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나무하던 손을 쉬고 중실은 발 밑의 깨금나무 포기를 들쳤다. 지천으로 떨어지는 깨금알이 손안에 오르르 들었다. 익을 대로 익은 제철의 열매가 어금니 사이에서 오도독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돌을 집어던지면 깨금알같이 오도독 깨어질 듯한 맑은 하늘, 물고기 등같이 푸르다. 높게 뜬 조각구름 때가 해변에 뿌려진 조개껍질같이 유난스럽게도 한편에 옹졸봉졸 몰려들 있다. 높은 산등이라 하늘이 가까우련만 마을에서 볼 때와 일반으로 멀다. 구만 리일까 십만 리일까. 골짜기에서의 생각으로는 산기슭에만 오르면 만져질 듯하던 것이 산허리에 나서면 단번에 구만 리를 내빼는 가을 하늘.

산 속의 아침나절은 졸고 있는 짐승같이 막막은 하나 숨결이 은근하다. 휘엿한 산등은 누워 있는 황소의 등어리요, 바람결도 없는데, 쉴새없이 파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잎새는 산의 숨소리다. 첫눈에 띄는 하아얗게 분장한 자작나무는 산 속의 일색. 아무리 단장한 대야 사람의 살결이 그렇게 흴 수 있을까. 수북 들어선 나무는 마을의 인총보다도 많고 사람의 성보다도 종자가 흔하다. 고요하게 무럭무럭 걱정 없이 잘들 자란다. 산오리나무, 물오리나무, 가락나무, 참나무, 졸참나무, 박달나무, 사스레나무, 떡갈나무, 무치나무, 물가리나무, 싸리나무, 고로쇠나무. 골짜기에는 신나무, 아그배나무, 갈매나무, 개옻나무, 엄나무. 산등에 간간이 섞여 어느 때나 푸르고 향기로운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노간주나무―걱정 없이 무럭무럭 잘들 자라는―산속은 고요하나 웅성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과실같이 싱싱한 기운과 향기, 나무 향기, 흙 냄새, 하늘 향기,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향기다.

낙엽 속에 파묻혀 앉아 깨금을 알뜰이 바수는 중실은, 이제 새삼스럽게 그 향기를 생각하고 나무를 살피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한데 합쳐 몸에 함빡 젖어들어 전신을 가지고 모르는 결에 그것을 느낄 뿐이다. 산과 몸이 빈틈없이 한데 얼린 것이다. 눈에는 어느 결엔지 푸른 하늘이 물들었고 피부에는 산 냄새가 배었다. 바심할 때의 짚북더기보다도 부드러운 나뭇잎― 여러 자 깊이로 쌓이고 쌓인 깨금잎, 가락잎, 떡갈잎의 부드러운 보료―속에 몸을 파묻고 있으면 몸뚱어리가 마치 땅에서 솟아난 한 포기의 나무와도 같은 느낌이다. 소나무, 참나무, 총중의 한 대의 나무다.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살을 베면 피 대신에 나뭇진의 흐를 듯하다. 잠자코 섰는 나무들의 주고받은 은근한 말을, 나뭇가지의 고개짓하는 뜻을, 나뭇잎의 소곤거리는 속심을 총중의 한 포기로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해가 뛸 때에 즐거하고, 바람 불 때에 농탕치고, 날 흐릴 때 얼굴을 찡그리는 나무들의 풍속과 비밀을 역력히 번역해 낼 수 있다. 몸은 한 포기의 나무다. 별안간 부드득 솟아오르는 힘을 느끼고 중실은 벌떡 뛰어 일어났다. 쭉 혀는 네 활개에 힘이 뻗쳐 금시에 그대로 하늘에라도 오를 듯 싶었다. 넘치는 힘을 보낼 곳 없어 할 수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늘이 울려라 고함을 쳤다. 땅에서 솟는 산 정기의 힘찬 단순한 목소리다. 산이 대답하고 나뭇가지가 고갯짓한다. 또 하나 그 소리에 대답한 것은 맞은편 산허리에서 불시에 푸드득 날아 뜨는 한 자웅의 꿩이었다. 살찐 까투리의 꽁지를 물고 나는 장끼의 오색 날개가 맑은 하늘에 찬란하게 빛났다.

살찐 꿩을 보고 중실은 문득 배가 허출함을 깨달았다. 아래편 골짜기 개울 옆에 간직하여 둔 노루 고기와 가랑잎 새에 싸 둔 개꿀이 있음을 생각하고 다시 낫을 집어들었다. 첫참때까지에는 한 점은 채워 놓아야 파장되기 전에 읍내에 다다르겠고, 팔아가지고는 어둡기 전에 다시 산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한참 쉰 뒤라 팔에는 기운이 남았다. 버스럭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품안에 요란하고 맑은 기운이 몸을 한바탕 멱감긴 것 같다. 산은 마을 보다 몇 곱절 살기가 좋은가. 산에 들어오기를 잘했다고 중실은 생각하였다.

 

세상에 머슴살이같이 잇속 적은 생업은 없다.

