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이 되었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누가 봄을 기다리지 않으련만 윤수는 남달리 봄을 기다렸다. 윤수는 겨울 동안에도 볕만 나면 뒷산에 올라가서 마른 나뭇가지며 썩은 등걸 따위를 모아서 땔나무를 해 오기도 하고 멀리 뵈는 산봉우리의 허옇게 덮인 눈경치를 구경하기에 그다지 갑갑한 줄은 모르지만, 날이 흐리고 몹시 추운 때에는 자연 집안에 들어앉아 있게 되기 때문에 심심하고 갑갑한 시간을 보내기가 퍽 괴로왔다. 이제 따뜻한 봄이 왔으니 윤수는 산과 들에 나가서 마음대로 뛰놀고 힘껏 일을 하게 되었다.
윤수가 봄을 기다리고 봄을 좋아하는 것은 춥지 않고 따뜻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뾰죽뾰죽 돋아나오는 새싹, 파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하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 이런 것을 보기가 무척 좋았다.
윤수는 돋아나는 새싹이나 파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를 보면 오래 못 보던 동무를 만난 듯이 빙그레 웃고 좋아하고, 어떤 때는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새싹을 보고 무어라고 이야기도 해 보고 노래도 불러 보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아
돋아났어요
윤수는 언젠가 뒷집 교장네 작은 아이가 부르는 걸 듣고 배운 이 노래를 자꾸만 부르는 것이다.
윤수는 땅 속에서 파란 싹이 돋아나오는 것이 신기해서도 좋아하지만 길가에 오고가는 사람의 발길에 밟히면서 곱게 피는 민들레 노란 꽃도 썩 좋아한다.
봄날에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이나 하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그리고 길가에 핀 민들레 노란 꽃은 다 윤수의 좋은 동무였다. 윤수에게는 이런 동무밖에 동무가 없었다.
2
윤수네가 성재 동네 온 지는 일 년밖에 못되었다. 성재에 온지 석 달 만에 윤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윤수네가 처음 이 동네로 이사해 올 적에 허술한 집을 하나 사 가지고 왔기 때문에,윤수 아버지는 혼자서 손수 집을 고치고 영을 갈아 덮고 방 구들을 뜯고 다시 놓느라고 너 무 고달프게 지내다가 그만 눕기를 시작해서 시름시름 앓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병이 부쩍 더해서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 않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앓는 동안 윤수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이 정성껏 간호를 해드렸다.
윤수 아버지는 딸 하나는 일찍 시집보내고 이 동네 올 적에는 윤수 하나만 데리고 왔다. 그래서 어머니하고 세 식구가 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니까 어머니와 단둘이만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날 전에 조용한 밤인데,
「윤수야.」
부르고 나서 윤수의 손을 꼭 붙잡고 힘없는 목소리로,
「윤수야, 너 이담에 좋은 사람 돼야 한다. 좋은 사람 될려면 동무를 잘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함부로 동무를 사귀었다가는 큰일난다.」
아버지는 잠시 쉬어서,
「윤수야, 알겠니 ? 너 나쁜 아이들하구 놀면 안된다, 응? 내 아들 착하지,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서 꼭 그대루 해야 한다.」
그렇게 쉬엄쉬엄 이르시는 말을 듣다가 윤수는,
「아버지,염려 마세요. 그런데 아버지, 어떤 아이가 나쁜 아이야요? 무얼 보고 나쁜 아이, 좋은 아이를 가려요? 아버지, 그것만 더 일러 주셔요. 그러면 저는 그대루만 할 테야요.」
이렇게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잠깐 생각 하는 것 같더니,
「그래,내 말대루만 해라. 누구든지 말을 많이 하는 아이는 아예 사귀지 말아라. 그런 아이들은 믿을 수가 없느니라. 알겠니, 윤수야?」
아버지는 이렇게 간곡한 말로 일러 주었다.
「네,알겠읍니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윤수는 속으로 (옳지) 하면서 똑똑히 대답했다.
3
시집간 누이하고 매부가 오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보아 주어서 아버지 장사는 그럭저럭 지냈다.
