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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사천이백칠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의 사회라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발달되지 못하였다. 나라 국가라는 것도 아주 분명치 못하였다. 사람이라는 것은 짐승과 달라서 머리가 총명하여 짐승같이 단지 천연적 물건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의 힘으로 좀더 어떻게 잘살아 보자고, 농사짓는 법도 발명하고, 사냥이며 고기잡이도 하며, 집을 지어서 대자연의 덥고 추운 것을 방비하며 이렇게 나날이 더 잘살아 갈 방법을 연구하며 실행하며 살아 왔다. 그렇게 되니까 저절로 농사 잘 짓는 사람은 평지에서 살고 고기잡이 잘하는 사람은 강변이나 바닷가에서 살고 사냥 잘하는 사람은 산으로 가고 이리하여 부락(部落)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고 동리라는 것이 생기게되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형제 부자끼리도 그닥지 않은 일에 다투고 싸우는 일이 흔히 있다. 실수하는 일도 흔히 있다. 이런 때는 어른이 있어서 다툼은 말리고, 실수는 안하도록 지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남남끼리로 조직된 부락이나 동네에는 지도하고 중재할 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추장(酋長)이며 동리 어른이 필요하게 된다.

부락이며 동네가 많아지면, 부락부락끼리, 동네동네끼리의 지도자가 또 있어야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여러 부락이며 여러 동네를 합친 꽤 넓은 지역(地域)을 지도하고 지배할 사람이 있어야한다.

여기서 임군이라는 높으신 이가 계시어야 되게 되는 것이다.

위에 말한 사천이백칠십여 년 전에 부여(扶餘) 계통의 여러 부락들이 의논하여 임군으로 추대한 거룩하신 분이 단군(檀君)이라일컫는 분이다.

부여 계통의 민족이 몇 만 년 몇 십만 년 전부터 이 동반구에 살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단군이 임군이 되실 때는 지금의 만주군 전부와 조선 반도의 전부가 거지반 부여족의 동리 동리뿐이었다. 다른 민족도 간간 끼기는 하였으나 이 넓은 지역은 대개가 부여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지라 처음 단군께서 임군이 되실 때는 단군이 계신 그 근처의 지역 지금의 압록강 류의 사면수백 리의 임군이셨지만, 나도 나도 하고 뒤따라 부락 동네들이 단군께 심종하여 지금 조선 반도의 절반 이상과 지금 만주국의 대부분이 단군의 치하(治下)에 들게가 되었다.

이 민족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한다는 일 즉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는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나라에는 군사가 없고 무기(武器)는 단지 사냥을 하고 고기를 낚기 위한 것뿐이었다. 무슨 다툼이 있으면 말로 끝막아 중지시키고 검소 질박하고 반드시 제이마에서 땀을 흘려서야 먹고 입을 것을 구할 줄 알고 욕심이 없고 땅이 기름지고 산수가 청명하고 산물이 풍부하니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위로는 거룩하신 임군이 계시고 아래는 순후한 백성이 있으니 그야말로 태평건곤으로서 꿈과 같은 아름다운 나라이었다. 이리하여 단군의 창업하신 거룩한 나라이, 태평건곤 가운데서 수십 대를 보내고 세월이 일천이백여 년이나 흘렀다.

 

이러한 거룩하고 태평한 나라에 놀라운 괴변이 일어났다.

외국인의 침략을 받은 것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따라서 군사라는 것이 없던 이 나라에 천여 명의 외국인이 강제적으로 들어왔다.

()나라의 서족 자서여(子胥餘)라는 사람이 거느린 주()나라의 식민대(殖民隊) 오천여 명이었다.

이 자서여가 동방 식민대의 수령으로 되어 요동(遼東) 압록강 등 땅을 모두 지나서 지금의 평양까지 이르러서 거기다가 자리를 잡았다. 평양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부락을 모두 그의 세력 범위아래 집어넣었다.

단군의 이룩하신 나라는 그 동쪽은 태산 준령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교통로(交通路)는 서쪽 평양을 통과하여 남부 지방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서여의 이룩한 한족(漢族)의 새 나라 때문에 가운데로 탁 끊겼다.

하릴없이 단군의 후예는 압록강 상류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대만 다스리고 남부 지대는 내버렸다.

때는 지금부터 삼천육십여 년 전이다.

후일 이 부여 계통의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것과 거기 따라서 무예(武藝)라는 것이 없지 못할 것인 줄 절실히 느끼고 대대로 무예를 숭상하여 고주몽(高朱蒙)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구려(高句麗) 왕국을 건설하고 중부 지대를 도로 한족(漢族)의 손에서 빼앗기까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중부 지대는 늘 한족의 지배 아래서 지내 왔다.

그러면 자서여가 동쪽으로 오기까지 저편 서쪽인 지나(支那) 일대는 어떤 상황이었던가.

 

그 나라에도, () () ()와 같은 거룩한 임군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나라는 판도(版圖)가 매우 컸다. 교통 기관이 부족한 당시에 있어서는 동으로 가도 서로 가도 남, , 어디로 가도 끝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네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믿고, 자기네를 천하의 주인이라 믿었다. 저 멀고 또 먼 끝장나는 곳에 자기네와 생김생김이 다르게 생기고 말[言語]이 다른 사람이 사는것은 몰몰아 오랑캐라 하였다. 부여(扶餘)도 무론 지나인은 오랑캐라 하였다.

나라의 바닥이 너무 넓으니만치 한 임군이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형제나 아들들이나 혹은 공신(功臣)들에게 한 구역씩 떼어 맡겨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을 제후(諸侯)라 하였다. 임군은 천하의 주인이요 하늘의 아들이라 하여 천자(天子)라 하였다.

()나라의 시조(始祖) ()에서 시작하여 열일곱 번째의 천자인 걸()이 너무도 포학하였다.  제후(諸侯) 중의 한 사람인 성탕(成湯 ()나라에 ())이 군사를 거느리고 천자

를 쳐서 멸하고 스스로 서서 천자가 되었다. 이것이 지나 땅에 있어서의 타성찬역(他姓簒逆)의 시초이다.

이 나라에는 일찍부터 무기가 있고 군대가 있었다. 제후의 수효가 늘어 감을 따라서 제후끼리의 경쟁이 심하여지고 영토의 경계선에 대한 다툼이 많은 일 등등으로 자연히 군대가 생기고 전쟁이 생기게 되었다. 천자의 세력과 실력이 강하면 제후의 분쟁을 천자가 맡아 다스릴 것이지만 워낙 바닥이 넓어 천자 혼자서 감당키 힘드므로 제후에게 내어맡겼던 것이라, 천자가 그런 일까지간섭할 수가 없었다. 성탕(成湯)이 천자가 되면서는 나라 이름을 은()혹은 상()이라 하였다.

은나라 제이십육대 천자 주()의 대에 이르러 또한 포학이 자심하여 주()의 무왕(武王)이 제후를 거느리고 천자를 쳐서 천자를 손에 넣고 스스로 천자가 되었다. 무왕이 천자가 되면서 기() 땅의 자작(子爵) 자서여(子胥餘)로서 뽑아 조선 왕으로 봉하여 부여족의 평양으로 보낸 것이었다. 천하를 구분하여 외지(外地)와 내지(內地)로 나누는데, 천자가 직접 봉하는 곳을 내지라 하고 그렇지 않은 데를 외지라 하는바, 조선 땅도 내속(內屬)케 하는 의미였다.

세월은 또 흘렀다.

자서여 때문에 임군을 잃은 남쪽 부락들은 어떻게 되었나.

지금 조선 반도의 서남쪽에는 마한(馬韓)이라는 새 나라를 이룩하고 있었다. 동남쪽으로 한동안은 임군 없이 지내다가 마한의지도 아래 진한(辰韓)이 생기고 그 남쪽(지금의 경상남도의 남부요 삼국시대의 가락 방면)에는 변한(弁韓)이라는 나라이 생겼다.

지금의 강원도의 산악 지대와 동해안의 좁은 평지는 지나에서는 통틀어 이를 예맥(濊貊)이라 하는바, 창해국(滄海國)이라는 나라이 있었다.

자서여에게 교통로를 끊기어 모국(母國)과의 교섭의 길이 없어져서 한동안 쩔쩔매었으나, 이제는 도저히 모국과 교섭할 기회가다시 없을 것을 각오한 뒤에는 모두 자기네끼리 나라 하나씩을 이룩하여 가지고 다시 안정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후세의 일컫는 바 기자조선 때문에 단군의 나라이 남북 두토막에 잘라진 지도 구백여 년이라는 날짜가 흘렀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은 비교적 평원 지대요 땅이 기름지기 때문에 농사로써 근본을 삼았다. 게다가 기후가 온화하고 하니까, 천년세월에 사람의 체격 체질도 작게 되고 얼마간 약하게 되었다.

창해국은 그 대부분이 산악 지대요 동해안에 좁은 평지가 있고는 곧 동이 바다라 생업이 약초 캐기와 고기잡이라, 체격 체질이 자연 웅장 강대하여 갔다. 장사(壯士)들이 많이 났다. 창해국에서 유()씨가 세습적으로 임군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국내에서 나는 약초며 짐승의 가죽을 외국에 내보내고 곡식을 바꾸어다가 살며 그 지역이 산악이니만치 외국의 침범도 적게 살아 왔다.

그러는 동안 서쪽 지나 땅에는 유명한 주대(周代)의 치적이 베풀어졌다. 이보다 썩 후에 춘추시대 말년에 공자(孔子)라는 이가 생겨나서 유학(儒學)을 일으켰는데 그 소위 유학이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라 공자의 시대가 너무 어지러웠으니만치 옛날 주대(周代)의 예악(禮樂)이며 제도(制度)를 사모하여 그것을 강론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대로 몇 백 년 내려가면서 어지러워졌다. 제후(諸侯)의 위력은 나날이 약하여 감에 따라서 소위 춘추시대라 하는 것을 이루었다. 이 춘추시대 초에 벌써 제후의 나라가 일백이십 개로 줄어들었으니까, 그동안 벌써 구백여 개의 제후국이 다른 제후에게 먹힌 것이다. 춘추시대의 말기(末期)에는 줄고 또 줄어서 겨우 큰 제후 십여 국이 남은 뿐 다른 나라는 다 없어졌다.

천자주실(天子周室)도 오랑캐에게 쫓겨서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을 소위 동주(東周)라 한다. 춘추시대의 다음을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한다. 전국시대를 이룩하여 마감까지 막은 자가 진()나라이다. 본시진나라는 제후도 못 되는 미약한 지방이었다. 그렇던 것이 주실(周室)이 도읍을 옮길 때에 군사로 도운 공로로 제후로 오르고 기산(岐山)이서(以西)의 땅을 받았다.

그때는 진나라 밖에는 제후는 겨우 여섯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그런데 진나라는 땅이 너무 서쪽에 치우치고 게다가 근본이 얕다고 다른 여섯 제후가 얕보고 회의 같은 데도 청하지 않은 것을분하게 여기고, 성공한 뒤에는 동쪽으로 차차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벌써 다른 여섯 제후는 어느 제후든 진나라를 당할 자 없을이만치 진나라는 강하여졌다. 여섯 제후는 진나라를 제어할 방책이 없어서 쩔쩔매는 동안 진나라는 나날이 강성하여지며 나날이 제후들의 영토를 침범하였다.

여기서 여섯 제후는 소진(蘇秦)의 합종설(合縱說)도 써 보고 장의(張儀)의 연형(連衡)설도 써 보았지만, 진나라는 모두 그 계획을 깨뜨리고 그의 영토는 넓어 갈 뿐이었다. 진나라는 대대로 영명한 임군이 연하여 나서 백여 년 간을 꼭 같은 정책 아래서 방책과 방법에도 고침이 없이 안으로는 일변 나라를 기르고 밖으로는 여섯 제후를 쳐내려오다가 장양왕(莊襄王)의 아들 정()의 때에 이르러서는 책사들을 몰래 보내서 여섯 제후의 군신간을 이간붙이고 차례로 한() () () () () ()의 순서로 멸하여 버렸다.

천자인 주실(周室)은 이보다 먼저 없이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서서 천자가 되었다. 이 천자는 스스로 자기의 칭호를 시황(始皇)이라 하였다. 종래부터 수천 년간 써 내려오던 봉건제도 즉 제후를 봉하는 제도를 단연 폐지하고 천하를 제실(帝室)에 직속케 하여 군, (, ) 제도를 취하고 군에는 수()와 위()와 감()을 두어 는 정치, ‘는 군사를 맡고 은 이를 보살피고 의 아래을 속하게 하였다. 천자의 아래는 삼공을 두고, 삼공 이하로 백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자가 직접 임면(任免)하여 천자의 절대 독재권을 확립하였다. 여기 대하여 반대하는 소리가 꽤 높았으나(더욱이 제후가 되기를 바라는 황족 공신들의 반대) 일체로 탄압하였다. 천하의 병기(兵器)를 모두 서울로 거두어다가 녹여서 인형 열두개를 만들어 제실 이외에는 병기가 없게 하였다. 또 짐() () () () 등의 천자 전용의 글을 제정하여 다른 사람에게는 못 쓰게 하였다. 화폐, 도량형(度量衡), (), (), 차궤(車軌), 의관, 문자 등도 모두 획일적 제도를 세웠다. 천하의 책에 의서(醫書)와 농사에 관한 책과 복술에 관한 책 밖에는 모두 선비들의 군소리뿐으로 아무 쓸데 없는 것이라 하여 궁정의 소관이 이하 천하의 책을 모두 거두어서 불살라 버렸다. 여기 대하여 맹연히 반대하는 선비 사백육십여 인을 땅에 묻어죽였다.

옛날부터 제후들이 오랑캐를 막기 위하여 쌓았던 성을 수리하고 개축하고, 잇고, 늘이고 하여 만 리의 장성을 쌓았다. 천하의 부호(富豪) 십이만 명을 서울 한양에 불러들여서 서울을 호화로운 도희로 꾸몄다. 북쪽 오랑캐를 쳐물리고 그 대신 한족(漢族)을 거기 이민하고 남으로 안남(安南) 이북까지의 오랑캐를 몰아 내고 한족을 옮기어 강역을 넓히기 한량이 없었다. 일 년간에 다섯 번을 국내를 순유하여 천자의 높음과 애휼을 백성에게 알렸다. 그의 위령은 국내뿐 아니라 멀리 해외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천하를 손에 넣고 천하의 주인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시황에게도 한 가지의 커다란 번민과 근심이 있었으니,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인생에는 늙음과 죽음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피할 길이 없는가.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무엇하리오.’

옛날 이스라엘의 임군 솔로몬이 발한 탄식과 똑 같은 탄식을 시황도 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나라에서는 시황이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의 위협을 느끼어서 번민할 때에 동방 산악 지대 창해(滄海)왕국에는 유피(有皮)라는 이가 임군이 되어 평화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黎民雍여민옹

보습은 바로 메었느냐?”

창해(滄海)국 서울의 교외, 큰길에서 조금 벗어나서 있는 밭두렁에 앉아서 자기가 방금 다 치워 놓은 밭의 돌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민옹(黎民雍)은 뒤에서 들리는 이 소리에 번쩍 고개를 돌렸다. 거기는 그의 아버지 되는 상대부(上大夫 가장

높은 대신)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이리로 오는 것이었다.

아이구 아버님. 벌써 나오세요?”

오냐 후! 돌부리까지 모두 뽑아 치웠구나.”

, 방금 끝내고 지금 좀 쉬던 중이어요.”

여민옹은 그의 놀라운 장대한 몸집을 일으켰다. “그럼 시작할까요?”

어둡기 전에 갈아 치워야지.”

부자는 저편 밭두렁에 우두커니 서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소에게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소를 끌고 아들은 보습을 섬기면서 밭을 갈았다.

아버지.”

밭을 한창 갈면서 아들이 찾았다.

?

저 진()나라의 시황(始皇)인가 하는 사람은 어리석게도 장생불사해 보겠다고 산삼(山蔘)을 구한다지요.”

, 구한다더라마는 그게 어리석기야 뭐이 어리석겠느냐.”

천하이 넓으니 모르기는 하겠읍니다마는 산삼이야 우리나라밖에 어디 또 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으로야 제 생업 버리구 시황제의 상이나 타먹겠다구 산삼 가지구 갈 녀석이 어디 있겠어

. 그게 어리석지 않습니까?”

글쎄, 그렇게 생각하면 어리석을는지도 모르겠다마는 우리나라와 접경해서 기부조선(箕否朝鮮)에는 한족(漢族)도 꽤많으니까모르지. 한족의 욕심이란 본시 꽤 센 것이니까?

그놈들, 우리나라에 한 놈이라도 들어오기만 했다가는 이 주먹이 소리를 낼걸요.”

민옹은, 보습 섬기던 오른편 주먹 그야말로 커다란 바위와 같은 주먹을 들어서 한 번 둘러보았다.

, 그렇지만 시황제는 제법이더라. 그 넓은 나라를 다스려 나가자면 그렇게 해야지, 다른 방책이 없을 게야, 그만치 만들어 놓고도 불초한 자식이 있고 자기는 차차 늙어 가고 하니깐 걱정스러워서 좀더 오래 살아보잘 것이 아니냐?”

글쎄올시다.”

남의 나라 일은 둘째고, 우리나라의 일이 한심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느니라.”

뭐야요?”

, 그 중대부(中大夫)가 연해 참소질을 하고 내게 대해서 참소를 하다 못해서 너의 삼촌을 참소를 해서 잘못하다가는 일이 생기리라.”

중대부란 도전각(陶田角)이 말씀이지요? 그 도씨가 작은아버님을 나라님께 참소를 해요?”

그렇단다.”

아버지는 잠깐 돌아보세요.”

이 말에 아버지는 소를 멈추고 돌아보았다. 민옹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보습 위에 가로 놓았던(돌부리를 뽑느라고 가져왔던) 꽤 굵은 쇠몽치를 들었다. 그리고 그 한편 끝을 오른손으로 잡고 한번 고함치며 왼손에 힘을 주매 그 굵은 쇠몽치가 오른손 위에서 굽었다.

뿐이 아니었다. 다시 힘주어 마치 노끈을 팔에 감듯 천천히 팔에다가 감았다. 그것을 다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펴 가지고 좌우편 끝을 잡고 한 번 올라뛰며 고함치매 지금껏 굽었던 자

리가 남았던 쇠몽치가 쭉 곧추 펴졌다.

아버지, 이 주먹이면 못 당할 것이 있겠읍니까?”

아버지도 감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젊었을 때는 힘깨나 썼지만 너는 꽤 무던하구나.”

이 힘이 장차 헛되이 쓰이리까?”

이 대화뿐으로 아버지는 다시 소를 끄을고 아들은 보습을 섬기며 밭을 갈았다. 밭을 갈면서 또 이야기다.

아버지. 그 도씨가 무어라고 참소를 합니까?”

그저 별별 소리로 말하자면 나라님께 내 세력을 꺾자는 게로구나.”

그러구. 자기가 상대부가 되구 싶다는 겐가요?”

그럼! 이야 이놈의 소.”

이리하여 부자가 이 밭을 거의 다 간 때였다. 저편 큰길에서 이 밭을 향하여 총총걸음으로 달려오는 여남은 살쯤 난 계집애가 있었다.

민옹이 먼저 보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저 애가 누이 아닙니까?”

참 조카인가 보다.”

사실 그 계집애는 민옹의 삼촌 여해(黎蟹)의 딸이었다.

큰아버님!”

달려와서 큰아버지를 찾는 어린 계집애의 얼굴은 눈물이 그득하였다.

, 네냐? 웬 일이냐? 왜 눈물이냐? 무슨 일이 생겼느냐?”

큰아버님, 방금 나랏병정이 달려와서 아버님을 결박지어 갔어요.”

!”

부자가 동시에 낸 소리였다. “아버지. 도씨의 장난이군요.”

아버지는 대답치 않았다.

머리를 푹 수그렸다.

야 거기 잠깐 서 있거라, 밭 한 이랑만 더 갈구.”

한 이랑을 더 갈면서 생각하여 대답하려는 모양이었다. 부자는 소를 끄을고 저편 끝까지 갔다가 새 이랑을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계집애의 앞에 와서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 내 좋도록 조처할 터이니 어머님께 가서 아무 염려도 말고 기다리고 계시라구 그래라.”

염려 없을까요?”

내가 있지 않으냐?”

계집애는 잠시 더 서 있다가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자는 다시 밭을 갈았다. 한 이랑, 두 이랑, 아버지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 이랑을 더 간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

?”

너 오늘 밤 옥을 깨뜨리구 삼촌을 구해 내라. 결코 죄없는 병졸은 다치지 말구. 뒷벽을 뚫고.”

. 합지요.”

분명히 도씨의 작간이지만 네가 도씨를 건드리든가 하면 공연히 나라를 소란케 하는 거야. 그리고 나라님께 청을 해볼까구도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 나라님께서는 내가 백성들에게 신망이 있으니 하릴없이 나를 상대부로 두시지 도씨를 더 신임하시는 터에 청을 드려두 될 것 같지두 않아. 그러니께 그 주먹으로 옥 담벽을 뚫고서 그리고 구해 낼 도리 밖에는 없을까 부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왜 병졸을 건드리어요? 감쪽같이 구해내리다.”

. 나라 일두 참 한심하군.”

아버지, 아버지만 허락하시면 제 주먹으로 도씨 같은 것은 가루를 만들 터인데. 왜 허락 안하세요?”

글쎄, 너도 아다시피, 우리나라에는 우리네 여씨 집안과 그 도씨 집안이 수백 년째 명문 거족으로 내려오지 않았으냐. 도전 각이 한 사람을 없이한다 할지라도 수없는 도씨가 또 있지 않으냐 그러니까 나라이 크게 소란하게 될 것이야. 재상으로 앉아서 나라이 소란하게 될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제 생각 같아서는 한 주먹으로 가루를 만들겠읍니다마는. 아버지 인제 한 이랑 더 갈면 되겠읍니다.”

그 남은 한 이랑을 마저 갈고 아버지는 소를 끄을고 아들은 연장을 메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황혼이 가까워서였다.

그날 저녁 민옹은 저녁을 먹자마자 곧 잠자리에 들었다.

밤중에 깨기 위해서 일부러 일찍 잔 것이었다.

밤중, 닭이 두 회째 울 때쯤 해서 민옹은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소리없이 집을 빠져나왔다. 캄캄한 그믐 어두운 밤이었다. 길을 더듬어서 감옥까지 이르렀다. 감옥에서도 정문을 돌아서 뒤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그 낮지 않은 담 위에 손을 얹었다. 다음 순간은 그의 커다란 몸집이 소리도 없이 담 안에 들어서 있었다. 밤눈이 비교적 밝은 그는 옥문 앞에 병졸들이 앉아서 지키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다. 그리고 담에 꼭 붙어서 뒤로 뒤로 돌아갔다. 뒤로 돌아가서는 발소리를 힘껏 감추어 가지고 삼촌이 갇혀 있는 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이리하여 겨우 옥에까지 이르러서는 옥 담벽을 한 번 쓰다듬어 보고 그 뒤에는 잡담 제하고 주먹을 들어서 쿡쿡 담벽을 향하여 쏘았다. 주먹은 옥의 담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아무도 이 주먹 들어가는 소리는 못 들은 모양이었다. 주먹을 쫙 펴서 옥 담벽을 안에서 받치고 흠칫흠칫 하여보았다. 담벽은 그의 놀라운 힘에 움쩍거리었다. 소리가 안 나게 담벽을 뜯노라고 민옹은 한참 동안 노력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한모퉁이를 꽤 넓게 뜯어 놓았다. 민옹은 그 구멍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한 사람이 기다랗게 누워서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것이 만져졌다. 민옹은 가까이 가서 얼굴의 수염이며 손을 만져 보아 삼촌이 틀림이 없는 것을 알고 목 아래와 엉덩이 아래로 가만히 손을 넣어서 고요히쳐들었다. 그리고 그냥 잠에서 깨지 않게 하여가지고 구멍으로 도로 나와서 또한 소리를 감추어 담장까지 나왔다.

거기서 민옹은 삼촌을 높이 들어서 담장 위에 올려놓고 자기는

담장을 넘어서 다시 삼촌을 담장밖에서 내리었다. 이 동작에 삼촌이 잠이 깨었다.

?”

작은아버님.”

누구요?”

작은아버님. 저올시다. 조용하세요.”

, 민옹이냐, 여기가 어디냐?”

감옥 담장 밖이올시다.”

네가 나를 여기까지 꺼내었느냐?”

.”

안 된다. 나라님은 명으로 가둔 나를 꺼내면 되느냐?”

아니올시다. 아버님의 뜻을 받자와 이런 일을 했읍니다. 아버님 말씀이 이 일은 분명히 처사 그릇된 일이지만 나라님께서는 들으시지 않겠고, 그냥 두면 나라님께 좋지 않은 말씀이 돌아가겠다고 이렇게 구해 내라십디다.”

형님이 그러시어?”

, 아버님께서.”

.”

잠시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뒤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하였다.

음 인제부터는 영 망명객의 신세로구나.”

? 왜요?”

그렇지 않으냐. 나라의 죄인이니 어디 도망이나 해야지 않겠느냐.”

어디 다른 속에 가셔서 이름을 달리하시고 사시지요.”

그러니까 망명객이지. 좌우간 형님의 처분이니 좇을 수밖에 없지.”

어서 여기서 다른 데로 떠나십시다.”

형님께 먼저 가서 뵙자.”

숙질은 거기서 어두운 길을 더듬어서 여민옹의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매 민옹의 아버지 방은 민옹이 삼촌과 함께 올 것을 미리 알았던지 불을 가늘게 켜고 일어나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숙질이 들어서는 소리에 먼저 문을 열었다.

오는가?”

형님.”

아버지.”

, 어서 들어오게.”

숙질은 방 안에 들어갔다. 여방은 먼저 아들에게 물었다.

병졸은 다치치 않았지?”

감쪽같이 모셔왔읍니다.”

이번은 아우에게 향하였다.

욕보았네그려.”

아우는 푹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글쎄 알겠읍니까. 아까 병정들이 와서 어명으로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고는 지금껏 영문을 모르지요.”

형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생각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여보게, 자네에게 부탁을 할 중대한 일이 있어.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진나라 시황제가 천하에 널리 산삼을 구하지 않는가? 자네 진나라에 잠입을 해서 시황제가 사람을 산삼 캐러 우리나라로 밀송이나 하지 않는지 염탐해 가지고 돌아오게.”

그야 형님의 명령이라시면 하기는 하겠읍니다마는.”

마는 어떻단 말인가?”

나라의 죄인이 어떻게 다시 돌아오기야 하겠읍니까?”

여보게. 낸들 생각없이 일을 처리하겠나? 자네 그것을 염탐해가지고 돌아와서 몰래 내게로 오면 내가 나라님께 여쭈어서 그 공로로써 자네 소위 죄라는 것을 특사하도록 하면 될 것이 아닌가?”

형님!”

염려 말고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게. 자네 없는 동안 자네 집안 걱정도 하지 말고. 내 뒤보아 줄 테니.”

그럼 처분대로 하겠읍니다.”

그럼 자네 집에 잠깐 들러서 집안들에게 안심이나 하게 하고 밝기 전에 길을 떠나게. 밝으면 재미없으니.”

그럼 형님, 인제 가겠읍니다.”

어서 가게.”

아우는 일어섰다.

형과 조카는 대문까지 바래 주었다.

대문 밖을 조금 간 때쯤 해서 여방은 아들 민옹을 불렀다.

, 너 삼촌이 무사히 이 서울을 벗어나도록 먼발로 뒤밟아라.”

.”

쾌활히 대답을 한 뒤에 민옹은 대문 밖을 나서서 저편 어두운 길을 더듬어 가는 삼촌을 뒤밟았다. 삼촌은 자기의 집으로 들어갔다. 민옹은 그냥 이편에 서서 기다렸다. 들어갔던 삼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 그러고는 이번은 차차 교외로 향하여 나아갔다. 그 뒤를 민옹은 먼발로 밟아 갔다. 교외를 나서면 밭 틈으로 난 길. 그 길을 지나면 산, 그 산을

넘으면 다른 동리, 그 동리만 지나면 한참은 무인지경이요, 거기만 나서면 인제는 안심이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삼촌의 뒤를 민옹은 그냥 밟았다.

그리하여 산을 넘고 동리를 지나서 무인지경에 들게 되자 날이 훤하게 동이 트기 비롯하였다. 민옹은 여기서 저편 앞에 쓸쓸히 지금 타국을 향하여 가는 삼촌의 등을 향하여 절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려고 발을 돌이켰다.山蔘산삼

오늘도 또 나가시지요?”

. 나가지.”

여기는 창해국 개골산(皆骨山)의 외딴 산골에 단 한 채의 집이었다. 이 집었다. 이 집 주인 내외는 창해 사람의 복색을 하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한족(漢族)이었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다른 여섯 나라를 집어삼키고 책을 불사르고 선비들을 학살을 할 때에 그 난을 피하여 허덕지덕 도망하여 오고 또 오노란 것이, 창해국의 개골산까지 이르러서 거기서도 외딴 산골에 오막살이를 틀고 안해는 베짜고 남편은 약초 캐어 동리에 내려가서 쌀을 바꾸어다가 연명을 하여가는 망명객의 집이었다. 주인의 이름은 서복(徐福)이었다.

그럼 점심을 싸야겠지요.”

.”

아내는 점심을 싸다가 남편에게 주었다. 남편은 그것을 받아 차고 나섰다.

, 오늘은 이 골짜기로 가 볼까?”

매일 약초를 캐러 나다니는 서복으로서도 매일 다른 골짜기로만 찾아들 수가 있을 만치 수없는 골짜기와 수없는 봉우리를 가진 이 산이었다. 그 위에 그 어느 골짜기라 굽어보면 모래알 하나까 지라도 다 보이는 맑은 개천이 안 흐르는 곳이 없고 쳐다보면 기암괴석이 첩첩이 둘린 가운데 바위 틈마다 푸른 솔이며 아름다운 꽃이 없는 데가 없는 인간 세계의 선경(仙境)이었다. 매일 보나 매일 아름답고 매일 밟으나 매일 정다와지는 곳이었다.

아아, 선경이로다. 이것이 내 나라라면 얼마나 좋으랴?”

계곡을 건너며 바위를 넘으며 약초 캐기에 여념이 없는 서복이지만 이 아름다운 경치에는 자연히 눈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다운 산간을 약초를 캐며 올라가던 서복은 점심때 어떤 샘물가의 바위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 눈을 들었다. 눈을 들면 여전히 꿈 같은 선경의 기암괴석은 눈앞에 전개되어 그를 황홀케 한다. 잠시를 황홀히 이 경치를 우러러보다가 그의 생각은 망명할 때로 올라갔다.

오백 명에 가까운 그의 동지가 시황제에게 잡혀서 땅에 묻혀 죽을 때 그는 단지 삶을 찾아서 쫓기고 쫓기어 달아났다. 단지 한족(漢族) 없는 곳을 찾아서 뛰되 요동(遼東)에는 한족이 있었고 압록강 건너도 있었고 평양도 있었고 이 모든 곳을 피하여 산골로 산골로 피하여 온 곳이 이 선경 창해국이었다. 처음에는 고국이 그립기도 하고 친구며 친척들이 그립기도 하고

사람의 무리가 그립기도 하며 자기의 생활이 퍽 외롭기도 하였지만, 지나고 보매 이 선경이 정들었다. 인제는 자자손손이 이 신선의 나라에 뼈를 묻으며 번식하리라고 마음먹고 있는 중이다. 잠시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에라. 또 캐러 떠나자.”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면서 눈앞을 보매 문득 서너 걸음 앞에 이상한 풀이 한 포기 눈에 띄었다.

저게 뭐일까?”

가서 뽑아 보려 손을 대었다. 잡아당겼다. 이상하였다. 좀체 뽑아지지 않았다. 이번은 호미로 사면을 파고 뽑아보았다. 한 뼘이 좀 남짓한 무()같기도 하고 도라지 같기

도 한 이상한 지금껏 본 바이 없는 것이었다. 입으로 조금 씹어 보았다. 쓰디쓴 한편으로는 온 입안으로 향기가 확 퍼진다.

이게 무엇일까?”

너무도 향그러운 바람에 그냥 다 먹어 버렸다. 다 먹고 몸을 일으키려 하니 몸이 노곤하니 피곤하였다. 그래서 다시 주저 앉으니까 마치 독한 술을 마신 듯이 차차 몸이 취하여 온다. 서복은 그 뒤를 알지 못한다.

이튿날로 낮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깨어나니 몸이 한 번 개조된 듯 마음과 몸에 원기가 놀랍게 났다. 서복은 시험삼아 몸을 일으켜서 뛰어 보았다. 다리의 원기, 온몸의 원기 이전에 간신히 기어오르던 벼랑을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것이 이름에 듣던 바 산삼이었구나. 산삼이란 것은 신선 사는 곳에나 있다더니 이 창해국이 선계(仙界)였던가. 아마 경치로도 과연 선계로다.”

산삼을 맛본 서복은 다시 산삼을 얻어 보려고 눈이 뒤벌개서 다른 약초의 웬만한 것은 내버려 두고 돌아다녔다. 이 날도 늦어서야 서복은 집에 돌아갔다. 어제 나가서 지금이야 들어오는 남편을 너무도 기뻐서 맞는 안해에게 서복은 그 새 지난 일을 다 말하였다.

이튿날부터는 서복이가 산에 다니는 것은 순전히 산삼을 캐기 위해서였다. 다른 약초는 눈에 띄면 할 수 없이 캐었지 그의 원 목적은 산삼에 있었다. 그러나 산삼이란 것이 그렇게 쉽사리 눈에 뛸 까닭이 없었다. 목적한 산삼은 그 뒤는 한 번도 다시 못 만나고 목적치 않은 다른 약초만 연하여 늘어 갔다.

산삼! 산삼!

마치 산삼 미치광이였다. 이렇듯 구하려는 산삼은 다시 구하지 못하고 다른 약초만 늘어갈 동안 어느덧 서복의 집안 양식이 거의 끊어지게가 되었다. 이제는 그 새 캔 약초를 동리로 가져가서 양식을 바꾸어 올 밖에 없었다. 서복은 아내가 정리하여 말리어 둔 약초를 보에 싸서 지고 꽤먼 동리로 내려갔다.

거기서 단골 약초 주인을 찾아서 양식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큰 약초집으로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람들이 저희들끼리 잡담들을 하는 가운데 문득 시황제라는 말이 귓결에 들리므로 서복은 그리로 귀를 기울였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시황제가 산삼을 천하에 구한다니 진나라 천하에야 산삼이 어디 있담.”

하하하하. 그래도 구해 오면 좋은 벼슬을 주고 후한 상을 준다는걸.”

도대체 어리석은 사람이지, ()나라 제후로서 종주국(宗主國)을 없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단 그런 무도한 사람이 하는 노릇이라 귀여겨 들을 것도 아니야.”

그럼. 우리야 어쩌다가 다행히 산삼이 눈에 띄면 캐다가 우리 나라님께 드리지 시황제를 찾아갈 녀석은 없을걸.”

암 그렇구말구.”

도대체 산삼은 영물(靈物)이라 캐려구 마음먹구 덤벼들면 눈앞에 있으면서두 보이질 않는단 말이지.”

저절로 어떻게 눈이 뜨이지.”

진정으로 정성을 드리면 캐지기도 한다더군.”

글쎄.”

시황제에게 도라지나 한 짐 갖다주고 속으로 웃어 볼까.”

하하하하.”

그러고는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데로 넘어갔다.

서복은 그 말을 마음여겨 들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양식을 지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동리에서 돌아온 뒤로부터는 서복은 산삼과 약초를 캐러 산으로 돌아다니다가도 뜻하지 않고 멍하니 공상에 잠겨서 한참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고 하였다. 그의 마음에 생겨서 자라나는 한 가지의 공상 오히려 몽상(夢想)이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내니 임군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은 근거없이 공중 솟아나온 바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낼 만한 근거가 넉넉히 있었다.

서복의 공상의 줄기는 대략 이러하였다. 자기가 이제 산삼을 한 뿌리 캔다. 그러면 그것을 진나라로 가지고 가서 자기는 한 방사(方士)로 변색을 하고 시황제에게 뵙고 그 산삼을 바친다. 그러면 시황제는 산삼 한 뿌리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 더 많이 구해오기를 명할 것이다 그러면 그때야말로 자기의 공상 실현이 될 것이다.

듣건대 지금 창해국의 임군은 그다지 영특지 못하고 그 위에 사사 욕심이 많은 도씨가 신임을 받고 있다 한다. 이런 사람들은 매수 하려면 매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는 시황제에게, “산삼을 많이 구하려면 산삼은 영물이라 더러운 사람의 눈에는 뜨지 않는 법이오니,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씩만 줍시사.”

하고 그 동남동녀 오백 명씩의 의식용품을 넉넉히 받아 가지고, 후한 예물까지 받아 가지고 이 창해국으로 건너오리라. 이 나라의 도씨(陶氏) 따위는 약간한 예물이면 매수될 것이요, 그를 매수해 가지고 이 신선의 땅에 자리를 잡고 동남동녀 오백 쌍을 짝무어 놓으면 이삼 년 뒤에는 적지 않은 식구가 생길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이 신선의 땅의 임군이 아니냐. 일 년? 이 년? 삼 년만 가졌으면 자리야 넉넉히 잡겠지. 시황제에게 삼 년간을 먹고 입을 것을 타 가지고 오면 그 뒤는 여기 닦은 터에서 넉넉히 자활(自活)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을 먹고 서복은 더욱 눈이 뒤벌개서 산삼을 구하려 돌아다녔다. 얼마를 이렇게 다니면서도 산삼은 그림자도 못 본 서복은 전날에 약초방에서 들은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대체 산삼이라는 것은 구하려면 보이지를 않고 그렇지 않으면 정성을 잘 드리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서복은 정성을 드리기로 하였다.

이 땅 어느 곳이라 정갈하지 않은 곳이 없고 깨끗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서복은 그 가운데서도 고르고 골라서 가장 정갈하고 아름다운 곳에 제단을 뭇고 매일 목욕재계하면서 거기서 기도를 드리었다.

이러기를 백 일간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 날도 깨끗이 목욕재계를 하고 기도를 드리고 나니까 인제는 기도도 끝났다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맥이 푹 빠지며 그 자리에 그냥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한잠을 푹 자고 났다. 한잠을 푹 자고 그가 눈을 뜰 때였다. 그의 눈이 향한 곳 바로, 거기는 산삼의 잎이 분명히 있었다. 서복은 허망지망 달려갔다. 분명한 산삼이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인지 혹은 기도 덕인지는 모르지만 거기는 분명히 산삼이 하나마치 서복을 기다리듯이 비죽이 나 있었다.

서복은 그 가장자리를 곱게 돌라 파 가면서 이 산삼을 뽑았다.

!”

서복은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팔뚝만이나 한 커다란 산삼으로서 적어도 몇 백 년 묵은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옥황상제님, 감사합니다.”

다시 제단 앞에 이르러서 무한히 사례를 하였다. 서복은 그 캐낸 산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어떻게 됐지요?”

안해의 묻는 말에 서복은 대답 대신으로 캔 산삼을 내보였다.

아이구, 이게 무()구료.”

여보. 이 바보소리 작작 하오.”

그럼 뭐예요?”

이게 소위 불사약 불로초 산삼이라는 영물이오.”

이게?”

안해는 눈을 휘둥글게 하였다.

그러면 우리도.”

.”

그럼 당신은 이것을 가지고 진나라로 가세요?”

가구말구.”

가신다니 일이 바로 뜻대로 되면 오죽 좋으리까만 다 한 가지 근심은 당신은 시황께 근본만 들켰다가는 큰 일을 겪을 것이 근심이에요

그런 걱정 집어치오. 나를 알아볼 사람이 지금 천하에 어디있겠소? 그런 염려는 아예 하지나 마오.”

그 이튿날부터는 서복은 약초를 캐러 다니지 않았다. 남편과 안해는 길 떠날 준비에 분주하였다. 외딴 산골에 여인 혼자를 두고 길 떠나는 바이라 집 울타리도좀 튼튼히 하여야 할 것이다. 근처의 나무를 베어다가 이것도 하였다. 적지 않은 길이라 옷 준비도 넉넉히 하여야 할 것이다. 남편은 남편의 할 일, 안해는 안해의 할 일로 분주히 수일간을 보냈다. 그리고 인제는 준비는 다 되었다. 인제는 떠나는 일뿐이었다. 일이 뜻대로 되기만 하면 남편은 임군이 되고 안해는 왕비가 된다. 이런 솔깃한 노릇이 어디 다시 있으랴. 서복이 길을 떠나는 날이었다. 산삼을 좋은 종이에 싸고 또 싸서 그것을 봇짐 깊이 넣고 새벽 일찍이 안해가 지어 준 밥을 먹고 길을 떠남에 임하여 서로 작별하였다.

내 다녀올 동안 잘 있수.”

안녕히 다녀오세요.”

외딴 곳이라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자오. 늘 문 잘 닫고.”

. 저는 걱정 마시고 당신이나 본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삼가세요. 그것만이 걱정이여요.”

그것은 아예 걱정도 마시오. 자 갑니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바래는 안해, 돌아보며 가는 남편. 작별은 쓸쓸하였다. 그러나 장래의 엉뚱한 야망(野望)을 마음에품었으니만치 보내는 안해도 그다시 섭섭하지도 않았고 떠나는 남편도 마찬가지로 마음은 희망으로 찼을 뿐이었다. 육로로 낮에는 길을 가고 밤에는 인가에 묵으며

 

이리하여 기부조선(箕否朝鮮)도 지나고 압록강 건너서서 부여 땅도 지나고 진나라 영토 안에 들어섰다.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느낀 것은 역시 고국에 대한 정애였다. 눈 익은 옷을 입은 무리들만이 귀 익은 말로 지껄이며 돌아다니는 이고국, 이 고토 일단 단념하였다. 다시 보지 않으려 하였다지만 들어서 보니 역시 반갑고 정다왔다. 사람이란 역시 이런 정은 잊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서복은 통절히 느꼈다. 진나라 땅에 들어서서, 서복은 길가의 사람들의 이야기로써 지금 시황제는 전국을 순유(巡遊)하는 중으로서 지금쯤은 제()땅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 함양을 향하려던 길을 다시 돌이켜서 제 땅으로 향하였다. 그의 등에는 그의 장래를 작정할 귀중한 산삼이 든 봇짐이 지여 있는것이었다. 지금껏 오는 동안도 서복은 잠잘 때도 그 산삼만은 몸에서 떼지 않고 간수하여 온 것이다.

秦始皇진시황

날을 거듭하여 서복은 제()땅으로 길을 채었다. 이리하여 수 일 뒤에는 목적한 바에 제 땅에 이르렀다. 황제의 위신을 천하에 보이고자 나라를 순유하는 시황제라 의장병이라 호위하는 사람들로 우글우글 끓었다. 이 굉장한 무리를 끄을고 나라를 순유하던 시황제는 여기서 갑자기 병들어 눕게 되었다. 천하의 명의라는 명의는 모두 다 불러서 진맥케 하였다. 그리고 명약이라는 명약은 다 먹어 보았다. 그러나 시황제의 병세는 조금도 낫지 않고 나날이 침중하여 갔다.

선계(仙界)에 있다는 산삼이 아니오면 폐하의 환후를 돌이키기 좀 힘들까 하옵니다.”

명의들의 일치한 의견이 이것이었다. 이러한 때에 서복이 산삼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황제의 행궁(行宮)에 소복은 방사(方士)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리고 시황께 이르러서,

방사가 산삼 한 뿌리를 선계에서 구해 가지고 폐하께 진상하고자 지금 왔읍니다.”

고 여쭈었다. 아무리 귀한 산삼을 가져왔기로서니 한낱 방사로서 처음에 황제께 뵙기는 어려웠다. 서복은 행궁한 방에 머물게 하고 산삼은 황제 어전으로 가져갔다. 서복은 기위 자기가 산삼의 효력을 본 사람이니만치 산삼의 효력에 대하여서는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행궁의 한 방에 머물러서 반드시 황제가 자기를 부를 날이 있을 것을 믿고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이튿날 낮 뒤에 꽤 높은 관원이 직접 사복을 불러 내었다. 그리고 지금 황제가 부르신다는 뜻을 알리었다. 그 관원의 말에 의지하건대 어제 황제는 산삼을 먹고 그냥 혼혼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야 잠에서 깨었는데 깬 때는 벌써

그렇게 침중하던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와내(臥內)에서 서복을 불렀다. 이것은 각별한 대우였다. 와내의 문이 열리자 서복은 그만 황제의 위엄에 눌려 넓적 엎드

려 버렸다.

, 참 영약이더라.”

와내에서 나오는 이 말, 이것은 분명히 시황제의 말이었다. 보통으로 하는 말이언만 방이 더르릉 울리도록 웅장하였다. 서복은 엎드린 채 머리를 더욱 숙였다.

. 이 와내로 들어오너라.”

네이.”

서복이 움직이지 못하고 대답만 하였다. 시황제가 다시 불렀다.

감사한 말도 하고 싶고 의논할 일도 있고 하니 이 와내로 들어오너라.”

네이.”

서복은 엎드린 채로 와내로 들어갔다. “, 얼굴을 들어라.”

네이.”

그러나 감히 들지 못하였다

, 얼굴을 들어

네이.”

서복은 얼굴을 약간 들었다. 그러면서 순간의 틈으로 눈을 치떠 시황제를 보았다. 그러나 옥좌(玉座)의 편이 다만 눈이 부시고 황공할 뿐 서복은 시황제를 보지 못하였다.

그 영물을 어디서 구했느냐?”

네이.”

대답해 보아라.”

네이. 동해(東海) 밖 오천 리에 신선이 사는 섬이 있사옵니다. 소인이 낚시질을 나갔삽다가 바람에 불려 우연히 거기까지가서 한 뿌리 구해서 폐하께 진상합고저 가지고 돌아온 바이올시

.”

오오! 감사하다. 참 영약이더라.”

황공하옵니다. “그것을 더 구할 수는 없겠느냐?”

황제의 묻는 것은 모두 서복이 미리 짐작했던 바였다. 거기 대하여 할만한 대답을 전부 미리 준비했던 서복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어렵기는 어렵습지만 못 구할 바는 아니옵니다.”

그러면 어떤 방책이 있느냐.”

네이, 다름이 아니오라 산삼이라는 것은 영물이오라 이것을 찾고자 하는 자의 눈에는 띄지 않는 법이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얻을까?”

그 대신 아직 더러움을 모르는 동남(童男)이나 동녀(童女)가 구하러 다닐 때는 눈에 띄는 수도 있사옵니다.”

.”

폐하께옵서 소신께 동남동녀를 각각 오백 명씩만 내어맡기시면 소신이 인솔하옵고 그 신선의 섬에 이르와 힘 자라는껏 폐하를 위하와 산삼을 구하여 볼까 하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오늘로라도 추려 주마.”

황공하옵니다. 또 한가지 아룁는 바는 산삼을 하루이틀에 구하려 하여도 못 될 일이오니 적어도 삼 년의 긴 날짜는 가졌어야 되겠사옵니다. 동남동녀 합계 일천 명의 삼 년간 양식과 입을 것이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그것 역시 어렵잖은 일이다. 시재로라도 내어주마.”

또 한가지, 적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이오라 좋은 배 열 척이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준비하여 주마. 그 밖에 다른 것은 소용이 없느냐?”

그것이면 넉넉하올까 하옵니다.”

그것은 다 준비해 줄 터이고 삼 년의 날짜를 허락해 줄 터이니 삼 년만 많이 구해 가지고 돌아오너라.”

어명이 아니온들 지성껏 봉행하오리다.”

. 어제의 산삼도 감사하거니와 쉽지 않은 일을 짐()을 위해서 감행하려는 지성을 통촉한다.”

황공무지하옵니다.”

물러가서 기다려라. 후에 다시 부를 날이 있으리라.”

네이. 성수무강하시옵소서.”

서복은 엎드린 채 와내를 물러 나왔다. 그리고 와내의 문이 닫힌 뒤는 비로소 머리를 들고 있어섰다. 그를 그의 방으로 인도하려는 내감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내감의 인도를 받아서 이른 방은 아까까지 거처하던 방이 아니다. 그 방보다 훨씬 넓고 화려하며 서복에게 시중들기 위하여 내시까지 네 명이 벌써 등대되어 있었다. 서복은 내심 흡족하였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어 나간다. 계획하였던 바의 십의 구는 벌써 된 셈이다. 인제는 황제가 내어주는 동남동녀 일천 명과 양식과 기타 기구를 배에 싣고서 창해국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행궁의 화려한 자기 방에 몸을 커다랗게 내어던질 때에 서복의 입가에는 저절로 흐르는 득의의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황제에게서 산삼에 대한 사례가 내렸다. 그것은 황금 다섯 근과 백금 쉰 근과 비단 삼백 필이었다. 순유의 도중 병환이 나서 제() 땅에 머물러 있던 황제는 산삼의 덕택으로 몸이 깨끗이 되고 곧 다시 순유의 길을 떠났다. 서복도 황제의 어명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뿐더러 수행원 중에도 긴한 수행원의 축에 끼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서복은 득의양양하였다. 천하가 모두 자기의 발 아래 내려다보이는 듯하였다. 그러한 득의양양한 생활을 하면서 서복이 더욱 느낀 것이 권세에 대한 동경이었다. 지금 자기는 한낱 임군의 수행원이 되어서도 이렇듯 마음이 흡족하거늘 장차 자기가 임군이 되면서 그 날은 얼마나 기쁘고 흡족하랴. 일은 다 꾸미어 놓았다. 거의 다 되었다. 자기가 임군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어서 그 날이 오과저.

서복은 초조히 그 날을 기다렸다. 황제의 순유 그 뒤 두 달쯤 더 계속되었다. 그러고는 서울 함양 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서울 대궐 안에는 벌써 육천 명의 동남동녀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서 서복이 맘대로 뽑아 골라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황제의 순유는 그 뒤 두 달쯤 더 계속되었다. 그러고는 서울 함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서울 대궐 안에는 벌써 육천 명의 동남동녀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서 서복이 맘대로 뽑아 골라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서복은 육천 명의 동남동녀 중에서 일천 명을 뽑는데 무엇보다도 인물을 택하였다. 장차 자기의 꿈대로 자기의 나라가 서게 될 진대 백성들 가운데 추하게 생긴 자가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벌써 제일차로 뽑아들이었던 가운데서 서복이 재차 뽑은 자이라 사내나 계집이나 모두 미소년 미소녀들뿐이었다. 그것을 늘여 세우고 바라볼 때 서복은 웃음을 웃었다. 일천 명의 삼 년간 양식이며 의복 기구 등속은 언제든 황제의

창고만 열면 있을 것이로되 배가 아직 되지 못하여 서복은 수일 간을 함양에 머물렀다.

배도 튼튼히 되었다. 인제는 아무 때라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서복은 다시 한번 황제의 어전에 불리었다. 그것은 이전 제()땅의 행궁에서와 달라서 정식으로 대궐 용상(龍床) 앞에 나아간 것이었다. 서복은 황제의 어전에 부복하였다.

먼길을 떠나게 되었구나.”

황제는 위로하는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네이. 명일 인솔하옵고 서울을 떠나겠습니다.”

()을 위해서 수고하노나.”

신자(臣子) 된 자 폐하를 위하와 이맛 일을 하는 것을 무엇을 수고라하오리까. 단지 배 열 척에 가득가득히 싣도록 많이 캐지 못할까 이것이 근심이로소이다.”

열 뿌리만이라도 있으면 백 살까지는 살 것 같더라.”

만수무강하옵서야지 백 세가 무엇이오니까?”

고맙다. 무슨 다른 소청이 없느냐.”

한 가지 있사옵니다.”

그 새 생각한 결과 새로 생긴 안()이었다.

무엇이냐?”

진나라 태의경(太醫卿)의 직함을 소신께 주옵시면 매우 편켔사옵니다.”

이것은 당치 않은 소청이었다. 신선의 나라에 가노라는 서복이 진나라 태의경의 직함이 무엇에 쓸데 있을까.

여기는 황제도 의아히 여기고 굽어보았다. 그러나 거기 대답할 대답을 준비해 가지고 있던 서복은 곧 뒤를 틈이어서 말하였다.

만일 이후 명약을 캐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못된 바람이라도 만나서 배가 밀려서 오랑캐의 나라에라도 불려 가오면 그때 이런 직함이라도 가지지 못했다가는 산삼을 빼앗길 근심이 있사옵니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오냐, 내려주마. 그 밖에는?”

그 밖에는 성수무강하옵심과 장차 영약 많이 캐어지기를 바라올 따름이로소이다.”

오오, 고맙다. 험한 물길을 실수없이 잘 다녀오너라.”

이리하여 서복은 어전을 물러나왔다. 서복이 자기의 처소에 도달한 지 얼마를 지나지 않아서 대궐에서 서복에게 태의경의 직첩이 배달되었다. 이 직첩은 서복에게는 두 가지로 필요한 물건이다.

첫째로는 이 직첩으로서 장차 창해국의 임군께 보이고 진나라 태의경의 자격으로서 창해국에서 한동안 약초를 캐자고 청하려는 복안이었다. 둘째로는 이 직첩에 눌린 옥새(玉璽)의 모양이었다. 이 옥새를 본따서 옥새 하나를 위조하자는 것이었다. 그 옥새는 또한 두 가지로 필요하다. 첫째는 이 일천 명이라는 적지 않은 수효의 사람을 장차 기부조선(箕否朝鮮)에 하륙을 시키어서 기부조선을 지나가서 창해국까지 가야겠는데 그러자면 진나라의 국서가 없이는 힘든다. 그것도 한두 명 내지 십여 명이면여니와 일천 명이라는 큰 무리를 이끌고 남의 나라를 말없이 통과할 수 없다. 그 기부조선에서 쓸 국서를 하나 위조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창해국 임군께 보내는 진나라 시황제의 국서를 위조하자는 것이었다. 예를 지극히 갖추고 창해국 임군을 잔뜩 추어주면서 지금 진나라 태의경을 약초 구하려 귀국에 보내니 좋도록뒤보아 달라는 뜻의 국서이다. 천하의 황제에게서 창해국의 임군에게 이런 국서만 보내 놓으면 창해국 임군이야 펄펄 뛰며 기뻐할 것으로 서복은 믿었다.

시재 당장은 이 두 가지의 국서만 필요하되 대체 옥새를 손에 지니고 있으면 언제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필요한 일이 생길는지 모르는 바이다. 그래서 서복은 진나라 옥새를 위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는 위조하기 힘든 것이다. 발각나는 날에는 목이 달아날 일이니 응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서복은 장차 가는 길에 산동 방면의 이 진나라에 심복하지 않는 고장에 가서 하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이었다. 서복은 무슨 볼 일이 있어서 거리에 나가려고막 대문 밖을 나설 무렵이었다.

그때 서복의 눈에 뜨인 것은 웬 한 장대한 사람이 자기의 처소 담장 아래 서 있다가 서복이 나오는 것을 보고 몸을 피한다. 그때 서복은 그 사람의 얼굴 생김이 너무도 창해국 사람 같으므로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서복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길을 갔다. 가다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에 뜻없이 돌아보매 아까 그 인물이 자기의 뒤를 밟고 있다. 그때부터 서복은 가끔 주의하여 보았다. 수상한 인물은 그냥 자기의 뒤를 밟고 있는 것이었다. 서복은 볼 일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도 그 수상한 인물은 그냥 멀리 뒤밟는다. 서복은 꺼림칙하였다. 지금 자기는 산삼을 캐러 창해국으로 떠나려는 판인데 창해국 사람인 듯한 사람이 자기의 뒤를 밟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서복은 하인을 불러서 밖을 탐지하여 보았다. 그랬더니 수상한 인물은 그냥 밖을 배회하고 있다 하는 것이었다. 서복은 무시무시하여 몰래 하인을 순군청에 보내서 이 인물을 잡아가게 하였다. 장사(壯士)였다. 순군이 여러 명 주먹에 얻어맞아 죽고야 겨우 그 인물을 잡았다. 잡혀갔으나 이름이 여해(黎蟹)라고만 하고는 그 밖에는 일체로 대답하기를 피한다. ‘여해?’ 서복은 그 이름을 듣고 머리를 기울였다. 어디서 들은 법한 이름이었다. 드디어 창해국 상대부의 아우의 이름이 분명히 여해라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 날 잡힌 인물은 과연 형 여방의 명으로 진나에 잠입하였던 여해였었다

徐福서복入國입국

무덥기 한량없는 어떤 여름날이었다. 그날 아침 여민옹(黎民雍)은 근래에 없이 유쾌하게 지냈다. 그의 친구가 찾아온 것이었다. 척주(陟州)에 사는 허비(許羆)라는 사람이었다. 나이도 같은 열아홉 살씩이요, 뜻도 서로 맞으며 지식과 무력(武力)이며 완력(腕力)으로도 비슷비슷하였다. 안집도 같은 명문끼리였다. 허비는 사냥을 생애로 하였다. 허비는 서울에 오는 길에 오늘 새벽 산골길에서 멧도야지를 한 마리 산 채로 잡아서 친구와 술안주를 같이할 양으로 메고 왔다. 여민옹은 오래간만에 만나는 이 친구와 함께 뒤뜰 시냇가로 나가서 멧도야지를 찢어 안주삼아 유쾌히 먹고 놀았다. 그리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뒤에 오정쯤 집으로 돌아왔다. 도야지 피와 술을 좀 과히 먹었다.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 까닭에 약간 도를 넘치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사랑에서 목침을 베고 누웠다. 어느 틈엔지 잠까지 들어 버렸다. 밖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나므로 민옹은 잠에서 깨었다. 눈을 번쩍 뜨고 보니 벌써 아버지 상대부 여방(上大夫 黎螃)이 퇴조(退朝)하여 돌아오고 조정에서 수행한 하인이 하직하는 말소리가 자는 귀에 중얼중얼 들렸다. 민옹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아버지를 맞았다.

아버지 벌써 오세요?”

그러면서 걸핏 아버지의 기색을 살피니 아버지는 무슨 일엔지 몹시 노하고 기색이 매우 불쾌였다.

자식놈두, 어린애두 아니구 낮잠은 웬 낮잠이야.”

민옹은 다만 민망하여 문안에 읍하고 서 있었다.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내심 이상하였다. 장발한 이래 아버지께 꾸중을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꾸중받은 일도 그리 없었거니와, 어떻게 실수를 할지라도 천천히 타일렀지 이렇게 와락 꾸중하는 일이 없는 아버지였다. 더구나 인륜상 무슨 중대한 죄라도 범한 바가 아니고 잠깐 낮잠을 잔 데 지나지 못하는 일에 이렇듯 꾸중한 아버지가 아니다.

꽤 더우시지요.”

들어와 앉는 아버지를 민옹은 곁에 가서 부채질을 하여드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노염은 삭지 않았다.

술 냄새 역하다. 아침부터 술만 처달이고 낮잠이나 자구. 물러가거라.”

민옹은 더욱 민망하였다. 술 냄새가 안 갈이만치 썩 물러앉아서 팔을 뻗치고 부채질을 하였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계속된 뒤에 민옹이 나지막한 말로 물었다.

아버지. 무슨 역한 일을 보셨어요?”

자식이라고 있는 게 아침부터 술이나 처달이고 낮잠이나 자니 그게 역한 일이 아니고 뭐냐. 사람 되지 못한 자식 같으니 나가거라. 술내 역하다.”

하릴없었다. 민옹은 물러나왔다. 민옹이 물러나온 뒤에 아버지는 하인을 불러 술을 가져오라 하였다. 술을 연하여 불렀다. 예사 때의 곱은 먹었다. 그러고는 아까 아들이 술 취해 잔 자리에 누워서 그냥 자 버렸다. 아버지의 책망으로 그 방에서는 물러 나왔지만 사랑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아버지의 동정만 살피던 민옹은 가슴이 가속도(加速度)로 무거워 왔다. 무슨 일에 저다지도 화를 내시나? 무슨 커다란 오뇌가 분명히 아버지의 마음에 있어 괴로와하신다. 볕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점심을 굶었거늘 주린 줄도 모르고 민옹은 뜰 한모퉁이에 앉아서 사랑의 동정만 살폈다.

저녁때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냥 깨지 않았다. 아버지는 밤도 깊어서야 깨었다. 민옹은 곧 들어가서 불을 켜 놓았다. 그리고 시원한 듯이 냉수 한 그릇을 다 마시는 아버지에게, “진지상 내오리까?”

고 물어 보았다.

술이나 내오너라.””

또 술을 부른다. 민옹은 잠시 머뭇거렸다. 머뭇거린 뒤에 입을 열었다.

약주는 반주(飯酒)로나 하시지요.”

밥은 싫다. 술을 내와.”

민옹은 또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무슨 울화가 생겼읍니까?”

나랏일이 아니면 이렇듯 근심할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가 이렇듯도 심히 노염을 내는 것을 보니 일도 중대한 일이다.

아니다. 밤중에 밥 먹겠느냐. 어서 술이나 내오너라.”

하릴없었다. 민옹은 안으로 들어가서 하인을 깨워서 안주를 많이 하고 술을 적게 하여가지고, 손수 상을 들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들어갔다. 민옹은 자기가 주전자를 맡아 가지고 아버지로 하여금 할 수 있는껏 안주를 많이 들고 술을 적게 마시도록 하였다. 술을 매번 반 잔씩 붓고, 아버지가 안주를 후히 드는 것을 본 뒤에야 또 새로 반 잔만큼 부었다. 취기가 약간 돌 때 아버지의 입에서는 문득 한 마디 한숨이 나왔다. 이 기회를 붙들어서 민옹은 또 입을 열어 보았다.

아버지, 여러 번 같은 말씀을 묻습니다만 무슨 일이 생겼읍니까?”

아침부터 술이나 먹고 낮잠이나 자는 아이들에게는 모를 일이다. 어서 술이나 불어라.”

아버지, 아침에 척주(陟州)에서 허비(許羆)가 찾아왔어요. 안주하자고 멧도야지를 한 마리 잡아 가지고그래서 오래간만에 만난 터이라 좀 지나쳤었읍니다.”

아버지는 허비라는 말에 지금 막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중도에 멈추고 아들의 말을 들었다. “허비란 허웅(許雄)의 자제 말이지.”

.”

서울 있느냐, 혹은 돌아갔느냐?”

내일 아침 아버지 정청(政廳)에 들어가시기 전에 인사오겠다고요.”

.”

아버지의 마음이 허비의 말 때문에 꽤 누그러졌다. 이 기회를 타서 민옹은 또 물어보았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 생겼읍니까? 허비랑 피통(皮通 사람의 이름)이랑 저희네 동갑계(同甲契) 다섯 사람이 마음은 어리석지만 뜻은 굳어요. 게다가 겉힘으로는 다섯의 힘을 합치면

오백 명은 당해 내요. 그러니깐 무슨 분부하실 일이 있으면 분부하시고 분부하실 일이 아닐지라도 내막(內幕)쯤은 알아주시면 좋겠는데요.”

아버지는 종내 아까 들었던 잔을 마시지 않고 그냥 놓았다. 눈가에는 주름잡힌 주름으로 눈물까지 약간 흘러내렸다.

나라이 인제는 범벅판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비담 삼백 필에 나라이 흥정되었구나.”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는 대답이 없이 한숨만 쉬었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몇 번을 캐어물으매 아버지는 비로소 이번에 생긴 괴변을 아들에게 이야기하여 주었다.

그것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일전에 웬 진()나라 백성 하나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름은 서

(徐福)이라 하였다. 서복은 입경하여 중대부 도전각(中大夫 陶田角)에게 진나라 비단 오십 필을 뇌물하였다. 그리고는 자주 도전각의 집에 출입하였다. 그러더니 서복이 어제부터는 자기는 진나라의 태의경(太醫卿)이요 시황제의 사신으로 이 나라에 왔으며 국서(國書)까지 가지고왔고 자기의 사명은 막중막대한 것이고, 종자(從者)도 천여 명을 데리고 왔노라고 공언(公言)을 한다. 그리고 임군께 뵙겠다고 정식으로 정청(政廳)을 찾아왔다. 무론 도전각이가 함께 데리고 온것이었다. 여방은 어제 정청에서 서복이란 위인을 만나 보았다. 도전각은 서복이 천자(天子)의 사신이니만치 상좌(上座)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는 것을 여방은 일갈하여 버렸다.

진나라가 나라이면 우리나라도 나라이오. 시황제가 임군이면 우리 나라님도 임군이시오. 진나라 태의경은 우리나라 대전의(大典醫)에 해당하는 제십칠석()에 가 앉으오.”

먼저 얘기를 꺾어 놓았다. 시황제의 사신이라는 허울좋은 명색으로 한번 얼러 대려던 서복은 도리어 상대부의 위의에 눌려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작은 나라 사신이 큰 나라 대신에게 취하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고천자는 지금 매우 이 해동 신선의 나라를 동경하여 이 나라 산수의 정기를 견학시키기 위해 동남동녀 각각 오백 명을 뽑아 이 나라로 보냈다는 말, 그러나 허락없이 월경(越境)을 할 수가 없어 기부씨(箕否氏)의 조선에 멈추어 두고, 이 나라 임군의 윤허를 얻으러 자기 혼자서 앞서 왔다는 말, 이 나라에 견학하는동안 먹고 입을 것은 모두 가지고 왔으니까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말, 이 신선의 나라를 잘 견학하게 해서 이런 나라이 있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는 것도 해롭지는 않은 일이라는 말 등등을 하며 그 뜻으로 임군께 추천하여 배알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단지 견학에 그친다면 그다지 해로울 것도 없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신으로 이 나라를 남의 나라에 자랑하고 싶은 것도 인정이었다. 약간 사리에 어그러지는 일이 없는 바도 아니다. 단지견학을 목적하였으면 당연한 순로로 상대부 자기를 찾지 않고 중대부 도전각을 먼저 찾았다는 점이며 도전각에서 뇌물을 하였다는 점 등은 의심하자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슨 군사를 데리고 온 것도 아니요 아이들만 데리고 왔다니, 별다른 근심은 없고 이 선경(仙境)을 한 번 구경이나 하고 가겠노라는 것까지 거절하면 너무 용렬된 일 같기도 해서 그럼 내일 나라님께 배알하도록 주선하여 주마 하였다. 그 날로 진나라 시황제가 창해국을 사모하는 뜻으로 창해국 임군께 약소한 예물을 바치나이다하며 좋은 비단 삼백 필을 임군께 바쳤다. 이튿날 서복은 창해국 임군께 배알하였다. 먼저 국서를 바쳤다. 무론 이 국서는 서복이가 위조한 것이다. 국서의 뜻은 대략 이러하였다.

속인(俗人)의 임군이 신선국의 임군께 삼가 글월을 올리나이다. 속왕(俗王)이 귀국을 사모하고 동경한 지 오래나 속된 일에 분주하여 가 뵙지 못하는 죄를 용서하소서. (중략) 속왕이 본시 몸이 다병하와 이곳에서 나는 약초는 다 시험하여 보았으나 효력이 없삽고 천관(天官)의 말이 동해 밖 신선국의 약초라야만 효험이 있으리라 하옵기 지금 동남동녀 일천 명을 태의경 서복으로 하여금 인솔케 하와 귀국에 보내오니 거룩하신 임군께서는 이 속왕을 가련히 생각하시와 어느 산간 한모퉁이를 잠시 빌려주시기를 천만 복망하나이다. 기한도 그리 오래할 것도 아니라 삼 년이면 넉넉하옵고 그 속인의 무리들이 그동안 입고 먹고 살 물건은 예비하여 가지고 가오니 이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운운. 상대부 여방은 이 국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감쪽같이 속은 것이었다. 잠깐 다녀가겠노라더니 삼 년간이란 웬 딴 말이냐. 그러나 어전이라 눈을 부릅뜨고 고함지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임군께 안 됩니다라는 뜻으로 머리를 가로 저어 보았다. 무론 헛일이었다. 임군은 첫째로는 창해국에서 보지 못하던 비단 삼백 필에 마음을 팔리었고, 둘째로는 지금 천하의 주인으로알고 두려워하던 시황제가 스스로 자기를 속왕(俗王)이라 낮추고, 당신께는 신선국의 거룩하신 임군이라 높여 주는 데 마음이 기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윤허(允許)는 즉시로 내렸다. 어디든 마음에 드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시황제를 위하여 좋은 약초를 많이 캐어 가지고 돌아가서 시황제를 기쁘게 하여라 하는 분부였다. 이 윤허를 얻고 득의양양하여 서복이는 도전각과 함께 대궐을 물러나왔다. 그러나 여방은 물러가지 않고 묵묵히 그냥 꿇어 있었다. 이 여방을 보고 임군이 말하였다.

상대부, 세상에서는 시황제 시황제 해두 내 생각에는 늘 내 눈아랫사람 같더니 내 생각이 바루 맞지 않았소?”

나라님

왜 그러우?”

방토(邦土)를 너무도 쉽사리 남에게 베어 주셨습니다.”

베어 주다니 무슨 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천 명의 남녀가 삼 년간 있노라면 자식이

생겨 일천 이백 명은 넘는 식구가 됩니다. “삼 년 지나면 갈 것 아니오?”

안 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안 가면 군사로 내몰면 될 것이고.”

산간 요지(山間要地)에 자리잡고 진나라 정예한 무기로 저항하오면?”

상대부도 원. 너무도 지나친 걱정만 하는구료. 진나라에는 빈 땅이 없어서 예까지 살러 오겠소?”

그러면 왜 하필 동남동녀 오백 쌍을 보내겠읍니까? 동남이면 동남만, 동녀면 동녀만 보내도 좋은 것을 꼭 쌍무어 보냈겠습니까?”

상대부도 무론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온 의견이지만, 좀 편협된 듯해서 장자의 기상이 적소.”

하고 웃어 버리고는 임군은 내전으로 입어하였다.

이리하여 진나라 백성 일천여 명은 공공하게 창해국 어는 곳에든지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자리잡고 마을을 이를 권리를 얻게가 되었다. 말을 마치고는 아버지는 묵연히 머리를 숙여 버렸다. 민옹도 잠시는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윽고 민옹이 먼저 쾌활히 머리를 들며 말하였다.

그까짓 피비린내 나는 동자 2백쯤이야 저희 동갑계 다섯 사람이 철여의(鐵如意) 하나씩만 가졌으면 당해 내리다.”

그보다 먼저 행동을 염탐해야지.”

제가 염탐하리다.”

염탐 말이 났으니 말이지, 너의 삼촌이 염탐하러 진나라에 들어간 지 일 년이 넘었는데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으니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대체 이 서복인간 하는 놈은 뭐일까요? 시황제가 약초 구하러 보낸 놈이면 삼 년 안에 돌아갈 것이 아닙니까?”

시황제를 속여서 그런 국서와 아이들을 얻어 가지고 자기는 딴 꿈을 꾸는 놈이리라. 사람 된 품이 좀스럽게 생겨 큰 일도 못 할 것 같더라.”

그 따위 놈이면 더욱 우리 동갑계 절반으로라도 당해 내리다.”

여방은 아들을 건너다보았다. 어두컴컴한 등잔 아래 시꺼먼 얼굴에 번득이는 고래눈과 얇은 옷 아래서 불룩거리는 장대한 근육 등은 과시 장사다왔다. 근심 아래서도 이것을 보고는 만족한 미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우산국(于山國)서복은 동남동녀 일천 명을 인솔하고 공공하게 창해국에 들어왔다. 미리부터 장차 할 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서복이라, 금란동(錦蘭洞)이라하는 꽤 넓직한 벌판으로 찾아들었다. 금란동은 동서북은 험준한 산으로 둘려 막히고 남쪽만이 병목[甁口[병구]]모양으로 겨우 벌려진 천험의 요새지였다. 금란동에 들어가서 그는 부하들을 시켜서 우선 임시로 비나 막을 만한 막들을(나무와 풀을 베어다가) 치게 하였다.

그런 뒤에는 와공(瓦工)의 경험이 있는 자에게는 기와를 굽게 하고 목공(木工)의 경험이 있는 자에게는 문이며 지방을 짜게 하며 지공(紙工)의 경험이 있는 자에게는 종이를 뜨게 하며, 일변으로는 나무를 찍어오고 돌을 깎아다가 이 골짜기에 오백 채의 집을 짓게 하였다. 서복 자기의 거처할 집은 꽤 큼직하니 짓게 하였다. 몇 사람 매수해 가지고 온 모사 책사 무사(, , 武士) 등의 거처할 곳도 지었다. 그 밖에 공청(公聽) 비슷한 집도 몇 채 지었다. 서복이 금란동에 들어온 것이 한창 복거리라, 노천(露天) 아래서도 살만한 때였다. 가을철이 되어서는 여름내 짓던 집들이 다 낙성이 되었다. 집들이 낙성이 된 뒤에는 오백 쌍 남녀에게 마음대로 짝을 택하게 하였다.

그러나 서복의 새삼스러운 명이 없을지라도 그들은 벌써 거의 짝이 내정(內定)되어 있었다. 태반은벌써 임신중이었다. 시황제에게서 삼 년간의 생활 자료를 타 가지고 왔는지라 의식에 걱정이 없었다. 이 산 가운데의 낙원에서 그들은 아무 근심걱정 없이 신혼(新婚)의 즐거운 겨울을 보낼 수가 있었다. 이듬해 봄이 이르렀다. 금란동 안의 서로 이룩한 마을은 서북쪽 모퉁이의 일부분뿐이었다. 남은 널따란 벌판은 비어 있었다. 이 벌판을 서복은 둘로 나누어서 절반은 논, 절반은 밭으로 하여 개간하게 하였다. 길가, 논두렁, 밭두렁에는, 모두 뽕을 심게 하였다.

사내들은 세 대()로 나누었다. 논농사 한 대, 밭농사 한 대, 약초 캐고 사냥하는 무리 한 대 이렇게 임무를 맡겼다.

일관한 계획 아래서 미리 다 준비해 가지고 오니만치 말, , 도야지, , 닭 등의 집짐승을 비롯하여 농구(農具), 방직기구(紡織機具), 무기(武器) 등도 부족이 없었다. 서복의 꿈은 조금도 어김없이 실현이 되는 모양이었다. 여기 서복으로서 단 한 가지 흥미를 느끼면서 망설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기 세우는 새 나라를 진()나라 같은 제도로 할까 혹은 창해국과 같은 제도로 할까 하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신민들에게 지위의 고하(高下)를 혹은 무차별 평등으로 할까 하는 점이었다. 이번에도 통절히 느낀 바이지만 층층이 지위가 다른 수없는 신료(臣僚)의 위에 엄연히 임군으로 올라앉아서 호령하는 그 취미는 무엇에 비길 수 없이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위험성이많이 낀다. 신민에게 지위의 차이를 즐기는 재미를 주었다가는 마지막에는 왕위(王位)까지도 엿보는 심리가 생기기 쉽다.

()가 망하고 상()이 망하고 주()가 망하고 수천의 제후국(諸侯國)이 망한 그 원인이 모두 신료(臣僚)가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한 데 있지 않은가. 그러면 이 창해국의 제도는 어떤가? 창해국에서는 대신에서 비롯하여 한낱 이름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지위의 명색에는 차이가 있을 망정 높은 사람낮은 사람이라는 것은 없다. 신분이 비록 상대부일지라도 정무(政務)의 여가에는 제 일을 또 보아야 한다.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거나 고기를 잡거나 그릇을 굽거나 무엇이든 일을 하여야 한다. 부양(扶養)할 가족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부지런히 일하여도 뒤및지 못하는 사람에 한하여 나라에서 생활의 부족분만은 보조하여 준다. 국민 된 자는 자기의 이익의 십일 례를 세납으로 나라에 바친다.

나라에서는 이것으로 나라 비용에 충당한다. 이 나라에서 벌이를 안하고라도 살 권리가 있는 사람은 군인과 파수꾼과 옥졸과 및 그들의 가족과(부양해 줄 사람이 없는 노인, 부인, 아이들, 병신) 등뿐이다. 공직자(公職者)의 특권이라는 것은 세납의 면제를 받는 것뿐이었다. 그 밖에는 그들은 단지 그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으로 녹봉없이 일을 보는 것이었다. 이 밭에서 대신이 거금을 할 때 곁밭에서 평민이 밭갈고 있는 양 등은 이 나라에서는 결코 기이한 풍경이 아니다. 재단관(裁斷官)이 한창 도야지 물을 먹이다가 중대 사건이라도 돌발하면 손씻고 옷 갈아 입고 공청으로 달려가서 부탁하는 등사는 흔히 생기는 다반사였다. 그런지라 이 나라에서는 유난히 성질이 꾀어박힌 사람 밖에는 높은 지위를 탐낸다든가 하는 일이 없다. 그러니만치 또한 언제까지든 평화가 계속이 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야()하고도 아()한 정취도 서복으로서는 버리기 아까왔다. 둘이 각각 제 정취를 가지고 있는 것이로되 지금의 서복에 있어서는 코 앞에 늘어진 것과 같아서 마음대로 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전자를 취하든 후자를 취하든 그의 자유에 달린 바로서 이렇다 저렇다 용훼할 사람이 없다. 매일 막료들을 거느리고 서복은 이 자기가 설계하여 꾸며 놓은 새 나라를 돌보고 지휘하고 지도하고 하였다. 착착 진행되는 음모 그러나 서복의 희망이란 것은 요 금란동만이 아니었다. 땅도 더 넓게 잡아야 할 것이다. 백성의 수효도 더 늘려야 할 것이다. 금란동에 살기 좋은 새 마을이 생겼다는 소문이 퍼지자, 창해국 사람들도 이리로 이사하여 오는 사람도 있었다. 서복은 이 사람 도 달게 받았다. 금란동은 나날이 번성하여 갔다. 또 그 이듬해에는 작년에 미처 개간하지 못하였던 땅이 죄 개간 되었다. 지난해의 성적으로 미루어 금년은 천 석은 넉넉히 여유 가 생길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는 서복은 동내의 직속(直屬) 3백 명과 뒤로 들어 온 백여 명에게 시각과 절기를 작정하여(데리고 온) 무사로 하여금 무예(武藝)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시황제에게 넉넉하도록 받아 온 의식의 준비가 있는 위에, 또 이곳서 생산한 것도 적지 않은지라, 그 남는 것을 전부 기부조선(箕否朝鮮)이며 창해국, 마한 등지에서 쇠()로 바꾸어다가 일변 무기를 만들며 일변 무예를 닦는 것이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뜻대로 되어 나가매 서복의 마음에 일어난 욕

심은 진시황의 것과 꼭 같은 것이었다. 건강(健康)과 장수(長壽)

비록 천하를 얻되 목숨을 잃으면 무엇하랴. 여기는 선약(仙藥) 산삼의 생산지 일백칠십 명의 약초대(藥草隊)에게 서복은,“다른 약초도 약초지만 산삼에 더 주력을 하라.”고 나날이 타일러 보냈다. 그러나 산삼이 그렇게 쉽게 있을 까닭도 없거니와 산삼의 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도 못하는 이 약초대는 행여 이것이 산삼인가 이것이 산삼인가 하여 함부로 뽑아서 산만 거칠어 갈 뿐이었다. 드디어 서복은 산삼에 대하여서는 몸소 이에 당하기로 하였다. 이전에 백일 기도를 지성껏 드리고 산삼 한 뿌리를 얻어 본 일이 있는 서복은 이번도 또한 그와 같은 수단을 써 보려 하였다. 이 근처의 산이란 산, 골짜기란 골짜기는 죄다 약초대에게 밟힌바 되었는지라 그는 제단 자리를 꽤 멀리서 구할 수밖에는 없었다. 금란동에서 상당히 먼 곳에 제단 자리를 정한 서복은 매일 왕래할 수 없느니만치 백 일간 쓸 물건을 준비해 가지고 금란동을 떠났다. 이전에는 진시황의 산삼을 위하 기도였다. 이번은 직접 자기의 건강과 장수를 위한 산삼이었다. 정성도 그만치 더 드리었다. 이러한 치성의 아흔여드레도 어느덧 지나가고 아흔아홉 날째의 기도였다.

그가 금란동을 떠날 때는 첫여름이었는데 그동안 여름도 어언간 첫가을 새벽에 샘물에 몸을 씻자면 꽤 선뜻하였다.

아흔아홉 번째 몸을 깨끗이 씻고 정성껏 기도를 드린 뒤에 그가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몸이 너울너울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음 순간은 숨이 딱 막혔다. 정신이 아득하여지면서 웬 일인가고(어느 틈엔지) 감겼던 눈을 뜨는 그 순간, 웬 놀랍도록 커다란 발이 하나 쑥 나와서 그가 정성껏 차려 놓은 제물을 밟았다. 제물이 모두 헤어져나간 것을 물론이요, 제단까지 버썩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이것까지 의식하고 그는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정신 잃은 것도 한순간뿐이었다. 그가 공중에서 철썩 하니 바위에 떨어지면서 다시 번쩍 정신들었다.

들면서 보매 그의 앞에서 감감하게 높이 쳐다보이는 장승 하나이 서 있는 것이었다. 이 괴물의 출현에 또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장승의 호령이 온 산야가 다 떠나갈이만치 우렁차게 울렸다.

요놈! 요 벼룩 같은 놈.”

서복은 자기로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의식치 못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장승 앞에 끓어 엎드리었다.

네이. 아직 캐지 못했읍니다.”

못 캤어? 하하하하. 자겁해서 미리 토사하는구나. 캐기는커녕 손이라도 대었다가는 벌써 너는 가루가 됐어.”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했기에 아직 목숨이 붙었지. 이번만은 용서해 줄 터이니 어서 금란동으로 돌아가서 돼지 무리들을 몰고 돼지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 거룩한 땅에 쥐 같은 놈들이!”

벼룩에서 돼지로, 돼지에서 쥐로 세 번 오르내릴 동안 서복은 서른 번은 넘어 절하였다. 그리고 그 소위 돼지 무리들을 몰고는커녕 자기 혼자서만이라도 어서 이런 장승이 없는 나라로 도망하고 싶었다.

가다뿐이오리까. 오늘로 가오리다.”

그 새 새끼 돼지는 얼마나 늘었느냐?”

한 삼백 수 늘었읍니다.” 할 수 없다.

합해서 일천삼백 수 너희 버러지놈들이 감히 이 성역(聖域)을 더럽힌단 말이냐. 썩 네 나라로 가거라. 한 놈이라도 남아서 꿈틀거리다가는 가루도 추리지 못하리라.”

이번은 버러지다.

네이. 존대인의 처분을 어찌 추호만치인들 어기리까?”

벼룩에서 비롯해서 버러지까지 네 번이나 변화하는 동안 서복은 몸 안에 간직했던 땀이란 땀을 홀싹 뽑았다. 장승이 성큼성큼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 버린 뒤에야 겨우 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막으로 돌아와 보니 막에는 하인이 몸을 막에 기댄 채 정신을 잃고 있다. 필시 하인은 먼발로 장승을 보고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서복은 하인의 얼굴에 물을 뿌려 정신들게 하여가지고 총총히 다시 짐을 수습하여 말께 싣고 금란동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매 금란동에서도 또한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아까 말하자면 서복이가 제단 앞에서 한창 곤란을 겪는 꼭 그 시각쯤이었다.

금란동에서도 웬 장승 아니 장승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왔다 이 나타났다. 온몸이 털투성이였다. 털투성이는 금란동에 들어와서 성큼성큼 무고(武庫) 쪽으로 갔다. 무고지기가 웬 사람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없이 무고에 이르러서 마치 조그만 나뭇개비라도 집어치우듯 무고 기둥을 두 개 쑥 뽑아 버렸다. 무고는 한편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그 새 여러 달 동안 금란동에서 만들어 두었던 칼이며 창이며 도끼, 방패 동물이 무너진 담벽 틈으로 내비치었다.

털투성이는 담벽을 통째 잡아 젖혀 버린 뒤에 거기 나타난 칼이며 창이며를 한 아름씩 꺼내어서는 무릎에 대고 분질러 던지고 분질러 던지고 하였다. 마침 저편 활터에서는 무사의 지도 아래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괴물의 작폐에 노하여 괴물을 향하여 일제 사격을 하였다. 그러매 괴물은 귀찮은 듯이 칼을 하나 들고 돌아도 안 보면서(마치 부채질하듯 칼을 등 뒤에서 들렀다. 그러매 지금

백여 명이 연하여 쏘는 살은 한 대도 그의 몸은 건드리지 못하고 모두 그 칼에 맞아 떨어진다. 칼은 사뭇 바람개비 돌 듯 지금 바야흐로 떠오르는 아침 해에 찬란히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아간다. 그러면서 남의 한 손과 발로 연해 무고 안의 무기를 다 분질러버린 뒤에야 일어서면서 돌아섰다.

요놈들! 요 구데기 같은 놈들!”

뇌성과 같았다. 그 호령 소리는 한참 동안을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도로 이 산으로 울리어 다녔다.

쇠라는 것은 솥이나 농구(農具)나 식도(食刀) 돌쩌귀 같은 게나 만드는 게지 아까운 쇠를 모아다가 이런 데다 쓴담. [[]]같은 놈들! 다른데도 있거들랑 다들 모아오너라.”

어는 틈에 멎었는지 사격도 멎었다. 집모퉁이마다 숨어서 쏘던 무리들도 도망친 모양으로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얼흔이 빠져서 움쩍을 못하고 있는 무고지기만이 이 근처에 보이는 유일의 사람이었다. 괴물은 무고지기에게 가서 그를 움켜서 쳐들었다. 이 바람에 무고지기는 펄떡 정신이 들었다. 괴물은 무고지기를 앞장세워서(깊이 숨어 있는) 무사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무사를 앞장세우고 이 금란동 안에 있는 무기(武器)라는 무기는 다 찾아냈다. 소 열 마리를 징발하였다. 그리고 그 소에게 아까 분지른 무기며 지금 찾아낸 무기를 죄 실리었다. 그 뒤에는 소군을 열 명을 징발하여(쇠 한짐씩 실은) 소를 죄 몰아 가지고 금란동을 나와서 좀 내려가다가 있는 강에까지 이르렀다. 강에서도 가장 깊은 곳을 골라서 소 열 바리의 쇠를 전부 강물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에는 콧노래 흥그러이 부르면서 어디로인가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하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서복은 더 간담이 서느러울 뿐이었다. 아까 제단앞에 나타났던 장승 하며 또 이 금란동에 나타났던 괴물 하며 그것이 모두 사람일까 더욱이 창해국 사람일까. 보통으로 창해국 사람들은 몸집도 크고 힘도 세기는 하다. 창해국에는 역사(力士)가 드문드문 있다는 소문도 듣기는 하였다.

그러나 아까 그 물건들이 모두 사람이며 더욱이 창해국인일까. 만약 그렇다 할진대 허수로이 볼 나라이 아니요 우습게 여길 땅이 아니다. 다른 데로 가자. 여기서는 행세 잘못하다가는 어느 귀신 모를 송장이 될 것이다. 서복의 마음에는 한량없는 겁이 들어앉았다.

 

아까 제단 앞에 나타났던 것은 여민옹이요, 금란동에서 무기를 씨도 없이 없애버린 것은 허비였다.(미완)

(<少年소년>. 1937.7~12)

 

젊은 용사들 by 김동인 , 공유마당,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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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은 사십 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뿐은 있다---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짐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이러한 전제로써,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

기회(찬스)라 하는 것이 사람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는 것을 아시오?”, 새삼스러이 연구할 문제도 아닐걸요.”

, 여기 어떤 상점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마침 주인도 없고 사환도 없고 온통 비었을 적에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신사가---그 신사는 재산도 있고 명망도 있는 점잖은 사람인데---그 신사가 빈 상점을 들여다보고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요? 통 비었으니깐 도적놈이라도 넉넉히 들어갈 게다, 들어가서 훔치면 아무도 모를 테다, 집을 왜 이

렇게 비워 둔담…… 이런 생각 끝에 혹은 그 그 뭐랄까 그 돌발적 변태심리로써 조그만 물건 하나(변변치도 않고 욕심도 안 나는)를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않겠습니까?”

글쎄요.”

있습니다, 있어요.”

어떤 여름날 저녁이었었다. 도회를 떠난 교외 어떤 강변에 두 노인이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기회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명한 음악비평가 K씨였었다. 듣는 사람은사회 교화자의 모씨였었다.

글쎄 있을까요?”

있어요. 좌우간 있다 가정하고 그러한 경우에는 그 책임은 어디 있습니까?”

동양 속담말에 외밭서는 신끈도 다시 매지 말랬으니 그 신사가 책임을 질까요?”

그래 버리면 그뿐이지만 그 신사는 점잖은 사람으로서 그런 절대적 기묘한 찬스만 아니더라면 그런 마음은커녕 염도 내지도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찌 됩니까?”

……

말하자면 죄는 기회에 있는데 기회라는 무형물은 벌은 할 수가 없으니깐 그 신사를 가해자로 인정할 수밖에는 지금은 없지요.”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사람의 천재라 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기회가 없으면 영구히안 나타나고 마는 일이 있는데, 기회란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천재범죄본능을 한꺼번에 끄을어내었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하여야겠습니까 축복하여야겠습니까?”

글쎄요.”

선생은 백성수라는 사람을 아시오?”

백성수? , 기억이 없는데요.”

작곡가로서 그---”

, 생각납니다. 유명한 광염(狂炎) 소나타의 작가 말씀이지요?”

,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뭐 발광했단 말이 있었는데---”

, 지금 ××정신병원에 감금돼 있는데 그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 할게 들으시고 사회교화자로서의 의견을 말씀해 주십쇼.”

*

내가 이제 이야기하려는 백성수의 아버지도 또한 천분 많은 음악가였습니다. 나와는 동창생이었는데 학생시대부터 벌써 그의 천분은 넉넉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작곡과를 전공하였는데 때때로 스스로 작곡을 하여서는 밤중에 혼자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하여서 우리들로 하여금 뜻하지 않고 일어나게 하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밤중에 울리어오는 야성적 선율에 몸을 소스라치고 하였습니다.

그는 야인(野人)이었습니다. 광포스런 야성은 때때로 비위에 틀리면 선생을 두들기기가 예사이며 우리 학교 근처의 술집이며 모든 상점 주인들은 그에게 매깨나 안 얻어맞은 사람이없었습니다. 그러한 야성은 그의 음악 속에 풍부히 잠겨 있어서 오히려 그 야성적 힘이 그의 예술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그 야성은 다른 곳으로 발전되고 말았습니다. !! 무서운 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술잔이 그의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술을 먹고는 여편네들에게 행패를 하고, 경찰서에 구류를 당하, 나와서는 또 같은 일을 하고…….

작품? 작품이 다 무엇이외까. 술을 먹은 뒤에 취흥에 겨워 때때로 피아노에 앉아서 즉흥으로 탄주를 하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귀기(鬼氣)가 사람을 엄습하는 힘과 야성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발견할 수 없던) 그런 보물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각각 제 길 닦기에 바쁜 사람이라 주정꾼의 즉흥악을 일일이 베껴 둔다든가 그런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장래를 생각하여 때때로 술을 삼가기를 권고하였지만 그런 야인에게 친구의 권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술은 음악이다!”

하고는 하하하하 웃어 버리고 다시 술집으로 달아나고 합니다.

그러한 지 칠팔 년이 지난 뒤에 그는 아주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이 안 들어가면 그의손은 떨렸습니다. 눈에는 눈곱이 꼈습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술이 들어가면 그는 그광포성을 발휘하였습니다. 누구를 물론하고 붙잡고는 입에 술을 부어 넣어 주었습니다. 러다가는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 데나 누워서 잡니다.

사실 아까운 천재였습니다. 우리들 새에는 때때로 그의 천분을 생각하고 아깝게 여기는 한숨이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그 장래가 무서운 한 천재가 있었다는 것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그는 어떤 양가의 처녀를 어떻게 관계를 맺어서 애까지 뱄습니다. 그러나 그 애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아깝게도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유복자로 세상에 나온 것이 백성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수가 세상에 출생되었다는 풍문만 들었지, 그 애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는 그 애의 소식이며 그 애 어머니의 소식은 일절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는 것보다, 그 집안의 일은 우리의 머리에서 온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 년이면 산천도 변한다 하는데 삼십 년 새의 변천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좌우간 그 동안에 나는 내 이름을 닦아 놓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K라 하면 이 나라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음악비평가가 아닙니까. 견실한 지도적 비평가 K라면 이 나라의 음악계의 권위이며, 이 나의 한마디는 음악가의 가치를 결정하는 판결문이라 하여도 옳을 만치 되었습

니다. 많은 음악가가 내 손 아래서 자랐으며 많은 음악가가 내 지도로써 이름을 날렸습니.

*

재작년 이른 봄 어떤 날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조용한 밤중의 몇 시간씩을 ○○예배당에 가서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집으로서 조용한 밤중에 혼자 앉아 있노라면 때때로 들보에서 놀라 깬 비둘기의 날개 소리와 간간이 기둥에서 뚝뚝 하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말하자면 나 같은 괴상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돈을 주면서 들어가래도 들어가지 않을 음침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명상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다른 데서 구하기 힘들도록 온갖 것을 가진 집이었습니다. 외따로고 조용하고 음침하며 간간이 알지 못할 신비한 소리까지 들리며 멀리서는 때때로 놀란 듯한 기적(汽笛) 소리도 들리는…… 이것뿐으로도 상당한데, 게다가 이 예배당에는 피아노도 한 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오르간은 있을지나 피아노가 있는 곳은 쉽지 않은 것으로서 무슨 흥이나 날 때 에는 피아노에 가서 한 곡조 두드리는 재미도 또한 괜찮았습니다.

그날 밤도 (아마 두시는 지났을걸요) 그 예배당에서 혼자서 눈을 감고 조용한 맛을 즐기고있노라는데, 갑자기 저편 아래에서 재재 하는 소리가 납디다. 그래서 눈을 번쩍 뜨니까 화광이 충천하였는데, 내다보니까 언덕 아래 어떤 집이 불이 붙으며 사람들이 왔다갔다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불붙는 것을 바라보는 맛도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일어서는 불길이며 퍼져 나가는 연기, 불씨의 날아나는 양, 그 가운데 거뭇거뭇 보이는 기둥, 집의 송장, 재재거리는 사람의 무리,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과연시도 될지며 음악도 될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네로가 로마의 불붙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는 비파를 들고 노래를 하였다는 것도 음악가의 견지로 보면 그다지 나무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그때에 그 불을 보고 차차 흥이 났습니다.

……네로를 본받아서 나도 즉흥으로 한 곡조 두드려 볼까.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불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덜컥덜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배당 문이 열리며 웬 젊은 사람이 하나 낭패한 듯이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놀란 사람같이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더니 그래도 내가 있는 것은 못 보았는지 저편에 있는 창 안에 가서 숨어 서서 아래서 붙는 불을 내다봅니다.

나도 꼼짝을 못 하였습니다. 좌우간 심상스런 사람은 아니요 방화범이나 도적으로밖에는 인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꼼짝을 못 하고 서 있노라니까 그 사람은 한숨을 쉽니. 그리고 맥없이 두 팔을 늘이고 도로 나가려고 발을 떼려다가 자기 곁에 피아노가 놓인것을 보더니 교의를 끌어다 놓고 피아노 앞에 주저앉고 말겠지요. 나도 거기는 그만 직업적 흥미에 끌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 보자 하고 있노라니까 뚜껑을 열더니 한 번 뚱하고 시험을 해보아요. 그리고 조금 있더니 다시 뚱뚱 하고 시험을 해보겠지요.

이때부터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씩씩거리며 몹시 흥분된 사람같이 몸을 떨다가 벼락같이 양 손을 키 위에 갖다가 덮었습니다. 그 다음 순간으로 C샤프 단음계의 알레그로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만 흥미로써 그의 모양을 엿보고 있던 나는 그 알레그로가 울리어 나오는 순간마음은 끝까지 긴장되고 흥분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야성적 음향이었습니다. 음악이라 하기에는 너무 힘있고 무기교(無技巧)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아니라기에는 거기는 너무 괴롭고도 무겁고 힘있는 감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반의 종소리와도 같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고 음침하게 하는음향인 동시에 맹수의 부르짖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돋치게 하는 무서운 감정의

발현이었습니다. 아아 그 야성적 힘과 남성적 부르짖음, 그 아래 감추어 있는 침통한 주림과 아픔, 순박하고도 아무 기교가 없는 그 표현!

나는 덜석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음악가의 본능으로써 뜻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오선지와 연필을 꺼내었습니다. 피아노의 울리어 나아가는 소리에 따라서 나의 연필은 오선지 위에서 뛰놀았습니다.

좀 급속도로 시작된 빈곤, 거기 연하여 주림, 꺼져 가는 불꽃과 같은 목숨, 그러한 것을 지나서 한참 연속되는 완서조(緩徐調)의 압축된 감정, 갑자기 튀어져 나오는 광포. 거기 연한쾌미(快味) 홍소(哄笑)--- 이리하여 주화조(主和調)로서 탄주는 끝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 속에 나타나 있는 압축된 감정이며 주림 또는 맹렬한 불길 등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그

처참함이며 광포성은 나로 하여금 아직 문명이라 하는 것의 은택에 목욕하여 보지 못한야인(野人)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탄주가 다 끝이 난 뒤에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망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음악의 소양이 있는 사람일 것 같으면 이제 그 소나타를 음악에 대하여 정통으로 아무러한 수양도 받지 못한 사람이 다만 자기의 천재적 즉흥뿐으로 탄주한 것임을 알 것입니. 해결이 없이 감칠도 화현(減七度和絃)이며 증육도 화현(增六度和絃)을 범벅으로 섞어놓았으며 금칙(禁則)인 병행 오팔도(竝行五八度)까지 집어넣은 것으로서, 더구나 스케르초는 온전히 뽑아 먹은,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무식하다면 무식하달 수도 있는 방분 자유한소나타였습니다.

이때에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삼십 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은 백○○였습니다. 그의음악으로서 만약 정통적 훈련만 뽑고 거기다가 야성을 더 집어넣으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그 음악가의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귀기가 사람을 엄습하는 듯한 그 힘과 방분스런 표현과 야성--- 이것은 근대 음악가에게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습니다.

그 소나타에 취하여 한참 정신이 어리둥절히 앉았던 나는 고즈넉이 일어서서, 그 피아노앞에 가서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습니다. 한 곡조를 타고 나서 아주 곤한 듯이 정신이 없이 앉아 있던 그는 펄떡 놀라며 일어서서 내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네 몇 살 났나?”

나는 그에게 이렇게 첫 말을 물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한 나로서는 이런 말밖에는 갑자기다른 말이 생각 안 났습니다. 그는 높은 창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고 있는 내 얼굴을 한순간 쳐다보고 머리를 돌이키고 말았습니다.

배고프나?”

나는 두 번째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시끄러운 듯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달빛이 비친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다,

, K선생님 아니세요?”

