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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여학생에게 끌려 황주서 내렸다. 여학생은 영채를 자기의 친구라 하여 집에 소개하고 자기와 한방에 있기로 하였다. 그 집에는 사십여 세 되는 부모와, 여학생보다 삼사 세 위 되는 오라비와, 허리 구부러진 조모가 있었다. 그 조모는 손녀를 보고 아무 말도 없이 너무 반가워서 눈물을 흘렸다. 여학생의 자친은 다정하고 현숙한 부인이다. 부친은 딸이 절하는 것을 보고도 별로 기쁜 빛도 표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고개를 돌렸다. 여학생은 그것을 보고 혼자 빙긋 웃었다. 오라비는 웃으며 누이를 맞았다. 그러고 누이의 어깨를 만지며,
"왜 오는 날을 알리지 아니했니?"
하였다. 그러고 동경에 관한 말을 물었다. 오라범댁은 부모 앞에서는 가만히 웃기만 하다가 여학생과 마주앉았을 때에는 손을 잡고 등을 만지고 하며 반기는 빛이 넘친다. 영채는 이러한 모든 광경을 보고 재미있는 가정이다 하였다. 그러고 없어진 집 생각이 났다.
그날 저녁에는 부친을 빼어 놓고 온 가족이 모여앉아서 밀국수를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하였다. 영채는 여학생의 곁에 잠자코 가만히 앉았다. 오라비는 영채에게 대하여 어려운 생각이 나는지 한참 이야기하다가 밖으로 나가고 여자들만 모여앉았다. 여학생은 쾌활하게 조모와 모친과 형수(오라범댁)를 번갈아 보아 가며, 동경서 일 년 동안 지내던 이야기를 한다. 조모는 이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 중에도 형수가 제일 재미있게 듣는다. 모친은 딸의 이야기는 듣는지 마는지 먹을 것만 주선하며 이따금 딸의 이야기에는 상관도 없는 질문을 한다. 딸이,
"어머닌 남의 말은 아니 듣고."
하면,
"왜 안 들어. 어서 해라."
하기는 하면서도 또 딴소리를 하여서는 젊은 사람들을 웃긴다. 영채도 남을 따라서 웃었다. 실상 모친은 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조모는 더구나 알아듣지 못한다.) 조모는 웃기도 그치고 하품을 시작한다. 형수와 영채만이 턱을 받치고 재미나게 듣는다. 얼마 있다가 모친도 졸린지 눈이 껌벅이며 눈물이 흐른다. (모친이) 일어나 베개를 내려 조모께 드리며,
"어머님께서는 주무십시오. 그 애들 지껄이는 것은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하고 자기도 팔을 베고 눕는다. 두 노인은 잠이 들고 세 청년만 늦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셋은 즐거웠다. 영채도 형수와 친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에는 셋이 한자리에서 가지런히 누워 잤다. 영채는 늦도록 잠이 아니 들었으나 마침내 잠이 들어서 꿈에 월화를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혼자 웃었다. 죽으러 가던 몸이, 어젯저녁에 죽었을 몸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생각하니 우습다. 그러나 자기의 전도는 어찌 될는지 걱정이었다.
여학생의 이름은 병욱이다. 자기 말을 듣건대 처음 이름은 병옥이었으나 너무 부드럽고 너무 여성적이므로 병목이라고 고쳤다가, 그것은 또 너무 억세고 남성적이므로 그 중간을 잡아 병욱이라고 지은 것이라 하며 영채더러 하루는,
"병욱이라면 쓸쓸하지요. 나는 옛날 생각과 같이 여자는 그저 얌전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은 싫어요. 그러나 남자와 같이 억세고 뻑뻑한 것도 싫어요. 그 중간이 정말 (여자에게) 합당한 줄 압니다."
하고 웃으며,
"영채, 영채…… 어여쁜 이름이외다. (그러나 과히 여성적은 아니외다.)"
한 일이 있다. 그러나 집에서는 병욱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병옥이라고 부른다. '병옥아' 해도 대답은 한다.
병욱은 영채를 매우 재주 있고, 깨닫기 잘하고, 공부 잘한 여자로 알았다. 처음에는 자기의 말을 못 알아들을 듯하여 아무쪼록 알아듣기 쉬운 말을 골라 하였으나, 이제는 거의 평등으로 대접한다. 영채는 무론 병욱을 헤아릴 수 없이 이상한 지식과 생각을 많이 가진 사람으로 안다. 그러므로 병욱의 입으로 나오는 말이면 무엇이나 주의하여 듣고 힘써 해석해 본다. 그래서 이삼 일 내에 병욱의 생각을 대강 짐작하게 되었고, 또 병욱의 생각이 자기가 지금토록 하여 오던 생각과는 거의 정반대됨을 깨달았다. 그러고 그 생각이 도리어 합리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지금은 차 중에서 병욱이가 하던 말을 잘 깨달아 알게 되었다.
병욱과 영채는 깊이 정이 들었다. 둘이 마주앉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에 취하게 되었다. 영채는 병욱에게 새로운 지식과 서양식 감정을 맛보고, 병욱은 영채에게 옛날 지식과 동양식 감정을 맛보았다. 병욱은 낡은 것을 모두 싫어하였었다. 그러나 영채의 잘 이해한 사상을 접하매 옛날 사상에는(사상에도) 여러 가지 맛있는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소학이며 열녀전이며, 한시 한문을 배우고 싶은 생각까지도 나게 되었다. 집에서 먼지 오르던 {고문진보} 같은 것을 내어서 이것저것 영채에게 배우기도 하고, 배운 것을 외우기도 하였다. '참 재미있다' 하고 어린애같이 기뻐하면서 소리를 내어 읊기도 하였다. 부친은 병욱이가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칭찬을 하는지 조롱을 하는지 모르게 '흥, 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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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은 음악을 배운다. 한번은 사현금을 타다가 영채더러,
"집에서는 음악 배운다고 야단이야요. 그것은 배워서 광대 노릇을 하겠니? 하시고 학비도 아니 준다고 하지요. 내가 울고불고 떼를 쓰며 이것을 배우게 했어요. 집에서는 난봉났다 그러시지요. 오빠께서는 좀 나시지마는."
하고 웃었다. 한참 재미롭게 사현금을 타다가도 밖에서 부친의 기침 소리가 나면 얼른 그치고 어리광하는 듯이 진저리를 치며 웃는다. 영채도 사현금 소리가 좋다 하였다. 서양 악곡(樂曲)을 많이 들어 보지 못하였으므로 탑골공원의 음악도 별로 재미있게 아니 여겼더니, 이제는 서양 악곡의 묘미도 차차 알아 오는 듯하다.
병욱은 사현금과 한시와, 영채와 이야기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게 되었다. 더구나 새로 맛보는 한시 맛에 사현금을 잊어버리는 일까지 있다. 그러면서도 병욱은 분주히 돌아가며 형수를 도와 집일을 보살핀다. 하루는 크게 주름잡은 조모의 낡은 치마를 입고, 팔을 부르걷고, 호미를 들고 땀을 죽죽 흘리며 마당 구석과 담 밑과 울안에 잡초를 다 매고 이웃에 가서 화초를 얻어다가 옮겼다. 흙 묻은 손으로 땀을 씻어서 얼굴에는 누런 흙물이 여기저기 묻었다. 한(한참) 호미로 굳은 땅을 팔 적에 부친이 들어오다가 물끄러미 보고 섰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병옥이는 농사하는 집에 시집을 보내야겠군."
하였다. 또 모친은 보고,
"얘, 그만두어라. 더운데 널더러 김매라더냐?"
하면서 웃었다. 병욱도,
"이제 봅쇼. 온 집안이 꽃밭이 될 테니."
하고 웃었다. 그러나 부친이나 모친이 병욱(의) 꽃 심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알지 않는 모양인 것을 보고 곁에 섰는 영채를 돌아보며,
"꽃을 중하게 아니 여기는 터에 음악 배우는 것을 왜 좋아하겠소."
하고 웃으며,
"이제 아무렇게 해서라도 꾀꼬리를 한 쌍 잡아다가 아버지 방문 밖에 걸어 드릴랍니다. 설마 꾀꼬리 소리를 싫다고야 아니하시겠지, 어때요, 묘하지요?"
하고 웃는다. 영채도,
"녜, 묘합니다."
하고 웃었다.
"꽃이 고운 줄도 모르고, 꾀꼬리 소리가 고운 줄도 모르고 사는 인종은 불쌍하지요?"
하고 찬성을 구하는 듯이 영채를 본다. 영채는 그 뜻을 잘 알았다. 영채는 예술(藝術)이라는 말을 일전에 배웠더니 그 뜻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기생도 일종 예술가다. 다만 그 예술을 천하게 쓰는 것이다 하였다. 옛날 명기들은 다 예술가로 그네는 음악을 하고 무도를 하고, 시와 노래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므로 그네는 오늘날에 이르는 바 예술가로구나 하였다. 그러니까 자기도 예술가다. 예술가 되는 것이 내 천직인가 하였다. 자기도 병욱과 같이 음악을 배울까 하였다. 자기가 지금껏 원수로 알아 오던 춤추기와 노래부르기도 이제 와서는 뜻이 있구나 하였다. 이럭저럭 영채는 죽을 생각을 그치고 병욱과 같이 즐겁게 살아가도록 힘쓰리라 하게 되었다. 영채의 마음에는 기쁨이 생겼다.
병욱도 영채가 이제 변하여 가는 줄을 안다. 그래서 기뻐한다. 무도와 성악(聲樂)을 배우기를 권하고, 동경을 가면 그것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음악학교가 있는 것과, 성악과 무도를 잘 배우면 세계적 공명(世界的 功名)을 이룰 수 있는 것도 말하였다. 병욱은 영채의 목소리에 혹하다시피 취하였다. 서투른 창가를 불러도 저렇게 아름답거든 자기가 익숙한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였다.
병욱의 집은 황주성 서문 밖에 있다. 한적하고 깨끗한 집터이다. 이웃에 집도 많지 아니하므로 둘이서 손을 마주잡고 석양에 산보도 한다. 산보할 때에는 두 처녀가 꿈 같은 장래를 이야기한다. 무르익은 풀잎 밑으로 흘러내려오는 시내에 두 발을 잠그고 소리를 맞추어 노래도 부른다. 둘은 이런 말을 한다.
"집에서 자꾸 시집을 가라는구려."
"어떤 데로?"
"누가 아나요. 당신네 생각에 합당하면 좋다고 그러지요. 이번에는 기어이 시집을 가야 된다고 아주 엄명이야요."
"그러면 어찌하셨어요."
"아무 때나 내가 가고 싶어야 가지요."
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 생각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고 얼굴을 붉힌다. 영채도 웃으며,
"어디요? 동경?"
"녜, 그런데 집에서는 큰 반대지요. 서자(庶子)예요. 또 가난하고…… 호…… 그러나 사람은 참 좋아요. 얼굴도 좋고, 풍채도 좋고, 재주도 있고, 마음도 크고 곱고…… 아아, 너무 자랑을 했다. 그러나 자랑이 아니야요. 아마 영채 씨가 보셔도 사랑하리다. 언제 한번 보여 드리지요. 그러나 빼앗아서는 안 되어요."
하고 영채를 보고 웃는다. 영채는 고개를 숙인 대로 웃는다.
이 모양으로 사오 일이 지났다. 영채는 서울 노파와 형식에게 자기가 살아 있단 말을 알려 주지 아니하였다. 후일에 서로 알 날이 있기를 바랐다. 영채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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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차차 이 집 내용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가정이란 맛을 보지 못한 영채에게는 부모 있고, 형제 있고, 자매 있는 이 가정은 마치 선경같이 즐겁고 행복되어 보이더니 점점 알아본즉 그 속에도 슬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첫째는 부자간에 뜻이 맞지 아니함이니, 아들은 동경에 가서 경제학을 배워 왔으므로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자본을 내어 무슨 회사 같은 것을 조직하려 하나, 부친은 위태한 일이라 하여 극력 반대한다. 또 딸을 동경에 유학시키는 데 대하여서도 아들은 찬성하되 부친은 '계집애가 그렇게 공부는 해서 무엇 하느냐, 어서 시집이나 가는 것이 좋다' 하여 반대한다. 방학에 집에 올 때마다 부친은 반드시 한두 번 반대하지마는 마침내 아들에게 진다. 작년 여름에는 반대가 우심하여 동경 갈 노비를 아니 준다 하므로 딸은 이틀이나 울고, 아들과 어머니는 부친 모르게 돈을 변통하여 노비를 당하였다. 그래서 딸은 부친께는 간다는 하직도 못 하고 동경으로 떠났다. 그 후에 며칠 동안 부친은 성을 내어 식구들과 말도 잘 하지 아니하였으나 얼마 아니 하여,
"얘, 이달 학비는 보냈니? 옷값이나 주어라."
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부친은 기어이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 하고, 아들은 졸업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여 두어 번이나 부자끼리 다투었다. 부친은 자기의 친구의 아들에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지금 어느 재판소 서기로 있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 그가 작년에 상처한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기어이 사위를 삼으려 하나 아들은 반대한다. 그 사람은 원래 부유한 집 자제로 십육칠 세부터 좀 방탕하게 놀다가 벼슬이 하고 싶다는 동기로 전수학교에 입학하였다. 근래에 흔히 있는 청년과 같이 별로 높은 이상이라든지 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금줄을 두르고 칼 차는 것을 유익한(유일한) 자랑으로 알며, 한 달에 몇 번씩 기생을 희롱하여 월급 외에도 매삭 몇십 원씩 집에서 돈을 가져간다. 좀 교만하고 경박하고 허영심 있는 청년이라. 그러나 부친은 무엇에 혹하였는지 모르되, 이 사람밖에는 좋은 사람이 없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아들은 이 사람을 싫어할 뿐더러 도리어 천하게 여긴다. 이리하여 부자간에는 만사에 별로 의견이 일치하는 일이 없다. 부친은 아들을 고집쟁이요 철이 없고 부모의 말을 아니 듣는다 하고, 아들은 부친을 완고하고 무식하고 세상이 어떻게 변천하는지를 모른다 한다. 그러면서도 부친은 아들의 진실함과 친구간에 존경받는 줄을 알고, 아들은 그 부친의 진실함과 부드러운 애정이 있는 줄을 안다. 이러므로 부자간에는 무엇이나 반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로 일치하는 점이 있어 모친은 특별한 의견은 없으되 흔히 아들에게 찬성한다. 그러할 때마다 부친은 모친을 한번 흘겨보고, 모친도 부친을 한번 흘겨본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애들이 서로 흘겨보는 것과 같아서 얼른 풀어지고 만다.
그 다음에 걱정은 아들 내외의 사이에 정이 없음이다. 영채가 이 집에 온 지가 십여 일이 되도록 그 내외간에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지나가는 사람 모양으로 서로 슬쩍 보고는 고개를 돌리든지 나가든지 한다. 그래도 아내는 밤낮 남편의 옷을 빨고 다리고 한다. 영채가 여기 온 후로는 밤마다 며느리와 딸과 자기와 한방에서 잤다. 그러고 아들은 사랑에서 혼자 자는 모양이었다. 영채는 얼마큼 미안한 생각이 있어서 병욱더러 다른 방에 가기를 청하였더니 병욱은 웃으며,
"걱정 마시오. 우리 오빠는 아니 들어오셔요."
"왜 그러시나요?"
"모르지요. 이전에는 아니 그러더니 일본 갔다 와서부터 차차 멀어갑데다."
하고 입을 영채의 귀에 대며,
"그래서 우리 형님이 나를 보고 울어요."
하고 동정하는 듯이 한숨을 쉰다. 영채도 며느리가 불쌍하다 하였다. 그렇게 얼굴도 얌전하고 마음도 고운 부인을 왜 싫어하는고 하여,
"무엇이 불만해서 그러나요?"
"모르지요. 불만할 것이 없을 듯하건마는 애정이 아니 하는(가는) 게지요. 내가 오빠한테 물어 보니까,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지 모르지마는 그저 보기가 싫구나 합디다. 아마 형님이 오빠보다 나이 많아서 그런지? 참 걱정이야요."
하고 고개를 흔든다. 영채는 놀라며,
"형님께서 나이 많으셔요?"
영채도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다. 달리 적당한 칭호도 없었거니와 또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오 년 장이랍니다."
하고 웃으며,
"형님이 처음 시집올 때에는 우리 오빠는 겨우 열두 살이더라지요…… 형님은 열일곱 살이구, 그러니 무슨 정이 있겠어요. 말하자면 형님이 오빠를 길러 냈지요. 한 것이 다 자라나서는 도리어……."
하고 호호 웃는다.
"오빠도 퍽 다정하고 마음씨 고운 사람이언마는, 애정이란 마음대로 안 되나 봐요."
하고 두 처녀는 두 내외에게 무한한 동정을 준다. 영채는,
"그러면 어쩌면 좋아요. 늘 그래서야 어떻게 사나요."
"요새 젊은 부부는 대개 다 그렇대요. 큰 문제지요. 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터인데……."
하고 두 처녀가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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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간에 의견이 합하지 않는 것은 견디기도 하려니와, 내외간에 애정이 합하지 않는 것은 참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 상관없는 남의 일이언마는 다만 십여 일이라도 같이 있는 정리라, 영채에게는 이것도 걱정이 된다. 영채의 생각에는 될 수만 있으면 이 내외를 정답게 하여 주고 싶다. 영채에게는 그 부인이나 남편이 다 같이 정답게 보인다. 오래 교제를 하여 볼수록 그 부인이 마음에 들어 이제는 진정으로 (형님이라 부르고 싶다. 이전 월화에게) 대한 정과 비슷한 애정이 솟아오른다. 무론 월화에 대한 것과 같이 존경하고 의탁하는 생각은 없으나 한껏 사랑스럽고 한껏 불쌍한 생각이 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부인의 곁에 있어서 이야기 동무도 하여 주고, 기회만 있으면 위로도 하여 준다. 부인도 이제는 영채와 친하여서 여러 가지로 속에 있는 생각을 말한다. 병욱은 다정하면서도 얼마큼 뻑뻑한 맛이 있거니와 영채는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맛이 있었다. 그래서 부인은 영채와 말하기를 유일의 낙으로 알았다. 차라리 어떤 점으로는 시누이보다도 영채가 더 정답고 사랑스럽다. 그래서 영채의 손을 꼭 쥐며,
"아이구, 어쩌면 좋소?"
하기까지 한다.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영채의 생각이라. 영채는 웬일인지 모르게 그 부인의 남편 되는 이에게 대하여 일종 정다운 생각이 난다. 처음에는 친구의 오빠인 까닭이라 하였으나 차차 더 격렬하게 그의 모양이 생각이 나고, 그의 모양이 번뜻 보일 때마다 문득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얼굴이 뻘개진다. 영채가 보기에 그도 자기를 다정한 눈으로 보는 듯하다. 영채는 암만 그것을 억제하려 하건마는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리에 누워도 그의 좀 넓적한 얼굴이 눈에 보여서 도무지 잘 수가 없다. 그러할 때마다 곁에 누운 부인을 안으면 부인도 영채를 안아 준다. 영채는 부인에게 대하여 미안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다. 어서 이 집을 떠나야 하겠다 하면서, 또한 차마 떠나기가 싫기도 하다. 그래서 영채에게는 또 한 가지 새 괴로움이 생겼다. 요사이 영채는 흔히 멀거니 무슨 생각을 하다가,
"왜 그렇게 멀거니 앉았어요?"
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이로부터 영채는 차차 남자가 그리워진다. 전부터 외롭게 적막하게 지내 왔거니와, 지금은 그 외로움과 그 적막과는 유다른 적막이 더 굳세게 영채의 가슴을 누른다. 이전에는 넓은 천지에 저 혼자만 있는 듯한 적막이더니 지금은 제 몸이 반편인 듯한 적막이로다. 다른 반편이 있어야 제 몸은 온전하여질 것 같다. 공연히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얼굴이 훗훗하여진다. 피곤한 듯도 하고, 술취한 듯도 하다. 무엇에 기대고 싶고 누구에게 안기고 싶다.
영채는 가만히 앉아서 이때껏 접하여 오던 여러 남자를 생각하여 본다. 자기의 손목을 잡아 끌던 사람, 겨드랑으로 손을 넣어 끌어안던 사람, 억지로 뺨을 대던 사람, 음란한 눈으로 자기를 유혹하며 교만한 말로 자기를 위협도 하던 사람. 그때에는 그렇게 원수스럽고 미워 보이던 남자들조차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따뜻한 감각을 준다. 남자의 살이 자기의 살에 와 닿던 감각이 자릿자릿하게 새로워진다. 지금 내 곁에 남자가 하나 있었으면 작히 좋으랴. 누구든지 손을 달라면 손을 주고 안아 준다면 안기고 싶다.
영채는 신우선을 생각하고 이형식을 생각한다. 여러 해 동안 접하여 오던 남자 중에 신우선은 가장 영채의 마음을 끌던 사람이다. 그는 풍채가 좋고, 쾌활한 기상이 좋고, 어디까지 모르게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어떤 날 저녁에 둘이 마주앉아서 우선이가 영채를 달랠 때에 영채의 마음도 아니 움직임도 아니었다. 당장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때에 영채는 온전히 몸과 마음을 형식에게 바친 줄로 자신하였으므로 이를 갈고 억제하였다. 실로 그 동안 영채는 다른 남자의 모양이 생각에만 떠나와도 큰 죄로 여겨서 제 살을 꼬집어 억제하였다. 이러므로 지금껏 영채는 독립한 사람이 아니요, 어떤 도덕률(道德律)의 한 모형(模型)에 지나지 못하였다. 마치 누에가 고치를 짓고 그 속에 들어 엎디인 모양으로, 영채도 알 수 없는 정절이라는 집을 짓고 그 속을 자기 세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사건에 그 집이 다 깨어지고 영채는 비로소 넓은 세상에 뛰어나왔다. 더구나 기차 속에서 병욱을 만나며 자기가 지금껏 유일한 세상으로 알아 오던 세상이 기실 보잘것없는 허깨비에 지나지 못하는 것과, 인생에는 자유롭고 즐거운 넓은 세상이 있는 것을 깨닫고, 이에 비로소 영채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젊은 사람이 되고, 젊고 어여쁜 여자가 된 것이라. 영채의 가슴에는 이제야 비로소 사람의 피가 끓기 시작하고 사람의 정이 타기를 시작한다. 영채는 자기의 마음이 전혀 변하여진 것을 생각한다. 마치 나서부터 어둡고 좁은 옥 속에서 지내다가 처음 햇빛 있고, 바람 불고, 꽃 피고, 새 우는 세상에 나온 것 같다. 영채는 거문고를 타고 바이올린을 울린다. 그러나 그 소리가 모두 다 새로운 빛을 띤다. 그러고 영채의 눈에는 기쁨과 슬픔이 섞인 듯한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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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꿈같이 기쁘게 지낸다. 날마다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다 가르치고 나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선형은 이제는 낯이 익어서 부끄러워하면서도 조곰씩 농담도 한다. 그러나 순애는 여전히 웃지도 아니하고 말도 많이 하지 아니한다. 형식은 선형으로 더불어 재미있게 이야기하다가는 우두커니 앉았는 순애를 보고는 문득 말을 그치고 미안한 듯이 슬쩍 순애를 본다. 순애는 형식의 눈을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형식이야 자기를 보거나 말거나 전에 보던 데를 보고 앉았다. 이렇게 되면 형식도 말하던 흥이 깨어져서 잠자코 앉았고, 선형도 책장만 벌깍벌깍 뒤진다. 어떤 때에는 순애가 먼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고 형식과 선형은 가만히 순애의 뒷모양을 본다. 순애는 등이 좀 굽은 듯하고 어딘지 모르나 슬픈 빛이 보인다. 그러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는다. 웃으면서도 서로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형식은 아주 세상과 인연을 끊은 모양이 되었다. 학교는 사직하고, 학생들도 이제는 놀러 오지 아니하고, 원래 많지 않던 친구들도 근래에는 오지 아니한다. 우선도 무슨 분주한 일이 있는지 보이지 아니한다. 형식은 깨어서부터 잘 때까지 선형과 미국만 생각한다. 그래도 조곰도 적막하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더할 수 없이 기뻤다. 형식의 모든 희망은 선형과 미국에 있다. 기생집에 갔다고 남들이 시비를 하고, 돈에 팔려서 장가를 든다고 남들이 비방을 하더라도 형식이에게는 모두 우스웠다. 천하 사람이 다 자기를 미워하고 조롱하더라도 선형 한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칭찬하면 그만이다. 또 자기가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면 만인이 다 자기를 우러러보고 공경할 것이다. 장래의 희망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현재를 가장 가치 있는 듯이 보려 하되,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진 형식에게는 현재는 아주 가치 없는 것이라. 자기가 경성학교에서 교사 노릇 하던 것과, 그 학생들을 사랑하던 것과, 자기의 생활과 사업에 의미가 있는 듯이 생각하던 것이 우스워 보이고 지나간 자기는 아주 가치 없는 못생긴 사람같이 보인다. 지나간 생활은 임시의 생활이요, 이제부터가 참말 자기의 생활인 것 같다. 그래서 형식의 생각에, 자기의 전도에는 오직 행복뿐이요, 아무 불행도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자기의 몸은 괴롭고 혼란한 티끌 세상을 떠나서 수천 길 높은 곳에 올라선 것 같다. 길에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도 이제는 자기와는 종류가 다른 불쌍한 사람같이 보인다. 더구나 이전에는 자기의 동무로 알아 오던 주인 노파가 지극히 불쌍하게 보이고, 갑자기 더 늙고 쪼그라진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박복한 형식에게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생겼다.
어떤 사람이 김장로에게 형식의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말을 하였다. 하루는 장로가 불쾌한 낯빛으로 부인께,
"세상에 어디 믿을 사람 있소?"
하여 이러한 회화가 있었다.
"왜요?"
"형식이가 기생집에를 다닌다구려."
부인은 자기가 기생이매 이러한 말을 듣기가 좀 고통이 되었으나 이제는 귀부인이라, 그것을 고통으로 여길 체면이 아니라 하여 깜짝 놀라며,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뉘 말을 들으니까 형식이가 다방골 계월향이라든가 하는 기생에게 취해서 밤마다 거기 가서 파묻혀 있었다는구려. 그러다가 탑골 승방이라든가 어디서 누구누구와 그 계집 때문에 다툼이 나서 발길로 차고 때리고 야단이 났더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계월향이가 형식에게 싫증이 나서 평양으로 도망하는 것을 형식이가 따라갔더라고요. 내가 그럴 리가 있느냐고 하니까 날짜까지 분명히 알고 확실히 증거까지 있다는구려" 하고 한숨을 쉬며, "얘야, 내가 일을 경솔하게 하였어."
부인은 깜짝깜짝 놀라며 이 말을 듣더니,
"아, 누가 그래요?"
한다. 애지중지하는 딸을 그러한 사람에게 준단 말가, 하는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형식의 외모와 말하는 양을 보매 그러한 것 같지는 아니하여서,
"누가 형식을 허노라고 그러는 게지요."
"허,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만 알았구려. 했더니 차차 들어 본즉, 그 말이 확실한 모양이외다. 우선 형식이가 평양 갔다는 날짜가 꼭 이틀 동안 우리집에 아니 오던 날이오그려. 그래서 경성학교에서도 말하면 내어쫓은 모양이라는구려."
"에그, 저런!"
이러한 말을 하다가 마침 선형이가 들어오므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선형은 대강 그 말을 들었다. 그 후에 장로 부부는 다시 그런 말을 하지는 아니하였으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근심이 있었다. 선형도 왜 그런지 모르게 그 말을 듣고는 좀 불쾌하였다. 형식을 보아도 웃고 싶지를 아니하고 도리어 미운 듯한 생각이 난다. 여전히 정다운 생각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미운 생각과 의심이 난다. 선형의 가슴에는 괴로움이 생겼다. 형식은 이런 줄을 모르고 여전히 쾌활하게 지나건마는, 장로 집 식구들은 자연히 말이 적어지고 웃음이 적어지고 형식을 대할 때에 일종 불쾌하고 경멸하고 괘씸하여 하는 생각으로써 한다. 형식도 차차 이 변천을 깨닫게 되었다. 순애의 슬픈 듯한 눈은 가만히 여러 사람의 눈치만 본다.
96
선형이 보기에 형식은 처음부터 자기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 자격이 부족하였다. 자기의 이상의 지아비는 이러하였다. 첫째, 얼굴 모양이 둥그레하고 살빛이 희되 불그레한 빛이 돌고, 그러하고 말긋말긋하고 말소리가 유창하고 또 쾌활하고, 뒤로 보나 앞으로 보나 미끈하고 날씬하고, 손이 희고 부드럽고 재주가 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러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은 원칙상 부귀한 집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어떤 목사나 장로의 아들이기를 바랐으나, 점점 목사나 장로는 그다지 귀한 벼슬이 아닌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이상의 지아비는 미국에 유학하는 중이어니 하였었다.
그러다가 처음 형식을 보매 미상불 처녀가 처음 남자를 접하는 기쁨이 없음은 아니었으나 결코 자기의 짝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자기보다 여러 층 떨어지는 딴 계급에 속한 사람이어니 하였다. 첫째, 형식의 얼굴은 자기의 이상에 맞지 아니하였다. 얼굴이 길쭉하고 광대뼈가 나오고 볼이 좀 들어가고 눈꼬리가 처지고, 게다가 이마에는 오랫동안 빈궁하게 지낸 자취로 서너 줄 주름이 깔렸다. 그러고 손이 너무 크고 손가락이 모양이 없고…… 아주 못생긴 사람은 아니나 자기의 이상에 그리던 남자와는 어림없이 틀린다. 형식의 태도에는 숨길 수 없이 빈궁한 빛이 보이고 마음을 쭉 펴지 못하는 듯한 침울한 기상이 드러난다. 게다가 그의 이력과 경성학교 교사라는 그의 지위는 선형의 마음에는 너무 초라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일찍 그를 정답다고 생각한 일도 없고 하물며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일도 없었다. 만일 선형이가 형식에게 조곰이라도 호의를 가진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불쌍하게 생각하였음이리라. 선형의 눈에 형식은 과연 불쌍하게 보였다. 몇 시간 영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들으매 얼마큼 형식에게 숨은 위엄과 힘이 있는 줄도 깨달았으나 십칠팔 세 되는 처녀에게는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선형은 '형식과 순애가 배필이 되었으면' 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형식과 약혼을 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일변 놀라며 일변 실망하였다. 형식 같은 사람으로 자기의 배필을 삼으려 하는 부친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게도 생각이 되었다. 자기의 이상이 온통 깨어지고 자기의 지위가 갑자기 떨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선형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할 줄을 안다. 부친의 말 한마디에 자기의 일생은 결정되거니 한다.
그래서 선형은 형식의 좋은 점만 골라 보려 하였다. 형식의 얼굴을 여러 가지로 교정하여 본다. 눈꼬리를 좀 끌어올리고, 광대뼈를 좀 깎게 하고, (손을 좀 작게 하고) 깊숙한 아래턱을 좀 들여밀어서 얼굴을 동그스름하게 만들고 또 뺨과 이마에는 적당하게 살을 붙이고 분홍 물감칠을 하고…… 이렇게 교정을 하노라면 형식의 얼굴이 차차 자기의 마음에 맞게 된다. 그러나 이따금 들여밀려는 광대뼈가 더 (쑥) 나오기도 하고, 내밀려는 뺨이 더 쑥 들어가기도 하며, 눈이 몹시 가늘어지기도 하고, 혹은 쇠눈깔 모양으로 커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화를 내어서 형식의 얼굴을 발로 왁왁 비벼 부시고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았다가 그래도 안심이 아니 되어서 다시 형식의 얼굴을 만들기를 시작한다. 어떤 때에는 곧잘 마음대로 되어서 혼자 쳐다보고 즐겨할 때에, 정말 형식이가 즐거운 얼굴을 가지고 들어와서 모처럼 애써 만든 얼굴을 말못되게 깨트리고 만다. 글을 배우다가 이따금 형식을 쳐다보고는 형식의 얼굴에다가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은 탈을 씌워 본다. 그러나 그 탈이 씌워지지를 아니한다. 형식은 있는 정성을 다하여 가장 사랑하는 장래의 아내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에 선형은 열심으로 형식의 얼굴을 교정한다. 순애는 그 곁에 앉아서 형식과 선형을 번갈아 보며 두 사람의 생각을 알아보려 한다.
선형은 형식의 얼굴 교정하기를 그쳤다. 그 사업이 도저히 성공하지 못할 줄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형식의 얼굴에 아무쪼록 정이 들기를 힘쓴다. 지금까지는 형식의 얼굴로 하여금 자기의 마음에 맞도록 변화하게 하려 하였으나 지금은 자기의 마음으로 하여금 형식의 얼굴에 맞도록 변화하게 하려 한다. 억지로 '형식의 얼굴 곱다' 하여 본다. '광대뼈 내민 것과 눈꼬리 처진 것이 도리어 정답다' 하여도 본다. '그의 손이 크고 손가락이 긴 것이 도리어 남자답다' 하여도 본다. 그러면 과연 그렇다 하여지기도 하고 더 보기 흉하다 하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더) 오래 상종을 하고, 말도 많이 듣고, 서로 생각도 통하여짐을 따라 선형은 차차 형식에게 정이 들어 온다. 형식의 입술이 곱다 하게도 되고 형식은 썩 다정하고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다 하게도 된다. 자리에 들어가서는 으레 형식의 모양을 한번씩 그려 보고 (얼굴을) 교정도 하여 본다. 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형식의 입술을 그려 놓고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혼자 웃으며 '이것만 해도 좋지' 한다. 선형은 형식의 입술을 사랑한다. 그래서 형식의 얼굴이 온통 입술이 되고 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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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도 자기의 외모가 선형의 마음을 끌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약혼한 뒤로부터 형식은 혼자 거울을 대하여 제 얼굴을 검사하여 보고, 여기는 선형이가 좋아하려니, 여기는 싫어하렷다 하여 보며, 선형이가 하던 모양으로 자기의 얼굴을 교정하여 본다. 그러나 그 얼굴이 선형이가 발로 비비던 얼굴인 줄은 모른다. 그러나 형식은 자기의 인격을 믿고 지식을 믿는다. 자기의 인격의 힘이 족히 선형의 마음을 후리리라 한다. 선형은 아직 어린애다. 자기의 말동무가 되지 못한다. 선형은 아직 자기의 인격을 알아줄 만한 정도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고통이다. 왜 내게는 여자가 취할 만한 용모와 풍채가 없으며, 세상이 부러워하는 재산과 지위와 명예가 없는고 하여 본다. 평생에는 우습게 말도 하고 조롱도 하던 용모, 재산, 지위도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몹시 부러워진다. 그래서 자기를 부귀한 집 도련님을 만들어 보고 호화로운 미소년을 만들어 보고 그러한 뒤에 선형을 자기의 앞에 놓아 본다. 그렇게 하여 보고 나면 현재의 자기의 처지가 퍽 보잘것없게 초라해 보여서 혼자 등골에서 땀이 흐른다. 선형이가 자기를 사랑할까, 도리어 밉게 여기든가 불쌍하게 여기지 아니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다시 선형을 대하기가 싫다. 내가 선형과 혼인한 것이 앙혼(仰婚)이 아닐까. 그는 돈이 있고 지위가 있고 용모가 있는데 나는 무엇이 있나. 이렇게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게다가 '처갓집 돈으로 미국 유학을 하여' 하면 더 부끄러운 생각이 나고 세상이 다 자기의 못생긴 것을 비웃는 것 같다.
조선에 나만큼 열성 있는 사람이 없고 인격과 학식과 재주도 나만한 사람이 없다. 조선 문명의 주춧돌은 내 손으로 놓는다 하던 형식의 자부심은 다 없어지고 말았다. 없어진 것은 아니지마는 그것이 형식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선형의 사랑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형식의 유익한(유일한) 목적이라. 선형의 사랑을 못 얻을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형식의 유일한 슬픔이라. 미국 유학을 하는 것도 조선의 문명을 위한다는 것보다 선형 한 사람의 사랑을 위한다는 것이 마땅하게 되었다. 사랑의 앞에서는 모든 교만과 자부심이 다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형식은 선형이 없이는 못 산다. 만일 선형이가 자기를 떼어 버린다 하면 자기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 만일 선형이가 자기를 버린다 하면 자기는 칼로 선형과 자기를 죽일 것이라 한다. 다행히 선형은 부친의 명령을 거역할 자가 아니요, 또 사랑이 없다고 자기를 버릴 자가 아니다. 그러나 도덕의 힘을 빌려 법률의 힘을 빌려서야 겨우 선형을 자기의 사랑에 복종케 한다 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아니, 선형은 나를 사랑한다' 하고 억지로 확신하여 본다.
형식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아니하여 선형의 사랑을 시험하여 보리라 하는 생각이 난다. 우선 악수를 청하여 보고 다음에 키스를 청하여 보리라. 그래서 저편이 응하면 사랑 있는 표요, 응치 아니하면 사랑이 없는 표로 알리라 한다. 우선이가 일찍 '사내답게, 기운 있게' 하던 말을 생각하여 오늘은 기어이 실행하여 보리라 하면서도 이내 실행치 못하였다.
근일에 장로 부처의 태도가 얼마큼 변하여진 듯하다. 선형의 태도는 여전하지마는 그 눈에는 무슨 근심이 있는 듯하다. 형식도 대개 그 눈치를 짐작하였으나 자기가 먼저 말을 내기도 어려워서 혼자 걱정만 하였다. 그러나 자기는 조곰도 잘못한 일이 없으니까 언제나 여러 사람의 오해가 풀릴 날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래서 일간에는 영어만 가르치고는 곧 집에 돌아와서 책을 보았다.
하루는 형식에게 편지 한 장이 왔다. 황주 김병국의 편지다. 그 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내가 내외간에 애정이 없는 것도 형도 아는 일이어니와 근래에 와서 더욱 심하게 되었다. 내 아내에게 결점이 있는 것도 아니요, 내 마음이 방탕해서 그런 것도 아니라. 나는 근래에 극렬한 적막의 비애를 느끼게 되었고, 이 비애는 결코 내 아내의 능히 위로하여 줄 바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구한다. 무엇을 구한다는 것보다 어떤 사람을 구한다. 그러고 그 사람은 이성(異性)인 것 같다. 나는 그 사람을 못 구하면 죽을 것같이 적막하다. 그래서 억지로 내 아내를 사랑하려 한다. 그러나 힘쓰면 힘쓸수록 더욱 멀어져 간다.
내 누이가 돌아왔다. 누이를 대하면 매우 유쾌하다. 또 누이도 내 마음을 알아주어서 여러 가지로 위로도 하여 준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못 얻는 정신적 위안을 누이에게서 얻으려 하였다. 그래서 과연 얻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누이의 사랑에는 한정이 있다' 함이다. 나는 이제는 누이의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구하던 것은 오직 정신적 위안뿐인 줄 알았더니 이제 와서 비로소 그렇지 아니한 줄을 깨달았다. 즉 나의 요구하는 것은 정신적이라든가 육적(肉的)이라든가 하는 부분적 사랑이 아니요, (영육(靈肉)을 합한) 전인격(全人格)의 사랑인 줄을 깨달았다.
그런데 한 이성(異性)이 내 앞에 나섰다. 나는 견딜 수 없이 그에게 끌려진다. 나는 지금 의리와 사랑의 두 사이에 끼어서 더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긴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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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병국의 편지를 보고 놀랐다. 병국은 유학생 중에도 극히 도덕적 인물이었다. 술도 아니 먹고 계집은 무론 곁에도 가지 아니하였다. 그 중에도 부부의 관계에 대하여는 극히 굳건한 사상을 가졌었다. 누가 아내에게 애정이 없다든지 이혼 문제를 말하면 병국은 극력하여 반대하였다. 한번 부부가 된 이상에는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하여 예수교적 혼인관을 가졌었다. 당시 유학생에게 연애론과 이혼론이 성하였을 때에 병국은 유력한 부부 신성론자였다. 그러하던 병국이가 이제는 이러한 말을 하게 되었다. '아내를 사랑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건마는 힘을 쓰면 쓸수록 더욱 멀어 가오' 하는 병국의 편지 구절을 형식은 한번 더 읽어 보았다. 그러고 '나는 무엇을 구하오. 그것은 이성인가 보오. 이것을 못 얻으면 죽을 것 같소' 하는 구절과, '내가 구하는 것은 정신적이라든지 육적이라든지 하는 부분적 사랑이 아니요, 영육(靈肉)을 합한 전인격적 사랑이외다' 한 구절을 생각하매, 병국의 괴로워하는 모양이 역력히 눈에 보이는 듯하여 무한히 동정이 갔다. 그러나 형식은 또 자기의 처지를 생각한다. 선형은 과연 자기를 사랑하여 주는가. 자기는 선형에게 '부분적이 아니요 전인격적인 사랑'을 받는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하여도 선형의 자기에게 대한 태도는 냉담한 것 같다. 이 약혼은 과연 사랑을 기초로 한 것일까.
그날 저녁에 선형은 '녜' 하고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그 '녜'가 무슨 뜻일까. '형식을 사랑합니다' 하는 뜻일까. 또는 '부모께서 그렇게 하라 하시니 명령대로 합니다' 하는 뜻일까. 선형의 자기에게 대한 처지가, 병국의 그 아내에게 대한 처지와 같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며(생각하매) 형식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난다. 만일 선형이가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부모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 하면, 이는 불쌍한 선형을 희생함이라. 선형은 속절없이 사랑 없는 지아비 밑에서 괴로운 일생을 보낼 것이요, 또 형식 자기로 말해도 결코 행복되지 아니할 것이라. 남의 일생을 희생하여서까지 자기의 욕심을 채움이 인도에 어그러짐이 아닐까. 이에 형식은 선형의 뜻을 물어 보기로 결심하였다.
그 이튿날은 마침 순애가 두통이 나서 눕고 선형과 단둘이 마주앉을 기회를 얻었다. 영어를 다 가르치고 난 뒤에 형식은 있는 힘을 다하여,
"선형 씨, 한마디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하고 형식은 고개를 숙였으나 선형은 고개를 들어 형식의 갈라진 머리를 보고 의심나는 듯이 한참 생각하더니,
"무슨 말씀이야요?"
하고 살짝 얼굴을 붉힌다.
"제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을 해주셔야 합니다. 이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꺼리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는 형식의 가슴은 자못 울렁울렁한다. 사생이 달린 큰 판결이 몇 초 안에 내리는 듯하다. 선형도 아직 이렇게 책임 중한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으므로 형식의 말에 무서운 생각이 난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모르면서 간단히,
"녜."
하였다. 약혼하던 날 대답하던 '녜'와 다름이 없는 '녜'로다. 형식도 더 말하기가 참 어려웠다. 또 그 대답이 무섭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형의 참뜻을 모르고 의심 속으로 지내기는 더 무서웠다. 그래서 우선의 '사내답게' 하던 말을 생각하고 기운을 내어,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선형 씨는 나를 사랑합니까?"
하고는 힘있게 선형의 눈을 보았다. 선형도 하도 뜻밖에 질문이라 눈이 동그래진다. 더욱 무서운 생각이 난다. 실로 아직 선형은 자기가 형식을 사랑하는가 않는가를 생각하여 본 적이 없다. 자기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권리가 있는 줄도 몰랐다. 자기는 이미 형식의 아내다. 그러면 형식을 섬기는 것이 자기의 의무일 것이다. 아무쪼록 형식이가 정답게 되도록 힘은 썼으나, 정답게 아니 되면 어찌하겠다 하는 생각은 꿈에도 한 일이 없었다. 형식의 이 질문은 선형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래서 물끄러미
형식을 보다가,
"그런 말씀은 왜 물으셔요?"
"그런 말을 물어야지요. 약혼하기 전에 서로 물어 보았어야 할 것인데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물어야지요."
선형은 잠자코 앉았다.
"분명히 말씀을 하십시오. 오냐라든지 아니라든지……."
선형의 생각에는 그런 말은 물을 필요도 없고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이미 부부가 아니냐. 그것은 물어서 무엇 하랴 한다. 그래서 웃으며,
"왜 그런 말씀을 물으셔요?"
"하루라도 바삐 아는 것이 피차에 좋지요. 일이 아주 확정되기 전에……."
"에? 확정이 무슨 확정입니까."
"아직 약혼뿐이지 혼인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직 잘못된 것을 교정할 여지가 있지요."
선형은 더욱 무서워서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의 말하는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약혼했던 것을 깨트린단 말씀입니까?" 하는 선형의 눈에는 까닭 모르는 눈물이 고인다. 형식은 그것을 보매 이러한 말을 낸 것을 후회하였으나,
"녜― 그 말씀이야요."
"왜요?"
"만일 선형 씨가 나를 사랑하시지 아니하면……."
"벌써 약혼을 했는데두?"
"약혼이 중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무엇이 중합니까."
"사랑이지요."
"만일 사랑이 없다 하면?"
"약혼은 무효지요."
99
선형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선생께서는?"
"제야 선형 씨를 사랑하지요. 생명보다 더 사랑하지요."
"그러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오. 선형 씨도 저를 사랑하셔야지요."
"아내가 지아비를 아니 사랑하겠습니까."
형식은 물끄러미 선형을 본다. 선형은 고개를 숙인다.
"그것은 뉘 말입니까."
"성경에 안 있습니까."
"그렇지마는 선형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형 씨의 진정으로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합니까, 또는 사랑하니까 아내가 됩니까."
이것도 선형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마찬가지 아닙니까."
'마찬가지'라는 말에 형식은 놀랐다. 그것이 어찌하여 마찬가질까. 이 계집애는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할 줄을 모르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일언이폐지하고,
"한마디로 대답해 줍시오…… 저를 사랑하십니까?"
하는 소리는 얼마큼 애원(哀願)하는 듯하다. '아니오' 하는 대답이 나오면 형식은 곧 죽을 것 같다. 꼭 다문 선형의 입술은 형식의 생명을 맡은 재판장의 입술과 같다. 선형은 이제는 머리가 혼란하여 더 생각할 수가 없다. 형식의 비창한 얼굴을 보매 다만 무서운 생각이 날 따름이다. 그래서 다만,
"녜!"
하였다. 형식은 한번 더 물어 보려 하다가 '녜'가 변하여 '아니오'가 될 것이 무서워서 꾹 참고 갑자기 선형의 손을 쥐었다. 그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마치 형식의 손에 녹아 버리고 마는 듯하였다. 선형은 가만히 있다. 형식은 한번 더 힘을 주어서 선형의 손을 쥐었다. 그리하고 선형이가 마주 꼭 쥐어 주기를 바랐으나 선형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다. 형식은 얼른 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왔는지 형식도 모른다. 선형은 인사도 아니 하고 형식의 나가는 양을 보았다.
선형은 책상에 기대어서 눈을 감고 혼자 생각하였다. 형식이가 하던 말이 분명하게 생각이 난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을 어떻게 하는가. 부끄럽지도 아니한가. 이러한 말을 부끄럼 없이 하는 형식은 암만해도 단정한 남자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이 기생집에 가서 기생과 하던 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가 형식에게 욕을 당한 것 같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든지 동포를 사랑한다든지 부부는 서로 사랑할 것이라든지 하면, 그 사랑이란 말이 극히 신성하게 들리되, 남자가 여자에게 대하여, 또는 여자가 남자에게 대하여 사랑해 주시오 한다든지, 나는 사랑하오 한다든지 하면 어찌해 추해 보이고 점잖지 아니해 보인다. 선형이가 지금껏 가정과 교회에서 들은 바로 보건대, 다른 모든 사람은(사랑은) 다 거룩하고 깨끗하되 청년 남녀의 사랑만은 아주 불결하고 죄악같이 보인다. 선형은 사랑이란 생각과 말이 원래 남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인 줄을 모른다. 이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관한 말은 적지 않게 선형을 불쾌하게 하였다. 선형의 생각에 자기의 지아비는 극히 깨끗하고 점잖은 사람이라야 할 터인데 그러한 소리를 염치없이 하는 형식은 죄인인 듯하다. 더러운 기생에게 하던 버릇을 내게다가 했구나 하고 선형은 한번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형식이가 잡았던 손을 보았다. 그 큰 손 속에 자기의 손이 푹 파묻혔던 것과 자기의 손을 아프도록 힘껏 쥐어 주던 것을 생각하고 선형은 무엇이 묻은 것을 떨어 버리는 듯이 손을 서너 번 내어두르고 치마로 문대었다.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본즉, 사랑하여 준다는 말과 손을 잡아 주던 맛이 아주 싫지도 아니하였다. 그뿐더러 형식이가 힘껏 손을 꼭 쥘 때에는 전신이 찌르르 떨리는 듯이 기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다시 그 손을 내어들고 보다가 방그레 웃으며 가만히 입에 대어 보았다. 또 선형은 생각하였다. 자기는 과연 형식을 사랑하는가. '아내가 되었으니까 지아비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니까 그 지아비의 아내가 되었느냐' 하던 말과 '만일 사랑이 없다 하면 약혼은 무효지요' 하던 형식의 말을 생각하였다. 만일 그렇다 하면 부모의 명령은 어찌하는가. 내가 형식에게 사랑이 없다 하면 '나는 형식에게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모께서 정해 주신 이 혼인은 거절합니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주장하신 신성한 것이니까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의 말을 잘못이다. 형식의 말은 깨끗지 못한 말이다. 그러나 자기는 형식의 아내다. 결코 사람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형식의 아내다.
선형은 일어나서 방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암만해도 마음이 정치 못하여 다시 책상에 기대어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이시여, 죄 많은 딸의 죄를 용서하시고 갈 길을 밝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하고 잠깐 주저하다가,
"제 지아비를 정성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100
하루는 병욱이가 혼자 앉아서 한 손으로 곁에 뉘어 놓은 바이올린을 되는 대로 울리며 영채에게 배운 {고문진보}를 읽을 적에 어디 갔다 오는 병국은 한 손에 파나마를 들고 부채를 부치며 들어와서 병욱의 방 문지방에 걸어앉으며,
"요새에는 또 한시(漢詩)에 미쳤구나. 이제는 음악은 내버리고 한시 공부나 하지."
하며 웃는다.
"왜요? 이렇게 손으로는 음악하고 눈으로는 시를 읽지요."
하고 자주 바이올린 줄을 울리며 아이들 모양으로 몸을 흔들고 소리를 내어서 시를 읽는다.
병국은 병욱의 몸 흔드는 양을 보고 웃고 앉았더니,
"손님은 어디 가셨니?"
한다.
(병국은 영채를 손님이라고 부른다.) 병욱은 고개를 번쩍 들고 웃으면서,
"손님 어디 오셨어요. 어디서 왔나요?"
병국은 누이가 자기를 조롱하는 줄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아, 그이 말이다."
"아, 그이가 누구 말이야요?"
병욱은 병국이가 영채를 위하여 괴로워하는 줄을 알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병국은,
"그만두어라."
하고 휙 돌아앉는다. 병국은 견디지 못하여 일어서서 나가랸다. 병욱은 뛰어나와 병국의 소매를 당기며,
"오빠, 들어오십시오. 내가 잘못했으니."
"싫다, 어디 가야겠다."
하고 팔을 잡아챈다. 병욱은 깔깔 웃으며,
"글쎄 여쭐 말씀이 있으니 여기 좀 앉으셔요."
하는 말에 병국은 또 앉았다. 병욱의(병욱은) 손으로 병국의 등에 붙은 파리를 잡으며,
"오빠, 무슨 근심이 있어요?"
하고 웃기를 그치고 병국의 얼굴을 모로 본다. 병국은 놀라는 듯이 고개를 돌려 병욱을 보며,
"아니, 왜? 무슨 근심 빛이 보이니?"
"녜, 어째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애요."
하고 '나는 그 근심을 알지' 하는 듯이 생긋 웃는다. 병국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웃으면서,
"양잠회사를 꼭 세워야 하겠는데 아버지께서 허락을 아니 하시는구나. 그래서 지금도 그 일로 갔다가 오는 길이다. 너는 바이올린이나 뽕뽕 울리고, 나는 돈을 벌어야지……."
병욱은 한 걸음 물러서서 다른 데를 보며 비웃는 듯이,
"흥, 그것이 근심입니다그려. 내가 돈을 너무 써서. 그렇거든 그만둡시오. 나는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공부하지요. 여자는 저 먹을 것도 못 번답디까?"
 병국은 껄껄 웃으며,
"잘못했소, 누님. 그렇게 성내실 게야 있소? 제가 남을 조롱하니까, 나도 당신을 조롱하지요."
병욱은 다시 병국의 곁에 와 서며,
"그것은 농담이구요."
하고 앉아서 몸을 우쭐우쭐하며 소리를 낮추어, "오빠, 나 영채 데리고 동경 가요. 좋지요?"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하고 극히 냉정한 체하나 벌써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말을 왜 하니?"
"일간 가게 해주셔요. 집에 있기도 싫고 또 영채를 데리고 가면 입학 준비도 해야지요. 그러니까 곧 떠나게 해주셔요."
하고 유심하게 병국을 본다. 병국은 누이의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그러고 누이의 정을 더욱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만으론 확실치 못하므로,
"글쎄, 개학이 아직도 한 달이 있는데, 왜 그렇게 빨리 간다고 그러느냐."
병욱은 형(오라비)의 눈을 이윽히 보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어서 가야 해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하는 말에 병국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그렇다. 영채가 오래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기는 괴로울 것이요, 또 미상불 위험도 없지 아니할 것이라. 자기도 그러한 생각이 있기는 있었다. 자기가 어디로 여행을 가든지 영채를 어디로 보내든지 하는 것이 좋을 줄을 알기는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끄는 힘이 있어서 실행을 못 하였다. 병국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옳다, 네 말이 옳다. 어서 가야 한다."
하고는 휘 한숨을 쉰다. 병욱은 형(병국)의 어깨를 만지며,
"영채도 오빠를 사랑하니 동생으로 알고 늘 사랑해 주십시오. 저도 제 동생으로 알고 늘 같이 지내겠습니다. 동경 가면 둘이 한집에 있어서 밥 지어 먹고 공부하지요. 불쌍한 사람을 건져 주는 것이 안 좋습니까. 또 영채 씨는 좀더 공부를 하면 훌륭한 일꾼이 되겠는데요."
병국은 고개를 숙인 대로 누이의 말을 듣더니 손으로 무릎을 치고 몸을 쭉 펴면서,
"잘 생각하였다. 네게야 무엇을 숨기겠니. 실로 그 동안 퍽 괴로웠다."
하고 또 잠깐 생각하다가 한번 더 결심한 듯이,
"그러면 언제 떠나겠니?"
"글쎄요, 오빠께서 가라시는 날 가지요."
"그러면 모레 낮차에 가거라. 내일 노자를 얻어 줄 것이니."
이때에 영채가 대문 밖으로서 뛰어들어오다가 병국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병국도 얼른 일어나서 답례한다. 영채는 뒷산에서 뜯어온 붓꽃〔花菖蒲〕 한줌을 병욱에게 준다. 병욱은 그 꽃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더니 절반을 갈라 들며,
"이것은 오빠 책상 위에 꽂아 드려요. 이것은 우리 둘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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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선형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지금껏 형식이가 자기의 남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아니하였었다.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장로가 웃는 말 모양으로,
"이선생께서 잘 가르쳐 주시더냐?"
하고 유심히 자기를 보았다. 그때에도 선형은 무심히,
"녜, 퍽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요."
하였다.
"네 마음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니?"
그제야 선형은 부친의 말에 무슨 뜻이 있는 줄을 알아듣고 잠깐 주저하였으나 대답 아니할 수도 없어서,
"녜."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나서는 종일 형식의 일을 생각하였다. 형식이가 과연 자기의 마음에 드는가, 과연 자기는 형식의 아내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를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나 어떤지를 몰랐다. 형식이가 정다운 듯도 하고 그렇지 아니한 듯도 하였다. 그래서 순애더러,
"얘 순애야, 집에서 내 혼인을 할라나 보다. 어쩌면 좋으냐?"
하고 물었다. 순애는 별로 놀라는 양도 보이지 아니하고,
"누구와?"
"자세히 알 수는 없는데, 아마 이선생과 혼인을 할 생각이 있는지……."
"이선생과?" 하고 순애는 놀라는 빛을 보이며,
"무슨 말씀이 계셔요?"
"아까 아버지께서 이선생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느냐 하고 이상하게 내 얼굴을 보시던데……."
순애는 잠깐 생각하더니,
"그래, 형님 생각에 어떻소?"
선형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글쎄 모르겠어. 어쩐지를 모르겠구나. 얘 어쩌면 좋으냐?"
"형님 생각에 달렸지요. 좋거든 혼인하고 싫거든 말고 그럴 게지."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면 그만이지."
"왜 그래요. 내 마음에 없으면 아니하는 게지. 부모가 억지로 혼인을 하겠소. 지금 세상에……."
"그럴까?"
하고 결단치 못한 듯이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기웃기웃하다가,
"얘 순애야, 그런데 네 생각에는 어떠냐?"
"무엇이?"
"내가 혼인하는 것이― 이선생과."
"내가 어떻게 알겠소."
"그러지 말고 말을 해라. 너밖에 뉘게 의논을 하겠니. 아까 어머님께 말씀을 하려다가 어째 부끄러워서……."
"글쎄, 형님도 모르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런 일이야 자기 마음에 달렸지 누가 말을 하겠소."
선형은 답답한 모양으로,
"그러면 네 생각에 이선생이 사람이 어떠냐…… 좋을까."
"좋겠지요."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이삼 일 동안 한 시간씩 글이나 배워 보고야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겠어요. 형님 생각에는 어때요?"
"나도 모르겠으니 말이다…… 에그, 어쩌나…… 어쩌면 좋아."
이러한 회화가 있었다. 이 회화를 보아도 알 것같이 선형은 형식에 대하여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그러나 십칠팔 세 되는 처녀의 마음이라, 아주 악인이거나, 천한 사람이거나, 얼굴이 아주 못생긴 사람만 아니면 아무러한 남자라도 미운 생각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형식은 세상에서 다소간 칭찬도 받는 사람이므로 선형도 형식이가 싫지는 아니하였다. 차라리 어찌 생각하면 정다운 듯한 생각도 있었고, 더구나 아침에 부친의 말을 듣고는 전보다 좀더 정다운 생각도 나게 되었다. 그러나 무론 선형이가 형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 그렇게 이삼 일 내로 사랑이 생길 까닭이 없을 것이다. 장차 어떤 정도까지 사랑이 생길는지 모르거니와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랑이 생긴 것이 아니다.
형식이나 선형이가 피차의 성질을 모를 것은 물론이다. 형식이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도 다만 아름다운 꽃을 사랑함과 같은 사랑이다. 보기에 사랑스러우니 사랑하는 것이다. 극히 껍데기 사랑이다. 눈과 눈의 사랑이요, 얼굴과 얼굴의 사랑이다. 피차의 정신은 아직 한 번도 조곰도 마주 접하여 본 적이 없었다. 형식은 선형을 바라보며, 선형은 형식을 바라보며 속으로 '저 사람의 속이 어떠한가' 할 터이다. 그러고 '저 사람의 속이야 지내 보아야 알지' 할 터이다. 다만 김장로 양주와 한목사만 이 두 사람의 속을 잘 알거니 한다. 무론 이 두 사람이 피차에 아는 것만큼도 모르건마는 그래도 자기네는 이 두 사람의 속을 잘 알거니 한다. 그러고 두 사람이 부부 된 뒤에 행복될 것은 확실하거니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을 마주 붙인다. 다만 자기네 생각에― 그 미련하게 얕은 생각에 좋을 듯하게 보이므로 마주 붙인다. 그러다가 만일 이 부부가 불행하게 되면 그네는 자기네 책임이라 하지 아니하고 두 사람의 책임이라 하거나 또는 팔자라, 하느님의 뜻이라 할 것이다. 이 모양으로 하루에도 몇천 켤레 부부가 생기는 것이다.
82
장로는 형식과 선형을 번갈아 돌아보더니 목사를 향하여,
"어찌하면 좋을까요?"
한다. 아직 신식으로 혼인을 하여 본 경험이 없는 장로는 실로 어찌하면 좋을지를 모른다. 무론 목사도 알 까닭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모른다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인륜에 대사를 의논하는 터인데 위선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시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다른 사람들도 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목사는 정신을 모으려는지 한참 잠잠하더니 극히 정성스럽고 경건한 목소리로, 처음에는 들릴락말락하다가 차차 크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지하시며, 사랑이 많으사 저희 죄인 무리를 항상 사랑하시는, 하늘 위에 계신 우리 주 여호와 하느님 아버지시여."
하고 우선 하느님을 찾은 뒤에,
"이제 저의 철없고 지각 없고 죄 많고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죄인 무리가 우리 주 하느님 아버지께서 만세 전부터 정해 주신 뜻대로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이형식과 박선형과 약혼을 하려 하오니 비둘기 같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성신께옵서 우리 무지몽매한 죄인 무리들의 마음에 계시사 모든 일을 주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무지몽매한 죄인 무리라 무슨 공로 있어 감히 거룩하신 하느님 우리 여호와께 비오리까마는 다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시고 하느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공로를 의지하여 비옵나이다. 아멘"
하고도 한참이나 그대로 있다가 남들이 다 고개를 든 뒤에야 가만가만히 고개를 든다. 목사는 두 사람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정성껏 아멘을 불렀다. 목사는 엄숙하게,
"그러면 정식으로 서로…… 어…… 말씀을 하시지요."
하고 장로 양주를 보고 다음에 선형을 본다. 장로는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는지 모르는 모양으로 오른손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더니 부인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 옳으리라 하여 양반스럽게 느럭느럭한 목소리로,
"여보, 내가 형식 씨에게 약혼을 청하였더니 형식 씨가 승낙을 하셨소. 부인의 생각에는 어떠시오?"
하고는 자기가 경위 있게, 신식답게 말한 것을 스스로 만족하여 하며 부인을 본다. 부인은 아까 둘이 서로 의논한 것을 새삼스럽게 또 묻는 것이 우습다 하면서도 무엇이나 신식은 다 이러하거니 하여, 부끄러운 듯이 잠깐 몸을 움직이고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였다. 장로는,
"그러면 부인께서도 동의하신단 말씀이로구려."
"녜."
하고 부인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을 본다.
"그러면 약혼이 되었지요."
하고 목사를 본다. 목사는 기도나 하는 듯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눈으로,
"녜, 그러나 지금은 당자의 의사도 들어 보아야 하지요."
하고 자기가 장로보다 더 신식을 잘 아는 듯하여 만족해하며,
"무론 당자도 응낙은 했겠지마는 그래도 그렇습니까― 자기네 의사도 물어 보아야지요."
하고 형식을 본다. '어디 내 말이 옳지?' 하는 것 같다. 형식은 다만 목사를 힐끗 보고 또 고개를 숙인다. 장로가,
"그러면 당자의 뜻을 물어 보지요."
하고 재판관이 심문하는 태도로 위의를 갖추더니 남자 되는 형식의 뜻을 먼저 묻는 것과 다음에 여자 되는 선형의 뜻을 묻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여,
"그러면 형식 씨도 동의하시오?"
목사는 장로의 질문이 좀 부족한 듯하여 얼른 형식을 보며,
"지금은 당자의 뜻을 듣고야 혼인을 하는 것이니까 밝히 말씀을 하시오― 선형과 혼인하실 뜻이 있소?"
하고 주를 낸다. 형식은 어째 우스운 생각이 나는 것을 힘껏 참았다. 그러나 대답하기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우선을 생각하고 얼른 고개를 들고 위엄을 갖추며,
"녜."
하였다. 제 대답도 어째 우스웠다.
"이제는 선형의 뜻을 물어야 되겠소."
하고 목사가 선형의 수그린 얼굴을 옆으로 보며,
"너도 부끄러워할 것 없이 뜻을 말해라."
선형은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장로가
"네 뜻은 어떠냐?"
하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였다. 장로도 목사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빙그레 웃는다. 부인도 웃는다. 그러나 목사는 여전히 엄숙하게,
"그러면 부인께서 물어 보십시오."
"얘, 대답을 하려무나."
"신식은 그렇단다. 대답을 해라" 하고 목사가 또 주를 낸다. 부인이 또 한번,
"얘, 대답을 하려무나."
이번에는 목소리가 좀 날카롭다. 선형은 마지못하여 가만히,
"녜―."
하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들은 사람이 없었다. 장로가,
"어서 대답을 해라."
하고 한번 더 재촉을 받고 또 한번,
"녜―."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장로와 목사는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부인은 들었다. 또 한 사람 형식도 들었다. 이번에는 목사가,
"어서 대답을 해라!"
"지금 대답을 했어요."
하고 부인이 대신 말한다. 선형의 얼굴은 거의 무릎에 닿으리만큼 수그러졌다.
83
"옳지, 이제는 되었소. 이제는 부모의 허락도 있고 당자도 승낙을 하였으니까, 이제는 정식으로 된 모양이외다."
하고 목사가 비로소 만족하여 웃는다. 목사의 생각에 이만하면 신식 혼인이 되었거니 한 것이다. 장로는 이제는 정식으로 약혼을 선언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여,
"그러면 혼약이 성립되었소."
하고 형식을 보며,
"변변치 아니한 딸자식이오마는 일생을 부탁하오."
하고 다음에 선형을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친다. 형식은 꿈같이 기뻤다. 마치 전신의 피가 모두 머리로 모여 오르는 듯하여 눈이 다 안 보이는 것 같았다. 형식은 자기의 숨소리가 남에게 들릴까 보아서 억지로 숨을 조절한다. 목사와 장로는 새삼스럽게 형식의 벌겋게 된 얼굴을 보고 웃는다. 선형도 웬일인지 모르게 기뻤다. 자기가 '녜' 하고 대답하던 것이 기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였다. 일전 글 배울 때에 하던 모양으로 치맛고름으로 이마와 콧마루에 땀을 씻었다.
얼마 동안 서로 마주보고 앉았더니 장로가,
"그런데."
하고 목사를 향하여,
"성례를 하고 미국을 보낼까요, 공부하고 나서 성례를 하는 것이 좋을까요?"
"글쎄요."
하고 목사가,
"몇 해나 되면 졸업을 하겠나요?"
"선형이야 적어도 오 년은 있어야겠지."
하고 선형더러,
"오 년이면 졸업을 한다고 했지?"
"녜, 명년 봄에 칼리지대학(大學)에 입학을 하면……."
하고 이번에는 곧 대답을 하고 고개를 든다. 형식의 시선과 선형의 시선이 잠깐 마주치고 서로 갈라졌다. 마치 번개와 같이 빨랐다. 그러고 번개와 같이 힘이 있었다.
"그러고 형식 씨는."
하고 목사가,
"몇 해면 졸업을 하시겠소?"
형식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목사에게 자기도 미국에 보내어 준다는 말은 들었건마는 벌써 작정이 된 듯이 말하기는 좀 부끄러웠다. 그래서,
"녜?"
하고 말았다. 목사는,
"아니, 금년 가을에 미국을 가시면 언제 졸업을 하겠나 말이오."
"금년에 입학을 하면 만 사 년 후에 졸업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박사가 되나요?"
"아니지!"
하고 장로는 여기야말로 자기의 유식함을 보일 곳이라 하여,
"박사가 되려면 그 후에도 얼마를 있어야 하지."
하였다. 그러나 몇 해를 있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형식은 그런 줄을 알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제는 김장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아버지다. 장인이다. 그래서 속으로도 웃기를 그치고,
"칼리지대학(大學)을 졸업하고 이태 이상 포스트 그래듀에이트 코스대학원(大學院)을 공부하면 마스터라는 학위를 얻고 그 후에 또 삼사 년을 공부하여야 박사 시험을 치를 자격이 생긴답니다."
하였다. 이 말을 하고 나매 얼마큼 수줍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면 형식 씨는 박사가 되어 가지고 오시오. 여자도 박사가 있나요?"
"녜, 서양은 무론 여자도 있습니다. 일본 여자도 한 사람 미국서 박사가 되었다가 연전에 죽었습니다."
하고 얼른 선형을 보았다. 부인은,
"아니, 여자 박사가 다 있어요?"
하고 놀라며 웃는다. 장로도 여자 박사가 있는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자기도 놀랐건마는 아니 놀란 체하였다. 그러고,
"여자가 임금도 되는데."
하고 자기의 유식함을 증거하였다. 목사가,
"그러면 선형이도 박사가 되어 가지고 오지. 허허, 희한한 일이로다. 내외가 다 박사가 되고."
하고 벌써 박사가 되기나 한 듯이 기쁘게 웃는다. 형식과 선형도 웃었다. 다 웃었다. 형식도 박사가 되는 듯하였고 선형도 박사가 되는 듯하였다. 부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기뻤다. 목사가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러면 성례를 하고 가는 것이 좋겠구려. 오 년 동안이나……."
"그래도 공부를 마치고 성례를 해야지."
하고 장로가 말한다.
"그렇게 어떻게."
하고 부인이 딸에게 동정한다.
"그렇고말고요. 성례를 해야지."
"그러면 공부가 되나. 공부를 마치고 해야지요."
"이것도 당자에게 물어 봅시다."
하고 목사가 또 신식을 끄집어내어,
"형식 씨 생각에는 어떻소?"
"제가 알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아오?"
형식은 웃고 말았다. 목사는 선형에게,
"네 생각엔 어떠냐?"
선형도 속으로 웃었다. 그러고 말이 없다. 목사는 좀 무안하게 되었다. 성례하여야 한다는 편에도 아무 이유가 없고, 아니 해야 한다는 편에도 아무 이유가 없다. 혼인을 하는 것도 무슨 이유나 자신이 없이 하였거든 성례를 하고 아니 함에 무슨 이유나 자신이 있을 리가 없다. 장난 모양으로 혼인이 결정되고 장난 모양으로 공부를 마치고 성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고 일동은 가장 합리(合理)하게 만사를 행하였거니 하였다. 하느님의 성신의 지도를 받았거니 하였다. 위험한 일이다.
84
형식은 김장로 집 대문을 나섰다. 수증기 많은 여름밤 공기가 땀난 형식의 몸에 불같이 지나간다. 그것이 형식에게 지극히 시원하고 유쾌하였다. 형식은 반작반작하는 하늘의 별과 집집의 전등과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슬적슬적 보면서 더할 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자기의 운수에 봄이 돌아온 것 같다. 선형은 아내가 되었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내 것이 되었다. 그러고 미국에 가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학사가 되고 박사가 될 수 있다. 사랑스러운 선형과 한차를 타고 한배를 타고 같이 미국에 가서 한집에 있어서 한학교에서 공부할 수가 있다. 아아, 얼마나 즐거울는지. 그러고 공부를 마치고 나서는 선형과 팔을 겯고 한배로 한차로 본국에 돌아와서 만인의 부러워함과 치하함을 받을 수가 있다. 아아, 얼마나 즐거울는지. 그러고 경치도 좋고 깨끗한 집에 피아노 놓고 바이올린 걸고 선형과 같이 살 것이다. 늘 사랑하면서 늘 즐겁게…… 아아, 얼마나 기쁠는지. 형식은 마치 어린아이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장래도 장래려니와 지금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기쁘다. 그래서 이 생각하는 동안을 더 늘일 양으로 일부러 광화문 앞으로 돌아서 종로를 지나서 탑골공원을 거쳐서…… 그래도 집에 돌아오는 것이 아까운 듯이 집에 돌아왔다. 마음속에는 눈앞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앉았는 선형의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러고 그 모양으로 보면 볼수록 더욱 사랑스러워지고 더욱 어여뻐진다. 형식은 대문 밖에서 한참 주저하였다. 이제는 내가 이러한 대문으로 출입할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자기는 갑자기 귀해지고 높아진 듯하였다. 그래서 주먹으로 대문을 한번 치고 혼자 웃으며 마당에 들어섰다.
노파와 우선이가 툇마루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형식을 보고 벌덕 일어난다. 우선이가 형식의 어깨를 힘껏 치고 웃으며,
"요, 어찌 되었나."
형식은 시치미 뚝 떼고,
"무엇 말이야?"
"아따, 왜 이렇게……."
"아, 어떻게 하셨어요?"
하고 노파가,
"일이 되었어요?"
하고 웃는다.
"무슨 일 말이야요?"
하고 형식도 웃는다.
"어디 자초지종을 내게 아뢰게. 가서 저녁 먹고…… 그 담에는?"
"물 마시고……."
"그 담에는?"
"이야기하고……."
"그 담에는?"
"왔지!"
"에끼, 바로 아뢰지 못할 테야!"
하고 우선이가 두 팔로 형식의 팔을 비틀며,
"인제두, 인제두 말을 아니 할 터이야?"
"아이구구, 응…… 응, 말해…… 말해."
우선이가 팔을 놓으매 형식은, "글쎄 무슨 말을 하란 말이어?"
"주릿대를 안고야 말을 하겠니?"
하고 또 한번 힘껏 비튼다.
"오냐, 오냐, 인제는, 인제는 말한다."
"그래 말을 해!"
하고 팔은 놓지 아니하고 다짐을 받는다.
"가만 있게. 불이나 켜놓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지."
하고 자기의 방 램프에 불을 켜고 모자와 두루마기를 벗어 방 안에 집어던진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던지던 것과는 뜻이 다르다. 노파는 쌈지와 담뱃대를 들고 형식의 방으로 건너온다. 우선도 담배를 피워 물고 벙거지로 가슴과 다리와 등을 부치며 형식의 말 나오기를 기다린다. 형식은 웃으며,
"약혼했네."
하였다.
"그러면 성례는 언제 하고?"
"졸업 후에 한다대."
"졸업 후에? 미국 가서 말인가."
"응, 오 년 후에."
"오 년 후에?"
하고 노파가 놀라서 담뱃대를 입에서 떼며,
"오 년 후에, 다 늙은 담에요? 그게 무슨 일이람!"
"오 년 후에 누가 늙어요?"
하고 형식이가 노파를 보며 웃는다.
"한창 재미있을 시절은 서로 물끄러미 마주보기만 하고 있어요? 에그 참, 어서 성례하시오. 오 년 후라니."
하고 노파는 자기에게 큰 상관이나 있는 듯이 크게 반대한다. 형식은 노파의 말이 옳다 하였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는 동안이 좋지요."
하고 우선더러,
"그런데 칠월 그믐 안으로 떠나게 되었네. 오는 구월 학기에 입학을 할 양으로."
85
"칠월 그믐께?"
하고 우선은 놀라며,
"그렇게 급히?"
한다.
"구월에 입학을 못 하면 일년을 잃게 되겠으니까."
"그러면 무엇을 배울 터인가."
"가보아야 알겠지마는 교육을 연구하려네. 내가 지금껏 경험한 것도 교육이요, 또 지금 조선에 제일 중요한 것도 교육인 듯하고…… 하니까 힘껏 신교육을 연구해서 일생 교육에 종사하려 하네."
"교육이라 하면?"
"무론 교육이라 하면 소학 교육과 중학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지. 지금 조선은 정히 페스탈로치를 기다리는 때인 줄 아네. 조선 사람을 전혀 새 조선 사람을 만들려면 교육밖에 무엇으로 하겠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가 아니 그렇겠나마는, 더구나 시급히 낡은 조선을 버리고 신문명화(新文明化)한 신조선을 만들어야 할 조선에서는 만인이 다 교육을 위하여 힘써야 할 줄 아네. 자네도 문필에 종사하는 터니 아무쪼록 교육열을 고취해 주게. 지금 교육은 참 보잘것이 없느니……."
"그러면 사 년 동안 교육만 연구할 텐가."
"사 년이 길어 보이나. 충분히 연구하려면 십 년도 부족일 것일세."
"그런 줄은 나도 아네마는 교육 한 가지만 연구하겠는가 말일세."
"무론 거기 관련하여 다른 공부도 하지. 다른 교육을 중심으로 하고 공부한단 말일세. 특별히 사회제도(社會制度)와 윤리학(倫理學)에 힘을 쓸라네."
하고 '너는 이 뜻을 잘 모르겠다' 하는 듯이 우선을 본다. 우선은 실로 그 뜻을 잘 몰랐다. 그러나 자기의 어림으로 '대체 이러이러한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웃으며,
"그러면 자네의 아내…… 무엇이랄까, 스위트 하트는?"
형식은 웃고 얼굴을 좀 붉히며,
"내가 알겠나."
"누가 알고…… 남편이 모르면."
"제가 알지…… 지금 세상에야 지아비라도 아내의 자유를 꺾지 못하니까."
"그러면 아무것을 배우든지 자네는 상관하지 않는단 말일세그려?"
"물론이지. '저'라는 것이 있으니까…… 누구나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권리가 있으니까. 남의 힘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저'를 좌우하겠나. 남더러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하고 충고하거나 알려 주는 것은 좋지마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너는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참람한 일이지."
우선은 미상불 놀랐다. 그러나 그럴듯하다 하였다. 그러면서도 설마 그러하랴 하였다. 그러나 더 토론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형식의 사상은 자기와는 다름을 깨닫고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였을 뿐이다. 형식은 우선의 이마와 입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이기었다 하는 기쁜 빛이 보인다. 노파는 두 사람의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다만 형식이가 어디로 간다는 줄만 알았을 뿐이다. 세 사람은 각각 딴세상 사람이다. 우선과 형식은, 혹 같은 세상 사람이 될는지도 모르되 노파는 결코 형식과 한세상 사람이 될 수가 없다. 한방 안에, 같은 시간에 각각 딴세상에 속한 세 사람이 모여앉았다. 그러고 서로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만 한다. 그러므로 그네는 같은 세상에 속하였거니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딴세상 이야기가 나오면 문득 눈이 둥글어진다. 노파는,
"이선생께서 어디를 가셔요?"
하고 가장 놀란 듯하다. 두 사람은 웃었다.
"녜, 어찌 되면 내월 그믐께."
하고 노파는 음력밖에 모르는 것을 생각하고 형식은,
"내달 보름께 미국으로 갈랍니다."
"미국? 저 양국 말씀이야요!"
"녜, 양국이오."
하는 형식의 대답을 이어 우선이가 껄껄 웃으며,
"저 코가 이렇게 크고 눈이 움쑥 들어간 사람들 사는 나라예요."
한다. 두 사람은 웃고 한 사람은 놀란다.
"아, 양국이 얼마나 멀게요?"
"한 삼만 리 되지요."
는 형식의 말.
"바다로 한 십만 리 가요."
하고 우선이가 웃는다. 그러나 노파는 삼만 리와 십만 리가 얼마나 틀리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커녕 삼만 리가 얼마나 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만 입을 헤 벌릴 뿐이다.
"여기서 동네를 열댓 번 왔다갔다하기만큼 멀어요. 그런데 크다란 쇠로 만든 배를 타고 쿵쿵쿵쿵 하면서 가요."
하는 우선의 말에 노파는,
"화륜선 타고 갑니다그려. 몇 달이나 가나요?"
하고 담배를 빨기도 잊었다.
"한 서른아믄 달 가지요."
하고 우선이가 고개를 돌리고 입을 쭈물거리고 웃는다.
"에그머니!"
하는 것을, 형식이가,
"그것은 거짓말이야요. 한 보름이면 가요."
한다. 노파는 원망하는 듯이 슬쩍 우선을 쳐다보더니,
"무엇 하러 그렇게 먼 데를 가요. 또 부인은 어떻게 하시고…… 에그머니!"
하고 노파는 몸을 떤다. 우선이가,
"부인도 같이 가지요. 이제 이선생이 부인과 함께 양국으로 가는데, 노파는 안 가보시려요? 쿵쿵쿵쿵 하는 쇠배를 타고 저 하늘 붙은 양국으로 가 보지요."
노파는 그런 소리는 들은 체도 아니 하고,
"그러면 언제나 돌아오시나요?"
"모르겠습니다. 한 사오 년 있다가 오지요. 오면 곧 찾아오지요"
하고 형식도 웃는다. 노파는 한숨을 쉬며,
"내가 사오 년을 사나요?"
하고 눈에 눈물이 고인다. 두 사람은 웃음을 그치고 노파를 물끄러미 보았다.
86
이제는 영채의 말을 좀 하자. 영채는 과연 대동강의 푸른 물결을 헤치고 용궁의 객이 되었는가. 독자 여러분 중에는 아마 영채의 죽은 것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신 이도 있을지요. 고래로 무슨 이야기책에나 (나오듯) 늦도록 일점 혈육이 없던 사람이 아들 아니 낳은 자 없고, 아들을 낳으면 귀남자 아니 되는 법 없고, 물에 빠지면 살아나지 않는 법 없는 모양으로, 영채도 아마 대동강에 빠지려 할 때에 어떤 귀인에게 건짐이 되어 어느 암자에 승이 되어 있다가 장차 형식과 서로 만나 즐겁게 백년가약을 맺어, 수부귀다남자 하려니 하고, 소설 짓는 사람의 좀된 솜씨를 넘겨 보고 혼자 웃으신 이도 있으리라.
혹 영채가 빠져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여 영채가 평양으로 간 것을 칭찬하신 이도 있을지요, 빠져 죽을 까닭이 없다 하여 영채의 행동을 아깝게 여기실 이도 있으리라.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독자 여러분의 생각하시는 바와 내가 장차 쓰려 하는 영채의 소식이 어떻게 합하며 어떻게 틀릴지는 모르지마는, 여러분의 하신 생각과 내가 한 생각이 다른 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일일 듯하다.
부산서부터 오는 이등 차실은 손님의 대부분을 남대문에 내리우고 영채의 탄 방에는 남녀 합하여 오륙 인밖에 없었다. 영채는 한편 구석에 자리를 잡고 차가 떠나자 얼굴을 남에게 아니 보이려는 듯이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어 시원한 바람을 쏘이며 남산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로 그의 주의를 끄는 것도 없었다. 그는 다만 같이 탄 사람에게 얼굴을 보이기가 싫어서 멀거니 휙휙 지나가는 메와 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별로 슬프지도 아니하고 괴롭지도 아니하였다. 곤한 잠을 반쯤 깬 모양으로 정신이 희미하였다. 꿈속 같기도 하였다.
노파와 두어 동무의 작별을 받을 때에는 슬프기도 하였다. 자기의 신세가 애달프기도 하였다. 자기는 이십여 년 살아오던 세상을 버리고 죽으러 간다는 생각이 푹푹 가슴을 우귀어 내는 듯도 하였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지 아니하는 괴로운 세상을 버리고 마는 것이 시원한 듯도 하였다. 그래서 영채의 머릿속은 마치 물끓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두 시간을 지나매 영채의 정신은 아주 침착하게 되었다. 남대문 정거장에를 어떻게 나왔는지, 어떻게 차를 탔는지 잊어버린 듯도 하였다. 남대문을 떠난 지가 여러 십 년 된 것 같기도 하고 노파와 동무의 얼굴이 마치 여러 십 년 전에 보던 얼굴같이 희미하여진다.
영채의 눈에는 여름낮 볕을 받은 푸른 산이 보이고 밀과 보리의 누른 물결과, 조와 피의 푸른 물결도 보인다. 풀의 향기를 품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모시 적삼의 틈으로 불어 들어와 땀 나는 살을 서늘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도리어 영채에게 일종의 쾌감을 주었다. 그래서 영채는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안 보이는 것을 보려고도, 보이는 것을 안 보려고도 아니 하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고, 귀에 들어오는 대로 들었다. 그러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 것이며, 무엇 하러 가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이따금 나는 죽으러 간다는 생각이 난다. 그러면 영채는 죽었다 살아나는 듯이 한번 눈을 깜박 하고 진저리를 친다. 그러고는 집 생각과 평양 생각, 형식의 생각이 쑥 나온다. 그러나 조곰씩조곰씩 나오다가는 얼른 스러지고 또 여전히 꿈꾸는 사람같이 된다.
그러다가는 혹 청량리의 광경이 (눈에) 보인다. 그 짐승 같은 사람들이 자기의 손목을 잡아 끌던 생각이 나고는 혀로 입술을 빨아 본다. 조곰 힘을 들여 빨면 짭짤한 피가 입에 들어온다. 그러면 그 피 맛을 보는 듯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한참 있다가는 만사를 다 잊어버리려는 듯이 한번 고개를 흔들고 침을 뱉고는 아까 모양으로 메와 들을 바라본다. 바람이 영채의 머리카락을 펄펄 날린다.
차가 개성 터널을 지나서 황해도 산 많은 데로 달아난다. 푸푸 소리를 내며 고개를 올라가다가는 수루루 하고 고개를 내려가며 또 푸푸하고 비스듬한 산모퉁이를 돌아가서는 수십 길이나 될 듯한 길로 미끄러지는 듯이 내려간다. 좌우에 풀 깊은 산골짝으로 푸푸 하고 올라갈 때에는 그 풀숲에서 단김이 후끈후끈 올라오다가 수루루 내려갈 때에는 서늘한 바람이 지켜 섰던 모양으로 휙 지나간다. 길가에 산 옆에 이물스럽게 생긴 바윗돌들이 내려쪼이는 햇빛에 빠직빠직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고 여기저기 외롭게 선 나무들도 졸린 듯이 잎새 하나 움직이지 아니하고 가만히 섰다. 이따금 평평하게 뚫린 곳이 있어 거기는 냇가에 누워 자는 소도 보이고 한 뼘이나 넘어 자란 조밭에 김을 매다가 지나가는 (차를) 쳐다보는 모자(母子)도 있다. 그러나 영채는 여전히 꿈을 꾸는 듯이 차창에 턱을 걸고 앉았다.
차가 길게 고동을 울리며 어떤 산굽이를 돌아설 때에 기관차의 석탄 연기가 영채의 앞으로 (휙) 지나가며 영채의 오른편 눈에 석탄 가루를 집어넣었다. 영채는 눈을 감고 얼른 머리를 차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고 손에 들었던 명주 수건으로 눈을 씻었다. 그러나 석탄 가루는 나오지 아니하고 눈물만 흐른다. 눈이 몹시 아팠다.
87
영채는 수건으로 눈을 씻으며 얼굴을 찌푸리고 속으로 '에구 아파' 하였다. 석탄 가루가 처음에는 눈 윗시울 속에 들어간 듯하더니 한참 비비고 난 뒤에는 어디 간지를 알 수 없고 다만 아프기만 하였다. 그래도 수건을 눈 속으로 넣어서 씻어 내려 하다가 마침내 나오지 아니함을 보고 영채는 화를 내어 차창에 손을 대고 손 위에 얼굴을 대고 엎디어 울었다. 지금껏 졸던 슬픔이 갑자기 깨어난 모양으로 눈물이 쏟아진다. 무슨 까닭인지도 모르게 그저 슬프기만 하여 소리를 참고 울었다. 지금껏 꿈속 같던 정신이 갑자기 쇄락하여지는 듯하였다. 지나간 모든 생각이 온통 슬픔을 띠고 분명하게 마음속에 일어난다. 영채는 눈에 석탄 가루 들어간 것도 잊어버리고 혼자 슬퍼서 울었다. 오늘 저녁이면 나는 죽는다. 나는 대동강에 빠진다. 이 눈물도 없어지고 몸에 따뜻한 기운도 없어진다. 오늘 본 산과 들과 사람은 다 마지막 본 것이다. 나는 몇 시간 아니 하여서 죽는다 하는 생각이 바늘 끝 모양으로 전신을 폭폭 찌른다. 내가 왜 났던고, 무엇 하러 살아왔는고, 하는 후회도 난다.
이때에 누가 영채를 가볍게 흔들며,
"여봅시오. 고개를 드셔요."
한다. 영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겨우 한 눈을 떠서 그 사람을 보았다. 어떤 일복 입은 젊은 부인이 수건을 들고,
"이리 돌아앉으세요. 눈에 석탄 가루가 들어갔어요? 제가 씻어 내 드리지요."
하고 방그레 웃더니 영채의 얼굴에 슬픈 빛이 있는 것을 보고 한번 눈을 치떠서 영채의 얼굴을 본다. 영채는 감사한 듯도 부끄러운 듯도 하면서 그 부인의 말대로 돌아앉으며,
"관계치 않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인은 영채를 안을 듯이 마주앉으며,
"아니야요. 석탄 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를 아니해요."
하고 수건을 손가락 끝에 감아 들고 한편 손으로 영채의 눈을 만지며,
"이 눈이야요? 이 눈이야요?"
하다가 영채의 오른 눈 윗시울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수건으로 살짝 씻어 낸다. 그 하는 모양이 극히 익숙하고 침착하다. 영채는 하는 대로 가만히 앉았다. 그 부인의 피곤한 듯한 따뜻한 입김이 무슨 냄새가 있는 듯하면서도 향기롭게 자기의 입과 코에 닿는 것을 깨달았다. 부인은 좀더 바싹 영채에게 다가앉으며, 눈을 비집고 연해 고개를 기울여 가며 씻어 낸다. 부인은 화가 나는 것같이,
"에그, 남들이 없었으면 혓바닥으로 핥았으면 좋으련만."
하더니,
"에라! 나왔어요. 이것 보셔요. 이렇게 큰 게 들어갔으니까."
하고 수건에 묻은 석탄 가루를 영채에게 보인다. 그러나 영채는 눈이 부시고 눈물이 흘러서 그것이 보이지를 아니한다. 부인은 걸상에서 일어나 영채의 겨드랑에 손을 넣어 일으키며,
"자, 세면소에 가서 세수를 하셔요."
하고 앞서 간다. 차가 흔들리건마는 그 부인은 까딱없이 평지로 가는 모양으로 영채를 끌고 차실 저편 끝 세면소로 간다. 가다가 차실 중간쯤 해서 자기와 같이 앉았던 양복 입은 소년에게서 비누와 수건을 받아 들고 간다. 그 맞은편에서 책을 보고 앉았던 어떤 양복 입은 사람이 두 사람의 모양을 우두커니 보고 앉았더니 다시 책을 본다. 영채는 비틀비틀하면서 그 부인의 뒤를 따라 세면소에 갔다. 부인은 대리석판에 백설 같은 자기로 만든 세면기에 물을 따라 손으로 휘휘 저어 한번 부셔 내고 맑은 물을 가뜩이 부어 놓은 후에 비눗갑을 열어 놓고 붉은 줄 있는 큰 타월로 영채의 어깨와 옷깃을 가리어 주고 한 손으로 영채의 허리를 안는 듯이 영채의 몸을 자기의 몸에 기대게 하고,
"자, 비누로 왁왁 씻읍시오."
하고 물끄러미 영채의 반질반질한 머리와 꽃비녀와 하얀 목과 등을 보며,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다가 이따금 영채의 어깨를 가리운 수건도 바로잡아 주고 귀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걷어올려 준다. 남이 보면 마치 형이 동생을 도와 주는 것같이 생각하겠다. 사실상 그 부인은 영채를 동생같이 생각하였다. '얌전한 처녀다. 재주가 있겠다. 교육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그러고 석탄 가루가 눈에 들어가서 울던 것을 생각하고 '어리다, 사랑스럽다' 하였다.
영채는 슬프던 중에도 그 부인의 다정한 것을 감사하게, 기쁘게 여기면(서) 잘 세수를 하였다. 자기의 등에 그 부인의 손이 얹힌 것을 감각할 때에 월화에게 안기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그 부인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나 월화와 비슷하다 하였다. 그러고 그러나 나는 죽는다 하였다. 영채는 세수를 다 하고 일어섰다. 부인은 수건을 준다. 영채는 얼굴과 손을 씻었다. 부인은 수건을 달래서 영채의 목과 귀 뒤를 가만가만히 씻어 주었다. 영채는 눈을 떠서 정면으로 부인을 보았다. 영채의 눈은 벌겋다. 그러고 눈썹에는 아직 물이 묻어서 마치 눈물이 묻은 것 같다. 부인은 어머니가 딸을 보는 듯한 눈으로 빙그레 웃으면서 영채를 보더니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자 갑시다. 가서 점심이나 먹읍시다."
88
아까 오던 모양으로 영채의 자리에 돌아왔다. 영채는 그제야 겨우,
"감사합니다."
하였다. 부인은 앉으려 하다가 다시 자기의 자리로 가서 그 소년과 무슨 말을 하더니 가방 속에서 네모난 종잇갑을 내어들고 와서 영채의 맞은편 걸상에 앉으며,
"이것 좀 잡수셔요."
하고 그 종잇갑의 뚜께를 연다. 영채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구멍이 숭숭한 떡 두 조각 사이에 엷은 날고기를 끼인 것이다. 영채는 무엇이냐고 묻기도 어려워서 가만히 앉았다. 부인은 슬쩍 영채의 눈을 보더니, 속으로 '네가 이것을 모르는구나' 하면서 영채에게 먹기를 권하며,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자기 먼저 하나를 집어먹으며,
"자 잡수셔요."
한다.
"평양 갑시다(갑니다)."
하고 영채도 한쪽을 집어서 그 부인이 먹는 모양으로 먹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먹는 것인지 몰랐었다.
"댁이 평양이시야요?"
하고 부인은 또 하나를 집는다. 영채는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랐다. 나도 집이 있나 하였다. 그러나 집이 있다 하면 노파의 집이다 하여 고개를 돌리며,
"녜, 평양 있다가 지금 서울 와 있어요."
하고 영채는 집었던 것을 다 먹고 가만히 앉았다.
"자, 어서 잡수셔요."
하고 부인이 집어 줄 때에야 또 하나를 받아 먹었다. 별로 맛은 없으나 그 새에 낀 짭짤한 고기 맛이 관계치 않고 전체가 특별한 맛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운치 있는 맛이 있다 하였다. 부인은 또 한쪽을 집어 안팎 옆을 한번 뒤쳐 보며,
"그런데 방학이 되었어요?"
나를 여학생으로 아는구나 하고 한껏 부끄러웠다. 그러고 이 일본 부인이 어떻게 이렇게 조선말을 잘하나 하다가 너무도 조선말을 잘함을 보고 옳지 일본 가 있는 조선 여학생이로구나 하면서,
"아니야요. 잠깐 다니러 갑니다. 저는 학교에 아니 다녀요."
"그러면 벌써 졸업하셨어요. 어느 학교에 다니셨어요. 숙명이요, 진명이요?"
"아무 학교에도 아니 다녔어요."
이 말에 그 부인은 입에 떡을 문 채로 씹으려고도 아니 하고 우두커니 앉아서 영채를 본다. 그러면 이 여자는 무엇일까 하였다. '남의 첩'이라는 생각도 난다. 학교에 아니 다녔단 말에 다소 경멸하는 생각도 나나 또 그것이 어떤 계집인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好奇心)도 난다. 그러나 어떻게 물어 보아야 할지를 한참 생각하다가,
"그러면 평양에는 친척이 계셔요?"
영채도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지 모른다. 오늘 저녁이면 죽어 버리는 몸이요, 또 이 부인이 이처럼 친절하게 하여 주니 자초지종을 있는 대로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나 그래도 말을 내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또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몰라 떡을 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앉았다. 부인도 가만히 앉았다. '이 여자에게 무슨 비밀이 있구나' 하매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러나 영채의 불편하여 하는 것을 보고 말끝을 돌려,
"제 집은 황주야요. 동경 가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쟤는 제 동생이구요."
영채는 다만,
"녜―."
하고 그 소년을 보았다. 소년도 기대어 앉아서 눈을 꿈벅거리며 여기를 쳐다보다가 영채의 눈과 마주치매 눈을 돌려 방(창) 밖을 내다본다. 둥그스름하고 살이 풍후한 얼굴에 눈이 큰 것과 눈썹이 긴 것이 얼른 눈에 뜨인다. 영채는,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남매가 잘 닮았다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말이 없고 서로 이따금 마주보기만 한다. 영채는 '내게도 저런 동생이 있었으면' 하였다. 그러고 동경 유학하는 그의 신세를 부럽게도 여겼다. 또 나는 죽는다 하였다. 나는 왜 이렇게 박명한고, 나는 어찌하여 일생을 눈물로 보내다가 죽게 태어났는고 하였다. 차는 간다. 해도 간다. 내가 죽을 시간은 가까워 온다 하고 자기의 손과 몸을 보았다. 그러고 나오는 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영채는 눈물을 감추려 하였으나 참으려면 참을수록 흐득흐득 느껴 가며 눈물이 나온다. 영채는 마침내 자기의 걸어앉은 무릎 위에 이마를 대고 울었다. 그 여학생은 영채의 곁으로 옮아앉아 영채를 안아 일으키면서,
"여봅시오, 왜 그러셔요?"
영채는 자기의 가슴 밑으로 들어온 그 여학생의 손을 꼭 쥐어다가 자기의 입에 대며 엎딘 채로,
"형님, 감사합니다. 저는 죽으러 가는 몸이야요. 아아, 감사합니다."
하고 더 느낀다.
"에?"
하고 여학생은 놀라,
"그게 무슨 말씀이야요? 왜, 무슨 일이야요. 말씀을 하시지요. 힘있는 대로는 위로하여 드리지요. 왜 죽으려고 하셔요. 자 울지 말고 말씀합시오. 살아야지요. 꽃 같은 청춘에 즐겁게 살아야 하지요. 왜 죽으려 하셔요?"
하고 수건으로 영채의 눈물을 씻는다. 영채는 번히 눈을 떠서 여학생을 본다. 여학생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활발한, 남자 같은 사람에게도 눈물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에게는 그 여학생이 정다운 생각이 간절하게 된다. 영채의 눈물은(눈물을) 씻은 수건에는 영채의 입술에서 흐른 피가 묻었다. 여학생은 가만히 그 피와 영채의 얼굴을 비교하여 본다. 불쌍한 생각이 간절하여진다.
89
여학생은 영채의 신세 타령을 듣고,
"그러면 지금도 그 형식을 사랑하시오?"
사랑하느냐 하는 말에 영채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과연 자기가 형식을 사랑하였는가, 알 수가 없다. 자기는 다만, 형식이란 사람은 자기가 찾아야 할 사람, 섬겨야 할 사람으로 알았을 뿐이요, 칠팔 년래로 일찍 형식을 사랑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다만 어서 형식을 찾고 싶다, 어서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이루겠다, 만나면 기쁘겠다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영채는 멀거니 여학생을 보다가,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어려서 서로 떠났으니까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였는데……."
"그러면 부친께서 너는 아무의 아내가 되어라 하신 말씀이 있으시니까 지금껏 찾으셨습니다그려. 별로 사모하는 생각도 없었는데……."
"녜, 그러고 어렸을 때에 정들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되어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어째 그리운 생각이 나요."
"그것이야 그렇겠지요. 누구나 아잇적 생각은 안 잊히는 것이니깐. 그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 생각도 나시지요?"
영채는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녜, 여러 동무들이 나요. 그러나 그의 생각이 제일 정답게 나요. 그랬더니 일전 정작 얼굴을 대하니깐 생각던 바와 다릅데다. 어째 이전에 정답던 것까지도 다 깨어지는 것 같애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는 어떻게 마음이 섭섭한지 울었습니다."
잘 알아들은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말하기 어려운 듯이,
"그러면 지금은 그에게 대해서는 별로 사랑이 없습니다그려."
영채는 저도 제 생각을 모르는 모양으로 한참이나 생각하더니,
"글쎄요, 만나니깐 반갑기는 반가운데 어쩐지 기다리고 바라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애요. 내 마음속에 그려 오던 사람과는 딴사람 같애요. 저도 웬일인가 했어요. 또 그이도 그다지 저를 반가워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고……."
"알았습니다."
하고 여학생은 눈을 감는다. 무엇을 알았단 말인고 하고 영채도 눈을 감는다. 여학생이,
"그런데 왜 죽을 결심을 하셨어요?"
"아니 죽고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 하나를 바라고 지금껏 살아오던 것인데 일조에 정절을 더럽히고……."
괴로운 빛이 얼굴에 나타나며,
"다시 그 사람을 섬기지도 못하겠고…… 이제야 무엇을 바라고 사나요."
하고 절망하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그것이 죽을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찌하고요?"
"살지요! 왜 죽어요?"
영채는 깜짝 놀라 여학생을 본다. 여학생은 힘있는 목소리로,
"첫째, 영채 씨는 속아 살아 왔어요. 이형식이란 사람을 사랑하지도 아니하면서 공연히 정절을 지켜 왔어요. 부친께서 일시 농담삼아 하신 말씀 한마디 때문에 영채 씨는 칠팔 년 헛된 절을 지킨 것이외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피차에 허락도 아니한 사람을 위해서 절을 지키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야요? 마치 죽은 사람, 세상에 없는 사람을 위해서 절을 지키는 것이나 다름이 있어요? 영채 씨의 마음은 아름답지요, 절은 굳지요. 그러나 그뿐이외다. 그 아름다운 마음과 그 굳은 절을 바칠 사람이 따로 있지 아니할까요. 하니까 지금 영채 씨가 그이를 사랑하시거든 지금부터 그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실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거든 다른 남자 중에 구하실 것이오. 그런데……."
"그러나 지금토록 마음을 허하여 오던 것을 어떡합니까. 고성(古聖)의 교훈도 있는데."
한다.
"아니오. 영채 씨는 지금까지 꿈을 꾸고 지내셨지요. (허깨비를 보고 지내셨지요.) 얼굴도 잘 모르고 마음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마음을 허합니까. 그것은 다만 그릇된 낡은 사상의 속박이지요. 사람은 제 목숨으로 삽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지아비가 어디 있겠어요. 하니깐 영채 씨의 과거사는 꿈입니다. 이제부터 참생활이 열리지요."
영채는 이 말을 듣고 놀랐다. 열녀라는 생각과 틀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과연 지금토록 형식을 사랑한 적은 없었고, 다만 허깨비로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형식이라고 짓고, 그러고는 그 사람과 진정 형식과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을 찾는 대신 이형식을 찾다가, 이형식을 보매 그 사람이 아닌 줄을 깨닫고 실망하고 나서는, 아아, 이제는 영원히 형식을 보지 못하겠구나 하고 실망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영채는 잘못 생각하였던 것을 깨닫는 생각과 또 아주 절망하였던 중에 새로운 광명이 발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참생활이 열릴까요? 다시 살 수가 있을까요?"
하고 여학생을 보았다.
90
"참생활이 열리지요. 지금까지는 스스로 속아 왔으니깐 인제부터 참생활이 열리지요. 영채 씨 앞에는 행복이 기다립니다. 앞에 기다리고 있는 행복을 버리고 왜 귀한 목숨을 끊어요."
하고 이만하면 영채의 죽으려는 결심을 돌릴 수 있다 하는 생각이라,
"그러니까 울기를 그치고 웃읍시오. 자, 웃읍시다."
하고 자기가 먼저 웃는다. 영채도 따라서 빙그레 웃더니,
"행복이 기다릴까요! 그러나 의리는 어찌합니까. 의리는 어기고 행복을 찾을까요. 그것이 옳을까요!"
하며 마음을 정치 못하여 한다.
"의리? 영채 씨께서 죽으시는 것이 의리 같습니까?"
"의리가 아닐까요?"
"어찌해서 의릴까요?"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허하였다가 그 사람에게 몸을 바치기 전에 몸을 더럽혔으니 죽어 버리는 것이 의리가 아닐까요?"
옳다, 되었다 하는 듯이 여학생이,
"그러면 몇 가지를 물어 보겠습니다. 첫째, 이씨에게 마음을 허하신 것이 영채 씨오니까. 다시 말하면 영채 씨가 당신의 생각으로 마음을 허한 것입니까, 또는 부친의 말씀 한마디가 허한 것입니까?"
"그게야 무론 아버지께서 허하신 게지요."
"그러면, 부친의 말씀 한마디로 영채 씨의 일생을 작정한 것이오그려."
"그렇지요. 그것이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아닙니까?"
"흥, 그 삼종지도라는 것이 여러 천 년간, 여러 천만 여자를 죽이고, 또 여러 천만 남자를 불행하게 하였어요. 그 원수에 글자 몇 자가, 흥."
영채는 놀라며,
"그러면 삼종지도가 그르단 말씀이야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겠지요. 지아비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아내의 도리겠지요. 그러나 부모의 말보다도 자식의 일생이, 지아비의 말보다도 아내의 일생이 더 중하지 아니할까요? 다른 사람의 뜻을 위하여 제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저를 죽임이외다. 그야말로 인도(人道)의 죄라 합니다. 더구나 부사종자(夫死從子)라는 말은 참남자의 포학(暴虐)을 표함이외다. 여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이외다.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고 지배함이 마땅하외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복종하는 그런 비리(非理)가 어디 있어요."
하고 여학생은 얼굴이 붉게 되며 기운을 내어 구도덕(舊道德)을 공격하더니,
"영채 씨도 이러한 낡은 사상에 종이 되어서 지금껏 속절없는 괴로움을 맛보셨습니다. 그 속박을 끊읍시오. 그 꿈을 깨시오. 저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시오. 자유를 얻읍시오!"
하는 여학생의 얼굴에는 아주 엄숙한 빛이 보인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요?"
하는 영채의 사상은 자못 혼란하게 되었다. 영채는 자연히 그 여학생의 손에 자기의 운명을 맡기게 된 것 같다. 여학생의 입으로서 나오는 말대로 자기의 일생이 결정될 것 같다. 그래서 영채는 여학생의 눈과 입을 바라본다. 여학생은,
"여자도 사람이지요. 사람일진대 사람의 직분이 많겠지요. 딸이 되고,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도 여자의 직분이지요. 또 혹은 종교로, 혹은 과학으로, 혹은 예술로, 혹은 사회나 국가에 대한 일로 인생의 직분을 다할 길이 많겠지요. 그런데 고래로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아내 되는 것만으로 여자의 직분을 삼았고 남의 아내가 되는 것도 남의 뜻대로, 남의 말대로 되어 왔어요. 지금까지 여자는 남자의 한 부속품, 한 소유물에 지나지 못하였어요. 영채 씨는 부친의 소유물이다가 이씨의 소유물이 되려 하였어요. 마치 어떤 물품이 이 사람의 손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옮겨 가는 모양으로…… 우리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자도 되려니와 우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채 씨께서 할 일이 많지요. 영채 씨는 결코 부친과 이씨만을 위하여 난 사람이 아니외다. 과거 천만대 조선과, 현재 십육억 동포와, 미래 천만대 자손을 위하여 나신 것이야요. 그러니깐 부친께 대한 의무 외에, 이씨께 대한 의무 외에도 조상께, 동포에게, 자손에게 대한 의무가 있어]요. 그런데 영채 씨가 그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고 죽으려 하는 것은 죄외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여학생은 웃고,
"오늘부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시지요."
"어떻게 시작해요?"
"모든 것을 다 새로 시작하지요. 지나간 일을랑 온통 잊어버리고 새로 모든 것을 시작하지요. 이전에는 남의 뜻대로 살아왔거니와, 이제부터는……."
하고 여학생은 잠깐 말을 멈추고 영채를 바라본다. 영채는 얼굴이 붉게 되고 숨이 차며 여학생의 눈과 입에 매어달린 것 같다가,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요?"
한다.
"이제부터는 제……뜻……대……로…… 살아간단 말이야요."
열차는 산 속을 벗어나서 서흥 벌판으로 달아난다. 맑은 냇물이 왼편에 있다가 오른편에 가다가 한다. 두 사람은 잠자코 바깥을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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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형식은 사무실에 들어갔다. 벌써 상학종을 쳐서 교사들은 다 교실에 들어가고 배학감이 혼자 궐련을 피우고 앉았다가 형식을 슬쩍 보고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문득 불쾌한 생각이 났으나 잠자코 분필통과 책을 들고 이층 사년급 교실에 들어갔다. 형식은,
"시간이 늦어서 미안하외다."
하고 반가운 듯이 교실을 둘러보았다. 희경이가 형식을 슬쩍 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다른 학생들도 빙글빙글 웃으며 형식을 쳐다보기도 하고 서로 돌아보기도 한다. 김종렬이가 혼자 웃지도 아니하고 점잖게 앉았다.
형식은 책을 펴서 책상 위에 놓고 교의에 걸어앉아서 수상한 듯이 일동을 본다. 형식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이 불쾌한 생각이 난다. 학생들의 태도가 암만해도 수상하다 하였다. 전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다. 오늘은 학생들의 태도에 자기를 비웃는 빛이 보인다. 그러나 형식은 웃으며,
"왜들 나를 보고 웃으시오…… 자 시작합시다. 제 십팔과…… 김군 읽어 보시오."
학생들은 참다못한 듯이 한꺼번에,
"와!"
하고 웃는다.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끽끽 하며 웃는다. 학생들의 등이 들먹들먹한다. 형식은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래서 발을 구르며 책망도 하고 싶고 소리를 내어서 울고도 싶었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서 엄한 목소리로,
"이게 무슨 일들이오? 무슨 버르장머리들이란 말이오?"
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 말소리는 떨렸다. 일동은 웃음을 그치고 모두 바로앉았다. 희경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연필로 책상에 무엇을 그적그적한다. 김종렬은 여전히 시치미떼고 앉았다. 형식은 차마 가르칠 생각이 없다. 가슴이 활랑활랑하고 숨이 차다. 자기가 사오 년간 전심력을 다 바쳐서 가르치던 자들에게 모욕을 받은 것 같아서 참 분하였다. 저편 교실에서는 수학을 강의하는 모양이더니 학생의 웃음 소리와 형식의 큰소리가 나자 갑자기 말이 끊어진다. 아마 이편 교실 모양을 엿듣는 듯하다. 형식은,
"무슨 일이오, 누구든지 말을 하시오. 학생들이 그게 무슨 행위란 말이오? 말을 하시오!"
일동의 시선은 김종렬에게로 몰린다. 희경은 더욱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흔들흔들하면서 연필로 무슨 글자를 쓴다. 김종렬은 우뚝 일어선다. 학생들은 형식과 종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빙끗빙끗 웃기도 하고 서로 쿡쿡 찌르기도 한다. 어떤 자는 소곤소곤 이야기까지 한다. 형식의 머리터럭은 온통 하늘로 올라가는 듯하였다. 종렬은 연설하는 사람 모양으로 한번 기침을 하더니,
"선생님, 한마디 질문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형식을 노려 본다. 형식은 '질문'이라는 말에 몸이 으쓱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일이라도 상관없다 하는 용기도 난다. 그래서 종렬을 마주보며,
"무슨 질문이오?"
"선생님 그 동안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제가 질문이라 함은 그것을 가리킴이외다."
하고 자리에 앉는다. 일동의 시선은 형식의 입으로 모인다. 형식은,
"그래, 평양 갔다 왔소. 그래서? 그러니 어떻단 말이오?"
"무엇 하러?"
하고 어떤 학생이 혼자말 모양으로 묻자 다른 어떤 학생이,
"누구하고?"
한다. 학생들은 또 한번 끽끽 웃는다. 또 어떤 학생이,
"누구를 따라서?"
한다. 형식은 다 알았다. 종렬이가 다시 일어나며,
"평양은 무슨 일로 가셨습니까? 학교를 쉬고 가시는 것을 보매 무슨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줄을 추측하기 비난합니다마는……."
형식은 말이 막혔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자기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게 한참이나 가만히 섰다. 학생들은 또 웃는다. 누가,
"계월향이 따라서 후후."
한다.
이때에 배학감이 쑥 들어오며,
"이선생, 왜 이렇게 교실이 소요하오? 다른 교실에서 상학할 수가 없구려."
하고 학생들을 돌아보며,
"왜들 이렇게 떠드오?"
하고 돌아서서 나가려 할 적에 학생 중에서,
"계월향!"
하고 소리를 지른다. 배학감은 형식을 한번 흘겨보고 문을 닫고 나간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학생들을 둘러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사 년간 교정이 이에 다 끊어졌소. 나는 가오."
하고 교실에 나왔다. 교실에서는 웃는 소리,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무실로 들어가 모자를 집어 들고 어디로 달아나리라 하였다. 그러나 배학감이,
"여기 좀 앉으시오그려."
하고 의자를 권하므로 아무 생각도 없이 의자에 앉아서 궐련을 끄집어내어 불을 붙였다. 배학감은,
"그 동안 어디 가셨어요?"
"녜, 평양 좀 갔다 왔어요."
"아마 재미 많으셨겠습니다. 평양 경치가 좋지요?"
"노형은 나를 조롱하시오?"
하고 형식은 배학감을 흘겨보았다. 배학감은 웃으면서,
"아, 그렇게 성내실 것은 없지요. 남자가 기생을 좀 데리고 논다고 그렇게 흠할 것은 아니니까…… 다만 이선생님께서는 너무 고결하시니까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단 말이지요. 나는 계월향이가 이선생의 사랑하는 계집인 줄은 몰랐구려. 벌써 알았더면 그러한 실례는 아니하였을 것인데, 그렇게 계월향을 감추실 게야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도 그 얼굴이나 보고 소리나 듣게 해주시지요. 허허 참 복 좋으시오."
"이기지심으로 탁인지심(以己之心度人之心)이로구려! 이형식이가 노형같이……."
"흥, 무론 노형은 고결하시지요, 성인이시지요, 유하혜(柳下惠 : 신문관본에는 '백이숙제'로 바뀌어 있음―편자 주)시지요."
형식은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고 교문을 나섰다.
72
형식은 운동장에 나섰다. 일년급 어린 학생들이 체조를 하다가 형식을 쳐다본다. 뚱뚱한 체조 교사가 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씻으면서 형식에게 인사를 한다. 형식의 생각에는 모두 자기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더구나 평생 배학감에게 아첨을 하여 가며 자기에게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가지던 체조 교사의 눈에는 확실히 자기를 조롱하는 빛이 있다 하였다. 그래서 형식은 '다시는 이놈의 학교에 발길을 아니하겠다' 하면서 교문을 나섰다. 그러나 교문을 나서서는 한참 주저하였다. 자기가 사오 년 동안 집으로 알아 오던 학교와, 형제로 자녀로 아내로 사랑하는 자로 알아 오던 학생들을 영원히 떠나는가 하면 미상불 슬프기도 하였다. 그 운동장에 풀 한 대, 나무 한 가지가 어느 것이나 정들지 아니한 것이 없다. 저편 철봉 뒤에 선 십여 길이나 되는 포플러는 형식이가 처음 부임한 해에 자기의 손으로 심고, 자기가 날마다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 가며 기른 것이다. 그 포플러는 벌써 가지가 퍼지고 잎이 성하여 훌륭한 정자나무가 되었다. 예쁜 학생들이 낮에 그 나무 그늘에 앉아서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에 형식은 매양 기쁨을 깨달았다. 마치 자기의 마음이 그 포플러가 되어서 어린 학생들을 가리워 주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자기도 쉬는 시간에는 그 나무 그늘에서 거닐기도 하고 반가운 듯이 그 나무를 어루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형식은 간다. 그 나무는 점점 더 퍼져서 수없는 어린 학생들이 그 나무 그늘에서 여전히 즐겁게 노니련만, 다시 자기를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 형식은 고개를 돌려 한참 그 나무를 쳐다보며 창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차마 이 학교 문 밖에 오래 섰지 못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안동 네거리를 향하고 내려온다. 일기는 날로 더워 가고 하늘에는 구름장이 떠돌건마는 언제 비가 올 것 같지도 아니하다. 길 가는 사람들은 홰를 내어 부채질을 하고, 구루마꾼들은 흐르는 땀에 눈도 잘 뜨지 못한다. 파출소에 흰 복장 입은 순사가 추녀 끝 그늘에 들어서서 입으로 후후 바람을 내고 섰다. 그러나 형식은 더운 줄도 모르고 이따금 마주 오는 구루마를 비키면서 안동 골목으로 내려온다.
형식의 정신은 극히 혼란하다. 경성학교에 사직표를 제출할 것은 생각하나, 그 밖에는 어찌하여야 좋을는지 생각이 없다. 형식의 머리는 마치 물끓는 모양으로 부걱부걱 끓는다. 여러 날 정신과 몸이 피곤한데다가 지금 학교에서 극렬한 사격을 받았으므로 형식은 마치 열병 환자와 같이 되었다. 다만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머리를 내려누를 뿐이다.
아까 교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형식에게는 가장 중대하고 가장 불행한 사건이다. 형식의 전 희망은 그 사년급에 있었고 형식의 전 행복도 그 사년급에 있었다. 그 사년급이 있는지라 형식은 적막함이 없었고, 그 단순하고 무미한 생활 중에서도 큰 즐거움을 얻어 왔던 것이다. 그 사년급은 어떤 의미로 보아 지나간 사오 년간에 그의 재산이었고 생명이었었다. 또 그의 전심력을 다하는 사업이었었다. 그러고 그의 생각에 사년급 삼십여 명 학생은 영원히 자기의 정신적 아우와 아들이 되어, 마치 자기가 오매에 그네를 잊지 못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잊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자기가 그네를 사랑하는 모양으로 그네도 자기를 사랑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형식은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별로 친한 친구도 없으매, 그네를 그처럼 사랑하였거니와, 그네에게는 형식 외에 부모도 있고 형제도 있고 사랑스러운 동무도 있었다. 사오 년래 혹 형식을 따르는 학생도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가장 따르는 듯하던 이희경에게도 형식은 결코 중요한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었다. 형식은 이런 줄을 모르고 있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오늘에야 비로소 사년급 학생들의 눈에 비치인 자기를 분명히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여 오던 자가, 또는 자기를 전심력을 다하여 사랑하거니 하던 자가 일조에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줄을 깨달을 때에 그 슬픔이 얼마나 할까. 아마도 인생의 모든 슬픔 중에 '사랑의 실망'에서 더한 슬픔은 없을 것이다.
형식은 정히 이러한 상태에 있다. 지금 형식에게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번 평양 갔던 일은 변명도 할 수 있으려니와, 그것을 변명하는 것은 형식에게는 그다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을 변명한다. 사년급 학생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아니한다는 진리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형식은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는 사람에게 셋째나 넷째로 귀중한 것이다. 형식은 지금은 목숨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인생에 발 디딜 데를 잃고 공중에 둥둥 뜬 모양이다. 형식이가 아주 말라죽고 말는지, 다시 어디다가 뿌리를 박고 살는지 이것은 장래를 보아야 알 것이다.
73
형식은 정신없이 집에 돌아왔다. 노파가 웃통을 벗고 마루에 앉아서 담배를 먹는다. 어깨와 팔굽이에 뼈가 울룩불룩 나오고 주름잡힌 두 젖이 말라붙은 듯이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두어 줄기 땀이 마치 그의 살이 썩어서 흐르는 송장물 같은 감각을 준다. 반이나 세고 몇 오리가 아니 남은 머리터럭과, 주름 잡히고 움쑥 들어간 두 뺨과, 뜨거운 볕에 시든 풀잎과 같은 그 살과 허리를 구부리고 담배를 먹는 그 모양,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준다. 그도 일찍 여러 남자의 정신을 황홀(케)하던 젊은 미인이었었다. 그의 생각에 천하 남자는 다 자기를 보고 정신을 잃은 줄 알았었다. 자기의 얼굴과 몸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리라 하였었다. 그렇게 생각한 지가 불과 이삼십 년 전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몸에 있던 아름다움은 다 어디로 날아가고 말았다. 그가 흘리는 땀이, 즉 그 아름다움이 녹아내리는 물인 것 같다.
그는 무엇 하러 세상에 났으며, 세상에 나서 무슨 일을 하였고, 무슨 낙을 보았는고. 그렇지마는 그 노파는 아직도 살아간다. 병이 나면 약을 먹고, 겨울이 되면 솜옷을 입어 가면서 아직도 죽을 생각은 아니하는 것 같다. 내일이나 내년에 무슨 새로운 낙이 오기를 기다리는지도 모르지마는 그는 밤이 새고 아침이 되면, 또 자리에서 일어나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한다. 일찍 형식이가 노파의 빨래하다가 허리를 툭툭 치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담배 먹는 재미로 살으십니다그려."
한 적이 있다. 그때에 노파는 빙끗 웃었다. 형식은 그 웃음의 뜻을 모른다. '그렇소' 하는 뜻인지 '아니오' 하는 뜻인지 몰랐다. 이 뜻을 아는 사람은 없다. 노파 자기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보든지 노파의 살아가는 목적은 담배 먹기 위함이다. 그 담배 연기 속에 노파의 모든 행복과 사업이 있다. 노파는 하루 스물네 시간에 거의 절반은 담배 연기를 바라보고 살아간다. 눈도 끔벅 하지 아니하고 독한 담배 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앉았는 것이 노파의 생활의 중심이다. 노파에게서 만일 담배를 빼앗으면 이는 생명을 빼앗음이나 다름없다. 평생 아랫목에 우두커니 섰는, 댓진 배고 헝겊으로 세 군데나 감은 담뱃대가 즉 노파의 생명이다. 노파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아니 나오게 되면 이는 노파의 몸에 피가 아니 돌아가게 된 표다. 노파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는지 아니하는지 모르지마는 곁에서 보기에는 암만해도 그렇게밖에 더 생각할 수가 없다. 담배 먹기밖에 노파에게 모슨 인생의 목적이 있는 것 같지 아니하다. 형식이가 정신없이 들어올 때에 노파가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모른다. 아마 아무 생각도 없이 다만 무럭무럭 피어 오르는 담배 연기만 쳐다보았을 것 같다. 만일 무슨 생각이 있었다 하면 그는 아마 희미한 안개 속으로 보는 듯한 젊었을 적 기억일 것이다. 어떤 대감 집에서 세력을 잡던 기억, 젊고 고운 문객의 품에 안기었던 기억, 그렇지 아니하면 토실토실한 아기의 손에 자기의 부드럽고 살진 젖꼭지를 잡히던 기억, 또는 다 자란 아들이 턱춤을 추며 죽던 기억, 또는 아무 때 어디서 어떠한 고운 옷을 입고 어떠한 맛나는 음식을 먹던 기억일 것이다. 아마 하루에 몇 번씩 담배 연기 속에 이러한 기억이 떠나오는 것을 볼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 기억이 떠나왔던지 모르거니와 노파는 형식을 보고 얼른 곁에 벗어 놓았던 땀 밴 적삼을 입으며,
"어째 벌써 오셔요?"
한다.
형식은 두루마기와 모자를 벗어 홱 방 안에 집어던지면서,
"흥, 학교에도 다 갔소."
"왜, 이제는 학교에 아니 가셔요."
"이제는 교사도 그만둘랍니다."
하고 툇마루에 쿵 하고 몸을 던지는 듯이 걸어앉으며,
"냉수나 한 그릇 주시오. 속에서 불길이 피어 올라 못 견디겠소."
노파는 부엌에 들어가 사기 대접에 냉수를 떠다가 형식을 준다. 형식은 냉수를 한 모금에 다 들이켜더니,
"에 시원하다. 냉수가 제일 좋다."
하고 밀수 먹은 사람 모양으로 맛나는 듯이 입을 다시며 혀를 내밀어 아래위 입술에 묻은 물을 말끔 빨아들인다. 노파는 이상한 듯이 물끄러미 보더니 자기 방에 건너가 초갑과 담뱃대를 들고 형식의 곁으로 온다. 형식은, '또 나를 위로할 작정으로 오는구나' 하고 괴로운 중에도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노파의 위로를 듣는 것이 더욱 괴로울 듯하여 먼저 말끝을 돌려,
"어저께 신주사 안 왔었어요."
"아니오."
"근래에는 신주사를 싫어하세요. 한동안은 꽤 신주사를 좋아하셨지요."
"누가 신주사를 싫어하나요. 너무 함부로 말씀을 하시니 그렇지."
하고 픽 웃는다.
"장찌개에 구더기 있다고."
하고 형식도 허허 웃었다. 노파는 이 기회를 아니 놓치리라 하는 듯이,
"그런데 왜 학교를 그만두세요? 그 배학감인가 하는 사람과 다투셨어요?"
"다툰 것도 아니야요. 교사 노릇도 너무 오래 했으니 이제는 다른 것을 좀 해보지요."
"다른 것? 무엇이오? 옳지, 이제는 벼슬을 하시오. 그런 배학감 같은 사람과 같이 있으니까 살이 내리지, 벼슬을 하면 작히나 좋아요. 저 건너편 집 아들도 일전에 무슨 주사를 해서……."
"나는 벼슬보다 중 노릇을 하고 싶어요. 저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조고만 암자에다가…… 옳지, 칡베 장삼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하고 웃으며 노파를 본다. 노파는 눈이 둥그래지며,
"저런! 무엇을 못 해서 중이 되어요?"
"중이 안 되면 무엇을 해요?"
한참 잠잠하였다.
74
형식은 무심중 '중 노릇을 하고 싶어요' 하였다. 그러나 말을 하고 본즉 과연 중 되는 것이 제일 좋을 듯하다. 또 중 될 것밖에 더 길이 없는 것도 같다. 조선의 문명을 위하여,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힘쓰겠다는 마음이 일시에 다 스러지는 것 같다. 마치 어떤 사람이 아내도 죽고, 아들 딸도 다 죽고 재산도 다 없어진 때문에 느끼는 듯하는 슬픔과 절망이 가득 찼다. 영채의 죽은 것과 영채의 집의 멸망한 것과 자기가 지금 사년급 학생에게 욕을 당한 것과 모든 것이 힘을 합하여 형식의 정신을 깊고 어두운 땅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다. 지금껏 자기가 하여 온 생활이 마치 아무 뜻도 없고 맛도 없는 것 같고, 길고 불쾌한 꿈을 꾸다가 우연히 번쩍 눈을 뜬 것같이 불쾌한 생각이 난다. 학교에서 사오 년간 분필을 들고 가르치던 것이며, 늦도록 책을 보고 외국 말의 단자를 외우던 것이며, 선형과 순애에게 가르치던 것이며, 영채를 만났던 것과, 청량리에서 한 일과, 평양에 갔던 일이 모두 다 무슨 부끄럽고 싱거운 일같이 보인다. 지금껏 정답게 생각하여 오던 노파까지도 마치 무슨 더럽고 냄새 나는 물건같이 보인다. 모든 것이 다 부끄럽고 불쾌하고 성이 난다. '응, 내가 무엇 하러 이 모양으로 살아왔는고' 하여 본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값이 무엇이며 뜻이 무엇인고 한다. 당장 이 생활을 온통 내어던지고 어디 사람 없는 외딴 곳에 들어가서 숨고 싶은 생각이 난다. 한 시간이라도 이 서울 안에, 이 노파의 집에 있기 싫은 생각이 난다. 그래서 노파에게,
"중이 제일 좋아요. 세상에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나요."
"선생 같은 이야 왜 재미가 없어요. 나이가 젊으시것다, 재주가 있것…… 왜 세상이 재미가 없겠소."
"아주머니께서는 젊었을 때에 재미가 많았어요?"
노파는 빙그레 웃으며,
"아, 젊었을 적에야 날마다 기쁘기만 했지요. 웃다가도 울기도 했지마는, 젊었을 때에 우는 것은 늙어서 웃는 것보다도 낙이라오……."
형식은 '노파가 참 말을 잘한다' 하고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노파는 젊었을 때를 생각만 해도 기쁜 듯이 얼굴에 화기가 돌며,
"나는 이선생께서는 무슨 재미에 살으시는지 모르겠습디다. 좋은 벼슬도 아니하고, 고운 색시도…… 하하, 이런 말씀을 하면 선생은 늘 이마를 찌푸리시것다…… 그러나 내 말이 옳지요. 꽃 같은 청춘에 왜 혼자 우두커니 방에만 들어앉았겠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재미가 없어서 중이 되느니 무엇이 되느니 하지요. 나는 젊었을 적에는…… 말을 다 해 무엇 하겠소. 늙으면 허삽니다."
이 말은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이나 형식을 대하여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형식은 다만 웃고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노파의말에 새로운 뜻과 힘이 있는 것같이 들린다. 그러고 선형과 영채를 대하였을 때의 즐겁던 생각이 난다. 그러고 외국 서적에 사랑의 즐거움을 찬미한 것을 보던 생각이 난다. 과연 남녀의 사랑이 인생에 제일 큰 행복이라 할까. 적어도 이 노파는 일생에 기쁜 일이라고는 남녀의 사랑밖에 없는 것같이 말한다. 내가 평생 적막하고, 세상에 따뜻한 재미를 못 붙임은 이 사랑이란 맛을 못 보는 때문인가 하여 본다. 그래서 웃으며,
"그러면 나도 즐거운 재미를 볼 수가 있을까요?"
하였다. 그러고는 미련한 질문을 다 하였다 하고 속으로 부끄러웠다. 노파는,
"아, 재미를 볼 수가 있고말고. 선생 같은 이면 장안 미인들이 저마다 따르지요. 얼굴이 좋것다, 마음씨가 곱것다……. 지금은 세상이 말세가 되어서 그렇지마는, 전 세월 같으면 대과 급제에, 선생 같으신 이는 미인일내 채어 서지를(미인에 걸려 단기지를) 못하겠소."
"흥, 그러니까 지금은 쓸데없단 말씀이구려. 대과 급제가 없으니까."
"전 세월만 못하단 말이지, 지금인들 장안에 일등 기생이 여러 백 명 될 터인데……."
하더니 문득 목소리를 낮추며,
"그런데."
하고 잊어버렸던 것을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영채? 그 새악시 말이야요. 어떻게 되었나요. 그 후에 한번 만나 보셨어요?"
형식은 이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손에 들었던 궐련을 땅에 떨어뜨렸다. 그렇게 형식은 놀랐다.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답니다."
"물에 빠져? 언제?"
"아마, 그저께 빠져 죽었겠지요."
"에그머니, 웬일이야요? 왜 빠져 죽어요? 저런!"
형식은 말없이 두 팔로 제 목을 안고 고개를 수그렸다. 지나간 삼사 일의 광경이 눈앞으로 휘익휘익 지나간다. 노파의 눈에는 눈물이 핑 고인다.
"아, 글쎄 무슨 일이야요?"
"나처럼 세상이 재미없던 게지요."
"에그머니, 저런! 꽃 같은 청춘에 왜 죽는담. 명이 다해서 죽는 것도 설운데 물에를 왜 빠져 죽어?"
하고 한참 묵묵히 앉았더니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이선생이 잘못해서 죽었구려!"
"어째서요?"
"그렇게 십여 년을 그립게 지내다가 찾아왔는데 그렇게 무정하게 구시니까."
'무정하게' 라는 말에 형식은 놀랐다. 그래서,
"무정하게? 내가 무엇을 무정하게 했어요?"
"무정하지 않구. 손이라도 따뜻이 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손을 어떻게 잡아요?"
"손을 왜 못 잡아요? 내가 보니까, 명채……."
"명채가 아니라 영채야요."
"옳지, 내가 보니깐 영채 씨는 선생께 마음을 바친 모양이던데. 그렇게 무정하게 어떻게 하시오. 또 간다고 할 적에도 붙들어 만류를 하든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고 형식을 원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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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의 말에 형식은 더욱 놀랐다. 과연 자기가 영채에게 대하여 무정하였던가. 과연 그때에 영채의 손을 잡으며 나도 지금껏 자기를 그리워하던 말을 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일어나 나가려 할 때에 그를 붙들고 그의 장래에 대한 결심을 물어 보아야 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그 자리에서 내가 너를 거두겠다 하고 같이 영채의 집에 가서 그 어미와 의논할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였더면 영채는 그 이튿날 청량리에도 아니 갔을 것이요, 그 변도 당하지 아니하였을 것이 아니었던가. 또 청량리에서 같이 다방골로 오는 동안에도 내가 너를 거두마 할 것이 아니었던가. 다방골로 가지 말고 다른 객점이나 내 집에 데리고 올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였더면 평양으로 갈 생각도 아니하고 물에 빠져 죽지도 아니할 것이 아니었던가. 옳다, 노파의 말과 같이 영채를 죽인 것은 내다. 영채가 내 집에 온 것은, '나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만났구나' 하는 내 말을 들으려 함이다. 그러고 '이제부터 너는 내 아내다' 하는 말을 들으려 함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에 무슨 생각을 하였나. 영채가 기생이나 아니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상류 가정에 거둠이 되어 여학교에나 다녔으면 좋겠다……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마음속으로는 선형이가 있는데 왜 영채가 뛰어나왔나, 영채가 기생이거나 뉘 첩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기도 하였다. 아아, 상류 가정은 무엇이며 기생은 무엇인고.
또 나는 왜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영채를 찾지 아니하였던고. 학교를 위해서? 교육가라는 명예를 위해서?
옳다, 영채를 죽인 것은 내다. 그러고 평양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영채의 시체도 찾아보지 아니하고 왔다. 칠성문 밖에서 도리어 기쁜 마음을 가지고 왔다. 밤새도록 차 속에서도 영채는 생각도 아니하고 왔다. 영채가 죽은 것이 도리어 무거운 짐이 덜리는 것 같았다.
형식은 고개를 흔들며,
"옳아요. 내가 영채를 죽였어요, 내가 죽였어요! 나를 위하여 살아오던 영채를 내 손으로 죽였어요!"
하고 몹시 괴로운 듯이 숨이 차다. 노파는 도리어 미안한 생각이 나서,
"다 제 팔자지요."
"아니야요. 내가 죽였어요."
이때에 우선이가 대팻밥 벙거지를 두르며 들어와 인사도 없이,
"언제 왔나, 그래 찾았나."
형식은 우선은 보지 아니하고,
"내가 죽였네, 영채를 내가 죽였네."
"응, 죽었어! 그 전보가 아니 갔던가."
"내가 죽였어! 그러고서는 나는 그의 시체도 찾지 아니하고 왔네그려. 흥, 학생들 쉴까 보아서."
"김장로의 따님이 보고 싶던 게지" 하고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도 우선은 활해를 잊지 아니한다. "대관절 어찌 되었나?"
"죽었어!"
하고 벌떡 일어나며,
"자네 돈 있나. 있거든 한 오 원 꾸게."
하고 생각하니, 이제는 돈 나올 곳도 없다. 학교에서 유월 월급은 주겠지마는 찾으러 갈 수도 없고, 칠월부터는 형식에게는 아무 수입도 없다.
"돈은 해서?"
"가서 영채의 시체나 찾아야겠네. 찾아서 내가 업어다라도 장례나 지내 주어야겠네."
하고 형식은 괴로움을 못 견디어하는 듯이 마당으로 왔다갔다한다. 형식의 적삼에는 땀이 배었다. 우선은 지팡이로 엉덩이를 버티고 서서 형식을 보더니,
"벌써 다 떠내려 갔겠네. 황해바다로 둥둥 떠나갔겠네."
"왜 그래요? 물에 빠져 죽은 송장은 사흘 전에는 그 자리에 아니 떠난답니다."
하고 노파가 우선을 보며 말한다.
"떠내려갔거든 어디까지든지 따라 내려가지. 있는 데까지 따라 내려가지."
하고 잠깐 눈을 감고 우두커니 섰더니, 결심한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우선의 곁으로 와서 손을 내어밀며,
"어서 오 원만 내게."
"지금 곧 떠날 터인가."
"정거장에 나가서 차 있는 대로 떠날라네."
우선은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오 원짜리 지표를 내어준다. 영채가 죽었단 말을 듣고 우선도 미상불 슬펐다. 귀중히 여기던 무엇이 없어진 것 같았다.
형식은 돈을 받아 넣고, 방에 들어가 두루마기를 입고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신을) 신으려고 나섰다. 이때에 어떤 파나마를 쓴 신사가 형식을 찾는다. 형식은 이마를 찌푸리더니 마지못하여 문에 나갔다. 그는 김장로와 한 교회에 있는 목사다. 젊은 얼굴에 수염은 한 개도 없고 두 뺨에는 굵은 주름이 서너 줄 깔렸다. 정직한 듯한 중늙은이다. 우선과 노파는 노파의 방 툇마루에 가서 우두커니 두 사람을 본다. 형식은 책을 놓고 목사를 청해 올려 앉혔다.
"어디 가시는 길이오!"
"녜, 산보 나가던 길이올시다. 더운데 어떻게 이렇게……."
"뵈온 지도 오래고…… 또 무슨 할 말씀도 좀 있어서."
"제게요!"
하고 형식은 목사를 본다. 목사는 까닭 있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과히 바쁘시지는 않으셔요?"
"아니올시다. 말씀하시지요."
"허허허, 이선생께서 기뻐하실 말씀이외다."
하고 또 한번 웃으며 형식의 방 안을 둘러본다. 노파와 우선은 서로 돌아보며 무엇을 수군수군한다. 오늘은 노파가 우선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모양이로다.
목사는 한참 부채질을 하더니 유심히 형식을 보며,
"다른 말씀이 아니라."
하고 말을 내기가 어려운 듯이 말을 시작한다. 듣는 형식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목사의 태도가 수상하다 하였다. 그러고 어서 말을 다 하면 정거장으로 뛰어나가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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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이 아니라, 김장로의 말씀이……"
하고 목사가 말을 시작한다. 노파와 우선은 안 듣는 체하면서도 들으려 한다.
"김장로의 말씀이 선형이를 이 가을에 미국에 보낼 터인데……."
"녜."
하고 형식이 조자(調子)를 맞춘다.
"그런데 미국 가기 전에 어, 약혼을 하여야 하겠고, 또 미국을 보낸다 하더라도 딸 혼자만 보내기도 어려운즉― 이목사는 '어'와 '즉'을 잘 쓴다― 약혼을 하고 신랑까지 함께 미국을 보냈으면 좋겠다는데……" 하고 말을 그치고, 또 웃으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리며,
"녜, 그런데요."
하였다. 이 밖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목사는,
"그런데, 김장로께서는 어, 이선생께서 어, 허락만 하시면…… 어, 이선생도 미국 유학을 갔으면 좋겠고…… 그것은 어쨌든지 김장로 양주께서는 매우 이선생을 사랑하시는 모양인데. 그래서 날더러 한번 이선생의 뜻을 물어 달라고 해요. 어, 그래서……."
"제 뜻을?"
"녜, 이선생의 뜻을."
"무슨 뜻 말씀이야요?"
우선은 고개를 돌리며 노파를 보고 씩 웃는다. (노파도 웃는다.) 목사는 형식의 둥그래진 눈을 보더니 비웃는 듯이,
"그만하면 알으시겠구려."
"……."
"그러면 어, 다시 말하지요. 이선생이 선형과 약혼을 하여 주시기를 바란단 말이외다. 무론 청혼하는 데도 여러 곳 있지마는, 김장로 양주는 이선생이 꼭 마음에 드는 모양이로구려."
형식은 이제야 분명히 목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러고 가슴이 뜨끔했다.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형식은 어떻게 어떻게 생각할지를 몰랐다. 가만히 앉았다.
"그 동안 이선생께서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셨지요?"
"녜, 며칠 전부터."
"그 뜻을 알으셔요?"
"무슨 뜻이오?"
"하하, 영어를 가르쳐 주옵사고 청한 뜻 말씀이오."
"……."
"지금은 전과 달라 부모의 뜻대로만 혼인을 할 수가 없으니까 서로 잠깐 교제를 해보란 뜻이지요. 그래 어떠시오?"
"제가 감당치를 못하겠습니다. 저 혼자몸도 살아가기가 어려운 처지에, 혼인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요."
"그것이 제일 큰 문제지요. 경제적 기초 없이 혼인을 어떻게 합니까. 그게 제일 큰 문제지요."
"큰 문제지마는 우선 한 삼사 년간 미국에 유학하시고 그러고 나서는…… 그 다음에야 무슨 걱정이 있어요. 또 선형으로 보더라도 그만한 처녀가 쉽지 아니하지요. 이선생께서도 복 많이 받으셨소…… 자, 말씀하시오."
그래도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았다. 목사는 웃으며 부채질만 한다. 노파는 형식이 왜 '녜' 하지 않는가 하고 공연히 애를 쓴다. 우선은 일전 안동서 형식과 말하던 것을 생각하고 혼자 빙그레 웃는다. 모두 다 기뻐하는 속에 형식 혼자는 남모르게 괴로워한다. 목사는,
"자, 생각하실 것도 없겠구려, 어서 대답을 하시오."
"일후에 다시 말씀드리지요. 아무려나 저 같은 것을 그처럼 생각하여 주는 것은 어떻게 황송한지 모르겠습니다."
"일후를 기다릴 것이 있어요. 그러고 오늘 오후에 나하고 김장로 댁에 가시지요. 같이 저녁을 먹자고 그러시던데."
형식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평양도 가야 하겠지마는, 김장로의 집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더 중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채의 시체를 찾아가기로 결심하였던 것을 버리고 금시에 선형에게 취하여 '녜' 하기는 제 마음이 부끄러웠다. '선형과 나와 약혼한다'는 말은 말만 들어도 기뻤다. 영채가 마침 죽은 것이 다행이다 하는 생각까지 난다. 게다가 '미국 유학!' 형식의 마음이 아니 끌리고 어찌하랴. 사랑하던 미인과 일생에 원하던 서양 유학! 이 중에 하나만이라도 형식의 마음을 끌 만하거든, 하물며 둘을 다! 형식의 마음속에는 '내게 큰 복이 돌아왔구나' 하는 소리가 아니 발할 수가 없다. 형식이가 괴로운 듯이 숙이고 앉았는 그 얼굴에는 자세히 보면 단정코 참을 수 없는 기쁨의 빛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 목사를 대할 때에는 형식의 얼굴에는 과연 괴로운 빛이 있었다. 그러나 한 마디 두 마디 흘러나오는 목사의 말은 어느덧에 그 괴로운 빛을 다 없이하고 어느덧에 기쁜 빛을 폈다. 마치 봄철 따뜻한 볕에 눈이 일시에 다 녹아 없어지고, 산과 들이 갑자기 봄빛을 띠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형식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남에게 기쁜 빛을 보이기가 부끄러움이다. 형식은 힘써 얼굴에 괴로운 빛을 나타내려 한다. 그뿐더러 일부러 마음이 괴로워지려 한다.
형식은 이러한 때에는 머릿속이 착란하여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는 욱하고 무엇을 작정할 때에는 전후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작정하건마는, 또 어떤 때에는 이럴까저럴까 하여 어떻게 결단할 줄을 모른다. 길을 가다가도 갈까말까 갈까말까 하고 수십 번이나 주저하는 수가 있다. 이것은 마음 약한 사람의 특징이다. 그가 얼른 결단하는 것도 약한 까닭이요, 얼른 결단하지 못하는 것도 약한 까닭이다. 지금 형식은 이럴까저럴까 어떻게 대답하여야 좋을 줄을 모른다. 누가 곁에서 자기를 대신하여 대답해 주는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건넌방을 건너다보았다. 형식은 우선이가 이러한 경우에 과단 있게 결단할 줄을 앎이다. 우선도 웃으면서 형식을 건너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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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형식을 보고 눈을 끔적한다. 형식은 일부러 안 보는 체한다. 우선은 또 한번 눈을 끔적한다. 형식은 안 보는 체하면서도 그것을 다 보았다. 그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더 부끄럽고 더 머리가 혼란하다. 우선의 눈 끔적하는 뜻을 해석해 본다. '얼른 허락을 해라' 하는 뜻인지, '어서 평양을 가지 아니하고 왜 가만히 앉았느냐' 하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노파는 참다못한 듯이 우선을 꾹 찌르며,
"왜 이선생이 허락을 아니하오. 그 처녀가 마음에 아니 드나요."
"흥, 그 처녀가 서울에 유명한 미인이랍니다."
"또 부자고요?"
"부자기에 사위까지 미국을 보낸다지요."
노파는 미국에 보내는 것과 부자인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지마는,
"그런데 왜 저러고 앉았어요?" 하고 입을 쩍 다시며 담배를 담는다. 목사가,
"그렇게 하시지요."
하고 다시 재촉할 때에 형식은 겨우,
"그러면 갑지요! 그러나 약혼은 일후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하였다. 목사는,
"내 교회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르리다."
하고 웃으며 나간다. 형식은 대문 밖까지 목사를 보내고 들어왔다. 형식의 얼굴은 마치 선잠을 깨인 사람의 얼굴 같다. 우선이가 뛰어오며,
"자네 땡잡았네그려. 미인 얻고 미국 유학 가고."
하고 형식의 손을 잡아 흔든다. 형식은 우선의 눈을 피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도 웃음이 있었다. 우선은 다시,
"허, 자네도 수단이 용한걸. 불과 이삼 일에 그렇게 쉽게 선형 씨를 손에 넣어!"
노파도 웃으며,
"내 그런 줄 알았지. 어째 영채 씨가 오셨는데도 만류도 아니하고…… 그저 영채 씨가 불쌍하지……. 이선생은 벌써 정들여 둔 데가 있는데 공연히……."
말이 끝나기 전에 우선은 노파를 돌아보고 눈을 끔적하며, "쉬!" 하였다. 형식은 짐짓 노파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우선더러,
"나는 경성학교 사직했네."
"어느새에 사직을 하여, 약혼이나 되거든 하지. 허허허."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교사 노릇을 그만둘라네."
"암, 미국 유학으로 돌아오셔서 대학 교수가 되실 터이니까."
형식은 성난 듯이 획 돌아서며,
"자네는 남의 말을 조롱만 하려고 들데그려. 남은 마음이 괴로워서 그러는데……."
"응, 동정하네, 퍽 괴로우실 테지." 노파도 우선의 곁으로 오며,
"내가 어떻게 기쁜지 모르겠소. 이선생이 장가를 드신다니까 내 아들이……."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또 형식을 자기의 아들에 비기는 것이 버릇없는 듯도 하여,
"오늘 저녁에 가시거든 확실하게 허락을 합시오. 아까는 왜 그렇게 우두커니 앉았담…… 호호, 아직 도련님이니깐 수줍어서 그러시는가 보여."
형식은 어쩔 줄을 모르고 공연히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하며 왼편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기도 하고 손가락 마디를 딱딱 소리를 내기도 하더니,
"여보게 나는 지금 평양으로 떠나겠네. 암만해도……."
우선은 위협하는 듯이 형식을 노려보며,
"에그, 못생긴 것. 딸이 썩어져 가기로 저런 것을 준담!"
형식도 이 말에는 웃었다. 그러고 과연 못생긴 소리를 하였다. 우선은,
"이제부터는 좀 굳센 사람이 되게. 그게 무엇이람. 계집애도 아니요…… 딴소리 말고 오늘 저녁 김장로 집에 가게. 가면 또 혼인말이 날 터이니까, 아까 모양으로 못난이 부리지 말고 허락하게. 그러고 미국 가게. 나도 경성학교 말을 들었네. 아마 자네는 사직을 아니하더라도 쫓겨나겠나 보데."
"쫓겨나? 왜?"
"자네가 기생을 따라서 평양 갔다고. 청량리 원수 갚는 게지. 하니까, 약혼하고 미국 가게."
"그러면 영채는 어떻게 하고?"
"죽은 영채를 어쩐단 말인가. 자네도 따라 죽을 터인가, 열녀가 아니라 열남이 될 양으로. 그런 미련한 소리 말고 어서 꼭 내 말대로만 하게."
우선의 말을 들으매 형식도 얼마큼 안심이 된다. 자기도 그만한 생각을 못 함이 아니지마는 자기 생각만으로는 안심이 아니 되다가 우선의 활발한 말을 듣고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 형식은 우선의 말대로 하리라 하였다. 제 생각대로 한다는 것보다 우선의 말대로 한다는 것이 더 마음에 흡족한 듯하였다. 형식은 빙그레 웃으며,
"글쎄."
하였다. 노파도 공연히 기뻐한다.
"점심을 차릴까요. 신주사도 한술 잡수시고."
"또 장찌개 주실랍잉아."
하고 우선이가 형식의 조끼에서 제 것같이 궐련을 뽑아 손바닥에 턱턱 긁을 박는다.
"그만둡시오. 웬 장찌개."
"가서 냉면이나 시켜 오오."
하고 형식이가 일어난다.
"요, 한턱하시려네그려. 한턱하려거든 맥주나 사주게."
"돈이 있나."
"부잣집 사위가 무슨 걱정이야."
"부잣집 사위는 이따 되더라도."
"그 오 원 안 있나."
"평양 가야지."
"또 평양을 가?"
"가서 시체나 찾아야지."
"벌써 황해바다에 떠나갔어! 자네 같은 무정한 사람 기다리고 아직까지 청류벽 밑에 있을 듯싶은가. 자 청요릿집에나 가세."
"벌써 황해바다에 갔을까!"
하고 형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정 태양이 바로 서울 한복판에 떠서 다 데어 죽어라 하는 듯이 그 불 같은 볕을 담아 붓는다. 형식은 새삼스럽게 더운 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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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인왕산 마루턱에 걸렸다. 종로 전선대 그림자가 길게 가로누웠다. 종현 천주당 뾰족탑의 유리창이 석양을 반사하여 불길같이 번적거린다. 두부 장수의 "두부나 비지드렁" 하는 소리도 이제는 아니 들리게 되고 집집에는 앞뒷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한 손으로 땀을 씻어 가며 저녁밥을 먹는다. 북악의 황토가 가로쏘는 햇볕을 받아 빨간빛을 발하고 경복궁 어원 늙은 나무 수풀에서는 저녁 까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종일 빨갛게 달았던 기왓장이 한강으로 불어 들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을 받아 뜨거운 입김을 후끈후끈하게 토한다. 길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벌겋게 되었다.
가게에 앉았던 사람들은 '이제는 서늘한 밤이 온다' 하는 듯이 피곤한 얼굴에 땀을 씻으면서 행길에 나서 거닌다.
남산 솔수풀 위에 살짝 덮였던 석양도 무엇으로 지우는 듯이 점점 스러지고, 그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 속으로 자줏빛 띤 황혼이 거미줄 모양으로 아슬랑아슬랑 기어나온다.
해 바퀴는 인왕산 머리에서 뚝 떨어졌다. 북악산에 아직도 고깔 모양으로 석양이 남았다. 장안 만호에는 파르족족한 장막이 덮인다. 그 한끝이 늘어나서 북악산으로 덮여 올라간다. 마침내 그 고깔까지도 파랗게 물을 들이고 말았다.
강원도 바로 구름산이 떠올랐다. 그것이 처음에는 불길과 같다가 점점 식어서 거뭇거뭇하여진다. 그것이 거뭇거뭇하여짐을 따라서 장안을 덮은 장막도 점점 짙어져서 자줏빛이 되었다가 마침내 회색이 된다. 그러다가 그 속에서 조고만 전등들이 반딧불 모양으로 반작반작 눈을 뜬다. 연극장과 활동사진의 소요한 악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종로와 개천가에는 담배 붙여 물고 부채 든 산보객이 점점 많아진다. 야시를 펴놓으라고 조고마한 구루마도 끌고 오고 말뚝도 박으며 휘장도 친다.
사람들은 배가 불룩하고 몸이 서늘하여 마음이 상쾌하여진다. 낮에는 잠자고 있던 사람들도 차차 기운을 내어 말도 하고 웃기도 하게 된다.
안동 김장로의 집에는 방방에 전등이 켜 있다. 마당에는 물을 뿌려 흙냄새와 화단에 꽃향기가 섞여 들어와 즐겁게 먹고 마시는 여러 사람의 신경을 흥분케 한다. 김장로는 여덟팔자 수염을 손수건으로 (문대고) 한목사는 두 팔로 몸을 버티고 뒤로 기대었으며, 형식도 숭늉을 한입 물어 소리 안 나게 양치를 한다. 세 사람은 맛나게 또 유쾌하게 저녁을 먹었다.
다른 방에서는 부인과 선형과 순애와 계집 하인이 이 역시 맛나게 유쾌하게 저녁을 바치고 말없이 서로 보고 웃는다. 선형의 두 뺨에는 보는 사람의 신경인지 모르거니와 불그레한 빛이 도는 듯하다. 부인은 예쁜 자기 딸에게 황홀한 듯이 정신없이 선형을 마주본다. 선형은 부인을 슬쩍 보고는 순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얘 순애야, 가서 풍금이나 타자. 아까 배운 것 잊어버리지나 않었는지."
"응 아직 가서 풍금이나 타거라."
하고 부인이 먼저 일어선다. 선형과 순애는 풍금 놓인 방으로 간다.
선형은 등자에 올라앉으며 손으로 치맛자락을 모으고 풍금 뚜께를 열고 두어 번 건반(鍵盤)을 내려훑는다. 높은 소리로부터 낮은 소리까지, 또는 낮은 소리로부터 높은 소리까지 맑은 소리가 황혼의 공기를 가볍게 떤다. 순애는 한 팔로 풍금 머리를 짚고 우두커니 서서 오르내리는 선형의 하얀 손을 본다. 선형은 커다란 보표(譜表)를 펴고 고개를 까딱까딱 하며 한번 입으로 라라라라를 불러 보더니 첫번 누를 건(鍵)을 찾아 타기를 시작한다. 눈은 보표의 음부(音符)를 따르고, 손은 하얀 건을 따른다. 보표의 빠르고 늦음을 따라 선형의 몸짓도 빨랐다 늦었다 한다. 방 안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가득 찼다. 그것이 방에서 넘쳐나서 황혼의 바람에 풍겨 마당을 건너 담을 넘어 마치 물결 모양으로 사방으로 퍼진다. 몇 사람이나 가만히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사람이나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추는고.
선형의 손은 곡조를 따라 스스로 오르내리고 그 몸은 손을 따라 스스로 움직여진다. 마침내 맑은 노랫소리가 그의 부드러운 입술을 뚫고 흘러나왔다.
"하늘에 둥실 뜬 저 구름아, 비를 싣고서 어디로 가느냐."
순애도 가는 목소리로 화하여 불렀다. 형식도 이 노래를 들었다. 형식의 정신은 노랫소리로 더불어 공중에 솟아올랐다. 마치 정신에 날개가 돋아서 훨훨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듯하여 말할 수 없는 서늘한 듯도 하고 따뜻한 듯도 한 기쁨이 형식의 가슴에 가득 찼다.
김장로는 목사를 향하여,
"자, 이제는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나 합시다."
세 사람은 일어났다.
79
김장로의 서재는 양식으로 되었다. 그가 일찍 미국 공사로 갔다 와서부터는 될 수 있는 대로 서양식 생활을 하려 한다.
방바닥에는 붉은 모란 무늬 있는 모전을 깔고 사벽에는 화액(畵額)에 넣은 그림을 걸었다. 그림은 대개 종교화다. 북편 벽으로 제일 큰 화액에는 겟세마네에는 기도하는 예수의 화상이 있고 두어 자 동쪽에는 그보다 조곰 작은 화액에 구유에 누인 예수를 그린 것이요, 서편 벽에는 자기의 반신상이 걸렸다. 다른 나라 신사 같으면, 종교화 밖에도 한두 장 세계 명화를 걸었으련마는, 김장로는 아직 미술의 취미가 없고 또 가치도 모른다. 그는 그림이라 하면 종교에 관한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고, 기타에는 옛날 산수 풍경이며 지란매죽 같은 그림은 얼마큼 귀하에 여기되, 이러한 그림은 서양식으로 차려 놓은 방에는 부적당한 줄로 안다. 그러고 서양식 인물화라든지 그중에도 미인화, 나체화(裸體畵) 같은 것은 별로 보지도 못하였거니와 보려고도 아니하고 본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는 미술이라는 말도 잘 알지 못하거니와, 대체 그림 같은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한다. 더구나 조각(彫刻) 같은 것은 아마도 그의 오십 년 생활에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 사람들이 종교와 같이 귀중히 여기는 예술(藝術)도 그의 눈에는 거의 한푼 어치 가치도 아니 보일 것이다. 서양 사람의 생각으로 그를 비평할진대 '예술을 모르고 어떻게 문명 인사(文明人士)가 되나' 하고 의심할 것이다. 실로 문명 인사치고 예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장로는 방을 서양식으로 꾸밀 뿐더러 옷도 양복을 많이 입고, 잘 때에도 서양식 침상에서 잔다. 그는 서양, 그 중에도 미국을 존경한다. 그래서 모든 것에 서양을 본받으려 한다. 그는 과연 이십여 년 서양을 본받았다. 그가 예수를 믿는 것도 처음에는 아마 서양을 본받기 위함인지 모른다. 그리하고 그는 자기는 서양을 잘 알고 잘 본받은 줄로 생각한다. 더구나 자기가 외교관이 되어 (미국 서울) 워싱턴에 주재하였으므로 서양 사정은 자기보다 더 자세히 아는 이가 없거니 한다. 그러므로 서양에 관하여서는 더 들을 필요도 없고 더 배울 필요는 무론 없는 줄로 생각한다. 그는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한 문명 인사로 자임한다. 교회 안에서와 세상에서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러나 다만 그렇게 인정하지 아니하는 한 방면이 있다. 그것은 서양 선교사들이라.
선교사들은 김장로가 서양 문명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줄을 안다. 김장로는 과학(科學)을 모르고, 철학(哲學)과 예술(藝術)과 경제(經濟)와 산업(産業)을 모르는 줄을 안다. 그가 종교를 아노라 하건마는 그는 조선식 예수교의 신앙을 알 따름이요, 예수교의 진수(眞髓)가 무엇이며, 예수교와 인류와의 관계 또는 예수와 조선 사람과의 관계는 무론 생각도 하여 본 적이 없다.
문명이라 하면 과학, 철학, 종교, 예술, 정치, 경제, 산업, 사회 제도 등을 총칭하는 것이라. 서양의 문명을 이해(理解)한다 함은, 즉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한다는 뜻이니, 김장로는 무엇으로 서양을 알았노라 하는고. 서양 선교사들은 이러함을 안다. 그러므로 그네는 김장로를 서양을 흉내내는 사람이라 한다. 이는 결코 김장로를 비방하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김장로의 참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의 문명의 내용은 모르면서 서양 옷을 입고, 서양식 집을 짓고, 서양식 풍속을 따름을 흉내가 아니라면 무엇이라 하리요. 다만 용서할 점은 김장로는 결코 경박하여, 또는 일정한 주견이 없어서, 또 다만 허영심으로 서양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양이 우리보다 우승함과, 따라서 우리도 불가불 서양을 본받아야 할 줄을 믿음― 깨달음이 아니요― 이니 무식하여 그러는 것을 우리는 책망할 수가 없는 것이라. 그는 과연 무식하다. 그가 들으면 성도 내려니와 그는 무식하다. 그는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깨달을 줄로 안다. 하기는 그에게는 그 밖에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러나 눈으로 슬쩍 보아 가지고 서양 문명을 알 수가 있을까. 십 년 이십 년 책을 보고, 선생께 듣고, 제가 생각하여도 특별히 재주가 있고, 부지런하고, 눈이 밝은 사람이라야 처음 보는 남의 문명을 깨달을 동 말 동하거든, 김장로가 아무리 천질이 명민하다 한들 책 한 권 아니 보고 무슨 재주에 복잡한 신문명의 참뜻을 깨달으리요.
그러나 김장로는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우는지 자기는 잘 모르면서도 서양 사람들이 다 그 자녀를 학교에 보내므로 자녀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 줄을 안다. 안다는 것보다 믿는다 함이 적당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는 마침내 문명을 알게 될 것이라. 이리하여 조선도 점점 신문명을 완전히 소화(消化)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위험한 것이 있다. 그것은 김장로 같은 이가 자기의 지식을 너무 믿어 학교에서 배워 와 신문명을 깨달아 알게 되는 자녀의 사상을 간섭함이다. 자녀들은 잘 알고 하는 것이언마는 자기가 일찍 생각하지 않던 바를 자녀들이 생각하면 이는 무슨 이단(異端)같이 여겨서 기어이 박멸하려고 애를 쓴다. 이리하여 소위 신구 사상의 충돌이라는 신문명 들어올 때에 으레 있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지 못하던 바를 생각함은 낡은 사람이 보기에 이단 같지마는 기실은 낡은 사람들이 모르던 새 진리를 안 것이라. 아들은 매양 아버지보다 나아야 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 그러나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이 자기 아는 이상 알기를 싫어하는 법이니 신구 사상 충돌의 비극은 그 책임이 흔히 낡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라.
80
그러나 김장로가 미술을 위하여서 그 그림들을 붙인 것은 아니로되 그 그림을 보는 자녀들에게는 간접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생각이 나게 한다. 자기는 그림을 위함이 아니요, 거의 거린(거기 그린) 예수의 화상을 위함이언마는 그것을 보는 자녀들은 그와 반대로 거기 그린 예수보다 그림 그 물건을 재미있게 본다. 어떻게 저렇게 정묘하게 그렸는고. 기뻐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드러나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괴로워하는 빛이 나도록, 풀은 꼭 풀과 같고, 꽃은 꼭 꽃과 같게 어떻게 저렇게 정묘하게 그렸는고 하는 것이 그의 자녀들에게는 더욱 재미가 있었다. 이것은 김장로는 모르는 재미요, 그의 자녀들만 꼭 아는 재미라.
김장로는 자기의 방의 신식이요 화려한 것을 자랑하고 만족하는 듯이 한번 방 안을 둘러보더니, 목사와 형식에게 의자를 권한다. 가운데 둥근 테이블을 놓고 세 사람은 솥귀같이 둘러앉았다. 형식은 담배가 먹고 싶건마는 참았다. 그러고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저녁 서늘한 바람이 하얀 레이스 문장을 가만가만히 흔들고 그러할 때마다 바로 창 밑에 놓인 화분의 월계의 연한 잎새가 한들한들한다. 형식은 장차 나올 담화를 생각하매 자연히 가슴이 자주 뛴다. 그러나 무슨 말이 나오든지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할 것 같다. 아까 우선이가 말하던 대로 하리라 하였다. 아직도 풍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린다. 우선(형식)은 기뻤다. 어서 말을 시작하였으면 좋겠다 하고 목사와 장로의 입을 보았다. 목사가,
"아까 형식 씨를 보고 그 말씀을 하였지요. (하니깐 대강 승낙을 하시는 모양인데) 이제는 직접으로 말씀을 하시지요."
하고 형식을 본다. 장로는,
"녜, 감사하외다. 내 딸자식이 변변치 못하지마는 만일 버리지 아니시면……."
"허허."
하고 목사가,
"그것은 장로께서 과히 겸사시오마는 두 분이 실로 합당하지요"
하고 혼자 기뻐한다. 장로는,
"만일 마음에 없으시면 억지로 권하는 것이 아니외다마는 형식 씨를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외다."
형식은 아까 모양으로 못난이를 부리지 아니하리라 하여 얼른,
"감히 무어라고 말씀하오리까마는 제가 감당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얼굴을 붉어졌다. 장로는 만족하여 하는 듯이 몸을 젖혀 의자에 기대며,
"그야말로 너무 겸사외다. 그러면 승낙을 하시는구려!"
하고 한번 힘을 주어 형식을 훑어본다. 형식은 문득 고개를 수그렸다가 아까 우선의 '못생겼다'는 말을 생각하여 번적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낯빛을 엄숙하게 하였다. (그러나) 암만해도 '녜' 하는 대답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속으로 괴로워한다. 목사가,
"자 얼른 말씀을 하시오."
하는 뒤를 대어 장로가,
"그렇지요. 주저할 것이 있어요."
형식은 있는 힘을 다하여,
"녜."
하였다. 그러고는 혼자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개를 돌렸다.
"승낙하셔요?"
하고 장로가 다짐을 받는 듯이 몸을 앞으로 숙인다. 형식은 우선의 쾌활한 것을 흉내내어,
"녜, 명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힘드는 일을 마친 듯이 휘 하고 숨을 내어쉬었다. 과연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하여 마음이 가뜬하였다. 그러고 새로운 기쁨이 가슴에 차고 김장로의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 새로 정답게 되는 듯하였다. 형식은 꿈속 같았다.
"어, 참 기쁜 일이오."
하고 목사가 마음이 놓이는 것같이 몸을 한번 흔든다.
"참 어떻게 기쁜지 모르겠소. 그러면 내 아내를 오래서 아주 말을 맺읍시다."
하고 목사의 뜻을 묻는 듯,
"그러시오. 또 지금 혼인은 당자의 허락도 들어야 하니까 선형도 오라고."
하고 목사도 자기 딴에 구습을 버리고 신사상을 좇거니 한다.
장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초인종을 두어 번 친다. 그 계집아이가 나온다.
"얘, 가서 마님께 작은아씨 데리고 오십소사고……."
계집 하인도 이 일의 눈치를 아는지 슬적 형식을 보더니 생끗 웃고 나간다. 세 사람은 말없이 앉았다. 그러나 그네의 눈에 나뜨는 웃음은 그네의 마음의 즐거움을 말하였다. 형식은 이제 선형을 만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첫번 선형을 만날 적과 일전 영어를 가르치던 때에 하던 생각을 생각하였다. 형식의 머리는 마치 술취한 것 같았다. 전신이 아프도록 기쁨을 깨달았다.
부인이 선형을 뒤세우고 들어온다. 형식은 의자에서 일어나 부인께 인사하였다. 부인도 웃으며 답례하였다. 선형은 부인의 뒤에 숨어 선 대로 목사에게 예하고 다음에 형식에게 예하였다. 선형의 얼굴도 붉거니와 형식의 얼굴도 붉었다. 형식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씻었다. 부인이 장로의 곁에 앉고 선형은 부인과 목사의 새에 앉았다. 형식은 바로 부인과 정면하여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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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형식은 그 집에서 조반을 먹고 대문 밖에 나섰다. 노파와 어머니와 계향과 세 사람이 번갈아 형식을 권하므로 형식은 전보다 더 많이 먹었다. 더구나 그 밥이며 국이며 전골이며 모든 것이 평생 객줏집 밥만 먹던 형식에게는 지극히 맛이 좋았다. 그럴 뿐더러 형식은 아직도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정성스럽게 권함을 받으며 밥상을 대하여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계향과 같은 아름다운 처녀에게
"어서 더 잡수셔요."
하고 정성스럽게 권함을 받은 적은 없었다. 계향은 형식의 밥상에 붙어서 손수 구운 조기를 뜯었다. 아까 성냥개비에 덴 손가락에 누렇게 탄 자리가 보인다. 계향은 형식의 숟가락을 빼앗아 제 손으로 대접에 밥을 말았다. 형식은,
"그렇게 많이 못 먹는데."
하면서 그 밥을 다 먹었다. 계향은 형식이가 밥을 다 먹는 것을 보고 기쁜 듯이 방그레 웃었다. 그 웃는 계향의 눈썹에는 아직도 눈물이 묻었더라. 세 사람은 실로 진정으로 형식을 권하였다. 형식을 자기네의 아들 모양으로, 또는 오라비 모양으로 따뜻한 밥과 맛있는 반찬을 한 술이라도 많이 먹도록 진정으로 권하였다. 그러고 형식도 그 권하는 사람들을 어머니와 같이 또는 누이와 같이 정답게 생각하였다.
"아무것도 잡수실 것이 없어서."
하는 인사도 항용 말하는 형식적 인사와 같이 들리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맛나는 반찬이 부족함을 한탄하는 말로 들었다. 형식은 대문을 나설 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영채의 일로 근심하고 슬퍼하고 답답하여 하던 마음을 거의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기쁨을 깨달았다. 아까 오던 안개비가 걷히고 안개 낀 듯한 (하늘에는 보기만 하여도 땀이) 흐를 듯한 햇볕이 가득히 찼다. 형식이가 서너 걸음 걸어나갈 때에 뒤에서,
"저와 같이 가셔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계향의 소리로구나 하면서 우뚝 서며 고개를 돌렸다. 계향은 형식의 곁에 뛰어와 살짝 형식의 손을 잡으려다 말고 형식을 보면서,
"저와 같이 가셔요."
한다. 형식은 칠성문 밖 죄인의 무덤 있는 데와 기자묘 저편 북망산과 모란봉을 넘어 청류벽으로 걸어갈 것을 생각하면서,
"나를 따라오려면 다리가 아플걸요."
하고 계향의 눈을 내려다보며 '같이 갔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계향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계향은 몸을 한번 틀면서,
"아니야요. 다리 아니 아파요."
하고 기어이 따라갈 뜻을 보인다.
"또 날이 더운데."
하며 형식은 계향을 뒤세우고 종로를 향하여 나온다. 길가 초가 지붕에서는 가만가만히 김이 오른다. 벌써 사람들은 부채로 볕을 가리우고 다닌다. 손님도 없는 빙수 가게에 아롱아롱한 주렴이 무거운 듯이 가만히 있다. 바람이 불면 살랑살랑 소리가 나려니 하고 형식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계향은 길가 가게를 갸웃갸웃 엿보면서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걷어들고 형식의 뒤로 따라온다. 형식의 누렇게 된 맥고자를 보고 저 사람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어떠한 사람인가 생각한다. 그러고 자기가 날마다 만나는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사람들과 형식과를 속으로 비교하여 본다. 그러나 계향은 아직도 자기가 만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 줄을 알 줄을 모른다. 다만 이 사람은 옷을 잘 못 입은 것을 보니 가난한 사람인가 보다 한다. 그러고 형식의 구겨진 두루마기를 본다. 계향은 '어젯밤 차에서 구겨졌고나. 왜 벗어서 걸지를 아니하였던고' 한다. 그러고 형식의 발을 본다. '새 구두로구나' 한다. 아까 담뱃불 붙여 주던 생각을 하고 그 데인 손가락을 보면서 '아직도 아픈 듯하다' 한다. 그러고 형식이가 불붙은 성냥을 보고 '이리 주시오' 하던 것을 생각하고 자기더러 '하시오'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한다. 소가 끄는 구루마를 피하여 섰다가 얼른 형식의 뒤를 따라가서 형식의 손을 잡는다. 형식은 잠깐 고개를 돌려 계향을 보고 웃으면서 계향의 잡은 손은 활개를 아니 친다. 두 사람은 팔각 국숫집 모퉁이를 돌아 비스듬한 고개로 올라간다. 계향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솟는다. 형식은 그것을 보고 잠깐 걸음을 그치며,
"이마에 땀이 흐르는구려."
한다. 계향은 형식의 손을 잡았던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덥지 않습니다."
하고 또 형식의 손을 잡는다. 형식은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다. 벌거벗은 때묻은 아이들이 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두 사람을 보고 섰다. 치마 아니 입고 웃통 벗은 부인이 연기 나는 부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뛰어나오더니, 연기가 펄펄 오르는 부지깽이로 머리를 긁고 섰던 사내아이의 머리를 때린다. 맞은 아이는 '으아' 하고 울면서 길바닥에 흙을 집어 그 부인의 면상에 뿌린다. 형식은 영채가 숙천 어느 객주에 어떤 사람에게 업혀 가다가 그 사람의 얼굴에 흙을 뿌리던 생각을 한다. 계향은 우뚝 서며 우는 아이를 돌아보더니 두 손으로 형식의 손을 꼭 쥔다. 두 사람은 또 걷는다.
계향은 매맞던 아이를 생각하다가 버리고 형식과 월향의 관계를 생각한다. 언제 '형님'이 이 사람을 알았던고. 평양서 서로 알았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형님을 버려서 형님을 죽게 하였는고, 하고 형식이 원망스럽다 하여 가만히 형식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형식의 걱정 있는 듯한 낯빛을 보고 이 사람이 형님을 생각하고 슬퍼하는구나 한다.
이때에 어떤 젊은 사람이 자행거를 타고 두 사람의 앞으로 지나다가 번쩍 고개를 돌리더니 그만 자행거를 내려 형식의 앞으로 온다. 계향은 형식의 손을 놓고 한걸음 물러서서 지금 온 사람의 모양을 본다.
62
그 사람은 자행거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쾌활하게,
"그런데 웬일인가? 언제 왔는가?"
하고 담배를 내어 형식에게도 권하고 자기도 붙인다. 형식은 담배 연기를 코와 입으로 내어보내면서,
"오늘 아침차에 왔네."
하고 말하기 싫은 듯이 자행거의 말긋말긋한 방울을 본다. 그 사람은 형식의 곁에 한 걸음 비켜 섰는 계향을 유심히 보고 형식이가 어떤 기생을 데리고 가는가 하고 의심하면서,
"그런데 주인은 어디인가. 왜 바로 내 집으로 오지 아니하고."
하면서도 형식의 얼굴을 보며 '무슨 까닭이 있구나' 한다. 형식은,
"무슨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갈 양으로 온 것이니까."
하고 고개를 들어 멀리 하얗게 보이는 대동강을 본다. 그 사람은 한번 더 계향을 보더니,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군가?"
형식은 잠깐 얼굴이 붉어지며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모른다. 계향도 민망한 듯이 고개를 숙인다. 그 사람은 형식이 얼른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의심스럽다 하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다. 형식은 빙긋이 웃으며,
"내 누일세."
하였다. 그러고 내가 잘 대답을 하였구나, 하고 마음에 만족하였다. 그러고는 새로운 용기를 얻어 정면으로 그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내 누일세' 하는 형식의 대답의 뜻을 몰라 담배를 문 채로 멍멍하니 섰다. 그 사람은 형식에게 오직 한 누이가 있는 줄을 알고 또 그 누이는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줄을 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더니 담배 꽁달이를 발로 비비면서,
"그런데 어디로 가는가?"
한다. 형식은 다만,
"기자묘를 보러 가네."
한다. 그 사람은 형식의 행색이 수상하다 하면서,
"그러면 저녁에는 내 집으로 오게. 하룻밤 이야기나 하세."
하고 자행거를 타고 달아난다. 얼마를 가다가 자행거에서 고개를 돌려 천천히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양을 보더니 그만 어떤 길굽이를 돌아간다. 그 흰 껍데기 씌운 나파륜 모자 꼭대기가 번뜻번뜻 보이더니 아주 아니 보이고 만다. 계향은 안심한 듯이 형식의 손을 잡으며,
"그 어른이 누구시야요?"
한다.
"내 친구외다. 동경 가 있을 때에 같은 학교에 있던 친구요."
계향은 이 말을 듣고 '그러면 이 사람은 동경 유학생인가' 하였다. 그러나(그러고) 자기의 집에 동경 유학생이 여러 사람 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오는 것도 생각하였다. 그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늘 술이 취하여 (자기를 껴안을 때에) 그 입에서 구역나는 술냄새가 나던 것과, 또 한번은 자기의 화상을 그려 줄 터이니 벌거벗고 앉으라 할 때에 자기 '그러면 싫소!' 하고 건넌방으로 뛰어가던 것을 생각한다.
두 사람은 칠성문에 다다라 잠깐 걸음을 멈춘다. 칠성문통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형식은 두루마기 고름을 늦추고 땀에 젖은 자기의 적삼 가슴을 보면서 바람을 맞아들이려는 듯이 두루마기를 벌린다. 계향은 '후―후―' 하고 입김을 내어불면서 두 손으로 두 귀밑을 부친다. 형식은 계향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을(얼굴은) 둥그스름하다. 그러고 더위에 술이 취한 모양으로 두 뺨이 불그레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분도 바르지 아니하였건마는, 귀밑에는 어저께 발랐던 분이 조곰 남았다. 계향의 적삼 등에도 땀이 내어 배었다. 형식은 선형의 적삼에 땀이 배어 그 젖은 자리가 작았다 컸다 하던 것을 생각하고 빙긋이 웃었다. 계향은,
"녜, 왜 웃으세요?"
하고 웃는다. 형식은 계향의 어깨를 만지며,
"적삼 등에 땀이 배었구려"
한다.
계향은 얼른 돌아서며 형식의 등을 만져 보더니 머뭇머뭇하다가,
"여기도 땀이 배었습니다."
한다. 계향은 형식을 무엇이라고 부를는지 모른다. 자기의 집에 놀러 오는 동경 유학생들을 그 어머니는, 혹 '무슨 주사'라고도 하고 그저 '나리'라고도 하고 또 관 앞에 있는 키 큰 사람은 '김학사'라고도 부르건마는, 계향은 형식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모른다. 그래서 형식의 등에 땀이 밴 것을 보고 '나리도' 할까, '이학사도' 할까 하고 잠깐 주저하다가 '여기도 땀이 배었습니다' 한 것이다. 형식은 그것을 알고 어디 계향이가 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보리라 하여 또 웃으며,
"계향 씨의 얼굴은 술이 취한 것같이 붉구려!"
하였다. 계향도 형식이가 자기의(자기를) 무엇이라고 부를지 몰라 주저하던 것을 알았는가 하여 더욱 얼굴을 붉히더니,
"오빠의 얼굴도……."
하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더 숙이고 말을 다하지 못한다. 계향은 아까 형식이가 자기를 '내 누일세' 하던 것을 생각한다. 형식이가 계향에게서 들으려던 말은 이 '오빠'란 말이었다. 그러나 계향이가 '오빠의 얼굴도……' 하는 것을 듣고는 미상불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형식은 친누이 하나와 종매가 이삼 인 있다. 그러나 친누이는 그 시가를 따라 함경도에 살므로, 이래 사오 년간에 만나 본 적이 없고, 방학 때를 타서 고향에 돌아가면 누구보다도 먼저 종매 세 사람을 찾아갔다. 그 종매들은 오래간만에 만나는 종형을 잘 사랑하였다. 그 중에도 형식보다 나이 어린 두 종매는 형식을 만날 때에 떠날 때에 늘 울었다. 시부모의 앞이라 마음대로 반가운 정을 표하지는 못하나, 처음 만나서 '오빠' 하는 소리와 밥상에 놓은 국에 닭고기를 많이 넣는 것으로 넉넉히 그네의 애정을 알았었다. 형식이 방학에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실로 이 두 종매에게 '오빠'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함이러라. 계향의 '오빠의 얼굴도……' 하는 간단한 말은 형식에게 무한한 기쁨을 주었다. 형식과 계향은 또 걷는다. 그러나 계향은 형식의 손을 잡지 아니하였다.
63
두 사람은 칠성문을 나섰다. 길가에는 쓰러져 가는 집들이 섰다. 철도가 생기기 전에 지나가는 손님도 있어서 술도 팔고 떡도 팔더니 지금은 장날이나 아니면 사람 그림자도 보기가 어렵다. 문 밖에는 문짝 모양으로 만든 소위 '평상'이란 것을 놓고, 그 위에는 다 떨어진 볏짚 거적을 폈다. 어떤 낡디낡은 탕건을 쓴 노인이, 이 더운 때에 때묻은 무명옷을 입고 할일이 없는 듯이 평상에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하면서 두 사람의 지나가는 양을 본다. 그 노인의 얼굴은 붉고 눈에 빛이 있으며 매우 풍채가 늠름하다. 형식은 그가 수십 년 전 조선이 아직 옛날 조선으로 있을 때에 선화당(宣化堂) 안에서 즐겁게 노닐던 사람인 줄을 알았다. 그러고 형식의 고향에도 일찍 그 골에서 내로라 하고 번쩍하게 행세하던 사람들이 갑오 이래로 세상이 졸변하매 모두 시세를 잃고 적막하게 지내는 노인이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우뚝 서며 그 노인을 다시 보았다. 그 노인도 두 사람을 본다.
저 노인도 갑오 전 한창 서슬이 푸르렀을 적에는 평양 강산이 다 나를 위하여 있고, 천하 미인이 다 나를 위하여 있다고 생각하였으리라. 그러나 갑오년 을밀대 대포 한 방에 그가 꿈꾸던 태평시대는 어느덧 깨어지고 마치 캄캄한 밤에 번개가 번쩍하는 모양으로 새 시대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이 되고 세상은 그가 알지도 못하던, 또는 보지도 못하던 젊은 사람의 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철도를 모르고 전신과 전화를 모르고 더구나 잠행정이나 수뢰정을 알 리가 없다. 그는 대동문 거리에서 오 리가 못 되는 칠성문 밖에 있으면서 평양 성내에서 날마다 밤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의 머리에는 선화당이 있을 뿐이요, 도청(道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영원히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리니, 그는 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서 이 세상 밖에 있음과 (같다.) 형식과 그 노인은 전혀 말도 통하지 못하고 글도 통하지 못하는 딴나라 사람이로다. '낙오자(落伍者), 과거(過去)의 사람'이라 하는 생각과 함께 자기가 아무리 새 세상 이야기를 하여도 못 알아듣다가 세상을 버린 자기의 종조부를 생각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그 노인에게 대하여 일종 말할 수 없는 설움을 깨달았다. 계향은 형식이가 오래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 양을 보다가 형식의 소매를 끌며,
"어서 가세요!"
한다. 형식은 다시 그 노인을 돌아보고 '돌로 만든 사람이라' 하다가 '아니다, 화석(化石)한 사람이라' 하였다. 노인은 한참이나 형식을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눈을 감고 여전히 몸을 앞뒤로 흔든다. 혜경(계향)은 가늘게,
"아시는 노인야요?"
한다. 형식은 계향의 어깨에 손을 놓고 걷기를 시작하면서,
"녜, 이전에는 알던 노인이더니 지금은 모르는 노인이 되고 말았어요."
하고 웃으며 계향을 본다. 형식은 생각에 '계향이 너는 영원히 저 노인을 알지 못하리라' 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자기가 처음 평양에 올 때에 이리로 지나가던 생각을 하였다. 머리에 흰 댕기를 드리고 감발을 하고 아장아장 이 길로 지나가던 소년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그 소년은 저 노인을 알았다 하였다. 대동문 거리에서 커다란 유리창을 보고 놀라고, 대동강 위에서 '쌩' 하고 달아나는 화륜선을 보고 놀라던 소년은 그 노인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하던 소년은 이미 죽었다. '쌩' 하는 화륜선을 볼 때에 이미 죽었다. 그러고 그 소년의 껍데기에 전혀 다른 이형식이라는 사람이 들어앉았다. 마치 선화당(宣化堂)이던 것이 도청(道廳)이 되고 감사(監司)이던 것이 도장관(道長官)이 된 모양으로. 그러고 곁에 오는 계향을 보았다. 계향과 그 노인과의 거리를 생각하였다. 그 거리는 무궁대(無窮大)라 하였다. 형식은 어느 집 모퉁이로 돌아서려 할 때에 다시 그 노인을 보았다. 그러나 그 노인은 여전히 몸을 앞뒤로 흔들흔들한다. 계향도 그 노인을 보더니,
"녜? 어떤 노인이야요?"
한다.
"계향씨는 모를 노인이오."
하고 웃을 때에 계향은 의심나는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본다. 가만히 형식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은 성 밑 비탈길로 남쪽을 향하고 나아간다. 그리 길지 아니한 풀잎사귀가 내려쪼이는 볕에 조곰 시들어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형식은 무너져 가는 성을 바라보고, 저 성을 쌓은 조상의 얼과 저 성이 지금까지 구경한 조상을(조상의) 성하던 것, 쇠하던 것과 저 성이 그 동안에 몇 번이나 총알을 맞고 대포알을 맞았는고 하는 생각을 한다. 비탈 위에 우뚝 섰는 오랜 성이 마치 사람과 같이 정도 있고 눈물도 있는 것같이 생각되고, 할 말이 많으면서도 들어 줄 자가 없어서 못하는 듯한 괴로워하는 빛이 보이는 듯하다.
계향은 땀을 발발 흘리고 형식의 뒤로 따라가면서 아까 자기가 형식에게 오빠 하고 부르던 생각이 난다. 계향은 아직도 오빠라고 불러 본 사람이 없었다. 계향은 그 어머니의 외딸이요, 또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자세히 모르므로 아는 친척도 없었다. 그러므로 계향이가 형님 하고 부르는 사람은 이삼 인 되건마는 오빠 하고 부를 사람은 없었다. 계향뿐 아니라 계향의 주위에는 오빠, 누나 하고 지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계향이 있는 사회는 대개 여자의 사회요, 대하는 남자는 대개 기생집이라고 놀러 오는 손님뿐이었다. 계향은 처음 오빠 하고 불러 본 것이 매우 기뻤다. 아까 담뱃불을 붙여 줄 때보다 형식이가 더 정답게 보인다 하였다. 그러고 한번 더 오빠라고 불러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죄인들의 무덤 있는 곳에 다다랐다.
64
계향은 앞서서 가지런히 있는 세 무덤을 찾았다. 여러 해 동안에 비에 씻겨 내려 원래 작던 무덤이 거의 평지와 같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무패를 써 박았던 듯하여 썩어진 조각이 무덤 앞에 떨어졌다. 그 곁에도 그와 같은 무덤이 수십 개나 된다. 어떠한 무덤에는 서너 치 넓이 되는 나무패가 아직도 새로운 대로 있다. 계향은 그 셋이 가지런히 있는 무덤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월향 형님의 아버지의 무덤이요, 이것이 두 오라버지(오라버니)의 무덤이야요."
하며 이전에 월향과 같이 왔던 생각을 한다. 계향은 월향을 따라 서너 번이나 이 무덤에 왔었다. 그 중에도 지난봄 월향이가 서울로 가려 할 때에, 월향은 술을 한 병 가지고 계향을 데리고 왔었다. 그때는 따뜻한 늦은 봄날, 이 불쌍한 자들의 무덤 곁에는 이름 모를 조고마한 꽃이 피고, 보통 벌에는 새로난 수수와 조가 부드러운 바람에 가볍게 물결이 지더라. 월향은 그 아버지의 무덤 앞에 술을 따라 놓고 말없이 한참이나 울다가 곁에서 우는 계향의 등을 만지며 자기가 서울을 가거든 네가 한 해에 두 번씩 이 무덤을 찾아보아 달라 하였다. 그때에 계향은, '형님의 아버지면 내 아버지요, 형님의 오빠면 내 오빠지요' (하였다. 계향은 이러한 생각을) 하고 형식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형식은 가만히 세 무덤을 보고 말없이 섰다. 그 눈이 크고 콧마루가 높고 키가 크고, 평생 몸을 꼿꼿이 하고 앉았던 박진사를 생각하였다. 그가 사랑에 젊은 사람들은 모두 데리고, 상해서 사가지고 온 석판으로 박은 책들을 가르치던 것을 생각하고, 그가 포박을 당할 때에 '내가 잡혀가는 것은 조곰도 슬프지 아니하거니와 저 학교가 없어지는 것이 슬프다' 하고 눈물을 흘리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영채의 말에, 영채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옥중에서 절식 자살하였다는 말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시대(時代)의 선구(先驅)의 비참(悲慘)한 운명(運命)을 생각하였다. 박선생은 너무 일찍 깨었었다. 아니, 박선생이 너무 일찍 깬 것이 아니라, 박선생의 동족이 너무 깨기가 늦었었다. 박선생이 세우려던 학교는 지금 도처에 섰고, 박선생이 깎으려던 머리는 지금 사람마다 깎는다. 박선생이 만일 그 문명운동(文明運動)을 오늘에 시작하였던들 그는 사회의 핍박은커녕 도리어 사회의 칭찬과 존경을 받을 것이라. 시대가 옮아갈 때마다 이러한 희생이 있는 것이어니와 박선생처럼 참혹한 희생은 없다. 지금 그 며느리 두 사람은 어떻게 있는지 모르거니와 이제 영채까지 죽었다 하면 아주 박진사의 집은 멸망한 것이라. 형식의 집도 거의 멸망하다가 형식이 한 사람만 남고, 박진사의 집도 거의 멸망하다가 영채 하나만 남았었다. 그러나 이제 영채 죽으니 영채의 집은 아주 이 세상에 씨도 없이 되고 말았다. 수십여 호 되던 박씨 문중이 신미혁명(辛未革命)에 다 쓰러지고, 오직 하나 남았던 박진사의 집이 신문명운동(新文明運動)에 희생이 되어 아주 없어지고 말았다. 일문(一門)의 운명도 알 수 없고 일가(一家)의 운명도 알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게 이 무덤을 보고 슬퍼하지는 아니하였다. 형식은 무슨 일을 보고 슬퍼하기에는 너무 마음이 즐거웠다. 형식은 죽은 자를 생각하고 슬퍼하기보다 산 자를 보고 즐거워함이 옳다 하였다. 형식은 그 무덤 밑에 있는 불쌍한 은인의 썩다가 남은 뼈를 생각하고 슬퍼하기보다 그 썩어지는 살을 먹고 자란 무덤 위의 꽃을 보고 즐거워하리라 하였다. 그는 영채를 생각하였다. 영채의 시체가 대동강으로 둥둥 떠나가는 모양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슬픈 생각이 없었고, 곁에 섰는 계향을 보매 한량없는 기쁨을 깨달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혼자 놀랐다. 내가 어느덧에 이대도록 변하였는가 하였다. 형식은 너무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두 주먹을 쥐었다. 형식은 어저께 영채의 편지를 보고 울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슬퍼하였다. 그러고 밤에 차를 타고 올 때에도 남모르게 가슴을 아프고 남모르게 눈물을 씻었다. 더구나 아까 경찰서에서 영채가 아주 죽은 줄을 알 때에 형식의 몸은 마치 끓는 물에 들어간 듯하였다. 그러고 계향의 집을 떠나 박선생의 무덤을 찾아올 때에도, 무덤에 가거든 그 앞에 엎드려 실컷 통곡이라도 하리라 하였었다. 그리하였더니 이것이 웬일인가. 은사(恩師)의 무덤 앞에서 억지로라도 눈물을 흘리려 하였으나 조곰도 슬픈 생각이 아니 난다. 사람이 이렇게도 갑자기 변하는가 하고 혼자 빙그레 웃었다.
계향은 형식의 모양이 수상하다 하였으나 알아보려고도 하지 아니한다.
형식은 이렇게 살풍경(殺風景)한 곳에 오래 섰는 것보다 계향의 손을 잡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걸음을 걷는 것이 좋으리라 하여,
"자, 갑시다."
하였다. 계향은 이상하다 하는 듯이,
"어디로 가셔요?"
"집으로 갑시다."
"북망산에 아니 가시고요?"
"거기는 가서 무엇 하오? 가면서 이야기나 합시다. 영채 씨가 여기 왔던 형적이 없으니까 아마 아무 데도 아니 왔던 게지요."
하고 계향의 손을 잡는다.
형식은, 영채는 죽은 사람으로 작정하고 계향의 집에 돌아와, 노파는 이삼 일 평양에 있는다 하므로 자기 혼자 그날 저녁차로 서울에 올라왔다. 평양을 떠날 때에 노파는 문 밖에 나와 형식의 손을 잡고 울면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영채를 찾아 주시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다만 계향을 떠나는 것이 서운할 뿐이요, 영채를 위하여서는 별로 생각도 아니하였다. 형식은 차 속에서 '꿈이 깬 듯하다' 하면서 여러 번 웃었다.
65
평양서 올라올 때에 형식은 무한한 기쁨을 얻었다. 차에 같이 탄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의 사랑을 끌고, 모두 다 자기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는 듯하였다. 찻바퀴가 궤도에 깔리는 소리조차 무슨 유쾌한 음악을 듣는 듯하고, 차가 철교를 건너갈 때와 굴을 지나갈 때에 나는 소요한 소리도 형식의 귀에는 웅장한 군악과 같이 들린다. 형식은 너무 신경이 흥분하여,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차창을 열어 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어스름한 달빛을 어렴풋하게 보이는 황해도 연산(黃海道 連山)을 보았다. 산들은 물먹으로 그린 묵화 모양으로, 골짜기도 없고 나무나 돌도 없고, 모두 한 빛으로 보인다. 달빛과 밤빛과 구름빛을 합하여 커다란 붓으로 종이 위에 형체 좋게 그린 그림과 같다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형식의 정신도 실로 이와 같았다. 형식의 정신에는 슬픔과 괴로움과 욕망과 기쁨과 사랑과 미워함과, 모든 정신 작용이 온통 한데 (모이고 한데) 녹고 한데 뭉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비겨 말하면 이 모든 정신 작용을 한 솥에 집어넣고 거기다가 맑은 물을 두고 장작불을 때어 가며 그 솥에 있는 것을 홰홰 뒤저어서 온통 녹고 풀어지고 섞여서, 엿과 같이 죽과 같이 된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때의 형식의 정신 작용은 좋게 말하면 가장 잘 조화한 것이요, 좋지 않게 말하면 가장 혼돈한 상태러라. 엷은 구름 속에 가리워진 달빛이 산과 들을 변하여 꿈과 같이 몽롱하게 만든 모양으로, 그 달빛이 형식의 마음에 비치어 그 마음을 녹이고 물들여 꿈과 같이 몽롱하게 만들어 놓았다. 형식의 눈은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게 반작반작하고 형식의 머리는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게 흐물흐물한다. 형식의 몸은 차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고 형식의 귀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대로 듣는다. 형식은 특별히 무엇을 생각하려고도 아니하고, 눈과 귀는 특별히 무엇을 보고 들으려고도 아니한다. 형식의 귀에는 차의 가는 소리도 들리거니와 지구의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고 무한히 먼 공중에서 별과 별이 마주치는 소리와 무한히 작은 에틸의 분자의 흐르는 소리도 듣는다. 메와 들에 풀과 나무가 밤 동안에 자라노라고 바삭바삭 하는 소리와, 자기의 몸에 피 돌아가는 것과, 그 피를 받아 즐거워하는 세포들의 소곤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그의 정신은 지금 천지가 창조되던 혼돈한 상태에 있고 또 천지가 노쇠하여서 없어지는 혼돈한 상태에 있다. 그는 하느님이 장차 빛을 만들고 별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려고 고개를 기울이고,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는 양을 본다. 그러고 하느님이 모든 결심을 다 하고 나서 팔을 걷고 천지에 만물을 만들기 시작하는 양을 본다. 하느님이 빛을 만들고 어두움을 만들고 풀과 나무와 새와 짐승을 만들고 기뻐서 빙그레 웃는 양을 본다. 또 하느님이 흙을 파고 물을 길어다가 두 발로 잘 반죽하여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그 사람의 코에다 김을 불어넣으매, 그 흙으로 만든 사람이 목숨이 생기고 피가 돌고 소리를 내어 노래하는 양이 보인다. 그러고 처음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한 흙덩이다가 그것이 숨을 쉬고 소리를 하고 또 그 몸에 피가 돌게 되는 것을 보니 그것이 곧 자기인 듯하다. 이에 형식은 빙긋이 웃는다. 옳다, 자기는 목숨 없는 흙덩이였었다. 자기는 숨도 쉬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노래도 못 하던 흙덩어리였었다. 자기는 자기의 주위에 있는 만물을 보지도 못하였었고 거기서 나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였었다. 설혹, 만물의 빛이 자기의 눈에 들어오고 소리가 자기의 귀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는 오직 에틸의 물결에 지나지 못하였었다. 자기는 그 빛과 그 소리에서 아무 기쁨이나 슬픔이나 아무 뜻도 찾아낼 줄을 몰랐었다. 지금까지 혹 자기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마치 고무로 만든 인형(人形)의 배를 꼭 누르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과 같았었다. 그러므로 그 웃음과 울음은 결코 자기의 마음에서 스스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요, 전혀 타동적(他動的)이었었다.
자기가 지금껏 '옳다' '그르다' '슬프다' '기쁘다' 하여 온 것은 결코 자기의 지의 판단(知의 判斷)과 정의 감동(情의 感動)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온전히 전습(傳襲)을 따라, 사회의 습관(社會의 習慣)을 따라 하여 온 것이었다. 예로부터 옳다 하니 자기도 옳다 하였고, 남들이 좋다 하니 자기도 좋다 하였다. 다만 그뿐이로다. 그러나 예로부터 옳다 한 것이 자기에게 무슨 힘이 있으며, 남들이 좋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내게는 내 지(知)가 있고 내 의지(意志)가 있다. 내 지와 내 의지에 비추어 보아 '옳다'든가, '좋다'든가, 기쁘고 슬프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면 내게 대하여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내가 옳다 하던 것도 예로부터 그르다 하므로, 또는 남들이 옳지 않다 하므로 더 생각하지도 아니하여 보고 그것을 내어 버렸다. 이것이 잘못이로다. 나는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린 것이로다.
자기는 이제야 자기의 생명을 깨달았다. 자기가 있는 줄을 깨달았다.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있고 또 북극성은 결코 백랑성(白狼星)도 아니요 노인성(老人星)도 아니요, 오직 북극성인 듯이, 따라서 북극성은 크기로나 빛으로나 위치(位置)로나 성분(成分)으로나, 역사(歷史)로나 우주(宇宙)에 대한 사명(使命)으로나, 결코 백랑성이나 노인성과 같지 아니하고, 북극성 자신의 특징(特徵)이 있음과 같이, 자기도 있고 또 자기는 다른 아무러한 사람과도 꼭 같지 아니한 지와 의지와 위치와 사명과 색채(色彩)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형식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깨달았다.