아버지를 여읜 윤수는 슬프고 외로운 것을 참고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그럭저럭 지냈다. 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이 좀 있고 동네에 사 둔 땅마지기도 있어서 두 식구가 살아 가기는 걱정이 없었다. 윤수 하나 간신히 공부시킬 만한 형편도 되었기 때문에 윤수는 새해부터 학교에 들어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윤수는 참 심심했다. 그럭저럭 봄이 되고 농사 지을 철이 되어서 어머니는 사람을 얻어서 밭을 갈고 거름을 내기에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윤수는 더 심심하고 갑갑했다. 그래서 윤수는 갑갑한 때면 가끔가끔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의 아버지 무덤에 가서 놀았다. 어떤 때는 꼭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무덤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나 이담에 좋은 사람 될께요. 아버지,걱정 마세요. 말 많이 하는 아이하구는 놀지 않을께요,아버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달음박질해서 내려오곤 했다.
「윤수야, 너 어디 갔었니?」
어머니는 이렇게 묻는 것이다. 어머니는 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 나 아버지한테 갔다 왔어. 왜 아버지한테 가면 안돼요?」
「나하구 같이 가자,너 혼자만 가면 안 된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옷고름으로 눈을 씻는 것이다.
혼자 가면 왜 안돼요? 하고 불어 보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윤수야,윤수야!」
대문 밖에서 누가 찾는다. 나가 보니까 동네에서 늘 보던 아이다. 나이는 자기보다 몇 살 위였다. 보기에도 좀 컸다.
「윤수야, 나와 우리들하구 놀자. 너 왜 우리들하구 놀지 않고 밤낮 집안에만 틀어백혀 있니?」
「……」
윤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너 그리구 혼자 산으로 가서 뭘하니? 밤 낮 산에 가서 뭘하니?」
장손이란 아이가 이렇게 지껄이고 있는데 저쪽에 보니까 또 다른 아이가 둘이 있다. 그리고 장손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픽픽 웃는 소리가 들린다.
윤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얘,윤수가 왜 그럴까? 좀 바본가봐.」
장손이가 저희 동무들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윤수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하여튼 윤수는 썩 불쾌했다. 그리고,그런 애들하고 놀지 않고 들어온 것이 잘 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간곡하게 이르시던 것을 생각한 것이다.
4
그 이튿날이었다. 또 대문 밖에서 누군가 찾는다. 어머니는 어디 가고 없었다.
「윤수야,어머니 계시니?」
아버지 살아 계실 때부터 가끔 보던 사람이다. 동네에서 가끔 찾아오던 사람이다. 그런데,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도무지 온 일이 없었다. 윤수가 산에 아버지한테 간 동안에 왔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가끔 찾아가서 만난 모양이었다.
「허허,꼭 너의 어머니를 보아야 할 텐데, 어쩌나. 어머니 어디 가셨는지 너 모르겠니? 너 좀 가서 찾아보렴,응? 몇 살 이지.」
「열 살이어요.」
윤수는 겨우 이 한마디를 뱉어 버리고 인사도 하지 않고 들어와 버렸다.
(이 사람도 좀 말이 많으니 재미 없는 사람 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 아까 왔던 그 사람 아셔요? 우리 아버지 계실 때 가끔 우리 집에 오셨었나봐. 나이가 꽤 많은가봐. 수염이 길어요.」
「그래 그래,윗동네 주부님이로구나.」
「아마 그런가봐.」
이제 생각하니까 아버지 살아 계실 때도 오고 앓아 누웠을 때에 가끔 왔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엄마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요?」
「왜 그러냐?」
「글쎄 말이어요.」
「글쎄라니, 왜 그러니?」
「말이 좀 많지 않아요.」
「무슨 말이 많던?」
어머니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윤수는 어머니를 꼭 만나야 되겠다는 말이며, 공연히 남의 나이를 물어 보더란 말을 했다.
「애도,그만한 말을 하는 걸 가지고 그러니?」
「엄마 엄마,아버지가 말이 많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그러신 거 엄마도 알지?」
「글쎄 그리셨던가?」
어머니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큰 아이가 찾아와서 윤수를 불렀다. 이 큰 아이는 심부름 온 아이였다.
「윤수야,너 윤수지? 어머니 어디 가셨니? 너 왜 동무하고 놀지 않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윤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또 혼자서 아버지한테 갔다왔다. 어머니한테는 아버지 무덤에 갔다왔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판으로 다니면서 놀다 왔노라 했다. 전날 산에서 오다가 들판과 딴 동네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민들레꽃 오랑캐꽃도 구경하고 갓 깬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따라다니는 구경도 하고, 어떤 때는 병아리 한 놈이 어미 닭을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서 빽빽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손바닥에 놓아서 어미 있는 데 갖다 주고 오기도 했다. 그러기에 늦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너는 동무도 없니?」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면 윤수는,
「어디 믿을 만한 애가 있어야지요.」
5
윤수에게도 동무가 생겼다. 뒷집 교장네 애란이란 올해 여섯 살짜리 계집애였다.