하면서 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노라고 하니깐,

사진으로는 늘 봤습니다마는…….”

하면서 다시 맥없이 나를 놓으며 머리를 돌렸습니다.

그 순간, 그가 머리를 돌이키는 순간 달빛에 얼핏, 나는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뜻밖에 삼십 년 전에 죽은 벗 백○○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 자네 이름이 뭐인가?”

백성수…….”

백성수? 그 백○○의 아들이 아닌가. 삼십 년 전에, 자네가 나오기 전에 세상 떠난…….”

그는 머리를 번쩍 들었습니다.

? 선생님 어떻게 아세요?”

○○의 아들인가? 같이두 생겼다. 내가 자네의 아버지와 동창이네. 아아, 역시 그 애비

의 아들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며 머리를 수그려 버렸습니다.

*

나는 그날 밤 그 백성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비록 작곡상 온갖 법칙에는 어그러진다 하나 그만치 힘과 정열과 야성으로 찬 소나타를 거저 버리기가 아까워서 다시 한번 피아노에 올라앉기를 명하였습니다. 아까 예배당에서 내가 베낀 것은 알레그로가거의 끝난 곳부터였으므로 그 전 것을 베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향하여 앉아서 머리를 기울였습니다. 몇 번 손으로 키를 두드려 보다가는다시 머리를 기울이고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 여섯 번을 다시 하여 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피아노에서 울려 나오는 음향은 규칙 없고 되지 않은 한낱 소(騷音)에 지나지 못하였습니다. 야성? ? 귀기?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감정의 재뿐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잘 안 됩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연하여 고개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 시간도 못 되어서 벌써 잊어버린담?”

나는 그를 밀어 놓고 내가 대신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까 베낀 그 음보를 펴놓았습니. 그리고 내가 베낀 곳부터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화염! 화염! 빈곤, 주림, 야성적 힘, 기괴한 감금당한 감정! 음보를 보면서 타던 나는 스스로흥분이 되었습니다. 미상불 그때는 내 눈은 미친 사람같이 번득였으며 얼굴은 흥분으로 새빨갛게 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즉 그때에 그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나를 떠밀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하여 앉았습니다.

의자에서 떨어진 나는 너무 흥분되어 다시 일어날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앉은 대로 그의 양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밀쳐 버린 다음에 그 음보를 들고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아 그의 얼굴!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지면서 눈은 미친 사람과 같이 빛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음보를 홱 내어던지며 문득 벼락같이 그의 두 손은 피아노 위에 덧업혔습니다.

‘C샤프 단음계의 광포스런 소나타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폭풍우같이 또는 무서운 물결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숨막히게 하는 그 힘, 그것은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보지 못하던 광포스런 야성이었습니다. 무섭고도 참담스런 주림, 빈곤, 압축된 감정, 거기서튀어져 나온 맹염(猛炎), 공포, 홍소--- 아아 나는 너무 숨이 답답하여 뜻하지 않고 두

손을 홰홰 내저었습니다.

*

그날 밤이 새도록, 그는 흥분이 되어서 자기의 과거를 일일이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에 의지하면 대략 그의 경력이 이러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밴 뒤에 곧 자기의 친정에서 쫓겨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가난함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양이 있고 어진 그의 어머니는 품팔이를 할지언정 성수는 곱게 길렀습니다. 변변치는 않으나마 오르간 하나를 준비하여 두고, 그가 잠자렬 때에는 슈베르트의 자장가써 그의 잠을 도왔으며 아침에 깰 때는 하루 종일 유쾌히 지내게 하기 위하여 도 랜드의 세컨드 왈츠로써 그의 원기를 돋우었습니다.

그는 세 살 났을 적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오르간을 장난하여 보았습니다. 이 오르간을장난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근근이 돈을 모아서 그가 여섯 살 나는 해에 피아노를 하나 샀습니다.

아침에는 새소리, 바람에 버석거리는 포플러잎, 어머니의 사랑, 부엌에서 국 끓는 소리, 러한 모든 것이 이 소년에게는 신비스럽고도 다정스러워 그는 피아노에 향하여 앉아서 생각나는 대로 키를 두드리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이 소학과 중학도 마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음악에 대한 동경은 그의가슴에 터질 듯이 쌓였습니다.

중학을 졸업한 뒤에는 인젠 어머니를 위하여 그는 학업을 중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공장의 직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진 어머니의 교육 아래서 길러난 그는 비록 직공은 되었다 하나 아주 온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집착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비록 돈이 없어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은 못 받을망정 거리에서 손님을 끄느라고 틀어 놓은 유성기 앞이며 또는 일요일날 예배당에서 찬양대의 노래에 젊은 가슴을 뛰놀리던 그이었습니다. 집에서는 피아노 앞을 떠나 본일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비상한 감흥으로 오선지를 내어놓고 음보를 그려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만치 뛰놀던 열정과 터질 듯한 감격도 음보로 그려 놓으면 아무 긴장도 없는 싱거운 음계가 되어 버리고 하였습니다. ? 그만치 천분이 있고 그만치 열정이있던 그에게서 왜 그런 재와 같은 음악만 나왔느냐고 물으실 테지요. 거기 대하여서는 이따가 설명하리다.

감격과 불만 열정과 재, 비상한 흥분과 그 흥분에 대한 반비례되는 시원치 않은 결과 이러한 불만의 십 년이 지났습니다.

*

그의 어머니는 문득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자양과 약값, 그의 몇 해를 근근이 모았던 돈은 차차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안락한 생활이 되기만 하면 정식으로 음악에 대한 교육을 받으려고 모아 두었던 저금은 그의어머니의 병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내가 그 예배당에서 만나기 전 해 여름 어떤 날, 그의 어머니는 도저히 회복할 가망이 없는 중태에까지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그에게는 돈이라고는 다 떨어진 때였습니다.

그날 아침, 그는 위독한 어머니를 버려 두고 역시 공장에를 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일을 중도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어머니는 벌써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황급히 다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무얼 하러? 뜻없이 뛰어나와서 한참 달음박질하다가,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의사라도 청할 양으로 히끈 돌아섰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까 내가 말한 바 기회라는 것이 그때에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조그만 담뱃가게 앞이었는데 가게와 안방과의 새의 문은 닫겨 있고 안에는 미상불 사람이있을지나 가게를 보는 사람은 눈에 안 띄었습니다. 그리고 그 담배 상자 위에는 오십 전짜

리 은전 한 닢과 동전 몇 닢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로도 무엇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의사를 청하여 오려면, 다만 몇십 전이라도 돈이 있어야겠단 어렴풋한 생각만 가지고 있던 그는, 한번 사면을 살핀 뒤에 벼락같이 그 돈을 쥐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십 간도 뛰지 못하여 따라오는 그 집 사람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는 몇 번을 사정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자기의 어머니가 명재경각이니, 한 시간만 놓아주면 의사를 어머니에게 보내고 다시 오마고까지 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모두 헛소리로 돌아가고, 그는 마침내 경찰서로 가게 되었습니다.

경찰서에서 재판소로 재판소에서 감옥으로--- 이러한 여섯 달 동안에 그는 이를 갈면서분해하였습니다. 자기 어머니의 운명이 어찌 되었나. 그는 손과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만약 세상을 떠났다 하면 떠나는 순간에 얼마나 자기를 찾았겠습니까. 임종에도 물 한 잔 떠넣어 줄 사람이 없는 어머니였습니다. 애타하는 그 모양, 목말라하는 그

모양을 생각하고는 그 어머니에게 지지 않게 자기도 애타하고 목말라했습니다.

반 년 뒤에 겨우 광명한 세상에 나와서 자기의 오막살이를 찾아가매 거기는 벌써 다른 사람이 들어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반 년 전에 아들을 찾으며 길에까지 기어나와서 죽었다

합니다.

공동묘지를 가보았으나 분묘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갈 곳이 없이 헤매던 그는 그날도 역시 잘 곳을 찾으러 헤매다가 그 예배당(나하고 만난)까지 뛰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

여기까지 이야기해 오던 K씨는 문득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마도로스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피워 가지고 빨면서 모씨에게 향하였다.

선생은 이제 내가 이야기한 가운데 모순된 점을 발견 못 하셨습니까?”

글쎄요.”

그럼 내가 대신 물으리다. 백성수는 그만치 천분이 많은 음악가였었는데 왜 그 광염 소나(그날 밤의 소나타를 광염 소나타라고 그랬습니다)를 짓기 전에는 그만치 흥분되고 긴장되었다가도 일단 음보로 만들어 놓으면 아주 힘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했겠습니까?”

그게야 미상불 그때의 흥분이 광염 소나타를 지을 때의 흥분만 못한 연고겠지요.”

그렇게 해석하세요? 듣고 보니 그것은 한 해석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석 안 하는데요.”

그럼 K씨는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나는, 아니, 내 해석을 말하는 것보다 그 백성수한테서 내게로 온 편지가 한 장 있는데, 것을 보여 드리리다. 선생은 오늘 바쁘시지 않으세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집까지 잠깐 같이 가보실까요?”

가지요.”

두 노인은 일어섰다.

도회와 교외의 경계에 달린 K씨의 집에까지 두 노인이 이른 때는 오후 너덧시가 된 때였었.

두 노인은 K씨의 서재에 마주앉았다.

이것이 이삼 일 전에 백성수한테서 내게로 온 편지인데 읽어 보세요.”

K씨는 서랍에서 기다란 편지 뭉치를 꺼내어 모씨에게 주었다. 모씨는 받아서 폈다.

가만, 여기서부터 보세요. 그 전에는 쓸데없는 인사이니까.”

*

……(중략) 그리하여 그날도 또한 이제 밤을 지낼 집을 구하느라고 돌아다니던 저는 우연히 그 집, 제가 전에 돈 오십여 전을 훔친 집 앞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깊은 밤 사면은 고요한데 그 집 앞에서 잘 곳을 구하느라고 헤매던 저는 문득 마음속에 무서운 복수의 생각이일어났습니다. 이 집만 아니었더면, 이 집 주인이 조금만 인정이라는 것을 알았더면, 저는 그 불쌍한 제 어머니로서 길에까지 기어나와서 세상을 떠나게 하지는 않았겠습니다. 분묘가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하여 꽃 한 번 갖다가 꽂아 보지 못한 이러한 불효도 이 집 때문이외다. 이러한 생각에 참지를 못하여, 그 집 앞에 가려 있는 볏짚에다가 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거기 서서 불이 집으로 옮아 가는 것을 다 본 뒤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나서 달아났습니다.

좀 달아나다 보매 아래서는 벌써 사람이 꾀어들기 시작한 모양인데 이때에 저의 머리에 타오르는 생각은 통쾌하다는 생각과 달아나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몸을 숨기기 위하여 앞에 보이는 예배당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불이 다 꺼지도록 구경을 한 뒤에 나오려다가 피아노를 보고…….

*

이 보세요.”

K씨는 편지를 보는 모씨를 찾았다.

비상한 열정과 감격은 있어두 그것이 그대로 표현 안 된 것이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즉 성수의 어머니는 몹시 어진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성수의 교육을 몹시 힘을 들여서 착한사람이 되도록, 이렇게 길렀습니다그려. 그 어진 교육 때문에 그가 하늘에서 타고난 광포성과 야성이 표면상에 나타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타오르는 야성적 열정과 힘이 음보(

)로 그려 놓으면 아주 힘없는, 말하자면 김빠진 술과 같이 되고 하는 것이 모두 그 때문이었습니다그려. 점잖고 어진 교훈이, 그의 천분을 못 발휘하게 한 셈이지요.”

.”

그것이, 그 사람 성수가, 감옥생활을 할 동안에 한 번 씻기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사람의 교양이라 하는 것은 온전히 씻지는 못하는 것이외다.

그러다가, 원수의 집 앞에서 갑자기, 말하자면 돌발적으로 야성과 광포성이 나타나서 불을 놓고 예배당 안에 숨어 서서 그 야성적 광포적 쾌미를 한껏 즐긴 다음에, 그에게서 폭발하여 나온 것이 그 광염 소나타였구려.

일어서는 불길, 사람의 비명, 온갖 것을 무시하고 퍼져 나가는 불의 세력--- 이런 것은 사실 야성적 쾌미 가운데 으뜸이 되는 것이니깐요.”

……

아셨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에 그 편지의 여기부터 또 보세요.”

*

……(중략) 저는 그날의 일이 아직 눈앞에 어리는 듯하외다. 선생님이 저를 세상에 소개하시기 위하여 늙으신 몸이 몸소 피아노에 앉으셔서 초대한 여러 음악가들 앞에서 제 광염소나타를 탄주하시던 그 광경은 지금 생각하여도 제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 합니다. 그때에 그 손님 가운데 부인 손님 두 분이 기절을 한 것은 결코 광염 소나타의 힘뿐이 아니고

선생의 그 탄주의 힘이 많이 섞인 것을 뉘라서 부인하겠습니까. 그 뒤에 여러 사람 앞에 저를 내어세우고,

이 사람이 광염 소나타의 작자이며 삼십 년 전에 우리를 버려 두고 혼자 간 일대의 귀재○○의 아들이외다.”

고 소개를 하여 주신 그때의 그 감격은 제 일생에 어찌 잊사오리까.

그 뒤에 선생님께서 저를 위하여 꾸며 주신 방도 또한 제 마음에 가장 맞는 방이었습니다.

널따란 북향 방에 동남쪽 귀에 든든한 참나무 침대가 하나, 서북쪽 귀에 아무 장식 없는 참나무 책상과 의자, 피아노가 하나씩, 그 밖에는 방 안에 장식이라고는 서남쪽 벽에 커다란 거울이 하나 있을 뿐, 덩더렇게 넓은 방은 사실 밤에 전등 아래 앉아 있노라면 저절로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방이었습니다. 게다가 방 안은 모두 꺼먼 칠을 하고, 창 밖에는 늙은 홰나무의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 것도 과연 귀기가 돌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선생님은 저로 하여금 방분스러운 음악을 낳도록 애써 주셨습니다.

저도 그런 환경 아래서 좋은 음악을 낳아 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어떤 날 선생님께 작곡에 대한 계통적 훈련을 원할 때에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자네게는 그러한 교육이 필요가 없어. 마음대로 나오는 대로 하게. 자네 같은 사람에게 계통적 훈련이 들어가면 자네의 음악은 기계화해 버리고 말아. 마음대로 온갖 규칙과 규범을 무시하고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저는 이 말씀의 뜻을 똑똑히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대략한 의미뿐은 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마음대로 한껏 자유스러운 음악의 경지를 개척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제가 산출한 음악은 모두 이상히도 저의 이전(제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실 때)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러한 힘도 없는 음향의 유희에 지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얼마나 초조하였겠습니까. 때때로 선생님께서 채근 비슷이 하시는 말씀은 저로 하여금 더욱 초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초조하면 초조할수록 제게서 생겨나는 음악은 더욱 나약한 것이 되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그 불붙던 광경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통쾌하던 감정을 되풀이하여 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실패에 돌아갔습니다.

때때로 비상한 열정으로 음보를 그려 놓은 뒤에 몇 시간을 지나서 다시 한번 읽어 보면 거기는 아무 힘이 없는 개념만 있고 하였습니다.

저의 마음은 차차 무거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신 선생님께도 미안하기가 짝이 없었습니다.

음악은 공예품과 달라서 마음대로 만들고 싶은 때에 되는 것이 아니니 마음놓고 천천히 감흥이 생긴 때에…….”

이러한 선생님의 위로의 말씀이 듣기가 제 살을 깎아 먹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상은 인제는 제게서 다시 힘있는 음악이 나올 기회가 없는 것같이만 생각되었습니다.

이러는 동안에 무위의 몇 달이 지났습니다.

어떤 날 밤중, 가슴이 너무 무겁고 가슴속에 무엇이 가득 찬 것같이 거북하여서, 저는 산보를 나섰습니다. 무거운 머리와 무거운 가슴과 무거운 다리를 지향없이 옮기면서 돌아다니다가 저는 어떤 곳에서 커다란 볏짚 낟가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때의 저의 심리를 어떻게 형용하였으면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슨 무서운 적()을 만난 것같이 긴장되고 흥분되었습니다. 저는 사면을 한번 살펴보고, 그 낟가리에 달려가서 불을 그어서 놓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무서움증이 생겨서 돌아서서 달아나다가멀찌가니까지 달아나서 돌아보니까, 불길은 벌써 하늘을 찌를 듯이 일어났습니다. , ,

, , 사람들이 부르짖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저는 다시 그곳까지 가서, 그 무서운 불길에 날아 올라가는 볏짚이며, 그 낟가리에 연달아 있는 집을 헐어 내는 광경을 구경하다가문득 흥분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에 된 것이 성난 파도이었습니다.

그 뒤에 이 도회에서 일어난, 알지 못할 몇 가지의 불은, 모두 제가 질러 놓은 것이었습니. 그리고, 불이 있던 날 밤마다 저는 한 가지의 음악을 얻었습니다. 며칠을 연하여 가슴이 몹시 무겁다가 그것이 마침내 식체와 같이 거북하고 답답하게 되는 때는 저는 뜻없이거리를 나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날은 한 가지의 방화사건이 생겨나며 그날 밤에는 한 곡

의 음악이 생겨났습니다.

*

그러나 그것도 번수가 차차 많아 갈 동안, 저의, 그 불에 대한 흥분은 반비례로 줄어졌습니. 온갖 것을 용서하지 않는 불꽃의 잔혹함도, 그다지 제 마음을 긴장시키지 못하였습니.

차차, 힘이 적어져 가네.”

선생님께서 제 음악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그러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게서 더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한동안 음악을 온전히 잊어

버린 듯이 내버려두었습니다.

*

모씨가 성수의 마지막 편지를 여기까지 읽었을 때에, K씨가 찾았다.

재작년 봄에서 가을에 걸쳐서, 원인 모를 불이 많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죄 성수의 장난이었습니다그려.”

“K씨는 그것을 온전히 모르셨습니까?”

나요? 몰랐지요. 그런데, 그 어떤 날 밤이구려. 성수는 기대에 반해서, 우리집으로 온 지여러 달이 됐지만, 한 번도 힘있는 것을 지어 본 일이 없겠지요. 그래서, 저 사람에게 무슨흥분될 재료를 줄 수가 없나 하고 혼자 생각하며 있더랬는데, 그때에 저

K씨는 손을 들어 남편 쪽 창을 가리켰다.

편 꽤 멀리서 불붙는 것이 눈에 뜨입디다그려. 그래서 저것을 성수에게 보이면, 혹 그때의 감정(그때는, 나는 그 담배 장수네 집에 불이 일어난 것도 성수의 장난인 줄은 꿈에도생각 안 했구료)을 부활시킬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구 성수의 방으로 올라가려는데문득 성수의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려 나옵니다그려. 나는 올라가려던 발을 부지중 멈추고 말았지요. 역시 C샤프 단음계로서, 제일곡은 뽑아 먹고, 아다지오에서 시작되는데, 요하고 잔잔한 바다, 수평선 위로 넘어가려는 저녁 해, 이러한 온화한 것이 차차 스케르초로 들어가서는 소낙비, 풍랑, 번개질, 무서운 바람 소리, 우레질, 전복되는 배, 곤해서 물에떨어지는 갈매기, 한번 뒤집어지면서 해일에 쓸려 나가는 동네 사람의 부르짖음---

분에서 흥분, 광포에서 광포, 야성에서 야성, 온갖 공포와 포학한 광경이 눈앞에 어릿거리는데, 이 늙은 내가 그만 흥분에 못 견디어, 뜻하지 않고 그만두어 달라고 고함친 것만으로도 짐작하시겠지요. 그리고 올라가서 보니깐, 그는 탄주를 끝내고 피곤한 듯이 피아노에 기대고 앉아 있고, 이제 탄주한 것은 벌써 성난 파도라는 제목 아래 음보로 되어 있습디.”

그러면 성수는 불을 두 번 놓고, 두 음악을 얻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지요. 그러고, 그 뒤부터는 한 십여 일 건너서는 하나씩 지었는데, 그것이 지금 보면,한 가지의 방화사건이 생길 때마다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편지마따나, 얼마지나서부터는 차차 그 힘과 야성이 적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가만계십쇼. 그 사람이 그 다음에도 피의 선율이나 그 밖에 유명한 곡조를 여러 개 만들지 않았습니까?”

글쎄 말이외다. 거기 대한 설명은 그 편지를 또 보십쇼. 여기서부터 또 보시면 알리다.”

*

……(중략) ××다리 아래로서 나오려는데, 무엇이 발길에 채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냥을그어 가지고 보니깐, 그것은 웬 늙은이의 송장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서워서 달아나려다가, 돌아서려던 발을 다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선생님은 이제 제가 쓰는 일을 이해하여 주실는지요. 그것은 너무도 기괴한 일이라 저로서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 송장을 타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송장의 옷을 모두찢어서 사면으로 내어던진 뒤에, 그 벌거벗은 송장을, (제 힘이라 생각되지 않는) 무서운 힘으로써 높이 쳐들어서, 저편으로 내어던졌습니다. 그런 뒤에는, 마치 고양이가 알을 가

지고 놀 듯, 다시 뛰어가서 그 송장을 들어서, 도로 이편으로 던졌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하여 머리가 깨지고, 배가 터지고--- 그 송장은 보기에도 참혹스러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송장을 다시 만질 곳이 없이 된 뒤에, 저는 그만 곤하여 그 자리에 앉아서 쉬려다가 갑자기 마음이 긴장되고 흥분되어서,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날 밤에 된 것이 피의 선율이었습니다.

*

선생은 이러한 심리를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아마, 모르실걸요, 그러나 예술가로서는 능히 머리를 끄덕일 수 있는 심리외다. 그리고 또

여기를 읽어 보십시오.”

*

……(중략) 그 여자가 죽었다는 것은 제게는 사실 뜻밖이었습니다저는, 그날 밤 혼자 몰래 그 여자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칠팔 시간 전에 묻어 놓은 그의 무덤의 흙을 다시 파서 그의 시체를 꺼내어 놓았습니다.

푸르른 달빛 아래 누워 있는 아름다운 그의 모양은 과연 선녀와 같았습니다. 가볍게 눈을닫고 있는 창백한 얼굴, 곧은 콧날, 풀어헤친 검은 머리--- 아무 표정도 없는 고요한 얼굴은 더욱 처염함을 도왔습니다. 이것을 정신이 없이 들여다보고 있던 저는 갑자기 흥분이되어, 아아, 선생님 저는 이 아래를 쓸 용기가 없습니다. 재판소의 조서를 보시면 저절로

아실 것이올시다.

그날 밤에 된 것이 사령(死靈)’이었습니다.

*

어떻습니까?”

……

?”

……

언어도단이에요? 선생의 눈으로는 그렇게 뵈시리다. 또 여기를 읽어 보십쇼.”

*

……(중략) 이리하여 저는 마침내 사람을 죽인다 하는 경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한 개의 음악이 생겨났습니다. 그 뒤부터 제가 지은 그 모든 것은모두 다 한 사람씩의 생명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

인전 더 보실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보셨으면 성수에 대한 대략한 일은 아셨을 터인데, 거기 대한 의견이 어떻습니까?”

……

?”

어떤 의견 말씀이오니까?”

어떤 기회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천재와 함께, ‘범죄 본능까지 끄을어내었다 하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하여야겠습니까 혹은 축복하여야겠습니? 이 성수의 일로 말하자면 방화, 사체 모욕, 시간, 살인, 온갖 죄를 다 범했어요. 우리 예술가협회에서 별로 수단을 다 써서 정부에 탄원하고 재판소에 탄원하고 해서 겨우 성수를

정신병자라 하는 명목 아래 정신병원에 감금했지,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사형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그 편지를 보셔도 짐작하시겠지만 통상시에는 그 사람은 아주 명민하고 점잖고 온화한 청년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뭐랄까, 그 흥분 때문에 눈이 아득하여져서 무서운 죄를 범하고 그 죄를 범한 다음에는 훌륭한 예술을 하나씩 산출합니다. 이런 경우에우리는 그 죄를 밉게 보아야 합니까, 혹은 그 범죄 때문에 생겨난 예술을 보아서 죄를 용서하여야 합니까?”

그게야 죄를 범치 않고 예술을 만들어 냈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러나 이 성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니깐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해결하렵니?”

죄를 벌해야지요. 죄악이 성하는 것을 그냥 볼 수는 없습니다.”

K씨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술가의 견지로는 또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베토벤 이후로는 음악이라 하는 것이 차차 힘이 빠져 가서 꽃이나 계집이나 찬미할 줄 알고 연애나 칭송할 줄 알아서 선이 굵은 것은 볼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엄정한 작곡법이 있어서그것은 마치 수학의 방정식과 같이 작곡에 대한 온갖 자유스런 경지를 제한해 놓았으니깐

이후에 생겨나는 음악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전에는 한 기술이 될 것이지 예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에게는 이것이 쓸쓸해요. 힘있는 예술, 선이 굵은 예술, 야성으로 충일된 예술---는 이것을 기다린 지 오랬습니다. 그럴 때에, 백성수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말이지 백성수의 그새의 예술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의 문화를 영구히 빛낼 보물입니다.

우리의 문화의 기념탑입니다. 방화? 살인? 변변치 않은 집개, 변변치 않은 사람개는 그의예술의 하나가 산출되는 데 희생하라면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천 년에 한 번, 만 년에 한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적어도 우리 예술가에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K씨는 마주앉은 노인에게서 편지를 받아서 서랍에 집어넣었다. 새빨간 저녁 해에 비치어서 그의 늙은 눈에는 눈물이 반득였다.

출전:중외일보(1929.1.1~12)

 

광염 소나타 by 김동인 , 공유마당,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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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택 - 사진[무료소설]  (0) 2013.01.31
현진건 - 사립 정신병원장[무료소설]  (0) 201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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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도 술군은 역시 들지 않는다. 메주 뜨는 냄새와 같이 퀴퀴한 냄새로 방안은 쾨쾨하다. 웃간에는 쥐들이 찍찍거린다. 홀어머니는 쪽 떨어진 화로를 끼고 앉아서 쓸쓸한 채로 곰곰 생각에 젖는다. 가뜩이나 침침한 반짝 등불이 북쪽 지게문에 뚫린 구멍으로 새 드는 바람에 반득이며 빛을 잃는다. 헌버선짝으로 구멍을 틀어막는다. 그러고 등잔 밑으로 반짇고리를 끌어당기며 시름없이 바늘을 집어 든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 건 물소리, 골을 휘몰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퐁! 퐁 퐁! 쪼록 퐁!

바깥에서 신발 소리가 자작자작 들린다. 귀가 번쩍 띄어 그는 방문을 가볍게 열어젖힌다. 머리를 내밀며,

「덕돌이냐?」하고 반겼으나 잠잠하다. 앞뜰 건너편 수평을 감돌아 싸늘한 바람이 낙엽을 흩뿌리며 얼굴에 부딪친다.

용마루가 쌩쌩 운다. 모진 바람 소리에 놀라 멀리서 밤개가 요란히 짖는다.

「쥔 어른 계서유?」

몸을 돌리어 바느질거리를 다시 들려 할 제 이번에는 짜장 인기가 난다. 황급하게,

「누구유?」 하고 일어서며 문을 열어 보았다.

「왜 그러유?」

처음 보는 아낙네가 마루 끝에 와 섰다. 달빛에 비끼어 검붉은 얼굴이 해쓱하다. 추운 모양이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에 둘렀던 왜수건을 벗어 들고는 다른 손으로 흩어진 머리칼을 쓰담아올리며 수줍은 듯이 쭈뼛쭈뼛한다.

「저어, 하룻밤만 드새고 가게 해주세유.」

남정네도 아닌데 이 밤중에 웬일인가, 맨발에 짚신짝으로, 그야 아무렇던……

「어서 들어와 불 쬐게유.」

나그네는 주춤주춤 방 안으로 들어와서 화로 곁에 도사려 앉는다. 낡은 치맛자락 위로 삐지려는 속살을 아무리자 허리를 지그시 튼다. 그리고는 묵묵하다. 주인은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밥을 좀 주려느냐고 물어보아도 잠자코 있다.

그러나 먹던 대궁을 주워 모아 짠지쪽하고 갖다 주니 감지덕지 받는다. 그리고 물 한 모금 마심 없이 잠깐 동안에 밥그릇의 밑바닥을 긁는다.

밥숟갈을 놓기가 무섭게 주인은 이야기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미주알고주알 물어보니 이야기는 지수가 없다. 자기로도 너무 지쳐 물은 듯싶은 만치 대구 추근거렸다. 나그네는 싫단 기색도 좋단 기색도 별로 없이 시나브로 대꾸하였다. 남편 없고 몸 붙일 곳 없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고 난 뒤,

「이리 저리 얻어먹고 단게유.」 하고 턱을 가슴에 묻는다.

첫 닭이 홰를 칠 때 그제야 마을갔던 덕돌이가 돌아온다. 문을 열고 감사나운 머리를 디밀려다 낯선 아낙네를 보고 눈의 휘둥그렇게 주춤한다. 열린 문으로 억센 바람이 몰아들며 방 안이 캄캄하다. 주인은 문 앞으로 걸어와 서며 덕돌이의 등을 뚜덕거린다. 젊은 여자 자는 방에서 떠꺼머리 총각을 재우는 건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얘, 덕돌아, 오늘은 마을 가 자고 아침에 온.」


가을할 때가 지났으니 돈냥이나 좋이 퍼질 때도 되었다. 그 돈들이 어디로 몰키는지 이 술집에서는 좀체 돈맛을 못 본다. 술을 판대야 한 초롱에 오륙십 전 떨어진다. 그 한 초롱을 잘 친대도 사날씩이나 걸리는 걸 요새 같아선 그 잘량한(‘알량한’ 사투리) 술군까지 씨가 말랐다. 어쩌다 전일에 퍼놓았던 외상값도 갖다줄 줄을 모른다. 홀어미는 열벙거지가 나서 이른 아침부터 돈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그러나 다리품을 들인 보람도 없었다. 낼 사람이 즐겨야 할 텐데 우물쭈물하며 한단 소리가 좀 두고 보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안 갈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날이 양식은 달리고 지점집에서 집행을 하느니 뭘 하느니 독촉이 어지간치 않음에랴……

「저도 이젠 떠나야겠세유.」

그가 조반 후 나들이옷을 바꾸어 입고 나서니 나그네도 따라 일어선다. 그의 손을 자상히 붙잡으며 주인은,

「고달플 테니 며칠 더 쉬어 가게유」 하였으나,

「가야지유. 너무 오래 신세를……」

「그런 염려는 말구.」라고 누르며 집 지켜 주는 셈치고 방에 누웠으라 하고는 집을 나섰다.

백두고개를 넘어서 안말로 들어가 해동갑으로 헤매었다. 헤실수로 간 곳도 있기야 하지만 맑았다. 해가 지고 어두울 녘에야 그는 흘부들해서 돌아왔다. 좁쌀 닷 되밖에는 못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돈 낼 생각은커녕 이러면 다시 술 안 먹겠다고 도리어 얼러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만도 다행이다. 아주 못 받느니보다는 끼니때 가지었다. 그는 좁쌀을 씻고 나그네는 솥에 불을 지피어 부랴부랴 밥을 짓고 일변 상을 보았다.

밥들을 먹고 앉았으려니깐 갑자기 술군이 몰려든다. 이거 웬일일까. 처음에는 하나가 오더니 다음에는 세 사람 또 두 사람 모두 젊은 축들이다. 그러나 각각들 먹일 방이 없으므로 주인은 좀 망설이다가 그 연유를 말하였으나 뭐 한 동리 사람인데 어떠냐, 한데서 먹게 해달라는 바람에 얼씨구나 하였다. 이제야 운이 트나보다. 양푼에 막걸리를 딸쿠어 나그네에게 주어 솥에 넣고 좀 속히 데워 달라 하였다. 자기는 치마꼬리를 휘둘러 가며 잽싸게 안주를 장만한다. 짠지, 동치미, 고추장, 특별 안주로 삶은 밤도 놓았다. 사촌동생이 맛보라고 며칠 전에 갖다 준 것을 애껴 둔 것이었다.

방안은 떠들썩하다. 벽을 두드리며 아리랑 찾는 놈에 건으로 너털웃음 치는 놈, 혹은 수군숙덕하는놈, 가지각색이다. 주인이 술상을 받쳐 들고 들어가니 짜기나 한 듯이 일제히 자리를 바로 잡는다. 그 중에 얼굴 넓적한 하이칼라 머리가 야로가 나서 상을 받으며 주인 귀에다 입을 비벼 대인다.

「아주머니 젊은 갈보 사 왔다지유? 좀 보여 주게유.」

영문 모를 소문도 다 듣는다.

「갈보라니 웬 갈보?」 하고 어리삥삥하다 생각을 하니, 턱없는 소리는 아니다. 눈치 있게 부엌으로 내려가서 보강지1 앞에 앉았는 나그네의 머리를 은근히 끌어안았다. 자, 저패들이 새댁을 갈보로 횡보고 찾아온 맥이다. 물론 새댁편으론 망측스러운 일이겠지만 달포나 손님의 그림자가 드물던 우리 집으로 보면 재수의 빗발이다. 술국을 잡는다고 어디가 떨어지는 게 아니요, 욕이 아니니 나를 보아 오늘만 좀 팔아 주기 바란다, 이런 의미를 곰살궂게 간곡히 말하였다. 나그네의 낮은 별반 변함이 없다. 늘 한 양으로 예사로이 승낙하였다.

술이 온몸에 돌고 나서야 뒷술이 잔풀이가 난다. 한 잔에 5전, 그저 마시긴 아깝다. 얼간한 상투배기가 계집의 손목을 탁 잡아 앞으로 끌어당기며,

「권주가 좀 해, 이건 뀌어온 보릿자룬가?」

「권주가? 뭐야유?」

「권주가? 이 갈보가 권주가도 모르나. 으하하하하」 하고는 무안에 취하여 푹 숙인 계집 뺨에다 꺼칠꺼칠한 턱을 문질러 본다. 소리를 아무리 시켜도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만 기울일 뿐, 소리는 못 하나 보다. 그러나 노래 못하는 꽃도 좋다. 계집은 영 내리는 대로 이 무릎 저 무릎으로 옮아 앉으며 턱 밑에다 술잔을 받쳐 올린다.

술들이 담뿍 취하였다. 두 사람은 곯아져서 코를 곤다. 계집이 칼라머리 무릎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워 올릴 때 코웃음을 흥 치더니 그 무지스러운 손이 계집의 아래 뱃가죽을 사양 없이 움켜잡는다. 별안간 <아야!> 하고 퍼들껑하더니 계집의 몸뚱아리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다 도로 떨어진다.

「이 자식아 너만 돈 내고 먹었니?」

한 사람 새두고 앉았던 상투가 콧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맨발 벗은 계집의 두 발을 양손에 붙잡고 가랑이를 쩍 벌려 무릎 위로 지르르 끌어올린다. 계집은 앙탈을 한다. 눈시울에 눈물이 엉기더니 불현듯이 쪼록 쏟아진다.

방 안에서 왱마가리 소리가 끓어오른다.

「저 잡놈 보게, 으하하하하.」

술은 연실 데워서 들어가면서도 주인은 불안하여 마음을 졸였다. 겨우 마음을 놓은 것은 훨씬 밝아서다.

참새들은 소란히 지저귄다. 기직바닥이 부스럼 자죽보다 질배없다. 술, 짠지쪽, 가래침, 담뱃재 뭣해 너저분하다. 우선 한길치에 자리를 잡고 계배를 대 보았다. 마수걸이가 85전, 외상이 2원 각수다. 현금 85전, 두 손에 들고 앉아 세고 또 세어보고……

뜰에서는 나그네의 혀로 끌어올리는 인사,

「안녕히 가시게유.」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나두」


찌르쿵! 찌르쿵! 찔거러쿵!

「방앗머리가 무겁지유?…… 고만 까불을까.」

「들 익었세유. 더 찧어야지유.」

「그런데 얘는 어쩐 일이야……」

덕돌이를 읍에 보냈는데 날이 저물어도 여태 오지 않는다. 흩어진 좁쌀을 확에 쓸어 넣으며 홀어머니는 퍽으나 애를 태운다. 요새 날씨가 차지니까 늑대, 호랑이가 차차 마을로 찾아 내린다. 밤길에 고개 같은 데서 만나면 끽 소리도 못하고 욕을 당한다.

나그네가 방아를 괴놓고 내려와서 키로 확의 좁쌀을 담아 올린다. 주인은 그 머리를 쓰담고 자기의 행주치마를 벗어서 그 위에 씌워 준다. 계집의 나이 열아홉이면 활짝 필 때이건만 버케된 머리칼이며 야윈 얼굴이며 벌써부터 외양이 시들어 간다. 아마 고생을 진한 탓이리라.

날씬한 허리를 재빨리 놀려가며 일이 끊일 새 없이 다구지게2 덤벼드는 그를 볼 때 주인은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일변 측은도 하였다. 뭣하면 딸과 같이 자기 집에서 길게 살아주었으면 상팔자일 듯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소 한 마리와 바꾼대도 이것만은 안 내놓으리라고 생각도 하였다.

아들만 데리고 홀어머니의 생활은 무던히 호젓하였다. 그런데다 동리에서는 속 모르는 소리까지 한다. 떠꺼머리 총각을 그냥 늙힐 테냐고. 그러나 형세가 부치므로 감히 엄두도 못 내다가 겨우 올 봄에서야 다붙어 서둘게 되었다. 의외로 일은 손쉽게 되었다. 이리저리 언론이 돌더니 남촌산에 어느 집 둘째 딸과 혼약하였다. 일부러 홀어미는 40리 밖이나 걸어서 색시의 손등을 문질러 보고는,

「참 애기 잘도 생겹세!」

좋아서 사돈에게 칭찬을 뇌고 뇌곤 하였다.

그런데 없는 살림에 빚을 내어 혼수를 다 꼬매 놓은 뒤였다. 혼인날을 불과 이틀 격해 놓고 일이 그만 빗났다. 처음에야 그런 말이 없더니 난데 없는 선채금 30원을 가져 오란다. 남의 돈 3원과 집의 돈 5원으로 거추군에게 품삵 노비 주고 혼수하고 단지 2원……잔치에 쓸 것밖에 안 남고 보니 30원이란 입내도 못 낼 소리다. 그 밤, 그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넋 잃은 팔을 던져 가며 통 밤을 새웠던 것이다.

「어머님! 진지 잡수세유.」

새댁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끔찍이 귀여우리라. 이것이 단 하나의 그의 소원이었다.

「다리 아프지유? 너머 일만 시켜서……」

주인은 저녁 좁쌀을 쓸어 넣다가 방앗다리에 깝신대는 나그네를 걸쌈스럽게 쳐다본다. 방아가 무거워서 껍적이며 잘 오르지 않는다. 가냘픈 몸이라 상혈이 되어 두 볼이 샛밝아케 색색거린다. 치마도 치마려니와 명지 저고리는 어찌 삭았는지 어깨께가 손바닥만 하게 척 나갔다. 그러나 덕돌이가 왜포 다섯 자를 바꿔 오거든 첫대 사발허통된 솟곳부터 해입히고 차차 할 수밖엔 없다.

「같이 찝시다유.」

주인도 남저지3 방앗다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찌껑 위에 놓인 나그네의 손을 눈치 채지 않게 슬며시 쥐어보았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이만한 며느리만 얻어도 좋으련만. 나그네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열적어서4 시선을 돌렸다.

「퍽도 쓸쓸하지유!」 하며 손으로 울 밖을 가리킨다. 첫밤 같은 석양판이다. 색동저고리를 떨쳐입고 산들은 거방진 방앗소리를 은은히 전한다. 찔그러쿵! 찌러쿵!

그는 나그네를 금덩이같이 위하였다. 없는 대로 자긔옷가지도 서로 서로 별러 입었다. 그리고 잘 때에는 딸과 진배없이 이불 속에서 품에 꼭 품고 재우곤 하였다. 하지만 자기의 은근한 속심은 차마 입에 드러내어 말을 못 건넸다. 잘 들어주면이어니와 뭣하게 안다면 피차의 낯이 뜨뜻할 일이었다.

그러나 맘먹지 않았던 우연한 일로 인하여 마침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그네가 온 지 나흘 되던 날이었다. 거문관이 산기슭에 있는 영길네 벼방아를 좀 와서 찧어 달라고 한다. 나그네는 줄밤을 새우므로 낮에나 푸근히 자라고 두고 그는 홀로 나섰다.

머리에 겨를 보얗기 쓰고 맥이 풀려서 집에 돌아온 것은 이럭저럭 으스레하였다. 늙은 다리를 끌고 뜰 앞으로 향하다가 그는 주춤하였다. 나그네 홀로 자는 방에 덕돌이가 들어갈 리 만무한데 정녕코 그놈일 게다. 마루 끝에 자그마한 나그네의 짚세기5이 놓인 그 옆으로 질목채 벗은 왕달 짚세기이 왁살스럽게 놓였다. 그리고 방에서는 수군수군 낮은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는 무심코 닫은 방문께로 귀를 기울였다.

「그럼 와 그러는 게유? 우리 집이 굶을까봐 그러시유?」

「……」

「어머이도 사람은 좋아유……올해 잘만 하면 내년에는 소 한 마리 사 놀 게구, 농사만 해두 한 해에 쌀 넉 섬, 조 엿 섬, 그만하면 고만이지유……내가 싫은 게유?」

「……」

「사내가 죽었으니 아뭏든 얻을 게지유?」

옷 터지는 소리, 부시럭거린다.

「아이! 아이! 아이! 참! 이거 노세유」

쥐죽은 듯이 감감하다. 허공에 아롱거리는 낙엽을 이윽히 바라보며 그는 빙그레 한다. 신발 소리를 죽이고 뜰 밖으로 다시 돌쳐섰다.

저녁상을 물린 후 그는 시치미를 딱 떼고 나그네의 기색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젊은 아낙네가 홀몸으로 돌아다닌대두 고생일 게유. 또 어차피 사내는……」

여기서부터 사리에 맞도록 이 말 저 말을 주섬주섬 꺼내 오다가 나의 며느리가 되어 줌이 어떻겠느냐고 확 토파를 지었다. 치마를 흡싸고 앉아 갸웃이 듣고 있던 나그네는 치마끈을 깨물며 이마를 떨어뜨린다. 그러고는 두 볼이 발개진다. 젊은 계집이 나 시집 가겠소 하고 누가 나서랴. 이만하면 합의한 거나 틀림없을 것이다.

혼수는 전에 해둔 것이 있으니 한시름 잊었다. 그대로 이앙이나 고쳐서 입히면 고만이다. 돈 2원은 은비녀, 은가락지 사다가 각별히 색시에게 선물 내리고……

일은 밀수록 낭패가 많다. 급시로 날을 받아서 대례를 치렀다. 한편에서는 국수를 누른다. 잔치 보러 온 아낙네들은 국수 그릇을 얼른 받아서 후룩후룩 들이마시며 시악시 잘났다고 추었다.

주인은 즐거움에 너무 겨워서 축배를 흥건히 들었다. 여간 경사가 아니다. 뭇사람을 비집고 안팎으로 드나들며 분부하기에 손이 돌지 않는다.

「얘 메누라! 국수 한 그릇 더 가져온!」

어째 말이 좀 어색하구먼……다시 한 번,

「메누라, 애야! 얼른 가져와.」

30을 바라보자 동곳을 찔러 보니 제불에 멋이 질려 비드름하다. 덕돌이는 첫날을 치르고 부썩부썩 기운이 난다. 남이 두 단을 털 제면 그의 볏단은 석 단 째 풀려 나간다. 연방 손바닥에 침을 뱉어 붙이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끅! 끅! 끅! 찍어라. 굴려라 끅! 끅!」

동무의 품앗이 일이다. 거무무투록한 젊은 농군 댓이 볏단을 번차례로 집어든다. 열에 뜬 사람같이 식식거리며 세차게 벼알을 절구통배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얘! 장가 들고 한 턱 안 내니?」

「일색이더라. 단단히 먹자. 닭이냐? 술이냐? 국수냐?」

「웬 국수는? 너는 국수만 아느냐?」

저희끼리 찧고 까분다. 그들은 일을 놓으며 옷깃으로 땀을 씻는다. 골바람이 벼 깔치6를 부옇게 풍긴다. 옆 산에서 푸드덕 하고 꿩이 날며 머리 위를 지나간다. 갈퀴질을 하던 얼굴 넓적이가 갈퀴를 놓고 씽긋하더니 달려든다. 장난군이다. 여러 사람의 힘을 빌어 덕돌이 입에다 헌 짚신짝을 물린다. 버들껑거린다. 다시 양 귀를 두 손에 잔뜩 훔켜잡고 끌어 와서는 털어놓은 벼 무더기 위에 머리를 틀어박으며 동서남북으로 큰절을 시킨다.

「야아! 야아! 아!」

「아니다, 아니야. 장갈 갔으면 산신령에게 이러하다 말이 있어야지, 괜시리 산신령이 노하면 눈깔망나니(호랑이) 내려보낸다.」

뭇 웃음이 터져 오른다. 새신랑의 옷이 이게 뭐냐, 볼기짝에 구멍이 뚫리고……빈정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덕돌이는 상투의 먼지를 털고 나서 곰방대를 피워 물고는 싱그레 웃어치운다. 좋은 옷은 집에 두었다. 인조견 조끼, 저고리, 새하얀 옥당목 겹바지, 그러나 애끼는 것이다. 일할 때엔 헌 웃을 입고 집에 돌아와 쉴 참에나 입는다. 잘 때에도 모조리 벗어서 더럽지 않게 착착 개어 머리맡 위에 놓고 자곤 한다. 의복이 남루하면 인상이 추하다. 모처럼 얻은 귀여운 아내니 행여나 마음이 돌아앉을까 미리미리 사려 두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29년 만에 누런 이 조각에다 이제서야 소금을 발라 본 것도 이 까닭이었다.

덕돌이가 볏단을 다시 집어 올릴 제 그 이웃에 사는 돌쇠가 옆으로 와서 품을 안는다.

「얘 덕돌아! 너 내일 우리 조마댕이 좀 해 줄래?」

「뭐 어째?」 하고 소리를 빽 지르고는 그는 눈귀가 실룩하였다.

「누구보고 해라야? 응? 이 자식 까놀라.」

이제까진 턱없이 지냈단대도 오늘의 상투를 못 보는가?

바로 그날이었다. 웃간에서 혼자 새우잠을 자고 있던 홀어머니는 놀라 눈이 번쩍 띄었다. 만뢰 잠잠한 밤중이다.

「어머니! 그게 달아났에유, 내 옷도 없구……」

「응?」 하고 반마디 소리를 치며 얼떨김에 그는 캄캄한 방안을 더듬어 아랫간으로 넘어섰다. 황량히 등잔에 불을 댕기며,

「그래 어디로 갔단 말이야?」

영산이 나서 묻는다. 아들은 벌거벗은 채 이불로 앞을 가리고 앉아서 징징거린다. 옆자리에는 빈 베개뿐 사람은 간 곳이 없다. 들어본즉 온종일 일하기에 피곤하여 아들은 자리에 들자 고만 세상을 잊었다. 하기야 그때 안해도 옷을 벗고 누워서 맞붙어 잤던 것이다. 그는 보통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새침하니 드러누워서 천정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다가 벼란간 오줌이 마렵기에 요강을 좀 집어 달래려고 보니 뜻밖에 품안이 허룩하다.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다. 그래서는 어림짐작으로 우선 머리맡 위에 놓았던 옷을 더듬어 보았다. 딴은 없다.

필연 잠든 틈을 타서 살며시 옷을 입고 자기의 옷이며 버선까지 들고 내뺐음이 분명하리라.

「도적년!」

모자는 관솔에 불을 켜 들고 나섰다. 부엌과 잿간을 뒤졌다. 그리고 뜰 앞 수풀 속도 낱낱이 찾아봤으나 흔적도 없다.

「그래도 방 안을 다시 한 번 찾아보자.」

홀어미는 구태여 며느리를 도적년으로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거반 울상이 되어 허벙저벙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을 가라앉혀 들쳐 보니 아니나 다르랴 며느리 베개 밑에서 은비녀가 나온다. 달아날 계집 같으면 이 비싼 은비녀를 그냥 두고 갈 리 없다.

두말없이 무슨 병패가 생겼다. 홀어미는 아들을 데리고 덜미를 잡히는 듯 문 밖으로 찾아 나섰다.


마을에서 산길로 빠져나는 어귀에 우거진 숲 사이로 비스듬히 언덕길이 놓였다. 바로 그 밑에 석벽을 끼고 깊고 푸른 웅덩이가 묻히고 넓은 그 물이 겹겹 산을 에돌아 약 10리를 흘러내리면 신영강 중턱을 뚫는다. 시새에 반쯤 파묻히어 번들대는 큰 바위는 내를 싸고 양쪽으로 질펀하다. 꼬부랑길은 그 틈바귀로 뻗었다. 좀체 걷지 못할 자갈길이다. 내를 몇 번 건너고 험상궂은 산들을 비켜서 한 5마장 넘어야 겨우 길다란 길을 만난다. 그리고 거기서 좀더 간 곳에 냇가에 외지게 잃어진 오막살이 한 간을 볼 수 있다. 물방앗간이다. 그러나 이제는 밥을 찾아 흘러가는 뜬 몸들의 하룻밤 숙소로 변하였다. 벽이 확 나가고 네 기둥뿐인 그 속에 힘을 잃은 물방아는 을씨년궂게 모로 누웠다. 거지도 그 옆에 홑이불 위에 거적을 쓰고 누웠다. 거푸진 신음이다. 으! 으! 으응! 서까래 사이로 달빛은 쌀쌀히 흘러든다. 가끔 마른 잎을 뿌리며……

「여보 자우? 일어나게유 얼핀.」

계집의 음성이 나자 그는 꾸물거리며 일어나 앉는다. 그리고 너털대는 홑적삼의 깃을 여며 잡고는 덜덜 떤다.

「인제 고만 떠날테이야? 쿨룩……」

말라빠진 얼굴로 계집을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물었다.

10분 가량 지났다. 거지는 호사하였다. 달빛에 번쩍거리는 겹옷을 입고서 지팡이를 끌며 물방앗간을 등졌다. 골골 하는 그를 부축하여 계집은 뒤에 따른다. 술집 며느리다.

「옷이 너무 커, 좀 작았으면……」

「잔말 말고 어여 갑시다, 펄쩍…….」

계집은 부리나케 그를 재촉한다. 그리고 연해 돌아다보길 잊지 않았다. 그들은 강길로 향한다. 개울을 건너 불거져 내린 산모퉁이를 막 꼽뜨리려 할 제다. 멀리 뒤에서 사람 욱이는 소리가 끊일 듯 날 듯 간신히 들려온다. 바람에 묻히어 말소리는 모르겠으나 재없이 덕돌이의 목성임은 넉히 짐작할 수 있다.

「아 얼른 좀 오게유.」

똥끝이 마르는 듯이 계집은 사내의 손목을 겁겁히 잡아끈다. 병든 몸이라 끌리는 대로 뒤툭거리며 거지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같이 사라진다. 수은빛 같은 물방울을 뿜으며 물결은 산벽에 부닥뜨린다. 어디선지 지정치 못할 늑대 소리는 이산 저산서 와글와글 굴러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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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하던 손을 쉬고 중실은 발 밑의 깨금나무 포기를 들쳤다. 지천으로 떨어지는 깨금알이 손안에 오르르 들었다. 익을 대로 익은 제철의 열매가 어금니 사이에서 오도독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돌을 집어던지면 깨금알같이 오도독 깨어질 듯한 맑은 하늘, 물고기 등같이 푸르다. 높게 뜬 조각구름 때가 해변에 뿌려진 조개껍질같이 유난스럽게도 한편에 옹졸봉졸 몰려들 있다. 높은 산등이라 하늘이 가까우련만 마을에서 볼 때와 일반으로 멀다. 구만 리일까 십만 리일까. 골짜기에서의 생각으로는 산기슭에만 오르면 만져질 듯하던 것이 산허리에 나서면 단번에 구만 리를 내빼는 가을 하늘.

산 속의 아침나절은 졸고 있는 짐승같이 막막은 하나 숨결이 은근하다. 휘엿한 산등은 누워 있는 황소의 등어리요, 바람결도 없는데, 쉴새없이 파르르 나부끼는 사시나무 잎새는 산의 숨소리다. 첫눈에 띄는 하아얗게 분장한 자작나무는 산 속의 일색. 아무리 단장한 대야 사람의 살결이 그렇게 흴 수 있을까. 수북 들어선 나무는 마을의 인총보다도 많고 사람의 성보다도 종자가 흔하다. 고요하게 무럭무럭 걱정 없이 잘들 자란다. 산오리나무, 물오리나무, 가락나무, 참나무, 졸참나무, 박달나무, 사스레나무, 떡갈나무, 무치나무, 물가리나무, 싸리나무, 고로쇠나무. 골짜기에는 신나무, 아그배나무, 갈매나무, 개옻나무, 엄나무. 산등에 간간이 섞여 어느 때나 푸르고 향기로운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노간주나무―걱정 없이 무럭무럭 잘들 자라는―산속은 고요하나 웅성한 아름다운 세상이다. 과실같이 싱싱한 기운과 향기, 나무 향기, 흙 냄새, 하늘 향기,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향기다.

낙엽 속에 파묻혀 앉아 깨금을 알뜰이 바수는 중실은, 이제 새삼스럽게 그 향기를 생각하고 나무를 살피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한데 합쳐 몸에 함빡 젖어들어 전신을 가지고 모르는 결에 그것을 느낄 뿐이다. 산과 몸이 빈틈없이 한데 얼린 것이다. 눈에는 어느 결엔지 푸른 하늘이 물들었고 피부에는 산 냄새가 배었다. 바심할 때의 짚북더기보다도 부드러운 나뭇잎― 여러 자 깊이로 쌓이고 쌓인 깨금잎, 가락잎, 떡갈잎의 부드러운 보료―속에 몸을 파묻고 있으면 몸뚱어리가 마치 땅에서 솟아난 한 포기의 나무와도 같은 느낌이다. 소나무, 참나무, 총중의 한 대의 나무다.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살을 베면 피 대신에 나뭇진의 흐를 듯하다. 잠자코 섰는 나무들의 주고받은 은근한 말을, 나뭇가지의 고개짓하는 뜻을, 나뭇잎의 소곤거리는 속심을 총중의 한 포기로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해가 뛸 때에 즐거하고, 바람 불 때에 농탕치고, 날 흐릴 때 얼굴을 찡그리는 나무들의 풍속과 비밀을 역력히 번역해 낼 수 있다. 몸은 한 포기의 나무다. 별안간 부드득 솟아오르는 힘을 느끼고 중실은 벌떡 뛰어 일어났다. 쭉 혀는 네 활개에 힘이 뻗쳐 금시에 그대로 하늘에라도 오를 듯 싶었다. 넘치는 힘을 보낼 곳 없어 할 수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하늘이 울려라 고함을 쳤다. 땅에서 솟는 산 정기의 힘찬 단순한 목소리다. 산이 대답하고 나뭇가지가 고갯짓한다. 또 하나 그 소리에 대답한 것은 맞은편 산허리에서 불시에 푸드득 날아 뜨는 한 자웅의 꿩이었다. 살찐 까투리의 꽁지를 물고 나는 장끼의 오색 날개가 맑은 하늘에 찬란하게 빛났다.

살찐 꿩을 보고 중실은 문득 배가 허출함을 깨달았다. 아래편 골짜기 개울 옆에 간직하여 둔 노루 고기와 가랑잎 새에 싸 둔 개꿀이 있음을 생각하고 다시 낫을 집어들었다. 첫참때까지에는 한 점은 채워 놓아야 파장되기 전에 읍내에 다다르겠고, 팔아가지고는 어둡기 전에 다시 산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한참 쉰 뒤라 팔에는 기운이 남았다. 버스럭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품안에 요란하고 맑은 기운이 몸을 한바탕 멱감긴 것 같다. 산은 마을 보다 몇 곱절 살기가 좋은가. 산에 들어오기를 잘했다고 중실은 생각하였다.

 

세상에 머슴살이같이 잇속 적은 생업은 없다.

싸울래 싸운 것이 아니라 김영감 편에서 투정을 건 셈이다. 지금 와보면 처음부터 쫓아낼 의사였던 것이 확실하다. 중실은 머슴산 지 칠 년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맨주먹으로 살던 집을 쫓겨났다. 원통은 하였으나 애통하지는 않았다.

해마다 사경을 또박또박 받아 본 일 없다. 옷 한 벌 버젓하게 얻어 입은 적 없다. 명절에는 놀이할 돈도 푼푼이 없이 늘 개보름 쇠듯 하였다. 장가들이고 집 사고 살림을 내 준다는 것도 헛소리였다. 첩을 건드렸다는 생뚱 같은 다짐이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계책한 억지요 졸색의 등글개 따위에는 손댈 염도 없었던 것이다. 빨래하러 갔던 첩과 동구 밖에서 마주쳐 나뭇짐을 지고 앞서고 뒷서서 돌아왔다고 의심받을 법은 없다. 첩과 수상한 놈팡이는 도리어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애매한 중실에게 엉뚱한 분풀이가 돌아온 셈이었다. 가살스런 첩의 행실을 휘어잡지 못하고 늘그막판에 속태우는 영감의 신세가 하기는 가엾기는 하다. 더욱 엉클어질 앞일을 생각하고 중실은 차라리 하직하고 나온 것이었다. 넓은 하늘 밑에서도 갈 곳이 없다. 제일 친한 곳이 늘 나무하러 가던 산이었다. 짚북더기보다도 부드러운 두툼한 나뭇잎의 맛이 생각났다. 그 넓은 세상은 사람을 배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빈 지게만을 걸머지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서 얼마 동안이나 견딜 수 있을까가 한 시험도 되었다.

박중골에서도 오 리나 들어간, 마을과 사람과는 인연이 먼 산협이다. 산등이 펑퍼짐하고 양지쪽에 해가 잘 쬐고, 골짜기에 개울이 흐르고, 개울가에 나무열매가 지천으로 열려 있는 곳이다. 양지쪽에서는 나무하러 왔다 낮잠을 잔 적도 여러 번이었다. 개울가에 불을 피우고 밭에서 뜯어온 옥수수 이삭을 구웠다. 수풀 속에서 찾은 으름과 나뭇가지에 익어 시든 아그배와 산사로 배가 불렀다. 나뭇잎을 모아 그 속에 푹 파고 든 잠자리도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이튿날 산을 헤매다가 공교롭게도 주영나무가지에 야트막하게 달린 벌집을 찾아냈다. 담배 연기를 피워 벌떼를 이지러뜨리고 감쪽같이 집을 들어냈다. 속에는 맑은 꿀이 차 있었다. 사람은 살라고 마련인 듯싶다. 꿀은 조금으로도 요기가 되었다. 개와 함께 여러 날 양식이 되었다.

꿀이 다 떨어지지도 않은 그저께 밤에는 맞은편 심산에 산불이 보였다. 백일홍같이 새빨간 불꽃이 어둠 속에 가깝게 솟아올랐다. 낮부터 타기 시작한 것이 밤에 들어가서 겨우 알려진 것이다. 누에에게 먹히는 뽕잎같이 아물아물 헤어지는 것 같으나, 기실은 한 자리에서 아롱아롱 타는 것이었다. 아귀의 혀끝같이 널름거리는 불꽃이 세상에도 아름다왔다. 울밑의 꽃보다도, 비단결보다도, 무지개보다도 맨드라미보다도 곱고 장하다. 중실은 알 수 없이 신이 나서 몽둥이를 들고 산등을 따라 오르고 골짜기를 건너 불붙는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 가깝게 보이던 것과는 딴판으로 꽤 멀었다. 불은 산등에서 산등으로 둘러붙어 골짜기로 타 내려갔다. 화기가 확확 튀어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후끈후끈 무더웠다. 나무뿌리가 탁탁 튀며 땅이 쨍쨍 울렸다. 민출한 자작나무는 가지가지에 불이 피어올라 한 포기의 산호수 같은 불나무로 변하였다. 헛되이 타는 모두가 아까왔다. 중실은 어쩌는 수 없이 몸둥이를 쓸데없이 휘두르며 불 테두리를 빙빙 돌 뿐이었다. 불은 힘에 부치는 것이었다. 확실히 간 보람은 있었다. 그을린 노루 한 마리를 얻은 것이었다. 불 테두리를 뚫고 나오지 못한 노루는 산골짜기에서 뱅뱅 돌아 결국 불벼락을 맞은 것이다. 물론 그것을 얻을 때는 불도 거의 다 탄 새벽이었으나, 외로운 짐승이 몹시 가엾었다. 그러나 이미 죽은 후의 고기라 중실은 그것을 짊어지고 산으로 돌아갔다. 사람을 살리자는 신의 뜻이라고 비위좋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여러 날 동안의 흐뭇한 양식이 되었다. 다만 한 가지 그리운 것이 있었다. 짠맛―소금이었다. 사람은 그립지 않으나 소금이 그리웠다. 그것을 얻자는 생각으로만 마음이 그리웠다.

 

힘자라는 데까지 지었다.

이십리 길을 부지런히 걸으려니 잔등에 땀이 내배었다. 걸음을 따라 나뭇짐이 휘청휘청 앞으로 휘었다.

간신히 파장 전에 대었다.

나무를 판 때의 마음이 이날같이 즐거운 적은 없었다.

물건을 산 때의 마음도 이날같이 즐거운 적은 없었다.

그것은 짜장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무 판 돈으로 중실은 감자 말과 좁쌀 되와 소금과 남비를 샀다.

산 속의 호젓한 살림에는 이것으로써 족하리라고 생각되었다.

목숨을 이어 가는 데 해어쯤이 없으면 어떨까도 생각되었다.

올 때보다 짐이 단출하여 지게가 가벼웠다.

술집 골방에서 왁자지껄하고 싸우는 것도 전과 다름없다.

이상스러운 것은 그런 거리의 살림살이가 도무지 마음을 당기지 않는 것이다. 앙상한 사람들의 얼굴이 그다지 그리운 것이 아니었다.

무슨 까닭으로 산이 이렇게도 그리울까. 편벽된 마음을 의심도하여 보았다. 그러나 별로 이치도 없었다. 덮어놓고 양지쪽이 좋고, 자작나무가 눈에 들고, 떡갈잎이 마음을 끄는 것이다. 평생 산에서 살도록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김영감의 그 후의 소식은 물어 낼 필요도 없었으나, 거리에서 만난 박 서방 입에서 우연히 한 구절 얻어듣게 되었다.

병든 등글개 첩은 기어코 김영감의 눈을 감춰 최 서기와 줄행랑을 놓았다. 종적을 수색 중이나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한다.

사랑방에서 고시렁고시렁 잠을 못 이룰 육십 노인의 꼴이 측은하게 눈에 떠올랐다. 애매한 머슴을 내쫓았음을 뉘우치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중실에게는 물론 다시 살러들어갈 뜻도, 노인을 위로하고 싶은 친절도 가지기 싫었다.

다만 거리의 살림이라는 것이 더한층 어수선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산으로 향하는 저녁길이 한결 개운하다.

 

개울가에 남비를 걸고 서투른 솜씨로 지은 저녁을 마쳤을 때에는 밤이 적이 어두웠다.

깊은 하늘에 별이 총총 돋고 초생달이 나뭇가지를 올가미 지웠다.

새들도 깃들이고 바람도 자고 개울물만이 쫄쫄쫄쫄 숨쉰다. 검은 산등은 잠든 황소다.

등걸불이 탁탁 튄다. 나뭇잎 타는 냄새가 몸을 휩싸며 구수하다. 불을 쬐며 담배를 피우니 몸이 훈훈하다. 더 바랄 것 없이 마음이 만족스럽다.

한 가지 욕심이 솟아올랐다.

밥짓는 일이란 머슴애 할 일이 못 된다. 사내자식은 역시 밭갈고 나무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장가를 들려면 이웃집 용녀만한 색시는 없다. 용녀를 데려다 밥일을 맡길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용녀를 생각만 하여도 즐겁다. 궁리가 차례차례로 솔솔 풀렸다.

굵은 나무를 베어다 껍질째 토막을 내 양지쪽에 쌓아 올려 단간의 조촐한 오두막을 짓겠다. 펑퍼짐한 산허리를 일궈 밭을 만들고 봄부터 감자와 귀리를 갈 작정이다. 오랍 뜰에 우리를 세우고 염소와 돼지와 닭을 칠 터. 산에서 노루를 산 채로 붙들면 우리 속에 같이 기르고 용녀가 집일을 하는 동안에 밭을 가꾸고 나무를 할 것이며, 아이를 낳으면 소같이 산같이 튼튼하게 자라렸다. 용녀가 만약 말을 안 들으면 밤중에 내려가 가만히 업어 올걸.

한번 산에만 들어오면 별수 없지.

불이 거의거의 아스러지고 물소리가 더한층 맑다.

별들이 어지럽게 깜박거린다.

달이 다른 나뭇가지에 걸렸다.

나머지 등걸불을 발로 비벼 끄니 골짜기는 더한층 막막하다.

어느만 때인지 산 속에서는 때도 분별할 수 없다.

자기가 이른지 늦은지도 모르면서 나무 및 잠자리로 향하였다.

낟가리같이 두두룩하게 쌓인 낙엽 속에 몸을 송두리째 파묻고 얼굴만을 빠끔히 내놓았다.

몸이 차차 푸근하여 온다.

하늘의 별이 와르르 얼굴 위에 쏟아질 듯싶게 가까웠다멀어졌다한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세는 동안에 중실은 제 몸이 스스로 별이 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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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송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달 만에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사진을 싼 종이를 뜯어 보았다. 피봉에 쓰인 글씨의 주인은 이전에 S를 향하여 인사할 때와 같은 얌전하고 반기는 태도로 곱게 써 있다. 글씨의 주인은 Y이다. 그런데 사진에는 Y가 혼자 있으리라 기대하였더니,Y 밖에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Y의 친한 한반 동무이었다. S는 반가운 듯이 들여다보고 책상 서랍에 집어넣어 두었다.

 

S는 송도 어떤 소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 학교에는 여자부도 있고, 남자부도 있었는데, S는 여자부에서 많이 가르쳤다. 그 여학생들은 제일 나이 많은 아이가 열네 살 먹고, 모두 어리며 대개 얌전하고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본래 음악을 좋아하는 S는 열심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그리고 날마다 재미있는 동화를 많이 들려 주었다. 학생들도 열심으로 배우고, 재미있게 듣고, 그리고 S선생을 몹시 사랑하였다. 하학하여도 집으로 돌아 가지를 아니하였다.

하기휴학 후에도 학생들은 한모양으로 학교에 모여서 S선생의 소매에 매달려 놀며 더운 줄도 몰랐다. 그래서 S선생은 서울 자기 집에서 기다리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학교에 있었다.

Y는 그중에 성적이 좋고 S가 보기에 위인이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마음도 퍽 착한 아이였다. 여러 학생이 모두 S선생을 사랑하는 가운데 Y는 더욱 S를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집에 가서 객지에 있는 S의 의복 걱정과 식사 걱정을 간곡히 하였다. 말은 아니하여도 실상은 제일 S선생을 사랑하였다.

S선생은 개성을 떠나게 되었다. 첫째는 유학하기 위하여, 둘째는 학교 당사자와 사이에 조금 재미없는 일이 있어서, S선생이 하루는 하학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이제는 이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내려갔다가 두 시간이나 지나서 무심중 다시 올라와 보았더니, 운동장 한 모퉁이에 한 학생이 아카시아나무를 의지하고 돌아서 있었다. S는 벌써 멀리서 보고도 누구인 줄 알고 가까이 가 보았다. Y는 다시 돌아서면서 들릴이만큼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S는 그 봄에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오호츠까〉고등사범학교의 기숙사 서편 모퉁이 방에 혼자 있는 S는 논에 벼이삭이 누우래지고, 길가에 억새가 허얘지고, 여기저기 언덕에 단풍이 빨개져서 가을빛이 무르익는〈무사시노〉넓은 들에 한가히 넘어가는 석양볕을 받으면서, 책상을 의지하고 말없이 앉아 있다. 멀리 들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이따금 이따금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또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한참 있다가는 다시 눈을 떠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S는 동경 가서 고향 그리운 병이 났던지 늘 수심으로 지내었다. 그래 그것을 스스로 위로하여(실상은 옛날 그리운 병을 더 깊게 하였건마는) 가방에서 Y의 사진을 꺼내어 사진틀에 넣어 놓았다. 그 사진에는 본래 두 사람이 있었다. 얼굴 전체의 윤곽이 묘하고 예쁜데다가 입은 꼭 다물고 있으나,사람의 마음을 끌어가는 듯한 웃는 눈, 까맣고 동그란 눈의 주인은 Y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동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빠진 데가 있고 작은 눈과 긴 눈썹과 좁은 미간에는 독한 시기가 가득한 듯하였다. Y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S에게 반김과 기쁨을 주었으나, 그 동무의 얼굴은 불쾌와 무서움을 주었다.

그래서 S는 가위로 그 동무의 얼굴과 몸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남은 Y의 사진에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을 연필로 칠하여 묘하게 흐려 버렸다.

그리고 이따금 오는 Y의 편지를 픽 반가이 받아 보았다. 그리고 간단하고도 간곡한 회답을 해주었다. 그의 동무에게서도 혹 편지가 왔다.

 

여름방학이 되어 S는 서울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S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어느 여자 고등보통학교에 같이 와서 공부하던 Y와 그 동무가 찾아왔다. 그 동무는 Y와 함께 사진 박힌 학생이었다.

S는 퍽 반가와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고 물어도 보았다. 본래 말이 없고 얌전한 두 학 생은 방긋방긋 웃기만 하면서, 다른 대답이나 말은 별로 없었으나, 서울 와서 공부하는 재미가 어떠냐 묻는 말에는,

「시골서 선생님께서 저희를 가르치실 때 재미가 제일이야요.」

하는 대답을 힘있게 하였다.

S는 반가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경서 가져온 그림책과 사진첩을 가방에서 꺼내 놓고, 고무신을 신고 참외를 사러 나갔다. 참외를 사 가지고 오면서 생각하다가 S는 깜짝 놀란 듯이 아차! 하였다. 그 사진첩에는 동경서 책상에 놓았던 Y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내놓았었다. 속으로 많이 염려를 하면서 집에 들어갔더니, 과연 두 사람의 태도와 얼굴은 아주 일변하였다. 그림책과 사진첩은 접어 치워 놓고 두 사람은 무슨 몹시 부끄럽고, 몹시 섭섭한 일을 당한 듯한 얼굴로 당장 일어나 가려고 하는 모양이다.

여러 말로 만류하여 겨우 참외 한 쪽씩을 먹는 체하고는 두 사람은 바삐 달아나갔다. 그런 뒤에 S는 바삐 사진첩을 펼쳐 보았다. Y의 사진이 붙었던 자리가 함부로 찢어지고 없어졌다. (누가 이랬나, 누가 가져갔나) 하고 S는 생각하였다.

 

S는 가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갔다. 간지 두 달이 지난 후에 Y에게서 간단한 편지가 왔다;. 그 편지 속에는 Y의 혼자 박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동무는 개학해서 올라왔다가 폐병이 생겨서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S는 그 편지를 보고 지난 여름에 볼 때에 그 동무의 금시에 까매진 얼굴과 눈물 머금은 눈과 꼭 깨물어 다문 입술이 생각났다. 그래서 책상 서랍을 뒤져보았다. 아직도 기왕 가위로 베었던 사진 조각이 몇 조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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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재작년 겨울 일이다. 나는 오래 간만에야 고향에 돌아갔었다. 10여 호가 넘던 일가집들이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포플라 잎보다도 더 하잘것없이 흩어진 오늘날에야 말이 고향이지 기실 쓸쓸한 타향일 따름이다. 비록 초가일망정 20여 간이나 되는 우리집도 다섯 간 오막살이로 찌그러들어 성 밖 외따른 동리에 초라하게 남았고, 거기에 칠순에 가까운 아버지와 사십이 넘은 계모가 턱을 괴고 앉았을 뿐. 아들도 남부럽지 않게 많지마는 제 입 풀칠하기에 바쁜 그들은 부모님 봉양할 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몇 달 만에야 한 번, 몇 해 만에야 한 번 집안으로 기어드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요 손님이다. 쌀밥 한 그릇 고깃국 한 대접을 만들어 먹이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심하는 것을 잘 아는 나는 얼른 데밀어다 보고는 선선히 일어서는 것이 항례이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내 시세와 우리 집안 형편을 늘어놓자는 것은 아니다. 음산하고 참담한 내 동무 하나의 이야기를 기념삼아 적어 두자는 것이다.

아버지 집을 총총히 뛰어나온 나의 발길은 몇 아니되는 친구가 구락부삼아 모이는 L의 사랑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무조건으로 나를 환영해 주었다. 반가움 즐거움은 이야기의 즐거움으로 옮겨갔다. 서울 형편 이야기, 글 이야기를 비롯하여 친구들의 가정에 일어난 에피소우드까지 우리의 화제에 올랐다.

“W군이 어째 보이지 않나? 요새도 은행에 잘 다니나?”

나는 그 사랑의 단골 축의 하나인 W군의 소식을 물어 보았다.

“이번 정리 통에 그나마 미역국을 먹었네.”

하고 주인 되는 L군이 얼굴을 찌푸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이 W군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헐길 할길 없는 형편이었다. 본디 서발 막대 거칠 것 없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그는 열 여덟 살 때에 백부에게로 출계를 하게 되었다. 양자간 덕택으로 즉시 장가는 들 수 있으나 사람 좋은 양부는 남의 빚봉수로 말미암아 씩씩지 않은 시골 살림이 일조에 판들고 말았다. 그는 처가에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처가 또한 넉넉지 못한 형세이다. 조반석죽도 귈할 때가 많았다. 넉넉한 처가살이도 하기 어렵다 하거든 하물며 가난한 처가살이이랴. 목으로 넘어가는 밥 한 알 두 알이 바늘과 같이 그의 창자를 찔렀으리라. 이토록 고생에 부대끼면서도 그는 얼굴 한 번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언제든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는 말 한마디를 해도 웃지 않고는 못하는 낙천가였다. 서울에 올라와서 고학을 할 때 살을 에어 내는 듯한 겨울날 속옷을 빨다가 손이 몹시 쓰리면 그는 벌떡 일어나 손을 쩔레절레 혼들며

“이놈의 손가락이 별안간에 왜 뻣뻣해지나”

하고는 웃었다. 밥을 짓다가 연기가 눈으로 들어가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비비면서도 그는 히히 하고 웃기를 잊지 앉았다. 그 대신 그의 몸은 여지없이 말라 갔다. 뼈하고 가죽으로만 접한 듯한 얼굴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점 날 것 같지 않았다. 가장 기쁜 듯이 웃을 때면 입가는 마치 누비를 누벼 놓은 듯이 여러 가닥 주름이 잡히었다.

만사를 웃고 지내는 그이언만 처가살이는 견디지 못하였던지 작년 봄에 남의 협호를 얻어 자기 식구를 끌고 나왔다. 백관으로 살림을 차리고 보니 그 군색한 것이야 당자 아닌 남으론 상상도 못할 일이 있었으리라. 그는 친구에게 쌀되를 꾸어 가면서 그날그날 보내던 중 여러 가지로 주선한 끝에 T은행의 사원으로 채용이 되었었다. 25원이란 월급이 비록 적지마는 그들의 가정에겐 생명의 줄이었다. 그런데 그 줄이나마 끊어졌으니 그는 또 무엇을 하며 지낼 것인가. 더구나 그· 벌써 열 두 살 먹은 맏딸, 여덟 살 되는 둘째 딸, 네 살 먹은 아들의 아버지가 아니냐.

”그러면 무엇을 먹고 산단 말인가.”

나는 탄식하였다.

“요새는 사립 정신병원장이 되셨지요.”

하고 익살 찰 부리는 S군이 낄낄 웃었다. 온 방안은 이 말에 땍대그르 웃었다.

“사립 정신병원장이라니?”

나는 웬 까닭을 몰라서 채쳐 물었다.

“출근 오전 7시, 퇴근 오후 6시, 집무 중 면회 절대 사절, 일시라도 환자의 곁을 떠나지 못할지니 변소 출입도 엄금‥‥‥”

하고 S군이 북받치는 웃음을 못 참을 제, 방 안에 웃음소리는 또 한 번 높아졌다.

S군의 설명을 들으면 W군에게 P란 친구가 있었다. 워낙 체질이 나약한 그는 어릴 적부터 병으로 자라났다. 성한 날이라고는 단지 하루가 없었다. 가난한 집 자식 같으면 땅김을 벌써 맡았으련마는 다행히 수천석군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덕택에 삼과 녹용의 힘이 그의 끊어지려는 목숨을 간신히 부지해 왔었다. 자식이 그렇게 허약하거든 장가나 들이지 않았으면 좋을걸 재작년에 혼인을 한 뒤부터 그의 병세는 더욱더 처진 모양이었다. 금년 봄에 첫딸을 낳은 뒤론 그는 실성 실성 정신에 이상이 생기고 말았다.

미치고 보니 자연히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부모 친척까지 그와 오래 앉아 있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병자를 내어보낼 수도 없고 혼자 한방에 감금해 두는 것도 또한 염려스러운 일이다. 그래 W군이 <사립 정신병원장>이 된 것이다. 날이 맞도록 미친 이의 말벗이 되고 보호병 노릇을 하는 보수로 W군은 한 달에 쌀 한 가마니, 돈 10원씩을 받게 된 것이다.

“사립 정신병원장!”

나는 속으로 한 번 외어 보았다. 나의 가슴은 한그믐밤같이 캄캄해졌다.

그날 저녁에는 W군을 만났다.

“원장영감, 인제야 퇴근하셨읍니까?”

하고 S군은 또 낄낄댄다. 방안에 다시금 웃음이 터졌다. W군도 또한 빙그레 웃었으되 그 샛노란 얼굴엔 잠간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듯하였다.

“오늘은 별일 없었나?”

친구들은 W군을 중심으로 둘러앉으며 L군이 물었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번쩍이었다.

“여보게, 말도 말게, 오늘은 정말 혼이 났네”

하고 W군은 역시 싱글싱글 웃는다.

  • “왜?”

여러 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랄이 점점 늘어가나 보네. 오늘은 문 첩첩이 닫고 늘 하는 그 지랄을 하더니만 칼을 가지고 나를 찌르려고 덤비데.”

“칼은 또 웬 칼인고?”

“낮에 밤 깍으라고 내온 것을 어느새 집어 넣었던가 보데.”

“그래 그 칼을 빼앗았나?”

“그까짓 것 안 빼앗으면 어떨라구, 설마 미친 놈이 사람 죽이겠나.”

하고 W군은 또 웃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웬일인지 추운 듯이 떨고 있었다.

“자네도 좀 실성실성하이그려, 미친 놈이 사람을 죽이지 성한 놈이 사람을 죽이나.”

머기 모인 친구의 하나인 K군이 그 귀공자다운 횐 얼굴이 조금 푸르러지며 이런 말을 하였다.

“성한 사람 같으면 푹 찌르지만 칼을 들고 남의 목을 겨누며 한참 지랄을 하더니 그대로 퍽 쓰러지데그려.”

“자네 오늘은 운수가 좋았네. 문을 첩첩이 잠그고 그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정말 찔렀으면 어잴 뻔했나?”

하고 L군은 아찔아찔한듯이 몸서리를 친다.

“문을 왜 처잠그는가?”

나는 또 설명을 요구하였다.

“자네는 참 모를걸세” 하고 W군은 설명해 주었다.

P의 증세는 공인증(恐人症)이란 것이었다. 천연스럽게 앉아 있다가 문득 눈을 홉 뜨고 그 백지장 같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지고

“아이고, 저놈들이 또 온다. 아이구, 저놈이 나를 잡으러 온다”

라고 황급하게 중얼거리며 숨을 곳을 찾는 듯이 방안을 썰썰매다가

“여보게 W군 문 좀 닫아 주게”

하고 비대 발괄하는 법이었다. 그러면 W군은 하릴없이 사랑 중문을 닫고, 그들이 있는 방문이린 방문은 미닫이며 덧창이며 바깥문까지 모조리 닫아 걸어야 한다. 그래서 방안이 침침해지면 개한테 쫓긴 닭 모양으로 방 한구석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미친 이는 고개를 번쩍 들고 사면을 두리번두리번 살핀다. 그러다가 별안간

“히, 히, 히, 히”

라고 마디마디 끊어진 웃음을 웃는다.

이 웃음소리를 따라 그의 홉뜬 눈이 점점 번들번들해지자

“이놈들아, 너희들이 나를 잡아가? 어림 반푼어치 없어, 히, 히, 히”

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한 시간 가량 지나면 제풀에 지쳐서 그대로 쓰러지는 법이었다. 그런데 오늘도 법대로 또한 문을 다 잠그고 한참 발광을 하다가 문득 품속에서 창칼을 쑥 빼어 들더니 W군에게 달려 들어 그 칼을 목에다 겨누며

“이 죽일 놈, 네가 나 잡으러 온 것이지. 이놈, 내 칼에 죽어 보아라”

하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다행히 그대로 쓰러졌다고 한다.

“자네 오늘 십년 감수는 했겠네.”

하고 L군이 소리를 떨어뜨린다.

“글쎄, 원장 노릇도 못해먹겠는걸.”

하고 W군은 또 히히 웃어 보이었다.

K군의 주최로 그날 밤에 우리는 해동관이란 요리집에 가게 되었다. 일행이 거의 다 외투를 걸쳤건만 W군 홀로 옥양목 겹두루마기 자락을 찬바람에 날리며 가는 다리를 꼬는 듯이 하며 걸어가는 양이 눈물겨웠다.

요리상은 벌어졌다. 셋이나 부른 기생의 기름내와 분내가 신선로 김과 한테 서리었다.

장구 소리와 가야금 가락이 서로 어우러지자 한가한 고로 웅장한 단가며 멋지고 구슬픈 육자배기 단 입김과 함께 둥둥 떠돌았다.

술은 여러 차례 돌았건만 나는 조금도 취해지지를 않았다. W군의 존재가 어쩐지 나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첫째로 그의 주량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서울에서 고학하던 시절, 학비를 넉넉히 갖다 쓰는 친구가 청요리집으로 가난한 놀이를 하려면 강권하는 것을 떨치다 못하여 배갈 한 잔에 누른 얼굴이 흥당무로 변하며 그대로 쓰러지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 저녁엔 비록 정종일망정 열 잔이 넘었으되 조금도 취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빼빼 마른 팔뚝을 반만 걷어 요리 위에 세운 채 기생이 따라 주는 대로 그는 꿀꺽꿀꺽 들이켜고 있었다.

“자네 웬 술을 그렇게 먹나.”

마침내 나는 W군을 향해서 의아한 듯이 물었다.

“왜 나는 술도 못 먹는 줄 알았나”

하고 W군은 또 히히 웃어 보이었다.

“여보게 W군, 술이 어떤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나. 한 동이를 가지고는 못 가도 먹고는 간다네. 식전 해장도 세 사발은 먹어야 견디네.”

S군이 도리어 내 말을 의아하게 여기는 듯이 가로채더니만

“여보게 W군, 자네는 자네 말짝으로 그 눈알만한 잔 가지고는 턱이 아니될 터이니 컵으로 하게.“

“그것도 좋지. 나만 그럴 것 있나, 우리 모두 컵으로 하세그려.”

컵을 들여왔다. 처음에는 먹을 듯이 모두들 W군의 말에 찬동을 하더니만 컵에 술을 붓고 보니 끔찍하던지 감히 마시러 들지 않았다. W군 홀로 세 컵을 기울이고 말았다

“자네들도 들게그려”

하고 한두어 번 권해보았으나 잘들 들지 않으매 저 혼자 연거푸 다섯 잔을 들이켰다. 그는 자기의 비색한 신수와 악착한 형편을 도무지 잊은 듯하였다. 그와 반대로 모인 중에도 자기 혼자 유쾌하고 기쁜 듯하였다. 기생 하나가 장구를 메고 일어서자 앞장서서 얼신덜신 춤을 춘 이도 W군이었다. 꽉 잠긴 목으로 남먼저 ‘에라만수’를 찾은 이도 W군이었다.

놀이는 끝장날 때가 왔다. 꽹과리 소리가 사람의 귀를 찢었다. 춤추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하나씩 둘씩 늘게 되었다.

“인제 그만 가세그려,”

술이 덜 취한 L군 이 마침내 이런 제의를 하였다. 우리는 그 말에 찬동을 하며 외투를 떼어 입었다.

그때에도 한 팔로 요리상을 짚고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아직 술병을 기울이고 있건 W군은 문득 <보이>를 불러서 신문지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신문지를 받아들자 그는 약식이며 떡 같은 것을 주섬주섬 싸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창피하이, 그만두게.”

K군이 눈썹을 찡그리며 말리었다.

“어떤가, 내 돈 준 것 내가 가져가는데”

하고 W군은 역시 웃으며 벌벌 떠는 손으로 쌀 것을 줍기에 바쁘다.

“인제 그만 싸게, 에이 창피스러워”

하며 K군은 고개를 돌린다. 마침내 W군은 쌀 것을 다 싸가지고 송편과 약식이 삐죽삐죽 나오는 봉지를 들고 비슬비슬 일어선다.

그때 K군의 단골이1라는 명옥이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원장영감 댁은 오늘밤에 큰 잔치를 하겠구먼”

하고 비우적거리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W군은 나는 듯이 명옥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년, 뭣이 어째”

라는 고함과 함께 W군의 손은 철썩하고 명옥의 뺨에 올라붙었다. 명옥은

“에고고”

외마디소리를 치고 쓰러지자 W군은 미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원장댁 큰 잔치? 큰 잔치?”

라고 뇌이면서 발길로 엎어진 계집의 허리를 찼다. 이 야단통에 W군의 떡 싼 봉지는 방바닥에 떨어져 흩어 졌다. 나는 이 싸움의 원인이요 사랑의 뭉치인 봉지를 얼른 주워서 방 한구석 장구 얹혔던 자리 위에 올려 두었다.

싸움은 벌어졌다. K군이 명옥의 역성을 들며 W군에게 덤빈 까닭이다. K군은 W군의 목덜미를 잡아 회술레 돌리다가

“이 자식 미친 놈하고 같이 있더니 미쳤나뵈. 왜 사람을 차며 지랄 발광을 하노”

하며 휙 뿌리치자 W군은 비슬비슬 몇 걸음 걸어 나오다가 방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푹 꺼꾸러졌다. 그럴 겨를도 없이 엎어진 이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 곧 K군에게로 달려들었다. 우 리는 황망히 그의 팔을 잡아 만류를 하였는데 그때 그의 얼굴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몸서리가 끼친다. 엎어질 때 다쳤음이라, 악다문 이빨엔 피가 흘렀다. 그 경성드뭇한 눈썹이 올올이 일어섰으며 핏발선 눈엔 그야말로 불이 나는 듯하였고, 이마엔 마른 가죽을 뚫고 나올 듯이 푸른 힘줄이 섰다. 그러나 그것 보다도 마치 납을 끓여 부은 듯한 그 얼굴, 실룩실룩하는 살점 하나하나가 떠는 듯한 그 꼴이란 더할 수 없이 무서웠다. 입에 거품을 버글버글 흘리고

“미친 놈하고 같이 있으면 어쨌단 말지냐. 미쳤으면 어쨌단 말이냐. 오! 너는 돈 있다고, 너는 돈 있다고.”

하고 이를 빠드득빠드득 갈아붙이며 K군을 향해 몸부림을 쳤다. 순한 양 같은 이 낙천가 가 비록 취중일망정 사나운 짐승같이 날뛰며 악마보다도 더 지독한 표정을 할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하였으랴.

간신히 뜯어말려서 먼저 K군을 보내고 L군과 S군과 나는 이 W군을 진정시켜서 얼마 만에야 그 요리집 방문을 나오려 하였다. 그 때 W군은 무엇을 찾는 듯이 연해 방안을 살피다가 아까 내가 얹어 둔 봉지를 발견하자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이었다. 그의 뜻을 지레짐작한 나는 얼른 그 봉지를 집자 그는 내 손에서 그 봉지를 빼앗듯이 받아 가지고 방바닥에 태질을 쳤다. 그러자 그는 흩어진 음식 위에 꺼꾸러지며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그의 얼굴과 손은 약식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복돌아, 약식 안 먹어도 산다. 복돌아, 송편 안 먹어도 산다.“

한동안 그는 제 아들 이름을 부르며 목을 놓고 울었다.

문득 울음을 뚝 그친 그는 무엇을 노리는 듯이 제 앞을 바라보더니만 나를 향하며

“여보게, 칼로 푹 찔러 죽이는 것이 어떻겠나?”

우리는 어리둥절하며 그의 입만 바라 보았다.

“아니, 그럴 일이 아니다. 고 어린것을 칼로 찌를 거야 있나. 차라리 목을 눌러 죽이지, 목을 누르면 내 손아귀 밑에서 파득파득하겠지. “

“여보게, 누구를 죽인단 말인가?”

마침내 나는 물어 보았다.

“우리 복돌이를 말일세. 하나하나씩 죽이는 것보다 모두 비끄러매 놓고 둘을 질러 버릴까?”

나는 그 말을 듣고 전신에 소름이 끼치었다..

“흥, 내 자식 죽이면 저희들은 성할 줄 알고. 흥, 그놈들도 내 손에 좀 죽어야 될걸.”

하고 별안간 그는 소리쳐 웃었다.

S군이 W군과 바로 한이웃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취한 이를 맡기고 돌아왔었다.

그 이튿날, S군의 말을 들은즉 W군의 집에서 악머구리 떼 같은 어른과 아이의 울음이 하도 요란하기에 자다가 말고 가보니 W군의 부인은 어떻게 맞았던지 마루에 늘어진 채 갱신도 못하고, 아이새끼는 기둥 하나에 하나씩 바로 친친 매어 두었으며, W군은 손에 성냥을 쥔 채로 마당에 쓰러져 쿨쿨 코를 골고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차로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W군은 사립 정신병원의 사무가 바빠 나를 전송도 해주지 못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다섯 달 가량 지났으리라. 나는 L군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 ‥‥‥군이 마침내 미치고 말았다. 그는 오늘 아침에 P군을 단도로 찔러 그자리에 죽이고 말았네. P군의 미친 칼에 죽을 뻔 하던 그는 도리어 P군을 죽이고 만 것일세‥‥‥

나는 이 편지를 보고 물론 놀랐으되 어쩐지 으레 생길 참극이 마침내 실연되고 만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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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협집이 부엌으로 물을 길어 가지고 들어오매 쇠죽을 쑤던 삼돌이란 머슴이 부지깽이로 불을 헤치면서,

“어젯밤에는 어디 갔었던교?”

하며, 불밤송이 같은 머리에 왜수건을 질끈 동여 뒤통수에 슬쩍 질러맨 머리를 번쩍 들어 안협집을 훑어본다

“남 어데 가고 안 가고 님자가 알아 무엇 할 게요?”

안협집은 별 꼴사나운 소리를 듣는다는 듯이 암상스러운 눈을 흘겨보며 톡 쏴버린다.

조금이라도 염량이 있는 사람 같으면 얼굴빛이라도 변하였을 것 같으나 본시 계집의 궁둥이라면 염치없이 추근추근 쫓아다니며 음흉한 술책을 부리는 삼십이나 가까이 된 노총각 삼돌이는 도리어 비웃는 듯한 웃음을 웃으면서,

“그리 성낼 게야 무엇 있습나? 어젯밤 안 쥔 심바람으로 님자 집을 갔었으니깐두루 말이지.”

하고 털 벗은 송충이 모양으로 군데군데 꺼칫꺼칫하게 난 수염을 숯검정 묻은 손가락으로 두어 번 쓰다듬었다.

“어젯밤에도 김참봉 아들네 사랑방에서 자고 왔습네그려.”

삼돌이는 싱긋 웃는 가운데에도 남의 약점을 쥔 비겁한 즐거움이 나타났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이 망나니 같은 놈……”

하는 말이 입 바깥까지 나왔던 안협집은 꿀꺽 다시 집어삼키면서,

“남 어데 가 자든 말든 상관할 것이 무엇인고!”

하며, 물동이를 이고서 다시 나가려 하니까,

“흥! 두고 보소. 가만있을 줄 알았다가는……”

“듣기 싫어! 별꼬락서니를 다 보겠네.”

2

강원도 철원 용담(龍潭)이라는 곳에 김삼보(金三甫)라는 자가 있으니 나이는 삼십 오륙 세나 되었고, 키는 작달막하여 목은 다가붙고 얼굴빛은 노르께하며 언제든지 가죽창 박은 미투리에 대갈 편자를 박아 신고 걸음을 걸을 적마다 엉덩이를 내저으므로 동리에서는 그를 <땅딸보 김삼보>, <아편쟁이 김삼보>, <오리 궁둥이 김삼보>라고 부르는데 한 달에 자기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이틀이라면 꽤 오래 있는 셈이요, 하루라면 예사다. 그리고는 언제든지 나돌아다니므로 몇 해 전까지도 잘 알지 못하였으나 차차 동리서 소문이 돌기를 <노름꾼 김삼보>라는 말이 퍼지자 점점 알아본즉 딴은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접경을 넘어다니며 골패 투전으로 먹고 지내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노름꾼 김삼보의 여편네가 아까 말하던 안협집이니 안협(安峽)은 즉 강원, 평안, 황해, 삼도 품에 있는 고읍(古邑)의 이름이다.

그 안협집은 김삼보가 얻어오기는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 안협집이 스물 한 살 되던 해인데 어떻게 해서 얻었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술파는 것을 눈을 맞추어서 얻었다고 하기도 하고, 계집이 김삼보에게 반해서 따라왔다기도 하고, 또는 그런 것 저런 것도 아니라 계집의 전남편과 노름을 해서 빼앗았다고도 하는데 위인 된 품으로 보아서 맨 나중 말이 가장 유력할 것 같다고 동리 사람들이 말을 한다.

처음에 안협집이 동리에 오자 그 동리 그 또래 계집들은 모두 석경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안협집이 비록 몸은 그리 귀하게 태어나지 못하였으나 인물이 남달리 고운 점이 있어, 동리 젊은것들이 암연히 부러워도 하고 질투도 하게 되고 또는 석경 속에 비친 자기네들의 예쁘지 못한 얼굴을 쥐어뜯고 싶기도 하였으니 지금까지 <나만한 얼굴이면> 하는 자만심이 있던 젊은 계집들에게 가엾게도 자가결함(自家缺陷)이 폭로되는 환멸을 느끼게 하기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촌구석에서 아무렇게나 자란데다가 먼저 안 것이 돈이었다.

<돈만 있으면 서방도 있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다 있지> 하는, 굳은 신조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는 무엇이든지 제공하여 부끄러운 것이 없었다.

십 오륙 세 적, 참외 한 개에 원두막 속에서 총각 녀석들에게 정조를 빌린 것이나, 벼 몇 섬, 돈 몇 원, 저고리감 한 벌에 그것을 빌리는 것이 분량과 방법이 조금 높아졌을 뿐이요 그 관념은 동일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으로 온 뒤에도 동리에서 돈푼이나 있고 얌전한 젊은 사람은 거의 다 한번씩은 후려내었으니 그것은 남자편에서 실없은 짓 좋아하는 이에게 먼저 죄가 있다 하는 것보다도 이쪽 안협집에서 그 책임이 더 있다고 할 수 있고, 또 그것보다 더 큰 죄는 그 남편 되는 노름꾼 김삼보에게 있다고 할 수가 있으니 그것은 남편 노름꾼이 한 달에 한번을 올까 말까 하면서도 올 적에는 빈손을 들고 오는 때가 많으니 젊은 계집 혼자 지낼 수가 없으매 자연히 이 집 저 집 동리로 다니며 품방아도 찧어주고 김도 매주고 진일도 하여주며 얻어먹다가 한번은 어떤 집 서방님에게 실없은 짓을 당하고 나서 쌀 말과 피륙 필을 받아보니 그것처럼 좋은 벌이가 없어 차츰차츰 이번에는 자기가 스스로 벌이를 시작하여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거래 단골을 트듯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집어먹기 시작하더니 그것도 차차 눈이 높아지니까 웬만한 목도꾼 패장이나 장돌림, 조금 올라가서 순사 나리쯤은 눈으로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고, 적어도 그곳에서는 돈푼도 상당하고 여간해서 손아귀에 들지 않는다는 자들을 얼러보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일하지 않고 지내며 모양내고 거드름 부리고 다니는데 자기 남편이 오면은,

“이번에는 얼마나 땄습노?”

하고, 포르께한 눈을 사르르 내려 뜬다.

“딴 게 뭔가, 밑천까지 올렸네.”

삼보는 목 뒤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신다. 그러면 안협집은 전에 없던 바가지를 긁으며,

“X알 두 쪽을 달구서 그래 계집만두 못하다는 말요.”

하고서, 할 말 못할 말을 불어서 풀을 잔뜩 죽여놓은 뒤에는 혹시 서방이 알면 경이 내릴까 하여 노자랑 밑천 푼을 주어서 배송을 낸다. 그러면 울며 겨자 먹기로 삼보는 혼자 한숨을 쉬면서,

“허허, 실상 지금 세상에는 섣부른 X알보다는 계집편이 훨씬 나니라.”

하고, 봇짐을 짊어지고 가버린다.

3

이렇게 이삼 년을 지내고 난 어느 가을에 삼돌이란 놈이 그 뒷집 머슴으로 왔는데 놈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빌어먹던 놈인지는 모르나 논맬 때 콧소리나마 아리랑타령 마디나 똑똑히 하고 술잔이나 먹을 줄 알며, 동료들 가운데 나서면 제법 구변이나 있는 듯이 떠들어젖히는 것이 그럴 듯하고 게다가 힘이 세어서 송아지 한 마리 옆에 끼고 개천 뛰기는 밥 먹듯하는 까닭에 동리에서는 호랑이 삼돌이로 이름이 높다.

놈이 음침하여 오던 때부터 동리 계집으로 반반한 것은 남 모르게 모두 건드려보았으나 안협집 하나가 내내 말을 듣지 않으므로 추근추근 귀찮게 구는데 마침 여름이 되어 자기 집 주인 마누라가 누에를 놓고 혼자는 힘이 드니까 안협집을 불러서 같이 누에를 길러 실을 낳거든 반분하자는 약속을 한 후 여름내 같이 누에를 치게 된 것을 알고 어떤 틈 기회만 기다리며,

“흥, 계집년이 배때가 벗어서 말쑥한 서방님만 얼르더라. 어디 두고 보자. 너도 깩소리 못하고 한번 당해야 할걸. 건방진 년!”

