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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애하는 동혁 씨!'

영신이가 한곡리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온 편지의 서두에는 전에 단골로 쓰던 '존경' 두 자의 높을존(尊)자가 떨어지고 그 대신으로 사랑애(愛)자가 또렷이 달렸다.

무한한 감사와 가슴 벅찬 감격을 한아름 안고 무사히 나의 일터로 돌아왔습니다. 그 감사와 감격은 무덤 속으로 들어간 뒤까지라도 영원히 영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떠날 때의 바쁘신 중에도 여러분이 먼길에 전송해 주시고, 배표까지 사주신 것만 해도 염치없는데, 꼭 배 안에서 뜯어 보라구 쥐어 주신 봉투 속에 십 원짜리 지전 한 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몇 번이나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한창 어려운 고비를 넘는 농촌에서 십 원이란 큰 돈을 변통하기가 얼마나 어려우셨을 것을 알고, 또는 제가 떠나기 전날 밤에, 이 돈을 남에게 취하려고 몇십 리 밖까지 가셨다가 늦게야 돌아오셨던 것이 이제야 짐작되어서 차마 도로 부치지를 못하였습니다. 몸 보할 약이라도 한 제 지어 먹으라고 간곡히 부탁은 하셨지만, 백 원 천 원보다도 더 많은 이 돈을, 저 한몸의 영양을 위해서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꼭 저금을 해두었다가 가을에 지으려는 학원 마당 앞에 종을 사서 달겠습니다. 아침 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그 종소리는 저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어두운 귀와 혼몽히 든 잠을 깨워 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도 울리겠지요.

나의 경애하는 동혁 씨!

자동차가 닿은 정류장에는 부인 친목계의 회원들과 내 손으로 가르치는 어린이들이 수십 명이나 마중을 나와서, 손과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며 어찌나 반가워서 날뛰는지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것을 간신히 참었어요. 더구나 계집아이들은 거진 십 리나 되는 산길을 날마다 두 번씩이나 나와서 자동차 오기를 까맣게 기다리다가 '우리 선생님 아주 도망갔다'고 홀짝홀짝 울면서 돌아가기를 사흘 동안이나 하였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그다지도 안타까이 저를 기다려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변변치 못한 채영신이를 그다지도 따뜻이 품어 줄 고장이 이 세계의 어느 구석에 있겠습니까?

나의 경애하는 동혁 씨!

이번 길에 저는 고향 하나를 더 얻었어요. 한곡리는 저의 제삼의 고향이 되고 말았어요. 저와 한평생 고락을 같이하기로 굳게 굳게 맹세해 주신 당신이 계시고, 씩씩한 조선의 일꾼들이 있고 친형과 같이 친절히 굴어 주던 건배 씨의 부인과, 동네의 아낙네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째서 저의 고향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새로 얻어서 첫정이 든 그 고향을 꿈에라도 잊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슴에 피를 끓이던 그 애향가의 합창을.

나의 가장 경애하는 동혁 씨!

저는 행복합니다. 인제는 외롭지도 않습니다. 큰덕미 나루터의 커다란 바윗덩이와 같이 변함이 없으실 당신의 사랑을 얻고, 우리의 발길이 뻗치는 곳마다 넷째 다섯째의 고향이 생길 터이니 당신의 곁에 앉었을 때만치나 제 마음이 든든합니다. 저의 가슴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몸의 책임이 더한층 무거워진 것을 깨닫습니다. 청석동의 문화적 개척사업을 나 혼자 도맡은 것만 하여도 이미 허리가 휘도록 짐이 무거운데요, 우리의 사랑을 완성할 때까지 불과 삼 년 동안에 그 기초를 완전히 닦어 놓자면 그 앞길이 창창한 것 같습니다. 양식 떨어진 사람이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만치나 까마아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처럼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

하고 '애향가'의 둘째 절을 부르겠어요. 목청껏 부르세요!

나에게 다만 한 분이신 동혁 씨!

그러면 부디부디 건강히 일 많이 하여 주십시오. 그 동안 밀린 일이 많고, 야학 시간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이 몰려와서 오늘은 더 길게 쓰지 못하니 이 편지보다 몇 곱절 긴 답장을 주십시오. 다른 회원들에게 안부 전해 주시고 건배 씨 내외분에게는 틈나는 대로 따로이 쓰겠습니다.

××월 ××일

당신께도 하나뿐인 채영신 올림

영신은 어머니에게와 아버지가 혼인을 정해 준 남자에게도 편지를 썼다. '앞으로 몇 해 동안 결혼 문제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겠고, 또는 이 뒤에라도 당신과는 이상이 맞지 않고 주의가 틀려서 억지로 결혼을 한대도, 결단코 행복스러운 생활을 할 수가 없겠으니 이 편지를 보고는 아주 단념해 주기를 바란다'는 최후의 통첩을 띄웠다.

동혁이와 삼십 년 동안이라도 기다리겠다는 언약을 한 이상,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번거로운 문제로 새삼스러이 머리를 썩일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질질 끌어 나가는 것은 여러 해를 두고 저를 유념해 온 상대자에게 대해서 매우 미안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 일주일 뒤에야 어머니에게서는,

"진정으로 네 생각이 그렇다면 인력으로 못 할 노릇이나, 딸자식 하나로 해서 이 어미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줄이나 알어 다오."

하는 대서 편지가 왔고, 금융조합에 다니는 남자에게서는,

"얼마나 이상이 높고 주의가 맞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이 세상 복록을 골고루 누리며 사나 두구 보자. 아무튼 조만간 직접 만나서 최후의 담판을 할 테니 그런 줄 알라."

는 저주 비슷한 회답이 왔다. 그 사람이야 다시 오건 말건, 영신은 남이 억지로 짊어 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것만치나 마음이 거뜬하였다.

'자, 인젠 일이다! 일을 허는 것밖에 없다! 앞으로 삼 년이란 세월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기 위해서래도 힘껏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고 제 몸을 스스로 채찍질하였다. 일주일 동안 한곡리에서 받은 자극도 컸거니와 동혁이와 약혼을 한 것으로 말미암아, 여간 큰 충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청석골로 돌아온 뒤에도 며칠 동안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고, 그때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 반면으로 건강은 아주 회복이 되어서, 먼동이 훤하게 틀 때 일어나 기도회에 참례를 하고 낮에는 학원을 지을 기부금을 모집하러 몇십 리 밖까지 다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인 친목계의 계회원들과 같이 발을 벗고 들어서서 원두밭을 매고 풀을 뽑고 하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그 자리에 쓰러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예배당으로 가야 한다. 가서는 서너 시간이나 아이들과 아귀다툼을 해가면서 글을 가르치고 나오면, 다리가 굳어 오르는 것 같고 고개를 꼬는 힘까지 빠져서, 길가의 잔디밭만 보아도 턱 누워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숙하는 집까지 와서는 자리도 펼 사이가 없이 곯아떨어진다. 그렇건만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냉수에 세수를 하고 나면 새로운 용기가 솟는다. 아침마다 제 시간이 되면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 오는 것 같아서 더 좀 누웠으려야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까지 놀 새가 없는 농번기가 닥쳐왔건만 강습소의 아이들은 나날이 늘어 오 리 밖 십 리 밖에서까지 밥을 싸가지고 다니고, 기부금이 단돈 백 원씩이라도 늘어 가는 것과, 친목계의 계원들도 지도하는 대로 한몸뚱이가 되어 한 사람도 마실을 다니거나 버정거리는 사람이 없이 닭을 기르고 누에를 치고 또는 베를 짠다.

영신은 그러한 재미에 극도로 피곤하건만 몸이 괴로운 줄을 모르고 하루 이틀을 보냈다. 사업이 날로 늘어 가고 모든 성적이 뜻밖으로 좋아질수록, 끼니때를 잊을 적도 있고 심지어 며칠씩 머리도 빗지 못하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틈이 빠끔하게 나기만 하면 동혁의 환영에게 정신이 사로잡히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바닷가의 기울어 가는 달밤, 모래 위에 그 육중한 몸뚱이를 몸부림치며 사랑을 고백하던 동혁이, 온 몸뚱이가 액체로 녹을 듯이 힘차게 끌어안던 두 팔의 힘, 숨이 턱턱 막히던 불 같은 키스.

영신은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화끈화끈 달았다. 그날 밤 그 하늘에 떴던 달이나 별들밖에는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두 사람의 마음속의 비밀을 알 리 없건만, 그래도 동혁의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멀리 남녘 하늘의 구름을 바라다보고 섰을 때에는, 곁에 있는 사람이 제 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들기도 여러 번 하였다.

동혁에게서 꼭꼭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가 왔다. 사연은 간단한데 여전히 보고 싶다든지 그립다든지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고, 다만 영신의 건강을 축수하는 것과 새로 계획하는 일이나 방금 실지로 해나가는 일이 어떻다는 것만은 문체도 보지 않고 굵다란 글씨로 적어 보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영신은 그 편지를 틈틈이 꺼내 보는 것, 오직 그것만이 큰 위안거리였다.

그 동안 영신의 수입이라고는 경성연합회에서 백현경의 손을 거쳐 생활비 겸 사업을 보조하는 의미로 다달이 삼십 원씩 보내 주는 것밖에 없었다. 원재 어머니라는, 젊어서 홀로 된 교인의 집 건넌방에 들어서, 밥값 팔 원만 내면 방세는 따로 내지 않았다. 옷이라고는 그곳 여자들과 똑같은 보병것을 입고, 겨울이면 학생시대에 입던 헌 털재킷 하나가 유일한 방한구인데 구두도 아니 신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니, 통신비 신문 잡지 대금 해서 십여 원만 가지면 저 한몸은 빠듯이 먹고 지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이십 원도 못 되는 돈으로, 이태 전부터 강습소와 그 밖에 모든 경비를 써온 것이다. 월사금을 한 푼이라도 받기는커녕 그 중에도 어려운 아이들의 교과서와 연필 공책까지도 당해 주고, 심지어 넝마가 다 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장에 가서 옷감까지 끊어다가 소문 안 나게 해입힌 것이 한두 벌이 아니었다. 더구나 아이들이 장난을 하다가 다치거나 배탈이 나든지 하면 으레 '선생님'을 부르며 달려오고, 나중에는 동네 사람들까지 영신을 무슨 고명한 의사로 아는지,

"채선생님, 제 둘째 새끼가 복학을 앓는뎁쇼, 신효헌 약이 없습니까?"

하고 찾아와서 손길을 마주 부비는 사람에,

"아이구, 우리 딸년이 관격이 돼서 자반 뒤집기를 허는데, 제발 적선에 어떻게 좀 살려 줍쇼."

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얼굴도 모르는 여편네에, 낫으로 손가락을 베인 머슴에, 도끼로 발등을 찍힌 나무꾼 할 것 없이, 급하면 채선생을 찾아온다. 영신은,

"이건 내가 성이 채가니까 옛날 채동지가 여자루 태난 줄 아우?"

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네들을 하나도 그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서 내복약도 주고 겉으로 치료도 해주었다. 그러니 그 시간과 비용도 적지 않다. 붕대, 소독약, 옥도정기, 금계랍, 요오드포름 할 것 없이 근자에는 한 달에 약품값만 거진 십 원씩이나 들었다. 그래도 오히려 모자라는데, 그네들은 채선생이 병만 잘 고칠 줄 아는 것뿐 아니라, 화수분이나 가진 것처럼 돈도 뒷구녁으로 적지 않이 버는 줄 아는 모양이다.

보통 사람은 불러다 볼 생의도 못 하는 공의가 그나마 사십 리 밖 읍내에 겨우 한 사람이 있고, 장거리에 의생이 두어 사람 있다고는 하나, 옛날처럼 교군이나 보내야 온다니, 이 근처 백성들은 무료로 치료를 해주는 채선생을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신의 방이 어떤 때는 진찰실이 되고, 벽장 속은 양약국의 약장 같았다. 나날이 명망이 높아 가는 채의사(?)는 병을 고쳐 주는 데까지 재미가 나서, 빚을 얻어 가면서래도 급한 때 쓰는 약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아메바성 이질로 죽어 가던 사람이 에메틴 주사 한 대로 뒤가 막히고, 가슴앓이로 펄펄 뛰던 사람이 판토폰 한 대에 진정이 되는 것은 여간 신기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통속적인 의학과 임상에 관한 서책도 보게 되고 실지로 의사의 경험도 쌓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이 동리에 특파하신 사도다!'

하는 자존심과 자랑까지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수술을 해야 할 환자를 몇십 리 밖에서 업고 오고, 심지어 보기에도 더럽고 지겨운 화류병 환자까지 와서 치료를 해달라고 엎드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데는 진땀이 났다. 그네들이 거절을 당하고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왜 내가 정작 의술을 배우지 못했던가.'

하고 탄식을 할 때도 많았고 동시에,

'의료 기관 하나 만들어 놓지를 않구 세금을 받어다간 뭣에다 쓰는 거야. 의사란 놈들이 있대두 그저 돈에만 눈들이 번하지.'

하고 몹시 분개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영신은 이따금 재판장 노릇까지도 하게 된다. 아이들끼리 재그락거리는 싸움은 달래고 타이르고 하면 평정이 되지만, 어른들의 싸움, 그 중에도 내외 싸움까지 판결을 내려 달라는 데는 기가 탁 막힐 노릇이었다.

어느 비 오던 날은 딱장대로 유명한 억쇠 어머니가 집에서 양주가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다가, 영감쟁이의 멱살을 추켜 쥐고, 영감쟁이는 마누라의 머리채를 끄들며 씨근벌떡거리고 와서는,

"아이고 사람 죽겠네. 채선생님, 이 정칠놈의 영감을 어떡허면 투전을 못 허게 맨듭니까? 술 못 먹게 허는 약은 없습니까?"

하면, 영감쟁이는 만경이 된 눈을 휘번덕거리며,

"아이구 이 육실헐년, 버르장이를 좀 가르쳐 줍쇼."

하고 비가 줄줄 쏟아지는 진흙마당에서 서로 껴안고 뒹굴며 한바탕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버럭버럭 대드는 바람에, 영신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구경만 하다가 고만 뒷문으로 빠져서 예배당으로 뺑소니를 친 때도 있었다.

한편으로 글을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거진 날마다 늘었다. 양철 지붕에 송판으로 엉성하게 지은 조그만 예배당은 수리를 못 해서 벽이 떨어지고 비만 오면 천장이 새는데, 선머슴 아이들이 뛰고 구르고 하여서 마루청까지 서너 군데나 빠졌다. 그것을 볼 때마다 늙은 장로는,

"흥, 경비는 날 곳이 없는데 너희들이 예배당을 아주 헐어 내는구나. 강습이구 뭐구 인젠 넌덜머리가 난다."

하고 허옇게 센 머리를 내둘렀다. 더구나 새로 글을 깨친 아이들이 어느 틈에 분필과 연필로 예배당 안팎에다가 괴발개발 글씨도 쓰고 지저분하게 환도 친다. '신퉁이 개자식이라' '갓난이는 오줌을 쌌다더라' 하고 제 동무의 욕을 쓰기도 하고, 심지어 십자가를 새긴 강당 정면에다가 나쁜 그림까지 몰래 그려 놓기도 하여서 그런 낙서를 볼 때마다 장로와 전도사는 상을 찌푸린다.

영신은 여간 미안하지가 않아서 하루도 몇 번씩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타일렀다. 그러나 속으로는 제가 진땀을 흘리며 가르친 아이들이 하나 둘씩 글눈을 떠가는 것이 여간 대견하지 않았다. 비록 나쁜 그림을 그리고 욕을 쓸망정 그것이 여간 신통하지가 않아서,

"장로님, 저희두 따루 집을 짓구 나갈 테니, 올 가을꺼정만 참어 줍시오."

하고 몇 번이나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 변덕스러운 장로는 대머리를 어루만지며,

"원 채선생, 별말씀을 다 허는구려. 다 하나님의 뜻대루 되겠지요. 그게 조옴 거룩헌 사업이오."

하고 얼더듬는다. 그럴수록 영신은 사글셋집에 들어 있는 것만치나 불안스러워서 하루바삐 집을 짓고 나가려고 아니 해보는 궁리가 없었다.

그러나 원체 가난한 동리인데다가, 그나마 돈이 한창 마른 때라 기부금은 적어 놓은 액수의 십분의 일도 걷히지를 않고, 친목계원들이 춘잠을 쳐서 한장 치에 열서너 말씩이나 땄건만, 고치금이 사뭇 떨어져서 예산한 금액까지 되려면 어림도 없다. 닭도 집집마다 개량식으로 쳤지만 모이를 사서 먹인 것과 레그혼 같은 서양 종자의 어미닭 값을 따지고 보면 계란값과 비겨 떨어진다.

그러니 줄잡아도 오륙백 원이나 들여야 할 학원을 지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영신이가 하도 집을 짓지 못해서 성화를 하니까 다른 회원들은,

"급히 먹는 밥이 체헌다우. 우리 선생님두 성미가 퍽 급허셔."

하고 위로하듯 하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아이들이 한꺼번에 대여섯 명, 어떤 때는 여남은 명씩 부쩍부쩍 는다. 보통학교가 시오 리 밖이나 되는 곳에 있고 간이(簡易)학교라고 새로 생긴 것도 장터까지 가서야 있으니,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은 등잔불로 날아드는 나비처럼 청석골로만 모여들 수밖에 없는 형세다. 요새 들어온 아이들까지 합하면, 거진 일백삼십여 명이나 된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한 아이도 더 수용할 수 없다고 오는 아이를 쫓을 수는 없다. 영신은,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

하는 찬송가 구절을 입 속으로 부르며,

'오냐, 예배당이 터지도록 모여 오너라, 여름만 되면 나무 그늘도 좋고, 달밤이면 등불두 일없다.'

하고 들어오는 대로 받아서, 그곳 보통학교를 졸업한 젊은 사람들의 응원을 얻어 남자와 여자와 초급과 상급으로 반을 나누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영신을 숭배하고 일을 도와 주는 순진한 청년이 서너 명이나 되지만 그 중에도 주인집의 외아들인 원재는 영신의 말이라면 절대로 복종을 하는 심복이었다. 같은 집에 살기도 하지만 상급학교에는 가지 못하는 처지라, 새새틈틈이 영신에게서 중등 학과를 배우는 진실한 청년이다.

가뜩이나 후락한 예배당 안은 콩나물을 기르는 것처럼 아이들로 빡빡하다. 선생이 부비고 드나들 틈이 없을 만치 꼭꼭 찼다. 아랫반에서,

" '가'자에 ㄱ허면 '각' 허구."

" '나'자에 ㄴ허면 '난' 허구."

하면서 다리도 못 뻗고 들어앉은 아이들은 고개를 반짝 들고 칠판을 쳐다보면서 제비 주둥이 같은 입을 일제히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 그러면 윗반에서는『농민독본』을 펴놓고,

잠자는 자 잠을 깨고
눈먼 자 눈을 떠라.
부지런히 일을 하야
살 길을 닦아 보세.

하며 목청이 찢어져라고 선생의 입내를 낸다. 그 소리를 가까이 들으면 귀가 따갑도록 시끄럽지만, 멀리 축동 밖에서 들을 때,

'아아, 너희들이 인제야 눈을 떠 가는구나!'

하며 영신은 어깨춤이 저절로 났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때였다. 영신의 신변을 노상 주목하고 다니던 순사가 나와서 다짜고짜,

"주임이 당신을 보자는데, 내일 아침까지 주재소로 출두를 허시오."

하고 한마디를 이르고는 말대답을 들을 사이도 없이 자전거를 되집어타고 가버렸다.

'무슨 일로 호출을 할까?'

'강습소 기부금은 오백 원까지 모집을 해도 좋다고 허가를 해주지 않었는가?'

영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웬만한 일 같으면 출장 나온 순사에게 통지만 해도 고만일 텐데, 일부러 몇십 리 밖에서 호출까지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 붙은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신이가 처음 내려오던 해부터 이일 저일에 줄곧 간섭을 받아 왔었지만, 강습소 일이나 부인 친목계며 그 밖에 하는 일을 잘 양해를 시켜 오던 터이라 더욱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별 생각이 다 나서 영신은 그날 밤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이튿날 새벽밥을 지어 달래서 먹고는 길을 떠났다. 이십 리는 평탄한 신작로지만 나머지는 가파른 고개를 넘느라고 발이 부르트고 속옷은 땀에 젖었다.

……영신과 주재소 주임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나 그 밖의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출한 요령만 따서 말하면,

'첫째는 예배당이 좁고 후락해서 위험하니 아동을 팔십 명 이외에는 한 사람도 더 받지 말라는 것과, 둘째는 기부금을 내라고 돌아다니며 너무 강제 비슷이 청하면 법률에 저촉이 된다.'

는 것을 단단히 주의시키는 것이었다. 영신은 여러 가지로 변명도 하고 오는 아이들을 아니 받을 수는 없다고 사정사정하였으나,

"상부의 명령이니까 말을 듣지 아니하면 강습소를 폐쇄시키겠다."

고 얼러메어서 영신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깨물고 주재소 문 밖을 나왔다.

그는 아픈 다리를 간신히 끌고 돌아와서 저녁도 아니 먹고 그날 밤을 꼬박이 새우다시피 하였다.

'참자! 이버덤 더한 것도 참어 왔는데, 이만헌 일이야 참지 못하랴.'

하면서도 좀더 시원하게 들여대지를 못하고 온 것이 종시 분하였다. 그러나 혈기를 참지 못하고 덧들렸다가는 제한받은 수효의 아이들마저 가르치지 못하게 될 것을 생각하고 꿀꺽 참았던 것이다. 아무튼 어길 수 없는 명령이매, 내일부터 일백사십여 명 중에서 팔십 명만 남기고 오십여 명을 쫓아내야 한다. 저의 손으로 쫓아내야만 한다.

"난 못 하겠다! 차라리 예배당 문에 못질을 하는 한이 있드래도 내 손으로 차마 그 노릇은 못 하겠다!"

하고 영신은 부르짖으며 방바닥에 가 쓰러져 버렸다. 한참 동안이나 엎치락뒤치락하며 홀로 고민을 하였다.

그는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그러나 이제까지 갖은 고생과 온갖 곤욕을 당해 가면서 공들여 쌓은 탑을, 그 밑동부터 제 손으로 허물어트릴 수는 없다. 청석골 와서 몇 가지 시작한 사업 중에 가장 의미 깊고 성적이 좋은 한글 강습을 중도에서 손을 뗄 수는 도저히 없다.

'어떡허면 나머지 오십 명을 돌려보낼꼬?'

'이제까지 두말없이 가르쳐 오다가 별안간 무슨 핑계로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한단 말인가?'

거짓말을 하기는 죽어라고 싫건만 무어라고 꾸며 대지 않을 수도 없는 사세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 보아도 묘책이 나서지를 않아서 그는 하룻밤을 하얗게 밝혔다. 창 밖에 새벽별이 차차 빛을 잃어 갈 때, 영신은 소세를 하고 나와서 예배당으로 올라갔다. 땅 위의 모든 것이 아직도 단꿈에서 깨지 않아 천지는 함께 괴괴하다. 영신은 이슬이 축축히 내린 예배당 층계에 엎드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주여, 당신의 뜻으로 이곳에 모여든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양들이 오늘은 그 삼분의 일이나 목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다시 어둠 속에서 헤매일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주여, 그 가엾은 무리가 낙심하지 말게 하여 주시고 하나도 버리지 마시고 다시금 새로운 광명을 받을 기회를 내려 주시옵소서!

오오 주여, 저의 가슴은 지금 미어질 듯합니다.'

영신은 햇발이 등뒤를 비추며 떠오를 때까지 그대로 엎드린 채 소리 없이 흐느껴 울었다.

월사금 육십 전을 못 내고 몇 달씩 밀려 오다가 보통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이, 그날도 두 명이나 식전에 책보를 들고 그 학교의 모자표를 붙인 채 왔다.

"얘들아, 참 정말 안됐지만 인전 앉을 데가 없어서 받을 수가 없으니 가을버텀 오너라. 얼마 있으면 새 집을 커다랗게 지을 텐데 그때 꼭 불러 주마, 응."

하고 영신은 그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는 등을 어루만져 주며 간신히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다른 아이들이 오기 전에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잠 한숨 자지를 못해서 머리가 무겁고 눈이 빡빡한데, 교실 한복판에 가서 한참 동안이나 실신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섰자니, 어찔어찔하고 현기증이 나서 이마를 짚고 있다가 다리를 허청 떼어 놓으며 칠판 앞으로 갔다.

그는 분필을 집어 가지고 교단 앞에서 삼분의 일 가량 되는 데까지 와서는 동편짝 끝에서부터 서편짝 창 밑까지 한일자로 금을 주욱 그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예배당 문을 반쪽만 열었다. 아이들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재깔거리며 앞을 다투어 우르르 몰려들어온다.

영신은 잠자코 맨 먼저 온 아이부터 하나씩 둘씩 차례차례로 분필로 그어 놓은 금 안으로 앉혔다. 어느덧 금 안에는 제한받은 팔십 명이 찼다.

"나중에 온 아이들은 이 금 밖으로 나가 앉어요. 떠들지들 말구."

선생의 명령에 늦게 온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오늘은 왜 이럴까.'

하는 표정으로 선생의 눈치를 할끔할끔 보며 금 밖에 가서 쪼그리고 앉는다.

아이들에게 제비를 뽑힐 수도 없고 하급생이라고 마구 몰아내는 것도 공평치가 못할 듯해서, 영신은 생각다못해 나중에 오는 아이들을 돌려보내려는 것이다. 나중에 왔다고 해도 시간으로 보면 불과 십 분 내외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그렇게 하는 도리 이외에 아무 상책이 없었던 것이다.

영신은 아이들을 다 들여앉힌 뒤에 원재와 다른 청년들에게 그제야 그 사정을 귀띔해 주었다. 그런 소문이 미리 나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청년들의 얼굴빛은 금세 흙빛으로 변하였다.

"암말두 말구 나 허라는 대루만 장내를 잘 정돈해 줘요. 자세헌 얘긴 이따가 헐게……."

청년들은 영신을 절대로 신임하는 터이라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침통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영신은 찬찬히 교단 위에 올라섰다. 그 얼굴빛은 현기증이 나서 금방 쓰러지려는 사람처럼 해쓱해졌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무슨 말을 허시려구 저러나.'

하고 저희들 깐에도 보통 때와는 그 기색이 다른 것을 살피고는 기침 하나 아니 하고 영신을 쳐다본다.

영신은 입술만 떨며 얼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섰다. 사제간의 정을 한칼로 베어 내는 것 같은 마룻바닥에 그어 놓은 금을 내려다보고, 그 금 밖에 오십여 명 아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무슨 무서운 선고나 내리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 천진한 얼굴들을 바라볼 때, 영신은 눈두덩이 뜨끈해지며 목이 막혀서 말을 꺼낼 수가 없다. 한참 만에야 그는 용기를 내었다. 그러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여러 학생들 조용히 들어요. 오늘은 선생님이 차마 허기 어려운 섭섭헌 말을 헐 텐데……."

하고 나서 다시 주저하다가,

"저…… 금 밖에 앉은 아이들은 오늘버텀 공부를…… 시킬 수가…… 없게 됐어요!"

하였다. 청천의 벽력은 무심한 어린이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깜박깜박하고 선생을 쳐다보던 수없는 눈들은 모두가 꽈리처럼 똥그래졌다.

"왜요? 선생님, 왜 글을 안 가르쳐 주신대유?"

그 중에 머리가 좀 굵은 아이가 발딱 일어나며 질문을 한다.

영신은 순순히 타이르듯이 '집이 좁아서 팔십 명밖에는 더 가르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과, 올 가을에 새 집을 지으면 꼭 잊어버리지 않고 한 사람도 빼어 놓지 않고 불러 주마'고 빌다시피 하였다.

"그럼 입때꺼정은 이 좁은 데서 어떻게 가르쳐 주셨에유?"

이번엔 제법 목소리가 패인 남학생의 질문이 들어왔다. 영신은 화살이나 맞은 듯이 가슴 한복판이 뜨끔하였다. 그 말대답을 못 하고 머리가 핑 내둘려서 이마를 짚고 섰는데 금 밖에 앉았던 아이들은 하나 둘 앉은 채 엉금엉금 기어서, 혹은 살금살금 뭉치면서 금 안으로 밀려들어오다가,

"선생님! 선생님!"

하고 연거푸 부르더니 와르르 교단 위까지 뛰어오른다.

영신은 오십여 명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에워싸였다.

"선생님!"

"선생님!"

"전 벌써 왔에요."

"뒷간에 갔다가 쪼금 늦게 왔는데요."

"선생님, 난 막동이버덤두 먼첨 온 걸 저 차순이두 봤에요."

"선생님, 낼버텀 일뽢 오께요. 선생님버덤두 일뽢 오께요."

"선생님, 저 좀 보세요, 절 좀 보세요! 인전 아침두 안 먹구 오께 가라구 그러지 마세요, 네 네."

아이들은 엎드러지며 고푸러지며 앞을 다투어 교단 위로 올라와서, 등을 밀려 넘어지는 아이에, 발등을 밟히고 우는 아이에, 가뜩이나 머리가 휭한 영신은 정신이 아찔아찔해서 강도상 모서리를 잡고 간신히 서 있다. 제 몸뚱이로 버티고 선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포위를 당해서 쓰러지려는 몸이 억지로 떠받들려 있는 것이다.

"선생님!"

"선생님!"

아이들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은 귀가 따갑도록 그치지 않는다. 그래도 영신은 눈을 내리감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 뿐…….

"내려들 가!"

"어서 내려들 가거라!"

"말 안 들으면 모두 내쫓을 테다."

하면서 영신을 도와 주는 청년들이 아이들을 끌어내리고 교편을 들고 얼러메건만, 그래도 아이들은 울며불며 영신의 몸에 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죽기 기쓰고 떨어지지를 않는다.

영신의 저고리는 수세미가 되고 치마 주름까지 주루루 트더졌다. 어떤 계집애는 다리에다가 깍지를 끼고 엎드려서 꼼짝을 못 하게 한다.

영신은 트더진 치마폭을 휩싸쥐고 그제야,

"놔라, 놔! 얘들아, 저리들 좀 가 있어. 온 숨이 막혀서 죽겠구나!"

하고 몸을 뒤틀며 손과 팔에 매어달린 아이들은 가만히 뿌리쳤다. 아이들은 한번 떨어졌다가도 혹시나 제가 빠질까 하고 다시 극성스레 달려붙는다.

이 광경을 본 교회의 직원들이 들어와서 강제로 금 밖에 앉았던 아이들을 예배당 밖으로 내몰았다.

사내아이, 계집아이 할 것 없이 어머니의 젖을 억지로 떨어진 것처럼 눈이 빨개지도록 홀짝홀짝 울면서 또는 흑흑 흐느끼면서 쫓겨 나갔다.

장로는 대머리를 번득이며 쫓아 나가서, 예배당 바깥 문을 걸고 빗장까지 질렀다. 아이들이 소동을 해서 시끄러워 골치도 아프거니와, 경찰의 명령을 듣지 않다가는 교회의 책임자인 자기의 발등에 불똥이 튈까 보아 적지 않이 겁이 났던 것이다.

아이들의 등뒤에서 이 정경을 바라보던 영신은 깨물었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영신은 그 눈물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며 돌아섰다. 한참이나 진정을 하고 나서는 저희들 깐에도 동무들을 내쫓고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미안쩍은 듯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앉은 나머지 여든 명을 정돈시켜 놓고 차마 내키지 않는 걸음걸이로 칠판 앞으로 갔다.

그는 새로운 과정을 가르칠 경황이 없어서,

"오늘은 우리 복습이나 허지."

하고 교과서로 쓰는『농민독본』을 펴 들었다. 아이들은 글자 모으는 법을 배운 것을 독본에 있는 대로,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외기를 시작한다.

영신은 그 생기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데,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이가 빠진 듯이 띄엄띄엄 벌려 앉은 교실 한 귀퉁이가 훠언한 것을 보지 않으려고 유리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창 밖을 내다보던 영신은 다시금 콧마루가 시큰해졌다. 예배당을 에두른 야트막한 담에는 쫓겨 나간 아이들이 머리만 내밀고 조옥 매달려서 담 안을 넘겨다보고 있지 않은가. 고목이 된 뽕나무 가지에 닥지닥지 열린 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열매다. 그 중에도 키가 작은 계집애들은 나무에도 기어오르지를 못하고 땅바닥에 가 주저앉아서 홀짝거리고 울기만 한다.

영신은 창문을 말끔 열어제쳤다. 그리고 청년들과 함께 칠판을 떼어 담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창 앞턱에다가 버티어 놓고 아래와 같이 커다랗게 썼다.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나무에 오르고 담장에 매어달린 아이들은 일제히 입을 열어 목구멍이 찢어져라고 그 독본의 구절을 바라다보고 읽는다. 바락바락 지르는 그 소리는 글을 외는 것이 아니라 어찌 들으면 누구에게 발악을 하는 것 같다.

그러한 상태로 얼마 동안 지냈다. 그래도 쫓겨 나간 아이들은 날마다 제시간에 와서 담을 넘겨다보며 땅바닥에 엎드려 손가락이나 막대기로 글씨를 익히며 흩어질 줄 모른다. 주학과 야학으로 가르고는 싶으나 저녁에는 부인 야학이 있어서 번차례로 가르칠 수도 없었다.

"집을 지어야겠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하루바삐 학원을 짓고 나가야겠다!"

영신의 결심은 나날이 굳어 갔다. 그러나 그 결심만으로는 일이 되지 못하였다. 그는 원재와 교회 일을 보는 청년들에게 임시로 강습하는 일을 맡기고는, 청석학원 기성회 회원 방명부를 꾸며 가지고 다시 돈을 청하러 나섰다. 짚신에 사내처럼 감발을 하고는, 오늘은 이 동리 내일은 저 동리로 산을 넘고 논길을 헤매며 단 십 전 이십 전씩이라도 기부금을 모으러 다녔다. 푹푹 찌는 삼복중에 인가도 없는 심산궁곡으로 헐떡거리며 돌아다니자면, 목이 타는 듯이 조갈이 나는 때도 많았다. 논 귀퉁이 웅덩이에 흥건히 괸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긴긴 해에 점심을 굶어 시장기를 이기지 못하고 더운 김이 후끈후끈 끼치는 풀밭에 행려병자와 같이 쓰러져서 정신을 잃은 때도 있었다. 촌가로 찾아 들어가면 보리밥 한술이야 얻어먹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건만 굶으면 굶었지 비렁뱅이처럼,

"밥 한술 줍쇼."

하기까지는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는 저녁까지 굶고 눈이 하가마가 되어서 캄캄한 밤에 하늘의 별만 대중해서 방향을 잡고 오는 날도 겅성드뭇하였다.

집에까지 죽기 기쓰고 기어들어와 턱 눕는 것을 보면 원재 어머니는,

"아이고 채선생님, 이러다간 큰 병 나시겠구려. 사람이 성허구서야 학원 집이구 뭣이구 짓지, 온 가엾어라. 아주 초죽음이 되셨구려."

하고는 영신의 다리 팔을 주물러 주고, 더위를 먹었다고 영신환을 얻어다 먹이고 하였다.

그렇건만 기부금을 적은 명부를 펴보면, 하루에 사십 전 오십 전, 끽해야 이삼 원밖에는 적히지를 않았다. 원재 어머니는 이태 동안이나 영신이와 한집에서 살고 밥을 해주는 동안에, 글을 깨치고 쉬운 한문까지도 알아보게 된 것이다. 그는 영신의 감화를 받아 교회의 권사 노릇까지 하게 되었고, 영신이가 와서 발기한 부인 친목계의 서기 겸 회계까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영신과 정도 들었거니와 그를 천사와 같이 숭앙하고 친절을 다하는 터이다.

청석동 강습소가 폐쇄를 당할 뻔하였다는 것과, 기부금을 모집하러 다닌다는 소식을 영신의 편지로 안 동혁은,

"건강을 해치도록 너무 무리하게는 일을 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오늘만 살고 말 몸이 아니기 때문이외다. 그저 칡덩굴처럼 줄기차게 뻗어 나가고, 황소처럼 꾸준하게만 우리의 처녀지를 갈며 나가면 끝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몇 번이나 간곡히 건강을 주의하라는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러한 편지는, 도리어 달리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듯 영신으로 하여금 한층 더 용기를 돋우게 하고 분발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생각다못해서, 기부금을 십 원이고 이십 원이고 적어 놓고 이핑계 저핑계로 내지 않는 근처 동리의 밥술이나 먹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찾아다녔다. 그 중에도 번번이 따고 면회를 하지 않는 한낭청이란 부잣집에는,

'어디 누가 못 견디나 보자.'

하고 극성맞게 쫓아가서는 기어이 젊은 주인을 만나 보고 급한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여보 이건 빚 졸리기버덤 더 어렵구려. 글쎄 지금은 돈이 없다는데 바득바득 내라니, 그래 소 팔구 논 팔어서 기부금을 내란 말요? 온, 우리집 자식들이 한 놈이나 강습손가 허는 델 댕기기나 허나!"

하고 배를 내민다. 영신은 참다못해서 속으로,

'에에끼 제 배때기밖에 모르는 놈 같으니. 그래두 술 담배 사먹는 돈은 있겠지.'

하고 사랑마당에다 침을 탁 뱉고 돌아선 때도 있었다. 이래저래 영신은 근처 동리의 소위 재산가 계급에게는 인심을 몹시 잃었다.

"어디서 떠들어온 계집이 그 뻔새야. 기부금에 병풍상성을 해서 쏘댕기니. 온, 나중엔 별꼴 다 보겠군!"

하고 귀먹은 욕을 먹었다. 그와 동시에 주재소에서는, 주의를 시켰는데도 또 기부금을 강청한다고 다시 말썽을 부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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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이가 떠나기로 작정한 전날 밤은 달이 유난히 밝았다. 열나흗날 달이 어지간히 기운 것을 보니 자정도 가까운 듯. 다른 사람들은 초저녁에 다 와서 작별을 하고 갔고, 건배의 아낙은 영신이가 친정에나 왔다가 가는 것처럼 수수엿을 다 고아 가지고 와서 눈물로 작별을 하고 갔건만, 동혁이만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점심때 집에 볼일이 있다고 잠깐 다녀는 갔으나 동화의 말을 들으면 집에는 종일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영신은,

'한마디래두 꼭 허구 가야만 할 말이 있는데…….'

하고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눈이 까맣게 기다리다가,

'내일 아침에야 일찌감치 오겠지.'

하고 누웠었다. 서창을 물들이는 달빛은 이런 걱정 저런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영신을 문 밖으로 꾀어 내었다. 그는 바스켓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던 조그만 손풍금을 꺼냈다. 그것은 ××여고보를 우등 첫째로 졸업한 상품으로 미스 필링스란 서양 여자가 선사한 것이다.

영신이가 이곳에 온 뒤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거닐던 바닷가 백사장에는 하아얀 모래가 유리 가루처럼 반짝이는데, 그 모래를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난다. 옷 속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이 조금 산산하기는 하나 바람 한 점 일지를 않는다.

영신은 외로운 그림자를 이끌며 가만가만히 손풍금을 뜯으면서 그 모래 위를 거닐려니 영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노래가 저절로 입을 새어 나왔다. 그 노래는 드리고의 '세레나데(小夜曲)'였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찬송가나 동요 같은 노래 이외에 애틋한 사랑을 읊은 노래라든가, 조금이라도 유흥 기분이 떠도는 유행가는 귀에 익도록 들으면서도 입 밖에 내기는 삼가 왔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저녁은 즉흥적으로 드리고나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의 애련한 영탄적(詠嘆的)인 노래가 줄달아 불러졌다.

처음에는 입 속으로만 군소리하듯 불러 보던 것이 차츰차츰 그 소리가 높아져서, 무섭도록 고요한 깊은 밤 해변의 적막을 깨트리다가는 가느다랗게 뽑아내리는 피아니시모에 영신은 '내가 성악가나 될 걸 그랬어' 하리만치, 제 목소리가 오늘 저녁만은 은실같이 곱고 꾀꼬리 소리만치나 청아한 듯이 제 귀에 들렸다.

머리를 들면 황금가루 같은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머리를 숙이면 그 달빛을 실은 물결이 천조각 만조각으로 부서지며 눈과 영혼을 함께 황홀케 한다. 다시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면, 풀솜 같은 구름 속으로 숨바꼭질을 하는 달 속에는, 쓸쓸한 방구석에 홀로 누워 외딸을 그리는 어머니의 눈물에 젖은 얼굴이 비치는 것 같고, 기다란 한숨과 함께 머리를 떨어뜨리면, 닦아 놓은 거울 같은 바다 위에 꿈에도 잊히지 못하는 고향산천이 아련히 떠오른다.

영신은 백사장에 펄썩 주저앉으며 눈을 꽉 감았다. 이번에는 무형한 그 무엇이 젖가슴을 치밀어 오른다.

'아이,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제 마음을 의심도 해보았다. 이제까지 참고 눌러 왔던 청춘의 오뇌에 온몸이 사로잡히자, 영신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한 마디는,

'하나님, 제가 그이를 사랑해도 좋습니까?'

하는 독백이었다. 영신은 다시 부르짖듯이 신앙의 대상자에게 호소한다.

'하나님, 일과 사랑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주시옵소서. 저의 족속의 불행을 건지기 위해서 이 한몸을 바치겠다고 당신께 맹세한 저로서는, 지금 두 가지 길을 함께 밟을 수가 없는 처지에 부닥쳤습니다. 오오, 그러나 하나님, 저는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영신은 모래 위에 푹 엎드러졌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에 번지는 모래를 으스러지라고 한 움큼 움켜쥐고서…….

어디서 무엇에 놀라서 날아가는지 물새 한 마리가 젖을 보채는 어린애처럼 삐액― 삐액― 하고 울면서 머리 위를 지나간다.

영신은 고독과 적막이 등허리에 서리를 끼얹는 듯해서 진저리를 치고는 발딱 일어나면서 치맛자락의 모래를 활활 털었다.

그 외롭고 적적한 생각을 잠시라도 헤쳐 버리려고 곁에 동댕이를 쳤던 손풍금을 다시 집어 들고 감흥에 맡겨 열 손가락을 놀리며 저도 모를 곡조를 한바탕 뜯었다. 누가 곁에 있어서 그 음보를 그대로 오선지에 기록했더면, 혹시 '헝가리인의 광상곡' 같은 작품이 이루어졌을는지도 모르리라.

그는 풍금 타던 손을 쉬고 다시금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였다. 바로 영신의 등뒤에 솟은 바위 위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괴물과 같이 나타나더니,

"저…… 그 곡조 한 번만 더 타주세요!"

하는 굵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깜짝야!"

영신은 두 손을 짝 벌리며 오금에 용수철이나 달린 듯이 발딱 일어섰다. 전신에는 소름이 쪽 끼쳤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아 시꺼먼 그림자의 정체가 눈앞에 드러나자,

"난 누구라구요.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놀래 주세요?"

영신은 반가움과 원망스러움에 반죽이 된 표정으로 동혁을 살짝 흘겨본다. 동혁은 빙긋이 웃으며 저벅저벅 걸어서 영신의 앞에 와 선다.

"놀라긴 내가 정말 놀랐어요. 이 밤중에 어디루 가셨나 허구, 빈방 속에서 한참이나 기다렸는데……."

"풍금 소릴 들으시구 여?는 줄 아셨군요?"

"네, 독창회에 방해가 될까 봐 저 바위 그늘에서 입장권두 아니 사구 근청을 했지요."

그 말에 대낮 같으면 영신의 얼굴이 석류처럼 빨개진 것을 볼 수 있었으리라.

잠시 이성을 잃었던 모든 동작과 미쳐 날듯이 목청껏 부른 노래를, 동혁이가 지척에서 보고 들은 생각을 하고 열적고 부끄러워서 영신이가 얼굴을 붉힌 것뿐이 아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안타까이 하나님을 부르며 '일과 사랑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택해 줍소서!' 하고 빌던 그 상대자가 뜻밖에 유령과 같이 눈앞에 나타난 데는 형용키 어려운 신비를 느꼈다. 신비스럽다느니보다도 폭풍우처럼 뒤설레던 감정이 짓눌리고 머리가 저절로 수그러지리만치 엄숙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앉으십시다."

동혁은 바위 아래 모래밭을 가리키고 저 먼저 앉으며 두 무릎을 끌어앉고는 바다 저편을 바라다본다. 아득한 수평선을 따라 일렬로 주욱 깔린 것은 달빛을 새우는 듯한 새우잡이 중선의 등불들이다. 아까까지 영신은 그 불을 얕은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리 와 앉으시라니까요."

눈을 내리감고 발끝으로 모래를 허비적거리며 서 있는 영신을 돌려다보고 동혁은 명령하듯 한다.

"네……."

영신은 들릴 듯 말 듯하게 대답을 하고 동혁의 곁에 가 치맛자락을 휩싸쥐고 앉는다. 오늘 밤만은 동혁의 어떠한 요구에든지 순종하려는 듯이…….

"차차 바람이 이는데 춥지 않으세요?"

"아아뇨."

바닷가의 밤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해감내를 머금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해서, 이슬에 촉촉히 젖은 몸이 감기나 들지 않을까 하고 동혁은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온몸의 피를 끓이며 노래를 목청껏 부르던 영신은 도리어 홧홧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인제 오셨어요? 오늘 밤엔 못 만날 줄만 알었었는데……."

"한 이십 리나 되는 데 누굴 좀 만나 보려구 찾아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그럼 여태 저녁두 안 잡쉈게요?"

"주막거리서 요기를 해서 시장허진 않어요."

"무슨 급헌 일이 생겼어요?"

"급허다면 급허지만……."

하고 동혁은 더 자세한 대답을 하기를 피하느라고,

"참 달두 밝군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서녘 하늘을 쳐다본다.

볕에 그을어 이글이글하게 타는 듯하던 얼굴과 그 건장한 몸뚱이를 기울어 가는 창백한 달빛이 씻어내린다. 파르스름한 액체와 같은 달빛이.

영신은 다시 무슨 생각에 잠겨 동혁의 커다란 그림자가 저의 눈앞에 가로 비친 것을 들여다보고 잠자코 있다. 조금 전까지도 외로움과 쓸쓸함을 못 견디어 바람모지에 외따로 선 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던 영신은, 동혁이가 와서 제 곁에 턱 앉은 것이 큰 바위 속에다가 뿌리를 박은 것만치나 신변이 든든한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애상적이던 기분은 구름과 같이 흩어지고 안개처럼 스러졌다. 다만 동혁의 윤곽만이 점점 뚜렷하게 커져서 제 몸이 그 그늘 속으로 차츰차츰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 환각을 느낄 따름이다.

한참 만에 동혁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 오실 때 편지에 꼭 친히 만나서 의논헐 말씀이 있다구 그러셨지요? 그걸 지금 말씀해 주시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게 우리헌텐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

"내일은 그예 떠나신다니 또 만날 기회가 졸연치 않을 것 같은데, 꼭 해주실 말씀이건 지금 허시지요."

"……"

영신의 머리는 수그러만 드는데, 동혁의 눈은 점점 탐조등처럼 빛난다.

"왜 말씀을 못 허세요? 무슨 말인지 시원스럽게 해버리시지요. 나두 허구 싶은 말이 있는지두 모르니까요……."

영신은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동혁 씨가 허구 싶으신 말씀버텀 먼저 해주세요."

"아아니, 내가 먼첨 물었으니까, 영신 씨버텀 대답을 허실 의무가 있지 않겠에요?"

"그래두 먼첨 해주세요. 권리니 의무니 허구 빡빡허게 구실 거 없이……."

영신의 목소리에는 소녀와 같은 응석조차 약간 섞였다.

"그건 안 될 까닭이 있에요. 언권을 먼저 드리지 않으면 분개허시는 성미를 잘 알구 있으니까요."

그 말 한마디에 이태 전 ××일보사 주최의 간친회 석상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과, 악박골서 밤을 새우던 때의 정경이 바로 어제런 듯 주마등과 같이 두 사람의 눈앞을 달렸다. 그것은 두 사람의 평생을 두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무한히 정다운 추억이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불시에 몸과 마음이 더한층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혁은 더 우기지 않았다. 남자의 자존심으로가 아니라, 그런 말을 강제로 시키기가 가엾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이번만은 내가 지지요."

하고 동혁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어째서 그런지 몰라두, 내가 영신 씨헌테 허구 싶은 말이나 영신 씨가 나헌테 꼭 허구 싶다구 벼르면서두 얼핏 입 밖에 내지를 못 허는 말은 그 내용이 비슷헌 것 같은데…… 영신 씨 생각은 어떠세요?"

"……"

"아아니, 말대답이나 시원스럽게 해주셔야지요."

하고 동혁은 달려들기라도 할 형세를 보인다. 영신은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저 역시두 한평생에 제일 중요헌…… 우리의 운명이 좌우되는 그런……."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떠듬떠듬 토막을 친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무슨 일에나 앞장을 서고 누구에게나 지지 않으려는 성벽이 대단한 영신이건만, 오늘 저녁 이 자리에서만은 꽃을 부끄리는 처녀의 속탈을 벗지 못한다.

"아마 연애나 결혼 문제루 퍽 고민을 허시는 중이시지요?"

동혁이가 불쑥 내미는 말이 정통으로 들어가 맞히니까,

"……"

무언중에도 영신의 온몸의 신경은 불에나 닿은 것처럼 움찔하고 자지러들었다.

"나두 그런 문제로 적지 않이 괴롭게 지내는 중이에요. 늙으신 부모의 성화가 매일 같어서 그것두 어렵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몹시 외로울 때가 있에요. 억지루 일을 해서 잊어버리려구는 애를 써두 나만치 건강한 남자가, 언제까지나 독신으루 지낸다는 건 암만 생각해두 부자연헌 것 같아서……."

하고 발꿈치로 조약돌을 부벼서 으깨며 말을 멈추고는 영신을 흘낏 곁눈으로 흘려본다. 영신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다가 글씨를 썼다 지웠다 한다.

"영신 씨!"

동혁은 새삼스러이 저력 있는 목소리로 숨쉬는 소리가 서로 들릴 만치나 가까이 앉은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네?"

영신은 하얀 이마를 들었다.

"멀구두 가까운 게 뭘까요?"

끝도밑도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말에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무어라고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글쎄요…… 사람과 사람의 사일까요?"

하고 동혁의 표정을 살핀다.

"알 듯허구두 모르는 건요?"

"아마…… 남자의 맘일걸요."

그 말 한마디는 서슴지 않았다.

"아니, 난 여자의 맘인 줄 아는데요."

동혁의 커다란 눈동자는 영신의 가슴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하다.

달은 등뒤의 산마루를 타고 넘으려 하고 바람은 영신의 옷깃을 가벼이 날리는데, 어느덧 밀물은 두 사람의 눈앞까지 밀려들어와 날름날름 모랫바닥을 핥는다.

"……"

"……"

굴 껍데기로 하얗게 더께가 앉은 바위에 찰싹찰싹 부딪히는 파도 소리뿐…… 온 누리는 아담과 이브가 사랑을 속삭이던 태곳적의 삼림 속 같은 적막에 잠겨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형체 없는 영혼만은 무언중에도 가만히 교통한다. 똑같은 고민과 오뇌로 다리를 놓고서…….

영신은 앉아서 꿈을 꾸는 사람처럼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어서……."

간신히 한마디를 꺼내고는 말끝을 맺지 못하더니,

"제 사정은 대강 아시는 터이지만, 얼마 전에 어머니가 청석골까지 다녀가셨어요. 제에발 고만 시집을 가라구 이틀 밤이나 꼬박이 새워 가며 빌다시피 허시는 걸 끝끝내 시원헌 대답을 못 해드렸어요."

"그래서요?"

"그랬드니, 나중엔 '네가 이 홀어미 하나를 영영 내버릴 테냐'고 자꾸만 우시는 데는 참 정말 뼈를 깎어 내는 것 같어서……."

영신은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참느라고 이를 악문다.

"그렇게 언짢어허실 게 뭬 있어요? 얼른 결혼만 허시면 문제는 다 해결이 될걸요."

하고 동혁은 일부러 비위를 긁어 주면서도 그 다음 말이 궁금해서 영신의 곁으로 다가앉는다.

영신은 남자를 원망스러이 흘낏 쳐다보고는 다시금 주저주저하다가 버쩍 용기를 내어,

"저…… 보통학교에 댕길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혼인을 정해 두신 남자가 있었어요."

이 말을 듣자 동혁의 눈은 금방 화등잔만해졌다.

이제까지 사사로운 이야기는 일부러 해오지를 않던 터이나, 영신에게 약혼한 남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아, 약혼헌 사람이 있에요?"

제아무리 침착한 동혁이라도 저도 모르는 겨를에 이 말 한마디가 입 밖을 튀어나오는 것을 틀어막을 겨를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영신의 태도는 매우 침착해진다.

"어려서버텀 한동리에 자라나서 저두 그이를 잘 알어요. 김영근(金永根)이라구 시방 황해도 어느 금융조합에 취직을 했는데, 사람은 퍽 얌전해요."

하는데, 그 사이에 제가 너무 당황해하는 눈치를 보인 것을 뉘우친 동혁은, 영신의 말을 자아내는 수단으로 얼른 말끝을 채뜨려,

"그만허면 조건이 다 구비허군요."

하고는 시치미를 딱 갈기고 외면을 한다. 영신은 대들어서 동혁의 넓적다리를 꼬집기라도 하려는 자세를 보이다가,

"글쎄 그렇게 사람을 놀리지만 마시구 들어 보세요. 대강만 얘기를 허께요."

하고는 다시 바다 저편의 고기잡이 등불을 바라보다가,

"그런데 그이는 내가 자기허구 꼭 결혼을 헐 줄만 믿구 있거든요. 지난 겨울엔 일부러 휴가를 맡어 가지구 찾어왔었는데, 이말 저말 해 가며 속을 떠보니까 농촌운동 같은 데는 털끝만치두 이해가 없구요. 그런 덴 취미까지두 없어요."

"그래두 어떠헌 생활의 목표는 있겠지요."

"그저 월급이나 절약을 해서, 한 달에 얼마씩 또박또박 저금을 했다가, 그걸루 결혼비용을 쓰자는 것……."

그 말에 동혁은,

"아무렴 그래야지요. 현대는 금전만능시대니까요. 거 일찌감치 지각이 난 청년이로군."

하고 시골 늙은이처럼 매우 탄복을 한다. 남은 진심으로 하는 말에 한편에서는 자꾸만 이죽거리며 씨까스르기만 하니까 영신은 발끈하고 정말 성미가 났다.

"아아니, 그렇게 조롱만 허시는 법이 어딨어요? 난 인전 암말두 안 헐 테야요!"

하고 톡 쏘아붙인다. 그러나 그 말쯤에 노염을 탈 동혁이가 아니다.

"아아니, 이건 결혼 얼른 못 허는 화풀이를 내게다 허시는 셈이에요?"

하고 더한층 핀둥핀둥해진다.

동혁은 조바심이 나리만치나 영신과 약혼한 남자와의 사이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궁금하였다. 아무리 저에게는 가림새 없이 모든 것을 터놓고 말하는 터이지만 남녀간의 관계에 들어서는 자연 은휘하는 일이 있을 것이 의심스럽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남자에게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인이나 붙잡아다 앉혀 놓고 심문을 하는 것처럼 빡빡하게 물어 보면 실토를 하지 않을 듯도 해서, 일부러 농담을 하듯 하며 능청스러이 상대자의 속을 떠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영신이가 정말 입을 다물어 버려서 형세가 불리하니까,

"그건 다 웃음엣말이구요…… 남의 일 같지가 않으니 말이지, 그럼 그 사람은 장차 무슨 일을 허구 싶다는 거예요?"

하고 점잖게 묻는다. 그래도 영신은 성적한 색시처럼 눈을 꼭 내리감고는 입을 열려고 들지를 않는다.

"허어, 이거 정말 화가 나셨군요. 그러지 말구 어서 말씀허세요. 달이 저렇게 기울어 가는데……."

하고 동혁은 얼더듬으려고 든다.

"금융조합에서 한평생 늙을 작정이야 아니겠죠."

영신은 그제야 조금 풀린다.

"암, 그야 그럴 테지요."

"돈이 좀 모이면 장변이래두 놔서 늘려 가지구 잡화상을 하나 내구서, 생활 안정을 얻자는 게 그이의 고작 가는 이상이야요. 돈벌이를 허는 것밖에 우리루선 헐 노릇이 없다는 게 일테면 그이의 사상이구요."

"그만허면 짐작허겠에요. 요컨대 어머니께선 그런 착실헌 사람을 데릴사위처럼 얻어서 늙으신 몸을 의탁허구, 인젠 딸의 재미를 좀 보시겠다는 게지요?"

"그런 눈치야요."

동혁은 무엇을 궁리할 때면 으레 하는 버릇으로 두 눈을 꿈벅꿈벅하고 있다가 신중한 어조로,

"그럼, 워낙 주의나 이상은 맞지 않드래두, 그 사람헌테 혹시 애정을 느껴 보신 적은 있기가 쉬울 듯헌데……."

하고 가장 중요한 대문을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은 뻗었던 두 다리를 오그리고 치마를 도사리며,

"어려서버텀 봐오던 사람이니까 딱 마주치면 무조건허구 반갑긴 해요."

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그렇지만, 난 누구헌테나 입때까지…… 저어 동혁 씨를 만나기 전까지두……."

하고는 저고리 고름을 손가락에다 돌돌 감았다 폈다 한다. 동혁이도 자리를 고쳐 앉더니 영신의 얼굴을 면구스럽도록 똑바로 들여다보며,

"영신 씨는 어머니를 위해서 사랑이 없는 남자에게 한평생을 희생해 바칠 그런 봉건적인 여자는 아니겠지요?"

하니까,

"그런 말씀은 물어 보실 필요두 없겠죠."

하고 영신은 자존심을 상한 듯이 자신 있는 대답을 한다.

"그럼 앞으로 어떡허실 작정이세요?"

"그이허구는 단념허겠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미련은 남겠단 말씀인가요?"

"아아뇨."

"그러문요?"

"……"

동혁은 영신이가 경솔히 대답하지 못하는 심중을 약빨리 눈치채지 못할 만치 미욱하지 않았다.

"그럼 내 태도를 보신 뒤에 좌우간 결단을 허시겠단 말씀이지요?"

동혁이도 자신 있게 다져 묻는다. 그 말에 영신의 입에서는 분명히,

"네!"

하고 한마디가 서슴지 않고 떨어졌다.

동혁은 불시에 그 무엇이 마음속에 뿌듯하도록 꽉차는 것을 느꼈다. 그 만족감은 물에 불어 오르는 해면처럼 또는 한정 없이 부풀어 오르는 고무풍선처럼 당장 터질 듯 터질 듯하다.

동혁은 벌떡 일어섰다. 팔짱을 꽉 끼고 달빛에 뛰노는 바다를 바라다보고 섰노라니, 그 바다의 물결은 커다란 용광로 속에서 무쇠가 녹은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 보인다. 바다 위가 아니라 바로 저의 가슴 한복판에서 용솟음치는 정열을 눈앞에 보는 듯하였다.

한 십 분 동안이나 동혁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눈앞에서 조각돌만 탁탁 걷어차면서 왔다갔다하였다. 그러다가 사기 단추와 같이 손 집는 데가 반짝거리는 손풍금을 집어 들더니,

"아까, 그 곡조 한 번만 더 타주세요."

하고 영신의 치마 앞에다 떨어뜨린다.

영신은 마지못해서 풍금을 받아 들면서도,

"얘기를 허다 말구 이건 뭘요?"

하고 뒤설레는 마음을 진정하느라고 몸둘 곳을 몰라하는 동혁을 쳐다본다.

"글쎄 특청이니 두말씀 말구 타주세요."

이번에는 반쯤 명령하듯 한다. 영신은 그만 청을 거역하기가 어려워서 풍금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면서,

"아까 그건요, 되나 안 되나 함부루 타본 건데 나두 무슨 곡존지 잊어버렸어요."

하고 고개를 외로 꼬더니,

"왜 우리가 다 아는 훌륭헌 곡조가 있지 않어요. 난 어딜 가서든지 동혁 씨와 한곡리 생각이 나면 이 곡조를 탈 테야요."

말이 끝나자 영신은 찬찬히 팔을 폈다 오므렸다 한다. 그 곡조는 시작만 들어도 '애향가'다. 그러나 조기회 때에 부르는 것과는 딴판으로 느릿느릿하게 타는 그 멜로디는, 가늘게 떨며 그쳤다 이었다 하는 것이 무엇을 호소하는 듯이 몹시 애련하다. 이 밤만 밝으면 기약 없는 길을 또다시 떠나는, 그 애달픈 이별의 정을 조그만 악기 속에 가득히 담았다 흩었다 하기 때문인 듯.

허공에 얼굴을 쳐들고 두 눈을 딱 감고 섰던 동혁은 듣다못해서,

"그만 집어칩시다!"

하고 외친다. 그래도 얼른 그치지를 않으니까, 와락 달려들어 손풍금을 빼앗더니 백사장에다 동댕이를 친다. 영신은 어쩐 영문인지를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입을 조금 벌린 채 동혁의 눈치만 살핀다.

동혁은 술이 몹시 취한 사람처럼 앞을 가누지 못하더니, 그 유착한 몸이 푹 엎으러지자 영신의 소담한 손등은 남자의 뜨거운 입김과 축축한 입술을 느꼈다. 영신은 온몸을 달팽이처럼 오므라뜨리고는 눈을 사르르 내리감고 있다가,

"참 이 바닷가엔 왜 해당화가 없을까요?"

하고 딴전을 부리며 살그머니 손을 빼어 내려고 든다. 그러나 그 손끝과 목소리는 함께 떨려 나왔다.

동혁은 두 팔로 영신의 어깨와 허리를 버쩍 끌어안으며,

"해당화는 지금 이 가슴속에서 새빨갛게 피지 않었에요?"

하더니 불시의 포옹에 벅차서 말도 못 하고 숨만 가쁘게 쉬느라고 들먹들먹하는 영신의 젖가슴에 한아름이나 되는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영신은 생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남자의 뜨거운 입술과 소름이 오싹오싹 끼치도록 근지러운 육체의 감촉에 아찔하게 도취되는 순간, 잠시 제정신을 잃었다.

동혁은 숨결이 차츰차츰 가빠 오고 두근두근하는 심장의 고동까지 입술이 닿은 손등과 그의 얼굴에 짓눌린 가슴을 통해서 자릿자릿하게 전신에 전파된다.

영신은 조심스러이 손 하나를 빼어, 목사가 세례를 주는 것처럼 부스스하게 일어선 동혁의 머리 위에 얹으며,

"고만 일어나세요. 네?"

하고 달래듯이 가만히 흔들더니,

"나두요, 동혁 씨의 고민을 말씀허지 않어두 잘 알구 있어요. 동혁 씨가 내 맘을 잘 이해해 주시는 것처럼―--- 그러기에 이태 동안이나 그닥지 그리워하던 당신께 제 사정을 하소연허려구 일부러 온 거야요. 이 세상에 다만 한 분인 동지헌테, 제 장래를 의논허려구요……."

동혁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지독하게 마취를 당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눈물에 어린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영신 씨를 언제까지나 동지로만 사귈 수가 없에요. 그것만으로는 만족헐 수가 없에요!"

하고는 또다시 그 돌공이 같은 팔로 영신의 허리를 끊어져라고 껴안는다.

영신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서 손에 힘을 주어,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흥분허시면 못써요. 우리 냉정허게시리 얘기를 허십시다."

하면서 허리에 휘감긴 동혁의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리고는,

"어쩌면 저 역시두 동지로 교제허는 것만으룬 만족헐 수가 없는지두 모르지요. 그렇지만 그 문제를 백번 천번이나 생각해 봤는데……."

"어떻게요?"

동혁은 머리를 숙인 채 매우 조급히 묻는다. 영신은 조금 떨어져 앉아서 잠시 머릿속을 정돈시킨 뒤에 입을 연다.

"연애를 허는 데 소모허는 정력이나 결혼생활을 허느라구 또는 개인의 향락을 위해서 허비되는 시간을, 온통 우리 사업에다 바치구 싶어요. 난 내 몸 하나를 농촌사업이나 계몽운동에 아주 희생허려구 하나님께 맹세까지 헌 몸이니깐요."

"그러니까 그렇게 굳은 결심을 허구, 실지로 일을 해나가는 사람끼리 한몸뚱이루 뭉쳐서 힘을 합허면, 곱절이나 되는 효과를 얻지 않겠에요? 백지장두 마주 들면 낫다는데…… 영신 씨를 만난 뒤버텀 나는 줄창 그런 생각을 허구 있었는데요. 어느 기회에 나를 따러와 주실 줄을 나 혼자 믿구 있었던 것두 사실이구요."

"왜 낸들 그만 생각이야 못 해봤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교제가 이버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필경은 결혼 문제가 닥쳐오겠죠?"

"그럼 언제꺼정 독신생활을 허실 작정이신가요?"

영신은 그 말대답을 주저하고 손풍금을 집어 들고 어루만지며,

"이걸 나헌테 선사헌 미스 필링스란 서양 부인은, 미개헌 나라에 와서 별별 고생을 다 해가면서 우매한 백성을 깨우쳐 줄 양으루 오십이 넘두룩 독신생활을 허구 있어요. 그런 여자의 생활이야말루 거룩하지 않어요. 깨끗허지 않어요?"

"그 사람네와 우리와는 환경이 다르구 처지도 다르지요. 영신 씨가 그런 사람의 본을 떠서 독신생활을 해보겠다는 건, 우리의 현실이 허락지 않는 아름다운 공상에 지나지 못헐 줄 알어요."

"그러니깐 남몰래 살이 내리두룩 고민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두 못 허고 저렇게도 헐 수가 없으니깐……."

"그런 경우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허지 말구 양단간 결단을 내야만 허지요."

"그만헌 결단성이 없는 건 아니야요. 그렇지만 난 청석골을 떠날 수가 없어요. 나를 낳어 준 고향버덤두 더 정이 들었고요. 나 하나를 무슨 천사처럼이나 알어주는 그 고장 사람들을, 그 천진난만헌 어린이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요!"

"저엉 그러시다면 당분간 내가 청석골 천사헌테 데릴사위로 들어갈까요? 나 역시 이 한곡리에다가 뼈를 파묻으려는 사람이지만……."

하고 시꺼먼 눈을 끔쩍끔쩍한다. 영신은,

"호호호, 그건 참 정말 공상인데요."

하고 동혁의 무릎을 아프지 않게 치며 별 하늘을 우러러 명랑히 웃었다.

"……"

"……"

동혁이도 덩달아 웃는 체하다가, 속으로는 갑갑해 못 견디겠는 듯이 다시금 벌떡 일어선다. 한참 동안이나 신부리로 바위를 툭툭 걷어차기도 하고 돌멩이를 집어 팔매도 치면서도,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비장한 결심을 한 듯이 다시 돌아와 영신의 앞에 가 바싹 다가앉으며 손가락 셋을 펴들더니,

"자, 앞으로 삼 년만 더!"

하고 부르짖으며 영신의 턱밑을 치받치듯 한다.

"인제 삼 개년 계획만 더 세우구 노력허면 피차에 일터가 단단히 잡히겠지요. 후진들헌테 일을 맡겨두 될 만치 기초가 든든히 선 뒤에 우리는 결혼을 허십시다. 그러구는 될 수 있는 대루 좀더 공부를 허면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허십시다!"

하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영신 씨!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 테지요, 네? 꼭 기다려 주실 테지요?"

하고 영신의 두 손을 잡고 으스러지도록 힘을 준다.

"삼 년 아니라 삼십 년이래두…… 이 목숨이 끊……."

하는데 별안간 영신의 입술은 말끝을 맺을 자유를 잃었다.

지새려는 봄 밤, 잠 깊이 든 바다의 얼굴을 휩쓰는 쌀쌀한 바람이 쏴― 하고 또 쏴― 하고 타는 듯한 두 사람의 가슴에 벅차게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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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살포라뇨?"

영신이도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고목이 된 대추나무가 얼크러진 큰마을 편을 바라본다. 옥색 저고리를 입은 호리호리한 사나이가 안경을 번쩍거리며 기다란 살포를 지팡이삼아 짚고 언덕길을 어슬렁거리고 내려온다.

"살포는 감농이래두 헐 줄 아는 사람이 물꼬나 보러 댕기는 데 쓰는 건데요, 저 사람은 일년 감이 열린 걸 보구 '거 감자 탐스럽게 열렸군' 허던 출신이, 살포를 건성 휘두르며 댕겨서 건살포라구 별명을 지었어요."

입바른 소리 잘 하는 동화의 대답이다.

"저 사람이 누군데요?"

영신은 새신랑처럼 옥색 저고리를 입은 인물에게 호기심을 일으키며 물었다.

"성님헌테 들으셨겠지만, 저 강도사 집의 둘째아들 기만(基萬)이에요. 동경 가서 어느 대학엘 댕기다가 무슨 공부를 그렇게 지독허게 했는지 신경쇠약이 걸려 나왔다나요."

"네, 그래요? 그럼 이 근처선 제일 공부를 많이 헌 청년이로군요."

"그런 셈이지요. 헌데 자제가 아주 노새예요."

"아아니, 노새가 뭐야요?"

하고 영신이가 채쳐 묻는 말에 동화는 무심결에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놓고는 말대답을 얼른 못 하고 픽픽 웃기만 한다. 노새는 말과 당나귀 사이에 난 튀기인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물건이 명색만 달렸지 생식은 못 하는 동물이라는 것까지는 영신이가 모르고 있었다. 이 동리 청년들끼리 엇먹는 수작으로 허울만 좋지그려, 아무짝에 소용이 닿지 않는 인물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영신은 어렴풋이 '기만'이란 사람을 놀리는 말이거니 하고 더 묻지를 않았다.

기만이는 언덕에 살포를 꽂고 왼팔은 하느르르한 회색 바지를 입은 허리춤에 찌르고 서서 여러 사람의 일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섰다. 무슨 풍경화나 감상하는 듯한 자세를 짓고 선 것이 몹시 아니꼬워 보여서 그것만 보아도 비위가 뒤집히는 듯,

"병이 났습네 허구 영계만 실컨 과먹구 나니까 게트림이 나는 게지. 저 작자가 어슬렁거리구 댕기는 꼴은 뒀다가 봐두 눈꼴이 틀리드라."

하고 동화는 저 혼자 투덜거린다. 곁에서 말뚝을 박고 있던 형은,

"아서라, 오다가 다 들을라. 귀먹은 욕두 그만큼 먹였으면 고만이지 그렇게 원수 치부를 헐 게야 뭐 있니? 제 딴엔 우리헌테 허느라구 허는걸."

하고 아우의 험구를 틀어막는다. 이번에는 건배가 영신의 곁으로 와서 바지에 흙탕물이 튀어서 말라붙은 것을 부벼 털면서 기만이가 앉은 언덕 위를 흘끔 쳐다보더니,

"그래두 저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저의 아버지나 형헌테 대면 없는 사람들을 꽤 동정허는 셈이에요. 이 논 닷 마지기를 우리헌테 도지루 얻어 주려구, 담배씨루 뒤웅박을 파려고 드는 제 형허구 쌈을 다 했으니까요. 겉탈인지 몰라두, 우리가 허는 일을 여간 찬성을 허지 않어요. 이따금 우릴 청해서 그 집엘 가는 날이면 이밥에 고기 반찬에 한밥 잘 먹여서 소복을 단단히 허구 나오는데, 저 동화허군 아주 옹치거든요. 술만 먹으면 '요샛세상에 양반이 무슨 곤장을 맞을 양반이냐'구 들이대기를 일쑤하는데 그뿐이면 좋게요. 실컨 얻어먹구 나선 들어 두라는 듯이 허는 소리가 '제에길 요까짓 걸루 어름어름 우리 비위를 맞추려구, 몇 대를 두구서 저희가 우리를 빨어먹은 게 얼만데…… 그걸 다 토해 노려면 안직 신날두 안 꼬았다' 허구 건주정을 한바탕씩 허니 누가 듣기 좋다나요. 저 사람두 동화라면 딱 질색이건만, 그럴수록 극성맞게 쫓어다니며 성화를 받쳐서 아주 학질을 떼지요, 여간한 심술패기라야지……."

"그렇게 혈기 있는 청년두 있어야 해요. 급헌 때면 그런 사람이 앞잡이 노릇을 하니깐요."

하고 영신은 동화가 멀찌감치 서 있는 것을 보고 칭찬 비슷이 하고는,

"그런데 여긴 지금두 양반 상놈이 있나요?"

하고 묻는데, 어느 틈에 기만이가 언덕을 내려와서 영신이가 앉은 맞은편 논둑에 가 버티고 섰다. 여학생이 동혁이를 찾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하려고 나왔는지도 모른다. 기만이가 가까이 오자 동혁의 형제는 못 본 체하고 돌아섰는데, 일하던 사람 중의 반수 이상은 그 앞으로 가서 허리를 굽히고,

"구경 나오셨에유?"

하고 손길을 마주 부빈다. 그들은 강도사 집의 작인들이나 그렇지 않으면 돈을 얻어 쓴 사람의 자질들인 것이다.

기만이는 바지춤에 손을 찌른 채 여러 사람이 인사를 하는 대로,

"응, 응."

하고 코대답을 할 뿐이다. 논 귀퉁이에다가 살포를 꽂고 우두커니 섰다가 석돌이란 회원을 손짓을 해서 부른다. 영신의 편으로 눈짓을 하며 무어라고 수군거리는 것이 '저게 동혁이를 찾아온 여자냐'고 묻는 눈치다. 석돌이는 말대답하기가 거북한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다가 일자리로 돌아간다.

영신이는 기만이가 맞은짝에서 안경 너머로 똑바로 건너다보고 섰는 것이 면구스러워서,

"난 저리루 거닐다 오겠어요."

하고 일어선다.

"나 허던 일은 다 했는데, 혼자 다니시다 길이나 잊어버리시게요."

하고 건배가 뒤를 대선다. 동혁은 책임상 일이 다 끝나기 전에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모양인데, 영신이 혼자 돌아다니라고 내버려두기도 안됐고 하던 이야기도 남아서 건배는 입이 궁금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기만의 등뒤를 돌아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논과 밭이 눈앞에 질펀히 깔렸는데 여기저기서 두레로 물을 푸는 소리와 소 모는 소리가 들린다. 한 서너 군데서나 못자리를 만드느라고 흰 옷 입은 농군들이 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이 보인다.

영신은 바위 틈에 홀로 피었다가 이운 진달래 잎사귀를 어루만져 주다가,

"참, 아까 양반 얘길 하다가 중동무이를 했죠?"

하고 먼저 말을 꺼내더니,

"그런데 저 기만이란 사람의 아버지, 무슨 도산가 허는 이는 뭘 하는 사람이야요?"

하며 잔디 위에 손수건을 깔고 앉는다.

남들은 다 벗고 들어서서 일을 하는데 저 혼자 외톨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듯 하기가 미안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료하기도 해서 이말 저말 묻는 것이다.

"합방 전해꺼정 금부의 도사라는 벼슬을 다녔다나요."

"금부라뇨?"

"지금으루 치면 경무국쯤 되겠는데, 도사란 건 경부 같은 거라지요. 아무튼 그 늙은이는 여태 노루꼬리만헌 상투를 달고 체수는 조그만히 빠쭈한 노랑 수염을 쓰다듬으며 도사리구 앉어서, 에헴에헴 헛기침을 허면서 위엄을 부리는 게 여불없는 염소지요. 헌데 체격은 고 모양이래두 목구녁 하나는 크거든요. 한참 망해 들어가는 판에, 부자들이나 장사치를 사뭇 도적놈으로 몰아서 옭아다가는, 주리를 틀구 기왓장 꿇림을 시켜서, 박박 긁어 모아 이 고장에 전장(田庄)을 장만해 가지구 내려왔대요. 내려와선 심심허다구 돈놀이를 허구, 장릿벼를 놔서, 이 근동에서 강도사의 돈을 안 얻어 쓴 사람이 하나두 없다고 해두 과언이 아니에요."

"멀쩡한 고리가시(고리대금업자)로군요."

"고리가시구말구요. 그 취리허는 법이나 장릿벼를 놔먹는 수단이 알구 보면 기막히지요. 그런데, 근자엔 '인젠 이 세상에 더 두구 볼 게 없다'구 매일 술로만 장복을 허다가 간이 뚱뚱 부었다나요. 그래서 살림두 기천(基千)이란 큰아들헌테 내맡기구선 꼼짝못허구 누웠에요."

"그래 저 오입쟁이 같은 사람이, 그 늙은이의 둘째아들이군요?"

"저 기만이라는 인물만은 그래두 해외 바람을 쏘여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 짐작은 허는지 저 딴엔 우리가 허는 일을 찬성두 허구 추렴두 몇 곱절이나 내는데……."

"그런 사람을 잘 이용허면 좋지 않아요? 가끔 기부금이나 뜯어 오구요. 청석골 근처에두 대학이니 전문학교니 졸업을 허구 와서, 저 건살포 모양으로 번들번들 놀면서 장거리루 술추렴이나 다니는 사람이 서넛이나 돼요. 우리가 허는 일을 헤살이나 놀지 말었으면 헐 뿐이지, 그 따위 고등 유민들헌테 기대허는 건 없지만요, 논밭 팔어 가며 공부헌 청년들이 다 그 뻔새로 건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걸 보면 여간 한심허지가 않어요."

하는데, 기만이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그 백납같이 흰 얼굴을 들고 어슬렁거리고 올라온다. 아마 영신이와 인사를 청하려고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많지요. 저 사람이 첨엔 자꾸만 우리 회엘 들겠다구 허니까, 동혁이 말이 '어느 시기까지는 누구나 다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구 찬성을 해서 입회를 시켰더니 얼마 동안은 '나두 상일을 해보겠다'구 저 딴엔 열심으로 따러댕겼는데……."

"그래서요?"

"저의 부형은 양반의 체면을 더럽히는 미친 자식이라구 야단을 치다못해, 아주 내버려두게까지 됐었에요. 장에서 새루 사온 괭이를 뻔쩍거리며 그루를 가는 데 덤벼들어서 하룻동안 덥적거리더니 이튿날은 고만 몸살이 나서 한 댓새나 된통으루 앓았대요. 저의 집에선 '이거 생자식 잡겠다'구 자동차를 가시키리(대절)해서 읍내의 공의를 다 불러오구 한참 야단법석을 했에요."

"참 정말 혼이 났군요."

"그뿐이면 좋게요. 저의 집 앞 채마전에서 한 반나절만 꿈지럭거리면, 그날 밤엔 행랑 계집들을 불러다가 '다리를 주물러라', '허리를 밟어라' 허구 죽는 시늉을 헌대요. 그나 그뿐인가요, '나두 농군들이 단꿀 빨듯 허는 걸 먹어 봐야 헌다'구 머슴들이 두레를 놀던 이월 초 하룻날은 지푸래기를 꽂아두 안 넘어가는 그 틉틉헌 수수막걸리를 두 사발이나 들이켜군 그만 배탈이 나서 한 사날 동안이나 설사를……."

하는데, 영신은 웃음을 참다못해서,

"고만요, 고마안."

하고 허리를 잡으며 손을 내젓는다. 건배의 수다에는 또다시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동혁은 기만이가 올라가는 것을 보자 앞질러 두 사람이 앉은 데로 올라왔다.

"자, 그만 우리집으루 내려가십시다."

하는데, 기만이는 살폿자루를 내두르며 뒤미처 올라왔다.

기만은 세 사람이 내려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동혁이더러 소개를 해달래서 영신이와 인사를 했다. 기만이는 영신이가 초면이건만 M대학 정경과의 졸업 논문을 쓰다가 신경쇠약이 걸려서 나왔다는 것과, 별안간 궁벽한 이 시골서 지내려니 갑갑해서 죽겠다는 것과, 그러나 이러한 동지들이 있어서 함께 일을 하니까 여간 의미 깊은 생활이 아니라고 일본말 조선말 반죽으로 건배의 다음 결은 갈 만치 씩둑꺽둑 늘어놓는다.

영신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그러세요? 네, 그러시구말구요."

하고 말대꾸를 해준다. '동지'라는 말만 해도 귀에 거친데, 함께 일까지 한다는 데는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응달에서만 지내서 하얀 살결과 안경 속에서 사람을 깔보는 듯한 조그만 눈동자며, 삶아 논 게발같이 가냘픈 손가락을 보니, 어쩐지 말대답을 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명주 옥색 저고리를 입은 것과 부사견 회색 바지를, 또 구두가 덮이도록 사복을 치뜨려 입은 것이 바로 보기 싫을 만치나 눈꼴이 틀렸다.

기만은 안 보는 체하면서도 영신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심심허신데 우리집으로 놀러 가시지요."

하면서 동혁을 돌려다보고,

"우리 동지들끼리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좋은 얘기나 듣구 싶은데……."

하고 양해를 구한다. 그는 영신이가 먼 데서 찾아온 귀한 손님이라고 대접을 하려는 것보다도, 몸이 비비 틀리도록 심심한 판에 동리에 처음으로 떠들어온 신여성을 불러다 놓고 하루 저녁 소견이나 하고 싶은 눈치다.

제가 거처하는 작은 사랑채를 말끔 중창을 하고 유리를 붙이고 실내를 동경 같은 데의 찻집을 본떠서 모던식으로 꾸며 논 것과, 또는 새로 사온 유성기를 틀면서 '이 시굴 구석에도 이만치 문화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 또 한편으로는 몇 해를 두고 이혼을 못 해서 죽느니 사느니 하던 본처를 월전에 쫓아보내서 영신이 같은 여자를 저의 집으로 한번 끌고 들어가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혁이가 얼른 말대답을 아니 하는 것을 보고 영신은,

"오늘 저녁은 저 동혁 씨 댁으루 가기로 먼저 약속을 했습니다."