싸울래 싸운 것이 아니라 김영감 편에서 투정을 건 셈이다. 지금 와보면 처음부터 쫓아낼 의사였던 것이 확실하다. 중실은 머슴산 지 칠 년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맨주먹으로 살던 집을 쫓겨났다. 원통은 하였으나 애통하지는 않았다.

해마다 사경을 또박또박 받아 본 일 없다. 옷 한 벌 버젓하게 얻어 입은 적 없다. 명절에는 놀이할 돈도 푼푼이 없이 늘 개보름 쇠듯 하였다. 장가들이고 집 사고 살림을 내 준다는 것도 헛소리였다. 첩을 건드렸다는 생뚱 같은 다짐이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계책한 억지요 졸색의 등글개 따위에는 손댈 염도 없었던 것이다. 빨래하러 갔던 첩과 동구 밖에서 마주쳐 나뭇짐을 지고 앞서고 뒷서서 돌아왔다고 의심받을 법은 없다. 첩과 수상한 놈팡이는 도리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애매한 중실에게 엉뚱한 분풀이가 돌아온 셈이었다. 가살스런 첩의 행실을 휘어잡지 못하고 늘그막판에 속태우는 영감의 신세가 하기는 가엾기는 하다. 더욱 엉클어질 앞일을 생각하고 중실은 차라리 하직하고 나온 것이었다. 넓은 하늘 밑에서도 갈 곳이 없다. 제일 친한 곳이 늘 나무하러 가던 산이었다. 짚북더기보다도 부드러운 두툼한 나뭇잎의 맛이 생각났다. 그 넓은 세상은 사람을 배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빈 지게만을 걸머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얼마 동안이나 견딜 수 있을까가 한 시험도 되었다.

박중골에서도 오 리나 들어간, 마을과 사람과는 인연이 먼 산협이다. 산등이 펑퍼짐하고 양지쪽에 해가 잘 쬐고, 골짜기에 개울이 흐르고, 개울가에 나무열매가 지천으로 열려 있는 곳이다. 양지쪽에서는 나무하러 왔다 낮잠을 잔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개울가에 불을 피우고 밭에서 뜯어온 옥수수 이삭을 구웠다. 수풀 속에서 찾은 으름과 나뭇가지에 익어 시든 아그배와 산사로 배가 불렀다. 나뭇잎을 모아 그 속에 푹 파고 든 잠자리도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이튿날 산을 헤매다가 공교롭게도 주영나무가지에 야트막하게 달린 벌집을 찾아냈다. 담배 연기를 피워 벌떼를 이지러뜨리고 감쪽같이 집을 들어냈다. 속에는 맑은 꿀이 차 있었다. 사람은 살라고 마련인 듯싶다. 꿀은 조금으로도 요기가 되었다. 개와 함께 여러 날 양식이 되었다.

꿀이 다 떨어지지도 않은 그저께 밤에는 맞은편 심산에 산불이 보였다. 백일홍같이 새빨간 불꽃이 어둠 속에 가깝게 솟아올랐다. 낮부터 타기 시작한 것이 밤에 들어가서 겨우 알려진 것이다. 누에에게 먹히는 뽕잎같이 아물아물 헤어지는 것 같으나, 기실은 한 자리에서 아롱아롱 타는 것이었다. 아귀의 혀끝같이 널름거리는 불꽃이 세상에도 아름다왔다. 울밑의 꽃보다도, 비단결보다도, 무지개보다도 맨드라미보다도 곱고 장하다. 중실은 알 수 없이 신이 나서 몽둥이를 들고 산등을 따라 오르고 골짜기를 건너 불붙는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 가깝게 보이던 것과는 딴판으로 꽤 멀었다. 불은 산등에서 산등으로 둘러붙어 골짜기로 타 내려갔다. 화기가 확확 튀어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후끈후끈 무더웠다. 나무뿌리가 탁탁 튀며 땅이 쨍쨍 울렸다. 민출한 자작나무는 가지가지에 불이 피어올라 한 포기의 산호수 같은 불나무로 변하였다. 헛되이 타는 모두가 아까왔다. 중실은 어쩌는 수 없이 몸둥이를 쓸데없이 휘두르며 불 테두리를 빙빙 돌 뿐이었다. 불은 힘에 부치는 것이었다. 확실히 간 보람은 있었다. 그을린 노루 한 마리를 얻은 것이었다. 불 테두리를 뚫고 나오지 못한 노루는 산골짜기에서 뱅뱅 돌아 결국 불벼락을 맞은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얻을 때는 불도 거의 다 탄 새벽이었으나, 외로운 짐승이 몹시 가엾었다. 그러나 이미 죽은 후의 고기라 중실은 그것을 짊어지고 산으로 돌아갔다. 사람을 살리자는 신의 뜻이라고 비위좋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여러 날 동안의 흐뭇한 양식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 그리운 것이 있었다. 짠맛―소금이었다. 사람은 그립지 않으나 소금이 그리웠다. 그것을 얻자는 생각으로만 마음이 그리웠다.

 

힘자라는 데까지 지었다.

이십리 길을 부지런히 걸으려니 잔등에 땀이 내배었다. 걸음을 따라 나뭇짐이 휘청휘청 앞으로 휘었다.

간신히 파장 전에 대었다.

나무를 판 때의 마음이 이날같이 즐거운 적은 없었다.

