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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조선문단(朝鮮文壇)》 제6호에 발표

별로이 처녀작이라 할 만한 것을 낸 것은 없습니다마는 어렸을 때, 내가 지은 글이 처음 활자로 인쇄되어 지상에 발표되었을 때, 끝이 없이 기뻤던 기억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열아홉 살 때였습니다. 그 때까지 집에서 한학 공부를 한다고 노(老)선생 한 분을 모시고 집에서 한서(漢書)를 읽을 때인데 우연한 기회로 최남선(崔南善) 씨의 《청춘(靑春)》잡지를 보고 흥미가 끌리어 ㅈㅎ이라는 익명으로 작문을 투서해 놓고는 마음이 퍽 조이었습니다. 신문에 광고 나기를 고대 고대하다 못하여 신문관(新聞館)으로 전화를 걸면 으레 당국에서 허가가 나오지 않았으니 더 기다리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문지에서 광고를 보면 책이 우편으로 오기를 기다릴 사이 없이 뛰어나가서 종로 거리의 책점에 가서 학교에서 성적 발표를 기다리던 때나 조금도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맨 먼저 독자 문예난을 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 자기 익명을 발견하였을 때, 무슨 기술(奇術)이나 본 것처럼 몹시 신기해 하면서 선 채로 내리 읽었습니다. 읽고는,

“내가 그 때 정말 이렇게 써 보냈던가?”

싶어하면서 집에도 책이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 기쁜 마음에 돈 주고 사 가지고 와서는 읽은 것을 또 읽고 또 읽고 하여 그 글자 한 자, 한 자가 무섭게 강한 친밀성(親密性)을 가지고 머리에 스며들어 덮고도 어느 쪽에 제목과 성명이 어떻게 씌어 있는 것까지를 눈에 번하게 보게 되기까지 반복해 읽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글을 반복해 읽을 뿐 아니라 그 책에 내 글과 함께 실려 있는 여러 사람의 글을 모두 정다운 친우의 편지 읽듯 몇 번씩 반복해 읽으면서 그 미지의 벗들을 만나 사귀었으면……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퍽 마음이 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떄에 지상으로 성명을 익히고 편지로 사귄 사람으로 지금까지 사귀어 온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 외에 더 길게 말씀할 것은 없으나 내 손으로 학생 문예를 모아 소잡지(小雜誌) 《신청년(新靑年)》을 처음 간행하던 때와 그 후, 여러 해 뒤에 늘 뜻하던 《어린이》를 처음 간행할 때에도 그에 지지 않는 기쁨을 느끼어 세 번째 기뻤던 기억이 다 같이 사라지지 않고 있고 또 앞으로도 용이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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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신여성》 6월호에 발표.

