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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협집이 부엌으로 물을 길어 가지고 들어오매 쇠죽을 쑤던 삼돌이란 머슴이 부지깽이로 불을 헤치면서,

“어젯밤에는 어디 갔었던교?”

하며, 불밤송이 같은 머리에 왜수건을 질끈 동여 뒤통수에 슬쩍 질러맨 머리를 번쩍 들어 안협집을 훑어본다

“남 어데 가고 안 가고 님자가 알아 무엇 할 게요?”

안협집은 별 꼴사나운 소리를 듣는다는 듯이 암상스러운 눈을 흘겨보며 톡 쏴버린다.

조금이라도 염량이 있는 사람 같으면 얼굴빛이라도 변하였을 것 같으나 본시 계집의 궁둥이라면 염치없이 추근추근 쫓아다니며 음흉한 술책을 부리는 삼십이나 가까이 된 노총각 삼돌이는 도리어 비웃는 듯한 웃음을 웃으면서,

“그리 성낼 게야 무엇 있습나? 어젯밤 안 쥔 심바람으로 님자 집을 갔었으니깐두루 말이지.”

하고 털 벗은 송충이 모양으로 군데군데 꺼칫꺼칫하게 난 수염을 숯검정 묻은 손가락으로 두어 번 쓰다듬었다.

“어젯밤에도 김참봉 아들네 사랑방에서 자고 왔습네그려.”

삼돌이는 싱긋 웃는 가운데에도 남의 약점을 쥔 비겁한 즐거움이 나타났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이 망나니 같은 놈……”

하는 말이 입 바깥까지 나왔던 안협집은 꿀꺽 다시 집어삼키면서,

“남 어데 가 자든 말든 상관할 것이 무엇인고!”

하며, 물동이를 이고서 다시 나가려 하니까,

“흥! 두고 보소. 가만있을 줄 알았다가는……”

“듣기 싫어! 별꼬락서니를 다 보겠네.”

2

강원도 철원 용담(龍潭)이라는 곳에 김삼보(金三甫)라는 자가 있으니 나이는 삼십 오륙 세나 되었고, 키는 작달막하여 목은 다가붙고 얼굴빛은 노르께하며 언제든지 가죽창 박은 미투리에 대갈 편자를 박아 신고 걸음을 걸을 적마다 엉덩이를 내저으므로 동리에서는 그를 <땅딸보 김삼보>, <아편쟁이 김삼보>, <오리 궁둥이 김삼보>라고 부르는데 한 달에 자기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이틀이라면 꽤 오래 있는 셈이요, 하루라면 예사다. 그리고는 언제든지 나돌아다니므로 몇 해 전까지도 잘 알지 못하였으나 차차 동리서 소문이 돌기를 <노름꾼 김삼보>라는 말이 퍼지자 점점 알아본즉 딴은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접경을 넘어다니며 골패 투전으로 먹고 지내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노름꾼 김삼보의 여편네가 아까 말하던 안협집이니 안협(安峽)은 즉 강원, 평안, 황해, 삼도 품에 있는 고읍(古邑)의 이름이다.

그 안협집은 김삼보가 얻어오기는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 안협집이 스물 한 살 되던 해인데 어떻게 해서 얻었는지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술파는 것을 눈을 맞추어서 얻었다고 하기도 하고, 계집이 김삼보에게 반해서 따라왔다기도 하고, 또는 그런 것 저런 것도 아니라 계집의 전남편과 노름을 해서 빼앗았다고도 하는데 위인 된 품으로 보아서 맨 나중 말이 가장 유력할 것 같다고 동리 사람들이 말을 한다.

처음에 안협집이 동리에 오자 그 동리 그 또래 계집들은 모두 석경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안협집이 비록 몸은 그리 귀하게 태어나지 못하였으나 인물이 남달리 고운 점이 있어, 동리 젊은것들이 암연히 부러워도 하고 질투도 하게 되고 또는 석경 속에 비친 자기네들의 예쁘지 못한 얼굴을 쥐어뜯고 싶기도 하였으니 지금까지 <나만한 얼굴이면> 하는 자만심이 있던 젊은 계집들에게 가엾게도 자가결함(自家缺陷)이 폭로되는 환멸을 느끼게 하기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촌구석에서 아무렇게나 자란데다가 먼저 안 것이 돈이었다.

<돈만 있으면 서방도 있고 먹을 것, 입을 것이 다 있지> 하는, 굳은 신조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는 무엇이든지 제공하여 부끄러운 것이 없었다.

십 오륙 세 적, 참외 한 개에 원두막 속에서 총각 녀석들에게 정조를 빌린 것이나, 벼 몇 섬, 돈 몇 원, 저고리감 한 벌에 그것을 빌리는 것이 분량과 방법이 조금 높아졌을 뿐이요 그 관념은 동일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으로 온 뒤에도 동리에서 돈푼이나 있고 얌전한 젊은 사람은 거의 다 한번씩은 후려내었으니 그것은 남자편에서 실없은 짓 좋아하는 이에게 먼저 죄가 있다 하는 것보다도 이쪽 안협집에서 그 책임이 더 있다고 할 수 있고, 또 그것보다 더 큰 죄는 그 남편 되는 노름꾼 김삼보에게 있다고 할 수가 있으니 그것은 남편 노름꾼이 한 달에 한번을 올까 말까 하면서도 올 적에는 빈손을 들고 오는 때가 많으니 젊은 계집 혼자 지낼 수가 없으매 자연히 이 집 저 집 동리로 다니며 품방아도 찧어주고 김도 매주고 진일도 하여주며 얻어먹다가 한번은 어떤 집 서방님에게 실없은 짓을 당하고 나서 쌀 말과 피륙 필을 받아보니 그것처럼 좋은 벌이가 없어 차츰차츰 이번에는 자기가 스스로 벌이를 시작하여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거래 단골을 트듯이, 이 사람 저 사람을 집어먹기 시작하더니 그것도 차차 눈이 높아지니까 웬만한 목도꾼 패장이나 장돌림, 조금 올라가서 순사 나리쯤은 눈으로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고, 적어도 그곳에서는 돈푼도 상당하고 여간해서 손아귀에 들지 않는다는 자들을 얼러보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일하지 않고 지내며 모양내고 거드름 부리고 다니는데 자기 남편이 오면은,

“이번에는 얼마나 땄습노?”

하고, 포르께한 눈을 사르르 내려 뜬다.

“딴 게 뭔가, 밑천까지 올렸네.”

삼보는 목 뒤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신다. 그러면 안협집은 전에 없던 바가지를 긁으며,

“X알 두 쪽을 달구서 그래 계집만두 못하다는 말요.”

하고서, 할 말 못할 말을 불어서 풀을 잔뜩 죽여놓은 뒤에는 혹시 서방이 알면 경이 내릴까 하여 노자랑 밑천 푼을 주어서 배송을 낸다. 그러면 울며 겨자 먹기로 삼보는 혼자 한숨을 쉬면서,

“허허, 실상 지금 세상에는 섣부른 X알보다는 계집편이 훨씬 나니라.”

하고, 봇짐을 짊어지고 가버린다.

3

이렇게 이삼 년을 지내고 난 어느 가을에 삼돌이란 놈이 그 뒷집 머슴으로 왔는데 놈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빌어먹던 놈인지는 모르나 논맬 때 콧소리나마 아리랑타령 마디나 똑똑히 하고 술잔이나 먹을 줄 알며, 동료들 가운데 나서면 제법 구변이나 있는 듯이 떠들어젖히는 것이 그럴 듯하고 게다가 힘이 세어서 송아지 한 마리 옆에 끼고 개천 뛰기는 밥 먹듯하는 까닭에 동리에서는 호랑이 삼돌이로 이름이 높다.

놈이 음침하여 오던 때부터 동리 계집으로 반반한 것은 남 모르게 모두 건드려보았으나 안협집 하나가 내내 말을 듣지 않으므로 추근추근 귀찮게 구는데 마침 여름이 되어 자기 집 주인 마누라가 누에를 놓고 혼자는 힘이 드니까 안협집을 불러서 같이 누에를 길러 실을 낳거든 반분하자는 약속을 한 후 여름내 같이 누에를 치게 된 것을 알고 어떤 틈 기회만 기다리며,

“흥, 계집년이 배때가 벗어서 말쑥한 서방님만 얼르더라. 어디 두고 보자. 너도 깩소리 못하고 한번 당해야 할걸. 건방진 년!”

하고는 술잔이나 취하면 주먹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러자 집 주인 마누라가 치는 누에가 거의 오르게 되자 뽕이 떨어졌다. 자기 집 울타리에 심은 뽕은 어림도 없이 다 따다 먹이었고 그 후에는 삼돌이란 놈을 시켜서 날마다 십리나 되는 건넛말 일가집 뽕을 얻어다 먹이었으나 그것도 이제는 발가숭이가 되게 되었다. 인제는 뽕을 사다 먹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다가 먹이자면 돈이 든다. 주인노파는 담뱃대를 물고서 생각하여보았다.

(개량 뽕이 좋기는 좋지마는 돈을 여간 받아야지. 그리고 일일이 사서 먹이려다가는 뽕값으로 다 들어가고 남는 것이 어디 있나.)

노파 생각에는 돈 한푼 안 들이고 공짜로 누에를 땄으면 좋을 것이다. 돈 한푼을 들인다 하면 그 한푼이 전 수확에서 나오는 이익의 전부같이 생각되어 못 견디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 혼자 이익을 먹는 것 같으면 모르거니와 안협집하고 동사로 하는 것이므로 안협집이 비록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 힘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 한푼만 못해 보인다. 그래서 뽕을 어떻게 공짜로, 돈 안 들이고 얻어올 궁리를 하고 있다가 안협집이 마침 마당으로 들어서매,

“뽕 때문에 일 났구료.”

하며 안협집에게는 무슨 도리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글쎄.”

안협집 생각은 주인의 마음과 또 달라서 남의 주머니 돈 백 냥이 내 주머니 돈 한 냥만 못하다. 그래서 <돈주면 살걸> 하는 듯이 심상하게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 와야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때, 들에 나갔던 삼돌이란 놈이 툭 튀어들어오다가 이 소리를 듣더니 제딴은 동정하는 표정으로,

“그것 일 났쇠다. 어떻게 하나……”

한참 허리를 짚고 생각을 해보더니,

“헝! 참 그 뽕은 좋더라마는 똑 되기를 미선조각같이 된 놈이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데 그놈을 먹이기만 하면 고치가 차돌같이 여물 거야!”

들으라는 말인지 혼잣말인지는 모르나 한마디를 탁 던지고 말이 없다. 귀가 반짝 띈 주인은,

“어디 그런 것이 있단 말이야?”

하며 궁금증 난 사람처럼 묻는다.

“네, 저 새술막에 있는 것 말씀이요.”

혹시 좋은 수가 있을까 하려다가 남의 뽕밭, 더구나 그것으로 살아가는 양잠소 뽕이라, 말씨름만 하는 것이 될 것 같으므로,

“응! 나도 보았지, 그게 그렇게 잘되었나? 잘되었겠지. 그렇지만 그런 것이야 짐으로 있으면 무엇하나.”

“언제 보셨어요?”

“보기야 여러 번 보았지. 올 봄에 두릅 따러 갔다가도 보고.”

삼돌이란 놈이 한참 있다가 싱긋 웃더니 은근하게,

“쥔마님! 제가 뽕을 한 짐 저다 드릴 것이니 탁주 많이 먹이시렵니까?”

듣던 중에도 그렇게 반가운 소리가 또 어디 있으랴.

“작히 좋으랴. 따오기만 하면 탁주에다 젓이라도 담그마.”

귀찮스런 삼돌이도 이런 때는 쓸 만하다는 듯이 안협집도 환심 얻으려는 듯한 웃음을 웃으며 삼돌이를 보았다. 삼돌이는 사내자식의 솜씨를 네 앞에 보여주리라 하는 듯이 기운이 나며 만족하였다.

그날밤 저녁을 먹고 자정 때나 되더니 삼돌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문 밖으로 나갔다. 갔다가 한 두어 시간 만에 무엇인지 지고 오더니 그것을 뒷곁 건넌방 뒤 창밑에 뭉뚱그려 놓았다.

이튿날 보니까 딴은 미선쪽 같은 기름이 흐르는 뽕잎이었다.

“어디서 났을꼬?”

주인하고 안협집은 수근수근 하였다.

“그 녀석이 밤에 도둑질을 해온 게지? 뽕은 참 좋소, 그렇지?”

“참 좋쇠다. 날마다 이만큼씩만 가져오면 넉넉히 먹이겠쇠다.”

두 사람은 뽕을 또 따오지 않을까 보아서 아무 말도 아니하고,

“참 뽕 좋더라. 오늘도 좀 또 따오렴.”

하고 충동인다. 놈은 두 손을 내저으며,

“쉬, 떠드시지 맙쇼. 큰일나죠. 그것이 그렇게 쉬워서야 그 노릇만 하게요. 까딱하다가는 다리 마디가 두 동강 날걸요.”

도둑해온 삼돌이나 받아들인 두 사람이나 도둑질했소! 하는 말은 없으나 서로 알고 있다.

그러자 하루는 주인이 안협집더러,

“여보, 이번에는 임자가 하루 저녁 가보구려. 그놈이 혹시 못 가게 되더래도 임자가 대신 갈 수 있지 않수. 또 고삐가 길며는 바래인다구 무슨 일이 있을는지 모르니 임자가 둘이 가서 한몫 많이 따오는 것이 좋지 않수.”

안협집이 삼돌이를 꺼리는 줄 알지마는 제 욕심에 입맛이 달아서 자꾸자꾸 충동인다.

“따다가 잡히면 어찌 하구유.”

“무얼! 밤중에 누구 알우? 그러고 혼자 가라오. 삼돌이란 놈하고 가랬지.”

“글쎄 운이 글러서 잡히거나 하면 욕이지요.”

잡히는 것보다도 안협집의 걱정은 보기도 싫은 삼돌이란 녀석하고 밤중에 무인지경에를 같이 가라니 그것이 딱한 일이다.

안협집의 정조가 헤프기도 유명한 만치 또 매몰스럽기도 유명하여 한번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죽어도 막무가내다. 그것은 만냥 금을 주어도 거들떠보지도 아니한다. 그런데 삼돌이가 그 중에 하나를 참례하여 간장을 태우는 모양이다.

안협집은 생각하고 생각하여 결심해버렸다.

(빌어먹을 녀석이 그 따위 맘을 먹거든 저 죽이고 나 죽지. 내 기운은 없어도……)

하고 쌀쌀하게 눈을 가로뜨고 맘을 다가먹었다.

그리고는 뽕을 따러 가기로 하였다.

삼돌이는 어깨에서 춤이 저절로 추어진다.

“얘, 이것이 정말인가, 거짓말인가? 이제는 때가 왔구나 인제는 제가 꼭 당했지.”

놈이 신이 나서 저녁 먹고 마당 쓸고, 소 여물 주고, 도야지, 병아리 새끼 다 몰아넣고, 앞뒤로 돌아다니며 씻은 듯 부신 듯 다 해놓고, 목물하고 발 씻고, 등거리 잠뱅이까지 갈아입은 후 곰방대에 담배를 꾹꾹 눌러 듬뿍 한 모금 내뿜으며 시간 오기만 기다린다.

4

안협집은 보자기를 가지고 삼돌이를 따라서 뽕밭을 향하여 간다.

날이 유달리 깜깜하여 앞의 개천까지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돌부리가 발부리를 건드리면 안협집은 에구 소리를 내며 천방지축으로 다리도 건너고 논이랑도 지나고 하여 길 반쯤 왔다.

삼돌이란 놈은 속으로 궁리를 하였다.

(뽕을 따기 전에 논이랑으로 끌고 가?…… 아니지, 그러다가는 뽕두 못 따가지고 오면 어떻게 하게…… 저도 열녀가 아닌 다음에 당하고 나면 할 말 없지. 아주 그런 버릇이 없는 년 같으면 모르거니와…… 옳지, 수가 있어, 뽕을 잔뜩 따서 이어주면 제가 항우의 딸년이라고 한 번은 중간에서 쉬렸다. 그러거든……)

이렇게 궁리를 하다가 너무 말이 없으니까 심심파적도 될 겸 또는 실없이 농담도 좀 해서 마음을 좀 떠보아 나중 성사의 전제도 만들어 놀 겸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다.

“삼보는 언제나 온답데까?”

“몰라, 언제는 온다 간다 말이 있어 다니나.”

“그래 영감은 밤낮 나돌아다니니 혼자 지내기 쓸쓸치 않소?”

놈이 모르는 것같이 새삼스럽게 시치미를 뗀다.

“별걱정 다 하네. 어서 앞서 가, 난 길이 서툴러 못 가겠으니……”

“매우 쌀쌀하구려. 나는 님자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그렇지만 김참봉 아들이란 쇠귀신 같은 놈이라 아무리 다녀도 잇속 없습네. 내 말이 그르지 않지.”

안협집은 삼돌이가 아주 터놓고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까 분해서 뺨이라도 치고 싶었으나 그대로 참으며,

“무엇이 어째? 말이라면 다 하는 줄 아는군.”

하고, 뒤로 조금 떨어져 걸어갈 제 전에도 그 녀석이 미웠지마는 남의 약점을 들어 가지고 제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 더 더러웠다.

뽕밭에 왔다. 삼돌이란 놈이 철망으로 울타리 한 것을 들어주어 안협집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으로 삼돌이란 놈은 그 무거운 다리를 성큼 하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다가 발끝에 삭정이 가지를 밟아서 딱 우지끈 소리가 나고 조용하였다.

삼돌이는 손에 익어서 서슴지 않고 따지마는 안협집은 익지도 못한데다가 마음이 떨리고 손이 떨려서 마음대로 안 된다.

삼돌이는 뽕을 따면서도 있다가 안협집을 꾀일 궁리를 하지마는 안협집은 이것 저것을 잊어버리고 손에 닥치는 대로 뽕을 땄다.

얼마쯤 땄다. 갑자기 안협집의 뒤에서,

“누구야!”

하고, 범 같은 소리를 지르는 남자 소리가 안협집의 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삼돌이란 놈은 길이나 되는 철망을 어느 결에 뛰어넘었는지 십여 간 통이나 달아나서 안협집을 불렀다.

“어서 와요! 어서, 어서!”

그러나 안협집은 다리가 떨려서 빨리 나와지지를 않는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하여 달아나려고, 한아름 잔뜩 따 넣었던 뽕을 내던지고 철망으로 기어나오기는 나왔으나 치맛자락이 걸려서 잡아당긴다. 거기에 더 질겁을 해서 그대로 쭉 찢고 나오려 할 때, 때는 이미 늦었다. 뽕 지키던 남자는 안협집을 잡았다.

“이 도둑년! 남의 뽕을 네 것같이 따가? 온 참, 이년, 며칠째냐, 벌써? 이렇게 남의 것이라고 건깡깽이로 먹으면 체하지 않을 줄 알았더냐? 저리 가자.”

안협집은,

“살려주소, 제발 잘못했으니 살려만 주소. 나는 오늘이 처음이오. 저 삼돌이란 놈이 날마다 따가지 나는 죄가 없쇠다.”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듣기 싫어. 이년아! 무슨 변명이냐. 육시를 하고도 남을 년 같으니. 왜, 감옥소의 콩밥 맛이 고소하더냐?”

“그저 잘못했습니다.”

삼돌이는 보이지 않고 뽕지기는 안협집 손목을 끄을고 뽕밭으로 들어갔다.

“이리 와! 외양도 반반히 생긴 년이 무엇이 할 게 없어 뽕 서리를 다녀.”

하더니 성냥불을 그어대고 안협집을 들여다보더니,

“흥!”

의미 있는 웃음을 웃어 버렸다.

안협집은 이 웃음에 한 가닥 희망을 얻었다. 그 웃음은 안협집의 손아귀에 자기를 갖다 쥐어 준다는 웃음이다. 안협집은 따라서 방싯 웃었다. 그 웃음 한번이 넉넉히 뽕지기의 마음을 반 이상이나 흰 죽 풀어지게 하였다.

안협집은 끌려갔다.

(제가 철석 같은 간장을 가진 놈이 아닌 바에…… 한 번이면 놓아줄걸.)

그는 자기의 정조를 팔아서 자기의 죄를 면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마지 못하는 체하고 끌려갔다.

삼돌이란 놈은 멀리서 정경만 살피다가 안협집을 뽕지기가 데리고 가는 것을 보더니 두 눈에서 쌍심지가 돋았다.

“얘, 이놈이 호랑이 삼돌이를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나 대관절 어떻게 할 셈이냐? 이놈 안협집만 건드려보아라. 정강마루를 두 토막에다 내놀 터이니. 오늘밤에는 꼭 내 것이던걸 그랬지. 어디 좀 가까이 좀 가 볼까?”

이제는 단판씨름이라 주먹이 시비 판단을 하는 때이다. 다시 철망을 넘어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이곳 저곳 귀를 기울이더니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돌아다녀 보았다.

저쪽에서 인기척이 웅얼웅얼 하더니 아무 말이 없다. 한 두서너 시간 그 넓은 뽕밭을 헤매고 또 거기 닿은 과목밭, 채마전, 나중에는 그 옆 원두막까지 가보았다. 놈이 뽕나무 밭 가운데 부풀덤불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는 입맛만 다시면서 집으로 와서 주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노파의 눈은 등잔만 해지더니 두 손, 두 다리가 사시나무 떨 듯한다.

“이거 일 났구나. 어쩌면 좋단 말이냐.”

좌불안석을 할 제 삼돌이란 녀석은 분한 생각에 곰방대만 똑똑 떨고 앉았다.

5

그날 새벽에 안협집이 무사히 왔다. 머리에 지푸라기가 묻고 몸매무시가 말이 아니다.

“에그, 어떻게 왔어? 응?”

주인은 눈에 눈물이 괴어서 어루만진다.

“무얼 어떻게 와요? 밤새도록 놈하고 승강이를 하다가 그대로 왔지.”

“그대로 놓아주던가?”

“놓아주지 않고, 붙잡아두면 어찌할 테야?”

일이 너무 싱겁다. 삼돌이 놈만 혼잣말처럼,

“내가 잡혔더면 콩밥을 먹었을걸, 여편네니까 무사했지.”

주인은 그래도 미진해서,

“그래, 잘 놓아주었으니 다행이지. 그러나 저러나 뽕은 어떻게 되었소?”

“다 뺏겼죠!”

“인제는 아무 일 없겠소?”

“일이 무슨 일예요.”

그날 밤에 삼돌이란 놈은 혼자 앉아서 생각하기를,

(복 없는 놈은 하는 수가 없거든. 그러나 내가 다 눈치를 채었으니까, 노름꾼놈이 오거든 일르겠다고 위협을 하면 년도 발이 저려서 그대로는 못 있지, 내 입을 안 막고 될 줄 아는 게로구먼.)

그후부터는 삼돌이란 놈이 안협집을 보고는,

“뽕지기놈 보고 싶지 않습나?”

하고 오며가며 맞대놓고 빈정대기도 하고 빗대놓고도 비웃는다.

“뽕이나 또 따러 가소.”

이러는 바람에 온 동리에서 다 알았다. 안협집은 분해서 죽겠는데, 하루는 삼돌이란 놈이 막 안협집이 이불을 펴고 누우려는데 찾아와서 추근추근 가지도 않고,

“삼보 김서방이 올 때도 되었습네그려.”

하며, 눈치를 본다. 안협집은 졸음이 와서 눈꺼풀이 뻣뻣하여오는데 삼돌이란 놈이 가지도 않는 것이 귀찮아서,

“누가 아우.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겠지.”

하고,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앉는다.

삼돌이의 눈에는 그 고단해하면서 비스듬히 누워서 눈을 감을락말락한 안협집의 목덜미 살찌기며 볼그레한 두 볼이 몹시 정욕을 일으킨다.

그래서 차츰차츰 말소리가 음흉해간다.

“님자는 사람을 너무 가려봅디다. 그러지 마슈. 나도 지금은 남의 집 머슴놈이지마는 안집 지체라든지 젊었을 적에는 그래도 행세하는 집에서 났더라우. 지금은 그놈의 원수스런 돈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마는……”

하고, 말을 건네려 하는데 안협집은 별 시러베 자식 다 보겠다는 듯이 대답이 없다.

“자! 그럴 것 있소. 오늘은 내 청을 한번 들어 주소그려.”

하고, 바싹 달려드는 바람에 반쯤 감았던 안협집의 눈은 똥그래지며 어느 결에 삼돌의 뺨에 손뼉이 올라가 정월에 떡치듯 철썩 한다.

“이놈! 아무리 쌍녀석이기로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냐. 냉큼 나가거라!”

하고 호령이 추상같다. 삼돌이란 놈은 따귀를 비비면서 성이 꼭두까지 일어나서,

“무엇이 어쩌고 어째. 횡! 어디 또 한번 때려봐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기가 하려던 것은 이루고 마는 것이 상책이다. 이래도 소문은 날 것이요, 저래도 소문은 날 것이니 이왕이면 만족이나 채우고 소문이 나더라도 나는 것이 자기에게는 이로울 것 같았다.

더구나 안협집으로 말을 하면 온 동리에서 판박아 놓은 화냥년이니 한번 화냥이나 두 번 화냥이나, 남이나 내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으랴 하는 생각이 났다. 도리어 자기의 만족을 한번 얻는 것이 사내자식으로서의 일종의 자랑인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두 팔로 안협집을 힘껏 끼어안고,

“내가 호랑이 삼돌이다! 네가 만일 내 말을 들으면 무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두지 않을 터이야! 네 네 남편이 오기만 하면 모조리 꼬아바칠 터이야! 뽕 따러 갔던 날 일까지 모조리!”

무식한 놈이라 야비한 곳이 있다. 안협집은 그 소리가 얼마나 사내답지 못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쇠같은 팔이 자기 허리를 누를 때 눈을 감고 한번 허락할까 하려다가 그 말을 듣고서 고만 침을 얼굴에 뱉었다.

“이 더러운 녀석! 네가 그까짓 것으로 나를 위협한다고 말을 들을 줄 아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삼돌이는 손으로 안협집의 입을 막았으나 때는 늦었다. 마침 마을 다녀오던 이장의 동생이 이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삼돌이란 놈은 무안해서 얼굴이 붉어지며 안협집을 놓았다. 안협집은 분해서 색색거리며,

“저놈 보시소. 아닌 밤중에 혼자 자는데 와서 귀찮게 굽니다. 저 죽일 놈이요. 좀 끌어내다 중치(重治)를 좀 해주시오.”

이장의 동생은 안협집의 행실을 아는고로 삼돌이만 보내려고,

“이놈이 할 일이 없거든 자빠져 자기나 하지, 왜 아닌 밤중에 남의 계집의 방에서 지랄이야? 냉큼 네 집으로 가거라!”

두 눈이 등잔만하여진다.

“네, 그런 게 아니라 실없이 기롱을 좀 했삽더니……”

“딛기 싫어! 공연히 어름어름 하면서, 이놈아 너는 사람을 죽여도 기롱으로 아느냐?”

삼돌이는 쫓겨났다. 이장의 동생은 포달을 부리며 푸념을 하는 안협집을 향하여,

“젊은것이 늦도록 사내녀석들을 방에다 붙이니까 그런 꼴을 당하지.”

“누가요?……”

“고만둬! 어서 잠이나 자.”

하며 문을 닫다 주고 나가버렸다.

6

삼돌이는 앙심을 먹었다. 안협집을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 골리리라는 생각이 가슴속에 탱중하였다. 안협집은 독이 났다. 삼돌이란 놈 분풀이를 하려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이튿날 동리에 소문이 났다.

“삼돌이란 놈이 뺨을 맞았다지! 녀석이 음침하니까.”

“그렇지만 계집년이 단정하면 감히 그런 맘을 먹을라구.”

“그렇구 말구! 제 행실야 판에 박은 행실이니까.”

“지가 먼저 꼬리를 쳤던 게지.”

이 소리가 바람에 떠돌아오자 안협집은 분하였다. 요조숙녀보다도 빙설 같은 여자인데 이런 누추한 소문을 듣는 것 같았다. 맘에 드는 서방질은 부정한 일이 아니요, 죄가 아니요, 모욕이 아니나 마음에 없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당하는 것은 무서운 모욕 같았다.

그는 그 길로 삼돌의 주인마누라에게로 갔다.

“삼돌이란 놈을 내쫓으소.”

주인은 벌써 알아채었으나 안협집편은 안 들었다. 다만 어루만지는 수작으로,

“무얼 내쫓을 것까지 있소. 그만 일에…… 그저 눈감아 두지.”

“왜 눈을 감는단 말이요?”

주인은 속으로 웃었다.

(소 한 필을 달라면 줄지언정 삼돌이를 내놔?)

하였다.

“내쫓아선 무얼 하우, 또.”

<어림없는 년! 네가 떠들면 떠들수록 네 밑구멍 들춰서 남 보이는 것이라>는 듯이 치어다보며 맨 나중으로 아주 잘라 말을 해버렸다.

“나는 못 내보내겠소.”

안협집은 분해서 집에 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었다. 그리고 또 결심했다.

“두고 봐라. 너희들까지 삼돌이를 싸고도니! 영감만 와봐라.”

하루는, 딴은 영감이 왔다. 안협집은 곤두박질을 하면서 맞았다.

“에그, 어서 오슈.”

노름꾼 김삼보는 눈이 똥그래졌다. 무슨 큰 좋은 일이나 생긴 것 같았다. 딴 때와 유달리 반가와하는 것이 의심스럽고 이상하였다.

방에 들어앉자마자 얼마나 땄느냐는 말도 물어보지 않고 삼돌이란 놈에게 욕당할 뻔하였다는 말을 넋두리하듯 이야기하였다.

“사람이 분해서 죽겠구려. 이것도 모두 영감 잘못 둔 탓이야. 오죽 영감이 위엄이 없어 보이면 그따위 녀석이 그런 짓을 할라고…… 영감이라고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지, 1년 열두 달 계집이 죽거나 살거나 내버려 두고 돌아만 다니니까……”

영감은 픽 웃었다.

“왜 내 잘못인가? 오죽 행실을 잘 가지면 그따위 녀석에게 그 꼴을 당한담.”

김삼보는 분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계집의 소행을 짐작도 하려니와 그놈의 주먹도 아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계집이 먹여 살리라는 말이 없고 이혼하자는 말만 없는 것이 다행해서 서방질을 해도 눈을 감아주고 무슨 짓을 하든지 그저 코대답만 하여주는 터이라 그런 소리가 귓전으로 들릴 뿐이다.

“내가 행실 잘못 가진 게 무어요?”

안협집은 분풀이라도 하여줄 줄 알았더니 도리어 타박을 주므로 분한데 악이 났다.

“글쎄 무어야! 무엇? 어디 대 봐요! 임자가 내 행실 그른 것을 보았소? 어디 보았거든 본대로 말을 하시우.”

딴은 김삼보는 집어서 말할 것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런 눈치만 채었지, 반박할 증거는 잡은 것이 없다.

“본 거나 다름없지!”

“무엇이 본 거나 다름없어? 1년 열 두 달 계집이 죽거나 살거나 내버려 두었다가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그것밖에 없어? 살기가 싫거든 그대로 살기 싫다고 그래, 사내답게. 왜 고만 냄새가 나지? 또 어디다가 계집을 얻어 논 게지.”

“이년이 뒈지지를 못해서 기를 쓰나?”

“그렇다. 이놈아! 네까짓 녀석 아니면 서방 없을까 봐 그러니, 더러운 녀석!”

김삼보의 주먹은 안협집의 등줄기를 우렸다.

“이년, 그래도 잔소리야! 주둥이 좀 닫치지 못하겠니……”

이렇게 서로 툭닥거리며 싸우는 판에 뒷집에서 삼돌이란 놈이 이 소리를 듣고서 가장 긴한 체하고 달아왔다.

“삼보 김서방 언제 오셨소?”

하고, 마당에 들어섰다. 김삼보는 그놈의 상판을 보니까 참았던 분이 꼭두까지 올라온다. 삼돌이는 제법 웃음을 띠며,

“허허, 오래간만에 만나셔서 내외분 싸움이 웬일이시우?”

