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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모레 떠난다고 하였으나 병욱의 자친의 반대로 일주일 후에 떠나게 되었다. 만류하는 그 자친의 말은 이러하였다.
"일년 동안이나 그립게 지내다가 만났는데 한 달이 못 되어서 간다고 그러느냐. 너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아니한 게로구나. 저 무명밭에 너 줄 양으로 심은 참외와 수박 다 따먹고 가거라."
이 말에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은 병욱이가 영채더러,
"어떠니, 어머님의 정이?"
하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영채도 부친의 생각이 나서 소매로 눈을 씻었다.
날마다 낮밥때가 지나면 병욱과 영채는 집에서 한 삼 마장 되는 양지편 무명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가지고 밭모퉁이에 가지런히 앉아서 여러 가지로 꿈 같은 장래를 말하면서 맛나게 먹었다. 어떤 때에는 병국의 부인도 같이 나와서 삼인이 정좌(鼎坐)하여 해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일도 있다. 마침 그 무명밭이 길체에 있으므로 그 곁으로 다니는 사람도 없이 아주 고요하다. 하루는 병국의 부인이,
"아버님께서는 목화에 해롭다고 참외나 수박은 일절 넣지 말라는 것을 어머님께서 기어이 넣어야 된다고 하셔서 나와 둘이서 이 참외와 수박을 심었지요."
하였다.
병욱은 밭고랑으로 거닐면서 아름답게 매어달린 참외와 수박을 한바탕 시찰하더니, 그 중에서 얼룩얼룩한 참외를 하나 따가지고 나오면서,
"이놈은 어째서 이렇게 얼룩얼룩해요? 어째서 어떤 놈은 꺼멓고, 어떤 놈은 희고, 어떤 놈은 이렇게 얼룩얼룩할까. 암만 다니면서 보아도 꼭 같은 놈은 하나도 없으니……."
"다 같으면 재미가 있겠어요. 사람도 그렇지."
하고 영채가 웃는다.
"아무려나 자연(自然)이란 참 재미있어요. 같은 흙 속에서 별의별 형형색색의 풀이 나고 나무가 나고 꽃이 피고……."
하고 지금 따온 참외를 코에 대고 킁킁 맡아 보며,
"이것도 흙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지."
"사람도 처음에는 흙으로 빚었다고 하지 아니해요."
하고 병국의 부인,
"참 그 말이 옳아. 만물이 다 흙에서 나왔으니까…… 과연 땅이 만물의 어머니여. 만물을 낳아 주구 안아 주고…… 쌀이라든지 물이라든지 이 참외라든지. 이것은 말하면 젖이지…… 어머니의 젖이지."
하고 사랑스러운 듯이 그 참외를 어루만지다가 사방을 휘 돌아보며,
"어때요, 즐겁지 않아요. 하늘은 말갛지, 햇빛은 따뜻하지, 산은 퍼렇지, 저렇게 시냇물은 흐르지, 그러고 저 풀들은 아주 기운 있게 자라지. 그런데 우리들은 그 속에 앉았구려. 에구 좋아."
하고 춤을 추면서 웃는다.
영채가 동그란 돌을 들어서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시골서 자라나서 그런지 모르지마는 암만해도 이렇게 풀 있고 나무 있는 시골이 좋아요. 서울이나 평양 같은 도회에 있으려면 어째 옥 속에 있는 것 같애."
"그렇고말고. 이렇게 넓은 자연 속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온통 자유롭고 한가하고 하지마는 도회에 있으면…… 에구, 그 먼지, 그 구린내 나는 공기, 게다가 사람들의 마음까지 구린내가 나게 되지."
하고 방금 구린내가 나는 듯이 얼굴을 징그리니,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넓고 깨끗하지 않아요."
하고 후―후― 깊이 숨을 들이쉰다. 과연 공기는 맑다. 풀의 향기가 사람을 취하게 할 듯이 이따금 후끈후끈 돌아온다.
이렇게 즐겁고 이야기하고 놀다가 수박을 하나씩 따들고 돌아온다. 그것은 집에 있는 부모와 다른 가족에게 드리기 위함이라.
병욱은 수박의 뚜께를 떼고 거기다가 꿀을 넣어 두었다가 아랫목에 누운 조모께 드린다. 조모는 어린애 모양으로 쪼그라진 볼에 웃음을 띠며 맛나는 듯이 그것을 먹는다. 병욱은 기쁘게 보고 앉았다가 이따금 숟가락으로 수박 속을 파드린다. 거의 다 먹고 나서는 으레 병욱을 보고 웃으며,
"에그, 자라기도 자랐다. 저렇게 큰 것이 왜 시집가기를 싫어하는고?"
하고는 앉은 대로 몸을 한 걸음 끌어다가 병욱의 등을 두드리고,
"이제 네가 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까 보다."
하고 한숨을 쉰다. 그때마다 병욱은,
"왜 그래요. 할머니께서는 아흔까지는 걱정 없어요."
하고 크게 소리를 치면, 겨우 들리는 듯이 흥흥 하며,
"아흔까지!"
하고 만다. 지금 일흔셋이니까 아흔까지면 아직도 십칠 년이 있다.
'내가 그렇게 살까?' 하는 듯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듯도 하다.
이따금 손녀더러 바이올린을 해보라고 한다. 병욱은 시키는 대로 바이올린을 타면서 곁에 앉은 영채더러,
"듣기는 네가 해라. 할머니(는) 눈으로 들으시니까."
하고 둘이서 웃으면 조모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면서 자기도 웃는다. 그러고는 병욱이가 고개를 기울이고 활을 당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다가는 오 분이 못 하여서 대개는 껌벅껌벅 존다. 그러면 젊은 두 처녀는 마주보고 웃으며 자기네끼리만 즐거워한다.
102
모친은 멀리로 가려는 딸을 위하여서 여러 가지로 맛나는 것을 시킨다. 손수 쌀을 담가서 떡도 만들고 닭도 잡아 주고…… 그러고는 딸들이 맛나게 먹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앉았다. 부친도 딸을 위해서 쇠갈비 한 짝을 사오고 병국도 성내에 들어가서 과자와 귤과 사이다 같은 것을 사온다. 그러고 병욱과 영채는 무명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다가 혹은 꿀을 두고, 혹은 사탕을 두어서, 혹은 하룻밤을 재우기도 하고, 혹은 우물에 넣어 식히기도 하여 내어놓는다. 한번은 영채가 홀로 꿀 버무린 수박을 부친께 드렸다. 부친은 좀 의외인 듯이 그것을 받아서 숟가락으로 맛나게 떠넣으며,
"응, 고맙다."
하였다. 영채는 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한번은 병욱이가 병국에게 수박을 주며 농담같이,
"이것은 영채가 오빠 드린다고 특별히 만든 것이야요."
하였다. 곁에 섰던 영채는 얼굴을 붉혔다.