형식은 웃으며 차창으로 내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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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지금 신막 남천역을 지나 경의 철도 중에 제일 산이 많은 옛날 금천 큰고개 근방으로 달아난다. 초생달은 벌써 넘어가고 창 밖은 캄캄하다. 달빛의 없는 것이 도리어 산들의 모양을 보기에는 편하다. 하늘과 산과의 경계는 굵은 붓으로 되는 대로 구불구불하게 그린 곡선(曲線) 모양으로 아주 분명하게 보인다. 왈칵왈칵 하는 찻바퀴 소리 사이로 산 강물이 조약돌 많은 여울로 굴러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기관차 굴뚝으로 나오는 불빛에 조고마한 산골짜기에 초가집 두어 개가 번적 보이고 혹 오랜 가물에 얼마 아니 되는 물이 가기 싫은 듯이 흘러가는 산강의 한 토막도 보인다. 차가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에 저편 컴컴한 속에 조고마한 불빛이 반작반작한다. 그 불빛이 차가 달아남을 따라 깜박깜박 있다가 없다가 함은 아마 잎이 무성한 나무에 가리워짐인 듯, 그 불은 꽤 오랫동안 형식의 차창에서 보인다. 형식은 물끄러미 그 불을 본다. 저 불 밑에는 누가 앉아서 무엇을 하는고. 가난한 어머니가 아이들을 잠들여 놓고 혼자 일어나 지아비와 아이들의 누더기를 깁는가. 잘 보이지 아니하는 눈으로 바늘구멍을 찾지 못하여 연방 불을 돋우고 눈을 비비는가. 그러다가 '아아 늙었구나!' 하고 깁던 누더기에 굵은 눈물을 떨구는가. 그때에 아랫목에서 자던 앓는 어린아이가 꿈에 놀라서 우는 것을 껴안고 먹은 것이 없어서 나지도 아니하는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또는 앓는 외아들을 가운데 놓고 늙은 내외가 자리 위에 서서 번갈아 아들의 몸을 만지고 번갈아 울고 위로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느님 내려다봅소서'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형식은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자기 부모를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아직 젊었으나 아버지는 오십이 넘었으므로, 자기가 조곰이라도 병이 나면 그 병이 낫기까지 목욕재계하고 자기의 곁에서 밤을 새우던 것과, 자기가 혹 눈을 뜨면 아버지는 자기의 눈을 보고 그 아들이 눈을 뜨는 것이 무한히 기쁜 듯이 빙그레 웃으며 자기의 손을 잡던 것과, 아직 삼십이 다 못 된 자기의 어머니는 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앉은 대로 졸던 것이 생각이 난다. 형식은 잠깐 추연하다가 다시 그 불을 본다. 천지가 온통 캄캄한 중에 오직 불 하나가 반작반작하는 것과, 세상이 다 잠을 다 깊이 들었을 때에 그 불 밑에 혼자 깨어 있는 사람을 생각하매 형식은 그것이 마치 자기의 신세인 듯하였다. 차가 또 어떤 산모퉁이를 돌아서매 그 불은 그만 아니 보이게 되고 말았다. 형식은 서운한 듯이 머리를 창으로 끌어들였다. 차실에 같이 탄 사람들은 다 깊이 잠이 들었다. 바로 자기의 맞은 편에 누운 어떤 노동자 같은 소년이 추운 듯이 허리를 구부린다. 형식은 얼른 차창을 닫고 자기가 깔고 앉았던 담요로 그 소년을 덮어 주었다. 이 소년은 아마 어느 금광으로 가는지 흙 묻은 무명 고의를 입고 수건을 말아서 머리를 동였다. 머리는 언제 빗었는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뭉쳐지고 귀밑과 목에는 오래 묵은 때가 껴 있다. 역시 조고마한 흙물 묻은 보퉁이로 베개를 삼았는데 그 보퉁이를 묶은 종이로 꼰 노끈이 걸상 밑으로 늘어졌다. 형식은 그 노끈을 집어 보퉁이 밑에 끼웠다. 소년의 굵은 베로 만든 조끼 호주머니에는 국수표 궐련갑(菊水票卷煙匣)이 조곰 보이고 그 속에는 물부리가 넓적하게 된 궐련이 서너 개나 보인다. '아끼는 궐련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기의 '조일(朝日)'을 만져 보았다. 그러고 담배를 붙일 생각이 나서 한 대를 내었다. 형식은 그 궐련에 불을 붙여 길게 빨았다. 그때에 담배 맛은 특별하였다.
형식은 다시 차실을 돌아보았다. 어떤 일본 부인이 잠을 깨어 정신 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두어 번 머리와 목을 만지며 무엇을 찾는 듯이 기웃기웃하더니 도로 신현대(信玄袋)에 엎디어 잠이 든다. 형식도 내일에 곤할 것을 생각하고 한참 자리라 하여 수건을 창문턱에 접어 놓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형식의 정신은 더욱 쇄락할 뿐이요, 암만하여도 잠이 들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그래도 잠이 들까 하고 눈을 감은 대로 찻바퀴 소리를 세었다. 형식의 정신은 마치 풍랑이 침식한 바다 모양으로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형식의 머리에는 영채와 선형과 노파와 배학감과 이희경과 또 칠성문 밖에서 보던 노인과 박선생의 무덤과 계향과…… 이러한 것들이 순서도 없이 번쩍번쩍 떠나온다. 형식은 눈을 감은 채로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 사람들은 혹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혹 성난 듯이 입을 내어밀고, 눈을 흘깃흘깃하기도 하고, 혹 나무로 새겨 놓은 듯이 시치미떼고 나서기도 한다. 더구나 영채의 모양이 오래 보이고 또 자주 보인다. 형식은 곁에 놓인 가방을 생각하였다. 그 속에 있는 영채의 편지와 지환과 칼이 눈에 보인다. 형식은 오싹 소름이 끼치며 번쩍 눈을 떴다. 아― 내가 잘못함이 아닌가. 내가 너무 무정함이 아닌가. 내가 좀더 오래 영채의 거처를 찾아야 옳을 것이 아닌가. 설사, 영채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시체라도 찾아보아야 할 것이 아니던가. 그러고 대동강가에 서서 뜨거운 눈물이라도 오래 흘려야 할 것이 아니던가. 영채는 나를 생각하고 몸을 죽였다. 그런데 나는 영채를 위하여 눈물도 흘리지 않아. 아― 내가 무정하구나, 내가 사람이 아니로구나 하였다. 남대문을 향하고 달아나는 차를 거꾸로 세워 도로 평양으로 내려가고 싶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마음은 평양으로 끌리면서 몸은 남대문에 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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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숙소에 돌아와 조반을 먹고는 곧 학교에 갔다. 노파가,
"얼굴에 몹시 곤한 모양이 보이는데, 오늘은 하루 쉬시지요."
하는 말도 듣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지나간 사흘 동안에 너무 정신을 쓰고 또 잠을 잘 자지 못하여 얼굴에 졸리는 빛이 보이도록 몸이 피곤하였다. 그러나 오늘 아침 첫 시간에는 사년급 영어가 있다. 어저께도 쉬고 오늘도 쉬면 연하여 이틀을 쉬게 된다. 형식은 이것이 괴로웠다. 형식은 병이 있기 전에는 아직도 학교 시간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감기가 들어 여간 두통이 나고 열이 있더라도 억지로 학교에 출석하였다. 그러고 돌아와서 병이 더치더라도 형식은 '내 의무를 위함'이라 하여 스스로 만족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한 시간을 편안히 쉬기 위하여 백여 명 청년으로 하여금 각각 한 시간을 허송하게 하는 것을 큰 죄악으로 안다. 그러나 형식이가 이처럼 열심으로 학교에 가는 데는 의무라는 생각 밖에 더 큰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이렇다.
형식은 외롭게 자라났다. 형식은 부모의 사랑이라든가, 형제 자매의 사랑도 모르고 자라났다. 그뿐더러 형식에게는 사랑하는 동무도 없었다. 나이 같고 성미가 서로 맞는 동무의 사랑은 여간 형제 자매의 사랑에 지지 않는 것이라. 그러나 형식은 일정한 처소에 있지 아니하여 그러한 동무를 사귈 기회가 없었고 또 불쌍하게 돌아다닐 때에는 동무 될 만한 아이들이 형식을 천대하여 동무로 여겨 주지를 아니하였다. 형식이 열두 살 적에 그 족제(族弟) 하나를 심히 사랑한 일이 있었다. 족제는 형식과 동갑이요, 이전에는 글도 같이 읽었었다. 한번은 형식이가 그 족제의 집에서 놀다가 밤이 깊었다. 그때에 형식은 그 족제와 한자리에서 자게 된 것을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숙소 되는 당숙의 집에 갈 수도 있건마는 '어두워서 못 가겠다'고 떼를 쓰고 같이 자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족제는, '네 옷에는 이가 많더라' 하고 크게 소리를 쳐 온 집안 사람이 다 소리를 듣게 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섧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나 어찌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집에서 뛰어나온 일이 있었다. 과연 형식의 옷과 머리에는 이가 많이 끓었었다. 이러하므로 어린 형식은 동무의 사랑조차 맛보지 못하였다. 그 후 박진사의 집에 와서는 자기보다 십여 세 위 되는 사람과만 같이 있었고, 경성에 올라와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형식이가 동무의 재미를 보려면 볼 수 있던 때는 동경 유학하는 동안이었다. 동경에는 자기와 연갑 되는 소년이 많았었다. 그래서 동무에 목마른 형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네와 친하려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어려서부터 세상에 부대껴 왔으므로 어느덧 소년의 어여쁜 빛이 스러지고 얼굴에나 마음에나 노성한 어른의 빛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기와 연갑 되는 소년들과 친하려 하여도 그 소년들이 마음을 허하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형식은 그 소년들에게 비하여 학문의 정도에 차이가 많았으므로 그 소년들은 형식을 선배 모양으로 공경하는 생각은 가지되, 어깨를 겯고 손을 잡고 동무가 되려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그 소년들은 형식을 대하면 가댁질하던 것도 그치고 고개를 숙이며,
"안녕합시오."
하였다. 형식도 하릴없이,
"안녕합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한번은 형식이가 자기보다 두어 살 아래 되는 소년을 붙들고,
"여보, 나하고 동무가 되십시다. 너, 나 하고 지내입시다."
하였다. 그 소년은 농담인 줄 알고,
"녜."
하면서 모자를 벗고 경례하고 달아났다. 그 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소년들의 동무가 되려 하였으나 소년들은 헤헤 웃고는 경례를 하고 달아났다. 마침내 형식은 소년의 동무가 되어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고 지금까지 평생 자기보다 십여 년이나 어른 되는 이와 친구가 되어 왔다. 형식은 일찍 이렇게 자탄하였다.
'나는 소년시대를 건너뛰었어!' 소년시대를 보지 못한 형식의 마음은 과연 적막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나는 인생의 한 권리를 빼앗겼다' 하였고, 또 '그러고 그 권리는 인생에게 가장 크고 즐거운 권리라' 한다. 이러한 말을 할 때마다 형식은 적막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스물한 살에 경성학교에 교사가 되어 여러 소년들과 가까이 접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소년들이 '선생님' 하고 슬슬 피할 때에는 형식은 여전히 적막한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 어느 중학교에 입학을 하여 저 소년들과 같이 놀아 보았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였다.
형식은 학생들을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가 학생들에 대한 일언일동은 어느 것이나 뜨거운 사랑에서 아니 나옴이 없었다. 형식은 어린 학생들의 코도 씻어 주고 구두끈과 옷고름도 매어 주었다. 어떤 교사들은 형식이 이렇게 함을 비웃기도 하고, 심지어 형식이가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것을 좋지 못한 뜻으로까지 해석하였다. 더구나 형식이가 이희경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은 필연 희경의 얼굴을 탐내어 그러하는 것이라 하며, 어떤 자는 형식과 희경의 더러운 관계를 확실히 아노라고 장담하는 자도 있었다. 그래서 형식도 어떤 친구에게 충고를 받은 일도 있었고, 희경도 동창들 사이에 좋지 못한 조롱을 받은 일도 있으며, 희경이가 우등을 하는 것은 형식의 작간이라고 험구를 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은 여전히 학생들을 사랑하였다. 만일 학생들 중에 사람의 피를 마셔야 살아나리라 하는 병인이 있다 하면 형식은 달게 자기의 동맥을 끊으리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 중에도 이희경 같은 몇 사람에게 대하여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대하여 가지는 듯한 굉장히 뜨거운 사랑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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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좀 곁가지로 들어가지마는, 이 기회를 타서 형식의 지나간 동안 교사생활을 좀 말할 필요가 있다. 사 년간 형식의 경성학교 교사 생활은 일언이폐지하면 사랑과 고민(苦悶)의 생활(生活)이었다.
형식이 이십 년간 갇히고 주렸던 사랑은 교사가 되어 여러 소년을 접하게 되며(되매), 마치 눈에 가리워졌던 풀의 움이 봄바람을 타서 쑥 나오는 모양으로 나오기를 시작하였다. 부모의 사랑이나 형제의 사랑이나 동무의 사랑도 맛보지 못하고, 하물며 여자에게 대한 사랑은 꿈도 꾸어 보지 못한 형식의 사랑은 사리에 밀려들어 오는 밀물 모양으로 경성학교의 사백 명 어린 학생을 덮었다. 그가 일찍 일기(日記)에, '너희는 나의 부모요, 형제요, 자매요, 아내요, 동무요, 아들이로다. 나의 사랑을 나의 전 정신(全精神)을 점령한 것은 너희로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가 다 마르도록, 이 살이 다 깎이도록, 이 뼈가 다 휘도록 일하고 사랑하마' 한 구절은 형식의 거짓없는 정을 말한 것이다. 형식은 아침마다 학교 문을 들어서서 학생들이 노니는 양을 보면 기쁘고, 시간마다 강단에 서서 학생들이 자기를 보고 자기의 말을 듣는 양을 보면 기쁘고, 밤에 혼자 자리에 누워 학생들의 놀던 모양과 배우던 모양을 생각하면 기뻤다. 그래서 어찌하면 하나라도 학생들을 더 가르쳐 줄까, 어찌하면 그네의 행실을 아름답게 만들고, 어찌하면 그네의 정신을 깨우쳐 줄까 하여 자기가 아는 바 모든 것을 말하고, 할 수 있는 바 모든 방법을 다하였다. 그래서 학생들이 토론회를 할 때에 자기의 가르친 말을 끌어 쓴다든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자기가 시켜 준 어느 방법을 쓰는 것을 보면 형식은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이렇게 지나간 사 년간의 형식의 경력과 시간의 대부분은 전혀 학생들을 위하여 소비되었다. 그 때문에 형식은 얼마큼 신경도 쇠약되고 몸도 약하게 되었다. 자기도 그런 줄을 안다. 그러나 순전히 자기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사년급 학생들을 대할 때에는 마치 봄부터 여름내 땀을 흘리고 고생하던 농부가 가을에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논과 밭을 보고 깨닫는 듯하는 기쁨과 만족을 깨닫는다. 형식(의 생각)에 사년급 학생의 지식의 대부분과 아름다운 생각과 말과 행실의 대부분은 다 자기의 정성으로 힘쓴 결과려니 한다. 과연 형식은 조고마한 기회라도 놓치지 아니하고 자기의 가진 지식과 경험과 감상과 재미있는 이야기까지도 들려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사년급 학생을 대하여도 별로 할 말이 없으리만큼 자기가 가진 바를 온통 나눠 주었다. 형식은 교과서를 가르치고 남는 시간을 반드시 새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로 채웠다. 형식이가 독서를 하는 이유의 하나는 이 학생들에게 알려 주려는 욕심이었다. 그러고 학생들도 형식의 말을 재미있게 들었다.
"또 더 해주셔요."
하고 형식에게 청하기까지도 하였다. 이렇게 학생들이 청하는 것을 보고는 형식은 더욱 만족하였다. 무론 여러 학생 중에는 형식의 하는 이야기를 귀찮게 여기는 자도 있고, 형식이 한창 정성으로 이야기할 때에 일부러 한눈도 팔며 공책에 붓장난을 하는 자도 있었으나 형식의 보기에 대부분은 자기의 말을 흥미있게 듣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형식에게서 받은 감화와 얻은 지식과 쾌락도 적지 아니하였다. 여러 교사들 중에 학생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기로는 남들도 형식이라고 허하고 형식 자신도 그렇게 확신하였다.
그러나 교사들은 형식의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다지 좋은 줄로도 생각지 아니하고 어떤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만한 마음을 생기게 하느니, 학생들에게 좋지 못한 소설을 읽어 주어 학생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느니 하고 비방도 한다.
이러한 비방도 아주 까닭이 없음은 아니라. 형식은 항상 학생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자유를 주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학교 당국도 될 수 있는 대로는 학생의 의사를 존중하기를 주장한다. 더구나 처음 형식이가 이 학교에 교사로 왔을 때에는 교장과 학감이 극히 전제를 숭상하는 인물이 되어서 학생들은 선생에게 대하여 감히 한마디도 자기네의 의사를 표하지 못하였고, 혹 다만 한마디라도 학교의 명령이나 교사의 말에 대하여 비평을 한다든가 반대를 하는 자가 있으면 학생 일동의 앞에서 엄혹하게 책망을 한 후에 혹은 정학도 시키고 심하면 출학까지도 하였었다. 그래서 자유사상을 품은 형식은 여러 번 의견도 충돌하였었다. 형식은 학생들 앞에서, '학도에 대하여 불만한 일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옳소. 정당한 일을 학교가 부정당하게 여길 때에는 반항을 하여도 옳소.' 이러한 위험한 말도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배학감이, 이번 학생의 소동도 형식의 충동이라 함이 아주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라.
또 형식은 삼사년급 학생들에게 은연중 문학을 장려하였다. 그래서 학생 중에는 혹 소설도 보며, 철학에 관한 서적도 보며, 잡지도 보는 자가 생기고, 그 중에는 가장 문학자인 체, 사상가인 체, 철인(哲人)인 체하여 무슨 큰 생각이나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학생도 몇 사람이 생기고, 또 그러한 학생들도 다른 교사들을 아주 정신생활(精神生活)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주 유치한 사람들이라고 비웃기도 한다. 형식의 보기에 이는 학생들의 진보함이라 기쁜 일이언마는 다른 교사들 보기에 이는 학생들이 타락함이요 주제넘게 됨이었다. 교사들뿐 아니라 학생 중에도 이희경 일파가 글자 작은 어려운 책을 들고 다니는 것과 그달에 발행한 잡지를 들고 다니는 것을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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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론 이희경 일파가 그 어려운 책을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열 페이지나 스무 페이지를 읽은 뒤에 그 속에 있는 뜻을 계통적으로 깨닫지는 못하였다. 다만 여기저기 한 구절씩 혹은 두어 줄씩 자기네가 깨달을 만한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써 만족하여 하였다. 그네는 하루에 알지는 못하면서도 여러 페이지 읽기를 자랑으로 알고 형식에게 들은 대로 서양 문학자, 철학자, 종교가 같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네의 저서(著書)의 이름을 외우기로 (유일한) 영광을 삼았다. 그러고 그네가 보는 책에서 '인생이란 무엇이뇨'라든가 '우주란 무엇이뇨' 하는 구절을 외워 토론회나 친구간에 하는 회화에 인용하였다. 혹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의 격언을 인용하기도 하고 혹 그것을 영어대로 통으로 암기하여 인용하기도 하였다. 인용하는 자기도 그 뜻을 잘 모르면서도 그것을 인용하면 자기의 말하려는 바가 잘 발표된 듯하였고, 그것을 듣는 다른 학생들도 '흥' 하고 코웃음을 하면서도 그네의 지식이 많음을 속으로는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자기네도 몰래 낡은 잡지를 사다가 보기도 하고, 또는 이희경 일파에게 들은 말을 가만히 기억하였다가 다른 데 가서 자랑삼아 써보기도 하였다.
이희경은 꽤 이해력이 있었다. 형식의 생각에 희경은 가장 사상이 익었는 듯하고 희경 자신도 (자기는) 제법 형식의 하는 말을 깨닫는 줄로 믿었다. 그래서 형식과 희경이 같이 앉았을 때에는 마치 뜻맞는 사상가들이 오래간만에 만난 모양으로 인생 문제와 우주 문제가 뒤를 대어 흘러나왔다. 그러나 형식은 아직도 희경에게 말할 수 없는 고상한 사상을 많이 가진 듯이 생각하였다. 그는 사실이었다. 형식이가 한참이나 자기의 사상을 말하다가 희경의 멍하니 앉았는 것을 보고는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하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끊었다. 그러할 때에는 희경은 형식에게 모욕을 당한 듯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무론 희경은 형식이가 자기보다 지식이 많고 사상이 깊은 줄을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보다 여러 십 리 앞섰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래서 형식이가 자기를 '네야 알겠니' 하는 듯이 대접할 때에 형식에게 대하여 불쾌하고 반항하는 생각이 났다. 희경이가 이년급까지는 형식은 자기보다 수천 리나 앞선 사람인 듯이 보였다. 형식의 머릿속에는 없는 것이 없고, 형식의 입으로서 나오는 말은 모두 다 깊은 뜻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형식은 조선에 제일가는 지식도 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삼년급이 반쯤 지나간 뒤로부터는 형식도 자기와 얼마 다르지 아니한 사람과 같이 보았다. 형식의 지식은 그렇게 많지 못하고 형식의 생각하는 바는 자기도 생각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형식이가 강단에서 하는 말도 (별로) 감복할 만한 말이 아니요, 자기도 강단에 올라서면 그만한 말은 넉넉히 할 수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정작 토론회에서 말을 하여 보면 암만하여도 형식만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기가 형식만 못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형식은 여러 해 교사로 있어 말하는 법이 익은 것이지 자기가 그만큼 말을 연습하면 형식보다 나으리라 하였다. 희경의 생각에 삼 년만 지나면 자기는 생각으로나 지식으로나 말로나 모든 것으로 형식보다 나으리라 한다. 사년급이 되어 독본 사권을 배우게 되매 형식도 혹 모른다는 글자가 있고 문법관계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되매 희경은 영어로도 형식을 그렇게 우러러보지 아니하게 되었다. 지금은 희경의 보기에 형식은 자기보다 두어 걸음밖에 더 앞서지 못한 사람같이 보이고 장래에는 자기가 형식보다 열 배 스무 배나 높아질 것같이 보였다. 희경은 중학교 교사를 우습게 보게 되었다. 다른 교사를 아무것도 모르는 껍데기로 본 지는 벌써 오래거니와 그 중에 가장 무엇을 아는 듯하던 형식도 자세히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자기는 중학교에 교사 같은 직업을 가질 사람이 아니요, 장차는 큰 학자가 별로 되거나 (박사가 되거나) 중학교에 온다 하더라도 교장이나 주면 하리라 한다.
교사들은 대개 될 대로 다 된 작은 인물같이 보이고 자기는 무한히 크게 될 가능성(可能性)이 있는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희경은 형식도 육칠 년 전에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줄을 모른다. 희경이 보기에 형식은 본래 그릇이 작아서 높이 뛸 줄을 모르고, 사 년이 넘도록 중학교 교사로 있고, 또 일생을 중학교 교사로 지내는 것같이 보여서 일변 형식을 경멸하는 생각도 나고 일변 불쌍히도 여긴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희경뿐이 아니다. 희경과 같이 어려운 책을 읽으려 하는 자는 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애초부터 형식을 존경하지도 아니하였고, 다만 끔찍이 친절하게 굴려 하는 젊은 교사라 할 뿐이었다. 그뿐더러 그들은 형식이 이희경 일파를 편애하는 것과 특별히 희경을 사랑하는 것을 비웃고 얼마큼 형식을 싫어하는 생각까지 있었다.
학생들은 아이로부터 어른이 되었다. 일년급부터 사년급이 되었다. 아무 지식도 없던 것들이 보통 지식을 얻게 되었다. 학생들 생각에 자기는 지나간 사 년간에 진보도 하였다. 자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일년급 적이나 사년급 되는 지금이나 학생들의 보기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였다. 형식은 그 가진 바 지식을 온통은 아니라도 거의 다 자기네에게 빼앗기고 이제는 자기네보다 높다고 할 자격이 없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네가 형식에게 대한 표면의 행동은 전이나 다름이 없어도 마음으로는 형식을 자기네와 동등 또는 자기네 이하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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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항상 입버릇 모양으로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였다. 자기는 진실로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한 것이언마는, 학생들은 이전에는 그것이 다만 형식의 겸사에 지나지 못하거니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학생들은 그 한탄이 참인 줄로 안다. 그래서 형식의 하는 말에도 전과 같이 신용을 주지 아니하게 되었다. '나는 지식과 수양이 부족하외다' 하는 말을 형식이가 자기네를 두려워하여 사죄하는 말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형식은 그러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설혹 자기의 지식과 수양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아직은 희경 일파에게 떨어지기를 무서워할 지경은 아니었다. 형식의 보기에 희경 일파는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그네가 자기를 따라오려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달음질을 하더라도 여간 육칠 년 내에 따라잡힐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진보한 사상을 가진 선각자로 자신한다. 그래서 겸손한 듯한 그의 속에는 조선 사회에 대한 자랑과 교만이 있다. 그는 서양 철학도 보았고 서양 문학도 보았다. 그는 루소의『참회록(懺悔錄)』과『에밀』을 보았고, 셰익스피어의『햄릿』과 괴테의『파우스트』와 크로포트킨의『면포(麵匏)의 약탈(掠奪)』을 보았다. 그는 신간 잡지에 나는 정치론과 문학평론(文學評論)을 보았고 일본 잡지의 현상소설에 상도 한번 탔다. 그는 타고르의 이름을 알고 엘렌 케이 여사(女史)의 전기(傳記)를 보았다. 그러고 우주(宇宙)도 생각하여 보았고 인생(人生)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에게는 자기의 인생관(人生觀)이 있고, 우주관(宇宙觀), 종교관(宗敎觀), 예술관(藝術觀)이 있고 교육에 대하여서도 일가견(一家見)이 있는 줄로 자신한다. 그가 만원 된 차를 타고 눈앞에 욱적욱적하는 사람을 볼 때에 나는 저들의 모르는 말을 많이 알고, 모르는 사상을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고는 일종 자랑의 기쁨을 깨닫는 동시에 '언제나 저들을 나만큼이나마 가르치는가' (하는) 선각자의 책임을 깨닫고 또 이천만이나 되는 사람 중에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뜻을 이해(理解)하는 자가 몇 사람이 없구나 하는 선각자(先覺者)의 적막(寂寞)과 비애(悲哀)를 깨닫는다. 그러고 자기의 하는 말을 알아들을 만한 친구를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형식은 열 손가락을 다 꼽지 못한다. 그러고 이 열도 못 되는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 신문명(新文明)을 이해하는 선각자요, 따라서 온 조선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어 낼 자라 한다. 그러고 지나간 사 년간에 자기가 희경 등 사오 인을 자기와 같은 계급에 끌어낸 것을 더할 수 없는 만족으로 여긴다. 무론 자기보다는 어린아이로되 다른 사람들에게 비기면 어른이요, 선각자라 한다. 조선 안에 학교도 많고 학생도 많되 희경 일파만한 학생은 없다 하며, 따라서 교육자 중에 자기가 홀로 신문명을 이해하고 조선 전도를 통견(洞見)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생각한다. 서울 안에 수백 명 되는 교사는 모두 다 조선인 교육의 의의(意義)를 모르고 기계 모양으로 산술을 가르치고, 일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인 교육계에 대하여 항상 불만한 생각을 품는다. 그가 경성교육회라는 것을 설립할 양으로 두어 달을 두고 분주한 것도 이러한 기관을 이용하여 자기의 교육에 대한 이상(理想)을 선전(宣傳)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다른 교사들은 형식을 그처럼 지식과 사상이 높은 자라고 인정하지 아니하였고, 어떤 사람은 형식을 자기네와 평등이라고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과연 형식의 하는 말에나 일에는 별로 뛰어난 것이 없었다. 형식이가 큰 진리인 듯이 열심으로 하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는 별로 감동을 주는 바가 없었다. 다만 형식의 특색은 영어를 많이 섞고 서양 유명한 사람의 이름과 말을 많이 인용하여 무슨 뜻인지 잘 알지도 못할 말을 길게 함이었다. 형식의 연설이나 글은 서양 글을 직역한 것 같았다. 형식의 말을 듣건대 이러한 말이나 글이 아니고는 깊고 자세한 사상을 발표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좇지 아니함은 그네가 자기의 사상을 깨달을 힘이 없음이라 하여 혼자 분개하여 한다. 공평하게 말하면 형식은 다른 교사들보다 좀더 진보한 점이 있고, 또 자기가 믿는 바를 어디까지든지 실행하려 하는 정성은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마음을 보는 법이 어두웠다. 그의 생각에 세상 사람의 마음은 다 자기의 마음과 같아서 자기가 좋게 생각하는 바는 깨닫기만 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좋게 보이려니 한다. 일언이폐지하면 그는 주관적(主觀的)이요, 이상(理想)의 인(人)이요, 실제(實際)의 인(人)은 아니외다.
그의 지나간 사 년간의 교사생활은 실패의 생활이었다. 그는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출하였으나 별로 채용된 것이 없었고, 학생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가르치고 시키는 바가 있었으나 별로 환영되지도 아니하였고, 무론 실행된 것은 별로 없었다. 형식은 이것을 보고 분개한 적도 있고 비관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자기가 부족함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이 아직 자기의 높은 사상을 깨닫지 못함이라 하여 스스로 선각자의 설움이라 일컫고 혼자 안심하였다. 그러나 남들이 형식의 의견을 채용치 아니함은 자기네가 그것을 깨닫지 못함이라고는 하지 아니하였다. 그네의 보기에 형식의 의견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것이요, 또 설사 실행한다 하더라도 효력이 없을 듯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도 차차 형식의 지식이 (꽤) 많음과 어려운 책을 많이 보고 생각이 (꽤) 깊은 줄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농담삼아, 칭찬삼아 형식을 '사상가'라고도 하고, '철학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별명에는 '너는 생각이나 하여라. 실지에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 하는 조롱의 뜻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별명을 듣는 형식은, '너희는 사상가가 무엇이며 철학자가 무엇인지를 아느냐' 하고 비웃으면서도 그러한 별명이 아주 듣기 싫지는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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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형식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무릎 위에 놓인 눈물에 젖은 영채의 편지를 눈이 가는 대로 여기저기 다시 보았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는 그 편지의 글자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듯하였다. 형식은 편지를 둘둘 말아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편지와 동봉하였던 조고마한 봉투를 떼었다. 우선과 노파의 눈물 흐르는 눈은 다시 형식의 손에 있는 조고마한 봉투로 모였다. 형식은 그 봉투 속에 무슨 무거운 것이 있음을 보고, 봉투를 거꾸로 들어 자기의 무릎 위에 쏟았다. 빨간 명주 헝겊으로 싼 길쭉한 것이 나온다. 형식은 실로 묶은 것을 끊고 그 명주 헝겊을 풀었다. 명주 헝겊 속에서 여러 해 묵은 듯한 장지 뭉텅이가 나온다. 형식은 그 뭉텅이를 들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그 장지 뭉텅이를 폈다. 형식은
"응!"
하고 놀라는 소리를 발한다. 우선과 노파의 눈은 그 뭉텅이로부터 형식의 얼굴로 옮았다. 그러고 형식의 뚝 부릅뜬 눈에는 새 눈물이 고임을 보았다. 우선과 노파의 눈은 다시 형식의 떨리는 손에 든 장지 조각으로 옮았다. 그 장지 조각에는 ㄱㄴㄷ과 가나다를 썼다. 아이들이 처음 언문을 배울 때에 써 가지는 것이었다. 그 글씨는 어리더라. 형식은 체면도 보지 아니하고 그 장지 조각에 이마를 비비며 소리를 내어 운다. 우선과 노파는 웬일인지 모르고 형식의 들먹들먹하는 등만 본다. 형식은 안타까운 듯이 그 종이에다 얼굴을 부비며 더욱 우는 소리를 높인다. 우선도 눈에 새로 눈물이 돌면서도 '형식은 어린애로다' 하였다.
형식은 십여 년 전 생각을 한다. 형식이 처음 박진사의 집에 갔을 때에는 영채의 나이 여덟 살이었었다. 그때에 영채는『천자문(千字文)』과『동몽선습(童蒙先習)』과『계몽편(啓蒙篇)』과『무제시(無題詩)』를 읽었더라. 그러나 아직도 언문을 배우지 못하였더라. 한번은 박진사가 '국문을 배워야지' 하면서 좋은 장지에 가나다를 써주었다. 그러나 어린 영채는 밖에 가지고 나가 놀다가 어디서 그 종이를 잃어버렸다. 이에 영채는 아버지의 책망이 두려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서 그때 열세 살 된 형식에게 몰래 청하였다. 그때에는 아직 형식과 영채가 말을 하지 아니하던 때라,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반쯤 외면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저, 언문 써주셔요."
하였다. 이 말을 할 때의 영채의 얼굴과 태도는 형식의 눈에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참 어여쁜 계집애로다' 하고 형식도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녜, 내일 아침에 써드리지요."
하고 오 리(五里)나 되는 종이 장사 집에 몸소 가서 장지를 사다가―이 종이가 그 종이다―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넉 장이나 써버리고야 이것을 썼다. 그것을 써서 책 사이에 끼워 두고 '어서 아침이 왔으면'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 언문 써주셔요' 하고 모로 서서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 영채의 모양이 열세 살 되었던 형식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박혔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형식은 더욱 양치와 세수를 잘하고 두루마기를 방정히 입고 그 종이― 이 종이로다―를 접어 품에 품고 대문에 서서 영채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생각은 마치 사랑을 하는 남자가 사람 없는 곳에서 그 사랑하는 처녀를 기다리는 생각과 같았다. 이윽고 영채도 누가 보기를 꺼리는 듯이 사방을 돌아보며 가만가만 나오다가 형식의 곁에 와서는 너무 기쁜 듯이 얼굴이 빨개지며 형식의 허리를 꼭 쓸어안았다. 형식은 자기의 가슴에 치는 영채의 머리를 살작 만졌다. 지금 세수를 하였는지 머리에는 물이 묻었더라. 그러고는 품속에서 그 종이― 이 종이로다―를 내어 영채에게 주었다. 그 종이는 형식의 가슴의 체온(體溫)으로 따뜻하더라. 영채도 그 종이의 따뜻함을 깨달았는지 한 걸음 물러서서 가만히 형식의 눈을 보더니 낯이 빨개지며 뛰어들어갔다. '이것이 그 종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고개를 들어 다시금 그 종이와 글자를 보았다. 그 글자가 제가끔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안주에서 지내던 일과, 자기의 그 후에 지내던 일과, 영채의 이야기와 편지와 자기의 상상과로 본 영채의 일생이 번개 모양으로 형식의 머리로 지나간다. 형식은 한번 더 입술을 물며― 이것은 불식부지간에 영채에게 배운 것―그 종이를 끝까지 폈다. 그 끝에는 새로 쓴 글씨로,
"이것이 이 몸이 평생에 지니고 있던 선생의 기념이로소이다."
하였다. 우선과 노파도 이 글을 보고 형식의 우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그러고 우선은 그 종이를 형식의 손에서 당기어 한번 더 보았다. 노파도 우선과 함께 그 종이를 보았다. 형식은 다시 무릎 위에 있는 종이 뭉텅이를 풀었다. 그 속에서는 '황옥지환(黃玉指環)' 한 짝과 조고마한 칼 하나가 나온다. 그 칼날이 번적할 때에 세 사람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노파는 속으로 '저것이 이태 전에 김윤수의 아들 앞에서 뽑던 칼이로구나' 하였다. 형식은 그 칼을 집어 안과 밖을 보았다. 안 옆에 행서로, '일편심(一片心)'이라고 새겼다. 형식과 우선도 대개는 그 칼의 뜻을 짐작하였다. 형식은 다시 그 지환을 집었다. 노파는
"어째 한 짝만 있는고."
하였다. 형식은 그 지환에 아무것도 쓰지 아니하였음을 보고 지환을 쌌던 종이를 집었다. 그 종이에는 잘게 쓴 글씨로,
"이것은 평양 기생 계월화의 지환이로소이다. 계월화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으시려거든 아무러한 평양 사람에게나 물으소서. 월화가 이 몸에게 이 지환을 준 뜻은 썩어진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로소이다. 이 몸은 이제 힘껏 이 지환이 가르치는 바를 행하였나이다. 장차 이 지환을 대동강에서 원혼이 된 월화에게 돌려보내려니와 이 한 짝을 선생께 드림이 또한 무슨 뜻이 있는가 하나이다."
하고 아까 편지의 모양으로 연월일시 죄인 박영채 읍혈백배라 하였더라.
52
세 사람은 말이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제가끔 제 생각을 하였다. 한참이나 이러하다가 노파가 숨이 차서,
"여봅시오, 이 일을 어찌해요?"
하고 형식과 우선의 눈을 번갈아 본다. 노파의 일생에 남의 일을 위하여 이처럼 진정으로 슬퍼하고 걱정하고 마음이 괴로워하기는 처음이라. 노파는 어젯저녁에 진정으로 영채를 안고 울던 생각을 하였다. 그때에 영채가 생각하던 바와 같이 노파가 진정으로 남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영채의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따끈따끈하게 노파의 손등에 떨어질 때에, 또 영채가
"남들이 다 내 살을 뜯어먹으니 나도 내 살을 뜯어먹으렵니다."
하고 피 나는 입술을 더욱 꼭꼭 물어뜯을 때에 노파의 마음은 진실로 거북하였었다. 그때에 노파가 영채의 뺨에다 자기의 뺨을 대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 때에는 노파의 마음은 진실로 '참사람'의 마음이었었다. 그때에 노파가 마음속으로 영채를 향하여 합장 재배할 때에 노파의 영혼은 더러운 죄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이나 부처의 맑은 모양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고 자기가 이백 원에 사서 돈벌이하는 기계로 부리던 월향이라는 기생의 속에는 자기가 절하고 우러러볼 만한 무엇이 있음을 보았다. 그러고 명일부터는 영채를 자유의 몸을 만들고 자기도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영채와 자기와 정다운 모녀가 되어 서로 안고 서로 위로하며 즐겁게 깨끗하게 세상을 보내리라 하였다. 그러고 자리에 돌아와 벌써 코를 고는 '영감쟁이'를 볼 때에 '에그 더러운 짐승' 하고 옷을 입은 대로 저 윗목에서 혼자 누워 잤다. 그때에 '에그, 더러운 짐승'이라 함은 다만 '영감쟁이'의 몸뚱이가 더럽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 영채의 영혼과 자기의 영혼과 하느님과 부처를 본 눈으로 '영감쟁이'의 때묻은 사람을 볼 때에 자연히 구역이 난 것이라. 마치 더러운 집에서 생장한 사람이, 자기의 집이 더러운 줄을 모르다가도 한번 깨끗한 집을 본 뒤에는 자기의 집이 더러운 줄을 깨닫는 모양으로, 노파는 일생에 깨끗한 영혼과 참사람을 보지 못하다가 따끈따끈한 영채의 피에 오십여 년 죄악에 묻혀 자던 깨끗한 영혼이 깜짝 놀라 눈을 떠서, 백설과 같고 수정과 같은 영채의 영혼을 보고, 그를 보던 눈으로 자기의 영혼을 본 것이라. 그러다가 영감쟁이의 '사람'을 보니 비로소 더러운 줄을 깨달은 것이라. 그러나 아침에 영채가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들어오는 양을 보매 노파의 영혼의 눈은 다시 감기어, 어젯저녁에 보던 영채의 '속사람'을 보지 못하고 다만 영채의 육체만 보았을 뿐이다. 그때에 어젯저녁의 기억은 마치 수십 년 전에 지나간 일과 같았다. 그러므로 영채가 '생각하여 보니까 우스운 일이야요' 할 때에 노파는 옳다구나 하고 '잘 생각하였다. 과연 그러하니라' 하고 다시 영채를 돈벌이하는 기계로 삼으려 하는 욕심이 났었다. 그래서 영채를 평양에 보낸 후로부터 지금 영채의 편지를 볼 때까지 노파는 영채로 하여금 밤에 '손을 보'게 할 생각과, 김현수에게 이천 원에 팔아먹을 생각만 하였었다. 그러나 영채의 편지를 보매 갑자기 그러한 생각이 스러지고 칼과, 지환과, 형식의 눈물을 볼 때에 어젯저녁 떴던 노파의 영혼의 눈이 뜨였다. 노파는 오늘 아침 영채에게 '잘 생각하였다. 과연 그러하니라' 하던 것을 생각하매, 일변 부끄럽기도 하고 일변 영채의 '속 사람'에 대하여 죄송하기도 하였다. 마치 눈앞에 영채가 보이며 '흥, 잘 생각하였다!' 하고 노파의 하던 말을 조롱하는 듯도 하다.
노파의 눈에 늠실늠실하는 대동강이 보인다. 영채가 어떤 조고마한 바윗등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두 손에 치맛자락을 들고 물 속에 뛰어들려 한다. 그때에 자기가
"월향아,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죽일 년이다."
하고 뒤로 뛰어들어가 월향을 붙들려 하였다. 그러나 월향은 고개를 돌려 씩 웃고
"흥, 틀렸소. 내 몸은 더러웠소!"
하면서 그만 물 속에 들어가고 만다. 자기는 그 바윗등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구나? 네 몸을 더럽히게 한 것이 내로구나. 월향아? 용서하여라."
하는 듯하다. 그러고 어저께
"할 수 없소. 죽으려니까."
하고 실망하는 김현수더러
"여봅시오, 남자가 그렇게 기운이 없소? 한번 이러면 그만이지!"
하고 눈을 찡긋하여 김현수에게 월향을 강간하기를 권하던 생각이 난다. 옳다, 그렇다, 월향의 정절을 깨트린 것은 내로구나, 월향을 죽인 것은 내로구나, 하고 가슴이 타는 듯하여 입으로 숨을 쉬면서 또 한번,
"아이구,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하고 안타까운 듯이 두 무릎으로 방바닥을 탁탁 친다. 형식은 지금껏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이 다 저 더러운 뚱뚱한 더러운 노파라 하여 가슴이 아프고 원망이 깊을수록, 지극히 미워하는 눈으로 노파를 흘겨보더니, 노파가 심하게 고민하는 양을 보고 '네 속에 졸던 영혼이 깨었구나' 하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던 도적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저 노파는 역시 사람이라, 나와 같은 영채와 같은 사람이라 하는 생각이 나서 노파의 괴로워하는 모양이 불쌍히 보인다. 그러나 형식은, 노파가 아까 자기더러 '나는 누구신 줄도 모르고' 하던 것을 생각하니 금시에 동정하는 마음이 스러지고 아까보다 더한 싫고 미운 생각이 난다. 그래서 형식은 한번 더 노파를 흘겨보았다. 노파는 형식의 흘겨보는 눈을 보고 또,
"아이구, 이 일을 어째요?"
하고 무릎으로 방바닥을 친다. 우선은 묵묵히 앉았더니 형식더러,
"여보, 얼른 평양경찰서에 전보를 놓고 밤차로 노형이 평양으로 가시오!"
한다.
53
우선은 속으로 영채의 이번 행위는 마땅하다 하였다. 정조가 여자의 생명이니 정조가 깨어지면 몸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여자 된 영채가 어젯저녁 청량사 사건에 대하여 잡을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는 과연 옳은 여자로다 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기가 여태껏 영채를 유혹하던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사상(思想)에는 모순(矛盾)이 있는 줄을 우선은 모른다. 영채가 기생 월향일 때에는 기생이니까 정절을 깨트려도 상관이 없고, 월향이가 영채가 된 뒤에는 기생이 아니니까 정절을 지킴이 마땅하다……. 이것이 분명한 모순이언마는 우선은 그런 줄을 모른다. 우선의 생각을 넓히면 '열녀는 열녀니까 정절을 깨트림이 죄어니와, 열녀 아닌 여자는 열녀가 아니니까 정절을 깨트려도 죄가 아니라' 함과 같다. 그러면 이는 선후(先後)를 전도(顚倒)함이니, 열녀이니까 정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절을 지키니까 열녀어늘, 우선의 생각에는 열녀면 정절을 지킬 것이로되, 열녀가 아니면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여도 좋다 함이라. 그러므로 우선은 영채가 열녀인 줄을 모를 때에는 정절을 깨트려 주려 하다가 열녀인 줄을 안 뒤에는 영채의 정절을 깨트리려 한 것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함이라. 아무려나 우선은 영채의 이번 행위가 가장 좋은 행위라 한다. 그러나 형식은 이 일에 대하여 우선의 생각하는 바와는 다르게 생각한다. 형식도 영채가 그처럼 정절이 굳은 것을 김탄은 한다. 죽으려고까지 하는 깨끗하고 거룩한 정신을 보고 존경도 한다. 그러나 형식의 생각에는 우선과 같이 '영채의 이번 행위가 가장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사람의 생명(生命)은 우주(宇宙)의 생명과 같다. 우주가 만물(萬物)을 포용(包容)하는 모양으로 인생(人生)도 만물을 포용한다. 우주는 결코 태양(太陽)이나 북극(北極)만으로 그 내용(內容)을 삼지 아니하고, 만천(滿天)의 모든 성신(星辰)과 만지(萬地)의 모든 만물로 다 포용을 삼는다. 그러므로 창궁(蒼穹)에 극히 조고마한 별도 우주의 전생명(全生命)의 일부분(一部分)이요, 내지 지상(地上)의 극히 미세(微細)한 지풀잎 하나, 티끌 하나도 모두 우주의 전생명의 일부분이라. 태양이 지구(地球)보다 위대(偉大)하니, 태양(太陽)이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에 대한 관계가 지구(地球)의 그것보다 크다고는 할지나, 그렇다고 태양(太陽)만이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이요, 지구(地球)는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에 관계가 전무하다고는 못 할지라. 또 태양계(太陽系)에 있어서는 태양(太陽)이 중심(中心)이로되, 무궁대(無窮大)한 전우주(全宇宙)에 대하여는 태양(太陽) 그 물건도 한 티끌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 이와 같이 사람의 생명(生命)도 결코 일의무(一義務)나 일도덕률(一道德律)을 위하여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人生)의 만반 의무(萬般義務)와 우주(宇宙)에 대한 만반 의무(萬般義務)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충(忠)이나, 효(孝)나, 정절(貞節)이나, 명예(名譽)가 사람의 생명(生命)의 중심(中心)은 아니니, 대개 사람의 생명(生命)이 충(忠)이나 효(孝)에 재함이 아니요, 충(忠)이나 효(孝)가 사람의 생명에서 출함이라. 사람의 생명(生命)은 결코 충(忠)이나 효(孝)나의 하나에 속한 것이 아니요, 실로 사람의 생명(生命)이 충, 효, 정절, 명예 등(忠, 孝, 貞節, 名譽 等)을 포용(包容)하는 것이 마치 대우주(大宇宙)의 생명(生命)이 북극성(北極星)이나 백랑성(白狼星)이나 태양(太陽)에 재함이 아니요, 실로 대우주(大宇宙)의 생명(生命)이 북극성(北極星)과 백랑성(白狼星)과 태양과 기타 큰 별, 잔 별과 지상(地上)의 모든 미물(微物)까지도 포용(包容)함과 같다.
사람의 생명(生命)의 발현(發現)은 다종다양(多種多樣)하니, 혹 충(忠)도 되고 효(孝)도 되고 정절(貞節)도 되고, 기타 무수무한(無數無限)한 인사현상(人事現象)이 되는 것이라. 그 중에 무릇 민족(民族)을 따라, 혹은 국정(國情)을 따르고, 혹은 시대(時代)를 따라 필요성이 무수무궁(無數無窮)한 인사현상중(人事現象中)에서 특종(特種)한 것 일 개(一個)나 또는 수 개(數個)를 취하여 만반 인사행위(萬般人事行爲)의 중심(中心)을 삼으니 차 소위(此所謂) 도(道)요, 덕(德)이요, 법(法)이요, 율(律)이라. 무릇 사회적 생활(社會的 生活)을 완성(完成)하려면 그 사회(社會)의 각원(各員)이 그 사회(社會)의 도덕 법률(道德法律)을 권권복응(卷卷服膺)함이 마땅하되 그러나 결코 이는 생명(生命)의 전체(全體)는 아니니, 생명(生命)은 하여(何如)한 도덕 법률(道德法律)보다도 위대(偉大)한 것이라. 그러므로 생명(生命)은 절대(絶對)요, 도덕 법률(道德法律)은 상대(相對)니, 생명(生命)은 무수히 현시(現時)의 그것과 상이(相異)한 도덕(道德)과 법률(法律)을 조출(造出)할 수 있는 것이라. 이것이 형식이가 배워 얻은 인생관(人生觀)이라. 그러므로 영채가 정절이 깨어짐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 함은 효(孝)와 정절(貞節)이라는 일도덕률(一道德律)을 인생인 여자(女子)의 생명(生命) life의 전체(全體)로 오인(誤認)한 것이라 하였다. 효(孝)와 정절(貞節)이 현시(現時)에 있어서는 여자의 심중되는 덕(德)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여자인 인생(人生)의 생명(生命)의 소산(所産)이요, 일부분(一部分)이라 하였다. 영채는 과연 부모에게 대하여 효(孝)하지 못하였다. 지아비에게 대하여 정(貞)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도 자기의 의지(意志)로 그러한 것이 아니요, 무정한 사회(社會)가 연약한 그로 하여금 그리하지 아니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 설혹 영채가 자기의 의지(意志)로 효(孝)와 정(貞)에 대하여 생명(生命)의 의무(義務)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자. 그러나(그렇다) 가정하더라도 영채는 생명(生命)을 끊을 이유가 없다. 효와 정은 영채의 생명의 의무 중에 둘이니, 설혹 중요하다 하더라도 부분(部分)은 전체(全體)보다 작으니라. 이 두 의무는 실패(失敗)하였다 하더라도 아직도 영채의 생명에는 백천무수(百千無數)의 의무가 있다. 그의 생명에는 아직도 충(忠)도 있고, 세계(世界)에 대한 의무도 있고, 동물(動物)에 대한 의무도 있고, 산천(山川)이나 성신(星辰)에 대한 의무도 있고 부처에 대한 의무도 있다. 이렇게 무수한 의무를 가진 귀중한 생명을 다만 두 가지―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또 부득이한 것인데―를 위하여 (끊으려 하는 영채의 행위는) 결코 '옳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순결(純潔)하고 열렬(熱烈)한 사람이 자기(自己)의 중심적 의무(中心的 義務)를 생명으로 삼음은 또한 인생(人生)의 자랑이라 하였다.
형식은 이론(理論)으로는 영채의 행위를 그르다 하면서도 정(情)으로는 영채를 위하여 울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영채를 '낡은 여자'라 하고, 다시 형용사를 붙여서 순결 열렬(純潔熱烈)한 구식 여자(舊式女子)라 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이번 영채의 행위는 절대적(絶對的)으로 선(善)하다 한다. 하나는 영문식(英文式)이요, 하나는 한문식(漢文式)이로다.
54
(형식은 노파와 함께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탔다.) 형식은 어느덧 잠깐 잠이 들었다 번쩍 눈을 뜨니, 승객들은 혹은 창에 기대어, 혹은 팔을 베고, 혹은 고개를 잦기고 곤하게 잠이 들었다. 서넛쯤 저편 걸상에 어떤 인부 패장 같은 사람이 혼자 깨어서 눈을 번뜻번뜻하면서 담배를 피운다. 어느덧 차창에는 새벽빛이 비치었다. 형식은 맞은편 걸상에서 입으로 침을 흘리며 자는 노파를 보았다. 그러고 '더러운 계집'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형식은 노파의 일생을 생각하여 보았다. 본래 천한 집에 생장하여 좋은 일이나 좋은 말은 구경도 못 하다가 몸이 팔려 기생이 되매, 평생에 만나는 사람이 짐승 같은 오입쟁이가 아니면 짐승 같은 기생들뿐이요, 평생에 듣는 말과 하는 말은 전혀 음란한 소리와 더러운 소리뿐이라. 만일 글을 알아서 옛사람의 어진 말이나 들었어도 조곰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으련마는, 노파의 얼굴을 보니, 원래 천질이 둔탁한데다가 심술과 욕심과 변덕이 많을 듯하고 또 까만 눈썹이 길게 눈을 덮은 것을 보니 천생 음란한 계집이라. 이러한 계집은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가르치더라도 악인이 되기 쉬우려든, 하물며 평생을 더러운 죄악 세상에서 지냈으므로 짐승 같은 마음은 자랄 대로 자라고 '사람스러운 마음'은 눈을 뜰 기회가 없었다. 그는 일찍 선(善)이란 말이나 덕(德)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선한 사람이나 덕 있는 사람을 접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노파의 생각에, 세상은 다 자기네 사회(社會)와 같고 사람은 다 자기와 같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기는 결코 남보다 더 착한(악한) 사람이라고도 생각지 아니하였고, 하물며 남보다 더 못생긴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차라리 그도 이따금 남의 일을 보고 '저런 악한 사람이 있는가' 하기도 하였다. 아니― 하기도 하였을 뿐더러 항용 선하노라 자신하는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저 노파는 '참사람'이라는 것을 볼 기회가 없었고, 또 보려 하는 생각도 없었고, 따라서 '참사람' 되려는 생각을 하여 본 적도 없었다. 자기는 자기가 '참사람'이어니 하였다. 그러므로 칠 년 동안이나 아침저녁 '참사람'인 영채를 보면서도, 다만 월향이라는 살과 뼈로 생긴 기생을 보았을 뿐이요, 그 속에 있는 영채라는 '참사람'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영채가 정절을 지키려 할 때에 노파는 도리어 영채를 미련하다 하고 철이 없다 하고 고집불통이라 하였다. 노파가 보기에 기생이란 마땅히 아무러한 남자에게나 몸을 허하는 것이 선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선을 깨트리고 정절을 지키려 하는 영채는 노파의 보기에 악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다시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이때에는 노파에게 대한 밉고 더러운 생각이 스러지고 도리어 불쌍한 생각이 난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자기도 그 노파와 같은 경우에 있었더면 그 노파와 같이 되었을지요, 그 노파도 자기와 같이 십오륙 년간 교육을 받았으면 자기와 같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고 차 실내에 곤하게 잠든 여러 사람을 보았다. 그 중에는 노동자도 있고, 신사도 있고, 욕심꾸러기 같은 사람도 있고, 흉악한 듯한 사람도 있다. 또 그 중에는 조선 사람도 있고 내지 사람도 지나 사람도 있다. 그들이 만일 깨어 앉아 서로 마주본다 하면 혹 남을 멸시할 자도 있을지요, 혹 남을 부러워할 자도 있을지요, 혹 저놈은 악한 놈이요, 저놈은 무식한 놈이요, 저놈은 무례한 놈이라 하기도 할지나, 만일 그네를 어려서부터 같은 경우에 두어 같은(교육과 같은) 감화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하면, 혹 선천적 유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대개는 비슷비슷한 선량한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고 또 한번 자는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이때에는 노파가 정다운 듯한 생각이 난다. 저도 역시 사람이리라. 나와 같은, 영채와 같은 사람이로다 하였다. 그러고 엊그제 김장로의 집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상을 보고 상상하던 생각이 난다. 다 같은 사람으로서 혹은 춘향이 되고, 혹은 이도령이 되고, 혹은 춘향모도 되고, 혹은 남원 부사도 되어 혹은 사랑하고, 혹은 미워하고, 혹은 때리고, 혹은 맞고, 혹은 양반이 되고 (선인이 되고, 혹은 상놈이 되고) 악인(惡人)이 된다 하더라도 원래는 다 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고 노파의 얼굴을 보니 마치 어머니나 누이를 (대)하는 듯 사랑스러운 생각이 난다. 노파가 영채의 죽으려는 결심을 보고 일생에 처음 '참사람'을 발견하고, 영혼이 깨어 일생에 처음 진정한 눈물을 흘리면서 영채를 구원할 양으로 멀리 평양에까지 내려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형식은 노파에게 대하여 정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담요 끝으로 노파의 배를 가리어 주었다.
형식은 여기가 어딘가 하고 차창으로 내어다보았다. 이윽고 고동 소리가 들리자, 차가 어떤 다리를 건너는 소리가 난다.
형식의 머릿속에는 '대동강'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아― 영채는 어찌 되었는가. 이미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몸을 잠갔는가. 또는 경찰의 손에 붙들려 지금 어느 경찰서 구류간에서 눈물을 흘리고 지내는가. 형식은 가만히 노파의 어깨를 흔들면서, "여봅시오, 여봅시오! 대동강이외다" 하였다. 형식이가 이렇게 노파에게 정답게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노파의 집에서 '괘씸한 계집!' 하고 생각한 이래로 칠팔 시간이나 마주앉아 오면서도 밉고 더러운 생각에 아무 말도 아니하였었다. 노파는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며,
"에? 대동강!"
하고 차창을 내다본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대동강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기차는 평양역을 향하여 길게 고동을 핀다. 형식과 노파의 머리에는 영채의 생각이 있다.
55
형식은 차창을 열고 멀리 능라도 편을 바라보았다. 새벽 어스름에 아무것도 똑똑히 보이지는 아니하나, 평양 경치를 여러 번 본 형식의 눈에는 '저것이 능라도, 저것이 모란봉, 저기가 청류벽' 하고 어렴풋하게 마음으로 지정하였다. 형식은 어저께 보던 영채의 편지를 생각하였다. '이 몸을 대동강의 푸른 물에 던져―' 하고 형식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저 컴컴한 능라도 근방에 영채의 모양이 눈에 번쩍 보이는 듯하다. '탕탕한 물결로 하여금 이 몸의 더러움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이 죄 많은 살을 뜯게 하려 하나이다.' 형식은 영채의 시체가 바로 철교 밑으로 흘러내려오는 듯하여 얼른 창 밖에 머리를 내어밀어 물을 내려다보았다. 철교의 기둥에 마주쳐 둥그스름하게 물결이 지는 것이 보인다. 형식은 목에 무엇이 떨어짐을 깨달았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컴컴한 구름이 움쩍도 아니하고 무겁게 덮여 있고 가는 안개비가 내리며 이따금 조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며, 형식의 길게 가른 머리카락이 펄펄 날린다. 형식은 무슨 무서운 것을 본 듯이 고개를 흠칫하고 차창에서 끌어들였다. '만일 대동강상에서 선생의 소매를 적시는 궂은 비를 보시거든 죄 많은 박영채의 눈물인 줄 알으소서' 하던 영채의 편지의 일절이 번썩 눈에 보인다. 형식은 곁에 놓인 가방에서 그 언문 쓴 종이와 칼과 지환을 싼 뭉텅이를 내었다. 내어서 보려 하다가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차는 철교를 지났다. 좌우편에는 길게 늘어선 부인(빈) 화차(貨車)와 조고만 파수막들이 보인다. 노파는 멍하니 차창으로 내어다보던 눈으로 형식을 보며,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다. 그 눈과 얼굴에는 아직도 진정으로 걱정하는 빛이 보인다. 형식은 노파의 눈 뜬 영혼이 아직도 깨어 있구나 하였다. 노파는 아까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자기가 차를 타고 평양으로 내려오는데, 차가 대동강 철교 위에 다다랐을 때에 철교가 뚝 부러져 자기의 탔던 차가 대동강물 속에 푹 잠겼다. 노파는 '사람 살리오?' 하고 울면서 겨우 하여 물 위에 떠올랐다. 그러나 장마때가 되어 흙물 같은 커다란 물결이 노파의 머리를 여러 번 덮었다. 노파는 '아이구, 죽겠구나' 하고 엉엉 울면서 물에 떴다 잠겼다 하였다. 이때에 노파의 눈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영채가 우뚝 나섰다. 영채는 어제 아침에 자기의 방에 와서 하던 모양으로 방글방글 웃으며 '생각하여 보니깐 우스운 일이야요' 한다. 노파는 팔을 내어밀고 '내가 잘못하였다. 용서하여라. 내 팔을 잡아당겨 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노파의 팔을 잡으려 아니하고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하얀 이빨로 입술을 꼭 깨물어 새빨간 피를 노파의 얼굴에 뿌렸다. 노파는 이마와 뺨에 마치 끓는 물과 같이 뜨거운 핏방울이 뛰어옴을 깨달았다. 노파는 '영채야, 나를 살려 다고' 하면서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잠을 깨었다. 노파는 잠이 깨자 곧 대동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일기가 오랫동안 가물었으므로 대동강물은 꿈에 보던 것과 같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꿈과 같이 이 철교가 떨어지지나 아니할까 하고 열차가 철교를 다 지나도록 무서운 마음에 치를 떨다가 열차가 아주 육지에 나설 때에 비로소 마음을 놓고 한숨을 후 쉬며 형식에게,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고 영채의 일을 물음이라. 형식은 웃으며,
"어저께 전보를 놓았으니까 아마 경찰서에 가 있겠지요."
하고 말소리와 태도로 '걱정 없지요' 하는 뜻을 표하였다. 노파는 형식의 말에 얼마큼 안심하였다. 그러나 아직 전보의 힘과 경찰서의 힘을 이용하여 본 일이 없는 노파에게는 형식의 말에 아주 안심하기는 어려웠다. 노파도 전보가 기차보다 빨리 가는 줄을 알건마는 하고많은 사람에 어느 것이 영채인 줄을 어떻게 알리요 한다. 더구나 노파는 일생을 기생계에서 지내므로 경찰이란 자기를 미워하는 데요, 성가십게 구는 데로만 생각한다. 그러고 영채가 아마 경찰서에 있으리라는 형식의 말을 듣고, 지기가 일찍 평양서 밀매음사건에 관하여 이삼 일 경찰서 구류간에서 떨던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이니까' 하고, 영채는 경찰서에서 지난밤을 지냈더라도 자기와 같이 떨지는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얼마큼 안심을 하였다.
두 사람이 탄 열차는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헤이죠오' 하는 역부에(역부의) 외치는 소리와 딸깍딸깍 하는 나막신 소리가 차가 다 서기도 전부터 들린다. 아까부터 짐을 묶고 옷을 입던 사람들은, 혹은 제가 먼저 내릴 양으로 남을 떠밀치고 나기기도 하고, 혹은 가장 점잖은 듯이 빙그레 웃으며 일부러 남들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형식과 뚱뚱한 노파도 플랫폼에 내렸다. 어느 군대에(군대의) 어른이 가는지 젊은 사관들이 일등차실 곁에 서서 여러 번 모자에 손을 대어 허리를 굽힌다. 뚱뚱한 서양 사람 두엇이 바지에 두 손을 찌르고 주위엣사람들은 번뜻도 보지 아니하면서 뚜벅뚜벅 왔다갔다한다. 어떤 일본 부인이 차를 아니 놓칠 양으로 크다란 '신겐부쿠로(信玄袋)'를 들고 통통통 뛰어들어온다.
북으로 더 갈 승객들은 세수도 아니한 얼굴에 맨머릿바람으로 우두커니 나와 서서 아는 사람이나 찾는 듯이 입구(入口)를 바라보고 섰다. 개찰인(改札人)은 부인(빈) 가위를 떼걱떼걱 하고 섰다. 형식과 노파는 출구(出口)를 나섰다. 지켜 섰던 순사가 흘긋 두 사람의 뒤를 본다. 형식과 노파는 인력거에 올랐다. 두 인력거는 여러 인력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뾰족비를 지나서 아직 전등이 반작반작하는 평양 시가로 들어간다. 안개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온다.
56
형식은 인력거 위에서 자기가 첫 번째 평양에 오던 생각을 하였다. 머리는 아직 깎지 아니하여 부모상으로 흰 댕기를 드리고, 감발을 하고, 어느 봄날 아침에 칠성문으로 들어왔다. 칠성문 안에서 평양 시가를 내려다보고 '크기는 크구나' 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열한 살이라. 그러나 평양이란 이름과 평양이 좋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요, 평양이 어떠한 도회인지, 평양에 모란봉 청류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형식은 그때에 사서와 사략과 소학을 읽었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학교라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지리나 조선 역사를 읽어 본 적이 없었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문명한 나라 아이들 같으면 평양의 역사와 명소와 인구와 산물도 알았으리라.' 그때에 형식은 대동문 거리에서 처음 일본 상점을 보았다. 그러고 그 유리창이 큰 것과 그 사람들의 옷이 이상한 것을 보고 재미있다 하였다. 형식은 갑진년에 들어오던 일본 병정을 보고 일본 사람들은 다 저렇게 검은 옷을 입고, 빨간 줄 두른 모자를 쓰고 칼을 찼거니 하였었다. 그래서 대동문 거리로 오르내리며 기웃기웃 일본 상점을 보았다. 어떤 상점에는 성냥과 석유 상자가 놓였다. 형식은 아직도 그렇게 많은 성냥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래서 '옳지, 성냥은 다 여기서 만드는구나' 하고 고개를 까닥까닥하였다. 또 일본 사람들이 마주앉아서 이야기하고 웃는 것을 보고 '어떻게 서로 말을 알아듣는가' 하고 이상히 여겼다. 형식의 귀에는 모든 말이 다 같은 소리와 같이 들렸음이라. 더욱 형식의 눈에 재미있게 보이는 것은 일본 부인의 머리와 등에 매어달린 허리띠코였다. 형식은 저기다가 무엇을 넣고 다니는고 하였다. 이 의문은 오래도록 풀지 못하였다.
또 형식은 대동문 밖에 나서서 대동강을 보았다. 청천강보다 '좀 클까' 하였다. 그러고 '화륜선'을 보았다. 시꺼먼 굴뚝으로 시꺼먼 연기를 피우고 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돛도 아니 달고 다니는 '화륜선'은 참 이상도 하다 하였다. 그 '화륜선' 위에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저기 타보았으면' 하였다.
형식은 '물지게가 많기도 하다' 하였다. 형식의 생장한 촌중에는 그 앞술도 하고 겨울에 국수도 누르는 주막에 물지게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물지게란 주막에 있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므로 형식은 대동문으로 수없이 많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물지게를 보고 '평양에는 주막도 많다' 하였다. 그러고 '평양감사'라는데 평양감사가 어디 있는고 하고 한참이나 평양감사의 집을 찾다가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형식은 호로 구녁으로 거리를 내다보며 혼자 싱긋 웃었다. 밀철로가 사람을 가득히 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형식의 인력거 곁으로 지나간다.
형식은 또 생각을 잇는다. 그날 종일 평양 구경을 하다가 관 앞 어떤 객주에 들었다. 탕건 쓴 주인이,
"너 돈 있니?"
할 때에 형식은
"스무 냥이나 있는데."
하고 자기의 주머니를 생각하면서,
"돈 없겠소!"
하고 ('나도 손님인데' 하면서 서슴지 아니하고) 아랫목에 내려가 앉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이 평양장이라 하여 감발한 황화(荒貨) 장수들이 십여 인이나 형식의 주인에 들었다. 형식은 얼마큼 무서운 생각이 있으면서도 아주 태연한 듯이 벽에 바른 종이의 글을 읽었다. 그러나 밤에 자려 할 때에 같이 있던 이삼 인이 서로 다투어 형식의 곁에서 자려 하였다. 형식은 무서운 마음이 생겨서 방 한편 구석에 말없이 앉아서 그 사람들의 하는 양을 보았다. 그러나 형식의 손에는 목침이 들렸더라. 세 사람은 한참이나 다투더니 그 중에 제일 거무테테하고 무섭게 생긴 사람이 웃고 형식을 안으며,
"얘 나하고 자자. 돈 주께."
하고 형식의 목을 쓸어안으며 입을 맞추려 한다. 형식은 울면서 방 안에 둘러앉은 십여 명을 보았다. 그러나 모두 벙글벙글 웃을 뿐이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얘, 나하고 자자."
하며 자기의 주머니에서 엽전을 한줌 집어낸다. 형식은 반항하였다. 그러나 그 거무테테한 사람의 구린내 나는 입이 형식의 입에 닿았다.
형식은 머리로 그 사람의 면상을 깨어져라 하도록 들입다 받고 그 사람이 번쩍 고개를 잦기는 틈을 타서 손에 들었던 목침으로 그 사람의 가슴을 때렸다. 그 사람은 얼른 목침을 피하고 일어나면서 형식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형식의 머리를 벽에 부딪친다. 형식은 이를 갈며 울었다. 이때에 저편 구석에 말없이 앉았던 키 큰 사람이 벌떡 일어나 달려오더니 형식의 머리채를 잡은 사람의 상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가슴을 서너 번 때리더니 방바닥에 그 사람을 엎드려 놓고,
"이놈! 이 짐승놈?"
하고 발길로 찬다. 여러 사람은 다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감히 대어드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형식은 문득 영채를 생각하였다. 영채와 자기와는 이상하게 같은 운명을 지내어 오는 듯하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더욱이 정다워지는 듯함을 깨달았다. 영채는 자기의 아내를 삼아 일생을 서로 사랑하고 지내야 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살았는가. 살아서 경찰서에 있는가. 또 영채의 편지가 생각나고 아까 대동강을 건너올 때에 생각하던 바를 생각하였다. 그러고 그 편지와 그 언역 쓴 종이를 넣은 가방이 자기의 무릎 위에 놓인 것을 보았다. 그러고 평양경찰서의 집과 문과 그 속에 앉아서 사무를 보는 사람들을 상상하고 영채가 울면서 혼자 앉았는 방과 자기와 노파가 영채의 방에 들어가는 모양을 상상하였다.
인력거가 우뚝 서고 인력거꾼이 호로를 벗긴다. 형식의 앞에는 회칠한 서양제 집이 있다. 문 위에는 '平壤警察署(평양경찰서)'라고 대자로 새겼다.
57
형식은 가슴이 설렁거리면서 경찰서 문 안에 들어섰다. 사무 보는 책상과 의자가 다 보이고, 저편 유리창 밑에 어떤 흰 정복에 칼도 아니 차고 어깨에 수건을 걸은 순사가 앉아서 신문을 본다. 형식은 아직도 조선 땅에서 경찰서에 와본 적이 없었다. 일찍 동경에서 어떤 경찰서에 불려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서장과 말하여 본 적은 있었으나 인민이 관청에 오는 자격으로 경찰서에 와본 적은 없었다. 그는 톨스토이의『부활』을 읽어 아라사 경찰서의 모양을 상상할 뿐이었었다. 형식은 얼마큼 불쾌한 생각을 품으면서 모자를 벗고,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노파는 형식의 곁에 서서 무서움과 괴로움으로 치를 떤다. 그러나 순사는 그 말을 못 들은 모양. 형식은 좀더 소리를 높여,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제야 순사가 신문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려 형식과 노파의 얼굴과 모양을 유심히 보더니,
"무슨 일이오?"
한다. 형식이 서장이 오기 전에는 자세히 알 수 없으리라 하면서,
"어저께, 서울서 평양경찰서로 어떤 부인 하나를 보호하여 달라는 전보를 놓았는데요……."
형식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순사가,
"부인?"
한다. 형식과 노파의 생각에는 '옳지, 영채가 여기 있는 게로고' 하였다.
"녜― 부인 하나를 보호하여 달라고 전보를 놓았는데요…… 그래서 지금 어젯밤 차로 내려왔는데요…… 혹 그 부인이 지금 이 경찰서에 있습니까?"
하면서 형식은 그 순사의 얼굴을 보았다. 순사는 말없이 신문을 두어 줄 더 읽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곁으로 오면서,
"어떤 부인을 보호하여 달라고 평양경찰서로 전보를 놓았어요?"
하고 형식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이 소리를 높여 묻는다. 형식은 얼마큼 실망하였다. 만일 평양경찰서에서 영채를 붙들었으면 저 순사가 모를 리가 없으리라 하였다. 노파도 눈이 둥그래지며 순사에게,
"어떤 모시 치마 적삼 입고 서양 머리로 쪽찐 열팔구 세나 된 여자가 오지 아니하였어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순사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한참이나 고개를 기웃기웃하고 바지에 한 손을 꽂고 책상과 의자 사이를 지나 저편으로 들어가고 만다. 두 사람은 실망하였다. 영채는 평양경찰서에 없구나 하였다. 만일 영채가 여기 없다 하면 어디 있을까. 어저께 넉점에 평양에 내려서 자기의 부친과 월화의 무덤을 보고 그 길로 청류벽으로 나와 연광정 밑에서 물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그렇다. 영채는 죽었구나 하였다. 노파가 형식의 팔을 잡으며 우는 소리로,
"웬일이야요?"
한다. 형식은 울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물었다.
"설마 죽기야 하였겠어요. 이제 서장이 오면 알 터이지요."
하고 노파를 위로는 하면서도 자기도 영채가 살았으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그래서 속으로 '왜 죽어!' 하였다. 소학과 열녀전이 영채를 죽였구나 하였다. 만일 자기가 한 시간만 영채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더라도 영채는 죽지는 아니하였으리라 하였다. 형식은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왜 죽어?"
하였다. 노파는 '설마 죽었을라고요' 하고(하는) 형식의 말에 얼마큼 마음을 놓았다가 '왜 죽어?' 하는 형식의 탄식에 다시 절망이 되었다. 노파는 형식의 손을 꽉 쥐며,
"에그, 이 일을 어째요?"
하고 운다. 그러고 '나 때문에 영채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노파의 가슴을 찌른다. '아까, 꿈자리가 좋지 못하더니' 하고 꿈꾸던 생각을 한다. 하얀 옷을 입고 물 위에 서서 '흥, 생각하니깐 우스워요'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무섭게 변하며 입술을 깨물어 자기의 얼굴에 뜨거운 피를 뿜던 것이 생각이 난다. 그러고 그것이 영채의 혼령(魂靈)이 아니던가 하였다. 어저께 해지게 대동강에 빠져 죽은 영채의 혼령이 자기의 꿈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아아, 영채의 원혼(怨魂)이 밤낮 내 몸에 붙어서 낮에는 병이 되고 밤에는 꿈이 되어 나를 괴롭게 하지나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자기가 오늘부터 병이 들어 얼마를 신고하다가 마침내 영채에게 붙들려 가지나 아니할까, 또는 장차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영채의 원혼이 대동강 철교를 그 입술을 물어뜯던 모양으로 물어뜯어 자기 탄 기차가 대동강에 빠지지나 아니할까 하였다. 무섭게 변한 영채의 모양이 방금 노파의 앞에 섰는 듯도 하다. 노파는 마침내 울며 형식의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형식도 울음을 참으면서 흑흑 느끼는 노파의 등을 만지며,
"울지 마십시오. 이제 서장이 나오면 알지요."
한다.
이윽고 아까 그 순사가 들어가던 곳으로 다른 순사 하나가 나온다. 그 순사도 두 사람의 모양을 유심히 보더니 책상 서랍에서 어떤 전보를 내어보며,
"노형이 이형식이오?"
하고 형식을 본다. 형식은 순사의 손에 있는 전보를 슬쩍 보면서,
"녜, 내가 이형식이오."
노파가 우는 소리로,
"나리께서 그런 여자를 보셨습니까."
한다. 순사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이 전보는 받았지요. 그래서 정거장에 나가 보았지마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옷을 입은 사람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하고 그 전보를 책상 위에 놓으며,
"왜? 도망하는 계집이오?"
형식은 그만 실망하였다. 영채는 정녕 죽었구나 하면서,
"아니오, 자살할 염려가 있어요."
하고 자기가 전보를 놓을 때에 그 인상(人相)을 자세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을 한하였다. 먼저 나왔던 순사가 나와서 책상 위에 놓인 전보를 보면서,
"평양에 몇 사람이나 내리는지 아시오? 하고많은 사람에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한다.
58
형식과 노파는 아주 절망하여 경찰서에서 나왔다. 안개비에 길이 눅눅하게 젖었다. 아까보다 사람도 많이 다니고 구루마도 많이 다닌다. 상점에서는 널쪽 덧문을 열고, 어떤 사람은 길가에 나와 앉아서 세수를 하며 어떤 사람은 방 안에 앉아서 소리를 내어 신문을 본다. 찌국찌국 하고 오던 물지게들은 모로 서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우편 집배인(集配人)이 검은 가죽가방을 메고 손에 열쇠 뭉치를 들고 껑충껑충 뛰어온다. 노파는 형식의 손에 매어달려 걸음을 잘 걷지 못한다. 형식은 시장증이 난다. 노파더러,
"어디 들어가서 조반을 사먹고 찾아봅시다. 설마 죽었겠어요."
한다. 노파는 형식을 보며,
"아이구, 나도 대동강에나 가서 빠져 죽었으면 좋겠소."
하고 눈물을 씻는다. 형식은 어저께 우선이로 더불어 노파의 집에 갔을 때에 '뒷간에 있는데 야단을 하시구려' 하며 치맛고름을 고쳐 매던 노파를 생각하였다. 형식은,
"어서 너무 슬퍼 마시오. 아직 아니 죽고 세상에 있는지 알겠어요? 자, 어디 가서 조반이나 먹읍시다."
하고 혼자말 모양으로,
"장국밥이 있을까?"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노파는 '아니 죽고 세상에 있는지!' 하는 말에 얼마큼 위로를 얻으며,
"장국밥집에를 어떻게 들어갑니까. 나 아는 집으로 가시지요."
한다. 노파가 '나 아는 집'이라면 기생집이리라 하였다. 그러고 어리고 고운 기생들의 모양이 눈에 얼른 보인다. 그러고 노파의 말대로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예쁜 여자를 보기만 하는 것이야 상관이 있으랴.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모양으로 아름다운 꽃을 대하는 모양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그러나 한 핑계가 되기 쉽다'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내 마음은 깨끗하다' 하면서,
"어디오니까. 그러면 그리로 가시지요."
하고는 그래도 노파의 뒤를 따라 기생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모양이 흉하다 하여 노파를 거기 데려다 두고 자기는 어디든지 다른 데로 가리라 하였다.
형식은 노파의 뒤를 따라 어떤 깨끗한 기와집 대문 밖에 섰다. 아직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고 쓴 대문은 열리지 아니하였다. 노파는 마치 자기 집 사람을 부르는 모양으로,
"얘들아, 자느냐. 문 열어라!"
하면서 문을 서너 번 두드리더니 형식을 돌아보며,
"영채가 여기는 있으면 아니 좋겠어요."
하고 뜻없이 웃는다. 형식은 속으로 '영채는 벌써 죽었는데' 하고 말이 없었다. 이윽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가 신을 짤짤 끌며 나와서,
"누구셔요?"
하고 문을 연다. 형식은 한 걸음 비켜 섰다. 어떤 얼굴에 분자리 보이는 십삼사 세 되는 계집아이가 노파에게 매어달리며 반가운 듯이,
"아이구, 어머니께서 오셨네."
하고 '네'자를 길게 뽑는다. 머리와 옷이 자다가 뛰어나온 사람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두 사람이 반가워하는 양을 보았다. 어여쁜 처녀로다. 재주도 있을 듯하고 다정도 할 듯하다 하였다. 그러나 저도 기생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 아직 처녀의 모양으로 차렸건마는 벌써 처녀는 아니리라. 혹 어젯저녁에 어떤 사나이의 희롱을 받지나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노파는 대문 안에 한 걸음 들어서면서 목을 내어밀어,
"들어오시지요. 내 집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그 어린 기생은 그제야 문 밖에 어떤 사람이 있는 줄을 알고 고개를 기울여 형식을 본다. 형식은 그 좀 두터운 듯한 눈껍질이 곱다 하면서,
"나는 어떤 친구에게로 갈랍니다. 조반을 먹거든 이리로 오지요,"
하고 모자를 벗는다. 노파는 문 밖으로 도로 나오며,
"그러실 것이 있어요, 들어오시지. 내 동생의 집인데요."
하고 형식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래도 형식은 굳이 간다 하는 것을 이번에는 그 어린 기생이 나와 그 고운 손으로 형식의 등을 밀고 아양을 부리며,
"들어오셔요!"
한다. 형식의 생각에 아무리 보아도 그 어린 기생의 마음에는 티끌만한 더러움도 없다 하였다. 저 영채나 선형이나 다름없는 아주 깨끗한 처녀라 하였다. 그러고 그 등을 살짝 미는 고운 손으로 따뜻한 무엇이 흘러들어오는 듯하다 하였다. 형식은 남의 처녀를 볼 때에 늘 생각하는 버릇으로 '내 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얼마를 더 사양하다가 마침내 마지못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 팔을 노파에게 잡히고 다른 팔을 그 어여쁜 기생에게 잡히고 들어가는 맛은 유쾌하다 하였다. 인도함을 받아 들어간 방은 영채의 방과 크게 틀림이 없었다. 그 어린 기생은 얼른 먼저 뛰어들어가 자리를 갠다. 형식은 문 밖에서 그 빨간 깃들인 비단 이불이 그 어린 기생의 손에서 번적번적하는 양을 보았다. 노파와 형식은 들어앉았다. 기생은 저편 방에 가서 기쁜 소리로,
"어머니, 서울 어머니께서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그 방에서 무슨 향내가 나는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방바닥을 짚은 형식의 손은 따뜻한 맛을 깨달았다. 이는 그 기생의 몸에서 흘러나온 따뜻함이라 하였다. 이윽고 기생이 어린아이 모양으로 뛰어들어오며,
"지금 어머니 건너오십니다. 그런데 아침차로 오셨어요?"
하고 말과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빛이 보인다. 형식은 '다 같은 사람이로구나' 하였다. 따뜻한 인정은 사람 있는 곳에 아무 데나 있다 하였다. 그러고 담배를 내어 들고 조끼에서 성냥을 찾으려 할 제 그 기생이 얼른 성냥을 집어 불을 켜들고 한 손으로 형식의 무릎을 짚으면서,
"자, 붙이시오!"
한다. 형식은 그를 깨끗한 어린아이 같다 하였다.
59
형식은 여자의 손에 담뱃불을 붙이기가 미안한 듯도 하고 수줍은 듯도 하여,
"이리 줍시오."
하였다. '줍시오' 하는 것을 보고 그 기생은 쌕 웃는다. 웃을 때에 윗 앞니에 커다란 금니가 반짝 보인다. 그 기생은 형식의 무릎을 짚은 손을 한번 꼭 누르고 어리광하는 듯이 몸짓을 하면서,
"자, 이대로 붙이셔요."
하고 '요'자에 힘을 준다. 노파는 형식이가 그저께 '월향 씨' 하던 것을 듣고 우습게 여기던 것을 생각하고 빙그레 웃는다. 형식이가 사양하는 동안에 기생의 손에 있던 성냥이 다 탔다. 기생은,
"에그, 뜨거워라."
하고 그것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살짝 엎디어 입으로 혹 불고 성냥을 잡았던 손가락으로 제 귀를 잡는다. 형식은 미안한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 귀를 잡는 손가락을 자기의 입에 대고 '호' 하고 불어 주고 싶다 하면서,
"아차, 덥겠구려(뜨겁겠구려)."
하였다. 기생은 손가락을 귀에 대고 잠깐 형식의 얼굴을 보더니 또 다른 성냥개비를 그어 아까 모양으로 한 손을 형식의 무릎 위에 놓으면서 숨이 찬 듯이,
"자, 이번에는 얼른 붙입시오."
하고 성냥개비가 반쯤 타는 것을 보고는 제 몸을 춤을 추이며 급한 듯이,
"자, 얼른, 얼른."
한다. 형식은 고개를 숙여 궐련에 불을 붙이고 첫 번 입에 빤 연기를 그 기생의 얼굴에 가지 않도록 '후' 하고 옆으로 뿜었다. 기생은 형식이가 담뱃불을 다 붙인 뒤에도 여전히 형식의 얼굴을 쳐다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들어 마당을 내다보면서 '그 눈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하구나' 하였다. 기생은 성냥개비가 다 타기를 기다리는 듯이 두 손가락으로 그 성냥개비를 돌린다. 형식은 그 기생의 머리와 등을 본다. 새까만 머리를 느짓느짓 땋고 끝에다 새빨간 왜증 댕기를 드렸다. 그 머리채가 휘임하여 내려가다가 삼각형(三角形)으로 접은 댕기 끝이 치마 허리쯤 하여 가로누웠다. 형식은 그 댕기 빛이 핏빛과 같다 하였다. 기생은 성냥개비를 뱅뱅 돌리다가 잘못하여 형식의 다리 위에 떨어트렸다. 기생은, "아이구머니!" 하면서 두 손으로 형식의 다리를 때린다. 그러나 그 불티가 형식의 무명 고의 주름에 끼어 고의에 구멍이 뚫어지고 넓적다리가 따끔한다. 형식은 그 기생이 미안하여 하기를 두려워하여 두루마기로 얼른 거기를 가리고,
"불이 꺼졌소."
하였다. 기생은 형식의 무릎에서 손을 떼고 민망한 듯이 몸을 추이면서,
"에그, 고의가 탔지요? 더우셨겠네."
하며 고개를 돌려 노파를 본다. 노파는 빙그레 웃으면서,
"계향아, 너는 그저 어린애로구나!"
하였다. 노파는 확실히 이 기생의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깨끗한 영혼을 보았다. 그러고 형식이가 그 어린 기생을 보는 눈에는 조곰도 더러운 욕심이 없다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흔히 보지 못하던 종류의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형식이가 이 어린 기생에게 대하여 '하시오' 하고 존경하는 말을 쓰던 것이 처음에는 시골뜨기와 같고 무식한 듯하더니 도리어 점잖고 거룩하다 하였다.
형식은 그 어린 기생의 말과 모양을 보고 무슨 맛나는 좋은 술에 반쯤 취한 듯한 쾌미를 깨달았다. 마치 몸이 간질간질한 듯하다. 더구나 그 기생이 자기의 무릎에 손을 짚을 때와 불을 떨어뜨리고 그 조고마한 손으로 자기의 넓적다리를 가만가만히 때릴 때에는 마치 몸에 전류를 통(電流通)할 때와 같이 전신이 자릿자릿함을 깨달았다. 형식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일생에 그렇게 미묘(微妙)하고 자릿자릿한 쾌미를 깨닫기는 처음이라 하였다. 그 어린 기생의 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광선(光線)을 발하여 사람의 정신을 황홀하게 하고, 그 살에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자가 뛰어나 사람의 근육(筋肉)을 자릿자릿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생각하고, 일전 선형과 마주앉았을 때에 깨닫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자기가 희경을 대할 때마다 맛보던 달콤한 맛과 기타 정다운 친구를 대할 때에 맛보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차 속이나 배 속이나 길가에서 처음 보는 사람 중에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자가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즐거움 중에 지금 그 어린 기생이 주는 듯한 즐거움은 처음 본다 하였다. 그러고 그 이유는 그 어린 기생의 얼굴과 태도와 마음이 아름다움과 피차에 아무 욕심도 없고 아무 수단도 없고 아무 의심도 없고 서로서로의 영(靈)과 영(靈)이 모든 인위적(人爲的)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적나라(赤裸裸)하게 융합(融合)함에 있다 하며, 또 이렇게 맛보는 즐거움은 하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거룩한 즐거움이라 하였다. 각 사람의 속에는 대개는 서로 보고 즐거워할 무엇이 있는 것이어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껍데기를(껍데기로) 그것을 싸고 싸서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므로 즐거워야 할 세상이 그만 냉랭하고 적막한 세상이 되고 맒이라 하였다. 그 중에도 얼굴과 마음이 아름답게 생기거나, 혹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조각(彫刻)을 하며, 시(詩)를 짓는 사람은 이 인생을 즐겁게 하는 거룩한 천명(天命)을 가진 자라 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나오더니,
"에그, 형님께서 오셨네."
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저들도 사람이로다' 저의들 속에도 '참사람'이 있기는 있다. 사람의 붉은 피와 사람의 따뜻한 정이 있기는 있다 하였다. '어머니'는 얼른 형식에게 초면 인사를 하고 노파의 곁에 앉으며,
"그런데, 월향이 잘 있소?"
"에그 저런, 나는 형님의 안부도 묻기를 잊었네."
하고 '두터운 듯'한 눈시울을 잠깐 움직이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잊은 것이 아니라, 잊은 것보다 더욱 정답다' 하였다.
60
노파는 새로이 눈물을 흘리면서 영채의 말을 하였다. 영채가 청량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강간을 당할 뻔한 일과,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입술을 물어뜯고 울던 일과, 그 이튿날 아침에 자기가 자는 데 들어와서 평양에 갈 말을 하던 것과, 차를 탈 때에 자기에게 편지 한 장을 주었고 그 편지에는 이러이러한 말을 썼던 것과, 오늘 아침에 평양경찰서에 와서 물어 보던 일을 말하고 나중에,
"그런데 그 이형식이라는 이가 이 어른이구나" 하고 손으로 형식을 가리키며 '어머니'의 어깨에 쓰러져 운다. 어머니와 계향도 이야기를 들을 때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이야기가 끝나매 솰솰 흐르기 시작하며, 눈물로 잘 보이지 아니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형식을 본다. 형식은 의외로 생각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계향은 몰라도 '어머니'는 영채의 말을 들으면 와락 성을 내며 '미친년! 죽기는 왜 죽어!' 할 줄로 생각하였었다. 그랬더니 영채의 죽었단 말을 듣고 슬피 우는 양을 보매 그 따뜻한 인정은 자기와 다름이 없다 하였다. 그러고 지금껏 기생이라면 자기와는 전혀 정신상태가 다른 한 짐승과 같은 하등 인종으로 알던 것이 부끄럽게 생각된다. 어머니는 한참이나 울더니 코를 풀며,
"원래 월향이가 마음이 꼭하였습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월화와 친해서 밤낮 월화의 말만 들었으니까, 꼭 마음이 월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그런 줄을 못 알아보고 월향더러 손을 보라 한 것이 잘못이지" 하고, "지나간 일을 어찌하겠소. 울지 마오."
하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눈물 흘리는 양을 아니 보이려 하여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피운다. 노파도 코를 풀면서,
"내니 십 년이나 제 딸과 같이 기른 것을 미워서 그랬겠나. 저도 차차 낫살이 많아 가고…… 평생 기생 노릇만 할 수도 없을 터이니까 어디 좋은 자리를 구하여 일생 편히 살 만한 곳에 보낼 양으로 그랬지. 그런데 김현수라는 이는 부자요, 남작의 아들이요, 하기로 그리로 보내면 저도 상팔자겠다 하고 그랬지."
하며 눈물을 씻는다. 형식은 혼자 놀랐다. 노파의 '평생 기생 노릇만 할 수도 없으니까' 하는 말을 듣고, 그러면 김현수에게 억지로 붙이려 한 것이 영채의 일생을 위하는 뜻이던가 하였다. 노파가 영채를 죽인 것이 다만 천 원 돈을 위하여 한 악의(惡意)가 아니요, 영채의 일생을 위하여 한 호의(好意)인가 하였다. 그러면 영채를 죽인 노파의 마음이나 영채를 구원하려 하는 자기의 마음이나 필경은 같은 마음인가 하였다. 그러면 필경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표준과 사상이 다르므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인가 하였다. 이때에 어머니가 형식에게 극히 은근하게,
"이주사께선들 얼마나 슬프시겠소. 그러나 그것도 다 전생의 연분이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나요. 세상이란 그렇지요."
하고 고개를 돌려 노파에게,
"자 울지 마오. 다 전생의 연분이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나? 시장하시겠소. 조반이나 먹읍시다."
하고 빨떡 일어나면서 혼자말로,
"어쩌나, 장국밥을 시켜 올까, 집에서 밥을 지으랄까?"
하고 머뭇머뭇하더니 획 밖으로 나간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네의 인생관이로구나. 인생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슬픈 일을 다 전생의 인연이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한참 눈물을 흘리고는 곧 눈물을 씻고 단념한다. 그네의 생각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미련한 자의 하는 일이니 잠깐 눈물을 흘리다가 얼른 눈물을 씻고 마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네는 모든 일의 책임을 다 '전생의 인연과 팔자'에 돌리지, 결코 사람에게 돌리지 아니한다. 영채가 기생이 된 것이나 김현수에게 강간을 받은 것이나, 또는 대동강에 빠져 죽은 것이나 다 그 책임은 전생의 인연에 있는 것이요, 결코 노파에게나 영채에게나 또는 김현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따라서 영채가 정절을 지키는 것도 영채라는 사람이 특별히 좋아 그런 것이 아니요, 영채라는 사람의 전생의 연분이 그러하여 자연히 또는 아니하지 못하게 정절을 지킴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네가 보기에 특별히 좋은 사람도 없고 특별히 좋지 못한 사람도 없고, 다 전생의 인연과 팔자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네의 인생관과 형식의 인생관이 얼마큼 일치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인생관의 근본적 차이점(根本的 差異點)은 이러하다. 형식은,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個人) 또는 사회(社會)의 노력으로 개인이나 사회가 개선(改善)될 수 있고 향상(向上)될 수 있다 하고, 그네는 모든 일의 책임이 전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니 다만 되는 대로 살아갈 따름이요, 사람의 의지(意志)로 개선함도 없고 개악(改惡)함도 없다 한다. 형식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혼잣말로, '옳지! 이것이 조선 사람의 인생관(人生觀)이로구나' 하였다. 그러나 노파는 '어머니' 모양으로 잠깐 눈물을 흘리다가 얼른 눈물을 그치지 아니한다. 노파는 '세상'을 보는 외에 '사람'을 보았다. 영채의 따끈따끈한 입술의 피가 자기의 손등에 떨어질 때에 노파는 '사람'을 보았다. 노파는 이번 일의 책임을 전혀 인연과 팔자에 돌리지 못한다. 노파는 영채를 죽인 책임이 자기와 김현수에게 있는 줄을 알고 영채가 정절을 굳게 지킨 것이 영채의 속에 있는 '참사람'의 힘인 줄을 알았다. 노파는 이제는 모든 일의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노파는 '잠깐 울다가 얼른 눈물을 그치'지는 못한다. 노파의 이 눈물은 일생에 흐를 눈물이로다.
계향이가 형식의 무릎에 몸을 기대고 눈물로 빨개진 눈으로 형식을 물끄러미 보며,
"형님이 죽었을까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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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시가 넘어서 영채는 집에 돌아왔다. 형식은 영채의 집 문 밖까지 왔다가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청량리로서 다방골까지 오는 동안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고, 서로 얼굴도 보지 아니하였다. 차마 말을 할 수도 없고, 서로 얼굴도 볼 수가 없었음이라. 두 사람은 기쁜 줄도 슬픈 줄도 모르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도 생각지도 아니하였다. 두 사람은 생각이 많기는 많으면서도 또한 아무 생각이 없음과 같았다. 줄여 말하면 두 사람은 아무 정신도 없이 집에 돌아온 것이라.
영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리를 내어 울며 쓰러졌다. 노파는 저편 방에서 잠이 들어 있다가 울음 소리를 듣고 치마도 아니 입고 뛰어나와 영채의 방문 밖에 와서 영채의 울어 쓰러진 양을 보고,
"왜 늦었느냐, 왜 우느냐?"
하면서 영채의 찢어진 옷을 보았다. 그러고 고개를 끄덱끄덱하며 빙긋이 웃었다. '영채가 오늘은 서방을 맞았구나' 하였다. 자기도 열오륙 세 적에는 영채와 같이 누구를 위하는지 모르게 정절을 지키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민감사의 아들에게 억지로 정절을 깨트림이 되던 일을 생각하였다.) 자기도 그때에 대어드는 민감사의 아들을 팔로 떠밀다가 '이년!(괘씸한 년!)' 하는 책망을 듣고 울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는 자기는 기쁘게 남자를 보게 된 것을 생각하였다. 또 같은 남자와 오래 있기보다는 가끔 새로운 남자를 대하는 것이 더 즐겁던 것도 생각하였다. '나는 열아홉 살 적에 적어도 백 명은 남자를 대하였는데' 하고 영채가 오늘에야 비로소 남자를 대하게 된 것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러고 영채가 지금까지 남자를 대하지 아니함으로 얼마큼 교만한 마음이 있어 항상 자기를 멸시하는 빛이 있더니, 이제는 영채도 자기에게 대하여 큰소리를 못 하리라 하고 또 한번 빙긋이 웃었다.
"치마를 왜 찢겨? 치마를 찢기도록 반항할 것이 무엇이어?"
하고 노파는 흐득흐득 느끼는 영채의 등을 보며 생각한다. 못생긴 김현수가 영채에게 떠밀치우던 양과 더 못생긴 배명식이가 떠밀치고 악을 부리는 영채의 팔을 잡아 주던 양과, 영채가 이를 빠드득 하고 갈던 양을 생각하고 노파는 또 한번 웃었다. '못생긴 년! 저마다 당하는 일인데' 하고 노파는 영채가 아직 철이 나지 못하여 그러함을 속으로 비웃었다. '남작의 아들!' '그 좋은 자리에!' 하고, 영채가 아직 철이 아니 나서 '좋은 자리'를 몰라보는 것이 가엾기도 하고 가증하기도 하다 하였다. '내가 젊었더면' 하고 시기스럽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누가 나를 돌아보아야지' 하고 늙은 것이 분하기도 하였다. '나는 저 못생긴 영감쟁이도 좋다고 하는데, 젊은 사람…… 게다가 남작의 아들을 마다고' 하는 영채가 밉기도 하였다. 그러고 지나간 사오 년 동안 영채가 밤에 '손님을 치렀더면, 일년에 백 명씩을 치르더라도 한번에 오 원 치고 오백 명에 이천오백 원쯤은 더 벌었을 것을, 내가 약하여 저년의 미련한 고집을 들어주었구나' 하고 영채를 발길로 차고도 싶었다. 그 동안 영채를 공연히 먹여 주고 입혀 준 것이 한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손을 치르기 시작하였는데' 하고 여간 '천 원' 돈에 영채를 김현수에게 파는 것이 아깝다. 이대로 한 이삼 년 더 두고 이전에 밑진 것을 봉창하리라 하였다. '옳지, 그것이 상책이다' 하고 또 한번 웃었다. 만일 김현수의 첩으로 팔더라도 이번에는 '이천 원'을 청구하리라. 김현수가 이제는 이천 원이 아니라 이만 원이라도 아끼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옳다, 그것이 좋다. 영채를 오래 두면, 혹 병이 들는지도 모르니, 약값을 없이하고, 혹 송장을 치르는 것보다 한꺼번에 이천 원을 받고 팔아 버리는 것이 좋다 하였다. 내일 아침에는 식전에 김현수가 오렷다. 오거든 그렇게 계약을 하리라 하고 또 한번 웃었다.
노파는 영채가 점점 더욱 느끼는 양을 보았다. 그러고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무서운 마음이 생겼다. 한번 평양에 있을 때에 김윤수의 아들이 억지로 영채의 몸을 범하려다가 영채가 품에서 칼을 내어 제 목을 찌르려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후부터 김윤수의 아들이 '독한 계집년!' 하고 다시 오지 아니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노파는 얼른 영채의 방 안을 둘러보고 또 영채의 손을 보았다. 혹 칼이나 없는가 하고, 그러고 노파의 머리에는 '칼', '아편', '우물', '한강'이란 생각이 휙휙휙 돌아간다. 노파는 소름이 죽 끼쳤다. 그러고 영채를 보았다. 영채는 두 손으로 제 머리채를 감아쥐었다. 영채의 등은 들먹들먹한다. 노파는 눈이 둥그래졌다. 영채는 벌떡 일어나 시퍼런 칼을 뽑아 들고 자기에게 달려들어 '이년아! 이 도둑년아!' 하고 자기의 가슴을 푹 찌르고 칼을 둘러 자기의 갈빗대가 부걱부걱 하고 소리를 내는 듯하다. 또 영채가 그 칼을 뽑아 자기의 목을 찌르니 빨간 피가 콸콸 솟아 자기의 얼굴과 팔에 뿌려지는 듯하다. 노파는 또 한번 흠칫하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노파는 가만히 영채의 문 안에 들어섰다. 영채는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말로,
"월화 형님! 월화 형님!"
하며 빠드득 이를 간다. 노파는 흠칫하고 도로 문 밖에 나섰다. '영채를 달래자'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불쌍하구나' 하였다. '영채를 꼭 안아 주자' 하였다. '팔 년 동안이나 길러 온 내 딸이로구나!' 하였다. 그러고 빙그레 웃으며,
"월향아! 얘, 월향아!"
하면서 문 안에 들어갔다.
42
"얘, 월향아!"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파는 영채의 곁에 웅크리고 앉아서 영채의 등을 흔들며,
"얘, 월향아! 왜 우느냐?"
하였다. 영채는 고개를 들어 노파를 보았다. 그 치마도 아니 입은 두 다리와 뚱뚱한 몸뚱이가 구역이 날 듯이 더럽게 보인다. 더구나 그 음흉하고도 간사하여 보이는 눈이 더욱 불쾌하다. 저 노파는 내 피를 빨아먹고 저렇게 뚱뚱하여졌구나. 내가 칠 년간 갖은 고락을 다 겪은 것도 저 노파 때문이요, 내가 십구 년 동안 지켜 오던 정절을 이렇게 더럽히게 됨도 저 노파 때문이로구나. 이년의 할멈쟁이를 빠싹빠싹 깨물고 씹어 주고 싶구나 하였다. 오늘 나를 청량리에 보낸 것도 저 노파의 꾀로구나. 저 노파가 내가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 나를 청량리에 보내었구나, 하고 원망스럽게 노파를 보았다. 노파는 피가 선 영채의 눈을 보고 무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억지로 참고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웬일이냐, 네 입에 피가 묻었구나. 입술이 터졌느냐?"
영채는 이것이 다 너 때문이로다 하면서,
"내가 깨물었소! 뜯어먹을 양으로 깨물었소! 남들이 내 살을 다 뜯어먹는데, 나도 내 살을 뜯어먹을 양으로 깨물었소!"
이 말을 할 때에 영채는 노파의 두텁게 생긴 입술을 깨물어뜯고 싶었다. 노파는 곁에 있는 수건을 집어 들고 영채의 목에 팔을 걸며,
"아프겠구나. 피를 죄 씻자."
한다. 노파의 마음에는 진정으로 영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난다. 영채는 노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고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조곰은 남았구나' 하면서, 노파가 수건으로 자기의 입에 피를 씻는 것을 거절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고 저 노파의 눈에도 눈물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영채가 칠 년 동안이나 노파와 함께 있으되 아직 한 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한번 노파의 어금니에 고름이 들어서 사흘 동안이나 눈물을 흘려 본 일이 있으나, 그 밖에 누구를 불쌍히 여긴다든가, 또는 제 신세를 위하여서 흘리는 눈물을 보지 못하였다. 영채는 노파의 눈물을 보고 저 눈물 맛은 쓰고 차리라 하였다. 영채는 물어뜯긴 (입술이 아픈 줄도 모른다. 노파는) 입술이 아플까 보아서 부드러운 명주 수건으로 가만가만히 피를 씻는다. 씻으면 또 나오고 씻으면 또 나오고 깊이 박힌 두 앞니빨 자국으로 새빨간 핏방울이 연하여 솟아나온다. 명주 수건은 그만 피로 울긋불긋하게 되고 말았다. 노파는 '휘' 하고 한숨을 쉬며 그 피 묻은 수건을 (물에 비추어 본다. 영채도 그 수건을) 보았다. '저것이 내 피로구나. 저것이 내 부모께 받은 피로구나' 하였다. 그러고 치마 앞자락이 찢어진 것을 생각하고, 아까 청량리 일을 생각하고, '우후! 이 피가 이제는 더러운 피가 되었구나' 하고 노파에게서 피 묻은 수건을 빼앗아 입으로 빡빡 찢으며 또, '이 피가 더러운 피로구나, 더러운 피로구나!' 하고 몸을 우둘 떤다. 영채의 눈앞에는 아까 청량리에서 만나던 광경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김현수의 그 짐승 같은 눈, 그 곁에 서서 땀내 나는 손수건으로 영채의 입을 틀어막던 배명식의 모양, 배명식이가 영채의 두 팔을 꽉 붙들 때에 미친 듯한 김현수가 두 손으로 자기의 두 귀를 꽉 붙들고 술냄새와 구린내 나는 입을 자기의 입에 대던 모양, '이 계집을 비끄러맵시다' 하고 김현수가 자기의 두 발을 붙들고 배명식이가 눈을 찡긋찡긋하며 자기의 두 팔목을 대님짝으로 동여매던 모양, 그러한 뒤에, '이년, 이 발길년! 이제도' 하고 김현수가 껄껄 웃던 모양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영채는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발버둥을 치며,
"칼을 주시오! 칼을 주시오! 이 입술을 베어 내어 버리렵니다. 칼을 주시오!"
하고 운다.
노파는 영채를 껴안으며,
"얘, 얘, 월향아! 정신을 차려라, 정신을 차려!"
하고 노파의 눈에 아까 고였던 눈물이 영채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얘, 월향아! 참으려무나, 참아."
영채의 몸은 추워하는 사람 모양으로 떨린다. 영채는 또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따끈따끈한 핏방울이 영채의 가슴에 있는 노파의 손등에 떨어진다. 노파는 얼른 영채의 어깨 위로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영채의 입술에서는 샘물 모양으로 피가 솟는다. 앞니빨에 빨갛에 핏물이 들고 이빨 사이로 피거품이 나와서는 뚝뚝뚝 떨어진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과 뺨을 가리어 그림자에 영채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 노파는 영채의 가슴 안았던 팔을 풀어 영채의 목을 안고 영채의 뺨에 자기의 뺨을 비볐다. 영채의 뺨은 불덩어리와 같이 덥다. 노파는 흑흑 느끼며,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잘못하였다. 월향아, 참아라, 내가 죽일 년이로다."
하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노파는, '월향이가 이처럼 마음이 굳은 계집인 줄은 몰랐구나' 하였다. 내가 잘못하여 불쌍한 월향의(월향이) 피를 흘리는구나 하였다. '아아 어여쁜 월향! 내 딸 월향이' 하고 노파는 마음속으로 합장 재배하였다. 노파는 더욱 울음 소리를 내며 영채의 뺨에다 제 뺨을 비비고 영채의 향내 나는 머리카락을 입으로 씹었다. 영채의 찢기고 구겨진 치마 앞자락에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영채가 이빨로 물어뜯은 피 묻은 명주 수건 조각이 영채의 발 앞에 넘너로하여 전등빛에 반작반작한다. 아롱아롱한 자루에 넣어 비스듬히 벽에 세운 가얏고가 웬일인지 두어 번 스르릉 운다. 저편 방에서 노파를 기다리던 영감쟁이가 허리띠도 아니 매고 영채의 문 밖에 와서,
"흥, 울기들은 왜?"
한다.
43
형식은 집에 돌아왔다. 노파는 형식이가 전에 없이 늦게 온 것을 보고 제 방에 누운 대로,
"왜 늦으셨어요?"
한다. 그러나 형식은 대답도 아니하고 자기의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모자도 쓴 대로 두루마기도 입은 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파는 대문을 잠그고 가만가만히 형식의 방문 앞에 와서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은 눈을 감고 앉았다. 노파는 요새에 형식에게 무슨 걱정이 있는고 하였다. 형식은 이 집에 삼 년이나 있었다. 그러므로 노파는 형식을 친자식과 같이 동생과 같이 여겼다. 이제는 형식은 자기 집에 유하는 객이 아니요, 자기의 가족과 같이 여겼다. 그러므로 부엌에서 형식의 밥상을 차릴 때에도, 이것은 내 집에 와서 돈을 주고 밥을 사먹는 손님의 밥이라 하지 아니하고, 수십 년 전에 자기의 남편의 밥상을 차리던 생각과 정성으로 하였다. 노파는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다. 노파의 이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는 형식뿐이었다. 형식도 노파를 잘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형식은 노파에게 극히 경대하는 언어와 행동을 하고 그러면서도 어머니 모양으로 친하게 정답게 하였다. 형식은 노파가 무슨 걱정을 하는 양을 볼 때에는 담배를 들고 노파의 방에 가거나, 노파를 자기의 방에 청하여다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로 노파를 위로하였다. 그러면 노파는 반드시 '그렇지요, 세상이란 그렇지요' 하고 걱정이 다 스러져 웃고는 형식에게 과일도 사다 주고 떡도 사다 주었다. 노파도 형식의 말을 들으면 무슨 근심이나 다 스러지거니와, 형식도 노파를 위로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에 기쁨을 깨달았다. 혹 형식이가 일부러 불쾌한 일이 있는 체, 성나는 일이 있는 체하면, 노파는 담배를 들고 형식의 방에 와서 열심으로 형식을 위로하였다. 노파가 형식을 위로하는 말은 대개는 형식이가 노파를 위로하던 말과 같았다. 대개 노파는 이 세상에 친구도 없고, 글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 지식을 얻을 데는 형식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노파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개 형식의 위로하는 말에서 얻은 것이라. 형식의 말은 노파에게 대하여는 철학(哲學)이요, 종교(宗敎)였다. 그러나 노파는 이것을 형식에게서 얻은 줄로 생각지 아니하고 이것은 제 속에서 나오는 지식이거니 한다. 이는 결코 남의 은혜를 잊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게서 얻은 줄을 모르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노파가 형식을 위로하려 할 때에는 첫마디만 들으면 형식은 노파의 하려는 말을 대강은 짐작하고 혼자 빙긋이 웃곤 하였다. 그러나 열 번에 한 번이나 혹은 스무 번에 한 번씩 노파의 특유한 사상도 있었다. 노파는 극히 둔하나마 추리력(推理力)이 있었다. 형식에게서 들은 재료로 곧잘 새로운 명제(命題)를 궁리하여 내는 수도 있었다.
노파의 하는 말은 자기에게 들은 것인 줄은 알면서도 같은 말이라도 노파의 입으로서 나오면 새로운 맛이 있었다. 다 같이 '세상이란 다 그렇고 그렇지요' 하는 말이라도 형식의 입에서 나올 때와 노파의 입에서 나올 때와는 뜻과 맛이 달라진다. 이러므로 형식은 노파에게서 제가 하던 말을 도로 들으면서도 큰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노파가 특별히 발명한 진리인 듯이 형식의 하던 말을 낭독할 때에는 형식은 웃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아무려나 노파도 형식을 좋아하고 형식도 노파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형식도 노파를 불쌍히 여기고 노파도 형식을 불쌍히 여겼다. 노파는 젊었을 때에 어떤 양반집 종이었다. 그러다가 그 양반집 대감의 씨를 배에 받아 한참은 서슬이 푸르렀었다. 그 대감의 사랑은 극진하여 동무들도 자기를 우러러보고 자기도 동무들에게 자랑하였었다. 그러나 노파는 그 늙은 대감에게 만족지 못하여 몰래 그 대감집에 다니는 어떤 젊고 어여쁜 문객과 밀통하다가 마침내 대감에게 발각되어, 그 문객은 간 곳을 모르게 되고 자기는 인두로 하문을 지짐이 되어 그만 사오 삭의 영화가 일조에 한바탕 꿈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노파는 벼슬하는 양반의 세력 좋음을 잘 보았다. 그의 생각에 세상에 벼슬을 못 하는 남자는 불쌍한 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노파는 삼 년 전부터 형식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웃으며,
"나와 같은 사람에게 누가 벼슬을 주나요?"
하였다. 노파는 형식의 재주 있음을 알고 사람이 좋음을 안다. 그러므로 형식은 마땅히 벼슬을 하여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노파는 형식을 찾아오는 금줄 두르고 칼 찬 사람들을 볼 때마다 '왜 우리 형식 씨는 벼슬을 아니하는고' 하고 혼자 형식을 위하여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 금줄 두르고 칼 찬 손님이 돌아가면 으레,
"왜 나리께서는 벼슬을 아니하셔요?"
한다. 그때마다 형식은,
"내게야 누가 벼슬을 주나요?"
하고 웃는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하여도 형식이가 듣지 아니함을 보고 노파는 일년 전부터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형식에게 벼슬하는 친구들이 찾아오는 양과, 여러 사람들이 '이선생'이라고 부르는 양을 보고 '대체 형식도 벼슬은 아니할망정 저 사람들만은 하거니' 하고 혼자 위로한다. 그래서 근래에는 형식을 부를 때에 '나리'라 하지 아니하고 '선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벼슬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도 아직도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
노파는 한참이나 문 밖에 서서 형식의 하는 양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마 무슨 생각을 하는 게지' 하고 가만가만히 제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못 들고 가끔가끔 담배를 피워 물고는 머리를 내어밀어 형식의 방을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노파가 한참을 자고 나서 건너다볼 적에도 형식의 방에는 아직 불이 아니 꺼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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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노파가 문 밖에 와 섰던 줄도 모르고 영채를 생각하였다. 청량사에서 보던 광경을 생각하였다. 김현수가 영창을 떠들고 일어나던 것과 영채의 입술에 피가 흐르던 것과 영채의 옷이 흘러내려 하얀 허리가 한 뼘이나 드러났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우선이가 '모 다메다' 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영채는 과연 김현수에게 몸을 더럽힘이 되었는가 하고 생각을 하였다. 우선이가 창으로 엿보고 '모 다메다' 하던 것이 무슨 뜻인가 하였다.  그것이 '벌써 영채의 몸은 더러워졌다' 하는 뜻일까, 또는 우선이가 다만 더러워질 뻔하던 것을 보고 그러하였음이 아닐까. 형식은 자기가 발길로 영창을 차기 전에 한번 창으로 엿보더면 좋을 것을 하였다. 암만하여도 우선의 '모 다메다' 하던 뜻을 '영채의 몸은 먼저 더러워졌다' 하는 뜻으로 해석하기는 싫다. 마침 더러워지려 할 때에 하늘의 도움으로 나와 우선이가 영채를 구원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렇다! 하고 형식은 안심하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손발을 동여맨 것이 무슨 뜻일까. 그 치마와 바지가 찢어지고 다리가 드러났음이 무슨 뜻일까. 또 영채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입술을 물어뜯은 것이 무슨 뜻일까. 그러나(그러고) 나에게 대하여 아무러한 말도 아니한 것이 무슨 뜻일까. 아아, '모 다메다' 하던 우선의 말이 참말이 아닐까. 옳다! 옳다! 영채의 몸은 더러워졌구나. 영채의 몸은 김현수에게 더러워졌구나 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서 공중에 두어 번 내어둘렀다. 그러고 궐련 한 대를 붙여서 흡연도 아니하고 폭폭 빨았다. 그 담배 연기가 눅눅하고 바람 없는 공기 중에 퍼질 줄을 모르고 형식의 후끈후끈하는 머릿가로 물결을 지며 돌아간다. 형식은 반도 다 타지 못한 궐련을 마당에 홱 집어 내던지고 두 손으로 머릿가로 뭉게뭉게 돌아가는 담배 연기를 홰홰 젓는다. 담배 연기는 혹은 빠르게 혹은 더디게 길을 잃은 듯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천장에서 자던 파리가 놀라 왕왕하더니 도로 소리가 없어진다. 형식은 또 고개를 숙이고 그린 듯이 앉았다.
대체 영채는 지금까지 처녀였을까 하였다. 칠팔 년을 기생으로 지내면서 처녀로 있을 수가 있을까 하였다. 또 매음하지 아니하고 기생 노릇을 할 수가 있을까 하였다. 한두 번은 모르되, 열 번 스무 번 남자가 육욕과 돈으로 후릴 때에 영채라는 계집아이가 족히 정절을 지켰을까 하였다. 설혹 혈통이 좋고 어려서 내칙과 열녀전을 배웠다 하더라고 그것을 가지고 능히 칠팔 년간 수십 번, 수백 번의 힘센 유혹을 이길 수가 있을까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지금까지 읽어 오던 소설의 계집 주인공과 신문이나 말로 들어 온 계집의 일을 생각하여 보았다. 옛날 지나의 소설이나 우리나라 이야기책을 보건대 과연 송죽 같은 절개를 지켜 온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 중에 있는 일이다. 현실에 그러한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하였다. 옛날 소설에는 몸이 기생이 되어서도 팔에 앵혈이 지지 아니했다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 그러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십팔구 세나 된 여자가 매양 청구하여 오는 남자를 거절할 수가 있을까. 설혹 영채가 정절이 세상에 뛰어나 능히 모든 유혹을 다 이긴다 하더라도 그 동안에 김현수와 같은 사람이 없었을까. 김현수와 같은 사람은 서울에만 있을 것이 아니요, 또 서울에도 한 사람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청량사에서 당하던 일과 같은 일을 여러 번 당하지 아니하였을까. 그렇다! 영채는 도저히 처녀 될 리가 만무하다 하고, 형식은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왔다갔다하였다.
형식은 다시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고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였다. 형식은 과연 오늘날까지 일찍 계집을 본 적이 없었다. 이십사 세가 되도록 계집을 본 적이 없다 하면 극히 정결한 청년이라 할지라. 그러나 형식은 진실로 뜻이 굳고 마음이 깨끗하여 이러한 정절을 지켜 온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찍 동경에 있을 때에 어떤 여자가 주인 노파를 통하여 형식에게 사랑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형식은 주저함도 없이 그 청구를 거절하였다. 그 후에도 두어 번 청구가 있었으나 여전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형식의 마음이 과연 이처럼 깨끗하였던가. 형식의 양심의 힘이 과연 이렇게 굳세었던가. '그게 말이 되오? 못 하지요!' 하고 굳세게 거절한 뒤에 형식의 마음은 도리어 이 거절한 것을 후회하였다. '내가 못생겼다. 왜 거절을 하여!' 하고 다시 청구를 하거든 슬그머니 못 견디는 체하리라 하였다. 즉 이 청구를 거절한 것은 형식의 마음이 아니요, 형식의 입이었다. 형식은 '어떠시오?' 하고 빙그레 웃는 그 주인 노파의 말에 '좋소' 하기가 부끄러워서 '아니오!' 한 것이나, 그 주인 노파가 만일 형식의 '아니오!'를 '좋소'로 들어 주어, 어느 날 저녁에 그 여자를 데려다가 형식의 방에 넣어 주었더면 형식은 그 노파를 '괘씸하다' 하고 원망하였을까. 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후에 하루 저녁은 그 여자가 주인 노파의 방에 와서 잤다. 그날 형식이가 자리를 펼 때에도 노파가 슬그머니 눈짓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소리를 가다듬어, '아니오!' 하였다. 그러고는 그 노파가 이 '아니오!'를 반대로 들어 주기 위하여 유심하게 웃었다. 노파도 웃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누워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그 여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혹 일도 없이 뒷간에 오르내리면서 헛기침도 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형식은 주인 노파가 너무 정직한 것을 한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고개를 흔들며 한번 더,
"처녀 될 리가 만무하다."
하였다.
45
형식은 노파가 건넌방에서 담뱃대 떠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또 궐련을 피우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면 어떡할까. 영채를 어떻게 할까.
은인의 따님인 것을 위하여 내 아내를 삼을까. 그러하는 것이 내 도리에 마땅할까. 형식의 눈앞에는 어젯저녁 바로 이 방에 앉았던 영채의 모양이 보인다. '아버지는 옥중에서 굶어 돌아가시고……' 할 때의 눈물 그렁그렁한 영채의 얼굴은 과연 어여뻤다. 그때에 형식은 영채를 대하여 황홀하였었다. 그러고 영채와 회당에서 혼인할 광경과 영채와 자기와의 사이에 어여쁘고 튼튼한 아들과 딸이 많이 날 것도 상상하였었다. 형식은 지금, 어젯저녁에 영채가 앉았던 자리를 보고 그때의 광경과 그때의 상상하던 바를 생각한다. 그러고 형식은 한참이나 황홀하였다.
'그러나!' 하고 형식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영채는 처녀가 아니다. 설혹 어저께까지는 처녀라 하더라도 오늘 저녁에는 이미 처녀가 아니로다' 하고 청량사의 광경을 한번 다시 그렸다. 어젯저녁에는 행여나 영채가 어떠한 귀한 가정의 거둠이 되어 마치 선형이나 순애 모양으로 번뜻하게 여학교를 졸업하고 순결한 처녀로 있으려니 하였다. 만일에 기생이 되었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켰으려니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채는 처녀가 아니로다 하고 형식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한참이나 있었다.
또 건넌방에서 노파의 담뱃대 떠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또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을 돌아보았다. 이때에 형식의 머리에는 아까 김장로의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여 앉았던 생각이 난다. 그 머리로서 나는 향내, 그 책상을 짚고 있던 투명할 듯한 하얀 손가락, 그 조곰 구기고 때가 묻은 옥색 모시 치마, 그 넓적한 옥색 리본, 그 적삼 등에 땀이 배어 부드럽고 고운 살이 말갛게 비치던 모양이 말할 수 없는 향기와 쾌미를 가지고 형식의 피곤한 신경을 자극한다. 또 이것을 대할 때에 전신이 스르르 녹는 듯하던 즐거움과, 세상만사와 우주에 만물이 모두 다 기쁨으로 빛나고 즐거움으로 노래하는 듯하던 그 기억이 아주 분명하게 일어난다. 형식은 선형을 선녀 같은 처녀라 한다. 선형에게는 일찍 티끌만한 더러운 행실과 티끌만한 더러운 생각도 없었다. 선형은 오직 맑고 오직 깨끗하니, 마치 눈과 같고 백옥과 같고 수정과 같다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고 또 눈을 감았다.
형식의 앞에는 선형과 영채가 가지런히 떠 나온다. 처음에는 둘이 다 백설 같은 옷을 입고 각각 한 손에 꽃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형식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손길을 펴서 형식의 앞에 내어밀었다. 그러고 두 처녀는 각각 방글방글 웃으며, '형식 씨! 제 손을 잡아 주셔요, 녜' 하고 아양을 부리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형식은 이 손을 잡을까 저 손을 잡을까 하여 자기의 두 손을 공중에 내어들고 주저한다. 이윽고 영채의 모양이 변하여지며 그 백설 같은 옷이 스러지고 피 묻고 찢어진, 이름도 모를 비단 치마를 입고, 그 치마 째어진 데로 피 묻은 다리가 보인다. 영채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입술에서는 피가 흐른다. 영채의 손에 들었던 꽃가지는 금시에 간 데가 없고, 손에는 더러운 흙을 쥐었다. 형식은 고개를 흔들고 눈을 떴다. 그러나 여전히 백설같이 차리고 방글방글 웃는 선형은 형식의 앞에서 손을 내어밀고, '형식 씨! 제 손을 잡으세요, 녜' 하고 고개를 잠깐 기울인다. 형식이가 정신이 황홀하여 선형의 손을 잡으려 할 때에 곁에 섰던 영채의 얼굴이 귀신같이 무섭게 변하며 빠드득 하고 입술을 깨물어 형식을 향하고 피를 뿌린다. 형식은 흠칫 놀라 흔들었다.
형식은 다시 일어나 방 안으로 왔다갔다 거닐다가 뒤숭숭한 생각을 없이하노라고 학도들이 부르는 창가를 읊조리며 마당에 나왔다. 아까 소낙비 지나간 자취도 없이, 하늘은 새말갛게 맑고 물 먹은 별이 졸리는 듯이 반작반작한다. 남쪽이 훤한 것은 진고개의 전등빛이라 하였다.
형식은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반작반작하는 별에서 내려오는 듯한 서늘한 바람이 사람의 입김 모양으로 이따금 이따금 형식의 더운 낯으로 스쳐 지나간다. 형식의 물끓듯 하던 가슴은 얼마큼 서늘하게 된 듯하다.
저 별들은 언제부터나 저렇게 반작반작하는가. (또 무엇 하러 저렇게 반작반작하는가) 누가 이 별은 여기 있게 하고, 저 별은 저기 있게 하여 이 모양으로 있게 하였는고. 저 별과 별 사이로 보이는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허공으로 바로 날아 올라가면 어디로 갈 것인고. 형식은 동경서 유학할 때에 폐병 들린 선생에게 천문학 배우던 생각을 하였다. 그 선생이 매양,
"여러분에게 천문학자 되기는 권하지 아니하거니와, 밤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는 간절히 권하오."
하고 기침이 나서 타구에 핏덩이를 토하던 생각이 난다. 뒤숭숭한 세상 생각에 마음이 괴로울 적에 한번 끝없는 하늘과 수없는 별을 바라보면 천사만려가 봄눈 스러지듯 하는 것이라고 형식도 말로는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늘을 바라보지 아니치 못하도록 마음이 괴로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그는 그 천문학 선생의 하던 말을 깊이깊이 깨달았다. 형식은 기쁨을 못 이기는 듯,
"무궁한 시간의 일점과 무궁한 공간(空間)의 일점을 점령한 인생에게 큰일이라면 얼마나 크고 괴로운 일이라면 얼마나 괴로우랴."
하였다. 그러고 한번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고 고개를 숙여 기도를 올렸다.
46
형식은 석점이나 지나서야 잠이 들어 아침 아홉시가 되도록 잤다. 형식은 몹시 몸과 정신이 피곤하여 반쯤 잠을 깨고도 여러 가지로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노파는 벌써 조반을 차려 놓고 사오 차나 형식의 방을 엿보았다. 형식이가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자리도 아니 펴고 자는 것을 보고 노파는 '웬일인고?' 하였다. 그러나 노파는 어젯저녁 형식이가 늦게 잔 줄을 알므로 깨우려도 아니하고 모처럼 만들어 놓은 장찌개가 식는 것을 근심하였다. 이때에 신우선이가 대팻밥 모자를 제쳐 쓰고 단장을 두르며 들어오더니 노파를 보고,
"편안하시오. 이선생 있소?"
하고 쾌활히 점잖이 묻는다.
노파는 신우선을 잘 안다. 그러고 '시원한 남자'라고 형식을 대하여 비평한 일이 있었다. 노파는 웃고 마주 나오면서,
"어젯저녁에 늦게 돌아오셔서 새벽이 되도록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시더니 아직도 주무십니다그려. 저렇게 조반이 다 식는데."
하고 장찌개를 생각한다. 노파의 만드는 장찌개는 그다지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파는 자기가 된장찌개를 제일 잘 만드는 줄로 자신하고 또 형식에게도 그렇게 자랑을 하였다. 형식은 그 된장찌개에서 흔히 구더기를 골랐다. 그러나 노파의 명예심과 정성을 깨트리기가 미안하여, '참 좋소' 하였다. 그러나 '참 맛나오' 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이 '참 좋소'로 만족하였었다. 한번 신우선이가 형식으로 더불어 저녁을 같이 먹을 때에도 노파의 자랑하는 된장찌개가 있었다. 그때에 마침 굵다란 구더기가 신우선의 눈에 띄어 신우선은 그 험구로 노파의 된장찌개가 극히 좋지 못함을 비웃었다. 곁에 있던 형식이가 황망하게 우선의 입을 막았으나 우선은 일부러 빙긋 웃어 가며 소리를 높여 노파의 된장찌개 만드는 솜씨의 졸렬함을 공격하였다. 그때에 노파는 건넌방 툇마루에서 분한 모양으로 담배를 빨다가,
"나이 많으니깐 그렇구려."
하고 젊었을 때에는 잘 만들었었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 후로부터 노파는 우선을 '쾌활한 남자'라고 칭찬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선을 보면 여전히 친절하게 하였다. 대개 더 자기의 된장찌개를 공격할까 두려워함이러라. 우선은 형식에게 이 말을 들었음이라,
"요새는 된장찌개에 구더기나 없소?"
하고 형식의 방에 들어가 큰소리로,
"여보게, 일어나게 일어나! 이게 무슨 잠이란 말인가" 하였다. 형식은 어렴풋이 우선과 노파의 회화를 들으면서도 아주 잠을 깨지 못하였다가 우선의 큰 목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둥그런 자명종을 본다. 우선은,
"시계는 보아 무엇 하게. 열점일세. 열점이어! 자 어서 세수하고 옷 입게. 조반 먹고."
시계는 아홉점 반이었다. 형식은 우선이가 '어서 옷 입고―'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어젯저녁 생각을 하고 영채의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우선의 낯빛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줄을 깨닫고, 또 그 일이 영채의 일인 줄도 짐작하였다. 그러고 어젯저녁 자기 혼자 잠을 못 이루고 생각하던 일을 생각하였다. 형식은,
"왜 무슨 일이 있는가."
"어서 세수를 하고 조반을 먹어! 제가 할 걱정을 내가 하는데."
하고 책상 곁에 가서 영문책을 빼어 들고 초이스 독본 삼권 정도의 영어로 한자 두자 뜯어본다. 형식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우선의 낯빛을 보고 말하는 양을 보매, 대체 영채에게 관한 일이어니 하면서 잇솔을 물고 수건을 들고 나간다. 우선은 형식의 세수하러 나가는 양을 보고 '너도 걱정이로구나' 하였다. 우선은 형식의 인격이 으레 영채로 아내를 삼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로 아내를 삼으면 형식의 머릿속에 청량사 일이 늘 남아 있어 형식을 괴롭게 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형식을 괴롭게 하고 아니하게 함은 자기의 손에 있다 하였다. 대개 영채가 처녀요 아님을 아는 이는 김현수와 배명식과 자기의 삼인이 있을 따름이라. 우선은 이 비밀을 가지고 오래 두고 형식의 마음을 괴롭게 하리라. 그도 아니하면 자기가 영채를 어르다가 가만히 떨어진 분풀이를 어디다 하리요 하였다. 그러나 이는 우선의 악의에서 나옴이 아니라 어디까지든지 인생을 장난으로 알려 하는 우선의 한 희롱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 그러나 형식은 우선과 같이 세상을 장난으로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라. 형식은 어디까지든지 인생을 엄숙하게 보려 한다. 그러므로 우선은 이럭저럭 한 세상을 유쾌하게 웃고 지나면 그만이로되, 형식은 인생에서 무슨 뜻을 캐어 내려 하고 세상을 위하여 힘있는 데까지는 무슨 공헌을 하고야 말려 한다. 그러므로 형식에게는 인생의 어떠한 작은 현상(現象)이나 세상의 어떠한 작은 사건이라도 모두 엄숙하게 연구할 제목이요, 결코 우선과 같이 웃고 지내어 보내지 못한다. 우선은 이러한 형식을 일컬어 아직도 '탈속을 못 하였다' 하고, 형식은 우선을 일컬어 '세상에 무해무익한 사람'이라 한다. 그렇다고 우선은 세상의 문명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 대하여 전혀 무관언(無關焉)하냐 하면 그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선도 아무쪼록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고는 한다. 다만 그는 형식과 같이 열렬하게 세상을 위하여 일생을 버리려는 열성이 없음이니, 형식의 말을 빌건대 우선은 '개인 중심의 지나식 교육을 받은 자'요, 형식 자기는 '사회 중심의 희랍식 교육을 받은 자'라. 바꾸어 말하면, 우선은 한문의 교육을 받은 자요, 형식은 영문이나 독문의 교육을 받은 자라.
형식은 두어 번 잇솔을 왔다갔다하고 얼른 세수를 하고 들어와 거울을 보고 머리를 가른다. 우선은 까닭도 없이 이 머리 가르는 것을 미워하여 형식을 보면 매양 머리를 깎으라 하고, 이따금 무슨 전제(前提)로 그러한 결론(結論)을 하는지 '머리를 가르는 자는 무기력한 자'라 한다.
우선은,
"무슨 일이어? 응, 무슨 일이어?"
하고 된장찌개의 구더기를 골나하며(골라 가며)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형식의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방 안에서 벙글벙글 웃으면서 왔다갔다 거닐다가 형식이가 분주히 밥상을 물리기를 기다려 형식을 끌고 나간다. 노파는 밥상을 들내어 가면서 같이 나가는 두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밥상을 마루에 갖다 놓고 허리를 펴며,
"무슨 일이 있는고"
한다.
47
우선은 형식의 기뻐할 것을 상상하고 마치 누구를 전에 못 보던 좋은 구경터에 데리고 가는 모양으로 형식을 데리고 다방골 계월향의 집을 찾았다. 형식도 종각 모퉁이를 돌아설 때부터 우선이가 자기를 영채의 집으로 끌고 가는 줄을 알았다. 그러고 우선이가 자기를 이리로 끌고 올 때에는, 또 우선이가 기뻐하는 양을 보건대 무슨 좋은 일이 있는 줄도 생각하였고, 또 그 좋은 일이라 함은 아마 영채의 몸을 구원하는 일인 줄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벌써 늦었다' 하였다. 벌써 영채는 처녀가 아니라 하였다. 그러고 어젯저녁에 영채와 선형이가 하얀 옷을 입고 웃으면서 각각 한편 손을 내어밀며 '제 손을 잡아 줍시오. 녜' 하다가 영채의 몸이 문득 변하던 것도 생각하였다. 더구나 영채의 얼굴이 귀신같이 무섭게 되고,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자기의 몸에 뿌리던 것을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문 밖에 다다랐다. 우선은 형식을 보고 씩 웃으며,
"이 계월향이라는 광명등도 오늘까지일세그려."
하였다. 그러고 단장으로 그 광명등을 서너 번 때리며,
"흥 오늘 저녁에도 누가 계월향을 찾아서 놀러 올 테지. 왔다가 계월향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꼴이 장관이겠네."
하고 한번 더 단장으로 깨어져라 하고 광명등 지붕을 때리고 껄껄 웃는다. 광명등은 아픈 듯이 찌국찌국 소리를 내며 우쭐우쭐 춤을 춘다. 형식은 '깨어지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생각할 뿐이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웃지도 아니하였다. 우선은 형식의 얼굴에 기쁜 모양이 없는 것을 보고 얼마큼 낙심한 듯이 시치미떼고 크게,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른다. 행랑에서 어멈이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든지 옷을 치키며 나와,
"나리, 오십시오? 이리 오너라는 무엇이야요, 그냥 들어가시지!"
한다. 형식은 '많이 다녔구나' 하였다. 그러고 우선이도 영채의 정절을 깨트린 한 사람인가 하였으나 곧 작소하였다. 우선은 단장으로 어멈을 때리는 모양을 하면서,
"아직도 영감이라고 아니 부르고, 나리라고 불러!"
하고 넓적한 앞니를 보이며 깔깔 웃는다.
"아씨 계시냐?"
우선의 말.
"아씨께서 오늘 아침 차로 평양을 내려가셨어요!"
우선은 놀랐다. 형식도 놀랐다. 더구나 우선은 아주 낙담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왜? 무슨 일로?"
"모르겠어요, 제가 압니까? 어젯저녁 열한점이 친 다음에야 들어오시더니만…… 한참이나 울음 소리가 나더니…… 그 담에는 잠이 들어서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요…… 오늘 식전에 마님께서 구루마를 불러오라 하세요. 그래 아씨께서 어느 연회에를 가시는가…… 연회라면 퍽도 이르다…… 아마 노들 뱃놀이가 있는 게다 했지요. 했더니 아홉점 반 차로 아씨께서 평양엘 가신다구요."
하고 어멈은 아주 유창하게 말한다. 형식은 '숫보기는 아니로다' 하고 놀라면서도 그 어멈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멈의 얼굴에는 의심하는 빛이 있다. 형식은 '평양! 평양은 무엇 하러 갔는가' 하였다. 방에서 어린애가 울어 방으로 들어가려는 어멈에게 우선이가 말소리를 낮추어,
"아침에 누구 오든 않았던가?"
"아무도 아니 왔어요. 저."
하고 두어 집 건넛집을 가리키며,
"저 댁 아씨가 목욕 같이 가자고 오셨더군요."
하고 방으로 들어가
"울지 마라!"
하고 어린애의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난다. 형식은 저렇게 우리를 대하여서는 얌전하게 말하던 사람이 방에 들어가 어린애를 대하여서는 저렇게 함부로 한다 하였다. 우선은 단장으로 땅바닥에 무슨 글자를 쓰더니 형식더러,
"아무려나 들어가 보세그려. 노파에게 물어 보면 알 터이지."
하고 대팻밥 모자를 벗어 들고 앞서서 들어간다. 그러나 우선의 말소리에는 아까 쾌활하던 빛이 없다. 형식도 뒤를 따랐다. 형식은 어젯저녁 이 마당에 서서 그 노파에게 멸시당하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빙긋 웃었다. 형식은 이만큼 오늘은 냉정(冷靜)하더라. 도리어 우선이가 지금은 형식보다 더 애가 탄다.
방에는 사람이 없고 마루에 노파의 이른바 '못생긴 영감쟁이'가 무슨 이야기책을 보다 말고 목침을 베고 코를 곤다. 우선은 이 '영감쟁이'를 잘 알았다. 이 영감쟁이는 평양 외성에 어떤 부자의 자제로 시 잘 짓고 소리 잘하고 삼사십 년 전에는 평양 성내에 모르는 이 없는 오입쟁이였었다. 그러나 십유여 년 방탕한 생활에 여간 재산은 다 떨어 없애고, 속담말 모양으로 남은 것이 '뭣'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일찍 자기의 무릎에 앉히고 '어허둥둥' 하던 이 노파의 집에 식객인지 남편인지 모르는 손이 된 지가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노파와 가다가다 다투기도 하고, 혹 심히 성이 나면 '괘씸한 년' 하고 호령도 하더니, 이삼 년래로는 그도 못 하고 사흘에 한번씩 노파에게 '나가 뒈져라'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다만 껄껄 웃으며 '죄 되느니라' 할 따름이요, 반항할 생각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파는 대개는 '영감쟁이'를 친절하게 대접을 하였다. 그러고 더욱 기특한 것은, 밤에 잘 때에는 반드시 노파가 자기의 손으로 자리를 깔고, 이 '영감쟁이'를 아랫목에 누이더라.
우선은 서슴지 아니하고 구두를 신은 대로 마루에 올라서서 단장으로 마루를 울리며 누구를 부르는지 모르게,
"여보? 여보?"
하였다. 형식은 어젯저녁에 섰던 모양으로 서서 어젯저녁에 보던 모양으로 영채의 방을 보았다. 방 안의 모든 것은 그대로 있구나 하였다. 그러나 어젯저녁 모양으로 마음이 번민하지는 아니하였다.
48
우선은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구두와 단장으로 한꺼번에 마루를 쾅쾅 울리며 성난 듯이 더욱 소리를 높여,
"여보! 노파!"
하였다. '노파!' 하고 우선의 부르는 소리가 우스워 형식은 씩 웃었다. 이윽고 마당 한 모퉁이로서 노파가,
"아따, 신주사시구랴! 남 뒷간에 가 있는데 야단을 하시오?"
하고 치마고름을 고쳐 매면서 들어온다. 오다가 형식을 이윽히 본다. 어젯 저녁에 와서 '월향 씨 있소' 하던 사람이로구나 하고, 그러면 그가 '신주사의, 심부름꾼이던가' 하였다. 형식도 '네가 나를 멸시하였구나' 하였다. 노파는 형식은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닌 듯이 마루에 올라서며 아주 친근한 모양으로 우선에게,
"어떻게 일찍 오셨구려!"
하고는 발로 '영감쟁이'를 툭툭 차며 부르짖는 목소리로,
"여보, 일어나소! 손님 오셨소"
하고,
"그렇게 눕고 싶거든 땅 속에나 들어가지?"
하고 발로 '영감쟁이'의 목침을 탁 찬다. 목침은 곁에 놓인 소설책을 내던지고 저편으로 떼구랄 굴러가서 벽을 때리고 우뚝 섰다. '영감쟁이'는 센 터럭이 몇 오리가 아니 되는 빨간(맨숭맨숭한) 머리를 마루에 부딪고 벌떡 일어나며,
"응, 그게 무슨 버르장이란 말인고."
하고 우선은 본 체도 아니하고 일어나 자기의 방으로 들어간다. 형식은 그 '영감쟁이'를 보고, 자기의 죽은 조부를 생각하였다. 원래 부자던 자기의 조부도 전래하는 세간을 다 팔아 없이하고, 아들 형제는 먼저 죽고 손자인 자기는 일본에 가 있고 조고마한 오막살이에 일찍 기생이던 형식의 서조모에게 천대받던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자기의 조부는 저 '영감쟁이'보다는 고상하던 사람이라 하였다.
우선이는 급한 듯이,
"그런데 아씨가 평양을 가셨어요?"
하는 것을 대답도 아니하고 노파는 먼저 영채의 방에 들어가 우선을 보고,
"이리 들어오시구려, 집 무너지겠소?"
한다. 우선은,
"이리 들어오게그려."
하고 유심한 웃음으로 형식을 부르고 자기도 구두를 벗고 방으로 들어간다. 형식은 한 걸음 방을 향하여 나가다가 그 자개 함롱과 아롱아롱한 자루에 넣은 가얏고와 아랫목에 걸린 분홍 모기장을 보고 갑자기 불쾌한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구두를 벗으려다 말고 웃으며,
"나는 여기 앉겠네."
하고 마루에 걸어앉는다. 우선은,
"들어오게그려. 오늘부터는 자네가 이 방에 주인이니."
하고 일어나 형식의 팔을 당긴다. 형식은 갑자기 얼굴이 발갛게 된다. 우선은 '아직도 어린애로다' 하고 형식의 팔을 끈다. 노파는 우선이가 형식을 친구로 대우하는 양을 보고 한 번 놀라고 또 '오늘부터는 자네가 주인일세' 하는 것을 보고 두 번 놀라 눈이 둥그래졌다가 워낙 능란한 솜씨라 선웃음을 치며 일어나,
"나리 들어오십시오. 나는 누구신 줄도 모르고…… 어젯저녁에는 실례하였습니다……. 너무 검소하게 차리셨으니까"
한다. 형식은 부끄럽고 가슴이 설레는 중에도 '흥,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하면서 권하는 대로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 앉으며 노파의 시선(視線)을 피하는 듯이 방 안을 한번 더 돌아보았다. 모기장의 주름이 어제와 같으니, 영채가 어젯저녁에는 모기장을 아니 치고 잤구나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저 벽에 기대어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하였는가 하매 자연히 마음에 슬픔이 생긴다. 형식의 눈은 모기장으로서 문 달린 벽으로 돌았다. 형식은 멈칫하였다. 그 벽에는 찢어진 치마가 걸렸다. 형식의 머릿속에는 청량리 광경이 빙그르 돈다. 그 치마 앞자락에는 피가 묻었다. 형식은 남모르게 떨리는 숨소리를 죽이고 입술을 꼭 물었다. 그러고 '나도 영채 모양으로 입술을 무는구나' 하고 참(차마 더 보지 못하여 찢어진) 치마에서 눈을 떼었다. 동대문 오는 전차 속에서 영채가 치마의 찢어진 것을 감추는 양을 보고, 계집이란 이러한 때에도 인사를 차린다 하던 생각이 난다. 바로 치마 밑에 피 묻은 명주 수건 조각이 형식의 눈에 들었으나 형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지금껏 형식의 냉정(冷靜)하던 가슴에는 차차 뜨거운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 평양을 갔을까' 하는 생각이 무슨 무서운 뜻을 품은 듯이 형식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형식은 어서 우선이가 노파에게 영채가 평양에 간 이유를 물었으면 하였다. 우선은 담배를 피워 물더니,
"대관절 아씨는 어디 갔소?"
한다. 월향이라고는 부르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영채 씨라고 부르면 노파가 못 알아들을 듯하여 둥그스름하게 '아씨'라 함이라. 노파는 우선이가 장난으로 그러는 줄을 알므로 웃지도 아니한다.
"평양에 잠깐 다녀온다고 오늘 식전에 벼락같이 떠났어요. 오랫동안 성묘를 못 하였으니 잠깐 아버님 산소에나 다녀온다고요."
한다. 노파는 이 두 사람이 어젯저녁 사건을 모르려니 한다. 그러고 아마 우선이가 저 친구를 데리고 놀러 온 것이어니 한다. 저 새로운 친구도 아마 월향의 이름을 듣고 한번 만나 볼 양으로 어젯저녁에 왔다가 헛길이 되고, 아마 자기의 초라한 모양을 보고 월향을 내어놓지 아니하는가 보아서 오늘은 월향과 친한 우선을 데리고 온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저러한 주제에 기생 오입은 다 무엇인고 하였다.
영채가 평양에 성묘하러 갔단 말을 듣고 형식은 감옥에서 죽었다는 박선생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박선생의 얼굴을 다 상상하기도 전에, '영채가 성묘하러' 갔다는 말의, '성묘'란 말이 말할 수 없는 무서움을 가지고 형식의 가슴을 누른다. 형식은 불의에 "성묘!" 하고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우선과 노파는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의 눈에는 분명히 놀람과 무서움의 빛이 보이더라. 노파는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일어나 저편 방으로 간다.
49
우선도 영채가 갑자기 평양에 갔단 말에 무슨 뜻이 있는 듯하게 생각하였다. 그러고 일어나 제 방으로 가는 노파에게 눈을 주었다. 이 '성묘'라는 알 수 없는 비밀을 설명할 자는 그 노파여니 하였다. 그러고 그 노파가 갑자기 일어나 제 방으로 가는 것이 이 비밀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 하였다. 형식과 우선 두 사람의 눈은 노파가 없어지던 문으로 몰렸다. 두 사람은 무슨 큰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듯이 숨소리를 죽였다. 여름 볕이 모닥불을 퍼붓는 모양으로 마당을 내리쪼여, 마치 흙에서 금시에 불길이 피어 오를 듯하다. 기왓장에 볕이 비치어 천장으로 단김이 확확 내려온다. 형식의 오늘 아침에 새로 입은 모시 두루마기 등에는 땀이 두어 군데 내어비친다. 우선도 이마에 땀방울이 솟건마는 씻으려 하지도 아니하고 대팻밥 모자로 부치려 하지도 아니한다. 함롱 밑 유리로 만든 파리통에는 네다섯 놈 파리가 빠져서 벽으로 헤어오르려다가 빠지고, 헤어오르려다가는 빠지고 한다. 어디로서 얼룩고양이 하나가 낮잠을 자다가 뛰어나오는지 영채의 방 앞에 와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하면서 형식과 우선을 본다.
이윽고 노파가 봉투에 넣은 편지를 하나 들고 나오며 우선을 향하여,
"월향이가 정거장에서 바로 차가 떠나려는데 이것을 주면서 이형식 씨가 누군지 이형식 씨라는 이가 오시거든 드리랍데다."
하고 그 편지를 우선에게 주며 얼른 형식의 얼굴을 본다. 아까 정거장에서 노파가 이 편지를 받을 때에는 이형식이라는 이가 아마 어떤 월향에게 놀러 다니는 사람이어니 하고, 월향이가 특별히 편지를 하리만큼 친한 사람이면 자기가 모를 리가 없겠는데 하고 의심하였었다. 그러나 차가 빨리 떠나므로 자세히 물어 보지도 못하고, 아마 어떤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알려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선과 형식의 행동이 영채의 일을 근심하는 듯하는 양을 보고, 더구나 형식이가 이상히 고민하는 낯빛을 보일 뿐더러 '성묘!' 하고 놀라는 양을 보고, 혹 그가 '이형식'이라는 사람이나 아닌가 하여 이 편지를 내어 온 것이요, 또 우선에게 이 편지를 주면서도 얼른 형식의 낯빛을 엿봄이라. 형식은 우선이가 받아 든 편지 피봉에 매우 익숙한 글씨로 '이형식 씨 좌하(李亨植氏座下)'라 한 것을 보고,
"에!"
하고 놀라는 소리를 발하면서 우선의 손에서 그 편지를 빼앗아 봉투의 뒤 옆을 보았다. 그러나 뒤 옆에는 '유월 이십구일 조(六月二十九日朝)'라고 쓴 밖에는 아무것도 쓰지 아니하였다. 형식의 그 편지 든 손은 떨린다. 우선도 '무슨 까닭이 있구나' 하고 숨소리를 죽였다. 노파는 두 사람의 놀라는 얼굴을 보고 '웬일인가' 하여 역시 놀랐다. 그러고 월향이가 이번에 평양에 간 것에 무슨 큰뜻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오늘 아침 월향은, 어젯저녁의 슬퍼하던 빛이 없어지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모시 치마 저고리에 여학생 모양으로 차리고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아니한 노파의 방에 와서 아주 유쾌한 듯이 방글방글 웃으며,
"어머니, 어젯저녁에는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자고 나서 생각하니 그런 우스운 일이 없어요."
하기에, 걱정을 품고 자던 노파는 너무도 기뻐서 월향의 손을 잡으며,
"그러니라. 잘 생각하였다. 내가 기쁘다."
하였다. 그러고 이제는 안심이로다. 이제는 밤에 손님도 치르게 되려니 하고 두 겹으로 기뻤었다. 그때에 영채는 말하기 미안한 듯이 한참이나 주저하더니,
"어머니, 저는 평양이나 한번 갔다가 오려 합니다. 가서 오래간만에 아버지 성묘도 하고 좀 바람도 쏘이게……" 하였다. 노파는 그 슬퍼하고 고집하던 마음을 고친 것이 반갑고, 어젯저녁에 월향을 안고 울 때에 얼마큼 애정도 생겼고― 자고 나서는 사분의 삼이나 식었건마는―또 조고마한 일이면 제 소원대로 하여 주는 것이 좋으리라 하여,
"그래라. 석 달이나 넘었는데 한번 가고 싶진들 않겠느냐. 가서 동무들이나 실컷 찾아보고 한 삼사 일 놀다가 오너라."
하고 몸소 정거장에 나가서 이등 차표와 점심 먹을 것과, 칼표 궐련까지 넉넉히 사주고,
"가거든 아무아무에게 문안이나 하여라. 분주해서 편지도 못 한다고."
하는 부탁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대체 월향은 이삼 일 후면 방글방글 웃으면서 돌아오려니만 믿고 있었더니, 지금 우선과 형식 양인이 이 편지를 보고 대단히 놀라는 양을 보매, 월향이가 이번 평양에 간 것에 무슨 깊고 무서운 사정이 있는 듯하여 가슴이 뜨끔하다. 노파는 불현듯 오 년 전 월화의 생각을 하고, 월향이가 항상 월화가 준 누런 옥지환을 끼고 있던 것을 생각하고, 어젯저녁 청량리 일을 생각하고 눈이 둥그래지며,
"월향이가 왜 평양에 갔을까요."
하고 두 사람이 노파에게 물으려던 말을 노파가 도리어 두 사람에게 묻는다.
형식이가 그 편지를 들고 멍멍하니 앉았는 양을 보고 우선도 조민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여보게, 그 편지를 뜯게."
한다. 형식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한편 끝을 잡았다. 그러나 형식은 차마 떼지 못한다. 그 손은 점점 더 떨리고 그 얼굴의 근육(筋肉)은 점점 더욱 긴장(緊張)하여진다. 우선은, "어서, 어서!" 하고 봉투를 떼기를 재촉한다. 노파는 저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오겠는고 하고, 봉투의 한편 끝을 잡은 형식의 손만 본다. 세 사람의 가슴은 엷은 여름 옷 아래서 들먹들먹하고, 세 사람의 등에는 땀이 내어 배었다.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던 고양이가 지붕에 참새를 보고 '냥' 하면서 뛰어간다. 형식의 떨리는 손은 마침내 그 봉투의 한편 끝을 찢었다. 찢는 소리가 대포 소리와 같이 세 사람의 가슴에 울렸다.
50
떨리는 형식의 손에는 편지가 들렸다. 그러고 한편 끝이 떨어진 봉투는 형식의 무릎 위에 떨어졌다. 노파는 앉은 대로 한 걸음 몸을 움직여 형식의 곁에 가까이 오고, 우선은 몸과 고개를 형식의 어깨 곁으로 굽혔다. 형식의 가슴은 펄떡펄떡 뛰고, 우선과 노파의 눈은 유리로 만든 것 모양으로 가만히 형식의 손이 한 간씩 한 간씩 펴는 편지 글자 위에 박혔다. 형식은 슬픔을 억제하는 듯이 어깨를 두어 번 추더니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흐르는 듯한 궁녀체 언문으로 썼다. 우선과 노파의 전신의 신경(神經)은 온통 귀와 눈으로 모였다. 형식은 '이형식 씨 전 상서(李亨植氏前上書)'라 한 것은 빼어놓고 본문부터,
"어젯저녁에 칠 년 동안이나 그리고 그리던 선생을 (뵈오매, 마치 이미 세상을) 버리신 어버이를 대한 듯하여 기쁘기 그지없었나이다. 칠 년 전 선생께옵서 안주를 떠나실 때에 집 앞 버드나무 밑에서 이 몸을 껴안으시고, 잘 있거라 다시는 볼 날이 없겠다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것과, 그때에 아직도 열두 살 된 철없는 이 몸이 선생의 가슴에 매어달리며 가지 마오, 어디로 가오, 나와 같이 갑시다, 하던 것을 생각하오매 자연히 비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를 내어 울었나이다.
이렇게 이별하온 후 칠 년 동안 의지할 데 없는 외롭고 어린 이 몸이 부평과 같이 바람 가는 대로, 물결 가는 대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동서로 표류하올 때에 눈물인들 얼마나 흘렸으며 한숨인들 얼마나 쉬었사오리이까.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평양 감옥에서 철창의 신음을 당하시는 부친을 뵈옴이라, 열세 살 된 계집의 몸이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 모양으로 이리 굴고 저리 굴며,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쳐 평양 감옥에 흙물 옷을 입으신 부친의 얼굴을 대하기는 하였사오나, 무섭게 여윈 그 얼굴을 대할 때에 어린 이 몸의 가슴은 바늘로 쑥쑥 찌르는 듯하였나이다.
이에 철없는 이 몸은 감히 옛날 어진 여자의 본을 받아 몸으로써 부친을 구하려는 마음을 품고, 어떤 사람의 소개로 기생에 판 것은 이 몸이 열세 살 되던 해 가을이로소이다. 그러하오나 이 몸을 팔아 얻은 이백 원은 이 몸을 팔아 준 사람이 가지고 도망하니 부모의 혈육을 팔아 얻은 돈으로 부친의 몸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철장에서 신음하시는 늙으신 부친에게 맛난 음식 한 때도 받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이어든, 하물며 이 몸이 기생으로 팔림을 위하여 부친과 두 형이 사오 일 내에 세상을 버리시니 슬프다, 이 무슨 변이오리이까. 이 몸이 전생에 무슨 죄가 중하여 어려서 부친과 두 형을 옥에 가시게 하고, 다시 이 몸으로 말미암아 부친과 두 형으로 하여금 원망의 피를 뿜고 세상을 버리시게 하나이까. 오호라 이를 생각하오매 가슴이 터지고 골수가 저리로소이다. 이 몸이 만일 적이 어짐이 있었던들 마땅히 그때에 부친에 뒤를 따랐을 것이언마는 차홉다 완악한 이 목숨은 그래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부지하였나이다.
부친과 두 형을 여읜 후, 이 몸이 세상에 믿을 이가 누구오리까. 선생께서도 아시려니와 이 몸이 의지할 곳이 어디오리까. 아아, 하늘뿐이로소이다. 땅이 있을 뿐이로소이다. 그리하고 세상에 있어서는 선생뿐이로소이다.
이 몸은 그로부터 선생을 위하여 살았나이다. 행여나 부평같이 사방으로 표류하는 동안에 그리고 그리는 선생을 만날 수나 있을까 하고 그것을 바라고 이슬 같은 목숨이 오늘까지 이어 왔나이다. 이 몸은 옛날 성인과 선친의 가르침을 지키어 선친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 몸을 허하신 바 선생을 위하여 구태여 이 몸의 정절을 지키어 왔나이다. 이 몸이 이 몸의 정절을 위하여 몸에 지니던 것을 여기 동봉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몸은 이미 더러웠나이다. 아아, 선생이시여, 이 몸은 이미 더러웠나이다. 약하고 외로운 몸이 애써 지켜 오던 정절은 작야에 물거품〔水泡〕에 돌아가〔歸〕고 말았나이다.
이제는 이 몸은 천지가 허하지 못하고 신명이 허하지 못할 극흉 극악한 죄인이로소이다. 이 몸이 자식이 되어는 어버이를 해하고 자매가 되어는 형제도 해하고 아내가 되어는 정절을 깨트린 대죄인이로소이다.
선생이시여! 이 몸은 가나이다. 십구 년의 짧은 인생을 슬픈 눈물과 더러운 죄로 지내다가 이 몸은 가나이다. 그러나 차마 이 더럽고 죄 많은 몸을 하루라도 세상에 두기 하늘이 두렵고 금수와 초목이 부끄러워, 원(怨)도 많고 한(恨)도 많은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더러운 이 몸을 던져 탕탕한 물결로 하여금 더러운 이 몸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죄 많은 이 살을 뜯게 하려 하나이다.
선생님이시어! 이 세상에서 다시 선생의 인자하신 얼굴을 대하였으니 그만하여도 하늘에 사무친 원한은 푼 것이라 하나이다. 후일 대동강상에서 선생의 옷에 뿌리는 궂은 비를 보시거든 박명한 죄인 박영채의 눈물인가 하소서. 이 편지 마치고 붓을 떼려 할 제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리오나이다. 오호라 선생이시여 부디 내내 안녕하시고 국가의 동량(棟樑)이 되셔지이다."
하고 떨리는 붓으로, '歲次丙辰六月二十九日午前二時에 죄인 朴英采는 泣血百拜(세차병진 유월 이십구일 오전 두시에 죄인 박영채 읍혈백배)'라 하였다. 차차 더 떨던 형식의 손은 그만 편지를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고 흑흑 느끼며 굵은 눈물을 무릎 위에 펴놓인 편지 위에 떨어뜨린다. 떨어진 눈물은 편지에 쓰인 글자를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우선도 소매로 눈물을 씻고, 노파는 치마로 낯을 가리오고 방바닥에 엎드린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 마당에서는 점점 더 단김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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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그 동안 여러 기생을 보았다. 그러고 그네들 중에 어떠한 사람이 있는가 보았다. 영채가 '형님' 하고 정답게 지내던 자도 수십 인이요, '야, 네더냐' 하고 동무로 지내던 자도 수십 인이요, 영채더러 '형님!' 하고 정답게 따르던 자도 몇 사람이 있었다.
영채가 평양서 기생이 되어 맨 처음 '형님' 하고 정들인 기생은 계 월화라 하는 얼굴 곱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때에 평양 화류계에 풍류 남자들의 눈은 실로 이 월화 한 사람에게 모였었다. 월화는 단율도 잘 짓고 묵화도 남 지지 아니하게 쳤다. 그래서 월화는 매우 자존하는 마음이 있어서 여간한 남자는 가까이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퇴맞은 남자들에게는 '교만한 년' '괘씸한 년'이라는 책망도 듣고, 그 소위 어미 되는 노파에게는 '손님께 공손하라'는 경계도 들었다. 그러나 월화는 자기의 얼굴과 재주를 높이 믿었다. 그래서 제 눈에 낮게 보이는 손님을 대할 때에는, "솔이 솔이 하니 무슨 솔이로만 여겼던가 / 천인 절벽에 낙락장송 내 기로다 / 길 아래 초동의 낫이야 걸어 볼 줄 있으랴" 하는 솔이〔松伊〕가 지은 시조를 불렀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월화를 '솔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실로 월화의 이상은 '솔이'였었다. 영채가 월화를 사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라. 영채의 눈에 월화라는 기생은 족히 열녀전에 들어갈 만하다 하였다. 그러고 '솔이'라는 기생이 어떠한 기생인지도 모르면서 월화가 솔이를 이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 모양으로 솔이를 이상으로 하였다. 영채가 일찍 월화에게 안기며,
"형님! 형님과 저와 솔이와 세 사람이 친구가 됩시다."
한 일이 있었다. 그러고 나도 반드시 월화 형님과 같이 솔이가 되리라 하였다.
월화의 얼굴과 재주를 보고 여러 남자가 침을 흘리며 모여들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있고 미남자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투어 옷을 잘 입고 금시계와 금반지를 끼고 아무리 하여서라도 월화의 사랑을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월화가 머릿속에 그리는 남자는 그러한 경박자는 아니었다. 월화는 이태백을 생각하고 고적(高適)과 왕창령(王昌齡) 같은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을 생각하고 양창곡(楊昌曲)과 이도령(李道令)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월화의 주위에 모여드는 남자들 중에는 하나도 그러한 사람이 없고 다만 '돈'과 '육욕'이 있는 사람뿐이었다. 월화는 어느 요리점 같은 데 불려 갔다가 밤이 깊어 돌아오는 길에 영채를 찾아와서는 흔히 눈물을 흘리며,
"영채야, 세상이 왜 이렇게 적막하냐. 평양 천지에 사람 같은 사람을 볼 수가 없구나."
하였다. 영채는 아직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거니와 대체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어니 하였다. 그러고는 영채는 어린 생각에 '나는 이형식이가 있는데' 하였다.
월화는 점점 세상을 비감하게 되었다. 그가 영채에게 당시를 가르치다 흔히 영채를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영채야, 네나 내나 왜 이러한 조선에 났겠느냐?"
하였다. 그때에 영채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러면 어디 났으면 좋겠소?"
하였다. 월화는 영채의 어린 것을 불쌍히 여기는 듯이,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하였다. 월화는 성당시대 강남에 나지 못한 것을 한하였다. 탁문군은 자기언마는 봉황곡으로 자기를 후리는 사마상여의 없음을 한하였다. 월화의 생각에는 하늘이 대동강을 내시매, 모란봉을 또 내셨으니 계월화는 대동강이 되려니와 누가 모란봉이 되어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그 그림자를 부벽루 앞에 비추리요 하였다.
월화는 조선 사람의 무지하고 야속함을 원망하였다. 더구나 평양 남자에 일개 시인이 없고 일개 문사가 없음을 한하였다. 그가 나이 이십이 되도록 한 번도 자기의 뜻에 맞는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슬픈 마음과 세상을 경멸하는 비웃음으로 옛날 시를 읊고 저도 시와 노래를 짓기로 유일의 벗을 삼았었다. 그러고 영채를 사랑하여 친동생같이 귀애하며, 시 읽기와 시 짓기를 가르치고 마음이 슬픈 때에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채에게 자기의 회포를 말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영채는,
"형님!"
하고 월화의 가슴에 안겨 울었다.
일찍 어느 연회에 평양 성내 소위 일류 인사들과 일등 명기가 일제히 모였다. 이(른 여름) 바람 잔잔한 모란봉 밑 부벽루가 그 회장이었다. 그때 월화가 영채에게,
"야 영채야, 너는 보느냐?"
하고 한편 구석에 끌고 가서 귓속말을 하였다.
"무엇이오?"
하고 영채는 좌석을 돌아보았다. 월화는 영채의 귀에 입을 대고,
"저기 모인 저 사람들이 평양의 일류 명사란다. 그런데 저 소위 일류 명사란 것이 모두 다 허자비에게 옷 입혀 놓은 것이란다."
하고 다시 기생들을 가리키며,
"저것들은 소리와 몸을 팔아먹고 사는 더러운 계집년들이란다."
하였다. 그때에는 영채가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전보다 분명하게 월화의 말하는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고,
"참 그렇소."
하고 조고마한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어떤 양복 입은 신사가 웃으며 월화의 곁에 오더니 목에 손을 얹으며, "야 월화야, 어째 여기 섰느냐" 하고 끌고 가려 한다. 이 신사는 그때에 한창 월화에게 미쳤던 평양 일부 김윤수의 맏아들이니, 지금 나이 삼십여 세에 여태껏 하여 온 일이 기생 오입밖에 없었다. 월화는 무론 이 사람을 천히 여겼다. 그래서 이 사람 앞에서도 '솔이 솔이 하니'를 불렀다. 이때에 월화는 너무 불쾌하여,
"왜 이러시오?"
하고 몸을 뿌리쳤다. 뒤에 알아본즉, 이때에 이 좌석에 월화의 마음을 끄는 어떤 신사가 있었더라. 그는 어떠한 사람이며 그와 월화와의 관계는 장차 어찌 될는고.
32
그 연회로서 돌아오는 길에 영채는 월화를 따라 청류벽 밑으로 산보하였다. 그때에 마침 평양 패성중학(대성학교를 모델로 한 것임. 신문연재본과 신문관본에는 모두 '패성학교'로 되어 있으며, 삼중당 전집 이후 현재는 대성학교로 고쳐져 있음. 이하 동일―편자 주)이라는 학교의 학생 사오 인이 청류벽 바위 위에 서서 유쾌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굽이지는 대동강이
능라도를 싸고도니
둥두렷한 모란봉이
우쭐우쭐 춤을 추네
청류벽에 걸어앉아
가는 물아 말을 들어
청춘의 더운 피를
네게 부쳐 보내고저
월화가 영채의 소매를 당기며,
"얘, 저 노래를 듣느냐."
"매우 듣기 좋습니다."
월화는 한숨을 쉬며,
"저 속에 시인이 있기는 있고나"
하고 잠연히 눈물을 흘렸다. 영채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다만 청류벽 위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들을 보았다. 학생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데 두루막자락이 바람에 펄펄 날린다. 영채도 어째 자연히 그 학생들이 정다운 듯하고 알 수 없는 설움이 가슴에 떠오르는 듯하여 월화의 어깨에 엎데어 월화와 함께 울었다. 월화는 영채를 안으며,
"영채야, 저 속에 참시인이 있느니라"
하고 아까 하던 말을 또 한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그것들은 먹고 입고, 계집 희롱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들이니라. 그러나 저 학생들 속에 참시인이 있느니라."
이때에 학생이 또 다른 노래를 부른다.
새벽빛이 솟는다
해가 오른다
땅 위에 만물이
기뻐 춤을 추노나
천하 사람 꿈꿀 제
나만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네
월화는 못 견디어하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영채더러,
"이애, 저기 올라가 보자."
그러자 이 말이 끝나기 전에 학생들은 모자를 벗어 두르고 저편 고개로 넘어가고 말았다. 월화는 길가 돌 위에 펄썩 주저앉아서 아까 학생들이 부르던 노래를 십여 차나 불러 보았다. 영채도 자연히 그 노래가 마음에 드는 듯하여 월화와 함께 십여 차나 불렀다. 그러고 월화는 한참이나 지금 학생들 섰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로부터 월화는 더욱 우는 날이 많게 되었다. 영채는 월화와 함께 울고, 틈이 있는 대로는 월화와 같이 있었다. 영채는 더욱더욱 월화에게 정이 들고 월화도 더욱더욱 영채를 사랑하였다. 열다섯 살이나 된 영채는 차차 월화의 뜻을 알게 되었다. 뜻을 알게 될수록 월화의 눈물에 동정하게 되었다. 영채도 점점 미인이라는 이름과 노래 잘하고 단율 잘 짓는다는 이름이 나서, 영채라는 오늘 아침에 핀 꽃을 제가 꺾으리라 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 월화가 부벽루에서 하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부벽루 연회 이래로 월화의 변하고 괴로워하는 모양을 보매, 어린 영채도 월화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은 짐작하였다. 영채도 이제는 남자가 그리운 생각이 나게 되었다. 못 보던 남자를 대할 때에는 얼굴도 후끈후끈하고, 밤에 혼자 자리에 누워 잘 때에는 품어 줄 누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게 되었다. 한번은 영채와 월화가 연회에서 늦게 돌아와 한자리에서 잘 때에 영채가 자면서 월화를 꼭 껴안으며, 월화의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월화는 혼자 웃으며,
"아아, 너도 깨었구나― 네 앞에 설움과 고생이 있겠구나"
하고 영채를 깨워,
"영채야, 네가 지금 나를 꼭 껴안고 입을 맞추더구나"
하였다.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낯을 월화의 가슴의(가슴에) 비비고 월화의 하얀 젖꼭지를 물며,
"형님이니 그렇지"
하였다.
이만큼 영채도 철이 났으므로 월화의 눈물에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고 물어 볼까 물어 볼까 하면서도 자연히 제가 부끄러워 물어 보지 못하고, 다만 영채 혼자 생각에 아마 월화가 그때 청류벽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을 생각하는 게로다 하였다. 영채의 눈에도 그 청류벽에서 노래 부르던 학생의 모양이 잊히지를 아니한다. 무론 길에서 청류벽을 바라보면, 그 위에 선 사람의 얼굴의 윤곽이 보일 뿐이요 눈과 코도 잘 분별하지는 못하겠으나, 다만 거룩한 듯한 모양과 깨끗한 목소리와 뜻있고 아름다운 노래가 두 여자의 가슴을 서느렇게 한 것이라. 그 청년들은 아마 무심하게 그 노래를 불렀으련마는 아직 '진실한 사람', '정성 있는 사람', '희망 있는 사람',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보지 못하던 그네에게는 그 학생들의 모양과 노래가 지극히 분명하게 청신하게 인상이 박힌 것이라. 영채는 가만히 그 노래 부르던 학생들과, 지금껏 같이 놀던 소위 신사들을 비교할 때에 아무리 하여도 그 학생이 정이 든다 하였다. 영채는 근래에 더욱 가슴속이 서늘하고 몸이 간질간질하고 자연히 마음이 적막함을 깨닫는다. 월화가 물끄러미 자기의 얼굴을 볼 때에는, 혹 자기의 속을 꿰뚫어보지나 아니하는가 하여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월화도 영채의 마음이 점점 익어 옴을 깨달았다. 그러고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매, 영채의 장래에 설움이 많을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월화는 영채가 잘못하여 세상에 섞이기를 두려워하는 모양으로 항상,
"영채야, 지금 세상에는 우리의 몸을 의탁할 만한 사람이 없나니라."
하고 옛날 시로 일생의 벗을 삼기를 권하였다.
영채는 월화의 눈물의 뜻을 알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알 기회가 이르렀다.
33
하루 저녁에는 월화가 영채를 찾아와서 연설 구경을 가자고 한다. 그때에 평양에는 패성학교라는 새로운 학교가 일어나, 사방으로서 수백 명 청년이 모여들고, 패성학교장 함상모는 그 수백여 명 청년의 진정으로 앙모하는 선각자러라. 함교장은 매주일에 일차씩 패성학교 내에 연설회를 열고, 아무나 와서 방청하기를 청하였다. 평양 사람들은, 혹은 새로운 말을 들으리라는 정성으로, 혹은 다만 구경이나 하리라는 호기심으로 저녁 후면 패성학교 대강당이 터지도록 모여들었다. 함교장은 열성이 있고 웅변이 있었다. 그가 슬픈 말을 하게 되면 청중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그가 기쁜 말을 하게 되면 청중은 모두 손뼉을 치고 쾌하다 부르짖으며, 그가 만일 무슨 악한 일을 꾸짖게 되면 청중은 눈꼬리가 찢어지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의 말하는 제목은, 조선 사람도 남과 같이 옛날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새로운 문명을 실어 들여야 할 일과, 지금 조선 사람은 게으르고 기력이 없나니 새롭고 잘사는 민족이 되려거든 불가불 새 정신을 가지고 새 용기를 내어야 한다는 것과, 이렇게 하려면 교육이 으뜸이니 아들이나 딸이나 반드시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함이라.
영채도 함교장이란 말도 듣고, 함교장이 연설을 잘한다는 말도 들었으므로 월화를 따라 패성학교에 갔다. 두 사람은 (아무쪼록) 검소한 의복을 입었으나 얼굴과 태도를 속일 수가 없으며, 또 양인이 다 지금 평양에 이름난 기생이라 모이는 사람들 중에 손가락질하고 소곤소곤하는 것이 보인다. 월화와 영채는 회중을 헤치고 들어가 저편 구석에 가지런히 앉았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등을 밀치기도 하고 발을 밟기도 하고, 혹 제 손으로 두 사람의 손을 스치기도 하고, 혹 어떤 사람은 월화의 겨드랑에 손을 넣는 자도 있다. 월화는,
"너희는 기생이란 것만 알고, 사람이란 것은 모르는구나."
하고 영채를 안는 듯이 앞세우고 들어간 것이라. 부인계에는 연설을 들을 자도 없고 들으려 하는 자도 없으매, 별로 부인석이란 것이 있지 아니하므로 남자들 앉은 걸상 한편 옆에 앉았다. 함교장이 이윽고 부인이 있음을 보더니 어떤 학생을 불러 무슨 말을 한다. 그 학생이 의자 둘을 가져다가 맨 앞줄 왼편 끝에 놓더니 두 사람 곁에 와서 은근히 경례하면서,
"저편으로 와 앉으십시오."
하고 두 사람을 인도한다. 두 사람은 기생 된 뒤에 첫번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다 하였다. 이윽고 학생들이 들어와 착석한다. 월화는 저 학생들이 자기를 보는가 하고, 가만히 학생들의 동정을 보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모두 정면한 대로 까딱도 아니하고 앉았다. 월화는 영채를 보고 가만히,
"얘, 저 학생들은 우리가 보던 사람과는 딴세상 사람이지?"
하였다. 과연 함교장은 청년을 잘 교육하였다. 설혹 개성을 무시하고 만인을 한 모형에 집어넣으려는 구식 교육가의 때를 아주 다 벗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당시 조선에는 유일한 가장 진보하고 열성 있는 교육가였다. 과연 평양 성내에 월화를 보고 눈에 음란한 웃음을 아니 띄우는 자는 패성학교 학생밖에 없을 것이라. 학생들도 만일 월화를 본다 하면 '어여쁘다' 하는 생각이 날는지도 모르고, '한번 더 보자' 하는 생각이 날는지도 모르거니와, 그네는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저것을 하룻밤 데리고 놀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두지 아니한다. 또 설혹 그네가 '저것을 내 것을 삼았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 하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무릎에 앉히고) 희롱하려 함이 아니요, '나의 아내를 삼아 사랑하고 공경하리라' 함이라. 다른 사람들은 월화를 다만 한 장난감으로 알되, 그네는 비록 기생을 천히 여긴다 하더라도 그 역시 내 동포여니 내 누이어니 하는 생각은 있다.
이윽고 함교장이 연단에 올라선다. 만장에 박수가 일어나고, 월화도 두어 번 박수한다. 영채는 옳지 부벽루에서 말하던 이로구나 하였다. (함교장은) 위엄 있는 태도로 이윽히 회중을 내려다보더니,
"여러분."
하고 입을 열어,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마음이 썩어지지 아니하였고, 여러분과 같이 게으르고 기운 없지 아니하였소. 평양성을 쌓은 우리 조상의 기상은 웅대하였고, 을밀대와 부벽루를 지은 우리 조상의 뜻은 컸소이다."
하고 감개무량한 듯이 한참 고개를 숙이더니,
"여러분! 저 대동강에 물은 날로 흘러가느니, 평양성을 쌓고 을밀대를 짓는 우리 조상의 그림자를 비추었던 물은 지금 어디 간 곳을 알지 못하되, 오직 뚜렷한 모란봉은 만고에 한 모양으로 우리 조상의 발자국을 지니고 섰소이다. 아아, 여러분 아, 여러분의 웅장한 조상에게 받은 정신을 흘러가는 대동강에 부쳤는가, 만고에 우뚝 솟은 모란봉에 부쳤는가."
하고 흐르는 눈물로써 말을 잠깐 그치니, 만장이 숙연히 고개를 숙인다. 함교장은 여러 가지로 조선 사람의 타락한 것을 개탄한 뒤에 일단 더 소리를 높여,
"여러분! 여러분은 이 무너져 가는 평양성과 을밀대를 다 헐어 내어 흘러가는 대동강수에 부쳐 보내고, 우리의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기운으로 새로운 평양성과 새로운 을밀대를 쌓읍시다."
하고 유연히 단을 내리니 만장이 박수갈채성에 한참이나 흔들리는 듯하다. 월화는 영채의 손을 꼭 쥐고 몸을 바르르 떤다. 영채는 놀라서 월화를 보니, 무릎 위 치맛자락에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영채도 함교장의 풍채를 보고 연설을 들으매,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이 나서 울면서 월화를 따라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월화의 눈물은 영채의 눈물과는 달랐다. 월화의 눈물은 어떠한 눈물이던고.
34
집에 돌아와 월화는 펄썩 주저앉으며 영채더러,
"영채야, 나는 내가 구하던 사람을 찾았다. 나는 부벽루에서 함교장의 풍채를 보고 말을 들으매, 자연히 정신이 황홀하여짐을 깨달았다. 그러고 오늘 저녁 그의 풍채와 말을 또 들으니, 내 마음은 온통 그이게로 가고 말았다. 조선 천지에서 내가 찾던 사람을 이제야 만났구나."
하고 빙긋이 웃는다. 영채는 그제야 월화의 눈물 뜻을 깨달았다. 자기는 함교장을 아버지같이 생각하였는데, 월화는 자기의 정든 님같이 생각하더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월화의 얼굴을 보았다. 월화의 눈썹에는 맑은 눈물이 맺혔다. 월화는 다시,
"영채야, 너는 그때에 부벽루에서 부르던 노래 뜻을 아느냐? 
천하 사람 꿈꿀 제
나만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네
이 노래 뜻을 아느냐?"
영채는 아는 듯도 하면서도 말할 수는 없어 잠자코 앉았다. 월화는 영채를 이윽히 보더니,
"온 조선 사람이 다 자고 꿈을 꾸는데 함교장 혼자 깨어 일어났구나. 우리를 찾아오는 소위 일류 신사님네는 다 자는 사람들인데, 그 속에 깨어 일어난 것은 함교장뿐이로구나."
영채는 과연 그럴듯하다 하고,
"그러면 왜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를 부르나요?"
"깨어 일어나 본즉 천하 사람은 아직도 꿈을 꾸겠지. 암만 깨어라 깨어라 하여도 깰 줄은 모르고 잠꼬대만 하니 왜 외롭고 슬프지를 아니하겠느냐. 그러니까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
하고 영채의 손을 잡아 끌어다가 자기의 무릎 위에 엎디게 하고,
"그런데 나도 역시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를 부른다."
영채는 얼마큼 알아들으면서도,
"왜? 왜 슬픈 노래를 불러?"
"평양성내 오륙십 명 기생 중에 나밖에 깨인 사람이 누구냐. 모두 다 사람이 무엇인지, 하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중에 나밖에 깨인 사람이 누구냐. 나는 외롭구나, 슬프구나, 내 정회를 들어 줄 사람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하고 영채의 등에 이마를 비비며 영채의 허리를 끊어져라 하고 끌어안는다. 영채는 이제는 월화의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다. 월화는 다시 말을 이어,
"나는 지금 스무 살이다. 나는 이십 년 동안 찾던 친구를 이제는 찾아 만났다. 그러나 만나고 본즉 그는 잠시 만날 친구요, 오래 이야기하지 못할 친군 줄을 알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만 갈란다"
하고 영채를 일으켜 앉히며 더욱 다정한 말소리로,
"야, 너와 나와 삼 년 동안 동기같이 지내었구나. 이것도 무슨 큰 연분이로다. 안주 땅에 난 너와 평양 땅에 난 나와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정답게 지낼 줄을 사람이야 누가 뜻하였겠느냐. 이후도 나를 잊지 말고 '형님'이라고 불러 다고."
하면서 그만 울며 쓰러진다. 영채는 월화의 말이 이상하게 들려 몸에 오싹 소름이 끼치면서,
"형님! 왜 오늘 저녁에는 그런 말씀을 하셔요?"
하였다. 월화는 일어나 눈물을 씻고(뿌리고 망연히 앉았다가),
"너는 부디 세상 사람에게 속지 말고 일생을 너 혼자 살아라, 옛날 사람으로 벗을 삼아라, 만일 네 마음에 드는 사람 만나지 못하거든."
한다. 이런 말을 하고 그날 밤도 둘이서 한자리에 잤다. 둘은 얼굴을 마주대고 서로 꽉 안았다. 그러나 나 어린 영채는 어느덧 잠이 들었다. 월화는 숨소리 편안하게 잠이 든 영채의 얼굴을 이윽히 보고 있다가 힘껏 영채의 입술을 빨았다. 영채는 잠이 깨지 아니한 채로 고운 팔로 월화의 목을 꼭 쓸어안았다. 월화의 몸은 벌벌 떨린다. 월화는 가만히 일어나 장문을 열고 서랍에서 자기의 옥지환을 내어 자는 영채의 손에 끼우고 또 영채를 꼭 껴안았다.
짧은 여름밤이 새었다. 영채는 어렴풋이 잠을 깨어 팔로 월화를 안으려 하였다. 그러나 월화가 누웠던 자리는 비었다. 영채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형님! 형님!"
하고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영원히 없었다. 영채는 자기 손에 낀 옥가락지를 보고 울었다. 그날 저녁때에 대동강에서 낚시질하던 배가 시체 하나를 얻었다. 그것은 월화더라. 월화는 유언도 없었으며 아무도 그가 죽은 이유를 아는 자가 없고, 오직 옥가락지를 낀 영채가 홀로 월화의 뜻을 알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뿐, 그 소위 어미는 '안된년!' 하고 돈벌이할 밑천이 없어진 것을 원망하고, 평양 일부 김윤수의 아들은 '미친년!' 하고 자기의 희롱거리 없어짐을 한탄하더라. 그의 시체는 굵다란 베에 묶어 물지게꾼 이삼 인이 두루쳐 메어다가 북문 밖 북망산에 묻었다. 묻은 날 저녁때에 옥가락지 끼인 손이 꽃 한줌과, 눈물 한줌을 그 무덤 위에 뿌렸다. 비도 아니 세웠으니 지금이야 어느 것이 일대 명기 계월화의 무덤인 줄을 알리요. 함교장은 이런 줄이야 알았는지 말았는지. 계월화는 과연 영채의 '형님'이었다. 벗이었다. 월화는 참 영채를 사랑하였었다. 영채는 월화에게 큰 감화를 받았었다.
영채가 형식을 일생의 짝으로 알고 칠 년 동안 굳은 절을 지켜 온 것도 월화의 힘이 반이나 되었다. 영채도 생각하기를 이형식을 찾다가 못 찾으면 월화의 뒤를 따라 대동강에 몸을 던지리라 하였었다. 하다가 우연히 이형식의 거처를 알고, 이제는 내 소원을 이루었구나 하였다. 그러나 만일 형식이가 이미 혼인을 하였으면 어찌할까, 혼인을 아니했더라도 내 몸이 기생인 줄을 알고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어찌할까 하였다. 형식의 거처를 안 지가 한 달이 넘도록 형식을 찾지 아니하고, 어젯 형식을 찾아가서 자기의 신세를 이야기하다가 중도에 끊고 돌아옴도 이를 위함이러라. 형식의 집에서 돌아온 영채는 어떻게 되었는가.
35
영채가 형식을 대하여 자기의 신세를 말하다가 문득 생각한즉 자기는 기생의 몸이라 형식이 아직 혼인 아니하였다는 말을 들으며 잠깐 기뻐하였으나, 자기가 기생인 줄을 알면 형식은 반드시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또 설혹 돌아볼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내 몸은 돈이 있고야 구원할 몸이어늘, 가만히 형식의 살림살이를 보매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기가 기생인 줄을 알려 일생에 그리워하던 형식에서 마음으로까지 버림이 되기보다, 또는 나를 버리지 아니하더라도 구원할 힘이 없어 사랑하는 형식으로 하여금 부질없이 마음을 괴롭게 하기보다, 이러하기보다 차라리 대동강수에 풍덩실 몸을 던져 오 년 전에 먼저 간 월화의 뒤를 따라 저세상에서 월화로 더불어 같이 노닐려 하였다. 월화의 얼굴이 영채의 앞에 보이며 '영채야 나와 같이 가자' 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손에 있는 옥지환을 보다가 중도에 말을 끊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라.
영채는 곧 평양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였다. 몸을 던져 세상을 버릴진대 사랑하던 '월화 형님'의 몸을 던지던 대동강을 찾아가려 하였다. 평양에 가 우선 북망산에 아버지와 월화의 무덤을 찾아 그 동안 지내 오던 정회나 실컷 말하리라 하였다. 부친은 내가 기생 되었다는 말을 듣고 죽었으니 무덤에나마 가서 내가 기생으로 몸을 판 것은 부친과 두 형제를 구원하려 함임과, 기생이 된 지 육칠 년에 부친의 혈육을 받은 이 몸을 다행히 더럽히지 아니하였음과, 부친께서 이 몸을 허하신 이형식을 위하여 지금껏 아내의 절행을 지켜 온 것을 말하고, 죽은 후에 만일 영혼이 있거든 생전에 섬기지 못하던 한을 사후에나 풀리라 하였다. 만일 부친이 극락에 가셨거든 극락으로 찾아가고, 만일 지옥에 가셨거든 지옥으로 찾아가리라 하였다.
월화의 부탁을 나는 지켰다. 나는 세상에 섞이지 아니하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을 위하여 육칠 년간 고절(苦節)을 지켰다. 나는 월화가 하다가 남겨 둔 생활을 하였다. 나는 이제 네게로 돌아간다 하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니 영채의 몸은 바로 그때에 그 학생들이 '천하 사람 꿈꾸는데 나만 깨어서, 하늘을 우러러 슬픈 노래 부르도다' 하는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이 청류벽 위에 선 듯하다. 영채는 박명한 십구 년의 일생을 생각하였다. 더구나 형식을 대하였을 때에 말하던 과거의 기억이 바로 어저께 지난 일 모양으로 역력히 눈앞에 보이고, 그 모든 광경이 제가끔 영채의 가슴을 찌르고 창자를 박박 긁는 듯하다. 사람으로 세상에 생겨나서 즐거운 재미란 하나도 보지 못하고 꽃다운 청춘이 속절없이 대동강 무심한 물결 속에 스러질 것을 생각하니 원망스럽기도 하고 가이없고 원통하기도 하다. 십구 년 일생의 절반을 무정한 세상과 사람에게 부대끼고 희롱감이 되다가 매양에 그리고 바라던 이형식을 만나기는 만났으나 정작 만나고 보니 이형식은 나를 건져 줄 것 같지도 아니하고…… 아아, 이것이 무슨 팔자인고 하고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캄캄한 방에서 혼자 울었다. 이 팔은 어찌하여 생각하던 사람을 안아 보지 못하고, 이 젖은 어찌하여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을 빨려 보지 못하는고, 가슴속에 가득 찬 정과 사랑을 생각하던 이에게 주어 보지 못하고 마는고. 내 몸은 일생에 '기생'이란 이름만 듣고, 어찌하여 '아내'라든가 '부인'이라든가 '어머니'라든가 '아주머니'라든가 하는 정답고 거룩한 이름을 못 듣고 마는고. '기생!' '기생!' 에그 듣기 싫은 이름이도다. '기생!'이라는 말만 하여도 치가 떨린다 하였다.
지금 황금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사려는 사람이 사오 인이 된다고 한다. 지나간 칠 년 동안에 노래와 춤으로 수만 원 돈을 벌어 주어, 논밭도 사고 큰 집도 사고 비단 옷도 입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자유로 놓아 주어도 마땅하건마는 아직도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여 천 원이니 이천 원이니 하고 이 몸을 팔아먹으려 한다. 파는 놈도 파는 놈이어니와 사는 놈도 사는 놈이라. 지금까지는 이럭저럭 정절을 지켜 왔건마는 이제 몸이 뉘 첩으로 팔린 뒤에야 정절이 다 무슨 정절이뇨. 다만 죽을 뿐이다, 다만 죽을 뿐이다 하였다.
바라던 형식을 만나 본 것은 기쁘건마는 바라던 그 형식조차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이 절통하다 하였다.
영채는 그만 절망하였다. 지금까지 자기는 잠시 타향에 길을 잃었다가 선한 세계, 선한 사람 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칠 년 전 자기의 가정에서 누리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하였더니 모두 다 허사로다 하였다. 지금껏 유일한 선인으로 알아 오고 유일한 의지할 사람으로 알아 오던 형식도 정작 얼굴을 대하니 그저 그러한 사람인 듯, 칠 년간 악인들 사이에서 부대껴 오던 영채의 생각에는 형식같이 선한 사람은 얼굴이며 풍채며 말하는 것이 온통 항용 사람과 다르리라 하였다. 그러나 만나고 본즉 그저 그러한 사람이로고나. 옳다 죽는 수밖에 없다. 대동강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구태 더러운 세상에 섞여 구차히 목숨을 늘여 가기는 차마 못 하리니 하루바삐 새맑은 대동강 물결 밑에서 정다운 월화를 만나 서로 안고 이야기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에게는 돈이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몇 친구에게 돈 오 원을 취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얻지 못하고 점심때가 지나도록 방에 앉아 울었다. 형식이가 김장로의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여 즐거운 상상에 취하였을 때는 정히 영채가 자기 방에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던 때였다. 이날 저녁에 영채를 찾아온 형식은 영채를 만났는가.
36
형식은 한참이나 '계월향'이라고 쓴 광명등을 보고 섰다가 희경을 돌려보내고 결심한 모양으로 문 안에 들어섰다. 객이 없는지 적적히 아무 소리도 아니 들린다. 서슴지 아니하고 마당에 들어서니 여러 방에 불을 켰으되 사람 그림자가 없다. 형식은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떻게 찾을 줄을 몰라 다만 발소리를 내며 '에헴' 하고 크게 기침을 하였다. 저편 방으로서 뚱뚱한 노파가 나오는 것을 형식은 한 걸음 방 앞으로 (가까이) 갔다. 번적하는 화류자개 함롱이 보이고, 아랫목에는 분홍빛 그물 모기장이 걸리고, 오른편 구석에는 아롱아롱한 자루에 넣은 가얏고가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섰다. 형식은 이것이 '영채의 방'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슬픈 생각과 불쾌한 생각이 난다. 이 방에서 여러 남자로 더불어 저 가얏고를 타고 소리를 하고 춤을 추었는가. 그러다가 저 모기장 속에서 날마다 다른 남자와…… 형식은 차마 더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영채는 어디 갔는가. 벌써 누구에게 '천 원'에 팔려 갔는가. 어젯저녁에 내 집에서 돌아오는 길로 팔려 가지나 아니하였는가. 또는 만일 영채가 절개가 굳다 하면 벌써 어디 가서 자살이나 아니하였는가. 이때에 형식의 머릿속에는 수천 가지 생각이 뒤를 대어 나온다. 형식은 저편 방으로서 나오는 뚱뚱한 노파― 노파라 하여도 사오십이나 되었을까―를 보고, '저것이 소위 어미로구나' 하였다. 노파는 손에 태극선을 들고 담뱃대를 물었다. 지금까지 웃통을 벗고 앉았었는지 명주항라 적삼 고름을 매면서 나온다. '더러운 노파'라는 생각이 형식의 가슴을 불쾌하게 한다. 노파는 형식의 모양이 극히 초라함을 보고 경멸하는 모양으로,
"누구를 찾아요?"
한다. 일찍 형식이와 같이 초라하게 차린 자가 월향을 찾아온 적이 없었음이라. 노파의 생각에 아마 형식은 어떤 부자의 아들의 심부름꾼인가 하였다. 그러므로 기생의 집에 온 사람더러,
"누구를 찾아요?"
하고 냉대함이라. 형식은 노파가 자기를 멸시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고 더욱 불쾌한 마음이 생겼다. '나도 교육계에는 상당히 이름 있는 사람인데' 하였다. 그러나 노파의 눈에는 부자가 있고 오입쟁이가 있을 따름이요, '교육계에 상당한 이름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형식이가 만일 좋은 세비로 양복에 분홍 넥타이를 매고 술이 취하여 단장을 두르며 '여보게' 하고 들어왔던들 노파는 분주히 담뱃대를 놓고 마당에 뛰어내리며 '에그, 영감께서 오시는구랴' 하고 선웃음을 쳤으련마는, 굵은 모시 두루마기에 파리똥 묻은 맥고자를 쓰고, 술도 취하지 아니하고, 단장도 두르지 아니하고, '여보게'도 부르지 아니하는 형식과 같은 사람은 노파의 보기에 극히 하등 사람이었다. 형식은 겨우 입을 열어,
"월향 씨 어디 갔소?"
하였다. 그러고는 곧 '월향'에게 '씨'자를 달아 부른 것을 한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아직 남의 이름에 '씨'자를 아니 달고 불러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남의 여자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씨'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소위 '째운 사람'들은 여학생을 (보고는 '씨'를 달고 기생을 보고는 '씨'를) 달지 아니할 줄을 알되, 형식은 여학생과 기생을 구별할 줄을 모른다. 형식의 생각에는 여학생이나 기생이나 사람은 마찬가지 사람이라 한다. 그러므로 형식은 '월향'에 '씨'를 붙이는 것이 옳으리라 하여 한참 생각한 뒤에 있는 용기를 다하여 '월향 씨 어디 갔소' 한 것이언마는 말을 하고 생각한즉 미상불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고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노파는 웃음을 참는 듯이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월향 씨가 손님 모시고 어디 갔소. 왜 그러시오?"
"어디 갔습니까?"
노파는 '이것이 과연 시골뜨기로구나' 하면서,
"아까 오후에 청량리 나갔소. 여섯점에 들어온다더니 아직 아니 오구려"
하고 성가신 듯이 '잘 가오' 하는 말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고 만다.
"누구요?"
하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에
"모르겠소. 웬 거랑방인데 왔구면."
하는 그 노파의 평양 사투리가 들린다. 형식은 일변 실망도 하고, 일변 그 노파에게 멸시받은 것이 부끄럽기도 분하기도 하면서 발을 돌렸다. '계월향! 계월향이가 과연 박영채의 변명인가' 하고 계월향의 내력을 물어 보고도 싶었으나 노파에게 그러한 멸시를 받고는 다시 물어 볼 용기도 아니 나서 그만 대문 밖에 나섰다.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아까 오던 길로 나온다. 아까 올 때에 '반나마 늙었으니……' 하던 목소리로 '간다 간다네 나는 간다네' 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까 모양으로 여럿이 함께 웃는 웃음 소리가 들린다. 어찌할까 하고 형식은 생각하였다. '청량리! 오후에 나가서 여섯점엔 온다던 것이 아직 아니 들어와!' 형식은 이 말에 무슨 깊은 뜻이 있는 듯이 생각하고 몸이 오싹하였다. '영채가 혼자 어떤 남자로 더불어 청량리에 가 있어! 더구나 밤이 여덟시나 지났는데!' 하고 형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형식은 전속력으로 다방골 천변으로 내려온다. '옳다! 청량리로 가자' 하였다. 형식의 귀에 영채가 우는 소리로 '형식 씨, 나를 건져 주시오, 나는 지금 위급하외다' 하는 듯하다. 형식은 지금 광충교로 지나가는 동대문행 전차를 잡아탈 양으로 구보로 종각을 향하여 뛰었다. 그러나 전차는 찌구덩 하고 소리를 내며 종각 모퉁이를 돌아 두어 사람을 내려놓고 달아난다. 형식은 그래도 십여 보를 따라갔으나 전차는 본체만체하고 청년회관 앞으로 달아난다. 야시에는 아까보다도 사람이 많이 모였다. 종각 모퉁이 컴컴한 데로서 '에, 아이쓰구림, 아이쓰구림' 하는 늙은 총각의 목소린 듯한 것이 들린다.
37
형식은 다음 번 오는 전차를 탔다. 신호수가 푸른 등을 두르니, 전차는 또 찌국 하는 소리를 내며, 구부러진 데를 돌아간다. 형식은 조민한 생각에 구리개로서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잘못 탔다. 형식은 전차에서 뛰어내려서 바로 뒤대어 오는 동대문행을 잡아탔다. 형식은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의 땀을 씻었다. 차장은 형식의 차세를 받고 '딸랑' 하면서 유심히 형식의 얼굴을 본다. 형식의 얼굴은 과연 몹시 붉게 되었더라. 형식은 전차 속을 한번 둘러보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형식은 전차가 일부러 속력을 뜨게 하는 것같이 생각하였다. 과연 야시에 사람이 많이 내왕하여 운전수는 연해 두 발로 종을 딸랑딸랑 울리면서 천천히 진행하더라. 형식의 가슴에는 불이 일어난다. 형식은 활동사진에서 서양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질풍같이 달아나는 양을 생각하고, 이런 때에 나도 자동차를 탔으면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종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철물교를 지나 배오개를 지나 동대문을 지나 친잠하시는 상원 앞 버들 사이를 지나 청량리를 지나 홍릉 솔숲 속으로 달려가는 것을 상상하였다. 그러고 자기가 어느 집에서 영채가 어떤 사람에게 고생을 당하는가 하고 땀을 흘리며 이집 저집으로 찾아다니는 양과, 여승들이 방글방글 웃으며 '모르겠습니다' 할 때에 자기가 더욱 초조하여 하는 양을 상상하였다. 이때에 누가 형식의 어깨를 툭 치며,
"요― 어디 가는가?"
한다. 형식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신문기자 신우선이로다. 신우선은 형식의 곁에 앉아 그 대팻밥 모자로 부채질을 하며,
"그래 어떤가? 김장로의 따님이 자네를 사랑하던가?"
하고 곁에 앉은 사람이 듣는 것도 상관치 아니하는 듯이 큰소리로 말한다. 형식은 잠깐 아까 자기가 김장로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였던 생각을 하고 곧 우선이가 자기의 지금 가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을 생각하였다. 형식은 우선의 귀에 입을 대고,
"여보게 큰일이 났네."
하였다. 우선은 껄껄 웃으며,
"아따, 자네는 큰일도 많데, 또 무슨 큰일인가?"
한다. 형식은 우선의 팔을 잡아당기어 말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뜻을 표하고 다시 말을 이어 자기의 은인의 딸이 지금 기생으로 서울에 와 있는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왔는데, 지금 여러 유력한 사람들이 그를 자기네의 손에 넣으려 하는데, 지금 청량리에서 어떤 사람에게 위협을 당하는 중인데, 지금 자기는 그를 구원하러 가는 길이라 하고 마침내,
"여보게, 자네는(자네가) 좀 도와 주어야 되겠네."
하고 말을 맺었다. 형식은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영채가 방금 어떤 남자에게 위급한 위협을 받는 양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우선은,
"응, 응, 그래, 응."
하고 형식의 가늘게 하는 말을 주의하여 듣더니,
"그래, 그 이름은 무엇인가."
"본명은 박영채인데 계월향이라고 한다네."
하고 '계월향'이가 과연 '박영채'인가 하고 의심도 하였다. 우선은 '계월향'이란 말을 듣고, 또 계월향이가 (형식의 은인의 따님이란 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선은 눈이 둥글하여지며,
"여보게, 그게 참말인가?"
하고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은 조민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하는 듯 숨소리가 커지며,
"참말일세, 참말이어!" 하고 영채가 어젯저녁에 자기를 찾아왔단 말과 자기를 찾아와서 신세 타령을 하던 말과, 자기가 방금 다방골 월향의 집으로 다녀온다는 말을 하고 다시,
"그런데 나를 좀 도와 주게."
한다.
"도오다이몬 슈텐(동대문 종점)! 동대문이올시다."
하는 차장의 소리에, 두 사람은 말을 끊고 전차에서 내렸다. 아직도 청량리 가는 전차가 오지 아니하였다.
우선이가 형식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우선이도 계월향을 처음 보고 그만 정신을 잃은 여러 사람 중의 하나이라. 우선은 백에 하나도 쉽지 아니한 호남자였다. 풍채는 좋겠다, 구변이 있겠다, 나이는 불과 이십오륙 세로되, 문여시(文與詩)를 깨끗이 하겠다, 원래 서울에 똑똑한 집 자손으로 부귀한 집 자제들과 친분이 있겠다, 게다가 당시 서슬이 푸른 대신문에 기자였다. 이러므로 그는 계집을 후리는 데는 갖은 능력과 자격이 구비하였었다. 그는 여러 기생을 상종하였고, 또 연극장의 차리는 방〔樂屋〕에 출입하여 삼패며 광대도 희롱하였었다. 이렇게 말하면 신우선이란 사람은 계집 궁둥이나 따라다니는 망가자와 같이 들리되, 그에게는 시인의 아량이 있고 신사의 풍채가 있고 정성이 있고 의리가 있었다. 그의 친구는 그의 방탕함을 책망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재주와 쾌활한 기상을 사랑하였다. '신우선은 지나 소설에 뛰어나오는 풍류 남자라' 함은 형식의 그를 평한 말이니, 과연 그는 소주, 항주 근방에 당나라 시절 호협한 청년의 풍이 있었다.
