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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쏟아진데다가 비가 내린 뒤에 일기가 추워서 얼어붙은 길바닥이 미끄럽기 짝이 없는 음력으로 섣달 어느날이다. 그날 학교 방문을 나선 나는 광화문 앞에서 전차를 내려 사비(社費)바람에 팔자에 없는 인력거를 잡숫기로 하였다. 다닐 길은 육상궁(毓祥宮)까지 치받쳐서 제2고등보통학교를 방문하고 나오려다가 진명, 배화 두 여학교에 들를 작정이었다. 그리고 차부에 대하여는 제2고등보통학교를 왕복하는 데 얼마냐고 물어 보았다.

“80전만 주십시오.”

막걸리 몇 잔을 먹었던지, 익혀 놓은 게 딱지 모양으로 새빨간 얼굴과 우형(愚螢)하고 유순한 빛이 도는 동그란 소의 그것 같은 눈을 가진 차부가 이렇게 청구하였다.

내 깜냥보파는 매우 헐하기 때문에 선뜻 올라타며,

“오는 길에 한 둬 군데 들러올 데가 있네. 달라는 대로 줄 테니‥‥‥”

“그저 처분해 줍시오.”

하고 차부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서십자각(西十字角)으로 꺾어들어 평탄한 길을 풍우같이 몰아갔다.

제2고보와 진명여학교를 거쳐서 필운대(弼雲臺) 꼭대기로 배화학교를 찾아 올라갈 적 이었다.

길이 좁으며, 토방도 많고, 돌멩이도 많은데, 게다가 빙판이라, 차체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흔들리는 건 물론이려니와, 차부의 발이 질척질척 미끄러질 때가 많았다. 날은 차건만, 끄는 이의 목덜미에는 땀이 구슬같이 맺혔다. 학교를 다 가자 헐떡거리는 차부 앞에는 또 언덕배기가 닥치었다.

“여기서 내리지.”

차체가 둔덕 위로 기어오르려 할 제 나는 차부의 애쓰는 꼴을 보다 못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차부는 대꾸도 않고 버럭버럭 땀을 흘리며 차체를 끌어올렸다. 나의 미온적 동정이 말경(末境)에 차삯 깎을 구실이 될까 두려워함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오죽 험한 데를 모시고 갔읍니까?’ 하고 값을 더 달랄 밑천을 장만하려 함이리라.

저편이 그렇게 생각하는 다음에야 이편에서 애써 자선을 베풀려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타고 배겼다.

올라갈 적에는 무사하였다. 그러나, 그 학교의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무사치 않았다. 그리 누그럽지 않은 경사면을 내려 몰려고 할 제 나는 또 주의하였건만 차부는 또 코대답도 아니하였다. 자르르 하는 바퀴 소리가 나자 차부의 두 다리는 번개같이 달음질하였다.

(어째 이렇게 속히 가나?)라고 생각하자 마자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획하고 나의 몸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럴 겨를도 없이 나는 땅궁장으로 길바닥에 자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오른편 개천에 내리박힌 인력거는 모로 누웠고, 차부는 무슨 땅재주나 넘는 것처럼 두 다리를 번쩍 하늘로 쳐들고 머리와 상반부가 한데 오그라붙은 듯한 꼴이 얼른하고 나의 핑핑 돌리는 시선을 거쳤다.

내가 루루 털고 일어나자 차부도 루루 털고 일어났다.

“어디 다친 데나 없어요?”

“어디 다친 데나 없나?”

이런 인사가 서로 끝나자 우리의 눈은 인력거로 모였다. 채가 부서지고 흙받기가 깨졌으며 바퀴도 여러 군데 상한 모양이었다.

“이런, 젠강맞을 일 봐!”

간신히 엎어진 차체를 세운 후, 상한 곳을 어루만지며 차부는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그 눈에는 눈물의 그림자가 어른어른하였다‥‥‥

나도 한동안 우두커니 거기 서 있었다. 아무리 제 과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 원인의 일부임을 생각하매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얼마 줄까?”

이윽고 나는 물었다.

“처분해 주십시오. 저는 이 섣달 대목에 10여 원의 손해입니다.”

차부는 부서진 차체로부터 눈을·떼지 않으며 대답하였다.

“아까 내리우랄 제 내려 주었으면 좋았지.”

나는 꾸짖는 듯이 불쑥 한마디하고 돈 1원 을 준 채 홱 돌아섰다. 삯 투정을 할까 보아 나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될 수 있는 대로 걸음을 재게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말할 누 없는 읍울(悒鬱)이 나의 덜미를 집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해부에서 오는 읍울이었다. 돈 줄 때 불쑥 나온 나의 한마디, 그 속에는 차부에게 전책임을 돌림으로써, 나의 동정에 저버림을 질책함으로써 인력거 삯을 더 못 달라게 하려는 의식이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었다. 자선을 받으면 이익을 잃을까 보아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을 무릅쓴 끝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건만, ‘내리 우라’한 말 한마디를 끝끝내 방패삼아 도덕적으로 차삯을 더 달랄 수 없게 만든 나의 태도(의식적이든 무의식적 이든)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매 나의 가슴은 더욱더욱 읍울에 잠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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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인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 덩이가 똘똘 구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히 뿌리는 버덩1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 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에는 흔히 도깨비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그럴것이다. 고요하고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칙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서 그런 것을 본 적은 없다. 따라서 그런 것에 관하여서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 나는---자랑이 아니라---더 놀라운 유령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이니 놀랍단 말이다. 나는 그래도 문명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유령을 목격하였다. 거짓말이라구? 아니다. 거짓말도 아니고 환영도 아니었다. 세상 사람이 말하여 <유령>이라는 것을 나는 이 두 눈을 가지고 확실히 보았다.

어떻든 길게 말할 것 없이 다음 이야기를 읽으면 알 것이다.

