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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도 술군은 역시 들지 않는다. 메주 뜨는 냄새와 같이 퀴퀴한 냄새로 방안은 쾨쾨하다. 웃간에는 쥐들이 찍찍거린다. 홀어머니는 쪽 떨어진 화로를 끼고 앉아서 쓸쓸한 채로 곰곰 생각에 젖는다. 가뜩이나 침침한 반짝 등불이 북쪽 지게문에 뚫린 구멍으로 새 드는 바람에 반득이며 빛을 잃는다. 헌버선짝으로 구멍을 틀어막는다. 그러고 등잔 밑으로 반짇고리를 끌어당기며 시름없이 바늘을 집어 든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 건 물소리, 골을 휘몰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퐁! 퐁 퐁! 쪼록 퐁!

바깥에서 신발 소리가 자작자작 들린다. 귀가 번쩍 띄어 그는 방문을 가볍게 열어젖힌다. 머리를 내밀며,

「덕돌이냐?」하고 반겼으나 잠잠하다. 앞뜰 건너편 수평을 감돌아 싸늘한 바람이 낙엽을 흩뿌리며 얼굴에 부딪친다.

용마루가 쌩쌩 운다. 모진 바람 소리에 놀라 멀리서 밤개가 요란히 짖는다.

「쥔 어른 계서유?」

몸을 돌리어 바느질거리를 다시 들려 할 제 이번에는 짜장 인기가 난다. 황급하게,

「누구유?」 하고 일어서며 문을 열어 보았다.

「왜 그러유?」

처음 보는 아낙네가 마루 끝에 와 섰다. 달빛에 비끼어 검붉은 얼굴이 해쓱하다. 추운 모양이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에 둘렀던 왜수건을 벗어 들고는 다른 손으로 흩어진 머리칼을 쓰담아올리며 수줍은 듯이 쭈뼛쭈뼛한다.

「저어, 하룻밤만 드새고 가게 해주세유.」

남정네도 아닌데 이 밤중에 웬일인가, 맨발에 짚신짝으로, 그야 아무렇던……

「어서 들어와 불 쬐게유.」

나그네는 주춤주춤 방 안으로 들어와서 화로 곁에 도사려 앉는다. 낡은 치맛자락 위로 삐지려는 속살을 아무리자 허리를 지그시 튼다. 그리고는 묵묵하다. 주인은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밥을 좀 주려느냐고 물어보아도 잠자코 있다.

그러나 먹던 대궁을 주워 모아 짠지쪽하고 갖다 주니 감지덕지 받는다. 그리고 물 한 모금 마심 없이 잠깐 동안에 밥그릇의 밑바닥을 긁는다.

밥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주인은 이야기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미주알고주알 물어보니 이야기는 지수가 없다. 자기로도 너무 지쳐 물은 듯싶은 만치 대구 추근거렸다. 나그네는 싫단 기색도 좋단 기색도 별로 없이 시나브로 대꾸하였다. 남편 없고 몸 붙일 곳 없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고 난 뒤,

「이리 저리 얻어먹고 단게유.」 하고 턱을 가슴에 묻는다.

첫 닭이 홰를 칠 때 그제야 마을갔던 덕돌이가 돌아온다. 문을 열고 감사나운 머리를 디밀려다 낯선 아낙네를 보고 눈의 휘둥그렇게 주춤한다. 열린 문으로 억센 바람이 몰아들며 방 안이 캄캄하다. 주인은 문 앞으로 걸어와 서며 덕돌이의 등을 뚜덕거린다. 젊은 여자 자는 방에서 떠꺼머리 총각을 재우는 건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얘, 덕돌아, 오늘은 마을 가 자고 아침에 온.」


가을할 때가 지났으니 돈냥이나 좋이 퍼질 때도 되었다. 그 돈들이 어디로 몰키는지 이 술집에서는 좀체 돈맛을 못 본다. 술을 판대야 한 초롱에 오륙십 전 떨어진다. 그 한 초롱을 잘 친대도 사날씩이나 걸리는 걸 요새 같아선 그 잘량한(‘알량한’ 사투리) 술군까지 씨가 말랐다. 어쩌다 전일에 퍼놓았던 외상값도 갖다줄 줄을 모른다. 홀어미는 열벙거지가 나서 이른 아침부터 돈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그러나 다리품을 들인 보람도 없었다. 낼 사람이 즐겨야 할 텐데 우물쭈물하며 한단 소리가 좀 두고 보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날이 양식은 달리고 지점집에서 집행을 하느니 뭘 하느니 독촉이 어지간치 않음에랴……

「저도 이젠 떠나야겠세유.」

그가 조반 후 나들이옷을 바꾸어 입고 나서니 나그네도 따라 일어선다. 그의 손을 자상히 붙잡으며 주인은,

「고달플 테니 며칠 더 쉬어 가게유」 하였으나,

「가야지유. 너무 오래 신세를……」

「그런 염려는 말구.」라고 누르며 집 지켜 주는 셈치고 방에 누웠으라 하고는 집을 나섰다.