하고는 술잔이나 취하면 주먹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러자 집 주인 마누라가 치는 누에가 거의 오르게 되자 뽕이 떨어졌다. 자기 집 울타리에 심은 뽕은 어림도 없이 다 따다 먹이었고 그 후에는 삼돌이란 놈을 시켜서 날마다 십리나 되는 건넛말 일가집 뽕을 얻어다 먹이었으나 그것도 이제는 발가숭이가 되게 되었다. 인제는 뽕을 사다 먹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다가 먹이자면 돈이 든다. 주인노파는 담뱃대를 물고서 생각하여보았다.

(개량 뽕이 좋기는 좋지마는 돈을 여간 받아야지. 그리고 일일이 사서 먹이려다가는 뽕값으로 다 들어가고 남는 것이 어디 있나.)

노파 생각에는 돈 한푼 안 들이고 공짜로 누에를 땄으면 좋을 것이다. 돈 한푼을 들인다 하면 그 한푼이 전 수확에서 나오는 이익의 전부같이 생각되어 못 견디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 혼자 이익을 먹는 것 같으면 모르거니와 안협집하고 동사로 하는 것이므로 안협집이 비록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 힘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한푼만 못해 보인다. 그래서 뽕을 어떻게 공짜로, 돈 안 들이고 얻어올 궁리를 하고 있다가 안협집이 마침 마당으로 들어서매,

“뽕 때문에 일 났구료.”

하며 안협집에게는 무슨 도리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글쎄.”

안협집 생각은 주인의 마음과 또 달라서 남의 주머니 돈 백 냥이 내 주머니 돈 한 냥만 못하다. 그래서 <돈주면 살걸> 하는 듯이 심상하게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 와야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때, 들에 나갔던 삼돌이란 놈이 툭 튀어들어오다가 이 소리를 듣더니 제딴은 동정하는 표정으로,

“그것 일 났쇠다. 어떻게 하나……”

한참 허리를 짚고 생각을 해보더니,

“헝! 참 그 뽕은 좋더라마는 똑 되기를 미선조각같이 된 놈이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데 그놈을 먹이기만 하면 고치가 차돌같이 여물 거야!”

들으라는 말인지 혼잣말인지는 모르나 한마디를 탁 던지고 말이 없다. 귀가 반짝 띈 주인은,

“어디 그런 것이 있단 말이야?”

하며 궁금증 난 사람처럼 묻는다.

“네, 저 새술막에 있는 것 말씀이요.”

혹시 좋은 수가 있을까 하려다가 남의 뽕밭, 더구나 그것으로 살아가는 양잠소 뽕이라, 말씨름만 하는 것이 될 것 같으므로,

“응! 나도 보았지, 그게 그렇게 잘되었나? 잘되었겠지. 그렇지만 그런 것이야 짐으로 있으면 무엇하나.”

“언제 보셨어요?”

“보기야 여러 번 보았지. 올 봄에 두릅 따러 갔다가도 보고.”

삼돌이란 놈이 한참 있다가 싱긋 웃더니 은근하게,

“쥔마님! 제가 뽕을 한 짐 저다 드릴 것이니 탁주 많이 먹이시렵니까?”

듣던 중에도 그렇게 반가운 소리가 또 어디 있으랴.

“작히 좋으랴. 따오기만 하면 탁주에다 젓이라도 담그마.”

귀찮스런 삼돌이도 이런 때는 쓸 만하다는 듯이 안협집도 환심 얻으려는 듯한 웃음을 웃으며 삼돌이를 보았다. 삼돌이는 사내자식의 솜씨를 네 앞에 보여주리라 하는 듯이 기운이 나며 만족하였다.

그날밤 저녁을 먹고 자정 때나 되더니 삼돌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갔다. 갔다가 한 두어 시간 만에 무엇인지 지고 오더니 그것을 뒷곁 건넌방 뒤 창밑에 뭉뚱그려 놓았다.

이튿날 보니까 딴은 미선쪽 같은 기름이 흐르는 뽕잎이었다.

“어디서 났을꼬?”

주인하고 안협집은 수근수근 하였다.

“그 녀석이 밤에 도둑질을 해온 게지? 뽕은 참 좋소, 그렇지?”

“참 좋쇠다. 날마다 이만큼씩만 가져오면 넉넉히 먹이겠쇠다.”

두 사람은 뽕을 또 따오지 않을까 보아서 아무 말도 아니하고,

“참 뽕 좋더라. 오늘도 좀 또 따오렴.”

하고 충동인다. 놈은 두 손을 내저으며,

“쉬, 떠드시지 맙쇼. 큰일나죠. 그것이 그렇게 쉬워서야 그 노릇만 하게요. 까딱하다가는 다리 마디가 두 동강 날걸요.”

도둑해온 삼돌이나 받아들인 두 사람이나 도둑질했소! 하는 말은 없으나 서로 알고 있다.

그러자 하루는 주인이 안협집더러,

“여보, 이번에는 임자가 하루 저녁 가보구려. 그놈이 혹시 못 가게 되더래도 임자가 대신 갈 수 있지 않수. 또 고삐가 길며는 바래인다구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모르니 임자가 둘이 가서 한몫 많이 따오는 것이 좋지 않수.”

안협집이 삼돌이를 꺼리는 줄 알지마는 제 욕심에 입맛이 달아서 자꾸자꾸 충동인다.

“따다가 잡히면 어찌 하구유.”

“무얼! 밤중에 누구 알우? 그러고 혼자 가라오. 삼돌이란 놈하고 가랬지.”

“글쎄 운이 글러서 잡히거나 하면 욕이지요.”

잡히는 것보다도 안협집의 걱정은 보기도 싫은 삼돌이란 녀석하고 밤중에 무인지경에를 같이 가라니 그것이 딱한 일이다.

안협집의 정조가 헤프기도 유명한 만치 또 매몰스럽기도 유명하여 한번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죽어도 막무가내다. 그것은 만냥 금을 주어도 거들떠보지도 아니한다. 그런데 삼돌이가 그 중에 하나를 참례하여 간장을 태우는 모양이다.

안협집은 생각하고 생각하여 결심해버렸다.

(빌어먹을 녀석이 그 따위 맘을 먹거든 저 죽이고 나 죽지. 내 기운은 없어도……)

하고 쌀쌀하게 눈을 가로뜨고 맘을 다가먹었다.

그리고는 뽕을 따러 가기로 하였다.

삼돌이는 어깨에서 춤이 저절로 추어진다.

“얘, 이것이 정말인가, 거짓말인가? 이제는 때가 왔구나 인제는 제가 꼭 당했지.”

놈이 신이 나서 저녁 먹고 마당 쓸고, 소 여물 주고, 도야지, 병아리 새끼 다 몰아넣고, 앞뒤로 돌아다니며 씻은 듯 부신 듯 다 해놓고, 목물하고 발 씻고, 등거리 잠뱅이까지 갈아입은 후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듬뿍 한 모금 내뿜으며 시간 오기만 기다린다.

4

안협집은 보자기를 가지고 삼돌이를 따라서 뽕밭을 향하여 간다.

날이 유달리 깜깜하여 앞의 개천까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돌부리가 발부리를 건드리면 안협집은 에구 소리를 내며 천방지축으로 다리도 건너고 논이랑도 지나고 하여 길 반쯤 왔다.

삼돌이란 놈은 속으로 궁리를 하였다.

(뽕을 따기 전에 논이랑으로 끌고 가?…… 아니지, 그러다가는 뽕두 못 따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게…… 저도 열녀가 아닌 다음에 당하고 나면 할 말 없지. 아주 그런 버릇이 없는 년 같으면 모르거니와…… 옳지, 수가 있어, 뽕을 잔뜩 따서 이어주면 제가 항우의 딸년이라고 한 번은 중간에서 쉬렸다. 그러거든……)

이렇게 궁리를 하다가 너무 말이 없으니까 심심파적도 될 겸 또는 실없이 농담도 좀 해서 마음을 좀 떠보아 나중 성사의 전제도 만들어 놀 겸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다.

“삼보는 언제나 온답데까?”

“몰라, 언제는 온다 간다 말이 있어 다니나.”

“그래 영감은 밤낮 나돌아다니니 혼자 지내기 쓸쓸치 않소?”

놈이 모르는 것같이 새삼스럽게 시치미를 뗀다.

“별걱정 다 하네. 어서 앞서 가, 난 길이 서툴러 못 가겠으니……”

“매우 쌀쌀하구려. 나는 님자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지만 김참봉 아들이란 쇠귀신 같은 놈이라 아무리 다녀도 잇속 없습네. 내 말이 그르지 않지.”

안협집은 삼돌이가 아주 터놓고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까 분해서 뺨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그대로 참으며,

“무엇이 어째? 말이라면 다 하는 줄 아는군.”

하고, 뒤로 조금 떨어져 걸어갈 제 전에도 그 녀석이 미웠지마는 남의 약점을 들어 가지고 제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 더 더러웠다.

뽕밭에 왔다. 삼돌이란 놈이 철망으로 울타리 한 것을 들어주어 안협집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으로 삼돌이란 놈은 그 무거운 다리를 성큼 하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다가 발끝에 삭정이 가지를 밟아서 딱 우지끈 소리가 나고 조용하였다.

삼돌이는 손에 익어서 서슴지 않고 따지마는 안협집은 익지도 못한데다가 마음이 떨리고 손이 떨려서 마음대로 안 된다.

삼돌이는 뽕을 따면서도 있다가 안협집을 꾀일 궁리를 하지마는 안협집은 이것 저것을 잊어버리고 손에 닥치는 대로 뽕을 땄다.

얼마쯤 땄다. 갑자기 안협집의 뒤에서,

“누구야!”

하고, 범 같은 소리를 지르는 남자 소리가 안협집의 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삼돌이란 놈은 길이나 되는 철망을 어느 결에 뛰어넘었는지 십여 간 통이나 달아나서 안협집을 불렀다.

“어서 와요! 어서, 어서!”

그러나 안협집은 다리가 떨려서 빨리 나와지지를 않는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하여 달아나려고, 한아름 잔뜩 따 넣었던 뽕을 내던지고 철망으로 기어나오기는 나왔으나 치맛자락이 걸려서 잡아당긴다. 거기에 더 질겁을 해서 그대로 쭉 찢고 나오려 할 때, 때는 이미 늦었다. 뽕 지키던 남자는 안협집을 잡았다.

“이 도둑년! 남의 뽕을 네 것같이 따가? 온 참, 이년, 며칠째냐, 벌써? 이렇게 남의 것이라고 건깡깽이로 먹으면 체하지 않을 줄 알았더냐? 저리 가자.”

안협집은,

“살려주소, 제발 잘못했으니 살려만 주소. 나는 오늘이 처음이오. 저 삼돌이란 놈이 날마다 따가지 나는 죄가 없쇠다.”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듣기 싫어. 이년아! 무슨 변명이냐. 육시를 하고도 남을 년 같으니. 왜, 감옥소의 콩밥 맛이 고소하더냐?”

“그저 잘못했습니다.”

삼돌이는 보이지 않고 뽕지기는 안협집 손목을 끄을고 뽕밭으로 들어갔다.

“이리 와! 외양도 반반히 생긴 년이 무엇이 할 게 없어 뽕 서리를 다녀.”

하더니 성냥불을 그어대고 안협집을 들여다보더니,

“흥!”

의미 있는 웃음을 웃어 버렸다.

안협집은 이 웃음에 한 가닥 희망을 얻었다. 그 웃음은 안협집의 손아귀에 자기를 갖다 쥐어 준다는 웃음이다. 안협집은 따라서 방싯 웃었다. 그 웃음 한번이 넉넉히 뽕지기의 마음을 반 이상이나 흰 죽 풀어지게 하였다.

안협집은 끌려갔다.

(제가 철석 같은 간장을 가진 놈이 아닌 바에…… 한 번이면 놓아줄걸.)

그는 자기의 정조를 팔아서 자기의 죄를 면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마지 못하는 체하고 끌려갔다.

삼돌이란 놈은 멀리서 정경만 살피다가 안협집을 뽕지기가 데리고 가는 것을 보더니 두 눈에서 쌍심지가 돋았다.

“얘, 이놈이 호랑이 삼돌이를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대관절 어떻게 할 셈이냐? 이놈 안협집만 건드려보아라. 정강마루를 두 토막에다 내놀 터이니. 오늘밤에는 꼭 내 것이던걸 그랬지. 어디 좀 가까이 좀 가 볼까?”

이제는 단판씨름이라 주먹이 시비 판단을 하는 때이다. 다시 철망을 넘어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이곳 저곳 귀를 기울이더니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돌아다녀 보았다.

저쪽에서 인기척이 웅얼웅얼 하더니 아무 말이 없다. 한 두서너 시간 그 넓은 뽕밭을 헤매고 또 거기 닿은 과목밭, 채마전, 나중에는 그 옆 원두막까지 가보았다. 놈이 뽕나무 밭 가운데 부풀덤불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는 입맛만 다시면서 집으로 와서 주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노파의 눈은 등잔만 해지더니 두 손, 두 다리가 사시나무 떨 듯한다.

“이거 일 났구나. 어쩌면 좋단 말이냐.”

좌불안석을 할 제 삼돌이란 녀석은 분한 생각에 곰방대만 똑똑 떨고 앉았다.

5

그날 새벽에 안협집이 무사히 왔다. 머리에 지푸라기가 묻고 몸매무시가 말이 아니다.

“에그, 어떻게 왔어? 응?”

주인은 눈에 눈물이 괴어서 어루만진다.

“무얼 어떻게 와요? 밤새도록 놈하고 승강이를 하다가 그대로 왔지.”

“그대로 놓아주던가?”

“놓아주지 않고, 붙잡아두면 어찌할 테야?”

일이 너무 싱겁다. 삼돌이 놈만 혼잣말처럼,

“내가 잡혔더면 콩밥을 먹었을걸, 여편네니까 무사했지.”

주인은 그래도 미진해서,

“그래, 잘 놓아주었으니 다행이지. 그러나 저러나 뽕은 어떻게 되었소?”

“다 뺏겼죠!”

“인제는 아무 일 없겠소?”

“일이 무슨 일예요.”

그날 밤에 삼돌이란 놈은 혼자 앉아서 생각하기를,

(복 없는 놈은 하는 수가 없거든. 그러나 내가 다 눈치를 채었으니까, 노름꾼놈이 오거든 일르겠다고 위협을 하면 년도 발이 저려서 그대로는 못 있지, 내 입을 안 막고 될 줄 아는 게로구먼.)

그후부터는 삼돌이란 놈이 안협집을 보고는,

“뽕지기놈 보고 싶지 않습나?”

하고 오며가며 맞대놓고 빈정대기도 하고 빗대놓고도 비웃는다.

“뽕이나 또 따러 가소.”

이러는 바람에 온 동리에서 다 알았다. 안협집은 분해서 죽겠는데, 하루는 삼돌이란 놈이 막 안협집이 이불을 펴고 누우려는데 찾아와서 추근추근 가지도 않고,

“삼보 김서방이 올 때도 되었습네그려.”

하며, 눈치를 본다. 안협집은 졸음이 와서 눈꺼풀이 뻣뻣하여오는데 삼돌이란 놈이 가지도 않는 것이 귀찮아서,

“누가 아우.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겠지.”

하고,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앉는다.

삼돌이의 눈에는 그 고단해하면서 비스듬히 누워서 눈을 감을락말락한 안협집의 목덜미 살찌기며 볼그레한 두 볼이 몹시 정욕을 일으킨다.

그래서 차츰차츰 말소리가 음흉해간다.

“님자는 사람을 너무 가려봅디다. 그러지 마슈. 나도 지금은 남의 집 머슴놈이지마는 안집 지체라든지 젊었을 적에는 그래도 행세하는 집에서 났더라우. 지금은 그놈의 원수스런 돈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마는……”

하고, 말을 건네려 하는데 안협집은 별 시러베 자식 다 보겠다는 듯이 대답이 없다.

“자! 그럴 것 있소. 오늘은 내 청을 한번 들어 주소그려.”

하고, 바싹 달려드는 바람에 반쯤 감았던 안협집의 눈은 똥그래지며 어느 결에 삼돌의 뺨에 손뼉이 올라가 정월에 떡치듯 철썩 한다.

“이놈! 아무리 쌍녀석이기로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냐. 냉큼 나가거라!”

하고 호령이 추상같다. 삼돌이란 놈은 따귀를 비비면서 성이 꼭두까지 일어나서,

“무엇이 어쩌고 어째. 횡! 어디 또 한번 때려봐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가 하려던 것은 이루고 마는 것이 상책이다. 이래도 소문은 날 것이요, 저래도 소문은 날 것이니 이왕이면 만족이나 채우고 소문이 나더라도 나는 것이 자기에게는 이로울 것 같았다.

더구나 안협집으로 말을 하면 온 동리에서 판박아 놓은 화냥년이니 한번 화냥이나 두 번 화냥이나, 남이나 내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났다. 도리어 자기의 만족을 한번 얻는 것이 사내자식으로서의 일종의 자랑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두 팔로 안협집을 힘껏 끼어안고,

“내가 호랑이 삼돌이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들으면 무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두지 않을 터이야! 네 네 남편이 오기만 하면 모조리 꼬아바칠 터이야! 뽕 따러 갔던 날 일까지 모조리!”

무식한 놈이라 야비한 곳이 있다. 안협집은 그 소리가 얼마나 사내답지 못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쇠같은 팔이 자기 허리를 누를 때 눈을 감고 한번 허락할까 하려다가 그 말을 듣고서 고만 침을 얼굴에 뱉었다.

“이 더러운 녀석! 네가 그까짓 것으로 나를 위협한다고 말을 들을 줄 아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삼돌이는 손으로 안협집의 입을 막았으나 때는 늦었다. 마침 마을 다녀오던 이장의 동생이 이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삼돌이란 놈은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지며 안협집을 놓았다. 안협집은 분해서 색색거리며,

“저놈 보시소. 아닌 밤중에 혼자 자는데 와서 귀찮게 굽니다. 저 죽일 놈이요. 좀 끌어내다 중치(重治)를 좀 해주시오.”

이장의 동생은 안협집의 행실을 아는고로 삼돌이만 보내려고,

“이놈이 할 일이 없거든 자빠져 자기나 하지, 왜 아닌 밤중에 남의 계집의 방에서 지랄이야? 냉큼 네 집으로 가거라!”

두 눈이 등잔만하여진다.

“네, 그런 게 아니라 실없이 기롱을 좀 했삽더니……”

“딛기 싫어! 공연히 어름어름 하면서, 이놈아 너는 사람을 죽여도 기롱으로 아느냐?”

삼돌이는 쫓겨났다. 이장의 동생은 포달을 부리며 푸념을 하는 안협집을 향하여,

“젊은것이 늦도록 사내녀석들을 방에다 붙이니까 그런 꼴을 당하지.”

“누가요?……”

“고만둬! 어서 잠이나 자.”

하며 문을 닫다 주고 나가버렸다.

6

삼돌이는 앙심을 먹었다. 안협집을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 골리리라는 생각이 가슴속에 탱중하였다. 안협집은 독이 났다. 삼돌이란 놈 분풀이를 하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튿날 동리에 소문이 났다.

“삼돌이란 놈이 뺨을 맞았다지! 녀석이 음침하니까.”

“그렇지만 계집년이 단정하면 감히 그런 맘을 먹을라구.”

“그렇구 말구! 제 행실야 판에 박은 행실이니까.”

“지가 먼저 꼬리를 쳤던 게지.”

이 소리가 바람에 떠돌아오자 안협집은 분하였다. 요조숙녀보다도 빙설 같은 여자인데 이런 누추한 소문을 듣는 것 같았다. 맘에 드는 서방질은 부정한 일이 아니요, 죄가 아니요, 모욕이 아니나 마음에 없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당하는 것은 무서운 모욕 같았다.

그는 그 길로 삼돌의 주인마누라에게로 갔다.

“삼돌이란 놈을 내쫓으소.”

주인은 벌써 알아채었으나 안협집편은 안 들었다. 다만 어루만지는 수작으로,

“무얼 내쫓을 것까지 있소. 그만 일에…… 그저 눈감아 두지.”

“왜 눈을 감는단 말이요?”

주인은 속으로 웃었다.

(소 한 필을 달라면 줄지언정 삼돌이를 내놔?)

하였다.

“내쫓아선 무얼 하우, 또.”

<어림없는 년! 네가 떠들면 떠들수록 네 밑구멍 들춰서 남 보이는 것이라>는 듯이 치어다보며 맨 나중으로 아주 잘라 말을 해버렸다.

“나는 못 내보내겠소.”

안협집은 분해서 집에 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었다. 그리고 또 결심했다.

“두고 봐라. 너희들까지 삼돌이를 싸고도니! 영감만 와봐라.”

하루는, 딴은 영감이 왔다. 안협집은 곤두박질을 하면서 맞았다.

“에그, 어서 오슈.”

노름꾼 김삼보는 눈이 똥그래졌다. 무슨 큰 좋은 일이나 생긴 것 같았다. 딴 때와 유달리 반가와하는 것이 의심스럽고 이상하였다.

방에 들어앉자마자 얼마나 땄느냐는 말도 물어보지 않고 삼돌이란 놈에게 욕당할 뻔하였다는 말을 넋두리하듯 이야기하였다.

“사람이 분해서 죽겠구려. 이것도 모두 영감 잘못 둔 탓이야. 오죽 영감이 위엄이 없어 보이면 그따위 녀석이 그런 짓을 할라고…… 영감이라고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지, 1년 열두 달 계집이 죽거나 살거나 내버려 두고 돌아만 다니니까……”

영감은 픽 웃었다.

“왜 내 잘못인가? 오죽 행실을 잘 가지면 그따위 녀석에게 그 꼴을 당한담.”

김삼보는 분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계집의 소행을 짐작도 하려니와 그놈의 주먹도 아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계집이 먹여 살리라는 말이 없고 이혼하자는 말만 없는 것이 다행해서 서방질을 해도 눈을 감아주고 무슨 짓을 하든지 그저 코대답만 하여주는 터이라 그런 소리가 귓전으로 들릴 뿐이다.

“내가 행실 잘못 가진 게 무어요?”

안협집은 분풀이라도 하여줄 줄 알았더니 도리어 타박을 주므로 분한데 악이 났다.

“글쎄 무어야! 무엇? 어디 대 봐요! 임자가 내 행실 그른 것을 보았소? 어디 보았거든 본대로 말을 하시우.”

딴은 김삼보는 집어서 말할 것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런 눈치만 채었지, 반박할 증거는 잡은 것이 없다.

“본 거나 다름없지!”

“무엇이 본 거나 다름없어? 1년 열 두 달 계집이 죽거나 살거나 내버려 두었다가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것밖에 없어? 살기가 싫거든 그대로 살기 싫다고 그래, 사내답게. 왜 고만 냄새가 나지? 또 어디다가 계집을 얻어 논 게지.”

“이년이 뒈지지를 못해서 기를 쓰나?”

“그렇다. 이놈아! 네까짓 녀석 아니면 서방 없을까 봐 그러니, 더러운 녀석!”

김삼보의 주먹은 안협집의 등줄기를 우렸다.

“이년, 그래도 잔소리야! 주둥이 좀 닫치지 못하겠니……”

이렇게 서로 툭닥거리며 싸우는 판에 뒷집에서 삼돌이란 놈이 이 소리를 듣고서 가장 긴한 체하고 달아왔다.

“삼보 김서방 언제 오셨소?”

하고, 마당에 들어섰다. 김삼보는 그놈의 상판을 보니까 참았던 분이 꼭두까지 올라온다. 삼돌이는 제법 웃음을 띠며,

“허허, 오래간만에 만나셔서 내외분 싸움이 웬일이시우?”

어디서 한잔을 하였는지 얼굴이 불콰하다.

김삼보는 눈을 흘겨 뚫어지도록 삼돌이를 치어다보았다.

“이놈아! 남이 내외싸움을 하든 말든 참견이 무어야!”

삼돌이란 놈은 주춤하였다. 그는 비지 같은 눈꼽이 낀 눈을 꿈벅꿈벅 하더니,

“그렇게 역정 내실 것 무엇 있수. 말 좀 했기로……”

“이놈아 네가 아랑곳 할 게 무어야?”

“아랑곳은 할 것 없어도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랬으니까 말이오. 나는 싸움 좀 못 말린단 말이요?”

하고,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앉는다.

“이놈아, 술을 먹었거던 곱게 삭여!”

이번에는 삼돌이란 놈이 빌붓는다.

“나 술 먹고 어찌하든 김 서방이 관계할 게 무어요.”

“이놈아! 남의 내외싸움에 참견을 하니까 그렇지.”

주고받다가 삼돌이의 멱살을 김삼보가 쥐었다.

“이 녀석, 네가 무슨 뻔뻔으로 이따위 수작이냐? 내 계집 이놈 왜 건드렸니?”

삼돌이는 조금 발이 저렸으나 속으로 흥 하고 웃었다.

“요까짓 게 누구 멱살을 쥐어? 앙징하게……”

하더니 김삼보의 팔을 잡아 마당에다가 내려갈기니 개구리 떨어지듯 캑 한다.

“요놈의 자식아! 내 말을 좀 들어보고 말을 해! 네 계집 흠절을 모르고 뎀비기만 하면 강산이냐? 이 동리 반반한 사내양반 쳐놓고 네 계집 건드리지 않은 놈이 없다. 이놈! 꼭 집어 말을 하라면 위에서 아래로 내리섬기마. 이놈 너도 계집 덕분에 노자랑 노름 밑천 푼 좋이 얻어썼지. 그래 집이라고 오면서 볼 받은 것이나마 옥양목 버선 벌이나 얻어 가지고 가는 것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으로 아니? 요 땅딸보 오리궁둥아! 아무리 속이 밴댕이 같기로…… 그리고 또 들어봐라. 나중에는 주워먹다 못해서 뽕지기까지 주워먹었다.”

안협집이 파래서 달려든다.

“이놈! 네가 보았니!”

“보나 안 보나 일반이지.”

“이녀석, 네 말을 듣지 않으니까 된 말 안된 말 주둥이질을 하는구나.”

동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협집은 삼돌이에게 발악을 하고 김삼보는 듣고만 있다.

한참 있더니 듣다듣다 못하는 듯이 삼돌이란 놈이 안협집에게로 달려들며,

“이년이 뒈지려고 기를 쓰나?”

하고, 주먹을 들었다.

동리 사람들이 호령을 하고 말렸다.

“이놈! 저리 얼른 가거라!”

삼돌이는 변명을 하며 뻗딩겼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게 끌려 저리로 가버렸다.

사람이 헤어지자 노름꾼은 계집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는 삼돌이에게 태질을 당한 것이 분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까지 계집년의 행실을 온 동리에서 아는 것이 분하였다.

“이년! 더러운 년! 뽕밭에는 몇 번이나 나갔니?”

발길로 지르고 주먹으로 패고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땅에다 질질 끌었다. 그는 이를 갈고 어쩔 줄을 몰랐다. 계집은 울고 발버둥질을 쳤다.

“죽여라! 죽여!”

“그럼 살려줄 줄 아니? 이년! 들어앉아서 하는 게 그런 짓밖에는 없어?”

김삼보는 자기의 무딘 팔다리가 계집의 따뜻하고 연한 몸에 닿을 때에 적지 않은 쾌감을 느끼었다. 그는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어 저리도록 속에 숨겨 있던 잔인성이 북받쳐 올라왔다.

맞은 안협집은 당장에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왕 이리된 바에야 모두 말해버리고 저하고 갈라서면 고만이지 언제는 귀밑머리 풀고, 사주단자 보내고, 사당에 예배드린 내외냐. 저는 저고 나는 난데, 왜 이렇게 때리노? 하는 맘이 나며,

“이것 놔라! 내 말하마!”

하고, 머리를 붙잡았다.

“뽕밭에는 한 번밖에 안 갔다. 어쩔 테냐?”

삼보는 더욱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년! 한번?”

이번에는 더 때렸다. 안협집은 말한 것이 후회가 났다. 삼보는 그래도 거짓말을 한다고 그대로 엎어놓고 짓밟았다. 안협집은 기절을 하였다. 삼보는 귀로 안협집의 숨소리를 들어 보았다. 그러나 숨소리가 없다. 그는 기겁을 하여 약국으로 갔다. 그의 팔다리는 떨렸다. 그가 의사에게서 약을 지어 가지고 왔을 때 안협집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삼보는 반가웁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약을 마당에 팽개쳤다. 그리고 밤새도록 서로 말이 없었다.

이튿날은 벙어리들 모양으로 말이 없이 서로 앉아 밥을 먹고, 서로 앉아 치어다보고, 서로 말만 없이 옷도 주고 받아 갈아입고, 하루를 더 묵어 삼보는 또 가버렸다. 안협집은 여전히 동리 집 공청 사랑에서 잠을 잤다. 누에는 따서 30원씩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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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군!

북극의 이 항구에 두텁던 안개도 차차 엷어갈 젠 아마 봄도 퍽은 짙었나부에. 그동안 동지들과 무사히 건투하여 왔는가? 항구에 안개 끼고 부두에 등불 흐리니 고국을 그리워하는 회포 무던히도 깊어가네.

내가 이곳에 상륙한 지도 어언 두 주일이 넘지 않았나. 그동안 찾을 사람도 찾았고 볼것도 모조리 보았네. 모든 인상이 꿈꾸고 상상하던 것과 빈틈없이 합치되는 것이 어찌도 반가운지 모르겠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다같이 위대한 건설사업에 힘쓰고 있는 씩씩한 기상과 신흥의 기분! 이것이 나의 얼마나 보고저 하고 배우고저 한 것인지 이것을 이제 매일같이 눈앞에 보고 접대하는 내 자신 신이 나고 흥이 난다면 군도 대강은 짐작할 수 있겠지. 더구나 차근차근 줄기 찾고 가지 찾아서 빈틈없이 일을 진행하여 나가는 제 3인터내셔널의 비범한 활동이야말로 오직 탄복하고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네.

여기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야 하려들면 한이 없을 듯하기에 그것은 다음 기회로 밀고 이 편지는 내가 이곳에 온 후의 첫 편지이고 군 역시 이곳을 무한히 그리워하던 터이므로 여기서는 대강 이 도시의 인상과 나의 사생활에 관한 재미있는 한 편의 에피소드를 군에게 소개할려네 ---

두 가닥의 반도가 바다를 폭 싸고 있는 것 만큼 항구는 으슥하고도 잔잔하네. 잔잔한 그 안에 새로운 기를 펄펄 날리는 수많은 기선과 정크와 화물선. 항구 위로 훤히 터진 도시. 발달된 지 오래인만큼 건축이 대개는 낡았고 생각하였던 것보다는 좀 고색을 띠운 듯하네. 가장 번화한 거리인 해안과 평행하여 길게 뻐친 레닌가 그 속에 즐비한 건축 --- 은행, 극장, 호텔, 국영 백화점 그외 각 회관, 구락부, 극동XX대학 등이 모두 제정 시대의 건물 그대로 있고 언덕 중턱에는 백의 동포의 거리가 있으니 역시 정결치 못한 낡은 거리이네. 그러나 대체로 보아 희고 노란 석조의 건축들이 시가의 전체에 밝은 색조를 주는 --- 밝은 풍경 맑은 도시임은 틀림없네.

국영 판매소 앞에는 언제든지 사람의 행렬이 끊일 새 없고 노파, 젊은이, 아이들이 길게 열을 짓고 움직이면서 차례를 기다려서 여러 가지의 필요한 식료품을 사는 것이네.

흐레브(빵), 마쏘(고기), 아보스취(야채), 싸--하르(사탕), 웟카 등의 모든 식료품이 국영 판매소에서만 팔리고 사사로이 경영하는 소매상이라고는 시중에 극히 희소하다는 것은 군도 아는 바이겠지. 빵을 사려는 늙은이는 병을 들고 긴 행렬 속에 끼어서 결코 조급하게 덤비는 법 없이 행렬과 같이 유유히 움직이는 풍경 이것은 오로지 새시대의 풍경의 하나일 것이니 옛날의 생활 형태를 철저히 청산하여 버린 이 신흥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네.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시가는 온전히 노동자의 거리이니 한 시간 에누리없이 꼭 여덟 시간의 노동을 마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터에서 무수히 거리를 쏟아져 나오네. 검소하게 옷입은 그들이 자랑스러운 걸음으로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때 거리는 우리의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것이다!--- 그들의 자랑스런 태도와 굵은 보조가 이것을 또렸이 말하는 듯하네.

이것으로 보면 고색을 띤 이 거리가 실상은 가장 활기를 띤 새날의 거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느끼겠지. 신흥의 기상이 신선한 생장력이 거리의 구석구석에 충만하여 있고 그 속에서 굵은 조직이 크나큰 건설이 한층한층 굳어가는 것이네. 노동자들이 노동을 마치고도 날마다 갖가지 의회에 출석하기 위하여 분주히 돌아치고 젊은 학생들과 청년들이 질소한 옷을 입고 책을 끼고 역시 건설의 사업에 분주히 휘돌아치고 있는 것은 물론이어니와 오직 남자뿐이 아니라 신흥계급의 여자 역시 그러하네. 노동 부인이나 여학생이나 다같이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굽 얕은 구두를 신고 건강한 걸음으로 거리를 걸어다니네. 북극의 능금같이 신선한 그들의 얼굴빛 밋밋하고 탄력 있는 그들의 다리! 굽 높은 구두 끝에 불안정한 체력을 싣고 휘춘휘춘 걸어가는 엷은 다리에 멸망하여 가는 계급의 불안정한 미학이 있다면 굽 얕은 구두에 전신을 든든히 싣고 탄력 있게 걸어가는 밋밋한 다리에는 신흥한 이 나라의 건강한 미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이 나라는 미인 --- 자유롭고 순진하고 건강하고 그야말로 기쁨과 힘의 상징이요, 새날의 매력이 아니면 무엇일까.

도시의 인상은 이만하여 두고 나는 아까 말한 나의 사생활에 관한 에피소드라는 것을 다음에 소개하겠네. 그것은 나답지 않은 끔찍이도 달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니 ---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결코 자랑스런 일은 아니나) 아름다운 이 나라의 미인의 키스를 받고 사랑을 얻은 이야기라네. 설마 군이 사치하고 불건강하다고 비웃지는 않을 줄 믿네. 일상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이 이야기에 예술적 윤택을 가하여 소설의 형식으로 쓰겠으니 넌센스의 한 편이 되고 말지라도 이 북극의 봄 나의 첫 선물로만 알고 과히 허물은 말게.

상륙한 지 일주일이 되니 항구의 지리도 대강 터득되고 그들의 기풍도 차차 알아는졌으나 아직 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관계상 나는 일정한 숙소도 없이 박군과 김군에게 번차례로 폐를 끼칠 분이었다.

<카페 우스리> --- 안정치 못한 이 며칠 동안 자주 출입하게 된 것은 이 부두 가까이 외롭게 서있는 카페 우스리였다. 저녁부터 자옥한 안개 속에 붉은 불을 희미하게 던지고 있는 카페 우스리 --- 그곳은 온전히 노동자들의 오아시스였다.

모보들이 재즈를 추고 룸펜들이 호장된 기염을 토하는 곳이 아니요, 그야말로 똑바른 의미에서의 노동자의 안식처이었다. 마도로스 파이프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 서리운 이 나라의 제일 큰 공로자의 초상 밑에는 유쾌한 노동자의 웃음이 있고 건강한 선원들의 흥이 있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긴 항해를 마치고 동무들과 카페 우스리를 찾아오는 것은 곧 그들의 기쁨의 하나인 듯도 하였다. 그것은 물론 순진한 노동자의 숲에서만 우러나오는 이 집의 유쾌하고 건강한 기분을 사랑하여서지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보다 더 카페 주인의 딸 되는 사--샤의 매력에 끌려서라고 할까.

늙은 아버지의 타는 수풍금에 맞춰 기타를 뜯는 사--샤. 낭랑한 목소리로 슬라브의 민요를 노래하는 사--샤, 손님 숲은 유쾌히 돌아치는 사--샤. 그의 한 마디 한 동작이 다 말할 수 없이 귀여운 사--샤였다. 슬라브 독특한 아름다운 살결, 능금같이 신선한 용모, 북극의 하늘같이 맑은 눈, 어글어글한 몸맵시, 풍부한 육체. --- 북극의 헬렌이다. 손가락 하나 대지 말고 신선한 향기 그대로 맑은 자태를 그대로를 하루 온종일 바라보고도 싶고 가지채 곱게 꺽어 향기채 꽃송이채 한 입에 넣고 잘강잘강 씹어 버리고도 싶은 아름다운 꽃이다.

상륙 당시 내가 이 카페에 자주 출입하게된 것도 실상인즉 사--샤의 매력에 끌린 까닭이었다. 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기타에 맞춰서 순박한 민요를 읊을 때의 사--샤. 한 번 보고 두 번 봄을 따라 넓은 세상에는 그와 같은 존재는 다시 없으리라고까지 생각되었다. 사--샤! 세상에 둘도 없는 사--샤! 가련한 웃음을 띄우고 낭랑한 목소리로 「야 류뷰류 -- 빠아스」 하면서 품에 와서 넘싯 안긴다면 그 순간에 죽어도 이 세상에 났던 보람이 있겠다고 평소의 나답지 않은 이러한 당치않은 생각에 나중에는 센티멘탈하게까지 되었다. 일이 많고 짐이 무거운 몸에 괴롭게 할 처지가 아니라고 스스로 꾸짖어 보았으나 사람으로서의 이 영원한 감정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우스리를 찾은 지 사흘 되는 밤이었다.

육중한 기중기와 창고와 기선의 허리가 안개 속에 몽롱한 밤 부두에는 우스리의 창에서 흐르는 향기로운 불빛을 향하여 선원들의 검은 그림자가 하나씩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넓은 카페 안에는 어느덧 사람들이 그득하였고 값싼 마홀카의 푸른 연기가 방안에 자옥하였다.

늙은 아버지는 손님 시중들기에 분주하였고 사--샤의 목가적 자태를 볼 때에 그가 낮 동안에 부두에 나와 바닷바람을 쏘여가면서 새로 닻 내린 배에 올라 정신없이 무엇을 적으면서 선객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취조하는 해상 국가 보안부의 여서기인 줄야 누가 첫눈에 짐작할 수 있으랴. 그리고 그가 몇 해 전에 모스크바에 있을 때에 열렬한 콤사몰카1의 한 사람으로 낮 동안에는 회관에서 일보고 밤에는 또한 동무들과 혁명사 강의를 들으러 다니던 그 사--샤일 줄야 누가 짐작하랴. 혁명에 오빠와 어머니를 잃은 사--샤는 모스크바에서 열심으로 공부하고 일보던 그때에도 외로이 떨어져 있는 늙은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하였던 끝에 마침내 도읍을 떠나 동쪽 항구까지 멀리 아버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서기로서 바쁜 일을 보아 가면서도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경영하는 카페를 또한 도와 나갔던 것이다. 낮에는 바쁘게 휘돌아치면서도 밤에는 수많은 노동자와 선원들을 상대로 목가와 기쁨에 취하는 이 두 가지의 생활을 사--샤는 가장 자유롭고 양기롭게 해나갔던 것이다.

사--샤는 한참이나 기타의 줄을 맞추더니 익숙한 기술로 마주르카(Mazurka)의 한 곡조를 뜯기 시작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한편 구석 탁자를 차지하고 유쾌한 흥에 잠기면서 사--샤의 기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잡담과 웃음에 요란하던 사람들도 그 음조에 취한 듯이 방안은 고요하였다. 힘과 땀의 노동을 마친 뒤에 고요한 마주르카의 한 곡조는 사실 한 모금의 청량제일 것이다. 방안은 이 고요한 맛에 취한 듯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은은한 음조보다도 능란히 놀리는 그의 손맵시보다도 더 많이 어여쁜 사--샤의 용모에 정신이 쏠렸었다.

한 곡조가 그치자 박수하는 소리가 파도같이 일어나고 치하의 소리가 물 퍼붓듯 쏟아 졌다.

「사--샤!」

「부라보!」

이 물끓듯하는 환조의 사이에서 선원인 듯한 건장한 사나이가 문득 자리를 일어서더니 무엇이라고 높게 외치면서 사--샤의 앞으로 걸어갔다.

「크라시---바야떼---보슈카!」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이렇게 외치더니 그는 다짜고짜로 사--샤를 번쩍 들어 탁자 위에 올려세웠다. 사람들은 의아하여서 그의 거동을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사--샤 역시 영문을 모르나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양기로운 웃음을 띄우면서 기타를 한 손에 든 채 탁자 위에 서슴치 않고 올라섰다.

사나이는 또 소리 높이 외쳤다.

「아욱숀니 톨기.」

「!」

「?」

「아나---파세루---이.」

당돌한 그 사나이의 거동에 의아해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외치는 이 한마디에 기뻐하고 소리치고 박수하면서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

「하라쇼!」

「부라보!」

그러나 나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장난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키스를 경매하다니! 내가 은근히 생각하여 오던 사--샤의 키스를! 생각할 수 없었다. 허락할 수 없었다. 나의 가슴은 알 수 없이 떨렸다.

그러나 사--샤의 얼굴을 보았을 때에는---이 순진한 처녀는 그들의 제의에 승낙하는 듯이 양기롭게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시 박수를 하면서 동의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모를 백성이다.)

그들의 미친 장난을 이해하기 어려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세 사람이 수군수군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열광적 흥분과 환호 가운데에서 경매의 막은 드디어 열리고 말았다.

건장한 사나이는 사--샤의 옆에 선 채 군중을 향하여 소리쳤다.

「취토 스토---야트?」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 구석 한 편 탁자 옆에 앉았던 키작은 노인이 일어서면서 마도로스 파이프를 입에서 빼더니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가늘게 불렀다.

「아딘 루---브랴.」

별안간 웃음소리가 봇살 터지듯이 방안에 그득히 터져 나왔다. 키스 한 번에 일 루불이라는 것이 결코 망발된 값은 아니었으나 개시로 그것을 부른 것이 호호한 노인이었고 또 그의 태도가 하도 우스운 까닭에 모두들 웃음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첸 도쉐보!」

무참하여서 자리에 도로 주저앉은 노인을 보고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다시 「취토 스토---야트!」를 부르니 시세는 차차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드바 루---브랴.」

「트리 루---브랴.」

「파티 루---브랴.」

오 루불까지 오르더니 시세는 더 오르지 않고 잠깐 머물렀다.

건장한 사나이는 <샤티> <샤티>를 연발하면서 사람 숲을 휘돌아 보았으나 거기에는 침묵이 있을 뿐이요, 값을 더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한참이나 있다가.

「데---파샤티!」

하고 한편 구석에서 벌떡 얼어서는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나였다.

처음에는 그들의 당돌한 행동에 자못 놀랐으나 차차 그들의 무작위한 태도와 사--샤의 유쾌한 태도를 봄을 따라 나도 그 속에 한 몫 끼어 아름다운 사--샤의 한 송이의 사랑을 얻어 볼까 하고 알맞은 때를 기다려오던 터이었다.

십 루불이 결코 많은 돈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샤의 아름다운 입술을 살 수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귀중한 십 루불이며 영광스런 십 루불일 것인가! 흥분된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탁자 옆에 일어서서 사--샤을 바라보았다.

사--샤 역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징긋이 이쪽을 바라보는 묵직한 응시 속에는 그 무슨 깊은 의미가 있다---고 적어도 나는 생각하였다. 사흘이나 이곳을 찾아온 만큼 그는 나의 존재도 이미 짐작하였을 것이다. 그의 응시에는 차차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를 띤 그를 이렇게 정면으로 대하니 그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그의 입술이 십 루불에·····단 생각에 취하면서 나는 나에게 쏠려 있는 수많은 시선을 무시하면서 정신없이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단 생각도 중턱에서 끊어져 버리고야 말았다.

「드바따티!」

엄청나게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나의 옆 탁자에 앉았던 늘름 한 사나이가 나의 흥정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뭇사람의 시선과 사--샤의 시선을 독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또 다른 사람에게 가로채어 버리고 시세는 또다시 차차 폭등하기 시작하였다.

「트리따티!」

「소--로끄!」

「파티데샤티!」

처음에는 일 루불씩 오르던 것이 이제와서는 십 루불씩 올라갔다. 그리고 한 사람이 봉을 떠놓으면 왠일인지 그것이 가속도적으로 급속하게 올라갔다. 올라갈 때마다 나의 속을 죄이고 떨리고 흥분되어 갔던 것이다.

「쉐스티!데샤티!」

「쌤떼샤티!」

「부쌤데샤티!」

드디어 팔십 루불까지 올라갔다. 키스 한번에 팔십 루불. 그것은 아름다운 사--샤와 달아 볼 때에는 별로 무거운 것이 아니지만 넉넉지 못한 노동자나 선원들의 처지와 달아 볼 때에는 팔십 루불은 곧 저울대가 휠이만치 무거운 돈일 것이다. 사--샤의 아름다운 자태를 눈앞에 놓고도 시세가 이 팔십 루불 까지 와서는 그대로 침체하여 버리고 더 올라갈 형세를 보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팔십 루불을 부른 사나이는 몸이 부대한 것이라든지 해군모를 엇비슷하게 쓴 품이 틀림없는 선장격의 사나이였다. 그는 그가 부른 가격에 십분의 만족과 자신을 가지고 자랑스럽게 주위를 휘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를 좇을려는 사람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에 그는 유유히 자리를 일어서서 사--샤에게로 가려 하였다.

처음에는 무작위하게 장난으로 시작한 것이 일이 차차 이렇게 참스럽게 되고 나중에는 한 사나이가 그것도 그다지 마음먹지 않는 사나이가 자기 앞으로 서슴지 않고 달려 듦을 볼 때 사--샤는 적지않이 실망한 듯 하였다.

드디어 그는 군중을 돌아보면서 호소하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그러는 즈음에 기타줄에 걸려선지 그의 치마가 높이 들리며 양말속의 향기로운 하아얀 두 다리가 무릎 위에까지 드러났다. 새빨간 즈로오즈 밑으로 기름지게 드러난 백설 같은 감각이 전기불을 받아 눈이 부시게 현란하였다.

「데뱌노--스토.」

이 우연히 드러난 관능의 공인지는 모르나 잠시 중단 되었던 시세는 별안간 팔십 루불을 차버리고 구십 루불로 올랐다.

구십 루불을 부른 사나이는 역시 모자를 엇비슷하게 쓴 젊은 사나이였다. 그는 늠름히 일어서서 백분의 자신을 가지고 주위를 휘돌아보았다. 그러나 벌써 더 부를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분이 지나고 삼분이 지나고 오분이 지났다. 그러나 이 시세를 돌파한 새 시세는 나오지 않았다. 구십 루불이 최후의 결정적 기록인 듯하였다. 젊은 사나이는 최대의 자신을 가지고 한 걸음 두 걸음 사--샤의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사--샤의 사랑이 결국 이 사나이의 것이 된단 말인가 하고 생각할 때에 나는 모욕이나 받은 듯 하였다. 안된다. 안된다. 그럴 수 없다. 사--샤가 사--샤가······ 나는 부지중에 벌떡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 어느 결엔지 모르게,

「스토!」

하고 정신없이 백 루불을 불러 버렸다. 물론 아무 분별도 주책도 없이였다. 다만 머릿속에 있는 것은 사--샤를 뺏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박군과 김군은 의아하여 나를 똑바로 바라 보았고 뭇사람의 시선 역시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샤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이 요조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 가운데에는 처음에 내가 「데--샤티!」를 불렀을 때에 보여준 그것 이상 몇몇 배의 깊은 의미와 호의의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의 눈은 나를 부르는 듯도 하지 않았던가.

사--샤의 옆에 섰던 건장한 사나이는 군중을 향하여 「스토!」「스토!」를 연호하였으나 그 이상 올리는 사람도 올릴 만한 사람도 보이지는 않았다.

사--샤는 결국 내 차지였다. 나는 당당히 자리를 나서서 한 걸음 두 걸음 사--샤에게로 발을 옮겨 놓았다.

사--샤 역시 반기는 낯으로 두 팔을 내밀면서 나에게로 가까이 달려왔다.

결국 나는 사--샤의 손을 잡고 그 역시 말없이 나의 손을 든든히 잡았다. 그의 맑은 눈, 거룩한 미소, 든든한 팔--- 이 모든 그의 무언의 자태가 기실 나의 꿈꾸고 있던 「야--류부류--바--스」를 한마디 한마디 또렸 또렸이 속삭였다. 나는 꿈이나 아닌가 하였다. 꿈이 아니고는 이렇게 끔찍한 행복이 나에게 굴러떨어질 리 만무할 것이다. 세상에도 아름다운 사--샤--- 희랍의 <헬렌>인들 애란의 <데아드라>인들 어찌 사--샤에게 미칠 수 있었을까---해를 비웃고 달을 비웃을 사--샤! (동무여 나의 이때의 이 감상을 허락하라.) 그는 나의 생애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또 마지막으로 나타난 유일의 사람인 듯하였다.

황홀과 행복감에 흥분된 나는 몽롱한 의식 가운데에서도 감사의 눈으로 사--샤를 똑바로 대하면서 손을 옮겨 그의 팔을 붙들었다. 별안간 나의 팔을 꽉 잡고 사--샤와 나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처음부터 사--샤의 옆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나이 였다.

그는 사--샤를 나에게서 떼더니 자기 옆에 세워 놓고,

「드베스티!」

하고 부르짖더니 주머니 속에서 이백 루불의 지폐 뭉치를 집어냈다.

처음에 경매를 제의한 것이 이 사나이였던 것을 보고 이제 또 이 그의 행동을 봄에 그가 처음부터 사--샤에게 마음을 둔 것이 확실하였다. 시세가 오를 대로 올라 그 이상 더 오르지 못할 그 형세를 살펴서 그보다 높은 시세로 사--샤를 손에 넣겠다는 것이 이 사나이의 처음부터의 계획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흥분되고 당혹하였다.

「트리스타!」

삼백 루불이 나의 주머니 속에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 분별도 없이 당혹한 가운데서 그저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체트레스티!」

그 사나이 역시 나에게 지지 않을 만한 높은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또 이백 루불의 지폐 뭉치를 주머니 속에서 집어내서 합 사백 루불의 지폐를 두 손에 갈라 쥐었다.

이렇게 되면 죽든 살든 필사적이었다.

「파티소--티!」

나는 백 루불을 더 올렸다.

이때까지 늘름하던 그 사나이는 여기서 적지않은 당혹의 빛을 나타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안과 의혹의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손등으로 입을 씻고 어떤 결의의 빛을 보이면서 에라 마지막이다 하는 듯이 최후의 분발을 하였다.

「쉐스틔소--틔!」

주머니 속을 툭툭 긁어모아 합 육백 루불을 탁자 위에 던지더니 입맛이 쓴 듯이 그는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아서 나의 입만 쳐다보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로구나 하고 깨달았으나 나는 더 올려야 좋을지 안 올려야 좋을지 반은 광태에 빠진 나의 의식은 몽롱한 뿐이었다.

사--샤의 애원하는 듯한 시선이 매질하는 듯이 나의 전신에 흘렀다. 나는 그 시선을 배반하여 버릴 수 없었다. 온전히 미친 듯이 나는 목소리를 다하여 마지막으로,

「틔샤차!」

하고 외치고는 의식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던 것이었다. 나의 입만 바라보고 앉았던 그 사나이가 실망한 듯이 탁자 위의 지폐 뭉치를 도로 주섬주섬 주머니 속에 넣고 알지 못할 웃음을 커다랗게 웃으면서 군중 숲에서 사라진 것과 그 뒤에 파도 같은 박수와 환조가 군중 사이에 일어난 것과 그리고 영문모를 신세계의 노래가 집을 들어갈 듯이 높게 울린 것이 어렴풋이 짐작될 뿐이요 그 뒷일은 도무지 의식 밖이었다.

어느 맘때쯤 되었는지 새로 의식을 회복하였을 때 나는 그 카페 안의 넓은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요란하던 손님들은 다 가버리고 밤 깊은 카페 안은 고요하였다.

내가 깨나기를 기다리기에 지쳤는지 박군과 김군은 건너편 탁자 위에 두 팔로 머리를 괴인채 잠들어 있고 나의 옆에는 사--샤가 꿇어앉아 있었다.

내가 눈을 방긋 떴을 때에 거기에는 두팔을 소파에 걸치고 곤하지도 않은지 징긋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샤의 시선이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옆에 꿇어앉아 내가 깨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키스를 사려고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천 루불을 불렀다. 그러나 물론 나의 수중에 천 루불이라는 큰 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 루불을 커녕 백 루불도 아니 단 십 루불도 없었던 것이다. 몸을 전부 팔아도 단 십루불이 안될 내가 대담하게도 천 루불이란 값을 붙인 것은 온전히 광태 속에서였다.

사--샤를 뺏겨서는 안되겠다는 열증된 광태로 실상 그를 대하였을 때에는 그에 대한 미안한 생각과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무슨 주제에 천 루불의 끔찍한 대금을 부르고 그를 이렇게 붙들어 두었던가.

사--샤를 생각하던 열정도 간 곳 없고 다만 짝없이 부끄럽기만한 나는 말없이 소파에서 일어나서 동무를 깨워 가지고 이 집을 나갈 작정으로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나 나의 표정이 일일이 바라보고 있던 사--샤는 벌떡 얼어나면서 나를 붙들었다.

「늬에트! 늬에트!」

다시 나를 소파 위에 앉히고 그 역시 나의 앞에 바싹 다가앉더니 두 팔을 나의 어깨 위에 걸었다.

나는 그의 이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다음과 같은 연연한 그의 한 마디는 나를 이를 데 없이 혼란케 하였다.

「야 류뷰류---카레이스쿠!」

「?」

나는 잠시 멍멍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처구니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도 큰 기쁨에 놀라서였다. 그는 그의 입으로 틀림없이 「야 류뷰류---카레이스쿠!」를 연연히 부르짖었다.

모든 것은 명백하였다. 내가 사--샤를 생각하였던 것같이 그 역시 처음부터 나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인종적 편견도 가지지 아니하고 조선 사람인 나를 사랑하였던 것이다.

나는 기쁘고 말고 정신이 없이 좋았다.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든든히 잡았을 때에 거기에는 모든 것을 허락하는 사--샤가 있었다. 향기로운 용모가 애원하는 듯한 가련한 눈초리가 방끗 열린 입술이---황홀한 사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아름다운 사--샤의 키스와 사랑을 샀네---아니 얻었네. 그리고 지금 역시 받고 있네. 그나 내가 낮에는 바쁘게 일하고 밤에 다시 우스리에서 만날 때에는 사랑과 안식이 있다네. 이제는 벌써 우스리에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누구 한 사람 그의 키스를 경매할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네.

경매라니 말이지 처녀의 키스를 경매한다면 퍽 음란하고 야비하게 들릴 것일세. 그러나 알고 보면 이곳에서는 극히 건강하고 허물 없는 장난에 지나지 못하네. 퇴폐적 비열한 행동인 줄 알았던 것이 실상인즉 단순하고 무작위한 노름에 지나지 못함을 나는 깨달았네. 여기에 또한 슬라브다운 기풍이 나타나 있으니 이곳이 아니면 도저히 보기 어려운 장난일 것일세.

R군!

내가 지금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써 보낼 처지는 아니로되 낯모르는 땅에 처음으로 샹륙하자마자 우연히 겪은 나의 사생활의 잊지 못한 한 장의 이야기인 만큼 큼직한 슬라브의 풍모의 일단도 소개할 겸 허물 없는 군에게만은 기탄없이 말하고 싶었던 것일세. 그런 줄 알고 너그럽게 용서하게.

요 다음에는 무게 있는 좋은 소식 많이 들려줌세. 내내 군과 여러 동지의 건투를 빌고 이만 그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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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물세살이오 ― 三월이오 ― 咯血이다. 여섯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 가지고 藥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新開地 閑寂한 溫泉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靑春이 藥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旅館 寒燈 아래 밤이면 나는 억울해 했다.

사흘을 못 참고 기어 나는 旅館 主人 영감을 앞장 세워 밤에 長鼓소리 나는 집으로 찾아갔다. 게서 만난 것이 錦紅이다.

  • 「몇 살인구?」

體大가 비록 풋고추만 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맵다. 열여섯살? 많아야 열아홉살이지 하고 있자니까

  • 「스물 한 살이에요.」 「그럼 내 나인 몇 살이나 돼 뵈지?」 「글쎄 마흔? 서른 아홉?」

나는 그저 흥! 그래 버렸다. 그리고 팔짱을 떡 끼고 앉아서는 더욱더욱 점잖은 체했다. 그냥 그날은 無事히 헤어졌건만―

이튿날 畫友 K君이 왔다. 이 사람인즉 나와 弄하는 친구다. 나는 어쩌는 수 없이 그 나비 같다면서 달고 다니던 코밑수염을 아주 밀어 버렸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가 急하게 또 錦紅이를 만나러 갔다.

「어디서 뵌 어른 같은데.」

「엊저녁에 왔던 수염 난 양반, 내가 바루 아들이지. 목소리까지 닮았지?」

하고 익살을 부렸다. 酒席이 어느덧 罷하고 마당에 내려서다가 K君의 귀에 대이고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 「어때? 괜찮지? 자네 한 번 얼러보게.」 「관두게, 자네가 얼러보게.」 「어쨌든 旅館으로 껄구 가서 짱껭뽕을 해서 定허기루 허세나.」 「거 좋지.」

그랬는데 K君은 厠간 에 가는 체하고 避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不戰勝으로 錦紅이를 이겼다. 그날 밤에 錦紅이는 錦紅이가 經産婦라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 「언제?」 「열여섯살에 머리 얹어서 열일굽살에 낳았지.」 「아들?」 「딸」 「어딨나?」 「돌만에 죽었어.」

지어 가지고 온 藥은 집어치우고 나는 전혀 錦紅이를 사랑하는 데만 골몰했다. 못난 소린 듯하나 사랑의 힘으로 咯血이 다 멈췄으니까―

나는 錦紅이에게 노름채를 주지 않았다. 왜? 날마다 밤마다 錦紅이가 내 房에 있거나 내가 錦紅이 房에 있거나 했기 때문에―

그대신―

禹라는 佛蘭西 留學生의 遊治郞 을 나는 錦紅이에게 勸하였다. 錦紅이는 내 말대로 禹氏와 더불어 <獨湯>에 들어갔다. 이 <獨湯>이라는 것은 좀 淫亂한 設備였다. 나는 이 淫亂한 設備 문간에 나란히 벗어 놓은 禹氏와 錦紅이 신발을 보고 언짢아하지 않았다.

나는 또 내 곁房에 와 묵고 있는 C라는 辯護士에게도 錦紅이를 勸하였다. C는 내 熱誠에 感動되어 하는 수 없이 錦紅이 房을 犯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錦紅이는 늘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禹, C等等에게서 받은 十圓 紙幣를 여러 장 꺼내 놓고 어리광석게 내게 자랑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伯父님 소상 때문에 歸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복숭아꽃이 滿發하고 亭子 곁으로 石澗水가 졸졸 흐르는 좋은 터전을 한 군데 찾아가서 우리는 惜別의 하루를 즐겼다. 停車場에서 나는 錦紅이에게 十圓 紙幣 한 장을 쥐어 주었다. 錦紅이는 이것으로 典當잡힌 時計를 찾겠다고 그러면서 울었다.

2

錦紅이가 내 아내가 되었으니까 우리 內外는 참 사랑했다. 서로 지나간 일은 묻지 않기로 하였다. 過去래야 내 過去가 무엇 있을 까닭이 없고 말하자면 내가 錦紅이 過去를 묻지 않기로 한 約束이나 다름없다.

錦紅이는 겨우 스물한살인데 서른한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았다. 서른한살 먹은 사람보다도 나은 錦紅이가 내 눈에는 열일곱살 먹은 少女로만 보이고 錦紅이 눈에 마흔살 먹은 사람으로 보인 나는 其實 스물세살이오 게다가 주책이 좀 없어서 똑 여나믄살 먹은 아이 같다. 우리 內外는 이렇게 世上에도 없이 絢爛하고 아기자기하였다.

부질없는 歲月이―

一年이 지나고 八月, 여름으로는 늦고 가을로는 이른 그 북새통에―

錦紅이에게는 예전 生活에 對한 鄕愁가 왔다.

나는 밤이나 낮이나 누워 잠만 자니까 錦紅이에게 對하여 심심하다. 그래서 錦紅이는 밖에 나가 심심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 심심치 않게 놀고 돌아오는―

즉 錦紅이의 狹窄한 生活이 錦紅이의 鄕愁를 向하여 發展하고 飛躍하기 시작하였다는 데 지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게 자랑하지 않는다. 않을 뿐만 아니라 숨기는 것이다.

이것은 錦紅이로서 錦紅이답지 않은 일일밖에 없다. 숨길 것이 있나? 숨기지 않아도 좋지. 자랑을 해도 좋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錦紅이 娛樂의 便宜를 돕기 위하여 가끔 P君 집에 가 잤다. P君은 나를 불쌍하다고 그랬던가시피 지금 記憶된다.

나는 또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즉 남의 아내라는 것은 貞操를 지켜야 하느니라고!

錦紅이는 나를 懶怠한 生活에서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우정 姦淫하였다고 나는 好意로 解釋하고 싶다. 그러나 世上에 흔히 있는 아내다운 禮儀를 지키는 체해 본 것은 錦紅이로서 말하자면 千慮의 一失이 아닐 수 없다.

이런 實없는 貞操를 看板 삼자니까 自然 나는 外出이 잦았고 錦紅이 事業에 便宜를 도웁기 위하여 내 房까지도 開放하여 주었다. 그러는 中에도 歲月은 흐르는 法이다.

하루 나는 題目 없이 錦紅이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 했다. 너무도 錦紅이가 무서웠다.

나흘만에 와보니까 錦紅이는 때 묻은 버선을 웃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이렇게도 못나게 홀아비가 된 내게 몇 사람의 친구가 錦紅이에 關한 不美한 까싶을 가지고 와서 나를 慰勞하는 것이었으나 終始 나는 그런 趣味를 理解할 도리가 없었다.

뻐스를 타고 錦紅이와 男子는 멀리 果川 冠岳山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데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내가 쫓아가서 야단이나 칠까봐 무서워서 그런 모양이니까 퍽 겁장이다.

3

人間이라는 것은 臨時 拒否하기로 한 내 生活이 記憶力이라는 敏捷한 作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달 後에는 나는 錦紅이라는 姓名 三字까지도 말쑥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杜絶된 歲月 가운데 하루 吉日을 卜하여 錦紅이가 往復葉書처럼 돌아왔다.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錦紅이의 모양은 뜻밖에도 憔悴하여 보이는 것이 참 슬펐다. 나는 꾸짖지 않고 麥酒와 붕어菓子와 장국밥을 사 먹여 가면서 錦紅이를 慰勞해 주었다. 그러나 錦紅이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고 울면서 나를 원망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서 나도 그만 울어 버렸다.

  •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그만해두 두달之間이나 되지 않니? 헤어지자, 응?」 「그럼 난 어떻게 되우, 응?」 「마땅헌데 있거든 가거라, 응?」 「당신두 그럼 장가가나? 응?」

헤어지는 限에도 慰勞해 보낼지어다. 나는 이런 良識 아래 錦紅이와 離別했더니라. 갈 때 錦紅이는 선물로 내게 베개를 주고 갔다.

그런데 이 베개 말이다.

이 베개는 二人用이다. 싫대도 자꾸 떠맡기고 간 이 베개를 나는 두 週日동안 혼자 베어 보았다. 너무 길어서 안 됐다. 안 됐을 뿐 아니라 내 머리에서는 나지 않는 妙한 머릿기름땟내 때문에 安眠이 저으기 妨害된다.

나는 하루 錦紅이에게 葉書를 띄웠다. 「重病에 걸려 누웠으니 얼른 오라」고.

錦紅이는 와서 보니까 내가 참 딱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亦是 며칠이 못 가서 굶어 죽을 것 같이만 보였던가보다. 두 팔을 부르걷고 그 날부터 나가서 벌어다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 「오― 케― 」

人間天國― 그러나 날이 좀 추웠다. 그러나 나는 대단히 安逸하였기 때문에 재채기도 하지 않았다.

이러기를 두 달? 아니 다섯 달이나 되나보다. 錦紅이는 忽然히 外出했다.

달포를 두고 錦紅이 ‘홈씩’ 을 期待하다가 盡力이 나서 나는 器皿什物을 뚜들겨 팔아 버리고 二十一年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와 보니 우리 집은 老衰했다. 이어 不肖 李箱은 이 老衰한 家庭을 아주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그 동안 이태 가량―

於焉間 나도 老衰해 버렸다. 나는 스물일곱살이나 먹어 버렸다.

天下의 女性은 多少間 賣春婦의 要素를 품었느니라고 나 혼자는 굳이 信念한다. 그 대신 내가 賣春婦에게 銀貨를 支拂하면서는 한 번도 그네들을 賣春婦라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이것은 내 錦紅이와의 生活에서 얻은 體驗만으로는 成立되지 않는 理論같이 생각되나 其實 내 眞談이다.

4

나는 몇 篇의 小說과 몇 줄의 詩를 써서 내 衰亡해 가는 心身 위에 恥辱을 倍加하였다. 이 以上 내가 이 땅에서의 生存을 계속하기가 자못 어려울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何如間 허울 좋게 말하자면 亡命해야겠다.

어디로 갈까. 만나는 사람마다 東京으로 가겠다고 豪言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친구에게는 電氣技術에 關한 專門공부를 하러 간다는 둥 學校先生님을 만나서는 高級單式印刷術을 硏究하겠다는 둥 친한 친구에게는 내 五個國語에 能通할 作定일세 어쩌구 甚하면 法律을 배우겠소 까지 虛談을 탕탕 하는 것이다. 웬만한 친구는 보통들 속나보다. 그러나 이 헷宣傳을 안 믿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何如間 이것은 영영 빈 털털이가 되어버린 李箱의 마지막 空砲에 지나지 않는 것만은 事實이겠다.

어느 날 나는 이렇게 如前히 空砲를 놓으면서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자니까 내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다. ‘긴상 ’이라는 이다.

  • 「긴상(李箱도 事實은 긴상이다) 참 오래간만이슈. 건데 긴상 꼭 긴상 한 번 만나 뵙자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긴상 어떻거시려우」 「거 누군구. 남자야? 여자야?」 「여자니까 일이 재미있지 않으냐 거런말야.」 「여자라?」 「긴상 옛날 옥상 .」

錦紅이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나타났으면 나타났지 나를 왜 찾누?

나는 긴상에게서 錦紅이의 宿所를 알아 가지고 어쩔 것인가 망설였다. 宿所는 동생 一心이 집이다.

드디어 나는 만나보기로 決心하고 一心이 집을 찾아가서,

  • 「언니가 왔다지?」 「어유― 아제두, 돌아가신 줄 알았구려! 그래 자그만치 인제 온단말씀유, 어서 들오슈」

錦紅이는 亦是 憔悴하다. 生活戰線에서의 疲勞의 빛이 그 얼굴에 如實하였다.

  • 「네눔 하나 보구져서 서울 왔지 내 서울 뭘허러 왔다디?」 「그리게 또 난 이렇게 널 찾어오지 않었니?」 「너 장가 갔다더구나.」 「얘 디끼 싫다. 그 육모초 겉은 소리.」 「안 갔단말이냐, 그럼」 「그럼.」

당장에 목침이 내 面上을 向하여 날라 들어왔다. 나는 예나 다름이 없이 못나게 웃어 주었다.

술床을 보았다. 나도 한잔 먹고 錦紅이도 한잔 먹었다. 나는 寧邊歌를 한 마디 하고 錦紅이는 육자백이를 한 마디 했다.

밤은 이미 깊었고 우리 이야기는 이게 이生에서의 永離別이라는 結論으로 밀려갔다. 錦紅이는 銀수저로 소반전을 딱딱 치면서 내가 한번도 들은 일이 없는 구슬픈 唱歌를 한다.

  •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世上 그늘진 心情에 불질러 버려라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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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의사의 얼굴은 몇 번이나 치어다보았다. '의사도 인간이다, 나하고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이렇게 속으로 아무리 부르짖어 보았으나 그는 의사를 한낱 위대한 마법사나 예언자 쳐다보듯이 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의사는 붙잡았던 그의 팔목을 놓았다 (가만히). 그는 그것이 한없이 섭섭하였다. 부족하였다. '왜 벌써 놓을까, 왜 고만 놓을까? 그만 보아 가지고도 이 묵은[老] 중병자를 뚫어 들여다볼 수가 있을까.' 꾸지람 듣는 어린아이가 할아버지의 눈치를 쳐다보듯이 그는 가련 (참으로) 한 눈으로 의사의 얼굴을 언제까지라도 치어다보아 그만 두려고는 하지 않았다. 의사는 얼굴을 십장생화(十長生畵) 붙은 방문 쪽으로 돌이킨 채 눈은 천장에 꽂아 놓고 무엇인지 길이 깊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길게 한숨 하였다. 꽉 다물어져 있는 의사의 입은 그가 아무리 쳐다보아도 열릴 것 같지는 않았다.

안방에서 들리는 담소(談笑)의 소리에서 의사의 웃음소리가 누구의 것보다도 가장 큰 것을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눈물날 만큼 분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병이 그다지 중(重)치는 아니 하기에 저렇지. '하는 생각도 들어, 한편으로는 자그마한 안심을 가져 오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에도 그가 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팔목을 잡았을 때의 의사의 얼굴에서부터 방산(放散)해 오는 술의 취기 그것이었다. '술을 마시고도 정확한 진찰을 할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하여가며 그래도 그는 그의 가슴을 자제하였다. 그리고 의사를 믿었다.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그는 그렇게도 의사를 태산같이 믿었다.) 그러나 안방에서 나오는 의사의 큰 웃음소리를 그가 누워서 귀에 들을 수 있었을 때에 '내 병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지! 술을 마시고 와서 장난으로 내 팔목을 잡았지, 그 수심스러운 무엇인가를 숙고 하는 것 같은 얼굴의 표정도 다 - 일종의 도화극(道化劇)이었지! 아 - 아 - 중요하지도 않은 인간 -.' 이런 제어할 수 없는 상념이 열에 고조된 그의 머리에 좁은 구멍으로 뽑아 내는 철사처럼 뒤이어 일어났다. 혼자 애썼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 - 고만하세요, 전작이 있어서 이렇게 많이는 못 합니다." 의사가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는 이러한 소리와 함께 술잔이 무엇엔가 부딪히는 쨍그렁하는 금속성 음향까지도 구별해 내며 의식할 수 있을 만큼 그의 머리는 아직도 그다지 냉정을 상실치는 않았다.

의사 믿기를 하느님같이 하는 그가 약을 전혀 먹지 않는 것은 그 무슨 모순인지 알 수 없다. 한밤중에 달여 들여오는 약을 볼 때 우선 그는 '먹기 싫다.' 를 느꼈다.

그의 찌푸려진 지 오래 인 양미간은 더 한 층이나 깊디깊은 홈을 짓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아무리 바라보았으나 그 누르끄레한 액체의 한 탕기가 묵고 묵은 그의 중병(단지 지금의 형세만으로도 훌륭한 중병환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을 고칠 수 있을까 믿기는 예수 믿기보다도 그에게는 어려웠다.

묵은 그대로 타 들어온다. 밤이 깊어 갈수록 신열이 점점 더 높아 기고 의식은 상실되어 몽현간(夢現間)을 왕래하고,바른편 가슴은 펄펄 뛸 만큼 아파 들어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우선 가슴 아픈 것만이라도 나았으면 그래도 살 것 같다. 그의 의식이 상실되는 것도 다만 가슴 아픈데 원인 될 따름이었다. (절어고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나의 아프고 고(苦)로운 것을 하늘이나 땅이나 알지 누가 아나.'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말을 그는 그대로 자신에서 경험하였다. 약물이 머리맡에 놓인 채로 그는 그대로 혼수 상태에 빠져있었다. 얼마 후에 깨어났을 때에는 그의 전신에는 문자 그대로 땀이 눈으로 보는 동안에 커다란 방울을 지어 가며 황백색 피부에서 쏟아져 솟았다. 그는 거의 기능까지도 정지되어 가는 눈을 치어들어 벽에 붙은 시계를 보았다. 약 들여온 지 10 분, 그 동안이 그에게는 마치 장년월(長年月)의 외국 여행에서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약탕기를 들었을 때에 약은 냉수와 마찬가지로 식었다. '나는 이다지도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다. 이렇게 약이 식어버리도록 이것을 마시라는 말 한마디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는 그것을 그대로 들이마셨다. 거의 절망적 기분으로, 그러나 말라빠진 그의 목을 그것은 훌륭히 축여주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의 의식은 분명하였다. 빈약한 등광(燈光) 밑에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며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그의 우인(友人)의 <몽국풍경(夢國風景)>의 불운한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그 화면(畵面)이 몹시 눈이 부시어서 (밤에만)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하여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을 그만하여도 그의 시각은 자극에 대하여 무감각이 되었었다. 몽롱히 떠올라 오는 그 동안 수개월의 기억이 (더욱이) 그를 다시 몽현 왕래(夢現往來)의 혼수 상태로 이끌었다. 그 난의식(亂意識) 가운데서도 그는 동요(童搖)가 왔다.- 이것을 나는 근본적인 줄만 알았다.

그때에 나는 과연 한때의 참혹한 걸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의 거짓을 버리고 참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 ' 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만 믿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근본적은 아니었다. 감정으로만 살아나가는 가엾은 한 곤충의 내적 파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나는 또한 나로서도, 또 나의 주위의 - 모든 것에 대하여 굉장한 무엇을 분명히 창작(?)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모양인지 무엇인지 등은 도무지 기억할 길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동안 수개월 - 그는 극도의 절망 속에 살아 왔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죽어 왔다 '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급기야 그가 병상에 쓰러지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을 순간 - 그는 '죽음은 과연 자연적으로 왔다.' 를 느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누워 있는 동안 생리적으로 죽음에 가까이 까지에 빠진 그는 타오르는 듯한 희망과 야욕을 가슴 가득히 채웠던 것이다. 의식이 자기로 회복되는 사이사이 그는 이 오래간만에 맛보는 새 힘에 졸리었다 (보채어졌다). 나날이 말라 들어가는 그의 체구가 그에게는 마치 강철로 만든 것으로만, 결코 죽거나 할 것이 아닌 것으로만자신(自信)되었다.

그가 쓰러지던 그 날 밤 (그 전부터 그는 드러누웠었다. 그러나 의식을 잃기 시작하기는 그 날 밤이 첫 밤이었다) 그는 그의 우인에게서 길고 긴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글로서 졸렬한 것이겠다 하겠으나 한 순한 인간의 비통을 초(抄)한 인간 기록이었다. 그는 그것을 다 읽는 동안에 무서운 원시성(原始性)의 힘을 느꼈다. 그의 가슴속에는 보는 동안에 캄캄한 구름이 전후를 가릴 수도 없이 가득히 엉키어 들었다. '참을 가지고 나를 대하여 주는 이 순한 인간에게 대하여 어째 나는 거짓을 가지고만 밖에는 대할 수 없는 것은 이 무슨 슬퍼할 만한 일이냐.' 그는 그대로 배를 방바닥에 댄 채 엎드리었다. 그의 아픈 몸과 함께 그의 마음도 차츰차츰 아파들어왔다. 그는 더 참을 수는 없었다. 원고지 틈에 낑기어 있는 3030 용지를 꺼내어 한두 자 쓰기를 시작하였다. '그렇다, 나는 확실히 거짓에 살아왔다.- 그때에 나에게는 체험을 반려(伴侶)한 무서운 동요가 왔다.- 이것을 나는 근본적인 줄만 알았다. 그때에 나는 과연 한때의 참혹한 걸인이었다. 그러나 오늘까지의 거짓을 버리고 참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만 믿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근본적은 아니었다. 감정으로만 살아나가는 가엾은 한 곤충의 내적 파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나는 또한 나로서도 또 나의 주위의 모오든 것에게 대하여서도 차라리 여지껏 이상(以上)의 거짓에서 살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운운.' 이러한 문구를 늘어놓는 동안에 그는 또한 몇 줄의 짧은 시(詩)를 쓴 것도 기억할 수도 있었다. 펜이 무연(無聯)히 종이 위를 활주하는 동안에 그의 의식은 차츰차츰 몽롱하여 들어갔다. 어느 때 어느 귀절에서 무슨 말을 쓰다가 펜을 떨어뜨렸는지 그의 기억에서는 전혀 알아낼 길이 없다. 그가 펜을 든 채로,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아버린 것만은 사실이다.

의사도 다녀가고 며칠 후, 의사에게 대한 그의 분노도 식고 그의 의식에 명랑한 시간이 차차로 많아졌을 때, 어느 시간 그는 벌써 알지 못할 (근거) 희망에 애태우는 인간으로 나타났다.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에게는 단테의 <신곡(神曲)> 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아무것도 그의 마음대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오직 그의 몸이 불 건강한 것이 한 탓으로만 여겨졌다. 그는 그 우인의 기다란 편지를 다시 꺼내어 들었들 때 전날의 어두운 구름을 대신하여 무한히 곧센 '동지 '라는 힘을 느꼈다. '××시! 아무쪼록 광명을 보시오!' 그의 눈은 이러한 구절이 쓰인 곳에까지 다다랐다. 그는 모르는 사이에 입 밖에 이런 부르짖음을 내기까지하였다. '오냐, 지금 나는 광명을 보고 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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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누님 누님 누님 하고 눈물이 날 만큼 감격에 떨리는 목소 리로 누님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그것도 한낱 꿈일까요? 꿈이나 같으면 오히려 허무로 들리어 보내일 얼마간의 위로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것도 꿈이 아닌가 하나이다. 시간을 타고 뒷걸음질 친 또렷하 고 분명한 현실이었나이다.
그러나 꿈도 슬픈 꿈을 꾸고 나면 못 견딜 울음이 복받쳐 올라오는데, 더구나 그 저의 작은 가슴에 쓰리고 아픈 전상(箭傷)을 주고 푸른 비애로 물들여 주고 빼지 못할 애달픈 인상을 박아 준 그 몽롱한 과거를 지금 다시 돌아다볼 때 어찌 눈물이 아니 나고 어째 가슴이 못 견디게 쓰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멀리 멀리 간 과거는 어쨌든 가 버리었읍니다. 저의 일생을 꽃다운 역사, 행복스러운 역사로 꾸미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가 아닌 게 아니지마는 지나갔는지라 어찌할까요. 다시 뒷걸음질을 칠 수도 없고 다만 우연히 났다 우연히 사라지는 우리 인생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 운명이라 덮어 버리고 다만 때없이 생각되는 기억의 안타까움으로 녹는 듯한 감정이나 맛볼까 할 뿐이외다.

2
그날도 그전과 같이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몽롱한 의식 속에 C동 R의 집 에를 갔었나이다. R은 여전히 나를 보더니 반가와 맞으면서 그의 파리한 바른손을 내밀 어 악수를 하여 주었나이다. 저는 그의 집에 들어가 마루끝에 앉으며,
“오늘도 또 자네의 집 단골 나그네가 되어볼까?”
하고 구두끈을 끄르고 방안으로 들어가 모자를 벗어 아무데나 홱 내던지며 방바닥에 가 펄썩 주저앉았다가 그 R의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 한 개를 꺼내어 피워물었나이다.
바닷가에서는 거의 거의 그쳐 가는 가늘은 눈이 사르락사르락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나 이다.
그때 R의 얼굴은 어째 그전과 같이 즐겁고 사념없는 빛이 보이지 않고 제가 주는 농담에 다만 입 가장자리로 힘없이 도는 쓸쓸한 미소를 줄 뿐이었나이다. 저는 그것을 보고 아주 마음이 공연히 힘이 없어지며 다만 멍멍히 담배 연기만 뿜고 있었나이다.
R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멀거니 앉았다가,
“DH.”
하고 갑자기 부르지요. 그래 나는,
“왜 그러나?”
하였더니,
“오늘 KC에 갈까?”
하기에 본래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저는 아주 시원하게,
“가지.”
하고 대답을 하였더니 R은 아주 만족한 듯이 웃음을 웃으며,
“그러면 가세.”
하고 어디 갈 것인지 편지 한 장을 써 가지고 곧 KC를 향하여 떠났나이다.
KC가 여기서부터 60리, R의 말을 들으면 험한 산로(山路)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요. 그리고 벌써 11지나 되었으니 거기를 가자면 어두워서나 들어갈 곳인데 거기다가 오다가 스러지는 함박눈이 태산같이 쌓였나이다. 어떻든 우리는 떠났나이다. 어린아이들같이 기꺼운 마음으로 뛰어갈 듯이 떠났나이다.
우리가 수구문(水口門)에서 전차를 타고 왕십리 정류장에 가서 내릴 때에는 검은 구름이 흩어지기를 시작하고 눈이 부신 햇살이 구름 사이를 통하여 새로 덮인 횐 눈을 반짝반짝 무지개빛으로 물들였었나이다. 저는 그 눈을 밟을 때마다 처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때없이 지저귀는 어린 꾀꼬리의 그 소리같이 연하고도 애처롭게 얼크러지는 듯한 눈소리를 들으며 무슨 법열권 내에 들어나 간 듯이 다만 R의 손만 붙잡고 멀리 보이는 구부러진 넓은 시골길만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어갔을 뿐이외다.
그러나 R의 기색은 그리 좋지 못하였나이다. 무슨 푸른 비애의 기억이 그를 싸고 돌아가는 것같이 그의 앞을 내다보는 두 눈에는 검은 그림자가 덮여 있는 듯하였나이다. 그리고 때때 내가 주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보이지 않게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의 괴로운 듯한 가슴을 내려앉혔나이다.
때때 거리거리 서울로 향하여 떠돌아 온 시골 나무장사의 소몰이 소리가 한적한 시골의 가만한 공기를 울리어 부질없이 뜨겁게 돌아가는 저의 핏속으로 쓸쓸하게 기어들어 올 뿐이 었나이다.
넓고 넓은 벌판에는 보이는 것이 눈뿐이요, 여기저기 군데군데 서 있는 수척한 나무가 보일 뿐이었나이다. 저는 이것을 볼 때 마다 저 북쪽 나라를 생각하였으며 정처 없는 방랑의 생활을 생각하였나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두 사람이 방랑의 길을 떠난다고 가정까지 하여 보았나이다. R은 다 만 나의 유쾌하게 뛰어가는 것을 보고 쓸쓸한 웃음을 웃을 뿐이었나이다.
우리가 SC강을 건널 때에는 참으로 유쾌 하였지요. 회오리바람만 이 귀퉁이에서 저 귀퉁이로 저 귀퉁이에서 이 귀퉁이로 획획 불어갈 때에 발이 빠지는 눈 위로 더벅더벅 걸어갈 제 은싸라기 같은 눈가루가 이리로 사르락 저리로 사르락 바람에 불려가는 것이 참으로 끼어안을 듯이 깜찍하게 귀여웠나이다. 우리는 그 눈덮인 모래톱으로 두 손을 마주잡고 하나, 둘을 부르며 달음질을 하였나이다. 그리고 또다시 SP강에 다다랐을 때에는 보기에도 무서워 보이는 푸른 물결이 음녀(淫女)의 남치맛자락이 바람에 불리어 그의 구김샅이 울멍줄멍하는 것같이 움실움실 출렁출렁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그 강을 건너 주막 거리에서 점심을 먹을 때에 R이 나에게 말하기를,
“술 한잔 먹으려나?”
하기에 나는 하도 이상하여
“술!”
하고 아무 소리도 못하였읍니다. 여태까지 술을 먹을 줄 모르는 R이 자진하여 술을 먹 자는 것은 한 가지 이상한 일이었나이다.
KC를 무엇하러 가는지도 모르고 가는 저는 또한 R이 술 먹자는 것을 또다시 그 이유까지 물어 볼 필요가 없었나이다.
그는 처음으로 술을 먹었나이다.
우리는 또다시 걸어갔나이다. 마액(魔液)은 그 쓸쓸스러운 R을 무한히 흥분시켰나이다. 그는 팔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크게 하여 말하기를 시작하였나이다. 그는 나의 손을 힘있게 쥐며,
“DH.”
하고 부르더니 무슨 감격한 듯한 어조로,
“날더러 형님이라고 하게.”
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나는 DH를 얼마간 이해하고 또한 어디까지 인정하는데.”
하였나이다.
아, 얼마나 고마운 소리일까요? 저는 손 아래 동생은 있어도 손위의 형님을 가질 운명에서 나지를 못하였나이다. 손목 잡고 뒷동산 수풀 사이나, 등에 업고 앞세워 물가로 데리고 다녀 줄 사람이 없었나이다. 무릎에 얼굴을 비벼가며 어리광부려 말할 사람이 없었나이다. 다만 어린 마음 외로운 감정을 그렁저렁한 눈물 가운데 맛볼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부드러운 사랑을 맛보지 못하였나이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는·본래 젊으시니까‥‥‥
그리고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지낸 과거를 생각하여 보면 웬일인지 한귀퉁이 가슴속이 메인 듯해요.
그런데 <형님>이라 부르고 <아우>라고 부르라는 소리를 듣는 저는 그 얼마나 기꺼웠 을까요? 그 얼마나 반가왔을까요.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얼마간일지라도 인정하여 준다는 말을 들은 나는 얼마나 감사하였을까요?
그러나 그 감사하고 반갑고 기꺼운 말소리에 나는 얼핏 <네> 하지를 아니하였나이다.
그 <네>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일는지 잘못 아닐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하였든 저는 <네>소리를 하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인정하여 주는 그 R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였을는지 더 무슨 만족을 주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거기에 이렇게 대답을 하였나이다.
“좋은 말이오, 우리 두 사람이 어떠한 공통 선상에 서서 서로 인정하고 서로 이해함을 서로 받고 주면 그만큼 더 행복스러운 일이 없지. 그러하나 형이라 부르거나 아우라 부르지 않고라도 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도리어 형이라 아우라는 형식을 만들 것이 없지 아니하냐?”
고 말을 하였더니 그는 무엇을 깨달은 듯이,
“딴은 그것도 그렇지.”
하고 나의 손을 더 힘있게 쥐었나이다.

3
금빛나는 종소리가 파랗게 갠 공중을 울리고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지? 그렇지 아니하면 온 우주에 가득 찬 ‘’에에테르’’를 울리며 멀리멀리 자꾸자꾸 끝없이 가는지, 어떻든 그 예배당 종소리가 우두커니 장안을 내려다보는 인왕산 아래 붉은 벽돌 집에서 날 때 저와 R은 C예배당으로 들어갔나이다.
그때에 누님도 거기에 앉아 계시었지요. 그리고 그 MP양도‥‥‥
처음 보지 않는 MP양이지마는 보면 볼수록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자꾸자꾸 변하여 갔나이다. 지난번과 이번이 또 다르지요.
지난번 볼 때에는 적지 않은 불안을 가지고 그 여성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낙망을 가지고 보았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번에 그를 볼 때에는 웬일인지 그에게서 보이지 않게 새어 나오는 무슨 매력이 나의 온 감정을 몽롱한 안개 속으로 헤매이는 듯이 누런 감정을 나에게 주더니 오늘에는 불그레하게 황금색이 나는 빛을 나에게 던져 주더이다. 그리고 그 황금색이 농후한 액체가 평평한 곳으로 퍼지는 듯이 점점점점 보이지 않게 변하여 동(銅)색의 붉은빛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어여쁜 처녀의 분흥저고리 빛으로 변하기까지 하였나이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릴 듯 돌릴 듯 할 때 마다 나의 전신의 혈액은 타오르는 듯하고 천국의 햇발 같은 행복의 빛이 나의 온몸 위에 내리붓는 듯하였나이다.
그리고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예배 시간이 나의 마음을 공연히 못살게 굴었나이다.
어찌하였든 예배는 끝이 났지요. 그리고 나와 R은 바깥으로 나왔지요, 그때 누님은 나를 기다리었지요. 그리고 저와 누님은 무슨 이야기든가 그 이야기를 할 때 아아, 왜 MP양이 누님을 쫓아오다가 저를 보고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저편으로 줄달음질쳐 달아났을까요? --- 그렇지 않다는 그 MP양이--- 누님, 그 MP양이 고개를 돌리고 줄달음질을 하거나 부끄러워 얼굴빛이 타오르는 저녁 노을빛 같거나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 되겠읍니까?
그러나 왜 나를 보고 그리하였을까요? 아마 다른 남성을 보고는 그리 안했을 터이지요? 그리고 그 줄달음질하여 저쪽으로 돌아가서는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더욱 부끄럽지나 아니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는 마음이 나지나 아니하였을까요?
어떻든 그것이 나에게 준 MP의 첫째 인상이었나이다. 그리하고 환희와 번뇌의 분기점에 나를 세워 놓은 첫째 동기였나이다.
저는 언제든지 이 시간과 공간을 떠날 날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 깊이 박힌 인생은 두렵건대 그 시간과 공간에 영원한 흔적을 남겨 줄는지요?

4
사랑하는 누님, 왜 나의 원고는 도적질하여 갖다가 그 MP양을 보게 하였어요? 그 MP양이 그 글을 보고 얼마나 웃었을까요?
누님의 도적질한 것은, 그것을 죄를 정할까요, 상을 주어야 할까요? 저는 꿇어엎디어 절을 하겠읍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을 열어 드릴 터입니다.
그런데 그 원고 OOO이라 한 곳에 서투른 필적을 자랑하려 한 것인지?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요, 그렇지는 않지요?
그러나 나의 원고를 더럽힌 그에게는 무엇이라 말을 하여야 좋을까요?
그러나 그러나 그 필적은 나의 가슴에 무엇인지를 전하여 주는 듯하였나이다. 사람의 입으로나 붓으로는 조금도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을 전하여 주더이다. 다만 취몽 중에 헤매이는 젊은이의 가슴을 못살게 구는 그 무엇을?

5
고맙습니다. 누님은 그 MP양과는 또다시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제와 같다 하였지요? 그리고 서로서로 형님 아우하고 지낸다지요. 저는 다만 감사할 뿐이외다. 그리고 영원한 무엇을 바랄 뿐이외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 누님과 MP사이를 얽어 놓은 형제라 하는 형식의 줄이 나를 공연히 못살게 구나이다. 그리고 모든 불안과 낙망 사이에서 헤매이게 하나이다.
누님의 동생이면 나의 누이지요. 아니 나의 누님이지요. 그 MP양은 나보다 한 살이 더하니까 --- 그러면 나도 그 MP양을 누님 이라 불러야 할 것이지요.
아아, 그러나 그것이 될 일일까요. 누님이라 부르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마는 나의 입으로 그를 누님이라고 부른다 하면 그 부르는 그날로부터는 그의 전신에서 분흥빛나는 무슨 타는 듯한 빛을 무슨 날카로운 칼로 잘라 버리는 듯이 사라져 버릴 터이지. 아니 사라져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제가 이 눈을 감아야지요.
아아, 두려운 누님이란 말, 나는 이 두려운 소리를 입에 올리기도 두려워요.

6
오늘 저는 PC에 보낼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신흥(神興)이 나지기 않아서 펴 놓은 종이를 척척 접어 내던져 버리고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대님을 한 번 갈아 매고 모자를 집어쓰고 바깥으로 나갔읍니다. 시계는 벌써 7시를 10분이나 지나고 있었나 이다.
저의 가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R의 집이지요. 그리고 내가 책을 볼 때에나 글씨를 쓸 때에나 길을 걷거나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을 때나 눈을 감고 명상할 때에나 나의 눈앞을 떠나지 않는 그 MP양을 오늘 R의 집에를 가면서도 또 보았읍니다.
저는 언제든지 MP양을 생각합니다. 허무한 환영과 노래하며 춤추며 이야기하며 나중 에는 두렵건대 손을 잡고 이 세상의 모든 유열을 극도로 맛보았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공상인 것을 깨달을 때에는 저도 공연히 싫증이 나고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비관의 종자가 될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아아 과연 다만 일찰나 사이라도 그 MP의 머릿속에서 나의 환영을 찾아낸다 하면 그 얼마나 나의 행복일까 하였나이다. 그리고 그 MP는 나를 조금도 생각지 않는 것만 같아서 공연히 마음이 애달팠나이다.
그날 R은 집에 있지 않았읍니다. 저의 마음은 눈물이 날 듯이 공연히 ‘’센티멘탈’’로 변 하여졌나이다. 그래서 정처없이 방황하기로 정하고 우선 L의 집으로 가 보았읍니다.
제가 그 처녀와 같이 조금도 거짓 없음을 부러워하는 L은 나를 보더니 그 검은 얼굴에 반가와 죽을 듯한 웃음을 띠우고 손목을 잡아 자기 방으로 끌어들이더니 어저께도 왔었는데,
“왜 그 동안에 그렇게 오지를 않았나?”
하지요. 그래 나는 그 얼마나 고독히 지내는 그 L을 보고 이때껏 계속하여 왔던 감상이 가슴 한복판으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공연히 눈물이 날 듯‥‥‥하지요. 그래 억지로 그것을 참고 멀거니 앉아 있었더니 그 L은 또 날더러 독창을 하라지요. 다른 때 같으면 귀가 아프다고 야단을 쳐도 자꾸자꾸 할 저이지마는 오늘은 목구멍에서 무엇이 잡아당기는지 그 목소리가 조금도 나오지를 아니하였나이다. 그래 공연히 앙탈을 하고 일어나기를 싫어하는 그 L을 옷을 입혀 끌고 바깥으로 나갔읍니다.
저녁 안개는 달빛을 가리우고 붉은 전등불만이 어두움 속에 진주를 꿰뚫어 놓은 듯이 종로 큰거리에 나란히 켜 있을 뿐이었나이다.
두 사람이 나오기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곳이 없었나이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하루 저녁을 유쾌히 놀 수도 없고 또 갈 만한 친구의 집도 없고 마음만 점점 더 귀찮고 쓸쓸스러운 생각을 하였나이다.
우리 두 사람은 결국 때없이 웃는 이의 집으로 가기로 하였나이다. 우리는 한 집에를 갔으나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그는 있지 않았나이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설영(雪影)의 집으로 가기를 정하고 천변(川邊)으로 내려섰나이다. 골목 안의 전기불은 누구를 기다 리는 것같이 빙그레 웃으며 켜 있었지요. 우리는 그 집에를 들어가 ‘설영이’ 하고 불렀나이다. 안방에서 영리한 목소리로,
“누구요?”
하는 설영의 목소리가 났읍니다. 우리 두 사람은,
“있고나.”
하였읍니다. 그리고 공연히 마음이 반가왔나이다. 그리고 설영이는 마루끝까지 나와,
“아이그 어서 오세요, 왜 그렇게 한 번도 아니 오세요.”
하지요.
아, 누님 그 소리가 진정이거나 거짓이거나 관성으로 인하여 우연히 나온 말이거나 아무것이거나 나는 그것을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만 감상에 쫓기어 정처없이 방황하려는 이 불쌍한 사람에게 향하여 그의 성대를 수고롭게 하여 발하여 주는 그의 환영의 말이 얼마나 나의 피곤한 심령을 위로 하여 주었을까요.
그는 날더러 <오라버니>라 하여 주기를 맹서하여 주었읍니다. 그리고 영원히 오라버니가 되어 달라 하였읍니다.
누님, 과연 내가 남에게 오라버니라는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도 나의 원치 않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설영을 친누이동생같이 사랑하렵니다. 그리고 영원히 영원히 나의 누이동생을 만들려 하나이다. 그리고 다만 독신인 설영이도 진정한 오라비 같은 어떠한 남성의 남매 같은 애정을 원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나 무상인 세상에 그것을 과연 허락할 참 신(神)이 어느 곳에 계실는지요?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외다.
그날 L은 설영을 공연히 못살게 놀려먹었나이다. 물론 사념없는 어린애 같은 유회지요.
그때 L은 설영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읍니다. 설영은 소리를 지르며 간지러운 웃음을 웃으면서 나의 앞으로 달려들며,
“오아버니! 오라버니!”
하고 그 L을 피하였나이다. 나는 그때 그 설영이 비록 희롱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L에게 쫓기어 나에게 구호함을 청할 때에 아아, 과연 내가 이와 같은 여성의 구호를 청함을 받 을 만한 자격의 소유자일까 하였나이다. 그리고 모든 여성은 다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혼자 이 설영이가 나에게 구호함을 청 한다는 것은‥‥‥ 그 설영을 끼어안을 듯이 귀여운 생각이 났나이다. 그러나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영의 그림자일까? 팔팔팔 날리는 봄날의 아지랭이일까? 영원이란 무엇일는지요‥‥‥

7
날이 매우 따뜻하여졌읍니다. 내일쯤 한 번 가서 뵈오려 하나이다. 하오에 기다려 주 십시오. 그리고 W군은 어저께 동경으로 떠나갔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만나보지 못한 것이 매우 섭섭하외다. 그리고 S군 Y군도 그리로 향하여 수일 후에 떠나간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아아, 저는 외로운 몸이 홀로이 서울에 남아 있게 되겠지요. 정다운 친구들은 모두 다 저 갈 곳으로 가 버리고‥‥‥

8
왜 어저께 저는 누님에게를 갔을까요? 간 것이 나에게 좋은 기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좋지 못한 기회이었을까요.
어떻든 어저께 나는 처음으로 그 MP와 말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가까이 서로 보 고 앉아 간질간질한 시선으로 그를 보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나의 눈에서 방산하는 시선의 몇 줄기 위로 나의 될 새 없이 뛰는 영의 사자를 태워 보내었나이다.
그는 그때 그 예배당 앞에서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리고 줄달음질하던 때와는 아주 달랐 읍니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나의 전신의 귀퉁이로부터 귀퉁이까지 호의의 비평을 하였을는지 악의의 비평 --- 그렇지는 않겠지요 --- 을 하였을는지 어떻든 부단의 관찰로 비평을 하였겠지요. 그러나 그의 눈과 안색은 아주 침착하였나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는 아주 나의 마음을 취하게 할 듯이 부드럽고 연하며 은빛이 났나이다.
그리고 나의 글을 너무 칭상(稱賞)하는 것이 조금 나를 부끄럽게 하였으며 또는 선생님이라는 경어가 아주 나를 괴롭게 하였나이다.
누님, 만일 그가 날더러 선생이라 그러지 않고 오라비라고 하였더면? 그 찰나의 나의 모든 것은 다 절망이 되어 버렸을 터이지요. 그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제가 도리어 그 선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행복인 것을 깨달을 날이 있을 줄은 이제 처음으로 알게 되었나이다.
어떻든 저는 그 MP와 만날 기회를 얻었읍니다. 그리고 서로 말소리를 바꾸게 되었읍 니다. 아마 이것이 저와 그 MP사이에 처음 바꾸는 말소리가 되었겠지요? 그리고 우주의 생명 중에 또다시 없는 그 어떠한 마디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불안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못 견딜 만큼 불안합니다. 다만 한 번 있는 그 기회의 순간이 좋은 순간이었을까요? 기쁜 순간이었을까요. 무한한 희망과 영원한 행복을 저에게 열어 주는 그 열쇠 소리가 한번 째깍 하는 그 순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아니하면 끝없는 의혹과 오뇌 속에서 만일의 요행만 한 줄기 믿음으로 몽롱한 가운데 살아 있다 그대로 사라져 없어졌다면 도리어 행복일걸 하는 회한의 탄식을 나에게 부어줄 그 순간이었을까요?
어찌하였든 저는 한옆으로 요행을 꿈꾸며 한옆으로 부질없는 낙망에 에매이나이다.