동대문 밖에 상업학교가 가제(假製)될 무렵이었다. 나는 날마다 학교 집터에 미장이로 다니면서 일을 하였다. 남과 같이 버젓하게 일정한 노동을 못하고 밤낮 뜨내기 벌잇군으로 밖에는 돌아다니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래도 몇 달 동안은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마는 과격한 노동이었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쉬어 본 일은커녕 한 번이라도 늦게 가 본적도 없었다. 원수같이 지글지글 타내리는 여름 태양 아래에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감독의 말 한 마디 거슬리는 법 없이 고분고분히 일을 하였다. 체로 모래를 쳐라, 불같은 태양 아래에 새까맣게 타는 석탄으로 <노리2>를 끓여라, 시멘트에다 모래를 섞어라, 그것을 노리로 반죽하여라, 하여 쉴 새 없는 기계같이 휘몰아쳤다. 그 열매인지 선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들이 다지는 시멘트가 몇 백 간의 벌집 같은 방으로 변하고 친구들의 쨍쨍 울리는 끌 소리가 여러 층의 웅장한 건축으로 변함을 볼 때에 미상불 우리의 위대한 힘을 또 한 번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리석은 미련퉁이들이라····(1행 생략)···어떻든 콧구멍이 다 턱턱 막히는 시멘트 가루를 전신에 보얗게 뒤집어쓰고 메케한 노린 냄새와 더구나 전신을 한바탕 쪽 씻어 내리는 땀 냄새를 맡으면서 온종일 들볶아치고 나면 저녁물에는 정말이지 전신이 나른하였다. 그래도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고 끼니거리를 생각하면 마지막 힘이 났다. 일을 마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일인 감독의 집으로 같다. 삯전을 얻어 가지고 그 길로 바로 술집에 가서 한잔 빨고 나면 그제야 겨우 제정신인 듯싶었던 것이다.

술! 사실 술처럼 고마운 것도 없었다. 버쩍버쩍 상하는 속, 말할 수 없는 피로를 잠시라도 잊게 하는 것은 그래도 술의 힘이었다.

그날도 나는 술김에 얼근하였었다. 다른 때와 같이 역시 맨 꽁무니에 떨어진 김서방과 나는 삯전을 받아들고 나서자마자 한길 옆 술집에서 만판 먹어 댔다.

술집을 나와 보니 벌써 밤은 꽤 저물었었다. 잠을 자도 한참 너그러지게 잤을 판이었다. 잠이라니 말이지 종일 피곤하였던 판에 주기조차 돌아 놓으니 사실이지 글자대로 눈이 스르르 내리감겼다. 김서방과 나는 즉시 잠자리를 향하였다.

잠자리라니 보들보들한 아름다운 계집이 기다리고 있는 분홍 모기장 속 두툼한 요 위인 줄은 알지 말아라. 그렇다고 어둠침침한 행랑방으로 알라는 것도 아니다. 비록 빈대에는 뜯길망정 어둠침참한 행랑방 하나 나에게는 없었다. 단지 내 몸뚱이 하나인 나는 서울 안을 못 돌아다닐 데 없이 돌아다니면서 노숙(露宿)을 하였던 것이다(그래도 그것이 여름이었으니 말이지 겨울이었던들 꼼짝없이 얼어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못 볼것을 다 보고 겪어 왔었다. 참말이지 별별 야릇하고 말 못할 일이 많았다. 여기에 쓰는 이야기 같은 것은 말하자면 그 중에서 가장 온당한 이야기의 하나에 지나지 못한다. 어떻든 김서방---도 이미 늦었으니 행랑 구석에 가서 빈대에게 뜯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노숙하기를 좋아하였다.---과 나는 도수장께를 지나서 동묘 앞까지 갔었다.

어는 결엔지 가는 비가 보슬보슬 뿌리기 시작하였다. 축축한 어둠 속에 칙칙한 동묘가 그 윤곽을 감추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하였다.

「이놈들 게 있거라!」

별안간 땅에서 솟을 듯이 이런 음성이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는 대신에 빙긋 웃었다.

「이래보여도 한여름 동안을 이런 데루 댕기면서 잠자는 놈이다 그렇게 쉽게 놀래겠니.」

하는 담찬 소리를 남겨 놓고 동묘 대문께로 갔다. 예기한 바와 다름없이 거기에는 벌써 우리 따위의 친구들이 잠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꽤 넓은 대문간이지만 그 속에 그득하게 고기새끼 모양으로 와르르 차 있었다. 이리로 눕고 저리로 눕고 허리를 베이고 발치에 코를 박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이놈들 게 있거라!」

「아이그 그년···」

「이런 경칠 자식 보게」

엎치락뒤치락 연해 연방 잠꼬대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술맛 좋다!」

하고 입맛을 쩍쩍 다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바람에 나도 끌려서 어는 경에 쩍쩍 다시려하던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김서방을 둘러보았다.

「어떡하려나?」

「가세!」

「가다니?」

「아 아무 데래두 가 자야지.」

김서방은 시원치 않은 듯이 역시 눈만 비볐다.

「저 안으로 말야. 지금 가면 어델 간단 말인가. 아무 데래두 쓰러져 한잠 자면 됐지.」

「그래두.」

「머, 고지기한테 들킬까봐 말인가? 상관있나. 그까짓 거 낼 식전에 일찌기 일어나면 그만이지.」

그래도 시원치 않은 듯이 머리를 긁는 김서방의 등을 밀치면서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턱까지 들어서니 더 한층 고요하였다.

여러 해 동안 버려 두었던 빈 집터같이 어둠 속으로 보아도 길이 넘는 잡풀이 숲속같이 우거져 있고 낮에 보아도 칙칙한 단청이 어둠에 물들어 더 한층 우중충하고 게다가 비에 젖어서 말할 수 없이 구중중한3 느낌을 주었다. 똑바로 말이지 청 안에 안치한 그림 속에서 무서운 장사가 뛰어 내닫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에 머리끝이 쭈뼛하여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거진 옷을 적실 만하게 된 빗발을 피하여 앞뜰을 지나 넓은 처마 밑에 이르렀다. 그대로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아 겨우 안심한 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때이었다.

