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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 앉은 그를 매우 흥미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무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민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옷을 한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말도 곧잘 철철 대이거니와 중국말에도 그리 서툴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꼬마데 오이데 데스까?(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첫마디를 걸더니만, 도꼬가 어떠니, 오사까가 어떠니, 조선 사람은 고추를 끔찍이 많이 먹는다는 둥, 일본 음식은 너무 싱거워서 처음에는 속이 뉘엿걸다는 둥, 횡설수설 지껄이다가 일본 사람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짧게 끊은 꼿꼿한 윗수염을 비비면서 마지못해 까땍까땍하는 고개와 함께 “소데스까(그렇습니까)”란 한 마디로 코대답을 할 따름이요, 잘 받아 주지 않으매, 그는 또 중국인을 붙들고서 실랑이를 하였다. “니상나열취……” “니싱섬마”하고 덤벼 보았으나 중국인 또한 그 기름낀 뚜우한 얼굴에 수수께끼 같은 웃음을 띨 뿐이요 별로 대구를 하지 않았건만, 그래도 무어라고 연해 웅얼거리면서 나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짐승을 놀리는 요술장이가 구경꾼을 바라볼 때처럼 훌륭한 재주를 갈채해 달라는 웃음이었다. 나는 쌀쌀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주적대는 꼴이 어줍지 않고 밉살스러웠다. 그는 잠깐 입을 닫치고 무료한 듯이 머리를 덕억덕억 긁기도 하며, 손톱을 이로 물어뜯기도 하고,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다가, 암만해도 중절대지 않고는 못 참겠던지 문득 나에게로 향하며, “어디꺼정 가는 기오?”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붙인다.

“서울까지 가요.”

“그런기오. 참 반갑구마. 나도 서울꺼정 가는데. 그러면 우리 동행이 되겠구마.”

나는 이 지나치게 반가와하는 말씨에 대하여 무어라고 대답할 말도 없고, 또 굳이 대답하기도 싫기에 덤덤히 입을 닫쳐 버렸다.

“서울에 오래 살았는기요?”

그는 또 물었다.

“육칠년이나 됩니다.”

조금 성가시다 싶었으되, 대꾸 않을 수도 없었다.

“에이구, 오래 살았구마, 나는 처음길인데 우리 같은 막벌이군이 차를 내려서 어디로 찾아가야 되겠는기요? 일본으로 말하면 기전야도 같은 것이 있는기오?”

하고 그는 답답한 제 신세를 생각했던지 찡그려 보았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이 웃기보다 찡그리기에 가장 적당한 얼굴임을 발견하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겅성드뭇한 눈썹이 올올이 일어서며, 아래로 축 처지는 서슬에 양미간에는 여러 가닥 주름이 잡히고, 광대뼈 위로 뺨살이 실룩실룩 보이자 두 볼은 쪽 빨아든다. 입은 소태나 먹은 것처럼 왼편으로 삐뚤어지게 찢어 올라가고, 죄던 눈엔 눈물이 괸 듯 삼십 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그 얼굴이 10년 가량은 늙어진 듯하였다. 나는 그 신산스러운 표정에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하였다.

“글쎄요, 아마 노동 숙박소란 것이 있지요.”

노동 숙박소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묻고 나서,

“시방 가면 무슨 일자리를 구하겠는기오?”

라고 그는 매달리는 듯이 또 꽤쳤다.

“글쎄요, 무슨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는지요.”

나는 내 대답이 너무 냉랭하고 불친절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일자리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외에 더 좋은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흠, 고향에서 오누마.”

하고 그는 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의 신세타령의 실마리는 풀려 나왔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따른 동리였다. 한 백호 남짓한 그곳 주님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부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 척식 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지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료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이 3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갔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 봄에(그의 나이는 실상 스물여섯이었다. 가난과 고생이 얼마나 사람을 늙히는가?) 그의 집안은 살기 좋다는 바람에 서간도로 이사를 갔었다. 쫓겨가는 운명이거든 어디를 간들 신신하랴. 그곳의 비옥한 전야도 그들을 위하여 열려질 리 없었다. 조금 좋은 땅은 먼저 간 이가 모조리 차지하였고 황무지는 비록 많다 하나 그곳 당도하던 날부터 아침거리 저녁거리 걱정이랴. 무슨 행세로 적어도 1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먹고 입어 가며 거친 땅을 풀 수가 있으랴. 남의 밑천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보니, 가을이 되어 얻는 것은 빈주먹뿐이었다. 이태 동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버티어 갈 제, 그의 아버지는 망연히 병을 얻어 타국의 외로운 혼이 되고 말았다. 열아홉 살밖에 안된 그가 홀어머니를 보시고 악으로 악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중 4년이 못되어 영양 부족한 몸이 심한 노동에 지친 탓으로 그의 어머니 또한 죽고 말았다.

“모친까장 돌아갔구마.” “돌아가실 때 흰죽 한 모금도 못 자셨구마.”하고 이야기하던 이는 문득 말을 뚝 끊는다. 나는 무엇이라고 위로할 말을 몰랐다. 한동안 머뭇머뭇이 있다가 나는 차를 탈 때에 친구들이 사준 정종병 마개를 빼었다. 찻잔에 부어서 그도 마시고 나도 마셨다. 악착한 운명이 던져 준 깊은 슬픔을 술로 녹이려는 듯이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시는 그는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후 그는 부모 잃은 땅에 오래 머물기 싫었다. 신의주로, 안동현으로 품을 팔다가 일본으로 또 벌이를 찾아가게 되었다. 규슈 탄광에 있어도 보고, 오사까 철공장에도 몸을 담아 보았다. 벌이는 조금 나았으나 외롭고 젊은 몸은 자연히 방탕해졌다. 돈을 모으려야 모을 수 없고 이따금 울화만 치받치기 때문에 한곳에 주접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나고 고국 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훌쩍 뛰어나왔다가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보고 벌이를 구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했다.

“고향에 가시니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습디까?”

나는 탄식하였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다 뮌기오, 고향이 통 없어졌더마.”

“그렇겠지요. 9년 동안이나 퍽 변했겠지요.”

“변하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없더마.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마.”

“그러면, 아주 폐농이 되었단 말씀이오?”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 만 담만 즐비하게 남았드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 남았는기오, 암만 찾아도 못 찾겠더마. 사람 살던 동리가 그렇게 된 것을 혹 구경했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 한 목은 높아졌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호 살던 동리가 10년이 못 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이윽고 나는 이런 말을 물었다.

“그래, 이번 길에 고향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났습니까?”

“하나 만났구마, 단지 하나.”

“친척되는 분이던가요?”

“아니구마, 한 이웃에 살던 사람이구마.”

하고 그의 얼굴은 더욱 침울했다.

“여간 반갑지 않으셨지어요.”

“반갑다마다, 죽은 사람을 만난 것 같더마. 더구나 그 사람은 나와 까닭도 좀 있던 사람인데……”

“까닭이라니?”

“나와 혼인 말이 있던 여자구마.”

“하아!”

나는 놀란 듯이 벌린 입이 닫혀지지 않았다.

“그 신세도 내 신세만 하구마.”

하고 그는 또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보다 나이 두 살 위였는데, 한이웃에 사는 탓으로 같이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자라났다. 그가 열 네살 적부터 그들 부모들 사이에 혼인 말이 있었고 그도 어린 마음에 매우 탐탁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열일곱 살 된 겨울에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아버지되는 자가 20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처녀 가족은 그 동리에서 못 살고 멀리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는 물론 피차에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하였다. 이번에야 빈터만 남은 고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그 아내될 뻔한 댁과 마주치게 되었다.

처녀는 어떤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20원 몸값을 10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빚이 60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 주고, 작년 가을에야 놓아 준 것이었다.

궐녀도 자기와 같이 10년 동안이나 그리던 고향에 찾아오니까 거기에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쓸쓸한 돌무더기만 눈물을 자아낼 뿐이었다. 하루해를 울어 보내고 읍내로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10년 동안에 한 마디 두 마디 배워 두었던 일본말 덕택으로 그 일본 집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암만 사람이 변하기로 어째 그렇게도 변하는기오? 그 숱 많던 머리가 훌렁 다 벗을졌두마. 눈을 푹 들어가고 그 이들이들하던 얼굴빛도 마치 유산을 끼얹은 듯하더마.”

“서로 붙잡고 많이 우셨겠지요”

“눈물도 안 나오더마. 일본 우동집에 들어가서 둘이서 정종만 열병 때려뉘고 헤어졌구마.”

하고 가슴을 짜는 듯한 괴로운 한숨을 쉬더니만 그는 지난 슬픔을 새록새록 자아내어 마음을 새기기에 지쳤음이더라.

“이야기를 다하면 뭐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나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자, 우리 술이나 마자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주거니받거니 한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1926>
[출처]http://www.jikji.org/%EA%B3%A0%ED%96%A5?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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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식은 관청 사무를 끝내고서 집에 돌아왔다. 얼굴빛이 조금 가무스름한데 노란빛이 돌며, 멀리 세워 놓고 보면 두 눈이 쑥 들어 간 것처럼 보이도록 눈 가장자리가 가무스름 한데 푸른빛이 섞이었다. 어디로 보든지 호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삼십 내외의 청년이다. 문에 들어선 주인을 본 아내는 웃었는지 말았는지 눈으로 인사를 하고 모자와 웃옷을 받아서 의걸이에 걸며,

“오늘 어째 이렇게 일찍 나오셨소?”

하며 조금 꼬집어 뜯는 듯한 수작을 농담 비슷이 꺼낸다. 영식은 칼라를 떼면서 체경 앞에 서서,

“이르긴 무엇이 일러, 시간대로 나왔는데”

하고 피곤한 듯이 약간 상을 찌푸렸다.

“누가 퇴사 시간을 몰라서 하는 말요?”

”그럼.”

“오늘은 밤을 새고 들어오지를 않았으니까 말예요.”

영식의 아내는 구가정 부인으로 나이가 한 두 살 위다. 거기다가 애를 여럿 낳고 또 시집살이를 어려서부터 한 탓으로 얼굴이 몹시 여윈데다가 몸에 병이 잦아서 영식에게 대면 아주머니 뻘이나 돼 보인다. 그런데다가 히스테리 기운이 있어 몹시 질투를 하는 성질 이었다.

“내가 언제든지 밤을 새우고 다녔소? 어쩌다 한 번 그런 때가 있지.”

“어쩌다가 무엇이오? 나는 뻔뻔스러워서도 그런 말은 할 수가 없겠소.”

“무엇이 뻔뻔하단 말이요? 어젯저녁 하루밖에 더 새고 들어왔소?”

“무엇요? 아이 기가 막혀. 그끄저께에는 새벽 다섯 시에 들어왔죠. 또 지난번 공일날은 일곱 시에나 들어오지 않으셨소?”

영식은 씽긋 웃어 굴복한다는 뜻을 표하고도 그래도 버티어 보느라고,

“그때야 연회에서 늦어서 자연히 그렇게 되었지 내가 일부러 그랬나?”

“저런 걸핏하면 연회니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구식 여자라고 속이것다. 그렇지만 나는 못 속여요. 그 이튿날 당신 양복 주머니를 보니까 하이칼라 향수 냄새가 나는 여자 수건이 들었는데그래?”

“허허, 수건이 있기로 그렇게 이상할 건 없지. 요리집에서 기생의 수건을 술김에 넣고 온 게지.”

이 말을 듣더니 주인 아내는 서랍을 와락 열더니 꽃봉투에 넣은 편지 한 장을 쑥 내놓 으며,

“이것도 요리집에서 술김에 넣어 준 손수건이요? 자! 어서 오늘 저녁에는 이 편지한 여자에게 가서 밤이나 새고 오시우! 나같이 늙어 빠씬 년을 어떻게 당신같이 젊은이가 생각할 수 있겠소.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지.”

영식은 봉투를 물끄러미 보다가 상을 잠간 찌푸리며,

“이게 어디서 왔소?”

하며 피봉을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았다. 주인 아내는 소리를 포달스럽게 툭 쏘아서,

“누가 알우! 그것을 날더러 물어 본단 말요. 저런 사내들은 능청맞단 말야. 편지 하라고 번지수 알으켜 줄 적은 언제고 지금 와서 시치미를 딱 떼고 어름어름한다. “

영식은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것 모양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편지 보낸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없으니 누군 줄 알 수 있나‥‥‥”

속으로는 벌써 알아챈 것이 있으나 부인이 옆에서 감시를 하므로 어물어물하는 수작을 한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은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주소나 이름을 말할 것도 없이 안다는 뜻이 아니요. 어서 반갑거든 그대로 반갑다고 그래요. 다른 사연 있겠소? 오늘 밤에 오라는 것이겠지.”

“아따 퍽도 그러네. 편지를 한두 장 받는 터가 아니요 어떻게 안단 말이요. 하지만 누군지는 몰라도 남에게 편지를 하려면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쓰는 법이지‥‥‥ 아냐 도루 우체통에 넣어 버려.”

하고 짐짓 화나는 체하고 편지를 뜯지도 않고 장머리에다 올려 놓았다. 그것은 아내의 마음이 풀리면 슬그머니 갖다 보자는 수작이다.

“왜 보시지를 않소? 어서 보고 가 보시구려. 내 혼자 집보고 있을께.”

서로 이렇게 찧고 까불다가 아내가,

“대관절 나는 혼까 살림살이는 참 못 하겠소.“

하고 주인의 약점을 쥐인지라 거침없이 요구가 나온다.

“할멈이 간 후에 혼자 숱한 살림살이를 하자니까 사람이 죽겠구려.“

“왜 사람 하나를 얻으라니까 얻지 않고 그래.”

“사람이 어디 고렇게 입에 맞은 떡처럼 있소.“

“그래도 수소문하면 있겠지.”

“그런데 나리.“

이번에는 아내 쪽이 수그러지며 말소리가 공손해진다.

“왜 그러우?”

하는 영식의 얼굴에는 위엄을 꾸몄다.

“저 오늘 박주사댁이 와서 사람 하나를 지시하마 하였는데 당장에라도 불러올 수 있다고, 자식도 없고 서방도 없는데 일을 썩 잘한대.“

하며 주인을 타이르기에 전력을 다하다시피 한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데?”

영식이 나이 묻는 것도 싫어서,

“나이는 아무렇거나 알아 무엇하시료?”

”아따 나이 좀 물은 것이 잘못이란 말이요?”

“나이는 퍽 젊답디다. 자세 물어 보지는 않았으나 그렇지만 일도 잘하고 사람도 괜찮대.”

나이 젊다는 것을 들은 영식은 비록 이상한 야심이 생긴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기어서,

“그러면 데려오구려. 월급은 전에 있던 노파와 똑같이 주겠지?”

“그렇지.”

아내는 잠간 주저주저하더니 말할 듯 말 듯 하더니 급기야 입을 열면서,

“그런데요, 인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주사댁 말을 들으면 인물 하나가 안되었다고.”

주인이 말을 듣더니,

“인물이 어떻기에?”

하며 놀라는 듯이 아내를·본다.

“그게 아니라 어려서 불에 디어 얼굴을 찍어맸다구요.“

“그럼 보기 싫을걸.”

“그래서 박주사댁도 보고서 쓰랴거든 쓰고 말랴거든 말라는데 얼굴야 무슨 상관 있소, 일만 잘하면 고만이지.”

“그렇지만 너무 보기 싫으면 어떻게 하우?”

“보기 싫어도 눈 있고 코 있겠지 반쪽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안됐어, 사람이란 인상이 나쁘면 못써. 더구나 친구가 많이 다니는 우리 집에서 불쾌하게 보여서는 안될걸. 외국에서는 호텔이나 큰 상점의 여사무원도 무엇보다도 인불 시험부터 본다우.”

“글쎄 인물만 해반주룩하면 무엇하우. 일이 첫째 목적인데 일만 잘 하면 고만이지 인물만 이쁘면 첩을 삼을 테요? 회똑회똑하고 석경 앞에서 떨어질 줄이나 모르면 그런 고질을 어떻게 한단 말이요?”

”그래도 사람은 외양에 있지, 그렇게 보기 싫거든 조금더 기다려 보아서 다른 데 마땅한 것을 데려오지.”

아내는 화를 버럭 내며,

“글쎄 딱하기도 하시우. 어느 천년에 다른 것을 데려온단 말요, 좀 보.”

하고 툇마루 끝으로 나가서 빨래 광주리를 헤치면서

“이렇게 빨래가 쌓였구려. 요새처럼 날 좋은 때 하지 않고 언제 한단 말이요. 큰댁 생신이 며칠 안 남았는데 그동안에 준비는 누가 다 하우. 옷도 한 벌씩은 지어입어야지. 어린것들은 벌거벗겨 데리고 가우. 나는 시방이라도 데려올 터이야.”

“그런 것이 아냐. 왜 김주사집에 있던 사람 얌전하더군. 일주일만 지내면 오마고 했으니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아내는 하품을 하며,

“어이 일주일을 언제 기다린단 말요. 나는 모르겠소. 남의 생각은 조금도 할 줄 모르니까 내가 부릴 사람 내가 데려온다는데 웬 걱정들요.”

“그럼 나는 모르겠소. 하고 싶은 대로 하구려. 내 그렇게 악지를 시는 것은.”

하고 돌아앉으니까 아내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염려 말아요. 내 데려올께.”

2

그날로 양천집이 왔다. 오고 본즉 주인 아내도 유쾌치 못할 만큼 흉한 얼굴을 가졌다.한쪽 얼굴이 눈 하나를 어울러서 뺨까지 대패로 깎은 듯하고 따라서 눈알이 껍질이 벗겨져서 툭 불그러졌다. 그래 한 눈이 유달리 크므로 다른 한쪽은 또한 몹시 작아 보인다. 거기다가 곰보요 머리는 쥐가 뜯은 것처럼 군데군데 났다. 단 손이 크고 발이 크다.

그러나 아내는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남편이 들으라는 듯이,

“참 꼴불견이라더니 게 두고 마췄어. 일은 참 잘해요, 설겆이하는 것이라든지 쓰개질 하는 것이 또 황소같이 세차게 해.”

하고 남편 옆에서 넌지시 말을 하였다. 쥔은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신문만 보고 앉아 있다.

며칠이 지났다. 양천집의 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골서 아무렇게나 자라난데다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서 배운 것 없고 본 것이 없어서 어른 아이 알아볼 줄을 모르고 말버릇이 없다. 거기다가 성미가 뾰롱뾰롱하고 소갈머리가 없어서 어떤 때는 주인 아내의 눈짓하는 것도 모르고 제멋대로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상을 찌푸리고 코웃음을 친다.

어떤 때는 통내외하고 다니는 친구가 와서 보고 주인 귀에다 몰래,

“내보내게. 못쓰겠네. 첫째 남 볼썽이 사놔.“

하며 권고를 한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나도 아네. 하지만 온 지가 열흘도 못 된 것을 어떻게 내보내나. 차차‥‥‥”

하고 대답만 하여 두었다. 이 눈치를 챈 주인 아내는 그 친구를 몹시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별걱정을 다 하네. 오지랖도 꽤 넓지, 남의 집 살림 걱정까지 하게.”

하며 옆에다 세워 놓고 욕을 할 적이 있었다. 그럴 적마다 주인은 치밀어 올라오는 분을 참는다. 학교 다치는 열 두 살 먹은 큰아들도 걸핏하면,

“찍어뱅이, 애꾸눈이!”

하고 놀려먹는다. 그러면 그런 때마다 몽둥이찜이 내린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내외 쌈이 된다.

“집안의 위엄이 너무 없어.”

하고 남편이 호령을 하면 아내는,

“자식들이 너무 버릇 없어.”

하고 대든다. 공연히 사람 하나 데려온 것이 집안을 불화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양천집에게 하루는 기별이 오기를, 동서가 죽었는데 초상 볼 사람이 없으니 급 히 와 달라 하였다.

양천집은 황망히 그리로 갔다. 일을 하다 말고 갔으므로 주인 아내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떻든 속히 오라고 하기는 하였으나 한시가 액액한지라 혼자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인은 생각하기를 이런 좋은 기회를 잃지 말고 얼른 다른 것을 불러 오겠다 하 였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를 동정하듯이,

“일하던 것을 그대로 두고 가서 어떻게 한단 말이요!”

하고 은근히 의논을 하였다.

“글쎄 말요. 빨래는 허다 말고 그대로 내버리고 가서 그것도 걱정이오. 내가 손이 나야 바느질이라도 할 터인데.”

주인은 이 말을 듣더니,

“그것이 오고가는 데 적어야 이틀은 걸릴 것이요 초상을 치르자면 사흘은 걸릴 터이니, 적어도 닷새는 될 터이란 말야.”

“그래요. 허지만 어디 그렇게 꼭꼭 날짜대로 일이 되오, 조금 늦기가 쉽지.”

“그러면 여보, 그것이 나려을 때까지 김주사 집에 있던 것을 데려다 둡시다 그려.”

이 말에 솔깃한 아내는,

“하지만 어떻게 왔다가 도루 가라고 그런단 말이요?”

“무얼, 돈냥이나 더 주면 고만이지.”

“글쎄.”

피차 타협이 되어 김주사 집에 있던 점순 어멈을 데려왔다.

사람이 체나서 영리하고 인물도 반반하며 일도 하질 못하지 않고 말솜씨라든지 어린애 보는 것이 주인 맘에도 솔깃하였다.

그러나 주인 아내는 쓸데없이 의심을 내어서 주인이 점순 어멈에게 하는 행동을 눈 여겨보지 않는 것이 없다.

“점잖은 사람이 그럴 리가 있나.”

하고 혼자 위로도 하였다가,

“그렇지만 알 수 있어야지. 그런 짓이란 옛날부터 없는 일이 아니고.”

하며 공연한 걱정을 한다. 그런 기색을 볼 때 마다 주인은 혼자 웃으면서 속으로는 일상 같이 노는 기생 점고만 하고 앉아 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양천집이 오지를 않다가 열흘이 넘어서야 왔다. 문간에 들어서기 전까지도 혹시 내가 늦게 와서 다른 사람을 그 동안에 두지나 아니하였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며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골서 서울까지 걸어오는 길에서도 손가락을 꼽아 가며.

“벌써 열흘이지.“

하다가,

“만일 다른 사람이 있으면 나는 내쫓길 터인데.”

하고 걱정이 되어 애꾸눈을 두리번두리번하였다.

“실상은 늦게 오랴 늦게 온 것이 아니라 짚신이 떨어져서 그 값을 버느라고 옆엣집 방아를 이틀 동안 찧어 준 죄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걱정이 되어서 궁리가 대단하여,

“만일 나가라면 그 집에서 찾을 돈이 얼마나 되누. 열흘 동안 있었으니 한 달에 삼 원을 몇으로 쪼개야 되나.”

하고 길거리에 앉아서 모래알을 서른 개 주 워 가지고 닷 냥 열 냥 하고 삼십 분이 넘도록 셈을 보아서 일 원이라는 것을 발견은 하였으나 그래도 자기의 구구를 믿을 수가 없어서 어떤 주막에 들어가,

“여보 영감님!”

하고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자기 구구가 맞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늙은이 역시 한참 있다가 꾸물꾸물하더니,

”그런가 보외다.“

하고 몽롱하게 대답을 한다. 기연가미연가하여 반신반의로 어떻든 일 원은 주겠지 하고 서울까지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낮선 사람 하나가 밥솥을 씻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칠 때에 는 마치 고양이가 쥐 노리듯 무서웁고 암상스러운 질투의 광채가 두 눈에서 번개처럼 번득이었다. 서로 자기의 지위와 자리를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경계를 하였다.

“어서 오게.“

주인 아내가 나오며,

“왜 이렇게 늦었어?”

하는 소리는 풀이 없고 쌀쌀한 듯하게 양천집 귀에 들렸다.

“급히 볼일이 있어 늦게 왔어요.”

“무슨 볼일이 그리 급했담.”

양천집은 마루끝에 와 서서 주인 아내를 보며,

“저 사람은 누구예요?”

하며 부엌을 가리켰다.

“응, 새로 온 사람야.”

양천집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는 얼마간 아무 말이 없다가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저 사람은 자기보다 우선 인물이 곱다는 것이 여간 샘이 나지 않았다. 또는 자기처럼 투 박한 시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샘이 났다.

“어떻든 다리나 좀 쉬게. 그리고 되는 대로 결말을 내줄 터이니.”

처음에 온 양천집과 나중 온 점순 어멈 사이에는 암투가 시작되었다. 그 암투는 결코 상대자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었다.

점순 어멈이 밥상을 보면 양천집은 설겆이를 하고, 양천집이 마당을 쓸면 점순 어멈은 마루를 훔쳤다. 방이 끝나면 세간을 닦고 먼지를 털면 물을 뿌렸다. 네가 하면 내가 한다. 서로 겨끔내기로 하는 바람에 좋아지기는 주인밖에 없다. 나중에는 주인의 구두 닦기며 뒷간까지 말끔히 쓸어 놓았다.

그날 저녁 주인 내외는 서로 앉아서 의논을 하였다.

“어떻게 해야 좋겠소?”

“글쎄.“

“하나는 있던 것이니까 박절히 가라 할 수도 없고 또 나중 온 것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라고 해요?”

“허지만 제가 가서 늦게 오기 때문에 사람을 둔 것이지 제가 속히 왔어도 두어?”

하고 전것을 내미는 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나중 온 것은 나리 말씀과 마찬가지로 임시로 두기로 하지 않았소?”

하며 아내는 전것을 그대로 둘 의향이다.

“아따, 그때는 그랬지만 사람 둘을 놓고 보아요, 어느 것이 나은가?”

“사람야 둘이 다 괜찮지.”

“무엇야? 둘이 다 괜찮다니, 그래 얼거뱅이 찌거뱅이에다 악상군이요 또 보고 배운 것이 없는 것과, 인물 얌전하고 말솜씨 있고 사람 영리한 것하고 똑같단 말요? 온 말을 해도 조금이나 동에 닿는 말을 해야지”

“그렇지만 경우가 그렇지 않소.”

“경우가 무슨 경우야, 내 돈 주고 나 사람 쓰는데 내 맘에 들면 두고 그렇지 않으면 내보내는 것이지 경우가 다 무엇이야.”

이렇게 싸우다가 결국은 돈 소리에 아내가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한다. 남편은 화증을 와락 내이면서,

“아따 맘대로 하구려, 나는 그런 돈을 낼 수가 없으니 나중것을 두든지 먼첨것을 두든지 멋대로 하우.”

하고 돌아 드러눕는다. 아내는 남편을 타이르려고,

“그렇게 화까지 내실 것이 있어요? 좋을 대로 하지.“

그 이튿날 점순 어멈과 양천집은 아침을 해 치르기 전에 주인 앞에 서서 간택하기를 기다렸다. 영리한 점순어멈은 벌써 자기가 승리자인 것을 알아채고서,

“나리 처분대로 하시지요.”

하고 금치 못하여 나타나는 기꺼운 빛이 얼굴에 보이고 양천집은 자기 자리를 빼앗긴 것이 분하여,

“제가 있어야 옳지요. 제가 다니러 간 새에 저 사람은 임시로 와 있었으니까요.”

하고 잡았던 것을 빼앗기는 사람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억지 겸 변명을 한다.

“그렇지만,”

주인은 엄연히 서서,

“자네는 가서 오지 않았으므로 저 사람을 둔 것이지 자네를 내보내려고 그러한 것은 아냐.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둘 수가 없으니 용량해 하게.”

점순 어멈은 북받치는 즐거움을 이길 수가 없어서 돌아서서 씽긋 웃었다. 양천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제가 올 때까지 잠깐 와 있던 사람이요, 저는 처음부터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어쨌단 말야. 나는 더 말할 수 없어.”

하고 사랑으로 나갔다.

주인 아내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나리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나도 헐 말이 없네.“

짝짝이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그는 마지막으로 힘있게 하는 소리가,

“그러면 제가 받을 돈이나 주세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것야 그러지.“

하고 아내는 돈 일 원과 약간의 은전 몇 푼을 갖다 쥐어 주며,

“자, 미안하니 신이나 한 켤레 사 신게.”

하고 양천집의 손에 돈이 놓일 제, 그는 눈물이 젖은 얼굴이 반갑고 좋은 마음에 실룩실룩하고 떨리더니 마음이 저으기 풀리어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1925>

[출처] http://www.jikji.org/%EA%B3%84%EC%A7%91%20%ED%95%98%EC%9D%B8?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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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째

사랑하시는 C선생님께 어린 심정에서 때없이 솟아오르는 끝없는 느낌의 한 마디를 올리나이다.

시간이란 시내가 흐르는 대로 우리 인생은 그 위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읍니다. 늙은이 나 젊은이나 마음 아픈 이나 행복의 송가를 높이 외는 이나 성공의 구가([[謳]]歌)를 길게 부르짖는 사람이나, 이 시간이란 시내에서 뱃놀이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이 편지를 선생님께 올리는 이 젊은 A도 시간이란 시내에 일엽 편주(一葉片舟)를 띄워 놓고 곳 모르는 포구로 향하여 둥실둥실 떠갑니다.

어떠한 이는 쾌주하는 기선을 탔으며 어떠한 이는 높다란 돛을 달고 순풍(順風)에 밀리어 갑니다. 또 어떠한 이는 밑구멍 뚫어진 나룻배를 이리 뒤뚱 저리 뒤뚱 위태하게 젓고 갑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하품하고 기지개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또 어떠한 배에서는 장고를 두드리고 푸른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불그레한 정화(情話)의 소곤 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여자의 애끊는 울음 소리가 납니다. 어떠한 배 속에서는 촉루([[髑]][[髏]])가 춤을 추고 어떠한 배 속에서는 노름군의 코고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이 A가 탄 배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줄 아십니까? 때없는 우울과 비분과 실망과 고통과 원망이 뭉텡이가 되고 덩어리가 되어 듣는 이의 귓구멍을 틀어막을 듯이 다만 띵 하는 머리 아픔이 있을 뿐이외다.

나와 같이 배를 띄워 같은 자리를 지나가는 배가 몇 백 몇 천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서로 바라보며 기막혀 웃을 뿐이외다. 그리고 서로 눈물지을 뿐이외다.

선생님, 이 배가 가기는 갑니다. 한 시간에 5리를 가거나 단 1리를 가거나 가기는 갑니다. 그러나 그 배가 뒷걸음질 칠 리는 없을 터이지요. 가기만 하는 배는 우리를 실어다 무엇을 할까요? 흐르는 시간은 말이 없고 뜻이 없으매 다만 일정한 규칙대로 가기는 가겠으나 뜻없고 말없는 시간이란 시내 위에 이 A는 무슨 파문을 그리어 놓아야 할까요.

새벽 서리 찬바람에 차르럭 찰싹 뛰어노는 어여쁜 물결입니까? 아침 저녁 멀리 밀려왔다 밀려가는 밀물의 스르렁거리는 물결입니까? 초생달 갸우뜨름하게 비추인 푸르렀다 희었다 하는 깜찍한 파문입니까? 어떻든 저는 무슨 파문이든지 그 시간이란 파문 위에 그리어 놓아야 할 것이외다. 하다 못하여 시커먼 물결 위에 푸---하게 일어나는 거품일지라도 남겨 놓고야 말 것이외다.

선생님! 그러나 그 파문을 그리려 하나 그릴 수가 없읍니다. 하늘의 바람은 너무 강하고 몰려오는 물결은 너무 힘이 있읍니디

인습이란 물결이 아직은 편주를 몰아 낼 때와 육박하는 환경의 모든 시커먼 물결이 가려 하는 이 A라는 조그마한 배를 집어 삼키려 할 때 닻을 감으랴 노를 저으랴 가려고는 합니다마는 방향을 정하려 하나 괄에 힘이 약하고 가려 하나 나를 이끌어 나아가게 하는 힘 있는 발동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어떤 때에는 폭우가 내려 붓고 어떠한 때에는 광풍이 몰려와 간신히 뒤뚱거리는 이 작은 배를 사정없이 푸른 물결 속에 집어 넣으려 합니다.

아아, 선생님! 그나 그뿐이 아니외다. 어떠한 때는 어두운 밤이 됩니다. 울멍줄멍하는 노한 파도가 다만 시커먼 암흑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하늘에는 희망의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저쪽 어귀에 희미하게 비추이는 깨알 같은 등대의 깜빡거리는 불도 꺼질 때가 있읍니다.

그러나 저는 가렵니다. 약하고 힘없는 두 팔다리로 저 보이지 않는 포구를 향하여 형형 색색의 파문을 그리면서 가기는 가렵니다. 오늘에 그리어 놓은 파문의 한 폭이 내일에 그릴 파문을 낳고 내일에 그리어 놓은 파문의 한 폭이 모레의 그것을 낳아 저쪽 포구에 이를 때에는 대양으로 가는 힘있는 여울 물결 위에 거룩하고 꽃다운 성공의 파문을 그리려 합니다.

아아, 그때에는 암흑에 날뛰는 미친 파도나 때없는 폭풍우나 밀려오는 인습의 물결이나 모든 환경의 그 모진 파도가 그 거룩하고 꽃다운 파문 하나는 지워 버리지 못할 것이며 삼키어 버리지 못할 것이지요. 이 작은 일엽 편주는 그때가 되어 부딪쳐 깨어지거나 물결에 씻기어 사라지거나 저는 다만 죽어 가는 목구멍 속으로라도 넘치는 환희와 복받치는 기쁨으로 영생의 노래를 부를 것이외다.

둘 째

오늘은 웬일인지 일기가 전에 보지 못하게 음침합니다. 답답한 심사와 침울한 감정을 양기있고 청징하게 하려 애를 썼으나 그것은 실패하였읍니다.

아침에 밥을 먹은 저는 12시가 되도록 습기찬 방바닥에 누워 있었읍니다. 오고가는 공 상이 어떠한 때는 저를 웃기더니 어떠한 때는 울리더이다. 저의 젊은 아내는 오색 종이로 바른 반짇그룻을 옆에 놓고 별 같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저의 입고 나아갈 두루마기 끈을 달고 있었나이다. 저는 저의 아내를 볼 때마다 불쌍한 생각이 납니다. 나이 젊은 아내의 고생살이를 생각할 때마다 저의 심정은 웬일인지 쓰립니다. 제 옆에 앉아 있는 그 젊은 아내가 과연 저의 이상을 채우는 아내는 아니외다. 사랑과 사랑이 결합하여 된 부부가 아니외다. 자각 있는 애인의 조화 있는 사랑은 아니외다. 그는 무엇을 믿고서 나의 아내가 되었으며 무슨 각성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애인과 애인이 서로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대담한 일이라 하면 애인도 아니요 애인도 아닌 이 두 사람의 서로 결합된 것도 위태하게도 대담한 것이외다.

위태한 짓을 똑같이 한 이 A도 불쌍한 용자이지마는 그것을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저의 젊은 아내도 어리석은 용자이외다. 우리 두 사람이 과연 원만하게 사랑의 가락을 두 몸에 얽어 놓았읍니까? 강대한 세력을 두 사람의 붉은 피 속에 부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어린 자식은 절더러 ‘아빠 아빠’ 합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더러는 ‘엄마 엄마’ 합니다. <엄마 엄마>라 부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알지도 못하게 저의 마음은 깨끗하여지며 어느 틈엔지 따가운 귀여움이 저의 가슴을 채웁니다. 어린애가 웃으면 저도 웃습니다. 그러면 저의 아내도 웃습니다. 저의 아내의 웃는 눈은 반드시 나의 얼굴을 바라 봅니다.

철없는 아이가 재롱부려 웃을 때는 저의 웃음과 저의 아내의 웃음 소리는 보이지 않는 공중에서 서로 얼크러져 입을 맞춥니다. 그때에는 모든 불평 모든 고통이 그 방안에서 내쫓기어 버립니다.

오늘도 남향한 창에는 햇빛이 따뜻하게 드는데 철없는 어린 자식은 방 한 귀퉁이에서 자막대기를 가지고 몽클몽클한 두 다리를 쪽 뻗고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콧소리를 쌔근쌔근하며 장난을 하고 있을 때 답답한 감정이 공연히 저의 상을 흐리게 하였으나 근지러운 살과 부드러운 입김을 가진 저의 아내가 고요한 침묵을 가는 바늘로써 바느질할 제 웬일인지 눈을 감은 저의 전신의 모든 관능은 힘을 잃은 것같이 노곤하여졌나이다

잠들지 않은 나의 정신은 혼농한 가운데 젖어 있을 때 나의 아내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여보셔요, 날이 점점 추워 오는데 월급 되거든 어린애 모자 하나 사 오세요”

하였읍니다. 이 말을 듣는 저는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읍니다. 그리고 속마음오로는, ‘화구도 살 것이 있고 책도 좀 사야 할 터인데 어린애 모자는 천천히 사지’ 하며 아내의 말에 공연 한 싫증이 났읍니다. 그 싫증은 결코 아내의 말이 부당한 말이나 어린아이의 모자를 사다 주는 것이 아까와 그리 한 것이 아니라 경제의 압박을 당하여 오는 저는 돈이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쌓아 오고 쌓아 오는 불평이 공연히 좋던 감정도 얼크러뜨려 버립니다.

저의 아내는 여러 번 그런 일을 말하면서도 저의 대답하지 않는 것이 무안한 듯이 한참이나 아무 소리가 없다가,

“왜 남의 말에 대답이 없소?”

하였읍니다. 나는 여전히 말 대답이 없이 드러누워 있었읍니다. 아내는 또다시,

“어린애 모자 하나 사다 주기가 무엇이 그리 어려워서”

하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다 꿰맨 두루마기를 툭툭 털어 저의 누워 있는 다리 위에 툭 던졌읍니다.

자막대를 가지고 장난하던 어린애는 모자 소리를 듣더니,

“때때모자? 응 엄마”

하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저의 아내를 쳐다보며 달려듭니다. 이것을 본 저의 아내는 토라졌던 얼굴을 다시 고쳤던지,

“글쎄 이것 좀 보시우. 모자 모자 하는구료”

하며 아무 말 없이 두 눈 위에 팔을 얹고 누워 있는 저의 가슴을 가만히 연하고 부드럽게 흔들었읍니다. 저의 아내의 매낀매낀한 손가락이 저의 옷 위에서 꼼지락거릴 때에 저의 피부 밑으로 지나가는 신경은 무엇에 취한 듯한 감각을 저의 핏결 속에 전하는 듯 하였읍니다.

저는 다만,

”이리 구찮은‥‥‥”

하고 팔꿈치로 아내의 손을 툭 치며 다시 돌아누웠읍니다. 제가 본래 신경질임을 아는 아내는 조금도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다만 생글 웃으면서 가장 노한 듯이,

“고만두구료. 어서 옷이나 입고 나아가요. 대낮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갑갑해 못 견디겠구료.”

하는 목소리는 웬일인지 마음 강한 저의 거짓 노여워함을 오래 가게는 못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벌떡 일어나며 아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에이! 그 등쌀에 누워 있을 수가 있어야지. 두루마기 어쨌소?”

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읍니다. 저의 아내도 웃음이 떠도는 얼굴에 거짓 노여움을 섞으면서,

“그것 아니고 무엇이오.”

하며 방바닥에 놓여 있는 저의 두루마기 가리켰읍니다. 저는 다만 무안한 가운데도 우스운 생각이 나서 아무 말 없이 두루마기를 입고,

“지금 몇 시나 되었을꼬·?”

하며 혼잣말을 하고는 모자를 집어썼습니다.

저는 바깥으로 나왔읍니다. 젊은 아내와 정에 겨운 싸움을 하고 나온 저의 마음은 바깥에 나와 비로소 그 시간에 일어난 역사가 그립고 애착하는 생각이 났읍니다. 새로운 공기와 푸른 하늘이 거의 공연히 센티멘탈한 심정을 녹이며 부드럽게 하여 줄 때 웬일인지 반웃음과 반노여움을 섞은 저의 젊은 아내의 얼굴과 그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저의 마음을 매취(魅醉)케 하는 듯하였읍니다.

저는 저의 친구를 찾아 MW사로 향하여 오면서 생각하는 것은 저의 아내뿐이었으며 그 아내가 청하던 어린 자식의 새 모자이었읍니다. 저는 월급을 타거든 모자를 사다 주리라 하였읍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이의 어머니 된 젊은 아내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리라 하였읍니다.

세 째

MW사에 왔읍니다. DH, WC는 서로 바라 보며 무슨 걱정인지 하고 있었읍니다. 웬일 인지 그 넓지 못한 방안에서는 검푸른 근심의 그늘이 오락가락하였읍니다. 저는,

“웬일들이야? 무슨 걱정들 있었나?”

하였읍니다. 얼굴 검은 DH는,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었네. 그런게 아니라 NC의 아내가 앓는다는 기별이 왔는데 본래 구차한 그 사람이 어떻게나 근심을 하겠나. 그래서 오늘 NC의 집까지 가 볼까 하고 자네를 기다리던 터인데.”

“무엇야? NC의 아내가?”

“그래.”

“그것 안되었네그려. 그러면 언제 가려나? 차비들은 준비되었나?”

“그것은 내가 준비하였어.”

“그러면 가 보세그려.”

저는 다만 친구의 불쌍한 처지에 동정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였읍니다. NC의 집은 시골입니다. 더구나 한적한 촌입니다. 그의 생활은 부유롭지 못하고 빈곤합니다. 그는 지금 자기의 손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아침에 괭이 메고 논으로 갑니다. 저녁이면 시름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그는 깜빡깜빡하는 유경 밑에서 깨알 같은 책을 봅니다. 그리고 시를 씁니다. 그의 시는 선생님도 보신 바가 있겠지요마는 참으로 완벽을 이룬 것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NC의 한적한 생활을 부러워합니다. 조금도 불평이 없이 조금도 변함이 없는 그의 굳은 신앙 아래 살아가는 것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저는 그의 눈물을 못 보았읍니다. 그의 한숨이 저의 귀를 서늘하게 하지 못하였읍니다.

넷 째

사랑하시는 선생님. 사람의 눈물이 있다고 하면 이러한 경우에 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요? 만일 참으로 그 눈물이 눈물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눈물이 참눈물이겠지요.

오늘 저녁이외다. 저의 세 사람은 NC의 사는 시골에 왔읍니다. 정거장에서 10리를 걸어들어올 제 저희 세 사람은 참으로 공통된 의식 공퉁된 감정을 머릿속과 가슴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작은 별들은 옛날의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한 듯이 우리를 보고서 재롱부리어 깜빡거립니다. 다닥다닥한 좀생이는 간지러운 듯이 옹기종기합니다. 밤은 어둡고 길은 험하오나 저희을 이끌어 가는 그 무슨 세력의 선이 끝나는 저편에는 우정이라는 낙원이 있읍니다. 동지라는 그리운 <에덴>이 있읍니다.

말이 없고 소리가 없이 걸어가는 우리 세 사람은 다만 쓸쓸하고 적막하고 심심하고 무미담담한 NC의 집을 찾아가면서도 우리의 끓는 피와 타는 정열은 그 찾아가는 한적한 농촌을 싸고도는 가만한 공기를 꽃답고 찬란하게 그리어 놓으려 하였읍니다.

그러나 NC의 집에 다다랐을 때가 되었읍니다. 초가집 가장자리를 싸고도는 암혹 속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혼자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는 그때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그를 NC로 알았읍니다. 우리는 다만,

“NC!”

하고 반가운 두 손을 내밀었읍니다. 이것을 본 NC는 다만 아무 소리가 없이 파리한 두 손을 내어밀며,

“야, 어떻게들 이렇게 내려왔나?”

하며 힘없는 말소리에 처량한 기운이 도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읍니다. 우리 세 사람의 마음속에는 NC의 말소리를 들은 때에 그 무슨 애매한 의식을 깨달았읍니다. 인생의 애가, 마음 아프고 가슴 저린 그 무슨 노래를 듣는 뜻이 NC의 목소리에서는 푸른 기운이 돌았읍니다.

NC는 아무 말이 없이 다만 번갈아가며 우리 세 사람의 손을 단단히 쥐었읍니다. 그리 고는,

“나의 아내는 30분 전에 영원한 해결의 나라로 갔네.”

하였읍니다. NC의 눈에서는 여태까지 보지 못하던 눈물이 흘렀읍니다. NC의 가슴은 에이고 붉은 피는 식고 애탄의 결정인 뜨거운 눈물은 다만 차디찬 옷깃을 적시고 시름 없이 식어 버리더이다.

그 누가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는 별이 있읍니다. 땅에는 꽃이 있읍니다. 바다에는 진주가 있읍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뜨겁게 반짝이는 눈물이 있읍니다. 누가 이것을 보고 울지 않는 이가 있고 누가 이 꼴을 보고 눈물 홀리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우리 세 사람은 한참이나 선 채로 울었읍니다. 친한 친구, 사랑하는 동지자의 사랑하는 아내의 죽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새삼스럽게 우리 인생의 모든 비애가 심약한 우리들을 울리었읍니다.

다섯 째

오래 뵈옵지를 못하였읍니다. 1주일 동안이나 NC의 집에 있었읍니다. NC의 아내의 장례는 저희가 시골에 간 지 이틀 뒤였읍니다. 초가을은 으스스하였읍니다. 나뭇잎은 시체를 담은 상여 위에서 시들어 가는 듯이 춤을 추었읍니다. 상여군들의 목늘여 부르는 구슬픈 비가는 길고 느리게 공동묘지로 향하는 산고개를 넘어가더이다.

아! NC의 아내는 영원히 갔읍니다. 동리를 거치고 산모퉁이를 지나서 영원히 갔읍니다. 그러나 NC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고있을 그의 환영은 길고긴 세월을 두고 우리 NC를 얼마나 울릴까요? 회고(回顧)의 기억 속에서 시들스럽게 춤추는 그의 그림자는 몇 번이냐 NC의 두 눈을 감개무량하게 하겠읍니까? 새벽 서리 차디찬 밤, 초생달 갸웃스름한 저녁에 애타는 옛 기억, 마음 아픈 옛생각은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 NC를 울릴까요?

제가 NC의 아내의 장례에 참석하였을 때에는 저도 또한 죽음과 생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하였읍니다. 죽음과 삶이라는 거이 무엇이 다른 것인가요? 살아 있다 함은 육체에 혈액이 돌고 모든 것을 의식하고 모든 것을 감각한다 함입니까? 죽음이라 하는 것 모든 관능이 육체의 썩어짐과 함께 그 활동을 잃어버린다 함입니까? 저는 무한한 비애를 아니 느낄 수가 없읍니다.

여섯 째

어저께 시골서 올라왔읍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일기가 청명하더이다. 가녋고 달콤한 공기가 저의 코 속을 통하여 될새없이 벌록거리는 폐 속으로 지나 들어갈 때 어저께까지 시든 듯한 저의 혈액은 다시 정해진 듯하더이다.

<낙망(落望)>이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낙망을 염려하는 저는 쉬지 않고 꽃다운 희망으로 저의 가슴을 채웠었읍니다. 그윽한 법열(法悅)속에서 브러시와 팔레트<調色板>를 움직일 때 저는 살았었으며 생의 진실을 맛보았을니다. 다만 제가 팔레트 판을 들고 캔버 스를 격(隔)하여 앉았을 때가 저의 참 생이었읍니다. <낙망>이라는 모토를 가진 그림을 그리면서도 무한한 장래와 끝없는 유열이 있었읍니다. 애인의 손을 잡고 그의 귀밑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자기의 흉중(胸中)을 하소연할 때와 같이 정결하고 달콤한 맛이 저의 전신을 물들였읍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정신이 청징하였습니다. 1 주일 가까이 자극이 적은 향토에서 논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한아한 정신으로 노곤한 안일 속에 오늘 하루를 지내었읍니다.

그러나 안일에도 권태가 있고 법열도 깨일때가 없지 않았읍니다. 육체의 권태는 정신까지 권태하게 하더이다. 또다시 법열까지 깨뜨려 버리더이다.

저는 기지개 한 번 하고 팔레트 판을 내던졌읍니다. 그리고 캔버스를 집어치우고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시계를 보았읍니다. 그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읍니다. 저는 두 시간의 여가가 있음을 알았읍니다. 그래서 그 권태를 녹이기 위하여 SO의 집으로 가려 하였읍니다.

SO는 불쌍한 여성이외다. 한 다리가 없는 불구자이외다. 나이는 20세이외다. 그는 한쪽 없는 다리를 끌면서 추우나 더우나 학교에를 10여 년이나 다녔읍니다. 제가 중학교 4년급 다닐 때에 아침이면 같은 길모퉁이에서 만나는 것이 연(緣)이 되어 그와 사귀게 되어 지금까지 3년 동안을 지내 왔읍니다.

그에게는 나이 늙은 어머니 한 분밖에는 없읍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학교에 가고 올 때에든 그는 반드시 자기 딸의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기다렸다 합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어 늦게 돌아오게 되면 그의 늙은 어머니는 반드시 학교 문 앞까지 와서 자기의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아, 선생님. 불구자의 모녀의 생활은 침으로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게 불쌍하고 참담합니다. 그의 물질적 생활은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합니다. 그는 남의 집 곁방에서 바느질품으로 그날그날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오늘도 그 불쌍한 불구자를 찾아왔읍니다. 문을 들어서며 기침을 두어 번 하였읍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전에는 반드시 반가와 맞아 주던 그 불구자의 여성, 오늘은 그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읍니다.

문간에 들어선 저의 마음은 저녁때쯤 산골짜기를 헤매는 듯이 휘휘하였읍니다. 가련한 불구의 여성이 나를 맞아 주지 않는 것이 저의 마음을 울게 하였읍니다.

저는 또다시 기침을 하고 구멍이 뚫어지고 문풍지가 펄럭펄럭하는 방문을 열려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문을 열지 못하였읍니다. 숭숭 뚫어진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불구인 여성의 모녀의 울음 소리는 저의 감정을 연민의 정으로 물들였읍니다. 저는 다만 망연하게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습니다. 말없이 서 있는 저의 주위는 날연한 공기가 불구자의 어머니와 불구인 여성의 울음 소리를 싣고서 시들어지는 듯이 선무(旋舞)를 추었읍니다.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더니 나오는 사람은 그의 늙은 어머니였읍니다. 그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저를 바라보더니,

“오셨읍니까?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하며 돌아서서 코를 풀었읍니다. 저는 무엇이라 물어볼 말도 없거니와 또다시 말할 것도 없어 다만,

“네, SO는 있나요?”

하며 방안을 들여다보았읍니다. SO의 어머니는,

“네, 있어요.”

하고 저의 말에 대답을 하더니 다시 방안을 들여다보며,

“얘, 선생님 오셨다.”

하였읍니다.

방안에는 SO가 돌아앉아 여태껏 울고 있는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다만 치마끈으로 눈물만 씻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제가 온 것을 보고서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어 돌아앉으면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발갛게 피가 오른 두 눈으로 저를 쳐다 보더니 다시 눈을 방바닥으로 향하였읍니다.저는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읍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읍니다. 저는 구두 를 끄르고 그 방안으로 들어갔읍니다. 방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마루끝에 놓여 있는 SO의 다리를 대신하여 주는 나무때기가 저의 발에 채여 덜컥하였읍니다. 저는 그때 근지럽고 누가 옆에서 ‘에비’ 하고 징그러운 것을 저의 목에다 던져 주는 듯이 진저리를 치는 듯이 방안으로 뛰어들어갔읍니다.

SO는,

“오늘은 시간이 없으세요?”

하며 다른 때와 다르게 유심히 저를 쳐다보았읍니다. 저는,

“이따가 4시에나 시간이 있으니까요. 잠깐 다녀가려고 왔어요.”

하고 자리를 정하고 앉았읍니다.

“댁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읍니까?”

하고 저는 그의 운 이유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그는 다만,

“아녜요.”

하고 부끄러움을 띠며 아무 말이 없었읍니다.

저도 또다시 무엇이라 물어 볼 수가 없어서 다만 사면만 돌아다보며 아무 소리가 없었읍니다.

SO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읍니다. 그러다가 반쯤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님.”

하고 저를 부르더니 또다시 아무 말이 없이 한참이나 꼼지락꼼지락하는 손가락만 바라보다가 저의,

“네”

하는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또다시,

“선생님.”

하였읍니다. 저는,

“네”

하고 그의 구부린 머리의 까만 털만 바라보았읍니다.

“저는 병신입니다.”

하더니 여태까지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떨어져 방바닥으로 시름없이 굴렀읍니다. 이 소리를 듣는 저도 같이 울고 싶었읍니다.

“저는 병신인데요.”

하고 힘있는 어조로 또다시 한 말을 거푸 하더니 그대로 방바닥에 엎드려져 울면서 목멘 소리로,

”병신인 저도 피가 있고 감정이 있읍니다. 뜨거운 눈물과 새빨간 정열이 있읍니다. 그러하나 불쌍한 저는 그 눈물을 가지고 혼자 우나 그 눈물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으며 그 정열을 혼자 태웠으나 그것을 받아 주는 이가 없어요.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서 더욱 불쌍한 구덩이에 틀어박으려 할 뿐이에요.”

하고 느껴 가며 울었읍니다.

“저를 A씨는 불쌍히 여겨 주십니까? 만약 참으로 불쌍히 여겨 주신다면 이 저의 마음까지 알아 주세요.”

하고 애소하듯이 저의 무릎에 엎드려 울었읍니다.

선생님, 누가 이 말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있으며 누가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저는 다만 SO를 끼어안고 한참이나 울었읍니다.

“SO씨 울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참으로 동정합니다.”

“그러면 한 다리 없는 불구자인 저를 길이 길이 사랑하여 주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저는 다만,

“네?”

하고 아무 말이 없었읍니다. 저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읍니다. 저의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은 저의 나이 젊은 아내였읍니다. 자막대기 가지고 놀고 있던 어린아이였읍니다. SO는,

“네 A씨, 대답을 하여 주세요.”

하고 저를 애소하는 두 눈에 방울방을 눈물을 고이고서 쳐다보았읍니다.

아! 선생님. 이 SO를 저는 참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참으로 동정합니다. 그가 눈물을 흘릴 때에 나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속태울 때에는 나도 속을 태우려 합니다. 하늘 아래 지구 한 점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이 병신인 SO를 저는 힘껏 붙잡고 울더라도 시원치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그 찰나 사이에 벌써 사랑이라는 것이 간 것이 아닐까요. 그의 손을 잡고 따라서 같이 우는 것이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 불구의 여성은 저를 사랑하려 합니다마는 저는 여성의 사랑을 얻고서 도리어 가슴이 아팠읍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저는 불구인 여성의 뜨거운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 불행한 사람이외다.

선생님, 육체의 불구자는 그 불구를 동정한 저로 말미암아 사랑의 불구자가 될 줄이야 꿈에나 알았사오리까? 사랑은 곧은것이요 굽은 것이 아니니 저는 벌써 그 곧은 길 위에 선 사람이외다. 저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바가 아니었나이다. 그러면 저는 저의 아내에게로 향하는 꼿꼿한 사랑을 일부러 꺾어 이 불구의 여성을 사랑할 수 없었읍니다. 불구의 여성이므로 그를 동정하는 동시에 저의 사랑을 불구가 되게 할 수는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 불구자의 눈물은 그 눈물이 저의 무릎 위에 떨어지는 때부터, 아니올시다. 그의 사랑이 저에게로 향할 때부터 벌써 그의 가슴에 어리어 있는 사랑을 불구자 되게 하였읍니다. 그의 한 다리가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은 한 쪽 없는 사랑이었읍니다.

저는 다만,

“SO씨, 울지 마세요. 저의 가슴은 SO씨의 눈물로 인하여 녹아 버리는 듯하외다. SO씨의 눈물 방울이 저의 마음 위에 한 방울씩 두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그 무슨 화살로 꿰뚫은 듯이 아프고 쓰립니다.”

할 뿐이었나이다.

“A씨, 저는 다만 A씨 한 분이 저를 참으로 사랑하여 주실 줄 알았었는데요.”

하는 SO는 그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아무말이 없었읍니다. 저는 다만,

“그만 우세요. 자‥‥‥ 일어나세요.”

하고 가리지 못한 눈물을 씻을 뿐이었나이다.

