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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쏟아진데다가 비가 내린 뒤에 일기가 추워서 얼어붙은 길바닥이 미끄럽기 짝이 없는 음력으로 섣달 어느날이다. 그날 학교 방문을 나선 나는 광화문 앞에서 전차를 내려 사비(社費)바람에 팔자에 없는 인력거를 잡숫기로 하였다. 다닐 길은 육상궁(毓祥宮)까지 치받쳐서 제2고등보통학교를 방문하고 나오려다가 진명, 배화 두 여학교에 들를 작정이었다. 그리고 차부에 대하여는 제2고등보통학교를 왕복하는 데 얼마냐고 물어 보았다.

“80전만 주십시오.”

막걸리 몇 잔을 먹었던지, 익혀 놓은 게 딱지 모양으로 새빨간 얼굴과 우형(愚螢)하고 유순한 빛이 도는 동그란 소의 그것 같은 눈을 가진 차부가 이렇게 청구하였다.

내 깜냥보파는 매우 헐하기 때문에 선뜻 올라타며,

“오는 길에 한 둬 군데 들러올 데가 있네. 달라는 대로 줄 테니‥‥‥”

“그저 처분해 줍시오.”

하고 차부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서십자각(西十字角)으로 꺾어들어 평탄한 길을 풍우같이 몰아갔다.

제2고보와 진명여학교를 거쳐서 필운대(弼雲臺) 꼭대기로 배화학교를 찾아 올라갈 적 이었다.

길이 좁으며, 토방도 많고, 돌멩이도 많은데, 게다가 빙판이라, 차체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흔들리는 건 물론이려니와, 차부의 발이 질척질척 미끄러질 때가 많았다. 날은 차건만, 끄는 이의 목덜미에는 땀이 구슬같이 맺혔다. 학교를 다 가자 헐떡거리는 차부 앞에는 또 언덕배기가 닥치었다.

“여기서 내리지.”

차체가 둔덕 위로 기어오르려 할 제 나는 차부의 애쓰는 꼴을 보다 못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차부는 대꾸도 않고 버럭버럭 땀을 흘리며 차체를 끌어올렸다. 나의 미온적 동정이 말경(末境)에 차삯 깎을 구실이 될까 두려워함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오죽 험한 데를 모시고 갔읍니까?’ 하고 값을 더 달랄 밑천을 장만하려 함이리라.

저편이 그렇게 생각하는 다음에야 이편에서 애써 자선을 베풀려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타고 배겼다.

올라갈 적에는 무사하였다. 그러나, 그 학교의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무사치 않았다. 그리 누그럽지 않은 경사면을 내려 몰려고 할 제 나는 또 주의하였건만 차부는 또 코대답도 아니하였다. 자르르 하는 바퀴 소리가 나자 차부의 두 다리는 번개같이 달음질하였다.

(어째 이렇게 속히 가나?)라고 생각하자 마자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획하고 나의 몸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럴 겨를도 없이 나는 땅궁장으로 길바닥에 자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오른편 개천에 내리박힌 인력거는 모로 누웠고, 차부는 무슨 땅재주나 넘는 것처럼 두 다리를 번쩍 하늘로 쳐들고 머리와 상반부가 한데 오그라붙은 듯한 꼴이 얼른하고 나의 핑핑 돌리는 시선을 거쳤다.

내가 루루 털고 일어나자 차부도 루루 털고 일어났다.

“어디 다친 데나 없어요?”

“어디 다친 데나 없나?”

이런 인사가 서로 끝나자 우리의 눈은 인력거로 모였다. 채가 부서지고 흙받기가 깨졌으며 바퀴도 여러 군데 상한 모양이었다.

“이런, 젠강맞을 일 봐!”

간신히 엎어진 차체를 세운 후, 상한 곳을 어루만지며 차부는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그 눈에는 눈물의 그림자가 어른어른하였다‥‥‥

나도 한동안 우두커니 거기 서 있었다. 아무리 제 과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 원인의 일부임을 생각하매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얼마 줄까?”

이윽고 나는 물었다.

“처분해 주십시오. 저는 이 섣달 대목에 10여 원의 손해입니다.”

차부는 부서진 차체로부터 눈을·떼지 않으며 대답하였다.

“아까 내리우랄 제 내려 주었으면 좋았지.”

나는 꾸짖는 듯이 불쑥 한마디하고 돈 1원 을 준 채 홱 돌아섰다. 삯 투정을 할까 보아 나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될 수 있는 대로 걸음을 재게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말할 누 없는 읍울(悒鬱)이 나의 덜미를 집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해부에서 오는 읍울이었다. 돈 줄 때 불쑥 나온 나의 한마디, 그 속에는 차부에게 전책임을 돌림으로써, 나의 동정에 저버림을 질책함으로써 인력거 삯을 더 못 달라게 하려는 의식이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었다. 자선을 받으면 이익을 잃을까 보아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을 무릅쓴 끝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건만, ‘내리 우라’한 말 한마디를 끝끝내 방패삼아 도덕적으로 차삯을 더 달랄 수 없게 만든 나의 태도(의식적이든 무의식적 이든)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매 나의 가슴은 더욱더욱 읍울에 잠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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