「에그 저게 뭔가 이 사람!」

김서방은 선뜻 나의 팔을 꽉 잡았다. 그의 가리키는 곳에 시선을 옮긴 나는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별안간 소름이 쪽 돋고 머리끝이 또다시 쭈뼛하였다.

불과 몇 간 안되는 건너편 정전(正殿)옆에! 두어 개의 불덩어리가 번쩍번쩍하였다. 정신의 탓이었던지 파랗게 보이는 불덩이가 땅을 휘휘 기다가는 훌쩍날고 날다가는 꺼져 버렸다. 어디선지 또 생겨서는 또 날다가 또 꺼졌다.

무섬 잘 타기로 유명한 왕눈이 김서방은 숨을 죽이고 살려 달라는 듯이 나에게로 바짝 붙었다.

「하 하 하 하 ····」

「미쳤나 이 사람!」

오히려 화기가 버럭난 김서방은 말끝도 채 못 마쳤다.

「하하하 속았네 속았어.」

「····」

「속았어, 개똥불을 보고 속았단 말야. 하하하!」

「머 개똥불?」

김서방은 그래도 못 미덥다는 듯이 그 큰눈을 아직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그래 개똥불이야 이거 볼려나?」

하고 나는 손에 잡히는 작은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두어 걸음 저벅저벅 뜰 앞까지 나가서 역시 반짝거리는 개똥불을 겨누고 돌을 던졌다.

하나 나는 짜장 놀랐다. 돌을 던지면 헤어져야 할 개똥불이 헤어지긴커녕 요번에는 도리어 한 군데 모여서 움직이지도 않고 그 무슨 정세를 살피는 듯이 고요히 이쪽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또 숨을 죽이고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오··· 그때에 나는 더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꺼졌다 또 생긴 불에 비쳐 헙수룩한 산발과 똑똑지 못한 휘끄무레한 자태가 완연히 드러났다. 그제야 「흥 흥」하는 후렴 없는 신음 소리조차 들려 오는 줄을 알았다.

「에그머니!」

나는 순식간에 달팽이같이 오무라졌다. 그리고 또 부끄러운 말이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에 나는 동묘 밖 버드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사실 꿈에서나 깨어난 듯하였다. 곁에는 보나 안 보나 파랗게 질린 김서방이 신장대 모양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였는데 집으로 돌아가기도 무엇하니 나머지 밤을 동대문께 가서 새우자고 김서방이 제언하였다.

비는 여전히 뿌리고 있었다. 뒤에서 무어가 쫓아오는 듯하여 연해 연방 뒤를 돌려보면서 큰 한길에 가 섰을 때에는 파출소 붉은 전등만 보아도 산 듯싶었다.

허둥허둥 동대문 담 옆까지 갔었다. 고요한 담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것을 집어삼킨 캄캄한 어둠밖에는 물론 파란 도깨비불도 없다.

「애초에 이리로 왔더라면 아무 일두 없었을걸.」

후회 비슷하게 탄식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에라 아무 데나」하고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하자····나는 놀라기 전에 간이 싸늘해졌다. 도톨도톨한 조약돌이나 그렇지 않으면 축축한 흙이 깔려 있어야만 할 엉덩이 밑에···하나님 맙소서!····나는 부드럽고도 물큰한 촉감을 받았다.

뿐이 아니다. 버들껑하는 동작과 함께 날카로운 소리가 독살스런 땡삐같이 나의 귀를 툭 쏘았다.

「어떤 놈야 이게!」

나는 고무공같이 벌떡 뛰었다. 그리고는 쏜살같이---그꼴 이야말로 필연코 미친 모양이었을 것이다---줄행랑을 놓았다.

김서방도 내 뒤에서 헐레벌떡거렸다.

「제발 사람을 죽이지 마라.」

김서방은 거의 울음겨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놈의 서울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니구 도깨비굴이었던가.」

나 역시 나중에는 맡길 데 없는 분기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어리석고 못생긴 우리을 꼴들을 비웃고도 싶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세상에 원 도깨비나 귀신치고 몸뚱어리가 보들보들하고 물큰물큰하고---아니 그건 그렇다고 해 두더라도「어떤 놈야 이게!」하고 땡삐 소리를 치다니 그게 원····하고 의심하여 볼 때에는 더구나 단단치 못하게 겁을 집어먹은 것이 짝없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또 발을 돌려 그 정체를 탐지하러 갈 용기가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보슬비를 맞으면서 수구문 밖 김서방네 행랑방까지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뜩이나 덕실덕실 끓는 식구 틈에 끼여 하룻밤의 폐를 끼쳤다고 하여도 불과 두어 시간의 폐일 것이다. 막 한참 자려고 드러누웠을 때에는 벌써 날이 훤히 새었었으니까.

이렇게 하여 나는 원 무엇이 씌었던지 하룻밤에 두 번씩이나 도깨빈지 귀신에 혼이났었다. 사실 몇 해 수는 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 누구를 원망하면 좋았으리요? 술 먹고 늑장을 댄 내 자신일까, 노숙하지 않으면 아니된 나의 운명일까, 혹은 도깨비나 귀신 그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 외의 무엇일까····· 나는 이제야 겨우 이 중의 어느 것을 원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어떻든 유령 이야기는 이만이다. 하나 참 이야기는 이로부터다.

잠 못 자 곤한 것도 무릅쓰고 나는 열심으로 일을 하였다. 비는 어느 결에 개어 버렸던지 또 푹푹 내리찌는 태양 아래에서 시멘트 가루를 보얗게 뒤집어쓰고 줄줄 흐르는 땀에 젖어 가면서.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전날 밤에 당한 무서운 경험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깨비면 도깨빈가보다 하고만 생각하여 두면 그만이었지마는 그래도 그것을 단순하게 씩 닦아 버릴 수는 없었다.

