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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을 보내고 병욱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영채는 병욱의 손을 잡아 앉히며,
"그래 어때요?"
하고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질문을 한다. 병욱은,
"무엇이 어찌해. 형식 씨라는 이가 잘 차리구서 시치미 따고 앉았더구나. 우리 오빠를 안다구…… 동경 가서 같이 있었노라구……."
영채는 부지불각에 한숨을 지운다.
"왜, 형식 씨가 그리우냐. 아직도 단념이 아니 되는 게로구나."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면 왜 휘 하고 한숨을 쉬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하고 병욱의 무릎을 치며 웃는다.
"그래도 아주 마음이 편치는 않을걸."
하고 병욱도 웃는다. 영채는 한참 생각하더니 병욱의 손을 꼭 쥐며,
"참 그래요."
하고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어째 마음이 좀 불쾌한 듯해요."
하고 얼굴이 빨개진다. 병욱은 근 십년 기생으로 있던 계집애가 어떻게 이처럼 규문 속에서 자라난 처녀와 같은가, 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그러고 지금 영채의 감상이 어떠한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그래 불쾌하다니 어떻게 불쾌하냐."
"모르겠어요."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바로 대답을 해라. 그러면 내 맛나는 거 사 주께."
하고 둘이 다 웃는다. 영채가,
"이형식 씨가 퍽 무정한 사람같이 생각이 되어요. 그래도 내가 죽으러 갔다면 좀 찾아라도 볼 것인데…… 어느새에 혼인을 해가지고……"
하다가 병욱의 무릎에 자기의 이마를 대고 비비며,
"아이구, 언니,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해요."
병욱은 영채의 머리와 목과 등을 만져 주며 어린애게 하는 듯이,
"말하면 어떠냐…… 자, 그래서."
"아마, 내가 여기 있는 줄을 알겠지요?"
"알 테지……. 지금 선형이가 왔다 가서 네 말을 했을 테니깐…… 알면 어떠냐."
"어떻기야 어떻겠소마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왔다면 아마 놀랄 테지?"
"실컷 놀라 싸지. 아마 가슴이 뜨끔하리라…… 그렇게 적막할 데가 왜 있겠니."
"만일 저편에서 나를 찾아오면 어찌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할까."
"그러믄. 왜 무슨 원수가 있담."
"원수는 아니지마는, 어째……."
"어째 분이 난단 말이야?"
두 사람은 한참 잠자코 마주보더니,
"언니, 언니가 나를 살려 준 것이 잘못이야요. 나는 (그때에 꼭 죽었어야 할 터인데.) 그때에 죽었으면 벌써 다 썩어졌겠지……. 뼈만 하나씩 하나씩 여기저기 흩어졌겠지……. 그때에 죽었어야 해" 하고 후회하는 듯이 고개를 조악한다. 병욱은 영채의 낯빛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영채의 두 팔을 잡으며,
"얘 영채야,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제 나하고 둘이 가서 음악 잘 배워 가지구…… 둘이서 아메리카로 구라파로 돌아다니면서 실컷 구경하고…… 그러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새로 음악을 세우고 재미있게 살 터인데 왜 그런 소리를 하니?" 하고 영채를 잡아 흔든다. 영채는 멀거니 병욱의 눈을 보고 앉았더니 눈에서 눈물이 쑥 나오며,
"아니야요. 나는 살 사람이 아니야요. 죽어야 할 사람이야요. 가만히 지나간 일생을 생각해 보니까 암만해도 나는 살려고 난 것 같지를 아니해요.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는 옥중에서 죽고, 그러고 칠팔 년 고생이 모두 속절없이……."
하고 흑흑 느낀다.
"얘, 글쎄 웬일이냐. 곧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기뻐하다가 왜 갑자기 야단이냐…… 네가 그렇게 그러면 이 언니는 어쩌게…… 자 울지 마라!"
"암만 생각하여 보아도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생각이 없어요."
"왜? 그러면 너는 아직도 이형식 씨를 못 잊는 게로구나. 네가 그때에 날더러 실상은 이형식 씨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니?"
"아니오. 다만 그 일만 아니야요. 이 세상이 내 원수가 아니야요. 내 부모를 빼앗고, 내 형제를 빼앗고, 내 어린 몸을 실컷 희롱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마침내 내 정절을…… 내 정절을 빼앗고…… 그러고는 일생에 생각하던 사람은 아랑곳도 아니 하고…… 이렇게 구태 나를 없애고 말려는 세상에 내가 구태 붙어 있으면 무엇 해요. 세상을(세상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세상을 미워하지요. 세상이 나를 싫다 하면 나도 세상을 버리고 달아나지요…… 하늘로 올라가지요."
하는 울음 섞인 말에 병욱도 부지불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니깐 말이다― 그만치 세상한테 빼앗겼으니깐 또 세상에 좀 찾아 가져야지. 내 것을 주기만 하고 말아! 네가 이십 년이나 고생을 했으니깐 그 값을 받아야 아니 하겠니?"
"값이 무슨 값이오? 하루라도 더 살아 있으면 더 빼앗길 뿐이지……."
"아니다! 왜 그래? 이제부터는 찾는다. 아직도 전정이 구만린데 왜 어느새 실망을 한단 말이냐. 살 수 있는 대로 힘껏 살면서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야지…… 사업으로 찾고 행복으로 찾고…… 왜 찾을 것을 찾지도 않고 죽어?"
"행복? 행복? 내게 행복이 올까요? 이 세상이 내게다 행복을 줄까요!"
하고 병욱의 눈물 흐르는 눈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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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욱은 수건으로 영채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얘, 다른 손님들이 이상하게 여기겠다. 울지 말아라…… 이 세상이 왜 행복을 아니 주어…… 아니 주거든 내라지. 내라도 아니 주거든 억지로 빼앗지. 빼앗아도 아니 주거든 원수라도 갚지! 또 생각을 해봐라. 이 세상에 너와 같이 설움을 당하는 사람이 너뿐이겠니?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불쌍한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 안 된 사회제도를 고쳐서 우리 자손들이야 행복을 얻고 살게 해야지……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느냐. 그런데 만일 네가 제 고생을 못 이겨서 죽고 만다 하면 이것은 네가 우리 자손에게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많이 하자…… 자, 울지 말고 딸기나 내 먹자."
하고 일어서서 등으로 결은 하얀 두룽이(종다래끼)를 내린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지― 왜 못 해? 하느님이 큰 일꾼을 만들 양으로 네게 초년 고락을 주었구나…… 자, 우리 둘이 아니 있니? 그까짓 이형식 같은 사람은 잊어버리고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하고 살자…… 자, 옜다 먹자."
하고 빨갛게 익은 딸기를 내어놓고 먼저 자기가 하나를 먹는다. 입에 넣고 씹으니 하얀 이빨에 핏빛 같은 물이 든다. 이것은 어저께 아침 곁에 병국의 부인과 셋이 그 목화밭에 가서 송별연삼아 수박을 따먹으면서 따모은 것이라. 두 사람의 눈앞에는 황주 병욱의 집 광경이 얼른 지나간다.