병국의 부인은 두 누이가 떠나는 것을 진정으로 섭섭하여 한다. 또 새로 정들인 영채를 한 달이 못 하여서 작별하게 되는 것도 슬펐다. 자기도 누이들과 같이 훨훨 서울이나 동경으로 가보고도 싶었으나 불가능한 줄을 안다. 그래서 미상불 부러운 생각도 있지마는, 또 그는 자기의 분정에 만족할 줄 아는 수양이 있으므로 누이들은 저러할 사람이요, 나는 이러할 사람이라고 곧 단념을 하므로 그렇게 괴로워하지도 아니한다.
이렇게 매우 분주한 연락 속에 긴 듯하던 일주일도 꿈같이 지나고 말았다. 오늘은 떠난다 하여 짐을 묶으며 옷을 갈아입으며 할 때에는 보내는 사람은 보내기가 싫고 가는 사람은 가기가 싫다. 아랫목에 누워 있는 조모라든지, 나는 모른다 하는 듯이 담배만 피우는 부친이라든지, 고추장이며 암치 같은 반찬을 싸주는 모친이라든지, 시어머니를 도우며 말없이 있는 형수라든지, 두루마기를 입고 (파나마를 젖혀 쓴 대로 대소 짐을 묶고) 분주하는 병국이라든지,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며 활발하게 웃고 다니는 병욱이라든지, 또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듯이 우두커니 섰는 영채라든지…… 누구누구를 물론하고 가슴 저 구석에는 말할 수 없는 적막과 슬픔이 있다.
병욱과 영채는 조모, 부친, 모친의 순서로 하직하는 절을 하였다. 조모는 또 한번,
"이제는 다시 못 볼 것 같다."
하고 희미한 눈에 눈물이 고이며 병국에게 붙들려 대문까지 나왔다. 부친은 절을 받고
"응."
할 뿐이요 다른 말이 없고, 모친은,
"가서 공부들 잘해 가지고 오너라. 겨울방학에도 오려무나. 영채도 내년에 오너라."
하고 영채의 적삼 등을 펴주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잘 가거라' '잘 있으오' 하는 인사를 필하고 일행이 동구를 나설 때는 정히 오후 일시경, 내리쬐는 팔월 볕이 모닥불을 퍼붓는 듯하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미진한 정담을 말하면서 간다. 혹 한데 모여서기도 하고, 혹 두 사람씩 한떼가 되어 십여 보를 떨어지기도 하고, 혹 한 사람이 앞서 가다가 길가에 풀잎을 뜯으면서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흔히 모친과 병욱이가 한떼가 되고, 병국의 부인과 영채가 한떼가 되고, 부친과 병국은 대개 말없이 따로 떨어져서 간다. 짐 진 총각은 이따금 작심대로 지게를 버티고 서서 뒤에 오는 일행을 기다리더니 얼른 정거장에 가서 지게를 벗어 놓고 쉬고 싶은 생각이 나서 먼저 달아난다. 사람 아니 탄 마차와 인력거가 떨거덕떨거덕 소리를 내며 마주 오기도 하고 앞서 지나가기도 한다. 일행의 얼굴을 더위로 뻘겋게 데이고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떨어진다. 남자들은 부채를 부치고 여자들은 수건으로 땀을 씻는다.
언제까지 가도 끝이 없을 듯하던 이야기도 거의 다 없어지고 이제는 말없이 탄탄한 신작로로 태양을 마주보며 걸어나간다. 길가 원두막에서 수심가, 난봉가가 졸린 듯이 울려 나오더니,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고요하게 되며, 원두막 문으로 중대가리며, 감투 쓴 대가리, 수건 쓴 대가리, 크다란 총각의 대가리가 쑥쑥 나오며 무어라고 쑤군쑤군하다가 일행이 수십 보를 지나가자, 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일행은 그저 말없이 정거장을 향하고 간다.
영채는 좌우에 새로 이삭 나온 조밭을 보며 지나간 일 삭간의 일을 생각한다. 몸은 비록 가만히 있었으나 정신상으로는 실로 큰 변동이 있었다. 전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하리만한 큰 변동이 있었다. 죽으러 가노라고 가던 길에 우연히 병욱을 만난 일과, 병욱의 집에서 칠팔 년 만에 비로소 가정의 즐거움을 다시 본 것과, 자기가 지금껏 괴로워하던 옥 같은 세상 밖에도 넓고 자유롭고 즐거운 세상이 있음을 깨달은 것과, 또 병국에게 대하여 불타는 듯하는 사랑을 느낀 것을 두루 생각하다가 마침내 자기가 이제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러 감을 생각하매, 일신의 운명의 뜻밖에 변하여 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 일행은 정거장에 다다라 대합실의 걸상 하나를 점령하고 남은 시간 이십 분에 다 하지 못한 말을 한다.
103
병욱과 영채는 차에 올라서 차창으로 전송하는 일행을 내다본다. 병국도 사리원까지 갈 일이 있다 하여 같이 올랐으나, 자기는 오늘 저녁에 돌아올 길인 고로 걸상에 앉은 대로 바깥을 내다보지도 아니한다. 모친은 차창에 붙어서,
"얘, 조심해 가거라."를 두 번이나 하고, "얘, 한 달에 두 번씩은 꼭꼭 편지를 해라."를 서너 번이나 하였다. 병국의 부인은 바로 시어머니의 곁에 붙어 서서 병국(병욱)과 영채를 번갈아 본다. 더위에 붉게 된 그 조고마하고 말끔한 얼굴이 아름답게 보인다. 떨렁떨렁 하는 종소리가 나고 차장의 호각 소리가 날 적에 병국의 부인은 차창을 짚은 영채의 손을 꼭 누르며,
"가거든 편지 주셔요."
한다. 그 눈에는 눈물이 있다. 그것을 마주보는 영채의 눈에도 눈물이 있다. 헌병들이 흘끗흘끗 이 광경을 보고 벤또 파는 아이의 외치는 소리가 없어지자, 고동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모친은 또 한번,
"부디 조심해 가거라"를 부르며 눈을 한번 끔벅 한다. 병욱과 영채는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손수건을 두른다. 모친도 수건을 두르건마는 병국의 부인은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한다. 부친도 한번 팔을 들어 두르더니 돌아서 나간다. 덜컥 소리가 나고, 차가 휘돌더니 정거장에 선 사람 그림자가 아주 아니 보이게 된다. 두 사람은 그래도 두어 번 더 수건을 내어두르고는 도로 제자리에 앉는다. 앉아서 한참은 멍멍하니 피차에 말이 없다. 차의 속력이 점점 빨라지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병국은 맞은편 줄 걸상에 모으로 앉아서 두 사람을 건너다보며 부채질을 한다. 차 속에는 선교사인 듯한 늙은 서양 사람 하나와 금줄 두 줄 두른 뚱뚱한 관리 하나와, 그 밖에 일복 입은 사람 이삼 인뿐이다. 그네들은 모두 다 흰옷 입은 이등객을 이상히 여기는 듯이 시선을 이리로 돌린다. 병국은 건너편에 앉은 누이에게 말이 들리게 하기 위하여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나는 네 덕분에 (이등을) 이등을 처음 탄다."
하고 웃는다.
"그렇게 이등이 부러우시거든 더러 타십시오그려."
하고 병욱도 웃는다.