백두고개를 넘어서 안말로 들어가 해동갑으로 헤매었다. 헤실수로 간 곳도 있기야 하지만 맑았다. 해가 지고 어두울 녘에야 그는 흘부들해서 돌아왔다. 좁쌀 닷 되밖에는 못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돈 낼 생각은커녕 이러면 다시 술 안 먹겠다고 도리어 얼러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만도 다행이다. 아주 못 받느니보다는 끼니때 가지었다. 그는 좁쌀을 씻고 나그네는 솥에 불을 지피어 부랴부랴 밥을 짓고 일변 상을 보았다.

밥들을 먹고 앉았으려니깐 갑자기 술군이 몰려든다. 이거 웬일일까. 처음에는 하나가 오더니 다음에는 세 사람 또 두 사람 모두 젊은 축들이다. 그러나 각각들 먹일 방이 없으므로 주인은 좀 망설이다가 그 연유를 말하였으나 뭐 한 동리 사람인데 어떠냐, 한데서 먹게 해달라는 바람에 얼씨구나 하였다. 이제야 운이 트나보다. 양푼에 막걸리를 딸쿠어 나그네에게 주어 솥에 넣고 좀 속히 데워 달라 하였다. 자기는 치마꼬리를 휘둘러 가며 잽싸게 안주를 장만한다. 짠지, 동치미, 고추장, 특별 안주로 삶은 밤도 놓았다. 사촌동생이 맛보라고 며칠 전에 갖다 준 것을 애껴 둔 것이었다.

방안은 떠들썩하다. 벽을 두드리며 아리랑 찾는 놈에 건으로 너털웃음 치는 놈, 혹은 수군숙덕하는놈, 가지각색이다. 주인이 술상을 받쳐 들고 들어가니 짜기나 한 듯이 일제히 자리를 바로 잡는다. 그 중에 얼굴 넓적한 하이칼라 머리가 야로가 나서 상을 받으며 주인 귀에다 입을 비벼 대인다.

「아주머니 젊은 갈보 사 왔다지유? 좀 보여 주게유.」

영문 모를 소문도 다 듣는다.

「갈보라니 웬 갈보?」 하고 어리삥삥하다 생각을 하니, 턱없는 소리는 아니다. 눈치 있게 부엌으로 내려가서 보강지1 앞에 앉았는 나그네의 머리를 은근히 끌어안았다. 자, 저패들이 새댁을 갈보로 횡보고 찾아온 맥이다. 물론 새댁편으론 망측스러운 일이겠지만 달포나 손님의 그림자가 드물던 우리 집으로 보면 재수의 빗발이다. 술국을 잡는다고 어디가 떨어지는 게 아니요, 욕이 아니니 나를 보아 오늘만 좀 팔아 주기 바란다, 이런 의미를 곰살궂게 간곡히 말하였다. 나그네의 낮은 별반 변함이 없다. 늘 한 양으로 예사로이 승낙하였다.

술이 온몸에 돌고 나서야 뒷술이 잔풀이가 난다. 한 잔에 5전, 그저 마시긴 아깝다. 얼간한 상투배기가 계집의 손목을 탁 잡아 앞으로 끌어당기며,

「권주가 좀 해, 이건 뀌어온 보릿자룬가?」

「권주가? 뭐야유?」

「권주가? 이 갈보가 권주가도 모르나. 으하하하하」 하고는 무안에 취하여 푹 숙인 계집 뺨에다 꺼칠꺼칠한 턱을 문질러 본다. 소리를 아무리 시켜도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만 기울일 뿐, 소리는 못 하나 보다. 그러나 노래 못하는 꽃도 좋다. 계집은 영 내리는 대로 이 무릎 저 무릎으로 옮아 앉으며 턱 밑에다 술잔을 받쳐 올린다.