신우선이가 계월향에게 마음을 둔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우선은 자기의 힘을 믿으매 월향도 으레 자기의 손에 들려니 하였다. 월향이가 여러 부호가 자제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일생을 의탁할 만한 영웅 재자를 구함이라 하고, 자기는 족히 그 후보자가 되리라 하였다. 그래서 우선은 남들이 돈과 육욕으로 월향을 달랠 때에, 자기는 인물과 재주와 기상으로 월향을 달래리라 하였다. 무론 우선은 돈으로 경쟁할 만한 힘은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밤마다 시를 지어 혹은 우편으로 혹은 직접 월향에게 주었다. 이러노라면 월향은 자기의 인격과 천재를 알아보고 '이제야 내 배필을 만났구나' 하면서 두 팔을 벌리고 자기에게 안기려니 하였다. 그러하던 즈음에 형식에게서 이러한 말을 들으니 놀라는 것도 마땅하다.
38
신우선은 전차 오기를 기다리면서 괴로워하는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발전소에서는 쿵쿵쿵쿵 하는 발동기 소리가 나고 누런 복장 입은 차장과 운전사들이 전등빛 아래 왔다갔다하였다. 우선은 생각하였다. '월향이가 나더러 평양 친구를 묻던 것이 그 때문이로구나' 하였다. 한번 우선이가 월향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월향이가 농담 모양으로 웃으며,
"나리께 평양 친구가 계셔요?"
하고 우선에게 물었다. 우선은 월향이가 평양 사람이니까 평양 친구를 묻는 줄로 생각하고,
"이삼 인 되지."
하였다. 월향은,
"그래, 그 어른들은 다 무엇을 하시는가요?"
하였다. 이때에 월향은 첫째에 이형식의 거처를 알려 함과, 평안도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어떻게 지내는가를 알려 하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월향도 평안도 학생들이 많이 서울에 와 있는 줄은 알건마는 몸이 기생이 되어서는 그 평안도 학생들과 또 평안도 사람 신사들이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월향에게도 평안도 신사가 삼사 인 놀러 왔었다. 그네들은 다 번적하는 양복을 입고 일본말로 회화를 하며 동경에 가서 대학교에 다니던 이야기를 하고 매우 젠체하며 신사인 체하였다. 그러나 월향은 사 년 전 부벽루에서 월화가 '저것들은 허자비에 옷을 입힌 것이라' 하던 말을 생각하고 '저들도 역시 허자비에 옷을 입힌 것이라' 하였다. 그러고는 월향의 생각에 '저것들이 평안도 사람으로 서울에 와 있는 일류 신사인가' 하고 자기의 고향을 위하여 슬퍼하였었다. 그러하던 차에 우선이가 '평안도 친구가 이삼 인 있지' 하는 말을 듣고, 행여나 그 속에 '월화의 이상적 인물'이 되임직한 사람이 있는가 하고, 또 그 사람이 자기가 기다리는 이형식이나 아닌가 하였다. 월향의 눈에는 우선은 조선에 드문 남자라 하였다. 옛날 시에 있는 듯한 남자라 하였다. 그러고 그 의식의 호탕함을 더욱 사랑하여 '월화 형님에게 보였으면'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우선의 친구라 하면 상당한 사람이려니 하고,
"그래 그 어른들은 다 무엇을 하시는가요?"
하고 물음이라. 우선은,
"혹은 교사도 하고, 글짓기도 하고, 실업도 한다"
하였다. 월향은 더욱 더욱 유심하게,
"그 중에 누가 제일 좋은 사람이에요? 누가 제일 이름이 있어요?"
하였다. 우선은 유심히 월향의 얼굴을 보며 '옳지, 저 계집이 본고향 사람 중에 배필을 구하는구나' 하고 얼마큼 시기하는 생각이 나서,
"그 중에 이형식이란 사람이 제일 유망하지마는."
하고 이형식의 가치를 낮추기 위하여 '하지마는'에 힘을 주었다. 월향은 가슴이 갑자기 뛰었다. 그러나 그 빛을 감추고 아양을 부리며,
"유망하지마는 어때요?"
하였다. 우선은 자기가 친구의 험담을 한 듯하여 적이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응, 이형식이가 좋은 사람이지…… 매우 유망하지."
하고는 그래도 행여나 이형식에게 월향을 빼앗길까 두려워,
"아직 유치하지…… 때를 못 벗어서."
하고 자기보다 훨씬 낮은 사람 모양으로 말하였다. 무론 이것이 거짓말은 아니라. 우선은 결코 형식을 자기보다 인격으로나 학식으로나 문필로나 승하다고는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뿐더러 자기와 평등이라고도 생각지 아니한다.) 그래서 '형식은 우선 한문이 부족하니까' 하고 형식이가 자기보다 일문과 영문이 넉넉한 것은 생각지 아니한다. 그러고 자기는 어디까지든지 형식의 선배로 자처하며, 형식도 구태여 우선과 평등을 다투려 하지 아니하고, 우선이가 선배로 자처하면 형식도 우선을 선배 모양으로 대접하였다. 그리하다가 일전에 우선이가 형식에게 허교하기를 청할 적에도 형식은 윗사람에게서 허락을 받는 모양으로 극히 공손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결코 형식을 미워하거나 멸시하지 아니하였다. 우선은 '형식의 유망함'을 진실로 믿었다. 그러므로 월향에게 '유망은 하지마는 아직 때를 못 벗었어' 한 것은 결코 형식을 비방함이 아니요, 자기가 형식에게 대한 진정한 비평을 말한 것이라.
'아아, 그때에 내가 월향에게 형식을 소개한 것이 이러한 뜻을 가졌던가' 하고 다시금 전차를 기다리고 섰는 형식을 보았다. 형식은 조민한 듯이 왔다갔다하며 동편만 바라보고,
"어째 전차가 아니 오는가?"
"밤이 깊었으니까 삼십 분에 한 번씩이나 다니는지."
하고 우선은 형식의 괴로워함을 동정하였다. 형식은 애처로워서 우선을 손을 꼭 쥐며,
"참, 오늘 저녁 힘을 써주게."
하였다. 외로운 형식의 지금 경우에는 우선이밖에 믿는 사람이 없었다. 우선이만 자기를 도와 주면, 영채는 건져 낼 수가 있거니 하였다. 우선은
"걱정 말게."
하고 돌아서면서 픽 웃었다. 그 웃음에는 까닭이 있었다.
우선은 경성학교 교주 김남작의 아들 김현수와 배명식 양인이 월향을 청량리로 데리고 갔단 말을 월향의 집에서 듣고, 월향은 오늘 저녁에는 김현수의 손에 들어가는 줄을 짐작하였다. 그래서 우선은 빨리 종로경찰서에 가서 형사에게 말을 하여 (귓속하여) 후원을 청하고, 김현수의 계교를 깨트리려 하였다. 월향을 아주 김현수의 손에서 뽑아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신문에 발표하여 실컷 분풀이나 하고, 혹 될 수 있으면 김현수에게서 맥줏값이나 빼앗으려 하였다. 아까 철물교에서 전차를 탄 것은 바로 종로경찰서로서 나오던 길이었다. 그러한 일이러니 이제 들어 본즉, 월향은 형식에게 마음을 바친 사람이라 한다. 미상불 시기로운 생각도 없지 아니하나 형식의 뜻을 이뤄 줌이 옳은 일이라 하였다.
39
두 사람은 청량사에 다다랐다.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종로경찰서의 형사였다. 우선은 김현수의 가는 집을 잘 알았다. 그 집은 우물 북쪽에 있는 조고마한 암자라, 여러 암자 중에 제일 깨끗하고 조용한 암자였다. 우선은 형식에게 손짓을 하여 문 밖에 서 있으라 하고 가만히 안에 들어갔다. 형식은 '여기 영채가 있는가' 하고 다리를 떨며 귀를 기울였다. 똑똑지는 아니하나 여자의 괴로워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형식은 손으로 가슴을 만지며 한 걸음 더 들어서서 귀를 기울였다. 과연 여자의 괴로워하는 소리로다. 형식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뛰어들어갔다. 방에는 불이 켜 있고, 문을 닫쳤는데 머리를 깎은 사람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형식의 호흡은 차차 빨라진다. 우선이가 창으로 엿보다가 고양이 모양으로 가만가만히 나오면서 형식의 어깨에 손을 짚고 가늘게 일본말로,
"모 다메다(벌써 틀렸다)."
한다. 형식은 그만 눈에 불이 번뜻 하면서 '흑' 하고 툇마루에 뛰어오르며 구두 신은 발로 영창을 들입다 찼다. 영창은 와지끈 하고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떨어져 들어간다. 형식은 영창을 떠들고 일어나는 사람을 얼굴도 보지 아니하고 발길로 차넘겼다. 어떤 사람이 형식의 팔을 잡는다. 형식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놈, 배명식아!"
하고는 기가 막혀 말이 아니 나온다. 형식은 아니 잡힌 팔로 배학감의 면상을 힘껏 때리고, 아까 형식의 발길에 채어 거꾸러진 사람을 힘껏 이삼 차나 발길로 찼다. 그 사람은 저편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형식은,
"이놈, 김현수야!"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넘어져 깨어진 영창을 들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우고 흑흑 느낀다. 손과 발은 동여매였다. 그러고 치마와 바지는 찢겼다. 머리채는 풀려 등에 깔렸고, 아랫입술에서는 빨간 피가 흐른다. 방 한편 구석에는 맥주병과 얼음 그릇이 넘느른하고 어떤 것은 깨어졌다. 형식은 얼른 치마로 몸을 가리고 손발 동여맨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여자는 얽어매인 두 손으로 낯을 가리운 대로 울기만 한다. 우선도 방 안에 들어왔다. 얽어매인 손발을 풀면서 형식더러,
"두 사람은 포박되었네."
하고 웃는다. 형식은 이러한 경우에 웃는 우선을 원망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이러한 사건을 형식의 모양으로 그리 큰 사건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우선은 천하 만사를 웃고 지내려는 사람이었다. 형식은 얼굴에 꼭 대고 있는 여자의 손목을 풀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손을 낯에서 떼지 아니하고 운다. 형식은 얼마큼 분한 마음이 스러지고 냉정하게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형식은 우뚝 서서 옷고름이 온통 풀어지고 옷이 흘러내려 하얀 허리가 한 뼘이나 내어놓인 것을 보고 새로운 슬픔이 생긴다. 형식은 '이것이 과연 박영채인가' 하고 '박영채가 아니면 좋겠다' 하였다. 그러고 그 옷을 보고 머리를 보았다. 무론 그 여자는 모시 치마도 입지 아니하고, 서양 머리도 쪽찌지 아니하였다. 형식은 그 치마를 만든 감이 다만 무슨 비단이어니 할 따름이요, 무엇인지를 몰랐다. 머리에 핏빛 같은 왜증 댕기를 들이고 손에는 누런 빛 있는 옥지환을 꼈다. 형식은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 얼굴을 보고자 아니하였나니, 대개 그 얼굴이 '박영채'일까 보아 두려워함이라.
우선은 그가 월향인 줄을 알았다. 그러나 월향이가 그 친구 되는 이형식의 은인의 따님이요, 또 이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다는 말을 듣고는 월향더러 '얘, 월향아' 하고 부르기도 미안하고, 또 월향의 곁에 가까이 가기도 미안하였다. 그래서 한 걸음쯤 형식의 뒤에 서서 형식의 하는 양만 보고 섰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낯에 손을 대고 울 뿐이라 형식도 무어라고 부를 줄을 몰라 한참이나 우두커니 섰다가 그 여자더러,
"여보시오! 그 짐승놈들은 포박되었으니 안심하시오"
하였다. '안심하시오' 하는 형식도 그 안심하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 짐승놈들이 포박되고 아니 되기에 무슨 안심하고 안심 아니함이 있으리요. 아까 우선이가 형식에게 한 말과 같이 '모 다메다'가 아니뇨. 우선은 참다못하여,
"여보시오. 박영채 씨!"
하였다. 우선은 그 여자가 월향인 줄을 알며 또 월향은 즉 박영채인 줄을 알았다. 그러므로 한 달 동안이나 '얘, 월향아!' 하던 것을 고쳐 '여보시오, 박영채 씨' 한 것이라. 갑자기 '씨'를 달고 '얘'를 변하여 '여보시오' 하기가 보통 사람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언마는 우선에게는 그처럼 어려운 일이 아니라 우선은 다시,
"여보시오! 박영채 씨! 여기 이형식 형이 오셨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여자는 몸을 흠칫하며 두 손을 갑자기 떼더니 정신없는 듯한 눈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도 그 얼굴을 보았다. 그는 월향이었다! 박영채였다! 영채도 형식을 보았다. 그는 형식이었다! 이형식이었다! 형식과 영채는 한참이나 나무로 새긴 사람 모양으로 마주보았다. 우선은 말없이 마주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렇게 세 사람은 한참이나 마주보았다. 이윽고 우선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다음에 형식과 영채의 눈에도 눈물이 돌았다. 영채는 피 흐르는 입술을 한번 더 꼭 물었다. 옥으로 깎은 듯한 영채의 앞닛박이 빨갛게 물이 든다. 형식은 두 팔로 가슴을 안으며 고개를 돌린다. 우선은 형식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형식은 소리를 내어 운다. 영채는 다시 앞으로 쓰러지며 운다. 우선도 입술을 물고 옷소매로 눈물을 씻었다. 종소리가 서너 번 똥……똥 울어 온다.
40
형사는 김현수, 배명식 양인에게 박승을 지워 마당으로 끌고 들어왔다. 형식은 당장 마주 나가서 그 두 사람의 살을 뜯어 먹고 뼈를 갈아 먹고 싶었다. 두 사람은 그래도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네는 결코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네의 생각에 기생 같은 계집은 시키는 말을 아니 들으면 강간을 하여도 관계치 않다 한다. 그네는 여염집 부인이 남의 남자와 밀통함이 죄인 줄을 알건마는 기생 같은 것은 으레 아무나 희롱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다. 여염집 부녀에게는 정절이 있으되, 기생에게는 정절이 없는 것이라 한다. 과연 그네의 생각하는 바는 옳다. 법률상 기생은 소리와 춤으로 객을 대하는 것이라 하건마는, 기실은 어느 기생치고 밤마다 소위 '손을 보'지 아니하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김현수나 배명식의 생각에, 기생이라는 계집사람은 모든 도덕과 모든 인륜을 벗어난 일종 특별한 동물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오늘 저녁에 한 일이 결코 도덕이나 양심에 거슬리는 행위인 줄로는 생각지 아니한다. 다만 귀찮은 법률이라는 것이 있어 '부녀의 의사를 거슬리고 육교를 한 것'을 강간죄라 할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네가 만일 이 자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내일 아침부터는 자기네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인 줄로 알 것이라. 다만 배명식은 소위 교육자라는 명목을 띠고서 이러한 허물로 박승을 지게 되면, 경성학교의 학감의 지위가 위태할 것을 근심하였을 뿐이라.
형식은 분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두 사람을 보았다. 김현수로 말하면 마땅히 그러할 사람이라 하더라도, 소위 교육자라 일컫는 배명식이가 이런 대죄악을 범하였음을 보고 더욱 분하여 하였다. 형식은 배의 곁에 서며 조롱하는 목소리로,
"여보, 배형. 이게 무슨 짓이오? 교육가로 강간이란 말이 웬 말이오?"
하였다. 배명식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형식이가 왜 이 일에 참견하는가' 하고 그것을 이상히 여겼다. 그러고 이형식은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는 놈이라 하고 괘씸하게도 여겼다. 자기가 강간죄를 범하였으니, 형사의 포박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거니와 상관없는 이형식에게 책망을 받을 이유야 무엇이랴 하였다. 그러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마 이형식도 표면으로는 품행이 단정한 체하면서도 속으로 기생집에를 다녀 월향과 친하였다가, 자기가 월향을 손에 넣으려는 것을 시기하여 형사를 데리고 온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형식이가 상관도 없는 일에 형사를 데리고 오며 저렇게 성낼 까닭이 없으리라 하였다. 배명식은 직접으로 자기의 이해에 상관되는 일이 아니고는 슬퍼할 줄도 모르고 괴로워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 자기의 자식이 칼로 손가락을 조곰 벤 것을 보면 명식은 슬퍼할 줄을 알지마는, 남의 집의 아들이 죽는 것을 보더라도 '참 슬프옵니다' 하고 입으로는 남보다 더 간절한 듯이 말하는 대신에 마음으로 슬퍼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로다. 만일 영채가 자기의 누이동생이거나 딸이었던들, 남이 영채를 강간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형식보다 더욱 분을 내어 칼을 들고 덤비려니와 영채가 누이도 아니요, 딸도 아니므로 그가 강간을 받아도 관계치 않고 죽더라도 관계치 않다 한다.
형식은 김현수를 대하여,
"여보, 당신은 귀족이오! 귀족이란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칭호는 아니지요. 당신도 사오 년간 동경에 유학을 하였소. 당신이 어느 회석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시오? 당신은 일생을 교육사업에 바친다고 한 말을."
하고 형식은 발을 굴렀다. 현수는 시골 상놈한테 큰 수모를 당한다 하였다. 암만하여도 나는 남작이요, 수십만 원 부자요, 너는 가난한 일서생이로구나. 지금은 네가 나를 이렇게 모욕하되, 장차 네가 내 발 앞에 꿇어 엎드릴 날이 있으리라 하였다. 나는 이렇게 형사에게 포박을 당하더라도 내일 아침이면 놓여 나올 수도 있건마는, 너는 한번 옥에 들어가기가 바쁘게 일생을 그 속에서 썩으리라 하였다. 네가 아무리 행실이 단정하다 하더라도 일생에는 무슨 허물도 있으리니. 그때에는 내가 오늘 받은 수모를 네게 갚으리라 하였다. 그러고 아까 영채를 안던 쾌미를 생각하매 중도에 방해를 더한 형식의 행위가 괘씸하다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말할 바가 아니니 외따른 청량리 솔수풀 속에서는 남작의 권위와 황금의 힘도 부릴 수가 없음이라.
우선은 형식이가 두 사람을 크게 책망할 줄 알았더니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행실 잘하기를 가르치는 모양으로 말함을 보고 형식은 아직도 세상을 모르는 도련님이라 하였다. 만일 내가 형식이가 되었으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실컷 꾸지람이나 톡톡히 하여 분풀이를 하련마는 하였다. 그러나 형식으로는 이보다 이상 더 심한 책망을 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형식이가 마침내 다시 한번 발을 구르며,
"여보! 사람들이 되시오!"
하였다. 형식은 생각에 아마 이만하면 저 두 사람들이 양심에 부끄러움이 생겨 '다시는 이러한 일을 아니하리라' 하고 아프게 후회할 줄을 믿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앉았는 것은 아마 자기의 말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생겨 그러하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기실 부끄럽기는 하였으나 후회하지는 아니하였다.
우선은 참다못하여,
"여보게 자네는 영채 씨 모시고 들어가게. 이 일은 내가 맡음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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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형식은 분해하는 김종렬을 향하여,
"그러나 그런 온당치 못한 일을 해서야 쓰겠나. 참아야지."
"아니올시다. 벌써 삼 년 동안이나 참았습니다."
하고 기어이 배학감을 배척하고야 말려 한다. 김종렬은 말을 이어,
"이렇게 이백여 명 용감한 청년들이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제는 일보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주께서 허하지 아니하시면 할 수 있소?"
김종렬은 '교주'란 말을 듣고 얼마큼 낙심하였다. 한참 고개를 기웃기웃하고 생각하더니,
"그러니까 퇴학합지요. 경성학교가 아니면 학교가 없어요?"
"그러나 아무리 고식한 일이 있어도 동맹 퇴학은 온당치 아니하시. 또 모교를 떠나기가 어렵지 아니한가?"
"모교가 무슨 모교오니까. 이전 박선생님께서 교장으로 계시고, 윤선생님께서 학감으로 계실 때에는 모교였지마는…… 지금은 학교에 대하여 정이란 조곰도 없습니다. 교장이라는 어른은 아무것도 모르시지요……. 학감이라는 자는 기생집에만 다니지요……."
하고 김종렬의 눈에는 분한 기운이 오른다. 이희경은 '학감이란 자'라는 말을 듣고 김의 옆을 찌르며,
"여보, 그게 무슨 말이오?"
"어째! 그따위 학감을 무어라고!"
형식은 근심하는 빛으로,
"그러면 지금 교장 댁으로 가려 하오?"
"녜, 교장어른 가 뵈옵고, 열점쯤 해서 교주 댁으로 가렵니다. 교주는 열점이나 되어야 일어난다니까…….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저희 일에 동정하십니까?"
"내가 교사의 몸이 되어 동정하고 말고를 말할 수가 없지마는 다시 생각하여서 일이 없도록 하여야지."
하고 두 청년을 돌려보냈다. 형식도 마음으로는 무론 배학감의 배척에 찬성하였다. 교실에서 무슨 말하던 끝에 혹 그 비슷한 말을 한두 번 한 적도 있었다. 사백여 명 학생과 십여 명 교원 중에 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도 없었다. 교원들도 아무쪼록 배학감과 말을 아니하려 하고 학생들도 길가에서 만나면 못 본 체하고 지나간다. 누군지 모르나 익명으로 배학감에게 학감 사직의 권고를 한 자도 있고, 혹 배학감이 맡은 역사나 지리 시간에 칠판에다가 '배학감을 교장으로 할사, 배학감은 천하 제일 역사 지리사라' 하는 등 풍자하는 글을 쓰고, 혹 뒷간에다가 '배학감 요리점이라' 하고 연필로 쓴 어린 글씨는 아마 일이년급 학생이 배학감에게 '너도 사람이냐' 하는 책망을 받고 나와 분김에 쓴 것인 듯. 교사치고 별명 없는 이가 없거니와 배학감은 그 중에도 가장 별명이 많은 사람이라. 다른 교사의 별명은 다만 재미로 짓는 것이로되, 배학감의 별명은 미움과 원망으로 지은 것이라. 얼굴이 빨개지며 '너도 사람이냐' 하는 혹독한 책망을 받은 어린 학생들은 당장은 감히 대답을 못하되, 문 밖에만 나서면 혀를 내어밀고 (제가) 특별히 (짓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남이 지어 놓은 별명을) 새 별명을 이삼 차 부르고야 얼마큼 분이 풀린다. 어린 학생들은 이 별명이라는 방법으로 혹독한 배학감에게 대한 분풀이하는 약을 삼았다. 그러므로 여러 학생이 한꺼번에 배학감에게 '너희도 사람이냐' 하는 책망을 받은 때에는 일동이 한곳에 모여 앉아, 마치 큰절에서 아침에 중들이 모여앉아 염불하듯이 배학감의 별명을 있는 대로 부른다. 한참이나 열이 나서 별명을 부르다가 적이 속이 시원하게 되면,
"와, 와라, 후레, 라후레."
하고 모든 별명 중에 가장 (그) 경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별명을 부르고는 박장을 한다.
별명 중에 제일 유세력한 것이 셋이니, 즉 암펌, 여우 및 개다. 암펌이라 함은 혹독하다는 뜻이요, 여우라 함은 간특하다는 뜻이어니와, 개라 함은 자못 뜻이 깊다. 첫째, 배학감이 교주 김남작의 발을 핥고 똥을 먹으며 독일식 정탐견 노릇을 한다 함이니, 배학감은 아랫사람에게 대하여 혹독하게 하던 것과 달라, 자기보다 한층 높은 사람을 대하여서는 마치 오래 먹인 개가 그 주인을 보고 꼬리를 두르며 발굽을 핥는 모양으로 국궁돈수(鞠躬頓首)가 무소부지(無所不至)며, 조곰 아랫사람에게 대하여서는 일부러 몸을 뒤로 젖히고 혀가 안으로 가들어(기어)들다가도 한층 윗사람 앞에 나아가면 전신의 근육이 탁 풀어져 고개와 허리가 저절로 굽어지며 혀의 힘줄이 늘어나 말에 '하시옵', '하옵시겠삽' 같은 경어란 경어를 있는 대로 주워다가 바친다. 이리하여 용하게도 교주 김남작의 신용을 얻어 배명식이라면 김남작의 유일한 청년 친구라. 이리하여 배학감은 동료와 학생 간에는 지극히 비평이 나쁘되, 김남작을 머리로 하여 소위 상류계급에는 지극히 신용이 깊다. 이러므로 아무리 동료와 학생들이 배학감을 배척하여도 배학감의 지위는 반석같이 공고한 것이라. 둘째, 동료 중에 자기의 시키는 말을 듣지 아니하거나 또는 자기를 시비하는 자가 있거나, 혹 이유는 없으되 자기의 눈에 밉게 보이는 자가 있으면 곧 교주에게 품하여 이삼 일 내로 축출 명령이 내린다. 이리하여 아까 김종렬이가 사모하던 박교장과 윤교감을 내어쫓고 지금 교장과 같이 숙맥불변하는 노인을 교장으로 삼고 자기가 학감의 중임을 맡아 교내의 모든 사무를 온전히 제 마음대로 하게 된 것이라. 이리하여 학교에 있던 교사 중에 적이 마음 있는 자는 다 달아나고 다른 데 갈 데가 없다든가, 배학감의 절제를 달게 받는 사람만 남게 되어 학교는 점점 말이 못되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형식은 동경 유학생인 까닭에 배학감도 과히 괄시를 아니하고, 또 형식도 자기까지 떠나면 학교가 말이 아니리라 하여 아직 남아 있는 것이라.
이렇게 배학감은 전교내의 배척을 받아 오던데다가 근래에는 무슨 심화가 생겼는지 다동 구리개 근방으로 부지런히 청루를 방문하는 사실이 발각되어 이번 소동이 일어난 것이라.
형식은 '방관할 수 없고나.' 하고 곧 학교로 갔다.
22
형식은 될 수만 있으면 이 일을 무사하게 되도록 하리라 하고 학교에 가는 길에 생각하였다. 이 일의 원인은 온전히 배학감에게 있으니 우선 배학감을 보고 이러한 말을 한 후에 이로부터 몸을 삼가도록 권하리라 하였다. 배학감은 무론 이형식이가 자기의 휘하에 들지 아니함을 항상 미워하여 표면으로는 친한 (체 존경하는) 체하건마는 이면으로 어떻게 하든지 핑계를 얻어 눈껍질에 흙(눈 속에 못) 같은 이형식을 경성학교에서 내어쫓으리라 한다. 형식도 아주 이런 줄을 모름이 아니로되 그러나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또는 사람은 같고 아니 같고, 사오 년래 친구로 사귀어 온 배명식을 위하여 불가불 자기가 힘을 쓰지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 하였다.
교문에 들어서니 일이년급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놀다가 형식을 보고 모여들어,
"선생님, 오늘 놉니까. 저희도 놀아요?"
하고 삼사년급에서도 노는데 자기도 놀기를 바란다고 한다. 형식은 사무실에 들어갔다. 배학감은 매우 성이 났는지, 그렇지 아니해도 뾰족한 얼굴이 더욱 뾰족하게 되어서 형식이가 들어오는 것도 본체만체, 형식도 배학감에게는 인사도 아니하고 곁에 앉았는 다른 교사들에게만 인사를 하였다. 다른 교사들은 각각 앞에다가 분필통과 교과서를 놓고 벌써 아홉시에 십여 분이 지났건마는 교실에 들어갈 생각도 아니한다. 형식은 무슨 풍파가 있던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어째 시간에들 아니 들어가셔요?"
하였다. 한 교사가,
"웬일인지 삼사년급 학생은 하나도 아니 왔구려."
하고 일동은 학감을 본다. 형식은 물끄러미 학감을 보다가 그 곁으로 가까이 가서 선 대로,
"학감? 학교에 큰일이 났구려."
"나는 모르겠소."
하고 (학감은) 얼굴을 돌이킨다. 형식은 말을 나직이 하여,
"무슨 선후책을 해야 아니하겠소. 이렇게 앉았으면 어떻게 해요?"
"글쎄, 이게 웬일이오. 이 되지 아니한 자식들이― 이 삼사년급 놈들이 왜 오지를 아니하오?"
형식은 네가 아직 모르는구나 하였다. 삼사년급 일동이 동맹 퇴학을 한단 말을 할까말까 주저하다가 먼저 알고 잠자코 있음이 도리어 도리가 아니라 하여,
"모르시구려, 아직도."
"무엇을 말씀이오?"
"삼사년급 학생들이 동맹 퇴학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교장과 교주에게 퇴학 청원서를 제출하였다는데……."
"무엇이오? 동맹 퇴학?"
배학감도 이 일에는 얼마큼 놀라는 모양이라. 자기의 신학설의 교육도 그만 실패하였다. 곁에 있던 교사들도 모두 놀라서 자리를 떠나 학감의 곁으로 모였다. 학감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으셨소?"
"아까 어떤 학생들이 퇴학 청원서를 가지고 나한테 왔습데다그려. 교장 댁으로 가는 길이노라고."
이렇게 말하고 형식은 흠칫하고 저 혼자 놀랐다. 이러한 말을 공연히 하였구나 하였다.
배학감은 독기 있는 눈으로 물끄러미 형식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며,
"잘하였소. 노형은 철없는 학생들을 충동하여 학교를 망하게 하시구려!"
하고 형식을 흘겨본다. 배학감도 평상시에 학생들이 자기보다 도리어 형식을 존경하여 자기는 방문하는 학생이 없으되 형식을 방문하는 학생이 많은 줄을 알고 늘 시기하는 마음으로 있었다. 그러고 학생들이 형식을 따르는 것은 형식의 인격이 자기보다 높고 따뜻함이라 하지 아니하고, 형식이가 학생을 유혹하는 수단이 있고 학생들이 형식에게 속아서 따름이라 하였다. 학감은 속으로 '형식이가 학생들을 버린다' 하여 자기 보는 데서 학생들이 친절하게 형식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매양 불쾌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학생들이 마땅히 존경하여야 할 사람은 자기어늘, 자기를 존경하지 아니하고 형식을 존경함은 학생들이 미련하여서 그럼이라 하였다. 학생들이 점점 더욱 자기를 배척하게 되는 것을 볼 때에 배학감은 이는 형식이가 철없는 학생들을 유혹하여 고의로 자기를 배척하려 함이라 하였다. 배학감이 한번 어떤 사람을 대하여 '형식은 학생을 시켜 자기를 배척하고 제가 교감이 되려는 야심을 두었다' 한 일이 있었다. 이번에도 형식이가 어떤 학생이 퇴학 청원서를 가지고 자기 집에 왔더란 말을 듣고, 이 일도 형식이가 시킨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형식, 잘하셨소!"
한다.
형식은 자기의 호의를 도리어 곡해하는 것이 분하여 성을 내며,
"노형은 당신의 간교한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판단하시구려. 나는 어디까지든지 호의로 노형과 학교를 위하여 만사가 순하게 되어 가기를 바라고 한 말인데, 노형은 도리어……."
형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학감은 더욱 얼굴을 붉히고 한 걸음 형식의 곁에 가까이 오며,
"여보, 이형식 씨. 내가 이전부터 노형의 수단을 알았소. 이 알고도 참았소. 여태껏 사오 차나 학생들이 학교에 대하여 반항한 것도 다 노형의 수단인 줄을 내가 아오. 노형은 이 학교를 멸망을 시키고야 말 테란 말이오?"
하고 '멸망'이란 말에 힘을 주며 주먹으로 책상을 친다. 형식은 기가 막혀 깔깔 웃으며,
"여보, 배명식 씨. 나는 아직도 노형은 사람인 줄을 알았구려."
하고는 형식도 와락 성을 내어 말소리를 떨며,
"노형은 친구의 호의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오. 내가 그 동안 학생과 교원 사이에 서서 얼마나 노형을 위하여 힘을 쓴지 아시오? 노형을 변호한지 아시오?"
"흥, 변호! 말은 좋소. 어린 학생들은 좋소. 어린 학생들을 시켜 학교에 대하여 반항이나 일으키게 하고, 어디 노형의 힘이 얼마나 큰가 봅시다."
하고 모자를 벗겨 들고 인사도 없이 문 밖으로 나간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흥, 또 교주 각하께 가는구나."
하고 픽 웃었다. 형식은 분을 참지 못하여 왔다갔다한다.
23
교원들은,
"이제는 형식도 경성학교에서 쫓겨나리라."
하면서, 왔다갔다하는 형식을 보고 교원 중의 하나가,
"그런데 이번에는 학생들의 이유가 무엇인가요."
형식은 대답하기 싫은 듯이 한참이나 들은 체 만 체하고 마당을 내다보다가 펄썩 제자리에 걸터앉아 책상 서랍을 뽑아 그 속에 있는 책과 종잇조각을 집어내며,
"무슨 이유야요, 그 이유지요."
다른 교원 하나가,
"불문가지지요. 아마 이번 배학감과 월향의 사건이겠지요."
하고 찬성을 구하는 듯이 형식을 보며,
"그렇지요?"
한다. 형식은 책상 서랍에서 집어낸 종잇조각을 혹 찢기도 하고 혹 읽어 보다가 접어 놓기도 한다. 셋째 교원이,
"학감과 월향의 사건?"
"모르시오? 학감과 월향의 사건이라고 유명합데다. 근래에 월향이란 기생이 화류계에 썩 유명합니다. 평양서 두어 달 전에 왔다는데 얼굴은 어여쁘지요, 글은 잘하지요, 말을 잘하지요. 게다가 거문고와 수심가가 일수라는구려. 그래서 장안 풍류 남아가 침을 흘리고 들어덤빈다는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어요. 아직 아무도 그를 손에 넣어 본 사람이 없다는구려."
정직하여 보이는 교원 하나가 말에 취한 듯이,
"손에 넣다께?"
"하하하하, 참 과연 도덕 군자시로구려. 퍽 여러 사람이 월향이를 손에 넣을 양으로 동치서주를 하고 야단들을 하나 봅데다마는, 거의 거의 말을 들을 듯 들을 듯해서 이편의 마음을 못 견디리만큼 자릿자릿하게 하여 놓고는 이편이 이제는 되었다 할 때에 '못하겠어요' 하고 똑 끊는다는구려. 그래서 알 수 없는 계집이라고 소문이 낭자하지요."
그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가,
"왜 그럴까요?"
"내니 알겠소? 남들이 그럽데다그려!"
카이젤 수염 있는 교사가,
"노형도 한두 번 거절을 당하였나 보구려……. 그래 가슴이 따끔합디까. 하하하하."
"천만, 나 같은 사람이야 그러한 호화로운 화류계와는 절연이니까…… 참, 나야 깨끗하지요. 하하하."
"누가 아나."
하고 한 교사가 웃으니 여러 사람이 다 웃는다. 그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도 웃기는 웃으나 더 알고 싶어하는 듯이 마치 학생이 교사에게 질문하는 모양으로,
"그래서?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할 제 카이젤 수염 가진 이가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의 어깨를 툭 치며,
"노형께서는 미인의 일이라면 노상 범연치는 아니하구려" 하고 껄껄 웃으니,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는 얼굴이 빨개진다. 월향의 말을 하던 교사가 담배를 붙이면서,
"그런데, 이 배학감께서 그만 월향 씨의 포로가 되었지요. 아마 십여 차나 졸랐던가 봅데다. 암만 조르니 듣소? '아니올시다' 하고는 거의거의 들을 듯 들을 듯하다가는 그만 발길로 툭 차는구려. 그래서 지금 배학감은 열이 났지요. 오늘 아침에도 뾰족해서 오지 않았습디까" 하고 머리를 훔치며, "그게 어젯저녁에도 월향이한테 발길로 채인 표야요."
"옳지 옳지? 어째 근래에는 얼굴이 더 뾰족하여졌다 하였더니 옳지 옳지 그런 일이로구려, 응?"
하고 카이젤이 웃는다.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는 더 물어 보고 싶으면서도 남들이 웃기를 두려워하여 잠잠하고 앉았다. 지금껏 가만히 듣기만 하고 빙긋빙긋 웃던 이가,
"그런데 그런 줄을 학생들이 알았는가요? 이번 퇴학 청원한 이유가 그것인가요?"
"그것은 모르겠소."
하고 '형식이 너는 알겠구나' 하는 듯이 형식을 본다. 형식은 여전히 종잇조각을 조사하는 체하면서도 다른 교사들의 말을 듣는다. 형식은 그 월향이라는 기생이 혹시 박영채가 아닌가 하였다. 말하던 교사가 형식이가 잠잠한 것을 보고 말을 이어,
"자세히는 모르지요마는, 아마 그것이 이번 퇴학하는 이율 테지요" 하고 형식의 너무 잠잠한 데 말하던 흥이 깨어져 말을 그치고 담배 연기로 공중에 글자만 쓴다. 정직하여 보이는 교사가 참다 못한 듯,
"학생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카이젤 수염이,
"학생들이, 학생들이 잘 모르오리다. 그 군들이 교사들 정탐을 어떻게 하는데 그러오! 교사들 뒷간에 가는 것까지 다 알지요. 얼른 보기에 아주 온순한 체,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지마는 저희들 중에도 경찰서도 있고 정탐도 있답니다. 이번에도 아마 학감이 월향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어떤 학생이 경찰을 하였던 게지……."
"하하하, 그만 등시포착이 된 심이로구려."
이렇게 여러 교원이 말하는 것을 듣더니, 담배 연기로 공중에 글자를 쓰던 교사가 암만하여도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듯이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불을 끄며,
"이러하구려."
하고 말을 낸다.
"학감이 암만하여도 견딜 수가 없어서 요새에는 단연히 그 기생을 낙적(落籍)을 시켜서 아주 자기 손에 집어넣으려는 생각이 났나 봅데다. 그런데 거기도 경쟁자가 많지요. 갑이 삼백 원 하면, 을은 사백 원 하고, 또 병은 오백 원 하고 이 모양으로 아마 한 천 원 올라갔나 봅데다. 그러나 학감이야 집까지 온통 팔면 삼백 원이나 될는지…… 도저히 금력으로야 경쟁할 수가 없지 않소? 하니까 명망과 정성으로나 얼러 볼 양으로 매일 밤 월향 아씨게 참배 기도를 하는 모양인데 엊그저께 어떤 장난꾼 학생이 뒤를 따랐던가 봅데다" 하고 웃는다. 일동은 아주 재미있는 듯이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학감과 월향의 장차 되어 갈 관계를 상상한다.
형식은 책상 위에 벌여 놓은 종잇조각을 다 치우지 아니하고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그 종잇조각을 도로 책상 서랍에 부리나케 와락 집어넣고 일동에게 인사하고 나간다. 일동은 형식을 보내고 시계를 쳐다보며 하품을 한다.
24
형식은 교문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하였다. 그 월향이란 것이 영채가 아닌가. 원래 평양 기생으로 얼굴이 어여쁘고 아직 아무도 그를 손에 넣은 사람이 없다 하니 그가 과연 영채인가. 영채가 월향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어 이삼 삭 전에 서울에 올라와 지금 화류계에 유명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아무도 일찍 그를 손에 넣어 본 자가 (없다 하니, 그러면 나를 생각하여) 절행을 지킴이 아닌가. 옳다, 그렇다. 그가 나를 위하여 절행을 지킴이로다. 그런데 그가 마음대로 손에 들지 아니하므로 돈 많은 호화객들이 그를 아주 제 소유를 만들려 하여? 저 배학감 같은 자가 다 영채를 제 손에 넣으려 하여? 만일 영채가 잘못되어 배명식 같은 짐승 같은 자의 손에 든다 하면 그의 일생이 어떻게 될까. 배명식 같은 자가 무슨 사람에게 대한 동정이 있을까. 다만 일시 색에 취하여 더러운 욕심을 채울 양으로 영채를 장난감을 삼으려 함이로다. 더구나 배명식은 삼 년 전에 동경으로서 돌아와 칠팔 년간 홀로 자기를 기다리고 늙어 오던 본처에게 애매한 간음이라는 죄명을 씌워 이혼하고 작년에 어떤 여학생과 새로 혼인을 한 자다. 신혼한 일년이 차지 못하여 벌써 다른 계집에게 손을 대려 하는 그런 무정한 놈의 첩이 되어? 내 은인의 딸이! 못 될 일이로다. 못 될 일이로다 하였다. 사오 인의 경쟁자가 있다 하고 배명식도 거의 밤마다 영채를 찾아간다 하니 그 육욕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사람들의 새에 끼여 영채는 얼마나 괴로워하는고. 어제 영채가 나를 찾아옴도 이러한 괴로움을 견디다 못하여 마침내 내게 의탁할 양으로 온 것이 아닐까. 와서 내 의복과 거처가 극히 빈한함을 보매, 나에게 구원을 청하여도 무익할 줄을 알고 중도에 말을 그치고 돌아갔음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의 빈한함이 더욱 슬프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과연 형식은 영채를 구원할 자격이 없다. 만일 월향이라는 기생이 진실로 영채라 하면 과연 형식은 영채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 '천 원 이상에 올라갔나 봅데다' 하는 아까 어느 교사의 하는 말을 생각하고 형식은 한숨을 쉬었다. '천 원!' 내가 만일 영채를 구원하려 하면― 그 짐승 같은 사람들에게서 영채를 구원하여 사람다운 살림을 하게 하려면 '천 원'이 있어야 하리로다. 그러나 내게는 천 원이 있는가 하고 형식은 자기의 재산을 생각하여 보았다. 형식의 재산은 지금 형식의 조끼 호주머니에 있는 반이나 닳아진 돈지갑뿐이라. 그 돈지갑은 십 원짜리 지표를 가득하게 넣어도 이삼백 원이 들어갈까말까 한 것이라. 아직 형식의 돈지갑에는 한번에 백 원을 넣어 본 적도 없다. 일찍 동경서 졸업하고 올 때에 어떤 친구의 호의로 양복값, 노비 합하여 팔십 원을 넣어 본 적이 있을 뿐이니, 이것이 형식의 일생 두고 처음으로 많은 돈을 가져 본 경험이라. 동경서 돌아온 지가 사오 년이니, 매삭에 십 원씩만 저금을 하였더라도 오륙백 원의 저축은 있으련마는 형식은 아직도 이 생활을 자기의 진정한 생활로 여기지 아니하고 임시의 생활, 준비의 생활로 여기므로 몇 푼 아니 되는 월급을 저축할 생각은 없이 제가 쓰고 남는 돈은 가난한 학생에게 나눠 주고 말았다. 그러나 형식은 책을 사는 버릇이 있어 매삭 월급을 타는 날에는 반드시 일한서방에 가거나, 동경 마루젠 같은 책사에 사오 원을 없이하여 자기의 책장에 금자 박힌 책이 붇는 것을 유일의 재미로 여겼었다. 남들이 기생집에 가는 동안에, 술을 먹고 바둑을 두는 동안에, 그는 새로 사온 책을 읽기로 유일한 벗을 삼았다. 그래서 그는 붕배간에도 독서가라는 칭찬을 듣고 학생들이 그를 존경하는 또한 이유는 그의 책장에 자기네가 알지 못하는 영문, 덕문의 금자 박힌 책이 있음이었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 조선 사람의 살아날 유일의 길은 우리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세계에 가장 문명한 모든 민족, 즉 우리 내지(일본) 민족만한 문명 정도에 달함에 있다 하고, 이리함에는 우리나라에 크게 공부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기를, 이런 줄을 자각한 자기의 책임은 아무쪼록 책을 많이 공부하여 완전히 세계의 문명을 이해하고 이를 조선 사람에게 선전함에 있다 하였다. 그가 책에 돈을 아끼지 아니하고 재주 있는 학생을 극히 사랑하며 힘있는 대로 그네를 도와 주려 함도 실로 이를 위함이라.
그러나 '천 원'을 어찌하는고 하고 형식의 마음은 괴로웠다. 전달에 탄 월급 삼십오 원 중에 오 원은 플라톤 전집 값으로 동경 책사에 부치고 십 원은 학생들에게 갈라 주고, 팔 원은 주인 노파에게 밥값으로 주고, 이제 그 돈지갑에 남은 것이 오 원 지표 한 장과 은전이 좀 있을 뿐이라. 아아, '천 원'을 어찌하는가 하고 형식의 마음은 더욱 괴로워 간다. '천 원! 천 원!' '천 원'이 어디서 나는가. 형식은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천 원이 어디서 나는가."
하고 소리를 내어 탄식하였다. 이렁저렁 교동 자기 숙소 앞에 다다랐을 때에 어떤 청년 이삼 인이 모두 번쩍하는 양복에 반쯤 취하여 비스듬히 인력거를 타고 기생을 앞세우고 기운차게 방울을 울리며 철물교를 향하여 내어닫는다. 형식은 성큼 뛰어 인력거를 피하여 주고 우뚝 서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여섯 채 인력거를 보고,
"천 원이 있기는 있구나!"
하였다. 과연 지금 기생을 앞세우고 인력거를 몰아가는 청년들에게는 '천 원'이 아니라 '만 원'도 있기는 있다. 형식은 이윽히 그 자리에 섰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바람 한 점 아니 들어오는 자기의 숙소로 들어갔다.
25
집에 들어가니 노파가 점심을 짓다가 부엌으로서 나오며,
"어째 오늘은 이르셔요? 학교가 없어요?"
형식은 모자와 두루마기를 방에 홱 집어던지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옷고름을 끄르고 부채를 부치며 화나는 듯이,
"흥, 삼사년급 학생들이 동맹 퇴학을 하였답니다."
"또? 또 배학감인가 한 양반이 어떤 게로구면" 하고 치마로 땀을 씻으며 형식의 얼굴을 보더니,
"왜? 어디가 불편하셔요?"
"아니오."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구려. 에그, 그 학교에서 나오시오그려. 밤낮 소동만 일어나고. 소동이 일어날 때마다 늘 심로를 하시면서 무엇하러 거기 계세요?" 하고 건넌방 그늘진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형식은 한참이나 화를 못 이기는 듯이 함부로 부채질을 하더니,
"그까짓 학교 일 같은 것은 심상하외다. 걱정도 아니합니다."
"그러면 또 무슨 일이 있어요? 무슨 다른 일이?"
형식은 벌떡 누워 다리를 버둥버둥하면서 혼자말 모양으로,
"암만해도 돈이 있어야겠어요?"
"호호호, 이제야 아시는가 보구려. 아 이 세상이 돈 세상이랍니다. 나 같은 것도 돈이 있으면 이렇게 고생도 아니하련마는……."
"그만한 고생은 낙이외다."
"에그, 남이란 저렇것다. 나도 벌써 육십이 아니어요. 조곰만 무엇을 하면 이렇게 허리가 아픈데, 허리가 아프도록 고생을 하니 누가 위로하여 주는 이가 있을까…… (병신일망정 아들 자식 하나가 있을까……) 목숨 모질어서 그렇지 나 같은 것이 살면 무엇 하겠어요" 하고 담뱃대를 깨어져라 하고 돌에다 톡톡 떨어 또 한 대를 담아 지금 떨어 놓은 담뱃재에 대고 힘껏 두어 모금 빨더니 와락 화를 내며, "담뱃불까지 말을 아니 듣는구나."
하고 담뱃대를 방 안에 내어던지고 짓던 점심이나 지을 양으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다.
형식은 노파의 하는 말과 하는 모양을 보고 혼자 웃었다. 저마다 제 걱정이 있고 또 제 걱정이 세상에 제일 큰 걱정인 줄로 믿는다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다 아무라도 그러한 걱정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아들이 없어 걱정, 벼슬을 못 해 걱정, 장가를 못 들어 걱정, 혹 시집을 못 가서 걱정, 여러 가지 걱정이 많으되 현대 사람의 걱정의 대부분은 돈이 없어서 하는 걱정이라 하였다. 돈만 있으면 사람의 몸은커녕 영혼까지라도 사게 된 이 세상에 세상 사람이 돈을 귀히 여김이 그럴듯한 일이라 하였다. '아아, 천 원! 천 원이 어디서 나는가' 하고 벌떡 일어나 방에 들어와 앉았다. 이 집이 천 원짜리가 될까 하였다. 또 책장에 끼인 백여 권 양장책이 천 원짜리가 될까 하였다. 옳지, 저 한 책의 저작권은 각각 천 원 이상이라 하였다. 나도 저만한 책을 써서 책사에 팔면 천 원을 받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영문으로 글짓기를 공부하여 가지고 그렇게 된 뒤에 얼마 동안 저술에 세월을 허비하고, 그 원고를 미국이나 영국에 보내고, 미국이나 영국 책사 주인이 (그 원고를 한번 읽어 보고) 그 다음에 그 책사에서 그 원고를 출판하기로 작정하고, 그 다음에 그 책사 주인이 우편국에 사람을 보내어 이형식의 이름으로 천 원 환을 놓으면 그것이 배로 태평양을 건너와 경성우편국에 와…… 아이구 너무 늦다…… 그것을 언제…… 하였다.
형식은 또 생각한다. 저 책들을 사지 말고 학생들에게 돈도 주지 말고, 사오 년 동안 매삭 이십 원씩만 저금을 하였더면 오십 삭 치고 천 원은 되었으렷다. 옳다, 그리하였던들 이러한 근심은 없을 것을. 더구나 학생들에게 돈을 대어 준 것은 참 부질없는 일이었었다. 나는 정성껏 넉넉지도 못한 것을 저희에게 주건마는 받는 학생들은 마치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 줄로 여겨 좀 주는 시기가 늦어도 게두덜거리는 모양, 게다가 그것을 은혜로나 아는가. 그것들이 자라서 큰 인물만 되고 보면 자기 도움도 무슨 뜻이 있거니와 지금 같아서는 그놈이 그놈이라 별로 뛰어나는 천재나 위인도 있는 것 같지 아니하고…… 아아, 부질없는 짓을 하였구나. 저금을 하였더면 이런 걱정이나 없을 것을. 응, 이달부터라도 지금까지 주어 오던 학생에게 일체로 돈 주기를 거절할까 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 불쌍한 어린 청년들의 '이선생님' 하고(하는) 모양이 눈에 암암하여 차마 그럴 수도 없고.
아아, 어쩌면 '천 원'을 얻는가. 만일 오늘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 원'을 가지고 가서 영채를 손에 넣으면 어찌할까. 혹 어젯저녁에 벌써 누가 '천 원'을 가지고 가서 영채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나 아니하였는가. 그러면 어젯저녁에 벌써 십구 년 동안 지켜 오던 몸을 어떤 짐승 같은 더러운 놈에게 허하지나 아니하였을까. 처음에는 영채가 그 짐승 같은 놈을 떼밀치며, 울며 소리치며 반항하다가 마침내 어찌할 수 없이 몸을 허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 짐승 같은 몸이 육욕에 눈이 벌개서 불쌍하고 어여쁜 영채에게 억지로 달려드는 모양과 영채가 울고 떼밀고 죽기로써 저항하다가 마침내 으아 하고 절망하는 듯이 쓰러지는 모양이 형식의 눈앞에 역력히 보인다.) 형식은 분함과 슬픔으로 전신에 힘을 주고 숨을 길게 내어쉬었다. 또 생각하면 영채가 어떤 사람에게 팔린 줄을 알고 밤에 남모르게 도망하지나 아니하였는가. 도망을 한다 하면 장차 어디로나 갈 것인가. 어여쁜 얼굴! 지키는 이 없는 열아홉 된 어여쁜 처녀! 도처에 '천 원' 가진 짐승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 영채는 도망이나 아니할까.
옳지! 영채가 그렇게 절조 굳은 영채가 제 몸이 어떤 사나이에게 팔린 줄을 알면! 그 골독한 마음으로 자살이나 아니하였을까.
'자살? 자살?' 하고 형식은 몸을 떨었다.
26
어찌하면 좋을까. 어찌하면 '천 원'을 얻어 불쌍한 영채― 사랑하는 영채― 은인의 따님 영채를 구원할까…… 이럴까…… 저럴까 하고 마음을 정치 못하면서 오후 한시에 안동 김장로의 집에 선형과 순애의 영어를 가르치러 갔다. 장로는 어디 출입하여 집에 없고 장로의 부인이 나와서 형식을 맞는다. 부인이 선형과 순애를 데리러 안에 들어간 뒤에 형식은 교실로 정한 모퉁이 방에 혼자 앉아 두 제자의 나오기를 기다린다. 방 한편 구석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상이 걸리고, 다른 한편에는 주인 김장로의 사진이 걸렸다. 아마 그 두 사진을 꽃으로 장식함은 선형, 순애 양인의 솜씨인 듯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로마 병정의 창으로 찔린 옆구리로서는 피가 흘러내린다. 그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눈은 하늘을 향하였다. 십자가 밑에는 치마 앞자락으로 낯을 가리고 우는 자도 있고 무심하게 구경하는 자도 있고 십자가 저편 옆에서는 병정들이 예수의 옷을 가지려고 제비뽑는 양을 그렸다. 형식은 물끄러미 이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십자가에 달린 자도 사람, 가시관을 씌우고 옆구리를 찌른 자도 사람, 그 밑에서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는 자나 무심하게 우두커니 구경하고 섰는 자도 사람, 저편에서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죽임받는 자의 옷을 저마다 가질 양으로 제비를 뽑는 자도 사람― 모두 다 같은 사람이로다. 날마다 시마다 인생 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희극 비극이 모두 다 같은 사람의 손으로 되는 것이로다. 퇴학 청원을 하는 학생들이나 학생들의 배척을 받는 배학감이나, 또는 내나 다 같은 사람이 아니며, 저 불쌍한 영채나, 영채를 팔아 먹으려 하는 욕심 사나운 노파나 영채를 사려 하는 짐승 같은 사람들이나, 영채를 위하여 슬퍼하는 내나 다 같은 사람이 아니뇨. 필경은 다 같은 사람끼리 조금씩 조금씩 빛과 모양을 다르게 하여 네로다 내로다 하고, 옳다 그르다 함이 아니뇨. 저 예수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정도 될 수 있고, 그 로마 병정이 예수도 될 수 있을 것이라.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무엇이 어떠한 힘이 마치 광대로, 혹은 춘향을 만들고, 혹은 이도령을 만드는 모양으로, 혹은 예수가 되게 하고, 혹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로마 병정이 되게 하고, 또 혹은 무심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가 함이라.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모든 인류가 다 나와 비슷비슷한 형제인 듯하고, 또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지배되어 날마다 시마다 저희들의 뜻에도 없는 비극 희극을 일으키지 아니치 못하는 인생을 불쌍히 여겼다.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마치 신관 사또 남원 부사 된 광대가 제 뜻에는 없건마는 가련한 춘향의 볼기를 때림과 같다 하면 용서하지 아니하고 어찌하리요. 그럴진대 배학감도 그리 미워하는 것은 아니요,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예수를 죽여 달라 한 간악한 유태인도 그리 미워할 것은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살려야 하겠다. 비록 이것이 연극 중의 일이라 하더라도 영채는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지 불현듯 일어나 형식은 예수의 화상을 보다가 눈을 돌이켜 멀거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에는 파리 네다섯 놈이 저희도 인생과 같이 무슨 연극을 하노라고, 혹은 따르고 혹은 피하고, 혹은 앉았고 혹은 앞발을 비빈다. 형식은 고개를 숙이며 이 집에는 '천 원'이 있으련만 하였다.
"선생님!"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본즉, 선형과 순애가 책과 연필을 들고 문안에 들어와 섰다가 형식의 눈뜨고 고개듦을 기다려 은근하게 경례한다. 형식은 놀란 듯이 얼른 일어나 두 처녀에게 답례하였다. 그러고 웃으면서 쾌활하게,
"오늘은 어제보다도 더웁니다."
하고 선형과 순애에게 앉기를 권하고 자기도 양인과 상대하여 책상을 새에 두고 앉았다.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책을 편다. 형식은 두 처녀를 보매 얼마큼 뒤숭숭하던 생각이 없어지고 적이 정신이 쇄락한 듯하다. 형식은 고개 숙인 두 처녀의 까만 머리와 쪽찐 서양 머리에 꽂은 널따란 옥색 리본을 보았다. 그러고 책상에 짚은 두 처녀의 손가락을 보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슬쩍 불어 지나갈 때에 두 처녀의 몸과 머리에서 나는 듯 만 듯한 향내가 불려 온다. 선형의 모시 적삼 등에는 땀이 배어 하얀 살에 착 달라붙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 붙은 자리가 넓었다 좁았다 한다. 순애는 치마로 발을 가리느라고 두어 번 몸을 들먹들먹하여 밑에 깔린 치마를 빼인다. 선형은 이마에 소스락소스락하게 구슬땀이 맺히어 이따금 치맛고름으로 가만히 씻고는 손으로 책상 밑에서 부채질을 한다. 형식은 아침부터 괴로움으로 지내 오던 마음속에 일점 향기롭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들어 옴을 깨달았다. 여자란 매우 아름답게 생긴 동물이라 하였다. 어깨의 동그스름한 것과 뺨의 불그레한 것과 머리터럭의 길고 까만 것과 또 앉은 태도와 옷고름 맨 모양과 그 중에도 널찍한 적삼 고름이 차차 좁아 오다가 가운데서 서로 꼭 옭혀 매여 위로 간 고는 비스듬히 왼편 가슴을 향하고 아래로 간 고름의 한끝이 훌쩍 날아 오른팔굽이를 지나간 양이 더욱 풍정이 있다. 이렇게 두 처녀를 보고 앉았으면 말할 수 없는 향기로운 쾌미가 전신에 미만하여 피 돌아가는 것도 극히 순하고 쾌창한 듯하다. 인생은 즐거우려면 즐거울 수가 있는 것이라, 아무 목적과 꾀도 없이 가만히 마주보고 앉았기만 하면 인생은 서로서로 사랑스럽고 즐거운 것이라. 여자의 몸이나 남자의 몸이나 내지 천지의 모든 만물이 다 가만히 보기만 하면 그새에 친밀한 교통이 생기고 따뜻한 사랑이 생기고 달콤한 쾌미가 생기는 것이라. 쓸데없이 지혜 놀리고 입을 놀리고 손을 놀림으로 모처럼 일러 놓은 아름다운 쾌락을 말못되게 깨트리는 것이라 하였다. 형식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처녀가 단번에 에이, 비, 시를 외워 쓰는 양을 보고 앉았다.
27
두 처녀는 에이, 비, 시를 잘 외워 썼다. 선형은 어서 미국에 갈 생각으로, 순애는 아무에게나 남에게 지지 않게 많이 배울 생각으로 어제 종일과 오늘 오전에 별로 쉬일 틈 없이 에이, 비, 시를 외우고 썼다. 또 그들은 영어를 처음 배우게 된 것이 자기네가 학식이 매우 높아진 표인 듯하여 일종 유쾌한 자랑을 깨달았다. 선형은 자기가 좋은 양복을 입고 새깃 꽂은 서양 모자를 쓰고 미국에 가서 저와 같은 서양 처녀들과 영어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모양을 상상하고 혼자 웃었다. 자기가 영어를 잘하게 되면 자기의 자격도 높아지고 남들도 자기를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 존경하리라 하였다. 자기가 미국에 가서 미국 처녀들과 같이 미국 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올 때에 그때에는 암만하여도 자기와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그러고 그 동행하는 사람은 남자요…… 키 크고 얼굴 번뜻한 남자요…… 미국서 대학교를 졸업한 남자라 하였다. 선형은 무론 일찍 그러한 남자를 본 적도 없고, 그러한 남자가 있단 말도 못 들었거니와, 하여간 자기가 미국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그러한 남자가 자기의 동행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한복판에서 배 갑판 위에 그 사람과 서로 외면하고 서서 바다 구경을 하다가 배가 흔들려 제 몸이 넘어질새, 그 사람의 가슴에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그것이 인연이 되어 본국에 돌아온 후 그 사람과 따뜻한 가정을 짓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고 벽돌 이층집에 나는 피아노 타고…… 이러한 것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선형의 꿈이었다. 그는 아직 큐피드의 화살을 맞지 아니하였다. 그의 가슴에는 아직 인생이란 생각도 없고, 여자 남자라는 생각도 없다. 그는 전세계는 다 자기의 가정과 같고 천하 사람은 자기와 같거니 한다. 아니, 차라리 전세계가 자기네 가정과 같은지 아니 같은지, 천하 사람이 자기와 같은지 아니 같은지를 생각하여 본 적도 없다 함이 마땅할 것이로다. 그를 봄철, 따뜻한 아침에 핀 꽃에 비길진대, 그는 아직 바람도 모르고 비도 모르고 늙음도 모르고 시들어 떨어짐도 모르는 바로 핀 꽃이라. 아무도 일찍 그에게 바람이란 것이며, 비란 것이 있단 말과 혹 바람이란 것과 비란 것이 함께 오면 지금 핀 꽃도 떨어지는 수가 있고 다 피어 보지 못한 꽃봉오리조차 떨어지는 수가 있다 하는 것을 일러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성경을 외웠다. 그러나 다만 외웠을 뿐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아담과 에와를 만든 줄을 믿고, 에와가 뱀의 꾀에 넘어 금한 바 지식 열매를 따먹음으로 늙음과 죽음과 온갖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단 말과 천당과 지옥과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예수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을 성경에 쓴 대로 다 외우고, 또 날마다 보는 신문의 삼면에 보이는 강도, 살인, 사기, 간음, 굶어죽은 자, 목을 매어 자살한 자 등 여러 가지를 알며, 또 그 말을 친구에게 전하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러할 뿐이다. 그는 그 모든 것― 위에 말한 그 모든 것과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어니 한다. 아니, 차라리 그는 그 모든 것이 자기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려고도 아니한다. 그는 아직 난 대로 있다. 화학적으로 화합되고 생리학적으로 조직된 대로 있는, 말하자면 아직도 실지에 한 번도 써보지 아니하고 곡간에 넣어 둔 기계와 같다. 그는 아직 사람이 아니로다. 그는 예수교의 가정에 자라남으로 벌써 천국의 세례는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인생이라는 불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소위 문명한 나라에 만일 선형이가 났다 하면 그는 어려서부터― 칠팔 세부터, 혹은 사오 세부터 시와 소설과 음악과 미술과 이야기로 벌써 인생의 세례를 받아 십칠팔 세가 된 금일에는 벌써 참말 인생인 한 여자가 되었을 것이라. 그러하나 선형은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선형의 속에 있는 '사람'은 아직 깨지 못하였다. 이 '사람'이 깨어 볼까 말까는 하느님밖에 아는 이가 없다.
이러한 것이 '순결하다' 하면 '순결하다'고도 할지요, '청정하다' 하면 '청정하다'고도 할지나, 그러나 이는 결코 '사람'은 아니요, 다만 장차 '사람'이 되려 하는 재료니, 마치 장차 조각물(彫刻物)이 되려 하는 대리석과 같다. 이 대리석에 정이 맞고 끌이 맞은 뒤에야 비로소 눈 있고 코 있는 조각물이 됨과 같이 선형 같은 자도 인생이란 불세례를 받아 그 속에 있는 '사람'이 깨인 뒤에야 비로소 참사람이 될 것이라.
순애는 이와 달리 어려서부터 겪어 오는 자연한 단련에 얼마큼 속에 있는 '사람'이 깨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이불 속에서 돌아누운 것이요, 아직 깨인 것은 아니로다.
형식은 저 스스로 깨인 '사람'으로 자처하거니와 그 역시 아직 인생의 불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 지금 이 방에 모여앉은 세 사람, 청년 남녀가 장차 어떠한 길을 지내어 '사람'이 될는고. 이 세 사람의 가슴은 마치 장차 오려는 폭풍을 기다리는 바다와 같다. 지금은 물결도 없고 거품도 없고 흐름도 없는 편편한 바다라. 이제 하늘로서 큰 바람이 내려와 이 바다의 물을 온통 흔들어 거기 물결을 만들고 (거품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지니, 그때야말로 비로소 참바다가 되리로다. 모르괘라. 그 바람이 무엇이며 그 바람을 보내는 자가 누구뇨. 지금 형식의 가슴에는 이 바람이 불어오려는 전조로 이상한 구름장이 하늘가에 배회한다.
28
형식은 김장로의 집에서 나왔다. 백운대 가로 이상한 구름장이 떠돌고 서늘한 바람이 후끈후끈하는 낯을 스쳐 지나간다. 형식은 시원하다 하였다. 아마 소나기가 지나가려는가 보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좀 서늘하여지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어서 소낙비가 왔으면 하였다.
형식은 아까 김장로의 집으로 들어갈 때와는 무엇이 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천지에는 여태껏 자기가 알지 못하던 무엇이 있는 듯하고, 그것이 구름장 속에서 번개 모양으로 번쩍 눈에 보였는 듯하다. 그러고 그 번개같이 번쩍 보인 것이 매우 자기에게 큰 관계가 있는 듯이 생각된다. 형식은 그 속에 그 번개같이 번쩍 하던 속에 알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쁨이 숨은 듯하다고 생각하였다. 형식은 가슴속에 희미한 새 희망과 새 기쁨이 일어남을 깨달았다. 그러고 그 기쁨이 아까 선형과 순애를 대하였을 때에 그네의 살내와 옷고름과 말소리를 듣고 생기던 기쁨과 근사하다 하였다. 형식의 눈앞에는 지금껏 보지 못하던 인생의 일방면이 벌어졌다. 자기가 오늘날까지, '이것이 인생의 전체로구나' 하던 외에 인생에는 다른 한 부분이 있고 그리하고 그 한 부분이 도리어 지금까지 인생으로 알아 오던 모든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 듯하다. 명예와 재산과 법률과 도덕과 학문과 성공과 이렇게 지금껏 인생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알아 오던 것 외에 무슨 새로운 내용 하나가 더 생기는 듯하다. 그러나 아직 형식은 그것에 이름 지을 줄을 모르고 다만 '이상하다' 하고 놀랄 뿐이었다.
그러고 사오 년 동안을 날마다 다니던 교동으로 내려올 때에 형식은 놀랐다. 길과 집과 그 집에 벌여 놓은 것과 그 길로 다니는 사람들과 전신대와 우뚝 선 우편통이 다 여전하건마는, 형식은 그것들 속에서 전에 보지 못한 빛을 보고 내를 맡았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그것들이 새로운 빛과 새로운 뜻을 가진 것 같다. 길 가는 사람은 다만 길 가는 사람이 아니요, 그 속에 무슨 알지 못할 것이 품긴 듯하며, 두부 장수의 '두부나 비지드렁 사리아' 하고 외우는 소리에는 두부와 비지를 사라는 뜻 밖에 더 깊은 무슨 뜻이 있는 듯하였다. 형식은 자기의 눈에서 무슨 껍질 하나가 벗겨졌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는 눈에서 껍질 하나가 벗겨진 것이 아니요, 기실은 지금껏 감고 오던 눈 하나가 새로 뜬 것이로다. 아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상을 볼 때에 다만 그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 보지 아니하고 그 속에 새로운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이 이 눈이 떠지는 처음이요, 선형과 순애라는 두 젊은 계집을 볼 때에 다만 두 젊은 계집으로만 보지 아니하고 그것이 우주와 인생의 알 수 없는 무슨 힘의 표현으로 본 것이 이 눈이 떠지는 둘째요, 지금 교동 거리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전에 보고 맡지 못하던 새 빛과 새 내를 발견함이 그 셋째라. 그러나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름 지을 줄을 모르고 다만 '이상하다' 하는 생각과 희미한 기쁨을 깨달을 뿐이라.
형식은 방에 돌아와 잠시 영채의 일을 잊고 새로 변화하는 마음을 돌아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았노라면 전에 보던 시와 소설의 기억이 그때 처음 볼 때와 다른 맛을 가지고 마음속에 떠 나온다. 모든 것에 강한 색채가 있고 강한 향기가 있고 깊은 뜻이 있다. 형식은 '내가 지금까지 인생과 서적을 뜻을 모르고 보았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모든 기억을 다 끌어내어 지금 새로 뜬 눈에 비치어 보았다. 그리한즉, 모든 기억에 다 전에 보지 못하던 새로운 색채가 보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하고 책장에 늘어 세운 양장책들을 보았다. 자기는 다 알고 읽었거니 하였던 것이 기실을 알지 못하고 읽은 것임을 깨달았다. 형식은 모든 서적과 인생과 세계를 온통 다시 읽어 볼 생각이 난다. 첫 페이지 첫 줄부터 온통 다시 읽더라도 '전에 읽은 적이 없구나' 하다시피 글귀마다, 글자마다 새로운 뜻을 가지고 내 눈에 비치리라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책장에서 몇 권 책을 내어 전에 보던 데 몇 군데 떠들어 보았다. 그러고 그 결과는 형식의 생각하던 바와 같았다.
형식은 이제야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눈을 떴다. 그 '속눈'으로 만물의 '속뜻'을 보게 되었다. 형식의 '속 사람'은 이제야 해방되었다. 마치 솔씨 속에 있는 솔의 움이 오랫동안 솔씨 속에 숨어 있다가…… 또는 갇혀 있다가 봄철 따뜻한 기운을 받아 굳센 힘으로 그가 갇혀 있던 솔씨 껍데기를 깨트리고 가이없이 넓은 세상에 쑥 나솟아 장차 줄기가 되고 가지가 나고 잎과 꽃이 피게 됨과 같이 형식이라는 한 '사람'의 씨 되는 '속 사람'은 이제야 그 껍질을 깨트리고 넓은 세상에 우뚝 벗샤(솟아) 햇빛을 받고 이슬을 받아 한이 없이 생장하게 되었다.
형식의 '속 사람'은 여문 지 오래였다. 마치 봄철 곡식의 씨가 땅 속에서 불을 대로 불었다가 안개비만 조곰 와도 하룻밤에 쑥 움이 나오는 모양으로, 형식의 '속 사람'도 남보다 풍부한 실사회의 경험과 종교와 문학이라는 수분으로 흠뻑 불었다가 선형이라는 처녀와 영채라는 처녀의 봄바람 봄비에 갑자기 껍질을 깨트리고 뛰어난 것이라.
누가 '속 사람이란 무엇이뇨'와 '속 사람이 어떻게 깨는가'의 질문을 제출하면 그 대답은 이러하리라.
'생명이란 무엇이뇨'와 '생명이 나다 함은 무엇이뇨'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음과 같이 이도 대답할 수 없다고. 오직 이 '속 사람'이란 것을 알고 '속 사람이 깬다'는 것을 알 이는 오직 이 '속 사람'이 깬 사람뿐이니라.
'깬' 형식은 장차 어찌 될는고. 이 이야기가 발전되어 나가는 양을 보아야 알 것이로다.
29
과연 소나기가 지나갔다. 그러고 동대문과 남산 새에 곱다란 무지개의 한 부분이 형식의 방에서 보인다. 형식은 한참이나 무지개를 보고 황홀하여 앉았다 불현듯 영채를 생각하였다. 벌써 밤이 가까웠다. 영채의 위기는 일각일각이 가까워 오는 듯하다. 형식은 두루마기를 뒤쳐 입고 집에서 뛰어나왔다. 그러나 어디로 갈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한참 망망하였다. 그러다가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안동을 향하고 부리나케 걸어간다. 형식은 어떤 '학생 기숙관'이라 하는 문 앞에 섰다. 이윽고 어떤 소년이 신을 끌고 나오더니 형식을 보고 경례한다. 형식은 소년의 손을 잡아 흔들며 묻기 어려운 듯이,
"엊그저께 학감의 뒤를 따라갔던 학생이 누구요?"
소년은 방긋이 웃으며,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상한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본다. 황혼의 형식의 얼굴은 하얗게 보인다.
"아니야! 희경 군. 무슨 일이 있으니 누가 학감의 뒤를 따라갔는지 좀 알려 주게."
희경은 형식의 태도가 수상함을 보고 웃음을 그치고 이윽고 생각한다. 형식의 말소리는 떨렸더라. 희경은 마침내,
"종렬 군 제가 갔습니다."
하고 책망을 기다리는 듯이 우향우를 하며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기뻐하는 목소리로,
"희경 군이 갔다 왔어요? 참 일이 잘되었소!"
한다. 희경은 더욱 형식의 태도가 이상하다 하였다. 아무리 기생 월향이가 유명하기로 설마 형식이야 월향을 탐내어 할까 함이라. 그래서 희경은 더욱 유심히 형식을 보며,
"왜 그러셔요?"
형식은 이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그러면 그 집 통호를 알겠소? 그 학감께서 가시던 집……."
"통호수는 모릅니다."
이 대답에 형식은 한참 낙망하더니 다시 희경의 손을 잡으며, "
미안하나 내게 그 집을 좀 가르쳐 주게"
하였다.
희경은 마지못하는 듯이 들어가 모자와 두루마기를 입고 나온다. 희경은 '아마 학감의 일에 대하여 조사할 일이 있어 그러는가 보다' 하고 앞서서 종로로 향하여 간다. 형식은 희경의 뒤를 따라가며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가서 어찌할까. 찾아서 설혹 영채를 만난다 하더라도 손에 '천 원'이 없으니 어찌할까. 만일 누가 방금 '천 원'을 가지고 와서 영채를 제 손에 넣는 계약을 맺는다 하더라도 '천 원'이 없는 나는 다만 그 곁에서 이를 갈 뿐이겠구나 하였다.
밤은 서늘하다. 종료 야시에는 '싸구려' 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길다란 칼을 내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여기저기 수십 명 사람이 모여선 것은 아마 무슨 값싸고 쓰기 좋은 물건을 파는 것인 듯, 사람들은 저녁의 서늘한 맛에 취하여 아무 목적 없이 왔다갔다한다. 그 사이로 어린 학생들은 둘씩 셋씩 떼를 지어 무슨 분주한 일이나 있는 듯이 무어라고 지껄이며 사람들 사이로 뛰어다닌다.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갔다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앞서 가는 희경은 사람들이 모여선 곳마다 조곰씩 엿보다가는 형식의 발자취가 들리면 또 가고 가고 한다. 가물다가 비가 왔으므로 이따금 후끈후끈 흙내가 올라온다.
형식과 희경은 종각 모퉁이를 돌아 광충교로 향한다. 신용산행 전차가 커다란 눈을 부르뜨고 두 사람의 앞으로 달아난다. 두 사람은 컴컴한 다방골 천변에 들어섰다. 천변에는 섬거적을 펴고 사나이며 계집들이 섞여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웃다가 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이야기를 그치고, 컴컴한 속에서 두 사람을 쳐다본다. 두 사람이 아니 보이리만 하면 또 이야기와 웃기를 시작한다. 혹 뒤창으로 기웃기웃 엿보는 행랑 까지의(아씨의) 동백기름 번적번적하는 머리도 보인다. 희경은 가끔 길을 잊은 듯하여 우뚝 서서 사방을 돌아보다가는 그대로 가기도 하고, 혹 '잘못 왔습니다' 하고 웃으며 오륙 보나 뒤로 물러 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집 문 밖에는 호로 씌운 인력거가 놓이고 인력거꾼이 그 인력거의 발등상에 걸앉아 가늘게 무슨 소리를 한다. '계옥'이니 '설매'니 하는 고운 이름을 쓴 광명등이 보이고, 혹 어디선지 모르나 '반나마―' 하는 시조의 첫 구절이 떨려 나오며 그 뒤를 따라 이삼 인 남자가 함께 웃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화류촌이로구나' 하였다. 처음 이러한 곳에 오는 형식은 이상하게 가슴이 서늘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행여 누가 보지 않는가 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남치마 입은 기생 두엇이 길 모퉁이에서 양인을 보고 '소곤소곤'하며 웃고 지나갈 때에 형식은 남모르게 가슴이 뛰고 얼굴이 후끈하였다. 양인은 아무 말도 없이 간다. 양인의 구두 소리가 벽에 울려 이상하게 '뚜벅뚜벅' 한다. 희경은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가 마침내, "여기올시다" 하고 어떤 광명등 단 집을 가리킨다. 형식은 더욱 가슴이 서늘하며 그 대문 앞에 우뚝 서서 광명등을 보았다. '계월향!'
'계월향!' 하고 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월향은 영채가 아니런가. 기생이 되매 이름은 고칠지언정 성조차 고쳤으랴. 그러면 월향은 영채가 아닌가. 그러면 영채는 기생이 아니 되었는가. 내가 일찍 상상하던 모양으로 우리 영채는 어떤 귀한 가정에 거둠이 되어 학교에 다니며 즐겁게 지내는가. 형식은 크게 의심하였다. 희경은 두어 걸음 비켜서서 광명등 빛에 해쓱해 보이는 형식의 얼굴을 보고 '무슨 근심이 있구나.' 하였다.
30
영채는 칠 년 만에 형식을 만나 일변 반갑고 일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울며 칠 년 동안에 지내 온 이야기를 하려다가 문득 말을 그치고 일어나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형식이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만나고 싶은 마음은 불같이 일어났으나 자연히 찾아보리라는 결심을 정하지 못하고 한 달이 지났었다. 그러다가 그날 아침에 '오늘은 기필코 형식을 찾아보리라.' 하고 오후에 형식을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저녁에 또 찾아왔던 것이라.
세상에 영채에게 제일 가까운 사람은 형식밖에 없다.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일가도 없고, 오직 남은 것이 어려서 같이 자라나던 형식이란 사람 하나뿐이라. 영채의 부친과 형들이 평양감옥에서 죽기 전까지는 영채는 그네를 위하여 살았었다. 그러나 그네가 죽은 뒤에는 영채는 오직 이형식이라 하는 사람을 위하여 살았었다. 더구나 낫살이 점(점) 많아지고 몸이 기생이 되어 여러 십 명, 여러 백 명, 육욕밖에 모르는 짐승 같은 남자에게 갖은 희롱을 다 받은 영채는 세상에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한 남자는 형식밖에 없다 하였다. 형식이가 서로 떠난 지 칠팔 년(간)에 어떻게 변화하여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지는 영채에 대하여는 문제가 아니었었다. 영채는 다만 형식이라 하는 사람은 천 년을 가나 만 년을 가나 이전 안주골 자기 집에 있을 때에 그 형식이거니 하였다. 영채는 착하던 사람이 변하여 좋지 못하게 되는 줄을 모른다. 좋은 사람은 천생 좋은 사람이요, 평생 좋은 사람이거니 한다. 그와 같이 악한 사람은 천생 악한 사람이요, 평생 악한 사람이거니 한다. 영채는 어려서는 악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의 아버지도 선한 사람이요, 오라버니네도 선한 사람이었고, 그 집 사랑에 와 있던, 또는 다니던 사람들도 선한 사람이었다. 형식도 무론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고 그가 소학과 열녀전 같은 책을 배울 때에 그 속에 나오는 사람들도 다 선한 사람이었다. 영채는 어린 생각에도 그 책에 있는 인물과 자기의 가정과 주위에 있는 인물과는 같은 인물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영채 자신도 선한 사람이었다. 내칙이나 열녀전에 있는 여자들과 자기와는 같은 여자라 하였었다. 그러고 세상은 다 자기의 가정과 같으려니, 세상 사람은 다 자기와 및 자기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같으려니 하였었다. 저 김선형이나 이 박영채나 이 점에 이르러서는 공통이로다.
그러나 선하던 자기의 아버지며 주위엣사람들이 도리어 죄를 짓고, 세상 사람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게 됨을 보고, 어린 마음에는 한번 놀랐다. 또 외가에 가서 내종형댁의 학대와 조카네의 학대를 당하고, 거기서 도망할 때에 어느 촌중 아이들의 핍박을 당하고, 그날 저녁 죽천 땅 어느 객주에서 그 변을 당하고, 마침내 평양에서 자기의 몸이 기생으로 팔리게 되매, 어린 영채는 세상이 자기의 가정과 다르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와 및 자기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과 다름을 깨달았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악이란 것이 있고 세상 사람에 악인이란 것이 있는 줄을 깨달았다. 그러나 영채는 이 악한 세상과 악한 사람들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거니 하였다. 영채는 결코 자기의 선하던 가정과 저 악한 세상과, 또 자기가 일찍 보던 선한 사람들과 자기가 지금 보는 악한 사람들을 혼동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세상에는 악한 세상과 선한 세상이 있고, 사람에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있어, 각각 종류가 다르고 합할 수 없음이 마치 물과 기름과 같다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점점 경험을 쌓아 감을 따라 또 이 진리도 깨달았다……. '악한 세상은 선한 세상보다 크고, 악한 사람은 선한 사람보다 많다' 함을.
영채는 집을 떠난 지 칠팔 년간에 아직 한 번도 선한 세상을 보지 못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칠 년 동안을 자기의 고향인 선한 세상을 떠나서 악한 타향에 객이 되고 자기의 동족인 선한 사람들을 떠나서 자기의 원수인 악한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한 세상과 선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아니하였나니, 대개 그가 칠 년 전에 그러한 세상과 그러한 사람들을 목격하였음이라. 그러고 자기는 열녀전, 내칙, 소학 속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니, 결코 악한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다. 영채의 아버지가 영채의 어렸을 때에 가르친 열녀전과 내칙과 소학은 과연 영채의 일생을 지배한 것이라.
영채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선한 세상도 있기는 있고 선한 사람도 있기는 있건마는, 자기는 무슨 운수로 일시 그 선한 세상을 떠나고 선한 사람을 떠난 것이니, 일생에 반드시 자기는 그러한 세상과 사람을 찾을 날이 있으리라고. 그러므로 그가 남대문 안에서 동대문까지 늘어선 만호 장안을 볼 때에, 이 중에 어느 집이 칠 년 전에 자기가 있던 집과 같은 집이며, 종로 네거리에 왔다갔다하는 여러 만 명 사람을 대할 때에 이 중에 어떠한 사람이 일찍 자기가 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하였다. 
그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고 자기에게 가까이하는 사람을 대할 때에 마음에는 항상 '너는 나와는 딴세계 사람!' 하고 일종 경멸하는 모양으로 그네를 대하여 왔다. 영채는 장안에 선한 집과 선한 사람이 있는 줄을 믿는다. 그러고 밤낮으로 그 집과 그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영채의 기억에 있는 선한 사람은 오직 이형식이라. 영채가 칠 년 동안 수십 명, 수백 명의 남자를 대하되, 오히려 몸을 허하지 아니하고 주야 일념에 이형식을 찾으려 함이 실로 이 뜻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형식이 서울에 있는 줄을 알고 이렇게 찾아왔던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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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는 마침내 그 악한에게 붙들려 갔다. 그 악한의 집은 산밑에 있는 조고마한 집안이었다. 얼른 보아도 게으른 사람의 집인 줄을 알겠더라. 그 악한은, 지금은 비록 이러한 못된 짓을 하거니와, 일찍은 이 동네에서 부자라는 이름을 듣고 살았었다. 그러나 원래 문벌이 낮아 남의 천대를 받더니, 갑진년에 동학의 세력이 창궐하여 무식한 농사꾼들도 머리를 깎고 탕건을 쓰면 호랑같이 무섭던 원님도 감히 건드리지를 못하였다. 이 악한도 그 세력이 부러워 곧 동학에 입도하고, 여간 전래의 논밭을 다 팔아 동학에 바치고 그만 의식이 말유한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감사도 되고 군수 목사도 되리라는 희망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이제는 논밭 한 이랑도 없는 거지가 되고 말았다. 마음이 착하고 수양이 많은 사람이면 아무리 가난하여도 절행을 고칠 리가 없건마는, 원래 갑작 양반이나 되기를 바라고 동학에 들었던 인물이라, 처음에는 양반의 체면과 신사의 체면도 보았건마는 점점 체면을 차리는 데 필요한 두루마기와 탕건과 가죽신이 없어지매 양반의 체면과 신사의 체면도 그와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그 악한은 아무러한 짓을 하여서라도 돈만 얻으면 그만이요, 술만 먹으면 그만이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동네에 유명한 협잡꾼이 되고 몹쓸놈이 된 것이라. 객주에 앉아서 영채의 밥값을 담당함은 잠시 이전 신사의 체면을 보던 마음이 일어남이요, 영채가 계집아이인 줄을 알며 그를 업어 감은 시방 그의 썩어진 마음을 표함이라.
그는 아들 형제가 있었다. 맏아들은 벌써 스물둘인데 아직도 장가를 들이지 못하였고, 둘째아들은 지금 십오륙 세 된 더벅머리였다. 그가 처음 영채를 업어 갈 때에는 이십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맏아들에게 주려 하는 마음이었다. 그같이 마음이 악하여져서 거의 짐승이 된 놈에게도 아직까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남았음이라. 그러나 영채를 등에 업고 캄캄한 밤에 사람 없는 데로 걸어가니, 등과 손에 감각되는 영채의 따뜻한 살이 금할 수 없이 그의 육욕의(육욕을) 자극하였다. 연계로 말하면 제 손녀나 되어(될) 만한 이제 겨우 열세 살 되는 영채에게 대하여 색욕을 품는다 함이 이상히 들리려니와, 원래 몸이 건강한데다가 마음에 도덕과 인륜의 씨가 스러졌으니 이러함도 괴이치 아니한 일이라. 집에 아내가 없지 아니하나 나도 많고 또 여러 해 가난한 고생에 아주 노파가 되고 말아 조곰도 따뜻한 맛이 없었다. 이제 꽃송이 같은 영채가 내 손에 있으니, 짐승 같은 그는 며느리를 삼으려 하던 생각도 없어지고 불길같이 일어나는 육욕을 제어하지 못하여 외딴 산모루 길가에 영채를 내려놓았다. 아직 나이 어린 영채는 그가 자기에게 대하여 어떠한 악의를 품은지는 모르거니와, 다만 무섭기만 하여 손을 마주 비비며 또 한번 '살려 주오' 하고 빌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아니하고 미친 듯이 영채를 땅에 눕혔다.
이까지 하는 말을 듣고 형식은 전신이 오싹하였다. 마침내 영채는 처녀가 아닌 지가 오래구나 하였다. 설혹 영채가 욕을 보지 아니하였노라 하더라도 형식은 믿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형식은 그 악한이 영채를 땅에 엎드리던 광경을 생각하고, 일변 영채를 불쌍히도 여기고, 일변 영채가 더러운 듯이도 생각하였다. 노파는 숨소리도 없이 영채의 기운 없이 말하는 입술만 보고 앉아서 이따금 '저런 저런' 하고는 한숨을 쉰다.
악한이 영채를 땅에 누일 때, 영채는 웬일인지 모르거니와 갑자기 대단한 무서움이 생겨 발길로 그의 가슴을 힘껏 차고 으아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악한은 푹 꺼꾸러졌다. 영채가 아무리 약하고 어리더라도 죽을 악을 쓰고 달려드는 악한의 가슴을 찼으니, 불의에 가슴을 차인 악한은 그만 숨이 막힘이라. 영채는 악한이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서 도로 일어나려는 악한의 얼굴에 흙과 모래를 쥐어뿌리고 정신없이 발 가는 대로 달아났다. 얼마를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우뚝 서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아니하고 새벽 바람이 땀 흐르는 얼굴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영채의 눈에는 뒤에 얼른얼른 그 악한의 따라오는 그림자가 보이는 듯하고, 또 그 악한의 손에는 피 흐르는 칼날이 번적번적하는 듯하여 또 한번 으아 하고 뛰기를 시작하였다. 얼마를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뒤에 지금껏 잊어버렸던 개가 입에 희끄무레한 무엇을 물고 따라온다. 영채는 반겨 그 개를 안았다. 그러나 그 개의 몸에는 온통 피투성이요, 더구나 영채가 그 개의 머리를 안을 때에 개의 목에서 솟는 피에 손이 젖음을 깨달았다. 영채는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났다. 개는 킁킁 하고 두어 번 짖더니 그만 다리를 버둥버둥하고 땅에 거꾸러진다. 영채는 어쩔 줄을 모르고 멍멍하니 섰다가 개의 입에 물었던 희끄무레한 것을 집었다. 아직 희미한 새벽빛이언마는 그것이 아까 그 악한의 저고리 옷자락인 줄을 알았다. 개는 그 악한과 오랫동안 싸워 마침내 그 악한을 물어 메뜨리고 주인에게 그 뜻을 알리려고 그 악한의 저고리 옷자락을 물어 온 것이라. 그러나 그 개도 악한에게 발길로 차이고, 주먹으로 맞고, 입으로 물려 여러 군데 살이 떨어지고 피가 흐르고, 그 중에도 왼편 갈빗대가 둘이나 꺾어져서 심장을 찢은 것이라. 제 목숨이 얼마나 남은지도 모르고 불쌍한 주인을 따라와 제가 그 주인을 위하여 원수 갚은 줄을 알리고 그 사랑하던 주인의 발부리에서 죽고자 함이라.
"저는 개의 시체를 붙들고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하는 영채의 눈에는 새로이 눈물이 흐르더라.
12
형식은 영채의 말을 듣고 얼마큼 안심이 되었다. 영채의 얼굴을 다시금 보매, 새삼스럽게 정다운 마음과 사랑스러운 생각이 난다. 지금까지 영채의 절행을 의심하던 것이 죄송스럽다 하였다. 영채는 어디까지든지 옥과 같이 깨끗하고 눈과 같이 깨끗하다 하였다. 이전 안주에 있을 때에 보던 어리고 아리따운 영채의 모양이 뚜렷이 형식의 앞에 보이더니 그 아리따운 모양이 방금 그 앞에 앉아 신세 타령을 하는 영채와 하나가 되고 만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옳다, 은혜 많은 내 선생님의 뜻을 이어 영채와 부부가 되어 일생을 즐겁게 지내리라 하였다. 그러고는 자기와 영채가 부부 된 뒤에 할 일이 눈앞에 보인다. 우선 영채와 자기가 좋은 옷을 입고 목사 앞에 서서 맹세를 하렷다. 나는 영채의 손을 꼭 쥐고 곁눈으로 영채의 불그레하여진 뺨을 보리라. 그때에 영채는 하도 기쁘고 부끄러워 더욱 고개를 숙이렷다. 그날 저녁에 한자리에 누워 서로 꼭 쓸어안고, 지나간 칠팔 년간의 고생하던 것과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던 말을 하리라. 그때에 영채가 기쁜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속에 쌓이고 쌓였던 정회를 풀 때에, 나는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전신을 바르르 떨며 영채를 껴안으리라. 그러면 영채도 내 가슴에 이마를 대고 '에그, 이것이 꿈인가요' 하고 몸을 떨리리라. 그러한 후에 나는 일변 교사로, 일변 저술로 돈을 벌어 깨끗한 집을 짓고,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리라. 내가 저녁때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영채는 나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뛰어나오며 내게 안기리라. 그때에 우리는 서양 풍속으로 서로 쓸어안고 입을 맞추리라. 그러다가 이윽고 아들이 나렷다. 영채와 같이 눈이 큼직하고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나와 같이 체격이 튼튼한 아들이 나렷다. 그 다음에 딸이 나렷다. 그 다음에는 또 아들이 나렷다. 아아, 즐거운 가정이 되렷다.
그러나 영채가 만일 지금껏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으면 어쩌나. 내 마음과 내 사상을 알아주리만한 공부가 없으면 어쩌나. 어려서 글을 좀 읽었건마는 그 동안 칠팔 년간이나 공부를 아니 하였으면 모두 다 잊어버렸으렷다. 아아, 만일 영채가 이렇게 무식하면 어쩌는가. 그렇게 무식한 영채와 행복된 가정을 이룰 수가 있을까. 아아, 영채가 무식하면 어쩌나. 이렇게 생각하매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이 다 쓸데없는 듯하여 어째 서어한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형식은 영채의 얼굴을 다시금 보았다. 그 몸가짐과 얼굴이(얼굴의) 표정이 아무리 하여도 교육 없는 여자는 아니로다. 더구나 그 손과 옷을 보매, 지금껏 괴로운 일로 고생은 아니한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영채는 고등한 가정에서, 고등한 교육을 받은 사람인 듯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렇게 몸가짐에 자리가 잡히고, 말하는 것이 저렇게 얌전하고 익숙지 못하리라 하였다. 더구나 그 말에 문학적 색채가 있는 것을 보니 아무리 하여도 고등한 교육을 받았구나 하였다.
혹 내가 남의 도움을 받아 이만큼이라도 출세를 하게 된 모양으로 그도 누구의 도움을 받아 편안히 지내면서 어느 학교를 졸업하지 아니하였는가. 마치 김장로의 집에 있는 윤순애 모양으로 어느 귀족의 집이나, 문명한 신사의 집에서 여태까지 공부를 하지나 아니하였는가. 혹 금년쯤 어느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지나 아니하였는가. 그렇기만 하면 오죽 좋으랴. 옳다, 그렇다 하고 형식은 혼자 믿고 좋아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어서 영채의 그 후에 지낸 내력을 듣고 싶었다. 영채의 하는 말은 꼭 자기의 생각한 바와 같으려니 하였다.
영채는 노파가 정성으로 베어 주는 배를 한쪽 받아 먹고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도 고생이 아님이 아니요, 눈물 흘릴 일이 아님이 아니나, 이제부터 말할 것은 그보다 더한 슬픈 일이라. 혼자 이따금 그 일을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가 나는데 다른 사람을 대하여 그러한 일을 말하게 되니 더욱 비감도 하고, 또 일변 부끄럽기도 하다. 영채는 이래 사오 년간에 사람도 퍽 많이 대하였고, 잠시나마 형제와 같이 친히 지내던 친구도 꽤 많았었다. 혹 같은 친구들이 모여앉아서 신세 타령을 할 때에 여러 가지 못할 말 없이 다 하면서도 지금 형식에게 말하려는 말은 아직 하여 본 적이 없다. 대개 이런 말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다만 그것 불쌍하다고나 할 따름이요, 깊이 자기를 동정하여 주지 아니할 줄을 앎이라. 영채는 극히 절친한 친구에게라도 자기의 신분은 말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이웃 사람의 손에 일어났노라 할 뿐이었었다. 대개 그는 차마 그 아버지의 말을 할 수 없고 그의 진정한 신세를 말할 수 없음이라. 이리하여 그는 슬픈 경력을 제 가슴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여 두었었다. 아마 그가 일생에 형식을 만나지 아니하였슨들 그의 흉중에 쌓이고 (쌓인 회포와 맺히고 맺힌 원한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세상에 사람이 많건마는 제 가슴속에 깊이깊이 간직한 회포를 들어 줄 사람이 몇이나 되리요. 영채는 그 동안 지극히 마음이 괴로울 때에는, 혹 그 중에 자기를 가장 동정하는 사람을 구하여 한번 시원히 자기의 신세 타령이나 하여 보리라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 실컷 신세 타령을 하고 나면 얼마큼 몸이 가뜬하여지려니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이 다 자기를 희롱하고 잡아먹으려는 사람뿐이었다. 길가에 본체만체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무론이어니와 가장 다정한 듯이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소리로 가까이 오는 자도 기실은 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그러함이 아니라 나를 속이고 나를 농락하여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 함이었다.
13
영채는 지금 자기가 일생에 잊히지 아니하고 생각하고 그리던 형식을 만났으니 지금까지 가슴속에 간직하였던 회포를 말하리라 하였다. 세상에 아직도 제 회포를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영채는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다시 생각하였다. 형식의 얼굴빛을 보매, 자기를 만난 것을 반가워하는 것과 자기의 신세를 불쌍히 여기는 줄은 알건마는 만일 자기가 몸을 팔아 기생이 되어 오륙 년간 부랑한 남자의 노리개 된 줄을 알면 형식이가 얼마나 낙심하고 슬퍼하랴. 또 형식은 아주 품행이 단정한 사람이라는데 만일 내가 기생 같은 천한 몸이 되었다 하면 싫은 마음이 아니 생길까. 지금은 형식이가 저렇게 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나를 대하여 사랑하는 빛을 보이건마는 내가 만일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 곧 미운 생각이 나고 불쾌한 생각이 나지나 아니할까. 그래서 '너는 더러운 사람이로다. 나와 가까이할 사람이 아니로다' 하고 얼굴을 찡그리지 아니할까. 이러한 생각을 하매, 영채는 더 말할 용기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죽은 부모와 동생을 만나 보듯 한 반가운 정이 스러지고 새로운 설움과 새로운 부끄러움이 생긴다. 아아, 역시 남이로구나. 형식이도 역시 남이로구나. 마음놓고 제 속에 있는 비밀을 다 말하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영채는 새로이 눈물이 흘러 고개를 숙였다. 내가 왜 기생이 되었던고, 왜 남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 기생이 되었던고. 남의 종이 되거나, 아이 보는 계집이 되거나, 바느질품을 팔고 있었더면 형식을 대하여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고 이렇게 제 속에 있는 말을 못 하지는 아니하려든. 아아, 왜 내가 기생이 되었던고. 무론 영채는 제가 기생이 되고 싶어 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두 오라비를 건져 내려고 기생이 된 것이라. 영채가 평양 감옥에 다다라 처음 그 아버지와 면회를 허함이 되었던 날. 영채는 그 아버지를 보고 일변 놀라고 일변 슬펐다. 철없고 어린 생각에도 그 아버지의 변한 모양을 보매 가슴이 찌르는 듯하였다. 조고마한 구녁으로 내어다보는 그 아버지의 몹시 주름잡히고 여윈 얼굴, 움쑥 들어간 눈, 이전에는 그렇게 보기 좋던 백설 같은 수염도 조곰도 다스리지를 아니하여 마치 흐트러진 머리카락처럼 되고, 그 중에도 가장 영채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황톳물 묻은 흉물스러운 옷이라. 감옥 문 밖에 다다랐을 적에 이 흉물스러운 황톳물 옷을 입고 짚으로 결은 이상한 갓을 쓰고 굵은 쇠사슬을 절절 끌며 무슨 둥글한 똥내 나는 통을 메고 다니는 양을 볼 때에, 이러한 모양을 처음 보는 영채는 어렸을 때부터 무서워하던 어뷔나 귀신을 보는 듯하여 치가 떨렸다. 저것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까. 아마도 저것들은 무슨 몹쓸 큰 죄악을 지은 놈이라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그 곁으로 지나올 때에 그 흉물스러운 사람들이 이상하게 힐끗힐끗 자기를 보는 양을 보고 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철없는 영채는 자기 아버지도 저러한 모양을 하였으려니 하고 생각하지는 아니하였다. 영채는 자기 아버지가 이전 자기집 사랑에 앉았을 때 모양으로 깨끗한 두루마기에 깨끗한 버선을 신고, 책상을 앞에 놓고 책을 읽으며 여러 젊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으려니 하였다. 그래서 저는 평양에 올 때까지는 죽을 고생을 다하였거니와 아버지를 만나기만 하면 평생 아버지의 곁에 있어 아버지의 심부름도 하고 옷도 빨아 다려 드리고, 이전 모양으로 오래간만에 재미있던 소학과 열녀전과 시경도 배우려니 하였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늘 웃는 빛이요, 아버지의 눈에는 늘 광명이 있고, 아버지의 말소리는 늘 정이 있고, 힘이 있으려니 하였다. 대합실에서 두 시간이나 넘어 기다리다가, 간수에게 이끌려 들어갈 적에 영채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흐를 뻔하였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뵈오려니 하면, 숙천 어떤 촌중에서 아이놈들에게 고생받던 생각과 그 이튿날 어느 주막에서 어떤 악한에게 붙들려 하마터면 큰 괴변을 당할 뻔하던 것과 순안 석암리 근방에서 금점꾼에게 붙들려 고생하던 것도 다 잊어버려지고 다만 기쁜 생각만 가슴에 가득히 찼었다. 면회소에 들어가면 응당 아버지가, '네가 오느냐' 하고 뛰어나와 자기를 안아 주려니 하였다. 그러나 면회소에 들어가 본즉, 사방에 두터운 널조각으로 둘러막고, 긴 칼을 찬 간수들이 무정한 눈으로 자기를 보며 쿵쿵 소리를 내고 지나갈 뿐, 나오리라 하는 아버지는 아니 보이고 어떤 시커먼 수염이 많이 난 순검― 간수연마는 영채의 생각에는 순검이어니 하였다― 이 손에 무슨 줄을 잡고 서서 영채를 보며,
"너 울지 말아라. 울면 네 아버지 안 보일 테야."
하고 호령을 할 때, 영채는 그만 실망하고 무섭고 슬픈 생각이 났다. 이윽고 그 순검이 손에 잡은 줄을 잡아당기니 덜커덕 하는 소리가 나면서 널쪽 벽에 있던 나뭇조각이 그 줄에 달려 올라가고, 네모난 조고마한 구녁이 뚫리며 그렇게도 몹시 변한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 어깨 위에서부터 눈까지가 보이고, 이마 위는 벽에 가려 아니 보인다. 아버지는 웃지도 아니하고 말도 없이, 가만히 영채를 내다볼 뿐, 그 얼굴에는 전에 보던 화기가 없고 그 눈에는 전에 있던 웃음과 광채가 없어지고 말았다. 전에 영채를 대할 때에는 얼굴이 온통 웃음이 되더니, 지금은 나무로 깎아 놓은 모양으로 아무러한 표정도 없다. 영채는, '저것이 내 아버진가' 하고 너무 억하여 한참이나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채의 몸에는 피가 식고 사지가 굳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그 나무로 깎은 듯한 얼굴, 움쑥한 눈에 눈물이 스르르 도는 것을 보고 그제야 '이것이 내 아버지로구나' 하는 듯이,
"아버지?"
하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웬일이오?"
하고 영채는 통곡하였다.
14
이렇게 아버지를 만나 보고 간수에게 붙들려 도로 대합실에 나왔다. 그 간수가 아까 줄을 잡고 있던 간수와 달라 매우 친절하게 영채를 위로하여 주었다. 대합실 걸상 위에 앉히고, "울지 말아라. 이제 얼마 아녀서 네 아버지께서 나오시느니라" 하고 간절하게 위로하여 주었다. 그러나 아주 미련치 아니한 영채는 그것이 다만 저를 위로하는 말에 불과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목을 놓아 울었다. 간수는 달래다 못하여,
"울지 말고 어서 집에 가거라."
하고는 자기 갈 데로 가고 말았다. 그때에 곁에 앉았던 어떤 머리 깎고 모직 두루마기 입은 사람이 영채더러,
"너 왜 우느냐. 여기 누가 와서 찾느냐?"
하고 아주 친절하게 묻는다. 영채는 그 아버지와 두 오라비가 이 감옥에 와 있는 말과 또 아버지와 오라비는 기실 아무 죄도 없다는 말과 자기는 아버지를 뵈올 양으로 혼자 이 먼 곳에 찾아왔다는 뜻을 고하였다. 영채 생각에, 이런 말을 하면 혹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아버지도 자주 뵈옵게 하여 주고 또 얼마 동안 밥도 먹여 주려니 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더니 아주 정성스럽고 다정한 말로 영채를 위로한다.
"참 가엾고나. 아직 내 집에 있어서 다음 번 면회일을 기다려라. 한 달에 한 번씩밖에 면회를 아니 시켜 주는 것이니, 내 집에 가서 한 달쯤 있다가 또 한번 아버지를 만나 보고 집에 가거라."
한다. 영채는 한 달을 더 있다 가야 또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매, 마음이 답답하기는 하나 그 사람의 친절히 구는 것이 어떻게 감사한지 몰랐다. 또 영채의 생각에는 평양에 와서 아버지만 만나면 평생 아버지를 모시고 있을 줄로 알고 갔던 것이 정작 와본즉, 모시고 있기는커녕 한 달에 한 번씩밖에 더 뵈올 수가 없고, 또 손에 돈이 없고 평양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 저녁부터라도 먹고 잘 일이 걱정이라. 또 팔월도 이십 일이 지났으니, 아침 저녁에는 찬바람이 솔솔 불어 무명고의 베적삼이 으스스하게 되었고, 또 밤에 덮을 것도 없이 자려면 사지가 가들어들어(옹송그려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젯저녁에도 칠성문 밖 어떤 집 윗목에서 밤새도록 추워서 한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웠더니, 아침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하여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세 번이나 설사를 하였다. 여러 날 괴로운 길의 노독과 고생과 또 오늘 아버지를 만날 때에 슬픔과 낙심으로 전신에 기운이 한땀도 없고 촌보를 옮길 생각이 없다. 이때에 마침 어떤 사람이 이렇게 친절하게 자기를 거두어 주니 영채는 슬픈 중에도 얼마큼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숙천 땅 어느 주막에서 머리 깎은 사람에게 속은 생각을 하매, 이 사람이 또 그러한 사람이나 아닌가 하고 의심이 나서 자세히 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보았다. 그러나 이 사람은 숙천서 보던 사람과 달라 옷도 잘 입고 얼굴도 점잖고 아무리 보아도 악한 사람은 아니로다. 또 만일 그가 나를 속이려거든 나는 입으로 그의 코를 물어뜯고 달아나면 그만이라 하였다. 우선 따뜻한 밥도 먹고 싶고, 불 잘 때인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잠도 잤으면 좋겠다 하였다. 이 사람의 집에 가면 아마 맛나는 밥도 주려니, 덮고 잘 이불도 주려니, 저만큼 옷을 입은 사람이면 집이 그만큼 넉넉하려니 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그 사람의 말대로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가는 길에도 그 사람은 영채의 손을 잡아 끌며 친절하게 여러 가지 말을 묻는다. 영채는 기운 없이 그 묻는 말을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집은 남대문 안이었다. 영채가 아주 피곤하여 걸음을 못 걸으리만한 때에 그 사람의 집에 다다랐다. 집이 그리 크지는 아니하나, 얼른 보기에도 깨끗은 하였다. 문에는 김운룡(金雲龍)이라는 문패가 붙었다. 영채는 글씨를 잘 썼다 하고 생각하였다. 안에 들어가니 마당과 방 안이 극히 정결하고, 어떤 어여쁜 젊은 부인과 처녀 하나가 있었다. 영채는 혼자 생각에, 저 부인은 그 사람의 부인, 저 처녀는 그 사람의 누이라 하였다. 왜 어머니가 없는가. 그 사람의 어머니가 계실 듯한데, 아마 우리 조모님 모양으로 늙어서 죽었나 보다 하였다. 모든 것이 영채의 상상하던 바와 같으므로 영채는 아주 마음을 놓았다. 더구나 그 사람의 누이인 듯한 처녀가 있고 또 다른 남자가 없으니 더욱 좋다 하였다. 그 집 식구들은 다 영채를 사랑하였다. 그날 저녁에 영채는 생각하던 바와 같이 오래간만에 고깃국에 맛나는 밥을 먹었다. 식후에 그 사람은 어디로 나가고, 영채는 그 부인과 처녀와 함께 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처녀는 영채를 남자로 알매,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나, 부인은 여러 가지로 영채의 신세를 물었다. 영채는 그 부인이 다정하게 혹 머리도 쓸어 주며 손도 만져 줌을 보고 하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의 신세를 말하였다. 자기가 부친과 오라비를 찾아 남자의 모양을 하고 외가에서 도망한 일과, 오다가 중로에서 여러 가지로 곤란당하던 일을 자세히 말할 때에, 그 처녀는 눈이 둥글하여지고, 부인은 영채의 등을 만지고 목을 쓸어안으면서 울었다. 영채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부인은 치맛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어째 네 얼굴이 여자 같다 하고 이상히 여겼다' 하면서 장을 열고 새로 지어 둔 옷 한 벌을 내어 주었다. 영채는 두어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입었다. 그러고는 세 사람이 더욱 정이 들어 웃고 이야기하였다. 그 중에도 지금까지 시치미떼고 앉았던 그 처녀가 갑자기 웃고 영채의 손을 잡으며 다정히 말하게 되었다. 영채는 아버지와 오라버니 일도 잠시 잊어버리고 없어진 집에 새로 돌아온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그 사람이 돌아와서 부인께 영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일동이 웃었다. 이렇게 며칠을 지내며 어서 한 달이 지나가서 다시 아버지를 뵈옵고 이러한 큰 은인의 말을 하려 하였다.
15
기다리면 한 달의 세월도 퍽 멀다. 영채는 차차 아버지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그 무섭게 여위고 침한(수척한) 얼굴과 움쑥 들어간 눈과 황톳물 들인 옷과 그 수염 많이 난 간수와 쇠줄을 허리에 매고 똥통을 나르던 사람들의 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영채는 제가 입은 곱고 따뜻한 의복을 볼 때마다, 아침 저녁 먹는 맛나는 음식을 볼 때마다 아버지의 가엾은 모양이 눈에 보인다. 영채는 점점 쾌활한 빛이 없어지고 음식도 잘 먹지 아니하고 가끔 혼자 앉아서 울기도 하였다. 부인과 그 처녀는 여전히 다정하게 위로하여 주건마는 그 위로를 받는 것도 잠시 몇 날이요, 부인도 처녀도 없는 데 혼자 앉았으면 자연히 눈물이 흐른다. 영채는 어찌하여 그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를 구원하지 못할까. 옥에서 나오게 할 수가 없을까. 아주 나오게는 하지 못하더라도 옷이라도 좀 깨끗이 입고 음식이나 맛나는 것을 잡수시도록 할 수가 없을까. 들으니, 감옥에서는 콩 절반 쌀 절반 두고 지은 밥을 먹는다는데, 아버지께서 저렇게 수척하심도 나 많은 이가 음식이 부족하여 그러함이 아닌가. 옛날 책을 보면, 혹 어떤 처녀가 제 몸을 팔아서 죄에 빠진 부모를 구원하였다는데, 나도 그렇게나 하였으면…… 이렇게 생각하고 영채가 하루는 그 사람에게 이 뜻을 고하였다. 그 사람은 영채의 뜻을 칭찬하면서,
"돈만 있으면 음식도 들일 수 있고, 혹 옥에서 나오시게도 할 수 있건마는……."
하고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영채는 옛말을 생각하였다. 그때 아버지께서 제 몸을 팔아 그 돈으로 그 아버지의 죄를 속한 옛날 처녀의 말을 들을 제, 아직 열 살이 넘지 못하였던 영채는 눈물을 흘리며 나도 그리하였으면 한 일이 있음을 생각하였다. 영채는 그 사람이, '돈만 있으면 음식도 들일 수도 있고 혹 옥에서 나오시게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렇게 할까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그러나 돈이 있어야 하지' 하고 영채의 얼굴을 보며 웃을 때에 영채는 생각하기를, 옳지, 이 어른도 내가 옛날 처녀의 하던 일을 하라고 권하는 뜻이라 하였다. 내가 이제 옛날 처녀의 본을 받아 내 몸을 팔아 돈만 얻으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옥에서 나오시렷다. (옥에서 나오시면 나를 칭찬하시렷다.) 세상 사람이 나를 효녀라고 칭찬하렷다. 옛날 처녀 모양으로 책에 기록하여 여러 처녀들이 읽고 나와 같이 울며 칭찬하렷다. 그러나 내가 내 몸을 팔아 부모와 형제를 구원하지 아니하면 이 어른과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불효한 계집이라고 비웃으렷다. 또 그 동안 이 집에 있어 보니 그 부인도 본래 기생이요, 그 처녀도 지금 기생 공부를 한다 하매 매일 놀러 오는 기생들도 다 얼굴도 좋고 옷도 잘 입고 마음들도 다 착한데…… 하였다. 기생이란 다 좋은 처녀들이어니 하였다. 더구나 그 기생들이 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아는 것을 보고, 기생들은 다 공부도 잘한 처녀들이라 하였다. 그래서 영채는 결심하였다. 그러고 그 사람께,
"저는 결심하였습니다. 저도 기생이 되렵니다. 저도 글을 좀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아버지를 구원하려 합니다."
하고 영채는 알 수 없는 기쁨과 일종의 자랑을 감각하였다. 그 사람은 영채의 등을 만지며,
"참 기특하다. 효녀로다. 그러면 네 뜻대로 주선하여 주마."
하였다.
이리하여 영채는 기생이 된 것이라. 영채는 결코 기생이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요, 행여나 늙으신 부친을 구원할까 하고 기생이 된 것이라. 기실 제 몸을 판 돈으로 부친과 형제를 구원치만 못할 뿐더러 주선하여 주마 하던 그 사람이 영채의 몸값 이백 원을 받아 가지고 집과 아내도 다 내어버리고 어디로 도망을 갔건마는, 또 영채가 그 부친을 구하려고 제 몸을 팔아 기생이 되었단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절식 자살을 하였건마는― 그러나 영채가 기생이 된 것은 제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늙으신 부친과 형제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렇건마는 이 줄을 누가 알아주랴. 하늘과 신명은 알건마는 화식 먹는 사람이야 이 줄을 누가 알아주랴. 내가 이제 이런 말을 한들 형식이가 이 말을 믿어 주랴. 아마도 네가 행실이 부정하여 창기의 몸이 되었거늘, 이제 와서 점점 낫살이 많아 가고 창기생활에 염증이 나므로 네가 나를 속임이로다, 하고 도리어 나를 비웃지 아니할까. 내가 기생이 된 지 이삼 삭 후에 감옥에 아버지를 찾았더니, 아버지께서 내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와락 성을 내어,
"이년아! 이 우리 빛난 가문을 더럽히는 년아! 어린 계집이 뉘 꼬임에 들어 벌써 몸을 더럽혔느냐!"
하고 내가 행실이 부정하여 기생이 된 줄로 알으시고 마침내 자살까지 하셨거든, 부모조차 이러하거든 하물며 형식이야 어찌 내 말을 신용을 하랴. 오늘 아침 형식을 찾으려고 결심할 때에는 형식에게 그 동안 지내 온 말을 다 하려 하였더니, 이러한 생각이 나매 그만 그러한 결심도 다 풀어지고, 슬픈 생각과 원망스러운 생각만 가슴에 북받쳐 오를 뿐이다. 아아, 세상에는 다시 내 진정을 들어 줄 곳이 없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영채는 후 하고 한숨을 쉬며 눈물을 씻고 형식과 노파를 보았다. 형식은 다정한 눈으로 영채의 얼굴을 보며 그 후에 지내 온 이야기를 기다리고, 노파는 영채의 등을 어루만지며 코를 푼다.
"그래, 그 악한의 손에서 벗어난 뒤에는 어찌 되었습니까?"
하고 형식은 영채의 이야기를 재촉한다. 영채는 이윽고 (형식을 보더니) 눈물을 씻고 일어나면서,
"일후에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그러셔요?"
하는 형식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고,
"어디 계십니까?"
하는 질문도 대답지 아니하고 계집아이를 데리고 일어나 간다. 형식과 노파는 서로 보며,
"웬일이오?"
하였다.
16
영채가 하던 말을 그치고 갑자기 일어나 나가는 양을 보고 형식은 한참 망연히 섰다가 모자도 아니 쓰고 문 밖에 뛰어나갔다. 그러나 하고많은 행인 중에 영채의 거처를 알 수가 없었다. 형식은 영채가 나올 때에 곧 뒤따라 나오지 아니한 것을 한하였다. 형식은 잠시 동안 행길로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낙심하여 집에 돌아왔다. 노파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앉았더라.
형식은 혼자 책상에 의지하여 영채의 일을 생각하였다. 영채가 어찌하여 중간에 하던 이야기를 끊고 총총히 돌아갔는가. 왜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그렇게 슬피 울었는가. 아무리 하여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혹 내가 영채에게 대하여 불만한 거동을 보였는가. 아니라, 나는 영채의 말을 들을 때에 지극한 동정과 정성으로써 하였다. 아까 영채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볼 때에 나는 그 눈물 고인 맑은 눈을 보고 더할 수 없이 사랑하는 정이 생겼다. 영채는 내 얼굴에서 그 빛을 보았으려니, 그러면 어찌하여 하던 말을 중도에 끊고 그렇게 총총히 일어 갔는고. 암만하여도 내게 차마 말하지 못할 무슨 깊은 사정이 있나 보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사정일까. 나를 찾아올 때에는 아무러한 사정이라도 다 말하려고 왔겠거늘, 어찌하여 하던 말을 그치고 총총히 돌아갔는고. 옳다, 아까 주인 노파가, '여학생 모양을 하였으나 암만해도 기생 같습데다' 하더니 참말 그러한가 보다. 홀몸으로 평양에 왔다가 어떤 못된 놈이나 년의 꼬임에 들어 그만 기생이 되었는가 보다. 서울서 기생 노릇을 하다가 어찌어찌 풍편에 내가 여기 있단 말을 듣고 찾아왔던가 보다. 만일 그렇다 하면 그가 무슨 뜻으로 나를 찾았을까. 어려서 같이 놀던 동무를 그리워서 한번 만나 보기나 하리라 하고 나를 찾았을까. 그리하여 나를 만나매, 옛날 생각이 나고 부모와 형제 생각이 나서 나를 보고 울다가 마침내 신세 타령을 시작한 것일까. 그러다가 제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을 하면 내가 제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을 품을까 저어하여 하던 말을 뚝 끊고 돌아갔음일까. 그러고 보면 그는 실로 기생의 몸이 되었는가. 그 은혜 많은 박선생의 따님이 그만 기생의 몸이 되었는가. 세상을 위하여 몸과 맘을 다 바치던 열성 있는 박선생의 따님이 그만 세상의 유혹을 받아 부랑한 남자들의 노리갯감이 되었는가. 혹 어떤 유야랑(遊冶郞)과 오늘 저녁에 만나기를 약속하고 그 약속한 시간이 오기 전에 잠깐 나를 찾은 것이 아닌가. 또는 그 유야랑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깐 내 집에 들렀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듯도 하다. 아까 영채의 뒤를 따라 행길에 나갔을 때에 교동파출소 앞으로 어떤 키 큰 남자와 여자 하나가 어깨를 겯고 내려가는 양을 보았더니, 그러면 그것이 영채던가. 그럴진대 지금 영채는 어떤 요리점에 앉아서 어떤 부랑한 남자와 손을 마주잡고 안기며 안으며, 한 술잔에 술을 나눠 마시며 음란한 노래와 음란한 말로 더러운 쾌락을 취하렷다. 아까 여기서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 남자를 후리는 추파를 띄우고 그 슬픈 신세를 말하던 그 입으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소리를 하렷다. 혹 지금 어떤 남자에게 안기어 더러운 쾌락을 탐하지나 아니하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니 형식의 흉중에 와락 불쾌한 생각이 난다. 아까 내 앞에서 하던 모든 가련한 모양이 말끔 일시의 외식이로다. 제 신세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나와 노파를 보고 속으로는 깔깔 웃었으리로다. 아아, 가증한 계집이로다 하였다. 아아, 영채는 그만 버린 계집이 되었구나. 더럽고 썩어진 창기가 되고 말았구나. 부모를 잊고 형제를 잊고 유혹에 빠져 그만 개똥같이 더러운 몸이 되고 말았구나. 박선생의 집은 그만 멸망하고 말았구나 하였다. 형식은 머리를 들어 하염없이 방 안을 돌아보고, 책상머리에 있는 부채를 들어 훅훅 다는 얼굴을 부치며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어디서 활동사진 음악대 소리가 들리고 교동 거리로 지나가는 인력거의 방울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흐트러진 생각을 수습지 못하여 좁은 마당으로 얼마 동안 거닐다가 방에 들어와 옷도 입은 채로 자리에 누웠다. 형식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는 울고 앉았는 영채의 모양이 뚜렷이 보이고, 영채가 말하던 경력담이 환등 모양으로, 활동사진 모양으로 형식의 주위에 얼른얼른 보인다. 안주 박선생의 집을 떠날 때에 자기가 영채를 안고, '이제는 다시 못 보겠구나' 하던 양도 보이고, 외가를 뛰어나와 개를 데리고 달밤에 혼자 도망하는 영채의 모양과 숙천 객점에서 어떤 악한에게 붙들려 가던 양이 얼른얼른 보이고, 남복을 입은 영채가 죽어 넘어진 개를 안고 새벽 외따른 길가에 앉아 우는 양도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활동사진이 뚝 끊어지고 한참이나 캄캄하였다가, 장구를 들고 부랑한 난봉들을 모시고 앉아 음탕한 얼굴로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앉았는 영채가 보이고, 또 어떤 놈과 베개를 같이 하고 누워 자는 양도 눈에 얼른얼른한다.
그러고는 또 아까 자기가 영채를 대하여 앉아서 생각하던 혼인생활이 보인다. 회당에서 성례하던 일, 즐거운 가정을 이뤘던 일, 아들과 딸을 낳았던 일이 마치 지나간 사실을 회상하는 모양으로 뚜렷하게 눈앞에 보인다.
"그만 영채가 기생이 되고 말았구나!"
하고 형식은 돌아누우며 자탄하였다. 형식은 이런 생각을 아니하리라 하고 몸을 흠칫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잠이 들리라 하고 일부러 숨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또 생각이 터져 나온다. 슬픈 신세 타령을 하며 눈물 고인 눈으로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영채의 모양이 쑥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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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그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어여쁜 손가락이 바르르 떨린다. 형식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영채는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사정을 다 말하고 자기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왔던 것이 아닐까. 설혹 몸이 기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형식이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자기를 그 괴로운 지경에서 건져 내어 달라기 위하여 찾아왔던 것이 아닐까. 온 세상에 형식이밖에 말할 곳이 없고 믿을 곳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어 부모를 찾아오는 모양으로, (형제를 찾아오는 모양으로) 형식을 찾아왔음이 아닐까. 아까, '제가 이형식이올시다' 할 때에 영채가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담박 눈물을 흘리던 것과 자기의 신세를 말하면서도 연해 연방 형식의 얼굴을 쳐다보던 것을 보니, 영채는 정녕 형식을 믿고 형식의 동정을 구하고, 형식에게 안아 주고 건져 주기를 청한 것이라. 옳다, 영채는 과연 나를 믿고 내게 보호를 청하려고 왔던 것이로다. 육칠 년간이나 차디차디 하고, 괴롭디괴롭디 한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저를 사랑하여 주어야 할 내가 서울에 있음을 알고 반갑고 기뻐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로다. 옳다, 그렇다. 나는 영채를 구원할 의무가 있다. 영채는 나의 은사의 따님이요, 또 은사가 내 아내로 허락하였던 여자라. 설혹 운수가 기박하여 일시 더러운 곳에 몸이 빠졌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건져 낼 책임이 있다. 내가 먼저 그를 찾아다니지 못한 것이 도리어 한이 되고 죄송하거늘, 이제 그가 나를 찾아왔으니 어찌 모르는 체하고 있으리요. 나는 그를 구원하리라. 구원하여서 사랑하리라. 처음에 생각하던 대로, 만일 될 수만 있으면 나의 아내를 삼으리라. 설혹 그가 기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원래 양반의 집 혈속이요, 또 어려서 가정의 교훈을 많이 받았으니 반드시 여자의 아름다운 점을 구비하였으리라. 또 만일 기생이라 하면 인정과 세상도 많이 알았을지요, 시와 노래도 잘할지니, 글로 일생을 보내려는 나에게는 가장 적합하다 하고 형식은 가만히 눈을 떴다. 멍하니 모기장을 바라보고 모기장 밖에서 앵앵하는 모기의 소리를 듣다가 다시 눈을 감으며 싱긋 혼자 웃었다. 아까 영채의 태도는 과연 아름다웠다. 눈썹을 짓고, 향수내 나는 것이 좀 불쾌하기는 하였으나 그 살빛과 눈찌와 앉은 태도가 참 아름다웠다. 더구나 그 이야기할 때에 하얀 이빨이 반작반작하는 것과 탄식할 때에 잠깐 몸을 틀며 보일 듯 말 듯 양미간을 찌그리는 것이 (못 견디리만큼 어여뻤다.) 아까 형식은 너무 감격하여 미처 영채의 얼굴과 태도를 자세히 비평할 여유가 없었거니와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영채의 일언 일동과 옷고름 맨 모양까지도 (못 견디게) 어여뻐 보인다. 형식은 눈을 감고 한번 더 영채의 모양을 그리면서 싱긋 웃었다. 도리어 저 김장로의 딸 선형이도 그 얌전한 태도에 이르러서는 영채에게 및지 못한다 하였다. 선형의 얼굴과 태도도 얌전치 아니함이 아니지마는 영채에 비기면 변화가 적고 생기가 적다 하였다. 선형은 가만히 앉았는 부처와 같다 하면, 영채는 구름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선녀와 같다 하였다. 선형의 얼굴과 태도는 그린 듯하고, 영채의 얼굴과 태도는 움직이는 듯하다 하였다. 영채의 얼굴은 잠시도 한 모양이 아니요, 마치 엷은 안개가 그 앞으로 휙휙 지나가는 모양으로 얼굴의 빛과 눈찌가 늘 변하였다. 그러면서 그 변하는 모양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얌전하였다. 그의 말소리도 정이 자아침을 따라 높았다 낮았다, 굵었다가 가늘었다, 마치 무슨 미묘한 음악을 듣는 듯하였다. 실로 형식과 노파가 그렇게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 것은 영채의 불쌍한 경력보다도 그 경력을 말하는 아름다운 말씨였었다. 형식은 아까 품었던 영채에게 대한 불쾌한 감정을 다 잊어버리고, 눈앞에 보이는 영채의 모양을 대하여 한참 황홀하였다. 형식의 눈앞에 보이는 영채가, '형식 씨, 저는 세상에 오직 당신을 믿을 뿐이외다. 형식 씨, 저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저는 이 외로운 몸을 당신의 품속에 던집니다)' 하고 눈물 고인 눈으로 형식을 쳐다보는 듯하다. 형식은 마음속으로, '영채 씨, 아름다운 영채 씨, 박선생의 따님인 영채 씨, 나는 영채 씨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랑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사랑하면 지하에 누워 계신 그 부친이 오죽이 즐거하실까. 그리하고 일후(만일~일후 : 하고 두 팔을 벌리고 안는 시늉을 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영채의 따뜻한 뺨이 자기의 뺨에 와 스치고 입김이 자기의 입에 와 닿는 듯하였다. 형식의 가슴은 자주 뛰고 숨소리는 높아졌다. 옳다, 사랑하는 영채는 내 아내로다.) 회당에서 즐겁게 혼인 예식을 행하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즐거운 가정을 이루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어디 있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형식은 또 불쾌한 마음이 생긴다. 영채가 어떤 남자와 희학하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남자와~보인다 : 남자에게 안겨 자는 모양이 눈에 보인다. 형식이 영채의 자는 방에 들어가니 영채는 어떤 사나이를 꼭 껴안고 고개를 번쩍 들고 형식을 보며, 히히히 하고 웃는 모양이 보인다).
형식은 '여보, 영채, 이것이 웬일이오' 하고 발길로 영채의 머리를 차는 양을 생각하면서 정말 다리를 들어 모기장을 탁 찼다. 모기장을 달았던 끈이 뚝 끊어지며 모기장이 얼굴을 덮는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 모기장을 집어던지고 궐련을 붙였다. 노파는 벌써 잠이 든 듯하고 서늘한 바람이 무슨 냄새를 띄워 솔솔 불어온다. 형식은 손에 든 궐련이 다 타는 줄도 모르고 멍멍하게 마당을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이 나는지 마당으로 뛰어나온다.
교동 거리에는 늦게 돌아가는 사람의 구두 소리가 나고 잘 맑은 여름 하늘에는 별이 반작반작한다. 형식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휙 돌아서며 혼자말로,
"참 인생이란 우습기도 하다."
18
이튿날 형식은 어젯밤 늦게야 잠이 들었던 탓으로 여덟시가 지나서야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영채의 일을 생각하며 조반을 먹을 제, 형식이가 가르치는 경성학교 학생 두 사람이 왔다. 형식은 어느 학생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게 하므로 형식을 따르는 학생이 많았었다. 그 중에도 형식은 자기의 과거의 신세를 생각하여 불쌍한 학생에게 특별히 동정을 표하고, 그러할 뿐더러 그 얼마 아니 되는 수입을 가지고 학비 없는 학생을 이삼 인이나 도와 주었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재주 있는 학생 얌전한 학생을 더욱 사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무론 아무나 재주 있고 얌전한 사람을 더욱 사랑하건마는, 그네는 용하게 그것을 겉에 드러내지 아니하되, 정이 많은 형식은 이러할 줄을 모르고 자기의 어떤 사람에게 대한 특별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떤 친구가 형식에게,
"자네는 편애하는 버릇이 있느니."
하는 충고도 받았다. 그때에 형식은 웃으며,
"더 사랑스러운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흠이란 말인가?"
하였다. 그러면 그 친구가,
"그러나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배우는 자를 하루같이 사랑할 필요가 있느니."
하고 이 말에 형식은,
"그러나 장차 자라서 사회에 크게 이익을 주어(줄) 만한 자를 특별히 더 사랑하고 가르침이 무엇이 잘못이랴."
하였다. 이리하여서 형식은 동료간에나 학생간에 편애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혹 어떤 형식을 미워하는 사람은, 형식이가 얼굴 어여쁜 학생만 사랑한다는 말도 한다. 학생 중에도 삼사년급 심술 사납고 장난 잘하는 학생들은, 형식은 얼굴 어여쁜 학생만 사랑하여 시험 점수도 특별히 많이 주고, 질문하는 것도 특별히 잘 가르쳐 준다 하며, 형식이가 특별히 사랑하는 학생을 대하여서는 듣기 싫은 비방도 많이 한다. 그럴 때면 형식의 특별히 사랑하는 학생들이 형식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변명하건마는, 도리어 심술 사나운 학생들은 그네를 비웃었다. 지금 형식을 찾아온 두 학생 중에 십칠팔 세 되는 얌전해 보이는 학생은 형식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자 중에 하나이요, 그와 함께 온 키 크고 얼굴 거무테테한 학생은 형식을 미워하는 학생 중의 하나이라. 형식을 사랑하는 학생의 이름은 이희경이니 지금 경성학교 사년급 첫 자리요, 다른 학생의 이름은 김종렬이니, 겨우하여 낙제나 아니하고 따라 올라오는, 역시 경성학교 사년생이라. 그러나 이 김종렬은 낫살이 많고 또 공부에 재주는 없으면서도 무슨 일을 꾸미는 수단이 매우 능란하여 이년급 이래로 그 반의 모든 일은 다 제가 맡아 하게 되고, 그뿐더러 이 김종렬이가 무슨 의견을 제출하면 열에 아홉은 전반 학생이 다 찬성한다. 전반 학생이 반드시 그를 존경하거나 사랑함이 아니로되, 도리어 그의 성적이 좋지 못한 방면으로, 그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방면으로, 그의 성질이 완패하고 심술이 곱지 못한 방면으로, 전반 학생의 미움과 비웃음을 받건마는 무슨 일을 하는 데 대하여는 전반 학생이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를 신임하며 그를 복종한다. 그는 무론 정직은 하다. 속에 있는 바를 꺼림없이 말하며 아무러한 어른의 앞에 가서라도 서슴지 아니하고 제 의견을 발표하는 용기가 있다. 아무려나 그는 일종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로다. 지금은 최상급 학생이므로 다만 사년급에만 세력이 있을 뿐더러, 온 학교 학생간에 위대한 세력을 가져 새로 입학한 일년급 어린 학생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고 그를 보면 경례를 한다. 만일 어린 학생이 자기를 대하여 경례를 아니하면 당장에 위엄 있는 태도와 목소리로, "여보, 왜 상급생에게 경례를 아니하오" 하고 책망한다. 그러므로 어린 학생들은 경례하고 돌아서서는 혀를 내어밀고 웃으면서도 그와 마주 대하여서는 공순히 경례를 한다. 동급생 중에 김계도라 하는, 김종렬과 비슷한 학생이 있다. 김계도는 김종렬보다 좀 온화하고 공손하여 사귈 맛은 있으나 그 일하기를 좋아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점에는 서로 일치한다. 게다가 연치가 상적하고 의취가 상합하므로 김종렬과 김계도 양인은 절친한 지기지우라. 김종렬의 생각에는, 세상에 족히 마음을 허하고 서로 천하를 의논할 사람은 나폴레옹과 김계도밖에는 없다 하였다. 그는 무론 나폴레옹의 자세한 전기도 한 권 읽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서양사에서 얻어들은 재료를 가지고 즉각적으로 나폴레옹은 이러한 사람이어니 하여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을 삼았다.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폴레옹이요, 동창회에서 연설을 할 때에도 나폴레옹이라. 모든 것에 나폴레옹을 인용하므로 학생들은 그를 나폴레옹이라고 별호를 짓고, 얼굴이 검다 하여 그의 별호에 '검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 '검은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게 되고, 혹 영리한 학생은― 이희경도 그렇다― 발음의 편의상 '검은 나폴레옹'을 줄여 '검나, 검나' 하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이 법국 황제인 줄은 알지마는 원래 지중해 중에 있는 코르시카 섬 사람인 줄은 모른다. 워털루에서 영국 장수 웰링턴에게 패하여 대서양 중 세인트헬레나라는 외로운 섬에서 나폴레옹이 죽었단 말을 역사 교사에게 들었으나, 그는 '워털루'라든가 '세인트헬레나'라든가 하는 배우기 어려운 말은 다 잊어버리고 다만 나폴레옹은 패하여 대서양 중 어떤 섬에서 죽었다고 기억할 뿐이라. 그러면서도 나폴레옹은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이라. 말하자면 김종렬의 이른바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에서 나고 프랑스에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이 아니라, 김종렬이가 하느님이 자기 모양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전설과 같이 자기 모양으로 나폴레옹을 만든 것이라. 이 나폴레옹 숭배자는 형식에게 인사한 뒤에 엄연히 꿇어앉아,
"저희가 선생님을 뵈오러 온 뜻은……."
하고 말을 시작한다.
19
형식은 궐련을 피워 물고 김종렬과 이희경 두 학생을 웃는 낯으로 대한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이 두 학생이 찾아왔는지는 모르거니와 김종렬, 이희경 양인이 함께 온 것을 보니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인 줄은 알았다. 대개 전부터 학생 전체에 관한 일이거나, 사년급 전체에 관한 일에는 이 두 사람이 흔히 총대가 됨을 앎이다. 원 격식으로 말하면 최상급의 반장인 이희경이가 으레 그 총대가 될 것이로되, 이희경은 아직 나이 어리고 또 김종렬과 같이 얼굴(일을) 좋아하는 마음과 일을 잘 처리하는 수단이 없으므로 항상 김종렬의 절제를 받는다. 혹 이희경이가 갈 일에도 김종렬은 마치 어린것을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이 아니 놓이는 듯이, 반드시 희경의 뒤를 따라가고, 따라가서는 이 희경이가 두어 마디 말도 하기 전에 자기가 가로맡아 말을 하고 이희경은 도리어 따라온 사람 모양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방긋방긋 웃고만 있을 뿐이다. 이희경은 이렇게 김종렬에게 권리의 침해를 받으면서도 처음은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듯하여 불쾌한 생각도 있었으며(있었으나) 점점 습관이 되매, 도리어 김종렬이가 자기의 할일을 가로맡아 하여 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더러, 혹 자기가 공부가 분주하거나 일하기가 싫은 때에는 자기가 김종렬을 찾아가서 자기의 맡은 일을 위탁하기조차 한다. 그리하면 김종렬은 즉시 승낙하고 저 볼일도 내어놓고 알선한다. 이러한 때마다 이희경은 혼자 웃었다. 이번에 형식을 찾아온 일도 아마 명의상으로는 이희경이가 대표요, 김종렬은 수행원인 줄을 형식은 알았다. 그러고 정작 대표자는 상긋상긋 웃고만 앉았고 수행원인 김종렬이가 입을 열어, '저희가 오늘 선생을 찾은 것은' 함이 하도 우스워서 형식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고 김종렬 같은 사람도 사회에 쓸 곳이 많다 하였다. 저런 사람은 아무 재능도 없으되, 오직 무슨 일이나 하기 좋아하는 성미가 있으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실행하기에 편리하리라 하였다. 김종렬 같은 사람은 조고마한 일을 맡길 때에도 그것을 큰일인 듯이 말하고, 조고마한 성공을 하거든 그것이 큰 성공인 듯이, 사회에 큰 이익이 있는 성공인 듯이 말하고, '노형이 아니면 이 일을 할 수가 없소' 하여 주기만 하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러한 일이나 맡으리라 하였다. 지금 자기가 자기보다 유치하게 보고 철없게 보는 이희경이가 얼마가 아니하여 자기를 부리는 사람이 되고, 자기보다 세상에 더 공경받는 사람이 될 것이언마는 김종렬은 그런 줄을 모르나니 그런 줄을 모르는 것이 김종렬에게는 행복이라 하였다.
또 학생들이 무슨 일을 의논하여 김종렬을 내어세웠는고 하고 형식은 지극히 은근하게,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녜, 학교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종렬은 이렇게 조고마한 일에도 법률상, 정치상 술어를 쓰기를 좋아하며 또 다른 것을 외우는 재주는 없으되, 자기의 유일한 숭배 인물인 나폴레옹의 이름이 보나파르트인 줄도 외우지 못하되, 법률상 정치상의 술어는 용하게 잘 외운다. 한번 들으면 반드시 실제에 응용을 하나니, 혹 잘못 응용하는 때도 있거니와 열에 네다섯은 옳게 응용한다. 이번 형식에게 '중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것 같은 것은 적당하게 응용한 일례라. 형식은,
"녜, 무슨 중대사건이오?"
"저희는 삼사년급이 합하여 동맹 퇴학을 하려 합니다. 학교의 학생에게 대한 처분 권리를 불만족히 여겨서 이렇게 동맹을 체결한 것이올시다."
하고 동맹 퇴학 청원서를 낸다. 김종렬은 그만 말 두 마디를 잘못 적용하였다. '처분 권리'의 '권리'는 연문이요, '동맹을 체결한다'는 '체결'은 너무 굉장하다 하였다. 그러나 한 발이나 되는 퇴학 청원서에 이백여 명이 연명 날인한 것을 보고 형식은 놀랐다. 과연 '중대사건'이요, 굉장하게 '동맹을 체결하였구나' 하였다. 김종렬은 퇴학 청원서를 내어 형식을 주며 자기도 형식의 곁으로 가까이 자리를 옮겨 그 글을 낭독하려는 모양을 보인다. 형식은 너무 김종렬의 예절답지 못한 데 불쾌한 생각이 나서 얼른 퇴학 청원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기 혼자만 소리 없이 읽었다. 김종렬이가 또 형식의 책상머리로 따라가려는 것을 이희경이가 웃으며 잡아당기어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김종렬은 이 뜻은 못 알아보고, '왜 버릇없이' 하고 이희경을 흘겨보았다. 이희경은 얼굴이 발개지며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듯 웃었다. 김종렬은 마침내 책상 맞은편에 가서 형식과 마주앉았다. 형식은 또 돌아앉으려다가 차마 그러지도 못하여 청원서를 도로 내어주며,
"종렬군, 그러나 이것은 좋지 못한 일이외다. 무슨 이유를 물론하고 학생의 학교에 대한 스트라이크는 좋지 못한 일이외다"
하였다.
김종렬은 스트라이크라는 말의 뜻은 자세히 모르거니와 베이스볼에 스트라이크란 말이 있음을 보건댄, 대체 학교를 공격하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청원서를 접으며 장중한 목소리로,
"아니올시다. 저의 모교 당국은 부패지극(腐敗之極)에 달하였습니다. 차제(此際)를 당하여 저희 용감한 청년들이 일대 혁명을 아니 일으키면 오히려 모교는 멸망할 것이올시다"
하고 결심의 굳음이 말에 보인다. 형식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이희경을 돌아보며,
"희경군도 의견이 그렇소?"
"녜, 어저께 하학 후에 삼사년급이 모여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래, 증거는 확실하오!"
김종렬이가 소리를 높여,
"확실하올시다. 저희 학생 중에서 몇 사람이 바로 목격을 하였습니다."
하고 주먹을 내어두르며,
"증거가 확실하올시다. 그대로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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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퇴학 청원의 이유는 대개 이러하였다. 경성학교의 학감 겸 지리 역사를 담임한 교사인 배명식이 술을 먹고 화류계에 다니매, 청년을 교육하는 학감이나 교사 될 자격이 없을 뿐더러, 또 매양 학생 전체의 의사를 무시하고 학과의 배당과 기타 모든 것을 자기의 임의대로 하며 학생의 상벌과 출석이 항상 공평되지 못하고 자기의 의사로 한다 함이다. 학감 배명식은 동경고등사범 지리 역사과의 전과를 졸업하고 이삼 년 전에 환국하여 경성학교주 김남작의 청탁으로 대번에 경성학교의 학감이라는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경성학교의 십여 명 교사가 다 중등교원의 법률상 자격이 없는 중에 자기는 당당히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노라 하여 학교 일에 대한 만반 사무는 오직 자기의 임의대로 하였다. 그의 주장하는 바를 듣건대 동경고등사범학교는 세계에 제일 좋은 학교요, 그 학교를 졸업한 자기는 조선에 제일가는 교육가라. 교육에 관한 모든 것에 모르는 것이 없고 자기가 하려 하는 모든 일은 다 교육학의 원리와 조선의 시세에 맞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곁에서 보기에는 고등사범을 졸업하지 아니한 다른 교사들보다 별로 나은 줄을 모르겠더라. 그는 취임 초에 학과의 변경을 주장하고 지리와 역사는 만학의 집합처라 하여 시간을 배나 늘리고, 수학과 박물은 중등교육에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여 시간 수효를 이삼 할이나 줄였다. 그는 역사 지리 중심 교육론자로라 자칭하여 학생을 대하여서는 역사 지리가 모든 학과 중에 가장 필요하고 귀중한 학과이며, 따라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가장 중요하고 힘드는 교사라 하였다. 그때에 다른 교사들은 총독부의 고등보통교육령과 일본 중학교의 제도를 근거로 하여 배학감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배학감은 웃으며,
"여러분은 교육의 원리를 모르시니까?"
하고 자기의 학설의 옳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각 중학교에서는 이렇게 학과를 배당하는데."
하고 누가 반대하면,
"허, 일본에 큰 교육가가 있소? 참 일본의 교육은 극히 불완전합니다."
하고 자기는 청출어람이라는 격언과 같이 일본서 배워 왔건마는 일본 모든 일류 교육가보다도 뛰어나는 새 학설과 새 교육의 이상을 가졌노라 한다. 마침 배학감의 개정한 학과 배당을 학무국에서 불인가하고 마침내 전에 하던 대로 하게 되매, 여러 교사들은 배학감을 대하여 웃었다. 그리하고 자기네의 승리를 기뻐하였다. 그러나 배학감은 아직 세상이 유치하여 자기의 가장 진보한 학설이 시행되지 아니함이라 하고 매우 분개하였다. 일찍 형식이가 조롱 겸 배학감에게 물었다.
"선생의 신학설은 뉘 학설을 근거로 한 것이오니까. 페스탈로치오니까, 엘렌 케이오니까?"
배학감은 페스탈로치가 누구며, 엘렌 케이가 누군지 한번 들은 듯은 하건마는 얼른 생각이 아니 난다. 그러나 조선 일류 교육가가 삼사류의 교육가가 아는 이름을 모른다 함도 수치라, 이에 배학감은 껄껄 웃으며,
"녜, 나도 푸스털과 얼른커의 학설은 보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 오쿠레(時代運)왼다."
한다. 페스탈로치와 엘렌 케이라는 말을 잊어버려 푸스털, 얼른커라 하리만큼 무식하면서도 그네의 학설을 다 보았다 하는 배학감의 심정을 도리어 불쌍히 여겼다. 그러고 서슴지 않고, '그러나 그것은 다 지다이 오쿠레(時代運)왼다' 하는 용기는 과연 칭찬할 만하다 하고, 형식은 혼자 웃은 일이 있었다. 기실 배학감은 자칭 신학설 신학설 하면서도 대체 학설이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가 고등사범에 다닐 때에 얼마나 도저하게 공부를 하였는지는 알 수 없거니와, 남이 사 년에 졸업하는 것을 오 년에 졸업하였다 하니, 그 동안에 굉장히 공부를 하여 교육에 관한 제자백가서를 다 통독하였는지 알 수 없거니와, 조선에 돌아온 뒤에는 그날그날 신문의 삼면기사나 읽는지 마는지, 독서하는 양을 보지 못하고 독서한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다. 일찍 같이 경성학교의 교사로 있는 어떤 사람이 형식을 보고,
"배학감은 백지(白紙)입데다그려."
"백지라니, 무슨 뜻이오니까."
"아무것도 쓴 것이 없단 말이야요― 무식하단 말씀이야요."
형식은 껄껄 웃으며,
"노형께서 조곰 모르셨습니다. 배학감은 백지가 아니라, 흑입니다. 검은 종이입니다."
"어째서요?"
"백지나 같으면 아직은 쓴 것이 없어도 장차야 쓸 수가 있지요. 그렇지마는 흑지는 장차 쓸 수도 없습니다."
하고 서로 웃은 일이 있었다.
배학감은 또 규칙을 좋아한다. '규칙적'이란 말과 '엄하게'라는 말은 배학감의 가장 잘 쓰는 말이었다. 취임 후 얼마 아니하여 친히 규칙을 개정하였다. 개정이 아니라 이전 있던 규칙은 교육의 원리에 합하지 아니하여 폐지하고 자기의 신학설을 기초로 하여 온통 이백여 조에 달하는 당당한 대규칙을 제정하였다. 어느 날 직원 회의에 교원 일동을 소집하고 친히 신규칙의 각 조목을 낭독하며 일일이 그 규칙의 정신을 설명하였다. 오후 한시에 시작한 것이 넉점이 지나도록 끝이 나지 못하였다. 배학감은 이마와 코에 땀이 흐르고 목이 쉬었다. 교원 일동은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 연방 엉덩이를 들먹들먹하였다. 어떤 교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코를 골다가 학감의 대갈일성에 깊이 든 꿈을 놀라기도 하고, 어떤 교원은 문을 홱 닫치고 뒷간에 한번 간 후에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참다 못하여,
"그것은 학교 규칙이 아니라 한 나라의 법률이외다그려."
하고 그 조목이 너무 많음을 공격하였다. 자리에 있던 오륙 인― 뒷간에 가고 남은― 교원은 일제히 형식의 말에 찬성을 표하였다. 그러나 학감의 직권으로 이 규칙이 확정이 되었다. 배학감과 일반 교원 및 학생과의 갈등이 심하여진 것은 이때부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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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려쪼이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고빙하여 오늘 오후 세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남의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고 이렇게 순결한 청년이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젊은 여자를 대하면 자연 수줍은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확확 달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남자로 생겨나서 이러함이 못생겼다면 못생겼다고도 하려니와, 여자를 보면 아무러한 핑계를 얻어서라도 가까이 가려 하고, 말 한마디라도 하여 보려 하는 잘난 사람들보다는 나으리라. 형식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우선 처음 만나서 어떻게 인사를 할까. 남자 남자 간에 하는 모양으로, '처음 보입니다. 저는 이형식이올시다' 이렇게 할까. 그러나 잠시라도 나는 가르치는 자요, 저는 배우는 자라, 그러면 미상불 무슨 차별이 있지나 아니할까. 저편에서 먼저 내게 인사를 하거든 그제야 나도 인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할까. 그것은 그러려니와 교수하는 방법은 어떻게나 할는지. 어제 김장로에게 그 청탁을 들은 뒤로 지금껏 생각하건마는 무슨 묘방이 아니 생긴다. 가운데 책상을 하나 놓고, 거기 마주앉아서 가르칠까. 그러면 입김과 입김이 서로 마주치렷다. 혹 저편 히사시가미(양갈래로 딴 머릿단)가 내 이마에 스칠 때도 있으렷다. 책상 아래에서 무릎과 무릎이 가만히 마주 닿기도 하렷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얼굴이 붉어지며 혼자 빙긋 웃었다. 아니 아니? 그러다가 만일 마음으로라도 죄를 범하게 되면 어찌하게. 옳다? 될 수 있는 대로 책상에서 멀리 떠나 앉겠다. 만일 저편 무릎이 내게 닿거든 깜짝 놀라며 내 무릎을 치우리라. 그러나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면 여자에게 대하여 실례라, 점심 후에는 아직 담배는 아니 먹었건마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고 입김을 후 내어 불어 본다. 그 입김이 손바닥에 반사되어 코로 들어가면 냄새의 유무를 시험할 수 있음이라. 형식은, 아뿔싸! 내가 어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는가, 내 마음이 이렇게 약하던가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신에 힘을 주어 이러한 약한 생각을 떼어 버리려 하나, 가슴속에는 이상하게 불길이 확확 일어난다. 이때에,
"미스터 리, 어디로 가는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쾌활하기로 동류간에 유명한 신우선(申友善)이가 대팻밥 모자를 갖춰 쓰고 활개를 치며 내려온다. 형식은 자기 마음속을 꿰뚫어보지나 아니한가 하여 두 뺨이 한번 더 후끈하는 것을 겨우 참고 지어서 쾌활하게 웃으면서, "오래 막혔구려" 하고 손을 잡아 흔들었다.
"오래 막혔구려는 무슨 막혔구려야. 일전 허교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형식은 얼마큼 마음에 수치한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리며,
"아직 그런 말에 익숙지를 못해서……" 하고 말끝을 못 맺는다.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인가? 급지 않거든 점심이나 하세그려."
"점심은 먹었는걸."
"그러면 맥주나 한잔 먹지."
"내가 술을 먹는가."
"그만두게. 사나이가 맥주 한 잔도 못 먹으면 어떡한단 말인가. 자 잡말 말고 가세" 하고 손을 끌고 안동파출소 앞 청국 요릿집으로 들어간다.
"아닐세. 다른 날 같으면 사양도 아니하겠네마는."
하고 다른 날이란 말이 이상하게나 아니 들렸는가 하여 가슴이 뛰면서,
"오늘은 좀 일이 있어."
"일? 무슨 일? 무슨 술 못 먹을 일이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 같으면 이러한 경우에 다만 '급히 좀 볼일이 있어' 하면 그만이려니와 워낙 정직하고 나약한 형식이라, 조곰이라도 거짓말을 못하여 한참 주저주저하다가,
"세시부터 개인교수가 있어."
"영어?"
"응."
"어떤 사람인데 개인교수를 받어?"
형식은 말이 막혔다. 우선은 남의 폐간을 꿰뚫어볼 듯한 두 눈으로 형식의 얼굴을 유심하게 들여다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숙인다.
"응, 어떤 사람인데 말을 못 하고 얼굴이 붉어지나, 응?"
형식은 민망하여 손으로 목을 쓸어 만지고 하염없이 웃으며,
"여자야."
"요― 오메데토오(아― 축하하네). 이이나즈케(약혼한 사람)가 있나 보네그려. 음 나루호도(그러려니). 그러구도 내게는 아무 말도 없단 말이야. 에, 여보게"
하고 손을 후려친다.
형식은 하도 심란하여 구두로 땅을 파면서,
"아니야. 저, 자네는 모르겠네. 김장로라고 있느니……."
"옳지, 김장로의 딸일세그려? 응. 저, 옳지, 작년이지.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명년 미국 간다는 그 처녀로구먼. 베리 굿."
"자네 어떻게 아는가?"
"그것 모르겠나. 이야시쿠모(적어도) 신문기자가. 그런데 언제 엥게지먼트를 하였는가."
"아니오. 준비를 한다고 날더러 매일 한 시간씩 와달라기에 오늘 처음 가는 길일세."
"아따, 나를 속이면 어쩔 터인가."
"엑."
"히히, 그가 유명한 미인이라대. 자네 힘에 웬걸 되겠나마는 잘 얼러 보게. 그러면 또 보세."
하고 대팻밥 벙거지를 벗어 활활 부채를 하며 교동 골목으로 내려간다. 형식은 이때껏 그의 너무 방탕함을 허물하더니 오늘은 도리어 그 파탈하고 쾌활함이 부러운 듯하다.
2
미인이라는 말도 듣기 싫지 아니하거니와 이이나즈케(약혼), 엥게지먼트라는 말이 이상하게 기쁘게 들린다. 그러나 '자네 힘에 웬걸 되겠는가' 하였다. 과연 형식은 아무 힘도 없다. 황금시대에 황금의 힘도 없고, 지식시대에 남이 우러러볼 만한 지식의 힘도 없고, 예수 믿는 지는 오래나 워낙 교회에 뜻이 없으며 교회 내의 신용조차 그리 크지 못하다. 아무 지식도 없고, 아무 덕행도 없는 아이들이 목사나 장로의 집에 자주 다니며 알른알른하는 덕에 집사도 되고, 사찰도 되어 교회 내에서 젠체하는 꼴을 볼 때마다 형식은 구역이 나게 생각하였다. 실로 형식에게는 시체 하이칼라 처자의 애정을 끌 만한 아무 힘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형식은 자연히 낙심스럽기도 하고, 비감스럽기도 하였다. 이럴 즈음에 김광현(金光鉉)이라 문패 붙은 집 대문에 다다랐다. 비록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는 예수의 사도연마는 그도 개명하면 땅도 사고, 수십 인 하인도 부리는 것이라. 김장로는 서울 예수교회 중에도 양반이요 재산가로 두셋째에 꼽히는 사람이라. 집도 꽤 크고 줄행랑조차 십여 간이 늘어 있다. 형식은 지위와 재산의 압박을 받는 듯한, 일변 무섭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면서 소리를 가다듬어,
"이리 오너라."
하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무리 하여도 뚝 자리가 잡히지 못하고, 시골 사람이 처음 서울 와서 부르는 소리와 같이 어리고 떨리는 맛이 있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하는 어멈의 말을 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중문을 지나 안대청에 오르다. 전 같으면 외객이 중문 안에를 들어설 리가 없건마는 그만하여도 옛날 습관을 많이 고친 것이라. 대청에는 반양식으로 유리 문도 하여 달고 가운데는 무늬 있는 책상보 덮은 테이블과 네다섯 개 홍모전 교의가 있고, 북편 벽에 길이나 되는 책상에 신구서적이 쌓였다. 김장로가 웃으면서 툇마루에 나와 형식이가 구두끈 끄르기를 기다려 손을 잡아 인도한다. 형식은 다시 온공하게 국궁례를 드린 후에 권하는 대로 교의에 앉았다. 김장로는 이제 사십오륙 세 되는 깨끗한 중로라. 일찍 국장도 지내고 감사도 지낸 양반으로서 십여 년 전부터 예수교회에 들어가 작년에 장로가 되었다. 김장로가 형식에게 부채를 권하며,
"매우 덥구려. 자 부채를 부치시오."
"녜, 금년 두고 처음인가 봅니다."
하고 부채를 들어 두어 번 부치고 책상 위에 놓았다. 장로가 책상 위에 놓인 초인종을 두어 번 울리니 건넌방으로서, "녜" 하고 열너덧 살 된 예쁜 계집아이가 소반에 유리 대접과 은으로 만든 서양 숟가락을 놓아 내어다가 형식의 앞에 놓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복숭아 화채에 한줌이나 될 얼음을 띄웠다. 손이 오기를 기다리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모양이라.
"자, 더운데 이것이나 마시오."
하고 장로가 친히 숟가락을 들어 형식을 준다. 형식은 사양할 필요도 없다 하여 연해 십여 술을 마셨다. 마음 같아서는 두 손으로 치어들고 죽 들이켜고 싶건마는 혹 남 보기에 체면 없어 보일까 저어하여 더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술을 놓았다. 그만하여도 얼마큼 속이 뚫리고 땀이 걷고 정신이 쇄락하여진다. 장로는,
"일전에도 말씀하였거니와 내 딸을 위하여 좀 수고를 하셔야 하겠소. 분주하신 줄도 알지마는 달리 청할 사람이 없소그려. 영어를 아는 사람이야 많겠지오마는 그렇게…… 어…… 말하자면…… 노형 같은 이가 드무시니까."
하고 잠시 말을 끊고 '너는 신용할 놈이지' 하는 듯이 형식을 본다. 형식은 남이 젊은 딸을 제게 맡기도록 제 인격을 신용하여 주는 것이 한껏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아까 입에 손을 대고 냄새나는 것을 시험하던 생각을 하면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그러나 기실 장로는 여러 사람의 말도 듣고 친히 보기도 하여 형식의 인격을 아주 신용하므로 이번 계약을 맺은 것이라. 여간 잘 알아보지 아니하고야 미국까지 보내려는 귀한 딸을 젊은 교사에게 다만 매일 한 시간씩이라도 맡길 리가 없는 것이라. 장로는 다시 말을 이어,
"하니까 노형께서 맡아서 일년 동안에 무엇을 좀 알도록 가르쳐 주시오."
"제가 아는 것이 없어서 그것이 민망하올시다."
"천만에. 영어뿐 아니라 노형의 학식은 내가 다 들어 아는 바요."
하고 다시 초인종을 울리니, 아까 나왔던 계집아이가 나온다.
"얘, 이것(화채 그릇) 들여가고 마님께 아씨 데리고 이리 나옵시사고 여쭈어라."
"녜."
하고 소반을 들고 들어가더니, 저편 방에서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장차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무슨 큰일을 기다리는 듯이 속이 자못 덜렁덜렁하며 가슴이 뛰고 두 뺨이 후끈후끈한다. 형식은 장로의 눈에 아니 띄우리만큼 가만가만히 옷깃을 바르고, 몸을 바르고, 눈과 얼굴에 아무쪼록 젊지 아니한 위엄을 보이려 한다.
이윽고 건넌방 발이 들리며 나이 사십이 될락말락한 부인이 연옥색 모시 적삼, 모시 치마에 그와 같이 차린 여학생을 뒤세우고 테이블 곁으로 온다. 형식은 반쯤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서 공손하게 읍하였다. 부인과 여학생도 읍하고, 장로의 가리키는 교의에 걸터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3
장로가 형식을 가리키며,
"이 어른이 내가 매양 말하던 이형식 씨요. 젊으시지마는 학식이 도저하고 또 문필도 유명한 어른이오. 이번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쳐 줍소사 하고 내가 청하였더니, 분주하심도 헤아리지 아니시고 이처럼 허락을 하여 주셨소. 이제부터 매일 오실 터이니까 내가 출입하고 없더라도 부인께서 잘 접대를 하셔야 하겠소."
하고 다시 형식을 향하여,
"이가 내 아내요, 저애가 내 딸이오. 이름은 선형인데 작년에 정신학교라고 졸업은 하였지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요."
형식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부인과 선형이도 답례를 한다. 부인은 형식을 보며,
"제 자식을 위하여 수고를 하신다니 감사하올시다. 젊으신 이가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는지, 참 은혜 많이 받으셨삽니다."
"천만에 말씀이올시다."
하고 형식은 잠깐 고개를 들어 부인을 보는 듯 선형을 보았다. 선형은 한 걸음쯤 그 모친의 뒤에 피하여 한편 귀와 몸의 반편이 그 모친에게 가리웠다. 고개를 숙였으며 눈은 보이지 아니하나 난 대로 내어 버린 검은 눈썹이 하얗게 널찍한 이마에 뚜렷이 춘산을 그리고 기름도 아니 바른 까만 머리는 언제 빗었는가 흐트러진 두어 오리가 불그레 복숭아꽃 같은 두 뺨을 가리어 바람이 부는 대로 하느적하느적 꼭 다문 입술을 때리고, 깃 좁은 가는 모시 적삼으로 혈색 좋은 고운 살이 몽롱하게 비추이며, 무릎 위에 걸어 놓은 두 손은 옥으로 깎은 듯 불빛에 대면 투명할 듯하다. 그 부인은 원래 평양 명기 부용이라는 인물 좋고 글 잘하고 가무에 빼어나 평양 춘향이라는 별명 듣던 사람이러니, 이십여 년 전 김장로의 부친이 평양에 감사로 있을 때에 당시 이십여 세 풍류 남아이던 책방 도령 이도령이라, 김도령의 눈에 들어 십여 년 전 김장로의 소실로 있다가 본부인이 별세하자 정실로 승차하였다. 양반의 가문에 기생 정실이 망령이어니와, 김장로가 예수를 믿은 후로 첩 둠을 후회하나 자녀까지 낳고 십여 년 동거하던 자를 버림도 도리에 그르다 하여 매우 양심에 괴롭게 지내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정실이 별세하므로 재취하라는 일가와 붕우의 권유함도 물리치고 단연히 이 부인을 정실로 삼았음이라. 부인은 사십이 넘어서 눈꼬리에 가는 주름이 약간 보이건마는, 옛날 장부의 간장을 녹이던 아리땁고 얌전한 모양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선형의 눈썹과 입 얼레는 그 모친과 추호 불차니, 이 눈썹과 입만 가지고도 족히 미인 노릇을 할 수가 있으리라.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형식이가 남의 처녀를 대할 때마다 생각하는 버릇이니, 형식은 처녀를 대할 때에 누이라고밖에 더 생각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가슴속에 이상한 불길이 일어남이니, 이는 청년 남녀가 가까이 접할 때에 마치 음전과 양전이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서로 감응하여 불꽃을 일리는 것과 같이 면치 못할 일이며, 하늘이 만물을 내실 때에 정한 일이라, 다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덕과 수양의 힘으로 제어할 뿐이니라. 형식이 말없이 앉았는 양을 보고 장로가 선형더러,
"얘, 지금 곧 공부를 시작하지. 아차, 순애는 어디 갔느냐. 그애도 같이 배워라. 나도 틈 있는 대로는 배울란다."
"녜."
하고 선형이가 일어나 저편 방으로 가더니 책과 연필을 가지고 나온다. 그 뒤로 선형과 동년배 되는 처녀가 그 역시 책과 연필을 들고 나와 공순하게 읍한다. 장로가, "이애가 순애인데 내 딸의 친구요.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불쌍한 아이요" 하는 말을 듣고 형식은 자기와 자기의 누이의 신세를 생각하고 다시금 순애의 얼굴을 보았다. 의복 머리를 선형과 꼭 같이 하였으니 두 사람의 정의를 가히 알려니와, 다만 속이지 못할 것은 어려서부터 세상 풍파에 부대낀 빛이 얼굴에 박혔음이라. 그 빛은 형식이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볼 때에 있는 것이요, 불쌍한 자기 누이를 볼 때에 있는 것이라. 형식은 순애를 보매 지금껏 가슴에 설렁거리던 것이 다 스러지고 새롭게 무거운 듯한 감정이 생겨 부지불각에 동정의 한숨이 나오며 또 한번 순애를 보았다. 순애도 형식을 본다.
장로와 부인은 저편 방으로 들어가고 형식과 두 처녀가 마주앉았다. 형식은 힘써 침착하게,
"이전에 영어를 배우셨습니까?"
하고, 이에 처음 두 처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두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이 없다. 형식도 어이없이 앉았다가 다시,
"이전에 좀 배우셨는가요."
그제야 선형이가 고개를 들어 그 추수같이 맑은 눈으로 형식을 보며,
"아주 처음이올시다. 이 순애는 좀 알지마는."
"아니올시다. 저도 처음입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도……? 그것은 물론 아실 터이지오마는."
여자의 마음이라 모른다기는 참 부끄러운 것이라 선형은 가지나 붉은 뺨이 더 붉어지며,
"이전에는 외웠더니 다 잊었습니다."
"그러면 에이, 비, 시, 디부터 시작하리까요?"
"녜."
하고 둘이 함께 대답한다.
"그러면, 그 공책과 연필을 주십시오. 제가 에이, 비, 시, 디를 써 드릴 것이니."
선형이가 두 손으로 공책에다 연필을 받쳐 형식을 준다. 형식은 공책을 펴놓고 연필 끝을 조사한 뒤에 똑똑하게 a, b, c, d를 쓰고, 그 밑에다가 언문으로 '에이' '비' '시' 하고 발음을 달아 두 손으로 선형에게 주고 다시 순애의 공책을 당기어 그대로 하였다.
"그러면 오늘은 글자만 외기로 하고 내일부터 글을 배우시지요. 자 한번 읽읍시다. 에이."
그래도 두 학생은 가만히 있다.
"저 읽는 대로 따라 읽읍시오. 자, 에이, 크게 읽으셔요. 에이."
형식은 기가 막혀 우두커니 앉았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꼭 물고, 순애도 웃음을 참으면서 선형의 낯을 쳐다본다. 형식은 부끄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당장 일어나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이때에 장로가 나오면서,
"읽으려무나, 못생긴 것. 선생님 시키시는 대로 읽지 않고."
그제야 웃음을 그치고 책을 본다. 형식은 하릴없이 또 한번,
"에이."
"에이."
"비."
"비."
"시."
"시."
이 모양으로 '와이' '제트'까지 삼사 차를 같이 읽은 후에 내일까지 음과 글씨를 다 외우기로 하고 서로 경례하고 학과를 폐하였다.
4
형식은 김장로 집에서 나와서 바로 교동 자기 객주로 돌아왔다.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다만 일년 넘어 다니던 습관으로 집에 왔다. 말하자면 형식이가 온 것이 아니요, 형식의 발이 형식을 끌고 온 모양이라.
주인 노파가 저녁상을 차리다가 치마로 손을 씻으면서,
"이선생 웬일이시오?"
하고 이상하게 웃는다. 형식은 눈이 둥글하여지며,
"왜요."
"아니, 그처럼 놀라실 것은 없지마는……."
"왜 무슨 일이 생겼어요?"
하고 우뚝 서서 노파를 본다. 노파는 그 시치미떼고 놀라는 양이 우스워서 혼자 깔깔 웃더니,
"아까 석점쯤 해서 어떤 어여쁜 아가씨가 선생을 찾아오셨는데 머리는 여학생 모양으로 하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기생 같습디다. 선생님도 그런 친구를 사귀는지."
"어떤 아가씨? 기생?"
하고 형식은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구두끈을 끄르고 마루에 올라서면서,
"서울 안에는 나를 찾아올 여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아마 잘못 알고 왔던 게로구려."
"에그, 아주 모르는 체하시지. 평양서 오신 이형식 씨라고, 똑똑히 그러던데."
형식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앉았더니,
"암만해도 모르는 일이외다. 그래 무슨 말은 없어요……?"
"이따가 저녁에 또 온다고 하고 매우 섭섭해서 갑데다."
"그래 나를 아노라고 그래요."
"에그, 모르는 이를 왜 찾을꼬. 자 들어가셔서 저녁이나 잡수시고 기다리십시오. 밥맛이 달으시겠습니다."
형식에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한다. 과연 형식을 찾을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장차 김선형이나 윤순애가 형식을 찾아오게 될는지는 모르거니와
지금 어느 여자가 형식을 찾으리요. 하물며 기생인 듯한 여자가. 형식은 밥상을 앞에 놓고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어 좀 지나면 온다 하였으니 그때가 되면 알리라 하고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신문을 볼 즈음에 대문 밖에 찾는 사람이 있다. 노파가,
"이것 보시오."
하고 눈을 꿈적하고 나간다.
"이선생 돌아오셨어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노파의 뒤를 따라 어떤 젊은 여자가 들어온다. 아까 노파의 말과 같이 모시 치마 저고리에 머리도 여학생 모양으로 쪽쪘다. 형식도 말이 없고 여자도 말이 없고 노파도 어인 영문을 모르고 우두커니 섰다. 여자가 잠깐 형식을 보더니, 노파더러,
"이선생께서 계셔요?"
"저 어른이 이선생이시외다."
하고 노파도 매우 수상해한다.
"녜, 내가 이형식이오. 누구시오니까."
여자는 깜짝 놀라는 듯이 몸을 흠칫하고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폭 숙인다. 해가 벌써 넘어가고 집집 광명등이 반작반작 눈을 뜬다. 형식은 무슨 까닭이 있음을 알고, 얼른 일어나 램프에 불을 켜고 마루에 담요를 내어 깐 뒤에,
"아무려나 이리 올라오십시오. 아까도 오셨더라는데 마침 집에 없어서 실례하였습니다."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저 같은 계집이 찾아와 선생님의 명예에 상관이 아니 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우선 올라오십시오. 무슨 일이신지……."
여자는 은근하게 예하고 올라온다. 데리고 온 계집아이도 올라앉는다. 형식도 앉았다. 노파는 건넌방에서 불도 아니 켜고 담배를 피우면서 이 광경을 본다.
형식은 불빛에 파래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이윽히 보더니, 무슨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감는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글쎄올시다. 얼굴이 혹 뵈온 듯도 합니다마는."
"박응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에? 박응진?"
하고 형식은 눈이 둥글하고 말이 막힌다. 여자도 그만 책상 위에 쓰러져 운다. 형식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형식은 비창한 목소리로,
"아아, 영채 씨로구려. 영채 씨로구려. 고맙소이다. 나같이 은혜 모르는 놈을 찾아 주시기 고맙소이다. 아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고 여자의 흑흑 느끼는 소리뿐이로다. 따라온 계집아이도 주인의 손에 매어달려 운다.
5
벌써 십유여 년 전이로다. 평안남도 안주읍에서 남으로 십여 리 되는 동네에 박진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십여 년을 학자로 지내어 인근 읍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원래 일가가 수십여 호 되고, 양반이요 재산가로 고래로 안주 일읍에 유세력자러니, 신미년 난 역적의 혐의로 일문이 혹독한 참살을 당하고, 어찌어찌하여 이 박진사의 집만 살아 남았다 하더니 거금 십오륙 년 전에 청국 지방으로 유람을 갔다가 상해서 출판된 신서적을 수십 종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서양의 사정과 일본의 형편을 짐작하고 조선도 이대로 가지 못할 줄을 알고 새로운 문명운동을 시작하려 하였다. 우선 자기 사랑에 젊은 사람을 모아 들이고 상해서 사온 책을 읽히며 틈틈이 새로운 사상을 강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귀에는 철도나 윤선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아니하여 박진사를 가리켜 미친 사람이라 하고, 사랑에 모였던 선배들도 하나씩 하나씩 헤어지고 말았다. 이에 박진사는 공부하려도 학자 없어 못 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하나 둘 데려다가 공부시키기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 삼사 년 후에는 그의 교육을 받은 학생이 이삼십 명이나 되게 되었고, 그 동안 그 이삼십 명의 의식과 지필묵은 온통 자담하였다. 그러할 즈음에 평안도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각처에 학교가 울흥하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박진사는 즉시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고 아들 둘도 그렇게 시켰다. 머리 깎고 검은 옷 입는 것이 그때치고는 대대적 대용단이라. 이는 사천여 년 내려오던 굳은 습관을 다 깨트려 버리고, 온전히 새것을 취하여 나아간다는 표라. 인해 집 곁에 학교를 짓고 서울에 가서 교사를 연빙하며 학교 소용 제구를 구하여 왔다. 일변 동네 사람을 권유하며, 일변 아이들과 청년들을 달래어 학교에 와 배우도록 하였다. 일년이 지나매 이삼십 명 학생이 모이고, 교사도 두 사람을 더 연빙하였다. 학생은 삼십 이하, 칠팔 세 이상이었다. 이렇게 학교 경비를 전담하는 외에도 여전히 십여 명 청년을 길렀다. 이 이형식도 그 십여 명 중의 하나이라. 그때 형식은 부모를 여의고 의지가지없이 돌아다니다가 박진사가 공부시킨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던 것이라. 마침 형식은 사람도 영리하고 마음이 곧고 재주가 있고, 또 형식의 부친은 이전 박진사와 동년지우이므로 특별히 박진사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 박진사의 아들 형제는 다 형식보다 사오 세 위로되 학력은 형식에게 밀리고 더구나 산술과 일어는 형식에게 배우는 처지였다. 그러므로 여러 동창들은 형식이가 장차 박선생의 사위가 되리라 하여 농담삼아, 시기삼아 조롱하였다. 대개 우리 소견에 박선생이라 하면 전국에 제일가는 선생인 줄 알았음이라. 그때 박진사의 딸 영채의 나이 열 살이니 지금 꼭 열아홉 살일 것이라. 박진사는 남이 웃는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영채를 학교에 보내며 학교에서 돌아온 뒤에는 소학, 열녀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열두 살 되던 여름에는 시전도 가르쳤다. 박진사의 위인이 점잖고 인자하고 근엄하고도 쾌활하여 어린 사람들도 무서운 선생으로 아는 동시에 정다운 친구로 알았었다. 그는 세상을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집을 바치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라도 바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네 사람들은 그의 성력을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이러한 지 육칠 년에 원래 그리 많지 못하던 재산도 다 없어지고 조석까지 말유하게 되니, 학교를 경영할 방책이 만무하다. 이에 진사는 읍내 모모 재산가를 몸소 방문도 하고 사람도 보내어 자기 경영하는 학교를 맡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는 오직 세상을 위하여 자기의 온 재산과 온 성력을 다 들인 학교를 남에게 내어맡기려 하건마는 어느 누가 '내가 맡으마' 하고 나서는 이는 없고 도리어 '제가 먹을 것이 없어 저런다' 하고 비웃었다. 육십이 다 못 된 박진사는 거의 백발이 되었다. 먹을 것이 없으매 사랑에 모여 있던 학생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제일 나 많은 홍모와 제일 나 어린 이형식만 남았다. 형식은 그때 열여섯 살이었다.
그해 가을에 거기서 십여 리 되는 어느 부잣집에 강도가 들어 주인의 옆구리를 칼로 찌르고 현금 오백여 원을 늑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강도는 박진사 집 사랑에 있는 홍모라, 자기의 은인인 박진사의 곤고함을 보다 못하여, 처음에는 좀 위협이나 하고 돈을 떼어 올 차로 갔더니 하도 주인이 무례하고 또 헌병대에 고소하겠노라 하기로 죽이고 왔노라 하고 돈 오백 원을 내어놓는다. 박진사는 깜짝 놀라며,
"이 사람아,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 하늘이 먹고 입을 것을 주나니…… 아아, 왜 이러한 일을 하였는가?"
하고 돈을 도로 가지고 가서 즉시 사죄를 하고 오라 하였더니, 중도에서 포박을 당하고 강도, 살인, 교사 급 공범 혐의로 박진사의 삼부자는 그날 아침으로 포박을 당하였다. 박진사의 집에 남은 것은 두 며느리와 영채와 형식뿐, 영채의 모친은 영채를 낳고 두 달이 못 하여 별세하였었다.
그 후에 박진사의 사랑에 있던 학생도 몇 사람 붙들리고 형식도 증거인으로 불려 갔었으나 이틀 만에 놓였다.
두어 달 후에 홍모와 박진사는 징역 종신, 박진사의 아들 형제는 징역 십오 년, 기타는 혹 칠 년 혹 오 년의 징역의 선고를 받고 평양감옥에 들어갔다.
인해 하릴없이 두 며느리는 각각 친정으로 가고, 영채는 외가로 가고, 형식은 다시 의지를 잃고 적막한 천지에 부평같이 표류하였다. 그후 형식은 두어 번 평양 감옥으로 편지를 하였으나 편지도 아니 돌아오고 회답도 없었다. 작년 하기에 안주를 갔더니 박진사의 집에는 낯모를 사람들이 장기를 두며 웃더라. 이제 칠 년만에 서로 만난 것이라.
6
형식은 번개같이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눈물을 거두고 그 앞에 엎더져 우는 영채를 보았다. 그때― 십 년 전에 상긋상긋 웃으면서 어깨에도 매어달리고 손도 잡아 끌며 오빠 오빠 하던 계집아이가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 그 동안 칠팔 년에 어떠한 풍상을 겪었나.
형식은 남자로되 지난 칠팔 년을 고생과 눈물로 지냈거든 하물며 연약한 어린 여자로 오죽 아프고 쓰렸으랴. 형식은 그 동안 지낸 일을 알고 싶어, 우는 영채의 어깨를 흔들며,
"울지 말으시오. 자, 말씀이나 들읍시다. 녜, 일어앉으세요."
울지 말라 하는 형식이도 아니 울 수가 없거든 영채의 우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자, 일어나시오."
"녜, 자연히 눈물이 납니다그려."
"……."
"선생을 뵈오니 돌아가신 부친님과 오라버님들을 함께 뵈온 것 같습니다"
하고 또 울며 쓰러진다. '돌아가신!' 박진사 삼부자는 마침내 죽었는가. 집을 없이하고, 재산을 없이하고, 마침내 몸을 없이하였는가. 불쌍한 나를 구원하여 주던 복 있는 집 딸이 복 있던 지 사오 년이 못 하여 또 불쌍한 사람이 되었는가. 세상일을 어찌 믿으랴. 젊은 사람의 생명도 믿을 수 없거든 하물며 물거품 같은 돈과 지위랴. 박진사가 죽었다 하면 옥중에서 죽었을지니, 같은 옥중에 있으면서 아들들이나 만나 보았는가. 누가 임종에 물 한 술을 떠 넣었으며, 누가 눈이나 감겼으리요. 외롭게 죽은 몸이 섬거적에 묶이어 까마귀밥이 되단 말가. 그가 죽으매 슬퍼할 이 뉘뇨. 막막하게 북망으로 돌아갈 때에 누가 눈물을 흘렸으리요. 그가 위하여 눈물 흘리던 세상은 다시 그를 생각함이 없고, 도리어 그의 혈육을 핍박하고 회롱하도다. 하늘이 뜻이 있다 하면 무정함이 원망스럽고, 하늘이 뜻이 없다 하면 인생을 못 믿으리로다.
"돌아가시다니,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어요?"
"녜, 옥에 가신 지 이태 만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아버님 돌아가신 지 보름 만에 오라버니 두 분도 함께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한 말은 알 수 없으나 옥에서는 병에 죽었다 하고 어떤 간수의 말에는, 첨에 아버님께서 굶어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맏오라버니께서 또 굶어 돌아가시고, 맏오라버니 돌아가신 날 작은오라버니는 목을 매어 돌아가셨다고 합데다."
하고 말끝에 울음이 복받쳐 나온다. 형식도 불식부지간에 소리를 내어 운다.
주인 노파는 처음에는 이형식을 후리려고 나오는 추한 계집으로만 여겼더니 차차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본래 양가 여자인 듯하고, 또 신세가 가이없은지라, 자기 방에 혼자 울다가 거리에 나아가 빙수와 배를 사가지고 들어와 영채를 흔든다.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요? 다 팔자로 알고 참아야지. 나도 젊어서 과부 되고 다 자란 자식 죽고…… 그러고도 이렇게 사오. 부모 없는 것이 남편 없는 것에 비기면 우스운 일이랍니다. 이제 청춘에 전정이 구만리 같은데 왜 걱정을 하겠소.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
하며 분주히 부엌에 가서 녹슨 식칼을 가져다가 배를 깎으면서,
"여봅시오, 선생께서 좀 위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더 울으시니……."
"가슴이 터져 오는 것을 아니 울면 어찌하오. 이가 내 사오 년간 양육받은 은인의 따님이오그려. 그런데 그 은인은 애매한 죄로 옥에서 죽고, 그의 아들 형제는 아버지를 좇아 죽고, 천지간에 은인의 혈육이라고는 이분네 하나뿐이오그려. 칠팔 년 동안이나 생사를 모르다가 이렇게 만나니 왜 슬프지를 아니하겠소."
"슬프나 울면 어찌하나요" 하고 배를 깎아 들고 영채를 한 팔로 안아 일으키면서,
"초년 고락은 낙의 본입니다. 너무 설워 말으시고 이 배나 하나 자시오."
영채도 친절한 말에 감격하여 눈물을 씻고 배를 받는다. 형식은 다시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보니 과연 그때의 모양이 있다. 더욱 그 큼직한 눈이 박진사를 생각게 한다. 영채도 형식의 얼굴을 본다. 얼굴이 이전보다 좀 길어진 듯하고 코 아래 수염도 났으나 전체 모양은 전과 같다 하였다. 마주보는 두 사람의 흉중에는 십여 년 전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휙휙 생각이 난다. 즐겁게 지내던 일, 박진사가 포박되어 갈 적에 온 집안이 통곡하던 일, 식구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 흩어지고 수십 대 내려오던 박진사 집이 아주 망하게 되던 일, 떠나던 날 형식이가 영채를 보고,
"이제는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다. 네게 오빠란 말도 다시는 못 듣겠다."
할 적에 영채가,
"가지 마오. 나와 같이 갑시다."
하고 가슴에 와 안기며 울던 생각이 어제런 듯 역력하게 얼른얼른 보인다. 형식은 영채의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하여 묻기를 시작한다.
7
노파와 형식이 하도 간절히 권하므로 영채도 눈물을 거두고 일어 앉아 빙수를 마시고 배를 먹는다. 눈물에 붉게 된 눈과 두 뺨이 더 애처롭고 아리땁게 보인다. 형식은 얼른 선형을 생각하였다.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그 부모의 귀여워함은 피차에 다름이 없건마는 현재 두 사람의 팔자는 왜 이다지도 다른고. 하나는 부모 갖고, 집 있고, 재산 있어 편안하게 학교에도 다니고, 명년에는 미국까지 간다 하는데, 하나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집도 없고, 어디 의지할 곳이 없이 밤낮을 눈물로 보내는고. 만일 선형으로 하여금 이 영채의 신세를 보게 하면 단정코 자기와는 딴 나라 사람으로 알렷다. 즉, 자기는 결단코 영채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이요, 영채는 결단코 자기와 같이 되지 못할 사람으로 알렷다. 또는 자기는 특별히 하늘의 복과 은혜를 받는 사람이요, 영채는 특별히 하늘의 앙화와 형벌을 받는 사람으로 알렷다. 그러하므로 부자가 가난한 자를 압시하고 천대하여 가난한 자는 능히 자기네와 마주서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고, 길가에 굶었다는(굶어 떠는) 거지들을 볼 때에 소위 제 것으로 사는 자들이 개나 도야지와 같이 천대하고 기롱하여 침을 뱉고 발길로 차는 것이라. 그러나 부자 조상 아니 둔 거지가 어디 있으며, 거지 조상 아니 둔 부자가 어디 있으리요. 저 부귀한 자를 보매 자기네는 천지개벽 이래로 부귀하여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부귀할 듯하나, 그네의 조상이 일찍 거지로 다른 부자의 대문에서 그 집 개로 더불어 식은 밥을 다툰 적이 있었고, 또 얼마 못 하여 그네의 자손도 장차 그리 될 날이 있을 것이라. 칠팔 년 전 박진사를 보고야 뉘라서 그의 딸이 칠팔 년 후에 이러한 신세가 될 줄을 짐작하였으랴.
다 같은 사람으로 부하면 얼마나 더 부하며, 귀하다면 얼마나 더 귀하랴. 조고마한 돌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놈들, 나는 너희보다 높은 사람이로다' 함과 같으니, 제가 높으면 얼마나 높으랴. 또 지금 제가 올라선 돌은 어제 다른 사람이 올라섰던 돌이요, 내일 또 다른 사람이 올라설 돌이다. 거지에게 식은밥 한술을 줌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는 뜻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지금 어떤 거지를 박대하고 기롱함은 후일 네 자손으로 하여금 내 자손에게 이렇게 하여 달라 함이 아닐까. 모르네라, 얼마 후에 영채가 어떻게 부귀한 몸이 되고, 선형이가 어떻게 빈천한 몸이 될는지도. 이렇게 생각하면서 형식은 입을 열어,
"서로 떠난 후에 지내던 말을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선생께서 가신 뒤에 이삼 일이나 더 있다가 저는 외가로 갔습니다." 하고 말을 시작한다.
외가에는, 외조부모는 벌써 죽고 외숙은 그보다 먼저 죽고, 외숙모와 내종형 두 사람과 내종형 자녀들만 있었다. 이미 자기 모친이 없고, 또 가장 다정한 외조부모도 없으니, 외가에를 간들 누가 살뜰하게 하여 주리요. 더구나 내 집이 잘살고야 친척이 친척이라, 내 집에 재산이 있고 세력이 있을 때에는 멀디멀디한 친척까지도 다정한 듯이 찾아오고, 이편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가더라도 큰손님같이 대접하거니와, 내 집이 가난하고 세력이 없어지면 오던 친척도 차차 발이 멀어지고, 내가 저편에 찾아가더라도 '또 무엇을 달래러 왔나' 하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라.
"외숙모님은 저를 귀여하셔서 머리도 빗겨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시건마는 그 맏오라버니댁이 사나워서 걸핏하면 욕하고 때리고 합데다. 그뿐이면 참기도 하려니와, 그 어머니의 본을 받아 아이까지도 저를 업신여기고, 무슨 맛나는 음식을 먹어도 저희들만 먹고 먹어 보라는 말도 아니해요. 그 중에도 열세 살 된 새서방― 제 외오촌 조카지요―은 가장 심해서 공연히 이년, 저년 하였습니다. 어린 생각에도, 내가 제 아주머니어든 하는 마음이 있어서."
하고 웃으며,
"매우 분하고 괘씸하여 보입데다. 옷은 집에서 서너 벌 가지고 갔었으나, 밤낮 물 긷고 불 때기에 다 더럽고, 더러워도 빨아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제 손으로 빨아서 풀도 아니 먹이고 다리지도 아니하고 입었습니다. 제일 걱정은 옷 한 벌을 너무 오래 입으니깐 이가 끓어서 가려워 못 견디겠어요. 그러나 남 보는 데서는 마음대로 긁지도 못하고 정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뒷울안, 사람 없는 데 가서 실컷 긁기도 하고 혹 이를 잡기도 하였습니다. 하다가 한번은 맏오라버니댁한테 들켜서 톡톡히 꾸중을 듣고, '아이들에게 이 오르겠다. 저 헛간 구석에 자빠져 자거라' 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제사 때나 명절에 고기나 떡이 생겨도 제게는 먹지 못할 것을 조곰 주고 그러고도 일도 아니하면서 처먹기만 한다고 말을 들었습니다. 한번은 궷속에 넣었던 은가락지 한 쌍이 잃어졌습니다. 저는 또 내가 경을 치나 보다 하고 부엌에 앉았노라니, 아니나다를까, 맏오라버니댁이 성이 나서 뛰어들어오며 부지깽이로 되는 대로 찌르고 때리고 하면서 저더러 그것을 내어놓으랍니다. 저도 그때에는 하도 분이 나서 좀 대답을 하였더니, '이년, 이 도적놈의 계집년, 네가 아니 훔치면 누가 훔쳤겠니' 하고 때립니다. 제 부친께서 도적으로 잡혀갔다고 걸핏하면 도적놈의 계집년이라 하는데, 그 말이 제일 가슴이 쓰립데다."
"저런 변이 있나. 저런 몹쓸년이 어디 있노."
하고 노파가 듣다고 혀를 찬다. 형식은 말없이 가만히 듣고 앉았다.
영채는 후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
8
"그렇게 때리고 맞고 하는 즈음에 이웃에 사는 계집 하나가 와서, '저 주막에 있는 갈보가 웬 커다란 은가락지를 꼈습데다. 어디서 났는가 하고 물어 보니까 기와집 새서방이 주더랍데다그려. 새서방님이 요새 자주 다니는가 보더구먼' 합데다. 이래서 저는 누명을 벗었으나, 그 다음에 오라버니댁과 그 계집과 대판 싸움이 납데다. '이년, 서방 있는 년이 남의 어린 사람을 후려다가 끼고 자고, 가락지도 네가 가져오라고 했지 이년' 하면, '제 자식을 잘 가르칠 게지. 남의 탓을 왜' 이 모양으로 다툽데다."
"어린것을 가르칠 줄은 모르고 장가만 일찍 들여서 못된 버릇만 배우게 하니."
하고 형식이가 탄식한다.
"그래서 이선생께서는 장가도 아니 들으시는게구먼."
영채는 형식이가 일찍 취처 아니했단 노파의 말을 듣고 놀라서 형식을 보았다. 그러고 그 장가 아니 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 이유가 자기에게 무슨 상관이 없는가 하였다. 이전 부친께서 농담삼아, '너 형식의 아내 될래' 하던 말을 생각하였다. 그때에 어린 생각에도 형식은 참 좋은 사람이거니 하고 사랑에 와 있던 여러 사람 중에도 특별히 형식에게 정이 들었었다. 이래 칠팔 년간에 한강에 뜬 버들잎 모양으로 갖은 고락을 다 겪으며 천애지각으로 표류하면서도 일찍 형식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차차 낫살을 먹어 갈수록 형식의 얼굴이 더욱 정답게 가슴속에 떠 나오더라. 혼자 어디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형식을 생각하고 울면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몸이 팔려 기생 노릇 한 지가 이미 육칠 년에 여러 남자의 청구도 많이 받았건마는 아직 한 번도 몸을 허한 적이 없음은 어렸을 적 소학 열녀전을 배운 까닭도 되거니와, 마음속에 형식을 잊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까닭이었다. 부친께서, '너는 형식의 아내가 되어라' 하신 말씀을 자라나서 생각하니, 다만 일시 농담이 아니라 진실로 후일에 그 말씀대로 하시려 한 것이라 하고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부친의 뜻을 아니 어기리라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살았는가 죽었는가. 살았다 하더라도 이미 유실 유가하고 생자 생녀하였으려니 하고는 혼자 절망도 하였으나, 설혹 그러하더라도 나는 일생을 형식에게 바치고 달리 남자를 보지 아니하리라고 굳게 작정하였었다. 이번 우연히 형식을 만나게 되니 기쁨은 기쁘거니와, 자기는 영원히 혼잣몸으로 지내려니 하였다. 그러다가 형식이가 아직 장가 아니 들었단 말을 들으니, 일변 놀랍기도 하고 일변 기쁘기도 하나,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형식은 지금 교육계에 다니는 사람이라, 행실과 명망이 생명이니 기생을 아내로 삼는다 하면 사회의 평론이 어떠할까 하고 다시 절망스러운 마음도 생긴다.
형식으로 말하면, 그 동안 동경에 유학하노라고 장가들 틈도 없었거니와 그 동안 구혼하는 데도 없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공부로 핑계를 삼고 아직도 구혼에 응하지 아니한 것은 중심에 영채를 생각하였음이라. 일찍 박진사가 형식을 대하여 직접으로 말한 적은 없었으나 박진사가 특별히 자기를 사랑하는 양을 보고, 또 남이 전하는 말을 들어도 박진사가 자기로 사위삼으려는 뜻이 있는 줄을 대강 짐작하였었다. 형식이가 박진사의 집을 떠날 때에 영채의 손을 잡고, '다시 너를 보지 못하겠다' 한 것은 여러 가지 깊은 슬픔이 많이 있어서 한 말이라. 그러나 그 후에 영채의 소식을 알 길이 바이 없고, 또 영채의 나이 이미 과년이 된지라 응당 뉘 집 아내가 되어 혹 자녀를 낳았을는지도 모르리라 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은사의 뜻을 저버리고 차마 제 몸만 위하여 달리 장가들 마음이 없고 행여나 영채의 소식을 들을까 하고 지금껏 기다리던 차이라. 그러다가 오늘 우연히 만나니, 아무리 하여도 기생 노릇을 하는 모양, 그러면 벌써 여러 사람에게 몸을 더럽혔으려니, 만일 그렇다 하면 자기 아내 못 되는 것이 한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애쓰던 은인의 혈육이 이처럼 윤락하게 됨이 원통하여 아까도 슬피 소리를 내어 운 것이요, 또 그 동안 지나온 이야기를 들으려 함도 행여나 기생이나 아니 되었으면 하는 희망과 설혹 되었다 하더라도 옛사람의 본을 받아 송죽 같은 정절을 지켰으면 하는 희망이 있음이라. 이제 형식과 영채는 피차에 저편의 속을 알고 싶어하게 된 것이라.
"그래, 그 다음에 어찌 되었습니까."
"그날 종일 밥도 아니 먹고 울다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 집에 있지 못할 줄을 알고 어디로 도망할 마음이 불현듯 납데다. 도망을 하자니 열세 살이나 된 계집아이가 가기를 어디로 갑네까. 영변 고모님 댁이 있단 말을 들었으나 어디인지도 모르고, 또 고모님도 이미 돌아가셨다 하니 거기인들 외가와 다르랴. 들은즉, 아버님과 두 오라버니께서 평양에 계시다 하니 차라리 거기나 찾아가리라. 아무리 옥에 계시다 하기로 자식이야 같이 있게 아니하랴 하고 그날 밤에 도망하여 평양으로 가려고 작정하고 저녁밥을 많이 먹고 식구들이 잠들기를 기다렸습니다."
9
"저는 외숙모님과 같이 잤는데 그 어른은 노인이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돌아눕는 소리만 들리고 암만 기다리니 잠드는 양이 아니 보입니다. 그래 기다리다 못하여 뒷간에 가는 체하고 일어나 옷을 입었습니다. 외숙모님께서도 의심이 나시는지, 옷은 왜 입느냐 하십데다. 그래서 뒤보러 가노라 하고 얼른 문 밖에 나섰습니다. 여자의 옷으로는 혼자 도망할 수가 없을 줄을 알고 제 조카의 옷을 훔쳐 입으리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정말 도적질을 하게 되었지요."
하고 웃으며,
"마침 저녁에 옷을 다려서 대청에 놓은 줄을 알므로 가만가만히 대청에 가서 제 옷을 벗어 놓고 조카의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때는 팔월 열사흘이라, 달이 짜듯하게 밝고 밤바람이 솔솔 부옵데다. 가만히 대문을 나서니 참 황황합데다. 평양이 동인지 서인지도 모르고 돈 한푼도 없이 어떻게 가는고 하고 부모 생각과 제 몸 생각에 저절로 눈물이 납데다. 그러나 이 집에는 더 있지 못할 줄을 확실히 믿으므로 더벅더벅 앞길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대문간에서 자던 개가 저를 보고 우두커니 섰더니 꼬리를 치면서 따라나옵데다. 한참 나와서 길가 큰 들매나무 아래 와서 저는 펄썩 주저앉았습니다. 거기서 한참이나 울다가 곁에 섰는 개를 쓸어안고, '나는 멀리로 간다.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할까 보다. 일년 동안 네가 내 동무 노릇을 하였구나. 그러나 나는 너를 버리고 멀리로 간다. 집에 가서 누가 내 거처를 묻거든 아버지를 찾아 평양으로 가더라고 일러라' 하고 다시 일어나서 갔습니다. 참 개도 인정을 아는 듯해요. 제 옷을 물고 매어달려서 킁킁하면서 도로 집으로 가자는 시늉을 합데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못 들어간다. 너나 들어가거라' 하고 손으로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개는 떨어지지 아니하고 따라옵데다. 저도 외로운 밤길에 동무나 될까, 하고 구태 때려 쫓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저것 보게. 개가 도리어 사람보다 낫지."
하고 노파가 눈물을 씻는다. 영채는 도리어 웃으면서,
"그러니 어디로 갈지 길을 알아야 아니합니까. 지난봄에 나물하러 갔다가 넓은 길을 보고 이 길이 서편으로 가면 의주와 대국으로 가고, 동편으로 가면 평양도 가고 서울도 간다는 말을 들었기로 허방지방 그리로만 향하였습니다. 촌중 앞으로 지날 적마다 개가 짖는데 개 소리를 들으면 한껏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데다. 저를 따라오는 개는 짖지도 아니하고 가만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저를 따라옵데다.
그렇게 얼마를 가노라니 촌중에서 닭들이 우는데 저편에 허연 길이 보입데다. 옳다구나 하고 장달음으로 큰길에 나섰습니다. 나서서 한참이나 사방을 돌아보다가 대체 달 지는 편이 서편이려니, 하고 달을 등지고 한정없이 갔습니다.
이튿날 조반도 굶고 낮이 기울어지도록 가다가 시장증도 나고 다리도 아프기로 길가 어느 촌중에 들어갔습니다. 집집에 떡치는 소리가 나고 아이들은 새옷을 갈아입고 떼를 지어 밀려다닙데다. 저는 그중에 제일 큰 집 사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랑에는 여러 어른들이 모여서 술을 먹고 웃고 이야기합데다. 길 가던 아인데 시장하여 들어왔노라 하니까 주발에 떡을 한 그릇 담아 내어다 줍데다. 시장했던 김이라 서너 개나 단숨에 먹노라니까 사랑에 앉은 어른 중에 수염 많이 나고 얼굴 투돔투돔한 사람이 제 곁에 와서 머리를 쓸며 '뉘 집 아인고. 얌전도 하다' 하면서 성명을 묻고, 사는 데를 묻고, 부친의 이름을 묻고, 나를 묻습데다. 저는 숙천 사는 김 아무라고 되는 대로 대답하고 안주 외가에 갔다 오노라고 하였더니, 제 얼굴빛과 대답하는 모양이 수상하던지, 여러 어른들이 다 말을 그치고 저만 쳐다봅데다. 저는 속이 덜렁덜렁하고 낯이 훅훅 달아서 떡도 다 먹지 못하고 일어나 절한 뒤에 문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나온즉, 장난꾼 아이들이 모여섰다가 저를 보고 '얘 너 어디 있는 아이냐? 어디로 가느냐' 하고 성가스럽게 묻습니다. '나는 숙천 있는 아이로다. 안주 외가에 갔다 온다' 하고 고개를 숙이고 달아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이 말을 묻는데 뛰기는 왜 뛰어' 하고 트집을 잡고 따라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이 어리고 밤새도록 걸음을 걸어 다리가 아파서 뛰지 못할 줄을 알고 우뚝 섰습니다. 그제는 아이놈들이 죽 둘러서고 그 중에 제일 큰 놈이 와서 제 목에다 손을 걸고 구린내를 피우면서 별의별 말을 다 묻습니다. 대답하면 묻고, 대답하면 또 묻고, 다른 아이놈들은 웃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고 쿡쿡 찌르기도 하고 아무리 빌어도 놓아 주지를 아니합니다. 한참이나 부대끼다가 하릴없이 으아 하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마침 그때에 저리로서 큰기침 소리가 나더니 서당 훈장 같은 이가 정자갓을 젖혀 쓰고 기다란 담뱃대를 춤을 추이면서 오다가, '이놈들, 왜 그러느냐' 하고 호령을 하니까 아이놈들이 사방으로 달아납데다. 저는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달음질을 하여 나왔습니다. 뒤에서는 아이놈들이 욕하고 떠드는 소리가 들립데다.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큰길에 나서니 개가 어디 있다가 따라나옵데다. 어떤 아이놈이 돌로 때렸는지 귀밑에서 피가 조곰 납데다. 저는 울면서 호― 하고 불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쉬엄쉬엄 또 동으로만 향하고 갔습니다.
몸은 더할 수 없이 곤하고 해도 저물었습니다. 아까 혼난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나서 다시 어느 촌중에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밥 굶어서 한데에서 잘 수도 없으며 어쩌면 좋은가 하고 주저하다가 어떤 길가 객점에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고생한 생각을 하면 지금도 치가 떨립니다" 하고 손을 한번 비틀고 한숨을 내어 쉰다.
10
"돈 한푼도 없이?"
하고 노파가 걱정을 한다.
"돈이 있으면 그처럼 고생은 아니하였겠지요"
하고 말을 이어,
"객점에 드니깐 먼저 든 객이 육칠 인 되옵데다. 주인이 아랫목에 앉았다가 저를 보고 '너 어떤 아이냐' 하기로 길 가던 아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자고 가려노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녁을 먹어야 하겠구나 하기에, 돈이 한푼도 없어서 밥을 사먹을 수 없으니 자고나 가게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즉, 주인이 '그러걸랑은 저 안동네 뉘 집 사랑에 들어가 자거라. 우리집에는 손님이 많아서 잘 데가 없다' 고 합데다. 그제 손님 중의 한 분, 머리도 깎고 매우 점잖아 보이는 이가 주인더러, '어린것이 이제 어디로 가겠소. 내가 밥값을 낼 것이니 저녁과 내일 아침 조반을 먹이고 재우시오' 합데다. 저는 그때에 어떻게나 고마운지 마음 같아서는 아저씨, 하고 엎데어 절이라도 하고 싶습데다. 그래 저녁을 먹고 나서 여러 손님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어느 틈에 윗목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어떤 도적놈에게 잡혀가는 무서운 꿈을 꾸고 잠을 깨어 가만히 들은즉, 방 안에 객들이 무슨 토론을 하는 모양입데다. 하나가 '아니어, 사나희지' 하면, '그럴 수가 있나? 그 얼굴과 목소리가 단정코 계집아이지요' 하고, 그러면 또 하나가 '어린 계집아이가 남복을 하고 혼자 갈 이유가 있나?' 하면서 저를 두고 말함이 분명합데다. 아뿔싸, 이 일을 어쩌나 하고 치를 떨고 누웠는데, 여러 사람들은 한참이나 서로 다투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다툴 것이 있는가 보면 그만이지' 하고 저 있는 데로 옵데다. 저는 기가 막혀 벽에 꼭 붙었습니다. 그러나 힘센 어른을 대적할 수가 있습니까. 마침내 제 본색이 탄로되었습니다. 부끄럽기도 그지없고 설기도 그지없고 분하기도 그지없어 하염없이 소리를 놓아 울었습니다."
"저런 변이 있나. 그 몹쓸놈들이 밤새도록 잠은 아니 자고 그런 토론만 하였구먼"
하고 노파가 분하여 한다.
"그래 한참 우는데 제 몸을 보던 사람이 말하기를, '자― 여러분, 이제는 내기한 대로 내가 이 계집아이를 가지겠소' 하면서 제 등을 툭툭 두드립데다. 그래 저는 평양 계신 아버님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간절히 말하고 빌었습니다. 한즉, 그 사람 대답이, '아버님은 오는 달에 찾아가고 우선 내 집으로 가자' 하면서 팔을 제 목 아래로 넣어 저를 일으켜 앉히며, 어서 가자 합데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행여나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있는가 하고."
"아까 밥값 내어 준다던 사람은 어디로 갔던가요."
하고 형식이가 주먹을 부르쥐고 물었다.
"글쎄 말씀을 들으십시오. 지금 저를 데려가려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외다그려. 여러 사람들은 그 사람을 무서워하는지 아무 말도 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합데다. 저는 울면서 빌다 빌다 못하여 마침내 사람 살리시오 하고 힘껏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제 울음 소리에 개들이 야단을 쳐 짖는데 그 중에 제가 데리고 온 개 소리도 납데다. 그제는 그 사람이 수건으로 제 입을 꼭 동여매더니 억지로 뒤쳐업고 나갑데다. 방에 있던 사람들은 내다보지도 아니하고 문을 닫칩데다."
하고 잠시 말을 그친다.
형식은 영채의 기구한 운명을 듣고 자기의 어렸을 때에 고생하던 것에 대조하여 한참 망연하였었다. 영채는 그 악한에게 붙들려 장차 어찌 되려는가. 그 악한은 영채의 어여쁜 태도를 탐하여 못된 욕심을 채우려 하는가. 또는 영채의 몸을 팔아 술과 노름의 밑천을 만들려 함인가. 아무려나, 영채의 몸이 그 악한에게 더럽혀지지나 아니하였으면 하였다. 그리하고 영채의 얼굴과 몸을 다시 자세히 보았다. 대개 여자가 남자를 보면 얼굴과 체격에 변동이 생기는 줄을 앎이다. 어찌 보면 아직 처녀인 듯도 하고, 또 어찌 보면 이미 남자에게 몸을 허한 듯도 하다. 더구나 그 곱게 다스린 눈썹과 이마와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가 아무리 하여도 아직도 순결한 처녀같이 보이지 아니한다.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갑자기 싫은 마음이 생긴다. 저 계집이 이때까지 누군지 알 수 없는 수없는 남자에게 몸을 허하지나 아니하였는가. 지금 자기 신세 타령을 하는 저 입으로 별의별 더러운 남의 입술을 빨고, 별의별 더러운 남의 마음을 호리는 말을 하던 입이 아닌가. 지금 여기 와서 이러한 소리를 하고 가장 얌전한 체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육칠 년 전의 애정을 이용하여 나를 휘어넘기려는 휼계(譎計)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선형을 생각하였다. 선형은 참 아름다운 처녀라. 얼굴도 아름답거니와 마음조차 아름다운 처녀라. 저 선형과 이 영채를 비교하면 실로 선녀와 매음녀의 차이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고 또 한번 영채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이고 얼굴에는 거룩하다고 할 만한 슬픈 빛이 보인다. 더욱이 아무 상관없는 노파가 영채의 손을 잡고 주름잡힌 두 뺨에 거짓 없는 눈물을 흘림을 볼 때에 형식의 마음은 또 변하였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죄로다. 영채는 나를 잊지 아니하고 이처럼 찾아와서 제 부모나 형제를 만난 모양으로 반갑게 제 신세를 말하거늘, 내가 이러한 괘씸한 생각을 함은 영채에게 대하여 큰 죄를 범함이로다. 박선생같이 고결한 어른의 따님이, 그렇게 꽃송아리같이 어여쁘던 영채가 설마 그렇게 몸을 더럽혔을 리가 있으랴. 정녕시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도 송죽의 절개를 지켜 왔으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어 왔는고. 영채는 다시 말을 이어, 그 악한에게 잡혀가는 일에서부터 지금까지 지내 오던 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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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 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 끔 되고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로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놓을 것 같소. 위트와 파라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리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 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하는 것이니……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 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감정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의 원소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여왕봉과 미망인--세상의 하고 많은 여인이 본질적으로 이미 미망인이 아닌 이가 있으리까? 아니, 여인의 전부가 그 일상에 있어서 개개'미망인'이라는 내 논리가 뜻밖에도 여성에 대한 모험이 되오? 굿바이.