영채도 울어야 쓸데없음을 알고 눈물을 거둔다. 또 병욱의 말에는 정이 있고 힘이 있고 이치가 있어서 반가우면서도 자기를 내려누르는 듯한 힘이 있다. 가슴이 터져 오게 슬프다가도 병욱의 말을 한마디 들으면 그만 스르르 풀리고 만다. 영채는 병욱이가 남자같이 활발한 듯하면서도 속에는 뜨겁고 예민한 정이 있음과, 또 자기를 위로할 때에는 진정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이 되어서 하는 줄을 잘 안다. 만일 영채가 자살을 하려고 물가에 섰거나 칼을 들고 섰다가라도 병욱의 말소리만 들리면 얼른
"언니."
하고 따라갈 것이다. 영채가 보기에 병욱은 언니라기보다 어머니라 함이 적당할 듯하였다.
그러나 이십 년 생활이 한데 뭉쳐 된 영채의 슬픔이 다만 병욱의 그 말만으로는 아주 다 스러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더 자기의 고집을 부리는 것은 친절한 병욱에게 대하여 미안한 듯하여 영채도 딸기를 먹는다. 빨간 딸기가 두 처녀의 고운 입술로 들어가서는 하얀 이빨을 빨갛게 물들이곤 하다. 차창에는 비가 뿌려서 눈물 같은 물방울이 떼그루 굴러내리다가는 다른 물방울과 한데 합하여 흘러내린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떨리는 전등 가에는 하루살이 등속이 떼를 지어 모여 들어간다. 두 처녀의 입술과 손가락 끝이 딸깃물에 불그레하여졌을 때에 형식이가,
"영채 씨!"
하고 두 사람 앞에 와 섰다.
형식은 얼마 전에 이 차실에 들어와서 바로 영채의 곁으로 오려다가 영채가 우는 듯한 모양을 보고 영채 앉은 걸상에서 서넛 건너 있는 빈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찻바퀴 소리에 자세히 들리지는 아니하나 이따금 이따금 한 마디씩 두 마디씩 들리는 말을 주워 모으면 대강 뜻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죄송한 마음과 자기에게 대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영채에게 정성껏 사죄를 하리라 하였다.
영채와 선형은(병욱은) 놀라서 일어선다. 두 사람을(사람은) 일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영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형식은 고개를 숙였다. 병욱이가 오직 고개를 들고 형식에게,
"앉으시오."
한다. 형식은 앉는다.
"얘, 앉으려무나."
하는 병욱의 말에 영채도 앉는다. 그러나 고개는 여전히 돌렸다. 형식은 마치 무슨 무서운 것이나 대한 듯이 몸에 소름이 쭉 끼친다. 영채의 뒷모양이 자기를 내려누르고 위협하는 듯하다. 대동강에 빠져 죽은 영채의 넋이 지금 자기 앞에 나서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금시에 영채가 휙 돌아서며 무서운 얼굴로 자기를 흘겨보고 입에 가득한 뜨거운 피를 자기에게다가 확 뿌리며,
"이 무정한 놈아, 영원히 저주를 받아라"
하고 달겨들 것 같다. 왜 그때에 평양 갔던 길에 더 수탐을 하여 보지 아니하였던가. 왜 그때 우선에게서 돈 오 원을 꾸어 가지고 즉시 평양으로 내려가지를 아니하였던가 하여도 본다. 이제 영채가 고개를 돌리면 어찌하나. 아니 왔더면 좋겠다 하여도 본다. 이때에,
"자, 딸기 잡수십시오."
하고 병욱이가 딸기 그릇을 내어놓으며,
"얘, 영채야."
하고 자기의 발로 영채의 발을 꼭 누른다. 영채는 가만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형식은 보지 아니한다.
"영채 씨, 용서해 줍시오. 무에라고 할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대하여서나 영채 씨께 대하여서나 큰 죄인이외다. 무슨 책망을 하시든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제가 철없이 찾아가서 공연한 걱정을 끼쳤습니다. 또 죽지도 못하는 것을 죽는다고 해서 얼마나 노심을 하셨습니까."
하고 고개를 숙인다.
병욱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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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차마 더 영채에게 말이 나오지 아니하므로 병욱더러,
"그런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이오니까. 이전부터 영채 씨를 아셨어요?"
병욱은 형식을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형식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준다. 자기를 비웃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아니올시다. 제가 방학에 집으로 오는 길에 차 속에서 만났어요."
형식은 눈이 둥그래지며 영채를 한번 보고 다시 병욱을 향하여,
"그러면 영채 씨가 평양 가시는 길에?"
"녜."
하고 만다. 형식은 더 알고 싶었다. 영채가 어찌하여 죽을 결심을 풀었으며, 어찌하여 동경으로 가게 된 것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병욱은 고개를 기울여서 영채의 돌아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래서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 즐거운 인생을 하루라도 오래 살지 못하여 걱정인데 왜 구태 지레 죽으려느냐고 그랬지요. 그러고 지금까지는 네가 천하 사람의 조롱을 받고, 학대를 받고……."
하고는 주저하는 듯이 형식을 바라보다가 또 웃으면서,
"또 일생에 생각하고 사모하던 사람에도 버림을 받았지마는……."
이 말이 끝나기 전에 형식의 가슴은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병욱은 형식의 낯빛이 변하여짐을 보고 말을 끊었다가,
"그렇게 지금토록 네 일생은 눈물과 원망의 일생이지마는 이제부터 네 앞에는 넓고 즐거운 장래가 있지 아니하냐 하고 억지로 차에서 끌어내렸지요."
"참 감사합니다. 아씨 덕에 나도 죄가 얼마큼 가벼워진 듯합니다. 저는 꼭 영채 씨께서 돌아가신 줄만 알았어요― 이때에 병욱과 영채는 속으로 흥 한다― 그래 즉시 평양경찰서에 전보를 놓고 다음 번 차로 평양으로 내려갔지요― 여기 와서 형식은 자기의 변명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 기쁘다 하는 생각이 난다― 했더니,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정거장에 나가서 수탐을 하여 보았지마는 알 수 없다고 하지요. 그래서 알 만한 집에도 가 물어 보고, 또 박선생 묘소에도……."
하다가, 중간에 돌아온 생각을 하매 문득 말을 그치고 고개를 숙인다. 그때에 북망산까지 가보고 대동강가로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시체를 찾아보았더면 좋을 뻔하였다 하는 생각이 난다. 병욱은 한참 듣더니,
"녜, 아마 그리하셨겠지요. 그러면 시체를 찾으시느라고 꽤 애를 쓰셨겠네."
형식은 '이 계집애가 꽤 사람을 골린다' 하였다. 과연 형식의 등에는 땀이 흘렀다.