9
오늘은 아침 9시에 겨우 잠을 깨었나이다. 그것도 어제 저녁에 공연히 돌아다니느라고 늦게 잔 덕택으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행복을 얻었더니 그나마 행복이 되어 그리하였는지 R이 찾아와서 못살게 굴지요. 못살게 구는 데 쪼들리어 겨우 잠을 깨어 세수를 하였나이다.
이상한 일이었나이다. 제가 R의 집을 가기는 하여도 R이 저의 집에 찾아오는 일이 없는 그가 오늘 식전 아침에 저를 찾아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고 이상합니다.
그는 매우 갑갑한 모양이었나이다. 그리고 요사이 며칠 동안 그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하였으며 언제든지 무슨 실망의 빛이 있었나이다.
오늘도 그는 침묵 속에 있었나이다. 그리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나이다.
그는 어디로 산보를 가자 하였나이다. 저는 아침도 먹지 않고 그와 함께 정처없이 나섰나이다.
우리는 전차를 타고 H와 P의 집에를 가 보았으나 H는 아침 먹고 막 어딘지 가고 없다하고 P는 집에 일이 있어서 가지를 못하겠다 하지요. 그래 하는 수 없이 우리 단 두 사람이 또다시 HC를 향하여 떠났나이다.
천기는 청명, 가는 바람은 살살, 아주 좋은 봄날이었나이다.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나이다. 오포(午砲)가 탕 하였나이다.
멀리멀리 흐르는 HC강은 옛적과 같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나이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향기도 없고 아무 웃는 것도 없고 다만 푸른 물 속에 취색(翠色)의 산 그림자를 비추어 있어 다만 ‘아아 아름답다’하는 우리 두 사람의 못 견디어 나오는 탄성뿐이 고요한 침묵을 가늘게 울릴 뿐이었나이다. 우리는 언덕으로 내려가 한가히 매여 있는 주인 없는 배 위에 앉아 아무 소리 없이 물 위만 바라보았나이다. 푸른 물 위에는 때때 은사(銀絲)의 맴도는 듯한 파련(波漣)이 가늘게 떨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사르렁사르렁 은사의 풀렸다 감겼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나이다.
우리는 한참이나 앉아 있었나이다.
우리는 문득 저쪽을 바라보았나이다. 그리고 나의 가슴은 공연히 덜렁덜렁하고 전신에·식은땀치 흐르는 듯하였나이다. 저기 저쪽·에는 그 비단결 같은 물 위에 한가히 떠 있어 물 속으로 녹아들 듯이 가만히 있는 그 ‘’요트’’위에는 참으로 뜻밖이었지요, 그 MP가 어떠한 다른 동무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나이다.
그러나 그 MP는 나를 보고도 모르는 체하는지 보지 못하고 모르는 체하는지 다만 저의 볼 것, 저의 들을 것만 보고 들을 뿐이었나이다.
저는 그 MP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나 만일 그가 나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불과 몇십 간 되지 않는 거기에 있는 그가 어째 나를 보지 못하였을까? 못 보았을 리가 있나? 라고만 생각하는 저는 그에게로 가기가 두렵고 공연히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무엇이 원망스러웠을 뿐이었나이다.
그런데 웬일일까요‥‥‥MP를 나 혼자만 아는 줄 아는 저는 R의 기색에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나이다.
R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MP가 왔네.”
하였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저는 R이 어떻게 MP를 아는가 하였나이다. 그리고 무엇 인지 번개와 같이 저의 머리를 지나가는 것이 있더니 저는 그 R에게서 무슨 공포를 깨달은 것이 있었나이다.
R은 대담하게 MP에게로 갔읍니다. 저도 그를 따라갔읍니다. R은 모자를 벗고 그에게예를 하였나이다. 아아 그러나 누님, 정성을 다하지 않고 몽롱한 의심과 적지 않은 불안으로 주는 저의 예에는 그의 입 가장자리로 불그레한 미소가 떠돌았으며 따뜻한 눈동자 의 금빛 광채이었나이다. 그리고,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오셨어요?”
하는 그의 전신을 녹이는 듯한 독특한 어조가 저를 그 순간에 환희의 정화 속으로 스며들게 하였나이다.
우리 두 사람은 그를 작별하고 바로 시내로 들어왔나이다. 웬일인지 저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나이다. 그리고 전신의 혈액은 더욱더 펄펄 끓기를 시작하였나이다. 그러나 R의 얼굴은 그 전보다 더 비애롭고 실망의 빛이 떠돌았나이다. 쓸쓸한 미소와 쓸쓸한 어조가 도는, 저의 동정의 마음을 일으킬 만큼 처참한 듯하였나이다. 저는 R에게,
“어떻게 MP를 알던가?”
하였읍니다. 그는 무슨 옛날의 환상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전부터 알아.”
하였나이다. 이 소리를 듣는 저는 그러면 이성 사이에 만나면 생기는 사랑의 가락이 그 MP와 이 R 사이에 매여지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여태껏 기껍던 것이 점점 무슨 실망의 감상으로 변하여 버리었나이다. 그리고 차차 의혹 속에 방황하게 되었나이다.
그리하다가도 그 R의 실망하는 빛과 MP의 냉담한 답례가 저에게 눈물날 만큼 R을 동정하는 생각을 나게 하면서도 또 한옆으로는 무슨 승자의 자랑을 마음 한귀퉁이에서 만족히 여기었으며 불행한 R을 옆에 세우고 다행히 환희를 맛보았읍니다.
그날 저는 R의 집에서 자기로 정하였나이다. 밤 11시가 지나도록 별로 서로 말을 한 일이 없는 R과 두 사람 사이에는 공연히 마음이 괴로운 간격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그의 푸른 비애와 회색 실망의 빛이 그의 얼굴로 가끔가끔 농후하게 지나갈 때마다 저는 공연히 불안하였나이다.
저는 R에게 그 기색이 좋지 못찬 이유를 묻기를 두려워하였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 비애의 빛과 실망의 빛이 그 MP로 인한 것이 아니고 다른 것으로 인한 것이라 하면 저는 그때 그 R의 그 비애와 실망과 똑같은 비애와 실망을 맛보았을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형제와 같은 그 R의 비애와 실망을 그 MP로 인하여서라고 인정하지를 아니하면 저의 마음이 불안하셔 못 견딜 정도였읍니다.
그날 저녁 R은 자리에 누워서도 한잠을 자지 못하는 모양이었나이다. 다만 눈만 멀뚱멀뚱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나이다. 그리고 머리를 짚고 눈을 감고 무엇인지 명상 하듯이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나이다. 그의 엷은 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읍니다.
저도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읍니다. 그래 머리맡 서가에 놓여 있는 <On The Eve>를 집어들고 한참이나 보다가 잠이 깜빡 들었나이다.

10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버리었나이다. 꿈을 믿고 길에서 장님을 만나면 두 다리에 풀이 다하도록 실망을 하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꽃의 화판을 “하나 둘” 하며 <MP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하며 차례차례 따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사랑한다> 하는 곳에서 맨 나중 꽃잎사귀가 떨어지면 성공한 것처럼 춤을 출 듯이 만족하였으며 그렇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는 곳에 와서 그 맨 나중 꽃잎사귀가 떨어지면 공연히 낙망하는 생각이 나며 비로소 그 헛된 것을 조소합니다. 그러나 어느 틈에 또다시 그 꽃잎사귀를 따 보고 싶어 못 견디게 되나이다. 저는 요행을 바라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미신자가 되었읍니다. 오늘은 제가 누님을 만나뵈러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W군이 ‘’피스’’(piece)를 찾아 달라 하여서 누님에게로 갔읍니다.
누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다만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정문 앞 ‘’플랫폼’’을 왔다 갔다 하였나이다.
그러다가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나오는 사람은 누님이 아니고 그 MP였읍니다. MP 는 나를 보더니 쌩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하여 주었나이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있 었나이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이가 누님이었지요.
저의 마음은 이상하게 기뻤나이다. 그리고 아주 무슨 희망을 얻은 듯하였나이다. 길거리로 걸어다니면서도 혹시나 MP를 만나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순간의 기회를 기대하는 저는 누님에게로 갈 때마다 그 MP를 만날 수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다니었나이다. 오늘도 그 기대를 조금일지라도 아니 가지고 간 것이 아니었건마는 그 MP가 있지 않을 줄 안 저는 아주 단념을 하고 갔었읍니다. 그래 그 MP를 만난 것은 아주 의외이었지요.
누님 그 MP가 무엇하러 누님보다도 먼저 저를 보러 나왔을까요. 어린 아우를 만나려 는 누님의 마음이었을까요. 반가운 정인을 만나려는 애인의 마음이었을까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저와 오랫동안 말을 하였나이다. 그리고 동청이 푸른 잔디 사이를 누님과 저 세 사람이 산보하였지요? 저희가 그 좁은 길로 지나올 때 저는 그 MP에게,
“R을 어떻게 아셨던가요?”
하고 물어 보았읍니다. 그 MP는 조금 얼굴이 불그레한 중에도 미소를 띠우며,
“네, 그전에 한 두어 번 만나본 일이 있었어요.”
하고 대답을 하였지요. 그 소리를 듣는 저는 곧,
“R은 참 좋은 사람이야요.”
하였지요. 그러니까 그 MP는 곧 다른 말로 옮기어 버렸나이다.
그렇게 한 10분쯤 되어 누님과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조용히 할 말이나 있는 것처럼 주저주저하였나이다. 그러니까 그 MP는 곧 영리하게 그것을 알아차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요.
아아 그때 저의 마음은 아주 섭섭하였읍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MP는 떠나기가 싫었나이다. 그러나 그의 검은 치맛자락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사라져 버리었나이다. 그때 누님은 절더러 이야기를 하여 주었지요. 그 MP를 R이 사랑하려다가 그 MP가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MP가 저의 그 누님이 도적하여 간 원고를 보고 도외(度外)의 찬상을 하더라는 것과 그러나 그가 한가지 불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적더라는 것을. 저는 누님과 작별을 하고 문 밖으로 나오며 뛰어갈 듯이 걸음을 속히 하여 걸어 가며,
“내가 행복한 자냐 불행한 자냐?”
하고 혼자 소리를 질러 보았읍니다. 그거다가는 그 신앙이 적다고 하는데 대하여는 적지 않은 불쾌와 또 한옆으로는 희미한 실망을 깨달았읍니다.
그래 집에 돌아와 아랫목에 누워서 여러 가지로 그 MP와 저 사이를 무지개빛 나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만 얽어 놓아 보다가도 그 신앙이란 말을 생각하고는 곧 의혹 속에 헤매었나이다. 그러다가는 그의 집에서본 <On The Eve>를 읽던 것이 생각되며 그 여주인공 ‘’에레나’’의 일기가 생각났읍니다.
그의 애인 ‘’인사로프’’와 그의 아버지가 그와 결혼시키려는 ‘’크르나도오스키’’를 비교하여 ‘’인사로프’’에게는 신앙이 있을지라도 ‘’크르나도오스키’’에게는 신앙이 없었다. 자기를 믿는 것 만으로는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누님, 저는 이 글을 볼 때 공연히 실망하였읍니다. ‘’에레나’’는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하였읍니다. 그리고 신앙 없는 사람을 사랑치 않았읍니다. 그러면 MP도 언제든지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할 터이지요. 그러면 그 MP가 저에게 신앙이 없다고 한 말은 저를 동생 이나 친우로 여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애인으로 생각지는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누님, 그러면 저는 실망할까요. 낙담할까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누구에게든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없읍니다. 누구는 예수를 믿고 석가를 믿고 우상을 믿고 여러 가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를 믿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님, 저도 무엇인지 신앙하는 것이 있겠지요? 신앙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니까---누구든지 각각 자기가 신앙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아 있으니까 저도 또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 어떠한 신앙이든지 가지고 있겠지요.
저 어떠한 종교를 어리석게 믿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신앙만이 참신앙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의 신앙을 조소합니다. 그러나 한 번 더 크게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어 사면을 둘러보는 자는 각각 이것과 저것을 대조할 수가 있을 것이지요. 그리고 각각 장처와 결점을 찾아 낼 수가 있을 것이지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물론 그 이불 속뿐이 세상인 줄 알 터이지요. 그리고 그 속에만 참진리가 있는 줄 알 터이지요. 그러하나 그 이불 속만이 세상이 아니고 그 속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닌 줄 아나 그 이불을 벗어 버린 자는 그 이불 쓴 사람을 불쌍히 여기었을 터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는 그 이불을 벗은 사람이 여럿이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들을 아주 불쌍히 여기었읍니다.
그러면 저도 그 이불을 벗은 사람의 하나가 되려 합니다. 다만 어떠한 이름 아래서든지 그 온 우주에 가득 차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는 진리를 믿는 사람이 되려 하나이다. 그리하여 다만 그것을 구할 뿐이요, 그것을 체험하려 할 뿐이외다.
물론 사람은 약한 것이지요. 심신이 다 강하지는 못하지요. 제가 어떠한 때 본의아닌 일을 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약한 까닭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때 는 그것을 고치겠지요. 그리고 누님 한 가지 끊어 말하여 둘 것은 <Quo Vadis>에 있는 ‘’비니큐스’’와 같이 ‘’리기아’’의 신앙과 같은 신앙으로 인하여서 저도 그 ‘’비니큐스’’는 되지 않겠지요.
아아 그러나 누님, 제가 어찌하여 이와 같은 말을 쓸까요? 사랑보다 더 큰 신앙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요.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것은 사랑이 있을 뿐이지요. 사람 이 사랑으로 나고 사랑으로 죽고 사랑으로 살기만 하면 그 사람의 생은 참생이 되겠지요. 그러하나 저희는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처음은 이성에게 사랑을 구하는 자가 누가 주저하지 않은 자가 있고 누가 가슴이 떨리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그러면 사랑이란 죄악일까요? 죄지은 자와 똑같은 떨림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어찌함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읍니다. 그것은 열정과 이지입니 다. 이 세상의 역사는 이 두 가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행의 근원은 이 열정과 이지가 서로 용납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운 이성을 보고 자기 마음을 피력치 못하고 혼자 의심하고 오뇌하는 것도 이 이지로 인함이지요? 저는 어떻게 하면 이 이지를 몰각한 열정만의 인물이 되려 하나, 그 이지를 몰각한 열정의 인물이 되겠다는 것까지도 이지의 사주지요. 저도 또한 그렇게 되려 하나이다.
오늘 저는 또다시 R의 집에를 갔었나이다. 그 R은 있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으면 곧 들어오리라는 그 집 사람의 말을 듣고 저는 그의 방에서 기다리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R이 저와 형제같이 친하지가 않으면 그와 같이 주인 없는 방안에 들어가 앉아 있지를 못하였을 터이지요. 그래 그와 친하다 하는 무엇이 저를 그의 방으로 들어가게 하였읍니다.
저는 그의 방에 들어가 그의 책상 앞에 앉았나이다. 그때 문득 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가 써서 놓은 편지였나이다. 그리고 그 편지 피봉에는 MP라 씌어 있었읍니다. 저의 마음은 공연히 시기하는 마음이 나며 또한 그 편지를 기어이 보고 싶은 생각이 났었읍니다. 마침 다행한 것은 그 편지를 봉하지 않은 것이었나이다.
저는 그것을 보았읍니다.
그 속에는 이러한 말이 쓰여 있었읍니다.
‥‥‥DH는 미숙한 문사이오. 그리고 일개 ‘’부르주아’’에 지나지 못하는 사람이오‥‥‥
라고.
아아 누님, 저는 손이 떨리었나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다시 그 자리에 놓고 그대로 바깥으로 뛰어나왔읍니다. 그리고 길거리로 걸어오며 눈물이 날 만큼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또 한옆으로는 분한 생각이 나서 못 견디었나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R이 그와 같은 말을 써 보낼 줄 참으로 알지 못하였나이다. 누님 그렇지요. 저는 글쓰는 데 미숙하겠지요. 저는 거기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말하려 하지 않나 이다. 그러나 그 말을 무엇하러 MP에게 한 것일까요.
아아 누님, 저는 일개 참사람이 되려 할 뿐이외다.
저는 문학가, 문사라는 칭호를 원치 않아요. 다만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글을 봅니다. 그리고 느끼는 바를 견딜 수 없었읍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느낌과 깨달음이 우리 인생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 일개인의 성공은 얻기가 어려울 터이지요. 제가 느끼고 깨닫는 것은 길고 긴 우주의 생명과 함께 많고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것에 다만 몇천만억분의 1이 될락말락 할 터이지요. 그리고 그 저의 생명이 그치는 날에는 그것보다 조금 더하여질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무엇을 원할지라도 유한한 저의 육체와 정신은 그것을 용서치 않을 터이지요.
그러면 제가 ‘’부르주아’’나 ‘’프를레타리아’’나 무엇 어떠한 부름을 듣던지 언제든지 참사람이 되려 할 뿐이외다.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혼자 깨달은 줄 아는 사람일지라도 이 참사람이 되려는 데서 더 벗어나지는 못하였을 터이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부터 친애하는 친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나이다. 아무리 아무리 제가 너그러운 마음으로써 그전과 같이 R을 대하려 하나 그는 나를 모함한 자이지요. 어찌 그전과 같은 정의(情[[誼]])를 계속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저의 마음은 괴롭습니다. 그리고 그 KC를 가면서 저에게 형제와 같이 지내자 던 것을 생각하고 또는 그동안 지내 오던 정분을 생각하고 그것이 다만 한순간에 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저의 마음은 아주 안타까왔나이다. 그러다가도 그 R의 손을 잡고 기꺼워하고 싶었읍니다.

11
집에서 나을 때 동생 L이 울며 쫓아나오면서,
“형님 형님 나하고 가.”
하며 부르짖었나이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L은 맡기고 또다시 R을 찾아갔나이다.
어제 저녁 늦도록 잠을 자지 못한 저는 오늘 또다시 새벽에 일찍 일어났으므로 몸이 조금 피곤하였나이다.
저는 R의 집으로 가면서 몇 번이나 가지 않으리라 하여 보았읍니다. 날마다 가는 R의 집에를 1주일이나 가지 않은 저는 오늘도 또 가 볼 마음이 그리 많지는 않았읍니다. R을 생각하면 할수록 분하고 답답한 저는 언제든지 그 마음을 누르려 하였으나 그리 속마음이 편치는 못하였읍니다.
제가 R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아주 마음이 유쾌치 못하였읍니다. R은 저를 보고 힘없이 저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여 주었읍니다. 그리고,
“어서 오게.”
하는 소리가 아주 반갑지 못하였읍니다. 저는 그 R을 보기 전에는 반갑게 인사를 하리 라 한 것이 지금 그를 만나보니까 공연히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싫은 생각이 나서 그대로 바깥으로 나오고 싶었읍니다.
저는 그대로 서서,
“여러 날 만나지 못하여서 조금 보고나갈까 하고‥‥‥”
하며 그를 쳐다보았읍니다.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하며,
“응‥‥‥”
할 뿐이었나이다. 저는 갑자기 뛰어나오고 싶었읍니다. 그래,
”내일 또 봅시다.”
하고 그대로 뛰어나왔읍니다. 그 R은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읍니다.
아아, 누님,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어째 이리 멀어졌을까요? 무슨 간격이 생겼을까요? 그리고 무슨 줄이 끊어졌을까요. 저는 그것을 알 수가 없읍니다.
제가 종로를 걸어올 때였읍니다. 저쪽에서 뜻밖에 그 MP가 걸어왔읍니다. 그때 저는 그 MP와 만나 인사를 하리라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MP는 어떠한 양복 입은 이와 함께 저를 못 보았는지 저의 곁으로 그대로 지나가 버렸나이다. 저는 다만 지나가는 그만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단단히 쥐고, ‘에 고만 두어라’ 하였읍니다.
저는 말할 수 없는 번뇌 가운데 ‘에, 설영에게나 가리라’ 하였나이다. 그리고 천변으로 그의 집을 찾아갔읍니다. 그때 저의 마음 에도 ‘설영이가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없이 으례히 만나려니 하였나이다. 그러나 설영을 부르는 저의 목소리에 그 영리하고 귀여운 우리 누이동생의 목소리는 나지 않고 그의 어머니가 “없소” 하고 냉대하듯 보통 손님과 같이 대답을 하였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저는 공연히 섭섭한 생각이 나며 또는 설영이가 저를 한낱 지나가는 손처럼 생각하는 듯하고 또한 어떠한 정인이나 찾아가지 않았나 할 때 오라비 노릇을 하려는 저도 공연히 질투스러운 마음이 나며, ‘다 그만두어라’하는 생각이 나고 공연히 감상(感傷)의 마음이 났읍니다.
저는 그대로 집으로 갔읍니다. 집 문간에 서 놀던 L은 반기어 맞으면서 두 팔을 벌리고 저에게 턱 안기며 몸을 비비 꼬고 그의 가는 손으로 간지럽고 차디차게 저의 뺨을 문질러 주었나이다. 그때 저는 모든 감상의 감정은 가슴 한복판으로 모아드는 듯하더니 눈물이 날 듯하였나이다. 그때 그 L은,
“형님, 임마!”
하였나이다. 그래 저는 그에게 입을 맞추려 하니까 그는 무엇이 만족치 못한지,
“아니 아니 귀 붙잡고.”
하며 그의 손으로 저의 두 귀를 붙잡고 입을 맞추어 주려다가 또다시,
“형님도 내 귀 붙잡아.”
하였나이다. 저는 그 L의 귀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나이다. 그러나 그때 L은 저를 쳐다보며,
“형님 우네.”
하였나이다. 아아 누님, 저의 눈에는 눈물이 나왔읍니다. 그리고 그 L을 껴안고 울고 싶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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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총각 M이 혼약을 하였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뜻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습니다.

M은 서른 두 살이었습니다. 세태가 갑자기 변하면서 혹은 경제 문제 때문에, 혹은 적당한 배우자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단지 조혼(早婚)이라 하는 데 대한 반항심 때문에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 가기는 하지만, 서른 두 살의 총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아직껏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채근 비슷이, 결혼에 대한 주의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M은 언제나 그런 의논을 받을 때마다(속으로는 매우 흥미를 가진 것이 분명한데) 겉으로는 고소로써 친구들의 말을 거절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M이 우리가 모르는 틈에 어느덧 혼약을 한 것이외다.

M은 가난하였습니다. 매우 불안정한 어떤 회사의 월급쟁이였습니다. 이 뿌리 약한 그의 경제 상태가 그로 하여금 늙도록 총각으로 지내게 한 듯도 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친구들은 M의 총각 생활을 애석히 생각하여, 장가들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만은 M이 장가를 가지 않는 데 다른 종류의 해석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의사라는 나의 직업이 발견한 M의 육체적인 결함―이것 때문에 M은 서른이 넘도록 총각으로 지낸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M은 학생 시절부터 대단한 방탕 생활을 하였습니다. 방탕이라야 금전상의 여유가 부족한 그는, 가장 하류에 속하는 방탕을 하였습니다. 오십 전 혹은 일 원만 생기면, 즉시로 우동집이나 유곽으로 달려가던 그였습니다. 체질상 성욕이 강한 그는, 그 불붙는 정욕을 끄기 위하여 눈앞에 닥치는 기회는 한 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을 만날지라도 음식을 한턱 하라기보다 유곽을 한턱 하라는 그였습니다.

“질(質)로는 모르지만, 양(量)으로는 세계의 누구에게든 그다지 지지 않을 테다.”

관계한 여인의 수효에 대하여, 이렇게 방언하기를 주저치 않으리 만치 그는 선택(選擇)이라는 도정을 밟지 않고 ‘집어세었’습니다. 스물 서너 살에 벌써 이 백 명은 넘으리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서른 살 때는 벌써 괴승(怪僧) 신돈(辛旽)이를 멀리 눈 아래로 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지라 온갖 성병(性病)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술이 억배요, 그 위에 유달리 성욕이 강한 그는, 성병에 걸린 동안도 결코 삼가지를 않았습니다. 일 년 삼백 육십여 일 그에게서 성병이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늘 농이 흐르고, 한 달 건너쯤 고환염(睾丸炎)으로서, 걸음걸이도 거북스러운 꼴을 하여 가지고, 나한테 주사를 맞으러 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십 전, 혹은 일 원만 생기면, 또한 성행위를 합니다. 이런지라, 물론 그는 생식 능력이 없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을 잘 아는 나는 M이 결혼을 안 하는 이유를 여기다가 연결시켜 가지고, 그의 도덕심(?)에 동정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일생을 빈곤한 가운데서 보내고, 늙은 뒤에도 슬하도 없이 쓸쓸하게 지낼 그, 더구나 자기을 봉양할 슬하가 없기 때문에 백발이 되도록 제 손으로 이 고해를 헤엄치어 나갈 그는, 과연 한 가련한 존재이었습니다.

이렇던 M이, 어느덧 우리의 모르는 틈에 우물쭈물 혼약을 한 것이외다.

하기는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을 먹은 뒤에, 혼자서 신간 치료 보고서를 읽고 있을 때에 M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어두운 얼굴로 내가 묻는 이야기에도 그다지 시원치 않은 듯이 입술엣대답을 억지로 하고 있다가,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졌습니다.

“남자가 매독을 앓으면 생식을 못 하나?”

“괜찮겠지.”

“임질은?”

“글쎄, 고환을 ‘오까사레루(침벙당하지)’하지 않으면 괜찮아.”

“고환은…… 내 친구 가운데 고환염을 앓은 사람이 있는데, 인제는 생식을 못 하겠다고 비관이 여간이 아니야. 고환을 오까사레루하면 절대 불가능인가. 양쪽 다 앓았다는데…….”

“그것도 경하게 앓았으면 영향 없겠지.”

“가령 그 경하다치면…… 내가 앓은 게 그게 경한 편일까. 중한 편일까?”

나는 뜻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중하기도 그만치 중하게 앓은 뒤에, 지금 그게 경한 거냐 중한 거냐 묻는 것이 농담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으므로……. M의 얼굴은 역시 무겁고 어두웠습니다. 무슨 중대한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눈을 푹 내리뜨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본 뒤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아주 경한 편이지.”

이렇게 대답하여 버렸습니다.

“경한 편?”

“그럼.”

이리하여 작별을 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면 그 저녁의 그 문답이 오늘날의 그의 혼약을 이루게 하지 않았는가 합니다.

M이 혼약을 하였다는 기보(寄報)을 가지고 온 것은 T라는 친구였습니다. 그 때는 마침 (다 M을 아는) 친구가 너덧 사람 모여 있을 때였습니다.

“골동(骨董)―국보 하나 없어졌다.”

누가 이런 비평을 가하였습니다. 나는 T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연애로 혼약이 된 셈인가요?”

“연애. 연애가 다 무에요. 갈보 나까이(술집의 여자 종업원)밖에는 여자라는 걸 모르는 녀석이, 어디서 연애의 대상을 구하겠소?”

“그럼 지참금이라도 있답디까?”

“지참금이란 뉘 집 애 이름이오?”

나는 여기서 이 혼약에 대하여 가장 불유쾌한 면을 보았습니다. 삼십이 넘도록 총각으로 지낸 그로서, 연애라 하는 기묘한 정사 때문에 그 절(節)을 굽혔다면, 그것은 도리어 축하할 일이지 책할 일이 아니외다. 지참금을 바라고 혼약을 하였다 하더라도 지금의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더구나 그의 빈곤을 잘 아는 처지인지라) 크게 욕할 수가 없는 일이외다. 그러나 연애도 아니요, 금전 문제도 아닌 이 혼약에서는, 가장 불유쾌한 한 가지의 결론밖에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나는 가장 불유쾌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곽에 다닐 비용을 경제하기 위하여 마누라를 얻은 셈이구려.”

이 혹평(酷評)에 대하여 T는 마땅치 않다는 듯이 나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혹언할 것도 아니겠지요. M도 벌써 서른 두 살이든가, 세 살이든가, 좌우간 그만하면 차차로 자식도 무릎에 앉혀 보고 싶을 게고, 그렇다고 마땅할 마누라를 선택할 길이나 방법은 없고…….”

“자식. 고환염을 그만침이나 심히 앓은 녀석에게 자식. 자식은…….”

불유쾌하기 때문에 경솔히도 직업적 비밀을 입 밖에 내인 나는, 하던 말을 중도에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 말까지도 도로 삼킬 수가 없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오?”

M의 생식 능력에 대하여 사면에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이미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나는 그 말을 돌려 꾸미기에 한참 애를 썼습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혹은 M은 생식 능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찰을 안 해 본 바이니까, 혹은 또 생식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M이 너무도 싱거운 혼약을 한 데 대하여, 불유쾌하여 그런 혹언을 하였지만 그 말을 취소한다. 이러한 뜻으로 꾸며 대었습니다. 그리고 그 좌석에 있던 스무 살쯤 난 젊은이가,

“외려 일생을 자식 없이 지내면 편치 않아요?”

이러한 의견을 내는 데 대하여 ‘젊은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혈족의 애정‘이라는 문제와, 그 문제를 너무도 무시하는 요즘의 풍조에 대한 논평으로 말머리를 돌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M은 몰래 결혼식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친구들로서 M의 결혼식 날짜를 미리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모두들 제각기 하는 소위 신식 혼례식을 하지 않고, 제 집에서 구식으로 하였답니다. 모 여고보 출신인 신부는 구식 결혼이 싫다고 하였지만 M이 억지로 한 것이라 합니다.

이리하여 유곽에서는 한 부지런한 손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독점이라 하는 건 참 유쾌하던걸.”

결혼한 뒤에 M은 어떤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합니다. 비록 연애로써 성립된 결혼은 아니지만, 그다지 실패의 결혼은 아닌 듯하였습니다. 오십 전, 혹은 일 원의 돈을 내어 던지고 순간적 성욕의 만족을 사던 이 노총각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독점을 하였으매 그의 긍지가 적지 않았을 것이외다. 연애 결혼은 아니었지만 결혼한 뒤에 연애가 생긴 듯하였습니다. 언제든 음침한 이 기분이 떠돌던 그의 얼굴이 그럴싸해서 그런지 좀 밝아진 듯하였습니다.

“복 받거라.”

우리들―더구나 나는 그들의 결혼을 심축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한낱 M의 성행위의 기구로 M과 결합케 된 커다란 희생물인 그의 젊은 아내를 위하여, 이것이 행복된 결혼이 되기를 축수하였습니다. 동기는 여하튼 결과에 있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 너의 젊은 아내로서, 한 개 ‘희생물’이 되지 않게 하여라. 어머니로서의 즐거움을 맛볼 기회가 없는 너의 아내에게, 그 대신 아내로서는 남에게 곱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여라. M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진심으로 이렇게 축수하였습니다.

신혼의 며칠이 지난 뒤부터는, M이 젊은 아내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조금씩 들렸습니다. 완력을 사용한단 말까지 조금씩 들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는 그다지 크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런 소문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나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마신(魔神)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되풀이하여 보곤 하였습니다.

어떤 어부가 그물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물을 끌어올리니까 거기에 고기는 없고, 그 대신 병(甁)이 하나 걸려 있었습니다. 병은 마개가 닫혀 있고, 그 위에 납[鉛]으로 굳게 봉함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어부는 잠시 주저한 뒤에 병의 봉함을 뜯고 마개를 뽑아 보았습니다. 즉 병에서는 한 줄기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그 연기는 차차 뭉쳐서 거기는 커다란 마신이 나타났습니다.

“나를 이 병 속에 감금한 것은 선지자 솔로몬이다. 이 병 속에 갇혀 있는 동안 나는 스스로 맹세하였다. 백년 안에 나를 구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거대한 부(富)를 주겠다고. 그리고 백년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를 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맹세했다. 이제 다시 백년 안으로 나를 구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에게 이 세상에 있는 보배를 다 주겠다고. 그리고 헛되이 백년을 더 기다린 뒤에, 백년을 더 연기해서 그 백년 안에 나를 구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와 영화를 주겠다고. ……그러나 그 백년이 다 지나도 역시 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맹세했다. 인제 누구든지 나를 구해 주는 놈이 있거든 당장에 그놈을 죽여서 그새 갇혀 있던 그 분풀이를 하겠다고.“

이것이 병 속에서 나온 마신의 이야기였습니다. M이 자기의 젊은 아내를 학대한다는 소문이 들릴 때에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십이 지나도록 총각으로 지낸 그 고통과 고적함에 대한 분풀이를 제 아내에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실컷 학대해라, 더욱 축수하였습니다.

M이 결혼한 지 이 년이 거의 된 어떤 날 저녁이었습니다. 그와 나는 어떤 곳에서 저녁을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이 날 유난히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그는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술만 들이키고 있었습니다. 본시 말이 많지 않은 그가 이 날은 더욱 입이 무거웠습니다.

몹시 취하여 더 술을 먹지 못하리 만치 되어서, 그는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충혈이 된 그의 눈은 무시무시하게 번뜩였습니다.

“여보게 여보게. 속이지 말구 진정으로 말해 주게. 내게 생식 능력이 있겠나?”

“글쎄, 검사를 해 보아야지.”

나는 이만치 하여 넘기려 하였습니다.

“그럼 한번 진찰해 봐 주게.”

“왜 갑자기…….”

그는 곧 대답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오려던 말을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술을 한잔 먹은 뒤에, 눈을 푹 내리뜨며 말했습니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내게 만약 생식 능력이 없다면 저 사람(자기의 아내)이 불쌍하지 않나. 그래서 없는 게 판명되면 아직 젊었을 때에 헤져서 저 사람이 제 운명을 다시 개척할 ‘때’를 줘야지 않겠나. 그래서 말일세.”

“진찰해 보아야지.”

“그럼 언제 해 보세.”

그 며칠 뒤에 나는 M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검사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M은 그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M의 아내는 임신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M이 검사하겠다던 마음을 짐작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 날의 제 말마따나 ‘아내의 장래를 위하여’ 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내에게 대한 의혹 때문에 하여 보려는 것일 것이외다. 자기도 온전히 모르는 바는 아니로되, 십중 팔구는 자기는 생식 불능자일 텐데 자기의 아내는 임신을 한 것이외다.

생각하면 재미있는 연극이외다. 생식 능력이 없는 M은, 그런 기색도 뵈지 않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M에게로 시집을 온 새 아내는 임신을 하였습니다. 제 남편이 생식 불능자인 줄 모르는 아내는, 뻐젓이 자기의 가진 죄의 씨를 M에게 자랑을 하고 있을 것이외다. 일찍이 자기가 생식 불능자인지도 모르겠다는 점을 밝혀 주지 않은 M은, 지금 이 의혹의 구렁이에게도 제 아내를 책할 권리가 없을 것이외다. 그가 검사를 하겠다 하나, 검사를 하여서 자기가 불구자인 것이 판명된 뒤에는 어떤 수단을 취할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내의 음행을 책하자면 자기의 사기적 행위를 폭로시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외다. 그것을 감추자면, 제 번민만 더욱 크게 할 것이외다.

어떤 날, 그는 검사를 하자고 왔습니다. 그 때 마침 환자가 몇 사람 밀려 있던 관계상 나는 그를 내 사실에 가서 좀 기다리라 하고, 환자 처리를 다 하고 내려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그는 다시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돌아가 버렸습니다.

나도 사실 어찌하여야 할지 똑똑히 마음을 작정치 못했던 것이외다. 검사한 뒤에 당연히 사멸해 있을 생식 능력을 살아 있다고 하자니, 그것은 나의 과학적 양심이 허락지 않는 바외다. 그러나 또한 사멸하였다고 하자니, 이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망쳐 버리는 무서운 선고에 다름없습니다. M이라 하는 정당한 남편을 두고도 불의의 쾌락을 취하는 M의 아내는 분명히 책받을 여인이겠지요. 그러나 또한 다른 편으로 이 사건을 관찰할 때에, 내가 눈을 꾹 감고 그릇된 검안을 내린다면, 그로 인하여 절대로 불가능하던 M이 슬하에 사랑스런 자식(?)을 두고 거기서 노후의 위안도 얻을 수 있을 것이요, 만사가 원만히 해결될 것이외다.

내가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갈림길에 서서, 나는 어느 편 길을 취하여야 할지 판단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사오 일 뒤에 저절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날도 역시 침울한 얼굴로 찾아온 M에게 대하여, 나는 의리상

“오늘 검사해 보자나?”

하니깐 그는 간단히 대답하였습니다.

“벌써 했네.”

“응. 어디서?”

“P병원에서.”

“그래서 그 결과는?”

“살았다데.”

“?”

나는 뜻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의외의 대답을 들은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살았다데.’ 하는 그의 음성이 너무 침통하기 때문에…….

“그럼 안심이겠네.”

이렇게 대답하는 동안, 나는 내가 하마터면 질 뻔한 괴로운 임무에서 벗어난 안심을 느끼는 동시에, P병원에서의 검안의 의외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눈을 만난 M의 눈은 낭패한 듯이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눈으로 그가 방금 한 말이 거짓말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럼 그는 왜 거짓말을 하였나. 자기의 아내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세상과 제 마음을 속여 가면서라도 자식을 슬하에 두어 보기 위하여.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무겁고 침울한 음성이었습니다.

“여보게, 자네 이런 기모치(기분) 알겠나?”

“어떤?”

그는 잠시 쉬어서 말을 시작했습니다.

“월급쟁이가 월급을 받았네. 받은 즉시로 나와서 먹고 쓰고 사고, 실컷 마음대로 돈을 썼네. 막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세. 지갑 속에 돈이 몇 푼 안 남아 있을 것은 분명해. 그렇지만 지갑을 못 열어 봐. 열어 보기 전에는 혹은 아직은 꽤 많이 남아 있겠거니 하는 요행심도 붙일 수 있겠지만 급기야 열어 보면 몇 푼 안 남은 게 사실로 나타나지 않겠나. 그게 무서워서 아직 있거니, 스스로 속이네그려. 쌀도 사야지. 나무도 사야지. 열어 보면 그걸 살 돈이 없는 게 사실로 나타날 테란 말이지.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지갑에서 손을 멀리하고 제 집으로 돌아오네. 그 기모치 알겠나?”

나는 머리를 끄덕이었습니다.

“알겠네.”

그는 다시 입을 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알았습니다. M은 검사도 하여 보지 않은 것이외다. 그는 무서워합니다. 그는 검사를 피합니다. 자기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상식으로 판단하여 물론 남편의 아일 것이외다. 거기 대하여 의심을 품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외다. 의심을 품을 필요도 없는 것이외다. 왜. 여인이 남편을 맞으면 원칙상 임신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깐.

이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을 의심하다가 향기롭지 못한 결과가 나타나면, 이것은 자작지얼(自作之孼)로서 원망할 곳이 없을 것이외다. 벌의 둥지를 건드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외다. 십중 팔구는 향기롭지 못한 결과가 나타날 ‘검사’를, M은 회피한 것이외다. 절망을 스스로 사지 않으려 ― 그리고, 번민 가운데서도 끝끝내 일루의 희망을 붙여 두려, M은 온전히 ‘검사’라는 위험한 벌의 둥지을 건드리지 않기로 한 것이외다. 그리고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제 아내 뱃속에 있는) 자식에게 대하여, 억지로 애정을 가져 보려 결심한 것이외다. 검사를 하여서 정충이 살아 있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사멸하였다면 시재 제 아내와의 새에 생길 비극과 분노와 절망은 둘째 두고라도, 일생을 슬하에 혈육이 없이 보내고, 노후에 의탁할 곳을 가질 가능성조차 없는 절망의 지위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외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외다.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을 거부(拒否)하고까지 이런 모험 행위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외다. 이리하여 그는 검사는 단념했지만, 마음에 의혹만은 온전히 끄지를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그 뒤 어떤 날 그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식은 꼭 제 애비를 닮는다면 좋겠구먼…….”

거기 대하여 나는 닮은 예를 여러 가지로 들어서 말하여 주었습니다. 그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여인이 애를 배면 걱정일 테야. 아버지나 친할아비를 닮는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외편을 닮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고 닮지 않으면 걱정이 아니겠나. 그저 애비를 닮아야 제일이야. 하하하…….”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글쎄 말이지. 내 전문이 아니니깐 이름은 기억 못 하지만, 독일 소설에 이런 게 있지 않나. 「아버지」라나 하는 희곡 말일세. 자식을 낳았는데 제 자식인지 아닌지 몰라서 번민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지. 그것도 아버지만 닮으면 문제가 없겠지.”

“아! 아, 다 귀찮어.”

M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습니다.그 아이가 반 년쯤 자랐습니다.

어떤 날 M은 그 아이를 몸소 안고, 병을 뵈려 나한테 왔습니다. 기관지가 조금 상하였습니다. 약을 받아 가지고도 그냥 좀 앉아 있던 M은, 묻지도 않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이놈이 꼭 제 증조부님을 닮었다거든.”

“그래?”

나는 그의 말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끼면서 이렇게 응했습니다. 내 눈으로 보자면, 그 어린애와 M과는 관련도 없는 바인데, 그 애가 M의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은 기이함으로써…… 어린애의 친편과 외편의 근친(近親)에서 아무도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M의 친척은, 하릴없이 예전의 조상을 들추어 내인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애에게, 커다란 의혹과 그보다 더 커다란 희망(의혹이 오해였던 것을 바라는)은 M으로 하여금 손쉽게 그 말을 믿게 한 모양이었습니다. 적어도 신뢰하려고 마음먹게 한 모양이었습니다.

내가 자기의 말에 흥미를 가지는 것을 본 M은, 잠시 주저하다가 그가 예비했던 둘째 말을 마침내 꺼내었습니다.

“게다가 날 닮은 데도 있어.”

“어디?”

“이 보게.”

M은 어린애를 왼편 팔로 가만히 옮겨서 붙안으면서, 오른손으로는 제 양말을 벗었습니다.

“내 발가락 보게. 내 발가락은 남의 발가락과 달라서, 가운뎃발가락이 그 중 길어. 쉽지 않은 발가락이야. 한데…….”

M은 강보를 들치고 어린애의 발을 가만히 꺼내어 놓았습니다.

“이놈의 발가락 보게. 꼭 내 발가락 아닌가. 닮았거든…….”

M은 열심으로, 찬성을 구하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닮은 곳을 찾아보았기에 발가락 닮은 것을 찾아내었겠습니까?

나는 M의 마음과 노력에 눈물겨워졌습니다. 커다란 의혹 가운데서 그 의혹을 어떻게 하여서든 삭여 보려는 M의 노력은 인생의 가장 요절할 비극이었습니다. M이 보라고 내어 놓은 어린애의 발가락은 안 보고, 오히려 얼굴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는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발가락뿐 아니라 얼굴도 닮은 데가 있네.”

그리고 나의 얼굴로 날아오는 (의혹과 희망이 섞인) 그의 눈을 피하면서 돌아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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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는 한국의 대표적인 무속신화이며, 전국에서 전승된다. 지역마다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아래의 본문은 김태곤, 최운식, 김진영 공저의 한국의 신화를 기본으로 해서 서 대석교수님의 한국의 신화와 황패강 교수님의 한국의 신화를 참고해 주석을 넣었습니다.
◦보기: (서:서대석, 황 :황패강) •이 신화는 사자를 저승으로 천도시켜주는 굿인 지노귀새남의 말미에 부르는 무가입니다.
•어비대왕 : 어비1는 무섭다는 말의 방언. - 민음사 출판의 조선의 귀신에서는 처용을 어비대왕이라 했다고 합니다. 바리공주도 용왕의 딸이고 처용의 처로 나옵니다.)
•바리공주는 버린 공주라는 뜻. •분량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4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지은이

출전

분몬

바리공주의 탄생과 부모와의 이별
옛날에 삼나라(황:천별산)를 다스리는 어비대왕(황:오구대왕)이란 임금이 있었다. 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정전(正殿)이 비어 있는 것이 흠이었다. 여러 종실과 시신백관이 간택할 것을 아뢰었다. 대왕은 간택할 것을 허락하는 전교를 내렸다. 나라에 영을 내려 간택을 하는데, 이간택, 삼간택을 하여 길대부인(황 : 병온)을 국모로 모시게 되었다.
"국가에 길흉을 알고 싶은데 어디 용한 복자(卜者)가 있더냐?" 대왕마마가 시녀 상궁에게 물었다.
"천하궁의 갈이박사(서: 다지(多智)박사(='박수' : 남자무당)), 제석궁의 소수락시(서 : 모란(牡丹)박사), (서 : 지하궁의 소실악씨('소실애기씨' : 여자무당)), 명두궁의 주역박사(서 : 명도(冥塗, 명계)궁의 강림(=강림도령,강림 : 저승사자)박사)가 용하다고 하더이다."
"천하궁에 가서 문복(問卜)하여라" 대왕의 전교를 받은 상궁은 생진주 석 되 서홉, 금돈 닷 돈 자금 닷 돈을 간추려 싸가지고 천하궁의 갈이박사를 찾아갔다.
천하궁의 갈이박사는 백옥반에 백미를 흩어놓고 점을 치기 시작했다.
"초산은 흐튼산이요, 이산은 상하문(上下門)이요, 세 번째는 이로성이외다." 상궁에게 점괘를 일러 주었는데,
"아뢰옵기 황송하나, 금년에 길례를 하면 칠공주를 보실 것이오, 내년이 길례를 하면 세자대군(서 : 삼동궁(세사람의 왕자))를 보시리이다." 상궁은 돌아와 그대로 아뢰었다. 상궁의 말을 들은 대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문목이 용하다고 한들 제 어찌 알소냐, 일각이 여삼추요, 하루가 열흘 같은데 어떻게 기다리겠느냐" 어비대왕은 예조(서 : 관상감)에게 택일을 명했다.
삼월 삼일을 초간택을 봉하시고 오월 오일 단오는 이간택을 봉하시고, 칠월 칠일 견우직녀가 상봉하는 날을 길례로 정하고 길례도감을 설치한후 준비하시 시작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몇 달이 석달이 지나가니 길대부인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수라에서는 생쌀내가 나고, 어수(중전마마가 드시는 물)에서는 해감(물속에 생기는 썩은 냄새나는 찌꺼기)내가 나고, 금광초(담배의 일종)에 풋내가 나고 탕수(국)에서는 날장내(생장냄새)가 나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대왕마마에게 와뢰자 대왕마마가 묻는다.
"몽사가 어떠하더이까?" "예. 품안에 달이 돋아 뵈고 오른 손에 청도화(靑桃花) 한 짝을 꺽어 들고 있더이다." 대왕마마는 상궁에게 문복 가라 명했다.
천하궁의 다지막사는 점을 쳐 상궁에게 일러준다.
"길대 중전마마의 태기가 분명하구나. 자식을 보시는데 여공주를 볼것이요" 그대로 상달하자.
"문복이 용하다고 한들 제 어찌 알소냐" 고 웃어 넘긴다.
열달이 되어 낳으니 공주였다. 공주의 탄생을 대왕마마께 아뢰자 "공주를 낳았으니 세자인들 아니 날소냐, 귀하게 길러라."
하신다.
공주 애기가 태어난지 석 달이 되자 청대공주(서 : 청도공주, 황 : 청난)라 하고 별호로 다리당씨(서 : 달이장 아씨)라 하였다.
세월이 흘러 길대부인은 또 잉태했는데, 몽사를 말하기를
"품안에 칠성별이 떨어져 보이고 오른손에 홍도화 한가지를 물고 있더이다." 또 딸을 낳아 이름을 홍대공주(서 : 홍도공주, 황 : 홍난)라 하고 별호로 별이당씨(서 : 별이장 아씨)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렸는데, 계속 딸이 태어나 딸만 육형제를 두게 되었다.
(황 : 백난, 사녀, 오녀, 육녀)
육형제를 낳은 후 길대부인은 다시 잉태하였다.
"이번 몽사는 어떠하더이까" "이번 몽사는 연약한 몸이 부지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 대명전 대들보이 청룡 황룡이 엉켜져 보이고 오른손에 보라매, 왼손에 백마르 받아보이고 왼 무릎에 흑거북이 앉아 뵈고 양 어깨에는 일월이 돋아 뵈더이다." 길대부인의 말을 들은 대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대가 이번에는 세자 대군을 낳겠구려." 그리고는 상궁에게 문복갈 것을 명했다.
문복을 다녀온 상궁이 아뢰었다.
"이번에도 공주를 본다고 합니다." "점복이 용하다 한들 점복마다 맞출소냐. 이번 몽사는 세자 대군을 얻을 몽사로다." 하며 사대문에 방을 붙어 옥문을 열어 중죄인을 용서하게 하였다.
드디어 열달이 되어 해산을 하였는데 또 딸이었다. 길대 중전마마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대왕은 길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 전생의 죄가 남아 옥황상제가 일곱 딸을 점지하였구나. 서해 용왕에게 진상이나 보내리다." 옥장이 불러서 옥함을 짜게 하여 함 뚜껑에 '국왕공주'라 새기게 했다.
중전마마가 탄식하며 말했다.
"대왕마마는 모질기도 모지시다. 혈육을 버리려 하옵시니, 신하 중 자식 없는 신하에게 양녀로 주시지" 대왕마마는 중전마마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버리는 자손 이름이나 지읍시다." "버려도 버릴 것이요 던져도 던질 것이니 '바리공주'라 지어라." (서 : 발이다(버리다) 발이덕이(바리데기), 더지다(던지다) 더지덕이) 양 마마의 생월 일시와 아기의 생월 생시를 옷고름에 맨 후에 옥병에 젖을 넣어 아기 입에 물린 후 함에 넣었다. 금거북 금자물쇠, 흑거북 흑자물쇠를 채운 후에 신하를 시켜 바다에 버릴 것을 명했다.
앞에는 황천강 뒤에는 유사강이 흐르는 여울에 한번 던지니 용솟음하여 뭍으로 다시 나오고 두 번째 던져도 뭍으로 다시 나온다. 세 번째 던지니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하늘이 안던 자손이라 깊이 가라앉지 않고 금거북이 나타나 지고 간다.

부모님과의 재회
이때, 석가세존이 삼천세자를 거느리고 사해도 구경하고 인간도 제도할겸 해서 세상으로 나오다가 타향산 서촌을 굽어보니 밤이면 서기가 하늘에 가득하고 낮에는 안개가 자욱한 것이 이상했다.
"목련존자 들어라. 저곳에 하늘이 하는 천인이 있을 것이니, 네가 가서 살펴보아라" 다녀온 목련존자가 석가세존에게 아뢰었다.
"소승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석가 세존은
"네 공부 아직 멀었다." 하시며 돌배를 바삐 지어 가까이 가보니 국왕의 일곱째 공주였다.
"남자 같으면 제자나 삼으련만 여자니 부질없구나." 석가세존은 탄식하였다.
주위를 살펴보니 비리공덕 할아비와 비리공덕 할미가 바랑을 둘러메고 노감투 숙여 쓰고 황천경을 손에 들고 자지곡(서 : 지옥노래)을 노래삼아 외우면서 온다. 석가 세존이 묻는다.
"어떤 할아비, 할미가 시름없이 다니는고?" "저희는 비리공덕 할아비, 비리공덕 할미 입고, 절을 지어 승인(僧人)공덕, 다리 놓아 만인 공덕 원을 지어 행인 공덕을 할지라도 옷벗어 주는 대시주와 부엌공덕이 가장크고 젖 없는 자손 젖 먹여 주는 공덕이 제일입니다." "여기에 하늘이 아는 자손이 있으니 데려다가 길러라" 석가세존의 말을 듣고 할미가 말했다.
"봄과 가을에는 들에서 머무르고 겨울에는 굴 속에 머무는데 어찌 중한 자손을 데려다 기르겠습니까?" "이 아기를 데려다 기르면 집도 생기고 옷과 밥이 절로 생길 것이니 데려다 길러라." 말을 마친 석가세존은 온데간데 없이 바람처럼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할아비와 할미는 부처님인 줄 알았다.
함을 굽어보니 국왕 칠공주라 써 있었다. 함 앞에서 효성경과 애정경과 금강경, 법화경, 천지팔양경을 차례로 외우니 함 뚜껑이 열린다. 함 속에 든 아이를 보니 입에는 왕거미가 가득하고 귀에는 불개미가 가득하고 허리에는 구렁이가 감겨 있었다. 아이를 데려다가 물로 깨끗하게 씻었다. 가사장삼을 벗어 씻은 아이를 안고 돌아서니 난데없는 초가삼간이 절묘하게 지어져 있다. 비리공덕 할아비, 비리공덕 할미는 거기서 아이를 키우기로 하였다.
아기는 점점 자라나 어느 덧 일곱 살이 되니 배우지 않은 학문에도 능통하여 상통천문 하달지리 육도삼략 모두가 무불통지하여 모를 것이 없다.
하루는 아기가 묻는다.
"할미 할아비야, 내 아바마마 어마마마는 어디 계시냐?" 할아비와 할미가 아뢴다.
"아바마마는 하늘이고 어마마마는 땅이로소이다." "할아비, 할미, 거짓말마소. 천지가 인간을 골육으로 두던가." 할미는 뜰로 내려가 옷깃을 여민 후 눈물을 흘리며 아뢴다.
"무주고아(無主孤兒)인 아기씨에게 의탁하려 하였더니 부모를 찾습니까. 전라도 왕대(王竹)이 아바마마이시고, 뒷동산 옆 넓은 머구나무가 어마마마이십니다." "할미 거짓말 마소, 금수와 초목도 인간 골육을 두던가, 전라도 왕대는 아바마마 승천하시면 아랫동 윗동 잘라낸 후 두건 숙여 쓰고 짚는 데 쓰는 것이고 뒷동산 머구나무느 어마마마 승하하시면 아랫동 윗동 잘라내고 두건 숙여쓰고 짚으라는 것이니 그게 어찌 부모 되겠나." 이럭저럭하여 세월은 자꾸 가고 아가씨는 십오 세의 나이가 되었다.
한편 대왕마마 내외가 한날 한시에 똑같이 병이 들어 시녀 상궁들은 걱정이 많았다. 하루는 대왕마마가 상궁을 부르더니
"옛날의 문복이 용하더구나. 가서 점 한 번 쳐 보아라." 하고 문복할 것을 명했다.
상궁이 천하궁의 갈이박사를 찾아가 점괘를 들었다.
"동쪽에는 해가 떨어지고 서쪽에는 달이 떨어지니 양전마마가 한날 한시에 승하하리다. 바리공주의 사처를 찾으소서" 상궁으로부터 점괘를 들은 대왕마마는 길게 탄식하였다.
"종묘사직을 뉘게다 전하고 조정 백관은 뉘게 의지할고, 만백성은 뉘게 의탁하고, 시녀 상궁은 뉘게 의지할소냐" 눈물을 흘리다가 언뜻 잠이 들었는데 뜰 가운데에 난데없는 청의동자가 나타나 절을한다.
"어떠한 동자인데 깊은 궁중에 들어왔느뇨?" 동자가 올라와서 아뢴다.
"양전 마마가 한날 한시에 승하하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사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조정 백관에 원망이 있더냐? 시녀 상궁에게 원책이 있더냐? 만인에게 원한이 있다더냐?" 대왕이 묻자 동자가 대답한다.
"원책도 아니오. 원망도 아닙니다. 옥황상제가 점지한 칠공주를 버린 죄로 그러합니다." "그러면, 어찌 다시 회춘하리오?" "다시 회춘하려면 동해 용왕과 서해 용왕이 있는 용궁에서 약을 잡수시거나, 삼신산 불사약과 봉내방장 무장승의 양현수(藥水)를 얻어 잡수시면 회춘하리다. 바리공주 사처를 찾으소서" 하고 동자는 온데 같데 없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깨어보니 남가일몽 꿈이었다.
대왕마마는 신하들을 불러 물어보았다.
"약수를 얻어다가 나를 회춘시킬 신하가 있는가?" "동해 용왕도 용궁이고 서해 용왕은 천궁이고 봉내방장 무장승의 향헌수는 수용궁이라 살아 육신은 못 가고 죽어 혼백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거행할 신하가 없습니다." 신하들이 아뢰는 말을 들은 대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용상을 치며 탄식하였다.
"바리공주 찾는 자는 천금상에 만호후를 봉하리라." 신하들에게 바리공주 찾을 것을 명령했다.
한 신하가 나와 대왕마마에게 아뢴다.
"소신은 대대로 구록을 먹어 국은이 망극합니다. 간밤에 천기를 잠깐 보니 서쪽에 밤이면 서기가 하늘에 가득하고 낮에는 운무가 자욱하니 그곳에 공주가 계신 것 같습니다. 소인이 찾으러 가겠습니다." 그러자 중전마마가
"간 곳도 없이 한번 버린 자손을 어디 가서 찾으리요" 하면서 탄식하였다.
"그리하여도 가려하나이다." 신하는 거듭 청했다.
"그러면 가라" 대왕마마는 어주 삼배를 내린 후에 하직하고 길을 떠나 보냈다.
대궐문을 나서자 어딘지 갈 바를 몰라 신하가 망설이고 있는데, 까막까치가 나타나 고개짓을 하며 길을 인도하고 풀과 나무들도 한곳으로 쏠리며 방향을 알려 인도해 태양 서촌으로 찾아 들어갔다.
마을에 들어가니 월직사자와 일직 사자가 나타나 묻는다.
"인내가 나는구나. 그대는 사람인가 귀신인가. 길짐승, 날새도 못 들어오는 곳에 어떻게 왔는가.?" "나는 양전 마마의 명을 받들고 바리공주를 찾기 위해 생사를 결단하고 왔나이다." 사자들은 신하를 대문으로 안내했다. 쇠문을 두드리며 소리쳐 부르니 비리공덕 할아비, 할미가 나온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날새 길짐승도 못 들어오는데 천궁을 범하느냐?" "저는 국왕마마의 분부로 바리공주를 찾아왔나이다." 바리공주가 나와서 신하에게 묻는다.
"표적을 가져왔는가?" "아기의 칠일 안저고리를 가져왔습니다. 죄가 많아 국왕 자손을 이 산중에 버렸구나 하시면서 용루를 흘리시며 표적을 주더이다." 바리공주가 표적을 받아보니 양전 마마의 생월 생시며 애기의 생월 생시가 꼭 같았다.
"그래도 못 가겠구나. 다른 표를 가져오너라" 금쟁반에 정안수를 담고 대왕마마 무명지를 베어 피를 흘리게 하고 아기 무명지를 베어 섞으니 한 데로 합친다. 그제서야 바리공주는
"틀림없는 혈육이니 가겠노라" 고 하며 따라나선다.
"그리하면 금연(金輦)을 드리릿가. 옥교(玉較)를 드리릿가.?" 공주는 사양하였다.
"그리하오면 거동 시위를 하오릿까?" "거동시위를 내 어찌 알겠느냐. 그대로 가리라." 바리공주는 자기가 살던 곳을 정리한 후 대궐을 향해 떠났다. 일행은 몇날을 걷고 또 걸어서야 대궐에 당도했다.
"궐문 밖에 도달하였나이다." 신하가 먼저 들어가 대왕마마에게 아뢰엇다.
"그러냐, 궐문에 들게하라" 바리공주가 대명전에 읍하고 통곡하니 대왕마마는 용루를 흘리시며
"저 자손아 울음을 그쳐라. 네가 미워 버렸으랴. 역정 끝에 버렸도다. 봄삼월은 어찌 살고 겨울 삼삭은 또 어찌 살았으며, 배 고파서 어찌 살았느냐?" 바리공주는 울음을 그치며 말했다.
"추위도 어렵고 더위도 어렵고 배고픔도 어렵더이다." "그래 어허, 저 자손아 부모 목숨 구하러 가겠느냐?" "아흔 아홉 빗장 속에서 청사 흑사 이불에 진주 안석으로 귀하게 기른 여섯 형님네는 어찌 못 가나이까?" 여섯 형님네가 옆에 있다가.
"뒷동산 후원에 꽃구경 가서도 동서남북을 분간치 못하고 대명전도 찾지 못하는데 서천서역을 어찌 갈 수 있겠느냐" 고 하는 말이 오뉴월의 악다구리 우는 소리 같다. 바리공주가 드디어 가겠다고 나섰다.
"소녀는 열달 동안 부모님 배속에 있었으니 그 은혜가 커서 가도록 하겠나이다."
바리공주의 모험
대왕마마는 바리공주에게 비대 창옥, 비단 고의, 고운 패랭이, 무쇠 질방, 무쇠 주령, 무쇠 신을 내려 주었다. 바리공주는 그것을 받아 몸에 걸친 후 대궐문을 나섰다. 나서니 동서를 분간치 못하고 갈 곳도 아득했다. 망설이고 서 있는데 까막 까치가 날아와서 길을 인도해 준다. 바리공주가 무쇠 지팡이를 한 번 짚으니 펀리를 가고, 두 번 짚으니 이천리를, 세 번 짚으니 삼사천리를 간다. 때는 춘삼월 호시절로 백화는 만발하고 시내는 잔잔했다. 푸른 버들 속에 황금 같은 꾀꼬리는 벗을 부르느라 지저귀고 앵무 공작은 서로 희롱한다.
금바위 밑을 보니 반송이 구부러졌는데 석가여래와 지장보살이 바둑을 두고 있다. (황 : 석가세존님과 지장보살님에게 오기전까지의 모험이 그려져 있다. - 검은빨래가 눈처럼 희어질때까지 빨래를 해 주고, 무쇠 다리 아흔 아홉칸을 놓아주고, 탑을 쌓아주고, 검은 수건을 하얗게 빨아주는 일) 바리공주는 나가 재배하였다. 그러자 석가세존님은 눈을 감으시고 지장보살이 말씀하신다.
"귀신인가 사람인가.? 날짐승 길짐승도 못 들어오는데 천궁을 범하였구나" "소신은 조선국왕의 일곱째 대군인데 부모님 목숨 구할 약수 가지러 왔다가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소신의 길을 인도하소서" 그제서야 석가세존님은 눈을 뜬다.
"나는 국왕의 칠공주란 말은 들었지만 일곱째 대군이란 말은 듣던 중 처음이로다. 네가 하늘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리라. 너를 태양서촌에 버렸을 때 잔명을 구한 게 나인데 나를 속일소냐? 부처님 속인 죄는 팔만사천지옥을 가는 죄이다. 그래도 네가 용하구나, 육로 육천리를 왔으니 험한 길 삼천리가 남았는데 어찌 가려느냐?" "가다가 개죽음을 당할지라도 가려 하나이다." 석가세존님은 감동한 듯 머리를 연신 끄덕인다.
"정성이 지극하면 지성이 감천이다. 네 말이 기특하니 내가 길을 인도하리라. 낭화(열매를 맺지 않는 꽃)을 가져 왔느냐?" "촉망중이라 가져오지 못했나이다" 석가세존님은 낭화 세 가지와 금주령(황 : 금지팡이)을 주시며 일러준다.
"이 주령을 끌고 가면 험로가 평탄해지고 대해는 물이 되느니라" 바리공주는 두 손으로 받고 하직 인사를 올린 후 길을 떠났다.
한 곳에 당도하니 칼산지옥, 불산지옥, 독사지옥, 한빙지옥, 구렁지옥, 배암지옥, 문지옥이 펼쳐져 있었다(황 : 팔만 사천지옥). 철성(鐵城)이 하늘에 닿았는데 구름도 쉬어 넘고 바람도 쉬어 넘는 곳이었다. 귀를 기울이니 죄인 다스리는 소리가 나는데 육칠월 악마구리 우는 소리 같았다. 낭화를 흔드니 칠성이 무너지고 죄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없는 죄인, 팔없는 죄인, 다리없는 죄인, 목 없는 죄인, 귀졸들이 나와 바리공주에게 매달리며 구제해 달라고 애원한다. 바리공주는 그들을 위해 염불을 외어 극락 가기를 빌어 주었다. 바리공주가 이곳을 지나니 또 커다란 바다가 펼쳐 있다. 이곳은 날짐승의 깃도 가라앉는 곳으로 배도 없는 곳이다. 망설이던 바리공주는 부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금주령을 하늘로 던졌다. 그러자 무지개가 서서 건너갈 수가 있었다. 건너가니 키는 하늘에 닿고, 눈은 등잔 같고 얼굴은 쟁반 같은 무장승이 서 있다.
"사람인가 귀신인가? 열 두 지옥을 어찌 넘어오며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도 쉬어 넘고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넘는 철성을 어떻게 넘어 왔는가.? 또 모든 것이 가라앉는 삼천리 바다(弱水약수)(서 :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 부력이 약하여 큰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 다고 한다.)는 어찌 넘어 왔는가?" "나는 국왕의 일곱째 대군인데, 무장승의 약수를 얻어다가 부모님 살릴려고 왔나이다" "그대 길 값을 가져왔는가" "촉마중에 못 가져 왔나이다" "길 값으로 나무 삼년 하여 주오" "그리 하오이다." "삼값으로 불 삼 년 때 주오" "그리 하오이다" "물 값으론 물 삼 년 길어 주오" "그리 하오이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석삼 년 아홉 해가 되니 하루는 무장승이,
"그대의 상이 남루하여 보이나 앞으로는 국왕의 기상이요, 뒤로는 여인의 몸이니 나와 천생 배필이라. 혼인하여 아들 일곱을 낳아 주오."한다. 바리공주와 무장승은 천지로 장막을 삼고, 일월로 등촉을 삼고, 썩은 나무 등걸로 원앙금침을 삼고 살림을 시작했다. 세월은 또 흘러서 바리공주는 마침내 아들 입곱을 낳아 주었다.
바리공주는 이제 그만 돌아가겠다고 했다.
"부부의 정도 중하지만 부모님께 효행이 늦어지니 바삐 가야겠나이다." "앞바다의 물 구경을 하고 가소" 무장승이 청했다.
"물 구경도 싫소" "뒷동산 꽃 구경 하고 가소" "꽃 구경도 싫소. 초경에 꿈을 꾸니 금관자가 부러져 뵈고 이경에 꿈을 꾸니 신관자가 부러져 뵈더이다. 양전 마마가 승하할 꿈이니 급히 가야겠소" "그리하면 그대가 길어다 쓰는 물이 약수이니 가져가고, 베던 풀은 개안초이니 가져가오. 뒷동산 후원의 꽃은 숨 살이, 뼈 살이, 살 살이 꽃이니 가져가오. 숨 살이, 뼈 살이, 살 살이의 삼색 꽃은 눈에 넣고 개안초는 몸에 품고 약수는 입에 넣으시오" 바리공주는 물을 넣어 짊어지고 하직 인사를 한 후 길을 떠나려 하자.
"그 전에는 혼자 살았으나 이제는 혼자 살 수 없소. 나도 공주 따라 가리다." 무장승도 가겠다고 나섰다. 갈때는 한 몸이더니 돌아올 때에는 아홉 몸이었다

부모님의 회생과 무신이 된 바리공주
갈치산 불치 고개 대세지 고개를 넘어오니 피바다에 배들이 떠다닌다.
"염불을 외우고 아미타불 소리 요란하고 연꽃이 사방에 바쳐져 있고 거북이 받들고 청룡 황룡이 끄는 배는 어떤 밴고?" 바리공주가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물었다.
"그 배는 오는 망자는 세상에 있을 적에 다리 놓아 만인공덕, 원을 지어 행인 공덕, 절을 지어 중생 공덕, 옷을 벗어 시주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염불 열심히 하고 만인에게 시주하여 극락세계 연화대로 소원 성취하러 가는 배입니다." 그 뒤에 배 한 척이 또 따르고 있어 바리공주가 물어보았다.
"풍류로 잔치하고 화기가 만발하여 웃음으로 열락(悅樂)하고 고운 향기가 가득하여 맑은 기운을 띠고 오는 배는 어떤 밴고?" "그 배에 오는 망자는 세상에 있을 적에 나라에 충신이요 부모에 효성하고 동기간에 우애있고 일가에 화목하고 동네 사람에게 유순하고 가난한 사람 구제하며 선심으로 평생을 살다가 죽은 후에 초단에 사제 삼성 지노귀굿 받고 이단에 새남굿 받고 삼단에 법식 받고 시왕제 사십구제 백일제 받아 극락세계에 왕생극락하러 가는 배로소이다." "또 그 뒤에 오는 활 든 사람, 창 든 사람이 둘러있고 머리 풀어 산발하고 의복도 벗기고 결박하여 울음소리 가득하고 모진 악기가 충만하니 그것은 또 어떤 배인고?" "그 배에 오는 망자는 세상에 있을 때에 나라에 역적이요, 부모에게 불효하고, 동기간에 우애 없고 일가에 살(煞)이 세고 동네 사람에게 불순하고 시주도 못하고 남의 험담 잘하고 남의 말 엿듣고 역매흥정하고 이간질하여 싸움 붙이기와 사람 죽이기 심하고 탐이 많아 작은 되로 주고 큰 말로 받고 짐승 많이 죽이고 불법을 비방하였기에 화탕지옥 칼산지옥으로 가는 배로소이다." 또 한 배가 보이는데 그 배는 불도 없고 달도 없고 임자도 없고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저 배는 어떤 밴고?" "그 배에 있는 망자는 무자귀신(無子鬼神)과 해산길에 죽은 망자와 시왕제(十王祭) 사십구제 지노귀 새남도 못받고 길을 읽고 세계를 몰라 임자없이 얹혀 있는 배로소이다." 바리공주는 크게 슬퍼하며 염불하여 그들이 극락왕생하도록 해주었다.
바리공주가 유사강을 지나 세상으로 나오니 소여대여가 나온다. 산에서 나무를 베는 초등들에게 어떤 연고의 소여, 대여냐고 물었다.
"댓가를 받아야 말하겠오" 바리공주가 아기 업었던 수건 일곱 자 일곱 치 고를 풀어서 주니 초동들은 그제서야 대답한다.
"양전 마마 한날 한시에 승하하셔서 북망산천으로 가시는 상여로이다." 그제서야 명정을 보니 임금 왕자가 뚜렷했다. 바리공주는 머리풀어 산발하고 무장승과 일곱 아들을 감춘 후 상여 앞으로 나가 소여꾼과 대여꾼을 물리게 하고 관을 뜯어서 양전 마마를 묶은 안매 일곱매밖매 일곱매, 소대렴을 풀고 좌수와 우수를 편안하게 한 후에, 바리공주는 조정 백관과 시녀 상궁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전마마의 입에 서천서역에서 가져온 약수를 넣고 또 개안수를 양전 마마의 품에 넣고 또 뼈 살이 꽃, 살 살이 꽃, 피 살이 꽃을 눈에 넣으니, 양전마마가 후-하고 긴 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키고 일어나 앉으면서
"이게 잠결이냐 꿈결이냐? 시녀 상궁들이 무슨일로 다 모였느냐? 앞바다 구경하고 왔느냐? 뒷동산 꽃구경 갔다 왔느냐?" 조정 백관들이 아뢰었다.
"버렸던 자손이 약수를 구해 와서 양전마마 회춘하셨나이다. 바삐 환궁하시이다." 나오실 적에는 곡성을 하며 인산이었는데 돌아가실 제는 거동 시위가 분명했다. 상궁 시녀가 뒤따르고 별감이 시위하여 환궁하는데 녹의 홍상이 꽃밭을 이루어 나라 안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환궁하여 정좌한 후에 대왕마마는 바리공주에게 물었다.
"이 나라 반을 베어 너를 주랴?" "나라도 싫소이다" "그러면 사대문에 들어오는 재산 반을 나누어 너를 주랴?" "그도 다 싫소이다. 그간 저는 죄를 지어 왔나이다." "무슨 죄를 지어 왔는가?" "부모 위해 약수 구하러 갔다가 무장승을 만나 일곱 아들을 낳아 왔나이다." "그 죄가 네 죄가 아니라 우리 죄라" 대왕마마는 무장승 입시할 것을 명했다. 잠시후 신하들이 돌아와 아뢴다.
"광화문에 사모뿔이 걸려 못 들어오나이다." "옥도끼로 찍고 들어오게 하라" 무장승이 입시하니 대왕마마는 깜짝 놀라
"몸 생김이 저만하고 일곱 아들 있다 하니 먹고 살게 하여 주마" 하자,
"비리공덕 할아비와 할미도 먹고 입게 제도하여 주옵소서" 하고 바리공주는 자신의 양부모인 비리공덕 할아비 할미의 은덕을 아뢰었다.
대왕마마는 모두에게 골고루 은덕을 베풀어 제도해 주었다.
무장승은 산신제 평토제를 받아 먹고 살게 점지하였으며, 비리공덕 할미는 지노귀새남굿을 할 때 영혼이 저승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가는 가시문과 쇠문, 시왕문에 지켜 섰다가 별비(別費)를 받아 먹고 살게 점지하고, 바리공주의 일곱 아이들은 저승의 십대왕이 되어 먹고 살게 점지하였다. 그리고 바리공주는 인도국 보살이 되어 절에 가면만반 공양을 받고, 들로 내려오면 큰머리 단장에 은아몽두리 입고 언얼도와 삼지창, 방울과 부채를 손에 든 무당이 되어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도록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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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 불고 몹시 추운 저녁이었다. 정옥은 학교에 갔다 와서「에 추워」하면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책상에 책보를 놓고 나니깐 전보 한 장이 놓였다.

「어쩐 전보야.」

하고 얼른 뜯어 보았다. 전보의 사연은 이랬다.

〈할멈 금야 구 시 착〉

정옥은 이런 사연을 보고 이마를 찌푸리고 입으로는 웃었다. 그것은 그 전보가 안주 그 본집에서 온 것을 알고 마치 놀이각시 시집 보내는 것처럼 할멈을 보내면서 그것을 하필 자기에게 보내어 어떻게 처리하라는 것이 귀찮고 속상하기 때문에 이마를 찌푸린 것이요, 집에서 그렇게 비루먹은 개처럼 구박 하다가 썩은 생선처럼 노래기처럼 보내는 터에 반가운 식구나 손님처럼 전보로 미리 통지를 하고 오는 것이 할멈의 처지에는 고양이 장삼 입은 것 같고 농사군이 사모관대나 한 것처럼 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더구나 그래도 그것이 서울 간다고 좋다고 춤을 추면서 오겠지 하고 입으로는 웃는 것이다.

「전보들도 잘하지, 돈들도 많은 게야.」

정옥은 쯧 하고 혀를 차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전보 종이를 버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2

벌써 삼 년 전 일이다. 정옥의 둘째오빠가 그 부인과 화합하지 못하여 이혼한 후에 여러 해 동안 혼자 지내다가 새로 장가를 들어 서울서 학교 졸업한 새색시를 맞아들이고 회갑이 가까운 정옥의 모친은 더구나 노환이 몸에 떠나지 않기 때문에 집안일은 돌보아 줄 수 없는 형편이라, 아무리 간단한 살림이라도 식모의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충청도로 출가한 정옥의 언니 정순이 출가한 이후에 처음으로 친정에 오는 길에 함멈을 하나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 할멈은 나이 칠십이 가깝고 키가 좀 작고 얼굴은 꺼멓고 커다란 주름살이 많고 보기에도 뻣뻣하고 두터운 살가죽을 가진 노파이다. 그리고 아들이나 딸이나 세상에 도무지 혈육이란 하나도 없고 친척이 도무지 없는 그야말로 바위에서 낳았는지 장마비에 섞여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난 곳도 모르고 그러니까 제 나이도 모르고 물론 제 생일도 모른다. 아이들이 일부러,

「할멈 몇 살이오?」

하고 물으면 그 대답이 이렇다.

「충청도 있을 때 나하고 의좋게 지내던 처녀가 열 일곱 살인데 나하고 동갑이어서 나도 열 일곱 살이어.」

이 말을 듣고는 온 집안이 웃음판이 된다. 정옥은 몸이 오싹오싹 춥고 머리가 좀 아파서 자리를 펴고 누웠다. 가만히 누우니 할멈의 생각이 난다. 지난 여름방학에 집에 갔을 때 보던 생각이 난다. 공연히 싱글싱글 웃고 어깨를 실룩실룩하면서 춤을 추고 다니던 모양이 보인다. 하루종일 부엌에서 일하고 빨래하고 심부름하다가 어떻게 틈이 나서 주인마님이나 아가씨가 없는데 방안에 들어오면 고개를 기웃기웃하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작은 아씨 내 춤에 장단쳐 주어요.」

「그래 그래.」

그러면 할멈은, 좋다꾸나! 하고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좀 갸웃하고 어깨를 놀리고 볼기짝을 흔들고 다리를 들썩거리면서 돌아 간다. 그러다가 흥이 나면 소리가 나온다. 그 소리는 늘 자청해서 하는 꼭 한 가지 소리다.

대모야 풍잠아 너 잘 있거라.
떨어지는 상투는 염낭에 넣고
……(여기는 정옥도 생각이 안 난다.)

도검불 치마는 검어서 좋고
홍당목 치마는 붉어서 좋다.

이상스럽게 우러나오는 딴 목소리를 내어 저 혼자 신이 나서 지껄이면서 춤을 추고 돌아간다. 늘 보고 듣는 것이라 그리 신기하지도 않아서 정옥은 소리를 질러,

「할멈 어서 나가서 저녁 시작하지, 또 마님한테 걱정 들으면 어떡해.」

그러면 할멈은 히히 웃으면서,

「밥은 만날 먹는걸 그리 급한가, 나는 늘 춤이나 추고 소리나 하라면 좋겠더라. 작은아씨도 지금 그러지 나처럼 늙으면 쓸데 없어. 죽으면 쓸데있나.」

「아이 어서 나가보아, 또 마님에게 야단맞으면 어떡해.」

「마님이 왜 야단하셔? 마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데, 떡도 사 주시고 저고리도 해 주시고 마님도 좀 들어와서 들으시라지. 내 소리를 들으면 모두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데, 이왕에는 인력거 타고 불려 다녔다오.」

그러고는 또 희희희희하면서 돌아서 나간다.

할멈은 집에서만 이렇게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에 가서도 그러고, 거리에 다니면서도 그런다. 할멈은 매일 주 인나리의 도시락을 가지고 은행에 가는 것이 한 일과요,그것이 할멈에게는 큰 기쁨이다. 그 시간이 되기만 기다리다가 그때가 되면 다른 옷을 갈아입고 춤을 추면서 나간다. 은행에 갈 때나 심부름 갈 때나 밖에 나갈 때에는 으례 빨간 주머니 달린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갈아입는다.

할멈은 이 빨간 주머니와 거기에 달린 은노리개가 큰 자랑거리다. 빨간 주머니는 충청도 아씨가 주고 간 것이요, 은노리개는 일본 공부갔던 작은나리가 준 돈 오전으로 어느 장날 산 것인데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잊어버리지 않고 달고 나간다. 마님이 흉하다고 때어 버리라고 해도 기어이 비뜰어매고 다닌다. 그리고 나가서는 거리의 상점에 앉아서 하라지도 않는 소리를 혼자 한다. 그러면 사람이 둘러서서 큰 웃음거리가 된다. 그래서 성내 거리에서는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는 충청도 할멈이라, 흑은 기생할멈이라 하여 유명하다. 그래서 나가면 으례 상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소리해라,춤 추어라.」

한다.

할멈은 나이는 육십이 훨씬 넘었지만 마음은 어린애다. 어린애들과 썩 잘 논다. 정옥의 큰집에는 어린애가 없으나 작은집에는 정옥의 조카가 둘이나 있다. 심부름을 갔다가는 그아이들과 놀고 과자를 얻어먹고 세월 가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늘 책망을 듣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얻어 먹을 뿐 아니라 정옥을 보고도 조용한 틈만 있으면 떡 사 달라고 하고 마님과 같이 장에 나가면〈떡 사 달 라, 사탕 사 달라〉염치없이 조른다. 그러면 어떤 때는 사주기도 한다.

할멈은 몸이 아주 든든해서 힘드는 일도 잘하고 별로 앓는 일이 없다. 그러다가 일이 정말 고되고 어려울 때에 몸이 좀 지쳐서 앓게 되면 방 한모통이에서 요를 머리까지 온통 들쓰고 끙끙 몹시 앓는다. 그럴 때는 당장 죽을 것처럼 앓는다. 그러면 주인나리는 불쌍한 늙은이라하여 아랫목에 눕게 하고 이불을 덮어 주고 마님이나 아씨가 친히 부엌에 나가서 밥을 짓는다.

정옥은 지난 가을에(개학할 임시에). 할멈이 찬 비를 맞고 빨래를 하고 나서 그날 밤에 몹시 않은 것이 생각나서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할멈이 대개는 말도 잘 듣고 일도 잘하고 춤추고 소리나 하여 낙천적으로 지내지만 조금이라도 심사가 틀리면 큰소리를 내어 대답을 하고 밥도 아니 먹고 들어와 아프다고 쓰고 눕는다.

할멈이 심사가 틀릴 때에 들어가 병을 앓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주인마님이나 아씨의 말을 안 듣고 항거하여 함부로 덤벼들 때에는 동정하던 주인들도 그만 진절머리가 나서 가만두지 아니한다. 처음에는 주인나리는 불쌍한 늙은이라 하여 역성을 들어 주고 주인 여자들을 잘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용하던 집에 정옥이 어머니의 환갑을 지내고, 아씨가 아기를 낳고 하기 때문에,일도 좀 많아졌거니와 한 가지 까닭은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늙은이라 하여 너무 덮어 주고 너무 동정하여 어떤 때는 한집에 세력을 잡은 나리가 주인마님이나 아씨보다 자기를 더 위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여 실상 분명히 할멈이 잘못하여 책망을 듣고 주인의 노염을 당할 때에도 할멈은 덮어 두고 마님이나 아씨를 그르다고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너무 길러 주고 그 성미를 길러 준 결과 마침내 옳거나 그르거나 주인 부인네의 말을 듣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주인을 업신여겨서 여러 가지 수욕을 더하고 야단을 하는 일이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정옥은 친히 목도하여 잘 안다.

정옥은 여름에 갔을 때에 할멈이 심사를 내어 그 어머니에게 대하여 마치 자기 동배로 더불어 싸우는 것같이 아주 거만스러운 태도로 마디마디 큰 소리를 내어 야단하던 것과 그러다가 가없이 어슬렁어슬렁 대문 밖으로 쫓겨나가던 것과 나갔다가도 마님에게 사과도 아니하고 태연히 들어와서 웅크리고 앉았던 것이 생각나고,또 한번은 주인아씨와 충돌되어서 후원 우물가에서 입에 담을 수 없이 고약스러운 욕설을 퍼붓던 것도 생각났다. 그뿐 아니라 밖에 나가서 주인아씨와 심지어 나리의 흉을 선전하였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또 비녀와 돈을 훔쳐서 그 오빠 에게 초달1을 맞던 생각이 났다. 그때마다 할멈은 불쌍한 것인지 미운 것인지 불쌍히 여겨 도와 주어야 할지 미워서 내버려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정옥에게는 불쌍한 것을 어떻게 하여 구할까 하는 생각보다도 저 미치광이 같은 것, 저 미친 개 같은 것, 집에서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종내 쫓아 보낸 것. 이런 생각만 나서 할멈이라는 것은 끔찍하고 무서운 물건, 싫고 괴로운 것같이만 생각되었다. 자리에 누웠던 정옥은 저걸 어떡해, 하며 벌떡 일어나서 나왔다.

3

정옥은 부엌에 나가서 주인집 아주머니가 저녁 짓는 데 불을 때어 주고 앉았다.

「참 전보 보소오. 무슨 전봅디까?」

「보았어요, 그까짓 거.」

「왜 무슨 전본데.」

「우리 할멈이 오신다오.」

「응 접때 편지 왔다더니 그게구먼.」

「그렇다오, 글쎄 그걸 어쩌면 좋아요?」

「아 나가 보아야지.」

「나가 보면 무얼해요, 나가면 만나지요, 만나면 데리고 들어와야지요, 들어오면 여기를 두어 둡니까, 그걸 차마 한길에 내다 버립니까.」

「그래두 나가 보아야지 그거 불쌍하지 않소?」

「글쎄 아주머니 어떡해?」

「어떡하긴 어떡해, 나가보아야지. 나오라구 했다지?」

「아이구 난 몰라.」

「대관절 편지에 뭐랬읍디까? 다시 좀 이야기를 하오.」

「무어라고 그러긴 아주머니도 가 보시고 그래. 할멈이 너무 흉악하게 굴어서 암만 해도 둘 수 없어서 자기 소원대로 서울을 보내니 너 있는 곳에 네나 데리고 있든지 저 있던 곳이라는 데를 데려다 주든지 충청도 저희 고향으로 보내든지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말은 좋지.」

「참 그랬지!」

「저 있던 데라는 데가 어데요?」

「사직골이라든가, 내 접때 이야기했지요, 왜.」

「그럼 거기 데려다 주지.」

「아주머니두, 그게 벌써 몇 해 전인데 그 집이 여태 그냥 있기나 하며, 또 있다면 그 따윗걸 무엇이 반가워서 맞아들인답디까?」

「글쎄, 우리 집에라도 두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고 어떡하나?」

정옥은 방안에서 저녁을 먹고 날이 몹시 춥고 바람이 또한 요란스럽게 불기 때문에, 더욱 쓸쓸한 건넌방에 혼자 앉아 있기도 싫거니와 건넌방은 춥고 안방은 따뜻하기 때문에 그냥 안방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더구나 내일은 임시 시험이 있으므로 여러 해 교사 노릇하던 아주머니에게 모를 것은 물어가며 수학을 복습하기에 골몰했다. 새로 난 교과서의 미터법은 옛날에 공부한 아주머니도 가르쳐 주지 못하기 때문에 정옥이 혼자서 교과서와 필기책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몹시 애를 쓴다.

그러다가 정옥은 우연히 아랫목 담벼락에 걸린 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를 보고,

「아이쿠」

하고 부르짖었다. 작은 침은 IX자를 지나고 큰 침은 VI에 가까왔다. 신의주 방면에서 오는 찻시간은 아홉 시 이십 분이라 벌써 도착한 지 오랬다. 정옥은 무슨 큰 죄나 지은 것 같이 멍하니 앉았다.

정옥의 눈에는 커다란 보퉁이를 옆에 끼고 정거장 구내에서 두리번두리번하고 허둥지둥 하는 할멈이 보였다. 그러다가 마중나올 줄 알았던 작은아씨가 아니 보일 때에, 혹 작은 아씨 비슷한 사람은 바삐 왔다갔다 하여도 모두 모른 체하고 지나갈 때에 할 수 없이 밖으로 바삐 밀려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휩싸여서 휘황한 전등불을 쳐다보면서 밀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밖에 나와서도 왔다갔다 하면서 작은아씨를 찾다가 인력거군과 여관쟁이들의 야단하는 소리, 자동차의 붕붕 하는 소리가 뒤섞여 몹시 분주한 가운데 뒤도 아니 돌아보고 달아나는 사람뿐이요, 작은아씨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할 때에 그만 절망하여 울 듯이 한모퉁이에 멍하고 섰는것이 보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여관쟁이에게 붙들려 어디로 들어갔을까? 그러면 평안히 자겠지. 혹 순사에게 붙들려서 벌벌 떨고 섰을까? 거기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내 말을 하면 어떡하나, 만일에 집에서 번지를 적어 주었으면 어떡하나. 그래서 순사가 데리고 와서 야단을 하면 어쩌나.)

정옥은 이런 생각을 하고 아주머니와 같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제 어떡하나 할 수 없지.」

하고 자리를 펴고 누웠다.

바람은 그냥 호통치듯 불고 있다. 조금 떨어진 뒷간 함석이 바람에 흔들려서 덜거덕덜거덕 야단을 한다. 바람에 대문 소리가 조금 삐걱 하고 나도〈순사가 와서 찾지 않는가〉 하고 깜짝깜짝 놀랐다.

4

열 시가 거의 다 되어서 정옥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대문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뜰에 사람 소리가 난다.

「손님 오셨읍니다.」

정옥은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서 아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서 나가 보라.」

하는 아주머니의 눈짓으로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깜깜한 뜰에 시꺼먼 사람이 초롱불을 잡고 섰는 것이 눈에 보이자 마루끝에 회끄무레한 그림자가 선뜻 올라서면서,

「아이 작은아씨 아니야요!」

하는 것은 온다고 하던 할멈의 목소리다.

정옥은 하도 놀라고 기가 막혀서 말도 아니 나오는 것을 입맛을 다시고서 게다가 추워서 떨면서 인력거 값을 물어 주었다. 그리고 할멈이 들어와서 빙글빙글 웃으면서 묻지도 않는 것을 혼자말로 전하는 본집 소식을 잠자코 듣고 앉았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할멈 왜 왔노?」

「작은아씨 볼려고 왔지?」

하고 할멈은 한번 히히 웃었다. 그리고 작은 아씨에게 드리는 선물이라 하는 것처럼 먹던 귤 한 개를 내놓았다.

「작은아씨 잡수어 보셔요.」

정옥은 안 들은 체하고 일어서 건넌방으로 가면서,

「어서 가 자지, 할멈.」

그날 밤은 건넌방에서 정옥의 옆에서 잤다.

5

다음날 아침이다. 정옥은 학교에 가고 할멈은 정옥의 방으로 안방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혼자서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중얼거린다. 정옥의 아주머니는 하도 우스워서 쳐다보다가 얼굴에 분칠을 하얗게 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늙은이가 분은 왜 발랐나?」

「예쁘라고 발랐지.」

할멈은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서 돌아 간다. 너무 우습고 가없어서 다시는 묻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할멈은 정옥이 없는 새에 종일 묻지도 않는 말을 남이 듣거나 말거나 혼자서 지껄이고 있다. 그것은 모두 예전 있던 안주댁 정옥의 본집의 흉이다. 주인아씨의 욕이며 마님의 흉이며 나중에는 정옥의 오빠의 흉까지 입에 담을 수 없는 흉악한 말뿐이다. 듣다못해, 「늙은이가 있던 주인댁의 흉을 전해서는 못써!」

하고 그 입을 막았다. 그때에 할멈은,

「참말 그래 내 실수로군.」

하고 웃는다. 정옥의 아주머니는 집에 둘 수 없는 고약한 늙은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6

정옥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정옥이 학교에서 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구두도 벗지 아니하고 할멈보고 말했다.

「할멈 있던 사직골 데려다 줄 터이니 지금 가.」

「작은아씨, 데려다 줄 테야? 그럼 가지.」

「할멈 짐도 가지고 가지.」

「가지고 갈까? 그랴.」

부엌에서 밥 짓는 정옥 아주머니에게 가서 귓속말 하는 것같이 하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작은아씨가 나를 데리고 가서 떼어버리고 오랴고 그러지.」

이 말이 끝나기 전에 정옥은 큰 소리를 치면서, 저물었는데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할멈은 춤을 추면서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정옥을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갔다.

한 사십 분 만에 정옥은 돌아왔다. 바람이 몹시 부는데 나갔다가 온 정옥은 볼이 빨개져서 아무말도 없이 들어온다. 아주머니는 잠깐 기다려서 물어보았다.

「어떡하고 왔소?」

「사직골 가서 두리번두리번할 때 휙 돌아서 왔지.」

「저걸 어째!」

「…………」

「참 안주댁에서 편지 왔읍디다. 책상에 놓아 두었소.」

「편지?」

하면서 정옥은 방으로 들어갔다. 펼썩 주저 앉으면서 책상에 놓인 엽서를 읽어 보았다. 편지 사연은 이렇다.

  • ……할멈은 보았을 듯하다. 할멈은 그 댁에 두게 하든지 여비를 보내 줄 터이니 고향으로 보내 주든지 저 있던 집을 찾아 주든지 어디 있을 곳을 얻어 주든지 하지 함부로 갖다 내버려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신다. 너는 아직 앞길이 창창한 어린애다.

할멈을 갖다 버리고 와서 정옥은 마음에 죄송스러운 생각이 많고 큰 죄를 저질러 놓은 것 같아서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마음이 편치 못하던 터에 오라버니 편지에〈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신다〉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벽력이 내리는 듯이 속이 끔찍하고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것이 편지의 구절 같지 않고 공중에서 나는 무서운 소리같이 정옥을 위협하였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며 정옥은 망연히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지으면서,

「어쩌란 말이야……나는 몰라.」

정옥은 한숨을 길게 쉬고 엽서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생각하였다.

사실 정옥은 아직 나이 어리고 더구나 인제 혼인 문제도 있는 터이라 앞길이 멀고먼 처녀다.

(내가 왜 남에게 못할 짓을 하랴. 남의 원한을 받으랴. 더구나 상관도 없는 일에 내가 죄를 입으랴.)

생각하였다. 겨우 밥을 좀 먹고 곧 아주머니와 같이 바로 떠났다. 바삐 사직골로 가서 그 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할멈은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이 모퉁이 저 모퉁이 한참 찾아보아야 할멈 같은 사람은 없다. 파출소에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한다. 몇 곳 상점에서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불어 날씨가 차기 때문에 밤도 깊지 않았는데 행인이 드물고, 여염집은 물론이요,상점 문들도 다 닫혔다. 그래서 더 물어보고 싶은 것도 못 물어보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바람만 야단스럽게 부는데 야주개 모퉁이 군밤 장수는 웅크리고 떨면서 걷어 가지고 돌아가기를 준비한다.

정옥은 집에 와 누웠으나 그날 밤은 꿈만 꾸고 졸연히 깊은 잠을 들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도 선생의 말이 귀에 잘 들어 오지 않았다.

그 뒤에 두 달 석 달이 지나도록 종내 할멈을 만나지 못하고 그 비슷한 늙은이도 보지 못했다. 아무에게서도 그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밤에 자려고 눈만 감으면 할멈이 싱글싱글 이상스럽게 웃으면서,

대모야 풍잠아 너 잘 있거라
떨어지는 상투는 염낭에 넣고
……웅웅
도검불 치마는 검어서 좋고
홍당목 치마는 붉어서 좋다.

얄궂은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눈앞에 떠오고 잠만 들면 전에 안주서 자기 어머니——마님에게 대들어서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발발 떨면서 발악을 하던 흉악스러운 꼴이 자꾸만 보이고 뇌리에 달라 붙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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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덜컹덜컹 홈통에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었다가 쿵 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겻가루가 켜켜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 나온다.

솰 솰 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댓줄기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십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오리쯤 꿰뚫은 뒤에 이방원(李芳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물레방아에서 들여다보면 동북간으로 큼직한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에 가장 부자요, 가장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름은 신치규(申治圭)라고 부른다. 이방원이라는 사람은 그 집의 막실(幕室)살이를 하여가며 그의 땅을 경작하여 자기 아내와 두 사람이 그날그날을 지내 간다.

어떠한 가을 밤 유난히 밝은 달이 고요한 이 촌을 한적하게 비칠 때 그 물레방앗간 옆에 어떠한 여자 하나와 어떤 남자 하나가 서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 여자는 방원의 아내로 지금 나이가 스물 두 살, 한참 정열에 타는 가슴으로 가장 행복스러울 나이의 젊은 여자이요, 그 남자는 오십이 반이 넘어 인생으로서 살아올 길을 다 살고서 거의거의 쇠멸의 구렁이를 향하여 가는 늙은이다.

그의 말소리는 마치 그 여자를 달래는 것같이,

“얘, 내 말이 조금도 그를 것이 없지? 쇤네 할멈에게도 자세한 말을 들었을 터이지마는 너 생각해 보아라. 네가 허락만 하면 무엇이든지 네가 하고 싶다는 것을 내가 전부 해줄 터이란 말야. 그까짓 방원이 녀석하고 네가 몇 백년을 살아야 언제든지 막실 구석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허허, 사람이란 젊어서 호강해 보지 못하면 평생 한번 하여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느니라! 대강 너의 말을 쇤네 할멈에게 듣기는 들었으나 그래도 너에게 한번 바로 대고 듣는 것만 못해서 이리로 만나자고 한 것이다. 너의 마음은 어떠냐? 허허, 내 앞이라고 조금도 어떻게 알지 말고 이야기해 봐, 응?”

이 늙은이는 두말할 것 없이 신치규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방원의 계집을 들여다보며 한 손으로 등을 두드린다.

새침한 얼굴이 파르족족하고 기다란 눈썹과 검푸른 두 눈 가장자리에 예쁜 입, 뾰로통한 뺨이며 콧날이 오뚝한 데다가 후리후리한 키에 떡 벌어진 엉덩이가 아무리 보더라도 무섭게 이지적(理智的)인 동시에 또는 창부형(娼婦型)으로 생긴 것이다.

계집은 아무 말이 없이 서서 짐짓 부끄러운 태를 지으며 매혹적인 웃음을 생긋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짐승 같은 신치규의 만족을 사게 되었으며 또한 마음을 충족시켰는지 희끗희끗한 수염의 거의 계집의 뺨에 닿도록 더 가까이 와서,

“응? 왜 대답이 없니? 부끄러워서 그러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하고 계집의 손을 잡으며,

“손도 이렇게 예쁜 줄은 이제까지 몰랐구나. 참 분결같다. 이렇게 얌전히 생긴 애가 방원 같은 천한 놈의 계집이 되어 일평생을 그대로 썩는다는 것은 너무 가엽고 아깝지 않느냐? 얘.”

계집은 몸을 돌리려고 하지도 않고 영감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며 눈으로 땅만 내려다보고 섰다가 가까스로 입을 떼는 듯하더니,

“제 말야 모두 쇤네 할멈이 여쭈었지요. 저에게는 너무 분수에 과한 말씀이니까요.‘

“온, 천만에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너도 아다시피 내가 너를 장난삼아 그러는 것도 아니겠고 후사(後嗣)가 없어 그러는 것이니까 네가 내 아들이나 하나 나 주렴. 그러면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되지 않겠니? 자아 그러지 말고 오늘 허락을 허렴. 그러면 내일이라도 방원이란 놈을 내쫓고 너를 불러들일 터이니.”

“어떻게 내쫓을 수가 있에요?”

“허어, 그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무엇 있니. 내가 나가라는데 제가 나가지 않고 배길 줄 아니?”

“그렇지만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무엇? 저런 생각을 하니까 네가 이 모양으로 이때까지 있었지. 어떻단 말이냐?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구. 자아, 또 네서방에게 들킬라, 어서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세요.”

“왜?”

“남이 보면 수상히 알게요.”

“무얼 나하고 가는데 수상히 알게 무어야……어서 가자.”

계집은 천천히 두어 걸음을 따라가다가,

“영감!”

하고 멈춤하고 서 있다.

“왜 그러니?”

계집은 다시 말이 없이 서 있다가,

“아니에요.”

하고,

“먼저 들어가세요.”

하며 돌아선다. 영감이 간이 달아서 계집의 손을 잡으며,

“가자, 집으로 들어가자.”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는지 숨소리가 잦아진다. 계집은 손을 빼려고 하며,

“점잖으신 어른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면서도 그의 몸짓에는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 보였다. 영감은 계집의 몸을 끌어안더니 방앗간 뒤로 돌아 섰다. 계집은 영감 가슴에 안겨서 정욕이 가득찬 눈으로 그를 보면서,

“영감.”

