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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는 송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지 달 만에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사진을 싼 종이를 뜯어 보았다. 피봉에 쓰인 글씨의 주인은 이전에 S를 향하여 인사할 때와 같은 얌전하고 반기는 태도로 곱게 써 있다. 글씨의 주인은 Y이다. 그런데 사진에는 Y가 혼자 있으리라 기대하였더니,Y 밖에 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Y의 친한 한반 동무이었다. S는 반가운 듯이 들여다보고 책상 서랍에 집어넣어 두었다.

 

S는 송도 어떤 소학교 교사로 있었다. 그 학교에는 여자부도 있고, 남자부도 있었는데, S는 여자부에서 많이 가르쳤다. 그 여학생들은 제일 나이 많은 아이가 열네 살 먹고, 모두 어리며 대개 얌전하고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본래 음악을 좋아하는 S는 열심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그리고 날마다 재미있는 동화를 많이 들려 주었다. 학생들도 열심으로 배우고, 재미있게 듣고, 그리고 S선생을 몹시 사랑하였다. 하학하여도 집으로 돌아 가지를 아니하였다.

하기휴학 후에도 학생들은 한모양으로 학교에 모여서 S선생의 소매에 매달려 놀며 더운 줄도 몰랐다. 그래서 S선생은 서울 자기 집에서 기다리는 것도 생각지 못하고 그대로 학교에 있었다.

Y는 그중에 성적이 좋고 S가 보기에 위인이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마음도 퍽 착한 아이였다. 여러 학생이 모두 S선생을 사랑하는 가운데 Y는 더욱 S를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집에 가서 객지에 있는 S의 의복 걱정과 식사 걱정을 간곡히 하였다. 말은 아니하여도 실상은 제일 S선생을 사랑하였다.

S선생은 개성을 떠나게 되었다. 첫째는 유학하기 위하여, 둘째는 학교 당사자와 사이에 조금 재미없는 일이 있어서, S선생이 하루는 하학하고 내려오면서 나는 이제는 이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간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내려갔다가 두 시간이나 지나서 무심중 다시 올라와 보았더니, 운동장 한 모퉁이에 한 학생이 아카시아나무를 의지하고 돌아서 있었다. S는 벌써 멀리서 보고도 누구인 줄 알고 가까이 가 보았다. Y는 다시 돌아서면서 들릴이만큼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S는 그 봄에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오호츠까〉고등사범학교의 기숙사 서편 모퉁이 방에 혼자 있는 S는 논에 벼이삭이 누우래지고, 길가에 억새가 허얘지고, 여기저기 언덕에 단풍이 빨개져서 가을빛이 무르익는〈무사시노〉넓은 들에 한가히 넘어가는 석양볕을 받으면서, 책상을 의지하고 말없이 앉아 있다. 멀리 들 경치를 바라보다가는 이따금 이따금 책상 위에 있는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러고는 또 눈을 감고 무슨 생각을 한다. 한참 있다가는 다시 눈을 떠서 사진을 들여다본다.

S는 동경 가서 고향 그리운 병이 났던지 늘 수심으로 지내었다. 그래 그것을 스스로 위로하여(실상은 옛날 그리운 병을 더 깊게 하였건마는) 가방에서 Y의 사진을 꺼내어 사진틀에 넣어 놓았다. 그 사진에는 본래 두 사람이 있었다. 얼굴 전체의 윤곽이 묘하고 예쁜데다가 입은 꼭 다물고 있으나,사람의 마음을 끌어가는 듯한 웃는 눈, 까맣고 동그란 눈의 주인은 Y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동무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빠진 데가 있고 작은 눈과 긴 눈썹과 좁은 미간에는 독한 시기가 가득한 듯하였다. Y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S에게 반김과 기쁨을 주었으나, 그 동무의 얼굴은 불쾌와 무서움을 주었다.

그래서 S는 가위로 그 동무의 얼굴과 몸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남은 Y의 사진에 아직 남아 있는 부분을 연필로 칠하여 묘하게 흐려 버렸다.

그리고 이따금 오는 Y의 편지를 픽 반가이 받아 보았다. 그리고 간단하고도 간곡한 회답을 해주었다. 그의 동무에게서도 혹 편지가 왔다.

 

여름방학이 되어 S는 서울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S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어느 여자 고등보통학교에 같이 와서 공부하던 Y와 그 동무가 찾아왔다. 그 동무는 Y와 함께 사진 박힌 학생이었다.

S는 퍽 반가와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고 물어도 보았다. 본래 말이 없고 얌전한 두 학 생은 방긋방긋 웃기만 하면서, 다른 대답이나 말은 별로 없었으나, 서울 와서 공부하는 재미가 어떠냐 묻는 말에는,

「시골서 선생님께서 저희를 가르치실 때 재미가 제일이야요.」

하는 대답을 힘있게 하였다.

S는 반가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동경서 가져온 그림책과 사진첩을 가방에서 꺼내 놓고, 고무신을 신고 참외를 사러 나갔다. 참외를 사 가지고 오면서 생각하다가 S는 깜짝 놀란 듯이 아차! 하였다. 그 사진첩에는 동경서 책상에 놓았던 Y의 사진이 붙어 있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내놓았었다. 속으로 많이 염려를 하면서 집에 들어갔더니, 과연 두 사람의 태도와 얼굴은 아주 일변하였다. 그림책과 사진첩은 접어 치워 놓고 두 사람은 무슨 몹시 부끄럽고, 몹시 섭섭한 일을 당한 듯한 얼굴로 당장 일어나 가려고 하는 모양이다.

여러 말로 만류하여 겨우 참외 한 쪽씩을 먹는 체하고는 두 사람은 바삐 달아나갔다. 그런 뒤에 S는 바삐 사진첩을 펼쳐 보았다. Y의 사진이 붙었던 자리가 함부로 찢어지고 없어졌다. (누가 이랬나, 누가 가져갔나) 하고 S는 생각하였다.

 

S는 가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갔다. 간지 두 달이 지난 후에 Y에게서 간단한 편지가 왔다;. 그 편지 속에는 Y의 혼자 박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동무는 개학해서 올라왔다가 폐병이 생겨서 시골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S는 그 편지를 보고 지난 여름에 볼 때에 그 동무의 금시에 까매진 얼굴과 눈물 머금은 눈과 꼭 깨물어 다문 입술이 생각났다. 그래서 책상 서랍을 뒤져보았다. 아직도 기왕 가위로 베었던 사진 조각이 몇 조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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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 불고 몹시 추운 저녁이었다. 정옥은 학교에 갔다 와서「에 추워」하면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책상에 책보를 놓고 나니깐 전보 한 장이 놓였다.

「어쩐 전보야.」

하고 얼른 뜯어 보았다. 전보의 사연은 이랬다.

〈할멈 금야 구 시 착〉

정옥은 이런 사연을 보고 이마를 찌푸리고 입으로는 웃었다. 그것은 그 전보가 안주 그 본집에서 온 것을 알고 마치 놀이각시 시집 보내는 것처럼 할멈을 보내면서 그것을 하필 자기에게 보내어 어떻게 처리하라는 것이 귀찮고 속상하기 때문에 이마를 찌푸린 것이요, 집에서 그렇게 비루먹은 개처럼 구박 하다가 썩은 생선처럼 노래기처럼 보내는 터에 반가운 식구나 손님처럼 전보로 미리 통지를 하고 오는 것이 할멈의 처지에는 고양이 장삼 입은 것 같고 농사군이 사모관대나 한 것처럼 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더구나 그래도 그것이 서울 간다고 좋다고 춤을 추면서 오겠지 하고 입으로는 웃는 것이다.

「전보들도 잘하지, 돈들도 많은 게야.」

정옥은 쯧 하고 혀를 차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전보 종이를 버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2

벌써 삼 년 전 일이다. 정옥의 둘째오빠가 그 부인과 화합하지 못하여 이혼한 후에 여러 해 동안 혼자 지내다가 새로 장가를 들어 서울서 학교 졸업한 새색시를 맞아들이고 회갑이 가까운 정옥의 모친은 더구나 노환이 몸에 떠나지 않기 때문에 집안일은 돌보아 줄 수 없는 형편이라, 아무리 간단한 살림이라도 식모의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충청도로 출가한 정옥의 언니 정순이 출가한 이후에 처음으로 친정에 오는 길에 함멈을 하나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 할멈은 나이 칠십이 가깝고 키가 좀 작고 얼굴은 꺼멓고 커다란 주름살이 많고 보기에도 뻣뻣하고 두터운 살가죽을 가진 노파이다. 그리고 아들이나 딸이나 세상에 도무지 혈육이란 하나도 없고 친척이 도무지 없는 그야말로 바위에서 낳았는지 장마비에 섞여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난 곳도 모르고 그러니까 제 나이도 모르고 물론 제 생일도 모른다. 아이들이 일부러,

「할멈 몇 살이오?」

하고 물으면 그 대답이 이렇다.

「충청도 있을 때 나하고 의좋게 지내던 처녀가 열 일곱 살인데 나하고 동갑이어서 나도 열 일곱 살이어.」

이 말을 듣고는 온 집안이 웃음판이 된다. 정옥은 몸이 오싹오싹 춥고 머리가 좀 아파서 자리를 펴고 누웠다. 가만히 누우니 할멈의 생각이 난다. 지난 여름방학에 집에 갔을 때 보던 생각이 난다. 공연히 싱글싱글 웃고 어깨를 실룩실룩하면서 춤을 추고 다니던 모양이 보인다. 하루종일 부엌에서 일하고 빨래하고 심부름하다가 어떻게 틈이 나서 주인마님이나 아가씨가 없는데 방안에 들어오면 고개를 기웃기웃하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작은 아씨 내 춤에 장단쳐 주어요.」

「그래 그래.」

그러면 할멈은, 좋다꾸나! 하고 두 팔을 벌리고 고개를 좀 갸웃하고 어깨를 놀리고 볼기짝을 흔들고 다리를 들썩거리면서 돌아 간다. 그러다가 흥이 나면 소리가 나온다. 그 소리는 늘 자청해서 하는 꼭 한 가지 소리다.

대모야 풍잠아 너 잘 있거라.
떨어지는 상투는 염낭에 넣고
……(여기는 정옥도 생각이 안 난다.)

도검불 치마는 검어서 좋고
홍당목 치마는 붉어서 좋다.

이상스럽게 우러나오는 딴 목소리를 내어 저 혼자 신이 나서 지껄이면서 춤을 추고 돌아간다. 늘 보고 듣는 것이라 그리 신기하지도 않아서 정옥은 소리를 질러,

「할멈 어서 나가서 저녁 시작하지, 또 마님한테 걱정 들으면 어떡해.」

그러면 할멈은 히히 웃으면서,

「밥은 만날 먹는걸 그리 급한가, 나는 늘 춤이나 추고 소리나 하라면 좋겠더라. 작은아씨도 지금 그러지 나처럼 늙으면 쓸데 없어. 죽으면 쓸데있나.」

「아이 어서 나가보아, 또 마님에게 야단맞으면 어떡해.」

「마님이 왜 야단하셔? 마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데, 떡도 사 주시고 저고리도 해 주시고 마님도 좀 들어와서 들으시라지. 내 소리를 들으면 모두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데, 이왕에는 인력거 타고 불려 다녔다오.」

그러고는 또 희희희희하면서 돌아서 나간다.

