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설

이광수 - 무정5[무료소설]

골목대장균 2012. 1. 9. 21:34
반응형

41
열한시가 넘어서 영채는 집에 돌아왔다. 형식은 영채의 집 문 밖까지 왔다가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청량리로서 다방골까지 오는 동안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고, 서로 얼굴도 보지 아니하였다. 차마 말을 할 수도 없고, 서로 얼굴도 볼 수가 없었음이라. 두 사람은 기쁜 줄도 슬픈 줄도 모르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도 생각지도 아니하였다. 두 사람은 생각이 많기는 많으면서도 또한 아무 생각이 없음과 같았다. 줄여 말하면 두 사람은 아무 정신도 없이 집에 돌아온 것이라.
영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 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리를 내어 울며 쓰러졌다. 노파는 저편 방에서 잠이 들어 있다가 울음 소리를 듣고 치마도 아니 입고 뛰어나와 영채의 방문 밖에 와서 영채의 울어 쓰러진 양을 보고,
"왜 늦었느냐, 왜 우느냐?"
하면서 영채의 찢어진 옷을 보았다. 그러고 고개를 끄덱끄덱하며 빙긋이 웃었다. '영채가 오늘은 서방을 맞았구나' 하였다. 자기도 열오륙 세 적에는 영채와 같이 누구를 위하는지 모르게 정절을 지키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민감사의 아들에게 억지로 정절을 깨트림이 되던 일을 생각하였다.) 자기도 그때에 대어드는 민감사의 아들을 팔로 떠밀다가 '이년!(괘씸한 년!)' 하는 책망을 듣고 울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는 자기는 기쁘게 남자를 보게 된 것을 생각하였다. 또 같은 남자와 오래 있기보다는 가끔 새로운 남자를 대하는 것이 더 즐겁던 것도 생각하였다. '나는 열아홉 살 적에 적어도 백 명은 남자를 대하였는데' 하고 영채가 오늘에야 비로소 남자를 대하게 된 것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러고 영채가 지금까지 남자를 대하지 아니함으로 얼마큼 교만한 마음이 있어 항상 자기를 멸시하는 빛이 있더니, 이제는 영채도 자기에게 대하여 큰소리를 못 하리라 하고 또 한번 빙긋이 웃었다.
"치마를 왜 찢겨? 치마를 찢기도록 반항할 것이 무엇이어?"
하고 노파는 흐득흐득 느끼는 영채의 등을 보며 생각한다. 못생긴 김현수가 영채에게 떠밀치우던 양과 더 못생긴 배명식이가 떠밀치고 악을 부리는 영채의 팔을 잡아 주던 양과, 영채가 이를 빠드득 하고 갈던 양을 생각하고 노파는 또 한번 웃었다. '못생긴 년! 저마다 당하는 일인데' 하고 노파는 영채가 아직 철이 나지 못하여 그러함을 속으로 비웃었다. '남작의 아들!' '그 좋은 자리에!' 하고, 영채가 아직 철이 아니 나서 '좋은 자리'를 몰라보는 것이 가엾기도 하고 가증하기도 하다 하였다. '내가 젊었더면' 하고 시기스럽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누가 나를 돌아보아야지' 하고 늙은 것이 분하기도 하였다. '나는 저 못생긴 영감쟁이도 좋다고 하는데, 젊은 사람…… 게다가 남작의 아들을 마다고' 하는 영채가 밉기도 하였다. 그러고 지나간 사오 년 동안 영채가 밤에 '손님을 치렀더면, 일년에 백 명씩을 치르더라도 한번에 오 원 치고 오백 명에 이천오백 원쯤은 더 벌었을 것을, 내가 약하여 저년의 미련한 고집을 들어주었구나' 하고 영채를 발길로 차고도 싶었다. 그 동안 영채를 공연히 먹여 주고 입혀 준 것이 한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손을 치르기 시작하였는데' 하고 여간 '천 원' 돈에 영채를 김현수에게 파는 것이 아깝다. 이대로 한 이삼 년 더 두고 이전에 밑진 것을 봉창하리라 하였다. '옳지, 그것이 상책이다' 하고 또 한번 웃었다. 만일 김현수의 첩으로 팔더라도 이번에는 '이천 원'을 청구하리라. 김현수가 이제는 이천 원이 아니라 이만 원이라도 아끼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옳다, 그것이 좋다. 영채를 오래 두면, 혹 병이 들는지도 모르니, 약값을 없이하고, 혹 송장을 치르는 것보다 한꺼번에 이천 원을 받고 팔아 버리는 것이 좋다 하였다. 내일 아침에는 식전에 김현수가 오렷다. 오거든 그렇게 계약을 하리라 하고 또 한번 웃었다.
노파는 영채가 점점 더욱 느끼는 양을 보았다. 그러고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무서운 마음이 생겼다. 한번 평양에 있을 때에 김윤수의 아들이 억지로 영채의 몸을 범하려다가 영채가 품에서 칼을 내어 제 목을 찌르려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후부터 김윤수의 아들이 '독한 계집년!' 하고 다시 오지 아니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노파는 얼른 영채의 방 안을 둘러보고 또 영채의 손을 보았다. 혹 칼이나 없는가 하고, 그러고 노파의 머리에는 '칼', '아편', '우물', '한강'이란 생각이 휙휙휙 돌아간다. 노파는 소름이 죽 끼쳤다. 그러고 영채를 보았다. 영채는 두 손으로 제 머리채를 감아쥐었다. 영채의 등은 들먹들먹한다. 노파는 눈이 둥그래졌다. 영채는 벌떡 일어나 시퍼런 칼을 뽑아 들고 자기에게 달려들어 '이년아! 이 도둑년아!' 하고 자기의 가슴을 푹 찌르고 칼을 둘러 자기의 갈빗대가 부걱부걱 하고 소리를 내는 듯하다. 또 영채가 그 칼을 뽑아 자기의 목을 찌르니 빨간 피가 콸콸 솟아 자기의 얼굴과 팔에 뿌려지는 듯하다. 노파는 또 한번 흠칫하면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노파는 가만히 영채의 문 안에 들어섰다. 영채는 그런 줄도 모르고 혼자말로,
"월화 형님! 월화 형님!"
하며 빠드득 이를 간다. 노파는 흠칫하고 도로 문 밖에 나섰다. '영채를 달래자'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불쌍하구나' 하였다. '영채를 꼭 안아 주자' 하였다. '팔 년 동안이나 길러 온 내 딸이로구나!' 하였다. 그러고 빙그레 웃으며,
"월향아! 얘, 월향아!"
하면서 문 안에 들어갔다.
42
"얘, 월향아!"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파는 영채의 곁에 웅크리고 앉아서 영채의 등을 흔들며,
"얘, 월향아! 왜 우느냐?"
하였다. 영채는 고개를 들어 노파를 보았다. 그 치마도 아니 입은 두 다리와 뚱뚱한 몸뚱이가 구역이 날 듯이 더럽게 보인다. 더구나 그 음흉하고도 간사하여 보이는 눈이 더욱 불쾌하다. 저 노파는 내 피를 빨아먹고 저렇게 뚱뚱하여졌구나. 내가 칠 년간 갖은 고락을 다 겪은 것도 저 노파 때문이요, 내가 십구 년 동안 지켜 오던 정절을 이렇게 더럽히게 됨도 저 노파 때문이로구나. 이년의 할멈쟁이를 빠싹빠싹 깨물고 씹어 주고 싶구나 하였다. 오늘 나를 청량리에 보낸 것도 저 노파의 꾀로구나. 저 노파가 내가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 나를 청량리에 보내었구나, 하고 원망스럽게 노파를 보았다. 노파는 피가 선 영채의 눈을 보고 무서운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억지로 참고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웬일이냐, 네 입에 피가 묻었구나. 입술이 터졌느냐?"