영채는 형식의 하는 말을 다 들었다. 그러고 형식에게 대하여 원통한 듯하던 마음이 얼마큼 풀린다. 그러나 형식이가 즉시 자기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내려온 것과, 열심으로 자기의 시체를 찾아 준 고마움도 자기가 죽은 지 한 달이 못 하여 선형과 혼인을 하여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눌려 버리고 만다. 영채의 생각에는 형식 한 사람이 정다운 애인도 되고 박정한 낭군도 되어 보인다. 그러나 만사가 이미 다 지나갔으니 이제 와서 한탄하면 무엇 하고 분풀이를 하면 무엇 하랴. 차라리 웃는 낯으로 형식을 대하여 저편의 마음이나 기쁘게 하여 줌이 좋으리라 하는 생각도 난다. 그래서 마음을 좀 돌리기는 돌렸으나 그래도 아주 웃는 얼굴을 보여 형식에게 안심을 주고 싶지는 아니하여,
"참말 죄송합니다. 황주 가서 곧 편지를 드리려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잠깐 살아 있는 것을 알려 드리면 무엇 하랴. 차라리 죽은 줄로 믿고 계시는 것이 도리어 안심이 되실 듯하기로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보면 아니 알려 드린 것이 어떻게 잘 되었는지요."
하고 영채도 과히 말하였다는 생각이 나서 웃는다.
"그러면 어찌해서 엽서 한 장도 아니 주신단 말씀이오?"
하고 형식은 분개한 구조로, "그렇게 사람을 괴롭게 하십니까?"
형식은 진실로 이 말을 듣고 영채를 원망하였다. 만일 영채가 엽서 한 장만 하였으면 자기는 마땅히 당장 영채를 찾아가서 영채의 손을 잡았을 것 같다. 병욱과 영채는 형식의 분개하여 하는 얼굴을 본다. 더구나 영채는 형식에게 대하여 불안한 생각이 나서,
"그러나 저는 제가 살아 있는 줄을 알게 하는 것이 도리어 선생께 부질없는 근심을 끼칠 줄로 알았어요. 만일 제가 선생의 몸에 누가 되어서 명예를 상한다든지 하면 도리어― 주저하다가― 선생을 위하는 도리도 아니겠고…… 그래서 억지로 참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고 또 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형식이 영채의 하는 말을 듣다가 눈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디까지든지 자기를 위하여 주는 영채의 심정이 더욱 감사하게 생각된다. 죽으려 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줄을 알리지 아니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한 것임을 생각하매 자기의 영채에게 대한 태도의 너무 무정함이 후회된다.
마주앉은 눈물 흘리는 영채를 보고, 또 저편 차실에 앉은 선형을 생각하매 형식의 마음은 자못 산란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한참 말이 없고 기차는 어느 철교를 건너가느라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창에 뿌리는 빗발과 흘러가는 물소리는 큰비가 아직 계속하는 줄을 알게 한다. 홍수나 아니 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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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부글부글 끓는 머리를 가지고 영채의 차실에서 나왔다. 우선이가 지켜 섰다가 형식의 어깨를 툭 치며,
"영채 씨가 울데그려."
형식은 우선의 손을 잡으며,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왜, 무슨 일이 났나. 영채 씨가 바가지를 긁던가 보이그려…… 요― 호남자!"
"아니어! 그렇게 농담으로 들을 것이 아닐세…… 참, 어쩌면 좋아?"
"아따, 걱정도 많기도 많아…… 부산 가서 배 타고, 마관 가서 차 타고, 횡빈 가서 배 타고, 상항 가서 내리고 하면 그만이지 걱정이 무슨 걱정이어!"
형식은 원망스러이 우선의 얼굴을 보고 서서 무슨 생각을 하더니,
"나는 미국 가기를 중지할라네."
"응?"
하고 우선도 놀라며,
"어째?"
"미국 가기를 중지할 테여……. 그것이 옳은 일이지……. 응, 그리할라네."
하면서 우선의 손을 놓고 차실로 들어가려 한다. 우선은 손을 잡아 형식을 끌어당기며,
"자네 미쳤단 말인가. 이리 좀 오게."
형식은 멀거니 섰다.
"자네 지금 정신이 혼란되었네. 미국 가기를 중지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여?"
"아니 저편은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선형 씨한테 이 뜻을 말하고 약혼을 파하겠네……. 그것이 옳은 일이지."
"그러면 영채하고 혼인한단 말이지?"
"응, 그렇지! 그것이 옳지!"
"영채는 자네와 혼인을 한다던가."
"그런 말은 없어."
"만일 영채가 자네와 혼인하기를 싫다 하면 어쩔 터인가."
형식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일생 혼인 말고 지내지……. 절에 가서 중이 되든지."
우선은 마침내 껄껄 웃으며,
"지금 자네가 좀 노보세(上氣)했네. 참 자네는 어린내일세. 세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네그려. 행여 꿈에라도 그런 생각 내지 말고 어서 미국이나 가게."
"그러면 저 사람을 버리고?"
"버리는 것이 아니지. 일이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까. 이제 그런 생각을 하면 무엇 하나. 또 영채 씨도 동경에 유학도 하게 되었고 하니까 피차에 공부나 잘하고 장래에 서로 형제삼아 지내게그려. 그런 어림없는 미친 소리는 다 집어치고……"
하면서 형식의 등을 퉁 하고 때린다. 팔에 붉은 헝겊 두른 차장이 지나가다가 두 사람을 실척 본다.
형식은 자기의 자리에 돌아와 뒤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선형은 조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린 듯이 기대어 앉았다.
형식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의문 하나가 일어난다.
대체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것 같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까 남대문에서 차를 탈 때까지는 자기는 오직 선형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듯하더니 지금 또 영채를 보매, 선형은 둘째가 되고 영채가 자기의 사랑의 대상(對象)인 듯도 하다. 그러다가 또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이야말로 내 아내, 내 사랑하는 아내'라는 생각도 난다. 자기는 선형과 영채를 둘 다 사랑하는가. 그렇다 하면 동시에 두 사람을 다 같이 사랑할 수가 있을까. 남들이 하는 말을 듣거나, 자기가 지금껏 생각하여 온 바로 보건대, 참된 사랑은 결코 동시에 두 사람 이상에 향할 수 없는 것이어늘, 지금 자기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에 있나. 아무렇게 해서라도, 어떠한 표준을 세워서라도 형식은 선형과 영채 양인 중에 한 사람을 골라야 하겠다.
오래 생각한 후에 형식은 이러한 결론에 달하였다.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도 결코 뿌리 깊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는 선형의 얼굴이 어여쁜 것과 태도가 얌전한 것과 학교에서 우등한 것과 부자요 양반집 딸인 것밖에 아무것도 선형에게 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아직도 약혼한 지금까지도 선형의 성격(性格)을 알지 못한다. 무론 선형도 자기의 성격을 알지 못한다. 서로 이해(理解)함이 없이 참사랑이 성립될 수 있을까. 내 영혼은 과연 선형을 요구하고, 선형의 영혼은 과연 나를 요구하는가. 서로 만날 때에 영혼과 영혼이 마주 합하고, 마음과 마음이 마주 합하였는가.