물건을 산 때의 마음도 이날같이 즐거운 적은 없었다.

그것은 짜장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무 판 돈으로 중실은 감자 말과 좁쌀 되와 소금과 남비를 샀다.

산 속의 호젓한 살림에는 이것으로써 족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목숨을 이어 가는 데 해어쯤이 없으면 어떨까도 생각되었다.

올 때보다 짐이 단출하여 지게가 가벼웠다.

술집 골방에서 왁자지껄하고 싸우는 것도 전과 다름없다.

이상스러운 것은 그런 거리의 살림살이가 도무지 마음을 당기지 않는 것이다. 앙상한 사람들의 얼굴이 그다지 그리운 것이 아니었다.

무슨 까닭으로 산이 이렇게도 그리울까. 편벽된 마음을 의심도하여 보았다. 그러나 별로 이치도 없었다. 덮어놓고 양지쪽이 좋고, 자작나무가 눈에 들고, 떡갈잎이 마음을 끄는 것이다. 평생 산에서 살도록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김영감의 그 후의 소식은 물어 낼 필요도 없었으나, 거리에서 만난 박 서방 입에서 우연히 한 구절 얻어듣게 되었다.

병든 등글개 첩은 기어코 김영감의 눈을 감춰 최 서기와 줄행랑을 놓았다. 종적을 수색 중이나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한다.

사랑방에서 고시렁고시렁 잠을 못 이룰 육십 노인의 꼴이 측은하게 눈에 떠올랐다. 애매한 머슴을 내쫓았음을 뉘우치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중실에게는 물론 다시 살러들어갈 뜻도, 노인을 위로하고 싶은 친절도 가지기 싫었다.

다만 거리의 살림이라는 것이 더한층 어수선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산으로 향하는 저녁길이 한결 개운하다.

 

개울가에 남비를 걸고 서투른 솜씨로 지은 저녁을 마쳤을 때에는 밤이 적이 어두웠다.

깊은 하늘에 별이 총총 돋고 초생달이 나뭇가지를 올가미 지웠다.

새들도 깃들이고 바람도 자고 개울물만이 쫄쫄쫄쫄 숨쉰다. 검은 산등은 잠든 황소다.

등걸불이 탁탁 튄다. 나뭇잎 타는 냄새가 몸을 휩싸며 구수하다. 불을 쬐며 담배를 피우니 몸이 훈훈하다. 더 바랄 것 없이 마음이 만족스럽다.

한 가지 욕심이 솟아올랐다.

밥짓는 일이란 머슴애 할 일이 못 된다. 사내자식은 역시 밭갈고 나무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장가를 들려면 이웃집 용녀만한 색시는 없다. 용녀를 데려다 밥일을 맡길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용녀를 생각만 하여도 즐겁다. 궁리가 차례차례로 솔솔 풀렸다.

굵은 나무를 베어다 껍질째 토막을 내 양지쪽에 쌓아 올려 단간의 조촐한 오두막을 짓겠다. 펑퍼짐한 산허리를 일궈 밭을 만들고 봄부터 감자와 귀리를 갈 작정이다. 오랍 뜰에 우리를 세우고 염소와 돼지와 닭을 칠 터. 산에서 노루를 산 채로 붙들면 우리 속에 같이 기르고 용녀가 집일을 하는 동안에 밭을 가꾸고 나무를 할 것이며, 아이를 낳으면 소같이 산같이 튼튼하게 자라렸다. 용녀가 만약 말을 안 들으면 밤중에 내려가 가만히 업어 올걸.

한번 산에만 들어오면 별수 없지.

불이 거의거의 아스러지고 물소리가 더한층 맑다.

별들이 어지럽게 깜박거린다.

달이 다른 나뭇가지에 걸렸다.

나머지 등걸불을 발로 비벼 끄니 골짜기는 더한층 막막하다.

어느만 때인지 산 속에서는 때도 분별할 수 없다.

자기가 이른지 늦은지도 모르면서 나무 및 잠자리로 향하였다.

낟가리같이 두두룩하게 쌓인 낙엽 속에 몸을 송두리째 파묻고 얼굴만을 빠끔히 내놓았다.

몸이 차차 푸근하여 온다.

하늘의 별이 와르르 얼굴 위에 쏟아질 듯싶게 가까웠다멀어졌다한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세는 동안에 중실은 제 몸이 스스로 별이 됨을 느꼈다.

반응형

'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동인 - 광염 소나타  (0) 2019.05.25
김유정 - 산골나그네  (1) 2013.02.01
전영택 - 사진[무료소설]  (0) 2013.01.31
현진건 - 사립 정신병원장[무료소설]  (0) 2012.08.21
나도향 - 뽕[무료소설]  (1) 2012.03.20
반응형

 

S는 송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달 만에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사진을 싼 종이를 뜯어 보았다. 피봉에 쓰인 글씨의 주인은 이전에 S를 향하여 인사할 때와 같은 얌전하고 반기는 태도로 곱게 써 있다. 글씨의 주인은 Y이다. 그런데 사진에는 Y가 혼자 있으리라 기대하였더니,Y 밖에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Y의 친한 한반 동무이었다. S는 반가운 듯이 들여다보고 책상 서랍에 집어넣어 두었다.

