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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형식은 소매로 눈물을 씻고, 무릎 위에 놓인 눈물에 젖은 영채의 편지를 눈이 가는 대로 여기저기 다시 보았다. 그러나 형식의 눈에는 그 편지의 글자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듯하였다. 형식은 편지를 둘둘 말아 방바닥에 내려놓고 그 편지와 동봉하였던 조고마한 봉투를 떼었다. 우선과 노파의 눈물 흐르는 눈은 다시 형식의 손에 있는 조고마한 봉투로 모였다. 형식은 그 봉투 속에 무슨 무거운 것이 있음을 보고, 봉투를 거꾸로 들어 자기의 무릎 위에 쏟았다. 빨간 명주 헝겊으로 싼 길쭉한 것이 나온다. 형식은 실로 묶은 것을 끊고 그 명주 헝겊을 풀었다. 명주 헝겊 속에서 여러 해 묵은 듯한 장지 뭉텅이가 나온다. 형식은 그 뭉텅이를 들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그 장지 뭉텅이를 폈다. 형식은
"응!"
하고 놀라는 소리를 발한다. 우선과 노파의 눈은 그 뭉텅이로부터 형식의 얼굴로 옮았다. 그러고 형식의 뚝 부릅뜬 눈에는 새 눈물이 고임을 보았다. 우선과 노파의 눈은 다시 형식의 떨리는 손에 든 장지 조각으로 옮았다. 그 장지 조각에는 ㄱㄴㄷ과 가나다를 썼다. 아이들이 처음 언문을 배울 때에 써 가지는 것이었다. 그 글씨는 어리더라. 형식은 체면도 보지 아니하고 그 장지 조각에 이마를 비비며 소리를 내어 운다. 우선과 노파는 웬일인지 모르고 형식의 들먹들먹하는 등만 본다. 형식은 안타까운 듯이 그 종이에다 얼굴을 부비며 더욱 우는 소리를 높인다. 우선도 눈에 새로 눈물이 돌면서도 '형식은 어린애로다' 하였다.
형식은 십여 년 전 생각을 한다. 형식이 처음 박진사의 집에 갔을 때에는 영채의 나이 여덟 살이었었다. 그때에 영채는『천자문(千字文)』과『동몽선습(童蒙先習)』과『계몽편(啓蒙篇)』과『무제시(無題詩)』를 읽었더라. 그러나 아직도 언문을 배우지 못하였더라. 한번은 박진사가 '국문을 배워야지' 하면서 좋은 장지에 가나다를 써주었다. 그러나 어린 영채는 밖에 가지고 나가 놀다가 어디서 그 종이를 잃어버렸다. 이에 영채는 아버지의 책망이 두려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서 그때 열세 살 된 형식에게 몰래 청하였다. 그때에는 아직 형식과 영채가 말을 하지 아니하던 때라, 영채는 부끄러운 듯이 반쯤 외면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저, 언문 써주셔요."
하였다. 이 말을 할 때의 영채의 얼굴과 태도는 형식의 눈에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참 어여쁜 계집애로다' 하고 형식도 부끄러운 생각이 나면서,
"녜, 내일 아침에 써드리지요."
하고 오 리(五里)나 되는 종이 장사 집에 몸소 가서 장지를 사다가―이 종이가 그 종이다―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넉 장이나 써버리고야 이것을 썼다. 그것을 써서 책 사이에 끼워 두고 '어서 아침이 왔으면'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저, 언문 써주셔요' 하고 모로 서서 주먹으로 눈물을 씻는 영채의 모양이 열세 살 되었던 형식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박혔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형식은 더욱 양치와 세수를 잘하고 두루마기를 방정히 입고 그 종이― 이 종이로다―를 접어 품에 품고 대문에 서서 영채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생각은 마치 사랑을 하는 남자가 사람 없는 곳에서 그 사랑하는 처녀를 기다리는 생각과 같았다. 이윽고 영채도 누가 보기를 꺼리는 듯이 사방을 돌아보며 가만가만 나오다가 형식의 곁에 와서는 너무 기쁜 듯이 얼굴이 빨개지며 형식의 허리를 꼭 쓸어안았다. 형식은 자기의 가슴에 치는 영채의 머리를 살작 만졌다. 지금 세수를 하였는지 머리에는 물이 묻었더라. 그러고는 품속에서 그 종이― 이 종이로다―를 내어 영채에게 주었다. 그 종이는 형식의 가슴의 체온(體溫)으로 따뜻하더라. 영채도 그 종이의 따뜻함을 깨달았는지 한 걸음 물러서서 가만히 형식의 눈을 보더니 낯이 빨개지며 뛰어들어갔다. '이것이 그 종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고개를 들어 다시금 그 종이와 글자를 보았다. 그 글자가 제가끔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듯이 안주에서 지내던 일과, 자기의 그 후에 지내던 일과, 영채의 이야기와 편지와 자기의 상상과로 본 영채의 일생이 번개 모양으로 형식의 머리로 지나간다. 형식은 한번 더 입술을 물며― 이것은 불식부지간에 영채에게 배운 것―그 종이를 끝까지 폈다. 그 끝에는 새로 쓴 글씨로,
"이것이 이 몸이 평생에 지니고 있던 선생의 기념이로소이다."
하였다. 우선과 노파도 이 글을 보고 형식의 우는 뜻을 대강 짐작하였다. 그러고 우선은 그 종이를 형식의 손에서 당기어 한번 더 보았다. 노파도 우선과 함께 그 종이를 보았다. 형식은 다시 무릎 위에 있는 종이 뭉텅이를 풀었다. 그 속에서는 '황옥지환(黃玉指環)' 한 짝과 조고마한 칼 하나가 나온다. 그 칼날이 번적할 때에 세 사람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노파는 속으로 '저것이 이태 전에 김윤수의 아들 앞에서 뽑던 칼이로구나' 하였다. 형식은 그 칼을 집어 안과 밖을 보았다. 안 옆에 행서로, '일편심(一片心)'이라고 새겼다. 형식과 우선도 대개는 그 칼의 뜻을 짐작하였다. 형식은 다시 그 지환을 집었다. 노파는
"어째 한 짝만 있는고."
하였다. 형식은 그 지환에 아무것도 쓰지 아니하였음을 보고 지환을 쌌던 종이를 집었다. 그 종이에는 잘게 쓴 글씨로,
"이것은 평양 기생 계월화의 지환이로소이다. 계월화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으시려거든 아무러한 평양 사람에게나 물으소서. 월화가 이 몸에게 이 지환을 준 뜻은 썩어진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로소이다. 이 몸은 이제 힘껏 이 지환이 가르치는 바를 행하였나이다. 장차 이 지환을 대동강에서 원혼이 된 월화에게 돌려보내려니와 이 한 짝을 선생께 드림이 또한 무슨 뜻이 있는가 하나이다."
하고 아까 편지의 모양으로 연월일시 죄인 박영채 읍혈백배라 하였더라.
52
세 사람은 말이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제가끔 제 생각을 하였다. 한참이나 이러하다가 노파가 숨이 차서,
"여봅시오, 이 일을 어찌해요?"
하고 형식과 우선의 눈을 번갈아 본다. 노파의 일생에 남의 일을 위하여 이처럼 진정으로 슬퍼하고 걱정하고 마음이 괴로워하기는 처음이라. 노파는 어젯저녁에 진정으로 영채를 안고 울던 생각을 하였다. 그때에 영채가 생각하던 바와 같이 노파가 진정으로 남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영채의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따끈따끈하게 노파의 손등에 떨어질 때에, 또 영채가
"남들이 다 내 살을 뜯어먹으니 나도 내 살을 뜯어먹으렵니다."
하고 피 나는 입술을 더욱 꼭꼭 물어뜯을 때에 노파의 마음은 진실로 거북하였었다. 그때에 노파가 영채의 뺨에다 자기의 뺨을 대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 때에는 노파의 마음은 진실로 '참사람'의 마음이었었다. 그때에 노파가 마음속으로 영채를 향하여 합장 재배할 때에 노파의 영혼은 더러운 죄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이나 부처의 맑은 모양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고 자기가 이백 원에 사서 돈벌이하는 기계로 부리던 월향이라는 기생의 속에는 자기가 절하고 우러러볼 만한 무엇이 있음을 보았다. 그러고 명일부터는 영채를 자유의 몸을 만들고 자기도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영채와 자기와 정다운 모녀가 되어 서로 안고 서로 위로하며 즐겁게 깨끗하게 세상을 보내리라 하였다. 그러고 자리에 돌아와 벌써 코를 고는 '영감쟁이'를 볼 때에 '에그 더러운 짐승' 하고 옷을 입은 대로 저 윗목에서 혼자 누워 잤다. 그때에 '에그, 더러운 짐승'이라 함은 다만 '영감쟁이'의 몸뚱이가 더럽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 영채의 영혼과 자기의 영혼과 하느님과 부처를 본 눈으로 '영감쟁이'의 때묻은 사람을 볼 때에 자연히 구역이 난 것이라. 마치 더러운 집에서 생장한 사람이, 자기의 집이 더러운 줄을 모르다가도 한번 깨끗한 집을 본 뒤에는 자기의 집이 더러운 줄을 깨닫는 모양으로, 노파는 일생에 깨끗한 영혼과 참사람을 보지 못하다가 따끈따끈한 영채의 피에 오십여 년 죄악에 묻혀 자던 깨끗한 영혼이 깜짝 놀라 눈을 떠서, 백설과 같고 수정과 같은 영채의 영혼을 보고, 그를 보던 눈으로 자기의 영혼을 본 것이라. 그러다가 영감쟁이의 '사람'을 보니 비로소 더러운 줄을 깨달은 것이라. 그러나 아침에 영채가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들어오는 양을 보매 노파의 영혼의 눈은 다시 감기어, 어젯저녁에 보던 영채의 '속사람'을 보지 못하고 다만 영채의 육체만 보았을 뿐이다. 그때에 어젯저녁의 기억은 마치 수십 년 전에 지나간 일과 같았다. 그러므로 영채가 '생각하여 보니까 우스운 일이야요' 할 때에 노파는 옳다구나 하고 '잘 생각하였다. 과연 그러하니라' 하고 다시 영채를 돈벌이하는 기계로 삼으려 하는 욕심이 났었다. 그래서 영채를 평양에 보낸 후로부터 지금 영채의 편지를 볼 때까지 노파는 영채로 하여금 밤에 '손을 보'게 할 생각과, 김현수에게 이천 원에 팔아먹을 생각만 하였었다. 그러나 영채의 편지를 보매 갑자기 그러한 생각이 스러지고 칼과, 지환과, 형식의 눈물을 볼 때에 어젯저녁 떴던 노파의 영혼의 눈이 뜨였다. 노파는 오늘 아침 영채에게 '잘 생각하였다. 과연 그러하니라' 하던 것을 생각하매, 일변 부끄럽기도 하고 일변 영채의 '속 사람'에 대하여 죄송하기도 하였다. 마치 눈앞에 영채가 보이며 '흥, 잘 생각하였다!' 하고 노파의 하던 말을 조롱하는 듯도 하다.
노파의 눈에 늠실늠실하는 대동강이 보인다. 영채가 어떤 조고마한 바윗등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두 손에 치맛자락을 들고 물 속에 뛰어들려 한다. 그때에 자기가
"월향아,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죽일 년이다."
하고 뒤로 뛰어들어가 월향을 붙들려 하였다. 그러나 월향은 고개를 돌려 씩 웃고
"흥, 틀렸소. 내 몸은 더러웠소!"
하면서 그만 물 속에 들어가고 만다. 자기는 그 바윗등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구나? 네 몸을 더럽히게 한 것이 내로구나. 월향아? 용서하여라."
하는 듯하다. 그러고 어저께
"할 수 없소. 죽으려니까."
하고 실망하는 김현수더러
"여봅시오, 남자가 그렇게 기운이 없소? 한번 이러면 그만이지!"
하고 눈을 찡긋하여 김현수에게 월향을 강간하기를 권하던 생각이 난다. 옳다, 그렇다, 월향의 정절을 깨트린 것은 내로구나, 월향을 죽인 것은 내로구나, 하고 가슴이 타는 듯하여 입으로 숨을 쉬면서 또 한번,
"아이구,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하고 안타까운 듯이 두 무릎으로 방바닥을 탁탁 친다. 형식은 지금껏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이 다 저 더러운 뚱뚱한 더러운 노파라 하여 가슴이 아프고 원망이 깊을수록, 지극히 미워하는 눈으로 노파를 흘겨보더니, 노파가 심하게 고민하는 양을 보고 '네 속에 졸던 영혼이 깨었구나' 하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던 도적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저 노파는 역시 사람이라, 나와 같은 영채와 같은 사람이라 하는 생각이 나서 노파의 괴로워하는 모양이 불쌍히 보인다. 그러나 형식은, 노파가 아까 자기더러 '나는 누구신 줄도 모르고' 하던 것을 생각하니 금시에 동정하는 마음이 스러지고 아까보다 더한 싫고 미운 생각이 난다. 그래서 형식은 한번 더 노파를 흘겨보았다. 노파는 형식의 흘겨보는 눈을 보고 또,
"아이구, 이 일을 어째요?"
하고 무릎으로 방바닥을 친다. 우선은 묵묵히 앉았더니 형식더러,
"여보, 얼른 평양경찰서에 전보를 놓고 밤차로 노형이 평양으로 가시오!"
한다.
세 사람은 말이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제가끔 제 생각을 하였다. 한참이나 이러하다가 노파가 숨이 차서,
"여봅시오, 이 일을 어찌해요?"
하고 형식과 우선의 눈을 번갈아 본다. 노파의 일생에 남의 일을 위하여 이처럼 진정으로 슬퍼하고 걱정하고 마음이 괴로워하기는 처음이라. 노파는 어젯저녁에 진정으로 영채를 안고 울던 생각을 하였다. 그때에 영채가 생각하던 바와 같이 노파가 진정으로 남을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영채의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따끈따끈하게 노파의 손등에 떨어질 때에, 또 영채가
"남들이 다 내 살을 뜯어먹으니 나도 내 살을 뜯어먹으렵니다."