말 한번하고 침 한번 삼키었다.

“영감이 거짓말은 안 하시지요?”

“아니.”

그의 말은 떨리었다. 계집은 영감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방앗간 속을 가리켰다.

“저리로 들어가세요.”

영감과 계집은 방앗간에서 이삼십 분 후에 다시 나왔다.

2

사흘이 지난 뒤에 신치규는 방원이를 자기 집사랑 마당 앞으로 불렀다.

“예.”

방원은 상전이라 고개를 숙이고,

“예.”

공손하게 대답을 하였다.

“네가 그간 내 집에서 정성스럽게 일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마는……”

점잔과 주짜를 빼면서 신치규는 말을 꺼내었다. 방원의 가슴은 이 ‘마는’이라는 말 뒤에 이어질 말을 미리 깨달은 듯이 온몸의 피가 가슴으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다시 터럭이라는 터럭은 전부 거꾸로 일어서는 듯하였다.

“오늘부터는 우리 집에 사정이 있어 그러니 내 집에 있지 말고 다른 곳에 좋은 곳을 찾아가 보아라.”

아무 조건이 없다. 또한 이곳에서도 할말이 없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은 돈 가지고 사람을 사고 팔 수도 있는 것이다.

방원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자기 혼자 몸 같으면 어디 가서 어떻게 빌어먹더라도 살 수 있지마는 사랑하는 아내를 구해 갈 길이 막연하다. 그는 고개를 굽히고, 허리를 굽히고, 나중에는 마음을 굽히어 사정도 하여 보고 애걸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주인의 마음은 쇠나 돌보다도 더 굳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자기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아내더러 안주인 마님께 사정을 좀 하여 얼마간이라도 더 있게 하여 달라고 하여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방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도리어,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요. 이제부터는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릴테요?”

“너는 그렇게도 먹고 살 수 없을까봐 겁이 나니?”

“겁이 나지 않고, 생각을 해 보구려. 인제는 꼼짝할 수 없이 죽지 않았소?”

“죽어?”

“그럼 임자가 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올 때에 무어라고 하였소. 어떻게 해서든지 너 하나야 먹여 살리지 못하겠느냐고 하였지요?”

“그래.”

“그래, 얼마나 나를 잘 먹여 살리고 나를 호강시켰소? 이때까지 이태나 되도록 끌구 돌아다닌다는 것이 남의 집 행랑이었지요.”

“얘, 그것을 내가 모르고 하는 말이냐?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냐? 차차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이든지 생기겠지. 설마 요대로 늙어 죽기야 하겠니?”

“듣기 싫소! 뿔 떨어지면 구워 먹지 어느 천년에.”

방원이는 가뜩이나 내쫓기고 화가 나는데 계집까지 그리하니까 속에서 열화가 치밀어 올라 왔다.

“이 육시를 하고도 남을 년! 왜 남의 마음을 글컹거리니1?”

“왜 사람에게 욕을 해!”

“이년아 욕 좀 하면 어떠냐?”

“왜 욕을 해!”

계집의 얼굴이 노래지며 대든다.

“이년이 발악인가?”

“누가 발악야. 계집년 하나 건사 못하는 위인이 계집보고 욕만 하고 한 게 무어야? 그래 은가락지 은비녀나 한 벌 사주어 보았어? 내가 임자 하자고 하는 대로하지 않은 것은 없지!”

“이년아! 은가락지 은비녀가 그렇게 갖고 싶으냐? 이 더러운 년아.”

“무엇이 더러워? 너는 얼마나 정한 놈이냐!”

졔집의 입속에서는 ‘놈’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년 보게! 누구더러 놈이래.”

하고 손길이 계집의 낭자를 후려 잡더니 그대로 집어들고 주먹으로 등줄기를 우리었다.

“이 주릿대를 안길 년!”

발길이 엉덩이를 두어 번 지르니까 계집은 그대로 거꾸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풀어 헤뜨린 머리가 치렁치렁 끌리고 씰룩한 눈에는 독기가 섞이었다.

“왜 사람은 치니? 이놈! 죽여라 죽여, 어디 죽여 보아라, 이놈 나 죽고 너 죽자!”

하고 달려드는 계집을 후려쳐서 거꾸러뜨리고서

“이년이 죽으려고 기를 쓰나!”

방원이가 계집을 치는 것은 그것이 주먹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농담이다. 그는 주먹이나 발길이 계집의 몸에 닿을 때 거기에 얻어맞는 계집의 살이 아픈 것보다 더 찌르르하게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아픔을 방원은 깨닫는 것이다. 홧김에 계집을 치는 것이 실상은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이빨로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때리는 그에게는 몹시 애처로움이 있고 불쌍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화풀이를 받아 주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계집밖에는 없었다. 제일 만만하다는 것보다도 가장 마음놓고 화풀이를 할 수 있음이다. 싸움한 뒤, 하루가 못되어 두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고 서로 꼭 끼고 잘 때에는 그렇게 고맙고 그렇게 감격이 일어나는 위안이 또다시 없음이다. 계집을 치고 화풀이를 하고 난 뒤에 다시 가슴을 에는 듯한 후회와 더 뜨거운 포옹으로 위로를 받을 그때에는 두 사람 아니라 방원에게는 그만큼 힘있고 뜨거운 믿음이 또다시 없는 까닭이다.

계집을 일부러 소리를 높여 꺼이꺼이 운다.

온 마을 사람이 거의 귀를 기울였으나,

“응, 또 사랑싸움을 하는군!”

하고 도리어 그 싸움을 부러워하였다. 옆집 젊은것이 와서 싱글싱글 웃으며 들여다보며,

“인제 고만두라구.”

하며, 말리는 시늉을 한다. 동네 아이들만 마당 앞에 죽 늘어서서 눈들이 뚱그래서 구경을 한다.

3

그 날 저녁에 방원이는 술이 얼근하여 돌아왔다. 아까 계집을 차던 마음은 어느덧 풀어지고 술로 흥분된 마음에 그는 계집의 품이 몹시 그리워져서 자기 아내에게 사과를 할 마음까지 생기었다. 본시 사람이 좋고 마음이 약하고 다정한 그는 무식하게 자라난 까닭에 무지한 짓을 하기는 하나 그것은 결코 그의 성격을 말하는 무지함이 아니다.

그는 비척거리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거슴츠레하게 풀린 눈을 스르르 내리 감고 혼잣소리로,

“빌어먹을 놈! 나가라면 나가지 무서운가? 제 집 아니면 살 곳이 없는 줄 아는 게로군! 흥, 되지 않게 다 무엇이냐? 돈만 있으면 제일이냐? 이놈, 네가 그러다가는 이 주먹맛을 언제든지 볼라. 그대로 곱게 뒈질 줄 아니?.”

하고, 개천 하나를 건너뛴 후에,

“돈! 돈이 무엇이냐?”

한참 생각하다가,

“에후.”

한숨을 쉬고 나서,

“돈이 사람을 죽이는구나! 돈! 돈! 흥,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니?”

또 징검다리를 비척비척하고 건넌 뒤에,

“고 배라먹을 년이 왜 고렇게 포탈을 부려서 장부의 마음을 긁어 놓아!”

그의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맛이 있었다. 그는 자기 계집을 생각하면 모든 불평이 스러지는 듯이, 숙였던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면서,

“허어, 저도 고생은 고생이지.”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내가 너무 해. 너무 그럴 게 아닌데.”

그는 자기 집에 와서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면서,

“얘! 자니! 자?”

그러나 대답이 없고 캄캄하다.

“이년이 어디를 갔어!”

그는 문짝을 깨어져라 하고 닫은 후에 다시 길거리로 나와 그 옆집으로 가서,

“여보 아주머니! 우리 집 색시 어디 갔는지 보았소!”

밥들을 먹는 옆엣집 내외는,

“어디서 또 취했소 그려! 애 어머니가 아까 머리 단장을 하더니 저 방아께로 갑디다.”

“방아께로?”

“네.”

“빌어먹을 년! 방아께로는 무얼 먹으러 갔누!”

다시 혼자 방아를 향하여 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그는 방앗간을 막 뒤로 돌아서자 신치규와 자기 아내가 방앗간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

그는 너무 뜻밖의 일이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한참이나 멀거니 서서 보기만 하였다.

그의 눈에서 쌍심지가 거꾸로 섰다. 열이 올라와서 마치 주홍을 칠한 듯이 그의 눈은 붉어지고 번개같은 광채가 번뜩거리었다.

그는 한참이나 사지를 떨었다. 두 이가 서로 맞춰서 달그락 달그락하여졌다. 그의 주먹은 부서질 것같이 단단히 쥐어졌다.

계집과 신치규는 방원이 와서 선 것을 보고서 처음에는 조금 간담이 서늘하여졌으나 다시 태연하게 내려앉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매 할대로 하라는 뜻이다.

방원은 달려들어서 계집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부르르 떨었다.

“나는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계집은,

“무얼 이럴 줄 몰라?”

하며, 파란 눈을 흘겨보더니,

“나중에는 별꼴을 다 보겠네. 으레히 그럴 줄을 인제 알았나? 놔요! 왜 남의 팔을 잡고 요 모양이야. 오늘부터는 나를 당신이 그리 함부로 하지는 못해요! 더러운 녀석 같으니! 계집이 싫다고 그러면 국으로 물러갈 일이지 이게 무슨 사내답지 못한 일야! 놔요!”

팔을 뿌리쳤으나 분노가 전신에 가득찬 그는 그렇게 쉽게 손을 놓지 않았다.

“얘! 네가 이것이 정말이냐?”

“정말이 아니구 비싼 밥먹고 거짓말할까?”

“네가 참으로 환장을 하였구나!”

“아니 누구더러 환장을 했대. 온 기가 막혀 죽겠지! 놔요! 놔! 왜 추근추근하게 이 모양야? 놔.“

하고서 힘껏 뿌리치는 바람에 계집의 손이 쑥 빠지었다. 계집은 손목을 주무르면서 암상 맞게 돌아섰다.

이때까지 이 꼴을 멀찍이 서서보고 있던 신치규는 두어 발짝 나서더니 기침 한번을 서투르게 하고서,

“얘! 네가 술이 취하였으면 일찍 들어가 자든지 할 것이지 웬 짓이냐? 네 눈깔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단 말이냐? 너희 년놈이 싸우는 것은 너희 년놈이 어디 가서 할 일이지 여기 누가 있는지 없는지 눈깔에 보이는 것이 없어? 엣, 괘씸한 놈!”

눈깔을 부라리었다. 방원은 한참이나 쳐다보고서 말이 없었다. 생각대로 하면 한 주먹에 때려 누일 것이지마는 그래도 그의 머리 속에는 아까까지의 상전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번갯불같이 그 관념이 그의 입과 팔을 얽어 놓았다.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남을 섬겨 보기만 한 그의 마음은 상전이라면 모두 두려워하는 성질을 깊이깊이 뿌리박아 놓았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신치규가 자기의 상전이 아니요, 자기가 신치규의 종도 아니다. 다만 똑같은 사람으로 마주섰을 뿐이다. 아니다, 지금부터는 신치규도 방원의 원수였다. 그의 간을 씹어먹어도 오히려 나머지 한이 있는 원수다.

신치규는 똑바로 쳐다보는 방원을 마주 쳐다보며,

“똑바루 보면 어쩔 터이냐? 온 세상이 망하려니까 별 해괴한 일이 다 많거든. 어째 이놈아!”

“이놈아?”

방원은 한 걸음 들어섰다. 나무같이 힘센 다리가 성큼하고 나설 때 신치규는 머리끝이 으쓱하였다. 쇠몽둥이 같은 두 주먹이 쑥 앞으로 닥칠 때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네 입에서 이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이 사지를 찢어발겨도 오히려 시원치 못할 놈아! 네가 내 계집을 빼앗으려고 오늘 날더러 나가라고 그랬지?”

“어허 이거 그놈이 눈깔이 삐었군, 얘,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 너는 네 서방하고 나중 들어오너라!”

신치규는 형세가 위험하니까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고 돌아서서 들어가려 하니까 방원은 돌아서는 신치규의 멱살을 잔뜩 쥐어 한 팔로 바싹 치켜들고,

“이놈 어디를 가? 네가 이때까지 맛을 몰랐구나?”

하며, 한번 집어쳐 땅바닥에다 태질을 한 뒤에 그대로 타고 앉아서 목줄띠를 누르니까, 마치 뱀이 개구리 잡아먹을 적 모양으로 깩깩 소리가 나며 말 한 마디도 못한다.

“이놈 너 죽고 나 죽으면 고만 아니냐?”

하고 방원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들이댄다. 나중에는 주먹이 부족하여 옆에 있는 모루돌멩이를 집어서 죽어라 하고 내리친다. 그의 팔, 그의 몸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극도에 달하자 사람의 가슴속에 본능적으로 숨어 있는 잔인성(殘忍性)이 조금도 남지 않고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눈은 마치 펄떡펄떡 뛰는 미끼를 가로차고 앉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이 뜨거운 피를 보고야 만족하다는 듯이 무섭게 번쩍거렸다. 그에게는 초자연(超自然)의 무서운 힘이 그의 팔과 다리에 올라왔다.

이 꼴을 보는 계집은 무서웠다. 끔찍끔찍한 일이 목전에 생길 것이다. 그의 맥이 풀린 다리는 마음대로 놓여지지 아니하였다.

“아! 사람 살류! 사람 살류!”

적적한 밤중에 쓸쓸한 마을에는 처참한 여자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울리었다. 이 소리를 들은 방원은 더욱 힘을 주어서 눈을 딱 감고 죽어라 내리 짓찧었다. 뼈가 돌에 맞는 소리가 살이 으크러지는 소리와 함께 퍽퍽하였다. 피 묻은 돌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갈가리 찢긴 옷에는 살점이 묻었다.

동네편 쪽에는 수군수군하더니 구둣소리가 나며 칼소리가 덜거덕거리었다. 방원의 머리에는 번갯불같이 무엇이 보이었다. 그는 손에 주먹을 쥔 채 잠깐 정신을 차려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순검.”

그는 신치규의 배를 타고 앉아서 순검의 구두 소리를 듣자 비로소 자기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달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일어났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벌벌 떠는 계집에게로 갔다.

“얘! 가자! 도망가자! 너하고 나하고 같이 가자! 자! 어서, 어서!”

계집은 자기에게 또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겁을 내어 도망을 하려 한다. 방원은 계집을 따라가며,

“얘! 얘! 네가 이렇게도 나를 몰라주니!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를 못하니? 자! 어서, 도망가자, 어서 어서, 뒤에서 순검이 쫓아 온다.”

계집은 그대로 서서 종종걸음을 치며,

“싫소! 임자나 가구료, 나는 싫어요, 싫어.”

“가자! 응! 가!”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계집의 팔을 붙잡고 끌었다. 그때 누구인지 그의 두 팔을 마치 형틀에 매다는 것같이 꽉 뒤로 끼어 앉는 사람이 있었다.

“이놈아! 어디를 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온 전신에 맥이 풀리어 그대로 뒤로 자빠지려 할 때 어느덧 널판 같은 주먹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정신 차려.”

“네.”

그는 무의식 중에 고개가 숙어지고 말소리가 공손하여졌다.

땅바닥에서는 신치규가 꿈지럭거리며 이리저리 뒹군다. 청승스러운 비명(悲鳴)이 들린다.

방원은 포승 지인 채, 계집은 그대로 주재소로 끌려가고 신치규는 머슴들이 업어 들였다.

4

석 달이 지났다. 상해죄(傷害罪)로 감옥에서 복역을 하던 방원은 만기가 되어 출옥을 하였다. 그러나 신치규는 아무 일 없이 자기 집에서 치료하고 방원의 계집을 데려다 산다. 신치규는 온 몸이 나은 뒤에 홀로 생각하였다.

‘죽는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하고, 얼굴에 흠이 진 곳을 만져 보며,

‘오히려 그놈이 그렇게 한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지, 얼굴이 아프기는 좀 하였으나! 허어. 어떻게 그놈을 떼어버릴까 하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을 하던 차에 잘 되었지. 그놈 한 십년 감옥에서 콩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방원은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나가기만 하면 연놈을 죽여 버리고 제가 죽든지 요정(了定)을 내리라 하였다. 집에서 내어쫓기고 계집까지 빼앗기고, 그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었다. 그것이 모두 자기의 돈 없는 탓인 것을 생각하며 더욱 분한 생각이 났다.

“에 더러운 년!”

그는 홍바지에 쇠사슬을 차고서 일을 할 때에도 가끔 침을 땅에다 뱉으면서 혼자 중얼거리었다.

“사람이 이러고서야 살아서 무엇하나. 멀쩡한 놈이 계집 빼앗기고 생으로 콩밥까지 먹으니…….”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감옥소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내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목숨을 잃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손으로 내 목을 찔러 죽든지, 무슨 요정이 날 것을 생각하고, 다시 온 몸에 힘을 주고 쓸쓸한 웃음을 웃었다.

그는 이백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계집이 사는 촌에를 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그를 보고 피해 갔다. 마치 문둥병자나 마찬가지 대우를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부터는 더욱이 세상이 차디차졌다. 자기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더 무정하여졌다.

그는 하는 수없이 밤이 될 때까지 그 근처 산속으로 돌아다녔다. 그래서 깊은 밤에 촌으로 내려왔다. 그는 그 방앗간을 다시 지나갔다. 석 달 전 생각이 났다. 자기가 여기서 잡혀 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한참이나 거기 서서 그때 일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친 후에 다시 그 전 집을 찾아갔다.

날이 몹시 추워지고 눈이 쌓였다. 옷을 입은 것이 가을에 입고 감옥에 들었던 그것이므로 살을 에이는 듯할 것이로되 그는 분한 생각과 흥분된 마음에 그것도 몰랐다.

‘년놈을 모두 처치를 해 버려?’

혼자 속으로 궁리를 하다가,

‘그렇지, 그까짓 것들은 살려 두어 쓸데없는 인생들이야.’

하면서 옆구리에 지른 기름한 단도를 다시 만져 보았다. 그는 감격스런 마음으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는 신치규의 집 울을 넘어 들어갔다. 그의 발은 전에 다닐 적같이 익숙하였다. 그는 사랑을 엿보고 다시 뒤로 돌아서 건넌방 창 밑에 와 섰었다.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손에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뒤 창문을 달각달각 흔들었다.

“그 뉘?”

하고 계집의 머리가 쑥 나오며 문이 열리었다. 그는 얼른 비켜섰다. 문은 다시 닫혀지고 계집은 들어갔다.

방원의 마음은 이상하게 동요가 되었다. 예쁜 계집의 목소리가 오래간만에 귀에 들릴 때, 마치 자기가 감옥에서 꿈을 꿀 적 모양으로 요염하고도 황홀하게 그의 마음을 꾀는 것 같았다. 그는 꿈속에서 다시 만난 것 같고 오래간만에 그를 만나 보매 모든 결심은 얼음같이 녹는 듯하였다. 그래도 계집이 설마 나를 영영 잊어버리랴 하고 옛날의 정리를 생각할 때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랴는 생각이 났다.

아무리 자기를 감옥에까지 가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감히 칼을 들어 죽이려는 용기가 단번에 나지 않아서 주저하기 시작하였다.

“아니다, 다시 한 번만 물어 보자!”

그는 들었던 칼을 다시 짚고 생각하였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다.

“그렇다. 한번만 다시 물어 보고 죽이든 살리든 하자!”

그는 다시 문을 달각달각하였다. 계집은 이번에 다시 문을 열고 사면을 둘러보더니 헌 짚신 짝을 신고 나왔다.

“뉘요?”

그는 방원이 서 있는 집 모퉁이를 돌아서려 할 제,

“내다!”

하고, 입을 틀어막고 칼을 가슴에 대었다.

“떠들면 죽어!”

방원은 계집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고 결박을 한 후 들쳐업고서 번개같이 달음질하였다. 그는 어느 결에 계집을 업어다가 물레방아 앞에 내려놓은 후 결박을 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를 모르겠니?”

캄캄한 그믐밤에 얼굴을 바짝 계집의 코앞에 들이대었다. 계집은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아!”

소리를 지르더니 뒤로 물러섰다.

“조금도 놀랄 것이 없다. 오늘 네가 내 말을 들으면 살려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야!”

하고, 시퍼런 칼을 들이대었다. 계집은 다시 태연하게,

“말요? 임자의 말을 들으렬 것 같으면 벌써 들었지요, 이때까지 있겠소? 임자도 남의 마음을 알거요. 임자와 나와 이년 전에 이곳으로 도망해 올적에도 전 남편이 나를 죽이겠다고 허리를 찔러 그 흠이 있는 것을 날마다 밤에 당신이 어루만지었지요? 내가 그까짓 칼쯤을 무서워서 나하고 싶은 것을 못한단 말이요? 힝, 이게 무슨 비겁한 짓이요. 사내자식이, 자! 찌르려거든 찔러 보아요. 자, 자.”

계집은 두 가슴을 벌리고 대들었다. 방원은 너무 계집의 태도가 대담하므로 들었던 칼이 도리어 뒤로 움찔할 만큼 기가 막혔다. 그는 무의식 중에,

“정말이냐?”

하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섰다.

“정말이 아니고? 내가 비록 여자지마는 당신같이 겁쟁이는 아니라오! 이것이 도무지 무엇이오?”

계집은 그래도 두려웠던지 방원의 손에 든 칼을 뿌리쳐 땅에 떨어뜨리었다.

이 칼이 땅에 떨어지자 방원은 이때까지 용사와 같이 보이던 계집이 몹시 비겁스럽고 더러워 보이어 다시 칼을 집어들고 덤비었다.

“에잇! 간사한 년! 어쩔 터니냐? 나하고 당장에 멀리 가지 않을 터이냐? 자아 가자!”

그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타일러 보기도 하고 간청도 하여 보았다.

“자아, 어서 옛날과 같이 나하고 멀리멀리 도망을 가자! 나는 참으로 나의 칼로 너를 죽일 수는 없다!”

계집의 눈에는 독이 올라왔다. 광채가 어두운 밤에 번개같이 번쩍거리며,

“싫어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가기는 싫어요. 이제 나는 고만 그렇게 구차하고 천한 생활을 다시 하기는 싫어요. 고만 물렸어요.”

“너의 입으로 정말 그런 말이 나오느냐? 너는 나를 우리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한 후에 또 나중에는 세상에서 지옥이라고 하는 감옥소에까지 가게 하였지! 그러고도 나의 맨 마지막 원을 들어주지 않을 터이냐?”

“나는 언제든지 당신 손에 죽을 것까지도 알고 있소! 자!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언제든지 죽기는 일반, 이렇게 된 이상 나를 죽이시오.”

“정말이냐? 정말이야?”

“정말요!”

계집은 결심한 뜻을 나타내었다. 방원의 손은 떨리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꽉 감고,

“에, 여우 같은 년!”

하고 칼끝을 계집의 옆구리를 향하여 힘껏 내밀었다. 계집은 이를 악물고,

“사람 죽인다!”

소리 한번에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칼자루를 든 손이 피가 몰리는 바람에 우루루 떨리더니 피가 새어 나왔다. 방원은 그 칼을 빼어 들더니 계집 위에 거꾸러져서 가슴을 찌르고 절명(絶命)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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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개었다.

동시에 저 편 들판 건너 숲 뒤에는 둥그렇게 무지개가 뻗쳤다. 오묘하신 하느님의 재주를 자랑하 듯이, 칠색의 영롱한 무지개가 커다랗게 숲 이 편 끝에서 저 편 끝으로 걸치었다.

소년은 마루에 걸터앉아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나절을 황홀히 그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마음 속으로 커다란 결심을 하였다.

  • '저 무지개를 가져다가 뜰 안에 갖다 놓으면 얼마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소년은 방 안에 있는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

  • "왜?"

어머니께서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 저 무지개를 잡으러 가겠어요, 네?"

어머니께서는 일감을 놓았다. 그리고 뚫어질듯이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네?"

  • "얘야, 무지개는 못 잡는단다. 멀리 하늘 끝 닿는 데 있어서 도저히 잡지 못한다."

"아니에요. 저 들판 건너 숲 위에 걸려 있는데......"

  • "아니다. 보기에는 그렇지만, 너의 이 어미도 오십 년 동안을 잡으려면서도 그것을 못 잡았구나."

"그래도...... 난 잡아요. 네? 내 얼른 잡아 올께."

어머니는 다시 일감을 드셨다. 그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 찼다.

"네? 가요?"

찬란히 빛나는 무지개의 유혹은 소년에게는 무엇보다도 강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의품보다도, 따뜻한 가정보다도, 맛있는 국밥보다도, 무지개의 유혹만이 이 소년의 마음의 전체를 누르고 지배하였다.

네 번, 다섯 번, 소년은 어머니에게 간청하였다.

어머니께서도 마침내 이 소년의 바람이 꺾을 수 없이 강한 것임을 알았다.

  • "정 그럴 것 같으면 가 보기는 해라. 그러나 벌 건너 저 숲까지 가 보고 거기서 잡지 못하거든 꼭 돌아와야 한다."

그런 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든든히 차림을 차려 주어서 떠나보냈다.

"어머니! 그럼 내 얼른 가서 잡아 올게요. 꼭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커다란 희망으로 떠나는 아들을 어머니는 눈물로서 보냈다.

소년은 걸음을 다하여 벌을 건너 갔다. 그리고 바라던 숲에까지 이르렀다.

그거 이상하다.

무지개는 벌써 그 곳에 있지 아니하였다. 찬란히 빛나는 무지개는 더 저편으로 썩 물러가서 그대로 소년을 이끄는 듯이 아름다운 자태를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가깝기는 가까왔다. 그러나 좀더 가야겠구나!'

소년은 또 다시 무지개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좀 몸이 피곤하였다. 동시에 마음도 피곤하여졌다. 그러나 눈앞에 찬란히 빛나는 무지개를 바라볼 때에, 소년은 용기가 다시 나서 무지개를 향하여 걸었다.

얼마만큼 가서 이만하면 됐으려니 하고 눈을 들어서 보았다. 그러나 찬란히 빛나는 무지개는 역시 같은 거리에서 그를 오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소년은 높은 뫼도 어느덧 하나 넘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 그러나 그 무지개의 찬란한 광채는 여전히 끊임 없이 소년을 오라는 듯이 유혹하였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혀 주지 않는 그 무지개는 역시 소년에게는 커다란 유혹이었다.

소년은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무지개를 향하여 또 달음박질하였다.

무지개를 잡으려는 오로지 안 조각의 붉은 마음으로 피곤도 잊고, 아픔도 잊고, 뛰어가던 소년은 어떤 산마루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쓰러졌다. 이제는 한 걸음도 더 걸을 용기와 기운이 없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쓰러지면서 피곤한 잠에 잠기고 말았다.

어지럽고 사나운 꿈 -- 그 가운데에서도 소년의 눈에는 끊임없이 찬란한 무지개의 광채가 어른거렸다. 그리고 그 무지개의 광채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끊임없이 들리었다.

많은 소년들과 소녀들이 꽃으로 온 몸을 장식하고, 손을 서로 맞잡고, 노래하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 소녀의 동그라미 속에는 칠색의 영롱한 무지개가 마치 주위에 있는 소년 소녀들를 애호하듯이 커다랗게 팔을 벌리고 있었다.

행복은
뉘것?
누릴자
누구?

소년과 소녀들의 노래는 부드럽고 아름답게 울려 온다.

얼마를 이러한 꿈에 잠겨 있던 소년은 그 꿈에서 벌떡 깨면서 눈을 떴다.

조금 아래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무지개는 역시 오 소년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이 아름다운 공채를 내어,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조금 더, 이제 한 걸음!'

소년은 후닥닥 일어섰다.

쏘는 다리, 저린 오금!

피곤으로 말미암아 소년은 하마터면 넘어질뻔 하였다. 소년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온몸에 있는 힘을 다 주었다.

눈 아래서 황홀히 빛나는 무지개는 그로 하여금 없는 힘을 다시 내게 한 것이었다.

또 다시 그는 무지개를 향하여 달음박질을 하였다.

그러나 산 중턱에 걸린 줄 알고 뛰어내려오던 소년은 중턱에서 무지개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산 아래까지 그냥 내려왔지만 무지개는 역시 멀리 물러서서, 마치 소년의 어리석음을 비웃듯이 빛나고 있었다.

'아! 곤하다.'

소년은 맥이 빠져 덜썩 주저앉았다.

소년은 뒤숭숭한 소리에 놀래어 깨었다. 그는 피곤함을 못이겨 어느덧 또 쓰러져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깨어서 보니 그 근처에는 어느덧 많은 소년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다투고 있었다. 무엇을 다투는가 자세히 들으니, 그들은 무지개가 있는 방향이 서로 이 편이다, 저 편이다, 다투는 것이었다.

"무지개는 이편 쪽에 있다."

어떤 소년은 동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정신 없는 소리 말아라. 무지개는 저 쪽에 있다."

다른 소년은 반대했다.

"너희들은 눈이 있냐 없냐? 저 쪽에 있지 않냐? 아직껏 너희들에게 속아서 따라 왔지만 무지개는 역시 내 생각대로 저 쪽에 있다."

다른 소년은 또 다른 데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많은 소년들이 가리키는 곳이 한 곳도 정확한 곳이 없었다. 모두 뚱딴지 같은 곳만 가리키면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소년은 마침내 일어났다. 그리고 점잖은 웃음으로 그들을 찾았다.

"여보세요! 당신네들도 무지개를 잡으러 떠난 분들이오?"

  • "그렇소."

"당신네의 말을 들으니까 무지개는 이 곳에 있다, 저 곳에 있다, 다투는 모양이지만 무지개는 바로 요 앞에 있지 않소?"

소년은 무지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은 소년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그러나 무지개는 뵈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다툼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한참을 나투던 소년들의 의견은 모두 맞지 않아서 그 곳에서 제가 생각하는 곳으로 찾아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잡으러 서로 손을 나누어 떠나기로 하였다.

그것을 눈이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우리의 소년도 마침내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무지개가 있다고 믿는 곳을 향하여 또한 피곤한 다리를 옮겼다.

무지개는 역시 소년의 눈 앞 몇 걸음 밖에서 찬란히 광채를 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꼭......!'

눈 앞에 커다랗게 보이는 무지개에 소년의 용기는 백 배나 더하여졌다.

어떤 곳에서 소년은 또다른 많은 소년의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모두 든든한 길신가리를 차리고 있었다. 소년은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말을 붙여 보았다.

"노형들은 어디로 가시오?"

  • "가는 게 아니라 갔다가 오는 길이오."

뭇 소년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그들은 모두 끝 없이 피곤한 눈에는 정기가 없고 몸은 쇠약으로 말미암아 떨고 있었다.

"어디를 갔다가 오시오?"

  • "무지개를 잡으러."

"네? 그래, 잡았소?"

  • "여보, 말도 마오. 그것에 속아서 공연히 좋은 세월을 헛되이 보냈소."

"집을 떠난 것은 언제쯤이오?"

  • "모르겠우, 감감하니까......"

"그래, 인제 그만두겠오?"

  • "그만두고 말고! 눈앞에 보이는 것 같기에 그것에 속아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이제껏 왔지만..."

"인젠 무지개라는 요 앞에 있지 않소?"

  • "하하하하......"

그들은 웃었다.

"그러기에 말이오. 눈 앞에 몇 걸음 앞에 있는 것 같기에 그것에 속아서 아직껏 세월만 허송했오."

소년은 낙담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그만 돌아가 버릴까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다. 그 때에 그 무지개는 쑤욱 더 소년에게 가까오 오며, 그 광채며, 빛깔이 더욱 영롱하여져서 단념하려는 소년으로 하여금 또 다시 단념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아, 아!"

소년은 커다른 한숨과 함께 다시 용기를 내었다.

"여보! 조금만 더 가 봅시다그려, 조금만."

소년은 그들에게 동행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몇 번을 권하여 본 뒤에 소년은 그들의 마음을 도저히 돌이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과 작별한 뒤에 자기는 역시 그 찬란한 무지개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어떤 곳에서 그는 두 소년을 만났다. 그 두 소년은 무엇이 기쁜지 몹시 만족한 듯이 웃고들 있었다.

소년은 그들에게 가까이 갔다.

"여보! 말 좀 물읍시다."

  • "무슨 말이오?"

"좀 이상한 말이나 당신네들 무지개를 못 보았소?"

사실 소년은 그 때에 무지개를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어디로 갔나? 아직껏 눈앞에 찬란히 빛나던 그 무지개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새었는지, 홀연히 그의 눈앞에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감추고 만 것이었다. 소년은 눈이 벌겋게 되어 찾았다. 그리고 종내 찾지 못하여 낙담하였을 때 그의 앞에 두 소년이 나타난 것이었다.

두 소년은 빙글빙글 웃었다.

  • "무지개 말이오? 무지개는 우리가 벌써 잡았소."

소년은 낙담하였다. 그리고 남담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비분으로, 걷잡을 새 없이 소년의 마음이 꺽어져 나갈 때, 이상도 하다. 역시 그의 앞에 역시 칠색이 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개가 문득 나타났다. 그 광채는 아직까지의 무지개보다 더 찬란하였다. 그 아직까지의 무지개보다 더 훌륭하였다.

소년의 마음은 절망에서 단숨에 희망으로 뛰어올라 갔다.

"여보! 봅시다, 봅시다."

  • "무에요?"

"노형네가 잡았다는 그 무지개를!"

두 소년은 장한 듯이 품 안에서 자기네의 자랑감을 꺼내어 소년에게 보였다.

소년은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하마터면 웃을 뻔하였다. 그것은 평범하고 변변치 않은 기왓장에 지나지 못하였다. 두 소년은 하나씩 기왓장을 얻어가지고 가지고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지개요? 이건 기왓장이구려."

두 소년은 각기 자기네의 보물을 다시금 살폈다. 그리고 한 소년은 부르짖었다.

  • "오, 무지개, 무지개! 나는 드디어 무지개를 잡았다. 이게 무지개가 아니고 무어란 말이오?"

그러나 한 소년은 한참 정신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보다가 커다란 한숨과 함께 그 무지개를 높이 들었다. 절망의 부르짖음을 발하였다.

  • "아니로구나, 아니야! 이것은 무지개가 아니야! 아직껏 무지개로 믿고 기뻐하던 것은 기왓장에 지나지 못하누나."

그리고 그는 그 기왓장을 던지고 우리의 소년에게 말하였다.

  • "노형도 무지개를 잡으러 떠난 사람이오?"

"예."

우리의 소년은 대답하였다.

  • "그럼 우리 같이 갑시다. 나는 무지개를 꼭 잡고야 말겠소."

여기서 서로 뜻이 맞은 두 소년은 만족해, 한 소년을 남기고 또한 찬란히 빛나는 무지개를 잡으러 길을 떠났다.

두 소년은 험한 산을 넘었다. 물결 센 물을 건넜다. 가시덤불을 헤쳤다. 자갈밭도 지났다. 그들은 오로지 무지개를 잡으려는 열정으로 온갖 난관을 참으면서 앞으로 갔다.

그들은 가는 길에 그들은 수많은 소년들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무지개를 잡으려다 잡지 못하고 낙망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변변치 않은 기왓장을 얻어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요를 점령한 사람들은 무지개를 잡으려다 종내 잡지 못하고 심신이 피로하여 쓰러져서 괴로운 부르짖음만 발하는 것이었다.

"아, 무지개! 그것은 마침내 사람의 손으로 잡지 못할 것인가!"

그들은 목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팔을 헤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낙망과 피곤의 끝에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 많이 섞여 있었다.

이런 광경을 볼 때 두 소년은 용기가 꺾여졌다. 그러나 더욱 훌륭한 무지개가 그을을 오라는 듯이 두 팔을 벌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금 용기를 얻은 두 소년은 무지개를 향하여 험한 길을 앞으로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떤 험한 산골짜기까지 이르러서 동행하던 소년은 마침내 쓰러졌다.

  • "여보! 난 인제 더 못 가겠소. 무지개는 도저히 잡지 못할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소."

동행하던 소년은 이렇게 한숨을 쉬었다.

"여보! 정신을 차려요. 여기까지 와서 이제 넘어진다니 웬 말이요?"

소년은 동행하던 친구를 흔들었다. 그러나 친구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흔들었다.

"여보! 정신을 차려요."

아,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동행하던 소년은 차디찬 몸으로 변하여 버렸다.

소년은 거기서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그런 야망이 흔들거렸다. 무지개는 도저히 잡지 못할 것인가 하는 의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 그러나 그 때에 그의 눈앞에 다시금 찬란히 빛나는 무지개가 마치 그의 마음 약한 것을 비웃 듯이 커다랗게 웃고 있었다.

위태스러운 산길, 험한 골짜기, 가파로운 뫼며, 깊은 물, 온갖 고난은 또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는 더욱 희망과 용기를 내어 무지개로 무지개로 가까이 갔다.

그러나, 얼마를 더 간 뒤에 소년도 마침내 인제 한 걸음도 더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무지개는 도저히 잡지 못할 것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는 몸을 커다랗게 땅에 내어 던졌다. 그리고 드높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아, 무지개란 기어이 사람의 손으로 잡지 못할 것인가?"

아직껏 그와 같은 길을 걸은 수많은 소년들의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이 소년은 여기서 또한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그 야망을 마침내 단념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 때에는 이상하다. 아직껏 검었던 머리는 갑자기 하얗게 되고, 그의 얼굴에는 전면에 수없이 주름살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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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돌아간 뒤요, 팔리지 못한 나무꾼패가 길거리에 궁싯거리고들 있으나 석유병이나 받고 고깃마리나 사면 족할 이 축들을 바라고 언제까지든지 버티고 있을 법은 없다. 칩칩스럽게 날아드는 파리떼도 장난꾼 각다귀들도 귀찮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이 동업의 조선달을 나꾸어 보았다.

"그만 거둘까 ? "

"잘 생각했네. 봉평 장에서 한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었을까. 내일 대화 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오늘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달이 뜨렷다."

절렁절렁 소리를 내며 조선달이 그날 번 돈을 따지는 것을 보고, 허 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려 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 필과 주단 바리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 각이 어수선하게 남았다.

다른 축들도 벌써 거의 전들을 걷고 있었다. 약빠르게 떠나는 패도 있었다. 어물장수도 땜장 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 았다.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쪽 으로든지 밤 을 새며 육칠십 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장판은 잔치 뒤 마당같 이 어 수선하게 벌어지고 술집에서는 싸움이 터져 있었다. 주정 꾼 욕지거리에 섞여 계집의 앙칼 진 목 소리가 찢어졌다. 장날 저녁은 정 해 놓고 계집의 고함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생원,시침을 떼두 다 아네. --- 충주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화중지병이지. 연소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그렇지두 않을 걸. 축들이 사족을 못 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주집을 후린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가? 물건 가지고 낚았나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그 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그려. 내 한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쫓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설 숫기도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주집을 생각만 하여 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충주집 문을 들어서 술 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된 서슬엔지 발끈 화가 나 버렸다. 상위에 붉은 얼굴 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군인데 꼴 사납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 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동색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 어디서 주워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치워.

그러나 한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은히 여겨졌다. 아직도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이 섬짓해졌다. 주제도 넘지, 같은 술 손님이면서도 아무리 젊다고 자식 낫세 되는 것을 붙들고 치고 닦아 세울 것은 무어야 원. 충주집은 입술을 쫑긋하고 술 붓는 솜씨도 거칠었으나, 젊은애들한테는 그것이 약이 된다고 하고 그 자리는 조선달이 얼버무려 넘겼다. 너 녀석한테 반했지? 애숭이를 빨면 죄된다. 한참 법석을 친 후이다. 담도 생긴 데다가 웬일인지 흠뻑 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허생원은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거나해짐을 따라 계집의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할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망하는 마음도 한 편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 없이 허덕이며 충주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구 야단이에요."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짐승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거슴츠레 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으다.

"부락스런 녀석들이라 어쩌는 수 있어야죠."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 않을걸."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 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슬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목덜미를 어루만져 주니 나귀는 코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다. 콧물이 튀었다. 허생원은 짐승 때문에 속도 무던히는 썩였다. 아이들의 장난이 심한 눈치여서 땀배인 몸뚱어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좀체 흥분이 식지 않는 모양이었다. 굴레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요 몹쓸 자식들, 하고 허생원은 호령을 하였으나 패들은 벌써 줄행랑을 논 뒤요. 몇 남지 않은 아이들이 호령에 놀래 비슬비슬 멀어졌다.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

코홀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고녀석 말투가."

"김첨지 당나귀가 가버리니까 온통 흙을 차고 거품을 홀리면서 미친 소같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는 앵돌아진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뭇 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리워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

아이의 웃음 소리에 허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이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니 아이를 쫓았다.

"쫓으려거든 쫓아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후릴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조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드팀전 장돌이를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도 혜매이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 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 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의 가까웠을 때, 지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젊은 시절에는 알뜰하게 벌어 돈푼이나 모아본 적도 있기는 있었으나, 읍내에 백중이 열린 해 호탕스럽게 놀고 투전을 하고 하여 사흘 동안에 다 털어버렸다. 나귀까지 팔게 된 판이었으나, 애끓는 정분에 그것만은 이를 물고 단념하였다. 결국 도로아미타불로 장돌이를 다시 시작할 수 밖에는 없었다. 짐승을 데리고 읍내를 도망해 나왔을 때에는 너를 팔지 않기를 다행이었다고 길가에서 울면서 짐승의 등을 어루만졌던 것이다.

빚을 지기 시작하니 재산을 모을 염은 당초에 틀리고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러 장에서 장으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호탕스럽게 놀았다고는 하여도 계집 하나 후려보지는 못하였다. 계집이란 쌀쌀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평생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신세가 서글퍼졌다.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번의 첫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허생원은 오늘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장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주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 쳤단 말이야.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 팔자에 있었나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는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 판인 때였지. 한 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이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음날이렷다."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에 발끈 뒤집혀 고작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라고 처녀의 뒷공론이 자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하나 처녀의 꼴은 꿩 궈먹은 자리야.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수 좋았지. 그렇게 신통한 일이란 쉽지 않어. 항용 못난 것 얻어 새끼 낳고 걱정 늘고 생각만 해두 진저리 나지 --- 그러나 늘그막바지까지 장돌뱅이로 지내기도 힘드는 노릇 아닌가. 난 가을까지만 하구 이 생계와두 하직하려네. 대화쯤에 조그만 전방이나 하나 벌이구 식구들을 부르겠어. 사시 장천 뚜벅뚜벅 걷기란 여간이래야지."

"옛 처녀나 만나면 같이나 살까 ---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산길을 벗어나니 큰 길로 틔어졌다. 꽁무니의 동이도 앞으로 나서 나귀들은 가로 늘어섰다.

"총각두 젊것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렷다. 충주집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섧게 생각 말게."

“처, 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자나 깨나 어머니 생각뿐인 데요."

허생원의 이야기로 실심해 한 끝이라 동이의 어조는 한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아비 어미란 말에 가슴이 터지는 것도 같았으나 제겐 아버지가 없어요. 피붙이라고는 어머니 하나뿐인걸요."

"돌아가셨나 ? "당초부터 없어요."

"그런 법이 세상에......"

생월과 선달이 야단스럽게 껄껄들 웃으니, 동이는 정색하고 우길 수 밖에는 없었다.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예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지 내와요."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대견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듯하면 미끄러졌다. 허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렸다. 동이 같은 젊은 축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 바탕 쪽 씻어내렸다.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홀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 "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가서 술장수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의부라고 전 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한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쳐나와서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동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녔으나, 동이는 허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 해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뎠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 버렸다. 허비적거릴수록 몸을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이나 흘렀었다. 옷째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서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 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랬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조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이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 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 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치울 젠 딴은 대단한 나귀 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 에겐 더운 물을 끓여주고. 내일 대화 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 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신이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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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이 되었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누가 봄을 기다리지 않으련만 윤수는 남달리 봄을 기다렸다. 윤수는 겨울 동안에도 볕만 나면 뒷산에 올라가서 마른 나뭇가지며 썩은 등걸 따위를 모아서 땔나무를 해 오기도 하고 멀리 뵈는 산봉우리의 허옇게 덮인 눈경치를 구경하기에 그다지 갑갑한 줄은 모르지만, 날이 흐리고 몹시 추운 때에는 자연 집안에 들어앉아 있게 되기 때문에 심심하고 갑갑한 시간을 보내기가 퍽 괴로왔다. 이제 따뜻한 봄이 왔으니 윤수는 산과 들에 나가서 마음대로 뛰놀고 힘껏 일을 하게 되었다.

윤수가 봄을 기다리고 봄을 좋아하는 것은 춥지 않고 따뜻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뾰죽뾰죽 돋아나오는 새싹, 파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하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 이런 것을 보기가 무척 좋았다.

윤수는 돋아나는 새싹이나 파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를 보면 오래 못 보던 동무를 만난 듯이 빙그레 웃고 좋아하고, 어떤 때는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새싹을 보고 무어라고 이야기도 해 보고 노래도 불러 보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아
돋아났어요

윤수는 언젠가 뒷집 교장네 작은 아이가 부르는 걸 듣고 배운 이 노래를 자꾸만 부르는 것이다.

윤수는 땅 속에서 파란 싹이 돋아나오는 것이 신기해서도 좋아하지만 길가에 오고가는 사람의 발길에 밟히면서 곱게 피는 민들레 노란 꽃도 썩 좋아한다.

봄날에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이나 하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그리고 길가에 핀 민들레 노란 꽃은 다 윤수의 좋은 동무였다. 윤수에게는 이런 동무밖에 동무가 없었다.

2

윤수네가 성재 동네 온 지는 일 년밖에 못되었다. 성재에 온지 석 달 만에 윤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윤수네가 처음 이 동네로 이사해 올 적에 허술한 집을 하나 사 가지고 왔기 때문에,윤수 아버지는 혼자서 손수 집을 고치고 을 갈아 덮고 방 구들을 뜯고 다시 놓느라고 너 무 고달프게 지내다가 그만 눕기를 시작해서 시름시름 앓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병이 부쩍 더해서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 않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앓는 동안 윤수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이 정성껏 간호를 해드렸다.

윤수 아버지는 딸 하나는 일찍 시집보내고 이 동네 올 적에는 윤수 하나만 데리고 왔다. 그래서 어머니하고 세 식구가 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니까 어머니와 단둘이만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날 전에 조용한 밤인데,

「윤수야.」

부르고 나서 윤수의 손을 꼭 붙잡고 힘없는 목소리로,

「윤수야, 너 이담에 좋은 사람 돼야 한다. 좋은 사람 될려면 동무를 잘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함부로 동무를 사귀었다가는 큰일난다.」

아버지는 잠시 쉬어서,

「윤수야, 알겠니 ? 너 나쁜 아이들하구 놀면 안된다, 응? 내 아들 착하지,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서 꼭 그대루 해야 한다.」

그렇게 쉬엄쉬엄 이르시는 말을 듣다가 윤수는,

「아버지,염려 마세요. 그런데 아버지, 어떤 아이가 나쁜 아이야요? 무얼 보고 나쁜 아이, 좋은 아이를 가려요? 아버지, 그것만 더 일러 주셔요. 그러면 저는 그대루만 할 테야요.」

이렇게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잠깐 생각 하는 것 같더니,

「그래,내 말대루만 해라. 누구든지 말을 많이 하는 아이는 아예 사귀지 말아라. 그런 아이들은 믿을 수가 없느니라. 알겠니, 윤수야?」

아버지는 이렇게 간곡한 말로 일러 주었다.

「네,알겠읍니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윤수는 속으로 (옳지) 하면서 똑똑히 대답했다.

3

시집간 누이하고 매부가 오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보아 주어서 아버지 장사는 그럭저럭 지냈다.

아버지를 여읜 윤수는 슬프고 외로운 것을 참고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그럭저럭 지냈다. 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이 좀 있고 동네에 사 둔 땅마지기도 있어서 두 식구가 살아 가기는 걱정이 없었다. 윤수 하나 간신히 공부시킬 만한 형편도 되었기 때문에 윤수는 새해부터 학교에 들어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윤수는 참 심심했다. 그럭저럭 봄이 되고 농사 지을 철이 되어서 어머니는 사람을 얻어서 밭을 갈고 거름을 내기에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윤수는 더 심심하고 갑갑했다. 그래서 윤수는 갑갑한 때면 가끔가끔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의 아버지 무덤에 가서 놀았다. 어떤 때는 꼭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무덤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나 이담에 좋은 사람 될께요. 아버지,걱정 마세요. 말 많이 하는 아이하구는 놀지 않을께요,아버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달음박질해서 내려오곤 했다.

「윤수야, 너 어디 갔었니?」

어머니는 이렇게 묻는 것이다. 어머니는 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 나 아버지한테 갔다 왔어. 왜 아버지한테 가면 안돼요?」

「나하구 같이 가자,너 혼자만 가면 안 된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옷고름으로 눈을 씻는 것이다.

혼자 가면 왜 안돼요? 하고 불어 보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윤수야,윤수야!」

대문 밖에서 누가 찾는다. 나가 보니까 동네에서 늘 보던 아이다. 나이는 자기보다 몇 살 위였다. 보기에도 좀 컸다.

「윤수야, 나와 우리들하구 놀자. 너 왜 우리들하구 놀지 않고 밤낮 집안에만 틀어백혀 있니?」

「……」

윤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너 그리구 혼자 산으로 가서 뭘하니? 밤 낮 산에 가서 뭘하니?」

장손이란 아이가 이렇게 지껄이고 있는데 저쪽에 보니까 또 다른 아이가 둘이 있다. 그리고 장손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픽픽 웃는 소리가 들린다.

윤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얘,윤수가 왜 그럴까? 좀 바본가봐.」

장손이가 저희 동무들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윤수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하여튼 윤수는 썩 불쾌했다. 그리고,그런 애들하고 놀지 않고 들어온 것이 잘 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간곡하게 이르시던 것을 생각한 것이다.

4

그 이튿날이었다. 또 대문 밖에서 누군가 찾는다. 어머니는 어디 가고 없었다.

「윤수야,어머니 계시니?」

아버지 살아 계실 때부터 가끔 보던 사람이다. 동네에서 가끔 찾아오던 사람이다. 그런데,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도무지 온 일이 없었다. 윤수가 산에 아버지한테 간 동안에 왔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가끔 찾아가서 만난 모양이었다.

「허허,꼭 너의 어머니를 보아야 할 텐데, 어쩌나. 어머니 어디 가셨는지 너 모르겠니? 너 좀 가서 찾아보렴,응? 몇 살 이지.」

「열 살이어요.」

윤수는 겨우 이 한마디를 뱉어 버리고 인사도 하지 않고 들어와 버렸다.

(이 사람도 좀 말이 많으니 재미 없는 사람 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 아까 왔던 그 사람 아셔요? 우리 아버지 계실 때 가끔 우리 집에 오셨었나봐. 나이가 꽤 많은가봐. 수염이 길어요.」

「그래 그래,윗동네 주부님이로구나.」

「아마 그런가봐.」

이제 생각하니까 아버지 살아 계실 때도 오고 앓아 누웠을 때에 가끔 왔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엄마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요?」

「왜 그러냐?」

「글쎄 말이어요.」

「글쎄라니, 왜 그러니?」

「말이 좀 많지 않아요.」

「무슨 말이 많던?」

어머니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윤수는 어머니를 꼭 만나야 되겠다는 말이며, 공연히 남의 나이를 물어 보더란 말을 했다.

「애도,그만한 말을 하는 걸 가지고 그러니?」

「엄마 엄마,아버지가 말이 많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그러신 거 엄마도 알지?」

「글쎄 그리셨던가?」

어머니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큰 아이가 찾아와서 윤수를 불렀다. 이 큰 아이는 심부름 온 아이였다.

「윤수야,너 윤수지? 어머니 어디 가셨니? 너 왜 동무하고 놀지 않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윤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또 혼자서 아버지한테 갔다왔다. 어머니한테는 아버지 무덤에 갔다왔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판으로 다니면서 놀다 왔노라 했다. 전날 산에서 오다가 들판과 딴 동네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민들레꽃 오랑캐꽃도 구경하고 갓 깬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따라다니는 구경도 하고, 어떤 때는 병아리 한 놈이 어미 닭을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서 빽빽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손바닥에 놓아서 어미 있는 데 갖다 주고 오기도 했다. 그러기에 늦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너는 동무도 없니?」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면 윤수는,

「어디 믿을 만한 애가 있어야지요.」

5

윤수에게도 동무가 생겼다. 뒷집 교장네 애란이란 올해 여섯 살짜리 계집애였다.

애란이는 아직 학교에도 안 가면서도 노래를 잘했다. 처음에 저희 집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윤수는 밖에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애란이가 대문 밖엘 내다보다가 윤수가 혼자서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또 혼자서 쓸쓸한 것 같은 것을 알았는지 윤수더러 들어오라고 했다. 그것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눈과 고개와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다.

윤수는 가만히 보다가 슬금슬금 애란이 뒤로 따라 들어갔다. 애란네 집에는 여러 가지 전에 보지 못하던 훌륭한 꽃이 많았다.

그래서 그 꽃 구경을 하기에 정신없었다. 꽃구경을 하다가는 가끔 애란이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늘 웃기만 하는 애란이도 꽃과 같이 예뻤다.

왜 날 쳐다보니? 그런 말도 아니하고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아주 말이 없이 웃기만 하는 것이다.

애란이도 동무가 없어서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좀 있다가는 윤수보고 또 오라고 눈과 고개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애란이는 벙어리가 아니었다.

「엄마,나 잠깐 나갔다 올께요.」

하면서 윤수의 뒤를 따라와서 윤수네 대문까지 왔다 가는 것을 윤수는 보았다.

애란이는 그 뒤에도 가끔 윤수네 집에 와서 대문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윤수는 어느 틈에 그것을 알고 문을 급히 열고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두 아이는 말도 없이 애란네 집으로 가는 것이다.

어떤 때는 윤수가 애란네 집 대문 밖에 가서 안쪽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어느 틈에 안에서 뛰어나와서 말없이 윤수를 맞아들인다.

「너 어떤 꽃이 제일 예쁘지?」

「글쎄, 다 예뻐.」

「그래도 그 중에 어느 꽃이?」

「요것이 제일 예뻐.」

「그것 무슨 꽃인지 알어?」

「몰라.」

「시클라멘(Cyclamen)이란다.」

「뭐 시크라문?」

「그래,하나 줄까? 너희 갖다 심을래?」

「싫어, 그만둬. 나 여기 와서 너하구 둘이 같이 보면 되지 머.」

애란이는 고개만 까딱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놀다가 애란이가 먼산을 바라보면서 가만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윤수는 처음에는 가만히 듣다가 나중에는 따라서 해 본다.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하는 노래도 하고 다른 새 노래도 하고 그러다가, 「참 아름다워라」하는 노래도 해 보았다.

「애란아,그것 무슨 노래지?」

「그것 말이야,찬송가라는 거야, 또 할까?」

「그래, 또 해, 응?」

이렇게 두 사람은 찬송가도 제법 부르게 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어머니는,

「윤수야,애란이는 좋은 애더냐.」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애는 말이 없으니까요.」

「그럼 벙어리더냐?」

「아니야, 아니야. 어쨌든 좋은 애야.」

「그런데 윤수야,애란네 이제 읍으로 이사 간다더라.」

「참말이야? 엄마, 공갈이지?」

「참말이다. 이제 한 달 있다가 간다더라.」

「그래요! 엄마?」

윤수의 얼굴은 금방 빨개졌다.

「윤수야,우리도 토지 팔아 가지고 읍으로 갈까?」

「그래요, 엄마. 우리도 가요, 읍으로 가요.」

「정말 갈까,우리끼리 살기 적적한데…… 읍으로 가면 누나네도 가깝고 좋지!」

윤수는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더니 똑똑 한 목소리로,

「엄마, 우리 읍에 가지 말아. 우리 떠나면 아버지는 어떡해요? 아버지 혼자 버리고 가문 안돼! 애란네는 가두 우린 가지 말어. 아버지 손수 손질해서 얌전하게 꾸린 이 집에서 그냥 살아요!」

한 달이 지났다. 윤수는 말없이 웃으면서 떠나가는 애란이를 물끄레 바라보다가 달음박질로 아버지한테 갔다. 오래도록 아버지 옆에 앉아서 애란이한테 배운,〈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을 부르고 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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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 시간이었다.

“이 없는 동물이 무엇인지 아는가?”

선생이 두 번씩 거푸 물어도 손 드는 학생이 없더니 별안간 “넷!” 소리를 지르면서 기운 좋게 손을 든 사람이 있었다.

“음, 창남인가. 어데 말해 보아.”

“이 없는 동물은 늙은 영감입니다!”

“예에끼!”

하고 선생은 소리 질렀다.

온 반 학생이 깔깔거리고 웃어도 창남이는 태평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

도덕 시간이었다.

“성냥 한 개피의 불을 잘못하야 한 동리 삼십여 집이 불에 타 버렸으니 단 성냥 한 개의 성냥이라도 무섭게 알고 주의해 써야 되는 것이니라.”

하고 열심히 설명해 준 선생님이 채 교실 문 밖에도 나아가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진 빗물이 모이고 모이어 큰 홍수가 난 것이니 누구든지 콧물 한 방울이라도 무섭게 알고 주의해 흘려야 하나니라.”

하고 크게 소리친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듣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돌아서서,

“그게 누구냐? 아마 창남이가 또 그랬지?”

하고 억지로 눈을 크게 떴다. 모든 학생들은 킬킬거리고 웃다가 조용해졌다.

“네, 선생님 안 계신 줄 알고 제가 그랬습니다. 이담엔 안 그러지요.”

병정같이 우뚝 일어서서 말한 것은 창남이었다.

억지로 골낸 얼굴을 지은 선생님은 기어코 다시 웃고 말았다. 그래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고는 그냥 나가 버렸다.

“아하하하.”

학생들은 일시에 손뼉들을 치면서 웃어대었다.

○○ 고등 보통 학교 1학년의 2반 창남이는 반 중에 제일 인기 좋은 쾌활한 소년이었다.

이름이 창남이요 성이 한가인 고로 ‘안창남’ 씨와 같다고 학생들은 모두 그를 보고 “비행사, 비행사.” 하고 부르는데 사실상 그는 비행사같이 시원스럽고 유쾌한 성질을 가진 좋은 소년이었다.

모자가 다 해어져도 새 것을 사 쓰지 않고 양복 바지가 해어져서 궁둥이에 조각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집안이 구차한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단 한 번이라도 근심하는 빛이 있거나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눈치도 없었다.

남이 걱정이 있어 얼굴을 찡그릴 때에는 우스운 말을 잘 지어 내고 동무들이 곤란한 일이 있는 때에는 좋은 의견도 잘 꺼내는 고로 비행사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다.

연설을 잘 하고 토론을 잘 하는 고로 1반하고 내기를 할 때에는 언제든지 창남이 혼자 나아가 이기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이 정말 가난한지 넉넉한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또 그의 집이 어데인지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그 가는 쪽으로 가는 학생이 없었고 가끔 그 뒤를 쫓아가 보려고도 하였으나 모두 중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왜 그런고 하니 그는 날마다 이십 리 밖에서 학교를 다니는 까닭이었다.

그는 다른 우스운 말은 가끔가끔 하여도 자기 집안일이나 자기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을 보면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그는 입과 같이 궁둥이가 무거워서 운동틀(철봉)에서는 잘 넘어가지 못하여 늘 체육 선생께 흉을 잡혔다.

하학한 후에 학생들이 다 돌아간 후에도 혼자 남아 있어서 운동틀에 매어 달려 땀을 흘리면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동무들은 가끔 보았다.

“얘, 비행사가 하학한 후에 혼자 남아서 철봉 연습을 하고 있더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혼자 애를 쓰더라.”

“그래 인제는 좀 넘어가데?”

“웬걸, 한 이백 번이나 넘어 연습을 하면서 그래도 혼자 못 넘어가더라.”

“그래 맨 나중에는 자기가 자기 손으로 그 누덕누덕 기운 궁둥이를 자꾸 때리면서 ‘궁둥이가 무거워, 궁둥이가 무거.’ 하면서 가더라!”

“자기가 자기 궁둥이를 때려?”

“그러게 괴짜지.”

“아하하하하하하.”

모두 웃었다.

어느 모로든지 창남이는 반 중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몸이었다.

2

겨울도 겨울,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혹혹 부는 이른 아침에 상학종은 치고 공부는 시작되었는데 한 번도 결석한 일이 없는 창남이가 이 날은 오지 않았다.

“호외일세, 호외야! 비행사가 결석을 하다니.”

“엊저녁 그 무서운 바람에 어데로 날러간 게지.”

“아마 병이 났나 부다. 감기가 든 게지.”

“이놈아, 능청스럽게 아는 체 말어라.”

1학년 2반은 창남이 소문으로 소근소근 야단들이었다.

첫째 시간이 반이나 넘어 지났을 때에 교실 문이 덜컥 열리고 창남이가 얼굴이 새빨개 가지고 들어섰다.

학생과 선생은 반가워하면서 웃었다. 그러고 그들은 창남이가 신고 서 있는 구두를 보고 더욱 크게 웃었다.

그의 오른편 구두는 헝겊으로 싸매고 또 새끼로 감아 매고 또 그 위에 손수건으로 싸매고 하여 퉁퉁하기 짝이 없었다.

“창남아, 오늘은 웬일로 늦었느냐?”

“네.”

하고 창남이는 그 괴상한 퉁퉁한 구두 신은 발을 번쩍 들고,

“오다가 길에서 구두가 다 떨어져 너털거리는 고로 새끼를 얻어서 고쳐 신었더니 또 너털거리고 또 너털거리고 해서 여섯 번이나 제 손으로 고쳐 신고 오느라고 늦어졌습니다.”

그러고도 창남이는 태평이었다. 그 시간이 끝나고 쉬는 동안에 창남이는 그 구두를 벗어 들고 다 해어져서 너털거리는 주둥이를 손수건과 대님짝으로 얌전스럽게 싸매어 신었다. 그러고도 태평이었다.

따뜻한 날도 귀찮아하는 체육시간이 이렇게 살이 터지게 추운 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추운 날 체육을 한담.”

“또 그 무섭고 딱딱한 선생이 웃통을 벗으라 하겠지…… 아이그, 아찔이야.”

하고 싫어하는 체육 시간이 되었다.

원래 군인 다니던 성질이라 뚝뚝하고 용서성 없는 체육 선생이 호령을 하다가 그 괴상스런 창남이의 구두를 보았다.

“한창남! 그 구두를 신고도 활동할 수 있니? 뻔뻔하게.”

“네,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하고 창남이는 시키지도 않는 뜀도 뛰어 보이고, 달음박질도 하여 보이고 제자리걸음도 부지런히 해 보였다.

체육 선생도 어이가 없던지,

“음! 상당히 치료해 신었군!”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호령을 계속하였다.

“전열만 삼 보 앞으로옷!”

“전후열 모두 웃옷 벗엇!”

3

죽기보다 싫어도 체육 선생의 명령인지라 온 반 학생이 일제히 검은 양복 저고리를 벗고 샤쓰만 입은 채로 서 있고 선생까지 벗었는데 다만 한 사람 창남이가 벗지를 않고 있었다.

“한창남! 왜 웃옷을 안 벗니?”

창남이의 얼굴은 폭 수그러지면서 빨개졌다. 그가 이러기는 참말 처음이었다. 한참 동안 멈츳멈츳하다가 고개를 들고,

“선생님, 만년 샤쓰도 좋습니까?”

“무엇? 만년 샤쓰? 만년 샤쓰란 무어야?”

“매 매 맨몸 말씀입니다.”

성난 체육 선생은 당장에 후려 갈길 듯이 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벗어랏!”

호령하였다.

창남이는 양복 저고리를 벗었다. 그는 샤쓰도 적삼도 아무것도 안 입은 벌거숭이 맨몸이었다. 선생은 깜짝 놀라고 학생들은 깔깔 웃었다.

“한창남! 왜 샤쓰를 안 입었니?”

“없어서 못 입었습니다.”

그 때 선생의 무섭던 눈에 눈물이 돌았다. 그리고 학생들의 웃음도 갑자기 없어졌다. 가난! 고생! 아아, 창남이 집은 그렇게 몹시 구차하였던가..... 모두 생각하였다.

“창남아, 정말 샤쓰가 없니?”

눈물을 씻고 다정히 묻는 소리에,

“오늘하고 내일만 없습니다. 모레는 인천서 형님이 올라와서 사 줍니다.”

“음! 그럼 웃옷을 다시 입어라!”

체육 선생은 다시 물러서서 큰 소리로,

“한창남은 오늘은 웃옷을 입고 해도 용서한다. 그러고 학생 제군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으니 제군은 다 한창남 군같이 용감한 사람이 되란 말이다. 누구든지 샤쓰가 없으면 추운 것은 둘째요, 첫째 부끄러워서 결석이 되더라도 학교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같이 제일 추운 말 한창남 군은 샤쓰 없이 맨몸, 으응, 즉 그 만년 샤쓰로 학교에 왔단 말이다. 여기 섰는 제군 중에는 샤쓰를 둘씩 포개 잆은 사람도 있을 것이요, 재킷까지 외투까지 입고 온 사람이 있지 않은가……. 물론 맨몸으로 오는 것이 예의는 아니야. 그러나 그 용기, 의기가 좋단 말이다. 한창남 군의 의기는 일등이다. 제군도 다 그 의기를 배우란 말야.”

만년 샤쓰! 비행사란 말도 없어지고 그 날부터 만년 샤쓰라는 말이 온 학교 안에 퍼져서 만년 샤쓰라고만 부르게 되었다.

4

그 다음 날은 만년 샤쓰 창남이가 늦게 오지 않았건마는 그가 교문 근처에까지 오자마자 온 학교 학생이 허리가 부러지게 웃기 시작하였다.

창남이가 오늘은 양복 웃저고리에 바지는 어쨌는지 얄따랗고 해어져 뚫어진 조선 겹바지를 입고 버선도 안 신고 맨발에 짚신을 끌고 뚜벅뚜벅 걸어온 까닭이었다.

맨가슴에 양복 저고리. 위는 양복 저고리 아래는 조선 바지(그나마 다 뚫어진 겹바지) 맨발에 짚신, 그 꼴을 하고 이십 리 길을 걸어왔으니 행길에서는 오죽 웃었으랴. 그러나 당자는 태평이었다.

“고아원 학생 같으니, 고아원야.”

“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아이 같구나.”

하고들 떠드는 학생들 틈을 헤치고 체육 선생이,

“무슨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다가 창남이의 그 꼴을 보고 놀랐다.

“너는 양복 바지를 어찌했니?”

“없어서 못 입고 왔습니다.”

“어째 그렇게 없어지느냐? 날마다 한 가지씩 없어진단 말이냐?”

“네! 그렇게 하나씩 둘씩 없어집니다.”

“어째서?”

“네…….”

하고 창남이는 침을 삼키고서.

“그저께 저녁이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저희 집 동리에 큰 불이 나서 저희 집도 반이나 넘어 탔어요. 그래서 모두 없어졌습니다.”

듣기에 하도 딱해서 모두 혀끝을 찼다.

“그렇지만 양복 바지는 어저께도 입고 있지 않었니? 불은 그저께 나고…….”

“네, 저희 집은 반만이라도 타다가 남어서 세간도 더러 건졌지만 이웃집이 십여 호나 모두 타 버린 고로 동리가 야단들이야요. 저는 어머니하고 단 두 식구만 있는데 집은 반이라도 남았으니까 먹고 잘 것은 넉넉해요. 그런데 동리 사람들이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게 되야서 야단이야요. 그래 저희 어머니께서는 ‘우리들은 먹고 잘 수가 있으니까 벌거벗는 것만 면하면 살 수가 있으니 두 식구가 당장에 입을 것 한 벌씩만 남기고는 모두 길거리에 떨고 있는 동리 사람들게 나눠 드려라.’ 하시는 고로 어머니 옷, 제 옷을 모두 동리 어른들게 드렸답니다. 그러구 양복 바지는 주지 않고 제가 입고 있었는데 저희 집 옆에서 숯 장사하던 영감님이 병든 노인인 고로 하도 춥다 하니까 보기에 딱해서 어제 저녁에 마저 벗어 주고 저는 가을에 입던 해진 겹바지를 꺼내 입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고개들이 말없이 수그러졌다. 선생님도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너는 네가 입을 샤쓰까지 버선까지 다 벗어 주었단 말이냐?”

“아니오. 버선과 샤쓰뿐만은 한 벌씩 남겼는데 저희 어머니가, 입었던 옷은 모두 남에게 주어 놓고 앉어서 추워서 발발 떠시는 고로 제가 ‘어머니, 저의 샤쓰라도 입으실까요?’ 하니까, ‘네 샤쓰도 모두 남 주었는데 웬 것이 두 벌씩 남어 있겠니?’ 하는 고로 저는 제가 입고 있는 것 한 벌뿐이면서도 ‘네, 두 벌 남었으니 하나는 어머니 입으시지요.’ 하고 입고 있던 것을 어저께 아침에 벗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먼길에 학교 가기 추울 터인데 둘을 포개 입을 것을 그랬구나.’ 하시면서 받아 입으셨어요. 그러고 하도 발이 시려 하시면서 ‘이 애야 창남아, 너 버선도 두 켤레가 있느냐?’ 하시기에 신고 있는 것 한 켤레뿐이건마는 ‘네, 두 켤레올시다. 하나는 어머니 신으시지요.’ 하고 거짓말을 하고, 신었던 것을 어제 저녁에 벗어 드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나쁜 일인 줄은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도 아침에 나올 때에 ‘이 애야, 오늘같이 추운 날 샤쓰를 하나만 입어서 춥겠구나. 버선을 잘 신고 가거라.’ 하시기에 맨몸 맨발이면서도 ‘네, 샤쓰도 잘 입고 버선도 잘 신었으니까 춥지는 않습니다.’ 하고 속이고 나왔어요. 저는 거짓말쟁이가 되었습니다.”

하고 창남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네가 거짓말을 하드래도 어머니께서는 너의 벌거벗은 가슴과 버선 없이 맨발로 짚신 신은 것을 보시고 아실 것이 아니냐?”

“아아, 선생님…….”

하는 창남이의 소리는 우는 소리같이 떨렸다. 그러고 그의 수그린 얼굴에서 눈물 방울이 뚝뚝 그의 짚신 코에 떨어졌다.

“저희, 저희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눈이 멀으셔서 보지를 못하고 사신답니다.”

체육 선생의 얼굴에도 굵다란 눈물이 흘렀다. 와글와글하던 그 많은 학생들이 자는 것같이 고요하고 훌적훌적 훌적거리며 우는 소리만 여기서 저기서 조용히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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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꽃다지, 질경이, 나생이, 딸장이, 민들레,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신금초, 씀바귀, 돌나물, 비름, 늘쟁이. 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족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뽀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주빛과 그림자의 옥색빛밖에는없어 단순하기 옷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은 것이, 봄은 옷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흙빛에서 초록으로.... 이 기막한 신비에 다시 한 번 놀라 볼 필요가 없을까.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기에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어 놓을까. 바닷물을 고래같이 들이켰던가. 하늘의 푸른 정기를 모르는 결에 함빡 마셔 두었던가. 그것을 빗물에 풀어 시절이 되면 땅 위로 솟쳐 보내는 것일까. 그러나 한 표기의 풀을 뽑에 볼 때 잎새만이 푸를 뿐이지 뿌리와 흙에는 아무 물들인 자취도 없음은 웬일일까. 시험관 속 붉은 물에 약품을 넣으면 그것이 금시에 새파랗게 변하는 비밀. 그것과도 흡사하다. 이 우주의 비밀의 약품, 그것을 결국 알 바 없을까. 할 톨의 보리알이 열 낱으로 나는 이치를 가르치는 이 있어도 그 보리알에서 푸른 잎이 돋는 조화의 동기는 옳게 말하는 이 없는 듯하다.

사람의 지혜란 결국 신비의 테두리를 뱅뱅 돌 뿐이요 조화의 속의 속은 언제까지나 열리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일 듯싶다. 초록 풀에 덮인 땅 속의 뜻을 초록 옷을 입은 여자의 마음과도 같이 엿볼 수 없는 저 건너 세상이다.

얀들얀들 나부끼는 초목의 양자는 부드럽게 솟는 음악. 줄기는 굵고 잎은 연한 멜로디의 마디마디이다. 부피 있는 대궁은 나팔소리요 가는 가지는 거문고의 음률이라고도 할까.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 그것이 봄의 걸음이다. 풀 위에 누워 있으면 은근한 음악의 율동에 끌려 마음이 너볏너볏 나부낀다.

꽃다지 질경이 민들레.... 가지가지 풋나물들을 뜯어 먹으면 몸이 초록으로 물들 것같다. 물들어야 될 것 같다. 물들어야 옳을 것 같다. 물들지 않음이 거짓말이다. 물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새가 지저귄다. 꾀꼬리일까.

지평선이 아롱거린다.

들은 내 세상이다.

2

언제까지든지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으면 나중에는 현기증이 나며 눈이 둘러빠질 듯싶다. 두 눈을 뽑아서 푸른 물에 채웠다가 라무네1 병 속의 구슬같이 차진 놈을 다시 살속에 박아넣은 것과도 같이 눈망울이 차고 어리어리하고 푸른 듯하다. 살과는 동떨어진 유리알이다. 그렇게도 하늘은 맑고 멀다. 눈이 아픈 것은 그 하늘을 발칙하게도 오랫동안 우러러본 벌인 듯싶다. 확실히 마음이 죄송스럽다. 반나절 동안 두려움 없이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란 세상에서도 가장 착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장 용기있는 악한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도 푸른 하늘은 거룩하다.

눈을 돌리면 눈물이 푹 쏟아진다. 벌판이 새파랗게 물들어 눈앞에 아물아물한다. 이런 때에는 웬일인지 구름 한 점도 없다. 곁에는 한 묶음의 꽃이 있다. 오랑캐꽃, 고들빼기, 노고초, 새고사리, 가처무릇, 대게, 맛탈, 차치광이. 나는 그것들을 섞어 틀어 꽃다발을 곁기 시작한다. 각색 꽃판과 꽃술이 무릎 위에 지천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헤어지는 석류알보다도 많다.....

나는 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졌는지를 모른다. 지금에는 한 그릇의 밥, 한 권의 책과 똑같은 지위를 마음속에 차지하게 되었다. 책에서 읽은 이론도 아니요 얻어들은 이치도 아니요 몇 해 동안 하는 일 없이 들과 벗하고 지내는 동안에 이유없이 그것은 살림 속에 푹 젖었던 것이다. 어릴 때에 동물들과 벌판을 헤매며 찔레를 꺾으러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고 소똥버섯을 따다 화로 속에 굽고 메를 캐러 밭이랑을 들치며 골로 말을 만들어 끌고 다니느라고 집에서보다도 들에서 더 많은 날을 지우던, 그때가 다시 부활하여 돌아온 셈이다. 사람은 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에 있는 것 같다.

자연과 벗하게 됨은 생활에서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일까. 식물적 애정은 반드시 동물적 열정이 진한 곳에 오는 것일까. 학교를 쫓기우고 서울을 물러오게 된 까닭으로 자연을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동무들과 골방에서 만나고 눈을 기여 거리를 돌아치다 붙들리고 뛰다 잡히고 쫓기고....하였을 때의 열정이나 지금에 들을 사랑하는 열정이나 일반이다.

지금의 이 기쁨은 그때의 그 기쁨과도 흡사한 것이다. 신념에 목숨을 바치는 영웅이라고 인간 이상이 아닌 것과 같이 들을 사랑하는 졸부라고 인간 이하는 아닐 것이다. 아직도 굳은 신념을 가지면서 지난날에 보던 책들을 들척거리다도 문득 정신을 놓고 의미없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때가 많다.

학교. 이제는 고향이 마음에 붙는 모양이지.

마을 사람들은 조롱도 아니요 치사도 아닌 이런 말을 던지게 되었고 동구 밖에서 만나는 이웃집 머슴은 인사 대신에 흔히,

해동지 늪에 붕어 떼 많던가?

고기사냥 갈 궁리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십리정 보리 고개 숙었던가?

하고 곡식 소식을 묻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보다도 내가 더 들과 친하고 곡식의 소식을 잘 알게 된 증거이다.

나는 책을 외듯이 벌판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외고 있다. 마음속에는 들의 지도가 세밀히 박혀 있고 사철의 변화가 표같이 적혀있다. 나는 들사람이요 들은 내 것과도 같다.

어느 논두렁의 청대콩이 가장 진미이며 어느 이랑의 감자가 제일 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발고사리가 많이 피어 있는 진펄과 종달새 뜨는 보리밭을 잠작할 수 있다. 남대천 어느 모퉁이를 돌 때 가장 고기가 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개리 쇠리 붉어지가 덕실덕실 끓는 여율과 메게 뚜구뱅이가 잠겨있는 웅덩이와 쏘가리 꺽지가 누워 있는 바위 밑과... 매재와 고들빼기를 잡으려면 철교께서도 몇 마장을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것과 쇠치네와 기름종개를 뜨려면 얼마나 벌판을 나가야 될 것을 안다. 물 건너 귀릉나무 수풀과 방치골 으름 덩굴 있는 곳을 아는 것은 아마도 나뿐일 듯싶다.

학교를 퇴학맞고 처음으로 도회를 쫓겨 내려왔을 때에 첫걸음으로 찿은 곳은 일가집도 아니요 동무 집도 아니요 실로 이 들이었다. 강가의 사시나무가 제대로 있고 버들숲 둔덕의 잔디가 헐리지 않았으며 과수원의 모습이 그대로 남은 것을 보았을 때의 기쁨이란 형언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란 곧 산천을 사랑하고 벌판을 반가와하는 심정이 아닐까.

이런 자연의 풍물을 내놓고야 고향의 그림자가 어디에 알뜰히 남아 있는가. 헐리어 가는 초가지붕에 남아 있단 말인가. 고향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면서도 그리운 것은 더 많이 들과 시냇물이다.

3

시절은 만물을 허랑하게 만드는 듯하다.

짐승은 드러내놓고 모든 것을 들의 품 속에 맡긴다.

새 풀 숲에서 새둥우리를 발견한 것을 나는 알 수 없이 기쁘게 여겼다. 거룩한 것을, 아름다운 것을 찾은 느낌이다. 집과 가족들을 송두리째 안심하고 땅에 맡기는 마음씨가 거룩하다. 풀과 깃을 모아 두툼하게 결은 둥우리 안에는 아직 까지 않은 알이 너더 알 들어 있다. 아롱아롱 줄이 선 풋대추만큼씩한 새알.

막 뛰어나려는 생명을 침착하게 간직하고 있는 얇은 껍질---금시에 딸깍 두 조각으로 깨뜨려질 모태---창조의 보금자리!

그 고요한 보금자리가 행여나 놀래고 어지럽혀질까를 두려워하여 둥우리 기슭 손가락 하나 대기조차 주저되어 나는 다만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풀포기를 제대로 덮어 놓고 깜쪽같이 발을 옮겨 놓았다. 금시에 알이 쪼개지며 생명이 돋아날 듯싶다. 등 뒤에서 새가 푸드득 날아들 것같다. 적막을 깨뜨리고 하늘과 들을 놀래이며 푸드득 날았다! 생각에 마음이 즐겁다.

그렇게 늦게 까는 것이 무슨 새일까. 청새일까. 덤불지일까. 고요하게 뛰노는 기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어 목소리를 내서 노래라도 부를까 느끼며 뚝아래로 발을 옮겨 놓으려다 문득 주춤하고 서 버렸다.

맹랑한 것이 눈에 뜨인 까닭이다. 껄껄 웃고 싶은 것을 참고 풀 위에 주저 앉았다. 그 웃고 싶은 마음은 노래라도 부르고 싶윽 마음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그 맹랑한 풍경이 나의 마음을 결코 노엽히거나 모욕한 것이 아니요 도리어 아까와 똑같은 기쁨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일반으로 창조의 기쁨을 보여 준 것이다.

개울녘 풀밭에서 한 자웅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겁내지 않고 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의 눈을 꺼리는 법 없이 자웅은 터놓고 마음의 자유를 표현할 뿐이다. 부끄러운 것은 도리어 이쪽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대중없이 오랫동아 그 요절할 광경을 바라보기가 몹시도 겸연쩍었다. 확실히 나는 그런 장난을 목격한 일이 없다. 역시 들이 푸를 때 새가 늦은 알을 깔 때 자웅도 농탕치는 것이다. 나는 그 광경을 성내어서는 비웃어서는 안되었다.

보고 있는 동안에 어디서부터인지 자웅에게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킬킬킬킬 웃음 소리가 나며 두 번째 것이 날았다. 가뜩이나 몸이 떨어지지 않는 자웅은 그제서야 겁을 먹고 흘끔흘끔 눈을 굴리며 어색한 걸음으로 주체스런 두 몸을 비틀거렸다. 나는 나 이외에 그 광경을 그때까지 은근히 바라보고 있던 또 한 사람이 부근에 숨어 있음을 비로소 알고 더 한층 부끄러운 생각이 와락 나며 숨도 크게 못 쉬고 인기척을 죽이고 잠자코만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세 번째 돌멩이가 날리더니 이윽고 호담스런 웃음 소리가 왈칵 터지며 아래편 숲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덥석 뛰어나왔다. 빨래 함지를 인 채 한 손으로 연해 자웅을 쫓으면서 어깨를 떨며 웃음을 금할 수 없다는 자세였다.

그 돌연한 인물에 나는 놀랐다. 한편 응겼던 마음이 풀리기도 하였다. 옥분이였다. 빨래를 하고 나자 그 광경임에 마음속은 미리 흠뻑 그것을 즐기고 난 뒤인 모양이다. 그러나 나의 놀람보다도 옥분이가 문득 나를 보았을 때의 놀람....그것은 몇 갑절 더 큰 것이었다. 별안간 웃음을 뚝 그치고 주춤 서는 서슬에 머리에 였던 함지가 왈칵 떨어질 판이었다. 얼굴의 표정이 삽시간에 검붉게 질려 굳어졌다. 눈알이 땅을 향하고 한편 손이 어쩔 줄 몰라 행주치마를 의미없이 꼬깃거렸다.

별안간 깊은 구렁에 빠진 것과도 같은 궁축한 처지와 덴 마음을 건져 주기 위하여 나는 마음에도 없는 목소리를 일부러 자아내어 관대한 웃음을 한바탕 웃으면서 그의 곁으로 내려갔다.

빌어먹을 짐승들.

마음에도 없는 책망이었으나 옥분의 마음을 풀어 주자는 뜻이었다.

득추녀석쯤이 너를 싫달 법 있니, 주제넘은 녀석.

이어 다짜고짜로 그의 일신의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은 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자는 생각이었다. 군청 고원 득추는 일껏 옥분과 성혼이 된 것을 이제 와서 마다고 투정을 내고 다른 감을 구하였다. 옥분의 가세가 빈한하여 들고 날 판이므로 혼인한 뒤에 닥쳐올 여러 가지 귀찮은 거래를 염려하여 파혼한 것이 확실하다. 득추의 그런 꾀바른 마음씨를 나무라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거개 고원의 불신을 책하였다.

배반을 당하고 분하지도 않으냐?

모른다.

옥분은 도리어 짜증을 내며 발을 떼놓았다.

그 녀석 한번 해내 줄까.

웬일인지 그에게로 쏠리는 동장을 금할 수 없다.

쓸데없는 짓 할 것 있니?

동정의 눈치를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옥분의 마음씨에는 말할 수 없이 그윽한 것이 있어 그것이 은연중에 마음을 당긴다.

눈앞에 떨어지는 그의 민출한 자태가 가슴속에 새겨진다. 검은 치마폭 밑으로 드러난 불그레한 늠츳한 두 다리---자작나무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헐벗기 때문에 한결 빛나는 것---세상에도 가지고 싶은 탐나는 것이다.

4

일요일인 까닭에 오래간만에 문수와 함께 둑 위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날마다 거리의 학교에 가야 하는 그를 자주 붙들어 낼 수는 없다. 일요일이 없는 나에게도 일요일이 있는 것이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뚝에 오르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듯이 시원하다. 바다 바람이 아직 조금 차기는 하나 신선한 맛이다. 잔디 밭에는 간간이 피지 않은 해당화 봉오리가 조촐하게 섞였으며 뚝 맞은편에 군데군데 모여선 백양나무 잎새가 햇빛에 반짝반짝 나부껴 은가루를 뿌린 것 같다.

문수는 빌어 갔던 몇 권의 책을 돌려 주고 표해 두었던 몇 구절의 뜻을 질문하였다. 나는 그에게는 하루의 선배인 것이다. 돈독하게 뛰어 주는 것이 즐거운 의무도 되었다.

공부가 끝난 다음 책을 덮어 두고 잡담에 들어갔을 때에 문수는 탄식하는 어조였다.

학교가 점점 틀려 가는 모양이다.

구체적 실례를 가지가지 들고 나중에는 그 한 사람의 협착한 처지를 말하였다.

책 읽는 것까지 들키었네. 자네 책도 빼앗길 뻔했어.

짐작되었다.

나와 사귀는 것이 불리하지 않은가.

자네 걸은 길대로 되어 나가는 것이 뻔하지. 차라리 그 편이 시원하겠네.

너무 궁박한 현실 이야기만도 멋없어 두 사람은 무릎은 툭 털고 일어서 기분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아는 말 아는 곡조를 모조리 불렀다.

노래가 진하면 번갈아 서서 연설을 하였다. 눈앞에 수많은 대중을 가상하고 목소리를 다하여 부르짖어 본다. 바닷물이 수물거리나 어쩌나 새들이 놀라서 떨어지나 어쩌나를 시험하려는 듯이도 높게 고함쳐 본다. 박수하는 사람은 수만의 대중 대신에 한 사람의 동무일 뿐이나 지쩔이는 동안에 정신이 흥분되고 통쾌하여 간다. 훌륭한 공부 이외 단련이다.

협착한 땅 위에 그렇게 자유로운 벌판이 있음이 새삼스러운 놀람이다. 아무리 자유로운 말을 외쳐도 거기에서만을 <중지>를 당하는 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땅 위는 좁으면서도 넓은 셈인가.

둑은 속 풀리는 시원한 곳이며 문수와 보내는 하루는 언제든지 다시없이 즐거운 날이다.

5

과수원 철망 너머로 엿보이는 철 늦은 딸기


잎새 사이로 불긋불긋 둗아난 송이 굵은 양딸기---지날 때마다 건강한 식욕을 참을 수 없다.

더구나 달빛에 젖은 딸기의 야자란 마치 크림을 껴얹은 것과도 같이 한층 부드럽게 빛난다.

탐나는 열매에 눈독을 보내며 철망을 넘기에 나는 반드시 가책과 반성으로 모질게 마음을 매질하지는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누구의 과수원이든 간에 찰망을 넘는 것은 차라리 들 사람의 일종의 성격이 아닐까.

들 사람은 또 한편 그것을 용납하고 묵인하는 아량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 해 동안에 완전히 이 야취의 성격을 얻어 버런 것 같다.

흐뭇한 송이를 정신없이 따서 입에 넣으면서도 철망 밖에서 다만 탐내고 보기만 할 때보다 한층 높은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됨은 도리어 웬일일까. 입의 감동이 눈의 감동보다 떨어지는 탓일까. 생각만 할 때의 감동이 실상 당하였을 때의 감동보다 항용 더 나은 까닭일까. 나의 욕심을 만족시키기에는 불과 몇 송이의 딸기가 필요할 뿐이었다. 차라리 발판에 지천으로 열려 언제든지 딸 수 있는 들딸기 편이 과수원 안의 양딸기보다 나음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철망을 넘었다.

멍석딸기, 중딸기, 장딸기, 나무딸기, 감내달기, 곰딸기, 닷딸기, 뱀딸기....

능금나무 그늘에 난데없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자 황급히 뛰어넘다 철망에 걸려 나는 옷을 찢었다. 그러나 옷보다도 행여나 들키지나 않았나 하는 염려가 앞서 허둥허둥 풀 속을 뛰다가 또 공교롭게도 그가 옥분임을 알고 마음이 일시에 턱 놓였다. 그 역시 딸기밭을 노리고 있던 터가 아닐까. 철망 기숡을 기웃거리며 능금나무 아래 몸을 간직하고 있지 않던가.

언제인가 개천 둑에서 기묘하게 만난 후 두 번째의 공교로운 만남임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동안에 마음이 퍽이나 헐하게 놓여졌다. 가까이 가서 시룽시룽 말을 건 것도 그역시 시스러워하지 않고 수얼하게 말을 받고 대답하고 하였다. 전날의 기묘한 만남이 확실히 두 사람의 마음을 방긋이 열어 놓은 것 같다.

딸기 따 줄까.

무서워.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왜 그리도 나의 마음을 끌었는지 모른다. 나는 떨리는 그의 팔을 붙들고 풀밭을 지나 버드나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입술은 딸기보다도 더 붉다. 확실히 그는 딸기 이상의 유혹이었다.

무서워.

무섭긴.

하고 달래기는 하였으나 기실 딸기를 훔치러 철망을 넘을 때와 똑같이 가슴이 후둑후둑 떨림을 어쩌는 수는 없었다. 버드나무 잎새 사이로 달빛이 가늘게 새어들었다. 옥분은 굳이 거역하려고 하지 않았다.

양딸기 맛이 아니요 확실히 들딸기 맛이었다. 멍석딸기 나무딸기의 신선한 감각에 마음은 흐뭇이 찼다.

아무리 야취의 습관에 젖었기로 철망 너머 딸기를 딸 때와 일반으로 아무 가책도 반성도 없었던가. 벌판서 난창치던 한 자웅의 짐승과 일반이 아닌가. 그것이 바른가 그래서 옳을까 하는 한 줄기의 곧은 생각이 한결이 벋쳐오름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 판단은 누가 옳게 내릴 수 있을까.

6

며칠이 자나도 여전히 귀찮은 생각이 머릿 속에 뱅 돈다. 어수선한 마음을 활짝 씻어 버릴 양으로 아침부터 그물을 들고 집을 나섰다.

그물을 후릴 곳을 찾으면서 남대천 물줄기를 따라 올라간 것이 시적시적 걷는 동안에 어느덧 철교께서도 근 10리를 올라가게 되었다. 아무 고기나 닥치는 대로 잡으려던 것이 그렇게 되고 보니 불현듯이 고들빼기를 후려 볼 욕심이 솟았다.

고기 사냥 중에서도 가장 운치 있고 흥있는 고들빼기 사냥에 나는 몇 번인지 성공한 일이 있어 그 호젓한 멋을 잘 안다. 그 중 많이 모여 있을 듯이 보이는 그럴 듯한 여울을 점쳐 첫그물을 던져 보기로 하였다.

산 속에 오막하게 둘러싸인 개울, 물도 맑거니와 물소리도 맑다. 돌을 굴리는 여울 소리가 티끌 한 점 있을 리 없는 공기와 초목을 영롱하게 울린다. 물 속에서 노는 고기는 산신령이 아닐까.

옷을 활짝 벗어부치고 그물을 메고 물 속에 뛰어들었다. 넉넉히 목욕을 할 시절임에도 워낙 산골물이라 뼈에 차다. 마음이 한꺼번에 씻쳐쳤다느니보다도 도리어 얼어붙을 지경이다. 며칠 내로 내려오던 어수선한 생각이 확실히 덜해지고 날아갔다고 할까.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지막 한 가지 생각이 아직도 철사같이 가늘게 꿰뚫고 흐름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사람의 사이란 그렇게 수월할까.)

옥분과의 그날 밤 인연이 어처구니없게 쉽사리 맺어진 것이 도리어 의심쩍은 것이었다. 아무 마음의 거래도 없던 것이 달빛과 딸기에 꼬임을 받아 그때 그 자리에서 금방 응낙이 되다니. 항용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두 사람의 마음의 교섭이란 이야기 속에서 읽을 때에는 기막히게 장황하고 지리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수월할 리 있을까. 들 복판에서는 수월한 법일까.

(책임 문제는 생기지 않는가.)

생각은 다시 솔솔 풀린다. 물이 찰수록 생각도 첨점 차게만 들어간다.

물이 다리목을 넘게 되었을 때 그쯤에서 한 훌기 던져 보려고 그물을 펴들고 물 속을 가늠 보았다. 속물이 꽤 세어 다리를 훌친다. 물때 낀 돌멩이가 몹시 미끄러워 마음대로 발을 디딜 수 없다. 누르칙칙한 물 속이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몇 걸음 아래편은 바위요 바위 아래는 소가 되어있다.

그물을 던질 때의 호흡이란 마치 활을 쏠때의 그것과도 같이 미묘한 것이어서 일종의 통일된 정신과 긴장된 자세를 요구하는 것임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안다. 그러면서도 그 때 자칫하여 기어이 실수를 하게 된 것은 필시 던지는 찰나까지도 통일되지 못한 마음이 어수선하고 정신이 까닥거렸음이 확실하다.

몸이 휫등하고 휘더니 휭하게 날아야 할 그물이 물 위에 떨어지자 어지럽게 흩어졌다. 발이 미끄러져서 센 물결에 다리가 쓸리니까 그물은 손을 빠져 달아났다. 물 속에 넘어져 흐르는 몸을 아무리 버둥거려야 곧추 일으키는 장사 없었다. 생각하면 기가 막히나 별수없이 몸은 흐를 대로 흐르고야 말았다. 바위에 부딪쳐 기어이 소에 빠졌다. 거품을 날리는 폭포 속에 송두리째 푹 잠겼다가 날리는 폭포 속에 송두리째 푹 잠겼다가 휘엿이 솟으면서 푸른 물 속을 뱅돌았다. 요행 헤엄의 술득이 약간 있던 까닭에 많은 고생 없이 허부적거리고 소를 벗어날 수는 있었다.

면상과 어깻죽지에 몇 군데 상처가 있었다. 피가 돋았다. 다리에도 군데군데 싯퍼렇게 멍이 들어 있음을 보았다. 잃어버린 그물은 어느 줄기에 묻혀 흐르는지 알 바도 없거니와 찾을 용기도 없었다. 고들빼기는 물론 한 마리도 손에 쥐어 보지 못하였다.

귀가 메이고 코에서는 켰던 물이 줄줄 흘렀다. 우연히 욕을 당하게 된 뭄뚱어리를 홅어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별안간 옥분의 몸이, 향기가 눈앞에 흘러 왔다. 비밀을 가진 나의 몸이 다시 돌려보이며 한동안 부끄러운 생각이 쉽게 꺼지지 않았다.

7

문수는 기어이 학교를 쫓겨났다. 기한 없는 정학 처분이었으나 영영 몰려난 것과 같은 결과이다. 덕분에 나도 빌려 주었던 책권을 영영 빼앗긴 셈이 되었다.

차라리 시원하다고 문수는 거드름부렸으나 시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집안 사람들이다. 들볶는 바람에 그는 집을 피하여 더 많이 나와 지내게 되었다. 원망의 물줄기는 나에게까지 튀어왔다. 나는 애매하게도 그를 타락시켜 놓은 안된 놈으로 몰릴 수밖에는 없다.

별수없이 나날을 들과 벗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들의 동무를 얻은 셈이다.

풀밭에 서면 경주를 하고 시냇가에 서면 납작한 돌을 집어 물 위에 수제비를 뜨기가 일쑤다. 돌을 힘껏 던져 그것이 물위를 뛰어가는 뜀 수를 세는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이 최고 기록이다. 돌은 굴러갈수록 걸음이 좁아지고 빨라지다 나중에는 깜박 물 속에 꺼진다. 기차가 차차 멀어지고 작아지다 산모퉁이에 깜박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 재미있는 장난이다. 나는 몇 번이고 싫지 않게 돌을 집어 시험하는 것이었다.

팔이 축 처지게 되면 다시 기운을 내여 모래밭에 겨루고 서서 씨름을 한다. 힘이 비등하여 승패가 상반이다. 떠밀기도 하고 샅바씨름도 하고 잡아나꾸기도 하고, 다리걸이 딴죽치기, 기술도 차차 늘어가는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장하고 제일 크고 제일 아름답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바른 것이 무엇이냐?

되고 말고 수수께끼를 걸고,

힘이다!

하고 껄껄 웃으면 오장육부가 물에 행군 듯이 시원한 것이다. 힘! 무슨 힘이든지 좋다. 씨름을 해 가는 동안에 우리는 힘에 대한 인식을 한층 더 새롭혀 갔다. 조직의 힘도 장하거니와 그것을 꾸미는 한 사람의 힘이 크다면 더 한층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8

문수와 천렵을 나섰다.

그물을 잃은 나는 하는 수 없이 족대를 들고 쇠치네 사냥을 하러 시냇물을 훑어내려갔다.

벌판에 남비를 걸고 뜬 고기를 끓이고 밥을 지었다.

먹을 것이 거의 준비되었을 때 더운 판에 목욕을 들어갔다.

땀을 씻고 때를 밀고는 깊은 곳에 들어가 물장구와 가댁질이다. 어린아이 그대로의 순진한 마음이 방울방울 날리는 물방울과 함께 맑은 하늘을 휘덮었다가는 쏟아지는 것이다. 물가에 나와 얼굴을 씻고 물을 들일 때에 문수는 다따가,

어깨의 상처가 웬일인가.

하고 나의 어깨의 군데군데를 가리켰다. 나는 뜨끔하면서 그때까지 완전히 잊고 있던 고들빼기 사냥과 거기에 관련된 옥분과의 일건이 생각났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에게까지 기일 바 못 되어 기어이 고기잡이 이야기와 따라서 옥분과의 곡절을 은연중 귀뜀하여 주게 되었다.

이상한 것은 그의 태도였다.

명예의 부상일세그려.

놀리고는 걱실걱실 웃는 것이다.

웃다가 문득 그치더니,

이왕 말이 났으니 나도 내 비밀을 게울 수 밖에는 없게 되었네 그려.

정색하고 말을 풀어냈다.

옥분이....나도 그와는 남이 아니야.

어안이 벙벙한 나의 어깨를 치며,

생각하면 득추와 파혼된 후부터는 달뜬 마음이 허랑해진 모양이네. 일종의 자표자기야. 죽일 놈은 득추지 옥분의 형편이 가엾기는 해.

나에게는 이상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문수에게 대하여 노염과 질투를 느끼는 대신에, 도리어 일종의 안심과 감사를 느끼는 것이었다. 괴롭던 책임이 모면된 것 같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은 듯이도 감정이 가벼워지고 응겼던 마음이 풀리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교활하고 악한 마음 보일까. 그러나 나를 단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옥분의 허랑한 태도에 해결의 열쇠는 있다. 그의 태도가 마지막 책임을 져야 될 터이니까.

왜 말이 없나. 거짓말로 알아듣나. 자네가 버드나무에서 숲에서 만났다면 나는 풀밭에서 만났네.