술들이 담뿍 취하였다. 두 사람은 곯아져서 코를 곤다. 계집이 칼라머리 무릎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워 올릴 때 코웃음을 흥 치더니 그 무지스러운 손이 계집의 아래 뱃가죽을 사양 없이 움켜잡는다. 별안간 <아야!> 하고 퍼들껑하더니 계집의 몸뚱아리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다 도로 떨어진다.

「이 자식아 너만 돈 내고 먹었니?」

한 사람 새두고 앉았던 상투가 콧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맨발 벗은 계집의 두 발을 양손에 붙잡고 가랑이를 쩍 벌려 무릎 위로 지르르 끌어올린다. 계집은 앙탈을 한다. 눈시울에 눈물이 엉기더니 불현듯이 쪼록 쏟아진다.

방 안에서 왱마가리 소리가 끓어오른다.

「저 잡놈 보게, 으하하하하.」

술은 연실 데워서 들어가면서도 주인은 불안하여 마음을 졸였다. 겨우 마음을 놓은 것은 훨씬 밝아서다.

참새들은 소란히 지저귄다. 기직바닥이 부스럼 자죽보다 질배없다. 술, 짠지쪽, 가래침, 담뱃재 뭣해 너저분하다. 우선 한길치에 자리를 잡고 계배를 대 보았다. 마수걸이가 85전, 외상이 2원 각수다. 현금 85전, 두 손에 들고 앉아 세고 또 세어보고……

뜰에서는 나그네의 혀로 끌어올리는 인사,

「안녕히 가시게유.」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나두」


찌르쿵! 찌르쿵! 찔거러쿵!

「방앗머리가 무겁지유?…… 고만 까불을까.」

「들 익었세유. 더 찧어야지유.」

「그런데 얘는 어쩐 일이야……」

덕돌이를 읍에 보냈는데 날이 저물어도 여태 오지 않는다. 흩어진 좁쌀을 확에 쓸어 넣으며 홀어머니는 퍽으나 애를 태운다. 요새 날씨가 차지니까 늑대, 호랑이가 차차 마을로 찾아 내린다. 밤길에 고개 같은 데서 만나면 끽 소리도 못하고 욕을 당한다.

나그네가 방아를 괴놓고 내려와서 키로 확의 좁쌀을 담아 올린다. 주인은 그 머리를 쓰담고 자기의 행주치마를 벗어서 그 위에 씌워 준다. 계집의 나이 열아홉이면 활짝 필 때이건만 버케된 머리칼이며 야윈 얼굴이며 벌써부터 외양이 시들어 간다. 아마 고생을 진한 탓이리라.

날씬한 허리를 재빨리 놀려가며 일이 끊일 새 없이 다구지게2 덤벼드는 그를 볼 때 주인은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일변 측은도 하였다. 뭣하면 딸과 같이 자기 집에서 길게 살아주었으면 상팔자일 듯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소 한 마리와 바꾼대도 이것만은 안 내놓으리라고 생각도 하였다.

아들만 데리고 홀어머니의 생활은 무던히 호젓하였다. 그런데다 동리에서는 속 모르는 소리까지 한다. 떠꺼머리 총각을 그냥 늙힐 테냐고. 그러나 형세가 부치므로 감히 엄두도 못 내다가 겨우 올 봄에서야 다붙어 서둘게 되었다. 의외로 일은 손쉽게 되었다. 이리저리 언론이 돌더니 남촌산에 어느 집 둘째 딸과 혼약하였다. 일부러 홀어미는 40리 밖이나 걸어서 색시의 손등을 문질러 보고는,

「참 애기 잘도 생겹세!」

좋아서 사돈에게 칭찬을 뇌고 뇌곤 하였다.

그런데 없는 살림에 빚을 내어 혼수를 다 꼬매 놓은 뒤였다. 혼인날을 불과 이틀 격해 놓고 일이 그만 빗났다. 처음에야 그런 말이 없더니 난데 없는 선채금 30원을 가져 오란다. 남의 돈 3원과 집의 돈 5원으로 거추군에게 품삵 노비 주고 혼수하고 단지 2원……잔치에 쓸 것밖에 안 남고 보니 30원이란 입내도 못 낼 소리다. 그 밤, 그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넋 잃은 팔을 던져 가며 통 밤을 새웠던 것이다.

「어머님! 진지 잡수세유.」

새댁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끔찍이 귀여우리라. 이것이 단 하나의 그의 소원이었다.