 더운 날 오후의 구름 보는 재미.
 아침에 없던 구름이 오후만 되면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날마다 모여든다.
 회색빛 음산한 구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싸늘한 비늘구름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이얀 솜을 펴논 것보다도 더 희고 더 부드럽고……, 그리고, 그 둥글고 깊고 그윽한 뭉게구름이 하얀 노인처럼 유한하게 떠 있는 것이다.
 ‘여름 구름은 봉우리가 많다.’
고 한 옛날 사람의 말대로 그렇게 희고 부드러운 구름에는 산봉우리보다도 더 첩첩하게 봉우리가 많다. 그러나, 결코 산봉우리처럼 그냥 많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한없는 변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 여름의 뭉게구름이다.
 불볕이 내리쬐는 넓은 마당 그 한 끝에 서 있는 높은 버드나무의 머리 위로 멀리 보이는 한 뭉치의 뭉게구름.
 첩첩이 일어난 봉우리와 봉우리 속으로 휘몰아 들어가보았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옛날 얘기 듣던 신선들의 잔치가 벌어져 있을 듯도 싶다.
 부채 든 손을 쉬고 무심히 앉아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하얀 봉우리 위에서 선녀들이 춤을 추는 모양이 눈에 보이는 듯한 때도 있다.
 그러나, 한참이나 보고 있는 동안에는 어느 틈에 구름의 형상이 변해 버린다.
 높다랗게 우뚝 솟은 봉우리가 어느 틈에 슬그머니 가로 퍼져 가지고 옆에 있더너 구름과 아무 말없이 합쳐 버리고 만다. 그러면 구름 한편 쪽에는 옅은 보랏빛으로 보드라운 그늘이 지어진다.
 간간이 부는 바람에도 나무 끝은 한들한들 조용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 뒤로 보이는 뭉게구름은 까딱도 하지 않는다. 어니 때까지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구름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할 수 없이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면서도 구름은 만나면 합치고, 합치고는 새로운 봉우리를 짓는다.
 그런가 하고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보드랍던 보랏빛 그늘이 검은 그늘로 변해 가지고 햇볕을 가리면서 주먹같은 물방울을 내리 쏟는다. 모래를 내리 쏟는 듯한 형세로 발마이 나게 내리 쏟는다.
 “으아아.”
 “소낙비다.”
하고 소리를 치면서 맥고 모자를 벗어 들고 양복쟁이가 뛴다. 미인이 뛴다.
 학생이 뛴다. 순사가 칼을 붙잡고 뛴다. 길가의 처마 밑마다 길 가던 사람이 쭉 늘어서 있다. 그 길로 인력거가 위세 좋게 달아난다.
 낮잠 자던 부인이 놀라 깨어 일어나서 황망히 장독의 뚜껑을 덮고 빨래를 걷고 나니까 뚝뚝 소낙비는 그치고 햇볕이 반짝 난다.
 “잘도 속이네.”
하고 부인은 빨래를 다시 넌다. 처마 밑에 늘어섰던 사람이 모두 헤어져서 걸어간다.
 타던 기와 지붕과 가까운 산들이 세수를 하고 난 것처럼 깨끗하고 산뜻해지고 더 한층 선명하게 햇볕이 비친다. 빙수보다도 더 달고 서늘한 여름 낮의 한 줄기 양미(시원한 맛)! 이것도 잊지 못할 뭉게구름의 비밀의 하나다.
 소낙비가 지나간 후는 저녁때 가까운 때다. 소나기 장난에 시치미를 떼이는 뭉게구름이 높이로보다는 옆으로 길어져 가지고 무슨 회의나 잔치에 참례하는 것처럼 약속한 듯이 한쪽으로만 모두들 쏠리어 간다.
 그러면 여름의 하루가 무사히 저물고 서늘한 저녁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불볕밖에 아무것도 없는 듯싶은 더운 날, 뭉게구름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여름의 좋은 흥취의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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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이

백석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이것은 강원도 농군이 흔히 부르는 노래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산골이 지닌 바 여러 자랑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화창한 봄을 맞아 싱숭거리는 그 심사야 예나 이제나 다를리 있으리까마는 그 매력에 감수感受되는 품이 좀 다릅니다.

일전 한 벗이 말씀하되 나는 시골이, 한산한 시골이 그립다 합니다. 그는 본래 시인이요 병마에 시달리는 몸이라 소란한 도시생활에 물릴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허나 내가 생각건대 아마 악착스러운 이 자파姿婆에서 좀이나마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본의일 듯싶습니다. 그때 나는 그러나 더러워서요, 아니꼬워 못사십니다, 하고 의미 몽롱한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결백한, 너무 도사류인 그의 성격에 나는 존경과 아울러 하품을 아니 느낄 수 없었습니다. 시골이란 그리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 아닙니다. 서울 사람이 시골을 동경하여 산이 있고 내가 있고 쌀이 열리는 풀이 있고······이렇게 단조로운 몽상으로 애상적 시흥에 잠길 그때 저쪽 촌뜨기는 쌀 있고 옷 있고 돈이 물밀 듯 질번거릴법한 서울에 오고 싶어 몸살을 합니다.

퇴폐한 시골, 굶주린 농민, 이것은 자타없이 주지하는 바라 이제 새삼스레 뇌일 것도 아닙니다마는 우리가 아는 것은 쌀을 못 먹는 시골이요 밥을 못 먹는 시골이 아닙니다. 굶주린 창자의 야릇한 기미는 도시 모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본능적으로 주림을 인식했다면 곧바로 아름다운 시골, 고요한 시골이라 안 합니다.