"우리와 같은 아무것도 아니 하는 사람들이 삼등도 아까운데 이등을 어떻게 타니? 죄송스러워서……."
"그러면 왜 이등표를 사주셨어요. 저 짐차에나 처실어 주시지."
하고 병욱은 성을 내는 듯이 시치미뗀다. 영채는 우스워서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 남매간에 어린애 싸움같이 농담을 하다가 병국이가,
"영채 씨도 명년에 귀국하시겠소."
"녜, 제야 알겠습니까."
"왜, 나와 같이 오지. 그럼 나 혼자 올까. 형제가 같이 다녀야지."
하고 병욱이가 영채를 보다가 병국을 본다. 영채는,
"그럼 언니께서 데려다 주신다면 오지요."
하고 웃는다. 병욱은 어리광하는 듯이 병국을 보고 몸을 흔들며,
"오빠, 명년에 우리 둘이 같이 와요."
하고 묻는 말인지 대답하는 말인지 분명치 아니한 말을 한다. 병국은,
"그러면 얘하고 같이 오시지요. 댁이 없으시다니 내 집을 집으로 알으시고……."
"녜, 감사합니다."
하고 영채가 고개를 숙인다.
이러한 말을 하는 동안에 차가 벌써 걸음을 멈추며,
"사리잉, 사리잉!"
하는 역부의 소리가 들린다. 병국은 모자를 벗고,
"그러면 잘들 가거라."
하고 뛰어서 차를 내린다. 내려서 두 사람이 앉은 창 밑에 와서 선다. 두 사람도 내다본다. 몇 사람이 뛰어내리고 뛰어오르기가 바쁘게 또 차장의 호각 소리가 난다. 차가 움직인다. 병국은 모자를 높이 든다. 두 사람도 손을 내어두르며 고개를 숙인다. 병국은 차차 작아 가는 두 팔과 머리를 보고, 두 사람은 차차 작아 가는 모자를 두르는 병국을 보았다.
영채는 왜 그런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여진다. 그래서 정신이 황홀하여지는 듯하였다. 병욱은 슬적슬적 영채의 낯빛을 살피더니 영채를 웃기려고,
"얘, 너 그때에 눈에 석탄재가 들어가서 울던 생각 나니?"
하고 자기가 먼저 웃는다. 영채도 웃는다. 병욱은,
"석탄 가루 들어간 것이 그렇게 아프더냐?"
"누가 그것이 아파서 울었나. 자연히 화가 나서 울었지."
하고 그때 생각을 하여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웃는다.
"아무려나 그때에 네가 우는 얼굴이 어떻게 예뻐 보이든지…… 내가 남자면 당장에 홀리겠더라."
"에그, 그런 소리만 하시지!" 하고 영채가 손으로 병욱의 무릎을 때린다.
"얘, 잠깐 서울 들러 가자."
"에그, 싫여요. 누가 보면 어쩌나."
"서울서는 지금 네가 죽은 줄 알겠구나. 그 이형식 씬가 한 이도."
"아마 그럴 테지요. 실상 죽었으니깐."
"누가? 네가? 왜?"
"그때, 나는 벌써 죽지 않았어요? 언니께서 얼굴 씻어 주실 때에."
"그러고 부활을 했구나."
"암, 부활이지. 참, 언니 아니더면 꼭 죽었어요. 벌써 다 썩어졌겠네."
"썩도록 깃허(붙어) 있나."
"그러면 어쩌고?"
"고기가 다 뜯어먹고 말지."
"그렇게 큰 것을 고기가 다 어떻게 먹어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병욱은,
"얘, 네가 처음 나를 볼 때에 어떻게 생각했니?"
"웬 일본 여자가 이렇게 조선말을 잘하고 친절하게 하는고, 했지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퍽 활발한 여자다 했지요."
"그러고 너 그때에 먹은 것이 그게 무엇인지 아니?"
"나 몰라. 어떻게 먹는 것인지 몰라서 언니 잡수시는 것을 가만히 보았지요."
"내 아예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은 서양 음식인데 샌드위치라는 것이어…… 꽤 맛나지?"
"응" 하고 고개를 까딱 하며 "샌드위치" 하고 발음이 분명하게 외운다.
104
차가 남대문에 닿았다. 아직 다 어둡지는 아니하였으나 사방에 반작반작 전기등이 켜졌다. 전차 소리, 인력거 소리, 이 모든 소리를 합한 '도회의 소리'와 넓은 플랫폼에 울리는 나막신 소리가 합하여 지금까지 고요한 자연 속에 있던 사람의 귀에는 퍽 소요하게 들린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에 그 나라가 잘된다. 수레바퀴 소리, 증기와 전기기관 소리, (쇠마차 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 실로 현대의 문명은 소리의 문명이라. 서울도 아직 소리가 부족하다. 종로나 남대문통에 서서 서로 말소리가 아니 들리리만큼 문명의 소리가 요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쌍하다. 서울 장안에 사는 삼십여 만 흰옷 입은 사람들은 이 소리의 뜻을 모른다. 또 이 소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네는 이 소리를 들을 줄을 알고, 듣고 기뻐할 줄을 알고, 마침내 제 손으로 이 소리를 내도록 되어야 한다. 저 플랫폼에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이 분주한 뜻을 아는지, 왜 저 전등이 저렇게 많이 켜지며, 왜 저 전보 기계와 전화 기계가 저렇게 불분주야하고 때각거리며, 왜 저 흉물스러운 기차와 전차가 주야로 달아나는지…… 이 뜻을 아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는가.
이렇게 북적북적하는 속에 영채는 행여나 누가 자기의 얼굴을 볼까 하여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병욱은 혹 자기의 동창 친구나 만날까 하고 플랫폼에 내려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도로 차실로 들어오려 할 적에 누가 어깨를 치며,
"병욱 언니 아니야요?"
한다.
병욱은 놀라 돌아서며 자기보다 이태를 떨어졌던 동창생을 보았다.
"에그, 얼마 만이어!"
"그런데 어디로 가오?"
"지금 동경으로 가는 길인데……."
"왜, 어느새에…… 여보, 그런데 좀 만나 보고나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정하오."
하고 썩 돌아서더니,
"아무려나 내립시오. 우리집으로 갑시다."
한다.
"아니오. 동행이 있어서…… 그런데 누구 작별 나왔소?"
"응, 아니, 언니 모르셔요?"
"무엇을?"
"에그, 저런! 저 선형이 알지요. 선형이가 오늘 미국 떠난다오."
"선형이가 미국?" 하고 놀란다. 그 여학생은 저편 이등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선 것을 가리키며,
"저기 탔는데…… 이번에 혼인해 가지고 양주가 미국 공부하러 간다오. 잘들 한다. 다 미국을 가느니 일본을 가느니 하는데 나 혼자 이렇게 썩는구먼!"