영채는 이것이 다 너 때문이로다 하면서,
"내가 깨물었소! 뜯어먹을 양으로 깨물었소! 남들이 내 살을 다 뜯어먹는데, 나도 내 살을 뜯어먹을 양으로 깨물었소!"
이 말을 할 때에 영채는 노파의 두텁게 생긴 입술을 깨물어뜯고 싶었다. 노파는 곁에 있는 수건을 집어 들고 영채의 목에 팔을 걸며,
"아프겠구나. 피를 죄 씻자."
한다. 노파의 마음에는 진정으로 영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난다. 영채는 노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을 보고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조곰은 남았구나' 하면서, 노파가 수건으로 자기의 입에 피를 씻는 것을 거절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러고 저 노파의 눈에도 눈물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영채가 칠 년 동안이나 노파와 함께 있으되 아직 한 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한번 노파의 어금니에 고름이 들어서 사흘 동안이나 눈물을 흘려 본 일이 있으나, 그 밖에 누구를 불쌍히 여긴다든가, 또는 제 신세를 위하여서 흘리는 눈물을 보지 못하였다. 영채는 노파의 눈물을 보고 저 눈물 맛은 쓰고 차리라 하였다. 영채는 물어뜯긴 (입술이 아픈 줄도 모른다. 노파는) 입술이 아플까 보아서 부드러운 명주 수건으로 가만가만히 피를 씻는다. 씻으면 또 나오고 씻으면 또 나오고 깊이 박힌 두 앞니빨 자국으로 새빨간 핏방울이 연하여 솟아나온다. 명주 수건은 그만 피로 울긋불긋하게 되고 말았다. 노파는 '휘' 하고 한숨을 쉬며 그 피 묻은 수건을 (물에 비추어 본다. 영채도 그 수건을) 보았다. '저것이 내 피로구나. 저것이 내 부모께 받은 피로구나' 하였다. 그러고 치마 앞자락이 찢어진 것을 생각하고, 아까 청량리 일을 생각하고, '우후! 이 피가 이제는 더러운 피가 되었구나' 하고 노파에게서 피 묻은 수건을 빼앗아 입으로 빡빡 찢으며 또, '이 피가 더러운 피로구나, 더러운 피로구나!' 하고 몸을 우둘 떤다. 영채의 눈앞에는 아까 청량리에서 만나던 광경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김현수의 그 짐승 같은 눈, 그 곁에 서서 땀내 나는 손수건으로 영채의 입을 틀어막던 배명식의 모양, 배명식이가 영채의 두 팔을 꽉 붙들 때에 미친 듯한 김현수가 두 손으로 자기의 두 귀를 꽉 붙들고 술냄새와 구린내 나는 입을 자기의 입에 대던 모양, '이 계집을 비끄러맵시다' 하고 김현수가 자기의 두 발을 붙들고 배명식이가 눈을 찡긋찡긋하며 자기의 두 팔목을 대님짝으로 동여매던 모양, 그러한 뒤에, '이년, 이 발길년! 이제도' 하고 김현수가 껄껄 웃던 모양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영채는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발버둥을 치며,
"칼을 주시오! 칼을 주시오! 이 입술을 베어 내어 버리렵니다. 칼을 주시오!"
하고 운다.
노파는 영채를 껴안으며,
"얘, 얘, 월향아! 정신을 차려라, 정신을 차려!"
하고 노파의 눈에 아까 고였던 눈물이 영채의 머리 위에 떨어진다.
"얘, 월향아! 참으려무나, 참아."
영채의 몸은 추워하는 사람 모양으로 떨린다. 영채는 또 아랫입술을 꼭 물었다. 따끈따끈한 핏방울이 영채의 가슴에 있는 노파의 손등에 떨어진다. 노파는 얼른 영채의 어깨 위로 영채의 얼굴을 보았다. 영채의 입술에서는 샘물 모양으로 피가 솟는다. 앞니빨에 빨갛에 핏물이 들고 이빨 사이로 피거품이 나와서는 뚝뚝뚝 떨어진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과 뺨을 가리어 그림자에 영채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다. 노파는 영채의 가슴 안았던 팔을 풀어 영채의 목을 안고 영채의 뺨에 자기의 뺨을 비볐다. 영채의 뺨은 불덩어리와 같이 덥다. 노파는 흑흑 느끼며,
"월향아,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잘못하였다. 월향아, 참아라, 내가 죽일 년이로다."
하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노파는, '월향이가 이처럼 마음이 굳은 계집인 줄은 몰랐구나' 하였다. 내가 잘못하여 불쌍한 월향의(월향이) 피를 흘리는구나 하였다. '아아 어여쁜 월향! 내 딸 월향이' 하고 노파는 마음속으로 합장 재배하였다. 노파는 더욱 울음 소리를 내며 영채의 뺨에다 제 뺨을 비비고 영채의 향내 나는 머리카락을 입으로 씹었다. 영채의 찢기고 구겨진 치마 앞자락에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영채가 이빨로 물어뜯은 피 묻은 명주 수건 조각이 영채의 발 앞에 넘너로하여 전등빛에 반작반작한다. 아롱아롱한 자루에 넣어 비스듬히 벽에 세운 가얏고가 웬일인지 두어 번 스르릉 운다. 저편 방에서 노파를 기다리던 영감쟁이가 허리띠도 아니 매고 영채의 문 밖에 와서,
"흥, 울기들은 왜?"
한다.
43
형식은 집에 돌아왔다. 노파는 형식이가 전에 없이 늦게 온 것을 보고 제 방에 누운 대로,
"왜 늦으셨어요?"
한다. 그러나 형식은 대답도 아니하고 자기의 방에 들어가 불을 켜고, 모자도 쓴 대로 두루마기도 입은 대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파는 대문을 잠그고 가만가만히 형식의 방문 앞에 와서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은 눈을 감고 앉았다. 노파는 요새에 형식에게 무슨 걱정이 있는고 하였다. 형식은 이 집에 삼 년이나 있었다. 그러므로 노파는 형식을 친자식과 같이 동생과 같이 여겼다. 이제는 형식은 자기 집에 유하는 객이 아니요, 자기의 가족과 같이 여겼다. 그러므로 부엌에서 형식의 밥상을 차릴 때에도, 이것은 내 집에 와서 돈을 주고 밥을 사먹는 손님의 밥이라 하지 아니하고, 수십 년 전에 자기의 남편의 밥상을 차리던 생각과 정성으로 하였다. 노파는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다. 노파의 이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는 형식뿐이었다. 형식도 노파를 잘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형식은 노파에게 극히 경대하는 언어와 행동을 하고 그러면서도 어머니 모양으로 친하게 정답게 하였다. 형식은 노파가 무슨 걱정을 하는 양을 볼 때에는 담배를 들고 노파의 방에 가거나, 노파를 자기의 방에 청하여다가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로 노파를 위로하였다. 그러면 노파는 반드시 '그렇지요, 세상이란 그렇지요' 하고 걱정이 다 스러져 웃고는 형식에게 과일도 사다 주고 떡도 사다 주었다. 노파도 형식의 말을 들으면 무슨 근심이나 다 스러지거니와, 형식도 노파를 위로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에 기쁨을 깨달았다. 혹 형식이가 일부러 불쾌한 일이 있는 체, 성나는 일이 있는 체하면, 노파는 담배를 들고 형식의 방에 와서 열심으로 형식을 위로하였다. 노파가 형식을 위로하는 말은 대개는 형식이가 노파를 위로하던 말과 같았다. 대개 노파는 이 세상에 친구도 없고, 글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 지식을 얻을 데는 형식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노파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개 형식의 위로하는 말에서 얻은 것이라. 형식의 말은 노파에게 대하여는 철학(哲學)이요, 종교(宗敎)였다. 그러나 노파는 이것을 형식에게서 얻은 줄로 생각지 아니하고 이것은 제 속에서 나오는 지식이거니 한다. 이는 결코 남의 은혜를 잊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게서 얻은 줄을 모르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노파가 형식을 위로하려 할 때에는 첫마디만 들으면 형식은 노파의 하려는 말을 대강은 짐작하고 혼자 빙긋이 웃곤 하였다. 그러나 열 번에 한 번이나 혹은 스무 번에 한 번씩 노파의 특유한 사상도 있었다. 노파는 극히 둔하나마 추리력(推理力)이 있었다. 형식에게서 들은 재료로 곧잘 새로운 명제(命題)를 궁리하여 내는 수도 있었다.