그 33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 번지에 18가구가 죽 어깨를 맞대고 늘어서서 창호가 똑같고 아궁이 모양이 똑같다. 게다가 각 가구에 사는 사람들이 송이송이 꽃과 같이 젊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는 까닭이다. 턱살밑에다 철줄을 매고 얼룩 진 이부자리를 널어 말린다는 핑계로 미닫이에 해가 드는 것을 막아 버린다. 침침한 방안에서 낮잠들을 잔다. 그들은 밤에는 잠을 자지 않나? 알 수 없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잠만 자느라고 그런 것을 알 길이 없다. 33번지 18 가구의 낮은 참 조용하다.

조용한 것은 낮뿐이다. 어둑어둑하면 그들은 이부자리를 걷어들인다. 전등불이 켜진 뒤의 18 가구는 낮보다 훨씬 화려하다. 저물도록 미닫이 여닫는 소리가 잦다. 바빠진다. 여러가지 냄새가 나 기 시작한다. 비웃 굽는 내, 탕고도오랑내, 뜨물내, 비눗내.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그들의 문패가 제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이다.

이 18 가구를 대표하는 대문이라는 것이 일각이 져서 외따로 떨어지기는 했으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도 닫힌 일이 없는, 한길이나 마찬가지 대문인 것이다. 온갖 장사치들은 하루 가운데 어느 시간에라도 이 대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이네들은 문간에서 두부를 사는 것이 아니라, 미닫이를 열고 방에서 두부를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긴 33번지 대문에 그들 18 가구의 문패를 몰아다 붙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각 미닫이 위 백인당이니 길상당이니 써 붙인 한곁에다 문패를 붙이는 풍속을 가져 버렸다.

내 방 미닫이 위 한곁에 칼표 딱지를 넷에다 낸 것만한 내--아니! 내 아내의 명함이 붙어 있는 것도 이 풍속을 좇은 것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러나 그들의 아무와도 놀지 않는다. 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사도 않는다. 나는 내 아내 와 인사하는 외에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내 아내 외의 다른 사람과 인사를 하거나 놀거나 하는 것은 내 아내 낯을 보아 좋지 않은 일인 것만 같이 생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만큼 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내 아내를 소중히 생각한 까닭은 이 33번 지 18 가구 속에서 내 아내가 내 아내의 명함처럼 제일 작고 제일 아름다운 것을 안 까닭이다. 18 가구에 각기 빌어 들은 송이송이 꽃들 가운데서도 내 아내가 특히 아름다운 한 떨기의 꽃으로 이 함석지붕 밑 볕 안드는 지역에서 어디까지든지 찬란하였다. 따라서 그런 한 떨기 꽃을 지키고--아니 그 꽃에 매어달려 사는 나라는 존재가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거북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마음에 들었다. 방안의 기온은 내 체온 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 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은 원 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 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 을 그저 까닭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쳐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이 절대적인 내 방은 대문간에서 세어서 똑 일곱째 칸이다. 럭키 세븐의 뜻이 없지 않다. 나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훈장처럼 사랑하였다. 이런 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 만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 해지면서 나가 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윗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드는 방이 내 방이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랫방으로 와서 그 동쪽으로 난 들창을 열어 놓고 열어놓으면 들이비치는 햇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쳐 가지각색 병들이 아롱이 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없는 내 오락이다. 나는 조그만 돋보기를 꺼내가지고 아내만이 사용하는 지리가미를 꺼내 가지고 그을려 가면서 불장난을 하고 논다. 평행광선을 굴절시켜서 한 촛점에 모아가지고 그 촛점이 따근따근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종이를 그을리기 시작하고, 가느다란 연기를 내면서 드디어 구멍을 뚫어 놓는 데까지 이르는, 고 얼마 안되는 동안의 초조한 맛이 죽고 싶을 만 큼 내게는 재미있었다.

이 장난이 싫증이 나면 나는 또 아내의 손잡이 거울을 가지고 여러가지로 논다. 거울이란 제 얼 굴을 비칠 때만 실용품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이 장난도 곧 싫증이 난다.

나의 유희심은 육체적인 데서 정신적인 데로 비약한다. 나는 거울을 내던지고 아내의 화장대 앞으로 가까이 가서 나란히 늘어 놓인 그 가지각색의 화장품 병들을 들여다본다. 고것들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매력적이다. 나는 그 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구멍을 내 코에 가져다 대 고 숨 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여 본다. 이국적인 센슈얼한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나는 저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느낀다. 확실히 아내의 체취의 파편이다.

나는 도로 병마개를 막고 생각해 본다. 아내의 어느 부분에서 요 냄새가 났던가를…… 그러나 그 것은 분명하지 않다. 왜? 아내의 체취는 여기 늘어섰는 가지각색 향기의 합계일 것이니까.

아내의 방은 늘 화려하였다. 내 방이 벽에 못 한 개 꽂히지 않은 소박한 것인 반대로, 아내 방에 는 천장 밑으로 쫙 돌려 못이 박히고, 못마다 화려한 아내의 치마와 저고리가 걸렸다. 여러가지 무늬가 보기 좋다. 나는 그 여러 조각의 치마에서 늘 아내의 동체와, 그 동체가 될 수 있는 여러가지 포우즈를 연상하고 연상하면서 내

마음은 늘 점잖지 못하다.

그렇건만 나에게는 옷이 없었다. 아내는 내게 옷을 주지 않았다. 입고 있는 골덴양복 한 벌이 내 자리옷이었고 통상복과 나들이옷을 겸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넥의 스웨터가 한 조각 사철을 통한 내 내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다 빛이 검다. 그것은 내 짐작 같아서는 즉 빨래를 될 수 있는 데까지 하지 않아도 보기 싫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허리와 두 가랑이 세 군데 다--고무밴드가 끼어 있는 부드러운 사루 마다를 입고 그리고 아무 소리없이 잘 놀았다.

어느덧 손수건만해졌던 볕이 나갔는데 아내는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요만일에도 좀 피 곤하였고 또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내 방으로 가 있어야 될 것을 생각하고 그만 내 방으로 건너간 다. 내 방은 침침하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잔다. 한번도 걷은 일이 없는 내 이부자리 는 내 몸뚱이의 일부분처럼 내게는 참 반갑다. 잠은 잘 오는 적도 있다. 그러나 또 전신이 까칫까칫하면서 영 잠이 오지 않는 적도 있다. 그런 때는 아무 제목으로나 제목을 하나 골라서 연구하였다.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속에서 참 여러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잠이 드는 것과 동시에 내 방에 담겨서 철철 넘치는 그 흐늑흐늑한 공기 에 다 비누처럼 풀어져서 온데간데 없고, 한잠 자고 깨인 나는 속이 무명헝겊이나 메밀껍질로 띵띵 찬 한 덩어리 베개와도 같은 한 벌 신경이었을 뿐이고 뿐이고 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는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 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쓰라리다. 그것은 그윽한 쾌감에 틀림없었다. 나는 혼곤히 잠이 든다.

나는 그러나 그런 이불 속의 사색 생활에서도 적극적인 것을 궁리하는 법이 없다. 내게는 그럴 필요가 대체 없었다. 만일 내가 그런 좀 적극적인 것을 궁리해내었을 경우에 나는 반드시 내 아내 와 의논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면 반드시 나는 아내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이고--나는 꾸지람이 무서웠다느니 보다는 성가셨다. 내가 제법 한 사람의 사회인의 자격으로 일을 해 보는 것도 아내에게 사설 듣는 것도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 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아내는 하루에 두 번 세수를 한다.

나는 하루 한 번도 세수를 하지 않는다.

나는 밤중 세 시나 네 시쯤 해서 변소에 갔다.

달이 밝은 밤에는 한참씩 마당에 우두커니 섰다가 들어오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 18 가구의 아무와도 얼굴이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18 가구의 젊은 여인네 얼굴들을 거반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 아내만 못하였다.

열한 시쯤 해서 하는 아내의 첫번 세수는 좀 간단하다. 그러나 저녁 일곱 시쯤해서 하는 두번째 세수는 손이 많이 간다. 아내는 낮에 보다도 밤에 더 좋고 깨끗한 옷을 입는다. 그리고 낮에도 외출하고 밤에도 외출하였다.

아내에게 직업이 있었던가?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아내에게 직업이 없었다면 같이 직업이 없는 나처럼 외출할 필요가 생기지 않을 것인데-- 아내는 외출한다. 와출할 뿐만 아니라 내객이 많다. 아내에게 내객이 많은 날은 나는 온종일 내 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어야만 된다.

불장난도 못한다. 화장품 냄새도 못 맡는다. 그런 날은 나는 의식적으로 우울해 하였다. 그러면 아내는 나에게 돈을 준다. 오십전짜리 은화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에 써야 옳을지 몰라서 늘 머리맡에 던져 두고 두고 한 것이 어느 결에 모여서 꽤 많아졌다 어느날 이것을 본 아내는 금고처럼 생긴 벙어리를 사다 준다.

나는 한푼씩 한푼씩 그 속에 넣고 열쇠는 아내가 가져갔다. 그후에도 나는 더러 은화를 그 벙어리에 넣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게을렀다. 얼마 후 아내의 머리쪽에 보지 못하던 누깔잠이 하나 여드름처럼 돋았던 것은 바로 그 금고형 벙어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증거일까. 그러나 나 는 드디어 머리맡에 놓았던 그 벙어리에 손을 대지 않고 말았다. 내 게으름은 그런 것에 내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싫었다.

아내에게 내객이 있는 날은 이불 속으로 암만 깊이 들어가도 비오는 날만큼 잠이 잘 오지 않았 다. 나는 그런 때 나에게 왜 늘 돈이 있나 왜 돈이 많은가를 연구했다. 내객들은 장지 저쪽에 내가 있는 것을 모르나보다. 내 아내와 나도 좀 하기 어려운 농을 아주 서슴지 않고 쉽게 해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아내를 찾은 서너 사람의 내객들은 늘 비교적 점잖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자정이 좀 지나면 으레 돌아들 갔다.

그들 가운데에는 퍽 교양이 얕은 자도 있는 듯싶었는데, 그런 자는 보통 음식을 사다 먹고 논다.

그래서 보충을 하고 대체로 무사하였다. 나는 우선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기에 착수하였으나 좁은 시야와 부족한 지식으로는 이것을 알아내기 힘이 든다. 나는 끝끝내 내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말려나보다.

아내는 늘 진솔 버선만 신었다. 아내는 밥도 지었다. 아내가 밥을 짓는 것을 나는 한번도 구경한 일은 없으나 언제든지 끼니때면 내 방으로 내 조석밥을 날라다 주는 것이다. 우리집에는 나와 내 아내 외의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밥은 분명 아내가 손수 지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나를 자기 방으로 부른 일은 없다. 나는 늘 웃방에서나 혼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밥은 너무 맛이 없었다. 반찬이 너무 엉성하였다. 나는 닭이나 강아지처럼 말없이 주는 모이를 넓적넓적 받아먹기는 했으나 내심 야속하게 생각한 적도 더러 없지 않다.

나는 안색이 여지없이 창백해가면서 말라 들어갔다. 나날이 눈에 보이듯이 기운이 줄어들었다. 영 양 부족으로 하여 몸뚱이 곳곳의 뼈가 불쑥불쑥 내어 밀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차를 돌쳐 눕지 않고는 여기저기가 배겨서 나는 배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이불 속에서 아내가 늘 흔히 쓸 수 있는 저 돈의 출처를 탐색해 내는 일 변 장지 틈으로 새어나오는 아랫방의 음성은 무엇일까를 간단히 연구하였다.

나는 잠이 잘 안 왔다.

깨달았다. 아내가 쓰는 그 돈은 내게는 다만 실없는 사람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까닭 모를 내객들 이 놓고 가는 것이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왜 그들 내객은 돈을 놓고 가나? 왜 내 아내는 그 돈을 받아야 되나? 하는 예의 관념이 내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예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혹 무슨 댓가일까? 보수일까? 내 아 내가 그들의 눈에는 동정을 받아야만 할 한 가엾은 인물로 보였던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 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 사람처럼 이것 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 두는 까닭이다.

내객들이 돌아가고, 혹 외출에서 돌아오고 하면 아내는 간편한 것으로 옷을 바꾸어 입고 내 방으로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불을 들치고 내 귀에는 영 생동생동한 몇 마디 말로 나를 위로하려든 다. 나는 조소도 고소도 홍소도 아닌 옷음을 얼굴에 띠고 아내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본다. 아내 는 방그레 웃는다. 그러나 그 얼굴에 떠도는 일말의 애수를 나는 놓치지 않는다.

아내는 능히 내가 배고파하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러나 아랫방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나에게 주려 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나를 존경하는 마음일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배가 고프면서도 적이 마음이 든든한 것을 좋아했다. 아내가 무엇이라고 지껄이고 갔는지 귀에 남아 있을 리 가 없다. 다만 내 머리맡에 아내가 놓고 간 은화가 전등불에 흐릿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고 금고형 벙어리 속에 은화가 얼마만큼이나 모였을까? 나는 그러나 그것을 쳐들어 보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의욕도 기원도 없이 그 단추구멍처럼 생긴 틈바구니로 은화를 떨어뜨려 둘 뿐이었다.

왜 아내의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이 풀 수 없는 의문인 것같이, 왜 아내는 나에게 돈을 놓고 가나 하는 것도 역시 나에게는 똑같이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내 비록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 싫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고것이 내 손가락 닿는 순간에서부터 고 벙어리 주둥이에서 자취를 감추기까지의 하잘것 없는 짧은 촉각이 좋았달 뿐이 지 그 이상 아무 기쁨도 없다.

어느날 나는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넣어 버렸다. 그 때 벙어리 속에는 몇 푼이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고 은화들이 꽤 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 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

이불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는 나는 고 은화를 고 벙어리에 넣고 넣고 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나는 아내가 손수 벙어리를 사용하였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벙어리도 돈도 사실은 아내에게만 필요한 것이지 내게는 애초부터 의미가 전연 없는 것이었으니까 될 수만 있으면 그 벙어리를 아내는 아내 방으로 가져 갔으면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가져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내 방으로 가져다 둘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 즈음에는 아내의 내객이 워낙 많아서 내가 아내 방에 가 볼 기회가 도무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 는 수 없이 변소에 갖다 집어 넣어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서글픈 마음으로 아내의 꾸지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내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돈은 돈대로 머리맡에 놓고 가지 않나! 내 머리맡에는 어느덧 은화가 꽤 많이 모였다.

내객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일종의 쾌감--그 외의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또 이불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쾌감이라면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를 계속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불 속의 연구로는 알 길이 없었다. 쾌감, 쾌감, 하고 나는 뜻밖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 흥미를 느꼈다.

아내는 물론 나를 늘 감금하여 두다시피 하여 왔다. 내게 불평이 있을 리 없다. 그런 중에도 나는 그 쾌감이라는 것의 유무를 체험하고 싶었다.

나는 아내의 밤 외출 틈을 타서 밖으로 나왔다. 나는 거리에서 잊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나온 은화를 지폐로 바꾼다. 오 원이나 된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나는 목적지를 잃어버리기 위하여 얼마든지 거리를 쏘다녔다. 오래간만에 보는 거리는 거의 경이에 가까울 만큼 내 신경을 흥분시키지 않고는 마지 않았다. 나는 금시에 피곤하여 버렸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까닭을 잃어버린 채 이 거리 저 거리로 지향없이 헤매었다. 돈은 물론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돈을 쓸 아무 엄두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벌써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다.

나는 과연 피로를 이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가까스로 내 집을 찾았다. 나는 내 방을 가려면 아내 방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고, 아내에게 내객이 있나 없나를 걱정하면서 미닫이 앞에서 좀 거북살스럽게 기침을 한 번 했더니, 이것은 참 또 너무도 암상스럽게 미닫이가 열리면서 아내의 얼굴과 그 등 뒤에 낯설은 남자의 얼굴이 이쪽을 내다보는 것이다. 나는 별안간 내어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부셔서 좀 머뭇머뭇했다.

나는 아내의 눈초리를 못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왜? 나는 어쨌든 아내의 방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안 되니까…….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엇보다도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 속에서는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암만해도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걸을 때는 몰랐더니 숨이 차다. 등에 식은땀이 쭉 내배인다. 나는 외출한 것을 후회하였다. 이런 피로를 잊고 어서 잠이 들었으면 좋았다. 한잠 잘 자고 싶었다.

얼마동안이나 비스듬히 엎드려 있었더니 차츰차츰 뚝딱 거리는 가슴 동계가 가라앉는다. 그만해 도 우선 살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들쳐 반듯이 천장을 향하여 눕고 쭈욱 다리를 뻗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가슴의 동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랫방에서 아내와 그 남자의 내 귀에 도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기척이 장지 틈으로 전하여 왔던 것이다. 청각을 더 예민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아내와 남자는 앉았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고 일어서면서 옷과 모자 쓰는 기척이 나는 듯하더니 이어 미닫이가 열리고 구두 뒤축 소리가 나고 그리고 뜰에 내려서는 소리 가 쿵 하고 나면서 뒤를 따르는 아내의 고무신 소리가 두어 발짝 찍찍나고 사뿐사뿐 나나 하는 사 이에 두사람의 발소리가 대문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아내의 이런 태도를 본 일이 없다. 아내는 어떤 사람과도 결코 소곤거리는 법이 없다. 나는 웃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웠는 동안에도 혹 술이 취해서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내객들의 담화는 더러 놓치는 수가 있어도 아내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말소리는 일찌기 한마디도 놓쳐 본 일이 없다.

더러 내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있어도 나는 그것이 태연한 목소리로 내 귀에 들렸다는 이유로 충 분히 안심이 되었다.

그렇던 아내의 이런 태도는 필시 그 속에 여간하지 않은 사정이 있는 듯 시피 생각이 되고 내 마 음은 좀 서운했으나 그보다도 나는 좀 너무 피로해서 오늘만은 이불 속에서 아무것도 연구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잠을 기다렸다. 낮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문간에 나간 아내도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흐지부지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꿈이 얼쑹덜쑹 종을 잡을 수 없는 거리의 풍경을 여전히 헤매었다.

나는 몹시 흔들렸다. 내객을 보내고 들어온 아내가 잠든 나를 잡아 흔드는 것이다. 나는 눈을 번 쩍 뜨고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나는 좀 눈을 비비고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노기가 눈초리에 떠서 얇은 입술이 바르르 떨린다. 좀처럼 이 노기가 풀리기 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벼락이 내리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쌔 근 하는 숨소리가 나면서 부스스 아내의 치맛자락 소리가 나고 장지가 여닫히며 아내는 아내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몸을 돌쳐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개구리처럼 엎드리고 엎드려서 배가 고픈 가운데도 오 늘 밤의 외출을 또 한 번 후회하였다.

나는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사죄하였다. 그것은 네 오해라고…… 나는 사실 밤이 퍽으나 이슥한 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네 말마따나 자정 전인지는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너무 피곤하였다. 오래간만에 나는 너무 많이 걸은 것이 잘못이다.

내 잘못이라면 잘못은 그것 밖에 없다. 외출은 왜 하였더냐고? 나는 그 머리맡에 저절로 모인 오 원 돈을 아무에게라도 좋으니 주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뿐 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 잘못이라면 나는 그렇게 알겠다. 나는 후회하고 있지 않나? 내가 그 오 원 돈을 써 버릴 수가 있었던들 나는 자정 안에 집에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는 너무 복잡하였고 사람은 너무도 들끓었다. 나는 어느 사람을 붙들고 그 오 원 돈을 내어 주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여지없이 피곤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좀 쉬고 싶었다. 눕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 다. 내 짐작 같아서는 밤이 어지간히 늦은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불행히도 자정 전이었다는 것은 참 안된 일이다. 미안한 일이다. 나는 얼마든지 사죄하여도 좋다. 그러나 종시 아내의 오해를 풀 지 못하였다 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사죄하는 보람은 그럼 어디 있나? 한심하였다.

한 시간 동안을 나는 이렇게 초조하게 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불을 홱 젖혀 버리고 일어나서 장지를 열고 아내 방으로 비칠비칠 달려갔던 것이다. 내게는 거의 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내 이불 위에 엎드러지면서 바지 포켓 속에서 그 돈 오 원을 꺼내 아내 손에 쥐어 준 것을 간신히 기억할 뿐이다.

이튿날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내 아내 방 아내 이불 속에 있었다. 이것이 이 33번지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내가 아내 방에서 잔 맨 처음이었다.

해가 들창에 훨씬 높았는데 아내는 이미 외출하고 벌써 내 곁에 있지는 않다. 아니! 아내는 엊저녁 내가 의식을 잃은 동안에 외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조사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전신이 찌뿌드드한 것이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조차 없었다. 책보보다 좀 작은 면적의 볕 이 눈이 부시다. 그 속에서 수없이 먼지가 흡사 미생물처럼 난무한다. 코가 콱 막히는 것 같다. 나 는 다시 눈을 감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낮잠을 자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코를 스치는 아내의 체취는 꽤 도발적이었다. 나는 몸을 여러번 여러번 비비꼬면서 아내의 화장대에 늘어선 고 가지각색 화장품 병들의 마개를 뽑았을 때 풍기는 냄새를 더듬느라고 좀처럼 잠은 들지 않는 것을 나는 어찌하는 수도 없었다.

견디다못하여 나는 그만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서 내 방으로 갔다. 내 방에는 다 식어빠진 내 끼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다. 내 방에는 다 식어 빠진 내 끼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내 모이를 여기다 두고 나간 것이다. 나는 우선 배가 고팠다. 한 숟갈을 입에 떠 넣었을 때 그 촉감은 참 너무도 냉회와 같이 써늘하였다. 나는 숟갈을 놓고 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비었던 내 이부자리는 여전히 반갑게 나를 맞아 준다. 나는 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 번에는 참 늘어지게 한잠 잤다. 잘--

내가 잠을 깬 것은 전등이 켜진 뒤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보다.

아니! 돌아왔다 또 나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상고하여 무엇하나? 정신이 한결 난다. 나는 밤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돈 오 원을 아내 손에 쥐어 주고 넘어졌을 때에 느낄 수 있었던 쾌감을 나는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객들이 내 아내에게 돈 놓고 가는 심리며 내 아내가 내게 돈 놓고 가는 심리의 비밀을 나는 알아낸 것 같아서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나는 속으로 빙그레 웃어 보았다.

이런 것을 모르고 오늘까지 지내온 내 자신이 어떻게 우스꽝스럽게 보이는지 몰랐다.

따라서 나는 또 오늘 밤에도 외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돈이 없다. 나는 또 엊저녁에 그 돈 오 원 을 한꺼번에 아내에게 주어 버린 것을 후회하였다. 또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쳐넣어 버린 것도 후회하였다. 나는 실없이 실망하면서 습관처럼 그 돈 오 원이 들어 있던 내 바지 포켓에 손을 넣어 한번 휘둘러 보았다. 뜻밖에도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원 밖에 없다. 그러나 많아야 맛 은 아니다. 얼마간이고 있으면 된다. 나는 그만한 것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운을 얻었다. 나는 그 단벌 다 떨어진 골덴 양복을 걸치고 배고픈 것도 주제 사나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활갯짓을 하면서 또 거리로 나섰다. 나서면서 나는 제발 시간이 화살 단듯해서 자정 이 어서 홱 지나 버렸으면 하고 조바심을 태웠다. 아내에게 돈을 주고 아내 방에서 자 보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좋았지만 만일 잘못해서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갔다가 아내의 눈총을 맞는 것은 그것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저물도록 길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또 지향없이 거리를 방황하였다. 그러나 이날은 좀처럼 피곤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이 좀 너무 더디게 가는 것만 같아서 안타까웠다.

경성역(京城驛) 시계가 확실히 자정을 지난 것을 본 뒤에 나는 집을 향하였다. 그날은 그 일각대 문에서 아내와 아내의 남자가 이야기하고 섰는 것을 만났다. 나는 모른 체하고 두 사람 곁을 지나 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아내도 들어왔다. 와서는 이 밤중에 평생 안 하던 쓰레질을 하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아내가 눕는 기척을 엿보자마자 나는 또 장지를 열고 아내 방으로 가서 그 돈 이 원을 아내 손에 덥석 쥐어 주고 그리고--하여간 그 이 원을 오늘 밤에도 쓰지 않고 도로 가 져 온 것이 참 이상하다는 듯이 아내는 내 얼굴을 몇번이고 엿보고--아내는 드디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자기 방에 재워 주었다. 나는 이 기쁨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편히 잘 잤다.

이튿날도 내가 잠이 깨었을 때는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내 방으로 가서 피곤한 몸이 낮잠을 잤다. 내가 아내에게 흔들려 깨었을 때는 역시 불이 들어온 뒤였다. 아내는 자기 방으로 나를 오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다. 아내는 끊임없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내 팔을 이끄는 것이 다. 나는 이런 아내의 태도 이면에 엔간치 않은 음모가 숨어 있지나 않은가 하고 적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하자는 대로 아내의 방으로 끌려 갔다. 아내 방에는 저녁 밥상이 조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나는 이틀을 굶었다. 나는 지금 배고픈 것까지도 긴가민가 잊어버리고 어름어름하던 차다.

나는 생각하였다. 이 최후의 만찬을 먹고 나자마자 벼락이 내려도 나는 차라리 후회하지 않을 것 을. 사실 나는 인간 세상이 너무나 심심해서 못 견디겠던 차다. 모든 것이 성가시고 귀찮았으나 그러나 불의의 재난이라는 것은 즐겁다.

나는 마음을 턱 놓고 조용히 아내와 마주 이 해괴한 저녁밥을 먹었다.

우리 부부는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밥을 먹은 뒤에도 나는 말이 없이 부스스 일어나서 내 방 으로 건너가 버렸다. 아내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 고 그리고 벼락이 떨어질 테거든 어서 떨어져라 하고 기다렸다.

오 분! 십 분!

그러나 벼락은 내리지 않았다. 긴장이 차츰 풀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어느덧 오늘 밤에도 외출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돈은 확실히 없다. 오늘은 외출하여도 나중에 올 무슨 기쁨이 있나? 내 앞이 그저 아뜩하였다. 나는 화가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굴렀다. 금 시 먹은 밥이 목으로 자꾸 치밀어 올라온다. 메스꺼웠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것이 그저 한없이 야속하고 슬펐다.

나는 이렇게 밖에 돈을 구하는 아무런 방법도 알지는 못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좀 울었나 보다.

왜 없느냐면서……

그랬더니 아내가 또 내 방에를 왔다. 나는 깜짝 놀라 아마 이제서야 벼락이 내리려 나보다 하고 숨을 죽이고 두꺼비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떨어진 입을 새어나오는 아내의 말소리는 참 부드러웠다. 정다웠다. 아내는 내가 왜 우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란다.

나는 실없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사람의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는고 해서 나는 한편으로 슬그머니 겁도 안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 내게 돈을 줄 생각이 있나보다, 만일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은 일일까. 나는 이불 속에 뚤뚤 말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아내의 다음 거동 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옜소'하고 내 머리맡에 내려뜨리는 것은 그 가뿐한 음향으로 보아 지폐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 귀에다 대고 오늘을랑 어제보다도 늦게 돌아와도 좋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그 돈이 무엇보다도 고맙고 반가웠다.

어쨌든 나섰다. 나는 좀 야맹증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밝은 거리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는 경성역 일 이등 대합실 한곁 티이루움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거기는 우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안 온다. 설사 왔다가도 곧 돌아가니까 좋다. 나는 날마다 여기 와서 시간 을 보내리라 속으로 생각하여 두었다. 제일 여기 시계가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하리라는 것이 좋았다. 섣불리 서투른 시계를 보고 그것을 믿고 시간 전에 집에 돌아갔다가 큰 코를 다쳐서는 안된다.

나는 한 복스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주 앉아서 잘 끓은 커피를 마셨다. 총총한 가운데 여객들 은 그래도 한 잔 커피가 즐거운가보다. 얼른얼른 마시고 무얼 좀 생각하는 것같이 담벼락도 좀 쳐다보고 하다가 곧 나가 버린다. 서글프다. 그러나 내게는 이 서글픈 분위기가 거리의 티이루움들의 그 거추장스러운 분위기보다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이따금 들리는 날카로운 혹은 우렁찬 기적 소리가 모오짜르트보다도 더 가깝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번 읽었다. 그 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거기서 얼마나 내가 오래 앉았는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 객이 슬며시 뜸해지면서 이 구석 저 구석 걷어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아마 닫는 시간이 된 모양이다. 열 한 시가 좀 지났구나, 여기도 결코 내 안주의 곳은 아니구나, 어디 가서 자정을 넘길까? 두루 걱정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온다.

빗발이 제법 굵은 것이 우비도 우산도 없는 나를 고생을 시킬 작정이다. 그렇다고 이런 괴이한 풍모를 차리고 이 홀에서 어물어물하는 수도 없고 에이 비를 맞으면 맞았지 하고 그냥 나서 버렸다.

대단히 선선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골덴 옷이 젖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속속들이 스며들면서 추근거린다. 비를 맞아 가면서라도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거리를 돌아다녀서 시간을 보내려 하였으나, 인제는 선선해서 이 이상은 더 견딜 수가 없다. 오한이 자꾸 일어나면서 이가 딱딱 맞부딪는다. 나는 걸음을 늦추면서 생각하였다. 오늘 같은 궂은 날도 아내에게 내객이 있을라구?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집으로 가야겠다. 아내에게 불행히 내객이 있거든 내 사정을 하리라. 사정을 하면 이렇게 비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아 주겠지.

부리나케 와 보니까 그러나 아내에게는 내객이 있었다. 나는 너무 춥고 척척해서 얼떨김에 노크 하는 것을 잊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

나는 감발자국 같은 발자국을 내면서 덤벙덤벙 아내 방을 디디고 내 방으로 가서 쭉 빠진 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이불을 뒤썼다. 덜덜덜덜 떨린다. 오한이 점점 더 심해 들어온다. 여전 땅이 꺼져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내가 눈을 떴을 때 아내는 내 머리맡에 앉아서 제법 근심스러운 얼굴이다.

나는 감기가 들었다. 여전히 으스스 춥고 또 골치가 아프고 입에 군침이 도는 것이 씁쓸하면서 다리 팔이 척 늘어져서 노곤하다. 아내는 내 머리를 쓱 짚어 보더니 약을 먹어야지 한다. 아내 손 이 이마에 선뜻한 것을 보면 신열이 어지간한 모양인데 약을 먹는다면 해열제를 먹어야지 하고 속 생각을 하자니까 아내는 따뜻한 물에 하얀 정제약 네 개를 준다. 이것을 먹고 한잠 푹 자고 나면 괜찮다는 것이다. 나는 널름 받아먹었다. 쌉싸름한 것이 짐작 같아서는 아마 아스피린인가 싶다.

나는 다시 이불을 쓰고 단번에 그냥 죽은 것처럼 잠이 들어 버렸다.

나는 콧물을 훌쩍훌쩍 하면서 여러 날을 앓았다. 앓는 동안에 끊이지 않고 그 정제약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에 감기도 나았다. 그러나 입맛은 여전히 소태처럼 썼다.

나는 차츰 또 외출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아내는 나더러 외출하지 말라고 이르는 것이 다. 이 약을 날마다 먹고 그리고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것이다. 공연히 외출을 하다가 이렇게 감기 가 들어서 저를 고생시키는게 아니란다. 그도 그렇다. 그럼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 약을 연복하여 몸을 좀 보해 보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날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이나 낮이나 잤다. 유난스럽게 밤이나 낮이나 졸려서 견딜 수 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잠이 자꾸만 오는 것은 내가 몸이 훨씬 튼튼해진 증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아마 한 달이나 이렇게 지냈나보다. 내 머리와 수염이 좀 너무 자라서 후틋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내 거울을 좀 보리라고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서 나는 아내 방으로 가서 아내의 화장대 앞 에 앉아 보았다. 상당하다. 수염과 머리가 참 상당하였다.

오늘은 이발을 좀 하리라고 생각하고 겸사겸사 고 화장품 병들 마개를 뽑고 이것저것 맡아 보았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향기 가운데서는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체취가 전해 나왔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속으로만 한 번 불러 보았다. "연심이--"하고…… 오래간만에 돋보기 장난도 하였다. 거울 장난도 하였다. 창에 든 볕이 여간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하면 오월이 아니냐.

나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한 번 켜 보고 아내 베개를 내려 베고 벌떡 자빠져서는 이렇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세월을 하느님께 흠씬 자랑하여 주고 싶었다. 나는 참 세상의 아무것과도 교섭을 가지지 않는다. 하느님도 아마 나를 칭찬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로 세상에도 이상스러운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최면약 아달린갑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내의 화장대 밑에서 발견하고 그것이 흡사 아스피린처럼 생겼다고 느꼈다. 나는 그 것을 열어 보았다. 꼭 네 개가 비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네 개의 아스피린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잤다. 어제도 그제도 그끄제도……나는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감기가 다 나았는데도…… 아내는 내게 아스피린을 주었다. 내가 잠이 든 동안에 이웃에 불이 난 일이 있다. 그때에도 나는 자느라고 몰랐다. 이렇게 나는 잤다. 나는 아스피린으로 알고 그럼 한 달 동안을 두고 아달린을 먹 어 온 것이다. 이것은 좀 너무 심하다.

별안간 아뜩하더니 하마터면 나는 까무러칠 뻔하였다. 나는 그 아달린을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산을 찾아 올라갔다.

인간 세상의 아무것도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걸으면서 나는 아무쪼록 아내에 관계되는 일은 일 체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길에서 까무러치기 쉬우니까다. 나는 어디라도 양지가 바른 자리를 하나 골라 자리를 잡아 가지고 서서히 아내에 관하여서 연구할 작정이었다. 나는 길가의 돌 장판, 구경도 못한 진개나리꽃, 종달새, 돌멩이도 새끼를 까는 이야기, 이런 것만 생각하였다. 다행히 길 가에서 나는 졸도하지 않았다.

거기는 벤치가 있었다. 나는 거기 정좌하고 그리고 그 아스피린과 아달린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머리가 도무지 혼란하여 생각이 체계를 이루지 않는다. 단 오 분이 못가서 나는 그만 귀찮은 생각이 번쩍 들면서 심술이 났다. 나는 주머니에서 가지고 온 아달린을 꺼내 남은 여섯 개를 한꺼번에 질겅질겅 씹어먹어 버렸다. 맛이 익살맞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 벤치 위에 가로 기다랗게 누웠다. 무슨 생각으로 내가 그 따위 짓을 했나,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나는 게서 그 냥 깊이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바위 틈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졸졸 하고 언제까지나 귀에 어렴풋이 들려 왔다.

내가 잠을 깨었을 때는 날이 환히 밝은 뒤다. 나는 거기서 일주야를 잔 것이다. 풍경이 그냥 노오랗게 보인다. 그 속에서도 나는 번개처럼 아스피린과 아달린이 생각났다.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마르크,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아내는 한 달 동안 아달린을 아스피린이라고 속이고 내게 먹였다.

그것은 아내 방에서 이 아달린 갑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다.

무슨 목적으로 아내는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웠어야 됐나? 나를 밤이나 낮이나 재워 놓고, 그리고 아내는 내가 자는 동안에 무슨 짓을 했나? 나를 조금씩 조 금씩 죽이려던 것일까?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내가 한 달을 두고 먹어 온 것이 아스피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무슨 근심되는 일이 있어서 밤이면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정작 아내가 아달린을 사용한 것이나 아닌지? 그렇다면 나는 참 미안하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큰 의혹을 가졌다는 것이 참 안됐다.

나는 그래서 부리나케 거기서 내려왔다. 아랫도리가 홰홰 내어 저이면서 어찔어찔한 것을 나는 겨 우 집을 향하여 걸었다. 여덟 시 가까이였다.

나는 내 잘못된 생각을 죄다 일러바치고 아내에게 사죄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무 급해서 그만 또 말을 잊어버렸다. 그랬더니 이건 참 큰일났다. 나는 내 눈으로 절대로 보아서 안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냉큼 미닫이를 닫고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둥을 짚고 섰자니까, 일 초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매무새를 풀어헤친 아내가 불쑥 내밀면서 내 멱살을 잡는 것이다.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게가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함부로 물어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 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적 엎드려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까,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여간 미운 것이 아니다. 밉다.

아내는 너 밤새워 가면서 도둑질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냐고 발악이다. 이것은 참 너 무 억울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너는 그야말로 나를 살해하려 던 것이 아니냐고 소리를 한 번 꽥 질러 보고도 싶었으나, 그런 긴가민가한 소리를 섣불리 입밖에 내었다가는 무슨 화를 볼는지 알 수 없다. 차라리 억울하지만 잠자코 있는 것이 우선 상책인 듯시피 생각이 들길래, 나는 이것은 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툭툭 떨고 일어나서 내 바지 포켓 속에 남은 돈 몇원 몇십전을 가만히 꺼내서는 몰래 미닫이를 열고 살며시 문지방 밑에다 놓고 나서는, 나는 그냥 줄달음박질을 쳐서 나와 버렸다.

여러번 자동차에 치일 뻔하면서 나는 그래도 경성역으로 찾아갔다. 빈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좋다. 그러나 경성역 홀에 한 걸음 들여 놓았을 때 나는 내 주머니에는 돈이 한푼도 없는 것을 그것을 깜박 잊었던 것을 깨달았다. 또 아뜩하였다. 나는 어디선가 그저 맥없이 머뭇머뭇하면 서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그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 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도 생겼다. 작은놈은 작은놈대로 큰놈은 큰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려 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이 따뜻하다.

나는 또 오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오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그때 내 눈앞에는 아내의 모가지가 벼락처럼 내려 떨어졌다. 아스피린과 아달린.

우리들은 서로 오해하고 있느니라. 설마 아내가 아스피린 대신에 아달린의 정량을 나에게 먹여 왔을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아내가 대체 그럴 까닭이 없을 것이니, 그러면 나는 날밤을 새면서 도둑질을 계집질을 하였나? 정말이지 아니다.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 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하 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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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기슭에 붉게 물든 담쟁이 잎새와 푸른 하늘, 가을의 가장 아름다운 이 한 폭도 비늘 구름같이 자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장 먼저 가을을 자랑하던 창 밖의 한 포기의 벚나무는 또한 가장 먼저 가을을 내버리고 앙클한 회초리만을 남겼다. 아름다운 것이 다 지나가 버린 늦가을은 추잡하고 한산하기 짝없다.

담쟁이로 폭 씌어졌던 집도 초목으로 가득 덮였던 뜰도 모르는 결에 참혹하게도 옷을 벗기워 버리고 앙상한 해골만을 드러내게 되었다. 아름다운 꿈의 채색을 여지없이 잃어 버렸다.

벽에는 시들어 버린 넝쿨이 거미줄같이 얼기설기 얽혔고 마른 머룽송이 같은 열매가 함빡 맺혔을 뿐이다. 흙 한 줌 찾아볼 수 없이 푸르던 뜰에서는 지금에는 푸른 빛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거의 날마다 뜰의 낙엽을 긁어야 된다. 아무리 공들여 긁어모아도 다음 날에는 새 낙엽이 다시 질볏이 늘어져 거듭 각지를 들지 않으면 안된다. 낙엽이란 세상의 인총1같이도 흔한 것이다. 밑빠진 독에 물을 긷듯 며칠이든지 헛노릇으로 여기면서도 공들여 긁어모은다. 벚나무 아래 수북이 쌓아 놓고 불을 붙이면 속으로부터 푸슥푸슥 타면서 푸른 연기가 모로 길게 솟아오른다. 연기는 바람 없는 뜰에 아늑히 차서 울같이 괸다. 낙엽 연기에는 진한 커피의 향기가 있다. 잘익은 깨금의 맛이 있다 나는 그 귀한 연기를 마음껏 마신다. 욱신한 향기가 몸의 구석구석에 배어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갔을 때와도 같은 풍준한 만족을 느낀다. 낙엽의 연기는 시절의 진미요, 가을의 마지막 선물이다.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타 버린 낙엽을 재를 묻어 버림으러써 가을은 완전히 끝난 듯싶다. 뜰에는 벌써 회초리만의 나무들이 섰고 엉성긋한 포도시렁이 남았고 담쟁이 넝쿨이 서리었고 국화 포기의 글거리가 솟았고 잡초의 시들어 버린 양이 있을 뿐이니 말이다. 잎새에 가리었던 둥근 유리창이 달덩이같이 드러나고 현관 앞에 조약돌이 지저분하게 흩어졌으니 말이다.

낙엽을 장사 지내고 가을을 보내니 별안간 생활이 없어진 것도 같고 새 생활이 와야 할것도 같은 느낌이 생겼다. 적어도 꿈이 가고 생활의 때가 온 듯하다. 나는 꿈을 대신할 생활의 풍만을 위하여 생각하고 설계하여야한다. 가령 나는 아내를 대신하여 거의 사흘 돌이로 목욕물을 데우게 되었다. 손수 수도에 호스를 대서 물을 가득 길어 붓고는 아궁에 불을 넣는다.

음산한 바람으로 아궁이 연기를 몹시 낸다. 나는 그 연기를 괴로이 여기지 않는다. 눈물을 흘릴 지경이요, 숨이 막히면서도 연기의 웅덩이 속에서 정성껏 나무를 지피고 불을 쑤시고 목욕간의 창을 열어 연기를 뽑고 여러 차례나 물을 저어 온도를 맞추고 하면서 그 쓸데없는 행동, 적어도 책상에 맞붙어 책을 읽고 글줄의 쓰는 것보다는 비생산적이요, 소비적이라고 늘 생각하여 오던 그 행동을 도리어 귀히 여기게 되고 나날의 생활을 꾸며 가는 그런 행동이야말로 가장 생산적이요, 창조적인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정리되지 못한 가닥가닥의 생각을 머릿속에 잡아 넣고 살을 깍을 정도로 애쓰고 궁싯거리면서 생활 일에 단 한 시간 허비하기조차 아깝게 여기고 싫어하던 것이 생활에 관한 그런 사소한 잡일을 도리어 귀중히 알게된 것은 도시 시절의 탓일까.

어두운 아궁 속에서 새빨갛게 타는 불을 보고 목욕통에서 무럭무럭 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나는 이것이 생활이다, 이것이 책보다도 원고보다도 더 귀한 일이다, 이것을 귀히 여김이 반드시 필부의 옹졸한 짓은 아닐것이며 생활을 업시여기는 곳에 필부 이상 뛰어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고 두서 없는 긴 생각에 잠겨도 본다.

이윽고 더운 물 속에 몸을 잠그고 창으로 날아들어와 물 위에 뜬 마지막 낙엽을 두 손으로 건져 내고 안개같이 깊은 무더운 김 속에 몸과 마음을 푸근히 녹일 때 이 생각은 더욱 절실히 육체 속에 사무쳐 든다.

거리의 백화점에 들어가 그 자리에서 거피를 갈아서 손가방 속에 넣고 그 욱신한 향기를 즐기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물론 이러한 생각으로부터이다. 진한 차를 탁자 위에 놓고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나는 그 넓은 냉방에다 난로를 피우고 침대 속에는 더운 물통을 넣고 한겨울 동안을 지내게 할까 어쩔까 그리고 겨울에는 뒷산을 이용하여 스키를 시작하여 볼까 어쩔까 하고 겨울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기를 아내와 의논한다.

시절이 여위어갈수록 꿈이 멀어갈수록 생활의 의욕이 두터워짐일까. 생활, 생활, 초목 없는, 푸른 빛 없어진 멀숭하게 된 집 속에서 나는 하루의 전부를 생활의 생각으로 지내게 되었다. 시절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일가. 심술궃은 결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푸른 시절은 일종의 신비였다. 푸른 초목에 싸인 푸른 집속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제목은 반드시 생활이 아니었다. 그날 그날은 토막토막의 흐트러진 생활의 조작이 아니요 물같이 흐른 꿈경이었다.

푸른 널을 비스듬이 달고, 가는 모기둥으로 괸 갸우뚱한 현관 차양에도 담쟁이가 함빡 피어올라 이른 아침이면 넓은 잎에 맺힌 흔한 이슬방울이 서리서리 모여 아랫잎 위로 뚝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란 산골짜기 물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아서 금시에 시원한 산의 영기를 느끼게 되었다. 머루 다래의 넝쿨 대신에 드레드레 열매 맺힌 포도넝쿨이 있고 바람에 포르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대신에는 슷한 잎새를 가진 대추나무가 있다. 뜰은 그림자 깊은 지름길만을 남겨 놓고는 흙 한 줌 보이지 않게 일면 화초에 덮이었다. 장미, 글라이올러스2, 해바라기, 촉규화3, 맨드라미, 반금초, 금잔화, 제비초, 만수국, 프록스, 다알리아, 봉선화, 양귀비, 채송화의 꽃발이 소나무, 벚나무, 버드나무, 황양목, 앵도나무, 대추나무, 능금나무, 배나무의 모든 나무와 어울려 뜰은 채색과 광채와 그림자의 화려한 동산이었다.