하고 두말 못 하게 똑 잡아떼었다. 기만은 자존심을 상한 듯,

"그럼 여러 날 계실 테니까, 일간 다시 한번 청허지요."

하고 머리를 까딱해 보이더니 무색해서 내려간다.

"난 우리집에까지 따러 내려올 줄 알았더니…… 제가 헐 일 없는 생각만 허구, 줄줄 따러댕기는 덴 학질이야."

하고 동혁은 앞을 섰다. 건배는 휘적거리고 동혁의 뒤를 따라오다 말고 멋쩍은 듯이,

"여보게, 약국의 감초두 빠질 차롄가?"

하고 일부러 돌아서는 체를 한다.

"아따 이 사람, 화젓가락 윗마디 꼬듯 허지 말구 어서 사발 농사나 지러 오게그려."

하고 동혁은 건배를 돌려다보고 손짓을 한다.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은행나무 아래로 내려갔다.

"어쩌면 인사를 허자마자 대뜸 저의 집으루 가재요?"

"그러니깐 자제가 노새지요."

동혁도 영신을 돌려다보며 웃다가,

"그 사람은 문제가 없에요. 잘 구슬려 주기만 허면 고만이니까. 허지만 기천이라는 그 형 때문에 큰 걱정이에요. 우리 일엔 덮어놓구서 반대니까요. 반대만 하면 좋겠는데 머리악을 쓰구 훼방을 놀아서 마구 대들어 싸울 수두 없구. 큰 두통거린걸요."

하고는 쩍 하고 입맛을 다신다. 영신이가,

"형은 뭘 허는 사람인데요?"

하니까, 입이 궁금하던 건배가 다가선다.

"대대로 곱사등이라구, 그자두 고리대금을 허지 뭘 해먹겠에요. 여러 해 면서기를 댕기다가 요샌 명정거리나 장만을 허려는지 면협의원을 선거허는 데 출마를 했다나요. 저의 아버지버텀두 더 옹충맞게 생겨먹은 게, 얼리지 않는 양복을 뻐질르구 자전거를 타구서 유권자를 찾어댕기는 화상이란 참 장관이지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루 청년들이 허는 일을 반대허는 건가요?"

하고 영신이가 묻는데 어느덧 동혁의 집 앞까지 당도하였다. 동혁의 어머니는 싸리문 밖으로 내달으며,

"어서 오우."

하고 여러 해 보아 오던 사람처럼 영신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그는 치마를 갈아입고 새 버선까지 꺼내 신었다.

동혁은 저의 집의 가난한 살림살이를 영신에게 보여 주기가 싫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어머니나 아버지나, 동네 사람들이 자기네 짐작대로 영신을 저의 색싯감으로 알고 놀리기까지 하는 것이 싫어서 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얘야, 좀 가까이 보자꾸나. 먼 광으루만 보구 어디 알 수 있니? 색싯감을 서넛째나 퇴짜를 놓더니만 연분이 따루 있는 줄이야 누가 알었겠니? 으뭉스레 굴지 말구 저녁엔 꼭 데리구 오너라."

하고 아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며느릿감을 데리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사실 정분이, 차순이, 필례 할 것 없이 동네의 색시들은 동혁이를 믿고 있었는데, 당자가 '안직 장가를 아니 들겠다'고 쇠고집을 세워서 다른 데로 혼인을 한 뒤에 벌써 아들딸들을 낳고 사는 중이다. 근동에서도 여러 군데서 통혼이 들어왔건만, 아무리 사윗감을 탐을 내어도, '글쎄 갓서른까진 장가를 안 든다니까…… 암만 해보구려' 하고 막무가내로 말을 안 들어 왔다. 어제 저녁에는 동화도 형과 겸상을 해서 밥을 푹푹 퍼넣다가,

"성님, 사람이 썩 무던해 뵈는데…… 쇠뿔두 단결에 빼랬다우. 그 덕에 나두 고만 장가나 들어 봅시다."

하고 뒤퉁그러진 소리를 해서, 형은,

"너두 날 놀리는 셈이냐? 그렇게 급헌데 누가 너 먼첨 장가를 들지 말라든."

하고 씁쓸히 웃었다.

한편으로 영신이도 동혁의 생활이 보고 싶었다. 오래 두고 머릿속에 그려 보던 것과 같은가, 또한 얼마나 틀릴까―--- 하고 적지 않이 궁금히 여기다가 동혁이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가서 둘러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차한 살림이요, 더구나 홀앗이라 번쩍거리는 세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문학교까지 다니던 사람이 거처하는 방으로는 너무나 검소하다. 흙바닥에다가 그냥 기직대기를 깔았는데, 눈에 새틋하게 뜨이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윗목에 놓인 책상에는 학교에 다닐 때 쓰던 노트 몇 권이 꽂혔고, 신문 잡지가 흐트러졌을 뿐이요, 아랫목에는 발길로 걷어차서 두르르 말아 놓은 듯한 이불 한 채가 동그마니 놓였다. 참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은 마분지로 도배를 한 벽에 붙은 사기 등잔인데, 그것도 오늘 지나다니며 들여다본 다른 농가의 것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

무엇을 장하게 차리는 것도 아니나, 눈 어둔 어머니는 부엌 속에서 데그럭거리며 어둡도록 꾸물거린다. 조금 있자, 건배의 아낙이 달걀 한 꾸러미를 행주치마로 감추어 가지고 노인의 응원을 하러 왔다.

"그 색시 복성스럽게 생겼습죠? 조금두 신식 여자 티가 없구, 아주 서글서글헌 게 속터진 사내 같어요."

하더니,

"인제야 부엌일을 면하시나 봅니다."

하고 밥을 푸는 동혁의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이번에두 김칫국버텀 마시는 셈인지 누가 아나. 내 뱃속으루 났어두 당최 그눔의 속을 들여다볼 수가 있어야지. 내가 무슨 팔자에 살아생전 그런 며느리를 얻어 보겠나."

하고 마누라는 한숨을 내쉰다. 박첨지와 동화는 자리를 내어 주느라고 마실을 갔는데, 윗간에서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세 사람은 농촌 문제를 토론하고, 요새 한참 떠드는 중에 있는 자력갱생(自力更生) 운동을 비판하는데, 건배의 아낙이 밥상을 들고 들어온다.

"참 정말 미안허군요. 이렇게 여기꺼정 출장을 허셔서……."

하고 영신이가 일어나며 상을 받아 들었다. 동혁의 어머니가 문 밖까지 따라와 눈을 찌긋 하고 영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숫제 찬 없는 밥을 대접헌답시구…… 온, 시굴 구석이라 뭐 있어야지. 늙은 사람이 헌 거라구 숭을랑 보지 말구 많이 자슈."

한다. 영신은 일어서며,

"온 천만의 말씀을 다 허십니다. 들어오십시오."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괜찮소. 어서 자슈."

하고 여전히 '허우'를 하니까, 영신은,

"말씀 낮춰 허십쇼."

하고 정말 색시처럼 조심스러이 앉았다. 건배의 아낙은 남편을 보고,

"그런데 두 분이 얘기두 조용히 못 허게시리 뭣 허러 줄줄 따라댕기는 거요? 집에 가서 어린애나 봐주지 않구?"

하니까,

"흥,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이 자리를 가려서야 되나."

하고 건배는 소매를 걷으며 젓가락을 집는다.

*

영신은 매우 유쾌한 그날그날을 보냈다. 날마다 동혁이가 부는 나팔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은행나무 밑으로 올라가서 조기회에 참례를 하였다.

"아직 힘드는 운동은 허지 말구 편히 쉬시지요."

하고 동혁이가 말려도 남에게 조금이라도 지는 것을 대기하는 영신은 맨 뒷줄에 서서 끝까지 체조를 하고, 또는 여러 사람과 함께 애향가를 불렀다.

"얘, 동혁이헌테 온 여학생이 체조를 다 헌다드라."

하는 소문이 쫙 퍼지자 이삼 일 동안에 조기회원이 부쩍 늘었다. 늙은이 여편네들 할 것 없이 모여들어서 무슨 구경이나 난 것처럼 운동장인 잔디밭이 삑삑하도록 들어차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네들은 운동꾼이 아니요 구경꾼인 것은 물론이다.

"허, 이거 장꾼버덤 엿장수가 많다더니,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드나."

하면서도 건배는 여러 사람이 모인 김에,

"여러분, 조기회에 참가를 헙시오. 아침 일찍이 일어나 운동을 한바탕 허면 정신이 쇄락해지구, 첫째 소화가 잘 됩니다."

하고 구세군처럼 선전을 하다가,

"우린 밥이 너무 잘 내려서 걱정이라네."

"체증이나 나거든 옴세."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어서 건배는 아무 말 못 하고 뒤통수를 긁었다.

영신은 농우회원들끼리만 모이는 일요회에도 방청을 하였다. 처음에는 뒷줄에 가 앉아서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듣다가, 건배의 동의와 만장의 찬성으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였다. 청석골에서는 저 한몸으로 분투하는 이야기며, 남의 강제나 또는 일종의 유행으로 하는 소위 농촌운동과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할 농촌운동을 구별해 가면서 그 성질을 밝히고,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녀를 물론하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단결할 필요와 언제나 연락을 취하자는 부탁을 하였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나, 영신의 말은 억양이 심해서 유창하지는 못해도 조리가 닿고 열이 있어서 농우회원들은 물론 동혁이도 '그 동안 고생도 많이 허구 수양도 어지간히 했구나,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헌 것두 많은걸' 하고 속으로 혀를 빼물 정도였다.

건배의 아낙도 문 밖에서 동리 여편네들과 엿듣고는 매우 감동이 되어,

"여자두 저만큼이나 났어야 사내들헌테 코큰 소리를 해보지."

하고 자기가 보통학교 졸업밖에 하지 못하고 시집이라고 와서, 살림과 어린것들에게 얽매여 늙어만 가는 것을 분하고 절통히 여겼다.

온 지 나흘 되는 날 저녁에 영신은 건배의 아낙을 앞장 세우고, 동네에 말귀 알아들을 만한 여인네들을 그 집 마당에 모아 놓고 또 한 번 일장연설을 하였다.

"내가 이 한곡리에 와서 며칠이라도 지내게 된 걸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이 동네에도 부인들끼리의 회를 하나 모아 드리고 가겠습니다."

하고 그런 모임을 조직할 필요를 역설하였다. 부인회를 모은대야, 그네들은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는 터이요, 남자들처럼 금주 단연을 하거나 도박 같은 것은 금할 필요도 없고 살림살이를 이 이상 더 조리차를 해서 저축을 할 여지도 없지만, 당분간은 여자들의 글눈을 뜨여 주는 강습회 일만 하더라도 남자들의 힘을 빌지 말고 여자들끼리 자치를 해서, 지금부터 하루에 쌀 한 숟가락, 보리 한 줌씩을 모아서라도 농한기에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그 경비를 써나갈 것을 힘있게 말하였다.

마당 가득히 모인 여인네들은 손 하나 들 줄은 모르면서도, 모두 찬성한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래서 영신은 회 같은 것을 조직하는 데 훈련을 받아 온 터이라, 건배의 아내를 회장격으로 추천해서 '한곡리 부인근로회'라는 단체 하나를 조직하였다. 그러고는 앞으로 유지해 나아갈 방법까지 세워서 건배의 아내에게 소상 분명히 일러 준 후, 그와 앞으로는 형님 동생을 하자고 해서 의형제까지 맺고 굳은 악수를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 가지 몹시 거북한 것은 식사를 할 때는 물론 농우회 석상에서나 마당과 행길에서까지 회원들과 동네 여자들이 이구석 저구석에서 수군거리며, 뒤를 쫓아다니면서까지 동혁이와 영신의 행동과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털끝만치도 이상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처음 대하는 손님과 다름없이 더면더면하게 굴었다.

그 뒤로 기만이는 영신을 청하려고 몇 번이나 동혁의 집으로 행랑아범을 보내고, 머슴을 시켜 청좌하는 편지까지 보내고 하였다. 동혁은,

"그분이 왜 우리집에 있는 줄 아나?"

해서 돌려보내기도 하고, 전해 달라는 편지는 받아 두고도 영신에게 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영신이가 그런 편지를 직접 받았더라도 몸이 불편하다고 핑계를 하든지 해서 이른바 초대회에 까닭 없는 주빈 노릇 하기를 거절하였으리라. 동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일이나 무슨 집회 같은 데는 자발적으로 출석을 하였지만, 기만의 심심풀이를 해주거나 그런 사람이 자랑하는 생활을 보기 위해서, 더구나 홀로 지낸다는 남자를 찾아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업을 위해서는 소갈데 말갈데 없이 다니나, 이러한 경우에는 처녀로서의 처신을 가지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기만이는 매우 분개하였다.

"제가 얼마나 도고헌 계집이길래 내가 여러 번 청허는데 안 온단 말이냐!"

하고 하인을 세워 놓고 몰아대다가,

"동혁이버텀 못생긴 자제지. 저헌테 온 여자를 내가 어쩔 줄 아나.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하고 벼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낮이 훨씬 겨워서 기만은 자회색 봄 양복을 말쑥하게 거들고 도금으로 장식을 한 단장을 휘두르며 바닷가 영신이가 유숙하는 집으로 찾아갔다. 영신은 잡지를 보고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며,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하고 달갑지 않게 맞았다.

"하두 여러 번 청해두 안 오시길래, 몸이 편치 않으신가 허구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하며 꾸며 대는 말에, 영신은,

'지나는 길이라니 바닷속에 볼일이 있었나?'

하고 속으로 웃었다. 이러한 궁벽한 촌에서 빳빳한 칼라에 자줏빛 넥타이를 매끈하게 매고 나온 것이 옥색 저고리에 부사견 바지를 입었던 것만치나 눈허리가 시었다. 방으로 들어오라고만 하면 마냥 늑장을 부리고 앉을 것 같아서 멀리 신작로 편짝을 바라다보고 앉았다가, 양복쟁이 서넛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게 뭘 허러 쏘다니는 사람들인가요?"

하고 한마디를 물었다. 기만이는 문지방에 가 걸터앉으며, 안경 속에서 실눈을 짓고 맨 앞에 곡마단의 원숭이처럼 허리를 발딱 제치고 자전거를 저어 가는 사람을 가리키더니,

"저게 우리 아니키(형)예요. 저 아니키 때문에, 원 창피해서……."

하고 기만은 고개를 돌리며 소태나 먹은 듯이 입맛을 다신다. 영신은 건배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형제분이 뜻이 맞지 않으시는 게로군요."

하고 아우의 편을 드는 체하니까, 기만이는 피죤을 꺼내 피어 물며,

"아니키는 당최 이마빼기에 송곳을 꽂아두 진물 한 방울 안 나올 에고이스트야요. 돈푼 긁어모으는 것밖에는 아무 취미두 모르는 인간인데, 게다가 면협의원인가 허는 게 큰 벼실이나 되는 줄 알구 뽐내는 화상이야 요란허지요. 이래저래 나허군 매사에 충돌이니까요. 오늘 아침에두 대판으루 싸웠는걸요."

한다.

"왜요?"

"아, 엊저녁엔 공직자 부스럭지들을 대접헌다구 주막의 갈보까지 불러다가 밤새두룩 술상을 벌여 놓구 뚱땅거려서 잠두 못 자게 굴길래 그래서 한바탕 야단을 쳤지요."

하고 백판 아무 상관도 없는, 더구나 초면의 여자를 대해서 제 형을 개 꾸짖듯 한다. 영신은 담배 연기를 피하느라고 외면을 하면서,

'참 정말 별 쑥스런 자제를 다 보겠군.'

하면서도 하는 소리를 들어 보느라고,

"그래두 그만치 유력허신 분이니까 동네 일은 열성 있게 보시겠지요?"

하고 넘겨짚었다. 기만은 핥아 놓은 것처럼 지꾸(머릿기름)를 바른 머리를 홰홰 내저으며,

"말씀 마세요. 박동혁이 김건배 헐 것 없이 이 동네의 젊은 사람들은 아주 원수 치부를 허는걸요."

"왜요? 퍽 건실헌 분들인데요."

"그 속이야 뻐언허지만…… 그까짓 게 무슨 얘깃거리나 되나요?"

하고 기만은 일본말로,

"도니가쿠 안나 진부쓰가 무라니 오루카라 난니모 데키코 아리마셍요(아무튼 저 따위 인물이 동네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구 될 턱이 없지요)."

하고 결론을 짓더니, 조츰조츰 영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말머리를 돌리려고 든다. 영신은 어이가 없어,

'대체 당신은 얼마나 낫소?'

하고 입 밖까지 나오는 말을 마른침으로 꼴깍 삼키고, 솜털 하나 없이 면도질을 한 기만의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건배의 아낙이 꽃게를 서너 마리나 들고, 새로 조직된 부인근로회의 회원들을 대여섯 사람이나 데리고 왔다. 영신은 구원병이나 만난 듯이 그네들을 반기는데, 기만은,

"그럼 내일 저녁에래두 놀러 와 줍시오. 꼭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어물어물하다가 멋쩍게 꽁무니를 빼었다.

일주일 동안이나 동혁이와 건배 내외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숙식이 부드러이 지내서 영신은 건강이 매우 회복되었다. 처음부터 어느 한 귀퉁이에 병이 깊이 들었던 것이 아니요, 영양 부족과 과로한 탓으로 전신이 매우 쇠약해졌던 터이라, 불과 며칠 동안에 눈에 보이는 듯이 피부가 윤택해지고 혈색이 좋아졌다. 영신이 자신도 동지들의 자별한 정의에 눈물이 날 만치나 고마워서, 아침 저녁으로 한곡리 청년들의 건강과 그네들의 사업을 위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처음에는 고작해야 사나흘만 견습도 할 겸 쉬어 가자던 것이 '하루만 더, 이틀만 더' 하고 간곡히 붙잡는 통에 자별한 호의를 매몰스러이 뿌리치고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도 건배의 아낙은,

"아우님, 우리가 한번 작별허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데……."

하고 눈물을 흘려 가며 붙잡아서, 차마 떼치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신은 하루라도 더 남의 신세를 지며 저 혼자만 편하게 지내는 것이 무슨 죄나 짓는 것처럼 청석골 사람들에게 미안하였다. 영신이가 청석골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뒤에 야학의 교장 겸 소사의 일까지 겹쳐 하고, 어린애들에게는 보모요 부녀자들에게는 지도자가 될 뿐 아니라, 교회의 관계로 전도 부인 노릇도 하고 간단한 병이면 의사 노릇까지 하여 왔다. 그렇게 몸 하나를 열에 쪼개 내도 감당을 못 할 만치나 바쁘게 지내던 사람이 여러 날 나와 있으니 모든 사세가 하루라도 더 머무르기가 어려웠다.

그 중에도 눈에 암암한 것은 저녁마다 손목과 치마꼬리에 매어달리던 어린이들이요, 귀에 쟁쟁한 것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던 아이들의 목소리다. 엄동설한에도 홑고쟁이를 입고 다니던 계집아이들―---그러면서도 으슥한 구석으로 선생을 무작정 끌고 가서 황률이나 대추 같은 것을 슬며시 손에 쥐어 주고는 부끄러워서 꼬리가 빠질 듯이 달아나던 그 정든 아이들.

한번은 이런 일까지 있었다. 어느 눈 내리던 날 밤 야학을 파하고 사숙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잃어버리고 일갓집에 붙어서 사는 금분이란 계집애가 숨이 턱에 닿아서 쫓아오더니, 선생님의 재킷 주머니에다가 꽁꽁 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넌지시 넣어 주고 달아났다.

"아서라, 이런 것 가져오지 말구우 네나 먹어라, 응."

하면서도 영신은 어린애의 정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왜콩이나 밤톨이거니.'

하고 만져 보지도 않고 가저 재킷을 벗어 거는데 방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니 껍질을 말끔 깐 도토리였다.

영신은 떫어서 먹지도 못하는 그 도토리를 접시에 소복이 담아 책상머리에 놓고 들여다보고 손바닥에 굴려 보고 하다가 콧마루가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뜨끈하게 솟던 생각이 났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금세 그 아이들이 보고 싶어 당장 날아라도 가서 안아 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거짓말은커녕 실없는 소리도 잘 하지 않는 동혁이까지,

"발동선이 고장이 나서 못 댕긴다는데, 저 바다를 건너 뛸 재주가 있거든 가보시지요."

하고 붙잡는 바람에 그 말을 곧이듣고 한 이틀을 더 묵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신은 누구에게나 발표하지 못한 고민을 가슴속에 감추고 왔었다. 사실은 그 고민을 해결짓기 위해서 동혁이와 의논을 할 양으로 일부러 온 것이었다. 정양을 하려는 것도, 동혁이가 실지로 일하는 것이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십이 훨씬 넘은 처녀로서 저 혼자로는 해결지을 수 없는 일생에 가장 중대한 문제와 부닥쳤기 때문이다. 여간한 남자보다도 용단성이 있는 영신이건만, 동혁이와 단둘이 만나서 가슴속의 비밀을 조용히 고백할 기회도 없었거니와 동혁의 얼굴만 마주 대해도 그 말을 끄집어내려던 용기가 자라 모가지처럼 옴츠러들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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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또다시 이틀 동안을 질금질금 오다가, 씻은 듯 부신 듯이 개고 날이 번쩍 들었다. 보리 해갈이나 바라던 것이 장마 때처럼 원 둑이 넘치도록 흐뭇하게 와서, 초목이란 초목, 생물이란 생물이 온통 죽음에서 소생한 듯 청신한 공기가 천지에 가득 찼다.

이른 아침 물 속에서 낚여 나온 듯이 선명한 태양이 바다 저편에 붕긋이 솟아오를 때, 동리 한복판의 두 아름이나 되는 은행나무가 선 언덕 위에서 나팔 소리가 들린다.

도도 도도 미도 도도
솔도 도미도―---
미미 미미 솔미 솔미
도미 솔솔 도―---

새된 기상나팔 소리는 황금빛 햇발이 퍼지듯이 비 뒤의 티끌 하나 없는 공기를 찢으며 온 동리의 구석구석이 퍼진다.

배춧빛 노동복을 입은 청년들이 여기저기서 납작한 초가집을 뛰어나오더니 언덕 위로 치닫는다.

나팔 소리가 난 지 오 분쯤 되어, 그들의 운동장인 잔디밭에는 중년, 청년, 소년 할 것 없이 한 오십여 명이나 되는 조기회원들이 그득 모여 섰다.

학교에서 군사 교련을 받을 때에 곡호수였던 동혁은 힘차게 불던 나팔을 놓고 앞으로 나섰다.

"기착!"

"우로 나라닛!"

우렁찬 호령 소리에 따라 회원들은 이 열로 벌려 선다.

"하낫, 둘, 셋, 넷!"

"둘, 둘, 셋, 넷!"

정말(丁抹) 체조(體操)가 시작되는 것이다.

동혁이가 서울서 강습을 해가지고 와서 시작한 뒤에 이 체조를 금년까지 줄곧 계속해 왔다. 바지저고리를 퉁퉁히 입은 낫살이나 먹은 사람과, 나팔 소리에 어깻바람이 나서 모여든 아이들은 다 각각 제멋대로 팔다리를 놀려서 보기에 어색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호랑이라도 두드려 잡음직한 한창 기운의 청년들이 동시에 목청껏 내지르는 고함은 조금 허풍을 친다면 앞산이라도 물러앉을 듯이 기운차다.

십오 분 동안에 체조를 마치고 동녘 하늘을 향해서 산천의 정기를 다 마셔들일 듯이 심호흡을 한 뒤에, 청년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둘러섰다. 이번에는 건배가 한가운데 가 우뚝 나서며,

"자, 애향가를 부릅시다!"

하고 뽕나무 막대기를 지휘봉 대신으로 내젓기 시작한다. 이 노래는 동혁이와 건배의 합작으로, 청년들의 정신을 통일시키고 활기를 돋우기 위해서 아침마다 체조가 끝나면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곡조는 너무나 애상적이라고 템포를 빠르게 해서 짧고 쾌활하게 부른다.

건배의 두 팔이 올라갔다가 허공을 힘있게 가르자 청년들은 정중한 태도로 애향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만(灣)과 ××산(山)이
마르고 닳도록
정들고 아름다운
우리 한곡(漢谷) 만세!
(후렴) 비바람이 험궂고
물결은 사나워도
피와 땀을 흘려 가며
우리 고향 지키세!
우리들은 가난하고
힘은 아직 약하나
송백(松栢)같이 청청하고
바위처럼 버티네!

첫 절과 같이 후렴까지 부른 뒤에,

"자― 삼 절!"

하고 건배는 더한층 힘차게 팔을 내젓는다.

한 줌 흙도 움켜쥐고
놓치지 말아라
이 목숨이 끊기도록
북돋우며 나가세!

날마다 한 번씩 부르는 노래건만, 이 노래를 지은 사람이나 받아서 합창을 하는 청년들은 아침마다 새로운 흥분을 느낀다. 얼굴에 혈조를 띠고 목에 힘줄을 세우며 부르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서 있다.

오늘 아침에는 은행나무에 몸을 반쯤 가리고 서서 이 노래를 듣다가 감격에 흐느끼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영신이었다.

조기회가 파하기 전에 동혁은,

"자, 아침 뒤에 우리 공동답 못자리를 만드세. 한 사람두 빠지면 안 되네."

하고 여러 회원에게 일렀다. 건배와 동화는 몇몇 회원과 함께 영신이가 홀로 서 있는 언덕 뒤로 올라갔다. 회원들은,

"일찍 일어나셨군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춥지나 않으셨에요?"

하고 번차례로 인사를 한다. 영신은 머리만 숙여 답례를 하고, 그 말에는 얼른 대답을 못 한다. 아침볕을 눈이 부시도록 온몸에 받으며 눈물 흔적을 보이지 않으려고 바다 저편을 바라다보고 섰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뒤에야,

"나팔 소릴 듣구 뛰어올라왔어요."

하고 같이 운동을 하고 나서 혈색 좋은 여러 사람의 얼굴을 둘러본다.

"미상불 그 노래 잘 지었지요? 답답헌 때 한바탕 부르구 나면 속이 후련허거든요."

건배의 넓적한 얼굴이 싱글벙글한다.

"저 사람은 구렝이 제 몸 추듯 그저 제 자랑을 못 해서…… 그만 게 무슨 자랑인가?"

하고 동혁은 핀잔을 준다. 건배는,

"그럼 다른 건 몰라두, 청석골에 애향가 같은 노래를 부르는 조기회야 있겠나?"

하고 미소를 띤 영신의 얼굴을 슬쩍 흘려본다.

"우린 아침마다 기도회가 있어요. 찬송가두 부르구요. 촌 여자들이 제가끔 작곡을 해가며 부르는 찬미야말루 들을 만허죠."

하고 영신은 앞을 서서 언덕을 내려오는데, 건배가 동혁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무어라 귓속을 하더니,

"채선생, 조반은 우리집에 가서 잡수십시다."

하고는 앞장을 서서 휘적휘적 내려간다. 영신은 처음에는 사양을 하다가,

"고맙습니다."

하고 동혁이와 나란히 서서 풀밭의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려온다.

형의 뒤를 따르던 동화는 다른 동무들을 어깨로 떠밀며,

"여보게 우리들은 빠질 차례세."

하고는 저의 집 편짝으로 불평스러이 발꿈치를 홱 돌린다. 건배는 영신을 돌려다보며,

"우리집 여편네요. 보통학교 하나는 명색 졸업이라구 해서 아주 맹문이는 아니지요. 농촌운동이 어떤 거라구 일러 주면 말귀는 어둡지 않어서 곧잘 알아듣거든요. 허지만 새끼를 셋이나 연거퍼 쏟아 놓더니 인젠 쭈구렁바가지가 다 됐어요."

하고 슬그머니 여편네 칭찬을 한다.

"저 사람은 마누라 자랑을 못 허면 몸살이 나는 거야."

동혁이가 또 놀리니까, 건배는,

"흥, 자네 같은 엿장수(늙은 총각이라는 뜻)가 뭘 안다구 말참견인가?"

하고 영신을 돌려다보면서,

"저 사람 혼인 국수를 얻어먹으려다가 허기가 져서 죽겠에요."

하고 나서, 동혁에게 눈 하나를 찌긋해 보인다. 동혁은,

"에이 이 사람!"

하고 호령이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건배를 노려본다. 건배는 납작한 토담집 앞까지 와서,

"이게 명색 우리집인데요, 나 같은 김부귀(키 크기로 유명한 사람) 사촌쯤 되는 사람은 이마 받이 허기가 똑 알맞지요. 허지만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비고 누웠어도 낙이 다 게 있구 게 있거든요."

하더니 미리부터 허리를 구부리며 집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두 사람은 아침 짓는 연기가 서리어 오르는 굴뚝 곁에서 서성거리며,

"저 사람두 겉으로는 저렇게 버티지만, 생활이 말씀 아녀요. 교원 노릇을 허다가 쫓겨난 뒤에, 화가 난다구 만주로 시베리아로 돌아댕기며 바람을 잡느라구 논 마지기나 좋이 허든 걸 말끔 팔어 없앴는데, 냉수를 먹구 이를 쑤시면서두 궁헌 소린 당최 안 허거든요."

"산전수전 다 겪어서 속이 탁 터진 게지요. 아무튼 미안헌데요."

하는데, 젖먹이를 들춰업은 건배의 아내가 행주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나오더니,

"어서 들어오세요. 이 누추헌 집엘 귀헌 손님이 어떻게 들어오시나."

하고 친정붙이나 되는 것처럼 영신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고생살이에 찌든 그의 얼굴에는 잣다란 주름살이 수없이 잡혔고, 검불을 뒤집어쓰고 불을 때다가 나와서 머리는 푸스스하게 일어섰는데, 남편만 못지않게 너름새가 좋다.

"온 천만엣말씀을 다 허세요. 이렇게 불시에 와 뵙게 돼서 여간 미안치가 않은데요."

하고 영신이가 마악 싸리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별안간 건배가 미쳐난 사람처럼 작대기를 휘두르며 뛰어나온다.

건배가 놓여 나간 닭을 잡으려고 작대기를 들고 논틀 밭틀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광경은 혼자 보기 아까웠다.

그는 닭을 잡아 가지고 헐레벌떡거리며 들어오더니,

"이거, 우리 아버지 제사 때 잡으려는 씨암탉인데, 우리가 청석골 가면 송아지 한 마리는 잡으셔야 헙니다. 이게 미끼니까……."

하고 생색을 내고 나서, 푸득거리는 대로 흰 털을 풍기는 닭의 모가지를 바짝 비틀어 부엌 바닥에다 던지고는 손을 탁탁 털며 방으로 들어온다.

수란을 뜨고 닭고기를 볶고 하여서 세 사람은 아침을 맛있게 먹었다. 사실 영신은 상일까지도 힘에 부치도록 했거니와, 돈 한푼이라도 적게 쓰려고 지나치게 악의 악식을 하고 지냈다. 그래서 한창 나이에 영양이 대단히 부족되어 건강을 상한 것이었다.

영신은 밥상으로 달려드는 두 어린것에게 닭의 다리를 하나씩 물려 주고는,

"오늘이 내 생일인가 봐요."

하고 잠시 고향의 어머니 생각을 하였다.

"고만 이리 들어오세요. 어서요."

하고 영신은 건배의 아내를 자꾸만 끌어들이려고 하건만, 그는 동혁이가 스스러운지,

"부엌 시중을 헐 사람이 있어야죠."

하는 핑계로 들어오지를 않는다. 영신은 말머리를 돌려,

"그런데 공동답은 어떻게 허시는 거야요?"

하고 묻는다. 그 말에 선전부장이 잠자코 있을 리 없다.

"이일 저일 헐 것 없이 이 박군이 다 발설을 해서 실행해 오는 거지만, 저 너머 큰마을 강도사네 집 논 닷 마지기를 억지루 떼를 써서 도지루 얻었에요. 그래 우리 농우회원 열두 사람이 합력을 해서 작년버텀 짓는 게야요."

"그럼 추수허는 건 어떡허나요?"

"도지 닷 섬만 그 집에 치르구선, 그 나머지는 우리가 농사를 잘 지어서 열 섬이 나든 열닷 섬이 나든 적립을 했다가 다른 돈허구 보태서 우리의 회관을 꼭 지을 작정인데……."

"참 좋은 계획이로군요. 우리 청석골두 강습소 겸 공회당처럼 쓸 회관을 시급히 지어야 헐 텐데, 당최 예산이 서질 않아요. 지금 임시로 빌려 쓰는 예배당은 워낙 협착헌데다가 주일날허구 삼일날 저녁은 쓰지 못허니까, 여간 불편치가 않어서 이번에 좀 쉬었다가 가선, 억지루라도 집 한 채를 얽어 볼 작정이야요."

동혁은 구수한 보리밥 숭늉을 훌훌 마시고 앉았다가,

"회관을 짓는 게 그닥지 시급헐 것 같진 않지만 회원들이 무시루 모여서 신문 잡지나 돌려 보며 무슨 일이든지 서루 의논해 허려면, 아무래두 집합헐 장소가 필요허겠어요. 야학만 해두 사철 한 데서 헐 수는 없으니까요."

하고는 눈을 아래로 깔고 무엇인지 생각하더니,

"허지만, 공동답을 짓거나 또는 이용조합을 만들어 씨앗이나 일용품을 싸게 사다가 쓰거나, 허다못해 이발조합 같은 것을 만들고, 우리가 술 담배를 끊고 그 절약헌 돈을 저축하는 것은, 반드시 회관 하나를 짓기 위헌 게 아니지요."

"그럼 일테면 어느 비상 시기에 한몫 쓰시려는 건가요?"

"아니오, 우린 언제나 비상시를 당허고 있는 게니까. 위선 조그만 일이래두 여러 사람이 한몸 한뜻이 돼서 직접 벗어붙이구 나서서 일을 허는데, 정신적으루 통일을 얻고, 또는 육체적으루 단련을 받으려는 데 있에요. 무엇버덤두 우리헌텐 단결력이 부족허니까요. 제가끔 뿔뿔이 헤져서 눈앞에 뵈는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다투는 것버덤은, 그렇게 팔다리를 따루따루 놀리질 말구서 너나 헐 것 없이 한몸뚱이루 딴딴히 뭉쳐서 그 뭉친 덩어리가 큼직허게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위력이 있다는 것과, 모든 일에 능률이 올라가는 것과, 또는 땀을 흘리면서두 유쾌허게 일을 헐 수 있다는 것을 실지로 체험을 해서 그 이치를 자연히 터득허두룩 훈련을 시키려는 데 있에요. 조기회만 해두 그렇지요. 지금 동리 늙은이 축에선 밥지랄을 헌다구 여간 반대가 아닌데, 실상 진종일 그 괴로운 일을 허구두, 먹을 것이 없어서 쩔쩔매는 우리들헌테는, 영양분이 필요헐지언정, 정말 체조 같은 운동이 필요치는 않으니까요. 허지만 아침마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억지루 부비면서 은행나무 밑으로 치닫는 것은 일이 있으나 없으나 하루 한 번씩 깨끗헌 정신으로 한장소에 모이자는 거지요. 그 모인다는 것, 한 사람의 호령 아래에 여러 사람의 몸이 똑같이 움직이고, 한맘 한뜻으로 애향가를 부르는 데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의식을 찾구 용기를 회복허려는 거예요."

동혁은 고개만 끄덕이며 듣는 영신의 얼굴에서 '나도 동감이야요'하는 표정을 보며, 말 구절마다 힘을 들인다.

건배는 물론 영신이도 매우 긴장한 태도로 무엇보다도 단결이 필요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식전에 느낀 감상을 이야기하는데, 동화가 와서 문 밖에서 헛기침을 칵칵 하더니,

"성님, 회원들이 벌써 뫼서 기다리구 있수."

하고 나오기를 재촉한다.

*

한 백 평쯤 되는 못자리에는 논둑이 찰찰 넘치도록 물이 잡혔다. 가벼운 아침 바람에 주름이 잡히는 잔물결을 헤치며 칠룡이는 쟁기를 꼬느고 소를 몰아 갈기를 시작한다. 못자리 논은 적어도 한 열흘 전에 갈아 두어야 벼 끝도 썩고 땅도 골라지는데, 가뭄 때문에 이제야 갈게 된 것이다.

"이―러, 이눔의 소."

"어디어, 쩌쩌쩌쩌."

연골에 상일이 몸에 밴 칠룡이는 여자 손님이 논둑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바람에 연방 혀를 차가면서 소 모는 소리를 멋지게 내뽑는다. 개량 보습이 논바닥을 무찌르고 나가는 대로 물과 함께 시꺼멓게 건 흙이 솟아올랐다가는 한쪽으로 착착 엎친다.

"다른 일은 거진 다 숭내를 내겠는데, 안직 논 가는 건 서툴러서 저 사람들한테 숭을 잡히는걸요. 학교서 실습이라구 헐 때 어디 쟁기질야 해봤어야지요."

동혁은 논둑 위에서 치맛자락을 날리는 영신의 곁으로 오며 말을 건넨다. '선전부장'은 논을 다 갈기 전에는 아직 할 일이 별로 없는 데도 넓적다리까지 걷어붙이고 공연히 흙탕물을 텀벙거리며 돌아다닌다. 흰 저고리에 검정 바지를 입었는데, 아랫도리가 껑충한 것이 물고기를 찍으러 다니는 황새와 흡사하다. 영신은 그 꼴을 보고는 웃다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남 허는 일이 보기엔 쉬운 것 같지만, 제가 실지루 해보니까 사뭇 다르드군요. 청석골은 부인친목계가 있는데요, 여편네들이 모두 나와서 벗어붙이구 일을 허길래, 남한테 지긴 싫어서 하루 종일 목화밭을 매지 않었겠어요. 아 그랬드니만 그 이튿날은 허리가 빳빳허구 오금이 떨어지질 않어서 꼼짝두 못 했어요."

하면서 남들은 다 꿈지럭거리는데 저 혼자 구경을 하고 섰는 것을 매우 미안쩍게 여기는 눈치다.

"그러길래 힘드는 일을 허는 데두 저 사람네와 똑같이 헐 수 있두룩 단련을 받어야만 하겠에요. 책상 물림들이 상일에 잔뼈가 굵은 사람처럼 그 세찬 일을 진종일 허구두 배겨 낼 만치 되려면 첨엔 코피를 푹푹 쏟아야지요."

"그럼요. 그게 조옴 어려운 노릇이야요? 서양선 소나 말이 허는 일을 우린 사람이 허니까요. 그럴수록 소위 우리 같은 지도분자버텀 나서서 직접 일을 해야만 그게 모범이 돼서 남들이 따러오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잠시두 쉴 새가 없을 수밖에요."

하는데 눈앞에서 소머리를 돌리던 칠룡이가 종아리에서 커다란 거머리를 잡아 떼더니,

"이 경칠놈에게 벌써부텀 붙어당기나?"

하고 논두덕에다 힘껏 메어붙인다. 굵다란 지렁이가 기어올라가는 듯 힘줄이 불뚝불뚝 솟은 종아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영신은 씻지도 않고 내버려두는 그 피를 바라다보다가 서울 백선생이 말쑥한 양장에 비단 양말을 신고 학교 실습장으로 나돌아다니던 것을 연상하였다. 파리라도 낙성을 할 듯이 매끈하던 그 종아리와 거머리에게 빨려 논물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칠룡이의 종아리.

"그렇구말구요, 지도자라구 무슨 감독이나 십장처럼 심든 일은 남에게 시키구서 뻔뻔스레 놀구 먹으려는 건 아니니까요. 남녀의 구별꺼정두 없이 다 함께 덤벼들어서 일을 해야지요."

영신은 그제야 그전에 백씨의 집에서 들은 동혁의 말을 되풀이하듯 하였다. 그러나 오늘 이 경우에 있어서는, 저 역시 피를 흘려 가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편히 앉아 바라다보는 처지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불안한 것뿐 아니라 일종의 수치를 느끼며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

갈아 놓은 논바닥을 다시 써레로 썰고, 여러 회원들이 덤벼들어서 잡아 놓은 물을 바가지로, 혹은 두레질을 해서 퍼내느라니 거진 점심때나 되었다. 회원들은 우스운 소리를 해가며 자못 유쾌한 듯이 일을 하는데, 그네들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숭숭 내배었다. 동혁은 화가래 장치를 꼬느고, 건배는 키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고무래를 들고 못자리판을 판판히 고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줄을 띄워서 한 판씩 두 판씩 갈라 나간다. 나머지 회원들은 바소쿠리 지게에 거름을 지고 낑낑거리고 와서 펴는데, 퇴비 같은 거친 거름은 누르고 재 같은 몽근 거름은 손으로 내저어 골고루 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죽가래로 쪼옥 고르게 번대질을 치는데 건배의 아내가 점심을 이고 도랑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내리쪼이는 오월의 태양 아래에 숭늉을 담아 든 오지병이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린다.

시계도 없는데 점심때를 어떻게 그렇게 일제히 맞추는지, 건배의 아낙의 뒤를 따라 회원들의 사내동생이며 누이동생들이 밥 보자기를 들고 혹은 함지박을 이고 한군데서 모였다 나온 것처럼 주욱 열을 지어 언덕을 넘고 논둑을 건너온다.

"이를 어쩌나, 저고리가 다 젖었군요."

영신은 건배의 아낙이 이고 나온 묵직한 함지박을 받아 내려놓는다. 보자기를 열고 보니 아침에 먹다 남긴 것인지 미역을 넣고 끓인 닭국에는 노란 기름이 동동 떴다. 건배의 밥은 보리 반 섞임인데, 새로 닦은 주발에 고슬고슬하게 퍼 담은 영신의 밥은 외씨 같은 이밥이다.

"찬은 없지만, 들밥이 맛있길래 가지구 나왔어요."

하고 밥 보자기로 어깨에 흐른 국국물을 닦는다. 영신은 건배의 아낙을 붙잡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건만 그는 어린애를 볼 사람이 없다고 되짚어 들어갔다.

"속이 궁해 죽겠는데, 우리 밥은 웬일이여?"

동화의 거센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참 두 분 점심은 왜 그저 안 가져올까요?"

영신이가 돌려다보며 물으니까, 동화는,

"가져올 사람이 있어야죠."

한다. 그러자,

"얘, 저어기 어머니가 오신다."

하고 동혁이가 손을 들어 멀리 축동 편짝을 가리킨다.

동화가 마주 가서 어머니의 머리에서 함지박을 받아 들고 뛰어왔다. 동혁의 어머니는,

"고만둬라, 고만둬. 내가 가주구 가마니깐……."

하고 아들 형제의 밥 함지를 손수 들고 가겠다고 고집을 하다가, 숭늉병을 들고 작은아들의 뒤를 따라온다. 이런 계제에 아들을 찾아온 여학생을 먼발치로라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회원들은 웅덩이로 가서 흙과 거름을 주무르던 손을 씻고, 논두렁에 가 둘러앉아서 점심을 먹는다. 그들의 점심은 쌀을 양념처럼 둔 보리밥이나, 조가 반 넘어 섞인 덩어리를 짠지쪽과 고추장만으로 먹는다. 그 중에서는 돌나물 김치에 마른 새우를 넣고 지짐이처럼 끓인 동혁이 형제의 반찬이 상찬이다.

"여보게들, 우리 합병을 허세."

새가 똥을 깔기고 간 것처럼 얼굴에 온통 흙이 튄 것도 모르는 건배가 함지박을 들고 동혁에게로 간다.

"참, 그러십시다요. 나 혼자 맛난 걸 먹으니까 넘어가질 않는걸요."

하고 영신은 밥을 따라 동혁이 형제의 곁으로 간다. 동혁은 커다란 숟가락으로 보리밥을 모를 지어서 푹푹 떠넣다가,

"왜 일 안 허구 편하게 지내는 사람이라야만 기름진 걸 먹는 그 쉬운 이칫속을 모르세요."

하고 껄껄껄 웃는다. 영신은 저를 빗대어 놓고 하는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얼굴을 살짝 붉혔다.

닭국 한 그릇을 들고 서로 권하느라고 이리 밀어 놓고 저리 밀어 놓고 하니까, 아까부터 넘실거리고 있던 동화가,

"그럼 이리 내슈. 먹는 죄는 없다우."

하고 뚝배기를 집어 들고 돌아앉아 훌훌 마시더니 건데기까지 두매한짝으로 건져 먹는다. 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무튼 비위는 좋다."

하고 아우의 턱밑의 어기적거리는 근육을 곁눈으로 본다. 영신은,

"퍽 쾌활허시군요."

하고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건배는 동화를 물끄러미 보다가,

"참말 우리들이 먹는 거란 말씀이 아니지요. 그래두 오늘은 일을 헌다구 반찬이 좀 나은 셈인데요. 인제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굴뚝에서 연기가 못 나는 집이 겅성드뭇해요. 높은 고개는 올라갈수록 숨이 가쁜 것처럼 이 앞으로 몇 달 동안이 한창 어려운 고비니까요."

하고 여러 사람의 밥 먹는 것을 돌아보면서,

"우리 동리 사람들이 지내는 걸 보면 기막히지요. 몇십 리 밖에 나가서 품팔이를 허면 삯메기로 한대두 고작해서 삼십오 전이나 사십 전을 받는데, 어둑어둑헐 때꺼정 일을 허려면 허기가 지니까 막걸리라두 한 사발 마셔야 견디지 않겠어요? 그러니 나머지 돈을 가지구는 수다 식구가 입에 풀칠두 허기가 어렵거든요. 나무 장사들두 허는데, 남의 멧갓의 솔가지 한 개피래두 꺾다가 산림 간수헌테 들키는 날이면, 불려가서 경치구 벌금을 무니까 그나마 근년엔 못 해먹어요."

하는데, 동혁이가,

"여보게, 궁상은 고만 떨게. 온, 밥이 체허겠네그려."

하고 숟가락을 놓더니,

"허지만, 우리 농민들의 육체는 비타민 A가 어떠니 B가 어떠니 하는 현대의 영양학설은 당최 적용되지 않는데 그래두 곧잘 살거든요."

하고 입 속으로 몰래 양치질을 하는 영신을 쳐다본다. 영신은 눈을 깜박이더니,

"그렇구말구요, 칡뿌리를 캐거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구두 사는 수가 용허지요."

한다. 건배는 그 말을 받아,

"흥."

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그게 다른 게 아니라 기적이거든."

하고 하늘을 우러러,

"헛허허허."

하고 허청웃음을 웃는다.

점심 뒤에 회원들은 잡담을 하며 잠시 쉬었다.

"이런 때 담배나 한 대 피웠으면 좋겠지만 이 박군이 단연회를 만든 뒤엔 식후의 제일미두 못 먹게 됐어요. 나버텀 생각은 간절헌데 낫살이나 먹은 게 도둑 담배야 피울 수가 있어야지요."

선전부장의 설명이 또 나온다.

"술두 다들 끊으셨다죠?"

영신의 묻는 말에 동화는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

"술두 엄금이에요. 내 의견 같어선 막걸리 같은 곡기 있는 술은 요기두 되구 취허지 않을 만치 먹으면 흥분두 돼서 일두 훨씬 붙건만, 젊은 기운이라 입에만 대면 어디 적당허게들 먹어야지요. 신작롯가에 술집이 둘이나 되구 계집들이 들어와서 젊은 사람의 풍기두 나뻐지길래 회원들은 당최 입에두 대지 않기루 했어요. 허지만, 혼인이나 환갑 같은 때는 더러 밀주들을 해먹는 모양입디다."

하는데, 동혁이가 뒤를 대어,

"내 아우 하나가 말을 안 듣구 술만 먹으면 심술을 부려서 여러 회원들헌테 아주 면목이 없어요."

하고는, 제 발이 저려서 피해 가는 아우의 등뒤에다 대고 눈살을 찌푸린다. 동혁은 말을 이어,

"회원들에게 조사를 시켜서 일년의 지출액을 뽑아 보니까, 백 호두 못 되는 이 동리에 술값이 거진 구백 원이나 되구요, 담뱃값이 오백여 원이나 되니, 참말 엄청나지 않어요? 그래서 이회(里會)를 헐 때 자세헌 숫자까지 들어서 이러다간 굶어 죽는다구 한바탕 격동을 시켰더니, 늙은이만 빼놓군 거진 다 술을 끊겠다구 손을 들드군요. 허더니 웬걸, 작심 삼 일은커녕 그날 저녁두 못 참구 주막으루 간 사람들이 있었어요. 담배두 끊는다구 곰방대를 꺾어 버린 게 수십 개나 되드니만 차츰차츰 또들 태우길 시작허는데, 담뱃대가 없으니깐 궐련을 사먹으니 안팎으로 손해지요. 우리 회원들만은 꼭 맹세를 지켜 왔지만……."

"그게 참말 큰 문젯거리야요. 허지만 여자들허구 일을 하면 술 담배를 모르니까 그거 한 가진 좋드군요."

하는데,

"자 그만들 일어나 보지."

하고 건배가 벌떡 일어선다.

"오늘 해 전으루 씻나락꺼정 다 뿌리나요."

영신이도 일이나 하려고 들어가는 사람처럼 일어섰다. 건배는,

"아아뇨, 인제 죽가래루 판판허게스리 번대를 친 뒤에 새내끼를 다시 띄워 놓구서 하루 밤 하루 낮을 뒀다가, 수확이 많다는 은방주(銀坊主)든지 요새 새루 장려하는 팔단(八段) 같은 걸 뿌리지요. 그러구 나설랑은 한 치쯤 자란 뒤에 물을 빼구서 못자리를 고른 뒤에 일 주야쯤 뒀다가 다시 물을 넣지 않겠에요? 그래야 뿌리가 붙거든요. 그 뒤엔 가끔 물꼬를 봐서 혀 빼문 걸 뽑아 버리구선, 거진 치 닷 푼쯤 자란 뒤엔 한 번 김을 매주는데, 여기선 그걸 도사리를 잡는다구 허지요. 그런 뒤에 유산 암모니아 같은 속효비료(速效肥料)를 주면 무럭무럭 자랄 게 아니에요? 논바닥이 시꺼멓게 되는 걸 봐서 그때야 모를 내는데, 그 후에두 또 몇 차례 김을 매주면 한가위엔 싯누렇게 익어서 이삭이 축축 늘어진단 말이지요. 아 그러면 낫을 시퍼렇게 갈어 가지구 덤벼들어 척척 후려서 묶어 세우군……."

하고 신이야 넋이야 배우처럼 형용까지 해가며 주워 섬기는데, 동혁은 듣다못해서,

"여보게, 웬놈의 수다를 그렇게 늘어놓나? 저 사람은 입두 아프지 않은 게여."

하고 핀잔을 주듯 하고는 논으로 들어선다. 건배는 들은 체 만 체하고,

"아 그러구설랑 개상을 놓구 바심을 헌 뒤엔 방아를 찧어서 외씨 같은 하얀 쌀밥을 지어 놓구 통배추 김치에……."

하고 마른침을 꿀떡 삼키는데, 영신은 항복이나 하는 듯이 손을 들고,

"고만요 고만, 그만허면 다 알겠어요. 어쩌면 그렇게 입담이 좋으세요?"

하고 호호호 웃으며 건배의 입을 막듯 하였다. 그래도 건배는,

"두구 보세요. 양석두 바라보지 못허던 논에서 한 마지기에 넉 섬 추수는 무난히 허구 말 테니. 그만이나 해야 우리들이 땀을 흘린 티가 나거든요."

가만히 그대로 내버려두면 얼마든지 더 지껄일 형세다.

"더군다나 농사는 이력이 있어야겠어요. 우린 아주 손방이지만……."

영신이가 대접상으로 한마디를 해주니까, 건배는,

"아무렴 그렇구말구요. 이력이 제일이지요."

하면서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이더니 황새 다리를 성큼성큼 떼어 놓으며 논으로 들어간다.

어느덧 곁두리 때가 되었다. 열두 회원들은 손이 맞아 거쩐거쩐 일을 해서 오늘 일은 거진 끝이 나게 되었는데, 먼저 나와서 발을 닦던 동화가 큰 마을 편을 바라보더니,

"에에키, 건살포 나오시는군."

하고 입을 삐죽해 보인다. 여러 사람들의 눈은 그리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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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가물어서 동리마다 소동이 대단하다. 정월 대보름날은 하루 종일 진눈깨비가 휘뿌려서 송아지 한 마리를 태우는 윷놀이판에 헤살을 놓았었고, 모처럼 풍물을 차리고 나선 두레꾼들을 찬비 맞은 족제비 꼴을 만들더니, 그 뒤로 석 달째 접어든 오늘까지 비 한 방울 구경을 못 하였다.


"허어 이 날, 사람을 잡으려구 이렇게 가무는 게여." 바싹 마른 흙이 먼지처럼 피어올라 폴삭폴삭 날리는 보리밭에 붓을 주던 박첨지는, 기신없이 괭이질을 하던 손을 쉬고 허리를 펴며 혼자말로 탄식을 한다. 그는 검버섯이 돋은 이마에 주름살을 잡으며 머리 위를 우러러본다. 그러나 가을날처럼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찾아 낼 수가 없다. 바닷가의 메마른 농촌에 바람만 진종일 씽씽 불어서 콧구멍이 막히고 목의 침이 말라드는 것 같다.

"이런 제에기, 보리싹이 연골에 말러 배틀어지니 올 여름엔 냉수만 마시구 산담메."

늙은이는 다시 한번 말과 한숨을 뒤섞어 내뿜고는, 이제야 겨우 강아지풀 잎사귀만하게 꼬리를 흔드는 보리싹을 짚신발로 걷어찬다. 그러다가 화풀이로 쌈지를 긁어 희연 부스러기 한 대를 태워 물고 빼끔빼끔 빨다가 괭이 자루에 탁탁 털어 버린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섰다가 그래도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멍에같이 굽은 허리를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드린 뒤에, 손바닥에다 침을 튀튀 뱉더니 다시 괭이를 잡는다.

"참 정말 큰일났구려. 참죽나무에 순이 나는 걸 보니깐 못자리 헐 때두 지냈는데, 비 한 방울이나 구경을 해야 허지 않소."

곁두리 때가 훨씬 지나도록 바닷가에서 갯줄나물을 캐어 가지고 들어온 마누라가 영감의 등뒤에서 반나마 기운 광주리를 던지고, 기신없이 밭두덕에 가 주저앉으며 하는 말이다. 앞니가 몽땅 함몰을 해서, 동리 계집애들은 그를 합죽할머니라고 놀린다.

"그러게 말요. 이대루 가물다간 기미(己未)년처럼 기우제를 지낸다구 떠들겠는걸."

박첨지는 마누라를 흘깃 돌려다보고 중얼중얼 군소리하듯 한다.

"너구리굴 보구 피물돈버텀 내쓴다구 동혁이 월급 탈 때만 바라구서 조합 돈꺼정 써놨으니, 참 정말 입맛이 소태 같구려."

영감의 말을 한숨으로 화답하던 마누라는,

"그래두 동혁이가 어떡허든지 우리 양주 배야 곯게 하겠수?"

"명색이라두 학교 졸업이나 했으면 모를까, 지금 와서 전들 무슨 뾰죽헌 수가 있나베. 양식이라구 인젠 묵은 보리 여남은 말이 달랑달랑허는데……."

"아무튼 그 자식이 우리집 기둥인데 조석 때마다 동리 일만 헌다구 몰아세질랑 마슈. 그렇게 성화를 헌다구 말을 들을 듯싶우? 제가 허구 싶어서 허는 노릇을. 목이 말러두 주막에 가서 탁배기 한잔 입에 대지 않는 자식을 가지구서……."

"글쎄, 오늘두 여태 안 들어오는 걸 좀 보우. 아비가 올버텀은 일이 심에 부쳐서 당최 꿈지럭거리질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 나댕기기만 허니 말이지."

"그래두 저 딴엔 동네에 유조헌 일을 헌답시구, 밥도 제때에 못 먹구 돌아댕기는 게 난 가엾어 못 보겠습디다."

"아무튼 그놈의 농우횐가 강습횐가 허는 것버텀 없애 버려야 해. 동혁이 초사에 동리 젊은 녀석들은 한 놈이나 집에 붙어 있어야지. 밤낮 몰려댕기며 역적 모의허듯 쑥덕공론만 허니 밥이 생기나 옷이 생기나."

박첨지는 혀를 끌끌 차며 젊은 사람들을 꾸짖고 마누라는 아들의 두둔을 하느라고 어느덧 땅거미 지는 줄을 모른다.

맷방석만한 시뻘건 해는 맞은편 잿배기를 타고 넘는다.

"저 해를 좀 보슈. 가물지 않겠나."

한쪽을 찌긋한 마누라의 눈에는 흉년이 들 조짐이 보이는 듯하다. 그는 유심히 서녘 하늘을 바라다보다가,

"아, 저어기 동혁이가 오는구려!"

하고 아들의 그림자를 몇 해 만에야 발견하듯 가벼이 부르짖으며 무릎을 짚고 일어선다.

박첨지 양주의 눈이 부시도록 넘어가는 석양을 등뒤에 받으면서 잿배기를 넘어오는 동혁의 윤곽은 점점 뚜렷이 나타났다. 회색 저고리 바지에 검정 조끼를 입고 삽을 둘러멘 동혁이는 역광선에 원체 건장한 체격이 더한층 걸대가 커 보인다. 아들이 가까이 오자,

"점심두 안 들어와 먹구 여태 어디서 뭣들을 했니?"

하고 묻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까 꾸짖던 때와는 딴판으로 부드럽다.

"공동답(共同畓) 못자릴 허려구 물을 푸는데 쌈들이 나서 입때꺼정 뜯어말리구 왔에요."

"넌 집의 못자린 헐 생각두 않구, 공동답에만 매달리면 어떡허잔 말이냐?"

아버지의 나무라는 말에 동혁은,

"차차 허지요. 물 푸는 게 서툴르니까 어떻게 심이 드는지…… 두렁 밑을 파는 데두 논바닥이 바싹 말러서 세상 가래를 받어야지요."

하고 집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발을 씻고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직자리 위에 가 턱 눕는다. 누웠다느니보다도 진종일 삐친 팔다리를 쭈욱 뻗고 지쳐 늘어진 것이다. 산울 밖에서 걸귀가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리건만, 꼼짝도 할 수가 없어서 누워 있노라니,

"저녁 먹어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된장찌개 냄새가 허기가 지도록 시장하던 동혁의 코에 맡혔다. 장물을 찔금 친 갯줄나물과 짠지쪽이 반찬이다.

"동화는 그저 안 들어왔에요? 들어오건 같이 먹지요."

동혁은 벌떡 일어나며 아우를 찾는다.

"누가 아니. 수동이네 주막에서 대낮버텀 술을 처먹는다더니 여태 게 있는 게지. 뭐구 뭐구 그 애가 맘을 못 잡어서 큰일났다. 글쎄 요샌 매일 장취로구나. 형두 형세가 부쳐서 허다 만 공부를, 뭘 가지고 허겠다구 허고헌 날 성화를 받치니 온 살이 내릴 노릇이지. 큰말 강도사네 작은아들이 대학굔가 졸업허구 와설라문 꺼덕대는 걸 보군, 버쩍 더 거염을 내니 어쩌면 좋냐. 뱁새가 황새를 따르려다간 다리가 찢어지는 줄 모르구 덮어놓고 날뛰는구나."

"아닌게아니라 큰 걱정이에요. 암만 사정허듯 타일러두 점점 왜먹기만 허는걸. 성미가 여간내기라야 손아귀에 너보지요."

하는데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고 동화가,

"아아니, 이 집에선 바 밥들을 호 혼자 먹나?"

하고 혀끝을 굴리지 못하고 비틀걸음을 치면서 들어온다. 눈동자까지 게게 풀린 것이 막걸리 사발이나 좋이 들이켠 모양이다. 평소에는 성이 난 사람처럼 뚜웅허니 남하고 수작하기도 싫어하면서 술만 들어가면 불평이 쏟아진다. 근자에는 안하무인으로 술주정까지 함부로 해서 아버지조차,

"저 자식은 하우불이야."

하고 그만 치지도외를 한다.

동화는 썩은 연시 냄새 같은 술 냄새를 후― 하고 내뿜으며 방으로 뛰어들더니,

"아 그래, 성님은 공부두 혼자 하구 밥꺼정 혼자 먹는 거유?"

하고 지게미가 낀 눈을 부라리며 생트집을 잡는다. 싹 깎은 머리가 자라서 불밤송이처럼 일어났는데, 형만 못지않게 건강한 몸집은 올해 스물두 살이라면 누구나 곧이를 안 들을 만하게 우람스럽다.

"어서 밥이나 먹어라. 얘긴 술이 깨건 허구……."

아우의 성미를 건드렸다가는 마구 뚫린 창구멍으로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서 형은 점잖이 타이른다.

"아아니, 내가 술이 취 취헌 줄 아우? 술두 안 먹는 성님은 도무지 대체 허는 게 뭐유? 밤낮 그 잘나 빠진 공동답이나 주무르구 콧물 흘리는 아이들을 뫄놓구서 언문 뒷다리나 가르치면 제일의 강산이란 말이요. 나 하나 공부두 못 허게 말끔 팔어 없애구서 큰소리가 무슨 큰소리유. 어디 헐 말이 있건 해보."

하면서 사뭇 형의 턱밑에다 삿대질을 하더니 이빨을 부르륵부르륵 갈다가,

"아이구―---"

하고 주먹으로 앙가슴을 친다. 그러다가는,

"제에길헐, 두 번 못 올 청춘을 이 시굴 구석에서 썩여야 옳단 말이냐?"

하고 벽이 무너져라고 걷어차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더니 그만 넉장거리로 자빠져 버린다.

동혁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앉아서 아우의 폭백을 받았다. 금세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하는 동화의 머리를 들고, 목침을 베어 주고는 뱃속이 몹시 괴로운 듯 눈살을 잔뜩 찌푸린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려니까, 속도 상하고 식곤증이 나서 팔베개를 하고 그 곁에 누웠는데,

"편지 받우―--- 박동혁이 있소?"

하는 소리가 싸리문 밖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동혁은 벌떡 일어나 고무신짝을 끌며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편지는 영신에게서 온 것이었다. 동혁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올 때에 정거장에서 굳은 악수로 작별을 한 뒤에, 올봄까지 오고 간 편지가 조그만 손가방으로 하나는 가득 찼으리라.

그 후 한 사람은 고향인 한곡리로, 한 사람은 기독교청년회연합회 농촌사업부의 특파원격으로 경기 땅이지만 모든 문화시설과는 완전히 격리된 청석골〔靑石洞〕이란 두메 구석으로 내려가서 일터를 잡은 뒤에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한가히 찾아다닐 시간과 여비까지도 없었거니와, 피차에 사업의 기초가 어느 정도까지 잡히기 전에는 만나지 말자는 언약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삼 전짜리 우표가 두 장 혹은 석 장씩 붙은 편지가 일주일에 한 번 열흘에 한 번씩은 거르지 않고 내왕을 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이란, 젊은 남녀간에 흔히 있는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업보고요, 의견교환이요, 또는 실제 운동의 고심담이었다. 서로 눈을 감고 앉았어도 한곡리와 청석골의 형편과 무슨 일을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며, 심지어 틈틈이 무슨 책을 읽고 어떠한 느낌을 받았다는 등 머릿속까지 환하게 들여다보이도록 적어 보냈고 적혀 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피차에 사사로운 생활이나 신변에 관한 일은 단 한 줄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터에 오늘은 편지를 뜯어 보고 동혁은 적지 않이 놀랐다.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건만, 그 동안 과로한 탓인지 몸이 매우 쇠약해졌어요. 더 참다가는 큰 병이 날 것만 같은데요, 단 며칠 동안이나마 쉬고는 싶어도, 성한 때와 달러 어머니한테도 가기는 싫고요, 잠시 쉬는 동안이라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동혁 씨가 계신 한곡리로 가서 얼마 동안 바닷바람이나 쏘이다가 올까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당신이 착수하신 사업을 직접 보고(결단코 시찰은 아니지만……) 많이 배워 가지고 오려고 합니다.

꼭 친히 뵙고 의논헐 일도 있고요, 겸사겸사 가고 싶은데 과히 방해나 되지 않으실는지요. 가면은 이 편지를 받으시는 다음다음 날(화요일) 아침 그곳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동혁은 흐릿한 등잔 밑에서 눈을 꿈벅꿈벅하며 몇 번이나 편지를 내려읽고 치읽고 하였다.

'그다지 튼튼허던 사람이 얼마나 고생을 했길래 큰 병이 날 것 같다구 했을까?'

'대관절 꼭 친히 만나서 의논하겠다는 일이란 무엇일까?'

'오는 거야 반갑지만, 도대체 무엇을 보여 주나? 무슨 일을 했다고 그 동안의 보고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과 걱정이 쥐가 꼬리를 물듯이 줄달아 일어났다. 더구나,

'정양을 하러 오는 사람이 당장 거처헐 데가 없으니 어떡허나.'

하는 것이 당면한 큰 문제다. 동혁은 가슴이 설레면서도 갑갑증이 나는데, 동화의 코고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마당으로 나왔다.

감나무 가지에 낫〔鎌〕같은 초생달이 걸린 것을 쳐다보면서 이런 생각 저런 궁리를 하다가,

'참 벌써 회원이 다들 모였겠네.'

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전번 일요일에 모였을 때의 회록과 오늘 저녁에 여러 사람에게 들려 줄 이야기를 초잡아 놓은 공책을 꺼내 가지고 나와서 작은마을 건배네 집 편으로 걸었다.

아직 여럿이 모일 만한 장소가 없어서, 김건배(金建培)라는 동지의 집 머슴 방을 빌려서 야학당 겸 농우회의 회관으로 쓰는 중이다.

이번 일요회(日曜會)에는 입에 침들이 말라서 가물어서 큰일이 났다는 걱정들만 하다가, 진종일 고역에 너무 지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회원이 태반이나 되었다. 그래서 동혁은,

"내일두 비가 안 오건, 우리 샘물을 길어다 퍼붓드래두 공동답에만은 못자리를 내두룩 허세."

하고 일찌감치 헤어지게 하였다. 집께까지 다 와서 축동 앞 다박솔 밑에 가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서 한참 동안이나 오스름한 달빛을 우러러보다가,

'달무리를 허니 인제나 비가 좀 오려나?'

하고 일어섰다. 제 그림자를 기다랗게 끌며 집으로 돌아오자니, 간담회 석상에서 처음 만나던 때와 악박골서 둘이 함께 밝히던 정열과 감격에 끓어 넘치는 그날 밤의 모든 정경이, 바로 어제런 듯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는 영신이가 보고 싶었다. 불현듯이 보고 싶었다. 이틀 동안을 기다리기가 한 이태나 되는 듯이―---

*

"이게 무슨 소리야!"

밤중에 동혁은 별안간 이불을 걷어차며 일어났다. 몸이 실실이 풀리는 듯 피곤해서 턱 쓰러지기만 하면 금방 잠이 들 것 같건만, 영신을 만날 생각과 시골은 도회지와 달라 남의 일에도 말썽이 많은데 미혼 처녀가 늙은 총각을 찾아오면 근처 청년의 지도자로 신망을 한몸에 모으고 모든 일에 몸소 모범이 되어야 할 처지에 있는 저로서 일동일정에 주목을 받을 터이니, 그것도 적지 않이 거북한 노릇이다. 생각이 옥신각신하다가 잠이 어렴풋하게 들었건만, 강제로 마취를 당한 듯도 하고 꺼져 가는 등잔불처럼 의식이 꿈벅꿈벅하는 판인데, 뜻밖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저 저녁도 안 먹고 자는 동화의 거친 숨소리에 섞여, 누에가 뽕잎을 써는 것처럼 부시럭부시럭하는 소리가 간간이 머리맡에서 들렸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릴까?'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들창 앞으로 다가앉으며 창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는,

'뚝― 뚝― 후두둑 후두둑.'

개초를 그저 못 해서 뒤꼍 헛간에 묶어서 세워 놓은 짚단과 수수깡이 사이에서, 잊어버릴 만치나 오랫동안 듣지 못하던 소리가 점점 크게 점점 똑똑하게 잦은 가락으로 들린다.

바람이 일어 청솔가지로 둘러싼 산울을 우수수 우수수 흔들다가, 덧문 창호지에 굵은 모래를 끼얹는 듯이 휘뿌리는 것은 틀림없는 빗소리가 아닌가.

"오오, 빗소리!"

동혁은 덧문을 밀쳤다. 습기를 축축히 머금은 밤바람이 방 안으로 휘돌아 들자, 자던 얼굴에 방울방울 부딪히는 찬 빗방울의 감촉! 동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얘 동화야, 비가 온다. 비가 와!"

형은 반가운 김에 아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동화는,

"응?"

하고 깜짝 놀라 일어나서 두 주먹으로 눈등을 부비더니,

"아 정말 비가 오우?"

하고 바깥을 내다본다. 시꺼먼 구름이 잔뜩 끼어 별 하나 찾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제엔장, 인제야 온담."

하고 볼멘소리를 하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나 아까 주정했수?"

하고 형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를 못한다.

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서 더 자거라. 이 담버텀 챙기면 고만이지…… 다 형의 잘못이다."

하고 문을 닫는다. 그러다가 아우가 엎드리며 머리맡을 더듬으니까, 얼핏 자리끼 사발을 집어서 입에 대어 준다. 동화는 조갈이 심하게 나던 판이라 목을 늘이고 숭늉 한 사발을 벌떡벌떡 들이켜고는 다시 쓰러진다.

비가 제법 장마 때처럼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한다. 동혁은 일종의 신비감을 느끼어 노래라도 한마디 부르고 싶었다.

십 년 만에 만나는 친구의 음성인들 이 빗소리보다 더 반가우랴. 흉년이 들겠다고 벌써부터 쌀금 보릿금이 오르고 초목의 새싹이 지지리 타들어 가도록, 온갖 생물이 목말라하던 대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그 비를 휘몰고 들어오는 선들바람의 교향악! 그것은 오직 하늘의 처분만 바라고 사는 농민의 귀에라야 각별히 반갑게 들리는 소리다.

안방에서는 늙은 양주도 잠이 깨었는지 이야기하는 소리가 두런두런한다.

동혁은 창 밖으로 팔을 내밀고 천금을 주고도 그 한 방울을 살 수 없는 생명수를 손바닥에 받아 본다. 자리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뛰어나가서 그 비에 온몸을 골고루 적시다가 땅 위에 디굴디굴 구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동혁은 아우가 감기나 들까 보아 다시 문을 닫았다. 바람은 파도 소리처럼 쏴아쏴아 하고 머리맡에서 뒤설렌다. 논배미마다 단물이 흥건히 고이고, 보리밭 원두밭이 시꺼매지도록 빗물이 흠씬 배어들어갈 것을 상상하면서도,

'이 우중에 영신이가 어떻게 오나. 내일까지만 실컨 오구 말었으면…….'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튿날도 비는 끊임없이 왔다. 동혁은 도롱이를 쓰고 살포를 짚고 나가서 논의 물꼬를 보고 들어왔다. 점심 뒤에는 신문지를 말끔 몰아 가지고 집에서 한 삼 마장이나 되는 바닷가로 나왔다.

해변에서 새우를 잡아 말리고 준치나 숭어를 잡는 철이 되면, 막살이를 나오는 술장사에게 빌려 주는 오막살이의 방 한 간을 빌렸다.

아들은 젓잡이를 하러 나가고, 늙은 마누라와 며느리만 집을 지키고 있어서, 대낮에도 노 젓는 소리와 간간이 뱃노래 소리밖에는 들리는 것이 없어 여간 조용하지가 않다.

동혁은 주인 마누라에게 풀을 쑤어 달래서 신문지로 흙방을 지키고 기직을 구해다가 방바닥에 깔고 하느라고 비에 젖은 하루 해를 보냈다.

"어떤 손님이 오시길래 이렇게 손수 방치장을 허우? 그만허면 신방두 꾸미겠네."

하고 주인 마누라는 안질이 나서 짓무른 눈을 꿈적이며 두번 세번 묻는다. 동혁은,

"오는 사람을 보면 알 걸 뭬 그렇게 궁금허우."

하고는 손님이 묵고 있는 동안, 밥까지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집에는 거처할 방도 없거니와, 거진 하루 한 번씩은 입버릇처럼 장가를 들라고 성화를 하는 부모가 어떻게 알는지도 몰라서, 일테면 사처를 잡은 것이다.

저녁 뒤에 동혁은 가장 무관하게 지내고 또 영신을 오래 소개해 온 건배와 정득이, 갑산이, 칠룡이 같은 농우회원을 찾아다니며 '채영신이가 내일 아침에 온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동혁은 단독으로 영신을 맞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건배는,

"흥, 인제야 자네가 몽달귀신을 면허나 보이. 앞으로 다섯 해 안에는 결혼을 안 헌다구 장담을 허더니 허는 수 있나. 지남철 기운에 끌려오는걸."

하고 연방 동혁을 놀려 댄다. 동혁은 변색을 하며,

"여보게,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린가? 아예 그런 말은 입 밖에두 내지 말게. 동지와 애인을 구별 못 허는 낸 줄 아나?"

하고 건배의 험구를 틀어막았다.

이튿날은 이슬 같은 보슬비로 변하였다. 앞 논과 집 뒤 개울에서는, 개구리가 제철을 만난 듯이 운다. 밤새도록 울고도 지칠 줄을 몰라서, 대합조개 껍데기를 마주 부비는 듯이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이다.

이른 아침, 동혁은 찢어진 지우산을 숙여 쓰고 큰덕미로 갔다. 쇠대갈산 등성이 위에 올라 머리를 드니, 구름과 안개에 싸인 바다가 눈앞에 훤하게 터진다. 무엇에 짓눌렸던 가슴이 두 쪽에 쩍 뻐개지는 것 같은 통쾌감과 함께, 동혁은 앞으로 안기는 시원한 바람을 폐량껏 들이마셨다가 후우 하고 토해 내고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나루께로 내려갔다.

큰덕미라는 곳은 하루 한 번 똑딱이(석유 발동선)가 와 닿는 조그만 포구로, 주막 몇 집과 미루나무만 엉성하게 선 나루터다.

고무신 운두가 넘도록 발이 진흙에 푹푹 빠져, 동혁은 신바닥을 모래에다 부비며 비에 젖은 바윗돌 위에 가 털퍼덕 주저앉아서 물참이 되기만 기다리는데,

"여보게 동혁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동혁은 소리나는 편을 돌려다보며,

"건밴가? 어서 오게―---"

하고 손짓을 하였다. 가마솥 뚜껑만한 농립을 쓰고, 육 척 장신에 밀짚 도롱이를 껑충하게 두르고서 휘적휘적 오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틀림없는 건배였다. 그 뒤에는 정득이, 갑산이, 칠룡이, 석돌이, 또 동화까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농우회의 회원들이 유지로 만든 우장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푸대쪽을 두르고, 칠팔 명이나 줄렁줄렁 따라온다. 그네들이 가까이 오자 동혁은,

"자네들 미안허이그려."

하고 무심코 동혁은 한 말이건만,

"자네가 우리더러 미안허달 게 뭐 있나? 그야말루 진날 개 사위 꼴을 허구 나왔어두 자네 장가드는 데 배행 나온 셈만 치면 좋지 않은가?"

건배는 동혁의 말을 얼른 채뜨려 가지고, 이번에는 빗대어 놓고 놀려 댄다.

"앗게 이 사람, 또 그런 소릴……."

하고 동혁은 눈을 슬적 흘기면서도, 어쩐지 건배의 놀리는 말이 그다지 듣기 싫지는 않았다.

바람결에 통통통통 하는 소리가 바위에 철썩철썩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섞여 차츰차츰 가까이 들려 왔다. 조금 있자,

'뛰―잇.'

새된 기적 소리는 동혁의 가슴속까지 찌르르하도록 울렸다.

이윽고 파아란 뼁끼칠을 한 똑딱이가 선체를 들까불며 들어온다. 갑판 위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보인다. 동혁은 손을 높직이 들며 허공을 저었다.

조그만 거루는 선객과 짐을 받아 싣고 선창으로 들어와 닿았다. 동혁은 반가운 웃음을 얼굴 가득히 담고 영신의 손을 잡아 뭍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비, 참 잘 왔죠?"

한마디가 첫밗에 하는 영신의 인사였다.

"잘 오구말구요.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허셨에요?"

하며 동혁은 영신의 얼굴빛을 살핀다. 상상하던 것보다는 나아도, 어글어글하던 눈이 전보다 더 커다래 보이는 것은, 그 복성스럽던 얼굴의 살이 그만큼 빠진 탓일 듯. 그러나 반가운 김에 상기가 되어 그런지 혈색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위선 안심을 하였다.

"그거 내 들어다 드릴까요?"

"아아니, 괜찮어요."

"글쎄 이리 주세요."

"이 속엔 비밀 주머니가 들어서 안 돼요."

바스켓 하나를 가지고 네가 들리 내가 들리 승강이다.

'고집이 여전허군.'

하면서 동혁은 우산을 받쳐 주며 나란히 서서 주막 앞까지 와서,

"참 인사들 허시지요. 편지루 아셨겠지만 같이 일허는 동무들인데……."

하고는,

"이 키 큰 친구는 김건배 군이구요."

하고 건배를 위시하여 인사를 시킨다.

"감사합니다. 비 오는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영신은 활발히 손을 내밀고 서양 여자처럼 차례차례 악수를 한다. 여러 청년은 입 속으로 간신히 제 이름을 대면서 계집애처럼 얼굴들을 붉혔다. 피차에 악수를 교환한 것이 아니라, 얼떨김에 생후 처음으로 젊은 여자에게 악수를 당한 셈이었다.

두 사람이 앞장을 서고, 여러 청년은 그 뒤를 따라온다.

"허어 이거, 정말 우리가 별배 노릇을 허는군."

"여보게 말 말게. 손을 어떻게 쥐구 잡어 흔드는지 하마터면 아얏 소리를 지를 뻔했네."

하고 뒷공론을 하는 소리가 동혁의 귀에까지 들려서, 픽 하고 혼자 웃었다.

신작로로 나오자, 잠시 뜨음하던 빗발이 다시 뿌리기 시작한다. 자갈도 깔지 않은 길바닥은 된 풀을 이겨 논 것처럼 발을 옮겨 놓을 수가 없도록 끈적끈적하다. 영신은 미끄럼을 탈까 보아 길바닥만 들여다보며,

"이렇게 진데, 용허게들 나오셨군요."

하고 길가의 아카시아나무를 붙들고 신바닥에 붙어 달린 진흙을 문지르고는 언덕의 잔디를 이리저리 골라 딛는다.

어젯밤 비만 해도
보리에는 무던하다.
그만 갤 것이지
어이 이리 굳이 오노.
봄비는 찰지다는데
질어 어이 왔는가.
비 맞은 나뭇가지
새 움이 뾰죽뾰죽.
잔디 속잎이
파릇파릇 윤이 난다.
자네도 그 비를 맞어서
정이 치〔寸〕나 자랐네.

이런 때 이런 경우에 동혁이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비 맞고 찾아온 벗에게」라는, 조운(曺雲) 씨의 시조 두 장을 가만히 입 속으로 읊었으리라.

영신은 바라던 대로 바닷가 한가한 집에서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동혁이가 신문지로나마 도배를 말끔히 하고 자리까지 새 것을 깔아 놓고 저를 기다려 준 데는 무어라고 말이 나오지 않을 만치 고마웠다.

더구나 농우회원들은 비를 맞으며 갯고랑으로 나가서 낙지를 캐어 오는 사람에, 손 그물을 쳐서 새우를 잡아 오는 사람에 대접이 융숭하다. 그것도 못 하는 사람은 인제야 고추잎만한 시금치를 솎아 가지고 와서 몰래 주인 마누라를 주고 간다.

"경치두 좋지만, 우리 청석골보덤 인심두 여간 후하지 않군요."

하고 영신은 너무 미안해서 몸둘 곳을 몰라한다. 회원들은 선생으로 숭앙하는 동혁이와 가장 뜻이 맞는 동지요, 또는 공부도 많이 했건만 농촌사업을 헌신적으로 하는 여자라니까(실상 그네들은 십여 리 밖에 있는 보통학교 여훈도밖에는 신여성과 대해 본 경험이 없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무슨 까닭이 있는 줄로 짐작을 하는 눈치면서도 자기네 힘껏은 대접을 하는 것이다.

그 중에도 어느 사립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사건에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이태 동안이나 콩밥을 먹고 나온 경력이 있는 건배는, 남의 일이라면 발을 벗고 나선다. 주선성이 있어서 한곡리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농우회의 선전부장격으로 진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며 활동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동혁이보다도 몇 해나 먼저 야학을 개설한 선각자로 동혁이와는 어려서 싸움도 많이 하였지만, 뜻이 맞는 막역한 동무였다. 그는 무슨 여왕이나 모셔다 놓은 것처럼 수선을 부리며 돌아다닌다. 그 멋없이 큰 키를 바람에 불리는 바지랑대처럼 내젓고 돌아다니며 광고를 하여서, 여학생이 동혁이를 찾아왔다는 소문이 하룻동안에 동네에 파다하게 돌았다.

"그게 누구냐? 응. 그 여학생이 누구야? 어디 나두 좀 보자꾸나."

며느리를 못 보아 상성이 난 어머니는 꼬부랑거리고 아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성화를 받친다. 박첨지도 마누라를 염탐꾼처럼 놓아서 며느릿감(?)을 보고 오라고 넌지시 이르기까지 하건만 동혁은,

"글쎄 얼투당투 않은 말씀은 입 밖에두 내지 마세요. 신병이 있어서 잠깐 휴양두 헐 겸 우리들이 일하는 걸 보러 온 여자라니까요."

하고 골까지 내었다. 그런 때는 동화가 형의 편을 들어서 제가 무슨 속중이나 아는 듯이 그렇지 않다는 변명을 해준다.