저는 어제날까지 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는 자를 행복자라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오늘 이 불구자의 하소연을 들을 때에 비로소 저의 가슴이 아팠었읍니다. 한 개의 사랑을 두 군데로 짜르려 할 때 그 아픔을 알았었읍니다. 그 쓰림을 알았읍니다. 한 개인 사랑을 가진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여러 사랑을 받는 것의 그 가슴저리고 불행한 것을 알았읍니다.

아! 그러나 그 불구자는 더욱더욱 불구자가 되어 갈 터이지요. 낙망과 원한의 심연에서 하늘을 우러러 그의 불행을 부르짖을 터이지요? 그 부르짖음의 애처로운 소리는 저의 피를 얼마나 식힐까요? 그 소리는 영원토록 저의 귀밑에서 슬퍼 울 터이지요?

선생님! 저는 참으로 사랑하는 여성의 사랑을 매정하게 물리쳐야 할 것입니까? 영원도록 받아 주어야 할 것입니까? 불쌍한 자의 울음을 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까? 불구자의 애소의 눈물을 저의 가슴에 파묻히도록 안아야 할 것입니까? 저는 다만 기로에 방황하며 약한 심정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일뿐이외다.

“네, 알았읍니다. 그러나 저는 SO씨의 말씀에 그렇게 속히 대답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면 언제 대답을 하여 주시겠습니까?”

“네 그것은 천천히 해 드리지요.”

하는 묻고 대답하는 말이 우리 두 사람 가운데에는 교환되었읍니다. SO는 의심하는 듯이,

“그러면 저를 절대로 사랑하여 주시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A씨의 가슴에는 저를 위하여서는 절대의 사랑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지요?”

하며 원망하듯이 저를 쳐다보았읍니다. 저는 무엇이라 대답할는지 몰랐읍니다. 참으로 저에게 절대의 사랑이 그때 있었읍니까? 참으로 없었읍니다. 절대의 동정과 연민은 있었 을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절대의 사랑은 없었읍니다. 타산이 있었으며 주저가 많았었읍니다. 어떠한 때에는 불구자라는 근지러운 대명사가 저를 진저리치게까지 하였읍니다. 아무 대답도 없는 저를 보던 SO는,

“저는 알았읍니다. 저는 영원토록 불구자이외다. 한 귀퉁이가 이지러진 사랑의 소유자이외다. 그뿐 아니라 저는‥‥‥”

하더니 단념과 원망이 엉킨 두 눈에는 어리 석은 눈물이 어느 틈에 말라 버리고 냉소와 저주가 맺힌 듯할 뿐이었읍니다. 이 소리를 듣는 저는 어쩐지 마음이 으스스 차고 몸이 달달 떨리는 듯하여 그의 눈물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단념과 원망과 냉소와 저주의 맺힌 듯한 표정을 볼 때 저는 또다시 그의 마음을 풀어뜨리어 힘없고 연하게 울리고 싶었읍니다. 저는,

“SO씨!”

하고 그의 손을 잡으며,

“저는 영원토록 SO씨를 잊지는 못하겠읍니다.”

하였읍니다. 그는,

“네 저를 잊지는 말아 주세요. 저도 눈을 감을 때까지는 A씨를 잊지는 못하겠지요.”

할 뿐이었읍니다.

일곱 째

SO의 집에서 나온 저는 학교를 향하여 갔었읍니다. 아까까지 청징하던 심신은 웬일인지 불구인 여성의 집을 다녀온 후부터는 흐릿하고 몽롱할 뿐만 아니라 침울하고 센티멘탈로 변하였읍니다.

저는 학교에를 갑니다. 한 시간의 도화(圖畵)를 가르치기 위함보다도 그 보수를 바라고 갑니다. 세상의 제일 불행한 범죄가 있다 하면 아마 이와 같은 자이겠지요. 뜻하지 않고 내 마음에 있지 않은 짓을 한 뭉치의 밥덩어리와 김치 몇 쪽의 충복할 식물을 위하여 알면서 행한다 하면 죄인줄 알면서 타인의 물건을 도적한 기한(飢寒)에 쪼들린 자와 얼마나 나을 것이 있겠읍니까? 남의 물건을 도적한 자의 양심이 떨린다 하면 그안큼 비례한 저의 양심도 떨리었을 것이며 박두하는 기한에 못 이기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적한 사람의 생을 갈구한 것을 동정할 것이라면 생명을 이어 얻기 위하여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이 A라는 화가도 또한 동정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일는지요?

저는 학교 정문에 들어섰었읍니다. 그때 마침 M교주가 학교를 다녀가는 길인지 자동차에 오르려 할 때였읍니다. 그때에 그 간사한 이선생은 M교주의 팔을 부축하여 자동차 속으로 몰아넣었읍니다. 저는 이것을 보로 크게 웃었읍니다. 옆에서 저의 웃는 것을 보는 박선생은,

“왜 웃으시우?”

하며 눈을 흘기더니,

“그게 무슨 무례한 짓이요?”

하더이다. 저는 또다시 한 번 껄껄 웃으면서,

“박선생은 나의 웃는 의미를 모르시는구료.”

하고는,

“인형이외다. 인형예요. 두 팔 두 다리가 있고도 못 쓰는 인형이외다. 인형은 인형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인형을 부축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보구서는 나는 아니 웃을 수가 없지요.”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교실 안으로 들어갔읍니다.

오늘은 그믐날이외다. 월급 타는 날이외다. 사무실엔 들어선 저는 다만 보이는 것이 회계의 동정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쓸 궁리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읍니다. 오늘은 어린애 모자를 하나 사다 주고 사랑하는 아내의 목도리를 하나 사다 주어야 하겠다 하였읍니다.

  • 25원이라는 월급을 기다리는 저의 마음은 웬일인지 씁쓸하고도 저의 몸이 불쌍해 보였읍니다. 그리고 공연히 심증이 났읍니다.

교실에 들어가 백묵을 들고서 칠판 위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모든 학생들까지 밉살스 러울 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저의 운명을 이렇게 만들어 준 듯하기도 하였읍니다. 저는 마음에 없는 한 시간을 아니 지낼 수가 없었읍니다.

그날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해 오라고 한 날이었읍니다. 근 40명 학생중에 숙제를 해 오지 않은 학생이 다섯이 있었읍니다. 그 중에 그 중 나이 적고 옷을 헐벗은 학생은 제가,

“왜 숙제를 안 그려 왔소?”

할 때 그는 다만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있더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자꾸자꾸 울고 섰을 뿐이었읍니다. 다른 애 학생은 여러 가지 핑계로써 선생인 저를 속이려 하였읍니다.

저는 그 눈물 흘리는 학생을 바라보고 또다시 다 뚫어진 양말을 볼 때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나서,

“왜 대답은 아니하고 울기만 하시오?”

하며 그의 어깨에 팔을 대니 선생인 저의 손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이 더욱 그의 감정을 느즈러지게 하였던지 더욱더욱 느끼어 울 뿐이었읍니다. 그러다가는 복받치는 울음 소리와 함께,

“집에서 돈이 없다고 도화지를 사 주지 않아요.”

하였읍니다.

선생님! 제가 이 학생을 벌줄 자격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저는 다만 창연한 두 눈으로 그 어린 학생을 바라보며,

“여보시오, 참마음만 있으면 그만이오. 나는 당신의 그림 그려 오지 않은 것을 책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참성의가 없었는가 하는 것을 책하려 함이었소. 당신의 눈물 한 방울은 오늘 그려 오지 못한 그 그림보다 몇 배의 가치가 있는 것이오.”

하였읍니다.

하교 후 사무실로 나왔읍니다. 회계는 나를 보더니 아주 은근한 듯이,

“A선생님, 이리로 좀 오십시오.”

하고 자기 곁으로 부르더니 봉투에 집어넣은 월급을 저의 손에 쥐어 주면서,

“담배값이나 하십시오.”

하였읍니다. 저는 그것을 받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읍니다. 그래서,

“네, 고맙습니다.”

하고 그대로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읍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느라고 회색의 저녁빛이 온 시가를 싸고도는데 저는 학교 문 밖에 나와서야 그 봉투를 다시 끄집어 내어 그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보았읍니다.

그 속에는 17원 50전, 17원 50전이 들어 있었읍니다.

저는 멈칫하고 섰었읍니다. 그리고,

(어째서 17원 50전만 되나?)

하고 한참이나 의아하여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문득 생각나는 것은 NC의 집에 갔었던 것이외다. 아내 잃은 친우를 찾아갔던 1주일 간의 노력의 대가는 학교에서는 제하여졌읍 니다.

아! 선생님, 저의 손에는 17원 50전이 있읍니다. 1개월 노력의 대가는 17원 50전이외 다. 불쌍한 젊은 화가의 양심을 부끄럽게 한 죄의 대가가 17원 50전이외다.

저는 하는 수 없었읍니다. 회색 봉투에 집어넣은 그 돈을 들고 SO의 집까지 무의식중에 왔읍니다. 하늘의 구름장 사이로는 가렸다 보였다 하는 작은 별들이 이 우스운 젊은 A를 비웃는 듯이 내다보고 있었읍니다. 회색의 감정이 공연히 저의 마음을 울분하고 원망스럽게 하였읍니다.

SO의 집에는 무엇하러 왔을까요?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하였읍니다. 문간에 와서야 내가 무엇하러 여기를 왔나 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저의 가슴에서 때없이 울고 있는 그 무슨 하모니는 저의 발을 SO의 집안으로 끌어들였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그전과 같이 서슴지 않고 그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읍니다. 조그마한 집, 조그마한 문으로 흘러나오는 무거운 공기는 급히 흐르는 시냇물같이 저의 가슴으로 몰려오는 듯하였읍니다.

저는 다만 문간에 서서 도적놈같이 문 안을 엿듣고 망설였읍니다.

선생님! 사랑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할 적에는 서슴지 않고 아무 불안도 없이 다니던 제가 오늘은 어찌하여 죄지은 자 모양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으며 가슴이 거북 하였을까요?

죄악이 아닌 사랑을 주려 하는데 저는 가슴이 떨림을 깨달았으며 잘못이 아닌 사랑을 준다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저는 10분 동안이나 서 있었읍니다. 그때에 또다시 그 불구자의 모녀의 울음 소리가 들렸읍니다. 그 울음 소리는 그전보다 더 저의 마음을 훑는 듯하고 쪼개는 듯하였읍니다. 그리고 모든 비애를 저의 가슴 위에 실어 놓는 듯이 무겁게 슬펐읍니다. 그러나 저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읍니다. 학교에서 받은 1개월 노력의 대가인 17원 50전이 울분하게 하였음이 공연히 저의 눈물까지 막아 버렸읍니다.

저는 한참이나 그 울음 소리를 들었읍니다. 그 울음에 섞이어 나오는 늙은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치 못하게 들리는 것은,

“SO야, 이제는 그만 한길 귀신이 되었구나.”

하는 살이 얼어붙는 듯한 불쌍한 소리였읍니다.

저는 그제야 그 눈물을 알았읍니다. 불구자의 모녀는 몸을 담을 집이 없읍니다. 그는 오늘에 몇 푼 안 되는 세전(貰錢)으로 말미암아 이 집에서 내어쫓깁니다.

창 밖에서 듣고 있는 이 A의 주머니에는 17원 50전이 있읍니다. 이 A는 그래도 한길에서 방황하지는 않겠지요? 저는 그 주머니의 17원 50전을 꺼내었읍니다. 그리고 연필로 봉투에 A라 썼읍니다. 저는 그 찰나간에 절대의 동정이 저의 가슴속에서 약동하였읍니다. 저의 피를 뜨겁고 힘있게 끓게 하였읍니다.

저는 그 돈을 문을 소리없이 열고 가만히 마루 위에 놓았읍니다. 그리고 절도와 같이 그 문을 떨리는 다리로 얼른 뛰어나왔읍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저의 집으로 향하여 갔읍니다.

집에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겠지요. 어린 자식은 아버지 오면 때때모자를 사준다고 몽실몽실한 손을 고개에 괴고 이 젊은 아버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터이지요?

그러나 월급날인 오늘의 저의 주머니는 벌써 한 닢도 없는 털터리가 되었읍니다. 저의 들어가는 대문 소리를 듣고 다른 날보다 더 반가와 맞아 주는 젊은 아내에게 그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아무것도 없읍니다. 어린 자식의 기뻐 뛰는 마음을 도리어 풀이 죽게 할 뿐이 겠지요.

그러하오나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어가듯이 암흑(暗黑)한 동리를 걸어가는 이 A의 마음은 웬일인지 만족한 기꺼움이 있었으며 싱싱한 생의 약동이 있었읍니다. 저는 또다시 MW사로 왔옵니다. 거기에는 DH와 WC가 웅크리고 않아서 무슨 책을 보고 있더니 저를 보고서,

“어떻게 되었나?”

하였읍니다. 그것은 저의 월급 말이었읍니다. 저는 모자를 벗고 구두를 끄르면서 기가 막힌 듯이 씁쓸히 웃으면서,

“흥, 나의 1개월 동안의 노력의 대가는 참으로 값있게 써 버리었네.”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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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12월 12일 제4회 시작부분 나의 지난날의 일은 말갛게 잊어 주어야하겠다. 나조차도 그것을 잊으려 하는 것이니 자살1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 동안 자그마한 광명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전연 얼마 동안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또 한 번 나에게 자살이 찾아왔을 때에 나는 내가 여전히 죽을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으로 죽을 것을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그만큼 이번에 나를 찾아온 자살은 나에게 있어 본질적2이요, 치명적3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연 실망 가운데 있다. 지금에 나의 이 무서운 생활이 노4 위에 선 도승사5의 모양과 같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도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나의 일생에 다시 없는 행운이 돌아올 수만 있다 하면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까지는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이 호흡을 속에서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1930. 4. 26. 의주통 공사장에서
(李○)

본문
이때나 저때나 박행(薄幸)에 우는 내가 십유여 년 전 그 해도 저무려는 어느 날 지향도 없이 고향을 등지고 떠나가려 할 때에 과거의 나의 파란 많은 생활에도 적지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죽마의 구우 M군이 나를 보내려 먼 곳까지 쫓아나와 갈림을 아끼는 정으로 나의 손을 붙들고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네」 하며 처창한 낯빛으로 나에게 말하던 그때의 그 말을 나는 오늘까지도 기억하여 새롭거니와 과연 그 후의 나는 M군의 그 말과 같이 내가 생각던 바 그러한 것과 같은 세상은 어느 한 모도 찾아내일 수는 없이 모두가 돌연적이었고 모두가 우연적이었고 모두가 숙명적일 뿐이었었다.
「저들은 어찌하여 나의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여 주지 아니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해야 옳다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들은 저렇게 생각하여 옳다하는 것일까」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은 하여 볼 겨를도 없이
「세상이란 그런 것이야. 네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것, 때로는 정반대되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는 것이야!」 이러한 결정적 해답이 오직 질풍신뢰6적으로 나의 아무 청산도 주관도 없는 사랑을 일약 점령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 후에 나는 네가 세상에 그 어떠한 것을 알고자 할 때에는 우선 네가 먼저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아라. 그런 다음에 너는 그 첫번 해답의 대칭점을 구한다면 그것은 최후의 그것의 정확한 해답일 것이니」
하는 이러한 참혹한 비결까지 얻어 놓았었다. 예상 못한 세상에서 부질없이 살아가는 동안에 어느덧 나라는 사람은 구태여 이 대칭점을 구하지 아니하고도 세상일을 대할 수 있는 가련한 「비틀어진」 인간성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을 바라볼 때에 일상에 그 이면(裏面)을 보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기쁨」도 「슬픔」도 「웃음」도 「광명」도 이러한 모든 인간으로서의 당연히 가져야 할 감정의 권위를 초월한 그야말로 아무 자극도 감격도 없는 영점(零點)에 가까운 인간으로 화하고 말았다. 오직 내가 나의 고향을 떠난 뒤 오늘날까지 십유여 년 간의 방랑생활에서 얻은 바 그 무엇이 있다 하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 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어그러진 결론 하나가 있을 따름이겠다. 이것은 지나간 나의 반생의 전부(全部)요 총결산이다. 이 하잘것 없는 짧은 한 편은 이 어그러진 인간법칙을 「그」라는 인격에 붙이여서 재차의 방랑 생활에 흐르려는 나의 참담을 극한 과거의 공개장으로 하려는 것이다.

1
통절한 자극 심각한 인상 그것은 사람의 성격까지도 변화시킨다. 평범한 환경 단조한 생활 긴장 없는 전개 가운데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그의 성격까지의 변경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느 때 무슨 종류의 일이고 참으로 아픈 자극과 참으로 깊은 인상을 거쳐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성격 위에까지의 결정적 변화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지금으로부터 지나간 이삼년 동안에 그를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다 「그」의 성격의 어느 곳인지 집어내이지 못할 변화를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그의 용모와 표정 어조까지의 차라리 슬퍼할 만한 변화를 또한 누구나 다―놀래임과 의아(疑呀)를 가지고 대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사람 저 사람의 그동안 생활에 저 사람의 성격을 저만치 변화시킬 만한 무슨 큰 자극과 깊은 인상이 있었던 것이겠지 무엇일까」 그러나 이와 같은 의아는 도리어 그의 그 동안의 생활에도 그의 성격을 오늘의 그것으로 변화시키게까지 한 그러한 아픈 자극과 깊은 인상이 있었다는 것을 더 잘 이야기하는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겠다.

2
세대와 풍정은 나날이 변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들을 점점 더 살 수 없는 가운데서 그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변화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이 첫번 희생으로는 그의 아내가 산후(産後)의 발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은 것이었다. 나많은(많다 하여도 사십이 좀 지난) 어머니를 우으로 모시고 어미 잃은 젖먹이를 품안에 끼고 그날 그날의 밥을 구하여 어두운 거리를 헤매이는 그의 인간고야말로 참담 그것이었다.
「죽어라 죽어 차라리 죽어라. 나의 이 힘없는 발길에 걸치적대이지를 말아라. 피곤한 이 다리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내여다오.」 그의 푸른 입술이 떨리는 이러한 무서운 부르짖음이 채―그의 입술을 떨어지기도 전에 안타까운 몇 날의 호흡을 계속하여 오던 그 젖먹이마저 놓였던 자리도 없이 죽은 어미의 뒤를 따라갔다. M군과 그 그리고 애총7메이는 사람 이 세 사람이 돌림돌림 얼어붙은 땅을 땀을 흘리어가며 파서 그 조고마한 시체를 묻어 준 다음에 M군과 그는 저문 서울의 거리를 걷는 두 사람이 되었다.
「M군 나는 이제 나의 지게의 한편짝 짐을 내려 놓았어. 나는 아무래도 여기서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으니 죽으나 사나 고향을 한 번 뛰어나가 볼 테야.」 「그야…… 그러나 늙으신 자네의 어머니를 남의 땅에서 고생시킨다면 차라리 더 아픈 일이 아니겠나.」 「그러나 나는 불효한 자식이라는 것을 면치 못한 지 벌써 오래니깐」 드물게 볼 만치 그의 눈이 깊숙이 숨벅이고 축축히 번쩍이는 것이 그의 굳은 결심의 빛을 여지없이 말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T씨(T씨는 그와의 의(義)는 좋지 못하다 할망정 그래도 그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친아우였다) 어렵기 짝이 없는 그들의 살림이면서도 이 단둘밖에 없는 형제가 딴집 살림을 하고 있는 것도 그들의 의가 좋지 못한 까닭이었었으나 그러나 그가 이 크낙한 결심을 의논하려 함에는 그는 그 T씨의 집으로 달려가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네나 내나 여기서는 살 수 없으니 우리 죽을셈치고 한 번 뛰어나가 벌어 보자.」 「형님은 처자도 없고 한몸이니깐 그렇게 고향을 뛰어나가시기가 어렵지 않으시리다만 나만 해도 철없는 처가 있고 코 흘리는 저 업(T씨의 아들)이 있지 않소. 자 저것들을 데리고 여기서 살재도 고생이 자심8한데 낯설은 남의 땅에 가서 그 남 못한 고생을 어떻게 하며 저것들은 다 무슨 죄란 말이요 갈려거든 형님 혼자나 가시오 나는 갈 수 없으니」
일상에 어머니를 모신 형 그가 가까이 있어서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가끔 어머니를 구실(口實)로 그에게 뜯기워 가며 사는 것을 몹시도 괴로이 여기던 T씨는 내심으로 그가 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로든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기를 바라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가 홧김에
「어머니 큰 아들 밥만 밥입니까. 작은 아들 밥도 밥이지요. 큰 아들만 그렇게 바라지 마시고 작은 아들네 밥도 가끔 가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좀 얻어 잡숫다 오시구려.」 이러한 그의 말이 비록 그의 홧김이나 술김의 말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일상에 가난에 허덕지는 자식들을 바라볼 때에 불안스럽고 면구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늙은 그들의 어머니는 작은 아들 T씨가 싫어할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또 작은 아들 역시 큰 아들보다 조곰도 나을 것이 없이 가난한 줄까지 번연히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래도 큰 아들 가엾은 생각에 하루이고 이틀이고 T씨의 집으로 얻어먹으러 터덜거리고 갔었다. 또 그외에도 즉 어머니 생일날 같은 때
「너도 어머니의 자식 나도 어머니의 자식 네나 내나 어머니의 자식되기는 일반인데 내가 큰 아들이래서 내 혼자서만 물라는 법이 있니 그러니 너도 반만 물 생각해라.」 그럴 때마다 반이고 삼분의 일이고 T씨는 할 수 없거나 있거나 싫은 것을 억지로 부담하여 왔었다. 이와같은 것들이 다―T씨가 그의 가까이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아니하는 까닭이었다.
「그럼 T야 너 어머니를 맡아라. 나는 일년이고 이태이고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올 터이니 그러면 그때에는……」 「에―다 싫소. 돈 벌어 가지고 오는 것도 아무 것도 다 싫소 내가 어머니가 당했소 그런 어수룩한 소리 하지도 마시오 더군다나 생각해 보시오. 형님은 지금 처자도 다 없는 단 한몸에 늙으신 어머님 한 분을 무엇을 그러신단 말이오 나는 처자들이 우물우물하는데 게다가 또 어머니까지 어떻게 맡는단 말이오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시면서 고생을 시키든지 낙을 뵈우든지 그건 다 내가 알 배 아니니깐 어머니를 나한테 떠맡기고 갈 생각은 꿈에도 마시오.」
이렇게 T는 그의 면전에서 한 번에 획―뱉아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를 그 자식들이 서로 떠미는 이 불효 어머니 모시기를 싫어하는 이 불효 이것도 오직 그들을 어찌할 수도 없이 비끌어매이고 있는 적빈(赤貧)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차마 저지르게 한 조고마한 죄악일 것이다.
그후 며칠 동안 그는 그의 길들였던 세대도구(世帶道具)를 다 팔아 가지고 몇 푼의 노비를 만들어서 정든 고향을 길이 등지려는 가련한 몸이 되었다. 비록 그다지 의는 좋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그러나 그러한 형 그와의 불의도 다―적빈 그것 때문이었던 그의 아우 T는 생사(生死)를 가운데 놓은 마지막 이별을 맡기며 눈물 흘려 설어하는 사람도 오직 이 T 하나가 있을 따름이었다.
「어머니 형님 언제나 또 뵈오리이까.」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목메인 그들의 차마 보지 못할 비극 기차는 가고 T씨는 돌아오고 한밤중 경성 역두에는 이러한 눈물의 이별극이 자국도 없이 있었다.
죽마의 친구 M군이 학창의 여가를 타서 부산부두까지 따라와서 마음으로의 섭섭함으로써 그들 모자를 보내어 주었다. 새벽바람 찬 부두에서 갈림을 아끼는 친구와 친구는 손을 마주 잡고
「언제나 또 만날까 또 만날 수 있을까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 그러한 것은 아니라네 부디 몸조심 부모 효도 잊지 말아 주게.」 「잘 있게 이렇게 먼 데까지 나와 주니 참 고맙기 끝없네 자네의 지금 한 말 언제라도 잊지 아니할 것일세 때때로 생사를 알리는 한 조각 소식 부치기를 잊지 말아 주게 자―그러면.」 새벽 안개 자옥한 속을 뚫고 검푸른 물을 헤치며 친구를 싣고 떠나가는 연락선의 뒷모양을 어느 때까지나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자취도 남기지 않은 그때가 즉 그 해도 저무려는 십이월 십이일(十二月十二日) 이른 새벽이었다.
그후 그의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고향의 사람에는 오직 M군이라는 그의 친구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가 처음의 한두번을 제하고는 T씨에게 직접 편지하지 아니한 것과 같이 T씨도 처음의 한두번을 제하고는 그에게 편지하지 아니하였다.
오직 그들 형제는 그도 M군을 사이로 하여 M씨의 소식을 얻어 알고 T씨도 M군을 사이로 하여 그의 생사를 알 수 있는 흐릿한 상태가 길이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M에게 보내는 편지(第一信) M군 추운데 그렇게 먼 곳까지 나와서 어머니와 나를 보내 주려고 자네의 정성을 다하였으니 그 고마운 말을 무엇으로 다 하겠나 이 나의 충정의 만분의 일이라도 이 글발에 붙여 보려 할 뿐일세 생전에 처음 고향을 떠난 이 몸의 몸과 마음의 더없는 괴로움 또한 어찌 이루 다 말하겠나 다만 나의 건강이 조곰도 축나지 아니한 것만 다시없는 요행으로 알고 있을 따름일세 그러나 처음으로의 긴 동안의 여행으로 말미암아 어머님께서는 건강을 퍽 해하셔서 지금은 일어 앉으시지도 못하시고 누워 계시네 이렇게도 몸의 아픔과 괴로움을 맛보시면서도 나에게 대하여는 도리어 미안하다는 듯이 이렇다는 말씀 한 마디 아니하시니 이럴 때마다 이 자식의 불효를 생각하고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한숨지며 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맛보는 것일세 자네가 말한 바와 같이 역시 세상은 우리들이 생각한 바와는 몹시도 다른 것인 모양이야 오나 가나 나에게 대하여서는 저주스러운 것들 뿐이요 차디찬 것들 뿐일세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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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조선사람으로만 조직되어 있는 조합이 있어서 처음 도항(渡航)하여 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직업 거주(居住) 등절을 소개도 하며 돌보아도 주며 여러 가지로 편의를 도모하기에 진력하고 있는 것일세 나의 지금 있는 곳은 신호시(新戶市)9에서 한 일리쯤 떨어져 있는 산지(山地)에 가까운 곳인데 이곳에는 수없는 조선사람의 노동자가 보금자리를 치고 있는 것일세 이 산비탈에 일면으로 움들을 파고는 그 속에서 먹고 자고 울고 웃고 씻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하면서 복작복작 오물거리며 살아가는 것일세 빨아 널은 흰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나 다홍 저고리와 연두 치마 입은 어린아이들이 오고 가며 뛰노는 것이나 고향땅을 멀리 떠난 이곳일세만 그래도 우리끼리 모여 사는 것 같아서 그리 쓸쓸하거나 낯설지는 않은 듯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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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움을 파지는 못하였네 헐어빠진 함석 철판 몇 장과 화재터에 못 쓸 재목 몇 토막을 아까운 돈의 몇 푼을 들여서 사다가 놓기는 하였네마는 처음 당해 보는 긴 여행 끝에 몸도 피곤하고 날도 요즈음 좀 치웁고 또 그날그날 먹을 벌이를 하노라고 시내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아니 될 몸이라 어떻게 그렇게 내가 들어 있을 움집이라고 쉽사리 팔 사이가 있겠나. 병드신 어머님을 모시고서 동포라고는 하지만 낯설은 남의 집에서 폐를 끼치고 있는 생각을 하며 어서어서 하루라도 바삐 움집이나마 파서 짓고 들어야 할 터인데 모든 것이 다― 걱정거리뿐일세. 직업이라야 별로 이렇다는 직업이 있을 까닭이 없네. 더욱 요즈음은 겨울날이라 숙련된 기술 노동자 외에 그야말로 함부로 그날그날을 벌어 먹고 사는 막벌잇군 노동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일세. 더욱이 나는 아직 이곳 사정도 모르고 해서 당분간은 고향에서 세간기명10을 팔아 가지고 노자 쓰고 나머지 얼마 안 되는 돈을 살이나 뼈를 긁어 먹는 세음으로 갉아먹어 가며 있을 수밖에 없네. 그러나 이곳은 고향과는 그래도 좀 달라서 아주 하루에 한 푼도 못 벌어서 눈 뜨고 편히 굶고 앉았거나 그렇지는 않은 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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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과 옷을 모두 팔아먹고 와서 첫째로 도무지 추워서 살 수 없네. 더군다나 병드신 늙은 어머님을 생각하면 어서 하루라도 바삐 돈을 변통하여서 덮을 것과 입을 것을 장만하여야만 할 터인데 그 역시 걱정거리에 하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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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여행 기분이 확―풀리지 아니하여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으니 우선 이만한 통지 비슷한데 그치거니와 벌써부터 이렇게 고향이 그리워서야 어떻게 앞으로 길고 긴 날을 살아갈는지 의문일세. 이곳 사람들은 이제 처음이니깐 그렇지 조곰 지나가면 차차 관계치 않다고 하데마는 요즈음은 밤이나 낮이나 눈만 감으면 고향꿈이 꾸여지어서 도무지 괴로워 살 수 없네그려. 아―과연 운명은 나의 앞길에 어떠한 장난감을 늘어놓을는지 모르겠네마는 모두를 바람과 물결에 맡길 작정일세. 직업도 얻고 어머니의 병환도 얼른 나으시게 하고 또 움집이라도 하나 마련하여 이국의 생활(異國生活)이나마 조금 안정이 된 다음에 서서히 모든 것을 또 알리어 드리겠네. 나도 늙은 어머니와 특히 건강을 주의하겠거니와 자네도 아무쪼록 몸을 귀중히 생각하여 언제까지라도 튼튼한 일꾼으로의 자네가 되어주기를 바라네. 떠난 지 며칠 못되는 오늘 어찌 다시금 만날 날을 기필(期必)11할 수야 있겠나마는 운명이 전연 우리 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면 일후 또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없지는 않겠지! 한 번 더 자네의 끊임없는 건강을 빌며 또 자네의 사랑에 넘치는 글을 기다리며 ……친구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二信) M군! 하늘을 꾸짖고 땅을 눈흘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M군 M군! 어머니는 돌아가시었네. 세상에 나오신 지 오십년에 밝은 날 하루를 보시지 못하시고 이렇다는 불평의 말씀 한 마디도 못하여 보시고 그대로 이역(異域)의 차디찬 흙 속에 길이 잠드시고 말았네. 불효한 이 자식을 원망하시며 쓰라렸던 이 세상을 저주하시며 어머님의 외롭고 불쌍한 영혼은 얼마나 이 이역 하늘에 수없이 방황하실 것인가. 죽음! 과연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나 사람들은 얼마나 그 죽음을 무서워하며 얼마나 어렵게 알고 있나. 그러나 그 무서운 죽음, 그 어려운 죽음이라는 것이 마침내는 그렇게도 우습고 그렇게도 하잘 것 없이 쉬운 것이더란 말인가. 나는 이제 그 일상에 두려워하고 어렵게 여기던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이 나기보다도 사람이 살아가기보다도 그 어느 것보다도 가장 하잘것없고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네. 오십년 동안 기구한 목숨을 이어오시던 어머님이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풀잎에 맺혔던 이슬과 같이 사라지고 마시는 것을 보니 인생이라는 것이 그다지도 허무(虛無)하더라는 것을 느낄 대로 느꼈네. M군! 살길을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형제를 떨치고 친구를 버리고 이 곳으로 더듬거려 흘러온 나는 지금에 한 분밖에 아니 계시던 어머님을 잃었네 그려! 내가 지금 운명의 끊임없는 장난을 저주하면 무엇을 하며 나의 불효를 스스로 뉘우치며 한탄한들 무엇을 하며 무상한 인세에 향하여 소리지르며 외친들 그 또한 무엇하겠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가 허무일세. 우주(宇宙)에는 오직 이 허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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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 어머니를 마저 잃었으니 지금에 나는 문자(文字) 대로 아주 홀몸이 되고 말았네. 이제 내가 어디를 간들 무엇 내 몸을 비끌어매이는 것이 있겠으며 나의 걸어가는 길 위에 무엇 걸리적대일 것이 있겠나? 나는 일로부터 그날을 위한 그날의 생활 이러한 생활을 하여 가려고 하는 것일세. 왜? 인생에게는 다음 순간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오직 눈앞에의 허무스러운 찰나(刹那)가 있을 따름일 터이니깐! 나는 지금에 한 사람의 훌륭한 숙련(熟練) 직공일세. 사회에 처하여 당당한 유직자(有職者)일세. 고향에 있을 때 조곰 배워둔 도포업(塗布業)12이 이곳에 와서 끊어져 가던 나의 목숨을 이어 주네. 쓰여먹을 줄 어찌 알았겠나. 지금 나는 ××조선소(造船所) 건구도공부(建具塗工部)에 목줄을 매이고 있네. 급료 말인가 하루에 일원 오십전 한 달에 사십 오 원. 이 한 몸뚱이가 먹고 살기에는 너무나 많은 돈이 아니겠나. 나는 남는 돈을 저금이라도 하여 보려 하였으나 인생은 허무인데 그것 무엇 그럴 필요가 있나. 언제 죽을지 아는 이 몸이라고 아주 바로 저금을 다하고 그것 다 내게는 주제넘은 일일세. 나의 주린 창자를 채이고 남는 돈의 전부를 술과 그리고 도박으로 소비해 버리고 마는 것일세. 얻어도 술! 잃어도 술! 지금 나의 생활이 술과 도박이 없다 할진댄 그야말로 전혀 제로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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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도 봄이 왔겠지 아! 고향의 봄이 한없이 그리우네 그려! 골목골목이 「앵도지리―뻐찌13」장사 다니고 개천 가에 달래장사 헤매이는 고향의 봄이 그립기 한이 없네그려. 초저녁 병문14에 창자를 끊는 듯한 처량한 날라리소리, 젖빛 하늘에 떠도는 고향의 봄이 더욱 한없이 그리워 산 설고 물 설은 이 땅에도 봄은 찾아와서 지금 내가 몸을 의지하고 있는 이 움집들 다닥다닥 붙은 산비탈도 엷은 양광(陽光)에 씻기워 가며 종달새 노래에 기지개 펴고 있는 것일세 이 때에 나는 유쾌하게 일하고 있는 것일세. 이 세상을 괴롭게 구는 봄이 밖에 왔건마는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소리 높여 목청 놓아 노래 부르며 떠들며 어머님 근심도 집의 근심도 또 고향 근심도 아무것도 없이 유쾌하게 일하고 있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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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돌아가시던 그 움집은 나의 눈으로는 보기도 싫었네. 그리하여 나는 새로이 건너온 사람에게 그 움집을 넘기고 그곳에서 좀 뚝 떨어져서 새로이 움집을 하나 또 지었네. 그러나 그 새 움집 속에는 누구라 나의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겠나. 참으로 아무도 없는 것일세. 나는 일터에서 나오는 대로 밤이 깊도록 그대로 시가지(市街地)를 정신없이 헤매이다가 그야말로 잠을 자기 위하여 그 움집을 찾아들고 찾아들고 하는 것일세. 그러나 내가 거리 한모퉁이나 공원 벤치 위에서 밤새운 것도 한두 번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네. 자네는 지금의 나의 찰나적으로 타락된 생활을 매도(罵倒)할는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설사 자네가 나를 욕하고 꾸지람을 한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일세. 지금 나의 심정(心情)의 참 깊은 속을 살펴 알 사람은 오직 나를 제하고 아무도 없는 것이니깐 원컨대 자네는 너무나 나를 책망 힐타만 말고서 이― 나의 기막힌 심정의 참 깊은 속을 조곰이라도 살피어 주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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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두 주일이 넘었네 그려. 그 즉시로 자네에게 이 비참(悲慘)한 소식을 전하여 주려고도 하였으나 자네 역시 짐작할 일이겠지마는 도무지 착란(錯亂)된 나의 머리와 손끝으로는 도저히 한자를 그릴 수가 없었네. 그래서 이렇게 늦은 것도 늦은 것이겠으나 아직도 나의 그 극도로 착란(錯亂)되었던 머리는 완전히 진정(鎭靜)되지 못하였네. 요사이 나의 생활 현상 같아서야 사람이 사는 것이 무슨 의의(意義)가 있는 것이겠으며 또 사람이 살아야만 하겠다는 것도 무슨 까닭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오직 모든 것이 우습게만 보이고 하잘 것 없이만 보이고 가치 없어만 보이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옮기는 데에만 무엇이고 있다는 의의(意義)가 조곰이라도 있는 것인 듯하기만 하네. 나의 요즈음 생활은 나로서도 양심의 가책(苛責)을 전연 받지 않는 것도 아닐세. 그러나 지금의 나의 어두워진 가슴에 한 줄기 조고마한 빛깔이라도 돌아올 때까지는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네. 설사 이 당분간(當分間)이라는 것이 나의 눈을 감는 전(前)순간까지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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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의 돌아가심에 대하여는 물론 영양부족(營養不足)으로 말미암아 몸의 극도의 쇠약과 도(度)에 넘치는 기한(飢寒)이 그 대부분의 원인이겠으나 그러나 그 직접 원인은 생전 못하여 보시던 장시간의 여행 끝에 극도로 몸과 마음의 흥분과 피로(疲勞)를 가져온 데다가 토질(土質)이 다른 물과 밥으로 말미암은 일종의 토질(土疾) 비슷한 병에 걸리신 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평소에 그다지 뛰어난 건강을 가지시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별로 잔병 치레를 하지도 아니하며 계시던 어머님이 이번에 이렇게 한번에 힘없이 쓰러지실 줄은 참으로 꿈밖에도 생각 못하였던 바이야. 돌아가실 때에도 역시 아무 말도 아니 하시고 오직 자식 낳아 길러서 남같이 호강은 못 시키나마 뼈마디가 빠지도록 고생시킨 것이 다시 없이 미안하고 한이 된다는 말씀과 T를 못 보시며 돌아가시는 것이 또 한 가지 섭섭한 일이라는 말씀, 자네의 후정(厚情)을 감사하시는 말씀을 하실 따름이었었네. 그리고는 그다지 몸의 고민도 없이 고요히 잠들 듯이 눈을 감으시데. 참 허무한 그러나 생각하면 우선 눈물이 앞을 가리는 어머님의 임종(臨終)이었네. 어머님의 그 말들은 아직도 그 부처님 같은 어머니를 고생시킨 이 불효의 자식의 가슴을 에이는 것 같으며 내 일생 내가 눈 감을 순간까지 어찌 그때 그 말씀을 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가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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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로부터 자유로이 세상을 구경하며 그날 그날을 유쾌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일세. 나의 장래를 생각할 것도, 불쌍히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할 것도 다 없다고 생각하네. 그것은 왜? 그것은 차라리 나의 못박힌 가슴에 더없는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니깐! 마음 가라앉는 대로 일간 또 자세한 말 그리운 말 적어 보내겠거니와 T는 지금에 어머님 세상 떠나가신 것도 모르고 그대로― 적빈(赤貧) 속에 쪼들리어 가며 허덕이겠지?! 또한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 한이 없네. T에게는 곧 내가 직접 알려 줄 것이니 어머님의 세상 떠나신 데 대하여는 자네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게. 자네의 정에 넘치는 글을 기다리고 아울러 자네의 더없는 건강을 빌며……. 친구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三信) M군! 내가 자네를 그리워 한없이 적조한 날을 보내는 거와 같이 자네도 또한 나를 그리어 얼마나 적조한 날을 보냈나? 언제나 나는 자네의 끊임없는 건강을 알리우고 자네는 나의 또한 끊임없는 건강을 알리울 수 있는 것이 오직 우리 두 사람의 다시도 없는 기쁨이 아니겠나. 내가 신호를 떠나 이곳 명고옥(名古屋)15으로 흘러온 지도 벌써 반 년! 아―고향땅을 떠난 지도 벌써 꿈결 같은 삼 년이 지나갔네 그려. 그 동안에 나는 무엇을 하였나. 오직 나의 청춘의 몸 닳는 삼 년이 속절없이 졸아들었을 따름일세 그려! 신호 ××조선소(造船所) 시대의 나의 생활은 그 가운데 비록 한 분 어머니를 잃은 설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여 본다면 그것은 참으로 평온무사한 안일한 생활이었었네. 악마와 같은 이 세상에 이미 도전(桃戰)한 지 오래인 나로서는 이 평온무사한 안일한 직선생활(直線生活)이 싫증이 났네. 나는 널리 흐트러져 있는 이 살벌(殺伐)의 항(巷)16이 고루고루 보고 싶어졌네. 그리하여 그곳에서 사괴인 그곳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이곳 명고옥으로 뛰어온 것일세. 두 사람은 처음에 이곳 어느 식당 「뽀이」가 되었었네. 세상이 허무라는 이 불후(不朽)의 법칙은 적용되지 아니하는 곳이 없데. 얼마 전 그의 공휴일(公休日)에 일상에 사냥(獵)을 즐기는 그는 그의 친구와 함께 이곳에서 퍽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산촌(山村)으로 총을 메이고 떠나갔네. 그러나 그날 오후에 그는 그의 친구의 그릇으로 그 친구는 탄환에 맞아 산중에서 무참히 죽고 말았네. 그 친구는 겁결에 고만 어디로 도망하였었으나 얼마 되지 아니하여 잡히었다고 하데. 일상에 쾌활하고 개방적(開放的)이고 양기(陽氣)에 넘치던 그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더 세상의 허무를 느낀 것일세. 그와 나의 사괴임 동안이 비록 며칠 되지는 아니 하였으나 퍽― 마음과 뜻의 상통됨을 볼 수 있던 그를 잃은 나는 그래도 그곳을 획― 떠나지 못하고 지금은 그 식당 「헤드 쿡」이 되어 가지고 있으면서 늘― 그를 생각하며 어떤 때에는 이 신변이 약간의 공허(空虛)까지도 느낄 적이 다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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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금 목줄을 매이고 있는 식당은 이름이야 먹을 식자 식당일세마는 그것을 먹기 위한 식당이 아니라 놀기를 위한 식당일세. 이 안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고 라디오가 있고 축음기가 몇 개씩이나 있네. 뿐만 아니라 어여쁜 여자(女給)가 이십여 명이나 있으니 이곳 청등(靑燈) 그늘을 찾아드는 버러지의 무리들은 「만하탄17」과 「화이트 호스18」에 신경을 마비시켜 가지고 난조(亂調)의 재즈에 취하며 육향분복(肉香芬馥)한 소녀들의 붉은 입술을 보려고 모여드는 것일세. 공장의 기적이 저녁을 고할 때면 이곳 식당은 그 광란(狂亂)의 뚝게를 열기 시작하는 것일세. 음란을 극한 노래와 광대에 가까운 춤으로 어울어지고 무르녹아서 그날 밤 그날 밤이 새어가는 것일세. 이 버러지들은 사회 전반의 계급을 망라하였으니 직업이 없는 부랑아(浮浪兒)·「샐러리맨」·학생·노동자·신문기자·배우·취한, 그러한 여러 가지 계급의 그들이나 그러나 촉감(觸感)의 향락을 구하며 염가(廉價)의 헛된 사랑을 구하러 오는 데에는 다 한결같이 일치하여 버리고 마는 것일세. 나는 밤마다 이 버러지들의 목을 축이기 위한, 신경을 마비시키기 위한 비료(肥料)거리와 마취제를 요리하기에 여념이 없는 것일세. 나는 밤새도록 이 어지러운 소음(騷音)을 귀가 해어지도록 듣고 있는 것일세. 더없는 황홀과 흥분과 피로를 느끼면서 나의 육체를 노예화시켜서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일세. 그 피로(疲勞)와 긴장(緊張)도 지금에 와서는 다 어느덧 면역(免疫)이 되고 말았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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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번이나 나도 놀랄 만치 코웃음쳤는지 모르겠네. 나! 오늘가지 나 역시 그날의 근육을 판 그날의 주머니를 술과 도박에 떨고 떠는 생활을 계속하여 오던 나로서 그 버러지들을 향하여, 그 소음을 향하여 코웃음을 쳤다는 말일세. 내가 시퍼런 칼을 들고 나의 손을 분주히 놀릴 때에 그들의 떠들고 날치는 것이 어떻게 그리 우습게 보이는지 몰랐네. 「무엇하러 저들은 일부러 술로 몸을 피로시키며 밤새임으로 정력을 감퇴시키기를 즐겨 할까 무엇하러 저들의 포켓트를 일부러 털어 바치러 올까」 이것은 전면 나에게 대하여 수수께끼였네. 한편으로는 그들이 어린애같이 보이고 철없어 보이고 불쌍한 생각까지 들어서. 「내가 왜 술을 먹었던가, 내가 왜 도박을 했던가 내가 왜 일부러 나의 포켓트를 털어 바쳤었던가.」 이렇게 지나간 이태 남짓한 나의 생활에 대하여 의심도 하며 스스로 꾸짖으며 부끄러워도 하여 보았네. 「인제야 내 마음이 아마 바른 길로 들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으나 「술을 먹지 말아야지. 도박도 고만 두어야지. 돈을 모아야지. 이것이 옳을까 아― 그러나 돈을 모아서 무엇하랴. 무엇에 쓰며 누구를 주랴. 또 누구를 주면 무엇하랴.」 이러한 생각이 아직도 나의 머리에 생각되어 밤마다 모여드는 그 버러지들을 나는 한없이 비웃으면서도 그래도 나는 아직 그 타락적 찰나적 생활기분이 남아 있는지 인생에 대한 허무와 저주를 아니 느낄 수는 없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소생(蘇生)의 길일는지도 모르겠으나 때로 나의 과거 생활의 그릇됨을 느낄 적도 있으며 생에 대한 참된 의의(意義)를 조곰씩이라도 알아지는 것도 같으나 이것이 나의 마음과 사상의 점점 약하여 가는 징조나 아닌가 하여 섭섭히 생각될 적도 없지 않으나 하여간 최근 나의 내적 생활현상(內的 生活現像)은 확실히 과도기(過渡期)를 걷고 있는 것 같으니 이때에 아무쪼록 자네의 나를 위한 마음으로의 교시(敎示)와 주저(躊躇)없는 편달(鞭撻)을 바라고 기다릴 뿐일세. 이렇게 심리상태의 정곡(正鵠)을 잃은 나는 요사이 무한히 번민하고 있는 것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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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직업이라 밤을 낮으로 바꾸는 생활이 처음에는 꽤 괴로운 것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그것도 면역이 되어서 공휴일 같은 날 일찍 드러누으면 도리어 잠이 얼른 오지 아니하는 형편일세. 그러나 물론 이러한 생활이 건강상에 좋지 못할 것은 명백한 일이니 나로서 나의 몸의 변화를 인식하기는 좀 어려우나 일상에 창백한 얼굴빛을 가지고 있는 그 소녀들이 퍽 불쌍하여 보이네. 그러나 또 한편 밤잠은 못 잘망정 지금의 나는 한 사람의 훌륭한 「쿡」으로서 누구에게도 손색이 없는 것일세. 부질없는 목구녕을 이어가기에 나는 두가지의 획식술(獲食術)을 배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이 몸이 한없이 애처롭기만 하네! 「쿡」이니만큼 먹기는 누구보다도 잘 먹으며 또 이 식당 안에서는 그래 당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세. 내가 몹시 쌀쌀한 사람이라 그런지 여급(女給)들도 그리 나를 사괴이려고도 아니하나 들은즉 그들 가운데에도 퍽 고생도 많이 하고 기구한 운명에 쫓기어 온 불쌍한 사람도 많은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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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쿡」 생활이 언제까지나 계속되겠으며 또 이 「명고옥」에 언제까지나 있을지는 나로서도 기필할 수 없거니와 아직은 이 「쿡」 생활을 그만둘 생각도 명고옥을 떠날 계획도 아무것도 없네. 오직 운명이 가져올 다음의 장난은 무엇인지 기다리고 있을 따름일세. 처음 신호에 닿았을 때, 그 곳 누구인가가 말한 것과 같이 날이 가고 달이 가면 차차 관계치 않으리라 하더니 참으로 요사이는 고향도 형제도 친구도 다 잊었는지 별로이 꿈도 안 꾸어지네. 오직 자네를 그리워하는 외에는 그저 아무나 만나는 대로 허허 웃고 사는 요사이의 나의 생활은 그다지 나로 하여금 적막과 고독을 느끼게 하지도 않네. 차라리 다행으로 여길까? 이곳은 그다지 춥지는 않으나 고향은 무던히 추우렷다. T는 요사이 어찌나 살아가며 업이가 그렇게 재주가 있어서 공부를 잘한다니 T 집안을 위해서나 널리 조선을 위해서나 또 한 번 기뻐할 일이 아니겠나. 자네의 나를 생각하여 주는 뜨거운 글을 기다리고 아울러 자네의 건강을 빌며.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四信) 태양은― 언제나 물체들의 짧은 그림자를 던져 준 적이 없는 그 태양을 머리에 이고―였다느니보다는 비뚜로 바라다보며 살아가는 곳이 내가 재생(再生)하기 전에 살던 곳이겠네. 태양은 정오(正午)에도 결코 물체들의 짧은 그림자를 던져 주기를 영원히 거절하여 있는―물체들은 영원히 긴 그림자만을 가짐에 만족하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그만큼 북극권(北極圈)에 가까운 위경도(緯經度)의 숫자를 소유한 곳―그 곳이 내가 재생하기 전에 내가 살던 참으로 꿈 같은 세계이겠네. 원시(原始)를 자랑스러운 듯이 이야기하며 하늘의 높은 것만 알았던지 법선(法線)19으로만 법선으로만 이렇게 울립(鬱立)하여 있는 무수한 침엽수(針葉樹)들은 백중천중(白重千重)으로 포개져 있는 잎새 사이로 담황색(淡黃色) 태양광을 황홀한 간섭작용(干涉作用)으로 투과(透過)시키고 있는 잠자고 있는 듯한 광경이 내가 재생하기 전에 살던 그 나라 그 북극이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얻어 볼 수 없는 시적 정조(詩的 情調)인 것이겠네. 오로지 지금에는 꿈―꿈이라면 너무나 깊이가 깊고 잊어버리기에 너무나 감명 독(感銘毒)한 꿈으로만 나의 변화만은 생(生)의 한 조각답게 기억되네마는 그 언제나 휘발유 찌꺼기 같은 값싼 음식에 살찐 사람의 지방(脂肪) 빛 같은 그 하늘을 내가 부득이 연상할 적마다 구름 한 점 없는 이 청천을 보고 있는 나의 개인(個人) 마음까지 지저분한 막대기로 휘저어 놓는 것 같네. 그것은 영원히 나의 마음의 흐리터분한 기억으로 조곰이라도 밝은 빛을 얻어보려고 고달파하는 나의 가엾은 노력에 최후까지 수반(隨伴)될 저주할 방해물인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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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육안(肉眼)의 부정확한 오차(誤差)를 관대히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십 오도(25°)에는 내리지 않을 치명적 「슬로우프20」(傾斜)이었을 것일세. 그 뒷둑뒷둑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궤도(軌道) 위의 바람을 쪼개고 공간을 쪼개고 맥진(驀進)21하는 「토로코22」 위에 내 몸을 싣는 것은 전혀 나의 생명을 그대로 내어던지려는 것과 조곰도 다름없는 것일세. 이미 부정(否定)된 생(生)을 식도(食道)라는 질긴 줄에 포박당하여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그들의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의 피부와 조곰도 질 것 없이 조고 만치의 윤택도 없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들의 메마른 인후(咽喉)를 통과하는 격렬한 공기의 진동은 모두가 창조의 신에 대한 최후적 마멸(馬蔑)23의 절규(絶叫)인 것일세. 그 음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싫다는 것을 억지로 매질을 받아가며 강제되는 「삶」에 대하여 필사적 항의를 드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오직 그들의 눈에는 천고의 백설을 머리 위에 이고 풍우로 더불어 이야기하는 연산의 봄도라지들도 한낱 악마의 우상밖에 아무것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일세. 그때에 사람의 마음은 환경의 거울이라는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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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생으로 말미암아 생에 대한 새로운 용기와 환희를 한 몸에 획득한 것 같은 지금의 나로 변하여 있는 것일세. 그러기에 전세의 나를 그 혈사(血史)를 고백하기에 의외의 통쾌와 얼마의 자만까지 느끼는 것이 아니겠나. 내가 그 경사 위에서 참으로 생명을 내어던지는 일을 하던 그 의식 없던 과정을 자네에게 쏟아뜨리는 것도 필연컨대 그 용기와 그 기쁨에 격려된 한 표상이 아닐까 하는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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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의 나의 생에 대한 신념은―구태여 신념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유희적이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네. 「사람이 유희적으로 살 수가 있담?」 결국 나는 때때로 허무 두 자를 입밖에 헤뜨리며 거리를 왕래하는 한 개 조고마한 경멸할 「니힐리스트」였던 것일세. 생을 찾다가, 생을 부정했다가 드디어 첨으로 귀의하여야 할 나의 과정은―나는 허무에 귀의하기 전에 벌써 생을 부정하였어야 될 터인데―어느 때에 내가 나의 생을 부정했던가……집을 떠날 때! 그때는 내가 줄기찬 힘으로 생에 매어달리지 않았던가. 그러면 어머님을 잃었을 때! 그때 나는 어언간 무수한 허무를 입 밖에 방산시킨 뒤가 아니었던가. 그 사이! 내가 집을 떠날 때부터 어머님을 잃을 때까지 그 사이는 실로 짧은 동안……뿐이랴 그 동안에 나는 생을 부정해야만 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지 않았던가.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이 앙감질[單足跳]로 허탄히 허무를 질질 흘려 왔다는 그 희롱적 나의 과거가 부끄럽고 꾸지람하고 싶은 것일세. 회한을 느끼는 것일세. 「생을 부정할 아무 이유도 없다. 허무를 운운할 아무 이유도 없다. 힘차게 살아야만 하는 것이…….」 재생한 뒤의 나는 나의 몸과 마음에 채찍질하여 온 것일세. 누구는 말하였지.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내 몸을 사바로부터 사라뜨리는 데 있다」고. 그러나 나는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부정되려는 생을 줄기차게 살아가는 데 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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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뢰(迅雷)와 같이 그 「슬로우프」를 나려 줄이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순간에, 어떠한 순간이었네. 내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어. 「X야, 뛰어 내려라 죽는다……」 「네 뒤 토로24가 비었다[空] 뛰어내려라!」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네. 과연 나의 뒤를 몇 간 안되게까지 육박해 온―반드시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할 그 토로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네. 나는 브레이크를 놓았네. 동시에 나의 토로도 무서운 속도로 나의 앞에 가는 토로를 육박하는 것이었네. 나는 토로 위에서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네.
「야! 앞의 토로야. 브레이크를 놓아라. 충돌된다. 죽는다. 내 뒤 토로에는 사람이 없다. 브레이크를 놓아라.」 그러나 앞의 토로는 브레이크를 놓을 수는 없었네. 그것은 레일이 끝나는 종점에 거의 가까이 닿았으므로 앞의 토로는 도리어 브레이크를 눌러야만 할 필요에 있는 것이었네. 「내가 뛰어내려 그러면 내 토로의 브레이크는 놓아진다. 그러면 내 토로는 앞의 토로와 충돌된다. 그러면 앞의 놈은 죽는다…….」 나는 뒤를 또 한 번 돌아다보았네. 얼마 전에 놀래어 브레이크를 놓은 나의 토로보다도 훨씬 먼저 브레이크가 놓아진 내 뒤 토로는 내 토로 이상의 가속도로 내 토로를 각각으로 육박해 와서 이제는 한 두 간 뒤―몇 초 뒤에는 내 목숨을 내어던져야 될 (참으로) 충돌이 일어날―그렇게 가깝게 육박해 있는 것이었네. 「뛰어내리지 아니하고 이대로 있으면 아무리 브레이크를 놓아도 나는 뒤 토로에 충돌되어 죽을 것이다. 뛰어내려? 그러면 내가 뛰어내린 빈 토로와 그 뒤를 육박하던 빈 토로는 충돌될 것이다. 다행히 선로 바깥으로 굴러 떨어지면 좋겠지만 선로 위에 그대로 조곰이라도 걸쳐 놓인다면 그 뒤를 따르던 토로들은 이 갑빠진 토로에 충돌되어 쓰러지고 또 그 뒤를 따르던 토로는 거기서 충돌되고, 또 그 뒤를 따르던 토로는 거기서 충돌되고, 이렇게 수없는 토로들은 뒤으로 뒤으로 충돌되어 그 위에 탔던 사람들은 죽고 다치고……!」 나는 세 번째 도한 거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네. 그러나 다행히 넷째 토로부터 앞에 올 위험을 예기하였던지 브레이크를 벌써 눌러서 멀리 보이지도 않을 만큼 떨어져서 가만가만히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네. 다만 화산(火山)의 분화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초리와 같은 그러한 공포에 가득찬 눈초리로 멀리 앞을―우리들을 바라다보고 있는 것이었네. 그때에 「뛰어내리자. 그래야만 앞의 사람이 산다.」 내가 화살 같은 토로에서 발을 떼이려 하는 순간 때는 이미 늦었었네 뒤에 육박해 오던 주인 없는 토로는 무슨 증오(憎惡)가 나에게 그리 깊었던지 젖먹은 기운까지 다하는 단말마의 야수같이 나의 토로에 거대한 음향과 함께 충돌되고 말았네. 그 순간에 우주는 나로부터 소멸되고 다만 오랜 동안의 무(無)가 계속되었을 뿐이었다고 보고할 만치 모든 일과 물건들은 나의 정신권 내에 있지 아니하였던 것일세. 다만 재생한 후 멀리 내 토로의 뒤를 따르던 몇 사람으로부터 「공중에 솟았던」 나의 그후 존재를 신화(神話) 삼아 들었을 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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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되던 첫순간 나의 눈에 비쳐진 나의 주위에 더러운 광경을 나는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그것은 그런 것을 쓰고 있는 동안에 나의 마음에 혹이나 동요가 생기지나 아니할까 하는 위험스러운 의문에서―그러나 나의 주위에 있는 동무들의 참으로 근심스러워 하는 표정의 얼굴들이 두 번째로 나의 눈에 비치었을 때에 의식을 잃은 나의 전 몸뚱어리에서 다만 나의 입만이 부드럽게― 참으로 고요히― 참으로 착하게 미소하는 것을 내 눈으로도 보는 것 같았었네. 나는 감사하였네. 신에게보다도 우선 그들 동무에게―감사는 영원히 신에게 드림없이 그 동무들에게만 그치고 말는지도 몰라. 내 팔이 아직도 나의 동체(胴體)에 달려 있는가 만져 보려 하였으나 그 팔 자신이 벌써 전부터 생리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된 지 오래였던 모양이데. 나는 다시 그들 동무들에게 감사하며 환계(幻界) 같은 꿈 속으로 깊이 빠지고 말았네. 나는 어머니에게 좀더 값있는 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지 못한 「내」가 악마―신이 아니라―에게 무수히 매맞는 것을 보았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욕하였고 경멸하였네. 그리고 나는 좀더 건실하게 살지 않았던 「쿡」 생활 이후의 「내」가 또한 악마에게 매맞는 것을 보았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욕하였고 경멸하였네. 그리고 생애 새로운 참다운 의의(意義)와 신에 대한 최후적 복수의 결심을 마음 속으로 깊이 암송하였네. 그 꿈은 나의 죽은 과거와 재생 후의 나 사이에 형상지어져 있는 과도기에 의미 깊은 꿈이었네. 하여간 이를 갈아 가며라도 살아가겠다는 악지가 나의 생애 대한 변경시키지 못할 신념이었네. 다만 나의 의미없이 또 광명없이 그대로 삭제(削除)되어 버린 과거―나의 인생의 한부분을 섧―게 조상(吊喪)하였을 따름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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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끝만한 인정미(人情味)도 포함하고 있지 아니한 바깥에 부는 바람은 이 북국에 장차 엄습하여 올 무서운 기절을 교활하게 예고하고 있는 것이나 아니겠나. 번개같이 스치는 지난 겨울, 이곳에서 받은 나의 육체적 고통의 기억의 단편들은 눈 깜박할 사이에 무죄한 나를 전율(戰慄)시키는 것일세. 이 무서운 기절25이 이 나라에 찾아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서 바람이나마 인정미―비록 그러한 사람은 못 만나더라도―있는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야 할 터인데 나의 몸은 아직도 전연 부자유에 비끄러매여 있네― 그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의사하는 사람은 나의 반드시 원상대로의 복구를 예언하데마는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방문 밖에서
「절뚝발이는 아무래도 면치 못하리라」 이렇게 근심(?)하는 그들의 말소리를 들었네 그려― 만일에 내가 그들의 이 말과 같이 참으로 절뚝발이가 되고 만다 하면―나는 이 생각을 하며 내 마음이 우는 것을 느끼네. 「절뚝발이」 여태껏 내 몸 위에 뒤집어씌워져 있던 무수한 대명찰(代名札) 외에 나에게는 또 이러한 새로운 대명찰 하나가 더 뒤집어지는구나― 어디까지라도 깜깜한 암흑에 지질리워26 있는 나의 앞길을 건너다 보며 영원히 나의 신변에서 없어진 등불을 원망하는 것일세. 절뚝발이도 살 수 있을까― 절뚝발이도 살게 하는 그렇게 관대한 세계가 지상에 어느 한 귀퉁이에 있을까? 자네는 이 속타는 나의 물음―아니 차라리 부르짖음에 대하여 대답할 무슨 재료, 아니 용기라도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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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국 생활 칠년! 그 동안에 나는 지적(知的)으로나 덕적(德的)으로나 많은 교훈을 얻은 것만은 사실일세. 머지 아니한 장래에 그 전에 나보다 확실히 더 늙은 절뚝발이의 내가 동경에 다시 나타날 것을 약속하네. 그곳에는 그래도 조곰이라도 따뜻한 나의 식어빠진 인생을 조곰이라도 덥혀줄 바람이 불 것을 꿈꾸며 줄기차게 정말 악마까지도 나를 미워할 때가지 줄기차게 살겠다는 것도 약속하네. 재생한 나이니까 물론 과거의 일체 추상(醜相)은 곱게 청산하여 버리고 박물관 내의 한 권의 역사책으로 하여 가만히 표지를 덮는 것일세. 모든 새로운 광채 찬란한 역사는 이제로부터 전개할 것일세. 하면서도 「절뚝발이가?……」 새로이 방문하여 오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아직 나는 최후까지 줄기차게 살 것을 맹세하는 것일세. 과거를 너무 지껄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면 장래를 너무 지껄이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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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군! 자네가 편지를 손에 들고 글자 글자를 자네 눈에 통과시킬 때, 자네 눈에 몇 방울 눈물이 있으리란 추측이 그렇게 억측일까 그러나 감히 바란다면 「첫째로는 자네의 생에 대한 실망을 경계할 것이며 둘째로는 나의 절뚝발이에 대하여 형식적 동정에 그칠 것이요, 결코 자살적 비애를 느끼지 말 것들」이겠네. 그것은 나의 지금 이 「줄기차게 살겠다는」 무서운 고집에 조고마한 실망적 파동이라도 이끌어 올까 두려워서……나의 염세(厭世)에 대한 결사적 투쟁은 자네의 신경을 번잡케 할 만치 되어 나아갈 것을 자네에게 약속하기를 꺼리지 아니하네. 자네의 건강을 비는 동시에 못 면할 이 절뚝발이의 또한 건강이 있기를 빌어주기를 은근히 바라며. X로부터 M에게 보내는 편지(五信) 자네의 장문의 편지 그 가운데에 오직 자네의 건강을 전하는 구절 외에는 글자 글자의 전부가 오직 나의 조소(嘲笑)를 사기 위한 외에는 아무 매력(魅力)도 가지지 아니한 것들이었네. 자네는 왜―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려 하는가.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곧 생에 대한 권리를 그 그 사람 위에 가져올 자포자기의 짓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일조일석 많은 재물을 탕진시켜 버렸다 하여 자네는 자네 아버지를 무한히 경멸하에며 나중에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절망까지 하소연하지 아니하였는가, 그것이 자네가 스스로 구실을 꾸미어 가지고 나아가서 자네의 애를 써 잘―경―영되어 나오던 생을 구태여 부정하여 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것은 비겁한 동시에―모든 비겁이 하나도 죄악 아닌 것이 없는 것과 같이― 역시 죄악인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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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거든, 혹은 나의 말이 우의적(友誼的)으로 좋지 않게 들리거든 구태여라도 운명이라고 그렇게 단념하여 주게. 그것도 오직 자네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나의 자네에게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나온 것인만큼 나는 자네에게 인생의 혁명적으로 새로운 제이차적 「스타일」을 충고치 아니할 수 없는 것일세.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이 운명이라는 요물을 신용치 말아 주기를 바라는 것일세―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부터도 이 운명이라는 요물의 다시 없는 독신자(篤信者)이면서도―. 「운명의 장난?」 하,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나 있다면 너무도 운명의 장난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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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군! 나는 그 동안 여러 날을 두고 몹시 앓았네. 무슨 원인인지 나도 모르게, 이―원인 알 수 없는 병이 나의 몸을 산 채로 더 삶을 수 없는 데까지 삶아 가지고는 죽음의 출입구까지 이끌어 갔던 것일세. 그때에 나의 곱게 청산하여 버렸던 나의 정신 어느 모에도 남아 있지 않아야만 할 재생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까지도 재생 후의 그것과 함께 죽 단렬(單列)로 나의 의식(意識) 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네. 그리고 나는 반 의식의 나의 눈으로 그 행렬 가운데서 숨차게 허덕이던 과거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던 것이었네. 그것은 내 눈에 너무도 불쌍한 꼴로 나타났었기 때문에, 아― 그것들은― 「이것이 죽은 것인가 보다. 적어도 죽어가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몽롱히 느끼면서도 「죽는 것이 이렇기만 하다면야.」 이런 생각도 나서 일종의 통쾌까지도 느낀 것 같으며 그러나 죽어가는 나의 눈에 비치는 과거의 나의 모양 그 불쌍한 꼴을 보는 것은 확실히 슬픈 일일 뿐 아니라 고통이었네. 어쨌든 나를 간호하던 이 집 주인의 말에 의하면 무엇 나는 잠을 자면서도 늘―울고 있더라던가……. 「이것이 죽는 것이라면―」 이렇게 그―꼴사나운 행렬을 바라보던 나의 머리 가운데에는 내가 사랑에 주려 있는 형제와 옛친구를 애걸하듯이 그리며 그 행렬 가운데에 행여나 나타나기를 무한히 기다렸던 것일세. 이 마음이 아마 어떤 시인의 병석에서 부른―. 「얼른 이때 옛친구 한 번씩 모두 만나 둘 거나.」 하던 그 시경(詩境)에 노는 것이나 아닌가 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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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하숙(下宿)이라고만 볼 수도 없으나 그러나 괴상한 성격을 각각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지금의 나의 사는 곳일세. 이곳 주인은 나보다 퍽 연배(年輩)에 속하는 사람으로 그의 일상생활 양(樣)으로 보아 나의 마음을 끄는 바가 적지 않았으되 자세한 것은 더 자세히 안 다음에 써 보내겠거니와 하여간 내가 고국을 떠나 자네와 눈물로 작별 한 후로 처음으로 만난 가장 친한 친구의 한 사람으로 사괴이고 있는 것일세. 그와 나는 깊이깊이 인생을 이야기하였으며 나는 그의 말과 인격과 그리고 그의 생애에 많은 경의로써 대하고 있는 중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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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악희가 내게 끼칠 「프로그램」은 아직도 다하지 아니하였던지 나는 그 죽음의 출입구가지 다녀온 병석으로부터 다시 일어났네. 생각하면 그 동안에 내가 흘린 「땀」만 해도 말(斗)로 계산할 듯하니 다시금 푹 젖은 욧바닥을 내려다 보며 이 몸의 하잘 것 없는 것을 탄식하여 마지 않았으며 피비린 냄새 나는 눈방울을 달음박질 시켜 가며 불려 놓았던 나의 「포켓」은 이번 병으로 말미암아 많이 줄어들었네. 그러나 병석에서도 나의 먹을 것의 걱정으로 말미암아 나의 그 「포켓」을 건드리게 되기는 주인의 동정이 너무나 컸던 것일세. 지금도 그의 동정을 받고 있을 뿐이야. 앞으로도 길이 그의 동정을 받지 않으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며. 「돈을 모아 볼까.」 내가 줄기차게 살아 보겠다는 결심으로 모은 돈을 남의 동정을 받아가면서도 쓰기를 아까와하는 나의 마음의 추한 것을 새삼스러이 발견하는 것 같아서 불유쾌하기 짝이 없네. 동시에 나의 마음이 잘못하면 허무주의에 돌아가지나 아니할까 하여 무한히 경계도 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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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군! 웃지 말아 주게. 나는 그 동안에 의학(醫學) 공부를 시작하였네. 그것은 내가 전부터 그 방면에 취미가 있었다는 것도 속일 수 없는 일이겠으나 또 의사인 자네를 따라가고 싶은 가엾은 마음에서 그리 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속일 수 없는 일이겠네. 모든 것이 다―그―줄기차게 살아가겠다는 가엾은 악지에서 나온 짓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칭찬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일세. 또다시 생각하면 나의 몸이 불구자이므로 세상에 많은 불구자를 동정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불구자인 것이 사실인 만큼 내가 의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자네에게는 너무나 돌연적이겠으나 역시 사실인 것을 어찌 하겠나. 여기에도 나는 주인의 많은 도움을 받아 오는 것을 말하여 두거니와 하여간 이 새로운 나의 노력(努力)이 나의 앞길에 또 어떠한 운명을 늘어놓도록 만들는지 아직도 수수께끼에 붙일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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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의문에 싸였던 그 「정말 절뚝발이가 될는지」도, 끝끝내는 한 개의 완전한 절뚝발이로 울면서 하던 예언에 어기지 않은 채 다시금 동경시가에 나타났네그려! 오고가는 사람이 이 가엾은 「인생의 패배자」 절뚝발이를 누구나 비웃지 않고는 맞고 보내지 아니하는 것을 설워하는 불유쾌한 마음이 나는 아무리 용기를 내어 보았으나 소제시킬 수가 없이 뿌리 깊이 박혀 있네 그려. 「영원한 절뚝발이 그러나 절뚝발이의 무서운 힘을 보여 줄 걸 자세히 보아라」 이곳에서도 원한과 울분에 짖는 단말마의 전율할 신에 대한 복수의 맹서를 볼 수 있는 것일세. 내 몸이 이렇게 악지를 쓸 때에 나는 스스로 내 몸을 돌아다 보며 한없는 연민과 고독을 느끼는 것일세. 물에 빠져 애쓰는 사람의 목이 수면 위에 솟았을 때 그의 눈이 사면의 무변대해임을 바라보고 절망하는 듯한 일을 나는 우는 것일세. 그때마다 가장 세상에 마음을 주어 가까운 사람에게 둘러싸여 따뜻한 이불 속에 고요히 누워서 그들과 또 나의 미소를 서로 교환하는 그러한 안일한 생활이 하루바삐 실현되기를 무한히 꿈꾸고 있는 것일세. 그것은 즉시로 내 몸을 깊은 「노스탤지어」에 빠뜨리어서는 고향을 꿈꾸게 하고 친구를 꿈꾸게 하고 육친과 형제를 꿈꾸게 하도록 표상되는 것일세. 나는 가벼운 고통 가운데에도 눈물겨운 향수(鄕愁)의 쾌감을 눈 감고 가만히 느끼는 것일세. × × ×
명고옥(名古屋)의 쿡 생활 이후로 전전 유랑의 칠년 동안 한 번도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없던 나는 절뚝발이로 동경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양이 나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만치 그렇게도 무섭게 변한 데에 「악!」 소리를 지르지 아니할 수 없었네. 그것은 청춘―뿐이랴 인생의 대부분을 박탈당한 썩어 찌그러진 험집[傷痕] 투성이의 값없는 골동품인 나였던 것일세.
그때에도 나는 또한 나의 동체(胴體)를 꽉 차서 치밀어 올라오는 무거운 「피스톤」에 눌리우는 듯한 절망에 빠졌었네. 그러나 즉시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 이 패배의 인간을 위로하며 격려하여 주데.
그때에
「그러면 M군도 아차 T도!」
이런 생각이 암행열차(暗行列車)같이 나의 허리를 스쳐갔네. 별안간 자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환등(幻燈)을 보는 어린 아해의
「무엇이 나올까」
하는 못생긴 생각에 가득 찼네. 그래서 나도 자네에게 나의 근영(近影)을 한 장 보내거니와 자네도 나의 환등을 보는 어린아해 같은 마음을 생각하여 자네의 최근 사진을 한 장 보내 주기를 바라네. 물론 서로 만나 보았으면 그 위에 더 시원하고 반가울 일이 있겠나마는 기필치 못할 우리의 운명은 지금도 자네와 나, 두 사람의 만날 수 있는 아무 방책도 가르쳐 주지 않네 그려!
× × ×
내가 주인에게 그만큼 나의 마음을 붙일 수까지 있었느니만큼 아직 나는 아무 데로도 옮길 생각은 없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얼마든지 이곳에 있을 것 같으니까 나에게 결정적 변동이 없는 한 자네는 안심하고 이곳으로 편지하여 주기를 바라네. T는 요즈음 어떠한가 여전히 적빈(赤貧)에 심신(心身)을 쪼들리우고 있다 하니 그도 한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의 안부 잘 전하여 주게. 내가 집을 떠나 십년 동안 T에게 한 장 편지를 직접 부치지 아니한 데 대하여서는―나의 마음 가운데에 털끝만치라도 T에게 악의가 있지 아니한 것은 물론 자네가 잘 알고 있으니깐―자네의 사진이 오기를 기다리며, 또 자네의 여전한 건강을 빌며―영원한 절뚝발이 X로부터.