어디서 한잔을 하였는지 얼굴이 불콰하다.

김삼보는 눈을 흘겨 뚫어지도록 삼돌이를 치어다보았다.

“이놈아! 남이 내외싸움을 하든 말든 참견이 무어야!”

삼돌이란 놈은 주춤하였다. 그는 비지 같은 눈꼽이 낀 눈을 꿈벅꿈벅 하더니,

“그렇게 역정 내실 것 무엇 있수. 말 좀 했기로……”

“이놈아 네가 아랑곳 할 게 무어야?”

“아랑곳은 할 것 없어도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랬으니까 말이오. 나는 싸움 좀 못 말린단 말이요?”

하고, 술 냄새를 풍기며 다가앉는다.

“이놈아, 술을 먹었거던 곱게 삭여!”

이번에는 삼돌이란 놈이 빌붓는다.

“나 술 먹고 어찌하든 김 서방이 관계할 게 무어요.”

“이놈아! 남의 내외싸움에 참견을 하니까 그렇지.”

주고받다가 삼돌이의 멱살을 김삼보가 쥐었다.

“이 녀석, 네가 무슨 뻔뻔으로 이따위 수작이냐? 내 계집 이놈 왜 건드렸니?”

삼돌이는 조금 발이 저렸으나 속으로 흥 하고 웃었다.

“요까짓 게 누구 멱살을 쥐어? 앙징하게……”

하더니 김삼보의 팔을 잡아 마당에다가 내려갈기니 개구리 떨어지듯 캑 한다.

“요놈의 자식아! 내 말을 좀 들어보고 말을 해! 네 계집 흠절을 모르고 뎀비기만 하면 강산이냐? 이 동리 반반한 사내양반 쳐놓고 네 계집 건드리지 않은 놈이 없다. 이놈! 꼭 집어 말을 하라면 위에서 아래로 내리섬기마. 이놈 너도 계집 덕분에 노자랑 노름 밑천 푼 좋이 얻어썼지. 그래 집이라고 오면서 볼 받은 것이나마 옥양목 버선 벌이나 얻어 가지고 가는 것은 모두 어디서 나온 것으로 아니? 요 땅딸보 오리궁둥아! 아무리 속이 밴댕이 같기로…… 그리고 또 들어봐라. 나중에는 주워먹다 못해서 뽕지기까지 주워먹었다.”

안협집이 파래서 달려든다.

“이놈! 네가 보았니!”

“보나 안 보나 일반이지.”

“이녀석, 네 말을 듣지 않으니까 된 말 안된 말 주둥이질을 하는구나.”

동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안협집은 삼돌이에게 발악을 하고 김삼보는 듣고만 있다.

한참 있더니 듣다듣다 못하는 듯이 삼돌이란 놈이 안협집에게로 달려들며,

“이년이 뒈지려고 기를 쓰나?”

하고, 주먹을 들었다.

동리 사람들이 호령을 하고 말렸다.

“이놈! 저리 얼른 가거라!”

삼돌이는 변명을 하며 뻗딩겼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게 끌려 저리로 가버렸다.

사람이 헤어지자 노름꾼은 계집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는 삼돌이에게 태질을 당한 것이 분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까지 계집년의 행실을 온 동리에서 아는 것이 분하였다.

“이년! 더러운 년! 뽕밭에는 몇 번이나 나갔니?”

발길로 지르고 주먹으로 패고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땅에다 질질 끌었다. 그는 이를 갈고 어쩔 줄을 몰랐다. 계집은 울고 발버둥질을 쳤다.

“죽여라! 죽여!”

“그럼 살려줄 줄 아니? 이년! 들어앉아서 하는 게 그런 짓밖에는 없어?”

김삼보는 자기의 무딘 팔다리가 계집의 따뜻하고 연한 몸에 닿을 때에 적지 않은 쾌감을 느끼었다. 그는 그럴수록 더욱 힘을 주어 저리도록 속에 숨겨 있던 잔인성이 북받쳐 올라왔다.

맞은 안협집은 당장에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왕 이리된 바에야 모두 말해버리고 저하고 갈라서면 고만이지 언제는 귀밑머리 풀고, 사주단자 보내고, 사당에 예배드린 내외냐. 저는 저고 나는 난데, 왜 이렇게 때리노? 하는 맘이 나며,

“이것 놔라! 내 말하마!”

하고, 머리를 붙잡았다.

“뽕밭에는 한 번밖에 안 갔다. 어쩔 테냐?”

삼보는 더욱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년! 한번?”

이번에는 더 때렸다. 안협집은 말한 것이 후회가 났다. 삼보는 그래도 거짓말을 한다고 그대로 엎어놓고 짓밟았다. 안협집은 기절을 하였다. 삼보는 귀로 안협집의 숨소리를 들어 보았다. 그러나 숨소리가 없다. 그는 기겁을 하여 약국으로 갔다. 그의 팔다리는 떨렸다. 그가 의사에게서 약을 지어 가지고 왔을 때 안협집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삼보는 반가웁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약을 마당에 팽개쳤다. 그리고 밤새도록 서로 말이 없었다.

이튿날은 벙어리들 모양으로 말이 없이 서로 앉아 밥을 먹고, 서로 앉아 치어다보고, 서로 말만 없이 옷도 주고 받아 갈아입고, 하루를 더 묵어 삼보는 또 가버렸다. 안협집은 여전히 동리 집 공청 사랑에서 잠을 잤다. 누에는 따서 30원씩 나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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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누님 누님 누님 하고 눈물이 날 만큼 감격에 떨리는 목소 리로 누님을 불러 보고 싶습니다.
그것도 한낱 꿈일까요? 꿈이나 같으면 오히려 허무로 들리어 보내일 얼마간의 위로가 있겠지만 그러나 그러나 그것도 꿈이 아닌가 하나이다. 시간을 타고 뒷걸음질 친 또렷하 고 분명한 현실이었나이다.
그러나 꿈도 슬픈 꿈을 꾸고 나면 못 견딜 울음이 복받쳐 올라오는데, 더구나 그 저의 작은 가슴에 쓰리고 아픈 전상(箭傷)을 주고 푸른 비애로 물들여 주고 빼지 못할 애달픈 인상을 박아 준 그 몽롱한 과거를 지금 다시 돌아다볼 때 어찌 눈물이 아니 나고 어째 가슴이 못 견디게 쓰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멀리 멀리 간 과거는 어쨌든 가 버리었읍니다. 저의 일생을 꽃다운 역사, 행복스러운 역사로 꾸미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가 아닌 게 아니지마는 지나갔는지라 어찌할까요. 다시 뒷걸음질을 칠 수도 없고 다만 우연히 났다 우연히 사라지는 우리 인생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 운명이라 덮어 버리고 다만 때없이 생각되는 기억의 안타까움으로 녹는 듯한 감정이나 맛볼까 할 뿐이외다.

2
그날도 그전과 같이 고개를 숙이고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몽롱한 의식 속에 C동 R의 집 에를 갔었나이다. R은 여전히 나를 보더니 반가와 맞으면서 그의 파리한 바른손을 내밀 어 악수를 하여 주었나이다. 저는 그의 집에 들어가 마루끝에 앉으며,
“오늘도 또 자네의 집 단골 나그네가 되어볼까?”
하고 구두끈을 끄르고 방안으로 들어가 모자를 벗어 아무데나 홱 내던지며 방바닥에 가 펄썩 주저앉았다가 그 R의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 한 개를 꺼내어 피워물었나이다.
바닷가에서는 거의 거의 그쳐 가는 가늘은 눈이 사르락사르락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나 이다.
그때 R의 얼굴은 어째 그전과 같이 즐겁고 사념없는 빛이 보이지 않고 제가 주는 농담에 다만 입 가장자리로 힘없이 도는 쓸쓸한 미소를 줄 뿐이었나이다. 저는 그것을 보고 아주 마음이 공연히 힘이 없어지며 다만 멍멍히 담배 연기만 뿜고 있었나이다.
R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멀거니 앉았다가,
“DH.”
하고 갑자기 부르지요. 그래 나는,
“왜 그러나?”
하였더니,
“오늘 KC에 갈까?”
하기에 본래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저는 아주 시원하게,
“가지.”
하고 대답을 하였더니 R은 아주 만족한 듯이 웃음을 웃으며,
“그러면 가세.”
하고 어디 갈 것인지 편지 한 장을 써 가지고 곧 KC를 향하여 떠났나이다.
KC가 여기서부터 60리, R의 말을 들으면 험한 산로(山路)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요. 그리고 벌써 11지나 되었으니 거기를 가자면 어두워서나 들어갈 곳인데 거기다가 오다가 스러지는 함박눈이 태산같이 쌓였나이다. 어떻든 우리는 떠났나이다. 어린아이들같이 기꺼운 마음으로 뛰어갈 듯이 떠났나이다.
우리가 수구문(水口門)에서 전차를 타고 왕십리 정류장에 가서 내릴 때에는 검은 구름이 흩어지기를 시작하고 눈이 부신 햇살이 구름 사이를 통하여 새로 덮인 횐 눈을 반짝반짝 무지개빛으로 물들였었나이다. 저는 그 눈을 밟을 때마다 처녀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때없이 지저귀는 어린 꾀꼬리의 그 소리같이 연하고도 애처롭게 얼크러지는 듯한 눈소리를 들으며 무슨 법열권 내에 들어나 간 듯이 다만 R의 손만 붙잡고 멀리 보이는 구부러진 넓은 시골길만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어갔을 뿐이외다.
그러나 R의 기색은 그리 좋지 못하였나이다. 무슨 푸른 비애의 기억이 그를 싸고 돌아가는 것같이 그의 앞을 내다보는 두 눈에는 검은 그림자가 덮여 있는 듯하였나이다. 그리고 때때 내가 주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보이지 않게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의 괴로운 듯한 가슴을 내려앉혔나이다.
때때 거리거리 서울로 향하여 떠돌아 온 시골 나무장사의 소몰이 소리가 한적한 시골의 가만한 공기를 울리어 부질없이 뜨겁게 돌아가는 저의 핏속으로 쓸쓸하게 기어들어 올 뿐이 었나이다.
넓고 넓은 벌판에는 보이는 것이 눈뿐이요, 여기저기 군데군데 서 있는 수척한 나무가 보일 뿐이었나이다. 저는 이것을 볼 때 마다 저 북쪽 나라를 생각하였으며 정처 없는 방랑의 생활을 생각하였나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두 사람이 방랑의 길을 떠난다고 가정까지 하여 보았나이다. R은 다 만 나의 유쾌하게 뛰어가는 것을 보고 쓸쓸한 웃음을 웃을 뿐이었나이다.
우리가 SC강을 건널 때에는 참으로 유쾌 하였지요. 회오리바람만 이 귀퉁이에서 저 귀퉁이로 저 귀퉁이에서 이 귀퉁이로 획획 불어갈 때에 발이 빠지는 눈 위로 더벅더벅 걸어갈 제 은싸라기 같은 눈가루가 이리로 사르락 저리로 사르락 바람에 불려가는 것이 참으로 끼어안을 듯이 깜찍하게 귀여웠나이다. 우리는 그 눈덮인 모래톱으로 두 손을 마주잡고 하나, 둘을 부르며 달음질을 하였나이다. 그리고 또다시 SP강에 다다랐을 때에는 보기에도 무서워 보이는 푸른 물결이 음녀(淫女)의 남치맛자락이 바람에 불리어 그의 구김샅이 울멍줄멍하는 것같이 움실움실 출렁출렁하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그 강을 건너 주막 거리에서 점심을 먹을 때에 R이 나에게 말하기를,
“술 한잔 먹으려나?”
하기에 나는 하도 이상하여
“술!”
하고 아무 소리도 못하였읍니다. 여태까지 술을 먹을 줄 모르는 R이 자진하여 술을 먹 자는 것은 한 가지 이상한 일이었나이다.
KC를 무엇하러 가는지도 모르고 가는 저는 또한 R이 술 먹자는 것을 또다시 그 이유까지 물어 볼 필요가 없었나이다.
그는 처음으로 술을 먹었나이다.
우리는 또다시 걸어갔나이다. 마액(魔液)은 그 쓸쓸스러운 R을 무한히 흥분시켰나이다. 그는 팔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크게 하여 말하기를 시작하였나이다. 그는 나의 손을 힘있게 쥐며,
“DH.”
하고 부르더니 무슨 감격한 듯한 어조로,
“날더러 형님이라고 하게.”
하고 조금 있다가 다시,
“나는 DH를 얼마간 이해하고 또한 어디까지 인정하는데.”
하였나이다.
아, 얼마나 고마운 소리일까요? 저는 손 아래 동생은 있어도 손위의 형님을 가질 운명에서 나지를 못하였나이다. 손목 잡고 뒷동산 수풀 사이나, 등에 업고 앞세워 물가로 데리고 다녀 줄 사람이 없었나이다. 무릎에 얼굴을 비벼가며 어리광부려 말할 사람이 없었나이다. 다만 어린 마음 외로운 감정을 그렁저렁한 눈물 가운데 맛볼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부드러운 사랑을 맛보지 못하였나이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는·본래 젊으시니까‥‥‥
그리고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지낸 과거를 생각하여 보면 웬일인지 한귀퉁이 가슴속이 메인 듯해요.
그런데 <형님>이라 부르고 <아우>라고 부르라는 소리를 듣는 저는 그 얼마나 기꺼웠 을까요? 그 얼마나 반가왔을까요. 그리고 나를 이해하고 나를 얼마간일지라도 인정하여 준다는 말을 들은 나는 얼마나 감사하였을까요?
그러나 그 감사하고 반갑고 기꺼운 말소리에 나는 얼핏 <네> 하지를 아니하였나이다.
그 <네>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일는지 잘못 아닐는지 알 수 없으나 어찌하였든 저는 <네>소리를 하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인정하여 주는 그 R의 마음을 더 슬프게 하였을는지 더 무슨 만족을 주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거기에 이렇게 대답을 하였나이다.
“좋은 말이오, 우리 두 사람이 어떠한 공통 선상에 서서 서로 인정하고 서로 이해함을 서로 받고 주면 그만큼 더 행복스러운 일이 없지. 그러하나 형이라 부르거나 아우라 부르지 않고라도 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도리어 형이라 아우라는 형식을 만들 것이 없지 아니하냐?”
고 말을 하였더니 그는 무엇을 깨달은 듯이,
“딴은 그것도 그렇지.”
하고 나의 손을 더 힘있게 쥐었나이다.

3
금빛나는 종소리가 파랗게 갠 공중을 울리고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지? 그렇지 아니하면 온 우주에 가득 찬 ‘’에에테르’’를 울리며 멀리멀리 자꾸자꾸 끝없이 가는지, 어떻든 그 예배당 종소리가 우두커니 장안을 내려다보는 인왕산 아래 붉은 벽돌 집에서 날 때 저와 R은 C예배당으로 들어갔나이다.
그때에 누님도 거기에 앉아 계시었지요. 그리고 그 MP양도‥‥‥
처음 보지 않는 MP양이지마는 보면 볼수록 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자꾸자꾸 변하여 갔나이다. 지난번과 이번이 또 다르지요.
지난번 볼 때에는 적지 않은 불안을 가지고 그 여성을 보았읍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낙망을 가지고 보았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번에 그를 볼 때에는 웬일인지 그에게서 보이지 않게 새어 나오는 무슨 매력이 나의 온 감정을 몽롱한 안개 속으로 헤매이는 듯이 누런 감정을 나에게 주더니 오늘에는 불그레하게 황금색이 나는 빛을 나에게 던져 주더이다. 그리고 그 황금색이 농후한 액체가 평평한 곳으로 퍼지는 듯이 점점점점 보이지 않게 변하여 동(銅)색의 붉은빛으로 변하고 나중에는 어여쁜 처녀의 분흥저고리 빛으로 변하기까지 하였나이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릴 듯 돌릴 듯 할 때 마다 나의 전신의 혈액은 타오르는 듯하고 천국의 햇발 같은 행복의 빛이 나의 온몸 위에 내리붓는 듯하였나이다.
그리고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예배 시간이 나의 마음을 공연히 못살게 굴었나이다.
어찌하였든 예배는 끝이 났지요. 그리고 나와 R은 바깥으로 나왔지요, 그때 누님은 나를 기다리었지요. 그리고 저와 누님은 무슨 이야기든가 그 이야기를 할 때 아아, 왜 MP양이 누님을 쫓아오다가 저를 보고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저편으로 줄달음질쳐 달아났을까요? --- 그렇지 않다는 그 MP양이--- 누님, 그 MP양이 고개를 돌리고 줄달음질을 하거나 부끄러워 얼굴빛이 타오르는 저녁 노을빛 같거나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 되겠읍니까?
그러나 왜 나를 보고 그리하였을까요? 아마 다른 남성을 보고는 그리 안했을 터이지요? 그리고 그 줄달음질하여 저쪽으로 돌아가서는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더욱 부끄럽지나 아니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는 마음이 나지나 아니하였을까요?
어떻든 그것이 나에게 준 MP의 첫째 인상이었나이다. 그리하고 환희와 번뇌의 분기점에 나를 세워 놓은 첫째 동기였나이다.
저는 언제든지 이 시간과 공간을 떠날 날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 깊이 박힌 인생은 두렵건대 그 시간과 공간에 영원한 흔적을 남겨 줄는지요?

4
사랑하는 누님, 왜 나의 원고는 도적질하여 갖다가 그 MP양을 보게 하였어요? 그 MP양이 그 글을 보고 얼마나 웃었을까요?
누님의 도적질한 것은, 그것을 죄를 정할까요, 상을 주어야 할까요? 저는 꿇어엎디어 절을 하겠읍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을 열어 드릴 터입니다.
그런데 그 원고 OOO이라 한 곳에 서투른 필적을 자랑하려 한 것인지? 그렇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요, 그렇지는 않지요?
그러나 나의 원고를 더럽힌 그에게는 무엇이라 말을 하여야 좋을까요?
그러나 그러나 그 필적은 나의 가슴에 무엇인지를 전하여 주는 듯하였나이다. 사람의 입으로나 붓으로는 조금도 흉내낼 수 없는 그 무엇을 전하여 주더이다. 다만 취몽 중에 헤매이는 젊은이의 가슴을 못살게 구는 그 무엇을?

5
고맙습니다. 누님은 그 MP양과는 또다시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제와 같다 하였지요? 그리고 서로서로 형님 아우하고 지낸다지요. 저는 다만 감사할 뿐이외다. 그리고 영원한 무엇을 바랄 뿐이외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 누님과 MP사이를 얽어 놓은 형제라 하는 형식의 줄이 나를 공연히 못살게 구나이다. 그리고 모든 불안과 낙망 사이에서 헤매이게 하나이다.
누님의 동생이면 나의 누이지요. 아니 나의 누님이지요. 그 MP양은 나보다 한 살이 더하니까 --- 그러면 나도 그 MP양을 누님 이라 불러야 할 것이지요.
아아, 그러나 그것이 될 일일까요. 누님이라 부르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마는 나의 입으로 그를 누님이라고 부른다 하면 그 부르는 그날로부터는 그의 전신에서 분흥빛나는 무슨 타는 듯한 빛을 무슨 날카로운 칼로 잘라 버리는 듯이 사라져 버릴 터이지. 아니 사라져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제가 이 눈을 감아야지요.
아아, 두려운 누님이란 말, 나는 이 두려운 소리를 입에 올리기도 두려워요.

6
오늘 저는 PC에 보낼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신흥(神興)이 나지기 않아서 펴 놓은 종이를 척척 접어 내던져 버리고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대님을 한 번 갈아 매고 모자를 집어쓰고 바깥으로 나갔읍니다. 시계는 벌써 7시를 10분이나 지나고 있었나 이다.
저의 가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R의 집이지요. 그리고 내가 책을 볼 때에나 글씨를 쓸 때에나 길을 걷거나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을 때나 눈을 감고 명상할 때에나 나의 눈앞을 떠나지 않는 그 MP양을 오늘 R의 집에를 가면서도 또 보았읍니다.
저는 언제든지 MP양을 생각합니다. 허무한 환영과 노래하며 춤추며 이야기하며 나중 에는 두렵건대 손을 잡고 이 세상의 모든 유열을 극도로 맛보았읍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낱 공상인 것을 깨달을 때에는 저도 공연히 싫증이 나고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것이 비관의 종자가 될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아아 과연 다만 일찰나 사이라도 그 MP의 머릿속에서 나의 환영을 찾아낸다 하면 그 얼마나 나의 행복일까 하였나이다. 그리고 그 MP는 나를 조금도 생각지 않는 것만 같아서 공연히 마음이 애달팠나이다.
그날 R은 집에 있지 않았읍니다. 저의 마음은 눈물이 날 듯이 공연히 ‘’센티멘탈’’로 변 하여졌나이다. 그래서 정처없이 방황하기로 정하고 우선 L의 집으로 가 보았읍니다.
제가 그 처녀와 같이 조금도 거짓 없음을 부러워하는 L은 나를 보더니 그 검은 얼굴에 반가와 죽을 듯한 웃음을 띠우고 손목을 잡아 자기 방으로 끌어들이더니 어저께도 왔었는데,
“왜 그 동안에 그렇게 오지를 않았나?”
하지요. 그래 나는 그 얼마나 고독히 지내는 그 L을 보고 이때껏 계속하여 왔던 감상이 가슴 한복판으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공연히 눈물이 날 듯‥‥‥하지요. 그래 억지로 그것을 참고 멀거니 앉아 있었더니 그 L은 또 날더러 독창을 하라지요. 다른 때 같으면 귀가 아프다고 야단을 쳐도 자꾸자꾸 할 저이지마는 오늘은 목구멍에서 무엇이 잡아당기는지 그 목소리가 조금도 나오지를 아니하였나이다. 그래 공연히 앙탈을 하고 일어나기를 싫어하는 그 L을 옷을 입혀 끌고 바깥으로 나갔읍니다.
저녁 안개는 달빛을 가리우고 붉은 전등불만이 어두움 속에 진주를 꿰뚫어 놓은 듯이 종로 큰거리에 나란히 켜 있을 뿐이었나이다.
두 사람이 나오기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곳이 없었나이다.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하루 저녁을 유쾌히 놀 수도 없고 또 갈 만한 친구의 집도 없고 마음만 점점 더 귀찮고 쓸쓸스러운 생각을 하였나이다.
우리 두 사람은 결국 때없이 웃는 이의 집으로 가기로 하였나이다. 우리는 한 집에를 갔으나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그는 있지 않았나이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설영(雪影)의 집으로 가기를 정하고 천변(川邊)으로 내려섰나이다. 골목 안의 전기불은 누구를 기다 리는 것같이 빙그레 웃으며 켜 있었지요. 우리는 그 집에를 들어가 ‘설영이’ 하고 불렀나이다. 안방에서 영리한 목소리로,
“누구요?”
하는 설영의 목소리가 났읍니다. 우리 두 사람은,
“있고나.”
하였읍니다. 그리고 공연히 마음이 반가왔나이다. 그리고 설영이는 마루끝까지 나와,
“아이그 어서 오세요, 왜 그렇게 한 번도 아니 오세요.”
하지요.
아, 누님 그 소리가 진정이거나 거짓이거나 관성으로 인하여 우연히 나온 말이거나 아무것이거나 나는 그것을 생각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나만 감상에 쫓기어 정처없이 방황하려는 이 불쌍한 사람에게 향하여 그의 성대를 수고롭게 하여 발하여 주는 그의 환영의 말이 얼마나 나의 피곤한 심령을 위로 하여 주었을까요.
그는 날더러 <오라버니>라 하여 주기를 맹서하여 주었읍니다. 그리고 영원히 오라버니가 되어 달라 하였읍니다.
누님, 과연 내가 남에게 오라버니라는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도 나의 원치 않는 형식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설영을 친누이동생같이 사랑하렵니다. 그리고 영원히 영원히 나의 누이동생을 만들려 하나이다. 그리고 다만 독신인 설영이도 진정한 오라비 같은 어떠한 남성의 남매 같은 애정을 원하겠지요. 그러나 그러나 무상인 세상에 그것을 과연 허락할 참 신(神)이 어느 곳에 계실는지요?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외다.
그날 L은 설영을 공연히 못살게 놀려먹었나이다. 물론 사념없는 어린애 같은 유회지요.
그때 L은 설영을 잡으려고 달려들었읍니다. 설영은 소리를 지르며 간지러운 웃음을 웃으면서 나의 앞으로 달려들며,
“오아버니! 오라버니!”
하고 그 L을 피하였나이다. 나는 그때 그 설영이 비록 희롱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L에게 쫓기어 나에게 구호함을 청할 때에 아아, 과연 내가 이와 같은 여성의 구호를 청함을 받 을 만한 자격의 소유자일까 하였나이다. 그리고 모든 여성은 다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혼자 이 설영이가 나에게 구호함을 청 한다는 것은‥‥‥ 그 설영을 끼어안을 듯이 귀여운 생각이 났나이다. 그러나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영의 그림자일까? 팔팔팔 날리는 봄날의 아지랭이일까? 영원이란 무엇일는지요‥‥‥

7
날이 매우 따뜻하여졌읍니다. 내일쯤 한 번 가서 뵈오려 하나이다. 하오에 기다려 주 십시오. 그리고 W군은 어저께 동경으로 떠나갔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만나보지 못한 것이 매우 섭섭하외다. 그리고 S군 Y군도 그리로 향하여 수일 후에 떠나간다는 말을 들었읍니다. 아아, 저는 외로운 몸이 홀로이 서울에 남아 있게 되겠지요. 정다운 친구들은 모두 다 저 갈 곳으로 가 버리고‥‥‥

8
왜 어저께 저는 누님에게를 갔을까요? 간 것이 나에게 좋은 기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좋지 못한 기회이었을까요.
어떻든 어저께 나는 처음으로 그 MP와 말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가까이 서로 보 고 앉아 간질간질한 시선으로 그를 보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나의 눈에서 방산하는 시선의 몇 줄기 위로 나의 될 새 없이 뛰는 영의 사자를 태워 보내었나이다.
그는 그때 그 예배당 앞에서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리고 줄달음질하던 때와는 아주 달랐 읍니다. 그의 마음속으로는 나의 전신의 귀퉁이로부터 귀퉁이까지 호의의 비평을 하였을는지 악의의 비평 --- 그렇지는 않겠지요 --- 을 하였을는지 어떻든 부단의 관찰로 비평을 하였겠지요. 그러나 그의 눈과 안색은 아주 침착하였나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는 아주 나의 마음을 취하게 할 듯이 부드럽고 연하며 은빛이 났나이다.
그리고 나의 글을 너무 칭상(稱賞)하는 것이 조금 나를 부끄럽게 하였으며 또는 선생님이라는 경어가 아주 나를 괴롭게 하였나이다.
누님, 만일 그가 날더러 선생이라 그러지 않고 오라비라고 하였더면? 그 찰나의 나의 모든 것은 다 절망이 되어 버렸을 터이지요. 그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제가 도리어 그 선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행복인 것을 깨달을 날이 있을 줄은 이제 처음으로 알게 되었나이다.
어떻든 저는 그 MP와 만날 기회를 얻었읍니다. 그리고 서로 말소리를 바꾸게 되었읍 니다. 아마 이것이 저와 그 MP사이에 처음 바꾸는 말소리가 되었겠지요? 그리고 우주의 생명 중에 또다시 없는 그 어떠한 마디이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불안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못 견딜 만큼 불안합니다. 다만 한 번 있는 그 기회의 순간이 좋은 순간이었을까요? 기쁜 순간이었을까요. 무한한 희망과 영원한 행복을 저에게 열어 주는 그 열쇠 소리가 한번 째깍 하는 그 순간이었을까요. 그렇지 아니하면 끝없는 의혹과 오뇌 속에서 만일의 요행만 한 줄기 믿음으로 몽롱한 가운데 살아 있다 그대로 사라져 없어졌다면 도리어 행복일걸 하는 회한의 탄식을 나에게 부어줄 그 순간이었을까요?
어찌하였든 저는 한옆으로 요행을 꿈꾸며 한옆으로 부질없는 낙망에 에매이나이다.

9
오늘은 아침 9시에 겨우 잠을 깨었나이다. 그것도 어제 저녁에 공연히 돌아다니느라고 늦게 잔 덕택으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행복을 얻었더니 그나마 행복이 되어 그리하였는지 R이 찾아와서 못살게 굴지요. 못살게 구는 데 쪼들리어 겨우 잠을 깨어 세수를 하였나이다.
이상한 일이었나이다. 제가 R의 집을 가기는 하여도 R이 저의 집에 찾아오는 일이 없는 그가 오늘 식전 아침에 저를 찾아온 것은 참으로 뜻밖이고 이상합니다.
그는 매우 갑갑한 모양이었나이다. 그리고 요사이 며칠 동안 그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하였으며 언제든지 무슨 실망의 빛이 있었나이다.
오늘도 그는 침묵 속에 있었나이다. 그리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나이다.
그는 어디로 산보를 가자 하였나이다. 저는 아침도 먹지 않고 그와 함께 정처없이 나섰나이다.
우리는 전차를 타고 H와 P의 집에를 가 보았으나 H는 아침 먹고 막 어딘지 가고 없다하고 P는 집에 일이 있어서 가지를 못하겠다 하지요. 그래 하는 수 없이 우리 단 두 사람이 또다시 HC를 향하여 떠났나이다.
천기는 청명, 가는 바람은 살살, 아주 좋은 봄날이었나이다. 우리는 전차에서 내렸나이다. 오포(午砲)가 탕 하였나이다.
멀리멀리 흐르는 HC강은 옛적과 같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나이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향기도 없고 아무 웃는 것도 없고 다만 푸른 물 속에 취색(翠色)의 산 그림자를 비추어 있어 다만 ‘아아 아름답다’하는 우리 두 사람의 못 견디어 나오는 탄성뿐이 고요한 침묵을 가늘게 울릴 뿐이었나이다. 우리는 언덕으로 내려가 한가히 매여 있는 주인 없는 배 위에 앉아 아무 소리 없이 물 위만 바라보았나이다. 푸른 물 위에는 때때 은사(銀絲)의 맴도는 듯한 파련(波漣)이 가늘게 떨 뿐이었나이다. 그리고 사르렁사르렁 은사의 풀렸다 감겼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나이다.
우리는 한참이나 앉아 있었나이다.
우리는 문득 저쪽을 바라보았나이다. 그리고 나의 가슴은 공연히 덜렁덜렁하고 전신에·식은땀치 흐르는 듯하였나이다. 저기 저쪽·에는 그 비단결 같은 물 위에 한가히 떠 있어 물 속으로 녹아들 듯이 가만히 있는 그 ‘’요트’’위에는 참으로 뜻밖이었지요, 그 MP가 어떠한 다른 동무하고 나란히 앉아 있었나이다.
그러나 그 MP는 나를 보고도 모르는 체하는지 보지 못하고 모르는 체하는지 다만 저의 볼 것, 저의 들을 것만 보고 들을 뿐이었나이다.
저는 그 MP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나 만일 그가 나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불과 몇십 간 되지 않는 거기에 있는 그가 어째 나를 보지 못하였을까? 못 보았을 리가 있나? 라고만 생각하는 저는 그에게로 가기가 두렵고 공연히 무엇인지 보이지 않는 무엇이 원망스러웠을 뿐이었나이다.
그런데 웬일일까요‥‥‥MP를 나 혼자만 아는 줄 아는 저는 R의 기색에 놀라지 아니치 못하였나이다.
R은 나의 손을 잡아당기며,
”MP가 왔네.”
하였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저는 R이 어떻게 MP를 아는가 하였나이다. 그리고 무엇 인지 번개와 같이 저의 머리를 지나가는 것이 있더니 저는 그 R에게서 무슨 공포를 깨달은 것이 있었나이다.
R은 대담하게 MP에게로 갔읍니다. 저도 그를 따라갔읍니다. R은 모자를 벗고 그에게예를 하였나이다. 아아 그러나 누님, 정성을 다하지 않고 몽롱한 의심과 적지 않은 불안으로 주는 저의 예에는 그의 입 가장자리로 불그레한 미소가 떠돌았으며 따뜻한 눈동자 의 금빛 광채이었나이다. 그리고,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오셨어요?”
하는 그의 전신을 녹이는 듯한 독특한 어조가 저를 그 순간에 환희의 정화 속으로 스며들게 하였나이다.
우리 두 사람은 그를 작별하고 바로 시내로 들어왔나이다. 웬일인지 저의 마음은 한없이 기뻤나이다. 그리고 전신의 혈액은 더욱더 펄펄 끓기를 시작하였나이다. 그러나 R의 얼굴은 그 전보다 더 비애롭고 실망의 빛이 떠돌았나이다. 쓸쓸한 미소와 쓸쓸한 어조가 도는, 저의 동정의 마음을 일으킬 만큼 처참한 듯하였나이다. 저는 R에게,
“어떻게 MP를 알던가?”
하였읍니다. 그는 무슨 옛날의 환상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전부터 알아.”
하였나이다. 이 소리를 듣는 저는 그러면 이성 사이에 만나면 생기는 사랑의 가락이 그 MP와 이 R 사이에 매여지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여태껏 기껍던 것이 점점 무슨 실망의 감상으로 변하여 버리었나이다. 그리고 차차 의혹 속에 방황하게 되었나이다.
그리하다가도 그 R의 실망하는 빛과 MP의 냉담한 답례가 저에게 눈물날 만큼 R을 동정하는 생각을 나게 하면서도 또 한옆으로는 무슨 승자의 자랑을 마음 한귀퉁이에서 만족히 여기었으며 불행한 R을 옆에 세우고 다행히 환희를 맛보았읍니다.
그날 저는 R의 집에서 자기로 정하였나이다. 밤 11시가 지나도록 별로 서로 말을 한 일이 없는 R과 두 사람 사이에는 공연히 마음이 괴로운 간격을 깨닫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그의 푸른 비애와 회색 실망의 빛이 그의 얼굴로 가끔가끔 농후하게 지나갈 때마다 저는 공연히 불안하였나이다.
저는 R에게 그 기색이 좋지 못찬 이유를 묻기를 두려워하였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 비애의 빛과 실망의 빛이 그 MP로 인한 것이 아니고 다른 것으로 인한 것이라 하면 저는 그때 그 R의 그 비애와 실망과 똑같은 비애와 실망을 맛보았을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형제와 같은 그 R의 비애와 실망을 그 MP로 인하여서라고 인정하지를 아니하면 저의 마음이 불안하셔 못 견딜 정도였읍니다.
그날 저녁 R은 자리에 누워서도 한잠을 자지 못하는 모양이었나이다. 다만 눈만 멀뚱멀뚱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나이다. 그리고 머리를 짚고 눈을 감고 무엇인지 명상 하듯이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나이다. 그의 엷은 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읍니다.
저도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읍니다. 그래 머리맡 서가에 놓여 있는 <On The Eve>를 집어들고 한참이나 보다가 잠이 깜빡 들었나이다.