 

S는 송도 어떤 소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 학교에는 여자부도 있고, 남자부도 있었는데, S는 여자부에서 많이 가르쳤다. 그 여학생들은 제일 나이 많은 아이가 열네 살 먹고, 모두 어리며 대개 얌전하고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본래 음악을 좋아하는 S는 열심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그리고 날마다 재미있는 동화를 많이 들려 주었다. 학생들도 열심으로 배우고, 재미있게 듣고, 그리고 S선생을 몹시 사랑하였다. 하학하여도 집으로 돌아 가지를 아니하였다.

하기휴학 후에도 학생들은 한모양으로 학교에 모여서 S선생의 소매에 매달려 놀며 더운 줄도 몰랐다. 그래서 S선생은 서울 자기 집에서 기다리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학교에 있었다.

Y는 그중에 성적이 좋고 S가 보기에 위인이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마음도 퍽 착한 아이였다. 여러 학생이 모두 S선생을 사랑하는 가운데 Y는 더욱 S를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집에 가서 객지에 있는 S의 의복 걱정과 식사 걱정을 간곡히 하였다. 말은 아니하여도 실상은 제일 S선생을 사랑하였다.

S선생은 개성을 떠나게 되었다. 첫째는 유학하기 위하여, 둘째는 학교 당사자와 사이에 조금 재미없는 일이 있어서, S선생이 하루는 하학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이제는 이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내려갔다가 두 시간이나 지나서 무심중 다시 올라와 보았더니, 운동장 한 모퉁이에 한 학생이 아카시아나무를 의지하고 돌아서 있었다. S는 벌써 멀리서 보고도 누구인 줄 알고 가까이 가 보았다. Y는 다시 돌아서면서 들릴이만큼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S는 그 봄에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오호츠까〉고등사범학교의 기숙사 서편 모퉁이 방에 혼자 있는 S는 논에 벼이삭이 누우래지고, 길가에 억새가 허얘지고, 여기저기 언덕에 단풍이 빨개져서 가을빛이 무르익는〈무사시노〉넓은 들에 한가히 넘어가는 석양볕을 받으면서, 책상을 의지하고 말없이 앉아 있다. 멀리 들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이따금 이따금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또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한참 있다가는 다시 눈을 떠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S는 동경 가서 고향 그리운 병이 났던지 늘 수심으로 지내었다. 그래 그것을 스스로 위로하여(실상은 옛날 그리운 병을 더 깊게 하였건마는) 가방에서 Y의 사진을 꺼내어 사진틀에 넣어 놓았다. 그 사진에는 본래 두 사람이 있었다. 얼굴 전체의 윤곽이 묘하고 예쁜데다가 입은 꼭 다물고 있으나,사람의 마음을 끌어가는 듯한 웃는 눈, 까맣고 동그란 눈의 주인은 Y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동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빠진 데가 있고 작은 눈과 긴 눈썹과 좁은 미간에는 독한 시기가 가득한 듯하였다. Y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S에게 반김과 기쁨을 주었으나, 그 동무의 얼굴은 불쾌와 무서움을 주었다.

그래서 S는 가위로 그 동무의 얼굴과 몸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남은 Y의 사진에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을 연필로 칠하여 묘하게 흐려 버렸다.

그리고 이따금 오는 Y의 편지를 픽 반가이 받아 보았다. 그리고 간단하고도 간곡한 회답을 해주었다. 그의 동무에게서도 혹 편지가 왔다.

 

여름방학이 되어 S는 서울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S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어느 여자 고등보통학교에 같이 와서 공부하던 Y와 그 동무가 찾아왔다. 그 동무는 Y와 함께 사진 박힌 학생이었다.

S는 퍽 반가와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고 물어도 보았다. 본래 말이 없고 얌전한 두 학 생은 방긋방긋 웃기만 하면서, 다른 대답이나 말은 별로 없었으나, 서울 와서 공부하는 재미가 어떠냐 묻는 말에는,

「시골서 선생님께서 저희를 가르치실 때 재미가 제일이야요.」

하는 대답을 힘있게 하였다.

S는 반가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경서 가져온 그림책과 사진첩을 가방에서 꺼내 놓고, 고무신을 신고 참외를 사러 나갔다. 참외를 사 가지고 오면서 생각하다가 S는 깜짝 놀란 듯이 아차! 하였다. 그 사진첩에는 동경서 책상에 놓았던 Y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내놓았었다. 속으로 많이 염려를 하면서 집에 들어갔더니, 과연 두 사람의 태도와 얼굴은 아주 일변하였다. 그림책과 사진첩은 접어 치워 놓고 두 사람은 무슨 몹시 부끄럽고, 몹시 섭섭한 일을 당한 듯한 얼굴로 당장 일어나 가려고 하는 모양이다.

여러 말로 만류하여 겨우 참외 한 쪽씩을 먹는 체하고는 두 사람은 바삐 달아나갔다. 그런 뒤에 S는 바삐 사진첩을 펼쳐 보았다. Y의 사진이 붙었던 자리가 함부로 찢어지고 없어졌다. (누가 이랬나, 누가 가져갔나) 하고 S는 생각하였다.