3
벗어나려고 애쓰는 환경일수록 그 환경은 그 사람에게 매어달려 벗어나지를 않는 것이다. T가 아무리 그 적빈을 벗어나려고 애써 왔으나 형과 갈린 지 십유여 년인 오늘까지도 역시 그 적빈을 면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불의의 실패가 있기 전까지도 그래도 그 곳에서는 상당히 물적으로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던 M군의 호의로 T가 결정적 직업을 가지게 되지 못하였었다 할진댄 세상에서― 더욱이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지 않으면 아니되게 변하여 가는 세상에서 T의 가족들은 그날 그날의 목을 축일 것으로 말미암아 더욱이나 그들의 머리를 썩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위험성 적은 생계를 경영해 나아간다고는 하여도 역시 가난 그것을 한 껍데기도 면치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행인지 불행인지 T의 안해는 「업」이 하나를 낳는 뒤로는 사나이도 계집아이도 낳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T의 가정은 쓸쓸하였다. 그러나 다만 세 식구 밖에 안되는 간단한 가정으로도 그때나 이때나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전번 가운데에서 출생한 업이가 반드시 못났으리라고 추측한다면 그것은 전연 사실과 반대되는 추측일 것이다. 업이는 그 아버지 T에게도 또 그 외에 그 가족의 누구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치 영리하고 예민한 재질과 풍부한 두뇌의 소유자로 태어났던 것이다. 과연 업이는 어려서부터 간기(癎氣)27로 죽을 뻔 죽을 뻔하면서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지금에는 건강한 몸이 되었다. T의 적빈한 가정에는 그들에게 다시없는 위안거리였고 자랑거리였었다. T의 부처는 업이가 어려서부터 죽을 것을 근근히 살려왔다는 이유로도 또 남의 자식보다 잘나고 똑똑하다는 이유로도, 그 가정의 자랑거리라는 이유로도, 그 아들의 덕을 보겠다는 이유로도 그들의 줄 수 있는 최절정의 사랑을 업에게 바쳐왔던 것이다.
양육의 방침이 그 양육되는 아이의 성격의 거의 전부를 결정한다면 교육의 방침도 또한 그의 성격에 적지 아니한 관계를 끼칠 것이다. 업이는 적빈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또한 M군의 호의로 받을 만큼의 계제적(階梯的)28 교육을 받아왔다. 좋은 두뇌의 소유자인 업에게 대하여 이 교육은 효과 없지 않을 뿐이랴! 무엇에든지 그는 남보다 먼저 당할 줄 알고 남보다 일찍 알 줄 알고 남보다 일찍 느낄 줄 아는 혁혁한 공적을 이루었다. M군이 해외에 있는 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는 의미를 떠난 더없는 칭찬도 칭찬이었거니와 학교 선생이나 그들 주위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최고의 칭찬하기를 아끼지 아니하여 왔던 것이다. T에게는 이것이 몸에 넘치는 광영인 것은 물론이요 그러므로 업이는 T의 둘도 없는 자랑거리요 보물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아들을 가진 사람」
이와 같은 말을 들은 T로 하여금 업을 위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이와 같은 말을 영구히 몸에 받기 위하여서는 업이를 T의 상전(上殿)으로 위하게까지 시키었다. 너무 과도한 칭찬의 말은 T에게 기쁨을 줄 뿐 아니라 T에게 또한 무거운 책임도 주는 것이었다.
「이 아들을 위해야 한다.」
업을 소유한 아버지의 T씨가 아니었고 T씨를 소유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업은 T씨가 가장 그 책임을 다하여야만 하고 그 충실을 다하여야만 할 T씨의 주인인 것이었다. T씨는 업이 그 어머니의 뱃속을 하직하던 날부터 오늘까지 성난 손으로 업을 때려 본 일이 한 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변한 어조로 꾸지람 한 마디 못하여 본 채로 왔던 것이다.
「내가 지금은 이렇게 가난하지만 저것이 자라서 훌륭하게 되는 날에는 나는 저것의 덕을 보리라.」
다만 하루라도 바삐 업이 학업을 마치기만 그리하여 하루라도 바삐 훌륭한 사람이 되어지기만 한없이 기다리던 것이었다. 비록 업이 여하한 괴상한 행동에 나아가더라도 T씨는
「저것도 다 공부에 소용되는 일이겠지.」
하고 업이 활동사진 배우의 푸로마이트29를 사다가 그의 방벽에다가 죽 붙여 놓아도 그것이 무엇이냐고 업에게도 M군에게도 묻지도 아니하고 그저 이렇게만 생각하여 버리고 고만두는 것이었다. 더욱이 무식한 T씨로서는 그런 것을 물어 보거나 혹시 잘못하는 듯한 점에 대하여 충고라도 하여 보거나 하는 것은 필요 없는 간섭같이 생각되어 전혀 입을 내어밀기를 주저하여 왔던 것이다. 언제나 T씨는 업의 동정(動靜)을 살펴가며 업이가 T씨 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T씨가 업의 밑에서 사는 것과 같은 모순에 가까운 상태에서 그날 그날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때에 선천적 성격(先天的 性格)이라는 것은 의문이 많은 것이다. 사람의 성격은 외래의 자극(外來의 刺戟) 즉 환경에 다라 형성지어지는 것이라는 결론(結論)에 도달치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방침 밑에 있는 또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는 업의 성격이 그가 태어난 가정의 적빈함에 반대로 교만하기 짝이 없고 방종하기 짝이 없는 업을 형성할 것은 물론임에 오류(誤謬)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업은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을 보기를 모두 자기 아버지 T씨와 같이 보는 것이었다. 자기의 말에 전연 노예적으로 굴종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자기를 호위하여 주리라고 믿는 것이었다. 업의 걷잡을 수도 없는 공상은 천마(天馬)가 공중을 가는 것과 같이 자유롭게 구사(驅使)되어 왔던 것이다.
<햄릿>의 「유령(幽靈)」, <올리브>의 「감람수의 방향」, <브로드웨이>의 「경종」, <맘모―톨>의 「리젤」, <오페라>좌의 「화문천정―」 이렇게
허영! 그것들은 뒤가 뒤를 물고 환상에 젖은 그의 머리를 끊이지 아니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방종(放縱) 허영(虛榮) 타락 이것은 영리한 두뇌의 소유자인 업이라도 반드시 걸어야만 할 과정이 아닐까 그들의 가정이 만들어내인 그들의 교육방침이 만들어내인 그러나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 예기 못한 기적. 업은 과연 지금에 그의 가정 혜성같이 나타난 한 기적적 존재인 것이었다.