(대체 원 도깨비가·····)

하고 요리조리로 무한히 생각한다 하더라도 결국 나에게는 풀지 못할 수수께끼에 지나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점심 시간을 타서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모두들 적지않은 흥미를 가지고 들었다.

「머 도깨비?」

2층 꼭대기에 시멘트를 갖다 주고 내려온 맹꽁이 유서방은 등에 메었던 통을 내려놓기도 전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가 있었더라면 그까짓 걸 그저·····」

벤또를 박박 긁던 덜렁이 최서방은 이렇게 뽐냈다. 그러나 가장 침착하게 담배를 푹푹 피우던 대머리 박서방만은 그다지 신통치 않은 듯,

「그래 그것한테 그렇게 혼이 났단 말인가·····따는 왕눈이 따위니까.」

하면서 밉지 않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김서방과 나를 등분으로 건너보았다. 그리고,

「도깨비 도깨비해두 나같이 밤마다야 보겠나.」

하고 빨던 담배를 툭툭 털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우리 집 옆에 빈 집이 하나 있네. 지금 있는 행랑에 든지 몇 달 안되어 모르긴 모르겠으나 어떻게 된 놈의 집이 원 사람이 들었던 집인지 안들었던 집인지 벽은 다 떨어지구 문짝 하나 없단 말야. 그런데 그 빈 집에 말일세.」

여기서 박서방은 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저녁을 먹구 인제 골목쟁이를 거닐지 않겠나. 그러면 그때일세, 별안간 고요하던 빈 집에 불이 하나씩 둘씩 꺼졌다 켜졌다 하겠지. 그것이 진서방(나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말마따나 무엇을 찿는 듯이 슬슬 기다는 꺼졌단 또 생긴단 말야. 그리곤 무언지 지껄하는 소리가 나자 한쪽에서는 돈을 세는지 은방망이로 장난을 하는지 절걱절걱하다간 또 무엇을 먹는지, 쭉쭉하는 소리까지 들리네. 그나 그뿐인가, 어떤 날은 저희끼리 싸움을 하는지 씨름을 하는지 후당탕하면서 욕지거리 웃음 소리가 다 들려 오데.」

박서방은 여기서 말을 문득 끊더니

「어때 재미들 있나?」

하고 좌중을 돌려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정말유 그게?」

웅크리고 앉았던 덜렁이 최서방은 겨우 숨을 크게 쉬면서 눈을 까불까불 하였다.

「그럼 정말 아니구 내가 그래 자네들을 데리구 실없는 소리를 하겠나.」

하면서 박서방은 말을 이었다.

「하나 너무 속지들은 말게. 그런 도깨비는 비단 그 빈집에나 진서방들 혼난 데만 있는 것이 아닐세. 위선 밤에 동관이나 혹은 종묘께만 가 보게 시글시글할 테니.」

나의 도깨비 이야기를 하여 의심을 풀려던 나는 박서방을 도깨비 이야기로 하여 그 의심을 더 한층 높였을 따름이었다. 더구나 뼈있는 그의 말과 뜻있는 듯한 그의 웃음은 더한층 알지 못할 수수께끼였다.

「그럼 대체 그 도깨비가 무엇이란 말유.」

「내가 이 자리에서 길다케 말할 것 없이 자네가 오늘 저녁에 또 한 번 가서 찬찬히 살펴보게. 그러면 모든 것이 어름장 같이······」

할 때에 박서방의 곁에 시커먼 것이 나타났다.

「무슨 애기 했소?」

일인 감독의 일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고하는 듯한 소리였다.

「오소 오소 일이 해야지.」

모두들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도 하는 수 없이 박서방에게 더 캐묻지도 못하고 자리를 일어나서 나 맡은 일터로갔다.

그날 저녁이다.

결국 나는 또 한 번 거기를 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물론 김서방은 뺑소니를 치고 나 혼자다. 뻔히 도깨비가 있는 줄 알면서 또 가기는 사실 속이 켕겼다. 하나 또 모든 의심을 풀어 버리고 그 진상을 알려 하는 나의 욕망은 그보다 크면 컸지 결코 적지는 않았다. 나는 가슴을 벌떡이면서 발에다 용기를 주었다.

「그까짓 거 여차직하면 이걸로.」

하고 손에 든 몽둥이---나는 만일의 경우를 염려하여 몽둥이 하나를 준비하였던 것이다---를 번쩍 들 때에 나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미소를 금할 수 없었다. 도깨비를 정복하러 가는 유령장군같이도 생각되어서 사실 하는 X자놈들이면 몰라도 무엇을 못먹겠다고 하필 가난뱅이 노숙자들을 못 살게 굴고 위협과 불안을 주는 유령을 정복하여 버리겠다는 것은 사실 뜻있고도 용맹스런 사업일 것이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어떻든 장차 닥쳐올 모험에 가슴을 벌떡이면서 발에다 용기를 주었다.

어두워가는 황혼 속에 음침한 동묘는 여전히 우중충하였다.

좀 이르다고 생각하였으나 나오기를 기다리면 되지 하고 제멋대로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아직도 열려 있는 대문을 서슴지 않고 들어섰다. 중문을 들어서 정전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갔을 때이다.

전날 밤에 나타났던 정전 바로 옆 그 자리에 헙수룩하게 산발한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벌써 어리석은 전날 밤의 나는 아니었다.

「원 요놈의 도깨비가·····」

몽둥이를 번쩍 들고 사실 장군다운 담을 가지고 나는 그 자리까지 달려갔다. 하나!

나의 손에서는 만신의 힘이 맺혔던 몽둥이가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유령장군이 금시에 미치광이 광대새끼로 변하여 버렸던 것이다.

「원 이런 놈의·····」

틀림없던 도깨비가 순식간에 두 모자의 거지로 변하다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음 순간 그 무엇을 번쩍 돌려 생각한 나는 또다시 몽둥이를 번쩍 들었다.