10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버리었나이다. 꿈을 믿고 길에서 장님을 만나면 두 다리에 풀이 다하도록 실망을 하게 되었나이다.
그리고 꽃의 화판을 “하나 둘” 하며 <MP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하며 차례차례 따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사랑한다> 하는 곳에서 맨 나중 꽃잎사귀가 떨어지면 성공한 것처럼 춤을 출 듯이 만족하였으며 그렇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 는 곳에 와서 그 맨 나중 꽃잎사귀가 떨어지면 공연히 낙망하는 생각이 나며 비로소 그 헛된 것을 조소합니다. 그러나 어느 틈에 또다시 그 꽃잎사귀를 따 보고 싶어 못 견디게 되나이다. 저는 요행을 바라는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미신자가 되었읍니다. 오늘은 제가 누님을 만나뵈러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W군이 ‘’피스’’(piece)를 찾아 달라 하여서 누님에게로 갔읍니다.
누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나는 다만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정문 앞 ‘’플랫폼’’을 왔다 갔다 하였나이다.
그러다가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나오는 사람은 누님이 아니고 그 MP였읍니다. MP 는 나를 보더니 쌩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하여 주었나이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있 었나이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이가 누님이었지요.
저의 마음은 이상하게 기뻤나이다. 그리고 아주 무슨 희망을 얻은 듯하였나이다. 길거리로 걸어다니면서도 혹시나 MP를 만나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순간의 기회를 기대하는 저는 누님에게로 갈 때마다 그 MP를 만날 수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다니었나이다. 오늘도 그 기대를 조금일지라도 아니 가지고 간 것이 아니었건마는 그 MP가 있지 않을 줄 안 저는 아주 단념을 하고 갔었읍니다. 그래 그 MP를 만난 것은 아주 의외이었지요.
누님 그 MP가 무엇하러 누님보다도 먼저 저를 보러 나왔을까요. 어린 아우를 만나려 는 누님의 마음이었을까요. 반가운 정인을 만나려는 애인의 마음이었을까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저와 오랫동안 말을 하였나이다. 그리고 동청이 푸른 잔디 사이를 누님과 저 세 사람이 산보하였지요? 저희가 그 좁은 길로 지나올 때 저는 그 MP에게,
“R을 어떻게 아셨던가요?”
하고 물어 보았읍니다. 그 MP는 조금 얼굴이 불그레한 중에도 미소를 띠우며,
“네, 그전에 한 두어 번 만나본 일이 있었어요.”
하고 대답을 하였지요. 그 소리를 듣는 저는 곧,
“R은 참 좋은 사람이야요.”
하였지요. 그러니까 그 MP는 곧 다른 말로 옮기어 버렸나이다.
그렇게 한 10분쯤 되어 누님과 우리 두 사람은 무슨 조용히 할 말이나 있는 것처럼 주저주저하였나이다. 그러니까 그 MP는 곧 영리하게 그것을 알아차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요.
아아 그때 저의 마음은 아주 섭섭하였읍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한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MP는 떠나기가 싫었나이다. 그러나 그의 검은 치맛자락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게 사라져 버리었나이다. 그때 누님은 절더러 이야기를 하여 주었지요. 그 MP를 R이 사랑하려다가 그 MP가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MP가 저의 그 누님이 도적하여 간 원고를 보고 도외(度外)의 찬상을 하더라는 것과 그러나 그가 한가지 불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적더라는 것을. 저는 누님과 작별을 하고 문 밖으로 나오며 뛰어갈 듯이 걸음을 속히 하여 걸어 가며,
“내가 행복한 자냐 불행한 자냐?”
하고 혼자 소리를 질러 보았읍니다. 그거다가는 그 신앙이 적다고 하는데 대하여는 적지 않은 불쾌와 또 한옆으로는 희미한 실망을 깨달았읍니다.
그래 집에 돌아와 아랫목에 누워서 여러 가지로 그 MP와 저 사이를 무지개빛 나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만 얽어 놓아 보다가도 그 신앙이란 말을 생각하고는 곧 의혹 속에 헤매었나이다. 그러다가는 그의 집에서본 <On The Eve>를 읽던 것이 생각되며 그 여주인공 ‘’에레나’’의 일기가 생각났읍니다.
그의 애인 ‘’인사로프’’와 그의 아버지가 그와 결혼시키려는 ‘’크르나도오스키’’를 비교하여 ‘’인사로프’’에게는 신앙이 있을지라도 ‘’크르나도오스키’’에게는 신앙이 없었다. 자기를 믿는 것 만으로는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누님, 저는 이 글을 볼 때 공연히 실망하였읍니다. ‘’에레나’’는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하였읍니다. 그리고 신앙 없는 사람을 사랑치 않았읍니다. 그러면 MP도 언제든지 신앙 있는 사람을 사랑할 터이지요. 그러면 그 MP가 저에게 신앙이 없다고 한 말은 저를 동생 이나 친우로 여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애인으로 생각지는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누님, 그러면 저는 실망할까요. 낙담할까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물론 누구에게든지 신앙이 없는 사람이 없읍니다. 누구는 예수를 믿고 석가를 믿고 우상을 믿고 여러 가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를 믿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님, 저도 무엇인지 신앙하는 것이 있겠지요? 신앙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니까---누구든지 각각 자기가 신앙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아 있으니까 저도 또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 어떠한 신앙이든지 가지고 있겠지요.
저 어떠한 종교를 어리석게 믿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신앙만이 참신앙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의 신앙을 조소합니다. 그러나 한 번 더 크게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어 사면을 둘러보는 자는 각각 이것과 저것을 대조할 수가 있을 것이지요. 그리고 각각 장처와 결점을 찾아 낼 수가 있을 것이지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물론 그 이불 속뿐이 세상인 줄 알 터이지요. 그리고 그 속에만 참진리가 있는 줄 알 터이지요. 그러하나 그 이불 속만이 세상이 아니고 그 속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닌 줄 아나 그 이불을 벗어 버린 자는 그 이불 쓴 사람을 불쌍히 여기었을 터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는 그 이불을 벗은 사람이 여럿이 있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이불을 뒤집어쓴 사람들을 아주 불쌍히 여기었읍니다.
그러면 저도 그 이불을 벗은 사람의 하나가 되려 합니다. 다만 어떠한 이름 아래서든지 그 온 우주에 가득 차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치 않는 진리를 믿는 사람이 되려 하나이다. 그리하여 다만 그것을 구할 뿐이요, 그것을 체험하려 할 뿐이외다.
물론 사람은 약한 것이지요. 심신이 다 강하지는 못하지요. 제가 어떠한 때 본의아닌 일을 할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약한 까닭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때 는 그것을 고치겠지요. 그리고 누님 한 가지 끊어 말하여 둘 것은 <Quo Vadis>에 있는 ‘’비니큐스’’와 같이 ‘’리기아’’의 신앙과 같은 신앙으로 인하여서 저도 그 ‘’비니큐스’’는 되지 않겠지요.
아아 그러나 누님, 제가 어찌하여 이와 같은 말을 쓸까요? 사랑보다 더 큰 신앙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요. 자기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것은 사랑이 있을 뿐이지요. 사람 이 사랑으로 나고 사랑으로 죽고 사랑으로 살기만 하면 그 사람의 생은 참생이 되겠지요. 그러하나 저희는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처음은 이성에게 사랑을 구하는 자가 누가 주저하지 않은 자가 있고 누가 가슴이 떨리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그러면 사랑이란 죄악일까요? 죄지은 자와 똑같은 떨림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어찌함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읍니다. 그것은 열정과 이지입니 다. 이 세상의 역사는 이 두 가지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모든 불행의 근원은 이 열정과 이지가 서로 용납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운 이성을 보고 자기 마음을 피력치 못하고 혼자 의심하고 오뇌하는 것도 이 이지로 인함이지요? 저는 어떻게 하면 이 이지를 몰각한 열정만의 인물이 되려 하나, 그 이지를 몰각한 열정의 인물이 되겠다는 것까지도 이지의 사주지요. 저도 또한 그렇게 되려 하나이다.
오늘 저는 또다시 R의 집에를 갔었나이다. 그 R은 있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으면 곧 들어오리라는 그 집 사람의 말을 듣고 저는 그의 방에서 기다리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R이 저와 형제같이 친하지가 않으면 그와 같이 주인 없는 방안에 들어가 앉아 있지를 못하였을 터이지요. 그래 그와 친하다 하는 무엇이 저를 그의 방으로 들어가게 하였읍니다.
저는 그의 방에 들어가 그의 책상 앞에 앉았나이다. 그때 문득 저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가 써서 놓은 편지였나이다. 그리고 그 편지 피봉에는 MP라 씌어 있었읍니다. 저의 마음은 공연히 시기하는 마음이 나며 또한 그 편지를 기어이 보고 싶은 생각이 났었읍니다. 마침 다행한 것은 그 편지를 봉하지 않은 것이었나이다.
저는 그것을 보았읍니다.
그 속에는 이러한 말이 쓰여 있었읍니다.
‥‥‥DH는 미숙한 문사이오. 그리고 일개 ‘’부르주아’’에 지나지 못하는 사람이오‥‥‥
라고.
아아 누님, 저는 손이 떨리었나이다. 그리고 그 편지를 다시 그 자리에 놓고 그대로 바깥으로 뛰어나왔읍니다. 그리고 길거리로 걸어오며 눈물이 날 만큼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또 한옆으로는 분한 생각이 나서 못 견디었나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R이 그와 같은 말을 써 보낼 줄 참으로 알지 못하였나이다. 누님 그렇지요. 저는 글쓰는 데 미숙하겠지요. 저는 거기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말하려 하지 않나 이다. 그러나 그 말을 무엇하러 MP에게 한 것일까요.
아아 누님, 저는 일개 참사람이 되려 할 뿐이외다.
저는 문학가, 문사라는 칭호를 원치 않아요. 다만 참사람이 되기 위하여 글을 봅니다. 그리고 느끼는 바를 견딜 수 없었읍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느낌과 깨달음이 우리 인생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 일개인의 성공은 얻기가 어려울 터이지요. 제가 느끼고 깨닫는 것은 길고 긴 우주의 생명과 함께 많고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것에 다만 몇천만억분의 1이 될락말락 할 터이지요. 그리고 그 저의 생명이 그치는 날에는 그것보다 조금 더하여질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무엇을 원할지라도 유한한 저의 육체와 정신은 그것을 용서치 않을 터이지요.
그러면 제가 ‘’부르주아’’나 ‘’프를레타리아’’나 무엇 어떠한 부름을 듣던지 언제든지 참사람이 되려 할 뿐이외다.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혼자 깨달은 줄 아는 사람일지라도 이 참사람이 되려는 데서 더 벗어나지는 못하였을 터이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부터 친애하는 친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나이다. 아무리 아무리 제가 너그러운 마음으로써 그전과 같이 R을 대하려 하나 그는 나를 모함한 자이지요. 어찌 그전과 같은 정의(情[[誼]])를 계속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저의 마음은 괴롭습니다. 그리고 그 KC를 가면서 저에게 형제와 같이 지내자 던 것을 생각하고 또는 그동안 지내 오던 정분을 생각하고 그것이 다만 한순간에 깨어지는 것을 생각할 때 저의 마음은 아주 안타까왔나이다. 그러다가도 그 R의 손을 잡고 기꺼워하고 싶었읍니다.

11
집에서 나을 때 동생 L이 울며 쫓아나오면서,
“형님 형님 나하고 가.”
하며 부르짖었나이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L은 맡기고 또다시 R을 찾아갔나이다.
어제 저녁 늦도록 잠을 자지 못한 저는 오늘 또다시 새벽에 일찍 일어났으므로 몸이 조금 피곤하였나이다.
저는 R의 집으로 가면서 몇 번이나 가지 않으리라 하여 보았읍니다. 날마다 가는 R의 집에를 1주일이나 가지 않은 저는 오늘도 또 가 볼 마음이 그리 많지는 않았읍니다. R을 생각하면 할수록 분하고 답답한 저는 언제든지 그 마음을 누르려 하였으나 그리 속마음이 편치는 못하였읍니다.
제가 R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아주 마음이 유쾌치 못하였읍니다. R은 저를 보고 힘없이 저의 손을 잡고 인사를 하여 주었읍니다. 그리고,
“어서 오게.”
하는 소리가 아주 반갑지 못하였읍니다. 저는 그 R을 보기 전에는 반갑게 인사를 하리 라 한 것이 지금 그를 만나보니까 공연히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싫은 생각이 나서 그대로 바깥으로 나오고 싶었읍니다.
저는 그대로 서서,
“여러 날 만나지 못하여서 조금 보고나갈까 하고‥‥‥”
하며 그를 쳐다보았읍니다. 그는 다만 고개를 끄덕하며,
“응‥‥‥”
할 뿐이었나이다. 저는 갑자기 뛰어나오고 싶었읍니다. 그래,
”내일 또 봅시다.”
하고 그대로 뛰어나왔읍니다. 그 R은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읍니다.
아아, 누님,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어째 이리 멀어졌을까요? 무슨 간격이 생겼을까요? 그리고 무슨 줄이 끊어졌을까요. 저는 그것을 알 수가 없읍니다.
제가 종로를 걸어올 때였읍니다. 저쪽에서 뜻밖에 그 MP가 걸어왔읍니다. 그때 저는 그 MP와 만나 인사를 하리라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MP는 어떠한 양복 입은 이와 함께 저를 못 보았는지 저의 곁으로 그대로 지나가 버렸나이다. 저는 다만 지나가는 그만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단단히 쥐고, ‘에 고만 두어라’ 하였읍니다.
저는 말할 수 없는 번뇌 가운데 ‘에, 설영에게나 가리라’ 하였나이다. 그리고 천변으로 그의 집을 찾아갔읍니다. 그때 저의 마음 에도 ‘설영이가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없이 으례히 만나려니 하였나이다. 그러나 설영을 부르는 저의 목소리에 그 영리하고 귀여운 우리 누이동생의 목소리는 나지 않고 그의 어머니가 “없소” 하고 냉대하듯 보통 손님과 같이 대답을 하였읍니다. 그 소리를 듣는 저는 공연히 섭섭한 생각이 나며 또는 설영이가 저를 한낱 지나가는 손처럼 생각하는 듯하고 또한 어떠한 정인이나 찾아가지 않았나 할 때 오라비 노릇을 하려는 저도 공연히 질투스러운 마음이 나며, ‘다 그만두어라’하는 생각이 나고 공연히 감상(感傷)의 마음이 났읍니다.
저는 그대로 집으로 갔읍니다. 집 문간에 서 놀던 L은 반기어 맞으면서 두 팔을 벌리고 저에게 턱 안기며 몸을 비비 꼬고 그의 가는 손으로 간지럽고 차디차게 저의 뺨을 문질러 주었나이다. 그때 저는 모든 감상의 감정은 가슴 한복판으로 모아드는 듯하더니 눈물이 날 듯하였나이다. 그때 그 L은,
“형님, 임마!”
하였나이다. 그래 저는 그에게 입을 맞추려 하니까 그는 무엇이 만족치 못한지,
“아니 아니 귀 붙잡고.”
하며 그의 손으로 저의 두 귀를 붙잡고 입을 맞추어 주려다가 또다시,
“형님도 내 귀 붙잡아.”
하였나이다. 저는 그 L의 귀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나이다. 그러나 그때 L은 저를 쳐다보며,
“형님 우네.”
하였나이다. 아아 누님, 저의 눈에는 눈물이 나왔읍니다. 그리고 그 L을 껴안고 울고 싶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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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덜컹덜컹 홈통에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었다가 쿵 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겻가루가 켜켜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 나온다.

솰 솰 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댓줄기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십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오리쯤 꿰뚫은 뒤에 이방원(李芳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물레방아에서 들여다보면 동북간으로 큼직한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에 가장 부자요, 가장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름은 신치규(申治圭)라고 부른다. 이방원이라는 사람은 그 집의 막실(幕室)살이를 하여가며 그의 땅을 경작하여 자기 아내와 두 사람이 그날그날을 지내 간다.

어떠한 가을 밤 유난히 밝은 달이 고요한 이 촌을 한적하게 비칠 때 그 물레방앗간 옆에 어떠한 여자 하나와 어떤 남자 하나가 서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 여자는 방원의 아내로 지금 나이가 스물 두 살, 한참 정열에 타는 가슴으로 가장 행복스러울 나이의 젊은 여자이요, 그 남자는 오십이 반이 넘어 인생으로서 살아올 길을 다 살고서 거의거의 쇠멸의 구렁이를 향하여 가는 늙은이다.

그의 말소리는 마치 그 여자를 달래는 것같이,

“얘, 내 말이 조금도 그를 것이 없지? 쇤네 할멈에게도 자세한 말을 들었을 터이지마는 너 생각해 보아라. 네가 허락만 하면 무엇이든지 네가 하고 싶다는 것을 내가 전부 해줄 터이란 말야. 그까짓 방원이 녀석하고 네가 몇 백년을 살아야 언제든지 막실 구석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허허, 사람이란 젊어서 호강해 보지 못하면 평생 한번 하여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느니라! 대강 너의 말을 쇤네 할멈에게 듣기는 들었으나 그래도 너에게 한번 바로 대고 듣는 것만 못해서 이리로 만나자고 한 것이다. 너의 마음은 어떠냐? 허허, 내 앞이라고 조금도 어떻게 알지 말고 이야기해 봐, 응?”

이 늙은이는 두말할 것 없이 신치규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방원의 계집을 들여다보며 한 손으로 등을 두드린다.

새침한 얼굴이 파르족족하고 기다란 눈썹과 검푸른 두 눈 가장자리에 예쁜 입, 뾰로통한 뺨이며 콧날이 오뚝한 데다가 후리후리한 키에 떡 벌어진 엉덩이가 아무리 보더라도 무섭게 이지적(理智的)인 동시에 또는 창부형(娼婦型)으로 생긴 것이다.

계집은 아무 말이 없이 서서 짐짓 부끄러운 태를 지으며 매혹적인 웃음을 생긋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짐승 같은 신치규의 만족을 사게 되었으며 또한 마음을 충족시켰는지 희끗희끗한 수염의 거의 계집의 뺨에 닿도록 더 가까이 와서,

“응? 왜 대답이 없니? 부끄러워서 그러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하고 계집의 손을 잡으며,

“손도 이렇게 예쁜 줄은 이제까지 몰랐구나. 참 분결같다. 이렇게 얌전히 생긴 애가 방원 같은 천한 놈의 계집이 되어 일평생을 그대로 썩는다는 것은 너무 가엽고 아깝지 않느냐? 얘.”

계집은 몸을 돌리려고 하지도 않고 영감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며 눈으로 땅만 내려다보고 섰다가 가까스로 입을 떼는 듯하더니,

“제 말야 모두 쇤네 할멈이 여쭈었지요. 저에게는 너무 분수에 과한 말씀이니까요.‘

“온, 천만에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너도 아다시피 내가 너를 장난삼아 그러는 것도 아니겠고 후사(後嗣)가 없어 그러는 것이니까 네가 내 아들이나 하나 나 주렴. 그러면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되지 않겠니? 자아 그러지 말고 오늘 허락을 허렴. 그러면 내일이라도 방원이란 놈을 내쫓고 너를 불러들일 터이니.”

“어떻게 내쫓을 수가 있에요?”

“허어, 그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무엇 있니. 내가 나가라는데 제가 나가지 않고 배길 줄 아니?”

“그렇지만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무엇? 저런 생각을 하니까 네가 이 모양으로 이때까지 있었지. 어떻단 말이냐?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구. 자아, 또 네서방에게 들킬라, 어서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세요.”

“왜?”

“남이 보면 수상히 알게요.”

“무얼 나하고 가는데 수상히 알게 무어야……어서 가자.”

계집은 천천히 두어 걸음을 따라가다가,

“영감!”

하고 멈춤하고 서 있다.

“왜 그러니?”

계집은 다시 말이 없이 서 있다가,

“아니에요.”

하고,

“먼저 들어가세요.”

하며 돌아선다. 영감이 간이 달아서 계집의 손을 잡으며,

“가자, 집으로 들어가자.”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는지 숨소리가 잦아진다. 계집은 손을 빼려고 하며,

“점잖으신 어른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면서도 그의 몸짓에는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 보였다. 영감은 계집의 몸을 끌어안더니 방앗간 뒤로 돌아 섰다. 계집은 영감 가슴에 안겨서 정욕이 가득찬 눈으로 그를 보면서,

“영감.”

말 한번하고 침 한번 삼키었다.

“영감이 거짓말은 안 하시지요?”

“아니.”

그의 말은 떨리었다. 계집은 영감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방앗간 속을 가리켰다.

“저리로 들어가세요.”

영감과 계집은 방앗간에서 이삼십 분 후에 다시 나왔다.

2

사흘이 지난 뒤에 신치규는 방원이를 자기 집사랑 마당 앞으로 불렀다.

“예.”

방원은 상전이라 고개를 숙이고,

“예.”

공손하게 대답을 하였다.

“네가 그간 내 집에서 정성스럽게 일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마는……”

점잔과 주짜를 빼면서 신치규는 말을 꺼내었다. 방원의 가슴은 이 ‘마는’이라는 말 뒤에 이어질 말을 미리 깨달은 듯이 온몸의 피가 가슴으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다시 터럭이라는 터럭은 전부 거꾸로 일어서는 듯하였다.

“오늘부터는 우리 집에 사정이 있어 그러니 내 집에 있지 말고 다른 곳에 좋은 곳을 찾아가 보아라.”

아무 조건이 없다. 또한 이곳에서도 할말이 없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은 돈 가지고 사람을 사고 팔 수도 있는 것이다.

방원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자기 혼자 몸 같으면 어디 가서 어떻게 빌어먹더라도 살 수 있지마는 사랑하는 아내를 구해 갈 길이 막연하다. 그는 고개를 굽히고, 허리를 굽히고, 나중에는 마음을 굽히어 사정도 하여 보고 애걸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주인의 마음은 쇠나 돌보다도 더 굳었다.

그는 하는 수없이 자기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아내더러 안주인 마님께 사정을 좀 하여 얼마간이라도 더 있게 하여 달라고 하여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방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도리어,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요. 이제부터는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릴테요?”

“너는 그렇게도 먹고 살 수 없을까봐 겁이 나니?”

“겁이 나지 않고, 생각을 해 보구려. 인제는 꼼짝할 수 없이 죽지 않았소?”

“죽어?”

“그럼 임자가 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올 때에 무어라고 하였소. 어떻게 해서든지 너 하나야 먹여 살리지 못하겠느냐고 하였지요?”

“그래.”

“그래, 얼마나 나를 잘 먹여 살리고 나를 호강시켰소? 이때까지 이태나 되도록 끌구 돌아다닌다는 것이 남의 집 행랑이었지요.”

“얘, 그것을 내가 모르고 하는 말이냐?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냐? 차차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이든지 생기겠지. 설마 요대로 늙어 죽기야 하겠니?”

“듣기 싫소! 뿔 떨어지면 구워 먹지 어느 천년에.”

방원이는 가뜩이나 내쫓기고 화가 나는데 계집까지 그리하니까 속에서 열화가 치밀어 올라 왔다.

“이 육시를 하고도 남을 년! 왜 남의 마음을 글컹거리니1?”

“왜 사람에게 욕을 해!”

“이년아 욕 좀 하면 어떠냐?”

“왜 욕을 해!”

계집의 얼굴이 노래지며 대든다.

“이년이 발악인가?”

“누가 발악야. 계집년 하나 건사 못하는 위인이 계집보고 욕만 하고 한 게 무어야? 그래 은가락지 은비녀나 한 벌 사주어 보았어? 내가 임자 하자고 하는 대로하지 않은 것은 없지!”

“이년아! 은가락지 은비녀가 그렇게 갖고 싶으냐? 이 더러운 년아.”

“무엇이 더러워? 너는 얼마나 정한 놈이냐!”

졔집의 입속에서는 ‘놈’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년 보게! 누구더러 놈이래.”

하고 손길이 계집의 낭자를 후려 잡더니 그대로 집어들고 주먹으로 등줄기를 우리었다.

“이 주릿대를 안길 년!”

발길이 엉덩이를 두어 번 지르니까 계집은 그대로 거꾸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풀어 헤뜨린 머리가 치렁치렁 끌리고 씰룩한 눈에는 독기가 섞이었다.

“왜 사람은 치니? 이놈! 죽여라 죽여, 어디 죽여 보아라, 이놈 나 죽고 너 죽자!”

하고 달려드는 계집을 후려쳐서 거꾸러뜨리고서

“이년이 죽으려고 기를 쓰나!”

방원이가 계집을 치는 것은 그것이 주먹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농담이다. 그는 주먹이나 발길이 계집의 몸에 닿을 때 거기에 얻어맞는 계집의 살이 아픈 것보다 더 찌르르하게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아픔을 방원은 깨닫는 것이다. 홧김에 계집을 치는 것이 실상은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이빨로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때리는 그에게는 몹시 애처로움이 있고 불쌍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화풀이를 받아 주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계집밖에는 없었다. 제일 만만하다는 것보다도 가장 마음놓고 화풀이를 할 수 있음이다. 싸움한 뒤, 하루가 못되어 두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고 서로 꼭 끼고 잘 때에는 그렇게 고맙고 그렇게 감격이 일어나는 위안이 또다시 없음이다. 계집을 치고 화풀이를 하고 난 뒤에 다시 가슴을 에는 듯한 후회와 더 뜨거운 포옹으로 위로를 받을 그때에는 두 사람 아니라 방원에게는 그만큼 힘있고 뜨거운 믿음이 또다시 없는 까닭이다.

계집을 일부러 소리를 높여 꺼이꺼이 운다.

온 마을 사람이 거의 귀를 기울였으나,

“응, 또 사랑싸움을 하는군!”

하고 도리어 그 싸움을 부러워하였다. 옆집 젊은것이 와서 싱글싱글 웃으며 들여다보며,

“인제 고만두라구.”

하며, 말리는 시늉을 한다. 동네 아이들만 마당 앞에 죽 늘어서서 눈들이 뚱그래서 구경을 한다.

3

그 날 저녁에 방원이는 술이 얼근하여 돌아왔다. 아까 계집을 차던 마음은 어느덧 풀어지고 술로 흥분된 마음에 그는 계집의 품이 몹시 그리워져서 자기 아내에게 사과를 할 마음까지 생기었다. 본시 사람이 좋고 마음이 약하고 다정한 그는 무식하게 자라난 까닭에 무지한 짓을 하기는 하나 그것은 결코 그의 성격을 말하는 무지함이 아니다.

그는 비척거리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거슴츠레하게 풀린 눈을 스르르 내리 감고 혼잣소리로,

“빌어먹을 놈! 나가라면 나가지 무서운가? 제 집 아니면 살 곳이 없는 줄 아는 게로군! 흥, 되지 않게 다 무엇이냐? 돈만 있으면 제일이냐? 이놈, 네가 그러다가는 이 주먹맛을 언제든지 볼라. 그대로 곱게 뒈질 줄 아니?.”

하고, 개천 하나를 건너뛴 후에,

“돈! 돈이 무엇이냐?”

한참 생각하다가,

“에후.”

한숨을 쉬고 나서,

“돈이 사람을 죽이는구나! 돈! 돈! 흥,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니?”

또 징검다리를 비척비척하고 건넌 뒤에,

“고 배라먹을 년이 왜 고렇게 포탈을 부려서 장부의 마음을 긁어 놓아!”

그의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맛이 있었다. 그는 자기 계집을 생각하면 모든 불평이 스러지는 듯이, 숙였던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면서,

“허어, 저도 고생은 고생이지.”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내가 너무 해. 너무 그럴 게 아닌데.”

그는 자기 집에 와서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면서,

“얘! 자니! 자?”

그러나 대답이 없고 캄캄하다.

“이년이 어디를 갔어!”

그는 문짝을 깨어져라 하고 닫은 후에 다시 길거리로 나와 그 옆집으로 가서,

“여보 아주머니! 우리 집 색시 어디 갔는지 보았소!”

밥들을 먹는 옆엣집 내외는,

“어디서 또 취했소 그려! 애 어머니가 아까 머리 단장을 하더니 저 방아께로 갑디다.”

“방아께로?”

“네.”

“빌어먹을 년! 방아께로는 무얼 먹으러 갔누!”

다시 혼자 방아를 향하여 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그는 방앗간을 막 뒤로 돌아서자 신치규와 자기 아내가 방앗간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

그는 너무 뜻밖의 일이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한참이나 멀거니 서서 보기만 하였다.

그의 눈에서 쌍심지가 거꾸로 섰다. 열이 올라와서 마치 주홍을 칠한 듯이 그의 눈은 붉어지고 번개같은 광채가 번뜩거리었다.

그는 한참이나 사지를 떨었다. 두 이가 서로 맞춰서 달그락 달그락하여졌다. 그의 주먹은 부서질 것같이 단단히 쥐어졌다.

계집과 신치규는 방원이 와서 선 것을 보고서 처음에는 조금 간담이 서늘하여졌으나 다시 태연하게 내려앉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매 할대로 하라는 뜻이다.

방원은 달려들어서 계집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부르르 떨었다.

“나는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계집은,

“무얼 이럴 줄 몰라?”