할멈은 집에서만 이렇게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에 가서도 그러고, 거리에 다니면서도 그런다. 할멈은 매일 주 인나리의 도시락을 가지고 은행에 가는 것이 한 일과요,그것이 할멈에게는 큰 기쁨이다. 그 시간이 되기만 기다리다가 그때가 되면 다른 옷을 갈아입고 춤을 추면서 나간다. 은행에 갈 때나 심부름 갈 때나 밖에 나갈 때에는 으례 빨간 주머니 달린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갈아입는다.

할멈은 이 빨간 주머니와 거기에 달린 은노리개가 큰 자랑거리다. 빨간 주머니는 충청도 아씨가 주고 간 것이요, 은노리개는 일본 공부갔던 작은나리가 준 돈 오전으로 어느 장날 산 것인데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잊어버리지 않고 달고 나간다. 마님이 흉하다고 때어 버리라고 해도 기어이 비뜰어매고 다닌다. 그리고 나가서는 거리의 상점에 앉아서 하라지도 않는 소리를 혼자 한다. 그러면 사람이 둘러서서 큰 웃음거리가 된다. 그래서 성내 거리에서는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는 충청도 할멈이라, 흑은 기생할멈이라 하여 유명하다. 그래서 나가면 으례 상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소리해라,춤 추어라.」

한다.

할멈은 나이는 육십이 훨씬 넘었지만 마음은 어린애다. 어린애들과 썩 잘 논다. 정옥의 큰집에는 어린애가 없으나 작은집에는 정옥의 조카가 둘이나 있다. 심부름을 갔다가는 그아이들과 놀고 과자를 얻어먹고 세월 가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늘 책망을 듣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얻어 먹을 뿐 아니라 정옥을 보고도 조용한 틈만 있으면 떡 사 달라고 하고 마님과 같이 장에 나가면〈떡 사 달 라, 사탕 사 달라〉염치없이 조른다. 그러면 어떤 때는 사주기도 한다.

할멈은 몸이 아주 든든해서 힘드는 일도 잘하고 별로 앓는 일이 없다. 그러다가 일이 정말 고되고 어려울 때에 몸이 좀 지쳐서 앓게 되면 방 한모통이에서 요를 머리까지 온통 들쓰고 끙끙 몹시 앓는다. 그럴 때는 당장 죽을 것처럼 앓는다. 그러면 주인나리는 불쌍한 늙은이라하여 아랫목에 눕게 하고 이불을 덮어 주고 마님이나 아씨가 친히 부엌에 나가서 밥을 짓는다.

정옥은 지난 가을에(개학할 임시에). 할멈이 찬 비를 맞고 빨래를 하고 나서 그날 밤에 몹시 않은 것이 생각나서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할멈이 대개는 말도 잘 듣고 일도 잘하고 춤추고 소리나 하여 낙천적으로 지내지만 조금이라도 심사가 틀리면 큰소리를 내어 대답을 하고 밥도 아니 먹고 들어와 아프다고 쓰고 눕는다.

할멈이 심사가 틀릴 때에 들어가 병을 앓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주인마님이나 아씨의 말을 안 듣고 항거하여 함부로 덤벼들 때에는 동정하던 주인들도 그만 진절머리가 나서 가만두지 아니한다. 처음에는 주인나리는 불쌍한 늙은이라 하여 역성을 들어 주고 주인 여자들을 잘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용하던 집에 정옥이 어머니의 환갑을 지내고, 아씨가 아기를 낳고 하기 때문에,일도 좀 많아졌거니와 한 가지 까닭은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늙은이라 하여 너무 덮어 주고 너무 동정하여 어떤 때는 한집에 세력을 잡은 나리가 주인마님이나 아씨보다 자기를 더 위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여 실상 분명히 할멈이 잘못하여 책망을 듣고 주인의 노염을 당할 때에도 할멈은 덮어 두고 마님이나 아씨를 그르다고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너무 길러 주고 그 성미를 길러 준 결과 마침내 옳거나 그르거나 주인 부인네의 말을 듣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주인을 업신여겨서 여러 가지 수욕을 더하고 야단을 하는 일이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일을 정옥은 친히 목도하여 잘 안다.

정옥은 여름에 갔을 때에 할멈이 심사를 내어 그 어머니에게 대하여 마치 자기 동배로 더불어 싸우는 것같이 아주 거만스러운 태도로 마디마디 큰 소리를 내어 야단하던 것과 그러다가 가없이 어슬렁어슬렁 대문 밖으로 쫓겨나가던 것과 나갔다가도 마님에게 사과도 아니하고 태연히 들어와서 웅크리고 앉았던 것이 생각나고,또 한번은 주인아씨와 충돌되어서 후원 우물가에서 입에 담을 수 없이 고약스러운 욕설을 퍼붓던 것도 생각났다. 그뿐 아니라 밖에 나가서 주인아씨와 심지어 나리의 흉을 선전하였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또 비녀와 돈을 훔쳐서 그 오빠 에게 초달1을 맞던 생각이 났다. 그때마다 할멈은 불쌍한 것인지 미운 것인지 불쌍히 여겨 도와 주어야 할지 미워서 내버려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정옥에게는 불쌍한 것을 어떻게 하여 구할까 하는 생각보다도 저 미치광이 같은 것, 저 미친 개 같은 것, 집에서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종내 쫓아 보낸 것. 이런 생각만 나서 할멈이라는 것은 끔찍하고 무서운 물건, 싫고 괴로운 것같이만 생각되었다. 자리에 누웠던 정옥은 저걸 어떡해, 하며 벌떡 일어나서 나왔다.

3

정옥은 부엌에 나가서 주인집 아주머니가 저녁 짓는 데 불을 때어 주고 앉았다.

「참 전보 보소오. 무슨 전봅디까?」

「보았어요, 그까짓 거.」

「왜 무슨 전본데.」

「우리 할멈이 오신다오.」

「응 접때 편지 왔다더니 그게구먼.」

「그렇다오, 글쎄 그걸 어쩌면 좋아요?」

「아 나가 보아야지.」

「나가 보면 무얼해요, 나가면 만나지요, 만나면 데리고 들어와야지요, 들어오면 여기를 두어 둡니까, 그걸 차마 한길에 내다 버립니까.」

「그래두 나가 보아야지 그거 불쌍하지 않소?」

「글쎄 아주머니 어떡해?」

「어떡하긴 어떡해, 나가보아야지. 나오라구 했다지?」

「아이구 난 몰라.」

「대관절 편지에 뭐랬읍디까? 다시 좀 이야기를 하오.」

「무어라고 그러긴 아주머니도 가 보시고 그래. 할멈이 너무 흉악하게 굴어서 암만 해도 둘 수 없어서 자기 소원대로 서울을 보내니 너 있는 곳에 네나 데리고 있든지 저 있던 곳이라는 데를 데려다 주든지 충청도 저희 고향으로 보내든지 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말은 좋지.」

「참 그랬지!」

「저 있던 데라는 데가 어데요?」

「사직골이라든가, 내 접때 이야기했지요, 왜.」

「그럼 거기 데려다 주지.」

「아주머니두, 그게 벌써 몇 해 전인데 그 집이 여태 그냥 있기나 하며, 또 있다면 그 따윗걸 무엇이 반가워서 맞아들인답디까?」

「글쎄, 우리 집에라도 두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고 어떡하나?」

정옥은 방안에서 저녁을 먹고 날이 몹시 춥고 바람이 또한 요란스럽게 불기 때문에, 더욱 쓸쓸한 건넌방에 혼자 앉아 있기도 싫거니와 건넌방은 춥고 안방은 따뜻하기 때문에 그냥 안방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더구나 내일은 임시 시험이 있으므로 여러 해 교사 노릇하던 아주머니에게 모를 것은 물어가며 수학을 복습하기에 골몰했다. 새로 난 교과서의 미터법은 옛날에 공부한 아주머니도 가르쳐 주지 못하기 때문에 정옥이 혼자서 교과서와 필기책을 가지고 씨름을 하면서 몹시 애를 쓴다.

그러다가 정옥은 우연히 아랫목 담벼락에 걸린 큰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를 보고,

「아이쿠」

하고 부르짖었다. 작은 침은 IX자를 지나고 큰 침은 VI에 가까왔다. 신의주 방면에서 오는 찻시간은 아홉 시 이십 분이라 벌써 도착한 지 오랬다. 정옥은 무슨 큰 죄나 지은 것 같이 멍하니 앉았다.

정옥의 눈에는 커다란 보퉁이를 옆에 끼고 정거장 구내에서 두리번두리번하고 허둥지둥 하는 할멈이 보였다. 그러다가 마중나올 줄 알았던 작은아씨가 아니 보일 때에, 혹 작은 아씨 비슷한 사람은 바삐 왔다갔다 하여도 모두 모른 체하고 지나갈 때에 할 수 없이 밖으로 바삐 밀려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휩싸여서 휘황한 전등불을 쳐다보면서 밀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밖에 나와서도 왔다갔다 하면서 작은아씨를 찾다가 인력거군과 여관쟁이들의 야단하는 소리, 자동차의 붕붕 하는 소리가 뒤섞여 몹시 분주한 가운데 뒤도 아니 돌아보고 달아나는 사람뿐이요, 작은아씨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할 때에 그만 절망하여 울 듯이 한모퉁이에 멍하고 섰는것이 보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여관쟁이에게 붙들려 어디로 들어갔을까? 그러면 평안히 자겠지. 혹 순사에게 붙들려서 벌벌 떨고 섰을까? 거기서 내 이름을 부르고 내 말을 하면 어떡하나, 만일에 집에서 번지를 적어 주었으면 어떡하나. 그래서 순사가 데리고 와서 야단을 하면 어쩌나.)

정옥은 이런 생각을 하고 아주머니와 같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인제 어떡하나 할 수 없지.」

하고 자리를 펴고 누웠다.

바람은 그냥 호통치듯 불고 있다. 조금 떨어진 뒷간 함석이 바람에 흔들려서 덜거덕덜거덕 야단을 한다. 바람에 대문 소리가 조금 삐걱 하고 나도〈순사가 와서 찾지 않는가〉 하고 깜짝깜짝 놀랐다.

4

열 시가 거의 다 되어서 정옥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대문 소리가 나더니 어느새 뜰에 사람 소리가 난다.

「손님 오셨읍니다.」

정옥은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눈이 둥그래서 아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서 나가 보라.」

하는 아주머니의 눈짓으로 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깜깜한 뜰에 시꺼먼 사람이 초롱불을 잡고 섰는 것이 눈에 보이자 마루끝에 회끄무레한 그림자가 선뜻 올라서면서,

「아이 작은아씨 아니야요!」

하는 것은 온다고 하던 할멈의 목소리다.

정옥은 하도 놀라고 기가 막혀서 말도 아니 나오는 것을 입맛을 다시고서 게다가 추워서 떨면서 인력거 값을 물어 주었다. 그리고 할멈이 들어와서 빙글빙글 웃으면서 묻지도 않는 것을 혼자말로 전하는 본집 소식을 잠자코 듣고 앉았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할멈 왜 왔노?」

「작은아씨 볼려고 왔지?」

하고 할멈은 한번 히히 웃었다. 그리고 작은 아씨에게 드리는 선물이라 하는 것처럼 먹던 귤 한 개를 내놓았다.

「작은아씨 잡수어 보셔요.」

정옥은 안 들은 체하고 일어서 건넌방으로 가면서,

「어서 가 자지, 할멈.」

그날 밤은 건넌방에서 정옥의 옆에서 잤다.