일언이폐지하면 자기와 선형 사이에는 과연 칼로 끊지 못하고 불로도 끊지 못할 사랑의 사실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실망함을 금치 못한다. 자기는 비록 선형에게 이 모든 것을 구하였다 하더라도 선형은 결코 자기에게 영혼도 보이지 아니하고 마음도 주지 아니하였다. 어찌 생각하면 선형에게는 자기에게 줄 영혼과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부모의 명령과 세상의 도덕에 눌려 하릴없이 자기를 따라오는지도 모르겠다. 무론 일찍 선형이가 자기 입으로 "녜" 하고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그 대답이 과연 자각(自覺) 있게 나온 대답일까.
그러면 자기가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즉 항용 사나이들이 고운 기생 같은 여성의 색에 취하여 하는 사랑과 다름이 있을까. 자기의 사랑은 과연 문명의 세례를 받은 전인격적(全人格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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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결코 지금까지 장난으로 선형을 사랑한 것도 아니요, 육욕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포가 사랑을 장난으로 여기고 희롱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하여 큰 불만을 품는다. 자기의 일시 정욕을 만족하기 위하여 이성(異性)을 사랑한다 함을 큰 죄악으로 여긴다. 그는 사랑이란 것을 인류의 모든 정신작용 중에 가장 중하고 거룩한 것의 하나인 줄을 믿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에게 대하여서는 극히 뜻이 깊고 거룩한 일이요, 자기의 동포에게 대하여서는 큰 정신적 혁명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으로 진실하고 경건(敬虔)한 것이었다. 사랑을 인생의 전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태도로 족히 인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여 보건대 자기의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너무 유치한 것이었다. 너무 근거가 박약하고 내용이 빈약한 것이었다.
형식은 오늘 저녁에 이것을 깨달았다. 깨달으매 슬펐다. 마치 자기가 일생 경력을 다 들여서 하여 오던 사업이 일조에 헛된 것인 줄을 깨달은 듯한 실망을 맛보았다. 그와 함께 자기의 정신의 발달한 정도가 아직도 극히 유치함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 인생을 깨달을 때도 아니요, 따라서 사랑을 의논할 때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인 줄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도 어린애다. 마침 어른 없는 사회에 처하였으므로 스스로 어른인 체하던 것인 줄을 깨달으매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도 난다.
형식은 생각에 이어 생각을 한다.
나는 조선의 나갈 길을 분명히 알았거니 하였다. 조선 사람의 품을 이상과, 따라서 교육자의 가질 이상을 확실히 잡았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필경은 어린애의 생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선의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모른다. 조선의 과거를 알려면 우선 역사 보는 안식(眼識)을 길러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현재를 알려면 우선 현대의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의 대세를 살펴서 사회와 문명을 이해할 만한 안식을 기른 뒤에 조선의 모든 현재 상태를 주밀히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나갈 방향을 알려면 그 과거와 현재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지금껏 생각하여 오던 바, 주장하여 오던 바는 모두 다 어린애의 어린 수작이라.
더구나 나는 인생을 모른다. 내게 무슨 인생의 지식이 있는가.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 근본적(根本的)으로 무엇인지는 설혹 알지 못한다 하여도, 적더라도 현재에 내가 세상에 처하여 갈 인생관은 있어야 할 것이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할 만한 무슨 표준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있는가. 나는 과연 자각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자기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이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다. 형식은 눈을 떠서 선형을 본다. 선형은 여전히 가만히 앉았다. 형식은 또 생각한다.
나는 선형을 어리고 자각 없는 어린애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선형이나 자기나 다 같은 어린애다. 조상 적부터 전하여 오는 사상(思想)의 전통(傳統)은 다 잃어버리고 혼돈한 외국 사상 속에서 아직 자기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줄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오라비와 누이, 생활(生活)의 표준도 서지 못하고 민족의 이상도 서지 못한, 세상에 인도하는 자도 없이 내어던짐이 된 오라비와 누이― 이것이 자기와 선형의 모양인 듯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다시 눈을 떠서 선형을 보매 선형은 잠이 들었는지 입을 반쯤 열고 가슴이 들먹들먹한다. 형식은 참지 못하여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선형의 손에 입을 대었다. 형식의 생각에 선형은 자기의 아내라기보다 같이 손을 끌고 길을 찾아가는 부모 잃은 누이라는 생각이 난다.
옳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배우러 간다. 네나 내나 다 어린애이므로 멀리멀리 문명한 나라로 배우러 간다. 형식은 저편 차에 있는 영채와 병욱을 생각한다. '불쌍한 처녀들!'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 처녀가 다 같이 사랑스러워지고 정다워진다. 형식의 상상은 더욱 날개를 펴서 이희경 일파를 생각하고, 경성학교 학생 전체를 생각하고, 또 서울 장안 길에서 보던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 성명도 모르는 남녀 학생들과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네들이 모두 다 자기와 같이 장차 나갈 길을 부르짖어 구하는 듯하며,) 그네들이 다 자기의 형이요 동생이요 누이들인 것같이 정답게 생각된다. 형식은 마음속으로 커다란 팔을 벌려 그 어린 동생들을 한 팔에 안아 본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와 선형과, 또 병욱과 영채와 그 밖에 누군지 모르나 잘 배우려 하는 사람 몇십 명 몇백 명이 조선에 돌아오면 조선은 하루이틀 동안에 갑자기 새 조선이 될 듯이 생각한다. 그러고 아까 슬픔을 잊어버리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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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선형의 가슴은 그렇게 평안하지 아니하였다. 형식이가 영채를 찾아가고 없는 동안에 더욱 마음이 산란하게 되었다. 영채가 이 차에 탔단 말을 듣고 몹시 괴로워하는 형식의 모양을 보매 암만해도 형식의 마음에는 자기보다도 영채가 더 사랑스러운 것같이 보인다. 설혹 형식의 말과 같이 영채가 죽은 줄을 믿고 자기와 약혼을 하였다 하더라도 형식의 가슴속에는 영채의 기억이 깊이깊이 들어박혀서 자기는 용납할 곳이 없는 것 같다. (영채가 없으므로 부득이 자기를 사랑하려 하다가 이제) 영채가 살아난 줄을 알매 다시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일어나는 것 같다. 자기는 형식에게 대하여 임시로 영채의 대신을 하여 준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매 더욱 불쾌하여진다.
'옳지, 영채가 없으니깐 나를 사랑하였지' 하고 선형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면 나는 이형식의 노리개가 되었던가' 하고 한참 몸을 흔든다. '옳지, 아마 형식이가 미국 유학에 탐을 내어서 나와 약혼을 한 게다' 하고 벌떡 일어선다. '아아, 나는 남의 첩이 된 셈이로구나!' 하고 주먹을 불끈 쥔다. 형식을 정직한 사람으로 믿었던 것이 후회도 난다.