노파의 하는 말은 자기에게 들은 것인 줄은 알면서도 같은 말이라도 노파의 입으로서 나오면 새로운 맛이 있었다. 다 같이 '세상이란 다 그렇고 그렇지요' 하는 말이라도 형식의 입에서 나올 때와 노파의 입에서 나올 때와는 뜻과 맛이 달라진다. 이러므로 형식은 노파에게서 제가 하던 말을 도로 들으면서도 큰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노파가 특별히 발명한 진리인 듯이 형식의 하던 말을 낭독할 때에는 형식은 웃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아무려나 노파도 형식을 좋아하고 형식도 노파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형식도 노파를 불쌍히 여기고 노파도 형식을 불쌍히 여겼다. 노파는 젊었을 때에 어떤 양반집 종이었다. 그러다가 그 양반집 대감의 씨를 배에 받아 한참은 서슬이 푸르렀었다. 그 대감의 사랑은 극진하여 동무들도 자기를 우러러보고 자기도 동무들에게 자랑하였었다. 그러나 노파는 그 늙은 대감에게 만족지 못하여 몰래 그 대감집에 다니는 어떤 젊고 어여쁜 문객과 밀통하다가 마침내 대감에게 발각되어, 그 문객은 간 곳을 모르게 되고 자기는 인두로 하문을 지짐이 되어 그만 사오 삭의 영화가 일조에 한바탕 꿈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노파는 벼슬하는 양반의 세력 좋음을 잘 보았다. 그의 생각에 세상에 벼슬을 못 하는 남자는 불쌍한 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노파는 삼 년 전부터 형식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웃으며,
"나와 같은 사람에게 누가 벼슬을 주나요?"
하였다. 노파는 형식의 재주 있음을 알고 사람이 좋음을 안다. 그러므로 형식은 마땅히 벼슬을 하여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노파는 형식을 찾아오는 금줄 두르고 칼 찬 사람들을 볼 때마다 '왜 우리 형식 씨는 벼슬을 아니하는고' 하고 혼자 형식을 위하여 괴로워한다. 그래서 그 금줄 두르고 칼 찬 손님이 돌아가면 으레,
"왜 나리께서는 벼슬을 아니하셔요?"
한다. 그때마다 형식은,
"내게야 누가 벼슬을 주나요?"
하고 웃는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하여도 형식이가 듣지 아니함을 보고 노파는 일년 전부터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형식에게 벼슬하는 친구들이 찾아오는 양과, 여러 사람들이 '이선생'이라고 부르는 양을 보고 '대체 형식도 벼슬은 아니할망정 저 사람들만은 하거니' 하고 혼자 위로한다. 그래서 근래에는 형식을 부를 때에 '나리'라 하지 아니하고 '선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벼슬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도 아직도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
노파는 한참이나 문 밖에 서서 형식의 하는 양을 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마 무슨 생각을 하는 게지' 하고 가만가만히 제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못 들고 가끔가끔 담배를 피워 물고는 머리를 내어밀어 형식의 방을 건너다보았다. 그러나 노파가 한참을 자고 나서 건너다볼 적에도 형식의 방에는 아직 불이 아니 꺼졌더라.
44
형식은 노파가 문 밖에 와 섰던 줄도 모르고 영채를 생각하였다. 청량사에서 보던 광경을 생각하였다. 김현수가 영창을 떠들고 일어나던 것과 영채의 입술에 피가 흐르던 것과 영채의 옷이 흘러내려 하얀 허리가 한 뼘이나 드러났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우선이가 '모 다메다' 하던 것을 생각하였다. 영채는 과연 김현수에게 몸을 더럽힘이 되었는가 하고 생각을 하였다. 우선이가 창으로 엿보고 '모 다메다' 하던 것이 무슨 뜻인가 하였다.  그것이 '벌써 영채의 몸은 더러워졌다' 하는 뜻일까, 또는 우선이가 다만 더러워질 뻔하던 것을 보고 그러하였음이 아닐까. 형식은 자기가 발길로 영창을 차기 전에 한번 창으로 엿보더면 좋을 것을 하였다. 암만하여도 우선의 '모 다메다' 하던 뜻을 '영채의 몸은 먼저 더러워졌다' 하는 뜻으로 해석하기는 싫다. 마침 더러워지려 할 때에 하늘의 도움으로 나와 우선이가 영채를 구원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렇다! 하고 형식은 안심하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손발을 동여맨 것이 무슨 뜻일까. 그 치마와 바지가 찢어지고 다리가 드러났음이 무슨 뜻일까. 또 영채가 두 손으로 낯을 가리고 입술을 물어뜯은 것이 무슨 뜻일까. 그러나(그러고) 나에게 대하여 아무러한 말도 아니한 것이 무슨 뜻일까. 아아, '모 다메다' 하던 우선의 말이 참말이 아닐까. 옳다! 옳다! 영채의 몸은 더러워졌구나. 영채의 몸은 김현수에게 더러워졌구나 하였다. 그러고 형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서 공중에 두어 번 내어둘렀다. 그러고 궐련 한 대를 붙여서 흡연도 아니하고 폭폭 빨았다. 그 담배 연기가 눅눅하고 바람 없는 공기 중에 퍼질 줄을 모르고 형식의 후끈후끈하는 머릿가로 물결을 지며 돌아간다. 형식은 반도 다 타지 못한 궐련을 마당에 홱 집어 내던지고 두 손으로 머릿가로 뭉게뭉게 돌아가는 담배 연기를 홰홰 젓는다. 담배 연기는 혹은 빠르게 혹은 더디게 길을 잃은 듯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천장에서 자던 파리가 놀라 왕왕하더니 도로 소리가 없어진다. 형식은 또 고개를 숙이고 그린 듯이 앉았다.