5

다음날 아침이다. 정옥은 학교에 가고 할멈은 정옥의 방으로 안방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혼자서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고 중얼거린다. 정옥의 아주머니는 하도 우스워서 쳐다보다가 얼굴에 분칠을 하얗게 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늙은이가 분은 왜 발랐나?」

「예쁘라고 발랐지.」

할멈은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서 돌아 간다. 너무 우습고 가없어서 다시는 묻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할멈은 정옥이 없는 새에 종일 묻지도 않는 말을 남이 듣거나 말거나 혼자서 지껄이고 있다. 그것은 모두 예전 있던 안주댁 정옥의 본집의 흉이다. 주인아씨의 욕이며 마님의 흉이며 나중에는 정옥의 오빠의 흉까지 입에 담을 수 없는 흉악한 말뿐이다. 듣다못해, 「늙은이가 있던 주인댁의 흉을 전해서는 못써!」

하고 그 입을 막았다. 그때에 할멈은,

「참말 그래 내 실수로군.」

하고 웃는다. 정옥의 아주머니는 집에 둘 수 없는 고약한 늙은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6

정옥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정옥이 학교에서 오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구두도 벗지 아니하고 할멈보고 말했다.

「할멈 있던 사직골 데려다 줄 터이니 지금 가.」

「작은아씨, 데려다 줄 테야? 그럼 가지.」

「할멈 짐도 가지고 가지.」

「가지고 갈까? 그랴.」

부엌에서 밥 짓는 정옥 아주머니에게 가서 귓속말 하는 것같이 하면서 혼자서 중얼거렸다.

「작은아씨가 나를 데리고 가서 떼어버리고 오랴고 그러지.」

이 말이 끝나기 전에 정옥은 큰 소리를 치면서, 저물었는데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할멈은 춤을 추면서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정옥을 따라 대문 밖으로 나갔다.

한 사십 분 만에 정옥은 돌아왔다. 바람이 몹시 부는데 나갔다가 온 정옥은 볼이 빨개져서 아무말도 없이 들어온다. 아주머니는 잠깐 기다려서 물어보았다.

「어떡하고 왔소?」

「사직골 가서 두리번두리번할 때 휙 돌아서 왔지.」

「저걸 어째!」

「…………」

「참 안주댁에서 편지 왔읍디다. 책상에 놓아 두었소.」

「편지?」

하면서 정옥은 방으로 들어갔다. 펼썩 주저 앉으면서 책상에 놓인 엽서를 읽어 보았다. 편지 사연은 이렇다.

  • ……할멈은 보았을 듯하다. 할멈은 그 댁에 두게 하든지 여비를 보내 줄 터이니 고향으로 보내 주든지 저 있던 집을 찾아 주든지 어디 있을 곳을 얻어 주든지 하지 함부로 갖다 내버려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신다. 너는 아직 앞길이 창창한 어린애다.

할멈을 갖다 버리고 와서 정옥은 마음에 죄송스러운 생각이 많고 큰 죄를 저질러 놓은 것 같아서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마음이 편치 못하던 터에 오라버니 편지에〈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신다〉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벽력이 내리는 듯이 속이 끔찍하고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것이 편지의 구절 같지 않고 공중에서 나는 무서운 소리같이 정옥을 위협하였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며 정옥은 망연히 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지으면서,

「어쩌란 말이야……나는 몰라.」

정옥은 한숨을 길게 쉬고 엽서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생각하였다.

사실 정옥은 아직 나이 어리고 더구나 인제 혼인 문제도 있는 터이라 앞길이 멀고먼 처녀다.

(내가 왜 남에게 못할 짓을 하랴. 남의 원한을 받으랴. 더구나 상관도 없는 일에 내가 죄를 입으랴.)

생각하였다. 겨우 밥을 좀 먹고 곧 아주머니와 같이 바로 떠났다. 바삐 사직골로 가서 그 자리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할멈은 그림자도 볼 수 없다. 이 모퉁이 저 모퉁이 한참 찾아보아야 할멈 같은 사람은 없다. 파출소에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한다. 몇 곳 상점에서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불어 날씨가 차기 때문에 밤도 깊지 않았는데 행인이 드물고, 여염집은 물론이요,상점 문들도 다 닫혔다. 그래서 더 물어보고 싶은 것도 못 물어보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고 바람만 야단스럽게 부는데 야주개 모퉁이 군밤 장수는 웅크리고 떨면서 걷어 가지고 돌아가기를 준비한다.

정옥은 집에 와 누웠으나 그날 밤은 꿈만 꾸고 졸연히 깊은 잠을 들지 못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도 선생의 말이 귀에 잘 들어 오지 않았다.

그 뒤에 두 달 석 달이 지나도록 종내 할멈을 만나지 못하고 그 비슷한 늙은이도 보지 못했다. 아무에게서도 그 소식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밤에 자려고 눈만 감으면 할멈이 싱글싱글 이상스럽게 웃으면서,

대모야 풍잠아 너 잘 있거라
떨어지는 상투는 염낭에 넣고
……웅웅
도검불 치마는 검어서 좋고
홍당목 치마는 붉어서 좋다.

얄궂은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눈앞에 떠오고 잠만 들면 전에 안주서 자기 어머니——마님에게 대들어서 이를 악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발발 떨면서 발악을 하던 흉악스러운 꼴이 자꾸만 보이고 뇌리에 달라 붙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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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이 되었다. 기다리던 봄이 왔다.

누가 봄을 기다리지 않으련만 윤수는 남달리 봄을 기다렸다. 윤수는 겨울 동안에도 볕만 나면 뒷산에 올라가서 마른 나뭇가지며 썩은 등걸 따위를 모아서 땔나무를 해 오기도 하고 멀리 뵈는 산봉우리의 허옇게 덮인 눈경치를 구경하기에 그다지 갑갑한 줄은 모르지만, 날이 흐리고 몹시 추운 때에는 자연 집안에 들어앉아 있게 되기 때문에 심심하고 갑갑한 시간을 보내기가 퍽 괴로왔다. 이제 따뜻한 봄이 왔으니 윤수는 산과 들에 나가서 마음대로 뛰놀고 힘껏 일을 하게 되었다.

윤수가 봄을 기다리고 봄을 좋아하는 것은 춥지 않고 따뜻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뾰죽뾰죽 돋아나오는 새싹, 파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하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 이런 것을 보기가 무척 좋았다.

윤수는 돋아나는 새싹이나 파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를 보면 오래 못 보던 동무를 만난 듯이 빙그레 웃고 좋아하고, 어떤 때는 땅 속에서 솟아나오는 새싹을 보고 무어라고 이야기도 해 보고 노래도 불러 보는 것이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아
돋아났어요

윤수는 언젠가 뒷집 교장네 작은 아이가 부르는 걸 듣고 배운 이 노래를 자꾸만 부르는 것이다.

윤수는 땅 속에서 파란 싹이 돋아나오는 것이 신기해서도 좋아하지만 길가에 오고가는 사람의 발길에 밟히면서 곱게 피는 민들레 노란 꽃도 썩 좋아한다.

봄날에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이나 하얗게 피어나는 버들개지, 그리고 길가에 핀 민들레 노란 꽃은 다 윤수의 좋은 동무였다. 윤수에게는 이런 동무밖에 동무가 없었다.

2

윤수네가 성재 동네 온 지는 일 년밖에 못되었다. 성재에 온지 석 달 만에 윤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윤수네가 처음 이 동네로 이사해 올 적에 허술한 집을 하나 사 가지고 왔기 때문에,윤수 아버지는 혼자서 손수 집을 고치고 을 갈아 덮고 방 구들을 뜯고 다시 놓느라고 너 무 고달프게 지내다가 그만 눕기를 시작해서 시름시름 앓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병이 부쩍 더해서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 않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앓는 동안 윤수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어머니와 같이 정성껏 간호를 해드렸다.

윤수 아버지는 딸 하나는 일찍 시집보내고 이 동네 올 적에는 윤수 하나만 데리고 왔다. 그래서 어머니하고 세 식구가 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니까 어머니와 단둘이만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몇 날 전에 조용한 밤인데,

「윤수야.」

부르고 나서 윤수의 손을 꼭 붙잡고 힘없는 목소리로,

「윤수야, 너 이담에 좋은 사람 돼야 한다. 좋은 사람 될려면 동무를 잘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 함부로 동무를 사귀었다가는 큰일난다.」

아버지는 잠시 쉬어서,

「윤수야, 알겠니 ? 너 나쁜 아이들하구 놀면 안된다, 응? 내 아들 착하지,내 말을 명심해서 들어서 꼭 그대루 해야 한다.」

그렇게 쉬엄쉬엄 이르시는 말을 듣다가 윤수는,

「아버지,염려 마세요. 그런데 아버지, 어떤 아이가 나쁜 아이야요? 무얼 보고 나쁜 아이, 좋은 아이를 가려요? 아버지, 그것만 더 일러 주셔요. 그러면 저는 그대루만 할 테야요.」

이렇게 물어 보았다. 아버지는 잠깐 생각 하는 것 같더니,

「그래,내 말대루만 해라. 누구든지 말을 많이 하는 아이는 아예 사귀지 말아라. 그런 아이들은 믿을 수가 없느니라. 알겠니, 윤수야?」

아버지는 이렇게 간곡한 말로 일러 주었다.

「네,알겠읍니다. 아버지, 염려 마세요.」

윤수는 속으로 (옳지) 하면서 똑똑히 대답했다.

3

시집간 누이하고 매부가 오고 동네 사람들이 와서 보아 주어서 아버지 장사는 그럭저럭 지냈다.

아버지를 여읜 윤수는 슬프고 외로운 것을 참고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그럭저럭 지냈다. 아버지가 남겨 준 재산이 좀 있고 동네에 사 둔 땅마지기도 있어서 두 식구가 살아 가기는 걱정이 없었다. 윤수 하나 간신히 공부시킬 만한 형편도 되었기 때문에 윤수는 새해부터 학교에 들어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윤수는 참 심심했다. 그럭저럭 봄이 되고 농사 지을 철이 되어서 어머니는 사람을 얻어서 밭을 갈고 거름을 내기에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윤수는 더 심심하고 갑갑했다. 그래서 윤수는 갑갑한 때면 가끔가끔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의 아버지 무덤에 가서 놀았다. 어떤 때는 꼭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무덤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나 이담에 좋은 사람 될께요. 아버지,걱정 마세요. 말 많이 하는 아이하구는 놀지 않을께요,아버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달음박질해서 내려오곤 했다.

「윤수야, 너 어디 갔었니?」

어머니는 이렇게 묻는 것이다. 어머니는 좀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엄마, 나 아버지한테 갔다 왔어. 왜 아버지한테 가면 안돼요?」

「나하구 같이 가자,너 혼자만 가면 안 된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옷고름으로 눈을 씻는 것이다.

혼자 가면 왜 안돼요? 하고 불어 보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윤수야,윤수야!」

대문 밖에서 누가 찾는다. 나가 보니까 동네에서 늘 보던 아이다. 나이는 자기보다 몇 살 위였다. 보기에도 좀 컸다.

「윤수야, 나와 우리들하구 놀자. 너 왜 우리들하구 놀지 않고 밤낮 집안에만 틀어백혀 있니?」

「……」

윤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너 그리구 혼자 산으로 가서 뭘하니? 밤 낮 산에 가서 뭘하니?」

장손이란 아이가 이렇게 지껄이고 있는데 저쪽에 보니까 또 다른 아이가 둘이 있다. 그리고 장손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픽픽 웃는 소리가 들린다.