 

S는 가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갔다. 간지 두 달이 지난 후에 Y에게서 간단한 편지가 왔다;. 그 편지 속에는 Y의 혼자 박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동무는 개학해서 올라왔다가 폐병이 생겨서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S는 그 편지를 보고 지난 여름에 볼 때에 그 동무의 금시에 까매진 얼굴과 눈물 머금은 눈과 꼭 깨물어 다문 입술이 생각났다. 그래서 책상 서랍을 뒤져보았다. 아직도 기왕 가위로 베었던 사진 조각이 몇 조각 남아 있었다.

반응형

'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유정 - 산골나그네  (1) 2013.02.01
이효석 - 산[무료소설]  (0) 2013.02.01
현진건 - 사립 정신병원장[무료소설]  (0) 2012.08.21
나도향 - 뽕[무료소설]  (1) 2012.03.20
이효석 - 북국사신[무료소설]  (1) 2012.02.23
반응형

생각하면 재작년 겨울 일이다. 나는 오래 간만에야 고향에 돌아갔었다. 10여 호가 넘던 일가집들이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포플라 잎보다도 더 하잘것없이 흩어진 오늘날에야 말이 고향이지 기실 쓸쓸한 타향일 따름이다. 비록 초가일망정 20여 간이나 되는 우리집도 다섯 간 오막살이로 찌그러들어 성 밖 외따른 동리에 초라하게 남았고, 거기에 칠순에 가까운 아버지와 사십이 넘은 계모가 턱을 괴고 앉았을 뿐. 아들도 남부럽지 않게 많지마는 제 입 풀칠하기에 바쁜 그들은 부모님 봉양할 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몇 달 만에야 한 번, 몇 해 만에야 한 번 집안으로 기어드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요 손님이다. 쌀밥 한 그릇 고깃국 한 대접을 만들어 먹이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심하는 것을 잘 아는 나는 얼른 데밀어다 보고는 선선히 일어서는 것이 항례이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내 시세와 우리 집안 형편을 늘어놓자는 것은 아니다. 음산하고 참담한 내 동무 하나의 이야기를 기념삼아 적어 두자는 것이다.

아버지 집을 총총히 뛰어나온 나의 발길은 몇 아니되는 친구가 구락부삼아 모이는 L의 사랑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무조건으로 나를 환영해 주었다. 반가움 즐거움은 이야기의 즐거움으로 옮겨갔다. 서울 형편 이야기, 글 이야기를 비롯하여 친구들의 가정에 일어난 에피소우드까지 우리의 화제에 올랐다.

“W군이 어째 보이지 않나? 요새도 은행에 잘 다니나?”

나는 그 사랑의 단골 축의 하나인 W군의 소식을 물어 보았다.

“이번 정리 통에 그나마 미역국을 먹었네.”

하고 주인 되는 L군이 얼굴을 찌푸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이 W군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헐길 할길 없는 형편이었다. 본디 서발 막대 거칠 것 없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그는 열 여덟 살 때에 백부에게로 출계를 하게 되었다. 양자간 덕택으로 즉시 장가는 들 수 있으나 사람 좋은 양부는 남의 빚봉수로 말미암아 씩씩지 않은 시골 살림이 일조에 판들고 말았다. 그는 처가에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처가 또한 넉넉지 못한 형세이다. 조반석죽도 귈할 때가 많았다. 넉넉한 처가살이도 하기 어렵다 하거든 하물며 가난한 처가살이이랴. 목으로 넘어가는 밥 한 알 두 알이 바늘과 같이 그의 창자를 찔렀으리라. 이토록 고생에 부대끼면서도 그는 얼굴 한 번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든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말 한마디를 해도 웃지 않고는 못하는 낙천가였다. 서울에 올라와서 고학을 할 때 살을 에어 내는 듯한 겨울날 속옷을 빨다가 손이 몹시 쓰리면 그는 벌떡 일어나 손을 쩔레절레 혼들며

“이놈의 손가락이 별안간에 왜 뻣뻣해지나”

하고는 웃었다. 밥을 짓다가 연기가 눈으로 들어가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비비면서도 그는 히히 하고 웃기를 잊지 앉았다. 그 대신 그의 몸은 여지없이 말라 갔다. 뼈하고 가죽으로만 접한 듯한 얼굴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점 날 것 같지 않았다. 가장 기쁜 듯이 웃을 때면 입가는 마치 누비를 누벼 놓은 듯이 여러 가닥 주름이 잡히었다.

만사를 웃고 지내는 그이언만 처가살이는 견디지 못하였던지 작년 봄에 남의 협호를 얻어 자기 식구를 끌고 나왔다. 백관으로 살림을 차리고 보니 그 군색한 것이야 당자 아닌 남으론 상상도 못할 일이 있었으리라. 그는 친구에게 쌀되를 꾸어 가면서 그날그날 보내던 중 여러 가지로 주선한 끝에 T은행의 사원으로 채용이 되었었다. 25원이란 월급이 비록 적지마는 그들의 가정에겐 생명의 줄이었다. 그런데 그 줄이나마 끊어졌으니 그는 또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 더구나 그· 벌써 열 두 살 먹은 맏딸, 여덟 살 되는 둘째 딸, 네 살 먹은 아들의 아버지가 아니냐.