"나를 사랑하시오?"
할 때에,
"아니오, 나는 당신을 조곰도 사랑하지 아니하오."
하고 슬쩍 돌아서지 못한 것도 분하고, 형식이가 손을 잡을 때에 순순히 잡힌 것도 분하고 모든 것이 다 분하여진다. 선형은 다시 펄적 주저앉으며, '아아, 내가 그러한 사람을 따라 미국을 가누나' 하고, 방금 울음이 터질 듯이 코를 실룩실룩하기도 한다.
형식이가 속으로 자기와 영채를 비교할 것을 생각해 본다. 영채는 참 곱다. 그러고 영리하고 다정하게 생겼다. 선형도 자기가 친히 거울을 대하거나 남의 칭찬하는 말을 들어 자기의 얼굴이 어여쁘고 태도가 얌전한 줄을 안다. 그 중에도 자기의 맑은 눈이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는 줄을 안다. 그러므로 선형은 자기와 연치가 비슷한 여자를 볼 때에는 반드시 그 얼굴을 자세히 보고, 또 속으로 자기의 얼굴과 비교해 보는 버릇이 있다. 아까도 영채를 보고 곧 자기의 얼굴과 비교해 보았다. 그때에 선형은 매우 영채를 곱게 보았다. '친해 두고 싶은 사람이로군' 하였다. 그러나 알고 본즉, 그는 다방골 기생이다. 형식이가 자기의 얼굴과 더러운 기생의 얼굴을 비교할 것을 생각하매 더할 수 없이 괘씸하다. 영채의 얼굴이 비록 곱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생의 얼굴이다. 내 얼굴이 비록 영채의 것만 못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반집 처녀의 얼굴이다. 어찌 감히 비기랴 한다.
형식의 끈끈한 것을 보건대 당당한 여학생인 자기보다도 아양을 떨고 간사를 부리는 영채를 곱게 볼 것 같다. 영채가 무엇이냐, 다방골 기생이 아니냐, 하여 본다.
형식이가 계월향이라는 기생과 좋아하다가 평양까지 따라갔다는 말을 들을 제 형식을 조곰 의심하게 되고, 그 후 형식이가 자기더러 '나를 사랑하시오?' 하고 염치없는 소리를 물으며, 나중에 자기의 손을 잡을 때에 '과연 기생집에나 다니던 버릇이로다' 하였고, 지금 와서 선형은 더욱 형식을 더럽게 본다. 한참 악감정이 일어난 이 순간에는 선형의 보기에 형식은 모든 더러운 것, 악한 것을 다 갖춘 사람 같다.
'아이 어찌해!' 하고 화가 나는 듯이 선형은 고개를 짤레짤레 흔든다. 자기의 앞에, 형식의 빈자리에 허깨비 형식을 그려 놓고, '엑, 나를 속였구나' 하고 두어 번 눈을 흘겨 본다. 그러고는 또 한번 속에 불이 일어서 몸을 흔든다.
선형은 아직 사람을 미워하여 본 적이 없었다. 팔자 좋은 선형은 미워하려도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자기를 대하는 사람은 다 자기를 귀여워해 주고 칭찬해 주었다. 학교에서 몇 번 선생을 미워하여 본 적은 있었으나 '아이구 미워…….' 하고 얼굴을 찡글도록 누구를 미워할 기회는 없었다. 형식은 선형에게 첫번 미움을 받는 사람이다.
형식의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그 얼굴이 어찌해 뻔질뻔질해 보이고 천해 보인다.
선형은 그 얼굴을 아니 보려고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하며 손으로 땀에 축축하니 젖은 머리를 뻑뻑 긁었다.
형식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영채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여 본다. 쌍긋쌍긋 웃는 영채가 보인다. 그 하얗고 동그레한 얼굴이 요물스럽게 보인다. '무엇이 고와, 그 얼굴이 고와!' 하고 발을 한번 들었다 놓는다. 그러고 그 요물스러운 영채가 고개를 갸웃갸웃하여 가며 (형식을 호리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형식은 그 넓짓한 입을 헤벌리고 흥흥 하면서 징글징글한 웃음을 웃는다.
'아이그, 꼴보기 싫어!' 하며 선형은 두 손길을 펴서 이마에 댄다. '왜 이 사람이 아직 아니 오누' 하며 자리를 한번 옮아 앉는다.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아!' 하매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한번 일어났다가 앉는다. 형식이가 돌아오거든 실컷 분풀이를 하고 싶다. '너희들끼리 더럽게 잘 놀아라' 하고 침을 탁 뱉고 달아나고도 싶다. '아이쿠, 내 팔자야!' 하고 함부로 몸을 흔든다. 한번 더 '어쩌면 좋아!' 하고 푹 쓰러져 운다.
선형도 계집애다. 질투와 울기를 이리하여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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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가 영채한테 간 지가 두 시간이나 세 시간이나 된 것 같다. 퍽도 오래 있는 것 같다. 오래 있는 것 같을수록 선형의 마음이 더욱 산란하였다.
선형은 지금까지 형식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하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형식이가 퍽 자기를 사랑하여 주니 자기도 힘껏 형식을 사랑하여 주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은 있었다. 아내 되어서는 지아비를 사랑하라 하였고, 부모께서는 자기더러 이형식의 아내가 되어라 하였으니 자기는 불가불 형식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형식이가 자기더러 요구하는 그러한 사랑,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 사랑은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다른 여자가 형식을 안아 준다 하면 자기의 생각이 어떠할까 하는 것은 생각하여 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선형은 지금 자기가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선형도 시기라든지 질투라는 말은 안다. 그러나 시기나 질투는 큰 죄악이라, 자기와 같은 예수도 잘 믿고 교육도 잘 받은 얌전한 아가씨의 가질 것은 아니라 한다.
조물은 각 사람에게 사람으로 배워야만 할 모든 것을 다 가르친다. 그리하되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것과 같이 책이나 말로써 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실험으로써 한다. 조물은 말할 줄을 모르고 오직 실행할 줄만 아니까 그러한가 보다. 선형의 인생의 학과는 이제부터 차차 중등과에 들려 한다. 사랑을 배우고 질투를 배우고 분노하기와 미워하기와 슬퍼하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이란 죽는 날까지 이것을 배우는 것이니까 선형이가 졸업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 점으로 보면 영채나 형식은 선형보다 훨씬 상급생이다. 그러고 병욱은 사람들이 조물을 흉내내어, 또는 조물의 생각을 도적질하여 만들어 놓은 문학이라든지 예술(藝術)이라든지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퍽 많이 배웠다.