윤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얘,윤수가 왜 그럴까? 좀 바본가봐.」

장손이가 저희 동무들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윤수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하여튼 윤수는 썩 불쾌했다. 그리고,그런 애들하고 놀지 않고 들어온 것이 잘 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간곡하게 이르시던 것을 생각한 것이다.

4

그 이튿날이었다. 또 대문 밖에서 누군가 찾는다. 어머니는 어디 가고 없었다.

「윤수야,어머니 계시니?」

아버지 살아 계실 때부터 가끔 보던 사람이다. 동네에서 가끔 찾아오던 사람이다. 그런데,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도무지 온 일이 없었다. 윤수가 산에 아버지한테 간 동안에 왔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가끔 찾아가서 만난 모양이었다.

「허허,꼭 너의 어머니를 보아야 할 텐데, 어쩌나. 어머니 어디 가셨는지 너 모르겠니? 너 좀 가서 찾아보렴,응? 몇 살 이지.」

「열 살이어요.」

윤수는 겨우 이 한마디를 뱉어 버리고 인사도 하지 않고 들어와 버렸다.

(이 사람도 좀 말이 많으니 재미 없는 사람 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 아까 왔던 그 사람 아셔요? 우리 아버지 계실 때 가끔 우리 집에 오셨었나봐. 나이가 꽤 많은가봐. 수염이 길어요.」

「그래 그래,윗동네 주부님이로구나.」

「아마 그런가봐.」

이제 생각하니까 아버지 살아 계실 때도 오고 앓아 누웠을 때에 가끔 왔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엄마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요?」

「왜 그러냐?」

「글쎄 말이어요.」

「글쎄라니, 왜 그러니?」

「말이 좀 많지 않아요.」

「무슨 말이 많던?」

어머니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윤수는 어머니를 꼭 만나야 되겠다는 말이며, 공연히 남의 나이를 물어 보더란 말을 했다.

「애도,그만한 말을 하는 걸 가지고 그러니?」

「엄마 엄마,아버지가 말이 많은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그러신 거 엄마도 알지?」

「글쎄 그리셨던가?」

어머니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큰 아이가 찾아와서 윤수를 불렀다. 이 큰 아이는 심부름 온 아이였다.

「윤수야,너 윤수지? 어머니 어디 가셨니? 너 왜 동무하고 놀지 않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윤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또 혼자서 아버지한테 갔다왔다. 어머니한테는 아버지 무덤에 갔다왔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들판으로 다니면서 놀다 왔노라 했다. 전날 산에서 오다가 들판과 딴 동네에서 이리저리 다니면서 민들레꽃 오랑캐꽃도 구경하고 갓 깬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따라다니는 구경도 하고, 어떤 때는 병아리 한 놈이 어미 닭을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서 빽빽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손바닥에 놓아서 어미 있는 데 갖다 주고 오기도 했다. 그러기에 늦었다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너는 동무도 없니?」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면 윤수는,

「어디 믿을 만한 애가 있어야지요.」

5

윤수에게도 동무가 생겼다. 뒷집 교장네 애란이란 올해 여섯 살짜리 계집애였다.

애란이는 아직 학교에도 안 가면서도 노래를 잘했다. 처음에 저희 집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윤수는 밖에서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애란이가 대문 밖엘 내다보다가 윤수가 혼자서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또 혼자서 쓸쓸한 것 같은 것을 알았는지 윤수더러 들어오라고 했다. 그것도 말로 하는 것이 아니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눈과 고개와 손짓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다.

윤수는 가만히 보다가 슬금슬금 애란이 뒤로 따라 들어갔다. 애란네 집에는 여러 가지 전에 보지 못하던 훌륭한 꽃이 많았다.

그래서 그 꽃 구경을 하기에 정신없었다. 꽃구경을 하다가는 가끔 애란이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늘 웃기만 하는 애란이도 꽃과 같이 예뻤다.

왜 날 쳐다보니? 그런 말도 아니하고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아주 말이 없이 웃기만 하는 것이다.

애란이도 동무가 없어서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좀 있다가는 윤수보고 또 오라고 눈과 고개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애란이는 벙어리가 아니었다.

「엄마,나 잠깐 나갔다 올께요.」

하면서 윤수의 뒤를 따라와서 윤수네 대문까지 왔다 가는 것을 윤수는 보았다.

애란이는 그 뒤에도 가끔 윤수네 집에 와서 대문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윤수는 어느 틈에 그것을 알고 문을 급히 열고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두 아이는 말도 없이 애란네 집으로 가는 것이다.

어떤 때는 윤수가 애란네 집 대문 밖에 가서 안쪽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어느 틈에 안에서 뛰어나와서 말없이 윤수를 맞아들인다.

「너 어떤 꽃이 제일 예쁘지?」

「글쎄, 다 예뻐.」

「그래도 그 중에 어느 꽃이?」

「요것이 제일 예뻐.」

「그것 무슨 꽃인지 알어?」

「몰라.」

「시클라멘(Cyclamen)이란다.」

「뭐 시크라문?」

「그래,하나 줄까? 너희 갖다 심을래?」

「싫어, 그만둬. 나 여기 와서 너하구 둘이 같이 보면 되지 머.」

애란이는 고개만 까딱였다. 두 사람은 이렇게 놀다가 애란이가 먼산을 바라보면서 가만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윤수는 처음에는 가만히 듣다가 나중에는 따라서 해 본다.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하는 노래도 하고 다른 새 노래도 하고 그러다가, 「참 아름다워라」하는 노래도 해 보았다.

「애란아,그것 무슨 노래지?」

「그것 말이야,찬송가라는 거야, 또 할까?」

「그래, 또 해, 응?」

이렇게 두 사람은 찬송가도 제법 부르게 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어머니는,

「윤수야,애란이는 좋은 애더냐.」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요, 그애는 말이 없으니까요.」

「그럼 벙어리더냐?」

「아니야, 아니야. 어쨌든 좋은 애야.」

「그런데 윤수야,애란네 이제 읍으로 이사 간다더라.」

「참말이야? 엄마, 공갈이지?」

「참말이다. 이제 한 달 있다가 간다더라.」

「그래요! 엄마?」

윤수의 얼굴은 금방 빨개졌다.

「윤수야,우리도 토지 팔아 가지고 읍으로 갈까?」

「그래요, 엄마. 우리도 가요, 읍으로 가요.」

「정말 갈까,우리끼리 살기 적적한데…… 읍으로 가면 누나네도 가깝고 좋지!」

윤수는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더니 똑똑 한 목소리로,

「엄마, 우리 읍에 가지 말아. 우리 떠나면 아버지는 어떡해요? 아버지 혼자 버리고 가문 안돼! 애란네는 가두 우린 가지 말어. 아버지 손수 손질해서 얌전하게 꾸린 이 집에서 그냥 살아요!」

한 달이 지났다. 윤수는 말없이 웃으면서 떠나가는 애란이를 물끄레 바라보다가 달음박질로 아버지한테 갔다. 오래도록 아버지 옆에 앉아서 애란이한테 배운,〈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을 부르고 또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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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침 아내가 밖에 나가고 없는 틈을 타서 나간다는 정분이를 불렀다.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는 종내 정분이가 있는 건넌방으로 갔다.

「정분아, 이제 네가 나가면 어델 나간단 말이냐. 그러지 말고 내 말대로만 해라. 그러지 말고 참고 있어라. 아짐마가 몸도 약하고 사람 없이는 안될 텐데……」

「……」

간곡히 타이르는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대답이 없이 볼이 잔뜩 부은 그대로 금방이라도 나갈 자세를 취하고 외면을 하고 있는 정분이 꼴이 얄밉기도 하다.

「에익 이년」하고 일어서고 말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린 정분이가 불쌍해서 못 견디겠다. 어린것이 불쌍한 생각과 자기의 정신이 통쾌해지지 않는 안타깝증이 어울려서 그는 홱 달려들어 정분이를 껴안았다.

「정분아,정분아……」

이렇게 정답게 불러 보았으나 정분이 자신은 붉게 상혈된 눈만 두꺼비 모양 껌벅거리고 있고 아무 감각이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그는 단념할 수가 없다.

「정분아 네가 아무리 어리기로서니 내 마음을 모른단 말이냐, 응 정분아.」

그는 울음까지 섞인 목소리로 정분이 어깨를 흔들었다.

「응, 얘 정분아……」

그는 다시 한번 정분이 어깨를 흔들었다.

「아저씨 맘은 저두 잘 알아요. 그래두 저는 나가겠어요. 나가라는 걸 나가지 어떻게 있어요?」

정분이의 목소리도 약간 흐려지고 떨렸다. 그래도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 같지는 않다.

「이애가 글쎄 나가라긴 뭐 아짐마기 널 미워서 그랬겠니,네가 하두 말썽을 부리니까 화가 나서 그랬지. 내가 있으라면 그만 아니냐. 내가 이 집의 주인이 아니냐, 내가 월급을 주지 않니.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주는 게 아니냐? 너도 그만한 건 알겠구나!」

그는 이런 말까지 해본다.

「그래두 아저씨는 늘 나가 계시구 집엔 얼마 계셔요? 집에서 일 시키는 아줌마가 나를 보기 싫다구 나가라는 걸 어떻게 있어요. 저두 인제 이 집에 있기 싫어요. 씨씨해요.」

아내가 하던 말까지 덧붙이는 정분이의 말은 냉정하였다. 아내가 있었더면 또 한번 야단이 날 판이다.

「음!」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믿었던 자기의 인격 이라는 것이나 자비심에 가까운 사랑이란 것도 몇 푼어치 안되는 걸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얼굴이 달아오는 걸 느끼며 화가 날 지경이다. 종내 벌떡 일어났다.

「그래두 넌 못 나간다. 네 맘대로 못 나간다. 너의 어머니가 와서 널 어쨌느냐고 내놓으라면 어쩌니? 내가 그렇게 말리는 말두 안 듣고 나가겠단 말이지, 안된다.」 \

정분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내쏘았다.

「내 맘대로 하지 누구에게 맸나요?」

밖에서 대문 열라는 종소리가 나는데 정분이는 대문을 열기 위하여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고 돌아앉아서 속으로 옹알거리며 제 보따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는 얼른 나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가게집에 접때부터 부탁했더니 음식두 잘 하고 얌전한 아이 하나 있다구 내일 모레쯤 데려다 준대요. 에잇 속이 시원해……」

아내는 아무 일도 없이 다 되었다는 듯이 싱긋이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온다.

「글쎄……」

아내와 더 말해야 소용이 없는 줄 안 그는 모자를 쓰고 나가버렸다. 대학 강의시간이 있어서 더 머무를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아직 완전히 응낙을 하지 아니했다는 속셈으로〈글쎄〉를 던져 놓고 나오기를 잊지 아니했다.

아내는 정분이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이 썩썩 방걸레를 치고 있다. 건넌방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남편이 나간 뒤를 걷어치운 다음에 아내 경희는 조간신문을 들어서《여인 천하》를 들여다보고 있다. 쥐 이야기를 읽는 그녀는「과연 옛날 이야기로군」하면서 그리 흥미를 느끼지 않는 성싶었으나 내려읽고 있었다.