4
M군은 실망하였다. 업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마이너스’의 존재였다.
「저런 사람이 필요할까? 아니 있어도 좋을까?」
그러나 ‘유해무익’이라는 참을 수 없는 결론이었다.
「가지가 돋고 꽃이 피기 전에 일찍이 그 순(荀)을 잘라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M군에게 대하여서는 너무도 악착한 착상(着想)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업의 전도를 위하여 잘 지도하여 볼까」
그러나
「한 사람의 사상은 반응(反應)키 어려운 만치 완성되어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설복(說服)을 당하기에는 업의 이지(理智)는 너무 까다롭다」
M군의 업에게 대한 애착은 근본적으로 다하여 버렸다. M군의 이러한 정신적 실망의 반면에는 물질적 방면에서 받은 영향(影響)도 적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업의 학비(學費)를 대어 오던 M군이 수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불의의 액운(厄運)으로 말미암아 파산(破産)을 당하다시피 되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던 연구실의 생활도 더하지 못하고 어느 관립병원 촉탁의(囑託醫)가 되어 가지고 온갖 물질적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간으로도 M군은 여러 번이나 업의 학비를 대이기를 단념하려 하였던 것이었으나 그러나 아직 그의 업에 대한 실망이 그리 크지도 아니하였고 또 싹이 나려는 아름다운 싹을 그대로 꺾어 버리는 것도 같아서 어딘지 애착 때문에 매어 달려지는 미련(未練)에 끌리어 그럭저럭 오늘까지 끌어왔던 것이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업에 대한 애착과 미련도 곱게 어디론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질적 관계가 그로 하여금 업을 단념시키기를 더욱 쉽게 하였던 것이나 아니었던가 한다.
「업이! 이번 봄은 벌써 업이 졸업일세 그려!」
「네― 구속 많고 귀찮던 중학생활도 이렇게 끝나려 하고 보니 섭섭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졸업 후의 지망은?」
「음악학교!―」
그래도 주저하던 단념은 M군을 결정시켜 버렸다.
「업이 자네도 잘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나 한 몸뚱이를 지지(支持)해 나아가기에도 어려운 가운데 있어! 음악학교의 뒤를 대어 줄 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악의가 아니야. 나의 지금 생각 같아서는 천재의 순을 꺾는 것도 같으나 이제부터는 이만큼이라도 자네를 길러주신 가난한 자네의 부모의 은혜라도 갚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이 말을 하는 M군은 도저히 업의 얼굴을 치어다볼 수가 없었다. M군의 이와 같은 소극적 약점(消極的 弱點)은 업으로 하여금
「오― 네 은혜를 갚으란 말이로구나.」
하는 부적당한 분개를 불지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M군은 언제인가 학교 무슨 회에서 여흥으로 만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연단 위에서 ‘바이올린’의 줄을 농락하던 그 업이를 생각하고 섭섭히 생각한 것만치 그에게는 조곰도 악의가 품어 있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M군의 업에 대한 「내 몸이 어렵더라도 시켜 보려 하였으나」하던 실망은 즉시로 「나를 미워하는 세상,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하는 업의 실망으로 옮기어졌다.
「내 생명을 꺾으려는 세상, 활동의 원동력을 주려 하지 않는 세상」
「M씨여, 당신은 나를 미워했지. 나의 천재를 시기했지. 나는 당신을 원망합니다.」
어두운 거리를 수없이 헤매이는 것이, 여항(閭巷)의 천한 계집과 씩뚝꺽뚝 하소연하는 것이 남의 집 담모퉁이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 공원 벤취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때때로 죽어가는 T씨를 졸라서 몇 푼의 돈을 긁어내어 피부의 옅은 환락을 찾아다니는 것이 중학을 마치고 나온 청소년 업의 그후 생활이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것은 업의 교만 방종한 태도
「아버지! 아버지는 왜 다른 아버지들과 같이 돈을 많이 좀 못 벌었습니까. 왜 남같이 자식 공부 좀 못 시켜 줍니까 왜 남같이 자식 호강 좀 못 시켜 줍니까 왜 돋으려는 순을 꺾느냐는 말이오.」
「아버지 무섭다」는 생각은 업에게는 털끝만치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T씨가 아들 업이를 무서워하는 것이 옳을 것 같은 상태였었으니까.
「오냐, 다― 내 죄다. 그저 아비 못 만난 탓이다.」
T씨는 이렇게 업에게 비는 것이었다.
「애비가 자식 호강 못 시티는 생각만 하고 자식이 애비 호강 좀 시켜 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겠니? 예끼 못된 자식.」
T씨에게 이런 생각은 참으로 꿈에도 날 수 없었다. 「천재를 썩힌다. 애비가 죄다.」 이렇게 T씨의 생활은 속죄(贖罪)의 생활이었다. 그날의 밥을 끓여 먹을 쌀을 걱정하는 그들의 살림 가운데에서였으나 업의 「돈을 내라」는 절대한 명령에는 쌀팔 돈이고 전단을 잡혀서이고 당장에 내어 놓지 않고는 죽을 것 같이만 알고 잇는 T씨의 살림이었다. 차마 못 할 야료30를 T씨의 눈앞에서 거리낌없이 연출하더라도 며칠밤씩 못 갈 데 가서 자고 들어오는 것을 T씨 눈으로 보면서도
「저것의 심정을 살핀다」는 듯이
「미안하다. 다 내 죄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듯이 업의 앞에서 머리를 숙인 채 업에게 말 한 마디 던져 볼 용기도 없이 마치 무슨 큰 죄나 진 종[僕]이 주인의 얼굴을 차마 못 쳐다보는 것과 같이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이었다. 때로는
「해외의 형은 어쩌면 돈도 좀 보내 주지 않는담」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그 형을 원망도 하여 보는 것이었다. T씨의 아들 업에 대한 이와 같은 죽은 쥐 같은 태도는 업의 그 교만종횡(驕慢縱橫)한 잔인성을 더욱더욱 조장시키는 촉진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업에 실망한 M군과 M군에 실망한 업의 사이가 멀어져 감은 물론이요 그러한 불합리(不合理)한 T씨의 태도에 불만을 가득 가진 M군과 자기 아들에게 주던 사랑을 일조에 집어던진 가증한 M군을 원망하는 T씨의 사이도 점점 멀어져 갈 따름이었다. 다만 해외에 방랑하는 그의 소식을 직접 듣는 M군이 그의 안부를 전하는 동시에 그들의 안부를 알려 T씨의 집을 이따금 방문하는 외에는 그들 사이에 오고 감의 필요가 전혀 없던 것이었다.
M에게 보내는 편지(六信) 두 달! 그것은 무궁한 우주의 연령(年齡)으로 볼 때에 얼마나 짧은 것일까? 그러나 자네와 나 사이에 가로질렸던 그 두달이야말로 나는 자네의 죽음가지도 우려하고 자네는 나의 죽음까지도 우려하였음직한 추측이 오측(誤測)이 아닐 것이 분명할만치 그렇게도 초조와 근심에 넘치는 기―←고 긴 두 달이 아니었겠나. 자네와 나의 그 우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며 자네의 틀림없는 건강을 믿는 것과 같이 나는 다시없는 건강의 주인으로서 나의 경력이 허락하는 한도까지 밤과 낮으로 힘차게 일하고 있는 것일세.
M군! 나의 이 끊임없는 건강을 자네에게 전하는 기쁨과 아울러 머지 아니하여 우리 두 사람이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만나겠다는 기쁨을 또한 전하는 것일세.
× × ×
우스운 말이나 지금쯤 창으로 노련(老鍊)한 한 사람의 의학사(醫學士)로 완성되어 있겠지. 그 노련한 의학사를 멀리 떨어져 나의 요즈음 열심히 하여 오던 의학의 공부가 지금에는 겨우 얼간 의사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그 무슨 희극적 대조이겠나 이것은 이곳에 친구의 직접의 원조도 원조이겠지만은 또 한편으로 멀리 있는 자네의 나에게 대하여 주는 끊임없는 사랑의 덕이 그 대부분이겠다고 믿으며 도한 자네가 더 한층이나 반가와할 줄 믿는 소식이겠다고도 믿는 것일세. 내가 고국에 돌아간 다음에는 자네는 나의 이 약한 손을 이끌어 그 길을 함께 걸어 주겠다는 것을 약속하여 주기를 바라며 마지않는 것일세.
× × ×
오늘날 꿈에만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고 보니 감개무량하여 나의 가슴을 어지럽게 하네. 십유여 년의 기나긴 방랑생활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한 분의 어머니를 잃었네. 그리고 절뚝발이가 되었네. 글 한 자 못 배웠네. 돈 한푼 못 벌었네. 사람다운 일 하나 못 하여 놓았네. 오직 누추한 꿈 속에서 나의 몸서리칠 청춘을 일생의 중요한 부분을 삭제당하기를 그저 달게 받아왔을 따름일세. 차인잔고(差引殘高)31가 무엇인가 무슨 낯으로 고향 땅을 밟으며 무슨 낯으로 형제의 낯을 대하며 무슨 낯으로 고향 친구의 낯을 대할 것인가? 오직 회한(悔恨) 차인잔고가 있다고 하면 오직 이 회한의 한 뭉텅이가 있을 따름이 아니겠나? 그러나 다시 생각하고 나는 가벼운 한숨으로써 나의 괴로운 마음을 안심시키는 것이니 그렇게 부끄러워야만 할 고향땅에는 지금쯤은 나의 얼굴, 아니 나의 이름이나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의 한 사람조차도 있지 아니할 것일 뿐이랴. 그 곳에는 이 인생의 패배자인 나를 마음으로써 반가이 맞아줄 자네 M군이 있을 것이요, 육친의 형제 T가 있을 것이므로일세. 이 기쁨으로 나는 나의 마음에 용기를 내이게 하여 몽매에도 그리한 고향의 흙을 밟으려 하는 것일세.
× × ×
근 삼년 동안이나 마음과 몸의 안정을 가지고 머물러 있는 이곳의 주인은 내가 자네와 작별한 후에 자네에게 주던 이 만큼의 우정을 아끼지 아니한 그렇게 친한 친구가 되어 있다는 말을 자네에게 전한 것을 자네는 잊지 아니하였을 줄 믿네. 피차에 흉금을 놓은 두 사람은 주객(主客)의 굴레를 일찍이 벗어난 그리하여 외로운 그와 외로운 나는 적적(비록 사람은 많으나)한 이 집안에 단 두 사람의 가족이 되었네. 이렇게 그에게 그의 가족이 없는 것은 물론이나 이만한 여관 외에 처처에 상당한 건물들을 그의 소유로 가지고 있는 꽤 있는 그일세.
나로서 들어 아는 바 그의 과거가 비풍참우(悲風慘雨)의 혈사를 이곳에 나열하면 무엇 하겠나마는 과연 그는 문자대로의 고독한 낭인(浪人)32일세. 그러나 그의 친구들의 간곡한 권고와 때로는 나의 마음으로의 권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아내를 취(聚)하지 아니하는 것일세.
「돈도 그만큼 모았고 나이도 저만큼 되었으니 장차의 길고 긴 노후(老後)의 날을 의지할 신변의 고적을 위로할 해로가 있어야 아니하겠소」
「하 그것은 전혀 내 마음을 몰라 주는 말이오」
일상에 내가 나의 객관33에 고적을 그에게 하소연할 때면 그는 도리어 나를 부러워하며 자기 신변의 고적과 공허를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일세.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안해를 얻지 아니하겠다 하며 그렇다고 허튼 여자를 함부로 대하거나 하는 일도 결코 없는 것일세.
「그러면 그가 여자에 대하여 무슨 갖지 못할 깊은 원한이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선입관념(先入觀念)을 가진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그는 남자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친절하게 하면서도 여자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냉정하기 짝이 없는 것일세. 예(例)를 들면 이 집 여중(女中)34들에게 하는 그의 태도는 학대, 냉정, 잔인, 그것일세.
나는 때로
「너무 그러지 마오, 가엾으니」
「여자니깐」
그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네. 그의 이 수수께끼의 대답은 나의 의아(疑訝)를 점점 깊게만 하는 것이었네. 하루는 조용한 밤 두 사람은 또한 떫은 차를 마셔가며 세상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그 끝에
「여자에 관련된 남에게 말 못할 무슨 비밀의 과거가 있소?」
「있소! 있되 깊소!」
「내게 들려 줄 수 없소?」
「그것은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오. 오직 신(神)이 그것을 알고 있을 따름이어야만 할 것이오. 그것은 내가 눈을 감고 내 그림자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동시에 사라져야만 할 따름이오」
나는 물론 그에게 질기게 더 묻지 아니하였네. 그의 그림자와 함께 사라질 비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쾌활한 기상의 주인인 그는 또한 남다른 개성의 소유자인 것일세.
× × ×
그는 나보다 십여세(十餘歲) 맏일세. 그의 나이에 겨누어 너무 과하다 할만치 많이 난 그의 흰 머리털(白髮)은 나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네. 또한 동시에 그의 풍파 많은 과거를 웅변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같으니 그와 같은 그가 나를 사귀어 주기를 동년배의 터놓은 사이의 우의(友誼)로써 하여 주니 내가 나의 방랑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나의 ‘희로애락’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겠나? 그와 나는 구구한, 그야말로 경제문제(經濟問題)를 벗어난 가족―그가 지금에 경영하고 있는 여관(旅館)은 그와 내가 주객의 사이는커녕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게 차라리 어떤 때에는 내가 주인 노릇을 하게금 되는 말하자면 공동 경영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그와 나 사이인 것일세. 그의 장부(帳簿)는 나의 장부이었고, 그의 금고(金庫)는 나의 금고이었고, 그의 열쇠는 나의 열쇠이었고, 그의 이익과 손실(利益損失)은 나의 이익과 손실이었고, 그의 채권과 채무(債權債務)는 나의 채권과 채무인 것이었네. 그와 나의 모―든 행동은 그와 내가 목적을 같이 한 방향을 같이 한 그와 나의 행동들이었네. 참으로 그와 내가 서로 믿음은 마치 한 들보를 떠받치고 있는 양편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믿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사이도 같은 것이었네.
× × ×
이와 같은 기쁜 소식만을 나열하고 있던 나는 지금 돌연히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자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조우(遭遇)된 지 오래인 것을 말하네. 나와 만난 후 삼년에 가까운 동안뿐 아니라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이전에도 몸살이나 감기 한 번도 앓아 본 적이 없는 퍽 건강한 몸의 주인이던 그가 졸지에 이렇게 쓰러졌다는 것은 그와 오랫동안 같이 있던 나로서는 더욱이나 의외인 것이었네. 한 이삼일을 앓는 동안에는 신열이 좀 있다 하더니 내가 옆에 앉아 있는 앞에서 고요히 잠자는 듯이 갔네.
「사람 없는 벌판에서 별(星)을 쳐다보며 죽을 줄 안 내 몸이 오늘 이렇게 편안한 자리에 누워서 당신의 서러운 간호를 받아가며 세상을 떠나니 기쁘오. 당신의 은혜는 명도35에 가서 반드시 갚을 것을 약속하오―이 집과 내 가진 물건의 얼마 안되는 것을 당신에게 맡기기로 수속까지 다 되어 있으니 가는 사람의 마음이라 가엾이 생각하여 맡아 주기를 바라고 아무쪼록 그것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형제 친구들과 함께 기쁘게 살아 주기를 바라오. 내가 이렇게 하잘 것 없이 갈 줄은 나도 몰랐소. 그러나 그것도 다― 내가 나의 과거에 받은 그 뼈살에 지나치는 고생의 열매가 도진 때문인 줄 아오. 나를 보내는 그대도 외롭겠소마는 그대를 두고 가는 나는 사바(裟婆)에 살아 꿈즉이던 날들보다도 한층이나 외로울 것 같소!」
이렇게 쓰디 쓴 몇 마디를 남겨 놓고 그는 갔네. 그후 그의 장사도 치른 지 며칠 째 되던 날, 나는 그의 일상 쓰던 책상 속에서 위의 말들과 같은 의미의 유서(遺書), 그리고 문서들을 찾아내었네.
× × ×
이제 이것이 나에게 기쁜 일일까 그렇지 않으면 슬픈 일일까 나는 그 어느 것이라고도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일세.
내가 그의 생전에 그와 내가 주고받던 친교를 생각하면 그의 죽음은 나에게 무한히 슬픈 일이 아니겠나마는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던 날부터 적빈에만 지질리워 가며 살아온 내가 비록 남에게는 얼마 안되게 보일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나의 일생에 상상도 하여 보지도 못할만치의 거대한 재산을 얻은 것이 어찌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겠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러한 나의 생각은 세상을 떠난 그를 생각하기만 하는 데에서도 더없을 양심의 가책을 아니 받는 것도 아니겠으나 그러나 위의 말한 것은 나의 양심의 속임 없는 속삭임인 것을 어찌 하겠나.
「어째서 그가 이것을 나에게 물려 줄까」
「죽은 그의 이름으로 사회업에 기부할까」
이러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나의 머리에 지나가고 지나오고 한 것은 또한 내가 나의 마음을 속이는 말이겠나? 그러나 물론 전에도 느끼지 아니한 바는 아니나 차차 나이 들고 체력이 감퇴되고 원기가 좌절됨을 따라서 이 몸의 주위의 공허가 역력히 발견되고 청운(靑雲)의 젊은 뜻도 차차 주름살이 잡히기를 시작하여 한낱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한 낱 이 몸의 쓸쓸한 느낌만이 나날이 커가는 것일세. 그리하여 어서 바삐 고향에 돌아가 사랑하는 친구와 얼싸안기 원하며 그립던 형제와 섞이어 가며 몇 날 남지 아니한 나의 여생(餘生)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좀더 기쁨과 웃음과 안일한 가운데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날이 가면 갈수록 최근에 이르러서는 일층 더하여 가는 것일세. 내가 의학공부를 시작한 것도 전전푼의 돈이나마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가엾은 짓들이었네.
사회사업에 기부할 생각보다도 내가 가질 생각이 더 컸던 나는 드디어 그 가운데의 일부를 헤치어 생전 그에게 부수(附隋)되어 있던 용인(庸人) 여중(女中)들과 얼마 아니되는 채무를 처치한 다음 나머지의 전부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갈 결심을 하였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으로부터는 단언커니와 나의 일생에 들어본 적이 없던 비난의 말까지 들었네.
「돈! 재물! 이것 때문에 그의 인간성(人間性)이 이렇게도 더럽게 변하고 말다니! 죽은 그는 나를 향하여 얼마나 조소할 것이며 침 배앝을 것이냐」
새삼스러이 찌들고 까부러진 이 몸의 하잘 것 없음을 경멸하여 연민하였네. 그러면서도
「이것도 다― 여태껏 나를 붙들어 매고 그는 적빈 때문이 아니냐」
이렇게 자기변명의 길도 찾아보면서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었네.
× × ×
친구를 잃은 슬픔은 어느 결에 사라졌는가 지금에 나의 가슴은 고향 땅을 밟을 기쁨 친구를 만날 기쁨 형제를 만날 기쁨 이러한 가지의 기쁨들로 꽉 차 있네. 놀라거니와 나의 일생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면서라도 최근 며칠 동안만큼 기뻤던 날이 있었던가를 의심하네.
아― 이것을 기쁨이라고 나는 자네에게 전하는 것일세 그려. 눈물이 나네 그려!
× × ×
자네는 일상 나의 조카 업의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아니하여 왔지. 최근에 자네의 편지에 이 업에 대한 아무런 말도 잘 볼 수 없음은 무슨 일일까, 하여간 젖 먹던, 코 흘리던 그 업이를 보아 버리고 방랑생활 십유여 년 오늘날 그 업이 재질의 풍부한 생래의 영리한 업이로 자라났다 하니 우리 집안을 위하여서나 일상에 적빈에 우는 T 자신을 위하여서나 더없이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제는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감개무량하네. 또한 미구에 만나 볼 기쁨과 아울러 이 미지수의 조카 업이에 대하여 많은 촉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일세.
M군! 나는 아무쪼록 빨리 서둘러서 어서 속히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를 차리려 하거니와 이곳에서 처치해야만 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 해서 아직도 이곳에 여러 날 있지 아니하면 아니될 형편이나 될 수만 있으면 세전(歲前)에 고향에 돌아가 그립던 형제와 친구와 함께 즐거운 가운데에서 오는 새해를 맞이하려 하네. 어서 돌아가서 지나간 옛날을 추억도 하여 보며 그립던 회포를 풀어도 보아야 할 터인데!
일기 추운데 더욱더욱 건강에 주의하기를 바라며 T에게도 불일간 내가 직접 편지하려고도 하거니와 자네도 바쁜 몸이지만 한 번 찾아가서 이 소식을 전하여 주기를 바라네. 자―그러면 만나는 날 그때까지 평안히― X로부터……
「나의 지난 날의 일은 말갛게 잊어 주어야 하겠다. 나조차도 그것을 잊으려 하는 것이니 자살(自殺)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죽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 동안 자그마한 광명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전연 얼마 동안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또 한번 나에게 자살이 찾아왔을 때에 나는 내가 여전히 죽을 수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참으로 죽을 것을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그만큼 이번에 나를 찾아온 자살은 나에게 있어 본질적(本質的)이요, 치명적(致命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연 실망 가운데 있다. 지금에 나의 이 무서운 생활이 노[繩] 위에 선 도승사(渡繩師)의 모양과 같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이 ‘죽을 수 없는 실망’은 가장 큰 좌표에 있을 것이다.
나에게, 나의 일생에 다시 없는 행운이 돌아올 수만 있다 하면 내가 자살할 수 있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까지는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復讐)―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一九三○. 四. 二十六 於 義州通工事場
(李 ○)」
어디로 가나?
사람은 다 길을 걷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로인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나?
광맥(鑛脈)을 찾으려는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보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어둡고 험준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헤매인다. 탐험가(探險家)나 산보자(散步者)나 다 같이―
사람은 다 길을 걷는다. 간다. 그러나 가는 데는 없다. 인생은 암야의 장단 없는 산보이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적응(適應)으로 하여 올빼미와 같은 눈을 얻었다. 다 똑같다.
그들은 끝없이 목마르다. 그들은 끝없이 구(求)한다. 그리고 그들은 끝없이 고른[擇]다.
이 ‘고름’이라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나온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면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이 암야에서도 끝까지 쫓겨난 사람이 있다. 그는 어떠한 것,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제되지 않는다.
―선혈이 임리36한 복수는 시작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복수를―피밑―(底) 없는 학대의 함정―
× × ×
사람에게는 고통이 없다. 그는 지구(地球)권 외에서도 그대로 학대받았다. 그의 고기를 전부 졸여서 애(愛)라는 공물(供物)을 만들어 사람들 앞에 눈물 흘리며도 보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더 한층 그를 학대하고 쫓아내었을 뿐이었다.
「가자! 잊어버리고 가자!」
그는 몇 번이나 자살을 꾀하여 보았던가. 그러나 그는 이 나날이 진[濃]하여만 가는 복수의 불길을 가슴에 품은 채 싱겁게 가 버릴 수는 없었다.
「내 뼈 끝까지 다 갈려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그때에는 내 정령(精靈) 혼자서라도―」
그의 갈리는 이빨[齒] 사이에서는 뇌장(腦漿)을 갈아 마실 듯한 쇳소리와 피육(皮肉)을 말아 올릴 듯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의 반생을 두고 (아마) 하여 내려 오던 무위한 애(愛)의 산보는 끝났다.
그는 그의 몽롱한 과거를 회고하여 보며 그 눈멀은 산보를 조소하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일직선으로 뻗쳐 있는 목표 가진 길을 바라보며 득의(得意)의 웃음을 완이(莞爾)히 웃었다.37
× × ×
닦아도 닦아도 유리창에는 성에가 슬었다. 그럴수록 그는 자주 닦았고 자주 닦으면 성에는 자꾸 슬었다. 그래도 그는 얼마든지 닦았다.
승강장 찬바람 속에 옷고름을 날리며 섰다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퍽 따스하더니 그것도 삽시간(霎時間)이요 발 밑에 ‘스팀’은 자꾸 식어만 가는지 삼등객차(三等客車) 안은 가끔 소름이 끼칠만치 써늘하였다.
가방을 겨우 다나38 위에다 얹고 앉기는 앉았으나 그의 마음은 종시 앉지 않았다. 그의 눈은 유리창에 스는 성에가 닦아도 스고 또 닦아도 또 스듯이 씻어도 솟고 또 씻어도 또 솟는 눈물로 축였다[濡]. 그는 이 까닭 모를 눈물이 이상하였다. 그런 것도 그의 눈물의 원한이었는지도 모른다.
젖은 눈으로 흐린 풍경을 보지 아니하려 눈물과 성에를 쉴 사이 없이 번갈아 닦아가며 그는 창밖을 내다보기에 주린 듯이 탐하였다. 모든 것이 이상하기만 할 뿐이었다.
「어찌 이렇게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을까? 아!」 그에게는 이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서 그는 그의 백사지(白砂地)된 뇌와 심장을 조상하였다.
회색으로 흐린 하늘에 소리없는 까마귀 떼가 몽롱한 북망산을 반점(斑點) 찍으며 감도는 모양― 그냥 세상 끝까지라도 닿아 있을 듯이 겹친 데 또 겹쳐 누워 있는 적갈색(赤褐色)의 벗어진 산(山)들의 자비(慈悲)스러운 곡선(曲線)― 이런 것들이 그의 흥미(興味)를 일게 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도무지 이상치 아니한 것이 그에게는 도무지 이상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그는 그의 눈과 유리창을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의 것을 왜― 거저 먹으려고 그리는 것일까」
그는 ‘따개꾼39’을 생각하여 보았다.
「남의 것을 거저― 남의 것을― 거저―」
그는 또 자기를 생각하여 보았다.
「남의 것을 거저― 나는 남의 것을 거저 갖지 않았느냐― 비록 그 사람은 죽어서 이 세상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유서(遺書)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할지라도― 그의 유산의 전부를 차지하여도 조곰도 거리낌이 없을만치 그와 나는 친한 사이였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하고 많은 유산을 그저 차지하지 않았느냐. 남의 것을― 그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남이다― 남의 것을 거저, 나는 그의 유산의 전부를― 사회사업(社會事業)에 반드시 바쳤어야 옳을 것을― 남의 것이다― 상속이 유언된 유산― 거저― 사회사업― 남의 것―’」 그의 머리는 어지러웠다.
「고요한 따개꾼― 체면 있는 따개꾼!」
그러나 그는 성에 실은 유리창을 닦는 것과 같이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의 종잇 조각― 수형40을 어루만져 보기를 때때로 하는 것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발끝에서 올라오는 추위와 피곤― 머리끝에서 내려오는 산란한 피곤― 그것은 복부(腹部)에서 충돌되어서는 시장함으로 표시(表示)되었다. 한 조각의 마른 빵을 씹어 본 다음에 그는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다. 오줌 누러 가는 것이 귀치않아서―
먹은 것이라고는 새벽녘에도 역시 마른 빵 한 조각밖에는 없다. 그때도 역시 물은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벌써 변소에를 몇 번이고 갔는지 모른다. 절름발이를 이끌고 사람 비비대는 차 안의 좁은 틈을 헤쳐 가며 지나다니기가 귀찮았다. 이것이 괴로웠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물을 마시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오줌을 수없이― 그는 이것이 이 차 안의 특유인 미지근한 추위 때문이 아닌가?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변소에 들어서서는 반드시 한 번씩 그 수형(手形)을 꺼내어 자세히 검사하여 보는 것도 겸겸하였다.
「오냐― 무슨 소리를 내가 듣더라도 다시 살자」
왼편 다리가 차차 아파 올라왔다― 결리는 것처럼― 저리는 것처럼― 기미(氣味) 나쁘게―.
「기후가 변하여서― 풍토가 변하여서―」
사람의 배를 가르고 그 내장을 세척(內藏洗滌)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썩는 다리를 절단(折斷)하는 것은 고사하고― 등에는 조고만 부스럼에 메스 한 번을 대어 본 일이 없는 슬플만치 풍부한 경험을 가진 훌륭한 의사의 그는 이러한 진단을 그의 아픈 다리에다 내려도 보았다. 그래 바지 아래를 걷어 올리고 아픈 다리를 내여 보았다. 바른편 다리와는 엄청나게 훌륭하게 뼈만 남게만은 외인편 다리는 바닥에서 솟아올라 오는 ‘풍토 다른’ 추위 때문인지 죽은 사람의 그것과 같이 푸르렀다. 거기에 몇 줄기 새파란 정맥줄이 반투명체(半透明體)가 내뵈듯이 내보이고 있었다. 털은 어느 사이에인지 다 빠져 하나도 없고 모공(毛孔)의 자국에는 파리똥 같은 깜은 점(黑點)이 위축(萎縮)된 피부 위에 일면으로 널려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나의 것’이니만치 가장 친한 기분으로 언제까지라도 들여다보며 깔깔한 그 면을 맛좋게 쓸어 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때에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신사(紳士)(?)는 가냘픈 한숨을 섞어 혀를 한번 ‘쩍’하고 치더니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황황히 어디론지 가버렸다.
「내리는 게로군― 저 가방― 여보시오, 저 가방」
그는 고개를 돌이키어 그 신사의 가는 쪽을 향하여 소리 질렀다.
「여보시오 저― 가방을 가지고 내리시오― 저」
또 한 번 소리쳐 보았으나 그 신사의 모양은 벌써 어느 곳으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생각나서 찾으러 오도록 나는 저 가방을 지켜주리라」 이런 생각을 그는 한턱 쓰는 세음으로 생각하였다.
「여보 인젠 그 다리 좀 내놓지 마시오」
「아― 참 저 가방―」
이렇게 불식간에 대답을 한 그는 아까 자리를 떠나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던 그 신사가 어느 틈에인지 다시 그 자리에 와 앉아 있는 것을 그제야 겨우 보아 알았다. 신사는 또 서서히 입을 열어
「여보 나는 인제 몇 정거장 남지 않았으니 내가 내릴 때까지는 제발 그 다리 좀 내어 놓지 좀 마오!」
「네― 하도 아프기에 어째 그런가 하고 좀 보았지요. 혹시 풍토가…… 」
「풍토? 당신 다리는 풍토에 따라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하고 그렇소?」
「네― 원래 이 외인편 다리는 다친 다리가 되어서 조곰 일기가 변하기만 하여도 곧 아프기가 쉬운― 신세는 볼일 다 본― 그렇지만 이를 갈고― 」
「하하 그러면 오― 알았소― 그 왼편―……」
「네― 그 아플 적마다 고생이라니 어디 참―」
「내 생각 같아서는 그건 내 생각이지만 그렇게 두고 고생할 것 없이 병신되기는 다― 일반이니 아주 잘라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저 내가 아는 사람도 하나 그 이야기는 할 것도 없소만― 어쨌든 그것은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말이니까 짜르라고 당신보고― 짜르라고 그러는 말은 아니오만― 하여간 그렇다면 퍽 고생이 되겠는데―」
「글쎄 말씀이야 좋은 말씀이외다만 원 아무리 고생이 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제 다리를 자르는 것을 제 눈으로 뻔히 보고 있을 수가 있나요?」
「그렇지만 밤낮 두고 고생하느니보다는 낫겠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뭐 어쩌다가 그렇게 몹시 다쳤단 말이오」
「그거요 다 이루 말할 수 있나요. 이 다리는 화태(樺太)41에서 일할 적에 토로에서 뛰어내리려다가 토로와 한데 뒹구는 바람에 이렇게 몹시 다친 거지요」
「화태?」
신사는 잠시 의아와 놀라는 얼굴빛을 보인 다음에 다시 말을 이어
「어쩌다가 화태까지나 가셨더란 말이요?」
「예서는 먹고 살 수가 없고 하니까 돈 벌러 떠난다는 것이 마지막 천하에 땅 있는 데는 사람 사는 곳이고 안 사는 곳이고 안 가본 데가 있나요.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게 올째 꼭! 가만 있자― 열 일곱 해 아니 열 다섯 핸가― 어쨌든 십여 년이지요」
「돈만 많이 벌었으면 고만 아니오」
「그런데 어디 돈이 그렇게 벌리나요. 한 푼― 참 없습니다. 벌기는 고만두고 굶기를 남 먹듯 했습니다. 어머님 집 떠난 지 일년도 못 되어 돌아가시고―……」
「하― 어머님이― 어머님도 당신하고 같이 가셨습디까― 처자(妻子)는 그럼 다 있겠구려」
「웬걸요― 처자는 집 떠나기 전에 다― 죽었습니다. 어린 것을 나은 지― 에 그게― 어쨌든 에미가 먼저 죽으니까 죽을 밖에요. 어머님은 아우에게 맡기고 떠나려고 했지만 원래 우리 형제는 의가 좋지 못한 데다가 아우도 처자가 다 있는데다가 저처럼 이렇게 가난하니 어디 맡으려고 그럽니까」
「아우님은 단 한 분이요?」
「네― 그게 그렇게 의가 좋지 못하답니다. 남이 보면 부끄러울 지경이지요」
「그래 시장 어떻게 해서 어디로 가는 모양이오」
신사의 얼굴에는 연민(憐憫)의 빛이 보이었다.
「십여 년을 별짓을 다하고 돌아다니다가…… 참 그 동안에는 죽으려고 약까지 타 논 일도 몇 번인지 모르지요. 세상이 다 우스꽝스러워서 술 노름으로 세월을 보낸 일도 있고 식당 쿡 노릇을 안 해 보았나 이래 보여도 양요리(洋料理)는 그래도 못 만드는 것 없이 능란하답니다. 일등 쿡이었으니까 화태에도 오랫동안 있었지요. 그때 저는 꼭 죽는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명이 기니까 할 수 없나 보아요. 이렇게 절름발이가 되어 가면서도 여태껏 살고 있으니 그때 그 놈들(그는 누구라는 것도 없이 이렇게 평범히 불렀다)이 이 다리를 막 자르려고 뎀비는 것들을 죽어라하고 못 자르게 했지요 기를 쓰고 죽어도 그냥 죽지 내 살점을 떼내 던지지는 않겠다고 이[齒]를 악물었더니 그놈들이 그래도 내 억지는 못 이기겠던지 그냥 내버려 두었에요. 덕택에 시방 이 모양으로 절름발이 신세를 네― 가기는 제가 갈 데가 있겠습니까. 아우의 집으로 가야지요. 의가 좋으니 나쁘니 해도 한 배의 동생이요, 또 십여 년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몸이니 반가워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리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고향이요, 고향은 서울, 아주 서울태생이올시다. 서울에는 아우하고 또 극진히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그 사람들을 믿고 시방 이렇게 가는 길이올시다. 그렇지만 내 이를 악물고라도」
「그럼 그저 고향이 그리워서 오는 모양이로구려」
「네― 그렇다면 그렇지요. 그런데 하기는……」
그는 별안간에 말을 멈추는 것같이 하였다.
「그럼 아마 무슨 큰 수가 생겨서 우는 모양이로구려」
어디까지라도 신사의 말은 그의 급처(急處)를 찌르는 것이었다.
「수― 에― 수가 생겼다면― 하기야 수라도―」
「아주 큰 수란 말이로구려 하……」
두 사람은 잠시 쓰디쓴 웃음을 웃어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하잘 것 없는 것일는지 몰라도 제게는 참 큰 수치요, 허고 보니.」
「얘기를 좀 하구려. 그 무슨 그렇게 큰 순가.」
「얘기를 해서 무엇하나요? 그저 그렇게만 아시지요 뭐― 해도 상관은 없기는 없지만……」
「그 아마 당신께 좀 꺼리는 데가 있는 게로구려? 그렇다면 할 수 없겠소만 또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천리나 만리나 따라다닐 사람이 아니요, 또 내가 무슨 경찰서 형사(警察署刑事)나 그런 사람도 아니요 이렇게 차 속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헤어지고 말 사람인데 설사 일후에 또 만나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피차에 얼굴조차도 잊어버릴 것이니 누가 누군지 안단 말이오. 내가 또 무슨 당신의 성명을 아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지 않겠소.」
「아― 그렇다면야― 뭐, 제가 이야기 안 한다는 까닭은 무슨 경찰에 꺼릴 무슨 사기 취재(?)나 했다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서 또 몇 정거장 안 가서 내리신다기에 이야기가 중간에 끊어지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피차 재미도 없을 것 같고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내 이야기 끝나는 정거장까지 더 가리다 그려― 이야기가 재미만 있다면 말이요―」
「네(?) 아니― 몇 정거장을 더 가셔도 좋다니 그것이 어떻게 하시는 말씀인지 저는 도무지―」
두 사람은 또 잠깐 웃었다. 그러나 그는 놀랐다.
「내 여행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는 여행이란 말이오―」
「그렇지만 돈을 더 내셔야 않나요」
「돈? 하― 그래서 그렇게 놀랜 모양이로구려! 그건 조곰도 염려할 것 없소. 나는 철도국에 다니는 사람인고로 차는 돈 한푼 아니 내고라도 얼마든지 거저 탈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지금 볼일로 ××까지 가는 길인데 서울에도 볼일이 있고 해서 어디를 먼저 갈까 하고 망설거리던 차에 미안한 말이지요만 아까 당신의 그 다리를 보고 그만 ××일을 먼저 보기로 한 것이오. 그렇지만 또 당신의 이야기가 아주 썩 재미가 있어서 중간에서 그냥 내리기가 아깝다면 서울까지 가면서 다 듣고 서울 일도 보고 하는 것이 좋을 듯도 하고 해서 하는 말이오」
「네― 나는 또 철도국 차를 거저, 그것 참 좋습니다. 차를 얼마든지 거저」
이 ‘거저’ 소리가 그의 머리에 거머리 모양으로 묘하게 착 달라붙어서는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아 그는 잠깐 동안 혼자 애쓰지 아니하면 안되었다. 억지로 태연(泰然)한 차림을 꾸미며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말마디는 묘하게 굴곡이 심하였다. 그는 유리창이 어느 틈에 밖이 조곰도 내어다 보이지 않을만치 슬은 성에를 닦기도 하여 보았다.
「말하자면 횡재 에― 횡재― 무엇 횡재될 것도 없지만 또 횡재라면 그야― 횡재 아니라고도 할수 없지만 어쨌든 제가 고생 고생 끝에 동경(東京)으로 한 삼년 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게서 친구 한 사람을 사귀었는데 그는 별 사람이 아니라 제가 묵고 있던 집주인입니다. 그 사람은 저보다도 더 아무도 없는 아주 고독한 사람인데 그 여관 외에 또 집도 여러 채를 가지고 있었는데 있는 동안에 그 사람과 나는 각별히 친한 사이가 되어 그 여관을 우리 둘이서 경영하여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얼마 전에 고만 죽었습니다 믿던 친구가 죽었으니 비록 남이었건만 어떻게 설은지 아마 어머님 돌아가실 때만큼이나 울었습니다. 남다른 정분을 생각하고는 장사도 제 손으로 잘 지내 주었지요. 그런데 인제 그렇거든요― 자― 그가 떠―ㄱ 죽고 보니까 그의 가졌던 재산― 무엇 재산이라고까지는 할 것은 없을지는 몰라도 하여간 제게는 게서 더 큰 재산은 여태―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을지 몰라도 어쨌든 상당히 큰돈(?)이니까요― 그게 어디로 가겠느냐 이렇게 될 것이 아니냐 그런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당신이― 슬쩍 이렇게 했다는 말인 것이요 그려 하……따는……참……횡재는……」
「아― 천만에 제 생각에는 그것을 죄다 사회사업(社會事業)에 기부할 생각이었지요 물론―」
「그런데 안했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벌써 그가 저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고 그랬던지 다 저에게다 상속하도록 수속을 하여 놓고는 유서에다가는 떠―ㄱ 무엇이라고 써 놓았는고 하니」
「사회사업에 기부하라고 써―」
「아― 그게 아니거든요. 이것을 그대의 마음 같아서는 반드시 사회사업에 기부할 줄 믿는다. 그러나 죽는 사람의 소원이니 아무쪼록 그대로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척 친구와 함께 노후(老後)의 편안한 날을 맞고 보내도록 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내 말을 어길 때에는 나의 영혼은 명도에서도 그대의 몸을 우려하여 안정(安靜)할 날이 없을 것이라고―」
「하― 대단히 편리한 유서로군! 당신 그 창작……」
신사는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어디까지든지 냉소와 조롱의 빛으로 차 있었다.
「그래서 그의 죽은 혼령도 위로할 겸 저도 좀 인제는 편안한 날을 좀 보내 보기도 할 겸해서 이렇게 돌아오는 길이오―」
「하― 그럴 듯하거든. 그래 대체 그 돈은 얼마나 되며 무엇에다 쓸 모양이오.」
「얼마요 많대야 실상 얼마되지는 않습니다. 제게는― 무얼 하겠느냐― 먹고 살고 하는데 쓰지요」
「아 그래 그저 그 돈에서 자꾸 긁어다 먹기만 할 모양이란 말이오. 사회사업에 기부하겠다는 사람의 사람은 딴 사람인 모양이로군!」
「그저 자꾸 긁어다 먹기만이야 하겠습니까. 설마하기는 시방 계획은 크답니다.」
「한번 다부지게 먹어 보겠다는 말이로구료」
「제게 한 친구가 의사지요. 그 전에는 그 사람도 남부럽지 않게 상당히 살았건만 그 부친되는 이가 미두(米豆)42라나요 그런 것을 해서 우리 친구 병원까지를 들어먹었지요. 그래 시방은 어떤 관립병원에 촉탁의(囑託醫)로 월급생활(月給生活)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몇 해 전부터 편지거든요. 그래서 친구 좋은 일도 할 겸 또 세상에 나처럼 아픈 사람 병든 사람을 위하여 사회사업도 할 겸― 가서 그 친구와 같이 병원을 하나 내일까 생각인데요. 크기야 생각만은―」
「당신은 집이나 지키려요」
「왜요 저도 의사랍니다. 친구의 그 소식을 들었대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몸이 병신이니까 그런지 세상에 하고많은 불쌍한 사람 중에도 병든 사람 앓는 사람처럼 불쌍한 이는 없는 것 같애서 저도 의학을 좀 배워 두었지요」
신사는 가벼운 미소(微笑)를 얼굴에 띄우면서 ‘의학’을 배운 사람치고는 너무도 무식하고 유치하고 저급인 그의 말에 놀란다는 듯이 ‘쩍’ ‘쩍’ 혀를 몇 번 찼다.
「그래 당신이 의학을 안단 말이오」
「네― 안다고 까지야― 그저 좀 뜅겼지요― 가갸거겨― 왜 그리십니까― 어디 편치 않으신 데가 있다면 제가 시방이라도 보아 드리겠습니다. 있습니까― 있으면」
두 사람은 크게 소리치며 웃었다. 차창(車窓) 밖은 어느 사이에 날이 저물어 흐린 하늘에 가뜩이나 음울한 기분이 떠돌았다.
차안에는 전등까지도 켜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도 깨닫지 못하였었다. 그는 밖을 좀 내다 보려고 유리창의 성에를 또 닦았다. 닦기운 부분에는 밖으로 수없는 물방울이 마치 말못할 설움에 소리없이 우는 사람의 뺨에 묻은 몇 방울 눈물처럼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차의 움직임으로 일순 후에는 곧 자취도 없이 떨어지고 그리면 또 새로운 물방울이 또 어느 사이엔지 와 붙고 하여 그 물방울은 늘 거의 같은 수효로 널려 있었다.
「눈이 오시는 게로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멈추고 고개를 모아 창밖을 내어다 보았다. 눈은 ‘너는 서울 가니? 나는 부산 간다’ 하는 듯이 옆으로만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야기에 팔리어 얼마 동안은 잊었던 외인편 다리는 여전히 아까보다도 더하게 아프고 쑤시었다 저렸다. 그는 그 다리를 옷 바깥으로 내리 쓰다듬으며 순식간에 ‘싀―ㅅ’소리를 내이며 입에 군침을 한 모금이나 꿀떡 삼켰다. 그 침은 몹시도 끈적끈적한 것으로 마치 ‘콘덴스트 밀크’나 엿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신사는 양미(兩眉)간에 조고만 내 천(川)자를 그린 채 그 모양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앉았더니 별안간 쾌활한 어조(語調)로 바꾸어 입을 열었다.
「의사(醫師)가 다리를 앓는 것은 회괴한 일이로군!」
「제 똥 귄 줄 모른다고!」
두 사람은 이전보다도 더 크게 소리쳐 웃었다. 그 웃음은 추위에 원기를 지질리운 차안의 승객들의 멍멍한 귀에 벽력 같은 파동을 주었음인지 그들은 이 웃음소리의 발원지를 향하여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이 모든 시선의 화살에 살이 간지러웠다. 그리하여 고개를 다시 창 쪽으로 향하여 보았다가 다시 또 숙여도 보았다.
얼마만에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통로(通路) 건너편에 그를 향하여 앉아 있는 젊은 여자 하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것을 그는 발견할 수 있었다.
「우나?―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게지― 누구와 생이별이라도 한 게지!」
그는 이런 유치한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러면 그 돈을 시방 당신의 몸에 지니고 있겠구려 그렇지 않으면!」
신사의 이 말소리에 그는 졸도할 듯이 나로 돌아왔다. 그 순간에 그의 머리에는 전광(電光) 같은 그 무엇이 떠도는 것이 있었다.
「아―니요 벌써 아우 친구에게 보냈세요. 그런 것을 이렇게 몸에다 지니고 다닐 수가 있나요」
하며 그는 그 수형에 들은 웃 포켓트의 것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보았다. 한 장의 종이를 싸고 또 싸고 몇 겹이나 쌌던지 그의 손바닥에는 풍부한 질량의 쾌감이 느껴졌다. 그의 입안에는 만족과 안심의 미소가 맴돌았다.
차안은 제법 어두워졌다. (그것은 더욱이 창밖이었을는지도 모르나 지금에 그의 세계는 이 차안이었으므로이다) 생각없이 그는 아까 그가 바라보던 젊은 여자의 앉아 있는 곳으로 머리를 돌려 보았다. 그때에 여자는 들었던 얼굴을 놀란 듯이 숙이고는 수건으로 가려 버리었다. 더욱 놀란 것은 그였다.
「흥― 원 도무지 별일이로군!」
그는 군입을 다셔 보았다. 창밖에는 희미한 가운데에도 수없는 전등이 우는 눈으로 보는 별들과도 같이 이지러져 번쩍이고 있었다.
「서울이 아마 가까운 게로군요」
「가까운 게 아니라 예가 서울이오」
그는 이 빈약한 창밖 풍경(風景)에 놀랐다.
「서울! 서울! 기어코―어디 내 이를 갈고―」
그는 이 ‘이를 갈고’ 소리를 벌써 몇 번이나 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자기도 또 듣는 사람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어찌 하겠다는 소리인지 깨달을 수 없었다. 차안은 이제 극도로 식어온 것이었다. 그는 별안간 시베리아 철도를 타면 안이 어떠할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하여 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부시럭 부시럭 일어났다. 그는 얼른 변소에를 안전하도록 다녀온 다음 신사의 조력을 얻어 다나 위의 가방을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바른 손아귀에 꽉 쥐고서 내릴 준비를 하였다. 차는 벌써 역 구내에 들어왔는지 무수한 검고 무거운 화물차 사이를 서서히 걷고 있는 것이었다.
차는 ‘치―ㄱ’ 소리를 지르며 졸도할만치 큰 기적 소리를 한번 울리고는 승강장에 닿았다. 소란한 천지는 시작되었다.
그는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 여자의 있던 곳을 또 한 번 돌아다 보았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 여자는 반대편 문으로 나갔었기 때문에 그는 여자의 등과 머리 뒷모양밖에는 볼 수 없었다.
「에― 그러나 도무지― 이렇게 기억 안되는 얼굴은 처음 보겠어. 불완전 불완전!」
그는 밀려 나가며 이런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 여자의 잠깐 본 얼굴을 아무리 다시 그의 머리 속에 나타내어 보려 하였으나 종시 정돈되지 아니하는 채 희미하게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아픈 다리, 차안의 추위에 몹시 식은 다리를 이끌고 사람 틈에 그럭저럭 밀려 나가는 그의 머리는 이러한 쓸데없는 초조로 불끈 화가 나서 어지러운 것이었다.
승강대를 내릴 때에 그는 그 신사 손목을 한 번 잡아 보았다. 아픈 다리를 가지고 내리는데 신사의 힘을 빈다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그가 무엇인지 유혹하여지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쥐고 보았으나 그는 할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잠깐 머뭇머뭇하였다.
「저 오늘이 며칠입니까?」
「십이월 십이일(十二月十二日)!」
「십이월 십이일! 네, 십이월 십이일!」
신사의 손목을 쥐인 채 그는 이렇게 중얼거려 보았다. 순식간에 신사의 모양은 잡다한 사람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누구인지 아지 못할 사람이 그의 손목을 달려 잡았을 때까지 그는 아무도 찾지는 못하였다. 희미한 전등 밑에 우쭐대는 사람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다 똑같은 것만 같았다. 그는 그의 손목을 잡는 사람의 얼굴을 거의 저절로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눈― 코― 입―.
「하…… 두 개의 눈― 한 개씩의 코와 입!」
소리 안 나는 웃음을 혼자 웃었다. 눈을 뜬 채!
「X군! 나를 못 알아보나 X군!」
한참 동안이나 두 사람의 시선은 그대로 늘어붙은 채 마구 매어달려 있었다.
「M군! 아! 하! 이거 얼마만이십니까 ―얼마―에 얼마만인가」
그의 눈에는 그대로 눈물이 괴었다.
「M군! 분명히 M군이시지요! 그렇지?」
침묵…… 이 부득이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아니 찾아올 수 없었다. ―입을 꽉 다문 채 그는 눈물을 흘린 눈으로 M군의 옷으로 신발로 또 옷으로 이렇게 보기를 오르내리켰다. 그의 머리(?)에 가까운 곳에는(?) 이상한 생각(같은 것)이 떠올랐다.
「M군― 그 M군은 나의 친구였다. 분명히 역시」
M군보다 키는 차라리 그가 더 컸다. 그러나 그가 M군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치어다보는 것’이었다. 그의 이 모순된 눈에서는 눈물이 그대로 쏟아지기만 하였다 ―어느 때까지라도―.
군중의 잡다한 소음은 하나도 그리 귀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그의 눈이 초점을 잃어버렸던 것도,
「차라리 아까 그 신사나 따라갈 것을」
전광 같은 생각이 또 떠올랐다. 그때 그는 그의 귀가 ‘형님’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던 기억’까지 쫓아 버렸다.
「차라리―아―」
「이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었던가―아―」
모든 것은 다 간다. 가는 것은 어언간 간 것이다. 그에게 있어도 모든 것은 벌써 다 간 것이었다.
다만― 그리고는 오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 그 뒤를 이어서 ‘가기 위하여’ 줄대어 오고 있을 뿐이었다.
「아― 갔구나[去]― 간 것은 없는 것만도 못한 ‘없는 것’이다―모―든……」
그는 M군과 T씨와 그리고 T씨의 아들 업―이 세 사람의 손목을 번갈아 한 번씩 쥐어 보았다. 어느 것이나 다 뻣뻣하고 핏기없이 마른 것이었다.
「아우야―T―
조카―업―네가 업이지……」
그들도 그의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어두운 낯빛에 아무 말들도 없었다. 간단한 해석을 내리운 것이었다.
「바깥에는 눈이 오지?」
「떨어지면 녹고―떨어지면 녹고 그러니까 뭐」
떨어지면 녹고―그에게는 오직 눈만이 그런 것도 아닐 것 같았다―그리고 비유할 곳 없는 자기의 몸을 생각하여도 보았다.
네 사람은 걷기를 시작하였다. 어느 틈엔지 그는 업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네 얼굴이 그렇게 잘생긴 것은―최상의 행복이요 동시에 최하의 불행이다.」
그는 업의 붉게 익은 두 뺨부터 코 밑에 인중을 한참이나 훔쳐 보았다. 그 곳은 그를 만든 신(神)이 마지막 새끼 손가락을 떼인 자리인 것만 같았다.
도영(倒映)되는 가로등(街路燈)과 ‘헷드라이트’는 눈물에 젖은 그의 눈 속에 이중적(二重的)으로 재현되어 있는 것 같았다.
× × ×
T씨의 집에서 이것 저것 맛있는 음식을 시켜다 먹었다. 그 자리에 M군도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자리는 어리석기 쉬웠다. 그래 그는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오고 보니―그것도 그래―만나고 보면 할말도 없거든―사람이란 도무지 이상한 것이거든―얼싸안고 한― 두어 시간 뒹굴 것 같지―하기야― 그렇지만― 떡― 당하고 보면 그저 한량없이 반갑다 뿐이지―또 별 무슨―」
자기 말이 자기 눈에 띄울 때처럼 싱거운 때는 없다.
그는 이렇게 늘어놓는 동안에 ‘자기 말이 자기 눈에 띄었’다. 자리는 또 어리석어 갔다.
「이 세상에 벙어리나 귀머거리처럼―어쨌든 그런 병신이 차라리 나을 것이야―」
이런 말을 하고 나서 보니 너무 지나친 말인 것도 같았던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멈칫했다.
「X군― 말 끝에 말이지― 그래도 눈먼 장님은 아니니까 자네 편지는 자세 보아서 아네. 자네도 인제 고생 끝에 낙이 나느라― 고하기는 우리 같은 사람도 자네 덕을 입지 않나! 하……」
M군의 이 말 끝에 웃음은 너무나 기교적(技巧的)이었다. 차라리 웃을 만하였다.
「웃을 만한 희극(喜劇)!」
그는 누구의 이런 말을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는 M군의 이 웃음이 정히 그것에 해당(該當)치 않는 것인가도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웃었다.
「형님 언제나 심평43이 필까 ‘필까’했더니…… 인제는 나도 기지개 좀 펴겠소―허……」
이렇게도 모든 ‘웃을 만한 희극’은 자꾸만 일어났다.
「하……! 하……」
그는 나가는 데 맡겨서 그대로 막 웃어 버렸다. 눈 감고 칼쌈 하는 세 사람처럼 관계도 없는 세 가지 웃음이 서로 어울어져서 스치고 부딪고 맞닥치는 꼴은 “웃을 만한” 희극 중에서도 진기한 광경이었다.
열한시쯤하여 M군은 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자리에 쓰러졌다. 곧 깊은 꿈 속에서 떨어진 그는 여러 날만에 극도로 피곤한 그의 몸을 처음으로 편안히 쉬이게 하였다.
얼마를 잤는지 (그것은 하여간 그에게는 며칠 동안만 같았다) 귀가 간지러움을 견디다 못하여 억지로 깨었다. 깨이고 난 그는 그의 귀가 그렇게 간지러웠던 까닭이 무엇이었던가를 찾아 보았으나 어두컴컴한 방안에는 아무것도 집어내일 것이 없었다.
「꿈을 꾸었나― 그럼―」
꿈이었던가 아니었던가를 생각하여 보는 동안에 그의 의식은 일순간에 명료하여졌다. 따라서 그의 귀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구분해 내일만치 정확히 간지러움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시계 소리― 밤(夜) 소리(그런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리고―」
분명히 퉁소 소리다.
「이럴 내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알 수 없이 감상적(感傷的)으로 변하여 갔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까를 생각하여 보았으나 알 수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어둠침침한 공간 속에서 초점 잃은 두 눈을 유희시키다가 별안간 그는 「퉁소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생각에는 그 퉁소의 크기는 그가 짚고 다니는 ‘스틱’ 기러기만은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런 굵은 옅은 소리가 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여 보고 나서 그는 혼자 웃었다.
「아까 그 신사나 따라갈 것을! 차라리!」
어찌하여 이런 생각이 들까, 그는 몇 번이나 생각하여 보았다. M군과 T는 나를 얼마나 반가와하여 주었느냐― 나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아니하였느냐― 업의 손목을 잡지 아니하였느냐― M군과 T는 나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냐― 나는― 그들을 믿고― 오직― 이곳에 돌아온 것이 아니냐―.
「아― 확실히 그들은 나를 반가와하고 있음에 틀림은 없을까? 나는 지금 어디로 들어가느냐」
그는 지금 그윽한 곳으로 통하여 있는― 그 그윽한 곳에는 행복이 있을지 불행이 있을는지 모른다― 층계를 한 단 한 단 디디며 올라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가슴은 아지 못할 것으로 꽉 차 있었다. 그것을 그가 의식할 때에 그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황황히 들여다 본다. 그때에 그는 이때까지 무엇에인지 꽉 채워져 있는 것 같은 그의 가슴 속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인 것으로 그의 눈앞에 나타난다―
「아무것도 없었구나― 역시」
그가 다시 고래를 들었을 때에는 비인 것으로만 알아졌던 그의 가슴 속은 역시 무엇으로인지 차 있는 것을 다시 느껴지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모순이다. 그러나 모순된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만큼 모순이라는 것은 진리이다. 모순은 그것이 모순된 것이 아니다. 다만 모순된 모양으로 되어져 있는 진리의 한 형식이다.
「나는 그들을 반가와하여야만 한다― 나는 그들을 믿어 오지 아니하였느냐? 그렇다 확실히 나는 그들이 반가왔다― 아― 나는 그들을 믿어―야 한다― 아니다. 나는 벌써 그들을 믿어 온 지 오래다―내가 참으로 그들을 반가와하였던가― 그것도 아니다― 반갑지 아니하면 아니될 이 경우에는 반가운 모양외에 아무런 모든 모양도 나에게― 이 경우에― 나타날 수는 없다― 어쨌든 반가왔다―」
시계는 가느단 소리로 네 시를 쳤다. 다음은 다시 끔찍끔찍한 침묵 속에 잠기고 만다. T씨의 코고는 소리와 업의 가냘픈 숨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그의 귀를 간지럽히던 퉁소 소리도 어느 사이에인지 없어졌다.
「혹시 내가 속지나 않은 것일까. ―사람은 모두 다 서로 속이려고 드는 것이니까. 그러나 설마 그들이―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바치리라―」
사람은 속이려 한다. 서로서로―그러나 속이려는 자기가 어언간 속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속는 것은 더 쉬운 일이다― 그 점에 있어 속이는 것이란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반성(反省)한다. 그 반성은 이러한 토대 위에 선 것이므로 그들은 그들이 속이는 것이고 속는 것이고 아무 것도 반성치는 못한다.
이때에 그도 확실히 반성하여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반성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도 속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아무도 나를 속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반가와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믿지 아니하면 안된다」 등의 ‘……지 아니하면 안되’는 의무를 늘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 아니하면 안된다’라는 것이 도덕상에 있어 어떠한 좌표 위에 놓여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그의 소위 ‘의무’라는 것이 참말 의미의 ‘죄악’과 얼마나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없었는 것도 물론이다.
사람은 도덕의 근본성을 고구하기 전에 우선 자기의 일신을 관념 위에 세워 놓고 주위의 사물에 당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최후적 실망과 공허를 어느 때이고 반드시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이 왔을 때에 그가 모든 근본 착오를 깨닫는다 하여도 때는 그에게 있어 이미 너무 늦어지고야 말고 하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사람은 얼마나 오류(誤謬)를 반복하여 왔던가 이 점에 있어서 인류의 정신적 진보는 실로 가엾을만치 지지(遲遲)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주위를 나의 몸으로써 사랑함으로써 나의 일생을 바치자……」
그는 이 ‘사랑’이라는 것을 아무 비판도 없이 실행을 ‘결정’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아까 그 신사를 따라갔던들? 나는 속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속을 것을 보증할 사람이 또 누구냐 ―그 신사에게 나의 마음과 같은 참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증할 사람은 또 누구냐……」
이러한 자기 반역도 그에게 있어서는 관념에 상쇄(相殺)될 만큼도 없는 극히 소규모의 것이었다. ―집을 떠나 천애44를 떠다닌 저 십여 년. 그는 한 번도 이만큼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머리는 냉수에 끄어낸 것같이 맑고 투명하였다. 모든 것이 이상하였다.
「밤이라는 것은 사람이 생각하여야만 할 시간으로 신이 사람에게 준 것이다」
그는 새삼스러이 밤의 신비를 느꼈다.
「그 여자는 누구며 지금쯤은 어디 가서 무엇을 생각하고는 울고 있을까?」
그의 눈앞에는 그 인상 없는 여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얼굴의 평범이라는 것은 특이(못생긴 편으로라도) 보다 얼마나 못한 것인가를 그는 그 여자의 경우에서 느꼈다.
「그 여자를 따라갔어도」
이것은 그에게 탈선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생각하기를 그쳤다. 그는 몸 괴로운 듯이(사실에) 한 번 자리 속에서 돌아 누웠다. 방안은 여전히 단조로이 시간만 삭이고 있다. 그때 그의 눈은 건너편 벽에 걸린 조고마한 일력 위에 머물렀다.
DECEMBER12
이 숫자는 확실히 그의 일생에 있어서 기념하여도 좋을 만한 (그 이상의) 것인 것 같았다.
「무엇하려 내가 여기를 돌아왔나」
그러나 그 곳에는 벌써 그러한 ‘이유’를 캐어 보아야 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말 안 듣는 몸을 억지로 가만히 일으키었다. 그리하고는 손을 내어밀어 일력의 ‘12’쪽을 떼어 내었다.
「벌써 간 지 오래다」
머리맡에 벗어 놓은 웃옷의 ‘포켓’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서는 그 일력쪽을 집어넣었다 ―마치 그는 정신 잃은 사람이 무의식으로 하는 꼴로― 천장을 향하여 눈을 꽉 감고 누웠다. 그의 혈관에는 인제 피가 한 방울씩 두 방울씩 돌기를 시작한 것 같았다. 완전히 편안한 상태였다.
주위는 침묵 속에서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명은 의지다」
무의미한 자연 속에 오직 자기의 생명만이 넘치는 힘을 소유한 것 같은 것이 그에게는 퍽 기뻤다. 그때에 퍽 가까운 곳에서 닭이 홰를 ‘탁탁’ 몇 번 겹쳐 치더니 청신한 목소리로 이튿날의 첫 번 울음을 울었다. 그 소리가 그에게는 얼마나 생명의 기쁨과 의지의 힘을 표상하는 것 같았었는지 몰랐다. 그는 소리 안 나게 속으로 마음껏 웃었다―.
조금 후에는 아까 그 소리 난 곳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서 더 한층이나 우렁찬 목소리로의 ‘꼬끼오’가 들려왔다. 그는 더없이 기뻤다. 어찌할 수도 없이 기뻤다. 그가 만일 춤출 수 있었다 하면 그는 반드시 일어나서 춤추었을 것이다. 그는 견딜 수 없었다.
「T― T― 집에서 닭을 치나?」
「T― 업아― 집에서……」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다만 T씨의 코고는 소리와 업의 가냘픈 숨소리가 전과 조곰도 다름없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와 도로 마찬가지로 변하였다. (사실에 아무일이고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승리! 승리!」
어언간 그는 또다시 괴로운 꿈속으로 들어가 버렸다―해가 미닫이에 꽤 높았을 때까지―
× × ×
아무리 그는 찾아보았으나 나무도 없는 마른 풀 밭에는 천 개나 만 개나한 모양의 무덤들이 일면으로 널려 있기만 할 뿐이었다.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서기 전부터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나섰다. 또 찾을 수가 있었대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의 마음 가운데는 무엇이나 영감이 있을 것만 같았다.
「반가이 맞아 주겠지! 적어도 반갑기는 하겠지!」
지팡이를 쥐인 손―손등은 바람에 터져 새빨간 피가 흘렀으나 손바닥에는 축축이 식은땀이 배었다. 수건을 꺼내어 손바닥을 닦을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에 젖은 눈가와 뺨을 씻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눈물은 뺨에 흘러서 그대로 찬 바람에 어[凍]는지 싸늘하였다― 두 줄기만이 더욱이나.
「왜 눈물이 흐를까― 무엇이 설울까?」
그에게는 다만 찬바람 때문인 것만 같았다. 바람이 소리 지르며 불 때마다 그의 눈은 더한층이나 젖었다. 키 작은 잔디의 벌판은 소리날 것도 없이 다만 바람과 바람이 서로 어여드는 칼날 같은 비명이 있을 뿐이었다.
해가 훨씬 높았을 때까지 그는 그대로 헤매었다. 손바닥의 땀과 눈의 눈물을 한 번씩 더 씻어내인 다음 그는 아무데이고 그럴 법한 자리에 가 앉았다.
그곳에도 한 개의 큰 무덤과 그 옆에 작은 무덤이 어깨를 마주대인 것처럼 놓여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세상에 또 나와 같은 젊은 안해와 어린 자식을 한꺼번에 갖다 파묻은 사람이 또 있는가 보다.」
그는 그러한 남과 이러한 자기를 비교하여 보았다.
「그러한 사람도 있다면 그 사람도 지금은 나같이 세상을 떠돌아다닐 터이지. 그리고 또 지금쯤은 벌써 그 사람도 죽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는 자기가 지금 무엇하러 이곳에 와 있는지 몰랐다. 반가와하여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래도 고사하고라도 그에게 반가운 것의 아무 것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마른 풀밭에 앉아 있는 그의 모양이 그의 눈으로도 ‘남이 보이듯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가자― 가― 이곳에 오래 있을 필요는 없다― 아니 처음부터 올 필요도 없다―
사람은 살아야만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이고는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까지라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죽는 것은 사람의 사는 것을 없이하는 것이므로 사람에게는 중대한 일이겠다―죽는 것―죽는 것―과연 죽는 것이란 사람이 사는 가운데에는 가장 두려운 것이다―그러나―
죽는 것은 사는 것의 크낙한 한 부분이겠으나 그러나 죽는 것은 벌써 사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죽는 것에 철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에는 벌써 눈이라도 주어 볼 아무 값[價]도 없어지는 것이다.
죽는 것에 대한 미적지근한 미련은 깨끗이 버리자― 그리하여 죽는 것에 철저하도록 힘차게 살아 볼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실험(實驗)이 아니다. 실행(實行)이다.
사람은 놀랄 만한 긴장 속에서 일각의 여유조차도 가지지 아니하였다.
「보아라 이 언덕에 널려 있는 수도 없는 무덤들을. 그들이 대체 무엇이냐, 그것들은 모든 점에 있어서 무(無) 이하의 것이다.」
해는 비최일 땅을 가졌으므로 행복하다. 그러나 땅은 해의 비최임을 받는 것만으로는 행복되지 않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보아라 해의 비최임을 받고 있는 저 무덤들은 무엇이 행복되랴 ―해는 무엇이 행복되며!」
그것은 현상이 아니다. 존재도 아니다. 의의 없는 모양(?)이다 (만일 이러한 말이 통할 수 있다면)
「생성하고 자라나고 살고―아―그리하여 해도 땅도 비로소 행복된 것이 아니랴!」
그의 머리 위를 비스듬히 비최이고 있는 그가 사십 년 동안을 낯익히 보아오던 그 해가 오늘에 있어서는 유달리도 숭엄하여 보였고 영광(靈光)에 빛나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나 따뜻한 것만 같았고 더욱이나 밝은 것만 같았다.
십여 년 전에 M군과 함께 어린것을 파묻고 힘없는 몸이 다시 집을 향하여 걷던 이 좁고 더러운 길과 그리고 길가의 집들은 오늘 역시 조곰도 변한 곳은 없었다.
「사람이란 꽤 우스운 것이야」
그는 의식없이 발길을 아무 데로나 죽은 것들을 피하여 옮기었다. 어디를 어느 곳으로 헤매었는지 그가 이 촌락(?)을 들어설 수가 있었을 때에는 세상은 벌써 어둠컴컴한 암흑 속에 잠긴 지 오래였다.
집에는 피곤한 사람들의 코고는 무거운 소리가 흐릿한 등광과 함께 찢어진 들창으로 새어 나왔다. 바람은 더한층이나 불고 그대로 찼다[冷].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이 작은 키로 늘어선 것은 그 곳이 빈민굴인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래도 이곳이 얼마나 ‘사람사는 것’같고 따스해 보이는지 몰랐다.
× × ×
그는 도무지 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느 때에는 그에게 무한히 호의를 보여 주는 것같이 하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도조차 없었다. 일로 보아 하여 간 그들이 그에게 무엇이나 불평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였다. 어느 날 밤에 그는 그들을 모두 불렀다. 이야기라도 같이 하여 보자는 뜻으로
「T! 의가 좋으니 나쁘니 하여도 지금 우리에게 누가 있나. 다만 우리 두 형제가 있지 않나― 아주머니(T씨의 아내를 그는 이렇게 불렀다) 그렇지 않소. 또 그리고 업아, 너도 그렇지 아니하냐. 우리 외에 설령 M군이 있다 하더라도―하기야 M군은 우리들 가족과 마찬가지로 친밀한 사이겠지만 그래도 M군은 ‘남’이 아닌가」
그는 여기에 말을 뚝 끊고 한 번 그들의 얼굴들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근심스럽거나 어두운 표정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라 무엇이나 그들은 그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한 빛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자! 우리 일을 우리끼리 의논하지 아니하고 누구하고 의논하나― 나에게는 벌써 먹은 바 생각이 있어! 그것은 내 말하겠으되― 또 자네들께도 좋은 생각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여 주었으면 좋겠어. 하여간 이 돈은 남의 것이 아닌가. 남의 것을 내가 억지로(?) 얻은 것은― 죽은 사람의 뜻을 어기듯 하여 가며 이렇게 내가 차지한 것은 다 우리들도 한번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 이 돈에 내 것 남의 것이 있을 까닭이 없어. 내 것이라면 제각기 다 내것이 될 수 있겠고 남의 것이라면 다 각기 누구에게나 남의 것이니깐? 자! 내 눈에 띄이지 못한 나에게 대한 불평이 있다든지 또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생각이 있다든지 하거든 우리가 같이 서로 가르쳐 주며 의논하여 보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
그는 또 한 번 고개를 돌리어 가며 그들의 얼굴빛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 변화도 찾아내일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여 보지! 내 생각 같아서는―이 돈을 반에 탁 갈라서 자네하고 나하고 반분씩 노놔 갖는 것도 좋을 것 같으나 기실 얼마되지 않은 것을 또 반에 나누고 말면 더욱이나 적어지겠고 무슨 일을 해볼 수도 없겠고 그럴 것 같아서! 생각다 생각 끝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그의 얼굴에는 무슨 이야기?! 못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어려운 표정이 보였다.
「즉 반분을 하고 고만두는 것보다는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같이 무슨 일이고 한번 하여 보자는 말이야. 그러는 데는 우리는 M군의 힘도 빌 수밖에는 없어. 또 우리 둘의 힘만으로는 된다 하더라도― 생각하면 우리는 옛날부터 M군의 신세를 끔찍이 져왔으니까. 지금은 거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한 사람과 함께 협력해 보는 것도 좋지 아니할까 하는데― 또 M군은 요사이 자네들도 아다시피 매우 곤궁한 속에서 지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하면 여지껏 신세진 은혜도 갚아 보는 세음으로!」
「M군은 의사(醫師)이지. 하기는 나도 그 생각으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로되 어쨌든 의학공부를 약간 해둔 경력도 있고 하니― M군의 명의(名義)로 병원을 하나 내이는 것이 어떠할가 하는 말이거든!―」
그는 이 말을 뚝 떨어뜨린 다음 입안에 모든 굳은 침을 한 모금 꿀떡 삼켰다.
「그야 누구의 이름으로 하든지 상관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M군은 그 방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연조 도 있고 또 이름도 있지 않은가― 즉 그것은 우리의 편리한 점을 위하는 방침상 그리는 것이고―무슨 그 사람이 반드시 전부의 주인이라는 것은 아니거든― 그래서는 수입이 얼마가 되든지 삼분하여서 논키로 !―어떤가? 의향이」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다른 표정도 찾아 내일 수는 없었다. 꽉 다물어 있는 그들의 입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열릴 것 같지도 않았다.
「자― 좋으면 좋겠다고, 또 더 좋은 방책이 있으면 그것을 말하여 주게! 불만인가―덜 좋은가」
방안은 고요하다. 밖에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버러지 소리의 한결같은 ‘리듬’ 외에는 방안은 언제까지라도 침묵이 계속하려고만 들었다.
그날 밤에 그는 밤이 거의 밝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끝없는 생각의 줄이 뒤를 이어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의 일들은 불행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 그렇게도 불행하므로 행복된 것이다」
그에게는 불행의 쾌미(快味)가 알려진 것도 같았다.
「이대로 가자― 이대로 가는 수밖에는 아무 도리도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여지껏 찾아오던 ‘행복’이라는 것을 찾기도 고만두고 다만 ‘삶’을 값있게 만들기에만 힘쓰자. 행복이라는 것은 없다 ―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여지껏 찾앗다. 나는 그릇 ‘겨냥’ 대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실히 ‘완전한 인간의 패배자’였다 ―때는 이미 늦은 것 같다. 그러나 또 생각하면 때라는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다만 삶에 대한 굳은 의지를 가질 따름이어야만 한다― 그 삶이라는 것이 싸움과 슬픔과 피로투성이 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곳에는 불행도 없다. ―다만 힘세찬 ‘삶’의 의지가 그냥 그 힘을 내어휘두르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실로 인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얼마나 애를 썼나 하늘도 쌓아 보고 지옥도 파 보았다. 그리고 신(神)도 조각(彫刻)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땅 이외에 그들의 발 하나를 세울 만한 곳을 찾아내이지 못하였고 사람 이외에 그들의 반려(伴侶)도 찾아내일 수 없었다. ―그들은 땅 위와 그리 사람들의 얼굴들을 번갈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결국 길게 한숨 쉬었다.
「벗도 갈 곳도 없다 ―이 괴로운 몸을 그래도 이 험악한 싸움터에서 질질 끌고 돌아다녀야 할 것인가 ―그밖에 도리가 없다면! 사람아 힘 풀린 다리라도 최후의 힘을 주어 세워 보자. 서로서로 다같이 또 다 각기 잘 싸우자!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있을 따름이고나―」
그는 그의 몸이 한층이나 더 피곤한 듯이 자리 속에서 한 번 돌쳐 누웠다. 피곤함으로부터 오는 옅은 쾌감이 전신에 한꺼번에 스르르 기어 올라옴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하여간 나는 우선 T의 집에서 떨어지자[離] 그것은 내가 T의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피차에 고통을 가져온다는 이유로부터라느니보다도 그까진 일로 마음을 귀찮게 굴어 진지한 인간투쟁을 방해시킬 수는 없다.」
밤이 거의 밝게쯤 되어서야 겨우 그는 최후의 결정을 얻었다. 설령 그가 T씨의 집을 떠난다 하여도 그는 지금의 형편으로 도저히 혼자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M군과 함께 있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T씨가 좋아하든지 그의 방침대로 병원을 낸 다음 수입은 삼분할 것도 결정하였다.
지금 M군의 집은 전일의 대가를 대신하여 눈에 띄우지도 아니할 만한 오막살이였다. 모든 것이 결정되는 대로 병원 가까이 좀 큰 집을 하나 산 다음 M군의 명의로 자기도 M군의 한 가족이 될 것도 결정하였다. 또 병원을 신축하기에 넉넉하다면 아주 그 건물 한 모퉁이에다 주택까지 겸할 수 있도록 하여 볼 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는 될 것 같지도 않게 생각키웠다.
× × ×
새해는 왔다. 그의 생활도 한층 새로운 활기를 띠어오는 것 같았다.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은 새해였으나 그에게는 다시 몹시 의미 깊은 새해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1930. 5. 於 義州通工事場)―
생물은 다 즐거웠다. 적어도 즐거운 것같이 보였다. 그가 봄을 만났을 대 봄을 보았을 때에 죽을 힘을 다 기울여 가며 긍정(肯定)하렸던 ‘생’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회의와 그에 좇는 실망이 그를 찾았다[訪]. 진행하며 있는 온갖 물상 가운데에서 그 하나만이 뒤에 떨어져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벌써 도태되었을’ 그를 생각하고 법칙이라는 것의 때로는 기발한 예외를 자신에서 느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여력(餘力)이 있었다. 긍정에서 부정에 항거하는 투쟁― 최후의 피투성이의 일전(一戰)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용납되지 않은 애(愛)’ ‘눈먼[盲] 애’―그것을 조건 없이 세상에 헌상하는 그것이었다.