대체 영채는 지금까지 처녀였을까 하였다. 칠팔 년을 기생으로 지내면서 처녀로 있을 수가 있을까 하였다. 또 매음하지 아니하고 기생 노릇을 할 수가 있을까 하였다. 한두 번은 모르되, 열 번 스무 번 남자가 육욕과 돈으로 후릴 때에 영채라는 계집아이가 족히 정절을 지켰을까 하였다. 설혹 혈통이 좋고 어려서 내칙과 열녀전을 배웠다 하더라고 그것을 가지고 능히 칠팔 년간 수십 번, 수백 번의 힘센 유혹을 이길 수가 있을까 하였다. 형식은 자기가 지금까지 읽어 오던 소설의 계집 주인공과 신문이나 말로 들어 온 계집의 일을 생각하여 보았다. 옛날 지나의 소설이나 우리나라 이야기책을 보건대 과연 송죽 같은 절개를 지켜 온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 중에 있는 일이다. 현실에 그러한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하였다. 옛날 소설에는 몸이 기생이 되어서도 팔에 앵혈이 지지 아니했다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 그러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을까, 십팔구 세나 된 여자가 매양 청구하여 오는 남자를 거절할 수가 있을까. 설혹 영채가 정절이 세상에 뛰어나 능히 모든 유혹을 다 이긴다 하더라도 그 동안에 김현수와 같은 사람이 없었을까. 김현수와 같은 사람은 서울에만 있을 것이 아니요, 또 서울에도 한 사람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청량사에서 당하던 일과 같은 일을 여러 번 당하지 아니하였을까. 그렇다! 영채는 도저히 처녀 될 리가 만무하다 하고, 형식은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왔다갔다하였다.
형식은 다시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고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였다. 형식은 과연 오늘날까지 일찍 계집을 본 적이 없었다. 이십사 세가 되도록 계집을 본 적이 없다 하면 극히 정결한 청년이라 할지라. 그러나 형식은 진실로 뜻이 굳고 마음이 깨끗하여 이러한 정절을 지켜 온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찍 동경에 있을 때에 어떤 여자가 주인 노파를 통하여 형식에게 사랑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형식은 주저함도 없이 그 청구를 거절하였다. 그 후에도 두어 번 청구가 있었으나 여전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형식의 마음이 과연 이처럼 깨끗하였던가. 형식의 양심의 힘이 과연 이렇게 굳세었던가. '그게 말이 되오? 못 하지요!' 하고 굳세게 거절한 뒤에 형식의 마음은 도리어 이 거절한 것을 후회하였다. '내가 못생겼다. 왜 거절을 하여!' 하고 다시 청구를 하거든 슬그머니 못 견디는 체하리라 하였다. 즉 이 청구를 거절한 것은 형식의 마음이 아니요, 형식의 입이었다. 형식은 '어떠시오?' 하고 빙그레 웃는 그 주인 노파의 말에 '좋소' 하기가 부끄러워서 '아니오!' 한 것이나, 그 주인 노파가 만일 형식의 '아니오!'를 '좋소'로 들어 주어, 어느 날 저녁에 그 여자를 데려다가 형식의 방에 넣어 주었더면 형식은 그 노파를 '괘씸하다' 하고 원망하였을까. 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후에 하루 저녁은 그 여자가 주인 노파의 방에 와서 잤다. 그날 형식이가 자리를 펼 때에도 노파가 슬그머니 눈짓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소리를 가다듬어, '아니오!' 하였다. 그러고는 그 노파가 이 '아니오!'를 반대로 들어 주기 위하여 유심하게 웃었다. 노파도 웃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누워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그 여자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혹 일도 없이 뒷간에 오르내리면서 헛기침도 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형식은 주인 노파가 너무 정직한 것을 한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고개를 흔들며 한번 더,
"처녀 될 리가 만무하다."
하였다.
45
형식은 노파가 건넌방에서 담뱃대 떠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또 궐련을 피우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면 어떡할까. 영채를 어떻게 할까.
은인의 따님인 것을 위하여 내 아내를 삼을까. 그러하는 것이 내 도리에 마땅할까. 형식의 눈앞에는 어젯저녁 바로 이 방에 앉았던 영채의 모양이 보인다. '아버지는 옥중에서 굶어 돌아가시고……' 할 때의 눈물 그렁그렁한 영채의 얼굴은 과연 어여뻤다. 그때에 형식은 영채를 대하여 황홀하였었다. 그러고 영채와 회당에서 혼인할 광경과 영채와 자기와의 사이에 어여쁘고 튼튼한 아들과 딸이 많이 날 것도 상상하였었다. 형식은 지금, 어젯저녁에 영채가 앉았던 자리를 보고 그때의 광경과 그때의 상상하던 바를 생각한다. 그러고 형식은 한참이나 황홀하였다.
'그러나!' 하고 형식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영채는 처녀가 아니다. 설혹 어저께까지는 처녀라 하더라도 오늘 저녁에는 이미 처녀가 아니로다' 하고 청량사의 광경을 한번 다시 그렸다. 어젯저녁에는 행여나 영채가 어떠한 귀한 가정의 거둠이 되어 마치 선형이나 순애 모양으로 번뜻하게 여학교를 졸업하고 순결한 처녀로 있으려니 하였다. 만일에 기생이 되었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정절을 지켰으려니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채는 처녀가 아니로다 하고 형식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한참이나 있었다.
또 건넌방에서 노파의 담뱃대 떠는 소리가 들린다. 형식은 또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을 돌아보았다. 이때에 형식의 머리에는 아까 김장로의 집에서 선형과 순애를 대하여 앉았던 생각이 난다. 그 머리로서 나는 향내, 그 책상을 짚고 있던 투명할 듯한 하얀 손가락, 그 조곰 구기고 때가 묻은 옥색 모시 치마, 그 넓적한 옥색 리본, 그 적삼 등에 땀이 배어 부드럽고 고운 살이 말갛게 비치던 모양이 말할 수 없는 향기와 쾌미를 가지고 형식의 피곤한 신경을 자극한다. 또 이것을 대할 때에 전신이 스르르 녹는 듯하던 즐거움과, 세상만사와 우주에 만물이 모두 다 기쁨으로 빛나고 즐거움으로 노래하는 듯하던 그 기억이 아주 분명하게 일어난다. 형식은 선형을 선녀 같은 처녀라 한다. 선형에게는 일찍 티끌만한 더러운 행실과 티끌만한 더러운 생각도 없었다. 선형은 오직 맑고 오직 깨끗하니, 마치 눈과 같고 백옥과 같고 수정과 같다 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형식은 빙긋이 웃었다. 그러고 또 눈을 감았다.
형식의 앞에는 선형과 영채가 가지런히 떠 나온다. 처음에는 둘이 다 백설 같은 옷을 입고 각각 한 손에 꽃가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형식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손길을 펴서 형식의 앞에 내어밀었다. 그러고 두 처녀는 각각 방글방글 웃으며, '형식 씨! 제 손을 잡아 주셔요, 녜' 하고 아양을 부리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형식은 이 손을 잡을까 저 손을 잡을까 하여 자기의 두 손을 공중에 내어들고 주저한다. 이윽고 영채의 모양이 변하여지며 그 백설 같은 옷이 스러지고 피 묻고 찢어진, 이름도 모를 비단 치마를 입고, 그 치마 째어진 데로 피 묻은 다리가 보인다. 영채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입술에서는 피가 흐른다. 영채의 손에 들었던 꽃가지는 금시에 간 데가 없고, 손에는 더러운 흙을 쥐었다. 형식은 고개를 흔들고 눈을 떴다. 그러나 여전히 백설같이 차리고 방글방글 웃는 선형은 형식의 앞에서 손을 내어밀고, '형식 씨! 제 손을 잡으세요, 녜' 하고 고개를 잠깐 기울인다. 형식이가 정신이 황홀하여 선형의 손을 잡으려 할 때에 곁에 섰던 영채의 얼굴이 귀신같이 무섭게 변하며 빠드득 하고 입술을 깨물어 형식을 향하고 피를 뿌린다. 형식은 흠칫 놀라 흔들었다.