”그러면 무엇을 먹고 산단 말인가.”

나는 탄식하였다.

“요새는 사립 정신병원장이 되셨지요.”

하고 익살 찰 부리는 S군이 낄낄 웃었다. 온 방안은 이 말에 땍대그르 웃었다.

“사립 정신병원장이라니?”

나는 웬 까닭을 몰라서 채쳐 물었다.

“출근 오전 7시, 퇴근 오후 6시, 집무 중 면회 절대 사절, 일시라도 환자의 곁을 떠나지 못할지니 변소 출입도 엄금‥‥‥”

하고 S군이 북받치는 웃음을 못 참을 제, 방 안에 웃음소리는 또 한 번 높아졌다.

S군의 설명을 들으면 W군에게 P란 친구가 있었다. 워낙 체질이 나약한 그는 어릴 적부터 병으로 자라났다. 성한 날이라고는 단지 하루가 없었다. 가난한 집 자식 같으면 땅김을 벌써 맡았으련마는 다행히 수천석군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삼과 녹용의 힘이 그의 끊어지려는 목숨을 간신히 부지해 왔었다. 자식이 그렇게 허약하거든 장가나 들이지 않았으면 좋을걸 재작년에 혼인을 한 뒤부터 그의 병세는 더욱더 처진 모양이었다. 금년 봄에 첫딸을 낳은 뒤론 그는 실성 실성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말았다.

미치고 보니 자연히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부모 친척까지 그와 오래 앉아 있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병자를 내어보낼 수도 없고 혼자 한방에 감금해 두는 것도 또한 염려스러운 일이다. 그래 W군이 <사립 정신병원장>이 된 것이다. 날이 맞도록 미친 이의 말벗이 되고 보호병 노릇을 하는 보수로 W군은 한 달에 쌀 한 가마니, 돈 10원씩을 받게 된 것이다.

“사립 정신병원장!”

나는 속으로 한 번 외어 보았다. 나의 가슴은 한그믐밤같이 캄캄해졌다.

그날 저녁에는 W군을 만났다.

“원장영감, 인제야 퇴근하셨읍니까?”

하고 S군은 또 낄낄댄다. 방안에 다시금 웃음이 터졌다. W군도 또한 빙그레 웃었으되 그 샛노란 얼굴엔 잠간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듯하였다.

“오늘은 별일 없었나?”

친구들은 W군을 중심으로 둘러앉으며 L군이 물었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번쩍이었다.

“여보게, 말도 말게, 오늘은 정말 혼이 났네”

하고 W군은 역시 싱글싱글 웃는다.

  • “왜?”

여러 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랄이 점점 늘어가나 보네. 오늘은 문 첩첩이 닫고 늘 하는 그 지랄을 하더니만 칼을 가지고 나를 찌르려고 덤비데.”

“칼은 또 웬 칼인고?”

“낮에 밤 깍으라고 내온 것을 어느새 집어 넣었던가 보데.”

“그래 그 칼을 빼앗았나?”

“그까짓 것 안 빼앗으면 어떨라구, 설마 미친 놈이 사람 죽이겠나.”

하고 W군은 또 웃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웬일인지 추운 듯이 떨고 있었다.

“자네도 좀 실성실성하이그려, 미친 놈이 사람을 죽이지 성한 놈이 사람을 죽이나.”

머기 모인 친구의 하나인 K군이 그 귀공자다운 횐 얼굴이 조금 푸르러지며 이런 말을 하였다.

“성한 사람 같으면 푹 찌르지만 칼을 들고 남의 목을 겨누며 한참 지랄을 하더니 그대로 퍽 쓰러지데그려.”

“자네 오늘은 운수가 좋았네. 문을 첩첩이 잠그고 그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정말 찔렀으면 어잴 뻔했나?”

하고 L군은 아찔아찔한듯이 몸서리를 친다.

“문을 왜 처잠그는가?”

나는 또 설명을 요구하였다.

“자네는 참 모를걸세” 하고 W군은 설명해 주었다.

P의 증세는 공인증(恐人症)이란 것이었다. 천연스럽게 앉아 있다가 문득 눈을 홉 뜨고 그 백지장 같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지고

“아이고, 저놈들이 또 온다. 아이구, 저놈이 나를 잡으러 온다”

라고 황급하게 중얼거리며 숨을 곳을 찾는 듯이 방안을 썰썰매다가

“여보게 W군 문 좀 닫아 주게”

하고 비대 발괄하는 법이었다. 그러면 W군은 하릴없이 사랑 중문을 닫고, 그들이 있는 방문이린 방문은 미닫이며 덧창이며 바깥문까지 모조리 닫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방안이 침침해지면 개한테 쫓긴 닭 모양으로 방 한구석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미친 이는 고개를 번쩍 들고 사면을 두리번두리번 살핀다. 그러다가 별안간

“히, 히, 히, 히”

라고 마디마디 끊어진 웃음을 웃는다.