하며, 파란 눈을 흘겨보더니,

“나중에는 별꼴을 다 보겠네. 으레히 그럴 줄을 인제 알았나? 놔요! 왜 남의 팔을 잡고 요 모양이야. 오늘부터는 나를 당신이 그리 함부로 하지는 못해요! 더러운 녀석 같으니! 계집이 싫다고 그러면 국으로 물러갈 일이지 이게 무슨 사내답지 못한 일야! 놔요!”

팔을 뿌리쳤으나 분노가 전신에 가득찬 그는 그렇게 쉽게 손을 놓지 않았다.

“얘! 네가 이것이 정말이냐?”

“정말이 아니구 비싼 밥먹고 거짓말할까?”

“네가 참으로 환장을 하였구나!”

“아니 누구더러 환장을 했대. 온 기가 막혀 죽겠지! 놔요! 놔! 왜 추근추근하게 이 모양야? 놔.“

하고서 힘껏 뿌리치는 바람에 계집의 손이 쑥 빠지었다. 계집은 손목을 주무르면서 암상 맞게 돌아섰다.

이때까지 이 꼴을 멀찍이 서서보고 있던 신치규는 두어 발짝 나서더니 기침 한번을 서투르게 하고서,

“얘! 네가 술이 취하였으면 일찍 들어가 자든지 할 것이지 웬 짓이냐? 네 눈깔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단 말이냐? 너희 년놈이 싸우는 것은 너희 년놈이 어디 가서 할 일이지 여기 누가 있는지 없는지 눈깔에 보이는 것이 없어? 엣, 괘씸한 놈!”

눈깔을 부라리었다. 방원은 한참이나 쳐다보고서 말이 없었다. 생각대로 하면 한 주먹에 때려 누일 것이지마는 그래도 그의 머리 속에는 아까까지의 상전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번갯불같이 그 관념이 그의 입과 팔을 얽어 놓았다.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남을 섬겨 보기만 한 그의 마음은 상전이라면 모두 두려워하는 성질을 깊이깊이 뿌리박아 놓았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신치규가 자기의 상전이 아니요, 자기가 신치규의 종도 아니다. 다만 똑같은 사람으로 마주섰을 뿐이다. 아니다, 지금부터는 신치규도 방원의 원수였다. 그의 간을 씹어먹어도 오히려 나머지 한이 있는 원수다.

신치규는 똑바로 쳐다보는 방원을 마주 쳐다보며,

“똑바루 보면 어쩔 터이냐? 온 세상이 망하려니까 별 해괴한 일이 다 많거든. 어째 이놈아!”

“이놈아?”

방원은 한 걸음 들어섰다. 나무같이 힘센 다리가 성큼하고 나설 때 신치규는 머리끝이 으쓱하였다. 쇠몽둥이 같은 두 주먹이 쑥 앞으로 닥칠 때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네 입에서 이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이 사지를 찢어발겨도 오히려 시원치 못할 놈아! 네가 내 계집을 빼앗으려고 오늘 날더러 나가라고 그랬지?”

“어허 이거 그놈이 눈깔이 삐었군, 얘,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 너는 네 서방하고 나중 들어오너라!”

신치규는 형세가 위험하니까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고 돌아서서 들어가려 하니까 방원은 돌아서는 신치규의 멱살을 잔뜩 쥐어 한 팔로 바싹 치켜들고,

“이놈 어디를 가? 네가 이때까지 맛을 몰랐구나?”

하며, 한번 집어쳐 땅바닥에다 태질을 한 뒤에 그대로 타고 앉아서 목줄띠를 누르니까, 마치 뱀이 개구리 잡아먹을 적 모양으로 깩깩 소리가 나며 말 한 마디도 못한다.

“이놈 너 죽고 나 죽으면 고만 아니냐?”

하고 방원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들이댄다. 나중에는 주먹이 부족하여 옆에 있는 모루돌멩이를 집어서 죽어라 하고 내리친다. 그의 팔, 그의 몸에 끓어오르는 분노가 극도에 달하자 사람의 가슴속에 본능적으로 숨어 있는 잔인성(殘忍性)이 조금도 남지 않고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눈은 마치 펄떡펄떡 뛰는 미끼를 가로차고 앉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이 뜨거운 피를 보고야 만족하다는 듯이 무섭게 번쩍거렸다. 그에게는 초자연(超自然)의 무서운 힘이 그의 팔과 다리에 올라왔다.

이 꼴을 보는 계집은 무서웠다. 끔찍끔찍한 일이 목전에 생길 것이다. 그의 맥이 풀린 다리는 마음대로 놓여지지 아니하였다.

“아! 사람 살류! 사람 살류!”

적적한 밤중에 쓸쓸한 마을에는 처참한 여자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울리었다. 이 소리를 들은 방원은 더욱 힘을 주어서 눈을 딱 감고 죽어라 내리 짓찧었다. 뼈가 돌에 맞는 소리가 살이 으크러지는 소리와 함께 퍽퍽하였다. 피 묻은 돌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갈가리 찢긴 옷에는 살점이 묻었다.

동네편 쪽에는 수군수군하더니 구둣소리가 나며 칼소리가 덜거덕거리었다. 방원의 머리에는 번갯불같이 무엇이 보이었다. 그는 손에 주먹을 쥔 채 잠깐 정신을 차려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순검.”

그는 신치규의 배를 타고 앉아서 순검의 구두 소리를 듣자 비로소 자기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달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일어났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벌벌 떠는 계집에게로 갔다.

“얘! 가자! 도망가자! 너하고 나하고 같이 가자! 자! 어서, 어서!”

계집은 자기에게 또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겁을 내어 도망을 하려 한다. 방원은 계집을 따라가며,

“얘! 얘! 네가 이렇게도 나를 몰라주니!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를 못하니? 자! 어서, 도망가자, 어서 어서, 뒤에서 순검이 쫓아 온다.”

계집은 그대로 서서 종종걸음을 치며,

“싫소! 임자나 가구료, 나는 싫어요, 싫어.”

“가자! 응! 가!”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계집의 팔을 붙잡고 끌었다. 그때 누구인지 그의 두 팔을 마치 형틀에 매다는 것같이 꽉 뒤로 끼어 앉는 사람이 있었다.

“이놈아! 어디를 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온 전신에 맥이 풀리어 그대로 뒤로 자빠지려 할 때 어느덧 널판 같은 주먹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정신 차려.”

“네.”

그는 무의식 중에 고개가 숙어지고 말소리가 공손하여졌다.

땅바닥에서는 신치규가 꿈지럭거리며 이리저리 뒹군다. 청승스러운 비명(悲鳴)이 들린다.

방원은 포승 지인 채, 계집은 그대로 주재소로 끌려가고 신치규는 머슴들이 업어 들였다.

4

석 달이 지났다. 상해죄(傷害罪)로 감옥에서 복역을 하던 방원은 만기가 되어 출옥을 하였다. 그러나 신치규는 아무 일 없이 자기 집에서 치료하고 방원의 계집을 데려다 산다. 신치규는 온 몸이 나은 뒤에 홀로 생각하였다.

‘죽는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하고, 얼굴에 흠이 진 곳을 만져 보며,

‘오히려 그놈이 그렇게 한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지, 얼굴이 아프기는 좀 하였으나! 허어. 어떻게 그놈을 떼어버릴까 하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을 하던 차에 잘 되었지. 그놈 한 십년 감옥에서 콩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방원은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나가기만 하면 연놈을 죽여 버리고 제가 죽든지 요정(了定)을 내리라 하였다. 집에서 내어쫓기고 계집까지 빼앗기고, 그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었다. 그것이 모두 자기의 돈 없는 탓인 것을 생각하며 더욱 분한 생각이 났다.

“에 더러운 년!”

그는 홍바지에 쇠사슬을 차고서 일을 할 때에도 가끔 침을 땅에다 뱉으면서 혼자 중얼거리었다.

“사람이 이러고서야 살아서 무엇하나. 멀쩡한 놈이 계집 빼앗기고 생으로 콩밥까지 먹으니…….”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감옥소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내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목숨을 잃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손으로 내 목을 찔러 죽든지, 무슨 요정이 날 것을 생각하고, 다시 온 몸에 힘을 주고 쓸쓸한 웃음을 웃었다.

그는 이백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계집이 사는 촌에를 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그를 보고 피해 갔다. 마치 문둥병자나 마찬가지 대우를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부터는 더욱이 세상이 차디차졌다. 자기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더 무정하여졌다.

그는 하는 수없이 밤이 될 때까지 그 근처 산속으로 돌아다녔다. 그래서 깊은 밤에 촌으로 내려왔다. 그는 그 방앗간을 다시 지나갔다. 석 달 전 생각이 났다. 자기가 여기서 잡혀 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한참이나 거기 서서 그때 일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친 후에 다시 그 전 집을 찾아갔다.

날이 몹시 추워지고 눈이 쌓였다. 옷을 입은 것이 가을에 입고 감옥에 들었던 그것이므로 살을 에이는 듯할 것이로되 그는 분한 생각과 흥분된 마음에 그것도 몰랐다.

‘년놈을 모두 처치를 해 버려?’

혼자 속으로 궁리를 하다가,

‘그렇지, 그까짓 것들은 살려 두어 쓸데없는 인생들이야.’

하면서 옆구리에 지른 기름한 단도를 다시 만져 보았다. 그는 감격스런 마음으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는 신치규의 집 울을 넘어 들어갔다. 그의 발은 전에 다닐 적같이 익숙하였다. 그는 사랑을 엿보고 다시 뒤로 돌아서 건넌방 창 밑에 와 섰었다.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손에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뒤 창문을 달각달각 흔들었다.

“그 뉘?”

하고 계집의 머리가 쑥 나오며 문이 열리었다. 그는 얼른 비켜섰다. 문은 다시 닫혀지고 계집은 들어갔다.

방원의 마음은 이상하게 동요가 되었다. 예쁜 계집의 목소리가 오래간만에 귀에 들릴 때, 마치 자기가 감옥에서 꿈을 꿀 적 모양으로 요염하고도 황홀하게 그의 마음을 꾀는 것 같았다. 그는 꿈속에서 다시 만난 것 같고 오래간만에 그를 만나 보매 모든 결심은 얼음같이 녹는 듯하였다. 그래도 계집이 설마 나를 영영 잊어버리랴 하고 옛날의 정리를 생각할 때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랴는 생각이 났다.

아무리 자기를 감옥에까지 가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감히 칼을 들어 죽이려는 용기가 단번에 나지 않아서 주저하기 시작하였다.

“아니다, 다시 한 번만 물어 보자!”

그는 들었던 칼을 다시 짚고 생각하였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다.

“그렇다. 한번만 다시 물어 보고 죽이든 살리든 하자!”

그는 다시 문을 달각달각하였다. 계집은 이번에 다시 문을 열고 사면을 둘러보더니 헌 짚신 짝을 신고 나왔다.

“뉘요?”

그는 방원이 서 있는 집 모퉁이를 돌아서려 할 제,

“내다!”

하고, 입을 틀어막고 칼을 가슴에 대었다.

“떠들면 죽어!”

방원은 계집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고 결박을 한 후 들쳐업고서 번개같이 달음질하였다. 그는 어느 결에 계집을 업어다가 물레방아 앞에 내려놓은 후 결박을 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를 모르겠니?”

캄캄한 그믐밤에 얼굴을 바짝 계집의 코앞에 들이대었다. 계집은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아!”

소리를 지르더니 뒤로 물러섰다.

“조금도 놀랄 것이 없다. 오늘 네가 내 말을 들으면 살려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야!”

하고, 시퍼런 칼을 들이대었다. 계집은 다시 태연하게,

“말요? 임자의 말을 들으렬 것 같으면 벌써 들었지요, 이때까지 있겠소? 임자도 남의 마음을 알거요. 임자와 나와 이년 전에 이곳으로 도망해 올적에도 전 남편이 나를 죽이겠다고 허리를 찔러 그 흠이 있는 것을 날마다 밤에 당신이 어루만지었지요? 내가 그까짓 칼쯤을 무서워서 나하고 싶은 것을 못한단 말이요? 힝, 이게 무슨 비겁한 짓이요. 사내자식이, 자! 찌르려거든 찔러 보아요. 자, 자.”

계집은 두 가슴을 벌리고 대들었다. 방원은 너무 계집의 태도가 대담하므로 들었던 칼이 도리어 뒤로 움찔할 만큼 기가 막혔다. 그는 무의식 중에,

“정말이냐?”

하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섰다.

“정말이 아니고? 내가 비록 여자지마는 당신같이 겁쟁이는 아니라오! 이것이 도무지 무엇이오?”

계집은 그래도 두려웠던지 방원의 손에 든 칼을 뿌리쳐 땅에 떨어뜨리었다.

이 칼이 땅에 떨어지자 방원은 이때까지 용사와 같이 보이던 계집이 몹시 비겁스럽고 더러워 보이어 다시 칼을 집어들고 덤비었다.

“에잇! 간사한 년! 어쩔 터니냐? 나하고 당장에 멀리 가지 않을 터이냐? 자아 가자!”

그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타일러 보기도 하고 간청도 하여 보았다.

“자아, 어서 옛날과 같이 나하고 멀리멀리 도망을 가자! 나는 참으로 나의 칼로 너를 죽일 수는 없다!”

계집의 눈에는 독이 올라왔다. 광채가 어두운 밤에 번개같이 번쩍거리며,

“싫어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가기는 싫어요. 이제 나는 고만 그렇게 구차하고 천한 생활을 다시 하기는 싫어요. 고만 물렸어요.”

“너의 입으로 정말 그런 말이 나오느냐? 너는 나를 우리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한 후에 또 나중에는 세상에서 지옥이라고 하는 감옥소에까지 가게 하였지! 그러고도 나의 맨 마지막 원을 들어주지 않을 터이냐?”

“나는 언제든지 당신 손에 죽을 것까지도 알고 있소! 자!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언제든지 죽기는 일반, 이렇게 된 이상 나를 죽이시오.”

“정말이냐? 정말이야?”

“정말요!”

계집은 결심한 뜻을 나타내었다. 방원의 손은 떨리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꽉 감고,

“에, 여우 같은 년!”

하고 칼끝을 계집의 옆구리를 향하여 힘껏 내밀었다. 계집은 이를 악물고,

“사람 죽인다!”

소리 한번에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칼자루를 든 손이 피가 몰리는 바람에 우루루 떨리더니 피가 새어 나왔다. 방원은 그 칼을 빼어 들더니 계집 위에 거꾸러져서 가슴을 찌르고 절명(絶命)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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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일을 때때 당하는 일이 있다. 더구나 오늘과 같이 중독이 될이만큼 과학이 발달되어 그것이 인류의 모든 관념을 이룬 이때에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하면 혹 웃음을 받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총명한 체하면서도 어리석음이 있는 사람이 아직 의심을 품고 있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쓴다 하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서로 반대되는 끝과 끝이 어떠한 때는 조화가 되고 어떠한 경우에는 모순이 되는 이 현실 세상에서 아직 우리가 의심을 품고 있는 문제를 여러 독자에게 제공하여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해 내는 데 도움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사실을 부인하여 버리게 되고, 또는 그렇지 않음을 결정해 낼 수 있다 하면 쓰는 사람이나 읽는 이의 해혹이 될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그것은 해석하는 이의 마음대로 할 것이요 쓰는 이 의 관계할 바가 아니니, 쓰는 이는 문제를 제공하는 것이 그것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큰 천직인 까닭이다.

더구나 이야기는 실지로 당한 이가 있었고 또는 쓰는 나도 믿을 수도 없고 아니 믿을 수 토 없는 까닭이다.

2

내가 열 아홉 살이 되던 해다. 세상에는 숫자를 무서워하는 습관이 있어 우리 조선서는 석 삼(三)자와 아홉 구(九)자를 몹시 무서워 한다. 석 삼 자는 귀신이 붙은 자라 해서 몹시 꺼려하며 아홉 구 자 즉 셋을 세 번 곱한 자는 그 석 삼 자보다도 더 무서워한다. 더구나 연령에 들어서 그러하니 아홉 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 서른아홉 살‥‥‥ 이렇게 아홉이라는 단수가 붙은 해를 몹시 경계한다. 그래서 다만,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나는 열 아홉 살이 되는 날부터 마치 죽을 날이나 당한 듯이 무서움과 조심스러움으로 그날 그날을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에서 저곳을 떠날 일이 있어서도 방위를 보고 벽에 못 하나를 박아도 손을 보며 생 일 음식을 먹으려 하여도 부정을 염려하며 더구나 혼인 참례나 조상집에는 가까이 하지도 못하였으며 일동 일정을 재래의 미신을 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다 못해 감기가 들어서 누웠더라도 무당과 판수가 푸닥거리와 경을 읽었다.

나는 어릴 때이라 그렇게 구속적이요 부자유한 법칙을 지키기도 싫었을 뿐 아니라 그 때 동리에 있는 보통학교에를 다닐 때이므로 어머니의 말씀과 또는 하시는 일을 어리석다 해서 여간한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일인 줄은 알 고 자기도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인 줄은 알면서도 그것을 단단히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사 음식이 눈에 보이면 거기 귀신이 붙은 것 같기도 하여 어째 구미가 당겨지지를 아니하고 길에서 상여를 만나면 하루 종일 자기 생명이 위태한 것 같아서 아니 본 것만 못하였다. 장님을 보면 돌아가고 예방해 내버린 것을 볼 때는 자연히 침을 뱉았다.

쉽게 말하면 이 무서운 인습적 미신을 완전히 깨뜨려 버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3

나는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여러 가지 행복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아버지가 끼쳐 주고 돌아가신 넉넉한 재산과 따뜻한 어머니의 자애로 무엇 하나 불만족한 것이 없이 소년 시대를 지내 오며 따라서 백여 호밖에 되지 않는 촌락에서 가장 재산 있고 문벌 있는 얌전한 도령님으로 지내던 생각을 하면 고전적 즐거움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도 거울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때에 보르통하고 혈색 좋던 얼굴의 흔적은 숨어 버리었으나 잘 정제된 모습이라든지 정기가 넘치는 눈이라든지 살적이 뚜렷한 이마라든지 웃음이 숨은 듯 나타나는 듯한 입 가장자리에 날씬날씬한 팔 다리와 가는 허리를 아울러 생각하면 어디를 내놓든지 귀공자의 태도가 있었다.

그래서 동리에서는 나를 사위를 삼으려는 사람이 퍽 많았었다. 하루에도 중매를 들려고 오는 사람이 두셋씩 있을 때가 많아서 그 사람들은 서로 눈치들만 보고 서로 말하기를 꺼려 그대로 돌아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어느 것을 택해야 좋을는지 몰라서 적지 아니 헤매신 모양이요 또는 그 까닭으로 열 네 살부터 말이 있던 혼인이 열 아홀 살이 되도록 늦어진 것이다.

4

동리 처녀들 중에 내 말을 듣거나 또는 담 틈으로나 울 너머로 나를 본 처녀는 모두 나를 사모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서 세째 집 건너편에 있는 열 여 덟 살 먹은 처녀 하나는 내가 학교를 갈 적이나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반드시 문 틈으로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을 나는 본 일이 있었다. 어떠한 날은 대담하게도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자기의 노랑 수건을 내 앞에 던진 일까지 있었다. 또 어떤 처녀 하나는 자기 부모에게 자기가 나를 사모한단 말을 하여 직접 통혼까지 한 일이 있었으나 그 집안 문벌이 얕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거절을 당한 후에 그 여자는 병이 들었더니 그 후에 다른 데로 시집을 갔다고 할 적에는 나는 공연히 섭섭한 일도 있었다.

그 중에 가장 내가 귀찮게 생각한 것은 우리 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그 주막에 술 파는 여자가 나에게 반하였던 일이다. 그것도 내가 학교에 가는 길가에 있는 곳인데 하루는 학교에서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떻게 목이 말랐던지 일상 어머니가 ‘물 한 그릇이라도 남의 집에서 먹지 말라’는 경계를 어기고 그 주막에 들러서 그 술 파는 여자에게 물 한 그릇을 얻어먹은 일이 있었다. 그 여자란 것은 나이가 스물 두서넛이 되어 보이는 남편이 있는 여자인데 눈이 크고 검으며 살이 검누르고 퉁퉁한 여자로 사람을 보면 싱글싱글 웃는 버릇이 있어 얼핏 보면 사람이 좋아 보이지마는 어디인지 음침한 빛이 있다.

그 이튿날 나는 무심히 그 주막 앞을 지내려니까 그 여자는 나를 보고 싱글 웃었다. 그날 저녁에도 싱글 웃었다. 그 웃음이 어떻게 야비한지 나는 그 웃음을 잊으려 하였으나 잊으려 하면 더 생각이 나서 못 견디었다.

그렇지만 그 앞을 아니 지날 수가 없어서 그 웃음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지나간 지 이틀 만에 그 여자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지 문간에 나섰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질겁을 하여 머리끝이 으쓱하였다.

“여보시소 서방님네.”

“왜 그러는고?”

나는 돌아보며 물었다.

“사내가 와 그렇게 무정게계요?”

나는 사변을 돌려보았다. 그 말하는 그 사람은 그만두고 그 말을 듣는 내가 몹시 더럽고 부끄러운 것 같은 까닭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 가려 하니까, 그 여자는 나의 손목을 잡아끌고 자기 집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였다. 그는

“술이나 한잔 자시고 가시소.”

하며 잡아다녔다. 술? 나는 말만 들어도 해괴하였다. 학교 규칙, 어머니, 학생, 계집, 주정, 음란, 이 모든 것이 번득번득 연상이 되어서 온몸이 떨렸다.

“이 손 못 놓겠는게요?”

나는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나는 학생이래서 술 못 먹는지러.”

하고 뒤로 물러서며

“나중에는 얄궂은 일을 다 당하는게로.”

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집에 와서는 얼른 손을 씻어 그 여자의 손때를 떨어 버리고 옷까지 바꾸어 입었다. 그 음탕한 눈이며 살 냄새가 눈에 보이고 코에 맡히는 것 같아서 못 견디었다.

5

그 후부터는 그 길로 학교를 갈 수가 없어서 길을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전 길로 가면 오 리밖에 되지 않는 길을 십 리나 되는 산길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다행히 그 길 중턱에는 우리 집 논이 있고 그 논 옆에는 우리 마름이 살므로 적이 안심이 되었다.

첫날 그 집 앞을 지날 때 나는 주인 된 자격으로라고 하는 것보다도 반가운 마음으로 그 집에를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그 집 싸리짝 문을 들어서니 집 안이 너무 적적하였다. 이십 년 동안이나 우리 집 땅을 부쳐먹는 사람 좋은 늙은 마름도 볼 수가 없고 후덕스러 보이는 그의 마누라도 볼 수가 없다. 하다 못해 늙은 개까지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의아하여 고개를 기웃기웃 하려니까 그 집 봉당방문이 열리며 기웃이 고개를 내미는 사람은 그 집 딸인 임실이었다. 임실이는 어렸을 때 앞치마 하나만 두르고 발바닥으로 어머니를 따라서 우리 집에 드나든 일이 있으므로 나는 그 얼굴을 잘 알 뿐더러 어려서는 같이 장난까지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근 삼 년이나 보지를 못하였다.

어렸을 적에 볼 때에는 머리가 쥐꼬리 같고 때가 덕지덕지하며 코를 흘리던 것이 지금 보니까 제법 머리를 치렁치렁 발뒤꿈치까지 따 늘이고 얼굴에 분칠을 하였는데 때가 쑥 빠졌다.

그는 반가웁다는 뜻인지 생긋 웃고 나를 보며 어서 오라는 듯이 나를 치어다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데 온 것이 미안한 듯이 황망해하며 어떻게 이 갑작스러웁게 방문한 주인댁 도령님을 맞아야 좋을지 모르는 모양이다.

“죄다 어데 간는?”

나는 상전의 아들이 하인의 딸에게 향하는 태도로 물었다. 그는

“들에 나갔는게로.”

하며 다시 한 번 나를 곁눈으로 살펴보았다.

길게 있을 시간도 없거니와 이따가 하학할 때에는 또다시 들릴 터이니까 오래 있을 필요가 없어서 그대로 학교를 다녀 돌아올 적에 다시 들렀다.

그때에는 마름 내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점심 먹으라고 밀국수를 해 주었다. 아마 그 계집애가 저희 부모에게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 후에는 올 적 갈 적 들렀다. 그 계집애도 상전과 부리는 사람의 관계로 숙친하여졌다.

어떤 때 나의 옷고름이 떨어지면 그것을 달아 주고 혹 별다른 음식을 갖다가 내 앞에 놀 때에는 이상한 미소를 띠고 나를 곁눈으로 치어다보았다. 그 웃음이란 나의 눈에 보이기에도 몹시 유혹적이었으나 나는 실없는 계집년이란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6

그 후에 하루는 내가 학질 기운이 갑자기 생겨서 하학 시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어떻게든지 집으로 가려고 무한한 노력으로 줄달음질쳐 오다가 그 집 앞을 당도해 보니까 여태까지 참았던 마음이 홱 풀어지며 그대로 그 집 마루에 가 털썩 주저앉아 버린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마름들은 나를 방으로 데려다 누이고 일변 집으로 통지를 하며 또는 물을 끓인다, 미음을 쑨다 하여 야단을 하는데 그 중에 가장 난처하게 여기는 것은 나를 깔고 덮어 줄 이불 요가 없어서 걱정인 것이다.

자기네들이 깔고 덮는 누더기를 주인 상전의 귀여운 아들 더구나 유달리 위하는 아들의 몸에는 덮어 주기를 꺼리는 모양이다.

염려하는 것을 본 그 처녀는 얼핏 자기 방---아랫방---으로 가서 새로이 꾸며둔 이불 요 한 채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자기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가서 신랑과 덮고 잘 이불을 준비해 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깔고 덮어 준 후 발 아래를 잘 여미고 두덕두덕 매만져 주었다. 촌 여자의 손이지만 어디인지 연하고 부드러운 맛이 있어서 몹시 육감적 자극을 전하는 듯하였다. 그러고는 그 처녀는 내 앞을 잘 떠나지 않고 자기의 가장 아끼는 이불 요를 꺼내 덮어 준 것이 퍽 만족하다는 듯이 항상 이불과 요를 매만졌다.

어떠한 때에는 나의 이마도 눌러 주고 시키지도 아니하였는데 나의 베개를 바로 베 주기도 하고 허트러진 옷고름을 매 주기까지 하였다.

그때 그 당시로 말하면 내가 그 임실이쯤은 다른 의미로 생각할 여지가 없었고 더구나 임실이를 이성으로 생각한다는 것으로는 마음이 끌리지 아니하였으니 그와 나의 지위의 간격이 너무 멀었음이 첫째 원인이며 하고 많은 여자를 다 제쳐놓고 임실이에게 마음을 끄을린다는 것은 그때 나의 관념으로도 우스운 일일 뿐 아니라 그런 일이 있다 하면 그것은 자기의 명예라든지 여러 가지의 사정을 생각하여 으례히 있지 못할 일이었으므로 더구나 임실이가 나에게 마음을 둔다 하면 그것은 마치 파수 병정이 나라의 공주에게 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파수 병정이 공주를 사모한 일이 만일 있었다 하면 그것이 대개는 불행으로서 끝을 마치는 것과 같이 임실이가 나를 사모한 것도 그러하였으니 그때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그 후에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가슴이 몹시 아픔을 깨닫지 아니치 못하였다.

7

병이 나아서 다시 학교를 다닌 지 한 달 남짓한 때 나는 그 집을 들렀다가 그 집에서 마누라쟁이가 소리를 질러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이 정출 가스내야, 죽어도 대답을 못 하겠는가?”

하며 임실이를 두들겨 주는 꼴을 보았다. 계집애는 죽어도 못하겠소 하는 듯이 입을 다물고 돌아앉아서 눈물만 흘리고 느껴 가면서 울 뿐이다.

“말해라 그래도 못 하겠는게로?”

하고 그의 손에 든 방치가 임실의 등줄대를 내려갈겼다.

임실이는 그대로 엎드러져서 등만 비비며 말이 없다.

어미는 죽어라 하고 두어 번 짓이기더니 나를 보고 물러섰다.

그 까닭은 이러한 것이었다. 임실이를 어떠한 촌에 사는 늙수그레한 농부가 후실로 달라고 하는데 그 농부인즉 돈도 있고 땅도 많고 소도 많아 살기가 넉넉하나 상처를 하여 다시 장가를 들 터인데 만일 딸을 주면 닷마지기 땅에 소 두 마리를 주겠다는 말이 있음이다. 그러나 임실이는 죽어도 가기 싫다 하니까 그렇게 수가 나는 것을 박차 버리는 것이 분하고 절통한 일이 되어서 지금 경찰이 고문이나 하는 듯이 딸에게 대답을 받으려 함이었다.

나도 그 말을 듣고는 임실이를 철없는 계집애라 하였다. 그렇게 하면은 부모에게도 좋은 일이요 자기 신상에도 괜찮을 것이라 하였다.

나도 어미 편을 들었다. 그랬더니 어미는 더욱 펄펄 뛰면서 자 도련님 말씀을 들어 보라고 야단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 무심히 한 말이 그 계집애에게 치명상을 줄 줄을 누가 알았으랴. 지금도 생각만 하면 모골이 송연하다.

8

그 후에는 임실이가 몸이 아파서 누웠단 말을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여 즉 말하자면 주인 된 도리로나 날마다 지나다니며 폐를 끼치는 것으로나 또는 내가 앓을 적에 제가 해 주던 공으로나 약 한 첩 아니 지어다 줄 수 없어서 그 병을 물어보았으나 다만 몸살이라고 할 뿐이므로 무슨 병인지 몰라서 그것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한 보름은 무심히 지나갔다. 임실이 병이 어찌되었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무심히 지내던 어떠한 날 저녁에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날이 몹시 침울하고 흐려서 안개가 자욱이 낀 밤이었다. 척척한 기운이 삼투를 하여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 깨기는 깨었으나 분명히 깨지도 못하였다. 눈에는 방안에 있는 것이 분명히 보이나 정신은 잠 속에 잠겨 있었다. 시계 소리가 들리었으나 그것이 생시에 듣는 것 같기도 하고 꿈속에 듣는 것 같기도 하였다. 누구든지 가위를 눌릴 때 당하는 것같이 몸은 깨려 하고 정신은 깨지 않는 벗과 같았다. 띵한 기운이 머릿속에 가득 차고 온몸이 녹는 듯이 혼몽하였다.

그러자 누구인지 문을 열었다. 석유불을 켜 놓은 등잔불이 더욱 밝아지더니 눈이 부신 햇빛같이 환하여졌다. 나는 이상하지도 알고 무섭지도 않았다. 생시나 같이 예사로 왔다.

문이 열리더니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분명한 임실이었다. 그는 하얗게 소복을 입었었다. 그의 손에는 이상한 꽃가지를 들었었다. 문을 닫더니 내 앞에 와서 섰다. 그는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처창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누구와 이별하는 것같이 몹시 슬픈 낯으로 나를 보았다. 그의 옷 빛은 똑똑하고 선명하게 내 눈에 비치었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보고 있더니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더니 나의 가슴에 엎드려 울었다. 생시나 꼭 마찬가지 목소리로 나를 향하여

“저는 지금 당신을 이별하고 영원히 갑니다. 생시에는 감히 말씀을 못 하였으나 지금 마지막 당신을 떠나갈 때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였는지 알 수 없던 그 간곡한 정이나 알려 드릴까 하여 가는 길에 들렀사오니 영영 가는 혼이나마 마지막으로 저를 한 번 안아 주세요.”

하고 가슴에 안겼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임실이를 물리치며

“버릇없는 가시네 년, 누구에게 네가 감히 이따위 버르장을 하니.”

하고 꾸짖었다. 그랬더니 임실이는 돌아서서 원망스럽게 나를 흘겨보면서 그러면 이것이 마지막이니 안녕이나 계시라고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나는 그 사라지는 것이 연기와 같이 허무한 것을 보고 공연히 섭섭한 생각이 나고 가슴속이 메어지는 듯하여 그렇게 준절히 꾸짖은 나로서 다시

“임실아! 임실아!”