이래저래 동혁은 오던 날 하루는 여러 회원들과 얼려다니며 영신을 접대하고, 일부러 단둘이 앉을 기회는 피하였다. 한편으로는 몸도 쇠약해진데다가 밤배를 타고 우중에 시달려 온 사람을 붙잡고 길게 이야기를 하기도 안되어서, 마음을 턱 놓고 쉬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녁 뒤에 건배는,

"이 사람, 그이가 귀양살이를 왔단 말인가? 혼자 적적해헐 테니 우리 가서 청석골서 활동허는 얘기나 듣구 오세."

하고는 회원들을 끌고 가서 저 혼자 한바탕 떠들다가 돌아왔다.

영신은 그 동안 동혁이가 내려와서 한 일과 계속해서 하는 일이며, 동네 형편까지도 '선전부장'인 건배의 입을 통해서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영신은, '저이가 원체 묵중허겐 생겼지만, 내가 누굴 찾어왔다고 저렇게 뚜웅허니 앉었다가, 다른 사람버덤도 앞을 서서 갈까?'

하고 동혁의 태도가 섭섭할 지경이었다.

비는 그치고 바닷가의 밤은 깊어 갔다. 영신은 공연히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잠을 청하느라고 조그만 등잔 밑에서 공부삼아 볼까 하고 가지고 온 잡지의 농촌 문제 특집호를 뒤적거리고 누웠다. 모래사장을 찰싹찰싹 가벼이 두드리는 파도 소리를 베개삼고서…….

그때에 창 밖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만 주무시지요. 고단허실 텐데……."

하는 것은 틀림없는 동혁의 목소리였다. 그는 집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나와서 홀로 해변을 거닐며 영신의 신변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네 자겠어요, 난 벌써 가셨다구요."

하고 영신이가 반가이 일어나 문을 열려니까,

"문고리를 꼭 걸구 주무세요."

한마디를 남긴 뒤에, 동혁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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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은 그날 밤 그가 숭배하는 백씨에게 백 퍼센트로 동혁을 소개하였었다. 어쩌면 동혁이가 영신에게 대한 것보다, 그 이상으로 '박동혁'이란 인물의 첫인상이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 구릿빛 같은 얼굴, 황소처럼 건강한 체격, 거기다가 조금도 꾸밀 줄은 모르면서도 혀끝으로 불길을 뿜어 내는 듯한 열변, 그리고 비록 처음 만났으나마 어두운 길거리로 제 뒤를 따라다니며 보호해 주면서도, 조그만치도 비굴하거나 지나친 친절을 보이지 않던 그 점잖은 몸가짐.

영신이가 입에 침이 말라서 동혁의 외모와 행동을 그려 내니까 백씨는,

"오우 그래? 온 저런. 매우 좋은 청년이로군."

하고 서양 여자처럼 연방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자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 곁눈질로 흘끔흘끔 영신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니, 영신이가 대번에 그 남자헌테 홀딱 반헌 게 아냐?"

하고 거침없이 한마디를 하고 사내처럼 껄껄껄 웃는다. 영신의 얼굴은 금세 주황물을 끼얹은 것처럼 빨개졌다. 머리를 푹 수그린 채,

"아이 선생님두……."

하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능갈친 백씨는 나이 찬 처녀의 마음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이,

"그렇지? 별안간 앙카슴 한복판에 화살이 콱 들어와 박힌 것 같지? 난 못 속이지, 난 못 속여."

하고 사뭇 놀려 댄다. 영신은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하느라고 억지로 얼굴을 쳐들며,

"제가 그렇게 경솔헌 여잔 줄 아세요?"

하고 가벼이 뒤받듯 하였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다시금 부끄러움에 눌려 익은 곡식의 이삭처럼 저절로 수그러진다. 백씨는 한참이나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꿈벅꿈벅하며 무엇을 생각하다가, 손등으로 하품을 누르면서,

"그렇지만, 지금 와서 맘에 맞는 남자가 나타났드래두……."

하고는 주저주저하더니,

"벌써 약혼해 논 사람은 어떡허누?"

하고 혼자말하듯 하며 돌아누워 버렸었다.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제 모양과 같이 뭉툭한 철필 끝으로 꾹꾹 눌러 쓴 글발은 굵다란 획마다 전기가 통해서 꿈틀거리는 듯, 피봉을 뜯는 영신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주신 글월은 반가이 받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실례한 것은 이 사람이었소이다. 남자끼리였으면 하룻밤쯤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영신 씨의 사정을 보느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고 말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러한 의미 깊은 모임에 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오는 토요일에는 교우회의 책임 맡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토요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법전'과 축구시합이 있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시합이 끝나면 시간이 늦더라도 백선생 댁으로 가겠으니, 그때 반가이 뵙겠습니다.

하는 사연이었다. 영신은 그 편지를 백씨에게까지 가지고 가서 보이고, 침상머리의 일력을 하루에 몇 번씩 쳐다보면서 그 다음 토요일이 달음박질로 돌아오기만 고대하였다.

시합하는 날, 동혁은 연습할 때와는 딴판으로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신문사 같은 데서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도 늦더위가 대단해서 그런지 넓은 운동장에 구경꾼은 반쯤밖에 아니 찼다. 중학교끼리 대항을 하는 야구와도 달라서 응원도 매우 조용하게 진행이 되었다. 전반까지는 골키퍼인 동혁이가, 적군이 몰고 들어와서 쏜살같이 들여 지르는 볼을 서너 번이나 번갯불처럼 집어 던지고 그 큰 몸뚱이를 방패삼아서 막아 내고 한 덕으로 승부가 없다가, 후반에 가서는 선수 중에 두 사람이나 부상자가 생긴 데 기운이 꺾여서 '고농'이 세 끗이나 졌다.

그러나 최후까지 딱 버티고 서서 문을 지키다가, 볼을 막아 내치는 동혁의 믿음성 있고 민활한 동작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혁은 풀이 죽은 다른 선수들과 섞여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나오다가 정문 곁에 비켜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자를 발견하였다.

"구경 오셨에요?"

동혁은 발을 멈추며, 뜻밖인 듯이 영신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 곁에 초록색 양장을 하고 서서 저를 주목하는 나이가 한 사십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를 보자,

'백현경이로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영신은 가벼이 답례를 한 뒤에,

"중간에 왔지만 참 썩 잘 막어 내시드군요."

하고 흙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뒤발을 한 동혁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백선생님허고 인사허시죠."

하고 양장 부인을 소개한다. 백씨는 동혁이가 모자를 벗을 사이도 없이 다가서며,

"오우, 미스터 박!"

하고 손을 내민다. 동혁은 같이 나오던 선수들이 흘끔흘끔 돌려다보고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전찻길로 건너가는 것을 보면서, 흙투성이가 된 운동복 바지에다 얼른 손바닥을 문지르고 백씨의 악수를 받았다.

"박동혁이올시다. 백선생의 선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체수에 걸맞지 않게 수줍어한다. 백씨가,

"아, 이 미스 채가 자꾸만 구경을 가자구 졸라싸서……."

하고 돌려다보니까 영신은,

"아이, 선생님두…… 제가 언제 졸랐어요?"

하고 선생의 말끝을 무지르며 살짝 흘겨본다.

"아무튼 아주 파인 플레이를 보여 주셔서 여간 유쾌허지 않었습니다."

하는 백씨의 칭찬에,

"천만에요, 두 분이 오실 줄 알었드면 꼭 이길 걸 그랬습니다."

하고 동혁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운동선수다운 쾌활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그때에 먼저 전차를 탄 선수들이 승강대에서,

"여보게, 동혁이―---"

하고 소리를 지르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동혁은,

"가네, 가!"

하고 손을 들어 보이자, 영신이가 다가서며,

"이따가 꼭 오시죠? 시간은 일곱시야요."

하고 입빨리 묻는다. 동혁은,

"네, 가겠습니다."

한마디를 던지듯 하고, 백씨에게는 인사도 할 사이가 없이 전찻길로 달려가더니, 속력을 놓기 시작한 전차를 홱 집어탔다. 전차가 지나간 뒤에는 두 줄기 선로만 영신의 눈이 부시도록 석양을 반사하였다.

……동혁은 약속한 시간에 거의 일 분도 어김없이 백씨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을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와서, 중문간까지 나갔던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서 들어오세요. 난 누구시라구요. 시간을 썩 잘 지켜 주시는군요."

하고 팔뚝시계를 보고 너스레를 놀며 동혁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댁이 훌륭헌데요."

하고 동혁은 두리번거리며 집 안을 둘러본다. 삼천 원이나 들여서 새로 지었다는 집은 네 귀가 반짝 들렸는데, 서까래까지 비둘기장처럼 파란 뼁끼칠을 하였고, 분합 마루 유리창에는 장미꽃 무늬가 혼란한 휘장을 늘여 쳤다. 마당은 그다지 넓지 못하나 각색 화초가 어울려 피었는데, 그 중에도 이름과 같이 청초한 옥잠화 두어 분은 황혼에 그윽한 향기를 놓는다.

먼저 온 회원들은 응접실로 쓰는 대청에 모여서 혹은 피아노를 눌러 보고, 혹은 백씨가 구미 각국으로 시찰과 강연을 하러 다닐 때 박힌 사진첩을 꺼내 놓고 둘러앉았다.

그가 여류 웅변가요 음악도 잘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집에 피아노까지 있을 줄은 몰랐고,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가 이러한 문화주택을 짓고 지낼 줄은 더구나 상상 밖이었다.

그는 대청으로 올라가서, 주인의 소개로 칠팔 명이나 되는 젊은 여자들과 인사를 하였다. 여자들은 입 속으로만 제 이름을 대서 하나도 기억은 할 수 없다. 남자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아니 온 모양인데, 웬일인지 안내역인 영신은 그림자도 나타내지를 않는다.

'그저 아니 왔을 리는 없는데…….'

동혁은 매우 궁금하기는 하나 이구석 저구석 기웃거리며 찾을 수도 없고, '채영신은 왜 보이지를 않느냐'고 누구더러 물어 보기도 무엇해서, 한구석 의자에 걸터앉아서 분통같이 꾸며 놓은 마루방 치장만 둘러보았다. 백씨가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반쯤 열린 침실이 언뜻 눈에 띄었다. 유리 같은 양장판 아랫목에는 새빨간 비단 보료를 깔아 놓았고, 그 머리맡의 자개 탁자는 초록빛의 삿갓을 씌운 전등이 지금 막 들어와서 으스름 달처럼 내리비친다. 여자의, 더구나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실례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주인이 제가 앉은 바로 맞은쪽의 미닫이를 열고 드나들기 때문에 자연 눈에 띄는 데야 일부러 고개를 돌릴 까닭도 없었다.

동혁은 그와 똑같이 으리으리하게 치장을 해놓은 방이, 그 윗간에도 또한 이 간쯤이나 엇비슷이 들여다보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왜들 얘기도 안 허고 있어요? 자, 이것들이나 들으면서 우리 저녁을 먹읍시다."

하고 귀중품인 듯 빨간 딱지가 붙은 유성기판을 들고 나오는데, 그 등뒤를 보니까 윗목에 반 간통이나 되는 체경이 달려 있다. 동혁은 속으로,

'오오라, 체경에 비쳐서 또 다른 방이 있는 것 같은 걸 몰랐구나.'

'기생방이면 저만큼이나 차려 놨을까.'

하면서도, 은근히 영신이를 기다리느라고 고개를 대문 편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자,

"아 이건 별식을 헌다구 저녁을 굶길 작정야?"

하고 백씨가 분합 끝으로 나서며 외치니까,

"네에, 다 됐어요."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부엌 속에서 나더니, 뒤미처 에이프런을 두른 영신이가 양식 접시를 포개 들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나온다. 동혁이가 온 줄은 벌써 알았지만, 음식을 만들다 말고 내달아 번잡스러이 인사를 하기 싫어서 인제야 나온 것이다. 동혁은 영신과 눈이 마주쳐서,

'오, 부엌 속에 있었구나.'

하면서 말 대신 웃음을 띠고 머리만 숙여 보인다.

유성기를 틀어 오케스트라(交響樂)를 반주삼으며, 여러 사람은 영신이가 만든 라이스카레와 오믈렛 같은 양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이야기판이 벌어졌대도 영신은 이 집의 식모와 함께 시중을 드느라고 부엌으로 들락날락하고, 농민수양소 여자부에서 초대를 받아 온 시골 학생들은 처음으로 먹는 양식을 잘 못 먹다가 흉이나 잡힐까 보아 포크를 들고 남의 눈치들만 보는데, 백씨 혼자서 떠들어 댄다. 동혁과 영신을 번갈아 보면서, 그 동안에 몇십 번이나 곱삶았을 듯한 정말(丁抹)의 시찰담으로부터, 구미 각국의 여성들의 활동하는 상황 같은 것을 풍을 쳐가며 청산유수로 늘어놓는다.

청년회의 농촌지도부 간사로 있는 얼굴이 노란 김씨라는 사람이 늦게야 참석을 해서 인사를 하였을 뿐이요, 남자는 단 두 사람이라 동혁은 잠자코 제 차례에 오는 음식만 퍼넣듯 하고 앉았다.

영신이가 모박아서 두둑히 담아 준 라이스카레 한 접시를 게눈 감추듯 하고는 잠자커니 앉았는 동혁을 보고 백씨는,

"여봐 영신이, 이 미스터 박은 한 세 그릇 자셔야 헐걸."

하고 더 가져오라고 눈짓을 한다. 영신은 저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듯이 카레 건덕지를 담은 것을 냄비째 들고 와서,

"첫번 솜씨가 돼서 맛은 없지만, 냉기시면 안 돼요."

하고 귓속하듯 한다. 동혁은,

"허, 이건 나를 밥통으루 아시는군요."

하며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영신이와 말을 주고받았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차가 나오고 실과가 나왔다.

백씨는 잠시도 입을 다물 사이가 없이 '우리의 살 길은 오직 농촌을 붙드는 데 있다'는 것과 '여러분들과 같은 일꾼들의 어깨로 조선의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는 등 열변을 토한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감동이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백씨는,

"미스터 박, 그 동안 많이 활동을 허셨다니 그 얘기를 좀 들려 주시지요. 대단히 참고가 될 줄 믿습니다."

하고 농촌운동에 관한 감상을 묻는다. 동혁은,

"나는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려구 왔으니까요……."

하고 사양을 하여도 무슨 말이든지 해달라고 굳이 조르다시피 하니까, 동혁은 못 이기는 체하고 찻잔을 입에서 떼며 뒤통수를 긁적긁적하더니,

"그럼 한마디 허지만 들으시기가 좀 거북허실는지두 모를걸요."

하고 뒤를 다진다.

"온 천만에,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라는데요."

사교에 능란한 백씨라, 낯을 조금 붉히는 듯하면서도 그만한 대답쯤은 예사로 한다. 동혁은 실내의 장식과 여러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둘러본 뒤에,

"나는 뒷구녁으루 남의 숭을 본다든지 당자가 듣지 않는데 뒷공론을 허는 걸 싫어허는 성미예요."

하고 화두를 꺼내더니 목소리를 떨어뜨려,

"이런 모임이 고적허게 지내는 백선생을 가끔 위로해 드리는 사교적 회합이라면 모르지만, 농촌을 지도헐 분자들이 장래에 헐 일을 의논허려는 모임 같지는 않은 감상이 들었어요."

하고 눈도 깜작거리지 않고 쳐다보는 영신을 향해서 말하듯이,

"나는 이런 정경을 눈앞에 그려 보구 있었는데…… 들판〔平野〕의 정자라구 헐 수 있는 원두막에서 우리들이 모였다구 칩시다. 몇 사람은 밭으루 내려가서, 단내가 물큰허구 코를 찌르는 참외나, 한 아름이나 되는 수박을 둥둥 두드려 보고는 꼭지를 비틀어서 이빨이 제리두록 찬 샘물에다가 흠씬 담거 두거든요. 그랬다가 해가 설핏헐 때 그눔을 끄내설랑 쩍 뻐개 놓구는 삑 둘러앉어서 어적어적 먹어 가며 얘기를 했으면 아마 오늘 저녁의 백선생이 허신 말씀이 턱 어울릴 겝니다."

하고 의미 깊게 듣는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주인을 흘낏 본다. 영신은,

"아이, 말만 들어두 침이 괴네."

하고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애처럼 다가앉는다. 동혁은 물끄러미 영신을 보다가 말을 계속한다.

"석양판에 선들바람이 베옷 속으루 스며들 적에, 버드나무의 매미 쓰르라미 소리가, 피아노나 유성기 소리버덤 더 정답구 깨끗헌 풍악 소리루 들려야 허겠는데…… 어째 오늘 저녁엔 서양으루 유람이나 온 것 같은걸요."

하고 시치미를 딱 갈기고 한마디 비꼬아 던지는 바람에 백씨는 고만 자존심을 상한 듯 동혁과는 외면을 한 채,

"그야 도회지에서 살게 되니까 외국 사람허구 교제 관계두 있어서 자연 남 봄에는 문화생활을 하는 것 같겠지요. 그렇다구 내가 그런 시굴 취미를 모르는 줄 아시면 그건 큰 오핸걸요."

하고 변명 비슷이 한다. 동혁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처럼,

"취미요? 시굴 경치에 취미를 붙인다는 것과, 농민들과 똑같은 생활을 해가면서 우리의 감각까지 그네들과 같어진다는 것과는 딴판이 아닐는지요? 값비싼 향수나 장미꽃의 향기를 맡어 오던 후각이 거름 구덩이 속에서 두엄 썩는 냄새가 밥 재치는 냄새처럼 구수하게 맡아지게까지 돼야만, 비로소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생길 줄 알어요. 농촌 운동자라는 간판을 내걸은 사람의 말과 생활이 이다지 동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나서 동혁은 제가 한 말이 좀 과격한 듯해서,

"반드시 백선생더러만 들으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허지만, 농촌 운동일수룩 무엇버덤 실천이 제일일 줄 알어요. 피리를 부는 사람 따루 있구, 춤을 추는 사람이 따루 있던 시대는 벌써 지냈으니까요. 우리는 피리를 불면서 동시에 춤을 추어야 헙니다. 요령을 말씀하면, 우리는 남의 등뒤에 숨어서 명령하는 상관이 되지 말고 앞장을 서서 제가 내린 명령에 누구버덤 먼저 복종을 허는 병정이 돼야만 우리의 운동이 성공허겠단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하기에 동혁은 이마에 땀을 다 흘렸다. 그 동안 백씨는 몇 번이나 얼굴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다가 무슨 생각에 잠긴 모양인데, 영신은 눈을 내려감고 앉았으나 동혁이가 말 구절마다 힘을 들일 때는 무엇에 꾹꾹 찔리는 것처럼 어깨와 젖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동혁은 정면으로 보았다.

백씨가 자기의 변명을 기다랗게 늘어놓으려는 기세를 살피고, 동혁은 기둥에 걸린 뻐꾸기 시계를 쳐다보더니,

"기차 시간이 돼서 고만 실례허겠습니다."

하고 일어선다. 백씨는 형식적으로,

"왜 어느새……."

하고 붙잡는 체하는데, 영신이도 시계를 쳐다보더니,

"참 저두 가야겠어요."

하고 따라 일어선다.

*

두 사람은 큰길로 나왔다. 상기가 되었던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우리 산보나 헐까요?"

"기차 시간이 되지 않었어요?"

"오늘 못 가면 내일 첫차루 가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영신 씨가 또 쫓겨나실까 봐서……."

"전 괜찮아요. 쫓겨나면 고만이죠."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

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두 허는 덴가요?"

"여태 한 번도 못 가보셨어요?"

"온, 시굴뜨기가 돼서……."

"누군 시굴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 고장은 옛날에 서울 양반들이 귀양살이나 하러 오던 동해변의 조그만 어촌인데요. 동혁 씨의 고향은 저번에 소개를 해주셔서 잘 알었지만 거기두 어지간히 궁벽한 데드군요."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서로 자기네 고향의 풍경과 주민들의 생활하는 형편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버스는 그친 지도 오랜 듯, 큰길 양 옆의 가게는 빈지를 닫기 시작한다.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감옥 앞 넓은 마당까지 오니까 전등불이 겅성드뭇해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드물어서 어두운 골목 속으로 드나드는 흰 옷자락만 희뜩희뜩 보일 뿐.

떠오른 지 얼마 안 되는 하얀 달은 회색빛 구름 속에 숨었다가는 흐릿한 얼굴 반쪽을 내밀고 감옥의 높은 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악박골 물터 위의 조그만 요릿집에서는 장구 소리와 함께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 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동혁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돈 십 전을 주고, 약물 한 주전자와 억지로 떠맡기는 말라 빠진 굴비 한 마리를 샀다.

"온, 샘물을 다 사먹는담."

하고 한 바가지를 철철 넘치도록 따라서 영신에게 권한다.

"주전자 꼴허구, 약이 되기는커녕 배탈이 나겠어요."

하면서도 한창 조갈이 심하던 판이라, 둘이 번차례로 한 사발씩이나 벌떡벌떡 마셨다. 물이야 정하나마나 폭양에 운동을 한데다가 한여름 동안 더위에 들볶이던 오장은 탄산수를 마신 것처럼 쏴아 하고 씻겨내려가는 것 같은데, 골 안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에 속적삼에 배었던 땀이 식어서 선뜩선뜩할 만치나 서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으슥한 언덕 밑 바위 아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등 뒤 송림 속에서 누군지 청승맞게 단소를 부는 소리가 들린다. 영신은 한참이나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감옥 속에 갇힌 사람이 자다 말구 저 소릴 들으면 퍽 처량허겠어요."

하고 얼굴을 든다. 구름을 벗어난 창백한 달빛은 고향 생각에 잠겼던 그의 얼굴을 씻어내린다.

"참,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군요."

동혁이도 약간 애상적인 감정에서 눈을 번쩍 뜨며 혼자말하듯 한다.

"왜요?"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몇 주일 전까지는 백판 이름두 모르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앉어서 약물터의 달을 똑같이 쳐다볼 줄이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참말요, 이것두 하나님의 뜻인가 봐요."

"참, 영신 씨는 크리스찬이시지요?"

"전 어려서버텀 믿어 왔어요. 왜 동혁 씨는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주의자세요?"

"글쎄요, 그건 차차 두구 보시면 알겠지요. 아무튼 신념을 굳게 하기 위해서나 봉사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허는 것두 좋겠지요.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아첨을 허는, 그 따위 타락헌 종교는 믿구 싶지 않어요."

하다가 영신이가 무어라고 질문을 할 기세를 보이니까 동혁은,

"종교 문제 같은 건 우리 뒀다가 토론허십시다. 그버덤 더 중요헌 얘기가 있으니까요."

하고 손을 들어 미리 영신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러고는 눈을 딱 감고 한참이나 이슬에 젖은 숲속의 벌레 소리를 듣고 있더니,

"나는 이런 생각을 하구 있에요."

하고 응성깊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간담회 석상에서 영신 씨가 허신 말씀을 듣구 감복을 했지만, 내가 농촌의 태생이면서두 여러 해 나와 있다가 직접 농촌 속으루 들어가 보니까, 참말 그네들의 사는 형편이 말씀이 아니에요. 신문이나 잡지에서 떠드는 것버덤 몇 곱절 비참하거든요."

하고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오래 전부터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난 자진해서 학교를 퇴학허고 싶어요."

하고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숲속에서 반득이는 반딧불을 들여다보며 동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영신은 얼굴을 번쩍 들며,

"왜요? 일년 반만 더 댕기시면 졸업을 허실 텐데요?"

하고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뜬다.

"고만둘 수밖에 없어요. 중학교 때엔 억지를 쓰구 별별 짓을 다 해가면서 고학을 했지만, 나 하나 공부를 시키느라구 아버지는 올봄까지 대대루 내려오던 집 앞 논까지 거진 다 팔으셨에요. 졸업만 하면 큰 수가 날 줄 알구 계량할 것두 아니 남기신 모양인데, 내가 졸업이라구 헌댔자 바루 취직두 허기 어렵지만, 무슨 기수(技手)라는 명색이 붙대야 월급이라군 고작 사오십 원밖에 안 될 테니, 그걸 가지구 객지에서 물 밥 사먹어 가며, 양복 해입구 소위 교제비까지 써가면서 수다 식구를 먹여 살릴 수가 있겠어요? 되레 빚만 지게 되지요. 그러니까 나머지 땅마지기나 밭날갈이를 깡그리 팔어 없애구서 거산을 허게 되기 전에 하루바삐 집으루 돌아가서 넘어진 기둥을 버티고 다시 일으켜 세울 도리를 차려야겠에요. 까딱허면 굶어 죽게 될 형편이니까요."

"……"

영신은 동혁이의 사정도 딱하거니와, 그만 못지않게 말이 아닌 저의 집의 형편을 생각하느라고 말대답도 아니 하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한숨을 섞어,

"제 사정은 백선생밖에는 아무헌테두 말한 적이 없어요.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는 육십 노인이 딸 하나 공부를 시키느라구 입때 생선 광주리를 이고 댕기세요. 올 여름엔 더위를 잡숫고 길바닥에 가 쓰러지신 걸, 동네 사람들이 업어다가 눕혀 드렸어요. 그렇건만 약 한 첩 변변히……."

그는 고만 목이 메었다가 간신히 입술을 떨며,

"정신을 잃으신 동안에 어느 몹쓸놈이 푼푼이 모아 넣으신 돈주머니를 끌러 가서 그게 원통해 밤새두룩 우시는데……!"

하고 영신은 가슴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는 울음을 참느라고 잇자국이 나도록 손가락을 깨문다.

동혁은 몹시 우울해졌다. 가슴이 턱 막힌 듯이 갑갑해서 더운 입김을 후― 하고 내뿜는다. 숲속의 버러지 소리도, 바위 틈으로 졸졸졸 흘러내리는 샘물 소리도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동혁은,

'내가 공연히 그런 소리를 끄집어냈구나.'

하고 바로 정수리 위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내려다보는 유난히 큰 별을 원망스러이 쳐다보다가 영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자, 우린 그런 생각은 고만 허십시다. 어쨌든 우리는 명색 전문학교까지 댕겨 보니까, 여간 행복된 사람들이 아니지요."

하고 목소리 부드러이 영신을 위로한다.

"참말 공부니 뭐니 다 집어치구 시굴루 내려가야겠어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서울 와서 나 혼자 편안히 지내는 게 어머니께나 동리 사람들한테까지 큰 죄를 짓는 것 같어요. 첨엔 멋도 모르구서 무슨 성공을 허구야 내려간다고 하나님께 맹세꺼정 허구 올라왔지만요…… 더군다나 아까 백선생 댁에서 허신 말씀을 듣구, 이제까지 지내 온 걸 여간 뉘우치지 않었어요."

그 말을 듣자 동혁은 벌떡 일어섰다. 양복 바지에다가 두 손을 찌르고 거진 궐련 한 개를 태울 동안이나 왔다갔다하며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영신의 앞으로 다가서며,

"영신 씨!"

하고 힘차게 부른다.

"우리 둘이 이렇게 만나서 한 십 년이나 사귄 동지처럼 가슴을 터놓구 하룻밤을 새운 기념을 우리 영원히 남기십시다."

하고 중대한 동의를 한다.

"어떻게요?"

영신의 눈은 별빛에 새파랗게 빛난다. 동혁은 버썩 대들어 그 소댕 같은 손으로 서슴지 않고 여자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우리 시굴루 내려갑시다! 이번 기회에 공부구 뭐구 다 집어치우구서 우리의 고향을 지키러 내려갑시다! 한 가정을 붙든다느니버덤두 다 쓰러져 가는 우리의 고향을 붙들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 용기를 냅시다! 그네들을 위해서 일을 허다가 죽는 한이 있드래두 선구자로서의 기쁨과 자랑만은 남겠지요."

영신이가 무엇에 아찔하게 취한 듯이 눈을 내리감고 있는 것은 불시에 두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의 고동을 진정하려 함이다. 그는 마주 일어서서 동혁에게 으스러지도록 잡힌 두 손에 힘을 주며,

"고맙습니다! 당신 같으신 동지를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영신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덧 인왕산 너머로 기울어 가는 달빛 아래서 두 남녀의 마주 쏘아보는 네 줄기 시선은 비상한 결심에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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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학기가 되자, ○○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오륙백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에는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흩어져서 한여름 동안 땀을 흘려 가며 활동한 남녀 대원들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폭양에 그을은 그들의 시커먼 얼굴! 큰 박덩이만큼씩 한 전등이 드문드문하게 달린 천장에서 내리비치는 불빛이 휘황할수록, 흰 벽을 등지고 앉은 그네들의 얼굴은 더한층 검어 보인다.

만호 장안의 별처럼 깔린 등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사방의 유리창을 활짝 열어제쳤건만, 건장한 청년들의 코와 몸에서 풍기는 훈김이 우거진 콩밭 속에를 들어간 것만치나 후끈후끈 끼친다.

정각이 되자 P학당의 취주악대는 코넷, 트럼본 같은 번쩍거리는 악기를 들고 연단 앞줄에 가 벌려 선다. 지휘자가 손을 내젓는 대로 힘차게 연주하는 것은 유명한 독일 사람의 작곡인 쌍두취 행진곡(雙頭鷲行進曲)이다. 그 활발하고 장쾌한 멜로디는 여러 사람의 심장까지 울리면서 장내의 공기를 진동시킨다.

악대의 연주가 끝난 다음에, 사회자인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안경을 번득이며 점잖은 걸음걸이로 단 위에 나타났다.

"에― 아직 개학을 아니 헌 학교도 있어서 미처 올라오지 못한 대원이 많을 줄 알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처럼 성황을 이루어서 장소가 매우 협착한 까닭에, 여러분끼리 서로간 친하는 기회를 드리려는 다과회가 무슨 강연회처럼 되었습니다."

하고 일장의 인사를 베푼 뒤에 으흠으흠 하고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금년에는 여러 가지로 지장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작년보다도 거진 곱절이나 되는 놀라울 만한 성적을 보게 됐습니다. 이것은 오직 동족을 사랑하는 여러분의 열성과, 문맹을 한 사람이라도 더 물리치려는 헌신적 노력의 결과인 것이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주최자측으로서 여러분의 수고를 감사할 뿐 아니라, 우리 계몽운동의 장래를 위해서 경축하기를 마지않는 바입니다."

처음에는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수성수성하던 장내가 인제는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사회자는 말을 이어,

"긴 말씀은 허지 않겠으나, 차나 마셔 가면서 간담적으로 피차에 의견도 교환하고, 그 동안에 분투한 체험담도 들려 주셔서 앞으로 이 운동을 계속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되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라고 부탁을 한 후 단에서 내렸다.

대원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느 전문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 나아가 간단한 답사를 하고 돌아왔다.

문간에서 회장을 정돈시키던 이 신문사의 배지를 붙인 사원이 눈짓을 하니까, L여학교 가사과의 학생들은, 굉장한 연회나 차리는 듯이 일제히 에이프런을 두르고 돌아다니며 자기네의 손으로 만든 과자와 차를 주욱 돌린다.

대원들은 찻잔을 받아 들고 앉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은 과자 접시를 들여다보면서,

'에게―--- 요걸루 어디 간에 기별이나 가겠나.'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신다.

장내는 사기 그릇이 부딪쳐 대그락거리는 소리와 잡담을 하는 소리로 웅성웅성하는데, 맨 앞줄 한구석에서 하와이안 기타를 뜯는 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애응애응 하고 들리기 시작한다.

남양의 달밤을 상상케 하는 애련하고도 청아한 선율에, 회장은 다시 조용해졌다. C전문의 명물인 익살꾼으로 기타의 명수인 S군이 자청을 해서 한 곡조를 타는 것이다.

S군은 한참 타다가 저 혼자 신이 나서 악기를 들고 일어나 엉덩춤을 춘다. 메기 같은 넓적한 입을 실룩거리며 토인의 노래를 흉내내는데, 그 목소리는 체수에 어울리지 않게, 염생이가 우는 소리와 흡사하게 떨려 나와서, 여러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다. 어떤 중학생은 웃음을 억지로 참다가, 입에 물고 있던 과자를 앞줄에 앉은 사람의 뒤통수에다가 확 내뿜었다. 한구석에 몰려 앉은 여학생들은 손수건을 입에다 대고 허리를 잡는다.

"재청요―---"

"앙코르―--- 앙코르―---"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며 회장 안은 벌통 속처럼 와글와글한다. S군은 저더러 잘한다는 줄만 알고, 두번 세번 껑충거리고 나와서 익살을 깨트리는 바람에 점잔을 빼던 사회자도 간신히 웃음을 참고 앉았다. 그는 미소를 띠고 일어서며,

"여러분 고만 조용헙시다."

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체험담을 듣겠습니다. 한 사람도 빼어 놓지 않고 고향에서 활동하던 이야기를 골고루 듣고는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 관계로 유감천만이나 사회자가 몇 분을 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양복 주머니에서 각 지방으로부터 온 통신과, 이미 신문에 발표된 대원들의 보고서를 한 뭉텅이나 꺼내 놓고 뒤적거리더니,

"금년에 활동한 계몽 대원 중에 뛰어나게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글을 깨쳐 준 아동의 수효로는 우리 신문사에서 이 운동을 개시한 이래 최고 기록을 지은 분을 소개하겠소이다."

하고는 다시 안경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들고 선생이 출석부를 부르듯이,

"××고등농림의 박동혁(朴東赫) 군!"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내는 테를 메인 듯이 긴장해졌건만, 제 이름을 못 들었는지 얼핏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박동혁 군 왔소?"

사회자는 더한층 목소리를 높이고는 사면을 살핀다. 만장의 학생들은,

'박동혁이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야!'

하는 듯이 서로 돌려다보며 이름을 불린 고농 학생을 찾는다.

"여기 있습니다."

맨 뒷줄에서 굵다란 목소리가 청처짐하게 들렸다. 여러 사람의 고개는 일제히 목소리가 난 데로 돌려졌다.

"그리루 나가랍니까?"

엉거주춤하고 묻는 말이다.

"이리 나오시오."

사회자는 연단에서 비켜 서며 손짓을 한다.

기골이 장대한 고농 학생이 뭇 사람이 쏘는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뚜벅뚜벅 걸어나오자 우뢰 같은 박수 소리가 강당이 떠나갈 듯이 일어났다.

'박동혁'이라고 불린 학생은 연단에 올라서기를 사양하고 앞줄에 가 두 다리를 떡 버티고 섰다. 빗질도 아니 한 듯한 올백으로 넘긴 머리며 숱하게 난 눈썹 밑에 부리부리한 두 눈동자에는 여러 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떠돈다.

그는 박수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여러분!"

청중이 숨소리를 죽이게 하는 저력 있는 목소리다.

"오늘 저녁에 항상 그리워하던 여러분 동지와 한자리에 모여서 흉금을 터놓고 서로 얘기할 기회를 얻은 것을 무한히 기뻐합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음성이 아니요, 땀에 절은 교복이 팽팽하게 켕기도록 떡 벌어진 가슴 한복판을 울리며 나오는 바리톤(남자의 저음)이다. 청중은,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려나?'

하는 듯이 눈도 깜짝거리지 않으며 동혁의 얼굴을 바라다본다.

동혁은 장내를 다시 한번 둘러본 뒤에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러나, 삼 년째 이 운동에 참가해서 적으나마 힘을 써온 이 사람으로서 그 경험이나 감상을 다 말씀하려면 매우 장황허겠습니다. 더구나 오늘 저녁은 간단한 경과만 보고하기를 약속헌 까닭에, 정작 이 가슴속에 첩첩이 쌓인 그 무엇을 여러분 앞에 시원스럽게 부르짖지 못하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못 허는 말은 사사로운 좌석에서 얘기헐 기회를 짓고, 또는 개인적으로도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서로 간담을 비춰 가며 토론도 하고 의견도 교환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수첩을 꺼내 들고 자기의 고향인 남조선의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漢谷里)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호수(號數)가 구십사 호인데, 농업이 칠 할 어업이 이 할이요, 토기업(土器業)이 일 할이라는 것과, 인구가 사백육십여 명에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 팔 할 이상이나 점령한 것을 삼 년 동안을 두고 여름과 겨울 방학에 중년 이하로 여자들과 육칠 세 이상의 아동을 모아 놓고 한글을 깨쳐 주고 간단한 셈수를 가르쳐 준 것이 이백사십칠 명에 달하는데, 그곳 보통학교 출신들의 조력이 많았다는 것을 말하자, 박수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동혁은 천천히 수첩을 집어넣으며 집안 식구와 이야기하는 듯한 말씨로,

"우리 고향은 워낙 원시부락과 같은 농어촌이 돼서, 무지한 부형들의 이해가 전연 없는데다가, 관변의 간섭두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어요. 그런 걸 별짓을 다해 가면서 억지루 시작을 했었지요. 첫해에는 아이들을 잔뜩 모아는 놨어두 가르칠 장소가 없어서 큰 은행나무 밑에다 널판대기에 먹칠을 한 걸 칠판이라고 기대어 놓구 공석이나 가마니를 깔구는 밤 깊도록 이슬을 맞아 가면서 가르치기를 시작했었는데, 마침 장마 때라 비가 자꾸만 와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헐 수 없이 움을 팠에요. 나흘 동안이나 장정 십여 명이 들러붙어서 한 대여섯 간통이나 파구서 밀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덮구, 그 속에 들어가서 진땀을 흘리며 '가갸거겨'를 가르쳤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은 밤새도록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까 교실 속에 빗물이 웅덩이처럼 흥건하게 고였는데, 송판으로 엉성하게 만든 책상 걸상이 둥실둥실 떠다니는군요."

그 말에 여기저기서 픽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동혁이 자신도 남자다운 웃음을 띄우고,

"그뿐인가요. 제철을 만난 맹꽁이란 놈들이 뛰어들어서 저희끼리나 글을 읽겠다구 '맹자 왈 공자 왈' 해가며 한바탕 복습을 허는데……."

그때에 어느 실없는 군이 코를 싸쥐고,

"매앵 꽁, 매앵 꽁."

하고 커다랗게 흉내를 내어서 여러 사람은 천장을 우러러 간간대소를 하였다. 여학생들은 킬킬거리고 웃어쌓다가 눈물을 다 질금질금 흘린다. 그러자,

"웃을 얘기가 아니오!"

"쉬― 조용들 헙시다."

하고 꾸짖듯 하는 소리가 회장 한복판에서 들렸다. 동혁이도 검붉은 얼굴에 떠돌던 웃음을 지워 버리고 한 걸음 다가서며,

"나 역시 이 자리를 웃음 바탕을 만들려구 그런 말을 헌 게 아닙니다. 이보담 더 비참한 현실과 부닥쳐서 더한층 쓰라린 체험을 허신 분이 많을 줄 알면서도, 다만 한 가지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하고 잠시 눈을 꽉 감고 침묵하더니 손을 번쩍 쳐들며,

"그러나 여러분! 끝으로 꼭 한마디만 허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높여 힘차게 청중에게 소리친다. 대원들은 물론, 사회자까지도 다시금 긴장해서 엄숙해진 동혁의 얼굴만 주목한다.

"눈 뜬 소경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것은 두말헐 것 없이 필요헙니다. 계몽운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헌 사업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 분자인 우리들이 이러한 기회에 전 조선의 농촌, 어촌, 산촌으로 방방곡곡이 파구들어가서, 그네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떡허면 그네들이 그 더헐 수 없이 비참헌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허는 문제를 머리를 싸매구서 생각해 봐야 헙니다. 지금부터 육칠 년 전 노서아의 청년들이 부르짖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말)를 지금 와서야 우리가 입내내듯 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남에게 뒤떨어진 것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어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모인 바루 여러분의 손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질로 즉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온갖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정신(精神),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끝마다 힘을 주다가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를 못살게 구는 적(敵)이, 고쳐 말씀하면 우리의 원수가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하고 나서, 그는 무슨 범인이나 찾는 듯한 눈초리로 청중을 돌려본 뒤에 손가락을 펴들어 저의 머리를 가리키며,

"그 원수가 이 속에 들었습니다. '아이구 인제는 죽는구나', '너나 헐 것 없이 모조리 굶어 죽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절망과 탄식! 이것 때문에 우리는 두 눈을 멀거니 뜬 채 피를 뽑히구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레짐작, 즉 선입관념이 골수에 박혀 있는 까닭에, 우리가 피만 식지 않은 송장 노릇을 헌다고 해두 과언이 아닙니다. 그야 천치 바보가 아닌 담에야 우리의 현실을 낙관헐 수야 없겠지요. 덮어놓구 '기운을 차려라', '벌떡 일어나 달음박질을 해라' 허고 고함을 지르며 채찍질을 헌대도 몇백 년이나 앓던 중병환자가 벌떡 일어나지야 못허겠지요. 그렇지만……."

하고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며 혀끝으로 불을 뿜는 듯한 열변에 회장은 유리창이 깨어질 듯한 박수 소리가 일어났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옳소―---"

"그렇소―---"

하는 고함과 함께,

"그건 탈선이오."

하고 반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동혁은 금세 눈초리가 실쭉해지더니,

"어째서 탈선이란 말요!"

하고 눈을 커다랗게 부릅뜨며 목소리가 난 편짝을 노려보는 판에, 사회자는 동혁의 곁으로 가서 무어라고 귓속을 한다.

"중지시킬 권리가 없소!"

"말해라, 말해!"

이번에는 발을 구르며 사회자를 공박하는 소리로 장내가 물끓듯 한다.

동혁은 그 자리에 꿈쩍도 아니 하고 버티고 서서 매우 흥분된 어조로,

"지금은 시간의 자유까지도 없지만, 내 의견과 틀리는 분은 이 회가 파헌 뒤에 얼마든지 토론을 헙시다."

하고 누구든지 덤벼라! 하는 기세를 보이더니,

"나는 어떠헌 수단과 방법을 써서래두, 우리 민중에겐 위선 희망의정신과 용기를 길러 주기 위해서 노력허는 것이, 우리 계몽운동 대원의 가장 큰 사명으로 믿습니다. 동시에 여러분도 이 신조를 다 같이 지키기를 충심으로 바랍니다."

동혁은 성량(聲量)껏 부르짖고는 교복 소매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사회자는 아까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짓고 동혁이가 섰던 자리로 가서 장내가 정숙해지기를 기다려,

"박동혁 군의 말은 개념적이나마 누구나 존중해야 헐 좋은 의견으로 압니다."

하고는,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계몽운동은 계몽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혼동해 가지고 공연헌 데까지 피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하고 단단히 주의를 시킨다. 그때에 한구석에서,

"에그 추워―---"

하고 일부러 어깨와 목소리를 떠는 학생이 있었다.

동혁의 뒤를 이어 서너 사람이나 판에 박은 듯한 경과보고가 지루하게 있은 후, 사회자는,

"이번에는 금년에 처음으로 참가헌 여자 대원 중에서 제일 좋은 성적을 나타낸 ××여자신학교에 재학중인 채영신(蔡永信) 양의 감상담이 있겠습니다."

하고 회장은 오른편에 여자들이 모여 앉은 데를 바라다본다. 남학생들은 그편으로 머리를 돌리며 손뼉을 친다. '채영신'이라고 불린 여자는 한참 만에 얼굴이 딸깃빛이 되어 가지고 일어나더니,

"전 아무 말두 허기 싫습니다!"

하고 머리를 내저으며 여무지게 한마디를 하고는 펄썩 주저앉아 버린다. 사회자는 어쩐 영문인지 몰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뜻밖에 미리 약속까지 하였던 연사가 말하기를 딱 거절하는 데는, 사회자와 청중이 함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말헙시다."

"그 대신 독창이래두 시키세."

상대자가 여자인 까닭에 더욱 호기심을 가진 남학생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음악회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재청이나 시키는 것처럼 짓궂게 박수를 하며 야단들이다.

"간단하게나마 말씀해 주시지요."

사회자는 좀 무색한 듯이 채영신이가 앉은 편으로 몇 걸음 다가오며 어서 일어나기를 권한다.

그래도 영신은 꼼짝도 아니 하고 앉았다가 곁에서 동무들이 옆구리를 찌르고 등을 떠다밀어서 마지못해 일어났다. 서울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처럼 속살이 하얗게 내비치는 깨끼 적삼에 무늬가 혼란한 조세트나, 근래에 유행하는 수박색 코로나프레프 같은 박래품으로 치마를 정강 마루까지 추켜 입고 다닐 때건만, 그는 언뜻 보기에도 수수한 굵다란 광당포 적삼에 검정 해동저 치마를 입었고, 화장품과는 인연이 없는 듯,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를 붙들어다 세워 놓은 것 같다. 그러나 얼굴에 두드러진 특징은 없어도, 청중을 둘러보는 두 눈동자는 인텔리(지식 계급) 여성다운 이지가 샛별처럼 빛난다. 그는 사회자를 쏘아보며,

"첫째, 이런 자리에까지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이 다 말을 허구 난 맨 끄트머리에 언권을 주는 것이 몹시 불쾌합니다."

새되고 결곡한 목소리다.

"흥, 왼간헌걸."

"여간내기가 아닌데."

남학생들은 혀를 내두르며 수군거린다. 제 자리에 돌아와 이제껏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눈을 딱 감고 있던 동혁이도, 얼굴을 쳐들고 채영신의 편을 주목한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영신은 말을 이어,

"둘째는 제 속에 있는 말씀을 솔직허게 쏟아 놓구는 싶어두요, 사회허시는 분이 또 무어라고 제재를 허실 테니깐, 구차스레 그런 속박을 받어 가면서까지 말을 헐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

하고 다시 앉아 버린다. 이번에는 여자석에서 손뼉치는 소리가 생철 지붕에 소낙비 쏟아지듯 한다.

사회자는 그만 무안에 취해서 얼굴을 붉히며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아까 박동혁 군이 말헐 때는, 시간이 없다고 주의를 시킨 것이지 말의 내용을 간섭헌 것은 아닙니다."

하고 뿌옇게 발뺌을 한다. 그러자 동혁이가 벌떡 일어나 나치스식으로 팔을 들며,

"사회!"

하고 회장이 찌렁찌렁하도록 부른다.

"밤을 새우는 한이 있드래두 이런 기회에 우리는 충분히 의견을 교환허고 싶습니다. 위선 지도원리를 통일해 놓고 나서 깃발을 드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톡톡히 항의를 한다. 사회자는 시계를 꺼내 보고 사교적 웃음을 띄우며,

"채영신 씨, 그럼 내년에는 맨 먼첨 언권을 드릴 테니 그렇게 고집허지 마시고 말씀허시지요."

하고는 장내의 공기를 완화시키려고 슬쩍 농친다.

영신은 다시 망설이다가 이번에는 대접상으로 간신히 일어났다.

"저는 금년에야 참가를 했으니까, 이렇다고 보고를 헐 만한 재료가 없고요, 고생을 좀 했다고 자랑할 것도 못 될 줄 압니다. 그저 앞으로 이 운동을 꾸준허게 해나갈 결심이 굳을 뿐이니까요."

하고는 그 영채가 도는 눈을 사방으로 돌리더니,

"그렇지만 저 역시 여러분께 우리 계몽대의 운동이 글자를 가르치는 데만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한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 위선 그네들에게 희망의 정신을 넣어 주자는……."

하다가 상막해서 잠시 이름을 생각해 보더니,

"……박동혁 씨의 의견은 저도 전연 동감입니다!"

하고 남학생 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러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양복을 갈러 붙이고 의자를 타구 앉아서, 월급이나 타먹으려는 공상버텀 깨트려야 헙니다. 우리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머리를 동쳐매구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몸을 희생에 바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헙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고만 쓰러지듯이 앉아 버린다. 장내는 엄숙한 기분에 잠겼다. 말썽을 부리던 남학생들도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 그네들의 머릿속에도 감격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긴장된 중에 K보육학교 학생들의 코러스로 간친회는 파하였다. 동혁은 여러 학생들 틈에 섞여서 서대문행 전차를 탔다. 전차가 마악 떠나려는데, 놓치면 큰일이나 날 듯이 뛰어오르는 한 여학생이 있다. 그는 동혁에게 생후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준 채영신이었다.

영신은 승객들에게 밀려서 동혁이가 걸터앉은 데까지 와서는 손잡이를 붙들고 섰다. 두 사람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검붉은 얼굴을 서로 무릎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저도 모르는 겨를에 목례를 주고받았다. 비록 오늘 저녁 공석에서 처음 대면을 하였건만, 여러 해 사귀어 온 지기(知己)와 같이 피차에 반가웠던 것이다. 동혁은 앉아 있기가 미안해서,

"이리 앉으시지요."

하고 일어서며 자리를 내준다. 영신은 머리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전 섰는 게 시원해 좋아요."

하고 사양하면서 도리어 반걸음쯤 물러선다.

동혁은 아직도 애티가 남아 있어 귀염성스러운 영신의 입 모습을 보았다. 그 입 모습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소를 보았다.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더 시원한데요."

동혁은 엉거주춤하고 자꾸만 앉기를 권한다.

"어서 앉어 계세요. 전 괜찮아요."

"그럼 나두 서겠습니다."

동혁이가 반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다른 승객이 냉큼 뚱뚱한 궁둥이를 들여밀었다. 동혁은,

'어지간히 고집이 세구나.'

하면서도, 영신이가 저를 연약한 여자라고 자리를 사양하는 그런 대우가 받기 싫어서 굳이 앉지 않는 줄은 몰랐으리라.

차 속이 붐벼서 두 사람은 손잡이 하나를 나누어 쥐고 옷이 스치도록 나란히 섰건만,

"되레 미안헙니다."

"천만에요."

하고 한마디씩 주고받은 다음에는 말이 없었다.

운전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밤바람은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영신은 앞머리카락이 자꾸만 이마를 간질어서,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등으로 뿌리듯 한다. 한 발자국쯤 앞에 선 동혁의 안반 같은 잔등이에서는 교복에 절은 땀 냄새가 영신의 코에까지 맡힌다. 그러나, 한여름 동안 머리도 감지 않은 촌 여편네들과 세수도 변변히 하지 않은 아이들 틈에 끼여 지내서, 시크무레한 땀내가 코에 밴 영신은 동혁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고개를 돌리도록 불쾌하지는 않았다. 전차가 '감영' 앞에 와 정거를 하자 영신은 앞을 부비고 나서며,

"전 여기서 내립니다."

하고 공손히 예를 한다.

동혁은 목을 늘이고 창 밖을 내다보더니,

"나도 여기서 내려야겠는데요."

하고 영신의 뒤를 따라 내렸다. 안전지대에서 두 사람은 즉시 헤어지지를 못하고 서성서성하다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동혁이가 물었다.

"학교 기숙사루 가서 잘 텐데, 문 닫을 시간이 지나서 걱정이야요. 여간 규측이 엄해야죠. 시간이 급해서 사감헌텐 말도 못 하고 나왔는데요."

"그럼 쫓겨나셨군요. 물론 객지시지요?"

"네."

두 사람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아현리 편짝으로 나란히 서서 걷는다.

"그럼 어떡허나요? 나는 이 근처서 통학허는 친구 집이 있어서 그리루 자러 가는 길이지만……."

"전 서울 사는 동지라곤 친헌 사람이 하나두 없어요."

하고 영신은 다시 돌아서며,

"아무튼 기숙사루 가보겠어요."

하고 잘 가라는 듯이 인사를 한다. 동혁은 우연히 같은 전차를 탔으나, 여기까지 같이 왔다가 혼자 보내기가 안돼서,

"그럼 내 보호병정 노릇을 해드리지요."

하고 영신이가 사양하는 것을 금화산 밑에 있는 여신학교 기숙사 앞까지, 멀찌감치 걸어서 따라 올라갔다.

기숙사는 불을 끈 지도 오래인 모양인데, 대문을 잡아 흔들고 초인종을 연거푸 누르고 하여도 감감소식이다.

"이를 어쩌나. 인전 숙직실루 전화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는데, 전화나 어디 빌릴 데가 있어야죠."

하며 영신은 발을 구르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덕길을 더듬으며 감영 네거리로 내려왔다. 깊은 밤 후미진 구석으로 여학생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부터 부질없는 노릇인데, 더구나 아는 사람의 눈에 띄든지 해서 재미 없는 소문이 퍼지는 날이면 영신에게 미안할 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혁은 밤중에 길거리로 헤매게 된 젊은 여자를 내버려두고 저 혼자만 휘적휘적 친구의 집으로 자러 갈 수는 없었다.

영신이도 건장한 남자가 뒤를 따라 주는 것이 정말 보호병정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든든히 여기는 눈치를 살피고 동혁은,

"아무튼 전화나 걸어 보시지요."

하고 길가 포목전의 닫힌 빈지를 두드려서 간신히 전화를 빌려 주었다.

영신은 학교의 전화번호를 불렀다. 마지못해서 문을 열어 주고서도 귀찮은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 돈을 세고 앉은 주인을 곁눈으로 보면서, 두번 세번 걸어도 귓바퀴에서 이잉 이잉 소리만 들릴 뿐, 나와 주는 사람이 없다.

"도시데모 오이데니 나리마셍카라 마타 네가이마스(암만해도 안 나오니 다시 걸어 주시오)."

하는 교환수의 맵살스러운 목소리를 듣고야, 영신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길거리로 나왔다.

"인젠 여관으루 가실 수밖에 없군요."

동혁이도 입맛을 다시었다. 영신은,

"저 때문에 너무 걱정을 허셔서 미안합니다."

하고는 구둣부리로 길바닥을 후비듯 하다가, 고개를 외로 꼬고 무엇을 생각하더니,

"인전 백선생님 집으로나 갈까 봐요."

한다.

"백선생이라니요?"

"왜 여자기독교연합회 총무로 있는, 백현경 씨를 모르세요?"

"이름은 익숙히 들었지만…… 그의 집이 이 근천가요?"

영신은 전등불이 드문드문 보이는 송월동 편짝을 가리키며,

"네, 바루 저 언덕 밑이야요. 그 선생님이 농촌 문제를 강연하느라구 우리 학교에도 오시는데, 저를 여간 사랑해 주지 않으셔요. 요새 새루 설립헌 농민수양소로 실습도 허러 같이 당겼는데, 사정을 허면 하룻밤쯤이야 재워 주시겠지요."

그 말을 듣고 동혁은 매우 안심한 듯이,

"그럼, 진작 그리루 가시질 않고……."

하고는 그만 헤어지려는 것을,

"이왕 여기꺼정 와주셨으니, 그 집까지만 바래다 주세요, 네?"

하고 영신이가 간청하다시피 해서, 동혁은,

'아무려나.'

하고 다시 뒤를 따랐다. 동혁이도, 조선 사회에서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이 유명한 백현경(白賢卿)이란 여자를 간접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말썽 많던 그의 과거로부터 최근에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와서 또다시 개인 문제로 크나큰 이야깃거리를 제공하였고, 한편으로는 농촌사업을 한다고 강연도 다니고 저술도 하여서,

'무슨 주의를 가지고 어떠한 방법으로써 조선의 농촌운동을 지도하려나.'

하는 점이 고등농림의 상급생인 동혁의 주의를 끌어 왔었다. 그의 사사로운 생활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않으나, 그가 신문이나 잡지에 내는 논문이나 감상담 같은 것은 빼어 놓지 않고 읽어 오는 중이었다.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동혁은 적지 않은 호기심을 가지고, 여자 중에는 호걸이라고 여간 숭배를 하지 않는 영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백씨의 집까지 당도 하였다.

그러나 동혁은 밤중에 여기까지 여자의 뒤를 따라온 것이 새삼스러이 멋쩍은 것 같고, 또는 백씨까지도 초면에 저를 어떻게 볼는지 몰라서 모자를 훌떡 벗으며,

"자, 난 그만 실례합니다. 기회 있으면 또 만나 뵙지요."

하고는 발꿈치를 홱 돌린다.

"왜 그렇게 가셔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소개를 잘 할 테니, 문간에서래두 백선생님을 만나 보구 가시죠, 네? 여간 환영허지 않으실걸."

좁다란 골목 안을 환하게 밝히는 외등 밑에서 영신은 길목을 막아서면서 조르듯 한다.

"아니오. 다음날이나 만나게 해주세요."

하고 한마디를 남기고 동혁은 구두징 소리를 뚜벅뚜벅 내며 골목 밖으로 나가 버린다. 영신은 어찌하는 수 없이,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하고 큰길로 사라지는 동혁의 기다란 그림자를 서운히 바라보다가 돌쳐섰다. 대문을 흔들면서,

"백선생님! 백선생님!"

하고 커다랗게 불렀다. 모기장을 바른 행랑방 들창이 열리더니 자다가 일어난 어멈이 얼굴을 반쯤 내밀며,

"한강으로 선유 나갑셔서 여태 안 들어오셨는뎁쇼."

한다. 영신은 고만 울상이 되었다.

*

그 이튿날 학교로 내려간 뒤에, 동혁은 며칠 동안 마음의 안정을 잃고 지냈다. 개학초가 되어서 기숙사 안이 뒤숭숭한 탓도 있지만, 영신의 첫인상이 앉으나 서나 눈앞에 떠돌아서 공연히 들썽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상학 시간에는 노트 위에 펜을 달리다가도 손을 멈추고 칠판 위에 환등처럼 나타나는 영신의 환영을 멀거니 바라보기도 하고 운동장에 나가서는 축구부의 선수로 골키퍼(문지기) 노릇을 하여 왔는데, 상대 편에서 몰고 들어와서 힘없이 질러 넣는 공도 어름어름하다가 발길이 헛나가서 막아 내지 못하기를 여러 번이나 거듭하였다. 마침 서울 법전(法專)과 시합을 하려고 맹렬히 연습을 하는 판이라 축구부 감독으로부터,

"여보게 박군, 요새 며칠은 왜 얼빠진 사람 같은가? 이러다간 우승기를 뺏기고 말겠네그려."

하는 주의까지 받았다. 그럴수록 동혁은,

'내가 정말 왜 이럴까?'

하고 평소에 자제심이 굳센 것을 믿어 오던 제 자신을 의심하리만치 침착해지지 않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수수한 차림차림, 조금도 어설픈 구석이 없는 그 체격, 그리고 혈색 좋은 얼굴에 샛별같이 빛나던 눈동자, 또 그리고 언권을 먼저 주지 않았다고 말하기를 딱 거절하던 그 맺고 끊는 듯하던 태도―--- 그나 그뿐인가, 남학생들에게 정면으로 일장의 훈계를 하던 정열적이면서도 결곡한 목소리! 그 어느 한 가지가 머릿속에 사진 찍히지 않은 것이 없고, 말 한마디조차 귀 밖으로 사라진 것이 없다.

'처음 보는 여자다. 외모가 예쁜 여자는 길거리에서도 더러 본 일이 있지만 채영신이처럼 의지가 굳어 보이는 여자는 처음이다. 무엇이든지 한번 결심하면 기어이 제 손으로 해내고야 말 것 같은 여자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고 필기를 하지 못하고 헛발길질만 자꾸 하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박동혁 씨의 의견과 전연 동감입니다.'

하던 한마디를 입 속으로 외고 또 외고 하다가는,

'오냐, 나는 비로소 한 사람의 동지를 얻었다! 내 사상의 친구를 찾었다!'

하고 부르짖으며 저 혼자 감격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고학을 하여 온 늙은 총각으로 이성과 접촉할 기회도 없었지만, 틈틈이 여러 가지 모양의 여성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장래를 공상해 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간담회 석상에서 채영신이란 여자를 한 번 보고 밤거리를 몇십 분 동안 같이 걸어 본 뒤에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그 숱한 여자들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화닥닥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굵다란 말뚝처럼 동혁의 머릿속에 꽉 들어와 박힌 것은 '채영신' 하나뿐이다.

'그날 무사히 들어가 잤나? 학교서 말이나 듣지 않었나?'

몹시 궁금은 하였건만, 규칙이 까다로운 여학교로 편지는 할 수 없었다. 그만한 용기야 못 낼 것이 아니지만, 받는 사람의 처지가 곤란할 것을 생각하고, 또다시 만날 기회만 고대하면서 한 일주일을 지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천만뜻밖에 영신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글씨는 남필 같으나 피봉 뒤에는,

'××여자신학교 기숙사에서 채영신 올림.'

이라고 버젓이 씌어 있는 것을 보니 동혁의 가슴은 울렁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은 여간 실례를 하지 않었습니다. 미안한 말씀은 형용키 어렵사오며,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한 것도 여간 유감이 되지 않습니다. 그날 밤 백선생도 늦게야 한강에서 들어오셔서 같이 자면서 간접으로나마 동혁 씨를 소개하였더니, 좋은 동지라고 꼭 한 번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토요일 저녁마다 농촌운동에 뜻을 둔 청년 남녀들이 모여서 토론도 하고 간담도 하는 모임이 백선생 댁에서 열리는데, 돌아오는 토요일에 올러오셔서 참석하시면 백선생은 물론이고요, 여러 회원들이 여간 환영을 하지 않겠습니다. 꼭 올라와 주실 줄 믿사오나 엽서로라도 미리 회답을 하여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동혁은 두번 세번 읽으며 편지를 손에서 놓을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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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홈통에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었다가 쿵 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겨 가루가 켜켜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나온다.

솰 솰 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댓줄기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 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십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오리쯤 꿰뚫은 뒤에 이방원(芳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물레방아에서 들여다보면 동북간으로 큼직한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에 가장 부자요, 가장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름을 신치규(申治圭)라고 부른다. 이방원이라는 사람은 그 집의 막실(幕室) 살이를 하여가며 그의 땅을 경작하여 자기 아내와 두 사람이 그날 그날을 지내간다.

어떠한 가을밤 유난히 밝은 달이 고요한 이 촌을 한적하게 비칠 때 그 물레방앗간 옆에 어떠한 여자 하나와 어떤 남자 하나가 서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 여자는 방원의 아내로 지금 나이가 스물 두 살, 한참 정열에 타는 가슴으로 가장 행복스러울 나이의 젊은 여자요, 그 남자는 오십이 반이 넘어 인생으로서 살아올 길을 다 살고서 거의거의 쇠멸의 구렁이를 향하여 가는 늙은이다.

그의 말소리는 마치 그 여자를 달래는 것같이,

“얘, 내 말이 조금도 그를 것이 없지? 쇤네 할멈에게도 자세한 말을 들었을 터이지마는 너 생각해보아라. 네가 허락만 하면 무엇이든지 네가 하고 싶다는 것을 내가 전부 해줄 터이란 말야. 그까짓 방원이 녀석하고 네가 몇백 년 살아야 언제든지 막실 구석을 면하지 못할 터이니…… 허허, 사람이란 젊어서 호강해보지 못하면 평생 한번 하여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하는 것이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느니라! 대강 너의 말을 쇤네 할멈에게 듣기는 들었으나 그래도 너에게 한번 바로 대고 듣는 것만 못해서 이리로 만나자고 한 것이다. 너의 마음은 어떠냐? 허허, 내 앞이라고 조금도 어떻게 알지 말고 이야기 해봐, 응?”

이 늙은이는 두말할 것 없이 신치규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방원의 계집을 들여다보며 한 손으로 등을 두드린다.

새침한 얼굴이 파르족족하고 기다란 눈썹과 검푸른 두 눈 가장자리에 예쁜 입, 뾰르퉁한 뺨이며 콧날이 오뚝한데다가 후리후리한 키에 떡 벌어진 엉덩이가 아무리 보더라도 무섭게 이지적(理知的)인 동시에 또는 창부형(娼婦型)으로 생긴 것이다.

계집은 아무 말이 없이 서서 짐짓 부끄러운 태를 지으며 매혹적인 웃음을 생긋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웃음이 얼마나 짐승 같은 신치규의 만족을 사게 되었으며, 또한 마음을 충동시켰는지 희끗희끗한 수염이 거의 계집의 뺨에 닿도록 더 가까이 와서,

“응? 왜 대답이 없니? 부끄러워서 그러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

하고 계집의 손을 잡으며,

“손도 이렇게 예쁜 줄은 이제까지 몰랐구나. 참 분결 같다. 이렇게 얌전히 생긴 애가 방원 같은 천한 놈의 계집이 되어 일평생을 그대로 썩는다는 것은 너무 가엾고 아깝지 않느냐? 얘.”

계집은 몸을 돌리려고 하지도 않고 영감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며 눈으로 땅만 내려다보고 섰다가 가까스로 입을 떼는 듯하더니,

“제 말야 모두 쇤네 할멈이 여쭈었지요. 저에게는 너무 분수에 과한 말씀이니까요.”

“온, 천만에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 너도 아다시피 내가 너를 장난 삼아 그러는 것도 아니겠고 후사(後嗣)가 없어 그러는 것이니까 네가 내 아들이나 하나 낳주렴. 그러면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되지 않겠니? 자아 그러지 말고 오늘 허락을 하렴. 그러면 내일이라도 방원이란 놈을 내쫓고 너를 불러들일 터이니.”

“어떻게 내쫓을 수가 있에요?”

“허어, 그것이 그리 어려울 것이 무엇 있니. 내가 나가라는데 제가 나가지 않고 배길 줄 아니?”

“그렇지만 너무 과하지 않을까요?”

“무엇, 저런 생각을 하니까 네가 이 모양으로 이때까지 있었지. 어떻단 말이냐? 그런 것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구. 자아, 또 네 서방에게 들킬라, 어서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세요.”

“왜?”

“남이 보면 수상히 알게요.”

“무얼 나하고 가는데 수상히 알게 무어야… 어서 가자.”

계집은 천천히 두어 걸음 따라가다가,

“영감!”

하고 머춤하고 서 있다.

“왜 그러니?”

계집은 다시 말이 없이 서 있다가,

“아니에요.”

하고,

“먼저 들어가세요.”

하며 돌아선다. 영감이 간이 달아서 계집의 손을 잡으며,

“가자, 집으로 들어가자.”

그의 가슴은 두근거리는지 숨소리가 잦아진다. 계집은 손을 빼려 하며,

“점잖으신 어른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면서도 그의 몸짓에는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 보였다. 영감은 계집의 몸을 끌어안더니 방앗간 뒤로 돌아섰다. 계집은 영감 가슴에 안겨서 정욕이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보면서,

“영감.”

말 한 마디 하고 침 한번 삼키었다.

“영감이 거짓말은 안 하지요?”

“아니.”

그의 말은 떨리었다. 계집은 영감의 팔을 한 손으로 잡고 또 한 손으로는 방앗간 속을 가리켰다.

“저리로 들어가세요.”

영감과 계집은 방앗간에서 이삼십 분 후에 다시 나왔다.

사흘이 지난 뒤에 신치규는 방원이를 자기 집 사랑 마당 앞으로 불렀다.

“얘.”

방원은 상전이라 고개를 숙이고,

“예.”

공손하게 대답을 하였다.

“네가 그간 내 집에서 정성스럽게 일한 것은 고마운 일이지마는…”

점잔과 주짜를 빼면서 신 치규는 말을 꺼내었다. 방원의 가슴은 이 '마는'이라는 말 뒤에 이어질 말을 미리 깨달은 듯이 온 전신의 피가 가슴으로 모여드는 듯하더니 다시 터럭이라는 터럭은 전부 거꾸로 일어서는 듯하였다.

“오늘부터는 우리 집에 사정이 있어 그러니 내 집에 있지 말고 다른 곳에 좋은 곳을 찾아 가보아라.”

아무 조건이 없다. 또한 이곳에서도 할말이 없다.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주인은 돈 가지고 사람을 사고 팔 수도 있는 것이다.

방원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자기 혼잣몸 같으면 어디 가서 어떻게 빌어먹더라도 살 수 있지마는 사랑하는 아내를 구해갈 길이 막연하다. 그는 고개를 굽히고, 허리를 굽히고, 나중에는 마음을 굽히어 사정도 하여보고 애걸도 하여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다. 주인의 마음은 쇠나 돌보다도 더 굳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기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아내더러 안주인 마님께 사정을 좀 하여 얼마간이라도 더 있게 하여달라고 하여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방원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도리어,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요. 이제부터는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릴 터이요?”

“너는 그렇게도 먹고 살 수 없을까봐 겁이 나니?”

“겁이 나지 않고. 생각을 해보구려. 인제는 꼼짝할 수 없이 죽지 않았소?”

“죽어?”

“그럼 임자가 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올 때에 무어라고 하였소. 어떻게 해서든지 너 하나야 먹여 살리지 못하겠느냐고 하였지요?”

“그래.”

“그래, 얼마나 나를 잘 먹여 살리고 나를 호강시켰소. 이때까지 이때나 되도록 끌구 돌아다닌다는 것이 남의 집 행랑이었지요.”

“얘, 그것을 내가 모르고 하는 말이냐?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냐? 차차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이든지 생기겠지. 설마 요대로 늙어죽기야 하겠니?”

“듣기 싫소! 뿔 떨어지면 구워먹지 어느 천년에.”

방원이는 가뜩이나 내어쫓기고 화가 나는데 계집까지 그리하니까 속에서 열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 육시를 하고도 남을 년! 왜 남의 마음을 글컹거리니?”

“왜 사람에게 욕을 해!”

“이년아, 욕 좀 하면 어떠냐?”

“왜 욕을 해!”

계집이 얼굴이 노래지며 대든다.

“이년이 발악인가?”

“누가 발악야. 계집년 하나 건사 못하는 위인이 계집보고 욕만 하고 한 게 무어야? 그래 은가락지 은비녀나 한 벌 사주어보았어? 내가 임자 하자고 하는 대로 하지 않은 것은 없지!”

“이년아! 은가락지 은비녀가 그렇게 갖고 싶으냐? 이 더러운 년아.”

“무엇이 더러워? 너는 얼마나 정한 놈이냐!”

계집의 입 속에서는 놈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년 보게! 누구더러 놈이래.”

하고 손길이 계집의 낭자를 후려잡더니 그대로 집어들고 두어 번 주먹으로 등줄기를 우리었다.

“이 주릿대를 안길 년!”

발길이 엉덩이를 두어 번 지르니까 계집은 그대로 거꾸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풀어헤뜨린 머리가 치렁치렁 끌리고 씰룩한 눈에는 독기가 섞이었다.

“왜 사람을 치니? 이놈! 죽여라 죽여, 어디 죽여보아라, 이놈 나 죽고 너 죽자!”

하고 달려드는 계집을 후려서 거꾸러뜨리고서,

“이년이 죽으려고 기를 쓰나!”

방원이가 계집을 치는 것은 그것이 주먹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농담이다. 그는 주먹이나 발길이 계집의 몸에 닿을 때 거기에 얻어맞는 계집의 살이 아픈 것보다 더 찌르르하게 가슴 한복판을 찌르는 아픔을 방원은 깨닫는 것이다. 홧김에 계집을 치는 것이 실상은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이빨로 물어뜯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때리는 그에게는 몹시 애처로움이 있고 불쌍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화풀이를 받아주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계집밖에는 없었다. 제일 만만하다는 것보다도 가장 마음놓고 화풀이할 수 있음이다. 싸움한 뒤, 하루가 못되어 두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고 서로 꼭 끼고 잘 때에는 그렇게 고맙고 그렇게 감격이 일어나는 위안이 또다시 없음이다. 계집을 치고 화풀이를 하고 난 뒤에 다시 가슴을 에는 듯한 후회와 더 뜨거운 포옹으로 위로를 받을 그때에는 두 사람 아니라 방원에게는 그만큼 힘있고 뜨거운 믿음이 또다시 없는 까닭이다.

계집은 일부러 소리를 높여 꺼이꺼이 운다.

온 마을 사람이 거의 귀를 기울였으나,

“응, 또 사랑싸움을 하는군!”

하고 도리어 그 싸움을 부러워하였다. 옆집 젊은것이 와서 싱글싱글 웃으면서 들여다보며,

“인제 고만 두라구.”

하며, 말리는 시늉을 한다. 동네 아이들만 마당 앞에 죽 늘어서서 눈들이 뚱그래서 구경을 한다

그날 저녁에 방원이는 술이 얼근하여 돌아왔다. 아까 계집을 차던 마음은 어느덧 풀어지고 술로 흥분된 마음에 그는 계집의 품이 몹시 그리워져서 자기 아내에게 사과를 할 마음까지 생기었다. 본시 사람이 좋고 마음이 약하고 다정한 그는 무식하게 자라난 까닭에 무지한 짓을 하기는 하나 그것은 결코 그의 성격을 말하는 무지함이 아니다.

그는 비척거리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에 거슴츠레하게 풀린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혼잣소리로,

“빌어먹을 놈! 나가라면 나가지 무서운가? 제 집 아니면 살 곳이 없는 줄 아는 게로군! 흥, 되지않게 다 무엇이냐? 돈만 있으면 제일이냐? 이놈, 네가 그러다가는 이 주먹 맛을 언제든지 볼라. 그대로 곱게 뒈질 줄 아니?”

하고, 개천 하나를 건너뛴 후에,

“돈! 돈이 무엇이냐?”

한참 생각하다가,

“에후.”

한숨을 쉬고 나서,

“돈이 사람을 죽이는구나! 돈! 돈! 흥,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니?”

또 징검다리를 비척비척 하고 건넌 뒤에,

“고 배라먹을 년이 왜 고렇게 포달을 부려서 장부의 마음을 긁어놓아!”

그의 목소리에는 말할 수 없이 다정한 맛이 있었다. 그는 자기 계집을 생각하면 모든 불평이 스러지는 듯이, 숙였던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보면서,

“허어, 저도 고생은 고생이지.”

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 후,

“내가 너무해, 너무 그럴 게 아닌데.”

그는 자기 집에 와서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면서,

“얘! 자니! 자?”

그러나 대답이 없고 캄캄하다.

“이년이 어디를 갔어!”

그는 문짝을 깨어지라 하고 닫친 후에 다시 길거리로 나와 그 옆집으로 가서,

“여보 아주머니! 우리 집 색시 어디 갔는지 보았소!”

밥들을 먹는 옆엣 집 내외는,

“어디서 또 취했소 그려! 애 어머니가 아까 머리 단장을 하더니 저 방아께로 갑디다.”

“방아께로?”

“네.”

“빌어먹을 년! 방아께로는 무얼 먹으러 갔누!”

다시 혼자 방아를 향하여 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그는 방앗간을 막 뒤로 돌아서자 신치규와 자기 아내가 방앗간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

그는 너무 뜻밖의 일이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한참이나 멀거니 서서 보기만 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쌍심지가 거꾸로 섰다. 열이 올라와서 마치 주홍을 칠한 듯이 그의 눈은 붉어지고 번개 같은 광채가 번뜩거리었다.

그는 한참이나 사지를 떨었다. 두 이가 서로 맞쳐서 달그락달그락 하여졌다. 그의 주먹은 부서질 것같이 단단히 쥐어졌다.

계집과 신치규는 방원이 와 선 것을 보고서 처음에는 조금 간담이 서늘하여졌으나 다시 태연하게 내려 앉혔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매 할 대로 하라는 뜻이다.

방원은 달려들어서 계집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부르르 떨었다.

“나는 네가 이럴 줄은 몰랐다.”

계집은,

“무얼 이럴 줄을 몰라?”

하며, 파란 눈을 흘겨보더니,

“나중에는 별꼴을 다 보겠네. 으례히 그럴 줄을 인제 알았나? 놔요! 왜 남의 팔을 잡고 요 모양야. 오늘부터는 나를 당신이 그리 함부로 하지는 못해요! 더러운 녀석 같으니! 계집이 싫다고 그러면 국으로 물러갈 일이지 이게 무슨 사내답지 못한 일야! 놔요!”

팔을 뿌리쳤으나 분노가 전신에 가득찬 그는 그렇게 쉽게 손을 놓지 않았다.

“얘! 네가 이것이 정말이냐?”

“정말 아니구 비싼 밥 먹고 거짓말 할까?”

“네가 참으로 환장을 하였구나!”

“아니 누구더러 환장을 했대. 온 기가 막혀 죽겠지! 놔요! 놔! 왜 추근추근하게 이 모양야? 놔.”

하고서 힘껏 뿌리치는 바람에 계집의 손이 쑥 빠지었다. 계집은 손목을 주무르면서 암상맞게 돌아섰다.

이때까지 이 꼴을 멀찍이 서서 보고 있던 신치규는 두어 발자국 나서더니 기침 한번을 서투르게 하고서,

“얘! 네가 술이 취하였으면 일찍 들어가 자든지 할 것이지 웬 짓이냐? 네 눈깔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단 말이냐? 너희 년 놈이 싸우는 것은 너희 년 놈이 어디든지 가서 할 일이지 여기 누가 있는지 없는지 눈깔에 보이는 것이 없어?……”

“엣, 괘씸한 놈!”

눈깔을 부라리었다. 방원은 한참이나 쳐다보고서 말이 없었다. 생각대로 하면 한 주먹에 때려누일 것이지마는 그래도 그의 머릿속에는 아까까지의 상전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었다. 번갯불같이 그 관념이 그의 입과 팔을 얽어놓았다.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남을 섬겨보기만 한 그의 마음은 상전이라면 모두 두려워하는 성질을 깊이깊이 뿌리박아놓았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신치규가 자기의 상전이 아니요, 자기가 신치규의 종도 아니다. 다만 똑같은 사람으로 마주섰을 뿐이다. 아니다, 지금부터는 신치규도 방원의 원수였다. 그의 간을 씹어먹어도 오히려 나머지 한이 있는 원수다.

신치규는 똑바로 쳐다보는 방원을 마주 쳐다보며,

“똑바루 보면 어쩔 터이냐? 온 세상이 망하려니까 별 해괴한 일이 다 많거든. 어째 이놈아!”

“이놈아?”

방원은 한 걸음 들어섰다. 나무같이 힘센 다리가 성큼 하고 나설 때 신치규는 머리끝이 으쓱 하였다. 쇠몽둥이 같은 두 주먹이 쑥 앞으로 닥칠 때 그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네 입에서 이놈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이 사지를 찢어발겨도 오히려 시원치 못할 놈아! 네가 내 계집을 뺏으려고 오늘 날더러 나가라고 그랬지?”

“어허 이거 그놈이 눈깔이 삐었군. 얘,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 너는 네 서방하고 나중 들어오너라!”

신치규는 형세가 위험하니까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려고 돌아서서 들어가려 하니까 방원은 돌아서는 신치규의 멱살을 잔뜩 쥐어 한 팔로 바싹 치켜들고,

“이놈 어디를 가? 네가 이때까지 맛을 몰랐구나?”

하며, 한번 집어쳐 땅바닥에다가 태질을 한 뒤에 그대로 타고 앉아서 목줄띠를 누르니까, 마치 뱀이 개구리 잡아먹을 적 모양으로 깩깩 소리가 나며 말 한마디도 못한다.

“이놈 너 죽고 나 죽으면 고만 아니냐?”

하고 방원은 주먹으로 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들이댄다. 나중에는 주먹이 부족하여 옆에 있는 모루돌멩이를 집어서 죽어라 하고 내리친다. 그의 팔, 그의 몸에는 본능적으로 숨어 있는 잔인성(殘忍性)이 조금도 남지 않고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눈은 마치 펄떡펄떡 뛰는 미끼를 가로차고 앉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이 뜨거운 피를 보고야 만족하다는 듯이 무섭게 번쩍거렸다. 그에게는 초자연(超自然)의 무서운 힘이 그의 팔과 다리에 올라왔다.

이 꼴을 보는 계집은 무서웠다. 끔찍끔찍한 일이 목전에 생길 것이다. 그의 맥이 풀린 다리는 마음대로 놓여지지 아니하였다.

“아! 사람 살류! 사람 살류!”

적적한 밤중에 쓸쓸한 마을에는 처참한 여자 목소리가 으스스하게 울리었다. 이 소리를 들은 방원은 더욱 힘을 주어서 눈을 딱 감고 죽어라 내리 짓찧었다. 뼈가 돌에 맞는 소리가 살이 을크러지는 소리와 함께 퍽퍽 하였다. 피 묻은 돌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갈갈이 찢긴 옷에는 살점이 묻었다.

동네편 쪽에서 수군수군 하더니 구두 소리가 나며 칼 소리가 덜거덕거리었다. 방원의 머리에는 번갯불같이 무엇이 보이었다. 그는 손에 주먹을 쥔 채 잠깐 정신을 차려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순검……”

그는 신치규의 배를 타고 앉아서 순검의 구두 소리를 듣자 비로소 자기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달았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일어났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벌벌 떠는 계집에게로 갔다.

“얘, 가자! 도망가자! 너하고 나하고 같이 가자! 자! 어서, 어서!”

계집은 자기에게 또 무슨 일이 있을까 하여 겁을 내어 도망을 하려 한다. 방원은 계집을 따라가며,

“얘! 얘! 네가 이렇게도 나를 몰라주니?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를 못하니? 자! 어서, 도망가자, 어서 어서, 뒤에서 순검이 쫓아온다.”

계집은 그대로 서서 종종걸음을 치며,

“싫소! 임자나 가구려, 나는 싫어요, 싫어.”

“가자! 응! 가!”

그는 미친 사람처럼 계집의 팔을 붙잡고 끌었다. 그때 누구인지 그의 두 팔을 마치 형틀에 매다는 것같이 꽉 뒤로 끼어안는 사람이 있었다.

“이놈아! 어디를 가?”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온 전신에 맥이 풀리어 그대로 뒤로 자빠지려 할 때 어느덧 널판 같은 주먹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정신 차려.”

“녜.”

그는 무의식하게 고개가 숙여지고 말소리가 공손하여졌다.

땅바닥에서는 신치규가 꿈지럭거리며 이리저리 뒹군다. 청승스러운 비명(悲鳴)이 들린다.

방원은 포승 지인 채, 계집은 그대로, 주재소로 끌려가고 신치규는 머슴들이 업어들였다.

석 달이 지났다. 상해죄(傷害罪)로 감옥에서 복역을 하던 방원은 만기가 되어 출옥을 하였다. 그러나 신치규는 아무 일 없이 자기 집에서 치료하고 방원의 계집을 데려다 산다. 신치규는 온몸이 나은 뒤에 홀로 생각하였다.

- 죽는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하고, 얼굴에 흠이 진 곳을 만져보며,

- 오히려 그놈이 그렇게 한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지, 얼굴이 아프기는 좀 하였으나! 허어.

- 어떻게 그놈을 떼어버릴까 하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을 하던 차에 잘 되었지. 그놈 한 십 년 감옥에서 콩밥을 먹었으면 좋겠다.