인간 낙선자(落選者)의 힘은 오히려 클 때도 있다. 봄을 보았을 대, 지상에 엉키는 생(生)을 보았을 때, 증대되는 자아 이외(自我以外)의 열락을 보았을 때 찾아오는 자살적 절망에 충돌당하였을 때 그래도 그는 의연히 차라리 더한층 생에 대한 살인적 집착과 살신성인적(殺身成仁的) 애(愛)를 지불키 용감하였다. 봄을 아니 볼 수 없이 볼 수박에 없었을 때 그는 자신을 혜성(慧星)이라 생각하여도 보았다. 그러나 그가 혜성이기에는 너무나 광채가 없었고 너무나 무능하였다. 다시 한번 자신을 일평범 이하의 인간에 내려뜨려 보았을 때 그가 그렇기에는 너무나 열락과 안정이 없었다. 이 중간적(실로 아무것도 아닌) 불만은 더욱이나 그를 광란에 가깝게 심술 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 × ×
T씨에 관한 그의 근심은 그가 그의 생에 대한 신조의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커가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원인이 어느 곳에 있든지는 하여간 그가 T씨의 집을 나온 것은 한낱 도의적으로만 생각할 때에는 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의 그러한 결정적 일이 동인(動因)에 있어서는 추호의 ‘잘못’도 섞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가 변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역설할 수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인상(人相)이 몹시 나빠서 그랬던지 M군의 가족으로부터도 그는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M군의 어린아이들까지도 딸치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때문에 자신의 불복을 느끼거나 혹은 M군의 집을 떠날 생각이나 다시 T씨의 집으로 들어갈 생각 같은 것은 하지도 아니하였다. 그까짓 것들은 그에게 있어 별로 문제 안되는 자기는 그 이상 더 크나큰 문제에 조우하여 있는 것으로만 여겼다. 밤이면 밤마다 자신의 실추(失墜)된 인생을 명상하고 멀지아니한 병원을 아침마다 또 저녁마다 오고가는 것이 어찌 그다지 단조할 것 같았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실로 긴장 그것이었다. 언제나 저는 다리를 이끌고서 홀로 그 길과 그 길을 오르내리는 것은 부근 사람들에게 한 철학적 인상까지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에게 말 한마디나 한 번의 주의를 베풀어 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러한 똑같은 모양으로 가끔 T씨의 집을 방문한다. 그것은 대개는 밤이었다. 그가 넉 달 동안 T씨의 문지방을 넘어 다녔으나 그가 T씨를 설복할 수는 없었다.
「오너라 같이 가자!」
「형님에게 신세 끼치고 싶지 않소」
그들의 회화는 일상에 이렇게 간단하였다. 그리고는 그 뒤에 반드시 길다란 침묵이 끝가지 낑기우고 말고는 하였다. 때로는 그가 눈물까지 흘리어가며 T씨의 소매에 매어달려 보았으나 T씨의 따뜻한 대답은 얻어들을 수는 없었다.
× × ×
늦은 봄의 저녁은 어지러웠다. 인간과 온갖 물상과 그리고 그런 것들 사이에 낑기워 있는 공기까지도 느른한 난무(亂舞)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젖빛 하늘은 달을 중심으로 하여 타기만만(墮氣滿滿) 한 폭죽(爆竹)을 계속하여 방사하고 있으며 마비된 것 같은 별들은 조잡한 회화(會話)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온갖 것들은 한참동안만의 광란에 지쳐서 고요하다. 그러나 대지는 넘치는 자기 열락을 이기지 못하여 몸 비트는 것같이 저음(低音)의 아우성 소리를 그대로 단조로이 헤뜨리고만 있는 것도 같았다. 그 속에 지팡이를 의지하여 T씨의 집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양은 전연히 세계에 존재할 만한 것이 아닌만치 타계에서 꾸어 온 괴존재라도 같았다. 물론 그 자신은 그런 것을 인식할 수 없었으나(또 없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그런 것을 인식할 수 있었던들 그가 첫째 그대로 살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때로 맹렬한 기세로 그의 가슴을 습격하는 치명적 적요는 반드시 그것을 상증한 것이거나 적어도 그런 것에 원인되는 것이었다. 보는 것과 듣는 것과 그리고 생각하는 것에 피곤한 그의 이마 위에는 그의 마음과 살을 한데 쥐어 짜내어 놓은 것과도 같은 무색 투명의 땀이 몇 방울인가 엉키었었다. 그는 보기 싫게 절며 움직이는 다리를 잠시 동안 멈추고 그 땀을 씻어가면서 ‘후―’ 한숨을 쉬었다.
「아― 인생은 극도로 피로하였다」
T씨의 문지방을 그는 그날 밤에 또한 넘어섰다. 그리고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사양하는 듯한 옅은 목소리로
「업이야― 업이야」를 불렀다.
T씨는 아직 일터에서 돌아오지 아니하였었다. 업이도 어디를 나갔는지 보이지 아니하였다. T씨의 아내만이 희미한 불 밑에서 헐어빠진 옷자락을 주무르고 앉아 있었다. 편리하지 아니한 침묵이 어디가지라도 두 사람의 사이에 심연을 지었다. 그는 생각과 생각 끝에 준비하였던 주머니의 돈을 꺼내어 T씨의 아내의 앞에 놓았다.
「자― 그만하면― 그만큼이나 하였으면 나의 정성을 생각해 주실게요― 자―」
몇 번이었던가 이러한 그의 피와 정성을 한데 뭉치어 (그 정성은 오로지 T씨 한 사람에게 향하여 바치는 정성이었다느니보다도 그가 인간 전체에게 눈물로 헌상하는 과연 살신적 정성이었다) T씨들의 앞에 드린 이 돈이 그의 손으로 다시금 쫓기어 돌아온 것이 헤아려서 몇 번이었던가. 그 여러 번 가운데 T씨들이 그것을 받기만이라도 한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러나 참으로 개[犬]와 같이 충실한 그는 이것을 바치기를 잊어버리지는 아니하였다. 일어나는 반감의 힘보다도 자기의 마음이 부족하였음과 수만의 무능하였음을 회오하는 힘이 도리어 더 컸던 것이다.
T씨의 아내는 주물르던 옷자락을 한편에 놓고 핏기 없는 두 팔을 아래로 축 처뜨리었다. 그러나 입은 열릴 것 같기도 하면서 한 마디의 말은 없었다.
「자― 그만하였으면― 자―」
두 사람의 고개는 말없는 사이에 수그러졌다. 그의 눈에서 굵다란 눈물이 더 뚝뚝 떨어졌을 때에 T씨의 아내의 눈에서도 그만 못지 아니한 눈물이 흘렀다. 대기는 여전히 단조로이 울었다.
「자― 그만하면―」
「네―」
그대로 계속되는 침묵이 그들의 주위의 모든 것을 점령하였다.
× × ×
그가 일어서자 T씨가 들어왔다. 그는 나가려던 발길을 멈칫하였다. 형제의 시선은 마주친 채 잠시 동안 계속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T씨의 안면 전체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강한 술의 취기를 인식할 수 있었다.
「T! 내 마음이 그르지 않은 것을 알아다고!」
「하…… 하……」
T씨는 그대로 얼마든지 웃고만 서 있었다. 몸의 땀내와 입의 술내를 맡을 수 없이 퍼뜨리면서!
「T야…… 네가 내 말을 이렇게나 안 들을 것은 무엇이냐? T! 나의……」
「자 이것을 좀 보시오! 형님! 이 팔뚝을!」
「본다면!」
「아직도 내 팔로 내가…… 하…… 굶어 죽을까봐 그리 근심이시오? 하……」
T씨가 팔뚝을 걷어든 채 그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볼 때 그의 고개는 아니 수그러질 수 없었다.
「T! 나는 지금 집으로 도로 가는 길이다―어쨌든 오늘 저녁에라도 좀더 깊이 생각하여 보아라」
아직도 초저녁 거리로 그가 나섰을 때에 그는 T씨의 아직도 선웃음 소리를 그의 뒤에서 들을 수 있었다. 걷는 사이에 그는 무엇인가 이제껏 걸어오던 길에서 어떤 다른 터진 길로 나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감을 느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여 보면 그가 새로 나온 그 터진 길이라는 것도 종래의 길과는 그다지 다름없는 협착하고 괴벽한 길이라는 것 같은 느낌도 느껴졌다.
C라는 간호부에게 대하여 그는 처음부터 적지않게 마음을 이끌리어 왔다. 그가 C간호부에 대하여 소위 호기심이라는 것은 결코 이성적 그 어떤 것이 아닐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C간호부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이상한 기분이 날 적도 있었다.
「도무지 어디서―본 듯해―」
C는 일상 그와 가까이 있었다. 일상에 말이 없어 침울한 기분의 여자였다. 언제나 축축히 젖은 것 같은 눈이 아래로 깔리어서는 무엇인가 깊은 명상에 잠기어 있었다. 그리다가는 묵묵히 잡고만 있던 일거리도 한데로 제쳐놓고는 곱게 살 속으로 분이 스며들어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우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더욱 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울 때,
「어디서 본 듯해― 도무지」
생각날 듯 날 듯하면서도 종시 그에게는 생각나지 아니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생소한 C가 그에게 많은 친밀의 뜻을 보여 주고 있는 것도 같았으나 각별히 간절한 회화 한 번이라도 바꾸어 본 일은 없었다. 늘 그의 앞에서 가장 종순하고 머리 숙이고 일하고 있었다.
첫여름의 낮은 땅 위의 초목들까지도 피곤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종횡으로 불규칙하게 얽히운 길들을 축축한 생기라고는 조곰도 찾아 볼 수는 없고 메마른 먼지가 ‘포플라’ 머리의 흔들릴 적마다 일고 일고 하는 것이 마치 극도로 쇠약한 병자가 병상 위세서 가끔 토하는 습기 없는 입김과도 같이 보였다. 고색창연한 늙은 도시(都市)의 부정연한 건축물 사이에 소밀도(疎密度)로 낑기어 있는 공기까지도 졸음 졸고 있는 것같이 벙―하니 보였다. C는 건너편 책상에 의지하여 무슨 책인지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는 신문조각을 뒤적거리다 급기 졸고 앉아 있었다. 피곤해빠진 인생을 생각할 때 그의 졸음 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좋으십니까? 아― 저도!」
그 목소리도 역시 피곤한 한 인생의 졸음 조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최면술사가 어슴푸렷한 푸른 전등 밑에서 한 사람에게 무슨 한 마디이고를 무한히 시진하도록 ‘리피트’시키고 있는 것과도 같이 꿈속같이 고요하고 어슴푸레하였다.
「선생님! 선생님! 저도 한때는 신이라는 것을 믿었던 일이 있답니다!」
「…………」
「선생님! 신은 있는 것입니까?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있어도 관계치 않는 것입니까?」
「……흥……C씨!…… 소설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여기서도! 그들은 신을 믿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려! 한때의 저와 같이!」
「…………」
또한 졸음 조는 것 같은 침묵이 그 사이에 한참이나 놓여 있었다. ‘앵도지리―뻐찌―’ 어린 장사의 목소리가 자꾸만― 그들의 쉬이려는 귀를 귀찮게 굴고 있었다.
「선생님! 저를 선생님의 곁에다― 제가 있고 싶어하는 때까지 두어 주시지요」
「그것은? 그러면? 그렇다면?」
「선생님! 선생님은 저를 전연 모르셔도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들려는 잠은 일시에 냉수 끼얹은 것같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즉! 안다면!」
「선생님! 팔년!― 어쨌든 그전― 명고옥의 생활을 기억하십니까?」
「명고옥? ― 하―명고옥?」
「선생님! 제가― 죽은 ××의 아우올습니다」
「응! ××? 그 ―아!」
고향을 떠나 두 형매는 오랜동안 유랑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죽음으로만 다가가는 그들을 찾아오는 극도의 곤궁은 과연 그들에게는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한 바른[正] 삶이었다. 차차 움돋기 시작하는 세상에 대한 조소(嘲笑)와 증오는 드디어 그들의 인간성까지도 변형시키어 놓지 않고는 마지 아니하였다. ××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그가 이십이 조곰 넘었을 때 그는 극도의 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남의 대야 한 개를 훔친 일이 있었다. 물론 일순간 후에는 무한히 참회의 눈물을 흘렸으나 한 번 엎질러 놓은 물은 다시 어찌할 수도 없었다. 첫째로 법의 눈을 피한다느니보다도 여지껏의 자기를 깨끗이 장사지낸다는 의미 아래에서 자기의 본명을 버린 다음 지금의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청정된 새로운 생활을 영위(營爲)하여 나아가기 위하여 어린 누이의 C를 이끌고 그의 발길이 돌아 들어선다는 곳이 곧 명고옥―X―그냥 삼년 외국생활을 겪어 보던 그 식당이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이 두 신생에 발길 들이어 놓은 인간들은 곧 가장 친밀한 우인이 되었다.
「참회! 자기가 자기의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참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하면 그는 그의 지은 죄에 대하여 속죄받을 수 있을까?」
그는 ××로부터 일상에 이러한 말을 침울한 얼굴로 하고는 하는 것을 들었다.
「만인의 신은 없다. 그러나 자기의 신은 있다」
그는 늘 이러한 대답을 하여 왔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그 대야를 가지고 그 주인 앞에 엎드리어 울며 사죄한다면 그 주인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신까지도 나를 용서할 것인가」
어느 밤에 ××는 자기가 도적하였었다는 것과 같은 모양이라는 대야를 한 개 사가지고 돌아온 일까지도 있었다. ××의 얼굴에는 취소할 수 없는 어둔 구름이 가득히 끼어 있는 것을 그는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이 상처를 두고두고 앓는 것보다는― X! 내일은 내가 그 주인을 찾아가겠소. 그리고는 그 앞에서 울어 보겠소?」
그는 죽을 힘을 다하여 ××를 말리었다.
「이왕 이처럼 새로운 생활을 하기 시작하여 놓은 이상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를 옛날 그 죄악의 속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 되지 않을까! 참회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순간에 벌써 모든 것으로부터 용서받았어! 지난날을 추억하느니보다는 새 생활을 근심할 것이야!」
××의 친구 중에 A라는 대학생이 있었다. C는 A에게 부탁되어 있었다. A는 아직도 나어린 C였으나 은근히 장래의 자기의 아내 만들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C도 A를 극히 따르고 존경하여 인륜의 깊은 정의를 맺고 있었다.
늦은 가을 하늘이 맑게 개인 어느 날 ××와 A는 엽총(獵銃)을 어깨에―즐거운 수렵의 하루를 어느 깊은 산중에서 같이 보내게 되었다. 운명은 악희라고만은 보아 버릴 수 없는 악희를 감히 시작하였으니 A의 겨냥대인 탄환은 ××의 급처에 명중하고 말았다. 모든 일은 꿈이 아니었다. 기막힌 현실일 뿐이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엄연한 과거였다. A는 며칠의 유치장 생활을 한 다음 머리 깎은 채 어디로인지 종적을 감춘 후 이 세상에서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그의 자취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일시에 두 사람을 잃어버린 C는 A가 우편으로 보내 준 얼마의 돈을 수중에 한 다음 그대로 넓은 벌판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동안 칠년―팔년의 저의 삶에 대하여서는 어떤 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까지 이야기한 C의 눈에는 몇 방울의 눈물이 분먹은 뺨에 가느다란 두 줄의 길을 내어놓고까지 있었다.
「제가 선생님을 뵈옵기는 오라버님을 뵈오러 갔을 때 몇 번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해도 이상히 선생님의 얼굴만은 저의 기억에 가장 인상깊은 그이였나 보아요!」
이곳까지 들은 그는 여지껏 꼼짝할 수도 없이 막히었던 그의 호흡을 비로소 회복한 듯이 길다란 심호흡을 한 번 쉬었다.
「C씨― 그래 그 A씨는 그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하셨소?」
「선생님! 제가 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천하를 헤매이는 것도 A씨를 찾아보겠다는 일념입니다― A씨는 벌써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오늘― 돌아가신 오라버님의 기념처럼 X선생님을 이렇게 만나 모시게 되니― 선생님 아무쪼록 죽은 오라버님을 생각하시고 저를 선생님 곁에 제가 싫증나는 날까지 두어 주세요. 제가 싫증이 났을 때에는 또―선생님, 가엾은 이 새[鳥]를 저 가고 싶은 데로 가게 내버려 두어 두세요. 저는……」
수그러지는 고개에 두 손이 올라가 가리워질 때에
「도무지 어디서 본 듯해!」
그 기억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명고옥에서의 기억은 아니었고 분명히 다른 어느 곳에서의 기억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시 그의 기억에 떠올라오지는 아니하였다.
「선생님! A씨나 오라버님이나― 그들을 위하여서라도 저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신을 믿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의 존재 커녕은 신의 존재의 가능성까지도 의심합니다」
「만인을 위한 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한 사람의 신은 누구나 있습니다」
창밖의 길 먼지 속에서는 구세군 행려도의 복음과 찬미의 소리가 가장 저음으로 들려왔다.
× × ×
사람들은 놀래어 T씨를 둘러쌌다. 그리고 떠들었다. 인사불성된 T씨의 어깨와 팔 사이로는 붉은 선혈이 옷 바깥으로 배어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이 사람 형님이 병원을 한답디다」
「어딘고? 누구 아는 사람 있나」
「내 알아― 어쨌든 메고들 갑시다」
폭양은 대지를 그대로 불살라 버릴 듯이 내리쪼이고 있었다. 목쉬인 지경 노래 와 목도 소리가 무르녹은 크낙한 공사장 한귀퉁이에서는 자그마한 소동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그까짓 것이 다 무엇이냐’는 듯이 도로 전모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 × ×
T씨는 거의 일주야 만에야 의식이 회복되었다. 상처는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으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노라고 몹시 놀래인 것인 듯하였다. T씨의 아내는 곧 달려와서 마음껏 간호하였다. 그러나 업의 자태는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가 T씨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T씨 부부의 무슨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곧 그치어 버린 듯한 표정을 그는 읽을 수 있었다. T씨의 아내의 아래로 숙인 근심스러운 얼굴에는 ‘적빈’ 두 글자가 새긴 듯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T야! 상처는 대단치 않으니 편안히 누워 있어라. 다― 염려는 말고―」
「…………」
그는 자기 방에서 또 무엇인가 깊이 깊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생각하고 있는 자기조차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그의 두뇌는 혼란― 쇠약하였다.
「아―극도로 피곤한 인생이여!」
세상에 바치려는 자기의 ‘목’의 가는 곳―혹 이제는 이 목을 비록 세상이 받아라도 하여 주는 때가 돌아왔나 보다―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험상스러운 손가락 사이에 낑기워 단조로운 곡선으로 피어 올라가고 있는 담배 연기와도 같이 그의 피곤해빠진 뇌수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흑색의 연기가 엉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냐 만인을 위한 신이야 없을망정 자기 하나를 위한 신이 왜― 없겠느냐?」
그의 손은 책상 위의 신문을 집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지면 위의 활자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교회당에 방화! 범인은 진실한 신자!」
그의 가슴에서는 맺히었던 화산이 소리없이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뜨거운 느낌도 느낄 수는 없었다. 다만 무엇인가 변형된 (혹은 사각형의) 태양적갈색의 광선을 방사하며 붕괴되어 가는 역사의 때아닌 여명을 고하는 것을 그는 볼 수 있는 것도 같았다―.
× × ×
T씨는 저녁때 드디어 병원을 나서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T씨의 아내만이 변명 못할 신세의 눈초리를 그에게 보여 주며 쓸쓸히 T씨의 인력거 뒤를 따라갔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여 버렸다.
「T야― T야―」
그는 그 뒤의 말을 이을 수 있는 단어(單語)를 찾아내일 수 없었다. T씨의 얼굴에는 전연 표정이 없었다. 그저 병원을 의식이 회복되자 형의 병원인 줄을 알은 다음에 있을 곳이 아니니까 나간다는 그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기도 하였고 욕하는 이까지도 있었다.
「그 형인지 무엇인지 전 구두쇤가 봅디다」
「이 염천 에 먹고 사는 것은 고사하고 하도 집에서 아무리 한대야 상처가 낫기는 좀 어려울걸!」
그의 귀는 이러한 말들에 귀머거리였다.
「그래 그렇게 내보내면 어떻게 사―노? 굶어죽지」
그 뒤로도 그의 발길이 T씨의 집 문지방을 아니 넘어선 날은 없었다. 또 수입의 삼분의 일을 여전히 T씨의 아내에게 전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는 아니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의사를 대이게 하여(그와 M군은 T씨로부터 거절하였으므로) 치료는 나날이 쾌유의 쪽으로 진척되어 가고 있었다.
수입의 삼분의 일이 무조건으로 T씨의 손으로 돌아가는 데 대하여 M군은 적지 않게 불평을 가졌었다. 그러나 물론 M군이 그러한 불평을 입밖에 내일 리는 없었다. 그가 또한 이러한 것을 눈치 못 채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떤 때에는 이러한 것을 터놓고 M군의 앞에 하소하여 볼까도 한 적까지 있었으나 그러지 못한 채로 세월에게 질질 끌리어가고 있었다.
「다달이 나는 분명히 T의 아내에게 그것을 전하여 주었거늘!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기 시작한 지가 이미 오래거든― 그러면 분명히 T는 그것을 자기 손에 다달이 넣고 써왔을 것을― T의 태도는 너무 과하다― 극하다―」
그는 더 참을 수 없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넘기는 것이 그가 세상에 바치고자 하는 그의 참마음이라는 것을 깊이 자신하고 모든 유지되어 오던 현상을 게을리 아니할 뿐이랴. 한층 더 부지런히 하였다.
× × ×
오늘도 또한 그의 절름발이의 발길은 T씨의 집 문지방을 넘어섰다. T씨의 아내만이 만면한 수색으로 그를 대하여 주었다. 물론 이야기 있을 까닭이 없었다. 비스듬히 열린 어둠컴컴한 방문 속에서는 T씨의 앓는 소리 섞인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좀 어떤가요?」
「차차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의사는?」
「다녀갔습니다.」
「무어라고 그럽니까요?」
「염려할 것 없다고.」
그만하여도 그의 마음은 기뻤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이마에 맺힌 땀을 씻으려 할 때 그의 머리 위 하늘은 시커멓게 흐리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가보다 하는 사이에 주먹 같은 빗방울이 마당의 마른 먼지를 폭발시키기 시작하였다. 서늘한 바람이 한번 휙 불어 스치더니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는 벼란간 완연 전쟁을 일으킨 것 같았다. T씨의 초가지붕에서는 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더러운 액체가 줄줄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치어다보았다. 그저 무한히 검기만 하였다. 다만 가끔 번쩍거리는 번개가 푸른 빛의 절선을 큰 소리와 함께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얼마나 새롭고 감사의 것일 것이었으랴마는― 그에게는 다만 그의 눈과 귀에 감각되는 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새로울 것도 감사할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피곤한 인생― 그는 얼마 동안이나 멀거니 앉아 있다가 정말 인간들이 내어다버린 것 모양으로 앉아 있는 T씨의 앞에 예의 것을 내어밀었다. T씨의 아내는 그저 고개를 숙이었을 뿐이었고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또 거북한 기분 속에서 벗어나려고,
「업이는 어딜 갔나요 요새는 도무지 볼 수가 없으니― 더러 들어앉아서 T 간병도 좀 하고 하지.」
「벌써 나간 지가 닷새― 도무지 말을 할 수도 없고.」
「왜 말을 못하시나요.」
「…………」
우연한 회화의 한 토막이 그에게 적지아니한 의아의 파문을 일으키었다.(속으로 분하였다)
「에― 못된 자식― 애비가 죽어 들어 누웠는데.」
그는 비 오는 속으로 그대로 나섰다. 머리 위에서는 우뢰와 번개가 여전히 끊이지 아니하고 일었다.
「신은 이제 나를 징벌하려 드는 것인가.」
「나는 죄가 없다― 자―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좀 보아라― 나는 죄가 없다!」
그는 자기의 선인임을 나아가 역설하기에는 너무나 약한 인간이었다. 자기의 오직 죄 없음을 죽어가며 변명하는 데 그칠 줄밖에는 몰랐다.
「만인의 신! 나의 신! 아! 무죄!」
모든 것은 걷어잡을 수 없이 뒤죽박죽이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빗속에서 번개와 어울어져서 번쩍이었다.
그것이 벌써 찌는 듯한 여름 어느 날의 일이었었다면 세월은 과연 빠른 것이다. 축 늘어진 나뭇잎에는 윤택이랄 것이 없었다. 영원히 윤택이 나지 못할 투명한 수증기가 세계에 차 있는 것 같았다.
꼬박꼬박 오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그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거운 발길을 옮기어 놓으며 있었다. 서로 만나는 사람은 담화를 하는 것도 같았다. 장사도 지나갔다. 무엇이라고 소리높이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입만 뻥긋거리는 데에 그치는 것같이 소리나지 아니하였다. ‘고요한 담화인가’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벽돌집의 한 덩어리는 구름이 해를 가렸다 터놓을 때마다 흐렸다 개였다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지극히 고요한 이동(移動)이었다. 그의 윗 눈썹은 차차 무게를 늘리는 것 같았다. 얼마 가지 아니하여는 아랫 눈썹 위에 가만히 얹혔다. 공기가 겨우 통할만한 작은 그 틈에서는 참을 수 없는 졸음이― 그것도 소리없이― 새어나왔다.
병원은 호흡(呼吸)을― 불규칙(不規則)한 호흡을 무겁게 계속하고 있었다. 그 불규칙한 호흡은 그의 졸음에 혼화되어 저으기 얼마간 규칙적인 것같이 보였다.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렸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엿가락처럼 늘어진 졸음의 줄을 건드려 볼 수도 없었다. 한번 지나가는 바람과 같았다. 그 뒤에는 또 피곤한 그의 졸음이 그대로 계속되어 갔을 뿐이다.
그가 있는 방 ‘도어’가 이상한 음향을 내이며 가만히 열렸다. 둔(鈍)한 슬리퍼 소리가 둘, 셋, 넷 하고 하나가 끝나기 전에 또 하나가 났다. 저절로 돌아가는 도어의 장식[蝶番]은 도어를 도어틀[額框] 틈 사이에― 무거운 짐을 내려 놓는 모양으로 갖다 낑끼웠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숨소리―혹 전연 침묵이었는지도 모를― 남아 날 듯한 비중(比重) 늘은 공기가 실내(室內)에 속도 더딘 파도를 장난하고 있었다.
일분― 이분― 삼분……
「선생님! 선생님! 주무세요? 선생님.」
C간호부(看護婦)는 몇 번이나 그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그의 어깨에 닿은 C간호부의 손은 젊디 젊은 것이었다. 그는 쾌감 있는 탄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문에 더욱이나 졸음은 두께 두꺼운[厚] 것이 되어갔다.
「선생님! 잠에 취하셨세요? 선생님!」
구루마 바퀴 도는 소리― 매암이 잡으러 몰려 다니는 아이들의 소리―이런 것들은 아직도 그대로 그의 귓바퀴에 붙어 남아 있어서 손으로 몰래 훑으면 우수수 떨어질 것도 같았다. 그렇게 그의 잠! 졸음!은 졸음 그것만으로 단순한 것이었다.
장주(壯周)의 꿈 과 같이―눈을 비비어 보았을 때 머리는 무겁고 무엇인가 어둡기가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 짧은 동안에 지나간 그의 반생의 축도를 그는 졸음 속에서도 피곤한 날개로 한 번 휘거쳐 날아 보았는지도 몰랐다. 꿈을 기억할 수는 없었으나 꿈을 꾸었는지도 혹은 안 꾸었는지도 그것까지도 알 수는 없었다. 그는 어디인가 풍경 없는 세계에 가서 실컷 울다 그 울음이 다하기 전에 깨워진 것만 같은 모―든 그의 사고(思考)의 상태는 무겁고 어두운 것이었다.
「선생님! 잠에 취하셨세요? 퍽 곤하시지요 깨워 드려서― 곤하신데 주무시게 둘걸!」
그는 하품을 한 번 큼직하게 하여 보았다. 머리와 그리고 머리에 딸리지 아니하면 아니될 모든 것은 한 번에 번쩍 가벼워졌다. 동시에 짧은 동안의 기다란 꿈도 한 번에 다― 날아간 것과 같았다. 그리고는 그의 몸은 또다시 어찌할 수도 없는 현실의 한모퉁이로 다시금 돌아온 것 같았다.
「선생님! 그리기에 저는 선생님께 아무런 짓을 하여도 관계치 않지요! 다 용서해 주세요」
「그야!」
「선생님 졸리셔서 단잠이 폭 드신 걸 깨워 놓아―서 그래도 선생님은 저를 용서해 주시지요」
「글쎄!」
「용서하여 주시고 싶지 않으세요? 선생님」
「혹시!」
「선생님 오늘 일은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더위에 괴로우신 선생님을 잠깐만 버려도 그것은 정말 선생님 용서해 주실는지요」
「즉 그렇다면!」
「며칠 동안만 선생님 곁을 떠나 더위의 선생님을 내어버리고 저만 선선한 데를 찾아서 정말 잠깐 며칠 동안만―선생님 혹시 용서해 주실 수가 있을는지요? 정말 며칠 동안만!」
「선선한 데가 있거든 가오. 며칠 동안만이랄 것이 아니라 선선한 것이 싫어질 때까지 있다 오오. 제 발로 걷겠다 용서 여부가 붙겠소? 하하」
그의 얼굴에서는 웃을 때에 움직이는 근육이 확실히 움직이고는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아니 보이던 몇 줄기의 혈관이 뚜렷이 새로 보였다.
「선생님 그렇게 하시는 것은 싫습니다. 선생님 저를 미워하십니까? 저를 미워하시지는 않으시지요. 절더러 어디로 가라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회화에는 나는 관계가 없는 것 같소 하하, 그러나 다 천만의 말씀이오」
「그러시면 못 가게 하시는 걸 제가 졸르다 졸르다 겨우 허락―용서를 받게―이렇게 하셔야 저도 가는 보람도 있고 또 가고 얼른 오고― 선생님도 보내시는― 용서하시는 보람이 계시지 않습니까?」
「허락할 것은 얼른 허락하는 것이 질질 끄으는 것보다 좋지」
「그것은 그렇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나는 늙어서 아마 그런 재미를 모르는 모양이오.」
「선생님은!」
「늙어서! 하하……」
돌아앉은 C간호부는 품 속에서 손바닥보다도 작은 원형의 거울을 끄집어내어 또 무엇으로인지 뺨, 이마를 싹싹 문지르고 있었다. 잊지 않은 동안 같이 있던 그들 사이였건마는 그로서는 실로 처음 보는 일이오 그의 눈에는 한 이상한 광경으로 비치었다.
× × ×
미목수려(眉目秀麗)한 한 청소년이 이리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양편 손에는 여러 개의 물건 상자가 매어 달려 있었다. 흑(黑)과 백(白)으로만 장속 한 그 청소년의 몸에서는 거의 광채를 발하다시피 눈부시었다. 들창에 매어달려 바깥만을 내어다보고 있던 C간호부는 그때에 그의 방에서 나갔다. 거의 의식(意識)을 잃은 그는 C간호부의 풍부한 발이 층계를 내려가는 여러 음절의 소리 가운데의 몇 토막을 들었을 뿐이었다. 아래층에서는 가벼운―그러나 퍽 명랑한 웃음소리가 알아듣지 못할 만한 정도로 흐려진 유쾌한 그러나 퍽 짤막한 담화 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쿵― 쿵― 쿵쿵 분명히 네 개의 발이 층계를 올라오고 있었다.
「큰아버지!」
「선생님!」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이 두 청춘(靑春)을 바라볼 때에 그의 눈에서는 번개가 났다. 혹은 어린 양들에게 백년의 가약을 손수 맺게 하여 주는 거룩한 목사(牧師)와도 같았다. 그의 가슴에서는 형상 없는 물질이 흔들렸다. 그 위에 뜬 조고만 사색(思索)의 배를 파선시키려는 듯이
「아, 내가 너를 본 지 몇 달이 되는지?」
고개를 숙인 업의 입술은 떨어질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업아 네가 입은 옷(依服)은 감도 좋거니와 꼭맞는다」
그의 시선은 푸른 빛을 내이며 업의 입상(立像)을 오르내렸다.
「업아 네가 가지고 온 이 상자 속에 든 것은 무슨 좋은 물건이냐 혹시 그 가운데에는 나에게 줄 선물도 섞여 있는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의 시선은 다시금 판자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여러 개의 상자 위를 하나 둘 거쳐 가며 산보하였다.
「업아 아버지의 상처는 좀 나은가? 아니 너 최근에 너의 집을 들른 일이 혹 있는가?」
「…………」
「내가 보는 대로 말하고 보면 아마 지금 여행의 길을 떠나는 모양이지 아마」
「…………」
방안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들창이 새어 들어오는 훈훈한 바람도 다 이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바깥 온도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C씨! C씨는 언제부터 나의 업이와 친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자― 두 사람에게 내가 물을 말은 이렇게 두 사람이 내 앞에 함께 나타난 뜻은 무슨 뜻인지? 이야기할 것이 있는지 청할 것이 있는지 혹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이 있는지―」
C간호부는 고개를 숙인 채 좌우를 두어번 둘러 보더니 무슨 생각이 급히 떠올랐는지 황황히 그 방을 나갔다. 남아 있는 업 한 사람만이 교의에 걸터앉은 그 앞에 깎아 세운 장승과 같이 부동자세(不動姿勢)로 서 있었다. 그는 교의에서 몸을 일으키며 담배를 한 개 피워 물었다. 연기의 빛은 신선한 청색이었다.
「업아― 이리 와서 앉아라. 큰 아버지는 결코 너에게 악의를 가지지 아니하였다. 나의 묻는 말을 속이지 말고 대답하여라」
「네가 돈이 어디서 생기니? 네가 버는 것은 아니겠지」
「어머님이 주십니다」
「아범에게는 얻어 본 일이 없니?」
「없습니다」
「그만하면 알았다」
업은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한번 치어다보았다.
「C양은 어떻게 언제부터 알았니?」
「우연히 알았습니다. 사귀인 지는 아직 한 달도 못 됩니다.」
「저것들은 다 무엇이냐」
「해수욕에 쓰는 것입니다. 옷― 그런 것」
「해수욕― 그러면 해수욕을 가는 데 하하…… 작별을 하러 온 것이로군. 물론 C양과 둘이서?」
「네. 제 생각은 큰 아버지를 뵈옵고 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마는 C간호부의 말이 우 리 둘이서 그 앞에 나가 간곡(懇曲)히 용서를 빌면 반드시 용서하여 주시리라고― 그 말을 제가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아니 올 수 없었습니다. 또 C간호부는 큰아버지께서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도 반드시 이해하여 주시리라는 말도 하였습니다마는 물론 그 말도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잘 알았어. 나는― 그러면 나로서는 혹 용서하여 줄 점도 있겠고 혹 용서하지 아니할 점도 있을 테니까」
「그럼 무엇을 용서하시고 무엇은 용서하지 아니하실 터인지요?」
「그것은 보면 알 것이 아닌가」
그의 말끝에는 가벼운 경련이 같이 따랐다. 책상 위에 끄집어내어 쌓아 놓은 해수욕 도구(道具)는 꽤 많은 것이었다. 그는 그 자그마한 산(山) 위에 ‘알콜’의 소낙비를 내리었다. 성냥 끝에서 옮겨 붙은 불은 검붉은 화염(火焰)을 발하며 그의 방 천장을 금시로 시꺼멓게 그슬려 놓았다. 소리없이 타오르는 직물류, 고무류의 그 자그마한 산은 보는 동안에 무너져가고 무너져가고 하였다. 그 광경은 마치 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동작이 있고 음향이 없는 반환영(半幻影)과 같았다. 벽 위의 시계가 가만히 새로 한시를 쳤다. 업의 얼굴은 초일초 분일분 새파랗게 질리어 갔다.
입술은 파래지며 심히 덜었다. 동구(瞳球)를 싸고 있는 눈윗두덩도 떨었다. 눈의 흰자위는 빛깔을 잃으며 회갈색으로 변하고 검은 자위는 더욱 더욱 칠흑(漆黑)으로 변하며 전광(電光) 같은 윤택을 방사하였다. 그러나 동상(銅像) 같은 업의 부동자세는 조곰도 변형되려고 하지 안하였다.
‘푸지직’ 소리를 남기고 불은 꺼졌다. 책상을 덮어 쌌던 크로드 도 책상의 봐니스 도 나타나고 눌었다. 그 위에 그 해수욕 도구들의 다 타고 남은 몇 줌의 검은 재가 엉기어 있었다. 꼭 닫은 도어가 바깥으로부터 열렸다.
「선생님!」
오직 한마디― 잠시 나붓거리는 그 입술이 달려있는 C간호부의 얼굴은 심야의 정령(精靈)의 그것과도 같이 창백(蒼白)하고도 가련(可憐)하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러한 C간호부의 서 있는 등 뒤에 부동명왕의 얼굴과 같이 흑연 화염 속에 인쇄되어 있는 듯한 T씨의 그것도 그는 볼 수 있었다. 일순 후에는 그의 얼굴도 창백화 하지 아니할 수 없었고 그의 입술도 조곰씩 조곰씩 그리하여 커다랗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흐르는 세월의 조락(凋落)의 가을을 이 땅 위에 방문시키었을 때는 그가 나뭇잎 느껴 우는 수림을 산보하고 업의 병세(病勢)를 T씨의 대문간에 물어 버릇하기 시작하였은지도 이미 오래인 때였다.
업은 절대로 그를 만나지 아니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업의 병세를 부득이 T씨의 집 대문간에서 묻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다. 오직 T씨의 아내가 근심과 친절을 함께 하여 그를 맞아 주었다.
「좀 어떻습니까? 그 떠는 증세가 조곰도 낫지 않습니까?」
「그거 마찬가지예요. 어떡하면 좋을지요」
「무엇 먹고 싶다는 것 가지고 싶다는 것은 없습니까? 하고 싶다는 것은 또 없습디까?」
「해수욕복을 사주랍니다. 또 무슨 아루꼬(알콜?)―」
「네네, 알았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 궁리를 가슴 가운데에 왕래시키려 그는 병원으로 돌아왔다. 필요 이외의 회화를 바꾸어 본 일이 없는 사이쯤 된 M군에게 그는 간곡한 어조로 말을 붙이어 보았다.
「M군! 도무지 모를 일이야. 모든 죄가 결국은 내게 있다는 것이 아닐까? M군 자네가 아무쪼록 좀 힘을 써 주게」
「힘이야 쓰고 싶지마는 자네도 마찬가지로 나도 만나지 않겠다는 환자의 고집을 어떻게 하느냐는 말일세. 청진기 한 번이라도 대어 보아야 성의 무성의 여부가 생기지 않겠나」
「내 생각 같아서는 그 업에게는 청진기의 필요도 없을 것 같건만……」
「그것은 자네가 밤낮 하는 소리 마찬가지 소리」
그에게는 이 이상 더 말을 계속시킬 용기조차도 힘조차도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편지―발신인 주소도 성명도 그 겉봉에는 씌어 있지마는―가 있었다.
「선생님! 가을바람이 부니 인생이라는 더욱이나 어두운 것이라는 것이 생각됩니다.
표연히 야속한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선생님의 곁을 떠난 후 벌써 철 하나이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흐르는 광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속절없이 찾고만 있을까요.
그동안 한 장의 글월을 올리지 않다가 이제 새삼스러이 이 펜을 날려 보는 저의 심사를 혹은 선생님은 어찌나 생각하실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즉 오해(誤解) 속에서 오해로만 살아가는 것인가 합니다. 선생님이 우리들을 이해하셨기에 우리들은 선생님의 거룩한 사랑까지도 오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업씨를―그리고 또 표연히 선생님의 곁을 떠난 저도 선생님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이 그다지 짧지 않은 글도 물론 전부가 다 오해 투성이겠지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제가 이 글을 드리는 태도나 또는 그 글의 내용을 오해하실 것도 물론이겠지요. 아― 세상은 어디까지나 오해의 갈구리로 연쇄되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저의 오라버님의 최후도 또 그이(대학생―C간호부의 내면)도 그때의 일도 그후의 일도 모든 것이 다 오해 때문에―가 아니었습니까? 제가 저의 신세를 이 모양으로 만든 것도, 이처럼 세상을 집삼아 표랑(漂浪)의 삶을 영위(營爲)하게 된 것도 전부 다― 그 기인(起因)은 오해―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의 무지로부터 출발된 오해 때문이 아니었으면 무엇이었던가 합니다. (어폐를 관대히 보아 주세요) (中略)
선생님이 저에게 끼쳐 주신 하해(河海) 같은 은혜(恩惠)에 치하의 말씀이 어찌 이에서 다하겠습니까마는 덧없는 붓끝이 오직 선생님의 고명(高名)과 종이의 백색을 더럽힐 따름입니다.
선생님, 이제 저는 과거에 제가 가졌던 모든 오해를 오해 그대로 적어 올려 보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도 그 오해를 그 오해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까닭이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업씨와 저 두 사람 사이를 과연 어떠한 색채로 관찰하시었는지요(어폐를 아무쪼록 관대히 보아 주십시요) 아닌 것이 아니라 저는 업씨를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또 업씨도 저를 좀더 무겁게 사랑하여 주었습니다. 이제 생각하여 보면― 업씨의 나이―이제 스물 한살― 저 스물 여섯― 과연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이 철저한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연령의 상태의 아래에서는 그 사랑이란 그래도 좀더 좀더 빛다른 그 무엇이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만남― 무엇이라 할까― 하여간 우연 중에도 너무 우연이겠습니다. 그것은 말씀올리기 꺼립니다. 혹시 병상에 누워 계신 업씨의 신상에 어떠한 이상이라도 있지나 아니할까 하여 다만 저이들 두 사람의 사랑의 내용을 불구자적(不具者的) 병적이면 불구자적 병적 그대로라도 사뢰어 볼까 합니다.
(아― 끝없는 오해 아직도― 아직도) 선생님! 제가 업씨를 사랑한 이유는 업씨의 얼굴― 면영(面影)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 그이의 면영과 흡사하였다는― 다만 그 한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이는― 지금쯤은 퍽 늙었겠지요! 혹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이의 면영은 그이와 제가 갈리지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그 순간의 그것 채로 신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幸福)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적어도 기쁨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나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이나 인간의 아름다움의 극치(極致)이겠습니다.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저의 업씨에게 대한 사랑도 과연 인간의 아름다움의 하나로 칠 수 있을까를 그러나 저는 저로도 과연 저의 업씨에게 대한 사랑에는 너무나 많은 아욕(我慾)이 품겨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곧― 저는 저의 업씨에게 대한 사랑을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아뢰올 것은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입니다. 경조부박 한 생활 부피 없는 생활을 하여 오던 업씨는 저에게서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의 내음 나는 역량(力量) 있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합니다. 업씨의 말을 들으면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은 적극적으로 업씨가 저에게 제공하는 그러한 사랑이라느니보다도 저의 사랑이 깃이 있다면 업씨는 업씨 자신의 저에게 대한 사랑을 신선한대로 그대로 소지(所持)한 채 그 깃 밑으로 기어들고 싶은 그러한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하여간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도 우리가 항상 볼 수 있는 시정간(市井間)의 사랑보다는 무엇인가 좀더 깊이가 있었던 듯하며 성스러운 것이었던가 합니다. 여러 가지 점으로 주저하던 저는 업씨의 저에게 대한 사랑의 피로 말미암아 무던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어쨌든 이제는 원인을 고구(考究)할 것 없이 서로 사랑하여 자유로 사랑하여 가기로 하였습니다. 이만큼 저희들은 삽시간 동안에 눈멀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의 사랑꼴은 생리적으로도 한 불구자적 현상에 속하겠지요. 더욱, 사회적으로는 한 가련한 탈선이겠지요. 저희들도 이것만은 어렴풋이나마 느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의 심각한 추억의 인간과 면영이 같은 사람에게 적어도 호의를 갖는 것은 사람의 본능(本能)의 하나가 아닐까요. 생리학(生理學)에나 혹은 심리학에나 그런 것이 어디 없습니까. 또 사회적(社會的)으로도 영(靈과 靈)끼리만이 충돌하여 발생되는 신성(神聖)한 사랑의 결합체(結合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그다지 해괴한 사건에 속할까요! (中略)
선생님! 해수욕행도 저의 제의(提議)였습니다. 해수욕 도구도 제 돈으로 산 것입니다. 업씨는 헤엄도 칠 줄 모른다 합니다. 또 물을 그다지 즐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말이면 어디라도 가고 싶다 하였습니다. 그것을 한 계집의 간사한 유혹이라느니보다도 모성(母性)의 갸륵한 애무(愛撫)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합니다.
선생님! 너무나 가혹하시지나 아니하셨던가요. 그것을 왜 살라버리셨습니까? 업씨에게도 기쁨이 있었습니다. 저도 모성애(母性愛)와 같은 사랑을 업씨에게 베푸는 것이 또 사랑을 달게 받아주는 것이 무한한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선생님은 검붉은 화염 속에 불살라 버리시었습니다. 그 이상한 악취를 발하며 타오르는 불길은 오직 그 책상 우에 목면과 고무만을 태운 데 그친 줄 아십니까? ‘도어’ 뒤에서 있던 저의 심장도(확실히) 또 그리고 업씨의 그것도, 업씨의 아버님의 그것도 다 살라버린 것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등 뒤에 사람이 있는지 알 길이 있었겠습니까. 하물며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 길은 더욱이나 있었겠습니까. 얼마 후에 참으로 긴 동안의 얼마 후에 그이가 업씨 아버님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저는 업씨의 아버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에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의외이셨겠지요. 업씨의 아버님이 그곳에 와 계셨다는 데 대하여는…… 그러나 저는 업씨의 아버님이 그곳에 와 계신 데 대하여서 업씨의 아버님 자신으로부터 그 전말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아뢰일 만한 것은 못됩니다. (中略)
병석에서도 늘 해수욕복을 원한다는 소식을 저는 업씨의 친구되는 이들께서 얻어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도 물론 잘 아시겠지요. 선생님! 감상이 어떠십니까? 무엇을 의미함이었든지 저는 업씨의 원을 풀어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 나머지 저의 월급이 몇 푼 있을 줄 생각합니다. 좌기 주소로 송부하여 주십시요.
오해 속에서 나온 오해의 글인 만큼 저는 당당히 닥쳐오는 오해를 인수(引受)할만한 준비를 갖추어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길다란 글이 혹시 선생님께 폐를 끼치거나 아니하였나 합니다. 관대하신 용서와 선생님의 건강을 빌며
××통 ×정목 ○○ C변명 △△올」 × × ×
그는 어디까지라도 자신을 비판하여 보았고 반성하여 보았다.
그는 다달이 잊지 않고 적지 않은 돈을 T씨의 아내 손에 쥐어 주었다. T씨의 아내는 그것을 차마 T씨의 앞에 내놓지 못하였으리라. T씨의 아내는 그것을 업에게 그대로 내어주었으리라. 업은 그것을 가지고 경조부박한 도락(道樂)을 탐하였으리라. 우연히 간호부를 만나 해수욕행까지 결정하였으리라. 애비(T씨가)가 다쳐서 드러누웠건마는 집에는 한 번도 들르지 않는 자식, 그 돈을― 그 피가 나는 돈을 그대로 철없고 방탕한 자식에게 내어주는 어머니―그는 이런 것들이 미웠다. C간호부만 하더라도 반드시 유혹의 팔길을 업의 위에 내리밀었을 것이다. 그는 이것이 괘씸하였다.
그러나 한 장 C간호부의 그 편지는 모든 그의 추측과 단안을 전복시키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었다.
「역시 모―든 죄는 나에게 있다」
그의 속주머니에는 적지아니한 돈이 들어 있었다. C간호부는 삼층 한귀퉁이 조고만 다다미방에 누워 있었다. 그 품에 전에 볼 수 없던 젖먹이 간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C양! 과거는 어찌되었든 지금에 이것은 도무지 어찌된 일이오?」
「선생님! 아무것도 저는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일생은 이렇게 죄악만으로 얽어서 놓지 아니하면 유지가 안되는 것입니까?」
「C양! 나는 그 말에 대답할 아무 말도 가지지 못하오. 오해와 용서! 그리기에 인류사회(人類社會)는 그다지 큰 풍파가 없이 지지되어 가지 않소?」
「선생님! 저는 지금 아무것도 후회치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후회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니까요. 선생님! 이것을 부탁합니다.」
C간호부의 눈에서는 맑은 눈물방울이 흘렀다. 그는 C간호부의 내어미는 젖먹이를 의식없이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얼고 식어빠진 그의 손에 전하여 왔다. 그때에 그는 누워 있는 C간호부의 초췌한 얼굴에서 십여 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간 아내의 면영을 발견하였다. 그는 기쁨, 슬픔 교착된 무한한 애착을 느꼈다. 그리고 C간호부의 그 편지 가운데의 어느 구절을 생각내어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C간호부의 일들에 조건 없는 용서―라느니보다도 호의를 붙였다.
「선생님! 오늘 이곳을 떠나가시거든 다시는 저를 찾지는 말아 주셔요. 이것은 제가 낳은 것이라 생각하셔도 좋고, 안 낳은 것이라 생각하셔도 좋고, 아무쪼록 선생님 이것을 부탁합니다」
하려던 말도 시키려던 계획도 모두 허사로 다만 그는 그의 포켓 속에 들었던 돈을 C간호부 머리 밑에 놓고는 뜻도 아니한 선물을 품에 안은 채 첫눈 부실거리는 거리를 나섰다.
「사람이란 그 추억의 사람과 같은 면영의 사람에게서 어떤 연연한 정서를 느끼는 것인가」
이런 것을 생각하여도 보았다.
× × ×
업의 병세는 겨울에 들어서 오히려 점점 더하여 가는 것이었다. 전신은 거의 뼈만 남고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눈과 입 이 둘뿐이었다. 그 방 웃목에는 철 아닌 해수욕 도구로 차 있었다. 업은 앉아서나 누워서나 종일토록 눈이 빠지게 그것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 말쑥한 새 기와집 안방에 가 누워서 앓았으면 병이 나을 것 같애― 아버지 기와집 하나 삽시다. 말쑥하고 정결한……」
업의 말이었다는 이 말이 그의 귀에 듣자 어찌 며칠이라는 날짜가 갈 수 있으랴. 즉시 업의 유원은 풀릴 수 있었다. 새 집에 간 지 이틀, 업은 못 먹던 밥도 먹었다. 집안 사람들과 그는 기뻐하였다. 그저 한없이…
그러나 이미 때는 돌아왔다. 사흘되던 날 아침 (그 아침은 몹시 추운 아침이었다) 업은 해수욕을 가겠다는 출발이었다. 새 옷을 갈아 입고 방문을 죄다 열어 놓고 방 웃목에 쌓여 있는 해수욕 도구를 모두 다 마당으로 끄집어 내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위에 적지 않은 해수욕 도구의 산에 알콜을 들어부으라는 업의 명령이었다.
「큰아버지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겠으니 좀 오시라고 그래 주시요. 어서 어서 곧― 지금 곧」
그와 업의 시선이 오래― 참으로 오래간만에 서로 마주치었을 때 쌍방에서 다 창백색의 인광을 발사하는 것 같았다.
「불! 인제 게다가 불을 지르시오」
몽몽한 흑연(黑煙)이 둔한 음향을 반주시키며 차고 건조한 천공을 향하여 올라갔다. 그것은 한 괴기(怪氣)를 띄운 그다지 성(聖)스럽지 않은 광경이었다.
가련한 백부의 그를 입회시킨 다음 업은 골수에 사무친 복수를 수행하였다(이것은 과연 인세의 일이 아닐까? 작자의 한 상상의 유희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뜰 가운데에 타고 남아 있는 재부스러기와 조곰도 못함이 없을 때까지 그의 주름살 잡힌 심장도 아주 새까맣도록 다 탔다.
그날 저녁때 업은 드디어 운명(殞命)하였다. 동시에 그의 신경의 전부는 다 죽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아득하고 캄캄한 무한대의 태허(太虛) 가 있을 뿐이었다.
(여― 요에헤―요) 그리고 종소리 상두군의 입 고운 소리가 차고 높은 하늘에 울렸다.
그의 발은 마치 공중에 떠서 옮겨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타고 전신의 신경이 운전을 정지하고― 그의 그 힘없는 발은 아름다운 생기에 충만한 지구(地球) 표면에 부착될 만한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서는 그 몽몽 한 흑연― 업의 새 집 마당에서 피어오르던 그 몽몽한 흑연의 일상이 언제까지라도 아른거려 사라지려고는 하지 않았다.
뼈만 남은 가로수(街路樹)도 넘어가고 나머지 빈약한 석양(夕陽)에 비추어가며 기운 시진해 하는 건축물들도 공중을 횡단하는 헐벗은 참새의 떼들도― 아니 가장 창창(蒼蒼)하여야만 할 대공(大空) 그것까지도― 다―한 가지 흑색으로밖에는 그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의 호흡하고 있는 산소(酸素)와 탄산와사의 몇 ‘리틀’도 그의 모세관(毛細管)을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의 그 어느 한 방울까지도 다 흑색 그 몽몽한 흑연과 조곰도 다름이 없는―이 아니라고는 그에게 느끼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아니― 이것이 나일까― 이것이 무엇일까. 나일까, 나일 수가 있을까」
가로등 건축물 자동차 피곤한 마차와 짐구루마― 하나도 그의 눈에 이상치 아니한 것은 없었다.
「저것들은 다 무슨 맛에 저짓들이람!」
그러나 그의 본기를 상실치는 아니한 일신의 제 기관들은 그로 하여금 다시 그의 집에 돌아가게 하지 않고는 두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의 집 문을 밀어 열려 하여 보았으나 팔뚝의 관절은 굳었는지 조곰도 들리지는 않았다. 소리를 질러 집안 사람들을 불러보려 하였으나 성대는 진동관성(振動慣性)을 망각(忘却)하였는지 음성(音聲)은 나오지 아니하였다.
「창조의 신(創造神)은 나로부터 그 조종(操縱)의 실줄[絲線]을 이미 거두었는가?」
눈썹 밑에는 굵다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그것을 감각할 수 없었다. 그위 등 뒤에에 웬 사람인지 외투에 내려앉은 눈을 터느라고 옷자락을 흔들고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응? 누구― 누구요」
「왜 그렇게 놀라나? 날세 나야」
M군이었다. 병원에서 이제 돌아오는 길이었다.
「업이가 갔어」
「응? 기어코?」
두 사람은 이 이상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둠침침한 그의 방 안에는 몇 권의 책이 시체(屍體)와 같이 이곳 저곳에 조리 없이 산재하여 있을 뿐이었다.
위풍이 반자 를 울리며 휙 스쳤다.
「으아―」
「하하 잠이 깨였구나. 잘 잤느냐, 아아 울지 마라. 울 까닭은 없지 않느냐. 젖 달라고, ―아이 ‘고무’ 젖꼭지가 어디 갔을까. 우유(牛乳)를 뎁히어 놓았는지 웬― 아아아 울지 마라, 울지 말아야 착한 아이이지. ―아― 이런이런!」
가슴에 끓어오르는 무량한 감개를 그는 억제할 수 없었다. 그저 쏟아져 흐르기만 하는 그 뜨거운 눈물을 그 어린것의 뺨에 부비며 씻었다. 그리고 힘껏힘껏 그것을 껴안았다. 어린것은 젖을 얻어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염치 없는 울음을 그치지는 않았다.
× × ×
T씨는 그대로 그 옆에 쓰러졌다. 구덩이는 벌써 반이나 팠다. 그때 T씨는 그 옆에 쓰러졌다.
언 땅에 깨쳐 가며 파는 곡괭이 소리― 이리 뒤치적 저리 뒤치적 나가 떨어지는 얼어 굳은 흙덩어리 다시는 모두어질 길 없는 만가(輓歌)의 토막과도 같이 처량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달려들어 T씨를 일으키었다. T씨의 콧구멍과 입으로는 속도 빠른 허―연 입김이 드나들었다. 그 옆에 서 있는 그의 서 있는 그의 모양― 그 부동자세는 이 북망산 넓은 언덕에 헤어져 있는 수많은 묘표나 그렇지 아니하면 까막까치 앉아 날개 쉬이는 헐벗은 마른 나무의 그 모양과도 같았다.
관은 내려갔다. T씨와 그 아내와 그리고 그의 울음은 이때 일시에 폭발하였다. 북망산 석양천에는 곡직착종(曲直錯綜) 된 곡성이 처량히 떠올랐다. 업의 시체를 이 모양으로 갖다 파묻고 터덜터덜 가던 그 길을 돌아 들어오는 그들의 모양은 창조주에게 가장 저주받은 것과도 같았고 도주하던 ‘카인’의 일행들의 모양과도 같았다.
× × ×
그는 잊지 아니하고 T씨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업이 죽은 뒤의 T씨의 집에는 한바람이 하나 불고 있었다. 또 그러나 그가 T씨의 집을 찾기는 결코 잊지는 않았다.
T씨는 무엇인지 깊은 명상에 빠져서는 누워 있었다. T씨는 일터에도 나가지 아니하였다. 다만 누워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T!……」
「………」
그는 T씨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T씨는 대답이 없었다. 또 그러나 그에게도 무슨 할말이 있어서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쓸쓸히 그대로 돌아오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문이나마 그는 결코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 × ×
북부에는 하룻밤에 두 곳―거의 동시에 큰 화재가 있었다. 북풍은 집집의 풍령(風鈴)을 못견디게 흔드는 어느날 밤은 이 뜻하지 아니한 두 곳의 화재로 말미암아 일면의 불바다로 화하고 말았다. 바람 차게 불고 추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원근에서 몰려 들어와서 북부 시가의 모든 길들은 송곳 한 개를 들어 세울 틈도 없을만치 악마구리 끓듯 야단이었다. 경성의 소방대는 비상의 경적을 난타하며 총동원으로 두곳에 나누어 모여 들었다. 그러나 충천의 화세는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더하여 가기만 하는 것이었다. 소방수들은 필사의 용기를 다하여 진화에 노력하였으나 연소의 구역은 각각으로 넓어만 가고 있을 뿐이었다. 기와와 벽돌은 튀고 무너지고 나무는 뜬숯 으로 되고 우지직 소리는 끊일 사이 없이 나고 기둥과 들보를 잃은 집들은 착착으로 무너지고 한 채의 집이 무너질 적마다 불똥은 천길 만길 튀어오르고 완연히 인간세계에 현출된 활화지옥(活火地獄)이었다. 잎도 붙지 아니한 수목들은 헐벗은 채로 그대로 다 타죽었다.
불길이 삽시간에 자기 집으로 옮겨 붙자 세간기명은 꺼낼 사이도 없이 행길로 뛰어나온 주민들은 어디로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 방황하였다.
「수길아!」
「복동아!」
「금순아!」
다 각기 자기 자식을 찾았다. 그 무리들 가운데에는
「업아! 업아!」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며 쏘다니는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신의 조리를 상실한 그들 무리는 그 소리 하나쯤은 귓등에 담을 여지조차도 없었다. 두 구역을 전멸시킨 다음 이튿날 새벽에 맹렬하던 그 불도 진화되었다. 게다가 고닭이 울던 이 두 동리는 검은 재의 벌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같이 큰 일에 이르기까지 한 그 불의 출화 원인에 대하여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그날 밤에는 북풍이 심하였던 것 수개의 소화전은 얼어붙어서 물이 나오지 아니하였던 까닭에 많은 소방수의 필사적 노력도 허사로 수수방관치 아니하면 아니되었던 곳이 있었던 것 등을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 × ×
M군과 그 가족은 인명이야 무사하였지마는 M군은 세간기명을 구하러 드나들다가 다리를 다쳤다.
이재민들은 가까운 곳 어느 학교 교사에 수용되었다. M군과 그 가족도 그 곳에 수용되었다.
M군이 병들어 누운 옆에는 거의 전신이 허물이 벗다시피 된 그가 말뚝 모양으로 서 있었다. 초췌한 그들의 안모에는 인세의 괴로운 물질이 주름살져 있었다.
그가 그 맹화 가운데에서 이리저리 날뛰었을 때,
「무엇을 찾으러― 무슨 목적으로 내가 이러나」
물론 자기도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첨편에 불이 붙어도 오히려 부동자세로 저립하고 있는 전신주(電信柱)와 같이 그는 멍멍히 서 있었다. 그때에 그의 머리에 벽력같이 떠오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얼마 전에 그간 간호부를 마지막 찾았을 때 C간호부의
「이것을 잘 부탁합니다」
하던 그것이었다. 그는 그대로 멱진적으로 맹렬히 붙어오르는 화염 속을 헤치고 뛰어들어갔다. 그리하여 그 젖먹이를 가슴에 꽉 안은 채 나왔다. 어린것은 아직 젖이 먹고 싶지는 않았던지 잠은 깨어 있었으나 울지는 않았다. 도리혀 그의 가슴에 이상히 힘차게 안기었을 제 놀라서 울었다.
「그렇지. 네 눈에는 이 불길이 이상하게 보이겠지」
그러나 그의 옷은 눌었다. 그의 얼굴과 팔뚝 손을 데었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것을 느낄 사이도 없었고 신경도 없었다. 타오르는 M군과 그의 집, 병원 그것들에 대하여는 조고만 애착도 없었다. 차라리 그에게는
「벌써 타 버렸어야 옳을 것이 여지껏 남아 있었지」
이렇게 그의 가슴은 오래오래 묵은 병을 떠나 버리는 것과 같이 그 불길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다만 한 가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를 건진 것과 같은 쾌감을 그 젖먹이에게서 맛볼 수 있었다.
한 사람 중년 노동자가 자수(自首)하였다. 대화재에 쌓여 있던 중첩한 의문은 일시에 소멸되었다.
「희유의 방화범!」
신문의 이 기사를 읽고 앉아 잇는 그의 가슴 가운데에는 그 대화에 못지 아니한 불길이 별안간 타오르고 있었다.
「T야! T야!」
T씨는 그날 밤 M군과 그의 집, 병원 두 곳에 그 길로 불을 놓았다. 타오르지 않을까를 염려하여 병원에서 많은 ‘알콜’을 훔쳐내어 부었다. 불을 그어대인 다음 그 길로 자수하려 하였으나 타오르는 불길이 너무도 재미있는 데 취하였었고 또 분주 수선한 그때에 경찰에 자수를 한대야 신통할 것이 조곰도 없을 것 같아서 그 이튿날 하기로 하였었다.
날이 새자 T씨는 곧 불터를 보러 갔다. 그것은 T씨 마음 가운데 상상한 이상 넓고 큰 것이었다. T씨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하루 이틀―T씨는 차츰차츰 평범한 인간의 궤도로 복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대로 언제까지라도 끌고 갈 수는 없었다.
「희유의 방화범!」
경찰에 나타난 T씨에게 세상은 의외에도 이러한 대명찰을 수여(授與)하였다.
× × ×
(모든 사건이라는 이름 붙을 만한 것들은 다― 끝났다. 오직 이제 남은 것은 ‘그’라는 인간의 갈 길을 그리하여 갈 곳을 선택하며 지정하여 주는 일뿐이다. ‘그’라는 한 인간은 이제 인간의 인간에서 넘어야만 할 고개의 최후의 첨편에 저립하고 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인간의 한 단편으로서의 종식(終熄)을 위하여 어느 길이고 걷지 아니하면 아니될 단말마(斷末魔)다.
작가는 ‘그’로 하여금 인간세계에서 구원받게 하여 보기 위하여 있는 대로 기회와 사건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구조되지 않았다. 작자는 영혼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작자는 아마 누구보다도 영혼을 믿지 아니하는 자에 속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 영혼이라는 것을 부여(賦與)치 아니하고는― 즉 다시 하면 그를 구하는 구하는 최후에 남은 한 방책은 오직 그에게 영혼(靈魂)이라는 것을 부여하는 것 하나가 남았다.)
황막한 벌판에는 흰눈이 일면으로 덮이어 있었다. 곳곳에 떨면서 있는 왜소한 마른 나무는 대지의 동면을 수호(守護)하는 가련한 패잔병(敗殘兵)과도 같았다. 그 위를 하늘은 쉬일 사이도 없이 함박눈을 떨구고 있었다. 소와 말은 오직 외양간에서 울었다. 사람은 방 안으로 이렇게 세계를 축소시키고 있었다.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걷기를 그친 황막한 이 벌판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벌판 가운데 어디로부터 어디까지나 늘어서 있는지 전신주의 전신은 찬바람에 못견디겠다는 듯이 ‘욍’ 소리를 지르며 이 나라의 이 끝에서 이 나라의 저 끝까지라도 방 안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과 사람의 음신 을 전하고 있다.
「기쁜 일도 있겠지. 그러나 또 생각하여 보면 몹시 급한 일도 있으렷다 아무런 기쁜 일도 아무런 쓰라린 일도 다― 통과시키어 전할 수 있는 전신주에 늘어져 있는 전신이야말로 나의 혈관이나 모세관과도 같다고나 할까?」
까마귀는 날았다. 두어조각 남아 있는 마른 잎은 두서너 번 조고만 재주를 넘으며 떨어졌다.
「깍! 깍!」
「왜 우느냐?」
그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어린것은 어느 사이엔지 그 품안에서 잠이 들었었다.
「배가 고프지나 않은지 웬!」
도홍색 그 조고마한 일면 피부에는 두어 송이 눈이 떨어져서는 하잘것 없이 녹아 버렸다. 그러나 어린 것은 잠을 깨이려고도 차갑다고도 아니하는 채 숱한 눈썹은 아래로 덮이어 추잡한 안계(眼界)를 폐쇄(閉鎖)시켰고 두 조고만 콧구멍으로는 찬 공기가 녹아서 드나들고 있었다.
선로가 나타났다. 잠들은 대지의 무장과도 같았다. 희푸르게 번쩍이는 기 쌍줄의 선로는 대지가 소유한 예리(銳利)한 칼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선로를 건너서서 단조로이 뻗쳐 있는 그 칼날을 좇아서 한없이 걸었다.
「꽝! 꽝!」
수많은 곡괭이가 언 땅을 내리 찍는 소리였다. 신작로 한편에는 모닥불이 피어서 있었다. 푸른 연기는 건조 투명한 하늘로 뭉겨 올랐다. 추위는 별안간 몸을 엄습하는 것 같았다.
「꽝! 꽝!」
청둥한 금속의 음향은 아직도 계속되었다. 그 소리는 이쪽으로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그리고 그는 그 소리 나는 곳을 향하여 걷고 있었다. 그는 모닥불가에 가 섰다. 확 끼치는 온기가 죽은 사람을 살릴 것같이 훈훈하였다.
「우선 살 것 같다―」
오므라 들었던 전신의 근육이 조곰씩 조곰씩 풀어지는 것 같았다.
「불! 흥! 불―내 심장을 태우고 내 전신의 혈관과 신경을 불사르고 내 집 내 세간 내 재산을 불살라 버린 불! 이 불이 지금 나의 몸을 이 얼어 죽게 된 나의 몸을 뎁히어 주다니! 장작을 하나씩 하나씩 뜬숯을 만들고 있는 조고만 화염들! 장래에는 또 무엇 무엇을살라 뜬숯을 만들려는지! 그것은 한 물체가 탄소로 변하는 현상에만 그칠까―산화작용? 아하 좀더 의미가 있지나 않을까? 그렇게 단순한 것인가?」
그의 눈앞에는 이제 한 새로운 우주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곳은 여지껏 그가 싸여 있던 그 검은 빛의 분위기를 대신하여 밝은 빛의 정화된 공기가 있었다. 차디찬 무관심을 대신하여 동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지금 일보 일보 그 세계를 향하여 전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리 오너라. 그대 배고픈 자여!」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그대 심혈의 노력에 보수받지 못하는 자여!」
이러한 소리도 들렸다.
「그대는 노력을 버리지 말 것이야. 보수가 있을 것이니!」
이러한 소리가 또 들려오기도 하였다.
「꽝! 꽝!」
그때 이 소리는 그의 귀 밑까지 와서 뚝 그쳤다. 그리하고는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 있는 모닥불가에 모여들었다.
「불이 다― 꺼졌네!」
「장작을 좀더 가져 오지!」
굵은 장작이 징겨졌다. 마른 장작은 푸지직 소리를 지르며 타올랐다. 그리하여 검푸른 연기가 부근을 흐리어 놓았다.
「에― 추워― 에― 뜨시다」
모든 사람들의 곱은 입술에는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기는 검고 불길은 붉었다. 푸지직 소리는 여전히 났다. 이제 그의 눈앞에 나타났던 새로운 우주는 어느 사이에인지 소멸되고 해수욕 도구(道具)를 불사르던 어느 장면이 환기되었다.
「불이냐! 불이냐!」
그의 심장은 높이 뛰었다. 그 고동은 가슴에 안기어 있는 어린것을 눌러 죽일 것 같았다. 그는 품안의 것을 끌러서는 모닥불 곁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가슴을 확 풀어 헤치고 마음껏 그 불에 안기어 보았다. 새로이 끼쳐오는 불기운은 그의 뛰는 가슴을 한층이나 더 건드리어 놓는 것 같았다.
무슨 동기로인지 그의 머리에는 알콜이라는 것이 연상되었다.
「에―ㅅ? 불? 불이냐?」
어린것을 모닥불 곁에 놓은 채 그는 일직선으로 그 선로를 밟아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였다. 그의 시야를 속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선로 침목(枕木)이 끝없이 늘여 놓여섰을 뿐이었다. 그의 전신의 혈관은 이제 순환을 시작한 것 같았다.
「누구야, 누구야」
「앗!」
「누구야 어디 가는 거야」
「아― 저 불! 불!」
「하……!」
그의 전신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 인제 죽을 때가 돌아왔나 보다! 아니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 돌아왔나 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 사람은 그의 그 모양을 조소와 경멸의 표정으로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최후로 새 우주가 그의 앞에는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보십시오!」
그는 수작하기 곤란한 이 자리에서 이렇듯 입을 열어 보았으나 별로 그 사람에게 대하여 할 말은 없었다. 그는 몹시 머뭇머뭇하였다.
「왜 그리오?」
「저 오늘이 며칠입니까?」
「오늘? 십이월 십이일?」
「네!」
기적일성과 아울러 부근의 ‘시그낼’은 내려졌다. 동시에 남행열차의 기다란 장사(長蛇)가 그들의 섰는 곳으로 향하여 달려왔다.
「여보, 여보 여보 기차! 기차!」
「…………」
「여보, 저거! 이리 비켜!」
「…………」
「앗!」
그는 지금 모든 세상에 끼치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받지 못하였던 모든 거룩한 성도(聖徒)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새로운 우주의 명랑한 가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일상에 볼 수 없었던 밝고 신선한 자연과 상록수(常綠樹)가 보였고 그의 귀에는 일상에 들을 수 없었던 유량(嚠喨45) 우아한 음악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가 호흡하는 공기는 맑고 따스하고 투명하였고 그가 마시는 물은 영겁을 상징하는 영험의 생명수였다. 그는 지금 논공행상(論功行賞)에 선택되어 심판의 궁정(宮廷)을 향하여 걷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후에 그의 머리에 얹혀질 월계수의 황금관을 생각할 때에 피투성이 된 그의 일신은 기쁨에 미쳐 뛰었다. 대 자유를 찾아서 우주애(宇宙愛)를 찾아서 그는 이미 선택된 길을 걷고 있는 데 다름 없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여 보면 불을 피하여 선로 위에 떨고 섰던 그는 과연 어디로 갔던가.
그는 확실히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보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또 그의 영락한 육체 위로는 무서운 ‘에너지’의 기관차의 차륜이 굴러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의 피곤한 뼈를 분쇄시키고 타고 남은 근육을 산산히 저며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기관차의 ‘피스톤’은 그의 해골을 이끌고 그의 심장을 이끌고 검붉은 핏방울을 칼날로 희푸르러 있는 선로 위에 뿌리며 십리나 이십리 밖에 있는 어느 촌락의 정거장까지라도 갔는지도 모른다. 모닥불을 쪼이던 철로 공사의 인부들도, 부근 민가의 사람들도 황황히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까에 불을 피하여 달아나던 그의 면영은 찾을 수도 없었다. 떨어진 팔과 다리, 동구(瞳球), 간장(肝臟), 이것들을 차마 볼 수 없다는 가애로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새로운 우주의 가로를 걸어가는 그에게 전별의 마지막 만가(輓歌)를 쓸쓸히 들려주었다.
그 사람은 그가 십유여 년 방랑생활 끝에 고국의 첫발길을 실었던 그 기관차 속에서 만났던 그 철도국에 다닌다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너무나 우연한 인과(因果)를 인식치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알거나 모르거나 인과는 그 인과의 법칙에만 충실스러이 하나에서 둘로, 그리하여 셋째로 수행되어 가고만 있는 것이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이 말을 그는 그 같은 사람에게 우연히 두 번이나 물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십이월 십이일!」 이 대답을 그는 같은 사람에게서 두 번이나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그들에게 다만 모를 것으로만 나타나기도 하였다.
인과에 우연이 되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만일 인과의 법칙 가운데에서 우연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하면 그 바퀴가 그의 허리를 넘어간 그 기관차 가운데에는 C간호부가 타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나 사람은 설명하려 하는가? 또 C간호부가 왁자지껄한 차창 밖을 내어다보고 그리고 그 분골쇄신한 검붉은 피의 지도(地圖)를 발견하였을 때 끔찍하다하여 고개를 돌렸던 일은 어떻게나 설명하려는가? 그리고 C간호부가 닫친 차창에는 허연 성에가 슬어 있었다는 것은 어찌나 설명하려는가? 이뿐일까, 우리는 더욱이나 근본적 의아에 봉착(逢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지금 이 C간호부가 타고 있는 객차의 고간이 그저께 그가 타고 오던 그 고간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도 역시 그 같은 자리였다 하면 그것은 또한 어찌나 설명하려느냐?
북풍은 마른 나무를 흔들며 불어 왔다.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참새들은 전선 위에서 배고픔으로 추운 날개를 떨며 쉬이고 있었다.
그가 피를 남기고 간 세상에는 이다지나 깊은 쇠락의 겨울이었으나 그러나 그가 논공행상을 받으려 행진하고 있는 새로운 우주는 사시상춘이었다.
한 영혼이 심판의 궁정을 향하여 걸어가기를 이미 출발한 지 오래니 인생의 어느 한 구절이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 다 몰켜가고 난 아무도 없는 모닥불 가에는 그가 불을 피하여 달아날 때 놓고 간 그 어린 젖먹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끼쳐오는 온기가 퍽 그 어린것의 피부에 쾌감을 주었던지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어 있는 깊이 모를 창공을 그 조고마한 눈으로 뜻있는 듯이 쳐다보며 소리없이 누워있었다. 강보(襁褓) 틈으로 새어나와 흔들리는 세상에도 조고맣고 귀여운 손은 일만년의 인류역사가 일찍이 풀지 못하고 고만둔 채의 대우주의 철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부근에는 그것을 알아 들을 수 있는 ‘파우스트’의 노철학자도 없었거니와 이것을 조소할 범인(凡人)들도 없었다.
어린 것은 별안간 사람이 그리웠던지 혹은 배가 고팠던지 ‘으아’ 울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시작되는 인간의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으아!」
과연 인간세계에 무엇이 끝났는가. 기막힌 한 비극이 그 종막을 내리우기도 전에 또 한 개의 비극을 다른 한 쪽에서 벌써 그 막을 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단조로운 이 비극에 피곤하였을 것이나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연출하기도 결코 잊지는 아니하여 또 그것을 구경하기에도 결코 배부르지는 않는다.
「으아!」
어떤 사람은 이 소리를 생기에 충만하였다 일컬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확실히 인생극의 첫막을 여는 ‘사이렌’인 것에도 틀림은 없다.
「으아!」
한 인간은 또 한 인간의 뒤를 이어 또 무슨 단조로운 비극의 각본을 연출하려 하는고. 그 소리는 오늘에만 ‘단조’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인가.
「으아!」
여전히 그 소리는 그치지 아니하려는가.
「으아!」
너는 또 어느 암로(闇路)를 한 번 걸어보려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일찍이 이곳을 떠나려는가. 그렇다. 그 모닥불이 다 꺼지고 그리고 맹렬한 추위가 너를 엄습할 때에는 너는 아마 일찌감치 행복의 세계를 향하여 떠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으아!」
「으아!」
이 소리가 약하게 그리하여 점점 강하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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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갈래.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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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自殺 (1)