시골의 생활감을 절실히 알려면 그래도 봄입니다. 한겨울 동안 흙방에서 복대기던 울분, 내일을 우려하는 그 췌조悴操, 그리고 터무니없는 야심, 이 모든 불온한 감정이 엄동에 지질려서 압축되었다 봄과 맞닥뜨려 몸이라도 나른히 녹고 보면 담박에 폭발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자란 워낙 뚝기가 좀 있어서 위험이 덜 합니다. 그것은 대체로 부녀 더욱이 파랗게 젊은 새댁에 있어서 그 예가 심합니다. 그들은 봄에 더 들떠서 방종하는 감정을 자제치 못하고 그대로 열에 띄웁니다. 물에 빠집니다. 행실을 버립니다. 나물 캐러 간다고 요리조리 핑계 대고는 바구니를 끼고 한번 나서면 다시 돌아올 줄은 모르고 춘풍에 살랑살랑 곧장 가는 이도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붙들리면은 반쯤 죽어날 줄을 그라고 모르는 바도 아니련만······.

또 하나 노래가 있습니다.

잘 살고 못살긴 내 분복이요

하이칼라 서방님만 얻어주게유

이것도 물론 산골이 가진 바 자랑의 하나입니다. 여기에 하이칼라 서방님이란 머리에 기름 바르고 향기 피는 매끈한 서방님이 아닙니다. 돈 있고 쌀 있고 또 집 있고 이렇게 푼푼하고 유복한 서울 서방님 말입니다. 언뜻 생각할 때 에이 더러운 계집들! 에이 우스운 것들! 하고 혹 침을 뱉으실 분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좀 덜 생각한 것입니다. 임도 좋지만 밥도 중합니다. 농부의 계집으로서 한평생 지지리 지지리 굶다 마느니 서울 서방님 곁에 앉아 밥 먹고 옷 입고 그리고 잘 살아 보자는 그 이상이 가질 바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임 있고, 밥 있고 이러한 곳이라야 행복이 깃듭니다.

내가 시골에 있을 제 나에게 봄을 제일 먼저 전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술상의 다래입니다. 나는 고놈을 매우 즐깁니다. 안주로 한 알을 입에 물고물고 꼭꼭 씹어보자면 매낀매낀한 그리고 알싸한 그 맛, 이크 봄이로군! 이렇게 직감으로 나는 철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봄에 몸 달은 큰 애기, 새댁들의 남다른 오뇌를 연상케 됩니다. 나물을 뜯으러 갑네 하고 꾀꾀틈틈이 빠져나와 심산유곡 그윽한 숲속에들 몰려 앉아서 넌지시 감춰 두었던 곰방대를 서로 빨아가며 슬픈 사정을 주고받는 그들은-차마 못하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울적한 그 심사를 연상케 됩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그러다 술이 좀 취하면 몇 해 후에는 농촌의 계집이 씨가 마른다. 그때는 알총각들만 남을 터이니 이를 어째나! 제멋대로 이렇게 단정하고 부질없이 근심까지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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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단인이 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내선일체(內鮮一體)로 국민의식을 높여가게 된것은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다. 만주사변은 '만주국'이 탄생하고 만주국 성립의 감정이 지나사변(支那事變)으로 부화되자 조선에선 '내선일체'의 부르짖음이 높이 울리고 내선일체의 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다시 대동아전쟁이 발발되자 이제는 '내선일체'도 문제거리가 안 되었다. 지금은 다만 '일본신민(日本臣民)'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 할 한 백성일 뿐이다. '내지(內地)'와 '조선'의 구별적 존재를 허락지 않는 한 민족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종족(種族)을 캐자면 다를지 모르나 일본인과 조선인은 지금은 합체(合體)된 단일민족이다.
이러한 심경에서 출발한 현재의 생활은 '엄숙(嚴肅)'의 단 두 자로 끝날 것이다.
나는 지금 구직운동(求職運動)을 한다. 40여 세에 이른 오늘날까지 단 40일간밖에는 봉급생활을 피해오던 내가 지금 진정으로 구직운동을 한다. 이것은 국민개로주의(國民皆勞主義)라는 뜻에서가 아니다. '보잘것 없는 미약한 것이지만' 나의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 들어 국가에 바치려는 진심에서다.
보잘것 없는 초라한 것이나마 열과 성으로 국강[ 바쳐 만분의 일이나마 국은(國恩)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국가가 명하는 일은 다 못하나마 국가가 '하지 말라'는 일은 양심적으로 피하련다. 국가가 '좋다'고 인정하는 일은 내 힘 자라는 데까지 하련다. 이미 자란 아이들은 할 수 없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는 '일본과 조선'의 별개존재(別個存在)라는 것을 애당초부터 모르게 하련다.
대동아전쟁이야말로 인류 역사 재건의 성전(聖戰)인 동시에 나의 심경을 가장 엄숙하게 긴장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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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화성의 관찰에 열성스러운 어떤 소인(素人)[1] 천문학자가 탄식하였다 한다 ― 신경도 훈련해야 되겠다고.