방원은 감옥에서 생각하기를 나가기만 하면 년 놈을 죽여버리고 제가 죽든지 요정을 내리라 하였다.

집에서 내어쫓기고 계집까지 빼앗기고, 그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었다. 그것이 모두 자기가 돈 없는 탓인 것을 생각하매 더욱 분한 생각이 났다.

- 에 더러운 년.

그는 홍바지에 쇠사슬을 차고서 일을 할 때에도 가끔 침을 땅에다 뱉으면서 혼자 중얼거리었다.

- 사람이 이러고서야 살아서 무엇하나. 멀쩡한 놈이 계집 빼앗기고 생으로 콩밥까지 먹으니…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에는 감옥소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내가 여기서 마지막으로 목숨을 잃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손으로 내 목을 찔러죽든지, 무슨 요정이 날 것을 생각하고, 다시 온몸에 힘을 주고 쓸쓸한 웃음을 웃었다.

그는 이백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계집이 사는 촌에를 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체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그를 보고 피해갔다.

마치 문둥병자나 마찬가지 대우를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부터는 더우기 세상이 차디차졌다. 자기가 상상하던 것보다도 더 무정하여졌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밤이 될 때까지 그 근처 산 속으로 돌아다녔다. 그래서 깊은 밤에 촌으로 내려왔다. 그는 그 방앗간을 다시 지나갔다. 석 달 전 생각이 났다. 자기가 여기서 잡혀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더욱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 올라왔다. 그는 한참이나 거기 서서 그때 일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친 후에 다시 그전 집을 찾아갔다.

날이 몹시 추워지고 눈이 쌓였다. 옷은 입은 것이 가을에 입고 감옥에 들어갔던 그것이므로 살을 에이는 듯한 것이로되 그는 분한 생각과 흥분된 마음에 그것도 몰랐다.

- 년 놈을 모두 처치를 해버려?

혼자 속으로 궁리를 하다가,

- 그렇지, 그까짓 것들은 살려두어 쓸데없는 인생들이야.

하면서 옆구리에 지른 기름한 단도를 다시 만져보았다. 그는 감격스런 마음으로 그것을 쓰다듬었다. 그는 신치규의 집 울을 넘어 들어갔다. 그의 발은 전에 다닐 적같이 익숙하였다. 그는 사랑을 엿보고 다시 뒤로 돌아서 건넌방 창 밑에 와 섰었다. 귀를 기울였으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손에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일부러 뒤 창문을 달각달각 흔들었다.

“그 뉘?”

하고 계집의 머리가 쑥 나오며 문이 열리었다. 그는 얼른 비켜섰다. 문은 다시 닫혀지고 계집은 들어갔다.

방원의 마음은 이상하게 동요가 되었다. 예쁜 계집의 목소리가 오래간만에 귀에 들릴 때, 마치 자기가 감옥에서 꿈을 꿀 적 모양으로 요염하고도 황홀하게 그의 마음을 꾀는 것 같았다. 그는 꿈속에서 다시 만난 것 같고 오래간만에 그를 만나보매 모든 결심은 얼음같이 녹는 듯하였다. 그래도 계집이 설마 나를 영영 잊어버리랴 하고 옛날의 정리를 생각할 때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랴는 생각이 났다.

아무리 자기를 감옥에까지 가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감히 칼을 들어 죽이려는 용기가 단번에 나지 않아서 주저하기 시작했다.

- 아니다, 다시 한번만 물어보자!

그는 들었던 칼을 다시 짚고 생각하였다.

-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반신반의하였다.

- 그렇다. 한번만 다시 물어보고 죽이든 살리든 하자!

그는 다시 문을 달각달각 하였다. 계집은 이번에 다시 문을 열고 사면을 둘러보더니 헌 짚신짝을 신고 나왔다.

“뉘요?”

그는 방원이 서 있는 집 모퉁이를 돌아서려 할 제,

“내다!”

하고, 입을 틀어막고 칼을 가슴에 대었다.

“떠들면 죽어!”

방원은 계집의 입을 수건으로 틀어막고 결박을 한 후 둘쳐업고서 번개같이 달음질하였다. 그는 어느 결에 계집을 업어다가 물레방아 앞에 내려놓은 후 결박을 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나를 모르겠니?”

캄캄한 그믐밤에 얼굴을 바짝 계집의 코앞에 들이대었다. 계집은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아!”

소리를 지르더니 뒤로 물러섰다.

“조금도 놀랄 것이 없다. 오늘 네가 내 말을 들으면 살려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야.”

하고, 시퍼런 칼을 들이대었다. 계집은 다시 태연하게,

“말요? 임자의 말을 들으렬 것 같으면 벌써 들었지요, 이때까지 있겠소? 임자도 남의 마음을 알 거요. 임자와 나와 이년 전에 이곳으로 도망해올 적에도 전 남편이 나를 죽이겠다고 허리를 찔러 그 흠이 있는 것을 날마다 밤에 당신이 어루만지었지요? 내가 그까짓 칼쯤을 무서워서 나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단 말이요? 힝, 이게 무슨 비겁한 짓이요. 사내자식이, 자! 찌르려거든 찔러보아요. 자, 자.”

계집은 두 가슴을 벌리고 대들었다. 방원은 너무 계집의 태도가 대담하므로 들었던 칼이 도리어 뒤로 움찔할 만큼 기가 막혔다. 그는 무의식하게,

“정말이냐?”

하고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섰다.

“정말이 아니고? 내가 비록 여자이지마는 당신같이 겁쟁이는 아니라오! 이것이 도무지 무엇이요?”

계집은 그래도 두려웠던지 방원의 손에 든 칼을 뿌리쳐 땅에 떨어뜨리었다.

이 칼이 땅에 떨어지자 방원은 이때까지 용사와 같이 보이던 계집이 몹시 비겁스럽고 더러워 보이어 다시 칼을 집어들고 덤비었다.

“에잇! 간사한 년! 어쩔 터이냐? 나하고 당장에 멀리 가지 않을 터이냐? 자아 가자!”

그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타일러보기도 하고 간청도 하여보았다.

“자아, 어서 옛날과 같이 나하고 멀리멀리 도망을 가자! 나는 참으로 나의 칼로 너를 죽일 수는 없다!”

계집의 눈에는 독이 올라왔다. 광채가 어두운 밤에 번개같이 번쩍거리며,

“싫어요. 나는 죽으면 죽었지 가기는 싫어요. 이제 나는 고만 그렇게 구차하고 천한 생활을 다시 하기는 싫어요. 고만 물렸어요.”

“너의 입으로 정말 그런 말이 나오느냐? 너는 나를 우리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나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한 후에 또 나중에는 세상에서 지옥이라고 하는 감옥소에까지 가게 하였지! 그러고도 나의 맨 마지막 원을 들어주지 않을 터이냐?”

“나는 언제든지 당신 손에 죽을 것까지도 알고 있소! 자!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언제든지 죽기는 일반, 이렇게 된 이상 나를 죽이시오.”

“정말이냐? 정말이야?”

“정말요!”

계집은 결심한 뜻을 나타내었다. 방원의 손은 떨리었다. 그리고 그는 눈을 꼭 감고,

“에, 여우 같은 년!”

하고 칼끝을 계집의 옆구리를 향하고 힘껏 내밀었다. 계집은 이를 악물고,

“사람 죽인다!”

소리 한번에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칼 자루를 든 손이 피가 몰리는 바람에 우루루 떨리더니 피가 새어나왔다. 방원은 그 칼을 빼어들더니 계집 위에 거꾸러져서 가슴을 찌르고 절명하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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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 살이 될락말락 한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이라 부르지마는 그때는 연화봉(蓮花峰)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南大門)에서 바로 내려다보며는 오정포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 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貧民窟)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 딴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목밭을 하고 또는 채소를 심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을 하여갔었다.

여기에 그중 큰 과목밭을 갖고 그중 여유 있는 생활을 하여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으나 동네사람들이 부르기를 오 생원(吳生員)이라고 불렀다.

얼굴이 동탕하고 목소리가 마치 여름에 버드나무에 앉아서 길게 목 늘여 우는 매미 소리같이 저르렁저르렁 하였다.

그는 몹시 부지런한 중년 늙은이로 아침이면 새벽 일찌기 일어나서 앞뒤로 뒷짐을 지고 돌아다니며 집안 일을 보살피는데 그 동네에는 그가 마치 시계와 같아서 그가 일어나는 때가 동네사람이 일어나는 때였다.

만일 그가 아침에 돌아다니며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동네사람들이 이상하여 그의 집으로 가보면 그는 반드시 몸이 불편하여 누웠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때는 일년 삼백 육십 일에 한번 있기가 어려운 일이요. 이태나 삼 년에 한번 있거나 말거나 하였다.

그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지는 얼마 되지 아니하나 그가 언제든지 감투를 쓰고 다니므로 동네사람들은 양반이라고 불렀고, 또 그 사람도 동네사람에게 그리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섣달이면 북어쾌 김톳을 동네사람에게 나눠주며 농사 때에 쓰는 연장도 넉넉히 장만한 후 아무 때나 동네사람들이 쓰게 하므로 그 동네에서는 가장 인심 후하고 존경을 받는 집인 동시에 세력 있는 집이다.

그 집에는 삼룡(三龍)이라는 벙어리 하인 하나이 있으니 키가 본시 크지 못하여 땅딸보로 되었고 고개가 빼지 못하여 몸뚱이에 대강이를 갖다가 붙인 것 같다. 거기다가 얼굴이 몹시 얽고 입이 크다. 머리는 전에 새 꼬랑지 같은 것을 주인의 명령으로 깎기는 깎았으나 불밤송이 모양으로 언제든지 푸 하고 일어섰다.

그래 걸어다니는 것을 보면, 마치 옴두꺼비가 서서 다니는 것같이 숨차 보이고 더디어 보인다. 동네사람들이 부르기를 삼룡이라고 부르는 법이 없고 언제든지 '벙어리' '벙어리'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앵모' '앵모' 한다. 그렇지만 삼룡이는 그 소리를 알지 못한다.

그도 이 집 주인이 이리로 이사를 올 때에 데리고 왔으니 진실하고 충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세차다. 눈치로만 지내가는 벙어리지마는 듣는 사람보다 슬기로울 적이 있고 평생 조심성이 있어서 결코 실수한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을 쓸고 소와 돼지의 여물을 먹이며 여름이면 밭에 풀을 뽑고 나무를 실어들이고 장작을 패며 겨울이면 눈을 쓸고 장 심부름이며 진 일 마른 일 할 것 없이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럴수록 이 집 주인은 벙어리를 위해주며 사랑한다. 혹시 몸이 불편한 기색이 있으면 쉬게 하고. 먹고 싶어하는 듯한 것은 먹이고 입을 때 입히고 잘 때 재운다.

그런데 이 집에는 삼대독자로 내려오는 그 집 아들이 있다. 나이는 열 일곱 살이나 아직 열 네 살도 되어 보이지 않고 너무 귀엽게 기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버릇이 없고 어리광을 부리며 사람에게나 짐승에게 잔인포악한 짓을 많이 한다.

동네 사람들은,

"후레자식, 아비 속상하게 할 자식, 저런 자식은 없는 것만 못해."

하고. 욕들을 한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잘못할 때마다 그의 영감을 보고,

"그 자식을 좀 때려주구려. 왜 그런 것을 보고 가만두."

하고 자기가 대신 때려주려고 나서면,

"아뇨, 아직 철이 없어 그렇지, 저도 지각이 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 아뇨."

하고 너그럽게 타이른다. 그러면 마누라는 왜가리처럼 소리를 지르며,

"철이 없긴 지금 나이가 몇이요? 낼 모레면 스무 살이 되는데, 또 며칠 아니면 장가를 들어서 자식까지 날 것이 그래가지고 무엇을 한단 말이요?"

하고. 들이대며,

"자식은 꼭 아버지가 버려놓았습니다. 자식 귀여운 것만 알았지 버릇 가르칠 줄은 모르니까…"

이렇게 싸움이 시작만 하려 하면 영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그 아들은 더구나 벙어리를 사람으로 알지도 않는다. 말 못하는 벙어리라고 오고가며 주먹으로 허구리를 지르기도 하고 발길로 엉덩이도 찬다.

그러면 그 벙어리는 어린것이 철없이 그러는 것이 도리어 귀엽기도 하고 또는 그 힘없는 팔과 힘없는 다리로 자기의 무쇠 같은 몸을 건드리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앙징하기도 하여 돌아서서 방그레 웃으면서 툭툭 털고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버린다.

어떤 때는 낮잠 자는 벙어리 입에다가 똥을 먹인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자는 벙어리 두 팔 두 다리를 살며시 동여매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화승불을 붙여놓아 질겁을 하고 일어나다가 발버둥질을 하고 죽으려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이러할 때마다 벙어리의 가슴에는 비분한 마음이 꽉 들어찼다. 그러나 그는 주인의 아들을 원망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병신인 것을 원망하였으며 주인의 아들을 저주한다는 것보다 이 세상을 저주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의 눈물은 나오려 할 때 아주 말라붙어버린 샘물과 같이 나오려하나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그는 주인의 집을 버릴 줄 모르는 개 모양으로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밖에 없고 자기가 믿을 것도 여기 있는 사람들밖에 없을 줄 알았다.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는 것이 자기의 운명인 줄밖에 알지 못하였다.

자기의 주인 아들이 때리고 지르고 꼬집어 뜯고 모든 방법으로 학대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으례히 있을 줄밖에 알지 못하였다. 아픈 것도 그 아픈 것이 으례히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요. 쓰린 것도 자기가 받지 않아서는 안될 것으로 알았다. 그는 이 마땅히 자기가 받아야 할 것을 어떻게 해야 면할까 하는 생각을 한번도 하여본 일이 없었다.

그가 이 집에서 떠나가려거나 또는 그의 생활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는 언제든지 그 주인아들이 자기를 학대하고 또는 자기를 못 살게 굴 때 그는 자기의 주먹과 또는 자기의 힘을 생각하여보았다.

주인 아들이 자기를 때릴 때 그는 주인 아들 하나쯤은 넉넉히 제지할 힘이 있는 것을 알았다.

어떠한 때는 아픔과 쓰림이 자기의 몸으로 스미어들 때면 그의 주먹은 떨리면서 어린 주인의 몸을 치려하다가는 그는 그것을 무서운 고통과 함께 꽉 참았다.

그는 속으로,

"…아니다. 그는 나의 주인의 아들이다. 그는 나의 어린 주인이다."

하고, 꾹 참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얼핏 잊어버리었다. 그러다가도 동네집 아이들과 혹시 장난을 하다가 주인아들이 울고 들어올 때에는 그는 황소같이 날뛰면서 주인을 위하여 싸웠다. 그래서 동네에서도 어린애들이나 장난꾼들이 벙어리를 무서워하여 감히 덤비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주인아들도 위급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벙어리를 찾았다. 벙어리는 얻어맞으면서도 기어드는 충견 모양으로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싫어하지 않고 힘을 다하였다.

벙어리가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그는 물론 이성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동네의 처녀들이 저를 '벙어리, 벙어리' 하며 괴상한 손짓과 몸짓으로 놀려먹음을 받을 적에 분하고 골나는 중에도 느긋한 즐거움을 느끼어본 일은 있었으나 그가 결코 사랑으로써 어떠한 여자를 대해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정욕을 가진 사람인 벙어리도 그의 피가 차디찰 리는 없었다. 혹 그의 피는 더욱 뜨거웠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뜨겁다 뜨겁다 못하여 엉기어버린 엿과 같을지도 알 수 없었다. 만일 그에게 볕을 주거나 다시 뜨거운 열을 준다면 그의 피는 다시 녹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깜박깜박하는 기름 등잔 아래에서 밤이 깊도록 짚세기를 삼을 때이면 남모르는 한숨을 아니 쉬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는 그것을 곧 억제할 수 있을 만치 정욕에 대하여 벌써부터 단념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언제 폭발이 될는지 알지 못하는 휴화산(休火山) 모양으로 그의 가슴속에는 충분한 정열을 깊이 감추어놓았으나 그것이 아직 폭발될 시기가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비록 폭발이 되려고 무섭게 격동함을 벙어리 자신도 느끼지 않는 바는 아니지마는 그는 그것을 폭발시킬 조건을 얻기 어려웠으며 또는 자기가 여태까지 능동적으로 그것을 나타낼 수가 없을 만치 외계의 압축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인한 이지(理智)가 너무 그에게 자제력(自制力)을 강대하게 하여주는 동시에 또한 너무 그것을 단념만 하게 하여주었다.

속으로, 나는 '벙어리'다, 자기가 생각할 때 그는 몹시 원통함을 느끼는 동시에 나는 말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자유와 똑같은 권리가 없는 줄 알았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에서 언제든지 단념 안하랴 단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단념이 쌓이고 쌓이어 지금에는 다만 한 개의 기계와 같이 이 집에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천직으로 알고 있을 뿐이요. 다시는 자기가 살아갈 세상이 없는 것 같이 밖에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해 가을이다. 주인의 아들이 장가를 들었다. 색시는 신랑보다 두 살 위인 열 아홉 살이다. 주인이 본시 자기가 언제든지 문벌이 얕은 것을 한탄하여 신부를 구할 때에 첫째 조건이 문벌이 높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문벌 있는 집에서는 그리 쉽게 색시를 내놀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하는 수없이 그 어떠한 영락한 양반의 딸을 돈을 주고 사오다시피 하였으니 무남독녀의 딸을 둔 남촌 어떤 과부를 꿀을 발라서 약혼을 하고 혹시나 무슨 딴소리가 있을까하여 부랴부랴 성례식을 시켜버렸다.

혼인할 때의 비용도 그때 돈으로 삼만 냥을 썼다. 그리고 아들의 처가집에 며느리 뒤 보아주는 바느질삯, 빨래 삯이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이천 오백 냥씩을 대어주었다.

신부는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까지 상당히 견디기도 하고 또는 금지옥엽같이 기른 터이라 구식 가정에서 배울 것 읽힐 것은 못한 것이 없고 또는 본래 인물이라든지 행동거지에 조금도 구김이 있지 아니하다.

신부가 오자 신랑의 흠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신부에게다 대면 두루미와 까마귀지."

"아직도 철딱서니가 없어."

"색시에게 쥐여 지내겠지."

"신랑에겐 과하지."

동네집 말 좋아하는 여편네들이 모여앉으면 이렇게 비평들을 한다. 어떠한 남의 걱정 잘하는 마누라님은 간혹 신랑을 보고는 그대로 세워놓고,

"글쎄, 인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셈이 좀 나요. 저리구 어떻게 색시를 거느려가누. 색시 방에 들어가기가 부끄럽지 않담."

하고 들이대다시피 하는 일이 있다.

이럴 적마다 신랑의 마음은 그 말하는 이들이 미웠다. 일부러 자기를 부끄럽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후에 그를 만나면 말도 안하고 인사도 하지 아니한다.

또 그의 고모 되는 이가 와서 자기 조카를 보고,

"인제는 어른이야. 너도 그만하면 지각이 날 때가 되지 않았니? 네 처가 부끄럽지 아니하냐?"

하고 타이를 적마다 그의 마음은 그 말하는 사람이 부끄럽다는 것보다도 자기를 이렇게 하게 한 자기 아내가 더욱 밉살머리스러웠다.

'여편네가 다 무엇이냐. 저 빌어먹을 년이 들어오더니 나를 이렇게 못 살게 굴지.'

혼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그는 색시 방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집안에서는 야단이 났다. 마치 돼지나 말 새끼를 혼례시키려는 것같이 신랑을 색시 방으로 집어넣으려 하나 막무가내였다. 그럴 때마다 신랑은 손에 닥치는 대로 집어때려서 자기의 외사촌 누이의 이마를 뚫어서 피까지 나게 한 일이 있었다.

집안 식구들은 하는 수가 없어 맨 나중으로 아버지에게 밀었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이 없을 뿐더러 풍파를 더 일으키게 하였다. 아버지께 꾸중을 듣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로 신부의 머리채를 쥐어잡아 마루 한복판에 태질을 쳤다. 그리고는,

"이년 네 집으로 가거라. 보기 싫다. 내 눈앞에는 보이지도 말아."

하였다. 밥상을 가져오면 그 밥상이 마당 한복판에서 재주를 넘고 옷을 가져오면 그 옷이 쓰레기통으로 나간다.

이리하여 색시는 시집오던 날부터 팔자 한탄을 하고서 날마다 밤마다 우는 사람이 되었다.

울며는 요사스럽다고 때린다. 또 말이 없으면, 빙충맞다고 친다. 이리하여 그 집에는 평화스러운 날이 하루도 없었다.

이것을 날마다 보는 사람 가운데 알 수 없는 의혹을 품게 된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는 곧 벙어리 삼룡이었다.

그렇게 예쁘고 유순하고 그렇게 얌전한 벙어리의 눈으로 보아서는 감히 손도 대지 못할 만치 선녀 같은 색시를 때리는 것은 자기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의심이다.

보기에는 황홀하고 건드리기도 황홀할 만치 숭고한 여자를 그렇게 하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세상에 있지 못할 일이다. 자기는 주인 새서방에게 개나 돼지같이 얻어맞는 것이 마땅한 이상으로 마땅하지마는 선녀와 짐승의 차가 있는 색시와 자기가 똑같이 얻어맞는 것은 너무 무서운 일이다. 어린 주인이 천벌이나 받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하였다.

어떠한 달밤, 사면은 고요적막하고 별들은 드문드문 눈들만 깜박이며 반달이 공중에 뚜렷이 달려 있어 수은으로 세상을 깨끗하게 닦아낸 듯이 청명한데 삼룡이는 검둥개 등을 쓰다듬으며 밖 마당 멍석 위에 비슷이 드러누워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하여 보았다.

주인 색시를 생각하면 공중에 있는 달보다도 더 곱고 별들보다도 더 깨끗하였다. 주인 색시를 생각하면 달이 보이고 별이 보이었다. 삼라만상을 씻어내는 은빛보다도 더 흰 달이나 별의 광채보다도 그의 마음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듯하였다. 마치 달이나 별이 땅에 떨어져 주인 새아씨가 된 것도 같고 주인 새아씨가 하늘에 올라가면 달이 되고 별이 될 것 같았다.

더구나 자기를 어린 주인이 때리고 꼬집을 때 감히 입벌려 말은 하지 못하나 측은하고 불쌍히 여기는 정이 그의 두 눈에 나타나는 것을 다시 생각할 때 그는 부들부들한 개 등을 어루만지면서 감격을 느끼었다. 개는 꼬리를 치며 자기를 귀여워하는 줄 알고 벙어리의 손을 핥았다.

삼룡이의 마음은 주인아씨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또는 그를 위하여서는 자기의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겠다는 의분에 넘치었다. 그것이 마치 살구를 보면 입 속에 침이 도는 것같이 본능적으로 느끼어지는 감정이었다.

새댁이 온 뒤에 다른 사람들은 자유로운 안 출입을 금하였으나 벙어리는 마치 개가 맘대로 안에 출입할 수 있는 것같이 아무 의심 없이 출입할 수가 있었다.

하루는 어린 주인이 먹지 않던 술이 잔뜩 취하여 무지한 놈에게 맞아서 길에 자빠진 것을 업어다가 안으로 들여다 누인 일이 있었다. 그때에 아무도 안에 있지 않고 다만 새색시 혼자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이 꼴을 보고 벙어리의 충성된 마음이 고마와서 그후에 쓰던 비단 헝겊조각으로 부지쌈지 하나를 하여준 일이 있었다.

이것이 새서방님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색시는 어떤 날 밤 자던 몸으로 마당 복판에 머리를 푼 채 내어 동댕이가 쳐졌다. 그리고 온몸에 피가 맺히도록 얻어맞았다.

이것을 본 벙어리는 또다시 의분의 마음이 뻗쳐올라왔다. 그래서 미친 사자와 같이 뛰어들어가 새서방님을 내어던지고 새색시를 둘러메었다. 그리고 나는 수리와 같이 바깥사랑 주인영감 있는 곳으로 뛰어가 그 앞에 내려놓고 손짓과 몸짓을 열 번 스무 번 거푸하며 하소연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는 주인 새서방님에게 물푸레로 얼굴을 몹시 얻어맞아서 한쪽 뺨이 눈을 얼러서 피가 나고 주먹같이 부었다. 그 때릴 적에 새서방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 흉칙한 벙어리 같으니, 내 여편네를 건드려?"

하고, 부지쌈지를 뺏아서 갈갈이 찢어서 뒷간에 던졌다.

"그러고 이놈아, 인제는 주인도 몰라보고 막 친다. 이런 것은 죽어야 해."

하고. 채찍으로 그의 뒷덜미를 갈겨서 그 자리에 쓰러지게 하였다.

벙어리는 다만 두 손으로 빌 뿐이었다. 말도 못하고 고개를 몇백 번 코가 땅에 닿도록 그저 용서해달라고 빌기만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는 비로소 숨겨 있던 정의감(正義感)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아픈 것을 참아가면서도 북받치는 분노(심술)를 억제하였다.

그때부터 벙어리는 안방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더욱 벙어리로 하여금 궁금증이 나게 하였다. 그 궁금증이라는 것이 묘하게 빛이 연하여 주인 아씨를 뵈옵고 싶은 감정으로 변하였다. 뵈옵지 못하므로 가슴이 타올랐다. 몹시 애상(哀傷)의 정서가 그의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한번이라도 아씨를 뵈올 수가 있으면 하는 마음이 나더니 그의 마음의 넋은 느끼기를 시작하였다. '센티멘털'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그 무슨 정서는 그에게 생명 같은 희열을 주었다. 그것과 자기의 목숨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때는 그대로 대강이로 담을 뚫고 들어가고 싶도록 주인아씨를 뵈옵고 싶은 것을 꾹 참을 때도 있었다.

그후부터는 밥을 잘 먹을 수가 없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틈만 있으면 안으로만 들어가고 싶었다.

주인이 전보다 많이 밥과 음식을 주고 더 편하게 하여주었으나 그것이 싫었다. 그는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집 가장자리를 돌아다녔다.

하루는 주인 새서방님이 술이 취하여 들어오더니 집안이 수선수선하여지며 계집 하인이 약을 사러 갔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계집 하인을 붙잡았다. 그리고 무엇이냐고 물었다.

계집 하인은 한 주먹을 뒤통수에 대이고 얼굴을 젊다고 하는 뜻으로 쓰다듬으며 둘째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것은 그집 주인은 엄지손가락이요. 둘째손가락은 새서방님이라는 뜻이요 주먹을 뒤통수에 대이는 것은 여편네라는 뜻이요 얼굴을 문지르는 것은 예쁘다는 뜻으로 벙어리에게 쓰는 암호다.

그런 뒤에 다시 혀를 내밀고 눈을 뒤집어쓰는 형상을 하고 두 팔을 싹 벌리고 뒤로 자빠지는 꼴을 보이니 그것은 사람이 죽게 되었거나 앓을 적에 하는 말 대신의 손짓이다.

벙어리는 눈을 크게 뜨고 계집 하인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들어서며 놀래는 듯이 멀거니 한참이나 있었다.

그의 가슴은 무섭게 격동하였다. 자기의 그리운 주인아씨가 죽었다는 말이나 아닌가. 그는 두 주먹을 마주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자기 방에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두어 시간이나 두 눈만 껌벅껌벅 하고 앉았었다.

그는 밤이 깊어갈수록 궁금증 나는 사람처럼 일어섰다 앉았다 하더니 두시나 되어서 바깥으로 나가서 뒤로 돌아갔다.

그는 도둑놈처럼 조심스럽게 바로 건넌방 뒤 미닫이 앞 담에 서서 주저주저 하더니 담을 넘었다. 가까이 창 앞에 서서 문틈으로 안을 살피다가 그는 진저리를 치며 물러섰다.

어두운 밤에 그의 손과 발이 마치 그 뒤에 서 있는 감나무 잎같이 떨리더니 그대로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갔을 때 그의 팔에는 주인 아씨가 한 손에 길다란 명주수건을 들고서 한 팔로 벙어리의 가슴을 밀치며 뻐팅기었다. 벙어리는 다만 눈이 뚱그래서 '에헤' 소리만 지르고 그 수건을 뺏으려 애쓸 뿐이다.

집안이 야단났다.

"집안이 망했군."

"어디 사내가 없어서 벙어리를?"

"어떻든 알 수 없는 일이야."

하는, 소리가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댄다.

그 이튿날 아침에 벙어리는 온몸이 짓이긴 것이 되어 마당에 거꾸러져 입에서 피를 토하여 신음하고 있었다. 그 곁에서는 새서방이 쇠줄 몽둥이를 들고서 문초를 한다.

"이놈!"

하고는 음란한 흉내는 모조리 하여가며 건넌방을 가리킨다. 그러나 벙어리는 손을 내저을 뿐이다. 또 몽둥이에는 살점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피가 흘렀다.

벙어리는 타들어가는 목으로 소리도 못 내며 고개만 내젓는다. 그는 피를 토하며 거꾸러지며 이마를 땅에 비비며 고개를 내흔든다. 땅에는 피가 스며든다. 새서방은 채찍 끝에 납 뭉치를 달아서 가슴을 훔쳐갈겼다가 힘껏 잡아뽑았다. 벙어리는 그대로 거꾸러지며 말이 없었다.

새서방은 그래도 시원치 못하였다. 그는 어제 벙어리가 새로 갈아놓은 낫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그 시퍼렇게 드는 날을 번쩍 들었다. 그래서 벙어리를 찌르려 할 제 벙어리는 한 팔로 그것을 받았고 집안 사람은 달려들었다. 벙어리는 낫을 뿌리쳐 저리로 내던졌다.

주인은 집안이 망하였다고 사랑에 누워서 모든 일을 들은 체 만 체 문을 닫고 나오지를 아니하며 집안에서는 색시를 쫓는다고 야단이다. 그날 저녁에 벙어리는 다시 끌려나왔다. 그때에는 주인 새서방이 그의 입던 옷과 신짝을 주며 눈을 부릅뜨고 손을 멀리 가리키며.

"가! 인제는 우리 집에 있지 못한다."

하였다. 이 소리를 듣는 벙어리는 기가 막혔다. 그에게는 이 집 외에 다른 집이 없다. 살 곳이 없었다. 자기는 언제든지 이 집에서 살고 이 집에서 죽을 줄 밖에 몰랐다. 그는 새서방님의 다리를 끼어안고 애걸하였다. 말도 못하는 것을 몸짓과 표정으로 간곡한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새서방님은 발길로 지르고 사람을 불렀다.

"이놈을 좀 내쫓아라!"

벙어리는 죽은 개 모양으로 끄을려나갔다. 그리고 대갈빼기를 개천 구석에 들이박히면서 나가 곤드라졌다가 일어서서 다시 들어오려 할 때에는 벌써 문이 닫혀 있었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의 마음으로는 주인영감을 찾았으나 부를 수가 없었다.

그가 날마다 열고 날마다 닫던 문이 자기가 지금은 열려 하나 자기를 내어쫓고 열리지를 않는다. 자기가 건사하고 자기가 거두던 모든 것이 오늘에는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일한 값이 오늘에는 이것이다.

그는 비로소 믿고 바라던 모든 것이 자기의 원수란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자기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 나은 것을 알았다.

그날 저녁 밤은 깊었는데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개 짖는 소리뿐이 들린다. 난데없는 화염이 벙어리 있던 오 생원 집을 에워쌌다. 그 불을 미리 놓으려고 준비하여 놓았는지 집 가장자리로 쪽 돌아가며 흩어놓은 풀에 모조리 돌라붙어 공중에서 내려다보며는 집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일 듯이 타오른다.

불은 마치 피묻은 살을 맛있게 잘라먹는 요마(妖魔)의 혓바닥처럼 날름날름 집 한 채를 삽시간에 먹어버리었다. 이와 같은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낮에 이 집을 쫓겨난 삼룡이다. 그는 먼저 사랑에 가서 문을 깨뜨리고 주인을 업어다가 밭 가운데 놓고 다시 들어가려 할 제 얼굴과 등과 다리가 불에 데이어 쭈그러져드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건넌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색시는 없었다. 다시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또 없고 새서방이 그의 팔에 매달리어 구원하기를 애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뿌리쳤다. 다시 서까래가 불이 시뻘겋게 타면서 그의 머리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부엌으로 가보았다. 거기서 나오다가 문설주가 떨어지며 왼팔이 부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몰랐다. 그는 다시 광으로 가보았다. 거기도 없었다. 그는 다시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그때야 그는 색시가 타죽으려고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색시를 안았다. 그리고는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나갈 곳이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는 비로소 자기의 몸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을 자기의 가슴에 느끼는 것을 알았다. 색시를 자기 가슴에 안았을 때 그는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숨이 다한 줄 알았을 때 그 색시를 내려놀 때는 그는 벌써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집은 모조리 타고 벙어리는 색시를 무릎에 뉘고 있었다. 그의 울분은 그 불과 함께 사라졌을는지.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 가장자리에 엷게 나타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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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

점순네 수탉(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 작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하고 면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푸드득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닦아 놓는다. 그러면 이 못생긴 것은 쪼일 적마다 주둥이로 땅을 받으며 그 비명이 킥, 킥, 할 뿐이다. 물론 미처 아물지도 않은 면두를 또 쪼이며 붉은 선혈은 뚝뚝 떨어진다. 이걸 가만히 내려다보자니 내 대강이가 터져서 피가 흐르는 것같이 두 눈에서 불이 번쩍 난다. 대뜸 지게막대기를 메고 달려들어 점순네 닭을 후려칠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헛매질로 떼어만 놓았다.

이번에도 점순이가 쌈을 붙여 놨을 것이다. 바짝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놈의 계집애가 요새로 들어서 왜 나를 못 먹겠다고 고렇게 아르릉거리는지 모른다.

나흘 전 감자 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 갔지 남 울타리 엮는 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서로 만나도 본체 만 척하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항차 망아지만 한 계집애가 남 일하는 놈 보구…….

"그럼 혼자 하지 떼루 하듸?"

내가 이렇게 내배앝는 소리를 하니까,

"너 일하기 좋니?"

또는,

"한여름이나 되거든 하지 벌써 울타리를 하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 놈의 계집애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제 집께를 할금 할금 돌아보더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구웠는 지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 집엔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난 감자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일하던 손으로 그 감자를 도로 어깨 너머로 쑥 밀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우리가 이 동네에 들어온 것은 근 삼 년째 되어 오지만 여태껏 가무잡잡한 점순의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바구니를 다시 집어들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어질 듯 자빠질 듯 논둑으로 횡하게 달아나는 것이다.

어쩌다 동리 어른이,

"너 얼른 시집을 가야지?"

하고 웃으면,

"염려 마서유. 갈 때 되면 어련히 갈라구!"

이렇게 천연덕스레 받는 점순이었다. 본시 부끄럼을 타는 계집애도 아니거니와 또한 분하다고 눈에 눈물을 보일 얼병이도 아니다. 분하면 차라리 나의 등어리를 바구니로 한번 모질게 후려쌔리고 달아날지언정.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잡아먹으려 기를 복복 쓰는 것이다.

설혹 주는 감자를 안 받아먹는 것이 실례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느 집엔 이거 없지.'는 다 뭐냐. 그렇잖아도 저희는 마름이고 우리는 그 손에서 배재를 얻어 땅을 부치므로 일상 굽실거린다.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집이 없어서 곤란으로 지낼 제 집터를 빌리고 그 위에 집을 또 짓도록 마련해 준 것도 점순 네의 호의였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농사 때 양식이 딸리면 점순이네한테 가서 부지런히 꾸어다 먹으면서 인품 그런 집은 다시 없으리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열 일곱씩이나 된 것들이 수군수군하고 붙어 다니면 동네의 소문이 사납다고 주의를 시켜 준 것도 또 어머니였다. 왜냐하면 내가 점순이 하고 일을 저질렀다가는 점순네가 노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땅도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계집애가 까닭없이 기를 복복 쓰며 나를 말려 죽이려고 드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고 간 담날 저녁나절이었다. 나무를 한 짐 잔뜩 지고 산을 내려오려니까 어디서 닭이 죽는 소리를 친다. 이거 뉘집에서 닭을 잡나, 하고 점순네 울 뒤로 돌아오다가 나는 고만 두 눈이 똥그랬다. 점순이가 저희 집 봉당에 홀로 걸터앉았는데 이게 치마 앞에다 우리 씨암탉을 꼭 붙들어 놓고는,

"이놈의 씨닭! 죽어라 죽어라."

요렇게 암팡스레 패 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대가리나 치면 모른다마는 아주 알도 못 낳으라고 그 볼기짝께를 주먹으로 콕콕 쥐어박는 것이다.

나는 눈에 쌍심지가 오르고 사지가 부르르 떨렸으나 사방을 한번 휘둘러보고야 그제서야 점순이 집에 아무도 없음을 알았다. 잡은 참 지게 막대기를 들어 울타리의 중턱을 후려치며,

"이놈의 계집애! 남의 닭 알 못 낳으라구 그러니?"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점순이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고 그대로 의젓이 앉아서 제 닭 가지고 하듯이 또 죽어라,죽어라, 하고 패는 것이다. 이걸 보면 내가 산에서 내려올 때를 겨냥해 가지고 미리부터 닭을 잡아가지고 있다가 네 보라는 듯이 내 앞에서 줴지르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남의 집에 뛰어들어가 계집애하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형편이 썩 불리함을 알았다. 그래 닭이 맞을 적마다 지게 막대기로 울타리를 후려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울타리를 치면 칠수록 울섶이 물러앉으며 뼈대만 남기 때문이다. 허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만 밑지는 노릇이다.

"아, 이년아! 남의 닭 아주 죽일 터이야?"

내가 도끼눈을 뜨고 다시 꽥 호령을 하니까 그제서야 울타리께로 쪼르르 오더니 울 밖에 섰는 나의 머리를 겨누고 닭을 내팽개친다.

"에이 더럽다! 더럽다!"

"더러운 걸 널더러 입때 끼고 있으랬니? 망할 계집애년 같으니"

하고 나도 더럽단 듯이 울타리께를 횡허케 돌아내리며 약이 오를 대로 다 올랐다, 라고 하는 것은 암탉이 풍기는 서슬에 나의 이마빼기에다 물지똥을 찍 갈겼는데 그걸 본다면 알집만 터졌을 뿐 아니라 골병은 단단히 든 듯싶다. 그리고 나의 등 뒤를 향하여 나에게만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이 바보 녀석아!"

"애! 너 배냇병신이지?"

그만도 좋으련만,

"얘! 너 느 아버지가 고자라지?"

"뭐 울아버지가 그래 고자야?"

할 양으로 열벙거지가 나서 고개를 홱 돌리어 바라봤더니 그때까지 울타리 위로 나와 있어야 할 점순이의 대가리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다 돌아서서 오자면 아까에 한 욕을 울 밖으로 또 퍼붓는 것이다. 욕을 이토록 먹어 가면서도 대거리 한 마디 못하는 걸 생각하니 돌부리에 채이어 발톱 밑이 터지는 것도 모를 만큼 분하고 급기야는 두 눈에 눈물까지 불끈 내솟는다.

그러나 점순이의 침해는 이것뿐이 아니다.

사람들이 없으면 틈틈이 제 집 수탉을 몰고 와서 우리 수탉과 쌈을 붙여 놓는다. 제 집 수탉은 썩 험상궂게 생기고 쌈이라면 홰를 치는 고로 으레 이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툭하면 우리 수탉이 면두며 눈깔이 피로 흐드르하게 되도록 해 놓는다. 어떤 때에는 우리 수탉이 나오지를 않으니까 요놈의 계집애가 모이를 쥐고 와서 꾀어내다가 쌈을 붙인다.

이렇게 되면 나도 다른 배차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우리 수탉을 붙들어 가지고 넌지시 장독께로 갔다. 쌈닭에게 고추장을 먹이면 병든 황소가 살모사를 먹고 용을 쓰는 것처럼 기운이 뻗친다 한다. 장독에서 고추장 한 접시를 떠서 닭 주둥아리께로 들여 밀고 먹여 보았다. 닭도 고추장에 맛을 들였는지 거스르지 않고 거진 반 접시 턱이나 곧잘 먹는다. 그리고 먹고 금시는 용을 못쓸 터이므로 얼마쯤 기운이 돌도록 횃속에다 가두어 두었다.

밭에 두엄을 두어 짐 져내고 나서 쉴 참에 그 닭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밖에는 아무도 없고 점순이만 저희 울안에서 헌옷을 뜯는지 혹은 솜을 터는지 웅크리고 앉아서 일을 할 뿐이다.

나는 점순네 수탉이 노는 밭으로 가서 닭을 내려놓고 가만히 맥을 보았다. 두 닭은 여전히 얼리어 쌈을 하는데 처음에는 아무 보람이 없었다. 멋지게 쪼는 바람에 우리 닭은 또 피를 흘리고 그러면서도 날갯죽지만 푸드득푸드득하고 올라 뛰고 뛰고 할뿐으로 제법 한번 쪼아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한번엔 어쩐 일인지 용을 쓰고 펄쩍 뛰더니 발톱으로 눈을 하비고 내려오며 면두를 쪼았다. 큰 닭도 여기에는 놀랐는지 뒤로 멈씰하며 물러난다. 이 기회를 타서 작은 우리 수탉이 또 날쌔게 덤벼들어 다시 면두를 쪼니 그제서는 감때사나운 그 대강이에서도 피가 흐르지 않을 수 없다.

옳다 알았다, 고추장만 먹이며는 되는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아주 쟁그러워 죽겠다. 그때에는 뜻밖에 내가 닭쌈을 붙여 놓는 데 놀라서 울 밖으로 내다보고 섰던 점순이도 입맛이 쓴지 눈쌀을 찌푸렸다.

나는 두 손으로 볼기짝을 두드리며 연방,

"잘한다! 잘한다!"하고, 신이 머리끝까지 뻐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넋이 풀리어 기둥같이 묵묵히 서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큰 닭이 한번 쪼인 앙갚음으로 호들갑스레 연거푸 쪼는 서슬에 우리 수탉은 찔끔 못하고 막 곯는다. 이걸 보고서 이번에는 점순이가 깔깔거리고 되도록 이쪽에서 많이 들으라고 웃는 것이다.

나는 보다 못하여 덤벼들어서 우리 수탉을 붙들어 가지고 도로 집으로 들어왔다. 고추장을 좀더 먹였더라면 좋았을 걸, 너무 급하게 쌈을 붙인 것이 퍽 후회가 난다. 장독께로 돌아와서 다시 턱밑에 고추장을 들이댔다. 흥분으로 말미암아 그런지 당최 먹질 않는다.

나는 하릴없이 닭을 반듯이 눕히고 그 입에다 궐련 물부리를 물리었다. 그리고 고추장물을 타서 그 구멍으로 조금씩 들여 부었다. 닭은 좀 괴로운지 킥킥하고 재채기를 하는 모양이나 그러나 당장의 괴로움은 매일 같이 피를 흘리는 데 댈 게 아니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 두어 종지 가량 고추장물 먹이고 나서는 나는 고만 풀이 죽었다. 싱싱하던 닭이 왜 그런지 고개를 살며시 뒤틀고는 손아귀에서 뻐드러지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볼까 봐서 얼른 홰에다 감추어 두었더니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정신이 든 모양 같다.

그랬던 걸 이렇게 오다 보니까 또 쌈을 붙여 놓으니 이 망한 계집애가 필연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제가 들어와 홰에서 꺼내 가지고 나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다시 닭을 잡아다 가두고 염려는 스러우나 그렇다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소나무 삭정이를 따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암만해도 고년의 목쟁이를 돌려놓고 싶다. 이번에 내려가면 망할 년 등줄기를 한번 되게 후려치겠다 하고 싱둥겅둥 나무를 지고는 부리나케 내려왔다.

거지반 집에 다 내려와서 나는 호드기 소리를 듣고 발이 딱 멈추었다. 산기슭에 널려 있는 굵은 바윗돌 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하니 깔리었다. 그 틈에 끼어 앉아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시리 호드기를 불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고 앞에서 또 푸드득, 푸드득, 하고 들리는 닭의 횃소리다. 필연코 요년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닭을 집어내다가 내가 내려올 길목에다 쌈을 시켜 놓고 저는 그 앞에 앉아서 천연스레 호드기를 불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두 눈에서 불과 함께 눈물이 퍽 쏟아졌다. 나뭇지게도 벗어 놀 새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지게 막대기를 뻗치고 허둥허둥 달려들었다.

가까이 와 보니 과연 나의 짐작대로 우리 수탉이 피를 흘리고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닭도 닭이려니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 없이 고대로 앉아서 호드기만 부는 그 꼴에 더욱 치가 떨린다.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거니와 나도 한때는 걱실걱실히 일 잘 하고 얼굴 예쁜 계집애인 줄 알았더니 시방 보니까 그 눈깔이 꼭 여우새끼 같다.

나는 대뜸 달려들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큰 수탉을 단매로 때려 엎었다. 닭은 푹 엎어진 채 다리 하나 꼼짝 못 하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점순이가 매섭게 눈을 홉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닭을 때려죽이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 집 닭인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땅이 떨어지고 집도 내쫓기고 해야 될는지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점순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 온 듯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알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 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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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바기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년이면 삼년, 기한을 딱 작정하고 일을 해야 원 할 것이다. 덮어놓고 딸이 자라는 대로 성례를 시켜 주마, 했으니 누가 늘 지키고 섰는 것도 아니고, 그 키가 언제 자라는지 알 수 있는가. 그리고 난 사람의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줄만 알았지 붙배기 키에 모로만 벌어지는 몸도 있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때가 되면 장인님이 어련하랴 싶어서 군소리없이 꾸벅꾸벅 일만 해왔다. 그럼 말이다. 장인님이 제가 다 알아 채서, “어참, 너 일 많이 했다. 고만 장가들어라.” 하고 살림도 내주고 해야 나도 좋을 것이 아니냐. 시치미를 딱 떼고 도리어 그런 소리가 나올까봐서 지레 펄펄뛰고 이야 단이다. 명색이 좋아 데릴사위지 일하기에 싱겁기도 할 뿐더러 이건 참 아무것도 아니다.

숙맥이 그걸 모르고 점순이의 키 자라기만 까맣게 기다리지 않았나.

언젠가는 하도 갑갑해서 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서 그 키를 한번 재볼까 했다. 마는 우리는 장인님이 내외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마주 서 이야기도 한마디하는 법 없다. 우물길에서 언제나 마주칠 적이면 겨우 눈어림으로 재보고 하는 것인데 그럴 적마다 나는 저만침 가서 ‘제에미 키두!’하고 논둑에다 침을 퉤, 뱉는다.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말락 밤낮 요모양이다.

개 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뼉다귀가 움츠라드나보다, 하고 내가 넌즛넌즈시 그 물을 대신 길어도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 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줍소사.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립죠니까.’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되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니…….

그래 내 어저께 싸운 것이지 결코 장인님이 밉다든가 해서가 아니다.

모를 붓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또 싱겁다. 이 벼가 자라서 점순이가 먹고 좀 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걸 내 심어서 뭘하는 거냐. 해마다 앞으로 축 불거지는 장인님의 아랫배(가 너무 먹는 걸 모르고 냇병이라나, 그 배)를 불리기 위하여 심곤 조금도 싶지 않다.

“아이구 배야!”

난 몰 붓다 말고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그대루 논둑으로 기어올랐다. 그리고 겨드랑에 꼈던 벼 담긴 키를 그냥 땅바닥에 털썩 떨어치며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일이 암만 바빠도 나 배 아프면 고만이니까. 아픈 사람이 누가 일을 하느냐. 파릇파릇 돋아오른 풀 한숲을 뜯어 들고 다리의 거머리를 쑥쑥 문대며 장인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논 가운데서 장인님도 이상한 눈을 해가지고 한참 날 노려보더니,

“넌 이자식, 왜 또 이래 응?”

“배가 좀 아파서유!”하고 풀 위에 슬며시 쓰러지니까 장인님은 약이 올랐다. 저도 논에서 철벙철벙 둑으로 올라오더니 잡은참 내 멱살을 움켜잡고 뺨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자식아. 일 허다 말면 누굴 망해놀 속셈이냐. 이 대가릴 까놀자식?”

우리 장인님은 약이 오르면 이렇게 손버릇이 아주 못됐다. 또 사위에게 이자식 저자식 하는 이놈의 장인님은 어디 있느냐. 오죽해야 우리 동리에서 누굴 물론하고 그에게 욕을 안 먹는 사람은 명이 짜르다 한다. 조그만 아이들까지도 그를 돌아세놓고 욕필이(본 이름이 봉필이니까) 욕필이, 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치 두루 인심을 잃었다. 허나 인심을 정말 잃었다면 욕보다 읍의 배참봉댁 마름으로 더 잃었다. 번히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 치고, 그리고 생김생기길 호박개같애야 쓰는 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 됐다. 장인에게 닭마리나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 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락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던 놈이 그 땅을 슬쩍 돌라 안는다. 이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동리 사람들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실굽실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겐 장인님이 감히 큰소리할 계제가 못된다.

뒷생각은 못하고 뺨 한 개를 딱 때려놓고는 장인님은 무색해서 덤덤히 쓴 침만 삼킨다. 난 그속을 퍽 잘 안다.

조금 있으면 갈도 꺾어야 하고 모도 내야 하고, 한참 바쁜 때인데 나 일 안하고 우리집으로 그냥 가면 고만이니까.

작년 이맘때도 트집을 좀 하니까 늦잠잔다구 돌멩이를 집어던져서 자는 놈의 발목을 삐게 해놨다. 사날씩이나 건숭 끙끙, 앓았더니 종당에는 거반 울상이 되지 않았는가……

“예, 그만 일어나 일 좀 해라. 그래야 올 갈에 벼 잘되면 너 장가 들지 않니.”

그래 귀가 번쩍 띄어서 그날로 일어나서 남이 이틀 품들일 논을 혼자 삶아 놓으니까 장인님도 눈깔이 커다랗게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가을에 와서 혼인을 시켜 줘야 온 경우가 옳지 않겠나, 볏섬을 척척 들여쌓아도 다른 소리는 없고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는 점순이를 담배통으로 가리키며, “이 자식아, 미처 커야지 조걸 무슨 혼인을 한다구 그러니 원!”하고 남 낯짝만 붉혀 주고 고만이다.

골김에 그저 이놈의 장인님, 하고 댓돌에다 메꼰코 우리 고향으로 내뺄까 하다가 꾹꾹 참고 말았다.

참말이지 난 이꼴하고는 집으로 차마 못 간다. 장가를 들러갔다가 오죽 못났어야 그대로 쫓겨왔느냐고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논둑에서 벌떡 일어나 한풀 죽은 장인님 앞으로 다가서며,

“난 갈 테야유. 그동안 사경 쳐내슈.”

“너 사위로 왔지 어디 머슴살러 왔니?”

“그러면 얼찐 성례를 해줘야 안하지유. 밤낮 부려만 먹구 해준다, 해준다……”

“글쎄, 내가 안하는 거냐, 그년이 안 크니까.”하고 어름어름 담배만 담으면서 늘 하는 소리를 또 늘어놓는다.

이렇게 따져나가면 언제든지 늘 나만 밑지고 만다. 이번엔 안 된다, 하고 대뜸 구장님한테로 판단 가자고 소맷자락을 내끌었다.

“아, 이자식이 왜 이래 어른을.”

안 간다구 뻗디디구 이렇게 호령은 제맘대로 하지만 장인님 제가 내 기운은 못 당한다. 막 부려먹고 딸은 안 주고, 게다 땅땅 치는 건 다 뭐야…….

그러나 내 사실 참 장인님이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전날, 왜 내가 새고 개 맞은 봉우리 화전밭을 혼자 갈고 있지 않았느냐. 밭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 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병을 아직 모르지만)이 날려구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어러이! 말이! 맘 마 마……”

이렇게 노래를 하며 소를 부리면 여느때 같으면 어깨가 으쓱으쓱한다. 웬일인지 밭을 반도 갈지 않아서 온몸이 맥이 풀리고 대구 짜증만 난다. 공연히 소만 들입다 두들기며……

“안야! 안야! 이 망할 자식의 소(장인님의 소니까) 대리를 꺾어들라.”

그러나 내 속은 정말 안야●● 때문이 아니라 점심을 이고 온 점순이의 키를 보고 울화가 났던 것이다.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된다. 그렇다구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치 그저 툽툽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뭉툭한 것이 내 눈에는 헐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참외가 제일 맛좋고 예쁘니까 말이다. 둥글고 커다란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지쳐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나 톡톡히 먹음직하니 좋다. 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 아니냐. 헌데 한 가지 과가 있다면 가끔가다 몸이(장인님이 이걸 채신이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너무 빨리빨리 논다. 그래서 밥을 나르다가 때없이 풀밭에서 깨빡을 쳐서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인다. 안 먹으면 무안해 할까봐서 이걸 씹고 앉았느라면 으적으적 소리만 나고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 겐지……,
그러나 이날은 웬일인지 성한 밥채루 밭머리에 곱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 또 내외를 해야 하니까 저만큼 떨어져 이쪽으로 등을 향하고 웅크리고 앉아서 그릇나기를 기다린다.
내가 다 먹고 물러섰을 때, 그릇을 챙기는데 난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고개를 푹 숙이고 밥함지에 그릇을 포개면서 날더러 들으라는지, 혹은 제 소린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서 쫑알거린다. 고대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무슨 좋은 수가 있나 없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을 대고 혼잣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되알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빨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친다.
나는 잠시 동안 어떻게 되는 심판인지 맥을 몰라서 그 뒷모양만 덤덤히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온갖 초목이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한다. 사람도 아마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내에 부쩍 (속으로) 자란 듯싶은 점순이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이런 걸 멀쩡하게 아직 어리다구 하니까…….
우리가 구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는 싸리문 밖에 있는 돼지우리에서 죽을 퍼주고 있었다. 서울엘 좀 갔다오더니 사람은 점잖아야 한다구 웃쇰이(얼른 보면 지붕 위에 앉은 제비꼬랑지 같다) 양쪽으로 뾰죽히 삐치고 그걸 애헴, 하고 늘 쓰담는 손버릇이 있다.
우리를 멀뚱히 쳐다보고 미리 알아챘는지,
"왜 일들 허다 말구 그래?"하더니 손을 올려서 그 애헴을 한번 후딱 했다.
"구장님! 우리 장인님과 츰에 계약하기를……"
먼저 덤비는 장인님을 뒤로 떠다밀고 내가 허둥지둥 달려들다가 가만히 생각하고, '아니 우리 빙장님과 츰에.'하고 첫번부터 다시 말을 고쳤다. 장인님은 빙장님, 해야 좋아하고 밖에 나와서 장인님, 하면 괜스리 골을 내려고 든다. 뱀두 뱀이래야 좋으냐구 창피스러우니 남 듣는 데는 제발 빙장님, 빙모님, 하라구 일상 당조심을 받아오면서 난 그것두 자꾸 잊는다.
당장두 장인님, 하나 옆에서 내 발등을 꾹 밟고 곁눈질을 흘기는 바람에야 겨우 알았지만……
구장님도 내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퍽 딱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구장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다 그럴 게다.
길게 길러둔 새끼손톱으로 코를 후벼서 저리 탁 튀기며,
"그럼 봉필씨! 얼른 성례를 시켜 주구려, 그렇게까지 제가 하구싶다는 걸……"
하고 내 짐작대로 말했다. 그러나 이말에 장인님이 삿대질로 눈을 부라리고,
"아 성례구 뭐구 계집애년이 미처 자라야 할 게 아닌가?"
하니까 고만 멀쑤룩해져서 입맛만 쩍쩍 다실 뿐이 아닌가.
"그것두 그래!"
"그래, 거진 사년 동안에도 안 자랐더니 그 킨 은제 자라지유"다 그만두구 사경 내슈……"
"글쎄, 이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사실 빙모님은점순이보다도 귓배기가 작다)"
장인님은 이말을 듣고 껄껄 웃더니(그러나 암만 해두 돌 씹은 상이다) 코를 푸는 척하고 날 은근히 곯리려고 팔꿈치로 옆 갈비께를 퍽 치는 것이다.
더럽다. 나두 종아리의 파리를 쫓는 척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그 궁둥이를 콱 떼밀었다. 장인님은 앞으로 우찔근하고 싸리문께로 쓰러질 듯하다 몸을 바로 고치더니 눈총을 몹시 쏘았다. 이런 쌍년의 자식, 하곤 싶으나 남의 앞이라니 차마 못하고 섰는 그 꼴이 보기에 퍽 쟁그러웠다.
그러나 이밖에는 별반 신통한 귀정을 얻지 못하고 도로 논으로 돌아와서 모를 부었다. 왜냐면 장인님이 뭐라구 귓속말로 수군수군하고 간 뒤다. 구장님이 날 위해서 조용히 데리고 아래와 같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뭉태의 말은 구장님이 장인님에게 땅 두 마지기 얻어부치니까 그래 꾀엿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않는다)
"자네 말두 하기야 옳지, 암 나이 찼으니 아들이 급하다는 게 잘못된 말은 아니야. 허지만 농사가 한층 바쁜 때 일을 안한다든가집으로 달아 난다든가 하면 손해죄루 그것두 징역을 가거든!(여기에 그만 정신이 번쩍 났다) 왜 요전에 삼포말서 산에 불좀 놓았다구 징역간 거 못 봤나. 제 산에 불을 놓아도 징역을 가는 이땐데 남의 농사를 버려두니 죄가 얼마나 더 중한가. 그리고 자넨 정장을(사경 받으러 정장 가겠다 했다) 간대지만 그러면 괜스리 죄를 들쓰고 들어가는 걸세. 또 결혼두 그렇지. 법률에 성년이란 게 있는데 스물하나가 돼야지 비로소 결혼을 할 수가 있는걸세. 자넨 물론 아들이 늦을 걸 염려하지만 점순이루 말하면 이제 겨우 열여섯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까 빙장님의 말씀이 올 갈에는 열일을 제치고라두 성례를 시켜주겠다 하시니 좀 고마울겐가. 빨리 가서 모붓든 거나 마저 붓게, 군소리 말구 어서 가."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끽소리 없이 왔다.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전혀 뜻밖의 일이라 안할 수 없다.
장인님으로 말하면 요즈막 작인들에게 행세를 좀 하고 싶다고 해서,
"돈 있으면 양반이지 별게 있느냐!"
하고 일부러 아랫배를 쑥 내밀고 걸음도 뒤틀리게 걷고 하는 이판이다. 이까진 나쯤 두들기다 남의 땅을 가지고 모처럼 닦아놓았던 가문을 망친다든가 할 어른이 아니다. 또 나로 논지면 아무쪼록 잘 봬서 점순이에게 얼른 장가를 들어야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자면 결국 어젯밤 뭉태네 집에 마슬간 것이 썩 나빴다. 낮에 구장님 앞에서 장인님과 내가 싸운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대구 빈정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 맞구두 그걸 가만 둬?"
"그럼 어떡허니?"
"임마, 봉필일 모판에다 거꾸로 박아놓지 뭘 어떡해?"하고 괜히 내 대신 화를 내가지고 주먹질을 하다 등잔까지 쳤다. 놈이 번히 괄괄은 하지만 그래놓고 날더러 석유값을 물라구 막 찌다우를 붙는다. 난 어안이 벙벙해서 잠자코 앉았으니까 저만 연신 지껄이는 소리가,
"밤낮 일만 해주구 있을 테냐?"
"영득이는 일년을 살구두 장갈 들었는데 넌 사년이나 살구두 더살아야 해?"
"네가 세번째 사윈줄이나 아니? 세번째 사위"
"남의 일이라두 분하다. 이자식아, 우물에 가 빠져 죽어."
나중에는 겨우 손톱으로 목을 따라고까지 하고, 제 아들같이 함부로 훅닥이었다. 별의별 소리를 다해서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나 그 줄거리는 이렇다…….
우리 장인님 딸이 셋이 있는데 맏딸은 재작년 가을에 시집을 갔다. 정말은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그 딸도 데릴사위를 해가지고 있다가 내보냈다. 그런데 딸이 열 살 때부터 열아홉 즉 십년 동안에 데릴사위를 갈아들이기를, 동리에선 사위부자라고 이름이 났지마는 열네 놈이란 참 너무 많다. 장인님이 아들은 없고 딸만 있는 고로 그담 딸을 데릴사위를 해올 때까지는 부려먹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머슴을 두면 좋지만 그건 돈이 드니까, 일 잘하는 놈을 고르느라고 연방 바꿔들였다. 또 한편 놈들이 욕만 줄창 퍼붓고 심히도 부려먹으니까 밸이 상해서 달아나기도 했겠지, 점순이는 둘째딸인데 내가 일테면 그 세번째 데릴사위로 들어온 셈이다. 내 담으로 네번째 놈이 들어올 것을 내가 일도 잘하고 그리고 사람이 좀 어수록하니까 장인님이 잔뜩 붙들고 놓질 않는다. 세째딸이 인제 여섯살, 적어두 열 살은 돼야 데릴사위를 할 테므로 그 동안은 죽도록 부려먹어야 된다. 그러니 인제는 속 좀 채리고 장가를 들여달라구 떼를 쓰고 나자빠져라, 이것이다.
나는 겉으로 엉, 엉, 하며 귓등으로 들었다. 뭉태는 땅을 얻어부치다가 떨어진 뒤로는 장인님만 보면 공연히 못 먹어서 으릉거린다. 그것도 장인님이 저 달라고 할 적에 제 집에서 위한다는 그 감투(예전에 원님이 쓰던 것이라나, 옆구리에 뽕뽕 좀 먹은 걸레)를 선뜻 주었더면 그럴 리도 없었던 걸…….
그러나 나는 뭉태란 놈의 말을 전수히 곧이듣지 않았다. 꼭 곧이들었다면 간밤에 와서 장인님과 싸웠지 무사히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딸에게까지 인심을 잃은 장인님이 혼자 나빴다.
실토이지 나는 점순이가 아침상을 가지고 나올 때까지는 오늘은 또 얼마나 밥을 담았나, 하고 이것만 생각했다. 상에는 된장찌개하고 간장 한 종지, 조밥 한 그릇, 그리고 밥보다 더 수부룩하게 담은 산나물이 한 대접, 이렇다. 나물은 점순이가 틈틈이 해오니까 두 대접이고 네 대접이고 멋대로 먹어도 좋으나 밥은 장인님이 한 사발 외엔 더 주지 말라고 해서 안된다. 그런데 점순이가 그 상을 내 앞에 내려 놓으며 제 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구장님한테 갔다 그냥 온담 그래!"하고 엊그제 산에서와 같이 되우 쫑알거린다. 딴은 내가 더 단단히 덤비지 않고 만 것이 좀 어리석었다, 속으로 그랬다.
나도 저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하니까,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하고 또 얼굴이 빨개지면서 성을 내며 안으로 샐죽하니 튀들어가지 않느냐, 이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게 망정이지 보았다면 내 얼굴이 에미 잃은 황새새끼처럼 가여 웁다 했을 것이다.
사실 이때만치 슬펐던 일이 또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두 괜찮지만 내 아내 될 점순이가 병신으로 본다면 참 신세는 따분하다. 밥을 먹은 뒤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갈려 하다 도로 벗어던지고 바깥 마당 공석 위에 드러누워서 나는 차라리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생각했다.
내가 일 안하면 장인님 저는 나이가 먹어 못하고 결국 농사 못 짓고 만다. 뒷짐으로 트림을 꿀꺽하고 대문 밖으로 나오다 날 보고서,
"이자식아, 왜 또 이러니."
"관격이 났어유, 아이구 배야!"
"기껀 밥 처먹구 무슨 관격이야, 남의 농사 버려주면 이자식아징역간다 봐라!"
"가두 좋아유, 아이구 배야!"
참말 난 일 안해서 징역 가도 좋다 생각했다. 일후 아들을 낳아도 그 앞에서 바보, 바보, 이렇게 별명을 들을 테니까 오늘은 열쪽이 난대도 결정을 내고 싶었다.
장인님이 일어나라고 해도 내가 안 일어나니까 눈에 독이 올라서 저편으로 힝하게 가더니 지게막대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걸로 내 허리를 마치 돌 떠넘기듯이 쿡 찍어서 넘기고 넘기고 했다. 밥을 잔뜩 먹어 딱딱한 배가 그럴 적마다 퉁겨지면서 밸창이 꼿꼿한 것이 여간 켕기지 않았다. 그래도 안 일어나니까 이번에는 배를 지게 막대기로 위에서 쿡쿡 찌르고 발길로 옆구리를 차고 했다. 장인님은 원체 심청이 궂어서 그러지만 나도 저만 못하지 않게 배를 채었다. 아픈 것을 눈을 꽉 감고 넌 해라 난 재밌단 듯이 있었으나 볼기짝을 후려갈길 적에는 나도 모르는 결에 벌떡 일어나서 그 수염을 잡아챘다. 마는 내 골이 난 것이 아니라 정말은 아까부터 벽 뒤 울타리 구멍으로 점순이가 우리들의 꼴을 몰래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말 한마디 톡톡히 못한다고 바라보는데 매까지 잠자코 맞는 걸 보면 짜장 바보로 알 게 아닌가. 또 점순이도 미워하는 이까짓 놈의 장인님하곤 아무것도 안되니까 막 때려도 좋지만 사정 보아서 수염만 채고(제 원대로 했으니까 이때 점순이는 퍽 기뻤겠지) 저기까지 잘 들리도록 '이걸 까셀라부다!'하고 소리를 쳤다.
장인님은 더 약이 바짝 올라서 잡은 참 지게막대기로 내 어깨를 그냥 내려갈겼다. 정신이 다 아찔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엔 나도 온몸에 약이 올랐다. 이녀석의 장인님을, 하고 눈에서 불이 퍽 나서 그 아래 밭 있는 넝알로 그대로 떠밀어 굴려버렸다.
"부려만 먹구 왜 성례 안하지유!"
나는 이렇게 호령했다. 허지만 장인님이 선뜻 오냐 낼이라두 성례시켜 주마, 했으면 나도 성가신 걸 그만두었을지 모른다. 나야 이러면 때린 건 아니니까 나중에 장인 쳤다는 누명도 안 들을 터이고 얼마든지 해도 좋다.
한번은 장인님이 헐떡헐떡 기어서 올라오더니 내 바짓가랭이를 요렇게 노리고서 단박 움켜잡고 매달렸다. 악, 소리를 치고 나는 그만 세상이 다 팽그르 도는 것이,
"빙장님! 빙장님! 빙장님!"
"이자식! 잡아먹어라, 잡아먹어!"
"아! 아! 할아버지! 살려줍쇼, 할아버지!"하고 두팔을 허둥지둥 내절 적에는 이마에 진땀이 쭉 내솟고 인젠 참으로 죽나보다 했다. 그래두 장인님은 놓질 않더니 내가 기어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거진 까무러치게 되니까 놓는다. 더럽다, 더럽다. 이게 장인님인가? 나는 한참을 못 일어나고 쩔쩔맸다. 그러나 얼굴을 드니(눈엔 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사지가 부르르 떨리면서 나도 엉금엉금 기어가 장인님의 바짓가랭이를 꽉 움키고 잡아나꿨다.
내가 머리가 터지도록 매를 얻어맞은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가 또한 우리 장인님이 유달리 착한 곳이다.
여느 사람이면 사경을 주어서라도 당장 내어쫓았지, 터진 머리를 볼솜으로 손수 지져 주고, 호주머니에 희연 한 봉을 넣어 주고 그리고,
"올 갈엔 꼭 성례를 시켜 주마. 암만 말구 가서 뒷골의 콩밭이나얼른 갈아라." 하고 등을 뚜덕여 줄 사람이 누구냐. 나는 장인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어느덧 눈물까지 났다.
점순이를 남기고 인젠 내쫓기려니 하다 뜻밖의 말을 듣고,
"빙장님! 인제 다시는 안그러겠어유!"
이렇게 맹세를 하며 부랴부랴 지게를 지고 일터로 갔다. 그러나 이때는 그걸 모르고 장인님을 원수로만 여겨서 잔뜩 잡아당겼다.
"아! 아! 이놈아! 놔라, 놔."
장인님은 헷손질을 하며 솔개미에 챈 닭의 소리를 연해 질렀다. 놓긴 왜, 이왕이면 호되게 혼을 내주리라 생각하고 짖궂이 더 댕겼다. 마는 장인님이 땅에 쓰러져서 눈에 눈물이 피잉 도는 것을 알고 좀 겁도 났다.
"할아버지! 놔라, 놔, 놔, 놔, 놔라."
그래도 안되니까,
"애 점순아! 점순아!"
이 악장에 안에 있었던 장모님과 점순이가 헐레벌떡하고 단숨에 뛰어 나왔다. 나의 생각에 장모님은 제 남편이니까 역성을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순이는 내 편을 들어서 속으로 고수해 하겠지---. 대체 이게 웬 속인지(지금까지도 난 영문을 모른다) 아버질 혼내 주기는 제가 내래 놓고 이제 와서는 달겨들며,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고, 귀를 뒤로 잡아댕기며 마냥 우는 것이 아니냐. 그만 여기에 기운이 탁 꺾이어 나는 얼빠진 등신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도 덤벼들어 한쪽 귀마저 뒤로 잡아채면서 또 우는 것이다.
이렇게 꼼짝도 못하게 해놓고 장인님은 지게막대기를 들어서 사뭇 내려조졌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피하려지도 않고 암만해도 그 속 알 수 없는 점순이의 얼굴만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이자식!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가 나오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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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름드리 노송은 삑삑히 늘어박혔다. 무거운 송낙을 머리에 쓰고 건들건들. 새새이 끼인 도토리, 벚, 돌배, 갈잎 들은 울긋불긋. 잔디를 적시며 맑은 샘이 쫄쫄거린다. 산토끼 두 놈은 한가로이 마주 앉아 그 물을 할짝거리고. 이따금 정신이 나는 듯 가랑잎은 부수수 하고 떨린다. 산산한 산들바람. 귀여운 들국화는 그 품에 새뜩새뜩 넘논다.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땅김이 코를 찌른다. 요놈은 싸리버섯, 요놈은 잎 썩은 내, 또 요놈은 송이―--- 아니, 아니, 가시넝쿨 속에 숨은 박하풀 냄새로군.

응칠이는 뒷짐을 딱 지고 어정어정 노닌다. 유유히 다리를 옮겨 놓으며 이나무 저나무 사이로 호아든다. 코는 공중에서 벌렸다 오므렸다 연신 이러며 훅, 훅. 구붓한 한 송목 밑에 이르자 그는 발을 멈춘다. 이번에는 지면에 코를 얕이 갖다 대고 한 바퀴 비잉, 나물 끼고 돌았다.

‘아하, 요놈이로군!’

썩은 솔잎에 덮이어 흙이 봉곳이 돋아 올랐다.

그는 손가락을 꾸짖으며 정성스레 살살 헤쳐 본다. 과연 귀여운 송이. 망할 녀석, 조금만 더 나오지, 그걸 뚝 따들고 뒷짐을 지고 다시 어실렁어실렁. 가끔 선하품은 터진다. 그럴적마다 두 팔을 떡 벌리곤 먼 하늘을 바라보고 늘어지게도 기지개를 늘인다.

때는 한창 바쁠 추수 때이다. 농군치고 송이파적 나올 놈은 생겨나도 않았으리라. 하나 그는 꼭 해야만 할 일이 없었다. 싶으면 하고 말면 말고 그저 그뿐. 그러함에는 먹을 것이 더러 있느냐면 있기는커녕 부쳐 먹을 농토조차 없는, 계집도 없고 자식도 없고. 방은 있대야 남의 곁방이요 잠은 새우잠이요. 하지만 오늘 아침만 해도 한 친구가 찾아와서 벼를 털 텐데 일 좀 와 해달라는 걸 마다하였다. 몇 푼 바람에 그까짓 걸 누가 하느냐보다는 송이가 좋았다. 왜냐면 이 땅 삼천리 강산에 늘여 놓인 곡식이 말짱 뉘 것이람.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아니냐. 먹다 걸릴 만치 그토록 양식을 쌓아 두고 일이 다 무슨 난장맞을 일이람. 걸리지 않도록 먹을 궁리나 할 게지. 하기는 그도 한 세 번이나 걸려서 구메밥으로 사관을 틀었다. 마는 결국 제 밥상 위에 올라앉은 제 몫도 자칫하면 먹다 걸리긴 매일반.

올라갈수록 덤불은 욱었다. 머루며 다래, 칡, 게다 이름 모를 잡초. 이것들이 위아래로 이리저리 서리어 좀체 길을 내지 않는다. 그는 잔디길로만 돌았다. 넓적다리가 벌쭉이는 찢어진 고의자락을 아끼며 조심조심 사려 딛는다. 손에는 칡으로 엮어 든 일곱 개 송이. 늙은 소나무마다 가선 두리번거린다. 사냥개 모양으로 코로 쿡, 쿡, 내를 한다. 이것도 송이 같고 저것도 송이 같고. 어떤 게 알짜 송이인지 분간을 모른다. 토끼똥이 소보록한 데 갈잎이 한 잎 뚝 떨어졌다. 그 잎을 살며시 들어 보니 송이 대구리가 불쑥 올라왔다. 매우 큰 송이인 듯. 그는 반색하여 그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그 위에 두 손을 내들며 열 손가락을 다 펴들었다. 가만가만히 살살 흙을 헤쳐 본다. 주먹만한 송이가 나타난다. 얘 이놈 크구나. 손바닥 위에 따 올려놓고는 한참 들여다보며 싱글벙글한다. 우중충한 구석으로 바위는 벽같이 깎아질렀다. 그 중턱을 얽어 나간 칡잎에서는 물이 쪼록쪼록 흘러내린다. 인삼이 썩어 내리는 약수라 한다. 그는 돌 위에 걸터앉으며 또 한번 하품을 하였다. 간밤 쓸데 없는 노름에 밤을 팬 것이 몹시 나른하였다. 따사로운 햇발이 숲을 새어든다. 다람쥐가 솔방울을 떨어치며, 어여쁜 할미새는 앞에서 알씬거리고. 동리에서는 타작을 하느라고 와글거린다. 흥겨워 외치는 목성, 그걸 억누르고 공중에 응, 응, 진동하는 벼 터는 기계 소리. 맞은쪽 산속에서 어린 목동들의 노래는 처량히 울려 온다. 산속에 묻힌 마을의 전경을 멀리 바라보다가 그는 눈을 찌긋하며 다시 한번 하품을 뽑는다. 이 웬놈의 하품일까. 생각해 보니 어젯저녁부터 여태껏 창자가 곯렸던 것이다. 불현듯 송이꾸러미에서 그중 크고 먹음직한 놈을 하나 뽑아 들었다.

응칠이는 그 송이를 물에 써억써억 부벼서는 떡 벌어진 대구리부터 걸쌍스레 덥석 물어 떼었다. 그리고 넓죽한 입이 움질움질 씹는다. 혀가 녹을 듯이 만질만질하고 향기로운 그 맛. 이렇게 훌륭한 놈을 입맛만 다시고 못 먹다니. 문득 옛 추억이 혀끝에 뱅뱅 돈다. 이놈을 맛보는 것도 참 근자의 일이다. 감불생심이지 어디 냄새나 똑똑히 맡아 보리. 산속으로 쏘다니다 백판 못 따기도 하려니와 더러 딴다는 놈은 행여 상할까 봐 손도 못 대게 하고 집에 내려다 묻고 묻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행히 한 꾸러미 차면 금시로 장에 가져다 판다. 이틀 사흘씩 공들인 거로되 잘 하면 사십 전, 못 받으면 이십오 전. 저녁거리를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며 좁쌀 서너 되를 손에 사들고 어두운 고개를 터덜터덜 올라오는 건 좋으나 이 신세를 뭐에 쓰나 하고 보면 을프냥궂기가 짝이 없겠고―---이까짓 걸 못 먹어 그래 홧김에 또 한 놈을 뽑아 들고 이번엔 물에 흙도 씻을 새 없이 그대로 텁석거린다. 그러나 다른 놈들도 별 수 없으렷다. 이 산골이 송이의 본고향이로되 아마 일년에 한 개조차 먹는 놈이 드물리라.

‘흠, 썩어진 두상들!’

그는 폭넓은 얼굴을 일그리며 남이나 들으란 듯이 이렇게 비웃는다. 썩었다 함은 데생겼다 모멸하는 그의 언투였다. 먹다 나머지 송이 꽁댕이를 바로 자랑스러이 입에다 치뜨리곤 트림을 섞어 가며 우물거린다.

송이 두 개가 들어가니 이제는 더 먹을 재미가 없다. 뭔가 좀 든든한 걸 먹었으면 좋겠는데. 떡, 국수, 말고기, 개고기, 돼지고기 그렇지 않으면 쇠고기냐. 아따 궁한 판이니 아무 거나 있으면 속중으로 여러 가질 먹으며 시름없이 앉았다. 그는 눈꼴이 슬그러미 돌아간다. 웬놈의 닭인지 암탉 한 마리가 조 아래 무덤 앞에서 뺑뺑 맨다. 골골거리며 감도는 걸 보매 아마 알자리를 보는 맥이라. 그는 돌에서 궁뎅이를 들었다. 낮은 하늘로 외면하여 못 본 척하고 닭을 향하여 저켠으로 널찍이 돌아 내린다. 그러나 무덤까지 왔을 때 몸을 돌리며,
“후, 후, 후, 이 자식이 어딜 가 후―”
두 팔을 벌리고 쫓아간다. 산꼭대기로 치모니 닭은 허둥지둥 갈 길을 모른다. 요리 매낀 조리 매낀, 꼬꼬댁거리며 속만 태울 뿐. 그러나 바위틈에 끼어 왁살스러운 그 주먹에 모가지가 둘로 나기에는 불과 몇 분 못 걸렸다.

그는 으슥한 숲속으로 찾아들었다. 닭의 껍질을 홀랑 까고서 두 다리를 들고 찢으니 배창이 옆구리로 꿰진다. 그놈은 긁어 뽑아서 껍질과 한데 뭉치어 흙에 묻어 버린다.

고기가 생기고 보니 연하여 나느니 막걸리 생각. 이걸 부글부글 끓여 놓고 한 사발 떡 겯으면 똑 좋을 텐데 제―기. 응칠이의 고기는 어디 떨어졌는지 술집까지 못 가는 고기였다. 아무려나 고기 먹고 술 먹고 거꾸론 못 먹느냐. 그는 닭의 가슴패기를 입에 들여대고 쭉 찢어가며 먹기 시작한다. 쫄깃쫄깃한 놈이 제법 맛이 들었다. 가슴을 먹고 넓적다리, 볼기짝을 먹고 거반 반쯤을 다 해내고 나니 어쩐지 맛이 좀 적었다. 결국 음식이란 양념을 해야 하는군. 수풀 속으로 그냥 내던지고 그는 설렁설렁 내려온다. 솔숲을 빠져 화전께로 내리려 할 때 별안간 등뒤에서,
“여보게, 저 응칠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 보니 대장간 하는 성팔이가 작달막한 체수에 들갑작거리며 고개를 넘어온다. 그런데 무슨 긴한 일이나 있는지 부리나케 달려들더니,
“자네 응고개 논의 벼 없어진 거 아나?”
응칠이는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바쁜 때 농군의 몸으로 응고개까지 앨 써 갈 놈도 없으려니와 또한 하필 절 보고 벼의 없어짐을 말하는 것이 여간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잡담 제하고 응칠이는,
“자넨 어째서 응고개까지 갔던가?”
하고 대담스레 그 눈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성팔이는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아 어쩌다 지났지 뭘 그래.”
하며 도리어 얼레발을 치고 덤비는 수작이다. 고얀 놈, 응칠이는 입때 다녀야 동무를 팔아 배를 채우고 그런 비열한 짓은 안 한다. 낯을 붉히자 눈에 불이 보이며,
“어쩌다 지냈다?”

응칠이가 이 동리에 들어온 것은 어느덧 달이 넘었다. 인제는 물릴 때도 되었고, 좀 떠보고자 생각은 간절하나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망설거리는 중이었다.

그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았다. 산으로 들로 해변으로 발부리 놓이는 곳이 즉 가는 곳이다.

그러나 저물면은 그대로 쓰러진다. 남의 방앗간이고 헛간이고 혹은 강가, 시새장. 물론 수가 좋으면 괴때기 위에서 밤을 편히 잘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강원도 어수룩한 산골로 이리 넘고 저리 넘고 못 간 데 별로 없이 유람 겸 편답하였다.

그는 한구석에 머물러 있음은 가슴이 답답할 만치 되우 괴로웠다.

그렇다고 응칠이가 본시 역마 직성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도 오 년 전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아들이 있었고 집도 있었고, 그때야 어딜 하루라도 집을 떨어져 보았으랴. 밤마다 아내와 마주 앉으면 어찌 하면 이 살림이 좀 늘어 볼까 불어 볼까, 애간장을 태우며 갖은 궁리를 되하고 되하였다마는,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농사는 열심으로 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남는 건 겨우 남의 빚뿐. 이러다가는 결말엔 봉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루는 밤이 깊어서 코를 골며 자는 아내를 깨웠다. 밖에 나아가 우리의 세간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보라 하였다. 그리고 저는 벼루에 먹을 갈아 찍어 들었다. 벽에 바른 신문지는 누렇게 끄을렀다. 그 위에다 아내가 불러 주는 물목대로 일일이 내려 적었다. 독이 세 개, 호미가 둘, 낫이 하나로부터 밥사발, 젓가락, 짚이 석 단까지 그 다음에는 제가 빚을 얻어온 데, 그 사람들의 이름을 쪽 적어 놓았다. 금액은 제각기 그 아래다 달아 놓고, 그 옆으론 조금 사이를 떼어 역시 조선문으로 나의 소유는 이것밖에 없노라. 나는 오십사 원을 갚을 길이 없으매 죄진 몸이라 도망하니 그대들은 아예 싸울 게 아니겠고 서로 의논하여 억울치 않도록 분배하여 가기 바라노라 하는 의미의 성명서를 벽에 남기자 안으로 문들을 걸어 닫고 울타리 밑구멍으로 세 식구가 빠져나왔다.