「홍 아저씨두 암만 그래두 아줌마 편이지 무얼 그래.」

정분이는 단발머리에 흰〈에리〉달린 여학생 교복에 백환짜리 브로우치를 붙이고(그것은 지난 가을에 애기를 업고 경희를 따라 미도파에 갔을 때에 산 것이다) 살짝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서 중얼거린다.

「날 보기 싫다는데 눈에 뵐 거 없지 기까짓거——」

정분이는 주인 아줌마에게 간다는 인사도 안하고 보따리를 끼고 대문을 나서서 뺑소니를 쳐버렸다.

정분이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다. 사실 요새 경희의 입에서는 정분이에게 대해서 보기 싫다는 말이 가끔 나왔다. 경희가 정분이를 보기 싫다는 것은 그 행동이나 태도가 보기 싫다는 것이지 사람 자체가 보기 싫다는 건 아니었다. 정분이가 불쌍하다는 것은 경희도 늘 생각하고 마음에 먹고 있는 일이다. 불쌍하다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키워서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시집까지 보내 주려고 하는 생각은 내외가 마찬가지였다.

(어린것이 철이 없어 그렇지.)

그가 정분이에게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나 아내가 생각하는 것은〈아직 철이 없는 것이 그렇지〉하는 것이었다. 정분이가 말을 안 듣고 말썽을 부릴 때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 하고 언제나 눌러오고 참아오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새에 들어서 아내는,

「안됩니다. 벌써 바탕이 글렀는걸.」

정분이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정적으로 역설하는 것이다.

어제 저녁에도 정분이 말이 나와서 아내는 가장 냉정하게〈바탕이 글렀는걸〉을 되풀이 하며 역설하였다. 그럴 적마다 그는 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바탕은 무슨 바탕, 어디 바탕이 따루 있소? 그야 물론 소질 관계두 좀 있긴 있지만 당신은 밤낮 바탕 바탕 하니 소질이 좀 좋지 못한 놈은 절대루 희망이 없단 말이오? 그런 게 아니야.」

그는 바탕이 좋지 못한 아이라도 잘 가르치면 된다는 주장을 늘 해왔다. 그럴 적마다 아내는 반대다.

「홍, 당신이 해보시구려. 왜 못하는 거요. 교육가요 종교가요 성자로 자처하는 분이 왜 못하셨소?」

아내는 무심히 하는 말이지만 그에게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가슴을 우벼내는 것같이 아픈 일이었다.

대문을 나선 그는 시간이 바쁘건만 발걸음이 내쳐지지 않았다.

(그 놈이 정말 내 말을 안 듣고 나갈까? 나갔을는지도 모른다. 나갔을 거다.)

정분에게 대한 조바심이 첫째요, 다음에는 그날 아침에 아내가 던진 그 말이 켕겨서 였다.

「교육가요 종교가요 성자로 자처하는 분이 왜 못하시오?」

하는 아내의 말에,

「내가 언제 성자로 자처했던 말이오? 당신은 절대로 그런 말을 마오. 그저 크리스찬으로, 또 세상에서 종교가로 지목받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보자는 거지!」

하고 아내의 말을 막아 놓았지만 그것이 마음에 몹시 걸린다.

목구멍에 반찬 가시가 걸린 이상으로 마음에 걸린다.

(내가 언제 성자로 자처했단 말인가.)

그는 버스길로 나가면서 곰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교회 경영의 여학교 선생 일을 볼 때 일이다. 어떤 말이 적고 생각을 많이 하는 모범생인 학생으로 그리고 자기를 잘 이해하는 학생 한 사람이 조용히,

「선생님은 요새 보통 사람은 아니야요. 저희들 눈에는 성자로 보이어요.」

하더란 말을 한 일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또 한번은 그 학생이,

「선생님이 언젠가 아침에 학교에 올라오셔서 밤 동안에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 별일이나 없는가 하고 염려가 되더란 말씀을 하셨지요. 그때에 어떤 아이는 입을 비쭉거리고 웃고 어떤 아이는 선생님 참말이예요? 하고 의아스러운 질문을 던졌지만 저희 몇 사람은 선생님이 사실 그러시리라고 믿었어요.」

하더란 말을 아내에게 솔직하게 한 일이 있긴 하다. 그리고 아내를 믿고 간격이 없이 생 각하기 때문에 요새 교육가는 물론이요 종교가란 사람들도 구십 구 퍼센트는 가짜라고 한 말이 있었다. 그때에 아내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 구십 구 퍼센트 가짜 내놓고 일 퍼센트가 진짜인 당신이시란 말이지요.」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성자로 자처한 일은 없다.

〈성자?〉〈성자?〉 내게 어느 정도 성자다운 사랑이 있다면 어째서 정분이가 내가 있는 집을 버리고 나가려고 할까? 이러니저러니 해야 내 사랑이 부족한 탓이다. 내 사랑의 힘이 부족한 까닭이다. 나는 사랑하는 체한다. 사랑하느라고 흉내를 내 왔었다.

언젠가 그것도 그 여학교 일을 볼 때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다가 전차를 기다리고 있는 데 어디서 사람의 신음소리가 들린 것을 살 펴보았더니 길 한모퉁이에 기다란 석재가 쌓여 있고, 그 위에 시커먼 그림자가 있는 데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쫓아가서 들여다본즉 어떤 계집애가 옹크리고 누워서,

「배아파, 아이구 배아파……」

하고 울고 있는 것이다.

「너의 집이 어디냐?」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고 그저,

「아이구 배아파……」

만 연발한다. 하도 물었더니 계집애는 고개만 흔든다. 그는 다짜고짜로 계집애를 업고 마침 떠나려는 전차를 탔다. 전차에서 내려서도 집에까지 들어가는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그래도 무거운 줄도 모르고 집에까지 들어가서 계집애를 마루위에 내려놓았다. 집에서는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무슨 송장이나 메고 들어오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계집애를 데리고 온 사정이야기를 하고 물을 끓이라고 해가지고 옷을 벗긴 다음에 온몸을 씻어주고 다른 옷을 갈아입혔다. 그래도 벌벌 떨고,

「아이구 배아파!」

를 연발하는 것을 소화제 약을 먹여서 아랫목에 재웠다. 〈배아파〉소리가 밤새도록 계속되는 것을 들으면서 하룻밤을 지내고 아무리 약을 써주어도 낫지 않기 때문에 S병원에 입원을 시켰더니 계집애가 일주일 만에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한동안은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그대로 성자라고도 하고 성자로 자처한다고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사랑이 도대체 몇 푼어치나 되는 것인가 이번에 시험할 때가 왔다. 그놈이 과연 나갈 것인가 안 나갈 것인가 내 사랑의 힘이 몇 푼어치나 되나 그놈을 붙들어 놓을 만한 힘이 내게 없는가, 오오! 위선자며 성자에는 발뒤꿈치두 못 따를 내가…… 오오! 위선자!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차에 오른 그는 거기에 같이 탄 승객들이 자기를 이상스럽게 빈정대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것 같다. 아까 정분이가 나를 이상스럽게 물끄레 바라보던 것도 나를 비웃고 빈정대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얼 그래? 당신이 날 정말 생각해서 그러는 거요. 가장 사람을 애끼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러지 아줌마보다 나을 게 있을라구.」

정분이란 년은 제법 내 속을 저울질해 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차에서 막 내리자 곤색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빨리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행여나 정분이가 아닌가 하고 몇 걸음 따라가 보았으나 그것은 그가 잘 아는 어떤 여학교 교표를 붙인 진짜 여학생이지 정분이는 아니었다.

그는 그날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나 친구들과 차를 마실 때나 그 마음과 생각이 정분이로 인하여 점령을 당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종로로 나와서 K관이라는, 밤에는 술을 팔고 낮에는 곰탕 전문을 하는 집에서 점심 요기를 하는 참이었다. 상 심부름을 하는 계집애가 있는데 얼굴에 살이 많고 광대뼈가 좀 두드러졌지만 눈매와 입 모양에 꽤 귀염성이 있는 것이 정분이와 모습이 비슷하였다. 모습도 비슷하거니와 몸 가지는 태도와 머리며 옷매무새가 단정한 데가 없고 모두 흐트러진 꼴이 꼭 정분이 같았다. 정분이가 시골서 갓 올 때처럼 아직 시골티가 벗겨지지 아니했다.

「너 어디서 왔니? 고향이 어디냐 말이다.」

「강경서 왔슈 ——」

마침 고향도 비슷하고 싱글싱글 웃는 것도 정분이와 어지간히 비슷하다. 꽤 귀염성스러우면서도 행동에 빠진 데가 있고 주책이 없어 보였다.

정분이가 그네 집에 온 것은 삼 년 전 정월 어느 날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오후였다. 웃옷 도 못 입고 옹크리고 왔다.

그때 나이는 열세살이라 했다. 머리도 제 손으로 빗을 줄 몰랐다. 치마는 흔히 폭이 찢어진 것을 질질 끌고 다녔다. 코도 좀 홀렸다. 그러면서도 늘 싱글싱글 웃고 언제나 무슨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든지 빨래를 하든지 언제나 입을 닫치고 있지 않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떤 때는 찬송가도 곧잘 불렀다. 그러나 흔히는 유행가를 불렀다. 목메인 이별가도 불렀다.

「너 여기 오기 전엔 어디 있었니?」

「……」

그의 아내가 짐작을 하면서도 물어보면 흔히는 대답이 없었다. 말을 아니하는 것은 주인 아저씨가 있기 때문이었던지 아무도 없고 아내와 단둘이만 있을 때는 더구나 신바람이 나서 묻지도 않는 말도 이야기를 곧잘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밥두 안했어유.」

「그럼 무얼 했니.」

「애 봤지 머.」

정분이 말 본때가 버릇이 없다는 것이 그의 아내의 첫째 성화거리고 핀잔거리였다.

「철 없는 게 그러면 어때?」

그러면 아내는 웃으면서,

「당신은 무조건 정분이 역성이구려.」

「역성이 무슨 역성이어, 깃까짓놈 말씨가 아무려면 어떠냐 말이지.」

「철이 없다니 생각을 해보시구려. 아무려면 글쎄 우리 애미란 년두 네살부터 꼭꼭 말을 제대루 하지 않었수. 그런데 열 세살이나 됐다는 게 어른 앞에서 말버릇이 그게 뭐겠소.」

(애미는 그들의 외손녀 이름이었다.)

「배운 데가 없단 말이지.」

「아무리 밴 데가 없으면 그럴라구.」

그의 아내는 쓴웃음을 웃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you면 그만이 아니오, 민주주의 시대에 차별할 게 무어요.」

그는 한 마디 덧붙이고 웃어넘겼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도 제일 곤란한 문제는 자다가 자리에 오줌싸고 가끔 바지에 오줌싸는 것이다.

「아이구 지린내.」

아내와 식구들이 콧살을 찡그리고 얼굴을 돌리면 그는 그러는 식구들에게 눈을 홀겼다. 그리고,

「그게 다 제 집에서 어붓애배 밑에서 구박 받은 결과로 그런 것이야,얼마나 불쌍해! 저는 얼마나 답답할 거야!」

하고 정분이 듣지 않는 데서 가만히 정분이 역성을 들었다.

정분이는 신바람이 나면 예전에 다른 집에 있을 때에 지내던 이야기를,시키지도 않는 것을 절절 잘 지껄이는 것이다.