하고 부르면서 따라나가려 하였다. 그러니 정녕코 생시요 모든 것이 분명하고 똑똑한데 다리를 떼어 놓으려면 다리가 떼어지지 않고 무엇이 확 붙잡는 것 같으며 입을 벌리려면 혀가 굳어서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여 무한히 고생을 하고 애를 쓰려 하였으나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러자 누구인지 내 몸을 흔드는 듯해서 눈을 떠 보니까 나는 자리 속에 누웠고 옆에 어머니가 일어나 앉으셔서

“왜 그러는?”

하고 물어보신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아서 내가 꿈을 꾸었던 것이다.

꿈은 꿈이나 그것이 너무 역력한 까닭에 어머니께 그런 말씀도 하지 못하고 이상하다 하는 생각으로 그날 밤을 지내었다.

9

그 이튿날 아침에 학교를 갈 적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 집부터 들렀다. 들르기도 전에 멀리서 나는 가슴이 서운하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고‥‥‥ 임실이가 죽단 말이 웬말이냐. 어미 애비 내버리고 네 혼자 어데매로 간단 말고 애고 애고 임실아‥‥‥”

하며 어미의 우는 소리가 적적한 마을 고요한 공기를 울리고 내 귀에 들려 왔다. 공중에서 날아왔다 날아가는 제비새끼라든지 다 익은 낟알이 바람에 불리어 이리 물결치고 저리 물결치는 것이든지 그 울음 소리에 섞이어 몹시 애처러운 정서를 멀리멀리 퍼뜨리는 것 같다.

나는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원한 품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함에 무서운 생각도 나고 으스스한 느낌이 생겼다.

어미는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임실아! 가려거든 같이 가지 너 혼자 간단 말고.”

하며 통곡을 한다. 마름은 옆에 않아 눈물을 씻고 있다. 농후한 애수가 그 집을 싸고돈다.

마누라는 나를 보더니,

”도련님 임실이가 죽었소.”

하며 푸념 검 하소연을 한다. 아랫방 임실의 누운 방문은 꼭 닫혀 있고 그 앞에는 임실이가 신던 신짝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이것이 정말이라 하면 너무 내 꿈이 지나치게 참말이요 거짓말이라 하면 이렇게 애통한 광경을 믿지 않아야 할 것이다. 꿈이 이렇게 사실과 결합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몇 시쯤 하여 그랬는고?”

나는 생각이 있어서 시간을 물어보았다. 마름은 눈을 꿈벅꿈벅하고 먼 산을 바라보고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오경은 되었을게로.“

하며 대답을 하였다. 나는 눈을 더 한 번 크게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분명히 임실의 혼이 임실의 몸에서 떠날 때 나에게 즉시 다녀간 것이 틀림없었다.

10

나는 그날 학교를 그만두었다. 집에 돌아 와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하고 종일 드러누워 생각함에 실없이 임실이 생각이 나서 못 견뎠다. 나에게 그렇게 구소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매 내 사지 마디가 저린 것 같았다. 불쌍함과 측은한 생각이 나고 또는 적지 않른 미신적 관념이 공연히 나를 두려웁게 하였다.

그리고 일상 나에게 하던 것이라든지 내가 아플 때 나에게 하여 준 것이라든지 또는 시집가기 싫어하던 것이든지 병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임실의 마음을 추측하매 임실이는 속으로 몹시 나를 사모하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상전이요 자기는 부리는 사람의 딸이었다. 고귀한 집 도령님을 사모한다고 말로는 차마 하지 못하였으나 그는 속으로 혼자 가슴을 태웠던 것이다. 골수에 사무치도록 나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입이 있고 말을 하나 차마 가슴속에 든 것을 내 놓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죽어 간 임실을 몹시 동정하게 되었었다. 다시 한 번 만날 수가 있어 그의 진정을 들었으면 좋을걸 하는 생각까지 나고 나중에는 제가 생시에 그런 말을 하였다면 들어 주기라도 하였을걸 하는 마음까지 났다. 말하자면 나는 임실이가 죽어 간 뒤에 분한 마음이 변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에 나는 잠을 자려 하나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무슨 영문도 모르시고 가지 각색 약을 갖다가 나를 권하셨다. 그러시면서 내가 어제 저녁에 꿈에 가위를 눌리더니 몸에 병이 생기었다 하시면서 매우 걱정을 하시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침 임실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만일 그 집에를 들렀다는 말을 하면 처녀 죽은 귀신이 씌었다고 당장에 집안이 뒤집힐 터인 까닭이다.

나는 온종일 임실이 생각만 하다가 자리 속에 누웠었다. 때는 자정이 될락말락하였었다. 어머니는 내가 잠들기를 기다리시느라고 옆에서 바느질을 하시고 계셨다. 사면은 고요하였다.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눈이 또렷또렷 잠 한잠 자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누구인지 문간에서 문을 두드렸다. 어머님도 바느질하시던 것을 그치시고 귀를 기울이셨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분명히 임실의 소리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 쳐다보았다. 서로 의아한 것을 깨치기 위함이다. 어머니 한 사람이나 나 한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 듣는다는 것을 알 때 나는 온몸이 으쓱하였다.

“도련님!”

목소리가 더 똑똑하고 날카로왔다. 나는 무의식하게 벌떡 일어나며 대답을 하려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얼핏 나에게로 달려 드시며 쉬---입을 막으라고 손짓을 하셨다.

“도련님!”

세 번째 소리가 날 때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나는 등에서 땀이 나도록 무서운 생각이 나서 얼른 자리 속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그게 누구 소리냐고 날더러 물어보셨다. 나는 어제 저녁 꿈 이야기로부터 오늘 이야기를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온 동리가 다 알 것을 속인들 소용이 없음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모조리 하였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나를 책망을 하셨다. 그렇게 생명에까지 관계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어찌 자식이며 어미냐고 우시기까지 하셨다. 나는 참으로 말 안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것은 귀신이 다녀간 것이라 하셨다. 세 번 부르기 전에 만일 대답을 하였다면 내가 죽을 것을 요행히 괜찮았다고 하셨다.

그날 저녁은 무사히 넘어갔다. 그 이튿날 어머니는 무당을 불러 오셨다. 무당이 내 말을 듣더니 처녀 죽은 귀신이 되어서 그렇다고 그 귀신을 모셔다가 아무 이러이러한 나무 위에 모셔 놓고 일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 주라 하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하셨다. 그 이튿날 임실이는 공동묘지에 갖다가 묻었다. 나는 서운한 생각으로 그 날을 지냈다. 더구나 이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을 자기가 직접 당하고 보니 이상 하게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더구나 처녀 귀신이 자기를 찾아다니는 것을 생각하고 여러 가지 미신을 종합해 생각할 때 적지않이 불안하였다.

그날 밤에도 임실이가 꿈에 보였다. 이번에는 아주 다른 세상으로 가서 모든 세상의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선녀처럼 어여쁜 얼굴과 고운 단장을 하고 찾아왔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퍽 반가움을 금치 못하여 이번에는 내가 임실이를 생각하는 것이 분수에 과한 것같이 임실이는 숭고하여졌었다. 나는 꿈속에서 임실이를 사모한다 하였다.

그러나 임실이는 조금 비웃는 듯이 나를 보더니 만일 당신이 나를 사모하거든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어제 저녁 찾아갔을 때 왜 대답도 아니 하였느냐 하며 자 어서 가자고 손을 끌었다. 그때 잠깐 나는 꿈속에서나마 생시에 먹었던 정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임실이가 참 정말 임실이가 아니요 귀신 임실이라는 생각이 들더니 만일 임실이를 따라가면 자기도 죽는다는 생각이 나서 손을 뿌리치는 바람에 잠이 깨었다.

잠은 깨었으나 눈앞에 보던 기억이 역력 하다.

가기 싫다고 손을 뿌리쳤으나 임실이 모양이 얼마나 숭고하고 어여뻤는지 옆엣집 계집 애가 노랑 수건을 던져 주던 따위로는 비길 수 없이 나의 정열을 일으켰다.

일이 허황된 일이라면서도 꿈에 보던 임실이를 잊을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 사람이 추상적 환상에 반하는 일이 있는 것이나 마찬 가지로 나는 꿈속에 임실이 혼에게 반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잊으려 하나 잊을 수가 없었다. 속으로 자기를 비웃으면서도 가슴속은 무엇에 취한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 말을 들으시더니 더욱 근심을 하시면서 얼핏 장가를 들여야겠다 하셨다. 그리고 유명한 무당과 판수에게는 날마다 다니시다시피 하셨다.

그 이튿날 또 그 이튿날 꿈에는 임실이가 보이지 않았다. 꿈속에서 다시 한 번이라도 만나보았으면 할 때는 정작 오지를 않았다.

꿈을 꾸어서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처음 날 그 이튿날까지는 그리 대단치 않더니 날이 지날수록 심해져서 어떻게 꿈 속에서 한 번 만나보나 하는 생각이 간절하여졌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임실이 생각만 하면 혹시 꿈 속에서 만나볼 수가 있을까 하여 일부러 생각만 하였었으나 허사였다.

그 후부터 날마다 학교는 가지마는 그 집에는 자주 들르지를 않았다. 첫째 나 때문에 자기 딸이 죽었다는 칭원을 할까 겁나는 까닭이요 둘째로는 그 죽은 방이 보기 싫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잊혀지지를 않으므로 이번에는 잊어 보려고 애를 썼다. 어떤 때는 혼자 눈을 딱 감아 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 고개를 흔들어 눈앞에 보이는 것을 깨뜨려 보려하였으나 더욱 분명히 보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도 귀신이 나의 마음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해서 몹시 괴로왔다.

11

하루는 토요일이다. 임실을 잊어버리려 하나 잊어버릴 수 없는 생각이 나를 공동 묘지까지 끌어갔다. 풀이 우거져서 상긋한 냄새가 온 우주의 생명의 냄새를 나의 콧구멍으로 전하여 주는 듯하였다. 익어 가는 나락들은 무거운 생명의 알갱이를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널따란 벌판에는 생명 기운이의 넘쳐 흐른다. 땅에서 솟아오르는 흙의 냄새가 새로이 나의 정신을 씻어 주는 듯 하였다. 먼 산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들은 꿈틀꿈틀한 줄기와 뻣뻣한 가지로 힘있게 흩날린다. 맑게 갠 하늘에는 긴장한 푸른 빛이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 귀퉁이 남겨 놓은 것 없이 가득히 찼다. 길 가는 행인들까지 걷어올린 두 다리에 시뻘건 근육이 힘있게 꿈틀거린다. 들로 나가는 황소 목에 달린 종소리까지 쨍쨍한 음향으로 공기를 울린다.

공동묘지는 우리 동리에서 북쪽으로 십 오리나 되는 산등성이에 있었다. 내가 묘지에를 가는 것은 임실의 실체를 만나보려 하는 것도 아니요 꿈속같이 임실의 혼을 만나려는 것도 아니다. 임실이가 나를 그렇게까지 사모하다가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대로 원혼이 되어 갔으며 또는 그 원혼이 그래도 나를 못 잊고 꿈속에까지 나를 못 잊어 내 눈에 보이며 또 그 원혼이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하면 그 간곡한 마음을 다만 얼마라도 위로 하는 것이 나의 의리 있는 짓이라고 하는 생각까지 난 까닭이었다. 그러면 사람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이 되어 어떠한 물건에 의지 하지 아니하면 그 마음이라든지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부처를 생각하매 흙으로 빞어 만든 불상이거나 예수를 경배하매 쇠로 만든 십자가가 아니면 그 마음을 한곳에 붙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가 임실이를 생각하매 그의 몸을 묻어 놓은 흙덩이 무덤이 아니면 나의 마음을 부쳐 보낼 수 없음이었다.

나는 이 무덤 저 무덤을 찾아서 임실의 무덤 앞에 섰다. 무덤이 무슨 말이 있으랴마는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채우는 듯이 어색하여 졌다. 죽은 사람의 무덤 위에는 새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풀들이 파릇파릇 났다. 나는 세상에 가장 애처로운 정서로 얽어 놓은 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는 임실이를 위하여 무엇이라고 하여야 좋을지 알지 못하였다. 처녀로서 순결한 마음으로 일평생 한 번밖에 그의 정을 주어 보지 못한 임실의 깨끗한 몸이 여기에 놓여 있고 그 순진한 심정에서 곱게 피어 오른 사랑의 꽃이 저 심산속에 피었다 사라진 이름 모를 꽃 같은 것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은 숭고하고 결백함으로 찼었다. 그러나 한 번밖에 피지못하는 꽃이 나로 말미암아 피었고 그것이 나로 인하여 꺼져 버린 것을 생각할 때 말할 수 없이 아까왔다. 더구나 그 꽃은 꺼졌으나 그 나머지 향기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고 피었던 자리 언저리에 남아 있어 없어지기를 아까와하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나의 마음이 어이는 듯하였는지 몰랐다.

나는 무덤 가장자리를 돌아다녀 보았다. 그의 무덤은 보잘것이 없었다. 그의 무덤에는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그의 죽어 간 뒤에는 그를 위하여 가슴을 태우는 이라고는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죽어 간 임실이가 그렇게까지 사모하던 내가 이 자리에 왔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일 참으로 넋이 있어 안다 하면 그가 그것을 만족히 여길는지 아닐는지? 나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옆에 피어 있는 석죽(石竹)꽃을 따서 그것으로 화환을 만들어 무덤 앞에 놓아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는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여 왔다. 그리고 임실이도 꿈에 오지 아니하고 나도 임실의 생각을 잊어버리었다.

그러자 일 년이 지나간 어떤 날 또다시 임실이가 왔었다. 그것은 바로 임실이가 죽은 지 일 년이 되던 날이다. 그 후에는 연연히 그날이면 임실이가 보이더니 내가 서울 와서 공부하던 해부터는 그날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지금은 아주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같이 잊어버리었으나 문득문득 그때 생각이 나면 그때 문간에서 나를 부르던 소리가 귀에 역력하여 온몸이 으쓱하여진다.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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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영식은 관청 사무를 끝내고서 집에 돌아왔다. 얼굴빛이 조금 가무스름한데 노란빛이 돌며, 멀리 세워 놓고 보면 두 눈이 쑥 들어 간 것처럼 보이도록 눈 가장자리가 가무스름 한데 푸른빛이 섞이었다. 어디로 보든지 호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삼십 내외의 청년이다. 문에 들어선 주인을 본 아내는 웃었는지 말았는지 눈으로 인사를 하고 모자와 웃옷을 받아서 의걸이에 걸며,

“오늘 어째 이렇게 일찍 나오셨소?”

하며 조금 꼬집어 뜯는 듯한 수작을 농담 비슷이 꺼낸다. 영식은 칼라를 떼면서 체경 앞에 서서,

“이르긴 무엇이 일러, 시간대로 나왔는데”

하고 피곤한 듯이 약간 상을 찌푸렸다.

“누가 퇴사 시간을 몰라서 하는 말요?”

”그럼.”

“오늘은 밤을 새고 들어오지를 않았으니까 말예요.”

영식의 아내는 구가정 부인으로 나이가 한 두 살 위다. 거기다가 애를 여럿 낳고 또 시집살이를 어려서부터 한 탓으로 얼굴이 몹시 여윈데다가 몸에 병이 잦아서 영식에게 대면 아주머니 뻘이나 돼 보인다. 그런데다가 히스테리 기운이 있어 몹시 질투를 하는 성질 이었다.

“내가 언제든지 밤을 새우고 다녔소? 어쩌다 한 번 그런 때가 있지.”

“어쩌다가 무엇이오? 나는 뻔뻔스러워서도 그런 말은 할 수가 없겠소.”

“무엇이 뻔뻔하단 말이요? 어젯저녁 하루밖에 더 새고 들어왔소?”

“무엇요? 아이 기가 막혀. 그끄저께에는 새벽 다섯 시에 들어왔죠. 또 지난번 공일날은 일곱 시에나 들어오지 않으셨소?”

영식은 씽긋 웃어 굴복한다는 뜻을 표하고도 그래도 버티어 보느라고,

“그때야 연회에서 늦어서 자연히 그렇게 되었지 내가 일부러 그랬나?”

“저런 걸핏하면 연회니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구식 여자라고 속이것다. 그렇지만 나는 못 속여요. 그 이튿날 당신 양복 주머니를 보니까 하이칼라 향수 냄새가 나는 여자 수건이 들었는데그래?”

“허허, 수건이 있기로 그렇게 이상할 건 없지. 요리집에서 기생의 수건을 술김에 넣고 온 게지.”

이 말을 듣더니 주인 아내는 서랍을 와락 열더니 꽃봉투에 넣은 편지 한 장을 쑥 내놓 으며,

“이것도 요리집에서 술김에 넣어 준 손수건이요? 자! 어서 오늘 저녁에는 이 편지한 여자에게 가서 밤이나 새고 오시우! 나같이 늙어 빠씬 년을 어떻게 당신같이 젊은이가 생각할 수 있겠소. 밥이나 짓고 빨래나 하지.”

영식은 봉투를 물끄러미 보다가 상을 잠간 찌푸리며,

“이게 어디서 왔소?”

하며 피봉을 이리저리 뒤적거려 보았다. 주인 아내는 소리를 포달스럽게 툭 쏘아서,

“누가 알우! 그것을 날더러 물어 본단 말요. 저런 사내들은 능청맞단 말야. 편지 하라고 번지수 알으켜 줄 적은 언제고 지금 와서 시치미를 딱 떼고 어름어름한다. “

영식은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것 모양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편지 보낸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없으니 누군 줄 알 수 있나‥‥‥”

속으로는 벌써 알아챈 것이 있으나 부인이 옆에서 감시를 하므로 어물어물하는 수작을 한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와 이름은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주소나 이름을 말할 것도 없이 안다는 뜻이 아니요. 어서 반갑거든 그대로 반갑다고 그래요. 다른 사연 있겠소? 오늘 밤에 오라는 것이겠지.”

“아따 퍽도 그러네. 편지를 한두 장 받는 터가 아니요 어떻게 안단 말이요. 하지만 누군지는 몰라도 남에게 편지를 하려면 자기의 이름과 주소를 쓰는 법이지‥‥‥ 아냐 도루 우체통에 넣어 버려.”

하고 짐짓 화나는 체하고 편지를 뜯지도 않고 장머리에다 올려 놓았다. 그것은 아내의 마음이 풀리면 슬그머니 갖다 보자는 수작이다.

“왜 보시지를 않소? 어서 보고 가 보시구려. 내 혼자 집보고 있을께.”

서로 이렇게 찧고 까불다가 아내가,

“대관절 나는 혼까 살림살이는 참 못 하겠소.“

하고 주인의 약점을 쥐인지라 거침없이 요구가 나온다.

“할멈이 간 후에 혼자 숱한 살림살이를 하자니까 사람이 죽겠구려.“

“왜 사람 하나를 얻으라니까 얻지 않고 그래.”

“사람이 어디 고렇게 입에 맞은 떡처럼 있소.“

“그래도 수소문하면 있겠지.”

“그런데 나리.“

이번에는 아내 쪽이 수그러지며 말소리가 공손해진다.

“왜 그러우?”

하는 영식의 얼굴에는 위엄을 꾸몄다.

“저 오늘 박주사댁이 와서 사람 하나를 지시하마 하였는데 당장에라도 불러올 수 있다고, 자식도 없고 서방도 없는데 일을 썩 잘한대.“

하며 주인을 타이르기에 전력을 다하다시피 한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데?”

영식이 나이 묻는 것도 싫어서,

“나이는 아무렇거나 알아 무엇하시료?”

”아따 나이 좀 물은 것이 잘못이란 말이요?”

“나이는 퍽 젊답디다. 자세 물어 보지는 않았으나 그렇지만 일도 잘하고 사람도 괜찮대.”

나이 젊다는 것을 들은 영식은 비록 이상한 야심이 생긴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기어서,

“그러면 데려오구려. 월급은 전에 있던 노파와 똑같이 주겠지?”

“그렇지.”

아내는 잠간 주저주저하더니 말할 듯 말 듯 하더니 급기야 입을 열면서,

“그런데요, 인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박주사댁 말을 들으면 인물 하나가 안되었다고.”

주인이 말을 듣더니,

“인물이 어떻기에?”

하며 놀라는 듯이 아내를·본다.

“그게 아니라 어려서 불에 디어 얼굴을 찍어맸다구요.“

“그럼 보기 싫을걸.”

“그래서 박주사댁도 보고서 쓰랴거든 쓰고 말랴거든 말라는데 얼굴야 무슨 상관 있소, 일만 잘하면 고만이지.”

“그렇지만 너무 보기 싫으면 어떻게 하우?”

“보기 싫어도 눈 있고 코 있겠지 반쪽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안됐어, 사람이란 인상이 나쁘면 못써. 더구나 친구가 많이 다니는 우리 집에서 불쾌하게 보여서는 안될걸. 외국에서는 호텔이나 큰 상점의 여사무원도 무엇보다도 인불 시험부터 본다우.”

“글쎄 인물만 해반주룩하면 무엇하우. 일이 첫째 목적인데 일만 잘 하면 고만이지 인물만 이쁘면 첩을 삼을 테요? 회똑회똑하고 석경 앞에서 떨어질 줄이나 모르면 그런 고질을 어떻게 한단 말이요?”

”그래도 사람은 외양에 있지, 그렇게 보기 싫거든 조금더 기다려 보아서 다른 데 마땅한 것을 데려오지.”

아내는 화를 버럭 내며,

“글쎄 딱하기도 하시우. 어느 천년에 다른 것을 데려온단 말요, 좀 보.”

하고 툇마루 끝으로 나가서 빨래 광주리를 헤치면서

“이렇게 빨래가 쌓였구려. 요새처럼 날 좋은 때 하지 않고 언제 한단 말이요. 큰댁 생신이 며칠 안 남았는데 그동안에 준비는 누가 다 하우. 옷도 한 벌씩은 지어입어야지. 어린것들은 벌거벗겨 데리고 가우. 나는 시방이라도 데려올 터이야.”

“그런 것이 아냐. 왜 김주사집에 있던 사람 얌전하더군. 일주일만 지내면 오마고 했으니 그 사람을 데려오지.”

아내는 하품을 하며,

“어이 일주일을 언제 기다린단 말요. 나는 모르겠소. 남의 생각은 조금도 할 줄 모르니까 내가 부릴 사람 내가 데려온다는데 웬 걱정들요.”

“그럼 나는 모르겠소. 하고 싶은 대로 하구려. 내 그렇게 악지를 시는 것은.”

하고 돌아앉으니까 아내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염려 말아요. 내 데려올께.”

2

그날로 양천집이 왔다. 오고 본즉 주인 아내도 유쾌치 못할 만큼 흉한 얼굴을 가졌다.한쪽 얼굴이 눈 하나를 어울러서 뺨까지 대패로 깎은 듯하고 따라서 눈알이 껍질이 벗겨져서 툭 불그러졌다. 그래 한 눈이 유달리 크므로 다른 한쪽은 또한 몹시 작아 보인다. 거기다가 곰보요 머리는 쥐가 뜯은 것처럼 군데군데 났다. 단 손이 크고 발이 크다.

그러나 아내는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남편이 들으라는 듯이,

“참 꼴불견이라더니 게 두고 마췄어. 일은 참 잘해요, 설겆이하는 것이라든지 쓰개질 하는 것이 또 황소같이 세차게 해.”

하고 남편 옆에서 넌지시 말을 하였다. 쥔은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신문만 보고 앉아 있다.

며칠이 지났다. 양천집의 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골서 아무렇게나 자라난데다가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서 배운 것 없고 본 것이 없어서 어른 아이 알아볼 줄을 모르고 말버릇이 없다. 거기다가 성미가 뾰롱뾰롱하고 소갈머리가 없어서 어떤 때는 주인 아내의 눈짓하는 것도 모르고 제멋대로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상을 찌푸리고 코웃음을 친다.

어떤 때는 통내외하고 다니는 친구가 와서 보고 주인 귀에다 몰래,

“내보내게. 못쓰겠네. 첫째 남 볼썽이 사놔.“

하며 권고를 한다. 그럴 때마다 주인은,

“나도 아네. 하지만 온 지가 열흘도 못 된 것을 어떻게 내보내나. 차차‥‥‥”

하고 대답만 하여 두었다. 이 눈치를 챈 주인 아내는 그 친구를 몹시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별걱정을 다 하네. 오지랖도 꽤 넓지, 남의 집 살림 걱정까지 하게.”

하며 옆에다 세워 놓고 욕을 할 적이 있었다. 그럴 적마다 주인은 치밀어 올라오는 분을 참는다. 학교 다치는 열 두 살 먹은 큰아들도 걸핏하면,

“찍어뱅이, 애꾸눈이!”

하고 놀려먹는다. 그러면 그런 때마다 몽둥이찜이 내린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내외 쌈이 된다.

“집안의 위엄이 너무 없어.”

하고 남편이 호령을 하면 아내는,

“자식들이 너무 버릇 없어.”

하고 대든다. 공연히 사람 하나 데려온 것이 집안을 불화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양천집에게 하루는 기별이 오기를, 동서가 죽었는데 초상 볼 사람이 없으니 급 히 와 달라 하였다.

양천집은 황망히 그리로 갔다. 일을 하다 말고 갔으므로 주인 아내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떻든 속히 오라고 하기는 하였으나 한시가 액액한지라 혼자 걱정만 하고 있었다.

그때에 주인은 생각하기를 이런 좋은 기회를 잃지 말고 얼른 다른 것을 불러 오겠다 하 였다.

그래서 하루는 아내를 동정하듯이,

“일하던 것을 그대로 두고 가서 어떻게 한단 말이요!”

하고 은근히 의논을 하였다.

“글쎄 말요. 빨래는 허다 말고 그대로 내버리고 가서 그것도 걱정이오. 내가 손이 나야 바느질이라도 할 터인데.”

주인은 이 말을 듣더니,

“그것이 오고가는 데 적어야 이틀은 걸릴 것이요 초상을 치르자면 사흘은 걸릴 터이니, 적어도 닷새는 될 터이란 말야.”

“그래요. 허지만 어디 그렇게 꼭꼭 날짜대로 일이 되오, 조금 늦기가 쉽지.”

“그러면 여보, 그것이 나려을 때까지 김주사 집에 있던 것을 데려다 둡시다 그려.”

이 말에 솔깃한 아내는,

“하지만 어떻게 왔다가 도루 가라고 그런단 말이요?”

“무얼, 돈냥이나 더 주면 고만이지.”

“글쎄.”

피차 타협이 되어 김주사 집에 있던 점순 어멈을 데려왔다.

사람이 체나서 영리하고 인물도 반반하며 일도 하질 못하지 않고 말솜씨라든지 어린애 보는 것이 주인 맘에도 솔깃하였다.

그러나 주인 아내는 쓸데없이 의심을 내어서 주인이 점순 어멈에게 하는 행동을 눈 여겨보지 않는 것이 없다.

“점잖은 사람이 그럴 리가 있나.”

하고 혼자 위로도 하였다가,

“그렇지만 알 수 있어야지. 그런 짓이란 옛날부터 없는 일이 아니고.”

하며 공연한 걱정을 한다. 그런 기색을 볼 때 마다 주인은 혼자 웃으면서 속으로는 일상 같이 노는 기생 점고만 하고 앉아 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양천집이 오지를 않다가 열흘이 넘어서야 왔다. 문간에 들어서기 전까지도 혹시 내가 늦게 와서 다른 사람을 그 동안에 두지나 아니하였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며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골서 서울까지 걸어오는 길에서도 손가락을 꼽아 가며.

“벌써 열흘이지.“

하다가,

“만일 다른 사람이 있으면 나는 내쫓길 터인데.”

하고 걱정이 되어 애꾸눈을 두리번두리번하였다.

“실상은 늦게 오랴 늦게 온 것이 아니라 짚신이 떨어져서 그 값을 버느라고 옆엣집 방아를 이틀 동안 찧어 준 죄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걱정이 되어서 궁리가 대단하여,

“만일 나가라면 그 집에서 찾을 돈이 얼마나 되누. 열흘 동안 있었으니 한 달에 삼 원을 몇으로 쪼개야 되나.”

하고 길거리에 앉아서 모래알을 서른 개 주 워 가지고 닷 냥 열 냥 하고 삼십 분이 넘도록 셈을 보아서 일 원이라는 것을 발견은 하였으나 그래도 자기의 구구를 믿을 수가 없어서 어떤 주막에 들어가,

“여보 영감님!”

하고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자기 구구가 맞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늙은이 역시 한참 있다가 꾸물꾸물하더니,

”그런가 보외다.“

하고 몽롱하게 대답을 한다. 기연가미연가하여 반신반의로 어떻든 일 원은 주겠지 하고 서울까지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낮선 사람 하나가 밥솥을 씻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칠 때에 는 마치 고양이가 쥐 노리듯 무서웁고 암상스러운 질투의 광채가 두 눈에서 번개처럼 번득이었다. 서로 자기의 지위와 자리를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경계를 하였다.

“어서 오게.“

주인 아내가 나오며,

“왜 이렇게 늦었어?”

하는 소리는 풀이 없고 쌀쌀한 듯하게 양천집 귀에 들렸다.

“급히 볼일이 있어 늦게 왔어요.”

“무슨 볼일이 그리 급했담.”

양천집은 마루끝에 와 서서 주인 아내를 보며,

“저 사람은 누구예요?”

하며 부엌을 가리켰다.

“응, 새로 온 사람야.”

양천집은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는 얼마간 아무 말이 없다가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저 사람은 자기보다 우선 인물이 곱다는 것이 여간 샘이 나지 않았다. 또는 자기처럼 투 박한 시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샘이 났다.

“어떻든 다리나 좀 쉬게. 그리고 되는 대로 결말을 내줄 터이니.”

처음에 온 양천집과 나중 온 점순 어멈 사이에는 암투가 시작되었다. 그 암투는 결코 상대자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었다.

점순 어멈이 밥상을 보면 양천집은 설겆이를 하고, 양천집이 마당을 쓸면 점순 어멈은 마루를 훔쳤다. 방이 끝나면 세간을 닦고 먼지를 털면 물을 뿌렸다. 네가 하면 내가 한다. 서로 겨끔내기로 하는 바람에 좋아지기는 주인밖에 없다. 나중에는 주인의 구두 닦기며 뒷간까지 말끔히 쓸어 놓았다.

그날 저녁 주인 내외는 서로 앉아서 의논을 하였다.

“어떻게 해야 좋겠소?”

“글쎄.“

“하나는 있던 것이니까 박절히 가라 할 수도 없고 또 나중 온 것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라고 해요?”

“허지만 제가 가서 늦게 오기 때문에 사람을 둔 것이지 제가 속히 왔어도 두어?”

하고 전것을 내미는 말을 하였다.

“그렇지만 나중 온 것은 나리 말씀과 마찬가지로 임시로 두기로 하지 않았소?”

하며 아내는 전것을 그대로 둘 의향이다.

“아따, 그때는 그랬지만 사람 둘을 놓고 보아요, 어느 것이 나은가?”

“사람야 둘이 다 괜찮지.”

“무엇야? 둘이 다 괜찮다니, 그래 얼거뱅이 찌거뱅이에다 악상군이요 또 보고 배운 것이 없는 것과, 인물 얌전하고 말솜씨 있고 사람 영리한 것하고 똑같단 말요? 온 말을 해도 조금이나 동에 닿는 말을 해야지”

“그렇지만 경우가 그렇지 않소.”

“경우가 무슨 경우야, 내 돈 주고 나 사람 쓰는데 내 맘에 들면 두고 그렇지 않으면 내보내는 것이지 경우가 다 무엇이야.”

이렇게 싸우다가 결국은 돈 소리에 아내가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한다. 남편은 화증을 와락 내이면서,

“아따 맘대로 하구려, 나는 그런 돈을 낼 수가 없으니 나중것을 두든지 먼첨것을 두든지 멋대로 하우.”

하고 돌아 드러눕는다. 아내는 남편을 타이르려고,

“그렇게 화까지 내실 것이 있어요? 좋을 대로 하지.“

그 이튿날 점순 어멈과 양천집은 아침을 해 치르기 전에 주인 앞에 서서 간택하기를 기다렸다. 영리한 점순어멈은 벌써 자기가 승리자인 것을 알아채고서,

“나리 처분대로 하시지요.”