이것이 응칠이가 팔자를 고치던 첫날이었다.

그들 부부는 돌아다니며 밥을 빌었다. 아내가 빌어다 남편에게, 남편이 빌어다 아내에게. 그러자 어느 날 밤 아내의 얼굴이 썩 슬픈 빛이었다. 눈보라는 살을 에인다. 다 쓰러져 가는 물방앗간 한구석에서 섬을 두르고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며 떨고 있더니 여보게유 하고 고개를 돌린다. 왜 하니까 그 말이, 이러다간 우리도 고생일 뿐더러 첫째 어린애를 잡겠수, 그러니 서로 갈립시다, 하는 것이다. 하긴 그럴 법한 말이다. 쥐뿔도 없는 것들이 붙어다닌댔자 별수는 없다. 그보담은 서로 갈리어 제 맘대로 빌어먹는 것이 오히려 가뜬하리라. 그는 선뜻 응낙하였다. 아내의 말대로 개가를 해가서 젖먹이나 잘 키우고 몸 성히 있으면 혹 연분이 닿아 다시 만날지도 모르니깐, 마지막으로 아내와 같이 땅바닥에서 나란히 누워 하룻밤을 새고 나서 날이 훤해지자 그는 툭툭 털고 일어섰다.

매팔자란 응칠이의 팔자이겠다.

그는 버젓이 게트림으로 길을 걸어야 걸릴 것은 하나도 없다. 논 맬 걱정도, 호포 바칠 걱정도, 빚 갚을 걱정, 아내 걱정, 또는 굶을 걱정도. 호동그란히 털고 나서니 팔자 중에는 아주 상팔자다. 먹고만 싶으면 도야지구, 닭이구, 개구, 언제나 옆을 떠날 새 없겠지, 그리고 돈, 돈도.

그러나 주재소는 그를 노려보았다. 툭하면 오라, 가라, 하는데 학질이었다. 어느 동리고 가 있다가 불행히 일만 나면 누구보다도 그부터 붙들려 간다. 왜냐면 그는 전과 사범이었다. 처음에는 도박으로, 다음엔 절도로, 또 고 담에는 절도로, 절도로.

그러나 이번 멀리 아우를 방문함은 생활이 궁하여 근대러 왔다거나 혹은 일을 해보러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혈족이라곤 단 하나의 동생이요, 또한 오래 못 본지라 때없이 그리웠다. 그래 모처럼 찾아온 것이 뜻밖에 덜컥 일을 만났다.

지금까지 논의 벼가 서 있다면 그것은 성한 사람의 짓이라 안 할 것이다.

응오는 응고개 논의 벼를 여태 베지 않았다. 물론 응오가 베어야 할 것이다. 누가 듣던지 그 형 응칠이를 먼저 의심하리라. 그럼 여기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응칠이가 혼자 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응오는 진실한 농군이었다. 나이 서른하나로 무던히 철났다 하고 동리에서 쳐주는 모범 청년이었다. 그런데 벼를 베지 않는다. 남은 다들 거둬 들였고 털기까지 하련만 그는 벨 생각조차 않는 것이다.

지주라든 혹은 그에게 장리를 놓은 김참판이든 뻔찔 찾아와 벼를 베라 독촉하였다.
“얼른 털어서 낼 건 내야지.”
하면 그 대답은,
“계집이 죽게 됐는데 벼는 다 뭐지유―---”
하고 한결같이 내뱉는 소리뿐이었다.

하기는 응오의 아내가 지금 기지 사경이매 틈은 없었다 하더라도 돈이 놀아서 약을 못 쓰는 이 판이니 진시 벼라도 털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왜 안 털었던가.

그것은 작년 응오와 같이 지주 문전에서 타작을 하던 친구라면 묻지는 않으리라. 한 해 동안 애를 졸이며 홑자식 모양으로 알뜰히 가꾸던 그 벼를 거둬 들임은 기쁨에 틀림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엣, 엣, 하며 괴로움을 모른다. 그러나 캄캄하도록 털고 나서 지주에게 도지를 제하고, 장리쌀을 제하고, 색초를 제하고 보니 남은 것은 등줄기를 흐르는 식은땀이 있을 따름. 그것은 슬프다 하기보다 끝없이 부끄러웠다. 같이 털어 주던 동무들이 뻔히 보고 섰는데 빈 지게로 덜렁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건 진정 열적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참다 참다 못해 응오는 눈에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가뜩한데 엎치고 덮치더라고 올해는 고나마 흉작이었다. 샛바람과 비에 벼는 깨깨 비틀렸다. 이놈을 가을하다간 먹을 게 남지 않음은 물론이요 빚도 다 못 가릴 모양. 에라, 빌어먹을 거 너들끼리 캐다 먹든 말든 멋대로 하여라, 하고 내던져 두지 않을 수 없다. 벼를 거뒀다고 말만 나면 빚쟁이들은 우― 몰려들 거니깐.

응칠이의 죄목은 여기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국으로 가만만 있었더면 좋은 걸 이 사품에 뛰어들어 지주의 뺨을 제법 갈긴 것이 응칠이었다.

처음에야 그럴 작정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곳 물을 마신 이만치 어지간히 속이 틘 건달이었다. 지주를 만나 까놓고 썩 좋은 소리로 의논하였다. 올 농사는 반실이니 도지도 좀 감해 주는 게 어떠냐고. 그러나 지주는 암말 없이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정 이러면 하여튼 일년 품은 빼야 할 테니 나는 그 논에다 불을 지르겠수, 하여도 잠자코 응치 않는다. 지주로 보면 자기로도 그 벼는 넉넉히 거둬 들일 수는 있다마는, 한번 버릇을 잘못 해놓으면 어느 작인까지 행실을 버릴까 염려하여 겉으로 독촉만 하고 있는 터이었다. 실상이야 고까짓 벼쯤 있어도 고만 없어도 고만, 그 심보를 눈치채고 응칠이는 화를 벌컥 낸 것만은 좋으나 저도 모르게 대뜸 주먹뺨이 들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문제 중에 있는 벼인데 귀신의 놀음 같은 변괴가 생겼다. 다시 말하면 벼가 없어졌다. 그것도 병들어 쓰러진 쭉정이는 제쳐 놓고 무얼로 그랬는지 알장 이삭만 따갔다. 그 면적으로 어림하면 아마 못 돼도 한 댓 말 가량은 될는지!

응칠이가 아침 일찍이 그 논께로 노닐자 이걸 발견하고 기가 막혔다. 누굴 성가시게 굴려고 그러는지. 산속에 파묻힌 논이라 아직은 본 사람이 없는 모양 같다. 하나 동리에 이 소문이 퍼지기만 하면 저는 어느 모로든 혐의를 받아 폐는 좋이 입어야 될 것이다.

응칠이는 송이도 송이려니와 실상은 궁리에 바빴다. 속중으로 지목 갈 만한 놈을 여럿 들어 보았으나 이렇다 찍을 만한 증거가 없다. 어쩌면 재성이나 성팔이 이 둘 중의 짓이리라, 하고 결국 이렇게 생각던 것도 응칠이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응칠이는 저의 짐작이 들어맞음을 알고 당장에 일을 낼 듯이 성팔이의 눈을 들이 노렸다.

성팔이는 신이 나서 떠들다가 그 눈총에 어이가 질려서 고만 벙벙하였다. 그리고 얼굴이 핼쑥하여 마주 대고 쳐다보더니,
“그래, 자네 왜 그케 노하나. 지내다 보니깐 그렇길래 일테면 자네보고 얘기지 뭐.”
하고 뒷갈망을 못 하여 우물쭈물한다.

“노하긴 누가 노해!”
응칠이는 뻐팅겼던 몸에 좀더 힘을 올리며,
“응고개를 어째 갔더냐 말이지?”
“놀러 갔다 오는 길인데 우연히…….”
“놀러 갔다, 거기가 노는 덴가?”
“글쎄, 그렇게까지 물을 게 뭔가. 난 응고개 아니라 서울은 못 갈 사람인가.”
하다가 성팔이는 속이 타는지 코로 후응 하고 날숨을 길게 뽑는다.

이렇게 나오는 데는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성팔이란 놈도 여간내기가 아니요 구장네 솥인가 뭔가 떼다 먹고 한 번 다녀온 놈이었다. 많이 사귀지는 못했으나 동리 평판이 그놈과 같이 다니다가는 엉뚱한 일 만난다 한다. 이번에 응칠이 저 역시 그 섭수에 걸렸음을 알고,
“그야 응고개라고 못 갈 리 없을 테…….”
하고 한 번 엇먹다, 그러나 자네두 알다시피 거 어디야, 거기 바로 길이 있다든지 사람 사는 동리라면 혹 모른다 하지마는 성한 사람이야 응고개에 뭘 먹으러 가나, 그렇지 자네야 심심하니까, 하고 앞을 꽉 눌러 등을 떠본다.

여기에는 대답 없고 성팔이는 덤덤히 쳐다만 본다. 무엇을 생각했는가 한참 있더니 호주머니에서 단풍갑을 꺼낸다. 우선 제가 한 개를 물고 또 하나를 뽑아 내대며,
“궐련 하나 피우게.”
매우 듬직한 낯을 해보인다.

이놈이 이에 밝기가 몹시 밝은 성팔이다. 턱없이 궐련 하나라도 선심을 쓸 궐자가 아니리라, 생각은 하였으나 그렇다고 예까지 부르대는 건 도리어 저의 처지가 불리하다.

그것은 짜장 그 손에 넘는 짓이니,
“아 웬 궐련은 이래.”
하고 슬쩍 눙치며,
“성냥 있겠나?”
일부러 불까지 거 대게 하였다.

응칠이에게 액을 떠넘기어 이용하려는 고 야심을 생각하면 곧 달려들어 다리를 꺾어 놔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당에 떠들어 대고 보면 저는 드러누워 침뱉기. 결국 도적은 뒤로 잡지 앞에서 어르는 법이 아니다. 동리에 소문이 퍼질 것만 두려워하며,
“여보게, 자네가 했건 내가 했건 간.”
하고 과연 정다이 그 등을 툭 치고 나서,
“우리 둘만 알고 동리에 말을 내지 말게.”
하다가 성팔이가 이 말에 되우 놀라며 눈을 말똥말똥 뜨니,
“그까진 벼쯤 먹으면 어떤가!”
하고 껄껄 웃어 버린다.

성팔이는 한 굽 접히어 말문이 메였는지 얼떨하여 입맛만 다신다.
“아예 말은 내지 말게, 응 알지.”
하고 다시 다질 때에야 겨우 주저주저 입을 열어,
“내야 무슨 말을 내겠나.”
하고 조금 사이를 떼어 또,
“내야 무슨 말을…… 그건 염려 말게.”
하더니 비실비실 몸을 돌리어 저 갈 길을 내걷는다. 그러나 저 앞 고개까지 가는 동안에 두 번이나 돌아다보며 이쪽을 살피고 살피고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응칠이는 그 꼴을 이윽히 바라보고 입 안으로 죽일 놈, 하였다. 아무리 도적이라도 같은 동료에게 제 죄를 넘겨씌우려 함은 도저히 의리가 아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응오가 더 딱하지 않은가. 기껏 힘들여 지어 놓았다 남 좋은 일 한 것을 안다면 눈이 뒤집힐 일이겠다.

이래서야 어디 이웃을 믿어 보겠는가.

확적히 증거만 있어 이놈을 잡으면 대번에 요절을 내리라 결심하고 응칠이는 침을 탁 뱉어던지고 산을 내려온다.

그런데 그놈의 행티로 가늠 보면 응칠이 저만치는 때가 못 벗은 도적이다. 어느 미친놈이 논두렁에까지 가새를 들고 오는가. 격식도 모르는 풋둥이가 그러려면 바로 조 낟가리나 수수 낟가리 말이지 그 속에 들어앉아 가위로 속닥거려야 들킬 리도 없고 일도 편하고 두 포대고 세 포대고 마음껏 딸 수도 있다. 그러나 틈 보고 집으로 나르면 그만이지만 누가 논의 벼를 다…… 그렇게도 벼에 걸신이 들었다면 바로 남의 집 머슴으로 들어가 한 달포 동안 주인 앞에 얼렁거리며 신용을 얻어 오다가 주는 옷이나 얻어입고 다들 잠들거든 볏섬이나 두둑이 짊어메고 덜렁거리면 그뿐이다. 이건 맥도 모르는 게 남도 못살게 굴려고 에―이 망할자식두…… 그는 분노에 살이 다 부들부들 떨리는 듯싶었다. 그러나 이런 좀도적이란 봉이 나기 전에는 바짝 물고 덤비는 법이었다. 오늘 밤에는 요놈을 지켰다 꼭 붙들어 가지고 정강이를 분질러 노리라. 밥을 먹고는 태연히 막걸리 한 사발을 껄떡껄떡 들이켜자,
“커! 가을이 되니깐 맛이 행결 낫군!”
그는 주먹으로 입가를 쓱쓱 훔친 다음 송이 꾸럼에서 세 개를 뽑는다. 그리고 그걸 갈퀴같이 마른 주막 할머니 손에 내어 주며,
“엣수, 송이나 잡숫게유.”
하고 술값을 치렀으나,
“아이, 송이두 고놈 참.”
간사를 피우는 것이 겉으로는 반기는 척하면서도 좀 시쁜 모양이다. 제딴은 한 개에 삼 전씩 치더라도 구 전밖에 안 되니깐.

응칠이는 슬며시 화가 나서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볼때기에 저건 또 왜 저리 멋없이 불거졌는지 툭 나온 광대뼈하고 치마 아래로 남실거리는 발가락은 자칫 잘못 보면 황새발목이니 이건 언제 잡아 가려고 남겨 두는 거야―---보면 볼수록 하나 이쁜 데가 없다. 한두 번 먹은 것도 아니요 언젠가 울타리께 풀을 베어 주고 술사발이나 얻어 먹은 적도 있었다. 고렇게 야멸치게 따질 건 뭔가. 그는 눈살을 흘깃 맞히고는 하나를 더 꺼내어,
“옜수, 또 하나 잡숫게유!”
내던져 주곤 댓돌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그제야 식성이 좀 풀리는지 그 가축으로 웃으며,
“아이구 이거 자꾸 주면 어떻게 해.”
“어떡하긴 자꾸 살찌게유.”
하고 한마디 툭 쏘고 일어서다가 무엇을 생각함인지 다시 툇마루에 주저앉는다.

“그런데 참 요즘 성팔이 보셨수?”
“아―니, 당최 볼 수가 없더구먼.”
“술도 안 먹으러 와유?”
“안 와!”
하고는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의아한 낯을 들더니,
“왜, 또 뭐 일이……?”
“아니유, 본 지가 하 오래니깐!”
응칠이는 말끝을 얼버무리고 고개를 돌리어 한데를 바라본다. 벌써 점심때가 되었는지 닭들이 요란히 울어 댄다. 논둑의 미루나무는 부 하고 또 부 하고 잎이 날리며 팔랑팔랑 하늘로 올라간다.

“성팔이가 이 마을에서 얼마나 살았지요?”
“글쎄, 재작년 가을이지 아마.”
하고 장죽을 빡빡 빨더니,
“근대 또 떠난대든가, 홍천인가 어디 즈 성님한테로 간대.”
하고 그게 옳지, 여기서 뭘 하느냐, 대장간이라구 일이나 많으면 모르거니와 밤낮 파리만 날리는데 그보다는 즈 형이 크게 농사를 짓는다니 그 뒤나 거들어 주고 국으로 얻어먹는게 신상에 편하겠지. 그래 불일간 처자식을 데리고 아마 떠나리라고 하고,
“농군은 그저 농사를 지야 돼.”
“낼 술 먹으러 또 오지유.”
간단히 인사만 하고 응칠이는 다시 일어났다.

주막을 나서니 옷깃을 스치는 개운한 바람이다. 밭 둔덕의 대추는 척척 늘어진다. 멀지 않아 겨울은 또 오렷다. 그는 응오의 집을 바라보며 그간 죽었는지 궁금하였다.

응오는 봉당에 걸터앉았다. 그 앞 화로에는 약이 바글바글 끓는다. 그는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앉았다.

우중충한 방에서는 아내의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색, 색 하다가 아이구, 하고는 까무러지게 콜록거린다. 가래가 치밀어 몹시 괴로운 모양. 뽑아 줄 사이가 없이 풀들은 뜰에 엉켰다. 흙이 드러난 지붕에서 망초가 휘어청휘어청 바람은 가끔 찾아와 싸리문을 흔든다. 그럴 적마다 문은 을씨년스럽게 삐―꺽 삐―꺽. 이웃의 발발이는 부엌에서 한창 바쁘게 달그락거린다. 마는, 아침에 아내에게 먹이고 남은 조죽밖에야. 아니 그것도 참 남편이 마저 긁었으니 사발에 붙은 찌꺼기뿐이리라.

“거, 다 졸았나 부다.”
응칠이는 약이란 다 졸면 못쓰니 고만 짜 먹여라 하였다. 약이라야 어젯저녁 울 뒤에서 옭 아들인 구렁이지만.

그러나 응오는 듣고도 흘렸는지 혹은 못 들었는지 잠자코 고개도 안 든다.

“옜다, 송이 맛이나 봐라.”
하고 형이 손을 내밀 제야 겨우 시선을 들었으나 술이 거나한 그 얼굴을 거북살스레 훑어본다. 그리고 송이를 고맙지 않게 받아 방에 치뜨리고는,
“이거나 먹어.”
하다가,
“뭐?”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래도 잘 들리지 않으므로,
“뭐야 뭐야, 좀 똑똑히 하라니깐?”
하고 골피를 찌푸린다. 그러나 아내는 손짓만으로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음성으로 치느니보다 종이 비비는 소리랄지, 그걸 듣기에는 지척도 멀었다.

가만히 보다 응칠이는 제가 다 불안하여,
“뒤보겠다는 게 아니냐?”
“그럼 그렇다 말이 있어야지.”
남편은 이내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킨다. 병약한 아내의 음성이 날로 변하여 감을 시방 안 것도 아니련만―---

그는 방바닥에 늘어져 꼬치꼬치 마른 반 송장을 조심히 일으키어 등에 업었다.

울 밖 밭머리에 잿간은 놓였다. 머리가 눌릴 만치 납작한 굴 속이다. 게다 거미줄은 예제없이 엉키었다. 부춛돌 위에 내려놓으니 아내는 벽을 의지하여 웅크리고 앉는다. 그리고 남편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지키고 섰는 것이다.

이 꼴들을 멀거니 바라보다 응칠이는 마뜩지 않게 코를 횡 풀며 입맛을 다시었다. 응오의 짓이 어리석고 울화가 터져서이다. 요즘 응오가 형에게 잘 말도 않고 왜 어딱비딱하는지 그 속은 응칠이도 모르는 바 아닐 것이다.

응오가 이 아내를 찾아올 때 꼭 삼 년간을 머슴을 살았다. 그처럼 먹고 싶던 술 한 잔 못 먹었고, 그처럼 침을 삼키던 그 개고기 한 메 물론 못 샀다. 그리고 사경을 받는 대로 꼭꼭 장리를 놓았으니 후일 선채로 썼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근사를 모아 얻은 계집이련만 단 두 해가 못 가서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병이 무슨 병인지 도시 모른다. 의원에게 한 번이라도 변변히 봬본 적이 없다. 혹 안다는 사람의 말인즉 뇌점이니 어렵다 하였다. 돈만 있으면야 뇌점이고 염병이고 알바가 못 될 거로되 사날 전 거리로 쫓아 나오며,
“성님!”
하고 팔을 챌 적에는 응오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왜?”
응칠이가 몸을 돌리니 허둥지둥 그 말이 이제는 별도리가 없다. 있다면 꼭 한 가지가 남았으니 그것은 엊그저께 산신을 부리는 노인이 이 마을에 오지 않았는가. 그 노인이 응오를 특히 동정하여 십오 원만 들이어 산치성을 올리면 씻은 듯이 낫게 해주리라는데.
“성님은 언제나 돈 만들 수 있지유?”
“거, 안 된다. 치성 들여 날 병이 안 낫겠니.”
하여 여전히 딱 떼고 그러게 내 뭐래든, 애전에 계집 다 내버리고 날 따라 나서랬지, 하고,
“그래 농군의 살림이란 제 목매기라지!”
그러나 아우가 암말 없이 몸을 홱 돌리어 집으로 들어갈 제 응칠이는 속으로 또 괜한 소리를 했구나, 하였다.

응오는 도로 아내를 업어다 방에 뉘었다. 약은 다 졸았다. 불이 삭기 전 짜야 할 것이다. 식기를 기다려 약사발을 입에 대어 주니 아내는 군말 없이 그 구렁이 물을 껄덕껄덕 들이마신다.

응칠이는 마당에 우두커니 앉았다. 사람의 목숨이란 과연 중하군 하였다. 그러나 계집이라는 저 물건이 저렇게 떼기 어렵도록 중할까, 하니 암만해도 알 수 없고.

“너 참 요 건너 성팔이 알지?”
“……”
“너하고 친하냐?”
“……”
“성이 뭐래는데 거 대답 좀 하렴.”
하고 소리를 빽 질러도 아우는 대답은 말고 고개도 안 든다. 그러나 응칠이는 하늘을 쳐다보고 트림만 끄윽 하고 말았다. 술기가 코를 꽉꽉 찔러야 할 터인데 이건 풋김치 냄새만 코 밑에서 뱅뱅 돈다. 공짜 김치만 퍼먹을 게 아니라 한 잔 더 했더면 좋았을걸. 그는 일어서서 대를 허리에 꽂고 궁둥이의 흙을 털었다. 벼 도둑맞은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아서라 가뜩이나 울상이 속이 쓰릴 것이다. 그보다는 이놈을 잡아 놓고 낭중 희자를 뽑는 것이 점잔하겠지.

그는 문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답답한 아우의 살림을 보니 역 답답하던 제 살림이 연상되고 가슴이 두루 답답하였다. 이런 때에는 무가 십상이다. 사실 하느님이 무를 마련해 낸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다. 맥맥할 때 한 개를 씹고 보면 꿀꺽 하고, 쿡 치는 그 맛이 좋고, 남의 무밭에 들어가 하나를 쑥 뽑으니 가락 무. 이―키, 이거 오늘 운수 대통이로군. 내던지고 그 다음 놈을 뽑아 들고 개울로 내려온다. 물에 쓱쓰윽 닦아서는 꽁지는 이로 베어 던지고 어썩 깨물어 붙인다.

개울 둔덕에 포플러는 호젓하게도 매출히 컸다. 자갈돌은 그 밑에 옹기종기 모였다. 가생이로 잔디가 소보록하다. 응칠이는 나가자빠져 마을을 건너다보며 눈을 멀뚱멀뚱 굴리고 누웠다. 산이 뺑뺑 둘리어 숨이 콕 막힐 듯한 그 마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노다 가세
증기차는 가자고 왼고동 트는데
정든 님 품 안고 낙누낙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노다 가세
낼 갈지 모래 갈지 내 모르는데
옥씨기 강낭이는 심어 뭐 하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그는 콧노래로 이렇게 흥얼거리다 갑작스레 강릉이 그리웠다. 펄펄 뛰는 생선이 좋고, 아침 햇살이 빗기어 힘차게 출렁거리는 그 물결이 좋고. 이까짓 둠 구석에서 쪼들리는 데 대다니. 그래도 즈이딴엔 무어 농사 좀 지었답시고 악을 복복 쓰며 잘도 떠들어 댄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어디인가 형언치 못할 쓸쓸함이 떠돌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삼십여 년 전 술을 빚어 놓고 쇠를 울리고 흥에 질리어 어깨춤을 덩실거리고 이러던 가을과는 저 딴쪽이다. 가을이 오면 기쁨에 넘쳐야 될 시골이 점점 살기만 띠어 옴은 웬일인고. 이렇게 보면 재작년 가을 어느 밤 산중에서 낫으로 사람을 찍어 죽인 강도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장을 보고 오는 농군을 농군이 죽였다. 그것도 많이나 되었으면 모르되 빼앗은 것이 한껏 동전 네 닢에 수수 일곱 되, 게다가 흔적이 탄로날까 하여 낫으로 그 얼굴의 껍질을 벗기고 조깃대강이 이기듯 끔찍하게 남기고 조긴 망나니다. 흉악한 자식. 그 알량한 돈 사 전에, 나 같으면 가여워 덧돈을 주고라도 왔으리라. 이번 놈은 그 따위 깍다귀나 아닐는지 할 때 찬 김과 아울러 치미는 소름에 머리끝이 다 쭈뼛하였다. 그간 아우의 농사를 대신 돌봐 주기에 이럭저럭 날이 늦었다. 오늘 밤에는 이놈을 다리를 꺾어 놓고 내일쯤은 봐서 설렁설렁 뜨는 것이 옳은 일이겠다. 이 산을 넘을까 저 산을 넘을까 주저거리며 속으로 점을 치다가 슬그머니 코를 골아 올린다.

밤이 내리니 만물은 고요히 잠이 든다. 검푸른 하늘에 산봉우리는 울퉁불퉁 물결을 치고 흐릿한 눈으로 별은 떴다. 그러다 구름떼가 몰려닥치면 깜깜한 절벽이 된다. 또한 마을 한복판에는 거친 바람이 오락가락 쓸쓸히 궁글고 이따금 코를 찌르는 후련한 산사 내음새. 북쪽 산밑 미루나무에 싸여 주막이 있는데 유달리 불이 반짝인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노랫소리는 나직나직 한산히 흘러온다. 아마 벼를 뒷심대고 외상이리라.

응칠이는 잠자코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 나와서야 그 집 친구에게 눈치를 안 채이도록,
“내 잠깐 다녀옴세!”
“어딜 가나?”
친구는 웬 영문을 몰라서 뻔히 쳐다보다 밤이 이렇게 늦었으니 나갈 생각 말고 어여 이리 들어와 자라 하였다. 기껏 둘이 앉아서 개코쥐코 떠들다가 갑자기 일어서니까 꽤 이상한 모양이었다.

“건너마을 가 담배 한 봉 사올라구.”
“담배 여깄는데 또 사 뭐 하나?”
친구는 호주머니에서 굳이 연봉을 꺼내어 손에 들어 보이더니,
“이리 들어와 섬이나 좀 쳐주게.”
“아 참, 깜빡…….”
하고 응칠이는 미안스러운 낯으로 뒤통수를 긁적긁적한다. 하기는 섬을 좀 쳐달라고 며칠 째 당부하는 걸 노름에 몸이 팔려 그만 잊고 잊고 했던 것이다. 먹고 자고 이렇게 신세를 지면서 이건 썩 안됐다, 생각은 했지만,
“내 곧 다녀올걸 뭐.”
어정쩡하게 한마디 남기곤 그 집을 뒤에 남긴다.

그러나 이 친구는,
“그럼, 곧 다녀오게!”
하고 때를 재치는 법은 없었다. 언제나 여일같이,
“그럼 잘 다녀오게!”
이렇게 그 신상만 편하기를 비는 것이다.

응칠이는 모든 사람이 저에게 그 어떤 경의를 갖고 대하는 것을 가끔 느끼고 어깨가 으쓱거린다. 백판 모르는 사람도 데리고 앉아서 몇 번 말만 좀 하면 대뜸 구부러진다. 그렇게 장한 것인지 그 일을 하다가, 그 일이라야 도적질이지만, 들어가 욕보던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이구, 그걸 어떻게 당하셨수!”
하고 적이 놀라면서도,
“그래 그 돈은 어떡했수?”
“또 그럴 생각이 납디까요?”
“참, 우리 같은 농군에 대면 호강살이유!”
하고들 한편 썩 부러운 모양이었다. 저들도 그와 같이 진탕 먹고 살고는 싶으나 주변 없어 못 하는 그 울분에서 그런 이야기만 들어도 다소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응칠이는 이걸 잘 알고 그 누구를 논에다 거꾸로 박아 놓고 달아나다가 붙들리어 경치던 이야기를 부지런히 하며,
“자네들은 안적 멀었네, 멀었어.”
하고 흰소리를 치면 그들은, 옳다는 뜻이겠지, 묵묵히 고개만 꺼떡꺼떡하며 속없이 술을 사주고 담배를 사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벼를 훔쳐 간 놈은 응칠이를 마구 넘보는 모양 같다.

이렇게 생각하면 응칠이는 더욱 괘씸하였다. 그는 물푸레 몽둥이를 벗삼아 논둑길을 질러서 산으로 올라간다.

이슥한 그믐 칠야.

길은 어둡고 흐릿한 언저리만 눈앞에 아물거린다.

그 논까지 칠 마장은 느긋하리라. 이 마을을 벗어나는 어귀에 고개 하나를 넘는다. 또 하나를 넘는다. 그러면 그 다음 고개와 고개 사이에 수목이 울창한 산중턱을 비겨 대고 몇 마지기의 논이 놓였다. 응오의 논은 그 중의 하나이었다. 길에서 썩 들어앉은 곳이라 잘 뵈도 않는다. 동리에 그런 소문이 안 났을 때에는 천행으로 본 놈이 없을 것이나 반드시 성팔이의 성행임에는…….

응칠이는 공동묘지의 첫 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다음 고개의 마루턱을 올라섰을 때 다리가 주춤하였다. 저 왼편 높은 산고랑에서 불이 반짝 하다 꺼진다. 짐승불로는 너무 흐리고…… 아―하, 이놈들이 또 왔군. 그는 가던 길을 옆으로 새었다. 더듬더듬 나뭇가지를 짚으며 큰 산으로 올라간다. 바위는 미끄러 내리며 발등을 찧는다. 딸기 가시에 종아리는 따갑고 엉금엉금 기어서 바위를 끼고 감돈다.

산, 거반 꼭대기에 바위와 바위가 어깨를 겯고 움쑥 들어간 굴이 있다. 풀들은 뻗치어 굴문을 막는다.

그 속에 돌아앉아서 다섯 놈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린다. 불빛이 샐까 염려다. 남폿불을 얕이 달아 놓고 몸들을 바싹바싹 여미어 가리운다.

“어서 후딱후딱 쳐, 갑갑해서 원.”
“이번엔 누가 빠지나?”
“이 사람이지 뭘 그래.”
“다시 섞어, 어서 이 따위 수작이야.”
하고 한 놈이 골을 내고 화투를 빼앗아 제 손으로 섞다가 깜짝 놀란다. 그리고 버썩 대드는 응칠이를 벙벙히 쳐다보며 얼뚤한다.

그들은 응칠이가 오는 것을 완고척이 싫어하는 눈치였다. 이런 애송이 노름판인데 응칠이를 들였다가는 맥을 못 쓸 것이다. 속으로는 되우 꺼렸지마는 그렇다고 응칠이의 비위를 건드림은 더욱 좋지 못하므로,
“아, 응칠인가, 어서 들어오게.”
하고 선웃음을 치는 놈에,
“난 올 듯하기에, 자넬 기다렸지.”
하며 어수대는 놈,
“하여튼 한 케 떠보세.”
이놈들은 손을 잡아 들이며 썩들 환영이었다.

응칠이는 그 속으로 들어서며 무서운 눈으로 좌중을 한번 훑어보았다.

그런데 재성이도 그 틈에 끼여 있는 것이 아닌가. 사날 전만 해도 응칠이더러 먹을 양식이 없으니 돈 좀 취하라던 놈이 의심이 부썩 일었다. 도둑이란 흔히 이런 노름판에서 씨가 퍼진다. 그 옆으로 기호도 앉았다. 이놈은 며칠 전 제 계집을 팔았다. 그 돈으로 영동 가서 장사를 하겠다던 놈이 노름을 왔다. 제깐 주제에 딸 듯싶은가. 하나는 용구. 농사엔 힘 안 쓰고 노름에 몸이 달았다. 시키는 부역도 안 나온다고 동리에서 손도를 맞을 놈이다. 그리고 남의 집 머슴녀석. 뽐을 내고 멋없이 점잔을 피우는 중늙은이 상투쟁이, 이 물건은 어서 날아왔는지 보지도 못하던 놈이다. 체 이것들이 뭘 한다구!

응칠이는 기호의 등을 꾹 찔러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외딴 곳으로 데리고 와서,
“자네 돈 좀 없겠나?”
하고 돌아서다가,
“웬걸 돈이 어디…….”
눈치만 남고 어름어름하니,
“아내와 갈렸다지, 그 돈 다 뭐 했나?”
“아 이 사람아, 빚 갚았지!”
기호는 눈을 내리깔며 매우 거북한 모양이다.

오른편 엄지로 한 코를 막고 흥 하고 내뽑더니 이번 빚에 졸리어 죽을 뻔했네 하고 묻지 않는 발뺌까지 얹어서 설대로 등어리를 긁죽긁죽한다.

그러나 응칠이는 속으로 이놈, 하였다.

응칠이는 실눈을 뜨고 기호를 유심히 쏘아 주었더니,
“꼭 사 원 남았네.”
하고 선뜻 알리고,
“빚 갚고 뭣 하고 흐지부지 녹았어.”
어색하게도 혼자말로 우물쭈물 웃어 버린다.

응칠이는 퉁명스러이,
“나 이 원만 최게.”
하고 손을 내대다 그래도 잘 듣지 않으매,
“따서 둘이 노눌 테야, 누가 떼먹나.”
하고 소리가 한번 빽 아니 나올 수 없다.

이 말에야 기호도 비로소 안심한 듯, 저고리섶을 쳐들고 훔척거리다 쭈삣쭈삣 꺼내 놓는다. 딴은 응칠이의 솜씨면 낙자는 없을 것이다. 설혹 재간이 모자라 잃는다면 우격이라도 도로 몰아갈 테니깐.

“나두 한 케 떠보세.”

응칠이는 우죄스레 굴로 기어든다. 그 콧등에는 자신 있는 그리고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사실이지 노름만큼 그를 행복하게 하는 건 다시 없었다. 슬프다가도 화투나 투전장을 손에 들면 공연스레 어깨가 으쓱거리고 아무리 일이 바빠도 노름판은 옆에 못 두고 지난다. 그는 이놈 저놈의 눈치를 슬쩍 한번 훑고,
“두 패루 너누지?”
응칠이는 재성이와 용구를 데리고 한옆으로 비켜 앉았다. 그리고 신바람이 나서 화투를 섞다가 손을 따악 짚으며,
“튀전이래지 이깐 화투는 하튼 뭘 할 텐가, 녹삐킨가 켤텐가?”
“약단이나 그저 보지!”
사방은 매섭게 조용하였다. 바위 위에서 혹 바람에 모래 구르는 소리뿐이다. 어쩌다,
“옛다 봐라.”
하고 화투짝이 쩔꺽, 한다. 그리곤 다시 쥐죽은 듯 잠잠하다.

그들은 이욕에 몸이 달아서 이야기고 뭐고 할 여지가 없다. 행여 속지나 않는가 하여 눈들이 빨개서 서로 독을 올린다. 어떤 놈이 뜯는 놈이고 어떤 놈이 뜯기는 놈인지 영문 모른다. 응칠이가 한 장을 내던지고 명월 공산을 보기 좋게 떡 젖혀 놓으니,
“이거 왜 수짜질이야!”
용구는 골을 벌컥 내며 쳐다본다.

“뭐가?”
“뭐라니, 아, 이 공산 자네 밑에서 빼내지 않았나?”
“봤으면 고만이지 그렇게 노할 건 또 뭔가!”
응칠이는 어설피 입맛을 쩍쩍 다시다,

“그럼 이번엔 파토지?”
하고 손의 화투를 땅에 내던지며 껄껄 웃어 버린다.

이때 한옆에서 별안간,
“이 자식, 죽인가!”
악을 쓰는 것이니 모두들 놀라며 시선을 몬다. 머슴이 마주 앉은 상투의 뺨을 갈겼다. 말인즉 매조 다섯 끗을 엎어 쳤다고.

하나 정말은 돈을 잃은 것이 분한 것이다. 이 돈이 무슨 돈이냐 하면 일년 품을 판 피 묻은 사경이다. 이런 돈을 송두리 먹히다니.

“이 자식, 너는 야마시(사기)꾼이지. 돈 내라.”
멱살을 훔켜잡고 다시 두 번을 때린다.

“허, 이놈이 왜 이러누, 어른을 몰라보고.”
상투는 책상다리를 잡숫고 허리를 쓰윽 펴더니 점잖이 호령한다. 자식 뻘 되는 놈에게 뺨을 맞는 건 말이 좀 덜 된다. 약이 올라서 곧 일을 칠 듯이 엉덩이를 번쩍 들었으나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악에 바짝 받친 놈을 건드렸다가는 결국 이쪽이 손해다. 더럽단 듯이 허, 허 웃고,
“버릇 없는 놈 다 봤고!”
하고 꾸짖은 것은 잘됐으나 기어이 어이쿠, 하고 그 자리에 푹 엎으러진다. 이마가 터져서 피가 흘렀다. 어느틈엔가 돌멩이가 날아와 이마의 가죽을 터친 것이다.

응칠이는 싱글거리며 굴을 나섰다. 공연스레 쑥스럽게 일이나 벌어지면 성가신 노릇이다. 그리고 돈 백이나 될 줄 알았더니 다 봐야 한 사십 원 될까말까. 그걸 바라고 어느 놈이 앉았는가.

그가 딴 것은 본밑을 알라 구 원 하고 팔십 전이다. 기호에게 오 원을 내주고,
“자, 반이 넘네. 자네 계집 잃고 돈 잃고 호강이겠네.”
농담으로 비웃어 던지고는 숲속으로 설렁설렁 내려온다.

“여보게, 자네에게 청이 있네.”
재성이 목이 말라서 바득바득 따라온다. 그 청이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에게 돈을 다 빼앗기곤 구문이겠지. 시치미를 딱 떼고 나 갈 길만 걷는다.

“여보게 응칠이, 아, 내 말 좀 들어!”
그제는 팔을 잡아 낚으며 살려 달라 한다. 돈을 좀 늘릴까 하고 벼 열 말을 팔아 해보았더니 다 잃었다고. 당장 먹을 게 없어 죽을 지경이니 노름 밑천이나 하게 몇 푼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벼를 털었으면 그저 먹을 것이지 어쭙잖게 노름은…….

“그런 걸 왜 너보고 하랬어?”
하고 돌아서며 소리를 빽 지르다가 가만히 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잠자코 돈 이 원을 꺼내 주었다.

응칠이는 돌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덜덜 떨고 있다.

사방은 뺑― 돌리어 나무에 둘러싸였다. 거무튀튀한 그 형상이 헐없이 무슨 도깨비 같다. 바람이 불 적마다 쏴― 하고 쏴― 하고 음충맞게 건들거린다. 어느 때에는 짹, 짹 하고 목을 따는지 비명도 울린다.

그는 가끔 뒤를 돌아보았다. 별일은 없을 줄 아나 호옥 뭐가 덤벼들지도 모른다. 서낭당은 바로 등뒤다. 족제빈지 뭔지, 요동통에 돌이 무너지며 바스락바스락한다. 그 소리가 묘하게도 등줄기를 쪼옥 긁는다. 어두운 꿈속이다. 하늘에서 이슬은 내리어 옷깃을 축인다. 공포도 공포려니와 냉기로 하여 좀체로 견딜 수가 없었다.

산골은 산신까지도 주렸으렷다. 아들 낳아 달라고 떡 갖다 바칠 이 없을 테니까. 이놈의 영감님 홧김에 덥석 달려들면. 앞뒤를 다시 한번 휘돌아본 다음 설대를 뽑는다. 그리고 오금팽이로 불을 가리고는 한 대 뻑뻑 피워 물었다. 논은 여남은 칸 떨어져 그 아래 누웠다. 일심 정기를 다하여 나무틈으로 뚫어보고 앉았다. 그러나 땅에 대를 털려니까 풀숲이 이상스러이 흔들린다. 뱀, 뱀이 아닌가. 구시월 뱀이라니 물리면 고만이다. 자리를 옮겨 앉으며 손으로 입을 막고 하품을 터친다.

아마 두어 시간은 더 넘었으리라. 이놈이 필연코 올 텐데 안 오니 또 무슨 조활까. 이 짓이란 소문이 나기 전에 한번 더 와 보는 것이 원칙이다. 잠을 못 자서 눈이 뻑뻑한 것이 제물에 슬금슬금 감긴다. 이를 악물고 눈을 뒵쓰면 이번에는 허리가 노글거린다. 속은 쓰리고 골치는 때리고. 불꽃 같은 노기가 불끈 일어서 몸을 옥죄인다. 이놈의 다리를 못 꺾어 놔도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겠다.

닭들이 세 홰를 운다. 멀―리 산을 넘어오는 그 음향이 퍽은 서글프다. 큰 비를 몰아드는지 검은 구름이 잔뜩 낀다. 하긴 지금도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진다.

그때 논둑에서 희끄무레한 허깨비 같은 것이 얼씬거린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영락없이 성팔이, 재성이 그들 중의 한 놈이리라. 이 고생을 시키는 그놈! 이가 북북 갈리고 어깨가 다 식식거린다. 몽둥이를 잔뜩 우려잡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서 나무줄기를 끼고 조심조심 돌아내린다. 하나 도랑쯤 내려오다가 그는 멈씰하여 몸을 뒤로 물렸다. 늑대 두 놈이 짝을 짓고 이편 산에서 저편 산으로 설렁설렁 건너가는 길이었다. 빌어먹을 늑대, 이것까지 말썽이람. 이마의 식은땀을 씻으며 도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어쩌면 이번 이놈도 재작년 강도 짝이나 안 될는지. 급시로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탁 치고 지나간다.

그는 옷깃을 여미어 한 대를 더 붙였다. 돌연히 풍세는 심하여진다. 산골짜기로 몰아드는 억센 놈이 가끔 발광이다. 다시금 더르르 몸을 떨었다. 가을은 왜 이 지경인지. 여기에서 밤 새울 생각을 하니 기가 찼다.

얼마나 되었는지 몸을 좀 녹이고자 일어나서 서성서성할 때이었다. 논으로 다가오는 희미한 그림자를 분명히 두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보니 피로고, 한고이고 다 딴소리다. 고개를 내대고 딱 버티고 서서 눈에 쌍심지를 올린다.

흰 그림자는 어느틈엔가 어둠 속에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나올 줄을 모른다. 바람 소리만 왱, 왱, 칠 뿐이다. 다시 암흑 속이 된다. 확실히 벼를 훔치러 논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여깽이 같은 놈이 궂은 날새를 기화삼아 맘껏 하겠지. 의리 없는 썩은 자식, 격장에서 같이 굶는 터에―---오냐 대거리만 있거라. 이를 한번 부드득 갈아붙이고 차츰차츰 논께로 내려온다.

응칠이는 논께로 바특이 내려서서 소나무에 몸을 착 붙였다. 섣불리 서둘다간 남의 횡액을 입을지도 모른다. 다 훔쳐 가지고 나올 때만 기다린다. 몸뚱이는 잔뜩 힘을 올린다.

한 식경쯤 지났을까, 도적은 다시 나타난다. 논둑에 머리만 내놓고 사면을 두리번거리더니 그제야 기어나온다. 얼굴에는 눈만 내놓고 수건인지 뭔지 헝겊이 가리었다. 봇짐을 등에 짊어메고는 허리를 구붓이 뺑손을 놓는다.

그러자 응칠이가 날쌔게 달려 들며,
“이 자식, 남의 벼를 훔쳐 가니!”
하고 대포처럼 고함을 지르니 논둑으로 고대로 데굴데굴 굴러서 떨어진다. 얼결에 호되게 놀란 모양이다.

응칠이는 덤벼들어 우선 허리께를 내려조겼다. 어이쿠쿠, 쿠― 하고 처참한 비명이다. 이 소리에 귀가 번쩍 띄어서 그 고개를 들고 팔부터 벗겨 보았다. 그러나 너무나 어이가 없었음인지 시선을 치걷으며 그 자리에 우두망찰한다.

그것은 무서운 침묵이었다. 살뚱맞은 바람만 공중에서 북새를 논다.

한참을 신음하다 도적은 일어나더니,
“성님까지 이렇게 못살게 굴기유?”
제법 눈을 부라리며 몸을 홱 돌린다. 그리고 느끼며 울음이 복받친다. 봇짐도 내버린 채,
“내 것 내가 먹는데 누가 뭐래?”
하고 데퉁스러이 내뱉고는 비틀비틀 논 저쪽으로 없어진다.

형은 너무 꿈속 같아서 멍하니 섰을 뿐이다.

그러다 얼마 지나서 한 손으로 그 봇짐을 들어 본다. 가뿐하니 끽 말가웃이나 될는지. 이까 짓 걸 요렇게까지 해가려는 그 심정은 실로 알 수 없다. 벼를 논에다 도로 털어 버렸다. 그리고 아내의 치마이겠지, 검은 보자기를 척척 개서 들었다. 내 걸 내가 먹는다―---그야 이를 말이랴. 하나 내 걸 내가 훔쳐야 할 그 운명도 얄궂거니와 형을 배반하고 이 짓을 벌인 아우도 아우렷다. 에―이 고얀 놈, 할 제 볼을 적시는 것은 눈물이다.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쓱, 비비고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두레두레한 황소의 눈깔. 시오 리를 남쪽 산으로 들어가면 어느 집 바깥 뜰에 밤마다 늘 매여 있는 투실투실한 그 황소. 아무렇게 따지든 칠십 원은 갈 데 없으리라. 그는 부리나케 아우의 뒤를 밟았다.

공동묘지까지 거반 왔을 때에야 가까스로 만났다. 아우의 등을 탁 치며,
“얘, 좋은 수 있다. 네 원대로 돈을 해줄게 나하구 잠깐 다녀오자.”
씩씩한 어조로 기쁘도록 달랬다. 그러나 아우는 입 하나 열려 하지 않고 그대로 실쭉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깨 위에 올려놓은 형의 손을 부질없단 듯이 몸으로 털어 버린다. 그리고 삐익 달아난다. 이걸 보니 하 엄청나고 기가 콱 막히었다.

“이눔아!”
하고 악에 받치어,
“명색이 성이라며?”
대뜸 몽둥이는 들어가 그 볼기짝을 후려갈겼다. 아우는 모로 몸을 꺾더니 시나브로 찌그러진다. 뒤미처 앞정강이를 때리고 등을 팼다. 일어나지 못할 만치 매는 내리었다. 체면을 불고하고 땅에 엎드리어 엉엉 울도록 매는 내리었다.

홧김에 하긴 했으되 그 꼴을 보니 또한 마음이 편할 수 없다. 침을 퇴, 뱉어 던지곤 팔자 드신 놈이 그저 그렇지 별수 있나, 쓰러진 아우를 일으키어 등에 업고 일어섰다. 언제나 철이 날는지 딱한 일이었다. 속 썩는 한숨을 후― 하고 내뿜는다. 그리고 어청어청 고개를 묵묵히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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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에서 굽어보던 햇님이 서쪽으로 기울어 나무에 긴 꼬리가 달렸건만 나물 뜯을 생각은 않고, 이뿐이는 늙은 잣나무 허리에 등을 비겨 대고 먼 하늘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섰다.

하늘은 맑게 개고 이쪽저쪽으로 뭉글뭉글 피어오른 흰 꽃송이는 곱게도 움직인다. 저것도 구름인지 학들은 쌍쌍이 짝을 짓고 그 새로 날아들며 끼리끼리 어르는 소리가 이 수풍까지 멀리 흘러내린다.

갖가지 나무들은 사방에 잎이 욱었고 땡볕에 그 잎을 펴들고 너훌너훌 바람과 아울러 산골의 향기를 자랑한다.

그 공중에는 나는 꾀꼬리가 어여쁘고…… 노란 날개를 팔딱이고 이가지 저가지로 옮아 앉으며 흥에 겨운 행복을 노래 부른다.

―---고―이! 고이고―이!

요렇게 아양스레 노래도 부르고.

―---담배 먹구 꼴 비어!

맞은쪽 저 바위 밑은 필시 호랑님의 드나드는 굴이리라. 음침한 그 위에는 가시덤불 다래넝쿨이 어지러이 엉클리어 지붕이 되어 있고, 이것도 돌이랄지 연록색 털복숭이는 올망졸망 놓였고,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뻐꾸기는 날아와 그 잔등에 다리를 머무르며.

―---뻐꾹! 뻐꾹! 뻐뻐꾹!

어느덧 이뿐이는 눈시울에 구슬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물 바구니가 툭, 하고 땅에 떨어지자 두 손에 펴든 치마폭으로 그새 얼굴을 폭 가리고는 이뿐이는 흐륵흐륵 마냥 느끼며 울고 섰다.

이제야 후회나노니 도련님 공부하러 서울로 떠나실 때 저도 간다고 왜 좀더 붙들고 늘어지지 못했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만 미어질 노릇이다. 그러나 마님의 눈을 기어 자그만 보따리를 옆에 끼고 산속으로 이십 리나 넘어 따라갔던 이뿐이가 아니었던가. 과연 이뿐이는 산등을 질러갔고 으슥한 고갯마루에서 기다리고 섰다가 넘어오시는 도련님의 손목을 꼭 붙잡고,

"난 안 데려가지유!"

하고 애원 못 한 것도 아니니 공연스레 눈물부터 앞을 가렸고 도련님이 놀라며,

"너 왜 오니? 여름에 꼭 온다니까, 어여 들어가라."

하고 역정을 내심에는 고만 두려웠으나 그래도 날 데려가라고 그 몸에 매어달리니 도련님은 얼마를 벙벙히 그냥 섰다가,

"울지 마라 이뿐아, 그럼 내 서울 가 자리나 잡거든 널 데려가마."

하고 등을 두드리며 달래일 제 만일 이 말에 이뿐이가 솔깃하여 꼭 곧이듣지만 않았던들 도련님의 그 손을 안타까이 놓지는 않았던 걸…….

"정말 꼭 데려가지유?"

"그럼 한 달 후에면 꼭 데려가마."

"난 그럼 기다릴 테야유!"

그리고 아침 햇발에 비끼는 도련님의 옷자락이 산등으로 꼬불꼬불 저 멀리 사라지고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이뿐이는 남이 볼까 하여 피어 흩어진 개나리 속에 몸을 숨기고 치마끈을 입에 물고는 눈물로 배웅하였던 것이 아니런가. 이렇게도 철석같이 다짐을 두고 가시더니 그 한 달이란 대체 얼마나 되는 겐지 몇 한 달이 거듭 지나고 돌도 넘었으련만 도련님은 이렇다 소식 하나 전할 줄조차 모르신다. 실토로 터놓고 말하자면 늙은 이 잣나무 아래에서 도련님과 맨 처음 눈이 맞을 제 이뿐이가 먼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니련만…… 이뿐 어머니가 마님 댁 씨종이고 보면 그 딸 이뿐이는 잘 따져야 씨의 씨종이니 하잘것없는 계집애이거늘 이뿐이는 제 몸이 이럼을 알고 시내에서 홀로 빨래를 할 제이면 도련님이 가끔 덤벼들어 이게 장난이겠지, 품에 꼭 껴안고 뺨을 깨물어뜯는 그 꼴이 숭굴숭굴하고 밉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이뿐이는 감히 그런 생각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날도 마님이 구미가 제치셨다고 얘 이뿐아 나물 좀 뜯어 온, 하실 때 이뿐이는 퍽으나 반가웠고 아침밥도 몇 술로 겉날리고 보구니를 동무삼아 집을 나섰으니 나이 아직 열여섯이라 마님에게 귀염을 받는 것이 다만 좋았고 칠칠한 나물을 뜯어 드리고자 한사코 이 험한 산속으로 기어올랐다. 풀잎의 이슬은 아직 다 마르지 않았고 바위 틈바구니에 흩어진 잔디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서 떡 머구리 한 놈을 우물거리며 있는 중이매 이뿐이는 쌔근쌔근 가쁜 숨을 쉬어 가며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고 섰다가 바로 발 앞에 도라지순이 있음을 발견하고 꼬챙이로 마악 캐려 할 즈음 등뒤에서 뜻밖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어디로 따라왔던가, 도련님은 물푸레나무 토막을 한 손에 지팡이로 짚고 붉은 얼굴이 땀바가지가 되어 식식거리며 그리고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 모양이 하도 수상하여 이뿐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니 도련님은 좀 면구쩍은지 낯을 모로 돌리며 그러나 여일히 싱글싱글 웃으며 뱃심 유한 소리가―---

"난 지팽이 꺾으러 왔다."

그렇지마는 이뿐이는 며칠 전 마님이 불러 세우고 '너 도련님하구 같이 다니면 매맞는다' 하시던 그 꾸지람을 얼른 생각하고,

"왜 따라왔지유…… 마님 아시면 남 매맞으라구?"

하고 암팡스레 쏘았으나 도련님은 귓등으로 듣는지 그래도 여전히 싱글거리며 뱃심 유한 소리로,

"난 지팽이 꺾으러 왔다."

그제야 이뿐이는 성을 안 낼 수 없고,

"마님께 나 매맞어두 난 몰라."

혼자말로 이렇게 되알지게 쫑알거리고 너야 가든 말든 하라는 듯이 고개를 돌리어 아까의 도라지를 다시 캐자노라니 도련님은 무턱대고 그냥 와락 달려들어,

"너 맞는 거 나는 알지?"

이뿐이를 뒤로 꼭 붙들고 땀이 쪽 흐른 그 뺨을 또 잔뜩 깨물고는 놓질 않는다. 이뿐이는 어려서부터 도련님과 같이 자랐고 같이 놀았으되 제가 먼저 그런 생각을 두었다면 도련님을 벌컥 떠다밀어 바위 너머로 곤두박히게 했을 리 만무이었고,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며 도련님이 무색하여 멀거니 쳐다보고 입맛만 다시니 이뿐이는 그 꼴이 보기 가여웠고 죄를 저지른 제 몸에 대하여 죄송한 자책이 없던 바도 아니건마는 다시 손목을 잡히고 이 잣나무 밑으로 끌릴 제에는 온 힘을 다하여 그 손깍지를 버리며 야단친 것도 사실이 아닌 건 아니나, 그러나 어딘가 마음 한편에 앙살을 피우면서도 넉히 끌리어 가도록 도련님의 힘이 좀더 좀더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이뿐이가 얼굴이 빨개지며 앙큼스러운 생각을 먹은 것은 바로 이때이었고,

"난 몰라, 마님께 여쭐 터이야, 난 몰라!"

하고 적잖이 조바심을 태우면서도 도련님의 속맘을 한번 뜯어 보고자,

"누가 종두 이러는 거야?"

하고 손을 뿌리치고 된통 호령을 하고 보니 도련님은 이 깊고 외진 산속임에도 불구하고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가만히 속삭이는 그 말이,

"너 나하고 멀리 도망가지 않으련!"

그러니 이뿐이는 이 말을 참으로 꼭 곧이들었고 사내가 이렇게 겁을 집어먹는 수도 있는지 도련님이 땅에 떨어지는 성냥갑을 호줌에 다시 집어널 줄도 모르고 덤벙거리며 산 아래로 꽁지를 뺄 때까지 이뿐이는 잣나무 뿌리를 베고 풀밭에 번듯이 드러누운 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인제 멀리만 달아나면 나는 저 도련님의 아씨가 되려니 하는 생각에 마님께 진상할 나물 캘 생각조차 잊고 말았다. 그러나 조금 지나매 이뿐이는 어쩐지 저도 겁이 나는 듯싶었고 발딱 일어나 사면을 휘돌아보았으나 거기에는 험상스러운 바위와 우거진 숲이 있을 뿐 본 사람은 하나도 없으련만―---아마 산이 험한 탓일지도 모르리라. 가슴은 여전히 달랑거리고 두려우면서 그러나 이 몸뚱이를 제 품에 꼭 품고 같이 둥굴고 싶은 안타까운 그런 행복이 느껴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도련님은 이렇게 정을 들이고 가시고는 이제 와서는 생판 모르는 체하시는 거나 아닐런가…….

 

 

두 손등으로 눈물을 씻고 고개는 어레 들었으나 나물 뜯을 생각은 않고 이뿐이는 늙은 잣나무 밑에 앉아서 먼 하늘을 치켜대고 도련님 생각에 이렇게도 넋을 잃는다.

이제 와 생각하면 야속도 스럽나니 마님께 매를 맞도록 한 것도 결국 도련님이었고 별 욕을 다 당하게 한 것도 결국 도련님이 아니었던가…….

매일과 같이 산엘 올라다닌 지 단 나흘이 못 되어 마님은 눈치를 채셨는지 혹은 짐작만 하셨는지 저녁때 기진하여 내려오는 이뿐이를 불러 앉히시고,

"너 요년 바른 대로 말해야지 죽인다."

하고 회초리로 때리시되 볼기짝이 톡톡 불거지도록 하시었고, 그래도 안차게 아니라고 고집을 쓰니 이번에는 어머니가 달겨들어 머리채를 휘감고 주먹으로 등어리를 서너 번 쾅쾅 때리더니 그만도 좋으련만 뜰 아랫방에 갖다 가두고는 사날씩이나 바깥 구경을 못 하게 하고 구메밥으로 구박을 막 함에는 이뿐이는 짜장 서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징역살이 맨 마지막 밤이 깊었을 제 이뿐이는 너무 원통하여 혼자 앉아서 울다가 자리에 누운 어머니의 허리를 꼭 끼고 그 품속으로 기어들며 '어머니, 나 데련님하고 살 테야' 하고 그예 저의 속중을 토설하니 어머니는 들었는지 먹었는지 그냥 잠잠히 누웠더니 한참 후 후유, 하고 한숨을 내뿜을 때에는 이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고, 그리고 또 한참 있더니 입을 열어 하는 이야기가 지금은 이렇게 늙었으나 자기도 색시 때에는 이뿐이만치나 어여뻤고 얼마나 맵시가 출중났던지 노라리와 은근히 배가 맞았으나 몇 달이 못 가서 노마님이 이걸 아시고 하루는 불러 세고 때리시다가 마침내 샘에 못 이기어 인두로 하초를 지지려고 들이덤비신 일이 있다고 일러 주고 다시 몇 번 몇 번 당부하여 말하되 석숭네가 벌써부터 말을 건네는 중이니 도련님에게 맘을랑 두지 말고 몸 잘 갖고 있으라 하고 딱 떼는 것이 아닌가. 하기야 이뿐이가 무남독녀의 귀여운 외딸이 아니었더런들 사흘 후에도 바깥엔 나올 수 없었으려니와 비로소 대문을 나와 보니 그간 세상이 좀 넓어진 것 같고 마치 우리를 벗어난 짐승과 같이 몸의 가뜬함을 느꼈고 흉측스러운 산으로 뺑뺑 둘러싼 이 산골에서 벗어나 넓은 버덩으로 나간다면 기쁘기가 이보다 좀 더하리라 생각도 하여 보고 어머니의 영대로 고추밭을 매러 개울길로 내려가려니까 왼편 수풍 속에서 도련님이 불쑥 튀어나오며 또 붙들고 산에 안 갈 테냐고 대고 보채인다. 읍에 가 학교를 다니다가 요즘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온 뒤로는 공부는 할 생각 않고 날이면 날 저물도록 저만 이렇게 붙잡으러 다니는 도련님이 딱도 하거니와 한편 마님도 무섭고 또는 모처럼 용서를 받는 길로 그러고 보면 이번에는 호되이 불이 내릴 것을 알고 이뿐이는 오늘은 안 되니 낼모레쯤 가자고 좋게 달래다가 그래도 듣지 않고 굳이 가자고 성화를 하는 데는 할 수 없이 몸을 뿌리치고 뺑손을 놀 수밖에 딴도리가 없었다. 구질구질히 내리는 비로 말미암아 한동안 손을 못 댄 고추밭은 풀들이 제법 성큼히 엉기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갈피를 모르겠는데 이뿐이는 되는 대로 한편 구석에 치마를 도사리고 앉아서, 이것도 명색은 김매는 거겠지, 호미로 흙등만 따작거리며 정작 정신은 어젯밤 종은 상전과 못 사는 법이라던 어머니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만 일념으로 아로새기며 이리 씹고 저리도 씹어 본다. 그러나 이뿐이는 아무렇게도 나는 도련님과 꼭 살아 보겠다, 혼자 맹세하고 제가 아씨가 되면 어머니는 일테면 마님이 되련마는 왜 그리 극성인가 싶어서 좀 야속하였고 해가 한나절이 되어 목덜미를 확확 달릴 때까지 이리저리 곰곰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어 보매 밭은 여태 한 고랑도 다 끝이 못 났으니 이놈의 밭이, 하고 탓 안 할 탓을 하며 저절로 하품이 나올 만치 어지간히 기가 막혔다. 이번에는 좀 빨랑빨랑 하리라 생각하고 이뿐이는 호미를 잽싸게 놀리며 폭폭 찍고 덤볐으나 그래도 웬일인지 일은 손에 붙지를 않고 그뿐 아니라 등뒤 개울의 덤불에서는 온갖 잡새가 귀둥대둥 멋대로 속삭이고 먼발치에서 풀을 뜯고 있는 황소가 메― 하고 늘어지게도 소리를 내뽑으니 이뿐이는 이걸 듣고 갑자기 몸이 나른해지지 않을 수 없고 밭가에 선 수양버들 그늘에 쓰러져 한잠 들고 싶은 생각이 곧바로 나지마는 어머니가 무서워 차마 그걸 못 하고 만다. 인제는 계집애는 밭일을 안 하도록 법이 됐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이뿐이는 울화증이 나서 호미를 메꽂고 얼굴의 땀을 씻으며 앉았노라니까 들로 보리를 걷으러 가는 길인지 석숭이가 빈 지게를 지고 꺼불꺼불 밭머리에 와 서더니 아주 썩 시퉁그러지게 입을 삐죽거리며 이뿐이를 건너대고 하는 소리가―---

 

 

"너 데련님하고 그랬대지."

새파랗게 간 비수로 가슴을 쭉 내리긋는대도 아마 이토록은 재겹지 않으리라마는 이뿐이는 어서 들었느냐고 따져 볼 겨를도 없이 얼굴이 그만 홍당무가 되었고, 그놈의 소위로 생각하면 대뜸 들어덤벼 그 귓배기라도 물고 늘어질 생각이 곧 간절은 하나 한 죄는 있고 어째 볼 용기가 없으매 다만 고개를 푹 수그릴 뿐이다. 그러니까 석숭이는 제가 괜 듯싶어서 이뿐이를 짜장 넘보고 제법 밭 가운데까지 들어와 떡 버티고 서서는 또 한번 시큰둥하게 그리고 엇먹는 소리로,

"너 데련님하구 그랬대지."

전일 같으면 제가 이뿐이에게 지게 막대기로 볼기 맞을 생각도 않고 감히 이 따위 버르장머리는 하기커녕 즈 아버지 장사하는 원두막에서 몰래 참외를 따가지고 와서,

"얘 이뿐아, 너 이거 먹어라."

하다가,

"난 네가 주는 건 안 먹을 테야."

하고 몇 번 내뱉음에도 굴치 않고 굳이 먹으라고 떠맡기므로 이뿐이가 마지못하는 체하고 받아 들고는 물론 치마폭에 흙을 싹싹 문대고 나서 깨물고 앉았노라면 아무쪼록 이뿐이 맘에 잘 들도록 호미를 대신 손에 잡기가 무섭게 는실난실 김을 매주었고, 그리고 가끔 이뿐이를 웃겨 주기 위하여 그것도 재주라고 밭고랑에서 잘 봐야 곰 같은 몸뚱이로 이리 둥굴고 저리 둥굴고 하였다. 석숭 아버지는 이놈이 또 어디로 내뺐구나 하고 찾아다니다가 여길 와보니 매라는 제 밭은 안 매고 남 계집애 밭에 들어와서 대체 온 이게 무슨 놀음인지 이 꼴이고 보매 기도 막힐 뿐더러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노여운 낯을 지어 가며,

"너 이놈아, 네 밭은 안 매고 남의 밭에 들어와 그게 뭐냐?"

하고 꾸중을 하였지마는 석숭이가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고 고만 멀쑤룩하여 궁둥이의 흙을 털고 일어서며,

"이뿐이 밭 좀 매주러 왔지 뭘 그래?"

하고 되레 퉁명스러이 뻗댐에는 더 책하지 않고,

"어 망할 자식두 다 많어이!"

하고 돌아서 저리로 가며 보이지 않게 피익 웃고 마는 것인데, 그러면 이뿐이는 저의 처지가 꽤 야릇하게 됨을 알고 저기까지 분명히 들리도록,

"너보고 누가 밭 매달랬어? 가, 어여 가, 가."

하고 다 먹은 참외는 생각 않고 등을 떠다밀며 구박을 막 하던 이런 터이련만 제가 이제 와 누굴 비위를 긁다니 하늘이 무너지면 졌지 이것은 도시 말이 안 된다.

 

 

이뿐이는 남다른 부끄럼으로 온 전신이 확확 다는 듯싶었으나 그러나 조금 뒤에는 무안을 당한 거기에 대갚음이 없어서는 아니 되리라 생각하고 앙칼스러운 역심이 가슴을 콕 찌를 때에는 어깨뿐만 아니라 등어리 전체가 샐룩거리다가 새침히 발딱 일어나 사방을 훑어보더니 대낮이라 다들 일들 나가고 안마을에 사람이 없음을 알고 석숭이 소맷자락을 넌지시 끌며 그 옆 숙성히 자란 수수밭 속으로 들어간다. 밭 한복판은 아늑하고 아무 데도 보이지 않으므로 함부로 떠들어도 괜찮으려니 믿고 이뿐이는 거기다 석숭이를 세워 놓자 밭고랑에 널려진 돌 틈에서 맞아 죽지 않고 단단히 아플 만한 모리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그 옆 정강이를 모질게 후려치며,

"이 자식, 뭘 어째구 어째?"

하고 딱딱 으르니까 석숭이는 처음에 뭐나 좀 생길까 하고 좋아서 따라왔던 걸 별안간 난데없는 모진 돌만 날아듦에는,

"아야!"

하고 소리치자 똑 선불 맞은 노루 모양으로 한번 뻐들껑 뛰며 눈이 그야말로 왕방울만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석숭이는 미움보다 앞서느니 기쁨이요, 전일에는 그 옆을 지나도 본 둥 만 둥하고 그리 대단히 여겨 주지 않던 그 이뿐이가 일부러 이리 끌고 와 돌로 때리되 정말 아프도록 힘을 들일 만치 이뿐이에게 있어는 지금의 저의 존재가 그만큼 끔찍함을 그 돌에서 비로소 깨닫고 짓궂이 씽글씽글 웃으며 한번 더 뒤둥그러진, 그리고 흘게 늦은 목소리로,

"뭘 데련님하고 그랬대는데."

하고 놀려 주었다. 이뿐이는,

"뭐 이 자식?"

하고 상기된 눈을 똑바로 떴으나 이번에는 돌멩이 집을 생각을 않고 아까부터 겨우 참아 왔던 울음이,

"으응!"

하고 탁 터지자 잡은 참 덤벼들어 석숭이 옷가슴에 매어달리며 쥐어 뜯으니 석숭이는 이뿐이를 울려 논 것은 저의 큰 죄임을 얼른 알고 눈이 휘둥그래서,

"아니다, 아니다, 내 부러 그랬다, 아니다."

하고 입에 부리나케 그러나 손으로 등을 어루만지며, '아니다'를 여러 십 번을 부른 때에야 간신히 울음을 진정해 놓았고 이뿐이가 아직 느끼는 음성으로 몇 번 당부를 하니,

"인제 남 듣는 데 그러면 내 너 죽일 터야?"

"그래 인전 안 그러마."

참으로 이런 나쁜 소리는 다시 입에 담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 이뿐이도 그제야 마음을 놓고 흔적이 없도록 눈물을 닦으면서,

"다시 그래 봐라 내 죽인다!"

또 한번 다져 놓고 고추밭으로 도로 나오려 할 제 석숭이가 와락 달려들어 그 허리를 잔뜩 껴안고,

"너 그럼 우리집에서 나한테로 시집오라니깐 왜 싫다구 그랬니?"

하고 설혹 좀 성가시게 굴었다 치더라도, 만일 이뿐이가 이 행실을 도련님이 아신다면 단박에 정을 떼시려니 하는 염려만 없었더라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을 그토록 오지게 혼을 냈을 리 없었겠다고, 생각하면 두고두고 입때껏 후회가 나리만치 그렇게 사내의 뺨을 우려친 것도 결국 도련님을 위하는 이뿐이의 깨끗한 정이 아니었던가…….

 

 

가득히 품에 찬 서러움을 눈물로 가시고 나물 바구니를 손에 잡았으니, 이뿐이는 다시 일어나 산중턱으로 거친 수풍 속을 기어내리며 도라지를 하나 둘 캐기 시작한다.

참인지 아닌지 자세히는 모르나 멀리 날아온 풍설을 들어 보면, 도련님은 서울 가 어여쁜 아씨와 다시 정분이 났다 하고 그뿐만도 오히려 좋으련마는 댁의 마님은 마님대로 늙은 총각 오래 두면 병난다 하여 상냥한 아가씨만 찾는 길이니 대체 이게 웬셈인지 이뿐이는 골머리가 아팠고 도라지를 캔다고 꼬챙이를 땅에 꾸욱 꽂으니 그대로 짚고 선 채 해만 점점 부질없이 저물어 간다. 맥을 잃고 다시 내려오다 이뿐이는 앞에 우뚝 솟은 바위를 품에 얼싸안고 그 앞을 굽어보니 험악한 석벽 틈에 맑은 물은 웅숭깊이 충충 괴었고 설핏한 하늘의 붉은 노을 한쪽을 똑 떼들고 푸른 잎새로 전을 둘렀거늘, 그 모양이 보기에 퍽도 아름답다. 그걸 거울삼고 이뿐이는 저 밑에 까맣게 비치는 저의 외양을 또 한번 고쳐 뜯어 보니 한때는 도련님이 조르다 몸살도 나셨으려니와 의복은 비록 추레할망정 저의 눈에도 밉지 않게 생겼고 남 가진 이목구비에 반반도 하련마는 뭐가 부족한지 달리 눈이 맞는 도련님의 심정이 알 수 없고 어느덧 원망스러운 눈물이 눈에서 떨어지니 잔잔한 물면에 물둘레를 치기도 전에 무슨 밥이나 된다고 커단 꺽지는 휘엉휘엉 올라와 꼴딱 받아 먹고 들어간다. 이뿐이는 얼빠진 등신같이 맑은 이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니 불시로 제 몸을 풍덩 던지어 깨끗이 빠져도 죽고 싶고, 아니 이왕 죽을진댄 정든 님 품에 안겨 같이 풍, 빠지어 세상사를 다 잊고 알뜰히 죽고 싶고, 그렇다면 도련님이 이 등에 넙죽 엎디어 뺨에 뺨을 비벼 대고, 그리고 이 물을 같이 굽어보며,

"얘 울지 마라, 내가 가면 설마 아주 가겠니?"

하고 세우 달랠 제 꼭 붙들고 풍덩실 하고 왜 빠지지 못했던가. 시방은 한가도 컸건마는 그 이뿐이는 그리도 삶에 주렸던지,

"정말 올 여름엔 꼭 오우?"

하고 아까부터 몇 번 묻던 걸 또 한번 다져 보았거늘 도련님은 시원스러이 선뜻,

"그럼 오구말구. 널 두고 안 오겠니!"

하고 대답하고 손에 꺾어 들었던 노란 동백꽃을 물 위로 홱 내던지며,

"너 참 이 물이 무슨 물인지 알면 용치?"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이야기하여 가로되, 옛날에 이 산속에 한 장사가 있었고 나라에서는 그를 잡고자 사방팔면에 군사를 놓았다. 그렇지마는 장사에게는 비호같이 날랜 날개가 돋친 법이니 공중을 훌훌 나는 그를 잡을 길 없고 머리만 앓던 중 하루는 그예 이 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로되, 왜 그러냐 하면 하느님이 잡수시는 깨끗한 이 물을 몸으로 흐렸으니 누구라도 천벌을 아니 입을 리 없고 몸에 물이 닿자 돋쳤던 날개가 흐지부지 녹아 버린 까닭이라고 말하고, 도련님은 손짓으로 장사의 처참스러운 최후를 시늉하며 가장 두려운 듯이 눈을 커닿게 끔적끔적하더니 뒤를 이어 그 말이,

"아 무서! 얘 우지 마라. 저 물에 눈물이 떨어지면 너 큰일난다."

그러나 이뿐이는 그까짓 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그리 신통치 못하였고, 며칠 후 서울로 떠나면 아주 놓일 듯만 싶어서 도련님의 얼굴을 이윽히 쳐다보고 그럼 다짐을 두고 가라 하다가, 도련님이 조금도 서슴없이 입고 있던 자기의 저고리 고름 한 짝을 뚝 떼어 이뿐이 허리춤에 꾹 꽂아 주며,

"너 이래두 못 믿겠니?"

하니 황송도 하거니와 설마 이걸 두고야 잊으시진 않겠지 하고 속이 든든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대장부의 노릇이매 이렇게 하고 변심은 없을 게나 그래도 잘 따져 보니 이 고름이 말하는 것도 아니거든 차라리 따라 나서느니만 같지 못하다고 문득 마음을 고쳐 먹고 고개로 쫓아간 건 좋으련마는 왜 그랬던고. 좀더 매달리어 진대를 안 붙고 고기 주저앉고 말았으니 이제 와서는 한가만 새롭고 몸에 고이 간직하였던 옷고름을 이 손에 꺼내 들고 눈물을 흘려 보되 별수없나니 보람 없이 격지만 늘어 간다. 하나 이거나마 아주 없었더런들 그야 살맛조차 송두리 잃었으리라마는 요즘 매일과 같이, 이 험한 깊은 산속에 올라와 옛 기억을 홀로 더듬어 보며 이뿐이는 해가 저물도록 이렇게 울고 섰곤 하는 것이다.

 

 

모든 새들은 어제와 같이 노래를 부르고 날도 맑으련만 오늘은 웬일인지 이뿐이는 아직도 올라오질 않는다.

석숭이는 아버지가 읍의 장에 가서 세 마리의 닭을 팔아 그걸로 소금을 사오라 하여 아침 일찍이 나온 것도 잊고 이 산에 올라와 다리를 묶은 닭들은 한편에 내던지고 늙은 잣나무 그늘에 누워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이뿐이가 좀체 나오지 않으매 웬일일까, 고게 또 노하지나 않았나 하고 일쩌웁이 이렇게 애를 태운다. 올 가을이 얼른 되어 새 곡식을 거두면 이뿐이에게로 장가를 들게 되었으니 기쁨인들 이 위 더할 데 있으랴마는 이번도 또 이뿐이가 밥도 안 먹고 죽는다고 야단을 친다면 헛일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거늘 그렇게 쌀쌀하고 매일매일 하던 이뿐이의 태도가 요즘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다소곳하고 눈 한번 흘길 줄도 모르니 이건 참으로 춤을 추어도 다 못 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슬비가 내리던 날 마님 댁 울 뒤에서 이뿐이는 옥수수를 따고 섰고 제가 그 옆을 지날 제 은근히 손짓을 하므로 가까이 다가서니 귀에다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너 편지 하나 써주련?"

"그래 그래 써주마, 내 잘 쓴다."

석숭이는 너무 반가워서 허둥거리며 묻지 않는 소리까지 하다가 또 그 말에 내 너 하라는 대로 다 할 게니 도련님에게 편지를 쓰되, 이뿐이는 여태 기다립니다, 하고 그리고 이런 소리는 아예 입 밖에 내지 말라 하므로 그런 편지면 일년 내내 두고 썼으면 좋겠다 속으로 생각하고 채 틀 못 박힌 연필 글씨로 다섯 줄을 그리기에 꼬박이 이틀 밤을 새고 나서 약속대로 산으로 이뿐이를 만나러 올라올 때에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이 바로 아내를 만나러 오는 남편의 그 기쁨이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뿐이가 얼른 올라와야 뭐가 제일 좋으냐 물어 보고 이 닭들을 팔아 선물을 사다 주련만 오진 않고 석숭이는 암만 생각해야 영문을 모르겠으니 아마 요전번,

"이 편지 써왔으니깐 너 나구 꼭 살아야 한다."

하고 크게 얼른 것이 좀 잘못이라 하더라도 이뿐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그래."

하고 눈에 눈물을 보이며,

"그 편지 읽어 봐."

하고 부드럽게 말한 걸 보면 그리 노한 것은 아니니 석숭이는 기뻐서 그 앞에 떡 버티고, 제가 썼으나 제가 못 읽는 그 편지를 떠듬떠듬 데련님 전상사리, 가신 지가 오래 됐는디 왜 안 오구, 일년 반이 됐는디 왜 안 오구 하니깐 이뿐이는 밤마두 눈물로 새오며, 이뿐이는 그럼 죽을 테니까 날을 듯이 얼찐 와서―---이렇게 땀을 내며 읽었으나 이뿐이는 다 읽은 뒤 그걸 받아서 피봉에 도로 넣고 그리고 나물 보구니 속에 감추고는 그대로 덤덤히 산을 내려온다. 산기슭으로 내리니 앞에 큰 내가 놓여 있고 골고루도 널려 박힌 험상궂은 웅퉁바위 틈으로 물은 우람스레 부딪치며 콸콸 흘러내리매 정신이 다 아찔하여 이뿐이는 조심스레 바위를 골라 디디며 이쪽으로 건너왔으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같이 멀리 도망 가자는 도련님이 저 서울로 혼자만 삐쭉 달아난 것은 그 속이 알 수 없고 사나이 맘이 설사 변한다 하더라도 잣나무 밑에서 그다지 눈물까지 머금고 조르시던 그 도련님이 인제 와 싹도 없이 변하신다니 이야 신의 조화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이뿐이는 산처럼 잎이 퍼드러진 호양나무 밑에 와 발을 멈추며 한 손으로 보구니의 편지를 꺼내어 행주치마 속에 감추어 들고 석숭이가 쓴 편지도 잘 찾아갈는지 미심도 하거니와 또한 도련님 앞으로 잘 간다 하면 이걸 보고 도련님이 끔뻑하여 뛰어올 겐지 아닌지 그것조차 장담 못 할 일이건마는 아니, 오신다 이 옷고름을 두고 가시던 도련님이거늘 설마 이 편지에도 안 오실 리 없으리라고 혼자 서서 우기며 해가 기우는 먼 고개치를 바라보며 체부 오기를 기다린다. 체부가 잘 와야 사흘에 한 번밖에는 더 들르지 않는 줄을 저라고 모를 리 없고 그리고 어제 다녀갔으니 모레나 오는 줄은 번연히 알련마는 그래도 이뿐이는 산길에 속는 사람같이, 저 산비탈로 꼬불꼬불 돌아 나간 기나긴 산길에서 금시 체부가 보일 듯 보일 듯싶었는지, 해가 아주 넘어가고 날이 어둡도록, 지루하게도 이렇게 속 달게 체부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어제와 같이 날도 맑고 산의 새들은 노래를 부르건만 이뿐이는 아직도 나올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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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 저 밑은 늘 음침하다.

고달픈 간드렛불, 맥없이 푸르끼하다.

밤과 달라서 낮엔 되우 흐릿하였다.

겉으로 황토 장벽으로 앞뒤좌우가 콕 막힌 좁직한 구뎅이. 흡사히 무덤 속같이 귀중중하다. 싸늘한 침묵, 쿠더브레한 흙내와 징그러운 냉기만이 그 속에 자욱하다.

곡괭이는 뻔질 흙을 이르집는다. 암팡스러이 내려쪼며,

퍽 퍽 퍼억.

이렇게 메떨어진 소리뿐. 그러나 간간 우수수 하고 벽이 헐린다.

영식이는 일손을 놓고 소맷자락을 끌어당기어 얼굴의 땀을 훑는다. 이놈의 줄이 언제나 잡힐는지 기가 찼다. 흙 한줌을 집어 코밑에 바짝 들여대고 손가락으로 샅샅이 뒤져본다. 완연히 버력은 좀 변한 듯싶다. 그러나 불통버력이 아주 다 풀린 것도 아니었다. 밀똥버력이라야 금이 온다는데 왜 이리 안 나오는지.

곡괭이를 다시 집어든다. 땅에 무릎을 꿇고 궁뎅이를 번쩍 든 채 식식거린다. 곡괭이는 무작정 내려찍는다. 바닥에서 물이 스미어 무르팍이 흔건히 젖었다. 굿엎은 천판에서 흙방울은 내리며 목덜미로 굴러든다. 어떤 때에는 웃벽의 한쪽이 떨어지며 등을 탕 때리고 부서진다.

그러나 그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금을 캔다고 콩밭 하나를 다 잡쳤다. 약이 올라서 죽을둥 살둥 눈이 뒤집힌 이판이다.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곡괭이 자루를 한번 꼰아잡더니 쉴 줄 모른다.

등뒤에서는 흙 긁는 소리가 드윽드윽 난다. 아직도 버력을 다 못 친 모양. 이 자식이 일을 하나 시졸 하나. 남은 속이 바직바직 타는데 웬 뱃심이 이리도 좋아.

영식이는 살기 띤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암 말 없이 수재를 노려본다. 그제야 꾸물꾸물 바지게에 흙을 담고 등에 메고 사다리를 올라간다.

굿이 풀리는지 벽이 우찔하였다. 흙이 부서져 내린다. 전날이라면 이곳에서 아내 한번 못하고 생죽음이나 안 할까 털끝까지 쭈볏할 게다. 그러나 이젠 그렇게 되고도 싶다. 수재란 놈하고 흙더미에 묻히어 한껍에 죽는다면 그게 오히려 날 게다.

이렇게까지 몹시 몹시 미웠다.

이놈 풍치는 바람에 애꿎은 콩밭 하나만 결딴을 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낭패다. 세 벌 논도 못 맸다. 논둑의 풀은 성큼 자란 채 어지러이 널려 있다. 이 기미를 알고 지주는 대로하였다. 내년부터는 농사질 생각을 말라고 발을 굴렀다. 땅은 암만을 파도 지수가 없다.