여전히 잠자코만 있으면서 나는 속으로 한결같이 들의 성격과 마술과도 같은 자연의 매력이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얼마나 이야기가 장황하였던지 밥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9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이런 때 마을은 더 한층 지내기 어렵고 역시 들이 한결 낫다.

낮은 낮으로 해 두고 밤을...하룻밤을 온전히 들에서 보낸 적이 없다.

우리는 의논하고 하룻밤을 들에서 야영하기로 하였다.

들의 밤을 두려운 것일까? 이런 위문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왕 의가 통한 후이니 이 후로는 옥분이도 데려다가 세 사람이 일단의 <들의아들>이되었으면 하는 문수의 의견이었으나 나는 그것을 일종의 악취미라고 배척하였다. 과거의 피차의 정의는 정의로 하여 두고 단체 생활에는 역시 두 사람이 적당하며 수효가 셋이 면 어떤 경우에든지 반드시 기울고 불안정 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나의 야성이 철저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

어떻든 두 사람은 둘 복판에서 해를 넘기고 어둡기를 기다리고 밤을 맞이하였다.

불을 피우고 이야기 하였다.

이야기가 장황하기 때문에 불이 마저 스러질 때에는 마을의 등불도 벌써 다 꺼지고 개짖는 소리도 수습된 뒤였다. 별만이 깜박거리고 바다 소리가 은은할 뿐이다.

어둠은 깊고 무한하다.

창조 이전의 혼돈의 세계는 이러하였을까.

무한한 적막....지구의 자전 공전 소리도 들리지는 않는 것이다.

공포....두려움이란 어디서 오는 감정일까.

어둠에서도 적막에서도 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일부러 두려운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로 마음을 떠 보았으나 이렇듯한 새삼스러운 공포의 감정이라는 것은 솟지 않았다..

위에는 하늘이요 아래는 풀이요---주위에 어둠이 있을 뿐이지 모두가 결국 낮 동안의 계속이요 연장이다. 몸에 소름이 돋는 법도 마음이 덜리는 법도 없다.

서로 눈말 말똥거리다가 피곤하여 어늘 결엔지 잠이 들어 버렸다.

단잠을 깨었을 때는 아침 해가 높은 후였다.

야영의 밤은 시원하였을 뿐이요 공포의 새는 결국 잡지 못하였다.

10

그러나 공포는 왔다.

그것은 들에서 온 것이 아니요 마을에서, 사람에게서 왔다.

공포를 만드는 것은 자연이 아니요 사람의 사회인 듯싶다.

문수가 돌연히 끌려간 것이다. 학교 사건의 뒤맺이인 듯하다. 이어 나도 들어가게 되었다.

나 혼자에 대하여 혹은 문수와 관련되어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사흘 밤을 지우고 쉽게 나왔으나 문수는 소식이 없다. 오랠 것 같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여름의 계획도 세웠으나 혼자서는 하릴없다.

가졌던 동무를 잃었을 때의 고독이란 큰 것이다.

들에서 무료히 지내는 날이 많다.

심심파적으로 옥분을 데려올까도 생각되나 여러 가지로 거리끼고 주체스런 일이다. 깨끗한 것이 좋을 것 같다.

별수없이 녀석이 하루라도 속히 나오기를 충심으로 바랄 뿐이다.

나오거든 풋콩을 실컷 구워 먹이고 기름종개를 많이 떠먹이고 씨름해서 몸을 불려 줄 작정이다.

들에는 도라지 꽃이 피고 개나리꽃이 장하다.

진펄의 새발 고사리꽃도 어느덧 활짝 피었다. 해오라기가 가끔 조촐한 자태로 물가에 내린다.

시절이 무르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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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 모퉁이 버드나무 까치 둥우리 위에 푸르둥한 하늘이 얕게 드리웠다. 토끼우리에서 하이얀 양토끼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까칠하게 웅크리고 있다. 능금나무 가지를 간들간들 흔들면서 벌판을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채 녹지 않은 눈 속에 덮인 종묘장(種苗場) 보리밭에 휩쓸려 돼지우리에 모질게 부딪친다.

우리 밖 네 귀의 말뚝 안에 얽어 매인 암퇘지는 바람을 맞으면서 유난히 소리를 친다. 말뚝을 싸고도는 종묘장(種苗場) 씨돝은 시뻘건 입에 거품을 뿜으면서 말뚝의 뒤를 돌아 그 위에 덥석 앞다리를 걸었다. 시꺼먼 바위 밑에 눌린 자라 모양인 암퇘지는 날카로운 비명을 울리며 전신을 요동한다. 미끄러진 씨돝은 게걸덕 거리며 다시 말뚝을 싸고 돈다. 앞뒤 우리에서 응하는 돼지들의 고함에 오후의 종묘장 안은 떠들썩했다.

반 시간이 넘어도 여의치 않았다. 둘러싸고 보던 사람들도 흥이 식어서 주춤주춤 움직인다. 여러 번째 말뚝 위에 덮쳤을 때에 육중한 힘에 말뚝이 와싹 무지러지면서 그 바람에 밑에 깔렸던 돼지는 말뚝의 테두리로 벗어져서 뛰어났다.

"어려서 안되겠군."

종묘장 기수가 껄껄 웃는다.

"--- 황소 앞에 암달 같으니 쟁그러워서 볼 수 있나."

"겁을 먹고 달아나는데."

농부는 날쌔게 우리 옆을 돌아 뛰어가는 돼지의 앞을 막았다.

"달포 전에 한번 왔다 갔으나 씨가 붙지 않아서 또 끌고 왔는데요."

식이는 겸연쩍어서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짐승이기로 저렇게 어리구야 씨가 붙을 수 있나."

농부의 말에 식이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빌어먹을 놈의 짐승."

무안도 무안이려니와 귀찮게 구는 짐승에 식이는 화를 버럭 내면서 농부의 부축을 하여 달아나는 돼지의 뒤를 쫓는다. 고무신이 진창에 빠지고 바지춤이 흘러내린다.

돼지의 허리를 매인 바를 붙잡았을 때에 그는 홧김에 바를 뒤로 잡아 나꾸며 기운껏 매질한다. 어린 짐승은 바들바들 뛰면서 비명을 울린다. 농가 일년의 생명선 --- 좀 있으면 나올 제일기 세금과 첫여름 감자가 나올 때까지의 가족의 양식의 예산의 부담을 맡은 이 어린 짐승에 대한 측은한 뉘우침이 나중에는 필연코 나련마는 종묘장 사람들 숲에서의 무안을 못 이겨 식이의 흔드는 매는 자연 가련한 짐승 위에 잦게 내렸다.

"그만 갖다 매시오."

말뚝을 고쳐 든든히 박고 난 농부는 식이에게 손짓한다. 겁과 불안에 떨며 허둥거리는 짐승을 이번에는 이걸 더 든든히 말뚝 안에 우겨 넣고 나뭇 대를 가로질러 배까지 떠받쳐 올려 꼼짝 요동하지 못하게 탐탁하게 얽어 매였다.

털몸을 근실근실 부딪히며 그의 곁을 궁싯궁싯 굼도는 씨돝은 미처 식이의 손이 떨어지기도 전에 '화차'와도 같이 말뚝 위를 엄습한다. 시뻘건 입이 욕심에 목메어서 풀무같이 요란히 울린다. 깔리운 암톹은 목이 찢어져라 날카롭게 고함친다.

둘러 선 좌중은 일제히 웃음소리를 멈추고 일시 농담조차 잊은 듯 하였다.

문득 분이의 자태가 눈앞에 떠오른다. 식이는 말뚝에서 시선을 돌려 딴전을 보았다.

---“분이 고것 지금엔 어디 가 있는구."

---제 이기분은 세려 일기분 세금조차 밀려오는 농가의 형편에 돼지보다 나은 부업이 없었다. 한 마리를 일년동안 충시히 기르면 세금도 세금이려니와 잔돈푼의 가용돈은 훌륭히 우러나왔다. 이 돼지의 공용을 잘 아는 식이다. 푼푼이 모든 돈으로 마을 사람들의 본을 받아 종묘장에서 가주 난 양 돼지 한 자웅을 사놓은 것이 자는 여름이었다. 기름이 자르를 흐르는 새까만 자웅을 식이는 사람보다도 더 귀히 여겨 가주 사왔던 무렵에는 우리에 넣기가 아까와 그의 방 한 구석에 짚을 펴고 그 위에 재우기까지 하던 것이 젖이 그리워서인지 한 달도 못돼서 숫놈이 죽었다. 나머지의 암놈을 식이는 애지중지하여 단 한 벌의 그의 밥그릇에 물을 받아 먹이기까지 하였다. 물도 먹지 않고 꿀꿀 앓을 때에는 그는 나무하러 가는 것도 그만두고 종일 짐승의 시중을 들었다. 여섯 달을 키우니 겨우 암퇘지 티가 났다. 달포 전에 식이는 첫 시험으로 십리가 넘는 종묘장으로 끌고 왔었다. 피돈 오십 전이나 내서 씨를 받은 것이 종시 붙지 않았다. 식이는 화가 났다. 때마침 정을 두고 지내던 이웃집 분이가 어디론지 도망을 갔다. 식이는 속이 상해서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늘 뾰로통해서 쌀쌀하게 대꾸하더니 그 고운 살을 한번도 허락하지 않고 늙은 아비를 혼자 둔 채 기어이 도망을 가버렸구나 생각하니 분이가 괘씸하였다. 그러나 속깊은 박초시의 일이니 자기 딸 조처에 무슨 꿍꿍이 수작을 대었는지 도무지 모를 노릇이었다. 청진으로 갔느니 서울로 갔느니 며칠 전에 박초시에게 돈 십원이 왔느니 소문은 갈피갈피 였으나 하나도 종잡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상할대로 속이 상했다. 능금꽃같은 두 볼을 잘강잘강 씹어먹고 싶던 분이인만큼 식이는 오늘까지 솟아오르는 심화를 억제할 수 없었다.

---"다 됐군."

딴전만 보고 섰던 식이는 농부의 목소리에 그쪽을 보았다. 씨돝은 만족한 듯이 여전히 꿀꿀 짖으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 빙빙 돈다.

파장 후의 광경이언만 분이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식이는 몹시도 겸연쩍었다. 잠자코 섰는 까칠한 암퇘지와 분이는 자태가 서로 얽혀서 그의 머리속에 추근하게 떠올랐다. 음란한 잡담과 허리 꺾는 웃음소리에 얼굴이 더 한층 붉어졌다. 환영을 떨쳐버리려고 애쓰면서 식이는 얽어매었던 돼지를 풀기 시작하였다. 농부는 여전히 게걸덕거리며 어른어른 싸도는 욕심 많은 씨돝을 몰아 우리 속에 가두었다.

"이번에는 틀림없겠지."

장부에 이름을 올리고 오십 전을 치뤄주고 종묘장을 나오니 오후의 해가 느지막하였다. 능금밭 건너편 양옥 관사의 지붕이 흐린 석양에 푸르뎅뎅하게 빛난다. 옛성 어귀에는 드나드는 장꾼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한다. 성안에서 한 채의 뻐스가 나오더니 폭넓은 이등도로를 요란히 달아온다. 돼지를 몰고 길 왼편 가으로 피한 식이는 푸뜩 지나가는 뻐스 안을 흘끗 살펴본다. 분이를 잃은 후로부터는 그는 달아나는 뻐스 안까지 조심스럽게 살피게 되었다. 일전에 나남에서 뻐스 차장 시험이 있었다더니 그런 데로나 뽑혀 들어가지 않았을까. 분이의 간 길을 이렇게도 상상하여 보았기 때문이다.

"장이나 한바퀴 돌아올까."

북문 어귀 성밑 돌 틈에 돼지를 매놓고 식이는 성을 들어가 남문 거리로 향하였다.

분이가 없는 이제, 장꾼의 눈을 피하여 으슥한 가게 앞에 가서 겸연쩍은 태도로 매화분을 살 필요도 없어진 식이는, 석유 한 병과 마른명태 몇 마리를 사들고 장판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한 동네 사람의 그림자도 눈에 띠이지 않기에 그는 곧게 성밖을 나와 마을로 향하였다.

어기죽거리며 돼지의 걸음이 올때만큼 재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질할 용기는 없었다.

철로를 끼고 올라가 정거장 앞을 지나 오촌포 한길에 나서니 장보고 돌아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드문 보인다. 산모퉁이가 바닷바람을 막아 아늑한 저녁 빛이 한길 위를 덮었다. 먼 산 위에는 전기의 고가선이 솟고 산밑을 물줄기가 돌아 내렸다. 온천 가는 넓은 도로가 철로와 나란히 누워서 남쪽으로 줄기차게 뻗쳤다. 저물어 가는 강산 속에 아득하게 뻗친 이 두 줄의 길이 새삼스럽게 식이의 마음을 끌었다. 걸어가는 그의 등뒤에서는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기차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별안간 식이에게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길로 아무데로나 달아날까."

장에 가서 돼지를 팔면 노자가 되겠지. 차 타고 노자 자라는 곳까지 달아나면 그곳에 분이가 있지 않을까, 어디서 들었는지 공장에 들어가기가 분이의 소원이더니 그 곳에서 여직공 노릇하는 분이와 만나 나도 '노동자'가 되어 같이 살면 오죽 재미있을까. 공장에서 버는 돈을 달마다 고향에 부치면 아버지도 더 고생하실 것 없겠지. 돼지를 방에서 기르지 않아도 좋고 세금 못 냈다고 면소 서기들한테 밥솥을 빼앗길 염려도 없을 터이지. 농사같이 초라한 업이 세상에 또 있을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못살기는 일반이니......분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돼지를 팔면 얼마를 받을까. 암퇘지 양돼지.......

"앗!"

날카로운 소리에 번쩍 정신이 깨었다.

찬바람이 휙 앞을 스치고 불시에 일신이 딴 세상에 뜬 것 같았다. 눈 보이지 않고, 귀 들리지 않고, 잠시간 전신이 죽고, 감각이 없어졌다.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레 소리가......바다 소리가......바퀴 소리가....... 별안간 눈앞이 환해지더니 열차의 마지막 바퀴가 쏜살같이 눈앞을 달아났다.

"앗 기차!"

다 지나간 이제 식이는 정신이 아찔하며 몸이 부르르 떨린다.

진땀이 나는 대신 소름이 쪽 돋는다. 전신이 불시에 비인 듯이 거뿐하다. 글자대로 전신이 비었다. 한쪽 팔에 들었던 석유병도 명태 마리도 간 곳이 없고 바른 손으로 이끌던 돼지도 종적이 없다.

"아, 돼지!"

"돼지구 무어구 미친놈이지. 어디라고 건널목을 막 건너."

따귀를 철썩 맞고 바라보니 철로 망보는 사람이 성난 얼굴로 그를 노리구 섰다.

"돼지는 어찌됐단 말이오."

"어제밤 꿈 잘 꾸었지. 네 몸 안 친 것이 다행이다."

"아니 그럼 돼지가 치었단 말요."

"다음부터 차에 주의해."

독하게 쏘아붙이면서 철로 망군은 식이의 팔을 잡아 나꿔 건널목 밖으로 끌어냈다.

"아 돼지가 치었다니 두 번 종묘장에 가서 씨를 받은 내 돼지 암퇘지 양돼지......."

엉겁결에 외치면서 훑어보았으나 피 한방을 찾아 볼 수 없다. 흔적조차 없다니 --- 기차가 달롱 들고 간 것 같아서 아득한 철로 위를 바라보았으나 기차는 벌써 그림자조차 없다.

"한 방에서 잠재우고, 한 그릇에 물 먹여서 기른 돼지, 불쌍한 돼지......."

정신이 아찔하고 일신이 허전하여서 식이는 급시에 그 자리에 푹 쓰러질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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觸角

觸角이 이런 情景을 圖解한다.

悠久한 歲月에서 눈 뜨니 보자, 나는 郊外 淨乾한 한 방에 누워 自給自足하고 있다. 눈을 둘러 방을 살피면 방은 追憶처럼 着席한다. 또 창이 어둑어둑하다.

不遠間 나는 굳이 지킬 한 개 슡케―스1를 발견하고 놀라야 한다. 계속하여 그 슡케―스 곁에 花草처럼 놓여 있는 한 젊은 女人도 발견한다.

나는 실없이 疑訝하기도 해서 좀 쳐다보면 각시가 방긋이 웃는 것이 아니냐. 하하, 이것은 기억에 있다. 내가 열심히 연구한다. 누가 저 새악시를 사랑하던가! 연구중에는

「저게 새벽일까? 그럼 저묾일까?」

부러 이런 소리를 했다. 女人은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하더니 또 방긋이 웃고 부스스 五月철에 맞는 치마저고리 소리를 내면서 슡케―스를 열고 그속에서 서슬이 퍼런 칼을 한 자루만 꺼낸다.

이런 경우에 내가 놀래는 빛을 보이거나 했다가는 뒷감당하기가 좀 어렵다. 反射的으로 그냥 손이 목을 눌렀다 놓았다 하면서 제법 천연스럽게

「임재는 刺客입니까요?」

서투른 西道사투리다. 얼굴이 더 깨끗해지면서 가느다랗게 잠시 웃더니 그것은 또 언제 갖다 놓았던 것인지 내 머리맡에서 나쓰미깡2을 집어다가 그 칼로 싸각 싸각 깎는다.

「요곳 봐라!」

내 입안으로 침이 쫘르르 돌더니 불현듯이 弄談이 하고 싶어 죽겠다.

「가시내애요, 날쭘 보이소, 나캉 結婚할낭기요? 盟誓듸나? 듸제?」

「융3이 날로 패아주뭉 내사 고마 마자 주울란다. 그람 늬능 우앨랑가? 잉?」

우리들이 맛있게 먹었다. 時間은 분명히 밤이 쏟아져 들어온다. 손으로 손을 잡고

「밤이 오지 않고는 결혼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탄식한다. 기대하지 않은 간지러운 경험이다.

낄낄낄낄 웃었으면 좋겠는데 ― 아 ― 결혼하면 무엇하나, 나따위가 생각해서 알 일이 되나? 그러나 재미있는 일이로다.

「밤이지요?」

「아 ―냐.」

「왜 ― 밤인데 ― 에 ― 우습다 ― 밤인데 그러네.」

「아 ― 냐, 아 ― 냐.」

「그러지 마세요 , 밤이예요.」

「그럼 뭐 , 결혼해야 허게.」

「그럼요 ―」

「히히히히 ―」

결혼하면 나는 姙이를 미워한다. 尹? 姙이는 지금 尹한테서 오는 길이다. 尹이 내어대었단다. 그래보는 거다. 그런데 姙이가 채 오해했다. 정말 그러는 줄 알고 울고 왔다.

(애게 ― 밤일세)

「어떻거구 왔누.」

「건 알아 뭐허세요?」

「그래두.」

「제가 버리구 왔어요.」

「足히?」

「그럼요 ―」

「히히.」

「절 모욕허지 마세요.」

「그래라.」

일어나더니 ― 나는 지금 이러한 姙이를 좀 描寫해야겠는데 最小限度로 그 차림차림이라도 알아 두어야겠는데― 姙이 슡케―스를 뒤집어 엎는다. 왜 저러누― 하면서 보자니까 야단이다. 죄다 파 헤치고 무엇인지 찾는 모양인데 무엇을 찾는지 알아야 나도 助力을 하지, 저렇게 방정만 떠니 낸들 손을 대일 수가 있나, 내버려 두었다. 가도 참다참다 못해서

「거 뭘 찾누?」

「엉― 엉― 반지― 엉― 엉―」

「원 세상에, 반진 또 무슨 반진구.」

「결혼반지지.」

「옳아, 옳아, 옳아, 응, 결혼 반지렷다.」

「아이구 어딜 갔누, 요게, 어딜 갔을까.」

결혼반지를 잊어버리고 온 新婦. 라는 것이 있을까? 可笑롭다. 그러나 모르는 말이다. 라는 것이 반지는 新郞이 준비하라는 것인데― 그래서 아주 아는 척 하고

「그건 내 슡케―스에 들어 있는 게 原則的으로 옳지!」

「슡케―스 어딧세요.」

「없지!」

「쯧, 쯧.」

나는 신부 손을 붙잡고

「이리 좀 와봐.」

「아야, 아야, 아이 그러지 마세요, 놓세요.」

하는 것을 달래서 왼손 무명지에다 털붓으로 쌍줄반지를 그려 주었다. 좋아한다. 아무 것도 낑기운 것은 아닌데 제법 간질간질한 게 천연반지 같단다.

천연 결혼하기 싫다. 트집을 잡아야겠기에 ―

「멫번?」

「한번.」

「정말?」

「꼭.」

이래도 안되겠고 間髮을 놓지 말고 다른 방법으로 拷問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尹 以外에?」

「하나.」

「예이!」

「정말 하나예요.」

「말 마라.」

「둘.」

「잘 헌다.」

「셋.」

「잘헌다, 잘 헌다.」

「넷.」

「잘 헌다, 잘 헌다, 잘헌다.」

「다섯.」

속았다. 속아넘어 갔다. 밤은 왔다. 촛불을 켰다. 즉 이런 假짜반지는 탄로가 나기 쉬우니까 감춰야 하겠기에 꺼도 얼른 켰다. 밤이 오래 걸려서 밤이었다.

敗北 시작

이런 情景은 어떨까? 내가 理髮所에서 理髮을 하는 중에 ―

理髮師는 낯익은 칼을 들고 내 수염 많이 난 턱을 치켜든다.

「임재는 刺客입니까?」

하고 싶지만 이런 소리를 여기 理髮師를 보고도 막 한다는 것은 어쩐지 아내라는 存在를 是認하기 시작한 나로서 좀 良心에 안된 일이 아닐까 한다.

싹뚝, 싹뚝, 싹뚝, 싹뚝,

나쓰미깡 두 개 外에는 또 무엇이 채용이 되었던가 암만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엇일까.

그러다가 悠久한 歲月에서 쫓겨나듯이 눈을 뜨면, 거기는 理髮所도 아무 데도 아니고 新房이다. 나는 엊저녁에 결혼했단다.

窓으로 기웃거리면서 참새가 그렇게 의젓스럽게 싹둑거리는 것이다. 내 수염은 조금도 없어지진 않았고.

그러나 큰일난 것이 하나 있다. 즉 내 곁에 누워 普通 아침잠을 자고 있어야 할 신부가 온 데 간 데가 없다. 하하 그럼 아까 내가 理髮所 걸상에 누워있던 것이 그 쪽이 아마 생시더구나, 하다가도 또 이렇게까지 역력한 꿈이라는 것도― 없을 줄 믿고 싶다.

속았나보다. 밑진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동안에 원 歲月은 얼마나 悠久하게 흘렀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까 어저께 만난 尹이 만난 지가 바로 몇 해나 되는 것도 같아서 익살맞다. 이것은 한 번 尹을 찾아가서 물어 보아야 알 일이 아닐까, 즉 내가 자네를 만난 것이 어제 같은데 實로 몇 해나 된 세음인가 , 必是 내가 姙이와 엊저녁에 결혼한 것 같은 착각이 있는데 그것도 다 虛妄된 일이렷다. 이렇게 ―

그러나 다음 순간 일은 더 커졌다. 신부가 忽然히 나타난다. 五月철로 치면 좀 더웁지나 않을까 싶은 洋裝으로 차렸다. 이런 姙이와는 나는 面識이 없는 것이다.

그나 그뿐인가 斷髮이다. 或 이 이는 딴 아낙네가 아닌지 모르겠다. 斷髮 洋裝의 姙이란 내 親近에는 없는데, 그럼 이렇게 서슴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올 줄 아는 남이란 나와 어떤 惡緣일가?

가시내는 손을 툭툭 털더니

「갖다 버렸지」

이렇다면 姙이에는 틀림없나 보니 安心하기로 하고

「뭘?」

「입구 옹 거」

「입구 옹 거?」

「입고 옹 게 치마저고리지 뭐예요?」

「건 어째 내다 버렷다능거야」

「그게 바로 그거예요」

「그게 그거라니?」

「어이 참, 아 그게 바로 그거라니까 그래」

초가을 옷이 늦은 봄 옷과 비슷하였다. 姙이 말을 假量 신용하기로 하고 姙이가 단 한번 尹에게―

가만 있자. 나는 잠시 내 신세에 대하여 釋明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를테면 적지아니 慘酷하다. 나는 아마 이 宿命的 業冤을 짊어지고 한평생을 내리 번민해야 하려나보다. 나는 형상없는 모던뽀이다. 라는 것이 누구든지 내 꼴을 보면 돌아서고 싶을 것이다. 내가 이래뵈도 체중이 十四貫이나 있다고 일러드리면 貴下는 알아차리시겠소? 즉 이 척신4이 銃알을 집어 먹었거로니 좀처럼 나기 어려운 洞窟을 보이는 것은 말하자면 나는 전혀 腦髓에 무게가 있다. 이것이 貴下가 나를 겁낼 重要한 비밀이외다.

그러니까―

於此於彼에 일은 運命에 波紋이 없는 듯이 이렇게까지 展開하고 말았으니 내 目的이라는 것을 披瀝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그러면―

尹, 姙이, 그리고 나,

누가 제일 미운가, 즉 나는 누구 편이냐는 말이다.

어쩔까, 나는 한 번만 똑똑이 말하고 싶지만 또한 그만두는 것이 옳은가도 싶으니 그럼 내 禮儀와 풍봉5을 確立해야겠다.

지난 가을 아니, 늦은 여름 어느날― 그 歷史的인 날짜는 姙이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만― 나는 尹의 사무실에서 이른 아침부터 와 앉아 있는 姙이의 可憐한 座席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 것이 아니라 가는 길인데 집의 아버지가 나가 갔다고6야단 치실까봐 무서워서 못가고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을 나는 일찌감치도 와 앉았구나 하고 문득 오해한 것이다. 그때 그 옷이다.

같은 슈미즈, 같은 듀로워즈7, 같은 머리쪽, 한 男子, 또 한 男子.

이것은 안 된다. 너무나 어색해서 급히 내다 버린 모양인데 나는 좀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大體 나는 그런 富裕한 이데올로기를 마음 놓고 諒解하기 어렵다.

그뿐 아니다. 첫째 나의 態度問題다. 그 시절에 나는 무엇을 하고 세월을 보냈더냐? 내게는 歲月조차 없다. 나는 들창이 어둑어둑한 것을 드나드는 안집 어린애에게 一錢씩 주어가면서 물었다.

「얘 아침이냐 저녁이냐.」

나는 또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슬을 받아 먹었나? 설마.

이런 나에게 姙이는 부질없이 體面을 차리려 들 것이다. 可憐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시절에 나는 제가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를 모르고 지냈다면 그것이 듣는 사람을 능히 속일 수 있나. 거짓부렁이리라. 나는 걷잡을 수 없이 皮膚로 거짓부렁이를 해버릇 하느라고 인제는 저도 눈치 채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이렇게 虛妄한 거짓부렁이를 엉덩방아 찧듯이 해 넘기는 모양인데, 만일 그렇다면 나는 큰일 났다.

그리기에 사실 오늘 아침에는 배가 고프다. 이것으로 미루면 아까 姙이가 스커트, 슬맆, 듀로워즈, 등속을 모조리 내다버리고 들어왔더라는 紹介조차가 필연 거짓말일 것이다. 그것은 내 吝嗇한 愛情의 打算이 姙이더러

「너 왜 그러지 않았더냐.」

하고 暗暗裡에 퉁명? 심술을 부려본 것일 줄 나는 믿는다.

그러나 發音 안되는 글짜처럼 생동생동한 姙이는 내 손톱을 열심으로 깎아주고 있다.

「猛獸가 家畜이 되려면 이 凶惡한 毒牙를 剪斷해 버려야 한다.」

는 美術的인 勸誘임에 틀림없다. 이런 一方 나는 못났게도

「아이 배 고파.」

하고 여지없이 素朴한 얼굴을 姙이에게 디밀면서 아침이냐 저녁이냐 과연 이것만은 묻지 않았다.

新婦는 어디까지든지 귀엽다. 돋보기를 가지고 보아도 이 可憐한 일타화8 의 나이를 알아내이기는 어려우리라. 나는 내 失望에 守備하기 위하여 열 일곱이라고 넉넉잡아 준다. 그러나 내 귀에다 속삭이기를

「스물두살이라나요. 어림없이 그리지 마세요. 그만하면 알텐데 부러 그리시지요?」

이 可憐한 新婦가 지금 赤手空拳으로 나갔다. 내 짐작에 쌀과 나무와 숯과 반찬거리를 장만하러 나간 것일 것이다.

그동안 나는 심심하다. 안집 어린애기 불러서 같이 놀까. 하고 전에 없이 불렀더니 얼른 나와서 내 房 미닫이를 열고

「아침이예요.」

그린다. 오늘부터 一錢 안 준다. 나는 다시는 이 어린애와는 놀 수 없게 되었구나 하고 나는 할 수 없어서 덮어놓고 성이 잔뜩 난 얼굴을 해 보이고는 뺨 치듯이 房 미닫이를 딱 닫아 버렸다. 눈을 감고 가슴이 두근두근하자니까 으아 하고 그 어린애 우는 소리가 안마당으로 멀어가면서 들려왔다. 나는 오랜동안을 혼자서 덜덜 떨었다. 姙이가 돌아오니까 몸에서 牛乳내가 난다. 나는 徐徐히 내 活力을 整理하여가면서 姙이에게 주의한다. 똑 갓난애기 같아서 썩 좋다.

「牧場꺼지 갔다 왔지요.」

「그래서?」

카스텔라와 山羊乳를 책보에 싸가지고 왔다. 집씨族 아침 같다.

그러고 나서도 나는 내 本能 以外의 것을 지껄이지 않았나 보다.

「어이 목말라 죽겠네.」

대개 이렇다.

이 牧場이 가까운 郊外에는 電燈도 水道도 없다. 水道 대신에 펌프.

물을 길러 갔다 오더니 운다. 우는 줄만 알았더니 웃는다. 조런― 하고 보면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그러고도 웃고 있다.

「고개 누우집 아일까. 아, 쪼꾸망게 나더러 너 담발했구나, 핵교 가니? 그리겠지 고개 나알 제 동무루 아아나봐, 참 내 어이가 없어서, 그래, 난 안 간단다, 그랬드니, 요개 또 헌다는 소리가 나 발 씻게 물 좀 끼얹어 주려무나 얘, 아주 이리겠지, 그래 내 물을 한통 그냥 막 쫙 쫙 끼얹어 쥐었지, 그랬드니 너두 발 씻으래, 난 있다가 씻는단다 그리구 왔어, 글쎄, 내 기가 맥혀.」

누구나 속아서는 안 된다. 햇수로 여섯해 전에 이 女人은 정말이지 處女대로 있기는 성가셔서 말하자면 헐값에 즉 아무렇게나 내어주신 분이시다. 그동안 滿五個年 이분은 休憩라는 것을 모른다. 그런 줄 알아야 하고 또 알고 있어도 나는 때마침 변덕이 나서

「가만 있자, 거 얼마 들었드라?」

나쓰미깡이 두 개에 제 아무리 비싸야 二十錢, 옳지 깜빡 잊어버렸다. 초 한 가락에 三錢, 카스텔라 二十錢, 山羊乳는 어떻게 해서 그런지 거저,

「四十三錢인데.」

「어이쿠.」

「어이쿠는 뭐이 어이쿠예요.」

「고눔이 아무 數루두 除해지질 않는군 그래.」

「素數?」

옳다.

신통하다.

「신통해라!」

乞人反對

이런 情景마저 불쑥 내어놓는 날이면 이번 復讐行爲는 完璧으로 흐지부지하리라. 적어도 完璧에 가깝기는 하리라.

한 사람의 女人이 내게 그 宿命을 公開해 주었다면 그렇게 쉽사리 公開를 받은― 懺悔를 듣는 神父 같은 地位에 있어서 보았다고 자랑해도 좋은― 나는 비교적 행복스러웠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든지 약다. 약으니까 그렇게 거저 먹게 내 행복을 얼굴에 나타내이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로직을 不言實行하기 위하여서만으로도 내가 그 구중중한 수염을 깎지 않은 것은 至當한 중에도 至當한 맵시일 것이다.

그래도 이 愚鈍한 女人은 내 얼굴에 더덕더덕 붙은 바 醜를 指摘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宿命을 公開하던 口實도 헛되거니와 그 女人의 愛情이 不足한 탓이리라. 아니 전혀 없다.

나는 바른 대로 말하면 애정 같은 것은 희망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결혼한 이튿날 新婦를 데리고 外出했다가 다행히 길에서 그 신부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내가 그럼 밤잠을 못자고 찾을까.

그때 가령 이런 엄청난 글발이 날라 들어왔다고 내가 은근히 희망한다.

「小生이 某月某日 길에서 줏은 바 少女는 貴下의 新婦임이 確實한 듯하기에 通知하오니 찾아가시오.」

그래도 나는 고집을 부리고 안 간다. 발이 있으면 오겠지, 하고 나의 念頭에는 그저 왕양9한 自由가 있을 뿐이다.

돈 지갑을 어느 포켓에다 넣었는지 모르는 사람만이 容易하게 돈 지갑을 잃어버릴 수 있듯이,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결코 新婦 姙이에 대하여 주의를 하지 않기로 주의한다. 또 사실 나는 좀 片頭通이다. 五月의 郊外길은 좀 눈이 부셔서 실없이 어찔어찔하다.

走馬加鞭(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함. 정진해서 일하는 사람에게 한층 더 권장함)

이런 느낌이다.

姙이 결코 結婚 이튿날 걷는 길을 앞서지 않으니 姙이로 치면 이날 사실 가볼 만한 데가 없다는 것일까. 姙이는 그럼 뜻밖에도 孤獨하던가.

닫는 말에 한층 채찍을 내리우는 형상, 姙이의 적은 步幅이 어디 어느 地點에서 卒倒를 하나 보고 싶기도 해서 좀 심청맞으나 자분참 걸었던 것인데 ―

아니나다를까? 떡 없다.

내 常識으로 하면 귀한 사람이 家畜을 끌고 逍遙하려 할 때 으례히 가축이 앞선다는 것이다.

앞서 가는 내가 놀라야 하나. 이 경우에 그러면 그렇지 하고 까딱도 하지 않아야 더 점잖은가.

아직은? 했거만은 於焉간 없어졌다.

나는 내 孤獨과 내 老年을 생각하고 거기는 銀行 벽 모퉁이인 것도 채 認識하지도 못하는 중 서서 그래도 서너 번은 뒤 或은 兩곁을 둘러보았다. 斷髮 洋裝의 少女는 마침 드물다.

「이만하면 遺失이구?.」

닥쳐와야 할 일이 척 닥쳐왔을 때 나는 내 갈팡질팡하는 肉身을 收拾해야 한다. 그러나 姙이는 銀行 正門으로부터 魔術처럼 나온다. 하이힐이 아까보다는 사뭇 무거워 보이기도 하는데, 이상스럽지는 않다.

「拾圓째리를 죄다 十錢째리루 바꿨지, 이것 좀 봐, 이망쿰이야, 주머니에다 느세요.」

走馬加鞭이라는 爽快한 내 語彙에 드디어 슬램프10가 왔다. 는 것이다.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大膽하게 그럴 성싶은 표정을 이 소녀 앞에서 하는 수는 없다. 그래서 얼른

SEUVENIR!11

均衡된 步調가 똑같은 목적을 향하여 걸었다면 겉으로 보기에 親和하기도 하련만, 나는 내 마음에 忍耐를 명령하여 놓고 파라독스에 의한 復讐에 착수한다. 얼마나 요런 암상12은 참나? 計算은 말잔다.

愛情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증거!

그러나 내 입에서 復讐라는 말이 떨어진 이상 나만은 내 姙이에게 對한 愛情을 있다고 우길 수 있는 것이다.

보자! 얼마간 피곤한 내 두 발과 姙이의 한 켤레 하이힐이 尹의 집 문간에 가 서게 되었는데도 깜쪽스럽게 姙이가 성을 안 낸다. 안차고 겸하여 다라지기도13하다.

尹은 不在요, 그러면 내가 뜻하지 않고 姙이의 顔色을 살필 기회가 온 것이기에

『PM 다섯 시까지 따이먼드14로 오기를』

이렇게 적어서 안짬재기15 에게 전하고 흘깃 姙을 노려보았더니―

얼떨결에 色素가 없는 血液이라는 說明할 修辭學을 나는 내가 마치 姙이 편인 것처럼 敏捷하게 찾아 놓았다.

暴風이 눈앞에 온 경우에도 얼굴빛이 변해지지 않는 그런 얼굴이야말로 人間苦의 根源이리라. 실로 나는 울창한 森林 속을 진종일 헤매고 끝끝내 한 나무의 印象을 훔쳐 오지 못한 幻覺의 人이다. 無數한 表情의 말뚝이 共同墓地처럼 내게는 똑같아 보이기만 하니 멀리 이 奔走한 焦燥를 어떻게 점잔을 빼어서 求하느냐.

따이먼드茶房 문앞에서 너무 머뭇머뭇하느라고 들어가지 못하고 말기는 처음이다. 尹이 오면―따이먼드 뽀이 녀석은 尹과 姙이 여기서 그늘을 사랑하는 夫婦인 것까지도 알고, 하니까 나는 다시 내 筆跡을

『PM 여섯 시까지 집으로 저녁을 토식16 하러 가리로다. 勿驚 夫妻』

주고 나왔다. 나온 것은 나왔다뿐이지

DOUGHTY DOG17이라는 可憎한 장난감을 살 의사는 없다. 그것은 다만 十圓짜리 쵄지18와 아울러 姙이의 분간 못할 天候에서 나온 經症의 賭博이리라.

여섯 시에 일어난 事件에서 나는 완전히 失脚했다.

가령―(내가 尹더러)

「아 아 있군 그래, 따이먼드에 갔든가, 게다 여섯 시에 오께 밥 달라구 적어놨는데 밥이라면 술이 붙으렷다.」

「갔지, 가구말구, 밥은 예편네가 어딜 가서 아직 안됐구 술은 내 미리 먹구 왔구.」

첫째 尹은 따이먼드까지 안갔다. 고 안짬내기 말이 아이구 댕겨 가신 지 오분두 못 돼서 드로세서 여태 기대리셨는데요― PM 다섯 시는 즉 말하자면 나를 힘써 만날 것이 없다는 태도다.

「대단히 교만하다.」

이러려다 그만 두어야했다. 나는 그 대신 배를 좀 불쑥 앞으로 내이밀고

「내 아내를 소개허지 이름은 姙이.」

「아내? 허― 착각을 일으켰군그래, 내 짐작 같아서는 그게 내 아내 비슷두 헌데!」

「내가 더 미안헌 말 한마디만 허까, 이따위 서푼째리 小說을 쓰느라고 내가 萬年筆을 쥐이지 않았겠나, 追憶이라는 건 요컨대 이 萬年筆망쿰 두 손에 直接 잽히능게 아니란 내 學說이지, 어때?」

「먹다 냉깅걸 몰르구 집어먹었네그려, 자넨 自古로 貴族趣味는 아니라니까. 아따 자네 衛生이 不足헌 체 허구 그저 그대루 견디게그려, 내게 암만 퉁명을 부려야 낸들 또 한번 죗다19 버린 萬年筆을 인제 와서 어쩌겠나.」

내 얼굴은 담박 잠잠하다. 할 말이 없다. 핑계삼아 내 포켓에서

DOUGHTY DOG

을 꺼내 놓고 스프링을 감아 준다. 한 마리의 그레이하운드가 제 몸집만이나 한 구두 한 짝을 물고 늘어져서 흔든다. 죽도록 흔들어도 구두대로 개는 개대로 鋼鐵의 位置를 변경하는 수가 없는 것이 딱하기가 짝이 없고 또 내가 더럽다.

DOUGHTY

는 더럽다는 말인가. 焦燥하다는 말인가. 이 글짜의 威壓에 참 나는 견딜 수 없다.

「아닝게 아니라 나두 깜짝 놀랬네, 놀랜 것이, 지애가(안짬내기가) 내댕겨 두로니까20 헌다는 소리가, 한 마흔댓 되는 이가 열칠팔 되는 시액시를 데리구 날 찾어왔드라구, 딸 겉기두 헌데 또 첩 겉기두 허드라구, 종이쪼각을 봐두 자네 이름을 안 썼으니 누군지 알 수 없구, 덮어놓구 따이먼드루 찾어갔다가 또 혹시 실수허지나 않을까봐, 예끼 그만 내버려 둬라, 제눔이 누구등간에 날 보구 싶으면 찾어오겠지 허구 기대리는 차에, 하하 이건 좀 일이 제대루 되질 않은 것 겉기두허예 어째.’

나는 좋은 기회에 姙이를 한 번 어디 돌아다보았다.

魚族이나 다름없이 몽툭한 채 그 이 두 남자를 건드렷다 말았다 한 손을 솜씨있게 놀려

DOUGHTY DOG

스프링을 감아 주고 있다. 이것이 나로서는 성화가 날 일이 아니면 罪씨인이다. 아― 아―.

나는 아― 아― 하기를 免하고 싶어도 다음에 내 무너져 들어가는 肉體를 支持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工夫하지 않고는 이 구중중한 아― 아―를 모른 체할 수는 없다.

明 示

女子란 과연 天惠처럼 男子를 철두철미 쳐다보라는 義務를 思想의 先決條件으로 하는 彈性體던가.

다음 瞬間 내 最後의 趣味가

「家畜은 인제 싫다.」

이렇게 快히 부르짖은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忘却의 벌판에다 내다던지고 얇다란 趣味 한풀만을 질질 끌고 다니는 자기 자신 문지방을 이제는 넘어 나오고 싶어졌다.

憂患!

유리 속에서 웃는 그런 不吉한 유령의 웃음은 싫다. 인제는 소리를 가장 快活하게 질러서 손으로 만지려면 만져지는 그런 웃음을 웃고 싶은 것이다. 憂患이 있는 것도 아니요 憂患이 없는 것도 아니요 나는 深夜의 車道에 내려진 超然한 性格으로 이런 俗된 混濁에서 돌아서 보았으면―

그러기에는 이번에 적잖이 技術을 要했다. 칼로 물을 버히듯이

「아차! 나는 T가 월급이군 그래, 잊어 버렸구나!(하건만 나는 덜 배앝아 놓은 것이 혀에 미꾸라지처럼 걸려서 근질근질한다. 尹은 或은 植物과 같이 人文을 떠난 防彈 조끼를 입었나) 그러나 尹! 들어보게, 자네가 모조리 핥았다는 姙이의 裸體는 그건 姙이가 沐浴할 때 입는 비누 듀레스21나 마창가질세! 지금 아니! 전무후무하게 姙이 벌거숭이는 내게 獨占된 걸세, 그리게 자넨 그만큼 해 두구 그 병정구두 겉은 교만을 좀 버리란말일세, 알아 듣겠나.」

尹은 落照를 받은 것처럼 얼굴이 붉콰하다. 거기 嘲笑가 脂肪처럼 윤이 나서 蔓廷하는 것이 내 戰鬪力을 재채기시킨다.

尹은 내가 불쌍하다는 듯이

「내가 이만큼꺼지 辭讓허는데 자네가 공연히 자꾸 그리면 또 모르네, 내 성가셔서 자네 따귀 한 대쯤 갈길는지두.」

이런 어리석어빠진 論爭을 왜 내게 裁判을 청하지 않느냐는 듯이 그레이하운드가 구두를 기껏 흔들다가 그치는 것을 보아 姙이는 舞踊의 어떤 포우즈 같은 손짓으로

「저이가 됴―스의 女神입니다. 둘이 어디 모가질 한 번 바꿔 붙여 보시지요. 안 되지요? 그러니 그만들 두시란말입니다. 尹헌테 내애준 肉體는 거기 該當한 貞操가 法律처럼 붙어갔던 거구요, 또 지이가 어저께 결혼했다구 여기두 여기 해당한 정조가 따라왔으니까 뽐낼 것두 없능거구, 嫉妬헐 것두 없능거구 그러지 말구 겉은 選手끼리 握手나 허시지요, 네?」

尹과 나는 악수하지 않았다. 握手 以上의 통봉22이 尹은 몰라도 적어도 내 위에는 내려 앉았던 것이니까. 이것은 여기 앉았다가 밴댕이처럼 납짝해질 징조가 아닌가, 겁이 차츰차츰 나서 나는 벌떡 일어나면서 들창 밖으로 춤을 탁 배앝을까 하다가 차분참

「그렇지만 자네는 萬金을 기울여두 이젠 姙이 裸體 스냅 하나 보기두 어려울 줄 알게, 조꿈두 사양헐게 없이 구구루 나허구 竝行해서 온전한 正義를 유지허능게 어떵가?’

하니까」

「二着 열번 헌 눔이 아무래도 一着 단 한 번 헌 눔 앞에서 고갤 못드는 법일세. 자네두 그만헌 禮儀쭘 분간이 슬듯헌데 왜 그리 바들짝바들짝허나 응? 그러구 그 萬金이니 萬萬金이니 허능 건 또 다 뭔가? 나라는 사람은 말일세 자세 듣게, 女子가 날 싫여허면 헐수록 좋아허는 체허구 쫓아댕기다가두 그 女子가 섣불리 그럼 허구 좋아허는 낯을 단 한번 허는 나날에는 즉 말허자면 마지막 물건을 단 한 번 건드리구 난 다음엔 당장 눈앞에서 그 女子가 싫여지는 성질일세, 그건 자네가 아주 바루 正義가 어쩌니 허지만 이거야말루 내 정의에서 우러나오는 걸세, 대체 난 나버덤 낮은 人間이 싫으예 女子가 한 번 제 마지막 것을 구경시킨 다암엔 열이면 열 百이면 百, 밑으로 내려가서 그 男子를 쳐다보기 시작이거든, 난 이게 견딜 수 없게 싫단 그말일세.」

나는 그제는 사뭇 돌아섰다. 그만침 精密한 侮辱에는 더 견디기 어려워서.

尹은 새로 담배에 불을 붙여 물더니 주머니를 뒤적뒤적한다. 나를 殺害하기 위한 凶器를 찾는 것일까. 담뱃불은 이미 붙었는데―

「여기 十圓 있네, 가서 가난헌 T군 졸르지 말구 자네가 T군 헌테 한 잔 사 주네가, 자넨 오늘 그 자네 서푼째리 體面 때문에 꽤 憂鬱해진 모양이니 자네 소위 新婦허구 같이 있다가는 좀 위험헐걸, 그러니까 말일세 그 신부는 내 오늘 같이 키네마루 모시구 갈 테니 안헐 말루 잠시 빌리게, 응? 왜 맘에 꺼림칙헝가?」

「너무 細密허게 내 行動을 指定허지 말게, 하여간 난 혼자 좀 나가겠으니 姙이, 尹군허구 키네마 가지 응 키네마 좋아허지 왜.’

하고 말끝이 채 맞기23 전에 姙이 뾰루퉁하면서―

「姙이 남편을 그렇게 맘대루 동정허거나 慈善허거나 헐 權利는 남에겐 더군다나 없습니다. 자―그거 받어서는 안됩니다. 여깃세요.」

하고 내어 놓은 無數한 十錢짜리.

「하 하 야 이겁봐라.」

尹은 담뱃불을 재떨이에다 벌레 죽이듯이 꼭 꼭 이기면서 좀처럼 웃음을 얼굴에서 걷지 않는다. 나도 사실 속으로

「하 하 야 요겁봐라.」

안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도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姙이 등을 어루만저 주고 그 白銅貨를 한 움큼 주머니에 넣고 그리고 과연 尹이 집을 나서는 길이다.

「이따 파헐 臨時 해서 키네마 문 밖에서 기대리지, 어디지?」

「단성사, 헌데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난 오늘 친구헌테 술값 꾀주는 權利를 완전히 구속당했능걸! 어― 쯧 쯧.」

적어도 百步 가량은 앞이 매음을 돌았다. 무던히 어지러워서 비척비척 하기까지 한 것을 나는 아무에게도 자랑할 수는 없다.

TEXT

「불장난― 貞操責任이 없는 불장난이면? 저는 즐겨합니다. 저를 믿어 주시나요? 貞操責任이 생기는 나잘에 벌써 이 불장난의 記憶을 저의 良心의 힘이 抹殺하는 것입니다. 믿으세요.」

評―이것은 分明히 다음에 敍述되는 같은 姙이의 敍述 때문에 姙이의 怜悧한 거짓부렁이가 되고 마는 일이다. 즉

「貞操責任이 있을 때에도 다음 같은 方法에 依하여 불장난은―主觀的으로 만이지만―용서될 줄 압니다. 즉 아내면 남편에게, 남편이면 아내에게, 무슨 特殊한 戰術로든지 감쪽같이 모르게 그렇게 스무우스하게 불장난을 하는데 하고 나도 이렇달 形蹟을 꼭 남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네?

그러나 主觀的으로 이것이 容納되지 않는 경우에 하였다면 그것은 罪요, 苦痛일 줄 압니다. 저는 罪도 알고 苦痛도 알기 때문에 저로서는 어려울까 합니다. 믿으시나요? 믿어주세요.」

評―여기서도 끝으로 어렵다는 대문 부근이 分明히 거짓부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亦是 같은 姙이의 筆蹟, 이런 潛在意識, 綻露現象에 依하여 確實하다.

「불장난을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과는 性質이 아주 다릅니다. 그것은 컨디션 如何에 左右되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어떻다는 말이냐고 그러십니까. 일러드리지요. 기뻐해 주세요. 저는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입니다.

自覺된 戀愛니가요.

안하는 경우에 못하는 것을 觀望하고 있노라면 좋은 語彙가 생각납니다.

嘔吐. 저는 이것은 견딜 수 없는 肉體的 刑罰이라고 생각합니다. 온갖 自然發生的 姿態가 저에게는 어째 乳臭萬年의 넝마쪼각 같습니다. 기뻐해 주세요. 저를 이런 遠近法에 좇아서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評―나는 싫어도 요만큼 다가선 位置에서 姙이를 說諭하려 드는 때쉬24의 姿勢를 取消해야 하겠다. 안하는 것은 못하는 것보다 敎養 知識 이런 尺度로 따져서 높다. 그러나 안한다는 것은 내가 빚어내이는 氣候 如何에 憑藉해서 언제든지 아무 謙遜이라든가 躊躇없이 불장난을 할 수 있다는 條件附契約을 車道 복판에 安全地帶 設置하듯이 强要하고 있는 徵兆에 틀림은 없다.

나 스스로도 不決할 에필로그로 貴下들을 引導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薄氷을 밟는 듯한 會話를 組織하마.

「너는 네 말 마따나 두 사람의 男子 或은 事實에 있어서는 그 以上 훨씬 더 많은 男子에게 내주었던 肉體를 걸머지고 그렇게도 豪氣있게 또 正正堂堂하게 내 城門을 闖入할 수가 있는 것이 그래 鐵面皮가 아니란 말이냐?」

「당신은 無數한 賣春婦에게 당신의 그 당신 말 마따나 高貴한 肉體를 廉價로 구경시키셨습니다. 마찬가지지요」

「하하! 너는 이런 社會組織을 깜빡 잊어버렸구나. 여기를 너는 서장25으로 아느냐, 그렇지 않으면 男子도 哺乳行爲를 하던 피테칸트롶스26 時代로 아느냐. 可笑롭구나. 未安하오나 男子에게는 肉體라는 觀念이 없다. 알아듣느냐?」

「未安하오나 당신이야말로 이런 社會組織을 어째 急速度로 逆行하시는 것 같습니다. 貞操라는 것은 一對一의 確立에 있습니다. 掠奪結婚이 지금도 있는 줄 아십니까?」

「肉體에 對한 男子의 權限에서의 嫉妬는 무슨 걸레쪼각 같은 敎養 나부랭이가 아니다. 本能이다. 너는 이 本能을 無視하거나 그 穉機滿滿한 敎養의 掌匣으로 整理하거나 하는 재주가 通用될 줄 아느냐?」

「그럼 저도 平等하고 溫順하게 당신이 定義하시는 ‘本能’에 依해서 당신의 過去를 嫉妬하겠습니다. 자― 우리 數字로 따져 보실까요?」

評―여기서 부터는 내 敎材에는 없다.

新鮮한 道德을 期待하면서 내 舊態依然하다고 할 만도 한 貫祿을 버리겠노라.

다만 내가 이제부터 내 不足하나마 努力에 依하여 獲得해야 할 것은 내가 脫皮할 수 있을 만한 知識의 購買다.

나는 내가 환甲을 지난 몇 해 後 내 무릎이 일어서는 날까지는 내 오―크材로 만든 葡萄송이 같은 孫子들을 거느리고 喫茶店에 가고 싶다. 내 알라모우드27는 孫子들의 그것과 泰然히 맞서고 싶은 現在의 내 悲哀다.

전 질(顚跌; 넘어짐)

이러다가는 내 中立地帶로만 알고 있던 健康術이 자칫하면 崩壞할 것 같은 危懼가 적지 않다. 나는 조심조심 내 앉은 자리에 或 有害한 昆蟲이나 棲息하지 않는가 보살펴야 한다.

T군과 마주앉아 싱거운 술을 마시고 있는 동안 내 눈이 여간 축축하지 않았단다. 그도 그럴밖에. 나는 時時刻刻으로 刺殺할 것을, 그것도 제 형편에 꼭 맞춰서 생각하고 있었으니―

내가 받은 自決의 判決文 題目은

「被告는 一朝에 人生을 浪費하였느니라. 하루 被告의 生命이 延長되는 것은 이 乾坤의 經常費를 구태여 騰貴시키는 것이어늘 被告가 들어가고자 하는 쥐구녕이 거기 있으니 被告는 모름지기 그리 가서 꽁무니 쪽을 돌아다보지는 말지어다.」

이렇다.

나는 내 言語가 이미 이 荒漠한 地上에서 蕩盡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치 精神은 空洞이요, 思想은 당장 貧困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悠久한 歲月을 무사히 睡眼하기 위하여, 내가 夢想하는 情景을 合理化하기 위하여, 입을 다물고 꿀항아리처럼 잠자코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몽고르퓌에 兄弟가 發明한 輕氣球가 結果로 보아 空氣보다 무거운 飛行機의 發達을 훼방놀 것이다. 그와 같이 또 空氣보다 무거운 飛行機 發明의 힌트의 出發點인 날개가 도리어 現在의 形態를 갖춘 飛行機의 發達을 훼방 놀았다고 할 수도 있다. 즉, 날개를 펄럭거려서 飛行機를 날으게 하려는 努力이야말로 車輪을 發明하는 대신에 말의 步行을 본떠서 自動車를 만들 궁리로 바퀴 대신 機械裝置의 네 발이 달린 自動車를 發明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抑場도 아무 것도 없는 死語다. 그럴밖에. 이것은 즈앙·꼭또우28의 말인 것도.

나는 그러나 내 말로는 그래도 내가 죽을 때까지의 단 하나의 絶望 아니 希望을 아마 텐스29를 고쳐서 지껄여버린 기색이 있다.

「나는 어떤 閨秀作家를 秘密히 사랑하고 있소이다그려!」

그 閨秀作家는 原告 한 줄에 반드시 한 자씩의 誤字를 揷入하는 快活한 怠慢性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이 女人 앞에서는 내 醜한 짓밖에는, 할 수 있는 擧動의 心理的 餘裕가 없다. 이 女人은 多幸히 경산부30다.

그러나 곧이듣지 마라.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 面目을 維持하기 위해 發掘한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結婚하고 싶어하는 女人과 結婚하지 못하는 것이 결이 나서 結婚하고 싶지도 저쪽에서 結婚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女人과 結婚해 버린 탓으로 뜻밖에 나와 結婚하고 싶어하던 다른 女人이 그 또 결이 나서 다른 男子와 結婚해 버렸으니 그야말로― 나는 지금 一朝에 破滅하는 結婚 위에 저립31하고 있으니 ― 一擧에 三尖일세그려.」

즉 이것이다.

T군은 암만해도 내가 불쌍해 죽겠다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더니

「자네, 그중 어려운 外國으로 가게, 가서 비로소 말두 배우구, 또 사람두 처음으로 사귀구 다시 채국채국 살기 시작허게, 그렇거능게 자네 自殺을 求할 수 있는 唯一의 方途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그럼 薄情한가?」

自殺? 그럼 T君이 눈치를 채었던가.

「이상스러워할 것도 없는 게 자네가 주머니에 칼을 넣고 댕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네에게 自殺하려는 意思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겠나. 勿論 이것두 내게 아니구 남한테서 꿔온 에피그람32이지만.’

여기 더 앉았다가는 鰒魚처럼 탁 터질 것 같다. 아슬아슬한 때 나는 T君과 함께 빠아를 나와 알마추 단성사 문앞으로 가서 三分쯤 기다렸다.

尹과 姙이가 一條二條하는 文章처럼 나란히 나온다. 나는 T君과 같이 ‘晩春’試寫를 보겠다. 尹은 우물쭈물하는 것도 같더니

「바통 가져 가게.」

한다. 나는 일없다. 나는 절을 하면서

「一着 選手여! 나를 列車가 沿線의 小驛을 잘디잔 바둑돌 默殺하고 通過하듯이 無視하고 通過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瞬間 姙이 얼굴에 毒花가 핀다. 응당 그러리로다. 나는 二着의 名譽 같은 것도 요새쯤 내다 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래 얼른 릴레를 棄權했다. 이 경우에도 語彙를 蕩盡한 浮浪者의 資格에서 恐懼 橫光利一33氏의 出世를 사글세 내어온 것이다.

姙이와 尹은 人波 속으로 숨어 버렸다.

갸렐리34 어둠 속에 T君과 어깨를 나란히 앉아서 신발 바꿔 신은 人間코메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랫배가 몹시 아프다. 손바닥으로 꽉 누르면 밀려 나가는 김이 입에서 哄笑로 化해 터지려 든다. 나는 阿片이 좀 생각났다. 나는 조심도 할 줄 모르는 野人이니까 半쯤 죽어야 껍적대이지 않는다.

스크린에서는 죽어야 할 사람들은 안 죽으려 들고 죽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은 죽으려 야단인데 수염난 사람이 수염을 혀로 핥듯이 만지적 만지적 하면서 이쪽을 향하더니 하는 소리다.

「우리 醫師는 죽으려 드는 사람을 부득부득 살려가면서도 살기 어려운 세상을 부득부득 살아가니 거 익살맞지 않소?」

말하자면 굽달린 自動車를 硏究하는 사람들이 거기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들 있다.

나는 차츰차츰 이 客 다 빠진 텅 빈 空氣 속에 沈沒하는 果實 씨가 내 허리띠에 달린 것 같은 恐怖에 지질리면서 정신이 점점 몽롱해 들어가는 벽두에 T군은 은근히 내 손에 한 자루 서슬 퍼런 칼을 쥐여 준다.

(復讐하라는 말이렷다)

(尹을 찔러야 하나? 내 決定的 敗北가 아닐까? 尹은 찌르기 싫다)

(姙이를 찔러야 하지? 나는 그 毒花 핀 눈초리를 網膜에 映像한 채 往生하다니)

내 心臟이 꽁꽁 얼어들어 온다. 빼드득 빼드득 이가 갈린다.

(아하 그럼 自殺을 勸하는 모양이로군, 어려운데 어려워, 어려워, 어려워)

내 卑怯을 嘲笑하듯이 다음 순간 내 손에 무엇인가 뭉클 뜨뜻한 덩어리가 쥐어졌다. 그것은 서먹서먹한 표정의 나쓰미깡, 어느 틈에 T군은 이것을 제 주머니에다 넣고 왔던구.

입에 침이 쫘르르 돌기 전에 내 눈에는 식은 컵에 어리는 이슬처럼 방울지지 않는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하였다.


===============================================================================================================

  1. 슡케―스; suitcase. 여행용 가방. (1)

  2. 나쓰미깡; 귤의 일종. 크기가 귤보다 크고 아주 신맛이 남. (2)

  3. 융(尹); 경상도 방언을 표기하느라 비음처럼 적음. (3)

  4. 瘠身; 수척한 몸 (4)

  5. 風丰; 살지고 아름다운 풍채. (5)

  6. 나가 갔다고; ‘나가 잤다고’의 오식 (6)

  7. 듀로워즈; drawers. 삼각팬티보다 긴 여자 속옷 (7)

  8. 一朶花; 한 떨기 꽃 (8)

  9. 汪洋한; 바다같이 넓은 (9)

  10. 슬램프; slump. 갑자기 오는 권태, 의기소침한 상태 (10)

  11. SEUVENIR; souvenir의 오식인 듯. 기억·추억·기념품·비망록의 뜻 (11)

  12. 암상; 남을 미워하고 샘을 잘 내는 잔망스러운 심술 (12)

  13. 다라지기도; 됨됨이가 단단하여 여간한 일에는 겁내지 아니하다 (13)

  14. 따이먼드; 다방 이름 (14)

  15. 안짬재기; 안잠자기. 남의 일에서 잠자며 일을 돕는 여자 (15)

  16. 討食; 음식을 강제로 청하여 먹음 (16)

  17. DOUGHTY DOG; 용감한 개. 여기서는 장난감의 이름 (17)

  18. 쵄지; change. 환전. 돈바꾸기 (18)

  19. 죗다; ‘쥐었다’의 뜻인 듯 (19)

  20. 내 댕겨 두로니까; ‘내가 다니다 들어오니까’의 사투리 (20)

  21. 듀레스; dress. 옷 (21)

  22. 痛棒; 좌선할 때 스승이 마음의 안정을 잡지 못하는 제자를 징벌할 때 쓰는 방망이 (22)

  23. 맞기; ‘맺기’의 오식 (23)

  24. 때쉬; dash. 돌진. 力走 (24)

  25. 西藏; 티벳지방 (25)

  26. 피테칸트롶스;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 1891년에 자바섬에서 발견된 약 50만년 전의 인류. 直立猿人 (26)

  27. 알라모우드; 아라모드( la mode). 유행의. 멋의 (27)

  28. 즈앙·꼭또우; 쟝 꼭도(Jean Cocteau). 프랑스의 시인·소설가·배우·화가. 세계 제1차 대전과 동시에 다다이즘으로 등장하여 <무서운 아이들>(1929) 등의 소설과 <Po sies>(1920)라는 시집을 남김 (28)

  29. 텐스; tense. 시제(時制) (29)

  30. 經産婦;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여자 (30)

  31. 佇立; 우두커니 섬 (31)

  32. 에피그람; epigram. 경구(警句) (32)

  33. 橫光利一; 요코미츠 리이츠(1898∼1947). 일본의 소설가. 川端康成과 더불어 신감각파 운동을 전개한 후 신심리주의 문학으로 옮아감. <機械>, <紋章>, <日輪> 등을 씀 (33)

  34. 갸렐리; gallery. 회랑. 방청석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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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쏟아진데다가 비가 내린 뒤에 일기가 추워서 얼어붙은 길바닥이 미끄럽기 짝이 없는 음력으로 섣달 어느날이다. 그날 학교 방문을 나선 나는 광화문 앞에서 전차를 내려 사비(社費)바람에 팔자에 없는 인력거를 잡숫기로 하였다. 다닐 길은 육상궁(毓祥宮)까지 치받쳐서 제2고등보통학교를 방문하고 나오려다가 진명, 배화 두 여학교에 들를 작정이었다. 그리고 차부에 대하여는 제2고등보통학교를 왕복하는 데 얼마냐고 물어 보았다.

“80전만 주십시오.”

막걸리 몇 잔을 먹었던지, 익혀 놓은 게 딱지 모양으로 새빨간 얼굴과 우형(愚螢)하고 유순한 빛이 도는 동그란 소의 그것 같은 눈을 가진 차부가 이렇게 청구하였다.

내 깜냥보파는 매우 헐하기 때문에 선뜻 올라타며,

“오는 길에 한 둬 군데 들러올 데가 있네. 달라는 대로 줄 테니‥‥‥”

“그저 처분해 줍시오.”

하고 차부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서십자각(西十字角)으로 꺾어들어 평탄한 길을 풍우같이 몰아갔다.

제2고보와 진명여학교를 거쳐서 필운대(弼雲臺) 꼭대기로 배화학교를 찾아 올라갈 적 이었다.

길이 좁으며, 토방도 많고, 돌멩이도 많은데, 게다가 빙판이라, 차체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흔들리는 건 물론이려니와, 차부의 발이 질척질척 미끄러질 때가 많았다. 날은 차건만, 끄는 이의 목덜미에는 땀이 구슬같이 맺혔다. 학교를 다 가자 헐떡거리는 차부 앞에는 또 언덕배기가 닥치었다.

“여기서 내리지.”

차체가 둔덕 위로 기어오르려 할 제 나는 차부의 애쓰는 꼴을 보다 못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차부는 대꾸도 않고 버럭버럭 땀을 흘리며 차체를 끌어올렸다. 나의 미온적 동정이 말경(末境)에 차삯 깎을 구실이 될까 두려워함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오죽 험한 데를 모시고 갔읍니까?’ 하고 값을 더 달랄 밑천을 장만하려 함이리라.

저편이 그렇게 생각하는 다음에야 이편에서 애써 자선을 베풀려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타고 배겼다.

올라갈 적에는 무사하였다. 그러나, 그 학교의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무사치 않았다. 그리 누그럽지 않은 경사면을 내려 몰려고 할 제 나는 또 주의하였건만 차부는 또 코대답도 아니하였다. 자르르 하는 바퀴 소리가 나자 차부의 두 다리는 번개같이 달음질하였다.

(어째 이렇게 속히 가나?)라고 생각하자 마자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획하고 나의 몸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럴 겨를도 없이 나는 땅궁장으로 길바닥에 자빠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오른편 개천에 내리박힌 인력거는 모로 누웠고, 차부는 무슨 땅재주나 넘는 것처럼 두 다리를 번쩍 하늘로 쳐들고 머리와 상반부가 한데 오그라붙은 듯한 꼴이 얼른하고 나의 핑핑 돌리는 시선을 거쳤다.

내가 루루 털고 일어나자 차부도 루루 털고 일어났다.

“어디 다친 데나 없어요?”

“어디 다친 데나 없나?”

이런 인사가 서로 끝나자 우리의 눈은 인력거로 모였다. 채가 부서지고 흙받기가 깨졌으며 바퀴도 여러 군데 상한 모양이었다.

“이런, 젠강맞을 일 봐!”

간신히 엎어진 차체를 세운 후, 상한 곳을 어루만지며 차부는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그 눈에는 눈물의 그림자가 어른어른하였다‥‥‥

나도 한동안 우두커니 거기 서 있었다. 아무리 제 과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그 원인의 일부임을 생각하매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얼마 줄까?”

이윽고 나는 물었다.

“처분해 주십시오. 저는 이 섣달 대목에 10여 원의 손해입니다.”

차부는 부서진 차체로부터 눈을·떼지 않으며 대답하였다.

“아까 내리우랄 제 내려 주었으면 좋았지.”

나는 꾸짖는 듯이 불쑥 한마디하고 돈 1원 을 준 채 홱 돌아섰다. 삯 투정을 할까 보아 나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될 수 있는 대로 걸음을 재게 걸었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말할 누 없는 읍울(悒鬱)이 나의 덜미를 집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해부에서 오는 읍울이었다. 돈 줄 때 불쑥 나온 나의 한마디, 그 속에는 차부에게 전책임을 돌림으로써, 나의 동정에 저버림을 질책함으로써 인력거 삯을 더 못 달라게 하려는 의식이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었다. 자선을 받으면 이익을 잃을까 보아 위험을 무릅쓰고, 위험을 무릅쓴 끝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건만, ‘내리 우라’한 말 한마디를 끝끝내 방패삼아 도덕적으로 차삯을 더 달랄 수 없게 만든 나의 태도(의식적이든 무의식적 이든)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매 나의 가슴은 더욱더욱 읍울에 잠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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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인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 덩이가 똘똘 구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히 뿌리는 버덩1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 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에는 흔히 도깨비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그럴것이다. 고요하고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칙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서 그런 것을 본 적은 없다. 따라서 그런 것에 관하여서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 나는---자랑이 아니라---더 놀라운 유령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이니 놀랍단 말이다. 나는 그래도 문명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유령을 목격하였다. 거짓말이라구? 아니다. 거짓말도 아니고 환영도 아니었다. 세상 사람이 말하여 <유령>이라는 것을 나는 이 두 눈을 가지고 확실히 보았다.

어떻든 길게 말할 것 없이 다음 이야기를 읽으면 알 것이다.

동대문 밖에 상업학교가 가제(假製)될 무렵이었다. 나는 날마다 학교 집터에 미장이로 다니면서 일을 하였다. 남과 같이 버젓하게 일정한 노동을 못하고 밤낮 뜨내기 벌잇군으로 밖에는 돌아다니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래도 몇 달 동안은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마는 과격한 노동이었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쉬어 본 일은커녕 한 번이라도 늦게 가 본적도 없었다. 원수같이 지글지글 타내리는 여름 태양 아래에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감독의 말 한 마디 거슬리는 법 없이 고분고분히 일을 하였다. 체로 모래를 쳐라, 불같은 태양 아래에 새까맣게 타는 석탄으로 <노리2>를 끓여라, 시멘트에다 모래를 섞어라, 그것을 노리로 반죽하여라, 하여 쉴 새 없는 기계같이 휘몰아쳤다. 그 열매인지 선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들이 다지는 시멘트가 몇 백 간의 벌집 같은 방으로 변하고 친구들의 쨍쨍 울리는 끌 소리가 여러 층의 웅장한 건축으로 변함을 볼 때에 미상불 우리의 위대한 힘을 또 한 번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어리석은 미련퉁이들이라····(1행 생략)···어떻든 콧구멍이 다 턱턱 막히는 시멘트 가루를 전신에 보얗게 뒤집어쓰고 메케한 노린 냄새와 더구나 전신을 한바탕 쪽 씻어 내리는 땀 냄새를 맡으면서 온종일 들볶아치고 나면 저녁물에는 정말이지 전신이 나른하였다. 그래도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고 끼니거리를 생각하면 마지막 힘이 났다. 일을 마치고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일인 감독의 집으로 같다. 삯전을 얻어 가지고 그 길로 바로 술집에 가서 한잔 빨고 나면 그제야 겨우 제정신인 듯싶었던 것이다.

술! 사실 술처럼 고마운 것도 없었다. 버쩍버쩍 상하는 속, 말할 수 없는 피로를 잠시라도 잊게 하는 것은 그래도 술의 힘이었다.

그날도 나는 술김에 얼근하였었다. 다른 때와 같이 역시 맨 꽁무니에 떨어진 김서방과 나는 삯전을 받아들고 나서자마자 한길 옆 술집에서 만판 먹어 댔다.

술집을 나와 보니 벌써 밤은 꽤 저물었었다. 잠을 자도 한참 너그러지게 잤을 판이었다. 잠이라니 말이지 종일 피곤하였던 판에 주기조차 돌아 놓으니 사실이지 글자대로 눈이 스르르 내리감겼다. 김서방과 나는 즉시 잠자리를 향하였다.

잠자리라니 보들보들한 아름다운 계집이 기다리고 있는 분홍 모기장 속 두툼한 요 위인 줄은 알지 말아라. 그렇다고 어둠침침한 행랑방으로 알라는 것도 아니다. 비록 빈대에는 뜯길망정 어둠침참한 행랑방 하나 나에게는 없었다. 단지 내 몸뚱이 하나인 나는 서울 안을 못 돌아다닐 데 없이 돌아다니면서 노숙(露宿)을 하였던 것이다(그래도 그것이 여름이었으니 말이지 겨울이었던들 꼼짝없이 얼어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못 볼것을 다 보고 겪어 왔었다. 참말이지 별별 야릇하고 말 못할 일이 많았다. 여기에 쓰는 이야기 같은 것은 말하자면 그 중에서 가장 온당한 이야기의 하나에 지나지 못한다. 어떻든 김서방---도 이미 늦었으니 행랑 구석에 가서 빈대에게 뜯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노숙하기를 좋아하였다.---과 나는 도수장께를 지나서 동묘 앞까지 갔었다.

어는 결엔지 가는 비가 보슬보슬 뿌리기 시작하였다. 축축한 어둠 속에 칙칙한 동묘가 그 윤곽을 감추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하였다.

「이놈들 게 있거라!」

별안간 땅에서 솟을 듯이 이런 음성이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는 대신에 빙긋 웃었다.

「이래보여도 한여름 동안을 이런 데루 댕기면서 잠자는 놈이다 그렇게 쉽게 놀래겠니.」

하는 담찬 소리를 남겨 놓고 동묘 대문께로 갔다. 예기한 바와 다름없이 거기에는 벌써 우리 따위의 친구들이 잠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꽤 넓은 대문간이지만 그 속에 그득하게 고기새끼 모양으로 와르르 차 있었다. 이리로 눕고 저리로 눕고 허리를 베이고 발치에 코를 박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이놈들 게 있거라!」

「아이그 그년···」

「이런 경칠 자식 보게」

엎치락뒤치락 연해 연방 잠꼬대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술맛 좋다!」

하고 입맛을 쩍쩍 다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바람에 나도 끌려서 어는 경에 쩍쩍 다시려하던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김서방을 둘러보았다.

「어떡하려나?」

「가세!」

「가다니?」

「아 아무 데래두 가 자야지.」

김서방은 시원치 않은 듯이 역시 눈만 비볐다.

「저 안으로 말야. 지금 가면 어델 간단 말인가. 아무 데래두 쓰러져 한잠 자면 됐지.」

「그래두.」

「머, 고지기한테 들킬까봐 말인가? 상관있나. 그까짓 거 낼 식전에 일찌기 일어나면 그만이지.」

그래도 시원치 않은 듯이 머리를 긁는 김서방의 등을 밀치면서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턱까지 들어서니 더 한층 고요하였다.

여러 해 동안 버려 두었던 빈 집터같이 어둠 속으로 보아도 길이 넘는 잡풀이 숲속같이 우거져 있고 낮에 보아도 칙칙한 단청이 어둠에 물들어 더 한층 우중충하고 게다가 비에 젖어서 말할 수 없이 구중중한3 느낌을 주었다. 똑바로 말이지 청 안에 안치한 그림 속에서 무서운 장사가 뛰어 내닫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에 머리끝이 쭈뼛하여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거진 옷을 적실 만하게 된 빗발을 피하여 앞뜰을 지나 넓은 처마 밑에 이르렀다. 그대로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아 겨우 안심한 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때이었다.

「에그 저게 뭔가 이 사람!」

김서방은 선뜻 나의 팔을 꽉 잡았다. 그의 가리키는 곳에 시선을 옮긴 나는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별안간 소름이 쪽 돋고 머리끝이 또다시 쭈뼛하였다.

불과 몇 간 안되는 건너편 정전(正殿)옆에! 두어 개의 불덩어리가 번쩍번쩍하였다. 정신의 탓이었던지 파랗게 보이는 불덩이가 땅을 휘휘 기다가는 훌쩍날고 날다가는 꺼져 버렸다. 어디선지 또 생겨서는 또 날다가 또 꺼졌다.

무섬 잘 타기로 유명한 왕눈이 김서방은 숨을 죽이고 살려 달라는 듯이 나에게로 바짝 붙었다.

「하 하 하 하 ····」

「미쳤나 이 사람!」

오히려 화기가 버럭난 김서방은 말끝도 채 못 마쳤다.

「하하하 속았네 속았어.」

「····」

「속았어, 개똥불을 보고 속았단 말야. 하하하!」

「머 개똥불?」

김서방은 그래도 못 미덥다는 듯이 그 큰눈을 아직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그래 개똥불이야 이거 볼려나?」

하고 나는 손에 잡히는 작은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두어 걸음 저벅저벅 뜰 앞까지 나가서 역시 반짝거리는 개똥불을 겨누고 돌을 던졌다.

하나 나는 짜장 놀랐다. 돌을 던지면 헤어져야 할 개똥불이 헤어지긴커녕 요번에는 도리어 한 군데 모여서 움직이지도 않고 그 무슨 정세를 살피는 듯이 고요히 이쪽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또 숨을 죽이고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오··· 그때에 나는 더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꺼졌다 또 생긴 불에 비쳐 헙수룩한 산발과 똑똑지 못한 휘끄무레한 자태가 완연히 드러났다. 그제야 「흥 흥」하는 후렴 없는 신음 소리조차 들려 오는 줄을 알았다.

「에그머니!」

나는 순식간에 달팽이같이 오무라졌다. 그리고 또 부끄러운 말이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에 나는 동묘 밖 버드나무 밑에 쓰러져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사실 꿈에서나 깨어난 듯하였다. 곁에는 보나 안 보나 파랗게 질린 김서방이 신장대 모양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였는데 집으로 돌아가기도 무엇하니 나머지 밤을 동대문께 가서 새우자고 김서방이 제언하였다.

비는 여전히 뿌리고 있었다. 뒤에서 무어가 쫓아오는 듯하여 연해 연방 뒤를 돌려보면서 큰 한길에 가 섰을 때에는 파출소 붉은 전등만 보아도 산 듯싶었다.

허둥허둥 동대문 담 옆까지 갔었다. 고요한 담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것을 집어삼킨 캄캄한 어둠밖에는 물론 파란 도깨비불도 없다.

「애초에 이리로 왔더라면 아무 일두 없었을걸.」

후회 비슷하게 탄식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에라 아무 데나」하고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하자····나는 놀라기 전에 간이 싸늘해졌다. 도톨도톨한 조약돌이나 그렇지 않으면 축축한 흙이 깔려 있어야만 할 엉덩이 밑에···하나님 맙소서!····나는 부드럽고도 물큰한 촉감을 받았다.

뿐이 아니다. 버들껑하는 동작과 함께 날카로운 소리가 독살스런 땡삐같이 나의 귀를 툭 쏘았다.

「어떤 놈야 이게!」

나는 고무공같이 벌떡 뛰었다. 그리고는 쏜살같이---그꼴 이야말로 필연코 미친 모양이었을 것이다---줄행랑을 놓았다.

김서방도 내 뒤에서 헐레벌떡거렸다.

「제발 사람을 죽이지 마라.」

김서방은 거의 울음겨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이놈의 서울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니구 도깨비굴이었던가.」

나 역시 나중에는 맡길 데 없는 분기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어리석고 못생긴 우리을 꼴들을 비웃고도 싶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세상에 원 도깨비나 귀신치고 몸뚱어리가 보들보들하고 물큰물큰하고---아니 그건 그렇다고 해 두더라도「어떤 놈야 이게!」하고 땡삐 소리를 치다니 그게 원····하고 의심하여 볼 때에는 더구나 단단치 못하게 겁을 집어먹은 것이 짝없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또 발을 돌려 그 정체를 탐지하러 갈 용기가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보슬비를 맞으면서 수구문 밖 김서방네 행랑방까지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뜩이나 덕실덕실 끓는 식구 틈에 끼여 하룻밤의 폐를 끼쳤다고 하여도 불과 두어 시간의 폐일 것이다. 막 한참 자려고 드러누웠을 때에는 벌써 날이 훤히 새었었으니까.

이렇게 하여 나는 원 무엇이 씌었던지 하룻밤에 두 번씩이나 도깨빈지 귀신에 혼이났었다. 사실 몇 해 수는 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 누구를 원망하면 좋았으리요? 술 먹고 늑장을 댄 내 자신일까, 노숙하지 않으면 아니된 나의 운명일까, 혹은 도깨비나 귀신 그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 외의 무엇일까····· 나는 이제야 겨우 이 중의 어느 것을 원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어떻든 유령 이야기는 이만이다. 하나 참 이야기는 이로부터다.

잠 못 자 곤한 것도 무릅쓰고 나는 열심으로 일을 하였다. 비는 어느 결에 개어 버렸던지 또 푹푹 내리찌는 태양 아래에서 시멘트 가루를 보얗게 뒤집어쓰고 줄줄 흐르는 땀에 젖어 가면서.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전날 밤에 당한 무서운 경험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깨비면 도깨빈가보다 하고만 생각하여 두면 그만이었지마는 그래도 그것을 단순하게 씩 닦아 버릴 수는 없었다.

(대체 원 도깨비가·····)

하고 요리조리로 무한히 생각한다 하더라도 결국 나에게는 풀지 못할 수수께끼에 지나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점심 시간을 타서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모두들 적지않은 흥미를 가지고 들었다.

「머 도깨비?」

2층 꼭대기에 시멘트를 갖다 주고 내려온 맹꽁이 유서방은 등에 메었던 통을 내려놓기도 전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가 있었더라면 그까짓 걸 그저·····」

벤또를 박박 긁던 덜렁이 최서방은 이렇게 뽐냈다. 그러나 가장 침착하게 담배를 푹푹 피우던 대머리 박서방만은 그다지 신통치 않은 듯,

「그래 그것한테 그렇게 혼이 났단 말인가·····따는 왕눈이 따위니까.」

하면서 밉지 않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김서방과 나를 등분으로 건너보았다. 그리고,

「도깨비 도깨비해두 나같이 밤마다야 보겠나.」

하고 빨던 담배를 툭툭 털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우리 집 옆에 빈 집이 하나 있네. 지금 있는 행랑에 든지 몇 달 안되어 모르긴 모르겠으나 어떻게 된 놈의 집이 원 사람이 들었던 집인지 안들었던 집인지 벽은 다 떨어지구 문짝 하나 없단 말야. 그런데 그 빈 집에 말일세.」

여기서 박서방은 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저녁을 먹구 인제 골목쟁이를 거닐지 않겠나. 그러면 그때일세, 별안간 고요하던 빈 집에 불이 하나씩 둘씩 꺼졌다 켜졌다 하겠지. 그것이 진서방(나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말마따나 무엇을 찿는 듯이 슬슬 기다는 꺼졌단 또 생긴단 말야. 그리곤 무언지 지껄하는 소리가 나자 한쪽에서는 돈을 세는지 은방망이로 장난을 하는지 절걱절걱하다간 또 무엇을 먹는지, 쭉쭉하는 소리까지 들리네. 그나 그뿐인가, 어떤 날은 저희끼리 싸움을 하는지 씨름을 하는지 후당탕하면서 욕지거리 웃음 소리가 다 들려 오데.」

박서방은 여기서 말을 문득 끊더니

「어때 재미들 있나?」

하고 좌중을 돌려보면서 싱글싱글 웃었다.

「정말유 그게?」

웅크리고 앉았던 덜렁이 최서방은 겨우 숨을 크게 쉬면서 눈을 까불까불 하였다.

「그럼 정말 아니구 내가 그래 자네들을 데리구 실없는 소리를 하겠나.」

하면서 박서방은 말을 이었다.

「하나 너무 속지들은 말게. 그런 도깨비는 비단 그 빈집에나 진서방들 혼난 데만 있는 것이 아닐세. 위선 밤에 동관이나 혹은 종묘께만 가 보게 시글시글할 테니.」

나의 도깨비 이야기를 하여 의심을 풀려던 나는 박서방을 도깨비 이야기로 하여 그 의심을 더 한층 높였을 따름이었다. 더구나 뼈있는 그의 말과 뜻있는 듯한 그의 웃음은 더한층 알지 못할 수수께끼였다.

「그럼 대체 그 도깨비가 무엇이란 말유.」

「내가 이 자리에서 길다케 말할 것 없이 자네가 오늘 저녁에 또 한 번 가서 찬찬히 살펴보게. 그러면 모든 것이 어름장 같이······」

할 때에 박서방의 곁에 시커먼 것이 나타났다.

「무슨 애기 했소?」

일인 감독의 일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고하는 듯한 소리였다.

「오소 오소 일이 해야지.」

모두들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도 하는 수 없이 박서방에게 더 캐묻지도 못하고 자리를 일어나서 나 맡은 일터로갔다.

그날 저녁이다.

결국 나는 또 한 번 거기를 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물론 김서방은 뺑소니를 치고 나 혼자다. 뻔히 도깨비가 있는 줄 알면서 또 가기는 사실 속이 켕겼다. 하나 또 모든 의심을 풀어 버리고 그 진상을 알려 하는 나의 욕망은 그보다 크면 컸지 결코 적지는 않았다. 나는 가슴을 벌떡이면서 발에다 용기를 주었다.

「그까짓 거 여차직하면 이걸로.」

하고 손에 든 몽둥이---나는 만일의 경우를 염려하여 몽둥이 하나를 준비하였던 것이다---를 번쩍 들 때에 나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미소를 금할 수 없었다. 도깨비를 정복하러 가는 유령장군같이도 생각되어서 사실 하는 X자놈들이면 몰라도 무엇을 못먹겠다고 하필 가난뱅이 노숙자들을 못 살게 굴고 위협과 불안을 주는 유령을 정복하여 버리겠다는 것은 사실 뜻있고도 용맹스런 사업일 것이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어떻든 장차 닥쳐올 모험에 가슴을 벌떡이면서 발에다 용기를 주었다.

어두워가는 황혼 속에 음침한 동묘는 여전히 우중충하였다.

좀 이르다고 생각하였으나 나오기를 기다리면 되지 하고 제멋대로 후둑후둑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아직도 열려 있는 대문을 서슴지 않고 들어섰다. 중문을 들어서 정전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갔을 때이다.

전날 밤에 나타났던 정전 바로 옆 그 자리에 헙수룩하게 산발한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벌써 어리석은 전날 밤의 나는 아니었다.

「원 요놈의 도깨비가·····」

몽둥이를 번쩍 들고 사실 장군다운 담을 가지고 나는 그 자리까지 달려갔다. 하나!

나의 손에서는 만신의 힘이 맺혔던 몽둥이가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유령장군이 금시에 미치광이 광대새끼로 변하여 버렸던 것이다.

「원 이런 놈의·····」

틀림없던 도깨비가 순식간에 두 모자의 거지로 변하다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다음 순간 그 무엇을 번쩍 돌려 생각한 나는 또다시 몽둥이를 번쩍 들었다.

「요게 정말 도깨비 장난이란 것야.」

하나 도깨비란 소리에 영문을 모르는 두 모자는 손을 모으고 썩썩 빌었다.

「아이구 왜 이럽니까?」

이건 틀림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가라면 그저 나가라던지 그래 이 병신을 죽이시렵니까. 감히 못 들어올 덴 줄은 알면서도 할수할수없이·····」

눈물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사죄를 하면서 여인네는 일어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어린애는 울면서 그를 붙들었다. 역시 광대에 지나지 못한 나는 너무도 경솔한 나의 행동을 꾸짖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우 앉아 계시우. 나는 고지기두 아무것도 아니니.」

「네?」

모자는 안심한 듯한 동시에 감사에 넘치는 눈으로 나를 치어다보았다.

「어젯밤에 여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수?」

무어가 무언지 분간할 수 없는 나는 이렇게 물었다.

「네? 나오다니요? 아무것도 나오지는 않았읍니다. 그리고 단지 우리 모자밖에는 여기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여인네는 어시무사하여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럼 대체 그 불은?」

나는 그래도 속으로 의심하면서 주위로 눈을 휘돌렸다.

「무슨 일이나 생겼읍니까? 정말 저희들 밖에는 아무것두 없었읍니다. 그리구 저희는 저지른 것두 없읍니다. 밤중은 돼서 다리가 하두 아프길레 약을 바르려고 찾으니 생전 있어야지유. 그래 그것을 찾느라구 성냥 한 갑을 거의 다 거어 내버린 일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읍니다.」

하고 여인네는 한쪽 다리를 훌떡 걷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 다리 위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어름장 풀리듯이 해득하기는 하였으나 여기서 참혹한 그림을 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훌떡 걷은 한편 다리! 그야말로 눈으로는 차마 보지 못할 것이었다. 발목은 끊어져 달아나고 장단지는 나무거피같이 마르고 채 아물지 않은 자리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놈의 원수의 자동차·····그나마 얻어 먹지도 못하게 이렇게 병신을 만들어 놓고·····」

여인네는 울음에 젖기 시작하였다.

「자동차에요?」

「네 공원 앞에서 그놈의 자동차에·····」

나는 문득 어슴푸레한 나의 기억의 한귀퉁이를 번개같이 되풀이하였다.

달포 전.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나는 이유 없이---가 아니라 바로 말하면 바람 쏘이러---밤 장안을 헤매고 있었다. 장안의 여름날은 아름 다왔다.

낮 동안에 이글이글 타는 해에 익은 몸뚱어리에 여름밤은 둘 없이 고마운 선물이었다. 여름의 장안 백성들에게는 욱신욱신한 거리를 고무풍선같이 떠다니는 파라솔이 있고 땀을 식혀주는 선풍기가 있고 목을 식혀 주는 맥주 거품이 있고 은접시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있다. 그리고 또 산 차고 물 맑은 피서지 삼방이 있고 석왕사가 있고 인천이 있고 원산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꿈에도 못 보는 나에게는 머루알빛 같은 밤하늘만 치어다보아도 차디찬 얼음 냄새가 흘러나오는 듯하였다. 이것만 하더라도 밤 장안을 헤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계집의 얼굴---은새려 분 냄새만 맡을 수 있는 것만 하여도 사실 밤 장안을 헤매는 값은 훌륭히 될 것이었다.

그러나 장안의 여름밤을 아름다운 꿈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거기에는 생활의 무거운 짐이 있다. 잔칫집 마당같이 들볶아치는 야시에는 하루면 스물 네 시간의 끊임없는 생활의 지긋지긋한 그림이 벌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낮과 다름없이 역시 부르짖음이 있고 싸움이 있고 땀이 있었다.

그러나 아뭏든 간에 가슴을 씻어 주는 시원한 맛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여름밤은 아름다왔다. 그런고로 나는 공원 앞 큰길 한 옆에 사람이 파도를 일으키면서 요란히 수물거리는 것은 구태여 볼 것 없이 술김에 얼근한 주객이나 그렇지 않으면 야시의 음악가 깡깡이 타는 친구를 둘러 싸고 있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흥 여름밤이니까!」

혼자 중얼거리면서 무심코 그곳을 지나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수물거리는 폼이 주정군이나 혹은 깡깡이군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리고 무었보다도

노자 노자

젊어 노자

먹구 마시구

만판 노자.

하는 주객의 노래는 안 들렸다. 그렇다고 밤 사람을 취하게 하는 <아름다운> 깡깡이 노래도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러문 대체·····」

나의 발길이 부지중에 그리로 향하였다.

「머? 겨우 요술군 약장수야?」

나는 거의 실망에 가까운 어조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발길을 돌이키려 할 때이다. 사람들의 수물거리는 틈으로 나는 무서운 것을 보았다.

군중의 숲에 싸여서 안 보이는 한 대의 자동차와 그 밑에 깔린 여인네 하나를 보았다. 바퀴 밑에는 선혈이 임리하고 그 옆에는 거지아이 하나가 목을 놓고 울면서 쓰러져 있었다. 「자동차 안에는」하고 보니 아니나다를까 불량배와 기생년들이 그득하였다.

「오라질 연놈들!」

「자동찰 타니 신이 나서 사람까지 치니!」

「원 끔직두 해라!」

이런 말 마디를 주우면서 나는 어느 결에 그 자리를 밀려 나왔었다.

「그래 당신이 그·····」

나는 되풀이하던 기억을 끝을 돌려 이렇게 물었다.

「네 그렇답니다. 달포 전에 그 원수의 자동차에 치어 가지구 병원엔지 무엔지를 끌구가니 생전 저 어린 것이 보구 싶어 견딜 수 있어야지유. 그래 한 두달두 채 못 돼 도루 나오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이놈의 다리가 또 아프기 시작해서 배길 수 있어야지유.」

「다리만 성하믄야 그래두 돌아 댕기면서 얻어 먹을 수는 있지만····」

여인네는 차마 더 볼 수 없는 다리를 두 손으로 만지면서 울음을 느꼈다. 나는 그의 과거를 더 캐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묻지 않아도 그의 대답은 뻔한 것이었다.

「집이 원래 가난했읍니다. 그런데다가 남편이 죽구나니·····」

비록 이런 대답은 안할지라도 그 운명이 운명이지 무슨 더 행복스런 과거를 찾아 낼 수 있었으리요.

나의 눈에는 어느 결엔지 눈물이 그득히 고였었다. <동정은 우울감의 반쪽>일는지 아닐는지는 모른다. 하나 나는 나도 모르는 동안에 주머니 속에 든 대로의 돈을 모두 움켜서 뚝 떨어지는 눈물과 같이 그의 손에 주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부리나케 그 자리를 뛰어나왔었다.

이야기는 이만이다.

독자여 이만하면 유령의 정체를 똑똑히 알았겠지. 사실 나도 이제는 동대문이나 동관이나 종묘나 또 박서방 말한 빈 집터에 더 가 볼 것 없이 박서방의 뼈 있는 말과 뜻 있는 웃음을 명백히 이해하였다.

그리고 나는 모두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애매한 친구들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어리석게 군 나를 실컷 웃어도 보고 뉘우쳐 보기도 하였다.

독자여 뭐? 그래도 유령이라고? 그래 그럼 유령이라고 해두자. 그렇게 말하면 사실 유령일 것이다. 살기는 살았어도 기실 죽어 있는 셈이니!

어떻든 유령이라고 해 두고 독자여 생각하여 보아라. 이 서울 안에 그런 유령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는가를!

늘어간다고 하면 말이다. 또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첫 페이지로 돌아가서·····

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인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덩이가 똘똘 구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히 뿌리는 버덩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엔 흔히 나타나는 유령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에 오히려 꺼림없이 나타나고 또 서울이 나날이 커가고 번창하여 가면 갈수록 유령도 거기에 정비례하여 점점 늘어가니 이게 무슨 뼈저린 현상이냐! 그리고 그 얼마나 비논리적 마술적 알지 못할 사실이냐! 맹랑하고도 기막힌 일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이런 비논리적 유령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유령을 늘어가지 못하게 하고 아니 근본적으로 생기지 못하게 할 것인가?

현명한 독자여! 무엇을 주저하는가. 이중하고도 큰 문제는 독자의 자각과 지혜와 힘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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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쓸데없이 자기가 애정의 거자인 것을 자랑하려 들었고 또 그렇지 않고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공연히 그는 서먹서먹하게 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불행에 고귀한 탈을 씌워 놓고 늘 인생에 한눈을 팔자는 것이었다.

이런 그가 한 소녀와 천변을 걸어가다가 그만 잘못해서 그의 소녀에게 대한 애욕을 지껄여 버리고 말았다.

여기는 분명히 그의 음란한 충동 외에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소녀는 그의 강렬한 체취와 악의의 태만에 역설적인 흥미를 느끼느라고 그냥 그저 흐리멍텅하게 그의 애정을 용납하였다는 자세를 취하여 두었다. 이것을 본 그는 곧 후회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중의 역어을 구사하여 동물적인 애정의 말을 거침없이 소녀 앞에 쏟고 쏟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육체와 그 부속품은 이상스러울만치 게을렀다.

소녀는 조금 있다가 이 드문 애정의 형식에 그만 갈팡질팡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내심 이 남자를 어디까지든지 천하게 대접했다. 그랬더니 또 그는 옳지 하고 카멜레온처럼 태도를 바꾸어서 소녀에게 하루라도 얼른 애인이 생기기를 희망한다는 둥 하여 가면서 스스롭게1 구는 것이었다.

소녀의 눈은 이런 허위가 그대로 무사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투시한 소녀의 눈이 오만을 장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기 위한 세상의 「교만한 여인」으로서의 구실을 찾아놓고 소녀는 빙그레 웃었다.

  •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연씨를 욕허니까 어디 제가 고쳐 디리지오. 연씨는 정말 악인인지두 모르니까요」

이런 소녀의 말버릇에 그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냥 코웃음으로 대접할 일이 못 된다. 왜? 사실 그는 무슨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악인일 것도 없었다. 말하자면 애호하는 가면을 도적을 맞는 외에 그 가면을 뒤집어 이용당하면서 놀림감이 되고 말 것밖에 없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소녀에게 자그마한 욕구가 없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이것은 한 무적 「에고이스트」가 할 수 있는 최대 욕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코 고독 가운데서 제법 하수할 수 있는 진짜 염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체취처럼 그의 몸뚱이에 붙어다니는 염세주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게으른 성격이요 게다가 남의 염세주의는 어느 때나 우습게 알려 드는 참 고약한 아리아욕의 염세주의였다.

죽음은 식전의 담배 한 모금보다도 쉽다. 그렇건만 죽음은 결코 그의 창호를 두드릴 리가 없으리라고 미리 넘겨짚고 있는 그였다. 그러나 다만 하나 이 예외가 있는 것을 인정한다.

A DoubleSuicide2

그것은 그러나 결코 애정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다만 아무 것도 이해하지 말고 서로 서로 ‘스프링보드’3 노릇만 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용할 것을 희망한다. 그들은 또 유서를 쓰겠지. 그것은 아마 힘써 화려한 애정과 염세의 문자로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이렇게 세상을 속이고 일부러 자기를 속임으로 하여 본연의 자기를 얼른 보기에 고귀하게 꾸미자는 것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애정이라는 것에 서먹서먹하게 굴며 생활하여 오고 또 오는 그에게 고런 마침 기회가 올까 싶지도 않다.

당연히 오지 않을 것인데도 뜻밖에 그가 소녀에게 가지는 감정 가운데 좀 세속적인 애정에 가까운 요소가 섞인 것을 알아차리자 그 때문에 몹시 자존심이 상하지나 않았나 하고 위구하고 또 쩔쩔매었다. 이것이 엔간치 않은 힘으로 그의 정신 생활을 섣불리 건드리기 전에 다른 가장 유효한 결과를 예기하는 처벌을 감행치 않으면 안될 것을 생각하고 좀 무리인 줄은 알면서 놀음하는 세음치고 소녀에게 DoubleSuicide를 ‘푸로포즈’하여 본 것이었다.

되어도 그만 안 되어도 그만 편리한 도박이다. 되면 식전에 담배 한 목음이요, 안 되면 소녀를 회피하는 구실을 내외에 선고할 수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거기는 좀 너무 어둔 그런 속에서 그것은 조인된 일이라 소녀가 어떤 표정을 하나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그의 이런 도박적 심리는 그의 앞에서 늘 태연한 이 소녀를 어디 한 번 마음껏 놀려 먹을 수 있었대서 속으로 시원해 하였다. 그런데 나온 패는 역시 ‘노 ―’ 였다. 그는 후― 한 번 한숨을 쉬어 보고 말은 없이 몸짓으로만

  • 「혼자 죽을 수 있는 수양을 허지.」

이렇게 한 번 배를 퉁겨 보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빨간 거짓인 것은 물론이다.

황량한 방풍림 가운데 저녁 노을을 멀거니 바라다보고 섰는 소녀의 모양이 퍽 아팠다.

늦은 가을이라기보다 첫겨울 저물게 강을 건너서 부첩과 같은 검은빛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았다. 그러나 발 아래 낙엽 속에서 거의 생물이랄 만한 생물을 찾아 볼 수조차 없는 참 적멸의 인외경이었다.

  • 「싫습니다. 불행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더없는 매력입니다. 그렇게 내어 버리구 싶은 생명이거든 제게 좀 빌려 주시지요.」

연애보다도 한 구 윗티즘4을 더 좋아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이때만은 풍경에 자칫하면 패배할 것 같기만 해서 갈팡질팡 그 자리를 피해 보았다.