그 뜻은 망원경을 사용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화성의 빛이 한 가지로만 보이더니 오래오래 관측을 계속한 결과로 드디어 화성이 육지에서 반사하는 광채와 그 운하라는 수면에서 발하는 빛의 구별을 ― 인식하게 되었으니 망원경이라고 곧 잘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안구의 신경이 상당히 훈련되었어야 비로소 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을 인식할 만한 신경의 훈련이 선행하여야 된다.

현미경도 또한 마찬가지다. 고도의 렌즈 밑에 생물의 세포를 보았거나 니콜경 밑에 광물의 구조를 살펴본 경험을 가진 이는 망원경 보는 이와 꼭같은 탄성을 발하고야 만다. 경하(鏡下)에 세포가 놓였으되 소인이 제 마음대로 들여다볼 때와 현명한 교수의 지시에 따라 ― 자색(紫色)은 무엇, 도색(桃色)[2]은 무엇, 우편엔 핵, 좌편엔 염색체 하면서 세포 내의 신비의 눈이 열린 후에 볼 때는 천양의 차와 같은 차이에 놀란다. 니콜경 밑의 석영 · 장석 등의 구조와 색채의 구별이 역시 그렇다. 물체가 현미경 밑에 놓였다고 놓인 그대로의 진상이 아무에게나 그 있는 진상대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능히 보는 눈을 가진’ 자에게만 보인다. 망원경도 현미경도 그 사용하는 이의 신경이 훈련되었을 때에만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세상 어리석은 자에게는 기이한 것이 없으되 현명한 이에게는 낱낱의 사물이 기이하지 않은 것이 없다. 칼라일은 기적을 부인하는 이를 향하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보라고 외쳤거니와 보는 눈으로써 보면 여인이 새 생명을 산출하는 일보다 더한 기적이 세상에 없다 하되 범용의 안목으로써 한국 고금의 상사(常事)이요, 동서의 관행인 것 뿐이다.

이른 봄에 살구나무를 보고 놀란 것은 선지자 예레미야였고 찬 하늘에 성신(星辰)의 운행을 우러러보면서 가슴 속의 엄연한 도덕률에 놀란 것은 철인 칸트였다. 이처럼 고도로 신경이 훈련된 이들에게는 보이는 것도 많고 놀라운 것도 많다.

불탄 진지 한 공기라도 감사로써 받아서 집사람들까지 위로하는 이 있고, 탄내난다 뿌리치고 온종일 분노로써 주위에 독 주는 사람이 있다. 감사할 자료에 포위되어 있어도 감사를 발견 못해 마르는 생명 있고, 눈물의 사막같은 골짜기에서라도 수시로 도처에 샘과 계류(溪流)와 화초를 발견하는 눈이 있다. 신경이 있다.

천체의 관차로 망원경을 사용하에도 먼저 신경을 훈련하여야 하며 생물의 세포와 광물의 구성을 엿보는 현미경에도 신경 훈련이 선결 조건이다. 하물며 조매(早梅)[3] · 만국(晩菊)[4]과 초로(草露)[5] · 성운을 그때그때에 느낄 대로 느끼는 대시인 같은 지혜를 받고자 함에 어찌 신경을 훈련함이 없이 될 소인가. 감사할 바를 감사하는 생애에 이르러서는 이는 과연 맹훈련이 없이는 능히 성취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감사할 것도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생애, 이는 가장 하등동물의 생애이며 극히 작은 감사 자료에도 절대한 감사와 찬송을 발견하는 신경, 이는 만물의 영장의 신경이다. 물체가 있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경을 훈련하여야 보이는 것처럼, 남부러워하는 팔자에 태어났다고 해서 감사의 생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경을 훈련하여야만 매사에 감사하여 향시로 기쁨에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눈은 떴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눈’이라야 보이는 법이요, 귀는 열렸다고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신경’이 훈련되었어야 들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6]고. 또 가라사대 “귀 있는 자는 들으라”[7]고.