하고 피 나는 입술을 더욱 꼭꼭 물어뜯을 때에 노파의 마음은 진실로 거북하였었다. 그때에 노파가 영채의 뺨에다 자기의 뺨을 대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 때에는 노파의 마음은 진실로 '참사람'의 마음이었었다. 그때에 노파가 마음속으로 영채를 향하여 합장 재배할 때에 노파의 영혼은 더러운 죄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이나 부처의 맑은 모양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고 자기가 이백 원에 사서 돈벌이하는 기계로 부리던 월향이라는 기생의 속에는 자기가 절하고 우러러볼 만한 무엇이 있음을 보았다. 그러고 명일부터는 영채를 자유의 몸을 만들고 자기도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영채와 자기와 정다운 모녀가 되어 서로 안고 서로 위로하며 즐겁게 깨끗하게 세상을 보내리라 하였다. 그러고 자리에 돌아와 벌써 코를 고는 '영감쟁이'를 볼 때에 '에그 더러운 짐승' 하고 옷을 입은 대로 저 윗목에서 혼자 누워 잤다. 그때에 '에그, 더러운 짐승'이라 함은 다만 '영감쟁이'의 몸뚱이가 더럽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 영채의 영혼과 자기의 영혼과 하느님과 부처를 본 눈으로 '영감쟁이'의 때묻은 사람을 볼 때에 자연히 구역이 난 것이라. 마치 더러운 집에서 생장한 사람이, 자기의 집이 더러운 줄을 모르다가도 한번 깨끗한 집을 본 뒤에는 자기의 집이 더러운 줄을 깨닫는 모양으로, 노파는 일생에 깨끗한 영혼과 참사람을 보지 못하다가 따끈따끈한 영채의 피에 오십여 년 죄악에 묻혀 자던 깨끗한 영혼이 깜짝 놀라 눈을 떠서, 백설과 같고 수정과 같은 영채의 영혼을 보고, 그를 보던 눈으로 자기의 영혼을 본 것이라. 그러다가 영감쟁이의 '사람'을 보니 비로소 더러운 줄을 깨달은 것이라. 그러나 아침에 영채가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들어오는 양을 보매 노파의 영혼의 눈은 다시 감기어, 어젯저녁에 보던 영채의 '속사람'을 보지 못하고 다만 영채의 육체만 보았을 뿐이다. 그때에 어젯저녁의 기억은 마치 수십 년 전에 지나간 일과 같았다. 그러므로 영채가 '생각하여 보니까 우스운 일이야요' 할 때에 노파는 옳다구나 하고 '잘 생각하였다. 과연 그러하니라' 하고 다시 영채를 돈벌이하는 기계로 삼으려 하는 욕심이 났었다. 그래서 영채를 평양에 보낸 후로부터 지금 영채의 편지를 볼 때까지 노파는 영채로 하여금 밤에 '손을 보'게 할 생각과, 김현수에게 이천 원에 팔아먹을 생각만 하였었다. 그러나 영채의 편지를 보매 갑자기 그러한 생각이 스러지고 칼과, 지환과, 형식의 눈물을 볼 때에 어젯저녁 떴던 노파의 영혼의 눈이 뜨였다. 노파는 오늘 아침 영채에게 '잘 생각하였다. 과연 그러하니라' 하던 것을 생각하매, 일변 부끄럽기도 하고 일변 영채의 '속 사람'에 대하여 죄송하기도 하였다. 마치 눈앞에 영채가 보이며 '흥, 잘 생각하였다!' 하고 노파의 하던 말을 조롱하는 듯도 하다.
노파의 눈에 늠실늠실하는 대동강이 보인다. 영채가 어떤 조고마한 바윗등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두 손에 치맛자락을 들고 물 속에 뛰어들려 한다. 그때에 자기가
"월향아,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죽일 년이다."
하고 뒤로 뛰어들어가 월향을 붙들려 하였다. 그러나 월향은 고개를 돌려 씩 웃고
"흥, 틀렸소. 내 몸은 더러웠소!"
하면서 그만 물 속에 들어가고 만다. 자기는 그 바윗등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구나? 네 몸을 더럽히게 한 것이 내로구나. 월향아? 용서하여라."
하는 듯하다. 그러고 어저께
"할 수 없소. 죽으려니까."
하고 실망하는 김현수더러
"여봅시오, 남자가 그렇게 기운이 없소? 한번 이러면 그만이지!"
하고 눈을 찡긋하여 김현수에게 월향을 강간하기를 권하던 생각이 난다. 옳다, 그렇다, 월향의 정절을 깨트린 것은 내로구나, 월향을 죽인 것은 내로구나, 하고 가슴이 타는 듯하여 입으로 숨을 쉬면서 또 한번,
"아이구,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하고 안타까운 듯이 두 무릎으로 방바닥을 탁탁 친다. 형식은 지금껏 이 비극을 일으킨 것이 다 저 더러운 뚱뚱한 더러운 노파라 하여 가슴이 아프고 원망이 깊을수록, 지극히 미워하는 눈으로 노파를 흘겨보더니, 노파가 심하게 고민하는 양을 보고 '네 속에 졸던 영혼이 깨었구나' 하면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던 도적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저 노파는 역시 사람이라, 나와 같은 영채와 같은 사람이라 하는 생각이 나서 노파의 괴로워하는 모양이 불쌍히 보인다. 그러나 형식은, 노파가 아까 자기더러 '나는 누구신 줄도 모르고' 하던 것을 생각하니 금시에 동정하는 마음이 스러지고 아까보다 더한 싫고 미운 생각이 난다. 그래서 형식은 한번 더 노파를 흘겨보았다. 노파는 형식의 흘겨보는 눈을 보고 또,
"아이구, 이 일을 어째요?"
하고 무릎으로 방바닥을 친다. 우선은 묵묵히 앉았더니 형식더러,
"여보, 얼른 평양경찰서에 전보를 놓고 밤차로 노형이 평양으로 가시오!"
한다.
53
우선은 속으로 영채의 이번 행위는 마땅하다 하였다. 정조가 여자의 생명이니 정조가 깨어지면 몸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여자 된 영채가 어젯저녁 청량사 사건에 대하여 잡을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는 과연 옳은 여자로다 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기가 여태껏 영채를 유혹하던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사상(思想)에는 모순(矛盾)이 있는 줄을 우선은 모른다. 영채가 기생 월향일 때에는 기생이니까 정절을 깨트려도 상관이 없고, 월향이가 영채가 된 뒤에는 기생이 아니니까 정절을 지킴이 마땅하다……. 이것이 분명한 모순이언마는 우선은 그런 줄을 모른다. 우선의 생각을 넓히면 '열녀는 열녀니까 정절을 깨트림이 죄어니와, 열녀 아닌 여자는 열녀가 아니니까 정절을 깨트려도 죄가 아니라' 함과 같다. 그러면 이는 선후(先後)를 전도(顚倒)함이니, 열녀이니까 정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절을 지키니까 열녀어늘, 우선의 생각에는 열녀면 정절을 지킬 것이로되, 열녀가 아니면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여도 좋다 함이라. 그러므로 우선은 영채가 열녀인 줄을 모를 때에는 정절을 깨트려 주려 하다가 열녀인 줄을 안 뒤에는 영채의 정절을 깨트리려 한 것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함이라. 아무려나 우선은 영채의 이번 행위가 가장 좋은 행위라 한다. 그러나 형식은 이 일에 대하여 우선의 생각하는 바와는 다르게 생각한다. 형식도 영채가 그처럼 정절이 굳은 것을 김탄은 한다. 죽으려고까지 하는 깨끗하고 거룩한 정신을 보고 존경도 한다. 그러나 형식의 생각에는 우선과 같이 '영채의 이번 행위가 가장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사람의 생명(生命)은 우주(宇宙)의 생명과 같다. 우주가 만물(萬物)을 포용(包容)하는 모양으로 인생(人生)도 만물을 포용한다. 우주는 결코 태양(太陽)이나 북극(北極)만으로 그 내용(內容)을 삼지 아니하고, 만천(滿天)의 모든 성신(星辰)과 만지(萬地)의 모든 만물로 다 포용을 삼는다. 그러므로 창궁(蒼穹)에 극히 조고마한 별도 우주의 전생명(全生命)의 일부분(一部分)이요, 내지 지상(地上)의 극히 미세(微細)한 지풀잎 하나, 티끌 하나도 모두 우주의 전생명의 일부분이라. 태양이 지구(地球)보다 위대(偉大)하니, 태양(太陽)이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에 대한 관계가 지구(地球)의 그것보다 크다고는 할지나, 그렇다고 태양(太陽)만이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이요, 지구(地球)는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에 관계가 전무하다고는 못 할지라. 또 태양계(太陽系)에 있어서는 태양(太陽)이 중심(中心)이로되, 무궁대(無窮大)한 전우주(全宇宙)에 대하여는 태양(太陽) 그 물건도 한 티끌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 이와 같이 사람의 생명(生命)도 결코 일의무(一義務)나 일도덕률(一道德律)을 위하여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人生)의 만반 의무(萬般義務)와 우주(宇宙)에 대한 만반 의무(萬般義務)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충(忠)이나, 효(孝)나, 정절(貞節)이나, 명예(名譽)가 사람의 생명(生命)의 중심(中心)은 아니니, 대개 사람의 생명(生命)이 충(忠)이나 효(孝)에 재함이 아니요, 충(忠)이나 효(孝)가 사람의 생명에서 출함이라. 사람의 생명(生命)은 결코 충(忠)이나 효(孝)나의 하나에 속한 것이 아니요, 실로 사람의 생명(生命)이 충, 효, 정절, 명예 등(忠, 孝, 貞節, 名譽 等)을 포용(包容)하는 것이 마치 대우주(大宇宙)의 생명(生命)이 북극성(北極星)이나 백랑성(白狼星)이나 태양(太陽)에 재함이 아니요, 실로 대우주(大宇宙)의 생명(生命)이 북극성(北極星)과 백랑성(白狼星)과 태양과 기타 큰 별, 잔 별과 지상(地上)의 모든 미물(微物)까지도 포용(包容)함과 같다.
사람의 생명(生命)의 발현(發現)은 다종다양(多種多樣)하니, 혹 충(忠)도 되고 효(孝)도 되고 정절(貞節)도 되고, 기타 무수무한(無數無限)한 인사현상(人事現象)이 되는 것이라. 그 중에 무릇 민족(民族)을 따라, 혹은 국정(國情)을 따르고, 혹은 시대(時代)를 따라 필요성이 무수무궁(無數無窮)한 인사현상중(人事現象中)에서 특종(特種)한 것 일 개(一個)나 또는 수 개(數個)를 취하여 만반 인사행위(萬般人事行爲)의 중심(中心)을 삼으니 차 소위(此所謂) 도(道)요, 덕(德)이요, 법(法)이요, 율(律)이라. 무릇 사회적 생활(社會的 生活)을 완성(完成)하려면 그 사회(社會)의 각원(各員)이 그 사회(社會)의 도덕 법률(道德法律)을 권권복응(卷卷服膺)함이 마땅하되 그러나 결코 이는 생명(生命)의 전체(全體)는 아니니, 생명(生命)은 하여(何如)한 도덕 법률(道德法律)보다도 위대(偉大)한 것이라. 그러므로 생명(生命)은 절대(絶對)요, 도덕 법률(道德法律)은 상대(相對)니, 생명(生命)은 무수히 현시(現時)의 그것과 상이(相異)한 도덕(道德)과 법률(法律)을 조출(造出)할 수 있는 것이라. 이것이 형식이가 배워 얻은 인생관(人生觀)이라. 그러므로 영채가 정절이 깨어짐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 함은 효(孝)와 정절(貞節)이라는 일도덕률(一道德律)을 인생인 여자(女子)의 생명(生命) life의 전체(全體)로 오인(誤認)한 것이라 하였다. 효(孝)와 정절(貞節)이 현시(現時)에 있어서는 여자의 심중되는 덕(德)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여자인 인생(人生)의 생명(生命)의 소산(所産)이요, 일부분(一部分)이라 하였다. 영채는 과연 부모에게 대하여 효(孝)하지 못하였다. 지아비에게 대하여 정(貞)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도 자기의 의지(意志)로 그러한 것이 아니요, 무정한 사회(社會)가 연약한 그로 하여금 그리하지 아니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 설혹 영채가 자기의 의지(意志)로 효(孝)와 정(貞)에 대하여 생명(生命)의 의무(義務)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자. 그러나(그렇다) 가정하더라도 영채는 생명(生命)을 끊을 이유가 없다. 효와 정은 영채의 생명의 의무 중에 둘이니, 설혹 중요하다 하더라도 부분(部分)은 전체(全體)보다 작으니라. 이 두 의무는 실패(失敗)하였다 하더라도 아직도 영채의 생명에는 백천무수(百千無數)의 의무가 있다. 그의 생명에는 아직도 충(忠)도 있고, 세계(世界)에 대한 의무도 있고, 동물(動物)에 대한 의무도 있고, 산천(山川)이나 성신(星辰)에 대한 의무도 있고 부처에 대한 의무도 있다. 이렇게 무수한 의무를 가진 귀중한 생명을 다만 두 가지―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또 부득이한 것인데―를 위하여 (끊으려 하는 영채의 행위는) 결코 '옳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순결(純潔)하고 열렬(熱烈)한 사람이 자기(自己)의 중심적 의무(中心的 義務)를 생명으로 삼음은 또한 인생(人生)의 자랑이라 하였다.
형식은 이론(理論)으로는 영채의 행위를 그르다 하면서도 정(情)으로는 영채를 위하여 울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영채를 '낡은 여자'라 하고, 다시 형용사를 붙여서 순결 열렬(純潔熱烈)한 구식 여자(舊式女子)라 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이번 영채의 행위는 절대적(絶對的)으로 선(善)하다 한다. 하나는 영문식(英文式)이요, 하나는 한문식(漢文式)이로다.
우선은 속으로 영채의 이번 행위는 마땅하다 하였다. 정조가 여자의 생명이니 정조가 깨어지면 몸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여자 된 영채가 어젯저녁 청량사 사건에 대하여 잡을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는 과연 옳은 여자로다 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기가 여태껏 영채를 유혹하던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사상(思想)에는 모순(矛盾)이 있는 줄을 우선은 모른다. 영채가 기생 월향일 때에는 기생이니까 정절을 깨트려도 상관이 없고, 월향이가 영채가 된 뒤에는 기생이 아니니까 정절을 지킴이 마땅하다……. 이것이 분명한 모순이언마는 우선은 그런 줄을 모른다. 우선의 생각을 넓히면 '열녀는 열녀니까 정절을 깨트림이 죄어니와, 열녀 아닌 여자는 열녀가 아니니까 정절을 깨트려도 죄가 아니라' 함과 같다. 그러면 이는 선후(先後)를 전도(顚倒)함이니, 열녀이니까 정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절을 지키니까 열녀어늘, 우선의 생각에는 열녀면 정절을 지킬 것이로되, 열녀가 아니면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여도 좋다 함이라. 그러므로 우선은 영채가 열녀인 줄을 모를 때에는 정절을 깨트려 주려 하다가 열녀인 줄을 안 뒤에는 영채의 정절을 깨트리려 한 것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함이라. 아무려나 우선은 영채의 이번 행위가 가장 좋은 행위라 한다. 그러나 형식은 이 일에 대하여 우선의 생각하는 바와는 다르게 생각한다. 형식도 영채가 그처럼 정절이 굳은 것을 김탄은 한다. 죽으려고까지 하는 깨끗하고 거룩한 정신을 보고 존경도 한다. 그러나 형식의 생각에는 우선과 같이 '영채의 이번 행위가 가장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사람의 생명(生命)은 우주(宇宙)의 생명과 같다. 우주가 만물(萬物)을 포용(包容)하는 모양으로 인생(人生)도 만물을 포용한다. 우주는 결코 태양(太陽)이나 북극(北極)만으로 그 내용(內容)을 삼지 아니하고, 만천(滿天)의 모든 성신(星辰)과 만지(萬地)의 모든 만물로 다 포용을 삼는다. 그러므로 창궁(蒼穹)에 극히 조고마한 별도 우주의 전생명(全生命)의 일부분(一部分)이요, 내지 지상(地上)의 극히 미세(微細)한 지풀잎 하나, 티끌 하나도 모두 우주의 전생명의 일부분이라. 태양이 지구(地球)보다 위대(偉大)하니, 태양(太陽)이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에 대한 관계가 지구(地球)의 그것보다 크다고는 할지나, 그렇다고 태양(太陽)만이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이요, 지구(地球)는 우주(宇宙)의 생명(生命)에 관계가 전무하다고는 못 할지라. 또 태양계(太陽系)에 있어서는 태양(太陽)이 중심(中心)이로되, 무궁대(無窮大)한 전우주(全宇宙)에 대하여는 태양(太陽) 그 물건도 한 티끌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 이와 같이 사람의 생명(生命)도 결코 일의무(一義務)나 일도덕률(一道德律)을 위하여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人生)의 만반 의무(萬般義務)와 우주(宇宙)에 대한 만반 의무(萬般義務)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충(忠)이나, 효(孝)나, 정절(貞節)이나, 명예(名譽)가 사람의 생명(生命)의 중심(中心)은 아니니, 대개 사람의 생명(生命)이 충(忠)이나 효(孝)에 재함이 아니요, 충(忠)이나 효(孝)가 사람의 생명에서 출함이라. 사람의 생명(生命)은 결코 충(忠)이나 효(孝)나의 하나에 속한 것이 아니요, 실로 사람의 생명(生命)이 충, 효, 정절, 명예 등(忠, 孝, 貞節, 名譽 等)을 포용(包容)하는 것이 마치 대우주(大宇宙)의 생명(生命)이 북극성(北極星)이나 백랑성(白狼星)이나 태양(太陽)에 재함이 아니요, 실로 대우주(大宇宙)의 생명(生命)이 북극성(北極星)과 백랑성(白狼星)과 태양과 기타 큰 별, 잔 별과 지상(地上)의 모든 미물(微物)까지도 포용(包容)함과 같다.