유리창에까지 나무 그림자가 깊고 방안에까지 지천으로 푸른 빛이 흘러들었다. 화단에는 나비와 벌이 날아들고 풀숲에는 가을 벌레들이 일찍부터 울기 시작하였다. 나뭇 가지에는 새들이 몰려오고 집에는 진귀한 손님이 왔다. 아름다운 것은 진실로 비늘구름과 같이도 쉽게 지나가 버렸다. 나뭇잎이 가고 푸른 빛이 없어지고 그늘이 꺼져 버렸다. 지금에는 벌써 벌레 울지 않고 나비 날지 않고 헐벗은 나뭇가지에는 새들도 드물게 앉게되었다. 지난 시절의 기억이 머릿속에 아리숭하게 멀어졌다. 꿈이 지나고 생활의 때가왔다. 손수 목욕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의 향기라는 것이 있다. 파도의 물결이 길게 주름잡혀 가듯이, 꺼진 음악의 멜로디가 오래도록 귀에 울려 오듯이, 푸른 집과 푸른 뜰의 향기가 아련하게 남아서 흘러온다.

훤출하고 쓸쓸한 뜰에서 한 떨기의 푸른것을 발견한 것을 나는 더없이 신기하고 아름답게 여겼다. 꿈의 찌꺼기이므로 꿈보다 한결 더 귀하게 여겨짐인지도 모른다. 화단 한구석에 남은 푸른 클로우버의 한 줌을 말함이 아니요, 현관 양편 기둥에 의지하여 창기슭으로 피어올라간 두 포기의 줄기 장미를 나는 의미한다. 단 줄의 장미이던 것이 어느결에 자랐는지 낙지 다리같이 가닥가닥 솟아 올라 제법 풍성한 포기를 이루었다. 민출한 푸른 줄기에 마디마다 조그만 생생한 잎새를 달고 추위와 서리에도 상하는 법 없이 장하게 뻗어올랐다. 신선한 야채에서 오는 식욕을 느끼어 잘강잘강 먹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창기숡으로 올라와 창에 어린 맑은 잎새와 줄기, 푸르면서도 붉은 기운을 약간 띤 줄기와 가시, 붉은 가시의 생각이 문득 나에게 한 폭의 환상을 일으킨다. 깊은 여름 밤, 열어젖힌 창으로 나의 방에 들어오다 장미 줄기에 걸리고 가시에 찔려 하아얀 팔과 다리에 붉은 피를 흘리는 낮 모르는 임의의 소녀---가시와 소녀와 피---이것은 한 폭의 꿈일는지 모른다. 글로 썼거나 머릿속에 생각하여 본 한 폭의 아픈 환영일는지 모른다---가시와 소녀와 피!

그러나 꿈 아닌 환영 아닌 피의 기억이 있다. 장미의 붉은 줄기와 가시에서 나는 문득 지난 기억을 선명하게 풀어낼 수 있다. 나머지 꿈의 아픈 물결이다. 무르녹은 여름의 하룻날 아침 일찌기 가족들과 함께 집을 나와 뒷산으로 소풍을 떠났다. 여름은 짙고 송림 속은 그윽하였다. 드뭇한 소풍객들 속에 섞여 그림자 깊은 길을 걸으면서 동물원에를 들어갈까 강에 나가 배를 타고 하루를 지울까 생각하다 결국 동물원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짐승들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고 잠시 동안이라도 근심을 잊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비위 좋은 생각은 여지없이 짓밟히고야 말았다.

동물원이라고는 하여도 이름만의 것이지 운동장과 꽃밭 한 구석에 덧붙이기로 우리 몇 간이 있을 뿐이다. 물새들이 못이 되고 원숭이와 독수리와 곰의 우리가 있을 뿐이다. 비극은 곰의 우리에서 왔다.

드문 사람 속에는 휘적휘적 우리와 우리 사이를 돌아치는 요정의 머슴 비슷한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다. 큰 눈이 둥글둥글 굴고 입이 반쯤 열린 맺힌 데 없는 허술한 사나이는 번번이 일행의 앞은 서서 우리 안의 짐승을 희롱하곤 하였다. 제 흥도 제 흥이려니와 그 어디인지 그런 철없는 거동을 우리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듯한 허물없고 어리석고 주책없는 생각이 숨어 있음이 눈치에 보였다. 원숭이를 희롱할 때에도 새들을 들여다볼 때에도 너무도 지나쳐 납신거리는 것을 우리는 민망히 여기는 끝에 나중에는 불쾌히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불쾌한 감정은 곰의 우리 앞에 이르렀을 때에 극도에 달하였다. 철말 사이로 손을 널름널름 들여 보내면 검은 곰은 육중한 몸을 끌고 와서 앞발을 덥석 들었다. 희롱이 잦을 수록 곰은 흥분하여 나중에는 일종의 분에 타오르는 듯한 험상스런 기세를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안을 대중없이 왔다갔다하면서 기회를 노리는 눈치였다. 몇 번째인가 사나이의 손이 다시 철망 사이에 들어같을 때 짐승은 기어이 민첩하게 왈칵 달려들어 앞발로 손을 잡자마자 입을 대었다.

사나이는 문득 꿈틀하며 소리를 치고 손을 빼려 애썼으나 손은 좀체 빠지지 않았다. 겨우 잡아 나꾸었을 때에는 무서웠다. 손가락 끝이 보기에도 무섭게 바른 형상을 잃어버렸었다. 손톱이 빠지고 끝이 새빨갛게 으끄러졌다. 사나이는 금시에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넋잃은 사람같이 한참 동안이나 멍숭하게 섰다가 비로소 피흐르는 손을 쥐고 어쩔 줄 모르고 쩔쩔 헤매었다.

민망한 생각도 불쾌한 느낌도 잊어버리고 우리는 순간 무서운 구렁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신경을 퉁기는 지릿한 느낌이 전신에 끔찍한 꼴을 더 보기도 싫어서 주저하고 있는 동안에 사나이는 사람 숲에 쓸려 문을 나가 나무그늘 아래 쩔쩔매고 섰는 것이었다.

이윽고 나가 보았을 때에는 근처 집에서 얻어온 석유에 손가락을 잠갔다가 반석 위에 내놓고 피흐르는 손가락을 돌멩이로 찧는 것이다. 말할 수 없이 미련한 그 거동이 도리어 화가 버럭 날 지경으로 측은하였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의 그 어리석고 철없는 거동이 우리들의 눈을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 얼마간의 허물이 우리 편에 있듯이 짐작되어 마음이 더한층 아파졌다. 될 수 있는 대로의 것을 그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느끼고 나는 속히 집으로 데려가서 응급의 소독을 해 줄까 느끼다가 그보다도 떳떳한 방법을 생각하고 급스러운 어조로 소리쳤다.

얼른 병원으로 뛰어가시오.

소리만 치고 쩔쩔매기만 하는 나보다는 휠씬 침착한 구원자가 있음을 알았다. 아내였다. 그는 지니고 있던 새 손수건을 내셔 붕대삼아 사나이의 피 흐르는 손을 감기 시작하였다. 사나이는 천치 같은 표정에 손을 넌지시 맡기고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아내의 날렵한 자태에 접하여 아름다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나친 감상이었을까.

병원을 뙤어 주기는 하였으나 사나이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주머니 속을 들치다가 나는 또한 그날 지갑을 잊은 것을 알았다. 집에까지 가서 비용을 가지고 그를 병원에까지 인도하려고 생각할 때에 이번에도 또 아내가 진실한 구원자가 되고 말았다. 지갑 속에서 손쉽게 은화 한 닢은 잡어 내어 사나이의 손에 쥐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다만 물끄러미 그의 자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 사람의 모르는 사나이를 구원함에 공연함 마음의 주저뿐이었고 결국은 두번 다 앞을 가로채이고 길을 빼앗긴 것을 생각하고 겸연쩍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제 나에게는 마지막 한 가지의 봉사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천치 같은 사나이를 근처 병원으로 인도함이었다. 나는 병원을 가리켜 주는 길로 아울러 집에 들러 지갑을 가지고 반날의 뱃놀이를 떠나기를 계획하며 아이들의 송림 속에 남겨 둔 채 사나이를 이끌고 길을 걸어내려 갔다.

아름다운 장면이 머릿속에 쉽사리 꺼지지않았다. 휜 손수건과 붉은 피가 아름다운 한 폭을 이루었다. 피와 수건의 붉은 것과 흰 것의 조화가 맑고 진하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물결치게 되었다.

수풀 속을 거닐 때마다 기억이 새로와지고 반석 위에 피 흔적을 살필 때마다 지난 때의 광경이 불같이 마음속에 살아났다. 근처 집에서 사나이의 그 뒷소식을 물어 무사하다는 것을 듣고 일종의 알 수 없는 안심조차 느꼈다. 시절이 갈려 가을이 짙고 수풀 속에 낙엽이 산란하게 날릴 때 오히려 기억은 더 새로왔다.

가을이 다 지난 흙빛만의 뜰에서 잠간 잊었던 피의 기억을 장미의 붉은 가시로 말미암아 다시 추억해 낸 것이다. 마음을 빛나게 하는 생생한 추억.... 늦게까지 남아 있는 장미 포기와 함께 늦가을의 귀한 마지막 선물이다.

푸른 집 속에 남은 철 늦은 꿈의 물경이다.

생활의 시절이 단란의 때가 왔다.

어린것을 데리고 목욕물 속에 잠기는 것도 한 기쁨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오색 전기를 장식하고 많은 선물을 달아맬 것도 한 즐거운 기대다. 책상 위에는 그림책을 펴놓고 허물 없는 꿈에도 잠길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재료로 될 수 있는 대로의 풍성한 꿈이 이 시절에 맡겨진 과제이다. 생활의 재주이다. 낙엽의 암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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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일을 때때 당하는 일이 있다. 더구나 오늘과 같이 중독이 될이만큼 과학이 발달되어 그것이 인류의 모든 관념을 이룬 이때에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하면 혹 웃음을 받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총명한 체하면서도 어리석음이 있는 사람이 아직 의심을 품고 있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쓴다 하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서로 반대되는 끝과 끝이 어떠한 때는 조화가 되고 어떠한 경우에는 모순이 되는 이 현실 세상에서 아직 우리가 의심을 품고 있는 문제를 여러 독자에게 제공하여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해 내는 데 도움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사실을 부인하여 버리게 되고, 또는 그렇지 않음을 결정해 낼 수 있다 하면 쓰는 사람이나 읽는 이의 해혹이 될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것은 해석하는 이의 마음대로 할 것이요 쓰는 이 의 관계할 바가 아니니, 쓰는 이는 문제를 제공하는 것이 그것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큰 천직인 까닭이다.

더구나 이야기는 실지로 당한 이가 있었고 또는 쓰는 나도 믿을 수도 없고 아니 믿을 수 토 없는 까닭이다.

2

내가 열 아홉 살이 되던 해다. 세상에는 숫자를 무서워하는 습관이 있어 우리 조선서는 석 삼(三)자와 아홉 구(九)자를 몹시 무서워 한다. 석 삼 자는 귀신이 붙은 자라 해서 몹시 꺼려하며 아홉 구 자 즉 셋을 세 번 곱한 자는 그 석 삼 자보다도 더 무서워한다. 더구나 연령에 들어서 그러하니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 서른아홉 살‥‥‥ 이렇게 아홉이라는 단수가 붙은 해를 몹시 경계한다. 그래서 다만,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나는 열 아홉 살이 되는 날부터 마치 죽을 날이나 당한 듯이 무서움과 조심스러움으로 그날 그날을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에서 저곳을 떠날 일이 있어서도 방위를 보고 벽에 못 하나를 박아도 손을 보며 생 일 음식을 먹으려 하여도 부정을 염려하며 더구나 혼인 참례나 조상집에는 가까이 하지도 못하였으며 일동 일정을 재래의 미신을 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다 못해 감기가 들어서 누웠더라도 무당과 판수가 푸닥거리와 경을 읽었다.

나는 어릴 때이라 그렇게 구속적이요 부자유한 법칙을 지키기도 싫었을 뿐 아니라 그 때 동리에 있는 보통학교에를 다닐 때이므로 어머니의 말씀과 또는 하시는 일을 어리석다 해서 여간한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일인 줄은 알 고 자기도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인 줄은 알면서도 그것을 단단히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사 음식이 눈에 보이면 거기 귀신이 붙은 것 같기도 하여 어째 구미가 당겨지지를 아니하고 길에서 상여를 만나면 하루 종일 자기 생명이 위태한 것 같아서 아니 본 것만 못하였다. 장님을 보면 돌아가고 예방해 내버린 것을 볼 때는 자연히 침을 뱉았다.

쉽게 말하면 이 무서운 인습적 미신을 완전히 깨뜨려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3

나는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여러 가지 행복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아버지가 끼쳐 주고 돌아가신 넉넉한 재산과 따뜻한 어머니의 자애로 무엇 하나 불만족한 것이 없이 소년 시대를 지내 오며 따라서 백여 호밖에 되지 않는 촌락에서 가장 재산 있고 문벌 있는 얌전한 도령님으로 지내던 생각을 하면 고전적 즐거움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도 거울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때에 보르통하고 혈색 좋던 얼굴의 흔적은 숨어 버리었으나 잘 정제된 모습이라든지 정기가 넘치는 눈이라든지 살적이 뚜렷한 이마라든지 웃음이 숨은 듯 나타나는 듯한 입 가장자리에 날씬날씬한 팔 다리와 가는 허리를 아울러 생각하면 어디를 내놓든지 귀공자의 태도가 있었다.

그래서 동리에서는 나를 사위를 삼으려는 사람이 퍽 많았었다. 하루에도 중매를 들려고 오는 사람이 두셋씩 있을 때가 많아서 그 사람들은 서로 눈치들만 보고 서로 말하기를 꺼려 그대로 돌아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느 것을 택해야 좋을는지 몰라서 적지 아니 헤매신 모양이요 또는 그 까닭으로 열 네 살부터 말이 있던 혼인이 열 아홀 살이 되도록 늦어진 것이다.

4

동리 처녀들 중에 내 말을 듣거나 또는 담 틈으로나 울 너머로 나를 본 처녀는 모두 나를 사모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세째 집 건너편에 있는 열 여 덟 살 먹은 처녀 하나는 내가 학교를 갈 적이나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반드시 문 틈으로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있었다. 어떠한 날은 대담하게도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자기의 노랑 수건을 내 앞에 던진 일까지 있었다. 또 어떤 처녀 하나는 자기 부모에게 자기가 나를 사모한단 말을 하여 직접 통혼까지 한 일이 있었으나 그 집안 문벌이 얕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거절을 당한 후에 그 여자는 병이 들었더니 그 후에 다른 데로 시집을 갔다고 할 적에는 나는 공연히 섭섭한 일도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내가 귀찮게 생각한 것은 우리 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막에 술 파는 여자가 나에게 반하였던 일이다. 그것도 내가 학교에 가는 길가에 있는 곳인데 하루는 학교에서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떻게 목이 말랐던지 일상 어머니가 ‘물 한 그릇이라도 남의 집에서 먹지 말라’는 경계를 어기고 그 주막에 들러서 그 술 파는 여자에게 물 한 그릇을 얻어먹은 일이 있었다. 그 여자란 것은 나이가 스물 두서넛이 되어 보이는 남편이 있는 여자인데 눈이 크고 검으며 살이 검누르고 퉁퉁한 여자로 사람을 보면 싱글싱글 웃는 버릇이 있어 얼핏 보면 사람이 좋아 보이지마는 어디인지 음침한 빛이 있다.

그 이튿날 나는 무심히 그 주막 앞을 지내려니까 그 여자는 나를 보고 싱글 웃었다. 그날 저녁에도 싱글 웃었다. 그 웃음이 어떻게 야비한지 나는 그 웃음을 잊으려 하였으나 잊으려 하면 더 생각이 나서 못 견디었다.

그렇지만 그 앞을 아니 지날 수가 없어서 그 웃음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지나간 지 이틀 만에 그 여자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지 문간에 나섰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질겁을 하여 머리끝이 으쓱하였다.

“여보시소 서방님네.”

“왜 그러는고?”

나는 돌아보며 물었다.

“사내가 와 그렇게 무정게계요?”

나는 사변을 돌려보았다. 그 말하는 그 사람은 그만두고 그 말을 듣는 내가 몹시 더럽고 부끄러운 것 같은 까닭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 가려 하니까, 그 여자는 나의 손목을 잡아끌고 자기 집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였다. 그는

“술이나 한잔 자시고 가시소.”

하며 잡아다녔다. 술? 나는 말만 들어도 해괴하였다. 학교 규칙, 어머니, 학생, 계집, 주정, 음란, 이 모든 것이 번득번득 연상이 되어서 온몸이 떨렸다.

“이 손 못 놓겠는게요?”

나는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나는 학생이래서 술 못 먹는지러.”

하고 뒤로 물러서며

“나중에는 얄궂은 일을 다 당하는게로.”

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집에 와서는 얼른 손을 씻어 그 여자의 손때를 떨어 버리고 옷까지 바꾸어 입었다. 그 음탕한 눈이며 살 냄새가 눈에 보이고 코에 맡히는 것 같아서 못 견디었다.

5

그 후부터는 그 길로 학교를 갈 수가 없어서 길을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전 길로 가면 오 리밖에 되지 않는 길을 십 리나 되는 산길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다행히 그 길 중턱에는 우리 집 논이 있고 그 논 옆에는 우리 마름이 살므로 적이 안심이 되었다.

첫날 그 집 앞을 지날 때 나는 주인 된 자격으로라고 하는 것보다도 반가운 마음으로 그 집에를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 집 싸리짝 문을 들어서니 집 안이 너무 적적하였다. 이십 년 동안이나 우리 집 땅을 부쳐먹는 사람 좋은 늙은 마름도 볼 수가 없고 후덕스러 보이는 그의 마누라도 볼 수가 없다. 하다 못해 늙은 개까지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의아하여 고개를 기웃기웃 하려니까 그 집 봉당방문이 열리며 기웃이 고개를 내미는 사람은 그 집 딸인 임실이었다. 임실이는 어렸을 때 앞치마 하나만 두르고 발바닥으로 어머니를 따라서 우리 집에 드나든 일이 있으므로 나는 그 얼굴을 잘 알 뿐더러 어려서는 같이 장난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근 삼 년이나 보지를 못하였다.

어렸을 적에 볼 때에는 머리가 쥐꼬리 같고 때가 덕지덕지하며 코를 흘리던 것이 지금 보니까 제법 머리를 치렁치렁 발뒤꿈치까지 따 늘이고 얼굴에 분칠을 하였는데 때가 쑥 빠졌다.

그는 반가웁다는 뜻인지 생긋 웃고 나를 보며 어서 오라는 듯이 나를 치어다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데 온 것이 미안한 듯이 황망해하며 어떻게 이 갑작스러웁게 방문한 주인댁 도령님을 맞아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다.

“죄다 어데 간는?”

나는 상전의 아들이 하인의 딸에게 향하는 태도로 물었다. 그는

“들에 나갔는게로.”

하며 다시 한 번 나를 곁눈으로 살펴보았다.

길게 있을 시간도 없거니와 이따가 하학할 때에는 또다시 들릴 터이니까 오래 있을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학교를 다녀 돌아올 적에 다시 들렀다.

그때에는 마름 내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점심 먹으라고 밀국수를 해 주었다. 아마 그 계집애가 저희 부모에게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 후에는 올 적 갈 적 들렀다. 그 계집애도 상전과 부리는 사람의 관계로 숙친하여졌다.

어떤 때 나의 옷고름이 떨어지면 그것을 달아 주고 혹 별다른 음식을 갖다가 내 앞에 놀 때에는 이상한 미소를 띠고 나를 곁눈으로 치어다보았다. 그 웃음이란 나의 눈에 보이기에도 몹시 유혹적이었으나 나는 실없는 계집년이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6

그 후에 하루는 내가 학질 기운이 갑자기 생겨서 하학 시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어떻게든지 집으로 가려고 무한한 노력으로 줄달음질쳐 오다가 그 집 앞을 당도해 보니까 여태까지 참았던 마음이 홱 풀어지며 그대로 그 집 마루에 가 털썩 주저앉아 버린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마름들은 나를 방으로 데려다 누이고 일변 집으로 통지를 하며 또는 물을 끓인다, 미음을 쑨다 하여 야단을 하는데 그 중에 가장 난처하게 여기는 것은 나를 깔고 덮어 줄 이불 요가 없어서 걱정인 것이다.

자기네들이 깔고 덮는 누더기를 주인 상전의 귀여운 아들 더구나 유달리 위하는 아들의 몸에는 덮어 주기를 꺼리는 모양이다.

염려하는 것을 본 그 처녀는 얼핏 자기 방---아랫방---으로 가서 새로이 꾸며둔 이불 요 한 채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자기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가서 신랑과 덮고 잘 이불을 준비해 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깔고 덮어 준 후 발 아래를 잘 여미고 두덕두덕 매만져 주었다. 촌 여자의 손이지만 어디인지 연하고 부드러운 맛이 있어서 몹시 육감적 자극을 전하는 듯하였다. 그러고는 그 처녀는 내 앞을 잘 떠나지 않고 자기의 가장 아끼는 이불 요를 꺼내 덮어 준 것이 퍽 만족하다는 듯이 항상 이불과 요를 매만졌다.

어떠한 때에는 나의 이마도 눌러 주고 시키지도 아니하였는데 나의 베개를 바로 베 주기도 하고 허트러진 옷고름을 매 주기까지 하였다.

그때 그 당시로 말하면 내가 그 임실이쯤은 다른 의미로 생각할 여지가 없었고 더구나 임실이를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는 마음이 끌리지 아니하였으니 그와 나의 지위의 간격이 너무 멀었음이 첫째 원인이며 하고 많은 여자를 다 제쳐놓고 임실이에게 마음을 끄을린다는 것은 그때 나의 관념으로도 우스운 일일 뿐 아니라 그런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자기의 명예라든지 여러 가지의 사정을 생각하여 으례히 있지 못할 일이었으므로 더구나 임실이가 나에게 마음을 둔다 하면 그것은 마치 파수 병정이 나라의 공주에게 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파수 병정이 공주를 사모한 일이 만일 있었다 하면 그것이 대개는 불행으로서 끝을 마치는 것과 같이 임실이가 나를 사모한 것도 그러하였으니 그때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 후에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가슴이 몹시 아픔을 깨닫지 아니치 못하였다.

7

병이 나아서 다시 학교를 다닌 지 한 달 남짓한 때 나는 그 집을 들렀다가 그 집에서 마누라쟁이가 소리를 질러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이 정출 가스내야, 죽어도 대답을 못 하겠는가?”

하며 임실이를 두들겨 주는 꼴을 보았다. 계집애는 죽어도 못하겠소 하는 듯이 입을 다물고 돌아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느껴 가면서 울 뿐이다.

“말해라 그래도 못 하겠는게로?”

하고 그의 손에 든 방치가 임실의 등줄대를 내려갈겼다.

임실이는 그대로 엎드러져서 등만 비비며 말이 없다.

어미는 죽어라 하고 두어 번 짓이기더니 나를 보고 물러섰다.

그 까닭은 이러한 것이었다. 임실이를 어떠한 촌에 사는 늙수그레한 농부가 후실로 달라고 하는데 그 농부인즉 돈도 있고 땅도 많고 소도 많아 살기가 넉넉하나 상처를 하여 다시 장가를 들 터인데 만일 딸을 주면 닷마지기 땅에 소 두 마리를 주겠다는 말이 있음이다. 그러나 임실이는 죽어도 가기 싫다 하니까 그렇게 수가 나는 것을 박차 버리는 것이 분하고 절통한 일이 되어서 지금 경찰이 고문이나 하는 듯이 딸에게 대답을 받으려 함이었다.

나도 그 말을 듣고는 임실이를 철없는 계집애라 하였다. 그렇게 하면은 부모에게도 좋은 일이요 자기 신상에도 괜찮을 것이라 하였다.

나도 어미 편을 들었다. 그랬더니 어미는 더욱 펄펄 뛰면서 자 도련님 말씀을 들어 보라고 야단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 무심히 한 말이 그 계집애에게 치명상을 줄 줄을 누가 알았으랴. 지금도 생각만 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8

그 후에는 임실이가 몸이 아파서 누웠단 말을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여 즉 말하자면 주인 된 도리로나 날마다 지나다니며 폐를 끼치는 것으로나 또는 내가 앓을 적에 제가 해 주던 공으로나 약 한 첩 아니 지어다 줄 수 없어서 그 병을 물어보았으나 다만 몸살이라고 할 뿐이므로 무슨 병인지 몰라서 그것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한 보름은 무심히 지나갔다. 임실이 병이 어찌되었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무심히 지내던 어떠한 날 저녁에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날이 몹시 침울하고 흐려서 안개가 자욱이 낀 밤이었다. 척척한 기운이 삼투를 하여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 깨기는 깨었으나 분명히 깨지도 못하였다. 눈에는 방안에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이나 정신은 잠 속에 잠겨 있었다. 시계 소리가 들리었으나 그것이 생시에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꿈속에 듣는 것 같기도 하였다. 누구든지 가위를 눌릴 때 당하는 것같이 몸은 깨려 하고 정신은 깨지 않는 벗과 같았다. 띵한 기운이 머릿속에 가득 차고 온몸이 녹는 듯이 혼몽하였다.

그러자 누구인지 문을 열었다. 석유불을 켜 놓은 등잔불이 더욱 밝아지더니 눈이 부신 햇빛같이 환하여졌다. 나는 이상하지도 알고 무섭지도 않았다. 생시나 같이 예사로 왔다.

문이 열리더니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한 임실이었다. 그는 하얗게 소복을 입었었다. 그의 손에는 이상한 꽃가지를 들었었다. 문을 닫더니 내 앞에 와서 섰다. 그는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처창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누구와 이별하는 것같이 몹시 슬픈 낯으로 나를 보았다. 그의 옷 빛은 똑똑하고 선명하게 내 눈에 비치었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보고 있더니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더니 나의 가슴에 엎드려 울었다. 생시나 꼭 마찬가지 목소리로 나를 향하여

“저는 지금 당신을 이별하고 영원히 갑니다. 생시에는 감히 말씀을 못 하였으나 지금 마지막 당신을 떠나갈 때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였는지 알 수 없던 그 간곡한 정이나 알려 드릴까 하여 가는 길에 들렀사오니 영영 가는 혼이나마 마지막으로 저를 한 번 안아 주세요.”

하고 가슴에 안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임실이를 물리치며

“버릇없는 가시네 년, 누구에게 네가 감히 이따위 버르장을 하니.”

하고 꾸짖었다. 그랬더니 임실이는 돌아서서 원망스럽게 나를 흘겨보면서 그러면 이것이 마지막이니 안녕이나 계시라고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나는 그 사라지는 것이 연기와 같이 허무한 것을 보고 공연히 섭섭한 생각이 나고 가슴속이 메어지는 듯하여 그렇게 준절히 꾸짖은 나로서 다시

“임실아! 임실아!”

하고 부르면서 따라나가려 하였다. 그러니 정녕코 생시요 모든 것이 분명하고 똑똑한데 다리를 떼어 놓으려면 다리가 떼어지지 않고 무엇이 확 붙잡는 것 같으며 입을 벌리려면 혀가 굳어서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무한히 고생을 하고 애를 쓰려 하였으나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러자 누구인지 내 몸을 흔드는 듯해서 눈을 떠 보니까 나는 자리 속에 누웠고 옆에 어머니가 일어나 앉으셔서

“왜 그러는?”

하고 물어보신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아서 내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꿈은 꿈이나 그것이 너무 역력한 까닭에 어머니께 그런 말씀도 하지 못하고 이상하다 하는 생각으로 그날 밤을 지내었다.

9

그 이튿날 아침에 학교를 갈 적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 집부터 들렀다. 들르기도 전에 멀리서 나는 가슴이 서운하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고‥‥‥ 임실이가 죽단 말이 웬말이냐. 어미 애비 내버리고 네 혼자 어데매로 간단 말고 애고 애고 임실아‥‥‥”

하며 어미의 우는 소리가 적적한 마을 고요한 공기를 울리고 내 귀에 들려 왔다. 공중에서 날아왔다 날아가는 제비새끼라든지 다 익은 낟알이 바람에 불리어 이리 물결치고 저리 물결치는 것이든지 그 울음 소리에 섞이어 몹시 애처러운 정서를 멀리멀리 퍼뜨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원한 품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함에 무서운 생각도 나고 으스스한 느낌이 생겼다.

어미는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임실아! 가려거든 같이 가지 너 혼자 간단 말고.”

하며 통곡을 한다. 마름은 옆에 않아 눈물을 씻고 있다. 농후한 애수가 그 집을 싸고돈다.

마누라는 나를 보더니,

”도련님 임실이가 죽었소.”

하며 푸념 검 하소연을 한다. 아랫방 임실의 누운 방문은 꼭 닫혀 있고 그 앞에는 임실이가 신던 신짝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이것이 정말이라 하면 너무 내 꿈이 지나치게 참말이요 거짓말이라 하면 이렇게 애통한 광경을 믿지 않아야 할 것이다. 꿈이 이렇게 사실과 결합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몇 시쯤 하여 그랬는고?”

나는 생각이 있어서 시간을 물어보았다. 마름은 눈을 꿈벅꿈벅하고 먼 산을 바라보고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오경은 되었을게로.“

하며 대답을 하였다. 나는 눈을 더 한 번 크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분명히 임실의 혼이 임실의 몸에서 떠날 때 나에게 즉시 다녀간 것이 틀림없었다.

10

나는 그날 학교를 그만두었다. 집에 돌아 와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하고 종일 드러누워 생각함에 실없이 임실이 생각이 나서 못 견뎠다. 나에게 그렇게 구소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매 내 사지 마디가 저린 것 같았다. 불쌍함과 측은한 생각이 나고 또는 적지 않른 미신적 관념이 공연히 나를 두려웁게 하였다.

그리고 일상 나에게 하던 것이라든지 내가 아플 때 나에게 하여 준 것이라든지 또는 시집가기 싫어하던 것이든지 병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임실의 마음을 추측하매 임실이는 속으로 몹시 나를 사모하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상전이요 자기는 부리는 사람의 딸이었다. 고귀한 집 도령님을 사모한다고 말로는 차마 하지 못하였으나 그는 속으로 혼자 가슴을 태웠던 것이다. 골수에 사무치도록 나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입이 있고 말을 하나 차마 가슴속에 든 것을 내 놓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죽어 간 임실을 몹시 동정하게 되었었다. 다시 한 번 만날 수가 있어 그의 진정을 들었으면 좋을걸 하는 생각까지 나고 나중에는 제가 생시에 그런 말을 하였다면 들어 주기라도 하였을걸 하는 마음까지 났다. 말하자면 나는 임실이가 죽어 간 뒤에 분한 마음이 변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에 나는 잠을 자려 하나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무슨 영문도 모르시고 가지 각색 약을 갖다가 나를 권하셨다. 그러시면서 내가 어제 저녁에 꿈에 가위를 눌리더니 몸에 병이 생기었다 하시면서 매우 걱정을 하시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침 임실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만일 그 집에를 들렀다는 말을 하면 처녀 죽은 귀신이 씌었다고 당장에 집안이 뒤집힐 터인 까닭이다.

나는 온종일 임실이 생각만 하다가 자리 속에 누웠었다. 때는 자정이 될락말락하였었다. 어머니는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시느라고 옆에서 바느질을 하시고 계셨다. 사면은 고요하였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눈이 또렷또렷 잠 한잠 자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누구인지 문간에서 문을 두드렸다. 어머님도 바느질하시던 것을 그치시고 귀를 기울이셨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분명히 임실의 소리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 쳐다보았다. 서로 의아한 것을 깨치기 위함이다. 어머니 한 사람이나 나 한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 듣는다는 것을 알 때 나는 온몸이 으쓱하였다.

“도련님!”

목소리가 더 똑똑하고 날카로왔다. 나는 무의식하게 벌떡 일어나며 대답을 하려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얼핏 나에게로 달려 드시며 쉬---입을 막으라고 손짓을 하셨다.

“도련님!”

세 번째 소리가 날 때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나는 등에서 땀이 나도록 무서운 생각이 나서 얼른 자리 속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게 누구 소리냐고 날더러 물어보셨다. 나는 어제 저녁 꿈 이야기로부터 오늘 이야기를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온 동리가 다 알 것을 속인들 소용이 없음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모조리 하였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나를 책망을 하셨다. 그렇게 생명에까지 관계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어찌 자식이며 어미냐고 우시기까지 하셨다. 나는 참으로 말 안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것은 귀신이 다녀간 것이라 하셨다. 세 번 부르기 전에 만일 대답을 하였다면 내가 죽을 것을 요행히 괜찮았다고 하셨다.

그날 저녁은 무사히 넘어갔다. 그 이튿날 어머니는 무당을 불러 오셨다. 무당이 내 말을 듣더니 처녀 죽은 귀신이 되어서 그렇다고 그 귀신을 모셔다가 아무 이러이러한 나무 위에 모셔 놓고 일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 주라 하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셨다. 그 이튿날 임실이는 공동묘지에 갖다가 묻었다. 나는 서운한 생각으로 그 날을 지냈다. 더구나 이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을 자기가 직접 당하고 보니 이상 하게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더구나 처녀 귀신이 자기를 찾아다니는 것을 생각하고 여러 가지 미신을 종합해 생각할 때 적지않이 불안하였다.

그날 밤에도 임실이가 꿈에 보였다. 이번에는 아주 다른 세상으로 가서 모든 세상의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선녀처럼 어여쁜 얼굴과 고운 단장을 하고 찾아왔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퍽 반가움을 금치 못하여 이번에는 내가 임실이를 생각하는 것이 분수에 과한 것같이 임실이는 숭고하여졌었다. 나는 꿈속에서 임실이를 사모한다 하였다.

그러나 임실이는 조금 비웃는 듯이 나를 보더니 만일 당신이 나를 사모하거든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어제 저녁 찾아갔을 때 왜 대답도 아니 하였느냐 하며 자 어서 가자고 손을 끌었다. 그때 잠깐 나는 꿈속에서나마 생시에 먹었던 정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임실이가 참 정말 임실이가 아니요 귀신 임실이라는 생각이 들더니 만일 임실이를 따라가면 자기도 죽는다는 생각이 나서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잠이 깨었다.

잠은 깨었으나 눈앞에 보던 기억이 역력 하다.

가기 싫다고 손을 뿌리쳤으나 임실이 모양이 얼마나 숭고하고 어여뻤는지 옆엣집 계집 애가 노랑 수건을 던져 주던 따위로는 비길 수 없이 나의 정열을 일으켰다.

일이 허황된 일이라면서도 꿈에 보던 임실이를 잊을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 사람이 추상적 환상에 반하는 일이 있는 것이나 마찬 가지로 나는 꿈속에 임실이 혼에게 반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잊으려 하나 잊을 수가 없었다. 속으로 자기를 비웃으면서도 가슴속은 무엇에 취한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 말을 들으시더니 더욱 근심을 하시면서 얼핏 장가를 들여야겠다 하셨다. 그리고 유명한 무당과 판수에게는 날마다 다니시다시피 하셨다.

그 이튿날 또 그 이튿날 꿈에는 임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꿈속에서 다시 한 번이라도 만나보았으면 할 때는 정작 오지를 않았다.

꿈을 꾸어서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처음 날 그 이튿날까지는 그리 대단치 않더니 날이 지날수록 심해져서 어떻게 꿈 속에서 한 번 만나보나 하는 생각이 간절하여졌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임실이 생각만 하면 혹시 꿈 속에서 만나볼 수가 있을까 하여 일부러 생각만 하였었으나 허사였다.

그 후부터 날마다 학교는 가지마는 그 집에는 자주 들르지를 않았다. 첫째 나 때문에 자기 딸이 죽었다는 칭원을 할까 겁나는 까닭이요 둘째로는 그 죽은 방이 보기 싫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잊혀지지를 않으므로 이번에는 잊어 보려고 애를 썼다. 어떤 때는 혼자 눈을 딱 감아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 고개를 흔들어 눈앞에 보이는 것을 깨뜨려 보려하였으나 더욱 분명히 보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도 귀신이 나의 마음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해서 몹시 괴로왔다.

11

하루는 토요일이다. 임실을 잊어버리려 하나 잊어버릴 수 없는 생각이 나를 공동 묘지까지 끌어갔다. 풀이 우거져서 상긋한 냄새가 온 우주의 생명의 냄새를 나의 콧구멍으로 전하여 주는 듯하였다. 익어 가는 나락들은 무거운 생명의 알갱이를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널따란 벌판에는 생명 기운이의 넘쳐 흐른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흙의 냄새가 새로이 나의 정신을 씻어 주는 듯 하였다. 먼 산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들은 꿈틀꿈틀한 줄기와 뻣뻣한 가지로 힘있게 흩날린다. 맑게 갠 하늘에는 긴장한 푸른 빛이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 귀퉁이 남겨 놓은 것 없이 가득히 찼다. 길 가는 행인들까지 걷어올린 두 다리에 시뻘건 근육이 힘있게 꿈틀거린다. 들로 나가는 황소 목에 달린 종소리까지 쨍쨍한 음향으로 공기를 울린다.

공동묘지는 우리 동리에서 북쪽으로 십 오리나 되는 산등성이에 있었다. 내가 묘지에를 가는 것은 임실의 실체를 만나보려 하는 것도 아니요 꿈속같이 임실의 혼을 만나려는 것도 아니다. 임실이가 나를 그렇게까지 사모하다가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대로 원혼이 되어 갔으며 또는 그 원혼이 그래도 나를 못 잊고 꿈속에까지 나를 못 잊어 내 눈에 보이며 또 그 원혼이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하면 그 간곡한 마음을 다만 얼마라도 위로 하는 것이 나의 의리 있는 짓이라고 하는 생각까지 난 까닭이었다. 그러면 사람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이 되어 어떠한 물건에 의지 하지 아니하면 그 마음이라든지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부처를 생각하매 흙으로 빞어 만든 불상이거나 예수를 경배하매 쇠로 만든 십자가가 아니면 그 마음을 한곳에 붙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가 임실이를 생각하매 그의 몸을 묻어 놓은 흙덩이 무덤이 아니면 나의 마음을 부쳐 보낼 수 없음이었다.

나는 이 무덤 저 무덤을 찾아서 임실의 무덤 앞에 섰다. 무덤이 무슨 말이 있으랴마는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채우는 듯이 어색하여 졌다. 죽은 사람의 무덤 위에는 새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풀들이 파릇파릇 났다. 나는 세상에 가장 애처로운 정서로 얽어 놓은 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는 임실이를 위하여 무엇이라고 하여야 좋을지 알지 못하였다. 처녀로서 순결한 마음으로 일평생 한 번밖에 그의 정을 주어 보지 못한 임실의 깨끗한 몸이 여기에 놓여 있고 그 순진한 심정에서 곱게 피어 오른 사랑의 꽃이 저 심산속에 피었다 사라진 이름 모를 꽃 같은 것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은 숭고하고 결백함으로 찼었다. 그러나 한 번밖에 피지못하는 꽃이 나로 말미암아 피었고 그것이 나로 인하여 꺼져 버린 것을 생각할 때 말할 수 없이 아까왔다. 더구나 그 꽃은 꺼졌으나 그 나머지 향기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고 피었던 자리 언저리에 남아 있어 없어지기를 아까와하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나의 마음이 어이는 듯하였는지 몰랐다.

나는 무덤 가장자리를 돌아다녀 보았다. 그의 무덤은 보잘것이 없었다. 그의 무덤에는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그의 죽어 간 뒤에는 그를 위하여 가슴을 태우는 이라고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죽어 간 임실이가 그렇게까지 사모하던 내가 이 자리에 왔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일 참으로 넋이 있어 안다 하면 그가 그것을 만족히 여길는지 아닐는지? 나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옆에 피어 있는 석죽(石竹)꽃을 따서 그것으로 화환을 만들어 무덤 앞에 놓아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는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여 왔다. 그리고 임실이도 꿈에 오지 아니하고 나도 임실의 생각을 잊어버리었다.

그러자 일 년이 지나간 어떤 날 또다시 임실이가 왔었다. 그것은 바로 임실이가 죽은 지 일 년이 되던 날이다. 그 후에는 연연히 그날이면 임실이가 보이더니 내가 서울 와서 공부하던 해부터는 그날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지금은 아주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같이 잊어버리었으나 문득문득 그때 생각이 나면 그때 문간에서 나를 부르던 소리가 귀에 역력하여 온몸이 으쓱하여진다.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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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보세요.」

「이야기가 있으니 이리 좀 오세요.」

「잠간 들어와 놀다 가세요.」

「너무 히야까시1 마시고 이리 좀 와요.」

「아따 들어오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 ······

저문 거리 붉은 등에 저녁 불이 무르녹기 시작할 때면 피를 말리우고 목을 짜내며 경칩에 개구리떼같이 울고 외치던 이 소리가 이 청루에서는 벌써 들리지 않았고 나비를 부르는 꽃들이 누 앞에 난만히 피지도 않았다.

<상품>의 매매와 흥정으로 그 어느 밤을 물론하고 이른 아침의 저자같이 외치고 들끓는 화려한 이 저자에서 이 누 앞만은 심히도 적막하였다.

문은 쓸쓸히 닫히었고 그 위에 걸린 홍등이 문 앞을 희미하게 비치고 있을 따름이다.

사시장청 어느 때를 두고든지 시들어 본적 없는 이곳이 이렇게 쓸쓸히 시들었을 적에는 반드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이 틀림없었다.

2

몇백 원이나 몇천 원 계약에 팔려서 처음으로 이 지옥에 들어오면 너무도 기막힌 일에 무섭고 겁이 나서 몇 주일 동안은 눈물과 울음으로 세상이 어두웠다. 밤이 되어 손님을 맡아 가지고 제 방으로 들어갈 때에는 도살장으로 끌리는 양이었다. 너무도 겁이 나서 울고 몸부림을 하면 어떤 사람은 가여워서 그대로 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소리를 치고 주인을 부르고 포악을 부렸다. 그러면 주인이 쫓아와서 사정없이 매질하였다. 눈물과 공포와 매질에 차차 길든다 하더라도 일년 열두 달 하루도 안 내놓고 밤새도록 부대끼고 나면 몸은 점점 피곤하여가서 나중에는 도저히 체력을 지탱하여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병이 들어 누웠을 때면은 미음 한 술은커녕 약 한 첩 안 대려주었다 --- 몸팔고 매맞고 ····· 학대받고 개나 도야지에도 떨어지는 생활을 그들은 하여 왔던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못 받아오는 그들이 불평을 품고 벌려 온 지는 이미 오래였다. 학대받으면 받을수록 원은 맺혀가고 분은 자라갔다. 비록 그들의 원과 분이 어떤 같은 목표를 향하여 통일은 되지 못하였을 망정 여덟 사람이면 여덟 사람 억울한 심사와 한많은 감정만은 똑같이 가졌던 것이었다.

유심히도 피곤한 날이었다.

오정때쯤은 되어서 아침들을 마치고 나른한 몸으로 중 아래 넓은 방에 모였을 때에 누구의 입에선지 이런 탄식이 새어 나왔다.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는가.」

말할 기맥조차 없는 듯이 모두 잠자코 있는 가운데서 봉선이라는 좀 나이 어린 창기가 뛰어나서며 말하였다.

「너나 내나 팔자가 기박해서 그렇지 않으냐? 그야 남처럼 버젓한 남편을 섬겨서 아들딸 낳고 잘살고 싶은 생각이야 누가 없겠니마는 타고난 팔자가 기박한 것을 어떻게 하니.」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참이나 잠자코 있던 부영이라는 나 찬 창기가 이 말에 찬동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항의를 하였다.

「팔자가 다 무어냐? 다같이 이목구비를 갖추고 무엇이 남만 못해서 부모를 버리고 동기를 잃고, 고향을 떠나 이 짓까지 하게 되었단 말이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왜 모두 그런 기박한 팔자만 타고 났겠니?」

「그것이 다 팔자 탓이 아니냐?」

「그래도 너는 팔자구나····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팔자밖에 우리를 요렇게 맨들어 놓은 무엇이 있는 것 같더라.」

경상도 어는 시골서 팔려와 밤마다의 울음과 매에 지친 채봉이가 뛰어나서면서 쉬인 목소리로 외쳤다.

「내 세상에 보다보다 X팔아 먹는 놈의 장사 처음 보았다. 문둥이 같은 놈의 세상!」

눈물 많은 그는 제 입으로 나온 이 말에 벌써 감동이 되어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부영이가 그 뒤를 이었다.

「그래 채봉이 마따나 문둥이 같은 놈의 세상? 우리를 요렿게 맨들어 논 것이 기박한 팔자가 아니라 이 문둥이 같은 놈의 세상이란다.」

「세상이 우리를 기구하게 맨들었단 말이냐?」

봉선이는 미심한 듯 하였다.

「그렇지 않으냐. 생각해 보려므나. 애초에 우리가 이리로 넘어올 때에 계약인지 무엇인지 해가지구 우리를 팔아먹은 놈이 누구며 지금 우리가 버는 돈을 푼푼이 뺏어내는 놈은 누구냐. 밤마다 피를 말리우고 살을 팔면서도 우리야 돈 한 푼 얻어 보았니?」

「그야 그렇지.」

「한 사람이 하룻밤에 적어도 육 원씩만 번다고 하여도 우리 여덟 사람이 벌써 근 오십 원 돈을 버는구나. 그 오십 원 돈이 다 뉘 주머니 속에 들어가고 마니 하루에 단 오 원어치도 못 얻어먹으면서 우리 여덟이 애쓰고 벌어서 생판 모르는 남 좋은 일만 시켜 주지 않았니.」

한참이나 있다가 봉선이가 탄식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멍텅구리가 아니냐?」

「암 그렇구말구. 우리는 사람이 아니구 물건이란다. 놈들의 농간으로 이리저리 펄려다니며 피를 짜 놈들을 살찌게 하는 물건이란다.」

「나 정말 그런고?」

「그럼 우리가 멀건 천치 아이가.」

「천치란다. 멀건 천치란다. 팔자가 기박하고 이목구비가 남 못한 것이 아니라 이런 천치 짓을 하는 우리가 못났단다.」

「······」

「우리가 사람 같은 대접을 받어 왔나 생각해 봐라. 개나 도야지보다도 더 천하게 여기어 오지 않았니.」

부영이의 목소리는 어쩐지 떨렸다.

「먹고 싶은 것 먹어 봤니. 놀고 싶을 때 놀아 봤니? 앓을 때에 미음 한 술 약 한 모금 얻어 먹었니? 처음 들어오면 매질과 눈물에 세상이 어둡고 기한이 되어도 내놓지 않는구나.」

어느덧 그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기어코 참을 수 없이 그만 울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채봉이도 따라 울었다.

나어린 봉선이는 설움을 못 이겨서 몸부림을 치면서 흑흑 느끼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윽고 각각 설운 처지를 회상하는 그들은 일제히 울어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부영이만은 입술을 찡긋이 깨물고 울음을 억제하면서 말 뒤를 이었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 개나 도야지만도 못한 천대를 너희들은 더 참을 수 있니, 꾸역꾸역 더 참을 수 있겠니?」

「······」

「이 천대를 더들 참을 수 있겠니?」

「참을 수 없으면 어이하노.」

채봉이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한탄하였다.

부영이는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좌중을 돌아다보면서,

「울지들 말아라. 울면 무엇하니.」

하고 고요히 심장에서 울려내는 듯이 한 마디 또렸또렸이 뱉아냈다.

「울지 말고 우리 한 번 해보자!」

「무얼 해보노?」

「우리 여덟이 짜고 주인과 한 번 해보자!」

「해보다니 어떻게 한단 말이냐!」

눈물어린 얼굴들이 일제히 부영이를 향하였다.

「우린 원이 많지 않으냐. 그 원을 풀어 달라고 주인한테 떼써 보자꾸나.」

「우리 원을 주인이 들어준다?」

채봉이 생각에는 얼토당토않은 듯하였다.

「그러니가 떼써서 안 들어주면 우리는 우리 할대로 하잔 말이다.」

「우리 할대로?」

눈물에 젖은 눈들이 의아하여서 다시 부영이를 바라보았다.

「모두 짜고 말을 안 들어주면 그만이 아니냐. 돈을 안 벌어주면 그만이 아니냐.」

「그렇게들 하겠니?」

「일제히 결심하고 죽어도 말 안 듣는데 저희들 어떻게 한단 말이냐.」

「옳지!」

「그렇지!」

그들은 차차 알아들 갔다.

마침내 부영이의 설명과 방침을 잘 새겨들은 그들은 두 손을 들고 기쁨에 넘쳐서 뛰고 외쳤다.

「좋다!」

「좋다!」

「부영아 이년아 니 어디서 그런 생각 배웠냐.」

「그전에 공장에 다니던 우리 오빠에게서 들었단다. 그때 공장에서도 그렇게 해서 월급 오르고 일 시간 적어지고 망나니 감독까지 내쫓았다드라.」

「니 이년아 맹랑하다.」

「우리도 하자!」

「하자!」

「하자!」

수많은 갸냘픈 주먹이 꿋꿋이 쥐이고 눈물에 흐렸던 방안은 이제 계획과 광명에 활짝 개어 올랐다.

이렇게 하여 결국 그들은 어여쁜 결심을 한끈에 맺어 일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이 세상에서 받아 온 학대에 대한 크나큰 원한과 분이 이제 이 집 주인과의 대항이라는 구체적 형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처음인 그들은 일의 교섭을 부영이에게 일임하였다. 부영이는 전에 오빠에게서 들은 것이 있어서 구두로 주인과 담판하기를 피하고 오빠들의 예를 본받아서 요구서 비슷한 것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여덟 사람 입에서 나오는 수많은 조목 중에서 대강 다음과 같은 요구의 조목을 추려서 능치는 못하나 대강 읽을 줄을 알고 쓸 줄을 아는 부영이는 한 장의 종이를 도톨도톨한 다다미 위에 놓은 채 그 위에 연필로 공들여서 내리 적었다.

1. 기한 넘은 명자를 하루라도 속히 내놓을 일.

1. 영업시간은 오후 여섯시부터 새로 두시까지 할 일(즉 두시 이후에는 손님을 더 들이지 말 일).

1. 낯 동안에는 외출을 마음대로 시킬 일.

1. 한 달에 하루씩 놀릴 일.

1. 처음 들어온 사람을 매질하지 말 일.

1. 앓은 때에는 낫도록 치료를 하여 줄 일.

이렇게 여섯 가지 조목을 적고 그 다음에 만약 이 조목의 요구를 하나라도 안 들어 주면 동맹하여 손님을 안 받겠다는 뜻을 간단히 쓰고 끝에 여덟 사람의 이름을 연서하고 각각 제 이름 밑에 지장을 찍었다.

다 쓴 뒤에 부영이가 한 번 읽어주었다. 제 입으로 한 마디 떠듬떠듬 뜯어들 읽기도 하였다.

다 읽은 뒤에 그들은 벌써 일이 다 되고 주인이 굽실굽실 끌려 오는 듯하여서 손을 치고 소리 지르고 한없이 기뻐들 하였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하였던 합력의 공이 끔찍이도 큰 것을 처음으로 안 것도 기쁜 일이었다.

뛰고 붙으고 마음껏 기뻐들 한 끝에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공을 집은 사람이 요구서를 주인한데 가지고 가서 내기로 하였다.

3

「아 요런 년들.」

「아니꼬운 년들 다보겠다.」

「되지 못한 년들.」

「주제 넘은 년들.」

주인 양주는 팔짝팔짝 뛰면서 번차례로 외치면서 방으로 쫓아왔다.

「같지 않은 년들 이것이 다 무어냐?」

요구서가 약오른 그의 손끝에서 바르르 떨렸다.]

「너이 할일이나 하구 애초에 작정한 돈이나 벌어주면 그만이지 요꼴들에 요건 다 무어냐?」

한 사람 한 사람씩 노리면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요구서를 쪽쪽 찢어버렸다.

「되지 못한 년들 일일이 너이들 시중만 들란 말이냐? 돈은 눈꼽만큼 벌어주고 큰 소리가 무슨 큰소리냐?」

분은 터져 오르나 주인의 암팡스런 권막에 모두들 잠자코 있는 사이에 참고 있던 부영이가 마침네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럼 우리를 사람으로 대접해 왔단 말요?」

「이년아 그럼 너희를 부자집 아가씨처럼 대접하란 말이냐?」

「부자집 아가씨구 빌어먹을 것이구 당신이 우리를 개나 도야지 만큼이나 여겨왔오?」

「그렇게 호강하고 싶은 년들이 애초에 팔려오기는 왜 팔려왔단 말이냐?」

「우리가 팔려오고 싶어 팔려왔소?」

「그러게 말이다. 한껏 이런 데 팔려오는 너이년들이 무슨 건방진 소리냐 말이다.」

「이런 데 팔려오는 사람은 다 죽을 거란 말요. 너무 괄세 말구려.」

「꼴들에 괄세는 다 무어냐 같지않게.」

「같지않다는 건 다 무어냐?」

「아 요런 넌 버릇없이.」

팔짝 뛰면서 그는 부영이의 따귀를 찰삭 갈겼다.

순간 약오른 그들의 얼굴에는 핏대가 쭉뻗쳐올랐다.

「이놈아 외 치니?」

「무슨 재세로 사람을 함부로 치느냐?」

「너한테 매어만 지낼 줄 알았느냐?」

「발길 놈아.」

「죽일 놈아.」

그들은 약속한 바 없었으나 약속하였던 것같이 일제히 일어나서 소리 높이 발악을 하였다.

「하 같지 않은 것들.」

주인은 같지 않아서 보다도 예기치 아니한 소리 높은 발악에 기를 뺏겨서 목소리를 낮추고 주춤 물러선다.

「이때까지 너희들 먹여 살린 것이 누구냐. 은혜도 모르고 너희들이 그래야 옳단 말이냐?」

「은혜? 같지않다. 누가 누구의 은혜를 입었단 말이냐.」

「배가 부르니까 괜듯만 싶으냐. 밥알이 창자 속에 곤두서니까 너희들 세상만 싶으냐?」

「두말 말고 우리 말을 들어 줄려면 주고 안들어 줄려면 그만이고 생각대로 하구려.」

「흥 누가 몸이 다나 두고보자. 굶어죽거나 말거나 이년들 밥 한술 주나봐라.」

이렇게 위협하면서 주인은 방을 나가 버렸다.

「원 나중엔 별것들 다보겠네.」

한 쪽 구석에 말없이 서 있는 주인 여편네도 중얼거리며 따라나갔다.

4

이렇게 하여 주인과 대전한 지 사흘이었다. 식료는 온전히 끊기었었다.

사흘 동안 속에 곡식 한 톨 넣지 못한 그들은 기맥이 쇠진하였다.

오늘도 명자는 이층 한구석 제 방에서 엎드려 울기만 하였다.

며칠 동안 손님을 안 받으니 몸이 거뿐하기는 하였으나 그대신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공연히 이 짓을 했지. 이 탓으로 나갈 기한이 더 늦어지면 어떻게 하나.」

고픈 배를 부등켜안고 엎드렸다 일어났다 하면서 그는 걱정하였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설워지면 품에 지닌 사진을 몇 번이고 꺼내 보았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는 때없이 한바탕 울고야 말았다. 그러나 눈물이 마를 만하면 그는 또 다시 사진을 꺼내 보았다.

이 지옥에 들어온 지 삼 년 동안 그 사진만이 그의 유일한 동무였고 위안이었다. 그것은 정든 님의 사진이 아니라 그의 어렸을 때의 집안 식구와 같이 박은 것이었다(그의 집안의 그때에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뒤에 서고 그는 어린 동생들과 손을 잡고 앞줄에 서서 박은 것이다. 추석날 읍에서 사진장이가 들어왔을 때에 머리 빗고 새옷 입고 박은 것이었다. 벌써 칠 년 전이다. 그후에 어찌 함인지 가운이 기울기 시작하여 집에 화재가 난다. 땅이 떠내려간다. 하여 불과 사 년 동안에 다 게다 폭삭 주저 앉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삼 년 전에 서리서리 뒤틀린 굉상한 연줄로 명자가 이리로 넘어오게까지 되었었다. 고향을 끌려 나올 때에 단 한 가지 몸에 지니고 나온 것이 이 한 장의 사진이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동생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는 사진을 내보고 실컷 울었다. 집도 절도 없는 고향에 지금 아버지 어머니가 있을 리 만무할 것이다. 그릇 이고 쪽박 차고, 알지 못하는 마을을 헤매이고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저것도 고향에 가야 알것이다. 얼른 고향에 가야 그들의 간 곳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는 하루 몇 번 사진과 눈씨름하면서 얼른 삼 년이 지나 계약한 기한이 오기만 고대하였다. 그러나 삼년이 지나 기한이 넘어도 주인은 그를 내놓으려고하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분하고 원통하여서 오늘도 종일 그는 사진을 보며 울기만 하였다.

사진 보고 생각하고 울고 하는 동안에 오늘 하루도 다 가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명자는 눈물을 씻고 일어나서 커튼을 열었다.

창 밖에는 넓은 장안이 끝없이 깔렸고 암흑의 거리거리가 층층의 생활을 집어삼키고 바다같이 깊다.

그 속에 수많은 등불이 초저녁의 별같이 쏟아져서 깜박깜박 사람을 부르는 듯하였다.

명자는 창을 열고 찬 야기(夜氣)를 쏘이면서 시름없이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은 어쩐지 자유로울 것 같다. 속히 이 곳을 벗어나 저 속에 마음껏 헤엄쳐볼까 하고도 그는 생각했다.

매력 있는 거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는 다시 창을 닫고 커튼을 쳤다.

새삼스럽게 기갈이 복받쳐왔다.

그는 그 길로 바로 곧은 층층대를 타고 내려가 층 아랫방으로 갔다.

넓은 방에는 사흘 동안의 단식에 눈이 푹꺼진 동무들이 맥없이 눕기도 하고 혹은 말없이 앉아있기도 하였다.

「배고파 못 살겠다.」

명자는 더 참을 수 없어 항복하여 버렸다 그들도 따라서 외쳤다.

「속쓰리다.」

「배고프다.」

「이게 무슨 못할 짓인고.」

「X을 팔면 팔지 내사 배곯구는 몬살겠다.」

누웠던 부영이가 일어나서 그들을 진정시키고 쇠진한 의기를 채질하였다.

「사흘 동안 굶어서 설마 죽겠니. 옛날의 영악한 사람은 한 달이나 굶어도 늠실하였다드라.」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지금이 아니냐!」

「지금 사람이 더 영악해야 되잖겠니. 저의가 아수운가 우리가 꿀리나 어데 더 참아 보자꾸나.」

부영이가 이렇게 말하면

「죽든지 살든지 해보자!」

「더 참어 보자!」

하는 한패와 그래도

「못 살겠다.」

「못 견디겠다.」

「배고파 죽겠다.」

하는 패가 있었다.

「그다지도 고프냐?」

부영이는 이제 더 달래갈 수는 없었다.

「눈이 뒤집히는 것 같고 몸이 뒤틀리는 것 같애서 못살겠다.」

「그럼 있는 대로 모아서 요기라도 하자꾸나.」

부영이는 치마춤을 뒤지더니 백통전2을 두어 닙 방바닥에 던졌다.

「자 너이들도 있는 대로 내놓아라. 보자.」

치마 춤에서 백통전이 한 닙 두 닙씩 방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손님을 받을 때 가외로 한닙 두 닙 얻어둔 것이었다.

볼 동안에 여남은 닙 모인 백통전을 긁어 모아서 부영이는 채봉에게 주었다.

「자! 너 좀 가서 무엇이든지 먹을 것을 사오려므나.」

채봉이는 돈을 가지고 건너편 가게에 나가서 두 팔에 수북이 빵을 사들고 들어왔다.

5

「년들 맹랑하거든.」

하루도 채 못 가 항복하리라고 생각한 것이 사흘이나 끌어 왔으니 주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년들의 소행이 괘씸하기도 하였으나 애초에 잘 달래 놓을 것을 그런 줄 모르고 뻗대 온 것이 큰 실책인 것도 생각되었다. 하룻밤이 아까운 이 시절에 사흘밤이나, 문을 닫치는 것은 그에게 막대한 손해를 의미한다. 더구나 다른 누구보다도 유달리 번창하는 이 누이니만치 손해는 더욱 큰 것이다. 수자적 타산이 언제든지 머릿속을 떠날 새 없는 주인은 한 시간이 아까와 견딜 수 없었다. 더구나 밤이 시작됨을 따라 밖에서 더욱 요란하여지는 사내들 노래를 들으려니 한시도 더 참을 수 없어서 그는 또 방으로 쫓아왔다.

「애들 배 안 고프냐?」

목소리를 힘써 부드럽게 하였다.

「우리 배고프든 안 고프든 무슨 상관이요?」

용기를 얻은 봉선이는 대담스럽게 톡 쏘아 부쳤다.

「공연히 그렇게 악만 쓰면 너이만 곯지 않느냐? 이를 때에 고분고분이 잘 들으려므나. 나중에 후회 말구.」

「우리야 후회를 하든지 말든지 남의 걱정 퍽 하우.」

이제 빵으로 배를 다진 그들은 쉽게 넘어 가지는 않았다.

「제발 그만들 마음을 돌려라.」

「그럼 우리의 원을 들어주겠단 말요.」

「아예 그런 딴소리는 말고 밥들이나 먹고 할 일들이나 해라.」

「딴 소리가 다 무어요. 우리의 원을 들어주겠느냐 안 들어주겠느냐 말요.」

「자 일어들 나거라. 벌써 사흘밤이 아니냐?」

「사흘 아니라 석 달 이래도 우리는 원을 이루고야 말 테예요.」

「글쎄 너이들 일이 됐니. 밥먹여 살리는 주인한테 이렇게 대드는 법이 세상에 어데 있단 말이냐.」

「잔소리는 그만 두어요. 우리의 원을 들어주겠으면 주고 싫으면 그만이지 딴 소리가 웬 딴소리요.」

부영이가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캐서 들이밀었다.

「너이년들 말 안 들을 테냐?」

누그러졌던 주인이 별안간에 발끈하였다. 노기에 세모진 눈이 노랗게 빛난다.

「얼리니까 괜듯만 싶어서 년들이.」

「아따 얼리지 않으면 어떻게 할 테요. 어떻게 할 테야?」

「그래도 그년이.」

「그년이란 다 무여야.」

「아 요런 년.」

주인은 팔짝 뛰면서 부영이의 볼을 갈겼다. 푹 고꾸라지는 그의 머리통을 뒤미쳐 갈기고 풀어진 머리채를 한 손에 감아 쥐면서 그는 큰소리로 그들을 위협하였다.

「이년들 다들 덤벼 봐라.」

그러나 악오른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동무가 이렇게 얻어맞고 창피한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일시에 똑같이 분이 터져 올랐다. 전신에 새빨간 핏대가 쭉 뻗쳤다. 그러나 너무도 악이 복받쳐 한참 동안은 벌벌 떨기만 하고 입이 붙어 말이 안나왔다.

「이년들 다들 덤벼라.」

놈은 머리채를 지긋이 감아 쥐면서 범같이 짖었다.

「이놈이 사람을 또 친단 말이냐.」

「너 듣기 싫으면 피차 그만이지 사람을 치느냐.」

「몹쓸 놈아!」

「개 같은 놈아!」

맥은 없으나마, 힘은 모자라나마 그들은 악과 분을 한데 모아 일제히 놈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옷자락을 붙들고 놈의 따귀도 치고 놈의 머리도 뜯고 놈의 다리에도 매어 달리고 놈의 살도 물어뜯고 그들은 악나는 대로 힘자라는 대로 벌떼같이 놈의 몸에 웅겨 붙었다.

나이 찬 몸에 힘이 좀 부치기는 하였으나 원체 뼈대가 단단하고 매서운 사나이라 놈은 몸에 들어붙은 그들을 한 손으로 뿌리쳐 뜯기도 하고 발길로 차서 떨어뜨리기도 하면서 여전히 부영이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채 이 구석 저 구석 넓은 방안을 질질 몰고 다녔다.

밑에서 밟히고 끌리는 부영이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이리저리 끌리는 대로 넓은 방 바닥에 핏줄이 구불구불 고패를 쳤다.

이윽고 한쪽에서는 분을 못 이기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몹쓸 놈아 쳐라.」

「너도 사람의 종자냐?」

「벼락을 맞을 놈아!」

「혀를 빼물고 꺼꾸러져도 남지 않을 놈아!」

「사람을 죽이네.」

「순사를 불러라!」

그들은 소리를 다하고 악을 다하였다. 나중에 주인 여편네가 기겁을 하고 쫓아왔다.

옷이 찢기고 멍이 들고 피가 흘렀다.

그것도 저것도 다 헤아리지 않고 그들은 온갖 힘을 다하여 이를 악물고 놈과 세상과 접전하였다.

6

「문 열어라.」

「자고 가자.」

밤이 익어감을 따라 문 밖에서는 취객들의 외치는 소리가 쉴새없이 높이났다.

「다들 죽었니.」

「명자야.」

「부영아.」

「채봉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새를 두고 들렸다. 그래도 안에서 대답이 없으면 부서져라 하고 난폭하게 한참씩 문을 흔들다가 무엇이라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이렇게 한 떼 가버리고 나면 다음에 또 한 떼가 나타났다.

「문 열어라.」

「웬 일이냐, 사흘이나!」

「봉선아.」

「채봉아.」

「봉선아.」

방에서는 모두들 맥을 잃고 누웠었다. 극렬한 싸움 뒤에 피곤---하였다느니보다도 실신한 듯이 잔약한 여병졸들은 피와 비린내와 난잡 속에 코를 막고 죽은 듯이 이리저리 눕고 있었다. 분이 나서 쌔근쌔근---하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기맥이 쇠진하였었다. 말없이 죽은 듯이 그들은 다만 눕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사람도 아직 그들이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피곤할 따름이다. 맥이 나면 놈과 또다시 싸워야 할 것이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봉선아.」

「내다. 봉선아.」

「너 이년 나를 괄세하니?」

「봉선아.」

「봉선아.」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하도 시쓰럽기에 봉선이는 일어나서 방을 나가 문을 열었다.

「봉선아 너 이년 나를 몰라보니?」

하면서 달려드는 사내는 자기를 맡아 놓고 사주는 나지미였다. 그러나 봉선이는 오늘만은 그를 반가운 낯으로 대하지 않았다.

「아녜요. 오늘은 안돼요.」

하면서 그를 붙드는 사내를 밀치고 문을 닫으려 하였다.

「안되긴 왜 안된단 말이냐? 사흘이나.」

사내는 그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주인 녀석과 싸우고 벌이 않기로 했어요.」

「주인과 싸웠어?」

사내들은 새삼스럽게 그의 찢긴 옷, 흐트러진 머리, 피 흔적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자 다음날 오구 오늘들은 가세요.」

「아니 왜 싸웠단 말이냐?」

「주인이 몹쓸 녀석이라우·····우리 말을 들어 주기 전에는 우리가 일을 하나봐라.」

「주인이 몹쓸 놈이어서 싸웠단 말이냐?」

봉선이는 주춤하고 뜰을 내려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을 굶기고 구 위에 죽도록 치고·····주인 놈이 천하에 고약한 놈이지 지금 저방에는 죽도록 얻어맞고 피를 토한 동무들이 죽은 듯이 누워 있다우.」

하면서 방을 가리키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봉선이의 높은 목소리에 이웃집 문전에서 떠들고 흥정하고 노래하던 사내와 계집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옹기종기 이리로 모여들었다.

봉선이는 설워서 견딜 수 없었다. 맡길 곳 없는 설움을 이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마음껏 하소연하여 보고 싶었다.

그는 뜰에 올라 서서 두 손을 들고 고함을 쳤다.

「들어 보시오! 당신들도 피가 있거든 들어 보시오! 우리는 사람이 아니요? 우리가 사람 같은 대접을 받아온 줄 아오? 개나 도야지보다도 더 천대를 받아왔오. 당신테들이 우리의 몸을 살 때에 한번이나 우리를 불쌍히 여겨본 적이 있었오? 우리는 개만도 못하고 도야지만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먹어봤나, 놀고 싶을 때 놀아 봤나, 앓을 때에 미음 한 술 약 한 모금 얻어 먹었나, 처음 들어오면 매질과 눈물에 세상이 어둡고 계약한 기한이 지나도 주인 놈이 내놓기를 하나. 한 방울이라도 더 우려내고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꼭 잡고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구 물건이다. 애초에 우리가 이리로 넘어올 때에 계약인지 무엇인지 해가지고 우리를 팔아먹은 놈 누구며, 지금 우리의 버는 돈을 한 푼 한 푼 다 빨아내는 놈은 누군가? 우리는 그놈들을 위해서 피를 짜내고 살을 말리우는 물건이다. 부모를 버리고 동기를 잃고 고향을 떠나 개나 도야지만도 못한 천대를 받게 한 것은 누구인가?」

그는 흥분이 되어서 그도 모르게 정신없이 이렇게 외쳤다. 며철 전 부영이에게 들어 두었던 말이 이제 그의 입에서 순서는 뒤바뀌었을 망정 마치 제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 같이 한 마디 한 마디 뒤를 이어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장황은 하나 그는 이것을 다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흥분된 어조로 계속 하였다.

「다같은 이목구비를 갖추고 무엇이 남보다 못나서 이 짓을 하게 되었나. 이 더러운 짓을 하게 되었는가. 남처럼 버젓하게 살지 못하고 왜 이렇게 되었는가? 우리의 팔자가 기박해서 그런가. 팔자가 무슨 빌어 먹을 놈의 팔잔가?」

사흘 전에 부영이에게 반대하여 팔자를 주장하던 그가 이제와서 확실히 팔자를 부정하였다. 그는 벌써 사흘 전의 그는 아니었다.

사흘 후인 이제 그는 똑바로 세상을 볼 줄 알았던 것이다.

「이 문둥이 같은 놈의 세상이, 놈들의 농간이, 우리를 이렇게 기구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봉선이가 주먹을 쥐고 이렇게 높이 외치자 사람 숲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오고 가운데에는 감동하여 손뼉 치는 사람도 있었다.

「옳다!」

「고년 맹랑하다.」

「똑똑하다.」

같은 처지에 있느니 만큼 그 중에 모여 섰던 이웃집 창기들에게는 봉선이의 말이 뼛속까지 젖어들어가서 그들은 감격한 끝에 길게 한숨을 쉬고 남몰래 눈물도 씻으면서 얕은 목소리로 각각 탄식하였다.

「정말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

「개만도 못한 천대를 받아오지 않았니?」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이것이 무슨 짓이냐.」

「몹쓸 놈의 세상 같으니.」

맡길 곳 없는 설움을 이제 이렇게 뭇 사람 앞에서 마음것 하소연한 봉선이의 속은 자못 시원하였다. 동시에 여러 사람 앞에서 한 번도 지껄여 본 적 없고 남이 하는 연설 한 마디들 들어 본 적이 없는 무식하고 철모르던 그가 어느 틈에 이렇게 철이 들고 구변이 늘었는가를 생각하매 자기 스스로 은근히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높은 구변으로 계속 하였다.

「우리는 이 천대를 더 참을 수 없다. 천치같이 더 속아 넘어갈 수 없다. 우리는 일제히 짜고 주인 놈과 싸웠다. 놈은 우리의 말을 한 마디도 안 들어 주고 우리를 사흘 동안이나 굶기면서 됩데 우리를 때리고 차고 죽일 놈 같으니. 지금 저 방에는 죽도록 얻어맞은 동무들이 피를 토하고 누워있다. 저 방에 저 방에.」

하면서 가리키는 그의 손을 따라 사람들은 그쪽을 향하였다.

정신없이 지껄인 바람에 잠깐 사라졌던 분이 이제 또다시 그의 가슴에 새삼스럽게 타올랐다. 그는 악을 다하여 소리소리쳤다.

「주인 놈이 죽일 놈이다. 우리가 다시 일을 하나봐라. 다시 이 짓을 하나봐라. 우리는 벌써 너에게 매인 몸이 아니다. 깍정이 같은 놈 다시 돈 벌어 주나봐라.」

주인이 바로 앞에 있는 것 처럼 그는 눈을 노리고 욕을 퍼부었다.

분통이 터져서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다시 일을 하나봐라. 이놈의 집에 이 더러운 놈의 집에 다시 있는가봐라.」

그는 이제 집 그것을 저주하는 듯이 터지는 분과 떨리는 몸을 문에다 갖다 탁 부딪쳤다.

문살이 부서지며 유리가 깨뜨려졌다.

미친 사람같이 그는 허둥지둥 다시 일어나 땅에서 돌을 한 개 찾아 들더니 봉학루라고 쓰인 문 위에 달린 붉은 기둥을 겨누었다.

다음 순간 뎅그렁 하고 깨뜨려지는 홍등이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으싹하고 조밥이 되어버렸다.

해끗한 유리 조각이 주위에 파삭 날고 집앞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하였다.

잠시 숨을 죽이고 그의 거동을 살피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수물거리기 시작하였다.

「봉선아 너 미쳤구나!」

「주인놈을 잡아내라!」

「잘깼다. 질내 이놈의 짓을 하겠니?」

「동맹파업이다.」

「잘했다!」

「요 아래 추월루에서도 했다드라!」

깨뜨려진 홍등, 어두운 이거리 이 문전을 중심으로 이 밤의 이 거리, 이 저자는 심히도 수물거리고 동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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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아침 시발 택시 한 대가 찻길에서 인도 쪽으로 굴러들어온다.

맹기호는 발걸음을 빨리 옮겨서 쫓아갔다.

「합승 안해요?」

눈치가 좀 다르다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손님을 청하는 것이 아니요, 독차로 누가 부른 모양이다.

버젓이 오르는 사람은 한 청년 신사다. 이 차를 부른 사람이 분명하다. 맹도 이제는 좀 졸업을 해서 누가 부른 차든지 좀 같이 타자는 배짱을 부리게 되어서 처음엔 물러섰다가 덮어놓고 올라탔다. 택시를 부른 젊은이 눈치가 타도 좋다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앉아 있었다. 어느 틈에 뒤에도 한 사람 타고 앞에도 두 사람이 탔다.

「좀 빨리 갑시다. 응, 이거 늦겠는데!」

아직 아홉 시는 멀었는데 이 택시 부른 사람이 퍽 조바심을 하고 서두르는 걸 보니 어떤 관청에 다니는 사람으로 여덟 시 반까지는 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서 공연히 애가 쓰였다.

차가 종로에 와 닿았다. 그는 화신 앞에 내려 달라고 청했다.

「합승이 아닌데요.」

「일행입니다.」

택시를 부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운전수는 말이 없다.

고마운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고 목례를 잊지 않고 내렸다.

물론 백 환짜리를 그에게 주었다. 기특한 사람이 있다. 요새 젊은이로 쉽지 않은 사람이다,생각을 하면서 그는 화신 앞을 서쪽으로 돌아 안국동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몇 날 전이었다. 전차는 벌써 만원이 되어서 오는 것이라 매달리거나 떼밀고 비비대고 들어가지 않으면 탈 수 없고, 더구나 버스는 말할 것도 없으니 벌써부터 단념을 한 것이고 합승을 타기로 한 그였다.

요새는 가끔 보통 택시가 와서 합승을 하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해서 이용을 해 왔는데,이날도 좀 큰 차가 하나 굴러서 인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맹은 택시인 줄 알고 달려갔다. 택시가 아니요 합승이다. 노우타이 잠바짜리가 왁 달려든다.

여느 때는 그런 경우에 애써 탈 생각도 아니하고 물러서던 그가 이날따라「에라,한번 대들어 보자」하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타기는 탔다. 정신없이 탔다. 전 같으면 탈 염도 못했지만 타려고 하다가도 밀려나오고 마는 것이었다.

맹을 떼밀어내고 올라가 타는 자들은 모두 삼십 내외의 자식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렇게도 양보할 줄을 모르나!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도의심이 없는가.」

저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른 합승이나 택시를 기다려서 늦더라도 천천히 타던 그가 이날은 제법 젊은 축에 끼어서 비비대고 올라앉은 것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나.)

팔목에 있을 시계가 없다. 가슴이 섬뜻하다. 좌우를 돌아보아야 전차와 달라서 그럼직한 사람은 없다. 운전수를 찾아서 시계가 금방 없어졌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해보았다.

「아저씨, 시계를 가진 자는 타질 않았읍니다.」

운전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이 앞만 보고 차를 몰고 있다.

「시계를 집에 놓고 온 것이나 아닙니까?」

「바닥에 떨어졌나 보시지요.」

차에 탄 사람들은 가장 동정이나 한다는 것이나 반갑지가 않았다.

몇 번을 팔목을 되보고 바지 포켓을 보고 하면서 정신없이 앉았다가 종로에 와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속으로 요새 젊은이들이 나쁘고 세월이 고약한 것을 개탄하고 공연히 여러 사람이 밀려드는 차에 덤벼 들어 탄 것을 몇 번이고 후회하면서 썩 기분 나쁜 하루를 지냈다. 왜 이렇게 실수를 하나, 이게 벌써 몇 번짼가,집에 가서 무어라고 하나, 복잡하게 사람이 밀려드는 차는 전차나 합승이나 안 타기로 작정을 하고도 또 이렇게 실수를 하는 자기 자신이 퍽 딱하게 생각 되었다.

「왜 또 그랬어,이담엔 애여 그러지 말어.」

예예,대답하고도 또 그러고 그러고 하는 어린 자식 타이르듯이 맹은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에 가깝고 먼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하나하나 머리에 떠 나와서 마음에 괴로움을 느꼈다. 하루종일 아무 일도 손에 붙지 않고 정신없이 지냈다.

다음날이 마침 월급날이라 시계가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덮어놓고 만 오 천 환을 뚝 잘라서 시계를 샀다. 시계장수에게 속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서 장사를 좀 해본 경험이 있는 조카딸을 데리고 가서 샀다.

「아저씨,물건을 사실 땐 혼자 가시지 말고 꼭 저를 데리고 다니세요. 아저씨는 으레 속으시니까.」

「그래, 너는 물건 시세를 잘 알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조카딸을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믿고 일을 시키곤 한 것이었다. 장사라고 좀 해 보는 것이 잘 안되어서 아이들 데리고 살기는 커녕 국민학교짜리 중학교 일학년짜리 공부도 시키기 어려운 형편이니 무슨 다른 도리가 있어야 하겠다고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조카를 시계장사나 시켜 보았으면 하였다. 같은 교회에 나오는 청년 가운데 상점도 안 내고 시계장사를 해서 곧잘 지내는 사림이 있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무엇이든 해보아라.」

「아무 거라도 할 테야요.」

부모 없고 남편까지 없는 조카가 독립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랐는데,물건도 잘 고르고 값 흥정도 잘하는 걸 보고,

(그만하면 장사를 꽤 하겠는걸.)

하고 다행으로 생각했다.

시계를 잃어서 손해를 보았으나 이 기회에 조카가 시계장사를 하여 장사가 잘된다면 화가 복이 되는 셈이라고 하였다.

「너 누구하고 뭘 해보겠다던 걸로 시계장사나 해보렴, 응.」

시계를 사 가지고 오면서 권해 보았으나 조카는 대답이 없었다.

시계는 샀지만——시계는 도리어 전엣것 보다 마음에 드는 것을 샀지만 돈 문제보다 시계를 잃어버리도록 한 자기 자신이 딱한 것이 괴롭고,더구나 그 시계는 바로 작년에 미국에 교육 시찰로 다녀올 적에 마침 시계를 잃어서 친구들이 사준 것이라 그 친구들 에게도 말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요새 젊은이들의 질이 나쁜 것을 몹시 개탄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특한 청년을 만나서 차를 잘 타고 종로까지 기분 좋게 왔다.

그날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나쁘고 고약한 것만 생각하고 실망하고,실패하는 일만 생각하고 마음을 괴롭히고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오후 한 시가 지났다. 웬만한 선생들은 다 나가고 학교 일이나 제 일이나 미진한 일이 있는 듯한 선생들만이 사오 인 남아 있다. 교무주임 박선생도 무슨 책을 뒤적거리고 앉아 있다.

「박선생,냉면이나 먹으러 갑시다. 일어나시오.」

옆에 있는 다른 선생까지도 바라보면서 맹은 큰 소리로 박선생을 불렀다.

「교감선생님, 오늘 한턱하시렵니까?」

「그래그래,한턱하지요. 선생님들 일어나셔요.」

「교감선생님을 발라먹으면 되나. 식구두 많으시구 어려우신데…… 우리가 대접을 해드려야지요.」

「별소릴 다 하시오, 황선생은…… 선생님들,어서들 갑시다.」

윤선생, 백선생,차선생 다음 자리에 앉아 있는 국어선생인 황선생이 어물어물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번 큰소리를 쳤다. 「식구두 많으시구 어려우신데……」어쩌구 하는 말이 듣기 싫은 것이었다.

「교감선생님이 모처럼 청하시는데 어서들 갑시다.」

교무주임이 이렇게 재촉을 해서 모두 여섯 사람이 평양루에 가서 곱배기 청하는 사람, 보통 청하는 사람 해서 냉면을 먹고 맹은 천 칠백 환을 치르고 돌아왔다. 주머니에는 겨우 오백 환짜리 한 장이 남았다. 그 누가 볼까봐 얼른 집어넣었다.

「오백 환, 오백 환.」

집에 가면 무얼 사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손주놈을 위해서 무얼 살 것이라든지,마누라가 찬거리 돈 달라고 하면 줄 것이라든지,다음날 출근할 때에 합승값이나 점심값이라 무어라 생각하면 오백 환이란 돈이 셈이 안되는 돈이다.

(왜 이렇게 남자가 대범하질 못하고 옹졸할까.)

맹은 속으로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왜 또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장한 척하고 호기를 뺐는가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에 떠오르고 지나갔다.

앞뒤를 생각해서 무슨 일을 하지 못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기분에 따라서 해버리는 것이 탈이라는 것을 맹은 잘 알면서 같은 실수를 밤낮 되풀이하는 것도 자기의 결점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오후엔 일찍 가서 쉬리라,이런 생각을 하면서 맹은 사무실에 들어갔다. 일찍 가서 쉰다는 것은 아침에 나올 때에 아내의 주의를 받고 부탁을 받은 것이요, 좀 쉬고 나서는 자기 방에 창문도 바르고 원고도 정리하고, 시간이 있으면 할일이 많다고, 생각에 예산한 것이 많았다.

「교감선생님, 손님이 오셔서 기다리고 있읍니다.」

급사아이의 말을 듣고 맹은 응접실에 들어가 보았다.’

「선생님,안녕하셔요? 아버지가 선생님이 토요일 오후쯤 와 보라구 그리셨다구 가 뵈라구 해서 왔어요.」

친구의 딸이다. 취직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우선 이력서를 가져오라고 했고,토요일 오후에 보내 보라고 했던 것을 맹은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E여학교 교장과 친하시다지요? 편지를 써주시면 제가 가 보겠어요.」

명함이나 한 장 보낼까 하고 생각하던 차인데 마침 당자가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다. 제가 가 보겠다는 것이 기특하다 하고 그는 서랍에서 양면괘지를 꺼내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

「가만 있자, 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쓰던 편지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린다.

「그럴 것 없이 내일 오후에 나하고 같이 가 보지. 편지를 가지고 가서는 안될 거야.」

맹은 다음날 오후에 종로 어떤 다방에서 만나서 대한희망원 원장 집을 같이 방문하기로 하였다.

맹은 지난 봄에 예전 어떤 여학교에 봉직하고 있을 시절의 학생이던 사람의 부탁으로 그 남편의 취직을 시켜 주려고,아는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 교장을 찾아보고, 또 어떤 여학교 교감에게도 부탁을 단단히 했건만 아무 데도 틀려서 몹시 미안했던 일을 생각하였다.

직업이 없어서 곤란한 사람에게 양요리 대접을 받고, 또 집에 고기며 계란 꾸러미를 가져온 것을 받은 것이 늘 마음에 꺼렸던 것이다. 애초에 못한다고 딱 거절을 했더면 좋지 않았던가. 집에 계란 꾸러미를 가져온 것은 옛 선생이라고 찾아오면서 들고 온 것이니 무방하다고 스스로 변명을 하더라도 고급 양식 대접을 받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시처럼 마음 한구석을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는 취직 부탁은 받지 않으리라. 취직 알선에는 아예 나서지 아니하리라. 그는 얼마나 맹세를 했는지 모른다.

「요새 세상에 친구가 어디 있어요. 그저 돈이 있든지 세력이 있든지 해야지,일개 이름 없는 중학교의 교감으로 있는 당신을 무엇이 대단하다고 청을 들어주겠소. 공연히 부질없이 다니지 마시구 가만히 계세요.」

동창이 교장으로 있는 유명한 중고등학교에 교장을 찾아갔다가 거의 냉대를 받고 돌아와서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집에 들어왔을 때에 하던 아내의 말을 생각하였다.

「자리가 없으니까 그렇지,머,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있나! 세상이 다 그런걸 할 수 없지만, 하긴 그 사람이 교장이 된 다음엔 달라졌어, 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좀……」

아내에게도 체면을 세워 보느라고 변명을 했다. 개탄을 해보았으나 아내의 말이 옳기는 옳기 때문에 말끝을 맺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들이 예전 선생이라고 생각이나 하는 줄 아셔요. 제게 긴하니까 알랑거리고 찾아다니지, 일이 안되면 성의가 없느니 되지 않을 걸 공연히 찾아댕겼느니 그런다오. 글쎄 왜 대답을 하구 나서요.」

아내에게 이런 핀잔까지 받고 또 한마디 대꾸도 못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맹은 슬슬 걸어서 전차를 타거나 합승을 타려고 종로 화신 쪽으로 왔다. 감기기운이 있고 몸이 거북하기 때문에 이미 예정한 대로, 자기가 예정했다는 것보다 아내의 부탁을 받은 대로 일찍 집에 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합승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선생님 어디 가셔요? 오늘 K여사의 출판 기념회에 안 가셔요? 가십시다. 선생님 같은 문단의 선배가 나가시면 퍽 기뻐할 겁니다.」

「글쎄, 이번 그의 기념회에는 꼭 가 볼려고 하긴 했지만……」

뜻밖에 시인 C를 만나서 깜박 잊어버렸던 K여사의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열시가 지나서야 고단한 다리를 끌고 집에 들어갔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맹은 아침에 어느 날보다도 약간 일찍 일어나서 다음날 주기로 한 원고를 정리하고 나서 아침밥을 먹고,정하고 다니는 교회엘 갔다가 예배가 끝나는 대로 친구 한 사람과 종로로 나왔다. 냉면을 한 그릇씩 먹고 나서 친구는 한강 구경을 가자는 것을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고 간신히 거절을 하고 병으로 누워 있는 친구의 딸 H양을 만나기로 한 다방을 향해서 바삐 걸었다.

(장마 뒤에 한강 구경도 한번 가 볼 만한 것인데, 그러나 어린 사람하고 약속한 일을 지키느라고 거절한 것이니 당연하지. 아무렴, 친구의 딸을 오라고 해 놓고 딴 데를 갈까.)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약속한 다방에 갔더니 친구의 딸은 벌써 와 앉아 있다.

여대 출신이면서도 별로 다방 출입을 안했던 모양인지 퍽 어색해하는 것을 억지로 자기도 마실 겸,코오피 한 잔을 같이 먹고 일어나서 영천 방면으로 가서 불광동행 버스를 탔다.

실상 남을 데리고 가기는 가면서 자기 자신이 길을 잘 모른다. 가는 방향도 집도 잘 모르고 짐작으로 가는 것이다. 불광동 종점까지 갔으나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다. 지서에 가서 물어 보았다. 시외버스를 타고 좀더 가다가 내리면 된다는 것이다. 걸어가도 얼마 안된다는 것이다. 친구의 딸 보기가 미안스럽다. 파주행 버스를 기다려 타고 가서 결국 원장집을 찾았다. 집은 찾았으나 원장 자신이 막 시내에 들어가고 없다는 것이다.

기다릴까, 갈까 하고 망설이다가 원장이 곧 온다고 해서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전화는 없다고 해도 편지라도 하고 올걸, 설사 만난다 해도 될지도 모르는 걸 공연히 왔다고 후회하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친구의 딸에게는 그런 체를 내지 않기로 노력했다.

「잠깐 다니러 갔다니까 곧 올 거야. 이원장은 나하고 퍽 가까운 사이요,그리고 상당한 사업가니까 어떻게든지 일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취직을 시켜 줄 거야.」

자기 변명 겸 갑갑하게 앉아 있는 친구의 딸을 위로할 겸 실상은 자기 자신을 위로할 겸 이따위 소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이원장 이란 사람은 예전에 맹이 봉직하고 있던 여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인데 그때에 여러 학생 중에 유난히 맹을 따랐고 또 맹 자신이 귀애했고 그리고 6•25사변 때 부산 피난 당시에 맹의 신세를 진 사람이었다. 여자라고 해도 웬만한 남자 이상의 활동력이 있고 교제 잘 하고 뱃심이 대단하고 게다가 소녀시절부터 매력 있는 용모를 타고났기 때문에 해방 이후로 특히 동란 이후에 고관들과 미군을 교제하여서 사회사업으로 교육사업으로 눈부신 활동을 했고 놀라운 업적을 보여주었다.

초여름 긴 해가 기울고 어슬어슬 해가 질 무렵에야 원장은 지프차를 몰아 가지고 돌아왔다.

「어떻게 이런 궁벽한 데를 찾아오셨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원장은 반가이 인사를 하고 자기가 경영하는 학원과 고아원의 시설을 대강대강 구경시켜 놓고는 그동안 지낸 이야기,미군부대가 많이 떠난 후에는 그 영향을 받아서 운영이 곤란하기 때문에 사업을 줄여서 요새 학원은 문을 닫아 버렸다는 이야기를 벌여놓아서 맹은 미처 친구의 딸의 취직건은 이야기를 꺼낼 새도 없었다.

「벌써부터 한번 와 보려고 하면서도……」

「바쁘신데 이런 데를 어떻게 오셔요. 선생님이 저를 기억하시고 계신 것만 감사하지요.」

원장은 학교를 갓 나온 듯한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취직을 시켜 주려고 온 것을 벌써 눈치채고 그동안 발길을 하지 않고 있다가 취직 부탁을 받고 비로소 찾아온 것을 원망 비슷이 또 우습게 생각하면서 말을 좋게 둘러서 거절하는 것을 맹은 나중에 시내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알았다.

「오래간만에 이렇게 절 찾아오셨는데 여기는 시골이 돼서 아무것두 없어서…… 시내로 들어가시지요,선생님……」

원장은 자기가 타고 왔던 지프차를 타라고 서두르는 바람에 맹은 그냥 따라 들어왔다. 친구의 딸은 자기 집에 가 보아야겠다고 먼저 가 버리고 두 사람은 국제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였다.

(아무려나 나보다 낫구나. 제자요, 여자연만 나보다 낫구나. 결국 오늘도 거절을 당했구나. 사업을 축소한다는 것이 사실 인지,듣기 좋게 말하는 취직 알선에 대한 거절인지도 모르겠다.)

무작정 장담을 하고 데리고 왔던 친구의 딸에 부끄러웠다.

「선생님, 오늘 더운데 수고 많이 하셨어요. 피곤하시겠어요.」

말이 적은 여자로서 제법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던 친구의 딸의 표정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댁에까지 모셔다드리지요.」

원장의 친절한 말이 고맙기는 하고 속으로는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으면 하면서도 가다가 볼일이 있다고 딴소리하고 종로 네거리 화신 앞에서 내렸다.

종로거리는 어느새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번쩍거리고 버스며 합승에는 말할 것도 없고 고급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려서 좀처럼 그칠 줄을 모르니 건너갈 수도 없어서 행은 얼빠진 사람처럼 사방에서 어른거리는 네온 사인을 바라보고 어리둥절해 서 있었다.

「선생님은 약하시고 인제는 나이도 유만하신데 맡은 일이나 보시고 글이나 쓰시고 가만히 계셔요. 웬만한 일은 못한다고 딱 거절을 하셔요. 제가 학교 있을 땐 몰랐지만 나중에야 알았어요. 선생님은 참 좋으시면서도 그게 결점이야요.」

「무얼 알았던가?」

「선생님이 저의 모교를 떠나시게 된 동기랄까 이유가 그게 아니야요? 예스,예스만 하시고 노우 소리를 못하신다는 게……」

(아이 고단하다…… 어떻게 집엘 갈까.)

하던 끝에 바로 전에 호텔 식당에 원장하고 이야기하던 일이,아니 옛 제자의 경고를 듣던 일이 생각나서 맹은 응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서 괴롬을 느낄 때 하는 버릇이었다.

가시처럼 괴로왔다. 원장의 까먹고 닳아먹은 태도가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얼마 만에 간신히 길을 건너서 화신 건너편 차를 타는 곳에 건너와 섰다. 마침 길가에 금붕어 가게가 있다.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한가히 아무 짐도 책임도 없이 가볍게 꼬리를 치고 떠다니는 금붕어가 행복스럽구나…… 네가 나보다 낫구나.)

차를 기다리는 동안 가게 안에 진열해 놓은 금붕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를 들여다보는 동안 합승을 기다리는 갑갑증도 면하고 아까 원장의 이야기도 잊어 버릴까 하고 들여다보고 있다가, 또 딴 생각을 하게 된다.

(금붕어나 사가지고 가자 !)

애들이 원하고 그리고 아내도 금붕어나 길러 보았으면 하는 소리를 들었고 며칠 전에,

「금붕어 장사가 지나가는 걸 돈이 없어서 못 샀군.」

하던 아내의 말이 생각나서 어항과 금붕어 한 쌍을 사가지고 얼마 만에 청량리행 합승을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열 시가 넘어서였다. 근래에 맹이 이렇게 늦어지기는 처음이었다.

몸을 씻고 일찍 쉬려고 마음먹고 들어간 맹의 계획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반가운 손님 오셨어요.」

아내의 말이다. 젊었을 적부터 가까이 지내는 친구로 지방에서 농촌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 밖에도 두어 사람 손님이 있다. 한 사람은 한 사십이 약간 넘은 듯한 여자, 한 사람은 키가 큰 젊은 여자다. 사십이 넘은 듯한 여자는 서울서 다방도 하고 가까운 시골서 여러 가지 사업과 장사를 한다는 활동가이다.

용무는 곧 알았다. 맹이 데리고 있는 조카가 장사를 해보겠다고 해서 맹 자신을 보증으로 돈 오십만 환을 돌려준 사람은 지금 온 친구요,사십대 넘은 여자는 내용으로 그 돈의 전주였다. 친구가 자기 돈을 준 것이 아니요,그 여자의 돈을 얻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눈으로 웃는 모습과, 가끔 보이는 매서운 눈띠가 창기 타입이요, 여우형의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느꼈다. 돈을 곧 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젊은 여자는 친척인데 어디 취직을 부탁하는 것이다. 다 골치 아픈 사건이다.

손님은 곧 갔다. 그러자 조카가 울면서 고백하는 것은 기막힌 이야기다.

「그 여자는 글쎄 계를 하다가 빚을 잔뜩 지고 어디로 도망을 했대요,이걸 어떻게 해요?」

「그러게 애초에 내가 안된다고 그랬지. 네가 하두 조르기에 해주었더니 종내…… 잘 됐다. 내가 물지 별수 있니?」

그 여자라는 것은 서울 어떤 변두리에서 다방을 같이 하기로 하고 조카의 돈을 맡았던 사람이다. 맹은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것도 처음엔 반대했고 다방을 한다는 것은 처음엔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조카가 울고 있는 꼴을 보고 결국 도장을 찍어 준 것이다. 결국 맹이 책임지게 된 일이다.

「애들이 어항을 깨뜨렸어요. 금붕어두 죽구 어떻게 해요.」

아내의 걱정소리가 마루에서 들린다.

「아이구,이놈의 팔자야.」

맹은 이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층층대를 올라가는 발걸음이 몹시 허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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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와 살림을 하기는, 내가 열 아홉 살 먹던 봄이었읍니다.

시방은 이래도, 삼십도 못 된 년이 이런 소리를 한다고 웃지 말아요. 기생이란 스무 살이 환갑이라니, 삼십이면 일테면 백 세 장수한 할미장이가 아니에요. 그때는 괜찮았답니다. 이 푸르족족한 입술도 발그스름하였고, 토실한 뺨볼이라든지, 시방은 촉루(髑髏)란 별명고차 듣지마는 오동통한 몸피라든지, 살성도 회고, 옷을 입으면 맵시도 나고, 걸음걸이도 멋이 있었답니다. 소리도 그만저만히 하고, 춤도 남의 흉내는 내었답니다. 화류계에서는 그래도 누구 하고 이름이 있었는지라, 호강도 웬만히 해보고 귀염도 남부럽잖게 받았읍네다. 망할 것 우스워 죽겠네.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하고 제 칭찬 만 하고 않았구먼.

어쨌든 나도 한시절이 있은 것은 사실입니다. 해구멍이 막히지도 안 해 요리집에서 인력거가 오고 가고만 보면 새로 두 점 석 점 전에는 집에 돌아온 적이 별로 없었읍니다. 그나마 집에 와서 곧 자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 대개 집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또는 손님과 같이 올 때가 많았읍니다. 그래가지고 또 고달픈 몸을 밤새도륵 고달프게 굴다가, 해뜬 뒤에야 인제 내 세상인가 보다 하고 간신히 눈을 붙이면 사정 모르는 손들이 낮부터 달려들어서 고단한 몸을 끌고 꽃 구경을 간다. 들놀이를 간다, 절에를 나간다 합니다그려. 그거니 몸이 피로치 않을 수 있읍니까. 놀기란 참 고된 일입니다. 어느 때는 사지가 늘어지고, 노는 것이 딱 싫고 귀찮아서, ‘이년의 노릇을 언제나 마나’ 하고, 탄식이 나옵니다.

그럴 때 나의 눈앞에 그이가 나타났읍니다. 나보담 네 해 맏이인 그는, 귀공자답게 얼굴도 곱상스럽고 돈도 잘 쓰며 노는 품도 재미스럽고 호귀로왔읍니다. 나는 그만 그에게로 마음이 솔깃하고 말았지요. 그이도 나에게 적지않게 빠진 모양이었읍니다. 그럭저럭 관계가 깊어 가자, 그이는 나와 살자고 조르지 않겠읍니까. 마침 기생 노릇도 하기 싫던 차이고 밉지도 않은 사내라, 내심으론 이게 웬 떡이냐 싶었지만, 그래도 기생 행투가 그렇지 않아 이 핑계 저 핑계로 그이를 바싹 달게 해서 돈 천 원이나 착실히 빼앗아서 어머니를 주고 마지못해 하는 듯이 살림을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그이는 간이라도 빼어먹일 듯이 나를 사랑해 주었읍니다. 나를 얻기 전에도 오입깨나 해본 모양이었으나, 나이가 나이라, 어리고 참다운 곳이 있었읍니다. 나의 말이면 콩을 팥이라 해도 곧이들었읍니다. 나의 청이라면 무엇이고 낙종(諾從)치 않는 것이 없었읍니다. 이 눈치를 알아본 나는 그이로부터 갖은 것을 졸라 내었읍니다. 우리 든 집 문서도 내 이름으로 내게 하고, 자개농이랑, 자개의 걸이랑, 한간 벽에 맞는 큰 체경이랑, 물론 온갖 비단과 포목을 필필이 들여오게 하고, 철철에 따르는 비녀며 사흘거리로 진고개에 가서는 순금반지 진주반지 보석반지를 사게 하였읍니다.

이 외에 어머니의 생신이라는 둥, 일가의 혼례에 쓴다는 둥, 장사에 쓴다는 둥, 빛을 졌다는 둥, 갖은 핑계를 만들어서 그의 돈을 긁어 내었읍니다. 무슨 내 변명이 아니라 이런 짓을 한 게 전부가 나의 욕심 사나운 까닭도 아닙니다. 사라고 하고 달라고 하는 그것이 어쩐지 좋고 재미스럽기도 하였어요. 그리고 또 그것이 그에게 피우는 애교이고 아양이었어요. 그것뿐도 아니지요. 내 말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들어 주나 곧 그이가 나한테 홀리었는지를 자질도 하고 싶고, 뜻대로 성공을 하면 물건을 얻은 것보담 몇 갑절 더 기뻤읍니다. 물론 어머니가 뒷구멍으로 부추 기기도 하였지만.

그인들 몇만금을 제 수중에 두고 쓰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팔고 빛을 내는 것이 하루 이틀 아니고 물쓰듯 하는 돈을 언제까지 대어 갈 수가 있겠읍니까. 같이 산 지 석 달이 못 되어 돈 주변할 길이 막힌 모양이었읍니다. 아무리 귀한 자식의 빚봉수라도 한 번 두 번이지 전부 아버지가 갚아 줄 리가 있겠어요. 더구나 구두쇠로 유명한 그의 부친이 그때까지 참은 것도 장한 일이지요. 마침내,

“너 같은 놈은 자식으로 알지도 않으니 죽든지 살든지 나는 모르겠다.”

하게 되었읍니다. 그전에도 여러 번 그러고 얼렀지만 이제는 아주 사실로 나타나게 되었겠지요.

빚장이가 벌떼같이 일어났읍니다. 요리집에서, 금은방에서, 선전, 드팀전 더구나 고리대금업자한테서, 빚장이는 문간을 떠날 새가 없었읍니다. 부자집 외동아들로 자라나 도무지 졸리는 것을 모르던 그이는 단박에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가기 시작하였읍니다. 문간에서 찾는 소리만 나면 온 몸을 옹송그리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꼴이란 곁에서 보아도 가없었읍니다. 빚에 졸리는 것이 딱 하기도 하고 또 자격지심도 나서,

“나 때문에 이런 곤란을 당하시지요. 내가 몹쓸 년이야.”

하며는 그이는,

“그게 무슨 말이야.”

하며 질색을 하고,

“왜 채선(彩仙)이 때문이람. 내가 못생긴 탓이지.”

하고는 도리어 면목없는 듯이 고개를 숙이었읍니다.

이런 중에 그에게 또 기막힌 일이 생기었지요.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그이가 돈 쓰기도 급하였고 또 못된 동무의 꾀임에 빠져 아버지 도장을 위조하여 빛을 낸 일이 발각이 된 것이에요. 돈 꾸어 준 놈도 물론 알고 한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나는 모른다고 딱 거절을 하니까 이제는 그이를 보고 얼으딱딱거리며 사기를 했느니, 인장 위조를 했느니, 만일 일주일 안으로 갚지 않으면 고소를 하느니 하고 야단을 합니다. 간이 작고 마음이 어린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타들어가겠지요. 몇 번 그의 어머니를 새에 두고 또는 직접으로 자기 아버지께 말을 해보는 모양이었으나, 도무지 일이 안될 줄은 그 찡긴 눈썹과 붙어진 새죽지 같은 어깨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읍디다. 그이는 조바심이 되어서 못견디는 듯이 누웠다, 앉았다. 일어 섰다 금시로 집을 뛰어나가는가 하면 금시로 또 뛰어들어오겠지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돌부처나 무엇같이 한 자리에 우두커니 않으면 멍하니 바람벽만 바라보고 어느 때까지 손끝 하나 꼼짝도 아니 하였읍니다.

내일같이 그 일주일이란 귀한 날이고 오늘같은 저녁이었읍니다. 여름답게 횐 구름이 봉오리봉오리 솟은 하늘엔 밝은 달이 걸리었읍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서 마루로 나와 달을 쳐다보고 있었읍니다. 그때 나는 문득,

“작년 이맘때에는 한강에서 선유를 하였는데.”

하였읍니다. 굼실거리는 시원한 물결은, 그림자를 부수는 배가 눈앞에 선하게 떠보이매 갑자기 덥고 갑갑해서 견딜 수 없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뻔지 좋은 나인들 사면팔방을 빚에 졸리어 머리를 못드는 그이에게 뱃놀이 가잘 염이야 있어요.

“이런 밤에 처박히어 나가지두 못하구”

하매 번화롭던 옛날 기생 생활이 그리웠읍니다. 살림 들어온 것이 후회가 났읍니다. 이렇게 마음이 들뜨는 판에 곁에서 훌쩔훌쩔하는 소리가 나지 않겠읍니까. 돌아다보니 그이가 울고 있지 않아요.

“왜 우세요”

하니까 얼른 대답은 아니하고 설움이 복받치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이윽히 코만 들이마시다가 껄떡이는 목소리로,

“채선이는, 채선이는 내가, 내가 감옥엘 들어가면 또 기생으로 나가겠지?”

하고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을 나에게로 돌리겠지요. 내 속을 알아차렸나 보다 하고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놀아먹은 보람이 있어서 담박에,

“흉헙게스리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하고 질색을 하였읍니다.

“아니야, 내가 감옥엘 가면 채선이는 또 기생에 나가서 뭇놈의 사랑을 받을 거야.”

감옥에 간단 말이 조금 안되었지만 속으로는 ‘암 그렇지’ 하면서도 입밖에 내어서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설령 나으리가 감옥에 간다손치더라도 나야 당신 사람이 아니에요. 왜 또 기생으로 나가겠읍니까. 댁에 가서 행랑방 구석으로 돌아다닐지라도 나으리의 나오기만 기다리지요”

라고 꿀을 담아 붓는 듯한 마음에 없는 딴청을 부리었읍니다. 이 말에 그이는 매우 감동된 모양이었읍니다. 바싹 다가들며,

“그게 참말이야?”

“그럼 참말 아니구.”

“그래 내가 감옥엘 가도 수절을 하고 나를 기다리겠단 말이야?”

“그럼 수절하구말구.“

천연덕스럽게 꼭 그러할 듯이 따끈해서 대답을 하였으되 속으로는 수절이란 말이 어째 춘향전이나 읽는 듯해서 우스웠습니다.

“만일 내가 감옥엘 아니 가고 죽는다면.”

하고 그이는 나의 얼굴을 딱 노리었읍니다. 그 시선이 전에 없이 날카로와서 슬쩍 외면 을 하면서도

“따라 죽지?”

하고서 청승맞게 ‘너 죽고 나 살면 열녀 되나 한강수 깊은 물에 빠져나 죽지’ 하는 노래를 읊었읍니다. 나도 죽일 년이지요. 그 소리를 들으며 그이는 또 얼빠진 듯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무슨 단단한 결심을 한 것같이 벌떡 일어서며,

“채선이, 할 말이 있으니 방으로 들어가자”

하지 않겠어요. 나는 ‘흥, 또 안고 끼고 하려나 보다’ 하였읍니다. 그이는 아직도 숫기가 남아 있어 남보는 데, 아니 남이 볼 만 한 데에서는 나의 손목 한 번 시원스럽게 못 쥐고 그리고 싶을 때엔 꼭 방으로 끌고 들어 갔읍니다. 더구나 요사이 와서는 몹시 근심을 한 뒤라든지 또는 비관한 뒤라든지 반드시 나를 쓰다듬고 어루만지기를 잊지 않았읍니다. 이런 짐작을 한 나는 조금 앙탈도 하고 싶었으나 그의 운 것이 가없어서 말대로 방에 들어갔읍니다. 방에 들어온 그는 방문을 모두 안으로 닫아걸겠지요. 내 짐작이 틀리지 않구나 하면서도,

“이 6월 염천에 방문을 왜 닫아요, 남 더워 죽겠는데.”

라고 까자를 올렸건만 그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고 제 할일을 다해 버립디다. 전 같으면 부끄러운 듯이 눈을 찡긋하기도 하고 손짓으로 말 말라고도 하였으련만. 나는 벌써 내 입술에 닿는 그의 입술, 나의 젖가슴으로 허리로 도는 그의 팔을 기다렸건만 그이는 이상스럽게 엄연한 얼굴로 마주 앉아 있을 뿐입니다. 얼마 만에 그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채선이 네나 내나 이 세상에 더 구차히 산다 한들 또 무슨 낙을 보겠니, 차라리 고만 죽어 버리는 게 어떠냐?”

하겠지요. ‘미쳤나, 죽기는 왜 죽어’ 하면서도,

“그래요, 고만 죽어 버려요”

라고 쉽사리 찬성을 하였읍니다.

“그래 나하고 같이 죽을 테냐?”

“나으리하구 죽는다면 죽는 것도 꿀이지요.“

“내야말로 너하구 같이 죽는다면 한이 없겠다.“

하는 그이의 소리는 떨리었읍니다. 나도 일부러 목이 메이며,

“내야말로 나으리하구 죽으면 한이 없어요.“

“말만 들어도 고맙다만 정말 나하구 죽을테냐?”

“원, 다심도 하이, 죽는다면 죽는 게지, 그렇게 내가 못미덥단 말이에요”

하고 가장 남의 속을 못도 알아준다는 듯이 새파랗게 성을 내었읍니다. 그리하는 것이 어째 신파 연극을 하는 듯싶어 재미스러웠어요. 설마 죽을 리는 만무하고 이왕이면 이대도록 너한테 정이 깊다는 걸 표시함도 좋았지요. 그이는 나의 기색을 살피더니 그만하면 되었다 하듯이 벌떡 일어나 자기가 쓰는 가방을 가져오더니 그 안에서 횐 봉지를 하나 꺼내겠지요.그 봉지 속으로는 밤낱만한 고약 같은 것 두 개가 나왔읍니다.

(저것이 아편이구나) 하매 가슴이 조금 섬뜩 어리었으되 그리 놀라지는 않았읍니다. 그 약으로 말하면 그이가 돈 안 주는 자기 아버지를 놀라게 하려고 몇 번 자기 어머니에게 보이는 것을 곁에서 구경을 하였으니까요. 그것을 먹고 죽는다고 야단을 해서 돈을 얻어온 일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시방 와서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지마는 같이 죽자는 말 끝에 그것이 나온지라 시방껏 달떴던 마음이 조금 긴장은 됩디다. 그이는 자릿기를 당기더니 그 약을 앞에다 놓고 이윽히 내려다보며 닭의 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지 않겠읍니까. 그때만은 나의 가슴도 찌르르하였읍니다.

한참 약을 내려다보고 울고 있던 그이는 무슨 비장한 결심을 한 듯이 몸을 흠칫하더니 그 약 한 개를 얼른 입에 집어넣고 한 개를 집어 나를 주지 않겠읍니까. 나도 서슴지 않고 그 약을 입에 넣었읍니다. 약을 머금은 그는 손가락으로 자릿기를 가리켜 나한테 물을 마시란 뜻을 보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시키는 대로 물을 마시었으나 물만 넘기었지 약은 혀밑에 감춰 둔 것은 물론입니다. 내야 꿈에도 죽을 마음이 없었읍니다. 같이 사는 정의에 그이의 빚에 졸리는 것이 딱하지 않은 바이 아니고, 그 때문에 살림살이가 전같이 호화롭지는 못하였을망정 그걸로 비관할 까닭은 조금도 없었읍니다. 정 못 살게 되면 도로 기생으로 나갈 뿐입니다. 벌써 살림살이가 물려서 그렇지 않아도 기생 생활이 그립던 나인데 아직 나이 어리고 남에게 귀염 받던 일, 호강하던 일이 어제 일같이 역력히 기억에 남아 있는 나인데, 앞길에도 기쁨과 호강이 춤추며 기다리고 있는 줄 믿는 나인 데, 왜 죽자는 마음이 추호만친들 생기겠읍니까. 내 몸뿐만 아니라 그이가 죽는다는 것도 믿지 않았읍니다. 처음엔 실없는 거짓말로 알았고 약을 머금은 뒤에라도 또 무슨 연극을 꾸미는가 보다, 내일이고 모레면 그 댁에서 허덕지덕 돈을 갖다 줄 터이니 또 홍청거릴 수 있구나 하고 도리어 기쁘기도 하였읍니다. 독약을 먹고 하는 노릇이라 가슴이 조금 아니 떨린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어찌해요. 그이는 나의 물 마시는 것을 보더니 매우 안심된 듯이 내 손에서 자릿기를 빼앗아 꿀떡 마셔 버렸읍니다. 그이가 정말 약을 삼킨 것은 좁은 목구멍으로 굵은 약덩이가 넘어가느라고 얼굴이 새빨개지고 어깨를 추스르며 목줄기가 구불텅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읍니다. 그러더니 고만 뒤로 벌떡 자파지겠지요. 약 힘이 삽시간에 퍼진 것은 아니겠지만 약을 먹었다 하는 생각에 정신을 잃었는가 보아요.

이 뜻밖의 일에---그이로 보면 조금도 뜻 밖의 일이 아니겠지만---나는 더할 수 없이 놀래었읍니다. 저이가 정말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칼날같이 가슴을 찌르자마자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온 몸을 뒤흔들었읍니다. 무어니무어니하여도 고작해야 열 아홉 살 먹은 계집애가 아니에요.

이 난생 처음 당하는 큰일에 어안이 벙벙 하여 ‘악’ 소리도 치지 못하고 가위눌린 눈만 휘등그리다가 나도 죽었네 하는 듯이 뒤로 자빠졌읍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이가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방안을 왔다갔다하지 않아요. 아편을 먹으면 자는 듯이 죽는다는 것은 빨간 거짓말인가 보아요. 답답하고 뉘엿거려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핫핫’ 하고 괴로운 숨을 토합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로 두 손을 입안으로 넣어 왝왝 헛구역질을 하겠지요. 아마 속이 너무도 괴로움에 죽자는 결심도 간 곳 없고 먹은 약을 토해 낼 작정이던가 보아요. 그러나 약은 아니 나오는 듯하였읍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나도 일변 무섭기도 하였지만 못 견딜이만큼 괴롭기도 하였읍니다. 그의 받는 고통이 도무지 내 탓이 아니에요. 나로 하여금 돈을 쓰고 그 돈을 물리다못하여 죽는 죽음이니 내 탓이 아니고 누구의 탓이겠옵니까. 그런데 나는 죽을 때까지 그를 속이었읍니다. 거짓 죽는 시능을 해서 그를 속이었읍니다. 내가 만일 따라 죽는다 아니하고, 그를 말리었던들 그이는 아니 죽고 말았을지도 모르지요. 그 약을 먹고 저런 욕을 아니 볼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내 손으로 그이를 죽인 것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율니까. 그때에야 물론 이렇게 사리를 쪼개서 생각은 안했지마는 차마 그이의 괴로와하는 꼴을 볼 수는 없었읍니다. 나는 진저리를 치고 눈을 딱 감았읍니다. 그때입니다. 무엇이 나의 어깨를 흔들지 않아요. 번쩍 눈을 떠보니까 그이가 걷어쳐 올라가는 개개풀린 눈으로 내 옆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겠지요.

나는 소름이 쪽 끼치어 흠칫하고 몸을 소스라쳐 일으켰읍니다.

나의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이도 따라 일어서며 용서해 달라는 표정으로,

”괴롭지, 괴롭지, 공연히 나 때문에”

라고 더듬거리고는 눈물이 핑 도는 듯하였읍니다. 그 소리는 어쩐지 무서움에 떠는 나의 창자 속까지 스며 들어가는 듯하였읍니다. 나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읍니다. 그러자 그이는 바짝 다가들며 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안고 또 한 손을랑 나의 입에 대입니다. 죽어가는 그이, 아니 벌써 송장이나 진배없는 그이의 손이 나에게 닿았건만 나는 조금도 전같이 두렵고 무서운 증이 들지 않았읍니다.

“배앝아라, 배앝아. 어서 배앝아”

하고 그이는 손가락을 입 안으로 꾸역꾸역 들여밀겠지요.

이때에 입 안에 든 약을 생각한 나는 흘리던 눈물을 뚝 그치고 ‘에그머니!’ 싶었습니다.

나는 그이의 지중한 사랑에 감읍하였으되, 그이가 돌려 내려고 얘를 쓰는 것이로되 나는 그 약을 내어놓기가 죽어도 싫었읍니다. 나는 차라리 삼켜 버려야 하였읍니다. 몇 번을 침을 모아 그 약을 넘기려 하였으나 원수의 덩이가 큰 까닭인지 세상 넘어가지를 않습디다. 그러는 판에 내 입에 들어온 그이의 손가락이 벌써 그 약을 집어내겠지요. 그 약을 집어내자 나를 바라보던 그이의 얼굴은 시방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곱상스럽던 얼굴이 그렇게 변할까요. 나는 어떻다 형용할 수가 없읍니다.

제 계집이 딴 사내를 끼고 자는 것을 보는 본남편의 얼굴이나 그러할는지요. 얼굴의 표정은 분노 그것이었읍니다. 원한 그것이었읍니다. 입술을 악물고 드러난 이빨 하나만 보고라도 누구든지 질겁을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잊히지 않는 것은 그 눈자위예요. 일상 생글생글 웃는 듯하던 그 눈매가 위로 홉뜨이 어서 미친 개 눈깔같이 핏발을 세워 나를 흘긴 것이에요. 그 무섭기란 시방 생각하여도 몸서리가 쳐져요.

그이는 숨이 진 뒤에도 그 홉뜬 눈을 감지 않았읍니다. 물론 나는 고약한 년이지요. 그 를 죽을 때까지 속인 몹쓸 년이지요. 그러나 그이는 나에게

“괴롭지”

라고 묻지 않았어요.

”배앝아”

라고 하지 않았어요. 돌려내려고 내 입에 손까지 넣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악을 삼키지 않고 그저 있음을 보았으면 내 마음은 어떠하든지 그이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생각한만큼 거룩한 사랑을 가진 그이는 기뻐해야 옳을 일이 아니에요. 좋아해야 옳을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성을 내고 나를 흘길 일이 무엇이에요. 내 그른 것은 어찌 갔든지 그때에는 그이가 야속한 듯싶었어요. 야속하다니보담 의외이었어요. 그런데 시방 와서는 그 흘긴 눈이 떠오를 적마다 몸서리를 치면서도 어째 정다운 생각이 들어요. 그립은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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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정히 오월 중순이라. 비온 뒤끝은 아직도 깨끗지 못하여 검은 구름발이 삼각산 봉우리를 뒤덮어 돌고 기운차게 서서 흔들기 좋아하는 포플러도 잎새 하나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서 있을 만치 그렇게 바람 한 점도 날리지 않는다. 참새들은 떼를 지어 갈팡질팡 이리 가랴 저리 가랴 하며 왜가리는 비 재촉하는 울음을 깨쳐 가며 지붕을 건너 넘어간다.

이때에 어느 집 삼 칸 대청(원문에는 ‘삼간대청’)에는 어린아이 보러 온 6, 7인의 부인네들이 혹은 앉아서 부채질도 하며, 혹은 더운 피곤에 못 이기어 옷고름을 잠깐 풀어 젖히고 화문석 위에 목침을 의지하여 가볍게 눈을 감고 있는 이도 있으며, 혹은 무심히 앉아서 처음 온 집이라 앞뒤를 살펴 보기도 하며, 혹은 살림에 대한 이야기도 하며, 혹은 그것을 듣고 앉았기도 한다. 마루에는 어린애의 기저귀가 두어 개 늘어놓아져 있고 물주전자가 놓여 있으며 물찌끼가 조금씩 남아 있는 공기가 3, 4개 널려 있다. 또 거기에는 앵두 씨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큰 유리화대접에 반도 채 못 담겨 있는 앵두는 물에 젖어 반투명체로 연연하게 곱고 붉은빛이 광선에 반사되어 기름 윤이 흐르게 번쩍번쩍한다.

이때에 열어젖힌 뒷문으로 어린애 우는 소리가 사랑으로부터 멀리 들리자 산후의 열기로 인하여 신음하다가 일어나 앉은 아기 어머니는 어푸수수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쪽지어 흑각(黑角: 물소의 검은 뿔, 또는 그것으로 만든 비녀)으로 꽂고 기운 없이 뒷문턱에 기대어 앉았다가 깜짝 놀라 일어서며 사랑으로 나가 아기를 고쳐 안고 들어온다. 아기의 두 눈에는 약간 눈물이 흘러 있고 모기에 물린 자국으로 두어 군데 붉은 점이 찍혀 있다. 어머니 팔에 안기어 오는 기쁨인지 또렷또렷한 눈망울을 굴리어 군중을 둘러보다가 아는 듯 모르는 듯 씽긋 웃는다. 군중의 시선은 모두 이 아기에게 집중하여 있는 중 모두 “아이고, 웃는구나.” 하고 다시 웃을까 하여 어르기도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손을 만져 보기도 한다. 아기는 모르는 체하고 몸을 돌리어 어머니 가슴에 입을 돌리어 젖을 찾는다.

저편 구석에 담배 물고 시름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앉은 부인은 어떻게 보면 거진 사십쯤 되어 보이고 어떻게 보면 겨우 삼십이 넘어 보인다. 어디인지 모르게 귀인성이 있어 보임직한 얼굴에는 얼마만한 고생의 흔적인지 주름살이 이리저리 잡혀진다. 거기다가 분을 좀 스친 모양이라 햇빛에 그을어 꺼무죽죽한 얼굴빛에 겉돌며 넉사 자 이맛전에 앞머리를 좌우 평행으로 밀기름에 재어 붙이고 느짓느짓 땋아 느짐하게 길쭉이 쪽을 지어 은비녀로 꾹 찔러 놓은 것이며 모시 적삼 화장은 길쭉하여 손등을 덮고 설핏한 모시 치마에 허리를 넓게 달아 느직하게 외로 여며 입은 것은 아무리 보아도 서울 부인네가 아닐 뿐 아니라, 어디인지 모르게 고상하게 보이는 것은 예절 있는 양반의 집에서 자라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여러 부인네들은 아기들 앞으로 와서 어르고 만져 보나 다만 홀로 이 부인만은 아무 말 없이 멀리 건너다보다가 흥 하고 이상한 코웃음을 한번 웃고 눈을 내리깔며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옆에 있는 재떨이에 놓고 허리를 굽혀 마루 아래 대뜰에다 탁탁 털며 이상하게 슬픈 기색을 띤다. 이 부인은 다시 전과 같이 앉더니 애기가 젖먹는 양을 바라보며,

  • “흐흥, 그거 보시오. 이렇게 많이들 앉았는 중에 아기 우는 소리를 그 어머니밖에 들은 사람이 없소그려. 그렇게 자식과 어머니 사이에는 끊으려도 끊을 수 없는 애정이 엉키어 있건마는 나 같은 것은…….”

하고 목이 메여 말끝을 아물지 못하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군중은 모두 이상히 여겨 왜 그리 서러운 기색을 띠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잠잠히 있고, 그와 동행하여 온 그의 친구 김 부인이 옆에 앉았다가 그를 쳐다보며,

  • “또 청승이 끌어 나오는군. 아들 둘의 생각을 하고 그러지요.”

한다. 군중의 의심은 더욱 깊어진다.

  • “아들 둘을 어떻게 하였기에요?”

하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부인은 역시 아무 말 없이 앉았고 김 부인이 또 이 부인을 쳐다보며,

  • “그 내력을 말하려면 숙향전의 고담이지요.”

한다. 군중에게는 더욱 호기심을 갖게 되고 궁금증을 일으킨다.

  • “어째서 그래요? 좀 이야기하시구려.”

하는 것이 군중의 청구(請求)이었다. 김 부인은 또 그를 쳐다보며,

  • “이야기하구려.”

권한다. 그 부인은 역시 잠잠히 앉았더니,

  • “이것 보십쇼.”

하고 두 손을 내밀며,

  • “세상에 사주팔자란 알 수 없습디다. 분길 같던 내 손이 이렇게 마디마다 못 박혀 볼 줄 뉘 알았으며 5, 6월 염천까지 무명 고쟁이로 날 줄 뉘 알았으리까(치마를 걷어치고 가리키는 무명 고쟁이는 오동빛이라). 나도 남부럽지 않게 호의호식으로 자라나서 시집가서도 마루 아래를 내려서 본 일이 없었더랍니다. 이래 보여도 나도 상당한 집 양반의 딸이랍니다. 내 내력을 말하자면 기가 막혀 죽을 일이지요.”

이렇게 차차 그의 내력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 “내 아버지께서는 평양 감사까지 지내시고 봉산(鳳山) 고을도 사시고(군수를 지냈다는 뜻), 안성(安城) 고을도 사셨지요. 우리 백부(伯父)님은 이 판서(李判書)집이시지요. 그리하여 우리 고향(故鄕)인 철원(鐵原)골에서는 우리 친정집 일파(一派)의 세력이 무섭지요. 그러한 집에서 아들 4형제 틈에 고명딸로 귀엽게도 자랐지요. 지금은 갖은 고생을 다 겪어서 이렇게 얼굴이 썩고 썩었지요마는, 내가 열두서너 살 먹었을 때는 색씨꼴도 박히고 빛깔이 희고 얼굴도 매우 고왔었으며 머리는 새까마니 전반 같았지요(여자의 머리채가 숱이 많고 치렁치렁함을 비유하는 말). 그리하여 열 살 먹던 해부터 시골 서울 할 것 없이 재상의 집에서들 청혼들을 해댔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머니는 딸자식 하나 있는 것이 그렇게 원수스러우냐고 하시지요.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 못하십니다. 그러나 딸자식이란 쓸데없어요. 열여섯 살 먹던 해 3월에 기어이 남의 집으로 가게 되옵디다.” “신랑은 몇 살이고요?”

하고 한 부인은 묻는다. “신랑은 열세 살이었댔지요. 우리 시부모되시는 김 판서(金判書)하고 우리 아버지와는 절친한 사이셨지요. 아마 두 분이 술잔을 나누시다가 우리 혼인이 정해진 모양입디다. 그렇게 어머니 떨어지기 싫어서 울면서 80리나 되는 곳으로 시집을 갔지요. 우리 집에서도 없는 것 없이 처해 가지고 갔거니와 그 집에도 단 형제뿐으로 필혼(畢婚: 마지막 혼사)이라 갖은 예물이며 채단이야 끔찍끔찍하였었지요. 시부모님에게 귀염인들 나같이 받았으리까. 말이 시집이지 세상에 나같이 어려운 것 모르고 괴로운 것 모르게 시집살이를 하였으리까. 혼인한 지 삼 년이 되도록 태기(胎氣)가 없어서 퍽도 걱정들을 하시고 기다리시더니 팔 년 되던 해 우연히 태기가 있어 가지고 아들을 낳아 놓으니 그 어른들께서 좋아하시는 것이야 어떻다 말할 수 없었어요. 은(銀) 소반 받들 듯하십디다. 바로 그 해에 우리 바깥양반이 춘천 군청(春川郡廳)에 군주사(郡主事)를 하였었지요. 그럴 동안에 첫애가 세 살을 먹자 또 아우가 있어서 낳으니 또 아들이지요. 밤이면 네 식구가 옹기옹기 앉아서 재롱을 보고 하면 타곳에서 외롭게 지내는 중에도 재미있게 지냈지요. 그러나 내 복조가 그만이었던지 집안 운수가 불길하려 함인지, 둘째 아이 낳던 그 해 동짓달에 일본 설(新正을 가리킴)이라고 하여 연회에 가시더니 밤이 늦어서 들어오시는데 술이 퍽 취한 듯싶습디다. 펴놓은 자리 위에 옷도 벗지 않고 탁 드러누워 머리를 몹시 아프다고 끙끙 앓더니 별안간에 와르르 게우는데 벌건 선지피가 두어 번 칵칵 엉키어 나옵디다그려. 나는 간담이 서늘하여지옵디다.”

여기까지 듣고 앉았던 여러 부인네의 가슴은 졸여지는 모양이라. “그래서요?” 하며 이야기 계속하기를 원하는 이도 있으며, 혹은 “저런, 어쩔까!” 하고 차마 들을 수 없겠다는 것처럼 찌푸린다. 혹은 “아이고, 딱해라.” 한다. 이 부인(李夫人)은 목이 메여 침 한 번을 꿀떡 삼키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한다.

  • “그때 드러누우신 후로 그 이튿날부터 사진(仕進: 벼슬아치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함)이 무엇입니까. 하루에 미음 한 번이나 자시는 둥 마는 둥 하고 담이 점점 성하여져서 벌건 피담을 한 요강씩 뱉지요. 그렇게 걷잡을 새 없이 나날이 병이 중(重)하여 가옵디다그려. 그래서 큰댁에 편지를 한다, 전보(電報)를 한다 하였더니 우리 맏시아주버니께서 다 모아 데리고 가시려고 곧 오셨습디다. 그리하여 우둥부둥 짐을 싸 가지고 불시로 모두 떠나 왔지요. 그러한 일이 또 어디 있었으리까. 큰댁에를 들어서니까 공연히 무슨 죄나 지은 것같이 어른 뵐 낯이 없습디다. 아니나다를까 시어머님되는 마님께서는 나를 보고 어떻게 하다 저렇게 병을 냈느냐고 원망을 하시며 두 내외분은 식음을 전폐하시고 느러누워 계시니 집안이 그런 난가(亂家)가 어디 있으리까. 인삼이며 사슴뿔이며 갖은 좋다는 약은 다 사들이고 용하다는 용한 의원은 멀고 가깝고 간에 데려다가 사랑에 두고 날마다 맥을 보고 약을 쓰나 만약(萬藥)이 무효이라. 돈도 많이 들었거니와 사람의 간장인들 그 얼마나 졸였었으리까. 필경은 그 이듬해 8월 스무하룻날 가서 그 몸을 마치었지요.”

하며 적삼 끈을 집어 두 눈을 씻는다. 군중은 모두 “저런 어쩔까?” 하고 혀들을 툭툭 한다. 이 부인은 한풀이 죽어서 겨우 말끝을 잇는다.

  • “그러니 스물다섯 살인 꽃 같은 나이에 세상 재미를 다 버리고 죽은 이도 불쌍하거니와 여편네가 30도 못 되어 혼자되니 그 신세야 말할 것 무엇 있겠소. 오죽 방정맞아 보였으리까. 왜 그런지 모든 사람이 이 몸을 모두 박복한 년으로 보는 듯싶어서 어찌 부끄러운지 혼자된 후로는 사람을 쳐다보지를 못하고 지내 왔지요. 친정 오라버니가 보러 오셨는데 하얗게 소복을 하고 보기가 어찌 부끄럽던지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아서 즉시 얼굴을 들지 못하였더랍니다.”

한 부인이 말하되,

  • “참 옛날 어른이시오. 아 그렇다뿐이에요. 생전 죄인이지요. 어디 가서 고개를 들어 보고 말소리를 크게 내어 보며 목소리를 높여 웃어 보아요. 그러기에 몸을 마친다 하고 과부가 되면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는가 봐요. 참, 기가 막히지요. 그러나 요사이 과부들은 어디 그럽디까. 벌건 자주 댕기를 아니 드리나, 분들을 못 바르나. 그러니 세상이 망하지 않겠소.”

하며 누었다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담뱃재 떠느라고 허리를 굽히는데 보니, 그의 머리에는 조적 댕기가 드려 있는 것이 이 부인도 과부 중에 한 사람인 듯싶고 말하는 것이 경험한 말 같다.

이 부인은 다시 말을 이어,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 못나서 그랬어요.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 형제를 두고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그것들로 위로를 많이 받으시고 나도 그것들에게 의지하게 되었지요. 우리 시아버님께서는 우리 세 식구를 어떻게 불쌍히 여기시는지 살림에나 재미를 붙여 살으라고 하시고, 둘째 아드님 몫으로 지어 두셨던 삼백 석 추수 받는 논과 밭을 내 이름으로 증명(證明)을 내어주시고 큰댁 바로 앞집을 사셔서 분통같이 꾸며서 상청하고 우리 세 식구들 세간을 그 동짓달에 내어주시며 조석으로 드나드시면서 보아주십디다. 살림도 내외가 가져서 해야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하여 재미가 나지요. 마지못하여 살림에 당한 것을 하나 사면 ‘어디를 가고 나 혼자 이렇게 살려고 애를 쓰나.’ 하는 마음이 생기고 걷잡을 새 없이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앞을 가리우지요. 우리 친정에서는 내가 불쌍하다고 철철이 나는 실과(實果)를 아니 사 보내 주시나, 아이들 옷을 아니 해 보내 주시나, 남편 없이 시아버님께 돈을 타서 쓰니 오죽 군색하랴 하고 일용(日用)에 보태어 쓰라고 돈을 다 보내 주시고 하지요. 아, 참 세월도 빨라요. 살아서 있는 것같이 조석상식(朝夕喪食)을 받들기에 큰 위로를 받고 밤에라도 나와서 마루에 있는 소장(素帳: 궤연 앞에 드리우는 흰 포장)을 보면 집을 지켜주는 듯싶어서 든든하더니 그나마 3년상을 마치고 나니 더구나 새삼스럽게 서러운 마음이 생기고 허수하며 섭섭하기가 말할 길 없습디다. 따라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이지요. 죽지 못하여 살아가는 동안에 한 해 가고 두 해 가서 4년이 되었지요. 그 해 8월에 마루에서 혼자 큰아이 녀석 추석 빔을 하고 앉았으려니까 전부터 우리 큰댁에 드나들면서 바느질도 하고 하던 점동 할머니가 손자를 등에 업고 들어옵디다. 그는 전에 없이 내가 혼자 사는 것이 불쌍하다는 둥 오죽 서럽겠느냐는 둥 하며 무슨 말인지 서울 어느 점잖은 사람이 상처(喪妻)를 하고 젊은 과부를 하나 얻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문벌(門閥)도 관계치 않고 재산도 상당하며 어쩌고저쩌고 늘어놓습디다. 나는 아마 그냥 그런 이야기를 하나 보다 하고 무심히 들었을 뿐이었지요. 그런 뒤 얼마 있다가 어느 날 또 할멈이 오더니 그런 말을 또 하면서 감히 무엇이라고는 못하고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매우 이상스럽겠지요? 어찌 괘씸스러운지 나 역시 모르는 체하였을 뿐이지요. 아, 이것 좀 보시오. 며칠 뒤에 또 와서는 불고 염치하고 날더러 마음이 없냐고 아니합니까. 내가 누구 앞에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악을 쓰니까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납디다. 그런 뒤로는 나는 어찌 분하든지 밤이면 잠이 다 아니 오겠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업수이여기는 것 같아서 어찌 서러운지 과부되었을 때보다 더해요. 그런데 이거 보세요. 망신살이 뻗치려니까 어렵지가 않겠지요. 도무지 날짜까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마는, 그 해 9월 열이튿날이었어요. 저녁밥을 다 해치우고 안방에서 신선해서 방문을 닫고 어린애 젖을 먹이느라고 끼고 드러누웠으려니까 별안간에 마당에서 우리 큰애 이름 ‘순영아, 순영아.’ 두어 번 부르는 남자의 소리가 나겠지요. 나는 시부(媤父)께서 나오셨나 하고 젖을 떼고 일어서려는데 다시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우리 시부님의 목소리는 캥캥하신데 그렇지가 않고 우렁찬 소리겠지요. 나는 이상스러운 마음이 생겨서 잠깐 문틈으로 내다보았지요. 어스름 밤이라 자세히는 볼 수 없으나 키가 훨씬 큰 사람이 뒷짐을 지고 그 손에는 단장을 휘적휘적 흔들며 안을 향하여 섰는 것이 잠깐 보아도 우리 집 내(內) 사람은 아니옵디다. 나는 불현듯 무서운 생각이 생겨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벌벌 떨며, ‘그 누구신가 여쭈어 보아라.’ 하였지요. 그자는 내 목소리를 듣자 반가운 듯이 마루 끝으로 가까이 오며 천연스럽게 ‘네, 서울서 왔습니다.’ 해요. 나는 다시 떨리는 소리로, ‘서울서 오시다니 누구신가 여쭈어 보아라.’ 한즉 그자는 버쩍 마루로 올라서며, ‘왜 점동 할머니께 들으셨지요. 서울 사는 장 주사라고요…….’ 하며 바로 익숙한 사람에게 대하여 말하듯이 반웃음을 띠며 말하겠지요. 나는 무섭고도 분하여서, ‘나는 그런 사람 몰라요. 그런데 대관절 남의 집 대청에를 아무 말 없이 들어오니 이런 법(法)이 어디 있소.’ 하며 주고받고 할 때에 마침 대문 소리가 나자 우리 시어머니되는 마님이 들어오시는구려.”

군중은 모두 “아이고, 저런 어쩔까.”, “어쩌면 꼭 그때.” 하며 마음을 졸여한다.

  • “그러니 꼭 그물에 걸린 고기지요. 넘치고 뛸 수 있나요. 그러니 장 주사라는 작자가 밖으로 뛰어나가야 옳겠습니까. 안으로 뛰어들어와야 옳겠습니까. 어쩔 줄을 몰라 그랬던지 방으로 뛰어들어오는구려. 나는 속절없이 누명을 쓰게 되었지요. 시모님께서는 그자의 태도가 수상스러운 것을 보시고 곧 눈치를 채신 모양이라, 방으로 쫓아 들어오시더니 눈을 똑바로 떠 쳐다보시며, ‘웬 사람이냐?’고 하시더니 다시 나의 태도를 유심히 보시는구려. 그러니 그 자리에서 무어라고 말하겠소. 하도 기가 막히는 일이라 아무 말도 아니 나와서 잠잠히 서 있을 뿐이었지요. 원래 괄괄하신 어른이라 곧 내게로 달려드시더니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 뺨 저 뺨 치시며, ‘이년, 남의 집을 착실하게도 망(亡)해 준다. 생때 같은 서방 죽이고 무엇이 부족하여 밤낮 뭇놈하고 부동을 하며 서방질을 하니? 이년, 그런 뭇서방놈들이 앞뒤로 널렸으니까 네 서방을 약을 먹여 병 내놓았구나. 에,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년. 내 집에 일시라도 머물지 말고 저놈 따라 나가 버려라. 어서 어서!’ 하는 벼락 같은 재촉이 거푸 나는데 어느 뉘라서 거역할 수 있던가요. 시골이라 앞뒷집에서 큰소리가 나니 남녀노소 물론하고 마당이 미어지도록 구경꾼이 밀려들어 오는구려. 오장을 버선목이라 뒤집어 뵈는 수도 없고 그 자리에서 내가 억울하다 하면 누가 곧이를 듣겠소. 남영 홍씨(洪氏)네 떼라니 순식간에 모여들더니 그년 어서 쫓아내 보내라는 말이 빗발치듯 합디다. 그렇게 원통할 길이 또 어디 있었으리까. 다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 맙소사 할 뿐이었지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부모님에게 큰소리 한 마디 들어 보지 못하고 자라났는데 머리가 한 움큼이나 빠지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멍이 퍼렇게 들도록 어떻게 맞았지요. 이것 좀 보시오(윗입술을 올려치니 간간이 금(金)을 넣어 번쩍번쩍 하는 앞니를 보이면서). 이것도 그때에 어찌 몹시 얻어맞았던지 그때부터 잇몸이 부어서 순색으로 쑤시더니 6달 만에 몽땅 빠지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앞니를 모조리(앞니 여섯을 가리키며) 해 박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그 시로 당장에 내쫓겼지요. 아이 둘은 물론 뺏기고요. 쫓겨 나와 갈 데가 있나요. 첫째 남이 부끄러워서 조그만 바닥이라 즉시로 온 성내(城內)에서 다 알게 되었지요. 할 수 없이 우리 친정 편으로 멀리 일가 되는 집을 찾아가서 그 집 행랑 구석 얼음장 같은 구들 위에서 그 밤을 앉아 새웠었지요. 손발이 차다 못하여 나중에는 저려 오고 두 젖이 뗑뗑 불어 아파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사람이 악에 바치니까 눈물도 아니 나오고 인사도 차릴 수 없습디다. 아무려면 어떠랴 하고 발길을 기다려 사람을 보내서 어린아이를 훔쳐 오다시피 했지요. 그 이튿날 늦은 조반 때쯤 되어서 보교(步轎: 정자 모양의 지붕에 사방을 장막으로 두른 가마의 한 가지) 하나가 들어오더니 그 뒤에는 어느 하이칼라 하나가 따라 들어오는데 잠깐 보니 어제 저녁에 내 집에서 방으로 뛰어들어오던 사람 비슷합디다. 나는 그자를 보자 곧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지며 분한 생각을 하면 곧 내려가서 멱살을 쥐고 마음껏 한판 해 내었으면 좋겠습디다. 바로 호기스럽게 어느 실내 마님이나 모시러 온 듯이 날더러 타라고 하겠지요. 어느 쓸개 빠진 년이 거기 타겠습니까. 그러자니 자연 말이 순순히 나가겠습니까. 남에게 누명을 씌운 놈이라는 둥 내 계집된 이상에 무슨 말이냐는 둥 점점 분통만 터지고 꼴만 드러나지요. 보니까 벌써 앞뒤가 빽빽하게 구경꾼이 들어섰구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곳을 떠나는 것이 일시(一時)가 바쁘게 되었지요. 큰댁 하인(下人) 놈들이 웅기중기 서서 구경하는 양을 보니까 고만 어떻게 부끄러운지 아무 소리가 아니 나오고 부지불각(不知不覺) 중에 아이를 끼고 보교 속으로 피신을 하여 버렸지요. 얼마를 한없이 가서 어느 산골 촌구석 다 쓰러져 가는 초가 앞에다 보교를 놓더니 날더러 내리라고 합디다. 그리고 원수의 그자는 정다이 나를 들여다보며 시장하지 않느냐고 묻겠지요. 참, 꿈인들 그런 꿈이 어디 있으리까. 분한 대로 하면 뺨을 치고 싶었으나 차마 남의 남자에게 손이 올라가야지요.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까지도 꼴을 들키고 싶지 아니하여서……. 거기서 이럭저럭 근 10여 일이나 지냈지요.”

이제껏 열심히 듣고 앉았던 애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 “그러면 혼인은 언제 했어요. 거기서 했나요.”

하고 묻는 말에 이 부인은 어물어물하며 잠깐 두 뺨이 불그레진다.

  • “그러면 어떻게 해요. 아무려면 그 계집 아니라나요. 그러기에 지금이라도 그때 내 살을 그놈에게 허락한 것을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분하지요. 내가 지금만 같았어도 무관하지요. 그때만 해도 안방 구석만 알다가 졸지에 쫓겨나서 물 설고 산 설은 곳으로 가니 그나마도 사람을 배반하면 이년의 몸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날 잡아 잡수 하고 있었지요. 그러기에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내가 목이라도 매서 못 죽었나 싶으지요. 자살도 팔자니까요……. 그리고 장 주사는 서울 집 사 놓고 데리러 오마 하고 떠났지요. 나는 어린애 데리고 거기 며칠 더 있다가 하루는 염치 불구하고 우리 친정을 찾아 나갔지요. 마침 그 동네 사람 하나가 평강으로 간다고 해서 애를 업고 생전 처음으로 50리 걸음을 하여 저녁때 우리 집 문앞에를 다다르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벌벌 떨려서 차마 대문 안에 발이 들여놓아집디까. 그러나 이를 깨밀어 물고 쑥 들어갔지요. 우리 집에서야 80리 밖의 일을 아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내려오시며 ‘이게 웬일이냐?’고 하시고 오라버니댁들도 뛰어내려와서 아이를 받아 들어가고 야단들입디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진지상에 고기 반찬을 해서 놓으면 꼭 반만 잡수시고 오라범댁들을 부르셔서 ‘이것은 홍집(홍씨 집안에 시집간 여자를 일컫는 말) 누이 주어라. 세상에 부부의 낙(樂)을 모르니 좀 불쌍하냐.’ 하시고 밤이면 잊지도 않으시고 ‘홍집 자는 방이 춥지나 않느냐.’ 하시며 꼭 물으시지요. 그렇게 호강스럽게 그 겨울 동안에 잘 먹고 잘 입고 지냈지요. 그 이듬해 3월 초엿샛날 아침나절이었지요. 건넌방에서 아버지 마고자를 꾸미고 있으려니까 손아래 오라범이 얼굴이 시퍼래져서 건넌방 미닫이를 부서져라 하고 열어젖히더니 퉁명스럽게 내 앞에다가 무슨 전보 한 장을 내어던집디다. 까막눈이라 볼 줄을 아나요. 옆에 앉았던 그 오라범댁더러 좀 보아 달라고 하였지요. 한참 보더니 이상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아이고, 형님. 순영이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이게 누구입니까. 아버님 함자로 왔는데 오늘 온다 하고 서랑(壻郞: 사위) 장필섭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요. 그런 원수가 어디 있으리까. 그러자 별안간에 문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키는 멀쑥하니 삼팔 두루마기 자락이 너풀거리며 금테 안경을 번쩍거리고 서슴지 않고 중문을 들어서 중청(重聽: 귀머거리)같이 안마당으로 들어오더니 마루 끝에 걸터앉는구려. 우리 어머니는 그만 이불 쓰시고 아랫목에 드러누우시고요. 우리 오빠들은 동네 집으로 피신하고 나는 부엌에 선 채로 오도 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섰으려니까 오라범댁이 ‘형님에게 온 손님이니 형님 나가셔서 대접하시오.’ 하는 권에 못 이길 뿐 아니라, 누구나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억지로 나가서 들어가자고 하여 건넌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지요. 아랫목에 하나, 윗목에 하나 섰을 뿐이지 무슨 말이 나오겠습니까. 갈수록 산이요, 물이라더니 죽을 수(數: 운수)니까 할 수 없습디다. 왜 하필 그때 우리 아버지는 사흘 전에 큰댁 제사에 가셨다가 돌아오십니까.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우리 어머니더러 왜 드러누웠냐고 하시겠지요. 어머니는 몸살이 났다고 하십디다. 다시 마루로 나오셔서 다니시다가 댓돌에 벗어 놓은 마른 발막신(앞부리가 넓적하게 생겼는데 거기에 가죽을 댄 마른신, 흔히 잘사는 집의 노인이 신었다)을 보시더니 오라범댁을 부르셔서 이게 웬 남자의 신이냐고 하시는구려. 오라범댁은 마지못하여 어물어물하면서 ‘평강형에게 손님이 왔어요.’ 하지요. ‘홍집에게 남자 손님이 웬 손님이며 남자 손님이면 으레 사랑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거늘 그 방에 들어앉는 손님이 대체 누구란 말이냐?’ 하시더니, ‘홍집 나오라.’고 두어 번 큰소리로 부르시는구려. 나는 그만 겁결에 건넌방 뒷문 밖으로 뛰어나갔지요. 그래서 가만히 섰었으려니까 별안간에 누가 내 뒷덜미를 부러져라 하고 치며 머리채를 휘어잡는구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우리 아버지시지요. 두 말씀 아니하시고 사뭇 아래위로 치시는데 아픈지 만지 하옵디다. 아이구 어머니 살리라고 악을 쓰나 누가 내다보기나 하옵디까. 지금도 장 주사는 그때 나 매 맞은 것을 생각하면 불쌍하다고는 하지요.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나를 앞장을 세우고 나서야 옳지요. 자기는 훌쩍 나가서 자동차를 잡아 타고 갔구먼요. 그러니 하인 등쌀에 남이 부끄러워 있을 수도 없거니와 우리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오라범댁들에게 왜 그놈을 부쳤느냐고 조련질(못되게 굴어 남을 괴롭힘)을 하시고 나를 내쫓으라고 하시지요. 할 수 없이 그날 저녁에 친정에서까지 쫓겨나서 아이를 업고 정처없이 나섰지요. 우리 어머니는 20리까지 쫓아 나오시며 우시는구려. 길거리에서 그렇게 모녀가 마지막 작별을 하였지요. 그러니 인제야 장가에게밖에 갈 곳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서울이 어디 가 박혔는지, 서울은 어떻게 하여서 간다 하더라도 그자의 집이 어디인지는 알아야지요. 아무려나 빌어먹어도 자식들하고나 같이 빌어먹으려고 40리나 되는 철원으로 가서 길에서 놀고 있는 우리 순영이를 훔쳐 가지고 다시 주막 있던 집으로 왔지요. 우리 집에서 나올 때에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쌀 판 돈 3원을 집어 주셔서 그것으로 밥값을 치르고 있었으나 그까짓 것 쓰려니까 얼마 되나요. 열흘도 못 가서 다 없어졌지요. 할 수 있나요. 그때부터 그 집 바느질도 하고 아이를 거두어도 주고 하며 세 식구 얻어먹고 지냈지요. 여보 말씀 마시오. 제법 어디 가 더운 밥 한술을 얻어먹어 보아요? 뭇상에서 남는 밥찌꺼기나 해가 한나절이나 되어서 겨우 좀 얻어먹어 보지요. 시골집이라니요. 여편네라도 허리를 못 펴고 다니지요. 단칸방에서 주인 식구 다섯하고 여덟이 자면 평생에 어디가 옷고름 한번을 풀어 보고 다리를 펴고 자 보리까. 알뜰히도 고생도 하였지요. 그나마도 가라면 어쩝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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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100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수가 없는 염서(炎署)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무작정 널따란 백지 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 된다. 그럼──나는 최서방네집 사랑 툇마루로 장기나 두러 갈까? 그것 좋다.

최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서방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최서방네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 시 지난 후니까,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에 틀림없다.

나는 최서방의 조카를 깨워 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서방의 조카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낫지―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여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번 두어서 열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수 없다.

한번쯤 져 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의례히 질 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 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이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 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나면 도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일부러 져준다는 것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저 최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영 방심 상태가 되어 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할 것 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세(些細)한 승부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는 없나?

내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인간 이욕(利慾)이 다시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신경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해 버려야 한다.

2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 빈약한 물이 소리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다 축 늘어져서 허더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다 결국 치열한 곡예의 역(域)에서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 본다.

지구 표면적의 100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 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漂着)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 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렁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은 실색(失色)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루를 갈기갈기 찢는 것과 다름 없는 추악한 색채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荒漠)하고 추악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래도 자살 민절(悶絶)하지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조한 권태 일색으로 도포된 것이리라. 일할 때는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칵 막히게 싱거울 것이요,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겨우 황원(荒原)처럼 거칠고 구지레하게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떨어져도, 그것은 뇌성(雷聲)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村童)이 범에게 물려가도, 그것은 맹수가 사는 산촌에 가끔있는 신벌(神罰)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전선주 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흥분할 수 있으랴.

팔봉산 등을 넘어 철골 전선주가 늘어섰다. 그러나, 그 동선은 이 촌락에 엽서 한 장을 내려뜨리지 않고 섰는 채다. 동선으로는 전류도 통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방이 아직도 송명(松明)으로 어둠침침한 이상, 그 전선주들은 이 마을 동구에 늘어선 포플라나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희망이 있던가? 가을에 곡식이 익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희망은 아니다. 본능이다. 내일. 내일도 오늘 하던 계속의 일을 해야지. 이 끝없는 권태의 내일은 왜 이렇게 끝없이 있나?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생각할 줄 모른다. 간혹, 그런 의혹이 전광과 같이 그들의 흉리(胸裏)를 스치는 일이 있어도, 다음 순간 하루의 노역(奴役)으로 말미암아 잠이 오고만다. 그러니, 농민은 참 불행하도다. 그럼 이 흉악한 권태를 자각할 줄 아는 나는 얼마나 행복된가?

3

대싸리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어왔으니까 그저 들었을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마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천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蓬髮)이 작소(鵲巢)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서 희귀한 겸손한 겁장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쟁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旅人)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한한 시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수운 위험한 지대이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랜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 대를 두고 짖지 않은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인제는 돌이나 나무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느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깐에 가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은 수비할 아무 대상도 없으니까다.

최서방네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양구(良久)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본다. 밤낮 다니던 길, 그 길에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풋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의 수위술을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날이나 남았나 전연 알 길이 없다.

4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태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아니,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도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살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自意識)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한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가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것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조차가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 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덩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수구(瘦軀)를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이면? 배인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위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畜類)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동해(童孩)들에게도 젊은 촌부(村婦)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집 부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가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례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 넝쿨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 넝쿨의 뿌리 돌친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너라도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하여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 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보았다는데 지나지 않는다.

5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村童)들을 원숭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대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나는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는 중의 웅덩이 속을 들여다 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도한다. 무수한 오점이 방향을 정돈해 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소택 속에 이런 앙징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벌레를 먹겠지. 그러나,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벌레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들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를 향하여 군중적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하류로만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중로(中路)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덩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덩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그 웅덩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러나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식이다. 야우(野牛)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읍니다──하는, 마치 폐병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수소의 그것보다도 더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위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인인가보다. 내 생면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는 소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략하는 체해보임이리요?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불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6

길 복판에서 6,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赤髮銅膚)의 반라군(半裸群)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두른 베두렁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6세 내지 7,8세의 <아이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 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으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 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가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피고, 또 다른 풀과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하다. 한 10분 동안니나 아무 말이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본다.

10분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도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 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중겅중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에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더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위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 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 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나?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 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 놓았다. 아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 최후의 창작 유희였다. 그런 그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7

날이 어두웠다. 해저(海底)와 같은 밤이 오는 것이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자기 부패작용이나 하고 있는 웅덩이 속을 실로 송사리떼가 쏘다니고 있더라. 그럼 내 장부속으로도 나로서 자각할 수 없는 송사리떼가 준동하고 있나보다. 아무렇든 나는 밥을 아니 먹을 수는 없다. 밥상에는 마늘장아찌와 날된장과 풋고추조림이 관성의 법칙처럼 놓여 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이 음식이 내 입에, 내 혀에 다르다. 그러나 나는 그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마당에서 밥을 먹으면, 머리 위에서 그 무수한 별들이 야단이다. 저것은 또 어쩌라는 것인가? 내게는 별이 천문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시상(詩想)의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향기도 촉감도 없는 절대 권태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피안(彼岸)이다. 별조차가 이렇게 싱겁다.

저녁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면, 집집에서는 모깃불의 연기가 한창이다.

그들은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잔다. 별을 쳐다 보면서 잔다. 그러나 그들은 별을 보지 않는다. 그 증거로는 그들은 멍석에 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눈을 감자마자 쿨쿨 잠이 든다. 별은 그들과 관계없다.

나는 소화를 촉진시키느라고 길을 왔다 갔다 한다. 돌칠 적마다 멍석 위에 누운 사람의 수가 늘어간다. 이것이 시체와 무엇이 다를까? 먹고 잘 줄 아는 시체──나는 이런 실례로운 생각을 정지해야만 되겠다. 그리고 나도 가서 자야겠다.

방에 돌아와 나는 나를 살펴 본다. 모든 것에서 절연된 지금의 내 생활──자살의 단서조차를 찾을 길이 없는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흉맹한 형리처럼──나는 그 형리를 피할 수 없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치 심심해 해야 되고, 기막힐 만치 답답해 해야 된다.

그럼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지냈던가? 이런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냥 자자! 자다가 불행히, 아니 다행히 또 깨거든 최서방의 조카와 장기나 또 한 판 두지. 웅덩이에 가서 송사리를 볼 수도 있고, 몇 가지 안 남은 기억을 소처럼 반추하면서 끝없는 나태를 즐기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출처] http://www.jikji.org/%EA%B6%8C%ED%83%9C?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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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인왕(仁王)--

바위 위에 잔솔이 서고 잔솔 아래는 이끼가 빛을 자랑한다.

굽어보니 바위 아래는 몇 포기 난초가 노란 꽃을 벌리고 있다. 바위에 부딪치는 잔바람에 너울거리는 난초잎.

여(余)는 허리를 굽히고 지팡이로 아래를 휘저어보았다. 그러나 아직 난초에는 사오 척의 거리가 있다. 눈을 옮기면 계곡(溪谷).

전면이 소나무의 잎으로 덮인 계곡이다. 틈틈이는 철색(鐵色)의 바위로 보이기는 하나, 나무밑의 땅은 볼 길이 없다. 만약 여로서 그 자리에 한 번 넘어지면 소나무의 잎 위로 굴러서 저편 어디인지 모를 골짜기까지 떨어질 듯하다.

여의 등뒤에도 이삼 장(丈)이 넘는 바위다. 그 바위에 올라서면 무학(舞鶴)재로 통한 커다란 골짜기가 나타날 것이다. 여의 발아래도 장여(丈餘)의 바위다. 아래는 몇 포기 난초, 또 그 아래는 두세 그루의 잔솔, 그 바위 아래로부터는 가파른 계곡이다.

그 계곡이 끝나는 곳에는 소나무 위로 비로소 경성 시가의 한편 모퉁이가 보인다. 길에는 자동차의 왕래도 가맣게 보이기는 한다. 여전한 분요(紛擾)와 소란의 세계는 그곳에 역시 전개되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 서 있는 곳은 심산이다. 심산이 가져야 할 온갖 조건을 구비하였다.

바람이 있고, 암굴이 있고, 산초 산화가 있고, 계곡이 있고, 생물이 있고, 절벽이 있고, 난송(亂松)이 있고― 말하자면 심산이 가져야 할 유수미(幽邃味)를 다 구비하였다.

본시는 이 도회는 심산 중의 한 계곡이었다. 그것을 오백 년간을 닦고, 갈고, 지어서 오늘날의 경성부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협곡에 국도(國都)를 창건한 이태조의 본의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 산보객의 자리에서 보자면 서울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미도(美都)일 것이다.

도회에 거주하며 식후의 산보로서 풀대님 채로 이러한 유수(幽邃)한 심산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는 점으로 보아서 서울에 비길 도회가 세계에 어디 다시 있으랴.

회흑색(灰黑色)의 지붕 아래 고요히 누워 있는 오백 년의 도시를 눈아래 굽어보는 여의 사위에는 온갖 고산식물이 난성(亂盛)하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와 눈아래 날아드는 기조(奇鳥)들은 완전히 여로 하여금 등산객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여는 지팡이를 바위틈에 꽂아 놓았다. 그리고 굴러 떨어지기를 면키 위하여 잔솔의 새에 자리잡고 비스듬히 앉았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잠시의 산보로 여기고 담배도 안 가지고 나온 발이 더듬더듬 여기까지 미쳤으므로 담배도 없다.

시야의 한편에는 이삼 장의 바위, 다른 한편에는 푸르른 하늘, 그 끝으로는 솔잎이 서너 개 어렴풋이 보인다. 그윽이 코로 몰려들어 오는 송진 님새. 소나무에 불리는 바람소리―

유수(幽邃)키 짝이 없다. 여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는 개벽 이래로 과연 몇 사람이나 밟아 보았을까? 이 바위 생긴 이래로 혹은 여가 맨 처음 발 대어본 것이 아닐까? 아까 바위를 기어서 이곳까지 올라오느라고 애쓰던 그런 맹랑한 노력을 하여본 바보가 여 이외에 몇 사람이나 있었을까? 그런 모험을 맛보기 위하여 심산을 찾아온 용사(勇士)는 많을 것이로되 결사적 인왕 등산을 한 사람은 그리 많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

등 뒤 바위에는 암굴이 있다.

배암이라도 있을까 무서워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지팡이로 휘저어 본 결과로 세사람은 넉넉히 들어가 앉아 있음직하다.

이 암굴을 무엇에 이용할 수가 없을까.

음모(陰謀)의 도시 한양은 그새 오백 년간 별별 음흉한 사건이 연출되었다. 시가 끝에서 반시간 미만에 넉넉히 올 수 있는 이런 가까운 거리에 뚫린 암굴은, 있는 줄 알기만 하였으면 혹은 음모에 이용되지 않았을까?

*

공상!

유수한 맛에 젖어 있던 여는 이 암굴 때문에 차차 불쾌한 공상에 빠지기 시작하려 한다.

온갖 음모, 그 뒤를 잇는 살육, 모함, 방축(防逐), 이조 오백 년간의 추악한 모양이 여로 하여금 불쾌한 공상에 빠지게 하려 한다.

여는 황망히 이런 불쾌한 공상에서 벗어나려고 주머니에 담배를 뒤적이었다. 그러나 담배는 여전히 있을 까닭이 없었다.

다시 눈을 들어서 안하를 굽어보면 일면에 깔린 송초(松梢)!

반짝!

보매 한줄기의 샘이다. 소나무 틈으로 보이는 그 샘은 아마 바위틈을 흐르는 샘물인 듯. 똘똘똘똘 들리는 것은 아마 바람소리겠지. 저렇듯 멀리 아래 있는 샘의 소리가 이곳까지 들릴 리가 없다.

*

샘물!

저 샘물을 두고 한 개 이야기를 꾸며볼 수가 없을까. 흐르는 모양도 아름답거니와 흐르는 소리도 아름답고, 그 맛도 아름다운 샘물을 두고 한 개 재미있는 이야기가 여의 머리에 생겨나지 않을까. 암굴을 두고 생겨나려던 음모, 살육의 불쾌한 공상보다 좀더 아름다운 다른 이야기가 꾸며나지 않을까.

여는 바위틈에 꽂았던 지팡이를 도로 뽑았다. 그 지팡이로써 여의 발아래 바위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한 개 이야기를 꾸며 보았다.

*

한 화공이 있다. ― 화공의 이름은?

지어내기가 귀찮으니 신라 때의 화성(畵聖)의 이름을 차용하여 솔거(率居)라 하여 두자. ― 시대는?

시대는 이 안하에 보이는 도시가 가장 활기 있고 아름답던 시절인 세종 성주의 때쯤으로 하여 둘까.

*

백악이 흘러내리다가 맺힌 곳. 거기는 한양의 정기를 한 몸에 지닌 경복궁 대궐이 있다. 이 대궐의 북문인 신무문(神武問) 밖 우거진 뽕밭 새에 중로(中老)의 사나이가 오뇌(懊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화공 솔거였다.

