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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송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달 만에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사진을 싼 종이를 뜯어 보았다. 피봉에 쓰인 글씨의 주인은 이전에 S를 향하여 인사할 때와 같은 얌전하고 반기는 태도로 곱게 써 있다. 글씨의 주인은 Y이다. 그런데 사진에는 Y가 혼자 있으리라 기대하였더니,Y 밖에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Y의 친한 한반 동무이었다. S는 반가운 듯이 들여다보고 책상 서랍에 집어넣어 두었다.

 

S는 송도 어떤 소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 학교에는 여자부도 있고, 남자부도 있었는데, S는 여자부에서 많이 가르쳤다. 그 여학생들은 제일 나이 많은 아이가 열네 살 먹고, 모두 어리며 대개 얌전하고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본래 음악을 좋아하는 S는 열심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그리고 날마다 재미있는 동화를 많이 들려 주었다. 학생들도 열심으로 배우고, 재미있게 듣고, 그리고 S선생을 몹시 사랑하였다. 하학하여도 집으로 돌아 가지를 아니하였다.

하기휴학 후에도 학생들은 한모양으로 학교에 모여서 S선생의 소매에 매달려 놀며 더운 줄도 몰랐다. 그래서 S선생은 서울 자기 집에서 기다리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학교에 있었다.

Y는 그중에 성적이 좋고 S가 보기에 위인이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마음도 퍽 착한 아이였다. 여러 학생이 모두 S선생을 사랑하는 가운데 Y는 더욱 S를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집에 가서 객지에 있는 S의 의복 걱정과 식사 걱정을 간곡히 하였다. 말은 아니하여도 실상은 제일 S선생을 사랑하였다.

S선생은 개성을 떠나게 되었다. 첫째는 유학하기 위하여, 둘째는 학교 당사자와 사이에 조금 재미없는 일이 있어서, S선생이 하루는 하학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이제는 이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내려갔다가 두 시간이나 지나서 무심중 다시 올라와 보았더니, 운동장 한 모퉁이에 한 학생이 아카시아나무를 의지하고 돌아서 있었다. S는 벌써 멀리서 보고도 누구인 줄 알고 가까이 가 보았다. Y는 다시 돌아서면서 들릴이만큼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S는 그 봄에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오호츠까〉고등사범학교의 기숙사 서편 모퉁이 방에 혼자 있는 S는 논에 벼이삭이 누우래지고, 길가에 억새가 허얘지고, 여기저기 언덕에 단풍이 빨개져서 가을빛이 무르익는〈무사시노〉넓은 들에 한가히 넘어가는 석양볕을 받으면서, 책상을 의지하고 말없이 앉아 있다. 멀리 들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이따금 이따금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또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한참 있다가는 다시 눈을 떠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S는 동경 가서 고향 그리운 병이 났던지 늘 수심으로 지내었다. 그래 그것을 스스로 위로하여(실상은 옛날 그리운 병을 더 깊게 하였건마는) 가방에서 Y의 사진을 꺼내어 사진틀에 넣어 놓았다. 그 사진에는 본래 두 사람이 있었다. 얼굴 전체의 윤곽이 묘하고 예쁜데다가 입은 꼭 다물고 있으나,사람의 마음을 끌어가는 듯한 웃는 눈, 까맣고 동그란 눈의 주인은 Y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동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빠진 데가 있고 작은 눈과 긴 눈썹과 좁은 미간에는 독한 시기가 가득한 듯하였다. Y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S에게 반김과 기쁨을 주었으나, 그 동무의 얼굴은 불쾌와 무서움을 주었다.

그래서 S는 가위로 그 동무의 얼굴과 몸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남은 Y의 사진에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을 연필로 칠하여 묘하게 흐려 버렸다.

그리고 이따금 오는 Y의 편지를 픽 반가이 받아 보았다. 그리고 간단하고도 간곡한 회답을 해주었다. 그의 동무에게서도 혹 편지가 왔다.

 

여름방학이 되어 S는 서울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S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어느 여자 고등보통학교에 같이 와서 공부하던 Y와 그 동무가 찾아왔다. 그 동무는 Y와 함께 사진 박힌 학생이었다.

S는 퍽 반가와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고 물어도 보았다. 본래 말이 없고 얌전한 두 학 생은 방긋방긋 웃기만 하면서, 다른 대답이나 말은 별로 없었으나, 서울 와서 공부하는 재미가 어떠냐 묻는 말에는,

「시골서 선생님께서 저희를 가르치실 때 재미가 제일이야요.」

하는 대답을 힘있게 하였다.

S는 반가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경서 가져온 그림책과 사진첩을 가방에서 꺼내 놓고, 고무신을 신고 참외를 사러 나갔다. 참외를 사 가지고 오면서 생각하다가 S는 깜짝 놀란 듯이 아차! 하였다. 그 사진첩에는 동경서 책상에 놓았던 Y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내놓았었다. 속으로 많이 염려를 하면서 집에 들어갔더니, 과연 두 사람의 태도와 얼굴은 아주 일변하였다. 그림책과 사진첩은 접어 치워 놓고 두 사람은 무슨 몹시 부끄럽고, 몹시 섭섭한 일을 당한 듯한 얼굴로 당장 일어나 가려고 하는 모양이다.

여러 말로 만류하여 겨우 참외 한 쪽씩을 먹는 체하고는 두 사람은 바삐 달아나갔다. 그런 뒤에 S는 바삐 사진첩을 펼쳐 보았다. Y의 사진이 붙었던 자리가 함부로 찢어지고 없어졌다. (누가 이랬나, 누가 가져갔나) 하고 S는 생각하였다.

 

S는 가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갔다. 간지 두 달이 지난 후에 Y에게서 간단한 편지가 왔다;. 그 편지 속에는 Y의 혼자 박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동무는 개학해서 올라왔다가 폐병이 생겨서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S는 그 편지를 보고 지난 여름에 볼 때에 그 동무의 금시에 까매진 얼굴과 눈물 머금은 눈과 꼭 깨물어 다문 입술이 생각났다. 그래서 책상 서랍을 뒤져보았다. 아직도 기왕 가위로 베었던 사진 조각이 몇 조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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