형식은 다시 일어나 방 안으로 왔다갔다 거닐다가 뒤숭숭한 생각을 없이하노라고 학도들이 부르는 창가를 읊조리며 마당에 나왔다. 아까 소낙비 지나간 자취도 없이, 하늘은 새말갛게 맑고 물 먹은 별이 졸리는 듯이 반작반작한다. 남쪽이 훤한 것은 진고개의 전등빛이라 하였다.
형식은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반작반작하는 별에서 내려오는 듯한 서늘한 바람이 사람의 입김 모양으로 이따금 이따금 형식의 더운 낯으로 스쳐 지나간다. 형식의 물끓듯 하던 가슴은 얼마큼 서늘하게 된 듯하다.
저 별들은 언제부터나 저렇게 반작반작하는가. (또 무엇 하러 저렇게 반작반작하는가) 누가 이 별은 여기 있게 하고, 저 별은 저기 있게 하여 이 모양으로 있게 하였는고. 저 별과 별 사이로 보이는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허공으로 바로 날아 올라가면 어디로 갈 것인고. 형식은 동경서 유학할 때에 폐병 들린 선생에게 천문학 배우던 생각을 하였다. 그 선생이 매양,
"여러분에게 천문학자 되기는 권하지 아니하거니와, 밤마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기는 간절히 권하오."
하고 기침이 나서 타구에 핏덩이를 토하던 생각이 난다. 뒤숭숭한 세상 생각에 마음이 괴로울 적에 한번 끝없는 하늘과 수없는 별을 바라보면 천사만려가 봄눈 스러지듯 하는 것이라고 형식도 말로는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하늘을 바라보지 아니치 못하도록 마음이 괴로워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그는 그 천문학 선생의 하던 말을 깊이깊이 깨달았다. 형식은 기쁨을 못 이기는 듯,
"무궁한 시간의 일점과 무궁한 공간(空間)의 일점을 점령한 인생에게 큰일이라면 얼마나 크고 괴로운 일이라면 얼마나 괴로우랴."
하였다. 그러고 한번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고 고개를 숙여 기도를 올렸다.
46
형식은 석점이나 지나서야 잠이 들어 아침 아홉시가 되도록 잤다. 형식은 몹시 몸과 정신이 피곤하여 반쯤 잠을 깨고도 여러 가지로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노파는 벌써 조반을 차려 놓고 사오 차나 형식의 방을 엿보았다. 형식이가 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자리도 아니 펴고 자는 것을 보고 노파는 '웬일인고?' 하였다. 그러나 노파는 어젯저녁 형식이가 늦게 잔 줄을 알므로 깨우려도 아니하고 모처럼 만들어 놓은 장찌개가 식는 것을 근심하였다. 이때에 신우선이가 대팻밥 모자를 제쳐 쓰고 단장을 두르며 들어오더니 노파를 보고,
"편안하시오. 이선생 있소?"
하고 쾌활히 점잖이 묻는다.
노파는 신우선을 잘 안다. 그러고 '시원한 남자'라고 형식을 대하여 비평한 일이 있었다. 노파는 웃고 마주 나오면서,
"어젯저녁에 늦게 돌아오셔서 새벽이 되도록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시더니 아직도 주무십니다그려. 저렇게 조반이 다 식는데."
하고 장찌개를 생각한다. 노파의 만드는 장찌개는 그다지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파는 자기가 된장찌개를 제일 잘 만드는 줄로 자신하고 또 형식에게도 그렇게 자랑을 하였다. 형식은 그 된장찌개에서 흔히 구더기를 골랐다. 그러나 노파의 명예심과 정성을 깨트리기가 미안하여, '참 좋소' 하였다. 그러나 '참 맛나오' 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이 '참 좋소'로 만족하였었다. 한번 신우선이가 형식으로 더불어 저녁을 같이 먹을 때에도 노파의 자랑하는 된장찌개가 있었다. 그때에 마침 굵다란 구더기가 신우선의 눈에 띄어 신우선은 그 험구로 노파의 된장찌개가 극히 좋지 못함을 비웃었다. 곁에 있던 형식이가 황망하게 우선의 입을 막았으나 우선은 일부러 빙긋 웃어 가며 소리를 높여 노파의 된장찌개 만드는 솜씨의 졸렬함을 공격하였다. 그때에 노파는 건넌방 툇마루에서 분한 모양으로 담배를 빨다가,
"나이 많으니깐 그렇구려."
하고 젊었을 때에는 잘 만들었었다는 뜻을 표하였다. 그 후로부터 노파는 우선을 '쾌활한 남자'라고 칭찬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선을 보면 여전히 친절하게 하였다. 대개 더 자기의 된장찌개를 공격할까 두려워함이러라. 우선은 형식에게 이 말을 들었음이라,
"요새는 된장찌개에 구더기나 없소?"
하고 형식의 방에 들어가 큰소리로,
"여보게, 일어나게 일어나! 이게 무슨 잠이란 말인가" 하였다. 형식은 어렴풋이 우선과 노파의 회화를 들으면서도 아주 잠을 깨지 못하였다가 우선의 큰 목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둥그런 자명종을 본다. 우선은,
"시계는 보아 무엇 하게. 열점일세. 열점이어! 자 어서 세수하고 옷 입게. 조반 먹고."
시계는 아홉점 반이었다. 형식은 우선이가 '어서 옷 입고―'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어젯저녁 생각을 하고 영채의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우선의 낯빛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긴 줄을 깨닫고, 또 그 일이 영채의 일인 줄도 짐작하였다. 그러고 어젯저녁 자기 혼자 잠을 못 이루고 생각하던 일을 생각하였다. 형식은,
"왜 무슨 일이 있는가."
"어서 세수를 하고 조반을 먹어! 제가 할 걱정을 내가 하는데."
하고 책상 곁에 가서 영문책을 빼어 들고 초이스 독본 삼권 정도의 영어로 한자 두자 뜯어본다. 형식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우선의 낯빛을 보고 말하는 양을 보매, 대체 영채에게 관한 일이어니 하면서 잇솔을 물고 수건을 들고 나간다. 우선은 형식의 세수하러 나가는 양을 보고 '너도 걱정이로구나' 하였다. 우선은 형식의 인격이 으레 영채로 아내를 삼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영채로 아내를 삼으면 형식의 머릿속에 청량사 일이 늘 남아 있어 형식을 괴롭게 하리라 하였다. 그러나 형식을 괴롭게 하고 아니하게 함은 자기의 손에 있다 하였다. 대개 영채가 처녀요 아님을 아는 이는 김현수와 배명식과 자기의 삼인이 있을 따름이라. 우선은 이 비밀을 가지고 오래 두고 형식의 마음을 괴롭게 하리라. 그도 아니하면 자기가 영채를 어르다가 가만히 떨어진 분풀이를 어디다 하리요 하였다. 그러나 이는 우선의 악의에서 나옴이 아니라 어디까지든지 인생을 장난으로 알려 하는 우선의 한 희롱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 그러나 형식은 우선과 같이 세상을 장난으로 알지는 못하는 사람이라. 형식은 어디까지든지 인생을 엄숙하게 보려 한다. 그러므로 우선은 이럭저럭 한 세상을 유쾌하게 웃고 지나면 그만이로되, 형식은 인생에서 무슨 뜻을 캐어 내려 하고 세상을 위하여 힘있는 데까지는 무슨 공헌을 하고야 말려 한다. 그러므로 형식에게는 인생의 어떠한 작은 현상(現象)이나 세상의 어떠한 작은 사건이라도 모두 엄숙하게 연구할 제목이요, 결코 우선과 같이 웃고 지내어 보내지 못한다. 우선은 이러한 형식을 일컬어 아직도 '탈속을 못 하였다' 하고, 형식은 우선을 일컬어 '세상에 무해무익한 사람'이라 한다. 그렇다고 우선은 세상의 문명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 대하여 전혀 무관언(無關焉)하냐 하면 그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선도 아무쪼록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고는 한다. 다만 그는 형식과 같이 열렬하게 세상을 위하여 일생을 버리려는 열성이 없음이니, 형식의 말을 빌건대 우선은 '개인 중심의 지나식 교육을 받은 자'요, 형식 자기는 '사회 중심의 희랍식 교육을 받은 자'라. 바꾸어 말하면, 우선은 한문의 교육을 받은 자요, 형식은 영문이나 독문의 교육을 받은 자라.