무르익은 여름, 뜨거운 볕은 뽕잎이 가리워준다. 하나, 훈훈한 기운은 머리 위 뽕잎과 땅에서 우러나서 꽤 무더운 이 뽕밭 속에 숨어 있는 화공, 자그마한 보따리에는 점심까지 싸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저녁까지 이곳에 있을 셈인 모양이다.

그러나 무얼 하는지? 단지 땀을 펑펑 흘리며 오뇌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다.

왕후 친잠(王后親蠶)에 쓰이는 이 뽕밭은 잡인들이 다니지 못할 곳이다. 하루 종일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

때때로 바람이 우수수하니 뽕나무 위로 불기는 하나, 솔거가 숨어 있는 곳에는 한 점의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다. 이 무더운 속에 솔거는 바람이 불 적마다 몸을 흠칫흠칫 놀라며, 그러면서도 무엇을 기다리듯이 뽕나무 그루 아래로 저편 앞을 주시하고 있다.

이윽고 석양이 무악을 넘고 이 도시에도 황혼이 들었다.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서 이 화공은 몸을 숨겨 가지고 거기서 나왔다.

'오늘은 헛길, 내일이나 다시 볼까?'

한숨을 쉬면서 제 오막살이를 찾아 돌아가는 화공. 날이 벌써 꽤 어두웠지만 그래도 아직 저녁 빛이 약간 남은 곳에 내어놓은 이 화공은 세상에 보기 드문 추악한 얼굴의 주인이었다. 코가 질병자루 같다, 눈이 퉁방울 같다, 귀가 박죽 같다, 입이 나발통 같다, 얼굴이 두꺼비같다 ― 소위 추한 얼굴을 형용하는 온갖 형용사를 한 얼굴에 지닌 흉한 얼굴의 주인으로서 그 얼굴이 또한 굉장히도 커서 멀리서 볼지라도 그 존재가 완연하리만하다.

이 얼굴을 가지고는 백주에는 나다니기가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다.

*

아닌게 아니라 솔거는 철이 들은 이래 여태껏 백주에 사람 틈에 나다닌 일이 없었다.

일찍이 열 여섯 살에 스승의 중매로서 어떤 양가 처녀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 처녀는 솔거의 얼굴을 보고 기절을 하고, 기절에서 깨어나서는 그냥 집으로 도망쳐버리고, 그 다음 또 한 번 장가를 들어보았지만 그 색시 역시 첫날밤만 정신 모르고 치른 뒤에는 이튿날은 무서워서 죽어도 같이 못 살겠노라고 부모에게 떼를 써서 두 번째의 비극을 겪고.

이러한 두 가지의 사변을 겪고 난 뒤에 솔거는 차차 여인이라는 것을 보기를 피하여오다가, 그 괴벽이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일체로 사람이란 것의 얼굴을 대하기가 싫어졌다.

사람을 피하기 위하여 ― 그리고 또한 일방으로는 화도(畵道)에 정진하기 위하여, 인가를 떠나서 백악의 숲속에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하나 틀고 거기 숨은지 근 삼십 년. 생활에 필요한 물건 혹은 그림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하여 부득이 거리에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반드시 밤을 택하였다. 피할 수 없어 낮에 나갈 때는 방립을 쓰고 그 위에 얼굴을 베로 가리었다.

화도(畵道)에 발을 들여놓은 지 근 사십 년, 부득이한 금욕 생활, 부득이한 은둔 생활을 경영한 지 삼십 년, 여인에게로 '소모되지 못한' 정력은 머리로 모이고, 머리로 모인 정력은 손끝으로 뻗어서 종이에, 비단에 갈겨 던진 그림이 벌써 수천 점. 처음에는 그 그림에 대하여 아무 불만도 느껴보지 않았다.

하늘에서 타고난 천분과 스승에게서 얻은 훈련과 저축된 정력의 소산인 한 장의 그림이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히 여기고 스스로 자랑스러이 여기던 그였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밟기 이십 년에 차차 그의 마음에 움돋은 불만,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화도에는 이단적인 생각일는지도 모를 것이다.

좀 다른 것은 그릴 수가 없는가?

산이다, 바다다, 나무다, 시내다, 지팡 짚은 노인이다, 다리다, 혹은 돛단배다, 꽃이다. 과적 달이다, 소다, 목동이다.

이밖에 그가 아직 그려본 것이 무엇이었던가.

유원(幽遠)한 맛, 단 한가지밖에 없는 전통적 그림보다 좀더 다른 것을 그려보고 싶다.

여태껏 스승에게 배운 바의 백발백염(白髮白髥)의 노옹이나 피리부는 목동 이외에 좀더 얼굴에 움직임이 있는 사람을 그려보고 싶다. 표정이 있는 얼굴을 그려보고 싶다.

이리하여 재래의 수법을 아낌없이 내어 던진 솔거는 그로부터 십 년간을 사람의 표정을 그리느라고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사람의 세상을 멀리 떠나서 따로이 사는 이 화공에게는 사람의 표정이 기억에 가맣다.

상인(商人)들의 간특(姦慝)한 얼굴, 행인들의 덜 민 무표정한 얼굴, 새꾼들의 싱거운 얼굴 ― 그 새 보고 지금도 대할 수 있는 얼굴은 이런 따위뿐이다. 좀더 색채 다른 표정은 없느냐?

*

색채 다른 표정!

색채 다른 표정!

이 욕망이 화공의 마음에 익고 커 가는 동안 화공의 머리에 솟아오르는 몽롱한 기억이 있다.

이 화공의 어머니의 표정이다.

지금은 거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에 자기를 품에 안고 눈물 글썽글썽한 눈으로 굽어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가끔 한순간씩 그의 기억의 표면까지 뛰쳐올랐다.

그의 어머니는 희세의 미녀(美女)였다. 대대로, 이후의 자손의 미(美)까지 모두 미리 빼앗았던지 세상에 드문 미인이었다.

화공은 이 미녀의 유복자였다.

아비 없는 자식을 가슴에 붙안고 눈물 머금은 눈으로 굽어보던 표정.

철이 들은 이래로 자기를 보는 얼굴에서는 모두 경악(驚愕)과 공포밖에는 발견하지 못한 화공에게는 사십여 년 전의 어머니의 사랑의 아름다운 얼굴이 때때로 몸서리치도록 그리웠다.

그것을 그려보고 싶었다.

커다란 눈에 그득히 담긴 눈물, 그러면서도 동경과 애무로서 빛나던 눈, 입가에 떠오르던 미소.

번개와 같이 순간적으로 심안(心眼)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이 환영을 화공은 그려보고 싶었다.

세상을 피하고 숨어살기 때문에 차차 삐뚤어진 이 화공의 괴벽한 마음에는 세상을 그리는 정열이 또한 그만치 컸다. 그리고 그것이 크면 크니만치 마음속에는 늘 울분과 분만(憤 )이 차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서는 한창 계집 사내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좋다고 야단할 것을 생각하고는 음울한 얼굴로 화필을 뿌리는 화공.

이러한 가운데서 나날이 괴벽 하여가는 이 화공은 한 개 미녀상(美女像)을 그려보고자 노심하였다.

*

처음에는 단지 아름다운 표정을 가진 미녀를 그려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녀를 가까이 본 일이 없는 이 화공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붓끝에 역정을 내며 있는 동안 차차 어느덧 미녀상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다.

자기의 아내로서의 미녀상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세상은 자기에게 아내를 주지 않는다.

보면 한 마리의 곤충, 한 마리의 날짐승도 각기 짝을 찾아 즐기고, 짝을 찾아 좋아하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짝없이 오십 년을 보냈다 하는 데 대한 불만이 일어났다.

세상 놈들은 자기에게 한 짝을 주지 않고 세상 계집들은 자기에게 오려는 자가 없이 홀몸으로 일생을 보내다가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이 산골에서 죽어버릴 생각을 하면 한심하기보다는 도리어 이렇듯 박정한 사람의 세상이 미웠다.

세상이 주지 않는 아내를 자기는 자기의 붓끝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비웃어 주리라.

이 세상에 존재한 가장 아름다운 계집보다 더 아름다운 계집을 자기의 붓끝으로 그려서 못나고도 아름다운 체하는 세상 계집들을 웃어 주리라.

덜난 계집을 아내로 맞아가지고 천하의 절색이라 믿고 있는 사내놈들도 깔보아 주리라.

사오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좋다꾸나고 춤추는 헌놈들도 굽어 보아주리라.

미녀! 미녀!

― 눈을 감고 생각하고 눈을 뜨고 생각하고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해 보나 미녀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얼굴에 철요(凸凹)가 없고 이목구비가 제대로 놓였으면 세상 보통의 미인이라 한다. 그런 얼굴에 연지나 그리고 눈에 미소나 그려 넣으면 더 아름다워지기는 할 것이다. 이만한 것은 상상의 눈으로도 볼 수가 있는 자며 붓 끝으로 그릴 수도 없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가만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얼굴을 순영적(瞬影的)으로나마 기억하는 이 화공으로서는 그런 미녀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뇌와 분만 중에서 흐르는 세월은 일 년 또 일년, 무위히 흘러간다.

*

미녀의 아랫동이는 그려진 지 벌써 수년. 그 아랫동이 위에 올려 놓일 얼굴을 어떻게 하여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화공의 오막살이 방안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걸려 있는 한 폭 그림은 언제든 어서 목과 얼굴을 그려 주기를 기다리듯이 화공을 힐책한다.

화공은 이것을 보기가 거북하였다.

특별한 일이라도 있기 전에는 낮에 거리에 다니지를 않던 이 화공이 흔히 얼굴을 싸매고 장안을 돌아다녔다.

행여나 길에서라도 미녀를 만날까 하는 요행심으로였다. 길에서 순간적으로 마음에 드는 미녀를 볼 수만 있으면 머리에 똑똑히 캐치하여 그 기억으로써 화상을 그릴까 하는 요행심으로……

그러나 내외법이 심한 이 도회에서 대낮에 양가의 부녀가 얼굴을 내놓고 길을 다니지는 않았다. 계집이라는 것은 하인배나 하류배뿐이었다.

하인배, 하류배에도 때때로 미녀라 일컬을 자가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산뜻한 미를 갖기는 했다 하나 얼굴에 흐르는 표정이 더럽고 비열하여 캐치할 만한 자가 없었다.

얼굴을 싸매고 거리로 방황하며, 혹은 계집들이 많이 모이는 우물가며 저자를 비실비실 방황하며 어찌 어찌하여 약간 예쁜 듯한 계집이라도 보이면 따라가면서 얼굴을 연구해 보곤 했으나 마음에 드는 미녀를 지금껏 얻어내지를 못하였다.

*

혹은 심규(深閨)에는 마음에 드는 계집이라도 있을까. 심규! 심규! 한 번 심규의 계집들을 모조리 눈앞에 벌여 세우고 얼굴 검사를 하여보았으면……

초조하고 성가신 가운데서 날을 보내고 날을 맞으면서 미녀를 구하던 화공은 마지막 수단으로 친잠상원(親蠶桑園)에 들어가서 채상(採桑)하는 궁녀의 얼굴을 얻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화공의 모험도 헛길로 돌아가고, 그날은 채상을 하러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 바야흐로 누에시절이라 견딜성있게 기다리노라면 궁녀의 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미녀 ― 아내의 얼굴을 그리려는 욕망에 열이 오르고 독이 난 이 화공은 그 이튿날 또 뽕밭에 들어가 숨었다. 숨어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달, 화공은 나날이 점심을 싸가지고 상원(桑園)으로 갔다. 그러나 저녁때 제 오막살이로 돌아올 때는 언제든지 그의 입에서는 기다란 탄식성이 나왔다.

궁녀를 못 본 바가 아니었다.

마치 여기 숨어 있는 화공에게 선보이려는 듯이 나날이 궁녀들은 번갈아 왔다. 한떼씩 밀려와서는 옷소매 치마자락을 펄럭이며 뽕을 따 갔다. 한달 동안에 합계 사오십 명의 궁녀를 보았다.

모두 일률로 미녀들이었다. 그리고 길가 우물가에서 허투루 볼 수 있는 미녀들보다 고아(高雅)한 얼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눈 ― 화공이 보는 바는 그 눈이었다.

그 눈에 나타난 애무와 동경이었다. 철철 넘어 흐르는 사랑이었다. 그것이 궁녀에게는 없었다. 말하자면 세상 보통의 미녀였다.

자기에게 계집을 주지 않는 고약한 세상에게 보복하는 의미로 절세의 미녀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 화공의 커다란 야심으로서는 그만 따위의 미녀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막살이로 돌아올 때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기다란 한숨, 이런 한숨을 쉬기 한달 ― 그는 다시 상원에 가지 않았다.

가을 하늘 맑고 푸르른 어떤 날이었다.

마음속에 불만과 동경을 가득히 담은 히 화공은 저녁쌀을 씻으러 소쿠리를 옆에 끼고 시내로 더듬어갔다.

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우거진 소나무 틈으로 보이는 시냇가 바위 위에 왠 처녀가 앉아 있다. 솔가지 틈으로 내리비치는 얼룩지는 석양을 받고 망연히 앉아서 흐르는 새냇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왠 처녀일까?

인가에서 꽤 떨어진 이곳, 사람의 동리보다 꽤 높은 이곳, 길도 없는 이곳 ― 아직껏 삼십년간을 때때로 초부나 목동의 방문은 받아 본 일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자취를 받아 보지 못한 이곳에 왠 처녀일까?

화공도 망연히 서서 바라보았다. 바라볼 동안 가슴에 차차 무거운 긴장을 느꼈다.

한 걸음 두 걸음 화공은 발소리를 감추고 나아갔다. 차차 그 상거(相距)가 가까워감을 따라서 분명하여가는 처녀의 얼굴 ― 화공의 얼굴에는 피가 떠올랐다.

세상에 드문 미녀였다. 나이는 열일고여덟, 그 얼굴 생김이 아름답다기보다 얼굴 전면에 나타난 표정이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흐르는 시내에 눈을 부었는지, 귀를 기울였는지, 하여간 처녀의 온 주의력은 시내에 모여 있다. 커다랗게 뜨인 눈은 깜박일 줄도 잊은 듯한 황홀한 눈으로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남벽(藍碧)의 시냇물에는 용궁(龍宮)이 보이는가? 소나무 그루에 부딪쳐서 튀어나는 바람에 앞머리를 약간 날리면서 처녀가 굽어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처녀의 온 공상과 정열과 환희가 한꺼번에 모인 절묘한 미소를 눈과 입에 띠고 일심불란(一心不亂)히 처녀가 굽어보는 것은 무엇인가.

*

아아!

화공은 드디어 발견하였다. 그 새 십 년간을 여항(閭巷)의 길거리에서 혹은 우물가에서 내지는 친잠 상원에서 발견하여 보려고 애쓰다가 종내 달하지 못한 놀랄 만한 아름다운 표정을 화공은 뜻 안한 여기서 발견하였다.

화공은 걸음을 빨리 하였다. 자기의 얼굴이 얼마나 더럽게 생겼는지, 이 처녀가 자기를 쳐다보면 얼마나 놀랄지, 이 점을 온전히 잊고 걸음을 빨리 하여 처녀의 쪽으로 갔다.

처녀는 화공의 발소리에 머리를 번쩍 들었다. 화공을 바라보았다. 그 무한히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기묘한 눈을 들어서―

"아아……"

가슴이 무득하여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 망설이며 화공이 반벙어리 같은 소리를 할 때에 처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 오니까?"

여기가 어디?

"여기가 인왕산록 이름도 없는 산이지만 너는 웬 색시냐?"

"네……"

문득 떠오르는 적적한 표정.

"더듬더듬 시내를 따라왔습니다."

화공은 머리를 기울였다. 몸을 움직여보았다. 무한히 먼곳을 바라보는 듯한 처녀의 눈은 그냥 움직임 없이 커다랗게 뜨여 있기는 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무엇을 보는지 알 수가 없다.

드디어 화공은 부르짖었다.

"너 앞이 보이느냐?"

"소경이올시다."

소경이었다. 눈물 머금은 소리로 하는 대답을 듣고 화공은 좀더 가까이 갔다.

"앞도 못 보면서 어떻게 무엇 하러 예까지 왔느냐?"

처녀는 머리를 푹 수그렸다. 무슨 대답을 하는 듯하였으나 화공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화공으로 하여금 저으기 호기심을 잃게 한 것은 처녀의 얼굴이 아까와 같은 놀라운 매력 있는 표정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만하면 보기 드문 미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까 화공이 그렇듯 놀란 것은 단지 미인인 탓이 아니었다. 그 얼굴에 나타난 놀라운 매력에 끌린 것이었다.

"불쌍도 하지. 저녁도 가까워 오는데 어둡기 전에 집으로 내려 가거라."

이만큼하여 화공은 처녀를 포기하려 하였다. 이 말에 처녀가 응하였다.

"어두운 것은 탓하지 않습니다마는 황혼은 매우 아름답지요?"

"그럼 아름답구말구."

"어떻게 아름답습니까?"

"황금빛이 서산에서 줄기줄기 비치는구나. 거기 새빨갛게 물들은 천하―푸르른 소나무도, 남빛 바위도, 검붉은 나무 그루도, 모두 황금빛에 잠겨서……"

"황금빛은 어떤 것이고 새빨간 빛과 붉은빛은 모두 어떤 빛이오니까? 밝은 세상이라지만 밝은 빛과 붉은 빛이 어떻게 다릅니까? 이 산 경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더듬어 왔습니다마는 바람 소리, 돌 물소리, 귀로 들리는 소리밖에는 어디가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차 다시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 커다랗게 뜨인 눈에 비치는 동경의 물결, 일단 사라졌던 아름다운 표정은 다시 생기가 비롯하였다.

화공은 드디어 처녀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

"이 샘줄기를 따라내려가면 바다가 있구, 바닷속에는 용궁이 있구나. 칠색 비단을 감은 기둥과 비취를 아로새긴 댓돌이며 황금으로 만든 풍경(風磬), 진주로 꾸민 문설주……"

마주 앉아서 엮어 내리는 이 화공의 이야기에 각일각 더욱 황홀하여가는 처녀의 눈이었다. 화공은 드디어 이 처녀를 자기의 오막살이로 데리고 돌아갈 궁리를 하였다.

"내 용궁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너의 집에서 걱정만 안하실 것 같으면……"

화공이 이렇게 꾈 때에 처녀는 그의 커다란 눈을 들어서 유원(幽園)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자기네 부모는 병신 딸 따위는 없어져도 근심을 안 한다고 쾌히 화공의 뒤를 따랐다.

*

일사천리로 여기까지 밀려오던 여(余)의 공상은 문득 중단되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진전시키나?

잡념이 일어난다. 동시에 여의 귀에 들리어 오는 한 절의 유행가.

여는 머리를 들었다. 저편 뒤 어디 잡인들이 온 모양이다. 그 분요(紛擾)가 무의식중에 귀로 들어와서 여의 집중되었던 머리를 헤쳐 놓는다.

귀찮은 가사(歌師)들이여, 저주받을 가사들이여.

이 저주받을 가사들 때문에 중단된 이야기는 좀처럼 다시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말 없는 이야기가 어디 있으랴. 어찌되었든 결말은 지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 화공은 처녀를 데리고 제 오막살이로 돌아와서 용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동안에 처녀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서 십 년래의 숙망을 성취하였다는 결말로 맺어 버릴까?

그러나 이런 싱거운 결말이 어디 있으랴? 결말이 되기는 되었지만 이따위 결말을 짓기 위하여 그런 서두(序頭)는 무의미한 자다.

그러면?

그럼 다르게 결말을 맺어 볼까?

화공은 처녀를 제 오막살이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처녀에게 용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아까 용궁 이야기를 초벌들은 처녀는 이번은 그렇듯 큰 감흥도 느끼지 않는 모양으로 그다지 신통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화공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화공은 그 그림을 영 미완 품인 채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었다.

그럼 또다시 ―

화공은 처녀를 데리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처녀를 보면 볼수록 탐스러워서 그림은 집어치우고 처녀를 아내로 삼아 버렸다. 앞을 못 보는 처녀는 추하게 생긴 화공에게도 아무 불만이 없이 일생을 즐겁게 보냈다. 그림으로나 아내를 얻으려던 화공은 절세의 미녀를 아내로 얻게 되었다……

역시 불만이다.

귀찮고 성가시다. 저주받을 유행가사(流行歌師)여!

*

여는 일어났다. 감흥을 잃은 이 자리에 그냥 앉아 있기는 싫었다. 그냥 들리는 유행가……그것이 안들리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굽어보매 저 멀리 소나무 틈으로 한줄기 번득이는 것은 아까의 샘물이다. 그 샘물로, 가장 이 이야기의 원천(源泉)이 된 그 샘으로 내려가자.

벼랑을 내려가기는 올라가기보다 더 힘들었다. 올라가는 것은 올라가다가 실수하여 떨어지면 과즉 제자리에 내린다. 그러나 내려가다가 발을 실수하면 어디까지 굴러갈지 예측할 길이 없다. 잘못하다가는 청운동(淸雲洞) 어귀까지 굴러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올라갈 때에는 도움이 되던 지팡이조차 내려갈 때에는 귀찮기 짝이 없다.

*

반 각이나 걸려서 여는 드디어 그 샘가에 도달하였다.

샘가에는 과연 한 개의 바위가, 사람 하나 앉기 좋을 만한 자리가 있다. 이 바위가 화공 쌀 씻던 바위일까? 처녀가 앉아서 공상하던 바위일까? 그 아래를 깊은 남벽(藍碧)으로 알았더니 겨우 한 뼘 미만의 얕은 물로서 바위를 기운 없이 똘똘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골짜기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소리도 멀리 위에서만 들린다. 그리고 소나무와 바위 둘러싸여서 꽤 음침한 이 골짜기는 옛날 세상을 피한 화공이 줄겨하였음직하다.

자, 그러면 이 골짜기에서 아까 그 이야기의 꼬리를 마저 지을까?

*

화공은 처녀를 데리고 오막살이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은 너무도 긴장되고 또한 기뻐서 저녁도 짓기 싫었다. 들어와 보매 벌써 여러해를 머리 달리기를 기다리는 족자(簇子)의 여인이 몸집조차 흔연히 화공을 맞는 듯하였다.

"자, 거기 앉아라."

수 년간 화공을 힐책하던 머리 없는 그림이 화공의 앞에 펴졌다. 단청도 준비되었다.

터질 듯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폭 앞에 자리를 잡은 화공은 빛이 비치도록 남향하여 처녀를 앉히고 손으로 붓을 적시며 이야기를 꺼냈다.

벌써 황혼, 인제 얼마남지 않은 오늘 해로써 숙망을 달하려 하는 것이었다. 십 년간을 벼르기만 하면서 착수를 못했기 때문에 저축되었던 화공의 힘은 손으로 모였다.

"그러구……알겠지?"

눈으로는 처녀의 얼굴을 보며, 입으로는 용궁 이야기를 하며 손은 번개같이 붓을 둘렀다.

"용궁에는 여의주(如意珠)라는 구슬이 있구나. 이 여의주라는 구슬은 마음에 있는 바에 도달할 수 있는 보물로서 구슬을 네 눈 위에 한 번 굴리면 너도 광명한 일월을 보게 된다."

"네? 그런 구슬이 있습니까?"

"있구말구, 네가 내 말을 잘 듣고 있기만 하면 수일 내로 너를 데리고 용궁에 가서 여의주를 빌어서 네 눈도 고쳐주마."

"그러면 저도 광명한 일월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광명한 일월, 무지개라는 칠색이 영롱한 기묘한 것, 아름다운 수풀, 유수한 골짜기, 무엇인들 못 보랴."

"아이구 어서 그 여의주를 구해서……"

아아, 놀라운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화공은 처녀의 얼굴에 나타나 넘치는 이 놀라운 표정을 하나도 잃지 않고 화폭 위에 옮겼다.

황혼은 어느덧 밤으로 변하였다. 이때는 여인에게는 단지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았을 뿐 그 밖의 것은 죄 완성이 되었다.

동자까지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생명을 좌우할 눈동자를 그리기에는 날은 너무도 어두웠다.

눈동자 하나쯤이야 밝는 날로 남겨 둔들 어떠랴. 하여간 십 년 숙망을 겨우 달한 화공의 심사는 무엇에 비기지 못하도록 기뻤다.

"아― 아!"

이 탄성은 오래 벼르던 일이 끝난 때에 나는 기쁨의 소리였다.

이 일단의 안심과 함께 화공의 마음에는 또 다른 긴장과 정열이 솟아올랐다.

꽤 어두운 가운데서 처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기 위하여 화공이 잡은 자리는 처녀의 무릎과 서로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림에 대한 일단의 안심과 함께 화공의 코로 몰려들어 오는 강렬한 처녀의 체취(體臭)와 전신으로 느끼는 처녀의 접근 때문에 화공의 신경은 거의 마비될 듯싶었다. 차차 각일각 몸까지 떨리기 시작하였다. 어두움 가운데서 황홀스러이 빛나는 커다란 눈과 정열로 들먹거리는 입술은 화공의 정신까지 혼미하게 하였다.

*

밝는 날 화공과 소경 처녀의 두 사람은 벌써 남이 아니었다.

'오늘은 동자를 완성시키리라.'

삼십 년의 독신생활을 벗어버린 화공은 삼십 년간을 혼자 먹던 조반을 소경 처녀와 같이 멱고 다시 그림 폭 앞에 앉았다.

"용궁은?"

기쁨으로 빛나는 처녀의 눈!

그러나 화공의 심미안에 비친 그 눈은 어제의 눈이 아니었다.

아름답기는 다시없는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은 사내의 사랑을 구하는 '여인의 눈'이었다. 병신이라 수모 받던 전생을 벗어버리고 어젯밤 처음으로 인생의 봄을 맛본 처녀는 인제는 한 개의 지어미의 눈이요, 한 개의 애욕의 눈이었다.

"용궁은?"

"용궁에 어서 가서 여의주를 얻어서 제 눈을 띄어 주세요. 밝은 천지도 천지려니와 당신이 어서 눈뜨고 보고 싶어!"

어젯밤 잠자리에서 자기는 스물 네 살 난 풍신 좋은 사내라고 자랑한 화공의 말을 그대로 믿는 소경이었다.

"응, 얻어 주지. 그 칠색이 영롱한……"

"그 칠색도 어서 보고 싶어요."

"그래 그래, 좌우간 지금 머리로 생각해보란 말이야."

"네, 참 어서 보고 싶어서……"

굽어보면 무릎 앞의 그림은 어서 한 점 동자를 찍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소경의 눈에 나타난 것은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그것은 애욕의 표정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런 눈을 그리려고 십 년을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자, 용궁을 생각해 봐!"

"생각이나 하면 뭘합니까? 어서 이 눈으로 보아야지."

"생각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짐작이 가야 생각도 하지요."

"어제 생각하던 대로 생각을 해봐!"

"네……"

화공은 드디어 역정을 내었다.

"자, 용궁! 용궁!"

"네……"

"용궁을 생각해 봐! 그래 용궁이 어때?"

"칠색이 영롱하구요……"

"그래, 또?"

"또, 황금기둥, 아니 비단으로 싼 기둥이 있구요, 또 푸른 진주가……"

"푸른 진주가 아냐! 푸른 비취지."

"비취 추녀던가, 문이던가?"

"에익! 바보!"

화공은 커다란 양손으로 칵 소경의 어깨를 잡았다. 잡고 흔들었다.

"자, 다시 곰곰이…… 용궁은."

"용궁은 바닷속에……"

겁에 띠어서 어릿거리는 소경의 양에 화공은 소경의 따귀를 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

이런 바보가 어디 있으랴. 보매 그 병신 눈은 깜박일 줄도 모르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천치 같은 눈을 보매 화공의 노염은 더욱 커졌다. 화공은 양손으로 소경의 멱을 잡았다.

"에이 바보야, 천치야, 병신아!"

생각나는 저주의 말을 연하여 퍼부으면서 소경의 멱을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병신처럼 멀겋게 뜨인 눈자위에 원망의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더욱 힘있게 흔들었다. 흔들다가 화공은 탁 그 손을 놓았다. 소경의 몸이 너무도 무거워졌으므로……

화공의 손에서 놓인 소경의 몸은 눈을 위솟은 채 번뜻 나가 넘어졌다. 넘어지는 서슬에 벼루가 전복되었다. 뒤집혀진 벼루에서 튀어 난 먹물 방울이 소경 얼굴에 덮였다.

깜짝 놀라서 흔들어 보매 소경은 벌써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소경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망지소조(芒知所措)하여 허둥거리던 화공은 눈을 뜻없이 자기의 그림 위에 던지다가 악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그 그림의 얼굴에는 어느덧 동자가 찍히었다. 자빠졌던 화공이 좀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몸을 일으켜서 다시 그림을 보매, 두 눈에는 완연히 동자가 그려진 것이다.

그 동자의 모양이 또한 화공으로 하여금 다시 털썩 엉덩이를 붙이게 하였다. 아까 소경 처녀가 화공에게 멱을 잡혔을 때에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원망의 눈 ― 그림의 동자는 완연히 그것이었다.

소경이 넘어지는 서슬에 벼루를 엎는다는 것은 기이할 것도 없고 벼루가 엎어질 때에 먹방울이 튄다는 것도 기이하달 수 없지만, 그 먹방울이 어떻게 그렇게도 기묘하게 떨어졌을까? 먹이 떨어진 동자로부터 먹물이 번진 홍채에 이르기까지 어찌도 그렇듯 기묘하게 되었을까?

한편에는 송장, 한편에는 송장의 화상을 놓고 망연히 앉아 있는 화공의 몸은 스스로 멈출 수 없이 와들와들 떨렸다.

*

수일 후부터 한양 성내에는 괴상한 화상을 들고 음울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늙은 광인(狂人) 하나가 생겼다.

그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괴상한 화상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므로 사람들이 보고자 하면 그는 기를 써서 보이지 않고 도망하여 버리곤 한다.

이렇게 수년간을 방황하다가 어떤 눈보라치는 날, 돌 베개를 베고 그의 일생을 막음하였다. 죽을 때도 그는 족자를 깊이 품에 품고 죽었다.

늙은 화공이여! 그대의 쓸쓸한 일생을 여는 조상하노라.

여(余)는 지팡이로써 물을 두어 번 저어 보고 고즈너기 몸을 일으켰다.

우러러보매 여름의 석양은 벌써 백악 위에서 춤추고, 이 천고(千古)의 계곡을 산새가 남북으로 건넌다.

[출처] http://www.jikji.org/%EA%B4%91%ED%99%94%EC%82%AC?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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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

생활, 내가 이미 오래 전부터 생활을 갖지못한 것을 나는 잘 안다. 단편적으로 나를 찾아오는 「생활 비슷한 것」도 오직 「고통」이란 요괴뿐이다. 아무리 찾아도 이것을 알아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생활력을 회복하려 꿈꾸는 때도 없지는 않다. 그것 때문에 나는 입때 자살을 안하고 대기(待機)의 열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

제2차의 객혈이 있은 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내 수명에 대한 개념을 파악하였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이튿날 나는 작은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맥 백이십오의 팔을 안은 채, 나의 물욕(物慾)을 부끄럽다 하였다. 나는 목을 놓고 울었다. 어린애 같이 울었다.

남 보기에 퍽이나 추악했을 것이다. 그리다 나는 내가 왜 우는가를 깨닫고 곧 울음을 그쳤다.

나는 근래의 내 심경을 정직하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만신창이의 나이언만 약간의 귀족취미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남 듣기 좋게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내 자신을 경멸하지 않고 그 대신 부끄럽게 생각하리라는 그러한 심리로 이동하였다고 할 수는 있다. 적어도 그것에 가까운 것만은 사실이다.

불행한 계승

사월로 들어서면서는 나는 얼마간 기동할 정신이 났다.

나는 물론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작은어머니 얼굴을 암만 봐도 미워할 데가 어디 있느냐. 넓은 이마, 고른 치아의 열, 알맞은 코, 그리고 작은아버지만 살아 계시면 아직도 얼마든지 연연한 애정의 색을 띠울 수 있는 총기가 있는 눈하며 다 내가 좋아하는 부분 부분인데 어째 그런지 그런 좋은 부분들이 종합된 「작은어머니」라는 인상이 나로 하여금 증오의 염을 일으키게 한다.

물론 이래서는 못쓴다. 이것은 분명히 내 병이다. 오래 오래 사람을 싫어하는 버릇이 살피고 살펴서 후 급기야에 이 모양이 되고 만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내 육친까지를 미워하기 시작하다가는 나는 참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 도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냐. 참 안됐다.

이런 공연한 망상들이 벌써 나을 수도 있었을 내 병을 자꾸 덧들리게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마름을 조용히 또 순하게 먹어야 할 것이라고 여러번 괴로워하는데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도리혀 또 겹겹이 짐되는 것도 같아서 나는 차라리 방심상태를 꾸미고 방 안에서는 천정만 쳐다보거나 나오면 허공만 쳐다보거나 하제도 역시 나를 싸고 도는 온갖것에 대한 증오의 염(念)이 무럭무럭 구름 일 듯 하는 것을 영 막을 길이 없다.

비가 두 어번 왔다.싹이 트려나 보다. 내려다보는 지면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 바람이 없이 조용한 날은 툇마루에 드는 볕을 가만히 잡기만 하면 퍽 따뜻하다. 이렇게 따뜻한 볕을 쪼이면서 이렇게 혼곤한데 하필 사람만을 미워해야 되는 까닭이 무엇이냐.

사람이 나를 싫어할 성싶은데 나도 내가 싫다. 이렇게 저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남을 위할 줄 알 수 있으랴. 없다. 그러면 나는 참 불행하구나.

이런 망상을 시작하면 정말이지 한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힘이 들고 힘이 드는 것이 싫어도 움직여야 한다. 나는 헌 구두짝을 끌고 마당으로 나가서 담 한 모퉁이를 의지해서 꾸며놓은 닭의 집 가까이 가 본다.

혹 나는 마음으로 작은어머니에게 사과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이것은 왜 그러나 - 작은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얼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저러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닭의 집 높이가 내 턱 좀 못미쳤기 때문에 나는 거기 가로 질린 나무에 턱을 받히고 닭의 집속을 내려다보고 있자니까 내음새도 어지간한데 제일 그 수닭이 딱해 죽겠다. 공연히 성이 대밑둥까지 나서 모가지 털을 벌컥 일으켜 세워 가지고는 숨이 헐레벌떡 헐레벌떡 야단 법석이다. 제딴은 그 가운데 막힌 철망을 뚫고 이쪽 암탉들 있는 데로 가고 싶어서 그리는 모양인데 사람 같으면 그만하면 못 넘어갈 줄 알고 그만둠직 하건만 이놈은 참 성벽이 대단하다.

가끔 철망 무너진 구멍에 무작정하고 목을 틀어 박았다가 잘 나오지 않아서 눈을 감고 끽끽 소리를 지르다가 가까스로 빠져 나가는 걸 보고 저놈이 그만 하면 단념하였다 하고 있으면 그래도 여전히 야단이다. 나는 그만 그놈의 끈기에 진력이 나서 못생긴 놈, 미련한 놈, 못생긴 놈, 미련한 놈, 하고 혼자서 화를 벌컥 내어 보다가도 또 그놈의 그런 미칠 것 같은 정열이 다시 없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해야 할 것같이 생각키기도 해서 자세히 본다.

그런데 암탉들은 어떠냐 하면 영 본숭만숭이다. 모-른 체하고 그저 모이 주워 먹기에만 열중이다. 아하 저러니까 수탉이란 놈이 화가 더 날 밖에 하고 나는 그 새침데기 암탉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다. 좀 가끔 수탉 쪽을 한두 번쯤 건너다가도 보아 주지 원 - 하고 나도 실없이 화가 난다. 수닭은 여전히 모이 주워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법석을 치는데 좀처럼 허기도지지 않는다.

이러다가 나는 저 수탉이 대체 요 세 마리 암탉 중의 어떤 놈을 노리는 것인가 살펴보기로 하였다. 물론 수탉이란 놈의 변두가 하도 두리번거리니까 그놈의 시선만 가지고는 알아채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보통사람 남자가 여자 보는 그런 눈으로 한 번 보아야겠다.

얼른 보기에 사람의 눈으로는 짐승의 얼굴을 사람이 아무개 아무개 하듯 구별하기는 어려운 것 같이 보이는데 또 그렇지도 않다. 자세히 보면 저마다 특징다운 특징이 있고 성미도 제각기 다르다. 요 암탉 세 마리도 기뻐하여서 얼른 보기에는 고놈이 고놈 같고 하더니 얼마만큼이나 들여다 보니까 모두 참 다르다.

키가 작달막하고, 눈앞이 검고, 털이 군데 군데 빠지고 흙투성이의 그 중 더러운 암탉 한 마리가 내 눈에 띄었다. 새침한 중에도 새침한 품이 풋고추같이 맵겠다. 그렇게 보니 그럴 성도 싶은 게 모이를 먹다가는 때대로 흘깃 흘깃 음분(淫奔)한 계집같이 곁눈질을 곧잘 한다. 금방 달려들어 모래라도 한줌 껴얹어 주었으면 하는 공연한 충동을 느끼나 그러나 허리를 굽히기가 싫다. 속 모르는 수탉은 수선도 피이는 구나.

아무 것도 생각 않는 게 상수다. 닭들의 생활에도 그런 개륵한 분쟁이 있으니 하물며 사람의 탈을 쓴 나에게 수없는 번거로움이 어찌 없으랴. 가엾은 수탉에 내 자신을 비겨 보고 비겨 보고 나는 다시 헌 구두짝을 질질 끈다. 바람이 없어서 퍽 따뜻하다. 싹이 트려나 보다.

얼굴이 이렇게까지 창백한 것이 웬일일까 하고 내가 번민해서 - 내 황막한 의학지식이 그예 진단하였다. - 회충 - 그렇지만 이 진단에는 심원한 유서가 있다. 회충이 아니면 십이지장충 - 십이지장충이 아니면 조충 - 이러리라는 것이다.

회충약을 써서 안 들으면, 십이지장충약을 쓰고, 십이지장충약을 써서 안들으면 조충약을 쓰고, 조충약을 써서 안 들으면 그 다음은 아직 연구해 보지 않았다.

어떤 몹시 불쾌한 하루를 선택하여 위선 회충약을 돈복하였다.

안다. 두 끼를 절식해야 한다는 것도, 복약 후에 반드시 혼도한다는 것도…

대낮이다. 이부자리를 펴고 그 속으로 움푹 들어가서 너부죽이 누워서, 이래도? 하고 그 혼도라는 것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마음이 늘 초조한 법, 귀로 위 속이 버글버글하는 소리를 알아 듣고 눈으로 방 네 귀가 정말 뒤퉁그러지려나 보고, 옆구리만 좀 근질근질해도 아하 요게 혼도라는 놈인가보다 하고 긴장한다.

그랬건만 딱한 일은 끝끝내 내가 혼도않고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세 시를 쳐도 역시 그턱이다. 나는 그만 흥분했다. 혼도커녕은 정신이 말똥말똥하단말이다. 이럴 이너가 없는데.

그렇다고 금방 십이지장충약무을 써 보기도 싫다. 내 진단이 너무나 허황한데 스스로 놀래이고 또 그 약을 구해야 할 노력이 아깝고 귀찮다.

구름 파듯 뭉게뭉게 불쾌한 감정이 솟아 오른다. 이러다가는 저녁 지으시는 작은어머니와 또 싸우겠군 - 얼마 후에 나는 히죽 히죽 자도 안 쓰고 거리로 나섰다.

막 다방에를 들어서니까 수군(壽君)이 마침 문깐을 나서면서 손바닥을 보인다.

「쉬 - 자네 마누라 와 있네」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얘 요것 봐라」

하고 무작정 그리 들어서려는 것을 수군이 아예 말리는 것이다.

「만좌지중에서 망신 톡톡이 당할 테니 염체 어델」

「그런가 - 」

입맛을 쩍 쩍 다시면서 발길을 돌리기는 돌렸으나 먼발치서라도 어디 좀 보고 싶었다.

솜옷을 입고 아내가 나갔거늘 이제 철은 홋것을 입어야 하니 넉 달지간이나 되나보다.

나를 배반한 계집이다. 삼년 동안 끔찍이도 사랑하였던 끝장이다. 따귀도 한 개 갈겨주고 싶다. 호령도 좀 하여 주고 싶다. 그러나 여기는 몰려드는 사람이 하나도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다방이다. 장히 모양도 사나우리라.

「자네 만나면 헐 말이 곡 한 마디 있다네」

「어쩌라누」

「사생결단을 허겠대네」

「어이쿠」

나는 몹시 놀래어 보이고 「레이몬드·하튼」같이 빙글 빙글 웃었다. 「아내 - 마누라」라는 말이 낮잠과도 같이 옆구리를 간지른다. 그 「이미지」는 벌써 먼 바다를 건너간다. 이미 파도소리까지 들리지 않았느냐. 이러한 환상 속에 떠오르는 내 자신은 언제든지 광채나는 「루파슈카」를 입었고 퇴폐적으로 보인다. 소년과 같이 창백하고 무시무시한 풍모이다. 어떤 때는 울기도 했다. 어떤 때는 어덴지 모르는 먼 나라의 십자로를 걸었다.

수군에게 끌려 한강으로 나갔다. 목선을 하나 빌어 맥주도 싣고 상류로 거슬러 동작리 갯가에다 대어놓고 목노 찾아 취토록 먹었다. 황혼에 수평은 시야와 어우러져서 아물아물 허공에 놓인 비조처럼 이 허망한 슬픔을 참 어디다 의지해야 떽葁을지 비철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응 - 넉달이 지나서 인제? 네가 내게 헐 말은 뭐냐? 애 더리고 더리다」

「이건 왜 벤벤치 못하게 이러는 거야」

「아-니, 아-니, 일테면 그렇다 그말이지, 고론 앙큼스럼 놈의 계집이 또 있을 수가 있나」

「글세 관 둬 관 둬」

「관 두긴 허겠지만 이채피 말을 허자구 자연 말이 이렇게쯤 나가지 않겠느냐 그런 말이야」

「이렇게 못생긴 건 내 보길 처엄 보겠네 원!」

「기집이란 놈의 물건이 아무리 독헌 물건이기루 고렇게 싹 칼루 어인 듯이 돌아설 수가 있나 고」

우리들은 술이 살렸다. 나야말로 술 없이 사는 도리가 없었다.

노들서 또 먹었다. 전후불각으로 취하여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려야겠어서 그랬다.

넉 달 - 장부답지 못하게 뒤끓던 마음이 그만하고 차츰 차츰 가라 앉기 시작하려는 이 철에 뭐냐 부전 붙은 편지모양으로 때와 손자죽이 잔뜩 묻은 채 돌아오다니,

「요 얌체두 없는 것아 요 요 요」

나는 힘껏 고성질타로 제 자신을 조소하건만도 이와 따로 밑둥치운 대목 기울 듯 자분참 기우는 이 어리석지 않고 들을 소리도 없는 마음을 주체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넉 달 - 이 동안이 결코 짧지가 않다. 한 사람의 아내가 남편을 배반하고 집을 나가 넉달을 잠잠하였다면 아내는 그예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요 남편은 꿀꺽 참아서라도 용서하여서는 안된다.

「이 천하의 공규(公規)를 너는 어쩌려느냐」

와서 그야말로 단죄를 달게 받아 보려는 것일까.

어떤 점을 붙잡아 한 여인을 믿어야 옳을 것인가. 나는 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하나같이 내 눈에 비치는 여인이라는 것이 그저 끝없이 경조부박(輕燼浮薄)한 음란한 요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없다.

생물이 이렇다는 의의를 훌떡 잃어버린 나는 환신이나 무엇이 다르랴. 산다는 것은 내게 따는 필요 이상의 「야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한 여인에게 배반당하였다는 고만 이유로 해서 그렇다는 것 아니라 사물의 어떤 「포인트」로 이 믿음이라는 역학의 지점을 삼아야겠느냐는 것이 전혀 캄캄하여졌다는 것이다.

「믿다니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구」

함부로 얘 제 침을 퇴 퇴 배앝으면서 보조는 자못 어지럽고 비창한 것이었다.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나면 약속 빨리 내 심경에 아첨하는 이 전신의 신경은 번번이 대담하게도 천변지이( 千變地異)가 이 일신에 벼락치기를 바라고 바라고 하는 것이었다.

「경칠 화물자동차에나 질컥 치여 죽어버리지 그랬으면 이렇게 후덥지근헌 생활을 면허기라두 허지」

하고 주착 없이 중얼거려 본다. 그러나 짜장 화물자동차가 탁 앞으로 닥칠 적이면 뎅급을 해서 피하는 재주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능히 빠르다고는 못해도 비슷했다. 그럴 적이면 혀를 쑥 내밀어 제 자신을 조롱하였읍네 하고 제 자신을 속여 버릇하였다.

이런 넉 달 -

이런 넉달이 지나고 어리석은 꿈을 그럭저럭 어리석은 꿈으로 돌릴줄 알만한 시기에 아내는 꿈을 거칠은 걸음걸이로 역행하여 여기 폭군(暴君)의 인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거암(巨岩)과 같은 불안이 공기와 호흡의 중압이 되어 덤벼든다. 나는 야행열차와 같이 자야 옳을는지도 모른다.

추악한 화물

그예 찾아내고 말았다.

나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풀칠한 현관 유리창에 거무테테한 내 얼굴의 「하이라이트」가 비칠 뿐이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내 바로 옆에서 한 마리의 개가 흙을 파고 있다. 드러누웠다. 혀를 내민다. 혀가 기葁발같이 굽이치는 게 퍽 고단해 보였다.

--- 온돌방 한간과 「이첩간(二疊間)」

이렇단다. 굳게 못질을 하여 놓았다. 분주하게 드나드는 쥐새끼들은 이 집에 관해서 아무것도 나에게 전하지 않는다.

안면근육이 별안간 바작바작 오그라드는 것 같다. 살이 내리나보다. 사람은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식 살이 내리고 오르고 하나보다.

--- 날라와야겠다. 그 오물투성이의 대화물( 大貨物)을!

절이나 하는 듯이 「대가(大家)」라 써 붙인 목패(木牌) 옆에 조그마한 명함 한 장이 꽂혀 있다. 한(韓)XX, 전등료( 電燈料)는 XX정XX번지로 받으러 오시오(거짓말 말어라) 이 한XX란 사나이도 오물투성이의 대화물을 질질 끌고 이리저리 방황했을 것이어늘 --- XX정이 어디쯤인가!

(거짓말 말어라)

왜 사람들은 이삿짐이란 대화물을 운반해야 할 구차기구한 책임을 가졌나.

나는 집 뒤로 돌아가 보려 했다. 그러나 길은 곧장 온돌방까지 뚫인 모양이다. 반간도 못되는 컴컴한 부엌이 변소와 마주 붙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거기도 못이 굳게 박혀 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성격파산 무엇 때문에? 나의 교식(敎食)은 아늬 생애와 다름 없이 되었다. 헌 누더기 수염도 길렀다. 거리. 땅.

한 번도 아내가 나를 사랑 않는 줄 생각해 본 일조차 없다. 나는 어느틈에 고상한 국화 모양으로 금시에 쑤세미가 되고 말았다. 아내는 나를 버렸다. 아내를 찾을 길이 없다.

나는 아내의 구두 속을 들여다 본다. 공복(空腹) - 절망적 공허가 나를 조롱하는 것 같다. 숨이 가빴다.

그 다음에 무엇이 왔나.

적빈(赤貧) - 중요한 오물들은 집안 사람들이 하나, 둘, 집어 내었다. 특히 더러운 상품가치 없는 오물만이 병균같이 남아 있었다.

하룻날, 탕아(蕩兒)는 이 처참한 현상을 내 집이라 생각하고 돌아와 보았다. 뜰 앞에 화초만이 향기롭게 피어 있다. 붉은 열매가 열린 것도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여지없이 변형되고 말았고, 기성(奇聲)을 발하여 욕지거리다.

종시 나는 암말 없었다.

이미 만사가 끝났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손바닥만한 마당에 내려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내 손때가 안 묻은 물건은 하나도 없다.

나는 책을 태워 버렸다. 산적했던 서신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나의 기념을 태워버렸다.

가족들은 나의 아내에 관해서 나에게 질문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도 말하지 않는다.

밤이면 나는 유령과 같이 흥분하여 거리를 魰었다. 나는 목표를 갖지 않았다. 공복만이 나를 지휘할 수 있었다. 성격의 파편 - 그런 것을 나는 꿈에도 돌아보려 않는다. 공허에서 공허로 말과 같이 나는 광분하여다. 술이 시작되었다. 술은 내 몸 속에서 향수같이 빛났다.

바른팔이 왼팔을, 왼팔이 바른팔을 가혹하게 매질했다. 날개가 부러지고 파랗게 멍들은 흔적이 남았다.

몹시 피곤하다. 아방궁을 준대도 움직이기 싫다. 이 집으로 정해 버려야 겠다.

--- 빨리 운반해야 한다. 그 악귀가 가득한 육신들을 피를 토하는 내가 헌 구루마 위에 걸레짝같이 실어 가지고 운반해야 한다.

노동이다. 나에게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불행의 실천

나는 닭도 보았다. 또 개도 보았다. 또 소 이야기도 들었다. 또 외국서 섬그림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너이들에게 이 행운의 열쇠를 빌려 주려고는 않는다. 내가 아니면 - 보아라 좀 오래 걸龶느냐 - 이런 것을 만들어 놓을 수는 없다.

책상 다리를 하고 앉은 채 그냥 앉아 있기만 하는 것으로 어떻게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른다. 벽은 육중한데 외풍은 되이고 천정은 여름 자처럼 이 방의 감춘 것을 뚜껑 젖히고 고자길하겠다는 듯이 선뜻하다. 장판은 뼈가 제리게 하지 않으면 안절부절을 못하게 달른다. 반닫이에 바른 색종이는 눈으로 보는 폭탄이다.

그저께는 그끄저께보다 여위고 어저께는 그저께보다 여위고 오늘은 어저께보다 여위고 내일은 오늘보다 여윌 터이고 - 나는 그럼 마지막에는 보숭보숭한 해골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불쌍한 동물들에게 무슨 방법으로 죽을 먹이나. 나는 방탕한 장판위에 넘어져서 한없는 「죄」를 섬겼다(종사從事). 「죄」 - 나는 시냇물 소리에서 가을을 들었다. 마개 뽑힌 가슴에 담을 무엇을 나는 찾았다. 그리고 스스로 달래었다. 가만 있으라고, 가만 있으라고 -

그러나 드디어 참다 못하여 가을비가 소조하게 내리는 어느날 나는 화덕을 팔아서 남비를 사고, 남비를 팔아서 풍로를 사고, 냉장고를 팔아서 식칼을 사고, 유리그릇을 팔아서 사기그릇을 샀다.

처음으로 먹는 따뜻한 저녁 밥상을 낯설은 sp 조각의 벽이 에워쌌다. 육원 - 육원어치를 완전히 다 살기 위하여 나는 방바닥에서 섣불리 일어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가구와 같이 주저앉았거나 서까래처럼 드러누웠거나 하였다. 식을까봐 연거푸 군불을 때웠고, 구들을 어디 흠씬 얼궈 보려고 중양(重陽)이 지난 철에 사날식 검부레기 하나 아궁지에 넣었다.

나는 나의 친구들의 머리에서 나의 번지수를 지워 버렸다. 아니 나의 복장까지도 말갛게 지웠 버렸다. 은근히 먹는 나의 조석이 게으르게 나는 육신에 만연(蔓延)하였다. 나의 영양의 찌꺼기가 나의 피부에 지저분한 수염을 낳았다. 나는 나의 독서를 뾰족하게 접어서 종이비행기를 만든 다음 어린아이와 같이 나의 자기(自棄)를 태워서 죄다 날려 버렸다.

아무도 오지 말아 안 드릴 터이다.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 칠면조처럼 심술을 내이기 쉬웁다. 나는 이 속에서 전부를 살라 버릴 작정이다. 이 속에서는 아픈 것도 거북한 것도 동에 닿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냥 쏟아지는 것 같은 기쁨이 즐거워할 뿐이다. 내 맨발이 값비싼 향수에 질컥질컥 젖었다.

한 달 - 맹렬한 절뚝발이의 세월 - 그 동안에 나는 나의 성격의 서막을 닫아 버렸다.

두 달 - 발이 맞아 들어 왔다.

호흡은 깨끼저고리처럼 찰싹 안팎이 달라 붙었다. 탄도(彈道)를 잃지 않은 질풍이 가리키는대로 곧잘 가는 황금과 같은 절정의 세월이었다. 그동안에 나는 나의 성격을 서랍 같은 그릇에다 담아 버렸다. 성격은 간데온데가 없어졌다.

석 달 - 그러나 겨울이 왔다. 그러나 장판이 카스테라 빛으로 타들어왔다. 얄팍한 요 한 겹을 통해서 올라오는 온기는 가히 비밀을 끄실를 만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특징까지 내어 놓았다. 그리고 단 한 재조를 샀다. 송곳과 같은 - 송곳 노릇밖에 못하는 - 송곳만도 못한 재조를 - 과연 나는 녹슬은 송곳 모양으로 멋도 없고 말라 버리기도 하였다.

혼자서 나쁜 짓을 해보고 싶다. 이렇게 어둠컴컴한 방 안에 표본과 같이 혼자 단좌(端坐)하여 창백한 얼굴로 나는 후회를 기다리고 있다.

[출처] http://www.jikji.org/%EA%B3%B5%ED%8F%AC%EC%9D%98%20%EA%B8%B0%EB%A1%9D?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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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 앉은 그를 매우 흥미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무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민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옷을 한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말도 곧잘 철철 대이거니와 중국말에도 그리 서툴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꼬마데 오이데 데스까?(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첫마디를 걸더니만, 도꼬가 어떠니, 오사까가 어떠니, 조선 사람은 고추를 끔찍이 많이 먹는다는 둥, 일본 음식은 너무 싱거워서 처음에는 속이 뉘엿걸다는 둥, 횡설수설 지껄이다가 일본 사람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짧게 끊은 꼿꼿한 윗수염을 비비면서 마지못해 까땍까땍하는 고개와 함께 “소데스까(그렇습니까)”란 한 마디로 코대답을 할 따름이요, 잘 받아 주지 않으매, 그는 또 중국인을 붙들고서 실랑이를 하였다. “니상나열취……” “니싱섬마”하고 덤벼 보았으나 중국인 또한 그 기름낀 뚜우한 얼굴에 수수께끼 같은 웃음을 띨 뿐이요 별로 대구를 하지 않았건만, 그래도 무어라고 연해 웅얼거리면서 나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짐승을 놀리는 요술장이가 구경꾼을 바라볼 때처럼 훌륭한 재주를 갈채해 달라는 웃음이었다. 나는 쌀쌀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주적대는 꼴이 어줍지 않고 밉살스러웠다. 그는 잠깐 입을 닫치고 무료한 듯이 머리를 덕억덕억 긁기도 하며, 손톱을 이로 물어뜯기도 하고,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다가, 암만해도 중절대지 않고는 못 참겠던지 문득 나에게로 향하며, “어디꺼정 가는 기오?”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붙인다.

“서울까지 가요.”

“그런기오. 참 반갑구마. 나도 서울꺼정 가는데. 그러면 우리 동행이 되겠구마.”

나는 이 지나치게 반가와하는 말씨에 대하여 무어라고 대답할 말도 없고, 또 굳이 대답하기도 싫기에 덤덤히 입을 닫쳐 버렸다.

“서울에 오래 살았는기요?”

그는 또 물었다.

“육칠년이나 됩니다.”

조금 성가시다 싶었으되, 대꾸 않을 수도 없었다.

“에이구, 오래 살았구마, 나는 처음길인데 우리 같은 막벌이군이 차를 내려서 어디로 찾아가야 되겠는기요? 일본으로 말하면 기전야도 같은 것이 있는기오?”

하고 그는 답답한 제 신세를 생각했던지 찡그려 보았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이 웃기보다 찡그리기에 가장 적당한 얼굴임을 발견하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겅성드뭇한 눈썹이 올올이 일어서며, 아래로 축 처지는 서슬에 양미간에는 여러 가닥 주름이 잡히고, 광대뼈 위로 뺨살이 실룩실룩 보이자 두 볼은 쪽 빨아든다. 입은 소태나 먹은 것처럼 왼편으로 삐뚤어지게 찢어 올라가고, 죄던 눈엔 눈물이 괸 듯 삼십 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그 얼굴이 10년 가량은 늙어진 듯하였다. 나는 그 신산스러운 표정에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하였다.

“글쎄요, 아마 노동 숙박소란 것이 있지요.”

노동 숙박소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묻고 나서,

“시방 가면 무슨 일자리를 구하겠는기오?”

라고 그는 매달리는 듯이 또 꽤쳤다.

“글쎄요, 무슨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는지요.”

나는 내 대답이 너무 냉랭하고 불친절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일자리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외에 더 좋은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흠, 고향에서 오누마.”

하고 그는 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의 신세타령의 실마리는 풀려 나왔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따른 동리였다. 한 백호 남짓한 그곳 주님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부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 척식 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지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료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이 3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갔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 봄에(그의 나이는 실상 스물여섯이었다. 가난과 고생이 얼마나 사람을 늙히는가?) 그의 집안은 살기 좋다는 바람에 서간도로 이사를 갔었다. 쫓겨가는 운명이거든 어디를 간들 신신하랴. 그곳의 비옥한 전야도 그들을 위하여 열려질 리 없었다. 조금 좋은 땅은 먼저 간 이가 모조리 차지하였고 황무지는 비록 많다 하나 그곳 당도하던 날부터 아침거리 저녁거리 걱정이랴. 무슨 행세로 적어도 1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먹고 입어 가며 거친 땅을 풀 수가 있으랴. 남의 밑천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보니, 가을이 되어 얻는 것은 빈주먹뿐이었다. 이태 동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버티어 갈 제, 그의 아버지는 망연히 병을 얻어 타국의 외로운 혼이 되고 말았다. 열아홉 살밖에 안된 그가 홀어머니를 보시고 악으로 악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중 4년이 못되어 영양 부족한 몸이 심한 노동에 지친 탓으로 그의 어머니 또한 죽고 말았다.

“모친까장 돌아갔구마.” “돌아가실 때 흰죽 한 모금도 못 자셨구마.”하고 이야기하던 이는 문득 말을 뚝 끊는다. 나는 무엇이라고 위로할 말을 몰랐다. 한동안 머뭇머뭇이 있다가 나는 차를 탈 때에 친구들이 사준 정종병 마개를 빼었다. 찻잔에 부어서 그도 마시고 나도 마셨다. 악착한 운명이 던져 준 깊은 슬픔을 술로 녹이려는 듯이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시는 그는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후 그는 부모 잃은 땅에 오래 머물기 싫었다. 신의주로, 안동현으로 품을 팔다가 일본으로 또 벌이를 찾아가게 되었다. 규슈 탄광에 있어도 보고, 오사까 철공장에도 몸을 담아 보았다. 벌이는 조금 나았으나 외롭고 젊은 몸은 자연히 방탕해졌다. 돈을 모으려야 모을 수 없고 이따금 울화만 치받치기 때문에 한곳에 주접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나고 고국 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훌쩍 뛰어나왔다가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보고 벌이를 구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했다.

“고향에 가시니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습디까?”

나는 탄식하였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다 뮌기오, 고향이 통 없어졌더마.”

“그렇겠지요. 9년 동안이나 퍽 변했겠지요.”

“변하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없더마.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마.”

“그러면, 아주 폐농이 되었단 말씀이오?”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 만 담만 즐비하게 남았드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 남았는기오, 암만 찾아도 못 찾겠더마. 사람 살던 동리가 그렇게 된 것을 혹 구경했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 한 목은 높아졌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호 살던 동리가 10년이 못 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이윽고 나는 이런 말을 물었다.

“그래, 이번 길에 고향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났습니까?”

“하나 만났구마, 단지 하나.”

“친척되는 분이던가요?”

“아니구마, 한 이웃에 살던 사람이구마.”

하고 그의 얼굴은 더욱 침울했다.

“여간 반갑지 않으셨지어요.”

“반갑다마다, 죽은 사람을 만난 것 같더마. 더구나 그 사람은 나와 까닭도 좀 있던 사람인데……”

“까닭이라니?”

“나와 혼인 말이 있던 여자구마.”

“하아!”

나는 놀란 듯이 벌린 입이 닫혀지지 않았다.

“그 신세도 내 신세만 하구마.”

하고 그는 또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보다 나이 두 살 위였는데, 한이웃에 사는 탓으로 같이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자라났다. 그가 열 네살 적부터 그들 부모들 사이에 혼인 말이 있었고 그도 어린 마음에 매우 탐탁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열일곱 살 된 겨울에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아버지되는 자가 20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처녀 가족은 그 동리에서 못 살고 멀리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는 물론 피차에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하였다. 이번에야 빈터만 남은 고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그 아내될 뻔한 댁과 마주치게 되었다.

처녀는 어떤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20원 몸값을 10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빚이 60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 주고, 작년 가을에야 놓아 준 것이었다.

궐녀도 자기와 같이 10년 동안이나 그리던 고향에 찾아오니까 거기에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쓸쓸한 돌무더기만 눈물을 자아낼 뿐이었다. 하루해를 울어 보내고 읍내로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10년 동안에 한 마디 두 마디 배워 두었던 일본말 덕택으로 그 일본 집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암만 사람이 변하기로 어째 그렇게도 변하는기오? 그 숱 많던 머리가 훌렁 다 벗을졌두마. 눈을 푹 들어가고 그 이들이들하던 얼굴빛도 마치 유산을 끼얹은 듯하더마.”

“서로 붙잡고 많이 우셨겠지요”

“눈물도 안 나오더마. 일본 우동집에 들어가서 둘이서 정종만 열병 때려뉘고 헤어졌구마.”

하고 가슴을 짜는 듯한 괴로운 한숨을 쉬더니만 그는 지난 슬픔을 새록새록 자아내어 마음을 새기기에 지쳤음이더라.

“이야기를 다하면 뭐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나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자, 우리 술이나 마자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주거니받거니 한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1926>
[출처]http://www.jikji.org/%EA%B3%A0%ED%96%A5?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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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식은 관청 사무를 끝내고서 집에 돌아왔다. 얼굴빛이 조금 가무스름한데 노란빛이 돌며, 멀리 세워 놓고 보면 두 눈이 쑥 들어 간 것처럼 보이도록 눈 가장자리가 가무스름 한데 푸른빛이 섞이었다. 어디로 보든지 호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삼십 내외의 청년이다. 문에 들어선 주인을 본 아내는 웃었는지 말았는지 눈으로 인사를 하고 모자와 웃옷을 받아서 의걸이에 걸며,

“오늘 어째 이렇게 일찍 나오셨소?”

하며 조금 꼬집어 뜯는 듯한 수작을 농담 비슷이 꺼낸다. 영식은 칼라를 떼면서 체경 앞에 서서,

“이르긴 무엇이 일러, 시간대로 나왔는데”

하고 피곤한 듯이 약간 상을 찌푸렸다.

“누가 퇴사 시간을 몰라서 하는 말요?”

”그럼.”

“오늘은 밤을 새고 들어오지를 않았으니까 말예요.”

영식의 아내는 구가정 부인으로 나이가 한 두 살 위다. 거기다가 애를 여럿 낳고 또 시집살이를 어려서부터 한 탓으로 얼굴이 몹시 여윈데다가 몸에 병이 잦아서 영식에게 대면 아주머니 뻘이나 돼 보인다. 그런데다가 히스테리 기운이 있어 몹시 질투를 하는 성질 이었다.

“내가 언제든지 밤을 새우고 다녔소? 어쩌다 한 번 그런 때가 있지.”

“어쩌다가 무엇이오? 나는 뻔뻔스러워서도 그런 말은 할 수가 없겠소.”

“무엇이 뻔뻔하단 말이요? 어젯저녁 하루밖에 더 새고 들어왔소?”

“무엇요? 아이 기가 막혀. 그끄저께에는 새벽 다섯 시에 들어왔죠. 또 지난번 공일날은 일곱 시에나 들어오지 않으셨소?”

영식은 씽긋 웃어 굴복한다는 뜻을 표하고도 그래도 버티어 보느라고,

“그때야 연회에서 늦어서 자연히 그렇게 되었지 내가 일부러 그랬나?”

“저런 걸핏하면 연회니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구식 여자라고 속이것다. 그렇지만 나는 못 속여요. 그 이튿날 당신 양복 주머니를 보니까 하이칼라 향수 냄새가 나는 여자 수건이 들었는데그래?”

“허허, 수건이 있기로 그렇게 이상할 건 없지. 요리집에서 기생의 수건을 술김에 넣고 온 게지.”

이 말을 듣더니 주인 아내는 서랍을 와락 열더니 꽃봉투에 넣은 편지 한 장을 쑥 내놓 으며,

“이것도 요리집에서 술김에 넣어 준 손수건이요? 자! 어서 오늘 저녁에는 이 편지한 여자에게 가서 밤이나 새고 오시우! 나같이 늙어 빠씬 년을 어떻게 당신같이 젊은이가 생각할 수 있겠소.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지.”

영식은 봉투를 물끄러미 보다가 상을 잠간 찌푸리며,

“이게 어디서 왔소?”

하며 피봉을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았다. 주인 아내는 소리를 포달스럽게 툭 쏘아서,

“누가 알우! 그것을 날더러 물어 본단 말요. 저런 사내들은 능청맞단 말야. 편지 하라고 번지수 알으켜 줄 적은 언제고 지금 와서 시치미를 딱 떼고 어름어름한다. “

영식은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것 모양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편지 보낸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없으니 누군 줄 알 수 있나‥‥‥”

속으로는 벌써 알아챈 것이 있으나 부인이 옆에서 감시를 하므로 어물어물하는 수작을 한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은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주소나 이름을 말할 것도 없이 안다는 뜻이 아니요. 어서 반갑거든 그대로 반갑다고 그래요. 다른 사연 있겠소? 오늘 밤에 오라는 것이겠지.”

“아따 퍽도 그러네. 편지를 한두 장 받는 터가 아니요 어떻게 안단 말이요. 하지만 누군지는 몰라도 남에게 편지를 하려면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쓰는 법이지‥‥‥ 아냐 도루 우체통에 넣어 버려.”

하고 짐짓 화나는 체하고 편지를 뜯지도 않고 장머리에다 올려 놓았다. 그것은 아내의 마음이 풀리면 슬그머니 갖다 보자는 수작이다.

“왜 보시지를 않소? 어서 보고 가 보시구려. 내 혼자 집보고 있을께.”

서로 이렇게 찧고 까불다가 아내가,

“대관절 나는 혼까 살림살이는 참 못 하겠소.“

하고 주인의 약점을 쥐인지라 거침없이 요구가 나온다.

“할멈이 간 후에 혼자 숱한 살림살이를 하자니까 사람이 죽겠구려.“

“왜 사람 하나를 얻으라니까 얻지 않고 그래.”

“사람이 어디 고렇게 입에 맞은 떡처럼 있소.“

“그래도 수소문하면 있겠지.”

“그런데 나리.“

이번에는 아내 쪽이 수그러지며 말소리가 공손해진다.

“왜 그러우?”

하는 영식의 얼굴에는 위엄을 꾸몄다.

“저 오늘 박주사댁이 와서 사람 하나를 지시하마 하였는데 당장에라도 불러올 수 있다고, 자식도 없고 서방도 없는데 일을 썩 잘한대.“

하며 주인을 타이르기에 전력을 다하다시피 한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데?”

영식이 나이 묻는 것도 싫어서,

“나이는 아무렇거나 알아 무엇하시료?”

”아따 나이 좀 물은 것이 잘못이란 말이요?”

“나이는 퍽 젊답디다. 자세 물어 보지는 않았으나 그렇지만 일도 잘하고 사람도 괜찮대.”

나이 젊다는 것을 들은 영식은 비록 이상한 야심이 생긴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기어서,

“그러면 데려오구려. 월급은 전에 있던 노파와 똑같이 주겠지?”

“그렇지.”

아내는 잠간 주저주저하더니 말할 듯 말 듯 하더니 급기야 입을 열면서,

“그런데요, 인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주사댁 말을 들으면 인물 하나가 안되었다고.”

주인이 말을 듣더니,

“인물이 어떻기에?”

하며 놀라는 듯이 아내를·본다.

“그게 아니라 어려서 불에 디어 얼굴을 찍어맸다구요.“

“그럼 보기 싫을걸.”

“그래서 박주사댁도 보고서 쓰랴거든 쓰고 말랴거든 말라는데 얼굴야 무슨 상관 있소, 일만 잘하면 고만이지.”

“그렇지만 너무 보기 싫으면 어떻게 하우?”

“보기 싫어도 눈 있고 코 있겠지 반쪽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안됐어, 사람이란 인상이 나쁘면 못써. 더구나 친구가 많이 다니는 우리 집에서 불쾌하게 보여서는 안될걸. 외국에서는 호텔이나 큰 상점의 여사무원도 무엇보다도 인불 시험부터 본다우.”

“글쎄 인물만 해반주룩하면 무엇하우. 일이 첫째 목적인데 일만 잘 하면 고만이지 인물만 이쁘면 첩을 삼을 테요? 회똑회똑하고 석경 앞에서 떨어질 줄이나 모르면 그런 고질을 어떻게 한단 말이요?”

”그래도 사람은 외양에 있지, 그렇게 보기 싫거든 조금더 기다려 보아서 다른 데 마땅한 것을 데려오지.”

아내는 화를 버럭 내며,

“글쎄 딱하기도 하시우. 어느 천년에 다른 것을 데려온단 말요, 좀 보.”

하고 툇마루 끝으로 나가서 빨래 광주리를 헤치면서

“이렇게 빨래가 쌓였구려. 요새처럼 날 좋은 때 하지 않고 언제 한단 말이요. 큰댁 생신이 며칠 안 남았는데 그동안에 준비는 누가 다 하우. 옷도 한 벌씩은 지어입어야지. 어린것들은 벌거벗겨 데리고 가우. 나는 시방이라도 데려올 터이야.”

“그런 것이 아냐. 왜 김주사집에 있던 사람 얌전하더군. 일주일만 지내면 오마고 했으니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아내는 하품을 하며,

“어이 일주일을 언제 기다린단 말요. 나는 모르겠소. 남의 생각은 조금도 할 줄 모르니까 내가 부릴 사람 내가 데려온다는데 웬 걱정들요.”

“그럼 나는 모르겠소. 하고 싶은 대로 하구려. 내 그렇게 악지를 시는 것은.”

하고 돌아앉으니까 아내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염려 말아요. 내 데려올께.”

2

그날로 양천집이 왔다. 오고 본즉 주인 아내도 유쾌치 못할 만큼 흉한 얼굴을 가졌다.한쪽 얼굴이 눈 하나를 어울러서 뺨까지 대패로 깎은 듯하고 따라서 눈알이 껍질이 벗겨져서 툭 불그러졌다. 그래 한 눈이 유달리 크므로 다른 한쪽은 또한 몹시 작아 보인다. 거기다가 곰보요 머리는 쥐가 뜯은 것처럼 군데군데 났다. 단 손이 크고 발이 크다.

그러나 아내는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남편이 들으라는 듯이,

“참 꼴불견이라더니 게 두고 마췄어. 일은 참 잘해요, 설겆이하는 것이라든지 쓰개질 하는 것이 또 황소같이 세차게 해.”

하고 남편 옆에서 넌지시 말을 하였다. 쥔은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신문만 보고 앉아 있다.

며칠이 지났다. 양천집의 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골서 아무렇게나 자라난데다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서 배운 것 없고 본 것이 없어서 어른 아이 알아볼 줄을 모르고 말버릇이 없다. 거기다가 성미가 뾰롱뾰롱하고 소갈머리가 없어서 어떤 때는 주인 아내의 눈짓하는 것도 모르고 제멋대로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상을 찌푸리고 코웃음을 친다.

어떤 때는 통내외하고 다니는 친구가 와서 보고 주인 귀에다 몰래,

“내보내게. 못쓰겠네. 첫째 남 볼썽이 사놔.“

하며 권고를 한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나도 아네. 하지만 온 지가 열흘도 못 된 것을 어떻게 내보내나. 차차‥‥‥”

하고 대답만 하여 두었다. 이 눈치를 챈 주인 아내는 그 친구를 몹시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별걱정을 다 하네. 오지랖도 꽤 넓지, 남의 집 살림 걱정까지 하게.”

하며 옆에다 세워 놓고 욕을 할 적이 있었다. 그럴 적마다 주인은 치밀어 올라오는 분을 참는다. 학교 다치는 열 두 살 먹은 큰아들도 걸핏하면,

“찍어뱅이, 애꾸눈이!”

하고 놀려먹는다. 그러면 그런 때마다 몽둥이찜이 내린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내외 쌈이 된다.

“집안의 위엄이 너무 없어.”

하고 남편이 호령을 하면 아내는,

“자식들이 너무 버릇 없어.”

하고 대든다. 공연히 사람 하나 데려온 것이 집안을 불화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양천집에게 하루는 기별이 오기를, 동서가 죽었는데 초상 볼 사람이 없으니 급 히 와 달라 하였다.

양천집은 황망히 그리로 갔다. 일을 하다 말고 갔으므로 주인 아내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떻든 속히 오라고 하기는 하였으나 한시가 액액한지라 혼자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인은 생각하기를 이런 좋은 기회를 잃지 말고 얼른 다른 것을 불러 오겠다 하 였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를 동정하듯이,

“일하던 것을 그대로 두고 가서 어떻게 한단 말이요!”

하고 은근히 의논을 하였다.

“글쎄 말요. 빨래는 허다 말고 그대로 내버리고 가서 그것도 걱정이오. 내가 손이 나야 바느질이라도 할 터인데.”

주인은 이 말을 듣더니,

“그것이 오고가는 데 적어야 이틀은 걸릴 것이요 초상을 치르자면 사흘은 걸릴 터이니, 적어도 닷새는 될 터이란 말야.”

“그래요. 허지만 어디 그렇게 꼭꼭 날짜대로 일이 되오, 조금 늦기가 쉽지.”

“그러면 여보, 그것이 나려을 때까지 김주사 집에 있던 것을 데려다 둡시다 그려.”

이 말에 솔깃한 아내는,

“하지만 어떻게 왔다가 도루 가라고 그런단 말이요?”

“무얼, 돈냥이나 더 주면 고만이지.”

“글쎄.”

피차 타협이 되어 김주사 집에 있던 점순 어멈을 데려왔다.

사람이 체나서 영리하고 인물도 반반하며 일도 하질 못하지 않고 말솜씨라든지 어린애 보는 것이 주인 맘에도 솔깃하였다.

그러나 주인 아내는 쓸데없이 의심을 내어서 주인이 점순 어멈에게 하는 행동을 눈 여겨보지 않는 것이 없다.

“점잖은 사람이 그럴 리가 있나.”

하고 혼자 위로도 하였다가,

“그렇지만 알 수 있어야지. 그런 짓이란 옛날부터 없는 일이 아니고.”

하며 공연한 걱정을 한다. 그런 기색을 볼 때 마다 주인은 혼자 웃으면서 속으로는 일상 같이 노는 기생 점고만 하고 앉아 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양천집이 오지를 않다가 열흘이 넘어서야 왔다. 문간에 들어서기 전까지도 혹시 내가 늦게 와서 다른 사람을 그 동안에 두지나 아니하였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며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골서 서울까지 걸어오는 길에서도 손가락을 꼽아 가며.

“벌써 열흘이지.“

하다가,

“만일 다른 사람이 있으면 나는 내쫓길 터인데.”

하고 걱정이 되어 애꾸눈을 두리번두리번하였다.

“실상은 늦게 오랴 늦게 온 것이 아니라 짚신이 떨어져서 그 값을 버느라고 옆엣집 방아를 이틀 동안 찧어 준 죄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걱정이 되어서 궁리가 대단하여,

“만일 나가라면 그 집에서 찾을 돈이 얼마나 되누. 열흘 동안 있었으니 한 달에 삼 원을 몇으로 쪼개야 되나.”

하고 길거리에 앉아서 모래알을 서른 개 주 워 가지고 닷 냥 열 냥 하고 삼십 분이 넘도록 셈을 보아서 일 원이라는 것을 발견은 하였으나 그래도 자기의 구구를 믿을 수가 없어서 어떤 주막에 들어가,

“여보 영감님!”

하고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자기 구구가 맞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늙은이 역시 한참 있다가 꾸물꾸물하더니,

”그런가 보외다.“

하고 몽롱하게 대답을 한다. 기연가미연가하여 반신반의로 어떻든 일 원은 주겠지 하고 서울까지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낮선 사람 하나가 밥솥을 씻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칠 때에 는 마치 고양이가 쥐 노리듯 무서웁고 암상스러운 질투의 광채가 두 눈에서 번개처럼 번득이었다. 서로 자기의 지위와 자리를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경계를 하였다.

“어서 오게.“

주인 아내가 나오며,

“왜 이렇게 늦었어?”

하는 소리는 풀이 없고 쌀쌀한 듯하게 양천집 귀에 들렸다.

“급히 볼일이 있어 늦게 왔어요.”

“무슨 볼일이 그리 급했담.”

양천집은 마루끝에 와 서서 주인 아내를 보며,

“저 사람은 누구예요?”

하며 부엌을 가리켰다.

“응, 새로 온 사람야.”

양천집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는 얼마간 아무 말이 없다가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저 사람은 자기보다 우선 인물이 곱다는 것이 여간 샘이 나지 않았다. 또는 자기처럼 투 박한 시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샘이 났다.

“어떻든 다리나 좀 쉬게. 그리고 되는 대로 결말을 내줄 터이니.”

처음에 온 양천집과 나중 온 점순 어멈 사이에는 암투가 시작되었다. 그 암투는 결코 상대자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었다.

점순 어멈이 밥상을 보면 양천집은 설겆이를 하고, 양천집이 마당을 쓸면 점순 어멈은 마루를 훔쳤다. 방이 끝나면 세간을 닦고 먼지를 털면 물을 뿌렸다. 네가 하면 내가 한다. 서로 겨끔내기로 하는 바람에 좋아지기는 주인밖에 없다. 나중에는 주인의 구두 닦기며 뒷간까지 말끔히 쓸어 놓았다.

그날 저녁 주인 내외는 서로 앉아서 의논을 하였다.

“어떻게 해야 좋겠소?”

“글쎄.“

“하나는 있던 것이니까 박절히 가라 할 수도 없고 또 나중 온 것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라고 해요?”

“허지만 제가 가서 늦게 오기 때문에 사람을 둔 것이지 제가 속히 왔어도 두어?”

하고 전것을 내미는 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나중 온 것은 나리 말씀과 마찬가지로 임시로 두기로 하지 않았소?”

하며 아내는 전것을 그대로 둘 의향이다.

“아따, 그때는 그랬지만 사람 둘을 놓고 보아요, 어느 것이 나은가?”

“사람야 둘이 다 괜찮지.”

“무엇야? 둘이 다 괜찮다니, 그래 얼거뱅이 찌거뱅이에다 악상군이요 또 보고 배운 것이 없는 것과, 인물 얌전하고 말솜씨 있고 사람 영리한 것하고 똑같단 말요? 온 말을 해도 조금이나 동에 닿는 말을 해야지”

“그렇지만 경우가 그렇지 않소.”

“경우가 무슨 경우야, 내 돈 주고 나 사람 쓰는데 내 맘에 들면 두고 그렇지 않으면 내보내는 것이지 경우가 다 무엇이야.”

이렇게 싸우다가 결국은 돈 소리에 아내가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한다. 남편은 화증을 와락 내이면서,

“아따 맘대로 하구려, 나는 그런 돈을 낼 수가 없으니 나중것을 두든지 먼첨것을 두든지 멋대로 하우.”

하고 돌아 드러눕는다. 아내는 남편을 타이르려고,

“그렇게 화까지 내실 것이 있어요? 좋을 대로 하지.“

그 이튿날 점순 어멈과 양천집은 아침을 해 치르기 전에 주인 앞에 서서 간택하기를 기다렸다. 영리한 점순어멈은 벌써 자기가 승리자인 것을 알아채고서,

“나리 처분대로 하시지요.”

하고 금치 못하여 나타나는 기꺼운 빛이 얼굴에 보이고 양천집은 자기 자리를 빼앗긴 것이 분하여,

“제가 있어야 옳지요. 제가 다니러 간 새에 저 사람은 임시로 와 있었으니까요.”

하고 잡았던 것을 빼앗기는 사람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억지 겸 변명을 한다.

“그렇지만,”

주인은 엄연히 서서,

“자네는 가서 오지 않았으므로 저 사람을 둔 것이지 자네를 내보내려고 그러한 것은 아냐.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둘 수가 없으니 용량해 하게.”

점순 어멈은 북받치는 즐거움을 이길 수가 없어서 돌아서서 씽긋 웃었다. 양천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제가 올 때까지 잠깐 와 있던 사람이요, 저는 처음부터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어쨌단 말야. 나는 더 말할 수 없어.”

하고 사랑으로 나갔다.

주인 아내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나리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나도 헐 말이 없네.“

짝짝이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그는 마지막으로 힘있게 하는 소리가,

“그러면 제가 받을 돈이나 주세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것야 그러지.“

하고 아내는 돈 일 원과 약간의 은전 몇 푼을 갖다 쥐어 주며,

“자, 미안하니 신이나 한 켤레 사 신게.”

하고 양천집의 손에 돈이 놓일 제, 그는 눈물이 젖은 얼굴이 반갑고 좋은 마음에 실룩실룩하고 떨리더니 마음이 저으기 풀리어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1925>

[출처] http://www.jikji.org/%EA%B3%84%EC%A7%91%20%ED%95%98%EC%9D%B8?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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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째

사랑하시는 C선생님께 어린 심정에서 때없이 솟아오르는 끝없는 느낌의 한 마디를 올리나이다.

시간이란 시내가 흐르는 대로 우리 인생은 그 위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읍니다. 늙은이 나 젊은이나 마음 아픈 이나 행복의 송가를 높이 외는 이나 성공의 구가([[謳]]歌)를 길게 부르짖는 사람이나, 이 시간이란 시내에서 뱃놀이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이 편지를 선생님께 올리는 이 젊은 A도 시간이란 시내에 일엽 편주(一葉片舟)를 띄워 놓고 곳 모르는 포구로 향하여 둥실둥실 떠갑니다.

어떠한 이는 쾌주하는 기선을 탔으며 어떠한 이는 높다란 돛을 달고 순풍(順風)에 밀리어 갑니다. 또 어떠한 이는 밑구멍 뚫어진 나룻배를 이리 뒤뚱 저리 뒤뚱 위태하게 젓고 갑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하품하고 기지개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또 어떠한 배에서는 장고를 두드리고 푸른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불그레한 정화(情話)의 소곤 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여자의 애끊는 울음 소리가 납니다. 어떠한 배 속에서는 촉루([[髑]][[髏]])가 춤을 추고 어떠한 배 속에서는 노름군의 코고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이 A가 탄 배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줄 아십니까? 때없는 우울과 비분과 실망과 고통과 원망이 뭉텡이가 되고 덩어리가 되어 듣는 이의 귓구멍을 틀어막을 듯이 다만 띵 하는 머리 아픔이 있을 뿐이외다.

나와 같이 배를 띄워 같은 자리를 지나가는 배가 몇 백 몇 천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서로 바라보며 기막혀 웃을 뿐이외다. 그리고 서로 눈물지을 뿐이외다.

선생님, 이 배가 가기는 갑니다. 한 시간에 5리를 가거나 단 1리를 가거나 가기는 갑니다. 그러나 그 배가 뒷걸음질 칠 리는 없을 터이지요. 가기만 하는 배는 우리를 실어다 무엇을 할까요? 흐르는 시간은 말이 없고 뜻이 없으매 다만 일정한 규칙대로 가기는 가겠으나 뜻없고 말없는 시간이란 시내 위에 이 A는 무슨 파문을 그리어 놓아야 할까요.

새벽 서리 찬바람에 차르럭 찰싹 뛰어노는 어여쁜 물결입니까? 아침 저녁 멀리 밀려왔다 밀려가는 밀물의 스르렁거리는 물결입니까? 초생달 갸우뜨름하게 비추인 푸르렀다 희었다 하는 깜찍한 파문입니까? 어떻든 저는 무슨 파문이든지 그 시간이란 파문 위에 그리어 놓아야 할 것이외다. 하다 못하여 시커먼 물결 위에 푸---하게 일어나는 거품일지라도 남겨 놓고야 말 것이외다.

선생님! 그러나 그 파문을 그리려 하나 그릴 수가 없읍니다. 하늘의 바람은 너무 강하고 몰려오는 물결은 너무 힘이 있읍니디

인습이란 물결이 아직은 편주를 몰아 낼 때와 육박하는 환경의 모든 시커먼 물결이 가려 하는 이 A라는 조그마한 배를 집어 삼키려 할 때 닻을 감으랴 노를 저으랴 가려고는 합니다마는 방향을 정하려 하나 괄에 힘이 약하고 가려 하나 나를 이끌어 나아가게 하는 힘 있는 발동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어떤 때에는 폭우가 내려 붓고 어떠한 때에는 광풍이 몰려와 간신히 뒤뚱거리는 이 작은 배를 사정없이 푸른 물결 속에 집어 넣으려 합니다.

아아, 선생님! 그나 그뿐이 아니외다. 어떠한 때는 어두운 밤이 됩니다. 울멍줄멍하는 노한 파도가 다만 시커먼 암흑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하늘에는 희망의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저쪽 어귀에 희미하게 비추이는 깨알 같은 등대의 깜빡거리는 불도 꺼질 때가 있읍니다.

그러나 저는 가렵니다. 약하고 힘없는 두 팔다리로 저 보이지 않는 포구를 향하여 형형 색색의 파문을 그리면서 가기는 가렵니다. 오늘에 그리어 놓은 파문의 한 폭이 내일에 그릴 파문을 낳고 내일에 그리어 놓은 파문의 한 폭이 모레의 그것을 낳아 저쪽 포구에 이를 때에는 대양으로 가는 힘있는 여울 물결 위에 거룩하고 꽃다운 성공의 파문을 그리려 합니다.

아아, 그때에는 암흑에 날뛰는 미친 파도나 때없는 폭풍우나 밀려오는 인습의 물결이나 모든 환경의 그 모진 파도가 그 거룩하고 꽃다운 파문 하나는 지워 버리지 못할 것이며 삼키어 버리지 못할 것이지요. 이 작은 일엽 편주는 그때가 되어 부딪쳐 깨어지거나 물결에 씻기어 사라지거나 저는 다만 죽어 가는 목구멍 속으로라도 넘치는 환희와 복받치는 기쁨으로 영생의 노래를 부를 것이외다.

둘 째

오늘은 웬일인지 일기가 전에 보지 못하게 음침합니다. 답답한 심사와 침울한 감정을 양기있고 청징하게 하려 애를 썼으나 그것은 실패하였읍니다.

아침에 밥을 먹은 저는 12시가 되도록 습기찬 방바닥에 누워 있었읍니다. 오고가는 공 상이 어떠한 때는 저를 웃기더니 어떠한 때는 울리더이다. 저의 젊은 아내는 오색 종이로 바른 반짇그룻을 옆에 놓고 별 같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저의 입고 나아갈 두루마기 끈을 달고 있었나이다. 저는 저의 아내를 볼 때마다 불쌍한 생각이 납니다. 나이 젊은 아내의 고생살이를 생각할 때마다 저의 심정은 웬일인지 쓰립니다. 제 옆에 앉아 있는 그 젊은 아내가 과연 저의 이상을 채우는 아내는 아니외다. 사랑과 사랑이 결합하여 된 부부가 아니외다. 자각 있는 애인의 조화 있는 사랑은 아니외다. 그는 무엇을 믿고서 나의 아내가 되었으며 무슨 각성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애인과 애인이 서로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대담한 일이라 하면 애인도 아니요 애인도 아닌 이 두 사람의 서로 결합된 것도 위태하게도 대담한 것이외다.

위태한 짓을 똑같이 한 이 A도 불쌍한 용자이지마는 그것을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저의 젊은 아내도 어리석은 용자이외다. 우리 두 사람이 과연 원만하게 사랑의 가락을 두 몸에 얽어 놓았읍니까? 강대한 세력을 두 사람의 붉은 피 속에 부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어린 자식은 절더러 ‘아빠 아빠’ 합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더러는 ‘엄마 엄마’ 합니다. <엄마 엄마>라 부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알지도 못하게 저의 마음은 깨끗하여지며 어느 틈엔지 따가운 귀여움이 저의 가슴을 채웁니다. 어린애가 웃으면 저도 웃습니다. 그러면 저의 아내도 웃습니다. 저의 아내의 웃는 눈은 반드시 나의 얼굴을 바라 봅니다.

철없는 아이가 재롱부려 웃을 때는 저의 웃음과 저의 아내의 웃음 소리는 보이지 않는 공중에서 서로 얼크러져 입을 맞춥니다. 그때에는 모든 불평 모든 고통이 그 방안에서 내쫓기어 버립니다.

오늘도 남향한 창에는 햇빛이 따뜻하게 드는데 철없는 어린 자식은 방 한 귀퉁이에서 자막대기를 가지고 몽클몽클한 두 다리를 쪽 뻗고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콧소리를 쌔근쌔근하며 장난을 하고 있을 때 답답한 감정이 공연히 저의 상을 흐리게 하였으나 근지러운 살과 부드러운 입김을 가진 저의 아내가 고요한 침묵을 가는 바늘로써 바느질할 제 웬일인지 눈을 감은 저의 전신의 모든 관능은 힘을 잃은 것같이 노곤하여졌나이다

잠들지 않은 나의 정신은 혼농한 가운데 젖어 있을 때 나의 아내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여보셔요, 날이 점점 추워 오는데 월급 되거든 어린애 모자 하나 사 오세요”

하였읍니다. 이 말을 듣는 저는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읍니다. 그리고 속마음오로는, ‘화구도 살 것이 있고 책도 좀 사야 할 터인데 어린애 모자는 천천히 사지’ 하며 아내의 말에 공연 한 싫증이 났읍니다. 그 싫증은 결코 아내의 말이 부당한 말이나 어린아이의 모자를 사다 주는 것이 아까와 그리 한 것이 아니라 경제의 압박을 당하여 오는 저는 돈이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쌓아 오고 쌓아 오는 불평이 공연히 좋던 감정도 얼크러뜨려 버립니다.

저의 아내는 여러 번 그런 일을 말하면서도 저의 대답하지 않는 것이 무안한 듯이 한참이나 아무 소리가 없다가,

“왜 남의 말에 대답이 없소?”

하였읍니다. 나는 여전히 말 대답이 없이 드러누워 있었읍니다. 아내는 또다시,

“어린애 모자 하나 사다 주기가 무엇이 그리 어려워서”

하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다 꿰맨 두루마기를 툭툭 털어 저의 누워 있는 다리 위에 툭 던졌읍니다.

자막대를 가지고 장난하던 어린애는 모자 소리를 듣더니,

“때때모자? 응 엄마”

하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저의 아내를 쳐다보며 달려듭니다. 이것을 본 저의 아내는 토라졌던 얼굴을 다시 고쳤던지,

“글쎄 이것 좀 보시우. 모자 모자 하는구료”

하며 아무 말 없이 두 눈 위에 팔을 얹고 누워 있는 저의 가슴을 가만히 연하고 부드럽게 흔들었읍니다. 저의 아내의 매낀매낀한 손가락이 저의 옷 위에서 꼼지락거릴 때에 저의 피부 밑으로 지나가는 신경은 무엇에 취한 듯한 감각을 저의 핏결 속에 전하는 듯 하였읍니다.

저는 다만,

”이리 구찮은‥‥‥”

하고 팔꿈치로 아내의 손을 툭 치며 다시 돌아누웠읍니다. 제가 본래 신경질임을 아는 아내는 조금도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다만 생글 웃으면서 가장 노한 듯이,

“고만두구료. 어서 옷이나 입고 나아가요. 대낮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갑갑해 못 견디겠구료.”

하는 목소리는 웬일인지 마음 강한 저의 거짓 노여워함을 오래 가게는 못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벌떡 일어나며 아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에이! 그 등쌀에 누워 있을 수가 있어야지. 두루마기 어쨌소?”

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읍니다. 저의 아내도 웃음이 떠도는 얼굴에 거짓 노여움을 섞으면서,

“그것 아니고 무엇이오.”

하며 방바닥에 놓여 있는 저의 두루마기 가리켰읍니다. 저는 다만 무안한 가운데도 우스운 생각이 나서 아무 말 없이 두루마기를 입고,

“지금 몇 시나 되었을꼬·?”

하며 혼잣말을 하고는 모자를 집어썼습니다.

저는 바깥으로 나왔읍니다. 젊은 아내와 정에 겨운 싸움을 하고 나온 저의 마음은 바깥에 나와 비로소 그 시간에 일어난 역사가 그립고 애착하는 생각이 났읍니다. 새로운 공기와 푸른 하늘이 거의 공연히 센티멘탈한 심정을 녹이며 부드럽게 하여 줄 때 웬일인지 반웃음과 반노여움을 섞은 저의 젊은 아내의 얼굴과 그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저의 마음을 매취(魅醉)케 하는 듯하였읍니다.

저는 저의 친구를 찾아 MW사로 향하여 오면서 생각하는 것은 저의 아내뿐이었으며 그 아내가 청하던 어린 자식의 새 모자이었읍니다. 저는 월급을 타거든 모자를 사다 주리라 하였읍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이의 어머니 된 젊은 아내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리라 하였읍니다.

세 째

MW사에 왔읍니다. DH, WC는 서로 바라 보며 무슨 걱정인지 하고 있었읍니다. 웬일 인지 그 넓지 못한 방안에서는 검푸른 근심의 그늘이 오락가락하였읍니다. 저는,

“웬일들이야? 무슨 걱정들 있었나?”

하였읍니다. 얼굴 검은 DH는,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었네. 그런게 아니라 NC의 아내가 앓는다는 기별이 왔는데 본래 구차한 그 사람이 어떻게나 근심을 하겠나. 그래서 오늘 NC의 집까지 가 볼까 하고 자네를 기다리던 터인데.”

“무엇야? NC의 아내가?”

“그래.”

“그것 안되었네그려. 그러면 언제 가려나? 차비들은 준비되었나?”

“그것은 내가 준비하였어.”

“그러면 가 보세그려.”

저는 다만 친구의 불쌍한 처지에 동정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였읍니다. NC의 집은 시골입니다. 더구나 한적한 촌입니다. 그의 생활은 부유롭지 못하고 빈곤합니다. 그는 지금 자기의 손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아침에 괭이 메고 논으로 갑니다. 저녁이면 시름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그는 깜빡깜빡하는 유경 밑에서 깨알 같은 책을 봅니다. 그리고 시를 씁니다. 그의 시는 선생님도 보신 바가 있겠지요마는 참으로 완벽을 이룬 것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NC의 한적한 생활을 부러워합니다. 조금도 불평이 없이 조금도 변함이 없는 그의 굳은 신앙 아래 살아가는 것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저는 그의 눈물을 못 보았읍니다. 그의 한숨이 저의 귀를 서늘하게 하지 못하였읍니다.

넷 째

사랑하시는 선생님. 사람의 눈물이 있다고 하면 이러한 경우에 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요? 만일 참으로 그 눈물이 눈물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눈물이 참눈물이겠지요.

오늘 저녁이외다. 저의 세 사람은 NC의 사는 시골에 왔읍니다. 정거장에서 10리를 걸어들어올 제 저희 세 사람은 참으로 공통된 의식 공퉁된 감정을 머릿속과 가슴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작은 별들은 옛날의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한 듯이 우리를 보고서 재롱부리어 깜빡거립니다. 다닥다닥한 좀생이는 간지러운 듯이 옹기종기합니다. 밤은 어둡고 길은 험하오나 저희을 이끌어 가는 그 무슨 세력의 선이 끝나는 저편에는 우정이라는 낙원이 있읍니다. 동지라는 그리운 <에덴>이 있읍니다.

말이 없고 소리가 없이 걸어가는 우리 세 사람은 다만 쓸쓸하고 적막하고 심심하고 무미담담한 NC의 집을 찾아가면서도 우리의 끓는 피와 타는 정열은 그 찾아가는 한적한 농촌을 싸고도는 가만한 공기를 꽃답고 찬란하게 그리어 놓으려 하였읍니다.

그러나 NC의 집에 다다랐을 때가 되었읍니다. 초가집 가장자리를 싸고도는 암혹 속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혼자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는 그때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그를 NC로 알았읍니다. 우리는 다만,

“NC!”

하고 반가운 두 손을 내밀었읍니다. 이것을 본 NC는 다만 아무 소리가 없이 파리한 두 손을 내어밀며,

“야, 어떻게들 이렇게 내려왔나?”

하며 힘없는 말소리에 처량한 기운이 도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읍니다. 우리 세 사람의 마음속에는 NC의 말소리를 들은 때에 그 무슨 애매한 의식을 깨달았읍니다. 인생의 애가, 마음 아프고 가슴 저린 그 무슨 노래를 듣는 뜻이 NC의 목소리에서는 푸른 기운이 돌았읍니다.

NC는 아무 말이 없이 다만 번갈아가며 우리 세 사람의 손을 단단히 쥐었읍니다. 그리 고는,

“나의 아내는 30분 전에 영원한 해결의 나라로 갔네.”

하였읍니다. NC의 눈에서는 여태까지 보지 못하던 눈물이 흘렀읍니다. NC의 가슴은 에이고 붉은 피는 식고 애탄의 결정인 뜨거운 눈물은 다만 차디찬 옷깃을 적시고 시름 없이 식어 버리더이다.

그 누가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는 별이 있읍니다. 땅에는 꽃이 있읍니다. 바다에는 진주가 있읍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뜨겁게 반짝이는 눈물이 있읍니다. 누가 이것을 보고 울지 않는 이가 있고 누가 이 꼴을 보고 눈물 홀리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우리 세 사람은 한참이나 선 채로 울었읍니다. 친한 친구, 사랑하는 동지자의 사랑하는 아내의 죽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새삼스럽게 우리 인생의 모든 비애가 심약한 우리들을 울리었읍니다.

다섯 째

오래 뵈옵지를 못하였읍니다. 1주일 동안이나 NC의 집에 있었읍니다. NC의 아내의 장례는 저희가 시골에 간 지 이틀 뒤였읍니다. 초가을은 으스스하였읍니다. 나뭇잎은 시체를 담은 상여 위에서 시들어 가는 듯이 춤을 추었읍니다. 상여군들의 목늘여 부르는 구슬픈 비가는 길고 느리게 공동묘지로 향하는 산고개를 넘어가더이다.

아! NC의 아내는 영원히 갔읍니다. 동리를 거치고 산모퉁이를 지나서 영원히 갔읍니다. 그러나 NC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고있을 그의 환영은 길고긴 세월을 두고 우리 NC를 얼마나 울릴까요? 회고(回顧)의 기억 속에서 시들스럽게 춤추는 그의 그림자는 몇 번이냐 NC의 두 눈을 감개무량하게 하겠읍니까? 새벽 서리 차디찬 밤, 초생달 갸웃스름한 저녁에 애타는 옛 기억, 마음 아픈 옛생각은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 NC를 울릴까요?

제가 NC의 아내의 장례에 참석하였을 때에는 저도 또한 죽음과 생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하였읍니다. 죽음과 삶이라는 거이 무엇이 다른 것인가요? 살아 있다 함은 육체에 혈액이 돌고 모든 것을 의식하고 모든 것을 감각한다 함입니까? 죽음이라 하는 것 모든 관능이 육체의 썩어짐과 함께 그 활동을 잃어버린다 함입니까? 저는 무한한 비애를 아니 느낄 수가 없읍니다.

여섯 째

어저께 시골서 올라왔읍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일기가 청명하더이다. 가녋고 달콤한 공기가 저의 코 속을 통하여 될새없이 벌록거리는 폐 속으로 지나 들어갈 때 어저께까지 시든 듯한 저의 혈액은 다시 정해진 듯하더이다.

<낙망(落望)>이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낙망을 염려하는 저는 쉬지 않고 꽃다운 희망으로 저의 가슴을 채웠었읍니다. 그윽한 법열(法悅)속에서 브러시와 팔레트<調色板>를 움직일 때 저는 살았었으며 생의 진실을 맛보았을니다. 다만 제가 팔레트 판을 들고 캔버 스를 격(隔)하여 앉았을 때가 저의 참 생이었읍니다. <낙망>이라는 모토를 가진 그림을 그리면서도 무한한 장래와 끝없는 유열이 있었읍니다. 애인의 손을 잡고 그의 귀밑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자기의 흉중(胸中)을 하소연할 때와 같이 정결하고 달콤한 맛이 저의 전신을 물들였읍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정신이 청징하였습니다. 1 주일 가까이 자극이 적은 향토에서 논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한아한 정신으로 노곤한 안일 속에 오늘 하루를 지내었읍니다.

그러나 안일에도 권태가 있고 법열도 깨일때가 없지 않았읍니다. 육체의 권태는 정신까지 권태하게 하더이다. 또다시 법열까지 깨뜨려 버리더이다.

저는 기지개 한 번 하고 팔레트 판을 내던졌읍니다. 그리고 캔버스를 집어치우고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시계를 보았읍니다. 그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읍니다. 저는 두 시간의 여가가 있음을 알았읍니다. 그래서 그 권태를 녹이기 위하여 SO의 집으로 가려 하였읍니다.

SO는 불쌍한 여성이외다. 한 다리가 없는 불구자이외다. 나이는 20세이외다. 그는 한쪽 없는 다리를 끌면서 추우나 더우나 학교에를 10여 년이나 다녔읍니다. 제가 중학교 4년급 다닐 때에 아침이면 같은 길모퉁이에서 만나는 것이 연(緣)이 되어 그와 사귀게 되어 지금까지 3년 동안을 지내 왔읍니다.

그에게는 나이 늙은 어머니 한 분밖에는 없읍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학교에 가고 올 때에든 그는 반드시 자기 딸의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기다렸다 합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어 늦게 돌아오게 되면 그의 늙은 어머니는 반드시 학교 문 앞까지 와서 자기의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아, 선생님. 불구자의 모녀의 생활은 침으로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게 불쌍하고 참담합니다. 그의 물질적 생활은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합니다. 그는 남의 집 곁방에서 바느질품으로 그날그날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오늘도 그 불쌍한 불구자를 찾아왔읍니다. 문을 들어서며 기침을 두어 번 하였읍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전에는 반드시 반가와 맞아 주던 그 불구자의 여성, 오늘은 그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읍니다.

문간에 들어선 저의 마음은 저녁때쯤 산골짜기를 헤매는 듯이 휘휘하였읍니다. 가련한 불구의 여성이 나를 맞아 주지 않는 것이 저의 마음을 울게 하였읍니다.

저는 또다시 기침을 하고 구멍이 뚫어지고 문풍지가 펄럭펄럭하는 방문을 열려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문을 열지 못하였읍니다. 숭숭 뚫어진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불구인 여성의 모녀의 울음 소리는 저의 감정을 연민의 정으로 물들였읍니다. 저는 다만 망연하게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습니다. 말없이 서 있는 저의 주위는 날연한 공기가 불구자의 어머니와 불구인 여성의 울음 소리를 싣고서 시들어지는 듯이 선무(旋舞)를 추었읍니다.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더니 나오는 사람은 그의 늙은 어머니였읍니다. 그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저를 바라보더니,

“오셨읍니까?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하며 돌아서서 코를 풀었읍니다. 저는 무엇이라 물어볼 말도 없거니와 또다시 말할 것도 없어 다만,

“네, SO는 있나요?”

하며 방안을 들여다보았읍니다. SO의 어머니는,

“네, 있어요.”

하고 저의 말에 대답을 하더니 다시 방안을 들여다보며,

“얘, 선생님 오셨다.”

하였읍니다.

방안에는 SO가 돌아앉아 여태껏 울고 있는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다만 치마끈으로 눈물만 씻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제가 온 것을 보고서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어 돌아앉으면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발갛게 피가 오른 두 눈으로 저를 쳐다 보더니 다시 눈을 방바닥으로 향하였읍니다.저는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읍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읍니다. 저는 구두 를 끄르고 그 방안으로 들어갔읍니다. 방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마루끝에 놓여 있는 SO의 다리를 대신하여 주는 나무때기가 저의 발에 채여 덜컥하였읍니다. 저는 그때 근지럽고 누가 옆에서 ‘에비’ 하고 징그러운 것을 저의 목에다 던져 주는 듯이 진저리를 치는 듯이 방안으로 뛰어들어갔읍니다.

SO는,

“오늘은 시간이 없으세요?”

하며 다른 때와 다르게 유심히 저를 쳐다보았읍니다. 저는,

“이따가 4시에나 시간이 있으니까요. 잠깐 다녀가려고 왔어요.”

하고 자리를 정하고 앉았읍니다.

“댁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읍니까?”

하고 저는 그의 운 이유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그는 다만,

“아녜요.”

하고 부끄러움을 띠며 아무 말이 없었읍니다.

저도 또다시 무엇이라 물어 볼 수가 없어서 다만 사면만 돌아다보며 아무 소리가 없었읍니다.

SO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읍니다. 그러다가 반쯤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님.”

하고 저를 부르더니 또다시 아무 말이 없이 한참이나 꼼지락꼼지락하는 손가락만 바라보다가 저의,

“네”

하는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또다시,

“선생님.”

하였읍니다. 저는,

“네”

하고 그의 구부린 머리의 까만 털만 바라보았읍니다.

“저는 병신입니다.”

하더니 여태까지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떨어져 방바닥으로 시름없이 굴렀읍니다. 이 소리를 듣는 저도 같이 울고 싶었읍니다.

“저는 병신인데요.”

하고 힘있는 어조로 또다시 한 말을 거푸 하더니 그대로 방바닥에 엎드려져 울면서 목멘 소리로,

”병신인 저도 피가 있고 감정이 있읍니다. 뜨거운 눈물과 새빨간 정열이 있읍니다. 그러하나 불쌍한 저는 그 눈물을 가지고 혼자 우나 그 눈물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으며 그 정열을 혼자 태웠으나 그것을 받아 주는 이가 없어요.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서 더욱 불쌍한 구덩이에 틀어박으려 할 뿐이에요.”

하고 느껴 가며 울었읍니다.

“저를 A씨는 불쌍히 여겨 주십니까? 만약 참으로 불쌍히 여겨 주신다면 이 저의 마음까지 알아 주세요.”

하고 애소하듯이 저의 무릎에 엎드려 울었읍니다.

선생님, 누가 이 말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있으며 누가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저는 다만 SO를 끼어안고 한참이나 울었읍니다.

“SO씨 울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참으로 동정합니다.”

“그러면 한 다리 없는 불구자인 저를 길이 길이 사랑하여 주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저는 다만,

“네?”

하고 아무 말이 없었읍니다. 저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읍니다. 저의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은 저의 나이 젊은 아내였읍니다. 자막대기 가지고 놀고 있던 어린아이였읍니다. SO는,

“네 A씨, 대답을 하여 주세요.”

하고 저를 애소하는 두 눈에 방울방을 눈물을 고이고서 쳐다보았읍니다.

아! 선생님. 이 SO를 저는 참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참으로 동정합니다. 그가 눈물을 흘릴 때에 나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속태울 때에는 나도 속을 태우려 합니다. 하늘 아래 지구 한 점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이 병신인 SO를 저는 힘껏 붙잡고 울더라도 시원치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그 찰나 사이에 벌써 사랑이라는 것이 간 것이 아닐까요. 그의 손을 잡고 따라서 같이 우는 것이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 불구의 여성은 저를 사랑하려 합니다마는 저는 여성의 사랑을 얻고서 도리어 가슴이 아팠읍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저는 불구인 여성의 뜨거운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 불행한 사람이외다.

선생님, 육체의 불구자는 그 불구를 동정한 저로 말미암아 사랑의 불구자가 될 줄이야 꿈에나 알았사오리까? 사랑은 곧은것이요 굽은 것이 아니니 저는 벌써 그 곧은 길 위에 선 사람이외다. 저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바가 아니었나이다. 그러면 저는 저의 아내에게로 향하는 꼿꼿한 사랑을 일부러 꺾어 이 불구의 여성을 사랑할 수 없었읍니다. 불구의 여성이므로 그를 동정하는 동시에 저의 사랑을 불구가 되게 할 수는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 불구자의 눈물은 그 눈물이 저의 무릎 위에 떨어지는 때부터, 아니올시다. 그의 사랑이 저에게로 향할 때부터 벌써 그의 가슴에 어리어 있는 사랑을 불구자 되게 하였읍니다. 그의 한 다리가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은 한 쪽 없는 사랑이었읍니다.

저는 다만,

“SO씨, 울지 마세요. 저의 가슴은 SO씨의 눈물로 인하여 녹아 버리는 듯하외다. SO씨의 눈물 방울이 저의 마음 위에 한 방울씩 두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그 무슨 화살로 꿰뚫은 듯이 아프고 쓰립니다.”

할 뿐이었나이다.

“A씨, 저는 다만 A씨 한 분이 저를 참으로 사랑하여 주실 줄 알았었는데요.”

하는 SO는 그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아무말이 없었읍니다. 저는 다만,

“그만 우세요. 자‥‥‥ 일어나세요.”

하고 가리지 못한 눈물을 씻을 뿐이었나이다.

저는 어제날까지 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는 자를 행복자라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오늘 이 불구자의 하소연을 들을 때에 비로소 저의 가슴이 아팠었읍니다. 한 개의 사랑을 두 군데로 짜르려 할 때 그 아픔을 알았었읍니다. 그 쓰림을 알았읍니다. 한 개인 사랑을 가진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여러 사랑을 받는 것의 그 가슴저리고 불행한 것을 알았읍니다.

아! 그러나 그 불구자는 더욱더욱 불구자가 되어 갈 터이지요. 낙망과 원한의 심연에서 하늘을 우러러 그의 불행을 부르짖을 터이지요? 그 부르짖음의 애처로운 소리는 저의 피를 얼마나 식힐까요? 그 소리는 영원토록 저의 귀밑에서 슬퍼 울 터이지요?

선생님! 저는 참으로 사랑하는 여성의 사랑을 매정하게 물리쳐야 할 것입니까? 영원도록 받아 주어야 할 것입니까? 불쌍한 자의 울음을 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까? 불구자의 애소의 눈물을 저의 가슴에 파묻히도록 안아야 할 것입니까? 저는 다만 기로에 방황하며 약한 심정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일뿐이외다.

“네, 알았읍니다. 그러나 저는 SO씨의 말씀에 그렇게 속히 대답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면 언제 대답을 하여 주시겠습니까?”

“네 그것은 천천히 해 드리지요.”

하는 묻고 대답하는 말이 우리 두 사람 가운데에는 교환되었읍니다. SO는 의심하는 듯이,

“그러면 저를 절대로 사랑하여 주시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A씨의 가슴에는 저를 위하여서는 절대의 사랑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지요?”

하며 원망하듯이 저를 쳐다보았읍니다. 저는 무엇이라 대답할는지 몰랐읍니다. 참으로 저에게 절대의 사랑이 그때 있었읍니까? 참으로 없었읍니다. 절대의 동정과 연민은 있었 을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절대의 사랑은 없었읍니다. 타산이 있었으며 주저가 많았었읍니다. 어떠한 때에는 불구자라는 근지러운 대명사가 저를 진저리치게까지 하였읍니다. 아무 대답도 없는 저를 보던 SO는,

“저는 알았읍니다. 저는 영원토록 불구자이외다. 한 귀퉁이가 이지러진 사랑의 소유자이외다. 그뿐 아니라 저는‥‥‥”

하더니 단념과 원망이 엉킨 두 눈에는 어리 석은 눈물이 어느 틈에 말라 버리고 냉소와 저주가 맺힌 듯할 뿐이었읍니다. 이 소리를 듣는 저는 어쩐지 마음이 으스스 차고 몸이 달달 떨리는 듯하여 그의 눈물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단념과 원망과 냉소와 저주의 맺힌 듯한 표정을 볼 때 저는 또다시 그의 마음을 풀어뜨리어 힘없고 연하게 울리고 싶었읍니다. 저는,

“SO씨!”

하고 그의 손을 잡으며,

“저는 영원토록 SO씨를 잊지는 못하겠읍니다.”

하였읍니다. 그는,

“네 저를 잊지는 말아 주세요. 저도 눈을 감을 때까지는 A씨를 잊지는 못하겠지요.”

할 뿐이었읍니다.

일곱 째

SO의 집에서 나온 저는 학교를 향하여 갔었읍니다. 아까까지 청징하던 심신은 웬일인지 불구인 여성의 집을 다녀온 후부터는 흐릿하고 몽롱할 뿐만 아니라 침울하고 센티멘탈로 변하였읍니다.

저는 학교에를 갑니다. 한 시간의 도화(圖畵)를 가르치기 위함보다도 그 보수를 바라고 갑니다. 세상의 제일 불행한 범죄가 있다 하면 아마 이와 같은 자이겠지요. 뜻하지 않고 내 마음에 있지 않은 짓을 한 뭉치의 밥덩어리와 김치 몇 쪽의 충복할 식물을 위하여 알면서 행한다 하면 죄인줄 알면서 타인의 물건을 도적한 기한(飢寒)에 쪼들린 자와 얼마나 나을 것이 있겠읍니까? 남의 물건을 도적한 자의 양심이 떨린다 하면 그안큼 비례한 저의 양심도 떨리었을 것이며 박두하는 기한에 못 이기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적한 사람의 생을 갈구한 것을 동정할 것이라면 생명을 이어 얻기 위하여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이 A라는 화가도 또한 동정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일는지요?

저는 학교 정문에 들어섰었읍니다. 그때 마침 M교주가 학교를 다녀가는 길인지 자동차에 오르려 할 때였읍니다. 그때에 그 간사한 이선생은 M교주의 팔을 부축하여 자동차 속으로 몰아넣었읍니다. 저는 이것을 보로 크게 웃었읍니다. 옆에서 저의 웃는 것을 보는 박선생은,

“왜 웃으시우?”

하며 눈을 흘기더니,

“그게 무슨 무례한 짓이요?”

하더이다. 저는 또다시 한 번 껄껄 웃으면서,

“박선생은 나의 웃는 의미를 모르시는구료.”

하고는,

“인형이외다. 인형예요. 두 팔 두 다리가 있고도 못 쓰는 인형이외다. 인형은 인형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인형을 부축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보구서는 나는 아니 웃을 수가 없지요.”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교실 안으로 들어갔읍니다.

오늘은 그믐날이외다. 월급 타는 날이외다. 사무실엔 들어선 저는 다만 보이는 것이 회계의 동정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쓸 궁리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읍니다. 오늘은 어린애 모자를 하나 사다 주고 사랑하는 아내의 목도리를 하나 사다 주어야 하겠다 하였읍니다.

  • 25원이라는 월급을 기다리는 저의 마음은 웬일인지 씁쓸하고도 저의 몸이 불쌍해 보였읍니다. 그리고 공연히 심증이 났읍니다.

교실에 들어가 백묵을 들고서 칠판 위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모든 학생들까지 밉살스 러울 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저의 운명을 이렇게 만들어 준 듯하기도 하였읍니다. 저는 마음에 없는 한 시간을 아니 지낼 수가 없었읍니다.

그날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해 오라고 한 날이었읍니다. 근 40명 학생중에 숙제를 해 오지 않은 학생이 다섯이 있었읍니다. 그 중에 그 중 나이 적고 옷을 헐벗은 학생은 제가,

“왜 숙제를 안 그려 왔소?”

할 때 그는 다만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있더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자꾸자꾸 울고 섰을 뿐이었읍니다. 다른 애 학생은 여러 가지 핑계로써 선생인 저를 속이려 하였읍니다.

저는 그 눈물 흘리는 학생을 바라보고 또다시 다 뚫어진 양말을 볼 때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나서,

“왜 대답은 아니하고 울기만 하시오?”

하며 그의 어깨에 팔을 대니 선생인 저의 손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이 더욱 그의 감정을 느즈러지게 하였던지 더욱더욱 느끼어 울 뿐이었읍니다. 그러다가는 복받치는 울음 소리와 함께,

“집에서 돈이 없다고 도화지를 사 주지 않아요.”

하였읍니다.

선생님! 제가 이 학생을 벌줄 자격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저는 다만 창연한 두 눈으로 그 어린 학생을 바라보며,

“여보시오, 참마음만 있으면 그만이오. 나는 당신의 그림 그려 오지 않은 것을 책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참성의가 없었는가 하는 것을 책하려 함이었소. 당신의 눈물 한 방울은 오늘 그려 오지 못한 그 그림보다 몇 배의 가치가 있는 것이오.”

하였읍니다.

하교 후 사무실로 나왔읍니다. 회계는 나를 보더니 아주 은근한 듯이,

“A선생님, 이리로 좀 오십시오.”

하고 자기 곁으로 부르더니 봉투에 집어넣은 월급을 저의 손에 쥐어 주면서,

“담배값이나 하십시오.”

하였읍니다. 저는 그것을 받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읍니다. 그래서,

“네, 고맙습니다.”

하고 그대로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읍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느라고 회색의 저녁빛이 온 시가를 싸고도는데 저는 학교 문 밖에 나와서야 그 봉투를 다시 끄집어 내어 그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보았읍니다.

그 속에는 17원 50전, 17원 50전이 들어 있었읍니다.

저는 멈칫하고 섰었읍니다. 그리고,

(어째서 17원 50전만 되나?)

하고 한참이나 의아하여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문득 생각나는 것은 NC의 집에 갔었던 것이외다. 아내 잃은 친우를 찾아갔던 1주일 간의 노력의 대가는 학교에서는 제하여졌읍 니다.

아! 선생님, 저의 손에는 17원 50전이 있읍니다. 1개월 노력의 대가는 17원 50전이외 다. 불쌍한 젊은 화가의 양심을 부끄럽게 한 죄의 대가가 17원 50전이외다.

저는 하는 수 없었읍니다. 회색 봉투에 집어넣은 그 돈을 들고 SO의 집까지 무의식중에 왔읍니다. 하늘의 구름장 사이로는 가렸다 보였다 하는 작은 별들이 이 우스운 젊은 A를 비웃는 듯이 내다보고 있었읍니다. 회색의 감정이 공연히 저의 마음을 울분하고 원망스럽게 하였읍니다.

SO의 집에는 무엇하러 왔을까요?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하였읍니다. 문간에 와서야 내가 무엇하러 여기를 왔나 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저의 가슴에서 때없이 울고 있는 그 무슨 하모니는 저의 발을 SO의 집안으로 끌어들였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그전과 같이 서슴지 않고 그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읍니다. 조그마한 집, 조그마한 문으로 흘러나오는 무거운 공기는 급히 흐르는 시냇물같이 저의 가슴으로 몰려오는 듯하였읍니다.

저는 다만 문간에 서서 도적놈같이 문 안을 엿듣고 망설였읍니다.

선생님! 사랑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할 적에는 서슴지 않고 아무 불안도 없이 다니던 제가 오늘은 어찌하여 죄지은 자 모양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으며 가슴이 거북 하였을까요?

죄악이 아닌 사랑을 주려 하는데 저는 가슴이 떨림을 깨달았으며 잘못이 아닌 사랑을 준다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저는 10분 동안이나 서 있었읍니다. 그때에 또다시 그 불구자의 모녀의 울음 소리가 들렸읍니다. 그 울음 소리는 그전보다 더 저의 마음을 훑는 듯하고 쪼개는 듯하였읍니다. 그리고 모든 비애를 저의 가슴 위에 실어 놓는 듯이 무겁게 슬펐읍니다. 그러나 저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읍니다. 학교에서 받은 1개월 노력의 대가인 17원 50전이 울분하게 하였음이 공연히 저의 눈물까지 막아 버렸읍니다.

저는 한참이나 그 울음 소리를 들었읍니다. 그 울음에 섞이어 나오는 늙은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치 못하게 들리는 것은,

“SO야, 이제는 그만 한길 귀신이 되었구나.”

하는 살이 얼어붙는 듯한 불쌍한 소리였읍니다.

저는 그제야 그 눈물을 알았읍니다. 불구자의 모녀는 몸을 담을 집이 없읍니다. 그는 오늘에 몇 푼 안 되는 세전(貰錢)으로 말미암아 이 집에서 내어쫓깁니다.

창 밖에서 듣고 있는 이 A의 주머니에는 17원 50전이 있읍니다. 이 A는 그래도 한길에서 방황하지는 않겠지요? 저는 그 주머니의 17원 50전을 꺼내었읍니다. 그리고 연필로 봉투에 A라 썼읍니다. 저는 그 찰나간에 절대의 동정이 저의 가슴속에서 약동하였읍니다. 저의 피를 뜨겁고 힘있게 끓게 하였읍니다.

저는 그 돈을 문을 소리없이 열고 가만히 마루 위에 놓았읍니다. 그리고 절도와 같이 그 문을 떨리는 다리로 얼른 뛰어나왔읍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저의 집으로 향하여 갔읍니다.

집에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겠지요. 어린 자식은 아버지 오면 때때모자를 사준다고 몽실몽실한 손을 고개에 괴고 이 젊은 아버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터이지요?

그러나 월급날인 오늘의 저의 주머니는 벌써 한 닢도 없는 털터리가 되었읍니다. 저의 들어가는 대문 소리를 듣고 다른 날보다 더 반가와 맞아 주는 젊은 아내에게 그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아무것도 없읍니다. 어린 자식의 기뻐 뛰는 마음을 도리어 풀이 죽게 할 뿐이 겠지요.

그러하오나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어가듯이 암흑(暗黑)한 동리를 걸어가는 이 A의 마음은 웬일인지 만족한 기꺼움이 있었으며 싱싱한 생의 약동이 있었읍니다. 저는 또다시 MW사로 왔옵니다. 거기에는 DH와 WC가 웅크리고 않아서 무슨 책을 보고 있더니 저를 보고서,

“어떻게 되었나?”

하였읍니다. 그것은 저의 월급 말이었읍니다. 저는 모자를 벗고 구두를 끄르면서 기가 막힌 듯이 씁쓸히 웃으면서,

“흥, 나의 1개월 동안의 노력의 대가는 참으로 값있게 써 버리었네.”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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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12월 12일 제4회 시작부분 나의 지난날의 일은 말갛게 잊어 주어야하겠다. 나조차도 그것을 잊으려 하는 것이니 자살1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 동안 자그마한 광명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전연 얼마 동안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또 한 번 나에게 자살이 찾아왔을 때에 나는 내가 여전히 죽을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으로 죽을 것을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그만큼 이번에 나를 찾아온 자살은 나에게 있어 본질적2이요, 치명적3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연 실망 가운데 있다. 지금에 나의 이 무서운 생활이 노4 위에 선 도승사5의 모양과 같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나의 일생에 다시 없는 행운이 돌아올 수만 있다 하면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까지는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이 호흡을 속에서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1930. 4. 26. 의주통 공사장에서
(李○)

본문
이때나 저때나 박행(薄幸)에 우는 내가 십유여 년 전 그 해도 저무려는 어느 날 지향도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려 할 때에 과거의 나의 파란 많은 생활에도 적지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죽마의 구우 M군이 나를 보내려 먼 곳까지 쫓아나와 갈림을 아끼는 정으로 나의 손을 붙들고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네」 하며 처창한 낯빛으로 나에게 말하던 그때의 그 말을 나는 오늘까지도 기억하여 새롭거니와 과연 그 후의 나는 M군의 그 말과 같이 내가 생각던 바 그러한 것과 같은 세상은 어느 한 모도 찾아내일 수는 없이 모두가 돌연적이었고 모두가 우연적이었고 모두가 숙명적일 뿐이었었다.
「저들은 어찌하여 나의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여 주지 아니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해야 옳다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들은 저렇게 생각하여 옳다하는 것일까」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은 하여 볼 겨를도 없이
「세상이란 그런 것이야. 네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것, 때로는 정반대되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이야!」 이러한 결정적 해답이 오직 질풍신뢰6적으로 나의 아무 청산도 주관도 없는 사랑을 일약 점령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나는 네가 세상에 그 어떠한 것을 알고자 할 때에는 우선 네가 먼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아라. 그런 다음에 너는 그 첫번 해답의 대칭점을 구한다면 그것은 최후의 그것의 정확한 해답일 것이니」
하는 이러한 참혹한 비결까지 얻어 놓았었다. 예상 못한 세상에서 부질없이 살아가는 동안에 어느덧 나라는 사람은 구태여 이 대칭점을 구하지 아니하고도 세상일을 대할 수 있는 가련한 「비틀어진」 인간성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을 바라볼 때에 일상에 그 이면(裏面)을 보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기쁨」도 「슬픔」도 「웃음」도 「광명」도 이러한 모든 인간으로서의 당연히 가져야 할 감정의 권위를 초월한 그야말로 아무 자극도 감격도 없는 영점(零點)에 가까운 인간으로 화하고 말았다. 오직 내가 나의 고향을 떠난 뒤 오늘날까지 십유여 년 간의 방랑생활에서 얻은 바 그 무엇이 있다 하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 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어그러진 결론 하나가 있을 따름이겠다. 이것은 지나간 나의 반생의 전부(全部)요 총결산이다. 이 하잘것 없는 짧은 한 편은 이 어그러진 인간법칙을 「그」라는 인격에 붙이여서 재차의 방랑 생활에 흐르려는 나의 참담을 극한 과거의 공개장으로 하려는 것이다.

1
통절한 자극 심각한 인상 그것은 사람의 성격까지도 변화시킨다. 평범한 환경 단조한 생활 긴장 없는 전개 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그의 성격까지의 변경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느 때 무슨 종류의 일이고 참으로 아픈 자극과 참으로 깊은 인상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성격 위에까지의 결정적 변화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지금으로부터 지나간 이삼년 동안에 그를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다 「그」의 성격의 어느 곳인지 집어내이지 못할 변화를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그의 용모와 표정 어조까지의 차라리 슬퍼할 만한 변화를 또한 누구나 다―놀래임과 의아(疑呀)를 가지고 대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사람 저 사람의 그동안 생활에 저 사람의 성격을 저만치 변화시킬 만한 무슨 큰 자극과 깊은 인상이 있었던 것이겠지 무엇일까」 그러나 이와 같은 의아는 도리어 그의 그 동안의 생활에도 그의 성격을 오늘의 그것으로 변화시키게까지 한 그러한 아픈 자극과 깊은 인상이 있었다는 것을 더 잘 이야기하는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겠다.

2
세대와 풍정은 나날이 변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들을 점점 더 살 수 없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변화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이 첫번 희생으로는 그의 아내가 산후(産後)의 발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은 것이었다. 나많은(많다 하여도 사십이 좀 지난) 어머니를 우으로 모시고 어미 잃은 젖먹이를 품안에 끼고 그날 그날의 밥을 구하여 어두운 거리를 헤매이는 그의 인간고야말로 참담 그것이었다.
「죽어라 죽어 차라리 죽어라. 나의 이 힘없는 발길에 걸치적대이지를 말아라. 피곤한 이 다리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내여다오.」 그의 푸른 입술이 떨리는 이러한 무서운 부르짖음이 채―그의 입술을 떨어지기도 전에 안타까운 몇 날의 호흡을 계속하여 오던 그 젖먹이마저 놓였던 자리도 없이 죽은 어미의 뒤를 따라갔다. M군과 그 그리고 애총7메이는 사람 이 세 사람이 돌림돌림 얼어붙은 땅을 땀을 흘리어가며 파서 그 조고마한 시체를 묻어 준 다음에 M군과 그는 저문 서울의 거리를 걷는 두 사람이 되었다.
「M군 나는 이제 나의 지게의 한편짝 짐을 내려 놓았어. 나는 아무래도 여기서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으니 죽으나 사나 고향을 한 번 뛰어나가 볼 테야.」 「그야…… 그러나 늙으신 자네의 어머니를 남의 땅에서 고생시킨다면 차라리 더 아픈 일이 아니겠나.」 「그러나 나는 불효한 자식이라는 것을 면치 못한 지 벌써 오래니깐」 드물게 볼 만치 그의 눈이 깊숙이 숨벅이고 축축히 번쩍이는 것이 그의 굳은 결심의 빛을 여지없이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T씨(T씨는 그와의 의(義)는 좋지 못하다 할망정 그래도 그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친아우였다) 어렵기 짝이 없는 그들의 살림이면서도 이 단둘밖에 없는 형제가 딴집 살림을 하고 있는 것도 그들의 의가 좋지 못한 까닭이었었으나 그러나 그가 이 크낙한 결심을 의논하려 함에는 그는 그 T씨의 집으로 달려가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네나 내나 여기서는 살 수 없으니 우리 죽을셈치고 한 번 뛰어나가 벌어 보자.」 「형님은 처자도 없고 한몸이니깐 그렇게 고향을 뛰어나가시기가 어렵지 않으시리다만 나만 해도 철없는 처가 있고 코 흘리는 저 업(T씨의 아들)이 있지 않소. 자 저것들을 데리고 여기서 살재도 고생이 자심8한데 낯설은 남의 땅에 가서 그 남 못한 고생을 어떻게 하며 저것들은 다 무슨 죄란 말이요 갈려거든 형님 혼자나 가시오 나는 갈 수 없으니」
일상에 어머니를 모신 형 그가 가까이 있어서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가끔 어머니를 구실(口實)로 그에게 뜯기워 가며 사는 것을 몹시도 괴로이 여기던 T씨는 내심으로 그가 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로든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기를 바라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가 홧김에
「어머니 큰 아들 밥만 밥입니까. 작은 아들 밥도 밥이지요. 큰 아들만 그렇게 바라지 마시고 작은 아들네 밥도 가끔 가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좀 얻어 잡숫다 오시구려.」 이러한 그의 말이 비록 그의 홧김이나 술김의 말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일상에 가난에 허덕지는 자식들을 바라볼 때에 불안스럽고 면구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늙은 그들의 어머니는 작은 아들 T씨가 싫어할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또 작은 아들 역시 큰 아들보다 조곰도 나을 것이 없이 가난한 줄까지 번연히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도 큰 아들 가엾은 생각에 하루이고 이틀이고 T씨의 집으로 얻어먹으러 터덜거리고 갔었다. 또 그외에도 즉 어머니 생일날 같은 때
「너도 어머니의 자식 나도 어머니의 자식 네나 내나 어머니의 자식되기는 일반인데 내가 큰 아들이래서 내 혼자서만 물라는 법이 있니 그러니 너도 반만 물 생각해라.」 그럴 때마다 반이고 삼분의 일이고 T씨는 할 수 없거나 있거나 싫은 것을 억지로 부담하여 왔었다. 이와같은 것들이 다―T씨가 그의 가까이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아니하는 까닭이었다.
「그럼 T야 너 어머니를 맡아라. 나는 일년이고 이태이고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올 터이니 그러면 그때에는……」 「에―다 싫소. 돈 벌어 가지고 오는 것도 아무 것도 다 싫소 내가 어머니가 당했소 그런 어수룩한 소리 하지도 마시오 더군다나 생각해 보시오. 형님은 지금 처자도 다 없는 단 한몸에 늙으신 어머님 한 분을 무엇을 그러신단 말이오 나는 처자들이 우물우물하는데 게다가 또 어머니까지 어떻게 맡는단 말이오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시면서 고생을 시키든지 낙을 뵈우든지 그건 다 내가 알 배 아니니깐 어머니를 나한테 떠맡기고 갈 생각은 꿈에도 마시오.」
이렇게 T는 그의 면전에서 한 번에 획―뱉아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를 그 자식들이 서로 떠미는 이 불효 어머니 모시기를 싫어하는 이 불효 이것도 오직 그들을 어찌할 수도 없이 비끌어매이고 있는 적빈(赤貧)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차마 저지르게 한 조고마한 죄악일 것이다.
그후 며칠 동안 그는 그의 길들였던 세대도구(世帶道具)를 다 팔아 가지고 몇 푼의 노비를 만들어서 정든 고향을 길이 등지려는 가련한 몸이 되었다. 비록 그다지 의는 좋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그러나 그러한 형 그와의 불의도 다―적빈 그것 때문이었던 그의 아우 T는 생사(生死)를 가운데 놓은 마지막 이별을 맡기며 눈물 흘려 설어하는 사람도 오직 이 T 하나가 있을 따름이었다.
「어머니 형님 언제나 또 뵈오리이까.」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목메인 그들의 차마 보지 못할 비극 기차는 가고 T씨는 돌아오고 한밤중 경성 역두에는 이러한 눈물의 이별극이 자국도 없이 있었다.
죽마의 친구 M군이 학창의 여가를 타서 부산부두까지 따라와서 마음으로의 섭섭함으로써 그들 모자를 보내어 주었다. 새벽바람 찬 부두에서 갈림을 아끼는 친구와 친구는 손을 마주 잡고
「언제나 또 만날까 또 만날 수 있을까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 그러한 것은 아니라네 부디 몸조심 부모 효도 잊지 말아 주게.」 「잘 있게 이렇게 먼 데까지 나와 주니 참 고맙기 끝없네 자네의 지금 한 말 언제라도 잊지 아니할 것일세 때때로 생사를 알리는 한 조각 소식 부치기를 잊지 말아 주게 자―그러면.」 새벽 안개 자옥한 속을 뚫고 검푸른 물을 헤치며 친구를 싣고 떠나가는 연락선의 뒷모양을 어느 때까지나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자취도 남기지 않은 그때가 즉 그 해도 저무려는 십이월 십이일(十二月十二日) 이른 새벽이었다.
그후 그의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고향의 사람에는 오직 M군이라는 그의 친구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가 처음의 한두번을 제하고는 T씨에게 직접 편지하지 아니한 것과 같이 T씨도 처음의 한두번을 제하고는 그에게 편지하지 아니하였다.
오직 그들 형제는 그도 M군을 사이로 하여 M씨의 소식을 얻어 알고 T씨도 M군을 사이로 하여 그의 생사를 알 수 있는 흐릿한 상태가 길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M에게 보내는 편지(第一信) M군 추운데 그렇게 먼 곳까지 나와서 어머니와 나를 보내 주려고 자네의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고마운 말을 무엇으로 다 하겠나 이 나의 충정의 만분의 일이라도 이 글발에 붙여 보려 할 뿐일세 생전에 처음 고향을 떠난 이 몸의 몸과 마음의 더없는 괴로움 또한 어찌 이루 다 말하겠나 다만 나의 건강이 조곰도 축나지 아니한 것만 다시없는 요행으로 알고 있을 따름일세 그러나 처음으로의 긴 동안의 여행으로 말미암아 어머님께서는 건강을 퍽 해하셔서 지금은 일어 앉으시지도 못하시고 누워 계시네 이렇게도 몸의 아픔과 괴로움을 맛보시면서도 나에게 대하여는 도리어 미안하다는 듯이 이렇다는 말씀 한 마디 아니하시니 이럴 때마다 이 자식의 불효를 생각하고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숨지며 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맛보는 것일세 자네가 말한 바와 같이 역시 세상은 우리들이 생각한 바와는 몹시도 다른 것인 모양이야 오나 가나 나에게 대하여서는 저주스러운 것들 뿐이요 차디찬 것들 뿐일세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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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조선사람으로만 조직되어 있는 조합이 있어서 처음 도항(渡航)하여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직업 거주(居住) 등절을 소개도 하며 돌보아도 주며 여러 가지로 편의를 도모하기에 진력하고 있는 것일세 나의 지금 있는 곳은 신호시(新戶市)9에서 한 일리쯤 떨어져 있는 산지(山地)에 가까운 곳인데 이곳에는 수없는 조선사람의 노동자가 보금자리를 치고 있는 것일세 이 산비탈에 일면으로 움들을 파고는 그 속에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씻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하면서 복작복작 오물거리며 살아가는 것일세 빨아 널은 흰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나 다홍 저고리와 연두 치마 입은 어린아이들이 오고 가며 뛰노는 것이나 고향땅을 멀리 떠난 이곳일세만 그래도 우리끼리 모여 사는 것 같아서 그리 쓸쓸하거나 낯설지는 않은 듯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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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움을 파지는 못하였네 헐어빠진 함석 철판 몇 장과 화재터에 못 쓸 재목 몇 토막을 아까운 돈의 몇 푼을 들여서 사다가 놓기는 하였네마는 처음 당해 보는 긴 여행 끝에 몸도 피곤하고 날도 요즈음 좀 치웁고 또 그날그날 먹을 벌이를 하노라고 시내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아니 될 몸이라 어떻게 그렇게 내가 들어 있을 움집이라고 쉽사리 팔 사이가 있겠나. 병드신 어머님을 모시고서 동포라고는 하지만 낯설은 남의 집에서 폐를 끼치고 있는 생각을 하며 어서어서 하루라도 바삐 움집이나마 파서 짓고 들어야 할 터인데 모든 것이 다― 걱정거리뿐일세. 직업이라야 별로 이렇다는 직업이 있을 까닭이 없네. 더욱 요즈음은 겨울날이라 숙련된 기술 노동자 외에 그야말로 함부로 그날그날을 벌어 먹고 사는 막벌잇군 노동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일세. 더욱이 나는 아직 이곳 사정도 모르고 해서 당분간은 고향에서 세간기명10을 팔아 가지고 노자 쓰고 나머지 얼마 안 되는 돈을 살이나 뼈를 긁어 먹는 세음으로 갉아먹어 가며 있을 수밖에 없네. 그러나 이곳은 고향과는 그래도 좀 달라서 아주 하루에 한 푼도 못 벌어서 눈 뜨고 편히 굶고 앉았거나 그렇지는 않은 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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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과 옷을 모두 팔아먹고 와서 첫째로 도무지 추워서 살 수 없네. 더군다나 병드신 늙은 어머님을 생각하면 어서 하루라도 바삐 돈을 변통하여서 덮을 것과 입을 것을 장만하여야만 할 터인데 그 역시 걱정거리에 하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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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여행 기분이 확―풀리지 아니하여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으니 우선 이만한 통지 비슷한데 그치거니와 벌써부터 이렇게 고향이 그리워서야 어떻게 앞으로 길고 긴 날을 살아갈는지 의문일세. 이곳 사람들은 이제 처음이니깐 그렇지 조곰 지나가면 차차 관계치 않다고 하데마는 요즈음은 밤이나 낮이나 눈만 감으면 고향꿈이 꾸여지어서 도무지 괴로워 살 수 없네그려. 아―과연 운명은 나의 앞길에 어떠한 장난감을 늘어놓을는지 모르겠네마는 모두를 바람과 물결에 맡길 작정일세. 직업도 얻고 어머니의 병환도 얼른 나으시게 하고 또 움집이라도 하나 마련하여 이국의 생활(異國生活)이나마 조금 안정이 된 다음에 서서히 모든 것을 또 알리어 드리겠네. 나도 늙은 어머니와 특히 건강을 주의하겠거니와 자네도 아무쪼록 몸을 귀중히 생각하여 언제까지라도 튼튼한 일꾼으로의 자네가 되어주기를 바라네. 떠난 지 며칠 못되는 오늘 어찌 다시금 만날 날을 기필(期必)11할 수야 있겠나마는 운명이 전연 우리 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면 일후 또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없지는 않겠지! 한 번 더 자네의 끊임없는 건강을 빌며 또 자네의 사랑에 넘치는 글을 기다리며 ……친구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二信) M군! 하늘을 꾸짖고 땅을 눈흘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M군 M군! 어머니는 돌아가시었네. 세상에 나오신 지 오십년에 밝은 날 하루를 보시지 못하시고 이렇다는 불평의 말씀 한 마디도 못하여 보시고 그대로 이역(異域)의 차디찬 흙 속에 길이 잠드시고 말았네. 불효한 이 자식을 원망하시며 쓰라렸던 이 세상을 저주하시며 어머님의 외롭고 불쌍한 영혼은 얼마나 이 이역 하늘에 수없이 방황하실 것인가. 죽음! 과연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나 사람들은 얼마나 그 죽음을 무서워하며 얼마나 어렵게 알고 있나. 그러나 그 무서운 죽음, 그 어려운 죽음이라는 것이 마침내는 그렇게도 우습고 그렇게도 하잘 것 없이 쉬운 것이더란 말인가. 나는 이제 그 일상에 두려워하고 어렵게 여기던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이 나기보다도 사람이 살아가기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하잘것없고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네. 오십년 동안 기구한 목숨을 이어오시던 어머님이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풀잎에 맺혔던 이슬과 같이 사라지고 마시는 것을 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그다지도 허무(虛無)하더라는 것을 느낄 대로 느꼈네. M군! 살길을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형제를 떨치고 친구를 버리고 이 곳으로 더듬거려 흘러온 나는 지금에 한 분밖에 아니 계시던 어머님을 잃었네 그려! 내가 지금 운명의 끊임없는 장난을 저주하면 무엇을 하며 나의 불효를 스스로 뉘우치며 한탄한들 무엇을 하며 무상한 인세에 향하여 소리지르며 외친들 그 또한 무엇하겠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가 허무일세. 우주(宇宙)에는 오직 이 허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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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 어머니를 마저 잃었으니 지금에 나는 문자(文字) 대로 아주 홀몸이 되고 말았네. 이제 내가 어디를 간들 무엇 내 몸을 비끌어매이는 것이 있겠으며 나의 걸어가는 길 위에 무엇 걸리적대일 것이 있겠나? 나는 일로부터 그날을 위한 그날의 생활 이러한 생활을 하여 가려고 하는 것일세. 왜? 인생에게는 다음 순간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오직 눈앞에의 허무스러운 찰나(刹那)가 있을 따름일 터이니깐! 나는 지금에 한 사람의 훌륭한 숙련(熟練) 직공일세. 사회에 처하여 당당한 유직자(有職者)일세. 고향에 있을 때 조곰 배워둔 도포업(塗布業)12이 이곳에 와서 끊어져 가던 나의 목숨을 이어 주네. 쓰여먹을 줄 어찌 알았겠나. 지금 나는 ××조선소(造船所) 건구도공부(建具塗工部)에 목줄을 매이고 있네. 급료 말인가 하루에 일원 오십전 한 달에 사십 오 원. 이 한 몸뚱이가 먹고 살기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 아니겠나. 나는 남는 돈을 저금이라도 하여 보려 하였으나 인생은 허무인데 그것 무엇 그럴 필요가 있나. 언제 죽을지 아는 이 몸이라고 아주 바로 저금을 다하고 그것 다 내게는 주제넘은 일일세. 나의 주린 창자를 채이고 남는 돈의 전부를 술과 그리고 도박으로 소비해 버리고 마는 것일세. 얻어도 술! 잃어도 술! 지금 나의 생활이 술과 도박이 없다 할진댄 그야말로 전혀 제로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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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도 봄이 왔겠지 아! 고향의 봄이 한없이 그리우네 그려! 골목골목이 「앵도지리―뻐찌13」장사 다니고 개천 가에 달래장사 헤매이는 고향의 봄이 그립기 한이 없네그려. 초저녁 병문14에 창자를 끊는 듯한 처량한 날라리소리, 젖빛 하늘에 떠도는 고향의 봄이 더욱 한없이 그리워 산 설고 물 설은 이 땅에도 봄은 찾아와서 지금 내가 몸을 의지하고 있는 이 움집들 다닥다닥 붙은 산비탈도 엷은 양광(陽光)에 씻기워 가며 종달새 노래에 기지개 펴고 있는 것일세 이 때에 나는 유쾌하게 일하고 있는 것일세. 이 세상을 괴롭게 구는 봄이 밖에 왔건마는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소리 높여 목청 놓아 노래 부르며 떠들며 어머님 근심도 집의 근심도 또 고향 근심도 아무것도 없이 유쾌하게 일하고 있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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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돌아가시던 그 움집은 나의 눈으로는 보기도 싫었네. 그리하여 나는 새로이 건너온 사람에게 그 움집을 넘기고 그곳에서 좀 뚝 떨어져서 새로이 움집을 하나 또 지었네. 그러나 그 새 움집 속에는 누구라 나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나. 참으로 아무도 없는 것일세. 나는 일터에서 나오는 대로 밤이 깊도록 그대로 시가지(市街地)를 정신없이 헤매이다가 그야말로 잠을 자기 위하여 그 움집을 찾아들고 찾아들고 하는 것일세. 그러나 내가 거리 한모퉁이나 공원 벤치 위에서 밤새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네. 자네는 지금의 나의 찰나적으로 타락된 생활을 매도(罵倒)할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설사 자네가 나를 욕하고 꾸지람을 한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일세. 지금 나의 심정(心情)의 참 깊은 속을 살펴 알 사람은 오직 나를 제하고 아무도 없는 것이니깐 원컨대 자네는 너무나 나를 책망 힐타만 말고서 이― 나의 기막힌 심정의 참 깊은 속을 조곰이라도 살피어 주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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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두 주일이 넘었네 그려. 그 즉시로 자네에게 이 비참(悲慘)한 소식을 전하여 주려고도 하였으나 자네 역시 짐작할 일이겠지마는 도무지 착란(錯亂)된 나의 머리와 손끝으로는 도저히 한자를 그릴 수가 없었네. 그래서 이렇게 늦은 것도 늦은 것이겠으나 아직도 나의 그 극도로 착란(錯亂)되었던 머리는 완전히 진정(鎭靜)되지 못하였네. 요사이 나의 생활 현상 같아서야 사람이 사는 것이 무슨 의의(意義)가 있는 것이겠으며 또 사람이 살아야만 하겠다는 것도 무슨 까닭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오직 모든 것이 우습게만 보이고 하잘 것 없이만 보이고 가치 없어만 보이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옮기는 데에만 무엇이고 있다는 의의(意義)가 조곰이라도 있는 것인 듯하기만 하네. 나의 요즈음 생활은 나로서도 양심의 가책(苛責)을 전연 받지 않는 것도 아닐세. 그러나 지금의 나의 어두워진 가슴에 한 줄기 조고마한 빛깔이라도 돌아올 때까지는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네. 설사 이 당분간(當分間)이라는 것이 나의 눈을 감는 전(前)순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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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돌아가심에 대하여는 물론 영양부족(營養不足)으로 말미암아 몸의 극도의 쇠약과 도(度)에 넘치는 기한(飢寒)이 그 대부분의 원인이겠으나 그러나 그 직접 원인은 생전 못하여 보시던 장시간의 여행 끝에 극도로 몸과 마음의 흥분과 피로(疲勞)를 가져온 데다가 토질(土質)이 다른 물과 밥으로 말미암은 일종의 토질(土疾) 비슷한 병에 걸리신 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평소에 그다지 뛰어난 건강을 가지시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별로 잔병 치레를 하지도 아니하며 계시던 어머님이 이번에 이렇게 한번에 힘없이 쓰러지실 줄은 참으로 꿈밖에도 생각 못하였던 바이야. 돌아가실 때에도 역시 아무 말도 아니 하시고 오직 자식 낳아 길러서 남같이 호강은 못 시키나마 뼈마디가 빠지도록 고생시킨 것이 다시 없이 미안하고 한이 된다는 말씀과 T를 못 보시며 돌아가시는 것이 또 한 가지 섭섭한 일이라는 말씀, 자네의 후정(厚情)을 감사하시는 말씀을 하실 따름이었었네. 그리고는 그다지 몸의 고민도 없이 고요히 잠들 듯이 눈을 감으시데. 참 허무한 그러나 생각하면 우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어머님의 임종(臨終)이었네. 어머님의 그 말들은 아직도 그 부처님 같은 어머니를 고생시킨 이 불효의 자식의 가슴을 에이는 것 같으며 내 일생 내가 눈 감을 순간까지 어찌 그때 그 말씀을 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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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로부터 자유로이 세상을 구경하며 그날 그날을 유쾌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일세. 나의 장래를 생각할 것도, 불쌍히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할 것도 다 없다고 생각하네. 그것은 왜? 그것은 차라리 나의 못박힌 가슴에 더없는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니깐! 마음 가라앉는 대로 일간 또 자세한 말 그리운 말 적어 보내겠거니와 T는 지금에 어머님 세상 떠나가신 것도 모르고 그대로― 적빈(赤貧) 속에 쪼들리어 가며 허덕이겠지?! 또한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 한이 없네. T에게는 곧 내가 직접 알려 줄 것이니 어머님의 세상 떠나신 데 대하여는 자네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게. 자네의 정에 넘치는 글을 기다리고 아울러 자네의 더없는 건강을 빌며……. 친구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三信) M군! 내가 자네를 그리워 한없이 적조한 날을 보내는 거와 같이 자네도 또한 나를 그리어 얼마나 적조한 날을 보냈나? 언제나 나는 자네의 끊임없는 건강을 알리우고 자네는 나의 또한 끊임없는 건강을 알리울 수 있는 것이 오직 우리 두 사람의 다시도 없는 기쁨이 아니겠나. 내가 신호를 떠나 이곳 명고옥(名古屋)15으로 흘러온 지도 벌써 반 년! 아―고향땅을 떠난 지도 벌써 꿈결 같은 삼 년이 지나갔네 그려. 그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나. 오직 나의 청춘의 몸 닳는 삼 년이 속절없이 졸아들었을 따름일세 그려! 신호 ××조선소(造船所) 시대의 나의 생활은 그 가운데 비록 한 분 어머니를 잃은 설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여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평온무사한 안일한 생활이었었네. 악마와 같은 이 세상에 이미 도전(桃戰)한 지 오래인 나로서는 이 평온무사한 안일한 직선생활(直線生活)이 싫증이 났네. 나는 널리 흐트러져 있는 이 살벌(殺伐)의 항(巷)16이 고루고루 보고 싶어졌네. 그리하여 그곳에서 사괴인 그곳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이곳 명고옥으로 뛰어온 것일세. 두 사람은 처음에 이곳 어느 식당 「뽀이」가 되었었네. 세상이 허무라는 이 불후(不朽)의 법칙은 적용되지 아니하는 곳이 없데. 얼마 전 그의 공휴일(公休日)에 일상에 사냥(獵)을 즐기는 그는 그의 친구와 함께 이곳에서 퍽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산촌(山村)으로 총을 메이고 떠나갔네. 그러나 그날 오후에 그는 그의 친구의 그릇으로 그 친구는 탄환에 맞아 산중에서 무참히 죽고 말았네. 그 친구는 겁결에 고만 어디로 도망하였었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잡히었다고 하데. 일상에 쾌활하고 개방적(開放的)이고 양기(陽氣)에 넘치던 그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더 세상의 허무를 느낀 것일세. 그와 나의 사괴임 동안이 비록 며칠 되지는 아니 하였으나 퍽― 마음과 뜻의 상통됨을 볼 수 있던 그를 잃은 나는 그래도 그곳을 획― 떠나지 못하고 지금은 그 식당 「헤드 쿡」이 되어 가지고 있으면서 늘― 그를 생각하며 어떤 때에는 이 신변이 약간의 공허(空虛)까지도 느낄 적이 다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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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금 목줄을 매이고 있는 식당은 이름이야 먹을 식자 식당일세마는 그것을 먹기 위한 식당이 아니라 놀기를 위한 식당일세. 이 안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고 라디오가 있고 축음기가 몇 개씩이나 있네. 뿐만 아니라 어여쁜 여자(女給)가 이십여 명이나 있으니 이곳 청등(靑燈) 그늘을 찾아드는 버러지의 무리들은 「만하탄17」과 「화이트 호스18」에 신경을 마비시켜 가지고 난조(亂調)의 재즈에 취하며 육향분복(肉香芬馥)한 소녀들의 붉은 입술을 보려고 모여드는 것일세. 공장의 기적이 저녁을 고할 때면 이곳 식당은 그 광란(狂亂)의 뚝게를 열기 시작하는 것일세. 음란을 극한 노래와 광대에 가까운 춤으로 어울어지고 무르녹아서 그날 밤 그날 밤이 새어가는 것일세. 이 버러지들은 사회 전반의 계급을 망라하였으니 직업이 없는 부랑아(浮浪兒)·「샐러리맨」·학생·노동자·신문기자·배우·취한, 그러한 여러 가지 계급의 그들이나 그러나 촉감(觸感)의 향락을 구하며 염가(廉價)의 헛된 사랑을 구하러 오는 데에는 다 한결같이 일치하여 버리고 마는 것일세. 나는 밤마다 이 버러지들의 목을 축이기 위한, 신경을 마비시키기 위한 비료(肥料)거리와 마취제를 요리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일세. 나는 밤새도록 이 어지러운 소음(騷音)을 귀가 해어지도록 듣고 있는 것일세. 더없는 황홀과 흥분과 피로를 느끼면서 나의 육체를 노예화시켜서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일세. 그 피로(疲勞)와 긴장(緊張)도 지금에 와서는 다 어느덧 면역(免疫)이 되고 말았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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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번이나 나도 놀랄 만치 코웃음쳤는지 모르겠네. 나! 오늘가지 나 역시 그날의 근육을 판 그날의 주머니를 술과 도박에 떨고 떠는 생활을 계속하여 오던 나로서 그 버러지들을 향하여, 그 소음을 향하여 코웃음을 쳤다는 말일세. 내가 시퍼런 칼을 들고 나의 손을 분주히 놀릴 때에 그들의 떠들고 날치는 것이 어떻게 그리 우습게 보이는지 몰랐네. 「무엇하러 저들은 일부러 술로 몸을 피로시키며 밤새임으로 정력을 감퇴시키기를 즐겨 할까 무엇하러 저들의 포켓트를 일부러 털어 바치러 올까」 이것은 전면 나에게 대하여 수수께끼였네. 한편으로는 그들이 어린애같이 보이고 철없어 보이고 불쌍한 생각까지 들어서. 「내가 왜 술을 먹었던가, 내가 왜 도박을 했던가 내가 왜 일부러 나의 포켓트를 털어 바쳤었던가.」 이렇게 지나간 이태 남짓한 나의 생활에 대하여 의심도 하며 스스로 꾸짖으며 부끄러워도 하여 보았네. 「인제야 내 마음이 아마 바른 길로 들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으나 「술을 먹지 말아야지. 도박도 고만 두어야지. 돈을 모아야지. 이것이 옳을까 아― 그러나 돈을 모아서 무엇하랴. 무엇에 쓰며 누구를 주랴. 또 누구를 주면 무엇하랴.」 이러한 생각이 아직도 나의 머리에 생각되어 밤마다 모여드는 그 버러지들을 나는 한없이 비웃으면서도 그래도 나는 아직 그 타락적 찰나적 생활기분이 남아 있는지 인생에 대한 허무와 저주를 아니 느낄 수는 없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소생(蘇生)의 길일는지도 모르겠으나 때로 나의 과거 생활의 그릇됨을 느낄 적도 있으며 생에 대한 참된 의의(意義)를 조곰씩이라도 알아지는 것도 같으나 이것이 나의 마음과 사상의 점점 약하여 가는 징조나 아닌가 하여 섭섭히 생각될 적도 없지 않으나 하여간 최근 나의 내적 생활현상(內的 生活現像)은 확실히 과도기(過渡期)를 걷고 있는 것 같으니 이때에 아무쪼록 자네의 나를 위한 마음으로의 교시(敎示)와 주저(躊躇)없는 편달(鞭撻)을 바라고 기다릴 뿐일세. 이렇게 심리상태의 정곡(正鵠)을 잃은 나는 요사이 무한히 번민하고 있는 것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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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직업이라 밤을 낮으로 바꾸는 생활이 처음에는 꽤 괴로운 것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그것도 면역이 되어서 공휴일 같은 날 일찍 드러누으면 도리어 잠이 얼른 오지 아니하는 형편일세. 그러나 물론 이러한 생활이 건강상에 좋지 못할 것은 명백한 일이니 나로서 나의 몸의 변화를 인식하기는 좀 어려우나 일상에 창백한 얼굴빛을 가지고 있는 그 소녀들이 퍽 불쌍하여 보이네. 그러나 또 한편 밤잠은 못 잘망정 지금의 나는 한 사람의 훌륭한 「쿡」으로서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는 것일세. 부질없는 목구녕을 이어가기에 나는 두가지의 획식술(獲食術)을 배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이 몸이 한없이 애처롭기만 하네! 「쿡」이니만큼 먹기는 누구보다도 잘 먹으며 또 이 식당 안에서는 그래 당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세. 내가 몹시 쌀쌀한 사람이라 그런지 여급(女給)들도 그리 나를 사괴이려고도 아니하나 들은즉 그들 가운데에도 퍽 고생도 많이 하고 기구한 운명에 쫓기어 온 불쌍한 사람도 많은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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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쿡」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겠으며 또 이 「명고옥」에 언제까지나 있을지는 나로서도 기필할 수 없거니와 아직은 이 「쿡」 생활을 그만둘 생각도 명고옥을 떠날 계획도 아무것도 없네. 오직 운명이 가져올 다음의 장난은 무엇인지 기다리고 있을 따름일세. 처음 신호에 닿았을 때, 그 곳 누구인가가 말한 것과 같이 날이 가고 달이 가면 차차 관계치 않으리라 하더니 참으로 요사이는 고향도 형제도 친구도 다 잊었는지 별로이 꿈도 안 꾸어지네. 오직 자네를 그리워하는 외에는 그저 아무나 만나는 대로 허허 웃고 사는 요사이의 나의 생활은 그다지 나로 하여금 적막과 고독을 느끼게 하지도 않네. 차라리 다행으로 여길까? 이곳은 그다지 춥지는 않으나 고향은 무던히 추우렷다. T는 요사이 어찌나 살아가며 업이가 그렇게 재주가 있어서 공부를 잘한다니 T 집안을 위해서나 널리 조선을 위해서나 또 한 번 기뻐할 일이 아니겠나. 자네의 나를 생각하여 주는 뜨거운 글을 기다리고 아울러 자네의 건강을 빌며.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四信) 태양은― 언제나 물체들의 짧은 그림자를 던져 준 적이 없는 그 태양을 머리에 이고―였다느니보다는 비뚜로 바라다보며 살아가는 곳이 내가 재생(再生)하기 전에 살던 곳이겠네. 태양은 정오(正午)에도 결코 물체들의 짧은 그림자를 던져 주기를 영원히 거절하여 있는―물체들은 영원히 긴 그림자만을 가짐에 만족하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그만큼 북극권(北極圈)에 가까운 위경도(緯經度)의 숫자를 소유한 곳―그 곳이 내가 재생하기 전에 내가 살던 참으로 꿈 같은 세계이겠네. 원시(原始)를 자랑스러운 듯이 이야기하며 하늘의 높은 것만 알았던지 법선(法線)19으로만 법선으로만 이렇게 울립(鬱立)하여 있는 무수한 침엽수(針葉樹)들은 백중천중(白重千重)으로 포개져 있는 잎새 사이로 담황색(淡黃色) 태양광을 황홀한 간섭작용(干涉作用)으로 투과(透過)시키고 있는 잠자고 있는 듯한 광경이 내가 재생하기 전에 살던 그 나라 그 북극이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얻어 볼 수 없는 시적 정조(詩的 情調)인 것이겠네. 오로지 지금에는 꿈―꿈이라면 너무나 깊이가 깊고 잊어버리기에 너무나 감명 독(感銘毒)한 꿈으로만 나의 변화만은 생(生)의 한 조각답게 기억되네마는 그 언제나 휘발유 찌꺼기 같은 값싼 음식에 살찐 사람의 지방(脂肪) 빛 같은 그 하늘을 내가 부득이 연상할 적마다 구름 한 점 없는 이 청천을 보고 있는 나의 개인(個人) 마음까지 지저분한 막대기로 휘저어 놓는 것 같네. 그것은 영원히 나의 마음의 흐리터분한 기억으로 조곰이라도 밝은 빛을 얻어보려고 고달파하는 나의 가엾은 노력에 최후까지 수반(隨伴)될 저주할 방해물인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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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육안(肉眼)의 부정확한 오차(誤差)를 관대히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십 오도(25°)에는 내리지 않을 치명적 「슬로우프20」(傾斜)이었을 것일세. 그 뒷둑뒷둑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궤도(軌道) 위의 바람을 쪼개고 공간을 쪼개고 맥진(驀進)21하는 「토로코22」 위에 내 몸을 싣는 것은 전혀 나의 생명을 그대로 내어던지려는 것과 조곰도 다름없는 것일세. 이미 부정(否定)된 생(生)을 식도(食道)라는 질긴 줄에 포박당하여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그들의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피부와 조곰도 질 것 없이 조고 만치의 윤택도 없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들의 메마른 인후(咽喉)를 통과하는 격렬한 공기의 진동은 모두가 창조의 신에 대한 최후적 마멸(馬蔑)23의 절규(絶叫)인 것일세. 그 음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싫다는 것을 억지로 매질을 받아가며 강제되는 「삶」에 대하여 필사적 항의를 드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오직 그들의 눈에는 천고의 백설을 머리 위에 이고 풍우로 더불어 이야기하는 연산의 봄도라지들도 한낱 악마의 우상밖에 아무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일세. 그때에 사람의 마음은 환경의 거울이라는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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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생으로 말미암아 생에 대한 새로운 용기와 환희를 한 몸에 획득한 것 같은 지금의 나로 변하여 있는 것일세. 그러기에 전세의 나를 그 혈사(血史)를 고백하기에 의외의 통쾌와 얼마의 자만까지 느끼는 것이 아니겠나. 내가 그 경사 위에서 참으로 생명을 내어던지는 일을 하던 그 의식 없던 과정을 자네에게 쏟아뜨리는 것도 필연컨대 그 용기와 그 기쁨에 격려된 한 표상이 아닐까 하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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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의 나의 생에 대한 신념은―구태여 신념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유희적이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네. 「사람이 유희적으로 살 수가 있담?」 결국 나는 때때로 허무 두 자를 입밖에 헤뜨리며 거리를 왕래하는 한 개 조고마한 경멸할 「니힐리스트」였던 것일세. 생을 찾다가, 생을 부정했다가 드디어 첨으로 귀의하여야 할 나의 과정은―나는 허무에 귀의하기 전에 벌써 생을 부정하였어야 될 터인데―어느 때에 내가 나의 생을 부정했던가……집을 떠날 때! 그때는 내가 줄기찬 힘으로 생에 매어달리지 않았던가. 그러면 어머님을 잃었을 때! 그때 나는 어언간 무수한 허무를 입 밖에 방산시킨 뒤가 아니었던가. 그 사이! 내가 집을 떠날 때부터 어머님을 잃을 때까지 그 사이는 실로 짧은 동안……뿐이랴 그 동안에 나는 생을 부정해야만 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지 않았던가.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이 앙감질[單足跳]로 허탄히 허무를 질질 흘려 왔다는 그 희롱적 나의 과거가 부끄럽고 꾸지람하고 싶은 것일세. 회한을 느끼는 것일세.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다. 허무를 운운할 아무 이유도 없다. 힘차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재생한 뒤의 나는 나의 몸과 마음에 채찍질하여 온 것일세. 누구는 말하였지.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내 몸을 사바로부터 사라뜨리는 데 있다」고. 그러나 나는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부정되려는 생을 줄기차게 살아가는 데 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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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뢰(迅雷)와 같이 그 「슬로우프」를 나려 줄이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순간에, 어떠한 순간이었네. 내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어. 「X야, 뛰어 내려라 죽는다……」 「네 뒤 토로24가 비었다[空] 뛰어내려라!」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네. 과연 나의 뒤를 몇 간 안되게까지 육박해 온―반드시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할 그 토로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네. 나는 브레이크를 놓았네. 동시에 나의 토로도 무서운 속도로 나의 앞에 가는 토로를 육박하는 것이었네. 나는 토로 위에서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네.
「야! 앞의 토로야. 브레이크를 놓아라. 충돌된다. 죽는다. 내 뒤 토로에는 사람이 없다. 브레이크를 놓아라.」 그러나 앞의 토로는 브레이크를 놓을 수는 없었네. 그것은 레일이 끝나는 종점에 거의 가까이 닿았으므로 앞의 토로는 도리어 브레이크를 눌러야만 할 필요에 있는 것이었네. 「내가 뛰어내려 그러면 내 토로의 브레이크는 놓아진다. 그러면 내 토로는 앞의 토로와 충돌된다. 그러면 앞의 놈은 죽는다…….」 나는 뒤를 또 한 번 돌아다보았네. 얼마 전에 놀래어 브레이크를 놓은 나의 토로보다도 훨씬 먼저 브레이크가 놓아진 내 뒤 토로는 내 토로 이상의 가속도로 내 토로를 각각으로 육박해 와서 이제는 한 두 간 뒤―몇 초 뒤에는 내 목숨을 내어던져야 될 (참으로) 충돌이 일어날―그렇게 가깝게 육박해 있는 것이었네. 「뛰어내리지 아니하고 이대로 있으면 아무리 브레이크를 놓아도 나는 뒤 토로에 충돌되어 죽을 것이다. 뛰어내려? 그러면 내가 뛰어내린 빈 토로와 그 뒤를 육박하던 빈 토로는 충돌될 것이다. 다행히 선로 바깥으로 굴러 떨어지면 좋겠지만 선로 위에 그대로 조곰이라도 걸쳐 놓인다면 그 뒤를 따르던 토로들은 이 갑빠진 토로에 충돌되어 쓰러지고 또 그 뒤를 따르던 토로는 거기서 충돌되고, 또 그 뒤를 따르던 토로는 거기서 충돌되고, 이렇게 수없는 토로들은 뒤으로 뒤으로 충돌되어 그 위에 탔던 사람들은 죽고 다치고……!」 나는 세 번째 도한 거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네. 그러나 다행히 넷째 토로부터 앞에 올 위험을 예기하였던지 브레이크를 벌써 눌러서 멀리 보이지도 않을 만큼 떨어져서 가만가만히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네. 다만 화산(火山)의 분화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초리와 같은 그러한 공포에 가득찬 눈초리로 멀리 앞을―우리들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었네. 그때에 「뛰어내리자. 그래야만 앞의 사람이 산다.」 내가 화살 같은 토로에서 발을 떼이려 하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었네 뒤에 육박해 오던 주인 없는 토로는 무슨 증오(憎惡)가 나에게 그리 깊었던지 젖먹은 기운까지 다하는 단말마의 야수같이 나의 토로에 거대한 음향과 함께 충돌되고 말았네. 그 순간에 우주는 나로부터 소멸되고 다만 오랜 동안의 무(無)가 계속되었을 뿐이었다고 보고할 만치 모든 일과 물건들은 나의 정신권 내에 있지 아니하였던 것일세. 다만 재생한 후 멀리 내 토로의 뒤를 따르던 몇 사람으로부터 「공중에 솟았던」 나의 그후 존재를 신화(神話) 삼아 들었을 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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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되던 첫순간 나의 눈에 비쳐진 나의 주위에 더러운 광경을 나는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그것은 그런 것을 쓰고 있는 동안에 나의 마음에 혹이나 동요가 생기지나 아니할까 하는 위험스러운 의문에서―그러나 나의 주위에 있는 동무들의 참으로 근심스러워 하는 표정의 얼굴들이 두 번째로 나의 눈에 비치었을 때에 의식을 잃은 나의 전 몸뚱어리에서 다만 나의 입만이 부드럽게― 참으로 고요히― 참으로 착하게 미소하는 것을 내 눈으로도 보는 것 같았었네. 나는 감사하였네. 신에게보다도 우선 그들 동무에게―감사는 영원히 신에게 드림없이 그 동무들에게만 그치고 말는지도 몰라. 내 팔이 아직도 나의 동체(胴體)에 달려 있는가 만져 보려 하였으나 그 팔 자신이 벌써 전부터 생리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된 지 오래였던 모양이데. 나는 다시 그들 동무들에게 감사하며 환계(幻界) 같은 꿈 속으로 깊이 빠지고 말았네. 나는 어머니에게 좀더 값있는 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지 못한 「내」가 악마―신이 아니라―에게 무수히 매맞는 것을 보았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욕하였고 경멸하였네. 그리고 나는 좀더 건실하게 살지 않았던 「쿡」 생활 이후의 「내」가 또한 악마에게 매맞는 것을 보았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욕하였고 경멸하였네. 그리고 생애 새로운 참다운 의의(意義)와 신에 대한 최후적 복수의 결심을 마음 속으로 깊이 암송하였네. 그 꿈은 나의 죽은 과거와 재생 후의 나 사이에 형상지어져 있는 과도기에 의미 깊은 꿈이었네. 하여간 이를 갈아 가며라도 살아가겠다는 악지가 나의 생애 대한 변경시키지 못할 신념이었네. 다만 나의 의미없이 또 광명없이 그대로 삭제(削除)되어 버린 과거―나의 인생의 한부분을 섧―게 조상(吊喪)하였을 따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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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끝만한 인정미(人情味)도 포함하고 있지 아니한 바깥에 부는 바람은 이 북국에 장차 엄습하여 올 무서운 기절을 교활하게 예고하고 있는 것이나 아니겠나. 번개같이 스치는 지난 겨울, 이곳에서 받은 나의 육체적 고통의 기억의 단편들은 눈 깜박할 사이에 무죄한 나를 전율(戰慄)시키는 것일세. 이 무서운 기절25이 이 나라에 찾아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서 바람이나마 인정미―비록 그러한 사람은 못 만나더라도―있는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야 할 터인데 나의 몸은 아직도 전연 부자유에 비끄러매여 있네― 그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의사하는 사람은 나의 반드시 원상대로의 복구를 예언하데마는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방문 밖에서
「절뚝발이는 아무래도 면치 못하리라」 이렇게 근심(?)하는 그들의 말소리를 들었네 그려― 만일에 내가 그들의 이 말과 같이 참으로 절뚝발이가 되고 만다 하면―나는 이 생각을 하며 내 마음이 우는 것을 느끼네. 「절뚝발이」 여태껏 내 몸 위에 뒤집어씌워져 있던 무수한 대명찰(代名札) 외에 나에게는 또 이러한 새로운 대명찰 하나가 더 뒤집어지는구나― 어디까지라도 깜깜한 암흑에 지질리워26 있는 나의 앞길을 건너다 보며 영원히 나의 신변에서 없어진 등불을 원망하는 것일세. 절뚝발이도 살 수 있을까― 절뚝발이도 살게 하는 그렇게 관대한 세계가 지상에 어느 한 귀퉁이에 있을까? 자네는 이 속타는 나의 물음―아니 차라리 부르짖음에 대하여 대답할 무슨 재료, 아니 용기라도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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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국 생활 칠년! 그 동안에 나는 지적(知的)으로나 덕적(德的)으로나 많은 교훈을 얻은 것만은 사실일세. 머지 아니한 장래에 그 전에 나보다 확실히 더 늙은 절뚝발이의 내가 동경에 다시 나타날 것을 약속하네. 그곳에는 그래도 조곰이라도 따뜻한 나의 식어빠진 인생을 조곰이라도 덥혀줄 바람이 불 것을 꿈꾸며 줄기차게 정말 악마까지도 나를 미워할 때가지 줄기차게 살겠다는 것도 약속하네. 재생한 나이니까 물론 과거의 일체 추상(醜相)은 곱게 청산하여 버리고 박물관 내의 한 권의 역사책으로 하여 가만히 표지를 덮는 것일세. 모든 새로운 광채 찬란한 역사는 이제로부터 전개할 것일세. 하면서도 「절뚝발이가?……」 새로이 방문하여 오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아직 나는 최후까지 줄기차게 살 것을 맹세하는 것일세. 과거를 너무 지껄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면 장래를 너무 지껄이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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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군! 자네가 편지를 손에 들고 글자 글자를 자네 눈에 통과시킬 때, 자네 눈에 몇 방울 눈물이 있으리란 추측이 그렇게 억측일까 그러나 감히 바란다면 「첫째로는 자네의 생에 대한 실망을 경계할 것이며 둘째로는 나의 절뚝발이에 대하여 형식적 동정에 그칠 것이요, 결코 자살적 비애를 느끼지 말 것들」이겠네. 그것은 나의 지금 이 「줄기차게 살겠다는」 무서운 고집에 조고마한 실망적 파동이라도 이끌어 올까 두려워서……나의 염세(厭世)에 대한 결사적 투쟁은 자네의 신경을 번잡케 할 만치 되어 나아갈 것을 자네에게 약속하기를 꺼리지 아니하네. 자네의 건강을 비는 동시에 못 면할 이 절뚝발이의 또한 건강이 있기를 빌어주기를 은근히 바라며.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五信) 자네의 장문의 편지 그 가운데에 오직 자네의 건강을 전하는 구절 외에는 글자 글자의 전부가 오직 나의 조소(嘲笑)를 사기 위한 외에는 아무 매력(魅力)도 가지지 아니한 것들이었네. 자네는 왜―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려 하는가.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곧 생에 대한 권리를 그 그 사람 위에 가져올 자포자기의 짓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일조일석 많은 재물을 탕진시켜 버렸다 하여 자네는 자네 아버지를 무한히 경멸하에며 나중에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절망까지 하소연하지 아니하였는가, 그것이 자네가 스스로 구실을 꾸미어 가지고 나아가서 자네의 애를 써 잘―경―영되어 나오던 생을 구태여 부정하여 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것은 비겁한 동시에―모든 비겁이 하나도 죄악 아닌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역시 죄악인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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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거든, 혹은 나의 말이 우의적(友誼的)으로 좋지 않게 들리거든 구태여라도 운명이라고 그렇게 단념하여 주게. 그것도 오직 자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나의 자네에게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 것인만큼 나는 자네에게 인생의 혁명적으로 새로운 제이차적 「스타일」을 충고치 아니할 수 없는 것일세.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이 운명이라는 요물을 신용치 말아 주기를 바라는 것일세―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부터도 이 운명이라는 요물의 다시 없는 독신자(篤信者)이면서도―. 「운명의 장난?」 하,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나 있다면 너무도 운명의 장난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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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군! 나는 그 동안 여러 날을 두고 몹시 앓았네. 무슨 원인인지 나도 모르게, 이―원인 알 수 없는 병이 나의 몸을 산 채로 더 삶을 수 없는 데까지 삶아 가지고는 죽음의 출입구까지 이끌어 갔던 것일세. 그때에 나의 곱게 청산하여 버렸던 나의 정신 어느 모에도 남아 있지 않아야만 할 재생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까지도 재생 후의 그것과 함께 죽 단렬(單列)로 나의 의식(意識)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네. 그리고 나는 반 의식의 나의 눈으로 그 행렬 가운데서 숨차게 허덕이던 과거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던 것이었네. 그것은 내 눈에 너무도 불쌍한 꼴로 나타났었기 때문에, 아― 그것들은― 「이것이 죽은 것인가 보다. 적어도 죽어가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몽롱히 느끼면서도 「죽는 것이 이렇기만 하다면야.」 이런 생각도 나서 일종의 통쾌까지도 느낀 것 같으며 그러나 죽어가는 나의 눈에 비치는 과거의 나의 모양 그 불쌍한 꼴을 보는 것은 확실히 슬픈 일일 뿐 아니라 고통이었네. 어쨌든 나를 간호하던 이 집 주인의 말에 의하면 무엇 나는 잠을 자면서도 늘―울고 있더라던가……. 「이것이 죽는 것이라면―」 이렇게 그―꼴사나운 행렬을 바라보던 나의 머리 가운데에는 내가 사랑에 주려 있는 형제와 옛친구를 애걸하듯이 그리며 그 행렬 가운데에 행여나 나타나기를 무한히 기다렸던 것일세. 이 마음이 아마 어떤 시인의 병석에서 부른―. 「얼른 이때 옛친구 한 번씩 모두 만나 둘 거나.」 하던 그 시경(詩境)에 노는 것이나 아닌가 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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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하숙(下宿)이라고만 볼 수도 없으나 그러나 괴상한 성격을 각각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지금의 나의 사는 곳일세. 이곳 주인은 나보다 퍽 연배(年輩)에 속하는 사람으로 그의 일상생활 양(樣)으로 보아 나의 마음을 끄는 바가 적지 않았으되 자세한 것은 더 자세히 안 다음에 써 보내겠거니와 하여간 내가 고국을 떠나 자네와 눈물로 작별 한 후로 처음으로 만난 가장 친한 친구의 한 사람으로 사괴이고 있는 것일세. 그와 나는 깊이깊이 인생을 이야기하였으며 나는 그의 말과 인격과 그리고 그의 생애에 많은 경의로써 대하고 있는 중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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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악희가 내게 끼칠 「프로그램」은 아직도 다하지 아니하였던지 나는 그 죽음의 출입구가지 다녀온 병석으로부터 다시 일어났네. 생각하면 그 동안에 내가 흘린 「땀」만 해도 말(斗)로 계산할 듯하니 다시금 푹 젖은 욧바닥을 내려다 보며 이 몸의 하잘 것 없는 것을 탄식하여 마지 않았으며 피비린 냄새 나는 눈방울을 달음박질 시켜 가며 불려 놓았던 나의 「포켓」은 이번 병으로 말미암아 많이 줄어들었네. 그러나 병석에서도 나의 먹을 것의 걱정으로 말미암아 나의 그 「포켓」을 건드리게 되기는 주인의 동정이 너무나 컸던 것일세. 지금도 그의 동정을 받고 있을 뿐이야. 앞으로도 길이 그의 동정을 받지 않으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며. 「돈을 모아 볼까.」 내가 줄기차게 살아 보겠다는 결심으로 모은 돈을 남의 동정을 받아가면서도 쓰기를 아까와하는 나의 마음의 추한 것을 새삼스러이 발견하는 것 같아서 불유쾌하기 짝이 없네. 동시에 나의 마음이 잘못하면 허무주의에 돌아가지나 아니할까 하여 무한히 경계도 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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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군! 웃지 말아 주게. 나는 그 동안에 의학(醫學) 공부를 시작하였네. 그것은 내가 전부터 그 방면에 취미가 있었다는 것도 속일 수 없는 일이겠으나 또 의사인 자네를 따라가고 싶은 가엾은 마음에서 그리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속일 수 없는 일이겠네. 모든 것이 다―그―줄기차게 살아가겠다는 가엾은 악지에서 나온 짓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칭찬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일세. 또다시 생각하면 나의 몸이 불구자이므로 세상에 많은 불구자를 동정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불구자인 것이 사실인 만큼 내가 의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자네에게는 너무나 돌연적이겠으나 역시 사실인 것을 어찌 하겠나. 여기에도 나는 주인의 많은 도움을 받아 오는 것을 말하여 두거니와 하여간 이 새로운 나의 노력(努力)이 나의 앞길에 또 어떠한 운명을 늘어놓도록 만들는지 아직도 수수께끼에 붙일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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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의문에 싸였던 그 「정말 절뚝발이가 될는지」도, 끝끝내는 한 개의 완전한 절뚝발이로 울면서 하던 예언에 어기지 않은 채 다시금 동경시가에 나타났네그려! 오고가는 사람이 이 가엾은 「인생의 패배자」 절뚝발이를 누구나 비웃지 않고는 맞고 보내지 아니하는 것을 설워하는 불유쾌한 마음이 나는 아무리 용기를 내어 보았으나 소제시킬 수가 없이 뿌리 깊이 박혀 있네 그려. 「영원한 절뚝발이 그러나 절뚝발이의 무서운 힘을 보여 줄 걸 자세히 보아라」 이곳에서도 원한과 울분에 짖는 단말마의 전율할 신에 대한 복수의 맹서를 볼 수 있는 것일세. 내 몸이 이렇게 악지를 쓸 때에 나는 스스로 내 몸을 돌아다 보며 한없는 연민과 고독을 느끼는 것일세. 물에 빠져 애쓰는 사람의 목이 수면 위에 솟았을 때 그의 눈이 사면의 무변대해임을 바라보고 절망하는 듯한 일을 나는 우는 것일세. 그때마다 가장 세상에 마음을 주어 가까운 사람에게 둘러싸여 따뜻한 이불 속에 고요히 누워서 그들과 또 나의 미소를 서로 교환하는 그러한 안일한 생활이 하루바삐 실현되기를 무한히 꿈꾸고 있는 것일세. 그것은 즉시로 내 몸을 깊은 「노스탤지어」에 빠뜨리어서는 고향을 꿈꾸게 하고 친구를 꿈꾸게 하고 육친과 형제를 꿈꾸게 하도록 표상되는 것일세. 나는 가벼운 고통 가운데에도 눈물겨운 향수(鄕愁)의 쾌감을 눈 감고 가만히 느끼는 것일세. × × ×
명고옥(名古屋)의 쿡 생활 이후로 전전 유랑의 칠년 동안 한 번도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던 나는 절뚝발이로 동경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양이 나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만치 그렇게도 무섭게 변한 데에 「악!」 소리를 지르지 아니할 수 없었네. 그것은 청춘―뿐이랴 인생의 대부분을 박탈당한 썩어 찌그러진 험집[傷痕] 투성이의 값없는 골동품인 나였던 것일세.
그때에도 나는 또한 나의 동체(胴體)를 꽉 차서 치밀어 올라오는 무거운 「피스톤」에 눌리우는 듯한 절망에 빠졌었네. 그러나 즉시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 이 패배의 인간을 위로하며 격려하여 주데.
그때에
「그러면 M군도 아차 T도!」
이런 생각이 암행열차(暗行列車)같이 나의 허리를 스쳐갔네. 별안간 자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환등(幻燈)을 보는 어린 아해의
「무엇이 나올까」
하는 못생긴 생각에 가득 찼네. 그래서 나도 자네에게 나의 근영(近影)을 한 장 보내거니와 자네도 나의 환등을 보는 어린아해 같은 마음을 생각하여 자네의 최근 사진을 한 장 보내 주기를 바라네. 물론 서로 만나 보았으면 그 위에 더 시원하고 반가울 일이 있겠나마는 기필치 못할 우리의 운명은 지금도 자네와 나, 두 사람의 만날 수 있는 아무 방책도 가르쳐 주지 않네 그려!
× × ×
내가 주인에게 그만큼 나의 마음을 붙일 수까지 있었느니만큼 아직 나는 아무 데로도 옮길 생각은 없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얼마든지 이곳에 있을 것 같으니까 나에게 결정적 변동이 없는 한 자네는 안심하고 이곳으로 편지하여 주기를 바라네. T는 요즈음 어떠한가 여전히 적빈(赤貧)에 심신(心身)을 쪼들리우고 있다 하니 그도 한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의 안부 잘 전하여 주게. 내가 집을 떠나 십년 동안 T에게 한 장 편지를 직접 부치지 아니한 데 대하여서는―나의 마음 가운데에 털끝만치라도 T에게 악의가 있지 아니한 것은 물론 자네가 잘 알고 있으니깐―자네의 사진이 오기를 기다리며, 또 자네의 여전한 건강을 빌며―영원한 절뚝발이 X로부터.