사람이란 이러한 과정을 많이 배우면 많이 배울수록 어른이 되어 간다. 즉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아리따운 태도가 스러지고 꾀도 있고, 힘도 있고, 고집도 있고, 뜻도 있고, 거짓말도 곧잘 하거니와 옳은 말도 힘있게 하는 소위 어른이 되어 간다. 정신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여지고 더욱 복잡하여진다. 일언이폐지하고 사람이 되는 것이라.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선형은 아직 천진난만한, 엊그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린애다. 오늘에야 처음 사람의 맛을 보았다. 사랑의 불길에, 질투의 물결에 비로소 쓴 것도 같도 단 것도 같은 인생의 맛을 보았다. 옛말에 마마는 백골이라도 한 번은 한다는 셈으로 사람 되고는 한번은 반드시 이 세례를 받는다. 아니 받고 지났으면 게서 더한 행복도 없을 듯하건마는, 그렇거든 사람으로 아니 나는 것이 좋다. 다나 쓰나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두를 놓으면 천연두를 벗어난다.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앓더라도 경하게 앓는다. 그러므로 근년에 와서는 누구든지 우두를 놓으며 그래서 별로 곰보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정신에도 마마가 있으니까 정신에도 천연두가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든지 질투라든지 실망, 낙담, 슬픔, 궤휼, 간사, 흉악, 음란, 행복, 기쁨, 성공 등 인생의 만만 현상은 다 일종 정신적 마마라. 소위 약은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의 괴로워하는 양을 차마 보지 못하여 아무쪼록 그네로 하여금 일생에 이 마마를 겪지 않도록 하려 하나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할 것이다. 야매한 사람들이 마마에 귀신이 있는 줄로 믿는 것은 잘못이어니와 이 정신적 마마야말로 귀신이 있어서, 지키는 부모 몰래 그네의 사랑하는 자녀의 정신 속에 숨어 들어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자녀에게 인생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방면을 감추려 함은 마치 공기 중에는 여러 가지 독균이 있다 하여 자녀들을 방 안에 가두어 두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바깥 독균 많은 공기에 익지 못한 자녀의 내장은 독균이 들어가자마자 곧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죽어 버린다. 그러나 평생에 바깥 공기에 익어서, 내장에 독균을 대항할 만한 힘을 기르면 여간한 독균이 들어오더라도 무섭지를 아니하다. 한번 우두로 앓은 사람은 천연두균을 저항하는 힘이 있는 것과 같다.
선형은 지금껏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는 공기 중에 독균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고 그는 우두도 놓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지금 질투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사랑이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가 만일 종교나 문학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대강 배워 사랑이 무엇이며 질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들 이 경우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언마는 선형은 처음 이렇게 무서운 변을 당하였다.
선형은 얼마 울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지금 지나간 자기의 심리(心理)를 돌아보고 깜짝 놀라며 진저리를 쳤다. 선형의 눈은 둥글어진다.
'내가 어찌 되었는가' 하고 한참 숨을 멈춘다. 첫번 지내 보는 그 아픈 경험이 마치 캄캄한 밤과 같은 무서움을 준다. '이게 무엇인가' 하고 오싹오싹한 소름이 두어 번 전신으로 쪽쪽 지나간다. 그러다가 멀거니 차실을 돌아보면서, '퍽도 오래 있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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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형은 몹시 무서운 생각이 난다. 자기의 내장이 온통 빠지직 타는 듯하고 코로는 시커먼 불길이 활활 나오는 듯하다. 씨걸씨걸 하는 자기의 숨소리가 마치 자기의 곁에 어떤 커다란 마귀가 와 서서 후후 찬 입김을 불어 주는 것 같다. 자기의 몸이 마치 성경을 배울 때에 상상하던 컴컴한 지옥 속으로 둥둥 떠 들어가는 것 같다. 선형은 흑 하고 진저리를 치며 차실 내에 여기저기 앉아 조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그 사람들도 모두 다 무서운 마귀가 된 것 같다. 그 사람의 얼굴들이 금시에 눈을 뚝 부릅뜨고 자기를 향하고 달려들 것 같다.
'아이구 무서워!' 하고, 선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가리면 영채와 형식의 모양이 또 보인다. 둘이 꼭 쓸어안고 뺨을 마주대고서 비웃는 얼굴로 자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가 그 곁에 섰다가 퇴 하고 침을 뱉으면 영채와 형식이가 갑자기 무서운 마귀가 되어서 '응' 하고 자기를 물어뜯는 것 같기도 하다. 선형은 '아이그 어머니!' 하고 푹 쓰러졌다. 선형의 몸은 알 수 없는 무서움으로 들들 떨린다. 선형은 얼른 하느님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 할 따름이요, 다른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몇 번 하느님을 찾다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 죄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말았다. 그만해도 얼마큼 무서운 생각이 없어지고 숨소리가 순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형은 곁에 그리스도가 와서 선 것을 상상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때 형식이가 우선으로 더불어 돌아왔고, 또 선형의 손등에 입을 댄 것이라. 선형은 그때에 결코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형식이가 돌아오는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눈을 뜨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형식의 입술이 자기의 손등에 댈 때에는 손등으로 형식의 면상을 딱 붙이고 싶도록 미웠다. 이것이 다 기생과 하던 버릇이로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선형도 잠이 들었다. 휘황하던 전등은 밤새도록 이 두 괴로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고 커다란 눈을 부릅뜬 시커먼 기관차는 캄캄한 밤과 내려쏟는 비를 뚫고 별로 태우고 내리우는 사람도 없이 산굽이를 돌고 굴을 통하여 여러 가지 꿈을 꾸는 여러 가지 사람을 싣고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잠을 깬 것은 차가 삼량진역에 닿을 적이었다. 시계의 짧은 침은 벌써 다섯시를 가리켰으나 하늘이 흐려 아직도 정거장의 등불이 반작반작한다.
차장이 모자를 옆에 끼고 은근히 고개를 숙이더니,
"두 군데 선로가 파손되어 네 시간 후가 아니면 발차할 수가 없습니다."
한다.
자다가 깬 손님들은 모두 눈을 비비며
"응, 응."
하고 불평한 소리를 하다가 모두 짐을 꾸며 가지고 내린다. 어떤 사람은 차창으로 내다보다가,
"저 물 보게, 물 보게!"
하며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감탄을 발한다. 비 외투를 입은 역부들은 나는 상관없다, 하는 듯이 시치미떼고 슬근슬근 열차 곁으로 왔다갔다한다. 정거장은 무슨 큰일이나 난듯이 공연히 수선수선한다. 형식은,
"우리도 내리지요. 네 시간을 어떻게 차 속에 있겠어요."
하고 선형을 본다. 선형은 형식의 입을 보고 어젯저녁 자기의 손등에 대던 생각을 하고 속으로 우스워하면서,
"내리지요!"
하고 먼저 일어선다. 형식은 가방과 담요들을 한데 들고 앞서 내리고 선형은 형식의 보던 책과 자기의 손가방을 들고 형식의 뒤를 따라 내렸다. 개찰구 곁에 갔을 적에 병욱이가 뛰어오며 뉘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내리셔요!"
하고 아침 인사를 잊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웃는다.