주인 마누라가 밤낮 어린아이를 내버려두고(제게 맡겨 두고) 나가다닌다는 이야기며, 그러면 저는 애를 업고 동네로 돌아다니는 데,그 동네에는 미군이 가끔 드나드는 집이 있고 그리고 집마다 색시들이 많이 있어서 밤이면 젊은 남자 손님들이 많이 몰려와서 술을 먹고 춤을 추고 떠들고 놀다가 나중엔 하나씩 하나씩 맡아 가지고 자고 간다는 이야기며,그 색시들은 짜장면이고 냉면이고 빵이고 찹쌀떡이고 무어나 마음대로 군것질을 잘하고, 그리고 옷도 늘 예쁜 것을 입는다는 이야기며,아침에는 늦도록 자고, 자고 나서는 화장을 오래오래 하고 나서야 밥을 먹고 낮에는 구경을 가고 노래들도 하는데 저도 그 색시들 하는 노래를 좀 배웠다는 이야기를 신이 나서 지껄이는 것이 종로 3가 뒷골목이나 양동에 있는 그 색시들이 부러웠던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나두 나이만 좀더 먹으면 그 색사들처럼 거기 가서 살려고 했지.」

정분이는 이런 이야기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큰일날 뻔했군.」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소리쳤다.

「이애야 나 더운 국 좀 갖다 주렴.」

그는 일하는 계집애를 불러가지고 나이를 묻고 이름을 물었다. 나이는 정분이와 꼭같은 열다섯살,이름은 정자라고 했다.

(이놈도 이런 데 있다가 앞길은 뻔한데 어쩌면 좋을까?)

그는 걱정이 되었다. 이 다음에 좀 일찌감치 와서 조용한 틈을 타서 이야기를 해가지고 아무런 수단을 쓰든지 정자를 꼬여내리라. 나쁜 데 빠져서 물이 들기 전에 손을 쓰는 것이다. 물이 든 다음에 구해낸다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또 오세요,아저씨.」

정자는 덮어놓고 아저씨라고 부르고 버릇 삼아 인사를 하는 것이지마는 그의 속셈은 그렇지 않은 것이어서,

「오냐 또 올께,잘 있어.」

다시 올 것을 약속하다시피 하고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정분의 앞날을 생각하니 예전에「배아파 배아파」하다가 죽은 소녀처럼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그날 오후에도 어떤 친구의 부탁도 있었고 자기 일도 있어서 어떤 출판사와 신문사, 시청에까지 다녀오고 누구하고 다방에서 만나서 이야기가 늦어졌기 때문에 저녁에 시간이 열 시나 가까와서 집에 돌아왔다.

「정분이 어떻게 됐소, 나갔소?」

으례히 웃으면서 나와서 대문을 열어주던 정분이가 나오지 않고 아내만이 나오고 집 안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놈이 기어이 나갔구나 하면서도 행여나 하고 한마디 물어본 것이다.

「정분이하구는 꽤 정분이 두터우신 모양이구려. 들어오시자마자 정분이 문안부텀 하시는 품이……」

아내는 낯색이 좋지 않다.

「춘풍추우 삼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식구로 살아온 정이 어째 없겠소. 그놈이 종내 갔구만,할 수 없지. 그런데 당신 어디가 불편하오?」

그는 이렇게 말끝을 흐려 버리고 아내의 문안을 했다.

「괜찮아요.」

그리고는 아내는 말을 이어서

「종내는 무슨 종내야. 오늘 아침에 당신 나갈 때 나간다고 안 그럽데까. 당신 나간 뒤로 금방 나간다는 말두 없이 도망꾼년처럼 나갔는데,하마터면 도둑이 들어와서 다 집어가두 모를 뻔했는걸. 그런 소갈머리 없는 계집애가 어디 있담. 그래두 제게 무던히 하느라고 해주었고,당신은 당신대루 그만큼 생각해 주었는데 어쩌면 그렇단 말이오. 그걸 사람이라구 당신은 생각을 하구 그러는 거요?」

경희는 어지간히 분이 난 모양이었다.

「나가는 걸 몰랐소,무에 없어지지나 않았읍디까?」

「없어지기야 무에 없어져,저 입으라구 주었던 거나 다 싸가지고 나갔지.」

「당신은 어디 나갔었소?」

「나가긴 어딜 나가,속이 불편해서 좀 누웠다가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깐 당신이 잠이 들었으니깐 간단 말두 못하구 간 게 아니오?」

자기도 미상불 괘씸하게 여겼지만 또 정분이 편을 들어준 셈이다.

「내가 잠이 들었다고 가노란 말을 못하고 갔다니 그런 말을 말이라구 하시우. 이러구 저러구 날더러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잘 됐다 하구 살짝 나가 버렸지. 나간 다음에야 무에 들어와서 집안의 물건을 집어가거나 말거나 그것두 알 바 아니지.」

「몸이 불편한데 저녁밥 준비를 하느라구 수고했소.」

그는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마침 저녁상을 받고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오늘은 왜 그렇게 늦으셨소?」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아내는 오래간 만에 밖에서 지난 일을 따져서 묻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내는 거기에다 한마디 독한 화살을 쏘아붙인다.

「당신이 나를 정분이만큼이나 생각하시는 게요?」

경희는 그를 한번 바라보고 금방 얼굴을 돌리는 것이다. 얼굴을 돌리고 하는 말이,

「당신은 나가서 그렇게 뉘게나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썩 친절하게 하고 집안에서는 일하는 계집애한테까지 그렇게 야단스럽게 생각을 하느라고 그러지만…… 이런 소리를 하면 말만 해두 더럽게시리 내가 질투나 하는 것 같지만, 당신이 내게는 너무두 무심하지 않아요?」

아내는 오래간만에 정면으로 불평을 터쳐 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좀 미안스러운 데가 있었는데, 오늘은 그의 아픈 데를 건드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의 말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말문이 막혀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 그거야 당신두 잘 알지 않소. 그건 크리스챤인 우리 가정의 한 이상으로 당신이나 내나 이 냉정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진정과 애정으로 한 모퉁이라두 참과 사랑의 향기를 피워 보자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잘 알지 않소. 정분이만 해두 불쌍한 것을 내 자식처럼 길러서 좋은 데 시집까지 보내 주기로 약속을 하지 않았소. 그러니까 불쌍한 애가, 더구나 그 애는 우리집에서 나가는 날에는 아무래두 잘못될 가능성이 많으니까 기어이 붙잡으려고 하는 게 아니오. 우리가 붙잡아 돌봐주지 않으면 누 가 그런 애를 돌보겠소. 그래두 나가지 말라구 달래고 볼 일이지,그리구 당신이야 집안 사람이니깐 믿구 지내는 거지 뭐요.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하시오.」

그는 이렇게 사정삼아 이야기를 하고 약속을 해놓고 어째서 나가라구 했느냐고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고 하는 것을 꾹 참고 아내에게 대한 말을 사과삼아 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그것을 알아채기나 했는지 그 말을 그편에서 꺼낸다.

「글쎄 오죽하면 나가라구 했겠소. 제편에서 척하면 나간다고 하니 나갈 테면 나가라지,그럼 저는 아무렇게 하든지 나가지 말아 달라구 애걸복걸 빌어야 옳단 말이오?」

아내는 한 번 한숨을 쉬고 나서,

「요새 와서는 내가 무얼 하라면 영 죽여라 하구 안하구 꼭 제 고집대루만 하는구먼, 제 고집대루 한다기보다 숫제 안하는걸. 뭘 하라구 이르면 어느 틈에 슬쩍 들어가 버리는걸. 들어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빠져 있구먼요.」

아내는 어젯밤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하다가 마지막에는 놀라운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얘 정분아 나와라 뭘하는데 들어가 누웠니? 하면서 내가 빌다시피 하면,그년이 하는 말이 기가 막히지. 내가 머 당신네 종이요,나두 자유가 있어요. 하기 싫어요, 안할 테야요,하면서 광주리 같은 대가리를 들고 나를 노려보는구먼,그러는 데는 입이 딱 벌어지구 다물어지질 않던걸.」

아내는 말을 이어서,

「그리구 그년이 인젠 벌써 딴 생각을 했어요. 이제 새해가 되면 열 여섯이 아니오. 벌써앞가슴이 떡 벌어진 게 기애가 인제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기애는 어쨌든 보통 애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언젠가 무슨 책에선가 보시구〈말을 강에까지 끌구 갈 수는 있어두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말을 당신 입으로 하시지 않았소? 안 됩니다 안돼요.」

아내는 밥상을 치우면서 자신 있는 듯이 말한다.

며칠 뒤였다. 경희는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사람 찾음(人)〉이란 광고란에 정 분의 모습을 말하고 찾아주는 이에겐 사례를 한다는 광고가 있는데, 광고주는 바로 자기 남편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라디오 공지 사항에도 같은 광고가 나온다.

「당신은 그렇게도 정분이를 단념하지 못하시오?」

저녁에 들어온 그에게 물은즉 그는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그런지 꼭 일년 뒤 처음과 꼭 매한가지로 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날 오후에 그가 마침 친구와 같이 집에 들어와 보니 집안이 왁자지껄하고 떠든다. 정분이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도 그 아내도 매우 반가와서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그 여윈 얼굴에 광대뼈가 유난히 드러난 것을 들여다보고 어서 밥먹기를 권했다. 정분이도 제집에나 돌아온 듯이 뿌연 오바를 벗어 걸었다.

다음날에도 정분이는 제집처럼 방소제도 하고 빨래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에는 저와 나이가 비슷한 처녀가 온 지가 벌써 오랜 듯이 익숙하게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정분이가 어색해하는 눈치를 채고 조용히 불러서 말했다.

「저 애는 이제 몇 날 더 있다가 집으로 간다고 하니깐 너 염려 말구 마음 놓구 있거라.」

「아니야요 저두 가요,우리 아버지는 죽었어요.」

「집에 가보아서 집에 있을 형편이 못되면 다시 오너라. 언제든지 오면 너는 전과같이 우리 식구로 같이 지낼 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오너라. 오는 차비까지 줄 테니 응.」

아내는 이렇게 타일렀다. 이 말을 들은 정분이는 한참 눈을 깜박거리고 섰더니,

「네, 가보아서 오겠어요 아줌마.」

이튿날 아내는 서울역에 손수 나가서 새 옷을 한 벌 사 입혀 가지고 오후 차로 조치원 가는 차를 태워 보냈다.

일주일 만에 과연 정분이는 돌아왔다.

「아무 데를 돌아다녀도 세상에 아줌마네 집 같은 덴 없어요. 여기 있으면 맘이 편안 해요.」

그럭저럭 반 년이 지난 어느 날 늦은 밤에 경희와 같이 앉아서 라디오로 HLKY방송1을 듣다가 하는 말이다. 정분이는 방송을 듣고 경희에게 배워서 찬송가를 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아줌마,저는 그전엔 찬송가 소리가 듣기 싫고 유행가만 불렀는데 인제는 유행가가 듣기 싫고 찬송가를 부르면 웬일인지 기쁘고 마음이 편안해요. 그전엔 유행가를 부르면서 웬일인지 눈물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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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도 아침 시발 택시 한 대가 찻길에서 인도 쪽으로 굴러들어온다.

맹기호는 발걸음을 빨리 옮겨서 쫓아갔다.

「합승 안해요?」

눈치가 좀 다르다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손님을 청하는 것이 아니요, 독차로 누가 부른 모양이다.