사람의 생명(生命)의 발현(發現)은 다종다양(多種多樣)하니, 혹 충(忠)도 되고 효(孝)도 되고 정절(貞節)도 되고, 기타 무수무한(無數無限)한 인사현상(人事現象)이 되는 것이라. 그 중에 무릇 민족(民族)을 따라, 혹은 국정(國情)을 따르고, 혹은 시대(時代)를 따라 필요성이 무수무궁(無數無窮)한 인사현상중(人事現象中)에서 특종(特種)한 것 일 개(一個)나 또는 수 개(數個)를 취하여 만반 인사행위(萬般人事行爲)의 중심(中心)을 삼으니 차 소위(此所謂) 도(道)요, 덕(德)이요, 법(法)이요, 율(律)이라. 무릇 사회적 생활(社會的 生活)을 완성(完成)하려면 그 사회(社會)의 각원(各員)이 그 사회(社會)의 도덕 법률(道德法律)을 권권복응(卷卷服膺)함이 마땅하되 그러나 결코 이는 생명(生命)의 전체(全體)는 아니니, 생명(生命)은 하여(何如)한 도덕 법률(道德法律)보다도 위대(偉大)한 것이라. 그러므로 생명(生命)은 절대(絶對)요, 도덕 법률(道德法律)은 상대(相對)니, 생명(生命)은 무수히 현시(現時)의 그것과 상이(相異)한 도덕(道德)과 법률(法律)을 조출(造出)할 수 있는 것이라. 이것이 형식이가 배워 얻은 인생관(人生觀)이라. 그러므로 영채가 정절이 깨어짐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 함은 효(孝)와 정절(貞節)이라는 일도덕률(一道德律)을 인생인 여자(女子)의 생명(生命) life의 전체(全體)로 오인(誤認)한 것이라 하였다. 효(孝)와 정절(貞節)이 현시(現時)에 있어서는 여자의 심중되는 덕(德)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여자인 인생(人生)의 생명(生命)의 소산(所産)이요, 일부분(一部分)이라 하였다. 영채는 과연 부모에게 대하여 효(孝)하지 못하였다. 지아비에게 대하여 정(貞)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도 자기의 의지(意志)로 그러한 것이 아니요, 무정한 사회(社會)가 연약한 그로 하여금 그리하지 아니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 설혹 영채가 자기의 의지(意志)로 효(孝)와 정(貞)에 대하여 생명(生命)의 의무(義務)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자. 그러나(그렇다) 가정하더라도 영채는 생명(生命)을 끊을 이유가 없다. 효와 정은 영채의 생명의 의무 중에 둘이니, 설혹 중요하다 하더라도 부분(部分)은 전체(全體)보다 작으니라. 이 두 의무는 실패(失敗)하였다 하더라도 아직도 영채의 생명에는 백천무수(百千無數)의 의무가 있다. 그의 생명에는 아직도 충(忠)도 있고, 세계(世界)에 대한 의무도 있고, 동물(動物)에 대한 의무도 있고, 산천(山川)이나 성신(星辰)에 대한 의무도 있고 부처에 대한 의무도 있다. 이렇게 무수한 의무를 가진 귀중한 생명을 다만 두 가지― 비록 중하다 하더라도, 또 부득이한 것인데―를 위하여 (끊으려 하는 영채의 행위는) 결코 '옳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순결(純潔)하고 열렬(熱烈)한 사람이 자기(自己)의 중심적 의무(中心的 義務)를 생명으로 삼음은 또한 인생(人生)의 자랑이라 하였다.
형식은 이론(理論)으로는 영채의 행위를 그르다 하면서도 정(情)으로는 영채를 위하여 울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영채를 '낡은 여자'라 하고, 다시 형용사를 붙여서 순결 열렬(純潔熱烈)한 구식 여자(舊式女子)라 하였다. 그러나 우선은 이번 영채의 행위는 절대적(絶對的)으로 선(善)하다 한다. 하나는 영문식(英文式)이요, 하나는 한문식(漢文式)이로다.
54
(형식은 노파와 함께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탔다.) 형식은 어느덧 잠깐 잠이 들었다 번쩍 눈을 뜨니, 승객들은 혹은 창에 기대어, 혹은 팔을 베고, 혹은 고개를 잦기고 곤하게 잠이 들었다. 서넛쯤 저편 걸상에 어떤 인부 패장 같은 사람이 혼자 깨어서 눈을 번뜻번뜻하면서 담배를 피운다. 어느덧 차창에는 새벽빛이 비치었다. 형식은 맞은편 걸상에서 입으로 침을 흘리며 자는 노파를 보았다. 그러고 '더러운 계집'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형식은 노파의 일생을 생각하여 보았다. 본래 천한 집에 생장하여 좋은 일이나 좋은 말은 구경도 못 하다가 몸이 팔려 기생이 되매, 평생에 만나는 사람이 짐승 같은 오입쟁이가 아니면 짐승 같은 기생들뿐이요, 평생에 듣는 말과 하는 말은 전혀 음란한 소리와 더러운 소리뿐이라. 만일 글을 알아서 옛사람의 어진 말이나 들었어도 조곰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으련마는, 노파의 얼굴을 보니, 원래 천질이 둔탁한데다가 심술과 욕심과 변덕이 많을 듯하고 또 까만 눈썹이 길게 눈을 덮은 것을 보니 천생 음란한 계집이라. 이러한 계집은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가르치더라도 악인이 되기 쉬우려든, 하물며 평생을 더러운 죄악 세상에서 지냈으므로 짐승 같은 마음은 자랄 대로 자라고 '사람스러운 마음'은 눈을 뜰 기회가 없었다. 그는 일찍 선(善)이란 말이나 덕(德)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선한 사람이나 덕 있는 사람을 접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노파의 생각에, 세상은 다 자기네 사회(社會)와 같고 사람은 다 자기와 같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기는 결코 남보다 더 착한(악한) 사람이라고도 생각지 아니하였고, 하물며 남보다 더 못생긴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차라리 그도 이따금 남의 일을 보고 '저런 악한 사람이 있는가' 하기도 하였다. 아니― 하기도 하였을 뿐더러 항용 선하노라 자신하는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저 노파는 '참사람'이라는 것을 볼 기회가 없었고, 또 보려 하는 생각도 없었고, 따라서 '참사람' 되려는 생각을 하여 본 적도 없었다. 자기는 자기가 '참사람'이어니 하였다. 그러므로 칠 년 동안이나 아침저녁 '참사람'인 영채를 보면서도, 다만 월향이라는 살과 뼈로 생긴 기생을 보았을 뿐이요, 그 속에 있는 영채라는 '참사람'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영채가 정절을 지키려 할 때에 노파는 도리어 영채를 미련하다 하고 철이 없다 하고 고집불통이라 하였다. 노파가 보기에 기생이란 마땅히 아무러한 남자에게나 몸을 허하는 것이 선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선을 깨트리고 정절을 지키려 하는 영채는 노파의 보기에 악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다시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이때에는 노파에게 대한 밉고 더러운 생각이 스러지고 도리어 불쌍한 생각이 난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자기도 그 노파와 같은 경우에 있었더면 그 노파와 같이 되었을지요, 그 노파도 자기와 같이 십오륙 년간 교육을 받았으면 자기와 같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고 차 실내에 곤하게 잠든 여러 사람을 보았다. 그 중에는 노동자도 있고, 신사도 있고, 욕심꾸러기 같은 사람도 있고, 흉악한 듯한 사람도 있다. 또 그 중에는 조선 사람도 있고 내지 사람도 지나 사람도 있다. 그들이 만일 깨어 앉아 서로 마주본다 하면 혹 남을 멸시할 자도 있을지요, 혹 남을 부러워할 자도 있을지요, 혹 저놈은 악한 놈이요, 저놈은 무식한 놈이요, 저놈은 무례한 놈이라 하기도 할지나, 만일 그네를 어려서부터 같은 경우에 두어 같은(교육과 같은) 감화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하면, 혹 선천적 유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대개는 비슷비슷한 선량한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고 또 한번 자는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이때에는 노파가 정다운 듯한 생각이 난다. 저도 역시 사람이리라. 나와 같은, 영채와 같은 사람이로다 하였다. 그러고 엊그제 김장로의 집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상을 보고 상상하던 생각이 난다. 다 같은 사람으로서 혹은 춘향이 되고, 혹은 이도령이 되고, 혹은 춘향모도 되고, 혹은 남원 부사도 되어 혹은 사랑하고, 혹은 미워하고, 혹은 때리고, 혹은 맞고, 혹은 양반이 되고 (선인이 되고, 혹은 상놈이 되고) 악인(惡人)이 된다 하더라도 원래는 다 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고 노파의 얼굴을 보니 마치 어머니나 누이를 (대)하는 듯 사랑스러운 생각이 난다. 노파가 영채의 죽으려는 결심을 보고 일생에 처음 '참사람'을 발견하고, 영혼이 깨어 일생에 처음 진정한 눈물을 흘리면서 영채를 구원할 양으로 멀리 평양에까지 내려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형식은 노파에게 대하여 정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담요 끝으로 노파의 배를 가리어 주었다.
형식은 여기가 어딘가 하고 차창으로 내어다보았다. 이윽고 고동 소리가 들리자, 차가 어떤 다리를 건너는 소리가 난다.
형식의 머릿속에는 '대동강'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아― 영채는 어찌 되었는가. 이미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몸을 잠갔는가. 또는 경찰의 손에 붙들려 지금 어느 경찰서 구류간에서 눈물을 흘리고 지내는가. 형식은 가만히 노파의 어깨를 흔들면서, "여봅시오, 여봅시오! 대동강이외다" 하였다. 형식이가 이렇게 노파에게 정답게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노파의 집에서 '괘씸한 계집!' 하고 생각한 이래로 칠팔 시간이나 마주앉아 오면서도 밉고 더러운 생각에 아무 말도 아니하였었다. 노파는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며,
"에? 대동강!"
하고 차창을 내다본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대동강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기차는 평양역을 향하여 길게 고동을 핀다. 형식과 노파의 머리에는 영채의 생각이 있다.
(형식은 노파와 함께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탔다.) 형식은 어느덧 잠깐 잠이 들었다 번쩍 눈을 뜨니, 승객들은 혹은 창에 기대어, 혹은 팔을 베고, 혹은 고개를 잦기고 곤하게 잠이 들었다. 서넛쯤 저편 걸상에 어떤 인부 패장 같은 사람이 혼자 깨어서 눈을 번뜻번뜻하면서 담배를 피운다. 어느덧 차창에는 새벽빛이 비치었다. 형식은 맞은편 걸상에서 입으로 침을 흘리며 자는 노파를 보았다. 그러고 '더러운 계집'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형식은 노파의 일생을 생각하여 보았다. 본래 천한 집에 생장하여 좋은 일이나 좋은 말은 구경도 못 하다가 몸이 팔려 기생이 되매, 평생에 만나는 사람이 짐승 같은 오입쟁이가 아니면 짐승 같은 기생들뿐이요, 평생에 듣는 말과 하는 말은 전혀 음란한 소리와 더러운 소리뿐이라. 만일 글을 알아서 옛사람의 어진 말이나 들었어도 조곰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으련마는, 노파의 얼굴을 보니, 원래 천질이 둔탁한데다가 심술과 욕심과 변덕이 많을 듯하고 또 까만 눈썹이 길게 눈을 덮은 것을 보니 천생 음란한 계집이라. 이러한 계집은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가르치더라도 악인이 되기 쉬우려든, 하물며 평생을 더러운 죄악 세상에서 지냈으므로 짐승 같은 마음은 자랄 대로 자라고 '사람스러운 마음'은 눈을 뜰 기회가 없었다. 그는 일찍 선(善)이란 말이나 덕(德)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선한 사람이나 덕 있는 사람을 접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노파의 생각에, 세상은 다 자기네 사회(社會)와 같고 사람은 다 자기와 같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기는 결코 남보다 더 착한(악한) 사람이라고도 생각지 아니하였고, 하물며 남보다 더 못생긴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차라리 그도 이따금 남의 일을 보고 '저런 악한 사람이 있는가' 하기도 하였다. 아니― 하기도 하였을 뿐더러 항용 선하노라 자신하는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저 노파는 '참사람'이라는 것을 볼 기회가 없었고, 또 보려 하는 생각도 없었고, 따라서 '참사람' 되려는 생각을 하여 본 적도 없었다. 자기는 자기가 '참사람'이어니 하였다. 그러므로 칠 년 동안이나 아침저녁 '참사람'인 영채를 보면서도, 다만 월향이라는 살과 뼈로 생긴 기생을 보았을 뿐이요, 그 속에 있는 영채라는 '참사람'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영채가 정절을 지키려 할 때에 노파는 도리어 영채를 미련하다 하고 철이 없다 하고 고집불통이라 하였다. 노파가 보기에 기생이란 마땅히 아무러한 남자에게나 몸을 허하는 것이 선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선을 깨트리고 정절을 지키려 하는 영채는 노파의 보기에 악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다시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이때에는 노파에게 대한 밉고 더러운 생각이 스러지고 도리어 불쌍한 생각이 난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자기도 그 노파와 같은 경우에 있었더면 그 노파와 같이 되었을지요, 그 노파도 자기와 같이 십오륙 년간 교육을 받았으면 자기와 같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고 차 실내에 곤하게 잠든 여러 사람을 보았다. 그 중에는 노동자도 있고, 신사도 있고, 욕심꾸러기 같은 사람도 있고, 흉악한 듯한 사람도 있다. 또 그 중에는 조선 사람도 있고 내지 사람도 지나 사람도 있다. 그들이 만일 깨어 앉아 서로 마주본다 하면 혹 남을 멸시할 자도 있을지요, 혹 남을 부러워할 자도 있을지요, 혹 저놈은 악한 놈이요, 저놈은 무식한 놈이요, 저놈은 무례한 놈이라 하기도 할지나, 만일 그네를 어려서부터 같은 경우에 두어 같은(교육과 같은) 감화와 같은 행복을 누리게 하면, 혹 선천적 유전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대개는 비슷비슷한 선량한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그러고 또 한번 자는 노파의 얼굴을 보았다. 이때에는 노파가 정다운 듯한 생각이 난다. 저도 역시 사람이리라. 나와 같은, 영채와 같은 사람이로다 하였다. 그러고 엊그제 김장로의 집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화상을 보고 상상하던 생각이 난다. 다 같은 사람으로서 혹은 춘향이 되고, 혹은 이도령이 되고, 혹은 춘향모도 되고, 혹은 남원 부사도 되어 혹은 사랑하고, 혹은 미워하고, 혹은 때리고, 혹은 맞고, 혹은 양반이 되고 (선인이 되고, 혹은 상놈이 되고) 악인(惡人)이 된다 하더라도 원래는 다 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고 노파의 얼굴을 보니 마치 어머니나 누이를 (대)하는 듯 사랑스러운 생각이 난다. 노파가 영채의 죽으려는 결심을 보고 일생에 처음 '참사람'을 발견하고, 영혼이 깨어 일생에 처음 진정한 눈물을 흘리면서 영채를 구원할 양으로 멀리 평양에까지 내려오는 것이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형식은 노파에게 대하여 정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담요 끝으로 노파의 배를 가리어 주었다.