병욱은 여학생을 따라 선형이가 탔다는 차 앞에까지 갔으나 너무 사람이 많아서 곁에 갈 수가 없다. 선형은 하얀 양복에 맨머리로 창 밑에 서서 전송 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대답하고, 그 곁 창에는 어떤 양복 입은 젊은 신사가 그 역시 연해 고개를 숙여 가며 무슨 인사를 한다. 전송인은 대개 두 패로 갈려서 한편에는 여자만 모이고, 한편에는 남자만 모여섰다. 그 남자들은 모두 다 서울 장안의 문명하였다는 계급이다. 병욱은 한참이나 그것을 보고 섰다가 중로에서 선형을 찾아볼 양으로 그 차실 바로 뒤에 달린 자기의 차실에 올라왔다. 영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아까 탔던 사람은 거의 다 내리고 새로운 승객이 거의 만원이라 하리만큼 많이 올랐다. 어떤 사람은 웃옷을 벗어 걸고, 어떤 사람은 창에 붙어서 작별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벌써 신문을 들고 앉았다. 그러나 흰옷 입은 사람은 병욱과 영채 둘뿐이다. 병욱은 자리에 앉아서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영채더러,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앉었니?"
"어째 남대문이라는 소리에 마음이 이상하게 혼란하여집니다그려. 어서 차가 떠났으면 좋겠다."
할 때에 벌써 종 흔드는 소리가 나고,
"사요나라, 고키겐요우"
하는 소리가 소낙비같이 들리더니 차가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어디서,
"만세,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인다. 또 한번,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의(사람들이) 두 사람의 창 밖으로 얼른한다. 그것은 모시 두루마기에 파나마 쓴 패였다. 병욱은 아까 선형의 곁에 있던 사람이 형식인 것과, 형식이가 선형의 지아빈 줄도 짐작하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영채는 형식이란 소리를 듣고 문득 가슴이 덜렁 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아무쪼록 형식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방금 같은 기차에 형식이가 탄 것을 생각하매 알 수 없는 눈물이 자연히 떨어진다. 병욱은 영채의 손을 쥐며,
"얘, 울지 말아라. 울기는 왜 우느냐."
"모르겠어요."
하고 눈물을 씻으며 지어서 웃는다.
용산을 지난 뒤에 병욱은 선형을 찾아갔다. 선형은 병욱의 손을 잡으며,
"이게 웬일이오?"
"동경으로 가는 길이외다. 그런데 미국으로 가신다고요."
"녜, 편지를 하여 드릴 것인데 동경 계신지, 어디 계신지 계신 데를 알아야지요."
"나는 아까 남대문에서 우연히 경애 씨를 만나서 그래서 이 차에 타시는 줄을 알았지."
하고 마주앉은 신사에게 인사를 한다. 신사가 답례하면서 앉기를 권한다. 십여 년 영채로 하여금 고절을 지키게 한 형식이란 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기회 있는 대로 형식을 관찰한다.
105
영채는 혼자 앉아서 생각한다. 첫째, 형식이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건대, 어디 멀리로 가는 것인 듯하다. 나는 그가 이 차에 탄 줄을 알건마는 그는 내가 여기 있는 줄을 모르렷다. 그러고 또 한번 칠팔 년 지나온 생각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한번 쑥 나온다. 팔자 좋은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적되, 슬픈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는 조고마한 기회만 있으면 그 슬픈 과거가 회상이 되는 것이라. 영채는 지금까지에 몇십 번 몇백 번이나 이 슬픈 과거를 회상하였으리요. 하도 여러 번 회상을 하므로 이제는 그 과거가 마치 일편의 소설과 같이 순서와 맥락(脈絡)이 정연하게 되어 어느 끝이나 한끝을 당기면 전체가 실 풀리는 듯이 술술 풀려 나오게 되었다. 칠팔 년간을 하루같이 일념에 형식을 그리고 사모하다가 마침내 형식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려 한 것을 생각하매 형식의 생각이 더욱 새로워지고 정다워진다. 영채는 속으로 '한번 더 보고 싶다' 하였다. 그렇게 생각할수록에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진다. 죽은 줄 알았던 나를 보면, 형식도 응당 반가워하렷다. 만나서 속에 품었던 말이나 실컷 하여도 속이 시원하여질 것 같다. 내가 왜 그때에 형식을 찾아가서 '나는 지금토록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소' 하고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하였던고. '나를 사랑해 줄 터이요, 아니 할 테요' 하고 저편의 뜻을 아니 물어 보았던고. 이제 만나면 서슴지 않고 물어 보리라.
영채는 당장이라도 형식의 탄 차실에 뛰어 건너가고 싶다. 영채의 가슴에는 정히 불길이 일어난다. 그러나 '언니께 의논해 보고' 하고 꿀꺽 참는다.
이때에 차가 수원역에 다다랐다. 바깥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병욱이 선형을 데리고 돌아와서 자기의 곁에 앉히며,
"영채야, 이이는 김선형 씨라는 인데 내 동창이다. 지금 미국 가시는 길이구."
하고 그 다음에는 선형을 향하여,
"이애는 박영채인데 내 동생이오."
하고 소개를 한다. 소개를 받은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숙인다. 선형은 박영채가 어떻게 동생인가 한다. 병욱은 영채와 선형을 번갈아 보며 두 사람의 얼굴과 운명을 비교해 본다. 영채도 선형이가 형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모르고, 선형도 무론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칠팔 년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버리려 한 사람인 줄은 알 이치가 없다. 선형은 다만 형식이가 일찍 계월향이라는 계집과 추한 관계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니, 이 박영채가 그 계월향인 줄은 무론 알 리가 없다. 세 처녀 사이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서로 잘 공부를 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장차 힘을 합하여 조선 여자계를 계발할 것과, 공부를 잘하려면 미국을 가거나 일본에 유학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또 영어와 독일어를 잘 배워야 할 것과, 그 다음에는 병욱과 영채는 음악을 배울 터인데 선형은 아직 확실한 작정은 없으나 사범학교에 입학하려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로 각각 크게 성공하기를 빌었다.
차실 내의 모든 사람의 눈은 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세 조선 여자에게로 모였다.
선형이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며(돌아오매), 형식은 선형의 자리에 편 담요를 바로잡아 주며,
"그래 그 동행이 누굽데까?"
"박영채라는 인데 퍽 얌전한 사람이야요. 병욱 씨가 자기 동생이라고 그럽데다."
형식은 숨이 막히고 몸이 떨리도록 놀랐다. 그래서 눈이 둥그래지며,
"에! (누,) 누구요?"
하고 말이 다 굳어진다. 선형은 웬 셈을 모르고 이상한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보면서,
"박영채라고 그래요."
"박영채, 박영채!"
하고 한참은 말을 못 한다. 그 뒤에 앉았던 우선도 벌떡 일어나며,
"응, 누구? 박영채?"
세 사람은 한참이나 벙어리와 같이 되었다. 우선이가 형식의 곁에 와 앉으며,
"이게 무슨 일이어! 그러면 살아 있네그려! 동성동명이란 말인가."
형식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더니,
"아무려나, 이런 기쁜 일이 없네."