2.本質的 (2)

3.致命的 (3)

4.繩 (4)

5.渡繩師 (5)

6.질풍신뢰(疾風迅雷); 심한 바람과 번개 또는 그것처럼 빠르고 모짐. (6)

7.애총; 아총(兒冢). 어린 아이의 무덤. (7)

8.자심(滋甚); 점점 더 심함. (8)

9.신호시(新戶市); 고베시. 일본 대판만에 면한 항구도시. (9)

10.세간기명; 집안살림에 쓰는 온갖 도구. 기명(器皿)은 그릇붙이. (10)

11.기필(期必); 꼭 되기를 기약함. (11)

12.도포업(塗布業); 약 따위를 바르는 직업. 여기서는 페인트칠을 하는 직업을 가리킴. (12)

13.앵도지리-뻐찌; 봄 과일들을 가리킴. 버찌는 벚나무 열매. 당시 서울의 풍속의 하나. (13)

14.병문(屛門); 골목에 접어드는 어귀의 길가. (14)

15.명고옥(名古屋); 나고야. 일본 중부에 있는 도시. (15)

16.항(巷); 거리. 골목. (16)

17.만하탄; Manhattan. 당시 표기는 망하탕. (17)

18.화이트 호스; Whitehalls. 당시 표기는 화이트홀스. (18)

19.법선(法線); 곡선이나 곡면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선. (19)

20.슬로우프; slope. 비탈. 사면. 당시 표기는 「스로-프」. (20)

21.맥진(驀進); 한눈팔 겨를이 없이 힘차게 나아감. (21)

22.토로코; 트럭. 공사용 궤도차를 일컬음. (22)

23.마멸(馬蔑); 모멸의 착오인 듯. (23)

24.토로; 토로코의 준말. (24)

25.기절(期節); 시절. 계절. (25)

26.지질리워; 기운이 꺾여 눌린. (26)

27.간기(癎氣); 지랄병. 염병. (27)

28.계제적(階梯的); 차례차례. (28)

29.푸로마이트; Bromide. 배우나 운동선수 등의 초상 사진. (29)

30.야료(惹鬧); 생트집을 하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것. (30)

31.차인잔고(差引殘高); 남의 가게에서 장사하는 일에 시중드는 사람의 수지(收支)를 제한 나머지 이익. 여기서는 삶의 보람이나 결과를 뜻함. (31)

32.낭인(浪人); 상전없는 사무라이. 떠돌이. (32)

33.객관(客館); 객지의 숙소. (33)

34.여중(女中); 하녀.(일본어) (34)

35.명도(冥途); 죽은 영혼이 가는 세계. (35)

36.임리(淋漓); 피·땀·물 등이 흘러 떨어지는 모양. (36)

37.완이(莞爾)히 웃었다; 완이이소(完爾而笑). 빙그레 웃었다. (37)

38.다나; 붕(棚)의 일본어. 선반. (38)

39.따개꾼; 소매치기. (39)

40.수형(手形); 어음의 옛말. (40)

41.화태(樺太); 사할린의 일본명. 카라후토. (41)

42.미두(米豆); 현물 없이 투기적 약속으로 곡물을 거래하는 일. 인천, 군산 등지의 미두 취인소에서 성행한 일제하의 상업의 한 제도. (42)

43.심평; 형편. (43)

44.천애(天涯); 천애이역(天涯異域) 또는 천애지각(天涯地角)의 준말. 아득히 먼 곳을 뜻함. (44)

45.음악의 음색이 거침없고 똑똑함 (45)

[출처] http://www.jikji.org/12%EC%9B%94%2012%EC%9D%BC?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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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땀, 여름볕에 땀 흘리며
호미 들고 밭고랑 타고 있어도,
어디선지 종달새 울어만 온다,
헌출한 하늘이 보입니다요, 보입니다요.

사랑, 사랑, 사랑에, 어스름을 맞은 님
오나 오나 하면서, 젊은 밤을 한소시 조바심할 때,
밟고 섰는 다리 아래 흐르는 江물 !
江물에 새벽빛이 어립니다요, 어립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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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임 무덤 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신 산천에도 금잔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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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구름을 잡아타면
붉게도 피로 물든 저 구름을,
밤이면 새캄한 저 구름을.
잡아타고 내 몸은 저 멀리로
九萬里 긴 하늘을 날아 건너
그대 잠든 품속에 안기렸더니,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
그대여, 들으라 비가 되어
저 구름이 그대한테로 내리거든,
생각하라, 밤저녁, 내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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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개벽》 24호에 발표.

백양가지에 우는 접동은 깊은 밤의 못물에
어렷하기도 하며 아득하기도 하여라.
어둡게 또는 소리없이 가늘게
줄줄의 버드나무에서는 비가 쌓일때.

푸른 하늘은 고요히 내려 갈리던 그 보드러운 눈결!
이제, 검은 내는 떠돌아오라 비구름이 되어라.
아아 나는 우노라 그 옛적의 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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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 고락[무료시]  (1) 201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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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은 모르나니 고향이나마
사람은 못 잊는 것 고향입니다.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하던 것
잠들면 어느덧 고향입니다.
조상님 뼈 가서 묻힌 곳이라
송아지 동무들과 놀던 곳이라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마는
아, 꿈에서는 항상 고향입니다.

봄이면 곳곳이 산새 소리
진달래 화초 만발하고
가을이면 골짜구니 물드는 단풍
흐르는 샘물 위에 떠내린다.
바라보면 하늘과 바닷물과
차 차 차 마주붙어 가는 곳에
고기잡이 배 돛 그림자
어기엇차 디엇차 소리 들리는 듯.

떠도는 몸 이거든
고향이 탓이되어
부모님 기억,동생들 생각
꿈에라도 항상 그 곳에서 뵈옵니다
고향이 마음속에 있습니까.
마음 속에 고향도 있습니다.
제 넋이 고향에 있습니까.
고향에도 제 넋이 있습니다.

물결에 떠내려 간 浮萍줄기
자리잡을 새도 없네
제 자리로 돌아갈 날 있으랴마는
괴로운 바다 이 세상의 사람인지라 돌아가리
고향을 잊었노라 하는 사람들
나를 버린 고향이라 하는 사람들
죽어서만 天涯一方 헤매지 말고
넋이라도 있거들랑 고향으로 네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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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 고독[무료시]  (0) 201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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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님의 편지를
받은 그날로
서러운 풍설이 돌았습니다

물에 던져달라고 하신 그 뜻은
언제나 꿈꾸며 생각하라는
그 말씀인 줄 압니다

흘려 쓰신 글씨나마
언문 글자로
눈물이라고 적어 보내셨지요.

물에 던져달라고 하신 그 뜻은
뜨거운 눈물 방울방울 흘리며,
마음 곱게 읽어달라는 말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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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기구한 발부리만 보지 말고서
때로는 고개들어 사방산천의
시원한 세상풍경 바라보시오

먹이의 달고 씀은 입에 달리고
영욕의 고(苦)와 낙(樂)도 맘에 달렸소
보시오 해가 져도 달이 뜬다오
그믐밤 날 궂거든 쉬어 가시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숨차다 고갯길을 탄치 말고서
때로는 맘을 녹여 탄탄대로의
이제도 있을 것을 생각하시오

편안히 괴로움의 씨도 되고요
쓰림은 즐거움의 씨가 됩니다
보시오 화전망정 갈고 심으면
가을에 황금이삭 수북 달리오.

칼날 위에 춤추는 인생이라고
물속에 몸을 던진 몹쓸 계집애
어쩌면 그럴 듯도 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줄은 왜 몰랐던고.

칼날 위에 춤추는 인생이라고
자기가 칼날 위에 춤을 춘 게지
그 누가 미친 춤을 추라 했나요
얼마나 비고인 계집애던가.

야말로 제 고생을 제가 사서는
잡을 데 다시 없어 엄나무지요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길가의 청풀밭에 쉬어 가시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기구한 발뿌리만 보지 말고서
때로는 춘하추동 사방산천의
뒤바뀌는 세상도 바라보시오.

무겁다 이 짐을랑 벗을 겐가요
괴롭다 이 길을랑 아니 걷겠나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은
보시오 시내 위의 물 한 방울을.

한 방울 물이라도 모여 흐르면
흘러가서 바다의 물결 됩니다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 됩니다
다시금 땅에 내려 비가 됩니다.

비 되어 나린 물이 모둥켜지면
산간엔 폭포 되어 수력전기요
들에선 관개 되어 만종석이오
메말라 타는 땅엔 기름입니다.

어여쁜 꽃 한 가지 이울어 갈 제
밤에 찬이슬 되어 추겨도 주고
외로운 어느 길손 창자 주릴 제
길가의 찬 샘 되어 누꿔도 주오.

시내의 여지없는 물 한 방울도
흐르는 그만 뜻이 이러하거든
어느 인생 하나이 저만 저라고
기구하다 이 길을 타발켰나요.

이 짐이 무거움에 뜻이 있고요
이 짐이 괴로움에 뜻이 있다오
무거운 짐 지고서 닫는 사람이
이 세상 사람다운 사람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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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의 바닷가의
모래밭이라
침묵의 하루 해만 또 저물었네

탄식의 바닷가의
모래밭이니
꼭 같은 열두 시만 늘 저무누나

바잽의 모래밭에
돋는 봄풀은
매일 붓는 범불에 터도 나타나
설움의 바닷가의
모래밭은요
봄 와도 봄 온줄을 모른다더라

이즘의 바닷가의 모래밭이면
오늘도 지는 해니 어서 져다오

아쉬움의 바닷가 모래밭이니
뚝 씻는 물소리가 들려나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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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태양이 씻은듯한 얼굴로
산속의 고요한 거리 위를 쓴다.
봄 아침 자리에서 갓 일어난 몸에
홑것을 걸치고 들에 나가 거닐면
산뜻이 살에 숨는 바람이 좋기도 하다.
뾰죽 뾰죽한 풀 엄을
밟는가봐, 저어
발도 사분히 가려 놓을 때
과거의 십년 기억은 머리 속에 선명하고
오늘날의 보람 많은 계획이 확실히 선다.
마음과 몸이 아울러 유쾌한 간밤의 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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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7월 《학생계(學生界)》 1호에 투고 형식으로 발표. 원제는 〈거츤풀 흐트러진 모래동(洞)으로〉

거친 풀 흐트러진 모래동으로
말없이 걸어가며 노래는 청령(蜻蛉),

들꽃 풀 보드라운 향기 맡으면
어린 적 놀던 동무 새 그리운 맘

길다란 쑥대 끝을 삼각(三角)에 메워
거미줄 감아들고 청령(蜻蛉)을 쫓던,

늘 함께 이 동 위에 이 풀숲에서
놀던 그 동무들은 어디로 갔노!

어린 적 내 놀이터 이 동마루는
지금 내 흩어진 벗생각의 나라.

먼 바다 바라보며 우득히 서서
나 지금 청령(蜻蛉) 따라 왜 가지 않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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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해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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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바람으로 생겨 났으면
달 돋는 개여울의 빈 들 속에서
내 옷의 앞자락을 불기나 하지.

우리가 굼벙이로 생겨 났으면
비오는 저녁 캄캄한 녕기슭의
미욱한 꿈이나 꾸어를 보지.

만일에 그대가 바다난 끝의
벼랑에 돌로나 생겨 났더면
둘이 안고 떨어나지지.

만일에 나의 몸이 불귀신이면
그대의 가슴 속을 밤도와 태워
둘이 함께 재 되어 스러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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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김소월이 《개벽》 19호에 발표한 시이다.

진달래 꽃이 피고
바람은 버들가지에서 울 때,
개아미는
허리가 가늣한 개아미는
봄날의 한나절, 오늘 하루도
고달피 부지런히 집을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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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저물고 돋는 달에
흰 물은 솰솰......
금모래 반짝......
靑(청)노새 몰고가는 郞君(낭군) !
여기는 江村(강촌)
江村에 내 몸은 홀로 사네.
말하자면, 나도 나도
늦은 봄 오늘이 다 盡(진)토록
百年 妻眷(백년처권)을 울고 가네.
길세 저문 나는 선비,
당신은 江村에 홀로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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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른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言約도 없건마는 !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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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시나무
가막 덤불은
덤불 덤불 산마루로
벌어 올랐소

산에는 가려해도
가지 못하고
바로 말로
집도 있는 내 몸이라오

길에는 혼잣몸의
홑옷 자락은
하룻밤 눈물에는
젖기도 했소

산에는 가시나무
가막덤불은
덤불덤불 산마루로
벌어 올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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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봄 三月 三日(삼월삼일)은 삼질
江南(강남) 제비도 안 잊고 왔는데.
아무렴은요
설게 이 때는
못 잊어 그리워.

잊으시기야 했으랴, 하마 어느새
님 부르는 꾀꼬리 소리.
울고 싶은 바람은 점도록 부는데
설리도 이 때는
가는 봄 三月 三日은 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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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 마당에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정문 외에 따로 만든 작은 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 아이 아아 아야!”
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 온다. 샛문을 열려던 박씨는 뒷문을 밀었다.
장독대 밑, 비스듬한 켠 아래, 아다다가 입을 헤 벌리고 넙적 엎더져, 두 다
리만을 힘없이 버지럭거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핀으로 한 발쯤 나가선 깨어
진 동이(배가 부르고 아가리가 넓으며 키가 작고 양 옆에 손잡이가 달린 질
그릇) 조각이 질서 없이 너저분하게 된장 속에 묻혀 있다.
“아이구메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년이 동이를 또 잡았구나! 이년아! 너
더러 된장 푸래든 푸래?”
어머니는 딸이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데 가는 동정
심보다, 깨어진 동이만이 아깝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어 어마! 아다아다 아다 아다아다…….”
모닥불을 뒤집어쓰는 듯한 끔찍한 어머니의 음성을 또다시 듣게 되는 아다
다는, 겁에 질려 얼굴에 시퍼런 물이 들며 넘어진 연유를 말하여 용서를 빌
려는 기색이나, 말이 되지를 않아 안타까워한다.
아다다는 벙어리였던 것이다. 말을 하렬(하려 할) 때에는 한다는 것이, 아다
다 소리만이 연거푸 나왔다. 어찌어찌 가다가 말이 한 마디씩 제법 되어 나
오는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쉬운 말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 이것을 조롱 삼아 확실이라는 뚜렷한 이름이 있었지만, 누구나 그를
부르는 이름은 아다다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자연히 이름으로 굳어져, 그 부
모네까지도 그렇게 부르게 되었거니와, 그 자신조차도 “아다다!” 하고 부
르면 마땅히 들을 이름인 듯이 대답을 했다.
“이년까타나 끌이 세누나! 시집엘 못 가갔음은 오늘은 어드메든가(어디든
지) 나가서 뒈디고 말아라, 이년아! 이년아! 아, 이년아!”
어머니는 눈알을 가로세워 날카롭게도 흰자위만으로 흘기며 성큼 문턱을 넘
어선다.
아다다는 어머니의 손길이 또 자기의 끌채(머리채)를 감아 쥘 것을 연상하고
몸을 겨우 뒤채 비꼬아 일어서서 절룩절룩 굴뚝 모퉁이로 피해 가며 어쩔
줄을 모르고 일변 고개를 좌우로 둘러 살피며 아연하게도,
“아다 어 어마! 아다 어마 아다다다다다”
하고 부르짖는다. 다시는 일을 아니 저지르겠다는 듯이, 그리고 한 번만 용
서를 하여 달라는 듯싶게. 그러나 사정 모르는 체 기어이 쫓아간 어머니는,
“이년! 어서 뒈데라. 뒈디기 싫건(싫거든) 시집으로 당장 가거라. 못 가간?

그리고 주먹을 귀 뒤에 넌지시 얼메고 마주선다. 순간, 주먹이 떨어지면? 하
는, 두려운 생각에 오싹하고 끼치는 소름이, 튀해(새나 짐승의 털을 뽑기 위
해 끓는 물에 잠깐 넣었다가 꺼내) 논 닭같이 전신에 돋아나는 두드러기를
느끼는 찰나, ‘턱’ 하고 마침내 떨어지는 주먹이 어느새 끌채를 감아쥐고
갈 지(之) 자로 흔들어 댄다.
“아다 어어 어마! 아 아고 어 어마!”
아다다는 떨며 빌며 손을 몬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한번 손을 댄 어머니는
그저 죽어 싸다는 듯이 자꾸만 흔들어 댄다. 하니, 그렇지 않아도 가꾸지 못
한 텁수룩한 머리는 물결처럼 흔들리며 구름같이 피어나선 얼크러진다.
그래도 아다다는 그저 빌 뿐이요, 조금도 반항하려고도 않는다. 이런 일은
거의 날마다 지나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한대야, 그것은 도리어 매까지 사는
것이 됨을 아는 것이다. 집에 일이 아무리 밀려 돌아가더라도 나 모르는 체
손 싸매고 들어앉았으면 오히려 이런 봉변은 아니 당할 것이, 가만히 앉았지
는 못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치에 가까운 그의 성격은 무엇엔지 힘에 맞히는 노력
이 있어야 만족을 얻는 듯했다. 시키건, 안 시키건, 헐하나(힘들지 아니하나),
힘차나(힘드나), 가리는 법이 없이 하여야 될 일로 눈에 띄기만 하면 몸을
아끼는 일이 없이 하는 것이 그였다. 그래서 집안의 모든 고된 일은 실로 아
다다가 혼자서 치워 놓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이 반갑지 않았다. 둔한 지혜로 마련(궁리나 계획) 없
이 뼈가 부러지도록 몸을 돌보지 않고, 일종 모험에 가까운 짓을 하게 되므
로, 그 반면에 따르는 실수가 되레 일을 저질러 놓게 되어, 그릇 같은 것을
깨쳐 먹는 일은 거의 날마다 있다 하여도 옳을 정도로 있었다.
그래도 아다다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집안 일을 못 치겠다면 모르지만, 그는
참례(참여)를 하지 않아도 행랑에서 차근차근히 다 해줄 일을 쓸데없이 가로
맡아선 일을 저질러 놓고 마는 데에 그 어머니는 속이 상했다.
본시 시집을 보내기 전에도 그 버릇은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벙어리인 데다
행동까지 그러하였으므로, 내용 아는 인근에서는 그를 얻어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열아홉 고개를 넘기도록 처묻어 두고 속을 태우다 못해 깃
부(지참금)로 논 한 섬지기를 처넣어 똥 치듯 치워 버렸던 것이, 그만 오 년
이 멀다 다시 쫓겨와, 시집에는 아예 갈 생각도 아니하고 하루 같은 심화(마
음속에 울적하게 일어나는 화)를 올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역겨운 마음에 아
다다가 실수를 할 때마다 주릿대(모진 벌)를 내리고 참례를 말라건만 그는
참는다는 것이 그 당시뿐이요, 남이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속이 쏘는 듯이 슬
그미(슬그머니) 나와서 곁을 슬슬 돌다가는 손을 대고 만다.
바로 사흘 전엔가도 무명 뉨(옷감을 잿물에 담가다가 솥에 찐 것)을 낼 때
홀짝 달은 솥뚜껑을 마련 없이 맨손으로 열다가 뜨거움을 참지 못해 되는
대로 집어 엎는 바람에, 그만 자배기(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
그릇)를 깨치고 욕과 매를 한바탕 겪고 났었건만, 어제 저녁 행랑 색시더러
오늘은 묵은 된장을 옮겨 담아야 되겠다고 이르는 말을 어느 겨를에 들었던
지, 아다다는 아침밥이 끝나자 어느새 나가서 혼자 된장을 퍼 나르다가 그만
또 실수를 한 것이었다.
“못 가간? 시집이! 못 가간? 이년! 못 가갔음 죽어라!”
움켜쥐었던 머리를 힘차게 휙 두르며 밀치는 바람에 손에 감겼던 머리카락
이 끊어지는지 빠지는지 무뚝 묻어나며 아다다는 비칠비칠 서너 걸음 물러
난다.
순간 정신이 어찔해진 아다다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써 버지럭거리며 삐치
는 다리에 겨우 진정을 얻어 세우자,
“아다 어마! 아다 어마! 아다 아다!”
하고 다시 달려들 듯이 눈을 흘기고 섰는 어머니를 향하여 눈물 글썽한 눈
을 끔벅 한 번 감아 보이고, 그리고 북쪽을 손가락질하여, 어머니의 말대로
시집으로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어라도 버리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이
며,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허청허청 대문 밖으로 몸을 이끌어 냈다.

나오기는 나왔으나 갈 곳이 없는 아다다는 마당귀를 돌아서선 발길을 더 내
놓지 못하고 우뚝 섰다.
시집으로 간다고는 하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의 매는 어머니의  그것
보다 무섭다. 그러면 다시 집으로 들어가나? 이번에는 외상 없는 매가 떨어
질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갈 곳 없는 갈 곳을 뒤 짜보자니, 눈물이 주
는 위로밖에 쓸데없는 오 년 전 그 시집이 참을 수 없이 그립다.
―치울세라(추울까), 더울세라, 힘이 들까, 고단할까, 알뜰살뜰히 어루만져 주
던 시부모, 밤이면 품속에 꼭 껴안아 피로를 풀어 주던 남편, 아, 얼마나 시
집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던 것인가?
참으로, 아다다가 처음 시집을 가서의 오 년 동안은 온 집안의 사랑을 한 몸
에 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벙어리라는 조건이 귀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
으나, 돈으로 아내를 사지 아니하고는 얻어 볼 수 없는 처지에서, 스물여덟
살에 아직 장가를 못 들고 있는 신세로 목구멍조차 치기 어려운 형세이었으
므로, 아내를 얻게 되기의 여유를 기다리기까지에는 너무도 막연한 앞날이었
다. 벙어리나마 일생을 먹여 줄 것까지 가지고 온다는 데 귀가 번쩍 띄어 그
자리를 앗기울까(빼앗길까) 두렵게 혼사를 지었던 것이니, 그로 인해서 먹고
살게 되는 시집에서는 아다다를 아니 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또한 아다다는 못 하는 일이 없이 일 잘하고,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조금도 말썽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생활고(생활의 어려움)가
주는 역경(불행한 환경)이 쓸데없이 서로 눈독(욕심 내어 눈여겨 봄)을 짓게
하여, 불쾌한 말만으로 큰소리가 끊일 새 없이 오고 가던 가족은, 일시에 봄
비를 맞는 동산같이 화락한(화평하고 즐거운) 웃음의 꽃이 피었다.
원래, 바른 사람이 못 되는 아다다에게는 실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로 인해서 밥을 먹게 되는 시집에서는 조금도 역겹게 안 여겼고, 되레 위로
를 하고 허물을 감추기에 서로 힘을 썼다.
여기에 아다다가 비로소 인생의 행복을 느끼며, 시집 가기 전 지난날 어머니
아버지가 쓸데없는 자식이라는 구실 밑에, 아니, 되레 가문을 더럽히는 앙화
(殃禍, 재앙) 자식이라고 사람으로서의 푼수에도 넣어 주지 않고 박대하던
일을 생각하고는, 어머니 아버지를 원망하는 나머지 명절 목시(대목 때)나
제향(제사) 때이면 시집에서는 그렇게도 가 보라는 친정이었건만, 이를 악물
고 가지 않고 행복 속에 묻혀 살던 지나간 그 날이 아니 그리울 수가 없었
다.
그러나 그 날은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영원한 꿈속에 흘러가고 말았다. 해
를 거듭하며 생활의 밑바닥에 깔아 놓았던 한 섬지기라는 거름이 차츰 그들
을 여유한 생활로 이끌어, 몇 백 원이란 돈이 눈앞에 굴게 되니 까닭 없이
남편 되는 사람은 벙어리로서의 아내가 미워졌다.
조그만 실수가 있어도 눈을 흘겼다. 그리고 매를 내렸다. 이 사실을 아는 아
버지는 그것은 들어오는 복을 차 버리는 짓이라고 타이르나,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자간에 충돌이 때때로 일어났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에게는 감히
하고 싶은 행동을 못 하는 아들은 그 분을 아내에게로 돌려 풀기가 일쑤였
다.
“이년 보기 싫다! 네 집으로 가거라.”
그리고 다음에 따르는 것은 매였다. 그러나 아다다는 참아 가며 아내로서의,
그리고 며느리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이것이 시부모로 하여금 더욱 아다다를
귀엽게 만드는 것이어서, 아버지에게서는 움직일 수 없는 며느리인 것을 깨
닫게 된 아들은, 가정적으로 불만을 느끼게 되어 한 해의 농사를 지은 추수
를 온통 팔아 가지고 집을 떠나서, 마음의 위안을 찾아 돌다가 주색(술과 여
자)에 돈을 다 탕진하고(다 써 버리고) 동무들과 물거품같이 밀리어 안동현
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이 투기적인(일의 성공과 실패가 불확실하고 모험적인) 도시에서
뒹굴며 노동의 힘으로 밑천을 얻어선 ‘양화(서양에서 들어온 물건)’와 ‘
은떼루’에 투기하여 황금을 꿈꾸어 오던 것이 기적적으로 맞아 나기 시작
하여, 이태(2년) 만에는 2만 원에 가까운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리하여
언제나 불만이던 완전한 아내로서의 알뜰한 사랑에 주렸던 그는, 돈에 따르
는 무수한 여자 가운데서 마음대로 흡족히 골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새로운 살림을 꿈꾸는 일변 새로이 가옥(집)을 건축함과 동시에 아
다다를 학대함이 전에 비할 정도가 아니었다. 이에는, 그 아버지도 명민하고
(사리에 밝으며 민첩하고) 인자한 남 부끄럽지 않은 뻐젓한 새 며느리에게
마음이 쏠리는 나머지, 이미 생활은 걱정이 없이 되었으니 아다다의 깃부로
서가 아니라도 유족할(풍족할) 앞날을 돌아볼 때, 아들로서의 아다다에게 대
하는 태도는 조금도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시부모의 눈에
서까지 벗어나게 된 아다다는 호소할 곳조차 없는 사정에, 눈감은 남편의 매
를 견디다 못해 집으로 쫓겨오게 되었던 것이니, 생각만 하여도 옛 매 자리
가 아픈 그 시집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찾아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에 있게 되니 그것보다는 좀 헐할망정, 어머니의 매도 결코 견디기
에 족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날마다 더 심해만 왔다. 오늘도 조금만
반항이 있었던들, 어김없이 매는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로 가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야 그저 이 세상에서는 수롱이
네 집밖에 또 찾아갈 곳은 없었다. 수롱은 부모 동생조차 없는 삼십이 넘은
총각으로, 누구보다도 자기를 사랑하여 준다고 믿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리
하여 쫓기어 날 때마다 그를 찾아가선 마음의 위안을 얻어 오던 것이다. 아
다다는 문득 발걸음을 떼어 아지랑이 얼른거리는 마을 끝 산턱 아래 떨어져
박힌 한 채의 오막살이를 향하여 마당귀를 꺾어 돌았다.

수롱은 벌써 일 년 전부터 아다다를 꾀어 왔다. 시집에서까지 쫓겨난 벙어리
였으나, 김 초시의 딸이라, 스스로도 낮추 보여지는 자신으로서는 거연히 염
(무엇을 하려는 생각)을 내지 못하고 뜻 있는 마음을 건너 볼 길이 없어 속
을 태워 가며 눈치만 보아 오던 것이, 눈치에서보다는 베풀어진 동정이 마침
내, 아다다의 마음을 사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아다다를 보기만 하면 따라다니며 놀렸다. 아니, 어른들까지도 “
아다다, 아다다.” 하고 골을 올려서 분하나, 말을 못 하고 이상한 시늉을 하
며 투덜거리는 것을 봄으로 좋아라고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래서 아다다는 사람을 싫어하였다. 집에 있으면 어머니의 욕과 매, 밖에
나오면 뭇 사람들의 놀림, 그러나 수롱이만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아
이들이 따라다닐 때에도 남 아니 말려 주는 것을 그는 말려 주고, 그리고,
매에 터질 듯한 심정을 풀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다다는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수롱을 생각해 오던 것이, 얼마 전
부터는 찾아 다니게까지 되어 동네의 눈치에도 이미 오른 지 오랬다.
그러나 아다다의 집에서도 그 아버지만이 지처(地處)를 가지기 위하여 깔맵
게 아다다의 행동을 경계하는 듯하고, 그 어머니는 도리어 수롱이와 배가 맞
아서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고 어디로든지 달아났으면 하는 눈치를 알
게 된 수롱이는,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까지 내어놓다시피 그를 사귀어 온
다.
아다다는 제 집이나처럼 서슴지도 않고 달리어오자마자 수롱이네 집문을 벌
컥 열었다.
“아, 아다다!”
수롱은 의외에 벌떡 일어섰다.
“너 또 울었구나!”
울었다는 것이 창피하긴 하였으나, 숨길 차비가 아니다. 호소할 길 없는 가
슴속에 꽉찬 설움은 수롱이의 따뜻한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지어 달램)가 그
렇게도 그리웠는지 모른다.
방 안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쫓기어 난 이유를 언제나같이 낱낱이 말했다.
“그러기(그러니까) 이젠 아야, 다시는 집으로 가지 말구 나하구 둘이서 살
아, 응?”
그리고 수롱은 의미 있는 웃음을 벙긋벙긋 웃어 가며 아다다의 등을 척척
뚜드려 달랬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것을 영원히 만들어 보고 싶
은 욕망에 불탔던 것이다.
그러나 아다다는,
“아다 무 무서! 아바 무 무서! 아다 아다다다!”
하고 그렇게 한다면 큰일 난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뜬다. 집에서 학대를
받고 있느니보다는 수롱의 사랑 밑에서 살았으면 오죽이나 행복되랴! 다시
집으로는 아니 들어가리라는 생각이 없었던 바도 아니었으나, 정작 이런 말
을 듣고 보니, 무엇엔지 차마 허하지(허락하지) 못할 것이 있는 것 같고, 그
렇지 않은지라 눈을 부릅뜨고 수롱이한테 다니지 말라는 아버지의 이르던
말이 연상될 때 어떻게도 그 말은 엄한 것이었다.
“우리 둘이 달아났음 그만이디, 무섭긴 뭐이 무서워?”
“…….”
아다다는 대답이 없다.
딴은 그렇기도 한 것이다. 당장 쫓기어 난 몸이 갈 곳이 어딘고? 다시 생각
을 더듬어 볼 때 어머니의 매는 아버지의 그 눈총보다 몇 배나 더한 두려움
으로 견딜 수 없이 아픈 것이다. 그러마고 대답을 못 하고 거역한 것이 금시
후회스러웠다.
“안 그래? 무서울 게 뭐야. 이젠 아야 집으루 가지 말구 나하구 있어, 응?

“응, 아다 이 있어, 아다 아다.”
하고 아다다는 다시 있자는 수롱이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듯이, 그리고
살길은 이제 찾기었다는 듯이, 한숨과 같이 빙긋 웃으며 있겠다는 뜻을 명백
히 보이기 위하여 고개를 주억이며 혓바닥을 손으로 툭툭 두드려 보인다.
“그렇지 그래, 정 있어야 돼. 응?”
“응, 이서 이서 아다 아다.”
“정말이야?”
“으, 응, 저 정 아다 아다.”
단단히 강문(다짐)을 받고 난 수롱이는 은근히 솟아나는 미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벙어리인 아다다가 흡족할 이치는 없었지만, 돈으로 사지 아니하고는 아내라
는 것을 얻어 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저 생기는 아내는 벙어리였어도 족했
다. 그저 자기의 하는 일이나 도와 주고, 아들 딸이나 낳아 주었으면 자기는
게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내를 얻으려고 십여 년 동안을 불피풍우(비바
람을 무릅쓰고 일을 함) 품을 팔아 궤(물건을 넣도록 나무로 네모 나게 만든
그릇) 속에 꽁공 묶어 둔 일백오십 원이란 돈이 지금에 와서는, 아내 하나를
얻기에 그리 부족할 것이 아니나, 장가를 들지 아니하고 아다다를 꼬여 온
이유도, 아다다를 꼬이므로 돈을 남겨서, 그 돈으로는 살림의 밑천을 만들어
가정의 마루를 얹자는 데서였던 것이다. 이제 그 계획이 은근히 성공에 가까
워 옴에 자기도 남과 같이 가정을 이루어 보게 되누나 하니, 바라지도 못하
였던 인생의 행복이 자기에게도 이제 찾아오는 것 같았다.
“우리 아다다.”
수롱이는 아다다의 등에 손을 얹으며 빙그레 웃었다.
“아다 아다.”
아다다도 만족한 듯이 히쭉 입이 벌어졌다.

그 날 밤을 수롱의 품안에서 자고 난 아다다는 이미 수롱의 아내 되기에 수
줍음조차도 잊었다. 아니, 집에서 자기를 받들어 들인다 하더라도 수롱을 떨
어져서는 살 수 없으리 만큼 마음은 굳어졌다. 수롱이가 주는 사랑은 이 세
상에서는 더 찾을 수 없는 행복이리라 느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을 위하연 이 자리에 그대로 박혀서는 누릴 수 없을 것
이 다음에 남은 근심이었다. 수롱이와 같이 살자면, 첫째 아버지가 허하지
않을 것이요, 동네 사람도 부끄럽지 않은 노릇이 아니다. 이것은 수롱이도
짐짓 근심이었다. 밤이 깊도록 의논을 하여 보았으나 동네를 피하여 낯 모르
는 곳으로 감쪽같이 달아나는 수밖에는 다른 묘책(신묘한 꾀)이 없었다.
예식 없는 가약(부부가 되자는 언약)을 그들은 서로 맹세하고, 그 날 새벽으
로 그 마을을 떠나, 신미도라는 섬으로 흘러가서, 그 곳에 안주를 정하였다.
그러나 생소한 곳이므로, 직업을 찾을 길이 없었다.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섬이라, 뱃놀음을 하는 것이 제 길이었으나, 이것은 아다다가 한사코 말렸다.
몇 해 전에 자기네 동네에서도 농토를 잃은 몇몇 사람이 이 섬으로 들어와
첫 배를 타다가 그만 풍랑에 몰살을 당하고 만 일이 있던 것을 잊지 못하는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은지라, 수롱이조차도 배에는 마음이 없었다. 섬으로 왔다고는 하
지만 땅을 파서 먹는 것이 조마구(주먹) 빨 때부터 길러 온 습관이요, 손 익
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저 그 노릇만이 그리웠다.
그리하여 있던 돈으로 어떻게, 밭날갈이(며칠 동안 걸려서 갈 만큼 넓은 밭)
나 사서 조 같은 것이나 심어 가지고 겨울의 시탄(땔나무와 숯)과 양식을 대
게 하고 짬짬이 조개나 굴, 낙지, 이런 것들을 캐어서 그날 그날을 살아갔으
면 그것이 더할 수 없는 행복일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삼십 반생에 자기의 소유라고는 손바닥만한 것조차 없어, 어
떻게든 몽매(잠은 자면서 꾸는 꿈)에 그리던 땅이었는지 모른다. 완전한 아
내를 사지 아니하고 아다다를 꼬여 온 것도 이 소유욕에서였다. 아내가 얻어
진 이제, 비록 많지는 않은 땅이나마 가져 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거니
와, 또는 그만한 소유를 가지는 것이 자기에게 향한 아다다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하는데도 보다 더한 수단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본시 뱃놀음판인 섬인데, 작년에 놀궂이가 잘되었다 하여(벼 뿌리
를 파먹는 ‘놀’이란 벌레가 너무 많아서) 금년에 와서 더욱 시세를 잃은
땅은 비록 때가 기경시(起耕時, 논밭을 가는 때)라 하더라도 용이히 살 수까
지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그렇게 하리라 일단 마음을 정하니, 자기도 땅을
마침내 가져 보누나 하는 생각에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아다다에게도
이 계획을 말하였다.
“우리 밭을 한 뙈기 사자, 그래두 농살 허야 사람 사는 것 같디. 내가 던답
(전답. 논밭)을 살라구 묶어 둔 돈이 있거든.”
하고 수롱이는 봐라는 듯이 실겅(물건을 얹기 위해 두 개의 긴 나무를 건너
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위에 얹힌 석유통 궤 속에서 지전(종이돈) 뭉치를
뒤져 내더니, 손끝에다 침을 발라 가며 펄딱펄딱 뒤어 보인다.
그러나 그 돈을 본 아다다는 어쩐지 갑자기 화기(생기가 도는 기색)가 줄어
든다.
수롱이는 그것이 이상했다. 돈을 보면 기꺼워할(기뻐할) 줄 알았던 아다다가
도리어 화기를 잃은 것이다. 돈이 있다니 많은 줄 알았다가 기대에 틀림으로
써인가?
“이것 봐! 그랜 봐두, 이게 일천오백 냥이야. 지금 시세에 밭 이천 평은 한
참 놀다가두 떡 먹두룩 살 건데.”
그래도 아다다는 아무 대답이 없다. 무엇 때문엔지 수심(근심)의 빛까지 역
연히 얼굴에 떠오른다.
“아니 밭이 이천 평이문 조를 심는다 하구, 잘만 가꿔 봐, 조가 열 섬에 조
짚이 백여 목 날 터이야. 그래, 이걸 개지구 겨울 한동안이야 못 살아? 그렇
거구 둘이 맞붙어 몇 해만 벌어 봐! 그 적엔(그 때엔) 논이 또 나오는 거야.
이건 괜히 생…….”
아다다는 말없이 머리를 흔든다.
“아니, 내레 이게, 거즈뿌레기(거짓말)야? 아, 열 섬이 못 나?”
아다다는 그래도 머리를 흔든다.
“아니, 고롬(그럼) 밭은 싫단 말인가?‘
“아다, 시 싫어.”
그리고 힘없이 눈을 내리깐다.
아다다는 수롱이에게 돈이 있다 해도 실로 그렇게 많은 돈이 있는 줄은 몰
랐다. 그래서 그 많은 돈으로 밭을 산다는 소리에, 지금까지 꿈꾸어 오던 모
든 행복이 여지없이도 일시에 깨어지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돈으로 인해서
그렇게 행복할 수 있던 자기의 신세는 남편(전남편)의 마음을 악하게 만듦으
로, 그리고 시부모의 눈까지 가리는 것이 되어, 필야엔(나중엔) 쫓겨나지 아
니치 못하게 되던 일을 생각하면, 돈 소리만 들어도 마음은 좋지 않던 것인
데, 이제 한푼 없는 알몸인 줄 알았던 수롱이에게도 그렇게 많은 돈이 있어
그것으로 밭을 산다고 기꺼워하는 것을 볼 때, 그 돈의 밑천은 장래 자기에
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보다는 몽둥이를 가져다 주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
같았고, 밭에다 조를 심는다는 것은 불행의 씨를 심는다는 것만 같았기 때문
이다.
아다다는 그저 섬으로 왔거니 조개나 굴 같은 것을 캐어서 그날 그날을 살
아가야 할 것만이 수롱의 사랑을 받는 데 더할 수 없는 살림인 줄만 안다.
그래서 이러한 살림이 얼마나 즐거우랴! 혼잣속으로 축복을 하며 수롱을 위
하여 일층 벌기에 힘을 써야 할 것을 생각해 오던 것이다.
“고롬 논을 사재나? 밭이 싫으문?”
수롱은 아다다의 의견이 알고 싶어 이렇게 또 물었다.
그러나 아다다는 그냥 힘 없는 고개만 주억일 뿐이었다. 논을 산대도 그것은
꼭 같은 불행을 사는 데 있을 것이다. 돈이 있는 이상 어느 것이든지 간 사
기는 반드시 사고야 말 남편의 심사이었음을 머리를 흔들어 댔자 소용이 없
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근본 불행인 돈을 어찌할 수 없는 이상엔 잠시라
도 남편의 마음을 거슬리므로 불쾌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아는 때문이었다.
“흥! 논이 도흔(좋은) 줄은 너두 아누나 그러나 가난한 놈에겐 밭이 논보다
나앗디 나아.”
하고 수롱이는 기어이 밭을 사기로, 그 달음에(곧바로) 거간(흥정 붙이는 것
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내세웠다.

그 날 밤.
아다다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남편은 아무런 근심도 없는 듯이 세상 모르고 씩씩 초저녁부터 자 내건만,
아다다는 그저 돈 생각을 하면 장차 닥쳐올 불길한 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불을 붙안고 밤새도록 쥐어 틀며 아무리 생각을 해야 그 돈을 그
대로 두고는 수롱의 사랑 밑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믿기
지 않았다.
짧은 봄밤은 어느덧 새어,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처량히
들려 온다.
밤이 벌써 새누나 하니, 아다다의 마음은 더욱 조급하게 탔다. 이 밤으로 그
돈에 대한 처리를 하지 못하는 한, 내일은 기어이 거간이 밭을 흥정하여 가
지고 올 것이다. 그러면 그 밭에서 나는 곡식은 해마다 돈을 불켜(늘려) 줄
것이다. 그 때면 남편은 늘어 가는 돈에 따라 차차 눈은 어둡게 되어 점점
정은 멀어만 가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더 생각하기조차 무
서웠다.
닭의 울음소리에 따라 날은 자꾸만 밝아 온다. 바라보니 어느덧 창은 희그스
럼하게 비친다. 아다다는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옆에 누운 남편을 지긋
이 팔로 밀어 보았다. 그러나 움찍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못 믿기는 무엇이
있는 듯이 남편의 코에다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대고 숨소리를 엿들었다. 씨근
씨근 아직도 잠은 분명히 깨지 않고 있다. 아다다는 슬그머니 이불 속을 새
어 나왔다. 그리고 실겅 위에 석유통을 휩쓸어 그 속에다 손을 넣었다. 그리
하여 마침내 지전 뭉치를 더듬어서 손에 쥐고는 조심조심 발자국 소리를 죽
여 가며 살그머니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일찍이 아침을 지어 먹고 나무 새기를 뽑으러 간다고 바구니를 끼
고 바닷가로 나섰다. 아무도 보지 못하게 깊은 물 속에다 그 돈을 던져 버리
자는 것이다.
솟아오르는 아침 햇발을 받아 붉게 물들며 잔뜩 밀린 조수(아침에 밀려들었
다가 나가는 바닷물)는 거품을 부걱부걱 토하며 바람결조차 철썩철썩 해안은
부딪친다.
아다다는 그 바구니를 내려놓고 허리춤 속에서 지전 뭉치를 쥐어 들었다. 그
리고는 몇 겹이나 쌌는지 알 수 없는 헝겊 조각을 둘둘 풀었다. 헤집으니 1
원짜리, 5원짜리, 10원짜리 무수한 관 쓴 영감들이 나를 박대해서는 아니 된
다는 듯이, 모두를 마주 바라본다. 그러나 아다다는 너 같은 것을 버리는 데
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넘노는 물결 위에다 휙 내어 뿌렸다. 세찬
바닷바람에 차인 지전은 바람결 좇아 공중으로 올라가 팔랑팔랑 허공에서
재주를 넘어가며 산산이 헤어져, 멀리, 그리고 가깝게 하나씩 하나씩 물 위
에 떨어져서는 넘노는 물결조차 잠겼다 떴다 솟구막질을 한다.
어서 물 속으로 가라앉든디, 그렇지 않으면 흘러내려가든지 했으면 하고 아
다다는 멀거니 서서 기다리나 너저분하게 물 위를 덮은 지전 조각들은 차마
주인의 품을 떠나기가 싫은 듯이 잠겨 버렸는가 하면, 다시 기웃거리며 솟아
올라서는 물 위를 빙글빙글 돈다.
하더니 썰물이 잡히자부터 할 수 없는 듯이 슬금슬금 밑이 떨어져 흐르기
시작한다.
아다다는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밀려 내려가는 무수한 그 지전 조각들은,
자기의 온갖 불행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다시 돌아올 길이 없는 끝없는 한
바다로 내려갈 것을 생각할 때 아다다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꺼웠다.
그러나 그 돈이 완전히 눈앞에 보이지 않게 흘러내려가기까지에는 아직도
몇 분 동안을 요하여야(있어야) 할 것인데, 뒤에서 허덕거리는 발자국 소리
가 들리기에 돌아다보니 뜻밖에도 수롱이가 헐떡이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야! 야! 아다다야! 너 돈 돈 안 건새핸(가지고 갔냐)? 돈 돈 말이야, 돈…
…?”
청천의 벽력 같은 소리였다.
아다다는 어쩔 줄을 모르고 남편이 이까지 이르기 전에 어서어서 물결은 휩
쓸려 돈을 모두 거둬 가지고 흘러 버렸으면 하나, 물결은 안타깝게도 그닐그
닐 한가이 돈을 이끌고 흐를 뿐, 아다다는 그 돈이 어서 자기의 눈앞에서 자
취를 감추어 버리는 것을 보기 위하여 그닐거리고 있는 돈 위에 쏘아 박은
눈을 떼지 못하고 쩔쩔매는 사이, 마침내 달려오게 된 수롱이 눈에도 필경
그 돈은 띄고야 말았다.
뜻밖에도 바다 가운데 무수하게 지전 조각이 널려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둥
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 수롱이는 아다다에게 그 연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미친 듯이 옷을 훨훨 벗고 첨버덩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롱이는 돈이 엉키어 도는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겨우 가슴패기까지 잠기는 깊이에서 더 들어가지 못하고 흘러
내려가는 돈더미를 안타깝게도 바라보며 허우적허우적 달려갔다. 차츰 물결
은 휩쓸려 떠내려가는 속력이 빨라진다. 돈들은 수롱이더러 어디 달려와 보
라는 듯이 휙휙 솟구막질을 하며 흐른다. 그러나 물결이 세어질수록 더욱 걸
음발은 자유로 놀릴 수가 없게 된다. 더퍽더퍽 물과 싸움이나 하듯 엎어졌다
가는 일어서고 일어섰다가는 다시 엎어지며 달려가나 따를 길이 없다. 그대
로 덤비다가는 몸조차 물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 같아, 멀거니 서서 바라
보니 벌써 지전 조각들은 가물가물하고 물거품인지 지전인지도 분간할 수
없으리 만큼 먼 거리에서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눈앞
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휙 휙 하고 밀려 내려가는 거품진 물결뿐
이다.
수롱이는, 마지막으로 돈을 잃고 말았다고 아는 정도의 물결 위에 쏘아진 눈
을 돌릴 길이 없이 정신 빠진 사람처럼 그냥그냥 바라보고 섰더니, 쏜살같이
언덕 켠으로 달려오자 아무런 말도 없이, 벌벌 떨고 섰는 아다다의 중동(중
간 부분)을 사정 없이 발길로 제겼다.
“흥앗!”
소리가 났다고 아는 순간, 철썩 하고 감탕(진흙)이 사방으로 튀자 보니, 벌
써, 아다다는 해안의 감탕판에 등을 지고 쓰러져 있다.
“이―이―이…….”
수롱이는, 무슨 말인지를 하려고는 하나, 너무도 기에 차서 말이 되지를 않
는 듯 입만 너불거리다가 아다다가 움찍하는 것을 보더니, 아직도 살았느냐
는 듯이 번개같이 쫓아 내려가 다시 한 번 발길로 제겼다.
“폭!”
하는 소리와 같이 아다다는 가꿉선(경사진) 언덕을 떨어져 덜 덜 덜 굴러서
물 속으로 잠긴다.
한참 만에 보니 아다다는 복판도 한복판으로 밀려가서 솟구어 오르며 두 팔
을 물 밖으로 허우적거린다. 그러나 그 깊은 파도 속을 어떻게 헤어나랴! 아
다다는 그저 물 위를 둘레둘레 굴며 요동을 칠 뿐,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
었다. 어느덧 그 자체는 물 속에서 사라지고 만다.
주먹을 부르쥔 채 우상(나무·돌·쇠붙이·흙 따위로 만든 형상)같이 서서,
굽실거리는 물결만 그저 뚫어져라 쏘아보고 섰는 수롱이는, 그 물 속에 영원
히 잠들려는 아다다를 못 잊어함인가? 그렇지 않으면 흘러 버린 그 돈이 차
마 아까워서인가?
짝을 찾아 도는 갈매기떼들은 눈물 겨운 처참한 인생 비극이 여기에 일어난
줄도 모르고 ‘끼약끼약’ 하며 흥겨운 춤에 훨훨 날아다닌 깃 치는 소리와
같이 해안의 풍경만 도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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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0월 《개벽》에 발표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저 산(山)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다.