형식은 여기가 어딘가 하고 차창으로 내어다보았다. 이윽고 고동 소리가 들리자, 차가 어떤 다리를 건너는 소리가 난다.
형식의 머릿속에는 '대동강'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아― 영채는 어찌 되었는가. 이미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몸을 잠갔는가. 또는 경찰의 손에 붙들려 지금 어느 경찰서 구류간에서 눈물을 흘리고 지내는가. 형식은 가만히 노파의 어깨를 흔들면서, "여봅시오, 여봅시오! 대동강이외다" 하였다. 형식이가 이렇게 노파에게 정답게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제 노파의 집에서 '괘씸한 계집!' 하고 생각한 이래로 칠팔 시간이나 마주앉아 오면서도 밉고 더러운 생각에 아무 말도 아니하였었다. 노파는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며,
"에? 대동강!"
하고 차창을 내다본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대동강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기차는 평양역을 향하여 길게 고동을 핀다. 형식과 노파의 머리에는 영채의 생각이 있다.
55
형식은 차창을 열고 멀리 능라도 편을 바라보았다. 새벽 어스름에 아무것도 똑똑히 보이지는 아니하나, 평양 경치를 여러 번 본 형식의 눈에는 '저것이 능라도, 저것이 모란봉, 저기가 청류벽' 하고 어렴풋하게 마음으로 지정하였다. 형식은 어저께 보던 영채의 편지를 생각하였다. '이 몸을 대동강의 푸른 물에 던져―' 하고 형식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저 컴컴한 능라도 근방에 영채의 모양이 눈에 번쩍 보이는 듯하다. '탕탕한 물결로 하여금 이 몸의 더러움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이 죄 많은 살을 뜯게 하려 하나이다.' 형식은 영채의 시체가 바로 철교 밑으로 흘러내려오는 듯하여 얼른 창 밖에 머리를 내어밀어 물을 내려다보았다. 철교의 기둥에 마주쳐 둥그스름하게 물결이 지는 것이 보인다. 형식은 목에 무엇이 떨어짐을 깨달았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컴컴한 구름이 움쩍도 아니하고 무겁게 덮여 있고 가는 안개비가 내리며 이따금 조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며, 형식의 길게 가른 머리카락이 펄펄 날린다. 형식은 무슨 무서운 것을 본 듯이 고개를 흠칫하고 차창에서 끌어들였다. '만일 대동강상에서 선생의 소매를 적시는 궂은 비를 보시거든 죄 많은 박영채의 눈물인 줄 알으소서' 하던 영채의 편지의 일절이 번썩 눈에 보인다. 형식은 곁에 놓인 가방에서 그 언문 쓴 종이와 칼과 지환을 싼 뭉텅이를 내었다. 내어서 보려 하다가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차는 철교를 지났다. 좌우편에는 길게 늘어선 부인(빈) 화차(貨車)와 조고만 파수막들이 보인다. 노파는 멍하니 차창으로 내어다보던 눈으로 형식을 보며,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다. 그 눈과 얼굴에는 아직도 진정으로 걱정하는 빛이 보인다. 형식은 노파의 눈 뜬 영혼이 아직도 깨어 있구나 하였다. 노파는 아까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자기가 차를 타고 평양으로 내려오는데, 차가 대동강 철교 위에 다다랐을 때에 철교가 뚝 부러져 자기의 탔던 차가 대동강물 속에 푹 잠겼다. 노파는 '사람 살리오?' 하고 울면서 겨우 하여 물 위에 떠올랐다. 그러나 장마때가 되어 흙물 같은 커다란 물결이 노파의 머리를 여러 번 덮었다. 노파는 '아이구, 죽겠구나' 하고 엉엉 울면서 물에 떴다 잠겼다 하였다. 이때에 노파의 눈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영채가 우뚝 나섰다. 영채는 어제 아침에 자기의 방에 와서 하던 모양으로 방글방글 웃으며 '생각하여 보니깐 우스운 일이야요' 한다. 노파는 팔을 내어밀고 '내가 잘못하였다. 용서하여라. 내 팔을 잡아당겨 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노파의 팔을 잡으려 아니하고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하얀 이빨로 입술을 꼭 깨물어 새빨간 피를 노파의 얼굴에 뿌렸다. 노파는 이마와 뺨에 마치 끓는 물과 같이 뜨거운 핏방울이 뛰어옴을 깨달았다. 노파는 '영채야, 나를 살려 다고' 하면서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잠을 깨었다. 노파는 잠이 깨자 곧 대동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일기가 오랫동안 가물었으므로 대동강물은 꿈에 보던 것과 같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꿈과 같이 이 철교가 떨어지지나 아니할까 하고 열차가 철교를 다 지나도록 무서운 마음에 치를 떨다가 열차가 아주 육지에 나설 때에 비로소 마음을 놓고 한숨을 후 쉬며 형식에게,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고 영채의 일을 물음이라. 형식은 웃으며,
"어저께 전보를 놓았으니까 아마 경찰서에 가 있겠지요."
하고 말소리와 태도로 '걱정 없지요' 하는 뜻을 표하였다. 노파는 형식의 말에 얼마큼 안심하였다. 그러나 아직 전보의 힘과 경찰서의 힘을 이용하여 본 일이 없는 노파에게는 형식의 말에 아주 안심하기는 어려웠다. 노파도 전보가 기차보다 빨리 가는 줄을 알건마는 하고많은 사람에 어느 것이 영채인 줄을 어떻게 알리요 한다. 더구나 노파는 일생을 기생계에서 지내므로 경찰이란 자기를 미워하는 데요, 성가십게 구는 데로만 생각한다. 그러고 영채가 아마 경찰서에 있으리라는 형식의 말을 듣고, 지기가 일찍 평양서 밀매음사건에 관하여 이삼 일 경찰서 구류간에서 떨던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이니까' 하고, 영채는 경찰서에서 지난밤을 지냈더라도 자기와 같이 떨지는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얼마큼 안심을 하였다.
두 사람이 탄 열차는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헤이죠오' 하는 역부에(역부의) 외치는 소리와 딸깍딸깍 하는 나막신 소리가 차가 다 서기도 전부터 들린다. 아까부터 짐을 묶고 옷을 입던 사람들은, 혹은 제가 먼저 내릴 양으로 남을 떠밀치고 나기기도 하고, 혹은 가장 점잖은 듯이 빙그레 웃으며 일부러 남들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형식과 뚱뚱한 노파도 플랫폼에 내렸다. 어느 군대에(군대의) 어른이 가는지 젊은 사관들이 일등차실 곁에 서서 여러 번 모자에 손을 대어 허리를 굽힌다. 뚱뚱한 서양 사람 두엇이 바지에 두 손을 찌르고 주위엣사람들은 번뜻도 보지 아니하면서 뚜벅뚜벅 왔다갔다한다. 어떤 일본 부인이 차를 아니 놓칠 양으로 크다란 '신겐부쿠로(信玄袋)'를 들고 통통통 뛰어들어온다.
북으로 더 갈 승객들은 세수도 아니한 얼굴에 맨머릿바람으로 우두커니 나와 서서 아는 사람이나 찾는 듯이 입구(入口)를 바라보고 섰다. 개찰인(改札人)은 부인(빈) 가위를 떼걱떼걱 하고 섰다. 형식과 노파는 출구(出口)를 나섰다. 지켜 섰던 순사가 흘긋 두 사람의 뒤를 본다. 형식과 노파는 인력거에 올랐다. 두 인력거는 여러 인력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뾰족비를 지나서 아직 전등이 반작반작하는 평양 시가로 들어간다. 안개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온다.
형식은 차창을 열고 멀리 능라도 편을 바라보았다. 새벽 어스름에 아무것도 똑똑히 보이지는 아니하나, 평양 경치를 여러 번 본 형식의 눈에는 '저것이 능라도, 저것이 모란봉, 저기가 청류벽' 하고 어렴풋하게 마음으로 지정하였다. 형식은 어저께 보던 영채의 편지를 생각하였다. '이 몸을 대동강의 푸른 물에 던져―' 하고 형식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저 컴컴한 능라도 근방에 영채의 모양이 눈에 번쩍 보이는 듯하다. '탕탕한 물결로 하여금 이 몸의 더러움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이 죄 많은 살을 뜯게 하려 하나이다.' 형식은 영채의 시체가 바로 철교 밑으로 흘러내려오는 듯하여 얼른 창 밖에 머리를 내어밀어 물을 내려다보았다. 철교의 기둥에 마주쳐 둥그스름하게 물결이 지는 것이 보인다. 형식은 목에 무엇이 떨어짐을 깨달았다. 형식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는 컴컴한 구름이 움쩍도 아니하고 무겁게 덮여 있고 가는 안개비가 내리며 이따금 조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며, 형식의 길게 가른 머리카락이 펄펄 날린다. 형식은 무슨 무서운 것을 본 듯이 고개를 흠칫하고 차창에서 끌어들였다. '만일 대동강상에서 선생의 소매를 적시는 궂은 비를 보시거든 죄 많은 박영채의 눈물인 줄 알으소서' 하던 영채의 편지의 일절이 번썩 눈에 보인다. 형식은 곁에 놓인 가방에서 그 언문 쓴 종이와 칼과 지환을 싼 뭉텅이를 내었다. 내어서 보려 하다가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차는 철교를 지났다. 좌우편에는 길게 늘어선 부인(빈) 화차(貨車)와 조고만 파수막들이 보인다. 노파는 멍하니 차창으로 내어다보던 눈으로 형식을 보며,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다. 그 눈과 얼굴에는 아직도 진정으로 걱정하는 빛이 보인다. 형식은 노파의 눈 뜬 영혼이 아직도 깨어 있구나 하였다. 노파는 아까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에 자기가 차를 타고 평양으로 내려오는데, 차가 대동강 철교 위에 다다랐을 때에 철교가 뚝 부러져 자기의 탔던 차가 대동강물 속에 푹 잠겼다. 노파는 '사람 살리오?' 하고 울면서 겨우 하여 물 위에 떠올랐다. 그러나 장마때가 되어 흙물 같은 커다란 물결이 노파의 머리를 여러 번 덮었다. 노파는 '아이구, 죽겠구나' 하고 엉엉 울면서 물에 떴다 잠겼다 하였다. 이때에 노파의 눈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영채가 우뚝 나섰다. 영채는 어제 아침에 자기의 방에 와서 하던 모양으로 방글방글 웃으며 '생각하여 보니깐 우스운 일이야요' 한다. 노파는 팔을 내어밀고 '내가 잘못하였다. 용서하여라. 내 팔을 잡아당겨 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노파의 팔을 잡으려 아니하고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하얀 이빨로 입술을 꼭 깨물어 새빨간 피를 노파의 얼굴에 뿌렸다. 노파는 이마와 뺨에 마치 끓는 물과 같이 뜨거운 핏방울이 뛰어옴을 깨달았다. 노파는 '영채야, 나를 살려 다고' 하면서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잠을 깨었다. 노파는 잠이 깨자 곧 대동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일기가 오랫동안 가물었으므로 대동강물은 꿈에 보던 것과 같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꿈과 같이 이 철교가 떨어지지나 아니할까 하고 열차가 철교를 다 지나도록 무서운 마음에 치를 떨다가 열차가 아주 육지에 나설 때에 비로소 마음을 놓고 한숨을 후 쉬며 형식에게,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고 영채의 일을 물음이라. 형식은 웃으며,
"어저께 전보를 놓았으니까 아마 경찰서에 가 있겠지요."
하고 말소리와 태도로 '걱정 없지요' 하는 뜻을 표하였다. 노파는 형식의 말에 얼마큼 안심하였다. 그러나 아직 전보의 힘과 경찰서의 힘을 이용하여 본 일이 없는 노파에게는 형식의 말에 아주 안심하기는 어려웠다. 노파도 전보가 기차보다 빨리 가는 줄을 알건마는 하고많은 사람에 어느 것이 영채인 줄을 어떻게 알리요 한다. 더구나 노파는 일생을 기생계에서 지내므로 경찰이란 자기를 미워하는 데요, 성가십게 구는 데로만 생각한다. 그러고 영채가 아마 경찰서에 있으리라는 형식의 말을 듣고, 지기가 일찍 평양서 밀매음사건에 관하여 이삼 일 경찰서 구류간에서 떨던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이니까' 하고, 영채는 경찰서에서 지난밤을 지냈더라도 자기와 같이 떨지는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얼마큼 안심을 하였다.
두 사람이 탄 열차는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헤이죠오' 하는 역부에(역부의) 외치는 소리와 딸깍딸깍 하는 나막신 소리가 차가 다 서기도 전부터 들린다. 아까부터 짐을 묶고 옷을 입던 사람들은, 혹은 제가 먼저 내릴 양으로 남을 떠밀치고 나기기도 하고, 혹은 가장 점잖은 듯이 빙그레 웃으며 일부러 남들이 먼저 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형식과 뚱뚱한 노파도 플랫폼에 내렸다. 어느 군대에(군대의) 어른이 가는지 젊은 사관들이 일등차실 곁에 서서 여러 번 모자에 손을 대어 허리를 굽힌다. 뚱뚱한 서양 사람 두엇이 바지에 두 손을 찌르고 주위엣사람들은 번뜻도 보지 아니하면서 뚜벅뚜벅 왔다갔다한다. 어떤 일본 부인이 차를 아니 놓칠 양으로 크다란 '신겐부쿠로(信玄袋)'를 들고 통통통 뛰어들어온다.
북으로 더 갈 승객들은 세수도 아니한 얼굴에 맨머릿바람으로 우두커니 나와 서서 아는 사람이나 찾는 듯이 입구(入口)를 바라보고 섰다. 개찰인(改札人)은 부인(빈) 가위를 떼걱떼걱 하고 섰다. 형식과 노파는 출구(出口)를 나섰다. 지켜 섰던 순사가 흘긋 두 사람의 뒤를 본다. 형식과 노파는 인력거에 올랐다. 두 인력거는 여러 인력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뾰족비를 지나서 아직 전등이 반작반작하는 평양 시가로 들어간다. 안개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온다.