소녀는 그때부터 그를 경멸하였다느니보다는 차라리 염오하는 편이었다. 그의 틈사구니투성이의 점잖으려는 재능을 걸핏하면 향하여 소녀의 침착한 재능의 창끝이 걸핏하면 침략하여 왔다.

5월이 되어서 한 돌발사건이 이들에게 있었다. 소녀의 단 하나의 동지 소녀의 오빠가 소녀로부터 이반하였다는 것이다. 오빠에게 소녀보다 세속적으로 훨씬 아름다운 애인이 생긴 것이다. 이 새 소녀는 그 오빠를 위하여 애정에 빛나는 눈동자를 가졌다. 이 소녀는 소녀의 가까운 동무였다.

오빠에게 하루라도 빨리 애인이 생겼으면 하고 바랐고 그래서 동무가 오빠를 사랑하였다고 오빠가 동생과의 굳은 약속을 저버려야 되나?

소녀는 비로소 ‘세월’이라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방심을 어느 결에 통과해 버린 ‘세월’의 소녀로서는 차라리 자신에게 고소하였다.

고독― 그런 어느날 밤 소녀의 고독 가운데서 그만 별안간 혼자 울었다. 깜짝 놀라 얼른 울음을 끊쳤으나 이것을 소녀는 자기의 어휘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튿날 소녀는 그가 하자는 대로 교외 조용한 방에 그와 대좌하여 보았다. 그는 또 그의 그 ‘윗티즘’과 ‘아이러니’를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산비할 연막을 펴는 것이었다. 또 가장 이 소녀가 싫어하는 몸맵시로 넙죽 드러누워서 그냥 장정없이 지껄여대는 것이다. 이런 그 앞에서 소녀도 인제는 어지간히 피곤하였던지 이런 소용없는 감정의 시합은 여기쯤서 그만두어야겠다고 절실히 생각하는 모양 같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소녀는 그에게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이기고 싶었다.

  • 「인제 또 만나 뵙기 어려워요. 저는 내일 E하구 같이 동경으루 가요.」

이렇게 아주 순량하게 도전하여 보았다. 그때 그는 아마 이 도전의 상대가 분명히 그 자신인 줄만 잘못 알고 얼른 모가지털을 불끈 일으키고 맞선다.

  • 「그래? 그건 섭섭허군. 그럼 내 오늘밤에 기념 스탐프5를 하나 찍기루 허지.」

소녀는 가벼이 흥분하였고 고개를 아래 위로 흔들어 보이기만 하였다. 얼굴이 소녀가 상기한 탓도 있었겠지만 암만 보아도 이것은 가장 동물적인 동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승부를 가릴 때가 되었나보다. 소녀는 도리어 초조하면서 기다렸다. 즉 도박적인 ‘성미’로!

(도박은 타기와 모멸! 뿐이려나보다)

(그가 과연 그의 훈련된 동물성을 가지고 소녀 위에 스탐프를 찍거든 산녀는 그가 보는 데서 그 스탐프와 얼굴 위에 침을 뱉는다.

그가 초조하면서도 결백한 체하고 말거든 소녀는 그의 비겁한 정도와 추악한 가면을 알알이 폭로한 후에 소인으로 천대해 준다)

그러나 아마 그가 좀더 웃길가는 배우였던지 혹 가련한 불감증이었던지 오전 한 시가 훨씬 지난 산길을 달빛을 받으며 그들은 내려왔다. 내려 오면서―

어느날 그는 이 길을 이렇게 내려오면서 소녀의 삼전 우표처럼 얄팍한 입술에 그의 입술을 건드려 본 일이 있었건만 생각하여 보면 그것은 그저 입술이 서로 닿았었다뿐이지―아니 역시 서로 음모를 내포한 암중모색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그리 부드럽지도 않은 피부를 느끼고 공기와 입술과의 따끈한 맛은 이렇게 다르고나를 시험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이 밤 소녀는 그의 거친 행동이 몹시 기다려졌다. 이것은 거의 역설적이었다. 안 만나기는 누가 안 만나―하고 조심조심 걷는 사이에 그만 산길은 시가에 끝나고 시가도 그의 이런 행동에 과히 적당치 않다.

소녀는 골목 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보고 경칠 나 쪽에서 서둘러 볼가까지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는 그렇게 초조한 듯한데 그때만은 웬일인지 바늘귀만한 틈을 소녀에게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느라고 그랬는지 걸으면서 그는 참 잔소리를 퍽 하였다.

  • 「가령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물을 상 찌푸리지 않고 먹어 보는 거 그래서 거기두 있는 ‘맛’인 ‘맛’을 찾아내구야 마는 거, 이게 말하자면 ‘파라독스’지. 요컨댄 우리들은 숙명적으로 사상, 즉 중심이 있는 사상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되먹었거든. 지성― 흥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조롱할 수야 얼마든지 있지, 있지만 그게 그 사람의 생활을 ‘리드’할 수 있는 근본에 있을 힘이 되지 않는 걸 어떡하나? 그러니까 선이나 내나 큰소리는 말아야 해 일체 맹서하지 말자― 허는 게 즉 우리가 해야 할 맹서지.’

소녀는 그만 속이 발끈 뒤집혔다. 이 씨름은 결코 여기서 그만둘 것이 아니라고 내심 분연하였다. 이따위 연막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새롭고 효과적인 엔간치 않은 무기를 장만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두었다.

또 그 이튿날 밤은 질척질척 비가 내렸다. 그 빗속을 그는 소녀의 오빠와 걷고 있었다.

  • 「연! 인젠 내 힘으로는 손을 대일 수가 없게 되구 말았으니까 자넨 뒷갈망이나 좀 잘 해 주게 선이가 대단히 흥분한 모양인데 ―」 「그건 왜 또.」

    「그건 왜 또 딴전을 허는 거야.」 「딴전을 허다니 내가 어떻게 딴전을 했단 말인가?」 「정말 모르나?」 「뭐를?」 「내가 E허구 동경 간다는 걸― 」 「그걸 자네 입에서 듣기 전에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선이는 그러니까 갈 수가 없게 된 거지. 선이허구 E허구 헌 약속이 나 때문에 깨여졌으니까.」 「그래서.」 「게서버텀은 자네 책임이지.」 「흥.」 「내가 동생버덤 애인을 더 사랑했다구 그렇게 선이가 생각헐까 봐서 걱정이야.」 「허는 수 없지.」 『선이― 오빠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참 깜짝 놀랐소. 오빠도 그립디다― 운명에 억지로 거역하려 들어서는 못쓴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나는 오랫동안 ‘세월’이라는 관념을 망각해 왔소. 이번에 참 한참만에 느끼는 ‘세월’이 퍽 슬펐소. 모든 일이 ‘세월’의 마음으로부터의 접대에 늘 우리들은 다 조신하게 제 부서에 나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하오. 흥분하지 말어요. 아무쪼록 이제부터는 내게 괄목하면서 나를 믿어 주기 바라오. 그 맨처음 선물로 우리 같이 동경 가기를 내가 ‘푸로포즈’할까? 아니 약속하지. 선이 안 기뻐하여 준다면 나는 나 혼자 힘으로 이것을 실현해 보이리다. 그럼 선이의 승낙서를 기다리기로 하오.』

그는 좀 겸연쩍은 것을 참고 어쨌든 이 편지를 포스트에 넣었다. 저로서도 이런 협기가 우스꽝스러웠다. 이 소녀를 건사한다?― 당분간만 내게 의지하도록 해?― 이렇게 수작을 해 가지고 소녀가 듣나 안 듣나 보자는 것이었다. 더 그에게 발악을 하려 들지 않을 만하거든 그는 소녀를 한 마리 ‘카나리아’를 놓아주듯이 그의 ‘윗티즘’의 지옥에서 석방― 아니 제풀에 나가나? 어쨌든 소녀는 길게 그의 길에 같이 있을 것은 아니니까다. 답장이 왔다.

  •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어야 하지 않았나요? 저는 지금 조금도 흥분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제가 연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린다면 연께서는 역정을 내이시나요? 그럼 감사한다는 기분만은 제 기분에서 삭제하기로 하지요. 연을 마음에 드는 좋은 교수로 하고 저는 연의 유쾌한 강의를 듣기로 하렵니다. 이 교실에서는 한 표독한 교수가 사나운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강의하고 있다는 것을 안 지는 오래지만 그 문간에서 머뭇머뭇하면서 때때로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교수의 ‘윗티즘’을 귓결에 들었다뿐이지 차마 쑥 들어가지 못하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벌써 들어와 앉았습니다. 자― 무서운 강의를 어서 시작해 주시지요. 강의의 제목은 ‘애정의 문제’ㄴ가요. 그렇지 않으면 ‘지성의 극치를 흘낏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하여 주시나요. 엊그제 연을 속였다고 너무 꾸지람은 말아 주세요. 오빠의 비장한 출발을 같이 축복하여 주어야겠지요. 저는 결코 오빠를 야속하게 여긴다거나 하지 않아요. 애정을 계산하는 버릇은 언제든지 미움받을 버릇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세월’이요? 연께서 가르쳐 주셔서 참 비로소 이 ‘세월’을 느꼈습니다. ‘세월’! 좋군요―교수―, 제가 제 맘대로 교수를 사랑해도 좋지요? 안 되나요? 괜찮지요? 괜찮겠지요 뭐? 단발했습니다. 이렇게도 흥분하지 않는 제 자신이 그냥 미워서 그랬습니다.』

단발? 그는 또 한 번 가슴이 뜨끔했다. 이 편지는 필시 소녀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데 그에게 의논없이 소녀는 머리를 짤렸으니, 이것은 새로와진 소녀의 새로운 힘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눈물이 났다. 왜?

머리를 자를 때의 소녀의 마음이 필시 제 마음 가운데 제 손으로 제 애인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애인으로 하여금 저에게 머리를 자르도록 명령하게 한, 말하자면 소녀의 끝없는 고독이 소녀에게 일인이역을 시킨 것에 틀림없었다.

소녀의 고독!

혹은 이 시합은 승부없이 언제까지라도 계속하려나―이렇게도 생각이 들었고―그것보다도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난 소녀의 얼굴―몸 전체에서 오는 인상은 어떠할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그에게는 흥미 깊은 우선 유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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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침 아내가 밖에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나간다는 정분이를 불렀다.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는 종내 정분이가 있는 건넌방으로 갔다.

「정분아, 이제 네가 나가면 어델 나간단 말이냐. 그러지 말고 내 말대로만 해라. 그러지 말고 참고 있어라. 아짐마가 몸도 약하고 사람 없이는 안될 텐데……」

「……」

간곡히 타이르는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대답이 없이 볼이 잔뜩 부은 그대로 금방이라도 나갈 자세를 취하고 외면을 하고 있는 정분이 꼴이 얄밉기도 하다.

「에익 이년」하고 일어서고 말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린 정분이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 어린것이 불쌍한 생각과 자기의 정신이 통쾌해지지 않는 안타깝증이 어울려서 그는 홱 달려들어 정분이를 껴안았다.

「정분아,정분아……」

이렇게 정답게 불러 보았으나 정분이 자신은 붉게 상혈된 눈만 두꺼비 모양 껌벅거리고 있고 아무 감각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그는 단념할 수가 없다.

「정분아 네가 아무리 어리기로서니 내 마음을 모른단 말이냐, 응 정분아.」

그는 울음까지 섞인 목소리로 정분이 어깨를 흔들었다.

「응, 얘 정분아……」

그는 다시 한번 정분이 어깨를 흔들었다.

「아저씨 맘은 저두 잘 알아요. 그래두 저는 나가겠어요. 나가라는 걸 나가지 어떻게 있어요?」

정분이의 목소리도 약간 흐려지고 떨렸다. 그래도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 같지는 않다.

「이애가 글쎄 나가라긴 뭐 아짐마기 널 미워서 그랬겠니,네가 하두 말썽을 부리니까 화가 나서 그랬지. 내가 있으라면 그만 아니냐. 내가 이 집의 주인이 아니냐, 내가 월급을 주지 않니.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주는 게 아니냐? 너도 그만한 건 알겠구나!」

그는 이런 말까지 해본다.

「그래두 아저씨는 늘 나가 계시구 집엔 얼마 계셔요? 집에서 일 시키는 아줌마가 나를 보기 싫다구 나가라는 걸 어떻게 있어요. 저두 인제 이 집에 있기 싫어요. 씨씨해요.」

아내가 하던 말까지 덧붙이는 정분이의 말은 냉정하였다. 아내가 있었더면 또 한번 야단이 날 판이다.

「음!」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믿었던 자기의 인격 이라는 것이나 자비심에 가까운 사랑이란 것도 몇 푼어치 안되는 걸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얼굴이 달아오는 걸 느끼며 화가 날 지경이다. 종내 벌떡 일어났다.

「그래두 넌 못 나간다. 네 맘대로 못 나간다. 너의 어머니가 와서 널 어쨌느냐고 내놓으라면 어쩌니? 내가 그렇게 말리는 말두 안 듣고 나가겠단 말이지, 안된다.」 \

정분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내쏘았다.

「내 맘대로 하지 누구에게 맸나요?」

밖에서 대문 열라는 종소리가 나는데 정분이는 대문을 열기 위하여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고 돌아앉아서 속으로 옹알거리며 제 보따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는 얼른 나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가게집에 접때부터 부탁했더니 음식두 잘 하고 얌전한 아이 하나 있다구 내일 모레쯤 데려다 준대요. 에잇 속이 시원해……」

아내는 아무 일도 없이 다 되었다는 듯이 싱긋이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온다.

「글쎄……」

아내와 더 말해야 소용이 없는 줄 안 그는 모자를 쓰고 나가버렸다. 대학 강의시간이 있어서 더 머무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아직 완전히 응낙을 하지 아니했다는 속셈으로〈글쎄〉를 던져 놓고 나오기를 잊지 아니했다.

아내는 정분이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이 썩썩 방걸레를 치고 있다. 건넌방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남편이 나간 뒤를 걷어치운 다음에 아내 경희는 조간신문을 들어서《여인 천하》를 들여다보고 있다. 쥐 이야기를 읽는 그녀는「과연 옛날 이야기로군」하면서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는 성싶었으나 내려읽고 있었다.

「홍 아저씨두 암만 그래두 아줌마 편이지 무얼 그래.」

정분이는 단발머리에 흰〈에리〉달린 여학생 교복에 백환짜리 브로우치를 붙이고(그것은 지난 가을에 애기를 업고 경희를 따라 미도파에 갔을 때에 산 것이다) 살짝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서 중얼거린다.

「날 보기 싫다는데 눈에 뵐 거 없지 기까짓거——」

정분이는 주인 아줌마에게 간다는 인사도 안하고 보따리를 끼고 대문을 나서서 뺑소니를 쳐버렸다.

정분이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다. 사실 요새 경희의 입에서는 정분이에게 대해서 보기 싫다는 말이 가끔 나왔다. 경희가 정분이를 보기 싫다는 것은 그 행동이나 태도가 보기 싫다는 것이지 사람 자체가 보기 싫다는 건 아니었다. 정분이가 불쌍하다는 것은 경희도 늘 생각하고 마음에 먹고 있는 일이다. 불쌍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키워서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시집까지 보내 주려고 하는 생각은 내외가 마찬가지였다.

(어린것이 철이 없어 그렇지.)

그가 정분이에게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나 아내가 생각하는 것은〈아직 철이 없는 것이 그렇지〉하는 것이었다. 정분이가 말을 안 듣고 말썽을 부릴 때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 하고 언제나 눌러오고 참아오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새에 들어서 아내는,

「안됩니다. 벌써 바탕이 글렀는걸.」

정분이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정적으로 역설하는 것이다.

어제 저녁에도 정분이 말이 나와서 아내는 가장 냉정하게〈바탕이 글렀는걸〉을 되풀이 하며 역설하였다. 그럴 적마다 그는 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바탕은 무슨 바탕, 어디 바탕이 따루 있소? 그야 물론 소질 관계두 좀 있긴 있지만 당신은 밤낮 바탕 바탕 하니 소질이 좀 좋지 못한 놈은 절대루 희망이 없단 말이오? 그런 게 아니야.」

그는 바탕이 좋지 못한 아이라도 잘 가르치면 된다는 주장을 늘 해왔다. 그럴 적마다 아내는 반대다.

「홍, 당신이 해보시구려. 왜 못하는 거요. 교육가요 종교가요 성자로 자처하는 분이 왜 못하셨소?」

아내는 무심히 하는 말이지만 그에게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가슴을 우벼내는 것같이 아픈 일이었다.

대문을 나선 그는 시간이 바쁘건만 발걸음이 내쳐지지 않았다.

(그 놈이 정말 내 말을 안 듣고 나갈까? 나갔을는지도 모른다. 나갔을 거다.)

정분에게 대한 조바심이 첫째요, 다음에는 그날 아침에 아내가 던진 그 말이 켕겨서 였다.

「교육가요 종교가요 성자로 자처하는 분이 왜 못하시오?」

하는 아내의 말에,

「내가 언제 성자로 자처했던 말이오? 당신은 절대로 그런 말을 마오. 그저 크리스찬으로, 또 세상에서 종교가로 지목받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보자는 거지!」

하고 아내의 말을 막아 놓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몹시 걸린다.

목구멍에 반찬 가시가 걸린 이상으로 마음에 걸린다.

(내가 언제 성자로 자처했단 말인가.)

그는 버스길로 나가면서 곰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교회 경영의 여학교 선생 일을 볼 때 일이다. 어떤 말이 적고 생각을 많이 하는 모범생인 학생으로 그리고 자기를 잘 이해하는 학생 한 사람이 조용히,

「선생님은 요새 보통 사람은 아니야요. 저희들 눈에는 성자로 보이어요.」

하더란 말을 한 일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또 한번은 그 학생이,

「선생님이 언젠가 아침에 학교에 올라오셔서 밤 동안에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 별일이나 없는가 하고 염려가 되더란 말씀을 하셨지요. 그때에 어떤 아이는 입을 비쭉거리고 웃고 어떤 아이는 선생님 참말이예요? 하고 의아스러운 질문을 던졌지만 저희 몇 사람은 선생님이 사실 그러시리라고 믿었어요.」

하더란 말을 아내에게 솔직하게 한 일이 있긴 하다. 그리고 아내를 믿고 간격이 없이 생 각하기 때문에 요새 교육가는 물론이요 종교가란 사람들도 구십 구 퍼센트는 가짜라고 한 말이 있었다. 그때에 아내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 구십 구 퍼센트 가짜 내놓고 일 퍼센트가 진짜인 당신이시란 말이지요.」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성자로 자처한 일은 없다.

〈성자?〉〈성자?〉 내게 어느 정도 성자다운 사랑이 있다면 어째서 정분이가 내가 있는 집을 버리고 나가려고 할까? 이러니저러니 해야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이다. 내 사랑의 힘이 부족한 까닭이다. 나는 사랑하는 체한다. 사랑하느라고 흉내를 내 왔었다.

언젠가 그것도 그 여학교 일을 볼 때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다가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 데 어디서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린 것을 살 펴보았더니 길 한모퉁이에 기다란 석재가 쌓여 있고, 그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있는 데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쫓아가서 들여다본즉 어떤 계집애가 옹크리고 누워서,

「배아파, 아이구 배아파……」

하고 울고 있는 것이다.

「너의 집이 어디냐?」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고 그저,

「아이구 배아파……」

만 연발한다. 하도 물었더니 계집애는 고개만 흔든다. 그는 다짜고짜로 계집애를 업고 마침 떠나려는 전차를 탔다. 전차에서 내려서도 집에까지 들어가는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그래도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에까지 들어가서 계집애를 마루위에 내려놓았다. 집에서는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무슨 송장이나 메고 들어오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집애를 데리고 온 사정이야기를 하고 물을 끓이라고 해가지고 옷을 벗긴 다음에 온몸을 씻어주고 다른 옷을 갈아입혔다. 그래도 벌벌 떨고,

「아이구 배아파!」

를 연발하는 것을 소화제 약을 먹여서 아랫목에 재웠다. 〈배아파〉소리가 밤새도록 계속되는 것을 들으면서 하룻밤을 지내고 아무리 약을 써주어도 낫지 않기 때문에 S병원에 입원을 시켰더니 계집애가 일주일 만에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한동안은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그대로 성자라고도 하고 성자로 자처한다고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사랑이 도대체 몇 푼어치나 되는 것인가 이번에 시험할 때가 왔다. 그놈이 과연 나갈 것인가 안 나갈 것인가 내 사랑의 힘이 몇 푼어치나 되나 그놈을 붙들어 놓을 만한 힘이 내게 없는가, 오오! 위선자며 성자에는 발뒤꿈치두 못 따를 내가…… 오오! 위선자!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차에 오른 그는 거기에 같이 탄 승객들이 자기를 이상스럽게 빈정대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것 같다. 아까 정분이가 나를 이상스럽게 물끄레 바라보던 것도 나를 비웃고 빈정대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얼 그래? 당신이 날 정말 생각해서 그러는 거요. 가장 사람을 애끼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러지 아줌마보다 나을 게 있을라구.」

정분이란 년은 제법 내 속을 저울질해 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차에서 막 내리자 곤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빨리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행여나 정분이가 아닌가 하고 몇 걸음 따라가 보았으나 그것은 그가 잘 아는 어떤 여학교 교표를 붙인 진짜 여학생이지 정분이는 아니었다.

그는 그날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나 친구들과 차를 마실 때나 그 마음과 생각이 정분이로 인하여 점령을 당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종로로 나와서 K관이라는, 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곰탕 전문을 하는 집에서 점심 요기를 하는 참이었다. 상 심부름을 하는 계집애가 있는데 얼굴에 살이 많고 광대뼈가 좀 두드러졌지만 눈매와 입 모양에 꽤 귀염성이 있는 것이 정분이와 모습이 비슷하였다. 모습도 비슷하거니와 몸 가지는 태도와 머리며 옷매무새가 단정한 데가 없고 모두 흐트러진 꼴이 꼭 정분이 같았다. 정분이가 시골서 갓 올 때처럼 아직 시골티가 벗겨지지 아니했다.

「너 어디서 왔니? 고향이 어디냐 말이다.」

「강경서 왔슈 ——」

마침 고향도 비슷하고 싱글싱글 웃는 것도 정분이와 어지간히 비슷하다. 꽤 귀염성스러우면서도 행동에 빠진 데가 있고 주책이 없어 보였다.

정분이가 그네 집에 온 것은 삼 년 전 정월 어느 날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오후였다. 웃옷 도 못 입고 옹크리고 왔다.

그때 나이는 열세살이라 했다. 머리도 제 손으로 빗을 줄 몰랐다. 치마는 흔히 폭이 찢어진 것을 질질 끌고 다녔다. 코도 좀 홀렸다. 그러면서도 늘 싱글싱글 웃고 언제나 무슨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언제나 입을 닫치고 있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떤 때는 찬송가도 곧잘 불렀다. 그러나 흔히는 유행가를 불렀다. 목메인 이별가도 불렀다.

「너 여기 오기 전엔 어디 있었니?」

「……」

그의 아내가 짐작을 하면서도 물어보면 흔히는 대답이 없었다. 말을 아니하는 것은 주인 아저씨가 있기 때문이었던지 아무도 없고 아내와 단둘이만 있을 때는 더구나 신바람이 나서 묻지도 않는 말도 이야기를 곧잘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밥두 안했어유.」

「그럼 무얼 했니.」

「애 봤지 머.」

정분이 말 본때가 버릇이 없다는 것이 그의 아내의 첫째 성화거리고 핀잔거리였다.

「철 없는 게 그러면 어때?」

그러면 아내는 웃으면서,

「당신은 무조건 정분이 역성이구려.」

「역성이 무슨 역성이어, 깃까짓놈 말씨가 아무려면 어떠냐 말이지.」

「철이 없다니 생각을 해보시구려. 아무려면 글쎄 우리 애미란 년두 네살부터 꼭꼭 말을 제대루 하지 않었수. 그런데 열 세살이나 됐다는 게 어른 앞에서 말버릇이 그게 뭐겠소.」

(애미는 그들의 외손녀 이름이었다.)

「배운 데가 없단 말이지.」

「아무리 밴 데가 없으면 그럴라구.」

그의 아내는 쓴웃음을 웃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you면 그만이 아니오, 민주주의 시대에 차별할 게 무어요.」

그는 한 마디 덧붙이고 웃어넘겼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도 제일 곤란한 문제는 자다가 자리에 오줌싸고 가끔 바지에 오줌싸는 것이다.

「아이구 지린내.」

아내와 식구들이 콧살을 찡그리고 얼굴을 돌리면 그는 그러는 식구들에게 눈을 홀겼다. 그리고,

「그게 다 제 집에서 어붓애배 밑에서 구박 받은 결과로 그런 것이야,얼마나 불쌍해! 저는 얼마나 답답할 거야!」

하고 정분이 듣지 않는 데서 가만히 정분이 역성을 들었다.

정분이는 신바람이 나면 예전에 다른 집에 있을 때에 지내던 이야기를,시키지도 않는 것을 절절 잘 지껄이는 것이다.

주인 마누라가 밤낮 어린아이를 내버려두고(제게 맡겨 두고) 나가다닌다는 이야기며, 그러면 저는 애를 업고 동네로 돌아다니는 데,그 동네에는 미군이 가끔 드나드는 집이 있고 그리고 집마다 색시들이 많이 있어서 밤이면 젊은 남자 손님들이 많이 몰려와서 술을 먹고 춤을 추고 떠들고 놀다가 나중엔 하나씩 하나씩 맡아 가지고 자고 간다는 이야기며,그 색시들은 짜장면이고 냉면이고 빵이고 찹쌀떡이고 무어나 마음대로 군것질을 잘하고, 그리고 옷도 늘 예쁜 것을 입는다는 이야기며,아침에는 늦도록 자고, 자고 나서는 화장을 오래오래 하고 나서야 밥을 먹고 낮에는 구경을 가고 노래들도 하는데 저도 그 색시들 하는 노래를 좀 배웠다는 이야기를 신이 나서 지껄이는 것이 종로 3가 뒷골목이나 양동에 있는 그 색시들이 부러웠던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나두 나이만 좀더 먹으면 그 색사들처럼 거기 가서 살려고 했지.」

정분이는 이런 이야기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큰일날 뻔했군.」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소리쳤다.

「이애야 나 더운 국 좀 갖다 주렴.」

그는 일하는 계집애를 불러가지고 나이를 묻고 이름을 물었다. 나이는 정분이와 꼭같은 열다섯살,이름은 정자라고 했다.

(이놈도 이런 데 있다가 앞길은 뻔한데 어쩌면 좋을까?)

그는 걱정이 되었다. 이 다음에 좀 일찌감치 와서 조용한 틈을 타서 이야기를 해가지고 아무런 수단을 쓰든지 정자를 꼬여내리라. 나쁜 데 빠져서 물이 들기 전에 손을 쓰는 것이다. 물이 든 다음에 구해낸다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 오세요,아저씨.」

정자는 덮어놓고 아저씨라고 부르고 버릇 삼아 인사를 하는 것이지마는 그의 속셈은 그렇지 않은 것이어서,

「오냐 또 올께,잘 있어.」

다시 올 것을 약속하다시피 하고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정분의 앞날을 생각하니 예전에「배아파 배아파」하다가 죽은 소녀처럼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그날 오후에도 어떤 친구의 부탁도 있었고 자기 일도 있어서 어떤 출판사와 신문사, 시청에까지 다녀오고 누구하고 다방에서 만나서 이야기가 늦어졌기 때문에 저녁에 시간이 열 시나 가까와서 집에 돌아왔다.

「정분이 어떻게 됐소, 나갔소?」

으례히 웃으면서 나와서 대문을 열어주던 정분이가 나오지 않고 아내만이 나오고 집 안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놈이 기어이 나갔구나 하면서도 행여나 하고 한마디 물어본 것이다.

「정분이하구는 꽤 정분이 두터우신 모양이구려. 들어오시자마자 정분이 문안부텀 하시는 품이……」

아내는 낯색이 좋지 않다.

「춘풍추우 삼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식구로 살아온 정이 어째 없겠소. 그놈이 종내 갔구만,할 수 없지. 그런데 당신 어디가 불편하오?」

그는 이렇게 말끝을 흐려 버리고 아내의 문안을 했다.

「괜찮아요.」

그리고는 아내는 말을 이어서

「종내는 무슨 종내야. 오늘 아침에 당신 나갈 때 나간다고 안 그럽데까. 당신 나간 뒤로 금방 나간다는 말두 없이 도망꾼년처럼 나갔는데,하마터면 도둑이 들어와서 다 집어가두 모를 뻔했는걸. 그런 소갈머리 없는 계집애가 어디 있담. 그래두 제게 무던히 하느라고 해주었고,당신은 당신대루 그만큼 생각해 주었는데 어쩌면 그렇단 말이오. 그걸 사람이라구 당신은 생각을 하구 그러는 거요?」

경희는 어지간히 분이 난 모양이었다.

「나가는 걸 몰랐소,무에 없어지지나 않았읍디까?」

「없어지기야 무에 없어져,저 입으라구 주었던 거나 다 싸가지고 나갔지.」

「당신은 어디 나갔었소?」

「나가긴 어딜 나가,속이 불편해서 좀 누웠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깐 당신이 잠이 들었으니깐 간단 말두 못하구 간 게 아니오?」

자기도 미상불 괘씸하게 여겼지만 또 정분이 편을 들어준 셈이다.

「내가 잠이 들었다고 가노란 말을 못하고 갔다니 그런 말을 말이라구 하시우. 이러구 저러구 날더러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잘 됐다 하구 살짝 나가 버렸지. 나간 다음에야 무에 들어와서 집안의 물건을 집어가거나 말거나 그것두 알 바 아니지.」

「몸이 불편한데 저녁밥 준비를 하느라구 수고했소.」

그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마침 저녁상을 받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오늘은 왜 그렇게 늦으셨소?」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아내는 오래간 만에 밖에서 지난 일을 따져서 묻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내는 거기에다 한마디 독한 화살을 쏘아붙인다.

「당신이 나를 정분이만큼이나 생각하시는 게요?」

경희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 금방 얼굴을 돌리는 것이다. 얼굴을 돌리고 하는 말이,

「당신은 나가서 그렇게 뉘게나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썩 친절하게 하고 집안에서는 일하는 계집애한테까지 그렇게 야단스럽게 생각을 하느라고 그러지만…… 이런 소리를 하면 말만 해두 더럽게시리 내가 질투나 하는 것 같지만, 당신이 내게는 너무두 무심하지 않아요?」

아내는 오래간만에 정면으로 불평을 터쳐 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좀 미안스러운 데가 있었는데, 오늘은 그의 아픈 데를 건드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의 말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말문이 막혀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 그거야 당신두 잘 알지 않소. 그건 크리스챤인 우리 가정의 한 이상으로 당신이나 내나 이 냉정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진정과 애정으로 한 모퉁이라두 참과 사랑의 향기를 피워 보자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잘 알지 않소. 정분이만 해두 불쌍한 것을 내 자식처럼 길러서 좋은 데 시집까지 보내 주기로 약속을 하지 않았소. 그러니까 불쌍한 애가, 더구나 그 애는 우리집에서 나가는 날에는 아무래두 잘못될 가능성이 많으니까 기어이 붙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오. 우리가 붙잡아 돌봐주지 않으면 누 가 그런 애를 돌보겠소. 그래두 나가지 말라구 달래고 볼 일이지,그리구 당신이야 집안 사람이니깐 믿구 지내는 거지 뭐요.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하시오.」

그는 이렇게 사정삼아 이야기를 하고 약속을 해놓고 어째서 나가라구 했느냐고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고 하는 것을 꾹 참고 아내에게 대한 말을 사과삼아 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그것을 알아채기나 했는지 그 말을 그편에서 꺼낸다.

「글쎄 오죽하면 나가라구 했겠소. 제편에서 척하면 나간다고 하니 나갈 테면 나가라지,그럼 저는 아무렇게 하든지 나가지 말아 달라구 애걸복걸 빌어야 옳단 말이오?」

아내는 한 번 한숨을 쉬고 나서,

「요새 와서는 내가 무얼 하라면 영 죽여라 하구 안하구 꼭 제 고집대루만 하는구먼, 제 고집대루 한다기보다 숫제 안하는걸. 뭘 하라구 이르면 어느 틈에 슬쩍 들어가 버리는걸. 들어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빠져 있구먼요.」

아내는 어젯밤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다가 마지막에는 놀라운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얘 정분아 나와라 뭘하는데 들어가 누웠니? 하면서 내가 빌다시피 하면,그년이 하는 말이 기가 막히지. 내가 머 당신네 종이요,나두 자유가 있어요. 하기 싫어요, 안할 테야요,하면서 광주리 같은 대가리를 들고 나를 노려보는구먼,그러는 데는 입이 딱 벌어지구 다물어지질 않던걸.」

아내는 말을 이어서,

「그리구 그년이 인젠 벌써 딴 생각을 했어요. 이제 새해가 되면 열 여섯이 아니오. 벌써앞가슴이 떡 벌어진 게 기애가 인제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기애는 어쨌든 보통 애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언젠가 무슨 책에선가 보시구〈말을 강에까지 끌구 갈 수는 있어두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을 당신 입으로 하시지 않았소? 안 됩니다 안돼요.」

아내는 밥상을 치우면서 자신 있는 듯이 말한다.

며칠 뒤였다. 경희는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사람 찾음(人)〉이란 광고란에 정 분의 모습을 말하고 찾아주는 이에겐 사례를 한다는 광고가 있는데, 광고주는 바로 자기 남편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라디오 공지 사항에도 같은 광고가 나온다.

「당신은 그렇게도 정분이를 단념하지 못하시오?」

저녁에 들어온 그에게 물은즉 그는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그런지 꼭 일년 뒤 처음과 꼭 매한가지로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날 오후에 그가 마침 친구와 같이 집에 들어와 보니 집안이 왁자지껄하고 떠든다. 정분이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도 그 아내도 매우 반가와서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 여윈 얼굴에 광대뼈가 유난히 드러난 것을 들여다보고 어서 밥먹기를 권했다. 정분이도 제집에나 돌아온 듯이 뿌연 오바를 벗어 걸었다.

다음날에도 정분이는 제집처럼 방소제도 하고 빨래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에는 저와 나이가 비슷한 처녀가 온 지가 벌써 오랜 듯이 익숙하게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정분이가 어색해하는 눈치를 채고 조용히 불러서 말했다.

「저 애는 이제 몇 날 더 있다가 집으로 간다고 하니깐 너 염려 말구 마음 놓구 있거라.」

「아니야요 저두 가요,우리 아버지는 죽었어요.」

「집에 가보아서 집에 있을 형편이 못되면 다시 오너라. 언제든지 오면 너는 전과같이 우리 식구로 같이 지낼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오너라. 오는 차비까지 줄 테니 응.」

아내는 이렇게 타일렀다. 이 말을 들은 정분이는 한참 눈을 깜박거리고 섰더니,

「네, 가보아서 오겠어요 아줌마.」

이튿날 아내는 서울역에 손수 나가서 새 옷을 한 벌 사 입혀 가지고 오후 차로 조치원 가는 차를 태워 보냈다.

일주일 만에 과연 정분이는 돌아왔다.

「아무 데를 돌아다녀도 세상에 아줌마네 집 같은 덴 없어요. 여기 있으면 맘이 편안 해요.」

그럭저럭 반 년이 지난 어느 날 늦은 밤에 경희와 같이 앉아서 라디오로 HLKY방송1을 듣다가 하는 말이다. 정분이는 방송을 듣고 경희에게 배워서 찬송가를 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아줌마,저는 그전엔 찬송가 소리가 듣기 싫고 유행가만 불렀는데 인제는 유행가가 듣기 싫고 찬송가를 부르면 웬일인지 기쁘고 마음이 편안해요. 그전엔 유행가를 부르면서 웬일인지 눈물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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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의 마지막 항구를 떠나 북으로 북으로! 밤을 새우고 날을 지나니 바다는 더욱 푸르다.

하늘은 차고 수평선은 멀고.

뱃전을 물어뜯는 파도의 흰 이빨을 차면서 배는 비장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마스트 위에 깃발이 높이 날리고 연기가 찬바람에 갈기갈기 찢겨 날린다.

두만강 넓은 하구를 건너 국경선을 넘어서니 노령연해의 연봉이 바라보인다---하얗게 눈을 쓰고 북국 석양에 우뚝우뚝 빛나는 금자색 연봉이.

저물어가는 갑판 위는 고요하다.

살롱에서 술타령하는 일등 선객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새어나올 뿐이요 그 외에는 인기척 조차 없다.

배꼬리 살롱 뒤 갑판. 은은한 뱃전에 의지하여 무언지 의논하는 두 사람의 선객이 있다---한 사람은 대모1테 쓴 청년이요 한 사람은 코 높은 <마우재>이다.

낙타빛 가죽 샤쓰 위에 띤 검은 에나멜 혁대이며 온세상은 구를 만한 굵은 발소리를 생각케 하는 툭툭한 구두가 창 빠른 모자와 아울러 그를 한층 영웅적으로 보인다.

연해주의 각지를 위시하여 네르친스크 치타 방면을 끊임없이 휘돌아치느니만큼 그들에게는 슬라브족 다운 큼직한 호활한 풍모가 떠돈다.

마우재는 대모테 청년과 조선말 아닌 말로 은은히 지껄인다.

냄새 잘 맡는 XX는 빨빨거리며 어데든지 안 쫓아오는 곳이 없다.

정신없이 의논하다가도 그들은 가끔 말을 그치고 살롱 쪽을 흘낏흘낏 돌아본다.

---거기에는 확실히 OO에서 쫓아오는 친구가 있을 것이다.

푸른 바다는 안개 속으로 저물어 간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흰 갈매기 두어 마리 끽끽 소리치며 배 앞을 건너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갈매기 소리 사라지니 갑판 위는 더 한층 고요하다.

뼁끼 냄새 새로운 살롱에서는 육지 부럽지 않은 잔치가 열렸다.

국경선을 넘어서 외지에서 한 걸음 들여놓았을 때에 꺼릴 것 없이 질탕으로 마시고 얼근히 취하는 것이 그들의 하는 상습이다.

흰 탁자 위에는 고기와 과일 접시가 수없이 놓였고 술병과 유리잔이 쉴새없이 돌아다닌다.

대개가 상인인 만치 그들 사이에는 주권 이야기 미두(米豆) 이야기가 꽃피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유리한 시장에서 어떻게 하면 싫도록 돈을 짜내 볼까 하는 것이 대머리를 기름지게 번쩍이는 그들의 똑같은 공론이다.

「서의 명령이니 쫓아만 오면 그만이지 바득바득 애쓰며 직무를 다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OO의 친구도 한편 구석에서 은근히 어떻게 하면 배를 좀 불려 볼까 하는 생각에 똑같이 취하고 있다.

유쾌한 취흥에 유쾌한 생각에 그들은 마음껏 즐겁다.

술병이 쉴새없이 거품을 쏟는다.

흰 옷 입은 보이가 쉴새없이 휘돌아친다.

「놈들 도야지 같이 처먹기도 한다.」

취사장에서 요리 접시를 나르는 보이는 중얼거리며 윈치 옆을 돌아올 때에 남몰래 요리 접시 두엇을 깜쪽같이 빼서 윈치 뒤에 감춰두었다.

「놈들의 양을 줄여서 나의 동무를 살려야겠다.」

살롱 갑판에서 몇 길 밑 쇠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곳에 기관실이 있다.

흰 식탁 위에 술이 있고 해가 비취고 뼁끼 냄새 새로운 선창에 푸른 바다가 보이고 간혹 달빛조차 비끼는 살롱이 선경이라면 초열과 암흑의 기관실은 완전히 지옥이다---육지의 이 그릇된 대조를 바다 위의 이 작은 집합 안에서도 역시 똑같이 노골적으로 들어내놓고 있다.

어둡고 숨차고 보일러의 열로 찌는 듯한 이 지옥은 이브를 꼬이다가 아흐레 동안이나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 사탄의 귀양간 불비오는 지옥에야 스스로 비길 바가 아니겠지만 그러나 또한 이 시인의 환영으로 짜놓은 상상의 지옥이 이 세상의 간교로 짜놓은 현실의 지옥에야 어찌 비길 바 되랴.

얼굴을 익혀가며 아궁 앞에 서서 불 때는 화부들, 마치 지옥에서 불장난치는 악마들과같이도 보이고 어둠 속에 웅크린 반나체의 그들은 마치 원시림 속에 웅크린 고릴라와도 흡사하다.

교제한 지 몇 분이 못되어 살은 이그러지고 땀은 멋대로 쏟아진다.

폭이 두 간에 남지 않은 좁은 데서 두 간에 남은 긴 화저로 아궁을 쑤시면 화기와 석탄재가 뽀얗게 화실을 덮는다.

다 탄 끄르터기를 바께쓰2에 그뜩그뜩 담아내고 그뒤에 삽으로 석탄을 퍼 던지면 널름거리는 독사의 혀끝 같은 불꽃이 확확 붙어 오른다.

둘째 아궁과 세째 아궁마저 이렇게 조절하여 놓으면 기관실은 온전히 불붙는 지옥이다.

아궁 위에 여섯 개의 보일러는 백 파운드가 넘는 증기를 올리면서 용솟음친다.

불을 쑤시고 또 석탄을 넣고······

땀은 쏟아지고 전신은 글자대로 빨갛게 익는다.

양동이에 떠 온 물이 세 사람 화부사이에서 볼 동안에 사라지고 만다. 사실 물이라도 안 마시면 잠시라도 견뎌나갈 수가 없다.

북극의 바다 오히려 이러하니 적도 직하의 인도양을 넘을 때에야 오죽하랴.

---이렇게 하여 배는 움직이는 것이다. 살롱은 취흥을 돋울이만치 경쾌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교체한 지 반 시간만 넘으면 화부의 체력은 낙지다리같이 느른해진다. 부삽 하나 쳐들 기맥 조차 없어진다.

보일러의 파운드가 내리기 시작한다.

「기관에 주의!」

「속력을 늘여라!」

역시 항구 계집의 젖가슴을 환상하던 기관장은 이 명령에 벌떡 일어나 화실로 쫓아온다.

「무엇들 하느냐!」

화부는 느릿느릿 아궁에 석탄을 집어넣는다.

(무엇 해 일하지 너희들 같이 편한 줄 아나.)

그러나 이것이 입 밖에는 나오지는 않았다. 폭발은 마땅한 때를 얻어야 할 것이다.

「부지런히 해라 이놈들아!」

기관장의 무서운 시선이 화부들의 등날을 재촉질한다.

(부삽으로 쳐서 아궁 속에 태워 버릴까. 삼분이 못되어 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 똑같은 생각이 세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이 솟아올랐다.

깊은 암흑.

이 세상과는 인연을 끊어 놓은 듯한 암흑의 공간.

---철벽으로 네모지게 이 세상을 막은 석탄고 속은 영원한 밤이다.

간단없는 동요 기관소리가 어렴풋이 흘러올 따름.

이 죽음 속에 확실히 허부적거리는 동체가있다. 허부적거릴 때마다 석탄덩이가 와르르 흩어진다.

「으---」

「아---」

이 원시적 모음의 발성은 구원을 부르는 소리라느니 보다는 자기의 목소리를 시험하려는 즉 생명이 아직 남아 있나 없나 시험하여보려는 듯한 목소리다.

「으---」

「아---」

기맥이 쇠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졌는지 잠시 고요하다.

와르르 흩어지는 석탄더미 위에 성냥불이 켜졌다.

푸른 인광은 석탄더미 위에 네 활개를 펴고 엎드린 청년의 초췌한 얼굴을 비추인다.

더벅숭이 밑에 끄시른 얼굴은 푸른빛을 받아 처참하고 제 혼자 살아 있는 듯한 말똥한 눈동자에는 찬바람이 휙휙 돈다.

「물!」

절망적으로 외치면서 다시 불을 그었다.

불빛에 조각조각 부서진 빵 조각과 물병이 보인다.

흔드는 물병 속에는 한 방울의 물도 없다.

물병을 던지고 청년은 허둥지둥 일어서 또 외친다.

「물!」

「물!」

「무---ㄹㅅ!」

어둠 속에서 미친놈같이 그는 싸움의 대상도 없이 혼자 날뛴다, 아니 싸움의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XX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요, 기갈(飢渴)뿐이다.

석탄덩이가 어둠 속에서 난다.

두 주먹으로 철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세상과 담쌓은 이 암흑의 공간에서 아무리 들볶아 친다 하여도 그것은 결국 이 버림받은 공간에서의 헛된 노력에 지나지 못 할 것이다. ---독에 빠진 쥐의 필사적 노력이 독 밖에 세상과는 아무 인연을 갖지 못한 것 같이.

「아---ㅅ」

「물 물 무---ㄹㅅ!」

그는 몸을 철벽에 부딪치면서 마지막 힘을 내었다.

급한 걸음으로 쇠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발자취가 있다.

발자취 소리는 석탄고 앞에서 그쳤다.

회중전등의 광선이 달덩이 같은 윤곽을 석탄고 문 위에 어지럽게 던진다.

광선은 칠 벗은 검붉은 뼁끼 위에 한 점을 노리더니 그곳이 마침내 열렸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어둠이 앞을 협박한다, 회중전등의 광선이 석탄고 속을 어지럽게 비치더니 나중에 한가운데에 쓰러져 있는 처참한 청년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물 물!」

두 팔을 내밀면서 그는 부르짖는다.

세상과 인연 끊겼던 이 암흑의 공간에 한줄기의 광명을 인도한 사람은 살롱의 보이였다.

「미안하에.」

하면서 그는 청년을 붙들고 그의 입에 물병을 기울인다.

「술을 따러라 잔을 날러라 하면서 놈들이 잠시라도 놓아야지.」

보이는 사과하는 듯이 그를 위로한다.

정신없이 물을 키든 청년은 입을 씻고 숨을 내쉰다.

「정신을 차리고 이것을 먹게!」

보이는 가져 왔던 바스켓을 열고 가지가지의 먹을 것을 낸다.

고기 빵 과일 그리고 금빛 레태르3 붙은 이름 모를 고급양주, 일등 선객의 요리를 감춘 것이니 범연할 리 없다.

「그들의 한 때의 양을 줄이면 우리의 열 때의 양은 찰걸세.」

고마운 권고에 청년은 신선한 식욕으로 빵 조각을 뜯으면서 동무에게 묻는다.

「대관절 몇 리나 남았나?」

「눈 꼭 감고 하루만 더 참게.」

「또 하루?」

「하루만 참으면 목적한 곳에 그리고 자네 일상 꿈꾸던 나라에 깜쪽같이 내리게 되네.」

「오---그 나라에!」

청년은 빵 조각을 떨어뜨리고 비장한 미소를 띠면서 꿈꾸는 듯이 잠시 명상에 잠겼다가 감동에 넘쳐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을 부끄러운 듯이 손등으로 씻는다.

「그곳에 가면 나도 이놈의 옷을 벗어버리고 이제까지의 생활을 버리겠내.」

「아! 그곳에 가면 동무가 있다. 마우재와같이 일하는 동무가 있다!」

울려오는 배의 동요에 석탄덩이가 굴러내린다.

파도소리와 기관소리가 새롭게 들려 온다.

「그럼 난 그만 가보겠네. 종일 동안만은 충실해야 하잖겠나.」

동무는 자리를 일어선다.

「하루! 배나 든든히 채우고 하루만 꾹 참게. 틈나는 대로 그들의 눈을 피해 내 또 한 번 오리.」

회중전등을 청년의 손에 쥐이고 입었던 속옷을 한꺼풀 벗어 몸을 둘러 주고는 그는 석탄고를 나갔다.

두 층으로 된 삼등 선실은 층 위에나 층 아래가 다 만원이다.

오래지 않은 항해이지만 동요와 괴롬에 지친 수많은 얼굴들이 생기를 잃고 떡잎같이 시들었다.

누덕감발에 머리를 질끈 동이고 돈 벌러가는 사람이 있다---돈 벌기 좋다던 부령청진 가신 낭군이 이제 또다시 돈 벌기 좋은 북으로 가는 것이다. 미주 동부 사람들이 금나는 서부 캘리포니아를 꿈꾸듯이 그는 막연히 금덩이 구는 북국을 환상하고 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다같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막연히 찾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 중에는 삼 년 동안이나 한 닢 두 닢 모아 두었던 동전으로 마지막 배삯을 삼아서 떠난 오십이 넘는 노인도 있다.

색달리 옷 입고 분바른 젊은 여자는 역시 돈 벌기 좋은 항구를 찾아가는 항구의 여자이다.

<돈 많은 마우재는 빛깔 다른 조선 계집을 유달리 좋아한다>니 <그런 나그네 하룻밤에 둘만 겪어도 한 달 먹을 것은 넉넉히 생긴다는>돈 많은 항구를 찾아가는 여자이다.

이 여러가지 층의 사람 숲에 섞여서 입으로 무엇인지 중얼중얼 외는 청년이 있다.

품에 지닌 만국지도 한 권과 손에 든 노서아어 회화책 한 권이 그의 전 재산이다.

거기 배에 취하여 악취에 코를 박고 들어누운 그 가운데에서 그만은 말끔한 정신을 가지고 노서아어 단어를 한 마디 한 마디 외어간다.

「가난한 노동자」---「베드느이 라보오취이」

「역사」---「이스토리야」

「전쟁」---「보이나」

책을 덮고 눈을 감고 다시 한 마디 한 마디 속으로 외어간다.

「깃발」---「즈나아마야」

「아름다운 내일」---「크라시부이 자부트라」

창구멍같이 뽕 뚫린 선창에는 파도가 출렁출렁 들이친다.

흐린 유리창 밖으로 안개 깊은 수평선을 바라보는 젊은 여자, 그에게는 며칠 전 항구를 떠날 때의 생각이 가슴속에 떠오른다.

---윈치가 덜컥덜컥 닻 감는 소리 항구 안에 요란히 울렸다. 닻이 감기자 출범의 기적소리 뚜---하고 길게 울리며 배가 고요히 움직이기 시작하니 부두와 갑판에서 보내고 가는 사람 손 흔들며 소리 지르며 수건 날렸다. 어머니도 오빠도 이웃사람도 자기를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배와 부두의 거리가 멀어지자 그에게는 눈물이 푹 솟았다. 어쩐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것 같아서 배가 항구를 벗어나 산모퉁이를 돌 때까지 정든 산천을 돌아보며 그는 눈물지었다. 눈물지었다! 눈물을 담뿍 품은 깊은 안개 선창 밖에 서리웠고 개일 줄 모르는 애수 흐린 가슴속에 서리었다.

대모테와 마우재는 무언지 여전히 은근히 지껄이며 삼등 선실 안으로 들어와 각각 자리로 간다.

노서아어에 정신없던 청년은 마우재를 보자 웃음을 띠며 무언지 말하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는 듯하다.

「루스키 하라쇼!」

「루스키 하라쇼!」

능치 못한 말로 되고 말고 그는 이렇게 호의를 표한다.

마우재 역시 반가운 듯이 웃음을 띠며 그에게로 손을 내민다.

밤은 깊었다.

바다도 깊고 하늘도 깊다.

깊은 하늘 먼 한편에 별 하나 반짝반짝.

연해의 하늘에 구비친 연봉도 깊은 잠 속에 그의 윤곽을 감추었다.

높은 마스트 위에 붉은 불 푸른 불이 잠자는 아련한 숨소리같이 빛날 뿐이요 갑판 위는 고요하다. 고요한 갑판 난간에 의지하여 얕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으니 대모테와 마우재이다.

인기척 없고 발자취 소리 끊어진 갑판 위에서 그래도 그들은 가끔 뒤를 돌아보며 무언지 은근히 의논한다.