「다리 아프지유? 너머 일만 시켜서……」

주인은 저녁 좁쌀을 쓸어 넣다가 방앗다리에 깝신대는 나그네를 걸쌈스럽게 쳐다본다. 방아가 무거워서 껍적이며 잘 오르지 않는다. 가냘픈 몸이라 상혈이 되어 두 볼이 샛밝아케 색색거린다. 치마도 치마려니와 명지 저고리는 어찌 삭았는지 어깨께가 손바닥만 하게 척 나갔다. 그러나 덕돌이가 왜포 다섯 자를 바꿔 오거든 첫대 사발허통된 솟곳부터 해입히고 차차 할 수밖엔 없다.

「같이 찝시다유.」

주인도 남저지3 방앗다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찌껑 위에 놓인 나그네의 손을 눈치 채지 않게 슬며시 쥐어보았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이만한 며느리만 얻어도 좋으련만. 나그네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열적어서4 시선을 돌렸다.

「퍽도 쓸쓸하지유!」 하며 손으로 울 밖을 가리킨다. 첫밤 같은 석양판이다. 색동저고리를 떨쳐입고 산들은 거방진 방앗소리를 은은히 전한다. 찔그러쿵! 찌러쿵!

그는 나그네를 금덩이같이 위하였다. 없는 대로 자긔옷가지도 서로 서로 별러 입었다. 그리고 잘 때에는 딸과 진배없이 이불 속에서 품에 꼭 품고 재우곤 하였다. 하지만 자기의 은근한 속심은 차마 입에 드러내어 말을 못 건넸다. 잘 들어주면이어니와 뭣하게 안다면 피차의 낯이 뜨뜻할 일이었다.

그러나 맘먹지 않았던 우연한 일로 인하여 마침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그네가 온 지 나흘 되던 날이었다. 거문관이 산기슭에 있는 영길네 벼방아를 좀 와서 찧어 달라고 한다. 나그네는 줄밤을 새우므로 낮에나 푸근히 자라고 두고 그는 홀로 나섰다.

머리에 겨를 보얗기 쓰고 맥이 풀려서 집에 돌아온 것은 이럭저럭 으스레하였다. 늙은 다리를 끌고 뜰 앞으로 향하다가 그는 주춤하였다. 나그네 홀로 자는 방에 덕돌이가 들어갈 리 만무한데 정녕코 그놈일 게다. 마루 끝에 자그마한 나그네의 짚세기5이 놓인 그 옆으로 질목채 벗은 왕달 짚세기이 왁살스럽게 놓였다. 그리고 방에서는 수군수군 낮은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무심코 닫은 방문께로 귀를 기울였다.

「그럼 와 그러는 게유? 우리 집이 굶을까봐 그러시유?」

「……」

「어머이도 사람은 좋아유……올해 잘만 하면 내년에는 소 한 마리 사 놀 게구, 농사만 해두 한 해에 쌀 넉 섬, 조 엿 섬, 그만하면 고만이지유……내가 싫은 게유?」

「……」

「사내가 죽었으니 아뭏든 얻을 게지유?」

옷 터지는 소리, 부시럭거린다.

「아이! 아이! 아이! 참! 이거 노세유」

쥐죽은 듯이 감감하다. 허공에 아롱거리는 낙엽을 이윽히 바라보며 그는 빙그레 한다. 신발 소리를 죽이고 뜰 밖으로 다시 돌쳐섰다.

저녁상을 물린 후 그는 시치미를 딱 떼고 나그네의 기색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젊은 아낙네가 홀몸으로 돌아다닌대두 고생일 게유. 또 어차피 사내는……」

여기서부터 사리에 맞도록 이 말 저 말을 주섬주섬 꺼내 오다가 나의 며느리가 되어 줌이 어떻겠느냐고 확 토파를 지었다. 치마를 흡싸고 앉아 갸웃이 듣고 있던 나그네는 치마끈을 깨물며 이마를 떨어뜨린다. 그러고는 두 볼이 발개진다. 젊은 계집이 나 시집 가겠소 하고 누가 나서랴. 이만하면 합의한 거나 틀림없을 것이다.

혼수는 전에 해둔 것이 있으니 한시름 잊었다. 그대로 이앙이나 고쳐서 입히면 고만이다. 돈 2원은 은비녀, 은가락지 사다가 각별히 색시에게 선물 내리고……

일은 밀수록 낭패가 많다. 급시로 날을 받아서 대례를 치렀다. 한편에서는 국수를 누른다. 잔치 보러 온 아낙네들은 국수 그릇을 얼른 받아서 후룩후룩 들이마시며 시악시 잘났다고 추었다.