56
형식은 인력거 위에서 자기가 첫 번째 평양에 오던 생각을 하였다. 머리는 아직 깎지 아니하여 부모상으로 흰 댕기를 드리고, 감발을 하고, 어느 봄날 아침에 칠성문으로 들어왔다. 칠성문 안에서 평양 시가를 내려다보고 '크기는 크구나' 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열한 살이라. 그러나 평양이란 이름과 평양이 좋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요, 평양이 어떠한 도회인지, 평양에 모란봉 청류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형식은 그때에 사서와 사략과 소학을 읽었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학교라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지리나 조선 역사를 읽어 본 적이 없었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문명한 나라 아이들 같으면 평양의 역사와 명소와 인구와 산물도 알았으리라.' 그때에 형식은 대동문 거리에서 처음 일본 상점을 보았다. 그러고 그 유리창이 큰 것과 그 사람들의 옷이 이상한 것을 보고 재미있다 하였다. 형식은 갑진년에 들어오던 일본 병정을 보고 일본 사람들은 다 저렇게 검은 옷을 입고, 빨간 줄 두른 모자를 쓰고 칼을 찼거니 하였었다. 그래서 대동문 거리로 오르내리며 기웃기웃 일본 상점을 보았다. 어떤 상점에는 성냥과 석유 상자가 놓였다. 형식은 아직도 그렇게 많은 성냥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래서 '옳지, 성냥은 다 여기서 만드는구나' 하고 고개를 까닥까닥하였다. 또 일본 사람들이 마주앉아서 이야기하고 웃는 것을 보고 '어떻게 서로 말을 알아듣는가' 하고 이상히 여겼다. 형식의 귀에는 모든 말이 다 같은 소리와 같이 들렸음이라. 더욱 형식의 눈에 재미있게 보이는 것은 일본 부인의 머리와 등에 매어달린 허리띠코였다. 형식은 저기다가 무엇을 넣고 다니는고 하였다. 이 의문은 오래도록 풀지 못하였다.
또 형식은 대동문 밖에 나서서 대동강을 보았다. 청천강보다 '좀 클까' 하였다. 그러고 '화륜선'을 보았다. 시꺼먼 굴뚝으로 시꺼먼 연기를 피우고 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돛도 아니 달고 다니는 '화륜선'은 참 이상도 하다 하였다. 그 '화륜선' 위에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저기 타보았으면' 하였다.
형식은 '물지게가 많기도 하다' 하였다. 형식의 생장한 촌중에는 그 앞술도 하고 겨울에 국수도 누르는 주막에 물지게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물지게란 주막에 있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므로 형식은 대동문으로 수없이 많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물지게를 보고 '평양에는 주막도 많다' 하였다. 그러고 '평양감사'라는데 평양감사가 어디 있는고 하고 한참이나 평양감사의 집을 찾다가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형식은 호로 구녁으로 거리를 내다보며 혼자 싱긋 웃었다. 밀철로가 사람을 가득히 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형식의 인력거 곁으로 지나간다.
형식은 또 생각을 잇는다. 그날 종일 평양 구경을 하다가 관 앞 어떤 객주에 들었다. 탕건 쓴 주인이,
"너 돈 있니?"
할 때에 형식은
"스무 냥이나 있는데."
하고 자기의 주머니를 생각하면서,
"돈 없겠소!"
하고 ('나도 손님인데' 하면서 서슴지 아니하고) 아랫목에 내려가 앉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이 평양장이라 하여 감발한 황화(荒貨) 장수들이 십여 인이나 형식의 주인에 들었다. 형식은 얼마큼 무서운 생각이 있으면서도 아주 태연한 듯이 벽에 바른 종이의 글을 읽었다. 그러나 밤에 자려 할 때에 같이 있던 이삼 인이 서로 다투어 형식의 곁에서 자려 하였다. 형식은 무서운 마음이 생겨서 방 한편 구석에 말없이 앉아서 그 사람들의 하는 양을 보았다. 그러나 형식의 손에는 목침이 들렸더라. 세 사람은 한참이나 다투더니 그 중에 제일 거무테테하고 무섭게 생긴 사람이 웃고 형식을 안으며,
"얘 나하고 자자. 돈 주께."
하고 형식의 목을 쓸어안으며 입을 맞추려 한다. 형식은 울면서 방 안에 둘러앉은 십여 명을 보았다. 그러나 모두 벙글벙글 웃을 뿐이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얘, 나하고 자자."
하며 자기의 주머니에서 엽전을 한줌 집어낸다. 형식은 반항하였다. 그러나 그 거무테테한 사람의 구린내 나는 입이 형식의 입에 닿았다.
형식은 머리로 그 사람의 면상을 깨어져라 하도록 들입다 받고 그 사람이 번쩍 고개를 잦기는 틈을 타서 손에 들었던 목침으로 그 사람의 가슴을 때렸다. 그 사람은 얼른 목침을 피하고 일어나면서 형식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형식의 머리를 벽에 부딪친다. 형식은 이를 갈며 울었다. 이때에 저편 구석에 말없이 앉았던 키 큰 사람이 벌떡 일어나 달려오더니 형식의 머리채를 잡은 사람의 상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가슴을 서너 번 때리더니 방바닥에 그 사람을 엎드려 놓고,
"이놈! 이 짐승놈?"
하고 발길로 찬다. 여러 사람은 다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감히 대어드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형식은 문득 영채를 생각하였다. 영채와 자기와는 이상하게 같은 운명을 지내어 오는 듯하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더욱이 정다워지는 듯함을 깨달았다. 영채는 자기의 아내를 삼아 일생을 서로 사랑하고 지내야 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살았는가. 살아서 경찰서에 있는가. 또 영채의 편지가 생각나고 아까 대동강을 건너올 때에 생각하던 바를 생각하였다. 그러고 그 편지와 그 언역 쓴 종이를 넣은 가방이 자기의 무릎 위에 놓인 것을 보았다. 그러고 평양경찰서의 집과 문과 그 속에 앉아서 사무를 보는 사람들을 상상하고 영채가 울면서 혼자 앉았는 방과 자기와 노파가 영채의 방에 들어가는 모양을 상상하였다.
인력거가 우뚝 서고 인력거꾼이 호로를 벗긴다. 형식의 앞에는 회칠한 서양제 집이 있다. 문 위에는 '平壤警察署(평양경찰서)'라고 대자로 새겼다.
형식은 인력거 위에서 자기가 첫 번째 평양에 오던 생각을 하였다. 머리는 아직 깎지 아니하여 부모상으로 흰 댕기를 드리고, 감발을 하고, 어느 봄날 아침에 칠성문으로 들어왔다. 칠성문 안에서 평양 시가를 내려다보고 '크기는 크구나' 하였다. 그때에 형식은 열한 살이라. 그러나 평양이란 이름과 평양이 좋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요, 평양이 어떠한 도회인지, 평양에 모란봉 청류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형식은 그때에 사서와 사략과 소학을 읽었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학교라는 것도 없었으므로 조선 지리나 조선 역사를 읽어 본 적이 없었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문명한 나라 아이들 같으면 평양의 역사와 명소와 인구와 산물도 알았으리라.' 그때에 형식은 대동문 거리에서 처음 일본 상점을 보았다. 그러고 그 유리창이 큰 것과 그 사람들의 옷이 이상한 것을 보고 재미있다 하였다. 형식은 갑진년에 들어오던 일본 병정을 보고 일본 사람들은 다 저렇게 검은 옷을 입고, 빨간 줄 두른 모자를 쓰고 칼을 찼거니 하였었다. 그래서 대동문 거리로 오르내리며 기웃기웃 일본 상점을 보았다. 어떤 상점에는 성냥과 석유 상자가 놓였다. 형식은 아직도 그렇게 많은 성냥을 보지 못하였었다. 그래서 '옳지, 성냥은 다 여기서 만드는구나' 하고 고개를 까닥까닥하였다. 또 일본 사람들이 마주앉아서 이야기하고 웃는 것을 보고 '어떻게 서로 말을 알아듣는가' 하고 이상히 여겼다. 형식의 귀에는 모든 말이 다 같은 소리와 같이 들렸음이라. 더욱 형식의 눈에 재미있게 보이는 것은 일본 부인의 머리와 등에 매어달린 허리띠코였다. 형식은 저기다가 무엇을 넣고 다니는고 하였다. 이 의문은 오래도록 풀지 못하였다.
또 형식은 대동문 밖에 나서서 대동강을 보았다. 청천강보다 '좀 클까' 하였다. 그러고 '화륜선'을 보았다. 시꺼먼 굴뚝으로 시꺼먼 연기를 피우고 뺑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돛도 아니 달고 다니는 '화륜선'은 참 이상도 하다 하였다. 그 '화륜선' 위에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저기 타보았으면' 하였다.
형식은 '물지게가 많기도 하다' 하였다. 형식의 생장한 촌중에는 그 앞술도 하고 겨울에 국수도 누르는 주막에 물지게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물지게란 주막에 있는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므로 형식은 대동문으로 수없이 많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물지게를 보고 '평양에는 주막도 많다' 하였다. 그러고 '평양감사'라는데 평양감사가 어디 있는고 하고 한참이나 평양감사의 집을 찾다가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형식은 호로 구녁으로 거리를 내다보며 혼자 싱긋 웃었다. 밀철로가 사람을 가득히 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형식의 인력거 곁으로 지나간다.
형식은 또 생각을 잇는다. 그날 종일 평양 구경을 하다가 관 앞 어떤 객주에 들었다. 탕건 쓴 주인이,
"너 돈 있니?"
할 때에 형식은
"스무 냥이나 있는데."
하고 자기의 주머니를 생각하면서,
"돈 없겠소!"
하고 ('나도 손님인데' 하면서 서슴지 아니하고) 아랫목에 내려가 앉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이 평양장이라 하여 감발한 황화(荒貨) 장수들이 십여 인이나 형식의 주인에 들었다. 형식은 얼마큼 무서운 생각이 있으면서도 아주 태연한 듯이 벽에 바른 종이의 글을 읽었다. 그러나 밤에 자려 할 때에 같이 있던 이삼 인이 서로 다투어 형식의 곁에서 자려 하였다. 형식은 무서운 마음이 생겨서 방 한편 구석에 말없이 앉아서 그 사람들의 하는 양을 보았다. 그러나 형식의 손에는 목침이 들렸더라. 세 사람은 한참이나 다투더니 그 중에 제일 거무테테하고 무섭게 생긴 사람이 웃고 형식을 안으며,
"얘 나하고 자자. 돈 주께."
하고 형식의 목을 쓸어안으며 입을 맞추려 한다. 형식은 울면서 방 안에 둘러앉은 십여 명을 보았다. 그러나 모두 벙글벙글 웃을 뿐이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얘, 나하고 자자."
하며 자기의 주머니에서 엽전을 한줌 집어낸다. 형식은 반항하였다. 그러나 그 거무테테한 사람의 구린내 나는 입이 형식의 입에 닿았다.
형식은 머리로 그 사람의 면상을 깨어져라 하도록 들입다 받고 그 사람이 번쩍 고개를 잦기는 틈을 타서 손에 들었던 목침으로 그 사람의 가슴을 때렸다. 그 사람은 얼른 목침을 피하고 일어나면서 형식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형식의 머리를 벽에 부딪친다. 형식은 이를 갈며 울었다. 이때에 저편 구석에 말없이 앉았던 키 큰 사람이 벌떡 일어나 달려오더니 형식의 머리채를 잡은 사람의 상투를 잡아당기며 주먹으로 가슴을 서너 번 때리더니 방바닥에 그 사람을 엎드려 놓고,
"이놈! 이 짐승놈?"
하고 발길로 찬다. 여러 사람은 다 놀라 일어났다. 그러나 감히 대어드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가 형식은 문득 영채를 생각하였다. 영채와 자기와는 이상하게 같은 운명을 지내어 오는 듯하다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더욱이 정다워지는 듯함을 깨달았다. 영채는 자기의 아내를 삼아 일생을 서로 사랑하고 지내야 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는 살았는가. 살아서 경찰서에 있는가. 또 영채의 편지가 생각나고 아까 대동강을 건너올 때에 생각하던 바를 생각하였다. 그러고 그 편지와 그 언역 쓴 종이를 넣은 가방이 자기의 무릎 위에 놓인 것을 보았다. 그러고 평양경찰서의 집과 문과 그 속에 앉아서 사무를 보는 사람들을 상상하고 영채가 울면서 혼자 앉았는 방과 자기와 노파가 영채의 방에 들어가는 모양을 상상하였다.
인력거가 우뚝 서고 인력거꾼이 호로를 벗긴다. 형식의 앞에는 회칠한 서양제 집이 있다. 문 위에는 '平壤警察署(평양경찰서)'라고 대자로 새겼다.
57
형식은 가슴이 설렁거리면서 경찰서 문 안에 들어섰다. 사무 보는 책상과 의자가 다 보이고, 저편 유리창 밑에 어떤 흰 정복에 칼도 아니 차고 어깨에 수건을 걸은 순사가 앉아서 신문을 본다. 형식은 아직도 조선 땅에서 경찰서에 와본 적이 없었다. 일찍 동경에서 어떤 경찰서에 불려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서장과 말하여 본 적은 있었으나 인민이 관청에 오는 자격으로 경찰서에 와본 적은 없었다. 그는 톨스토이의『부활』을 읽어 아라사 경찰서의 모양을 상상할 뿐이었었다. 형식은 얼마큼 불쾌한 생각을 품으면서 모자를 벗고,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노파는 형식의 곁에 서서 무서움과 괴로움으로 치를 떤다. 그러나 순사는 그 말을 못 들은 모양. 형식은 좀더 소리를 높여,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제야 순사가 신문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려 형식과 노파의 얼굴과 모양을 유심히 보더니,
"무슨 일이오?"
한다. 형식이 서장이 오기 전에는 자세히 알 수 없으리라 하면서,
"어저께, 서울서 평양경찰서로 어떤 부인 하나를 보호하여 달라는 전보를 놓았는데요……."
형식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순사가,
"부인?"
한다. 형식과 노파의 생각에는 '옳지, 영채가 여기 있는 게로고' 하였다.
"녜― 부인 하나를 보호하여 달라고 전보를 놓았는데요…… 그래서 지금 어젯밤 차로 내려왔는데요…… 혹 그 부인이 지금 이 경찰서에 있습니까?"
하면서 형식은 그 순사의 얼굴을 보았다. 순사는 말없이 신문을 두어 줄 더 읽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곁으로 오면서,
"어떤 부인을 보호하여 달라고 평양경찰서로 전보를 놓았어요?"
하고 형식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이 소리를 높여 묻는다. 형식은 얼마큼 실망하였다. 만일 평양경찰서에서 영채를 붙들었으면 저 순사가 모를 리가 없으리라 하였다. 노파도 눈이 둥그래지며 순사에게,
"어떤 모시 치마 적삼 입고 서양 머리로 쪽찐 열팔구 세나 된 여자가 오지 아니하였어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순사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한참이나 고개를 기웃기웃하고 바지에 한 손을 꽂고 책상과 의자 사이를 지나 저편으로 들어가고 만다. 두 사람은 실망하였다. 영채는 평양경찰서에 없구나 하였다. 만일 영채가 여기 없다 하면 어디 있을까. 어저께 넉점에 평양에 내려서 자기의 부친과 월화의 무덤을 보고 그 길로 청류벽으로 나와 연광정 밑에서 물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그렇다. 영채는 죽었구나 하였다. 노파가 형식의 팔을 잡으며 우는 소리로,
"웬일이야요?"
한다. 형식은 울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물었다.
"설마 죽기야 하였겠어요. 이제 서장이 오면 알 터이지요."
하고 노파를 위로는 하면서도 자기도 영채가 살았으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그래서 속으로 '왜 죽어!' 하였다. 소학과 열녀전이 영채를 죽였구나 하였다. 만일 자기가 한 시간만 영채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더라도 영채는 죽지는 아니하였으리라 하였다. 형식은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왜 죽어?"
하였다. 노파는 '설마 죽었을라고요' 하고(하는) 형식의 말에 얼마큼 마음을 놓았다가 '왜 죽어?' 하는 형식의 탄식에 다시 절망이 되었다. 노파는 형식의 손을 꽉 쥐며,
"에그, 이 일을 어째요?"