하고 금치 못하여 나타나는 기꺼운 빛이 얼굴에 보이고 양천집은 자기 자리를 빼앗긴 것이 분하여,

“제가 있어야 옳지요. 제가 다니러 간 새에 저 사람은 임시로 와 있었으니까요.”

하고 잡았던 것을 빼앗기는 사람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억지 겸 변명을 한다.

“그렇지만,”

주인은 엄연히 서서,

“자네는 가서 오지 않았으므로 저 사람을 둔 것이지 자네를 내보내려고 그러한 것은 아냐.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둘 수가 없으니 용량해 하게.”

점순 어멈은 북받치는 즐거움을 이길 수가 없어서 돌아서서 씽긋 웃었다. 양천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제가 올 때까지 잠깐 와 있던 사람이요, 저는 처음부터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어쨌단 말야. 나는 더 말할 수 없어.”

하고 사랑으로 나갔다.

주인 아내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나리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나도 헐 말이 없네.“

짝짝이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그는 마지막으로 힘있게 하는 소리가,

“그러면 제가 받을 돈이나 주세요.”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것야 그러지.“

하고 아내는 돈 일 원과 약간의 은전 몇 푼을 갖다 쥐어 주며,

“자, 미안하니 신이나 한 켤레 사 신게.”

하고 양천집의 손에 돈이 놓일 제, 그는 눈물이 젖은 얼굴이 반갑고 좋은 마음에 실룩실룩하고 떨리더니 마음이 저으기 풀리어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1925>

[출처] http://www.jikji.org/%EA%B3%84%EC%A7%91%20%ED%95%98%EC%9D%B8?highlight=%28%5Cb%EC%86%8C%EC%84%A4_%EA%B0%88%EB%9E%98%5Cb%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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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째

사랑하시는 C선생님께 어린 심정에서 때없이 솟아오르는 끝없는 느낌의 한 마디를 올리나이다.

시간이란 시내가 흐르는 대로 우리 인생은 그 위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읍니다. 늙은이 나 젊은이나 마음 아픈 이나 행복의 송가를 높이 외는 이나 성공의 구가([[謳]]歌)를 길게 부르짖는 사람이나, 이 시간이란 시내에서 뱃놀이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늘 이 편지를 선생님께 올리는 이 젊은 A도 시간이란 시내에 일엽 편주(一葉片舟)를 띄워 놓고 곳 모르는 포구로 향하여 둥실둥실 떠갑니다.

어떠한 이는 쾌주하는 기선을 탔으며 어떠한 이는 높다란 돛을 달고 순풍(順風)에 밀리어 갑니다. 또 어떠한 이는 밑구멍 뚫어진 나룻배를 이리 뒤뚱 저리 뒤뚱 위태하게 젓고 갑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하품하고 기지개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또 어떠한 배에서는 장고를 두드리고 푸른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불그레한 정화(情話)의 소곤 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떠한 배에서는 여자의 애끊는 울음 소리가 납니다. 어떠한 배 속에서는 촉루([[髑]][[髏]])가 춤을 추고 어떠한 배 속에서는 노름군의 코고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이 A가 탄 배에서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줄 아십니까? 때없는 우울과 비분과 실망과 고통과 원망이 뭉텡이가 되고 덩어리가 되어 듣는 이의 귓구멍을 틀어막을 듯이 다만 띵 하는 머리 아픔이 있을 뿐이외다.

나와 같이 배를 띄워 같은 자리를 지나가는 배가 몇 백 몇 천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만 서로 바라보며 기막혀 웃을 뿐이외다. 그리고 서로 눈물지을 뿐이외다.

선생님, 이 배가 가기는 갑니다. 한 시간에 5리를 가거나 단 1리를 가거나 가기는 갑니다. 그러나 그 배가 뒷걸음질 칠 리는 없을 터이지요. 가기만 하는 배는 우리를 실어다 무엇을 할까요? 흐르는 시간은 말이 없고 뜻이 없으매 다만 일정한 규칙대로 가기는 가겠으나 뜻없고 말없는 시간이란 시내 위에 이 A는 무슨 파문을 그리어 놓아야 할까요.

새벽 서리 찬바람에 차르럭 찰싹 뛰어노는 어여쁜 물결입니까? 아침 저녁 멀리 밀려왔다 밀려가는 밀물의 스르렁거리는 물결입니까? 초생달 갸우뜨름하게 비추인 푸르렀다 희었다 하는 깜찍한 파문입니까? 어떻든 저는 무슨 파문이든지 그 시간이란 파문 위에 그리어 놓아야 할 것이외다. 하다 못하여 시커먼 물결 위에 푸---하게 일어나는 거품일지라도 남겨 놓고야 말 것이외다.

선생님! 그러나 그 파문을 그리려 하나 그릴 수가 없읍니다. 하늘의 바람은 너무 강하고 몰려오는 물결은 너무 힘이 있읍니디

인습이란 물결이 아직은 편주를 몰아 낼 때와 육박하는 환경의 모든 시커먼 물결이 가려 하는 이 A라는 조그마한 배를 집어 삼키려 할 때 닻을 감으랴 노를 저으랴 가려고는 합니다마는 방향을 정하려 하나 괄에 힘이 약하고 가려 하나 나를 이끌어 나아가게 하는 힘 있는 발동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나 그뿐입니까? 어떤 때에는 폭우가 내려 붓고 어떠한 때에는 광풍이 몰려와 간신히 뒤뚱거리는 이 작은 배를 사정없이 푸른 물결 속에 집어 넣으려 합니다.

아아, 선생님! 그나 그뿐이 아니외다. 어떠한 때는 어두운 밤이 됩니다. 울멍줄멍하는 노한 파도가 다만 시커먼 암흑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하늘에는 희망의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저쪽 어귀에 희미하게 비추이는 깨알 같은 등대의 깜빡거리는 불도 꺼질 때가 있읍니다.

그러나 저는 가렵니다. 약하고 힘없는 두 팔다리로 저 보이지 않는 포구를 향하여 형형 색색의 파문을 그리면서 가기는 가렵니다. 오늘에 그리어 놓은 파문의 한 폭이 내일에 그릴 파문을 낳고 내일에 그리어 놓은 파문의 한 폭이 모레의 그것을 낳아 저쪽 포구에 이를 때에는 대양으로 가는 힘있는 여울 물결 위에 거룩하고 꽃다운 성공의 파문을 그리려 합니다.

아아, 그때에는 암흑에 날뛰는 미친 파도나 때없는 폭풍우나 밀려오는 인습의 물결이나 모든 환경의 그 모진 파도가 그 거룩하고 꽃다운 파문 하나는 지워 버리지 못할 것이며 삼키어 버리지 못할 것이지요. 이 작은 일엽 편주는 그때가 되어 부딪쳐 깨어지거나 물결에 씻기어 사라지거나 저는 다만 죽어 가는 목구멍 속으로라도 넘치는 환희와 복받치는 기쁨으로 영생의 노래를 부를 것이외다.

둘 째

오늘은 웬일인지 일기가 전에 보지 못하게 음침합니다. 답답한 심사와 침울한 감정을 양기있고 청징하게 하려 애를 썼으나 그것은 실패하였읍니다.

아침에 밥을 먹은 저는 12시가 되도록 습기찬 방바닥에 누워 있었읍니다. 오고가는 공 상이 어떠한 때는 저를 웃기더니 어떠한 때는 울리더이다. 저의 젊은 아내는 오색 종이로 바른 반짇그룻을 옆에 놓고 별 같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저의 입고 나아갈 두루마기 끈을 달고 있었나이다. 저는 저의 아내를 볼 때마다 불쌍한 생각이 납니다. 나이 젊은 아내의 고생살이를 생각할 때마다 저의 심정은 웬일인지 쓰립니다. 제 옆에 앉아 있는 그 젊은 아내가 과연 저의 이상을 채우는 아내는 아니외다. 사랑과 사랑이 결합하여 된 부부가 아니외다. 자각 있는 애인의 조화 있는 사랑은 아니외다. 그는 무엇을 믿고서 나의 아내가 되었으며 무슨 각성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애인과 애인이 서로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대담한 일이라 하면 애인도 아니요 애인도 아닌 이 두 사람의 서로 결합된 것도 위태하게도 대담한 것이외다.

위태한 짓을 똑같이 한 이 A도 불쌍한 용자이지마는 그것을 지금까지 알지 못하는 저의 젊은 아내도 어리석은 용자이외다. 우리 두 사람이 과연 원만하게 사랑의 가락을 두 몸에 얽어 놓았읍니까? 강대한 세력을 두 사람의 붉은 피 속에 부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어린 자식은 절더러 ‘아빠 아빠’ 합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더러는 ‘엄마 엄마’ 합니다. <엄마 엄마>라 부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알지도 못하게 저의 마음은 깨끗하여지며 어느 틈엔지 따가운 귀여움이 저의 가슴을 채웁니다. 어린애가 웃으면 저도 웃습니다. 그러면 저의 아내도 웃습니다. 저의 아내의 웃는 눈은 반드시 나의 얼굴을 바라 봅니다.

철없는 아이가 재롱부려 웃을 때는 저의 웃음과 저의 아내의 웃음 소리는 보이지 않는 공중에서 서로 얼크러져 입을 맞춥니다. 그때에는 모든 불평 모든 고통이 그 방안에서 내쫓기어 버립니다.

오늘도 남향한 창에는 햇빛이 따뜻하게 드는데 철없는 어린 자식은 방 한 귀퉁이에서 자막대기를 가지고 몽클몽클한 두 다리를 쪽 뻗고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콧소리를 쌔근쌔근하며 장난을 하고 있을 때 답답한 감정이 공연히 저의 상을 흐리게 하였으나 근지러운 살과 부드러운 입김을 가진 저의 아내가 고요한 침묵을 가는 바늘로써 바느질할 제 웬일인지 눈을 감은 저의 전신의 모든 관능은 힘을 잃은 것같이 노곤하여졌나이다

잠들지 않은 나의 정신은 혼농한 가운데 젖어 있을 때 나의 아내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여보셔요, 날이 점점 추워 오는데 월급 되거든 어린애 모자 하나 사 오세요”

하였읍니다. 이 말을 듣는 저는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읍니다. 그리고 속마음오로는, ‘화구도 살 것이 있고 책도 좀 사야 할 터인데 어린애 모자는 천천히 사지’ 하며 아내의 말에 공연 한 싫증이 났읍니다. 그 싫증은 결코 아내의 말이 부당한 말이나 어린아이의 모자를 사다 주는 것이 아까와 그리 한 것이 아니라 경제의 압박을 당하여 오는 저는 돈이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쌓아 오고 쌓아 오는 불평이 공연히 좋던 감정도 얼크러뜨려 버립니다.

저의 아내는 여러 번 그런 일을 말하면서도 저의 대답하지 않는 것이 무안한 듯이 한참이나 아무 소리가 없다가,

“왜 남의 말에 대답이 없소?”

하였읍니다. 나는 여전히 말 대답이 없이 드러누워 있었읍니다. 아내는 또다시,

“어린애 모자 하나 사다 주기가 무엇이 그리 어려워서”

하더니 아무 소리도 없이 다 꿰맨 두루마기를 툭툭 털어 저의 누워 있는 다리 위에 툭 던졌읍니다.

자막대를 가지고 장난하던 어린애는 모자 소리를 듣더니,

“때때모자? 응 엄마”

하고 벙긋벙긋 웃으면서 저의 아내를 쳐다보며 달려듭니다. 이것을 본 저의 아내는 토라졌던 얼굴을 다시 고쳤던지,

“글쎄 이것 좀 보시우. 모자 모자 하는구료”

하며 아무 말 없이 두 눈 위에 팔을 얹고 누워 있는 저의 가슴을 가만히 연하고 부드럽게 흔들었읍니다. 저의 아내의 매낀매낀한 손가락이 저의 옷 위에서 꼼지락거릴 때에 저의 피부 밑으로 지나가는 신경은 무엇에 취한 듯한 감각을 저의 핏결 속에 전하는 듯 하였읍니다.

저는 다만,

”이리 구찮은‥‥‥”

하고 팔꿈치로 아내의 손을 툭 치며 다시 돌아누웠읍니다. 제가 본래 신경질임을 아는 아내는 조금도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다만 생글 웃으면서 가장 노한 듯이,

“고만두구료. 어서 옷이나 입고 나아가요. 대낮에 드러누워 있는 것이 갑갑해 못 견디겠구료.”

하는 목소리는 웬일인지 마음 강한 저의 거짓 노여워함을 오래 가게는 못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벌떡 일어나며 아내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에이! 그 등쌀에 누워 있을 수가 있어야지. 두루마기 어쨌소?”

하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읍니다. 저의 아내도 웃음이 떠도는 얼굴에 거짓 노여움을 섞으면서,

“그것 아니고 무엇이오.”

하며 방바닥에 놓여 있는 저의 두루마기 가리켰읍니다. 저는 다만 무안한 가운데도 우스운 생각이 나서 아무 말 없이 두루마기를 입고,

“지금 몇 시나 되었을꼬·?”

하며 혼잣말을 하고는 모자를 집어썼습니다.

저는 바깥으로 나왔읍니다. 젊은 아내와 정에 겨운 싸움을 하고 나온 저의 마음은 바깥에 나와 비로소 그 시간에 일어난 역사가 그립고 애착하는 생각이 났읍니다. 새로운 공기와 푸른 하늘이 거의 공연히 센티멘탈한 심정을 녹이며 부드럽게 하여 줄 때 웬일인지 반웃음과 반노여움을 섞은 저의 젊은 아내의 얼굴과 그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저의 마음을 매취(魅醉)케 하는 듯하였읍니다.

저는 저의 친구를 찾아 MW사로 향하여 오면서 생각하는 것은 저의 아내뿐이었으며 그 아내가 청하던 어린 자식의 새 모자이었읍니다. 저는 월급을 타거든 모자를 사다 주리라 하였읍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이의 어머니 된 젊은 아내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리라 하였읍니다.

세 째

MW사에 왔읍니다. DH, WC는 서로 바라 보며 무슨 걱정인지 하고 있었읍니다. 웬일 인지 그 넓지 못한 방안에서는 검푸른 근심의 그늘이 오락가락하였읍니다. 저는,

“웬일들이야? 무슨 걱정들 있었나?”

하였읍니다. 얼굴 검은 DH는,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었네. 그런게 아니라 NC의 아내가 앓는다는 기별이 왔는데 본래 구차한 그 사람이 어떻게나 근심을 하겠나. 그래서 오늘 NC의 집까지 가 볼까 하고 자네를 기다리던 터인데.”

“무엇야? NC의 아내가?”

“그래.”

“그것 안되었네그려. 그러면 언제 가려나? 차비들은 준비되었나?”

“그것은 내가 준비하였어.”

“그러면 가 보세그려.”

저는 다만 친구의 불쌍한 처지에 동정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였읍니다. NC의 집은 시골입니다. 더구나 한적한 촌입니다. 그의 생활은 부유롭지 못하고 빈곤합니다. 그는 지금 자기의 손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아침에 괭이 메고 논으로 갑니다. 저녁이면 시름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그는 깜빡깜빡하는 유경 밑에서 깨알 같은 책을 봅니다. 그리고 시를 씁니다. 그의 시는 선생님도 보신 바가 있겠지요마는 참으로 완벽을 이룬 것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NC의 한적한 생활을 부러워합니다. 조금도 불평이 없이 조금도 변함이 없는 그의 굳은 신앙 아래 살아가는 것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저는 그의 눈물을 못 보았읍니다. 그의 한숨이 저의 귀를 서늘하게 하지 못하였읍니다.

넷 째

사랑하시는 선생님. 사람의 눈물이 있다고 하면 이러한 경우에 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요? 만일 참으로 그 눈물이 눈물이라고 하면 이와 같은 눈물이 참눈물이겠지요.

오늘 저녁이외다. 저의 세 사람은 NC의 사는 시골에 왔읍니다. 정거장에서 10리를 걸어들어올 제 저희 세 사람은 참으로 공통된 의식 공퉁된 감정을 머릿속과 가슴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작은 별들은 옛날의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한 듯이 우리를 보고서 재롱부리어 깜빡거립니다. 다닥다닥한 좀생이는 간지러운 듯이 옹기종기합니다. 밤은 어둡고 길은 험하오나 저희을 이끌어 가는 그 무슨 세력의 선이 끝나는 저편에는 우정이라는 낙원이 있읍니다. 동지라는 그리운 <에덴>이 있읍니다.

말이 없고 소리가 없이 걸어가는 우리 세 사람은 다만 쓸쓸하고 적막하고 심심하고 무미담담한 NC의 집을 찾아가면서도 우리의 끓는 피와 타는 정열은 그 찾아가는 한적한 농촌을 싸고도는 가만한 공기를 꽃답고 찬란하게 그리어 놓으려 하였읍니다.

그러나 NC의 집에 다다랐을 때가 되었읍니다. 초가집 가장자리를 싸고도는 암혹 속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혼자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는 그때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읍니다. 우리는 그를 NC로 알았읍니다. 우리는 다만,

“NC!”

하고 반가운 두 손을 내밀었읍니다. 이것을 본 NC는 다만 아무 소리가 없이 파리한 두 손을 내어밀며,

“야, 어떻게들 이렇게 내려왔나?”

하며 힘없는 말소리에 처량한 기운이 도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읍니다. 우리 세 사람의 마음속에는 NC의 말소리를 들은 때에 그 무슨 애매한 의식을 깨달았읍니다. 인생의 애가, 마음 아프고 가슴 저린 그 무슨 노래를 듣는 뜻이 NC의 목소리에서는 푸른 기운이 돌았읍니다.

NC는 아무 말이 없이 다만 번갈아가며 우리 세 사람의 손을 단단히 쥐었읍니다. 그리 고는,

“나의 아내는 30분 전에 영원한 해결의 나라로 갔네.”

하였읍니다. NC의 눈에서는 여태까지 보지 못하던 눈물이 흘렀읍니다. NC의 가슴은 에이고 붉은 피는 식고 애탄의 결정인 뜨거운 눈물은 다만 차디찬 옷깃을 적시고 시름 없이 식어 버리더이다.

그 누가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는 별이 있읍니다. 땅에는 꽃이 있읍니다. 바다에는 진주가 있읍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뜨겁게 반짝이는 눈물이 있읍니다. 누가 이것을 보고 울지 않는 이가 있고 누가 이 꼴을 보고 눈물 홀리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우리 세 사람은 한참이나 선 채로 울었읍니다. 친한 친구, 사랑하는 동지자의 사랑하는 아내의 죽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새삼스럽게 우리 인생의 모든 비애가 심약한 우리들을 울리었읍니다.

다섯 째

오래 뵈옵지를 못하였읍니다. 1주일 동안이나 NC의 집에 있었읍니다. NC의 아내의 장례는 저희가 시골에 간 지 이틀 뒤였읍니다. 초가을은 으스스하였읍니다. 나뭇잎은 시체를 담은 상여 위에서 시들어 가는 듯이 춤을 추었읍니다. 상여군들의 목늘여 부르는 구슬픈 비가는 길고 느리게 공동묘지로 향하는 산고개를 넘어가더이다.

아! NC의 아내는 영원히 갔읍니다. 동리를 거치고 산모퉁이를 지나서 영원히 갔읍니다. 그러나 NC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고있을 그의 환영은 길고긴 세월을 두고 우리 NC를 얼마나 울릴까요? 회고(回顧)의 기억 속에서 시들스럽게 춤추는 그의 그림자는 몇 번이냐 NC의 두 눈을 감개무량하게 하겠읍니까? 새벽 서리 차디찬 밤, 초생달 갸웃스름한 저녁에 애타는 옛 기억, 마음 아픈 옛생각은 어느 곳 어느 자리에서 NC를 울릴까요?

제가 NC의 아내의 장례에 참석하였을 때에는 저도 또한 죽음과 생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하였읍니다. 죽음과 삶이라는 거이 무엇이 다른 것인가요? 살아 있다 함은 육체에 혈액이 돌고 모든 것을 의식하고 모든 것을 감각한다 함입니까? 죽음이라 하는 것 모든 관능이 육체의 썩어짐과 함께 그 활동을 잃어버린다 함입니까? 저는 무한한 비애를 아니 느낄 수가 없읍니다.

여섯 째

어저께 시골서 올라왔읍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일기가 청명하더이다. 가녋고 달콤한 공기가 저의 코 속을 통하여 될새없이 벌록거리는 폐 속으로 지나 들어갈 때 어저께까지 시든 듯한 저의 혈액은 다시 정해진 듯하더이다.

<낙망(落望)>이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낙망을 염려하는 저는 쉬지 않고 꽃다운 희망으로 저의 가슴을 채웠었읍니다. 그윽한 법열(法悅)속에서 브러시와 팔레트<調色板>를 움직일 때 저는 살았었으며 생의 진실을 맛보았을니다. 다만 제가 팔레트 판을 들고 캔버 스를 격(隔)하여 앉았을 때가 저의 참 생이었읍니다. <낙망>이라는 모토를 가진 그림을 그리면서도 무한한 장래와 끝없는 유열이 있었읍니다. 애인의 손을 잡고 그의 귀밑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자기의 흉중(胸中)을 하소연할 때와 같이 정결하고 달콤한 맛이 저의 전신을 물들였읍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정신이 청징하였습니다. 1 주일 가까이 자극이 적은 향토에서 논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한아한 정신으로 노곤한 안일 속에 오늘 하루를 지내었읍니다.

그러나 안일에도 권태가 있고 법열도 깨일때가 없지 않았읍니다. 육체의 권태는 정신까지 권태하게 하더이다. 또다시 법열까지 깨뜨려 버리더이다.

저는 기지개 한 번 하고 팔레트 판을 내던졌읍니다. 그리고 캔버스를 집어치우고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시계를 보았읍니다. 그 시계는 2시를 가리키고 있었읍니다. 저는 두 시간의 여가가 있음을 알았읍니다. 그래서 그 권태를 녹이기 위하여 SO의 집으로 가려 하였읍니다.

SO는 불쌍한 여성이외다. 한 다리가 없는 불구자이외다. 나이는 20세이외다. 그는 한쪽 없는 다리를 끌면서 추우나 더우나 학교에를 10여 년이나 다녔읍니다. 제가 중학교 4년급 다닐 때에 아침이면 같은 길모퉁이에서 만나는 것이 연(緣)이 되어 그와 사귀게 되어 지금까지 3년 동안을 지내 왔읍니다.

그에게는 나이 늙은 어머니 한 분밖에는 없읍니다. 아침이나 저녁에 학교에 가고 올 때에든 그는 반드시 자기 딸의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기다렸다 합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어 늦게 돌아오게 되면 그의 늙은 어머니는 반드시 학교 문 앞까지 와서 자기의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아, 선생님. 불구자의 모녀의 생활은 침으로 눈으로 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게 불쌍하고 참담합니다. 그의 물질적 생활은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합니다. 그는 남의 집 곁방에서 바느질품으로 그날그날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오늘도 그 불쌍한 불구자를 찾아왔읍니다. 문을 들어서며 기침을 두어 번 하였읍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전에는 반드시 반가와 맞아 주던 그 불구자의 여성, 오늘은 그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었읍니다.

문간에 들어선 저의 마음은 저녁때쯤 산골짜기를 헤매는 듯이 휘휘하였읍니다. 가련한 불구의 여성이 나를 맞아 주지 않는 것이 저의 마음을 울게 하였읍니다.

저는 또다시 기침을 하고 구멍이 뚫어지고 문풍지가 펄럭펄럭하는 방문을 열려 하였읍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문을 열지 못하였읍니다. 숭숭 뚫어진 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불구인 여성의 모녀의 울음 소리는 저의 감정을 연민의 정으로 물들였읍니다. 저는 다만 망연하게 아무 말 없이 서 있었습니다. 말없이 서 있는 저의 주위는 날연한 공기가 불구자의 어머니와 불구인 여성의 울음 소리를 싣고서 시들어지는 듯이 선무(旋舞)를 추었읍니다.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더니 나오는 사람은 그의 늙은 어머니였읍니다. 그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저를 바라보더니,

“오셨읍니까?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하며 돌아서서 코를 풀었읍니다. 저는 무엇이라 물어볼 말도 없거니와 또다시 말할 것도 없어 다만,

“네, SO는 있나요?”

하며 방안을 들여다보았읍니다. SO의 어머니는,

“네, 있어요.”

하고 저의 말에 대답을 하더니 다시 방안을 들여다보며,

“얘, 선생님 오셨다.”

하였읍니다.

방안에는 SO가 돌아앉아 여태껏 울고 있는지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다만 치마끈으로 눈물만 씻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제가 온 것을 보고서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어 돌아앉으면서,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발갛게 피가 오른 두 눈으로 저를 쳐다 보더니 다시 눈을 방바닥으로 향하였읍니다.저는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읍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읍니다. 저는 구두 를 끄르고 그 방안으로 들어갔읍니다. 방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마루끝에 놓여 있는 SO의 다리를 대신하여 주는 나무때기가 저의 발에 채여 덜컥하였읍니다. 저는 그때 근지럽고 누가 옆에서 ‘에비’ 하고 징그러운 것을 저의 목에다 던져 주는 듯이 진저리를 치는 듯이 방안으로 뛰어들어갔읍니다.

SO는,

“오늘은 시간이 없으세요?”

하며 다른 때와 다르게 유심히 저를 쳐다보았읍니다. 저는,

“이따가 4시에나 시간이 있으니까요. 잠깐 다녀가려고 왔어요.”

하고 자리를 정하고 앉았읍니다.

“댁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읍니까?”

하고 저는 그의 운 이유를 알아보려 하였으나 그는 다만,

“아녜요.”

하고 부끄러움을 띠며 아무 말이 없었읍니다.

저도 또다시 무엇이라 물어 볼 수가 없어서 다만 사면만 돌아다보며 아무 소리가 없었읍니다.

SO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읍니다. 그러다가 반쯤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님.”

하고 저를 부르더니 또다시 아무 말이 없이 한참이나 꼼지락꼼지락하는 손가락만 바라보다가 저의,

“네”

하는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또다시,

“선생님.”

하였읍니다. 저는,

“네”

하고 그의 구부린 머리의 까만 털만 바라보았읍니다.

“저는 병신입니다.”

하더니 여태까지 참았던 눈물이 또다시 떨어져 방바닥으로 시름없이 굴렀읍니다. 이 소리를 듣는 저도 같이 울고 싶었읍니다.

“저는 병신인데요.”

하고 힘있는 어조로 또다시 한 말을 거푸 하더니 그대로 방바닥에 엎드려져 울면서 목멘 소리로,

”병신인 저도 피가 있고 감정이 있읍니다. 뜨거운 눈물과 새빨간 정열이 있읍니다. 그러하나 불쌍한 저는 그 눈물을 가지고 혼자 우나 그 눈물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으며 그 정열을 혼자 태웠으나 그것을 받아 주는 이가 없어요.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서 더욱 불쌍한 구덩이에 틀어박으려 할 뿐이에요.”

하고 느껴 가며 울었읍니다.

“저를 A씨는 불쌍히 여겨 주십니까? 만약 참으로 불쌍히 여겨 주신다면 이 저의 마음까지 알아 주세요.”

하고 애소하듯이 저의 무릎에 엎드려 울었읍니다.

선생님, 누가 이 말을 듣고 울지 않는 자가 있으며 누가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저는 다만 SO를 끼어안고 한참이나 울었읍니다.

“SO씨 울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불쌍히 여깁니다. 참으로 동정합니다.”

“그러면 한 다리 없는 불구자인 저를 길이 길이 사랑하여 주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저는 다만,

“네?”

하고 아무 말이 없었읍니다. 저는 그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였읍니다. 저의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 것은 저의 나이 젊은 아내였읍니다. 자막대기 가지고 놀고 있던 어린아이였읍니다. SO는,

“네 A씨, 대답을 하여 주세요.”

하고 저를 애소하는 두 눈에 방울방을 눈물을 고이고서 쳐다보았읍니다.

아! 선생님. 이 SO를 저는 참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참으로 동정합니다. 그가 눈물을 흘릴 때에 나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가 속태울 때에는 나도 속을 태우려 합니다. 하늘 아래 지구 한 점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이 병신인 SO를 저는 힘껏 붙잡고 울더라도 시원치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그 찰나 사이에 벌써 사랑이라는 것이 간 것이 아닐까요. 그의 손을 잡고 따라서 같이 우는 것이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 불구의 여성은 저를 사랑하려 합니다마는 저는 여성의 사랑을 얻고서 도리어 가슴이 아팠읍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것을 물리치지 않을 수가 없었읍니다.

저는 불구인 여성의 뜨거운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 불행한 사람이외다.

선생님, 육체의 불구자는 그 불구를 동정한 저로 말미암아 사랑의 불구자가 될 줄이야 꿈에나 알았사오리까? 사랑은 곧은것이요 굽은 것이 아니니 저는 벌써 그 곧은 길 위에 선 사람이외다. 저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바가 아니었나이다. 그러면 저는 저의 아내에게로 향하는 꼿꼿한 사랑을 일부러 꺾어 이 불구의 여성을 사랑할 수 없었읍니다. 불구의 여성이므로 그를 동정하는 동시에 저의 사랑을 불구가 되게 할 수는 없었읍니다. 그러나 이 불구자의 눈물은 그 눈물이 저의 무릎 위에 떨어지는 때부터, 아니올시다. 그의 사랑이 저에게로 향할 때부터 벌써 그의 가슴에 어리어 있는 사랑을 불구자 되게 하였읍니다. 그의 한 다리가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은 한 쪽 없는 사랑이었읍니다.

저는 다만,

“SO씨, 울지 마세요. 저의 가슴은 SO씨의 눈물로 인하여 녹아 버리는 듯하외다. SO씨의 눈물 방울이 저의 마음 위에 한 방울씩 두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그 무슨 화살로 꿰뚫은 듯이 아프고 쓰립니다.”

할 뿐이었나이다.

“A씨, 저는 다만 A씨 한 분이 저를 참으로 사랑하여 주실 줄 알았었는데요.”

하는 SO는 그 무슨 대답을 기다리는 듯이 아무말이 없었읍니다. 저는 다만,

“그만 우세요. 자‥‥‥ 일어나세요.”

하고 가리지 못한 눈물을 씻을 뿐이었나이다.

저는 어제날까지 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는 자를 행복자라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오늘 이 불구자의 하소연을 들을 때에 비로소 저의 가슴이 아팠었읍니다. 한 개의 사랑을 두 군데로 짜르려 할 때 그 아픔을 알았었읍니다. 그 쓰림을 알았읍니다. 한 개인 사랑을 가진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여러 사랑을 받는 것의 그 가슴저리고 불행한 것을 알았읍니다.

아! 그러나 그 불구자는 더욱더욱 불구자가 되어 갈 터이지요. 낙망과 원한의 심연에서 하늘을 우러러 그의 불행을 부르짖을 터이지요? 그 부르짖음의 애처로운 소리는 저의 피를 얼마나 식힐까요? 그 소리는 영원토록 저의 귀밑에서 슬퍼 울 터이지요?

선생님! 저는 참으로 사랑하는 여성의 사랑을 매정하게 물리쳐야 할 것입니까? 영원도록 받아 주어야 할 것입니까? 불쌍한 자의 울음을 들어 주어야 할 것입니까? 불구자의 애소의 눈물을 저의 가슴에 파묻히도록 안아야 할 것입니까? 저는 다만 기로에 방황하며 약한 심정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일뿐이외다.

“네, 알았읍니다. 그러나 저는 SO씨의 말씀에 그렇게 속히 대답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면 언제 대답을 하여 주시겠습니까?”

“네 그것은 천천히 해 드리지요.”

하는 묻고 대답하는 말이 우리 두 사람 가운데에는 교환되었읍니다. SO는 의심하는 듯이,

“그러면 저를 절대로 사랑하여 주시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A씨의 가슴에는 저를 위하여서는 절대의 사랑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지요?”