이 웃음소리를 따라 그의 홉뜬 눈이 점점 번들번들해지자

“이놈들아, 너희들이 나를 잡아가? 어림 반푼어치 없어, 히, 히, 히”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한 시간 가량 지나면 제풀에 지쳐서 그대로 쓰러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도 법대로 또한 문을 다 잠그고 한참 발광을 하다가 문득 품속에서 창칼을 쑥 빼어 들더니 W군에게 달려 들어 그 칼을 목에다 겨누며

“이 죽일 놈, 네가 나 잡으러 온 것이지. 이놈, 내 칼에 죽어 보아라”

하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다행히 그대로 쓰러졌다고 한다.

“자네 오늘 십년 감수는 했겠네.”

하고 L군이 소리를 떨어뜨린다.

“글쎄, 원장 노릇도 못해먹겠는걸.”

하고 W군은 또 히히 웃어 보이었다.

K군의 주최로 그날 밤에 우리는 해동관이란 요리집에 가게 되었다. 일행이 거의 다 외투를 걸쳤건만 W군 홀로 옥양목 겹두루마기 자락을 찬바람에 날리며 가는 다리를 꼬는 듯이 하며 걸어가는 양이 눈물겨웠다.

요리상은 벌어졌다. 셋이나 부른 기생의 기름내와 분내가 신선로 김과 한테 서리었다.

장구 소리와 가야금 가락이 서로 어우러지자 한가한 고로 웅장한 단가며 멋지고 구슬픈 육자배기 단 입김과 함께 둥둥 떠돌았다.

술은 여러 차례 돌았건만 나는 조금도 취해지지를 않았다. W군의 존재가 어쩐지 나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첫째로 그의 주량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서울에서 고학하던 시절, 학비를 넉넉히 갖다 쓰는 친구가 청요리집으로 가난한 놀이를 하려면 강권하는 것을 떨치다 못하여 배갈 한 잔에 누른 얼굴이 흥당무로 변하며 그대로 쓰러지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 저녁엔 비록 정종일망정 열 잔이 넘었으되 조금도 취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빼빼 마른 팔뚝을 반만 걷어 요리 위에 세운 채 기생이 따라 주는 대로 그는 꿀꺽꿀꺽 들이켜고 있었다.

“자네 웬 술을 그렇게 먹나.”

마침내 나는 W군을 향해서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나는 술도 못 먹는 줄 알았나”

하고 W군은 또 히히 웃어 보이었다.

“여보게 W군, 술이 어떤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나. 한 동이를 가지고는 못 가도 먹고는 간다네. 식전 해장도 세 사발은 먹어야 견디네.”

S군이 도리어 내 말을 의아하게 여기는 듯이 가로채더니만

“여보게 W군, 자네는 자네 말짝으로 그 눈알만한 잔 가지고는 턱이 아니될 터이니 컵으로 하게.“

“그것도 좋지. 나만 그럴 것 있나, 우리 모두 컵으로 하세그려.”

컵을 들여왔다. 처음에는 먹을 듯이 모두들 W군의 말에 찬동을 하더니만 컵에 술을 붓고 보니 끔찍하던지 감히 마시러 들지 않았다. W군 홀로 세 컵을 기울이고 말았다

“자네들도 들게그려”

하고 한두어 번 권해보았으나 잘들 들지 않으매 저 혼자 연거푸 다섯 잔을 들이켰다. 그는 자기의 비색한 신수와 악착한 형편을 도무지 잊은 듯하였다. 그와 반대로 모인 중에도 자기 혼자 유쾌하고 기쁜 듯하였다. 기생 하나가 장구를 메고 일어서자 앞장서서 얼신덜신 춤을 춘 이도 W군이었다. 꽉 잠긴 목으로 남먼저 ‘에라만수’를 찾은 이도 W군이었다.

놀이는 끝장날 때가 왔다. 꽹과리 소리가 사람의 귀를 찢었다. 춤추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하나씩 둘씩 늘게 되었다.

“인제 그만 가세그려,”

술이 덜 취한 L군 이 마침내 이런 제의를 하였다. 우리는 그 말에 찬동을 하며 외투를 떼어 입었다.

그때에도 한 팔로 요리상을 짚고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아직 술병을 기울이고 있건 W군은 문득 <보이>를 불러서 신문지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신문지를 받아들자 그는 약식이며 떡 같은 것을 주섬주섬 싸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창피하이, 그만두게.”

K군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리었다.

“어떤가, 내 돈 준 것 내가 가져가는데”

하고 W군은 역시 웃으며 벌벌 떠는 손으로 쌀 것을 줍기에 바쁘다.

“인제 그만 싸게, 에이 창피스러워”

하며 K군은 고개를 돌린다. 마침내 W군은 쌀 것을 다 싸가지고 송편과 약식이 삐죽삐죽 나오는 봉지를 들고 비슬비슬 일어선다.

그때 K군의 단골이1라는 명옥이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원장영감 댁은 오늘밤에 큰 잔치를 하겠구먼”

하고 비우적거리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W군은 나는 듯이 명옥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년, 뭣이 어째”

라는 고함과 함께 W군의 손은 철썩하고 명옥의 뺨에 올라붙었다. 명옥은

“에고고”

외마디소리를 치고 쓰러지자 W군은 미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원장댁 큰 잔치? 큰 잔치?”