「요게 정말 도깨비 장난이란 것야.」

하나 도깨비란 소리에 영문을 모르는 두 모자는 손을 모으고 썩썩 빌었다.

「아이구 왜 이럽니까?」

이건 틀림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가라면 그저 나가라던지 그래 이 병신을 죽이시렵니까. 감히 못 들어올 덴 줄은 알면서도 할수할수없이·····」

눈물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사죄를 하면서 여인네는 일어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어린애는 울면서 그를 붙들었다. 역시 광대에 지나지 못한 나는 너무도 경솔한 나의 행동을 꾸짖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우 앉아 계시우. 나는 고지기두 아무것도 아니니.」

「네?」

모자는 안심한 듯한 동시에 감사에 넘치는 눈으로 나를 치어다보았다.

「어젯밤에 여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수?」

무어가 무언지 분간할 수 없는 나는 이렇게 물었다.

「네? 나오다니요? 아무것도 나오지는 않았읍니다. 그리고 단지 우리 모자밖에는 여기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여인네는 어시무사하여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럼 대체 그 불은?」

나는 그래도 속으로 의심하면서 주위로 눈을 휘돌렸다.

「무슨 일이나 생겼읍니까? 정말 저희들 밖에는 아무것두 없었읍니다. 그리구 저희는 저지른 것두 없읍니다. 밤중은 돼서 다리가 하두 아프길레 약을 바르려고 찾으니 생전 있어야지유. 그래 그것을 찾느라구 성냥 한 갑을 거의 다 거어 내버린 일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하고 여인네는 한쪽 다리를 훌떡 걷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 다리 위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어름장 풀리듯이 해득하기는 하였으나 여기서 참혹한 그림을 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훌떡 걷은 한편 다리! 그야말로 눈으로는 차마 보지 못할 것이었다. 발목은 끊어져 달아나고 장단지는 나무거피같이 마르고 채 아물지 않은 자리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놈의 원수의 자동차·····그나마 얻어 먹지도 못하게 이렇게 병신을 만들어 놓고·····」

여인네는 울음에 젖기 시작하였다.

「자동차에요?」

「네 공원 앞에서 그놈의 자동차에·····」

나는 문득 어슴푸레한 나의 기억의 한귀퉁이를 번개같이 되풀이하였다.

달포 전.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나는 이유 없이---가 아니라 바로 말하면 바람 쏘이러---밤 장안을 헤매고 있었다. 장안의 여름날은 아름 다왔다.

낮 동안에 이글이글 타는 해에 익은 몸뚱어리에 여름밤은 둘 없이 고마운 선물이었다. 여름의 장안 백성들에게는 욱신욱신한 거리를 고무풍선같이 떠다니는 파라솔이 있고 땀을 식혀주는 선풍기가 있고 목을 식혀 주는 맥주 거품이 있고 은접시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있다. 그리고 또 산 차고 물 맑은 피서지 삼방이 있고 석왕사가 있고 인천이 있고 원산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꿈에도 못 보는 나에게는 머루알빛 같은 밤하늘만 치어다보아도 차디찬 얼음 냄새가 흘러나오는 듯하였다. 이것만 하더라도 밤 장안을 헤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계집의 얼굴---은새려 분 냄새만 맡을 수 있는 것만 하여도 사실 밤 장안을 헤매는 값은 훌륭히 될 것이었다.

그러나 장안의 여름밤을 아름다운 꿈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거기에는 생활의 무거운 짐이 있다. 잔칫집 마당같이 들볶아치는 야시에는 하루면 스물 네 시간의 끊임없는 생활의 지긋지긋한 그림이 벌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낮과 다름없이 역시 부르짖음이 있고 싸움이 있고 땀이 있었다.

그러나 아뭏든 간에 가슴을 씻어 주는 시원한 맛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여름밤은 아름다왔다. 그런고로 나는 공원 앞 큰길 한 옆에 사람이 파도를 일으키면서 요란히 수물거리는 것은 구태여 볼 것 없이 술김에 얼근한 주객이나 그렇지 않으면 야시의 음악가 깡깡이 타는 친구를 둘러 싸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흥 여름밤이니까!」

혼자 중얼거리면서 무심코 그곳을 지나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수물거리는 폼이 주정군이나 혹은 깡깡이군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리고 무었보다도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먹구 마시구

만판 노자.

하는 주객의 노래는 안 들렸다. 그렇다고 밤 사람을 취하게 하는 <아름다운> 깡깡이 노래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러문 대체·····」

나의 발길이 부지중에 그리로 향하였다.

「머? 겨우 요술군 약장수야?」

나는 거의 실망에 가까운 어조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발길을 돌이키려 할 때이다. 사람들의 수물거리는 틈으로 나는 무서운 것을 보았다.

군중의 숲에 싸여서 안 보이는 한 대의 자동차와 그 밑에 깔린 여인네 하나를 보았다. 바퀴 밑에는 선혈이 임리하고 그 옆에는 거지아이 하나가 목을 놓고 울면서 쓰러져 있었다. 「자동차 안에는」하고 보니 아니나다를까 불량배와 기생년들이 그득하였다.

「오라질 연놈들!」

「자동찰 타니 신이 나서 사람까지 치니!」

「원 끔직두 해라!」

이런 말 마디를 주우면서 나는 어느 결에 그 자리를 밀려 나왔었다.

「그래 당신이 그·····」

나는 되풀이하던 기억을 끝을 돌려 이렇게 물었다.

「네 그렇답니다. 달포 전에 그 원수의 자동차에 치어 가지구 병원엔지 무엔지를 끌구가니 생전 저 어린 것이 보구 싶어 견딜 수 있어야지유. 그래 한 두달두 채 못 돼 도루 나오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이놈의 다리가 또 아프기 시작해서 배길 수 있어야지유.」

「다리만 성하믄야 그래두 돌아 댕기면서 얻어 먹을 수는 있지만····」

여인네는 차마 더 볼 수 없는 다리를 두 손으로 만지면서 울음을 느꼈다. 나는 그의 과거를 더 캐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묻지 않아도 그의 대답은 뻔한 것이었다.