하며 원망하듯이 저를 쳐다보았읍니다. 저는 무엇이라 대답할는지 몰랐읍니다. 참으로 저에게 절대의 사랑이 그때 있었읍니까? 참으로 없었읍니다. 절대의 동정과 연민은 있었 을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절대의 사랑은 없었읍니다. 타산이 있었으며 주저가 많았었읍니다. 어떠한 때에는 불구자라는 근지러운 대명사가 저를 진저리치게까지 하였읍니다. 아무 대답도 없는 저를 보던 SO는,

“저는 알았읍니다. 저는 영원토록 불구자이외다. 한 귀퉁이가 이지러진 사랑의 소유자이외다. 그뿐 아니라 저는‥‥‥”

하더니 단념과 원망이 엉킨 두 눈에는 어리 석은 눈물이 어느 틈에 말라 버리고 냉소와 저주가 맺힌 듯할 뿐이었읍니다. 이 소리를 듣는 저는 어쩐지 마음이 으스스 차고 몸이 달달 떨리는 듯하여 그의 눈물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단념과 원망과 냉소와 저주의 맺힌 듯한 표정을 볼 때 저는 또다시 그의 마음을 풀어뜨리어 힘없고 연하게 울리고 싶었읍니다. 저는,

“SO씨!”

하고 그의 손을 잡으며,

“저는 영원토록 SO씨를 잊지는 못하겠읍니다.”

하였읍니다. 그는,

“네 저를 잊지는 말아 주세요. 저도 눈을 감을 때까지는 A씨를 잊지는 못하겠지요.”

할 뿐이었읍니다.

일곱 째

SO의 집에서 나온 저는 학교를 향하여 갔었읍니다. 아까까지 청징하던 심신은 웬일인지 불구인 여성의 집을 다녀온 후부터는 흐릿하고 몽롱할 뿐만 아니라 침울하고 센티멘탈로 변하였읍니다.

저는 학교에를 갑니다. 한 시간의 도화(圖畵)를 가르치기 위함보다도 그 보수를 바라고 갑니다. 세상의 제일 불행한 범죄가 있다 하면 아마 이와 같은 자이겠지요. 뜻하지 않고 내 마음에 있지 않은 짓을 한 뭉치의 밥덩어리와 김치 몇 쪽의 충복할 식물을 위하여 알면서 행한다 하면 죄인줄 알면서 타인의 물건을 도적한 기한(飢寒)에 쪼들린 자와 얼마나 나을 것이 있겠읍니까? 남의 물건을 도적한 자의 양심이 떨린다 하면 그안큼 비례한 저의 양심도 떨리었을 것이며 박두하는 기한에 못 이기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적한 사람의 생을 갈구한 것을 동정할 것이라면 생명을 이어 얻기 위하여 자기의 양심을 속이는 이 A라는 화가도 또한 동정을 구할 수가 있을 것일는지요?

저는 학교 정문에 들어섰었읍니다. 그때 마침 M교주가 학교를 다녀가는 길인지 자동차에 오르려 할 때였읍니다. 그때에 그 간사한 이선생은 M교주의 팔을 부축하여 자동차 속으로 몰아넣었읍니다. 저는 이것을 보로 크게 웃었읍니다. 옆에서 저의 웃는 것을 보는 박선생은,

“왜 웃으시우?”

하며 눈을 흘기더니,

“그게 무슨 무례한 짓이요?”

하더이다. 저는 또다시 한 번 껄껄 웃으면서,

“박선생은 나의 웃는 의미를 모르시는구료.”

하고는,

“인형이외다. 인형예요. 두 팔 두 다리가 있고도 못 쓰는 인형이외다. 인형은 인형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마는 인형을 부축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보구서는 나는 아니 웃을 수가 없지요.”

하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교실 안으로 들어갔읍니다.

오늘은 그믐날이외다. 월급 타는 날이외다. 사무실엔 들어선 저는 다만 보이는 것이 회계의 동정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쓸 궁리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읍니다. 오늘은 어린애 모자를 하나 사다 주고 사랑하는 아내의 목도리를 하나 사다 주어야 하겠다 하였읍니다.

  • 25원이라는 월급을 기다리는 저의 마음은 웬일인지 씁쓸하고도 저의 몸이 불쌍해 보였읍니다. 그리고 공연히 심증이 났읍니다.

교실에 들어가 백묵을 들고서 칠판 위에 그림을 그릴 때에는 모든 학생들까지 밉살스 러울 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이 저의 운명을 이렇게 만들어 준 듯하기도 하였읍니다. 저는 마음에 없는 한 시간을 아니 지낼 수가 없었읍니다.

그날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해 오라고 한 날이었읍니다. 근 40명 학생중에 숙제를 해 오지 않은 학생이 다섯이 있었읍니다. 그 중에 그 중 나이 적고 옷을 헐벗은 학생은 제가,

“왜 숙제를 안 그려 왔소?”

할 때 그는 다만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 있더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자꾸자꾸 울고 섰을 뿐이었읍니다. 다른 애 학생은 여러 가지 핑계로써 선생인 저를 속이려 하였읍니다.

저는 그 눈물 흘리는 학생을 바라보고 또다시 다 뚫어진 양말을 볼 때 어쩐지 측은한 생각이 나서,

“왜 대답은 아니하고 울기만 하시오?”

하며 그의 어깨에 팔을 대니 선생인 저의 손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것이 더욱 그의 감정을 느즈러지게 하였던지 더욱더욱 느끼어 울 뿐이었읍니다. 그러다가는 복받치는 울음 소리와 함께,

“집에서 돈이 없다고 도화지를 사 주지 않아요.”

하였읍니다.

선생님! 제가 이 학생을 벌줄 자격이 있읍니까? 없읍니까? 저는 다만 창연한 두 눈으로 그 어린 학생을 바라보며,

“여보시오, 참마음만 있으면 그만이오. 나는 당신의 그림 그려 오지 않은 것을 책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참성의가 없었는가 하는 것을 책하려 함이었소. 당신의 눈물 한 방울은 오늘 그려 오지 못한 그 그림보다 몇 배의 가치가 있는 것이오.”

하였읍니다.

하교 후 사무실로 나왔읍니다. 회계는 나를 보더니 아주 은근한 듯이,

“A선생님, 이리로 좀 오십시오.”

하고 자기 곁으로 부르더니 봉투에 집어넣은 월급을 저의 손에 쥐어 주면서,

“담배값이나 하십시오.”

하였읍니다. 저는 그것을 받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읍니다. 그래서,

“네, 고맙습니다.”

하고 그대로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읍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느라고 회색의 저녁빛이 온 시가를 싸고도는데 저는 학교 문 밖에 나와서야 그 봉투를 다시 끄집어 내어 그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보았읍니다.

그 속에는 17원 50전, 17원 50전이 들어 있었읍니다.

저는 멈칫하고 섰었읍니다. 그리고,

(어째서 17원 50전만 되나?)

하고 한참이나 의아하여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문득 생각나는 것은 NC의 집에 갔었던 것이외다. 아내 잃은 친우를 찾아갔던 1주일 간의 노력의 대가는 학교에서는 제하여졌읍 니다.

아! 선생님, 저의 손에는 17원 50전이 있읍니다. 1개월 노력의 대가는 17원 50전이외 다. 불쌍한 젊은 화가의 양심을 부끄럽게 한 죄의 대가가 17원 50전이외다.

저는 하는 수 없었읍니다. 회색 봉투에 집어넣은 그 돈을 들고 SO의 집까지 무의식중에 왔읍니다. 하늘의 구름장 사이로는 가렸다 보였다 하는 작은 별들이 이 우스운 젊은 A를 비웃는 듯이 내다보고 있었읍니다. 회색의 감정이 공연히 저의 마음을 울분하고 원망스럽게 하였읍니다.

SO의 집에는 무엇하러 왔을까요?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하였읍니다. 문간에 와서야 내가 무엇하러 여기를 왔나 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저의 가슴에서 때없이 울고 있는 그 무슨 하모니는 저의 발을 SO의 집안으로 끌어들였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그전과 같이 서슴지 않고 그대로 들어갈 수가 없었읍니다. 조그마한 집, 조그마한 문으로 흘러나오는 무거운 공기는 급히 흐르는 시냇물같이 저의 가슴으로 몰려오는 듯하였읍니다.

저는 다만 문간에 서서 도적놈같이 문 안을 엿듣고 망설였읍니다.

선생님! 사랑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할 적에는 서슴지 않고 아무 불안도 없이 다니던 제가 오늘은 어찌하여 죄지은 자 모양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으며 가슴이 거북 하였을까요?

죄악이 아닌 사랑을 주려 하는데 저는 가슴이 떨림을 깨달았으며 잘못이 아닌 사랑을 준다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였습니다.

저는 10분 동안이나 서 있었읍니다. 그때에 또다시 그 불구자의 모녀의 울음 소리가 들렸읍니다. 그 울음 소리는 그전보다 더 저의 마음을 훑는 듯하고 쪼개는 듯하였읍니다. 그리고 모든 비애를 저의 가슴 위에 실어 놓는 듯이 무겁게 슬펐읍니다. 그러나 저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읍니다. 학교에서 받은 1개월 노력의 대가인 17원 50전이 울분하게 하였음이 공연히 저의 눈물까지 막아 버렸읍니다.

저는 한참이나 그 울음 소리를 들었읍니다. 그 울음에 섞이어 나오는 늙은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로 분명치 못하게 들리는 것은,

“SO야, 이제는 그만 한길 귀신이 되었구나.”

하는 살이 얼어붙는 듯한 불쌍한 소리였읍니다.

저는 그제야 그 눈물을 알았읍니다. 불구자의 모녀는 몸을 담을 집이 없읍니다. 그는 오늘에 몇 푼 안 되는 세전(貰錢)으로 말미암아 이 집에서 내어쫓깁니다.

창 밖에서 듣고 있는 이 A의 주머니에는 17원 50전이 있읍니다. 이 A는 그래도 한길에서 방황하지는 않겠지요? 저는 그 주머니의 17원 50전을 꺼내었읍니다. 그리고 연필로 봉투에 A라 썼읍니다. 저는 그 찰나간에 절대의 동정이 저의 가슴속에서 약동하였읍니다. 저의 피를 뜨겁고 힘있게 끓게 하였읍니다.

저는 그 돈을 문을 소리없이 열고 가만히 마루 위에 놓았읍니다. 그리고 절도와 같이 그 문을 떨리는 다리로 얼른 뛰어나왔읍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저의 집으로 향하여 갔읍니다.

집에서 아내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겠지요. 어린 자식은 아버지 오면 때때모자를 사준다고 몽실몽실한 손을 고개에 괴고 이 젊은 아버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 터이지요?

그러나 월급날인 오늘의 저의 주머니는 벌써 한 닢도 없는 털터리가 되었읍니다. 저의 들어가는 대문 소리를 듣고 다른 날보다 더 반가와 맞아 주는 젊은 아내에게 그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아무것도 없읍니다. 어린 자식의 기뻐 뛰는 마음을 도리어 풀이 죽게 할 뿐이 겠지요.

그러하오나 어두움 속으로 파고들어가듯이 암흑(暗黑)한 동리를 걸어가는 이 A의 마음은 웬일인지 만족한 기꺼움이 있었으며 싱싱한 생의 약동이 있었읍니다. 저는 또다시 MW사로 왔옵니다. 거기에는 DH와 WC가 웅크리고 않아서 무슨 책을 보고 있더니 저를 보고서,

“어떻게 되었나?”

하였읍니다. 그것은 저의 월급 말이었읍니다. 저는 모자를 벗고 구두를 끄르면서 기가 막힌 듯이 씁쓸히 웃으면서,

“흥, 나의 1개월 동안의 노력의 대가는 참으로 값있게 써 버리었네.”

하였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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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홈통에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었다가 쿵 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겨 가루가 켜켜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나온다.

솰 솰 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댓줄기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 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십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오리쯤 꿰뚫은 뒤에 이방원(芳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물레방아에서 들여다보면 동북간으로 큼직한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에 가장 부자요, 가장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름을 신치규(申治圭)라고 부른다. 이방원이라는 사람은 그 집의 막실(幕室) 살이를 하여가며 그의 땅을 경작하여 자기 아내와 두 사람이 그날 그날을 지내간다.

어떠한 가을밤 유난히 밝은 달이 고요한 이 촌을 한적하게 비칠 때 그 물레방앗간 옆에 어떠한 여자 하나와 어떤 남자 하나가 서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 여자는 방원의 아내로 지금 나이가 스물 두 살, 한참 정열에 타는 가슴으로 가장 행복스러울 나이의 젊은 여자요, 그 남자는 오십이 반이 넘어 인생으로서 살아올 길을 다 살고서 거의거의 쇠멸의 구렁이를 향하여 가는 늙은이다.

그의 말소리는 마치 그 여자를 달래는 것같이,

“얘, 내 말이 조금도 그를 것이 없지? 쇤네 할멈에게도 자세한 말을 들었을 터이지마는 너 생각해보아라. 네가 허락만 하면 무엇이든지 네가 하고 싶다는 것을 내가 전부 해줄 터이란 말야. 그까짓 방원이 녀석하고 네가 몇백 년 살아야 언제든지 막실 구석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허허, 사람이란 젊어서 호강해보지 못하면 평생 한번 하여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느니라! 대강 너의 말을 쇤네 할멈에게 듣기는 들었으나 그래도 너에게 한번 바로 대고 듣는 것만 못해서 이리로 만나자고 한 것이다. 너의 마음은 어떠냐? 허허, 내 앞이라고 조금도 어떻게 알지 말고 이야기 해봐, 응?”

이 늙은이는 두말할 것 없이 신치규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방원의 계집을 들여다보며 한 손으로 등을 두드린다.

새침한 얼굴이 파르족족하고 기다란 눈썹과 검푸른 두 눈 가장자리에 예쁜 입, 뾰르퉁한 뺨이며 콧날이 오뚝한데다가 후리후리한 키에 떡 벌어진 엉덩이가 아무리 보더라도 무섭게 이지적(理知的)인 동시에 또는 창부형(娼婦型)으로 생긴 것이다.

계집은 아무 말이 없이 서서 짐짓 부끄러운 태를 지으며 매혹적인 웃음을 생긋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짐승 같은 신치규의 만족을 사게 되었으며, 또한 마음을 충동시켰는지 희끗희끗한 수염이 거의 계집의 뺨에 닿도록 더 가까이 와서,

“응? 왜 대답이 없니? 부끄러워서 그러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하고 계집의 손을 잡으며,

“손도 이렇게 예쁜 줄은 이제까지 몰랐구나. 참 분결 같다. 이렇게 얌전히 생긴 애가 방원 같은 천한 놈의 계집이 되어 일평생을 그대로 썩는다는 것은 너무 가엾고 아깝지 않느냐? 얘.”

계집은 몸을 돌리려고 하지도 않고 영감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며 눈으로 땅만 내려다보고 섰다가 가까스로 입을 떼는 듯하더니,

“제 말야 모두 쇤네 할멈이 여쭈었지요. 저에게는 너무 분수에 과한 말씀이니까요.”

“온, 천만에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너도 아다시피 내가 너를 장난 삼아 그러는 것도 아니겠고 후사(後嗣)가 없어 그러는 것이니까 네가 내 아들이나 하나 낳주렴. 그러면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되지 않겠니? 자아 그러지 말고 오늘 허락을 하렴. 그러면 내일이라도 방원이란 놈을 내쫓고 너를 불러들일 터이니.”

“어떻게 내쫓을 수가 있에요?”

“허어, 그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무엇 있니. 내가 나가라는데 제가 나가지 않고 배길 줄 아니?”

“그렇지만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무엇, 저런 생각을 하니까 네가 이 모양으로 이때까지 있었지. 어떻단 말이냐?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구. 자아, 또 네 서방에게 들킬라, 어서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세요.”

“왜?”

“남이 보면 수상히 알게요.”

“무얼 나하고 가는데 수상히 알게 무어야… 어서 가자.”

계집은 천천히 두어 걸음 따라가다가,

“영감!”

하고 머춤하고 서 있다.

“왜 그러니?”

계집은 다시 말이 없이 서 있다가,

“아니에요.”

하고,

“먼저 들어가세요.”

하며 돌아선다. 영감이 간이 달아서 계집의 손을 잡으며,

“가자, 집으로 들어가자.”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는지 숨소리가 잦아진다. 계집은 손을 빼려 하며,

“점잖으신 어른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면서도 그의 몸짓에는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 보였다. 영감은 계집의 몸을 끌어안더니 방앗간 뒤로 돌아섰다. 계집은 영감 가슴에 안겨서 정욕이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보면서,

“영감.”

말 한 마디 하고 침 한번 삼키었다.

“영감이 거짓말은 안 하지요?”

“아니.”

그의 말은 떨리었다. 계집은 영감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방앗간 속을 가리켰다.

“저리로 들어가세요.”

영감과 계집은 방앗간에서 이삼십 분 후에 다시 나왔다.

사흘이 지난 뒤에 신치규는 방원이를 자기 집 사랑 마당 앞으로 불렀다.

“얘.”

방원은 상전이라 고개를 숙이고,

“예.”

공손하게 대답을 하였다.

“네가 그간 내 집에서 정성스럽게 일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마는…”

점잔과 주짜를 빼면서 신 치규는 말을 꺼내었다. 방원의 가슴은 이 '마는'이라는 말 뒤에 이어질 말을 미리 깨달은 듯이 온 전신의 피가 가슴으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다시 터럭이라는 터럭은 전부 거꾸로 일어서는 듯하였다.

“오늘부터는 우리 집에 사정이 있어 그러니 내 집에 있지 말고 다른 곳에 좋은 곳을 찾아 가보아라.”

아무 조건이 없다. 또한 이곳에서도 할말이 없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은 돈 가지고 사람을 사고 팔 수도 있는 것이다.

방원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자기 혼잣몸 같으면 어디 가서 어떻게 빌어먹더라도 살 수 있지마는 사랑하는 아내를 구해갈 길이 막연하다. 그는 고개를 굽히고, 허리를 굽히고, 나중에는 마음을 굽히어 사정도 하여보고 애걸도 하여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주인의 마음은 쇠나 돌보다도 더 굳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기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아내더러 안주인 마님께 사정을 좀 하여 얼마간이라도 더 있게 하여달라고 하여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방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도리어,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요. 이제부터는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릴 터이요?”

“너는 그렇게도 먹고 살 수 없을까봐 겁이 나니?”

“겁이 나지 않고. 생각을 해보구려. 인제는 꼼짝할 수 없이 죽지 않았소?”

“죽어?”

“그럼 임자가 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올 때에 무어라고 하였소. 어떻게 해서든지 너 하나야 먹여 살리지 못하겠느냐고 하였지요?”

“그래.”

“그래, 얼마나 나를 잘 먹여 살리고 나를 호강시켰소. 이때까지 이때나 되도록 끌구 돌아다닌다는 것이 남의 집 행랑이었지요.”

“얘, 그것을 내가 모르고 하는 말이냐?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냐? 차차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이든지 생기겠지. 설마 요대로 늙어죽기야 하겠니?”

“듣기 싫소! 뿔 떨어지면 구워먹지 어느 천년에.”

방원이는 가뜩이나 내어쫓기고 화가 나는데 계집까지 그리하니까 속에서 열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 육시를 하고도 남을 년! 왜 남의 마음을 글컹거리니?”

“왜 사람에게 욕을 해!”

“이년아, 욕 좀 하면 어떠냐?”

“왜 욕을 해!”

계집이 얼굴이 노래지며 대든다.

“이년이 발악인가?”

“누가 발악야. 계집년 하나 건사 못하는 위인이 계집보고 욕만 하고 한 게 무어야? 그래 은가락지 은비녀나 한 벌 사주어보았어? 내가 임자 하자고 하는 대로 하지 않은 것은 없지!”

“이년아! 은가락지 은비녀가 그렇게 갖고 싶으냐? 이 더러운 년아.”

“무엇이 더러워? 너는 얼마나 정한 놈이냐!”

계집의 입 속에서는 놈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년 보게! 누구더러 놈이래.”

하고 손길이 계집의 낭자를 후려잡더니 그대로 집어들고 두어 번 주먹으로 등줄기를 우리었다.

“이 주릿대를 안길 년!”

발길이 엉덩이를 두어 번 지르니까 계집은 그대로 거꾸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풀어헤뜨린 머리가 치렁치렁 끌리고 씰룩한 눈에는 독기가 섞이었다.

“왜 사람을 치니? 이놈! 죽여라 죽여, 어디 죽여보아라, 이놈 나 죽고 너 죽자!”

하고 달려드는 계집을 후려서 거꾸러뜨리고서,

“이년이 죽으려고 기를 쓰나!”

방원이가 계집을 치는 것은 그것이 주먹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농담이다. 그는 주먹이나 발길이 계집의 몸에 닿을 때 거기에 얻어맞는 계집의 살이 아픈 것보다 더 찌르르하게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아픔을 방원은 깨닫는 것이다. 홧김에 계집을 치는 것이 실상은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이빨로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때리는 그에게는 몹시 애처로움이 있고 불쌍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화풀이를 받아주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계집밖에는 없었다. 제일 만만하다는 것보다도 가장 마음놓고 화풀이할 수 있음이다. 싸움한 뒤, 하루가 못되어 두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고 서로 꼭 끼고 잘 때에는 그렇게 고맙고 그렇게 감격이 일어나는 위안이 또다시 없음이다. 계집을 치고 화풀이를 하고 난 뒤에 다시 가슴을 에는 듯한 후회와 더 뜨거운 포옹으로 위로를 받을 그때에는 두 사람 아니라 방원에게는 그만큼 힘있고 뜨거운 믿음이 또다시 없는 까닭이다.

계집은 일부러 소리를 높여 꺼이꺼이 운다.

온 마을 사람이 거의 귀를 기울였으나,

“응, 또 사랑싸움을 하는군!”

하고 도리어 그 싸움을 부러워하였다. 옆집 젊은것이 와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들여다보며,

“인제 고만 두라구.”

하며, 말리는 시늉을 한다. 동네 아이들만 마당 앞에 죽 늘어서서 눈들이 뚱그래서 구경을 한다

그날 저녁에 방원이는 술이 얼근하여 돌아왔다. 아까 계집을 차던 마음은 어느덧 풀어지고 술로 흥분된 마음에 그는 계집의 품이 몹시 그리워져서 자기 아내에게 사과를 할 마음까지 생기었다. 본시 사람이 좋고 마음이 약하고 다정한 그는 무식하게 자라난 까닭에 무지한 짓을 하기는 하나 그것은 결코 그의 성격을 말하는 무지함이 아니다.

그는 비척거리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거슴츠레하게 풀린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혼잣소리로,

“빌어먹을 놈! 나가라면 나가지 무서운가? 제 집 아니면 살 곳이 없는 줄 아는 게로군! 흥, 되지않게 다 무엇이냐? 돈만 있으면 제일이냐? 이놈, 네가 그러다가는 이 주먹 맛을 언제든지 볼라. 그대로 곱게 뒈질 줄 아니?”

하고, 개천 하나를 건너뛴 후에,

“돈! 돈이 무엇이냐?”

한참 생각하다가,

“에후.”

한숨을 쉬고 나서,

“돈이 사람을 죽이는구나! 돈! 돈! 흥,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니?”

또 징검다리를 비척비척 하고 건넌 뒤에,

“고 배라먹을 년이 왜 고렇게 포달을 부려서 장부의 마음을 긁어놓아!”

그의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맛이 있었다. 그는 자기 계집을 생각하면 모든 불평이 스러지는 듯이, 숙였던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면서,

“허어, 저도 고생은 고생이지.”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내가 너무해, 너무 그럴 게 아닌데.”

그는 자기 집에 와서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면서,

“얘! 자니! 자?”

그러나 대답이 없고 캄캄하다.

“이년이 어디를 갔어!”

그는 문짝을 깨어지라 하고 닫친 후에 다시 길거리로 나와 그 옆집으로 가서,

“여보 아주머니! 우리 집 색시 어디 갔는지 보았소!”

밥들을 먹는 옆엣 집 내외는,

“어디서 또 취했소 그려! 애 어머니가 아까 머리 단장을 하더니 저 방아께로 갑디다.”

“방아께로?”

“네.”

“빌어먹을 년! 방아께로는 무얼 먹으러 갔누!”

다시 혼자 방아를 향하여 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그는 방앗간을 막 뒤로 돌아서자 신치규와 자기 아내가 방앗간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

그는 너무 뜻밖의 일이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한참이나 멀거니 서서 보기만 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쌍심지가 거꾸로 섰다. 열이 올라와서 마치 주홍을 칠한 듯이 그의 눈은 붉어지고 번개 같은 광채가 번뜩거리었다.

그는 한참이나 사지를 떨었다. 두 이가 서로 맞쳐서 달그락달그락 하여졌다. 그의 주먹은 부서질 것같이 단단히 쥐어졌다.

계집과 신치규는 방원이 와 선 것을 보고서 처음에는 조금 간담이 서늘하여졌으나 다시 태연하게 내려 앉혔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매 할 대로 하라는 뜻이다.

방원은 달려들어서 계집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부르르 떨었다.

“나는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계집은,

“무얼 이럴 줄을 몰라?”

하며, 파란 눈을 흘겨보더니,

“나중에는 별꼴을 다 보겠네. 으례히 그럴 줄을 인제 알았나? 놔요! 왜 남의 팔을 잡고 요 모양야. 오늘부터는 나를 당신이 그리 함부로 하지는 못해요! 더러운 녀석 같으니! 계집이 싫다고 그러면 국으로 물러갈 일이지 이게 무슨 사내답지 못한 일야! 놔요!”

팔을 뿌리쳤으나 분노가 전신에 가득찬 그는 그렇게 쉽게 손을 놓지 않았다.

“얘! 네가 이것이 정말이냐?”

“정말 아니구 비싼 밥 먹고 거짓말 할까?”

“네가 참으로 환장을 하였구나!”

“아니 누구더러 환장을 했대. 온 기가 막혀 죽겠지! 놔요! 놔! 왜 추근추근하게 이 모양야? 놔.”

하고서 힘껏 뿌리치는 바람에 계집의 손이 쑥 빠지었다. 계집은 손목을 주무르면서 암상맞게 돌아섰다.

이때까지 이 꼴을 멀찍이 서서 보고 있던 신치규는 두어 발자국 나서더니 기침 한번을 서투르게 하고서,

“얘! 네가 술이 취하였으면 일찍 들어가 자든지 할 것이지 웬 짓이냐? 네 눈깔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단 말이냐? 너희 년 놈이 싸우는 것은 너희 년 놈이 어디든지 가서 할 일이지 여기 누가 있는지 없는지 눈깔에 보이는 것이 없어?……”

“엣, 괘씸한 놈!”

눈깔을 부라리었다. 방원은 한참이나 쳐다보고서 말이 없었다. 생각대로 하면 한 주먹에 때려누일 것이지마는 그래도 그의 머릿속에는 아까까지의 상전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번갯불같이 그 관념이 그의 입과 팔을 얽어놓았다.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남을 섬겨보기만 한 그의 마음은 상전이라면 모두 두려워하는 성질을 깊이깊이 뿌리박아놓았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신치규가 자기의 상전이 아니요, 자기가 신치규의 종도 아니다. 다만 똑같은 사람으로 마주섰을 뿐이다. 아니다, 지금부터는 신치규도 방원의 원수였다. 그의 간을 씹어먹어도 오히려 나머지 한이 있는 원수다.

신치규는 똑바로 쳐다보는 방원을 마주 쳐다보며,

“똑바루 보면 어쩔 터이냐? 온 세상이 망하려니까 별 해괴한 일이 다 많거든. 어째 이놈아!”

“이놈아?”

방원은 한 걸음 들어섰다. 나무같이 힘센 다리가 성큼 하고 나설 때 신치규는 머리끝이 으쓱 하였다. 쇠몽둥이 같은 두 주먹이 쑥 앞으로 닥칠 때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네 입에서 이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이 사지를 찢어발겨도 오히려 시원치 못할 놈아! 네가 내 계집을 뺏으려고 오늘 날더러 나가라고 그랬지?”

“어허 이거 그놈이 눈깔이 삐었군. 얘,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 너는 네 서방하고 나중 들어오너라!”

신치규는 형세가 위험하니까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고 돌아서서 들어가려 하니까 방원은 돌아서는 신치규의 멱살을 잔뜩 쥐어 한 팔로 바싹 치켜들고,

“이놈 어디를 가? 네가 이때까지 맛을 몰랐구나?”

하며, 한번 집어쳐 땅바닥에다가 태질을 한 뒤에 그대로 타고 앉아서 목줄띠를 누르니까, 마치 뱀이 개구리 잡아먹을 적 모양으로 깩깩 소리가 나며 말 한마디도 못한다.

“이놈 너 죽고 나 죽으면 고만 아니냐?”

하고 방원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들이댄다. 나중에는 주먹이 부족하여 옆에 있는 모루돌멩이를 집어서 죽어라 하고 내리친다. 그의 팔, 그의 몸에는 본능적으로 숨어 있는 잔인성(殘忍性)이 조금도 남지 않고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눈은 마치 펄떡펄떡 뛰는 미끼를 가로차고 앉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이 뜨거운 피를 보고야 만족하다는 듯이 무섭게 번쩍거렸다. 그에게는 초자연(超自然)의 무서운 힘이 그의 팔과 다리에 올라왔다.

이 꼴을 보는 계집은 무서웠다. 끔찍끔찍한 일이 목전에 생길 것이다. 그의 맥이 풀린 다리는 마음대로 놓여지지 아니하였다.

“아! 사람 살류! 사람 살류!”

적적한 밤중에 쓸쓸한 마을에는 처참한 여자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울리었다. 이 소리를 들은 방원은 더욱 힘을 주어서 눈을 딱 감고 죽어라 내리 짓찧었다. 뼈가 돌에 맞는 소리가 살이 을크러지는 소리와 함께 퍽퍽 하였다. 피 묻은 돌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갈갈이 찢긴 옷에는 살점이 묻었다.

동네편 쪽에서 수군수군 하더니 구두 소리가 나며 칼 소리가 덜거덕거리었다. 방원의 머리에는 번갯불같이 무엇이 보이었다. 그는 손에 주먹을 쥔 채 잠깐 정신을 차려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순검……”

그는 신치규의 배를 타고 앉아서 순검의 구두 소리를 듣자 비로소 자기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달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일어났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벌벌 떠는 계집에게로 갔다.

“얘, 가자! 도망가자! 너하고 나하고 같이 가자! 자! 어서, 어서!”

계집은 자기에게 또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겁을 내어 도망을 하려 한다. 방원은 계집을 따라가며,

“얘! 얘! 네가 이렇게도 나를 몰라주니?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를 못하니? 자! 어서, 도망가자, 어서 어서, 뒤에서 순검이 쫓아온다.”

계집은 그대로 서서 종종걸음을 치며,

“싫소! 임자나 가구려, 나는 싫어요, 싫어.”

“가자! 응! 가!”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계집의 팔을 붙잡고 끌었다. 그때 누구인지 그의 두 팔을 마치 형틀에 매다는 것같이 꽉 뒤로 끼어안는 사람이 있었다.

“이놈아! 어디를 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온 전신에 맥이 풀리어 그대로 뒤로 자빠지려 할 때 어느덧 널판 같은 주먹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정신 차려.”

“녜.”

그는 무의식하게 고개가 숙여지고 말소리가 공손하여졌다.

땅바닥에서는 신치규가 꿈지럭거리며 이리저리 뒹군다. 청승스러운 비명(悲鳴)이 들린다.

방원은 포승 지인 채, 계집은 그대로, 주재소로 끌려가고 신치규는 머슴들이 업어들였다.

석 달이 지났다. 상해죄(傷害罪)로 감옥에서 복역을 하던 방원은 만기가 되어 출옥을 하였다. 그러나 신치규는 아무 일 없이 자기 집에서 치료하고 방원의 계집을 데려다 산다. 신치규는 온몸이 나은 뒤에 홀로 생각하였다.

- 죽는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하고, 얼굴에 흠이 진 곳을 만져보며,

- 오히려 그놈이 그렇게 한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지, 얼굴이 아프기는 좀 하였으나! 허어.

- 어떻게 그놈을 떼어버릴까 하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을 하던 차에 잘 되었지. 그놈 한 십 년 감옥에서 콩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방원은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나가기만 하면 년 놈을 죽여버리고 제가 죽든지 요정을 내리라 하였다.