형식은 두어 번 잇솔을 왔다갔다하고 얼른 세수를 하고 들어와 거울을 보고 머리를 가른다. 우선은 까닭도 없이 이 머리 가르는 것을 미워하여 형식을 보면 매양 머리를 깎으라 하고, 이따금 무슨 전제(前提)로 그러한 결론(結論)을 하는지 '머리를 가르는 자는 무기력한 자'라 한다.
우선은,
"무슨 일이어? 응, 무슨 일이어?"
하고 된장찌개의 구더기를 골나하며(골라 가며)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형식의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아니하고, 방 안에서 벙글벙글 웃으면서 왔다갔다 거닐다가 형식이가 분주히 밥상을 물리기를 기다려 형식을 끌고 나간다. 노파는 밥상을 들내어 가면서 같이 나가는 두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밥상을 마루에 갖다 놓고 허리를 펴며,
"무슨 일이 있는고"
한다.
47
우선은 형식의 기뻐할 것을 상상하고 마치 누구를 전에 못 보던 좋은 구경터에 데리고 가는 모양으로 형식을 데리고 다방골 계월향의 집을 찾았다. 형식도 종각 모퉁이를 돌아설 때부터 우선이가 자기를 영채의 집으로 끌고 가는 줄을 알았다. 그러고 우선이가 자기를 이리로 끌고 올 때에는, 또 우선이가 기뻐하는 양을 보건대 무슨 좋은 일이 있는 줄도 생각하였고, 또 그 좋은 일이라 함은 아마 영채의 몸을 구원하는 일인 줄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벌써 늦었다' 하였다. 벌써 영채는 처녀가 아니라 하였다. 그러고 어젯저녁에 영채와 선형이가 하얀 옷을 입고 웃으면서 각각 한편 손을 내어밀며 '제 손을 잡아 줍시오. 녜' 하다가 영채의 몸이 문득 변하던 것도 생각하였다. 더구나 영채의 얼굴이 귀신같이 무섭게 되고,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자기의 몸에 뿌리던 것을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문 밖에 다다랐다. 우선은 형식을 보고 씩 웃으며,
"이 계월향이라는 광명등도 오늘까지일세그려."
하였다. 그러고 단장으로 그 광명등을 서너 번 때리며,
"흥 오늘 저녁에도 누가 계월향을 찾아서 놀러 올 테지. 왔다가 계월향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꼴이 장관이겠네."
하고 한번 더 단장으로 깨어져라 하고 광명등 지붕을 때리고 껄껄 웃는다. 광명등은 아픈 듯이 찌국찌국 소리를 내며 우쭐우쭐 춤을 춘다. 형식은 '깨어지면 어쩌나' 하고 속으로 생각할 뿐이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웃지도 아니하였다. 우선은 형식의 얼굴에 기쁜 모양이 없는 것을 보고 얼마큼 낙심한 듯이 시치미떼고 크게, "이리 오너라!" 하고 부른다. 행랑에서 어멈이 어린애에게 젖을 먹이든지 옷을 치키며 나와,
"나리, 오십시오? 이리 오너라는 무엇이야요, 그냥 들어가시지!"
한다. 형식은 '많이 다녔구나' 하였다. 그러고 우선이도 영채의 정절을 깨트린 한 사람인가 하였으나 곧 작소하였다. 우선은 단장으로 어멈을 때리는 모양을 하면서,
"아직도 영감이라고 아니 부르고, 나리라고 불러!"
하고 넓적한 앞니를 보이며 깔깔 웃는다.
"아씨 계시냐?"
우선의 말.
"아씨께서 오늘 아침 차로 평양을 내려가셨어요!"
우선은 놀랐다. 형식도 놀랐다. 더구나 우선은 아주 낙담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왜? 무슨 일로?"
"모르겠어요, 제가 압니까? 어젯저녁 열한점이 친 다음에야 들어오시더니만…… 한참이나 울음 소리가 나더니…… 그 담에는 잠이 들어서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요…… 오늘 식전에 마님께서 구루마를 불러오라 하세요. 그래 아씨께서 어느 연회에를 가시는가…… 연회라면 퍽도 이르다…… 아마 노들 뱃놀이가 있는 게다 했지요. 했더니 아홉점 반 차로 아씨께서 평양엘 가신다구요."
하고 어멈은 아주 유창하게 말한다. 형식은 '숫보기는 아니로다' 하고 놀라면서도 그 어멈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어멈의 얼굴에는 의심하는 빛이 있다. 형식은 '평양! 평양은 무엇 하러 갔는가' 하였다. 방에서 어린애가 울어 방으로 들어가려는 어멈에게 우선이가 말소리를 낮추어,
"아침에 누구 오든 않았던가?"
"아무도 아니 왔어요. 저."
하고 두어 집 건넛집을 가리키며,
"저 댁 아씨가 목욕 같이 가자고 오셨더군요."
하고 방으로 들어가
"울지 마라!"
하고 어린애의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난다. 형식은 저렇게 우리를 대하여서는 얌전하게 말하던 사람이 방에 들어가 어린애를 대하여서는 저렇게 함부로 한다 하였다. 우선은 단장으로 땅바닥에 무슨 글자를 쓰더니 형식더러,
"아무려나 들어가 보세그려. 노파에게 물어 보면 알 터이지."
하고 대팻밥 모자를 벗어 들고 앞서서 들어간다. 그러나 우선의 말소리에는 아까 쾌활하던 빛이 없다. 형식도 뒤를 따랐다. 형식은 어젯저녁 이 마당에 서서 그 노파에게 멸시당하던 일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빙긋 웃었다. 형식은 이만큼 오늘은 냉정(冷靜)하더라. 도리어 우선이가 지금은 형식보다 더 애가 탄다.
방에는 사람이 없고 마루에 노파의 이른바 '못생긴 영감쟁이'가 무슨 이야기책을 보다 말고 목침을 베고 코를 곤다. 우선은 이 '영감쟁이'를 잘 알았다. 이 영감쟁이는 평양 외성에 어떤 부자의 자제로 시 잘 짓고 소리 잘하고 삼사십 년 전에는 평양 성내에 모르는 이 없는 오입쟁이였었다. 그러나 십유여 년 방탕한 생활에 여간 재산은 다 떨어 없애고, 속담말 모양으로 남은 것이 '뭣' 하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일찍 자기의 무릎에 앉히고 '어허둥둥' 하던 이 노파의 집에 식객인지 남편인지 모르는 손이 된 지가 벌써 십여 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노파와 가다가다 다투기도 하고, 혹 심히 성이 나면 '괘씸한 년' 하고 호령도 하더니, 이삼 년래로는 그도 못 하고 사흘에 한번씩 노파에게 '나가 뒈져라'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다만 껄껄 웃으며 '죄 되느니라' 할 따름이요, 반항할 생각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파는 대개는 '영감쟁이'를 친절하게 대접을 하였다. 그러고 더욱 기특한 것은, 밤에 잘 때에는 반드시 노파가 자기의 손으로 자리를 깔고, 이 '영감쟁이'를 아랫목에 누이더라.