앞강(江)물 뒷강(江)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지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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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그, 아야”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밑을 찔렀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그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아내는 얼른 바늘을 빼고 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누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던 일가지를 팔꿈치로 고이고이 밀어 내려놓았다. 이윽고 눌렀던 손을 떼어보았다. 그 언저리는 인제 다시 피가 아니 나려는 것처럼 혈색이 없다 하더니, 그 희던 꺼풀 밑에 다시금 꽃물이 차츰차츰 밀려온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상처로부터 좁쌀 낟 같은 핏방울이 송송 솟는다. 또 아니 누를 수 없다. 이만하면 그 구멍이 아물었으려니 하고 손을 떼면 또 얼마 아니되어 피가 비치어 나온다.

인제 헝겊 오락지로 처매는 수밖에 없다. 그 상처를 누른채 그는 바느질고리에 눈을 주었다. 거기 쓸만한 오락지는 실패 밑에 있다. 그 실패를 밀어내고 그 오락지를 두 새끼손가락 사이에 집어올리려고 한동안 애를 썼다. 그 오락지는 마치 풀로 붙여둔 것같이 고리 밑에 착 달라붙어 세상 집혀지지 않는다. 그 두 손가락은 헛되이 그 오락지 위를 긁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왜 집혀지지를 않아!”

그는 마침내 울 듯이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것을 집어줄 사람이 없나 하는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텅 비어 있다. 어느 뉘 하나 없다. 호젓한 허영(虛影)만 그를 휘싸고 있다. 바깥도 죽은 듯이 고요하다.

시시로 퐁퐁 하고 떨어지는 수도의 물방울 소리가 쓸쓸하게 들릴 뿐. 문득 전등불이 광채(光彩)를 더하는 듯하였다. 벽상(壁上)에 걸린 괘종(掛鍾)의 거울이 번들하며, 새로 한 점을 가리키려는 시침(時針)이 위협하는 듯이 그의 눈을 쏜다. 그의 남편은 그때껏 돌아오지 않았었다.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된지는 벌써 오랜 일이다. 어느덧 7∼8년이 지났으리라. 하건만 같이 있어본 날을 헤아리면 단 일년이 될락말락 한다. 막 그의 남편이 서울서 중학을 마쳤을 제 그와 결혼하였고, 그러자 마자 고만 동경(東京)에 부급한 까닭이다.

거기서 대학까지 졸업을 하였다. 이 길고 긴 세월에 아내는 얼마나 괴로왔으며 외로왔으랴! 봄이면 봄, 겨울이면 겨울, 웃는 꽃을 한숨으로 맞았고 얼음 같은 베개를 뜨거운 눈물로 덥히었다.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쓸쓸할 제, 얼마나 그가 그리웠으랴!

하건만 아내는 이 모든 고생을 이를 악물고 참았었다. 참을 뿐이 아니라 달게 받았었다. 그것은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하는 생각이 그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준 까닭이었다. 남편이 동경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가 무엇인가? 자세히 모른다. 또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어찌하였든지 이 세상에 제일 좋고 제일 귀한 무엇이라 한다. 마치 옛날 이야기에 있는 도깨비의 부자(富者) 방망이 같은 것이어니 한다. 옷 나오라면 옷 나오고, 밥 나오라면 밥 나오고, 돈 나오라면 돈 나오고… 저 하고 싶은 무엇이든지 청해서 아니되는 것이 없는 무엇을, 동경에서 얻어가지고 나오려니 하였었다.

가끔 놀러오는 친척들이 비단옷 입은 것과 금지환(金指環) 낀 것을 볼 때에 그 당장엔 마음 그윽히 부러워도 하였지만 나중엔 '남편이 돌아오면…' 하고 그것에 경멸하는 시선을 던지었다.

남편이 돌아왔다. 한 달이 지나가고 두 달이 지나간다. 남편의 하는 행동이 자기가 기대하던 바와 조금 배치(背馳)되는 듯하였다. 공부 아니한 사람보다 조금도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다, 다르다면 다른 점도 있다. 남은 돈벌이를 하는데 그의 남편은 도리어 집안 돈을 쓴다. 그러면서도 어디인지 분주히 돌아다닌다. 집에 들면 정신없이 무슨 책을 보기도 하고 또는 밤새도록 무엇을 쓰기도 하였다.

'저러는 것이 참말 부자 방망이를 맨드는 것인가 보다'

아내는 스스로 이렇게 해석한다.

또 두어 달 지나갔다. 남편의 하는 일은 늘 한 모양이었다. 한 가지 더한 것은 때때로 깊은 한숨을 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무슨 근심이 있는 듯이 얼굴을 펴지 않았다. 몸은 나날이 축이 나 간다.

'무슨 걱정이 있는고?'

아내는 따라서 근심을 하게 되었다. 하고는 그 여윈 것을 보충하려고 갖가지로 애를 썼다. 곧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밥상에 맛난 반찬가지를 붇게 하며 또 고음 같은 것도 만들었다. 그런 보람도 없이 남편은 입맛이 없다 하며 그것을 잘 먹지도 않았었다.

또 몇 달이 지나갔다. 인제 출입을 뚝 끊고 늘 집에 붙어있다. 걸핏하면 성을 낸다. 입버릇 모양으로 화난다, 화난다 하였다.

어느 날 새벽, 아내가 어렴폿이 잠을 깨어, 남편의 누웠던 자리를 더듬어보았다. 쥐이는 것은 이불자락뿐이다. 잠결에도 조금 실망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잃은 것을 찾으려는 것처럼, 눈을 부시시 떴다.

책상 위에 머리를 쓰러뜨리고 두손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흐릿한 의식이 돌아옴에 따라, 남편의 어깨가 덜석덜석 움직임도 깨달았다. 흑 흑 느끼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아내는 정신을 바짝 차리었다. 불현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아내의 손은 가볍게 남편의 등을 흔들며 목에 걸리고 나오지 않는 소리로,

“왜 이러고 계셔요.”

라고 물어보았다.

“…”

남편은 아무 대답이 없다. 아내는 손으로 남편의 얼굴을 괴어들려고 할 즈음에, 그것이 뜨뜻하게 눈물에 젖는 것을 깨달았다.

또 한 두어 달 지나갔다. 처음처럼 다시 출입이 자주로왔다. 구역이 날 듯한 술 냄새가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입에서 나게 되었다. 그것은 요사이 일이다. 오늘 밤에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초저녁부터 아내는 별별 생각을 다하면서 남편을 고대고대하고 있었다. 지리한 시간을 속히 보내려고 치웠던 일 가지를 또 꺼내었다. 그것조차 뜻같이 아니되었다. 때때로 바늘이 헛되이 움직이었다. 마침내 그것에 찔리고 말았다.

“어데를 가서 이때껏 오시지 않아!”

아내는 이제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짜증을 내었다. 잠깐 그를 떠났던 공상과 환영이 다시금 그의 머리에 떠돌기 시작하였다. 이상한 꽃을 수놓은, 흰 보(褓) 위에 맛난 요리를 담은 접시가 번쩍인다. 여러 친구와 술을 권커니 잡거니 하는 광경이 보인다. 그의 남편은 미친 듯이 껄껄 웃는다.

나중에는 검은 휘장이 스르르 하는 듯이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더니 낭자(狼藉)한 요릿상만이 보이기도 하고, 술병만 희게 빛나기도 하고, 아까 그 기생이 한 팔로 땅을 짚고 진저리를 쳐가며 웃는 꼴이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남편이 길바닥에 쓰러져 우는 것도 보이었다.

“문 열어라!”

문득 대문이 덜컥 하고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부르는 듯하였다.

“녜.”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급히 마루로 나왔다. 잘못 신은, 발에 아니 맞는 신을 질질 끌면서 대문으로 달렸다. 중문은 아직 잠그지도 않았고 행랑방에 사람이 없지 않지마는 으례히 깊은 잠에 떨어졌을 줄 알고 뛰어나감이었다. 가느름한 손이 어둠 속에서 희게 빗장을 잡고 한참 실랑이를 한다. 대문은 열렸다.

밤바람이 선득하게 얼굴에 안친다. 문 밖에는 아무도 없다! 온 골목에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다. 검푸른 밤 빛이 허연 길 위에 그물그물 깃들었을 뿐이었다.

아내는 무엇에 놀란 사람 모양으로 한참 멀거니 서 있었다. 문득 급거히 대문을 닫친다. 마치 그 열린 사이로 악마나 들어올 것처럼.

“그러면 바람 소리였구먼.”

하고 싸늘한 뺨을 쓰다듬으며 해쭉 웃고 발길을 돌리었다.

“아니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혹 내가 잘못 보지를 않았나?… 길바닥에나 쓰러져 있었으면 보이지도 않을 터야…”

중간문까지 다다르자 별안간 이런 생각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대문을 또 좀 열어볼까?… 아니야, 내가 헛들었지. 그래도 혹… 아니야, 내가 헛들었지.”

망설거리면서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저도 모를 사이에 마루까지 올라왔다. 매우 기묘한 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번쩍인다.

'내가 대문을 열었을 제 나 몰래 들어오지나 않았나?…'

과연 방안에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확실히 사람의 기척이 있다. 어른에게 꾸중 모시러 가는 어린애처럼 조심조심 방문 앞에 왔다. 그리고 문간 아래로 손을 대며 하염없이 웃는다. 그것은 제 잘못을 용서해줍시사 하는 어린애 같은 웃음이었다. 조심조심 방문을 열었다. 이불이 어째 움직움직하는 듯하였다.

“나를 속이랴고 이불을 쓰고 누웠구먼.”

하고 마음속으로 소곤거렸다. 가만히 내려앉는다.

그 모양이 이것을 건드려서는 큰일이 나지요 하는 듯하였다. 이불을 펄쩍 쳐들었다. 비인 요가 하얗게 드러난다. 그제야 확실히 아니 온 줄 안 것처럼,

“아니 왔구먼, 안 왔어!”

라고 울 듯이 부르짖었다.

남편이 돌아오기는 새로 두 점이 훨씬 지난 뒤였다. 무엇이 털썩하는 소리가 들리고 잇달아,

“아씨, 아씨!”

라고 부르는 소리가 귀를 때릴 때에야 아내는 비로소 아직도 앉았을 자기가 이불 위에 쓰러져있음을 깨달았다. 기실, 잠귀 어두운 할멈이 대문을 열었으리만큼 아내는 깜박 잠이 깊이 들었었다. 하건만 그는 몽경(夢境 : 꿈 속 - 편집자 주*)에서 방황하는 정신을 당장에 수습하였다. 두어 번 얼굴을 쓰다듬자 불현듯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한 다리를 마루 끝에 걸치고 한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있다. 숨소리가 씨근씨근 한다.

막 구두를 벗기고 일어나 할멈은 검붉은 상을 찡그려 붙이며,

“어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세요.”

라고 한다.

“응, 일어나지.”

나리는 혀를 억지로 돌리어 코와 입으로 대답을 하였다. 그래도 몸은 꿈적도 않는다. 도리어 그 개개 풀린 눈을 자려는 것처럼 스르르 감는다. 아내는 눈만 비비고 서 있다.

“어서 일어나셔요. 방으로 들어가시라니까.”

이번에는 대답조차 아니한다. 그 대신 무엇을 잡으려는 것처럼 손을 내어젓더니,

“물, 물, 냉수를 좀 주어.”

라고 중얼거렸다.

할멈은 얼른 물을 떠다 이취자(泥醉者 : 진흙처럼 취한 사람, 즉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 - 편집자 주*)의 코밑에 놓았건만, 그 사이에 벌써 아까 청(請)을 잊은 것같이 취한 이는 물을 먹으려고도 않는다.

“왜 물을 아니 잡수셔요.”

곁에서 할멈이 깨우쳤다.

“응 먹지 먹어.”

하고, 그제야 주인은 한 팔을 짚고 고개를 든다. 한꺼번에 물 한 대접을 다 들이켜버렸다. 그리고는 또 쓰러진다.

“에그, 또 눕네.”

하고, 할멈은 우물로 기어드는 어린애를 안으려는 모양으로 두 손을 내어민다.

“할멈은 고만 가 자게.”

주인은 귀치않다는 듯이 말을 한다.

이를 어찌해 하는 듯이 멀거니 서 있는 아내도, 할멈이 고만 갔으면 하였다. 남편을 붙들어 일으킬 생각이야 간절하였지마는, 할멈이 보는데 어찌 그럴 수 없는 것 같았다. 혼인한 지가 7∼8년이 되었으니 그런 파수(破羞 : 부끄러움이 없어지는 것 - 편집자 주*)야 되었으련만 같이 있어본 날을 꼽아보면, 그는 아직 갓 시집온 색시였다.

“할멈은 가 자게.”

란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입술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음 그윽히 할멈이 돌아가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좀 일으켜드려야지.”

가기는커녕, 이런 말을 하고, 할멈은 선웃음을 치면서 마루로 부득부득 올라온다. 그 모양은, 마치 주인 나리가 약주가 취하시거든, 방에까지 모셔다드려야 제 도리에 옳지요, 하는 듯하였다.

“자아, 자아.”

할멈은 아씨를 보고 히히 웃어가며, 나리의 등 밑으로 손을 넣는다.

“왜 이래, 왜 이래. 내가 일어날 테야.”

하고, 몸을 움직이더니, 정말 주인이 부시시 일어난다. 마루를 쾅쾅 눌러디디며, 비틀비틀, 곧 쓰러질 듯한 보조(步調)로 방문을 향하여 걸어간다. 와지끈하며 문을 열어젖히고는 방안으로 들어간다. 아내도 뒤따라 들어왔다. 할멈은 중간턱을 넘어설 제, 몇 번 혀를 차고는, 저 갈 데로 가버렸다.

벽에 엇비슷하게 기대어있는 남편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의 말라붙은 관자놀이에 펄떡거리는 푸른 맥(脈)을 아내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남편 곁으로 다가온다. 아내의 한 손은 양복 깃을, 또 한 손은 그 소매를 잡으며 화(和)한 목성으로,

“자아, 벗으셔요.”

하였다.

남편은 문득 미끄러지는 듯이 벽을 타고 내려앉는다. 그의 쭉 뻗친 발 끝에 이불자락이 저리로 밀려간다.

“에그, 왜 이리 하셔요. 벗자는 옷은 아니 벗으시고.”

그 서슬에 넘어질 뻔한 아내는 애닯게 부르짖었다. 그러면서도 같이 따라 앉는다. 그의 손은 또 옷을 잡았다.

“옷이 구겨집니다. 제발 좀 벗으셔요.”

라고 아내는 애원을 하며, 옷을 벗기려고 애를 쓴다. 하나, 취한 이의 등이 천근(千斤)같이 벽에 척 들어붙었으니 벗겨질 리(理)가 없다. 애를 쓰다쓰다 옷을 놓고 물러앉으며,

“원 참, 누가 술을 이처럼 권하였노.”

라고 짜증을 낸다.

“누가 권하였노? 누가 권하였노? 흥 흥.”

남편은 그 말이 몹시 귀에 거슬리는 것처럼 곱삶는다.

“그래, 누가 권했는지 마누라가 좀 알아내겠소?”

하고 껄껄 웃는다. 그것은 절망의 가락을 띤, 쓸쓸한 웃음이었다. 아내도 따라 방긋 웃고는 또 옷을 잡으며,

“자아, 옷이나 먼저 벗으셔요.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오늘 밤에 잘 주무시면 내일 아침에 아르켜 드리지요.”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야. 왜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어. 할 말이 있거든 지금 해!”

“지금은 약주가 취하셨으니, 내일 약주가 깨시거든 하지요.”

“무엇? 약주가 취해서?”

하고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며,

“천만에, 누가 술이 취했단 말이요. 내가 공연히 이러지, 정신은 말똥말똥 하오. 꼭 이야기 하기 좋을 만해. 무슨 말이든지… 자아.”

“글쎄, 왜 못 잡수시는 약주를 잡수셔요. 그러면 몸에 축이나지 않아요.”

하고 아내는 남편의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씻는다.

이취자(泥醉者)는 머리를 흔들며,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을 듣자는 것이 아니야.”

하고 아까 일을 추상하는 것처럼, 말을 끊었다가 다시금 말을 이어,

“옳지, 누가 나에게 술을 권했단 말이요? 내가 술이 먹고 싶어서 먹었단 말이요?”

“자시고 싶어 잡수신 건 아니지요. 누가 당신께 약주를 권하는지 내가 알아낼까요? 저… 첫째는 홧증이 술을 권하고 둘째는 '하이칼라'가 약주를 권하지요.”

아내는 살짝 웃는다. 내가 어지간히 알아맞췄지요 하는 모양이었다.

남편은 고소(苦笑)한다.

“틀렸소, 잘못 알았소. 홧증이 술을 권하는 것도 아니고, '하이칼라'가 술을 권하는 것도 아니요. 나에게 권하는 것은 따로 있어. 마누라가, 내가 어떤 '하이칼라'한테나 홀려 다니거나, 그 '하이칼라'가 늘 내게 술을 권하거니 하고 근심을 했으면 그것은 헛걱정이지. 나에게 '하이칼라'는 아무 소용도 없소. 나의 소용은 술뿐이요. 술이 창자를 휘돌아, 이것저것을 잊게 맨드는 것을 나는 취(取)할 뿐이요.”

하더니, 홀연 어조(語調)를 고쳐 감개무량하게,

“아아, 유위유망(有爲有望)한 머리를 '알코올'로 마비 아니 시킬 수 없게 하는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하고, 긴 한숨을 내어쉰다. 물큰물큰한 술냄새가 방안에 흩어진다.

아내에게는 그 말이 너무 어려웠다. 고만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벽이 자기와 남편 사이에 깔리는 듯하였다. 남편의 말이 길어질 때마다 아내는 이런 쓰디쓴 경험을 맛보았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윽고 남편은 기막힌 듯이 웃는다.

“흥 또 못 알아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홧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사회란 무엇인가? 아내는 또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리집 이름이어니 한다.

“조선에 있어도 아니 다니면 그만이지요.”

남편은 또 아까 웃음을 재우친다. 술이 정말 아니 취한 것 같이 또렷또렷한 어조로,

“허허, 기막혀. 그 한 분자(分子)된 이상에야 다니고 아니 다니는 게 무슨 상관이야. 집에 있으면 아니 권하고, 밖에 나가야 권하는 줄 아는가보아. 그런 게 아니야. 무슨 사회 사람이 있어서 밖에만 나가면 나를 꼭 붙들고 술을 권하는 게 아니야… 무어라 할까… 저 우리 조선사람으로 성립된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아니 못 먹게 한단 말이요.

…어째 그렇소?… 또 내가 설명을 해드리지. 여기 회를 하나 꾸민다 합시다. 거기 모이는 사람놈 치고 처음은 민족을 위하느니, 사회를 위하느니 그러는데, 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느니 아니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하다가 단 이틀이 못되어, 단 이틀이 못되어…”

한층 소리를 높이며 손가락을 하나씩 둘씩 꼽으며,

“되지 못한 명예 싸움, 쓸데없는 지위 다툼질,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내 권리가 많으니 네 권리 적으니…밤낮으로 서로 찢고 뜯고 하지, 그러니 무슨 일이 되겠소. 회(會)뿐이 아니라, 회사이고 조합이고… 우리 조선놈들이 조직한 사회는 다 그 조각이지.

이런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이요. 하려는 놈이 어리석은 놈이야. 적이 정신이 바루 박힌 놈은 피를 토하고 죽을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술밖에 먹을 게 도무지 없지. 나도 전자에는 무엇을 좀 해보겠다고 애도 써보았어. 그것이 모다 수포야. 내가 어리석은 놈이었지.

내가 술을 먹고 싶어 먹는 게 아니야. 요사이는 좀 낫지마는 처음 배울 때에는 마누라도 아다시피 죽을 애를 썼지. 그 먹고 난 뒤에 괴로운 것이야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먹은 것이 다 돌아올라오고 - 그래도 아니 먹은 것보담 나았어. 몸은 괴로와도 마음은 괴롭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 사회에서 할 것은 주정군 노릇밖에 없어…”

“공연히 그런 말 말아요. 무슨 노릇을 못해서 주정군 노릇을 해요! 남이라서…”

아내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흥분이 되어 열기(熱氣) 있는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불쑥 이런 말을 하였다. 그는 제 남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어니 한다. 따라서 어느 뉘보다 제일 잘 될 줄 믿는다. 몽롱하나마 그의 목적이 원대하고 고상한 것도 알았다.

얌전하던 그가 술을 먹게 된 것은 무슨 일이 맘대로 아니되어 화풀이로 그러는 줄도 어렴폿이 깨달았다. 그러나 술은 노상 먹을 것이 아니다. 그러면 패가망신하고 만다. 그러므로 하루바삐 그 화가 풀리었으면, 또다시 얌전하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날 때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이 꼭 올 줄 믿었다. 오늘부터는, 내일부터는… 하건만, 남편은 어제도 술이 취하였다. 오늘도 한 모양이다. 자기의 기대는 나날이 틀려간다. 좇아서 기대에 대한 자신도 엷어간다. 애닯고 원(寃)한 생각이 가끔 그의 가슴을 누른다. 더구나 수척해가는 남편의 얼굴을 볼 때에 그런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지금 저도 모르게 흥분한 것이 또한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못 알아듣네그려. 참, 사람 기막혀. 본정신 가지고는 피를 토하고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하지, 하루라도 살 수가 없단 말이야. 흉장(胸臟)이 막혀서 못 산단 말이야. 에엣, 가슴 답답해.”

라고 남편은 소리를 지르고 괴로와서 못 견디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미친 듯이 제 가슴을 쥐어뜯는다.

“술 아니 먹는다고 흉장이 막혀요?”

남편의 하는 짓은 본체만체 하고 아내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부르짖었다.

그 말에 몹시 놀랜 것처럼 남편은 어이없이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 다음 순간에는 말할 수 없는 고뇌(苦惱)의 그림자가 그의 눈을 거쳐간다.

“그르지, 내가 그르지 너 같은 숙맥(菽麥)더러 그런 말을 하는 내가 그르지. 너한테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으려는 내가 그르지. 후우.”

스스로 탄식한다.

“아아 답답해!”

-문득 기막힌 듯이 외마디 소리를 치고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한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하였던고? 아내는 불시에 후회하였다. 남편의 저고리 뒷자락을 잡으며 안타까운 소리로,

“왜 어디로 가셔요. 이 밤중에 어디를 나가셔요. 내가 잘못하였습니다. 인제는 다시 그런 말을 아니하겠습니다. …그러게 내일 아침에 말을 하자니까…”

“듣기 싫어, 놓아, 놓아요.”

하고 남편은 아내를 떠다밀치고 밖으로 나간다. 비틀비틀 마루 끝까지 가서는 털썩 주저앉아 구두를 신기 시작한다.

“에그, 왜 이리 하셔요. 인제 다시 그런 말을 아니한대도…

아내는 뒤에서 구두 신으려는 남편의 팔을 잡으며 말을 하였다. 그의 손은 떨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담박에 눈물이 쏟아질 듯하였다.

“이건 왜 이래, 저리로 가!”

배앝는 듯이 말을 하고 휙 뿌리친다. 남편의 발길이 뚜벅뚜벅 중문에 다다랐다. 어느덧 그 밖으로 사라졌다. 대문 빗장 소리가 덜컥 하고 난다. 마루 끝에 떨어진 아내는 헛되이 몇 번,

“할멈! 할멈!”

하고 불렀다.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는 구두 소리는 점점 멀어간다. 발자취는 어느덧 골목 끝으로 사라져버렸다. 다시금 밤은 적적히 깊어간다.

“가버렸구먼, 가버렸어!”

그 구두 소리를 영구히 아니 잃으려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내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는 듯이 부르짖었다. 그 소리가 사라짐과 함께 자기의 마음도 사라지고, 정신도 사라진 듯하였다. 심신(心身)이 텅 비어진 듯하였다. 그의 눈은 하염없이 검은 밤 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사회란 독(毒)한 꼴을 그려보는 것같이.

쏠쏠한 새벽 바람이 싸늘하게 가슴에 부딪친다. 그 부딪치는 서슬에 잠 못 자고 피곤한 몸이 부서질 듯이 지긋하였다.

죽은 사람에게서뿐 볼 수 있는 해쓱한 얼굴이 경련적으로 떨며 절망한 어조로 소근거렸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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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어째 없을까?"

아내가 장문을 열고 무엇을 찾더니 입안말로 중얼거린다.

"무엇이 없어?"

나는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책장만 뒤적뒤적하다가 물어 보았다.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았는데……."

"……"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 하려는 것을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이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는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 창고(典當局倉庫)에 들이밀거나 고물상 한구석에 세워 두고 돈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라.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 폈던 책을 덮으며 후― 한숨을 내쉬었다.

봄은 벌써 반이나 지났건마는 이슬을 실은 듯한 밤기운이 방구석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나와 사람에게 안기고 비가 오는 까닭인지 밤은 아직 깊지 않건만 인적조차 끊어지고 온 천지가 빈 듯이 고요한데 투닥투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한없는 구슬픈 생각을 자아낸다.

"빌어먹을 것 되는 대로 되어라."

나는 점점 견딜 수 없어 두 손으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며 중얼거려 보았다. 이 말이 더욱 처량한 생각을 일으킨다. 나는 또 한번, "후―" 한숨을 내쉬며 왼팔을 베고 책상에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이 순간에 오늘 지낸 일이 불현듯 생각이 난다.

늦게야 점심을 마치고 내가 막 궐련〔卷煙〕한 개를 피워 물 적에 한성은행(漢城銀行) 다니는 T가 공일이라고 놀러 왔었다.

친척은 다 멀지 않게 살아도 가난한 꼴을 보이기도 싫고 찾아갈 적마다 무엇을 뀌어 내라고 조르지도 아니하였건만 행여나 무슨 구차한 소리를 할까 봐서 미리 방패막이를 하고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여 나는 발을 끊고 따라서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다만 이 T는 촌수가 가까운 까닭인지 자주 우리를 방문하였다.

그는 성실하고 공순하며 소소한 소사(小事)에 슬퍼하고 기뻐하는 인물이었다. 동년배(同年輩)인 우리 둘은 늘 친척간에 비교(比較) 거리가 되었었다. 그리고 나의 평판이 항상 좋지 못했다.

"T는 돈을 알고 위인이 진실해서 그 애는 돈푼이나 모을 것이야! 그러나 K(내 이름)는 아무짝에도 못 쓸 놈이야. 그 잘난 언문(諺文) 섞어서 무어라고 끄적거려 놓고 제 주제에 무슨 조선에 유명한 문학가가 된다니! 시러베아들놈!"

이것이 그네들의 평판이었다. 내가 문학인지 무엇인지 하는 소리가 까닭 없이 그네들의 비위에 틀린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네들의 생일이나 혹은 대사(大事) 때에 돈 한푼 이렇다는 일이 없고 T는 소위 착실히 돈벌이를 하여 가지고 국수밥소래나 보조를 하는 까닭이다.

"얼마 아니 되어 T는 잘살 것이고 K는 거지가 될 것이니 두고 보아!"

오촌 당숙은 이런 말씀까지 하였다 한다. 입 밖에는 아니 내어도 친부모 친형제까지라도 심중(心中)으로는 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부모는 달라서 화가 나시면, "네가 그리하다가는 말경(末境)에 비렁뱅이가 되고 말 것이야"라고 꾸중은 하셔도, "사람이란 늦복 모르느니라" "그런 사람은 또 그렇게 되느니라" 하시는 것이 스스로 위로하는 말씀이고 또 며느리를 위로하는 말씀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하는 수 없는 놈이라고 단념(斷念)을 하시면서 그래도 잘되기를 바라시고 축원하시는 것을 알겠더라.

여하간 이만하면 T의 사람됨을 가히 알 수가 있다. 그러고 그가 우리집에 올 것 같으면 지어서 쾌활하게 웃으며 힘써 자미스러운 이야기를 하였다. 단둘이 고적(孤寂)하게 그날그날을 보내는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반가웠었다.

오늘도 그가 활발하게 집에 쑥 들어오더니 신문지에 싼 기름한 것을 '이것 봐라' 하는 듯이 마루 위에 올려놓고 분주히 구두끈을 끄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물어 보았다.

"저― 제 처의 양산(洋傘)이야요. 쓰던 것이 벌써 다 낡았고 또 살이 부러졌다나요."

그는 구두를 벗고 마루에 올라서며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여 벙글벙글하면서 대답을 한다. 그는 나의 아내를 보며 돌연히,

"아주머니 좀 구경하시렵니까?"

하더니 싼 종이와 집을 벗기고 양산을 펴 보인다. 흰 비단 바탕에 두어 가지 매화를 수놓은 양산이었다.

"검정이는 좋은 것이 많아도 너무 칙칙해 보이고…… 회색이나 누렁이는 하나도 그것이야 싶은 것이 없어서 이것을 산걸요."

그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살 수가 있나' 하는 뜻을 보이려고 애를 쓰며 이런 발명까지 한다.

"이것도 퍽 좋은데요."

이런 칭찬을 하면서 양산을 펴 들고 이리저리 홀린 듯이 들여다보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나도 이런 것을 하나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역력(歷歷)히 보인다.

나는 갑자기 불쾌한 생각이 와락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오며 아내의 양산 보는 양을 빙그레 웃고 바라보고 있는 T에게,

"여보게, 방에 들어오게그려, 우리 이야기나 하세."

T는 따라 들어와 물가폭등에 대한 이야기며 자기의 월급이 오른 이야기며 주권(株券)을 몇 주 사두었더니 꽤 이익이 남았다든가 이번 각 은행 사무원 경기회(競技會)에서 자기가 우월한 성적을 얻었다든가 이런 것 저런 것 한참 이야기하다가 돌아갔었다.

T를 보내고 책상을 향하여 짓던 소설의 결미(結尾)를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여보!"

아내의 떠는 목소리가 바로 내 귀 곁에서 들린다. 핏기 없는 얼굴에 살짝 붉은빛이 돌며 어느결에 내 곁에 바싹 다가앉았더라.

"당신도 살 도리를 좀 하셔요."

"……"

나는 또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에 번쩍이며 불쾌한 생각이 벌컥 일어난다. 그러나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이 묵묵히 있었다.

"우리도 남과 같이 살아 보아야지요!"

아내가 T의 양산에 단단히 자극(刺戟)을 받은 것이다. 예술가의 처 노릇을 하려는 독특(獨特)한 결심이 있는 그는 좀처럼 이런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무엇에 상당한 자극만 받으면 참고 참았던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이런 소리를 들을 적마다 '그럴 만도 하다'는 동정심이 없지 아니하나 심사가 어쩐지 좋지 못하였다. 이번에도 '그럴 만도 하다'는 동정심이 없지 아니하되 또한 불쾌한 생각을 억제키 어려웠다. 잠깐 있다가 불쾌한 빛을 드러내며,

"급작스럽게 살 도리를 하라면 어찌할 수가 있소. 차차 될 때가 있겠지!"

"아이구, 차차란 말씀 그만두구려, 어느 천년에……."

아내의 얼굴에 붉은빛이 짙어지며 전에 없던 흥분한 어조로 이런 말까지 하였다. 자세히 보니 두 눈에 은은히 눈물이 괴었더라.

나는 잠시 멍멍하게 있었다. 성낸 불길이 치받쳐 올라온다. 나는 참을 수 없다.

"막벌이꾼한테 시집을 갈 것이지 누가 내게 시집을 오랬어! 저 따위가 예술가의 처가 다 뭐야!"

사나운 어조로 몰풍스럽게 소리를 꽥 질렀다.

"에그……!"

살짝 얼굴빛이 변해지며 어이없이 나를 보더니 고개가 점점 수그러지며 한 방울 두 방울 방울방울 눈물이 장판 위에 떨어진다.

나는 이런 일을 가슴에 그리며 그래도 내일 아침거리를 장만하려고 옷을 찾는 아내의 심중을 생각해 보니, 말할 수 없는 슬픈 생각이 가을 바람과 같이 설렁설렁 심골(心骨)을 분지르는 것 같다.

쓸쓸한 빗소리는 굵었다 가늘었다 의연(依然)히 적적한 밤공기에 더욱 처량히 들리고 그을음 앉은 등피(燈皮) 속에서 비추는 불빛은 구름에 가린 달빛처럼 우는 듯 조는 듯 구차(苟且)히 얻어 산 몇 권 양책(洋冊)의 표제(表題) 금자가 번쩍거린다.

장 앞에 초연히 서 있던 아내가 무엇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들릴 듯 말 듯 목 안의 소리로,

"으흐…… 옳지 참 그날……."

"찾었소!"

"아니야요, 벌써…… 저 인천(仁川) 사시는 형님이 오셨던 날……."

"……"

아내가 애써 찾던 그것도 벌써 전당포의 고운 먼지가 앉았구나! 종지 하나라도 차근차근 아랑곳하는 아내가 그것을 잡혔는지 아니 잡혔는지 모르는 것을 보면 빈곤(貧困)이 얼마나 그의 정신을 물어뜯었는지 가히 알겠다.

"……"

"……"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가슴이 어째 답답해지며 누구하고 싸움이나 좀 해보았으면 소리껏 고함이나 질러 보았으면 실컷 울어 보았으면 하는 일종 이상한 감정이 부글부글 피어 오르며, 전신에 이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듯 옷이 어째 몸에 끼여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이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점점 구차한 살림에 싫증이 나서 못 견디겠지?"

아내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게 정신을 잃고 섰다가 그 게슴츠레한 눈이 둥그래지며,

"네에? 어째서요?"

"무얼 그렇지!"

"싫은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이렇게 말이 오락가락함을 따라 나는 흥분의 도(度)가 점점 짙어 간다. 그래서 아내가 떨리는 소리로,

"어째 그런 줄 아셔요?"

하고 반문할 적에,

"나를 숙맥(菽麥)으로 알우?"

라고, 격렬(激烈)하게 소리를 높였다.

아내는 살짝 분한 빛이 눈에 비치어 물끄러미 나를 들여다본다. 나는 괘씸하다는 듯이 흘겨보며,

"그러면 그것 모를까! 오늘날까지 잘 참아 오더니 인제는 점점 기색이 달라지는걸 뭐! 물론 그럴 만도 하지마는!"

이런 말을 하는 내 가슴에는 지난 일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얼른얼른 나타난다.

육 년 전에(그때 나는 십육 세이고 저는 십팔 세였다) 우리가 결혼한 지 얼마 아니 되어 지식에 목마른 나는 지식의 바닷물을 얻어 마시려고 표연히 집을 떠났었다. 광풍(狂風)에 나부끼는 버들잎 모양으로 오늘은 지나(支那) 내일은 일본으로 굴러다니다가 금전의 탓으로 지식의 바닷물도 흠씬 마셔 보지도 못하고 반거들충이가 되어 집에 돌아오고 말았다. 내게 시집 올 때에는 방글방글 피려는 꽃봉오리 같던 아내가 어느결에 기울어 가는 꽃처럼 두 뺨에 선연(鮮姸)한 빛이 스러지고 이마에는 벌써 두어 금 가는 줄이 그리어졌다.

처가덕으로 집간도 장만하고 세간도 얻어 우리는 소위 살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내었지마는 한푼 나는 데 없는 살림이라 한 달 가고 두 달 갈수록 점점 곤란해질 따름이었다. 나는 보수(報酬)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창작으로 해가 지고 날이 새며 쌀이 있는지 나무가 있는지 망연케 몰랐다. 그래도 때때로 맛있는 반찬이 상에 오르고 입은 옷이 과히 추하지 아니함은 전혀 아내의 힘이었다. 전들 무슨 벌이가 있으리요, 부끄럼을 무릅쓰고 친가에 가서 눈치를 보아 가며 구차한 소리를 하여 가지고 얻어 온 것이었다. 그것도 한번 두번 말이지 장구한 세월에 어찌 늘 그럴 수가 있으랴! 말경에는 아내가 가져온 세간과 의복에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잡히고 파는 것도 나는 알은체도 아니하였다. 그가 애를 쓰며 퉁명스러운 옆집 할멈에게 돈푼을 주고 시켰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그는 나의 성공만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믿고 빌었었다. 어느 때에는 내가 무엇을 짓다가 마음에 맞지 아니하여 쓰던 것을 집어던지고 화를 낼 적에,

"왜 마음을 조급하게 잡수셔요! 저는 꼭 당신의 이름이 세상에 빛날 날이 있을 줄 믿어요.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이 장래에 잘 될 근본이야요."

하고 그는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로한 적도 있었다.

내가 외국으로 돌아다닐 때에 소위 신풍조(新風潮)에 띄어 까닭 없이 구식 여자가 싫어졌다. 그래서 나의 일찍이 장가든 것을 매우 후회하였다. 어떤 남학생과 어떤 여학생이 서로 연애를 주고받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마다 공연히 가슴이 뛰놀며 부럽기도 하고 비감(悲感)스럽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낫살이 들어갈수록 그런 생각도 없어지고 집에 돌아와 아내를 겪어 보니 의외에 그에게 따뜻한 맛과 순결한 맛을 발견하였다. 그의 사랑이야말로 이기적 사랑이 아니고 헌신적(獻身的) 사랑이었다. 이런 줄을 점점 깨닫게 될 때에 내 마음이 얼마나 행복스러웠으랴! 밤이 깊도록 다듬이를 하다가 그만 옷 입은 채로 쓰러져 곤하게 자는 그의 파리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

하고 감격이 극하여 눈물을 흘린 일도 있었다.

내가 알다시피 내가 별로 천품은 없으나 어쨌든 무슨 저작가(著作家)로 몸을 세워 보았으면 하여 나날이 창작과 독서에 전심력을 바쳤다. 물론 아직 남에게 인정(認定)될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자연 일상생활이 말유(末由)하게 되었다.

이런 곤란에 그는 근 이 년 견디어 왔건마는 나의 하는 일은 오히려 아무 보람이 없고 방 안에 놓였던 세간이 줄어 가고 장농에 찼던 옷이 거의 다 없어졌을 뿐이다.

그 결과 그다지 견딜성 있던 저도 요사이 와서는 때때로 쓸데없는 탄식을 하게 되었다. 손잡이를 잡고 마루 끝에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먼산만 바라보기도 하며 바느질을 하다 말고 실심(失心)한 사람 모양으로 멍멍히 앉았기도 하였다. 창경(窓鏡)으로 비치는 어스름한 햇빛에 나는 흔히 그의 눈물 머금은 근심 있는 눈을 발견하였다. 이럴 때에는 말할 수 없는 쓸쓸한 생각이 들며 일없이,

"마누라!"

하고 부르면 그는 몸을 흠칫 하고 고개를 저리로 돌리어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으며,

"네에?"

하고 울음에 떨리는 가는 대답을 한다. 나는 등에 찬물을 끼얹는 듯 몸이 으쓱해지며 처량한 생각이 싸늘하게 가슴에 흘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비(自卑)하기 쉬운 마음이 더욱 심해지며,

'내가 무자격한 탓이다.'

하고 스스로 멸시를 하고 나니 더욱 견딜 수 없다.

'그럴 만도 하다.'

는 동정심이 없지 아니하되 그래도 그만 불쾌한 생각이 일어나며,

'계집이란 할 수 없어.'

혼자 이런 불평을 중얼거리었다.

환등(幻燈) 모양으로 하나씩 둘씩 이런 일이 가슴에 나타나니 무어라고 말할 용기조차 없어졌다. 나의 유일의 신앙자(信仰者)이고 위로자이던 저까지 인제는 나를 아니 믿게 되고 말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네가 육 년 동안 내 살을 깎고 저미었구나! 이 원수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매 그의 불 같던 사랑까지 엷어져 가는 것 같았다. 아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 같았다. 나는 감상적으로 허둥허둥하며,

"낸들 마누라를 고생시키고 싶어 시켰겠소! 비단옷도 해주고 싶고 좋은 양산도 사주고 싶어요! 그러길래 왼종일 쉬지 않고 공부를 아니 하우. 남 보기에는 편편히 노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안해! 본들 모른단 말이요."

나는 점점 강한 가면(假面)을 벗고 약한 진상(眞相)을 드러내며 이와 같은 가소로운 변명까지 하였다.

"왼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비소(誹笑)하고 모욕하여도 상관이 없지만 마누라까지 나를 아니 믿어 주면 어찌한단 말이요."

내 말에 스스로 자극이 되어 마침내,

"아아."

길이 탄식을 하고 그만 쓰러졌다. 이 순간에 고개를 숙이고 아마 하염없이 입술만 물어뜯고 있던 아내가 홀연,

"여보!"

울음 소리를 떨면서 무너지는 듯이 내 얼굴에 쓰러진다.

"용서……."

하고는 북받쳐 나오는 울음에 말이 막히고 불덩이 같은 두 뺨이 내 얼굴을 누르며 흑흑 느끼어 운다. 그의 두 눈으로부터 샘솟듯 하는 눈물이 제 뺨과 내 뺨 사이를 따뜻하게 젖어 퍼진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린다. 뒤숭숭하던 생각이 다 이 뜨거운 눈물에 봄눈 슬듯 스러지고 말았다.

한참 있다가 우리는 눈물을 씻었다. 내 속이 얼마큼 시원한 듯하였다.

"용서하여 주셔요!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어요."

이런 말을 하는 아내는 눈물에 불어오른 눈꺼풀을 아픈 듯이 꿈적거린다.

"암만 구차하기로니 싫증이야 날까요! 나는 한번 먹은 마음이 있는데……."

가만가만히 변명을 하는 아내의 눈물 흔적이 어룽어룽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겨우 심신이 가뜬하였다.

어제 일로 심신이 피곤하였던지 그 이튿날 늦게야 잠을 깨니 간밤에 오던 비는 어느결에 그치었고 명랑한 햇발이 미닫이에 높았더라. 아내가 다시금 장문을 열고 잡힐 것을 찾을 즈음에 누가 중문을 열고 들어온다. 우리는 누군가 하고 귀를 기울일 적에 밖에서,

"아씨!"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는 처가에서 부리는 할멈이었다. 오늘이 장인 생신이라고 어서 오라는 말을 전한다.

"오늘이야! 참 옳지, 오늘이 이월 열엿샛날이지, 나는 깜빡 잊었어!"

"원 아씨는 딱도 하십니다. 어쩌면 아버님 생신을 잊으신단 말씀이요. 아무리 살림이 자미가 나시더래도……."

시큰둥한 할멈은 선웃음을 쳐가며 이런 소리를 한다.

가난한 살림에 골몰하느라고 자기 친부의 생신까지 잊었는가 하매 아내의 정지(情地)가 더욱 측은하였다.

"오늘이 본가 아버님 생신이라요. 어서 오시라는데……."

"어서 가구려……."

"당신도 가셔야지요. 우리 같이 가셔요."

하고 아내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힌다.

나는 처가에 가기가 매우 싫었었다. 그러나 아니 가는 것도 내 도리가 아닐 듯하여 하는 수 없이 두루마기를 입었다.

아내는 머뭇머뭇하며 양미간을 보일 듯 말 듯 찡그리다가 곁눈으로 살짝 나를 엿보더니 돌아서서 급히 장문을 연다.

'흥, 입을 옷이 없어서 망설거리는구나' 나도 슬쩍 돌아서며 생각하였다. 우리는 서로 등지고 섰건만 그래도 아내가 거의 다 빈 장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만한 옷이 없어 눈살을 찌푸린 양이 눈앞에 선연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아, 가셔요."

무엇을 생각는지 모르게 정신을 잃고 섰다가 아내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리었다. 아내는 당목옷을 갈아입고 내 마음을 알았던지 나를 위로하는 듯이 방그레 웃는다. 나는 더욱 쓸쓸하였다.

우리집은 천변 배다리 곁에 있고 처가는 안국동에 있어 그 거리가 꽤 멀었다. 나는 천천히 가느라고 가고 아내는 속히 오느라고 오건마는 그는 늘 뒤떨어졌었다. 내가 한참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늘 멀리 떨어져 나를 따라오려고 애를 쓰며 주춤주춤 걸어온다. 길가에 다니는 어느 여자를 보아도 거의 다 비단옷을 입고 고운 신을 신었는데 아내만 당목옷을 허술하게 차리고 청목당혜로 타박타박 걸어오는 양이 나에게 얼마나 애연(哀然)한 생각을 일으켰는지!

한참 만에 나는 넓고 높은 처가 대문에 다다랐다. 내가 안으로 들어갈 적에 낯선 사람들이 나를 흘끔흘끔 본다. 그들의 눈에,

'이 사람이 누구인가. 아마 이 집 하인인가 보다.'

하는 경멸히 여기는 빛이 있는 것 같았다. 안 대청 가까이 들어오니 모두 내게 분분히 인사를 한다. 그 인사하는 소리가 내 귀에는 어째 비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욕하는 것 같기도 하여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후끈거리었다.

그 중에 제일 내게 친숙하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내보다 삼 년 맏이인 처형이었다. 내가 어려서 장가를 들었으므로 그때 그는 나를 못 견디게 시달렸다. 그때는 그가 싫기도 하고 밉기도 하더니 지금 와서는 그때 그러한 것이 도리어 우리를 무관하고 정답게 만들었다. 그는 인천 사는데 자기 남편이 기미(期米)를 하여 가지고 이번에 돈 십만 원이나 착실히 땄다 한다. 그는 자기의 잘사는 것을 자랑하고자 함인지 비단을 내리감고 치감고 얼굴에 부유한 태(態)가 질질 흐른다. 그러나 분으로 숨기려고 애쓴 보람도 없이 눈 위에 퍼렇게 멍든 것이 내 눈에 띄었다.

"왜 마누라는 어쩌고 혼자 오셔요!"

그는 웃으며 이런 말을 하다가 중문편을 바라보더니,

"그러면 그렇지! 동부인 아니하고 오실라구!"

혼자 주고받고 한다.

나도 이 말을 듣고 슬쩍 돌아다보니 아내가 벌써 중문 안에 들어섰더라. 그 수척한 얼굴이 더욱 수척해 보이며 눈물 괸 듯한 눈이 하염없이 웃는다. 나는 유심히 그와 아내를 번갈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분간을 못 하리만큼 그들의 얼굴은 혹사(酷似)하다. 그런데 얼굴빛은 어쩌면 저렇게 틀리는지! 하나는 이글이글 만발한 꽃 같고 하나는 시들시들 마른 낙엽 같다. 아내를 형이라 하고, 처형을 아우라 하였으면 아무라도 속을 것이다. 또 한번 아내를 보며 말할 수 없는 쓸쓸한 생각이 다시금 가슴을 누른다.

딴 음식은 별로 먹지도 아니하고 못 먹는 술을 넉 잔이나 마시었다. 그래도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앉아 견딜 수가 없다. 집에 가려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골치가 띵 하며 내가 선 방바닥이 마치 폭풍에 도도(滔滔)하는 파도같이 높았다 낮았다 어질어질해서 곧 쓰러질 것 같다. 이 거동을 보고 장모가 황망(惶忙)히 일어서며,

"술이 저렇게 취해 가지고 어데로 갈라구. 여기서 한잠 자고 가게."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에요. 집에 가겠어요."

취한 소리로 중얼거리었다.

"저를 어쩌나!"

장모는 걱정을 하시더니,

"할멈! 어서 인력거 한 채 불러 오게."

한다.

취중에도 인력거를 태우지 말고 그 인력거 삯을 나를 주었으면 책 한 권을 사보련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인력거를 타고 얼마 아니 가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 자다가 잠을 깨어 보니 방 안에 벌써 남폿불이 키었는데 아내는 어느결에 왔는지 외로이 앉아 바느질을 하고 화로에서는 무엇이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하였다. 아내가 나의 잠 깬 것을 보더니 급히 화로에 얹은 것을 만져 보며,

"인제 그만 일어나 진지를 잡수셔요."

하고 부리나케 일어나 아랫목에 파묻어 둔 밥그릇을 꺼내어 미리 차려 둔 상에 얹어서 내 앞에 갖다 놓고 일변 화로를 당기어 더운 반찬을 집어 얹으며,

"자아 어서 일어나셔요."

나는 마지못하여 하는 듯이 부시시 일어났다. 머리가 오히려 아프며 목이 몹시 말라서 국과 물을 연해 들이켰다.

"물만 잡수셔서 어째요. 진지를 좀 잡수셔야지."

아내는 이런 근심을 하며 밥상머리에 앉아서 고기도 뜯어 주고 생선 뼈도 추려 주었다. 이것은 다 오늘 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나는 맛나게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내 밥상이 나매 아내가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면 지금껏 내 잠 깨기를 기다리고 밥을 먹지 아니하였구나 하고 오늘 처가에서 본 일을 생각하였다. 어제 일이 있은 후로 우리 사이에 무슨 벽이 생긴 듯하던 것이 그 벽이 점점 엷어져 가는 듯하며 가엾고 사랑스러운 생각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우리는 정답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오늘 장인 생신 잔치로부터 처형 눈 위에 멍든 것에 옮겨 갔다.

처형의 남편이 이번 그 돈을 딴 뒤로는 주야 요리점과 기생집에 돌아다니더니 일전에 어떤 기생을 얻어 가지고 미쳐 날뛰며 집에만 들면 집안 사람을 들볶고 걸핏하면 처형을 친다 한다. 이번에도 별로 대단치 않은 일에 처형에게 밥상으로 냅다 갈겨 바로 눈 위에 그렇게 멍이 들었다 한다.

"그것 보아 돈푼이나 있으면 다 그런 것이야."

"정말 그래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의좋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야요."

아내는 충심(衷心)으로 공명(共鳴)해 주었다.

이 말을 들으매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만족해지며 무슨 승리자나 된 듯이 득의양양하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옳다, 그렇다. 이렇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다.'

하였다.

이틀 뒤 해 어스름에 처형은 우리집에 놀러 왔었다. 마침 내가 정신없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쓸쓸하게 닫혀 있는 중문이 찌긋둥 하며 비단옷 소리가 사으락사으락 들리더니 아랫목은 내게 빼앗기고 웃목에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간다.

"아이고 형님 오셔요."

아내의 인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처형이 계집 하인에게 무엇을 들리고 들어온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날 매우 욕을 보셨지요. 못 잡숫는 술을 무슨 짝에 그렇게 잡수셔요."

그는 이런 인사를 하다가 급작스럽게 계집 하인이 든 것을 빼앗더니 그 속에서 신문지로 싼 것을 끄집어내어 아내를 주며,

"내 신 사는데 네 신도 한 켤레 샀다. 그날 청목당혜를……."

말을 하려다가 나를 곁눈으로 흘끗 보고 그만 입을 닫친다.

"그것을 왜 또 사셨어요."

해쓱한 얼굴에 꽃물을 들이며 아내가 치사하는 것도 들은 체 만 체하고 처형은 또 이야기를 시작한다.

"올 적에 사랑양반을 졸라서 돈 백 원을 얻었겠지. 그래서 오늘 종로에 나와서 옷감도 바꾸고 신도 사고……."

그는 자랑과 기쁨의 빛이 얼굴에 퍼지며 싼 보를 끌러,

"이런 것이야!"

하고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자세히는 모르나 여하간 값 많은 품 좋은 비단일 듯하다. 무늬 없는 것, 무늬 있는 것, 회색 옥색 초록색 분홍색이 갖가지로 윤이 흐르며 색색이 빛이 나서 나는 한참 황홀하였다. 무슨 칭찬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참 좋은 것인데요."

이런 말을 하다가 나는 또 쓸쓸한 생각이 일어난다. 저것을 보는 아내의 심중이 어떠할까? 하는 의문이 문득 일어남이라.

"모다 좋은 것만 골라 샀습니다그려."

아내는 인사를 차리느라고 이런 칭찬은 하나마 별로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적이 의외의 감이 있었다.

처형은 자기 남편의 흉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 밉살스럽다는 둥 그 추근추근하다는 둥 말끝마다 자기 남편의 불미한 점을 들다가 문득 이야기를 끊고 일어선다.

"왜 벌써 가시려고 하셔요. 모처럼 오셨다가 반찬은 없어도 저녁이나 잡수셔요."

하고 아내가 만류를 하니,

"아니 곧 가야지. 오늘 저녁 차로 떠날 것이니까 가서 짐을 매어야지. 아직 차 시간이 멀었어? 아니 그래도 정거장에 일찍이 나가야지 만일 기차를 놓치면 오죽 기다리실라구. 벌써 오늘 저녁 차로 간다고 편지까지 했는데……."

재삼 만류함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그는 홀홀히 나간다. 우리는 그를 보내고 방에 들어왔다.

나는 웃으며 아내에게,

"그까짓 것이 기다리는데 그다지 급급히 갈 것이 무엇이야."

아내는 하염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래도 옷감 바꿀 돈을 주었으니 기다리는 것이 애처롭기는 하겠지."

밉살스러우니 추근추근하니 하여도 물질의 만족만 얻으면 그것으로 위로하고 기뻐하는 그의 생활이 참 가련하다 하였다.

"참, 그런가 보아요."

아내도 웃으며 내 말을 받는다. 이때에 처형이 사준 신이 그의 눈에 띄었는지 (혹은 나를 꺼려 보고 싶은 것을 참았는지 모르나) 그것을 집어 들고 조심조심 펴보려다가 말고 머뭇머뭇한다. 그 속에 그를 해케 할 무슨 위험품이나 든 것같이.

"어서 펴보구려."

아내가 하도 머뭇머뭇하기로 보다못하여 내가 재촉〔催促〕을 하였다.

아내는 이 말을 듣더니,

'작히 좋으랴.'

하는 듯이 활발하게 싼 신문지를 헤친다.

"퍽 이쁜걸요."

그는 근일에 드문 기쁜 소리를 치며 방바닥 위에 사뿐 내려놓고 버선을 당기며 곱게 신어 본다.

"어쩌면 이렇게 맞어요!"

연해연방 감탄사를 부르짖는 그의 얼굴에 흔연한 희색이 넘쳐흐른다.

"……"

묵묵히 아내의 기뻐하는 양을 보고 있는 나는 또다시,

'여자란 할 수 없어!'

하는 생각이 들며,

'조심하였을 따름이다!'

하매 밤빛 같은 검은 그림자가 가슴을 어둡게 하였다.

그러면 아까 처형의 옷감을 볼 적에도 물론 마음속으로는 부러워하였을 것이다. 다만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을 따름이다. 겨우,

"어서 펴보구려."

하는 한마디에 가슴에 숨겼던 생각을 속임 없이 나타내는구나 하였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저는 모르고 새 신 신은 발을 조금 쳐들며,

"신 모양이 어때요."

"매우 이뻐!"

겉으로는 좋은 듯이 대답을 하였으나 마음은 쓸쓸하였다. 내가 제게 신 한 켤레를 사주지 못하여 남에게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도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만 불쾌한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처형이 동서(同壻)를 밉다거니 무엇이니 하면서도 기차를 놓치면 남편이 기다릴까 염려하여 급히 가던 것이 생각난다. 그것을 미루어 아내의 심사도 알 수가 있다. 부득이한 경우라 하릴없이 정신적 행복에만 만족하려고 애를 쓰지마는 기실(其實) 부족한 것이다. 다만 참을 따름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전날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후회가 난다.