하기는 하면서도 속에는 여러 가지로 고통이 일어난다. 영채를 따라 평양까지 갔다가 죽고 산 것도 알아보지 아니하고 뛰어와서, 그 이튿날 새로 약혼을 하고, 그 뒤로는 영채는 잊어버리고 지내 온 자기는 마치 큰 죄를 범한 것 같다. 형식은 과연 무정하였다. 형식은 마땅히 그때 우선에게서 꾼 돈 오 원을 가지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야 할 것이다. 가서 시체를 찾아 힘 및는 데까지는 후하게 장례를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새로 혼인을 하더라도 인정상 다만 일년이라도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칠팔 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자기를 위하여 몸을 버리고 목숨을 버린 영채를 위하여 마땅히 아프게 울어서 조상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였는가.
영채가 세상에 없으매 잊어버리려 하던 자기의 죄악은 영채가 살아 있단 말을 들으매 칼날같이 날카롭게 형식의 가슴을 쑤신다. 형식은 이빨을 악물고 흑흑 한다. 곁에 선형이가 앉은 것도 잊어버린 듯하다.
우선은 벌떡 일어나더니 저편으로 간다. 영채의 진부(眞否)를 탐험코자 함이라.
106
우선이가 일어선 뒤에 선형은,
"웬일입니까. 박영채가 어떤 사람이야요?"
한다. 그러나 대답이 없으므로,
"왜 박영채 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나요."
그래도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선형은 형식의 숙인 머리를 보고 앉았더니 혼자말 모양으로,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잠잠한다.
얼마 있다가 형식은 고개를 들더니,
"내가 잘못하였어요. 내가 죄인이외다. 큰 죄인이외다."
하다가 말이 막힌다. 선형은 더욱 의아하여 눈띄가 자주 돌아간다. 형식은 말을 이어,
"벌써 말씀을 드려야 할 것인데 인해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없다는 것보다 내 마음이 약해서 지금껏 잠자코 있었어요. 박영채는 내 은인의 딸이외다. 어려서 그 부친과 오라비, 두 사람은 애매한 죄로 옥중에서 죽고, 영채는 그 부친을 구할 양으로 남에게 속아서 몸을 팔아 기생이 (되었다가……" 할 적에 선형은, "에! 기생이) 되어요?"
하고 놀란다. 계월향이란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녜, 기생이 되었어요. 그로부터 칠 년간."
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 주저하다가,
"나를 위하여서 정절을 지켜 왔어요. 무론 나도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그도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몰랐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나 있는 데를 알고 찾아왔습데다."
하고는 그 후에는 어떻게 말을 하여야 좋을는지 생각이 아니 난다. 선형은 아까 본 영채를 생각하고, 그러면 그가 기생이 되어 칠 년간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 사람인가 한다. 자기 생각에 계월향이라 하면 아주 요염(妖艶)하고 음탕한 계집으로 알았더니 이제 본즉 영채는 자기와 다름없는 얌전한 처녀로다. 그러면 어찌하여 형식이가 영채를 버렸는가 하여,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식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자살을 한다고 유서를 써놓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요. 그래서 나도 곧 따라 내려갔지요. 했더니 부지거처지요. 그래서 자기 말과 같이 대동강에 빠져 죽은 줄만 알았구려. 했더니, 그가 지금 살아서 우리와 같은 차에 있소그려."
하고 슬픔을 표하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
"그러면 접때 평양 가셨던 일이 그 일이야요?"
하고 선형은 정면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은 그 눈이 자기를 위협하는 듯하여 눈을 피하면서,
"녜."
하였다. 그러고 보면 영채가 죽었다 하는 날은 바로 형식과 자기가 혼인을 맺던 날이라.
선형은 지금까지 가슴속에 오던 의심― 즉 형식은 계월향이라는 기생에게 미쳤더라는 의심은 풀렸으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새로운 괴로움이 가슴을 내려누름을 깨달았다. 자기 몸도 무슨 죄에 빠진 것 같고 자기의 앞에는 알 수 없는 어려운 일과 괴로운 일이 가로막힌 것 같다.
이때에 우선이가 엄숙한 얼굴을 가지고 돌아보며 일본말로,
"다시카다요(확실해)."
하고 형식의 곁에 앉으며,
"참 희한한 일일세."
"그래, 가서 말해 보았나?"
"아니, 문에서 앉은 것이 보이데. 아까 여기 왔던 이하고 무슨 말을 하는데……."
하다가 선형이 곁에 앉은 것을 보고 말 아니 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는 듯이 말을 뚝 그쳤다가,
"아무려나 잘되었네. 지금 그 여학생과 같이 동경으로 가는 모양이니까, 아마 공부하러 가는 게지."
형식은 걸상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눈을 감는다.
영채는 선형의 돌아간 뒤에,
"언니, 웬일인지 나는 가슴이 몹시 설렙니다."
"왜, 이형식 씨란 말을 듣고?"
"응, 여태껏 잊고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잊은 것이 아니야요. 가슴속에 깊이깊이 숨어 있던 모양이야요. 그러다가 이형식 군 만세라는 소리에 갑자기 터져나온 것 같습니다. 아이구, 마음이 진정치 아니해서 못 견디겠소."
"아니 그렇겠니. 어쨌든 칠팔 년 동안이나 밤낮 생각하던 사람을 그렇게 어떻게 쉽게 잊겠니? 이제 얼마 지나면 잊을 테지마는……."
"잊어야 할까요?"
"그럼 어찌하고?"
"안 잊으면 아니 될까요?"
병욱은 물끄러미 영채를 보더니 영채의 곁에 가 앉아서 한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형식 씨가 벌써 혼인을 하였다. 지금 동부인하고 미국 가는 길이란다."
"에? 혼인?"
하고 영채는 병욱의 팔을 잡는다. 병욱은 위로하는 소리로,
"아까 여기 왔던 선형이라는 이가 그의 부인이란다."
"그러면 그때에 벌써 약혼을 하였던가?"
하고 지나간 일에 실망을 한다. 자기의 지나간 생활이 더욱 슬퍼지고 원통하여진다. 자기는 세상에 속아서 사나마나 한 생활을 해온 것 같고 지금껏 전력을 다하여 오던 것이 아무 뜻이 없는 것 같아서 실망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더구나 자기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형식을 생각하여 왔거늘 형식은 자기를 초개같이밖에 아니 여기는 것 같다.
"언니, 왜 그런지 원통한 생각이 나요."
"그러나 장래가 있지 않냐?"
하고 힘껏 영채를 안아 준다.
107
형식은 즉시 영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전에 보았던 영채의 얼굴은 다 잊어버린 듯하여 꼭 한번 새로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꼭 죽은 줄 알았던 영채의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차마 영채를 보러 갈 용기가 아니 난다. 형식은 선형의 얼굴을 보았다. 선형은 무슨 실망한 일이나 있는 듯이 반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다. 그러다가 이따금 형식을 슬쩍 보고는 불쾌한 듯이 도로 눈을 감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기도 한다. 선형의 눈과 형식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형식의 몸에는 후끈후끈하는 기운이 돈다.
같은 차실에 있는 승객들은 대개 잠이 들었다. 형식도 뒤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고 아무 생각도 아니 하리라 하는 듯이 한번 몸을 흔들고 두 손을 마주잡아 배 위에 놓았다. 그러나 형식의 마음은 형식의 뜻을 좇지 아니하고 폭풍에 물결치는 바다와 같았다.