하고 운다. 그러고 '나 때문에 영채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노파의 가슴을 찌른다. '아까, 꿈자리가 좋지 못하더니' 하고 꿈꾸던 생각을 한다. 하얀 옷을 입고 물 위에 서서 '흥, 생각하니깐 우스워요'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무섭게 변하며 입술을 깨물어 자기의 얼굴에 뜨거운 피를 뿜던 것이 생각이 난다. 그러고 그것이 영채의 혼령(魂靈)이 아니던가 하였다. 어저께 해지게 대동강에 빠져 죽은 영채의 혼령이 자기의 꿈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아아, 영채의 원혼(怨魂)이 밤낮 내 몸에 붙어서 낮에는 병이 되고 밤에는 꿈이 되어 나를 괴롭게 하지나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자기가 오늘부터 병이 들어 얼마를 신고하다가 마침내 영채에게 붙들려 가지나 아니할까, 또는 장차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영채의 원혼이 대동강 철교를 그 입술을 물어뜯던 모양으로 물어뜯어 자기 탄 기차가 대동강에 빠지지나 아니할까 하였다. 무섭게 변한 영채의 모양이 방금 노파의 앞에 섰는 듯도 하다. 노파는 마침내 울며 형식의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형식도 울음을 참으면서 흑흑 느끼는 노파의 등을 만지며,
"울지 마십시오. 이제 서장이 나오면 알지요."
한다.
이윽고 아까 그 순사가 들어가던 곳으로 다른 순사 하나가 나온다. 그 순사도 두 사람의 모양을 유심히 보더니 책상 서랍에서 어떤 전보를 내어보며,
"노형이 이형식이오?"
하고 형식을 본다. 형식은 순사의 손에 있는 전보를 슬쩍 보면서,
"녜, 내가 이형식이오."
노파가 우는 소리로,
"나리께서 그런 여자를 보셨습니까."
한다. 순사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이 전보는 받았지요. 그래서 정거장에 나가 보았지마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옷을 입은 사람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하고 그 전보를 책상 위에 놓으며,
"왜? 도망하는 계집이오?"
형식은 그만 실망하였다. 영채는 정녕 죽었구나 하면서,
"아니오, 자살할 염려가 있어요."
하고 자기가 전보를 놓을 때에 그 인상(人相)을 자세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을 한하였다. 먼저 나왔던 순사가 나와서 책상 위에 놓인 전보를 보면서,
"평양에 몇 사람이나 내리는지 아시오? 하고많은 사람에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한다.
형식은 가슴이 설렁거리면서 경찰서 문 안에 들어섰다. 사무 보는 책상과 의자가 다 보이고, 저편 유리창 밑에 어떤 흰 정복에 칼도 아니 차고 어깨에 수건을 걸은 순사가 앉아서 신문을 본다. 형식은 아직도 조선 땅에서 경찰서에 와본 적이 없었다. 일찍 동경에서 어떤 경찰서에 불려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서장과 말하여 본 적은 있었으나 인민이 관청에 오는 자격으로 경찰서에 와본 적은 없었다. 그는 톨스토이의『부활』을 읽어 아라사 경찰서의 모양을 상상할 뿐이었었다. 형식은 얼마큼 불쾌한 생각을 품으면서 모자를 벗고,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노파는 형식의 곁에 서서 무서움과 괴로움으로 치를 떤다. 그러나 순사는 그 말을 못 들은 모양. 형식은 좀더 소리를 높여,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하였다. 그제야 순사가 신문을 든 채로 고개를 돌려 형식과 노파의 얼굴과 모양을 유심히 보더니,
"무슨 일이오?"
한다. 형식이 서장이 오기 전에는 자세히 알 수 없으리라 하면서,
"어저께, 서울서 평양경찰서로 어떤 부인 하나를 보호하여 달라는 전보를 놓았는데요……."
형식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순사가,
"부인?"
한다. 형식과 노파의 생각에는 '옳지, 영채가 여기 있는 게로고' 하였다.
"녜― 부인 하나를 보호하여 달라고 전보를 놓았는데요…… 그래서 지금 어젯밤 차로 내려왔는데요…… 혹 그 부인이 지금 이 경찰서에 있습니까?"
하면서 형식은 그 순사의 얼굴을 보았다. 순사는 말없이 신문을 두어 줄 더 읽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곁으로 오면서,
"어떤 부인을 보호하여 달라고 평양경찰서로 전보를 놓았어요?"
하고 형식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듯이 소리를 높여 묻는다. 형식은 얼마큼 실망하였다. 만일 평양경찰서에서 영채를 붙들었으면 저 순사가 모를 리가 없으리라 하였다. 노파도 눈이 둥그래지며 순사에게,
"어떤 모시 치마 적삼 입고 서양 머리로 쪽찐 열팔구 세나 된 여자가 오지 아니하였어요?"
하고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순사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한참이나 고개를 기웃기웃하고 바지에 한 손을 꽂고 책상과 의자 사이를 지나 저편으로 들어가고 만다. 두 사람은 실망하였다. 영채는 평양경찰서에 없구나 하였다. 만일 영채가 여기 없다 하면 어디 있을까. 어저께 넉점에 평양에 내려서 자기의 부친과 월화의 무덤을 보고 그 길로 청류벽으로 나와 연광정 밑에서 물에 뛰어든 것이 아닐까, 그렇다. 영채는 죽었구나 하였다. 노파가 형식의 팔을 잡으며 우는 소리로,
"웬일이야요?"
한다. 형식은 울음을 참느라고 입술을 물었다.
"설마 죽기야 하였겠어요. 이제 서장이 오면 알 터이지요."
하고 노파를 위로는 하면서도 자기도 영채가 살았으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한다. 그래서 속으로 '왜 죽어!' 하였다. 소학과 열녀전이 영채를 죽였구나 하였다. 만일 자기가 한 시간만 영채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더라도 영채는 죽지는 아니하였으리라 하였다. 형식은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왜 죽어?"
하였다. 노파는 '설마 죽었을라고요' 하고(하는) 형식의 말에 얼마큼 마음을 놓았다가 '왜 죽어?' 하는 형식의 탄식에 다시 절망이 되었다. 노파는 형식의 손을 꽉 쥐며,
"에그, 이 일을 어째요?"
하고 운다. 그러고 '나 때문에 영채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더욱 노파의 가슴을 찌른다. '아까, 꿈자리가 좋지 못하더니' 하고 꿈꾸던 생각을 한다. 하얀 옷을 입고 물 위에 서서 '흥, 생각하니깐 우스워요'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무섭게 변하며 입술을 깨물어 자기의 얼굴에 뜨거운 피를 뿜던 것이 생각이 난다. 그러고 그것이 영채의 혼령(魂靈)이 아니던가 하였다. 어저께 해지게 대동강에 빠져 죽은 영채의 혼령이 자기의 꿈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아아, 영채의 원혼(怨魂)이 밤낮 내 몸에 붙어서 낮에는 병이 되고 밤에는 꿈이 되어 나를 괴롭게 하지나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자기가 오늘부터 병이 들어 얼마를 신고하다가 마침내 영채에게 붙들려 가지나 아니할까, 또는 장차 서울에 올라가는 길에 영채의 원혼이 대동강 철교를 그 입술을 물어뜯던 모양으로 물어뜯어 자기 탄 기차가 대동강에 빠지지나 아니할까 하였다. 무섭게 변한 영채의 모양이 방금 노파의 앞에 섰는 듯도 하다. 노파는 마침내 울며 형식의 어깨에 얼굴을 비빈다. 형식도 울음을 참으면서 흑흑 느끼는 노파의 등을 만지며,
"울지 마십시오. 이제 서장이 나오면 알지요."
한다.
이윽고 아까 그 순사가 들어가던 곳으로 다른 순사 하나가 나온다. 그 순사도 두 사람의 모양을 유심히 보더니 책상 서랍에서 어떤 전보를 내어보며,
"노형이 이형식이오?"
하고 형식을 본다. 형식은 순사의 손에 있는 전보를 슬쩍 보면서,
"녜, 내가 이형식이오."
노파가 우는 소리로,
"나리께서 그런 여자를 보셨습니까."
한다. 순사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이 전보는 받았지요. 그래서 정거장에 나가 보았지마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옷을 입은 사람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하고 그 전보를 책상 위에 놓으며,
"왜? 도망하는 계집이오?"
형식은 그만 실망하였다. 영채는 정녕 죽었구나 하면서,
"아니오, 자살할 염려가 있어요."
하고 자기가 전보를 놓을 때에 그 인상(人相)을 자세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을 한하였다. 먼저 나왔던 순사가 나와서 책상 위에 놓인 전보를 보면서,
"평양에 몇 사람이나 내리는지 아시오? 하고많은 사람에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안단 말이오?"
한다.
58
형식과 노파는 아주 절망하여 경찰서에서 나왔다. 안개비에 길이 눅눅하게 젖었다. 아까보다 사람도 많이 다니고 구루마도 많이 다닌다. 상점에서는 널쪽 덧문을 열고, 어떤 사람은 길가에 나와 앉아서 세수를 하며 어떤 사람은 방 안에 앉아서 소리를 내어 신문을 본다. 찌국찌국 하고 오던 물지게들은 모로 서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우편 집배인(集配人)이 검은 가죽가방을 메고 손에 열쇠 뭉치를 들고 껑충껑충 뛰어온다. 노파는 형식의 손에 매어달려 걸음을 잘 걷지 못한다. 형식은 시장증이 난다. 노파더러,
"어디 들어가서 조반을 사먹고 찾아봅시다. 설마 죽었겠어요."
한다. 노파는 형식을 보며,
"아이구, 나도 대동강에나 가서 빠져 죽었으면 좋겠소."
하고 눈물을 씻는다. 형식은 어저께 우선이로 더불어 노파의 집에 갔을 때에 '뒷간에 있는데 야단을 하시구려' 하며 치맛고름을 고쳐 매던 노파를 생각하였다. 형식은,
"어서 너무 슬퍼 마시오. 아직 아니 죽고 세상에 있는지 알겠어요? 자, 어디 가서 조반이나 먹읍시다."
하고 혼자말 모양으로,
"장국밥이 있을까?"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노파는 '아니 죽고 세상에 있는지!' 하는 말에 얼마큼 위로를 얻으며,
"장국밥집에를 어떻게 들어갑니까. 나 아는 집으로 가시지요."
한다. 노파가 '나 아는 집'이라면 기생집이리라 하였다. 그러고 어리고 고운 기생들의 모양이 눈에 얼른 보인다. 그러고 노파의 말대로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예쁜 여자를 보기만 하는 것이야 상관이 있으랴.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모양으로 아름다운 꽃을 대하는 모양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그러나 한 핑계가 되기 쉽다'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내 마음은 깨끗하다' 하면서,
"어디오니까. 그러면 그리로 가시지요."
하고는 그래도 노파의 뒤를 따라 기생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모양이 흉하다 하여 노파를 거기 데려다 두고 자기는 어디든지 다른 데로 가리라 하였다.
형식은 노파의 뒤를 따라 어떤 깨끗한 기와집 대문 밖에 섰다. 아직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고 쓴 대문은 열리지 아니하였다. 노파는 마치 자기 집 사람을 부르는 모양으로,
"얘들아, 자느냐. 문 열어라!"
하면서 문을 서너 번 두드리더니 형식을 돌아보며,
"영채가 여기는 있으면 아니 좋겠어요."
하고 뜻없이 웃는다. 형식은 속으로 '영채는 벌써 죽었는데' 하고 말이 없었다. 이윽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가 신을 짤짤 끌며 나와서,
"누구셔요?"
하고 문을 연다. 형식은 한 걸음 비켜 섰다. 어떤 얼굴에 분자리 보이는 십삼사 세 되는 계집아이가 노파에게 매어달리며 반가운 듯이,
"아이구, 어머니께서 오셨네."
하고 '네'자를 길게 뽑는다. 머리와 옷이 자다가 뛰어나온 사람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두 사람이 반가워하는 양을 보았다. 어여쁜 처녀로다. 재주도 있을 듯하고 다정도 할 듯하다 하였다. 그러나 저도 기생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 아직 처녀의 모양으로 차렸건마는 벌써 처녀는 아니리라. 혹 어젯저녁에 어떤 사나이의 희롱을 받지나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노파는 대문 안에 한 걸음 들어서면서 목을 내어밀어,
"들어오시지요. 내 집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그 어린 기생은 그제야 문 밖에 어떤 사람이 있는 줄을 알고 고개를 기울여 형식을 본다. 형식은 그 좀 두터운 듯한 눈껍질이 곱다 하면서,
"나는 어떤 친구에게로 갈랍니다. 조반을 먹거든 이리로 오지요,"
하고 모자를 벗는다. 노파는 문 밖으로 도로 나오며,
"그러실 것이 있어요, 들어오시지. 내 동생의 집인데요."
하고 형식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래도 형식은 굳이 간다 하는 것을 이번에는 그 어린 기생이 나와 그 고운 손으로 형식의 등을 밀고 아양을 부리며,
"들어오셔요!"
한다. 형식의 생각에 아무리 보아도 그 어린 기생의 마음에는 티끌만한 더러움도 없다 하였다. 저 영채나 선형이나 다름없는 아주 깨끗한 처녀라 하였다. 그러고 그 등을 살짝 미는 고운 손으로 따뜻한 무엇이 흘러들어오는 듯하다 하였다. 형식은 남의 처녀를 볼 때에 늘 생각하는 버릇으로 '내 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얼마를 더 사양하다가 마침내 마지못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 팔을 노파에게 잡히고 다른 팔을 그 어여쁜 기생에게 잡히고 들어가는 맛은 유쾌하다 하였다. 인도함을 받아 들어간 방은 영채의 방과 크게 틀림이 없었다. 그 어린 기생은 얼른 먼저 뛰어들어가 자리를 갠다. 형식은 문 밖에서 그 빨간 깃들인 비단 이불이 그 어린 기생의 손에서 번적번적하는 양을 보았다. 노파와 형식은 들어앉았다. 기생은 저편 방에 가서 기쁜 소리로,
"어머니, 서울 어머니께서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그 방에서 무슨 향내가 나는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방바닥을 짚은 형식의 손은 따뜻한 맛을 깨달았다. 이는 그 기생의 몸에서 흘러나온 따뜻함이라 하였다. 이윽고 기생이 어린아이 모양으로 뛰어들어오며,
"지금 어머니 건너오십니다. 그런데 아침차로 오셨어요?"
하고 말과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빛이 보인다. 형식은 '다 같은 사람이로구나' 하였다. 따뜻한 인정은 사람 있는 곳에 아무 데나 있다 하였다. 그러고 담배를 내어 들고 조끼에서 성냥을 찾으려 할 제 그 기생이 얼른 성냥을 집어 불을 켜들고 한 손으로 형식의 무릎을 짚으면서,
"자, 붙이시오!"
한다. 형식은 그를 깨끗한 어린아이 같다 하였다.
형식과 노파는 아주 절망하여 경찰서에서 나왔다. 안개비에 길이 눅눅하게 젖었다. 아까보다 사람도 많이 다니고 구루마도 많이 다닌다. 상점에서는 널쪽 덧문을 열고, 어떤 사람은 길가에 나와 앉아서 세수를 하며 어떤 사람은 방 안에 앉아서 소리를 내어 신문을 본다. 찌국찌국 하고 오던 물지게들은 모로 서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우편 집배인(集配人)이 검은 가죽가방을 메고 손에 열쇠 뭉치를 들고 껑충껑충 뛰어온다. 노파는 형식의 손에 매어달려 걸음을 잘 걷지 못한다. 형식은 시장증이 난다. 노파더러,
"어디 들어가서 조반을 사먹고 찾아봅시다. 설마 죽었겠어요."