3
벗어나려고 애쓰는 환경일수록 그 환경은 그 사람에게 매어달려 벗어나지를 않는 것이다. T가 아무리 그 적빈을 벗어나려고 애써 왔으나 형과 갈린 지 십유여 년인 오늘까지도 역시 그 적빈을 면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불의의 실패가 있기 전까지도 그래도 그 곳에서는 상당히 물적으로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M군의 호의로 T가 결정적 직업을 가지게 되지 못하였었다 할진댄 세상에서― 더욱이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지 않으면 아니되게 변하여 가는 세상에서 T의 가족들은 그날 그날의 목을 축일 것으로 말미암아 더욱이나 그들의 머리를 썩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위험성 적은 생계를 경영해 나아간다고는 하여도 역시 가난 그것을 한 껍데기도 면치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행인지 불행인지 T의 안해는 「업」이 하나를 낳는 뒤로는 사나이도 계집아이도 낳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T의 가정은 쓸쓸하였다. 그러나 다만 세 식구 밖에 안되는 간단한 가정으로도 그때나 이때나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전번 가운데에서 출생한 업이가 반드시 못났으리라고 추측한다면 그것은 전연 사실과 반대되는 추측일 것이다. 업이는 그 아버지 T에게도 또 그 외에 그 가족의 누구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치 영리하고 예민한 재질과 풍부한 두뇌의 소유자로 태어났던 것이다. 과연 업이는 어려서부터 간기(癎氣)27로 죽을 뻔 죽을 뻔하면서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지금에는 건강한 몸이 되었다. T의 적빈한 가정에는 그들에게 다시없는 위안거리였고 자랑거리였었다. T의 부처는 업이가 어려서부터 죽을 것을 근근히 살려왔다는 이유로도 또 남의 자식보다 잘나고 똑똑하다는 이유로도, 그 가정의 자랑거리라는 이유로도, 그 아들의 덕을 보겠다는 이유로도 그들의 줄 수 있는 최절정의 사랑을 업에게 바쳐왔던 것이다.
양육의 방침이 그 양육되는 아이의 성격의 거의 전부를 결정한다면 교육의 방침도 또한 그의 성격에 적지 아니한 관계를 끼칠 것이다. 업이는 적빈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또한 M군의 호의로 받을 만큼의 계제적(階梯的)28 교육을 받아왔다. 좋은 두뇌의 소유자인 업에게 대하여 이 교육은 효과 없지 않을 뿐이랴! 무엇에든지 그는 남보다 먼저 당할 줄 알고 남보다 일찍 알 줄 알고 남보다 일찍 느낄 줄 아는 혁혁한 공적을 이루었다. M군이 해외에 있는 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는 의미를 떠난 더없는 칭찬도 칭찬이었거니와 학교 선생이나 그들 주위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최고의 칭찬하기를 아끼지 아니하여 왔던 것이다. T에게는 이것이 몸에 넘치는 광영인 것은 물론이요 그러므로 업이는 T의 둘도 없는 자랑거리요 보물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아들을 가진 사람」
이와 같은 말을 들은 T로 하여금 업을 위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이와 같은 말을 영구히 몸에 받기 위하여서는 업이를 T의 상전(上殿)으로 위하게까지 시키었다. 너무 과도한 칭찬의 말은 T에게 기쁨을 줄 뿐 아니라 T에게 또한 무거운 책임도 주는 것이었다.
「이 아들을 위해야 한다.」
업을 소유한 아버지의 T씨가 아니었고 T씨를 소유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업은 T씨가 가장 그 책임을 다하여야만 하고 그 충실을 다하여야만 할 T씨의 주인인 것이었다. T씨는 업이 그 어머니의 뱃속을 하직하던 날부터 오늘까지 성난 손으로 업을 때려 본 일이 한 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변한 어조로 꾸지람 한 마디 못하여 본 채로 왔던 것이다.
「내가 지금은 이렇게 가난하지만 저것이 자라서 훌륭하게 되는 날에는 나는 저것의 덕을 보리라.」
다만 하루라도 바삐 업이 학업을 마치기만 그리하여 하루라도 바삐 훌륭한 사람이 되어지기만 한없이 기다리던 것이었다. 비록 업이 여하한 괴상한 행동에 나아가더라도 T씨는
「저것도 다 공부에 소용되는 일이겠지.」
하고 업이 활동사진 배우의 푸로마이트29를 사다가 그의 방벽에다가 죽 붙여 놓아도 그것이 무엇이냐고 업에게도 M군에게도 묻지도 아니하고 그저 이렇게만 생각하여 버리고 고만두는 것이었다. 더욱이 무식한 T씨로서는 그런 것을 물어 보거나 혹시 잘못하는 듯한 점에 대하여 충고라도 하여 보거나 하는 것은 필요 없는 간섭같이 생각되어 전혀 입을 내어밀기를 주저하여 왔던 것이다. 언제나 T씨는 업의 동정(動靜)을 살펴가며 업이가 T씨 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T씨가 업의 밑에서 사는 것과 같은 모순에 가까운 상태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때에 선천적 성격(先天的 性格)이라는 것은 의문이 많은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외래의 자극(外來의 刺戟) 즉 환경에 다라 형성지어지는 것이라는 결론(結論)에 도달치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방침 밑에 있는 또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업의 성격이 그가 태어난 가정의 적빈함에 반대로 교만하기 짝이 없고 방종하기 짝이 없는 업을 형성할 것은 물론임에 오류(誤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업은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을 보기를 모두 자기 아버지 T씨와 같이 보는 것이었다. 자기의 말에 전연 노예적으로 굴종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자기를 호위하여 주리라고 믿는 것이었다. 업의 걷잡을 수도 없는 공상은 천마(天馬)가 공중을 가는 것과 같이 자유롭게 구사(驅使)되어 왔던 것이다.
<햄릿>의 「유령(幽靈)」, <올리브>의 「감람수의 방향」, <브로드웨이>의 「경종」, <맘모―톨>의 「리젤」, <오페라>좌의 「화문천정―」 이렇게
허영! 그것들은 뒤가 뒤를 물고 환상에 젖은 그의 머리를 끊이지 아니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방종(放縱) 허영(虛榮) 타락 이것은 영리한 두뇌의 소유자인 업이라도 반드시 걸어야만 할 과정이 아닐까 그들의 가정이 만들어내인 그들의 교육방침이 만들어내인 그러나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예기 못한 기적. 업은 과연 지금에 그의 가정 혜성같이 나타난 한 기적적 존재인 것이었다.

4
M군은 실망하였다. 업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마이너스’의 존재였다.
「저런 사람이 필요할까? 아니 있어도 좋을까?」
그러나 ‘유해무익’이라는 참을 수 없는 결론이었다.
「가지가 돋고 꽃이 피기 전에 일찍이 그 순(荀)을 잘라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M군에게 대하여서는 너무도 악착한 착상(着想)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업의 전도를 위하여 잘 지도하여 볼까」
그러나
「한 사람의 사상은 반응(反應)키 어려운 만치 완성되어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설복(說服)을 당하기에는 업의 이지(理智)는 너무 까다롭다」
M군의 업에게 대한 애착은 근본적으로 다하여 버렸다. M군의 이러한 정신적 실망의 반면에는 물질적 방면에서 받은 영향(影響)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업의 학비(學費)를 대어 오던 M군이 수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불의의 액운(厄運)으로 말미암아 파산(破産)을 당하다시피 되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던 연구실의 생활도 더하지 못하고 어느 관립병원 촉탁의(囑託醫)가 되어 가지고 온갖 물질적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간으로도 M군은 여러 번이나 업의 학비를 대이기를 단념하려 하였던 것이었으나 그러나 아직 그의 업에 대한 실망이 그리 크지도 아니하였고 또 싹이 나려는 아름다운 싹을 그대로 꺾어 버리는 것도 같아서 어딘지 애착 때문에 매어 달려지는 미련(未練)에 끌리어 그럭저럭 오늘까지 끌어왔던 것이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업에 대한 애착과 미련도 곱게 어디론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질적 관계가 그로 하여금 업을 단념시키기를 더욱 쉽게 하였던 것이나 아니었던가 한다.
「업이! 이번 봄은 벌써 업이 졸업일세 그려!」
「네― 구속 많고 귀찮던 중학생활도 이렇게 끝나려 하고 보니 섭섭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졸업 후의 지망은?」
「음악학교!―」
그래도 주저하던 단념은 M군을 결정시켜 버렸다.
「업이 자네도 잘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나 한 몸뚱이를 지지(支持)해 나아가기에도 어려운 가운데 있어! 음악학교의 뒤를 대어 줄 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악의가 아니야. 나의 지금 생각 같아서는 천재의 순을 꺾는 것도 같으나 이제부터는 이만큼이라도 자네를 길러주신 가난한 자네의 부모의 은혜라도 갚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이 말을 하는 M군은 도저히 업의 얼굴을 치어다볼 수가 없었다. M군의 이와 같은 소극적 약점(消極的 弱點)은 업으로 하여금
「오― 네 은혜를 갚으란 말이로구나.」
하는 부적당한 분개를 불지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M군은 언제인가 학교 무슨 회에서 여흥으로 만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연단 위에서 ‘바이올린’의 줄을 농락하던 그 업이를 생각하고 섭섭히 생각한 것만치 그에게는 조곰도 악의가 품어 있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M군의 업에 대한 「내 몸이 어렵더라도 시켜 보려 하였으나」하던 실망은 즉시로 「나를 미워하는 세상,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하는 업의 실망으로 옮기어졌다.
「내 생명을 꺾으려는 세상, 활동의 원동력을 주려 하지 않는 세상」
「M씨여, 당신은 나를 미워했지. 나의 천재를 시기했지. 나는 당신을 원망합니다.」
어두운 거리를 수없이 헤매이는 것이, 여항(閭巷)의 천한 계집과 씩뚝꺽뚝 하소연하는 것이 남의 집 담모퉁이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공원 벤취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때때로 죽어가는 T씨를 졸라서 몇 푼의 돈을 긁어내어 피부의 옅은 환락을 찾아다니는 것이 중학을 마치고 나온 청소년 업의 그후 생활이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것은 업의 교만 방종한 태도
「아버지! 아버지는 왜 다른 아버지들과 같이 돈을 많이 좀 못 벌었습니까. 왜 남같이 자식 공부 좀 못 시켜 줍니까 왜 남같이 자식 호강 좀 못 시켜 줍니까 왜 돋으려는 순을 꺾느냐는 말이오.」
「아버지 무섭다」는 생각은 업에게는 털끝만치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T씨가 아들 업이를 무서워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 상태였었으니까.
「오냐, 다― 내 죄다. 그저 아비 못 만난 탓이다.」
T씨는 이렇게 업에게 비는 것이었다.
「애비가 자식 호강 못 시티는 생각만 하고 자식이 애비 호강 좀 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겠니? 예끼 못된 자식.」
T씨에게 이런 생각은 참으로 꿈에도 날 수 없었다. 「천재를 썩힌다. 애비가 죄다.」 이렇게 T씨의 생활은 속죄(贖罪)의 생활이었다. 그날의 밥을 끓여 먹을 쌀을 걱정하는 그들의 살림 가운데에서였으나 업의 「돈을 내라」는 절대한 명령에는 쌀팔 돈이고 전단을 잡혀서이고 당장에 내어 놓지 않고는 죽을 것 같이만 알고 잇는 T씨의 살림이었다. 차마 못 할 야료30를 T씨의 눈앞에서 거리낌없이 연출하더라도 며칠밤씩 못 갈 데 가서 자고 들어오는 것을 T씨 눈으로 보면서도
「저것의 심정을 살핀다」는 듯이
「미안하다. 다 내 죄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듯이 업의 앞에서 머리를 숙인 채 업에게 말 한 마디 던져 볼 용기도 없이 마치 무슨 큰 죄나 진 종[僕]이 주인의 얼굴을 차마 못 쳐다보는 것과 같이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때로는
「해외의 형은 어쩌면 돈도 좀 보내 주지 않는담」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그 형을 원망도 하여 보는 것이었다. T씨의 아들 업에 대한 이와 같은 죽은 쥐 같은 태도는 업의 그 교만종횡(驕慢縱橫)한 잔인성을 더욱더욱 조장시키는 촉진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업에 실망한 M군과 M군에 실망한 업의 사이가 멀어져 감은 물론이요 그러한 불합리(不合理)한 T씨의 태도에 불만을 가득 가진 M군과 자기 아들에게 주던 사랑을 일조에 집어던진 가증한 M군을 원망하는 T씨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 갈 따름이었다. 다만 해외에 방랑하는 그의 소식을 직접 듣는 M군이 그의 안부를 전하는 동시에 그들의 안부를 알려 T씨의 집을 이따금 방문하는 외에는 그들 사이에 오고 감의 필요가 전혀 없던 것이었다.
M에게 보내는 편지(六信) 두 달! 그것은 무궁한 우주의 연령(年齡)으로 볼 때에 얼마나 짧은 것일까? 그러나 자네와 나 사이에 가로질렸던 그 두달이야말로 나는 자네의 죽음가지도 우려하고 자네는 나의 죽음까지도 우려하였음직한 추측이 오측(誤測)이 아닐 것이 분명할만치 그렇게도 초조와 근심에 넘치는 기―←고 긴 두 달이 아니었겠나. 자네와 나의 그 우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며 자네의 틀림없는 건강을 믿는 것과 같이 나는 다시없는 건강의 주인으로서 나의 경력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밤과 낮으로 힘차게 일하고 있는 것일세.
M군! 나의 이 끊임없는 건강을 자네에게 전하는 기쁨과 아울러 머지 아니하여 우리 두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만나겠다는 기쁨을 또한 전하는 것일세.
× × ×
우스운 말이나 지금쯤 창으로 노련(老鍊)한 한 사람의 의학사(醫學士)로 완성되어 있겠지. 그 노련한 의학사를 멀리 떨어져 나의 요즈음 열심히 하여 오던 의학의 공부가 지금에는 겨우 얼간 의사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그 무슨 희극적 대조이겠나 이것은 이곳에 친구의 직접의 원조도 원조이겠지만은 또 한편으로 멀리 있는 자네의 나에게 대하여 주는 끊임없는 사랑의 덕이 그 대부분이겠다고 믿으며 도한 자네가 더 한층이나 반가와할 줄 믿는 소식이겠다고도 믿는 것일세. 내가 고국에 돌아간 다음에는 자네는 나의 이 약한 손을 이끌어 그 길을 함께 걸어 주겠다는 것을 약속하여 주기를 바라며 마지않는 것일세.
× × ×
오늘날 꿈에만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고 보니 감개무량하여 나의 가슴을 어지럽게 하네. 십유여 년의 기나긴 방랑생활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한 분의 어머니를 잃었네. 그리고 절뚝발이가 되었네. 글 한 자 못 배웠네. 돈 한푼 못 벌었네. 사람다운 일 하나 못 하여 놓았네. 오직 누추한 꿈 속에서 나의 몸서리칠 청춘을 일생의 중요한 부분을 삭제당하기를 그저 달게 받아왔을 따름일세. 차인잔고(差引殘高)31가 무엇인가 무슨 낯으로 고향 땅을 밟으며 무슨 낯으로 형제의 낯을 대하며 무슨 낯으로 고향 친구의 낯을 대할 것인가? 오직 회한(悔恨) 차인잔고가 있다고 하면 오직 이 회한의 한 뭉텅이가 있을 따름이 아니겠나?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 나는 가벼운 한숨으로써 나의 괴로운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이니 그렇게 부끄러워야만 할 고향땅에는 지금쯤은 나의 얼굴, 아니 나의 이름이나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의 한 사람조차도 있지 아니할 것일 뿐이랴. 그 곳에는 이 인생의 패배자인 나를 마음으로써 반가이 맞아줄 자네 M군이 있을 것이요, 육친의 형제 T가 있을 것이므로일세. 이 기쁨으로 나는 나의 마음에 용기를 내이게 하여 몽매에도 그리한 고향의 흙을 밟으려 하는 것일세.
× × ×
근 삼년 동안이나 마음과 몸의 안정을 가지고 머물러 있는 이곳의 주인은 내가 자네와 작별한 후에 자네에게 주던 이 만큼의 우정을 아끼지 아니한 그렇게 친한 친구가 되어 있다는 말을 자네에게 전한 것을 자네는 잊지 아니하였을 줄 믿네. 피차에 흉금을 놓은 두 사람은 주객(主客)의 굴레를 일찍이 벗어난 그리하여 외로운 그와 외로운 나는 적적(비록 사람은 많으나)한 이 집안에 단 두 사람의 가족이 되었네. 이렇게 그에게 그의 가족이 없는 것은 물론이나 이만한 여관 외에 처처에 상당한 건물들을 그의 소유로 가지고 있는 꽤 있는 그일세.
나로서 들어 아는 바 그의 과거가 비풍참우(悲風慘雨)의 혈사를 이곳에 나열하면 무엇 하겠나마는 과연 그는 문자대로의 고독한 낭인(浪人)32일세. 그러나 그의 친구들의 간곡한 권고와 때로는 나의 마음으로의 권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아내를 취(聚)하지 아니하는 것일세.
「돈도 그만큼 모았고 나이도 저만큼 되었으니 장차의 길고 긴 노후(老後)의 날을 의지할 신변의 고적을 위로할 해로가 있어야 아니하겠소」
「하 그것은 전혀 내 마음을 몰라 주는 말이오」
일상에 내가 나의 객관33에 고적을 그에게 하소연할 때면 그는 도리어 나를 부러워하며 자기 신변의 고적과 공허를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일세.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안해를 얻지 아니하겠다 하며 그렇다고 허튼 여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하는 일도 결코 없는 것일세.
「그러면 그가 여자에 대하여 무슨 갖지 못할 깊은 원한이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선입관념(先入觀念)을 가진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그는 남자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친절하게 하면서도 여자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냉정하기 짝이 없는 것일세. 예(例)를 들면 이 집 여중(女中)34들에게 하는 그의 태도는 학대, 냉정, 잔인, 그것일세.
나는 때로
「너무 그러지 마오, 가엾으니」
「여자니깐」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네. 그의 이 수수께끼의 대답은 나의 의아(疑訝)를 점점 깊게만 하는 것이었네. 하루는 조용한 밤 두 사람은 또한 떫은 차를 마셔가며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그 끝에
「여자에 관련된 남에게 말 못할 무슨 비밀의 과거가 있소?」
「있소! 있되 깊소!」
「내게 들려 줄 수 없소?」
「그것은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오. 오직 신(神)이 그것을 알고 있을 따름이어야만 할 것이오. 그것은 내가 눈을 감고 내 그림자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사라져야만 할 따름이오」
나는 물론 그에게 질기게 더 묻지 아니하였네. 그의 그림자와 함께 사라질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쾌활한 기상의 주인인 그는 또한 남다른 개성의 소유자인 것일세.
× × ×
그는 나보다 십여세(十餘歲) 맏일세. 그의 나이에 겨누어 너무 과하다 할만치 많이 난 그의 흰 머리털(白髮)은 나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네. 또한 동시에 그의 풍파 많은 과거를 웅변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같으니 그와 같은 그가 나를 사귀어 주기를 동년배의 터놓은 사이의 우의(友誼)로써 하여 주니 내가 나의 방랑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나의 ‘희로애락’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겠나? 그와 나는 구구한, 그야말로 경제문제(經濟問題)를 벗어난 가족―그가 지금에 경영하고 있는 여관(旅館)은 그와 내가 주객의 사이는커녕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게 차라리 어떤 때에는 내가 주인 노릇을 하게금 되는 말하자면 공동 경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그와 나 사이인 것일세. 그의 장부(帳簿)는 나의 장부이었고, 그의 금고(金庫)는 나의 금고이었고, 그의 열쇠는 나의 열쇠이었고, 그의 이익과 손실(利益損失)은 나의 이익과 손실이었고, 그의 채권과 채무(債權債務)는 나의 채권과 채무인 것이었네. 그와 나의 모―든 행동은 그와 내가 목적을 같이 한 방향을 같이 한 그와 나의 행동들이었네. 참으로 그와 내가 서로 믿음은 마치 한 들보를 떠받치고 있는 양편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믿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사이도 같은 것이었네.
× × ×
이와 같은 기쁜 소식만을 나열하고 있던 나는 지금 돌연히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자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조우(遭遇)된 지 오래인 것을 말하네. 나와 만난 후 삼년에 가까운 동안뿐 아니라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이전에도 몸살이나 감기 한 번도 앓아 본 적이 없는 퍽 건강한 몸의 주인이던 그가 졸지에 이렇게 쓰러졌다는 것은 그와 오랫동안 같이 있던 나로서는 더욱이나 의외인 것이었네. 한 이삼일을 앓는 동안에는 신열이 좀 있다 하더니 내가 옆에 앉아 있는 앞에서 고요히 잠자는 듯이 갔네.
「사람 없는 벌판에서 별(星)을 쳐다보며 죽을 줄 안 내 몸이 오늘 이렇게 편안한 자리에 누워서 당신의 서러운 간호를 받아가며 세상을 떠나니 기쁘오. 당신의 은혜는 명도35에 가서 반드시 갚을 것을 약속하오―이 집과 내 가진 물건의 얼마 안되는 것을 당신에게 맡기기로 수속까지 다 되어 있으니 가는 사람의 마음이라 가엾이 생각하여 맡아 주기를 바라고 아무쪼록 그것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형제 친구들과 함께 기쁘게 살아 주기를 바라오. 내가 이렇게 하잘 것 없이 갈 줄은 나도 몰랐소. 그러나 그것도 다― 내가 나의 과거에 받은 그 뼈살에 지나치는 고생의 열매가 도진 때문인 줄 아오. 나를 보내는 그대도 외롭겠소마는 그대를 두고 가는 나는 사바(裟婆)에 살아 꿈즉이던 날들보다도 한층이나 외로울 것 같소!」
이렇게 쓰디 쓴 몇 마디를 남겨 놓고 그는 갔네. 그후 그의 장사도 치른 지 며칠 째 되던 날, 나는 그의 일상 쓰던 책상 속에서 위의 말들과 같은 의미의 유서(遺書), 그리고 문서들을 찾아내었네.
× × ×
이제 이것이 나에게 기쁜 일일까 그렇지 않으면 슬픈 일일까 나는 그 어느 것이라고도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일세.
내가 그의 생전에 그와 내가 주고받던 친교를 생각하면 그의 죽음은 나에게 무한히 슬픈 일이 아니겠나마는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던 날부터 적빈에만 지질리워 가며 살아온 내가 비록 남에게는 얼마 안되게 보일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나의 일생에 상상도 하여 보지도 못할만치의 거대한 재산을 얻은 것이 어찌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겠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러한 나의 생각은 세상을 떠난 그를 생각하기만 하는 데에서도 더없을 양심의 가책을 아니 받는 것도 아니겠으나 그러나 위의 말한 것은 나의 양심의 속임 없는 속삭임인 것을 어찌 하겠나.
「어째서 그가 이것을 나에게 물려 줄까」
「죽은 그의 이름으로 사회업에 기부할까」
이러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나의 머리에 지나가고 지나오고 한 것은 또한 내가 나의 마음을 속이는 말이겠나? 그러나 물론 전에도 느끼지 아니한 바는 아니나 차차 나이 들고 체력이 감퇴되고 원기가 좌절됨을 따라서 이 몸의 주위의 공허가 역력히 발견되고 청운(靑雲)의 젊은 뜻도 차차 주름살이 잡히기를 시작하여 한낱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한 낱 이 몸의 쓸쓸한 느낌만이 나날이 커가는 것일세. 그리하여 어서 바삐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친구와 얼싸안기 원하며 그립던 형제와 섞이어 가며 몇 날 남지 아니한 나의 여생(餘生)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좀더 기쁨과 웃음과 안일한 가운데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날이 가면 갈수록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층 더하여 가는 것일세. 내가 의학공부를 시작한 것도 전전푼의 돈이나마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가엾은 짓들이었네.
사회사업에 기부할 생각보다도 내가 가질 생각이 더 컸던 나는 드디어 그 가운데의 일부를 헤치어 생전 그에게 부수(附隋)되어 있던 용인(庸人) 여중(女中)들과 얼마 아니되는 채무를 처치한 다음 나머지의 전부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였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으로부터는 단언커니와 나의 일생에 들어본 적이 없던 비난의 말까지 들었네.
「돈! 재물! 이것 때문에 그의 인간성(人間性)이 이렇게도 더럽게 변하고 말다니! 죽은 그는 나를 향하여 얼마나 조소할 것이며 침 배앝을 것이냐」
새삼스러이 찌들고 까부러진 이 몸의 하잘 것 없음을 경멸하여 연민하였네. 그러면서도
「이것도 다― 여태껏 나를 붙들어 매고 그는 적빈 때문이 아니냐」
이렇게 자기변명의 길도 찾아보면서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었네.
× × ×
친구를 잃은 슬픔은 어느 결에 사라졌는가 지금에 나의 가슴은 고향 땅을 밟을 기쁨 친구를 만날 기쁨 형제를 만날 기쁨 이러한 가지의 기쁨들로 꽉 차 있네. 놀라거니와 나의 일생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면서라도 최근 며칠 동안만큼 기뻤던 날이 있었던가를 의심하네.
아― 이것을 기쁨이라고 나는 자네에게 전하는 것일세 그려. 눈물이 나네 그려!
× × ×
자네는 일상 나의 조카 업의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아니하여 왔지. 최근에 자네의 편지에 이 업에 대한 아무런 말도 잘 볼 수 없음은 무슨 일일까, 하여간 젖 먹던, 코 흘리던 그 업이를 보아 버리고 방랑생활 십유여 년 오늘날 그 업이 재질의 풍부한 생래의 영리한 업이로 자라났다 하니 우리 집안을 위하여서나 일상에 적빈에 우는 T 자신을 위하여서나 더없이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감개무량하네. 또한 미구에 만나 볼 기쁨과 아울러 이 미지수의 조카 업이에 대하여 많은 촉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세.
M군! 나는 아무쪼록 빨리 서둘러서 어서 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차리려 하거니와 이곳에서 처치해야만 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해서 아직도 이곳에 여러 날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 형편이나 될 수만 있으면 세전(歲前)에 고향에 돌아가 그립던 형제와 친구와 함께 즐거운 가운데에서 오는 새해를 맞이하려 하네. 어서 돌아가서 지나간 옛날을 추억도 하여 보며 그립던 회포를 풀어도 보아야 할 터인데!
일기 추운데 더욱더욱 건강에 주의하기를 바라며 T에게도 불일간 내가 직접 편지하려고도 하거니와 자네도 바쁜 몸이지만 한 번 찾아가서 이 소식을 전하여 주기를 바라네. 자―그러면 만나는 날 그때까지 평안히― X로부터……
「나의 지난 날의 일은 말갛게 잊어 주어야 하겠다. 나조차도 그것을 잊으려 하는 것이니 자살(自殺)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 동안 자그마한 광명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전연 얼마 동안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또 한번 나에게 자살이 찾아왔을 때에 나는 내가 여전히 죽을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으로 죽을 것을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그만큼 이번에 나를 찾아온 자살은 나에게 있어 본질적(本質的)이요, 치명적(致命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연 실망 가운데 있다. 지금에 나의 이 무서운 생활이 노[繩] 위에 선 도승사(渡繩師)의 모양과 같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나의 일생에 다시 없는 행운이 돌아올 수만 있다 하면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까지는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復讐)―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一九三○. 四. 二十六 於 義州通工事場
(李 ○)」
어디로 가나?
사람은 다 길을 걷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로인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나?
광맥(鑛脈)을 찾으려는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보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어둡고 험준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헤매인다. 탐험가(探險家)나 산보자(散步者)나 다 같이―
사람은 다 길을 걷는다. 간다. 그러나 가는 데는 없다. 인생은 암야의 장단 없는 산보이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적응(適應)으로 하여 올빼미와 같은 눈을 얻었다. 다 똑같다.
그들은 끝없이 목마르다. 그들은 끝없이 구(求)한다. 그리고 그들은 끝없이 고른[擇]다.
이 ‘고름’이라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나온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면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이 암야에서도 끝까지 쫓겨난 사람이 있다. 그는 어떠한 것,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제되지 않는다.
―선혈이 임리36한 복수는 시작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복수를―피밑―(底) 없는 학대의 함정―
× × ×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다. 그는 지구(地球)권 외에서도 그대로 학대받았다. 그의 고기를 전부 졸여서 애(愛)라는 공물(供物)을 만들어 사람들 앞에 눈물 흘리며도 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더 한층 그를 학대하고 쫓아내었을 뿐이었다.
「가자! 잊어버리고 가자!」
그는 몇 번이나 자살을 꾀하여 보았던가. 그러나 그는 이 나날이 진[濃]하여만 가는 복수의 불길을 가슴에 품은 채 싱겁게 가 버릴 수는 없었다.
「내 뼈 끝까지 다 갈려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그때에는 내 정령(精靈) 혼자서라도―」
그의 갈리는 이빨[齒] 사이에서는 뇌장(腦漿)을 갈아 마실 듯한 쇳소리와 피육(皮肉)을 말아 올릴 듯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의 반생을 두고 (아마) 하여 내려 오던 무위한 애(愛)의 산보는 끝났다.
그는 그의 몽롱한 과거를 회고하여 보며 그 눈멀은 산보를 조소하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일직선으로 뻗쳐 있는 목표 가진 길을 바라보며 득의(得意)의 웃음을 완이(莞爾)히 웃었다.37
× × ×
닦아도 닦아도 유리창에는 성에가 슬었다. 그럴수록 그는 자주 닦았고 자주 닦으면 성에는 자꾸 슬었다. 그래도 그는 얼마든지 닦았다.
승강장 찬바람 속에 옷고름을 날리며 섰다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퍽 따스하더니 그것도 삽시간(霎時間)이요 발 밑에 ‘스팀’은 자꾸 식어만 가는지 삼등객차(三等客車) 안은 가끔 소름이 끼칠만치 써늘하였다.
가방을 겨우 다나38 위에다 얹고 앉기는 앉았으나 그의 마음은 종시 앉지 않았다. 그의 눈은 유리창에 스는 성에가 닦아도 스고 또 닦아도 또 스듯이 씻어도 솟고 또 씻어도 또 솟는 눈물로 축였다[濡]. 그는 이 까닭 모를 눈물이 이상하였다. 그런 것도 그의 눈물의 원한이었는지도 모른다.
젖은 눈으로 흐린 풍경을 보지 아니하려 눈물과 성에를 쉴 사이 없이 번갈아 닦아가며 그는 창밖을 내다보기에 주린 듯이 탐하였다. 모든 것이 이상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찌 이렇게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을까? 아!」 그에게는 이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서 그는 그의 백사지(白砂地)된 뇌와 심장을 조상하였다.
회색으로 흐린 하늘에 소리없는 까마귀 떼가 몽롱한 북망산을 반점(斑點) 찍으며 감도는 모양― 그냥 세상 끝까지라도 닿아 있을 듯이 겹친 데 또 겹쳐 누워 있는 적갈색(赤褐色)의 벗어진 산(山)들의 자비(慈悲)스러운 곡선(曲線)― 이런 것들이 그의 흥미(興味)를 일게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도무지 이상치 아니한 것이 그에게는 도무지 이상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그는 그의 눈과 유리창을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의 것을 왜― 거저 먹으려고 그리는 것일까」
그는 ‘따개꾼39’을 생각하여 보았다.
「남의 것을 거저― 남의 것을― 거저―」
그는 또 자기를 생각하여 보았다.
「남의 것을 거저― 나는 남의 것을 거저 갖지 않았느냐― 비록 그 사람은 죽어서 이 세상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유서(遺書)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할지라도― 그의 유산의 전부를 차지하여도 조곰도 거리낌이 없을만치 그와 나는 친한 사이였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하고 많은 유산을 그저 차지하지 않았느냐. 남의 것을― 그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남이다― 남의 것을 거저, 나는 그의 유산의 전부를― 사회사업(社會事業)에 반드시 바쳤어야 옳을 것을― 남의 것이다― 상속이 유언된 유산― 거저― 사회사업― 남의 것―’」 그의 머리는 어지러웠다.
「고요한 따개꾼― 체면 있는 따개꾼!」
그러나 그는 성에 실은 유리창을 닦는 것과 같이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의 종잇 조각― 수형40을 어루만져 보기를 때때로 하는 것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발끝에서 올라오는 추위와 피곤― 머리끝에서 내려오는 산란한 피곤― 그것은 복부(腹部)에서 충돌되어서는 시장함으로 표시(表示)되었다. 한 조각의 마른 빵을 씹어 본 다음에 그는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다. 오줌 누러 가는 것이 귀치않아서―
먹은 것이라고는 새벽녘에도 역시 마른 빵 한 조각밖에는 없다. 그때도 역시 물은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벌써 변소에를 몇 번이고 갔는지 모른다. 절름발이를 이끌고 사람 비비대는 차 안의 좁은 틈을 헤쳐 가며 지나다니기가 귀찮았다. 이것이 괴로웠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물을 마시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오줌을 수없이― 그는 이것이 이 차 안의 특유인 미지근한 추위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변소에 들어서서는 반드시 한 번씩 그 수형(手形)을 꺼내어 자세히 검사하여 보는 것도 겸겸하였다.
「오냐― 무슨 소리를 내가 듣더라도 다시 살자」
왼편 다리가 차차 아파 올라왔다― 결리는 것처럼― 저리는 것처럼― 기미(氣味) 나쁘게―.
「기후가 변하여서― 풍토가 변하여서―」
사람의 배를 가르고 그 내장을 세척(內藏洗滌)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썩는 다리를 절단(折斷)하는 것은 고사하고― 등에는 조고만 부스럼에 메스 한 번을 대어 본 일이 없는 슬플만치 풍부한 경험을 가진 훌륭한 의사의 그는 이러한 진단을 그의 아픈 다리에다 내려도 보았다. 그래 바지 아래를 걷어 올리고 아픈 다리를 내여 보았다. 바른편 다리와는 엄청나게 훌륭하게 뼈만 남게만은 외인편 다리는 바닥에서 솟아올라 오는 ‘풍토 다른’ 추위 때문인지 죽은 사람의 그것과 같이 푸르렀다. 거기에 몇 줄기 새파란 정맥줄이 반투명체(半透明體)가 내뵈듯이 내보이고 있었다. 털은 어느 사이에인지 다 빠져 하나도 없고 모공(毛孔)의 자국에는 파리똥 같은 깜은 점(黑點)이 위축(萎縮)된 피부 위에 일면으로 널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나의 것’이니만치 가장 친한 기분으로 언제까지라도 들여다보며 깔깔한 그 면을 맛좋게 쓸어 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때에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신사(紳士)(?)는 가냘픈 한숨을 섞어 혀를 한번 ‘쩍’하고 치더니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황황히 어디론지 가버렸다.
「내리는 게로군― 저 가방― 여보시오, 저 가방」
그는 고개를 돌이키어 그 신사의 가는 쪽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여보시오 저― 가방을 가지고 내리시오― 저」
또 한 번 소리쳐 보았으나 그 신사의 모양은 벌써 어느 곳으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생각나서 찾으러 오도록 나는 저 가방을 지켜주리라」 이런 생각을 그는 한턱 쓰는 세음으로 생각하였다.
「여보 인젠 그 다리 좀 내놓지 마시오」
「아― 참 저 가방―」
이렇게 불식간에 대답을 한 그는 아까 자리를 떠나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던 그 신사가 어느 틈에인지 다시 그 자리에 와 앉아 있는 것을 그제야 겨우 보아 알았다. 신사는 또 서서히 입을 열어
「여보 나는 인제 몇 정거장 남지 않았으니 내가 내릴 때까지는 제발 그 다리 좀 내어 놓지 좀 마오!」
「네― 하도 아프기에 어째 그런가 하고 좀 보았지요. 혹시 풍토가…… 」
「풍토? 당신 다리는 풍토에 따라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하고 그렇소?」
「네― 원래 이 외인편 다리는 다친 다리가 되어서 조곰 일기가 변하기만 하여도 곧 아프기가 쉬운― 신세는 볼일 다 본― 그렇지만 이를 갈고― 」
「하하 그러면 오― 알았소― 그 왼편―……」
「네― 그 아플 적마다 고생이라니 어디 참―」
「내 생각 같아서는 그건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두고 고생할 것 없이 병신되기는 다― 일반이니 아주 잘라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저 내가 아는 사람도 하나 그 이야기는 할 것도 없소만― 어쨌든 그것은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말이니까 짜르라고 당신보고― 짜르라고 그러는 말은 아니오만― 하여간 그렇다면 퍽 고생이 되겠는데―」
「글쎄 말씀이야 좋은 말씀이외다만 원 아무리 고생이 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제 다리를 자르는 것을 제 눈으로 뻔히 보고 있을 수가 있나요?」
「그렇지만 밤낮 두고 고생하느니보다는 낫겠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뭐 어쩌다가 그렇게 몹시 다쳤단 말이오」
「그거요 다 이루 말할 수 있나요. 이 다리는 화태(樺太)41에서 일할 적에 토로에서 뛰어내리려다가 토로와 한데 뒹구는 바람에 이렇게 몹시 다친 거지요」
「화태?」
신사는 잠시 의아와 놀라는 얼굴빛을 보인 다음에 다시 말을 이어
「어쩌다가 화태까지나 가셨더란 말이요?」
「예서는 먹고 살 수가 없고 하니까 돈 벌러 떠난다는 것이 마지막 천하에 땅 있는 데는 사람 사는 곳이고 안 사는 곳이고 안 가본 데가 있나요.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게 올째 꼭! 가만 있자― 열 일곱 해 아니 열 다섯 핸가― 어쨌든 십여 년이지요」
「돈만 많이 벌었으면 고만 아니오」
「그런데 어디 돈이 그렇게 벌리나요. 한 푼― 참 없습니다. 벌기는 고만두고 굶기를 남 먹듯 했습니다. 어머님 집 떠난 지 일년도 못 되어 돌아가시고―……」
「하― 어머님이― 어머님도 당신하고 같이 가셨습디까― 처자(妻子)는 그럼 다 있겠구려」
「웬걸요― 처자는 집 떠나기 전에 다― 죽었습니다. 어린 것을 나은 지― 에 그게― 어쨌든 에미가 먼저 죽으니까 죽을 밖에요. 어머님은 아우에게 맡기고 떠나려고 했지만 원래 우리 형제는 의가 좋지 못한 데다가 아우도 처자가 다 있는데다가 저처럼 이렇게 가난하니 어디 맡으려고 그럽니까」
「아우님은 단 한 분이요?」
「네― 그게 그렇게 의가 좋지 못하답니다. 남이 보면 부끄러울 지경이지요」
「그래 시장 어떻게 해서 어디로 가는 모양이오」
신사의 얼굴에는 연민(憐憫)의 빛이 보이었다.
「십여 년을 별짓을 다하고 돌아다니다가…… 참 그 동안에는 죽으려고 약까지 타 논 일도 몇 번인지 모르지요. 세상이 다 우스꽝스러워서 술 노름으로 세월을 보낸 일도 있고 식당 쿡 노릇을 안 해 보았나 이래 보여도 양요리(洋料理)는 그래도 못 만드는 것 없이 능란하답니다. 일등 쿡이었으니까 화태에도 오랫동안 있었지요. 그때 저는 꼭 죽는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명이 기니까 할 수 없나 보아요. 이렇게 절름발이가 되어 가면서도 여태껏 살고 있으니 그때 그 놈들(그는 누구라는 것도 없이 이렇게 평범히 불렀다)이 이 다리를 막 자르려고 뎀비는 것들을 죽어라하고 못 자르게 했지요 기를 쓰고 죽어도 그냥 죽지 내 살점을 떼내 던지지는 않겠다고 이[齒]를 악물었더니 그놈들이 그래도 내 억지는 못 이기겠던지 그냥 내버려 두었에요. 덕택에 시방 이 모양으로 절름발이 신세를 네― 가기는 제가 갈 데가 있겠습니까. 아우의 집으로 가야지요. 의가 좋으니 나쁘니 해도 한 배의 동생이요, 또 십여 년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몸이니 반가워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리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고향이요, 고향은 서울, 아주 서울태생이올시다. 서울에는 아우하고 또 극진히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그 사람들을 믿고 시방 이렇게 가는 길이올시다. 그렇지만 내 이를 악물고라도」
「그럼 그저 고향이 그리워서 오는 모양이로구려」
「네― 그렇다면 그렇지요. 그런데 하기는……」
그는 별안간에 말을 멈추는 것같이 하였다.
「그럼 아마 무슨 큰 수가 생겨서 우는 모양이로구려」
어디까지라도 신사의 말은 그의 급처(急處)를 찌르는 것이었다.
「수― 에― 수가 생겼다면― 하기야 수라도―」
「아주 큰 수란 말이로구려 하……」
두 사람은 잠시 쓰디쓴 웃음을 웃어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하잘 것 없는 것일는지 몰라도 제게는 참 큰 수치요, 허고 보니.」
「얘기를 좀 하구려. 그 무슨 그렇게 큰 순가.」
「얘기를 해서 무엇하나요? 그저 그렇게만 아시지요 뭐― 해도 상관은 없기는 없지만……」
「그 아마 당신께 좀 꺼리는 데가 있는 게로구려? 그렇다면 할 수 없겠소만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천리나 만리나 따라다닐 사람이 아니요, 또 내가 무슨 경찰서 형사(警察署刑事)나 그런 사람도 아니요 이렇게 차 속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헤어지고 말 사람인데 설사 일후에 또 만나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피차에 얼굴조차도 잊어버릴 것이니 누가 누군지 안단 말이오. 내가 또 무슨 당신의 성명을 아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지 않겠소.」
「아― 그렇다면야― 뭐, 제가 이야기 안 한다는 까닭은 무슨 경찰에 꺼릴 무슨 사기 취재(?)나 했다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서 또 몇 정거장 안 가서 내리신다기에 이야기가 중간에 끊어지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피차 재미도 없을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내 이야기 끝나는 정거장까지 더 가리다 그려― 이야기가 재미만 있다면 말이요―」
「네(?) 아니― 몇 정거장을 더 가셔도 좋다니 그것이 어떻게 하시는 말씀인지 저는 도무지―」
두 사람은 또 잠깐 웃었다. 그러나 그는 놀랐다.
「내 여행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는 여행이란 말이오―」
「그렇지만 돈을 더 내셔야 않나요」
「돈? 하― 그래서 그렇게 놀랜 모양이로구려! 그건 조곰도 염려할 것 없소. 나는 철도국에 다니는 사람인고로 차는 돈 한푼 아니 내고라도 얼마든지 거저 탈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지금 볼일로 ××까지 가는 길인데 서울에도 볼일이 있고 해서 어디를 먼저 갈까 하고 망설거리던 차에 미안한 말이지요만 아까 당신의 그 다리를 보고 그만 ××일을 먼저 보기로 한 것이오. 그렇지만 또 당신의 이야기가 아주 썩 재미가 있어서 중간에서 그냥 내리기가 아깝다면 서울까지 가면서 다 듣고 서울 일도 보고 하는 것이 좋을 듯도 하고 해서 하는 말이오」
「네― 나는 또 철도국 차를 거저, 그것 참 좋습니다. 차를 얼마든지 거저」
이 ‘거저’ 소리가 그의 머리에 거머리 모양으로 묘하게 착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아 그는 잠깐 동안 혼자 애쓰지 아니하면 안되었다. 억지로 태연(泰然)한 차림을 꾸미며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마디는 묘하게 굴곡이 심하였다. 그는 유리창이 어느 틈에 밖이 조곰도 내어다 보이지 않을만치 슬은 성에를 닦기도 하여 보았다.
「말하자면 횡재 에― 횡재― 무엇 횡재될 것도 없지만 또 횡재라면 그야― 횡재 아니라고도 할수 없지만 어쨌든 제가 고생 고생 끝에 동경(東京)으로 한 삼년 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게서 친구 한 사람을 사귀었는데 그는 별 사람이 아니라 제가 묵고 있던 집주인입니다. 그 사람은 저보다도 더 아무도 없는 아주 고독한 사람인데 그 여관 외에 또 집도 여러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있는 동안에 그 사람과 나는 각별히 친한 사이가 되어 그 여관을 우리 둘이서 경영하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얼마 전에 고만 죽었습니다 믿던 친구가 죽었으니 비록 남이었건만 어떻게 설은지 아마 어머님 돌아가실 때만큼이나 울었습니다. 남다른 정분을 생각하고는 장사도 제 손으로 잘 지내 주었지요. 그런데 인제 그렇거든요― 자― 그가 떠―ㄱ 죽고 보니까 그의 가졌던 재산― 무엇 재산이라고까지는 할 것은 없을지는 몰라도 하여간 제게는 게서 더 큰 재산은 여태―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을지 몰라도 어쨌든 상당히 큰돈(?)이니까요― 그게 어디로 가겠느냐 이렇게 될 것이 아니냐 그런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당신이― 슬쩍 이렇게 했다는 말인 것이요 그려 하……따는……참……횡재는……」
「아― 천만에 제 생각에는 그것을 죄다 사회사업(社會事業)에 기부할 생각이었지요 물론―」
「그런데 안했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벌써 그가 저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고 그랬던지 다 저에게다 상속하도록 수속을 하여 놓고는 유서에다가는 떠―ㄱ 무엇이라고 써 놓았는고 하니」
「사회사업에 기부하라고 써―」
「아― 그게 아니거든요. 이것을 그대의 마음 같아서는 반드시 사회사업에 기부할 줄 믿는다. 그러나 죽는 사람의 소원이니 아무쪼록 그대로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척 친구와 함께 노후(老後)의 편안한 날을 맞고 보내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내 말을 어길 때에는 나의 영혼은 명도에서도 그대의 몸을 우려하여 안정(安靜)할 날이 없을 것이라고―」
「하― 대단히 편리한 유서로군! 당신 그 창작……」
신사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디까지든지 냉소와 조롱의 빛으로 차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은 혼령도 위로할 겸 저도 좀 인제는 편안한 날을 좀 보내 보기도 할 겸해서 이렇게 돌아오는 길이오―」
「하― 그럴 듯하거든. 그래 대체 그 돈은 얼마나 되며 무엇에다 쓸 모양이오.」
「얼마요 많대야 실상 얼마되지는 않습니다. 제게는― 무얼 하겠느냐― 먹고 살고 하는데 쓰지요」
「아 그래 그저 그 돈에서 자꾸 긁어다 먹기만 할 모양이란 말이오. 사회사업에 기부하겠다는 사람의 사람은 딴 사람인 모양이로군!」
「그저 자꾸 긁어다 먹기만이야 하겠습니까. 설마하기는 시방 계획은 크답니다.」
「한번 다부지게 먹어 보겠다는 말이로구료」
「제게 한 친구가 의사지요. 그 전에는 그 사람도 남부럽지 않게 상당히 살았건만 그 부친되는 이가 미두(米豆)42라나요 그런 것을 해서 우리 친구 병원까지를 들어먹었지요. 그래 시방은 어떤 관립병원에 촉탁의(囑託醫)로 월급생활(月給生活)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몇 해 전부터 편지거든요. 그래서 친구 좋은 일도 할 겸 또 세상에 나처럼 아픈 사람 병든 사람을 위하여 사회사업도 할 겸― 가서 그 친구와 같이 병원을 하나 내일까 생각인데요. 크기야 생각만은―」
「당신은 집이나 지키려요」
「왜요 저도 의사랍니다. 친구의 그 소식을 들었대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몸이 병신이니까 그런지 세상에 하고많은 불쌍한 사람 중에도 병든 사람 앓는 사람처럼 불쌍한 이는 없는 것 같애서 저도 의학을 좀 배워 두었지요」
신사는 가벼운 미소(微笑)를 얼굴에 띄우면서 ‘의학’을 배운 사람치고는 너무도 무식하고 유치하고 저급인 그의 말에 놀란다는 듯이 ‘쩍’ ‘쩍’ 혀를 몇 번 찼다.
「그래 당신이 의학을 안단 말이오」
「네― 안다고 까지야― 그저 좀 뜅겼지요― 가갸거겨― 왜 그리십니까― 어디 편치 않으신 데가 있다면 제가 시방이라도 보아 드리겠습니다. 있습니까― 있으면」
두 사람은 크게 소리치며 웃었다. 차창(車窓) 밖은 어느 사이에 날이 저물어 흐린 하늘에 가뜩이나 음울한 기분이 떠돌았다.
차안에는 전등까지도 켜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도 깨닫지 못하였었다. 그는 밖을 좀 내다 보려고 유리창의 성에를 또 닦았다. 닦기운 부분에는 밖으로 수없는 물방울이 마치 말못할 설움에 소리없이 우는 사람의 뺨에 묻은 몇 방울 눈물처럼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차의 움직임으로 일순 후에는 곧 자취도 없이 떨어지고 그리면 또 새로운 물방울이 또 어느 사이엔지 와 붙고 하여 그 물방울은 늘 거의 같은 수효로 널려 있었다.
「눈이 오시는 게로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모아 창밖을 내어다 보았다. 눈은 ‘너는 서울 가니? 나는 부산 간다’ 하는 듯이 옆으로만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야기에 팔리어 얼마 동안은 잊었던 외인편 다리는 여전히 아까보다도 더하게 아프고 쑤시었다 저렸다. 그는 그 다리를 옷 바깥으로 내리 쓰다듬으며 순식간에 ‘싀―ㅅ’소리를 내이며 입에 군침을 한 모금이나 꿀떡 삼켰다. 그 침은 몹시도 끈적끈적한 것으로 마치 ‘콘덴스트 밀크’나 엿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신사는 양미(兩眉)간에 조고만 내 천(川)자를 그린 채 그 모양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앉았더니 별안간 쾌활한 어조(語調)로 바꾸어 입을 열었다.
「의사(醫師)가 다리를 앓는 것은 회괴한 일이로군!」
「제 똥 귄 줄 모른다고!」
두 사람은 이전보다도 더 크게 소리쳐 웃었다. 그 웃음은 추위에 원기를 지질리운 차안의 승객들의 멍멍한 귀에 벽력 같은 파동을 주었음인지 그들은 이 웃음소리의 발원지를 향하여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이 모든 시선의 화살에 살이 간지러웠다. 그리하여 고개를 다시 창 쪽으로 향하여 보았다가 다시 또 숙여도 보았다.
얼마만에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통로(通路) 건너편에 그를 향하여 앉아 있는 젊은 여자 하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것을 그는 발견할 수 있었다.
「우나?―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게지― 누구와 생이별이라도 한 게지!」
그는 이런 유치한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러면 그 돈을 시방 당신의 몸에 지니고 있겠구려 그렇지 않으면!」
신사의 이 말소리에 그는 졸도할 듯이 나로 돌아왔다. 그 순간에 그의 머리에는 전광(電光) 같은 그 무엇이 떠도는 것이 있었다.
「아―니요 벌써 아우 친구에게 보냈세요. 그런 것을 이렇게 몸에다 지니고 다닐 수가 있나요」
하며 그는 그 수형에 들은 웃 포켓트의 것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보았다. 한 장의 종이를 싸고 또 싸고 몇 겹이나 쌌던지 그의 손바닥에는 풍부한 질량의 쾌감이 느껴졌다. 그의 입안에는 만족과 안심의 미소가 맴돌았다.
차안은 제법 어두워졌다. (그것은 더욱이 창밖이었을는지도 모르나 지금에 그의 세계는 이 차안이었으므로이다) 생각없이 그는 아까 그가 바라보던 젊은 여자의 앉아 있는 곳으로 머리를 돌려 보았다. 그때에 여자는 들었던 얼굴을 놀란 듯이 숙이고는 수건으로 가려 버리었다. 더욱 놀란 것은 그였다.
「흥― 원 도무지 별일이로군!」
그는 군입을 다셔 보았다. 창밖에는 희미한 가운데에도 수없는 전등이 우는 눈으로 보는 별들과도 같이 이지러져 번쩍이고 있었다.
「서울이 아마 가까운 게로군요」
「가까운 게 아니라 예가 서울이오」
그는 이 빈약한 창밖 풍경(風景)에 놀랐다.
「서울! 서울! 기어코―어디 내 이를 갈고―」
그는 이 ‘이를 갈고’ 소리를 벌써 몇 번이나 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도 또 듣는 사람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어찌 하겠다는 소리인지 깨달을 수 없었다. 차안은 이제 극도로 식어온 것이었다. 그는 별안간 시베리아 철도를 타면 안이 어떠할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하여 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부시럭 부시럭 일어났다. 그는 얼른 변소에를 안전하도록 다녀온 다음 신사의 조력을 얻어 다나 위의 가방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바른 손아귀에 꽉 쥐고서 내릴 준비를 하였다. 차는 벌써 역 구내에 들어왔는지 무수한 검고 무거운 화물차 사이를 서서히 걷고 있는 것이었다.
차는 ‘치―ㄱ’ 소리를 지르며 졸도할만치 큰 기적 소리를 한번 울리고는 승강장에 닿았다. 소란한 천지는 시작되었다.
그는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 여자의 있던 곳을 또 한 번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 여자는 반대편 문으로 나갔었기 때문에 그는 여자의 등과 머리 뒷모양밖에는 볼 수 없었다.
「에― 그러나 도무지― 이렇게 기억 안되는 얼굴은 처음 보겠어. 불완전 불완전!」
그는 밀려 나가며 이런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 여자의 잠깐 본 얼굴을 아무리 다시 그의 머리 속에 나타내어 보려 하였으나 종시 정돈되지 아니하는 채 희미하게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아픈 다리, 차안의 추위에 몹시 식은 다리를 이끌고 사람 틈에 그럭저럭 밀려 나가는 그의 머리는 이러한 쓸데없는 초조로 불끈 화가 나서 어지러운 것이었다.
승강대를 내릴 때에 그는 그 신사 손목을 한 번 잡아 보았다. 아픈 다리를 가지고 내리는데 신사의 힘을 빈다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그가 무엇인지 유혹하여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쥐고 보았으나 그는 할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잠깐 머뭇머뭇하였다.
「저 오늘이 며칠입니까?」
「십이월 십이일(十二月十二日)!」
「십이월 십이일! 네, 십이월 십이일!」
신사의 손목을 쥐인 채 그는 이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순식간에 신사의 모양은 잡다한 사람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누구인지 아지 못할 사람이 그의 손목을 달려 잡았을 때까지 그는 아무도 찾지는 못하였다. 희미한 전등 밑에 우쭐대는 사람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다 똑같은 것만 같았다. 그는 그의 손목을 잡는 사람의 얼굴을 거의 저절로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눈― 코― 입―.
「하…… 두 개의 눈― 한 개씩의 코와 입!」
소리 안 나는 웃음을 혼자 웃었다. 눈을 뜬 채!
「X군! 나를 못 알아보나 X군!」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의 시선은 그대로 늘어붙은 채 마구 매어달려 있었다.
「M군! 아! 하! 이거 얼마만이십니까 ―얼마―에 얼마만인가」
그의 눈에는 그대로 눈물이 괴었다.
「M군! 분명히 M군이시지요! 그렇지?」
침묵…… 이 부득이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아니 찾아올 수 없었다. ―입을 꽉 다문 채 그는 눈물을 흘린 눈으로 M군의 옷으로 신발로 또 옷으로 이렇게 보기를 오르내리켰다. 그의 머리(?)에 가까운 곳에는(?) 이상한 생각(같은 것)이 떠올랐다.
「M군― 그 M군은 나의 친구였다. 분명히 역시」
M군보다 키는 차라리 그가 더 컸다. 그러나 그가 M군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치어다보는 것’이었다. 그의 이 모순된 눈에서는 눈물이 그대로 쏟아지기만 하였다 ―어느 때까지라도―.
군중의 잡다한 소음은 하나도 그리 귀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그의 눈이 초점을 잃어버렸던 것도,
「차라리 아까 그 신사나 따라갈 것을」
전광 같은 생각이 또 떠올랐다. 그때 그는 그의 귀가 ‘형님’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던 기억’까지 쫓아 버렸다.
「차라리―아―」
「이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었던가―아―」
모든 것은 다 간다. 가는 것은 어언간 간 것이다. 그에게 있어도 모든 것은 벌써 다 간 것이었다.
다만― 그리고는 오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 그 뒤를 이어서 ‘가기 위하여’ 줄대어 오고 있을 뿐이었다.
「아― 갔구나[去]― 간 것은 없는 것만도 못한 ‘없는 것’이다―모―든……」
그는 M군과 T씨와 그리고 T씨의 아들 업―이 세 사람의 손목을 번갈아 한 번씩 쥐어 보았다. 어느 것이나 다 뻣뻣하고 핏기없이 마른 것이었다.
「아우야―T―
조카―업―네가 업이지……」
그들도 그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어두운 낯빛에 아무 말들도 없었다. 간단한 해석을 내리운 것이었다.
「바깥에는 눈이 오지?」
「떨어지면 녹고―떨어지면 녹고 그러니까 뭐」
떨어지면 녹고―그에게는 오직 눈만이 그런 것도 아닐 것 같았다―그리고 비유할 곳 없는 자기의 몸을 생각하여도 보았다.
네 사람은 걷기를 시작하였다. 어느 틈엔지 그는 업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네 얼굴이 그렇게 잘생긴 것은―최상의 행복이요 동시에 최하의 불행이다.」
그는 업의 붉게 익은 두 뺨부터 코 밑에 인중을 한참이나 훔쳐 보았다. 그 곳은 그를 만든 신(神)이 마지막 새끼 손가락을 떼인 자리인 것만 같았다.
도영(倒映)되는 가로등(街路燈)과 ‘헷드라이트’는 눈물에 젖은 그의 눈 속에 이중적(二重的)으로 재현되어 있는 것 같았다.
× × ×
T씨의 집에서 이것 저것 맛있는 음식을 시켜다 먹었다. 그 자리에 M군도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자리는 어리석기 쉬웠다. 그래 그는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오고 보니―그것도 그래―만나고 보면 할말도 없거든―사람이란 도무지 이상한 것이거든―얼싸안고 한― 두어 시간 뒹굴 것 같지―하기야― 그렇지만― 떡― 당하고 보면 그저 한량없이 반갑다 뿐이지―또 별 무슨―」
자기 말이 자기 눈에 띄울 때처럼 싱거운 때는 없다.
그는 이렇게 늘어놓는 동안에 ‘자기 말이 자기 눈에 띄었’다. 자리는 또 어리석어 갔다.
「이 세상에 벙어리나 귀머거리처럼―어쨌든 그런 병신이 차라리 나을 것이야―」
이런 말을 하고 나서 보니 너무 지나친 말인 것도 같았던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멈칫했다.
「X군― 말 끝에 말이지― 그래도 눈먼 장님은 아니니까 자네 편지는 자세 보아서 아네. 자네도 인제 고생 끝에 낙이 나느라― 고하기는 우리 같은 사람도 자네 덕을 입지 않나! 하……」
M군의 이 말 끝에 웃음은 너무나 기교적(技巧的)이었다. 차라리 웃을 만하였다.
「웃을 만한 희극(喜劇)!」
그는 누구의 이런 말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는 M군의 이 웃음이 정히 그것에 해당(該當)치 않는 것인가도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웃었다.
「형님 언제나 심평43이 필까 ‘필까’했더니…… 인제는 나도 기지개 좀 펴겠소―허……」
이렇게도 모든 ‘웃을 만한 희극’은 자꾸만 일어났다.
「하……! 하……」
그는 나가는 데 맡겨서 그대로 막 웃어 버렸다. 눈 감고 칼쌈 하는 세 사람처럼 관계도 없는 세 가지 웃음이 서로 어울어져서 스치고 부딪고 맞닥치는 꼴은 “웃을 만한” 희극 중에서도 진기한 광경이었다.
열한시쯤하여 M군은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자리에 쓰러졌다. 곧 깊은 꿈 속에서 떨어진 그는 여러 날만에 극도로 피곤한 그의 몸을 처음으로 편안히 쉬이게 하였다.
얼마를 잤는지 (그것은 하여간 그에게는 며칠 동안만 같았다) 귀가 간지러움을 견디다 못하여 억지로 깨었다. 깨이고 난 그는 그의 귀가 그렇게 간지러웠던 까닭이 무엇이었던가를 찾아 보았으나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아무것도 집어내일 것이 없었다.
「꿈을 꾸었나― 그럼―」
꿈이었던가 아니었던가를 생각하여 보는 동안에 그의 의식은 일순간에 명료하여졌다. 따라서 그의 귀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구분해 내일만치 정확히 간지러움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시계 소리― 밤(夜) 소리(그런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리고―」
분명히 퉁소 소리다.
「이럴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알 수 없이 감상적(感傷的)으로 변하여 갔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까를 생각하여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어둠침침한 공간 속에서 초점 잃은 두 눈을 유희시키다가 별안간 그는 「퉁소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생각에는 그 퉁소의 크기는 그가 짚고 다니는 ‘스틱’ 기러기만은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런 굵은 옅은 소리가 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여 보고 나서 그는 혼자 웃었다.
「아까 그 신사나 따라갈 것을! 차라리!」
어찌하여 이런 생각이 들까, 그는 몇 번이나 생각하여 보았다. M군과 T는 나를 얼마나 반가와하여 주었느냐― 나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아니하였느냐― 업의 손목을 잡지 아니하였느냐― M군과 T는 나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냐― 나는― 그들을 믿고― 오직― 이곳에 돌아온 것이 아니냐―.
「아― 확실히 그들은 나를 반가와하고 있음에 틀림은 없을까? 나는 지금 어디로 들어가느냐」
그는 지금 그윽한 곳으로 통하여 있는― 그 그윽한 곳에는 행복이 있을지 불행이 있을는지 모른다― 층계를 한 단 한 단 디디며 올라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가슴은 아지 못할 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것을 그가 의식할 때에 그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황황히 들여다 본다. 그때에 그는 이때까지 무엇에인지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은 그의 가슴 속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인 것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아무것도 없었구나― 역시」
그가 다시 고래를 들었을 때에는 비인 것으로만 알아졌던 그의 가슴 속은 역시 무엇으로인지 차 있는 것을 다시 느껴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모순이다. 그러나 모순된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만큼 모순이라는 것은 진리이다. 모순은 그것이 모순된 것이 아니다. 다만 모순된 모양으로 되어져 있는 진리의 한 형식이다.
「나는 그들을 반가와하여야만 한다― 나는 그들을 믿어 오지 아니하였느냐? 그렇다 확실히 나는 그들이 반가왔다― 아― 나는 그들을 믿어―야 한다― 아니다. 나는 벌써 그들을 믿어 온 지 오래다―내가 참으로 그들을 반가와하였던가― 그것도 아니다― 반갑지 아니하면 아니될 이 경우에는 반가운 모양외에 아무런 모든 모양도 나에게― 이 경우에― 나타날 수는 없다― 어쨌든 반가왔다―」
시계는 가느단 소리로 네 시를 쳤다. 다음은 다시 끔찍끔찍한 침묵 속에 잠기고 만다. T씨의 코고는 소리와 업의 가냘픈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그의 귀를 간지럽히던 퉁소 소리도 어느 사이에인지 없어졌다.
「혹시 내가 속지나 않은 것일까. ―사람은 모두 다 서로 속이려고 드는 것이니까. 그러나 설마 그들이―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바치리라―」
사람은 속이려 한다. 서로서로―그러나 속이려는 자기가 어언간 속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속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그 점에 있어 속이는 것이란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반성(反省)한다. 그 반성은 이러한 토대 위에 선 것이므로 그들은 그들이 속이는 것이고 속는 것이고 아무 것도 반성치는 못한다.
이때에 그도 확실히 반성하여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반성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도 속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아무도 나를 속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반가와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믿지 아니하면 안된다」 등의 ‘……지 아니하면 안되’는 의무를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 아니하면 안된다’라는 것이 도덕상에 있어 어떠한 좌표 위에 놓여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그의 소위 ‘의무’라는 것이 참말 의미의 ‘죄악’과 얼마나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없었는 것도 물론이다.
사람은 도덕의 근본성을 고구하기 전에 우선 자기의 일신을 관념 위에 세워 놓고 주위의 사물에 당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후적 실망과 공허를 어느 때이고 반드시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이 왔을 때에 그가 모든 근본 착오를 깨닫는다 하여도 때는 그에게 있어 이미 너무 늦어지고야 말고 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사람은 얼마나 오류(誤謬)를 반복하여 왔던가 이 점에 있어서 인류의 정신적 진보는 실로 가엾을만치 지지(遲遲)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주위를 나의 몸으로써 사랑함으로써 나의 일생을 바치자……」
그는 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무 비판도 없이 실행을 ‘결정’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아까 그 신사를 따라갔던들? 나는 속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속을 것을 보증할 사람이 또 누구냐 ―그 신사에게 나의 마음과 같은 참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증할 사람은 또 누구냐……」
이러한 자기 반역도 그에게 있어서는 관념에 상쇄(相殺)될 만큼도 없는 극히 소규모의 것이었다. ―집을 떠나 천애44를 떠다닌 저 십여 년. 그는 한 번도 이만큼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리는 냉수에 끄어낸 것같이 맑고 투명하였다. 모든 것이 이상하였다.
「밤이라는 것은 사람이 생각하여야만 할 시간으로 신이 사람에게 준 것이다」
그는 새삼스러이 밤의 신비를 느꼈다.
「그 여자는 누구며 지금쯤은 어디 가서 무엇을 생각하고는 울고 있을까?」
그의 눈앞에는 그 인상 없는 여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얼굴의 평범이라는 것은 특이(못생긴 편으로라도) 보다 얼마나 못한 것인가를 그는 그 여자의 경우에서 느꼈다.
「그 여자를 따라갔어도」
이것은 그에게 탈선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생각하기를 그쳤다. 그는 몸 괴로운 듯이(사실에) 한 번 자리 속에서 돌아 누웠다. 방안은 여전히 단조로이 시간만 삭이고 있다. 그때 그의 눈은 건너편 벽에 걸린 조고마한 일력 위에 머물렀다.
DECEMBER12
이 숫자는 확실히 그의 일생에 있어서 기념하여도 좋을 만한 (그 이상의) 것인 것 같았다.
「무엇하려 내가 여기를 돌아왔나」
그러나 그 곳에는 벌써 그러한 ‘이유’를 캐어 보아야 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말 안 듣는 몸을 억지로 가만히 일으키었다. 그리하고는 손을 내어밀어 일력의 ‘12’쪽을 떼어 내었다.
「벌써 간 지 오래다」
머리맡에 벗어 놓은 웃옷의 ‘포켓’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서는 그 일력쪽을 집어넣었다 ―마치 그는 정신 잃은 사람이 무의식으로 하는 꼴로― 천장을 향하여 눈을 꽉 감고 누웠다. 그의 혈관에는 인제 피가 한 방울씩 두 방울씩 돌기를 시작한 것 같았다. 완전히 편안한 상태였다.
주위는 침묵 속에서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명은 의지다」
무의미한 자연 속에 오직 자기의 생명만이 넘치는 힘을 소유한 것 같은 것이 그에게는 퍽 기뻤다. 그때에 퍽 가까운 곳에서 닭이 홰를 ‘탁탁’ 몇 번 겹쳐 치더니 청신한 목소리로 이튿날의 첫 번 울음을 울었다. 그 소리가 그에게는 얼마나 생명의 기쁨과 의지의 힘을 표상하는 것 같았었는지 몰랐다. 그는 소리 안 나게 속으로 마음껏 웃었다―.
조금 후에는 아까 그 소리 난 곳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서 더 한층이나 우렁찬 목소리로의 ‘꼬끼오’가 들려왔다. 그는 더없이 기뻤다. 어찌할 수도 없이 기뻤다. 그가 만일 춤출 수 있었다 하면 그는 반드시 일어나서 춤추었을 것이다. 그는 견딜 수 없었다.
「T― T― 집에서 닭을 치나?」
「T― 업아― 집에서……」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만 T씨의 코고는 소리와 업의 가냘픈 숨소리가 전과 조곰도 다름없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와 도로 마찬가지로 변하였다. (사실에 아무일이고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승리! 승리!」
어언간 그는 또다시 괴로운 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해가 미닫이에 꽤 높았을 때까지―
× × ×
아무리 그는 찾아보았으나 나무도 없는 마른 풀 밭에는 천 개나 만 개나한 모양의 무덤들이 일면으로 널려 있기만 할 뿐이었다.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서기 전부터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나섰다. 또 찾을 수가 있었대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는 무엇이나 영감이 있을 것만 같았다.
「반가이 맞아 주겠지! 적어도 반갑기는 하겠지!」
지팡이를 쥐인 손―손등은 바람에 터져 새빨간 피가 흘렀으나 손바닥에는 축축이 식은땀이 배었다. 수건을 꺼내어 손바닥을 닦을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에 젖은 눈가와 뺨을 씻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눈물은 뺨에 흘러서 그대로 찬 바람에 어[凍]는지 싸늘하였다― 두 줄기만이 더욱이나.
「왜 눈물이 흐를까― 무엇이 설울까?」
그에게는 다만 찬바람 때문인 것만 같았다. 바람이 소리 지르며 불 때마다 그의 눈은 더한층이나 젖었다. 키 작은 잔디의 벌판은 소리날 것도 없이 다만 바람과 바람이 서로 어여드는 칼날 같은 비명이 있을 뿐이었다.
해가 훨씬 높았을 때까지 그는 그대로 헤매었다. 손바닥의 땀과 눈의 눈물을 한 번씩 더 씻어내인 다음 그는 아무데이고 그럴 법한 자리에 가 앉았다.
그곳에도 한 개의 큰 무덤과 그 옆에 작은 무덤이 어깨를 마주대인 것처럼 놓여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세상에 또 나와 같은 젊은 안해와 어린 자식을 한꺼번에 갖다 파묻은 사람이 또 있는가 보다.」
그는 그러한 남과 이러한 자기를 비교하여 보았다.
「그러한 사람도 있다면 그 사람도 지금은 나같이 세상을 떠돌아다닐 터이지. 그리고 또 지금쯤은 벌써 그 사람도 죽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는 자기가 지금 무엇하러 이곳에 와 있는지 몰랐다. 반가와하여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래도 고사하고라도 그에게 반가운 것의 아무 것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마른 풀밭에 앉아 있는 그의 모양이 그의 눈으로도 ‘남이 보이듯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가자― 가― 이곳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다― 아니 처음부터 올 필요도 없다―
사람은 살아야만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이고는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라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죽는 것은 사람의 사는 것을 없이하는 것이므로 사람에게는 중대한 일이겠다―죽는 것―죽는 것―과연 죽는 것이란 사람이 사는 가운데에는 가장 두려운 것이다―그러나―
죽는 것은 사는 것의 크낙한 한 부분이겠으나 그러나 죽는 것은 벌써 사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죽는 것에 철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에는 벌써 눈이라도 주어 볼 아무 값[價]도 없어지는 것이다.
죽는 것에 대한 미적지근한 미련은 깨끗이 버리자― 그리하여 죽는 것에 철저하도록 힘차게 살아 볼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실험(實驗)이 아니다. 실행(實行)이다.
사람은 놀랄 만한 긴장 속에서 일각의 여유조차도 가지지 아니하였다.
「보아라 이 언덕에 널려 있는 수도 없는 무덤들을. 그들이 대체 무엇이냐, 그것들은 모든 점에 있어서 무(無) 이하의 것이다.」
해는 비최일 땅을 가졌으므로 행복하다. 그러나 땅은 해의 비최임을 받는 것만으로는 행복되지 않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보아라 해의 비최임을 받고 있는 저 무덤들은 무엇이 행복되랴 ―해는 무엇이 행복되며!」
그것은 현상이 아니다. 존재도 아니다. 의의 없는 모양(?)이다 (만일 이러한 말이 통할 수 있다면)
「생성하고 자라나고 살고―아―그리하여 해도 땅도 비로소 행복된 것이 아니랴!」
그의 머리 위를 비스듬히 비최이고 있는 그가 사십 년 동안을 낯익히 보아오던 그 해가 오늘에 있어서는 유달리도 숭엄하여 보였고 영광(靈光)에 빛나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나 따뜻한 것만 같았고 더욱이나 밝은 것만 같았다.
십여 년 전에 M군과 함께 어린것을 파묻고 힘없는 몸이 다시 집을 향하여 걷던 이 좁고 더러운 길과 그리고 길가의 집들은 오늘 역시 조곰도 변한 곳은 없었다.
「사람이란 꽤 우스운 것이야」
그는 의식없이 발길을 아무 데로나 죽은 것들을 피하여 옮기었다. 어디를 어느 곳으로 헤매었는지 그가 이 촌락(?)을 들어설 수가 있었을 때에는 세상은 벌써 어둠컴컴한 암흑 속에 잠긴 지 오래였다.
집에는 피곤한 사람들의 코고는 무거운 소리가 흐릿한 등광과 함께 찢어진 들창으로 새어 나왔다. 바람은 더한층이나 불고 그대로 찼다[冷].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이 작은 키로 늘어선 것은 그 곳이 빈민굴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래도 이곳이 얼마나 ‘사람사는 것’같고 따스해 보이는지 몰랐다.
× × ×
그는 도무지 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느 때에는 그에게 무한히 호의를 보여 주는 것같이 하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도조차 없었다. 일로 보아 하여 간 그들이 그에게 무엇이나 불평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어느 날 밤에 그는 그들을 모두 불렀다. 이야기라도 같이 하여 보자는 뜻으로
「T! 의가 좋으니 나쁘니 하여도 지금 우리에게 누가 있나. 다만 우리 두 형제가 있지 않나― 아주머니(T씨의 아내를 그는 이렇게 불렀다) 그렇지 않소. 또 그리고 업아, 너도 그렇지 아니하냐. 우리 외에 설령 M군이 있다 하더라도―하기야 M군은 우리들 가족과 마찬가지로 친밀한 사이겠지만 그래도 M군은 ‘남’이 아닌가」
그는 여기에 말을 뚝 끊고 한 번 그들의 얼굴들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근심스럽거나 어두운 표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무엇이나 그들은 그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한 빛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자! 우리 일을 우리끼리 의논하지 아니하고 누구하고 의논하나― 나에게는 벌써 먹은 바 생각이 있어! 그것은 내 말하겠으되― 또 자네들께도 좋은 생각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좋겠어. 하여간 이 돈은 남의 것이 아닌가. 남의 것을 내가 억지로(?) 얻은 것은― 죽은 사람의 뜻을 어기듯 하여 가며 이렇게 내가 차지한 것은 다 우리들도 한번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 이 돈에 내 것 남의 것이 있을 까닭이 없어. 내 것이라면 제각기 다 내것이 될 수 있겠고 남의 것이라면 다 각기 누구에게나 남의 것이니깐? 자! 내 눈에 띄이지 못한 나에게 대한 불평이 있다든지 또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생각이 있다든지 하거든 우리가 같이 서로 가르쳐 주며 의논하여 보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그는 또 한 번 고개를 돌리어 가며 그들의 얼굴빛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 변화도 찾아내일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여 보지! 내 생각 같아서는―이 돈을 반에 탁 갈라서 자네하고 나하고 반분씩 노놔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으나 기실 얼마되지 않은 것을 또 반에 나누고 말면 더욱이나 적어지겠고 무슨 일을 해볼 수도 없겠고 그럴 것 같아서! 생각다 생각 끝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그의 얼굴에는 무슨 이야기?! 못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어려운 표정이 보였다.
「즉 반분을 하고 고만두는 것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같이 무슨 일이고 한번 하여 보자는 말이야. 그러는 데는 우리는 M군의 힘도 빌 수밖에는 없어. 또 우리 둘의 힘만으로는 된다 하더라도― 생각하면 우리는 옛날부터 M군의 신세를 끔찍이 져왔으니까. 지금은 거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한 사람과 함께 협력해 보는 것도 좋지 아니할까 하는데― 또 M군은 요사이 자네들도 아다시피 매우 곤궁한 속에서 지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하면 여지껏 신세진 은혜도 갚아 보는 세음으로!」
「M군은 의사(醫師)이지. 하기는 나도 그 생각으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로되 어쨌든 의학공부를 약간 해둔 경력도 있고 하니― M군의 명의(名義)로 병원을 하나 내이는 것이 어떠할가 하는 말이거든!―」
그는 이 말을 뚝 떨어뜨린 다음 입안에 모든 굳은 침을 한 모금 꿀떡 삼켰다.
「그야 누구의 이름으로 하든지 상관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M군은 그 방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연조 도 있고 또 이름도 있지 않은가― 즉 그것은 우리의 편리한 점을 위하는 방침상 그리는 것이고―무슨 그 사람이 반드시 전부의 주인이라는 것은 아니거든― 그래서는 수입이 얼마가 되든지 삼분하여서 논키로 !―어떤가? 의향이」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다른 표정도 찾아 내일 수는 없었다. 꽉 다물어 있는 그들의 입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열릴 것 같지도 않았다.
「자― 좋으면 좋겠다고, 또 더 좋은 방책이 있으면 그것을 말하여 주게! 불만인가―덜 좋은가」
방안은 고요하다. 밖에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버러지 소리의 한결같은 ‘리듬’ 외에는 방안은 언제까지라도 침묵이 계속하려고만 들었다.
그날 밤에 그는 밤이 거의 밝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끝없는 생각의 줄이 뒤를 이어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의 일들은 불행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 그렇게도 불행하므로 행복된 것이다」
그에게는 불행의 쾌미(快味)가 알려진 것도 같았다.
「이대로 가자― 이대로 가는 수밖에는 아무 도리도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여지껏 찾아오던 ‘행복’이라는 것을 찾기도 고만두고 다만 ‘삶’을 값있게 만들기에만 힘쓰자. 행복이라는 것은 없다 ―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여지껏 찾앗다. 나는 그릇 ‘겨냥’ 대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실히 ‘완전한 인간의 패배자’였다 ―때는 이미 늦은 것 같다. 그러나 또 생각하면 때라는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다만 삶에 대한 굳은 의지를 가질 따름이어야만 한다― 그 삶이라는 것이 싸움과 슬픔과 피로투성이 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곳에는 불행도 없다. ―다만 힘세찬 ‘삶’의 의지가 그냥 그 힘을 내어휘두르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실로 인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얼마나 애를 썼나 하늘도 쌓아 보고 지옥도 파 보았다. 그리고 신(神)도 조각(彫刻)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땅 이외에 그들의 발 하나를 세울 만한 곳을 찾아내이지 못하였고 사람 이외에 그들의 반려(伴侶)도 찾아내일 수 없었다. ―그들은 땅 위와 그리 사람들의 얼굴들을 번갈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결국 길게 한숨 쉬었다.
「벗도 갈 곳도 없다 ―이 괴로운 몸을 그래도 이 험악한 싸움터에서 질질 끌고 돌아다녀야 할 것인가 ―그밖에 도리가 없다면! 사람아 힘 풀린 다리라도 최후의 힘을 주어 세워 보자. 서로서로 다같이 또 다 각기 잘 싸우자!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있을 따름이고나―」
그는 그의 몸이 한층이나 더 피곤한 듯이 자리 속에서 한 번 돌쳐 누웠다. 피곤함으로부터 오는 옅은 쾌감이 전신에 한꺼번에 스르르 기어 올라옴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하여간 나는 우선 T의 집에서 떨어지자[離] 그것은 내가 T의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피차에 고통을 가져온다는 이유로부터라느니보다도 그까진 일로 마음을 귀찮게 굴어 진지한 인간투쟁을 방해시킬 수는 없다.」
밤이 거의 밝게쯤 되어서야 겨우 그는 최후의 결정을 얻었다. 설령 그가 T씨의 집을 떠난다 하여도 그는 지금의 형편으로 도저히 혼자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M군과 함께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T씨가 좋아하든지 그의 방침대로 병원을 낸 다음 수입은 삼분할 것도 결정하였다.
지금 M군의 집은 전일의 대가를 대신하여 눈에 띄우지도 아니할 만한 오막살이였다. 모든 것이 결정되는 대로 병원 가까이 좀 큰 집을 하나 산 다음 M군의 명의로 자기도 M군의 한 가족이 될 것도 결정하였다. 또 병원을 신축하기에 넉넉하다면 아주 그 건물 한 모퉁이에다 주택까지 겸할 수 있도록 하여 볼 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는 될 것 같지도 않게 생각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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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왔다. 그의 생활도 한층 새로운 활기를 띠어오는 것 같았다.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은 새해였으나 그에게는 다시 몹시 의미 깊은 새해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1930. 5. 於 義州通工事場)―
생물은 다 즐거웠다. 적어도 즐거운 것같이 보였다. 그가 봄을 만났을 대 봄을 보았을 때에 죽을 힘을 다 기울여 가며 긍정(肯定)하렸던 ‘생’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회의와 그에 좇는 실망이 그를 찾았다[訪]. 진행하며 있는 온갖 물상 가운데에서 그 하나만이 뒤에 떨어져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벌써 도태되었을’ 그를 생각하고 법칙이라는 것의 때로는 기발한 예외를 자신에서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여력(餘力)이 있었다. 긍정에서 부정에 항거하는 투쟁― 최후의 피투성이의 일전(一戰)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용납되지 않은 애(愛)’ ‘눈먼[盲] 애’―그것을 조건 없이 세상에 헌상하는 그것이었다.
인간 낙선자(落選者)의 힘은 오히려 클 때도 있다. 봄을 보았을 대, 지상에 엉키는 생(生)을 보았을 때, 증대되는 자아 이외(自我以外)의 열락을 보았을 때 찾아오는 자살적 절망에 충돌당하였을 때 그래도 그는 의연히 차라리 더한층 생에 대한 살인적 집착과 살신성인적(殺身成仁的) 애(愛)를 지불키 용감하였다. 봄을 아니 볼 수 없이 볼 수박에 없었을 때 그는 자신을 혜성(慧星)이라 생각하여도 보았다. 그러나 그가 혜성이기에는 너무나 광채가 없었고 너무나 무능하였다. 다시 한번 자신을 일평범 이하의 인간에 내려뜨려 보았을 때 그가 그렇기에는 너무나 열락과 안정이 없었다. 이 중간적(실로 아무것도 아닌) 불만은 더욱이나 그를 광란에 가깝게 심술 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 × ×
T씨에 관한 그의 근심은 그가 그의 생에 대한 신조의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커가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원인이 어느 곳에 있든지는 하여간 그가 T씨의 집을 나온 것은 한낱 도의적으로만 생각할 때에는 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의 그러한 결정적 일이 동인(動因)에 있어서는 추호의 ‘잘못’도 섞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가 변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역설할 수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인상(人相)이 몹시 나빠서 그랬던지 M군의 가족으로부터도 그는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M군의 어린아이들까지도 딸치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불복을 느끼거나 혹은 M군의 집을 떠날 생각이나 다시 T씨의 집으로 들어갈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까짓 것들은 그에게 있어 별로 문제 안되는 자기는 그 이상 더 크나큰 문제에 조우하여 있는 것으로만 여겼다. 밤이면 밤마다 자신의 실추(失墜)된 인생을 명상하고 멀지아니한 병원을 아침마다 또 저녁마다 오고가는 것이 어찌 그다지 단조할 것 같았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실로 긴장 그것이었다. 언제나 저는 다리를 이끌고서 홀로 그 길과 그 길을 오르내리는 것은 부근 사람들에게 한 철학적 인상까지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에게 말 한마디나 한 번의 주의를 베풀어 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러한 똑같은 모양으로 가끔 T씨의 집을 방문한다. 그것은 대개는 밤이었다. 그가 넉 달 동안 T씨의 문지방을 넘어 다녔으나 그가 T씨를 설복할 수는 없었다.
「오너라 같이 가자!」
「형님에게 신세 끼치고 싶지 않소」
그들의 회화는 일상에 이렇게 간단하였다. 그리고는 그 뒤에 반드시 길다란 침묵이 끝가지 낑기우고 말고는 하였다. 때로는 그가 눈물까지 흘리어가며 T씨의 소매에 매어달려 보았으나 T씨의 따뜻한 대답은 얻어들을 수는 없었다.
× × ×
늦은 봄의 저녁은 어지러웠다. 인간과 온갖 물상과 그리고 그런 것들 사이에 낑기워 있는 공기까지도 느른한 난무(亂舞)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젖빛 하늘은 달을 중심으로 하여 타기만만(墮氣滿滿) 한 폭죽(爆竹)을 계속하여 방사하고 있으며 마비된 것 같은 별들은 조잡한 회화(會話)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온갖 것들은 한참동안만의 광란에 지쳐서 고요하다. 그러나 대지는 넘치는 자기 열락을 이기지 못하여 몸 비트는 것같이 저음(低音)의 아우성 소리를 그대로 단조로이 헤뜨리고만 있는 것도 같았다. 그 속에 지팡이를 의지하여 T씨의 집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양은 전연히 세계에 존재할 만한 것이 아닌만치 타계에서 꾸어 온 괴존재라도 같았다. 물론 그 자신은 그런 것을 인식할 수 없었으나(또 없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그런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들 그가 첫째 그대로 살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때로 맹렬한 기세로 그의 가슴을 습격하는 치명적 적요는 반드시 그것을 상증한 것이거나 적어도 그런 것에 원인되는 것이었다.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그리고 생각하는 것에 피곤한 그의 이마 위에는 그의 마음과 살을 한데 쥐어 짜내어 놓은 것과도 같은 무색 투명의 땀이 몇 방울인가 엉키었었다. 그는 보기 싫게 절며 움직이는 다리를 잠시 동안 멈추고 그 땀을 씻어가면서 ‘후―’ 한숨을 쉬었다.
「아― 인생은 극도로 피로하였다」
T씨의 문지방을 그는 그날 밤에 또한 넘어섰다. 그리고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사양하는 듯한 옅은 목소리로
「업이야― 업이야」를 불렀다.
T씨는 아직 일터에서 돌아오지 아니하였었다. 업이도 어디를 나갔는지 보이지 아니하였다. T씨의 아내만이 희미한 불 밑에서 헐어빠진 옷자락을 주무르고 앉아 있었다. 편리하지 아니한 침묵이 어디가지라도 두 사람의 사이에 심연을 지었다. 그는 생각과 생각 끝에 준비하였던 주머니의 돈을 꺼내어 T씨의 아내의 앞에 놓았다.
「자― 그만하면― 그만큼이나 하였으면 나의 정성을 생각해 주실게요― 자―」
몇 번이었던가 이러한 그의 피와 정성을 한데 뭉치어 (그 정성은 오로지 T씨 한 사람에게 향하여 바치는 정성이었다느니보다도 그가 인간 전체에게 눈물로 헌상하는 과연 살신적 정성이었다) T씨들의 앞에 드린 이 돈이 그의 손으로 다시금 쫓기어 돌아온 것이 헤아려서 몇 번이었던가. 그 여러 번 가운데 T씨들이 그것을 받기만이라도 한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러나 참으로 개[犬]와 같이 충실한 그는 이것을 바치기를 잊어버리지는 아니하였다. 일어나는 반감의 힘보다도 자기의 마음이 부족하였음과 수만의 무능하였음을 회오하는 힘이 도리어 더 컸던 것이다.
T씨의 아내는 주물르던 옷자락을 한편에 놓고 핏기 없는 두 팔을 아래로 축 처뜨리었다. 그러나 입은 열릴 것 같기도 하면서 한 마디의 말은 없었다.
「자― 그만하였으면― 자―」
두 사람의 고개는 말없는 사이에 수그러졌다. 그의 눈에서 굵다란 눈물이 더 뚝뚝 떨어졌을 때에 T씨의 아내의 눈에서도 그만 못지 아니한 눈물이 흘렀다. 대기는 여전히 단조로이 울었다.
「자― 그만하면―」
「네―」
그대로 계속되는 침묵이 그들의 주위의 모든 것을 점령하였다.
× × ×
그가 일어서자 T씨가 들어왔다. 그는 나가려던 발길을 멈칫하였다. 형제의 시선은 마주친 채 잠시 동안 계속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T씨의 안면 전체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강한 술의 취기를 인식할 수 있었다.
「T! 내 마음이 그르지 않은 것을 알아다고!」
「하…… 하……」
T씨는 그대로 얼마든지 웃고만 서 있었다. 몸의 땀내와 입의 술내를 맡을 수 없이 퍼뜨리면서!
「T야…… 네가 내 말을 이렇게나 안 들을 것은 무엇이냐? T! 나의……」
「자 이것을 좀 보시오! 형님! 이 팔뚝을!」
「본다면!」
「아직도 내 팔로 내가…… 하…… 굶어 죽을까봐 그리 근심이시오? 하……」
T씨가 팔뚝을 걷어든 채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볼 때 그의 고개는 아니 수그러질 수 없었다.
「T! 나는 지금 집으로 도로 가는 길이다―어쨌든 오늘 저녁에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여 보아라」
아직도 초저녁 거리로 그가 나섰을 때에 그는 T씨의 아직도 선웃음 소리를 그의 뒤에서 들을 수 있었다. 걷는 사이에 그는 무엇인가 이제껏 걸어오던 길에서 어떤 다른 터진 길로 나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감을 느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여 보면 그가 새로 나온 그 터진 길이라는 것도 종래의 길과는 그다지 다름없는 협착하고 괴벽한 길이라는 것 같은 느낌도 느껴졌다.
C라는 간호부에게 대하여 그는 처음부터 적지않게 마음을 이끌리어 왔다. 그가 C간호부에 대하여 소위 호기심이라는 것은 결코 이성적 그 어떤 것이 아닐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C간호부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이상한 기분이 날 적도 있었다.
「도무지 어디서―본 듯해―」
C는 일상 그와 가까이 있었다. 일상에 말이 없어 침울한 기분의 여자였다. 언제나 축축히 젖은 것 같은 눈이 아래로 깔리어서는 무엇인가 깊은 명상에 잠기어 있었다. 그리다가는 묵묵히 잡고만 있던 일거리도 한데로 제쳐놓고는 곱게 살 속으로 분이 스며들어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우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더욱 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울 때,
「어디서 본 듯해― 도무지」
생각날 듯 날 듯하면서도 종시 그에게는 생각나지 아니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생소한 C가 그에게 많은 친밀의 뜻을 보여 주고 있는 것도 같았으나 각별히 간절한 회화 한 번이라도 바꾸어 본 일은 없었다. 늘 그의 앞에서 가장 종순하고 머리 숙이고 일하고 있었다.
첫여름의 낮은 땅 위의 초목들까지도 피곤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종횡으로 불규칙하게 얽히운 길들을 축축한 생기라고는 조곰도 찾아 볼 수는 없고 메마른 먼지가 ‘포플라’ 머리의 흔들릴 적마다 일고 일고 하는 것이 마치 극도로 쇠약한 병자가 병상 위세서 가끔 토하는 습기 없는 입김과도 같이 보였다. 고색창연한 늙은 도시(都市)의 부정연한 건축물 사이에 소밀도(疎密度)로 낑기어 있는 공기까지도 졸음 졸고 있는 것같이 벙―하니 보였다. C는 건너편 책상에 의지하여 무슨 책인지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는 신문조각을 뒤적거리다 급기 졸고 앉아 있었다. 피곤해빠진 인생을 생각할 때 그의 졸음 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좋으십니까? 아― 저도!」
그 목소리도 역시 피곤한 한 인생의 졸음 조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최면술사가 어슴푸렷한 푸른 전등 밑에서 한 사람에게 무슨 한 마디이고를 무한히 시진하도록 ‘리피트’시키고 있는 것과도 같이 꿈속같이 고요하고 어슴푸레하였다.
「선생님! 선생님! 저도 한때는 신이라는 것을 믿었던 일이 있답니다!」
「…………」
「선생님! 신은 있는 것입니까?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있어도 관계치 않는 것입니까?」
「……흥……C씨!…… 소설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여기서도! 그들은 신을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려! 한때의 저와 같이!」
「…………」
또한 졸음 조는 것 같은 침묵이 그 사이에 한참이나 놓여 있었다. ‘앵도지리―뻐찌―’ 어린 장사의 목소리가 자꾸만― 그들의 쉬이려는 귀를 귀찮게 굴고 있었다.
「선생님! 저를 선생님의 곁에다― 제가 있고 싶어하는 때까지 두어 주시지요」
「그것은? 그러면? 그렇다면?」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전연 모르셔도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들려는 잠은 일시에 냉수 끼얹은 것같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즉! 안다면!」
「선생님! 팔년!― 어쨌든 그전― 명고옥의 생활을 기억하십니까?」
「명고옥? ― 하―명고옥?」
「선생님! 제가― 죽은 ××의 아우올습니다」
「응! ××? 그 ―아!」
고향을 떠나 두 형매는 오랜동안 유랑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죽음으로만 다가가는 그들을 찾아오는 극도의 곤궁은 과연 그들에게는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한 바른[正] 삶이었다. 차차 움돋기 시작하는 세상에 대한 조소(嘲笑)와 증오는 드디어 그들의 인간성까지도 변형시키어 놓지 않고는 마지 아니하였다. ××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그가 이십이 조곰 넘었을 때 그는 극도의 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남의 대야 한 개를 훔친 일이 있었다. 물론 일순간 후에는 무한히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나 한 번 엎질러 놓은 물은 다시 어찌할 수도 없었다. 첫째로 법의 눈을 피한다느니보다도 여지껏의 자기를 깨끗이 장사지낸다는 의미 아래에서 자기의 본명을 버린 다음 지금의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청정된 새로운 생활을 영위(營爲)하여 나아가기 위하여 어린 누이의 C를 이끌고 그의 발길이 돌아 들어선다는 곳이 곧 명고옥―X―그냥 삼년 외국생활을 겪어 보던 그 식당이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이 두 신생에 발길 들이어 놓은 인간들은 곧 가장 친밀한 우인이 되었다.
「참회! 자기가 자기의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참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하면 그는 그의 지은 죄에 대하여 속죄받을 수 있을까?」
그는 ××로부터 일상에 이러한 말을 침울한 얼굴로 하고는 하는 것을 들었다.
「만인의 신은 없다. 그러나 자기의 신은 있다」
그는 늘 이러한 대답을 하여 왔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그 대야를 가지고 그 주인 앞에 엎드리어 울며 사죄한다면 그 주인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신까지도 나를 용서할 것인가」
어느 밤에 ××는 자기가 도적하였었다는 것과 같은 모양이라는 대야를 한 개 사가지고 돌아온 일까지도 있었다. ××의 얼굴에는 취소할 수 없는 어둔 구름이 가득히 끼어 있는 것을 그는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이 상처를 두고두고 앓는 것보다는― X! 내일은 내가 그 주인을 찾아가겠소. 그리고는 그 앞에서 울어 보겠소?」
그는 죽을 힘을 다하여 ××를 말리었다.
「이왕 이처럼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하여 놓은 이상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를 옛날 그 죄악의 속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 되지 않을까! 참회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순간에 벌써 모든 것으로부터 용서받았어! 지난날을 추억하느니보다는 새 생활을 근심할 것이야!」
××의 친구 중에 A라는 대학생이 있었다. C는 A에게 부탁되어 있었다. A는 아직도 나어린 C였으나 은근히 장래의 자기의 아내 만들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C도 A를 극히 따르고 존경하여 인륜의 깊은 정의를 맺고 있었다.
늦은 가을 하늘이 맑게 개인 어느 날 ××와 A는 엽총(獵銃)을 어깨에―즐거운 수렵의 하루를 어느 깊은 산중에서 같이 보내게 되었다. 운명은 악희라고만은 보아 버릴 수 없는 악희를 감히 시작하였으니 A의 겨냥대인 탄환은 ××의 급처에 명중하고 말았다. 모든 일은 꿈이 아니었다. 기막힌 현실일 뿐이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엄연한 과거였다. A는 며칠의 유치장 생활을 한 다음 머리 깎은 채 어디로인지 종적을 감춘 후 이 세상에서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그의 자취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일시에 두 사람을 잃어버린 C는 A가 우편으로 보내 준 얼마의 돈을 수중에 한 다음 그대로 넓은 벌판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동안 칠년―팔년의 저의 삶에 대하여서는 어떤 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까지 이야기한 C의 눈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분먹은 뺨에 가느다란 두 줄의 길을 내어놓고까지 있었다.
「제가 선생님을 뵈옵기는 오라버님을 뵈오러 갔을 때 몇 번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해도 이상히 선생님의 얼굴만은 저의 기억에 가장 인상깊은 그이였나 보아요!」
이곳까지 들은 그는 여지껏 꼼짝할 수도 없이 막히었던 그의 호흡을 비로소 회복한 듯이 길다란 심호흡을 한 번 쉬었다.
「C씨― 그래 그 A씨는 그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하셨소?」
「선생님! 제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천하를 헤매이는 것도 A씨를 찾아보겠다는 일념입니다― A씨는 벌써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오늘― 돌아가신 오라버님의 기념처럼 X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모시게 되니― 선생님 아무쪼록 죽은 오라버님을 생각하시고 저를 선생님 곁에 제가 싫증나는 날까지 두어 주세요. 제가 싫증이 났을 때에는 또―선생님, 가엾은 이 새[鳥]를 저 가고 싶은 데로 가게 내버려 두어 두세요. 저는……」
수그러지는 고개에 두 손이 올라가 가리워질 때에
「도무지 어디서 본 듯해!」
그 기억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명고옥에서의 기억은 아니었고 분명히 다른 어느 곳에서의 기억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시 그의 기억에 떠올라오지는 아니하였다.
「선생님! A씨나 오라버님이나―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저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신을 믿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의 존재 커녕은 신의 존재의 가능성까지도 의심합니다」
「만인을 위한 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한 사람의 신은 누구나 있습니다」
창밖의 길 먼지 속에서는 구세군 행려도의 복음과 찬미의 소리가 가장 저음으로 들려왔다.
× × ×
사람들은 놀래어 T씨를 둘러쌌다. 그리고 떠들었다. 인사불성된 T씨의 어깨와 팔 사이로는 붉은 선혈이 옷 바깥으로 배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이 사람 형님이 병원을 한답디다」
「어딘고? 누구 아는 사람 있나」
「내 알아― 어쨌든 메고들 갑시다」
폭양은 대지를 그대로 불살라 버릴 듯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목쉬인 지경 노래 와 목도 소리가 무르녹은 크낙한 공사장 한귀퉁이에서는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그까짓 것이 다 무엇이냐’는 듯이 도로 전모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 × ×
T씨는 거의 일주야 만에야 의식이 회복되었다. 상처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으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노라고 몹시 놀래인 것인 듯하였다. T씨의 아내는 곧 달려와서 마음껏 간호하였다. 그러나 업의 자태는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가 T씨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T씨 부부의 무슨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곧 그치어 버린 듯한 표정을 그는 읽을 수 있었다. T씨의 아내의 아래로 숙인 근심스러운 얼굴에는 ‘적빈’ 두 글자가 새긴 듯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T야! 상처는 대단치 않으니 편안히 누워 있어라. 다― 염려는 말고―」
「…………」
그는 자기 방에서 또 무엇인가 깊이 깊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하고 있는 자기조차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그의 두뇌는 혼란― 쇠약하였다.
「아―극도로 피곤한 인생이여!」
세상에 바치려는 자기의 ‘목’의 가는 곳―혹 이제는 이 목을 비록 세상이 받아라도 하여 주는 때가 돌아왔나 보다―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험상스러운 손가락 사이에 낑기워 단조로운 곡선으로 피어 올라가고 있는 담배 연기와도 같이 그의 피곤해빠진 뇌수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흑색의 연기가 엉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냐 만인을 위한 신이야 없을망정 자기 하나를 위한 신이 왜― 없겠느냐?」
그의 손은 책상 위의 신문을 집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지면 위의 활자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교회당에 방화! 범인은 진실한 신자!」
그의 가슴에서는 맺히었던 화산이 소리없이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뜨거운 느낌도 느낄 수는 없었다. 다만 무엇인가 변형된 (혹은 사각형의) 태양적갈색의 광선을 방사하며 붕괴되어 가는 역사의 때아닌 여명을 고하는 것을 그는 볼 수 있는 것도 같았다―.
× × ×
T씨는 저녁때 드디어 병원을 나서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T씨의 아내만이 변명 못할 신세의 눈초리를 그에게 보여 주며 쓸쓸히 T씨의 인력거 뒤를 따라갔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여 버렸다.
「T야― T야―」
그는 그 뒤의 말을 이을 수 있는 단어(單語)를 찾아내일 수 없었다. T씨의 얼굴에는 전연 표정이 없었다. 그저 병원을 의식이 회복되자 형의 병원인 줄을 알은 다음에 있을 곳이 아니니까 나간다는 그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기도 하였고 욕하는 이까지도 있었다.
「그 형인지 무엇인지 전 구두쇤가 봅디다」
「이 염천 에 먹고 사는 것은 고사하고 하도 집에서 아무리 한대야 상처가 낫기는 좀 어려울걸!」
그의 귀는 이러한 말들에 귀머거리였다.
「그래 그렇게 내보내면 어떻게 사―노? 굶어죽지」
그 뒤로도 그의 발길이 T씨의 집 문지방을 아니 넘어선 날은 없었다. 또 수입의 삼분의 일을 여전히 T씨의 아내에게 전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는 아니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의사를 대이게 하여(그와 M군은 T씨로부터 거절하였으므로) 치료는 나날이 쾌유의 쪽으로 진척되어 가고 있었다.
수입의 삼분의 일이 무조건으로 T씨의 손으로 돌아가는 데 대하여 M군은 적지 않게 불평을 가졌었다. 그러나 물론 M군이 그러한 불평을 입밖에 내일 리는 없었다. 그가 또한 이러한 것을 눈치 못 채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떤 때에는 이러한 것을 터놓고 M군의 앞에 하소하여 볼까도 한 적까지 있었으나 그러지 못한 채로 세월에게 질질 끌리어가고 있었다.
「다달이 나는 분명히 T의 아내에게 그것을 전하여 주었거늘!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기 시작한 지가 이미 오래거든― 그러면 분명히 T는 그것을 자기 손에 다달이 넣고 써왔을 것을― T의 태도는 너무 과하다― 극하다―」
그는 더 참을 수 없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넘기는 것이 그가 세상에 바치고자 하는 그의 참마음이라는 것을 깊이 자신하고 모든 유지되어 오던 현상을 게을리 아니할 뿐이랴. 한층 더 부지런히 하였다.
× × ×
오늘도 또한 그의 절름발이의 발길은 T씨의 집 문지방을 넘어섰다. T씨의 아내만이 만면한 수색으로 그를 대하여 주었다. 물론 이야기 있을 까닭이 없었다. 비스듬히 열린 어둠컴컴한 방문 속에서는 T씨의 앓는 소리 섞인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좀 어떤가요?」
「차차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의사는?」
「다녀갔습니다.」
「무어라고 그럽니까요?」
「염려할 것 없다고.」
그만하여도 그의 마음은 기뻤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이마에 맺힌 땀을 씻으려 할 때 그의 머리 위 하늘은 시커멓게 흐리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가보다 하는 사이에 주먹 같은 빗방울이 마당의 마른 먼지를 폭발시키기 시작하였다. 서늘한 바람이 한번 휙 불어 스치더니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는 벼란간 완연 전쟁을 일으킨 것 같았다. T씨의 초가지붕에서는 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더러운 액체가 줄줄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치어다보았다. 그저 무한히 검기만 하였다. 다만 가끔 번쩍거리는 번개가 푸른 빛의 절선을 큰 소리와 함께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얼마나 새롭고 감사의 것일 것이었으랴마는― 그에게는 다만 그의 눈과 귀에 감각되는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새로울 것도 감사할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피곤한 인생― 그는 얼마 동안이나 멀거니 앉아 있다가 정말 인간들이 내어다버린 것 모양으로 앉아 있는 T씨의 앞에 예의 것을 내어밀었다. T씨의 아내는 그저 고개를 숙이었을 뿐이었고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또 거북한 기분 속에서 벗어나려고,
「업이는 어딜 갔나요 요새는 도무지 볼 수가 없으니― 더러 들어앉아서 T 간병도 좀 하고 하지.」
「벌써 나간 지가 닷새― 도무지 말을 할 수도 없고.」
「왜 말을 못하시나요.」
「…………」
우연한 회화의 한 토막이 그에게 적지아니한 의아의 파문을 일으키었다.(속으로 분하였다)
「에― 못된 자식― 애비가 죽어 들어 누웠는데.」
그는 비 오는 속으로 그대로 나섰다. 머리 위에서는 우뢰와 번개가 여전히 끊이지 아니하고 일었다.
「신은 이제 나를 징벌하려 드는 것인가.」
「나는 죄가 없다― 자―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좀 보아라― 나는 죄가 없다!」
그는 자기의 선인임을 나아가 역설하기에는 너무나 약한 인간이었다. 자기의 오직 죄 없음을 죽어가며 변명하는 데 그칠 줄밖에는 몰랐다.
「만인의 신! 나의 신! 아! 무죄!」
모든 것은 걷어잡을 수 없이 뒤죽박죽이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빗속에서 번개와 어울어져서 번쩍이었다.
그것이 벌써 찌는 듯한 여름 어느 날의 일이었었다면 세월은 과연 빠른 것이다. 축 늘어진 나뭇잎에는 윤택이랄 것이 없었다. 영원히 윤택이 나지 못할 투명한 수증기가 세계에 차 있는 것 같았다.
꼬박꼬박 오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그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거운 발길을 옮기어 놓으며 있었다. 서로 만나는 사람은 담화를 하는 것도 같았다. 장사도 지나갔다. 무엇이라고 소리높이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입만 뻥긋거리는 데에 그치는 것같이 소리나지 아니하였다. ‘고요한 담화인가’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벽돌집의 한 덩어리는 구름이 해를 가렸다 터놓을 때마다 흐렸다 개였다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지극히 고요한 이동(移動)이었다. 그의 윗 눈썹은 차차 무게를 늘리는 것 같았다. 얼마 가지 아니하여는 아랫 눈썹 위에 가만히 얹혔다. 공기가 겨우 통할만한 작은 그 틈에서는 참을 수 없는 졸음이― 그것도 소리없이― 새어나왔다.
병원은 호흡(呼吸)을― 불규칙(不規則)한 호흡을 무겁게 계속하고 있었다. 그 불규칙한 호흡은 그의 졸음에 혼화되어 저으기 얼마간 규칙적인 것같이 보였다.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엿가락처럼 늘어진 졸음의 줄을 건드려 볼 수도 없었다. 한번 지나가는 바람과 같았다. 그 뒤에는 또 피곤한 그의 졸음이 그대로 계속되어 갔을 뿐이다.
그가 있는 방 ‘도어’가 이상한 음향을 내이며 가만히 열렸다. 둔(鈍)한 슬리퍼 소리가 둘, 셋, 넷 하고 하나가 끝나기 전에 또 하나가 났다. 저절로 돌아가는 도어의 장식[蝶番]은 도어를 도어틀[額框] 틈 사이에― 무거운 짐을 내려 놓는 모양으로 갖다 낑끼웠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숨소리―혹 전연 침묵이었는지도 모를― 남아 날 듯한 비중(比重) 늘은 공기가 실내(室內)에 속도 더딘 파도를 장난하고 있었다.
일분― 이분― 삼분……
「선생님! 선생님! 주무세요? 선생님.」
C간호부(看護婦)는 몇 번이나 그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그의 어깨에 닿은 C간호부의 손은 젊디 젊은 것이었다. 그는 쾌감 있는 탄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더욱이나 졸음은 두께 두꺼운[厚] 것이 되어갔다.
「선생님! 잠에 취하셨세요? 선생님!」
구루마 바퀴 도는 소리― 매암이 잡으러 몰려 다니는 아이들의 소리―이런 것들은 아직도 그대로 그의 귓바퀴에 붙어 남아 있어서 손으로 몰래 훑으면 우수수 떨어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그의 잠! 졸음!은 졸음 그것만으로 단순한 것이었다.
장주(壯周)의 꿈 과 같이―눈을 비비어 보았을 때 머리는 무겁고 무엇인가 어둡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짧은 동안에 지나간 그의 반생의 축도를 그는 졸음 속에서도 피곤한 날개로 한 번 휘거쳐 날아 보았는지도 몰랐다. 꿈을 기억할 수는 없었으나 꿈을 꾸었는지도 혹은 안 꾸었는지도 그것까지도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어디인가 풍경 없는 세계에 가서 실컷 울다 그 울음이 다하기 전에 깨워진 것만 같은 모―든 그의 사고(思考)의 상태는 무겁고 어두운 것이었다.
「선생님! 잠에 취하셨세요? 퍽 곤하시지요 깨워 드려서― 곤하신데 주무시게 둘걸!」
그는 하품을 한 번 큼직하게 하여 보았다. 머리와 그리고 머리에 딸리지 아니하면 아니될 모든 것은 한 번에 번쩍 가벼워졌다. 동시에 짧은 동안의 기다란 꿈도 한 번에 다― 날아간 것과 같았다. 그리고는 그의 몸은 또다시 어찌할 수도 없는 현실의 한모퉁이로 다시금 돌아온 것 같았다.
「선생님! 그리기에 저는 선생님께 아무런 짓을 하여도 관계치 않지요! 다 용서해 주세요」
「그야!」
「선생님 졸리셔서 단잠이 폭 드신 걸 깨워 놓아―서 그래도 선생님은 저를 용서해 주시지요」
「글쎄!」
「용서하여 주시고 싶지 않으세요? 선생님」
「혹시!」
「선생님 오늘 일은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더위에 괴로우신 선생님을 잠깐만 버려도 그것은 정말 선생님 용서해 주실는지요」
「즉 그렇다면!」
「며칠 동안만 선생님 곁을 떠나 더위의 선생님을 내어버리고 저만 선선한 데를 찾아서 정말 잠깐 며칠 동안만―선생님 혹시 용서해 주실 수가 있을는지요? 정말 며칠 동안만!」
「선선한 데가 있거든 가오. 며칠 동안만이랄 것이 아니라 선선한 것이 싫어질 때까지 있다 오오. 제 발로 걷겠다 용서 여부가 붙겠소? 하하」
그의 얼굴에서는 웃을 때에 움직이는 근육이 확실히 움직이고는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아니 보이던 몇 줄기의 혈관이 뚜렷이 새로 보였다.
「선생님 그렇게 하시는 것은 싫습니다. 선생님 저를 미워하십니까? 저를 미워하시지는 않으시지요. 절더러 어디로 가라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회화에는 나는 관계가 없는 것 같소 하하, 그러나 다 천만의 말씀이오」
「그러시면 못 가게 하시는 걸 제가 졸르다 졸르다 겨우 허락―용서를 받게―이렇게 하셔야 저도 가는 보람도 있고 또 가고 얼른 오고― 선생님도 보내시는― 용서하시는 보람이 계시지 않습니까?」
「허락할 것은 얼른 허락하는 것이 질질 끄으는 것보다 좋지」
「그것은 그렇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나는 늙어서 아마 그런 재미를 모르는 모양이오.」
「선생님은!」
「늙어서! 하하……」
돌아앉은 C간호부는 품 속에서 손바닥보다도 작은 원형의 거울을 끄집어내어 또 무엇으로인지 뺨, 이마를 싹싹 문지르고 있었다. 잊지 않은 동안 같이 있던 그들 사이였건마는 그로서는 실로 처음 보는 일이오 그의 눈에는 한 이상한 광경으로 비치었다.
× × ×
미목수려(眉目秀麗)한 한 청소년이 이리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양편 손에는 여러 개의 물건 상자가 매어 달려 있었다. 흑(黑)과 백(白)으로만 장속 한 그 청소년의 몸에서는 거의 광채를 발하다시피 눈부시었다. 들창에 매어달려 바깥만을 내어다보고 있던 C간호부는 그때에 그의 방에서 나갔다. 거의 의식(意識)을 잃은 그는 C간호부의 풍부한 발이 층계를 내려가는 여러 음절의 소리 가운데의 몇 토막을 들었을 뿐이었다. 아래층에서는 가벼운―그러나 퍽 명랑한 웃음소리가 알아듣지 못할 만한 정도로 흐려진 유쾌한 그러나 퍽 짤막한 담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쿵― 쿵― 쿵쿵 분명히 네 개의 발이 층계를 올라오고 있었다.
「큰아버지!」
「선생님!」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이 두 청춘(靑春)을 바라볼 때에 그의 눈에서는 번개가 났다. 혹은 어린 양들에게 백년의 가약을 손수 맺게 하여 주는 거룩한 목사(牧師)와도 같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형상 없는 물질이 흔들렸다. 그 위에 뜬 조고만 사색(思索)의 배를 파선시키려는 듯이
「아, 내가 너를 본 지 몇 달이 되는지?」
고개를 숙인 업의 입술은 떨어질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업아 네가 입은 옷(依服)은 감도 좋거니와 꼭맞는다」
그의 시선은 푸른 빛을 내이며 업의 입상(立像)을 오르내렸다.
「업아 네가 가지고 온 이 상자 속에 든 것은 무슨 좋은 물건이냐 혹시 그 가운데에는 나에게 줄 선물도 섞여 있는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의 시선은 다시금 판자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상자 위를 하나 둘 거쳐 가며 산보하였다.
「업아 아버지의 상처는 좀 나은가? 아니 너 최근에 너의 집을 들른 일이 혹 있는가?」
「…………」
「내가 보는 대로 말하고 보면 아마 지금 여행의 길을 떠나는 모양이지 아마」
「…………」
방안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들창이 새어 들어오는 훈훈한 바람도 다 이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바깥 온도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C씨! C씨는 언제부터 나의 업이와 친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자― 두 사람에게 내가 물을 말은 이렇게 두 사람이 내 앞에 함께 나타난 뜻은 무슨 뜻인지? 이야기할 것이 있는지 청할 것이 있는지 혹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이 있는지―」
C간호부는 고개를 숙인 채 좌우를 두어번 둘러 보더니 무슨 생각이 급히 떠올랐는지 황황히 그 방을 나갔다. 남아 있는 업 한 사람만이 교의에 걸터앉은 그 앞에 깎아 세운 장승과 같이 부동자세(不動姿勢)로 서 있었다. 그는 교의에서 몸을 일으키며 담배를 한 개 피워 물었다. 연기의 빛은 신선한 청색이었다.
「업아― 이리 와서 앉아라. 큰 아버지는 결코 너에게 악의를 가지지 아니하였다. 나의 묻는 말을 속이지 말고 대답하여라」
「네가 돈이 어디서 생기니? 네가 버는 것은 아니겠지」
「어머님이 주십니다」
「아범에게는 얻어 본 일이 없니?」
「없습니다」
「그만하면 알았다」
업은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한번 치어다보았다.
「C양은 어떻게 언제부터 알았니?」
「우연히 알았습니다. 사귀인 지는 아직 한 달도 못 됩니다.」
「저것들은 다 무엇이냐」
「해수욕에 쓰는 것입니다. 옷― 그런 것」
「해수욕― 그러면 해수욕을 가는 데 하하…… 작별을 하러 온 것이로군. 물론 C양과 둘이서?」
「네. 제 생각은 큰 아버지를 뵈옵고 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마는 C간호부의 말이 우 리 둘이서 그 앞에 나가 간곡(懇曲)히 용서를 빌면 반드시 용서하여 주시리라고― 그 말을 제가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아니 올 수 없었습니다. 또 C간호부는 큰아버지께서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도 반드시 이해하여 주시리라는 말도 하였습니다마는 물론 그 말도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잘 알았어. 나는― 그러면 나로서는 혹 용서하여 줄 점도 있겠고 혹 용서하지 아니할 점도 있을 테니까」
「그럼 무엇을 용서하시고 무엇은 용서하지 아니하실 터인지요?」
「그것은 보면 알 것이 아닌가」
그의 말끝에는 가벼운 경련이 같이 따랐다. 책상 위에 끄집어내어 쌓아 놓은 해수욕 도구(道具)는 꽤 많은 것이었다. 그는 그 자그마한 산(山) 위에 ‘알콜’의 소낙비를 내리었다. 성냥 끝에서 옮겨 붙은 불은 검붉은 화염(火焰)을 발하며 그의 방 천장을 금시로 시꺼멓게 그슬려 놓았다. 소리없이 타오르는 직물류, 고무류의 그 자그마한 산은 보는 동안에 무너져가고 무너져가고 하였다. 그 광경은 마치 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동작이 있고 음향이 없는 반환영(半幻影)과 같았다. 벽 위의 시계가 가만히 새로 한시를 쳤다. 업의 얼굴은 초일초 분일분 새파랗게 질리어 갔다.
입술은 파래지며 심히 덜었다. 동구(瞳球)를 싸고 있는 눈윗두덩도 떨었다. 눈의 흰자위는 빛깔을 잃으며 회갈색으로 변하고 검은 자위는 더욱 더욱 칠흑(漆黑)으로 변하며 전광(電光) 같은 윤택을 방사하였다. 그러나 동상(銅像) 같은 업의 부동자세는 조곰도 변형되려고 하지 안하였다.
‘푸지직’ 소리를 남기고 불은 꺼졌다. 책상을 덮어 쌌던 크로드 도 책상의 봐니스 도 나타나고 눌었다. 그 위에 그 해수욕 도구들의 다 타고 남은 몇 줌의 검은 재가 엉기어 있었다. 꼭 닫은 도어가 바깥으로부터 열렸다.
「선생님!」
오직 한마디― 잠시 나붓거리는 그 입술이 달려있는 C간호부의 얼굴은 심야의 정령(精靈)의 그것과도 같이 창백(蒼白)하고도 가련(可憐)하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러한 C간호부의 서 있는 등 뒤에 부동명왕의 얼굴과 같이 흑연 화염 속에 인쇄되어 있는 듯한 T씨의 그것도 그는 볼 수 있었다. 일순 후에는 그의 얼굴도 창백화 하지 아니할 수 없었고 그의 입술도 조곰씩 조곰씩 그리하여 커다랗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흐르는 세월의 조락(凋落)의 가을을 이 땅 위에 방문시키었을 때는 그가 나뭇잎 느껴 우는 수림을 산보하고 업의 병세(病勢)를 T씨의 대문간에 물어 버릇하기 시작하였은지도 이미 오래인 때였다.
업은 절대로 그를 만나지 아니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업의 병세를 부득이 T씨의 집 대문간에서 묻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오직 T씨의 아내가 근심과 친절을 함께 하여 그를 맞아 주었다.
「좀 어떻습니까? 그 떠는 증세가 조곰도 낫지 않습니까?」
「그거 마찬가지예요. 어떡하면 좋을지요」
「무엇 먹고 싶다는 것 가지고 싶다는 것은 없습니까? 하고 싶다는 것은 또 없습디까?」
「해수욕복을 사주랍니다. 또 무슨 아루꼬(알콜?)―」
「네네, 알았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 궁리를 가슴 가운데에 왕래시키려 그는 병원으로 돌아왔다. 필요 이외의 회화를 바꾸어 본 일이 없는 사이쯤 된 M군에게 그는 간곡한 어조로 말을 붙이어 보았다.
「M군! 도무지 모를 일이야. 모든 죄가 결국은 내게 있다는 것이 아닐까? M군 자네가 아무쪼록 좀 힘을 써 주게」
「힘이야 쓰고 싶지마는 자네도 마찬가지로 나도 만나지 않겠다는 환자의 고집을 어떻게 하느냐는 말일세. 청진기 한 번이라도 대어 보아야 성의 무성의 여부가 생기지 않겠나」
「내 생각 같아서는 그 업에게는 청진기의 필요도 없을 것 같건만……」
「그것은 자네가 밤낮 하는 소리 마찬가지 소리」
그에게는 이 이상 더 말을 계속시킬 용기조차도 힘조차도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편지―발신인 주소도 성명도 그 겉봉에는 씌어 있지마는―가 있었다.
「선생님! 가을바람이 부니 인생이라는 더욱이나 어두운 것이라는 것이 생각됩니다.
표연히 야속한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선생님의 곁을 떠난 후 벌써 철 하나이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흐르는 광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속절없이 찾고만 있을까요.
그동안 한 장의 글월을 올리지 않다가 이제 새삼스러이 이 펜을 날려 보는 저의 심사를 혹은 선생님은 어찌나 생각하실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즉 오해(誤解) 속에서 오해로만 살아가는 것인가 합니다. 선생님이 우리들을 이해하셨기에 우리들은 선생님의 거룩한 사랑까지도 오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업씨를―그리고 또 표연히 선생님의 곁을 떠난 저도 선생님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이 그다지 짧지 않은 글도 물론 전부가 다 오해 투성이겠지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제가 이 글을 드리는 태도나 또는 그 글의 내용을 오해하실 것도 물론이겠지요. 아― 세상은 어디까지나 오해의 갈구리로 연쇄되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저의 오라버님의 최후도 또 그이(대학생―C간호부의 내면)도 그때의 일도 그후의 일도 모든 것이 다 오해 때문에―가 아니었습니까? 제가 저의 신세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도, 이처럼 세상을 집삼아 표랑(漂浪)의 삶을 영위(營爲)하게 된 것도 전부 다― 그 기인(起因)은 오해―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의 무지로부터 출발된 오해 때문이 아니었으면 무엇이었던가 합니다. (어폐를 관대히 보아 주세요) (中略)
선생님이 저에게 끼쳐 주신 하해(河海) 같은 은혜(恩惠)에 치하의 말씀이 어찌 이에서 다하겠습니까마는 덧없는 붓끝이 오직 선생님의 고명(高名)과 종이의 백색을 더럽힐 따름입니다.
선생님, 이제 저는 과거에 제가 가졌던 모든 오해를 오해 그대로 적어 올려 보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도 그 오해를 그 오해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까닭이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업씨와 저 두 사람 사이를 과연 어떠한 색채로 관찰하시었는지요(어폐를 아무쪼록 관대히 보아 주십시요) 아닌 것이 아니라 저는 업씨를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또 업씨도 저를 좀더 무겁게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이제 생각하여 보면― 업씨의 나이―이제 스물 한살― 저 스물 여섯― 과연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이 철저한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연령의 상태의 아래에서는 그 사랑이란 그래도 좀더 좀더 빛다른 그 무엇이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만남― 무엇이라 할까― 하여간 우연 중에도 너무 우연이겠습니다. 그것은 말씀올리기 꺼립니다. 혹시 병상에 누워 계신 업씨의 신상에 어떠한 이상이라도 있지나 아니할까 하여 다만 저이들 두 사람의 사랑의 내용을 불구자적(不具者的) 병적이면 불구자적 병적 그대로라도 사뢰어 볼까 합니다.
(아― 끝없는 오해 아직도― 아직도) 선생님! 제가 업씨를 사랑한 이유는 업씨의 얼굴― 면영(面影)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 그이의 면영과 흡사하였다는― 다만 그 한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이는― 지금쯤은 퍽 늙었겠지요! 혹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이의 면영은 그이와 제가 갈리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그 순간의 그것 채로 신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幸福)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적어도 기쁨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나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이나 인간의 아름다움의 극치(極致)이겠습니다.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저의 업씨에게 대한 사랑도 과연 인간의 아름다움의 하나로 칠 수 있을까를 그러나 저는 저로도 과연 저의 업씨에게 대한 사랑에는 너무나 많은 아욕(我慾)이 품겨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곧― 저는 저의 업씨에게 대한 사랑을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아뢰올 것은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입니다. 경조부박 한 생활 부피 없는 생활을 하여 오던 업씨는 저에게서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의 내음 나는 역량(力量) 있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합니다. 업씨의 말을 들으면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은 적극적으로 업씨가 저에게 제공하는 그러한 사랑이라느니보다도 저의 사랑이 깃이 있다면 업씨는 업씨 자신의 저에게 대한 사랑을 신선한대로 그대로 소지(所持)한 채 그 깃 밑으로 기어들고 싶은 그러한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하여간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도 우리가 항상 볼 수 있는 시정간(市井間)의 사랑보다는 무엇인가 좀더 깊이가 있었던 듯하며 성스러운 것이었던가 합니다. 여러 가지 점으로 주저하던 저는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의 피로 말미암아 무던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어쨌든 이제는 원인을 고구(考究)할 것 없이 서로 사랑하여 자유로 사랑하여 가기로 하였습니다. 이만큼 저희들은 삽시간 동안에 눈멀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의 사랑꼴은 생리적으로도 한 불구자적 현상에 속하겠지요. 더욱, 사회적으로는 한 가련한 탈선이겠지요. 저희들도 이것만은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심각한 추억의 인간과 면영이 같은 사람에게 적어도 호의를 갖는 것은 사람의 본능(本能)의 하나가 아닐까요. 생리학(生理學)에나 혹은 심리학에나 그런 것이 어디 없습니까. 또 사회적(社會的)으로도 영(靈과 靈)끼리만이 충돌하여 발생되는 신성(神聖)한 사랑의 결합체(結合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그다지 해괴한 사건에 속할까요! (中略)
선생님! 해수욕행도 저의 제의(提議)였습니다. 해수욕 도구도 제 돈으로 산 것입니다. 업씨는 헤엄도 칠 줄 모른다 합니다. 또 물을 그다지 즐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말이면 어디라도 가고 싶다 하였습니다. 그것을 한 계집의 간사한 유혹이라느니보다도 모성(母性)의 갸륵한 애무(愛撫)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합니다.
선생님! 너무나 가혹하시지나 아니하셨던가요. 그것을 왜 살라버리셨습니까? 업씨에게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저도 모성애(母性愛)와 같은 사랑을 업씨에게 베푸는 것이 또 사랑을 달게 받아주는 것이 무한한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선생님은 검붉은 화염 속에 불살라 버리시었습니다. 그 이상한 악취를 발하며 타오르는 불길은 오직 그 책상 우에 목면과 고무만을 태운 데 그친 줄 아십니까? ‘도어’ 뒤에서 있던 저의 심장도(확실히) 또 그리고 업씨의 그것도, 업씨의 아버님의 그것도 다 살라버린 것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등 뒤에 사람이 있는지 알 길이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 길은 더욱이나 있었겠습니까. 얼마 후에 참으로 긴 동안의 얼마 후에 그이가 업씨 아버님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저는 업씨의 아버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에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의외이셨겠지요. 업씨의 아버님이 그곳에 와 계셨다는 데 대하여는…… 그러나 저는 업씨의 아버님이 그곳에 와 계신 데 대하여서 업씨의 아버님 자신으로부터 그 전말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아뢰일 만한 것은 못됩니다. (中略)
병석에서도 늘 해수욕복을 원한다는 소식을 저는 업씨의 친구되는 이들께서 얻어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물론 잘 아시겠지요. 선생님! 감상이 어떠십니까? 무엇을 의미함이었든지 저는 업씨의 원을 풀어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 나머지 저의 월급이 몇 푼 있을 줄 생각합니다. 좌기 주소로 송부하여 주십시요.
오해 속에서 나온 오해의 글인 만큼 저는 당당히 닥쳐오는 오해를 인수(引受)할만한 준비를 갖추어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길다란 글이 혹시 선생님께 폐를 끼치거나 아니하였나 합니다. 관대하신 용서와 선생님의 건강을 빌며
××통 ×정목 ○○ C변명 △△올」 × × ×
그는 어디까지라도 자신을 비판하여 보았고 반성하여 보았다.
그는 다달이 잊지 않고 적지 않은 돈을 T씨의 아내 손에 쥐어 주었다. T씨의 아내는 그것을 차마 T씨의 앞에 내놓지 못하였으리라. T씨의 아내는 그것을 업에게 그대로 내어주었으리라. 업은 그것을 가지고 경조부박한 도락(道樂)을 탐하였으리라. 우연히 간호부를 만나 해수욕행까지 결정하였으리라. 애비(T씨가)가 다쳐서 드러누웠건마는 집에는 한 번도 들르지 않는 자식, 그 돈을― 그 피가 나는 돈을 그대로 철없고 방탕한 자식에게 내어주는 어머니―그는 이런 것들이 미웠다. C간호부만 하더라도 반드시 유혹의 팔길을 업의 위에 내리밀었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괘씸하였다.
그러나 한 장 C간호부의 그 편지는 모든 그의 추측과 단안을 전복시키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역시 모―든 죄는 나에게 있다」
그의 속주머니에는 적지아니한 돈이 들어 있었다. C간호부는 삼층 한귀퉁이 조고만 다다미방에 누워 있었다. 그 품에 전에 볼 수 없던 젖먹이 간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C양! 과거는 어찌되었든 지금에 이것은 도무지 어찌된 일이오?」
「선생님! 아무것도 저는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이렇게 죄악만으로 얽어서 놓지 아니하면 유지가 안되는 것입니까?」
「C양!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아무 말도 가지지 못하오. 오해와 용서! 그리기에 인류사회(人類社會)는 그다지 큰 풍파가 없이 지지되어 가지 않소?」
「선생님! 저는 지금 아무것도 후회치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후회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니까요. 선생님! 이것을 부탁합니다.」
C간호부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방울이 흘렀다. 그는 C간호부의 내어미는 젖먹이를 의식없이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얼고 식어빠진 그의 손에 전하여 왔다. 그때에 그는 누워 있는 C간호부의 초췌한 얼굴에서 십여 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간 아내의 면영을 발견하였다. 그는 기쁨, 슬픔 교착된 무한한 애착을 느꼈다. 그리고 C간호부의 그 편지 가운데의 어느 구절을 생각내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C간호부의 일들에 조건 없는 용서―라느니보다도 호의를 붙였다.
「선생님! 오늘 이곳을 떠나가시거든 다시는 저를 찾지는 말아 주셔요. 이것은 제가 낳은 것이라 생각하셔도 좋고, 안 낳은 것이라 생각하셔도 좋고, 아무쪼록 선생님 이것을 부탁합니다」
하려던 말도 시키려던 계획도 모두 허사로 다만 그는 그의 포켓 속에 들었던 돈을 C간호부 머리 밑에 놓고는 뜻도 아니한 선물을 품에 안은 채 첫눈 부실거리는 거리를 나섰다.
「사람이란 그 추억의 사람과 같은 면영의 사람에게서 어떤 연연한 정서를 느끼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여도 보았다.
× × ×
업의 병세는 겨울에 들어서 오히려 점점 더하여 가는 것이었다. 전신은 거의 뼈만 남고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눈과 입 이 둘뿐이었다. 그 방 웃목에는 철 아닌 해수욕 도구로 차 있었다. 업은 앉아서나 누워서나 종일토록 눈이 빠지게 그것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 말쑥한 새 기와집 안방에 가 누워서 앓았으면 병이 나을 것 같애― 아버지 기와집 하나 삽시다. 말쑥하고 정결한……」
업의 말이었다는 이 말이 그의 귀에 듣자 어찌 며칠이라는 날짜가 갈 수 있으랴. 즉시 업의 유원은 풀릴 수 있었다. 새 집에 간 지 이틀, 업은 못 먹던 밥도 먹었다. 집안 사람들과 그는 기뻐하였다. 그저 한없이…
그러나 이미 때는 돌아왔다. 사흘되던 날 아침 (그 아침은 몹시 추운 아침이었다) 업은 해수욕을 가겠다는 출발이었다. 새 옷을 갈아 입고 방문을 죄다 열어 놓고 방 웃목에 쌓여 있는 해수욕 도구를 모두 다 마당으로 끄집어 내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위에 적지 않은 해수욕 도구의 산에 알콜을 들어부으라는 업의 명령이었다.
「큰아버지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겠으니 좀 오시라고 그래 주시요. 어서 어서 곧― 지금 곧」
그와 업의 시선이 오래― 참으로 오래간만에 서로 마주치었을 때 쌍방에서 다 창백색의 인광을 발사하는 것 같았다.
「불! 인제 게다가 불을 지르시오」
몽몽한 흑연(黑煙)이 둔한 음향을 반주시키며 차고 건조한 천공을 향하여 올라갔다. 그것은 한 괴기(怪氣)를 띄운 그다지 성(聖)스럽지 않은 광경이었다.
가련한 백부의 그를 입회시킨 다음 업은 골수에 사무친 복수를 수행하였다(이것은 과연 인세의 일이 아닐까? 작자의 한 상상의 유희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뜰 가운데에 타고 남아 있는 재부스러기와 조곰도 못함이 없을 때까지 그의 주름살 잡힌 심장도 아주 새까맣도록 다 탔다.
그날 저녁때 업은 드디어 운명(殞命)하였다. 동시에 그의 신경의 전부는 다 죽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아득하고 캄캄한 무한대의 태허(太虛) 가 있을 뿐이었다.
(여― 요에헤―요) 그리고 종소리 상두군의 입 고운 소리가 차고 높은 하늘에 울렸다.
그의 발은 마치 공중에 떠서 옮겨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타고 전신의 신경이 운전을 정지하고― 그의 그 힘없는 발은 아름다운 생기에 충만한 지구(地球) 표면에 부착될 만한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서는 그 몽몽 한 흑연― 업의 새 집 마당에서 피어오르던 그 몽몽한 흑연의 일상이 언제까지라도 아른거려 사라지려고는 하지 않았다.
뼈만 남은 가로수(街路樹)도 넘어가고 나머지 빈약한 석양(夕陽)에 비추어가며 기운 시진해 하는 건축물들도 공중을 횡단하는 헐벗은 참새의 떼들도― 아니 가장 창창(蒼蒼)하여야만 할 대공(大空) 그것까지도― 다―한 가지 흑색으로밖에는 그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의 호흡하고 있는 산소(酸素)와 탄산와사의 몇 ‘리틀’도 그의 모세관(毛細管)을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의 그 어느 한 방울까지도 다 흑색 그 몽몽한 흑연과 조곰도 다름이 없는―이 아니라고는 그에게 느끼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아니― 이것이 나일까― 이것이 무엇일까. 나일까, 나일 수가 있을까」
가로등 건축물 자동차 피곤한 마차와 짐구루마― 하나도 그의 눈에 이상치 아니한 것은 없었다.
「저것들은 다 무슨 맛에 저짓들이람!」
그러나 그의 본기를 상실치는 아니한 일신의 제 기관들은 그로 하여금 다시 그의 집에 돌아가게 하지 않고는 두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집 문을 밀어 열려 하여 보았으나 팔뚝의 관절은 굳었는지 조곰도 들리지는 않았다. 소리를 질러 집안 사람들을 불러보려 하였으나 성대는 진동관성(振動慣性)을 망각(忘却)하였는지 음성(音聲)은 나오지 아니하였다.
「창조의 신(創造神)은 나로부터 그 조종(操縱)의 실줄[絲線]을 이미 거두었는가?」
눈썹 밑에는 굵다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그것을 감각할 수 없었다. 그위 등 뒤에에 웬 사람인지 외투에 내려앉은 눈을 터느라고 옷자락을 흔들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응? 누구― 누구요」
「왜 그렇게 놀라나? 날세 나야」
M군이었다. 병원에서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업이가 갔어」
「응? 기어코?」
두 사람은 이 이상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둠침침한 그의 방 안에는 몇 권의 책이 시체(屍體)와 같이 이곳 저곳에 조리 없이 산재하여 있을 뿐이었다.
위풍이 반자 를 울리며 휙 스쳤다.
「으아―」
「하하 잠이 깨였구나. 잘 잤느냐, 아아 울지 마라. 울 까닭은 없지 않느냐. 젖 달라고, ―아이 ‘고무’ 젖꼭지가 어디 갔을까. 우유(牛乳)를 뎁히어 놓았는지 웬― 아아아 울지 마라, 울지 말아야 착한 아이이지. ―아― 이런이런!」
가슴에 끓어오르는 무량한 감개를 그는 억제할 수 없었다. 그저 쏟아져 흐르기만 하는 그 뜨거운 눈물을 그 어린것의 뺨에 부비며 씻었다. 그리고 힘껏힘껏 그것을 껴안았다. 어린것은 젖을 얻어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염치 없는 울음을 그치지는 않았다.
× × ×
T씨는 그대로 그 옆에 쓰러졌다. 구덩이는 벌써 반이나 팠다. 그때 T씨는 그 옆에 쓰러졌다.
언 땅에 깨쳐 가며 파는 곡괭이 소리― 이리 뒤치적 저리 뒤치적 나가 떨어지는 얼어 굳은 흙덩어리 다시는 모두어질 길 없는 만가(輓歌)의 토막과도 같이 처량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달려들어 T씨를 일으키었다. T씨의 콧구멍과 입으로는 속도 빠른 허―연 입김이 드나들었다. 그 옆에 서 있는 그의 서 있는 그의 모양― 그 부동자세는 이 북망산 넓은 언덕에 헤어져 있는 수많은 묘표나 그렇지 아니하면 까막까치 앉아 날개 쉬이는 헐벗은 마른 나무의 그 모양과도 같았다.
관은 내려갔다. T씨와 그 아내와 그리고 그의 울음은 이때 일시에 폭발하였다. 북망산 석양천에는 곡직착종(曲直錯綜) 된 곡성이 처량히 떠올랐다. 업의 시체를 이 모양으로 갖다 파묻고 터덜터덜 가던 그 길을 돌아 들어오는 그들의 모양은 창조주에게 가장 저주받은 것과도 같았고 도주하던 ‘카인’의 일행들의 모양과도 같았다.
× × ×
그는 잊지 아니하고 T씨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업이 죽은 뒤의 T씨의 집에는 한바람이 하나 불고 있었다. 또 그러나 그가 T씨의 집을 찾기는 결코 잊지는 않았다.
T씨는 무엇인지 깊은 명상에 빠져서는 누워 있었다. T씨는 일터에도 나가지 아니하였다. 다만 누워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T!……」
「………」
그는 T씨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T씨는 대답이 없었다. 또 그러나 그에게도 무슨 할말이 있어서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쓸쓸히 그대로 돌아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문이나마 그는 결코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 × ×
북부에는 하룻밤에 두 곳―거의 동시에 큰 화재가 있었다. 북풍은 집집의 풍령(風鈴)을 못견디게 흔드는 어느날 밤은 이 뜻하지 아니한 두 곳의 화재로 말미암아 일면의 불바다로 화하고 말았다. 바람 차게 불고 추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원근에서 몰려 들어와서 북부 시가의 모든 길들은 송곳 한 개를 들어 세울 틈도 없을만치 악마구리 끓듯 야단이었다. 경성의 소방대는 비상의 경적을 난타하며 총동원으로 두곳에 나누어 모여 들었다. 그러나 충천의 화세는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하여 가기만 하는 것이었다. 소방수들은 필사의 용기를 다하여 진화에 노력하였으나 연소의 구역은 각각으로 넓어만 가고 있을 뿐이었다. 기와와 벽돌은 튀고 무너지고 나무는 뜬숯 으로 되고 우지직 소리는 끊일 사이 없이 나고 기둥과 들보를 잃은 집들은 착착으로 무너지고 한 채의 집이 무너질 적마다 불똥은 천길 만길 튀어오르고 완연히 인간세계에 현출된 활화지옥(活火地獄)이었다. 잎도 붙지 아니한 수목들은 헐벗은 채로 그대로 다 타죽었다.
불길이 삽시간에 자기 집으로 옮겨 붙자 세간기명은 꺼낼 사이도 없이 행길로 뛰어나온 주민들은 어디로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 방황하였다.
「수길아!」
「복동아!」
「금순아!」
다 각기 자기 자식을 찾았다. 그 무리들 가운데에는
「업아! 업아!」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며 쏘다니는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신의 조리를 상실한 그들 무리는 그 소리 하나쯤은 귓등에 담을 여지조차도 없었다. 두 구역을 전멸시킨 다음 이튿날 새벽에 맹렬하던 그 불도 진화되었다. 게다가 고닭이 울던 이 두 동리는 검은 재의 벌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같이 큰 일에 이르기까지 한 그 불의 출화 원인에 대하여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날 밤에는 북풍이 심하였던 것 수개의 소화전은 얼어붙어서 물이 나오지 아니하였던 까닭에 많은 소방수의 필사적 노력도 허사로 수수방관치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곳이 있었던 것 등을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 × ×
M군과 그 가족은 인명이야 무사하였지마는 M군은 세간기명을 구하러 드나들다가 다리를 다쳤다.
이재민들은 가까운 곳 어느 학교 교사에 수용되었다. M군과 그 가족도 그 곳에 수용되었다.
M군이 병들어 누운 옆에는 거의 전신이 허물이 벗다시피 된 그가 말뚝 모양으로 서 있었다. 초췌한 그들의 안모에는 인세의 괴로운 물질이 주름살져 있었다.
그가 그 맹화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날뛰었을 때,
「무엇을 찾으러― 무슨 목적으로 내가 이러나」
물론 자기도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첨편에 불이 붙어도 오히려 부동자세로 저립하고 있는 전신주(電信柱)와 같이 그는 멍멍히 서 있었다. 그때에 그의 머리에 벽력같이 떠오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얼마 전에 그간 간호부를 마지막 찾았을 때 C간호부의
「이것을 잘 부탁합니다」
하던 그것이었다. 그는 그대로 멱진적으로 맹렬히 붙어오르는 화염 속을 헤치고 뛰어들어갔다. 그리하여 그 젖먹이를 가슴에 꽉 안은 채 나왔다. 어린것은 아직 젖이 먹고 싶지는 않았던지 잠은 깨어 있었으나 울지는 않았다. 도리혀 그의 가슴에 이상히 힘차게 안기었을 제 놀라서 울었다.
「그렇지. 네 눈에는 이 불길이 이상하게 보이겠지」
그러나 그의 옷은 눌었다. 그의 얼굴과 팔뚝 손을 데었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것을 느낄 사이도 없었고 신경도 없었다. 타오르는 M군과 그의 집, 병원 그것들에 대하여는 조고만 애착도 없었다. 차라리 그에게는
「벌써 타 버렸어야 옳을 것이 여지껏 남아 있었지」
이렇게 그의 가슴은 오래오래 묵은 병을 떠나 버리는 것과 같이 그 불길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다만 한 가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를 건진 것과 같은 쾌감을 그 젖먹이에게서 맛볼 수 있었다.
한 사람 중년 노동자가 자수(自首)하였다. 대화재에 쌓여 있던 중첩한 의문은 일시에 소멸되었다.
「희유의 방화범!」
신문의 이 기사를 읽고 앉아 잇는 그의 가슴 가운데에는 그 대화에 못지 아니한 불길이 별안간 타오르고 있었다.
「T야! T야!」
T씨는 그날 밤 M군과 그의 집, 병원 두 곳에 그 길로 불을 놓았다. 타오르지 않을까를 염려하여 병원에서 많은 ‘알콜’을 훔쳐내어 부었다. 불을 그어대인 다음 그 길로 자수하려 하였으나 타오르는 불길이 너무도 재미있는 데 취하였었고 또 분주 수선한 그때에 경찰에 자수를 한대야 신통할 것이 조곰도 없을 것 같아서 그 이튿날 하기로 하였었다.
날이 새자 T씨는 곧 불터를 보러 갔다. 그것은 T씨 마음 가운데 상상한 이상 넓고 큰 것이었다. T씨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T씨는 차츰차츰 평범한 인간의 궤도로 복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언제까지라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희유의 방화범!」
경찰에 나타난 T씨에게 세상은 의외에도 이러한 대명찰을 수여(授與)하였다.
× × ×
(모든 사건이라는 이름 붙을 만한 것들은 다― 끝났다. 오직 이제 남은 것은 ‘그’라는 인간의 갈 길을 그리하여 갈 곳을 선택하며 지정하여 주는 일뿐이다. ‘그’라는 한 인간은 이제 인간의 인간에서 넘어야만 할 고개의 최후의 첨편에 저립하고 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인간의 한 단편으로서의 종식(終熄)을 위하여 어느 길이고 걷지 아니하면 아니될 단말마(斷末魔)다.
작가는 ‘그’로 하여금 인간세계에서 구원받게 하여 보기 위하여 있는 대로 기회와 사건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구조되지 않았다. 작자는 영혼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작자는 아마 누구보다도 영혼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 속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영혼이라는 것을 부여(賦與)치 아니하고는― 즉 다시 하면 그를 구하는 구하는 최후에 남은 한 방책은 오직 그에게 영혼(靈魂)이라는 것을 부여하는 것 하나가 남았다.)
황막한 벌판에는 흰눈이 일면으로 덮이어 있었다. 곳곳에 떨면서 있는 왜소한 마른 나무는 대지의 동면을 수호(守護)하는 가련한 패잔병(敗殘兵)과도 같았다. 그 위를 하늘은 쉬일 사이도 없이 함박눈을 떨구고 있었다. 소와 말은 오직 외양간에서 울었다. 사람은 방 안으로 이렇게 세계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걷기를 그친 황막한 이 벌판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벌판 가운데 어디로부터 어디까지나 늘어서 있는지 전신주의 전신은 찬바람에 못견디겠다는 듯이 ‘욍’ 소리를 지르며 이 나라의 이 끝에서 이 나라의 저 끝까지라도 방 안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과 사람의 음신 을 전하고 있다.
「기쁜 일도 있겠지.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몹시 급한 일도 있으렷다 아무런 기쁜 일도 아무런 쓰라린 일도 다― 통과시키어 전할 수 있는 전신주에 늘어져 있는 전신이야말로 나의 혈관이나 모세관과도 같다고나 할까?」
까마귀는 날았다. 두어조각 남아 있는 마른 잎은 두서너 번 조고만 재주를 넘으며 떨어졌다.
「깍! 깍!」
「왜 우느냐?」
그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어린것은 어느 사이엔지 그 품안에서 잠이 들었었다.
「배가 고프지나 않은지 웬!」
도홍색 그 조고마한 일면 피부에는 두어 송이 눈이 떨어져서는 하잘것 없이 녹아 버렸다. 그러나 어린 것은 잠을 깨이려고도 차갑다고도 아니하는 채 숱한 눈썹은 아래로 덮이어 추잡한 안계(眼界)를 폐쇄(閉鎖)시켰고 두 조고만 콧구멍으로는 찬 공기가 녹아서 드나들고 있었다.
선로가 나타났다. 잠들은 대지의 무장과도 같았다. 희푸르게 번쩍이는 기 쌍줄의 선로는 대지가 소유한 예리(銳利)한 칼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선로를 건너서서 단조로이 뻗쳐 있는 그 칼날을 좇아서 한없이 걸었다.
「꽝! 꽝!」
수많은 곡괭이가 언 땅을 내리 찍는 소리였다. 신작로 한편에는 모닥불이 피어서 있었다. 푸른 연기는 건조 투명한 하늘로 뭉겨 올랐다. 추위는 별안간 몸을 엄습하는 것 같았다.
「꽝! 꽝!」
청둥한 금속의 음향은 아직도 계속되었다. 그 소리는 이쪽으로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는 그 소리 나는 곳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그는 모닥불가에 가 섰다. 확 끼치는 온기가 죽은 사람을 살릴 것같이 훈훈하였다.
「우선 살 것 같다―」
오므라 들었던 전신의 근육이 조곰씩 조곰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불! 흥! 불―내 심장을 태우고 내 전신의 혈관과 신경을 불사르고 내 집 내 세간 내 재산을 불살라 버린 불! 이 불이 지금 나의 몸을 이 얼어 죽게 된 나의 몸을 뎁히어 주다니! 장작을 하나씩 하나씩 뜬숯을 만들고 있는 조고만 화염들! 장래에는 또 무엇 무엇을살라 뜬숯을 만들려는지! 그것은 한 물체가 탄소로 변하는 현상에만 그칠까―산화작용? 아하 좀더 의미가 있지나 않을까?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그의 눈앞에는 이제 한 새로운 우주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곳은 여지껏 그가 싸여 있던 그 검은 빛의 분위기를 대신하여 밝은 빛의 정화된 공기가 있었다. 차디찬 무관심을 대신하여 동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지금 일보 일보 그 세계를 향하여 전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리 오너라. 그대 배고픈 자여!」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그대 심혈의 노력에 보수받지 못하는 자여!」
이러한 소리도 들렸다.
「그대는 노력을 버리지 말 것이야. 보수가 있을 것이니!」
이러한 소리가 또 들려오기도 하였다.
「꽝! 꽝!」
그때 이 소리는 그의 귀 밑까지 와서 뚝 그쳤다. 그리하고는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 있는 모닥불가에 모여들었다.
「불이 다― 꺼졌네!」
「장작을 좀더 가져 오지!」
굵은 장작이 징겨졌다. 마른 장작은 푸지직 소리를 지르며 타올랐다. 그리하여 검푸른 연기가 부근을 흐리어 놓았다.
「에― 추워― 에― 뜨시다」
모든 사람들의 곱은 입술에는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기는 검고 불길은 붉었다. 푸지직 소리는 여전히 났다. 이제 그의 눈앞에 나타났던 새로운 우주는 어느 사이에인지 소멸되고 해수욕 도구(道具)를 불사르던 어느 장면이 환기되었다.
「불이냐! 불이냐!」
그의 심장은 높이 뛰었다. 그 고동은 가슴에 안기어 있는 어린것을 눌러 죽일 것 같았다. 그는 품안의 것을 끌러서는 모닥불 곁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가슴을 확 풀어 헤치고 마음껏 그 불에 안기어 보았다. 새로이 끼쳐오는 불기운은 그의 뛰는 가슴을 한층이나 더 건드리어 놓는 것 같았다.
무슨 동기로인지 그의 머리에는 알콜이라는 것이 연상되었다.
「에―ㅅ? 불? 불이냐?」
어린것을 모닥불 곁에 놓은 채 그는 일직선으로 그 선로를 밟아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였다. 그의 시야를 속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선로 침목(枕木)이 끝없이 늘여 놓여섰을 뿐이었다. 그의 전신의 혈관은 이제 순환을 시작한 것 같았다.
「누구야, 누구야」
「앗!」
「누구야 어디 가는 거야」
「아― 저 불! 불!」
「하……!」
그의 전신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 인제 죽을 때가 돌아왔나 보다! 아니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 돌아왔나 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 사람은 그의 그 모양을 조소와 경멸의 표정으로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최후로 새 우주가 그의 앞에는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보십시오!」
그는 수작하기 곤란한 이 자리에서 이렇듯 입을 열어 보았으나 별로 그 사람에게 대하여 할 말은 없었다. 그는 몹시 머뭇머뭇하였다.
「왜 그리오?」
「저 오늘이 며칠입니까?」
「오늘? 십이월 십이일?」
「네!」
기적일성과 아울러 부근의 ‘시그낼’은 내려졌다. 동시에 남행열차의 기다란 장사(長蛇)가 그들의 섰는 곳으로 향하여 달려왔다.
「여보, 여보 여보 기차! 기차!」
「…………」
「여보, 저거! 이리 비켜!」
「…………」
「앗!」
그는 지금 모든 세상에 끼치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받지 못하였던 모든 거룩한 성도(聖徒)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새로운 우주의 명랑한 가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일상에 볼 수 없었던 밝고 신선한 자연과 상록수(常綠樹)가 보였고 그의 귀에는 일상에 들을 수 없었던 유량(嚠喨45) 우아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가 호흡하는 공기는 맑고 따스하고 투명하였고 그가 마시는 물은 영겁을 상징하는 영험의 생명수였다. 그는 지금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선택되어 심판의 궁정(宮廷)을 향하여 걷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후에 그의 머리에 얹혀질 월계수의 황금관을 생각할 때에 피투성이 된 그의 일신은 기쁨에 미쳐 뛰었다. 대 자유를 찾아서 우주애(宇宙愛)를 찾아서 그는 이미 선택된 길을 걷고 있는 데 다름 없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여 보면 불을 피하여 선로 위에 떨고 섰던 그는 과연 어디로 갔던가.
그는 확실히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보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그의 영락한 육체 위로는 무서운 ‘에너지’의 기관차의 차륜이 굴러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의 피곤한 뼈를 분쇄시키고 타고 남은 근육을 산산히 저며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기관차의 ‘피스톤’은 그의 해골을 이끌고 그의 심장을 이끌고 검붉은 핏방울을 칼날로 희푸르러 있는 선로 위에 뿌리며 십리나 이십리 밖에 있는 어느 촌락의 정거장까지라도 갔는지도 모른다. 모닥불을 쪼이던 철로 공사의 인부들도, 부근 민가의 사람들도 황황히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까에 불을 피하여 달아나던 그의 면영은 찾을 수도 없었다. 떨어진 팔과 다리, 동구(瞳球), 간장(肝臟), 이것들을 차마 볼 수 없다는 가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걸어가는 그에게 전별의 마지막 만가(輓歌)를 쓸쓸히 들려주었다.
그 사람은 그가 십유여 년 방랑생활 끝에 고국의 첫발길을 실었던 그 기관차 속에서 만났던 그 철도국에 다닌다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너무나 우연한 인과(因果)를 인식치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알거나 모르거나 인과는 그 인과의 법칙에만 충실스러이 하나에서 둘로, 그리하여 셋째로 수행되어 가고만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이 말을 그는 그 같은 사람에게 우연히 두 번이나 물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십이월 십이일!」 이 대답을 그는 같은 사람에게서 두 번이나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그들에게 다만 모를 것으로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인과에 우연이 되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인과의 법칙 가운데에서 우연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하면 그 바퀴가 그의 허리를 넘어간 그 기관차 가운데에는 C간호부가 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나 사람은 설명하려 하는가? 또 C간호부가 왁자지껄한 차창 밖을 내어다보고 그리고 그 분골쇄신한 검붉은 피의 지도(地圖)를 발견하였을 때 끔찍하다하여 고개를 돌렸던 일은 어떻게나 설명하려는가? 그리고 C간호부가 닫친 차창에는 허연 성에가 슬어 있었다는 것은 어찌나 설명하려는가? 이뿐일까, 우리는 더욱이나 근본적 의아에 봉착(逢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지금 이 C간호부가 타고 있는 객차의 고간이 그저께 그가 타고 오던 그 고간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도 역시 그 같은 자리였다 하면 그것은 또한 어찌나 설명하려느냐?
북풍은 마른 나무를 흔들며 불어 왔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참새들은 전선 위에서 배고픔으로 추운 날개를 떨며 쉬이고 있었다.
그가 피를 남기고 간 세상에는 이다지나 깊은 쇠락의 겨울이었으나 그러나 그가 논공행상을 받으려 행진하고 있는 새로운 우주는 사시상춘이었다.
한 영혼이 심판의 궁정을 향하여 걸어가기를 이미 출발한 지 오래니 인생의 어느 한 구절이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 다 몰켜가고 난 아무도 없는 모닥불 가에는 그가 불을 피하여 달아날 때 놓고 간 그 어린 젖먹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끼쳐오는 온기가 퍽 그 어린것의 피부에 쾌감을 주었던지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어 있는 깊이 모를 창공을 그 조고마한 눈으로 뜻있는 듯이 쳐다보며 소리없이 누워있었다. 강보(襁褓) 틈으로 새어나와 흔들리는 세상에도 조고맣고 귀여운 손은 일만년의 인류역사가 일찍이 풀지 못하고 고만둔 채의 대우주의 철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근에는 그것을 알아 들을 수 있는 ‘파우스트’의 노철학자도 없었거니와 이것을 조소할 범인(凡人)들도 없었다.
어린 것은 별안간 사람이 그리웠던지 혹은 배가 고팠던지 ‘으아’ 울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시작되는 인간의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으아!」
과연 인간세계에 무엇이 끝났는가. 기막힌 한 비극이 그 종막을 내리우기도 전에 또 한 개의 비극을 다른 한 쪽에서 벌써 그 막을 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단조로운 이 비극에 피곤하였을 것이나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연출하기도 결코 잊지는 아니하여 또 그것을 구경하기에도 결코 배부르지는 않는다.
「으아!」
어떤 사람은 이 소리를 생기에 충만하였다 일컬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확실히 인생극의 첫막을 여는 ‘사이렌’인 것에도 틀림은 없다.
「으아!」
한 인간은 또 한 인간의 뒤를 이어 또 무슨 단조로운 비극의 각본을 연출하려 하는고. 그 소리는 오늘에만 ‘단조’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인가.
「으아!」
여전히 그 소리는 그치지 아니하려는가.
「으아!」
너는 또 어느 암로(闇路)를 한 번 걸어보려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일찍이 이곳을 떠나려는가. 그렇다. 그 모닥불이 다 꺼지고 그리고 맹렬한 추위가 너를 엄습할 때에는 너는 아마 일찌감치 행복의 세계를 향하여 떠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으아!」
「으아!」
이 소리가 약하게 그리하여 점점 강하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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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갈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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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自殺 (1)

2.本質的 (2)

3.致命的 (3)

4.繩 (4)

5.渡繩師 (5)

6.질풍신뢰(疾風迅雷); 심한 바람과 번개 또는 그것처럼 빠르고 모짐. (6)

7.애총; 아총(兒冢). 어린 아이의 무덤. (7)

8.자심(滋甚); 점점 더 심함. (8)

9.신호시(新戶市); 고베시. 일본 대판만에 면한 항구도시. (9)

10.세간기명; 집안살림에 쓰는 온갖 도구. 기명(器皿)은 그릇붙이. (10)

11.기필(期必); 꼭 되기를 기약함. (11)

12.도포업(塗布業); 약 따위를 바르는 직업. 여기서는 페인트칠을 하는 직업을 가리킴. (12)

13.앵도지리-뻐찌; 봄 과일들을 가리킴. 버찌는 벚나무 열매. 당시 서울의 풍속의 하나. (13)

14.병문(屛門); 골목에 접어드는 어귀의 길가. (14)

15.명고옥(名古屋); 나고야. 일본 중부에 있는 도시. (15)

16.항(巷); 거리. 골목. (16)

17.만하탄; Manhattan. 당시 표기는 망하탕. (17)

18.화이트 호스; Whitehalls. 당시 표기는 화이트홀스. (18)

19.법선(法線); 곡선이나 곡면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선. (19)

20.슬로우프; slope. 비탈. 사면. 당시 표기는 「스로-프」. (20)

21.맥진(驀進); 한눈팔 겨를이 없이 힘차게 나아감. (21)

22.토로코; 트럭. 공사용 궤도차를 일컬음. (22)

23.마멸(馬蔑); 모멸의 착오인 듯. (23)

24.토로; 토로코의 준말. (24)

25.기절(期節); 시절. 계절. (25)

26.지질리워; 기운이 꺾여 눌린. (26)

27.간기(癎氣); 지랄병. 염병. (27)

28.계제적(階梯的); 차례차례. (28)

29.푸로마이트; Bromide. 배우나 운동선수 등의 초상 사진. (29)

30.야료(惹鬧); 생트집을 하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 (30)

31.차인잔고(差引殘高); 남의 가게에서 장사하는 일에 시중드는 사람의 수지(收支)를 제한 나머지 이익. 여기서는 삶의 보람이나 결과를 뜻함. (31)

32.낭인(浪人); 상전없는 사무라이. 떠돌이. (32)

33.객관(客館); 객지의 숙소. (33)

34.여중(女中); 하녀.(일본어) (34)

35.명도(冥途); 죽은 영혼이 가는 세계. (35)

36.임리(淋漓); 피·땀·물 등이 흘러 떨어지는 모양. (36)

37.완이(莞爾)히 웃었다; 완이이소(完爾而笑). 빙그레 웃었다. (37)

38.다나; 붕(棚)의 일본어. 선반. (38)

39.따개꾼; 소매치기. (39)

40.수형(手形); 어음의 옛말. (40)

41.화태(樺太); 사할린의 일본명. 카라후토. (41)

42.미두(米豆); 현물 없이 투기적 약속으로 곡물을 거래하는 일. 인천, 군산 등지의 미두 취인소에서 성행한 일제하의 상업의 한 제도. (42)

43.심평; 형편. (43)

44.천애(天涯); 천애이역(天涯異域) 또는 천애지각(天涯地角)의 준말. 아득히 먼 곳을 뜻함. (44)

45.음악의 음색이 거침없고 똑똑함 (45)

[출처] http://www.jikji.org/12%EC%9B%94%2012%EC%9D%BC?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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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정문 외에 따로 만든 작은 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 아이 아아 아야!”
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 온다. 샛문을 열려던 박씨는 뒷문을 밀었다.
장독대 밑, 비스듬한 켠 아래, 아다다가 입을 헤 벌리고 넙적 엎더져, 두 다
리만을 힘없이 버지럭거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핀으로 한 발쯤 나가선 깨어
진 동이(배가 부르고 아가리가 넓으며 키가 작고 양 옆에 손잡이가 달린 질
그릇) 조각이 질서 없이 너저분하게 된장 속에 묻혀 있다.
“아이구메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년이 동이를 또 잡았구나! 이년아! 너
더러 된장 푸래든 푸래?”
어머니는 딸이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데 가는 동정
심보다, 깨어진 동이만이 아깝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어 어마! 아다아다 아다 아다아다…….”
모닥불을 뒤집어쓰는 듯한 끔찍한 어머니의 음성을 또다시 듣게 되는 아다
다는, 겁에 질려 얼굴에 시퍼런 물이 들며 넘어진 연유를 말하여 용서를 빌
려는 기색이나, 말이 되지를 않아 안타까워한다.
아다다는 벙어리였던 것이다. 말을 하렬(하려 할) 때에는 한다는 것이, 아다
다 소리만이 연거푸 나왔다. 어찌어찌 가다가 말이 한 마디씩 제법 되어 나
오는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쉬운 말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이것을 조롱 삼아 확실이라는 뚜렷한 이름이 있었지만, 누구나 그를
부르는 이름은 아다다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자연히 이름으로 굳어져, 그 부
모네까지도 그렇게 부르게 되었거니와, 그 자신조차도 “아다다!” 하고 부
르면 마땅히 들을 이름인 듯이 대답을 했다.
“이년까타나 끌이 세누나! 시집엘 못 가갔음은 오늘은 어드메든가(어디든
지) 나가서 뒈디고 말아라, 이년아! 이년아! 아, 이년아!”
어머니는 눈알을 가로세워 날카롭게도 흰자위만으로 흘기며 성큼 문턱을 넘
어선다.
아다다는 어머니의 손길이 또 자기의 끌채(머리채)를 감아 쥘 것을 연상하고
몸을 겨우 뒤채 비꼬아 일어서서 절룩절룩 굴뚝 모퉁이로 피해 가며 어쩔
줄을 모르고 일변 고개를 좌우로 둘러 살피며 아연하게도,
“아다 어 어마! 아다 어마 아다다다다다”
하고 부르짖는다. 다시는 일을 아니 저지르겠다는 듯이, 그리고 한 번만 용
서를 하여 달라는 듯싶게. 그러나 사정 모르는 체 기어이 쫓아간 어머니는,
“이년! 어서 뒈데라. 뒈디기 싫건(싫거든) 시집으로 당장 가거라. 못 가간?