영채는 꼭 죽었어야 할 것이다. 살아 있더라도 자기가 몰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선형과 약혼이 되기 전에 만났어야 할 것이다. 약혼이 성립되고 미국을 향하고 떠나는 길에 만나게 한 것은 진실로 조물의 장난이다. 형식은 결코 영채를 버리려 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오랫동안 영채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겸하여 다시 영채를 만날 때에는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유연히 솟아나서 속으로 영채와 혼인할 일과 혼인한 후에 즐거운 생활을 할 것과 아름다운 자녀를 낳아 이상적으로 기를 것까지 생각하였고, 또 영채가 기생인 줄을 안 뒤에는 돈 천 원을 얻지 못하여 종일 번민한 일도 있었다. 만일 영채가 평양에만 가지 아니하였던들, 죽으러 가노라는 유언만 없었던들 자기는 마땅히 영채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은사(恩師)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고 칠팔 년간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온 영채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였을 것이다.
형식은 또 영채와 선형을 비교하여 보았다. 선형은 형식이가 일생의 처음 접한 젊은 여자요, 또 선형의 자태는 누가 보아도 황홀할 만하므로 형식에게 극히 깊고 강한 인상(印象)을 주었다. 그래서 처음 젊은 여자를 접하여 보는 젊은 남자가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형식은 선형을 세상에 다시 없는 여자로 여겼다. 다만 그 외모가 아름다울 뿐더러 그 정신까지도 외모와 같이 아름다우리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대하여 본 첫날에 선형에게 여자에 관한 모든 아름다운 덕을 붙였다. 선형은 형식의 눈에는 더할 수 없이 완전하고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렇게 강한 인상을 얻은 그날 저녁에 다시 영채를 보았다. 영채의 외모도 물론 아름다웠다. 공평한 눈으로 보건대 영채의 얼굴이 차라리 선형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형을 천하 제일로 확신한 형식은 영채를 제이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형은 부귀한 집 딸로서 완전한 교육을 받은 자요, 영채는 그 동안 어떻게 굴러다녔는지 모르는 계집이라. 이 모든 것이 합하여 형식에게는, 영채는 암만해도 선형과 평등으로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다만 선형은 자기의 힘에 미치지 못할 달 속에 계수나무 가지요, 영채는 자기가 꺾으려면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매화 가지였다. 그러므로 형식이가 제일로 생각한 선형을 버리고 제이로 생각하는 영채를 취하려 하였던 것이라. 그러다가 영채가 대동강에 빠지고, 게다가 김장로가 혼인을 청하매 형식은 별로 주저함도 없이 약혼을 허하였고 또 슬퍼함도 없이 영채를 잊어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형식은 선형에게 대하여서나 영채에 대하여서나 아직 참된 사랑을 가져 보지 못하였다. 대개 형식의 사랑은 아직도 외모의 사랑이었다.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선형의 성격(性格)은 한 땀도 몰랐다. 선형이가 냉정한 이지적 인물(理智的 人物)인지 또는 열렬한 정적 인물인지, 그의 성벽이 어떠하며 기호(嗜好)가 어떠한지, 그의 장처(長處)가 무엇이며 단처(短處)가 무엇인지, 또는 그와 자기와 어떤 점에서 서로 일치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모순(矛盾)하는지, 따라서 그의 성격과 재능이 장차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목적(盲目的)으로 사랑한 것이라. 그의 사랑은 아직 진화(進化)를 지나지 못한 원시적(原始的) 사랑이었다. 마치 어린애끼리 서로 정이 들어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요, 또는 아직 문명하지 못한 민족들이 다만 고운 얼굴만 보고 곧 사랑이 생기는 것과 같은 사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다름이 있다 하면 문명치 못한 민족의 사랑은 곧 육욕(肉慾)을 의미하되 형식의 사랑에는 정신적 분자(精神的 分子)가 많았을 뿐이다. 그러니 형식은 다만 정신적 사랑이라는 이름만 알고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었다. 진정한 사랑은 피차에 정신적으로 서로 이해(理解)하는 데서 나오는 줄을 몰랐다. 형식의 사랑은 실로 낡은 시대, 자각 없는 시대에서 새 시대, 자각 있는 대로 옮아가려는 과도기(過渡期)의 청년― 조선 청년―이 흔히 가지는 사랑이다. 자기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인 줄을 깨닫는다 하면 형식의 전도에는 대변동이 일어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는 형식에게는 지나간 한 달 동안에 행하여 온 일이 현미경으로 보는 것같이 분명히 떠나온다.
108
김장로 부부는 자기와 영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암만해도 신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번 자기가 영채와의 관계를 이야기한 끝에 김장로가 웃으며,
"남자가 한두 번 그러기도 예사지."
하였다. 형식은 더 발명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자기의 인격을 신용하여 주지 않는 것을 얼마큼 불쾌하게 여겼다. 그 후부터 형식은 장로 부처를 대하면 한껏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장로 부처는 자기가 선형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자기를 지극히 품행이 방정하고 장래성이 많은 줄로 알았다가 기생과 가까이하며 기생을 따라 평양까지 갔단 말을 들으매 형식은 갑자기 신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 사건 하나로 자기의 가치를 정하려 하는 것이 불쾌하였다. 될 수만 있으면 형식과의 약혼을 파하겠으나 한번 약속한 것을 체면상 깨트릴 수가 없다. 만일 형식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선형의 팔자로다…… 형식의 보기에 (장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였다.
더구나 미국으로서 돌아온 하이칼라 청년 하나가 선형에게 마음을 두어 백방으로 운동한 것과, 교회에 어떤 유력한 사람이 사이에 나서서, 일변 형식을 헐어 그 약혼을 깨트리게 하고, 일변 그 청년의 재산 있는 것과, 영어 잘하는 것과, 미국 유학한 것을 칭찬하여 선형과의 혼인을 이루게 하려고 운동하던 줄을 안다. 그때에 장로 부처가 열에 여섯이나 그편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과,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선형의 태도가 더욱 냉담하여지고 이따금 근심하는 빛까지도 있던 것을 안다. 그 중에도 장로의 부인은 웬일인지 형식에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이 나서 가장 미국서 온 청년과 혼인하기를 주창한 것과, 그러나 장로의 양반인 것과 장로인 체면이 마침내 이 일을 반대한 것을 안다.
거의 십여 일 동안이나 형식은 김장로의 집에서 미움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을 안다. 그때에 형식도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연해 삼사 일간 일절 장로의 집에 가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집에 꽉 들어박혀서 분노함과 부끄러움으로 혼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형식이가,
"오늘은 내가 먼저 약혼을 거절하고 말리다."
하고 옷을 입고 나가려 할 적에 선형이가 처음 찾아와서 은근하게,
"어디가 편치 아니하셔요?"
하고 그 뒤에는 순애가 과일 광주리를 들고 들어왔다. 아마 병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위문을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선형은,
"어저께 여행권이 나왔어요."