버젓이 오르는 사람은 한 청년 신사다. 이 차를 부른 사람이 분명하다. 맹도 이제는 좀 졸업을 해서 누가 부른 차든지 좀 같이 타자는 배짱을 부리게 되어서 처음엔 물러섰다가 덮어놓고 올라탔다. 택시를 부른 젊은이 눈치가 타도 좋다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앉아 있었다. 어느 틈에 뒤에도 한 사람 타고 앞에도 두 사람이 탔다.

「좀 빨리 갑시다. 응, 이거 늦겠는데!」

아직 아홉 시는 멀었는데 이 택시 부른 사람이 퍽 조바심을 하고 서두르는 걸 보니 어떤 관청에 다니는 사람으로 여덟 시 반까지는 들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남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서 공연히 애가 쓰였다.

차가 종로에 와 닿았다. 그는 화신 앞에 내려 달라고 청했다.

「합승이 아닌데요.」

「일행입니다.」

택시를 부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자 운전수는 말이 없다.

고마운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고 목례를 잊지 않고 내렸다.

물론 백 환짜리를 그에게 주었다. 기특한 사람이 있다. 요새 젊은이로 쉽지 않은 사람이다,생각을 하면서 그는 화신 앞을 서쪽으로 돌아 안국동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몇 날 전이었다. 전차는 벌써 만원이 되어서 오는 것이라 매달리거나 떼밀고 비비대고 들어가지 않으면 탈 수 없고, 더구나 버스는 말할 것도 없으니 벌써부터 단념을 한 것이고 합승을 타기로 한 그였다.

요새는 가끔 보통 택시가 와서 합승을 하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해서 이용을 해 왔는데,이날도 좀 큰 차가 하나 굴러서 인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맹은 택시인 줄 알고 달려갔다. 택시가 아니요 합승이다. 노우타이 잠바짜리가 왁 달려든다.

여느 때는 그런 경우에 애써 탈 생각도 아니하고 물러서던 그가 이날따라「에라,한번 대들어 보자」하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타기는 탔다. 정신없이 탔다. 전 같으면 탈 염도 못했지만 타려고 하다가도 밀려나오고 마는 것이었다.

맹을 떼밀어내고 올라가 타는 자들은 모두 삼십 내외의 자식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렇게도 양보할 줄을 모르나!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도의심이 없는가.」

저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다른 합승이나 택시를 기다려서 늦더라도 천천히 타던 그가 이날은 제법 젊은 축에 끼어서 비비대고 올라앉은 것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되었나.)

팔목에 있을 시계가 없다. 가슴이 섬뜻하다. 좌우를 돌아보아야 전차와 달라서 그럼직한 사람은 없다. 운전수를 찾아서 시계가 금방 없어졌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해보았다.

「아저씨, 시계를 가진 자는 타질 않았읍니다.」

운전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이 앞만 보고 차를 몰고 있다.

「시계를 집에 놓고 온 것이나 아닙니까?」

「바닥에 떨어졌나 보시지요.」

차에 탄 사람들은 가장 동정이나 한다는 것이나 반갑지가 않았다.

몇 번을 팔목을 되보고 바지 포켓을 보고 하면서 정신없이 앉았다가 종로에 와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 속으로 요새 젊은이들이 나쁘고 세월이 고약한 것을 개탄하고 공연히 여러 사람이 밀려드는 차에 덤벼 들어 탄 것을 몇 번이고 후회하면서 썩 기분 나쁜 하루를 지냈다. 왜 이렇게 실수를 하나, 이게 벌써 몇 번짼가,집에 가서 무어라고 하나, 복잡하게 사람이 밀려드는 차는 전차나 합승이나 안 타기로 작정을 하고도 또 이렇게 실수를 하는 자기 자신이 퍽 딱하게 생각 되었다.

「왜 또 그랬어,이담엔 애여 그러지 말어.」

예예,대답하고도 또 그러고 그러고 하는 어린 자식 타이르듯이 맹은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에 가깝고 먼 과거에 실패한 경험이 하나하나 머리에 떠 나와서 마음에 괴로움을 느꼈다. 하루종일 아무 일도 손에 붙지 않고 정신없이 지냈다.

다음날이 마침 월급날이라 시계가 없이는 하루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덮어놓고 만 오 천 환을 뚝 잘라서 시계를 샀다. 시계장수에게 속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서 장사를 좀 해본 경험이 있는 조카딸을 데리고 가서 샀다.

「아저씨,물건을 사실 땐 혼자 가시지 말고 꼭 저를 데리고 다니세요. 아저씨는 으레 속으시니까.」

「그래, 너는 물건 시세를 잘 알고 똑똑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조카딸을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믿고 일을 시키곤 한 것이었다. 장사라고 좀 해 보는 것이 잘 안되어서 아이들 데리고 살기는 커녕 국민학교짜리 중학교 일학년짜리 공부도 시키기 어려운 형편이니 무슨 다른 도리가 있어야 하겠다고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조카를 시계장사나 시켜 보았으면 하였다. 같은 교회에 나오는 청년 가운데 상점도 안 내고 시계장사를 해서 곧잘 지내는 사림이 있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무엇이든 해보아라.」

「아무 거라도 할 테야요.」

부모 없고 남편까지 없는 조카가 독립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랐는데,물건도 잘 고르고 값 흥정도 잘하는 걸 보고,

(그만하면 장사를 꽤 하겠는걸.)

하고 다행으로 생각했다.

시계를 잃어서 손해를 보았으나 이 기회에 조카가 시계장사를 하여 장사가 잘된다면 화가 복이 되는 셈이라고 하였다.

「너 누구하고 뭘 해보겠다던 걸로 시계장사나 해보렴, 응.」

시계를 사 가지고 오면서 권해 보았으나 조카는 대답이 없었다.

시계는 샀지만——시계는 도리어 전엣것 보다 마음에 드는 것을 샀지만 돈 문제보다 시계를 잃어버리도록 한 자기 자신이 딱한 것이 괴롭고,더구나 그 시계는 바로 작년에 미국에 교육 시찰로 다녀올 적에 마침 시계를 잃어서 친구들이 사준 것이라 그 친구들 에게도 말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요새 젊은이들의 질이 나쁜 것을 몹시 개탄하고 있었는데 마침 기특한 청년을 만나서 차를 잘 타고 종로까지 기분 좋게 왔다.

그날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나쁘고 고약한 것만 생각하고 실망하고,실패하는 일만 생각하고 마음을 괴롭히고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날은 마침 토요일이었다. 오후 한 시가 지났다. 웬만한 선생들은 다 나가고 학교 일이나 제 일이나 미진한 일이 있는 듯한 선생들만이 사오 인 남아 있다. 교무주임 박선생도 무슨 책을 뒤적거리고 앉아 있다.

「박선생,냉면이나 먹으러 갑시다. 일어나시오.」

옆에 있는 다른 선생까지도 바라보면서 맹은 큰 소리로 박선생을 불렀다.

「교감선생님, 오늘 한턱하시렵니까?」

「그래그래,한턱하지요. 선생님들 일어나셔요.」

「교감선생님을 발라먹으면 되나. 식구두 많으시구 어려우신데…… 우리가 대접을 해드려야지요.」

「별소릴 다 하시오, 황선생은…… 선생님들,어서들 갑시다.」

윤선생, 백선생,차선생 다음 자리에 앉아 있는 국어선생인 황선생이 어물어물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번 큰소리를 쳤다. 「식구두 많으시구 어려우신데……」어쩌구 하는 말이 듣기 싫은 것이었다.

「교감선생님이 모처럼 청하시는데 어서들 갑시다.」

교무주임이 이렇게 재촉을 해서 모두 여섯 사람이 평양루에 가서 곱배기 청하는 사람, 보통 청하는 사람 해서 냉면을 먹고 맹은 천 칠백 환을 치르고 돌아왔다. 주머니에는 겨우 오백 환짜리 한 장이 남았다. 그 누가 볼까봐 얼른 집어넣었다.

「오백 환, 오백 환.」

집에 가면 무얼 사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는 손주놈을 위해서 무얼 살 것이라든지,마누라가 찬거리 돈 달라고 하면 줄 것이라든지,다음날 출근할 때에 합승값이나 점심값이라 무어라 생각하면 오백 환이란 돈이 셈이 안되는 돈이다.

(왜 이렇게 남자가 대범하질 못하고 옹졸할까.)

맹은 속으로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왜 또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장한 척하고 호기를 뺐는가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에 떠오르고 지나갔다.

앞뒤를 생각해서 무슨 일을 하지 못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기분에 따라서 해버리는 것이 탈이라는 것을 맹은 잘 알면서 같은 실수를 밤낮 되풀이하는 것도 자기의 결점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오후엔 일찍 가서 쉬리라,이런 생각을 하면서 맹은 사무실에 들어갔다. 일찍 가서 쉰다는 것은 아침에 나올 때에 아내의 주의를 받고 부탁을 받은 것이요, 좀 쉬고 나서는 자기 방에 창문도 바르고 원고도 정리하고, 시간이 있으면 할일이 많다고, 생각에 예산한 것이 많았다.

「교감선생님, 손님이 오셔서 기다리고 있읍니다.」

급사아이의 말을 듣고 맹은 응접실에 들어가 보았다.’

「선생님,안녕하셔요? 아버지가 선생님이 토요일 오후쯤 와 보라구 그리셨다구 가 뵈라구 해서 왔어요.」

친구의 딸이다. 취직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우선 이력서를 가져오라고 했고,토요일 오후에 보내 보라고 했던 것을 맹은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E여학교 교장과 친하시다지요? 편지를 써주시면 제가 가 보겠어요.」

명함이나 한 장 보낼까 하고 생각하던 차인데 마침 당자가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다. 제가 가 보겠다는 것이 기특하다 하고 그는 서랍에서 양면괘지를 꺼내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

「가만 있자, 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쓰던 편지 종이를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버린다.

「그럴 것 없이 내일 오후에 나하고 같이 가 보지. 편지를 가지고 가서는 안될 거야.」

맹은 다음날 오후에 종로 어떤 다방에서 만나서 대한희망원 원장 집을 같이 방문하기로 하였다.

맹은 지난 봄에 예전 어떤 여학교에 봉직하고 있을 시절의 학생이던 사람의 부탁으로 그 남편의 취직을 시켜 주려고,아는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 교장을 찾아보고, 또 어떤 여학교 교감에게도 부탁을 단단히 했건만 아무 데도 틀려서 몹시 미안했던 일을 생각하였다.

직업이 없어서 곤란한 사람에게 양요리 대접을 받고, 또 집에 고기며 계란 꾸러미를 가져온 것을 받은 것이 늘 마음에 꺼렸던 것이다. 애초에 못한다고 딱 거절을 했더면 좋지 않았던가. 집에 계란 꾸러미를 가져온 것은 옛 선생이라고 찾아오면서 들고 온 것이니 무방하다고 스스로 변명을 하더라도 고급 양식 대접을 받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시처럼 마음 한구석을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는 취직 부탁은 받지 않으리라. 취직 알선에는 아예 나서지 아니하리라. 그는 얼마나 맹세를 했는지 모른다.

「요새 세상에 친구가 어디 있어요. 그저 돈이 있든지 세력이 있든지 해야지,일개 이름 없는 중학교의 교감으로 있는 당신을 무엇이 대단하다고 청을 들어주겠소. 공연히 부질없이 다니지 마시구 가만히 계세요.」

동창이 교장으로 있는 유명한 중고등학교에 교장을 찾아갔다가 거의 냉대를 받고 돌아와서 기분이 좋지 않아서 집에 들어왔을 때에 하던 아내의 말을 생각하였다.