한다. 노파는 형식을 보며,
"아이구, 나도 대동강에나 가서 빠져 죽었으면 좋겠소."
하고 눈물을 씻는다. 형식은 어저께 우선이로 더불어 노파의 집에 갔을 때에 '뒷간에 있는데 야단을 하시구려' 하며 치맛고름을 고쳐 매던 노파를 생각하였다. 형식은,
"어서 너무 슬퍼 마시오. 아직 아니 죽고 세상에 있는지 알겠어요? 자, 어디 가서 조반이나 먹읍시다."
하고 혼자말 모양으로,
"장국밥이 있을까?"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노파는 '아니 죽고 세상에 있는지!' 하는 말에 얼마큼 위로를 얻으며,
"장국밥집에를 어떻게 들어갑니까. 나 아는 집으로 가시지요."
한다. 노파가 '나 아는 집'이라면 기생집이리라 하였다. 그러고 어리고 고운 기생들의 모양이 눈에 얼른 보인다. 그러고 노파의 말대로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난다. '예쁜 여자를 보기만 하는 것이야 상관이 있으랴.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모양으로 아름다운 꽃을 대하는 모양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그러나 한 핑계가 되기 쉽다' 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내 마음은 깨끗하다' 하면서,
"어디오니까. 그러면 그리로 가시지요."
하고는 그래도 노파의 뒤를 따라 기생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모양이 흉하다 하여 노파를 거기 데려다 두고 자기는 어디든지 다른 데로 가리라 하였다.
형식은 노파의 뒤를 따라 어떤 깨끗한 기와집 대문 밖에 섰다. 아직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고 쓴 대문은 열리지 아니하였다. 노파는 마치 자기 집 사람을 부르는 모양으로,
"얘들아, 자느냐. 문 열어라!"
하면서 문을 서너 번 두드리더니 형식을 돌아보며,
"영채가 여기는 있으면 아니 좋겠어요."
하고 뜻없이 웃는다. 형식은 속으로 '영채는 벌써 죽었는데' 하고 말이 없었다. 이윽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가 신을 짤짤 끌며 나와서,
"누구셔요?"
하고 문을 연다. 형식은 한 걸음 비켜 섰다. 어떤 얼굴에 분자리 보이는 십삼사 세 되는 계집아이가 노파에게 매어달리며 반가운 듯이,
"아이구, 어머니께서 오셨네."
하고 '네'자를 길게 뽑는다. 머리와 옷이 자다가 뛰어나온 사람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두 사람이 반가워하는 양을 보았다. 어여쁜 처녀로다. 재주도 있을 듯하고 다정도 할 듯하다 하였다. 그러나 저도 기생이로구나 하고 형식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 아직 처녀의 모양으로 차렸건마는 벌써 처녀는 아니리라. 혹 어젯저녁에 어떤 사나이의 희롱을 받지나 아니하였는가 하였다. 노파는 대문 안에 한 걸음 들어서면서 목을 내어밀어,
"들어오시지요. 내 집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다. 그 어린 기생은 그제야 문 밖에 어떤 사람이 있는 줄을 알고 고개를 기울여 형식을 본다. 형식은 그 좀 두터운 듯한 눈껍질이 곱다 하면서,
"나는 어떤 친구에게로 갈랍니다. 조반을 먹거든 이리로 오지요,"
하고 모자를 벗는다. 노파는 문 밖으로 도로 나오며,
"그러실 것이 있어요, 들어오시지. 내 동생의 집인데요."
하고 형식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래도 형식은 굳이 간다 하는 것을 이번에는 그 어린 기생이 나와 그 고운 손으로 형식의 등을 밀고 아양을 부리며,
"들어오셔요!"
한다. 형식의 생각에 아무리 보아도 그 어린 기생의 마음에는 티끌만한 더러움도 없다 하였다. 저 영채나 선형이나 다름없는 아주 깨끗한 처녀라 하였다. 그러고 그 등을 살짝 미는 고운 손으로 따뜻한 무엇이 흘러들어오는 듯하다 하였다. 형식은 남의 처녀를 볼 때에 늘 생각하는 버릇으로 '내 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얼마를 더 사양하다가 마침내 마지못하여 그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 팔을 노파에게 잡히고 다른 팔을 그 어여쁜 기생에게 잡히고 들어가는 맛은 유쾌하다 하였다. 인도함을 받아 들어간 방은 영채의 방과 크게 틀림이 없었다. 그 어린 기생은 얼른 먼저 뛰어들어가 자리를 갠다. 형식은 문 밖에서 그 빨간 깃들인 비단 이불이 그 어린 기생의 손에서 번적번적하는 양을 보았다. 노파와 형식은 들어앉았다. 기생은 저편 방에 가서 기쁜 소리로,
"어머니, 서울 어머니께서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그 방에서 무슨 향내가 나는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방바닥을 짚은 형식의 손은 따뜻한 맛을 깨달았다. 이는 그 기생의 몸에서 흘러나온 따뜻함이라 하였다. 이윽고 기생이 어린아이 모양으로 뛰어들어오며,
"지금 어머니 건너오십니다. 그런데 아침차로 오셨어요?"
하고 말과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빛이 보인다. 형식은 '다 같은 사람이로구나' 하였다. 따뜻한 인정은 사람 있는 곳에 아무 데나 있다 하였다. 그러고 담배를 내어 들고 조끼에서 성냥을 찾으려 할 제 그 기생이 얼른 성냥을 집어 불을 켜들고 한 손으로 형식의 무릎을 짚으면서,
"자, 붙이시오!"
한다. 형식은 그를 깨끗한 어린아이 같다 하였다.
59
형식은 여자의 손에 담뱃불을 붙이기가 미안한 듯도 하고 수줍은 듯도 하여,
"이리 줍시오."
하였다. '줍시오' 하는 것을 보고 그 기생은 쌕 웃는다. 웃을 때에 윗 앞니에 커다란 금니가 반짝 보인다. 그 기생은 형식의 무릎을 짚은 손을 한번 꼭 누르고 어리광하는 듯이 몸짓을 하면서,
"자, 이대로 붙이셔요."
하고 '요'자에 힘을 준다. 노파는 형식이가 그저께 '월향 씨' 하던 것을 듣고 우습게 여기던 것을 생각하고 빙그레 웃는다. 형식이가 사양하는 동안에 기생의 손에 있던 성냥이 다 탔다. 기생은,
"에그, 뜨거워라."
하고 그것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살짝 엎디어 입으로 혹 불고 성냥을 잡았던 손가락으로 제 귀를 잡는다. 형식은 미안한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 귀를 잡는 손가락을 자기의 입에 대고 '호' 하고 불어 주고 싶다 하면서,
"아차, 덥겠구려(뜨겁겠구려)."
하였다. 기생은 손가락을 귀에 대고 잠깐 형식의 얼굴을 보더니 또 다른 성냥개비를 그어 아까 모양으로 한 손을 형식의 무릎 위에 놓으면서 숨이 찬 듯이,
"자, 이번에는 얼른 붙입시오."
하고 성냥개비가 반쯤 타는 것을 보고는 제 몸을 춤을 추이며 급한 듯이,
"자, 얼른, 얼른."
한다. 형식은 고개를 숙여 궐련에 불을 붙이고 첫 번 입에 빤 연기를 그 기생의 얼굴에 가지 않도록 '후' 하고 옆으로 뿜었다. 기생은 형식이가 담뱃불을 다 붙인 뒤에도 여전히 형식의 얼굴을 쳐다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들어 마당을 내다보면서 '그 눈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하구나' 하였다. 기생은 성냥개비가 다 타기를 기다리는 듯이 두 손가락으로 그 성냥개비를 돌린다. 형식은 그 기생의 머리와 등을 본다. 새까만 머리를 느짓느짓 땋고 끝에다 새빨간 왜증 댕기를 드렸다. 그 머리채가 휘임하여 내려가다가 삼각형(三角形)으로 접은 댕기 끝이 치마 허리쯤 하여 가로누웠다. 형식은 그 댕기 빛이 핏빛과 같다 하였다. 기생은 성냥개비를 뱅뱅 돌리다가 잘못하여 형식의 다리 위에 떨어트렸다. 기생은, "아이구머니!" 하면서 두 손으로 형식의 다리를 때린다. 그러나 그 불티가 형식의 무명 고의 주름에 끼어 고의에 구멍이 뚫어지고 넓적다리가 따끔한다. 형식은 그 기생이 미안하여 하기를 두려워하여 두루마기로 얼른 거기를 가리고,
"불이 꺼졌소."
하였다. 기생은 형식의 무릎에서 손을 떼고 민망한 듯이 몸을 추이면서,
"에그, 고의가 탔지요? 더우셨겠네."
하며 고개를 돌려 노파를 본다. 노파는 빙그레 웃으면서,
"계향아, 너는 그저 어린애로구나!"
하였다. 노파는 확실히 이 기생의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깨끗한 영혼을 보았다. 그러고 형식이가 그 어린 기생을 보는 눈에는 조곰도 더러운 욕심이 없다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흔히 보지 못하던 종류의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형식이가 이 어린 기생에게 대하여 '하시오' 하고 존경하는 말을 쓰던 것이 처음에는 시골뜨기와 같고 무식한 듯하더니 도리어 점잖고 거룩하다 하였다.
형식은 그 어린 기생의 말과 모양을 보고 무슨 맛나는 좋은 술에 반쯤 취한 듯한 쾌미를 깨달았다. 마치 몸이 간질간질한 듯하다. 더구나 그 기생이 자기의 무릎에 손을 짚을 때와 불을 떨어뜨리고 그 조고마한 손으로 자기의 넓적다리를 가만가만히 때릴 때에는 마치 몸에 전류를 통(電流通)할 때와 같이 전신이 자릿자릿함을 깨달았다. 형식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일생에 그렇게 미묘(微妙)하고 자릿자릿한 쾌미를 깨닫기는 처음이라 하였다. 그 어린 기생의 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광선(光線)을 발하여 사람의 정신을 황홀하게 하고, 그 살에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자가 뛰어나 사람의 근육(筋肉)을 자릿자릿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생각하고, 일전 선형과 마주앉았을 때에 깨닫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자기가 희경을 대할 때마다 맛보던 달콤한 맛과 기타 정다운 친구를 대할 때에 맛보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차 속이나 배 속이나 길가에서 처음 보는 사람 중에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자가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즐거움 중에 지금 그 어린 기생이 주는 듯한 즐거움은 처음 본다 하였다. 그러고 그 이유는 그 어린 기생의 얼굴과 태도와 마음이 아름다움과 피차에 아무 욕심도 없고 아무 수단도 없고 아무 의심도 없고 서로서로의 영(靈)과 영(靈)이 모든 인위적(人爲的)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적나라(赤裸裸)하게 융합(融合)함에 있다 하며, 또 이렇게 맛보는 즐거움은 하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거룩한 즐거움이라 하였다. 각 사람의 속에는 대개는 서로 보고 즐거워할 무엇이 있는 것이어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껍데기를(껍데기로) 그것을 싸고 싸서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므로 즐거워야 할 세상이 그만 냉랭하고 적막한 세상이 되고 맒이라 하였다. 그 중에도 얼굴과 마음이 아름답게 생기거나, 혹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조각(彫刻)을 하며, 시(詩)를 짓는 사람은 이 인생을 즐겁게 하는 거룩한 천명(天命)을 가진 자라 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나오더니,
"에그, 형님께서 오셨네."
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저들도 사람이로다' 저의들 속에도 '참사람'이 있기는 있다. 사람의 붉은 피와 사람의 따뜻한 정이 있기는 있다 하였다. '어머니'는 얼른 형식에게 초면 인사를 하고 노파의 곁에 앉으며,
"그런데, 월향이 잘 있소?"
"에그 저런, 나는 형님의 안부도 묻기를 잊었네."
하고 '두터운 듯'한 눈시울을 잠깐 움직이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잊은 것이 아니라, 잊은 것보다 더욱 정답다' 하였다.
형식은 여자의 손에 담뱃불을 붙이기가 미안한 듯도 하고 수줍은 듯도 하여,
"이리 줍시오."
하였다. '줍시오' 하는 것을 보고 그 기생은 쌕 웃는다. 웃을 때에 윗 앞니에 커다란 금니가 반짝 보인다. 그 기생은 형식의 무릎을 짚은 손을 한번 꼭 누르고 어리광하는 듯이 몸짓을 하면서,
"자, 이대로 붙이셔요."
하고 '요'자에 힘을 준다. 노파는 형식이가 그저께 '월향 씨' 하던 것을 듣고 우습게 여기던 것을 생각하고 빙그레 웃는다. 형식이가 사양하는 동안에 기생의 손에 있던 성냥이 다 탔다. 기생은,
"에그, 뜨거워라."
하고 그것을 방바닥에 떨어뜨리고는 살짝 엎디어 입으로 혹 불고 성냥을 잡았던 손가락으로 제 귀를 잡는다. 형식은 미안한 생각에 얼굴이 붉어진다. 그 귀를 잡는 손가락을 자기의 입에 대고 '호' 하고 불어 주고 싶다 하면서,
"아차, 덥겠구려(뜨겁겠구려)."
하였다. 기생은 손가락을 귀에 대고 잠깐 형식의 얼굴을 보더니 또 다른 성냥개비를 그어 아까 모양으로 한 손을 형식의 무릎 위에 놓으면서 숨이 찬 듯이,
"자, 이번에는 얼른 붙입시오."
하고 성냥개비가 반쯤 타는 것을 보고는 제 몸을 춤을 추이며 급한 듯이,
"자, 얼른, 얼른."
한다. 형식은 고개를 숙여 궐련에 불을 붙이고 첫 번 입에 빤 연기를 그 기생의 얼굴에 가지 않도록 '후' 하고 옆으로 뿜었다. 기생은 형식이가 담뱃불을 다 붙인 뒤에도 여전히 형식의 얼굴을 쳐다본다. 형식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들어 마당을 내다보면서 '그 눈이 마치 꿈을 꾸는 듯하구나' 하였다. 기생은 성냥개비가 다 타기를 기다리는 듯이 두 손가락으로 그 성냥개비를 돌린다. 형식은 그 기생의 머리와 등을 본다. 새까만 머리를 느짓느짓 땋고 끝에다 새빨간 왜증 댕기를 드렸다. 그 머리채가 휘임하여 내려가다가 삼각형(三角形)으로 접은 댕기 끝이 치마 허리쯤 하여 가로누웠다. 형식은 그 댕기 빛이 핏빛과 같다 하였다. 기생은 성냥개비를 뱅뱅 돌리다가 잘못하여 형식의 다리 위에 떨어트렸다. 기생은, "아이구머니!" 하면서 두 손으로 형식의 다리를 때린다. 그러나 그 불티가 형식의 무명 고의 주름에 끼어 고의에 구멍이 뚫어지고 넓적다리가 따끔한다. 형식은 그 기생이 미안하여 하기를 두려워하여 두루마기로 얼른 거기를 가리고,
"불이 꺼졌소."
하였다. 기생은 형식의 무릎에서 손을 떼고 민망한 듯이 몸을 추이면서,
"에그, 고의가 탔지요? 더우셨겠네."
하며 고개를 돌려 노파를 본다. 노파는 빙그레 웃으면서,
"계향아, 너는 그저 어린애로구나!"