하고 기뻐하는 빛조차 보였다. 형식은 그만 모든 분노가 다 풀리고,
"아니올시다. 몸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때에 선형과 순애는 물끄러미 형식을 보았다. 선형도 무론 자기 집에 일어난 문제를 안다. 부모가 형식에게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안다. 자기도 기실 형식에게 대하여 좋은 감정을 아니 가졌다. 그러나 부모간에 형식을 미워하는 빛이 보이고, 형식도 그 눈치를 아는지 삼사 일 동안이나 꿈적하지 않는 것을 보매, 형식에게 대하여 일종 동정이 생기고 정다운 듯한 생각이 났다. 그래서 순애를 데리고 형식을 찾아온 것이라. 그때에는 선형의 마음에는 형식이가 극히 사랑스러웠다. 형식도 선형의 눈에서 그러한 빛을 보고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뛰어들어 건져 주겠다는 생각이 나는 것과 같은 동정이라. 잠시 효력이 있으되 오래는 가지 못하는 동정이라. 부부간의 사랑은 이래서는 아니 된다. 저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산다. 저 사람이 행복되어야 나도 행복된다. 저 사람과 나와는 한몸이다…… 이러한 사랑이라야 한다. 선형의 형식에게 대한 사랑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대한 동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형식은 이렇게 분명하게는 알지 못하여도 어떤 정도까지는 선형의 마음속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선형은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의 전일생은 오직 선형의 위에 달린 듯하였다. 선형이가 설혹 자기더러 '보기 싫다, 가거라' 하더라도, 또는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로 차더라도 불가불 선형의 치맛자락에 매어달려야 하겠다. 김장로의 집에 가기가 불쾌하고 선형을 대하기가 불쾌하다 하더라도 그 불쾌한 것이 오히려 아주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나았다. 전신이 불구덩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이렇게 형식은 그 동안 괴로운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떠나기 한 이삼 일 전부터 장로 부처의 형식에게 대한 태도는 극히 친절하게 변하였고, 선형도 더욱 은근하고 가깝게 굴었다. 형식은 겉정(인심)의 반복의 믿을 수 없음을 의심하면서도 하늘에 오를 듯이 기뻤다. 더구나 떠나기 전날 장로 부처가 자기와 선형을 불러 놓고 자기네 두 사람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올린 뒤에 연해 '너희 둘이'라 하여 가며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할 때에는 형식은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는 기쁨을 깨달았다. '너희 둘이'라는 말이 자기와 사랑하는 선형과를 한몸을 만드는 듯하였다. 그때에는 선형도 형식을 슬쩍 보고 쌍끗 웃었다. 네 사람은 이 순간이 영원히 있기를 기도하였다.
109
형식은 이제부터는 자기 앞에는 오직 행복이 웃는 줄로만 생각하였다. 아까 남대문에서 떠날 때에도 여러 친구가 작별을 아껴 할 때에 자기는 오직 기쁘기만 하였다. 희경 일파가 여러 송별객 뒤에 서서 물끄러미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볼 때에는 미상불 가슴이 부듯함을 깨달았으나, 그래도 자기의 곁에 선 선형을 볼 때에 모든 슬픔이 다 스러졌다. 이제부터 자기는 선형으로 더불어, 이만여 리나 되는 지구 저편 쪽에 가서 사오 년 동안 즐겁게 공부를 마치고 그때야말로 만인 환호리에 선형과 팔을 겯고 남대문으로 돌아오리라. 그때에는 지금 여기 섰는 여러 사람들이 오늘보다 감정으로― 더 축하하고 더 공경하는 감정으로 자기를 맞으리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 비로소 서울이 그립고 남대문이 정답게 생각되었다. 남대문은 오직 행복된 자기를 보내고 맞아 주기 위하여서만 존재하는 듯하였다. 인해 차장이(차장의) 호각이 울고 만세 소리가 들릴 때의 형식의 감정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
선형은 여자라, 비록 신식 여자로 아무리 공명심과 허영심이 많아서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 동무들이 차차 차창에서 멀어지는 것을 볼 때에는 가슴에 고였던 눈물이 일시에 폭 쏟아져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울며 걸상에 쓰러졌다. 형식은 처음에는 가만가만히 선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 일어나시오. 눈물 씻고."
하다가, 이제는 이렇게만 할 처지가 아니라 하여 한참 주저하다가 한 팔을 선형의 가슴 밑으로 넣어 안아 일으켰다. 형식의 팔에 닿는 선형의 살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선형도 형식의 하는 대로 일어나면서 잠깐 형식의 손을 쥐었다. 그러고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아이구, 이게 무슨 꼴이야요. 내지(외국) 사람들이 웃었겠습니다."
하고 웃는다. 그 눈물로 붉게 된 눈과 뺨이 더 곱게 보였다. 내지 사람들은 과연 웃었다.
우선은 형식의 뒷자리에 앉아서 빙그레 웃으며 자기 곁에서 일어나는 형식과 선형의 말을 들어 가며 신문을 보고 앉았더니 고개를 돌리며,
"여보게, 큰일났네그려."
한다. 형식은 선형만 바라보고 우선은 잊어버리고 앉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응? 왜?"
"하하하, 그렇게 놀랄 것은 없지마는…… 오늘 아침부터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일경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금강 낙동강은 십여 척의 증수가 되었다고."
"어디."
하고 우선의 들었던 신문을 받아 보더니,
"그러면 철로가 불통하지나 아니할까?"
선형도 눈이 둥그래진다. 우선은,
"글쎄, 비를 아끼구 아끼구 하더니……."
하면(서)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휘휘 둘러본다. 황혼이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되, 하늘은 온통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선득선득한 바람에 이따금 굵은 빗방울이 섞여 떨어진다. 다른 승객들은 신문을 보고는 철롯길이 상할 것을 근심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이나 선형에게 별로 중대한 일은 아니었다. 철로길이 상하면 여관에 들어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때에 병욱이가 선형을 찾아오고, (그 다음에 선형이가 병욱을 따라가고,) 그 다음에 선형이가 돌아오고 형식이가 선형에게 병욱의 동행이 어떠한 사람이던가를 묻고, 선형은 "박영채라는데 퍽 얌전한 사람이야요" 하는 대답을 하고, 마침내 우선이가 탐험을 갔다가 "다시카다요" 하는 보고를 한 것이라.
이렇게 지나간 일을 생각하다가 형식은 마침내 선형더러,
"가서 박영채 씨를 좀 보고 와야겠소."
"가 보시지요."
하는 선형의 대답은 형식에게는 무슨 특별한 뜻이 품긴 것같이 들렸다. 실로 선형은 지금까지 마음이 불쾌하였다. 그러면 그것이 월향이라는 기생인가. 죽었다더니 그것은 거짓말인가. 속에는 별별 흉악한 꾀를 품으면서도 겉으로는 저렇게 얌전을 빼는가. 사람 좋은 병욱이가 고것의 꾀에 넘지나 아니하였는가. 오늘 형식이가(형식과) 자기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이 차를 골라 탄 것이나 아닌가. 혹 형식이가 아직도 영채를 잊지 못하여 남모르게 영채에게 떠나는 날을 알려 미국 가기 전에 한번 더 만나 보려는 꾀는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매 선형은 일종 투기가 일어나서 픽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선형의 불쾌한 낯빛을 이윽히 보고 섰더니 변명하는 듯이,
"그래도 한차에 탄 줄을 알고야 어떻게 모르는 체하겠어요."