라고 뇌이면서 발길로 엎어진 계집의 허리를 찼다. 이 야단통에 W군의 떡 싼 봉지는 방바닥에 떨어져 흩어 졌다. 나는 이 싸움의 원인이요 사랑의 뭉치인 봉지를 얼른 주워서 방 한구석 장구 얹혔던 자리 위에 올려 두었다.

싸움은 벌어졌다. K군이 명옥의 역성을 들며 W군에게 덤빈 까닭이다. K군은 W군의 목덜미를 잡아 회술레 돌리다가

“이 자식 미친 놈하고 같이 있더니 미쳤나뵈. 왜 사람을 차며 지랄 발광을 하노”

하며 휙 뿌리치자 W군은 비슬비슬 몇 걸음 걸어 나오다가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푹 꺼꾸러졌다. 그럴 겨를도 없이 엎어진 이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 곧 K군에게로 달려들었다. 우 리는 황망히 그의 팔을 잡아 만류를 하였는데 그때 그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몸서리가 끼친다. 엎어질 때 다쳤음이라, 악다문 이빨엔 피가 흘렀다. 그 경성드뭇한 눈썹이 올올이 일어섰으며 핏발선 눈엔 그야말로 불이 나는 듯하였고, 이마엔 마른 가죽을 뚫고 나올 듯이 푸른 힘줄이 섰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마치 납을 끓여 부은 듯한 그 얼굴, 실룩실룩하는 살점 하나하나가 떠는 듯한 그 꼴이란 더할 수 없이 무서웠다. 입에 거품을 버글버글 흘리고

“미친 놈하고 같이 있으면 어쨌단 말지냐. 미쳤으면 어쨌단 말이냐. 오! 너는 돈 있다고, 너는 돈 있다고.”

하고 이를 빠드득빠드득 갈아붙이며 K군을 향해 몸부림을 쳤다. 순한 양 같은 이 낙천가 가 비록 취중일망정 사나운 짐승같이 날뛰며 악마보다도 더 지독한 표정을 할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하였으랴.

간신히 뜯어말려서 먼저 K군을 보내고 L군과 S군과 나는 이 W군을 진정시켜서 얼마 만에야 그 요리집 방문을 나오려 하였다. 그 때 W군은 무엇을 찾는 듯이 연해 방안을 살피다가 아까 내가 얹어 둔 봉지를 발견하자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이었다. 그의 뜻을 지레짐작한 나는 얼른 그 봉지를 집자 그는 내 손에서 그 봉지를 빼앗듯이 받아 가지고 방바닥에 태질을 쳤다. 그러자 그는 흩어진 음식 위에 꺼꾸러지며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그의 얼굴과 손은 약식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복돌아, 약식 안 먹어도 산다. 복돌아, 송편 안 먹어도 산다.“

한동안 그는 제 아들 이름을 부르며 목을 놓고 울었다.

문득 울음을 뚝 그친 그는 무엇을 노리는 듯이 제 앞을 바라보더니만 나를 향하며

“여보게, 칼로 푹 찔러 죽이는 것이 어떻겠나?”

우리는 어리둥절하며 그의 입만 바라 보았다.

“아니, 그럴 일이 아니다. 고 어린것을 칼로 찌를 거야 있나. 차라리 목을 눌러 죽이지, 목을 누르면 내 손아귀 밑에서 파득파득하겠지. “

“여보게, 누구를 죽인단 말인가?”

마침내 나는 물어 보았다.

“우리 복돌이를 말일세. 하나하나씩 죽이는 것보다 모두 비끄러매 놓고 둘을 질러 버릴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었다..

“흥, 내 자식 죽이면 저희들은 성할 줄 알고. 흥, 그놈들도 내 손에 좀 죽어야 될걸.”

하고 별안간 그는 소리쳐 웃었다.

S군이 W군과 바로 한이웃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취한 이를 맡기고 돌아왔었다.

그 이튿날, S군의 말을 들은즉 W군의 집에서 악머구리 떼 같은 어른과 아이의 울음이 하도 요란하기에 자다가 말고 가보니 W군의 부인은 어떻게 맞았던지 마루에 늘어진 채 갱신도 못하고, 아이새끼는 기둥 하나에 하나씩 바로 친친 매어 두었으며, W군은 손에 성냥을 쥔 채로 마당에 쓰러져 쿨쿨 코를 골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차로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W군은 사립 정신병원의 사무가 바빠 나를 전송도 해주지 못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다섯 달 가량 지났으리라. 나는 L군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 ‥‥‥군이 마침내 미치고 말았다. 그는 오늘 아침에 P군을 단도로 찔러 그자리에 죽이고 말았네. P군의 미친 칼에 죽을 뻔 하던 그는 도리어 P군을 죽이고 만 것일세‥‥‥

나는 이 편지를 보고 물론 놀랐으되 어쩐지 으레 생길 참극이 마침내 실연되고 만것 같았다.

반응형

'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효석 - 산[무료소설]  (0) 2013.02.01
전영택 - 사진[무료소설]  (0) 2013.01.31
나도향 - 뽕[무료소설]  (1) 2012.03.20
이효석 - 북국사신[무료소설]  (1) 2012.02.23
이상 - 봉별기[무료소설]  (0) 2012.02.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