[편집]

  1. 아마추어
  2. 연한 분홍색
  3. 일찍 핀 매화
  4. 늦게 핀 국화
  5. 풀잎에 맺힌 이슬
  6. 요한 복음서 9:41
  7. 마태 복음서 13: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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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자연에 대한 예찬을 생활화했던 무교회주의 신앙인 김교신이 포플러(Populus) 나무를 예찬한 글이다. 2부분으로 되어 1934년 11월과 12월에 《성서조선》(聖書朝鮮)에 실렸다.

(其一)

낙락장송의 우거진 경개가 장하지 아님이 아니나,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할 만한 의열(義烈)의 사(士)가 아님을 어찌하며, 운표(雲表)에 우뚝 솟은 은행의 거수(巨樹)가 위관(偉觀)이 아님이 아니나, 인의에 기반을 세운 공부자(孔夫子)에게 경원하는 생각이 앞섬을 어찌하며, 매죽(梅竹)이 귀엽지 아님이 아니나, 시인 묵객의 취흥을 손(損)할까 저어하니, 차라리 우리는 계변(溪邊)에 반열(班列)지으며 혹은 고성(古城)에 외로이 솟은 포플라나무를 우러러보고자 하노라.

포플라는 하늘을 향하고 산다.

인간 살림에 세력투쟁이 있고 국가 생활에 영토확장의 야망이 없을 수 없는 것처럼 무릇 거대한 수목은 그 수세(樹勢)를 널리 횡(橫)으로 펴서 일장공성(一將功成)에 만골고(萬骨枯)라는 셈으로 거수의 광활한 지엽(枝葉)이 임의로 무성을 극하기 위하여 그 전후좌우의 만초(萬草)가 고갈을 당하고야 만다. 오직 포플라나무만은 횡으로 세력을 벌이려 하지 않고 종(縱)으로 하늘을 향하여 자라고 또 자라기만 한다. 그 일직한 구간(軀幹)과 수직적으로 하늘을 향한 대지(大枝)·소지(小枝)는 호렙산 아래서 축복하는 모세의 손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흐리신 예수의 팔뚝인가? 유한한 횡으로 살지 앟고 무한한 종으로 하늘로 사는 포플라야말로 고귀하도다.

포플라는 비애의 나무다. 춘양(春陽)에 포플라의 새싹이 발동하는 것처럼 생명의 요동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다시 없으니 신추늬 포플라가 물론 가하며 녹음방초 승화시(勝花時)에 우후(雨後)에 천지를 새롭게 하느 포플라의 청풍이 또한 가상한 것임은 물론이나 포플라의 본색은 아무래도 추색(秋色)에 비창(悲愴)이 만신(滿身)함에 있는 듯하다. 단풍의 붉음은 오히려 염태(艶態, 고운 자태)를 보이거니와 포플라나무의 황엽(黃葉)은 문자 그대로 처참한 신세를 표시한다. 고성에 외로이 솟은 포플라 한 대가 풍우에 부대껴 큰 줄기와 가는 가지까지 끄들렸다간 풀리고 휘어졌다간 다시 서고 하는 광경이며, 만추(晩秋)에 석양을 황엽에 반영하면서 미풍에도 오히려 일엽씩 귀근(歸根, 뿌리로 돌아옴)하는 자태를 보라. 포플라의 장간섬지(長幹纖枝)가 만신에 비창을 머금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복에 싸인 젊은 과부의 처지를 연상케 하거니와 그보다도 오히려 깊고 높고 넓은 비통이다.

실로 처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애의 사람〉 예수의 초상을 생각지 않고는 포플라 특유의 처참한 광경을 비기지 못하며,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한숨소리 없이는 포플라나무를 차마 보지 못한다. 천하의 비통을 일신에 머금은 포플라와 인류의 비애를 한몸에 걸머진 예수!