주인은 즐거움에 너무 겨워서 축배를 흥건히 들었다. 여간 경사가 아니다. 뭇사람을 비집고 안팎으로 드나들며 분부하기에 손이 돌지 않는다.

「얘 메누라! 국수 한 그릇 더 가져온!」

어째 말이 좀 어색하구먼……다시 한 번,

「메누라, 애야! 얼른 가져와.」

30을 바라보자 동곳을 찔러 보니 제불에 멋이 질려 비드름하다. 덕돌이는 첫날을 치르고 부썩부썩 기운이 난다. 남이 두 단을 털 제면 그의 볏단은 석 단 째 풀려 나간다. 연방 손바닥에 침을 뱉어 붙이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끅! 끅! 끅! 찍어라. 굴려라 끅! 끅!」

동무의 품앗이 일이다. 거무무투록한 젊은 농군 댓이 볏단을 번차례로 집어든다. 열에 뜬 사람같이 식식거리며 세차게 벼알을 절구통배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얘! 장가 들고 한 턱 안 내니?」

「일색이더라. 단단히 먹자. 닭이냐? 술이냐? 국수냐?」

「웬 국수는? 너는 국수만 아느냐?」

저희끼리 찧고 까분다. 그들은 일을 놓으며 옷깃으로 땀을 씻는다. 골바람이 벼 깔치6를 부옇게 풍긴다. 옆 산에서 푸드덕 하고 꿩이 날며 머리 위를 지나간다. 갈퀴질을 하던 얼굴 넓적이가 갈퀴를 놓고 씽긋하더니 달려든다. 장난군이다. 여러 사람의 힘을 빌어 덕돌이 입에다 헌 짚신짝을 물린다. 버들껑거린다. 다시 양 귀를 두 손에 잔뜩 훔켜잡고 끌어 와서는 털어놓은 벼 무더기 위에 머리를 틀어박으며 동서남북으로 큰절을 시킨다.

「야아! 야아! 아!」

「아니다, 아니야. 장갈 갔으면 산신령에게 이러하다 말이 있어야지, 괜시리 산신령이 노하면 눈깔망나니(호랑이) 내려보낸다.」

뭇 웃음이 터져 오른다. 새신랑의 옷이 이게 뭐냐, 볼기짝에 구멍이 뚫리고……빈정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덕돌이는 상투의 먼지를 털고 나서 곰방대를 피워 물고는 싱그레 웃어치운다. 좋은 옷은 집에 두었다. 인조견 조끼, 저고리, 새하얀 옥당목 겹바지, 그러나 애끼는 것이다. 일할 때엔 헌 웃을 입고 집에 돌아와 쉴 참에나 입는다. 잘 때에도 모조리 벗어서 더럽지 않게 착착 개어 머리맡 위에 놓고 자곤 한다. 의복이 남루하면 인상이 추하다. 모처럼 얻은 귀여운 아내니 행여나 마음이 돌아앉을까 미리미리 사려 두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29년 만에 누런 이 조각에다 이제서야 소금을 발라 본 것도 이 까닭이었다.

덕돌이가 볏단을 다시 집어 올릴 제 그 이웃에 사는 돌쇠가 옆으로 와서 품을 안는다.

「얘 덕돌아! 너 내일 우리 조마댕이 좀 해 줄래?」

「뭐 어째?」 하고 소리를 빽 지르고는 그는 눈귀가 실룩하였다.

「누구보고 해라야? 응? 이 자식 까놀라.」

이제까진 턱없이 지냈단대도 오늘의 상투를 못 보는가?

바로 그날이었다. 웃간에서 혼자 새우잠을 자고 있던 홀어머니는 놀라 눈이 번쩍 띄었다. 만뢰 잠잠한 밤중이다.