이만해도 다섯 길은 훨썩 넘었으리라. 좀더 지펴야 옳을지 혹은 북으로 밀어야 옳을지, 우두머니 망설거린다. 금점 일에는 푸뜸이다. 입때껏 수재의 지휘를 받아 일을 하여왔고, 앞으로도 역 그러해야 금을 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칙칙한 짓은 안 한다.

“이리 와 이것 좀 파게.”

그는 어쓴 위풍을 보이며 이렇게 분부하였다. 그리고 저는 일어나 손을 털며 뒤로 물러선다. 수재는 군말 없이 고분하였다. 시키는 대로 땅에 무릎을 꿇고 벽채로 군버력을 긁어낸 다음 다시 파기 시작한다.

영식이는 치다 나머지 버력을 짊어진다. 커단 걸대를 뒤툭거리며 사다리로 기어오른다. 굿문을 나와 버력더미에 흙을 마악 내칠려 할 제,

“왜 또 파. 이것들이 미쳤나 그래!”

산에서 내려오는 마름과 맞닥뜨렸다. 정신이 떠름하여 그대로 벙벙히 섰다. 오늘은 또 무슨 포악을 들을려는가.

“말라니까 왜 또 파는 게야.” 하고 영식이의 바지게 뒤를 지팡이로 콱 찌르더니,

“갈아먹으라는 밭이지 흙 쓰고 들어가라는 거야, 이 미친것들아. 콩밭에서 웬 금이 나온다구 이 지랄들이야 그래.” 하고 목에 핏대를 올린다. 밭을 버리면 간수 잘못한 자기 탓이다. 날마다 와서 그 북새를 피고 금하여도 담날 보면 또 여전히 파는 것이다.

“오늘로 이 구뎅이를 도로 묻어놔야지 낼로 당장 징역 갈 줄 알게.”

너무 감정에 격하여 말도 잘 안 나오고 떠듬떠듬거린다. 주먹은 곧 날아들 듯이 허구리게서 불불 떤다.

“오늘만 좀 해보고 고만두겠어유.”

영식이는 낯이 붉어지며 가까스로 한마디하였다. 그리고 무턱대고 빌었다. 마름은 들은 척도 안하고 가버린다. 그 뒷모양을 영식이는 멀거니 배웅하였다. 그러나 콩밭 낯짝을 들여다보니 무던히 애통 터진다. 멀쩡한 밭에가 구멍이 사면 풍풍 뚫렸다.

예제없이 버력은 무데기 무데기 쌓였다. 마치 사태 만난 공동 묘지와도 같이 귀살쩍고 되우 을씨년스럽다. 그다지 잘되었던 콩 포기는 거반 버력더미에 다아 깔려버리고 군데군데 어쩌다 남은 놈들만이 고개를 나풀거린다. 그 꼴을 보는 것도 자식 죽는 걸 보는 게 낫지 차마 못할 경상이었다.

농토는 모조리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올 밭도지 벼 두 섬 반은 뭘로 해내야 좋을지. 게다 밭을 망쳤으니 자칫하면 징역을 갈는지도 모른다. 영식이가 구뎅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동무는 땅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태연무심히 담배만 뻑뻑 피는 것이다.

“언제나 줄을 잡는 거야.”

“인제 차차 나오겠지.”

“인제 나온다.” 하고 코웃음치고 엇먹더니 조금 지나매,

“이 새끼.”

흙덩이를 집어들고 골통을 내려친다.

수재는 어쿠 하고 그대로 폭 엎드린다. 그러다 벌떡 일어선다. 눈에 띄는 대로 곡괭이를 잡자 대뜸 달겨들었다. 그러나 강약이 부동. 왁살스러운 팔뚝에 튕겨져 벽에 가서 쿵 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에 제가 빼앗긴 곡괭이가 정백이를 겨누고 날아드는 걸 보았다. 고개를 홱 돌린다. 곡괭이는 흙벽을 퍽 찍고 다시 나간다.

수재 이름만 들어도 영식이는 이가 갈렸다. 분명히 홀딱 속은 것이다.

영식이는 본디 금전에 이력이 없었다. 그리고 흥미도 없었다. 다만 밭고랑에 웅크리고 앉아서 땀을 흘려가며 꾸벅꾸벅 일만 하였다. 올엔 콩도 뜻밖에 잘 열리고 맘이 좀 놓였다. 하루는 홀로 김을 매고 있노라니까,

“여보게, 덥지 않은가. 좀 쉬었다 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수재다. 농사는 안 짓고 금전으로만 돌아다니더니 무슨 바람에 또 왔는지 싱글벙글한다. 좋은 수나 걸렸나 하고,

“돈 좀 많이 벌었나. 나 좀 주게.”

“벌구 말구, 맘껏 먹고 맘껏 쓰고 했네.”

술에 거나한 얼굴로 신껏 주적거린다. 그리고 밭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 객설을 부리더니,

“자네, 돈벌이 좀 안할려나. 이 밭에 금이 묻혔네 금이.”

“뭐?” 하니까,

바로 이 산 너머 큰골에 광산이 있다. 광부를 삼백여 명이나 부리는 노다지판인데 매일 소출되는 금이 칠십 냥을 넘는다. 돈으로 치면 칠천 원. 그 줄맥이 큰 산허리를 뚫고 이 콩밭으로 뻗어나왔다는 것이다. 둘이서 파면 불과 열흘 안에 줄을 잡을 게고, 적어도 하루 서너 돈씩은 따리라.

우선 삼십만 원만 해도 얼마냐. 소를 산대도 만 필이 아니냐고. 그러나 영식이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금점이란 칼 물고 뜀뛰기다, 잘되면이어니와 못되면 신세만 조핀다, 이렇게 전일부터 들은 소리가 있어서였다. 그 담날도 와서 꾀송거리다 갔다.

셋째 번에는 집으로 찾아왔는데 막걸리 한 병을 손에 떡 들고 영을 피운다. 몸이 달아서 또 온 것이었다. 봉당에 걸터앉아서 저녁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당수는 몸을 훑는다는 둥 일꾼은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둥 남들은 논을 사느니 밭을 사느니 떠드는데 요렇게 지내다 그만둘 테냐는 둥 일쩌웁게 지껄인다.

“아주머니, 이것 좀 먹게 해주시게유.”

그리고 비로소 영식이 아내에게 술병을 내놓는다. 그들은 밥상을 끼고 앉아서 즐거웁게 술을 마셨다. 몇 잔이 들어가고 보니 영식이의 생각도 저으기 돌아섰다. 딴은 일년 고생하고 끽 콩 몇 섬 얻어먹느니보다는 금을 캐는 것이 슬기로운 짓이다.

하루에 잘만 캔다면 한 해 줄곧 공들인 그 수확보다 훨썩 이익이다. 올 봄 보낼 제 비료값, 품삯, 빚해 빚진 칠 원 까닭에 나날이 졸리는 이판이다. 이렇게 지지하게 살고 말 바에는 차라리 가로지나 세로지나 사내자식이 한번 해볼 것이다.

“내일부터 우리 파보세. 돈만 있으면이야 그까진 콩은…”

수재가 안달스리 재우쳐 보채일 제 선뜻 응낙하였다.

“그래 보세. 빌어먹을 거 안됨 고만이지.”

그러나 꽁무니에서 죽을 마시고 있던 아내가 허구리를 쿡쿡 찔렀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면 좀 주저할 뻔도 하였다.

아내는 아내대로의 심이 빨랐다. 시체는 금점이 판을 잡았다. 섣부르게 농사만 짓고 있다간 결국 비렁뱅이밖에는 더 못된다. 얼마 안 있으면 산이고 논이고 밭이고 할 것 없이 다 금쟁이 손에 구멍이 뚫리고 뒤집히고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그때는 뭘 파먹고 사나.

자, 보아라. 머슴들은 짜위나 한 듯이 일하다 말고 후딱하면 금점으로들 내빼지 않는가. 일꾼이 없어서 올엔 농사를 질 수 없느니 마느니 하고 동리에서는 떠들썩하다. 그리고 번동 포농이 쫓아 호미를 내어던지고 강변으로 개울로 사금을 캐러 달아난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다비신에다 옥당목을 떨치고 히짜를 뽑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콩밭에서 금이 날 줄은 아주 꿈밖이었다. 놀라고도 또 기뻤다. 올해는 노냥 침만 삼키던 그놈 코다리(명태)를 짜장 먹어보겠구나, 만 하여도 속이 메질 듯이 짜릿하였다. 뒷집 양근댁은 금점 덕택에 남편이 사다준 흰 고무신을 신고 나릿나릿 걷는 것이 무척 부러웠다. 저도 얼른 금이나 펑펑 쏟아지면 흰 고무신도 신고 얼굴에 분도 바르고 하리라.

“그렇게 해보지 뭐. 저 양반 하잔 대로만 하면 어련히 잘될라구.”

얼뚤하여 앉았는 남편을 이렇게 추겼던 것이다.

동이 트기 무섭게 콩밭으로 모였다. 수재는 진언이나 하는 듯 이리대고 중얼거리고 저리대고 중얼거리고 하였다. 그리고 덤벙거리며 이리 왔다가 저리 왔다가 하였다. 제 딴은 땅속에 누운 줄맥을 어림하여 보는 맥이었다.

한참을 밭을 헤매다가 산 쪽으로 붙은 한구석에 딱 서며 손가락을 펴들고 설명한다. 큰 줄이란 본시 산운 산을 끼고 도는 법이다. 이 줄이 노다지임에는 필시 이켠으로 버듬히 누웠으리라. 그러니 여기서부터 파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영식이는 그 말이 무슨 소린지 새기지는 못했다. 마는 금점에는 난다는 수재이니 그 말대로 하기만 하면 영낙없이 금퇴야 나겠지 하고 그것만 꼭 믿었다. 군말 없이 지시해 받은 곳에다 삽을 폭 꽂고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금도 금이면 애써 키워온 콩도 콩이었다. 거진 다 자란 허울 멀쑥한 놈들이 삽 끝에 으스러지고 흙에 묻히고 하는 것이다. 그걸 보는 것은 썩 속이 아팠다. 애틋한 생각이 물밀 때 가끔 삽을 놓고 허리를 구부려서 콩잎의 흙을 털어주기도 하였다.

“아, 이 사람아, 맥적게 그건 봐 뭘해, 금을 캐자니깐.”

“아니야, 허리가 좀 아파서!”

핀잔을 얻어먹고는 좀 열쩍었다. 하기는 금만 잘 터져나오면 이까진 콩밭쯤이야. 이 밭을 풀어 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아버리고 삽의 흙을 아무렇게나 콩잎 위로 홱홱 내어던진다.

“구구루 땅이나 파먹지 이게 무슨 지랄들이야!”

동리 노인은 뻔질 찾아와서 귀 거친 소리를 하고 하였다.

밭에 구멍을 셋이나 뚫었다. 그리고 대구 뚫는 길이었다. 금인가 난장을 맞을 건가 그것 때문에 농꾼은 버렸다. 이게 필연코 세상이 망하려는 징조이리라. 그 소중한 밭에다 구멍을 뚫고 이 지랄이니 그놈이 온전할 겐가.

노인은 제물 화에 지팡이를 들어 삿대질을 아니할 수 없었다.

“벼락맞느니 벼락맞어.”

“염려 말아유. 누가 알래지유.”

영식이는 그럴 적마다 데퉁스리 쏘았다. 골김에 흙을 되는대로 내꼰지고는 침을 탁 뱉고 구뎅이로 들어간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끄은하였다. 줄을 찾는다고 콩밭을 통히 뒤집어놓았다. 그리고 줄이 언제나 나올지 아직 까맣다. 논도 못 매고 물도 못 보고 벼가 어이 되었는지 그것조차 모른다. 밤에는 잠이 안 와 멀뚱하니 애를 태웠다.

수재는 낙담하는 기색도 없이 늘 하냥이었다. 땅에 웅숭그리고 시적시적 노량으로 땅만 판다.

“줄이 꼭 나오겠나?” 하고 목이 말라서 물으면,

“이번에 안 나오거든 내 목을 비게.” 서슴지 않고 장담을 하고는 꿋꿋하였다.

이걸 보면 영식이도 마음이 좀 뇌는 듯싶었다. 전들 금이 없다면 무슨 멋으로 이 고생을 하랴. 반드시 금은 나올 것이다. 그제서는 이왕 손해는 하릴없거니와 고만두리라는 절망이 스스로 사라지고 다시금 주먹이 쥐어지는 것이었다.

캄캄하게 밤은 어두웠다. 어디선가 뭇개가 요란히 짖어대인다.

남편은 진흙투성이를 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풀이 죽어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고 아랫묵에 축 늘어진다.

이 꼴을 보니 아내는 맥이 다시 풀린다. 오늘도 또 글렀구나. 금이 터지며는 집을 한 채 사간다고 자랑을 하고 왔더니 이내 헛일이었다. 인제 좌지가 나서 낯을 들고 나아갈 염의조차 없어졌다.

남편에게 저녁을 갖다주고 딱하게 바라본다.

“인젠 꿔온 양식도 다 먹었는데…”

“새벽에 산제를 좀 지낼 텐데 한번만 더 꿔와.”

남의 말에는 대답 없고 유하게 흘개늦은 소리뿐 그리고 드러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아버린다.

“죽거리두 없는데 산제는 무슨…”

“듣기 싫어, 요망맞은 년 같으니.”

이 호통에 아내는 고만 멈씰하였다. 요즘 와서는 무턱대고 공연스리 골만 내는 남편이 역 딱하였다. 환장을 하는지 밤잠도 아니 자고 소리만 뻑뻑 지르며 덤벼들려고 든다. 심지어 어린것이 좀 울어도 이 자식 갖다 내꾼지라고 북새를 피는 것이다.

저녁을 아니 먹으므로 그냥 치워버렸다. 남편의 영을 거역키 어려워 양근댁한테로 또다시 안 갈 수 없다. 그간 양식은 줄곧 꾸어다먹고 갚지도 못하였는데 또 무슨 면목으로 입을 벌릴지 난처한 노릇이었다.

그는 생각다 끝에 있는 염치를 보째 쏟아던지고 다시 한번 찾아가는 것이다. 마는 딱 맞닥뜨리어 입을 열고,

“낼 산제를 지낸다는데 쌀이 있어야지유.” 하자니 역 낯이 화끈하고 모닥불이 날아든다.

그러나 그들은 어지간히 착한 사람이었다.

“암 그렇지요. 산신이 벗나면 죽도 글릅니다.” 하고 말을 받으며 그 남편은 빙그레 웃는다. 워낙 이 금점에 장구 닳아난 몸인 만치 이런 일에는 적잖이 속이 틔었다. 손수 쌀 닷 되를 떠다주며,

“산제란 안 지냄 몰라두 이왕 지낼려면 아주 정성껏 해야 됩니다. 산신이란 노하길 잘하니까유.”

하고 그 비방까지 깨쳐 보낸다.

쌀을 받아들고 나오며 영식이 처는 고마움보다 먼저 미안에 질리어 얼굴이 다시 빨갰다. 그리고 그들 부부 살아가는 살림이 참으로 참으로 몹시 부러웠다. 양근댁 남편은 날마다 금점으로 감돌며 버력더미를 뒤지고 토록을 줏어온다.

그걸 온종일 장판돌에다 갈면 수가 좋으면 이삼 원, 옥아도 칠팔십 전 꼴은 매일 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쌀을 산다, 피륙을 끊는다, 떡을 한다, 장리를 놓는다 - 그런데 우리는 왜 늘 요 꼴인지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메이는 듯 맥맥한 한숨이 연발을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 떡쌀을 담그었다. 낼은 뭘로 죽을 쑤어먹을는지. 웃목에 웅크리고 앉아서 맞은쪽에 자빠져 있는 남편을 곁눈으로 살짝 할퀴어본다. 남들은 돌아다니며 잘두 금을 줏어오련만 저 망나니 제 밭 하나를 다 버려도 금 한 톨 못 줏어오나. 에에, 변변치도 못한 사나이.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이 거푸 두 번을 터진다.

밤이 이슥하여 그들 양주는 떡을 하러 나왔다. 남편은 절구에 쿵쿵 빻았다. 그러나 체가 없다. 동네로 돌아다니며 빌려오느라고 아내는 다리에 불풍이 났다.

“왜 이리 앉었수, 불 좀 지피지.”

떡을 찧다가 얼이 빠져서 멍하니 앉았는 남편이 밉쌀스럽다. 남은 이래저래 애를 죄는데 저건 무슨 생각을 하고 저리 있는 건지. 낫으로 삭정이를 탁탁 조겨서 던져주며 아내는 은근히 훅닥이었다. 닭이 두 홰를 치고 나서야 떡은 되었다. 아내는 시루를 이고 남편은 겨드랑이에 자리때기를 꼈다. 그리고 캄캄한 산길을 올라간다.

비탈길을 얼마 올라가서야 콩밭은 놓였다. 전면이 우뚝한 검은 산에 둘리어 막힌 곳이었다. 가생이로 느티 대추나무들은 머리를 풀었다. 밭머리 조금 못미처 남편은 걸음을 멈추자 뒤의 아내를 돌아본다.

“인내, 그리구 여기 가만히 섰어.”

시루를 받아 한 팔로 껴안고 그는 혼자서 콩밭으로 올라섰다. 앞에 쌓인 것이 모두 흙더미, 그 흙더미를 마악 돌아설려 할 제 아마 돌을 찼나보다. 몸이 쓰러지려고 우찔끈하니 아내가 기겁을 하여 뛰어오르며 그를 부축하였다.

“부정 타라구 왜 올라와, 요망맞은 년.”

남편은 몸을 고루잡자 소리를 뻑 지르며 아내 얼뺨을 붙인다. 가뜩이나 죽으라 죽으라 하는데 불길하게도 계집년이. 그는 마뜩지 않게 두덜거리며 밭으로 들어간다. 밭 한가운데다 자리를 펴고 그 위에 시루를 놓았다. 그리고 시루 앞에다 공손하고 정성스레 재배를 커다랗게 한다.

“우리를 살려줍시사. 산신께서 거들어주지 않으면 저희는 죽을 밖에 꼼짝 수 없읍니다유.”

그는 손을 모으고 이렇게 축원하였다.

아내는 이 꼴을 바라보며 독이 뾰록 같이 올랐다. 금점을 합네 하고 금 한 톨 못 캐는 것이 버릇만 점점 글러간다. 그전에는 없더니 요새로 건듯하면 탕탕 때리는 못된 버릇이 생긴 것이다. 금을 캐랬지 뺨을 치랬나. 제발 덕분에 고놈의 금 좀 나오지 말았으면. 그는 뺨 맞은 앙심으로 맘껏 방자하였다.

하긴 아내의 말 고대로 되었다. 열흘이 썩 넘어도 산신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남편은 밤낮으로 눈을 까뒤집고 구덩이에 묻혀 있었다. 어쩌다 집엘 내려오는 때이면 얼굴이 헐떡하고 어깨가 축 늘어지고 거반 병객이었다. 그리고서 잠자코 커단 몸집을 방고래에다 큉, 하고 내던지고 하는 것이다.

“제이미 붙을, 죽어나 버렸으면.”

혹은 이렇게 탄식하기도 하였다.

아내는 바가지에 점심을 이고서 집을 나섰다. 젖먹이는 등을 두드리며 좋다고 끽끽거린다.

이젠 흰 고무신이고 코다리고 생각조차 물렸다. 그리고 금 하는 소리만 들어도 입에 신물이 날 만큼 되었다. 그건 고사하고 꿔다먹은 양식에 졸리지나 말았으면 그만도 좋으리마는.

가을은 논으로 밭으로 누으렇게 내리었다. 농꾼들은 기꺼운 낯을 하고 서로 만나면 흥겨운 농담, 그러나 남편은 앰한 밭만 망치고 논조차 건살 못하였으니 이 가을에는 뭘 거둬들이고 뭘 즐겨할는지. 그는 동리 사람의 이목이 부끄러워 산길로 돌았다.

솔숲을 나서서 멀리 밖에를 바라보니 둘이 다 나와 있다. 오늘도 또 싸운 모양. 하나는 이쪽 흙더미에 앉았고 하나는 저쪽에 앉았고. 서로들 외면하여 담배만 뻑뻑 피운다.

“점심들 잡숫게유.”

남편 앞에 바가지를 내려놓으며 가만히 맥을 보았다.

남편은 적삼이 찢어지고 얼굴에 생채기를 내었다. 그리고 두 팔을 걷고 먼 산을 향하여 묵묵히 앉았다.

수재는 흙에 박혔다 나왔는지 얼굴은커녕 귓속드리 흙투성이다. 코밑에는 피딱지가 말라붙었고 아직도 조금씩 피가 흘러내린다. 영식이 처를 보더니 열쩍은 모양. 고개를 돌리어 모로 떨어치며 입맛만 쩍쩍 다신다.

금을 캐라니까 밤낮 피만 내다 말라는가. 빚에 졸리어 남은 속을 볶는데 무슨 호강에 이지랄들인구. 아내는 못마땅하여 눈가에 살을 모았다.

“산제 지낸다구 꿔온 것은 은제나 갚는다지유?”

뚱하고 있는 남편을 향하여 말끝을 꼬부린다. 그러나 남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어조를 좀 돋으며,

“갚지도 못할 걸 왜 꿔오라 했지유!” 하고 얼추 호령이었다.

이 말은 남편의 채 가라앉지도 못한 분통을 다시 건드린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황밤주먹을 쥐어 창낭할 만치 아내의 골통을 후렸다.

“계집년이 방정맞게.”

다른 것은 모르나 주먹에는 아찔이었다. 멋없이 덤비다간 골통이 부서진다. 암상을 참고 바르르 하다가 이윽고 아내는 등에 업은 언내를 끌러들었다. 남편에게로 그대로 밀어던지니 아이는 까르륵 하고 숨 모는 소리를 친다. 그리고 아내는 돌아서서 혼잣말로,

“콩밭에서 금을 딴다는 숭맥도 있담.” 하고 빗대놓고 비양거린다.

“이년아, 뭐!”

남편은 대뜸 달겨들며 그 볼치에다 다시 올찬 황밤을 주었다. 저그나면 계집이니 위로도 하여주련만 요건 분만 폭폭 질러놓려나. 예이, 빌어먹을 거, 이판새판이다.

“너허구 안 산다. 오늘루 가거라.”

아내를 와락 떠다밀어 논뚝에 제켜놓고 그 허구리를 발길로 퍽 질렀다.

아내는 입을 헉 하고 벌린다.

“네가 허라구 옆구리를 쿡쿡 찌를 제는 은제냐, 요 집안 망할 년.”

그리고 다시 퍽 질렀다. 연하여 또 퍽.

이 꼴들을 보니 수재는 조바심이 일었다. 저러다가 그 분풀이가 다시 제게로 슬그머니 옮아올 것을 지르채었다. 인제 걸리면 죽는다. 그는 비슬비슬하다 어느 틈엔가 구뎅이 속으로 시나브로 없어져버린다. 볕은 다스로운 가을 향취를 풍긴다. 주인을 잃고 콩은 무거운 열매를 둥글둥글 흙에 굴린다. 맞은쪽 산밑에서 벼들을 베며 기뻐하는 농꾼의 노래.

“터졌네, 터져.”

수재는 눈이 휘둥그렇게 굿문을 뛰어나오며 소리를 친다. 손에는 흙 한줌이 잔뜩 쥐었다.

“뭐?” 하다가,

“금줄 잡았어, 금줄.”

“응!” 하고 외마디를 뒤남기자 영식이는 수재 앞으로 살같이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그 흙을 받아들고 샅샅이 헤쳐보니 딴은 재래에 보지 못하던 불그죽죽한 황토이었다. 그는 눈에 눈물이 핑 돌며,

“이게 원줄인가?”

“그럼 이것이 곱색줄이라네. 한 포에 댓 돈씩은 넉넉잡히대.”

영식이는 기쁨보다 먼지 기가 탁 막혔다. 웃어야 옳을지 울어야 옳을지. 다만 입을 반쯤 벌린 채 수재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본다.

“이리 와봐. 이게 금이래.”

이윽고 남편은 아내를 부른다. 그리고 내 뭐랬어, 그러게 해보라고 그랬지, 하고 설면설면 덤벼오는 아내가 한결 어여뻤다. 그는 엄지가락으로 아내의 눈물을 지워주고 그리고 나서 껑충거리며 구뎅이로 들어간다.

“그 흙 속에 금이 있지요?”

영식이처가 너무 기뻐서 코다리에 고래등 같은 집까지 연상할 제 수재는 시원스러이,

“네, 한 포대에 오십 원씩 나와유.” 하고 대답하고 오늘밤에는 꼭 정녕코 꼭 달아나리라 생각하였다.

거짓말이란 오래 못 간다. 봉이 나서 뼉다귀도 못 추리기 전에 훨훨 벗어나는 게 상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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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산한 검은 구름이 하늘에 뭉게뭉게 모여드는 것이 금시라도 비 한줄기 할 듯하면서도 여전히 짓궂은 햇발은 겹겹 산속에 묻힌 외진 마을을 통째로 자실 듯이 달구고 있었다. 이따금 생각나는 듯 살매들린 바람은 논밭간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미쳐 날뛰었다.

뫼 밖으로 농꾼들을 멀리 품앗이로 내보낸 안말의 공기는 쓸쓸하였다. 다만 맷맷한 미루나무숲에서 거칠어가는 농촌을 읊는 듯 매미의 애끓는 노래….

매움! 매애움!

춘호는 자기 집 - 올봄에 오 원을 주고 사서 들은 묵삭은 오막살이집 - 방문턱에 걸터앉아서 바른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는 봉당에서 저녁으로 때울 감자를 씻고 있는 아내를 묵묵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사날 밤이나 눈을 안 붙이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농사에 고리삭은 그의 얼굴은 더욱 해쓱하였다.

아내에게 다시 한 번 졸라보았다. 그러나 위협하는 어조로,

“이봐, 그래 어떻게 돈 이 원만 안 해줄 테여?”

아내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갓 잡아온 새댁모양으로 씻는 감자나 씻을 뿐 잠자코 있었다. 되나 안되나 좌우간 이렇다 말이 없으니 춘호는 울화가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타곳에서 떠돌아온 몸이라 자기를 믿고 장리를 주는 사람도 없고 또는 그 알량한 집을 팔려 해도 단 이삼 원의 작자도 내닫지 않으므로 앞뒤가 꼭 막혔다. 마는 그래도 아내는 나이 젊고 얼굴 똑똑하겠다, 돈 이 원쯤이야 어떻게라도 될 수 있겠기에 묻는 것인데 들은 체도 안 하니 괘씸한 듯싶었다.

그는 배를 튀기며 다시 한 번,

“돈 좀 안 해줄 테에?”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대꾸는 역시 없었다.

춘호는 노기 충천하여 불현듯 문지방을 떠다밀며 벌떡 일어섰다. 눈을 흡뜨고 벽에 기대인 지게막대를 손에 잡자 아내의 옆으로 바람같이 달겨들었다.

“이년아, 기집 좋다는 게 뭐여. 남편의 근심도 덜어주어야지, 끼고 자자는 기집이여?”

지게막대는 아내의 연한 허리를 모질게 후렸다. 까부라지는 비명은 모지락스리 찌그러진 울타리를 벗어나간다. 잼처 지게막대는 앉은 채 고꾸라진 아내의 발뒤축을 얼러 볼기를 내려갈겼다.

“이년아, 내가 언제부터 너에게 조르는 게여?”

범같이 호통을 치며 남편이 지게막대를 공중으로 다시 올리며 모질음을 쓸 때 아내는,

“에구머니!”

하고 외마디를 질렀다. 연하여 몸을 뒤치자 거반 엎어진 듯이 싸리문 밖으로 내달렸다. 얼굴에 눈물이 흐른 채 황그리는 걸음으로 문앞의 언덕을 내리어 개울을 건너고 맞은쪽에 뚫린 콩밭 길로 들어섰다.

“너, 네가 날 피하면 어딜 갈 테여?”

발길을 막는 듯한 의미 있는 호령에 달아나던 아내는 다리가 멈칫하였다. 그는 고개를 돌리어 싸리문 안에 아직도 지게막대를 들고 섰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른에게 죄진 어린애같이 입만 종깃종깃하다가 남편이 뛰어나올까 겁이 나서 겨우 입을 열었다.

“쇠돌 엄마 집에 좀 다녀올께유.”

쭈뼛쭈뼛 변명을 하고는 가던 길을 다시 횡허케 내걸었다. 아내라고 요새 이 돈 이 원이 금시로 필요함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마는 그의 자격으로나 노동으로나 돈 이 원이란 감히 땅띔도 못해볼 형편이었다. 벌이래야 하잘것없는 것 -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남에게 뒤질까 영산이 올라 산으로 빼는 것이다.

조그만 종댕이를 허리에 달고 거한 산중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도라지, 더덕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깊은 산속으로 우중충한 돌 틈바귀로 잔약한 몸으로 맨발에 짚신짝을 끌며 강파른 산등을 타고 돌려면 젖 먹던 힘까지 녹아 내리는 듯 진땀이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린다.

아랫도리를 단 외겹으로 두른 낡은 치맛자락은 다리로, 허리로 척척 엉기어 걸음을 방해하였다. 땀에 불은 종아리는 거칠은 숲에 긁혀매여 그 쓰라림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무거운 흙내는 숨이 탁탁 막히도록 가슴을 찌른다. 그러나 삶에 발버둥치는 순진한 그의 머리는 아무 불평도 일지 않았다.

가물에 콩 나기로 어쩌다 도라지 순이라도 어지러운 숲 속에 하나 둘 뾰족이 뻗어오른 것을 보면 그는 그래도 기쁨에 넘치는 미소를 띠었다. 때로는 바위도 기어올랐다. 정히 못 기어오를 그런 험한 곳이면 칡덩굴에 매어달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땟국에 절은 무명적삼은 벗어서 허리춤에다 꾹 찌르고는 호랑이숲이라 이름난 강원도 산골에 매어달려 기를 쓰고 허비적거린다.

골 바람은 지날 적마다 알몸을 두른 치맛자락을 공중으로 날린다. 그제마다 검붉은 볼기짝을 사양 없이 내보이는 칡덩굴이 그를 본다면, 배를 움켜쥐어도 다 못 볼 것이다. 마는 다행히 그윽한 산골이라 그 꼴을 비웃는 놈은 뻐꾸기뿐이었다.

이리하여 해동갑으로 해갈을 하고 나면 캐어 모은 도라지, 더덕은 얼러 사발 가웃, 혹은 두어 사발 남짓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동리로 내려와 주막거리에 가서 그걸 내주고 보리쌀과 사발 바꿈을 하였다. 그러나 요즘엔 그나마도 철이 겨워 소출이 없다. 그 대신 남의 보리방아를 온종일 찧어주고 보리밥 그릇이나 얻어다가는 집으로 돌아와 농토를 못 얻어 뻔뻔히 노는 남편과 같이 나누는 것이 그날 하루하루의 생활이었다. 그러고 보니 돈 이 원커녕 당장 목을 딴대도 피도 나올지가 의문이었다.

만약 돈 이 원을 돌린다면 아는 집에서 보리라도 꾸어 파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온 동리의 아낙네들이 치맛바람에 팔자 고쳤다고 쑥덕거리며 은근히 시새우는 쇠돌 엄마가 아니고는 노는 벌이를 가진 사람이 없다. 그런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는 자기 꼴 주제에 제물에 눌려서 호사로운 쇠돌 엄마에게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쇠돌 엄마도 처음에야 자기와 같이 천한 농부의 계집이련만 어쩌다 하늘이 도와 동리의 부자양반 이 주사와 은근히 배가 맞은 뒤로는 얼굴도 모양 내고, 옷치장도 하고, 밥 걱정도 안하고 하여 아주 금 방석에 딩구는 팔자가 되었다. 그리고 쇠돌 아버지도 이게 웬 땡이냔 듯이 아내를 내어논 채 눈을 살짝 감아버리고 이 주사에게서 나는 옷이나 입고, 주는 쌀이나 먹고 연년이 신통치 못한 자기 농사에는 한 손을 떼고는 히짜를 뽑는 것이 아닌가!

사실 말인즉, 춘호 처가 쇠돌 엄마에게 죽어도 아니 가려는 그 속 까닭은 정작 여기 있었다.

바로 지난 늦은 봄, 달이 뚫어지게 밝은 어느 밤이었다. 춘호가 보름 게추를 보러 산모퉁이로 나간 것이 이슥하여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집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인젠 자고 오려나 생각하고는 막 드러누워 잠이 들려니까 웬 난데없는 황소 같은 놈이 뛰어들었다. 허둥지둥 춘호처를 마구 깔다가 놀라서 으악 소리를 치는 바람에, 그냥 달아난 일이 있었다. 어수룩한 시골 일이라 별반 풍설도 아니 나고 쓱싹 되었으나 며칠이 지난 뒤에야 그것이 동리의 부자 이 주사의 소행임을 비로소 눈치채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춘호 처는 쇠돌 엄마와 직접 관계는 없단대도 그를 대하면 공연스리 얼굴이 뜨뜻하여지고 몹시 어색하였다. 죄나 진 듯이….

그리고 더우기 쇠돌 엄마가, ‘새댁, 나는 속옷이 세 개구, 버선이 네 벌이구 행.’ 하며, 아주 좋다고 핸들대는 그 꼴을 보면 혹시 자기에게 한 점을 두고서 비양거리는 거나 아닌가 하는 옥생각으로 무안해서 고개도 못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기도 좀만 잘했더면 지금쯤은 쇠돌 엄마처럼 호강을 할 수 있었을 그런 갸륵한 기회를 깝살려버린 자기 행동에 대한 후회와 애탄으로 말미암아 마음을 괴롭히는 그 쓰라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러한 욕을 보더라도 나날이 심해가는 남편의 무지한 매보다는 그래도 좀 헐할 게다. 오늘은 한맘 먹고 쇠돌 엄마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춘호 처는 이번 걸음이 헛발이나 안 칠까 일념으로 심화를 하며 수양버들이 쭉 늘여박힌 논두렁길로 들어섰다.

그는 시골 아낙네로는 용모가 매우 반반하였다. 좀 야윈 듯한 몸매는 호리호리한 것이 소위 동리의 문자대로 외입깨나 하얌직한 얼굴이었으되 추리한 의복이며 퀴퀴한 냄새는 거지를 볼지른다. 그는 왼손 바른손으로 겨끔내기로 치맛귀를 여며가며 속살이 뼈질까 조심조심이 걸었다. 감사나운 구름송이가 하늘 신폭을 휘덮고는 차츰차츰 지면으로 처져 내리더니 그예 산봉우리에 엉기어 살풍경이 되고 만다. 먼데서 개짖는 소리가 앞뒷산을 한적하게 울린다. 빗방울은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차차 굵어지며 무더기로 퍼부어내린다.

춘호 처는 길가에 늘어진 밤나무 밑으로 뛰어들어가 비를 거니며 쇠돌 엄마 집을 멀리 바라보았다. 북쪽 산기슭 높직한 울타리로 뺑 돌려 두르고 앉았는 오묵하고 맵시 있는 집이 그 집이었다. 그런데 싸리문이 꼭 닫힌 걸 보면 아마 쇠돌 엄마가 농군청에 저녁 제누리를 나르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쇠돌 엄마 오기를 지켜보며 오두커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뭇잎에서 빗방울은 뚝뚝 떨어지며 그의 뺨을 흘러 젖가슴으로 스며든다. 바람은 지날 적마다 냉기와 함께 굵은 빗발을 몸에 들여친다. 비에 쪼로록 젖은 치마가 몸에 찰싹 감기어 허리로, 궁둥이로, 다리로, 살의 윤곽이 그대로 비쳐올랐다.

무던히 기다렸으나 쇠돌 엄마는 오지 않았다. 하도 진력이 나서 하품을 하여가며 정신없이 서 있느라니 왼편 언덕에서 사람 오는 발자취 소리가 들린다. 그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나 날쌔게 나무 틈으로 몸을 숨겼다. 동이 배를 가진 이 주사가 지우산을 받쳐쓰고는 쇠돌네 집으로 향하여 응뎅이를 껍쭉거리며 내려가는 길이었다. 비록 키는 작달막하나 숱 좋은 수염이든지 온 동리를 털어야 단 하나뿐인 탕건이든지, 썩 풍채 좋은 오십 전후의 양반이다.

그는 싸리문 앞으로 가더니 자기 집처럼 거침없이 문을 떠다밀고는 속으로 버젓이 들어가버린다. 이것을 보니 춘호 처는 다시금 속이 편치 않았다. 자기는 개돼지같이 무시로, 매만 맞고 돌아치는 천덕꾼이다. 안팎으로 겹귀염을 받으며 간들대는 쇠돌 엄마와 사람된 치수가 두드러지게 다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쇠돌 엄마의 호강을 너무나 부럽게 우러러보는 반동으로 자기도 잘했더면 하는 턱없는 희망과 후회가 전보다 몇 갑절 쓰린 맛으로 그의 가슴을 찌푸뜨렸다.

쇠돌네 집을 하염없이 건너다보다가 어느덧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굴러내린다. 언덕에서 쓸려내리는 사탯물이 발등까지 개흙으로 덮으며 소리쳐 흐른다. 빗물에 폭 젖은 몸뚱아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한다.

그는 가벼웁게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당황한 시선으로 사방을 경계하여 보았다. 아무도 보이지는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리어 그 집을 쏘아보며 속으로 궁리하여 보았다. 안에는 확실히 이 주사뿐일 게다. 그때까지 걸렸던 싸리문이라든지 또는 울타리에 널은 빨래를 여태 안 걷어들이는 것을 보면 어떤 맹세를 두고라도 분명히 이 주사 외의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는 마음놓고 비를 맞아가며 그 집으로 달려들었다. 봉당으로 선뜻 뛰어오르며,

“쇠돌엄마 기슈?”

하고, 인기를 내보았다.

물론 당자의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 그 음성이 나자 안방에서 이 주사가 번개같이 머리를 내밀었다. 자기딴은 꿈밖이란 듯, 눈을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옷 위로 볼가진 춘호 처의 젖가슴, 아랫배, 넓적다리로 발등까지 슬쩍 음흉히 훑어보고는 거나한 낯으로 빙그레 한다. 그리고 자기도 봉당으로 주춤주춤 나오며,

“쇠돌 엄마 말인가? 왜 지금 막 나갔지. 곧 온댔으니 안방에 좀 들어가 기다렸으면…” 하고 매우 일이 딱한 듯이 어름어름한다.

“이 비에 어딜 갔에유?”

“지금 요 밖에 좀 나갔지, 그러나 곧 올걸…”

“있는 줄 알고 왔는디…”

춘호 처는 이렇게 혼잣말로 낙심하며 섭섭한 낯으로 머뭇머뭇하다가 그냥 돌아갈 듯이 봉당 아래로 내려섰다.

이 주사를 쳐다보며 물차는 제비같이 산드러지게,

“그럼 요담에 오겠에유, 안녕히 계시유.” 하고 작별의 인사를 올린다.

“지금 곧 온댔는데, 좀 기다리지…”

“담에 또 오지유.”

“아닐세, 좀 기다리게. 여보게, 여보게, 이봐!”

춘호 처가 간다는 바람에 이 주사는 체면도 모르고 기가 올랐다. 허둥거리며 재간껏 만류하였으나 암만해도 안될 듯싶다. 춘호 처가 여기엘 찾아온 것도 큰 기적이려니와 뇌성벽력에, 구석진 곳이겟다, 이렇게 솔깃한 기회는 두 번 다시 못 볼 것이다. 그는 눈이 뒤집히어 입에 물었던 장죽을 쭉 뽑아 방안으로 치뜨리고는 계집의 허리를 뒤로 다짜고짜 끌어안아서 봉당 위로 끌어올렸다.

계집은 몹시 놀라며,

“왜 이러서유, 이거 놓세유.” 하고 몸을 뿌리치려는 앙탈을 한다.

“아니 잠깐만.”

이 주사는 그래도 놓지 않으며 허겁스러운 눈짓으로 계집을 달래인다.

흘러내리는 고의춤을 왼손으로 연신 치우치며 바른팔로는 계집을 잔뜩 움켜잡고는 엄두를 못 내어 짤짤매다가 간신히 방안으로 꺾꺾 몰아넣었다. 안으로 문고리는 재빠르게 채이었다.

밖에서는 모진 빗방울이 배추 잎에 부딪치는 소리, 바람에 나무 떠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끔 양철통을 내려굴리는 듯 거푸진 천둥소리가 방고래를 울리며 날은 점점 침침하여갔다.

얼마쯤 지난 뒤였다. 이만하면 길이 들었으려니 안심하고 이 주사는 날숨을 후우, 하고 돌린다. 실없이 고마운 비 때문에 발악도 못 치고 앙살도 못 피우고 무릎 앞에 고분고분 늘어져 있는 계집을 대견히 바라보며 빙긋이 얼려보았다. 계집은 온몸에 진땀이 쭉 흐르는 것이 꽤 더운 모양이다. 벽에 걸린 쇠돌 엄마의 적삼을 꺼내어 계집의 몸을 말쑥하게 훌닦기 시작한다. 발끝서부터 얼굴까지….

“너, 열 아홉이지?” 하고 이 주사는 취한 얼굴로 얼간히 물어보았다.

“니에.” 하고, 메떨어진 대답.

계집은 이 주사 손에 눌리어 일어나도 못하고 죽은 듯이 가만히 누워 있다.

이 주사는 계집의 몸을 다 씻고 나서 한숨을 내뽑으며 담배 한 대를 턱 피워 물었다.

“그래, 요새도 서방에게 주리경을 치느냐?” 하고 묻다가 아무 대답도 없으매,

“원 그래서야 어떻게 산단 말이냐, 하루 이틀이 아니고.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있는 거냐? 그러다 혹시 맞아죽으면 정장 하나 해볼 곳 없는 거야. 허니, 네 명이 아까우면 덮어놓고 민적을 가르는 게 낫겠지.” 하고 계집의 신변을 위하여 염려를 마지않다가 번뜻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너 참, 아이 낳았다 죽었다구나?”

“니에.”

“어디 난 듯이나 싶으냐?”

계집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지며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외면하였다.

이 주사도 그까짓 것 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웬 녀석의 냄새인지 무 생채 썩는 듯한 시크무레한 악취가 불시로 코청을 찌르니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야 그런 줄은 소통 몰랐더니 알고 보니까 비위가 좋이 역하였다. 그는 빨고 있는 담배통으로 계집의 배꼽께를 똑똑히 가리키며,

“얘, 이 살의 때꼽 좀 봐라. 그래 물이 흔한데 이것 좀 못 씻는단 말이냐?” 하고 모처럼의 기분을 상한 것이 앵하단 듯이 꺼림한 기색으로 혀를 채었다. 하지만 계집이 참다 참다 이내 무안에 못 이기어 일어나 치마를 입으려 하니 그는 역정을 벌컥 내었다. 옷을 빼앗아 구석으로 동댕이를 치고는 다시 그 자리에 끌어앉혔다. 그리고 자기 딸이나 책하듯이 아주 대범하게 꾸짖었다.

“왜 그리 계집이 달망대니? 좀 듬직치가 못하구…”

춘호 처가 그 집을 나선 것은 들어간 지 약 한 시간 만이었다.

비가 여전히 쭉쭉 내린다. 그는 진땀을 있는 대로 흠뻑 쏟고 나왔다. 그러나 의외로, 아니 천행으로 오늘 일은 성공이었다.

그는 몸을 솟치며 생긋하였다. 그런 모욕과 수치는 난생 처음 당하는 봉변으로, 지랄 중에도 몹쓸 지랄이었으나 성공은 성공이었다.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고생이 따르는 법이니 이까짓 거야 골백번 당한대도 남편에게 매나 안 맞고 의좋게 살 수만 있다면 그는 사양치 않을 것이다. 이 주사를 하늘같이, 은인같이 여겼다.

남편에게 부쳐먹을 농토를 줄 테니 자기의 첩이 되라는 그 말도 죄송하였으나 더우기 돈 이 원을 줄께니 내일 이맘때 쇠돌네 집으로 넌즈시 만나자는 그 말은 무엇보다도 고마웠고 벅찬 짐이나 풀은 듯 마음이 홀가분하였다. 다만 애키는 것은 자기의 행실이 만약 남편에게 발각되는 나절에는 대매에 맞아죽을 것이다. 그는 일변 기뻐하며 일변 애를 태우며 자기 집을 향하여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을 가분가분 내려달렸다.

춘호는 아직도 분이 못 풀리어 뿌루퉁하니 홀로 앉았다.

그는 자기의 고향인 인제를 등진 지 벌써 삼년이 되었다. 해를 이어 흉작에 농작물은 말 못되고 따라 빚장이들의 위협과 악다구니는 날로 심하였다.

마침내 하릴없이 집 세간살이를 그대로 내버리고 알몸으로 밤도주하였던 것이다. 살기 좋은 곳을 찾는다고 나이 어린 아내의 손목을 끌고 이 산 저 산을 넘어 표랑하였다. 그러나 우정 찾아들은 곳이 고작 이 마을이나, 산 속은 역시 일반이다.

어느 산골엘 가 호미를 잡아보아도 정은 조그만치도 안 붙었고, 거기에는 오직 쌀쌀한 불안과 굶주림이 품을 벌려 그를 맞을 뿐이었다. 터무니없다 하여 농토를 안 준다. 일 구멍이 없으매 품을 못 판다. 밥이 없다. 결국에 그는 피폐하여 가는 농민 사이를 감도는 엉뚱한 투기심에 몸이 달떴다.

요사이 며칠 동안을 두고 요 너머 뒷산 속에서 밤마다 큰 노름판이 벌어지는 기미를 알았다. 그는 자기도 한몫 보려고 끼룩거렸으나 좀체로 밑천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이 원! 수나 좋아서 이 이 원이 조화만 잘한다면 금시 발복이 못된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으랴! 삼 사 십 원 따서 동리의 빚이나 대충 가리고 옷 한 벌 지어 입고는 진저리나는 이 산골을 떠나려는 것이 그의 배포였다.

서울로 올라가 아내는 안잠을 재우고 자기는 노동을 하고, 둘이서 다구지게 벌으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가 있을 텐데, 이런 산 구석에서 굶어죽을 맛이야 없었다. 그래서 젊은 아내에게 돈 좀 해오라니까 요리 매낀 조리 매낀 매만 피하고 곁들어주지 않으니 그 소행이 여간 괘씸한 것이 아니다.

아내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집으로 달려들자 미처 입도 벌리기 전에 남편은 이를 악물고 주먹 뺨을 냅다 붙인다.

“너 이년, 매만 살살 피하고 어디 가 자빠졌다 왔니?”

볼치 한 대를 얻어맞고 아내는 오기가 걸리어 벙벙하였다. 그래도 직성이 못 풀리어 남편이 다시 매를 손에 잡으려 하니 아내는 질겁을 하여 살려달라고 두 손으로 빌며 개신개신 입을 열었다.

“낼 되유… 낼. 돈, 낼 되유.” 하며 돈이 변통됨을 삼가 아뢰는 그의 음성은 절반이 울음이었다. 남편이 반신반의하여 눈을 찌긋하다가,

“낼?” 하고 목청을 돋았다.

“네, 낼 된다유.”

“꼭 되여?”

“네, 낼 된다유.”

남편은 시골 물정에 능통하니만치 난데없는 돈 이 원이 어디서 어떻게 되는 것까지는 추궁해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저으기 안심한 얼굴로 방문턱에 걸터앉으며 담뱃대에 불을 그었다. 그제야 비로소 아내도 마음을 놓고 감자를 삶으려 부엌으로 들어가려 하니 남편이 곁으로 걸어오며 측은한 듯이 말리었다.

“병 나, 방에 들어가 어여 옷이나 말리여. 감자는 내 삶을께.”

먹물같이 짙은 밤이 내리었다. 비는 더욱 소리를 치며 앙상한 그들의 방벽을 앞뒤로 울린다. 천정에서 비는 새이지 않으나 집지은 지가 오래 되어 고래가 물러앉다시피 된 방이라 도배를 못한 방바닥에는 물이 스며들어 귀죽축하다. 거기다 거적 두 잎만 덩그렇게 깔아놓은 것이 그들의 침소였다. 석유 불은 없어 캄캄한 바로 지옥이다. 벼룩이는 사방에서 마냥 스물거린다.

그러나 등걸 잠에 익달한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나란히 누워 줄기차게 퍼붓는 밤비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가난으로 인하여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모르고 나날이 매질로 불평과 원한 중에서 복대기는 그들도 이 밤에는 불시로 화목하였다. 단지 남편의 품에 들은 돈 이 원을 꿈꾸어보고도.

“서울 언제 갈라유?”

남편의 왼팔을 베고 누웠던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응석 비슷이 물어보았다. 그는 남편에게 서울의 화려한 거리며, 후한 인심에 대하여 여러 번 들은 바 있어 일상 안타까운 마음으로 몽상은 하여보았으나 실지 구경은 못하였다. 얼른 이 고생을 벗어나 살기 좋은 서울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곧 가게 되겠지, 빚만 좀 없어도 가뜬하련만.”

“빚은 낭종 줴더라도 얼핀 갑세다유.”

“염려 없어. 이 달 안으로 꼭 가게 될 거니까.”

남편은 썩 쾌히 승낙하였다. 딴은 그는 동리에서 일컬어주는 질꾼으로 투전장의 가보쯤은 시루에서 콩나물 뽑듯하는 능수였다. 내일 밤 이 원을 가지고 벼락같이 노름판에 달려가서 있는 돈이란 깡그리 모집어올 생각을 하니 그는 은근히 기뻤다. 그리고 교묘한 자기의 손재간을 홀로 뽐내었다.

“이번이 서울 첨이지?” 하매, 그는 서울 바람 좀 한번 쐬었다고 큰 체를 하며 팔로 아내의 머리를 흔들어 물어보았다. 성미가 워낙 겁겁한지라 지금부터 서울 갈 준비를 착착 하고 싶었다. 그가 제일 걱정되는 것은 둠 구석에서 · 자라먹은 아내를 데리고 가면 서울사람에게 놀림도 받을 게고 거리끼는 일이 많을 듯싶었다. 그래서 서울 가면 꼭 지켜야 할 필수 조건을 아내에게 일일이 설명치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사투리에 대한 주의부터 시작되었다. 농민이 서울사람에게 '꼬라리'라는 별명으로 감잡히는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투리에 있을지니 사투리는 쓰지 말며 '합세'를 '하십니까'로, '하게유'를 '하오'로 고치되 말끝을 들지 말지라, 또 거리에서 어릿어릿하는 것은 내가 시골뜨기요 하는 얼뜬 짓이니 갈 길은 재게 가고 볼 눈은 또릿또릿히 볼지라 - 하는 것들이었다. 아내는 그 끔찍한 설교를 귀담아 들으며 모기소리로 “네, 네.”를 하였다.

남편은 둬 시간 가량을 샐 틈 없이 꼼꼼하게 주의를 다져놓고는 서울의 풍습이며 생활 방침 등을 자기의 의견대로, 그럴싸하게 이야기하여 오다가 말끝이 어느덧 화장술에 이르게 되었다. 시골 여자가 서울에 가서 안잠을 잘 자주면 몇 해 후에는 집까지 얻어 갖는 수가 있는데, 거기에는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소문을 일찍 들은 바 있어 하는 소리였다.

“그래서 날마닥 기름도 바르고, 분도 바르고, 버선도 신고 해서 쥔 마음에 썩 들어야…”

한참 신바람이 올라 주워 삼기다가 옆에서 쌔근쌔근 소리가 들리므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내는 이미 곯아져 잠이 깊었다.

“이런 망할 거, 남 말하는데 자빠져 잔담.”

남편은 혼자 중얼거리며 바른팔을 들어 이마 위로 흐트러진 아내의 머리칼을 뒤로 쓰담아넘긴다. 세상에 귀한 것은 자기 아내! 명색이 남편이며 이날까지 옷 한 벌 변변히 못해 입히고 고생만 짓시킨 그 죄가 너무나 큰 듯 가슴이 뻐근하였다. 그는 왁살스러운 팔로 아내의 허리를 꼭 껴안아 자기의 앞으로 바특이 끌어당겼다.

밤새도록 줄기차게 내리던 빗소리가 아침에 이르러서야 겨우 그치고 점심때에는 생기로운 볕까지 들었다. 쿨렁쿨렁 눈물나는 소리는 요란히 들린다. 시내에서 고기 잡는 아이들의 고함이며, 농부들의 희희낙락한 미나리도 기운차게 들린다. 비는 춘호의 근심도 씻어간 듯 오늘은 그에게도 즐거운 빛이 보였다.

“저녁 제누리 때 되었을걸, 얼른 빗고 가봐…”

그는 갈증이 나서 아내를 대구 재촉하였다.

“아직 멀었어유.”

“뭘!”

아내는 남편의 말대로 벌써부터 머리를 빗고 앉았으나 원체 달포나 아니 가리어 엉클은 머리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는 호랑이 같은 남편과 오랜만에 정다운 정을 바꾸어보니 근래에 볼 수 없는 화색이 얼굴에 떠돌았다.

어느 때에는 매적하게 생글생글 웃어도 보았다.

아내가 꼼지작거리는 것이 보기에 퍽으나 갑갑하였다. 남편은 아내 손에서 얼레빗을 쑥 뽑아들고는 시원스레 쭉쭉 내려빗긴다. 다 빗긴 뒤, 옆에 놓인 밥 사발의 물을 손바닥에 연신 칠해가며 머리에다 번지르하게 발라놓았다. 그래놓고 위서부터 머리칼을 재워가며 맵시 있게 쪽을 딱 찔러주더니 오늘 아침에 한사코 공을 들여 삼아놓았던 짚신을 아내의 발에 신기고 주먹으로 자근자근 골을 내주었다.

“인제 가봐!”하다가,

“바루 곧 와, 응?” 하고 남편은 그 이 원을 고히 받고자 손색 없도록, 실패 없도록 아내를 모양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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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도 술군은 역시들지 않는다. 메주 뜨는 냄새와 같이 쾨쾨한 냄새로 방 안은 괴괴하다. 웃간에서는 쥐들이 찍찍거린다. 홀어머니는 쪽떨어진 화로를 끼고 앉아서 쓸쓸한대로 곰곰 생각에 젖는다. 가뜩이나 침침한 반짝 등불이 북쪽 지게문에 뚫린 구멍으로 새드는 바람에 반득이며 빛을 잃는다. 헌 버선 짝으로 구멍을 틀어막는다. 그러고 등잔 밑으로 반짇그릇을 끌어당기며 시름없이 바늘을 집어든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 뒤 울타리에서 부수수 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리는 듯 나직나직 속삭인다. 더욱 몹쓸 건 물소리, 골을 휘돌아 맑은 샘은 흘러내리고 야릇하게도 음률을 읊는다.

퐁! 퐁! 퐁! 쪼록 퐁!

바깥에서 신발 소리가 자작자작 들린다. 귀가 번쩍 띄여 그는 방문을 가볍게 열어젖힌다. 머리를 내밀며,

"덕돌이냐?" 하고 반겼으나 잠잠하다. 앞뜰 건너편 수퐁을 감돌아 싸늘한 바람이 낙엽을 뿌리며 얼골에 부딪친다. 용마루가 생생운다. 모진 바람소리에 놀라 멀리서 밤개가 요란히 짖는다.

"쥔 어른 계서유?"

몸을 돌리어 바느질거리를 다시 들려 할 제 이번에는 짜장 인끼가 난다. 황급하게 "누구유?" 하고 일어서며 문을 열어보았다.

"왜 그리유?"

처음 보는 아낙네가 마루 끝에 와 섰다. 달빛에 비끼어 검붉은 얼굴이 해쓱하다. 추운 모양이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에 둘렀던 왜수건을 벗어들고는 다른 손으로 흩어진 머리칼을 싸담어 올리며 수줍은 듯이 쭈뼛쭈뼛한다.

"저어, 하룻밤만 드새고 가게 해주세유."

남정네도 아닌데 이 밤중에 웬일인가, 맨발에 짚신 짝으로. 그야 아무렇든,

"어서 들어와 불 쬐게유."

나그네는 주춤주춤 방 안으로 들어와서 화로 곁에 도사려 앉는다. 낡은 치맛자락 위로 비어지려는 속살을 아무리자 허리를 지그시 튼다. 그리고는 묵묵하다. 주인은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밥을 좀 주려느냐고 물어보아도 잠자코 있다.

그러나 먹던 대궁을 주워모아 짠지쪽하고 갖다주니 감지덕지 받는다. 그리고 물 한 모금 마심 없이 잠깐 동안에 밥그릇의 밑바닥을 긁는다.

밥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주인은 이야기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미주알고주알 물어보니 이야기는 지수가 없다. 자기로도 너무 지쳐 물은 듯싶은 만치 대구 추근거렸다. 나그네는 싫단 기색도 좋단 기색도 별로 없이 시나브로 대꾸하였다. 남편 없고 몸 붙일 곳 없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고 난 뒤,

"이리저리 얻어먹고 단게유" 하고 턱을 가슴에 묻는다.

첫닭이 홰를 칠 때 그제야 마을갔던 덕돌이가 돌아온다. 문을 열고 감사나운(억세게 사나운) 머리를 디밀려다 낯선 아낙네를 보고 눈이 휘둥그렇게 주춤한다. 열린 눈으로 억센 바람이 몰아들며 방 안이 캄캄하다. 주인은 문 앞으로 걸어와 서며 덕돌이의 등을 뚜덕거린다. 젊은 여자 자는 방에서 떠꺼머리 총각을 재우는 건 상서럽지 못한 일이었다.

"얘 덕돌아, 오늘은 마을 가 자고 아침에 온."

가을할 때가 지엇으니 돈냥이나 좋이 퍼질 때도 되었다. 그 돈들이 어디로 몰리는지 이 술집에서는 좀체 돈맛을 못 본다. 술을 판대야 한 초롱에 50~60전 떨어진다. 그 한 초롱을 잘 판대도 사날씩이나 걸리는 걸 요새 같아선 그잘냥한(알량한) 술군까지 씨가 말랐다. 어쩌다 전일에 펴놓았던 외상값도 갓갖다줄 줄을 모른다. 홀어미는 열벙거지가나서 이른 아침부터 돈을 받으러 돌아다녔다. 그러나 다리품을 들인 보람도 없었다. 낼 사람이 즐겨야 할 텐데 우물쭈물하며 한단 소리가 좀 두고보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날이 양식은 딸리고 지점집에서 집행을 하느니 뭘 하느니 독촉이 어지간지 안음에랴…….

"저도 인젠 떠나겠세유."

그가 조반 후 나들이옷을 바꾸어 입고 나서니 나그네도 따라 일어서다 그의 손을 잔상히 붙잡으며 주인은,

"고달플 테니 며칠 더 쉬어가게유." 하였으나,

"가야지유, 너머 오래 신세를……."

"그런 염려는 말구" 라고 누르며 집 지켜주는 셈치고 방에 누웠으라, 하고는 집을 나섰다.

백두고개를 넘어서 아말로 들어가 해동갑으로 헤메었다. 헤실수로 간 곳도 있기야 하지만 맑았다. 해가 지고 어두울 녘에야 그는 홀부들해서 돌아왔다. 좁쌀 닷 되밖에는 못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돈 낼 생각은커녕 이러면 다시 술 안 먹겠다고 도리어 얼러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만도 다행이다. 아주 못 받느니보다는 끼니때 가지었다. 그는 좁쌀을 씻고 나그네는 솥에 불을 지피어 부랴사랴 밥을 짓고 일변 상을 보았다.

밥들을 먹고 나서 앉았으려니까 갑자기 술꾼이 몰려든다. 이거 웬일인가. 처음에는 하나가 오더니 다음에는 세 사람, 또 두 사람. 모두 젊은 축들이다. 그러나 각각들 먹일 방이 없으므로 주인은 좀 망설이다가 그 연유를 말하였으나 뭐 한 동리사람인데 어떠냐, 한데서 먹게 해달라는 바람에 얼씨구나 하였다. 이제야 운이 트이나보다. 양푼에 막걸리를 딸쿠어 나그네에게 주어 솥에 넣고 좀 속히 데워 달라 하였다. 자기는 치마꼬리를 휘둘러가며 잽싸게 안주를 장만한다. 짠지, 동치미, 고추장, 특별안주로 삶은 밤도 놓았다. 사촌동생이 맛보라고 며칠 전에 갖다 준 것을 아껴둔 것이었다.

방 안은 떠들썩하다. 벽을 두드리며 〈아리랑〉찾는 놈에, 건으로 너털웃음 치는 놈, 혹은 수군숙덕하는 놈 - 가지각색이다. 주인이 술상을 받쳐들고 들어가니 짜기나 한 듯이 일제히 자리를 바로잡는다. 그 중에 얼굴 넓적한 하이칼라 머리가 야리가 나서 상을 받으며 주인 귀에다 입을 비켜대인다.

"아주머니 젊은 갈보 사왔다유? 보여주게유."

영문 모를 소문도 다 듣는다.

"갈보라니 웬 갈보?" 하고 어리뻥벙하다 생각을 하니 턱없는 소리는 아니다. 눈치 있게 부엌으로 내려가서 보강지 앞에 웅크리고 있는 나그네의 머리를 은근히 끌어안았다. 자, 저 패들이 새댁을 갈보로 횡보고 찾아온 맥이다. 물론 새댁 편으론 망칙스러운 일이겠지만 달포나 손님의 그림자가 드물던 우리 집으로 보면 재수의 빗발이다. 술국을 잡는다고 어디가 떨어지는 게 아니요, 욕이 아니니 나를 보아 오늘만 좀 팔아주기 바란다 - 이런 의미를 곰살궃게 간곡히 말하였다. 나그네의 낯은 별반 변함이 없다. 늘 한 양으로 예사로이 승낙하였다.

술이 온 몸에 돌고 나서야 됫술이 잔풀이가 난다. 한 잔에 5전, 그저 마시긴 아깝다. 얼군한 상투박이가 계집의 손목을 탁 잡아 앞으로 끌어당기며,

"권주가 좀 해. 이건 뀌어온 보릿자룬가."

"권주가? 뭐야유?"

"권주가? 아 갈보가 권주가도 모르나. 으하하하." 하고는 무안에 취하여 푹 숙인 계집 뺨에다 꺼칠꺼칠한 턱을 문질러본다. 소리를 암만 시켜도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만 기울일 뿐 소리는 모샇나보다. 그러나 노래 못하는 꽃도 좋다. 계집은 영 내리는 대로 이 무릎 저 무릎으로 옮아앉으며 턱밑에다 술잔을 받쳐 올린다.

술들이 담뿍 취하였다. 두 사람은 곯아져서 코를 곤다. 계집이 칼라 머리 무릎 위에 앉아 담배를 피워 올릴 때 코웃음을 흥 치더니 그 무지스러운 손이 계집의 아래 뱃가죽을 사양 없이 웅켜잡았다. 별안간 "아야" 하고 퍼들껑하더니 계집의 몸뚱아리가 공중으로 도로 뛰어오르다 떨어진다.

"이 자식아, 너만 돈 내고 먹었니?"

한 사람 새두고 앉았던 상투가 콧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맨발 벗은 계집의 두 발을 양손에 붙잡고 가랑이를 쩍 벌려 무릎 위로 지르르 끌어올린다. 계집은 앙탈을 한다. 눈시울에 눈물이 엉기더니 불현듯이 쪼록 쏟아진다.

방 안에서 왱마가리 소리가 끓어오른다.

"저 잡놈 보게, 으하하하."

술은 연실 데워서 들여가면서도 주인은 불안하여 마음을 졸였다. 겨우 마음을 놓은 것은 훨씬 밝아서다.

참새들은 소란하게 지저귄다. 지직 바닥이 부스럼 자국보다 질배없다. 술, 짠지쪽, 가래침, 담뱃재 - 뭣해 너저분하다. 우선 한 길치에 자리를 잡고 계배를 대 보았다. 마수거리가 85전, 외상이 2원 각수다. 현금 85전, 두 손에 들고 앉아 세고 또 세어보고…….

뜰에서는 나그네의 혀로 끌어올리는 인사.

"안녕히 가십시게유."

"입이나 좀 맞치고 뽀! 뽀! 보!"

"나두."

찌르쿵! 찌르쿵! 찔거러쿵!

"방아머리가 무겁지유? ……고만 까불을까."

"들 익었세유, 더 찧어야지유."

"그런데 애는 어쩐 일이야……."

덕돌이를 읍에 보냈는데 날이 저물어도 여태 오지 않는다. 흩어진 좁쌀을 확에 쓸어 넣으며 홀어미는 퍽이나 애를 태운다. 요새 날치가 차지니까 늑대, 호랑이가 차자 마을로 찾아 내린다. 밤길에 고개 같은 데서 만나면 끽소리도 못하고 욕을 당한다.

나그네가 방아를 괴놓고 내려와서 키로 확의 좁쌀을 담아 올린다. 주인은 그 머리를 쓰담고 자기의 행주치마를 벗어서 그 위에 씌워준다. 계집의 나이 열아홉이면 활짝 필 때이건만 버케된 머리칼이며 야윈 얼굴이며 벌써부터 외양이 시들어간다. 아마 고생을 진한 탓이리라.

날씬한 허리를 재빨리 놀려가며 일이 끊일 새 없이 다구지게 덤벼드는 그를 볼 때 주인은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일변 측은도 하였다. 뭣하면 딸과 같이 자기 곁에서 길래 살아주었으면 상팔자일 듯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소 한 마리와 바꾼대도 이것만은 안 내놓으리라고 생각도 하였다.

아들만 데리고 홀어미의 생활은 무던히 호젓하였다. 그런데 다 동리에서는 속 모르는 소리까지 한다. 떡거머리 총각을 그냥 늙힐 테냐고. 그러나 형세가 부치므로 감히 엄두도 못 내다가 겨우 올 봄에서야 다붙어 서둘게 되었다. 의외로 일은 손쉽게 되었다. 이리저리 언론이 돌더니 남촌 산에 사는 어느 집 둘째딸과 혼약하였다. 일부러 홀어미는 40리 길이나 걸어서 색시의 손등을 문질러보고는,

"참 애기 잘도 생겹세!"

좋아서 사돈에게 칭찬을 뇌고 뇌곤 하였다.

그런데 없는 살림에 빚을 얻어가며 혼수를 다 꼬매놓은 뒤였다. 혼인날을 불과 이틀 격해놓고 일이 고만 빗났다. 처음에야 그런 말이 없더니 난데없는 선채금 30원을 가져오란다. 남의 돈 3원과 집의 돈 5원으로 거추꾼에게 품삯 노비 주고 혼수하고 단지 2원 - 잔치에 쓸 것밖에 안 남고 보니 30원이란 입내도 못 낼 소리다. 그 밤, 그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넋 잃은 팔을 던져가며 통밤을 새웠던 것이다.

"어머님! 진지 잡수세유."

새댁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끔찍이 귀여우리라. 이것이 단 하나의 그의 소원이었다.

"다리 아프지유? 너머 일만 시켜서……."

주인은 저녁 좁쌀을 쓸어다가 방아다리에 깝신대는 나그네를 걸삼스럽게 쳐다본다. 방아가 무거워서 껍적이며 잘 오르지 않는다. 가냘픈 몸이라 상혈이 되어 두 볼이 새빨갛게 색색거린다. 치마도 치마려니와 명지저고리는 어찌 삭았는지 어깨께가 손바닥만하게 척 나갔다. 그러나 덕돌이가 왜포 다섯 자를 바꿔오거든 첫 대 사발화통된 속곳부터 해 입히고 차차 할 수밖엔 없다.

"같이 찝시다유."

주인도 남저지 방아다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찌껑 위에 놓은 나그네의 손을 눈치 안 채게 살며시 쥐어보았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요만한 며느리만 얻어도 좋으련만! 나그네와 눈이 그만 마주치자 그는 열적어서 시선을 돌렸다.

"퍽도 쓸쓸하지유?" 하며 손으로 울 밖을 가리킨다. 첫 밤같은 석양판이다. 색동저고리를 떨쳐입고 산들은 거방진 방아소리를 은은히 전한다. 찔그러쿵! 찌러쿵!

그는 나그네를 금덩이같이 위하였다. 없는 대로 자기의 옷가지도 서로서로 별러 입었다. 그리고 잘 때에는 딸과 진배없이 이불 속에서 품에 꼭 품고 재우곤 하였다. 하지만 자기의 은근한 속심은 차마 입에 드러내어 말은 못 건넸다. 잘 들어주먼이어니와 뭣하게 안다면 피차의 낯이 뜨듯한 일이었다.

그러자 맘먹지 않았던 우연한 일로 인하여 마침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그네가 온 지 나흘 되던 일이었다. 거문관이 산기슭에 있는 영길네가 벼 방아를 좀 와서 찧어달라고 한다. 나그네는 줄밤을 새우므로 낮에나 푸근히 자라고 두고 그는 홀로 집을 나섰다.

머리에 겨를 뽀얗게 쓰고 맥이 풀려서 집에 돌아온 것인 이럭저럭 으스레하였다. 늙은 다리를 끌고 뜰 앞으로 향하다가 그는 주춤하였다. 나그네 홀로 자는 방에 덕돌이가 들어갈 리 만무한데 정녕코 그놈일 게다. 마루 끝에 자그마한 나그네의 짚세기가 놓인 그 옆으로 질목채 벗은 왕달짚세기가 왁살스럽게 놓였다. 그리고 방에서는 수군수군 낮은 말소리가 흘러져 나온다. 그는 무심코 닫은 방문께로 귀를 기울였다.

"그럼 와 그러는 게유? 우리 집이 굶을까봐 그리시유?"

"……."

"어머니도 사람은 좋아유…… 올해 잘만 하면 내년에는 소 한 마리 사놀 게구, 농사만 해도 한 해에 쌀 넉 섬, 조 엿 섬, 그만하면 고만이지유…… 내가 싫은 게유?"

"……."

"사내가 죽었으니 아무튼 얻을 게지유?"

옷 터지는 소리. 부스럭거린다.

"아이! 아이! 아이! 참! 이거 노세유."

쥐 죽은 듯이 감감하다. 허공에 아롱거리는 낙엽을 이윽히 바라보며 그는 빙그레 한다. 신발소리를 죽이고 뜰 밖으로 다시 돌쳐섰다.

저녁상을 물린 후 시치미를 딱 떼고 나그네의 기색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젊은 아낙네가 홀몸으로 돌아다닌대두 고상일 게유. 또 어차피 사내는……."

여기서부터 사리에 맞도록 이 말 저 말을 주섬주섬 꺼내오다가 나의 며느리가 되어줌이 어떻겠냐고 꽉 토파를 지었다. 치마를 흡싸고 앉아 갸웃이 듣고 있던 나그네는 치마끈을 깨물며 이마를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두 볼이 빨개진다. 젊은 계집이 나 시집가겠소, 하고 누가 나서랴. 이만하면 합의한 거나 틀림없을 것이다.

혼수는 전에 해둔 것이 있으니 한시름 잊었다. 그대로 이앙이나 고쳐서 입히면 고만이다. 돈 2원은 은비녀, 은가락지 사다가 각별히 색시한테 선물 내리고…….

일은 밀수록 낭패가 많다. 급시로 날을 받아서 대례를 치렀다. 한편에서는 국수를 누른다. 잔치 보러온 아낙네들은 국수 그릇을 얼른 받아서 후룩후룩 들여 마시며 색시 잘났다고 추었다.

주인은 즐거움에 너무 겨워서 추배를 은근히 들었다. 여간 경사가 아니다. 뭇 사람을 삐집고 안팎으로 드나들며 분부하기에 손이 돌지 않는다.

"얘 메누라! 국수 한 그릇 더 가져온."

어째 말이 좀 어색하구먼…… 다시 한번,

"메누라 얘야! 얼른 가져와."

서른을 바라보자 동곳을 찔러보니 제물에 멋이 질려 비드름하다. 덕돌이는 첫날을 치르고 부썩부썩 기운이 난다. 남이 두 단을 털 제면 그의 볏단은 석 단째 풀쳐나간다. 연방 손바닥에 침을 뱉어 붙이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끅! 끅! 끌! 찍어라. 굴려라, 끅! 끅!"

동무의 품앗이 일이다. 거무투룩한 젊은 농군 댓이 볏단을 번 차례로 집어든다. 열에 뜬 사람 같이 식식거리며 세차게 벼알을 절구통 배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얘! 장가들고 한턱 안 내니?"

"일색이드라. 단단히 먹자. 닭이냐? 술이냐? 국수냐?"

"웬 국수는? 너는 국수만 아느냐?"

저희끼리 찧고 까분다. 그들은 일을 놓으며 옷깃으로 땀을 씻는다. 골바람이 벼깔치를 부옇게 풍긴다. 갈퀴질을 하던 얼굴 넓적이가 갈퀴를 들고 씽급하더니 달려든다. 장난꾼이다. 여러 사람의 힘을 빌리어 덕돌이 입에다 헌 짚신 짝을 물린다. 버들껑거린다. 다시 양 귀를 두 손에 잔뜩 움켜잡고 끌고와서는 털이 놓인 볏무더기 위에 머리를 틀어박으며 동서남북으로 큰절을 시킨다.

"야아! 야아! 아!"

"아니다, 아니야. 장갈 갔으면 산신령한테 이러하다 말이 있어야지. 괜스리 산신령이 노하면 눈깔망난이 내려보낸다."

뭇 웃음이 터져오른다. 새신랑의 옷이 이게 뭐냐. 볼기짝에 구멍이 다 뚫리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덕돌이는 상투의 먼데기를 털고 나서 곰방대를 피어 물고는 싱그레 웃어치운다. 좋은 옷은 집에 두었다. 인조견 조끼, 저고리, 새하얀 옥당목 겹바지, 그러나 아끼는 것이다. 일할 때엔 헌 옷을 입고 집에 돌아와 쉬일 참에나 입는다. 잘 때에는 모조리 벗어서 더럽지 않게 착착 개어 머리맡 위에 놓고 자곤 한다. 의복이 남루하면 인상이 추하다. 모처럼 얻은 귀여운 아내니 행여나 마음이 돌아앉을까 미리미리 사려두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야말로 29년 만에 누런 이 조각에다 이제야 소금을 발라본 것도 이 까닭이었다.

덕돌이가 볏단을 다시 집어올릴 제 그 이웃에 사는 돌쇠가 옆으로 와서 품을 앗는다.

"얘 덕돌아! 어 내일 우리 조마댕이 좀 해줄래?"

"뭐 어째?" 하고 소리를 뻑 지르고는 그는 눈 귀가 실룩하였다.

"누구보고 해라야? 응? 이 자식 까놀라."

어제까지는 턱없이 지냈단대도 오늘의 상투를 못 보는가!

바로 그날이었다. 웃간에서 혼자 새우잠을 자고 있던 홀어미는 놀래어 눈이 번쩍 띄었다. 만뢰 잠잠한 밤중이다.

"어머니! 그거 달아났세유. 내 옷도 없구……."

"응?" 하고 반마디 소리를 치며 얼덜김에 그는 캄캄한 방 안을 더듬어 아랫간으로 넘어섰다. 황망히 등장에 불을 대리며,

"그래 어디로 갔단 말이냐?"

영산이 나서 묻는다. 아들은 벌거벗은 채 이불로 앞을 가리고 앉아서 징징거린다. 옆 자리에는 빈 배게뿐 사람은 간 곳이 없다. 들어본즉 온종일 일하기에 피곤하여 아들은 자리에 들자 그만 세상을 잊었다. 하기야 그때 아내도 옷을 벗고 한자리에 누워서 맞붙어 잤던 것이다. 그는 보통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새침하니 드러누워서 천장만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다가 별안간 오줌이 마렵기에 요강을 좀 집어 달래려고 보니 뜻밖에 품안이 허룩하다.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다. 그제서는 어레짐작으로 우선 머리맡 위에 놓았던 옷을 더듬어보았다. 딴은 없다.

필연 잠든 틈을 타서 살며시 옷을 입고 자기의 옷이며 버선까지 들고 내뺏음이 분명하리라.

"도적년!"

모자는 광솔불을 켜들고 나섰다. 부엌과 잿간을 뒤졌다. 그리고 뜰 앞 수풀 속도 낱낱이 찾아봤으나 흔적도 없다.

"그래도 방 안을 다시 한번 찾아보자."

홀어머니는 구태여 며느리를 도둑 년으로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거반 울상이 되어 허벙저벙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을 가라앉혀 둘쳐보니 아니면다르랴, 며느리 배게 밑에서 은비녀가 나온다. 달아날 계집 같으면 이 비싼 은비녀를 그냥 두고 갈 리 없다.

두말 없이 무슨 병폐가 생겼다. 홀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덜미를 집히는 듯 문밖으로 찾아 나섰다.

마을에서 산길로 바져나온 어귀에 우거진 숲 사이로 비스듬히 언덕길이 놓였다. 바로 그 밑에 석벽을 끼고 깊고 푸른 웅덩이가 묻히고 넓은 그 물이 겹겹 산을 에돌아 약 10리를 흘러내리면 신연강 중턱을 뚫는다. 시새에 반쯤 파묻혀 번들대는 큰 바위는 내를 사고 양쪽으로 질펀하다. 꼬부랑길은 그 틈바귀로 뻗었다. 좀체 걷지 못할 자갈길이다. 내를 몇 번 건너고 험상궂은 산들을 비켜서 한 5마장 넘어야 겨우 길다운 길을 만난다. 그리고 거기서 좀더 간 곳에 냇가에 외지게 잃어진 오막살이 한 칸을 볼 수 있다. 물방앗간이다. 그러나 이제는 밥을 찾아 흘러가는 뜬몸들의 하룻밤 숙소로 변하였다.

벽이 확 나가고 네 기둥뿐인 그 속의 힘을 잃은 물방아는 을씨년 궂게 모로 누웠다. 거지도 그 옆의 홀이불 위에 거적을 덧쓰고 누웠다. 거푸진 신음이다. 으! 으! 으흥! 서까래 사이로 달빛은 쌀쌀히 흘러든다. 가끔 마른 잎을 뿌리며…….

"여보 자우? 일어나게유 얼핀."

계집의 음성이 나자 그는 꾸물거리며 일어 앉는다. 그리고 너털대는 홑적삼 깃을 여며 잡고는 덜덜 떤다.

"인제 고만 떠날 테이야? 쿨룩……."

말라빠진 얼굴로 계집을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물었다.

10분 가량 지났다. 거지는 호사하였다. 달빛에 번쩍거리는 겹옷을 입고서 지팡이를 끌며 물방앗간을 등졌다. 골골하는 그를 부축하여 계집은 뒤에 따른다. 술집 며느리다.

"옷이 너무 커, 좀 적었으면……."

"잔말말고 어여 갑시다 펄쩍."

계집은 부리나케 그를 재촉한다. 그리고 연해 돌아다보길 잊지 않았다. 그들은 강길로 향한다. 개울을 건너 불거져내린 산모퉁이를 막 꼽뜨릴려 할 제다. 멀리 뒤에서 사람 욱이는 소리가 끊일 듯 날 듯 간신히 들려온다. 바람에 먹히어 말저는 모르겠으나 재없이 덕돌이의 목성임은 넉히 짐작할 수 있다.

"아 얼른 좀 오게유."

똥끝이 마르는 듯이 계집은 사내의 손목을 겁겁히 잡아끈다.병들은 몸이라 끌리는 대로 뒤툭거리며 거지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같이 사라진다. 수은빛 같은 물방울을 품으며 물결은 산 벽에 부닥뜨린다. 어디선지 지정치 못할 늑대소리는 이 산 저 산에서 와글와글 굴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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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 명색 없는 ‘평안도 선비’의 집에 태어났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간이 있을지라도 일

생을 진토에 묻히어서 허송치 않을 수 없는 것이 ‘평안도 사람’에게 부과된 이 나라의 태도

였다.

그런데, 오이배(吳而陪)는 쓸데없는 ‘날고 기는 재주’를 하늘에서 타고나서, 근린 일대에는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쓸데없는 재주, 먹을 데 없는 재주, 기껏해야 시골 향수 혹은 진사쯤밖에 출세하지 못하는

재주, 그 재주 너무 부리다가는 도리어 몸에 화가 및는 재주, 그러나 하늘이 주신 재주이니

떼어 버릴 수도 없고 남에게 물려줄 수도 없는 재주였다.

대대(代代)로 선비 노릇을 하였다. 그랬으니만치 시골서는 도저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산

업(産業)과 치부(致富) 방면에 유의(留意)하지 않았으니만치, 재산은 연년이 줄어서 이배

의 아버지의 대에는 드디어 파산을 면치 못하였다.

대대로 부리던 세도가 있느니만치, 그라도 근처에서 존경받은 지위는 간신히 지켜 왔지만,

재산 없고 산업을 모르고 그냥 그 ‘점잖음’을 지키노라니 여간 살림이 이상야릇하지 않았

다.

불행한 신동 이배를 시험하심에 하늘은 더 어려운 고초를 내렸다.이배가 열한 살 잡히는

해에, 신동 이배의 양친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다. 천하를 휩쓴 ‘쥐통’에 넘어진 것이었다.

여러 대를 이 동네에 살았지만 자손 번창치 못하는 집안이라, 여러 대 계속하여 외꼭지로

내려왔으니만치, 일가친척이라는 것이 전연 없었다. 이렇게 외롭게 될 때는 그래도 일가라

는 것이 있으면 얼마만치 힘입을 수도 있고, 믿고 의지할 수도 있지만, 일가라는 것이 전연

없는 오씨 집안에서 양친이 한꺼번에 세상 떠났으매, 이 넓은 천하에 이배 단 혼자가 덩더

렇게 남았다. 겨우 열한 살 난 코흘리개 소년이.

그래도 대대로 동네의 인심은 잃지 않고 내려왔으니만치, 동네의 동정심은 자연 이배에게

부어졌다. 그러나 인심은 안 잃었다 할지라도, 이쪽은 그래도 선비요 동네 사람은 모두가

이름없는 농꾼들이라, 자연 교제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껏 동정을 나타내기도 쑥스러웠다.