「집이 원래 가난했읍니다. 그런데다가 남편이 죽구나니·····」

비록 이런 대답은 안할지라도 그 운명이 운명이지 무슨 더 행복스런 과거를 찾아 낼 수 있었으리요.

나의 눈에는 어느 결엔지 눈물이 그득히 고였었다. <동정은 우울감의 반쪽>일는지 아닐는지는 모른다. 하나 나는 나도 모르는 동안에 주머니 속에 든 대로의 돈을 모두 움켜서 뚝 떨어지는 눈물과 같이 그의 손에 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부리나케 그 자리를 뛰어나왔었다.

이야기는 이만이다.

독자여 이만하면 유령의 정체를 똑똑히 알았겠지. 사실 나도 이제는 동대문이나 동관이나 종묘나 또 박서방 말한 빈 집터에 더 가 볼 것 없이 박서방의 뼈 있는 말과 뜻 있는 웃음을 명백히 이해하였다.

그리고 나는 모두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애매한 친구들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어리석게 군 나를 실컷 웃어도 보고 뉘우쳐 보기도 하였다.

독자여 뭐? 그래도 유령이라고? 그래 그럼 유령이라고 해두자. 그렇게 말하면 사실 유령일 것이다. 살기는 살았어도 기실 죽어 있는 셈이니!

어떻든 유령이라고 해 두고 독자여 생각하여 보아라. 이 서울 안에 그런 유령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는가를!

늘어간다고 하면 말이다. 또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첫 페이지로 돌아가서·····

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인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덩이가 똘똘 구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히 뿌리는 버덩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엔 흔히 나타나는 유령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에 오히려 꺼림없이 나타나고 또 서울이 나날이 커가고 번창하여 가면 갈수록 유령도 거기에 정비례하여 점점 늘어가니 이게 무슨 뼈저린 현상이냐! 그리고 그 얼마나 비논리적 마술적 알지 못할 사실이냐! 맹랑하고도 기막힌 일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이런 비논리적 유령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유령을 늘어가지 못하게 하고 아니 근본적으로 생기지 못하게 할 것인가?

현명한 독자여! 무엇을 주저하는가. 이중하고도 큰 문제는 독자의 자각과 지혜와 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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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쓸데없이 자기가 애정의 거자인 것을 자랑하려 들었고 또 그렇지 않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공연히 그는 서먹서먹하게 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불행에 고귀한 탈을 씌워 놓고 늘 인생에 한눈을 팔자는 것이었다.

이런 그가 한 소녀와 천변을 걸어가다가 그만 잘못해서 그의 소녀에게 대한 애욕을 지껄여 버리고 말았다.

여기는 분명히 그의 음란한 충동 외에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강렬한 체취와 악의의 태만에 역설적인 흥미를 느끼느라고 그냥 그저 흐리멍텅하게 그의 애정을 용납하였다는 자세를 취하여 두었다. 이것을 본 그는 곧 후회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중의 역어을 구사하여 동물적인 애정의 말을 거침없이 소녀 앞에 쏟고 쏟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육체와 그 부속품은 이상스러울만치 게을렀다.

소녀는 조금 있다가 이 드문 애정의 형식에 그만 갈팡질팡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내심 이 남자를 어디까지든지 천하게 대접했다. 그랬더니 또 그는 옳지 하고 카멜레온처럼 태도를 바꾸어서 소녀에게 하루라도 얼른 애인이 생기기를 희망한다는 둥 하여 가면서 스스롭게1 구는 것이었다.

소녀의 눈은 이런 허위가 그대로 무사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투시한 소녀의 눈이 오만을 장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기 위한 세상의 「교만한 여인」으로서의 구실을 찾아놓고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연씨를 욕허니까 어디 제가 고쳐 디리지오. 연씨는 정말 악인인지두 모르니까요」

이런 소녀의 말버릇에 그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냥 코웃음으로 대접할 일이 못 된다. 왜? 사실 그는 무슨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악인일 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애호하는 가면을 도적을 맞는 외에 그 가면을 뒤집어 이용당하면서 놀림감이 되고 말 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소녀에게 자그마한 욕구가 없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이것은 한 무적 「에고이스트」가 할 수 있는 최대 욕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코 고독 가운데서 제법 하수할 수 있는 진짜 염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체취처럼 그의 몸뚱이에 붙어다니는 염세주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게으른 성격이요 게다가 남의 염세주의는 어느 때나 우습게 알려 드는 참 고약한 아리아욕의 염세주의였다.

죽음은 식전의 담배 한 모금보다도 쉽다. 그렇건만 죽음은 결코 그의 창호를 두드릴 리가 없으리라고 미리 넘겨짚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다만 하나 이 예외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A DoubleSuicide2

그것은 그러나 결코 애정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다만 아무 것도 이해하지 말고 서로 서로 ‘스프링보드’3 노릇만 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용할 것을 희망한다. 그들은 또 유서를 쓰겠지. 그것은 아마 힘써 화려한 애정과 염세의 문자로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세상을 속이고 일부러 자기를 속임으로 하여 본연의 자기를 얼른 보기에 고귀하게 꾸미자는 것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애정이라는 것에 서먹서먹하게 굴며 생활하여 오고 또 오는 그에게 고런 마침 기회가 올까 싶지도 않다.