애란이는 아직 학교에도 안 가면서도 노래를 잘했다. 처음에 저희 집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윤수는 밖에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애란이가 대문 밖엘 내다보다가 윤수가 혼자서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또 혼자서 쓸쓸한 것 같은 것을 알았는지 윤수더러 들어오라고 했다. 그것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눈과 고개와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다.
윤수는 가만히 보다가 슬금슬금 애란이 뒤로 따라 들어갔다. 애란네 집에는 여러 가지 전에 보지 못하던 훌륭한 꽃이 많았다.
그래서 그 꽃 구경을 하기에 정신없었다. 꽃구경을 하다가는 가끔 애란이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늘 웃기만 하는 애란이도 꽃과 같이 예뻤다.
왜 날 쳐다보니? 그런 말도 아니하고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아주 말이 없이 웃기만 하는 것이다.
애란이도 동무가 없어서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좀 있다가는 윤수보고 또 오라고 눈과 고개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애란이는 벙어리가 아니었다.
「엄마,나 잠깐 나갔다 올께요.」
하면서 윤수의 뒤를 따라와서 윤수네 대문까지 왔다 가는 것을 윤수는 보았다.
애란이는 그 뒤에도 가끔 윤수네 집에 와서 대문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윤수는 어느 틈에 그것을 알고 문을 급히 열고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두 아이는 말도 없이 애란네 집으로 가는 것이다.
어떤 때는 윤수가 애란네 집 대문 밖에 가서 안쪽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어느 틈에 안에서 뛰어나와서 말없이 윤수를 맞아들인다.
「너 어떤 꽃이 제일 예쁘지?」
「글쎄, 다 예뻐.」
「그래도 그 중에 어느 꽃이?」
「요것이 제일 예뻐.」
「그것 무슨 꽃인지 알어?」
「몰라.」
「시클라멘(Cyclamen)이란다.」
「뭐 시크라문?」
「그래,하나 줄까? 너희 갖다 심을래?」
「싫어, 그만둬. 나 여기 와서 너하구 둘이 같이 보면 되지 머.」
애란이는 고개만 까딱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놀다가 애란이가 먼산을 바라보면서 가만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윤수는 처음에는 가만히 듣다가 나중에는 따라서 해 본다.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하는 노래도 하고 다른 새 노래도 하고 그러다가, 「참 아름다워라」하는 노래도 해 보았다.
「애란아,그것 무슨 노래지?」
「그것 말이야,찬송가라는 거야, 또 할까?」
「그래, 또 해, 응?」
이렇게 두 사람은 찬송가도 제법 부르게 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어머니는,
「윤수야,애란이는 좋은 애더냐.」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애는 말이 없으니까요.」
「그럼 벙어리더냐?」
「아니야, 아니야. 어쨌든 좋은 애야.」
「그런데 윤수야,애란네 이제 읍으로 이사 간다더라.」
「참말이야? 엄마, 공갈이지?」
「참말이다. 이제 한 달 있다가 간다더라.」
「그래요! 엄마?」
윤수의 얼굴은 금방 빨개졌다.
「윤수야,우리도 토지 팔아 가지고 읍으로 갈까?」
「그래요, 엄마. 우리도 가요, 읍으로 가요.」
「정말 갈까,우리끼리 살기 적적한데…… 읍으로 가면 누나네도 가깝고 좋지!」
윤수는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더니 똑똑 한 목소리로,
「엄마, 우리 읍에 가지 말아. 우리 떠나면 아버지는 어떡해요? 아버지 혼자 버리고 가문 안돼! 애란네는 가두 우린 가지 말어. 아버지 손수 손질해서 얌전하게 꾸린 이 집에서 그냥 살아요!」
한 달이 지났다. 윤수는 말없이 웃으면서 떠나가는 애란이를 물끄레 바라보다가 달음박질로 아버지한테 갔다. 오래도록 아버지 옆에 앉아서 애란이한테 배운,〈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을 부르고 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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