동네 사람의 조력을 빌려, 양친을 한꺼번에 장례를 치르기는 하였다.

그러나 상여를 따르는 상제는, 소년 상주(喪主) 하나뿐 동네 사람 서넛이 함께 묘지까지 가

기는 갔지만, 이 쓸쓸한 상여를 모시고 가는 소년 상주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솟았다.

*

이 세상에 단 혼자 남은 이배.

부모를 안장하고 집에 돌아오매, 오막살이에서 마주 나오는 것은 개 한 마리뿐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배 단 셋이서 살던 쓸쓸한 오막살이에, 아버지 어머니조차 영원의 세상

으로 보내고 보니, 세상에는 이배 한 사람에, 인종(人種)이 없는 듯, 밖의 길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기척도 있지만, 이배에게는 그것이 다 환몽이요 자기 혼자만이 이 너른 세상에

살아 있는 유일인인 듯싶었다.

한심하고 기막혀 한 사나흘은 밥도 짓지 않고, 따라서 먹지도 않고, 집안에 쓰고 누워 있었

다.

그 오막살이에 하도 인기척이 없으므로 동네 할머니가 미심질로 들여다보아서, 며칠이나

굶었는지 굶어서 거의 죽게 되어 정신을 못 차리는 이배 소년을 발견치 않았더면 이배도

제 부모 가신 나라로 갔을 것이다.

“아이구, 이게 웬일이냐. 무슨 일이냐? 정신차리거라.”

*

이배는 그 할머니의 성의 있는 간호로써 다시 소생하였다.

소생한 며칠 뒤, 이배는 그 동네에서 일백오십 상거 되는 곳에 있는 학교를 목적하고 제 고

향을 떠났다.

일백오십 리 밖에 있는 T라는 학교는, 위치는 산골에 있으나 전 조선에 이름높은 학교였

다.

그 학교의 설립자가 유명한 애국지사였다. 신학문과 아울러 애국사상을 소년들의 마음에

뿌려 주기 위해서 세운 학교였다.

옷 두어 가지를 넣은 보따리 하나를 끼고 학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의지할 데 없

고 믿을 데 없는 소년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두서를 못 차려서, 학교 문 밖에 배회하다가

그 학교 교장에게 발견되었다. 교장이라는 이가 또한 전국에 이름높은 선각자요 애국지사

로서, 설립자의 뜻을 받아 장차 자랄 어린 싹에 좋은 교훈을 하고자 일부러 이런 시골의 학

교장으로 와 있는 이였다.

교장은 이배 소년의 슬기로움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이 소년을 장차 나라의 큰그릇을 만들

고자, 자기 집에 데려다 두고 잔심부름이나 시키며 교육 일체의 책임을 졌다.

구학문에 있어서 신동이었던 이배는 신학문으로 돌아서서도 그의 천품을 충분히 발휘하였

다. 이 학교를 사모하여 전국에서 모여든 수재(秀才)들 가운데 섞이어서도 이배는 가장 빼

어난 성적을 보였다.

농촌의 선비 집안에 한 신동으로 태어나서, 동양 전통의 윤리를 닦고, 이것만이 학문이거

니 여기고 있던 이배는 이 학교에서 비로소 놀랄 만한 지식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세상에는 ‘청국(淸國)’이라는, 지금은 호인(胡人)의 나라가 본시 하우씨의 직계로서 만

국을 다스리고 있다―---이쯤밖에는 모르던 이배는 여기서 비로소 한국(韓國)이라는 본시

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 것을 알고, ‘왜(倭)’로만 알고 있던 일본이 놀랄 만한 신문화를

흡수하여 가지고 동양 천지에서 세도하려는 것이며, 그 일본이 현재 한국에게 대하여 어떤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며, 이런 때에 임하여 한국인은 어떤 길을 밟아야 할 것인가는 큰

과제 등을 비로소 알고 경악하였다.

교장은 이배 소년의 비상히 영특한 재질을 크게 평가하여, 이런 재질에다가 민족관념을 옮

게 지도하면 나라에 얼마나 유용한 인물이 되랴는 기대 아래 소년을 훈육하였다.

이 학교에 의탁한 지 일년 뒤에는 이배는 학문으로는 교사와 어깨를 겨눌 만하게 되었다.

애국사상으로는 모르긴 몰라도, 이 학교에서 교장에 버금가는 사상가로 변하였다.

학교도 무사히 졸업을 하였다. 졸업하고는 더 높은 학교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를 유난히 사랑하고 촉망하던 교장이 놓아 주지 않았다.

“그가 더 높은 학교에서 학업을 닦는다는 건, 본시 같으면 되레 내가 권할 일이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이 더 높은 학교를 나온 훌륭한 지도자보다도, 이맛 정도의 지도자가 더

필요해, 그리고 급해. 이 학교에 머물러 후배들을 지도하는 교원이 돼다고. 나라를 위해서

든, 너 개인을 위해서든 너 같은 총명한 사람이 세계의 우수한 학문을 닦아서 나라에 이바

지하면 오죽이나 좋으랴마는, 그런 먼 장래보다도 눈앞에 다닥쳐 있는 소년 지도의 책무를

감당할 일꾼이 더 급하구나. 그러니까, 좀더 이 학교에 그냥 있어서 교원이 돼다고. 국사가

매우 위태롭게 된 이 판국에, 먼 장래는 더 뒤에 생각하고, 목전의 급한 일부터---―”

과연 시국은 가장 어지럽게 되어 있었다. 일본은 그 마수를 차차 노골적으로 펴서 동학당

(東學黨)이라는 당을 손아귀에 넣고, 한국을 삼키려고 공작이 나날이 더 심해 갔다.

반역당파의 동학당은 일본의 농락 아래 들어서, 내 나라를 일본의 마수 안에 넣어 주려고

맹렬히 활동하고 있었다. 경향을 무론하고 일본 세력을 배격하려는 국민운동이 요원의 불

같이 일어서 퍼져 나간다.

이런 판국에 국민은 아직 몇 해 전의 이배나 마찬가지로 한국이라는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

르는 요순시절의 꿈에 잠겨 있는 무리가 태반이다.

하다못해 ‘내 나라’가 무엇이며 어떤 의의를 가진 것인지, 이 개념만이라도 온 국민에게 부

어넣어 주는 것은 여간 급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래의 위대한 지도자보다 현재의 대중적 지도자가 더 급하고, 더 긴하다.

내 한몸 더 훌륭한 학업을 닦고자 은혜 깊은 교장의 슬하를 떠나고자 하던 이배는, 교장의

이 말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서, 그냥 이 학교에 주저앉아서 장래 국민을 지도하는 대중적

역할을 맡기로 교장 앞에 맹서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

운명의 힘은 막을 수 없다.

한국은 드디어 일본과 보호조약을 체결치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외교권은 동경에 있는

일본 정부가 대행하며 한국의 모든 기관에 일본인을 고문으로 두어서 그 지도를 받는다는

조약이었다.

보호조약에 한국의 상하가 욱적할 동안, 일본은 한 걸음 더 나가서 한국을 병합하여 버렸

다.

일본은 외국에 선전하기를, 한국 황제가 그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호의로 넘긴 것으로

무혈병합(無血倂合)이라 한다.

하기는 그렇다. 미리 군대를 해산하고 무기를 걷어올려서 촌철(寸鐵)을 못 가진 한국인이

매 맞싸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각지에 의병(義兵)이 궐기하였다. 근처의 열혈 애국자를 수령으로 조직된 의병은,

감추어 두었던 낡은 총이며 포수(砲手)의 엽총들을 무기로 하여, 이 병합에 반대하는 의사

를 나타내었다.

다만 끓는 피, 힘주어지는 주먹만을 무기로, 일본의 정예한 군대를 당할 수가 도저히 없었

다. 의병 자신들도 그것은 잘 안다. 알기는 아나 참을 수 없는 분격심은, 이 당할 수 없는

싸움이나마 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민족의 의사였다.

*

소년 교원 이배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제자들의 위에서, 교장의 뜻을 받아 민족사상

을 기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기 스스로가 교장의 아래서 몇 해 지나는 동안, 민족을 알고

‘애족사상’을 느낀 뒤에, 자기의 심경의 변화를 돌보아서, 이 제자들로 하여금 내 민족을

사랑할 줄을 알고, 내 민족을 위하여서 사는 사람이 되게 해보려고, 자기의 성심을 다하였

다.

이 귀중한 사업에 종사하는 동안, 자기의 애족심도 나날이 가속도로 늘어 가는 것을 알았

다.

지금의 그에게는 다만 민족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민족문제가 가장 귀하였다. 민족문제와 관련이 없는 학문은 존재할 가치도 없었다.

열정적이요 감격적인 그는 느끼느니 민족이요 생각하느니 민족이요, 오직 민족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순정적으로 애족사상에 잠긴 이배라,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죄 애족사상에 관한 것뿐

이었다. ‘애족광(愛族狂)’이란 칭호를 듣도록 오직 민족문제에 빠져 있었다.

이 정열의 소년 교사의 순정적 교육은, 제자들로 하여금 진정한 애국자로 변하게 하였다.

이 학교의 출신자들이 후일 일본 관헌의 가장 미워하는 ‘요보’가 되었으며, 무슨 일이 있을

적마다 이 학교의 출신자들은 죄 없이 일본 관헌의 내리는 벌을 받고 한 그 원인은 이때에

씨뿌려진 것이었다.

전국에 이름난 학교라, 생도들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그들이 졸업하고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는지라, 이 학교의 지도사상은 전국에 널리 퍼졌다. 동시에, 소년 교사 오이배의 명

성은 전국에 퍼지고, 그 정열과 애국심을 사모하는 숭배자가 전국에 산재되었다.

이 학교의 이름과 이배 선생의 이름은 전국의 애국사상가의 위에 뚜렷한 존재로 되었다.

그런 차라 후일 한국이 일본에게 삼키우자, 이 학교는 곧 폐쇄 명령으로 장구한 명예 있는

전통을 지켜 내려온 이 학교는 폐쇄되어 버렸다.

*

학교가 폐쇄되자 이배에게는 곧 후원자가 나섰다. 이 후원자의 원조로써, 그는 일본 동경

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오랜 숙망이었다. 그러나 제자 양성이 더 급선무이므로 아직껏

달치 못하고 있던 바였다.

‘네 칼로 너를 치리라. 네게서 배워서 너를 둘러엎으리라.’

이러한 포부로 그는 적도(敵都) 동경으로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십 년, 이배는 적도에서 적의 칼로 적을 찍을 심산으로 열심으로 공부하였다. 중

등학교의 교원이던 그는, 동경에서 중학교에 입학하여 코 흘리는 일본 애들과 책상을 나란

히 공부하였다. 중학교를 마치고는 어떤 사립대학의 정치과에 적을 두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불타는 민족애의 사상을 품은 채 학업에 정진하면서 그가 가장 강렬히

느낀 바는 무한한 실망이었다. 실망에 따르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일본은 나날이 자란다. 그런데 조국 조선은 일본의 고약한 정책교육 아래 나날이 위축되어

들어간다.

조선도 자란다 할지라도 앞서 자란 일본을 따르기 힘들겠거늘, 이렇듯 나날이 위축되어 들

어가니, 일본과 조선과의 간격의 차이는 나날이 멀어 간다.

조국의 회복? 그것은 지금의 형편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희망이 없었다.

이것은 이배에게 있어서는 끝없는 실망일밖에 없었다. 일본이 자진하여 조선을 놓아 주기

전에는, 조선은 언제까지든 일본의 더부살이를 면할 날이 없을 것이다.

하숙에서 학과를 복습하다가도 이 생각이 문득 나면 책을 집어던지고 하였다. 그리고 멍하

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앉아 있고 하였다.

세계 제일차대전이 일었다가 끝났다. 그때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할 수 없고, 일본은 자진하여 조선을 놓아 주지 않을 형편에

서, 이 윌슨 대통령의 제창 같은 것은 조선 민족에게 있어서는 다시 잡을 수 없는 천래의

호기회다. 온 조선은 이 기회에 일본의 굴레를 벗어 보고자, 세계를 향하여 ‘조선 독립 만

세’를 외쳤다.

이배도 꿈밖에 생긴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고자, 선두에 서서 만세를 외치며 국민을 선동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실력은 너무도 강하였다. 강자의 앞에는 인류는 굴복하는 법이다. 약자인

조선이 남의 등쌀에 독립을 해보고자 야단하였지만 강자인 일본이 승낙지 않으매 이 사건

도 흐지부지해 버렸다. 전 조선의 감옥만 만세 죄인으로 가득 채워 놓고서…….

윌슨 대통령의 선언도 강자 일본에게는 아무 효력을 못 보였다는 이 비통한 현실 앞에 이

배는 처음에는 낙담하고 다음에는 생각하였다.

일본은 인제는 세계에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존재다. 조선 민족은 일본의 굴레

는 도저히 벗을 수 없다.

그러면 조선 민족은 언제까지든 일본의 한 식민지 민족으로 참담한 생활을 계속하여야 하

는가.

조선 민족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이배로서는, 이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한 민

족이 영원히 다른 민족의 종살이를 해? 더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 이 불

행을 벗고 행복된 민족으로 되게 할 무슨 수단은 없을까.

*

이배는 학업을 끝내고 귀국하였다.

쓰라린 회포를 품고 귀국하는 이배를 온 조선은 환영하여 맞았다.

옛날의 T학교의 출신자가, 조선의 각 부문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만치 열혈의

교사 이배를 환영하여 맞은 것은 조선의 각 사회의 각 부문에 걸치어서였다. 어떤 대신문

은 그를 위하여, 부사장 겸 주필의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렸다.

이배는 중요한 지도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을 지도하랴. 일본의 굴레는 도

저히 벗을 수가 없는 바이며, 일본에 반항하기를 시도하는 것은 공연히 감옥으로 갈 사람

을 늘리는 데 지나지 못한다. 이것은 도리어 민족적 불행이다.

조선 안의 민족적 행복을 따기 위해서는, 첫째로는 조선 민족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물질적으로 인제는 도저히 일본을 뒤따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인이 물질문화

의 발전에 주력하는 동안 조선인은 문화 향상에 전력을 다하면 문화 방면으로는 일본과 대

등의 민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배의 지도 호령은, 조선 민족의 위에 퍼져 나갔

다. 존경하는 지도자 이배의 지도에 조선 민족은 고요히 따랐다.

*

일본은 또 전쟁을 시작하였다. 중국을 상대로 삼아 일격에 부서질 줄 알았던 중국은 의외

에도 완강히 저항하였다. 차차 일본이 육해공의 전부의 병력을 집중하여도 좀체 부서지지

않았다.

우습게 여기고 시작하였던 전쟁이 이렇게까지 되어 일본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싸웠다. 종

내 하릴없이 조선에까지 조력을 빌렸다.

이배는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이 이렇듯 악전고투할

때에, 조선에 약간의 무력적 실력만 있더라도, 일본에 대항하여 일어서면 일본의 굴레를

벗을 길이 생길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의 현황은 그새 문화 방면에만 주력했더니

만치, 무력적으로는 일본 군인의 고함 한마디만으로 삼천만 조선 민족은 질겁을 할 것이

다. 그 대신 또한 그 반대로 조선이 일본에 약간의 협력이라도 하면 승리의 아침에는, 여덕

이 조선에도 흘러 넘어올 것이다.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일본

에 협력하자.

협력의 깃발은 높이 들리었다. 협력의 호령은 크게 외쳐졌다.

조선 민족은 어리둥절하였다. 지금껏 민족주의자로 깊이 믿었던 이배가 일본에게 협력하

자고 외칠 줄은 천만뜻밖이므로.

그러나 이 길만이 조선 민족을 행복되게 할 유일의 길이라 깊이 믿는 이배는, 그냥 성의를

다하여 부르짖었다.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까지 선전을 포고하였다. 만약 이 전쟁에 이기기만 하면 일본은 세계

의 패자(覇者)가 된다.

조선이 일본에 협력을 하여, 전승자의 하나가 되면 그때 조선의 몫으로 돌아올 보수는 막

대할 것이다. 한 빈약한 독립국가로 근근이 생명만 부지하기보다는 일본의 일부로서 승리

의 보좌에 나란히 해 앉는 편이 휠씬 크리라.

이배의 협력운동은 차차 더 급격화하였다. 본시부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이배라 성의

로써 대중에게 부르짖을 때는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차차 조선도 성의로써 일본 전쟁에

협력하는 무리가 늘어 갔다.

이런 가운데서, 이배는 단지 전도(前途)의 승리만 바라보았다. 반드시 이길 것이라 굳게 믿

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기는 날에는, 조선의 몫에도 돌아올 행복을 바라보며 기뻐하였다.

어째서 일본이 이기겠느냐. 거게 대해서도 독자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숙명적으로 일본은 패배를 모르는 나라이다. 게다가 또한 숙명적으로 서양은 인젠 쇠운에

들고 동양 발전의 새 세상이 전개될 차례다.

*

전쟁도 최고도에 달한 때에 적국 세 나라(미, 영, 중)의 대표자는 카이로에 모여서 한 가지

의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의 내용을 어떤 길로 통하여 안 이배는, 처음은 딱 숨이 막혔다.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 게다가 조선의 독립까지 그 조건의 하나였다.

딸 수 없는 독립으로 알았길래 일본의 일부분으로서나마 조선 민족의 행복을 구해 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카이로 선언을 보매, 일본은 인젠 다 진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리고, 거기

조선의 독립이 있었다.

오직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오십 년간 건투해 왔고,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일본

에 협력하기를 주장하여 왔거늘, 아아.

조선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는 그 노력이 오늘날 모두 반대의 결과로

나타나는가. 만약 이 카이로 선언대로 일본이 항복을 하고 조선이 일본에게서 해방이 된다

하면, 자기는 그날에는 반역자가 될 것이다. 그렇듯 사랑하고 그렇듯 귀히 여기던 조선의―

---내가 반역자?

일찍이 추호도 조선을 반역할 생각을 품어 본 일이 없고, 내 생명보다도 귀히 여기던 조국

조선이어늘, 반역이란 웬 말인가.

독립되는 조국에 나는 반역자로 그 기쁨을 함께할 권리도 없는 인생인가.

*

1945년 8월 보름날 정오에, 일본 천황 유인(裕仁)이 울음 섞인 소리로 온 일본인에게 부득

이 항복한다는 포고를 할 때에, 라디오 앞에 이배도 울면서 그 방송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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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仁王)

바위 위에 잔솔이 서고 잔솔 아래는 이끼가 빛을 자랑한다.

굽어보니 바위 아래는 몇 포기 난초가 노란 꽃을 벌리고 있다. 바위에 부딪치는 잔바람에 너울거리는 난초잎.

여(余)는 허리를 굽히고 스틱으로 아래를 휘저어보았다. 그러나 아직 난초에는 4,5축의 거리가 있다. 눈을 옮기면 계곡.

전면이 소나무의 잎으로 덮인 계곡이다. 틈틈이는 철색(鐵色)의 바위로 보이기는 하나, 나무밑의 땅은 볼 길이 없다. 만약 여로서 그 자리에 한 번 넘어지면 소나무의 잎 위로 굴러서 저편 어디인지 모를 골짜기까지 떨어질 듯하다.

여의 등뒤에도 2,3장(丈)이 넘는 바위다. 그 바위에 올라서면 무학(舞鶴)재로 통한 커다란 골짜기가 나타날 것이다. 여의 발아래도 장여(丈餘)의 바위다. 아래는 몇포기 난초, 또 그 아래는 두세 그루의 잔솔, 바위 아래로부터는 가파른 계곡이다.

그 계곡이 끝나는 곳에는 소나무 위로 비로소 경성시가의 한편 모퉁이가 보인다. 길에는 자동차의 왕래도 가맣게 보이기는 한다. 여전한 분요(紛擾)와 소란의 세계는 그곳에 역시 전개되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지금 서 있는 곳은 심산이다. 심산이 가져야 할 온갖 조건을 구비하였다.

바람이 있고, 암굴이 있고, 산초 산화가 있고, 계곡이 있고, 생물이 있고, 절벽이 있고, 난송(亂松)이 있고―말하자면 심산이 가져야 할 유수미(幽邃味)를 다 구비하였다.

본시는 이 도회는 심산 중의 한 계곡이었다. 그것을 5백년간을 닦고, 갈고, 지어서 오늘날의 경성부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협곡에 국도(國都)를 창건한 이태조의 본의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 산보객의 자리에서 보자면 서울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미도(美都)일 것이다.

도회에 거주하며 식후의 산보로서 푸대님 채로 이러한 유수(幽邃)한 심산에 들어갈 수 있다 하는 점으로 보아서 서울에 비길 도회가 세계에 어디 다시 있으랴.

회흑색(灰黑色)의 지붕 아래 고요히 누워 있는 5백년의 도시를 눈아래 굽어보는 여의 사위에는 온갖 고산식물이 난성(亂盛)하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와 눈아래 날아드는 기조(奇鳥)들은 완전히 여로 하여금 등산객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여는 스틱을 바위틈에 꽂아 놓았다. 그리고 굴러떨어지기를 면키 위하여 잔솔의 새에 자리잡고 비스듬히 앉았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잠시의 산보로 여기고 담배도 안 가지고 나온 발이 더듬더듬 여기까지 미쳤으므로 담배도 없다.

시야의 한편에는 2,3장의 바위, 다른 한편에는 푸르른 하늘, 그 끝으로는 솔잎이 서너 개 어렴풋이 보인다. 그윽히 코로 몰려들어오는 송진님새. 소나무에 불리는 바람소리―

유수키 짝이 없다. 여가 지금 앉아 있는 자리는 개벽 이래로 과연 몇 사람이나 밟아 보았을까. 이 바위 생긴 이래로 혹은 여가 맨처음 발 대어본 것이 아닐까. 아까 바위를 기어서 이곳까지 올라오느라고 애쓰던 그런 맹랑한 노력을 하여본 바보가 여 이외에 몇 사람이나 있었을까. 그런 모험을 맛보기 위하여 심산을 찾아온 용사는 많을 것이로되 결사적 인왕 등산을 한 사람은 그리 많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등 뒤 바위에는 암굴이 있다.뱀이라도 있을까 무서워서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스틱으로 휘저어본 결과로도, 세사람은 넉넉히 들어가 앉아 있음직하다.

이 암굴을 무엇에 이용할 수가 없을까.

음모의 도시. 한양은 그새 5백년간 별별 음흉한 사건이 연출되었다. 시가 끝에서 반시간 미만에 넉넉히 올 수 있는 이런 가까운 거리에 뚫린 암굴은, 있는 줄 알기만 하였으면 혹은 음모에 이용되지 않았을까.

공상!

유수한 맛에 젖어 있던 여는 이 암굴 때문에 차차 불쾌한 공상에 빠지기 시작하려 한다.

온갖 음모, 그 뒤를 잇는 살육·모함·방축, 이조 5백년간의 추악한 모양이 여로 하여금 불쾌한 공상에 빠지게 하려 한다.

여는 황망히 이런 불쾌한 공상에서 벗어나려고 주머니에 담배를 뒤적이었다. 그러나 담배는 여전히 있을 까닭이 없었다.

다시 눈을 들어서 안하를 굽어보면 일면에 깔린 송초(松梢)!

반짝!

보매 한줄기의 샘이다. 소나무 틈으로 보이는 그 샘은 아마 바위틈을 흐르는 샘물인 듯. 똘똘똘똘 들리는 것은 아마 바람소리겠지. 저렇듯 멀리 아래 있는 샘의 소리가 이곳까지 들릴 리가 없다.

샘물!

저 샘물을 두고 한 개 이야기를 꾸며볼 수가 없을까. 흐르는 모양도 아름답거니와 흐르는 소리도 아름답고, 그 맛도 아름다운 샘물을 두고 한 개 재미있는 이야기가 여의 머리에 생겨나지 않을까. 암굴을 두고 생겨나려던 음모·살육의 불쾌한 공상보다 좀더 아름다운 다른 이야기가 꾸며나지 않을까.

여는 바위틈에 꽂았던 스틱을 도로 뽑았다. 그 스틱으로써 여의 발아래 바위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한 개 이야기를 꾸며보았다.

한 화공이 있다.

화공의 이름은? 지어내기가 귀찮으니 신라 때의 화성(畵聖)의 이름을 차용하여 솔거(率居)라 하여 두자.

시대는?

시대는 이 안하에 보이는 도시가 가장 활기 있고 아름답던 시절인 세종 성주의 때쯤으로 하여 둘까.

백악이 흘러내리다가 맺힌 곳. 거기는 한양의 정기를 한몸에 지닌 경복궁 대궐이 있다. 이 대궐의 북문인 신무문(神武問) 밖 우거진 뽕밭 새에 중로(中老)의 사나이가 오뇌(懊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화공 솔거였다.

무르익은 여름, 뜨거운 볕은 뽕잎이 가리워준다. 하나, 훈훈한 기운은 머리 위 뽕잎과 땅에서 우러나서 꽤 무더운 이 뽕밭 속에 숨어 있는 화공, 자그마한 보따리에는 점심까지 싸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저녁까지 이곳에 있을 셈인 모양이다.

그러나 무얼 하는지, 단지 땀을 펑펑 흘리며 오뇌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다.

왕후 친잠(王后親蠶)에 쓰이는 이 뽕밭은 잡인들이 다니지 못할 곳이다. 하루 종일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

때때로 바람이 우수수하니 뽕나무 위로 불기는 하나 솔거가 숨어 있는 곳에는 한점의 바람도 들어오지 않는다. 이 무더운 속에 솔거는 바람이 불 적마다 몸을 흠칫흠칫 놀라며, 그러면서도 무엇을 기다리듯이 뽕나무 그루 아래로 저편 앞을 주시하고 있다.

이윽고 석양이 무악을 넘고 이 도시에도 황혼이 들었다.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서 이 화공은 몸을 숨겨가지고 거기서 나왔다.

"오늘은 헛길, 내일이나 다시 볼까."

한숨 쉬면서 제 오막살이를 찾아 돌아가는 화공. 날이 벌써 꽤 어두웠지만 그래도 아직 저녁빛이 약간 남은 곳에 내어놓은 이 화공은 세상에 보기드문 추악한 얼굴의 주인이었다. 코가 질병자루같다, 눈이 퉁방울같다, 귀가 박죽같다, 입이 나발통같다, 얼굴이 두꺼비같다―소위 추한 얼굴을 형용하는 온갖 형용사를 한 얼굴에 지닌 흉한 얼굴의 주인으로서 그 얼굴이 또한 굉장히도 커서 멀리서 볼지라도 그 존재가 완연할 이 만하다.

이 얼굴을 가지고는 백주에는 나다니기가 스스로 부끄러울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솔거는 철이 들은 이래 여태껏 백주에 사람 틈에 나다닌 일이 없었다.

일찍이 열여섯 살에 스승의 중매로서 어떤 양가 처녀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 처녀는 솔거의 얼굴을 보고 기절을 하고, 기절에서 깨어나서는 그냥 집으로 도망쳐버리고―

그 다음 또 한 번 장가를 들어보았지만 그 색시 역시 첫날밤만 정신 모르고 치른 뒤에는 이튿날은 무서워서 죽어도 같이 못 살겠노라고 부모에게 떼를 써서 두 번째의 비극을 겪고―

이러한 두 가지의 사변을 겪고난 뒤에 솔거는 차차 여인이라는 것을 보기를 피하여오다가 그 괴벽이 점점 자라서 나중에는 일체로 사람이란 것의 얼굴을 대하기가 싫어졌다.

사람을 피하기 위하여―그리고 또한 일방으로는 화도(畵道)에 정진하기 위하여, 인가를 떠나서 백악의 숲속에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하나 틀고 거기 숨은지 근 삼십년. 생활에 필요한 물건 혹은 그림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하여 부득이 거리에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반드시 밤을 택하였다. 피할 수 없어 낮에 나갈 때는 방립을 쓰고 그 위에 얼굴을 베로 가리었다.

화도에 발을 들여놓은 지 근 사십년, 부득이한 은둔생활을 경영한 지 삼십년, 여인에게로 소모되지 못한 정력은 머리로 모이고, 머리로 모인 정력은 손끝으로 뻗어서 종이에, 비단에 갈겨던진 그림이 벌써 수천 점. 처음에는 그 그림에 대하여 아무 불만도 느껴보지 않았다.

하늘에서 타고난 천분과 스승에게서 얻은 훈련과 저축된 정력의 소산인 한 장의 그림이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히 여기고 스스로 자랑스러이 여기던 그였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밟기 이십년에 차차 그의 마음에 움돋은 불만,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화도에는 이단적인 생각일는지도 모를 것이다.

좀 다른 것은 그릴 수가 없는가.

산이다, 바다다, 나무다,시내다, 지팡 짚은 노인이다, 다리다, 혹은 돛단배다, 꽃이다. 과즉 달이다, 소다,목동이다.

이밖에 그가 아직 그려본 것이 무엇이었던가.

유원(幽遠)한 맛, 단 한가지밖에 없는 전통적 그림보다 좀더 다른 것을 그려보고 싶다.

여태껏 스승에게 배운 바의 백발백염(白髮白髥)의 노옹이나 피리부는 목동 이외에 좀더 얼굴에 움직임이 있는 사람을 그려보고 싶다. 표정이 있는 얼굴을 그려보고 싶다.

이리하여 재래의 수법을 아낌없이 내어던진 솔거는 그로부터 십년간을 사람의 표정을 그리느라고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사람의 세상을 멀리 떠나서 따로이 사는 이 화공에게는 사람의 표정이 기억에 가맣다.

상인들의 간특한 얼굴, 행인들의 덜난 무표정한 얼굴, 나무꾼들의 싱거운 얼굴, 그새 보고 지금도 대할 수 있는 얼굴은 이런 따위뿐이다. 좀더 색채 다른 표정은 없느냐.

색채 다른 표정!

색채 다른 표정!

이 욕망이 화공의 마음에 익고 커가는 동안 화공의 머리에 솟아오르는 몽롱한 기억이 있다.

지금은 거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어린 시절에 자기를 품에 안고 눈물 글썽글썽한 눈으로 굽어보던 어머니의 표정이 가끔 한순간씩 그의 기억의 표면까지 뛰쳐올랐다.

그의 어머니는 희세의 미녀였다. 대대로, 이후의 자손의 미(美)까지 모두 미리 빼앗았던지 세상에 드문 미인이었다.

화공은 이 미녀의 유복자였다.

아비 없는 자식을 가슴에 붙안고 눈물 머금은 눈으로 굽어보던 표정.

철이 들은 이래로 자기를 보는 얼굴에서는 모두 경악과 공포밖에는 발견하지 못한 화공에게는 사십여년 전의 어머니의 사랑의 아름다운 얼굴이 때때로 몸서리치도록 그리웠다.

그것을 그려보고 싶었다.

커다란 눈에 그득히 담긴 눈물, 그러면서도 동경과 애무로서 빛나던 눈, 입가에 떠오르던 미소.

번개와 같이 순간적으로 심안(心眼)에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이 환영을 화공은 그려보고 싶었다.

세상을 피하고 숨어살기 때문에 차차 삐뚤어진 이 화공의 괴벽한 마음에는 세상을 그리는 정열이 또한 그만치 컸다. 그리고 그것이 크면 크니만치 마음속에는 늘 울분과 불만이 차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서는 한창 계집 사내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좋다고 야단할 것을 생각하고는 음울한 얼굴로 화필을 뿌리는 화공.

이러한 가운데서 나날이 괴벽하여가는 이 화공은 한 개 미녀상(美女像)을 그려보고자 노심하였다.

처음에는 단지 아름다운 표정을 가진 미녀를 그려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녀를 가까이 본 일이 없는 이 화공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붓끝에 역정을 내며 있는 동안 차차 어느덧 미녀상에 대한 관념이 달라졌다.

자기의 아내로서의 미녀상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세상은 자기에게 아내를 주지 않는다.

보면 한 마리의 곤충, 한 마리의 날짐승도 각기 짝을 찾아 즐기고, 짝을 찾아 좋아하거늘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짝없이 오십년을 보냈다 하는 데 대한 불만이 일어났다.

세상놈들은 자기에게 한 짝을 주지 않고 세상 계집들은 자기에게 오려는 자가 없이 홀몸으로 일생을 보내다가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이 산골에서 죽어버릴 생각을 하면 한심하기 보다는 도리어 이렇듯 박정한 사람의 세상이 미웠다.

세상이 주지 않는 아내를 자기는 자기의 붓끝으로 만들어서 세상을 비웃어주리라.

이 세상에 존재한 가장 아름다운 계집보다 더 아름다운 계집을 자기의 붓끝으로 그려서 못나고도 아름다운 체하는 세상 계집들을 웃어주리라.

덜난 계집을 아내로 맞아가지고 천하의 절색이라 믿고 있는 사내놈들도 깔보아주리라.

4,5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좋다꾸나고 춤추는 헌놈들도 굽어보아주리라.

미녀! 미녀!

―눈을 감고 생각하고 눈을 뜨고 생각하고 머리를 움켜쥐고 생각해보나 미녀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론 얼굴에 철요(凸凹)가 없고 이목구비가 제대로 놓였으면 세상 보통의 미인이라 한다. 그런 얼굴에 연지나 그리고 논에 미소나 그려넣으면 더 아름다워지기는 할 것이다. 이만 것은 상상의 눈으로도 볼 수가 있는 자며 붓끝으로 그릴 수도 없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가야만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얼굴을 순영적(瞬影的)으로나마 기억하는 이 화공으로서는 그런 미녀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뇌의 불만 중에서 흐르는 세월은 1년 또 1년, 무위히 흘러간다.

미녀의 아랫동이는 그려진 지 벌써 수년. 그 아랫동이 위에 올려놓일 얼굴을 어떻게 하여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화공의 오막살이 방안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걸려 있는 한 폭 그림은 언제든 어서 목과 얼굴을 그려주기를 기다리듯이 화공을 힐책한다.

화공은 이것을 보기가 거북하였다.

특별한 일이라도 있기 전에는 낮에 거리에 다니지를 않던 이 화공이 흔히 얼굴을 싸매고 장안을 돌아다녔다.

행여나 길에서라도 미녀를 만날까 하는 요행심으로였다. 길에서 순간적으로 마음에 드는 미녀를 볼 수만 있으면 머리에 똑똑히 캐치하여 그 기억으로써 화상을 그릴까 하는 요행심으로……

그러나 내외법이 심한 이 도회에서 대낮에 양가의 부녀가 얼굴을 내놓고 길을 다니지는 않았다. 계집이라는 것은 하인배나 하류배뿐이었다.

하인배·하류배에도 때때로 미녀라 일컬을 자가 있기는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산뜻한 미를 갖기는 했다 하나 얼굴에 흐르는 표정이 더럽고 비열하여 캐치할 만한 자가 없었다.

얼굴을 싸매고 거리로 방황하며 혹은 계집들이 많이 모이는 우물가며 저자를 비슬비슬 방황하며 어찌어찌하여 약간 예쁜 듯한 계집이라도 보이면 따라가면서 얼굴을 연구해보곤 했으나 마음에 드는 미녀를 지금껏 얻어내지를 못하였다.

혹은 심규(深閨)에는 마음에 드는 계집이라도 있을까. 심규! 심규! 한 번 심규의 계집들을 모조리 눈앞에 벌여 세우고 얼굴 검사를 하여보았으면……

초조하고 성가신 가운데서 날을 보내고 날을 맞으면서 미녀를 구하던 화공은 마지막 수단으로 친잠상원(親蠶桑園)에 들어가서 채상(採桑)하는 궁녀의 얼굴을 얻어보려 하였다.그러나 불행히도 화공의 모험도 헛길로 돌아가고, 그날은 채상을 하러 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 바야흐로 누에시절이라 견딜성있게 기다리노라면 궁녀의 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미녀―아내의 얼굴을 그리려는 욕망에 열이 오르고 독이 난 이 화공은 그 이튿날 또 뽕밭에 들어가 숨었다. 숨어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달, 화공은 나날이 점심을 싸가지고 상원(桑園)으로 갔다. 그러나 저녁때 제 오막살이로 돌아올 때는 언제든지 그의 입에서는 기다란 탄식성이 나왔다.

궁녀를 못본 바가 아니었다.

마치 여기 숨어 있는 화공에게 선보이려는 듯이 나날이 궁녀들은 번갈아 왔다.한떼씩 밀려와서는 옷소매 치마자락을 펄럭이며 뽕을 따갔다. 한달 동안에 합계 사오십명의 궁녀를 보았다. 모두 일률로 미녀들이었다. 그리고 길가 우물가에서 허투루 볼 수 있는 미녀들보다 고아한 얼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눈―화공이 보는 바는 그 눈이었다.

그 눈에 나타난 애무와 동경이었다. 철철 넘어 흐르는 사랑이었다. 그것이 궁녀에게는 없었다. 말하자면 세상 보통의 미녀였다.

자기에게 계집을 주지 않는 고약한 세상에게 보복하는 의미로 절세의 미녀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 화공의 커다란 야심으로서는 그만 따위의 미녀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오막살이로 돌아올 때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기다란 한숨, 이런 한숨을 쉬기 한달―그는 다시 상원에 가지 않았다.

가을 하늘 맑고 푸르른 어떤 날이었다.

마음속에 불만과 동경을 가득히 담은 히 화공은 저녁쌀을 씻으려 소쿠리를 옆에 끼고 시내로 더듬어갔다.

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우거진 소나무 틈으로 보이는 시냇가 바위 위에 왠 처녀가 앉아 있다. 솔가지 틈으로 내리비치는 얼룩지는 석양을 받고 망연히 앉아서 흐르는 새냇물을 내려다보았다.

왠 처녀일까?

인가에서 꽤 떨어진 이곳, 사람의 동리보다 꽤 높은 이곳, 길도 없는 이곳―아직껏 삼십년간을 때때로 초부나 목동의 방문은 받아본 일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자취를 받아보지 못한 이곳에 왠 처녀일까?

화공도 망연히 서서 바라보았다. 바라볼 동안 가슴에 차차 무거운 긴장을 느꼈다.

한걸음 두걸음 화공은 발소리를 감추고 나아갔다. 차차 그 상거가 가까워감을 따라서 분명하여 가는 처녀의 얼굴.

화공의 얼굴에는 피가 떠올랐다.

세상에 드문 미녀였다. 나이는 열 일여덟, 그 얼굴 생김이 아름답다기보다 얼굴 전면에 나타난 표정이 놀랄 만큼 아름다왔다.

흐르는 시내에 눈을 부었는지, 귀를 기울였는지, 하여간 처녀의 온 주의력은 시내에 모여 있다. 커다랗게 뜨인 눈은 깜박일 줄도 잊은 듯한 황홀한 눈으로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남벽(藍碧)의 시냇물에는 용궁이 보이는가? 소나무 그루에 부딪쳐서 튀어나는 바람에 앞머리를 약간 날리면서 처녀가 굽어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처녀의 온 공상과 정열과 환희가 한꺼번에 모인 절묘한 미소를 눈과 입에 띠고 일심불란(一心不亂)히 처녀가 굽어보는 것은 무엇인가.

아아.

화공은 드디어 발견하였다. 그새 십년간을 여항(閭巷)의 길거리에서 혹은 우물가에서 내지는 친잠 상원에서 발견하여보려고 애쓰다가 종내 달하지 못한 놀랄 만한 아름다운 표정을 화공은 뜻 안한 여기서 발견하였다.

화공은 걸음을 빨리 하였다. 자기의 얼굴이 얼마나 더럽게 생겼는지, 이 처녀가 자기를 쳐다보면 얼마나 놀랄지, 이 점을 온전히 잊고 걸음을 빨리하여 처녀의 쪽으로 갔다.

처녀는 화공의 발소리에 머리를 번쩍 들었다. 화공을 바라보았다. 그 무한히 먼곳을 바라보는듯한 기묘한 눈을 들어서―

"아아……"

가슴이 무둑하여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 망설이며 화공이 반벙어리같은 소리를 할 때에 처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오니까?"

여기가 어디?

"여기가 인왕산록 이름도 없는 산이지만 너는 웬 색시냐?"

"네……"

문득 떠오르는 적적한 표정.

"더듬더듬 시내를 따라왔습니다."

화공은 머리를 기울였다. 몸을 움직여보았다. 무한히 먼곳을 바라보는 듯한 처녀의 눈은 그냥 움직임없이 커다랗게 뜨여 있기는 하지만 어디를 보는지 무엇을 보는지 알 수가 없다.

드디어 화공은 부르짖었다!

"너 앞이 보이느냐?

"소경이올시다."

소경이었다. 눈물 머금은 소리로 하는 대답을 듣고 화공은 좀더 가까이 갔다.

"앞도 못보면서 어떻게 무엇하러 예까지 왔느냐?"

처녀는 머리를 푹 수그렸다. 무슨 대답을 하는 듯하였으나 화공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화공으로 하여금 저으기 호기심을 잃게 한 것은 처녀의 얼굴이 아까와 같은 놀라운 매력있는 표정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만하면 보기드문 미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까 화공이 그렇듯 놀란 것은 단지 미인인 탓이 아니었다. 그 얼굴에 나타난 놀라운 매력에 끌린 것이었다.

"불쌍도 하지. 저녁도 가까워오는데 어둡기 전에 집으로 나려가거라."

이만큼하여 화공은 처녀를 포기하려 하였다. 이 말에 처녀가 응하였다.

"어두운 것은 탓하지 않습니다마는 황혼은 매우 아름답지요?"

"그럼 아름답구말구."

"어떻게 아름답습니까?"

"황금빛이 서산에서 줄기줄기 비치는구나. 거기 새빨갛게 물들은 천하―푸르른 소나무도, 남빛 바위도, 검붉은 나무 그루도, 모 두 황금빛에 잠겨서……"

"황금빛은 어떤 것이고 새빨간 빛과 붉은빛은 모두 어떤 빛이오니까? 밝은 세상이라지만 밝은빛과 붉은빛이 어떻게 다릅니까? 이 산 경치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더듬어왔습니다마는 바람 소리, 돌물소리, 귀로 들리는 소리밖에는 어디가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차 다시 나타나는 미묘한 표정, 커다랗게 뜨인 눈에 비치는 동경의 물결, 일단 사라졌던 아름다운 표정은 다시 생기가 비롯하였다.

화공은 드디어 처녀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이 샘줄기를 따라내려가면 바다가 있구, 바닷속에는 용궁이 있구나. 칠색 비단을 감은 기둥과 비취를 아로새긴 댓돌이며 황금 으로 만든 풍경(風磬), 진주로 꾸민 문설주……"

마주 앉아서 엮어내리는 이 화공의 이야기에 각일각 더욱 황홀하여가는 처녀의 눈이었다. 화공은 드디어 이 처녀를 자기의 오막살이로 데리고 돌아갈 궁리를 하였다.

"내 용궁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너의 집에서 걱정만 안하실 것같으면……"

화공이 이렇게 꾈 때에 처녀는 그의 커다란 눈을 들어서 유원(幽園)히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자기네 부모는 병신 딸 따위는 없어져도 근심을 안한다고 쾌히 화공의 뒤를 따랐다.

일사천리로 여기까지 밀려오던 여(余)의 공상은 문득 중단되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진전시키나?

잡념이 일어난다. 동시에 여의 귀에 들리어오는 한 절의 유행가.

여는 머리를 들었다. 저편 뒤 어디 잡인들이 온 모양이다. 그 분요(紛擾)가 무의식중에 귀로 들어와서 여의 집중되었던 머리를 헤쳐놓는다.

귀찮은 가사(歌師)들이여, 저주받을 가사들이여.

이 저주받을 가사들 때문에 중단된 이야기는 좀처럼 다시 모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말 없는 이야기가 어디 있으랴. 어찌되었든 결말은 지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 화공은 처녀를 데리고 제 오막살이로 돌아와서 용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동안에 처녀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서 십년래의 숙망을 성취하였다는 결말로 맺어버릴까?

그러나 이런 싱거운 결말이 어디 있으랴. 결말이 되기는 되었지만 이따위 결말을 짓기 위하여 그런 서두(序頭)는 무의미한 자다.

그러면?

그럼 다르게 결말을 맺어볼까?

화공은 처녀를 제 오막살이로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처녀에게 용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아까 용궁 이야기를 초벌 들은 처녀는 이번은 그렇듯 큰 감흥도 느끼지 않는 모양으로 그다지 신통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화공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화공은 그 그림을 영 미완품인 채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결말이었다.

그럼 또다시―

화공은 처녀를 데리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처녀를 보면 볼수록 탐스러워서 그림은 집어치우고 처녀를 아내로 삼아버렸다. 앞을 못보는 처녀는 추하게 생긴 화공에게도 아무 불만이 없이 일생을 즐겁게 보냈다. 그림으로나 아내를 얻으려던 화공은 절세의 미녀를 아내로 얻게 되었다……

역시 불만이다.

귀찮고 성가시다. 저주받을 유행가사(流行歌師)여!

여는 일어났다. 감흥을 잃은 이 자리에 그냥 앉아 있기는 싫었다. 그냥 들리는 유행가……그것이 안들리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굽어보매 저 멀리 소나무 틈으로 한줄기 번득이는 것은 아까의 샘물이다.

그 샘물로, 가장 이 이야기의 원천이 된 그 샘으로 내려가자.

벼랑을 내려가기는 올라가기보다 더 힘들었다. 올라가는 것은 올라가다가 실수하여 떨어지면 과즉 제자리에 내린다. 그러나 내려가다가 발을 실수하면 어디까지 굴러갈지 예측할 길이 없다. 잘못하다가는 청운동 어귀까지 굴러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올라갈 때에는 도움이 되던 스틱조차 내려갈 때에는 귀찮기 짝이없다.

반각이나 걸려서 여는 드디어 그 샘가에 도달하였다.

샘가에는 과연 한 개의 바위가, 사람 하나 앉기 좋을 만한 자리가 있다. 이 바위가 화공 쌀 씻던 바위일까. 처녀가 앉아서 공상하던 바위일까? 그 아래를 깊은 남벽(藍碧)으로 알았더니 겨우 한 뼘 미만의 얕은 물로서 바위를 기운없이 똘똘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 골짜기는 고요하기 짝이없었다. 바람소리도 멀리 위에서만 들린다. 그리고 소나무와 바위 둘러싸여서 꽤 음침한 이 골짜기는 옛날 세상을 피한 화공이 줄겨하였음직하다.

자, 그러면 이 골짜기에서 아까 그 이야기의 꼬리를 마저 지을까―

화공은 처녀를 데리고 오막살이로 돌아왔다.

그의 마음은 너무도 긴장되고 또한 기뻐서 저녁도 짓기 싫었다.들어와 보매 벌써 여러해를 머리 달리기를 기다리는 족자(簇子)의 여인이 몸집조차 흔연히 화공을 맞는 듯하였다.

"자, 거기 앉아라."

수년간 화공을 힐책하던 머리 없는 그림이 화공의 앞에 펴졌다. 단청도 준비되었다.

터질 듯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폭 앞에자리를 잡은 화공은 빛이 비치도록 남향하여 처녀를 낮히고 손으로 붓을 적시며 이야기를 꺼냈다.

벌써 황혼, 인제 얼마남지 않은 오늘 해로써 숙망을 달하려 하는 것이었다. 십년간을 벼르기만 하면서 착수를 못했기 때문에 저축되었던 화공의 힘은 손으로 모였다.

"그러구……알겠지?"

눈으로는 처녀의 얼굴을 보며, 입으로는 용굴 이야기를 하며 손은 번개같이 붓을 들었다.

"용궁에는 여의주라는 구슬이 있구나. 이 여의주라는 구슬은 마음에 있는 바에 도달할 수 있는 보물로서 구슬을 네 눈 위에 한 번 굴리면 너도 광명한 일월을 보게 된다."

"네? 구슬이 있습니까?"

"있구말구, 네가 내 말을 잘 듣고 있기만 하면 수일 내로 너를 데리고 용궁에 가서 여의주를 빌어서 네 눈도 고쳐주마."

"그러면 저도 광명한 일월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광명한 일월, 무지개라는 칠색이 영롱한 기묘한 것, 아름다운 수풀, 유수한 골짜기, 무엇인들 못 보랴."

"아이구, 어서 그 여의주를 구해서……"

아아, 놀라운 아름다운 표정이었다. 화공은 처녀의 얼굴에 나타나 넘치는 이 놀라운 표정을 하나도 잃지 않고 화폭 위에 옮겼다.

황혼은 어느덧 밤으로 변하였다. 이때는 여인에게는 단지 눈동자가 그려지지 않았을 뿐 그밖의 것은 죄 완성이 되었다.

동자까지 그리고 싶었다.그러나 이 그림의 생명을 좌우할 눈동자를 그리기에는 날은 너무도 어두웠다.

눈동자 하나쯤이야 밝는 날로 남겨둔들 어떠랴. 하여간 십년 숙망을 겨우 달한 화공의 심사는 무엇에 비기지 못하도록 기뻤다.

"아―아!"

이 탄성은 오래 벼르던 일이 끝난 때에 나는 기쁨의 소리였다.

이 일단의 안심과 함께 화공의 마음에는 또다른 긴장과 정열이 솟아올랐다.

꽤 어두운 가운데서 처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기 위하여 화공이 잡은 자리는 처녀의 무릎과 서로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림에 대한 일단의 안심과 함께 화공의 코로 몰려들어오는 강렬한 처녀의 체취와 전신으로 느끼는 처녀의 접근 때문에 화공의 신경은 거의 마비될 듯싶었다. 차차 각일 각 몸까지 떨리기 시작하였다. 어두움 가운데서 황홀스러이 빛나는 커다란 눈과 정열로 들먹거리는 입술은 화공의 정신까지 혼미하게 하였다.

밝는 날 화공과 소경 처녀의 두 사람은 벌써 남이 아니었다.

'오늘은 동자를 완성시키리라.'

삼십년의 독신생활을 벗어버린 화공은 삼십년간을 혼자 먹던 조반을 소경 처녀와 같이 멱고 다시 그림폭 앞에 앉았다.

"용궁은?"

기쁨으로 빛나는 처녀의 눈!

그러나 화공의 심미안에 비친 그 눈은 어제의 눈이 아니었다.

아름답기는 다시없는 아름다운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은 사내의 사랑을 구하는 '여인의 눈'이었다. 병신이라 수모받던 전생을 벗어버리고 어젯밤 처음으로 인생이 봄을 맛본 처녀는 인제는 한 개의 지어미의 눈이요, 한 개의 애욕의 눈이었다.

"용궁은?"

"용궁에 어서 가서 여의주를 얻어서 제 눈을 띄어주세요. 밝은 천지도 천지려니와 당신이 어서 눈뜨고 보고 싶어!"

어젯밤 잠자리에서 지기는 스물 네 살난 풍신 좋은 사내라고 자랑한 화공의 말을 그대로 믿는 소경이었다.

"응, 얻어주지. 그 칠색이 영롱한!"

"그 칠색도 보고 싶어요."

"그래 그래, 좌우간 지금 머리로 생각해보란 말이야."

"네, 참 어서 보고 싶어서."

굽어보면 무릎 앞의 그림은 어서 한점 동자를 찍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소경의 눈에 나타난 것은 아름답기는 아름다우나 그것은 애욕의 표정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런 눈을 그리려고 십년을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자, 용궁을 생각해봐!"

"생각이나 하면 뭘 합니까? 어서 이 눈으로 보아야지."

"생각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짐작이 가야 생각도 하지요."

"어제 생각하던 대로 생각을 해봐!"

"네……"

화공은 드디어 역정을 내었다.

"자, 용궁! 용궁!"

"네……"

"용궁을 생각해봐! 그래 용궁이 어때?"

"칠색이 영롱하구요……"

"그래, 또……"

"또, 황금기둥, 아니 비단으로 싼 기둥이 있구요, 또 푸른 진주가……"

"푸른 진주가 아냐! 푸른 비취지."

"비취 추녀던가, 문이던가―?"

"에익! 바보!"

화공은 커다란 양손으로 칵 소경의 어깨를 잡았다. 잡고 흔들었다.

"자, 다시 곰곰이, 용궁은."

"용궁은 바닷속에……"

겁에 띄어서 어릿거리는 소경의 양에 화공은 소경의 따귀를 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

이런 바보가 어디 있으랴. 보매 그 병신 눈은 깜박일 줄도 모르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천치같은 눈을 보매 화공의 노염은 더욱 커졌다. 화공은 양손으로 소경의 멱을 잡았다.

"에이 바보야, 천치야, 병신아!"

생각나는 저주의 말을 연하여 퍼부으면서 소경의 멱을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병신다이 멀겋게 뜨인 눈자위에 원망의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더욱 힘있게 흔들었다.

흔들다가 화공은 탁 그 손을 놓았다. 소경의 몸이 너무도 무거워졌으므로, 화공의 손에서 놓인 소경의 몸은 눈을 뒤솟은 채 번뜻 나가넘어졌다. 넘어지는 서슬에 벼루가 전복되었다. 뒤집혀진 벼루에서 튀어난 먹물방울이 소경 얼굴에 덮였다.

깜짝 놀라서 흔들어보매 소경은 벌써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소경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망지소조(芒知所措)하여 허둥거리던 화공은 눈을 뜻없이 자기의 그림 위에 던지다가 악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그 그림의 얼굴에는 어느덧 동자가 찍히었다. 자빠졌던 화공이 좀 정신을 가다듬어가지고 몸을 일으켜서 다시 그림을 보매 두 눈에는 완연히 동자가 그려진 것이다.

그 동자의 모양이 또한 화공으로 하여금 다시 털썩 엉덩이를 붙이게 하였다. 아까 소경 처녀가 화공에게 멱을 잡혔을 때에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원망의 눈―그림의 동자는 완연히 그것이었다.

소경이 넘어지는 서슬에 벼루를 엎는다는 것은 기이할 것도 없고 벼루가 엎어질 때에 먹방울이 튄다는 것도 기이하달 수 없지만 그 먹방울이 어떻게 홍채에 이르기까지 어찌도 그렇듯 기묘하게 되었을까?

한편에는 송장, 한편에는 송장의 화상을 놓고 망연히 앉아 있는 화공의 몸은 스스로 멈출 수 없이 와들와들 떨렸다.

수일 후부터 한양 성내에는 괴상한 화상을 들고 음울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늙은 광인(狂人) 하나가 생겼다.

그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괴상한 화상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므로 사람들이 보고자 하면 그는 기를 써서 보이지 않고 도망하여버리곤 한다.

이렇게 수년간을 방황하다가 어떤 눈보라치는 날 돌베개를 베고 그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죽을 때도 그는 족자를 깊이 품에 품고 죽었다.

늙은 화공이여! 그대의 쓸쓸한 일생을 여는 조상하노라.

여(余)는 지팡이로써 물을 두어번 저어보고 그즈너기 몸을 일으켰다.

우러러보매 여름의 석양은 벌써 백악 위에서 춤추고 이 천고의 계곡을 산새가 남북으로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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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醫師의 手記-

그것은 여(余)가 만주를 여행할 때 일이었다. 만주의 풍속도 좀 살필 겸 아직껏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그들의 사이에 퍼져 있는 병(病)을 조사할 겸해서 일년의 기한을 예산하여 가지고 만주를 시시콜콜이 다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에 ××촌이라 하는 조그만 촌에서 본 일을 여기에 적고자 한다.

××촌은 조선사람 소작인만 사는 한 이십여 호 되는 작은 촌이었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한개의 산도 볼 수가 없는 광막한 만주의 벌판 가운데 놓여 있는 이름도 없는 작은 촌이었다. 몽고사람 종자(從者)를 하나 데리고 노새를 타고 만주의 촌촌을 돌아다니던 여가 그 ××촌에 이른 때는 가을도 다 가고 어느덧 광포한 북극의 겨울이 만주를 찾아온 때였다.

만주의 어느 곳이나 조선사람이 없는 곳은 없지만 이러한 오지(奧地)에서 한 동네가 죄 조선 사람뿐으로 되어 있는 곳을 만나니 반가왔다. 더구나 그 동네는 비록 모두가 만주국인의 소작인이라 하나, 사람들이 비교적 온량하고 정직하여, 장성한 이들은 그래도 모두 천자문 한 권쯤은 읽은 사람이었다.

살풍경한 만주, 그 가운데서 살풍경한 살림을 하는 만주국인이며 조선사람의 동네를 근 일년이나 돌아다니다가 비교적 평화스런 이런 동네를 만나면, 그것이 비록 외국인의 동네라 하여도 반갑겠거늘, 하물며 우리 같은 동족임에랴. 여는 그 동네에서 한 십여 일 이상을 일없이 매일 호별 방문을 하며 그들과 이야기로 날을 보내며, 오래간만에 맛보는 평화적 기분을 향락하고 있었다.

'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정익호'라는 인물을 본 것이 여기서이다.

익호라는 인물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촌에서 아무도 몰랐다. 사투리로 보아서 경기 사투리인 듯하지만 빠른 말로 재재거리는 때에는 영남 사투리가 보일 때도 있고, 싸움이라도 할 때는 서북 사투리가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지라 사투리로서 그의 고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쉬운 일본말도 알고, 한문글자도 좀 알고, 중국말은 물론 꽤 하고, 쉬운 러시아말도 할 줄 아는 점 등등, 이곳저곳 숱하게 줏어먹은 것은 짐작이 가지만 그의 경력을 똑똑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여(余)가 ××촌에 가기 일년 전쯤 빈손으로 이웃이라도 오듯 후덕덕 ××촌에 나타났다 한다. 생김생김으로 보아서 얼굴이 쥐와 같고 날카로운 이빨이 있으며 눈에는 교활함과 독한 기운이 늘 나타나 있으며, 발룩한 코에는 코털이 밖으로까지 보이도록 길게 났고, 몸집은 작으나 민첩하게 되었고, 나이는 스물 다섯에서 사십까지 임의로 볼 수 있으며, 그 몸이나 얼굴 생김이 어디로 보든 남에게 미움을 사고 근접치 못할 놈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의 장기(長技)는 투전이 일쑤며, 싸움 잘하고, 트집 잘 잡고, 칼부림 잘하고, 색시에게 덤벼들기 잘하는 것이라 한다.

생김생김이 벌써 남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거기다 하는 행동조차 변변치 못한 일만이라, ××촌에서도 아무도 그를 대척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하였다. 집이 없는 그였으나 뉘 집에 잠이라도 자러 가면 그 집 주인은 두말 없이 다른 방으로 피하고 이부자리를 준비하여주고 하였다. 그러면 그는 이튿날 해가 낮이 되도록 실컷 잔 뒤에 마치 제 집에서 일어나듯 느직이 일어나서 조반을 청하여 먹고는 한마디의 사례도 없이 나가버린다.

그리고 만약 누구든 그의 이 청구에 응치 않으면 그는 그것을 트집으로 싸움을 시작하고, 싸움을 하면 반드시 칼부림을 하였다.

동네의 처녀들이며 젊은 여인들은 익호가 이 동네에 들어온 뒤부터는 마음놓고 나다니지를 못하였다. 철없이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도 몇이 있었다.

'삵'

이 별명은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어느덧 ××촌에서는 익호를 익호라 부르지 않고 '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삵이 뉘 집에서 묵었나?”

“김 서방네 집에서.”

“다른 봉변은 없었다나?”

“요행히 없었다네.”

그들은 아침에 깨면 서로 인사 대신으로 '삵'의 거취를 알아보고 하였다.

'삵'은 이 동네에는 커다란 암종이었다. '삵' 때문에 아무리 농사에 사람이 부족한 때라도 젊고 튼튼한 몇 사람은 동네의 젊은 부녀를 지키기 위하여 동네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삵' 때문에 부녀와 아이들은 아무리 더운 여름 저녁에라도 길에 나서서 마음놓고 바람을 쏘여보지를 못하였다. '삵' 때문에 동네에서는 닭의 가리며 돼지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밤을 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네의 노인이며 젊은이들은 몇번을 모여서 '삵'을 이 동리에서 내어쫓기를 의논하였다. 물론 합의는 되었다. 그러나 내어쫓는 데 선착할 사람이 없었다.

“첨지가 선착하면 뒤는 내 담당하마.”

“뒤는 걱정 말고 형님 먼저 말해보시오.”

제각기 '삵'에게 먼저 달겨들기를 피하였다.

이리하여 동리에서는 합의는 되었으나 '삵'은 그냥 태연히 이 동네에 묵어있게 되었다.

“며늘년들이 조반이나 지었나?”

“손주놈들이 잠자리나 준비했나?”

마치 그 동네의 모두가 자기의 집안인 것같이 '삵'은 마음대로 이집 저집을 드나들었다.

××촌에서는 사람이라도 죽으면 반드시 조상 대신으로,

“삵이나 죽지 않고.”

하는 한마디의 말을 잊지 않고 하였다. 누가 병이라도 나면,

“에익! 이 놈의 병 '삵'한테로 가거라.”

고 하였다.

암종 - 누구나 '삵'을 동정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

'삵'도 남의 동정이나 사랑은 벌써 단념한 사람이었다. 누가 자기에게 아무런 대접을 하든 탓하지 않았다. 보이는 데서 보이는 푸대접을 하면 그 트집으로 반드시 칼부림까지 하는 그였지만, 뒤에서 아무런 말을 할지라도 - 그리고 그것이 '삵'의 귀에까지 갈지라도 탓하지 않았다.

“흥…”

이 한마디는 그의 가장 큰 처세 철학이었다.

흔히 곁 동네 만주국인들의 투전판에 가서 투전을 하였다. 때때로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하소연을 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할지라도 들을 사람도 없거니와 - 아무리 무섭게 두들겨 맞은 뒤라도 하루만 샘물에 상처를 씻고 절룩절룩한 뒤에는 또 이튿날은 천연히 나다녔다.

여(余)가 ××촌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송 첨지라는 노인이 그해 소출을 나귀에 실어 가지고 만주국인 지주가 있는 촌으로 갔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송장이 되었다. 소출이 좋지 못하다고 두들겨 맞아서 부러져 꺾어진 송 첨지는 나귀등에 몸이 결박되어서 겨우 ××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놀란 친척들이 나귀에서 몸을 내릴 때에 절명하였다.

××촌에서는 왁자하였다.

“원수를 갚자!”

명 아닌 목숨을 끊은 송 첨지를 위하여 동네의 젊은이는 모두 흥분하였다. 제각기 이제라도 들고 일어설 듯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누구든 앞장을 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이때에 누구든 앞장을 서는 사람만 있었더면 그들은 곧 그 지주에게로 달려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가 앞장을 서겠노라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제각기 곁사람을 돌아보았다.

발을 굴렀다. 부르짖었다. 학대받는 인종의 고통을 호소하며 울었다. 그러나 - 그뿐이었다. 남의 일로 지주에게 반항하여 제 밥자리까지 떼우기를 꺼림인지, 용감히 앞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여는 의사라는 여의 직업상 송 첨지 시체를 검시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여는 '삵'을 만났다. 키가 작은 '삵'을 여는 내려다보았다. '삵'은 여를 쳐다보았다.

‘가련한 인생아. 인종의 거머리야. 가치 없는 인생아. 밥 버러지야. 기생충아!’

여는 '삵'에게 말하였다.

“송 첨지가 죽은 줄 아나?”

여의 말에 아직껏 여를 쳐다보고 있던 '삵'의 얼굴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여가 발을 떼려는 순간 얼핏 '삵'의 얼굴에 나타난 비창한 표정을 여는 넘길 수가 없었다.

고향의 떠난 만리 밖에서 학대받는 인종의 가엾음을 생각하고 그 밤은 여도 잠을 못 이루었다.

그 억분함을 호소할 곳도 못 가진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고, 여도 눈물을 금치를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여를 깨우러 오는 사람의 소리에 여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삵'이 동구(洞口) 밖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는 '삵'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상, 곧 가방을 수습하여 가지고 '삵'이 넘어진 데까지 달려갔다. 송 첨지의 장례식 때문에 모였던 사람 몇은 여의 뒤를 따라왔다.

여는 보았다. '삵'의 허리가 기역자로 뒤로 부러져서 밭고랑 위에 넘어져 있는 것을 여는 달려가 보았다. 아직 약간의 온기는 있었다.

“익호! 익호!”

그러나 그는 정신을 못 차렸다. 여는 응급수단을 취하였다. 그의 사지는 무섭게 경련되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익호! 정신드나?”

그는 여의 얼굴을 보았다. 끝이 없이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었다.

겨우 처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저는 갔었습니다.”

“어디를?”

“그 놈… 지주 놈의 집에…”

무얼? 여는 눈물 나오려는 눈을 힘있게 닫았다. 그리고 덥석 그의 벌써 식어가는 손을 잡았다. 잠시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의 사지에서는 무서운 경련이 끊임없이 일었다. 그것은 죽음의 경련이었다. 듣기 힘든 그의 작은 소리가 또 그의 입에서 나왔다.

“선생님.”

“왜?”

“보고 싶어요. 전 보구 시…”

“뭐이?”

그는 입을 움직였다. 그러나 말이 안나왔다. 기운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그는 또다시 입을 움직였다. 무슨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무얼?”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 그리고 흰 옷이!”

아아, 죽음에 임하여 그의 고국과 동포가 생각난 것이었다. 여는 힘있게 감았던 눈을 고즈너기 떴다. 그때에 '삵'의 눈도 번쩍 뜨이었다. 그는 손을 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부러진 그의 손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돌이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런 힘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힘을 혀끝에 모아가지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

“왜?”

“저것… 저것…”

“무얼?”

“저기 붉은 산이… 그리고 흰 옷이… 선생님 저게 뭐예요!”

여는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는 황막한 만주의 벌판이 전개되어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 노래를 불러주세요. 마지막 소원 - 노래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는 머리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여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나왔다. 여는 고즈너기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고즈너기 부르는 여의 창가 소리에 뒤에 둘러섰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스는 울리어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 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엄숙하게 울리었다. 그 가운데 익호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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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 간통, 살인, 도둑,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사농공상의 제 이 위에 드는) 농민이었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이전 선비의 엄한 규율은 농민으로 떨어지자부터 없어졌다 하나, 그러나 어딘지는 모르지만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자라난 복녀는 물론 다른 집 처녀들같이 여름에는 벌거벗고 개울에서 멱감고, 바짓바람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을 예사로 알기는 알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저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열 다섯 살 나는 해에 동네 홀아비에게 팔십 원에 팔려서 시집이라는 것을 갔다. 그의 새서방(영감이라는 편이 적당할까)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이십 년이나 위로서, 원래 아버지의 시대에는 상당한 농민으로서 밭도 몇 마지기가 있었으나, 그의 대로 내려오면서는 하나 둘 줄기 시작하여서, 마지막에 복녀를 산 팔십 원이 그의 마지막 재산이었었다.

그는 극도로 게으른 사람이었었다. 동네 노인의 주선으로 소작 밭깨나 얻어주면, 종자나 뿌려둔 뒤에는 후치질도 안하고 김도 안 매고 그냥 버려두었다가는, 가을에 가서는 되는 대로 거두어서 ‘금년은 흉년이네’하고 전주집에는 가져도 안가고 자기 혼자 먹어버리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한밭을 이태를 연하여 붙여본 일이 없었다. 이리하여 몇 해를 지내는 동안 그는 그 동네에서는 밭을 못 얻으리만큼 인심과 신용을 잃고 말았다.

복녀가 시집을 온 뒤, 한 삼사 년은 장인의 덕으로 이렁저렁 지내갔으나, 이전 선비의 꼬리인 장인도 차차 사위를 밉게 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처가에까지 신용을 잃게 되었다.

그들 부처는 여러 가지로 의논하다가 하릴없이 평양 성 안으로 막벌이로 들어왔다. 그러나 게으른 그에게는 막벌이나마 역시 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지게를 지고 연광정에 가서 대동강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찌 막벌이인들 될까. 한 서너 달 막벌이를 하다가, 그들은 요행 어떤 집 막간(행랑)살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얼마 안 하여 쫓겨나왔다. 복녀는 부지런히 주인 집 일을 보았지만, 남편의 게으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복녀는 눈에 칼을 세워가지고 남편을 채근하였지만, 그의 게으른 버릇은 개를 줄 수는 없었다.

“벳섬 좀 치워달라우요.”

“남 졸음 오는데, 님자 치우시관.”

“내가 치우나요?”

“이십 년이나 밥 처먹구 그걸 못 치워.”

“에이구, 칵 죽구나 말디.”

“이년, 뭘!”

이러한 싸움이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그 집에서도 쫓겨나왔다.

이젠 어디로 가나? 그들은 하릴없이 칠성문 밖 빈민굴로 밀리어오게 되었다.

칠성문 밖을 한 부락으로 삼고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업은 거러지요, 부업으로는 도둑질과 '자기네끼리의' 매음, 그밖에 이 세상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죄악이었었다. 복녀도 그 정업으로 나섰다.

그러나 열 아홉 살의 한창 좋은 나이의 여편네에게 누가 밥인들 잘 줄까.

“젊은 거이 거랑은 왜?”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여러 가지 말로, 남편이 병으로 죽어가거니 어쩌거니 핑계는 대었지만, 그런 핑계에는 단련된 평양 시민의 동정은 역시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칠성문 밖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드는 편이었었다. 그 가운데서 잘 수입되는 사람은 하루에 오리짜리 돈 뿐으로 일원 칠팔십 전의 현금을 쥐고 돌아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극단으로 나가서는 밤에 돈벌이 나갔던 사람은 그날 밤 사 백 여 원을 벌어 가지고 와서 그 근처에서 담배장사를 시작한 사람까지 있었다.

복녀는 열 아홉 살이었었다. 얼굴도 그만하면 빤빤하였다. 그 동네 여인들의 보통 하는 일을 본받아서, 그도 돈벌이 좀 잘하는 사람의 집에라도 간간 찾아가면, 매일 오륙십 전은 벌 수가 있었지만, 선비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 부처는 역시 가난하게 지냈다. 굶는 일도 흔히 있었다.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끓었다. 그때, 평양 '부'에서는 그 송충이를 잡는데(은혜를 베푸는 뜻으로)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을 인부로 쓰게 되었다.

빈민굴 여인들은 모두 다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뽑힌 것은 겨우 오십 명쯤이었었다. 복녀도 그 뽑힌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었다.

복녀는 열심으로 송충이를 잡았다. 소나무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는, 송충이를 집게로 집어서 약물에 잡아넣고, 또 그렇게 하고, 그의 통은 잠깐 사이에 차고 하였다. 하루에 삼십이 전 씩의 품삯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대엿새 하는 동안에 그는 이상한 현상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젊은 여인부 한 여나믄 사람은 언제나 송충이는 안 잡고, 아래서 지절거리며 웃고 날뛰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놀고 있는 인부의 품삯은, 일하는 사람의 삯전보다 팔 전이나 더 많이 내어주는 것이다.

감독은 한 사람뿐이었는데 감독도 그들의 놀고 있는 것을 묵인할 뿐 아니라, 때때로는 자기까지 섞여서 놀고 있었다.

어떤 날 송충이를 잡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나무에서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올라가려 할 때에 감독이 그를 찾았다 -

“복네! 얘 복네!”

“왜 그릅네까?”

그는 약통과 집게를 놓고 뒤로 돌아섰다.

“좀 오나라.”

그는 말없이 감독 앞에 갔다.

“얘, 너, 음… 데 뒤 좀 가보자.”

“뭘 하례요?”

“글쎄, 가야…”

“가디요. - 형님.”

그는 돌아서면서 인부들 모여 있는 데로 고함쳤다.

“형님두 갑세다가례.”

“싫다 얘. 둘이서 재미나게 가는데, 내가 무슨 맛에 가갔니?”

복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면서 감독에게로 돌아섰다.

“가보자.”

감독은 저편으로 갔다. 복녀는 머리를 수그리고 따라갔다.

“복네 갔구나.”

뒤에서 이러한 조롱 소리가 들렸다. 복녀의 숙인 얼굴은 더욱 발갛게 되었다.

그날부터 복녀도 '일 안하고 품삯 많이 받는 인부'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복녀의 도덕관 내지 인생관은, 그때부터 변하였다.

그는 아직껏 딴 사내와 관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여본 일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짐승의 하는 짓쯤으로만 알고 있었다. 혹은 그런 일을 하면 탁 죽어지는지도 모를 일로 알았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일이 어디 다시 있을까. 사람인 자기도 그런 일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람으로 못할 일이 아니었었다. 게다가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일본말로 하자면 '삼 박자(拍子)' 같은 좋은 일은 이것뿐이었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비결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있은 뒤부터, 그는 처음으로 한 개 사람이 된 것 같은 자신까지 얻었다.

그 뒤부터는, 그의 얼굴에는 조금씩 분도 바르게 되었다.

일년이 지났다.

그의 처세의 비결은 더욱 더 순탄히 진척되었다. 그의 부처는 이제는 그리 궁하게 지내지는 않게 되었다.

그의 남편은 이것이 결국 좋은 일이라는 듯이 아랫목에 누워서 벌신벌신 웃고 있었다.

복녀의 얼굴은 더욱 이뻐졌다.

“여보, 아즈바니. 오늘은 얼마나 벌었소?”

복녀는 돈 좀 많이 벌은 듯한 거지를 보면 이렇게 찾는다.

“오늘은 많이 못 벌었쉐다.”

“얼마?”

“도무지 열 서너 냥.”

“많이 벌었쉐다가레. 한 댓 냥 꿰주소고레.”

“오늘은 내가…”

어쩌고 어쩌고 하면, 복녀는 곧 뛰어가서 그의 팔에 늘어진다.

“나한테 들킨 댐에는 뀌구야 말아요.”

“난 원 이 아즈마니 만나믄 야단이더라. 자 꿰주디 그대신 응? 알아있디?”

“난 몰라요. 해해해해.”

“모르믄, 안 줄 테야.”

“글쎄, 알았대두 그른다.”

- 그의 성격은 이만큼까지 진보되었다.

가을이 되었다.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가을이 되면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 밭에 감자(고구마)며 배추를 도둑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잣개나 잘 도둑질하여 왔다.

어떤 날 밤, 그는 고구마를 한 바구니 잘 도둑질하여가지고, 이젠 돌아오려고 일어설 때에, 그의 뒤에 시꺼먼 그림자가 서서 그를 꽉 붙들었다. 보니, 그것은 그 밭의 주인인 중국인 왕 서방이었었다. 복녀는 말도 못하고 멀찐멀찐 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집에 가.”

왕 서방은 이렇게 말하였다.

“가재믄 가디. 훤, 것두 못 갈까.”

복녀는 엉덩이를 한번 홱 두른 뒤에, 머리를 젖기고 바구니를 저으면서 왕 서방을 따라갔다.

한 시간쯤 뒤에 그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나왔다. 그가 밭고랑에서 길로 들어서려 할 때에, 문득 뒤에서 누가 그를 찾았다.

“복네 아니야?”

복녀는 홱 돌아서보았다. 거기는 자기 곁집 여편네가 바구니를 끼고, 어두운 밭고랑을 더듬더듬 나오고 있었다.

“형님이댔쉐까? 형님두 들어갔댔쉐까?”

“님자두 들어갔댔나?”

“형님은 뉘 집에?”

“나? 눅(陸) 서방네 집에. 님자는?”

“난 왕 서방네…. 형님 얼마 받았소?”

“눅 서방네 그 깍쟁이 놈, 배추 세 페기….”

“난 삼원 받았디.”

복녀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십 분쯤 뒤에 그는 자기 남편과, 그 앞에 돈 삼원을 내어놓은 뒤에, 아까 그 왕 서방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그 뒤부터 왕 서방은 무시로 복녀를 찾아왔다.

한참 왕 서방이 눈만 멀찐멀찐 앉아 있으면, 복녀의 남편은 눈치를 채고 밖으로 나간다. 왕 서방이 돌아간 뒤에는 그들 부처는, 일원 혹은 이원을 가운데 놓고 기뻐하고 하였다.

복녀는 차차 동네 거지들한테 애교를 파는 것을 중지하였다. 왕 서방이 분주하여 못 올 때가 있으면 복녀는 스스로 왕 서방의 집까지 찾아갈 때도 있었다.

복녀의 부처는 이제 이 빈민굴의 한 부자였었다.

그 겨울도 가고 봄이 이르렀다.

그때 왕 서방은 돈 백원으로 어떤 처녀를 하나 마누라로 사오게 되었다.

“흥!”

복녀는 다만 코웃음만 쳤다.

"복녀, 강짜하갔구만.”

동네 여편네들이 이런 말을 하면, 복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웃고 하였다.

내가 강짜를 해? 그는 늘 힘있게 부인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생기는 검은 그림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놈 왕 서방. 네 두고 보자.”

왕 서방이 색시를 데려오는 날이 가까왔다. 왕 서방은 아직껏 자랑하던 길다란 머리를 깎았다. 동시에 그것은 새색시의 의견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흥!”

복녀는 역시 코웃음만 쳤다.

마침내 색시가 오는 날이 이르렀다. 칠보단장에 사인교를 탄 색시가, 칠성문 밖 채마 밭 가운데 있는 왕 서방의 집에 이르렀다.

밤이 깊도록, 왕 서방의 집에는 중국인들이 모여서 별한 악기를 뜯으며 별한 곡조로 노래하며 야단하였다. 복녀는 집 모퉁이에 숨어 서서 눈에 살기를 띠고 방안의 동정을 듣고 있었다.

다른 중국인들은 새벽 두시쯤 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복녀는 왕 서방의 집 안에 들어갔다. 복녀의 얼굴에는 분이 하얗게 발리워 있었다.


신랑 신부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을 무서운 눈으로 흘겨보면서, 그는 왕 서방에게 가서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의 입에서는 이상한 웃음이 흘렀다.

“자, 우리집으로 가요.”

왕 서방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눈만 정처 없이 두룩두룩 하였다. 복녀는 다시 한번 왕 서방을 흔들었다 -

“자, 어서.”

“우리, 오늘 밤 일이 있어 못 가.”

“일은 밤중에 무슨 일.”

“그래두, 우리 일이…”

복녀의 입에 아직껏 떠돌던 이상한 웃음은 문득 없어졌다.

“이까짓 것.”

그는 발을 들어서 치장한 신부의 머리를 찼다.

“자, 가자우, 가자우.”

왕 서방은 와들와들 떨었다. 왕 서방은 복녀의 손을 뿌리쳤다.

복녀는 쓰러졌다. 그러나 곧 다시 일어섰다. 그가 다시 일어설 때는, 그의 손에는 얼른얼른 하는 낫이 한 자루 들리어 있었다.

“이 되놈, 죽에라. 이놈, 나 때렸디! 이놈아, 아이구 사람 죽이누나.”

그는 목을 놓고 처울면서 낫을 휘둘렀다. 칠성문 밖 외따른 밭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왕 서방의 집에서는 일장의 활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활극도 곧 잠잠하게 되었다. 복녀의 손에 들리어 있던 낫은 어느덧 왕 서방의 손으로 넘어가고, 복녀는 목으로 피를 쏟으면서 그 자리에 고꾸라져 있었다.

복녀의 송장은 사흘이 지나도록 무덤으로 못 갔다. 왕 서방은 몇 번을 복녀의 남편을 찾아갔다. 복녀의 남편도 때때로 왕 서방을 찾아갔다. 둘의 사이에는 무슨 교섭하는 일이 있었다. 사흘이 지났다.

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 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 의사 - 왕 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 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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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쇼오(起床)!"

잠은 깊이 들었지만 조급하게 설렁거리는 마음에 이 소리가 조그맣게 들린다. 나는 한 순간 화다닥 놀래어 깨었다가 또다시 잠이 들었다.

"여보,기쇼야,일어나오."

곁의 사람이 나를 흔든다. 나는 돌아누웠다. 이리하여 한 초 두 초, 꿀보다도 단 잠을 즐길 적에 그 사람은 나를 또 흔들었다.

"잠 깨구 일어나소."

"누굴 찾소?"

이렇게 나는 물었다. 머리는 또다시 나락의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디 말고 일어나요. 지금 오방 댕껭(點檢)합넨다."

"여보, 십 분 동안만 더 자게 해주."

"그거야 내가 알갔소? 간수한테 들키면 혼나갔게 말이지."

"에이! 누가 남을 잠도 못 자게 해. 난 잠들은 지 두 시간도 못 됐구레. 제발 조금만 더..."

이 말이 맺기 전에 나의 넓은 첩실과 그 머리맡의 담배를 얼핏 보면서, 나는 혼혼히 잠이 들었다. 그때에 문득 내게 담배를 한 가치 주는 사람이 있으므로, 그 담배를 먹으려 할 때에 아까 그 사람(나를 흔들던 사람)은 또다시 나를 흔든다.

"기쇼 불렀소. 뎅껑꺼정 해요. 일어나래두......"

"여보, 이제 남 겨우 또 잠들었는데 깨우긴 왜..."

"뎅껑이면 어떻단 말이오? 그래 노형 상관 있소?"

"그만 둡시다. 그러나 일어나 나오."

"남 이제 국수 먹고 담배 먹은 꿈 꾸댔는데......"

이 말을 하려던 나는 생각만 할 뿐 또다시 잠이 들었다. 또 한 초 두 초 단꿈에 빠지려던 나는, 곁방에서 들리는 제걱거리는 칼 소리와 문을 덜컥 덜컥 여는 소리에 벌떡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온몸을 취케 하던 졸음은 또다시 머리를 덮는다. 나는 무릎을 안고 머리를 묻은 뒤에 또다시 잠이 들었다. 또 한 초 두 초, 시간은 흐른다. 덜컥! 마침내 우리 방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갑자기 굴복을 하고 머리를 들었다. 이미 잘 아는 바이거니와, 한 초 전에 무거운 잠에 취하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되도록 긴장된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간수가 서넛 들어섰다.

"뎅껭!"

다섯 평이 좀 못 되는 방에는 너무 크지 않나 생각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오며, 경험으로 말미암아 숙련된 흐르는 듯한(우리의 대명사인) 번호가 불리운다. 몇 호 몇 호, 이렇게 흐르는 듯이 불러오던 간수부장은 한 번호에 멎었었다.