당연히 오지 않을 것인데도 뜻밖에 그가 소녀에게 가지는 감정 가운데 좀 세속적인 애정에 가까운 요소가 섞인 것을 알아차리자 그 때문에 몹시 자존심이 상하지나 않았나 하고 위구하고 또 쩔쩔매었다. 이것이 엔간치 않은 힘으로 그의 정신 생활을 섣불리 건드리기 전에 다른 가장 유효한 결과를 예기하는 처벌을 감행치 않으면 안될 것을 생각하고 좀 무리인 줄은 알면서 놀음하는 세음치고 소녀에게 DoubleSuicide를 ‘푸로포즈’하여 본 것이었다.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 편리한 도박이다. 되면 식전에 담배 한 목음이요, 안 되면 소녀를 회피하는 구실을 내외에 선고할 수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거기는 좀 너무 어둔 그런 속에서 그것은 조인된 일이라 소녀가 어떤 표정을 하나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그의 이런 도박적 심리는 그의 앞에서 늘 태연한 이 소녀를 어디 한 번 마음껏 놀려 먹을 수 있었대서 속으로 시원해 하였다. 그런데 나온 패는 역시 ‘노 ―’ 였다. 그는 후― 한 번 한숨을 쉬어 보고 말은 없이 몸짓으로만

  • 「혼자 죽을 수 있는 수양을 허지.」

이렇게 한 번 배를 퉁겨 보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빨간 거짓인 것은 물론이다.

황량한 방풍림 가운데 저녁 노을을 멀거니 바라다보고 섰는 소녀의 모양이 퍽 아팠다.

늦은 가을이라기보다 첫겨울 저물게 강을 건너서 부첩과 같은 검은빛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았다. 그러나 발 아래 낙엽 속에서 거의 생물이랄 만한 생물을 찾아 볼 수조차 없는 참 적멸의 인외경이었다.

  • 「싫습니다. 불행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더없는 매력입니다. 그렇게 내어 버리구 싶은 생명이거든 제게 좀 빌려 주시지요.」

연애보다도 한 구 윗티즘4을 더 좋아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이때만은 풍경에 자칫하면 패배할 것 같기만 해서 갈팡질팡 그 자리를 피해 보았다.

소녀는 그때부터 그를 경멸하였다느니보다는 차라리 염오하는 편이었다. 그의 틈사구니투성이의 점잖으려는 재능을 걸핏하면 향하여 소녀의 침착한 재능의 창끝이 걸핏하면 침략하여 왔다.

5월이 되어서 한 돌발사건이 이들에게 있었다. 소녀의 단 하나의 동지 소녀의 오빠가 소녀로부터 이반하였다는 것이다. 오빠에게 소녀보다 세속적으로 훨씬 아름다운 애인이 생긴 것이다. 이 새 소녀는 그 오빠를 위하여 애정에 빛나는 눈동자를 가졌다. 이 소녀는 소녀의 가까운 동무였다.

오빠에게 하루라도 빨리 애인이 생겼으면 하고 바랐고 그래서 동무가 오빠를 사랑하였다고 오빠가 동생과의 굳은 약속을 저버려야 되나?

소녀는 비로소 ‘세월’이라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방심을 어느 결에 통과해 버린 ‘세월’의 소녀로서는 차라리 자신에게 고소하였다.

고독― 그런 어느날 밤 소녀의 고독 가운데서 그만 별안간 혼자 울었다. 깜짝 놀라 얼른 울음을 끊쳤으나 이것을 소녀는 자기의 어휘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튿날 소녀는 그가 하자는 대로 교외 조용한 방에 그와 대좌하여 보았다. 그는 또 그의 그 ‘윗티즘’과 ‘아이러니’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산비할 연막을 펴는 것이었다. 또 가장 이 소녀가 싫어하는 몸맵시로 넙죽 드러누워서 그냥 장정없이 지껄여대는 것이다. 이런 그 앞에서 소녀도 인제는 어지간히 피곤하였던지 이런 소용없는 감정의 시합은 여기쯤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절실히 생각하는 모양 같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소녀는 그에게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이기고 싶었다.

  • 「인제 또 만나 뵙기 어려워요. 저는 내일 E하구 같이 동경으루 가요.」

이렇게 아주 순량하게 도전하여 보았다. 그때 그는 아마 이 도전의 상대가 분명히 그 자신인 줄만 잘못 알고 얼른 모가지털을 불끈 일으키고 맞선다.

  • 「그래? 그건 섭섭허군. 그럼 내 오늘밤에 기념 스탐프5를 하나 찍기루 허지.」

소녀는 가벼이 흥분하였고 고개를 아래 위로 흔들어 보이기만 하였다. 얼굴이 소녀가 상기한 탓도 있었겠지만 암만 보아도 이것은 가장 동물적인 동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승부를 가릴 때가 되었나보다. 소녀는 도리어 초조하면서 기다렸다. 즉 도박적인 ‘성미’로!

(도박은 타기와 모멸! 뿐이려나보다)

(그가 과연 그의 훈련된 동물성을 가지고 소녀 위에 스탐프를 찍거든 산녀는 그가 보는 데서 그 스탐프와 얼굴 위에 침을 뱉는다.

그가 초조하면서도 결백한 체하고 말거든 소녀는 그의 비겁한 정도와 추악한 가면을 알알이 폭로한 후에 소인으로 천대해 준다)

그러나 아마 그가 좀더 웃길가는 배우였던지 혹 가련한 불감증이었던지 오전 한 시가 훨씬 지난 산길을 달빛을 받으며 그들은 내려왔다. 내려 오면서―

어느날 그는 이 길을 이렇게 내려오면서 소녀의 삼전 우표처럼 얄팍한 입술에 그의 입술을 건드려 본 일이 있었건만 생각하여 보면 그것은 그저 입술이 서로 닿았었다뿐이지―아니 역시 서로 음모를 내포한 암중모색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그리 부드럽지도 않은 피부를 느끼고 공기와 입술과의 따끈한 맛은 이렇게 다르고나를 시험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이 밤 소녀는 그의 거친 행동이 몹시 기다려졌다. 이것은 거의 역설적이었다. 안 만나기는 누가 안 만나―하고 조심조심 걷는 사이에 그만 산길은 시가에 끝나고 시가도 그의 이런 행동에 과히 적당치 않다.