그리고 주먹을 귀 뒤에 넌지시 얼메고 마주선다. 순간, 주먹이 떨어지면? 하
는, 두려운 생각에 오싹하고 끼치는 소름이, 튀해(새나 짐승의 털을 뽑기 위
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내) 논 닭같이 전신에 돋아나는 두드러기를
느끼는 찰나, ‘턱’ 하고 마침내 떨어지는 주먹이 어느새 끌채를 감아쥐고
갈 지(之) 자로 흔들어 댄다.
“아다 어어 어마! 아 아고 어 어마!”
아다다는 떨며 빌며 손을 몬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한번 손을 댄 어머니는
그저 죽어 싸다는 듯이 자꾸만 흔들어 댄다. 하니, 그렇지 않아도 가꾸지 못
한 텁수룩한 머리는 물결처럼 흔들리며 구름같이 피어나선 얼크러진다.
그래도 아다다는 그저 빌 뿐이요, 조금도 반항하려고도 않는다. 이런 일은
거의 날마다 지나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한대야, 그것은 도리어 매까지 사는
것이 됨을 아는 것이다. 집에 일이 아무리 밀려 돌아가더라도 나 모르는 체
손 싸매고 들어앉았으면 오히려 이런 봉변은 아니 당할 것이, 가만히 앉았지
는 못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치에 가까운 그의 성격은 무엇엔지 힘에 맞히는 노력
이 있어야 만족을 얻는 듯했다. 시키건, 안 시키건, 헐하나(힘들지 아니하나),
힘차나(힘드나), 가리는 법이 없이 하여야 될 일로 눈에 띄기만 하면 몸을
아끼는 일이 없이 하는 것이 그였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고된 일은 실로 아
다다가 혼자서 치워 놓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이 반갑지 않았다. 둔한 지혜로 마련(궁리나 계획) 없
이 뼈가 부러지도록 몸을 돌보지 않고, 일종 모험에 가까운 짓을 하게 되므
로, 그 반면에 따르는 실수가 되레 일을 저질러 놓게 되어, 그릇 같은 것을
깨쳐 먹는 일은 거의 날마다 있다 하여도 옳을 정도로 있었다.
그래도 아다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집안 일을 못 치겠다면 모르지만, 그는
참례(참여)를 하지 않아도 행랑에서 차근차근히 다 해줄 일을 쓸데없이 가로
맡아선 일을 저질러 놓고 마는 데에 그 어머니는 속이 상했다.
본시 시집을 보내기 전에도 그 버릇은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벙어리인 데다
행동까지 그러하였으므로, 내용 아는 인근에서는 그를 얻어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열아홉 고개를 넘기도록 처묻어 두고 속을 태우다 못해 깃
부(지참금)로 논 한 섬지기를 처넣어 똥 치듯 치워 버렸던 것이, 그만 오 년
이 멀다 다시 쫓겨와, 시집에는 아예 갈 생각도 아니하고 하루 같은 심화(마
음속에 울적하게 일어나는 화)를 올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역겨운 마음에 아
다다가 실수를 할 때마다 주릿대(모진 벌)를 내리고 참례를 말라건만 그는
참는다는 것이 그 당시뿐이요, 남이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속이 쏘는 듯이 슬
그미(슬그머니) 나와서 곁을 슬슬 돌다가는 손을 대고 만다.
바로 사흘 전엔가도 무명 뉨(옷감을 잿물에 담가다가 솥에 찐 것)을 낼 때
홀짝 달은 솥뚜껑을 마련 없이 맨손으로 열다가 뜨거움을 참지 못해 되는
대로 집어 엎는 바람에, 그만 자배기(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
그릇)를 깨치고 욕과 매를 한바탕 겪고 났었건만, 어제 저녁 행랑 색시더러
오늘은 묵은 된장을 옮겨 담아야 되겠다고 이르는 말을 어느 겨를에 들었던
지, 아다다는 아침밥이 끝나자 어느새 나가서 혼자 된장을 퍼 나르다가 그만
또 실수를 한 것이었다.
“못 가간? 시집이! 못 가간? 이년! 못 가갔음 죽어라!”
움켜쥐었던 머리를 힘차게 휙 두르며 밀치는 바람에 손에 감겼던 머리카락
이 끊어지는지 빠지는지 무뚝 묻어나며 아다다는 비칠비칠 서너 걸음 물러
난다.
순간 정신이 어찔해진 아다다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써 버지럭거리며 삐치
는 다리에 겨우 진정을 얻어 세우자,
“아다 어마! 아다 어마! 아다 아다!”
하고 다시 달려들 듯이 눈을 흘기고 섰는 어머니를 향하여 눈물 글썽한 눈
을 끔벅 한 번 감아 보이고, 그리고 북쪽을 손가락질하여, 어머니의 말대로
시집으로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어라도 버리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이
며,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허청허청 대문 밖으로 몸을 이끌어 냈다.

나오기는 나왔으나 갈 곳이 없는 아다다는 마당귀를 돌아서선 발길을 더 내
놓지 못하고 우뚝 섰다.
시집으로 간다고는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의 매는 어머니의  그것
보다 무섭다. 그러면 다시 집으로 들어가나? 이번에는 외상 없는 매가 떨어
질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 없는 갈 곳을 뒤 짜보자니, 눈물이 주
는 위로밖에 쓸데없는 오 년 전 그 시집이 참을 수 없이 그립다.
―치울세라(추울까), 더울세라, 힘이 들까, 고단할까, 알뜰살뜰히 어루만져 주
던 시부모, 밤이면 품속에 꼭 껴안아 피로를 풀어 주던 남편, 아, 얼마나 시
집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던 것인가?
참으로, 아다다가 처음 시집을 가서의 오 년 동안은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
에 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벙어리라는 조건이 귀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
으나, 돈으로 아내를 사지 아니하고는 얻어 볼 수 없는 처지에서, 스물여덟
살에 아직 장가를 못 들고 있는 신세로 목구멍조차 치기 어려운 형세이었으
므로, 아내를 얻게 되기의 여유를 기다리기까지에는 너무도 막연한 앞날이었
다. 벙어리나마 일생을 먹여 줄 것까지 가지고 온다는 데 귀가 번쩍 띄어 그
자리를 앗기울까(빼앗길까) 두렵게 혼사를 지었던 것이니, 그로 인해서 먹고
살게 되는 시집에서는 아다다를 아니 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또한 아다다는 못 하는 일이 없이 일 잘하고,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조금도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생활고(생활의 어려움)가
주는 역경(불행한 환경)이 쓸데없이 서로 눈독(욕심 내어 눈여겨 봄)을 짓게
하여, 불쾌한 말만으로 큰소리가 끊일 새 없이 오고 가던 가족은, 일시에 봄
비를 맞는 동산같이 화락한(화평하고 즐거운) 웃음의 꽃이 피었다.
원래, 바른 사람이 못 되는 아다다에게는 실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로 인해서 밥을 먹게 되는 시집에서는 조금도 역겹게 안 여겼고, 되레 위로
를 하고 허물을 감추기에 서로 힘을 썼다.
여기에 아다다가 비로소 인생의 행복을 느끼며, 시집 가기 전 지난날 어머니
아버지가 쓸데없는 자식이라는 구실 밑에, 아니, 되레 가문을 더럽히는 앙화
(殃禍, 재앙) 자식이라고 사람으로서의 푼수에도 넣어 주지 않고 박대하던
일을 생각하고는, 어머니 아버지를 원망하는 나머지 명절 목시(대목 때)나
제향(제사) 때이면 시집에서는 그렇게도 가 보라는 친정이었건만, 이를 악물
고 가지 않고 행복 속에 묻혀 살던 지나간 그 날이 아니 그리울 수가 없었
다.
그러나 그 날은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영원한 꿈속에 흘러가고 말았다. 해
를 거듭하며 생활의 밑바닥에 깔아 놓았던 한 섬지기라는 거름이 차츰 그들
을 여유한 생활로 이끌어, 몇 백 원이란 돈이 눈앞에 굴게 되니 까닭 없이
남편 되는 사람은 벙어리로서의 아내가 미워졌다.
조그만 실수가 있어도 눈을 흘겼다. 그리고 매를 내렸다. 이 사실을 아는 아
버지는 그것은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리는 짓이라고 타이르나,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자간에 충돌이 때때로 일어났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에게는 감히
하고 싶은 행동을 못 하는 아들은 그 분을 아내에게로 돌려 풀기가 일쑤였
다.
“이년 보기 싫다! 네 집으로 가거라.”
그리고 다음에 따르는 것은 매였다. 그러나 아다다는 참아 가며 아내로서의,
그리고 며느리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이것이 시부모로 하여금 더욱 아다다를
귀엽게 만드는 것이어서, 아버지에게서는 움직일 수 없는 며느리인 것을 깨
닫게 된 아들은, 가정적으로 불만을 느끼게 되어 한 해의 농사를 지은 추수
를 온통 팔아 가지고 집을 떠나서, 마음의 위안을 찾아 돌다가 주색(술과 여
자)에 돈을 다 탕진하고(다 써 버리고) 동무들과 물거품같이 밀리어 안동현
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이 투기적인(일의 성공과 실패가 불확실하고 모험적인) 도시에서
뒹굴며 노동의 힘으로 밑천을 얻어선 ‘양화(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와 ‘
은떼루’에 투기하여 황금을 꿈꾸어 오던 것이 기적적으로 맞아 나기 시작
하여, 이태(2년) 만에는 2만 원에 가까운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불만이던 완전한 아내로서의 알뜰한 사랑에 주렸던 그는, 돈에 따르
는 무수한 여자 가운데서 마음대로 흡족히 골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새로운 살림을 꿈꾸는 일변 새로이 가옥(집)을 건축함과 동시에 아
다다를 학대함이 전에 비할 정도가 아니었다. 이에는, 그 아버지도 명민하고
(사리에 밝으며 민첩하고) 인자한 남 부끄럽지 않은 뻐젓한 새 며느리에게
마음이 쏠리는 나머지, 이미 생활은 걱정이 없이 되었으니 아다다의 깃부로
서가 아니라도 유족할(풍족할) 앞날을 돌아볼 때, 아들로서의 아다다에게 대
하는 태도는 조금도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시부모의 눈에
서까지 벗어나게 된 아다다는 호소할 곳조차 없는 사정에, 눈감은 남편의 매
를 견디다 못해 집으로 쫓겨오게 되었던 것이니, 생각만 하여도 옛 매 자리
가 아픈 그 시집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찾아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에 있게 되니 그것보다는 좀 헐할망정, 어머니의 매도 결코 견디기
에 족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날마다 더 심해만 왔다. 오늘도 조금만
반항이 있었던들, 어김없이 매는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로 가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야 그저 이 세상에서는 수롱이
네 집밖에 또 찾아갈 곳은 없었다. 수롱은 부모 동생조차 없는 삼십이 넘은
총각으로,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하여 준다고 믿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리
하여 쫓기어 날 때마다 그를 찾아가선 마음의 위안을 얻어 오던 것이다. 아
다다는 문득 발걸음을 떼어 아지랑이 얼른거리는 마을 끝 산턱 아래 떨어져
박힌 한 채의 오막살이를 향하여 마당귀를 꺾어 돌았다.

수롱은 벌써 일 년 전부터 아다다를 꾀어 왔다. 시집에서까지 쫓겨난 벙어리
였으나, 김 초시의 딸이라, 스스로도 낮추 보여지는 자신으로서는 거연히 염
(무엇을 하려는 생각)을 내지 못하고 뜻 있는 마음을 건너 볼 길이 없어 속
을 태워 가며 눈치만 보아 오던 것이, 눈치에서보다는 베풀어진 동정이 마침
내, 아다다의 마음을 사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아다다를 보기만 하면 따라다니며 놀렸다. 아니, 어른들까지도 “
아다다, 아다다.” 하고 골을 올려서 분하나, 말을 못 하고 이상한 시늉을 하
며 투덜거리는 것을 봄으로 좋아라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래서 아다다는 사람을 싫어하였다. 집에 있으면 어머니의 욕과 매, 밖에
나오면 뭇 사람들의 놀림, 그러나 수롱이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아
이들이 따라다닐 때에도 남 아니 말려 주는 것을 그는 말려 주고, 그리고,
매에 터질 듯한 심정을 풀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다다는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수롱을 생각해 오던 것이, 얼마 전
부터는 찾아 다니게까지 되어 동네의 눈치에도 이미 오른 지 오랬다.
그러나 아다다의 집에서도 그 아버지만이 지처(地處)를 가지기 위하여 깔맵
게 아다다의 행동을 경계하는 듯하고, 그 어머니는 도리어 수롱이와 배가 맞
아서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고 어디로든지 달아났으면 하는 눈치를 알
게 된 수롱이는,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까지 내어놓다시피 그를 사귀어 온
다.
아다다는 제 집이나처럼 서슴지도 않고 달리어오자마자 수롱이네 집문을 벌
컥 열었다.
“아, 아다다!”
수롱은 의외에 벌떡 일어섰다.
“너 또 울었구나!”
울었다는 것이 창피하긴 하였으나, 숨길 차비가 아니다. 호소할 길 없는 가
슴속에 꽉찬 설움은 수롱이의 따뜻한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지어 달램)가 그
렇게도 그리웠는지 모른다.
방 안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쫓기어 난 이유를 언제나같이 낱낱이 말했다.
“그러기(그러니까) 이젠 아야, 다시는 집으로 가지 말구 나하구 둘이서 살
아, 응?”
그리고 수롱은 의미 있는 웃음을 벙긋벙긋 웃어 가며 아다다의 등을 척척
뚜드려 달랬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것을 영원히 만들어 보고 싶
은 욕망에 불탔던 것이다.
그러나 아다다는,
“아다 무 무서! 아바 무 무서! 아다 아다다다!”
하고 그렇게 한다면 큰일 난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집에서 학대를
받고 있느니보다는 수롱의 사랑 밑에서 살았으면 오죽이나 행복되랴! 다시
집으로는 아니 들어가리라는 생각이 없었던 바도 아니었으나, 정작 이런 말
을 듣고 보니, 무엇엔지 차마 허하지(허락하지) 못할 것이 있는 것 같고, 그
렇지 않은지라 눈을 부릅뜨고 수롱이한테 다니지 말라는 아버지의 이르던
말이 연상될 때 어떻게도 그 말은 엄한 것이었다.
“우리 둘이 달아났음 그만이디, 무섭긴 뭐이 무서워?”
“…….”
아다다는 대답이 없다.
딴은 그렇기도 한 것이다. 당장 쫓기어 난 몸이 갈 곳이 어딘고? 다시 생각
을 더듬어 볼 때 어머니의 매는 아버지의 그 눈총보다 몇 배나 더한 두려움
으로 견딜 수 없이 아픈 것이다. 그러마고 대답을 못 하고 거역한 것이 금시
후회스러웠다.
“안 그래? 무서울 게 뭐야. 이젠 아야 집으루 가지 말구 나하구 있어, 응?

“응, 아다 이 있어, 아다 아다.”
하고 아다다는 다시 있자는 수롱이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듯이, 그리고
살길은 이제 찾기었다는 듯이, 한숨과 같이 빙긋 웃으며 있겠다는 뜻을 명백
히 보이기 위하여 고개를 주억이며 혓바닥을 손으로 툭툭 두드려 보인다.
“그렇지 그래, 정 있어야 돼. 응?”
“응, 이서 이서 아다 아다.”
“정말이야?”
“으, 응, 저 정 아다 아다.”
단단히 강문(다짐)을 받고 난 수롱이는 은근히 솟아나는 미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벙어리인 아다다가 흡족할 이치는 없었지만, 돈으로 사지 아니하고는 아내라
는 것을 얻어 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저 생기는 아내는 벙어리였어도 족했
다. 그저 자기의 하는 일이나 도와 주고, 아들 딸이나 낳아 주었으면 자기는
게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내를 얻으려고 십여 년 동안을 불피풍우(비바
람을 무릅쓰고 일을 함) 품을 팔아 궤(물건을 넣도록 나무로 네모 나게 만든
그릇) 속에 꽁공 묶어 둔 일백오십 원이란 돈이 지금에 와서는, 아내 하나를
얻기에 그리 부족할 것이 아니나, 장가를 들지 아니하고 아다다를 꼬여 온
이유도, 아다다를 꼬이므로 돈을 남겨서, 그 돈으로는 살림의 밑천을 만들어
가정의 마루를 얹자는 데서였던 것이다. 이제 그 계획이 은근히 성공에 가까
워 옴에 자기도 남과 같이 가정을 이루어 보게 되누나 하니, 바라지도 못하
였던 인생의 행복이 자기에게도 이제 찾아오는 것 같았다.
“우리 아다다.”
수롱이는 아다다의 등에 손을 얹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다 아다.”
아다다도 만족한 듯이 히쭉 입이 벌어졌다.

그 날 밤을 수롱의 품안에서 자고 난 아다다는 이미 수롱의 아내 되기에 수
줍음조차도 잊었다. 아니, 집에서 자기를 받들어 들인다 하더라도 수롱을 떨
어져서는 살 수 없으리 만큼 마음은 굳어졌다. 수롱이가 주는 사랑은 이 세
상에서는 더 찾을 수 없는 행복이리라 느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연 이 자리에 그대로 박혀서는 누릴 수 없을 것
이 다음에 남은 근심이었다. 수롱이와 같이 살자면, 첫째 아버지가 허하지
않을 것이요, 동네 사람도 부끄럽지 않은 노릇이 아니다. 이것은 수롱이도
짐짓 근심이었다. 밤이 깊도록 의논을 하여 보았으나 동네를 피하여 낯 모르
는 곳으로 감쪽같이 달아나는 수밖에는 다른 묘책(신묘한 꾀)이 없었다.
예식 없는 가약(부부가 되자는 언약)을 그들은 서로 맹세하고, 그 날 새벽으
로 그 마을을 떠나, 신미도라는 섬으로 흘러가서, 그 곳에 안주를 정하였다.
그러나 생소한 곳이므로, 직업을 찾을 길이 없었다.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섬이라, 뱃놀음을 하는 것이 제 길이었으나, 이것은 아다다가 한사코 말렸다.
몇 해 전에 자기네 동네에서도 농토를 잃은 몇몇 사람이 이 섬으로 들어와
첫 배를 타다가 그만 풍랑에 몰살을 당하고 만 일이 있던 것을 잊지 못하는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은지라, 수롱이조차도 배에는 마음이 없었다. 섬으로 왔다고는 하
지만 땅을 파서 먹는 것이 조마구(주먹) 빨 때부터 길러 온 습관이요, 손 익
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저 그 노릇만이 그리웠다.
그리하여 있던 돈으로 어떻게, 밭날갈이(며칠 동안 걸려서 갈 만큼 넓은 밭)
나 사서 조 같은 것이나 심어 가지고 겨울의 시탄(땔나무와 숯)과 양식을 대
게 하고 짬짬이 조개나 굴, 낙지, 이런 것들을 캐어서 그날 그날을 살아갔으
면 그것이 더할 수 없는 행복일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삼십 반생에 자기의 소유라고는 손바닥만한 것조차 없어, 어
떻게든 몽매(잠은 자면서 꾸는 꿈)에 그리던 땅이었는지 모른다. 완전한 아
내를 사지 아니하고 아다다를 꼬여 온 것도 이 소유욕에서였다. 아내가 얻어
진 이제, 비록 많지는 않은 땅이나마 가져 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거니
와, 또는 그만한 소유를 가지는 것이 자기에게 향한 아다다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하는데도 보다 더한 수단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본시 뱃놀음판인 섬인데, 작년에 놀궂이가 잘되었다 하여(벼 뿌리
를 파먹는 ‘놀’이란 벌레가 너무 많아서) 금년에 와서 더욱 시세를 잃은
땅은 비록 때가 기경시(起耕時, 논밭을 가는 때)라 하더라도 용이히 살 수까
지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렇게 하리라 일단 마음을 정하니, 자기도 땅을
마침내 가져 보누나 하는 생각에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아다다에게도
이 계획을 말하였다.
“우리 밭을 한 뙈기 사자, 그래두 농살 허야 사람 사는 것 같디. 내가 던답
(전답. 논밭)을 살라구 묶어 둔 돈이 있거든.”
하고 수롱이는 봐라는 듯이 실겅(물건을 얹기 위해 두 개의 긴 나무를 건너
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위에 얹힌 석유통 궤 속에서 지전(종이돈) 뭉치를
뒤져 내더니, 손끝에다 침을 발라 가며 펄딱펄딱 뒤어 보인다.
그러나 그 돈을 본 아다다는 어쩐지 갑자기 화기(생기가 도는 기색)가 줄어
든다.
수롱이는 그것이 이상했다. 돈을 보면 기꺼워할(기뻐할) 줄 알았던 아다다가
도리어 화기를 잃은 것이다. 돈이 있다니 많은 줄 알았다가 기대에 틀림으로
써인가?
“이것 봐! 그랜 봐두, 이게 일천오백 냥이야. 지금 시세에 밭 이천 평은 한
참 놀다가두 떡 먹두룩 살 건데.”
그래도 아다다는 아무 대답이 없다. 무엇 때문엔지 수심(근심)의 빛까지 역
연히 얼굴에 떠오른다.
“아니 밭이 이천 평이문 조를 심는다 하구, 잘만 가꿔 봐, 조가 열 섬에 조
짚이 백여 목 날 터이야. 그래, 이걸 개지구 겨울 한동안이야 못 살아? 그렇
거구 둘이 맞붙어 몇 해만 벌어 봐! 그 적엔(그 때엔) 논이 또 나오는 거야.
이건 괜히 생…….”
아다다는 말없이 머리를 흔든다.
“아니, 내레 이게, 거즈뿌레기(거짓말)야? 아, 열 섬이 못 나?”
아다다는 그래도 머리를 흔든다.
“아니, 고롬(그럼) 밭은 싫단 말인가?‘
“아다, 시 싫어.”
그리고 힘없이 눈을 내리깐다.
아다다는 수롱이에게 돈이 있다 해도 실로 그렇게 많은 돈이 있는 줄은 몰
랐다. 그래서 그 많은 돈으로 밭을 산다는 소리에,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모
든 행복이 여지없이도 일시에 깨어지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돈으로 인해서
그렇게 행복할 수 있던 자기의 신세는 남편(전남편)의 마음을 악하게 만듦으
로, 그리고 시부모의 눈까지 가리는 것이 되어, 필야엔(나중엔) 쫓겨나지 아
니치 못하게 되던 일을 생각하면, 돈 소리만 들어도 마음은 좋지 않던 것인
데, 이제 한푼 없는 알몸인 줄 알았던 수롱이에게도 그렇게 많은 돈이 있어
그것으로 밭을 산다고 기꺼워하는 것을 볼 때, 그 돈의 밑천은 장래 자기에
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보다는 몽둥이를 가져다 주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밭에다 조를 심는다는 것은 불행의 씨를 심는다는 것만 같았기 때문
이다.
아다다는 그저 섬으로 왔거니 조개나 굴 같은 것을 캐어서 그날 그날을 살
아가야 할 것만이 수롱의 사랑을 받는 데 더할 수 없는 살림인 줄만 안다.
그래서 이러한 살림이 얼마나 즐거우랴! 혼잣속으로 축복을 하며 수롱을 위
하여 일층 벌기에 힘을 써야 할 것을 생각해 오던 것이다.
“고롬 논을 사재나? 밭이 싫으문?”
수롱은 아다다의 의견이 알고 싶어 이렇게 또 물었다.
그러나 아다다는 그냥 힘 없는 고개만 주억일 뿐이었다. 논을 산대도 그것은
꼭 같은 불행을 사는 데 있을 것이다. 돈이 있는 이상 어느 것이든지 간 사
기는 반드시 사고야 말 남편의 심사이었음을 머리를 흔들어 댔자 소용이 없
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근본 불행인 돈을 어찌할 수 없는 이상엔 잠시라
도 남편의 마음을 거슬리므로 불쾌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아는 때문이었다.
“흥! 논이 도흔(좋은) 줄은 너두 아누나 그러나 가난한 놈에겐 밭이 논보다
나앗디 나아.”
하고 수롱이는 기어이 밭을 사기로, 그 달음에(곧바로) 거간(흥정 붙이는 것
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내세웠다.

그 날 밤.
아다다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은 아무런 근심도 없는 듯이 세상 모르고 씩씩 초저녁부터 자 내건만,
아다다는 그저 돈 생각을 하면 장차 닥쳐올 불길한 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불을 붙안고 밤새도록 쥐어 틀며 아무리 생각을 해야 그 돈을 그
대로 두고는 수롱의 사랑 밑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
지 않았다.
짧은 봄밤은 어느덧 새어,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처량히
들려 온다.
밤이 벌써 새누나 하니, 아다다의 마음은 더욱 조급하게 탔다. 이 밤으로 그
돈에 대한 처리를 하지 못하는 한, 내일은 기어이 거간이 밭을 흥정하여 가
지고 올 것이다. 그러면 그 밭에서 나는 곡식은 해마다 돈을 불켜(늘려) 줄
것이다. 그 때면 남편은 늘어 가는 돈에 따라 차차 눈은 어둡게 되어 점점
정은 멀어만 가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더 생각하기조차 무
서웠다.
닭의 울음소리에 따라 날은 자꾸만 밝아 온다. 바라보니 어느덧 창은 희그스
럼하게 비친다. 아다다는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남편을 지긋
이 팔로 밀어 보았다. 그러나 움찍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못 믿기는 무엇이
있는 듯이 남편의 코에다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대고 숨소리를 엿들었다. 씨근
씨근 아직도 잠은 분명히 깨지 않고 있다. 아다다는 슬그머니 이불 속을 새
어 나왔다. 그리고 실겅 위에 석유통을 휩쓸어 그 속에다 손을 넣었다. 그리
하여 마침내 지전 뭉치를 더듬어서 손에 쥐고는 조심조심 발자국 소리를 죽
여 가며 살그머니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일찍이 아침을 지어 먹고 나무 새기를 뽑으러 간다고 바구니를 끼
고 바닷가로 나섰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깊은 물 속에다 그 돈을 던져 버리
자는 것이다.
솟아오르는 아침 햇발을 받아 붉게 물들며 잔뜩 밀린 조수(아침에 밀려들었
다가 나가는 바닷물)는 거품을 부걱부걱 토하며 바람결조차 철썩철썩 해안은
부딪친다.
아다다는 그 바구니를 내려놓고 허리춤 속에서 지전 뭉치를 쥐어 들었다. 그
리고는 몇 겹이나 쌌는지 알 수 없는 헝겊 조각을 둘둘 풀었다. 헤집으니 1
원짜리, 5원짜리, 10원짜리 무수한 관 쓴 영감들이 나를 박대해서는 아니 된
다는 듯이, 모두를 마주 바라본다. 그러나 아다다는 너 같은 것을 버리는 데
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넘노는 물결 위에다 휙 내어 뿌렸다. 세찬
바닷바람에 차인 지전은 바람결 좇아 공중으로 올라가 팔랑팔랑 허공에서
재주를 넘어가며 산산이 헤어져, 멀리, 그리고 가깝게 하나씩 하나씩 물 위
에 떨어져서는 넘노는 물결조차 잠겼다 떴다 솟구막질을 한다.
어서 물 속으로 가라앉든디, 그렇지 않으면 흘러내려가든지 했으면 하고 아
다다는 멀거니 서서 기다리나 너저분하게 물 위를 덮은 지전 조각들은 차마
주인의 품을 떠나기가 싫은 듯이 잠겨 버렸는가 하면, 다시 기웃거리며 솟아
올라서는 물 위를 빙글빙글 돈다.
하더니 썰물이 잡히자부터 할 수 없는 듯이 슬금슬금 밑이 떨어져 흐르기
시작한다.
아다다는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밀려 내려가는 무수한 그 지전 조각들은,
자기의 온갖 불행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다시 돌아올 길이 없는 끝없는 한
바다로 내려갈 것을 생각할 때 아다다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꺼웠다.
그러나 그 돈이 완전히 눈앞에 보이지 않게 흘러내려가기까지에는 아직도
몇 분 동안을 요하여야(있어야) 할 것인데, 뒤에서 허덕거리는 발자국 소리
가 들리기에 돌아다보니 뜻밖에도 수롱이가 헐떡이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야! 야! 아다다야! 너 돈 돈 안 건새핸(가지고 갔냐)? 돈 돈 말이야, 돈…
…?”
청천의 벽력 같은 소리였다.
아다다는 어쩔 줄을 모르고 남편이 이까지 이르기 전에 어서어서 물결은 휩
쓸려 돈을 모두 거둬 가지고 흘러 버렸으면 하나, 물결은 안타깝게도 그닐그
닐 한가이 돈을 이끌고 흐를 뿐, 아다다는 그 돈이 어서 자기의 눈앞에서 자
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을 보기 위하여 그닐거리고 있는 돈 위에 쏘아 박은
눈을 떼지 못하고 쩔쩔매는 사이, 마침내 달려오게 된 수롱이 눈에도 필경
그 돈은 띄고야 말았다.
뜻밖에도 바다 가운데 무수하게 지전 조각이 널려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둥
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 수롱이는 아다다에게 그 연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미친 듯이 옷을 훨훨 벗고 첨버덩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롱이는 돈이 엉키어 도는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겨우 가슴패기까지 잠기는 깊이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흘러
내려가는 돈더미를 안타깝게도 바라보며 허우적허우적 달려갔다. 차츰 물결
은 휩쓸려 떠내려가는 속력이 빨라진다. 돈들은 수롱이더러 어디 달려와 보
라는 듯이 휙휙 솟구막질을 하며 흐른다. 그러나 물결이 세어질수록 더욱 걸
음발은 자유로 놀릴 수가 없게 된다. 더퍽더퍽 물과 싸움이나 하듯 엎어졌다
가는 일어서고 일어섰다가는 다시 엎어지며 달려가나 따를 길이 없다. 그대
로 덤비다가는 몸조차 물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 같아, 멀거니 서서 바라
보니 벌써 지전 조각들은 가물가물하고 물거품인지 지전인지도 분간할 수
없으리 만큼 먼 거리에서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눈앞
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휙 휙 하고 밀려 내려가는 거품진 물결뿐
이다.
수롱이는, 마지막으로 돈을 잃고 말았다고 아는 정도의 물결 위에 쏘아진 눈
을 돌릴 길이 없이 정신 빠진 사람처럼 그냥그냥 바라보고 섰더니, 쏜살같이
언덕 켠으로 달려오자 아무런 말도 없이, 벌벌 떨고 섰는 아다다의 중동(중
간 부분)을 사정 없이 발길로 제겼다.
“흥앗!”
소리가 났다고 아는 순간, 철썩 하고 감탕(진흙)이 사방으로 튀자 보니, 벌
써, 아다다는 해안의 감탕판에 등을 지고 쓰러져 있다.
“이―이―이…….”
수롱이는, 무슨 말인지를 하려고는 하나, 너무도 기에 차서 말이 되지를 않
는 듯 입만 너불거리다가 아다다가 움찍하는 것을 보더니, 아직도 살았느냐
는 듯이 번개같이 쫓아 내려가 다시 한 번 발길로 제겼다.
“폭!”
하는 소리와 같이 아다다는 가꿉선(경사진) 언덕을 떨어져 덜 덜 덜 굴러서
물 속으로 잠긴다.
한참 만에 보니 아다다는 복판도 한복판으로 밀려가서 솟구어 오르며 두 팔
을 물 밖으로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그 깊은 파도 속을 어떻게 헤어나랴! 아
다다는 그저 물 위를 둘레둘레 굴며 요동을 칠 뿐,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
었다. 어느덧 그 자체는 물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주먹을 부르쥔 채 우상(나무·돌·쇠붙이·흙 따위로 만든 형상)같이 서서,
굽실거리는 물결만 그저 뚫어져라 쏘아보고 섰는 수롱이는, 그 물 속에 영원
히 잠들려는 아다다를 못 잊어함인가? 그렇지 않으면 흘러 버린 그 돈이 차
마 아까워서인가?
짝을 찾아 도는 갈매기떼들은 눈물 겨운 처참한 인생 비극이 여기에 일어난
줄도 모르고 ‘끼약끼약’ 하며 흥겨운 춤에 훨훨 날아다닌 깃 치는 소리와
같이 해안의 풍경만 도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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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 아야”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밑을 찔렀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그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아내는 얼른 바늘을 빼고 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누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던 일가지를 팔꿈치로 고이고이 밀어 내려놓았다. 이윽고 눌렀던 손을 떼어보았다. 그 언저리는 인제 다시 피가 아니 나려는 것처럼 혈색이 없다 하더니, 그 희던 꺼풀 밑에 다시금 꽃물이 차츰차츰 밀려온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상처로부터 좁쌀 낟 같은 핏방울이 송송 솟는다. 또 아니 누를 수 없다. 이만하면 그 구멍이 아물었으려니 하고 손을 떼면 또 얼마 아니되어 피가 비치어 나온다.

인제 헝겊 오락지로 처매는 수밖에 없다. 그 상처를 누른채 그는 바느질고리에 눈을 주었다. 거기 쓸만한 오락지는 실패 밑에 있다. 그 실패를 밀어내고 그 오락지를 두 새끼손가락 사이에 집어올리려고 한동안 애를 썼다. 그 오락지는 마치 풀로 붙여둔 것같이 고리 밑에 착 달라붙어 세상 집혀지지 않는다. 그 두 손가락은 헛되이 그 오락지 위를 긁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왜 집혀지지를 않아!”

그는 마침내 울 듯이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것을 집어줄 사람이 없나 하는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텅 비어 있다. 어느 뉘 하나 없다. 호젓한 허영(虛影)만 그를 휘싸고 있다. 바깥도 죽은 듯이 고요하다.

시시로 퐁퐁 하고 떨어지는 수도의 물방울 소리가 쓸쓸하게 들릴 뿐. 문득 전등불이 광채(光彩)를 더하는 듯하였다. 벽상(壁上)에 걸린 괘종(掛鍾)의 거울이 번들하며, 새로 한 점을 가리키려는 시침(時針)이 위협하는 듯이 그의 눈을 쏜다. 그의 남편은 그때껏 돌아오지 않았었다.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된지는 벌써 오랜 일이다. 어느덧 7∼8년이 지났으리라. 하건만 같이 있어본 날을 헤아리면 단 일년이 될락말락 한다. 막 그의 남편이 서울서 중학을 마쳤을 제 그와 결혼하였고, 그러자 마자 고만 동경(東京)에 부급한 까닭이다.

거기서 대학까지 졸업을 하였다. 이 길고 긴 세월에 아내는 얼마나 괴로왔으며 외로왔으랴! 봄이면 봄, 겨울이면 겨울, 웃는 꽃을 한숨으로 맞았고 얼음 같은 베개를 뜨거운 눈물로 덥히었다.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쓸쓸할 제, 얼마나 그가 그리웠으랴!

하건만 아내는 이 모든 고생을 이를 악물고 참았었다. 참을 뿐이 아니라 달게 받았었다. 그것은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하는 생각이 그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준 까닭이었다. 남편이 동경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가 무엇인가? 자세히 모른다. 또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어찌하였든지 이 세상에 제일 좋고 제일 귀한 무엇이라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에 있는 도깨비의 부자(富者) 방망이 같은 것이어니 한다. 옷 나오라면 옷 나오고, 밥 나오라면 밥 나오고, 돈 나오라면 돈 나오고… 저 하고 싶은 무엇이든지 청해서 아니되는 것이 없는 무엇을, 동경에서 얻어가지고 나오려니 하였었다.

가끔 놀러오는 친척들이 비단옷 입은 것과 금지환(金指環) 낀 것을 볼 때에 그 당장엔 마음 그윽히 부러워도 하였지만 나중엔 '남편이 돌아오면…' 하고 그것에 경멸하는 시선을 던지었다.

남편이 돌아왔다. 한 달이 지나가고 두 달이 지나간다. 남편의 하는 행동이 자기가 기대하던 바와 조금 배치(背馳)되는 듯하였다. 공부 아니한 사람보다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다, 다르다면 다른 점도 있다. 남은 돈벌이를 하는데 그의 남편은 도리어 집안 돈을 쓴다. 그러면서도 어디인지 분주히 돌아다닌다. 집에 들면 정신없이 무슨 책을 보기도 하고 또는 밤새도록 무엇을 쓰기도 하였다.

'저러는 것이 참말 부자 방망이를 맨드는 것인가 보다'

아내는 스스로 이렇게 해석한다.

또 두어 달 지나갔다. 남편의 하는 일은 늘 한 모양이었다. 한 가지 더한 것은 때때로 깊은 한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슨 근심이 있는 듯이 얼굴을 펴지 않았다. 몸은 나날이 축이 나 간다.

'무슨 걱정이 있는고?'

아내는 따라서 근심을 하게 되었다. 하고는 그 여윈 것을 보충하려고 갖가지로 애를 썼다. 곧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밥상에 맛난 반찬가지를 붇게 하며 또 고음 같은 것도 만들었다. 그런 보람도 없이 남편은 입맛이 없다 하며 그것을 잘 먹지도 않았었다.

또 몇 달이 지나갔다. 인제 출입을 뚝 끊고 늘 집에 붙어있다. 걸핏하면 성을 낸다. 입버릇 모양으로 화난다, 화난다 하였다.

어느 날 새벽, 아내가 어렴폿이 잠을 깨어, 남편의 누웠던 자리를 더듬어보았다. 쥐이는 것은 이불자락뿐이다. 잠결에도 조금 실망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잃은 것을 찾으려는 것처럼, 눈을 부시시 떴다.

책상 위에 머리를 쓰러뜨리고 두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흐릿한 의식이 돌아옴에 따라, 남편의 어깨가 덜석덜석 움직임도 깨달았다. 흑 흑 느끼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아내는 정신을 바짝 차리었다. 불현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아내의 손은 가볍게 남편의 등을 흔들며 목에 걸리고 나오지 않는 소리로,

“왜 이러고 계셔요.”

라고 물어보았다.

“…”

남편은 아무 대답이 없다. 아내는 손으로 남편의 얼굴을 괴어들려고 할 즈음에, 그것이 뜨뜻하게 눈물에 젖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한 두어 달 지나갔다. 처음처럼 다시 출입이 자주로왔다. 구역이 날 듯한 술 냄새가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입에서 나게 되었다. 그것은 요사이 일이다. 오늘 밤에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초저녁부터 아내는 별별 생각을 다하면서 남편을 고대고대하고 있었다. 지리한 시간을 속히 보내려고 치웠던 일 가지를 또 꺼내었다. 그것조차 뜻같이 아니되었다. 때때로 바늘이 헛되이 움직이었다. 마침내 그것에 찔리고 말았다.

“어데를 가서 이때껏 오시지 않아!”

아내는 이제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짜증을 내었다. 잠깐 그를 떠났던 공상과 환영이 다시금 그의 머리에 떠돌기 시작하였다. 이상한 꽃을 수놓은, 흰 보(褓) 위에 맛난 요리를 담은 접시가 번쩍인다. 여러 친구와 술을 권커니 잡거니 하는 광경이 보인다. 그의 남편은 미친 듯이 껄껄 웃는다.

나중에는 검은 휘장이 스르르 하는 듯이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더니 낭자(狼藉)한 요릿상만이 보이기도 하고, 술병만 희게 빛나기도 하고, 아까 그 기생이 한 팔로 땅을 짚고 진저리를 쳐가며 웃는 꼴이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남편이 길바닥에 쓰러져 우는 것도 보이었다.

“문 열어라!”

문득 대문이 덜컥 하고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부르는 듯하였다.

“녜.”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급히 마루로 나왔다. 잘못 신은, 발에 아니 맞는 신을 질질 끌면서 대문으로 달렸다. 중문은 아직 잠그지도 않았고 행랑방에 사람이 없지 않지마는 으례히 깊은 잠에 떨어졌을 줄 알고 뛰어나감이었다. 가느름한 손이 어둠 속에서 희게 빗장을 잡고 한참 실랑이를 한다. 대문은 열렸다.

밤바람이 선득하게 얼굴에 안친다. 문 밖에는 아무도 없다! 온 골목에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 검푸른 밤 빛이 허연 길 위에 그물그물 깃들었을 뿐이었다.

아내는 무엇에 놀란 사람 모양으로 한참 멀거니 서 있었다. 문득 급거히 대문을 닫친다. 마치 그 열린 사이로 악마나 들어올 것처럼.

“그러면 바람 소리였구먼.”

하고 싸늘한 뺨을 쓰다듬으며 해쭉 웃고 발길을 돌리었다.

“아니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혹 내가 잘못 보지를 않았나?… 길바닥에나 쓰러져 있었으면 보이지도 않을 터야…”

중간문까지 다다르자 별안간 이런 생각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대문을 또 좀 열어볼까?… 아니야, 내가 헛들었지. 그래도 혹… 아니야, 내가 헛들었지.”

망설거리면서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저도 모를 사이에 마루까지 올라왔다. 매우 기묘한 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번쩍인다.

'내가 대문을 열었을 제 나 몰래 들어오지나 않았나?…'

과연 방안에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사람의 기척이 있다. 어른에게 꾸중 모시러 가는 어린애처럼 조심조심 방문 앞에 왔다. 그리고 문간 아래로 손을 대며 하염없이 웃는다. 그것은 제 잘못을 용서해줍시사 하는 어린애 같은 웃음이었다. 조심조심 방문을 열었다. 이불이 어째 움직움직하는 듯하였다.

“나를 속이랴고 이불을 쓰고 누웠구먼.”

하고 마음속으로 소곤거렸다. 가만히 내려앉는다.

그 모양이 이것을 건드려서는 큰일이 나지요 하는 듯하였다. 이불을 펄쩍 쳐들었다. 비인 요가 하얗게 드러난다. 그제야 확실히 아니 온 줄 안 것처럼,

“아니 왔구먼, 안 왔어!”

라고 울 듯이 부르짖었다.

남편이 돌아오기는 새로 두 점이 훨씬 지난 뒤였다. 무엇이 털썩하는 소리가 들리고 잇달아,

“아씨, 아씨!”

라고 부르는 소리가 귀를 때릴 때에야 아내는 비로소 아직도 앉았을 자기가 이불 위에 쓰러져있음을 깨달았다. 기실, 잠귀 어두운 할멈이 대문을 열었으리만큼 아내는 깜박 잠이 깊이 들었었다. 하건만 그는 몽경(夢境 : 꿈 속 - 편집자 주*)에서 방황하는 정신을 당장에 수습하였다. 두어 번 얼굴을 쓰다듬자 불현듯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한 다리를 마루 끝에 걸치고 한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있다. 숨소리가 씨근씨근 한다.

막 구두를 벗기고 일어나 할멈은 검붉은 상을 찡그려 붙이며,

“어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세요.”

라고 한다.

“응, 일어나지.”

나리는 혀를 억지로 돌리어 코와 입으로 대답을 하였다. 그래도 몸은 꿈적도 않는다. 도리어 그 개개 풀린 눈을 자려는 것처럼 스르르 감는다. 아내는 눈만 비비고 서 있다.

“어서 일어나셔요. 방으로 들어가시라니까.”

이번에는 대답조차 아니한다. 그 대신 무엇을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내어젓더니,

“물, 물, 냉수를 좀 주어.”

라고 중얼거렸다.

할멈은 얼른 물을 떠다 이취자(泥醉者 : 진흙처럼 취한 사람, 즉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 - 편집자 주*)의 코밑에 놓았건만, 그 사이에 벌써 아까 청(請)을 잊은 것같이 취한 이는 물을 먹으려고도 않는다.

“왜 물을 아니 잡수셔요.”

곁에서 할멈이 깨우쳤다.

“응 먹지 먹어.”

하고, 그제야 주인은 한 팔을 짚고 고개를 든다. 한꺼번에 물 한 대접을 다 들이켜버렸다. 그리고는 또 쓰러진다.

“에그, 또 눕네.”

하고, 할멈은 우물로 기어드는 어린애를 안으려는 모양으로 두 손을 내어민다.

“할멈은 고만 가 자게.”

주인은 귀치않다는 듯이 말을 한다.

이를 어찌해 하는 듯이 멀거니 서 있는 아내도, 할멈이 고만 갔으면 하였다. 남편을 붙들어 일으킬 생각이야 간절하였지마는, 할멈이 보는데 어찌 그럴 수 없는 것 같았다. 혼인한 지가 7∼8년이 되었으니 그런 파수(破羞 : 부끄러움이 없어지는 것 - 편집자 주*)야 되었으련만 같이 있어본 날을 꼽아보면, 그는 아직 갓 시집온 색시였다.

“할멈은 가 자게.”

란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입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음 그윽히 할멈이 돌아가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좀 일으켜드려야지.”

가기는커녕, 이런 말을 하고, 할멈은 선웃음을 치면서 마루로 부득부득 올라온다. 그 모양은, 마치 주인 나리가 약주가 취하시거든, 방에까지 모셔다드려야 제 도리에 옳지요, 하는 듯하였다.

“자아, 자아.”

할멈은 아씨를 보고 히히 웃어가며, 나리의 등 밑으로 손을 넣는다.

“왜 이래, 왜 이래. 내가 일어날 테야.”

하고, 몸을 움직이더니, 정말 주인이 부시시 일어난다. 마루를 쾅쾅 눌러디디며, 비틀비틀, 곧 쓰러질 듯한 보조(步調)로 방문을 향하여 걸어간다. 와지끈하며 문을 열어젖히고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아내도 뒤따라 들어왔다. 할멈은 중간턱을 넘어설 제, 몇 번 혀를 차고는, 저 갈 데로 가버렸다.

벽에 엇비슷하게 기대어있는 남편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의 말라붙은 관자놀이에 펄떡거리는 푸른 맥(脈)을 아내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남편 곁으로 다가온다. 아내의 한 손은 양복 깃을, 또 한 손은 그 소매를 잡으며 화(和)한 목성으로,

“자아, 벗으셔요.”

하였다.

남편은 문득 미끄러지는 듯이 벽을 타고 내려앉는다. 그의 쭉 뻗친 발 끝에 이불자락이 저리로 밀려간다.

“에그, 왜 이리 하셔요. 벗자는 옷은 아니 벗으시고.”

그 서슬에 넘어질 뻔한 아내는 애닯게 부르짖었다. 그러면서도 같이 따라 앉는다. 그의 손은 또 옷을 잡았다.

“옷이 구겨집니다. 제발 좀 벗으셔요.”

라고 아내는 애원을 하며, 옷을 벗기려고 애를 쓴다. 하나, 취한 이의 등이 천근(千斤)같이 벽에 척 들어붙었으니 벗겨질 리(理)가 없다. 애를 쓰다쓰다 옷을 놓고 물러앉으며,

“원 참, 누가 술을 이처럼 권하였노.”

라고 짜증을 낸다.

“누가 권하였노? 누가 권하였노? 흥 흥.”

남편은 그 말이 몹시 귀에 거슬리는 것처럼 곱삶는다.

“그래, 누가 권했는지 마누라가 좀 알아내겠소?”

하고 껄껄 웃는다. 그것은 절망의 가락을 띤, 쓸쓸한 웃음이었다. 아내도 따라 방긋 웃고는 또 옷을 잡으며,

“자아, 옷이나 먼저 벗으셔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오늘 밤에 잘 주무시면 내일 아침에 아르켜 드리지요.”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야. 왜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어. 할 말이 있거든 지금 해!”

“지금은 약주가 취하셨으니, 내일 약주가 깨시거든 하지요.”

“무엇? 약주가 취해서?”

하고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며,

“천만에, 누가 술이 취했단 말이요. 내가 공연히 이러지, 정신은 말똥말똥 하오. 꼭 이야기 하기 좋을 만해. 무슨 말이든지… 자아.”

“글쎄, 왜 못 잡수시는 약주를 잡수셔요. 그러면 몸에 축이나지 않아요.”

하고 아내는 남편의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씻는다.

이취자(泥醉者)는 머리를 흔들며,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을 듣자는 것이 아니야.”

하고 아까 일을 추상하는 것처럼, 말을 끊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어,

“옳지, 누가 나에게 술을 권했단 말이요? 내가 술이 먹고 싶어서 먹었단 말이요?”

“자시고 싶어 잡수신 건 아니지요. 누가 당신께 약주를 권하는지 내가 알아낼까요? 저… 첫째는 홧증이 술을 권하고 둘째는 '하이칼라'가 약주를 권하지요.”

아내는 살짝 웃는다. 내가 어지간히 알아맞췄지요 하는 모양이었다.

남편은 고소(苦笑)한다.

“틀렸소, 잘못 알았소. 홧증이 술을 권하는 것도 아니고, '하이칼라'가 술을 권하는 것도 아니요. 나에게 권하는 것은 따로 있어. 마누라가, 내가 어떤 '하이칼라'한테나 홀려 다니거나, 그 '하이칼라'가 늘 내게 술을 권하거니 하고 근심을 했으면 그것은 헛걱정이지. 나에게 '하이칼라'는 아무 소용도 없소. 나의 소용은 술뿐이요. 술이 창자를 휘돌아, 이것저것을 잊게 맨드는 것을 나는 취(取)할 뿐이요.”

하더니, 홀연 어조(語調)를 고쳐 감개무량하게,

“아아, 유위유망(有爲有望)한 머리를 '알코올'로 마비 아니 시킬 수 없게 하는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하고, 긴 한숨을 내어쉰다. 물큰물큰한 술냄새가 방안에 흩어진다.

아내에게는 그 말이 너무 어려웠다. 고만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벽이 자기와 남편 사이에 깔리는 듯하였다. 남편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아내는 이런 쓰디쓴 경험을 맛보았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윽고 남편은 기막힌 듯이 웃는다.

“흥 또 못 알아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홧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사회란 무엇인가? 아내는 또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리집 이름이어니 한다.

“조선에 있어도 아니 다니면 그만이지요.”

남편은 또 아까 웃음을 재우친다. 술이 정말 아니 취한 것 같이 또렷또렷한 어조로,

“허허, 기막혀. 그 한 분자(分子)된 이상에야 다니고 아니 다니는 게 무슨 상관이야. 집에 있으면 아니 권하고, 밖에 나가야 권하는 줄 아는가보아. 그런 게 아니야. 무슨 사회 사람이 있어서 밖에만 나가면 나를 꼭 붙들고 술을 권하는 게 아니야… 무어라 할까… 저 우리 조선사람으로 성립된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아니 못 먹게 한단 말이요.

…어째 그렇소?… 또 내가 설명을 해드리지. 여기 회를 하나 꾸민다 합시다. 거기 모이는 사람놈 치고 처음은 민족을 위하느니, 사회를 위하느니 그러는데,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느니 아니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하다가 단 이틀이 못되어, 단 이틀이 못되어…”

한층 소리를 높이며 손가락을 하나씩 둘씩 꼽으며,

“되지 못한 명예 싸움, 쓸데없는 지위 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 적으니…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소. 회(會)뿐이 아니라, 회사이고 조합이고… 우리 조선놈들이 조직한 사회는 다 그 조각이지.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루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 나도 전자에는 무엇을 좀 해보겠다고 애도 써보았어. 그것이 모다 수포야. 내가 어리석은 놈이었지.

내가 술을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야. 요사이는 좀 낫지마는 처음 배울 때에는 마누라도 아다시피 죽을 애를 썼지. 그 먹고 난 뒤에 괴로운 것이야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먹은 것이 다 돌아올라오고 - 그래도 아니 먹은 것보담 나았어. 몸은 괴로와도 마음은 괴롭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 사회에서 할 것은 주정군 노릇밖에 없어…”

“공연히 그런 말 말아요. 무슨 노릇을 못해서 주정군 노릇을 해요! 남이라서…”

아내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흥분이 되어 열기(熱氣) 있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불쑥 이런 말을 하였다. 그는 제 남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어니 한다. 따라서 어느 뉘보다 제일 잘 될 줄 믿는다. 몽롱하나마 그의 목적이 원대하고 고상한 것도 알았다.

얌전하던 그가 술을 먹게 된 것은 무슨 일이 맘대로 아니되어 화풀이로 그러는 줄도 어렴폿이 깨달았다. 그러나 술은 노상 먹을 것이 아니다. 그러면 패가망신하고 만다. 그러므로 하루바삐 그 화가 풀리었으면, 또다시 얌전하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날 때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이 꼭 올 줄 믿었다. 오늘부터는, 내일부터는… 하건만, 남편은 어제도 술이 취하였다. 오늘도 한 모양이다. 자기의 기대는 나날이 틀려간다. 좇아서 기대에 대한 자신도 엷어간다. 애닯고 원(寃)한 생각이 가끔 그의 가슴을 누른다. 더구나 수척해가는 남편의 얼굴을 볼 때에 그런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지금 저도 모르게 흥분한 것이 또한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못 알아듣네그려. 참, 사람 기막혀. 본정신 가지고는 피를 토하고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하지,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단 말이야. 흉장(胸臟)이 막혀서 못 산단 말이야. 에엣, 가슴 답답해.”

라고 남편은 소리를 지르고 괴로와서 못 견디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미친 듯이 제 가슴을 쥐어뜯는다.

“술 아니 먹는다고 흉장이 막혀요?”

남편의 하는 짓은 본체만체 하고 아내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부르짖었다.

그 말에 몹시 놀랜 것처럼 남편은 어이없이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 다음 순간에는 말할 수 없는 고뇌(苦惱)의 그림자가 그의 눈을 거쳐간다.

“그르지, 내가 그르지 너 같은 숙맥(菽麥)더러 그런 말을 하는 내가 그르지. 너한테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으려는 내가 그르지. 후우.”

스스로 탄식한다.

“아아 답답해!”

-문득 기막힌 듯이 외마디 소리를 치고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한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하였던고? 아내는 불시에 후회하였다. 남편의 저고리 뒷자락을 잡으며 안타까운 소리로,

“왜 어디로 가셔요. 이 밤중에 어디를 나가셔요. 내가 잘못하였습니다. 인제는 다시 그런 말을 아니하겠습니다. …그러게 내일 아침에 말을 하자니까…”

“듣기 싫어, 놓아, 놓아요.”

하고 남편은 아내를 떠다밀치고 밖으로 나간다. 비틀비틀 마루 끝까지 가서는 털썩 주저앉아 구두를 신기 시작한다.

“에그, 왜 이리 하셔요. 인제 다시 그런 말을 아니한대도…

아내는 뒤에서 구두 신으려는 남편의 팔을 잡으며 말을 하였다. 그의 손은 떨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담박에 눈물이 쏟아질 듯하였다.

“이건 왜 이래, 저리로 가!”

배앝는 듯이 말을 하고 휙 뿌리친다. 남편의 발길이 뚜벅뚜벅 중문에 다다랐다. 어느덧 그 밖으로 사라졌다. 대문 빗장 소리가 덜컥 하고 난다. 마루 끝에 떨어진 아내는 헛되이 몇 번,

“할멈! 할멈!”

하고 불렀다.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는 구두 소리는 점점 멀어간다. 발자취는 어느덧 골목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시금 밤은 적적히 깊어간다.

“가버렸구먼, 가버렸어!”

그 구두 소리를 영구히 아니 잃으려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내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는 듯이 부르짖었다. 그 소리가 사라짐과 함께 자기의 마음도 사라지고, 정신도 사라진 듯하였다. 심신(心身)이 텅 비어진 듯하였다. 그의 눈은 하염없이 검은 밤 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사회란 독(毒)한 꼴을 그려보는 것같이.

쏠쏠한 새벽 바람이 싸늘하게 가슴에 부딪친다. 그 부딪치는 서슬에 잠 못 자고 피곤한 몸이 부서질 듯이 지긋하였다.

죽은 사람에게서뿐 볼 수 있는 해쓱한 얼굴이 경련적으로 떨며 절망한 어조로 소근거렸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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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어째 없을까?"

아내가 장문을 열고 무엇을 찾더니 입안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없어?"

나는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장만 뒤적뒤적하다가 물어 보았다.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았는데……."

"……"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 하려는 것을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이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는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 창고(典當局倉庫)에 들이밀거나 고물상 한구석에 세워 두고 돈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라.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 폈던 책을 덮으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봄은 벌써 반이나 지났건마는 이슬을 실은 듯한 밤기운이 방구석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나와 사람에게 안기고 비가 오는 까닭인지 밤은 아직 깊지 않건만 인적조차 끊어지고 온 천지가 빈 듯이 고요한데 투닥투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한없는 구슬픈 생각을 자아낸다.

"빌어먹을 것 되는 대로 되어라."

나는 점점 견딜 수 없어 두 손으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며 중얼거려 보았다. 이 말이 더욱 처량한 생각을 일으킨다. 나는 또 한번, "후―" 한숨을 내쉬며 왼팔을 베고 책상에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이 순간에 오늘 지낸 일이 불현듯 생각이 난다.

늦게야 점심을 마치고 내가 막 궐련〔卷煙〕한 개를 피워 물 적에 한성은행(漢城銀行) 다니는 T가 공일이라고 놀러 왔었다.

친척은 다 멀지 않게 살아도 가난한 꼴을 보이기도 싫고 찾아갈 적마다 무엇을 뀌어 내라고 조르지도 아니하였건만 행여나 무슨 구차한 소리를 할까 봐서 미리 방패막이를 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여 나는 발을 끊고 따라서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다만 이 T는 촌수가 가까운 까닭인지 자주 우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성실하고 공순하며 소소한 소사(小事)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인물이었다. 동년배(同年輩)인 우리 둘은 늘 친척간에 비교(比較) 거리가 되었었다. 그리고 나의 평판이 항상 좋지 못했다.

"T는 돈을 알고 위인이 진실해서 그 애는 돈푼이나 모을 것이야! 그러나 K(내 이름)는 아무짝에도 못 쓸 놈이야. 그 잘난 언문(諺文) 섞어서 무어라고 끄적거려 놓고 제 주제에 무슨 조선에 유명한 문학가가 된다니! 시러베아들놈!"

이것이 그네들의 평판이었다. 내가 문학인지 무엇인지 하는 소리가 까닭 없이 그네들의 비위에 틀린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네들의 생일이나 혹은 대사(大事) 때에 돈 한푼 이렇다는 일이 없고 T는 소위 착실히 돈벌이를 하여 가지고 국수밥소래나 보조를 하는 까닭이다.

"얼마 아니 되어 T는 잘살 것이고 K는 거지가 될 것이니 두고 보아!"

오촌 당숙은 이런 말씀까지 하였다 한다. 입 밖에는 아니 내어도 친부모 친형제까지라도 심중(心中)으로는 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부모는 달라서 화가 나시면, "네가 그리하다가는 말경(末境)에 비렁뱅이가 되고 말 것이야"라고 꾸중은 하셔도, "사람이란 늦복 모르느니라" "그런 사람은 또 그렇게 되느니라" 하시는 것이 스스로 위로하는 말씀이고 또 며느리를 위로하는 말씀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하는 수 없는 놈이라고 단념(斷念)을 하시면서 그래도 잘되기를 바라시고 축원하시는 것을 알겠더라.

여하간 이만하면 T의 사람됨을 가히 알 수가 있다. 그러고 그가 우리집에 올 것 같으면 지어서 쾌활하게 웃으며 힘써 자미스러운 이야기를 하였다. 단둘이 고적(孤寂)하게 그날그날을 보내는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반가웠었다.

오늘도 그가 활발하게 집에 쑥 들어오더니 신문지에 싼 기름한 것을 '이것 봐라' 하는 듯이 마루 위에 올려놓고 분주히 구두끈을 끄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물어 보았다.

"저― 제 처의 양산(洋傘)이야요. 쓰던 것이 벌써 다 낡았고 또 살이 부러졌다나요."

그는 구두를 벗고 마루에 올라서며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벙글벙글하면서 대답을 한다. 그는 나의 아내를 보며 돌연히,

"아주머니 좀 구경하시렵니까?"

하더니 싼 종이와 집을 벗기고 양산을 펴 보인다. 흰 비단 바탕에 두어 가지 매화를 수놓은 양산이었다.

"검정이는 좋은 것이 많아도 너무 칙칙해 보이고…… 회색이나 누렁이는 하나도 그것이야 싶은 것이 없어서 이것을 산걸요."

그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살 수가 있나' 하는 뜻을 보이려고 애를 쓰며 이런 발명까지 한다.

"이것도 퍽 좋은데요."

이런 칭찬을 하면서 양산을 펴 들고 이리저리 홀린 듯이 들여다보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나도 이런 것을 하나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역력(歷歷)히 보인다.

나는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와락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오며 아내의 양산 보는 양을 빙그레 웃고 바라보고 있는 T에게,

"여보게, 방에 들어오게그려, 우리 이야기나 하세."

T는 따라 들어와 물가폭등에 대한 이야기며 자기의 월급이 오른 이야기며 주권(株券)을 몇 주 사두었더니 꽤 이익이 남았다든가 이번 각 은행 사무원 경기회(競技會)에서 자기가 우월한 성적을 얻었다든가 이런 것 저런 것 한참 이야기하다가 돌아갔었다.

T를 보내고 책상을 향하여 짓던 소설의 결미(結尾)를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여보!"

아내의 떠는 목소리가 바로 내 귀 곁에서 들린다. 핏기 없는 얼굴에 살짝 붉은빛이 돌며 어느결에 내 곁에 바싹 다가앉았더라.

"당신도 살 도리를 좀 하셔요."

"……"

나는 또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에 번쩍이며 불쾌한 생각이 벌컥 일어난다. 그러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이 묵묵히 있었다.

"우리도 남과 같이 살아 보아야지요!"

아내가 T의 양산에 단단히 자극(刺戟)을 받은 것이다. 예술가의 처 노릇을 하려는 독특(獨特)한 결심이 있는 그는 좀처럼 이런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무엇에 상당한 자극만 받으면 참고 참았던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이런 소리를 들을 적마다 '그럴 만도 하다'는 동정심이 없지 아니하나 심사가 어쩐지 좋지 못하였다. 이번에도 '그럴 만도 하다'는 동정심이 없지 아니하되 또한 불쾌한 생각을 억제키 어려웠다. 잠깐 있다가 불쾌한 빛을 드러내며,

"급작스럽게 살 도리를 하라면 어찌할 수가 있소. 차차 될 때가 있겠지!"

"아이구, 차차란 말씀 그만두구려, 어느 천년에……."

아내의 얼굴에 붉은빛이 짙어지며 전에 없던 흥분한 어조로 이런 말까지 하였다. 자세히 보니 두 눈에 은은히 눈물이 괴었더라.

나는 잠시 멍멍하게 있었다. 성낸 불길이 치받쳐 올라온다. 나는 참을 수 없다.

"막벌이꾼한테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어!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

사나운 어조로 몰풍스럽게 소리를 꽥 질렀다.

"에그……!"

살짝 얼굴빛이 변해지며 어이없이 나를 보더니 고개가 점점 수그러지며 한 방울 두 방울 방울방울 눈물이 장판 위에 떨어진다.

나는 이런 일을 가슴에 그리며 그래도 내일 아침거리를 장만하려고 옷을 찾는 아내의 심중을 생각해 보니, 말할 수 없는 슬픈 생각이 가을 바람과 같이 설렁설렁 심골(心骨)을 분지르는 것 같다.

쓸쓸한 빗소리는 굵었다 가늘었다 의연(依然)히 적적한 밤공기에 더욱 처량히 들리고 그을음 앉은 등피(燈皮) 속에서 비추는 불빛은 구름에 가린 달빛처럼 우는 듯 조는 듯 구차(苟且)히 얻어 산 몇 권 양책(洋冊)의 표제(表題) 금자가 번쩍거린다.

장 앞에 초연히 서 있던 아내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들릴 듯 말 듯 목 안의 소리로,

"으흐…… 옳지 참 그날……."

"찾었소!"

"아니야요, 벌써…… 저 인천(仁川) 사시는 형님이 오셨던 날……."

"……"

아내가 애써 찾던 그것도 벌써 전당포의 고운 먼지가 앉았구나! 종지 하나라도 차근차근 아랑곳하는 아내가 그것을 잡혔는지 아니 잡혔는지 모르는 것을 보면 빈곤(貧困)이 얼마나 그의 정신을 물어뜯었는지 가히 알겠다.

"……"

"……"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가슴이 어째 답답해지며 누구하고 싸움이나 좀 해보았으면 소리껏 고함이나 질러 보았으면 실컷 울어 보았으면 하는 일종 이상한 감정이 부글부글 피어 오르며, 전신에 이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듯 옷이 어째 몸에 끼여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이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점점 구차한 살림에 싫증이 나서 못 견디겠지?"

아내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게 정신을 잃고 섰다가 그 게슴츠레한 눈이 둥그래지며,

"네에? 어째서요?"

"무얼 그렇지!"

"싫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이렇게 말이 오락가락함을 따라 나는 흥분의 도(度)가 점점 짙어 간다. 그래서 아내가 떨리는 소리로,

"어째 그런 줄 아셔요?"

하고 반문할 적에,

"나를 숙맥(菽麥)으로 알우?"

라고, 격렬(激烈)하게 소리를 높였다.

아내는 살짝 분한 빛이 눈에 비치어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괘씸하다는 듯이 흘겨보며,

"그러면 그것 모를까! 오늘날까지 잘 참아 오더니 인제는 점점 기색이 달라지는걸 뭐! 물론 그럴 만도 하지마는!"

이런 말을 하는 내 가슴에는 지난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얼른얼른 나타난다.

육 년 전에(그때 나는 십육 세이고 저는 십팔 세였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아니 되어 지식에 목마른 나는 지식의 바닷물을 얻어 마시려고 표연히 집을 떠났었다. 광풍(狂風)에 나부끼는 버들잎 모양으로 오늘은 지나(支那) 내일은 일본으로 굴러다니다가 금전의 탓으로 지식의 바닷물도 흠씬 마셔 보지도 못하고 반거들충이가 되어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내게 시집 올 때에는 방글방글 피려는 꽃봉오리 같던 아내가 어느결에 기울어 가는 꽃처럼 두 뺨에 선연(鮮姸)한 빛이 스러지고 이마에는 벌써 두어 금 가는 줄이 그리어졌다.

처가덕으로 집간도 장만하고 세간도 얻어 우리는 소위 살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내었지마는 한푼 나는 데 없는 살림이라 한 달 가고 두 달 갈수록 점점 곤란해질 따름이었다. 나는 보수(報酬)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창작으로 해가 지고 날이 새며 쌀이 있는지 나무가 있는지 망연케 몰랐다. 그래도 때때로 맛있는 반찬이 상에 오르고 입은 옷이 과히 추하지 아니함은 전혀 아내의 힘이었다. 전들 무슨 벌이가 있으리요, 부끄럼을 무릅쓰고 친가에 가서 눈치를 보아 가며 구차한 소리를 하여 가지고 얻어 온 것이었다. 그것도 한번 두번 말이지 장구한 세월에 어찌 늘 그럴 수가 있으랴! 말경에는 아내가 가져온 세간과 의복에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잡히고 파는 것도 나는 알은체도 아니하였다. 그가 애를 쓰며 퉁명스러운 옆집 할멈에게 돈푼을 주고 시켰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나의 성공만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믿고 빌었었다. 어느 때에는 내가 무엇을 짓다가 마음에 맞지 아니하여 쓰던 것을 집어던지고 화를 낼 적에,

"왜 마음을 조급하게 잡수셔요! 저는 꼭 당신의 이름이 세상에 빛날 날이 있을 줄 믿어요.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 장래에 잘 될 근본이야요."

하고 그는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로한 적도 있었다.

내가 외국으로 돌아다닐 때에 소위 신풍조(新風潮)에 띄어 까닭 없이 구식 여자가 싫어졌다. 그래서 나의 일찍이 장가든 것을 매우 후회하였다. 어떤 남학생과 어떤 여학생이 서로 연애를 주고받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공연히 가슴이 뛰놀며 부럽기도 하고 비감(悲感)스럽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낫살이 들어갈수록 그런 생각도 없어지고 집에 돌아와 아내를 겪어 보니 의외에 그에게 따뜻한 맛과 순결한 맛을 발견하였다. 그의 사랑이야말로 이기적 사랑이 아니고 헌신적(獻身的) 사랑이었다. 이런 줄을 점점 깨닫게 될 때에 내 마음이 얼마나 행복스러웠으랴! 밤이 깊도록 다듬이를 하다가 그만 옷 입은 채로 쓰러져 곤하게 자는 그의 파리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

하고 감격이 극하여 눈물을 흘린 일도 있었다.

내가 알다시피 내가 별로 천품은 없으나 어쨌든 무슨 저작가(著作家)로 몸을 세워 보았으면 하여 나날이 창작과 독서에 전심력을 바쳤다. 물론 아직 남에게 인정(認定)될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자연 일상생활이 말유(末由)하게 되었다.

이런 곤란에 그는 근 이 년 견디어 왔건마는 나의 하는 일은 오히려 아무 보람이 없고 방 안에 놓였던 세간이 줄어 가고 장농에 찼던 옷이 거의 다 없어졌을 뿐이다.

그 결과 그다지 견딜성 있던 저도 요사이 와서는 때때로 쓸데없는 탄식을 하게 되었다. 손잡이를 잡고 마루 끝에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먼산만 바라보기도 하며 바느질을 하다 말고 실심(失心)한 사람 모양으로 멍멍히 앉았기도 하였다. 창경(窓鏡)으로 비치는 어스름한 햇빛에 나는 흔히 그의 눈물 머금은 근심 있는 눈을 발견하였다. 이럴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쓸쓸한 생각이 들며 일없이,

"마누라!"

하고 부르면 그는 몸을 흠칫 하고 고개를 저리로 돌리어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으며,

"네에?"

하고 울음에 떨리는 가는 대답을 한다. 나는 등에 찬물을 끼얹는 듯 몸이 으쓱해지며 처량한 생각이 싸늘하게 가슴에 흘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비(自卑)하기 쉬운 마음이 더욱 심해지며,

'내가 무자격한 탓이다.'

하고 스스로 멸시를 하고 나니 더욱 견딜 수 없다.

'그럴 만도 하다.'

는 동정심이 없지 아니하되 그래도 그만 불쾌한 생각이 일어나며,

'계집이란 할 수 없어.'

혼자 이런 불평을 중얼거리었다.

환등(幻燈) 모양으로 하나씩 둘씩 이런 일이 가슴에 나타나니 무어라고 말할 용기조차 없어졌다. 나의 유일의 신앙자(信仰者)이고 위로자이던 저까지 인제는 나를 아니 믿게 되고 말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네가 육 년 동안 내 살을 깎고 저미었구나! 이 원수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그의 불 같던 사랑까지 엷어져 가는 것 같았다. 아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 같았다. 나는 감상적으로 허둥허둥하며,

"낸들 마누라를 고생시키고 싶어 시켰겠소! 비단옷도 해주고 싶고 좋은 양산도 사주고 싶어요! 그러길래 왼종일 쉬지 않고 공부를 아니 하우. 남 보기에는 편편히 노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안해! 본들 모른단 말이요."

나는 점점 강한 가면(假面)을 벗고 약한 진상(眞相)을 드러내며 이와 같은 가소로운 변명까지 하였다.

"왼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비소(誹笑)하고 모욕하여도 상관이 없지만 마누라까지 나를 아니 믿어 주면 어찌한단 말이요."

내 말에 스스로 자극이 되어 마침내,

"아아."

길이 탄식을 하고 그만 쓰러졌다. 이 순간에 고개를 숙이고 아마 하염없이 입술만 물어뜯고 있던 아내가 홀연,

"여보!"

울음 소리를 떨면서 무너지는 듯이 내 얼굴에 쓰러진다.

"용서……."

하고는 북받쳐 나오는 울음에 말이 막히고 불덩이 같은 두 뺨이 내 얼굴을 누르며 흑흑 느끼어 운다. 그의 두 눈으로부터 샘솟듯 하는 눈물이 제 뺨과 내 뺨 사이를 따뜻하게 젖어 퍼진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뒤숭숭하던 생각이 다 이 뜨거운 눈물에 봄눈 슬듯 스러지고 말았다.

한참 있다가 우리는 눈물을 씻었다. 내 속이 얼마큼 시원한 듯하였다.

"용서하여 주셔요!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요."

이런 말을 하는 아내는 눈물에 불어오른 눈꺼풀을 아픈 듯이 꿈적거린다.

"암만 구차하기로니 싫증이야 날까요! 나는 한번 먹은 마음이 있는데……."

가만가만히 변명을 하는 아내의 눈물 흔적이 어룽어룽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겨우 심신이 가뜬하였다.

어제 일로 심신이 피곤하였던지 그 이튿날 늦게야 잠을 깨니 간밤에 오던 비는 어느결에 그치었고 명랑한 햇발이 미닫이에 높았더라. 아내가 다시금 장문을 열고 잡힐 것을 찾을 즈음에 누가 중문을 열고 들어온다. 우리는 누군가 하고 귀를 기울일 적에 밖에서,

"아씨!"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처가에서 부리는 할멈이었다. 오늘이 장인 생신이라고 어서 오라는 말을 전한다.

"오늘이야! 참 옳지, 오늘이 이월 열엿샛날이지, 나는 깜빡 잊었어!"

"원 아씨는 딱도 하십니다. 어쩌면 아버님 생신을 잊으신단 말씀이요. 아무리 살림이 자미가 나시더래도……."

시큰둥한 할멈은 선웃음을 쳐가며 이런 소리를 한다.

가난한 살림에 골몰하느라고 자기 친부의 생신까지 잊었는가 하매 아내의 정지(情地)가 더욱 측은하였다.

"오늘이 본가 아버님 생신이라요. 어서 오시라는데……."

"어서 가구려……."

"당신도 가셔야지요. 우리 같이 가셔요."

하고 아내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힌다.

나는 처가에 가기가 매우 싫었었다. 그러나 아니 가는 것도 내 도리가 아닐 듯하여 하는 수 없이 두루마기를 입었다.

아내는 머뭇머뭇하며 양미간을 보일 듯 말 듯 찡그리다가 곁눈으로 살짝 나를 엿보더니 돌아서서 급히 장문을 연다.

'흥, 입을 옷이 없어서 망설거리는구나' 나도 슬쩍 돌아서며 생각하였다. 우리는 서로 등지고 섰건만 그래도 아내가 거의 다 빈 장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만한 옷이 없어 눈살을 찌푸린 양이 눈앞에 선연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아, 가셔요."

무엇을 생각는지 모르게 정신을 잃고 섰다가 아내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었다. 아내는 당목옷을 갈아입고 내 마음을 알았던지 나를 위로하는 듯이 방그레 웃는다. 나는 더욱 쓸쓸하였다.

우리집은 천변 배다리 곁에 있고 처가는 안국동에 있어 그 거리가 꽤 멀었다. 나는 천천히 가느라고 가고 아내는 속히 오느라고 오건마는 그는 늘 뒤떨어졌었다. 내가 한참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늘 멀리 떨어져 나를 따라오려고 애를 쓰며 주춤주춤 걸어온다. 길가에 다니는 어느 여자를 보아도 거의 다 비단옷을 입고 고운 신을 신었는데 아내만 당목옷을 허술하게 차리고 청목당혜로 타박타박 걸어오는 양이 나에게 얼마나 애연(哀然)한 생각을 일으켰는지!

한참 만에 나는 넓고 높은 처가 대문에 다다랐다. 내가 안으로 들어갈 적에 낯선 사람들이 나를 흘끔흘끔 본다. 그들의 눈에,

'이 사람이 누구인가. 아마 이 집 하인인가 보다.'

하는 경멸히 여기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안 대청 가까이 들어오니 모두 내게 분분히 인사를 한다. 그 인사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어째 비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욕하는 것 같기도 하여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후끈거리었다.

그 중에 제일 내게 친숙하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내보다 삼 년 맏이인 처형이었다. 내가 어려서 장가를 들었으므로 그때 그는 나를 못 견디게 시달렸다. 그때는 그가 싫기도 하고 밉기도 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때 그러한 것이 도리어 우리를 무관하고 정답게 만들었다. 그는 인천 사는데 자기 남편이 기미(期米)를 하여 가지고 이번에 돈 십만 원이나 착실히 땄다 한다. 그는 자기의 잘사는 것을 자랑하고자 함인지 비단을 내리감고 치감고 얼굴에 부유한 태(態)가 질질 흐른다. 그러나 분으로 숨기려고 애쓴 보람도 없이 눈 위에 퍼렇게 멍든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왜 마누라는 어쩌고 혼자 오셔요!"

그는 웃으며 이런 말을 하다가 중문편을 바라보더니,

"그러면 그렇지! 동부인 아니하고 오실라구!"

혼자 주고받고 한다.

나도 이 말을 듣고 슬쩍 돌아다보니 아내가 벌써 중문 안에 들어섰더라. 그 수척한 얼굴이 더욱 수척해 보이며 눈물 괸 듯한 눈이 하염없이 웃는다. 나는 유심히 그와 아내를 번갈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분간을 못 하리만큼 그들의 얼굴은 혹사(酷似)하다. 그런데 얼굴빛은 어쩌면 저렇게 틀리는지! 하나는 이글이글 만발한 꽃 같고 하나는 시들시들 마른 낙엽 같다. 아내를 형이라 하고, 처형을 아우라 하였으면 아무라도 속을 것이다. 또 한번 아내를 보며 말할 수 없는 쓸쓸한 생각이 다시금 가슴을 누른다.

딴 음식은 별로 먹지도 아니하고 못 먹는 술을 넉 잔이나 마시었다. 그래도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앉아 견딜 수가 없다. 집에 가려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골치가 띵 하며 내가 선 방바닥이 마치 폭풍에 도도(滔滔)하는 파도같이 높았다 낮았다 어질어질해서 곧 쓰러질 것 같다. 이 거동을 보고 장모가 황망(惶忙)히 일어서며,

"술이 저렇게 취해 가지고 어데로 갈라구. 여기서 한잠 자고 가게."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에요. 집에 가겠어요."

취한 소리로 중얼거리었다.

"저를 어쩌나!"

장모는 걱정을 하시더니,

"할멈! 어서 인력거 한 채 불러 오게."

한다.

취중에도 인력거를 태우지 말고 그 인력거 삯을 나를 주었으면 책 한 권을 사보련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얼마 아니 가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 자다가 잠을 깨어 보니 방 안에 벌써 남폿불이 키었는데 아내는 어느결에 왔는지 외로이 앉아 바느질을 하고 화로에서는 무엇이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하였다. 아내가 나의 잠 깬 것을 보더니 급히 화로에 얹은 것을 만져 보며,

"인제 그만 일어나 진지를 잡수셔요."

하고 부리나케 일어나 아랫목에 파묻어 둔 밥그릇을 꺼내어 미리 차려 둔 상에 얹어서 내 앞에 갖다 놓고 일변 화로를 당기어 더운 반찬을 집어 얹으며,

"자아 어서 일어나셔요."

나는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부시시 일어났다. 머리가 오히려 아프며 목이 몹시 말라서 국과 물을 연해 들이켰다.

"물만 잡수셔서 어째요. 진지를 좀 잡수셔야지."

아내는 이런 근심을 하며 밥상머리에 앉아서 고기도 뜯어 주고 생선 뼈도 추려 주었다. 이것은 다 오늘 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는 맛나게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내 밥상이 나매 아내가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면 지금껏 내 잠 깨기를 기다리고 밥을 먹지 아니하였구나 하고 오늘 처가에서 본 일을 생각하였다. 어제 일이 있은 후로 우리 사이에 무슨 벽이 생긴 듯하던 것이 그 벽이 점점 엷어져 가는 듯하며 가엾고 사랑스러운 생각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답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오늘 장인 생신 잔치로부터 처형 눈 위에 멍든 것에 옮겨 갔다.

처형의 남편이 이번 그 돈을 딴 뒤로는 주야 요리점과 기생집에 돌아다니더니 일전에 어떤 기생을 얻어 가지고 미쳐 날뛰며 집에만 들면 집안 사람을 들볶고 걸핏하면 처형을 친다 한다. 이번에도 별로 대단치 않은 일에 처형에게 밥상으로 냅다 갈겨 바로 눈 위에 그렇게 멍이 들었다 한다.

"그것 보아 돈푼이나 있으면 다 그런 것이야."

"정말 그래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의좋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야요."

아내는 충심(衷心)으로 공명(共鳴)해 주었다.

이 말을 들으매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만족해지며 무슨 승리자나 된 듯이 득의양양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옳다, 그렇다. 이렇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다.'

하였다.

이틀 뒤 해 어스름에 처형은 우리집에 놀러 왔었다. 마침 내가 정신없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쓸쓸하게 닫혀 있는 중문이 찌긋둥 하며 비단옷 소리가 사으락사으락 들리더니 아랫목은 내게 빼앗기고 웃목에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간다.

"아이고 형님 오셔요."

아내의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처형이 계집 하인에게 무엇을 들리고 들어온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날 매우 욕을 보셨지요. 못 잡숫는 술을 무슨 짝에 그렇게 잡수셔요."

그는 이런 인사를 하다가 급작스럽게 계집 하인이 든 것을 빼앗더니 그 속에서 신문지로 싼 것을 끄집어내어 아내를 주며,

"내 신 사는데 네 신도 한 켤레 샀다. 그날 청목당혜를……."

말을 하려다가 나를 곁눈으로 흘끗 보고 그만 입을 닫친다.

"그것을 왜 또 사셨어요."

해쓱한 얼굴에 꽃물을 들이며 아내가 치사하는 것도 들은 체 만 체하고 처형은 또 이야기를 시작한다.

"올 적에 사랑양반을 졸라서 돈 백 원을 얻었겠지. 그래서 오늘 종로에 나와서 옷감도 바꾸고 신도 사고……."

그는 자랑과 기쁨의 빛이 얼굴에 퍼지며 싼 보를 끌러,

"이런 것이야!"

하고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자세히는 모르나 여하간 값 많은 품 좋은 비단일 듯하다. 무늬 없는 것, 무늬 있는 것, 회색 옥색 초록색 분홍색이 갖가지로 윤이 흐르며 색색이 빛이 나서 나는 한참 황홀하였다. 무슨 칭찬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참 좋은 것인데요."

이런 말을 하다가 나는 또 쓸쓸한 생각이 일어난다. 저것을 보는 아내의 심중이 어떠할까? 하는 의문이 문득 일어남이라.

"모다 좋은 것만 골라 샀습니다그려."

아내는 인사를 차리느라고 이런 칭찬은 하나마 별로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적이 의외의 감이 있었다.

처형은 자기 남편의 흉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 밉살스럽다는 둥 그 추근추근하다는 둥 말끝마다 자기 남편의 불미한 점을 들다가 문득 이야기를 끊고 일어선다.

"왜 벌써 가시려고 하셔요. 모처럼 오셨다가 반찬은 없어도 저녁이나 잡수셔요."

하고 아내가 만류를 하니,

"아니 곧 가야지. 오늘 저녁 차로 떠날 것이니까 가서 짐을 매어야지. 아직 차 시간이 멀었어? 아니 그래도 정거장에 일찍이 나가야지 만일 기차를 놓치면 오죽 기다리실라구. 벌써 오늘 저녁 차로 간다고 편지까지 했는데……."

재삼 만류함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는 홀홀히 나간다. 우리는 그를 보내고 방에 들어왔다.

나는 웃으며 아내에게,

"그까짓 것이 기다리는데 그다지 급급히 갈 것이 무엇이야."

아내는 하염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옷감 바꿀 돈을 주었으니 기다리는 것이 애처롭기는 하겠지."

밉살스러우니 추근추근하니 하여도 물질의 만족만 얻으면 그것으로 위로하고 기뻐하는 그의 생활이 참 가련하다 하였다.

"참, 그런가 보아요."

아내도 웃으며 내 말을 받는다. 이때에 처형이 사준 신이 그의 눈에 띄었는지 (혹은 나를 꺼려 보고 싶은 것을 참았는지 모르나) 그것을 집어 들고 조심조심 펴보려다가 말고 머뭇머뭇한다. 그 속에 그를 해케 할 무슨 위험품이나 든 것같이.

"어서 펴보구려."

아내가 하도 머뭇머뭇하기로 보다못하여 내가 재촉〔催促〕을 하였다.

아내는 이 말을 듣더니,

'작히 좋으랴.'

하는 듯이 활발하게 싼 신문지를 헤친다.

"퍽 이쁜걸요."

그는 근일에 드문 기쁜 소리를 치며 방바닥 위에 사뿐 내려놓고 버선을 당기며 곱게 신어 본다.

"어쩌면 이렇게 맞어요!"

연해연방 감탄사를 부르짖는 그의 얼굴에 흔연한 희색이 넘쳐흐른다.

"……"

묵묵히 아내의 기뻐하는 양을 보고 있는 나는 또다시,

'여자란 할 수 없어!'

하는 생각이 들며,

'조심하였을 따름이다!'

하매 밤빛 같은 검은 그림자가 가슴을 어둡게 하였다.

그러면 아까 처형의 옷감을 볼 적에도 물론 마음속으로는 부러워하였을 것이다. 다만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을 따름이다. 겨우,

"어서 펴보구려."

하는 한마디에 가슴에 숨겼던 생각을 속임 없이 나타내는구나 하였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저는 모르고 새 신 신은 발을 조금 쳐들며,

"신 모양이 어때요."

"매우 이뻐!"

겉으로는 좋은 듯이 대답을 하였으나 마음은 쓸쓸하였다. 내가 제게 신 한 켤레를 사주지 못하여 남에게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도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만 불쾌한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처형이 동서(同壻)를 밉다거니 무엇이니 하면서도 기차를 놓치면 남편이 기다릴까 염려하여 급히 가던 것이 생각난다. 그것을 미루어 아내의 심사도 알 수가 있다. 부득이한 경우라 하릴없이 정신적 행복에만 만족하려고 애를 쓰지마는 기실(其實) 부족한 것이다. 다만 참을 따름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전날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후회가 난다.

'어느 때라도 제 은공을 갚아 줄 날이 있겠지!'

나는 마음을 좀 너그럽게 먹고 이런 생각을 하며 아내를 보았다.

"나도 어서 출세를 하여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아내가 이런 말을 듣기는 참 처음이다.

"네에?"

아내는 제 귀를 못 미더워하는 듯이 의아(疑訝)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얼굴에 살짝 열기가 오르며,

"얼마 안 되어 그렇게 될 것이야요!"

라고 힘있게 말하였다.

"정말 그럴 것 같소?"

나는 약간 흥분하여 반문하였다.

"그러문요, 그렇고말고요."

아직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은 무명작가인 나를 다만 저 하나가 깊이깊이 인정해 준다. 그러기에 그 강한 물질에 대한 본능적 요구도 참아 가며 오늘날까지 몹시 눈살을 찌푸리지 아니하고 나를 도와 준 것이다.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두 팔로 덤썩 아내의 허리를 잡아 내 가슴에 바싹 안았다. 그 다음 순간에는 뜨거운 두 입술이…….

그의 눈에도 나의 눈에도 그렁그렁한 눈물이 물끓듯 넘쳐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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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온 지 한 달 남짓한, 금년에 열 다섯 살밖에 안 된 순이는 잠이 어릿어릿한 가운데도 숨길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큰 바위로 내리누르는 듯이 가슴이 답답하다. 바위나 같으면 싸늘한 맛이나 있으련마는, 순이의 비둘기 같은 연약한 가슴에 얹힌 것은 마치 장마지는 여름날과 같이 눅눅하고 축축하고 무더운데다가 천 근의 무게를 더한 것 같다. 그는 복날 개와 같이 헐떡이었다. 그러자 허리와 엉치가 뻐개 내는 듯, 쪼개 내는 듯, 갈기갈기 찢는 것같이, 산산히 바수는 것같이 욱신거리고 쓰라리고 쑤시고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쇠막대 같은 것이 오장육부를 한편으로 치우치며 가슴까지 치받쳐올라 콱콱 뻗지를 때엔 순이는 입을 딱딱 벌리며 몸을 위로 추스른다.

이렇듯 아프니 적이나 하면 잠이 깨련만 온종일 물 이기, 절구질하기, 물방아찧기, 논에 나간 일꾼들에게 밥 나르기에 더할 수 없이 지쳤던 그는 잠을 깨려야 깰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혼수상태에 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니 (이러다간 내가 죽겠구먼! 죽겠구먼! 어서 잠을 깨야지, 깨야지) 하면서도 풀칠이나 한 듯이 죄어붙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연해 입을 딱딱 벌리며 몸을 추스르다가 나중에는 지긋지긋한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 모양으로 이까지 빠드득빠드득 갈아부치었다.

얼마 만에야 무서운 꿈에 가위눌린 듯한 눈을 어렴풋이 뜰 수 있었다. 제 얼굴을 솥뚜껑 모양으로 덮은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함지박만한 큰 상판의 검은 부분은 어두운 밤빛과 어우러졌는데 번쩍이는 눈깔의 흰자위, 침이 께 흐르는 입술, 그것이 비뚤어지게 열리며 드러난 누런 이빨만 무시무시하도록 뚜렷이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자 가뜩이나 큰 얼굴이 자꾸자꾸 부어오르더니 주악빛으로 지져 놓은 암갈색의 어깨판도 따라서 확대되어서 깍짓동만하게 되고 집채만하게 된다. 순이는 배꼽에서 솟아오르는 공포와 창자를 뒤트는 고통에 몸을 떨었다가 버르적거렸다가 하면서 염치없는 잠에 뒷덜미를 잡히기도 하고 무서운 현실에 눈을 뜨기도 하였다. 그 고통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때에는, 유월의 단열밤(短夜)이 벌써 새었다. 사내의 어마어마한 윤곽이 방이 비좁도록 움직이자 밖으로 나간다. 들에 새벽일하러 나감이리라. 그제야 순이도 긴 한숨을 쉬며 잠을 깰 수 있었다. 짙은 먹칠이 가물한 가운데 노랏노랏이 삿자리의 눈이 드러난다. 윗목에 놓인 허술한 경대 위에 번들번들하는 석경이라든지 ‘원수의 방’이 분명하다. 더구나 제 등때기 밑에는 요까지 깔려 있다.

‘이것은 어찌된 셈인구?’

순이는 정신을 차리며 생각해 보았다. 어젯밤에 그가 잔 데는 여기가 아닐 테다. 밤이 되면 으레 당하는 이 몹쓸 노릇들을 하루라도 면하려고 저녁 설거지를 마치는 맡에 아무도 몰래 헛간으로 숨었었다. 단지 둘밖에 아니 남은 볏섬을 의지삼아 빈 섬거적을 깔고 두 다리를 쭉 뻗칠 사이도 없이 고만 고달픈 잠에 떨어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어찌 또 방으로 들어왔을까? 그 원수엣 놈이 육욕에 번쩍이는 눈알을 부라리며 사면팔방으로 찾다가 마침내 그를 발견하였음이리라. 억센 팔로 어렵지 않게 자는 그를 안아다가 또 ‘원수의 방’에 갖다놓았음이리라. 그리고는 또 원수의 그 노릇.

이런 생각을 끝도 맺기 전에 흐리터분한 잠이 다시금 그의 사개 물러난 몸을 엄습하였다.

집안이 떠나갈 듯한 시어미의 소리가 일어났다.

“안 일어났니! 어서 쇠죽을 끓여야지!”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순이는 빨딱 몸을 일으킨다.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또 한 손으로 남편이 벗겨놓은 옷을 주섬주섬 총망히 주워입는다. 그는 시방껏 자지 않았던가? 그 거동을 보면 자기는 새로 정신을 한껏 모으고 호령일하를 기다리던 군사에 질 바 없었다. 그러니만큼 자던 잠결에도 시어미의 호령은 무서웠음이다.

총총히 마루로 나오니 아직 날은 다 밝지 않았다. 자욱한 안개를 격해서 광채를 잃은 흰 달이 죽은 사람의 눈깔 모양으로 희멀겋게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저녁에 안쳐 놓은 쇠죽 솥에 가자 불을 살랐다. 비록 여름일망정 새벽 공기는 찼다. 더욱이 으슬한 기를 느끼던 순이는 번쩍하고 불붙는 모양이 매우 좋았다. 새빨간 입술이 날름날름 집어 주는 솔개비를 삼키는 꼴을 그는 흥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고된 하룻밤으로 말미암아 더욱 고된 순이의 하루는 또 시작되었다.

쇠죽을 다 끓이자 아침밥 지을 물을 또 아니 이어올 수 없었다. 물동이를 이고 두 팔을 치켜 그 귀를 잡으니 겨드랑이로 안개 실린 공기가 싸늘하게 기어들었다. 시냇가에 나와서 물동이를 놓고 한 번 기지개를 켰다. 안개에 묻힌 올망졸망한 산과 등성이는 아직도 몽롱한 꿈길을 헤매는 듯. 엊그제 농부를 기뻐 뛰게 한 큰비의 덕택으로 논이란 논엔 물이 질번질번한데 흰 안개와 어우러지니 마치 수은이 엉킨 것 같고 벌써 옮겨 놓은 모들은 파릇파릇하게 졸음 오는 눈을 비비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저 혼자 깨었다는 듯이 시내는 쫄쫄 소리를 치며 흘러간다. 과연 가까이 앉아서 들여다보니 새말간 그 얼굴은 잠 하나 없는 눈동자와 같다. 순이는 퐁하며 바가지를 넣었다. 상처가 난 데를 메우려는 듯이 사방에서 모여든 물이 바가지 들어갔던 자리를 둥글게 에워싸며 한동안 야료를 치다가 그리 중상은 아니라고 안심한 것같이 너르게 너르게 둘레를 그리며 물러나갔다. 순이는 자꾸 물을 퍼내었다.

한 동이를 여다 놓고 또 한 동이를 이러 왔을 제 그가 벌써부터 잡으려고 애쓰던 송사리 몇 마리가 겁없이 동실동실 떠 다니는 걸 보았다. 욜랑욜랑하는 그 모양이 퍽 얄미웠다.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두 손을 넣어서 움키려 하였건만 고놈들은 용하게 빠져 달아나곤 한다. 몇 번을 헛애만 쓴 순이는 그만 화가 더럭 나서 이번에는 돌멩이를 주워다가 함부로 물 속의 고기를 때렸다. 제 얼굴에, 옷에, 물만 튀었지, 고놈들은 도무지 맞지를 않았다. 짜증이 나서 울고 싶다. 돌질로 성공을 못한 줄 안 그는 다시금 손으로 움켜보았다. 그중에 불행한 한 놈이 마침내 순이의 손아귀에 들고 말았다.

손 새로 물이 빠져가자 제 목숨도 잦아 가는 것에 독살이 난 듯이 파득파득하는 꼴이 순이에게는 재미있었다. 얼마 안 되어 가련한 물짐승이 죽은 듯이 지친 몸을 손바닥에 붙이고 있을 제 잔인하게도 순이는 땅바닥에 태기를 쳤다. 아프다는 듯이 꼼지락하자 그만 작은 목숨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니 죽었거니 하고 순이는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다. 그래서 일순 송장이 된 것을 깨닫자 생명 하나를 없앴다는 공포심이 그의 뒷덜미를 집었다. 그 자리에서 곧 송사리의 원혼이 날 듯싶었다. 갈팡질팡 물을 긷고 돌아서는 그는 누가 뒤에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듯하였다.

눈코를 못 뜨게 아침을 치르자마자 그는 또 보리를 찧어야 했다. 절구질을 하노라니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다. 무거운 절구에 끌려서 하마터면 대가리를 절구통 속에 찧을 뻔도 하였다. 팔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그는 깽깽하며 끝까지 절구질을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점심이다. 부랴부랴 밥을 다 지어서는 모심기 하는 일꾼(거기는 자기 남편도 끼었다)에게 밥을 날라야 한다. 국이며 밥을 잔뜩 담은 목판이 그의 정수리를 내리누르니 모가지가 자라의 그것같이 움츠려지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키까지 졸아든 듯하였다. 이래 가지고 떼어 놓기 어려운 발길을 옮기며 삽짝 밖을 나섰다.

새말갛게 갠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중천에 솟은 햇님이 불 같은 볕을 내리퍼붓고 있었다. 질펀한 들에는 ‘흙의 아들’이 하얗게 흩어져 응석 피듯 어머니의 기름진 젖가슴을 철벅거리며 모내기에 한창 바쁘다. 그들이 굽혔다 폈다하는 서슬에 옷으로 다 여미지 못한 허리는 새까맣게 찢어 놓은 듯하고 염치없이 눈에까지 흘러드는 팥죽 같은 땀을닦느라고 얼굴은 모두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한시라도 속히, 한 포기라도 많이 옮기려고 골똘한 그들은 뼈가 휘어도 괴로운 한숨 한 번 쉬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노래를 부른다. 가장 자유로운 곡조로 가장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땅은 흠씬 젖은 물을 끓는 햇발에 바래이고 논두렁에 엉클어진 잡풀들은 사람의 발이 함부로 밟음에 맡기며, 발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고개를 쳐들고 부신 햇발에 푸른 웃음을 올리고 있다. 거기는 굳세게, 힘있게 사는 생명의 기쁨이 있고 더욱더욱, 삶을 충실히 하려는 든든한 노력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건강이 넘치는 천지였다. 불건강한 물건의 존재를 허락치 않는 천지였다.

이 강렬한 광선의 바다의 싱싱한 공기를 마시기엔 순이의 몸은 너무나 불건강하였다. 눈이 핑핑 내어둘리며 머리가 어찔어찔하다. 온 몸을 땀으로 미역감기면서도 으쓱으쓱 한기가 들었다. 빗물이 고인 데를 건너뛰렬 제 물속에 잠긴 태양이 번쩍하자 그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문득 아침에 제가 죽인 송사리란 놈이 퍼드득 하고 내달으며 방어만치나 어마어마하게 큰 몸뚱이로 그의 가는 길을 막았다. 속으로 ‘악’ 외마디 소리를 치며 몸을 빼쳐 달아나려고 할 제 그는 그만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었다. 누가 저의 머리채를 잡아서 회술레를 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사이에 그는 벼락치는 소리를 들은 채 정신을 잃었다.

한참 만에야 순이는 깨어났건만 본정신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다. 어리둥절하게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 사이 점심밥을 이고 나가던 일, 넓은 들에서 눈을 부시게 하던 햇발, 길을 막던 송사리 생각이 차례차례로 떠올랐다. 그러면 이고 가던 점심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서 휘 사방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그는 외마디 소리를 치며 몸을 소스라쳤다. 또다시 그 원수의 방에 누웠을 줄이야! 미친 듯이 뛰어나왔다. 그의 눈은 마치 귀신에게 홀린 사람 모양으로 두려움과 무서움에 호동그래졌다.

마당에 널어 놓은 밀을 고밀개로 젓고 있는 시어미는 뛰어나오는 며느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었다. 국과 밥을 모두 못 먹게 만든 것은 그만두더라도 몇 개 아니 남은 그릇을 깨뜨린 것이 한없이 미웠으되 까무러치기까지 한 며느리를 일어나는 맡에 나무라기는 어려웠음이리라.

“인제 정신을 차렸느냐. 왜 더 누워서 조리를 하지 방정을 떨고 나오니. 어 서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으려무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짓느라고 매우 애를 쓰는 모양이다.

그래도 순이는 비실비실하는 걸음걸이로 부득부득 마당으로 내려온다.

“방에 들어가서 조리를 하래도 그래.”

이번에는 언성이 조금 높아진다.

“싫어요. 싫어요. 괜찮아요.”

순이는 방에 다시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또 고분고분 말을 아니 듣고 억지를 부리는군.”
하다가 속에서 치받치는 미움을 걷잡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밀개 자루를 거꾸로 들 사이도 없이 시어미는 며느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요 방정맞은 년 같으니, 어쩌자고 그릇을 다 부수고 아실랑아실랑 나오는 건 뭐냐. 요 얌치없는 년 같으니, 저번 장에 산 사발을 두 개나 산산조각을 맨들고.”
하고 푸념을 섞어가며 고밀개 자루로 머리, 등, 다리 할 것 없이 함부로 두들기기 시작한다. 순이는 맞아도 아픈 줄을 몰랐다. 으스러지는 듯이 찌뿌두두한 몸에 괴상한 쾌감을 일으켰다.

“요런 악지 센 년 좀 보아! 어쩌면 맞아도 울지 않고 요렇게 있담.”
하고 또 한참 매질을 하다가 스스로 지친 듯이 고밀개를 집어던지며,
“요년, 보기 싫다. 어서 부엌에 가서 저녁이나 지어라.”
순이는 또 시키는 대로 부엌에 들어가서 밥을 안쳤다.

그럭저럭 하루 해는 저물어 간다. 으슥한 부엌은 벌써 저녁이나 된 듯이 어둑어둑해졌다. 무서운 밤, 지겨운 밤이 다시금 그를 향하여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려 한다. 해질 때마다 느끼는 공포심이 또다시 그를 엄습하였다. 번번이 해도 번번이 실패하는, 밤 피할 궁리로 하여 그의 좁은 가슴은 쥐어뜯기었다. 그럴 사이에 그 궁리는 나서지 않고 제 신세가 어떻게 불쌍하고 가엾은지 몰랐다. 수백 리 밖에 부모를 두고 시집을 온 일, 온 뒤로 밤마다 날마다 당하는 지긋지긋한 고생, 더구나 오늘 시어머니한테 두들겨맞은 일이 한없이 서럽고 슬퍼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주먹으로 씻다가 팔까지 젖었건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순이는 무심코 돌아보자마자 간이 오그라붙는 듯하였다. 그의 남편이 몸을 굽혀서 어깨넘어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볕에 그을린 험상궂은 얼굴엔 어울리지 않게 보드라운 표정과 불쌍해하는 빛이 역력히 흘렀다. 그러나 솔개에 치인 병아리 모양으로 숨 한 번 옳게 쉬지 못하는 순이는 그런 기색을 알아볼 여유도 없었다.

“왜 울어, 울지 말아, 울지 말아!”
라고 꺽세인 몸을 떨어뜨리며 위로를 하면서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우는 순이의 눈을 씻어 주고는 나가버린다.

남편을 본 뒤로는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을 지질러서 막는 바위, 온몸을 바스러 내는 쇠몽둥이, 시방껏 흐르던 눈물도 간 데 없고 다시금 이 지긋지긋한 ‘밤 피할 궁리’에 어린 머리를 짰다. 아니 밤 탓이 아니다. 온전히 그 ‘원수의 방’ 때문이다. 만일 그 방만 아니면 남편이 또한 그 눈물을 씻어주고 나갈 따름이다. 그 방만 아니면 그런 고통을 줄려야 줄 곳이 없을 것이다. 고 원수의 방! 을 없애 버릴 도리가 없을까? 입때 방을 피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순이는 인제 그 방을 없애버릴 궁리를 하게 되었다.

밥이 보그르르 넘었다. 순이가 솥뚜껑을 열려고 일어섰을 제 부뚜막에 얹힌 성냥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상한 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그는 성냥을 쥐었다. 성냥 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그러자 사면을 한 번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 성냥을 품속에 감추었다. 이만하면 될 일을 왜 여태껏 몰랐던가 하면서 그는 싱그레 웃었다.

그날 밤에 그 집에는 난데없는 불이 건넌방 뒤꼍 추녀로부터 일어났다. 풍세를 얻은 불길이 삽시간에 온 지붕에 번지며 훨훨 타오를 제 뒷집 담모서리에서 순이는 근래에 없이 환한 얼굴로 기뻐 못 견디겠다는 듯이 가슴을 두근거리며 모로 뛰고 세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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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군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훨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법대로 쪽찌거나 틀어올리지를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어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 똥만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노릴 때엔 기숙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격하고 매서웠다.

이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소위 '러브레터'였다. 여학교 기숙사라면 으례히 그런 편지가 많이 오는 것이지만 학교로도 유명하고 또 아름다운 여학생이 많은 탓인지 모르되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랑 타령이 날아들어 왔었다.

기숙생에게 오는 사신을 일일이 검토하는 터이니까 그따위 편지도 물론 B여사의 손에 떨어진다. 달짝지근한 사연을 보는 족족 그는 더할 수 없이 흥분되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편지 든 손이 발발 떨리도록 성을 낸다.

아무 까닭 없이 그런 편지를 받은 학생이야말로 큰 재변이었다. 하학하기가 무섭게 그 학생은 사감실로 불리어 간다.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사람 모양으로 쌔근쌔근하며 방안을 왔다갔다하던 그는, 들어오는 학생을 잡아먹을 듯이 노리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코가 맞닿을 만큼 바싹 다가들어서서 딱 마주선다. 웬 영문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선생의 기색을 살피고 겁부터 집어먹은 학생은 한동안 어쩔 줄 모르다가 간신히 모기만한 소리로,

“저를 부르셨어요?”

하고 묻는다.

“그래 불렀다. 왜!”

팍 무는 듯이 한 마디 하고 나서 매우 못마땅한 것처럼 교의를 우당퉁탕 당겨서 철썩 주저앉았다가 그저 서 있는 걸 보면,

“장승이냐? 왜 앉지를 못해!”

하고 또 소리를 빽 지르는 법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조그마한 책상 하나를 새에 두고 마주앉는다. 앉은 뒤에도,

“네 죄상을 네가 알지!”

하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눈살로 쏘기만 하다가 한참만에야 그 편지를 끄집어내어 학생의 코앞에 동댕이를 치며,

“이건 누구한테 오는 거냐?”

하고, 문초를 시작한다. 앞장에 제 이름이 쓰였는지라,

“저한테 온 것이야요.”

하고, 대답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발신인이 누구인 것을 채쳐 묻는다. 그런 편지의 항용으로 발신인의 성명이 똑똑치 않기 때문에 주저주저하다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내대일 양이면,

“너한테 오는 것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고, 불호령을 내린 뒤에 또 사연을 읽어 보라 하여 무심한 학생이 나즉나즉하나마 꿀 같은 구절을 입술에 올리면, B여사의 역정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놈의 소위인 것을 기어이 알려 한다. 기실 보도 듣도 못한 남성의 한 노릇이요, 자기에게는 아무 죄도 없는 것을 변명하여도 곧이 듣지를 않는다. 바른대로 아뢰어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퇴학을 시킨다는 둥, 제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편지할 리가 만무하다는 둥, 필연 행실이 부정한 일이 있으리라는 둥…

하다못해 어디서 한 번 만나기라도 하였을 테니 어찌해서 남자와 접촉을 하게 되었냐는 둥, 자칫 잘못하여 학교에서 주최한 음악회나 '바자'에서 혹 보았는지 모른다고 졸리다 못해 주워댈 것 같으면 사내의 보는 눈이 어떻드냐, 표정이 어떻드냐, 무슨 말을 건네드냐, 미주알 고주알 캐고 파며 얼르고 볶아서 넉넉히 십 년 감수는 시킨다.

두 시간이 넘도록 문초를 한 끝에는 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 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인 것을 입에 침이 없이 열에 띄어서 한참 설법을 하다가 닦지도 않은 방바닥(침대를 쓰기 때문에 방이라 해도 마루바닥이다)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말끝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서 악마의 유혹에 떨어지려는 어린 양을 구해달라고 뒤삶고 곱삶는 법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의 싫어하는 것은 기숙생을 남자가 면회하러 오는 일이었다. 무슨 핑계를 하든지 기어이 못 보게 하고 만다. 친부모, 친동기간이라도 규칙이 어떠니, 상학중이니 무슨 핑계를 하든지 따돌려 보내기가 일쑤다.

이로 말미암아 학생이 동맹 휴학을 하였고 교장의 설유까지 들었건만 그래도 그 버릇은 고치려 들지 않았다.

이 B사감이 감독하는 그 기숙사에 금년 가을 들어서 괴상한 일이 '생겼다'느니보다 '발각되었다'는 것이 마땅할는지 모르리라. 왜 그런고 하면 그 괴상한 일이 언제 '시작된' 것은 귀신밖에 모르니까.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밤이 깊어서 새로 한 점이 되어 모든 기숙생들이 달고 곤한 잠에 떨어졌을 때 난데없는 깔깔대는 웃음과 속살속살대는 말낱이 새어 흐르는 일이었다. 하루 밤이 아니고 이틀 밤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소리가 잠귀 밝은 기숙생의 귀에 들리기도 하였지만 잠결이라 뒷동산에 구르는 마른 잎의 노래로나, 달빛에 날개를 번뜩이며 울고 가는 기러기의 소리로나 흘러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깨비의 장난이나 아닌가 하여 무시무시한 증이 들어서 동무를 깨웠다가 좀처럼 동무는 깨지 않고 제 생각이 너무나 어림없고 어이없음을 깨달으면, 밤소리 멀리 들린다고, 학교 이웃 집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또 딴 방에 자는 제 동무들의 잠꼬대로만 여겨서 스스로 안심하고 그대로 자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가 풀릴 때는 왔다. 이때 공교롭게 한 방에 자던 학생 셋이 한꺼번에 잠을 깨었다. 첫째 처녀가 소변을 보러 일어났다가 그 소리를 듣고 둘째 처녀와 세째 처녀를 깨우고 만 것이다.

“저 소리를 들어보아요. 아닌 밤중에 저게 무슨 소리야.”

하고 첫째 처녀는 호동그래진 눈에 무서워하는 빛을 띠운다.

“어젯밤에 나도 저 소리에 놀랬었어. 도깨비가 났단 말인가?”

하고, 둘째 처녀도 잠오는 눈을 비비며 수상해 한다. 그중에 제일 나이 많을 뿐더러(많았자 열 여덟밖에 아니 되지만) 장난 잘 치고 짓궂은 짓 잘하기로 유명한 세째 처녀는 동무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이슥히 귀를 기울이다가,

“딴은 수상한걸. 나는 언젠가 한번 들어본 법도 하구먼. 무얼 잠 아니 오는 애들이 이야기를 하는 게지.”

이때에 그 괴상한 소리는 땍대굴 웃었다. 세 처녀는 귀를 소스라쳤다. 적적한 밤 가운데 다른 파동 없는 공기는 그 수상한 말 마디를 곁에서 나는 듯이 또렷또렷이 전해 주었다.

“오! 태훈씨! 그러면 작히 좋을까요.”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다.

“경숙씨가 좋으시다면 내야 얼마나 기쁘겠읍니까. 아아, 오직 경숙씨에게 바친 나의 타는 듯한 가슴을 인제야 아셨읍니까!”

정열에 띄인 사내의 목청이 분명하였다. 한동안 침묵…

“인제 그만 놓아요. '키스'가 너무 길지 않아요. 행여 남이 보면 어떻해요.”

아양떠는 여자 말씨.

“길수록 더욱 좋지 않아요.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키스'를 하여도 길다고는 못하겠읍니다. 그래도 짧은 것을 한하겠읍니다.”

사내의 피를 뿜는 듯한 이 말끝은 계집의 자지러진 웃음으로 묻혀버렸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사랑에 겨운 남녀의 허무러진 수작이다. 감금이 지독한 이 기숙사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세 처녀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놀랍고 무서운 빛이 없지 않았으되 점점 호기심에 번쩍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한결같이 '로맨틱'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안에 있는 여자 애인을 보려고 학교 근처를 뒤돌고 곰돌던 사내 애인이, 타는 듯한 가슴을 걷잡다 못하여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담을 뛰어 넘었는지 모르리라.

모든 불이 다 꺼지고 오직 밝은 달빛이 은가루처럼 서리인 창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여자 애인이 흰 수건을 흔들어 사내 애인을 부른지도 모르리라.

활동사진에 보는 것처럼 기나긴 피륙을 내리워서 하나는 위에서 당기고 하나는 밑에서 매달려 디룽디룽하면서 올라가는 정경이 있었는지 모르리라. 그래서 두 애인은 만나가지고 저와 같이 사랑의 속삭거림에 잦아졌는지 모르리라… 꿈결 같은 감정이 안개 모양으로 눈부시게 세 처녀의 몸과 마음을 휩싸 돌았다.

그들의 뺨은 후끈후끈 달았다. 괴상한 소리는 또 일어났다.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이번에는 매몰스럽게 내어대는 모양.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를 살려 주어요, 나를 구해 주어요.”

사내의 애를 졸리는 간청…

“우리 구경 가볼까.”

짖궂은 세째 처녀는 몸을 일으키며 이런 제의를 하였다. 다른 처녀들도 그 말에 찬성한다는 듯이 따라 일어섰으되 의아와 공구(恐懼)와 호기심이 뒤섞인 얼굴을 서로 교환하면서 얼마쯤 망설이다가 마침내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왔다. 쌀벌레 같은 그들의 발가락은 가장 조심성 많게 소리나는 곳을 향해서 곰실곰실 기어간다. 컴컴한 복도에 자다가 일어난 세 처녀의 흰 모양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움직였다.

소리나는 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찾고는 나무로 깎아 세운 듯이 주춤 걸음을 멈출 만큼 그들은 놀래었다. 그런 소리의 출처야말로 자기네 방에서 몇 걸음 안 되는 사감실일 줄이야! 그 방에 여전히 사내의 비대발괄하는 푸념이 되풀이 되고 있다…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의 애를 말려 죽이실 테요. 나의 가슴을 뜯어 죽이실 테요. 내 생명을 맡으신 당신의 입술로…

세째 처녀는 대담스럽게 그 방문을 빠끔히 열었다. 그 틈으로 여섯 눈이 방안을 향해 쏘았다. 이 어쩐 기괴한 광경이냐! 전등 불은 아직 끄지 않았는데 침대 위에는 기숙생에게 온 소위 '러브레터'의 봉투가 너저분하게 흩어졌고 그 알맹이도 여기저기 두서없이 펼쳐진 가운데 B여사 혼자 - 아무도 없이 제 혼자 일어나 앉았다.

누구를 끌어당길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안경을 벗은 근시안으로 잔뜩 한 곳을 노리며 그 굴비쪽 같은 얼굴에 말할 수 없이 애원하는 표정을 짓고는 '키스'를 기다리는 것 같이 입을 쫑긋이 내어민 채 사내의 목청을 내어가면서 아깟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다가 그 넋두리가 끝날 겨를도 없이 급작스리 앵돌아서는 시늉을 내며 누구를 뿌리치는 듯이 연해 손짓을 하며 이번에는 톡톡 쏘는 계집의 음성을 지어,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하다가 제물에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더니 문득 편지 한 장(물론 기숙생에게 온 '러브레터'의 하나)을 집어들어 얼굴에 문지르며,

“정 말씀이야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당신의 목숨같이 나를 사랑하셔요? 나를, 이 나를.”

하고 몸을 추수리는데 그 음성은 분명 울음의 가락을 띠었다.

“에그머니 저게 웬일이냐!”

첫째 처녀가 소곤거렸다.

“아마 미쳤나보아, 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왜 저리고 있을꾸.”

둘째 처녀가 맞방망이를 친다…

“에그 불쌍해!”

하고, 세째 처녀는 손으로 고인 때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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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은 관 모서리에 얼굴을 부비며 연거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영신 씨, 영신 씨! 내가 왔소. 여기 동혁이가 왔소!"

하고 목이 메어 부르나 대답은 있을 리 없는데, 눈물에 어리운 탓일까, 관 뚜껑이 소리 없이 열리며 면사포와 같은 하얀 수의를 입은 영신이가 미소를 띠고 푸시시 일어나 팔을 벌리는 것 같다.

이러한 환각에 사로잡히는 찰나에, 동혁은 당장에 뛰어나가서 도끼라도 들고 들어와 관을 뻐개고 시체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는 가슴 벅차게 용솟음치는 과격한 감정을 발뒤꿈치로 누룩을 디디듯이 이지의 힘으로 꽉꽉 밟았다. 어찌나 원통하고 모든 일이 뉘우쳐지는지, 땅바닥을 땅땅 치며 몸부림을 하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건만, 여러 사람 앞에서 그다지 수통스러이 굴 수도 없었다. 다만 한마디,

"왜 당신은, 일허는 것밖에 좀더 다른 허영심이 없었드란 말요!"

하고 꾸짖듯 하고는 한참이나 엎드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다가, '영신 씨 같은 여자두 이런 자리에서 남에게 눈물을 보이나요?'

라고 경찰서에서 마지막 만났을 때에 제 입으로 한 말이 문뜩 생각이 나서 주먹으로 눈두덩을 부비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다시 관머리를 짚고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침묵하다가, 바로 영신의 귀에다 대고 말을 하듯이 머리맡을 조금씩 흔들면서,

"영신 씨 안심허세요. 나는 이렇게 꿋꿋허게 살어 있소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이 못다 허구 간 일과 두 몫을 허리다!"

하고 새로운 결심과 영결의 인사를 겹쳐 한 뒤에, 여러 사람과 함께 관머리를 들고 앞서 나와서 조심스러이 상여에 옮겼다.

영신의 육신은 영원한 안식처를 향하여 떠나려 한다.

동혁의 기념품인 학원의 종을 아침저녁으로 치던 사람의 상여머리에서 요령 소리가 땡그랑땡그랑 울린다. 상여는 청년들이 메었는데, 수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부인네들과 동민이 가득 들어선 속에서 다시금 울음 소리가 일어난다. 아이들은 장강목에 조롱조롱 매달려 제 힘껏 버팅겨서 상여도 차마 못 떠나겠는 듯이 뒷걸음을 친다.

앞채를 꼬나 주던 동혁은 엄숙한 얼굴로 여러 사람의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조상 온 사람 전체를 향해서 외치는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차다.

"여러분! 이 채영신 양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농촌의 개발과 무산 아동의 교육을 위해서 너무나 과도히 일을 하다가, 둘도 없는 생명을 바쳤습니다. 완전히 희생했습니다. 즉, 오늘 이 마당에 모인 여러분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하고 한층 더 언성을 높여,

"지금 여러분에게 바친 채양의 육체는 흙 보탬을 하려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이분이 끼쳐 준 위대한 정신은 여러분의 머릿속에 살어 있을 것입니다. 저 아이들의 조그만 골수에도 그 정신이 박혔을 겝니다."

하고는 손길을 마주 모으고 서고, 혹은 머리를 떨어트리고 듣는 여러 청중들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서며,

"그러나 여러분, 조금두 설워허지 마십시오. 이 채선생은 결단코 죽지 않었습니다. 살과 뼈는 썩을지언정, 저 가엾은 아이들과 가난한 동족을 위해서 흘린 피는 벌써 여러분의 혈관 속에 섞였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가슴속에서도 그 뜨거운 피가 끓고 있습니다!"

하고 주먹으로 제 가슴 한복판을 친다. 여러 사람의 머리 위로는 감격의 물결이 사리 때의 조수와 같이 밀리는 듯. 서울서 온 백현경은 몇 번이나 안경을 벗어서 저고리 고름으로 닦았다.

동혁은 목소리를 낮추어,

"사사로운 말씀은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나는 이 청석골에서 사랑하던 사람의 사업을 당분간이라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나마 소용이 되신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길을 밟는 것이 나 개인에게도 가장 기쁜 의무일 줄로 생각합니다."

말이 끝나자, 청년들은 상여를 메고 선 채 박수를 하였다.

장사가 끝난 뒤에, 백현경과 장래의 일을 의논하며 산에서 내려왔던 동혁은 황혼에 몸을 숨기고 홀로 영신의 무덤으로 올라갔다.

이른 봄 산기슭으로 스며드는 저녁 바람은 소름이 끼칠 만치 쌀쌀하다. 그러나 그는 추운 줄을 몰랐다. 머리 위에서 새파란 광채를 흘리며 반짝거리는 외따른 별 하나를 우러러보고 섰으니까, 극도의 슬픔과 원한에 사무쳤던 동혁의 머리는 차츰차츰 식어 가는 것 같다. 마음이 가라앉는 대로 사람의 생명의 하염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스러이 느꼈다.

'그만 죽을 걸 그닥지도 애를 썼구나!'

하니,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고 무덤 앞에 앉은 저 자신도 판결을 받은 죄수처럼 언제 어느 때 죽음의 사자에게 덜미를 잡혀갈는지? 제 입으로 숨쉬는 소리를 제 귀로 들으면서도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수수께끼다! 왜 무엇 하러 뒤를 이어 낳고, 뒤를 이어 죽고 하는지 모르는 인생―---요컨대 영원히 풀어 볼 수 없는 수수께끼에 지나지 못한다.'

'내가 이 채영신이란 여자와 인연을 맺었던 것도 결국은 한바탕 꾸어 버린 악몽이다. 이제 와서 남은 것은 깨어진 꿈의 한 조각이 아니고 무엇이냐.'

될 수 있는 대로 인생을 명랑하게 보려고 노력하여 오던 동혁이건만, 너무도 뜻밖에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 보고는 회의와 일종 염세의 회색 구름에 온몸이 에워싸이는 것이다.

'별은 왜 저렇게 무엇이 반가워서 반짝거리느냐. 뻐국새는 무엇이 서러워서 밤 깊도록 저다지 청승맞게 우느냐. 영신은 왜 무엇 허러 낳었다 죽었고, 나는 왜 무엇 허러 이 무덤 앞에 올빼미처럼 두 눈을 껌벅거리며 쭈그리고 앉었느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순환소수와 같이 쪼개 보지 못하는 채 사사오입을 하는 것이 인생 문제일까?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모양으로, 까닭도 모르고 또한 아무 필요도 없이 제자리에서 맴을 돌며 허위적거리는 것이 인생의 길일까?

오직 먹기를 위해서, 씨를 퍼트리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서루 헐뜯고 싸우고 잡어먹지를 못해서 앙앙거리고 발버둥질을 치다가, 끝판에는 한 삼태기의 흙을 뒤집어쓰는 것이 인생의 본연한 자태일까.'

동혁의 머릿속은 천 갈래로 찢기고 만 갈래로 얽혀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는 가슴이 무엇에 짓눌리는 것처럼 답답해서 벌떡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제절 앞을 왔다갔다하다가, 봉분의 주위를 돌았다. 열 바퀴를 돌고 스무 바퀴를 돌았다. 그러다가는 무덤을 베개삼고 쓰러지며, 하늘을 쳐다본다. 별은 그 수가 버쩍 늘었다. 북두칠성은 금강석을 바수어서 끼얹은 듯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 중에도 큰 별 몇 개는 땅 위의 인간들을 비웃는 듯이 눈웃음을 치는 것 같다. 동혁은 그 별을 향해서 침이라도 탁 뱉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생각을 홱 뒤집었다.

'그렇다. 인생 문제는 그 자체인 인생의 머리로 해결을 짓지 못한다. 인류의 역사가 있은 후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술가가 머리를 썩히다가 해결의 실마리도 잡어 보지 못한 문제다. 그것을 손쉽게 풀어 보려고 덤비는 것버텀 망령된 짓이다.'

하고는 단념을 해버린 뒤에,

'그렇지만 채영신이가 죽은 것과 같이, 박동혁이가 살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명이 있는 동안은 값이 있게 살어 보자! 산 보람이 있게 살어 보자! 구차하게 살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타고난 목숨을 제 손으로 끊어 버리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하고 영신이가 반은 자살한 것처럼 생각도 하여 보았다.

'일을 하자! 이 영신이와 같이 죽는 날까지 일을 하자! 인생의 고독과 고민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만 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사업을 뒤를 이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울어 주고 서러워해 주는 것버덤, 내가 청석골로 와서 자기가 끼친 사업을 계속해 준다면, 그의혼백이라도 오죽이나 기뻐할까. 든든히 여길까. 일에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격언이 있지 않은가.'

하고 몇 번이나 생각을 뒤집었다.

'그럼, 우리 한곡리는 어떡허나? 흐트러진 진영(陣營)을 수습할 사람도 없는데…….'

동혁은 다시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혁은 앞으로 해나갈 일을 궁리하기보다도 우선 저의 신변이 몹시 외로운 것을 느꼈다. 애인의 무덤을 홀로 앉아 지키는 밤, 그 밤도 깊어 가서 저의 숨소리조차 듣기에 무서우리만치나 온누리는 괴괴한데, 추위와 함께 등허리에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게 하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고독감이다.

처음부터 서로 믿고 손이 맞아서 일을 하여 오던 동지에게 배반을 당하고, 부모의 골육을 나눈 단지 한 사람인 친동생은 만리타국으로 탈수한 후 생사를 알 길 없는데,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저의 반려를 삼아 한 쌍의 수리와 같이 이 세상과 용감히 싸워 나가려던 사랑하던 사람조차 죽음으로써 영원히 이별한 동혁은 외로웠다. 무변대해에서 키를 잃은 쪽배와도 같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아래서 격랑에 부닥기는 불 꺼진 등대만치나 외로웠다. 무한히 외로웠다.

그러나 한참 만에 동혁은 무거운 짐이나 부린 모군꾼처럼,

"휘유―"

하고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다시 마음을 돌이켜 보니, 저의 일신이 홀가분한 것도 같았던 것이다.

'채영신만한 여자를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진댄, 차라리 한평생 독신으로 지내리라. 아무 데도 얽매이지 않는 몸을 오로지 농촌사업에다만 바치리라.'

하고 일어서면서도 차마 무덤 앞을 떠나지 못하는데 멀리 눈 아래에서 등불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원재와 다른 청년들이 동혁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혹시 산소에나 있나 하고 떼를 지어 올라오는 것이었다.

동혁은 잠자코 청년들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장로의 집에 잠시 들러 곤해서 쓰러진 백현경을 일으키고, 몇 마디 앞일을 의논해 보았다. 백씨는 여전히 값비싼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종아리가 하얗게 내비치는 비단 양말을 신은 것이 불쾌해서, 동혁은 될 수 있는 대로 외면을 하고 그의 의견을 들었다.

"여기 일은 우리 연합회 농촌사업부에서 시작헌 게니까, 속히 후임자를 한 사람 내려보내서 사업을 계속하기로 작정했어요. 영신이만 헐 수야 없겠지만 나이두 지긋허구 퍽 진실헌 여자가 한 사람 있으니까요."

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동혁은 더 묻지 않았다. 부탁 비슷한 말도 하기 싫어서,

"그럼 나두 안심허겠소이다."

하고 원재네 집으로 내려왔다. 영결식장에서 여러 사람 앞에 선언한 대로 당분간이라도 청석골에 머물러 있어 뒷일을 제 손으로 수습해 주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였다. 그러나 이미 후임자까지 내정이 되고 진실한 사람이 온다는데, 부득부득 '나를 여기 있게 해주시오'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영신이가 거처하던 원재네 집 텅 비인 건넌방에서 하룻밤을 드새자니, 동혁은 참으로 무량한 감개에 몸둘 바가 없었다. 앉았다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세상 모르도록 술이나 취해 봤으면…….'

하고 난생 처음으로 술생각까지 해보는데, 원재가 저의 이부자리를 안고 건너왔다.

두 사람은 형제와 같이 나란히 누워서 불을 끈 뒤에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였다. 동혁은,

"나는 새루 온다는 여자버덤두 원재를 믿구 가네. 나도 틈이 있는 대루 와서 보살펴 주겠지만 조끔두 낙심 말구 일을 해주게!"

하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원재도,

"채선생님 영혼이 우리들헌테 붙어댕기시는 것 같어서 일을 안 헐래야 안 헐 수가 없겠에요."

하고 끝까지 잘 지도를 해달라는 말에 동혁은 이불 속에서 나 어린 동지의 손을 더듬어 꽉 쥐어 주었다.

닭은 두 홰를 울고 세 홰를 울었다. 그래도 동혁은 이 방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던 사람과 지내 오던 일이 너무나 또렷또렷이 눈앞에 나타나서 머리만 지끈지끈 아프고 잠은 아니 왔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감기는 눈앞에서 뜻밖에 이러한 글발이 나타났다. 청석학원 낙성식 때 식장 맞은편 벽에 영신이가 써붙였던 슬로건 같은 글발이 비문처럼 천장에 옴폭옴폭하게 새겨지는 것이었다.

과거를 돌려다보고 슬퍼하지 마라. 그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아니할지니 오직 현재를 의지하라. 그리하야 억세게, 사내답게 미래를 맞으라!

이튿날 아침 동혁은 산소로 올라가서,

'당신이 못다 한 일과 두 몫을 하겠다.'

고 맹세한 것을 이제로부터 실행하겠다는 말을 다시 한번 자신 있게 한 뒤에 홱 돌아서서 그 길로 내처 걸어 한곡리로 향하였다. 그러나 시꺼먼 눈썹이 숱하게 난 그의 양미간은 생목(生木)이 도끼에 찍힌 그 흠집처럼 찌푸려졌다. 아마 그 주름살만은 한평생 펴지지 못하리라.

어머니의 병이 염려는 되었으나, 그는 바로 집으로 가기가 싫어서 역로에 몇 군데 모범촌이라고 소문난 마을을 들렀다.

어느 곳에서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청년이 오막살이 한 채를 빌려 가지고 혼자서 야학을 시작한 곳이 있고, 어떤 마을에서는 제법 크게 차리고 여러 해 동안 한글과 여러 가지 과정을 강습해 내려오다가, 당국과 말썽이 생겨 강습소 인가를 취소당하고 구석구석이 도적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한곡리서 오십 리쯤 되는 장거리에서 멀지 않은 촌에서는 청년이 서너 명이나 보수 한 푼 받지 않고 삼 년 동안 주야학을 겸해서 하는 곳이 있는데, 그들은 겨우내 두루마기도 못 얻어 입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손끝을 호호 불어 가며 교편을 잡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편허게 지냈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그는 그러한 지도분자들과 굳게 악수를 하고 하룻밤씩 같이 자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새로운 방침을 토론도 하였다. 어느 곳에를 가나,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계몽적인 문화운동도 해야 하지만, 무슨 일에든지 토대가 되는 경제운동이 더욱 시급하다."

는 것을 역설하고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이제부터 한곡리에만 들어앉었을 게 아니라 다시 일에 기초가 잡히기만 하면,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널리 듣고 보기도 하고, 또는 내 주의와 주장을 세워 보리라. 그네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같은 정신과 계획 아래에서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 보리라.'

하니, 어느 구석에선지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들이 그러한 고생을 달게 받으며 굽히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을 실지로 보니 동혁은 한곡리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할 때의 생각이 바로 어제런 듯이 났다. 동시에 옛날의 동지가 불현듯이 보고 싶었다. 일체의 과거를 파묻어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아가려는 생각이 굳을수록 동지들의 얼굴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건배를 찾어가 보자.'

지난날의 경우는 어찌 되었든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건배였다. 보고만 싶은 게 아니라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박봉생활을 하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적지 않은 돈을 부쳐 준 치사도 할 겸 그가 일을 보는 군청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건배는 군청에도, 거기서 멀지 않은 사글세로 들어 있는 그의 집에도 없었다. 건배의 아내와 아이들은 반겼으나,

"엊저녁에 한곡리꺼정 다녀올 일이 있다구 자전거를 타구 가서 여태 안 들어왔어요."

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무슨 일일까? 나를 찾어가지나 않었나.'

하고 동혁은 일어서는데, 안주인이 한사코 붙들어서 더운 점심을 대접받으며 지내는 형편을 들었다.

"노루꼬리만한 월급에 그나마 반은 술값으루 나가서, 어렵긴 매일반이야요. 일구월심에 다시 한곡리루 가서 살 생각만 나요. 굶어두 제 고장에서 굶는 게 맘이나 편하죠."

건배의 아내는 당장에 따라 일어서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동혁은 그와 의형제까지 한 사이를 알면서도 영신의 죽음은 짐짓 말하지 않았다. 그가 영신의 소식을 묻고 혼인 때는 꼭 청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

"네에, 청허구말구요."

하고 쓰디쓴 웃음을 웃어 보였다.

한곡리가 십 리쯤 남은 주막 근처까지 왔을 때였다.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넘는 양복쟁이와 마주치자 동혁은,

"여어, 건배 군 아닌가?"

하고 손을 들었다.

"요오, 동혁이!"

키장다리 건배는 자전거를 내던지고 달려들어 동혁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피차에 눈을 꽉 감고 잠시 말이 없다가,

"이게 얼마 만인가?"

"어디루 해 오는 길인가?"

하고 동시에 묻고는 함께 대답이 없다.

"아무튼 저 집으루 좀 들어가세."

건배는 동혁을 끌고 주막으로 들어갔다.

"아, 신문에까지 났데만, 영신 씨가 온 그런……."

건배는 대뜸 동혁의 가슴속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르고는 말끝을 맺지 못한다. 동혁은 손을 들며,

"우리 그 사람의 말은 입 밖에두 내지 마세. 제발 그래 주게!"

하고 손을 들어 친구의 입을 막았다. 건배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있다가 한숨 섞어,

"그렇지, 남자헌테는 사랑이 그 생활의 전부가 아니니까…… 허지만, 어디 그이허구야 단순한 연애관계뿐이었었나? 참 정말 아까운……."

하는데,

"글쎄 이 사람, 그만둬!"

하고 동혁은 성을 더럭 내었다.

두 친구는 말머리를 돌렸다. 둘이 서로 집을 찾아갔더라는 것과 그동안에 격조했던 이야기를 대강대강 하는데, 청하지도 않은 술상이 들어왔다. 건배는,

"나 오늘은 술 안 먹겠네."

하고 막걸리 보시기를 폭삭 엎어 놓더니 각반 친 다리만 문지르며 말 꺼내기를 주저하다가,

"자네, 그 동안 한곡리서 변사(變事)가 생긴 줄은 모르지?"

한다.

"아아니, 무슨 변사?"

동혁의 눈은 둥그래졌다.

"그저께 강기천이가 죽었네!"

"뭐? 누가 죽어?"

동혁은 거짓말을 듣는 것 같았다.

"사실은 강기천이 조상을 갔다 오는 길일세."

하고 건배는 듣고 본 대로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기천이는 연전부터 주막 갈보에게 올린 매독을 체면상 드러내 놓고 치료를 못 하다가, 술 때문에 갑자기 덧쳐서 짤짤 매던 중, 그 병에는 수은을 피우면 특효가 있다는 말을 곧이듣고 비밀히 구해다가 서너 돈쭝씩이나 콧구멍에다 피웠었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고만 중독이 되어서, 온몸이 시퍼래 가지고 저 혼자 팔팔 뛰다가 방구석에 머리를 틀어박고는 이빨만 빠드득빠드득 갈다가 고만 뻐드러졌다는 것이었다, 동혁은,

"흥, 저두 고만 살걸."

하고 젓가락도 들지 않은 술상을 들여다보며 아무런 감상도 더 입 밖에 내지를 않았다.

건배는 마코를 꺼내 붙이며,

"가보니, 아주 난가(亂家)데 난가야. 헌데, 형이 죽은 줄도 모르는 건살포는 서울서 웬 단발헌 계집을 데리구 왔네그려. 마침 쫓겨갔던 본처가 시아주범 통부를 받구 왔다가, 외동서끼리 마주쳐서 송장을 뻗쳐 놓구 대판으루 쌈이 벌어졌는데, 참 정말 구경헐 만허데."

하고 여전히 손짓을 해가며 수다를 늘어놓는다. 동혁은 고개만 끄덕이며 듣다가,

"망헐 건 진작 망해여지."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그런데, 자넨……."

하고 전보다도 두 볼이 더 여윈 건배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자네 그 노릇을 오래 할 텐가?"

하고 묻는다. 건배는 그런 말 꺼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고만 집어치겠네. 이 연도 말꺼정만 댕기구, 먹거나 굶거나 한곡리루 다시 가겠네. 되레 빚만 더끔더끔 지게 돼서 고만둔다는 것버덤두 아니꼽구 눈꼴 틀리는 거 많어서 이젠 넌덜머리가 났네."

하고 담배 연기를 한숨 섞어 내뿜으며,

"월급푼에 목을 매다느니버덤은, 정든 내 고장에서 동네 사람이나 아이들의 종 노릇을 허는 게 얼마나 맘 편허구 사는 보람이 있는 걸 인제야 절실히 깨달었네."

하고 진정을 토한다. 그 말에 동혁은 벌떡 일어서며,

"자아 그럼, 우리 일터에서 다시 만나세! 나는 지금 자네가 헌 말을 다시 한번 믿겠네."

하고 맨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굳게굳게 건배의 손을 쥐었다.

"염려 말게. 자넬랑은 벌판의 모래버덤 한 줌의 소금이 되어 주게!"

건배도 잡힌 손을 되잡아 흔들었다.

아무리 지루하던 겨울도 한번 지나만 가면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닥쳐온다. 반가운 손님은 신 끄는 소리를 내지 않듯이, 자취 없이 걸어오기로서니, 얼어붙었던 개천 바닥을 뚫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말랐던 나뭇가지에서 새 움이 뾰족뾰족 돋아나는 것을 볼 때, 뉘라서 새봄이 오지 않았다 하랴.

동혁은 신작롯가에서 잔디 속잎이 파릇파릇해진 것을 비로소 보았다. 미루나무 껍질을 손톱 끝으로 제겨 보니, 벌써 물이 올라서 나무하는 아이들의 피리 소리도 멀지 않아 들릴 듯.

"인제 완구히 봄이로구나!"

한마디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짖어졌다.

그는 논둑으로 건너 서며 발을 탁탁 굴러 보았다. 흠씬 풀린 땅바닥은 우단 방석을 딛는 것처럼 물씬물씬하다.

동혁은 가슴을 봉긋이 내밀며 숨을 깊닿게 들여마셨다. 마음의 들창이 활짝 열리며 그리로 훈훈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 그는 다시 속 깊이 서리어 있는 묵은 시름과 함께,

"후―"

하고 마셨던 바람을 기다랗게 내뿜었다. 화로에 꺼졌던 숯불이 발갛게 피어난 방 속같이 온몸이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혁이가 동리 어귀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그스름하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삼고 언덕 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와 향나무들이었다. 회관이 낙성되던 날 그 기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회원들과 함께 패다 심은 상록수들이 키돋움을 하며 동혁을 반기는 듯.

"오오, 너이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구두 싱싱허구나! 저렇게 시푸르구나!"

동혁의 걸음은 차츰차츰 빨라졌다. 숨가쁘게 잿배기를 넘으려니까 회관 근처에서 '애향가'를 떼를 지어 부르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웅장하게 들려 오는 듯하여서, 그는 부지중에 두 팔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동리의 초가집들을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떠나 있던 주인이 저의 집 대문간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에헴, 에헴!"

하고 골짜구니가 울리도록 커다랗게 기침을 하였다.

그의 눈에는 회관 앞마당에 전보다 몇 곱절이나 삑삑하게 모여 선 회원들이 팔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체조를 하는 광경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꿈벅 하고 감았다가 떴다. 이번에는 훠언하게 터진 벌판에 물이 가득히 잡혔는데, 회원이 오리떼처럼 논바닥에 가 하얗게 깔려서, 일제히 '이앙가(移秧歌)'를 부르며 모를 심는 장면이 망원경을 대고 보는 듯이 지척에서 보였다.

동혁은 졸지에 안계가 시원해졌다. 고향의 산천이 새삼스러이 아름다워 보여서 높은 묏부리에서부터 골짜구니까지, 산허리를 한바탕 떼굴떼굴 굴러 보고 싶었다. 앞으로 가지가지 새로이 활동할 생각을 하며 걷자니, 그는 제풀에 어깻바람이 났다. 회관 근처까지 다가온 동혁은 누가 등뒤에서,

'엇, 둘! 엇, 둘!'

하고 구령을 불러 주는 것처럼 다리를 쭉쭉 내뻗었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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