"나나햐꾸 나나쥬 용고(七百七十四號)."

아무 대답이 없다.

"나나햐꾸 나나쥬 용고!"

자기의 대명사-더구나 일본말로 부르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 칠백칠십사호의 영감(곧 내 뒤에 앉은)은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참다 못하여 그를 꾹 찔렀다. 놀라서 덤비는 대답이 그때야 겨우 들렸다.

"예, 하이!"

"나제 하야꾸 헨지오 시나이(왜 빨리 대답 안 하나)."

"이리 와!"

이렇게 부장은 고함친다. 그러나 영감은 가만 있었다. 고요한 소리 하나 없다.

"이리 오너라!"

두 번째의 소리가 날 때에 영감은 허리를 구부리고 그의 앞에 갔다. 한 순간 공기를 헤치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것 역시 경험 때문에 손익게 된 솜씨인, 드는 손 보이지 않는 채찍을 영감의 등에 내리었다.

영감은 가만 있었다. 그러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칠백칠십사호 뒤의 번호들이 모두 불리운 뒤에, 정신차리라는 책망과 함께 영감은 자기 자리에 돌아오고 감방문은 다시 닫겼다.

이상한 일이거니와 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방안의 전체가 떨린다(공분이라거나 동정이라든가는 결코 아니다). 몸만 떨릴 뿐 아니라 염통까지 떨린다. 이 떨림을 처음 경험한 것은 경찰서에서 세 시간은 연하여 맞은 뒤에 구류실에 들어 가서 두 시간 동안을 사시나무 떨 듯 떨던 때였다. 죽지나 않나까지 생각되었다(지금은 매일 두세 번씩 당하는 현상이거니와.......)

방은 죽음의 방같이 소리 하나 없다. 숨도 크게 못 쉰다. 누구나 곁을 보면 거기는 악마라도 있는 것처럼 보려고도 안 한다. 그들에게 과연 목숨이 남아 있는지?

좀 있다가 점검이 끝났는지 간수들의 발소리가 도로 우리 방 앞을 지나갔다. 그때에 아까 그 영감의 조그만 소리가 겨우 침묵을 깨뜨렸다.

"집엔, 그 녀석(간수)보담 나이 많은 아들이 두 녀석이나 있쉐다가레..."

덥다.

몇 도(度)인지, 백십 도 혹은 그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매일 아침 경험하는 바와 같이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해를 '저 해가 이제 곧 무르녹일테지' 생각하면 그 예상을 맞추려는 듯이 해는 어느 덧 방을 무르녹인다.

다섯 평이 조금 못 되는 이 방에, 처음에는 스무 사람이 있었지만, 몇 방을 합칠 때에 스물 여덟 사람이 되었다. 그때에 이를 어찌하노 했다. 진남포 감옥에서 공소로 넘어온 사람까지 설흔네 사람이 되었을때에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신의주와 해주 감옥에서 넘어온 사람까지하여 마흔 네 사람이 될 때에 우리는 한 숨도 못 쉬었다. 혀를 채었다.

곧 추녀 끝에 걸린 듯한 뜨거운 해는 끊임없이 더위를 보낸다. 몸 속에 어디 그리 물이 많았던지, 아침부터 계속하여 흘린 땀이 그냥 멎지 않고 흐른다. 한참 동안 땀에 힘없이 앉아 있단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담벽을 기대고 흐늘흐늘 일어 섰다. 지옥이었었다. 빽빽이 앉은 사람들은 모두 힘없이 머리를 늘이우고 입을 송장같이 벌리고 흐르는 침과 땀을 씻을 생각도 안하고 먹먹히 앉아 있다. 둥그렇게 구부러진 허리, 맥없이 무릎 위에 놓인 손, 뚱뚱 부은 시퍼런 얼굴에 힘없이 벌어진 입, 생기 없는 눈, 흩어진 머리와 수염, 모든 것이 죽은 사람이었었다. 이것이 과연 아침에 세면소까지 뛰어갔으며 두 시간 전에 점심 먹느라고 움직인 사 람들인가? 나의 곤하여 둔하게 된 감각에도 눈이 쓰린 역한 냄새가 쏜다.

그들은 무얼 하러 여기 왔나? 바람 불고 잘 자리 있고 담배 있는 저 세상에서 무얼 하러 여기 왔나? 사랑스러운 손주가 있는 사람도 있겠지. 이쁜 아내가 있는 사람도 있겠지. 제기 벌어먹이지 않으면 굶어죽을 어머니가 있는 사람도 있겠지. 그리고 그들은 자유로 먹고 마시고 바람을 쏘이고 자유로 자고 있었을테다. 그러던 그들이 어떤 요구로 여기를 왔나?

그러나 지금의 그들의 머리에는 독립도 없고, 민족 자결도 없고, 자유도 없고, 사랑스러운 아내며 아들이며 부모도 없고, 또는 더위를 깨달을 만한 새로운 신경도 없다. 무거운 공기와 더위에 괴로움 받고 학대받아서, 조그맣게 두 개골 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의 피곤한 뇌에 다만 한 가지의 바램이 있다 하면, 그것은 냉수 한 모금이었다. 나라를 팔고 고향을 팔고 친척을 팔고 또는 뒤에 이를 모든 행복을 희생하여서라도 바꿀 값이 있는 것은 냉수 한 모금밖에는 없었다.

즉, 그 때에 눈에 얼핏 떠오른 것은(때때로 당하는 현상이거니와) 쫄쫄쫄쫄 흐르는 샘물과 표주박이었다.

"한 잔만 먹여다고,제발..."

나는 누구에게 비는지 모르게 빌었다. 그리고 힘없는 눈을 또다시 몸과 몸이 서로 닿아 썩어서 몸에는 종기투성이요, 전 인원의 십분의 칠은 옴장이인 무리로 향하였다. 침묵의 끝없는 시간은 그냥 흐른다.

나는 도로 힘없이 앉았다.

"에, 더워죽겠다!"

마지막 '죽겠다'는 말은 똑똑히 들리지 않도록 누가 토하는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 대꾸할 용기가 없는지, 또 끝없는 침묵이 연속된다. 머리나 몸 가운데 어느 것이든 노동하지 않고는 사람은 못 사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몇 달 동안을 머리를 쓸 재료가 없이, 몸은 움직일 틈이 없이 지내왔으니 어찌 견딜 수 있을까? 그것도 이 더위에......

더위는 저녁이 되어가며 차츰 더하여진다. 모든 세포는 개개의 목숨을 가진 것같이 더위에 팽창한 몸의 한 부분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무겁고 뜨거운 공기가 허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더위는 더하여진다. 이러고야 어찌 열병 환자가 안 날까?

닷새 전에 한 사람이 병감으로 나가고, 그저께 또 한 사람 나가고, 오늘은 또 두 사람이 앓고 있다.

우리는 간수가 병인을 병감으로 데리고 나갈 때마다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거기에는 한 방에 여나믄 사람밖에는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물'약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맑은 공기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오늘이 일요일이지요?"

나는 변기(便器)위에 올라앉아서 어두운 전등 밑에 이를 잡으면서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우리는 하룻밤을 삼분(三分)하고 사람을 삼분하여 번갈아 잠을 자고, 남은 사람은 서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내가 압네까? 종은 팁네다만, 삼일날인디 주일날인디......"

그러나 종소리는 그냥 땡-땡-고요한 밤하늘에 울리어온다. 그것은 마치 '여기로 자유로 냉수를 마시고 넓은 자리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정 사람의 얼굴이 보고파요."

"종소리 나는 저 세상에 물두 있을 테지. 넓은 자리도 있을 테지. 바람두, 바람두 불테지......"

이렇게 나는 중얼거렸다.

"물? 물? 여보 말 마오. 나두 밖에 있을 땐 목마르믄 물도 먹고, 넓은 자리에서 잔 사람이외다."

그는 성가신 듯이 외면을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도 밖에 있을 때에는 자유로 물을 먹었다. 자유로 버드렁거리며 잤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옛적의 꿈과 같이 머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아이스크림도 있구."

이번은 이편의 절은 사람이 나를 꾹 찔렀다.

"아이스크림? 그것만? 여보 그것만? 내겐 마누라도 있소. 뜰의 유월도(六月桃)두 거반 익어갈 때요."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즉, 아까 영감이 성가신 듯이 도로 나를 보며 말한다.

"마누라? 여보 젊은 사람이 왜 그리 철없는 소리만 하오? 난 아들이 둘씩이나 있었소. 나 들어온 지 두 달 반, 그것들이 죽지나 않았는지....."

서 있기로 된 사람 사이에는 한담이며 회고담들이 사귀어졌다.

그러나 우리들(자지 않고 서서 기다리기로 한) 가운데도 벌써 잠이 든 사람이 꽤 많았다. 서서 자는 사람도 있다. 변기 위 내 곁에 앉았던 사람도 끄덕끄덕 졸다가 툭 변기에서 떨어진 그대로 잔다. 아래 깔린 사람도 송장이 아닌 증거로는 한두 번 다리를 버둥거릴 뿐 그냥 잔다.

나도 어느 덧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가슴이 답답하여 깨니까(매일 밤 여러 번 겪는 현상이거니와)내 가슴과 머리는 온통 남의 다리(수십 개의)아래 깔려 있다. 그것들을 움으적 움으적 겨우 뚫고 일어나서, 그냥 어깨에 걸려 있는 몇 개의 남의 자리를 치워 버리고 무거운 김을 배앝았다.

다리 진열장이었었다. 머리와 몸집은 어디 갔는지 방안에 하나도 안 보이고, 다리만 몇 겹씩 포개고 포개고 하여 있다. 저편 끝에서 다리가 하나 버드렁거리는가 하면, 이편 끝에서는 두 다리가 움질움질하고-. 그것도 송장의 것과 같은 시퍼런 다리를. 이 사람의 세계를 멀리 떠난 그들에게도 사람과 같은 꿈이 깨어지는지(냉수 마시는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때때로 다리들 틈에서 꿈 소리가 나온다.

아아! 그들도 집에 돌아만 가면 빈약하나마 제가 잘 자리는 넉넉할 것을......

저편 끝에서 다리가 일여덟 개 들썩들썩 하더니 그 틈으로 머리가 하나 쑥 나오다가 긴 숨을 내어쉬고 도로 다리 속으로 스러진다.

그것을 어렴풋이 본 뒤에 나도 자려고 맥난 몸을 남의 다리에 기대었다.

아침 세수를 할 때마다 깨닫는 것은, 나는 결코 파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부었는지 살쪘는지는 모르지만, 하루 종일 더위에 녹고 밤새도록 졸음과 땀에게 괴로움 받은 얼굴을 상쾌한 찬물로 씻을 때마다 깨닫는 바가 이것이다. 거울이 없으니 내 얼굴은 알 수 없고 남의 얼굴은 점진적이라 모르지만 미끄러운 땀을 씻고 보둥보둥한 뺨을 만져볼 때마다 나는 결코 파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세수 뒤의 두세 시간이 우리들의 살림 가운데는 가장 값이 있는 시간이며, 그중 사람 비슷한 살림이었다. 이때뿐이 눈에는 빛이 있고 얼굴에는 산 사람의 기운이 있었다. 심지어는 머리도 얼마간 동작하며, 혹은 농담을 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된다. 좀(단 몇 시간만) 지나면 모든 신경은 마비되고, 머리를 느리우며 떠도 보지를 못하는 눈을 시리감고 끓는 기름과 같이 숨을 헐떡거릴 사람과 이 사람들 사이에는 너무 간격이 있었다.

"이따는 또 더워질 테지요?"

나는 곁의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더워요? 덥긴 왜 더워? 이것 보구려. 오히려 추운 편인데...."

그는 엄청스럽게 몸을 떨어본 뒤에 웃는다.

아직 아침은 서늘한 유월 중순이었다. 캘린더가 없으니 날짜는 똑똑히 모르되 음력 단오를 좀 지난 때였었다. 하루 진일 받은 더위를 모두 발산한 아침은 얼마간 서늘하였다.

"노형, 어제 공판 갔댔지요?"

이렇게 나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예!"

"바깥 형편이 어떻습디까?"

"형편꺼정이야 알겠소? 그저 포플라두 새파랗구, 구름도 세차게 날아 다니구, 말하자면 다 산 것 같습니다. 땅바닥꺼정 움직이는 것 같구,사람들도 모두 상판이 시커먼 것이 우리들 보기에는 도둑놈 관상입니다."

"그것을 한번 봤으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삼월 그믐 아직 두꺼운 솜옷을 입고야 지날 때에 여기 들어온 나는, 포플라가 푸른 빛이었는지 녹빛이었는지 똑똑히 모른다.

"노형도 수일 공판 가겠디오?"

"글세, 어제 이야기한 거같이 쉬 독립된답니다."

"쉬?"

"한 열흘 있으면 된답니다."

나는 거기 대꾸를 하려 할 때에 곁방에서 담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ㄱㄴ과 ㅏㅑㅓㅕ를 수로 한 우리의 암호 신호였다.

"무엇이오?"

나는 이렇게 두드렸다.

"좋은 소식이 있소. 독립은 다되었다오."

이때네 곁 감방의 문 따는 소리에 암호는 뚝 끊어졌다.

"곁방에서 공판 갈 사람을 불러낸다. 오늘은......"

"노형 꼭 가디?"

"글세, 꼭 가야겠는데......사람도 보구 넓은 데를......."

그러나 우리 방에서는 어제 간수부장한테 매맞은 그 영감과 그밖에 영원 맹산 등지 사람 두셋이 불리어나 갈 뿐 나는 역시 그 축에서 빠졌다.

"언제든 한 번 간다."

나는 맛없고 골이 나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언제든'이 과연 언제일까? 오늘은 꼭, 오늘은 꼭, 이리하여 석 달을 미뤄온 나이었다.'영원'과 같이 생각되는 석 달을 매일 아침마다 공판 가기를 기다리면서 지내온 나이었다. '언제 한 번'이란 과연 언제일까? 이런 석 달이 열 번 거듭하면 서른 달일 것이다.

"노형은 또 빠졌구려!"

"싫으면 그만두라지, 도둑놈들!"

"이제 한 번 안 가리까?"

"이제? 이제가 대체 언제란 말이오? 십 년을 기다려도 그뿐, 이십 년을 기다려도 그뿐......"

"그래도 한 번이야 안 가리까?"

"나 죽은 뒤에 말이오?"

나는 그에게까지 역정을 내었다.

좀 뒤에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도 나의 마음은 자못 편치 못하였다. 그것은 바깥을 구경할 기회를 빨리 지어주지 않는 관리에게 대함이라기보다, 오히려 공판에 불리어나가게 된 행복한 사람들에게 대한 무서운 시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비린내나는 냉수를 한 대접 다 마신 뒤에, 매일 간수의 눈을 기어나면서 장난하는 바와 같이, 밥그릇을 당겨서 거기 아직 붙어 있는 밥알을 모두 긁어서 이기기 시작하였다. 갑갑하고 답답하고, 사로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치 않고, 공상을 하자 하여도 벌써 재료가 없어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다만 하나의 오 락이 이것이었다.

때가 묻어서 새까맣게 될 때는 그 밥알은 한 덩어리의 떡으로 변한다. 그 떡은 혹은 개 혹은 돼지, 때때로는 간수의 모양으로 빚어져서, 마지막에는 변기 속으로 들어간다.

한창 내 손 속에서 움직이던 떡 덩이는-뿔은 좀 크케 되었지만 한 마리의 얌전한 소가 되어 내 무릎 위에 섰다. 나는 머리를 들었다.

아직 장난에 취하여 몰랐지만 해는 어느덧 또 무르녹기 시작하였다. 빈대 죽인 피가 여기저기 묻은 양회담벽에는 철창 그림자가 똑똑히 그려져 있다. 사르는 듯한 더위는 등지고 있는 창 밖에서 등을 타지고, 안고 있는 담벽에서 반사하여 가슴을 타지고, 곁에 빽빽이 사람의 열기로 온몸을 썩인다. 게다가 똥오줌 무르녹은 냄새와 살 썩은 냄새와 옴약 내에 매일 수없이 흐르는 땀 썩은 냄새를 합하여, 일종의 독가스를 이룬 무거운 기체는 방에 가라앉아서 환기까지 되지 않았다. 우리의 피곤해서 둔하게 된 감각으로도 넉넉히 깨달을 수 있는 역한 냄새였다. 간수가 가까이 와서 들여다 보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아거니와 나-뿐 아니라 온 사람의 몸에는 종기투성이이었다. 가득 차고 일변 증발하는 변기 위에 올라앉아서 뒤를 볼 때마다 역정나는 독한 습기가 엉덩이에 묻어서 거기서 생긴 종기를 이와 빈대가 온몸에 퍼져서 종기투성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땀은 온몸에서 뚝 뚝-이라는 것보다 짤짤 흐른다.

"에-땀."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상한 수수께끼와 같은 일이었다. 밥 먹은 뒤에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면, 이삼십분 뒤에는 그 물이 모두 땀으로 되어 땀구멍으로 솟는다.

폭포와 같다 하여도 좋을 땀이 목과 가슴으로 흘러서, 온 몸에 벌레 기어 다니는 것같이 그 불쾌함은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땀을 씻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초열지옥에라도 떨어질 것같이, 흐르는 땀을 씻으려는 사람도 없다.

'얼핏 진찰감에 보내어다고.'

나의 피곤한 머리는 이렇게 빌었다. 아침에 종기를 핑계삼아 겨우 빌어서 진찰하러 간 사람 축에 들 나는 지금 그것밖에는 바랄 것이 없었다. 시원한 공기와 넓은 자리를(다만 이십 분 동안이라도) 맛보는 것은, 여간한 돈이나 명예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입감이라도 안부는커녕 어느 감방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우의 소식을 알는 지도 모르겠다.

즉, 뜻하지 않게 눈에 떠오른 것은 집안의 일이었다. 희다 못하여 노랗게까지 보이는 햇빛에 반사하는 양회담벽에 먼저 담배와 냉수가 떠오르고 나의 넓은 자리가(처음 순간에는 어렴풋하였지만)똑똑히 나타났다.(어찌하여 그런 조그만 일까지 똑똑히 보였던지 아직껏 이상하게 생각하거니와)파리 한 마리가 성냥갑에서 담배갑으로 도로 성냥갑으로 왔다갔다 한다.

"쌍!"

나는 뜨거운 기운을 내뱉았다.

"파리까지 자유로 날아다닌다."

성내려야 성낼 용기도 없어진 머리로 억지로 성을 내고, 눈에서 그 그림자를 지워버리려 하였다. 그러나 담배와 냉수는 곧 없어졌지만, 성가신 파리는 끝끝내 떨어지지를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서(마치 그 파리를 날리려는 것 같이)두어 번 얼굴을 비빈 뒤에 맥없이 아까 만든 소만 쥐었다.

공기의 맛이 달다고는, 참으로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뜻하지도 못할 일일 것이다. 역한 냄새 나는 뜨거운 기운을 배앝고, 달고 맑은 새 공기를 들이마시는 처음 순간에는 기절할 듯이 기뻤다.

서늘한 좋은 일기였다. 아까는 참말로 더웠는지, 더웠으면 그 더위는 어디로 갔는지, 진찰감으로 가는 동안 오히려 춥다 하여도 좋을 만치 서늘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기쁜 것은 거기서 아우를 만난 일이었다.

"어느 방에 있니?"

나는 머리를 간수에게 향한 채로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

"사감 이방에......"

나는 좀 있다가 또 물었다.

"몇 사람씩이나 있니? 덥지?"

"모두들 살이 뚱뚱 부었어......"

"도둑놈들. 우리 방엔 사십여 인이 있다. 몸둥이가 모두 썩는다. 집엔 오히려 널거서 걱정인 자리가 있건만. 너 그새 앓지나 않었니?"

"감옥에선 앓을래야 병이 안 나. 더워서 골치만 쏘디......"

"어떻게 여기(진찰감) 왔니?"

"배 아프다구 거줏뿌러 하구......."

"난 종기투성이다. 이것 봐라."

하면서 나는 바지를 걷고 푸릿푸릿한 종기를 내어놓았다.

"그런데 너의 방엔 옴쟁이는 없니?"

"왜 없어......"

그는 누구도 옴쟁이고 누구도 옴쟁이고, 알 이름 모를 이름하여 한 일여덟 사람 부른다.

"그런데 집에서 면회는 왜 안 오는디....."

"글세 말이다. 모두들 죽었는지....."

문득 아직껏 생각이나 하여보지 않은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석 달 동안을 바깥 사람이라고는 간수들밖에 만나 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바깥이 어떤 형편인지는 모를 지경이었다. 간혹 재판소에 갔다 오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거기 다니는 길은 야외라, 성 안 형편은 아직 우리가 여기 들어올 때와 같이 음울한 기운이 시가를 두르고, 삼정은 모두 철전을 하고 있는지, 또는 전과 같이 거리에는 흥정이 있고, 집안에는 웃음소리가 퍼지며, 예배당에는 결혼하는 패도 있으며, 사람들은 석 달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을 거반 잊고 있는지, 보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일가나 친척의 소소한 일은 더구나 모를 일이었다.

"다 무슨 변이 생겼나부다."

"그래도 어제 공판 갔던 사람이 재판소 앞에서 맏형을 봤다는데...."

아우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그 아우위 '봤다는데'라는 말과 함께,

"천십칠호!"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귀에 울리었다. 그것은 내 번호였다.

"네!"

"딘찰."

나는 빨리 일어서서 의사의 앞으로 갔다.

"오데가 아파?"

"여기요."

하고 나는 바지를 벗었다. 의사는 내가 내어놓은 엉덩이와 넓적다리를 갈핏 들여다보고 요만 것을.....하는 듯 얼굴로 말없이 간병수에게 내어 맡긴다. 거기서 껍진껍진한 고약을 받아서 되는 대로 쥐어바르고 이번엔 진찰 끝난 사람 축에 앉았다.

이때에 아우는 자기 곁에 앉은 사람과(나 앉은 데서까지 들리도록)무슨 이야기를 둥둥 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간수를 보았다. 간수는 아우를 주목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지게를 하는 듯 손을 들었다. 아우는 못 보았다. 이번은 크게 기침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못 들은 모양이었다. 가슴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알귀야 할 테인데......'

몸을 움즉움즉 하여보았지만, 그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냥 그치지 않고 하다가, 간수가 두어 걸음 자기에게 가까이 올때야 처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시치미를 떼었다. 그러나 간수는 용서하지 않았다. 채찍의 날카로운 소리가 한 번 나는 순간, 아우는 어깨에 손을 대고 쓰러졌다. 피와 열이 한꺼번에 솟아올라 나는 눈 이 아뜩하여졌다.

좀 있다가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재빨리 곁눈으로 아우를 보니 나를 보내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여 있었다. 무엇이 어리고 순결한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였나?

나는 바라고 또 바라던 달고 맑은 공기를 맛보기는 맛보았지만, 이를 맛보기 전보다 더 어둡고 무거운 머리를 가지고 감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더위에 쓰러져 있던 나는, 아직 내어가지 않은 밥그릇에서 젓가락을 꺼내어 손수건 좌우 편 끝을 조금씩 감아서 부채와 같이 만들어 부쳐보았다. 훈훈하고 냄새나는 바람이 땀 위를 살짝 스쳐서, 그래도 조금의 서늘함을 맛볼 수가 있었다. 이깟 지혜가 어찌하여 아직 안 났던고? 나는 정신 잃은 사람같이 팔을 들었다. 이 감방 안에서는 처음의 냄새는 나지만 약간의 바람이 벌레 기어 다니는 것같이 흐르던 가슴의 땀을 증발시키느리고 꿈같은 냉미를 준다. 천장에 딱 붙은 전등이 켜졌다. 그러나 더위는 줄지 않았다.

손수건의 부채는 온방안이 흉내내어,나의 뒤의 사람으로 말미암아 등도 부쳐졌다. 썩어진 공기가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들의 부채질은 재판소에서 돌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중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방에서 나갔던 서너 사람도 돌아왔다. 영원 영감도 송장 같은 얼굴로 돌아 왔다.

나는 간수가 돌아간 뒤에 머리는 앞으로 향한 대로 손으로 영감을 찾았다.

"형편 어떻습디까?"

"모르갔소."

"판결은 어떻게 됐소?"

영감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입은 바늘로 호라메우지나 않았나? 그러나 한참 뒤에 그는 겨우 대답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대단히 떨렸다.

"태형 구십 대랍니다."

"거 잘 됐구려! 이제 사흘 뒤에는 담배도 먹고 바람도 쏘이고....난 언제나......"

"여보, 잘 됐시오? 무어이 잘 되었단 말이오? 나이 칠십 줄에 들어서태 맞으면.....말하기도 싫소.난 아직 죽기 싫어! 공소했쉐다."

그는 벌컥 성을 내어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 이은 내 성도 그에게 지지를 않았다.

"여보! 시끄럽소. 노망했소? 당신은 당신이 죽겠다구 걱정하지만, 그래 당신만 사람이란 말이오? 이 방 사십여 명이 당신 하나 나가면 그만큼 자리가 넓어지는 건 생각지 않소? 아들 둘 다 총에 맞아 죽은 다음에 뒤상 하나 살아 있으면 무얼 해? 여보!"

나는 곁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였다.

"여기 태형 언도에 공소한 사람이 있답니다."

나는 이상한 소리로 껄걸 웃었다.

다른 사람도 영감을 용서치 않았다. 노망하였다, 바보로다, 제 몸만 생각한다, 내어쫓아라, 여러 가지의 평이 일어났다.

영감은 대답이 없었다. 갈게 쉬는 한숨만 우리의 귀에 들렸다. 우리들도 한참 비웃은 후에는 기진하여 잠잠하였다. 무겁고 괴로운 침묵만 흘렀다.

바깥은 어느 덧 어두워졌다. 대동강 빛과 같은 하늘은 온 세상을 뒤덮었다. 우리들의 입은 모두 바늘로 호라메우지나 않았나? 그러나 한참 뒤에 마침내 영감이 나를 찾는 소리가 겨우 침묵을 깨뜨렸다.

"여보!"

"왜 그러오?"

영감은 또 먹먹하다. 그러나 좀 뒤에 그는 다시 나를 찾았다.

"노형 말이 옳소. 아들 두 놈은 덩녕쿠 다 죽었쉐다. 난 나 혼자 이제 살아서 무엇 하갔소? 취하하게 해주소."

"진작 그럴 게지. 그럼 간수 부릅시다."

"그래 주소."

영감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패통을 쳤다. 간수는 왔다. 내가 통역을 서서 그의 뜻(이라는 것보다 우리의 뜻)을 말하매 간수는 시끄러운 듯이 영감을 끌어내 갔다.

자리에 돌아올 때에 방안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그들의 얼굴에는 자리가 좀 넓어졌다는 기쁨이 빛나고 있었다.

모깡! 이것은 십여 일만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우리의 가장 큰 행복이다.

"모깡!"

간슈의 호령이 들린 때에 우리들은 줄을 지어서 뛰어나갔다.

뜨거운 해에 쪼인 시멘트 길은 석 달 동안을 쉰 우리의 발에는 무섭게 뜨거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즐거움의 하나였었다. 우리는 그 길을 건너서 목욕통 있는 데로 가서 옷을 벗어던지고. 반고형(半固型)이라 하여도 좋을 꺼룩한 목욕물에 뛰어들었다.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었다. 곧 곁에는 수도가 있다. 거기서는 언제든 맑은 물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들의 머리에서 한때도 떠나 보지 못한 '달콤한 냉수'이었었다. 잠깐 목욕통에서 덤빈 나는 수도로 나와서 코끼리와 같이 물을 먹었다.

바깥에는 여러 복역수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갑갑함에 겨운) 우리들에게는 부러움의 푯대였였다. 그들은 마음대로 바람을 쏘일 수가 있었다. 목마르면 간수의 허락을 듣고 물을 먹을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갑갑함이 없었다.

즉, 어느 덧 그치라는 간수의 호령이 울리었다. 우리의 이십 초 동안의 목욕은 이에 끝났다. 우리는 (매를 맞지 않으려고)시간을 유예치 않고 빨리 옷을 입은 후에 간수를 따라서 감방으로 돌아왔다.

꼭 가장 더울 시간이었었다. 문을 닫는 순간, 우리는 벌써 더위 속에 파묻혔다. 더위는 즐거움 뒤의 복수라는 듯이 용서없이 우리를 내리쪼인다.

"벌써 덥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매를 맞구라도 좀더 있을 걸......"

누가 이렇게 말한다. 서너 사람의 웃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뒤에는 먹먹하였다. 몇 시간 동안의 침묵이 연속되었다.

우리는 무서운 소리에 화다닥 놀랐다. 그것은 단말마의 부르짖음이었다.

"히도오쓰(하나), 후다아쓰(둘)."

간수의 헤어나가는 소리와 함께,

"아이구 죽겠다. 아이구 아이구!"

부르짖는 소리가 우리의 더위에 마비된 귀를 찔렀다. 그것은 태 맞는 사람의 부르짖음이었다.

서른까지 헤인 뒤에 간수의 소리는 없어지고 태 맞는 사람의 앓는 소리만 처량히 우리의 귀에 들렸다.

둘째 사람이 태형대에 올라간 모양이다.

"히도오쓰."

하는 간수의 소리에 연한 것은,

"아유!"

하는 기운 없는 외마디의 부르짖음이었다.

"후다아쓰."

"아유!"

"미이쓰(셋)."

"아유!"

우리는 그 소리의 주인공을 알았다. 그것은 어젯밤 우리가 내어쫓은 그 영원 영감이었었다. 쓰린 매를 맞으면서도 우렁찬 신음을 할 기운도 없이 '아유' 외마디의 소리로 부르짖은 것은 우리가 억지로 매를 맞게 한 그 영감이었다.

"요오쓰(넷)."

"아유!"

"이쓰으쓰(다섯)."

"후-."

나는 저절로 목이 늘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머리에는 어젯밤 그가 이 방에서 끌려나갈 때의 꼴이 떠올랐다.

"칠십 줄에 든 늙은이가 태 맞고 실길 바라갔소? 난 아무케 되든 노형들이나......"

그는 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초연히 간수에게 끌려나갔다. 그리고 그를 내어쫓은 장본인은 이 나였었다.

나의 머리는 더욱 숙여졌다. 멀거니 뜬 준에서는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나는 그것을 막으려고 힘껏 감았다. 힘있게 닫힌 눈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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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할 위엄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추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 내리는 대동강을 향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봄 향기에 취한 형형색색의 선율이, 우단보다도 부드러운 봄 공기를 흔들면서 날아온다.

그리고 거기서 기생들의 노래와 함께 날아오는 조선 아악(雅樂)은 느리게, 길게, 유장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또 애처롭게, 모든 봄의 정다움과 끝까지 조화하지 않고는 안두겠다는 듯이 대동강에 흐르는 시꺼먼 봄 물, 청류벽에 돋아나는 푸르른 푸러음, 심지어 사람의 가슴속에 봄에 뛰노는 불붙는 핏줄기까지라도, 습기 많은 봄 공기를 다리 놓고 떨리지 않고는 두지 않는다.

봄이다. 봄이 왔다.

부드럽게 부는 조그만 바람이, 시꺼먼 조선 솔을 꿰며, 또는 돋아나는 풀을 스치고 지나갈 때의 그 음악은, 다른 데서는 듣지 못할 아름다운 음악이다.

아아, 사람을 취케 하는 푸르른 봄의 아름다움이여! 열 다섯 살부터의 동경(東京) 생활에, 마음껏 이런 봄을 보지 못하였던 나는, 늘 이것을 보는 사람보다 곱 이상의 감명을 여기서 받지 않을 수 없다.

평양성 내에는, 겨우 툭툭 터진 땅을 헤치면 파릇파릇 돋아나는 나무새기와 돋아나려는 버들의 어음으로 봄이 온 줄 알 뿐, 아직 완전히 봄이 안 이르렀지만, 이 모란봉 일대와 대동강을 넘어 보이는 가나안 옥토를 연상시키는 장림(長林)에는 마음껏 봄의 정다움이 이르렀다.

그리고 또 꽤 자란 밀 보리들로 새파랗게 장식한 장림의 그 푸른 빛. 만족한 웃음을 띠고 그 벌에 서서 내다보는 농부의 모양은, 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가 있다.

구름은 자꾸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그 밀 위에 비치었던 구름의 그림자는 그 구름과 함께 저편으로 물러가며, 거기는 세계를 아까 만들어놓은 것 같은 새로운 녹빛이 퍼져나간다. 바람이나 조금 부는 때는 그 잘 자란 밀들은 물결같이 누웠다 일어났다, 일록 일청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봄의 한가함을 찬송하는 솔개들은, 높은 하늘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더욱 더 아름다운 봄에 향그러운 정취를 더한다.

“다스한 봄 정에 솟아나리다. 다스한 봄 정에 솟아나리다.”

나는 두어 번 소리나게 읊은 뒤에 담배를 붙여 물었다. 담뱃내는 무럭무럭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에도 봄이 왔다.

하늘은 낮았다. 모란봉 꼭대기에 올라가면 넉넉히 만질 수가 있으리만큼 하늘은 낮다. 그리고 그 낮은 하늘보다는 오히려 더 높이 있는 듯한 분홍빛 구름은, 뭉글뭉글 엉기면서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나는 이러한 아름다운 봄 경치에 이렇게 마음껏 봄의 속삭임을 들을 때는, 언제든 유토피아를 아니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애를 쓰며 수고하는 것은 - 그 목적은 무엇인가? 역시 유토피아 건설에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를 생각할 때는 언제든 그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며 ‘사람의 위대함을 끝까지 즐긴’ 진나라 시황(秦始皇)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찌하면 죽지를 아니할까 하여, 소년 삼백을 배를 태워 불사약을 구하러 떠나보내며, 예술의 사치를 다하여 아방궁을 지으며 매일 신하 몇 천 명과 잔치로써 즐기며, 이리하여 여기 한 유토피아를 세우려던 시황은, 몇만의 역사가가 어떻다고 욕을 하든, 그는 정말로 인생의 향락자며 역사 이후의 제일 큰 위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만한 순전한 용기있는 사람이 있고야 우리 인류의 역사는 끝이 날지라도 한 ‘사람’을 가졌었다고 할 수 있다.

“큰사람이었었다.”

하면서 나는 머리를 들었다.

이때다. 기자묘 근처에서 무슨 슬픈 음률이, 봄 공기를 진동시키며 날아오는 것이 들렸다.

나는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영유 배따라기’다. 그것도 웬만한 광대나 기생은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리만큼 - 그만큼 그 배따라기의 주인은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천후토 일월성신 하나님전 비나이다.
실낱같은 우리목숨 살려달라 비나이다.
에에야, 어그여지야.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에 저편 아래 물에서 장고 소리와 함께 기생의 노래가 울리어오며 배따라기는 그만 안 들리게 되었다. 나는 이년 전 한여름을 영유서 지내본 일이 있다. 배따라기의 본고장인 영유를 몇 달 있어본 사람은 그 배따라기에 대하여 언제든 한 속절없는 애처로움을 깨달을 것이다.

영유, 이름은 모르지만 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앞은 망망한 황해이니, 그곳 저녁때의 경치는 한번 본 사람은 영구히 잊을 수가 없으리라. 불덩이 같은 커다란 시뻘건 해가, 남실남실 넘치는 바다에 도로 빠질 듯, 도로 솟아오를 듯 춤을 추며, 거기서 때때로 보이지 않는 배에서 배따라기만 슬프게 날아오는 것을 들을 때엔 눈물 많은 나는 때때로 눈물을 흘렸다. 이로 보아서, 어떤 원의 아내가 자기의 모든 영화를 낡은 신같이 내어 던지고 뱃사람과 정처 없는 물길을 떠났다 함도 믿지 못할 말이랄 수가 없다.

영유서 돌아온 뒤에도 그 배따라기는 내 마음에 깊이 새기어져 잊을 수가 없었고 언제 한번 다시 영유를 가서 그 노래를 한번 더 들어보고 그 경치를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생각이 늘 떠나지를 않았다.

장고소리와 기생의 노래는 멎고 배따라기만 구슬프게 날아온다. 결결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때때로는 들을 수가 없으되, 나의 기억과 곡조를 종합하여 들은 배따라기는 이 대목이다.

강변에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만,
혼비백산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와르륵 달려들어
섬섬옥수로 부처잡고,
호천망극 하는 말이
‘하늘로서 떨어지며
땅으로서 솟아났나.
바람결에 묻어오고
구름길에 쌔여왔나.’
이리 서로 붙들고 울음 울 제,
인리 제인이며
일가 친척이 모두 모여,

여기까지 들은 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소나무가지에 걸었던 모자를 내려쓰고, 그곳을 찾으러 모란봉 꼭대기에 올라섰다. 꼭대기는 좀더 노래 소리가 잘 들린다. 그는 배따라기의 맨 마지막, 여기를 부른다.

밥을 빌어서
죽을 쑬지라도
제발덕분에
뱃놈 노릇은 하지 말아.
에에야 어그여지야

그의 소리로써 방향을 찾으려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섰다.

‘어딘가? 기자묘? 혹은 을밀대?’

그러나 나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든 찾아보자 하고, 현무문으로 가서 문 밖에 썩 나섰다. 기자묘의 깊은 솔밭은 눈앞에 쫙 퍼진다.

‘어딘가?’

나는 또 물어보았다.

이때에 그는 또다시 배따라기를 시초부터 부른다. 그 소리는 왼편에서 온다.

왼편이구나 하면서, 소리 나는 곳을 더듬어서 소나무 틈으로 한참 돌다가, 겨우 기자묘 치고는 그중 하늘이 넓고 밝은 곳에, 혼자서 뒹굴고 있는 그를 찾아내었다. 나의 생각한 바와 같은 얼굴이다. 얼굴, 코, 입, 눈, 몸집이 모두 네모나고 - 그의 이마의 굵은 주름살과 시꺼먼 눈썹은, 고생 많이 함과 순진한 성격을 나타낸다.

그는 어떤 신사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노래를 그치고 일어나 앉는다.

“왜? 그냥 하지요.”

하면서 나는 그의 곁에 가 앉았다.

“머…”

한 뿐 그는 눈을 들어서 터진 하늘을 쳐다본다.

좋은 눈이었다. 바다의 넓고 큼이, 유감없이 그의 눈에 나타나 있다. 그는 뱃사람이라 나는 짐작하였다.

“고향이 영유요?”

“예, 머, 영유서 나기는 했디만, 한 이십 년 영윤 가보디두 않았이요.”

“왜, 이십 년씩 고향엘 안가요?”

“사람의 일이라니, 마음대로 됩데까?”

그는 왜 그러는지, 한숨을 짓는다.

“거저, 운명이 데일 힘셉디다.”

운명의 힘이 제일 세다는 그의 소리는 삭이지 못할 원한과 뉘우침이 섞여 있다.

“그래요?”

나는 다만 그를 건너다볼 뿐이다.

한참 잠잠하니 있다가 나는 다시 말하였다.

“자 노형의 경험담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감출 일이 아니면 한번 이야기해보소.”

“머, 감출 일은…”

“그럼, 어디 들어봅시다그려.”

그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좀 있다가,

“하디요.”

하면서 내가 담배를 붙이는 것을 보고 자기도 담배를 붙여물고 이야기를 꺼낸다.

“잊히디두 않는 십 구 년 전 팔월 열 하룻날 일인데요.”

하면서 그가 이야기한 바는 대략 이와 같은 것이다.

그의 살던 마을은 영유 고을서 한 이십 리 떠나 있는 바다를 향한 조그만 어촌이다. 그의 살던 조그만 마을(설흔 집쯤 되는)에서는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열댓에 났을 때 돌아갔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곁집에 딴살림하는 그의 아우 부처와 그 자기 부처뿐이었다. 그들 형제가 그 마을에서 제일 부자이고 또 제일 고기잡이를 잘하였고, 그중 글이 있었고 배따라기도 그 마을에서 빼나게 그 형제가 잘 불렀다. 말하자면 그 형제가 그 동네의 대표적 사람이었다.

팔월 보름은 추석명절이다. 팔월 열 하룻날 그는 명절에 쓸 장도 볼 겸, 그의 아내가 늘 부러워하는 거울도 하나 사올 겸, 장으로 향하였다.

“당손네 집에 있는 것보다 큰 거이요 잊디 말구요.”

그의 아내는 길까지 따라나오면서 잊지 않도록 부탁하였다.

“안 잊어.”

하면서 그는 떠오르는 새빨간 햇빛을 앞으로 받으면서 자기 마을을 나섰다.

그는 아내를(이렇게 말하기는 우습지만) 고와했다. 그의 아내는 촌에서는 드물도록 연연하고도 예쁘게 생겼다(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내(평양) 덴줏골(갈보촌)을 가두 그만한 거 쉽디 않갔이요.”

그러니까 촌에서는,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남에게 우습게 보이도록 그 내외의 사이는 좋았다. 늙은이들은 계집에게 혹하지 말라고 흔히 그에게 권고하였다.

부처의 사이는 좋았지만 - 아니, 오히려 좋으므로 그는 아내에게 샘을 많이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시기를 받을 일을 많이 하였다. 품행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는 대단히 천진스럽고 쾌활한 성질로서 아무에게나 말 잘하고 애교를 잘 부렸다.

그 동네에서는 무슨 명절이나 되면, 집이 그중 정결함을 핑계삼아 젊은이들은 모두 그의 집에 모이고 하였다. 그 젊은이들은 모두 그의 아내에게 ‘아즈마니’라 부르고, 그의 아내는 아내라 ‘아즈바니 아즈바니’ 하며 그들과 지껄이고 즐기며 그 웃기 잘하는 입에는 늘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편 구석에서 눈만 할끈거리며 있다가 젊은이들이 돌아간 뒤에는 불문곡직하고 아내에게 덤비어들어, 발길로 차고 때리며, 이전에 사다주었던 것을 모두 걷어올린다. 싸움을 할 때에는 언제든 곁집에 있는 아우 부처가 말리러 오며, 그렇게 되면 언제든 그는 아우 부처까지 때려주었다.

그가 아우에게 그렇게 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우는 시골 사람에게는 쉽지 않도록 늠름한 위엄이 있었고, 매일 바닷바람을 쏘였지만 얼굴이 희었다. 이것 뿐으로도 시기가 된다 하면 되지만, 특별히 아내가 그의 아우에게 친절히 하는 데는, 그는 속이 끓어 못 견디었다.

그가 영유를 떠나기 반년 전쯤 ? 다시 말하자면 그가 거울을 사러 장에 갈 때부터 반년 전쯤 그의 생일날이었다. 그의 집에서는 음식을 차려서 잘 먹었는데, 그에게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으니, 맛있는 음식은 남겨두었다가 좀 있다 먹고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의 아내도 이 버릇은 잘 알 터인데 그의 아우가 점심때쯤 오니까, 아까 그가 아껴서 남겨두었던 그 음식을 아우에게 주려 하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못 주리라’고 암호하였지만 아내는 그것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그의 아우에게 주어버렸다. 그는 마음속이 자못 편치 못하였다. 트집만 있으면 이년을…, 그는 마음먹었다.

그의 아내는 시아우에게 상을 준 뒤에 물러오다가 그만 그의 발을 조금 밟았다.

“이년!”

그는 힘껏 발을 들어서 아내를 냅다 찼다. 그의 아내는 상 위에 꺼꾸러졌다가 일어난다.

“이년, 사나이 발을 짓밟는 년이 어디 있어!”

“거 좀 밟아서 발이 부러텟쉐까?”

아내는 낯이 새빨개져서 울음 섞인 소리로 고함친다.

“이년! 말대답이…”

그는 일어서서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형님! 왜 이리십니까?”

아우가 일어서면서 그를 붙잡았다.

“가만 있거라, 이놈의 자식.”

하며, 그는 아우를 밀친 뒤에 아내를 되는대로 내리찧었다.

“죽일 년, 이년! 나가거라!”

“죽여라, 죽여라! 난, 죽어도 이 집에선 못 나가!”

“못 나가?”

“못 나가디 않구. 뉘 집이게…”

이때다. 그의 마음에는 그 '못 나가겠다'는 아내의 마음이 폭 들이박혔다. 그 이상 때리기가 싫었다. 우두커니 눈만 흘기고 있다가 그는,

“망할 년, 그럼 내가 나갈라.”

하고 그만 문 밖으로 뛰어나와서,

“형님, 어디 갑니까?”

하는 아우의 말에는 대답도 안하고, 곁 동네 탁주 집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가서, 거기 있는 술 파는 계집과 술상 앞에 마주앉았다.

그날 저녁, 얼근히 취한 그는 아내를 위하여 떡을 한 돈어치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또 서너 달은 평화가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가 언제까지든 계속될 수가 없었다. 그의 아우로 말미암아 또 평화는 쪼개져나갔다.

오월 초승부터 영유 고을 출입이 잦던 그의 아우는 오월 그믐께부터는 고을서 며칠씩 묵어오는 일이 많았다. 함께, 고을에 첩을 얻어두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이 있은 뒤는 아내는 그의 아우가 고을 들어가는 것을 벌레보다도 더 싫어하고, 며칠 묵어서 오는 때면 곧 아우의 집으로 가서 그와 담판을 하며 심지어 동서 되는 아우의 처에까지 못 가게 하지 않는다고 싸우는 일이 있었다.

칠월 초승께 그의 아우는 고을에 들어가서 열흘쯤 묵어온 일이 있었다. 이때도 전과 같이 그의 아내는 그의 아우며 계수와 싸우다 못하여, 마침내 그에게까지 와서 아우가 그런 못된 데를 다니는 것을 그냥 둔다고, 해보자 한다. 그 꼴을 곱게 보지 않았던 그는 첫마디로 고함을 쳤다.

“네게 상관이 무에가? 듣기 싫다.”

“못난둥이. 아우가 그런 델 댕기는 걸 말리디두 못하고!”

분김에 이렇게 그의 아내는 고함쳤다.

“이년, 무얼?”

그는 벌떡 일어섰다.

“못난둥이!”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의 아내는 악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꺼꾸러졌다.

“이년! 사나이게 그따윗 말버릇 어디서 배완!”

“에미네 때리는 건 어디서 배왔노? 못난둥이!”

그의 아내는 울음소리로 부르짖었다.

“상년 그냥? 나갈! 우리 집에 있디 말구 나갈!”

그는 내리찧으면서 부르짖었다. 그리고 아내를 문을 열고 밀쳤다.

“나가디 않으리.”

하고 그의 아내는 울면서 뛰어나갔다.

“망한 년!”

토하는 듯이 중얼거리고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아내는 해가 져서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일단 내어쫓기는 하였지만, 그는 아내의 돌아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워져서도 그는 불도 안 켜고, 성이 나서 우들우들 떨면서 아내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참 기쁜 듯이 웃는 소리가 그의 아우의 집에서 밤새도록 울리었다. 그는 움쩍도 안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밤을 새운 뒤에, 새벽 동터올 때 아내와 아우를 죽이려고 부엌에 가서 식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문을 벌컥 열었다.

그의 아내로서 만약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그 문 밖에 우두커니 서서 문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더면, 그는 아내와 아우를 죽이고야 말았으리라.

그는 아내를 보는 순간, 마음에 가득 차는 사랑을 깨달으면서, 칼을 내던지고 뛰어나가서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년 하면서 들어와서 뺨을 물어뜯으면서 함께 이리저리 자빠져서 뒹굴었다.

그런 이야기는 다 하려면 끝이 없으되 다만 ‘그’ ‘그의 아내’ ‘그의 아우’ 세 사람의 삼각 관계는 대략 이와 같았다….

거울은 마침 장에 마음에 맞는 것이 있었다. 지금 것과 대보면, 어떤 때는 코도 크게 보이고 입이 작게도 보이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리고 그런 촌에서는 둘도 없는 귀물이었다. 거울을 사 가지고 장을 본 뒤에 그는 이 거울을 아내에게 주면 그 기뻐할 모양을 생각하며, 새빨간 저녁 햇빛을 받는, 넘치는 듯한 바다를 안고 자기 집으로, 늘 들러오던 탁주 집에도 안 들러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집 방안에 들어설 때에는, 뜻도 안 하였던 광경이 그의 눈에 벌어져 있었다.

방 가운데는 떡 상이 있고, 그의 아우는 수건이 벗어져서 목 뒤로 늘어지고, 저고리 고름이 모두 풀어져 가지고 한편 모퉁이에 서 있고, 아내도 머리채가 모두 뒤로 늘어지고, 치마가 배꼽 아래로 늘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그의 아내와 아우는 그를 보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움찍도 안하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어이가 없어서 서 있었다. 그러나 좀 있다가 마침내 그의 아우가 겨우 말했다.

“그놈의 쥐 어디 갔니?”

“흥! 쥐? 훌륭한 쥐 잡댔구나!”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짐을 벗어던지고, 뛰어가서 아우의 멱살을 끌어잡았다.

“형님! 정말 쥐가…”

“쥐? 이놈! 형수하고 그런 쥐 잡는 놈이 어디 있니?”

그는 아우를 따귀를 몇 대 때린 뒤에 등을 밀어서 문 밖에 내어던졌다. 그런 뒤에 이제 자기에게 이를 매를 생각하고, 우들우들 떨면서 아랫목에 서 있는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이년! 시아우와 그런 쥐 잡는 년이 어디 있어?”

그는 아내를 꺼꾸러뜨리고 함부로 내리찧었다.

“정말 쥐가… 아이 죽겠다.”

“이년! 너두 쥐? 죽어라!”

그의 팔다리는 함부로 아내의 몸에 오르내렸다.

“아이 죽갔다. 정말 아까 적으니(시아우) 왔기에 떡 자시라구 내놓았더니…”

“듣기 싫다! 시아우 붙은 년이, 무슨 잔소릴…”

“아이, 아이, 정말이야요. 쥐가 한 마리 나…”

“그냥 쥐?”

“쥐 잡을래다가…”

“샹년! 죽어라! 물에래두 빠데 죽얼!”

그는 실컷 때린 뒤에, 아내도 아우처럼 등을 밀어 쫓았다. 그 뒤에 그의 등으로,

“고기 배때기에 장사해라!”

토하였다.

분풀이는 실컷 하였지만, 그래도 마음속이 자못 편치 못하였다. 그는 아랫목으로 가서, 바람벽을 의지하고 실신한 사람같이 우두커니 서서 떡 상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서편으로 바다를 향한 마을이라, 다른 곳보다는 늦게 어둡지만, 그래도 술시(戌時) 쯤 되어서는 깜깜하니 어두웠다. 그는 불을 켜려고 바람벽에서 떠나 성냥을 찾으러 돌아갔다.

성냥은 늘 있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뒤적이노라니까, 어떤 낡은 옷 뭉치를 들칠 때에 문득 쥐 소리가 나면서 무엇이 후더덕 튀어나온다. 그리하여 저편으로 기어서 도망한다.

“역시 쥐댔구나!”

그는 조그만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만 그 자리에 맥없이 덜썩 주저앉았다.

아까 그가 보지 못한 때의 광경이, 활동사진과 같이 그의 머리에 지나갔다.

아우가 집에를 온다. 아우에게 친절한 아내는 떡을 먹으라고 아우에게 떡 상을 내놓는다. 그때에 어디선가 쥐가 한 마리 뛰어나온다. 둘(아우와 아내)이서는 쥐를 잡느라고 돌아간다. 한참 성화시키던 쥐는 어느 구석에 숨어버린다. 그들은 쥐를 찾느라고 두룩거린다. 그럴 때에 그가 집에 들어선 것이다.

“상년. 좀 있으믄 안 들어오리…”

그는 억지로 마음먹고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아내는 밤이 가고 날이 밝기는커녕, 해가 중천에 올라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는 차차 걱정이 나서 찾아보러 나섰다.

아우의 집에도 없었다. 동네를 모두 찾아보아도 본 사람도 없다 한다.

그리하여, 낮쯤 한 삼사 리 내려가서 바닷가에서 겨우 아내를 찾기는 찾았지만, 그 아내는 이전 같은 생기로 찬 산 아내가 아니요, 몸은 물에 불어서 곱이나 크게 되고, 이전에 늘 웃음을 흘리던 예쁜 입에는 거품을 잔뜩 물은, 죽은 아내였다.

그는 아내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정신이 없었다.

이튿날 간단하게 장사를 하였다. 뒤에 따라오는 아우의 얼굴에는,

‘형님, 이게 웬일이오니까?’

하는 듯한 원망이 있었다.

장사를 지낸 이튿날부터 아우는 그 조그만 마을에서 없어졌다. 하루 이틀은 심상히 지냈지만, 닷새가 지나도 아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꼭 그의 아우같이 생긴 사람이 오륙 일 전에 멧산자 보따리를 하여 진 뒤에, 시뻘건 저녁 해를 등으로 받고 더벅더벅 동쪽으로 가더라 한다. 그리하여 열흘이 지나고 스무날이 지났지만, 한번 떠난 그의 아우는 돌아올 길이 없고, 혼자 남은 아우의 아내는 매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도 이것을 잠자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불행의 모든 죄는 죄 그에게 있었다.

그도 마침내 뱃사람이 되어, 적으나마 아내를 삼킨 바다와 늘 접근하며, 가는 곳마다 아우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어떤 배를 얻어 타고 물길을 나섰다.

그는 가는 곳마다 아우의 이름과 모습을 말하여 물었으나, 아우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꿈결같이 십 년을 지내서 구년 전 가을, 탁탁히 낀 안개를 꿰며 연안(延安) 바다를 지나가던 그의 배는, 몹시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파선을 하여 벗 몇 사람은 죽고, 그는 정신을 잃고 물위에 떠돌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때는 밤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는 뭍 위에 올라와 있었고 그를 말리우느라고 새빨갛게 피워놓은 불빛으로 자기를 간호하는 아우를 보았다.

그는 이상히도 놀라지 않고, 천연하게 물었다.

“너, 어ㅅ개(어떻게) 여기 완?”

아우는 잠자코 한참 있다가 겨우 대답하였다.

“형님, 거저 다 운명이왼다.”

따뜻한 불기운에 깜빡 잠이 들려다가 그는 화닥닥 깨면서 또 말했다.

“십 년 동안에 되게 파랬구나.”

“형님, 나두 변했거니와 형님도 몹시 늙으셨쉐다.”

이 말을 꿈결같이 들으면서 그는 또 혼혼히 잠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어 시간, 꿀보다도 단 잠을 잔 뒤에 깨어보니, 아까같이 빨간 불은 피어 있지만 아우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곁의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아까 아우는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새빨간 불빛을 등으로 받으면서, 더벅더벅 아무말 없이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졌다 한다.

이튿날 아무리 알아보아야 그의 아우는 종적이 없어지고 알 수 없으므로, 그는 하릴없이 다른 배를 얻어 타고 또 물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의 배가 해주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해주장에 들어가서 무엇을 사려다가, 저편 맞은편 가게에 걸핏 그의 아우 같은 사람이 있으므로 뛰어가서 보니 그는 벌써 없어졌다. 배가 해주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므로 그는 마음은 해주에 남겨두고, 또다시 바닷길을 떠났다.

그 뒤에 삼 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어도 아우는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삼 년을 지내서 지금부터 육 년 전에, 그의 탄 배가 강화도를 지날 날에, 바다를 향한 가파로운 뫼켠에서 바다를 향하여 날아오는 배따라기를 들었다. 그것도 어떤 구절과 곡조는 그의 아우 특식으로 변경된 - 그의 아우가 아니면 부를 사람이 없는, 그 배따라기이다.

배가 강화도에는 머무르지 않아서 거저 지나갔으나, 인천서 열흘쯤 머무르게 되었으므로, 그는 곧 내려서 강화도로 건너가 보았다. 거기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어떤 조그만 객주집에서 물어보니, 이름도 그의 아우요, 생긴 모습도 그의 아우인 사람이 묵어 있기는 하였으나, 사나흘 전에 도로 인천으로 갔다 한다. 그는 곧 돌아서서 인천으로 건너와서 찾아보았지만, 그 조그만 인천서도 그의 아우를 찾을 바이 없었다.

그 뒤에 눈 오고 비 오며, 육년이 지났지만, 그는 다시 아우를 만나보지 못하고 아우의 생사까지도 알 수가 없다.

말을 끝낸 그의 눈에는 저녁 해에 반사하여 몇 방울의 눈물이 반짝인다.

나는 한참 있다가 겨우 물었다.

“노형 계수는?”

“모르디오. 이십 년을 영유는 안가봤으니낀요.”

“노형은 이제 어디루 갈 테요?”

“것두 모르디요. 덩처가 있나요? 바람 부는 대로 몰려댕기디오.”

그는 다시 한번 나를 위하여 배따라기를 불렀다. 아아, 그 속에 잠겨 있는 삭이지 못할 뉘우침, 바다에 대한 애처로운 그리움.

노래를 끝낸 다음에 그는 일어서서 시뻘건 저녁 해를 잔뜩 등으로 받고, 을밀대로 향하여 더벅더벅 걸어간다. 나는 그를 말릴 힘이 없어서, 멀거니 그의 등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배따라기와 그의 숙명적 경험담이 귀에 쟁쟁히 울리어서 잠을 못 이루고, 이튿날 아침 깨어서 조반도 안먹고 기자묘로 뛰어가서 또다시 그를 찾아보았다. 그가 어제 깔고 앉았던 풀은 모두 한편으로 누워서 그가 다녀감을 기념하되, 그는 그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 그러나 배따라기는 어디선가 쟁쟁히 울리어서 모든 소나무들을 떨리지 않고는 안 두겠다는 듯이 날아온다.

“모란봉(牡丹峰)이다. 모란봉에 있다.”

하고 나는 한숨에 모란봉으로 뛰어갔다. 모란봉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부벽루(浮碧樓)에도 없다.

“을밀대(乙密臺)다.”

하고 나는 다시 을밀대로 갔다. 을밀대에선 부벽루를 연한, 지옥까지 연한 듯한 골짜기에 물 한 방울을 안 새이리라고 빽빽이 난 소나무의 그 모든 잎잎은 떨리는 배따라기를 부르고 있지만, 그는 여기도 있지 않다. 기자묘의, 하늘을 향하여 퍼져나간 그 모든 소나무의 천만의 잎잎도, 그 아래쪽 퍼진 천만의 풀들도, 모두 그 배따라기를 슬프게 부르고 있지만, 그는 이 조그만 모란봉 일대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강가에 나가서 알아보니, 그의 배는 오늘 새벽에 떠났다 한다. 그 뒤에 여름과 가을이 가고 일년이 지나서 다시 봄이 이르렀으되, 잠깐 평양을 다녀간 그는 그 숙명적 경험담과 슬픈 배따라기를 두었을 뿐, 다시 조그만 모란봉에 나타나지 않는다.

모란봉과 기자묘에 다시 봄이 이르러서, 작년에 그가 깔고 앉아서 부러졌던 풀들도 다시 곧게 대가 나서 자주빛 꽃이 피려 하지만 끝없는 뉘우침을 다만 한낱 배따라기로 하소연하는 그는, 이 조그만 모란봉과 기자묘에서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남기고 간 배따라기만 추억하는 듯이 모든 잎잎이 속삭이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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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 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깍하고 손바닥에 떨어질 제 거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뻤었다. 더구나 이날 이때에 이 팔십 전이라는 돈이 그에게 얼마나 유용한지 몰랐다. 컬컬한 목에 모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줄 수 있음이다.
 그의 아내가 기침으로 쿨룩거리기는 벌써 달포가 넘었다. 조밥도 굶기를 먹다시피 하는 형편이니 물론 약 한 첩 써본 일이 없다. 구태여 쓰려면 못쓸 바도 아니로되, 그는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자기의 신조(信條)에 어디까지 충실하였다. 따라서 의사에게 보인 적이 없으니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듯이 누워 가지고 일어나기는커녕 새로 모로도 못 눕는 걸 보면 중증은 중증인 듯. 병이 이대도록 심해지기는 열흘 전에 조밥을 먹고 체한 때문이다. 그때도 김첨지가 오래간만에 돈을 얻어서 좁쌀 한 되와 십 전 짜리 나무 한 단을 사다 주었더니 김첨지의 말에 의하면, 오라질년이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남비에 대고 끓였다. 마음은 급하고 불길은 닿지 않아 채 익지도 않은 것을 그 오라질년이 숟가락은 고만두고 손으로 움켜서 두 뺨에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 빼앗을 듯이 처박질하더니만 그날 저녁부터 가슴이 땅긴다, 배가 켕긴다 하고 눈을 홉뜨고 지랄을 하였다. 그때 김첨지는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년, 조랑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
하고 앓는 이의 뺨을 한 번 후려갈겼다. 홉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김첨지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환자가 그러고도 먹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설렁탕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남편을 졸랐다.
 “이런 오라질 년! 조밥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지랄병을 하게.”
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인제 설렁탕을 사 줄 수도 있다. 앓는 어미 곁에서 배고파 보채는 개똥이(세살먹이)에게 죽을 사줄 수도 있다. ---팔십 전을 손에 쥔 김첨지의 마음은 푼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땀과 빗물이 섞여 흐르는 목덜미를 기름 주머니가 다 된 왜목 수건으로 닦으며, 그 학교 문을 돌아 나올 때였다. 뒤에서 “인력거!”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자기를 불러 멈춘 사람이 그 학교 학생인 줄 김첨지는 한번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학생은 다짜고짜로,
 “남대문 정거장까지 얼마요?”
라고 물었다. 아마도 그 학교 기숙사에 있는 이로 동기 방학을 이용하여 귀향하려 함이로다. 오늘 가기로 작정은 하였건만, 비는 오고 짐은 있고 해서 어찌 할 줄 모르다가 마침 김첨지를 보고 뛰어나왔음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구두를 채 신지 못해서 질질 끌고, 비록 ‘고꾸라’ 양복일망정 노박이로 비를 맞으며 김첨지를 뒤쫓아 나왔으랴.
 “남대문 정거장까지 말씀입니까?”
하고, 김첨지는 잠깐 주저하였다. 그는 이 우중에 우장도 없이 그 먼곳을 칠벅거리고 가기가 싫었음일까? 처음 것, 둘째 것으로 고만 만족하였음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상하게도 꼬리를 맞물고 덤비는 이 행운 앞에 조금 겁이 났음이다. 그리고 집을 나올 제 아내의 부탁이 마음에 켕기었다. 앞집 마나님한테서 부르러 왔을 제 병인은 그 뼈만 남은 얼굴에 유월의 샘물 같은 유달리 크고 움푹한 눈에다 애걸하는 빛을 띄우며,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제발 덕분에 집에 붙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하고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리며 숨을 걸그렁걸그렁하였다. 그래도 김첨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압다, 젠장맞을 년. 빌어먹을 소리를 다 하네. 맞붙들고 앉았으면 누가 먹여 살릴 줄 알아.”
하고 훌쩍 뛰어나오려니까 환자는 붙잡을 듯이 팔을 내저으며,
 “나가지 말라도 그래, 그러면 일찍이 들어와요.”
하고 목메인 소리가 뒤를 따랐다.
 정거장까지 가잔 말을 들은 순간에 경련적으로 떠는 손, 유달리 큼직한 눈, 울 듯한 아내의 얼굴이 김첨지의 눈앞에 어른어른하였다.
 “그래, 남대문 정거장까지 얼마란 말이요?”
하고 학생은 초조한 듯이 인력거꾼의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같이,
 “인천 차가 열한 점에 있고, 그 다음에는 새로 두 점이던가.”
라고 중얼거린다.
 “일 원 오십 전만 줍시요.”
 이 말이 저도 모를 사이에 불쑥 김첨지의 입에서 떨어졌다. 제 입으로 부르고도 스스로 그 엄청난 돈 액수에 놀래었다. 한꺼번에 이런 금액을 불러라도 본 지가 그 얼마만인가! 그러자, 그 돈 벌 용기가 병자에 대한 염려를 사르고 말았다. 설마 오늘 안으로 어떠랴 싶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일 제이의 행운을 곱친 것보다도 오히려 갑절이 많은 이 행운을 놓칠 수 없다 하였다.
 “일 원 오십 전은 너무 과한데.”
 이런 말을 하며 학생은 고개를 기웃하였다.
 “아니올시다. 잇수로 치면 여기서 거기가 시오 리가 넘는답니다.또 이런 진날에는 좀더 주셔야지요.”
하고 빙글빙글 웃는 차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러면 달라는 대로 줄 터이니 빨리 가요.”
 관대한 어린 손님은 그런 말을 남기고 총총히 옷도 입고 짐도 챙기러 갈 데로 갔다.
 그 학생을 태우고 나선 김첨지의 다리는 이상하게 가뿐하였다. 달음질을 한다느니보다 거의 나는 듯하였다. 바퀴도 어떻게 속히 도는지 군다느니보다 마치 얼음을 지쳐나가는 스케이트 모양으로 미끄러져가는 듯하였다. 언땅에 비가 내려 미끄럽기도 하였다.
 이윽고 끄는 이의 다리는 무거워졌다. 자기 집 가까이 다다른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염려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런 말이 잉잉 그의 귀에 울렸다. 그리고 병자의 움쑥 들어간 눈이 원망하는 듯이 자기를 노려보는 듯하였다. 그러자 엉엉 하고 우는 개똥이의 곡성도 들은 듯싶다. 딸국딸국하고 숨 모으는 소리도 나는 듯싶다.
 “왜 이러우? 기차 놓치겠구먼.”
하고, 탄 이의 초조한 부르짖음이 간신히 그의 귀에 들려왔다. 언뜻 깨달으니 김첨지는 인력거 채를 쥔 채 길 한복판에 엉거주춤 멈춰 있지 않은가.
 “예, 예”
하고 김첨지는 또다시 달음질하였다. 집이 차차 멀어갈수록 김첨지의 걸음에는 다시금 신이 나기 시작하였다. 다리를 재겨 놀려야만 쉴새없이 자기의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을 듯이……
 정거장까지 끌어다 주고 그 깜짝 놀란 일 원 오십 전을 정말 제 손에 쥠에 말마따나 십리나 되는 길을 비를 맞아가며 질퍽거리고 온 생각은 아니하고, 거저 얻은 듯이 고마웠다. 졸부나 된 듯이 기뻤다. 제 자식뻘밖에 안 되는 어린 손님에게 몇번 허리를 굽히며,
 “안녕히 다녀옵시요.”
라고, 깎듯이 재우쳤다.
 그러나 빈 인력거를 털털거리며 이 우중에 돌아갈 일이 꿈 밖이었다. 노동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옷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일 원 오십 전이란 돈이 얼마나 괜찮고 괴로운 것인 줄 절실히 느끼었다. 정거장을 떠나는 그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젠장맞을 것! 이 비를 맞으며 빈 인력거를 털털거리고 돌아를간담. 이런 빌어먹을, 제 할미를 붙을 비가 왜 남의 상판을 딱딱 때려!”
 그는 몹시 홧증을 내며 누구에게 반항이나 하는 듯이 게걸거렸다. 그럴 즈음에 그의 머리엔 또 새로운 광명이 비쳤나니, 그것은 ‘이러구 갈 게 아니라 이 근처를 빙빙돌며 차 오기를 기다리면 또 손님을 태우게 될는지도 몰라.’란 생각이었다. 오늘 운수가 괴상하게도 좋으니까 그런 요행이 또 한번 없으리라고 누가 보증하랴. 꼬리를 굴리는 행운이 꼭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기를 해도 좋을 만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거장 인력거꾼의 등살이 무서워 정거장 앞에 섰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는 이전에도 여러 번 해본 일이라 바로 정거장에서 조금 떨어져서 사람 다니는 길과 전찻길 틈에 인력거를 세워 놓고, 자기는 그 근처를 빙빙 돌며 형세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얼마만에 기차는 왔고 수십 명이나 되는 손이 정류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손님을 물색하던 김첨지의 눈에 양머리에 뒤축 높은 구두를 신고 망토까지 두른 기생 퇴물인 듯, 난봉 여학생인 듯한 여편네의 모양이 띄었다. 그는 슬근슬근 그 여자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아씨, 인력거 아니 타시랍시요?”
 그 여학생인지 뭔지가 한참은 매우 때깔을 빼며 입술을 꼭 다문 채 김첨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김첨지는 구경하는 거지나 무엇같이 연해연방 그의 기색을 살피며,
 “아씨 정거장 애들보담 아주 싸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댁이 어디신가요?”
하고 추근추근하게도 그 여자의 들고 있는 일본식 버들고리짝에 제 손을 대었다.
 “왜 이래? 남 귀찮게.”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는 돌아선다. 김첨지는 어랍시요 하고 물러섰다.
 전차가 왔다. 김첨지는 원망스럽게 전차 타는 이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예감을 틀리지 않았다. 전차가 빡빡하게 사람을 싣고 움직이기 시작하였을 제 타고 남은 손 하나가 있었다. 굉장하게 큰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붐비는 차안에 짐이 크다 하여 차장에게 밀려 내려온 눈치였다. 김첨지는 대어 섰다.
 “인력거를 타시랍시요.”
 한동안 값으로 실랑이를 하다가 육십 전에 인사동까지 태워다 주기로 하였다. 인력거가 무거워지매 그의 몸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졌고 그리고 또 인력거가 가벼워져서 몸은 다시금 무거워졌는데, 이번에는 마음조차 초조해온다. 집의 광경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어 이젠 요행을 바랄 여유도 없었다. 나무 등걸이나 무엇만 같고 제 것 같지도 않은 다리를 연해 꾸짖으며 갈팡질팡 뛰는 수밖에 없었다. 저놈의 인력거꾼이 저렇게 술이 취해 가지고 이 진 땅에 어찌 가노 하고, 길 가는 사람이 걱정을 하리만큼 그의 걸음은 황급하였다. 흐리고 비오는 하늘은 어둠침침한 게 벌써 황혼에 가까운 듯하다. 창경원 앞까지 다다라서야 그는 턱에 닿는 숨을 돌리고 걸음도 늦추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집이 가까워올수록 그의 마음은 괴상하게 누그러졌다. 그런데 이 누그러짐은 안심에서 오는 게 아니요, 자기를 덮친 무서운 불행이 박두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그는 불행이 닥치기 전 시간을 얼마쯤이라도 늘리려고 버르적거렸다. 기적에 가까운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할 수 있으면 오래 지니고 싶었다. 그는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었다. 그 모양은 마치 자기 집, 곧 불행을 향하고 달려가는 제 다리를 제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으니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다고, 구해다고 하는 듯하였다.
 그럴 즈음에 마침 길가 선술집에서 친구 치삼이가 나온다. 그의 우글우글 살진 얼굴은 주홍이 오른 듯, 온 턱과 뺨을 시커멓게 구레나룻이 덮이고, 노르탱탱한 얼굴이 바짝 말라서 여기저기 고랑이 파이고 수염도 있대야 턱밑에만, 마치 솔잎 송이를 거꾸로 붙여 놓은 듯한 김첨지의 풍채하고는 기이한 대상을 짓고 있었다.
 “여보게 김첨지, 자네 문 안 들어갔다 오는 모양일세 그려, 돈 많이 벌었을테니 한 잔 빨리게.”
 뚱뚱보는 말라깽이를 보는 말맡에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는 몸짓과 딴판으로 연하고 싹싹하였다. 김첨지는 이 친구를 만난 게 어떻게 반가운지 몰랐다. 자기를 살려준 은인이나 무엇같이 고맙기도 하였다.
 “자네는 벌써 한 잔 한 모양일세 그려. 자네도 재미가 좋아 보이.”
하고 김첨지는 얼굴을 펴서 웃었다.
 “압다. 재미 안 좋다고 술 못 먹을 낸가. 그런데 여보게, 자네 왼몸이 어째 물독에 빠진 새앙쥐 같은가? 어서 이리 들어와 말리게.”
 선술집은 훈훈하고 뜨뜻하였다. 추어탕을 끓이는 솥뚜껑을 열 적마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흰 김, 석쇠에서 빠지짓 빠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 구이며, 제육이며, 간이며, 콩팥이며, 북어며, 빈대떡…….이 너저분하게 늘어 놓은 안주 탁자에 김첨지는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할 양이면 거기 있는 모든 먹음 먹이를 모조리 깡그리 집어삼켜도 시원치 않았다. 하되, 배고픈 이는 우선 분량 많은 빈대떡 두 개를 쪼이기로 하고 추어탕을 한 그릇 청하였다. 주린 창자는 음식맛을 보더니 더욱더욱 비어지며 자꾸자꾸 들이라들이라 하였다. 순식간에 두부와 미꾸리 든 국 한 그릇을 그냥 물같이 들이키고 말았다. 첫째 그릇을 받아들었을 제 데우던 막걸리 곱빼기 두 잔이 더 왔다. 치삼이와 같이 마시자 원원이 비었던 속이라 찌르르 하고 창자에 퍼지며 얼굴이 화끈하였다. 눌러 곱빼기 한 잔을 또 마셨다.
 김첨지의 눈은 벌써 개개 풀리기 시작하였다. 석쇠에 얹힌 떡 두개를 숭덩숭덩 썰어서 볼을 볼록거리며 또 곱빼기 두 잔을 부어라 하였다.
 치삼은 의아한 듯이 김첨지를 보며,
 “여보게 또 붓다니, 벌써 우리가 넉 잔씩 먹었네. 돈이 사십 전일세.”
 “아따 이놈아, 사십 전이 그리 끔찍하냐? 오늘 내가 돈을 막 벌었어. 참 오늘 운수가 좋았느니.”
 “그래 얼마를 벌었단 말인가?”
 “삼십 원을 벌었어, 삼십 원을! 이런 젠장맞을, 술을 왜 안 부어……괜찮다, 괜찮아. 막 먹어도 상관이 없어. 오늘 돈 산더미같이 벌었는데.”
 “어, 이사람 취했군, 그만두세.”
 “이놈아, 이걸 먹고 취할 내냐? 어서 더 먹어.”
하고는 치삼의 귀를 잡아치며 취한 이는 부르짖었다. 그리고, 술을 붓는 열다섯 살 됨직한 중대가리에게로 달려들며
 “이놈, 오라질놈, 왜 술을 붓지 않아.”
라고 야단을 쳤다. 중대가리는 희희 웃고 치삼이를 보며 문의하는 듯이 눈짓을 하였다. 주정꾼이 이 눈치를 알아보고 화를 버럭내며,
 “에미를 붙을 이 오라질 놈들 같으니, 이놈 내가 돈이 없을 줄 알고?”
하자마자 허리춤을 훔척훔척하더니 일 원짜리 한장을 꺼내어 중대가리 앞에 펄쩍 집어던졌다. 그 사품에 몇 푼 은전이 잘그랑 하며 떨어진다.
 “여보게 돈 떨어졌네, 왜 돈을 막 끼얹나.”
 이런 말을 하며 일변 돈을 줍는다. 김첨지는 취한 중에도 돈의 거처를 살피는 듯이 눈을 크게 떠서 땅을 내려다보다가 불시에 제 하는 짓이 너무 더럽다는 듯이 고개를 소스라치자 더욱 성을 내며,
 “봐라 봐!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돈이 없나, 다리 뼉다구를 꺾어 놓을 놈들 같으니.”
하고 치삼이 주워주는 돈을 받아,
 “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
하면서 팔매질을 친다. 벽에 맞아 떨어진 돈은 다시 술 끓이는 양푼에 떨어지며 정당한 매를 맞는다는 듯이 쨍하고 울었다.
 곱빼기 두 잔은 또 부어질 겨를도 없이 말려가고 말았다. 김첨지는 입술과 수염에 붙은 술을 빨아들이고 나서 매우 만족한 듯이 그 솔잎 송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또 부어, 또 부어.”
라고 외쳤다.
 또 한 잔 먹고 나서 김첨지는 치삼의 어깨를 치며 문득 껄껄 웃는다. 그 웃음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술집에 있는 이의 눈이 모두 김첨지에게로 몰리었다. 웃는 이는 더욱 웃으며,
 “여보게 치삼이, 내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 오늘 손을 태우고 정거장에까지 가지 않았겠나.”
 “그래서?”
 “갔다가 그저 오기가 안됐데 그려, 그래 전차 정류장에서 어름어름하며 손님 하나를 태울 궁리를 하지 않았나. 거기 마침 마나님이신지 여학생이신지, 요새야 어디 논다니와 아가씨를 구별할 수가 있던가. 망토를 잡수시고 비를 맞고 서 있겠지. 슬근슬근 가까이 가서 인력거를 타시랍시요 하고 손가방을 받으랴니까 내 손을 탁 뿌리치고 핵 돌아서더니만 ‘왜 남을 이렇게 귀찮게 굴어!’그 소리야말로 꾀꼬리 소리지, 허허!”
 김첨지는 교묘하게도 정말 꾀꼬리 같은 소리를 내었다. 모든 사람은 일시에 웃었다.
 “빌어먹을 깍쟁이 같은 년, 누가 저를 어쩌나, ‘왜 남을 귀찮게굴어!’ 어이구 소리가 체신도 없지, 허허”
 웃음소리들은 높아졌다. 그런 그 웃음소리들이 사라지기 전에 김첨지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치삼은 어이없이 주정뱅이를 바라보며,
 “금방 웃고 지랄을 하더니 우는 건 무슨 일인가?”
 김첨지는 연해 코를 들여마시며,
 “우리 마누라가 죽었다네.”
 “뭐, 마누라가 죽다니, 언제”
 “이놈아 언제는. 오늘이지.”
 “예끼 미친놈, 거짓말 말아.”
 “거짓말은 왜, 참말로 죽었어…… 참말로. 마누라 시체를 집에 뻐들쳐 놓고 내가 술을 먹다니, 내가 죽일 놈이야 죽일 놈이야.”
하고 김첨지는 엉엉 소리 내어 운다.
 치삼은 흥이 조금 깨어지는 얼굴로,
 “원 이사람아 참말을 하나, 거짓말을 하나. 그러면 집으로 가세, 가.”
하고 우는 이의 팔을 잡아당기었다.
 치삼의 끄는 손을 뿌리치더니 김첨지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싱그레 웃는다.
 “죽기는 누가 죽어.”
하고 득의 양양.
 “죽기는 왜 죽어, 생떼같이 살아만 있단다. 그 오라질년이 밥을죽이지. 인제 나한테 속았다.”
하고 어린애 모양으로 손뼉을 치며 웃는다.
 “이 사람이 정말 미쳤단 말인가. 나도 아주먼네가 앓는단 말은 들었었는데.”
하고 치삼이도 어떤 불안을 느끼는 듯이 김첨지에게 또 돌아가라고 권하였다.
 “안 죽었어, 안 죽었대도 그래.”
 김첨지는 홧증을 내며 확신있게 소리를 질렀으되 그 소리엔 안 죽은 것을 믿으려고 애쓰는 가락이 있었다. 기어이 일 원어치를 채워서 곱빼기를 한 잔씩 더 먹고 나왔다. 궂은 비는 의연히 추적추적 내린다.
 김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가지고 집에 다다랐다. 집이라 해도 물론 셋집이요, 또 집 전체를 세든 게 아니라 안과 뚝 떨어진 행랑방 한 간을 빌어든 것인데 물을 길어대고 한 달에 일 원씩 내는 터이다. 만일 김첨지가 주기를 띠지 않았던들 한 발을 대문에 들여놓았을 제 그곳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정적(靜寂)---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바다 같은 정적에 다리가 떨렸으리라. 쿨룩거리는 기침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다만 이 무덤 같은 침묵을 깨뜨리는, 깨뜨린다느니보다 한층 더 침묵을 깊게 하고 불길하게 하는 빡빡거리 그윽한 소리, 어린애의 젖 빠는 소리가 날 뿐이다.만일 청각이 예민한 이 같으면, 그 빡빡소리는 빨 따름이요, 꿀떡꿀떡하고 젖 넘어가는 소리가 없으니, 빈 젖을 빤다는 것도 짐작할는지 모르리라.
 혹은 김첨지도 이 불길한 침묵을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전에 없이,
 “이 난장맞을 년,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이 오라질년.”
이라고 고함을 친 게 수상하다. 이 고함이야말로 제 몸을 엄습해오는 무시무시한 증을 쫓아 버리려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인 까닭이다.
 하여간 김첨지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추기 --- 떨어진 삿자리 밑에서 나온 먼지내, 빨지 않은 지저귀에서 나는 똥내와 오줌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옷내, 병인의 땀 섞은 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김첨지의 코를 찔렀다.
 방안에 들어서며 설렁탕을 한구석에 놓을 사이도 없이 주정꾼은 목청을 있는 대로 다 내어 호통을 쳤다.
 “이 오라질년, 주야장천(晝夜長川) 누워만 있으면 제일이야! 남편이 와도 일어나지를 못해.”
라는 소리와 함께 발길로 누운 이의 다리를 몹시 찼다. 그러나 발길에 채이는 건 사람의 살이 아니고 나무등걸과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때에 빽빽 소리가 응아 소리로 변하였다. 개똥이가 물었던 젖을 빼어놓고 운다. 운대도 온 얼굴을 찡그려 붙어서 운다는 표정을 할 뿐이다. 응아 소리도 입에서 나는 게 아니고, 마치 뱃속에서 나는 듯하였다. 울다가 울다가 목도 잠겼고 또 울 기운조차 시진한 것 같다.
 발로 차도 그 보람이 없는 걸 보자 남편은 아내의 머리맡으로 달려들어 그야말로 까치집 같은 환자의 머리를 껴들어 흔들며,
 “이년아, 말을 해, 말을! 입이 붙었어, 이 오라질년!”
 “……”
 “으응, 이것 봐, 아무말이 없네.”
 “……”
 “이년아, 죽었단 말이냐, 왜 말이 없어?”
 “……”
 “으응, 또 대답이 없네, 정말 죽었나보이.”
 이러다가 누운 이의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위로 치뜬 눈을 알아보자마자,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루 보지 못하고 천정만 바라보느냐, 응”
하는 말끝엔 목이 메이었다. 그러자 산 사람의 눈에서 떨어진 닭똥 같은 눈물이 죽은 이의 뻣뻣한 얼굴을 어룽어룽 적시었다. 문득 김첨지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이의 얼굴에 한데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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