우선은 서슴지 아니하고 구두를 신은 대로 마루에 올라서서 단장으로 마루를 울리며 누구를 부르는지 모르게,
"여보? 여보?"
하였다. 형식은 어젯저녁에 섰던 모양으로 서서 어젯저녁에 보던 모양으로 영채의 방을 보았다. 방 안의 모든 것은 그대로 있구나 하였다. 그러나 어젯저녁 모양으로 마음이 번민하지는 아니하였다.
48
우선은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구두와 단장으로 한꺼번에 마루를 쾅쾅 울리며 성난 듯이 더욱 소리를 높여,
"여보! 노파!"
하였다. '노파!' 하고 우선의 부르는 소리가 우스워 형식은 씩 웃었다. 이윽고 마당 한 모퉁이로서 노파가,
"아따, 신주사시구랴! 남 뒷간에 가 있는데 야단을 하시오?"
하고 치마고름을 고쳐 매면서 들어온다. 오다가 형식을 이윽히 본다. 어젯 저녁에 와서 '월향 씨 있소' 하던 사람이로구나 하고, 그러면 그가 '신주사의, 심부름꾼이던가' 하였다. 형식도 '네가 나를 멸시하였구나' 하였다. 노파는 형식은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닌 듯이 마루에 올라서며 아주 친근한 모양으로 우선에게,
"어떻게 일찍 오셨구려!"
하고는 발로 '영감쟁이'를 툭툭 차며 부르짖는 목소리로,
"여보, 일어나소! 손님 오셨소"
하고,
"그렇게 눕고 싶거든 땅 속에나 들어가지?"
하고 발로 '영감쟁이'의 목침을 탁 찬다. 목침은 곁에 놓인 소설책을 내던지고 저편으로 떼구랄 굴러가서 벽을 때리고 우뚝 섰다. '영감쟁이'는 센 터럭이 몇 오리가 아니 되는 빨간(맨숭맨숭한) 머리를 마루에 부딪고 벌떡 일어나며,
"응, 그게 무슨 버르장이란 말인고."
하고 우선은 본 체도 아니하고 일어나 자기의 방으로 들어간다. 형식은 그 '영감쟁이'를 보고, 자기의 죽은 조부를 생각하였다. 원래 부자던 자기의 조부도 전래하는 세간을 다 팔아 없이하고, 아들 형제는 먼저 죽고 손자인 자기는 일본에 가 있고 조고마한 오막살이에 일찍 기생이던 형식의 서조모에게 천대받던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형식은 자기의 조부는 저 '영감쟁이'보다는 고상하던 사람이라 하였다.
우선이는 급한 듯이,
"그런데 아씨가 평양을 가셨어요?"
하는 것을 대답도 아니하고 노파는 먼저 영채의 방에 들어가 우선을 보고,
"이리 들어오시구려, 집 무너지겠소?"
한다. 우선은,
"이리 들어오게그려."
하고 유심한 웃음으로 형식을 부르고 자기도 구두를 벗고 방으로 들어간다. 형식은 한 걸음 방을 향하여 나가다가 그 자개 함롱과 아롱아롱한 자루에 넣은 가얏고와 아랫목에 걸린 분홍 모기장을 보고 갑자기 불쾌한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구두를 벗으려다 말고 웃으며,
"나는 여기 앉겠네."
하고 마루에 걸어앉는다. 우선은,
"들어오게그려. 오늘부터는 자네가 이 방에 주인이니."
하고 일어나 형식의 팔을 당긴다. 형식은 갑자기 얼굴이 발갛게 된다. 우선은 '아직도 어린애로다' 하고 형식의 팔을 끈다. 노파는 우선이가 형식을 친구로 대우하는 양을 보고 한 번 놀라고 또 '오늘부터는 자네가 주인일세' 하는 것을 보고 두 번 놀라 눈이 둥그래졌다가 워낙 능란한 솜씨라 선웃음을 치며 일어나,
"나리 들어오십시오. 나는 누구신 줄도 모르고…… 어젯저녁에는 실례하였습니다……. 너무 검소하게 차리셨으니까"
한다. 형식은 부끄럽고 가슴이 설레는 중에도 '흥,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하면서 권하는 대로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 앉으며 노파의 시선(視線)을 피하는 듯이 방 안을 한번 더 돌아보았다. 모기장의 주름이 어제와 같으니, 영채가 어젯저녁에는 모기장을 아니 치고 잤구나 하였다. 그러고 영채가 저 벽에 기대어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하였는가 하매 자연히 마음에 슬픔이 생긴다. 형식의 눈은 모기장으로서 문 달린 벽으로 돌았다. 형식은 멈칫하였다. 그 벽에는 찢어진 치마가 걸렸다. 형식의 머릿속에는 청량리 광경이 빙그르 돈다. 그 치마 앞자락에는 피가 묻었다. 형식은 남모르게 떨리는 숨소리를 죽이고 입술을 꼭 물었다. 그러고 '나도 영채 모양으로 입술을 무는구나' 하고 참(차마 더 보지 못하여 찢어진) 치마에서 눈을 떼었다. 동대문 오는 전차 속에서 영채가 치마의 찢어진 것을 감추는 양을 보고, 계집이란 이러한 때에도 인사를 차린다 하던 생각이 난다. 바로 치마 밑에 피 묻은 명주 수건 조각이 형식의 눈에 들었으나 형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지금껏 형식의 냉정(冷靜)하던 가슴에는 차차 뜨거운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왜 평양을 갔을까' 하는 생각이 무슨 무서운 뜻을 품은 듯이 형식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형식은 어서 우선이가 노파에게 영채가 평양에 간 이유를 물었으면 하였다. 우선은 담배를 피워 물더니,
"대관절 아씨는 어디 갔소?"
한다. 월향이라고는 부르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영채 씨라고 부르면 노파가 못 알아들을 듯하여 둥그스름하게 '아씨'라 함이라. 노파는 우선이가 장난으로 그러는 줄을 알므로 웃지도 아니한다.
"평양에 잠깐 다녀온다고 오늘 식전에 벼락같이 떠났어요. 오랫동안 성묘를 못 하였으니 잠깐 아버님 산소에나 다녀온다고요."
한다. 노파는 이 두 사람이 어젯저녁 사건을 모르려니 한다. 그러고 아마 우선이가 저 친구를 데리고 놀러 온 것이어니 한다. 저 새로운 친구도 아마 월향의 이름을 듣고 한번 만나 볼 양으로 어젯저녁에 왔다가 헛길이 되고, 아마 자기의 초라한 모양을 보고 월향을 내어놓지 아니하는가 보아서 오늘은 월향과 친한 우선을 데리고 온 것이어니 하였다. 그러고 저러한 주제에 기생 오입은 다 무엇인고 하였다.
영채가 평양에 성묘하러 갔단 말을 듣고 형식은 감옥에서 죽었다는 박선생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박선생의 얼굴을 다 상상하기도 전에, '영채가 성묘하러' 갔다는 말의, '성묘'란 말이 말할 수 없는 무서움을 가지고 형식의 가슴을 누른다. 형식은 불의에 "성묘!" 하고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에 우선과 노파는 형식의 얼굴을 보았다. 형식의 눈에는 분명히 놀람과 무서움의 빛이 보이더라. 노파는 무슨 생각이 나는지 일어나 저편 방으로 간다.