집에서 내어쫓기고 계집까지 빼앗기고, 그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었다. 그것이 모두 자기가 돈 없는 탓인 것을 생각하매 더욱 분한 생각이 났다.

- 에 더러운 년.

그는 홍바지에 쇠사슬을 차고서 일을 할 때에도 가끔 침을 땅에다 뱉으면서 혼자 중얼거리었다.

- 사람이 이러고서야 살아서 무엇하나. 멀쩡한 놈이 계집 빼앗기고 생으로 콩밥까지 먹으니…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감옥소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내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목숨을 잃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손으로 내 목을 찔러죽든지, 무슨 요정이 날 것을 생각하고, 다시 온몸에 힘을 주고 쓸쓸한 웃음을 웃었다.

그는 이백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계집이 사는 촌에를 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그를 보고 피해갔다.

마치 문둥병자나 마찬가지 대우를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부터는 더우기 세상이 차디차졌다. 자기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더 무정하여졌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밤이 될 때까지 그 근처 산 속으로 돌아다녔다. 그래서 깊은 밤에 촌으로 내려왔다. 그는 그 방앗간을 다시 지나갔다. 석 달 전 생각이 났다. 자기가 여기서 잡혀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한참이나 거기 서서 그때 일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친 후에 다시 그전 집을 찾아갔다.

날이 몹시 추워지고 눈이 쌓였다. 옷은 입은 것이 가을에 입고 감옥에 들어갔던 그것이므로 살을 에이는 듯한 것이로되 그는 분한 생각과 흥분된 마음에 그것도 몰랐다.

- 년 놈을 모두 처치를 해버려?

혼자 속으로 궁리를 하다가,

- 그렇지, 그까짓 것들은 살려두어 쓸데없는 인생들이야.

하면서 옆구리에 지른 기름한 단도를 다시 만져보았다. 그는 감격스런 마음으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는 신치규의 집 울을 넘어 들어갔다. 그의 발은 전에 다닐 적같이 익숙하였다. 그는 사랑을 엿보고 다시 뒤로 돌아서 건넌방 창 밑에 와 섰었다.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손에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뒤 창문을 달각달각 흔들었다.

“그 뉘?”

하고 계집의 머리가 쑥 나오며 문이 열리었다. 그는 얼른 비켜섰다. 문은 다시 닫혀지고 계집은 들어갔다.

방원의 마음은 이상하게 동요가 되었다. 예쁜 계집의 목소리가 오래간만에 귀에 들릴 때, 마치 자기가 감옥에서 꿈을 꿀 적 모양으로 요염하고도 황홀하게 그의 마음을 꾀는 것 같았다. 그는 꿈속에서 다시 만난 것 같고 오래간만에 그를 만나보매 모든 결심은 얼음같이 녹는 듯하였다. 그래도 계집이 설마 나를 영영 잊어버리랴 하고 옛날의 정리를 생각할 때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랴는 생각이 났다.

아무리 자기를 감옥에까지 가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감히 칼을 들어 죽이려는 용기가 단번에 나지 않아서 주저하기 시작했다.

- 아니다, 다시 한번만 물어보자!

그는 들었던 칼을 다시 짚고 생각하였다.

-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반신반의하였다.

- 그렇다. 한번만 다시 물어보고 죽이든 살리든 하자!

그는 다시 문을 달각달각 하였다. 계집은 이번에 다시 문을 열고 사면을 둘러보더니 헌 짚신짝을 신고 나왔다.

“뉘요?”

그는 방원이 서 있는 집 모퉁이를 돌아서려 할 제,

“내다!”

하고, 입을 틀어막고 칼을 가슴에 대었다.

“떠들면 죽어!”

방원은 계집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고 결박을 한 후 둘쳐업고서 번개같이 달음질하였다. 그는 어느 결에 계집을 업어다가 물레방아 앞에 내려놓은 후 결박을 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를 모르겠니?”

캄캄한 그믐밤에 얼굴을 바짝 계집의 코앞에 들이대었다. 계집은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아!”

소리를 지르더니 뒤로 물러섰다.

“조금도 놀랄 것이 없다. 오늘 네가 내 말을 들으면 살려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야.”

하고, 시퍼런 칼을 들이대었다. 계집은 다시 태연하게,

“말요? 임자의 말을 들으렬 것 같으면 벌써 들었지요, 이때까지 있겠소? 임자도 남의 마음을 알 거요. 임자와 나와 이년 전에 이곳으로 도망해올 적에도 전 남편이 나를 죽이겠다고 허리를 찔러 그 흠이 있는 것을 날마다 밤에 당신이 어루만지었지요? 내가 그까짓 칼쯤을 무서워서 나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단 말이요? 힝, 이게 무슨 비겁한 짓이요. 사내자식이, 자! 찌르려거든 찔러보아요. 자, 자.”

계집은 두 가슴을 벌리고 대들었다. 방원은 너무 계집의 태도가 대담하므로 들었던 칼이 도리어 뒤로 움찔할 만큼 기가 막혔다. 그는 무의식하게,

“정말이냐?”

하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섰다.

“정말이 아니고? 내가 비록 여자이지마는 당신같이 겁쟁이는 아니라오! 이것이 도무지 무엇이요?”

계집은 그래도 두려웠던지 방원의 손에 든 칼을 뿌리쳐 땅에 떨어뜨리었다.

이 칼이 땅에 떨어지자 방원은 이때까지 용사와 같이 보이던 계집이 몹시 비겁스럽고 더러워 보이어 다시 칼을 집어들고 덤비었다.

“에잇! 간사한 년! 어쩔 터이냐? 나하고 당장에 멀리 가지 않을 터이냐? 자아 가자!”

그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간청도 하여보았다.

“자아, 어서 옛날과 같이 나하고 멀리멀리 도망을 가자! 나는 참으로 나의 칼로 너를 죽일 수는 없다!”

계집의 눈에는 독이 올라왔다. 광채가 어두운 밤에 번개같이 번쩍거리며,

“싫어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가기는 싫어요. 이제 나는 고만 그렇게 구차하고 천한 생활을 다시 하기는 싫어요. 고만 물렸어요.”

“너의 입으로 정말 그런 말이 나오느냐? 너는 나를 우리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한 후에 또 나중에는 세상에서 지옥이라고 하는 감옥소에까지 가게 하였지! 그러고도 나의 맨 마지막 원을 들어주지 않을 터이냐?”

“나는 언제든지 당신 손에 죽을 것까지도 알고 있소! 자!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언제든지 죽기는 일반, 이렇게 된 이상 나를 죽이시오.”

“정말이냐? 정말이야?”

“정말요!”

계집은 결심한 뜻을 나타내었다. 방원의 손은 떨리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꼭 감고,

“에, 여우 같은 년!”

하고 칼끝을 계집의 옆구리를 향하고 힘껏 내밀었다. 계집은 이를 악물고,

“사람 죽인다!”

소리 한번에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칼 자루를 든 손이 피가 몰리는 바람에 우루루 떨리더니 피가 새어나왔다. 방원은 그 칼을 빼어들더니 계집 위에 거꾸러져서 가슴을 찌르고 절명하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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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 살이 될락말락 한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이라 부르지마는 그때는 연화봉(蓮花峰)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南大門)에서 바로 내려다보며는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 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貧民窟)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 딴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목밭을 하고 또는 채소를 심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을 하여갔었다.

여기에 그중 큰 과목밭을 갖고 그중 여유 있는 생활을 하여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으나 동네사람들이 부르기를 오 생원(吳生員)이라고 불렀다.

얼굴이 동탕하고 목소리가 마치 여름에 버드나무에 앉아서 길게 목 늘여 우는 매미 소리같이 저르렁저르렁 하였다.

그는 몹시 부지런한 중년 늙은이로 아침이면 새벽 일찌기 일어나서 앞뒤로 뒷짐을 지고 돌아다니며 집안 일을 보살피는데 그 동네에는 그가 마치 시계와 같아서 그가 일어나는 때가 동네사람이 일어나는 때였다.

만일 그가 아침에 돌아다니며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동네사람들이 이상하여 그의 집으로 가보면 그는 반드시 몸이 불편하여 누웠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때는 일년 삼백 육십 일에 한번 있기가 어려운 일이요. 이태나 삼 년에 한번 있거나 말거나 하였다.

그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는 얼마 되지 아니하나 그가 언제든지 감투를 쓰고 다니므로 동네사람들은 양반이라고 불렀고, 또 그 사람도 동네사람에게 그리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섣달이면 북어쾌 김톳을 동네사람에게 나눠주며 농사 때에 쓰는 연장도 넉넉히 장만한 후 아무 때나 동네사람들이 쓰게 하므로 그 동네에서는 가장 인심 후하고 존경을 받는 집인 동시에 세력 있는 집이다.

그 집에는 삼룡(三龍)이라는 벙어리 하인 하나이 있으니 키가 본시 크지 못하여 땅딸보로 되었고 고개가 빼지 못하여 몸뚱이에 대강이를 갖다가 붙인 것 같다. 거기다가 얼굴이 몹시 얽고 입이 크다. 머리는 전에 새 꼬랑지 같은 것을 주인의 명령으로 깎기는 깎았으나 불밤송이 모양으로 언제든지 푸 하고 일어섰다.

그래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옴두꺼비가 서서 다니는 것같이 숨차 보이고 더디어 보인다. 동네사람들이 부르기를 삼룡이라고 부르는 법이 없고 언제든지 '벙어리' '벙어리'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앵모' '앵모' 한다. 그렇지만 삼룡이는 그 소리를 알지 못한다.

그도 이 집 주인이 이리로 이사를 올 때에 데리고 왔으니 진실하고 충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세차다. 눈치로만 지내가는 벙어리지마는 듣는 사람보다 슬기로울 적이 있고 평생 조심성이 있어서 결코 실수한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을 쓸고 소와 돼지의 여물을 먹이며 여름이면 밭에 풀을 뽑고 나무를 실어들이고 장작을 패며 겨울이면 눈을 쓸고 장 심부름이며 진 일 마른 일 할 것 없이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럴수록 이 집 주인은 벙어리를 위해주며 사랑한다. 혹시 몸이 불편한 기색이 있으면 쉬게 하고. 먹고 싶어하는 듯한 것은 먹이고 입을 때 입히고 잘 때 재운다.

그런데 이 집에는 삼대독자로 내려오는 그 집 아들이 있다. 나이는 열 일곱 살이나 아직 열 네 살도 되어 보이지 않고 너무 귀엽게 기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버릇이 없고 어리광을 부리며 사람에게나 짐승에게 잔인포악한 짓을 많이 한다.

동네 사람들은,

"후레자식, 아비 속상하게 할 자식, 저런 자식은 없는 것만 못해."

하고. 욕들을 한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잘못할 때마다 그의 영감을 보고,

"그 자식을 좀 때려주구려. 왜 그런 것을 보고 가만두."

하고 자기가 대신 때려주려고 나서면,

"아뇨, 아직 철이 없어 그렇지, 저도 지각이 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 아뇨."

하고 너그럽게 타이른다. 그러면 마누라는 왜가리처럼 소리를 지르며,

"철이 없긴 지금 나이가 몇이요? 낼 모레면 스무 살이 되는데, 또 며칠 아니면 장가를 들어서 자식까지 날 것이 그래가지고 무엇을 한단 말이요?"

하고. 들이대며,

"자식은 꼭 아버지가 버려놓았습니다. 자식 귀여운 것만 알았지 버릇 가르칠 줄은 모르니까…"

이렇게 싸움이 시작만 하려 하면 영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그 아들은 더구나 벙어리를 사람으로 알지도 않는다. 말 못하는 벙어리라고 오고가며 주먹으로 허구리를 지르기도 하고 발길로 엉덩이도 찬다.

그러면 그 벙어리는 어린것이 철없이 그러는 것이 도리어 귀엽기도 하고 또는 그 힘없는 팔과 힘없는 다리로 자기의 무쇠 같은 몸을 건드리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앙징하기도 하여 돌아서서 방그레 웃으면서 툭툭 털고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버린다.

어떤 때는 낮잠 자는 벙어리 입에다가 똥을 먹인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자는 벙어리 두 팔 두 다리를 살며시 동여매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화승불을 붙여놓아 질겁을 하고 일어나다가 발버둥질을 하고 죽으려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러할 때마다 벙어리의 가슴에는 비분한 마음이 꽉 들어찼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아들을 원망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병신인 것을 원망하였으며 주인의 아들을 저주한다는 것보다 이 세상을 저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의 눈물은 나오려 할 때 아주 말라붙어버린 샘물과 같이 나오려하나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그는 주인의 집을 버릴 줄 모르는 개 모양으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밖에 없고 자기가 믿을 것도 여기 있는 사람들밖에 없을 줄 알았다.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는 것이 자기의 운명인 줄밖에 알지 못하였다.

자기의 주인 아들이 때리고 지르고 꼬집어 뜯고 모든 방법으로 학대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으례히 있을 줄밖에 알지 못하였다. 아픈 것도 그 아픈 것이 으례히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요. 쓰린 것도 자기가 받지 않아서는 안될 것으로 알았다. 그는 이 마땅히 자기가 받아야 할 것을 어떻게 해야 면할까 하는 생각을 한번도 하여본 일이 없었다.

그가 이 집에서 떠나가려거나 또는 그의 생활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는 언제든지 그 주인아들이 자기를 학대하고 또는 자기를 못 살게 굴 때 그는 자기의 주먹과 또는 자기의 힘을 생각하여보았다.

주인 아들이 자기를 때릴 때 그는 주인 아들 하나쯤은 넉넉히 제지할 힘이 있는 것을 알았다.

어떠한 때는 아픔과 쓰림이 자기의 몸으로 스미어들 때면 그의 주먹은 떨리면서 어린 주인의 몸을 치려하다가는 그는 그것을 무서운 고통과 함께 꽉 참았다.

그는 속으로,

"…아니다. 그는 나의 주인의 아들이다. 그는 나의 어린 주인이다."

하고, 꾹 참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얼핏 잊어버리었다. 그러다가도 동네집 아이들과 혹시 장난을 하다가 주인아들이 울고 들어올 때에는 그는 황소같이 날뛰면서 주인을 위하여 싸웠다. 그래서 동네에서도 어린애들이나 장난꾼들이 벙어리를 무서워하여 감히 덤비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주인아들도 위급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벙어리를 찾았다. 벙어리는 얻어맞으면서도 기어드는 충견 모양으로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싫어하지 않고 힘을 다하였다.

벙어리가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그는 물론 이성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동네의 처녀들이 저를 '벙어리, 벙어리' 하며 괴상한 손짓과 몸짓으로 놀려먹음을 받을 적에 분하고 골나는 중에도 느긋한 즐거움을 느끼어본 일은 있었으나 그가 결코 사랑으로써 어떠한 여자를 대해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정욕을 가진 사람인 벙어리도 그의 피가 차디찰 리는 없었다. 혹 그의 피는 더욱 뜨거웠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뜨겁다 뜨겁다 못하여 엉기어버린 엿과 같을지도 알 수 없었다. 만일 그에게 볕을 주거나 다시 뜨거운 열을 준다면 그의 피는 다시 녹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깜박깜박하는 기름 등잔 아래에서 밤이 깊도록 짚세기를 삼을 때이면 남모르는 한숨을 아니 쉬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는 그것을 곧 억제할 수 있을 만치 정욕에 대하여 벌써부터 단념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언제 폭발이 될는지 알지 못하는 휴화산(休火山) 모양으로 그의 가슴속에는 충분한 정열을 깊이 감추어놓았으나 그것이 아직 폭발될 시기가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폭발이 되려고 무섭게 격동함을 벙어리 자신도 느끼지 않는 바는 아니지마는 그는 그것을 폭발시킬 조건을 얻기 어려웠으며 또는 자기가 여태까지 능동적으로 그것을 나타낼 수가 없을 만치 외계의 압축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인한 이지(理智)가 너무 그에게 자제력(自制力)을 강대하게 하여주는 동시에 또한 너무 그것을 단념만 하게 하여주었다.

속으로, 나는 '벙어리'다, 자기가 생각할 때 그는 몹시 원통함을 느끼는 동시에 나는 말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자유와 똑같은 권리가 없는 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 언제든지 단념 안하랴 단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단념이 쌓이고 쌓이어 지금에는 다만 한 개의 기계와 같이 이 집에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천직으로 알고 있을 뿐이요. 다시는 자기가 살아갈 세상이 없는 것 같이 밖에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해 가을이다. 주인의 아들이 장가를 들었다. 색시는 신랑보다 두 살 위인 열 아홉 살이다. 주인이 본시 자기가 언제든지 문벌이 얕은 것을 한탄하여 신부를 구할 때에 첫째 조건이 문벌이 높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문벌 있는 집에서는 그리 쉽게 색시를 내놀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는 수없이 그 어떠한 영락한 양반의 딸을 돈을 주고 사오다시피 하였으니 무남독녀의 딸을 둔 남촌 어떤 과부를 꿀을 발라서 약혼을 하고 혹시나 무슨 딴소리가 있을까하여 부랴부랴 성례식을 시켜버렸다.

혼인할 때의 비용도 그때 돈으로 삼만 냥을 썼다. 그리고 아들의 처가집에 며느리 뒤 보아주는 바느질삯, 빨래 삯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이천 오백 냥씩을 대어주었다.

신부는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까지 상당히 견디기도 하고 또는 금지옥엽같이 기른 터이라 구식 가정에서 배울 것 읽힐 것은 못한 것이 없고 또는 본래 인물이라든지 행동거지에 조금도 구김이 있지 아니하다.

신부가 오자 신랑의 흠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신부에게다 대면 두루미와 까마귀지."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어."

"색시에게 쥐여 지내겠지."

"신랑에겐 과하지."

동네집 말 좋아하는 여편네들이 모여앉으면 이렇게 비평들을 한다. 어떠한 남의 걱정 잘하는 마누라님은 간혹 신랑을 보고는 그대로 세워놓고,

"글쎄, 인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셈이 좀 나요. 저리구 어떻게 색시를 거느려가누. 색시 방에 들어가기가 부끄럽지 않담."

하고 들이대다시피 하는 일이 있다.

이럴 적마다 신랑의 마음은 그 말하는 이들이 미웠다. 일부러 자기를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후에 그를 만나면 말도 안하고 인사도 하지 아니한다.

또 그의 고모 되는 이가 와서 자기 조카를 보고,

"인제는 어른이야. 너도 그만하면 지각이 날 때가 되지 않았니? 네 처가 부끄럽지 아니하냐?"

하고 타이를 적마다 그의 마음은 그 말하는 사람이 부끄럽다는 것보다도 자기를 이렇게 하게 한 자기 아내가 더욱 밉살머리스러웠다.

'여편네가 다 무엇이냐. 저 빌어먹을 년이 들어오더니 나를 이렇게 못 살게 굴지.'

혼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그는 색시 방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집안에서는 야단이 났다. 마치 돼지나 말 새끼를 혼례시키려는 것같이 신랑을 색시 방으로 집어넣으려 하나 막무가내였다. 그럴 때마다 신랑은 손에 닥치는 대로 집어때려서 자기의 외사촌 누이의 이마를 뚫어서 피까지 나게 한 일이 있었다.

집안 식구들은 하는 수가 없어 맨 나중으로 아버지에게 밀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이 없을 뿐더러 풍파를 더 일으키게 하였다. 아버지께 꾸중을 듣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로 신부의 머리채를 쥐어잡아 마루 한복판에 태질을 쳤다. 그리고는,

"이년 네 집으로 가거라. 보기 싫다. 내 눈앞에는 보이지도 말아."

하였다. 밥상을 가져오면 그 밥상이 마당 한복판에서 재주를 넘고 옷을 가져오면 그 옷이 쓰레기통으로 나간다.

이리하여 색시는 시집오던 날부터 팔자 한탄을 하고서 날마다 밤마다 우는 사람이 되었다.

울며는 요사스럽다고 때린다. 또 말이 없으면, 빙충맞다고 친다. 이리하여 그 집에는 평화스러운 날이 하루도 없었다.

이것을 날마다 보는 사람 가운데 알 수 없는 의혹을 품게 된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는 곧 벙어리 삼룡이었다.

그렇게 예쁘고 유순하고 그렇게 얌전한 벙어리의 눈으로 보아서는 감히 손도 대지 못할 만치 선녀 같은 색시를 때리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의심이다.

보기에는 황홀하고 건드리기도 황홀할 만치 숭고한 여자를 그렇게 하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세상에 있지 못할 일이다. 자기는 주인 새서방에게 개나 돼지같이 얻어맞는 것이 마땅한 이상으로 마땅하지마는 선녀와 짐승의 차가 있는 색시와 자기가 똑같이 얻어맞는 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다. 어린 주인이 천벌이나 받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하였다.

어떠한 달밤, 사면은 고요적막하고 별들은 드문드문 눈들만 깜박이며 반달이 공중에 뚜렷이 달려 있어 수은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닦아낸 듯이 청명한데 삼룡이는 검둥개 등을 쓰다듬으며 밖 마당 멍석 위에 비슷이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하여 보았다.

주인 색시를 생각하면 공중에 있는 달보다도 더 곱고 별들보다도 더 깨끗하였다. 주인 색시를 생각하면 달이 보이고 별이 보이었다. 삼라만상을 씻어내는 은빛보다도 더 흰 달이나 별의 광채보다도 그의 마음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듯하였다. 마치 달이나 별이 땅에 떨어져 주인 새아씨가 된 것도 같고 주인 새아씨가 하늘에 올라가면 달이 되고 별이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자기를 어린 주인이 때리고 꼬집을 때 감히 입벌려 말은 하지 못하나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정이 그의 두 눈에 나타나는 것을 다시 생각할 때 그는 부들부들한 개 등을 어루만지면서 감격을 느끼었다. 개는 꼬리를 치며 자기를 귀여워하는 줄 알고 벙어리의 손을 핥았다.

삼룡이의 마음은 주인아씨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또는 그를 위하여서는 자기의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겠다는 의분에 넘치었다. 그것이 마치 살구를 보면 입 속에 침이 도는 것같이 본능적으로 느끼어지는 감정이었다.

새댁이 온 뒤에 다른 사람들은 자유로운 안 출입을 금하였으나 벙어리는 마치 개가 맘대로 안에 출입할 수 있는 것같이 아무 의심 없이 출입할 수가 있었다.

하루는 어린 주인이 먹지 않던 술이 잔뜩 취하여 무지한 놈에게 맞아서 길에 자빠진 것을 업어다가 안으로 들여다 누인 일이 있었다. 그때에 아무도 안에 있지 않고 다만 새색시 혼자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이 꼴을 보고 벙어리의 충성된 마음이 고마와서 그후에 쓰던 비단 헝겊조각으로 부지쌈지 하나를 하여준 일이 있었다.

이것이 새서방님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색시는 어떤 날 밤 자던 몸으로 마당 복판에 머리를 푼 채 내어 동댕이가 쳐졌다. 그리고 온몸에 피가 맺히도록 얻어맞았다.

이것을 본 벙어리는 또다시 의분의 마음이 뻗쳐올라왔다. 그래서 미친 사자와 같이 뛰어들어가 새서방님을 내어던지고 새색시를 둘러메었다. 그리고 나는 수리와 같이 바깥사랑 주인영감 있는 곳으로 뛰어가 그 앞에 내려놓고 손짓과 몸짓을 열 번 스무 번 거푸하며 하소연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는 주인 새서방님에게 물푸레로 얼굴을 몹시 얻어맞아서 한쪽 뺨이 눈을 얼러서 피가 나고 주먹같이 부었다. 그 때릴 적에 새서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 흉칙한 벙어리 같으니, 내 여편네를 건드려?"

하고, 부지쌈지를 뺏아서 갈갈이 찢어서 뒷간에 던졌다.

"그러고 이놈아, 인제는 주인도 몰라보고 막 친다. 이런 것은 죽어야 해."

하고. 채찍으로 그의 뒷덜미를 갈겨서 그 자리에 쓰러지게 하였다.

벙어리는 다만 두 손으로 빌 뿐이었다. 말도 못하고 고개를 몇백 번 코가 땅에 닿도록 그저 용서해달라고 빌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비로소 숨겨 있던 정의감(正義感)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아픈 것을 참아가면서도 북받치는 분노(심술)를 억제하였다.

그때부터 벙어리는 안방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더욱 벙어리로 하여금 궁금증이 나게 하였다. 그 궁금증이라는 것이 묘하게 빛이 연하여 주인 아씨를 뵈옵고 싶은 감정으로 변하였다. 뵈옵지 못하므로 가슴이 타올랐다. 몹시 애상(哀傷)의 정서가 그의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한번이라도 아씨를 뵈올 수가 있으면 하는 마음이 나더니 그의 마음의 넋은 느끼기를 시작하였다. '센티멘털'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그 무슨 정서는 그에게 생명 같은 희열을 주었다. 그것과 자기의 목숨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때는 그대로 대강이로 담을 뚫고 들어가고 싶도록 주인아씨를 뵈옵고 싶은 것을 꾹 참을 때도 있었다.

그후부터는 밥을 잘 먹을 수가 없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틈만 있으면 안으로만 들어가고 싶었다.

주인이 전보다 많이 밥과 음식을 주고 더 편하게 하여주었으나 그것이 싫었다. 그는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집 가장자리를 돌아다녔다.

하루는 주인 새서방님이 술이 취하여 들어오더니 집안이 수선수선하여지며 계집 하인이 약을 사러 갔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계집 하인을 붙잡았다. 그리고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집 하인은 한 주먹을 뒤통수에 대이고 얼굴을 젊다고 하는 뜻으로 쓰다듬으며 둘째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것은 그집 주인은 엄지손가락이요. 둘째손가락은 새서방님이라는 뜻이요 주먹을 뒤통수에 대이는 것은 여편네라는 뜻이요 얼굴을 문지르는 것은 예쁘다는 뜻으로 벙어리에게 쓰는 암호다.

그런 뒤에 다시 혀를 내밀고 눈을 뒤집어쓰는 형상을 하고 두 팔을 싹 벌리고 뒤로 자빠지는 꼴을 보이니 그것은 사람이 죽게 되었거나 앓을 적에 하는 말 대신의 손짓이다.

벙어리는 눈을 크게 뜨고 계집 하인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들어서며 놀래는 듯이 멀거니 한참이나 있었다.

그의 가슴은 무섭게 격동하였다. 자기의 그리운 주인아씨가 죽었다는 말이나 아닌가. 그는 두 주먹을 마주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자기 방에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두어 시간이나 두 눈만 껌벅껌벅 하고 앉았었다.

그는 밤이 깊어갈수록 궁금증 나는 사람처럼 일어섰다 앉았다 하더니 두시나 되어서 바깥으로 나가서 뒤로 돌아갔다.

그는 도둑놈처럼 조심스럽게 바로 건넌방 뒤 미닫이 앞 담에 서서 주저주저 하더니 담을 넘었다. 가까이 창 앞에 서서 문틈으로 안을 살피다가 그는 진저리를 치며 물러섰다.

어두운 밤에 그의 손과 발이 마치 그 뒤에 서 있는 감나무 잎같이 떨리더니 그대로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을 때 그의 팔에는 주인 아씨가 한 손에 길다란 명주수건을 들고서 한 팔로 벙어리의 가슴을 밀치며 뻐팅기었다. 벙어리는 다만 눈이 뚱그래서 '에헤' 소리만 지르고 그 수건을 뺏으려 애쓸 뿐이다.

집안이 야단났다.

"집안이 망했군."

"어디 사내가 없어서 벙어리를?"

"어떻든 알 수 없는 일이야."

하는, 소리가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댄다.

그 이튿날 아침에 벙어리는 온몸이 짓이긴 것이 되어 마당에 거꾸러져 입에서 피를 토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그 곁에서는 새서방이 쇠줄 몽둥이를 들고서 문초를 한다.

"이놈!"

하고는 음란한 흉내는 모조리 하여가며 건넌방을 가리킨다. 그러나 벙어리는 손을 내저을 뿐이다. 또 몽둥이에는 살점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피가 흘렀다.

벙어리는 타들어가는 목으로 소리도 못 내며 고개만 내젓는다. 그는 피를 토하며 거꾸러지며 이마를 땅에 비비며 고개를 내흔든다. 땅에는 피가 스며든다. 새서방은 채찍 끝에 납 뭉치를 달아서 가슴을 훔쳐갈겼다가 힘껏 잡아뽑았다. 벙어리는 그대로 거꾸러지며 말이 없었다.

새서방은 그래도 시원치 못하였다. 그는 어제 벙어리가 새로 갈아놓은 낫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그 시퍼렇게 드는 날을 번쩍 들었다. 그래서 벙어리를 찌르려 할 제 벙어리는 한 팔로 그것을 받았고 집안 사람은 달려들었다. 벙어리는 낫을 뿌리쳐 저리로 내던졌다.

주인은 집안이 망하였다고 사랑에 누워서 모든 일을 들은 체 만 체 문을 닫고 나오지를 아니하며 집안에서는 색시를 쫓는다고 야단이다. 그날 저녁에 벙어리는 다시 끌려나왔다. 그때에는 주인 새서방이 그의 입던 옷과 신짝을 주며 눈을 부릅뜨고 손을 멀리 가리키며.

"가! 인제는 우리 집에 있지 못한다."

하였다. 이 소리를 듣는 벙어리는 기가 막혔다. 그에게는 이 집 외에 다른 집이 없다. 살 곳이 없었다. 자기는 언제든지 이 집에서 살고 이 집에서 죽을 줄 밖에 몰랐다. 그는 새서방님의 다리를 끼어안고 애걸하였다. 말도 못하는 것을 몸짓과 표정으로 간곡한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새서방님은 발길로 지르고 사람을 불렀다.

"이놈을 좀 내쫓아라!"

벙어리는 죽은 개 모양으로 끄을려나갔다. 그리고 대갈빼기를 개천 구석에 들이박히면서 나가 곤드라졌다가 일어서서 다시 들어오려 할 때에는 벌써 문이 닫혀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의 마음으로는 주인영감을 찾았으나 부를 수가 없었다.

그가 날마다 열고 날마다 닫던 문이 자기가 지금은 열려 하나 자기를 내어쫓고 열리지를 않는다. 자기가 건사하고 자기가 거두던 모든 것이 오늘에는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일한 값이 오늘에는 이것이다.

그는 비로소 믿고 바라던 모든 것이 자기의 원수란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기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 나은 것을 알았다.

그날 저녁 밤은 깊었는데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개 짖는 소리뿐이 들린다. 난데없는 화염이 벙어리 있던 오 생원 집을 에워쌌다. 그 불을 미리 놓으려고 준비하여 놓았는지 집 가장자리로 쪽 돌아가며 흩어놓은 풀에 모조리 돌라붙어 공중에서 내려다보며는 집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일 듯이 타오른다.

불은 마치 피묻은 살을 맛있게 잘라먹는 요마(妖魔)의 혓바닥처럼 날름날름 집 한 채를 삽시간에 먹어버리었다. 이와 같은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낮에 이 집을 쫓겨난 삼룡이다. 그는 먼저 사랑에 가서 문을 깨뜨리고 주인을 업어다가 밭 가운데 놓고 다시 들어가려 할 제 얼굴과 등과 다리가 불에 데이어 쭈그러져드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건넌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색시는 없었다. 다시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또 없고 새서방이 그의 팔에 매달리어 구원하기를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뿌리쳤다. 다시 서까래가 불이 시뻘겋게 타면서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부엌으로 가보았다. 거기서 나오다가 문설주가 떨어지며 왼팔이 부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몰랐다. 그는 다시 광으로 가보았다. 거기도 없었다. 그는 다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그때야 그는 색시가 타죽으려고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색시를 안았다. 그리고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나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는 비로소 자기의 몸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을 자기의 가슴에 느끼는 것을 알았다. 색시를 자기 가슴에 안았을 때 그는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 알았을 때 그 색시를 내려놀 때는 그는 벌써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집은 모조리 타고 벙어리는 색시를 무릎에 뉘고 있었다. 그의 울분은 그 불과 함께 사라졌을는지.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 가장자리에 엷게 나타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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