뱃전을 고요히 스치는 파도소리가 때때로 그들의 회화를 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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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병욱이가 적삼 소매와 치마를 걷고 앉아서 부인의 손을 쥐물며,
"얘 영채야, 자 우선 좀 주무르자."
영채도 병욱과 같이 소매와 치마를 걷고 노파의 뒤로 가며,
"자, 어머니는 좀 일어납시오."
하고 자기가 대신 병인을 안으려 한다.
"웬걸요, 이렇게 전신이 흙투성이야요. 고운 옷에 흙 묻으리다."
하고 좀처럼 듣지 아니한다. 하릴없이 영채는 그 곁에 앉아서 흐트러진 부인의 머리를 거누어 준다. 선형은 앉아서 발과 다리를 주무른다. 구경꾼들이 죽 둘러선다. 세 처녀의 하얀 손에는 누런 흙이 묻는다.
얼마 않아서 형식이가 땀을 흘리며 뛰어오더니,
"자, 저리로 갑시다. 방에 불을 때라고 이르고 왔으니……."
노파는 눈물을 흘리고,
"생아자 부모라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쇠다. 아이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나."
하고 젊은 사람더러,
"얘, 자 업고 가자."
하며 병인을 일으켜 앉힌다. 젊은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형식의 일행을 실적 보며 병인을 업고 일어난다. 병인은 두 팔로 업은 사람의 목을 쓸어안고 얼굴을 어깨에 비빈다. 형식이가 앞서고 흙 묻은 노파가 한 손으로 병인의 등을 누르고 세 처녀가 뒤로 따라온다. 구경꾼들도 수군수군하면서 한참 따라오더니 하나씩 둘씩 다 떨어지고 말았다.
객주에 들여다가 옷을 갈아입혀 누이고, 일변 형식이가 의사를 불러오며, 일변 세 처녀가 전신을 주물렀다. 노파는 병인의 머리맡에 앉아서 울기만 하더니 가슴이 아프다고 하며 눕는다. 젊어서 가슴앓이가 있었는데 종일 찬비에 몸이 식어서 또 일어난 것이다. 영채와 선형은 태모를 맡고, 병욱은 노파를 맡아서 간호한다. 노파는 한참씩 정신을 못 차리다가도 조곰 정신이 들면,
"이런 은혜가 없어요. 백골난망이외다. 부대 수부귀다남자하고 아들딸 많이 낳고 잘살다가 극락세계에 가시오."
한다. 세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씩 웃었다.
영채와 선형은 땀을 흘리며 태모의 사지를 주무르고 배도 쓸어 준다. 영채의 손과 선형의 손이 가끔 마주 닿는다. 그러할 때마다 두 처녀는 슬쩍 마주본다. 영채가 선형더러,
"제가 부엌에 가서 물을 끓여 올게요."
하고 일어선다. 선형은,
"아니오, 제가 끓이지요!"
하는 것을 영채가 선형의 손을 잡아 앉히며,
"어서 주무르셔요. 제가 끓여 올게."
하고 일어나 나간다. 선형은 물끄러미 영채의 나가는 양을 본다. 그러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선형은 지금 어쩐 영문을 모른다. 병욱은 영채와 선형의 말하는 양을 보고 혼자 빙긋 웃는다.
영채가 물을 끓여 가지고 들어와서 선형으로 더불어 태모의 손발을 씻을 적에 형식이가 의사를 데리고 왔다. 의원의 진찰하는 동안에 일동은 삥 둘러서서 의사의 입과 눈만 바라보고 지금껏 말없이 문 밖에 앉았던 젊은 사람도 고개를 디밀어 물끄러미 진찰하는 양을 본다.
"염려할 것은 없소."
하고 의사는 약을 보낸다고 젊은 사람을 데리고 갔다. 태모와 노파는 이제는 적이 정신을 차리고 이따금 괴로워하기는 하면서도 얼마큼 낯빛이 순하게 되었다. 노파는 연방
"이런 은혜가 없어요. 부대 수부귀다남자하라."
는 축원을 한다.
노파의 말을 듣건대……
노파는 젊어서 과부가 되어 아들 하나를 데리고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아들이 점점 자라서 며느리도 얻게 되고 남의 땅일망정 농사를 지어 이럭저럭 재미롭게 살 만치 되어 자기 손으로 조고마한 집도 짓고 밭도 한 조각 사게 되었다. 또 며느리가 태중이므로 어서 손자를 안아 보았으면 남부러울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그랬더니 어저께 물에 농사 지은 것은 말끔 물 속으로 들어가고 오늘 새벽에는 집까지 물에 들어가고 말았다. 여기까지 말하고는 노파는 흑흑 느끼며,
"집이 떠나가지나 아니했으면 좋겠어요."
한다. 육십 년 근고로 얻은 집이 만일 한번 떠나가고 말면 노파는 생전에 다시 제 집이라 구경을 못 하고 말 것이다. 손자를 안아 보고 제 집 아랫목에서 죽는 것이 노파의 유일한 소원일 것이다. 그 집이란 것이야 팔아도 십 원을 받기가 어렵지마는 이 가족에게는 대궐보다도 더 중한 것이다. 노파의 눈에는 그 돌담 두른 조고마한 집만 보인다. 물결이 그 집을 헐 것을 생각할 때마다 노파는 마치 자기의 살점을 베어내는 듯하였다. 그래서,
"조곰 낙을 볼까 하면 이렇게 됩니다그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자식까지 앙화를 받는지요."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맙시오! 이제 또 잘살게 되지요. 하느님이 아니 계십니까?"
하고 영채가 위로를 한다. 그러고는 어젯저녁에 자기가 병욱에게 위로를 받던 생각이 나서 속으로 우스워진다.
"아이구, 이제는 저승에나 가서 잘살는지……."
하다가 중동에 말을 그치고 고개를 번쩍 들어 며느리를 보며,
"얘, 배 아프기가 좀 나으냐. 이 어른들 아니더면 꼭 죽을 뻔했다" 하고 또 수부귀다남자를 부른다.
122
병욱은 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에게 면회하기를 청하였다. 서장은 이상한 듯이 병욱을 보더니,
"무슨 일이오?"
한다.
"다른 일이 아니라."
하고, 저 수재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병인도 있고, 태모도 있고, 젖먹이 가진 부인도 있는데, 조반도 못 먹고 비를 맞고 떠는 정경이 가련하며, 더구나 어머니가 무엇을 먹지 못하였으므로 젖이 아니 나서 어린아이들의 우는 양은 차마 못 보겠다는 말을 한 뒤에, 그래서 마침 부산 가는 기차가 비에 걸려서 오후까지 머물게 되었으니, 음악회를 열어 거기서 수입된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국밥이라도 만들어 먹이고 싶다는 뜻을 말하고 허가와 원조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서장은 점점 놀라하는 빛을 보이더니,
"그러면 음악할 줄 아는 이가 있나요?"
하고 감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잘하기야 어떻게 바라겠습니까마는 제가 음악학교에 다닙니다. 그러고 동행하는 여자가 두어 사람 되는데 여학교에서 배운 창가마디나 하고요……."
서장은 이 말에 지극히 감복하여,
"참 당국에서도 구제 방침을 연구하던 중이외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니까."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참 감사하외다. 허가야 물론이지요."
하고 벌떡 일어나서 모자를 쓰고 나온다.
서장은 일변 정거장에 나가서 역장과 교섭하여 대합실을 회장으로 쓰기로 하고, 일변 순사를 파송하여 각 여관과 시가에 이 뜻을 말하게 하였다. 중간에서 사오 시간이나 기다리기에 답답증이 났던 승객들은 일제히 대합실에 모여들었다. 그 속에는 간혹 흰옷 입은 삼등객도 섞였다. 걸상을 있는 대로 내다 놓고, 근처 여관에서도 걸상을 모아다가 둘러 놓았다. 좁은 대합실은 가득 찼다. 출찰구 곁에 큰 테이블을 놓아서 무대를 만들었다. '자선 음악회'라는 말은 들었으나 어떠한 사람이 나오는지 모르는 군중은 눈이 둥글하여 무대만 바라본다. 이윽고 서장이 무대 곁으로 가더니 일동을 둘러보며,
"이렇게 모이시기를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외다. 여러분! 저 산기슭을 보시오. 저기는 수재를 당하여 집을 잃은 불쌍한 동포가 밥도 못 먹고 비에 젖어서 방황합니다. 그런데 아까 (어떤) 아름다운 처녀가 경찰서에 와서 저 불쌍한 동포들에게 한 끼나 따뜻한 밥을 먹이기 위하여 음악회를 열게 하여 달라 합디다. 우리는 그 처녀가 얼마나 음악을 잘하는지를 모르거니와 그의 아름다운 정성이 족히 피 있고 눈물 있는 신사 숙녀 제씨를 감동시킬 줄을 확신합니다" 하며, 서장은 눈물이 흐르고 말이 막힌다. 일동의 얼굴에는 찌르르 하는 감동이 휙 지나간다. 여기저기서 코를 푸는 부인의 소리도 난다. 서장은 말을 이어,
"여러분! 우리는 그 처녀의 정성에 대답함이 있어야 할 것이외다. 이제 그 처녀를 소개합니다."
하고 저편 구석에 가지런히 섰던 세 처녀를 부른다. 바이올린을 든 병욱을 선두로 하여 세 처녀는 은근히 일동에게 경례를 한다. 대합실이 터져라 하고 박수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사람은 감격함이 극하여 소리를 치는 이도 있다.
병욱은 세 사람을 대표하여,
"저희는 음악을 알아서 하려 함이 아니올시다. 다만 여러분 어른께서 동정을 줍시사 함이외다. 더구나 행리 중에 보표(譜表)가 없으니 따로 외워 하는 것이라 잘못되는 것도 많을 것이올시다."
하고 고개를 기울여 바이올린 줄을 고른 뒤에 '아이다의 비곡(悲曲)'을 시작하였다. 일동은 잠잠하다. 끊(이)는 (듯 잇는) 듯한 네 줄의 슬픈 소리만 여러 사람의 가슴속을 살살 울린다.
그 곡조는 이러한 경우에 가장 적당한 곡조였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슬픔에 가슴이 눌렸던 일동은 그만 울고 싶도록 되고 말았다. 병욱의 손이 바이올린의 활을 따라 혹은 자주, 혹은 더디게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일동의 숨소리도 그것을 맞추어서 끊었다 이었다 하는 듯하였다.
그 슬픈 곡조를 듣는 맛을 내가 길게 말하는 것보다 천고의 신인 강주사마(江州司馬)의 비파행(琵琶行)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편할 것이다. 애원한 가는 소리가 영원히 끊기지 아니할 듯이 길게 울더니 병욱은 바이올린을 안고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 더한 박수성이 일어나고 한 곡조 더 하라는 소리가 일어난다. 병욱의 얼굴에는 복숭아꽃빛이 비치었다.
다음에는 영채가 병욱에게 배운 찬미가 '지난 일 생각하니 부끄럽도다'의 독창이 있었다. 병욱의 바이올린에 맞춰서 영채는 얼굴에 표정(表情)을 하여 가며 부른다.
십여 년 연단한 목소리는 과연 자유자재하였다. 바이올린의 고상한 곡조를 들을 줄 모르던 사람들도 영채의 고운 목소리에는 취하였다.
"흐르는 두 줄 눈물 뿌릴 곳 없어."
할 때에는 일동의 눈에는 눈물이 돌았다. 시방 영채가 한문으로 짓고 형식이가 번역한 다음에 노래를 셋이 합창하였다. 그것은 집을 잃고 비에 젖은 불쌍한 사람들을 두고 지은 것인데, 이 노래는 듣는 사람에게 더욱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123
어린아기 보챕니다
젖 달라고 보챕니다
짜도 젖이 아니 나니
무엇 먹여 살리리까
봄에나 여름에나
애써 벌어 놓았던 걸
사정없는 붉은 물결
하룻밤에 쓸어 나가
비가 오고 바람 치고
날새조차 저뭅니다
늙은 부모 어린 처자
집 없으니 어디서 자
따뜻한 밥 한 그릇
국에 말아 드립시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국에 말아 드립시다
순박한 이 노래와 다정한 그 곡조는 마침내 일동의 눈물을 받고야 말았다. 정성되고 엄숙한 박수 소리에 세 처녀는 은근히 경례하고 물러났다. 박수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려 서장이 다시 일어나,
"여러분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다. 본직은 감히 여러분을 대표하여 세 처녀에게 감사한 뜻을 표합니다."
하고 세 사람을 향하여 고개를 숙인다. 세 사람은 답례한다. 일동은 박수한다.
이리하여 한 시간이 못 되는 짧은 음악회가 끝났다. 여러 사람은 즉석에 돈 팔십여 원을 모두었다. 서장은 그 돈을 병욱에게 주며,
"어떻게 쓰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시오."
한다. 이는 병욱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이다. 그러나 병욱은 사양하며,
"그것은 서장께서 맡아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서장은 병욱에게서 그 돈을 받는 듯이 또 한번 고개를 숙이고 일동을 향하여 그 돈으로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방법을 취하여 수재 만난 사람을 구제하겠노라 하였다. 일동은 병욱과 다른 두 사람의 성명을 듣고자 하였으나 그네는 다만 고개를 숙일 뿐이요, 말이 없었다.
이러하는 동안에 집 잃은 사람들은 여전히 어찌할 줄을 모르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차차 시장증이 나고 몸이 떨리기 시작하였으나 그네에게는 아무 방책도 없었다. 그네는 다만 되어 가는 대로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네는 과연 아무 힘이 없다. 자연(自然)의 폭력(暴力)에 대하여서야 누구라서 능히 저항(抵抗)하리요마는 그네는 너무도 힘이 없다. 일생에 뼈가 휘도록 애써서 쌓아 놓은 생활의 근거를 하룻밤 비에 다 씻겨 내려 보내고 말리만큼 그네는 힘이 없다. 그네의 생활의 근거는 마치 모래로 쌓아 놓은 것 같다. 이제 비가 그치고 물이 나가면 그네는 흩어진 모래를 긁어 모아서 새 생활의 근거를 쌓는다. 마치 개미가 그 가늘고 연약한 발로 땅을 파서 둥지를 만드는 것과 같다. 하룻밤 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발발 떠는 그네들이 어찌 보면 가련하기도 하지마는 또 어찌 보면 너무 약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그네의 얼굴을 보건대 무슨 지혜가 있을 것 같지 아니하다. 모두 다 미련해 보이고 무감각(無感覺)해 보인다. 그네는 몇 푼 어치 아니 되는 농사한 지식을 가지고 그저 땅을 팔 뿐이다. 이리하여서 몇 해 동안 하느님이 가만히 두면 썩은 볏섬이나 모아 두었다가는 한번 물이 나면 다 씻겨 보내고 만다. 그래서 그네는 영원히 더 부(富)하여짐 없이 점점 더 가난하여진다. 그래서 (몸은 점점 더 약하여지고 머리는 점점 더) 미련하여진다. 저대로 내어버려 두면 마침내 북해도의 '아이누'나 다름없는 종자가 되고 말 것 같다.
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해서 생활의 근거를 안전하게 하여 주어야 하겠다.
"과학(科學)! 과학!"
하고 형식은 여관에 돌아와 앉아서 혼자 부르짖었다. 세 처녀는 형식을 본다.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科學)을 주어야겠어요. 지식을 주어야겠어요."
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으로 거닌다.
"여러분은 오늘 그 광경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에 세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다. 한참 있다가 병욱이가,
"불쌍하게 생각했지요."
하고 웃으며,
"그렇지 않아요?"
한다. 오늘 같이 활동하는 동안에 훨씬 친하여졌다.
"그렇지요, 불쌍하지요!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무론 문명이 없는 데 있겠지요― 생활하여 갈 힘이 없는 데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 있는 듯이,
"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
"그리하려면?"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어떻게요?"
"교육으로, 실행으로."
영채와 선형은 이 문답의 뜻을 자세히는 모른다. 무론 자기네(가) 아는 줄 믿지마는 형식이와 병욱이가 아는 이만큼 절실(切實)하게, 단단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방금 눈에 보는 사실이 그네에게 산 교육을 주었다. 그것은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할 것이요, 대 웅변에서도 배우지 못할 것이었다.
124
일동의 정신은 긴장하였다. 더구나 영채는 아직도 이러한 큰 문제를 논란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제하나?' 함은 참 큰 문제였다. 이러한 큰 문제를 논란하는 형식과 병욱은 매우 큰 사람같이 보였다. 영채는 두자미며, 소동파의 세상을 근심하는 시구를 생각하고, 또 오 년 전 월화와 함께 대성학교장의 연설을 듣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때에는 아직 나이 어려서 찌찌(분명히) 알아듣지는 못하였거니와 "여러분의 조상은 결코 여러분과 같이 못생기지는 아니하였습니다" 할 때에 과연 지금 날마다 만나는 사람은 못생긴 사람들이다 하던 생각이 난다. 영채는 그 말과 형식의 말에 공통한 점이 있는 듯이 생각하였다. 그러고 한번 더 형식을 보았다. 형식은,
"옳습니다. 교육으로,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하나요?"
하고 형식은 입을 꼭 다문다. 세 처녀는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은 한번 더 힘있게,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고 세 처녀를 골고루 본다. 세 처녀는 아직도 경험하여 보지 못한 듯한 말할 수 없는 정신의 감동을 깨달았다. 그러고 일시에 소름이 쪽 끼쳤다. 형식은 한번 더,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였다.
"우리가 하지요!"
하는 대답이 기약하지 아니하고 세 처녀의 입에서 떨어진다. 네 사람의 눈앞에는 불길이 번쩍하는 듯하였다. 마치 큰 지진이 있어서 온 땅이 떨리는 듯하였다. 형식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앉았더니,
"옳습니다. 우리가 해야지요! 우리가 공부하러 가는 뜻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차를 타고 가는 돈이며 가서 공부할 학비를 누가 주나요? 조선이 주는 것입니다. 왜? 가서 힘을 얻어 오라고, 지식을 얻어 오라고, 문명을 얻어 오라고…… 그리해서 새로운 문명 위에 튼튼한 생활의 기초를 세워 달라고…… 이러한 뜻이 아닙니까?"
하고 조끼 호주머니에서 돈지갑을 내어 푸른 차표를 내어 들면서,
"이 차표 속에는 저기서 들들 떠는 저 사람들…… 아까 그 젊은 사람의 땀도 몇 방울 들었어요! 부대 다시는 이러한 불쌍한 경우를 당하지 말게 하여 달라고요?"
하고 형식은 새로 결심하는 듯이 한번 몸과 고개를 흔든다. 세 처녀도 그와 같이 몸을 흔들었다.
이때에 네 사람의 가슴속에는 꼭 같은 '나 할 일'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너와 나라는 차별이 없이 온통 한몸, 한마음이 된 듯하였다.
선형도 아까 영채가,
"제 물 끓여 올게요."
하고 자기의 손목을 잡아 앉힐 때부터 차차 영채가 정다운 생각이 나고 또 영채가 지은 노래를 셋이 합창할 때에는 영채의 손을 잡아 주도록 정다운 생각이 나고, 또 지금 세 사람이 일제히,
"우리지요!"
할 때에 더욱 영채가 정답게 되었다. 그러고 형식이가 지금 병욱과 문답할 때에는 그 얼굴에 일종 거룩하고 엄숙한 기운이 보여 지금껏 자기가 그에게 대하여 하여 오던 생각이 죄송한 듯하다. 자기는 언제까지 형식과 영채를 같이 사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이 형식과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우리가 늙어 죽게 될 때에는 기어이 이보다 훨씬 좋은 조선을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게으르고 힘없던 우리 조상을 원하는(원통히 여기는) 것을 생각하여 우리는 우리 자손에게 고마운 조상이라는 말을 듣게 합시다."
하고 웃으며,
"그런데, 이 자리에서 우리가 장래 나갈 길이나 서로 말합시다."
하고 세 사람을 본다. 세 사람도 그제야 엄숙하던 얼굴이 풀리고 방그레 웃는다.
"선형(선생)께서 먼저 말씀하셔요!"
하고 병욱이가 권할 때에 문 밖에서,
"들어가도 관계치 않습니까?"
하고 우선의 목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우선의 손을 잡으면서,
"어떻게 지금 오나?"
우선은 세 사람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인사한
뒤에 형식의 곁에 앉으며,
"사(社)에서 삼랑진 근방에 물구경을 하고 오라고 전보를 했데그려"
하고 손으로 턱을 한번 쓴다. 영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나?"
"정거장에 와서 다 들었네" 하고 여자들에게 절을 하며,
"참 감사합니다. 지금 정거장에서는 칭찬이 비 오듯 합니다. 어 과연 상쾌하외다."
하고 정거장에서 들은 말을 대개 한 뒤에 형식더러,
"오늘 일을 신문에 내도 좋겠지?"
형식은 대답 없이 병욱을 보다가,
"무론 관계치 않겠지요!"
한다.
"아이구, 그것은 내서 무엇합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저 같은 놈도 큰 감동을 받았는데…… 참 말만 듣고도 눈물이 흐를 뻔하였습니다."
한다. 과연 정거장에서 어떤 승객에게 그 말을 들을 때에 우선은 지극히 감동한 바 되었다. 원래 호활한 우선이가 그처럼 눈물이 흐르도록 감동되기는 영채가 죽으러 간 때와 이번뿐이었었다. 우선은 정거장에서부터 병욱 일파를 만나면 기어이 하려던 말이 있었다. 그래서 하인이 가져온 차를 마시며,
"지금 무슨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하고 자기의 말할 기회를 얻으려 한다.
125
"응, 지금 우리는 장차 무엇으로 조선 사람을 구제할까 하고 각각 제 목적을 말하려던 중일세."
"녜, 그러면 저도 좀 듣지요!"
처녀들은 그의 대팻밥 모자와 말하는 모양이 우스워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꿀덕 참는다. 영채 하나만 어찌할 줄을 몰라서 얼굴을 잠깐 붉히나 우선은 영채를 보면서도 모르는 체한다.
"어느 분 차례입니까"
하는 우선의 말에,
"내 차례인가 보에."
"응, 그러면 말하게"
하고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들을 준비를 한다. 병욱은 영채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선형은 웃음을 참느라고 살짝 고개를 돌린다.
"나는 교육가가 될랍니다. 그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生物學)을 연구할랍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형식도 무론 생물학이란 참뜻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가장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쌍하다.
형식은 병욱을 향하여,
"무론 음악이시겠지요?"
"녜― 저는 음악입니다."
"또 영채 씨는?"
영채는 말없이 병욱을 본다. 병욱은 어서 말해라 하고 눈짓을 한다.
"저도 음악입니다."
"선형 씨는?"
하는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서 형식은 가만히 앉았다. 여러 사람은 웃었다. 선형은 얼굴을 붉혔다.
"선형 씨는 무엇이오? 무론 교육이겠지."
하고 병욱이가 웃는다. 모두 웃는다. 형식도 고개를 수그렸다. 선형도 병욱이가 첫마디에 "녜, 저는 음악이외다" 하고 활발히 대답하는 것이 부러웠다. 그래서,
"저는 수학을 배울랍니다."
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서 말하였다. 학교에서 수학을 잘한다고 선생에게 칭찬받던 생각이 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수학이 좋은 것인 줄은 알았으나 수학과 인생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모른다.
"그 담에는 자네 차례일세."
"나는 붓이나 들지!"
한참 말이 없었다. 제가끔 제 장래를 그려 본다. 그러고 그 장래의 귀착점은 다 같았다.
우선이가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형식이가,
"왜, 오늘은 그렇게 점잖아졌나?"
하고 웃는다. 우선이가 고개를 들더니,
"언제인가 자네가 날더러 인생은 장난이 아니라고, 나는 인생을 희롱으로 본다고 그랬지? 마지메(진지)하게 생각지를 않는다고?"
"글쎄, 그런 일이 있던가."
"과연 그게 옳은 말일세.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장난으로 보아 왔네. 내가 술을 많이 먹는 것이라든지…… 또 되는 대로 노는 것이 확실히 인생을 장난으로 여기던 증거지. 나는 도리어 자네가 너무 마지메한 것을 속이 좁다고 비웃어 왔지마는 요컨대,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어!"
여기까지 와서는 형식도 우선의 말이 오늘은 농담이 아닌 것을 깨닫고 정색하고 우선의 얼굴을 본다. 세 처녀도 정색하고 듣는다. 과연 우선의 얼굴에는 무슨 결심의 빛이 보인다. 우선은 말을 이어,
"오늘 와서 깨달았네. 오늘 정거장에서 음악회 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네. 나는 차 타고 지나오면서 메기슭에 사람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나기는 났지마는 그 꾀죄하고 섰는 양이 우스워서 웃기부터 하였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들을 건지나 하는 생각도 아니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도 아니 흘렸네. 그러고 차를 내리면 얼른 구경을 가리라, 가서 시나 한 수 지으리라, 하고 울기는커녕 웃으면서 내려 가지고, 그 말을 들을 때에 나는 가슴이 뜨끔하였네…… 더구나 젊은 여자가……."
하고 감격한 듯이 말을 맺지 못한다. 듣던 사람들도 묵묵하다. 우선은 말을 이어,
"나도 오늘 이때, 이 땅 사람이 되었네. 힘껏, 정성껏 붓대를 둘러서 조곰이라도 사회에 공헌함이 있으려 하네. 이제 한 시간이 못 하여 자네와 작별을 하면 아마 사오 년 되어야 만나게 되겠네그려. 멀리 간 뒤에라도 내가 이전 신우선이가 아닌 줄로 알고 있게. 나는 자네와 떠나기 전에 이 말을 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아네."
하고 손을 내어밀어 형식의 손을 잡는다. 형식도 꼭 우선의 손을 잡아 흔들며,
"기쁜 말일세. 무론 자네가 언제인들 잘못한 일이 있었겠나마는 그처럼 새 결심 한 것이 무한히 기쁘이."
우선은 한참 주저하다가,
"영채 씨, 이전 버릇없던 것은 다 용서합시오! 저도 이제부터 새사람이 될랍니다. 부대 공부 잘하셔서 큰일하십시오."
하고 길게 한숨을 쉰다. 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선형은 이제야 형식에게 영채의 말이 모두 참인 줄을 깨달았다. 그러고 가만히 영채의 손을 잡고 속으로 '형님 잘못했습니다' 하였다. 영채는 선형의 손을 마주 쥐며 더욱 눈물이 쏟아진다. 형식도 울었다. 병욱도 울었다. 마침내 모두 울었다. 비 갠 뒤 맑은 바람이 창 밖에 늘어진 수양버들가지를 스쳐 방 안에 불어 들어와 다섯 사람의 열한 얼굴을 식힌다. 잠잠하다.
126
형식과 선형은 지금 미국 시카고대학 사년생인데 내내 몸이 건강하였으며― 금년 구월에 졸업하고는 전후의 구라파를 한번 돌아 본국에 돌아올 예정이며, 김장로 부부는 날마다 사랑하는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벌써부터 돌아온 후에 할 일과 하여 먹일 것을 궁리하는 중.
병욱은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자기의 힘으로 돈을 벌어서 독일 백림에 이태 동안 유학을 하고, 금년 겨울에 형식의 일행을 기다려 시베리아 철도로 같이 돌아올 예정이며, 영채도 금년 봄에 동경 상야 음악학교 피아노과와 성악과(聲樂科)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아직 동경에 있는 중인데 그 역시 구월경에 서울로 돌아오겠다. 더욱 기쁜 것은, 병욱은 베를린 음악계에 일종 이채(一種異彩)를 발하여 명성이 책책하다는 말이 근일에 도착한 베를린 어느 잡지에 유력한 비평가의 비평과 함께 기록된 것과, 영채가 동경 어느 큰 음악회에서 피아노와 독창과 조선춤으로 대갈채를 받았다는 말이 영채의 사진과 함께 동경 각신문에 게재된 것이라. 듣건대 형식과 선형도 해마다 우량한 성적을 얻었다 한다. 삼랑진 정거장 대합실에서 자선 음악회를 열던 세 처녀가 이제는 훌륭한 레이디가 되어 경성 한복판에 떨치고 나설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다.
신우선은 그로부터 일절 화류계에 발을 끊고 예의전심, 일변 수양을 힘쓰며 일변 저술에 노력하여 문명이 전토에 떨쳤으며 더욱이 근일 발행한『조선의 장래』는 발행한 이 주일이 못 하여 사판(四版)에 달하였으며 그의 사상은 더욱 깊고 넓게 되며, 붓은 더욱 날카롭게 되어 간다. 한 가지 걱정은 아직 술이 너무 과함이나, 고래로 동양 문장에 술 못 먹는 사람이 없으니, 그리 책망할 것도 없을 것이라. 지금은 유명한 대팻밥 모자를 벗어 버리고 백설 같은 파나마 모자를 쓰며 코 아래는 고운 카이젤 수염까지 났다.
황주 김병국은 십만여 주의 대상원을 지었다. 작년에 봄서리로 적지 아니한 손해를 보았으나 금년에는 상엽이 매우 충실하다 하니 다행이며, 병국의 조모는 불행히 사랑하는 손녀를 보지 못하고 작년 여름에 세상을 떠나셨다. 병국의 부인도 이제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내외의 금실도 전 같지는 아니하다던지.
형식의 주인 하고 있던 노파의 집에는 의학 전문학교 학생들이 있는데, 구더기 있는 장찌개와 담뱃대는 지금도 전같이 유명하나 다만 차차 몸이 쇠약하여져서 지금은 약수에도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보는 사람마다 형식의 말을 늘 한다.
영채의 '어머니'는 집을 팔아 가지고 평양 어느 촌으로 내려가서 양자를 들여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진실한 예수교 신자가 되어서 편안히 천당길을 닦는다. 우선에게서 영채가 죽지 않고 동경에 갔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울었다 함은 우선의 말이다. 그 후에 영채는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하였으며 '어머니'도 자기가 진실히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영채도 예수를 잘 믿으라는 말과 졸업하고 오거든 곧 자기의 집으로 오라는 말을 편지마다 하고 혹 옷값으로 돈도 보내 주며 가끔 고추장, 암치 같은 것도 보내어 준다.
한 가지 불쌍한 것은 형식이가 평양에 갔을 적에 데리고 칠성문으로 나가던 계향이가 어떤 부잣집 방탕한 자식의 첩이 되어 갔다가 매독을 올리고, 게다가 남편한테 쫓겨나기까지 하여 아주 적막하게 신고함이니, 아마 형식이가 돌아와서 이 말을 들으면 매우 슬퍼할 것이다. 그 어여쁘던 얼굴이 말못되게 초췌하여 이제는 누구 돌아보아 주는 이도 없게 되었다.
혹 독자 여러분이 기억하시는지 모르거니와 형식이가 사랑하던 이희경 군은 아까운 재주를 품고 조세하였고, 얼굴 컴컴하던 김종렬 군은 북간도 등지로 갔다는데 이내 소식을 모르며, 배학감은 그 후에 교주와 충돌이 생겨 지금은 황해도 어느 금광에 가 있다는데 아직도 철이 나지 못한 모양이라 하니 가엾은 일이다.
또 한 가지 말할 것은, 칠성문 밖 형식이가 돌부처라 하던 그 노인은 아직도 건강하여 십여 일 전부터 툇마루에 나와 앉아서 몸을 흔들거리고 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그 감투가 전보다 더 낡아졌을 뿐.
나중에 말할 것은 형식 일행이 부산서 배를 탄 뒤로 조선 전체가 많이 변한 것이다. 교육으로 보든지 경제로 보든지, 문학 언론으로 보든지, 모든 문명 사상의 보급으로 보든지 장족의 진보를 하였으며 더욱 하례할 것은 상공업의 발달이니, 경성을 머리로 하여 각 대도회에 석탄 연기와 쇠마치 소리가 아니 나는 데가 없으며 연래에 극도에 쇠하였던 우리의 상업도 점차 진흥하게 됨이라.
아아, 우리 땅은 날로 아름다워 간다. 우리의 연약하던 팔뚝에는 날로 힘이 오르고 우리의 어둡던 정신에는 날로 빛이 난다. 우리는 마침내 남과 같이 번적하게 될 것이로다. 그러할수록에 우리는 더욱 힘을 써야 하겠고, 더욱 큰 인물…… 큰 학자, 큰 교육가, 큰 실업가, 큰 예술가, 큰 발명가, 큰 종교가가 나야 할 터인데, 더욱더욱 나야 할 터인데 마침 금년 가을에는 사방으로 돌아오는 유학생과 함께 형식, 병욱, 영채, 선형 같은 훌륭한 인물을 맞아들일 것이니 어찌 아니 기쁠가. 해마다 각 전문학교에서는 튼튼한 일꾼이 쏟아져 나오고 해마다 보통학교 문으로는 어여쁘고 기운찬 도련님, 작은아씨 들이 들어가는구나! 아니 기쁘고 어찌하랴.
어둡던 세상이 평생 어두울 것이 아니요, 무정하던 세상이 평생 무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밝게 하고, 유정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가멸게 하고, 굳세게 할 것이로다.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무정』을 마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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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선형을 보내고 병욱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영채는 병욱의 손을 잡아 앉히며,
"그래 어때요?"
하고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질문을 한다. 병욱은,
"무엇이 어찌해. 형식 씨라는 이가 잘 차리구서 시치미 따고 앉았더구나. 우리 오빠를 안다구…… 동경 가서 같이 있었노라구……."
영채는 부지불각에 한숨을 지운다.
"왜, 형식 씨가 그리우냐. 아직도 단념이 아니 되는 게로구나."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면 왜 휘 하고 한숨을 쉬어?"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하고 병욱의 무릎을 치며 웃는다.
"그래도 아주 마음이 편치는 않을걸."
하고 병욱도 웃는다. 영채는 한참 생각하더니 병욱의 손을 꼭 쥐며,
"참 그래요."
하고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어째 마음이 좀 불쾌한 듯해요."
하고 얼굴이 빨개진다. 병욱은 근 십년 기생으로 있던 계집애가 어떻게 이처럼 규문 속에서 자라난 처녀와 같은가, 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그러고 지금 영채의 감상이 어떠한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그래 불쾌하다니 어떻게 불쾌하냐."
"모르겠어요."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바로 대답을 해라. 그러면 내 맛나는 거 사 주께."
하고 둘이 다 웃는다. 영채가,
"이형식 씨가 퍽 무정한 사람같이 생각이 되어요. 그래도 내가 죽으러 갔다면 좀 찾아라도 볼 것인데…… 어느새에 혼인을 해가지고……"
하다가 병욱의 무릎에 자기의 이마를 대고 비비며,
"아이구, 언니,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해요."
병욱은 영채의 머리와 목과 등을 만져 주며 어린애게 하는 듯이,
"말하면 어떠냐…… 자, 그래서."
"아마, 내가 여기 있는 줄을 알겠지요?"
"알 테지……. 지금 선형이가 왔다 가서 네 말을 했을 테니깐…… 알면 어떠냐."
"어떻기야 어떻겠소마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왔다면 아마 놀랄 테지?"
"실컷 놀라 싸지. 아마 가슴이 뜨끔하리라…… 그렇게 적막할 데가 왜 있겠니."
"만일 저편에서 나를 찾아오면 어찌해요? 만나서 이야기를 할까."
"그러믄. 왜 무슨 원수가 있담."
"원수는 아니지마는, 어째……."
"어째 분이 난단 말이야?"
두 사람은 한참 잠자코 마주보더니,
"언니, 언니가 나를 살려 준 것이 잘못이야요. 나는 (그때에 꼭 죽었어야 할 터인데.) 그때에 죽었으면 벌써 다 썩어졌겠지……. 뼈만 하나씩 하나씩 여기저기 흩어졌겠지……. 그때에 죽었어야 해" 하고 후회하는 듯이 고개를 조악한다. 병욱은 영채의 낯빛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영채의 두 팔을 잡으며,
"얘 영채야,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제 나하고 둘이 가서 음악 잘 배워 가지구…… 둘이서 아메리카로 구라파로 돌아다니면서 실컷 구경하고…… 그러고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새로 음악을 세우고 재미있게 살 터인데 왜 그런 소리를 하니?" 하고 영채를 잡아 흔든다. 영채는 멀거니 병욱의 눈을 보고 앉았더니 눈에서 눈물이 쑥 나오며,
"아니야요. 나는 살 사람이 아니야요. 죽어야 할 사람이야요. 가만히 지나간 일생을 생각해 보니까 암만해도 나는 살려고 난 것 같지를 아니해요. 아버지와 두 오라버니는 옥중에서 죽고, 그러고 칠팔 년 고생이 모두 속절없이……."
하고 흑흑 느낀다.
"얘, 글쎄 웬일이냐. 곧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기뻐하다가 왜 갑자기 야단이냐…… 네가 그렇게 그러면 이 언니는 어쩌게…… 자 울지 마라!"
"암만 생각하여 보아도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생각이 없어요."
"왜? 그러면 너는 아직도 이형식 씨를 못 잊는 게로구나. 네가 그때에 날더러 실상은 이형식 씨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니?"
"아니오. 다만 그 일만 아니야요. 이 세상이 내 원수가 아니야요. 내 부모를 빼앗고, 내 형제를 빼앗고, 내 어린 몸을 실컷 희롱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마침내 내 정절을…… 내 정절을 빼앗고…… 그러고는 일생에 생각하던 사람은 아랑곳도 아니 하고…… 이렇게 구태 나를 없애고 말려는 세상에 내가 구태 붙어 있으면 무엇 해요. 세상을(세상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세상을 미워하지요. 세상이 나를 싫다 하면 나도 세상을 버리고 달아나지요…… 하늘로 올라가지요."
하는 울음 섞인 말에 병욱도 부지불각에 눈물이 흘렀다.
"그러니깐 말이다― 그만치 세상한테 빼앗겼으니깐 또 세상에 좀 찾아 가져야지. 내 것을 주기만 하고 말아! 네가 이십 년이나 고생을 했으니깐 그 값을 받아야 아니 하겠니?"
"값이 무슨 값이오? 하루라도 더 살아 있으면 더 빼앗길 뿐이지……."
"아니다! 왜 그래? 이제부터는 찾는다. 아직도 전정이 구만린데 왜 어느새 실망을 한단 말이냐. 살 수 있는 대로 힘껏 살면서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야지…… 사업으로 찾고 행복으로 찾고…… 왜 찾을 것을 찾지도 않고 죽어?"
"행복? 행복? 내게 행복이 올까요? 이 세상이 내게다 행복을 줄까요!"
하고 병욱의 눈물 흐르는 눈을 본다.
112
병욱은 수건으로 영채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얘, 다른 손님들이 이상하게 여기겠다. 울지 말아라…… 이 세상이 왜 행복을 아니 주어…… 아니 주거든 내라지. 내라도 아니 주거든 억지로 빼앗지. 빼앗아도 아니 주거든 원수라도 갚지! 또 생각을 해봐라. 이 세상에 너와 같이 설움을 당하는 사람이 너뿐이겠니?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불쌍한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 안 된 사회제도를 고쳐서 우리 자손들이야 행복을 얻고 살게 해야지……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느냐. 그런데 만일 네가 제 고생을 못 이겨서 죽고 만다 하면 이것은 네가 우리 자손에게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많이 하자…… 자, 울지 말고 딸기나 내 먹자."
하고 일어서서 등으로 결은 하얀 두룽이(종다래끼)를 내린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지― 왜 못 해? 하느님이 큰 일꾼을 만들 양으로 네게 초년 고락을 주었구나…… 자, 우리 둘이 아니 있니? 그까짓 이형식 같은 사람은 잊어버리고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하고 살자…… 자, 옜다 먹자."
하고 빨갛게 익은 딸기를 내어놓고 먼저 자기가 하나를 먹는다. 입에 넣고 씹으니 하얀 이빨에 핏빛 같은 물이 든다. 이것은 어저께 아침 곁에 병국의 부인과 셋이 그 목화밭에 가서 송별연삼아 수박을 따먹으면서 따모은 것이라. 두 사람의 눈앞에는 황주 병욱의 집 광경이 얼른 지나간다.
영채도 울어야 쓸데없음을 알고 눈물을 거둔다. 또 병욱의 말에는 정이 있고 힘이 있고 이치가 있어서 반가우면서도 자기를 내려누르는 듯한 힘이 있다. 가슴이 터져 오게 슬프다가도 병욱의 말을 한마디 들으면 그만 스르르 풀리고 만다. 영채는 병욱이가 남자같이 활발한 듯하면서도 속에는 뜨겁고 예민한 정이 있음과, 또 자기를 위로할 때에는 진정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이 되어서 하는 줄을 잘 안다. 만일 영채가 자살을 하려고 물가에 섰거나 칼을 들고 섰다가라도 병욱의 말소리만 들리면 얼른
"언니."
하고 따라갈 것이다. 영채가 보기에 병욱은 언니라기보다 어머니라 함이 적당할 듯하였다.
그러나 이십 년 생활이 한데 뭉쳐 된 영채의 슬픔이 다만 병욱의 그 말만으로는 아주 다 스러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더 자기의 고집을 부리는 것은 친절한 병욱에게 대하여 미안한 듯하여 영채도 딸기를 먹는다. 빨간 딸기가 두 처녀의 고운 입술로 들어가서는 하얀 이빨을 빨갛게 물들이곤 하다. 차창에는 비가 뿌려서 눈물 같은 물방울이 떼그루 굴러내리다가는 다른 물방울과 한데 합하여 흘러내린다. 차가 흔들리는 대로 떨리는 전등 가에는 하루살이 등속이 떼를 지어 모여 들어간다. 두 처녀의 입술과 손가락 끝이 딸깃물에 불그레하여졌을 때에 형식이가,
"영채 씨!"
하고 두 사람 앞에 와 섰다.
형식은 얼마 전에 이 차실에 들어와서 바로 영채의 곁으로 오려다가 영채가 우는 듯한 모양을 보고 영채 앉은 걸상에서 서넛 건너 있는 빈 걸상에 앉아서 가만히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찻바퀴 소리에 자세히 들리지는 아니하나 이따금 이따금 한 마디씩 두 마디씩 들리는 말을 주워 모으면 대강 뜻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형식은 영채에게 대하여 죄송한 마음과 자기에게 대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영채에게 정성껏 사죄를 하리라 하였다.
영채와 선형은(병욱은) 놀라서 일어선다. 두 사람을(사람은) 일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영채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형식은 고개를 숙였다. 병욱이가 오직 고개를 들고 형식에게,
"앉으시오."
한다. 형식은 앉는다.
"얘, 앉으려무나."
하는 병욱의 말에 영채도 앉는다. 그러나 고개는 여전히 돌렸다. 형식은 마치 무슨 무서운 것이나 대한 듯이 몸에 소름이 쭉 끼친다. 영채의 뒷모양이 자기를 내려누르고 위협하는 듯하다. 대동강에 빠져 죽은 영채의 넋이 지금 자기 앞에 나서서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금시에 영채가 휙 돌아서며 무서운 얼굴로 자기를 흘겨보고 입에 가득한 뜨거운 피를 자기에게다가 확 뿌리며,
"이 무정한 놈아, 영원히 저주를 받아라"
하고 달겨들 것 같다. 왜 그때에 평양 갔던 길에 더 수탐을 하여 보지 아니하였던가. 왜 그때 우선에게서 돈 오 원을 꾸어 가지고 즉시 평양으로 내려가지를 아니하였던가 하여도 본다. 이제 영채가 고개를 돌리면 어찌하나. 아니 왔더면 좋겠다 하여도 본다. 이때에,
"자, 딸기 잡수십시오."
하고 병욱이가 딸기 그릇을 내어놓으며,
"얘, 영채야."
하고 자기의 발로 영채의 발을 꼭 누른다. 영채는 가만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형식은 보지 아니한다.
"영채 씨, 용서해 줍시오. 무에라고 할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대하여서나 영채 씨께 대하여서나 큰 죄인이외다. 무슨 책망을 하시든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제가 철없이 찾아가서 공연한 걱정을 끼쳤습니다. 또 죽지도 못하는 것을 죽는다고 해서 얼마나 노심을 하셨습니까."
하고 고개를 숙인다.
병욱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113
형식은 차마 더 영채에게 말이 나오지 아니하므로 병욱더러,
"그런데 대관절 어찌 된 일이오니까. 이전부터 영채 씨를 아셨어요?"
병욱은 형식을 보고 웃는다. 그 웃음이 형식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준다. 자기를 비웃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아니올시다. 제가 방학에 집으로 오는 길에 차 속에서 만났어요."
형식은 눈이 둥그래지며 영채를 한번 보고 다시 병욱을 향하여,
"그러면 영채 씨가 평양 가시는 길에?"
"녜."
하고 만다. 형식은 더 알고 싶었다. 영채가 어찌하여 죽을 결심을 풀었으며, 어찌하여 동경으로 가게 된 것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 어떻게 되었어요?"
병욱은 고개를 기울여서 영채의 돌아앉은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그래서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냐. 즐거운 인생을 하루라도 오래 살지 못하여 걱정인데 왜 구태 지레 죽으려느냐고 그랬지요. 그러고 지금까지는 네가 천하 사람의 조롱을 받고, 학대를 받고……."
하고는 주저하는 듯이 형식을 바라보다가 또 웃으면서,
"또 일생에 생각하고 사모하던 사람에도 버림을 받았지마는……."
이 말이 끝나기 전에 형식의 가슴은 마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병욱은 형식의 낯빛이 변하여짐을 보고 말을 끊었다가,
"그렇게 지금토록 네 일생은 눈물과 원망의 일생이지마는 이제부터 네 앞에는 넓고 즐거운 장래가 있지 아니하냐 하고 억지로 차에서 끌어내렸지요."
"참 감사합니다. 아씨 덕에 나도 죄가 얼마큼 가벼워진 듯합니다. 저는 꼭 영채 씨께서 돌아가신 줄만 알았어요― 이때에 병욱과 영채는 속으로 흥 한다― 그래 즉시 평양경찰서에 전보를 놓고 다음 번 차로 평양으로 내려갔지요― 여기 와서 형식은 자기의 변명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 기쁘다 하는 생각이 난다― 했더니,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정거장에 나가서 수탐을 하여 보았지마는 알 수 없다고 하지요. 그래서 알 만한 집에도 가 물어 보고, 또 박선생 묘소에도……."
하다가, 중간에 돌아온 생각을 하매 문득 말을 그치고 고개를 숙인다. 그때에 북망산까지 가보고 대동강가로 다만 한두 시간이라도 시체를 찾아보았더면 좋을 뻔하였다 하는 생각이 난다. 병욱은 한참 듣더니,
"녜, 아마 그리하셨겠지요. 그러면 시체를 찾으시느라고 꽤 애를 쓰셨겠네."
형식은 '이 계집애가 꽤 사람을 골린다' 하였다. 과연 형식의 등에는 땀이 흘렀다.
영채는 형식의 하는 말을 다 들었다. 그러고 형식에게 대하여 원통한 듯하던 마음이 얼마큼 풀린다. 그러나 형식이가 즉시 자기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내려온 것과, 열심으로 자기의 시체를 찾아 준 고마움도 자기가 죽은 지 한 달이 못 하여 선형과 혼인을 하여 가지고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눌려 버리고 만다. 영채의 생각에는 형식 한 사람이 정다운 애인도 되고 박정한 낭군도 되어 보인다. 그러나 만사가 이미 다 지나갔으니 이제 와서 한탄하면 무엇 하고 분풀이를 하면 무엇 하랴. 차라리 웃는 낯으로 형식을 대하여 저편의 마음이나 기쁘게 하여 줌이 좋으리라 하는 생각도 난다. 그래서 마음을 좀 돌리기는 돌렸으나 그래도 아주 웃는 얼굴을 보여 형식에게 안심을 주고 싶지는 아니하여,
"참말 죄송합니다. 황주 가서 곧 편지를 드리려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 잠깐 살아 있는 것을 알려 드리면 무엇 하랴. 차라리 죽은 줄로 믿고 계시는 것이 도리어 안심이 되실 듯하기로 그만두었습니다…… 이제 보면 아니 알려 드린 것이 어떻게 잘 되었는지요."
하고 영채도 과히 말하였다는 생각이 나서 웃는다.
"그러면 어찌해서 엽서 한 장도 아니 주신단 말씀이오?"
하고 형식은 분개한 구조로, "그렇게 사람을 괴롭게 하십니까?"
형식은 진실로 이 말을 듣고 영채를 원망하였다. 만일 영채가 엽서 한 장만 하였으면 자기는 마땅히 당장 영채를 찾아가서 영채의 손을 잡았을 것 같다. 병욱과 영채는 형식의 분개하여 하는 얼굴을 본다. 더구나 영채는 형식에게 대하여 불안한 생각이 나서,
"그러나 저는 제가 살아 있는 줄을 알게 하는 것이 도리어 선생께 부질없는 근심을 끼칠 줄로 알았어요. 만일 제가 선생의 몸에 누가 되어서 명예를 상한다든지 하면 도리어― 주저하다가― 선생을 위하는 도리도 아니겠고…… 그래서 억지로 참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고 또 영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형식이 영채의 하는 말을 듣다가 눈물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디까지든지 자기를 위하여 주는 영채의 심정이 더욱 감사하게 생각된다. 죽으려 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는 줄을 알리지 아니한 것도 자기를 위하여 한 것임을 생각하매 자기의 영채에게 대한 태도의 너무 무정함이 후회된다.
마주앉은 눈물 흘리는 영채를 보고, 또 저편 차실에 앉은 선형을 생각하매 형식의 마음은 자못 산란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한참 말이 없고 기차는 어느 철교를 건너가느라고 요란한 소리를 낸다. 창에 뿌리는 빗발과 흘러가는 물소리는 큰비가 아직 계속하는 줄을 알게 한다. 홍수나 아니 나려는지.
114
형식은 부글부글 끓는 머리를 가지고 영채의 차실에서 나왔다. 우선이가 지켜 섰다가 형식의 어깨를 툭 치며,
"영채 씨가 울데그려."
형식은 우선의 손을 잡으며,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왜, 무슨 일이 났나. 영채 씨가 바가지를 긁던가 보이그려…… 요― 호남자!"
"아니어! 그렇게 농담으로 들을 것이 아닐세…… 참, 어쩌면 좋아?"
"아따, 걱정도 많기도 많아…… 부산 가서 배 타고, 마관 가서 차 타고, 횡빈 가서 배 타고, 상항 가서 내리고 하면 그만이지 걱정이 무슨 걱정이어!"
형식은 원망스러이 우선의 얼굴을 보고 서서 무슨 생각을 하더니,
"나는 미국 가기를 중지할라네."
"응?"
하고 우선도 놀라며,
"어째?"
"미국 가기를 중지할 테여……. 그것이 옳은 일이지……. 응, 그리할라네."
하면서 우선의 손을 놓고 차실로 들어가려 한다. 우선은 손을 잡아 형식을 끌어당기며,
"자네 미쳤단 말인가. 이리 좀 오게."
형식은 멀거니 섰다.
"자네 지금 정신이 혼란되었네. 미국 가기를 중지한다는 것이 무슨 소리여?"
"아니 저편은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선형 씨한테 이 뜻을 말하고 약혼을 파하겠네……. 그것이 옳은 일이지."
"그러면 영채하고 혼인한단 말이지?"
"응, 그렇지! 그것이 옳지!"
"영채는 자네와 혼인을 한다던가."
"그런 말은 없어."
"만일 영채가 자네와 혼인하기를 싫다 하면 어쩔 터인가."
형식은 한참 생각하더니,
"그러면 일생 혼인 말고 지내지……. 절에 가서 중이 되든지."
우선은 마침내 껄껄 웃으며,
"지금 자네가 좀 노보세(上氣)했네. 참 자네는 어린내일세. 세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네그려. 행여 꿈에라도 그런 생각 내지 말고 어서 미국이나 가게."
"그러면 저 사람을 버리고?"
"버리는 것이 아니지. 일이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까. 이제 그런 생각을 하면 무엇 하나. 또 영채 씨도 동경에 유학도 하게 되었고 하니까 피차에 공부나 잘하고 장래에 서로 형제삼아 지내게그려. 그런 어림없는 미친 소리는 다 집어치고……"
하면서 형식의 등을 퉁 하고 때린다. 팔에 붉은 헝겊 두른 차장이 지나가다가 두 사람을 실척 본다.
형식은 자기의 자리에 돌아와 뒤에 몸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선형은 조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린 듯이 기대어 앉았다.
형식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의문 하나가 일어난다.
대체 자기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선형인가, 영채인가. 영채를 대하면 영채를 사랑하는 것 같고, 선형을 대하면 선형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까 남대문에서 차를 탈 때까지는 자기는 오직 선형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듯하더니 지금 또 영채를 보매, 선형은 둘째가 되고 영채가 자기의 사랑의 대상(對象)인 듯도 하다. 그러다가 또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이야말로 내 아내, 내 사랑하는 아내'라는 생각도 난다. 자기는 선형과 영채를 둘 다 사랑하는가. 그렇다 하면 동시에 두 사람을 다 같이 사랑할 수가 있을까. 남들이 하는 말을 듣거나, 자기가 지금껏 생각하여 온 바로 보건대, 참된 사랑은 결코 동시에 두 사람 이상에 향할 수 없는 것이어늘, 지금 자기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에 있나. 아무렇게 해서라도, 어떠한 표준을 세워서라도 형식은 선형과 영채 양인 중에 한 사람을 골라야 하겠다.
오래 생각한 후에 형식은 이러한 결론에 달하였다.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도 결코 뿌리 깊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는 선형의 얼굴이 어여쁜 것과 태도가 얌전한 것과 학교에서 우등한 것과 부자요 양반집 딸인 것밖에 아무것도 선형에게 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아직도 약혼한 지금까지도 선형의 성격(性格)을 알지 못한다. 무론 선형도 자기의 성격을 알지 못한다. 서로 이해(理解)함이 없이 참사랑이 성립될 수 있을까. 내 영혼은 과연 선형을 요구하고, 선형의 영혼은 과연 나를 요구하는가. 서로 만날 때에 영혼과 영혼이 마주 합하고, 마음과 마음이 마주 합하였는가.
일언이폐지하면 자기와 선형 사이에는 과연 칼로 끊지 못하고 불로도 끊지 못할 사랑의 사실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실망함을 금치 못한다. 자기는 비록 선형에게 이 모든 것을 구하였다 하더라도 선형은 결코 자기에게 영혼도 보이지 아니하고 마음도 주지 아니하였다. 어찌 생각하면 선형에게는 자기에게 줄 영혼과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부모의 명령과 세상의 도덕에 눌려 하릴없이 자기를 따라오는지도 모르겠다. 무론 일찍 선형이가 자기 입으로 "녜" 하고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그 대답이 과연 자각(自覺) 있게 나온 대답일까.
그러면 자기가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즉 항용 사나이들이 고운 기생 같은 여성의 색에 취하여 하는 사랑과 다름이 있을까. 자기의 사랑은 과연 문명의 세례를 받은 전인격적(全人格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115
형식은 결코 지금까지 장난으로 선형을 사랑한 것도 아니요, 육욕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동포가 사랑을 장난으로 여기고 희롱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하여 큰 불만을 품는다. 자기의 일시 정욕을 만족하기 위하여 이성(異性)을 사랑한다 함을 큰 죄악으로 여긴다. 그는 사랑이란 것을 인류의 모든 정신작용 중에 가장 중하고 거룩한 것의 하나인 줄을 믿는다. 그러므로 자기가 선형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에게 대하여서는 극히 뜻이 깊고 거룩한 일이요, 자기의 동포에게 대하여서는 큰 정신적 혁명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형식의 사랑에 대한 태도는 종교적으로 진실하고 경건(敬虔)한 것이었다. 사랑을 인생의 전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태도로 족히 인생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여 보건대 자기의 선형에게 대한 사랑은 너무 유치한 것이었다. 너무 근거가 박약하고 내용이 빈약한 것이었다.
형식은 오늘 저녁에 이것을 깨달았다. 깨달으매 슬펐다. 마치 자기가 일생 경력을 다 들여서 하여 오던 사업이 일조에 헛된 것인 줄을 깨달은 듯한 실망을 맛보았다. 그와 함께 자기의 정신의 발달한 정도가 아직도 극히 유치함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 인생을 깨달을 때도 아니요, 따라서 사랑을 의논할 때도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자기가 오늘날까지 여러 학생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인생을 가르친 것이 극히 외람된 일인 줄도 깨달았다. 자기는 아직도 어린애다. 마침 어른 없는 사회에 처하였으므로 스스로 어른인 체하던 것인 줄을 깨달으매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도 난다.
형식은 생각에 이어 생각을 한다.
나는 조선의 나갈 길을 분명히 알았거니 하였다. 조선 사람의 품을 이상과, 따라서 교육자의 가질 이상을 확실히 잡았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필경은 어린애의 생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조선의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모른다. 조선의 과거를 알려면 우선 역사 보는 안식(眼識)을 길러 가지고 조선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현재를 알려면 우선 현대의 문명을 이해하고 세계의 대세를 살펴서 사회와 문명을 이해할 만한 안식을 기른 뒤에 조선의 모든 현재 상태를 주밀히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의 나갈 방향을 알려면 그 과거와 현재를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할 것이다. 옳다, 내가 지금껏 생각하여 오던 바, 주장하여 오던 바는 모두 다 어린애의 어린 수작이라.
더구나 나는 인생을 모른다. 내게 무슨 인생의 지식이 있는가. 나는 아직 나를 모른다. 근본적(根本的)으로 무엇인지는 설혹 알지 못한다 하여도, 적더라도 현재에 내가 세상에 처하여 갈 인생관은 있어야 할 것이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좋은 것을 좋다고 할 만한 무슨 표준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것이 있는가. 나는 과연 자각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매 형식은 자기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이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듯하다. 형식은 눈을 떠서 선형을 본다. 선형은 여전히 가만히 앉았다. 형식은 또 생각한다.
나는 선형을 어리고 자각 없는 어린애라 하였다. 그러나 이제 보니 선형이나 자기나 다 같은 어린애다. 조상 적부터 전하여 오는 사상(思想)의 전통(傳統)은 다 잃어버리고 혼돈한 외국 사상 속에서 아직 자기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를 택할 줄 몰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는 오라비와 누이, 생활(生活)의 표준도 서지 못하고 민족의 이상도 서지 못한, 세상에 인도하는 자도 없이 내어던짐이 된 오라비와 누이― 이것이 자기와 선형의 모양인 듯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다시 눈을 떠서 선형을 보매 선형은 잠이 들었는지 입을 반쯤 열고 가슴이 들먹들먹한다. 형식은 참지 못하여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선형의 손에 입을 대었다. 형식의 생각에 선형은 자기의 아내라기보다 같이 손을 끌고 길을 찾아가는 부모 잃은 누이라는 생각이 난다.
옳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배우러 간다. 네나 내나 다 어린애이므로 멀리멀리 문명한 나라로 배우러 간다. 형식은 저편 차에 있는 영채와 병욱을 생각한다. '불쌍한 처녀들!'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세 처녀가 다 같이 사랑스러워지고 정다워진다. 형식의 상상은 더욱 날개를 펴서 이희경 일파를 생각하고, 경성학교 학생 전체를 생각하고, 또 서울 장안 길에서 보던 누군지 얼굴도 모르고 성명도 모르는 남녀 학생들과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네들이 모두 다 자기와 같이 장차 나갈 길을 부르짖어 구하는 듯하며,) 그네들이 다 자기의 형이요 동생이요 누이들인 것같이 정답게 생각된다. 형식은 마음속으로 커다란 팔을 벌려 그 어린 동생들을 한 팔에 안아 본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와 선형과, 또 병욱과 영채와 그 밖에 누군지 모르나 잘 배우려 하는 사람 몇십 명 몇백 명이 조선에 돌아오면 조선은 하루이틀 동안에 갑자기 새 조선이 될 듯이 생각한다. 그러고 아까 슬픔을 잊어버리고 혼자 빙그레 웃으며 잠이 들었다.
116
그러나 선형의 가슴은 그렇게 평안하지 아니하였다. 형식이가 영채를 찾아가고 없는 동안에 더욱 마음이 산란하게 되었다. 영채가 이 차에 탔단 말을 듣고 몹시 괴로워하는 형식의 모양을 보매 암만해도 형식의 마음에는 자기보다도 영채가 더 사랑스러운 것같이 보인다. 설혹 형식의 말과 같이 영채가 죽은 줄을 믿고 자기와 약혼을 하였다 하더라도 형식의 가슴속에는 영채의 기억이 깊이깊이 들어박혀서 자기는 용납할 곳이 없는 것 같다. (영채가 없으므로 부득이 자기를 사랑하려 하다가 이제) 영채가 살아난 줄을 알매 다시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일어나는 것 같다. 자기는 형식에게 대하여 임시로 영채의 대신을 하여 준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매 더욱 불쾌하여진다.
'옳지, 영채가 없으니깐 나를 사랑하였지' 하고 선형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면 나는 이형식의 노리개가 되었던가' 하고 한참 몸을 흔든다. '옳지, 아마 형식이가 미국 유학에 탐을 내어서 나와 약혼을 한 게다' 하고 벌떡 일어선다. '아아, 나는 남의 첩이 된 셈이로구나!' 하고 주먹을 불끈 쥔다. 형식을 정직한 사람으로 믿었던 것이 후회도 난다.
"나를 사랑하시오?"
할 때에,
"아니오, 나는 당신을 조곰도 사랑하지 아니하오."
하고 슬쩍 돌아서지 못한 것도 분하고, 형식이가 손을 잡을 때에 순순히 잡힌 것도 분하고 모든 것이 다 분하여진다. 선형은 다시 펄적 주저앉으며, '아아, 내가 그러한 사람을 따라 미국을 가누나' 하고, 방금 울음이 터질 듯이 코를 실룩실룩하기도 한다.
형식이가 속으로 자기와 영채를 비교할 것을 생각해 본다. 영채는 참 곱다. 그러고 영리하고 다정하게 생겼다. 선형도 자기가 친히 거울을 대하거나 남의 칭찬하는 말을 들어 자기의 얼굴이 어여쁘고 태도가 얌전한 줄을 안다. 그 중에도 자기의 맑은 눈이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는 줄을 안다. 그러므로 선형은 자기와 연치가 비슷한 여자를 볼 때에는 반드시 그 얼굴을 자세히 보고, 또 속으로 자기의 얼굴과 비교해 보는 버릇이 있다. 아까도 영채를 보고 곧 자기의 얼굴과 비교해 보았다. 그때에 선형은 매우 영채를 곱게 보았다. '친해 두고 싶은 사람이로군' 하였다. 그러나 알고 본즉, 그는 다방골 기생이다. 형식이가 자기의 얼굴과 더러운 기생의 얼굴을 비교할 것을 생각하매 더할 수 없이 괘씸하다. 영채의 얼굴이 비록 곱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생의 얼굴이다. 내 얼굴이 비록 영채의 것만 못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반집 처녀의 얼굴이다. 어찌 감히 비기랴 한다.
형식의 끈끈한 것을 보건대 당당한 여학생인 자기보다도 아양을 떨고 간사를 부리는 영채를 곱게 볼 것 같다. 영채가 무엇이냐, 다방골 기생이 아니냐, 하여 본다.
형식이가 계월향이라는 기생과 좋아하다가 평양까지 따라갔다는 말을 들을 제 형식을 조곰 의심하게 되고, 그 후 형식이가 자기더러 '나를 사랑하시오?' 하고 염치없는 소리를 물으며, 나중에 자기의 손을 잡을 때에 '과연 기생집에나 다니던 버릇이로다' 하였고, 지금 와서 선형은 더욱 형식을 더럽게 본다. 한참 악감정이 일어난 이 순간에는 선형의 보기에 형식은 모든 더러운 것, 악한 것을 다 갖춘 사람 같다.
'아이 어찌해!' 하고 화가 나는 듯이 선형은 고개를 짤레짤레 흔든다. 자기의 앞에, 형식의 빈자리에 허깨비 형식을 그려 놓고, '엑, 나를 속였구나' 하고 두어 번 눈을 흘겨 본다. 그러고는 또 한번 속에 불이 일어서 몸을 흔든다.
선형은 아직 사람을 미워하여 본 적이 없었다. 팔자 좋은 선형은 미워하려도 미워할 사람이 없었다. 자기를 대하는 사람은 다 자기를 귀여워해 주고 칭찬해 주었다. 학교에서 몇 번 선생을 미워하여 본 적은 있었으나 '아이구 미워…….' 하고 얼굴을 찡글도록 누구를 미워할 기회는 없었다. 형식은 선형에게 첫번 미움을 받는 사람이다.
형식의 얼굴이 눈앞에 보인다. 그 얼굴이 어찌해 뻔질뻔질해 보이고 천해 보인다.
선형은 그 얼굴을 아니 보려고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하며 손으로 땀에 축축하니 젖은 머리를 뻑뻑 긁었다.
형식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영채와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여 본다. 쌍긋쌍긋 웃는 영채가 보인다. 그 하얗고 동그레한 얼굴이 요물스럽게 보인다. '무엇이 고와, 그 얼굴이 고와!' 하고 발을 한번 들었다 놓는다. 그러고 그 요물스러운 영채가 고개를 갸웃갸웃하여 가며 (형식을 호리는 것이 보인다. 그러면) 형식은 그 넓짓한 입을 헤벌리고 흥흥 하면서 징글징글한 웃음을 웃는다.
'아이그, 꼴보기 싫어!' 하며 선형은 두 손길을 펴서 이마에 댄다. '왜 이 사람이 아직 아니 오누' 하며 자리를 한번 옮아 앉는다.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많아!' 하매 차마 견딜 수가 없어서 한번 일어났다가 앉는다. 형식이가 돌아오거든 실컷 분풀이를 하고 싶다. '너희들끼리 더럽게 잘 놀아라' 하고 침을 탁 뱉고 달아나고도 싶다. '아이쿠, 내 팔자야!' 하고 함부로 몸을 흔든다. 한번 더 '어쩌면 좋아!' 하고 푹 쓰러져 운다.
선형도 계집애다. 질투와 울기를 이리하여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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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가 영채한테 간 지가 두 시간이나 세 시간이나 된 것 같다. 퍽도 오래 있는 것 같다. 오래 있는 것 같을수록 선형의 마음이 더욱 산란하였다.
선형은 지금까지 형식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하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형식이가 퍽 자기를 사랑하여 주니 자기도 힘껏 형식을 사랑하여 주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은 있었다. 아내 되어서는 지아비를 사랑하라 하였고, 부모께서는 자기더러 이형식의 아내가 되어라 하였으니 자기는 불가불 형식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형식이가 자기더러 요구하는 그러한 사랑, 손을 잡고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 사랑은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다른 여자가 형식을 안아 준다 하면 자기의 생각이 어떠할까 하는 것은 생각하여 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선형은 지금 자기가 가진 생각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선형도 시기라든지 질투라는 말은 안다. 그러나 시기나 질투는 큰 죄악이라, 자기와 같은 예수도 잘 믿고 교육도 잘 받은 얌전한 아가씨의 가질 것은 아니라 한다.
조물은 각 사람에게 사람으로 배워야만 할 모든 것을 다 가르친다. 그리하되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것과 같이 책이나 말로써 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실험으로써 한다. 조물은 말할 줄을 모르고 오직 실행할 줄만 아니까 그러한가 보다. 선형의 인생의 학과는 이제부터 차차 중등과에 들려 한다. 사랑을 배우고 질투를 배우고 분노하기와 미워하기와 슬퍼하기를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이란 죽는 날까지 이것을 배우는 것이니까 선형이가 졸업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 점으로 보면 영채나 형식은 선형보다 훨씬 상급생이다. 그러고 병욱은 사람들이 조물을 흉내내어, 또는 조물의 생각을 도적질하여 만들어 놓은 문학이라든지 예술(藝術)이라든지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퍽 많이 배웠다.
사람이란 이러한 과정을 많이 배우면 많이 배울수록 어른이 되어 간다. 즉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아리따운 태도가 스러지고 꾀도 있고, 힘도 있고, 고집도 있고, 뜻도 있고, 거짓말도 곧잘 하거니와 옳은 말도 힘있게 하는 소위 어른이 되어 간다. 정신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여지고 더욱 복잡하여진다. 일언이폐지하고 사람이 되는 것이라.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선형은 아직 천진난만한, 엊그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린애다. 오늘에야 처음 사람의 맛을 보았다. 사랑의 불길에, 질투의 물결에 비로소 쓴 것도 같도 단 것도 같은 인생의 맛을 보았다. 옛말에 마마는 백골이라도 한 번은 한다는 셈으로 사람 되고는 한번은 반드시 이 세례를 받는다. 아니 받고 지났으면 게서 더한 행복도 없을 듯하건마는, 그렇거든 사람으로 아니 나는 것이 좋다. 다나 쓰나 면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두를 놓으면 천연두를 벗어난다.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앓더라도 경하게 앓는다. 그러므로 근년에 와서는 누구든지 우두를 놓으며 그래서 별로 곰보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정신에도 마마가 있으니까 정신에도 천연두가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든지 질투라든지 실망, 낙담, 슬픔, 궤휼, 간사, 흉악, 음란, 행복, 기쁨, 성공 등 인생의 만만 현상은 다 일종 정신적 마마라. 소위 약은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의 괴로워하는 양을 차마 보지 못하여 아무쪼록 그네로 하여금 일생에 이 마마를 겪지 않도록 하려 하나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지 못할 것이다. 야매한 사람들이 마마에 귀신이 있는 줄로 믿는 것은 잘못이어니와 이 정신적 마마야말로 귀신이 있어서, 지키는 부모 몰래 그네의 사랑하는 자녀의 정신 속에 숨어 들어가는 것이라. 그러므로 자녀에게 인생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방면을 감추려 함은 마치 공기 중에는 여러 가지 독균이 있다 하여 자녀들을 방 안에 가두어 두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바깥 독균 많은 공기에 익지 못한 자녀의 내장은 독균이 들어가자마자 곧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죽어 버린다. 그러나 평생에 바깥 공기에 익어서, 내장에 독균을 대항할 만한 힘을 기르면 여간한 독균이 들어오더라도 무섭지를 아니하다. 한번 우두로 앓은 사람은 천연두균을 저항하는 힘이 있는 것과 같다.
선형은 지금껏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는 공기 중에 독균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고 그는 우두도 놓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지금 질투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사랑이라는 독균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가 만일 종교나 문학에서 인생이라는 것을 대강 배워 사랑이 무엇이며 질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들 이 경우에 있어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언마는 선형은 처음 이렇게 무서운 변을 당하였다.
선형은 얼마 울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지금 지나간 자기의 심리(心理)를 돌아보고 깜짝 놀라며 진저리를 쳤다. 선형의 눈은 둥글어진다.
'내가 어찌 되었는가' 하고 한참 숨을 멈춘다. 첫번 지내 보는 그 아픈 경험이 마치 캄캄한 밤과 같은 무서움을 준다. '이게 무엇인가' 하고 오싹오싹한 소름이 두어 번 전신으로 쪽쪽 지나간다. 그러다가 멀거니 차실을 돌아보면서, '퍽도 오래 있네' 한다.
118
선형은 몹시 무서운 생각이 난다. 자기의 내장이 온통 빠지직 타는 듯하고 코로는 시커먼 불길이 활활 나오는 듯하다. 씨걸씨걸 하는 자기의 숨소리가 마치 자기의 곁에 어떤 커다란 마귀가 와 서서 후후 찬 입김을 불어 주는 것 같다. 자기의 몸이 마치 성경을 배울 때에 상상하던 컴컴한 지옥 속으로 둥둥 떠 들어가는 것 같다. 선형은 흑 하고 진저리를 치며 차실 내에 여기저기 앉아 조는 사람들을 돌아본다. 그 사람들도 모두 다 무서운 마귀가 된 것 같다. 그 사람의 얼굴들이 금시에 눈을 뚝 부릅뜨고 자기를 향하고 달려들 것 같다.
'아이구 무서워!' 하고, 선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얼굴을 가리면 영채와 형식의 모양이 또 보인다. 둘이 꼭 쓸어안고 뺨을 마주대고서 비웃는 얼굴로 자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가 그 곁에 섰다가 퇴 하고 침을 뱉으면 영채와 형식이가 갑자기 무서운 마귀가 되어서 '응' 하고 자기를 물어뜯는 것 같기도 하다. 선형은 '아이그 어머니!' 하고 푹 쓰러졌다. 선형의 몸은 알 수 없는 무서움으로 들들 떨린다. 선형은 얼른 하느님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 하느님' 할 따름이요, 다른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몇 번 하느님을 찾다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이 죄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말았다. 그만해도 얼마큼 무서운 생각이 없어지고 숨소리가 순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형은 곁에 그리스도가 와서 선 것을 상상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때 형식이가 우선으로 더불어 돌아왔고, 또 선형의 손등에 입을 댄 것이라. 선형은 그때에 결코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형식이가 돌아오는 줄을 알면서도 일부러 눈을 뜨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형식의 입술이 자기의 손등에 댈 때에는 손등으로 형식의 면상을 딱 붙이고 싶도록 미웠다. 이것이 다 기생과 하던 버릇이로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선형도 잠이 들었다. 휘황하던 전등은 밤새도록 이 두 괴로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고 커다란 눈을 부릅뜬 시커먼 기관차는 캄캄한 밤과 내려쏟는 비를 뚫고 별로 태우고 내리우는 사람도 없이 산굽이를 돌고 굴을 통하여 여러 가지 꿈을 꾸는 여러 가지 사람을 싣고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두 사람이 잠을 깬 것은 차가 삼량진역에 닿을 적이었다. 시계의 짧은 침은 벌써 다섯시를 가리켰으나 하늘이 흐려 아직도 정거장의 등불이 반작반작한다.
차장이 모자를 옆에 끼고 은근히 고개를 숙이더니,
"두 군데 선로가 파손되어 네 시간 후가 아니면 발차할 수가 없습니다."
한다.
자다가 깬 손님들은 모두 눈을 비비며
"응, 응."
하고 불평한 소리를 하다가 모두 짐을 꾸며 가지고 내린다. 어떤 사람은 차창으로 내다보다가,
"저 물 보게, 물 보게!"
하며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감탄을 발한다. 비 외투를 입은 역부들은 나는 상관없다, 하는 듯이 시치미떼고 슬근슬근 열차 곁으로 왔다갔다한다. 정거장은 무슨 큰일이나 난듯이 공연히 수선수선한다. 형식은,
"우리도 내리지요. 네 시간을 어떻게 차 속에 있겠어요."
하고 선형을 본다. 선형은 형식의 입을 보고 어젯저녁 자기의 손등에 대던 생각을 하고 속으로 우스워하면서,
"내리지요!"
하고 먼저 일어선다. 형식은 가방과 담요들을 한데 들고 앞서 내리고 선형은 형식의 보던 책과 자기의 손가방을 들고 형식의 뒤를 따라 내렸다. 개찰구 곁에 갔을 적에 병욱이가 뛰어오며 뉘게 하는 말인지 모르게,
"내리셔요!"
하고 아침 인사를 잊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웃는다.
"녜, 네 시간이나 어떻게 기다리겠습니까. 여관에 들어 좀 쉬지요……. 물구경이나 하고요."
"그러면 저희도 내리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셔요!"
하더니 저편으로 뛰어간다. 형식과 선형의 눈도 그리로 향하였다. 영채가 이편으로 향한 차창에 서서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다. 형식은 '어찌하나' 하고, 선형은 '조 요물이' 하였다. 병욱이가 뛰어가서,
"얘, 우리도 내리자. 저이들도 내리시는데."
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고야 비로소 영채도 형식과 선형을 보았다. 그러고 얼른 고개를 움촐하였다.
병욱이가 앞서고 영채는 병욱의 뒤에 서서 병욱의 그늘에 자기의 몸을 감추려는 듯이 비실비실 형식의 곁으로 온다. 병욱이가 실적 빗겨 서매 영채와 형식과는 정면으로 마주서게 되었다. 영채는 형식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다음에 선형을 향하고 방그레 웃으며 은근하게 인사를 하였다. 선형도 웃으며 답례하였다. 그러나 둘이 다 일시에 얼굴을 붉혔다.
네 사람은 열을 지어서 개찰구를 나섰다. 일없는 손님들은 네 사람의 행색을 유심히 보며 혹 웃기도 하고 수군수군하기도 한다. 마치 형식이가 세 누이를 데리고 가는 것 같다. 대합실에서 여관 하인에게 짐을 맡기고 네 사람은 그 하인의 뒤를 따라 나가다가 정거장 모퉁이에 서서 붉은 물이 굽실굽실하는 낙동강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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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물 보셔요!"
하고 병욱이가 가시 돋은 철사에 배를 대고 허리를 굽히며 소리를 친다. 다른 세 사람도 속으로는 '저 물 보게' 하면서도 아무도 입 밖에 말을 내지는 아니한다.
"저것 보게. 저기 저 집들이 반이나 잠겼습니다그려!"
하고 마산선으로 갈려 나가는 길가에 있는 초가집들을 가리킨다. 과연 대단한 물이로다. 좌우편 산을 남겨 놓고는 온통 시뻘건 흙물이로다. 강 한가운데로 굼실굼실 소용돌이를 쳐가며 흘러내려가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그 물들이 좌우편에 늘어선 산굽이를 파서 얼마 아니 되면 그 산들의 밑이 빠져나갈 것 같다.
길이 좁아서 미처 빠지지를 못하여 우묵우묵한 웅커리(웅덩이)라는 웅커리는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쓸어들여서 진을 치고 앞선 물들이 다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길을 잃은 물은 사람 사는 촌중에까지 침입하여 사람들을 다 내어몰고 방 안, 부엌, 벽장 할 것 없이 온통 점령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 집을 잃은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업고 늙은이를 이끌고 높은 데 높은 데를 찾아 산으로 기어오른다. 사람들이 (중히 여기고) 중히 여기어 남을 주기는커녕 잠깐 만져만 보자고 하여도 눈이 벌개지며 "못 한다" 하던 모든 세간을 그 벌건 물들이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띄워 가지고 왔다갔다하다가 물결에 강 한복판으로 집어던져 빙글빙글 곤두박질을 하며 한정없는 바다로 흘려내려 보낸다.
사람들이 여름내에 애써서 길러 놓은 곡식들도 그 붉은 물결 속에서 부다끼고 또 부다끼어 그 약한 허리가 부러지는 것도 있을 것이요, 그 부드러운 뿌리가 끊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라. 장차 누렇게 열매를 맺어 가을밤 골안개에 무거운 고개를 숙이려 하던 벼의 꽃도 다 말이 못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온 땅은 전혀 붉은 물의 지배하(支配下)에 들어가고 말았다.
비는 그쳤건마는 하늘에는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검은 구름장이 뭉글뭉글 떠돈다. 부리나케 동편을 향하고 달아나다가는 무슨 생각이 나는지 또 서편을 향하고 몰려간다. 이따금 참다못한 듯이 붉은(굵은) 빗방울이 우수수 떨어진다.
벌거벗은 높은 산에는 갑자기 된 폭포와 시내가 거꾸로 매어달린 듯이, 마치 검은 바탕에다가 여기저기 되는 대로 흰 줄을 그어 놓은 것 같다. 그 개천들이 벌거벗은 산들의 살을 깎고, 뼈를 우귀어 가지고 내려오는 소리가 무섭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와 합하여 웅대한 합주(合奏)를 듣는 것 같다.
땅은 목말랐던 판에 먹을 수 있는 대로 실컷 물을 먹어서 무럭무럭하게 되었다. 마치 지심(地心)까지 들여져 젖을 것 같다. 하늘 위이며 땅 밑이 온통 물 세상이로다. 이 물 세상에 서서 사람들은 '어찌 되려는고' 하고 하늘만 우러러본다. 병욱은 다시,
"이렇게 물이 많이 나서 흉년이나 아니 들까요?"
하고 형식을 본다. 형식도 우적우적 높은 땅으로 기어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섰다가 고개를 병욱에게로 돌리며,
"글쎄올시다. 이제라도 곧 비가 그쳤으면 좋으련마는 이제 하루만 더 오면 연사는 말이 아니 될 것 같습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에 세 처녀는 일제히 형식의 입을 바라본다. 그네의 속에는 개인(個人)을 뛰어난 일종의 근심과 두려움이 찬다. '큰물', '흉년' 하는 생각과, 물소리와 뭉굴뭉굴하는 구름과, 집을 잃고 높은 땅으로 기어오르는 사람은 그네로 하여금 개인이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공통한 생각…… 즉 사람으로 저마다 가지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선형도,
"이제 비가 그치면 오늘 안으로 이 물이 다 찔까요?"
하고 형식을 본다.
"아마, 내일 아침까지는 갈걸요."
한다.
"상류(上流)에 비가 아니 오면 곧 찌지마는 상류에 비가 오면……."
하고 영채가 연전 평양은 비도 아니 오는데 대동강이 범람하던 생각을 한다.
"평양 시가에도 물이 들어올 때가 있나요?"
하고 선형이가 영채를 보며 묻는다.
"들어오구말구요. 성내에는 별로 들어오는 일이 없지마는 외성에는 흔히 들어옵니다. 그저께도 외성 신시가로 배를 탔다구(타구) 다녔는데요."
하고 선형의 눈을 실적 본다. 선형이 얼른 눈을 피하였다. 병욱은 한참 듣다가 빙긋 웃으며 속으로, '너희들이 잘 이야기를 한다' 하였다. 영채는 병욱의 웃는 것을 보고 한 걸음 병욱에게 가까이 가며 남에게 아니 보이게 가만히 병욱의 손을 잡는다. 병욱은 영채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네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저 보고 싶은 데를 멀거니 보고 있었다. 그러나 네 사람은 공통한 생각을 버리고 각각 제가 되었다. 그러고 본즉 여기 서서 구경할 재미도 없어졌다. 그래도 그냥 우두커니 섰다가 의논한 듯이 네 사람은 슬몃 발을 돌려 거기서 십여 보가 다 못 되는 여관으로 향하였다. 하녀들과 반토(지배인)가 "이랏샤이(어서 오십시오)"를 부르고 네 사람은 이층 북편 끝 하치조마(八疊間)로 인도한다. 지나가면서 보건대 각 방에는 손님이 다 찬 모양이요, 모두 무슨 이야기들을 한다. 여관은 물난 덕에 매우 흥성흥성하게 되었다. 네 사람이 각각 방석을 당기어 깔고 앉자마자 소나기가 (쏴 하고) 여관의 함석 지붕을 때린다.
"아이구, 저 집 잃은 사람들을 어찌해."
하고 세 처녀가 일시에 얼굴을 찌푸린다. 비는 좍좍 퍼붓는다. 방 안은 적적하다.
120
집을 잃은 무리들은 산기슭에 선 대로 비를 함빡 맞아서 전신에서 물이 쪽 흐르게 되었다. 어린아이를 안은 부인들은 허리를 굽혀서 팔과 몸으로 아이들을 가리운다. 그러나 갑자기 퍼붓는 빗발에 숨이 막혀서 으아 하고 우는 아이도 있다. 그러면 어머니는 머리에서 흐르는 빗물에 섞어(섞인)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흔들거린다.
어떤 노파는 되는 대로 되어라 하는 듯이 우두커니 쭈그리고 앉아서 비에 가리운 먼산을 바라보고, 어떤 중늙은이는 머리 텁수룩한 총각을 데리고 그늘을 찾아서 뛰어간다.
여름내 김매기에 얼굴이 볕에 그을은 젊은 남녀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멀거니 서서 자기네가 애써 지어 놓은 논 있던 곳을 바라본다. 벌건 물결은 조곰 남았던 논까지도 차차 덮고야 말련다.
우르릉 하는 우레 소리가 한번 산천을 흔들 때마다 주렴 같은 비가 앞산으로 고함을 치고 들이달아서는 숨쉬듯 불어오는 동남풍에 비스듬히 휘면서 뒷산으로 달아 들어간다. 그러할 때마다 풀대 사이로 흙물이 모래를 밀고 왁 쓸려 내려온다. 또 한번 우레 소리가 나고는 또 한바탕 앞산 너머로서 모진 비가 밀려 넘어온다. 그 속에 백여 명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가만히 섰다. 처음에는 무서운 마음도 나고 슬픈 마음도 났건마는 한참 지나서는 아무러한 생각도 없이 되었다. 굵은 빗발이 깨어져라 하고 얼굴을 때릴 때마다 흑흑 느끼며 몸을 움츠릴 뿐이라.
여러 사람의 살은 싸늘하게 식었다. 입술은 파랗게 되고 몸이 덜덜덜 떨린다. 눈앞에 늘어 있는 집들에서는 조반 짓는 연기가 나온다. 그 연기도 굴뚝 밖에 나서자마자 짓쳐 들어오는 빗발에 기운을 못 쓰고 도로 쫓겨 들어가고 마는 것 같다.
비는 언제 그칠 것 같지도 아니하다. 하늘이 온통 녹아서 비가 되고 말 듯이 쏟아져 내려온다.
그 중에 저편 언덕에 지게를 기둥삼아 낡은 거적이 하나를 덮어 놓은 것이 있고, 그 밑에는 어떤 행주치마 입고 얼굴에 주름잡힌 노파가 입술을 물고 괴로워하는 젊은 부인을 안고 앉았다. 풀물 묻은 잠방이 입은 젊은 남자는 상투 바람으로 우뚝 서서 바람에 날리려는 섬거적을 붙들고 있다. 이 귀작이(귀)가 들먹하면 이것을 누르고 저 귀작이가 들먹하면 저것을 누른다.
노파에게 안긴 젊은 부인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듯이 몸을 비틀고 이따금 아이쿠 아이쿠 하고 소리를 친다. 그러할 때마다 노파는 더 힘껏 그 부인을 껴안아 주고 젊은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본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흙을 밀어다가 노파의 몸을 섬삼아 좌우로 흘러내려간다. 노파와 젊은 부인의 치맛자락이 흙에 묻혔다 나왔다 한다.
이윽고 우레 소리가 저 멀리 서편으로 달아나며 비가 차차 그치고 어둡던 천지가 좀 밝아진다. 산들이 모두 제 모양이 될 때에는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만 칼칼하게 들린다.
이때에 젊은 남자는 섬거적을 벗겨 내어 버리고 허리를 굽혀 젊은 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어떤고?"
한다. 그러나 부인은 몸을 비틀 뿐이요, 아무 대답도 없다. 노파가 부인의 손을 만지며,
"이것 보려무나. 이렇게 전신이 얼음장같이 차구나.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화증을 내며 눈물을 흘린다.
"어떻게 하나."
하고 젊은 사람도 얼굴을 찌푸린다. 부인은 또 한번 몸을 비틀며,
"아이쿠,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소."
하고는 말끝에 울음이 나온다. 전신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얘, 그래도 어느 집에 가서 말을 해봐라. 그래도 인정이 있지, 그렇겠니?"
"어느 집에를 가요. 누가 앓는 사람을 들인답디까?"
이때에 저편으로서 지금 바로 조반을 먹은 형식의 일행이 나와서 차차 이편을 향하고 온다. 몸에서 물이 흐르는 사람들은 땅바닥에 그냥 주저앉아서 말없이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본다. 다른 객들도 둘씩 셋씩 담배를 피워 물고 물구경을 나온다. 갑작 비에 흙이 다 씻겨 나가서 길은 번번하다. 다만 여기저기 도랑이 져서 물이 흘러내려갈 뿐이다. 앞서서 오던 병욱은 앓는 부인 앞에 서며,
"어디가 편치 않아요?"
할 때에 남자는 한번 실적 병욱을 보고는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형식과 선형과 영채도 그 앞에 와 선다. 흙투성이가 된 부인은 또 한번 몸을 비틀며,
"아이쿠!"
한다. 노파는 그 바람에 뒤로 쓰러졌다가 손에 묻은 흙을 자기의 팔과 허리에 되는 대로 문대면서,
"만삭 된 태모야요. 그런데 새벽부터 이렇게 배가 아프다고……."
하며 말끝을 못 맺는다.
"댁은 어디인데요?"
하고 형식이가 묻자,
"저 물 속에 들어갔답니다. 그 왼수의 물이…… 아아, 사람을 살려 줍시오!"
부인은 또 한번,
"아이쿠!"
하며 숨이 막힐 것 같다. 병욱은 부인의 손을 만져 보더니 형식을 돌아보며,
"여봅시오, 가서 방을 하나 빌어 가지고 병인을 들여다 누입시다. 아마 산기가 있나 봅니다."
한다. 영채와 선형은 얼굴을 찡그린다. 그 중에도 선형은 무서운 것이나 본 듯이 진저리를 치며 한 걸음 물러선다.
형식은 집 있는 데로 달음질을 하여 간다. 일동은 형식의 가는 양을 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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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모레 떠난다고 하였으나 병욱의 자친의 반대로 일주일 후에 떠나게 되었다. 만류하는 그 자친의 말은 이러하였다.
"일년 동안이나 그립게 지내다가 만났는데 한 달이 못 되어서 간다고 그러느냐. 너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아니한 게로구나. 저 무명밭에 너 줄 양으로 심은 참외와 수박 다 따먹고 가거라."
이 말에는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은 병욱이가 영채더러,
"어떠니, 어머님의 정이?"
하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영채도 부친의 생각이 나서 소매로 눈을 씻었다.
날마다 낮밥때가 지나면 병욱과 영채는 집에서 한 삼 마장 되는 양지편 무명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가지고 밭모퉁이에 가지런히 앉아서 여러 가지로 꿈 같은 장래를 말하면서 맛나게 먹었다. 어떤 때에는 병국의 부인도 같이 나와서 삼인이 정좌(鼎坐)하여 해 가는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 일도 있다. 마침 그 무명밭이 길체에 있으므로 그 곁으로 다니는 사람도 없이 아주 고요하다. 하루는 병국의 부인이,
"아버님께서는 목화에 해롭다고 참외나 수박은 일절 넣지 말라는 것을 어머님께서 기어이 넣어야 된다고 하셔서 나와 둘이서 이 참외와 수박을 심었지요."
하였다.
병욱은 밭고랑으로 거닐면서 아름답게 매어달린 참외와 수박을 한바탕 시찰하더니, 그 중에서 얼룩얼룩한 참외를 하나 따가지고 나오면서,
"이놈은 어째서 이렇게 얼룩얼룩해요? 어째서 어떤 놈은 꺼멓고, 어떤 놈은 희고, 어떤 놈은 이렇게 얼룩얼룩할까. 암만 다니면서 보아도 꼭 같은 놈은 하나도 없으니……."
"다 같으면 재미가 있겠어요. 사람도 그렇지."
하고 영채가 웃는다.
"아무려나 자연(自然)이란 참 재미있어요. 같은 흙 속에서 별의별 형형색색의 풀이 나고 나무가 나고 꽃이 피고……."
하고 지금 따온 참외를 코에 대고 킁킁 맡아 보며,
"이것도 흙이 변해서 이렇게 되었지."
"사람도 처음에는 흙으로 빚었다고 하지 아니해요."
하고 병국의 부인,
"참 그 말이 옳아. 만물이 다 흙에서 나왔으니까…… 과연 땅이 만물의 어머니여. 만물을 낳아 주구 안아 주고…… 쌀이라든지 물이라든지 이 참외라든지. 이것은 말하면 젖이지…… 어머니의 젖이지."
하고 사랑스러운 듯이 그 참외를 어루만지다가 사방을 휘 돌아보며,
"어때요, 즐겁지 않아요. 하늘은 말갛지, 햇빛은 따뜻하지, 산은 퍼렇지, 저렇게 시냇물은 흐르지, 그러고 저 풀들은 아주 기운 있게 자라지. 그런데 우리들은 그 속에 앉았구려. 에구 좋아."
하고 춤을 추면서 웃는다.
영채가 동그란 돌을 들어서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시골서 자라나서 그런지 모르지마는 암만해도 이렇게 풀 있고 나무 있는 시골이 좋아요. 서울이나 평양 같은 도회에 있으려면 어째 옥 속에 있는 것 같애."
"그렇고말고. 이렇게 넓은 자연 속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온통 자유롭고 한가하고 하지마는 도회에 있으면…… 에구, 그 먼지, 그 구린내 나는 공기, 게다가 사람들의 마음까지 구린내가 나게 되지."
하고 방금 구린내가 나는 듯이 얼굴을 징그리니,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넓고 깨끗하지 않아요."
하고 후―후― 깊이 숨을 들이쉰다. 과연 공기는 맑다. 풀의 향기가 사람을 취하게 할 듯이 이따금 후끈후끈 돌아온다.
이렇게 즐겁고 이야기하고 놀다가 수박을 하나씩 따들고 돌아온다. 그것은 집에 있는 부모와 다른 가족에게 드리기 위함이라.
병욱은 수박의 뚜께를 떼고 거기다가 꿀을 넣어 두었다가 아랫목에 누운 조모께 드린다. 조모는 어린애 모양으로 쪼그라진 볼에 웃음을 띠며 맛나는 듯이 그것을 먹는다. 병욱은 기쁘게 보고 앉았다가 이따금 숟가락으로 수박 속을 파드린다. 거의 다 먹고 나서는 으레 병욱을 보고 웃으며,
"에그, 자라기도 자랐다. 저렇게 큰 것이 왜 시집가기를 싫어하는고?"
하고는 앉은 대로 몸을 한 걸음 끌어다가 병욱의 등을 두드리고,
"이제 네가 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까 보다."
하고 한숨을 쉰다. 그때마다 병욱은,
"왜 그래요. 할머니께서는 아흔까지는 걱정 없어요."
하고 크게 소리를 치면, 겨우 들리는 듯이 흥흥 하며,
"아흔까지!"
하고 만다. 지금 일흔셋이니까 아흔까지면 아직도 십칠 년이 있다.
'내가 그렇게 살까?' 하는 듯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듯도 하다.
이따금 손녀더러 바이올린을 해보라고 한다. 병욱은 시키는 대로 바이올린을 타면서 곁에 앉은 영채더러,
"듣기는 네가 해라. 할머니(는) 눈으로 들으시니까."
하고 둘이서 웃으면 조모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면서 자기도 웃는다. 그러고는 병욱이가 고개를 기울이고 활을 당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앉았다가는 오 분이 못 하여서 대개는 껌벅껌벅 존다. 그러면 젊은 두 처녀는 마주보고 웃으며 자기네끼리만 즐거워한다.
102
모친은 멀리로 가려는 딸을 위하여서 여러 가지로 맛나는 것을 시킨다. 손수 쌀을 담가서 떡도 만들고 닭도 잡아 주고…… 그러고는 딸들이 맛나게 먹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앉았다. 부친도 딸을 위해서 쇠갈비 한 짝을 사오고 병국도 성내에 들어가서 과자와 귤과 사이다 같은 것을 사온다. 그러고 병욱과 영채는 무명밭에 가서 참외와 수박을 따다가 혹은 꿀을 두고, 혹은 사탕을 두어서, 혹은 하룻밤을 재우기도 하고, 혹은 우물에 넣어 식히기도 하여 내어놓는다. 한번은 영채가 홀로 꿀 버무린 수박을 부친께 드렸다. 부친은 좀 의외인 듯이 그것을 받아서 숟가락으로 맛나게 떠넣으며,
"응, 고맙다."
하였다. 영채는 또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였다.
한번은 병욱이가 병국에게 수박을 주며 농담같이,
"이것은 영채가 오빠 드린다고 특별히 만든 것이야요."
하였다. 곁에 섰던 영채는 얼굴을 붉혔다.
병국의 부인은 두 누이가 떠나는 것을 진정으로 섭섭하여 한다. 또 새로 정들인 영채를 한 달이 못 하여서 작별하게 되는 것도 슬펐다. 자기도 누이들과 같이 훨훨 서울이나 동경으로 가보고도 싶었으나 불가능한 줄을 안다. 그래서 미상불 부러운 생각도 있지마는, 또 그는 자기의 분정에 만족할 줄 아는 수양이 있으므로 누이들은 저러할 사람이요, 나는 이러할 사람이라고 곧 단념을 하므로 그렇게 괴로워하지도 아니한다.
이렇게 매우 분주한 연락 속에 긴 듯하던 일주일도 꿈같이 지나고 말았다. 오늘은 떠난다 하여 짐을 묶으며 옷을 갈아입으며 할 때에는 보내는 사람은 보내기가 싫고 가는 사람은 가기가 싫다. 아랫목에 누워 있는 조모라든지, 나는 모른다 하는 듯이 담배만 피우는 부친이라든지, 고추장이며 암치 같은 반찬을 싸주는 모친이라든지, 시어머니를 도우며 말없이 있는 형수라든지, 두루마기를 입고 (파나마를 젖혀 쓴 대로 대소 짐을 묶고) 분주하는 병국이라든지,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며 활발하게 웃고 다니는 병욱이라든지, 또 이 모든 것을 구경하는 듯이 우두커니 섰는 영채라든지…… 누구누구를 물론하고 가슴 저 구석에는 말할 수 없는 적막과 슬픔이 있다.
병욱과 영채는 조모, 부친, 모친의 순서로 하직하는 절을 하였다. 조모는 또 한번,
"이제는 다시 못 볼 것 같다."
하고 희미한 눈에 눈물이 고이며 병국에게 붙들려 대문까지 나왔다. 부친은 절을 받고
"응."
할 뿐이요 다른 말이 없고, 모친은,
"가서 공부들 잘해 가지고 오너라. 겨울방학에도 오려무나. 영채도 내년에 오너라."
하고 영채의 적삼 등을 펴주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잘 가거라' '잘 있으오' 하는 인사를 필하고 일행이 동구를 나설 때는 정히 오후 일시경, 내리쬐는 팔월 볕이 모닥불을 퍼붓는 듯하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미진한 정담을 말하면서 간다. 혹 한데 모여서기도 하고, 혹 두 사람씩 한떼가 되어 십여 보를 떨어지기도 하고, 혹 한 사람이 앞서 가다가 길가에 풀잎을 뜯으면서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흔히 모친과 병욱이가 한떼가 되고, 병국의 부인과 영채가 한떼가 되고, 부친과 병국은 대개 말없이 따로 떨어져서 간다. 짐 진 총각은 이따금 작심대로 지게를 버티고 서서 뒤에 오는 일행을 기다리더니 얼른 정거장에 가서 지게를 벗어 놓고 쉬고 싶은 생각이 나서 먼저 달아난다. 사람 아니 탄 마차와 인력거가 떨거덕떨거덕 소리를 내며 마주 오기도 하고 앞서 지나가기도 한다. 일행의 얼굴을 더위로 뻘겋게 데이고 이마에서는 구슬땀이 떨어진다. 남자들은 부채를 부치고 여자들은 수건으로 땀을 씻는다.
언제까지 가도 끝이 없을 듯하던 이야기도 거의 다 없어지고 이제는 말없이 탄탄한 신작로로 태양을 마주보며 걸어나간다. 길가 원두막에서 수심가, 난봉가가 졸린 듯이 울려 나오더니,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고요하게 되며, 원두막 문으로 중대가리며, 감투 쓴 대가리, 수건 쓴 대가리, 크다란 총각의 대가리가 쑥쑥 나오며 무어라고 쑤군쑤군하다가 일행이 수십 보를 지나가자, 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일행은 그저 말없이 정거장을 향하고 간다.
영채는 좌우에 새로 이삭 나온 조밭을 보며 지나간 일 삭간의 일을 생각한다. 몸은 비록 가만히 있었으나 정신상으로는 실로 큰 변동이 있었다. 전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하리만한 큰 변동이 있었다. 죽으러 가노라고 가던 길에 우연히 병욱을 만난 일과, 병욱의 집에서 칠팔 년 만에 비로소 가정의 즐거움을 다시 본 것과, 자기가 지금껏 괴로워하던 옥 같은 세상 밖에도 넓고 자유롭고 즐거운 세상이 있음을 깨달은 것과, 또 병국에게 대하여 불타는 듯하는 사랑을 느낀 것을 두루 생각하다가 마침내 자기가 이제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러 감을 생각하매, 일신의 운명의 뜻밖에 변하여 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 일행은 정거장에 다다라 대합실의 걸상 하나를 점령하고 남은 시간 이십 분에 다 하지 못한 말을 한다.
103
병욱과 영채는 차에 올라서 차창으로 전송하는 일행을 내다본다. 병국도 사리원까지 갈 일이 있다 하여 같이 올랐으나, 자기는 오늘 저녁에 돌아올 길인 고로 걸상에 앉은 대로 바깥을 내다보지도 아니한다. 모친은 차창에 붙어서,
"얘, 조심해 가거라."를 두 번이나 하고, "얘, 한 달에 두 번씩은 꼭꼭 편지를 해라."를 서너 번이나 하였다. 병국의 부인은 바로 시어머니의 곁에 붙어 서서 병국(병욱)과 영채를 번갈아 본다. 더위에 붉게 된 그 조고마하고 말끔한 얼굴이 아름답게 보인다. 떨렁떨렁 하는 종소리가 나고 차장의 호각 소리가 날 적에 병국의 부인은 차창을 짚은 영채의 손을 꼭 누르며,
"가거든 편지 주셔요."
한다. 그 눈에는 눈물이 있다. 그것을 마주보는 영채의 눈에도 눈물이 있다. 헌병들이 흘끗흘끗 이 광경을 보고 벤또 파는 아이의 외치는 소리가 없어지자, 고동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모친은 또 한번,
"부디 조심해 가거라"를 부르며 눈을 한번 끔벅 한다. 병욱과 영채는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손수건을 두른다. 모친도 수건을 두르건마는 병국의 부인은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한다. 부친도 한번 팔을 들어 두르더니 돌아서 나간다. 덜컥 소리가 나고, 차가 휘돌더니 정거장에 선 사람 그림자가 아주 아니 보이게 된다. 두 사람은 그래도 두어 번 더 수건을 내어두르고는 도로 제자리에 앉는다. 앉아서 한참은 멍멍하니 피차에 말이 없다. 차의 속력이 점점 빨라지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병국은 맞은편 줄 걸상에 모으로 앉아서 두 사람을 건너다보며 부채질을 한다. 차 속에는 선교사인 듯한 늙은 서양 사람 하나와 금줄 두 줄 두른 뚱뚱한 관리 하나와, 그 밖에 일복 입은 사람 이삼 인뿐이다. 그네들은 모두 다 흰옷 입은 이등객을 이상히 여기는 듯이 시선을 이리로 돌린다. 병국은 건너편에 앉은 누이에게 말이 들리게 하기 위하여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나는 네 덕분에 (이등을) 이등을 처음 탄다."
하고 웃는다.
"그렇게 이등이 부러우시거든 더러 타십시오그려."
하고 병욱도 웃는다.
"우리와 같은 아무것도 아니 하는 사람들이 삼등도 아까운데 이등을 어떻게 타니? 죄송스러워서……."
"그러면 왜 이등표를 사주셨어요. 저 짐차에나 처실어 주시지."
하고 병욱은 성을 내는 듯이 시치미뗀다. 영채는 우스워서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 남매간에 어린애 싸움같이 농담을 하다가 병국이가,
"영채 씨도 명년에 귀국하시겠소."
"녜, 제야 알겠습니까."
"왜, 나와 같이 오지. 그럼 나 혼자 올까. 형제가 같이 다녀야지."
하고 병욱이가 영채를 보다가 병국을 본다. 영채는,
"그럼 언니께서 데려다 주신다면 오지요."
하고 웃는다. 병욱은 어리광하는 듯이 병국을 보고 몸을 흔들며,
"오빠, 명년에 우리 둘이 같이 와요."
하고 묻는 말인지 대답하는 말인지 분명치 아니한 말을 한다. 병국은,
"그러면 얘하고 같이 오시지요. 댁이 없으시다니 내 집을 집으로 알으시고……."
"녜, 감사합니다."
하고 영채가 고개를 숙인다.
이러한 말을 하는 동안에 차가 벌써 걸음을 멈추며,
"사리잉, 사리잉!"
하는 역부의 소리가 들린다. 병국은 모자를 벗고,
"그러면 잘들 가거라."
하고 뛰어서 차를 내린다. 내려서 두 사람이 앉은 창 밑에 와서 선다. 두 사람도 내다본다. 몇 사람이 뛰어내리고 뛰어오르기가 바쁘게 또 차장의 호각 소리가 난다. 차가 움직인다. 병국은 모자를 높이 든다. 두 사람도 손을 내어두르며 고개를 숙인다. 병국은 차차 작아 가는 두 팔과 머리를 보고, 두 사람은 차차 작아 가는 모자를 두르는 병국을 보았다.
영채는 왜 그런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여진다. 그래서 정신이 황홀하여지는 듯하였다. 병욱은 슬적슬적 영채의 낯빛을 살피더니 영채를 웃기려고,
"얘, 너 그때에 눈에 석탄재가 들어가서 울던 생각 나니?"
하고 자기가 먼저 웃는다. 영채도 웃는다. 병욱은,
"석탄 가루 들어간 것이 그렇게 아프더냐?"
"누가 그것이 아파서 울었나. 자연히 화가 나서 울었지."
하고 그때 생각을 하여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 웃는다.
"아무려나 그때에 네가 우는 얼굴이 어떻게 예뻐 보이든지…… 내가 남자면 당장에 홀리겠더라."
"에그, 그런 소리만 하시지!" 하고 영채가 손으로 병욱의 무릎을 때린다.
"얘, 잠깐 서울 들러 가자."
"에그, 싫여요. 누가 보면 어쩌나."
"서울서는 지금 네가 죽은 줄 알겠구나. 그 이형식 씬가 한 이도."
"아마 그럴 테지요. 실상 죽었으니깐."
"누가? 네가? 왜?"
"그때, 나는 벌써 죽지 않았어요? 언니께서 얼굴 씻어 주실 때에."
"그러고 부활을 했구나."
"암, 부활이지. 참, 언니 아니더면 꼭 죽었어요. 벌써 다 썩어졌겠네."
"썩도록 깃허(붙어) 있나."
"그러면 어쩌고?"
"고기가 다 뜯어먹고 말지."
"그렇게 큰 것을 고기가 다 어떻게 먹어요?"
하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병욱은,
"얘, 네가 처음 나를 볼 때에 어떻게 생각했니?"
"웬 일본 여자가 이렇게 조선말을 잘하고 친절하게 하는고, 했지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퍽 활발한 여자다 했지요."
"그러고 너 그때에 먹은 것이 그게 무엇인지 아니?"
"나 몰라. 어떻게 먹는 것인지 몰라서 언니 잡수시는 것을 가만히 보았지요."
"내 아예 그런 줄 알았다. 그것은 서양 음식인데 샌드위치라는 것이어…… 꽤 맛나지?"
"응" 하고 고개를 까딱 하며 "샌드위치" 하고 발음이 분명하게 외운다.
104
차가 남대문에 닿았다. 아직 다 어둡지는 아니하였으나 사방에 반작반작 전기등이 켜졌다. 전차 소리, 인력거 소리, 이 모든 소리를 합한 '도회의 소리'와 넓은 플랫폼에 울리는 나막신 소리가 합하여 지금까지 고요한 자연 속에 있던 사람의 귀에는 퍽 소요하게 들린다. '도회의 소리!' 그러나 그것이 문명의 소리다. 그 소리가 요란할수록에 그 나라가 잘된다. 수레바퀴 소리, 증기와 전기기관 소리, (쇠마차 소리)…… 이러한 모든 소리가 합하여서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낳는다. 실로 현대의 문명은 소리의 문명이라. 서울도 아직 소리가 부족하다. 종로나 남대문통에 서서 서로 말소리가 아니 들리리만큼 문명의 소리가 요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쌍하다. 서울 장안에 사는 삼십여 만 흰옷 입은 사람들은 이 소리의 뜻을 모른다. 또 이 소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네는 이 소리를 들을 줄을 알고, 듣고 기뻐할 줄을 알고, 마침내 제 손으로 이 소리를 내도록 되어야 한다. 저 플랫폼에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이 분주한 뜻을 아는지, 왜 저 전등이 저렇게 많이 켜지며, 왜 저 전보 기계와 전화 기계가 저렇게 불분주야하고 때각거리며, 왜 저 흉물스러운 기차와 전차가 주야로 달아나는지…… 이 뜻을 아는 사람이 몇몇이나 되는가.
이렇게 북적북적하는 속에 영채는 행여나 누가 자기의 얼굴을 볼까 하여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병욱은 혹 자기의 동창 친구나 만날까 하고 플랫폼에 내려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도로 차실로 들어오려 할 적에 누가 어깨를 치며,
"병욱 언니 아니야요?"
한다.
병욱은 놀라 돌아서며 자기보다 이태를 떨어졌던 동창생을 보았다.
"에그, 얼마 만이어!"
"그런데 어디로 가오?"
"지금 동경으로 가는 길인데……."
"왜, 어느새에…… 여보, 그런데 좀 만나 보고나 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정하오."
하고 썩 돌아서더니,
"아무려나 내립시오. 우리집으로 갑시다."
한다.
"아니오. 동행이 있어서…… 그런데 누구 작별 나왔소?"
"응, 아니, 언니 모르셔요?"
"무엇을?"
"에그, 저런! 저 선형이 알지요. 선형이가 오늘 미국 떠난다오."
"선형이가 미국?" 하고 놀란다. 그 여학생은 저편 이등실 앞에 사람들이 모여선 것을 가리키며,
"저기 탔는데…… 이번에 혼인해 가지고 양주가 미국 공부하러 간다오. 잘들 한다. 다 미국을 가느니 일본을 가느니 하는데 나 혼자 이렇게 썩는구먼!"
병욱은 여학생을 따라 선형이가 탔다는 차 앞에까지 갔으나 너무 사람이 많아서 곁에 갈 수가 없다. 선형은 하얀 양복에 맨머리로 창 밑에 서서 전송 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대답하고, 그 곁 창에는 어떤 양복 입은 젊은 신사가 그 역시 연해 고개를 숙여 가며 무슨 인사를 한다. 전송인은 대개 두 패로 갈려서 한편에는 여자만 모이고, 한편에는 남자만 모여섰다. 그 남자들은 모두 다 서울 장안의 문명하였다는 계급이다. 병욱은 한참이나 그것을 보고 섰다가 중로에서 선형을 찾아볼 양으로 그 차실 바로 뒤에 달린 자기의 차실에 올라왔다. 영채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아까 탔던 사람은 거의 다 내리고 새로운 승객이 거의 만원이라 하리만큼 많이 올랐다. 어떤 사람은 웃옷을 벗어 걸고, 어떤 사람은 창에 붙어서 작별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벌써 신문을 들고 앉았다. 그러나 흰옷 입은 사람은 병욱과 영채 둘뿐이다. 병욱은 자리에 앉아서 방 안을 한번 둘러보고 영채더러,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앉었니?"
"어째 남대문이라는 소리에 마음이 이상하게 혼란하여집니다그려. 어서 차가 떠났으면 좋겠다."
할 때에 벌써 종 흔드는 소리가 나고,
"사요나라, 고키겐요우"
하는 소리가 소낙비같이 들리더니 차가 움직이기를 시작한다. 어디서,
"만세,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인다. 또 한번,
"이형식 군 만세!"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의(사람들이) 두 사람의 창 밖으로 얼른한다. 그것은 모시 두루마기에 파나마 쓴 패였다. 병욱은 아까 선형의 곁에 있던 사람이 형식인 것과, 형식이가 선형의 지아빈 줄도 짐작하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영채는 형식이란 소리를 듣고 문득 가슴이 덜렁 함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아무쪼록 형식을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방금 같은 기차에 형식이가 탄 것을 생각하매 알 수 없는 눈물이 자연히 떨어진다. 병욱은 영채의 손을 쥐며,
"얘, 울지 말아라. 울기는 왜 우느냐."
"모르겠어요."
하고 눈물을 씻으며 지어서 웃는다.
용산을 지난 뒤에 병욱은 선형을 찾아갔다. 선형은 병욱의 손을 잡으며,
"이게 웬일이오?"
"동경으로 가는 길이외다. 그런데 미국으로 가신다고요."
"녜, 편지를 하여 드릴 것인데 동경 계신지, 어디 계신지 계신 데를 알아야지요."
"나는 아까 남대문에서 우연히 경애 씨를 만나서 그래서 이 차에 타시는 줄을 알았지."
하고 마주앉은 신사에게 인사를 한다. 신사가 답례하면서 앉기를 권한다. 십여 년 영채로 하여금 고절을 지키게 한 형식이란 대체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기회 있는 대로 형식을 관찰한다.
105
영채는 혼자 앉아서 생각한다. 첫째, 형식이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건대, 어디 멀리로 가는 것인 듯하다. 나는 그가 이 차에 탄 줄을 알건마는 그는 내가 여기 있는 줄을 모르렷다. 그러고 또 한번 칠팔 년 지나온 생각이 활동사진 모양으로 한번 쑥 나온다. 팔자 좋은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적되, 슬픈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는 조고마한 기회만 있으면 그 슬픈 과거가 회상이 되는 것이라. 영채는 지금까지에 몇십 번 몇백 번이나 이 슬픈 과거를 회상하였으리요. 하도 여러 번 회상을 하므로 이제는 그 과거가 마치 일편의 소설과 같이 순서와 맥락(脈絡)이 정연하게 되어 어느 끝이나 한끝을 당기면 전체가 실 풀리는 듯이 술술 풀려 나오게 되었다. 칠팔 년간을 하루같이 일념에 형식을 그리고 사모하다가 마침내 형식을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려 한 것을 생각하매 형식의 생각이 더욱 새로워지고 정다워진다. 영채는 속으로 '한번 더 보고 싶다' 하였다. 그렇게 생각할수록에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진다. 죽은 줄 알았던 나를 보면, 형식도 응당 반가워하렷다. 만나서 속에 품었던 말이나 실컷 하여도 속이 시원하여질 것 같다. 내가 왜 그때에 형식을 찾아가서 '나는 지금토록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소' 하고 분명하게 말을 하지 못하였던고. '나를 사랑해 줄 터이요, 아니 할 테요' 하고 저편의 뜻을 아니 물어 보았던고. 이제 만나면 서슴지 않고 물어 보리라.
영채는 당장이라도 형식의 탄 차실에 뛰어 건너가고 싶다. 영채의 가슴에는 정히 불길이 일어난다. 그러나 '언니께 의논해 보고' 하고 꿀꺽 참는다.
이때에 차가 수원역에 다다랐다. 바깥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병욱이 선형을 데리고 돌아와서 자기의 곁에 앉히며,
"영채야, 이이는 김선형 씨라는 인데 내 동창이다. 지금 미국 가시는 길이구."
하고 그 다음에는 선형을 향하여,
"이애는 박영채인데 내 동생이오."
하고 소개를 한다. 소개를 받은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숙인다. 선형은 박영채가 어떻게 동생인가 한다. 병욱은 영채와 선형을 번갈아 보며 두 사람의 얼굴과 운명을 비교해 본다. 영채도 선형이가 형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모르고, 선형도 무론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칠팔 년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버리려 한 사람인 줄은 알 이치가 없다. 선형은 다만 형식이가 일찍 계월향이라는 계집과 추한 관계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니, 이 박영채가 그 계월향인 줄은 무론 알 리가 없다. 세 처녀 사이에는 이러한 말이 있었다. 서로 잘 공부를 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장차 힘을 합하여 조선 여자계를 계발할 것과, 공부를 잘하려면 미국을 가거나 일본에 유학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또 영어와 독일어를 잘 배워야 할 것과, 그 다음에는 병욱과 영채는 음악을 배울 터인데 선형은 아직 확실한 작정은 없으나 사범학교에 입학하려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로 각각 크게 성공하기를 빌었다.
차실 내의 모든 사람의 눈은 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세 조선 여자에게로 모였다.
선형이 자기의 자리로 돌아오며(돌아오매), 형식은 선형의 자리에 편 담요를 바로잡아 주며,
"그래 그 동행이 누굽데까?"
"박영채라는 인데 퍽 얌전한 사람이야요. 병욱 씨가 자기 동생이라고 그럽데다."
형식은 숨이 막히고 몸이 떨리도록 놀랐다. 그래서 눈이 둥그래지며,
"에! (누,) 누구요?"
하고 말이 다 굳어진다. 선형은 웬 셈을 모르고 이상한 듯이 형식의 얼굴을 보면서,
"박영채라고 그래요."
"박영채, 박영채!"
하고 한참은 말을 못 한다. 그 뒤에 앉았던 우선도 벌떡 일어나며,
"응, 누구? 박영채?"
세 사람은 한참이나 벙어리와 같이 되었다. 우선이가 형식의 곁에 와 앉으며,
"이게 무슨 일이어! 그러면 살아 있네그려! 동성동명이란 말인가."
형식은 두 손으로 낯을 가리더니,
"아무려나, 이런 기쁜 일이 없네."
하기는 하면서도 속에는 여러 가지로 고통이 일어난다. 영채를 따라 평양까지 갔다가 죽고 산 것도 알아보지 아니하고 뛰어와서, 그 이튿날 새로 약혼을 하고, 그 뒤로는 영채는 잊어버리고 지내 온 자기는 마치 큰 죄를 범한 것 같다. 형식은 과연 무정하였다. 형식은 마땅히 그때 우선에게서 꾼 돈 오 원을 가지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야 할 것이다. 가서 시체를 찾아 힘 및는 데까지는 후하게 장례를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새로 혼인을 하더라도 인정상 다만 일년이라도 지내었어야 할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칠팔 년 고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자기를 위하여 몸을 버리고 목숨을 버린 영채를 위하여 마땅히 아프게 울어서 조상하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였는가.
영채가 세상에 없으매 잊어버리려 하던 자기의 죄악은 영채가 살아 있단 말을 들으매 칼날같이 날카롭게 형식의 가슴을 쑤신다. 형식은 이빨을 악물고 흑흑 한다. 곁에 선형이가 앉은 것도 잊어버린 듯하다.
우선은 벌떡 일어나더니 저편으로 간다. 영채의 진부(眞否)를 탐험코자 함이라.
106
우선이가 일어선 뒤에 선형은,
"웬일입니까. 박영채가 어떤 사람이야요?"
한다. 그러나 대답이 없으므로,
"왜 박영채 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나요."
그래도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이 없다. 선형은 형식의 숙인 머리를 보고 앉았더니 혼자말 모양으로,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잠잠한다.
얼마 있다가 형식은 고개를 들더니,
"내가 잘못하였어요. 내가 죄인이외다. 큰 죄인이외다."
하다가 말이 막힌다. 선형은 더욱 의아하여 눈띄가 자주 돌아간다. 형식은 말을 이어,
"벌써 말씀을 드려야 할 것인데 인해 기회가 없어서…… 기회가 없다는 것보다 내 마음이 약해서 지금껏 잠자코 있었어요. 박영채는 내 은인의 딸이외다. 어려서 그 부친과 오라비, 두 사람은 애매한 죄로 옥중에서 죽고, 영채는 그 부친을 구할 양으로 남에게 속아서 몸을 팔아 기생이 (되었다가……" 할 적에 선형은, "에! 기생이) 되어요?"
하고 놀란다. 계월향이란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간다.
"녜, 기생이 되었어요. 그로부터 칠 년간."
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한참 주저하다가,
"나를 위하여서 정절을 지켜 왔어요. 무론 나도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그도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몰랐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나 있는 데를 알고 찾아왔습데다."
하고는 그 후에는 어떻게 말을 하여야 좋을는지 생각이 아니 난다. 선형은 아까 본 영채를 생각하고, 그러면 그가 기생이 되어 칠 년간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킨 사람인가 한다. 자기 생각에 계월향이라 하면 아주 요염(妖艶)하고 음탕한 계집으로 알았더니 이제 본즉 영채는 자기와 다름없는 얌전한 처녀로다. 그러면 어찌하여 형식이가 영채를 버렸는가 하여,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식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자살을 한다고 유서를 써놓고 평양으로 내려갔어요. 그래서 나도 곧 따라 내려갔지요. 했더니 부지거처지요. 그래서 자기 말과 같이 대동강에 빠져 죽은 줄만 알았구려. 했더니, 그가 지금 살아서 우리와 같은 차에 있소그려."
하고 슬픔을 표하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흔든다.
"그러면 접때 평양 가셨던 일이 그 일이야요?"
하고 선형은 정면으로 형식을 본다. 형식은 그 눈이 자기를 위협하는 듯하여 눈을 피하면서,
"녜."
하였다. 그러고 보면 영채가 죽었다 하는 날은 바로 형식과 자기가 혼인을 맺던 날이라.
선형은 지금까지 가슴속에 오던 의심― 즉 형식은 계월향이라는 기생에게 미쳤더라는 의심은 풀렸으나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새로운 괴로움이 가슴을 내려누름을 깨달았다. 자기 몸도 무슨 죄에 빠진 것 같고 자기의 앞에는 알 수 없는 어려운 일과 괴로운 일이 가로막힌 것 같다.
이때에 우선이가 엄숙한 얼굴을 가지고 돌아보며 일본말로,
"다시카다요(확실해)."
하고 형식의 곁에 앉으며,
"참 희한한 일일세."
"그래, 가서 말해 보았나?"
"아니, 문에서 앉은 것이 보이데. 아까 여기 왔던 이하고 무슨 말을 하는데……."
하다가 선형이 곁에 앉은 것을 보고 말 아니 하는 것이 좋으리라 하는 듯이 말을 뚝 그쳤다가,
"아무려나 잘되었네. 지금 그 여학생과 같이 동경으로 가는 모양이니까, 아마 공부하러 가는 게지."
형식은 걸상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눈을 감는다.
영채는 선형의 돌아간 뒤에,
"언니, 웬일인지 나는 가슴이 몹시 설렙니다."
"왜, 이형식 씨란 말을 듣고?"
"응, 여태껏 잊고 있는 줄 알았더니 역시 잊은 것이 아니야요. 가슴속에 깊이깊이 숨어 있던 모양이야요. 그러다가 이형식 군 만세라는 소리에 갑자기 터져나온 것 같습니다. 아이구, 마음이 진정치 아니해서 못 견디겠소."
"아니 그렇겠니. 어쨌든 칠팔 년 동안이나 밤낮 생각하던 사람을 그렇게 어떻게 쉽게 잊겠니? 이제 얼마 지나면 잊을 테지마는……."
"잊어야 할까요?"
"그럼 어찌하고?"
"안 잊으면 아니 될까요?"
병욱은 물끄러미 영채를 보더니 영채의 곁에 가 앉아서 한 팔로 영채의 허리를 안으며,
"형식 씨가 벌써 혼인을 하였다. 지금 동부인하고 미국 가는 길이란다."
"에? 혼인?"
하고 영채는 병욱의 팔을 잡는다. 병욱은 위로하는 소리로,
"아까 여기 왔던 선형이라는 이가 그의 부인이란다."
"그러면 그때에 벌써 약혼을 하였던가?"
하고 지나간 일에 실망을 한다. 자기의 지나간 생활이 더욱 슬퍼지고 원통하여진다. 자기는 세상에 속아서 사나마나 한 생활을 해온 것 같고 지금껏 전력을 다하여 오던 것이 아무 뜻이 없는 것 같아서 실망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더구나 자기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형식을 생각하여 왔거늘 형식은 자기를 초개같이밖에 아니 여기는 것 같다.
"언니, 왜 그런지 원통한 생각이 나요."
"그러나 장래가 있지 않냐?"
하고 힘껏 영채를 안아 준다.
107
형식은 즉시 영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전에 보았던 영채의 얼굴은 다 잊어버린 듯하여 꼭 한번 새로이 보아야만 할 것 같다. 꼭 죽은 줄 알았던 영채의 얼굴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앞에 앉은 선형을 보매 차마 영채를 보러 갈 용기가 아니 난다. 형식은 선형의 얼굴을 보았다. 선형은 무슨 실망한 일이나 있는 듯이 반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다. 그러다가 이따금 형식을 슬쩍 보고는 불쾌한 듯이 도로 눈을 감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기도 한다. 선형의 눈과 형식의 눈이 마주칠 때마다 형식의 몸에는 후끈후끈하는 기운이 돈다.
같은 차실에 있는 승객들은 대개 잠이 들었다. 형식도 뒤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고 아무 생각도 아니 하리라 하는 듯이 한번 몸을 흔들고 두 손을 마주잡아 배 위에 놓았다. 그러나 형식의 마음은 형식의 뜻을 좇지 아니하고 폭풍에 물결치는 바다와 같았다.
영채는 꼭 죽었어야 할 것이다. 살아 있더라도 자기가 몰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선형과 약혼이 되기 전에 만났어야 할 것이다. 약혼이 성립되고 미국을 향하고 떠나는 길에 만나게 한 것은 진실로 조물의 장난이다. 형식은 결코 영채를 버리려 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오랫동안 영채를 잊지 아니하였으며, 겸하여 다시 영채를 만날 때에는 영채에게 대한 애정이 유연히 솟아나서 속으로 영채와 혼인할 일과 혼인한 후에 즐거운 생활을 할 것과 아름다운 자녀를 낳아 이상적으로 기를 것까지 생각하였고, 또 영채가 기생인 줄을 안 뒤에는 돈 천 원을 얻지 못하여 종일 번민한 일도 있었다. 만일 영채가 평양에만 가지 아니하였던들, 죽으러 가노라는 유언만 없었던들 자기는 마땅히 영채와 일생을 같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은사(恩師)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고 칠팔 년간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온 영채에게 대한 의리도 다하였을 것이다.
형식은 또 영채와 선형을 비교하여 보았다. 선형은 형식이가 일생의 처음 접한 젊은 여자요, 또 선형의 자태는 누가 보아도 황홀할 만하므로 형식에게 극히 깊고 강한 인상(印象)을 주었다. 그래서 처음 젊은 여자를 접하여 보는 젊은 남자가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형식은 선형을 세상에 다시 없는 여자로 여겼다. 다만 그 외모가 아름다울 뿐더러 그 정신까지도 외모와 같이 아름다우리라 하였다. 형식은 선형을 대하여 본 첫날에 선형에게 여자에 관한 모든 아름다운 덕을 붙였다. 선형은 형식의 눈에는 더할 수 없이 완전하고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렇게 강한 인상을 얻은 그날 저녁에 다시 영채를 보았다. 영채의 외모도 물론 아름다웠다. 공평한 눈으로 보건대 영채의 얼굴이 차라리 선형보다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형을 천하 제일로 확신한 형식은 영채를 제이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선형은 부귀한 집 딸로서 완전한 교육을 받은 자요, 영채는 그 동안 어떻게 굴러다녔는지 모르는 계집이라. 이 모든 것이 합하여 형식에게는, 영채는 암만해도 선형과 평등으로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다만 선형은 자기의 힘에 미치지 못할 달 속에 계수나무 가지요, 영채는 자기가 꺾으려면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매화 가지였다. 그러므로 형식이가 제일로 생각한 선형을 버리고 제이로 생각하는 영채를 취하려 하였던 것이라. 그러다가 영채가 대동강에 빠지고, 게다가 김장로가 혼인을 청하매 형식은 별로 주저함도 없이 약혼을 허하였고 또 슬퍼함도 없이 영채를 잊어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형식은 선형에게 대하여서나 영채에 대하여서나 아직 참된 사랑을 가져 보지 못하였다. 대개 형식의 사랑은 아직도 외모의 사랑이었다. 형식은 선형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선형의 성격(性格)은 한 땀도 몰랐다. 선형이가 냉정한 이지적 인물(理智的 人物)인지 또는 열렬한 정적 인물인지, 그의 성벽이 어떠하며 기호(嗜好)가 어떠한지, 그의 장처(長處)가 무엇이며 단처(短處)가 무엇인지, 또는 그와 자기와 어떤 점에서 서로 일치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모순(矛盾)하는지, 따라서 그의 성격과 재능이 장차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목적(盲目的)으로 사랑한 것이라. 그의 사랑은 아직 진화(進化)를 지나지 못한 원시적(原始的) 사랑이었다. 마치 어린애끼리 서로 정이 들어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요, 또는 아직 문명하지 못한 민족들이 다만 고운 얼굴만 보고 곧 사랑이 생기는 것과 같은 사랑이었다. 다만 한 가지 다름이 있다 하면 문명치 못한 민족의 사랑은 곧 육욕(肉慾)을 의미하되 형식의 사랑에는 정신적 분자(精神的 分子)가 많았을 뿐이다. 그러니 형식은 다만 정신적 사랑이라는 이름만 알고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었다. 진정한 사랑은 피차에 정신적으로 서로 이해(理解)하는 데서 나오는 줄을 몰랐다. 형식의 사랑은 실로 낡은 시대, 자각 없는 시대에서 새 시대, 자각 있는 대로 옮아가려는 과도기(過渡期)의 청년― 조선 청년―이 흔히 가지는 사랑이다. 자기의 사랑이 이러한 사랑인 줄을 깨닫는다 하면 형식의 전도에는 대변동이 일어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는 형식에게는 지나간 한 달 동안에 행하여 온 일이 현미경으로 보는 것같이 분명히 떠나온다.
108
김장로 부부는 자기와 영채와의 관계에 대하여 암만해도 신용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번 자기가 영채와의 관계를 이야기한 끝에 김장로가 웃으며,
"남자가 한두 번 그러기도 예사지."
하였다. 형식은 더 발명하려고도 아니 하였으나, 자기의 인격을 신용하여 주지 않는 것을 얼마큼 불쾌하게 여겼다. 그 후부터 형식은 장로 부처를 대하면 한껏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형식의 생각에, 장로 부처는 자기가 선형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듯하였다. 처음에는 자기를 지극히 품행이 방정하고 장래성이 많은 줄로 알았다가 기생과 가까이하며 기생을 따라 평양까지 갔단 말을 들으매 형식은 갑자기 신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 사건 하나로 자기의 가치를 정하려 하는 것이 불쾌하였다. 될 수만 있으면 형식과의 약혼을 파하겠으나 한번 약속한 것을 체면상 깨트릴 수가 없다. 만일 형식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선형의 팔자로다…… 형식의 보기에 (장로는)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였다.
더구나 미국으로서 돌아온 하이칼라 청년 하나가 선형에게 마음을 두어 백방으로 운동한 것과, 교회에 어떤 유력한 사람이 사이에 나서서, 일변 형식을 헐어 그 약혼을 깨트리게 하고, 일변 그 청년의 재산 있는 것과, 영어 잘하는 것과, 미국 유학한 것을 칭찬하여 선형과의 혼인을 이루게 하려고 운동하던 줄을 안다. 그때에 장로 부처가 열에 여섯이나 그편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과,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 선형의 태도가 더욱 냉담하여지고 이따금 근심하는 빛까지도 있던 것을 안다. 그 중에도 장로의 부인은 웬일인지 형식에게 대하여 불쾌한 생각이 나서 가장 미국서 온 청년과 혼인하기를 주창한 것과, 그러나 장로의 양반인 것과 장로인 체면이 마침내 이 일을 반대한 것을 안다.
거의 십여 일 동안이나 형식은 김장로의 집에서 미움받는 사람이 되었던 것을 안다. 그때에 형식도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연해 삼사 일간 일절 장로의 집에 가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집에 꽉 들어박혀서 분노함과 부끄러움으로 혼자 괴로워하였다. 하루는 형식이가,
"오늘은 내가 먼저 약혼을 거절하고 말리다."
하고 옷을 입고 나가려 할 적에 선형이가 처음 찾아와서 은근하게,
"어디가 편치 아니하셔요?"
하고 그 뒤에는 순애가 과일 광주리를 들고 들어왔다. 아마 병이 있는 줄로 생각하고 위문을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선형은,
"어저께 여행권이 나왔어요."
하고 기뻐하는 빛조차 보였다. 형식은 그만 모든 분노가 다 풀리고,
"아니올시다. 몸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때에 선형과 순애는 물끄러미 형식을 보았다. 선형도 무론 자기 집에 일어난 문제를 안다. 부모가 형식에게 대하여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진 것도 안다. 자기도 기실 형식에게 대하여 좋은 감정을 아니 가졌다. 그러나 부모간에 형식을 미워하는 빛이 보이고, 형식도 그 눈치를 아는지 삼사 일 동안이나 꿈적하지 않는 것을 보매, 형식에게 대하여 일종 동정이 생기고 정다운 듯한 생각이 났다. 그래서 순애를 데리고 형식을 찾아온 것이라. 그때에는 선형의 마음에는 형식이가 극히 사랑스러웠다. 형식도 선형의 눈에서 그러한 빛을 보고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이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뛰어들어 건져 주겠다는 생각이 나는 것과 같은 동정이라. 잠시 효력이 있으되 오래는 가지 못하는 동정이라. 부부간의 사랑은 이래서는 아니 된다. 저 사람이 살아야 나도 산다. 저 사람이 행복되어야 나도 행복된다. 저 사람과 나와는 한몸이다…… 이러한 사랑이라야 한다. 선형의 형식에게 대한 사랑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대한 동정과 비슷한 것이었다. 형식은 이렇게 분명하게는 알지 못하여도 어떤 정도까지는 선형의 마음속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선형은 없지 못할 사람이었다. 형식의 생각에 자기의 전일생은 오직 선형의 위에 달린 듯하였다. 선형이가 설혹 자기더러 '보기 싫다, 가거라' 하더라도, 또는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로 차더라도 불가불 선형의 치맛자락에 매어달려야 하겠다. 김장로의 집에 가기가 불쾌하고 선형을 대하기가 불쾌하다 하더라도 그 불쾌한 것이 오히려 아주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슬퍼하는 것보다 나았다. 전신이 불구덩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팔이나 한 다리를 베어 내는 것이 나았다.
이렇게 형식은 그 동안 괴로운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떠나기 한 이삼 일 전부터 장로 부처의 형식에게 대한 태도는 극히 친절하게 변하였고, 선형도 더욱 은근하고 가깝게 굴었다. 형식은 겉정(인심)의 반복의 믿을 수 없음을 의심하면서도 하늘에 오를 듯이 기뻤다. 더구나 떠나기 전날 장로 부처가 자기와 선형을 불러 놓고 자기네 두 사람을 위하여 간절한 기도를 올린 뒤에 연해 '너희 둘이'라 하여 가며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할 때에는 형식은 세상에 나와서 처음 보는 기쁨을 깨달았다. '너희 둘이'라는 말이 자기와 사랑하는 선형과를 한몸을 만드는 듯하였다. 그때에는 선형도 형식을 슬쩍 보고 쌍끗 웃었다. 네 사람은 이 순간이 영원히 있기를 기도하였다.
109
형식은 이제부터는 자기 앞에는 오직 행복이 웃는 줄로만 생각하였다. 아까 남대문에서 떠날 때에도 여러 친구가 작별을 아껴 할 때에 자기는 오직 기쁘기만 하였다. 희경 일파가 여러 송별객 뒤에 서서 물끄러미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볼 때에는 미상불 가슴이 부듯함을 깨달았으나, 그래도 자기의 곁에 선 선형을 볼 때에 모든 슬픔이 다 스러졌다. 이제부터 자기는 선형으로 더불어, 이만여 리나 되는 지구 저편 쪽에 가서 사오 년 동안 즐겁게 공부를 마치고 그때야말로 만인 환호리에 선형과 팔을 겯고 남대문으로 돌아오리라. 그때에는 지금 여기 섰는 여러 사람들이 오늘보다 감정으로― 더 축하하고 더 공경하는 감정으로 자기를 맞으리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 비로소 서울이 그립고 남대문이 정답게 생각되었다. 남대문은 오직 행복된 자기를 보내고 맞아 주기 위하여서만 존재하는 듯하였다. 인해 차장이(차장의) 호각이 울고 만세 소리가 들릴 때의 형식의 감정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라.
선형은 여자라, 비록 신식 여자로 아무리 공명심과 허영심이 많아서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 동무들이 차차 차창에서 멀어지는 것을 볼 때에는 가슴에 고였던 눈물이 일시에 폭 쏟아져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울며 걸상에 쓰러졌다. 형식은 처음에는 가만가만히 선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 일어나시오. 눈물 씻고."
하다가, 이제는 이렇게만 할 처지가 아니라 하여 한참 주저하다가 한 팔을 선형의 가슴 밑으로 넣어 안아 일으켰다. 형식의 팔에 닿는 선형의 살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선형도 형식의 하는 대로 일어나면서 잠깐 형식의 손을 쥐었다. 그러고 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아이구, 이게 무슨 꼴이야요. 내지(외국) 사람들이 웃었겠습니다."
하고 웃는다. 그 눈물로 붉게 된 눈과 뺨이 더 곱게 보였다. 내지 사람들은 과연 웃었다.
우선은 형식의 뒷자리에 앉아서 빙그레 웃으며 자기 곁에서 일어나는 형식과 선형의 말을 들어 가며 신문을 보고 앉았더니 고개를 돌리며,
"여보게, 큰일났네그려."
한다. 형식은 선형만 바라보고 우선은 잊어버리고 앉았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응? 왜?"
"하하하, 그렇게 놀랄 것은 없지마는…… 오늘 아침부터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일경에 비가 오기 시작하여 금강 낙동강은 십여 척의 증수가 되었다고."
"어디."
하고 우선의 들었던 신문을 받아 보더니,
"그러면 철로가 불통하지나 아니할까?"
선형도 눈이 둥그래진다. 우선은,
"글쎄, 비를 아끼구 아끼구 하더니……."
하면(서)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휘휘 둘러본다. 황혼이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되, 하늘은 온통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선득선득한 바람에 이따금 굵은 빗방울이 섞여 떨어진다. 다른 승객들은 신문을 보고는 철롯길이 상할 것을 근심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이나 선형에게 별로 중대한 일은 아니었다. 철로길이 상하면 여관에 들어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때에 병욱이가 선형을 찾아오고, (그 다음에 선형이가 병욱을 따라가고,) 그 다음에 선형이가 돌아오고 형식이가 선형에게 병욱의 동행이 어떠한 사람이던가를 묻고, 선형은 "박영채라는데 퍽 얌전한 사람이야요" 하는 대답을 하고, 마침내 우선이가 탐험을 갔다가 "다시카다요" 하는 보고를 한 것이라.
이렇게 지나간 일을 생각하다가 형식은 마침내 선형더러,
"가서 박영채 씨를 좀 보고 와야겠소."
"가 보시지요."
하는 선형의 대답은 형식에게는 무슨 특별한 뜻이 품긴 것같이 들렸다. 실로 선형은 지금까지 마음이 불쾌하였다. 그러면 그것이 월향이라는 기생인가. 죽었다더니 그것은 거짓말인가. 속에는 별별 흉악한 꾀를 품으면서도 겉으로는 저렇게 얌전을 빼는가. 사람 좋은 병욱이가 고것의 꾀에 넘지나 아니하였는가. 오늘 형식이가(형식과) 자기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이 차를 골라 탄 것이나 아닌가. 혹 형식이가 아직도 영채를 잊지 못하여 남모르게 영채에게 떠나는 날을 알려 미국 가기 전에 한번 더 만나 보려는 꾀는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매 선형은 일종 투기가 일어나서 픽 고개를 돌린다. 형식은 선형의 불쾌한 낯빛을 이윽히 보고 섰더니 변명하는 듯이,
"그래도 한차에 탄 줄을 알고야 어떻게 모르는 체하겠어요."
하고 다시 앉아서 선형의 대답을 기다린다. 선형은 말없이 앉았다가 웃으며,
"글쎄 가 보세요. 누가 가시지를 말랍니까."
끝에 말은 없어도 좋은 말이다. 형식은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앉았더니 벌떡 일어서며,
"그러면 갔다 오겠소."
하고 우선더러,
"가서 영채 씨 좀 보고 오겠네."
"응, 가 보게. 그러고 내가 문안하더라고 그러게."
하고 슬쩍 선형을 본다. 우선은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장차 어찌 될는고 하여 본다.
영채를 보고 와서는 우선의 속도 아주 편치는 못하였다. 더구나 영채가 죽으려던 뜻을 변한 동기가, 일본으로 가게 된 이유가 알고 싶었다.
110
그전에는 한 미인으로 우선이가 영채를 자랑하였지마는, 영채가 형식을 위하여 지금토록 정절을 지켜 온 것과 청량리 사건으로 위하여 죽을 결심을 한 것을 보고는 영채를 색과 재와 덕이 겸비한 이상적 여자로 사랑하게 되었다. 만일 형식을 위한 우정(友情)이 아니었던들 어떤 정도까지나 열광(熱狂)하였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자기가 미치게 사랑하던 계월향이가 형식을 위하여 정절을 지켜 오는 박영채인 줄을 알 때에 우선은 미상불 창자를 끊는 듯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우정을 중히 여기고 협기 있기로 자임하는 우선은 힘껏 자기의 정을 누르고 형식과 영채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주기로 하였다. 만일 영채가 형식의 아내가 되면 자기는 친구의 부인으로 일생을 접할지니, 그것만 하여도 자기에게는 행복이리라 하였다. 그러다가 영채가 그 슬픈 유서를 써두고 평양으로 내려감을 볼 때에 우선은 깊은 슬픔과 실망을 깨달았다. 비록 아녀자에게 마음을 아니 움직이기로 이상을 삼는 우선도 그 후부터 지금까지 일시도 영채를 잊어 본 일이 없었다. 우선의 일기를 뒤져 보면 취침 전에 반드시 영채를 생각하는 단율 한 수씩을 지은 것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죽은 줄 알았던 영채가 살아서 같은 열차에 타고 있는 줄을 알고 보니, 우선의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자연한 일이라. 게다가 형식이가 아름다운 선형으로 더불어 아름다운 약속을 맺어 가지고 아름다운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을 보매, 더욱 부러운 생각이 난다. 우선은 벌써 아들을 형제가 넘어 낳고 삼십이 다된 자기의 아내가 행주치마를 두르고 어린애의 기저귀를 빠는 모양을 생각해 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밥 짓고, 옷 짓고, 아이 낳을 줄밖에 모른다. 자기는 그(와) 혼인한 지 십여 년간에 일찍 한자리에 앉아서 정답게 이야기를 하여 본 일도 없고 무론 자기의 뜻을 말하여 본 적도 없다. 잘 때에만 내외는 한자리에 있었다. 마치 아내는 자기를 위하여서만 있는 것 같았다. 홀아비가 육욕을 참지 못하여 갈봇집에 가는 셈치고 아내의 방에 들어갔다.
이러하는 동안에 아들도 나고 딸도 나고 지아비라 부르고 아내라 불렀다. 십 년 동안을 살아오면서도 서로 저편의 속을 모르고 알아보려고도 아니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실로 신기하다 하겠다. 그러나 우선은, 이는 면할 수 없는 천명을(천명으로) 알 뿐이요, 일찍이 관계를 벗어나려고도 하여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라는 것은 대체 이러한 것이니 집에다 먹여 두어 아이나 낳게 하고 이따금 가보아 주기나 하면 그만이라 한다. 그러고 아내에게서 못 얻는 재미는 기생에서 얻으면 그만이라 한다. 세상에 기생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이 실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식과 서로 대하면 이 문제로 흔히 다투었다. 형식은 엄정한 일부일부주의(一夫一婦主義)를 고집하고, 우선은 첩을 얻든지 기생 오입을 하는 것은 결코 남자의 잘하는(잘못하는) 일이 아니라 한다. 과연 우선으로 보면 첩이나 기생이 아니고는 오랜 일생을 지낼 것 같지 아니하다. 우선의 일부다처주의나 형식의 일부일부주의가 반면은 각각 이전 조선 도덕과 서양 예수교 도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반면은 확실히 각각 자기네의 경우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에게 만일 영채를 주고, 영채가 우선을 사랑해 준다 하면 우선은 그날부터라도 기생집에 가기를 그칠 것이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선은 형식의 경우가 지극히 부럽고, 자기의 처지가 지극히 불쌍히 보였다. 자기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도 하고 싶고 외국에 유람도 하고 싶었다. 기생을 데리고 노는 것도 좋지마는 기생에게는 무엇인지 모르되 부족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기생이 자기에게 친절한 모양을 보이고 또 그 기생이 비록 자기의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느 구석에 조곰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 부족한 점은 결코 작은 점이 아니요, 큰 점이었다. 그것은 아마 첫째, 정신상으로 서로 합하고 엉키는 맛이 없는 것과 또 사랑의 제일 힘있는 요소인 '내 것'이라는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돈을 많이 내어서 기생을 빼어 내면 '내 것'이 되기는 되지마는, 암만해도 정신적 융합은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외모의 사랑은 옅다. 그러므로 얼른 식는다. 정신적 사랑은 깊다. 그러므로 오래 간다. 그러나 외모만 사랑하는 사랑은 동물의 사랑이요, 정신만 사랑하는 사랑은 귀신의 사랑이다. 육체와 정신이 한데 합한 사랑이라야 마치 우주와 같이 넓고, 바다와 같이 깊고, 봄날과 같이 조화가 무궁한 사랑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 말은 아니 하지마는 속으로 밤낮 구하는 것은 이러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마치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 천에 한 사람, 십년 백년에 한 사람도 있을 듯 말 듯하다. 그래서 여자는 춘향을 부러워하고 남자는 이도령을 부러워한다. 자기네가 실지로 그러한 사랑을 맛보지 못하매, 소설이나 연극이나 시에서 그것을 보고 좋아서 웃고 울고 한다. 조선서는 천지개벽 이래로 오직 춘향, 이도령(의 사랑)이 (있었을 뿐이다. 저마다 춘향이 되려 하고, 이도령이) 되려 하건마는 다 그 곁에도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의 흉악한 혼인제도는 수백 년래 사랑의 가슴속에 하늘에서 받아 가지고 온 사랑의 씨를 다 말려 죽이고 말았다. 우선도 그 희생자의 하나이다.
이러한 우선이가 형식과 선형을 눈앞에 보고, 또 그립던 영채가 같은 차를 타고, 같은 기관차에 끌려가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울 것도 자연한 일이다. 또 영채는 이미 기생도 아니요, 겸하여 형식의 아내도 아니라. 오직 한 처녀다…… 하고 우선의 가슴에는 알 수 없는 생각이 번개같이 가슴에 일어난다. 그래서 우선은 형식의 간 뒤를 따라, 다음 차실 문 밖에 가서 바람을 쏘여 가며 가만히 엿본다. 형식은 영채의 곁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병욱도 이따금 말참례를 한다. 세 사람의 얼굴은 아주 엄숙하다. 우선은 들어갈까말까 하다가 형식의 돌아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뒷짐을 지고 기대어서 쿵쿵 찻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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