하고 다시 앉아서 선형의 대답을 기다린다. 선형은 말없이 앉았다가 웃으며,
"글쎄 가 보세요. 누가 가시지를 말랍니까."
끝에 말은 없어도 좋은 말이다.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앉았더니 벌떡 일어서며,
"그러면 갔다 오겠소."
하고 우선더러,
"가서 영채 씨 좀 보고 오겠네."
"응, 가 보게. 그러고 내가 문안하더라고 그러게."
하고 슬쩍 선형을 본다. 우선은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장차 어찌 될는고 하여 본다.
영채를 보고 와서는 우선의 속도 아주 편치는 못하였다. 더구나 영채가 죽으려던 뜻을 변한 동기가, 일본으로 가게 된 이유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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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는 한 미인으로 우선이가 영채를 자랑하였지마는,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지금토록 정절을 지켜 온 것과 청량리 사건으로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한 것을 보고는 영채를 색과 재와 덕이 겸비한 이상적 여자로 사랑하게 되었다. 만일 형식을 위한 우정(友情)이 아니었던들 어떤 정도까지나 열광(熱狂)하였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자기가 미치게 사랑하던 계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오는 박영채인 줄을 알 때에 우선은 미상불 창자를 끊는 듯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우정을 중히 여기고 협기 있기로 자임하는 우선은 힘껏 자기의 정을 누르고 형식과 영채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주기로 하였다. 만일 영채가 형식의 아내가 되면 자기는 친구의 부인으로 일생을 접할지니, 그것만 하여도 자기에게는 행복이리라 하였다. 그러다가 영채가 그 슬픈 유서를 써두고 평양으로 내려감을 볼 때에 우선은 깊은 슬픔과 실망을 깨달았다. 비록 아녀자에게 마음을 아니 움직이기로 이상을 삼는 우선도 그 후부터 지금까지 일시도 영채를 잊어 본 일이 없었다. 우선의 일기를 뒤져 보면 취침 전에 반드시 영채를 생각하는 단율 한 수씩을 지은 것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죽은 줄 알았던 영채가 살아서 같은 열차에 타고 있는 줄을 알고 보니, 우선의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자연한 일이라. 게다가 형식이가 아름다운 선형으로 더불어 아름다운 약속을 맺어 가지고 아름다운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보매, 더욱 부러운 생각이 난다. 우선은 벌써 아들을 형제가 넘어 낳고 삼십이 다된 자기의 아내가 행주치마를 두르고 어린애의 기저귀를 빠는 모양을 생각해 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밥 짓고, 옷 짓고, 아이 낳을 줄밖에 모른다. 자기는 그(와) 혼인한 지 십여 년간에 일찍 한자리에 앉아서 정답게 이야기를 하여 본 일도 없고 무론 자기의 뜻을 말하여 본 적도 없다. 잘 때에만 내외는 한자리에 있었다. 마치 아내는 자기를 위하여서만 있는 것 같았다. 홀아비가 육욕을 참지 못하여 갈봇집에 가는 셈치고 아내의 방에 들어갔다.
이러하는 동안에 아들도 나고 딸도 나고 지아비라 부르고 아내라 불렀다. 십 년 동안을 살아오면서도 서로 저편의 속을 모르고 알아보려고도 아니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실로 신기하다 하겠다. 그러나 우선은, 이는 면할 수 없는 천명을(천명으로) 알 뿐이요, 일찍이 관계를 벗어나려고도 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라는 것은 대체 이러한 것이니 집에다 먹여 두어 아이나 낳게 하고 이따금 가보아 주기나 하면 그만이라 한다. 그러고 아내에게서 못 얻는 재미는 기생에서 얻으면 그만이라 한다. 세상에 기생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이 실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식과 서로 대하면 이 문제로 흔히 다투었다. 형식은 엄정한 일부일부주의(一夫一婦主義)를 고집하고, 우선은 첩을 얻든지 기생 오입을 하는 것은 결코 남자의 잘하는(잘못하는) 일이 아니라 한다. 과연 우선으로 보면 첩이나 기생이 아니고는 오랜 일생을 지낼 것 같지 아니하다. 우선의 일부다처주의나 형식의 일부일부주의가 반면은 각각 이전 조선 도덕과 서양 예수교 도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반면은 확실히 각각 자기네의 경우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에게 만일 영채를 주고, 영채가 우선을 사랑해 준다 하면 우선은 그날부터라도 기생집에 가기를 그칠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선은 형식의 경우가 지극히 부럽고, 자기의 처지가 지극히 불쌍히 보였다. 자기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도 하고 싶고 외국에 유람도 하고 싶었다. 기생을 데리고 노는 것도 좋지마는 기생에게는 무엇인지 모르되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기생이 자기에게 친절한 모양을 보이고 또 그 기생이 비록 자기의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구석에 조곰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 부족한 점은 결코 작은 점이 아니요, 큰 점이었다. 그것은 아마 첫째, 정신상으로 서로 합하고 엉키는 맛이 없는 것과 또 사랑의 제일 힘있는 요소인 '내 것'이라는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돈을 많이 내어서 기생을 빼어 내면 '내 것'이 되기는 되지마는, 암만해도 정신적 융합은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외모의 사랑은 옅다. 그러므로 얼른 식는다. 정신적 사랑은 깊다. 그러므로 오래 간다. 그러나 외모만 사랑하는 사랑은 동물의 사랑이요, 정신만 사랑하는 사랑은 귀신의 사랑이다. 육체와 정신이 한데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 말은 아니 하지마는 속으로 밤낮 구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마치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 천에 한 사람, 십년 백년에 한 사람도 있을 듯 말 듯하다. 그래서 여자는 춘향을 부러워하고 남자는 이도령을 부러워한다. 자기네가 실지로 그러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매, 소설이나 연극이나 시에서 그것을 보고 좋아서 웃고 울고 한다. 조선서는 천지개벽 이래로 오직 춘향, 이도령(의 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저마다 춘향이 되려 하고, 이도령이) 되려 하건마는 다 그 곁에도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의 흉악한 혼인제도는 수백 년래 사랑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 우선도 그 희생자의 하나이다.
이러한 우선이가 형식과 선형을 눈앞에 보고, 또 그립던 영채가 같은 차를 타고, 같은 기관차에 끌려가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울 것도 자연한 일이다. 또 영채는 이미 기생도 아니요, 겸하여 형식의 아내도 아니라. 오직 한 처녀다…… 하고 우선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생각이 번개같이 가슴에 일어난다. 그래서 우선은 형식의 간 뒤를 따라, 다음 차실 문 밖에 가서 바람을 쏘여 가며 가만히 엿본다. 형식은 영채의 곁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병욱도 이따금 말참례를 한다. 세 사람의 얼굴은 아주 엄숙하다. 우선은 들어갈까말까 하다가 형식의 돌아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뒷짐을 지고 기대어서 쿵쿵 찻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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