'어느 때라도 제 은공을 갚아 줄 날이 있겠지!'

나는 마음을 좀 너그럽게 먹고 이런 생각을 하며 아내를 보았다.

"나도 어서 출세를 하여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아내가 이런 말을 듣기는 참 처음이다.

"네에?"

아내는 제 귀를 못 미더워하는 듯이 의아(疑訝)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얼굴에 살짝 열기가 오르며,

"얼마 안 되어 그렇게 될 것이야요!"

라고 힘있게 말하였다.

"정말 그럴 것 같소?"

나는 약간 흥분하여 반문하였다.

"그러문요, 그렇고말고요."

아직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은 무명작가인 나를 다만 저 하나가 깊이깊이 인정해 준다. 그러기에 그 강한 물질에 대한 본능적 요구도 참아 가며 오늘날까지 몹시 눈살을 찌푸리지 아니하고 나를 도와 준 것이다.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두 팔로 덤썩 아내의 허리를 잡아 내 가슴에 바싹 안았다. 그 다음 순간에는 뜨거운 두 입술이…….

그의 눈에도 나의 눈에도 그렁그렁한 눈물이 물끓듯 넘쳐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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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온 지 한 달 남짓한, 금년에 열 다섯 살밖에 안 된 순이는 잠이 어릿어릿한 가운데도 숨길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큰 바위로 내리누르는 듯이 가슴이 답답하다. 바위나 같으면 싸늘한 맛이나 있으련마는, 순이의 비둘기 같은 연약한 가슴에 얹힌 것은 마치 장마지는 여름날과 같이 눅눅하고 축축하고 무더운데다가 천 근의 무게를 더한 것 같다. 그는 복날 개와 같이 헐떡이었다. 그러자 허리와 엉치가 뻐개 내는 듯, 쪼개 내는 듯, 갈기갈기 찢는 것같이, 산산히 바수는 것같이 욱신거리고 쓰라리고 쑤시고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쇠막대 같은 것이 오장육부를 한편으로 치우치며 가슴까지 치받쳐올라 콱콱 뻗지를 때엔 순이는 입을 딱딱 벌리며 몸을 위로 추스른다.

이렇듯 아프니 적이나 하면 잠이 깨련만 온종일 물 이기, 절구질하기, 물방아찧기, 논에 나간 일꾼들에게 밥 나르기에 더할 수 없이 지쳤던 그는 잠을 깨려야 깰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혼수상태에 떨어진 것은 물론 아니니 (이러다간 내가 죽겠구먼! 죽겠구먼! 어서 잠을 깨야지, 깨야지) 하면서도 풀칠이나 한 듯이 죄어붙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연해 입을 딱딱 벌리며 몸을 추스르다가 나중에는 지긋지긋한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 모양으로 이까지 빠드득빠드득 갈아부치었다.

얼마 만에야 무서운 꿈에 가위눌린 듯한 눈을 어렴풋이 뜰 수 있었다. 제 얼굴을 솥뚜껑 모양으로 덮은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함지박만한 큰 상판의 검은 부분은 어두운 밤빛과 어우러졌는데 번쩍이는 눈깔의 흰자위, 침이 께 흐르는 입술, 그것이 비뚤어지게 열리며 드러난 누런 이빨만 무시무시하도록 뚜렷이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자 가뜩이나 큰 얼굴이 자꾸자꾸 부어오르더니 주악빛으로 지져 놓은 암갈색의 어깨판도 따라서 확대되어서 깍짓동만하게 되고 집채만하게 된다. 순이는 배꼽에서 솟아오르는 공포와 창자를 뒤트는 고통에 몸을 떨었다가 버르적거렸다가 하면서 염치없는 잠에 뒷덜미를 잡히기도 하고 무서운 현실에 눈을 뜨기도 하였다. 그 고통으로부터 겨우 벗어난 때에는, 유월의 단열밤(短夜)이 벌써 새었다. 사내의 어마어마한 윤곽이 방이 비좁도록 움직이자 밖으로 나간다. 들에 새벽일하러 나감이리라. 그제야 순이도 긴 한숨을 쉬며 잠을 깰 수 있었다. 짙은 먹칠이 가물한 가운데 노랏노랏이 삿자리의 눈이 드러난다. 윗목에 놓인 허술한 경대 위에 번들번들하는 석경이라든지 ‘원수의 방’이 분명하다. 더구나 제 등때기 밑에는 요까지 깔려 있다.

‘이것은 어찌된 셈인구?’

순이는 정신을 차리며 생각해 보았다. 어젯밤에 그가 잔 데는 여기가 아닐 테다. 밤이 되면 으레 당하는 이 몹쓸 노릇들을 하루라도 면하려고 저녁 설거지를 마치는 맡에 아무도 몰래 헛간으로 숨었었다. 단지 둘밖에 아니 남은 볏섬을 의지삼아 빈 섬거적을 깔고 두 다리를 쭉 뻗칠 사이도 없이 고만 고달픈 잠에 떨어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어찌 또 방으로 들어왔을까? 그 원수엣 놈이 육욕에 번쩍이는 눈알을 부라리며 사면팔방으로 찾다가 마침내 그를 발견하였음이리라. 억센 팔로 어렵지 않게 자는 그를 안아다가 또 ‘원수의 방’에 갖다놓았음이리라. 그리고는 또 원수의 그 노릇.

이런 생각을 끝도 맺기 전에 흐리터분한 잠이 다시금 그의 사개 물러난 몸을 엄습하였다.

집안이 떠나갈 듯한 시어미의 소리가 일어났다.

“안 일어났니! 어서 쇠죽을 끓여야지!”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순이는 빨딱 몸을 일으킨다.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또 한 손으로 남편이 벗겨놓은 옷을 주섬주섬 총망히 주워입는다. 그는 시방껏 자지 않았던가? 그 거동을 보면 자기는 새로 정신을 한껏 모으고 호령일하를 기다리던 군사에 질 바 없었다. 그러니만큼 자던 잠결에도 시어미의 호령은 무서웠음이다.

총총히 마루로 나오니 아직 날은 다 밝지 않았다. 자욱한 안개를 격해서 광채를 잃은 흰 달이 죽은 사람의 눈깔 모양으로 희멀겋게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저녁에 안쳐 놓은 쇠죽 솥에 가자 불을 살랐다. 비록 여름일망정 새벽 공기는 찼다. 더욱이 으슬한 기를 느끼던 순이는 번쩍하고 불붙는 모양이 매우 좋았다. 새빨간 입술이 날름날름 집어 주는 솔개비를 삼키는 꼴을 그는 흥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 고된 하룻밤으로 말미암아 더욱 고된 순이의 하루는 또 시작되었다.

쇠죽을 다 끓이자 아침밥 지을 물을 또 아니 이어올 수 없었다. 물동이를 이고 두 팔을 치켜 그 귀를 잡으니 겨드랑이로 안개 실린 공기가 싸늘하게 기어들었다. 시냇가에 나와서 물동이를 놓고 한 번 기지개를 켰다. 안개에 묻힌 올망졸망한 산과 등성이는 아직도 몽롱한 꿈길을 헤매는 듯. 엊그제 농부를 기뻐 뛰게 한 큰비의 덕택으로 논이란 논엔 물이 질번질번한데 흰 안개와 어우러지니 마치 수은이 엉킨 것 같고 벌써 옮겨 놓은 모들은 파릇파릇하게 졸음 오는 눈을 비비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저 혼자 깨었다는 듯이 시내는 쫄쫄 소리를 치며 흘러간다. 과연 가까이 앉아서 들여다보니 새말간 그 얼굴은 잠 하나 없는 눈동자와 같다. 순이는 퐁하며 바가지를 넣었다. 상처가 난 데를 메우려는 듯이 사방에서 모여든 물이 바가지 들어갔던 자리를 둥글게 에워싸며 한동안 야료를 치다가 그리 중상은 아니라고 안심한 것같이 너르게 너르게 둘레를 그리며 물러나갔다. 순이는 자꾸 물을 퍼내었다.

한 동이를 여다 놓고 또 한 동이를 이러 왔을 제 그가 벌써부터 잡으려고 애쓰던 송사리 몇 마리가 겁없이 동실동실 떠 다니는 걸 보았다. 욜랑욜랑하는 그 모양이 퍽 얄미웠다.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두 손을 넣어서 움키려 하였건만 고놈들은 용하게 빠져 달아나곤 한다. 몇 번을 헛애만 쓴 순이는 그만 화가 더럭 나서 이번에는 돌멩이를 주워다가 함부로 물 속의 고기를 때렸다. 제 얼굴에, 옷에, 물만 튀었지, 고놈들은 도무지 맞지를 않았다. 짜증이 나서 울고 싶다. 돌질로 성공을 못한 줄 안 그는 다시금 손으로 움켜보았다. 그중에 불행한 한 놈이 마침내 순이의 손아귀에 들고 말았다.

손 새로 물이 빠져가자 제 목숨도 잦아 가는 것에 독살이 난 듯이 파득파득하는 꼴이 순이에게는 재미있었다. 얼마 안 되어 가련한 물짐승이 죽은 듯이 지친 몸을 손바닥에 붙이고 있을 제 잔인하게도 순이는 땅바닥에 태기를 쳤다. 아프다는 듯이 꼼지락하자 그만 작은 목숨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니 죽었거니 하고 순이는 손가락으로 건드려 보았다. 그래서 일순 송장이 된 것을 깨닫자 생명 하나를 없앴다는 공포심이 그의 뒷덜미를 집었다. 그 자리에서 곧 송사리의 원혼이 날 듯싶었다. 갈팡질팡 물을 긷고 돌아서는 그는 누가 뒤에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듯하였다.

눈코를 못 뜨게 아침을 치르자마자 그는 또 보리를 찧어야 했다. 절구질을 하노라니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다. 무거운 절구에 끌려서 하마터면 대가리를 절구통 속에 찧을 뻔도 하였다. 팔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그는 깽깽하며 끝까지 절구질을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점심이다. 부랴부랴 밥을 다 지어서는 모심기 하는 일꾼(거기는 자기 남편도 끼었다)에게 밥을 날라야 한다. 국이며 밥을 잔뜩 담은 목판이 그의 정수리를 내리누르니 모가지가 자라의 그것같이 움츠려지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키까지 졸아든 듯하였다. 이래 가지고 떼어 놓기 어려운 발길을 옮기며 삽짝 밖을 나섰다.

새말갛게 갠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중천에 솟은 햇님이 불 같은 볕을 내리퍼붓고 있었다. 질펀한 들에는 ‘흙의 아들’이 하얗게 흩어져 응석 피듯 어머니의 기름진 젖가슴을 철벅거리며 모내기에 한창 바쁘다. 그들이 굽혔다 폈다하는 서슬에 옷으로 다 여미지 못한 허리는 새까맣게 찢어 놓은 듯하고 염치없이 눈에까지 흘러드는 팥죽 같은 땀을닦느라고 얼굴은 모두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한시라도 속히, 한 포기라도 많이 옮기려고 골똘한 그들은 뼈가 휘어도 괴로운 한숨 한 번 쉬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노래를 부른다. 가장 자유로운 곡조로 가장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땅은 흠씬 젖은 물을 끓는 햇발에 바래이고 논두렁에 엉클어진 잡풀들은 사람의 발이 함부로 밟음에 맡기며, 발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고개를 쳐들고 부신 햇발에 푸른 웃음을 올리고 있다. 거기는 굳세게, 힘있게 사는 생명의 기쁨이 있고 더욱더욱, 삶을 충실히 하려는 든든한 노력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건강이 넘치는 천지였다. 불건강한 물건의 존재를 허락치 않는 천지였다.

이 강렬한 광선의 바다의 싱싱한 공기를 마시기엔 순이의 몸은 너무나 불건강하였다. 눈이 핑핑 내어둘리며 머리가 어찔어찔하다. 온 몸을 땀으로 미역감기면서도 으쓱으쓱 한기가 들었다. 빗물이 고인 데를 건너뛰렬 제 물속에 잠긴 태양이 번쩍하자 그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문득 아침에 제가 죽인 송사리란 놈이 퍼드득 하고 내달으며 방어만치나 어마어마하게 큰 몸뚱이로 그의 가는 길을 막았다. 속으로 ‘악’ 외마디 소리를 치며 몸을 빼쳐 달아나려고 할 제 그는 그만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었다. 누가 저의 머리채를 잡아서 회술레를 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사이에 그는 벼락치는 소리를 들은 채 정신을 잃었다.

한참 만에야 순이는 깨어났건만 본정신이 다 돌아오지는 않았다. 어리둥절하게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 사이 점심밥을 이고 나가던 일, 넓은 들에서 눈을 부시게 하던 햇발, 길을 막던 송사리 생각이 차례차례로 떠올랐다. 그러면 이고 가던 점심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서 휘 사방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그는 외마디 소리를 치며 몸을 소스라쳤다. 또다시 그 원수의 방에 누웠을 줄이야! 미친 듯이 뛰어나왔다. 그의 눈은 마치 귀신에게 홀린 사람 모양으로 두려움과 무서움에 호동그래졌다.

마당에 널어 놓은 밀을 고밀개로 젓고 있는 시어미는 뛰어나오는 며느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었다. 국과 밥을 모두 못 먹게 만든 것은 그만두더라도 몇 개 아니 남은 그릇을 깨뜨린 것이 한없이 미웠으되 까무러치기까지 한 며느리를 일어나는 맡에 나무라기는 어려웠음이리라.

“인제 정신을 차렸느냐. 왜 더 누워서 조리를 하지 방정을 떨고 나오니. 어 서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 있으려무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짓느라고 매우 애를 쓰는 모양이다.

그래도 순이는 비실비실하는 걸음걸이로 부득부득 마당으로 내려온다.

“방에 들어가서 조리를 하래도 그래.”

이번에는 언성이 조금 높아진다.

“싫어요. 싫어요. 괜찮아요.”

순이는 방에 다시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또 고분고분 말을 아니 듣고 억지를 부리는군.”
하다가 속에서 치받치는 미움을 걷잡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밀개 자루를 거꾸로 들 사이도 없이 시어미는 며느리에게로 달려들었다.

“요 방정맞은 년 같으니, 어쩌자고 그릇을 다 부수고 아실랑아실랑 나오는 건 뭐냐. 요 얌치없는 년 같으니, 저번 장에 산 사발을 두 개나 산산조각을 맨들고.”
하고 푸념을 섞어가며 고밀개 자루로 머리, 등, 다리 할 것 없이 함부로 두들기기 시작한다. 순이는 맞아도 아픈 줄을 몰랐다. 으스러지는 듯이 찌뿌두두한 몸에 괴상한 쾌감을 일으켰다.

“요런 악지 센 년 좀 보아! 어쩌면 맞아도 울지 않고 요렇게 있담.”
하고 또 한참 매질을 하다가 스스로 지친 듯이 고밀개를 집어던지며,
“요년, 보기 싫다. 어서 부엌에 가서 저녁이나 지어라.”
순이는 또 시키는 대로 부엌에 들어가서 밥을 안쳤다.

그럭저럭 하루 해는 저물어 간다. 으슥한 부엌은 벌써 저녁이나 된 듯이 어둑어둑해졌다. 무서운 밤, 지겨운 밤이 다시금 그를 향하여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려 한다. 해질 때마다 느끼는 공포심이 또다시 그를 엄습하였다. 번번이 해도 번번이 실패하는, 밤 피할 궁리로 하여 그의 좁은 가슴은 쥐어뜯기었다. 그럴 사이에 그 궁리는 나서지 않고 제 신세가 어떻게 불쌍하고 가엾은지 몰랐다. 수백 리 밖에 부모를 두고 시집을 온 일, 온 뒤로 밤마다 날마다 당하는 지긋지긋한 고생, 더구나 오늘 시어머니한테 두들겨맞은 일이 한없이 서럽고 슬퍼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주먹으로 씻다가 팔까지 젖었건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순이는 무심코 돌아보자마자 간이 오그라붙는 듯하였다. 그의 남편이 몸을 굽혀서 어깨넘어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볕에 그을린 험상궂은 얼굴엔 어울리지 않게 보드라운 표정과 불쌍해하는 빛이 역력히 흘렀다. 그러나 솔개에 치인 병아리 모양으로 숨 한 번 옳게 쉬지 못하는 순이는 그런 기색을 알아볼 여유도 없었다.

“왜 울어, 울지 말아, 울지 말아!”
라고 꺽세인 몸을 떨어뜨리며 위로를 하면서 그 솥뚜껑 같은 손으로 우는 순이의 눈을 씻어 주고는 나가버린다.

남편을 본 뒤로는 더욱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을 지질러서 막는 바위, 온몸을 바스러 내는 쇠몽둥이, 시방껏 흐르던 눈물도 간 데 없고 다시금 이 지긋지긋한 ‘밤 피할 궁리’에 어린 머리를 짰다. 아니 밤 탓이 아니다. 온전히 그 ‘원수의 방’ 때문이다. 만일 그 방만 아니면 남편이 또한 그 눈물을 씻어주고 나갈 따름이다. 그 방만 아니면 그런 고통을 줄려야 줄 곳이 없을 것이다. 고 원수의 방! 을 없애 버릴 도리가 없을까? 입때 방을 피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순이는 인제 그 방을 없애버릴 궁리를 하게 되었다.

밥이 보그르르 넘었다. 순이가 솥뚜껑을 열려고 일어섰을 제 부뚜막에 얹힌 성냥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상한 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그는 성냥을 쥐었다. 성냥 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그러자 사면을 한 번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 성냥을 품속에 감추었다. 이만하면 될 일을 왜 여태껏 몰랐던가 하면서 그는 싱그레 웃었다.

그날 밤에 그 집에는 난데없는 불이 건넌방 뒤꼍 추녀로부터 일어났다. 풍세를 얻은 불길이 삽시간에 온 지붕에 번지며 훨훨 타오를 제 뒷집 담모서리에서 순이는 근래에 없이 환한 얼굴로 기뻐 못 견디겠다는 듯이 가슴을 두근거리며 모로 뛰고 세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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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는 B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군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죽은깨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훨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법대로 쪽찌거나 틀어올리지를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어넘긴 머리꼬리가 뒤통수에 염소 똥만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가는 자취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노릴 때엔 기숙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격하고 매서웠다.

이 B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소위 '러브레터'였다. 여학교 기숙사라면 으례히 그런 편지가 많이 오는 것이지만 학교로도 유명하고 또 아름다운 여학생이 많은 탓인지 모르되 하루에도 몇 장씩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랑 타령이 날아들어 왔었다.

기숙생에게 오는 사신을 일일이 검토하는 터이니까 그따위 편지도 물론 B여사의 손에 떨어진다. 달짝지근한 사연을 보는 족족 그는 더할 수 없이 흥분되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편지 든 손이 발발 떨리도록 성을 낸다.

아무 까닭 없이 그런 편지를 받은 학생이야말로 큰 재변이었다. 하학하기가 무섭게 그 학생은 사감실로 불리어 간다. 분해서 못 견디겠다는 사람 모양으로 쌔근쌔근하며 방안을 왔다갔다하던 그는, 들어오는 학생을 잡아먹을 듯이 노리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코가 맞닿을 만큼 바싹 다가들어서서 딱 마주선다. 웬 영문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선생의 기색을 살피고 겁부터 집어먹은 학생은 한동안 어쩔 줄 모르다가 간신히 모기만한 소리로,

“저를 부르셨어요?”

하고 묻는다.

“그래 불렀다. 왜!”

팍 무는 듯이 한 마디 하고 나서 매우 못마땅한 것처럼 교의를 우당퉁탕 당겨서 철썩 주저앉았다가 그저 서 있는 걸 보면,

“장승이냐? 왜 앉지를 못해!”

하고 또 소리를 빽 지르는 법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조그마한 책상 하나를 새에 두고 마주앉는다. 앉은 뒤에도,

“네 죄상을 네가 알지!”

하는 것처럼 아무 말 없이 눈살로 쏘기만 하다가 한참만에야 그 편지를 끄집어내어 학생의 코앞에 동댕이를 치며,

“이건 누구한테 오는 거냐?”

하고, 문초를 시작한다. 앞장에 제 이름이 쓰였는지라,

“저한테 온 것이야요.”

하고, 대답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발신인이 누구인 것을 채쳐 묻는다. 그런 편지의 항용으로 발신인의 성명이 똑똑치 않기 때문에 주저주저하다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내대일 양이면,

“너한테 오는 것을 네가 모른단 말이냐?”

고, 불호령을 내린 뒤에 또 사연을 읽어 보라 하여 무심한 학생이 나즉나즉하나마 꿀 같은 구절을 입술에 올리면, B여사의 역정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놈의 소위인 것을 기어이 알려 한다. 기실 보도 듣도 못한 남성의 한 노릇이요, 자기에게는 아무 죄도 없는 것을 변명하여도 곧이 듣지를 않는다. 바른대로 아뢰어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퇴학을 시킨다는 둥, 제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편지할 리가 만무하다는 둥, 필연 행실이 부정한 일이 있으리라는 둥…

하다못해 어디서 한 번 만나기라도 하였을 테니 어찌해서 남자와 접촉을 하게 되었냐는 둥, 자칫 잘못하여 학교에서 주최한 음악회나 '바자'에서 혹 보았는지 모른다고 졸리다 못해 주워댈 것 같으면 사내의 보는 눈이 어떻드냐, 표정이 어떻드냐, 무슨 말을 건네드냐, 미주알 고주알 캐고 파며 얼르고 볶아서 넉넉히 십 년 감수는 시킨다.

두 시간이 넘도록 문초를 한 끝에는 사내란 믿지 못할 것, 우리 여성을 잡아 먹으려는 마귀인 것, 연애가 자유이니 신성이니 하는 것도 모두 악마가 지어낸 소리인 것을 입에 침이 없이 열에 띄어서 한참 설법을 하다가 닦지도 않은 방바닥(침대를 쓰기 때문에 방이라 해도 마루바닥이다)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눈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말끝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서 악마의 유혹에 떨어지려는 어린 양을 구해달라고 뒤삶고 곱삶는 법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의 싫어하는 것은 기숙생을 남자가 면회하러 오는 일이었다. 무슨 핑계를 하든지 기어이 못 보게 하고 만다. 친부모, 친동기간이라도 규칙이 어떠니, 상학중이니 무슨 핑계를 하든지 따돌려 보내기가 일쑤다.

이로 말미암아 학생이 동맹 휴학을 하였고 교장의 설유까지 들었건만 그래도 그 버릇은 고치려 들지 않았다.

이 B사감이 감독하는 그 기숙사에 금년 가을 들어서 괴상한 일이 '생겼다'느니보다 '발각되었다'는 것이 마땅할는지 모르리라. 왜 그런고 하면 그 괴상한 일이 언제 '시작된' 것은 귀신밖에 모르니까.

그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밤이 깊어서 새로 한 점이 되어 모든 기숙생들이 달고 곤한 잠에 떨어졌을 때 난데없는 깔깔대는 웃음과 속살속살대는 말낱이 새어 흐르는 일이었다. 하루 밤이 아니고 이틀 밤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소리가 잠귀 밝은 기숙생의 귀에 들리기도 하였지만 잠결이라 뒷동산에 구르는 마른 잎의 노래로나, 달빛에 날개를 번뜩이며 울고 가는 기러기의 소리로나 흘러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깨비의 장난이나 아닌가 하여 무시무시한 증이 들어서 동무를 깨웠다가 좀처럼 동무는 깨지 않고 제 생각이 너무나 어림없고 어이없음을 깨달으면, 밤소리 멀리 들린다고, 학교 이웃 집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또 딴 방에 자는 제 동무들의 잠꼬대로만 여겨서 스스로 안심하고 그대로 자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가 풀릴 때는 왔다. 이때 공교롭게 한 방에 자던 학생 셋이 한꺼번에 잠을 깨었다. 첫째 처녀가 소변을 보러 일어났다가 그 소리를 듣고 둘째 처녀와 세째 처녀를 깨우고 만 것이다.

“저 소리를 들어보아요. 아닌 밤중에 저게 무슨 소리야.”

하고 첫째 처녀는 호동그래진 눈에 무서워하는 빛을 띠운다.

“어젯밤에 나도 저 소리에 놀랬었어. 도깨비가 났단 말인가?”

하고, 둘째 처녀도 잠오는 눈을 비비며 수상해 한다. 그중에 제일 나이 많을 뿐더러(많았자 열 여덟밖에 아니 되지만) 장난 잘 치고 짓궂은 짓 잘하기로 유명한 세째 처녀는 동무 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이슥히 귀를 기울이다가,

“딴은 수상한걸. 나는 언젠가 한번 들어본 법도 하구먼. 무얼 잠 아니 오는 애들이 이야기를 하는 게지.”

이때에 그 괴상한 소리는 땍대굴 웃었다. 세 처녀는 귀를 소스라쳤다. 적적한 밤 가운데 다른 파동 없는 공기는 그 수상한 말 마디를 곁에서 나는 듯이 또렷또렷이 전해 주었다.

“오! 태훈씨! 그러면 작히 좋을까요.”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다.

“경숙씨가 좋으시다면 내야 얼마나 기쁘겠읍니까. 아아, 오직 경숙씨에게 바친 나의 타는 듯한 가슴을 인제야 아셨읍니까!”

정열에 띄인 사내의 목청이 분명하였다. 한동안 침묵…

“인제 그만 놓아요. '키스'가 너무 길지 않아요. 행여 남이 보면 어떻해요.”

아양떠는 여자 말씨.

“길수록 더욱 좋지 않아요.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키스'를 하여도 길다고는 못하겠읍니다. 그래도 짧은 것을 한하겠읍니다.”

사내의 피를 뿜는 듯한 이 말끝은 계집의 자지러진 웃음으로 묻혀버렸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사랑에 겨운 남녀의 허무러진 수작이다. 감금이 지독한 이 기숙사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세 처녀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놀랍고 무서운 빛이 없지 않았으되 점점 호기심에 번쩍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한결같이 '로맨틱'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안에 있는 여자 애인을 보려고 학교 근처를 뒤돌고 곰돌던 사내 애인이, 타는 듯한 가슴을 걷잡다 못하여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담을 뛰어 넘었는지 모르리라.

모든 불이 다 꺼지고 오직 밝은 달빛이 은가루처럼 서리인 창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여자 애인이 흰 수건을 흔들어 사내 애인을 부른지도 모르리라.

활동사진에 보는 것처럼 기나긴 피륙을 내리워서 하나는 위에서 당기고 하나는 밑에서 매달려 디룽디룽하면서 올라가는 정경이 있었는지 모르리라. 그래서 두 애인은 만나가지고 저와 같이 사랑의 속삭거림에 잦아졌는지 모르리라… 꿈결 같은 감정이 안개 모양으로 눈부시게 세 처녀의 몸과 마음을 휩싸 돌았다.

그들의 뺨은 후끈후끈 달았다. 괴상한 소리는 또 일어났다.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이번에는 매몰스럽게 내어대는 모양.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를 살려 주어요, 나를 구해 주어요.”

사내의 애를 졸리는 간청…

“우리 구경 가볼까.”

짖궂은 세째 처녀는 몸을 일으키며 이런 제의를 하였다. 다른 처녀들도 그 말에 찬성한다는 듯이 따라 일어섰으되 의아와 공구(恐懼)와 호기심이 뒤섞인 얼굴을 서로 교환하면서 얼마쯤 망설이다가 마침내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왔다. 쌀벌레 같은 그들의 발가락은 가장 조심성 많게 소리나는 곳을 향해서 곰실곰실 기어간다. 컴컴한 복도에 자다가 일어난 세 처녀의 흰 모양은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움직였다.

소리나는 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찾고는 나무로 깎아 세운 듯이 주춤 걸음을 멈출 만큼 그들은 놀래었다. 그런 소리의 출처야말로 자기네 방에서 몇 걸음 안 되는 사감실일 줄이야! 그 방에 여전히 사내의 비대발괄하는 푸념이 되풀이 되고 있다… 나의 천사, 나의 하늘, 나의 여왕, 나의 목숨, 나의 사랑, 나의 애를 말려 죽이실 테요. 나의 가슴을 뜯어 죽이실 테요. 내 생명을 맡으신 당신의 입술로…

세째 처녀는 대담스럽게 그 방문을 빠끔히 열었다. 그 틈으로 여섯 눈이 방안을 향해 쏘았다. 이 어쩐 기괴한 광경이냐! 전등 불은 아직 끄지 않았는데 침대 위에는 기숙생에게 온 소위 '러브레터'의 봉투가 너저분하게 흩어졌고 그 알맹이도 여기저기 두서없이 펼쳐진 가운데 B여사 혼자 - 아무도 없이 제 혼자 일어나 앉았다.

누구를 끌어당길 듯이 두 팔을 벌리고 안경을 벗은 근시안으로 잔뜩 한 곳을 노리며 그 굴비쪽 같은 얼굴에 말할 수 없이 애원하는 표정을 짓고는 '키스'를 기다리는 것 같이 입을 쫑긋이 내어민 채 사내의 목청을 내어가면서 아깟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다가 그 넋두리가 끝날 겨를도 없이 급작스리 앵돌아서는 시늉을 내며 누구를 뿌리치는 듯이 연해 손짓을 하며 이번에는 톡톡 쏘는 계집의 음성을 지어,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하다가 제물에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더니 문득 편지 한 장(물론 기숙생에게 온 '러브레터'의 하나)을 집어들어 얼굴에 문지르며,

“정 말씀이야요?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요? 당신의 목숨같이 나를 사랑하셔요? 나를, 이 나를.”

하고 몸을 추수리는데 그 음성은 분명 울음의 가락을 띠었다.

“에그머니 저게 웬일이냐!”

첫째 처녀가 소곤거렸다.

“아마 미쳤나보아, 밤중에 혼자 일어나서 왜 저리고 있을꾸.”

둘째 처녀가 맞방망이를 친다…

“에그 불쌍해!”

하고, 세째 처녀는 손으로 고인 때 모르는 눈물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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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열 소년에 대한 기대와 문명 개화 실현의 의지를 노래한 최초의 신체시이다.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무 것 두려움 없어,
육상(陸上)에서, 아무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秦始皇), 나파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하고 겨룰 이 있건 오너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그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뼉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이리 좀 오너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작은 시비, 작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소년배(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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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의류제품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희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것입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아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음미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으로서 의류전문 계통으로선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여 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 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 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여 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를 못합니다. 또한 2만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 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서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 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 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서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서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1개월에 첫주와 삼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1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1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입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 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자들의 건당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12시간으로.

1개월 특(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여러분, 오날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이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잘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메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마른 인정을 합리화 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곧 그렇게 하는 것이 현사회에서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리를 취하고도 조그만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합법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아지를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 12. 1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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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은 관 모서리에 얼굴을 부비며 연거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영신 씨, 영신 씨! 내가 왔소. 여기 동혁이가 왔소!"

하고 목이 메어 부르나 대답은 있을 리 없는데, 눈물에 어리운 탓일까, 관 뚜껑이 소리 없이 열리며 면사포와 같은 하얀 수의를 입은 영신이가 미소를 띠고 푸시시 일어나 팔을 벌리는 것 같다.

이러한 환각에 사로잡히는 찰나에, 동혁은 당장에 뛰어나가서 도끼라도 들고 들어와 관을 뻐개고 시체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는 가슴 벅차게 용솟음치는 과격한 감정을 발뒤꿈치로 누룩을 디디듯이 이지의 힘으로 꽉꽉 밟았다. 어찌나 원통하고 모든 일이 뉘우쳐지는지, 땅바닥을 땅땅 치며 몸부림을 하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건만, 여러 사람 앞에서 그다지 수통스러이 굴 수도 없었다. 다만 한마디,

"왜 당신은, 일허는 것밖에 좀더 다른 허영심이 없었드란 말요!"

하고 꾸짖듯 하고는 한참이나 엎드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다가, '영신 씨 같은 여자두 이런 자리에서 남에게 눈물을 보이나요?'

라고 경찰서에서 마지막 만났을 때에 제 입으로 한 말이 문뜩 생각이 나서 주먹으로 눈두덩을 부비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다시 관머리를 짚고 기도를 올리는 것처럼 침묵하다가, 바로 영신의 귀에다 대고 말을 하듯이 머리맡을 조금씩 흔들면서,

"영신 씨 안심허세요. 나는 이렇게 꿋꿋허게 살어 있소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당신이 못다 허구 간 일과 두 몫을 허리다!"

하고 새로운 결심과 영결의 인사를 겹쳐 한 뒤에, 여러 사람과 함께 관머리를 들고 앞서 나와서 조심스러이 상여에 옮겼다.

영신의 육신은 영원한 안식처를 향하여 떠나려 한다.

동혁의 기념품인 학원의 종을 아침저녁으로 치던 사람의 상여머리에서 요령 소리가 땡그랑땡그랑 울린다. 상여는 청년들이 메었는데, 수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부인네들과 동민이 가득 들어선 속에서 다시금 울음 소리가 일어난다. 아이들은 장강목에 조롱조롱 매달려 제 힘껏 버팅겨서 상여도 차마 못 떠나겠는 듯이 뒷걸음을 친다.

앞채를 꼬나 주던 동혁은 엄숙한 얼굴로 여러 사람의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

조상 온 사람 전체를 향해서 외치는 목소리는 여전히 우렁차다.

"여러분! 이 채영신 양은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농촌의 개발과 무산 아동의 교육을 위해서 너무나 과도히 일을 하다가, 둘도 없는 생명을 바쳤습니다. 완전히 희생했습니다. 즉, 오늘 이 마당에 모인 여러분을 위해서 죽은 것입니다."

하고 한층 더 언성을 높여,

"지금 여러분에게 바친 채양의 육체는 흙 보탬을 하려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이분이 끼쳐 준 위대한 정신은 여러분의 머릿속에 살어 있을 것입니다. 저 아이들의 조그만 골수에도 그 정신이 박혔을 겝니다."

하고는 손길을 마주 모으고 서고, 혹은 머리를 떨어트리고 듣는 여러 청중들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서며,

"그러나 여러분, 조금두 설워허지 마십시오. 이 채선생은 결단코 죽지 않었습니다. 살과 뼈는 썩을지언정, 저 가엾은 아이들과 가난한 동족을 위해서 흘린 피는 벌써 여러분의 혈관 속에 섞였습니다. 지금 이 사람의 가슴속에서도 그 뜨거운 피가 끓고 있습니다!"

하고 주먹으로 제 가슴 한복판을 친다. 여러 사람의 머리 위로는 감격의 물결이 사리 때의 조수와 같이 밀리는 듯. 서울서 온 백현경은 몇 번이나 안경을 벗어서 저고리 고름으로 닦았다.

동혁은 목소리를 낮추어,

"사사로운 말씀은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나는 이 청석골에서 사랑하던 사람의 사업을 당분간이라도 계속하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나마 소용이 되신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이 길을 밟는 것이 나 개인에게도 가장 기쁜 의무일 줄로 생각합니다."

말이 끝나자, 청년들은 상여를 메고 선 채 박수를 하였다.

장사가 끝난 뒤에, 백현경과 장래의 일을 의논하며 산에서 내려왔던 동혁은 황혼에 몸을 숨기고 홀로 영신의 무덤으로 올라갔다.

이른 봄 산기슭으로 스며드는 저녁 바람은 소름이 끼칠 만치 쌀쌀하다. 그러나 그는 추운 줄을 몰랐다. 머리 위에서 새파란 광채를 흘리며 반짝거리는 외따른 별 하나를 우러러보고 섰으니까, 극도의 슬픔과 원한에 사무쳤던 동혁의 머리는 차츰차츰 식어 가는 것 같다. 마음이 가라앉는 대로 사람의 생명의 하염없음과 인생의 무상함을 새삼스러이 느꼈다.

'그만 죽을 걸 그닥지도 애를 썼구나!'

하니, 세상만사가 다 허무하고 무덤 앞에 앉은 저 자신도 판결을 받은 죄수처럼 언제 어느 때 죽음의 사자에게 덜미를 잡혀갈는지? 제 입으로 숨쉬는 소리를 제 귀로 들으면서도 도무지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수수께끼다! 왜 무엇 하러 뒤를 이어 낳고, 뒤를 이어 죽고 하는지 모르는 인생―---요컨대 영원히 풀어 볼 수 없는 수수께끼에 지나지 못한다.'

'내가 이 채영신이란 여자와 인연을 맺었던 것도 결국은 한바탕 꾸어 버린 악몽이다. 이제 와서 남은 것은 깨어진 꿈의 한 조각이 아니고 무엇이냐.'

될 수 있는 대로 인생을 명랑하게 보려고 노력하여 오던 동혁이건만, 너무도 뜻밖에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 보고는 회의와 일종 염세의 회색 구름에 온몸이 에워싸이는 것이다.

'별은 왜 저렇게 무엇이 반가워서 반짝거리느냐. 뻐국새는 무엇이 서러워서 밤 깊도록 저다지 청승맞게 우느냐. 영신은 왜 무엇 허러 낳었다 죽었고, 나는 왜 무엇 허러 이 무덤 앞에 올빼미처럼 두 눈을 껌벅거리며 쭈그리고 앉었느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순환소수와 같이 쪼개 보지 못하는 채 사사오입을 하는 것이 인생 문제일까?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 모양으로, 까닭도 모르고 또한 아무 필요도 없이 제자리에서 맴을 돌며 허위적거리는 것이 인생의 길일까?

오직 먹기를 위해서, 씨를 퍼트리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서루 헐뜯고 싸우고 잡어먹지를 못해서 앙앙거리고 발버둥질을 치다가, 끝판에는 한 삼태기의 흙을 뒤집어쓰는 것이 인생의 본연한 자태일까.'

동혁의 머릿속은 천 갈래로 찢기고 만 갈래로 얽혀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는 가슴이 무엇에 짓눌리는 것처럼 답답해서 벌떡 일어났다. 팔짱을 끼고 제절 앞을 왔다갔다하다가, 봉분의 주위를 돌았다. 열 바퀴를 돌고 스무 바퀴를 돌았다. 그러다가는 무덤을 베개삼고 쓰러지며, 하늘을 쳐다본다. 별은 그 수가 버쩍 늘었다. 북두칠성은 금강석을 바수어서 끼얹은 듯이 찬란히 빛나고 있다. 그 중에도 큰 별 몇 개는 땅 위의 인간들을 비웃는 듯이 눈웃음을 치는 것 같다. 동혁은 그 별을 향해서 침이라도 탁 뱉고 싶었다. 그러다가 그는 생각을 홱 뒤집었다.

'그렇다. 인생 문제는 그 자체인 인생의 머리로 해결을 짓지 못한다. 인류의 역사가 있은 후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술가가 머리를 썩히다가 해결의 실마리도 잡어 보지 못한 문제다. 그것을 손쉽게 풀어 보려고 덤비는 것버텀 망령된 짓이다.'

하고는 단념을 해버린 뒤에,

'그렇지만 채영신이가 죽은 것과 같이, 박동혁이가 살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명이 있는 동안은 값이 있게 살어 보자! 산 보람이 있게 살어 보자! 구차하게 살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타고난 목숨을 제 손으로 끊어 버리는 것도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하고 영신이가 반은 자살한 것처럼 생각도 하여 보았다.

'일을 하자! 이 영신이와 같이 죽는 날까지 일을 하자! 인생의 고독과 고민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일을 해야만 한다. 사랑하던 사람의 사업을 뒤를 이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 울어 주고 서러워해 주는 것버덤, 내가 청석골로 와서 자기가 끼친 사업을 계속해 준다면, 그의혼백이라도 오죽이나 기뻐할까. 든든히 여길까. 일에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는 격언이 있지 않은가.'

하고 몇 번이나 생각을 뒤집었다.

'그럼, 우리 한곡리는 어떡허나? 흐트러진 진영(陣營)을 수습할 사람도 없는데…….'

동혁은 다시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혁은 앞으로 해나갈 일을 궁리하기보다도 우선 저의 신변이 몹시 외로운 것을 느꼈다. 애인의 무덤을 홀로 앉아 지키는 밤, 그 밤도 깊어 가서 저의 숨소리조차 듣기에 무서우리만치나 온누리는 괴괴한데, 추위와 함께 등허리에 오싹오싹 소름이 끼치게 하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고독감이다.

처음부터 서로 믿고 손이 맞아서 일을 하여 오던 동지에게 배반을 당하고, 부모의 골육을 나눈 단지 한 사람인 친동생은 만리타국으로 탈수한 후 생사를 알 길 없는데,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저의 반려를 삼아 한 쌍의 수리와 같이 이 세상과 용감히 싸워 나가려던 사랑하던 사람조차 죽음으로써 영원히 이별한 동혁은 외로웠다. 무변대해에서 키를 잃은 쪽배와도 같고, 수백 길이나 되는 절벽 아래서 격랑에 부닥기는 불 꺼진 등대만치나 외로웠다. 무한히 외로웠다.

그러나 한참 만에 동혁은 무거운 짐이나 부린 모군꾼처럼,

"휘유―"

하고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다시 마음을 돌이켜 보니, 저의 일신이 홀가분한 것도 같았던 것이다.

'채영신만한 여자를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진댄, 차라리 한평생 독신으로 지내리라. 아무 데도 얽매이지 않는 몸을 오로지 농촌사업에다만 바치리라.'

하고 일어서면서도 차마 무덤 앞을 떠나지 못하는데 멀리 눈 아래에서 등불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원재와 다른 청년들이 동혁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혹시 산소에나 있나 하고 떼를 지어 올라오는 것이었다.

동혁은 잠자코 청년들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장로의 집에 잠시 들러 곤해서 쓰러진 백현경을 일으키고, 몇 마디 앞일을 의논해 보았다. 백씨는 여전히 값비싼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종아리가 하얗게 내비치는 비단 양말을 신은 것이 불쾌해서, 동혁은 될 수 있는 대로 외면을 하고 그의 의견을 들었다.

"여기 일은 우리 연합회 농촌사업부에서 시작헌 게니까, 속히 후임자를 한 사람 내려보내서 사업을 계속하기로 작정했어요. 영신이만 헐 수야 없겠지만 나이두 지긋허구 퍽 진실헌 여자가 한 사람 있으니까요."

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동혁은 더 묻지 않았다. 부탁 비슷한 말도 하기 싫어서,

"그럼 나두 안심허겠소이다."

하고 원재네 집으로 내려왔다. 영결식장에서 여러 사람 앞에 선언한 대로 당분간이라도 청석골에 머물러 있어 뒷일을 제 손으로 수습해 주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였다. 그러나 이미 후임자까지 내정이 되고 진실한 사람이 온다는데, 부득부득 '나를 여기 있게 해주시오'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영신이가 거처하던 원재네 집 텅 비인 건넌방에서 하룻밤을 드새자니, 동혁은 참으로 무량한 감개에 몸둘 바가 없었다. 앉았다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세상 모르도록 술이나 취해 봤으면…….'

하고 난생 처음으로 술생각까지 해보는데, 원재가 저의 이부자리를 안고 건너왔다.

두 사람은 형제와 같이 나란히 누워서 불을 끈 뒤에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였다. 동혁은,

"나는 새루 온다는 여자버덤두 원재를 믿구 가네. 나도 틈이 있는 대루 와서 보살펴 주겠지만 조끔두 낙심 말구 일을 해주게!"

하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원재도,

"채선생님 영혼이 우리들헌테 붙어댕기시는 것 같어서 일을 안 헐래야 안 헐 수가 없겠에요."

하고 끝까지 잘 지도를 해달라는 말에 동혁은 이불 속에서 나 어린 동지의 손을 더듬어 꽉 쥐어 주었다.

닭은 두 홰를 울고 세 홰를 울었다. 그래도 동혁은 이 방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던 사람과 지내 오던 일이 너무나 또렷또렷이 눈앞에 나타나서 머리만 지끈지끈 아프고 잠은 아니 왔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감기는 눈앞에서 뜻밖에 이러한 글발이 나타났다. 청석학원 낙성식 때 식장 맞은편 벽에 영신이가 써붙였던 슬로건 같은 글발이 비문처럼 천장에 옴폭옴폭하게 새겨지는 것이었다.

과거를 돌려다보고 슬퍼하지 마라. 그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아니할지니 오직 현재를 의지하라. 그리하야 억세게, 사내답게 미래를 맞으라!

이튿날 아침 동혁은 산소로 올라가서,

'당신이 못다 한 일과 두 몫을 하겠다.'

고 맹세한 것을 이제로부터 실행하겠다는 말을 다시 한번 자신 있게 한 뒤에 홱 돌아서서 그 길로 내처 걸어 한곡리로 향하였다. 그러나 시꺼먼 눈썹이 숱하게 난 그의 양미간은 생목(生木)이 도끼에 찍힌 그 흠집처럼 찌푸려졌다. 아마 그 주름살만은 한평생 펴지지 못하리라.

어머니의 병이 염려는 되었으나, 그는 바로 집으로 가기가 싫어서 역로에 몇 군데 모범촌이라고 소문난 마을을 들렀다.

어느 곳에서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청년이 오막살이 한 채를 빌려 가지고 혼자서 야학을 시작한 곳이 있고, 어떤 마을에서는 제법 크게 차리고 여러 해 동안 한글과 여러 가지 과정을 강습해 내려오다가, 당국과 말썽이 생겨 강습소 인가를 취소당하고 구석구석이 도적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한곡리서 오십 리쯤 되는 장거리에서 멀지 않은 촌에서는 청년이 서너 명이나 보수 한 푼 받지 않고 삼 년 동안 주야학을 겸해서 하는 곳이 있는데, 그들은 겨우내 두루마기도 못 얻어 입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손끝을 호호 불어 가며 교편을 잡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편허게 지냈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그는 그러한 지도분자들과 굳게 악수를 하고 하룻밤씩 같이 자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새로운 방침을 토론도 하였다. 어느 곳에를 가나,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계몽적인 문화운동도 해야 하지만, 무슨 일에든지 토대가 되는 경제운동이 더욱 시급하다."

는 것을 역설하고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이제부터 한곡리에만 들어앉었을 게 아니라 다시 일에 기초가 잡히기만 하면,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널리 듣고 보기도 하고, 또는 내 주의와 주장을 세워 보리라. 그네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같은 정신과 계획 아래에서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 보리라.'

하니, 어느 구석에선지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들이 그러한 고생을 달게 받으며 굽히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을 실지로 보니 동혁은 한곡리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할 때의 생각이 바로 어제런 듯이 났다. 동시에 옛날의 동지가 불현듯이 보고 싶었다. 일체의 과거를 파묻어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아가려는 생각이 굳을수록 동지들의 얼굴이 몹시도 그리워졌다.

'건배를 찾어가 보자.'

지난날의 경우는 어찌 되었든 맨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건배였다. 보고만 싶은 게 아니라 제가 감옥에 있는 동안 박봉생활을 하는 사람이 두 번이나 적지 않은 돈을 부쳐 준 치사도 할 겸 그가 일을 보는 군청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건배는 군청에도, 거기서 멀지 않은 사글세로 들어 있는 그의 집에도 없었다. 건배의 아내와 아이들은 반겼으나,

"엊저녁에 한곡리꺼정 다녀올 일이 있다구 자전거를 타구 가서 여태 안 들어왔어요."

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무슨 일일까? 나를 찾어가지나 않었나.'

하고 동혁은 일어서는데, 안주인이 한사코 붙들어서 더운 점심을 대접받으며 지내는 형편을 들었다.

"노루꼬리만한 월급에 그나마 반은 술값으루 나가서, 어렵긴 매일반이야요. 일구월심에 다시 한곡리루 가서 살 생각만 나요. 굶어두 제 고장에서 굶는 게 맘이나 편하죠."

건배의 아내는 당장에 따라 일어서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동혁은 그와 의형제까지 한 사이를 알면서도 영신의 죽음은 짐짓 말하지 않았다. 그가 영신의 소식을 묻고 혼인 때는 꼭 청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

"네에, 청허구말구요."

하고 쓰디쓴 웃음을 웃어 보였다.

한곡리가 십 리쯤 남은 주막 근처까지 왔을 때였다.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넘는 양복쟁이와 마주치자 동혁은,

"여어, 건배 군 아닌가?"

하고 손을 들었다.

"요오, 동혁이!"

키장다리 건배는 자전거를 내던지고 달려들어 동혁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피차에 눈을 꽉 감고 잠시 말이 없다가,

"이게 얼마 만인가?"

"어디루 해 오는 길인가?"

하고 동시에 묻고는 함께 대답이 없다.

"아무튼 저 집으루 좀 들어가세."

건배는 동혁을 끌고 주막으로 들어갔다.

"아, 신문에까지 났데만, 영신 씨가 온 그런……."

건배는 대뜸 동혁의 가슴속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르고는 말끝을 맺지 못한다. 동혁은 손을 들며,

"우리 그 사람의 말은 입 밖에두 내지 마세. 제발 그래 주게!"

하고 손을 들어 친구의 입을 막았다. 건배는 머리를 떨어트리고 있다가 한숨 섞어,

"그렇지, 남자헌테는 사랑이 그 생활의 전부가 아니니까…… 허지만, 어디 그이허구야 단순한 연애관계뿐이었었나? 참 정말 아까운……."

하는데,

"글쎄 이 사람, 그만둬!"

하고 동혁은 성을 더럭 내었다.

두 친구는 말머리를 돌렸다. 둘이 서로 집을 찾아갔더라는 것과 그동안에 격조했던 이야기를 대강대강 하는데, 청하지도 않은 술상이 들어왔다. 건배는,

"나 오늘은 술 안 먹겠네."

하고 막걸리 보시기를 폭삭 엎어 놓더니 각반 친 다리만 문지르며 말 꺼내기를 주저하다가,

"자네, 그 동안 한곡리서 변사(變事)가 생긴 줄은 모르지?"

한다.

"아아니, 무슨 변사?"

동혁의 눈은 둥그래졌다.

"그저께 강기천이가 죽었네!"

"뭐? 누가 죽어?"

동혁은 거짓말을 듣는 것 같았다.

"사실은 강기천이 조상을 갔다 오는 길일세."

하고 건배는 듣고 본 대로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기천이는 연전부터 주막 갈보에게 올린 매독을 체면상 드러내 놓고 치료를 못 하다가, 술 때문에 갑자기 덧쳐서 짤짤 매던 중, 그 병에는 수은을 피우면 특효가 있다는 말을 곧이듣고 비밀히 구해다가 서너 돈쭝씩이나 콧구멍에다 피웠었다. 그러다가 급작스레 고만 중독이 되어서, 온몸이 시퍼래 가지고 저 혼자 팔팔 뛰다가 방구석에 머리를 틀어박고는 이빨만 빠드득빠드득 갈다가 고만 뻐드러졌다는 것이었다, 동혁은,

"흥, 저두 고만 살걸."

하고 젓가락도 들지 않은 술상을 들여다보며 아무런 감상도 더 입 밖에 내지를 않았다.

건배는 마코를 꺼내 붙이며,

"가보니, 아주 난가(亂家)데 난가야. 헌데, 형이 죽은 줄도 모르는 건살포는 서울서 웬 단발헌 계집을 데리구 왔네그려. 마침 쫓겨갔던 본처가 시아주범 통부를 받구 왔다가, 외동서끼리 마주쳐서 송장을 뻗쳐 놓구 대판으루 쌈이 벌어졌는데, 참 정말 구경헐 만허데."

하고 여전히 손짓을 해가며 수다를 늘어놓는다. 동혁은 고개만 끄덕이며 듣다가,

"망헐 건 진작 망해여지."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그런데, 자넨……."

하고 전보다도 두 볼이 더 여윈 건배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자네 그 노릇을 오래 할 텐가?"

하고 묻는다. 건배는 그런 말 꺼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고만 집어치겠네. 이 연도 말꺼정만 댕기구, 먹거나 굶거나 한곡리루 다시 가겠네. 되레 빚만 더끔더끔 지게 돼서 고만둔다는 것버덤두 아니꼽구 눈꼴 틀리는 거 많어서 이젠 넌덜머리가 났네."

하고 담배 연기를 한숨 섞어 내뿜으며,

"월급푼에 목을 매다느니버덤은, 정든 내 고장에서 동네 사람이나 아이들의 종 노릇을 허는 게 얼마나 맘 편허구 사는 보람이 있는 걸 인제야 절실히 깨달었네."

하고 진정을 토한다. 그 말에 동혁은 벌떡 일어서며,

"자아 그럼, 우리 일터에서 다시 만나세! 나는 지금 자네가 헌 말을 다시 한번 믿겠네."

하고 맨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굳게굳게 건배의 손을 쥐었다.

"염려 말게. 자넬랑은 벌판의 모래버덤 한 줌의 소금이 되어 주게!"

건배도 잡힌 손을 되잡아 흔들었다.

아무리 지루하던 겨울도 한번 지나만 가면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닥쳐온다. 반가운 손님은 신 끄는 소리를 내지 않듯이, 자취 없이 걸어오기로서니, 얼어붙었던 개천 바닥을 뚫고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말랐던 나뭇가지에서 새 움이 뾰족뾰족 돋아나는 것을 볼 때, 뉘라서 새봄이 오지 않았다 하랴.

동혁은 신작롯가에서 잔디 속잎이 파릇파릇해진 것을 비로소 보았다. 미루나무 껍질을 손톱 끝으로 제겨 보니, 벌써 물이 올라서 나무하는 아이들의 피리 소리도 멀지 않아 들릴 듯.

"인제 완구히 봄이로구나!"

한마디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짖어졌다.

그는 논둑으로 건너 서며 발을 탁탁 굴러 보았다. 흠씬 풀린 땅바닥은 우단 방석을 딛는 것처럼 물씬물씬하다.

동혁은 가슴을 봉긋이 내밀며 숨을 깊닿게 들여마셨다. 마음의 들창이 활짝 열리며 그리로 훈훈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 그는 다시 속 깊이 서리어 있는 묵은 시름과 함께,

"후―"

하고 마셨던 바람을 기다랗게 내뿜었다. 화로에 꺼졌던 숯불이 발갛게 피어난 방 속같이 온몸이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혁이가 동리 어귀로 들어서자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불그스름하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삼고 언덕 위에 우뚝우뚝 서 있는 전나무와 소나무와 향나무들이었다. 회관이 낙성되던 날 그 기쁨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회원들과 함께 패다 심은 상록수들이 키돋움을 하며 동혁을 반기는 듯.

"오오, 너이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구두 싱싱허구나! 저렇게 시푸르구나!"

동혁의 걸음은 차츰차츰 빨라졌다. 숨가쁘게 잿배기를 넘으려니까 회관 근처에서 '애향가'를 떼를 지어 부르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웅장하게 들려 오는 듯하여서, 그는 부지중에 두 팔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동리의 초가집들을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떠나 있던 주인이 저의 집 대문간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에헴, 에헴!"

하고 골짜구니가 울리도록 커다랗게 기침을 하였다.

그의 눈에는 회관 앞마당에 전보다 몇 곱절이나 삑삑하게 모여 선 회원들이 팔다리를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체조를 하는 광경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눈을 꿈벅 하고 감았다가 떴다. 이번에는 훠언하게 터진 벌판에 물이 가득히 잡혔는데, 회원이 오리떼처럼 논바닥에 가 하얗게 깔려서, 일제히 '이앙가(移秧歌)'를 부르며 모를 심는 장면이 망원경을 대고 보는 듯이 지척에서 보였다.

동혁은 졸지에 안계가 시원해졌다. 고향의 산천이 새삼스러이 아름다워 보여서 높은 묏부리에서부터 골짜구니까지, 산허리를 한바탕 떼굴떼굴 굴러 보고 싶었다. 앞으로 가지가지 새로이 활동할 생각을 하며 걷자니, 그는 제풀에 어깻바람이 났다. 회관 근처까지 다가온 동혁은 누가 등뒤에서,

'엇, 둘! 엇, 둘!'

하고 구령을 불러 주는 것처럼 다리를 쭉쭉 내뻗었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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