포플라나무는 지평선을 깨뜨린다. 호주에는 유카리수(樹)라는 고목(高木)이 있다 하나 우리 주위에는 100척 내지 150척까지 천공에 솟은 포플라가 우선 고수(高樹)가 아닐 수 없다. 무릇 시기와 당쟁은 왜소에서 생긴다. 홀로 운표에 두각을 두고 미풍과 전광(電光)에 전신이 진동하여 책하는 이 없어도 스스로 통회하고 섰으니 그 민감, 그 고결함이여! 놀랍도다.

<1934. 11>

(其二)

포플라는 그 줄기나 가지나 다만 일직한 것 외에 볼 것이 없다. 기기묘묘한 곡절도 없고 시선을 새롭게 할 만한 색채도 없다. 다만 푸르고 오직 곧고 긴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수석을 즐기며 분재를 일삼는 이들에게는 포플라는 하등의 취할 점이 없으나 우리에게는 그 취할 데 없는 점이 고귀하다. 곡예와 술책은 모두 다른 나무에 구하라. 그리고 오직 순직하고 단명(單明)한 것만은 포플라나무에서 찾으라.

고색창연한 것을 찾는 이는 포플라나무의 새롭고 젊은 것이 불가하다 한다. 과연 포플라나무는 반도에 신래(新來)한 객이니 그 이름을 양류(洋柳)라고도 하거니와 포플라나무 보이는 데는 외래의 풍취가 없지 않고 경박의 가락이 전무함이 아니다. 그래도 포플라의 병렬한 재방은 수난(水難)과 풍재(風災)를 면하였다는 것을 말하이 되고 양류의 푸른 빛이 울타리처럼 둘러싼 동네는 신흥의 기운이 창일(漲溢)함을 시증(示證)하여 마지 않는다. 국수(國粹)가 가하고 전통이 귀하다하나 청태(靑苔)가 끼인 와편(瓦片)과 고총(古塚)에서 나온 파환(破環)은 골동가나 고곽자의 한시일(閑時日)에 맡기라. 생물은 새로울숡 그 생명이 왕성하니 적송(赤松)을 심었던 것이 반도 강산의 벌거숭이 된 일인(一因)인 줄 알았거든 적송을 뽑고 세력 강성한 나무를 대식(代植)할 것이요, 구간이 고쇠하였거든 새싹을 접목하는 일이 지당하지 않은가.

옛 것을 숭상하고 낡은 것을 생각한들 고각(故殼)이 된 후에야 무슨 소용이 있으랴. 고색을 자랑하는 불교도 가하지 않음이 아니요, 전통을 숭사아는 유교도 금할 것이 아니나 문제는 생명의 역량이다. 비록 반세기의 역사만을 가졌을지라도 영혼의 오저(奧低)에서부터 생명 건축의 마치소리 씩씩하게 자라나는 기독의 산 생명에 부딪쳐볼 때에, 우리의 눈은 신래의 나무 포플라의 울창함을 쳐다보게 된다. 부럽도다, 강변에선 포플라나무의 새로운 생명, 꾸준한 생명!

포플라는 그 세장(細長)한 자태로 인하여 그저 부드럽고 한갓 연약하여 여성적인 듯이도 보이나 이는 속단임을 면치 못한다. 외관과 원경(遠景)이 여성같이 보이지 아니함이 아니나 접근할 때에 그 거간(巨幹, 큰 줄기)이 지축을 뚫고나온 듯한 위세에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케 함은 포플라나무의 특성이다. 높은 나무는 풍상이 많다. 그 지엽이 미풍에도 진동함으 감상적인 여성보다도 예민하나 대지에 떡 버티고 선 그 웅자(雄姿, 남성적 자태)는 장부의 넋 그대로이다. 유순할 대로 유순하면서도 성전을 도굴화하는 무리들을 향하여는 의분의 채찍을 휘날리지 않을 수 없었던 어린 양을 병상(竝想)하면서 저 포플라나무를 바라보라. 부드럽고도 굳센 것은 포플라나무로다.

<193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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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1942년 3월의 권두언. 태평양전쟁 중 일제강점기 민족의 무서운 시련을 그린 것으로, 한국인의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성서조선》은 불온잡지로 지목되어 폐간당했으며 “성서조선사건”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작년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끓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하며 또한 찬성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大變事)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들, 때로운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서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흑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低)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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