「어머니! 그게 달아났에유, 내 옷도 없구……」

「응?」 하고 반마디 소리를 치며 얼떨김에 그는 캄캄한 방안을 더듬어 아랫간으로 넘어섰다. 황량히 등잔에 불을 댕기며,

「그래 어디로 갔단 말이야?」

영산이 나서 묻는다. 아들은 벌거벗은 채 이불로 앞을 가리고 앉아서 징징거린다. 옆자리에는 빈 베개뿐 사람은 간 곳이 없다. 들어본즉 온종일 일하기에 피곤하여 아들은 자리에 들자 고만 세상을 잊었다. 하기야 그때 안해도 옷을 벗고 누워서 맞붙어 잤던 것이다. 그는 보통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새침하니 드러누워서 천정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다가 벼란간 오줌이 마렵기에 요강을 좀 집어 달래려고 보니 뜻밖에 품안이 허룩하다.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다. 그래서는 어림짐작으로 우선 머리맡 위에 놓았던 옷을 더듬어 보았다. 딴은 없다.

필연 잠든 틈을 타서 살며시 옷을 입고 자기의 옷이며 버선까지 들고 내뺐음이 분명하리라.

「도적년!」

모자는 관솔에 불을 켜 들고 나섰다. 부엌과 잿간을 뒤졌다. 그리고 뜰 앞 수풀 속도 낱낱이 찾아봤으나 흔적도 없다.

「그래도 방 안을 다시 한 번 찾아보자.」

홀어미는 구태여 며느리를 도적년으로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거반 울상이 되어 허벙저벙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을 가라앉혀 들쳐 보니 아니나 다르랴 며느리 베개 밑에서 은비녀가 나온다. 달아날 계집 같으면 이 비싼 은비녀를 그냥 두고 갈 리 없다.

두말없이 무슨 병패가 생겼다. 홀어미는 아들을 데리고 덜미를 잡히는 듯 문 밖으로 찾아 나섰다.


마을에서 산길로 빠져나는 어귀에 우거진 숲 사이로 비스듬히 언덕길이 놓였다. 바로 그 밑에 석벽을 끼고 깊고 푸른 웅덩이가 묻히고 넓은 그 물이 겹겹 산을 에돌아 약 10리를 흘러내리면 신영강 중턱을 뚫는다. 시새에 반쯤 파묻히어 번들대는 큰 바위는 내를 싸고 양쪽으로 질펀하다. 꼬부랑길은 그 틈바귀로 뻗었다. 좀체 걷지 못할 자갈길이다. 내를 몇 번 건너고 험상궂은 산들을 비켜서 한 5마장 넘어야 겨우 길다란 길을 만난다. 그리고 거기서 좀더 간 곳에 냇가에 외지게 잃어진 오막살이 한 간을 볼 수 있다. 물방앗간이다. 그러나 이제는 밥을 찾아 흘러가는 뜬 몸들의 하룻밤 숙소로 변하였다. 벽이 확 나가고 네 기둥뿐인 그 속에 힘을 잃은 물방아는 을씨년궂게 모로 누웠다. 거지도 그 옆에 홑이불 위에 거적을 쓰고 누웠다. 거푸진 신음이다. 으! 으! 으응! 서까래 사이로 달빛은 쌀쌀히 흘러든다. 가끔 마른 잎을 뿌리며……

「여보 자우? 일어나게유 얼핀.」

계집의 음성이 나자 그는 꾸물거리며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너털대는 홑적삼의 깃을 여며 잡고는 덜덜 떤다.

「인제 고만 떠날테이야? 쿨룩……」

말라빠진 얼굴로 계집을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물었다.

10분 가량 지났다. 거지는 호사하였다. 달빛에 번쩍거리는 겹옷을 입고서 지팡이를 끌며 물방앗간을 등졌다. 골골 하는 그를 부축하여 계집은 뒤에 따른다. 술집 며느리다.

「옷이 너무 커, 좀 작았으면……」

「잔말 말고 어여 갑시다, 펄쩍…….」

계집은 부리나케 그를 재촉한다. 그리고 연해 돌아다보길 잊지 않았다. 그들은 강길로 향한다. 개울을 건너 불거져 내린 산모퉁이를 막 꼽뜨리려 할 제다. 멀리 뒤에서 사람 욱이는 소리가 끊일 듯 날 듯 간신히 들려온다. 바람에 묻히어 말소리는 모르겠으나 재없이 덕돌이의 목성임은 넉히 짐작할 수 있다.

「아 얼른 좀 오게유.」

똥끝이 마르는 듯이 계집은 사내의 손목을 겁겁히 잡아끈다. 병든 몸이라 끌리는 대로 뒤툭거리며 거지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같이 사라진다. 수은빛 같은 물방울을 뿜으며 물결은 산벽에 부닥뜨린다. 어디선지 지정치 못할 늑대 소리는 이산 저산서 와글와글 굴러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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