"녜, 네 시간이나 어떻게 기다리겠습니까. 여관에 들어 좀 쉬지요……. 물구경이나 하고요."
"그러면 저희도 내리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셔요!"
하더니 저편으로 뛰어간다. 형식과 선형의 눈도 그리로 향하였다. 영채가 이편으로 향한 차창에 서서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다. 형식은 '어찌하나' 하고, 선형은 '조 요물이' 하였다. 병욱이가 뛰어가서,
"얘, 우리도 내리자. 저이들도 내리시는데."
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영채도 형식과 선형을 보았다. 그러고 얼른 고개를 움촐하였다.
병욱이가 앞서고 영채는 병욱의 뒤에 서서 병욱의 그늘에 자기의 몸을 감추려는 듯이 비실비실 형식의 곁으로 온다. 병욱이가 실적 빗겨 서매 영채와 형식과는 정면으로 마주서게 되었다. 영채는 형식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음에 선형을 향하고 방그레 웃으며 은근하게 인사를 하였다. 선형도 웃으며 답례하였다. 그러나 둘이 다 일시에 얼굴을 붉혔다.
네 사람은 열을 지어서 개찰구를 나섰다. 일없는 손님들은 네 사람의 행색을 유심히 보며 혹 웃기도 하고 수군수군하기도 한다. 마치 형식이가 세 누이를 데리고 가는 것 같다. 대합실에서 여관 하인에게 짐을 맡기고 네 사람은 그 하인의 뒤를 따라 나가다가 정거장 모퉁이에 서서 붉은 물이 굽실굽실하는 낙동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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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물 보셔요!"
하고 병욱이가 가시 돋은 철사에 배를 대고 허리를 굽히며 소리를 친다. 다른 세 사람도 속으로는 '저 물 보게' 하면서도 아무도 입 밖에 말을 내지는 아니한다.
"저것 보게. 저기 저 집들이 반이나 잠겼습니다그려!"
하고 마산선으로 갈려 나가는 길가에 있는 초가집들을 가리킨다. 과연 대단한 물이로다. 좌우편 산을 남겨 놓고는 온통 시뻘건 흙물이로다. 강 한가운데로 굼실굼실 소용돌이를 쳐가며 흘러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그 물들이 좌우편에 늘어선 산굽이를 파서 얼마 아니 되면 그 산들의 밑이 빠져나갈 것 같다.
길이 좁아서 미처 빠지지를 못하여 우묵우묵한 웅커리(웅덩이)라는 웅커리는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쓸어들여서 진을 치고 앞선 물들이 다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길을 잃은 물은 사람 사는 촌중에까지 침입하여 사람들을 다 내어몰고 방 안, 부엌, 벽장 할 것 없이 온통 점령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업고 늙은이를 이끌고 높은 데 높은 데를 찾아 산으로 기어오른다. 사람들이 (중히 여기고) 중히 여기어 남을 주기는커녕 잠깐 만져만 보자고 하여도 눈이 벌개지며 "못 한다" 하던 모든 세간을 그 벌건 물들이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띄워 가지고 왔다갔다하다가 물결에 강 한복판으로 집어던져 빙글빙글 곤두박질을 하며 한정없는 바다로 흘려내려 보낸다.
사람들이 여름내에 애써서 길러 놓은 곡식들도 그 붉은 물결 속에서 부다끼고 또 부다끼어 그 약한 허리가 부러지는 것도 있을 것이요, 그 부드러운 뿌리가 끊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라. 장차 누렇게 열매를 맺어 가을밤 골안개에 무거운 고개를 숙이려 하던 벼의 꽃도 다 말이 못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온 땅은 전혀 붉은 물의 지배하(支配下)에 들어가고 말았다.
비는 그쳤건마는 하늘에는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검은 구름장이 뭉글뭉글 떠돈다. 부리나케 동편을 향하고 달아나다가는 무슨 생각이 나는지 또 서편을 향하고 몰려간다. 이따금 참다못한 듯이 붉은(굵은)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진다.
벌거벗은 높은 산에는 갑자기 된 폭포와 시내가 거꾸로 매어달린 듯이, 마치 검은 바탕에다가 여기저기 되는 대로 흰 줄을 그어 놓은 것 같다. 그 개천들이 벌거벗은 산들의 살을 깎고, 뼈를 우귀어 가지고 내려오는 소리가 무섭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와 합하여 웅대한 합주(合奏)를 듣는 것 같다.
땅은 목말랐던 판에 먹을 수 있는 대로 실컷 물을 먹어서 무럭무럭하게 되었다. 마치 지심(地心)까지 들여져 젖을 것 같다. 하늘 위이며 땅 밑이 온통 물 세상이로다. 이 물 세상에 서서 사람들은 '어찌 되려는고' 하고 하늘만 우러러본다. 병욱은 다시,
"이렇게 물이 많이 나서 흉년이나 아니 들까요?"
하고 형식을 본다. 형식도 우적우적 높은 땅으로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섰다가 고개를 병욱에게로 돌리며,
"글쎄올시다. 이제라도 곧 비가 그쳤으면 좋으련마는 이제 하루만 더 오면 연사는 말이 아니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에 세 처녀는 일제히 형식의 입을 바라본다. 그네의 속에는 개인(個人)을 뛰어난 일종의 근심과 두려움이 찬다. '큰물', '흉년' 하는 생각과, 물소리와 뭉굴뭉굴하는 구름과, 집을 잃고 높은 땅으로 기어오르는 사람은 그네로 하여금 개인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공통한 생각…… 즉 사람으로 저마다 가지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선형도,
"이제 비가 그치면 오늘 안으로 이 물이 다 찔까요?"
하고 형식을 본다.
"아마, 내일 아침까지는 갈걸요."
한다.
"상류(上流)에 비가 아니 오면 곧 찌지마는 상류에 비가 오면……."
하고 영채가 연전 평양은 비도 아니 오는데 대동강이 범람하던 생각을 한다.
"평양 시가에도 물이 들어올 때가 있나요?"
하고 선형이가 영채를 보며 묻는다.
"들어오구말구요. 성내에는 별로 들어오는 일이 없지마는 외성에는 흔히 들어옵니다. 그저께도 외성 신시가로 배를 탔다구(타구) 다녔는데요."
하고 선형의 눈을 실적 본다. 선형이 얼른 눈을 피하였다. 병욱은 한참 듣다가 빙긋 웃으며 속으로, '너희들이 잘 이야기를 한다' 하였다. 영채는 병욱의 웃는 것을 보고 한 걸음 병욱에게 가까이 가며 남에게 아니 보이게 가만히 병욱의 손을 잡는다. 병욱은 영채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네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저 보고 싶은 데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그러나 네 사람은 공통한 생각을 버리고 각각 제가 되었다. 그러고 본즉 여기 서서 구경할 재미도 없어졌다. 그래도 그냥 우두커니 섰다가 의논한 듯이 네 사람은 슬몃 발을 돌려 거기서 십여 보가 다 못 되는 여관으로 향하였다. 하녀들과 반토(지배인)가 "이랏샤이(어서 오십시오)"를 부르고 네 사람은 이층 북편 끝 하치조마(八疊間)로 인도한다. 지나가면서 보건대 각 방에는 손님이 다 찬 모양이요, 모두 무슨 이야기들을 한다. 여관은 물난 덕에 매우 흥성흥성하게 되었다. 네 사람이 각각 방석을 당기어 깔고 앉자마자 소나기가 (쏴 하고) 여관의 함석 지붕을 때린다.