소녀는 골목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경칠 나 쪽에서 서둘러 볼가까지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는 그렇게 초조한 듯한데 그때만은 웬일인지 바늘귀만한 틈을 소녀에게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느라고 그랬는지 걸으면서 그는 참 잔소리를 퍽 하였다.

  • 「가령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물을 상 찌푸리지 않고 먹어 보는 거 그래서 거기두 있는 ‘맛’인 ‘맛’을 찾아내구야 마는 거, 이게 말하자면 ‘파라독스’지. 요컨댄 우리들은 숙명적으로 사상, 즉 중심이 있는 사상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되먹었거든. 지성― 흥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조롱할 수야 얼마든지 있지, 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생활을 ‘리드’할 수 있는 근본에 있을 힘이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 그러니까 선이나 내나 큰소리는 말아야 해 일체 맹서하지 말자― 허는 게 즉 우리가 해야 할 맹서지.’

소녀는 그만 속이 발끈 뒤집혔다. 이 씨름은 결코 여기서 그만둘 것이 아니라고 내심 분연하였다. 이따위 연막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새롭고 효과적인 엔간치 않은 무기를 장만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두었다.

또 그 이튿날 밤은 질척질척 비가 내렸다. 그 빗속을 그는 소녀의 오빠와 걷고 있었다.

  • 「연! 인젠 내 힘으로는 손을 대일 수가 없게 되구 말았으니까 자넨 뒷갈망이나 좀 잘 해 주게 선이가 대단히 흥분한 모양인데 ―」 「그건 왜 또.」

    「그건 왜 또 딴전을 허는 거야.」 「딴전을 허다니 내가 어떻게 딴전을 했단 말인가?」 「정말 모르나?」 「뭐를?」 「내가 E허구 동경 간다는 걸― 」 「그걸 자네 입에서 듣기 전에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선이는 그러니까 갈 수가 없게 된 거지. 선이허구 E허구 헌 약속이 나 때문에 깨여졌으니까.」 「그래서.」 「게서버텀은 자네 책임이지.」 「흥.」 「내가 동생버덤 애인을 더 사랑했다구 그렇게 선이가 생각헐까 봐서 걱정이야.」 「허는 수 없지.」 『선이― 오빠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참 깜짝 놀랐소. 오빠도 그립디다― 운명에 억지로 거역하려 들어서는 못쓴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나는 오랫동안 ‘세월’이라는 관념을 망각해 왔소. 이번에 참 한참만에 느끼는 ‘세월’이 퍽 슬펐소. 모든 일이 ‘세월’의 마음으로부터의 접대에 늘 우리들은 다 조신하게 제 부서에 나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하오. 흥분하지 말어요. 아무쪼록 이제부터는 내게 괄목하면서 나를 믿어 주기 바라오. 그 맨처음 선물로 우리 같이 동경 가기를 내가 ‘푸로포즈’할까? 아니 약속하지. 선이 안 기뻐하여 준다면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이것을 실현해 보이리다. 그럼 선이의 승낙서를 기다리기로 하오.』

그는 좀 겸연쩍은 것을 참고 어쨌든 이 편지를 포스트에 넣었다. 저로서도 이런 협기가 우스꽝스러웠다. 이 소녀를 건사한다?― 당분간만 내게 의지하도록 해?― 이렇게 수작을 해 가지고 소녀가 듣나 안 듣나 보자는 것이었다. 더 그에게 발악을 하려 들지 않을 만하거든 그는 소녀를 한 마리 ‘카나리아’를 놓아주듯이 그의 ‘윗티즘’의 지옥에서 석방― 아니 제풀에 나가나? 어쨌든 소녀는 길게 그의 길에 같이 있을 것은 아니니까다. 답장이 왔다.

  •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하지 않았나요? 저는 지금 조금도 흥분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제가 연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린다면 연께서는 역정을 내이시나요? 그럼 감사한다는 기분만은 제 기분에서 삭제하기로 하지요. 연을 마음에 드는 좋은 교수로 하고 저는 연의 유쾌한 강의를 듣기로 하렵니다. 이 교실에서는 한 표독한 교수가 사나운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강의하고 있다는 것을 안 지는 오래지만 그 문간에서 머뭇머뭇하면서 때때로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교수의 ‘윗티즘’을 귓결에 들었다뿐이지 차마 쑥 들어가지 못하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벌써 들어와 앉았습니다. 자― 무서운 강의를 어서 시작해 주시지요. 강의의 제목은 ‘애정의 문제’ㄴ가요. 그렇지 않으면 ‘지성의 극치를 흘낏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하여 주시나요. 엊그제 연을 속였다고 너무 꾸지람은 말아 주세요. 오빠의 비장한 출발을 같이 축복하여 주어야겠지요. 저는 결코 오빠를 야속하게 여긴다거나 하지 않아요. 애정을 계산하는 버릇은 언제든지 미움받을 버릇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세월’이요? 연께서 가르쳐 주셔서 참 비로소 이 ‘세월’을 느꼈습니다. ‘세월’! 좋군요―교수―, 제가 제 맘대로 교수를 사랑해도 좋지요? 안 되나요? 괜찮지요? 괜찮겠지요 뭐? 단발했습니다. 이렇게도 흥분하지 않는 제 자신이 그냥 미워서 그랬습니다.』

단발? 그는 또 한 번 가슴이 뜨끔했다. 이 편지는 필시 소녀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에게 의논없이 소녀는 머리를 짤렸으니, 이것은 새로와진 소녀의 새로운 힘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이 났다. 왜?

머리를 자를 때의 소녀의 마음이 필시 제 마음 가운데 제 손으로 제 애인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애인으로 하여금 저에게 머리를 자르도록 명령하게 한, 말하자면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일인이역을 시킨 것에 틀림없었다.

소녀의 고독!

혹은 이 시합은 승부없이 언제까지라도 계속하려나―이렇게도 생각이 들었고―그것보다도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난 소녀의 얼굴―몸 전체에서 오는 인상은 어떠할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그에게는 흥미 깊은 우선 유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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