하였다. 노파는 확실히 이 기생의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깨끗한 영혼을 보았다. 그러고 형식이가 그 어린 기생을 보는 눈에는 조곰도 더러운 욕심이 없다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흔히 보지 못하던 종류의 사람이라 하였다. 그래서 형식이가 이 어린 기생에게 대하여 '하시오' 하고 존경하는 말을 쓰던 것이 처음에는 시골뜨기와 같고 무식한 듯하더니 도리어 점잖고 거룩하다 하였다.
형식은 그 어린 기생의 말과 모양을 보고 무슨 맛나는 좋은 술에 반쯤 취한 듯한 쾌미를 깨달았다. 마치 몸이 간질간질한 듯하다. 더구나 그 기생이 자기의 무릎에 손을 짚을 때와 불을 떨어뜨리고 그 조고마한 손으로 자기의 넓적다리를 가만가만히 때릴 때에는 마치 몸에 전류를 통(電流通)할 때와 같이 전신이 자릿자릿함을 깨달았다. 형식은 생각하기를 자기의 일생에 그렇게 미묘(微妙)하고 자릿자릿한 쾌미를 깨닫기는 처음이라 하였다. 그 어린 기생의 눈으로서는 알 수 없는 광선(光線)을 발하여 사람의 정신을 황홀하게 하고, 그 살에서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분자가 뛰어나 사람의 근육(筋肉)을 자릿자릿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생각하고, 일전 선형과 마주앉았을 때에 깨닫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자기가 희경을 대할 때마다 맛보던 달콤한 맛과 기타 정다운 친구를 대할 때에 맛보던 즐거움을 생각하고, 또 차 속이나 배 속이나 길가에서 처음 보는 사람 중에도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자가 있음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든 그러한 즐거움 중에 지금 그 어린 기생이 주는 듯한 즐거움은 처음 본다 하였다. 그러고 그 이유는 그 어린 기생의 얼굴과 태도와 마음이 아름다움과 피차에 아무 욕심도 없고 아무 수단도 없고 아무 의심도 없고 서로서로의 영(靈)과 영(靈)이 모든 인위적(人爲的)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적나라(赤裸裸)하게 융합(融合)함에 있다 하며, 또 이렇게 맛보는 즐거움은 하늘이 사람에게 주신 가장 거룩한 즐거움이라 하였다. 각 사람의 속에는 대개는 서로 보고 즐거워할 무엇이 있는 것이어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껍데기를(껍데기로) 그것을 싸고 싸서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므로 즐거워야 할 세상이 그만 냉랭하고 적막한 세상이 되고 맒이라 하였다. 그 중에도 얼굴과 마음이 아름답게 생기거나, 혹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조각(彫刻)을 하며, 시(詩)를 짓는 사람은 이 인생을 즐겁게 하는 거룩한 천명(天命)을 가진 자라 하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나오더니,
"에그, 형님께서 오셨네."
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저들도 사람이로다' 저의들 속에도 '참사람'이 있기는 있다. 사람의 붉은 피와 사람의 따뜻한 정이 있기는 있다 하였다. '어머니'는 얼른 형식에게 초면 인사를 하고 노파의 곁에 앉으며,
"그런데, 월향이 잘 있소?"
"에그 저런, 나는 형님의 안부도 묻기를 잊었네."
하고 '두터운 듯'한 눈시울을 잠깐 움직이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잊은 것이 아니라, 잊은 것보다 더욱 정답다' 하였다.
60
노파는 새로이 눈물을 흘리면서 영채의 말을 하였다. 영채가 청량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강간을 당할 뻔한 일과,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입술을 물어뜯고 울던 일과, 그 이튿날 아침에 자기가 자는 데 들어와서 평양에 갈 말을 하던 것과, 차를 탈 때에 자기에게 편지 한 장을 주었고 그 편지에는 이러이러한 말을 썼던 것과, 오늘 아침에 평양경찰서에 와서 물어 보던 일을 말하고 나중에,
"그런데 그 이형식이라는 이가 이 어른이구나" 하고 손으로 형식을 가리키며 '어머니'의 어깨에 쓰러져 운다. 어머니와 계향도 이야기를 들을 때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이야기가 끝나매 솰솰 흐르기 시작하며, 눈물로 잘 보이지 아니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형식을 본다. 형식은 의외로 생각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계향은 몰라도 '어머니'는 영채의 말을 들으면 와락 성을 내며 '미친년! 죽기는 왜 죽어!' 할 줄로 생각하였었다. 그랬더니 영채의 죽었단 말을 듣고 슬피 우는 양을 보매 그 따뜻한 인정은 자기와 다름이 없다 하였다. 그러고 지금껏 기생이라면 자기와는 전혀 정신상태가 다른 한 짐승과 같은 하등 인종으로 알던 것이 부끄럽게 생각된다. 어머니는 한참이나 울더니 코를 풀며,
"원래 월향이가 마음이 꼭하였습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월화와 친해서 밤낮 월화의 말만 들었으니까, 꼭 마음이 월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그런 줄을 못 알아보고 월향더러 손을 보라 한 것이 잘못이지" 하고, "지나간 일을 어찌하겠소. 울지 마오."
하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눈물 흘리는 양을 아니 보이려 하여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피운다. 노파도 코를 풀면서,
"내니 십 년이나 제 딸과 같이 기른 것을 미워서 그랬겠나. 저도 차차 낫살이 많아 가고…… 평생 기생 노릇만 할 수도 없을 터이니까 어디 좋은 자리를 구하여 일생 편히 살 만한 곳에 보낼 양으로 그랬지. 그런데 김현수라는 이는 부자요, 남작의 아들이요, 하기로 그리로 보내면 저도 상팔자겠다 하고 그랬지."
하며 눈물을 씻는다. 형식은 혼자 놀랐다. 노파의 '평생 기생 노릇만 할 수도 없으니까' 하는 말을 듣고, 그러면 김현수에게 억지로 붙이려 한 것이 영채의 일생을 위하는 뜻이던가 하였다. 노파가 영채를 죽인 것이 다만 천 원 돈을 위하여 한 악의(惡意)가 아니요, 영채의 일생을 위하여 한 호의(好意)인가 하였다. 그러면 영채를 죽인 노파의 마음이나 영채를 구원하려 하는 자기의 마음이나 필경은 같은 마음인가 하였다. 그러면 필경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표준과 사상이 다르므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인가 하였다. 이때에 어머니가 형식에게 극히 은근하게,
"이주사께선들 얼마나 슬프시겠소. 그러나 그것도 다 전생의 연분이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나요. 세상이란 그렇지요."
하고 고개를 돌려 노파에게,
"자 울지 마오. 다 전생의 연분이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나? 시장하시겠소. 조반이나 먹읍시다."
하고 빨떡 일어나면서 혼자말로,
"어쩌나, 장국밥을 시켜 올까, 집에서 밥을 지으랄까?"
하고 머뭇머뭇하더니 획 밖으로 나간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네의 인생관이로구나. 인생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슬픈 일을 다 전생의 인연이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한참 눈물을 흘리고는 곧 눈물을 씻고 단념한다. 그네의 생각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미련한 자의 하는 일이니 잠깐 눈물을 흘리다가 얼른 눈물을 씻고 마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네는 모든 일의 책임을 다 '전생의 인연과 팔자'에 돌리지, 결코 사람에게 돌리지 아니한다. 영채가 기생이 된 것이나 김현수에게 강간을 받은 것이나, 또는 대동강에 빠져 죽은 것이나 다 그 책임은 전생의 인연에 있는 것이요, 결코 노파에게나 영채에게나 또는 김현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따라서 영채가 정절을 지키는 것도 영채라는 사람이 특별히 좋아 그런 것이 아니요, 영채라는 사람의 전생의 연분이 그러하여 자연히 또는 아니하지 못하게 정절을 지킴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네가 보기에 특별히 좋은 사람도 없고 특별히 좋지 못한 사람도 없고, 다 전생의 인연과 팔자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네의 인생관과 형식의 인생관이 얼마큼 일치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인생관의 근본적 차이점(根本的 差異點)은 이러하다. 형식은,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個人) 또는 사회(社會)의 노력으로 개인이나 사회가 개선(改善)될 수 있고 향상(向上)될 수 있다 하고, 그네는 모든 일의 책임이 전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니 다만 되는 대로 살아갈 따름이요, 사람의 의지(意志)로 개선함도 없고 개악(改惡)함도 없다 한다. 형식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혼잣말로, '옳지! 이것이 조선 사람의 인생관(人生觀)이로구나' 하였다. 그러나 노파는 '어머니' 모양으로 잠깐 눈물을 흘리다가 얼른 눈물을 그치지 아니한다. 노파는 '세상'을 보는 외에 '사람'을 보았다. 영채의 따끈따끈한 입술의 피가 자기의 손등에 떨어질 때에 노파는 '사람'을 보았다. 노파는 이번 일의 책임을 전혀 인연과 팔자에 돌리지 못한다. 노파는 영채를 죽인 책임이 자기와 김현수에게 있는 줄을 알고 영채가 정절을 굳게 지킨 것이 영채의 속에 있는 '참사람'의 힘인 줄을 알았다. 노파는 이제는 모든 일의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노파는 '잠깐 울다가 얼른 눈물을 그치'지는 못한다. 노파의 이 눈물은 일생에 흐를 눈물이로다.
계향이가 형식의 무릎에 몸을 기대고 눈물로 빨개진 눈으로 형식을 물끄러미 보며,
"형님이 죽었을까요?"
한다.
노파는 새로이 눈물을 흘리면서 영채의 말을 하였다. 영채가 청량사에서 어떤 사람에게 강간을 당할 뻔한 일과,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입술을 물어뜯고 울던 일과, 그 이튿날 아침에 자기가 자는 데 들어와서 평양에 갈 말을 하던 것과, 차를 탈 때에 자기에게 편지 한 장을 주었고 그 편지에는 이러이러한 말을 썼던 것과, 오늘 아침에 평양경찰서에 와서 물어 보던 일을 말하고 나중에,
"그런데 그 이형식이라는 이가 이 어른이구나" 하고 손으로 형식을 가리키며 '어머니'의 어깨에 쓰러져 운다. 어머니와 계향도 이야기를 들을 때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이야기가 끝나매 솰솰 흐르기 시작하며, 눈물로 잘 보이지 아니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형식을 본다. 형식은 의외로 생각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계향은 몰라도 '어머니'는 영채의 말을 들으면 와락 성을 내며 '미친년! 죽기는 왜 죽어!' 할 줄로 생각하였었다. 그랬더니 영채의 죽었단 말을 듣고 슬피 우는 양을 보매 그 따뜻한 인정은 자기와 다름이 없다 하였다. 그러고 지금껏 기생이라면 자기와는 전혀 정신상태가 다른 한 짐승과 같은 하등 인종으로 알던 것이 부끄럽게 생각된다. 어머니는 한참이나 울더니 코를 풀며,
"원래 월향이가 마음이 꼭하였습니다. 게다가 처음부터 월화와 친해서 밤낮 월화의 말만 들었으니까, 꼭 마음이 월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그런 줄을 못 알아보고 월향더러 손을 보라 한 것이 잘못이지" 하고, "지나간 일을 어찌하겠소. 울지 마오."
하며 형식을 본다. 형식은 눈물 흘리는 양을 아니 보이려 하여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피운다. 노파도 코를 풀면서,
"내니 십 년이나 제 딸과 같이 기른 것을 미워서 그랬겠나. 저도 차차 낫살이 많아 가고…… 평생 기생 노릇만 할 수도 없을 터이니까 어디 좋은 자리를 구하여 일생 편히 살 만한 곳에 보낼 양으로 그랬지. 그런데 김현수라는 이는 부자요, 남작의 아들이요, 하기로 그리로 보내면 저도 상팔자겠다 하고 그랬지."
하며 눈물을 씻는다. 형식은 혼자 놀랐다. 노파의 '평생 기생 노릇만 할 수도 없으니까' 하는 말을 듣고, 그러면 김현수에게 억지로 붙이려 한 것이 영채의 일생을 위하는 뜻이던가 하였다. 노파가 영채를 죽인 것이 다만 천 원 돈을 위하여 한 악의(惡意)가 아니요, 영채의 일생을 위하여 한 호의(好意)인가 하였다. 그러면 영채를 죽인 노파의 마음이나 영채를 구원하려 하는 자기의 마음이나 필경은 같은 마음인가 하였다. 그러면 필경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표준과 사상이 다르므로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인가 하였다. 이때에 어머니가 형식에게 극히 은근하게,
"이주사께선들 얼마나 슬프시겠소. 그러나 그것도 다 전생의 연분이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나요. 세상이란 그렇지요."
하고 고개를 돌려 노파에게,
"자 울지 마오. 다 전생의 연분이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하나? 시장하시겠소. 조반이나 먹읍시다."
하고 빨떡 일어나면서 혼자말로,
"어쩌나, 장국밥을 시켜 올까, 집에서 밥을 지으랄까?"
하고 머뭇머뭇하더니 획 밖으로 나간다. 형식은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네의 인생관이로구나. 인생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슬픈 일을 다 전생의 인연이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한참 눈물을 흘리고는 곧 눈물을 씻고 단념한다. 그네의 생각에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는 것은 미련한 자의 하는 일이니 잠깐 눈물을 흘리다가 얼른 눈물을 씻고 마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네는 모든 일의 책임을 다 '전생의 인연과 팔자'에 돌리지, 결코 사람에게 돌리지 아니한다. 영채가 기생이 된 것이나 김현수에게 강간을 받은 것이나, 또는 대동강에 빠져 죽은 것이나 다 그 책임은 전생의 인연에 있는 것이요, 결코 노파에게나 영채에게나 또는 김현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따라서 영채가 정절을 지키는 것도 영채라는 사람이 특별히 좋아 그런 것이 아니요, 영채라는 사람의 전생의 연분이 그러하여 자연히 또는 아니하지 못하게 정절을 지킴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네가 보기에 특별히 좋은 사람도 없고 특별히 좋지 못한 사람도 없고, 다 전생의 인연과 팔자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네의 인생관과 형식의 인생관이 얼마큼 일치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인생관의 근본적 차이점(根本的 差異點)은 이러하다. 형식은,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個人) 또는 사회(社會)의 노력으로 개인이나 사회가 개선(改善)될 수 있고 향상(向上)될 수 있다 하고, 그네는 모든 일의 책임이 전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니 다만 되는 대로 살아갈 따름이요, 사람의 의지(意志)로 개선함도 없고 개악(改惡)함도 없다 한다. 형식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혼잣말로, '옳지! 이것이 조선 사람의 인생관(人生觀)이로구나' 하였다. 그러나 노파는 '어머니' 모양으로 잠깐 눈물을 흘리다가 얼른 눈물을 그치지 아니한다. 노파는 '세상'을 보는 외에 '사람'을 보았다. 영채의 따끈따끈한 입술의 피가 자기의 손등에 떨어질 때에 노파는 '사람'을 보았다. 노파는 이번 일의 책임을 전혀 인연과 팔자에 돌리지 못한다. 노파는 영채를 죽인 책임이 자기와 김현수에게 있는 줄을 알고 영채가 정절을 굳게 지킨 것이 영채의 속에 있는 '참사람'의 힘인 줄을 알았다. 노파는 이제는 모든 일의 책임이 사람에게 있는 줄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노파는 '잠깐 울다가 얼른 눈물을 그치'지는 못한다. 노파의 이 눈물은 일생에 흐를 눈물이로다.
계향이가 형식의 무릎에 몸을 기대고 눈물로 빨개진 눈으로 형식을 물끄러미 보며,
"형님이 죽었을까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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