"아이구, 저 집 잃은 사람들을 어찌해."
하고 세 처녀가 일시에 얼굴을 찌푸린다. 비는 좍좍 퍼붓는다. 방 안은 적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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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잃은 무리들은 산기슭에 선 대로 비를 함빡 맞아서 전신에서 물이 쪽 흐르게 되었다. 어린아이를 안은 부인들은 허리를 굽혀서 팔과 몸으로 아이들을 가리운다. 그러나 갑자기 퍼붓는 빗발에 숨이 막혀서 으아 하고 우는 아이도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머리에서 흐르는 빗물에 섞어(섞인)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흔들거린다.
어떤 노파는 되는 대로 되어라 하는 듯이 우두커니 쭈그리고 앉아서 비에 가리운 먼산을 바라보고, 어떤 중늙은이는 머리 텁수룩한 총각을 데리고 그늘을 찾아서 뛰어간다.
여름내 김매기에 얼굴이 볕에 그을은 젊은 남녀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멀거니 서서 자기네가 애써 지어 놓은 논 있던 곳을 바라본다. 벌건 물결은 조곰 남았던 논까지도 차차 덮고야 말련다.
우르릉 하는 우레 소리가 한번 산천을 흔들 때마다 주렴 같은 비가 앞산으로 고함을 치고 들이달아서는 숨쉬듯 불어오는 동남풍에 비스듬히 휘면서 뒷산으로 달아 들어간다. 그러할 때마다 풀대 사이로 흙물이 모래를 밀고 왁 쓸려 내려온다. 또 한번 우레 소리가 나고는 또 한바탕 앞산 너머로서 모진 비가 밀려 넘어온다. 그 속에 백여 명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가만히 섰다. 처음에는 무서운 마음도 나고 슬픈 마음도 났건마는 한참 지나서는 아무러한 생각도 없이 되었다. 굵은 빗발이 깨어져라 하고 얼굴을 때릴 때마다 흑흑 느끼며 몸을 움츠릴 뿐이라.
여러 사람의 살은 싸늘하게 식었다. 입술은 파랗게 되고 몸이 덜덜덜 떨린다. 눈앞에 늘어 있는 집들에서는 조반 짓는 연기가 나온다. 그 연기도 굴뚝 밖에 나서자마자 짓쳐 들어오는 빗발에 기운을 못 쓰고 도로 쫓겨 들어가고 마는 것 같다.
비는 언제 그칠 것 같지도 아니하다. 하늘이 온통 녹아서 비가 되고 말 듯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 중에 저편 언덕에 지게를 기둥삼아 낡은 거적이 하나를 덮어 놓은 것이 있고, 그 밑에는 어떤 행주치마 입고 얼굴에 주름잡힌 노파가 입술을 물고 괴로워하는 젊은 부인을 안고 앉았다. 풀물 묻은 잠방이 입은 젊은 남자는 상투 바람으로 우뚝 서서 바람에 날리려는 섬거적을 붙들고 있다. 이 귀작이(귀)가 들먹하면 이것을 누르고 저 귀작이가 들먹하면 저것을 누른다.
노파에게 안긴 젊은 부인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몸을 비틀고 이따금 아이쿠 아이쿠 하고 소리를 친다. 그러할 때마다 노파는 더 힘껏 그 부인을 껴안아 주고 젊은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본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흙을 밀어다가 노파의 몸을 섬삼아 좌우로 흘러내려간다. 노파와 젊은 부인의 치맛자락이 흙에 묻혔다 나왔다 한다.
이윽고 우레 소리가 저 멀리 서편으로 달아나며 비가 차차 그치고 어둡던 천지가 좀 밝아진다. 산들이 모두 제 모양이 될 때에는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만 칼칼하게 들린다.
이때에 젊은 남자는 섬거적을 벗겨 내어 버리고 허리를 굽혀 젊은 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어떤고?"
한다. 그러나 부인은 몸을 비틀 뿐이요, 아무 대답도 없다. 노파가 부인의 손을 만지며,
"이것 보려무나. 이렇게 전신이 얼음장같이 차구나.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화증을 내며 눈물을 흘린다.
"어떻게 하나."
하고 젊은 사람도 얼굴을 찌푸린다. 부인은 또 한번 몸을 비틀며,
"아이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소."
하고는 말끝에 울음이 나온다. 전신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얘, 그래도 어느 집에 가서 말을 해봐라. 그래도 인정이 있지, 그렇겠니?"
"어느 집에를 가요. 누가 앓는 사람을 들인답디까?"
이때에 저편으로서 지금 바로 조반을 먹은 형식의 일행이 나와서 차차 이편을 향하고 온다. 몸에서 물이 흐르는 사람들은 땅바닥에 그냥 주저앉아서 말없이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다른 객들도 둘씩 셋씩 담배를 피워 물고 물구경을 나온다. 갑작 비에 흙이 다 씻겨 나가서 길은 번번하다. 다만 여기저기 도랑이 져서 물이 흘러내려갈 뿐이다. 앞서서 오던 병욱은 앓는 부인 앞에 서며,
"어디가 편치 않아요?"
할 때에 남자는 한번 실적 병욱을 보고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형식과 선형과 영채도 그 앞에 와 선다. 흙투성이가 된 부인은 또 한번 몸을 비틀며,
"아이쿠!"
한다. 노파는 그 바람에 뒤로 쓰러졌다가 손에 묻은 흙을 자기의 팔과 허리에 되는 대로 문대면서,
"만삭 된 태모야요. 그런데 새벽부터 이렇게 배가 아프다고……."
하며 말끝을 못 맺는다.
"댁은 어디인데요?"
하고 형식이가 묻자,
"저 물 속에 들어갔답니다. 그 왼수의 물이…… 아아, 사람을 살려 줍시오!"
부인은 또 한번,
"아이쿠!"
하며 숨이 막힐 것 같다. 병욱은 부인의 손을 만져 보더니 형식을 돌아보며,
"여봅시오, 가서 방을 하나 빌어 가지고 병인을 들여다 누입시다. 아마 산기가 있나 봅니다."
한다. 영채와 선형은 얼굴을 찡그린다. 그 중에도 선형은 무서운 것이나 본 듯이 진저리를 치며 한 걸음 물러선다.
형식은 집 있는 데로 달음질을 하여 간다. 일동은 형식의 가는 양을 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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