「자리가 없으니까 그렇지,머,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있나! 세상이 다 그런걸 할 수 없지만, 하긴 그 사람이 교장이 된 다음엔 달라졌어, 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좀……」

아내에게도 체면을 세워 보느라고 변명을 했다. 개탄을 해보았으나 아내의 말이 옳기는 옳기 때문에 말끝을 맺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들이 예전 선생이라고 생각이나 하는 줄 아셔요. 제게 긴하니까 알랑거리고 찾아다니지, 일이 안되면 성의가 없느니 되지 않을 걸 공연히 찾아댕겼느니 그런다오. 글쎄 왜 대답을 하구 나서요.」

아내에게 이런 핀잔까지 받고 또 한마디 대꾸도 못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맹은 슬슬 걸어서 전차를 타거나 합승을 타려고 종로 화신 쪽으로 왔다. 감기기운이 있고 몸이 거북하기 때문에 이미 예정한 대로, 자기가 예정했다는 것보다 아내의 부탁을 받은 대로 일찍 집에 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합승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선생님 어디 가셔요? 오늘 K여사의 출판 기념회에 안 가셔요? 가십시다. 선생님 같은 문단의 선배가 나가시면 퍽 기뻐할 겁니다.」

「글쎄, 이번 그의 기념회에는 꼭 가 볼려고 하긴 했지만……」

뜻밖에 시인 C를 만나서 깜박 잊어버렸던 K여사의 출판기념회에 갔다가 열시가 지나서야 고단한 다리를 끌고 집에 들어갔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맹은 아침에 어느 날보다도 약간 일찍 일어나서 다음날 주기로 한 원고를 정리하고 나서 아침밥을 먹고,정하고 다니는 교회엘 갔다가 예배가 끝나는 대로 친구 한 사람과 종로로 나왔다. 냉면을 한 그릇씩 먹고 나서 친구는 한강 구경을 가자는 것을 누구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고 간신히 거절을 하고 병으로 누워 있는 친구의 딸 H양을 만나기로 한 다방을 향해서 바삐 걸었다.

(장마 뒤에 한강 구경도 한번 가 볼 만한 것인데, 그러나 어린 사람하고 약속한 일을 지키느라고 거절한 것이니 당연하지. 아무렴, 친구의 딸을 오라고 해 놓고 딴 데를 갈까.)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약속한 다방에 갔더니 친구의 딸은 벌써 와 앉아 있다.

여대 출신이면서도 별로 다방 출입을 안했던 모양인지 퍽 어색해하는 것을 억지로 자기도 마실 겸,코오피 한 잔을 같이 먹고 일어나서 영천 방면으로 가서 불광동행 버스를 탔다.

실상 남을 데리고 가기는 가면서 자기 자신이 길을 잘 모른다. 가는 방향도 집도 잘 모르고 짐작으로 가는 것이다. 불광동 종점까지 갔으나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다. 지서에 가서 물어 보았다. 시외버스를 타고 좀더 가다가 내리면 된다는 것이다. 걸어가도 얼마 안된다는 것이다. 친구의 딸 보기가 미안스럽다. 파주행 버스를 기다려 타고 가서 결국 원장집을 찾았다. 집은 찾았으나 원장 자신이 막 시내에 들어가고 없다는 것이다.

기다릴까, 갈까 하고 망설이다가 원장이 곧 온다고 해서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전화는 없다고 해도 편지라도 하고 올걸, 설사 만난다 해도 될지도 모르는 걸 공연히 왔다고 후회하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친구의 딸에게는 그런 체를 내지 않기로 노력했다.

「잠깐 다니러 갔다니까 곧 올 거야. 이원장은 나하고 퍽 가까운 사이요,그리고 상당한 사업가니까 어떻게든지 일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취직을 시켜 줄 거야.」

자기 변명 겸 갑갑하게 앉아 있는 친구의 딸을 위로할 겸 실상은 자기 자신을 위로할 겸 이따위 소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이원장 이란 사람은 예전에 맹이 봉직하고 있던 여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인데 그때에 여러 학생 중에 유난히 맹을 따랐고 또 맹 자신이 귀애했고 그리고 6•25사변 때 부산 피난 당시에 맹의 신세를 진 사람이었다. 여자라고 해도 웬만한 남자 이상의 활동력이 있고 교제 잘 하고 뱃심이 대단하고 게다가 소녀시절부터 매력 있는 용모를 타고났기 때문에 해방 이후로 특히 동란 이후에 고관들과 미군을 교제하여서 사회사업으로 교육사업으로 눈부신 활동을 했고 놀라운 업적을 보여주었다.

초여름 긴 해가 기울고 어슬어슬 해가 질 무렵에야 원장은 지프차를 몰아 가지고 돌아왔다.

「어떻게 이런 궁벽한 데를 찾아오셨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원장은 반가이 인사를 하고 자기가 경영하는 학원과 고아원의 시설을 대강대강 구경시켜 놓고는 그동안 지낸 이야기,미군부대가 많이 떠난 후에는 그 영향을 받아서 운영이 곤란하기 때문에 사업을 줄여서 요새 학원은 문을 닫아 버렸다는 이야기를 벌여놓아서 맹은 미처 친구의 딸의 취직건은 이야기를 꺼낼 새도 없었다.

「벌써부터 한번 와 보려고 하면서도……」

「바쁘신데 이런 데를 어떻게 오셔요. 선생님이 저를 기억하시고 계신 것만 감사하지요.」

원장은 학교를 갓 나온 듯한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을 보고 취직을 시켜 주려고 온 것을 벌써 눈치채고 그동안 발길을 하지 않고 있다가 취직 부탁을 받고 비로소 찾아온 것을 원망 비슷이 또 우습게 생각하면서 말을 좋게 둘러서 거절하는 것을 맹은 나중에 시내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알았다.

「오래간만에 이렇게 절 찾아오셨는데 여기는 시골이 돼서 아무것두 없어서…… 시내로 들어가시지요,선생님……」

원장은 자기가 타고 왔던 지프차를 타라고 서두르는 바람에 맹은 그냥 따라 들어왔다. 친구의 딸은 자기 집에 가 보아야겠다고 먼저 가 버리고 두 사람은 국제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였다.

(아무려나 나보다 낫구나. 제자요, 여자연만 나보다 낫구나. 결국 오늘도 거절을 당했구나. 사업을 축소한다는 것이 사실 인지,듣기 좋게 말하는 취직 알선에 대한 거절인지도 모르겠다.)

무작정 장담을 하고 데리고 왔던 친구의 딸에 부끄러웠다.

「선생님, 오늘 더운데 수고 많이 하셨어요. 피곤하시겠어요.」

말이 적은 여자로서 제법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던 친구의 딸의 표정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댁에까지 모셔다드리지요.」

원장의 친절한 말이 고맙기는 하고 속으로는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으면 하면서도 가다가 볼일이 있다고 딴소리하고 종로 네거리 화신 앞에서 내렸다.

종로거리는 어느새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번쩍거리고 버스며 합승에는 말할 것도 없고 고급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려서 좀처럼 그칠 줄을 모르니 건너갈 수도 없어서 행은 얼빠진 사람처럼 사방에서 어른거리는 네온 사인을 바라보고 어리둥절해 서 있었다.

「선생님은 약하시고 인제는 나이도 유만하신데 맡은 일이나 보시고 글이나 쓰시고 가만히 계셔요. 웬만한 일은 못한다고 딱 거절을 하셔요. 제가 학교 있을 땐 몰랐지만 나중에야 알았어요. 선생님은 참 좋으시면서도 그게 결점이야요.」

「무얼 알았던가?」

「선생님이 저의 모교를 떠나시게 된 동기랄까 이유가 그게 아니야요? 예스,예스만 하시고 노우 소리를 못하신다는 게……」

(아이 고단하다…… 어떻게 집엘 갈까.)

하던 끝에 바로 전에 호텔 식당에 원장하고 이야기하던 일이,아니 옛 제자의 경고를 듣던 일이 생각나서 맹은 응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혼자서 괴롬을 느낄 때 하는 버릇이었다.

가시처럼 괴로왔다. 원장의 까먹고 닳아먹은 태도가 밉살스럽기까지 했다. 얼마 만에 간신히 길을 건너서 화신 건너편 차를 타는 곳에 건너와 섰다. 마침 길가에 금붕어 가게가 있다.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한가히 아무 짐도 책임도 없이 가볍게 꼬리를 치고 떠다니는 금붕어가 행복스럽구나…… 네가 나보다 낫구나.)

차를 기다리는 동안 가게 안에 진열해 놓은 금붕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를 들여다보는 동안 합승을 기다리는 갑갑증도 면하고 아까 원장의 이야기도 잊어 버릴까 하고 들여다보고 있다가, 또 딴 생각을 하게 된다.

(금붕어나 사가지고 가자 !)

애들이 원하고 그리고 아내도 금붕어나 길러 보았으면 하는 소리를 들었고 며칠 전에,

「금붕어 장사가 지나가는 걸 돈이 없어서 못 샀군.」

하던 아내의 말이 생각나서 어항과 금붕어 한 쌍을 사가지고 얼마 만에 청량리행 합승을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은 열 시가 넘어서였다. 근래에 맹이 이렇게 늦어지기는 처음이었다.

몸을 씻고 일찍 쉬려고 마음먹고 들어간 맹의 계획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반가운 손님 오셨어요.」

아내의 말이다. 젊었을 적부터 가까이 지내는 친구로 지방에서 농촌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 밖에도 두어 사람 손님이 있다. 한 사람은 한 사십이 약간 넘은 듯한 여자, 한 사람은 키가 큰 젊은 여자다. 사십이 넘은 듯한 여자는 서울서 다방도 하고 가까운 시골서 여러 가지 사업과 장사를 한다는 활동가이다.

용무는 곧 알았다. 맹이 데리고 있는 조카가 장사를 해보겠다고 해서 맹 자신을 보증으로 돈 오십만 환을 돌려준 사람은 지금 온 친구요,사십대 넘은 여자는 내용으로 그 돈의 전주였다. 친구가 자기 돈을 준 것이 아니요,그 여자의 돈을 얻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눈으로 웃는 모습과, 가끔 보이는 매서운 눈띠가 창기 타입이요, 여우형의 무서운 여자라는 것을 느꼈다. 돈을 곧 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젊은 여자는 친척인데 어디 취직을 부탁하는 것이다. 다 골치 아픈 사건이다.

손님은 곧 갔다. 그러자 조카가 울면서 고백하는 것은 기막힌 이야기다.

「그 여자는 글쎄 계를 하다가 빚을 잔뜩 지고 어디로 도망을 했대요,이걸 어떻게 해요?」

「그러게 애초에 내가 안된다고 그랬지. 네가 하두 조르기에 해주었더니 종내…… 잘 됐다. 내가 물지 별수 있니?」

그 여자라는 것은 서울 어떤 변두리에서 다방을 같이 하기로 하고 조카의 돈을 맡았던 사람이다. 맹은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것도 처음엔 반대했고 다방을 한다는 것은 처음엔 알지도 못했던 것이다. 조카가 울고 있는 꼴을 보고 결국 도장을 찍어 준 것이다. 결국 맹이 책임지게 된 일이다.

「애들이 어항을 깨뜨렸어요. 금붕어두 죽구 어떻게 해요.」

아내의 걱정소리가 마루에서 들린다.

「아이구,이놈의 팔자야.」

맹은 이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층층대를 올라가는 발걸음이 몹시 허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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