49
우선도 영채가 갑자기 평양에 갔단 말에 무슨 뜻이 있는 듯하게 생각하였다. 그러고 일어나 제 방으로 가는 노파에게 눈을 주었다. 이 '성묘'라는 알 수 없는 비밀을 설명할 자는 그 노파여니 하였다. 그러고 그 노파가 갑자기 일어나 제 방으로 가는 것이 이 비밀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 하였다. 형식과 우선 두 사람의 눈은 노파가 없어지던 문으로 몰렸다. 두 사람은 무슨 큰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듯이 숨소리를 죽였다. 여름 볕이 모닥불을 퍼붓는 모양으로 마당을 내리쪼여, 마치 흙에서 금시에 불길이 피어 오를 듯하다. 기왓장에 볕이 비치어 천장으로 단김이 확확 내려온다. 형식의 오늘 아침에 새로 입은 모시 두루마기 등에는 땀이 두어 군데 내어비친다. 우선도 이마에 땀방울이 솟건마는 씻으려 하지도 아니하고 대팻밥 모자로 부치려 하지도 아니한다. 함롱 밑 유리로 만든 파리통에는 네다섯 놈 파리가 빠져서 벽으로 헤어오르려다가 빠지고, 헤어오르려다가는 빠지고 한다. 어디로서 얼룩고양이 하나가 낮잠을 자다가 뛰어나오는지 영채의 방 앞에 와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하면서 형식과 우선을 본다.
이윽고 노파가 봉투에 넣은 편지를 하나 들고 나오며 우선을 향하여,
"월향이가 정거장에서 바로 차가 떠나려는데 이것을 주면서 이형식 씨가 누군지 이형식 씨라는 이가 오시거든 드리랍데다."
하고 그 편지를 우선에게 주며 얼른 형식의 얼굴을 본다. 아까 정거장에서 노파가 이 편지를 받을 때에는 이형식이라는 이가 아마 어떤 월향에게 놀러 다니는 사람이어니 하고, 월향이가 특별히 편지를 하리만큼 친한 사람이면 자기가 모를 리가 없겠는데 하고 의심하였었다. 그러나 차가 빨리 떠나므로 자세히 물어 보지도 못하고, 아마 어떤 사람에게 물어 보면 알려니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선과 형식의 행동이 영채의 일을 근심하는 듯하는 양을 보고, 더구나 형식이가 이상히 고민하는 낯빛을 보일 뿐더러 '성묘!' 하고 놀라는 양을 보고, 혹 그가 '이형식'이라는 사람이나 아닌가 하여 이 편지를 내어 온 것이요, 또 우선에게 이 편지를 주면서도 얼른 형식의 낯빛을 엿봄이라. 형식은 우선이가 받아 든 편지 피봉에 매우 익숙한 글씨로 '이형식 씨 좌하(李亨植氏座下)'라 한 것을 보고,
"에!"
하고 놀라는 소리를 발하면서 우선의 손에서 그 편지를 빼앗아 봉투의 뒤 옆을 보았다. 그러나 뒤 옆에는 '유월 이십구일 조(六月二十九日朝)'라고 쓴 밖에는 아무것도 쓰지 아니하였다. 형식의 그 편지 든 손은 떨린다. 우선도 '무슨 까닭이 있구나' 하고 숨소리를 죽였다. 노파는 두 사람의 놀라는 얼굴을 보고 '웬일인가' 하여 역시 놀랐다. 그러고 월향이가 이번에 평양에 간 것에 무슨 큰뜻이 있는 듯하다 하였다. 오늘 아침 월향은, 어젯저녁의 슬퍼하던 빛이 없어지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고, 모시 치마 저고리에 여학생 모양으로 차리고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아니한 노파의 방에 와서 아주 유쾌한 듯이 방글방글 웃으며,
"어머니, 어젯저녁에는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자고 나서 생각하니 그런 우스운 일이 없어요."
하기에, 걱정을 품고 자던 노파는 너무도 기뻐서 월향의 손을 잡으며,
"그러니라. 잘 생각하였다. 내가 기쁘다."
하였다. 그러고 이제는 안심이로다. 이제는 밤에 손님도 치르게 되려니 하고 두 겹으로 기뻤었다. 그때에 영채는 말하기 미안한 듯이 한참이나 주저하더니,
"어머니, 저는 평양이나 한번 갔다가 오려 합니다. 가서 오래간만에 아버지 성묘도 하고 좀 바람도 쏘이게……" 하였다. 노파는 그 슬퍼하고 고집하던 마음을 고친 것이 반갑고, 어젯저녁에 월향을 안고 울 때에 얼마큼 애정도 생겼고― 자고 나서는 사분의 삼이나 식었건마는―또 조고마한 일이면 제 소원대로 하여 주는 것이 좋으리라 하여,
"그래라. 석 달이나 넘었는데 한번 가고 싶진들 않겠느냐. 가서 동무들이나 실컷 찾아보고 한 삼사 일 놀다가 오너라."
하고 몸소 정거장에 나가서 이등 차표와 점심 먹을 것과, 칼표 궐련까지 넉넉히 사주고,
"가거든 아무아무에게 문안이나 하여라. 분주해서 편지도 못 한다고."
하는 부탁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대체 월향은 이삼 일 후면 방글방글 웃으면서 돌아오려니만 믿고 있었더니, 지금 우선과 형식 양인이 이 편지를 보고 대단히 놀라는 양을 보매, 월향이가 이번 평양에 간 것에 무슨 깊고 무서운 사정이 있는 듯하여 가슴이 뜨끔하다. 노파는 불현듯 오 년 전 월화의 생각을 하고, 월향이가 항상 월화가 준 누런 옥지환을 끼고 있던 것을 생각하고, 어젯저녁 청량리 일을 생각하고 눈이 둥그래지며,
"월향이가 왜 평양에 갔을까요."
하고 두 사람이 노파에게 물으려던 말을 노파가 도리어 두 사람에게 묻는다.
형식이가 그 편지를 들고 멍멍하니 앉았는 양을 보고 우선도 조민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여보게, 그 편지를 뜯게."
한다. 형식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한편 끝을 잡았다. 그러나 형식은 차마 떼지 못한다. 그 손은 점점 더 떨리고 그 얼굴의 근육(筋肉)은 점점 더욱 긴장(緊張)하여진다. 우선은, "어서, 어서!" 하고 봉투를 떼기를 재촉한다. 노파는 저 속에서 무슨 말이 나오겠는고 하고, 봉투의 한편 끝을 잡은 형식의 손만 본다. 세 사람의 가슴은 엷은 여름 옷 아래서 들먹들먹하고, 세 사람의 등에는 땀이 내어 배었다.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던 고양이가 지붕에 참새를 보고 '냥' 하면서 뛰어간다. 형식의 떨리는 손은 마침내 그 봉투의 한편 끝을 찢었다. 찢는 소리가 대포 소리와 같이 세 사람의 가슴에 울렸다.
50
떨리는 형식의 손에는 편지가 들렸다. 그러고 한편 끝이 떨어진 봉투는 형식의 무릎 위에 떨어졌다. 노파는 앉은 대로 한 걸음 몸을 움직여 형식의 곁에 가까이 오고, 우선은 몸과 고개를 형식의 어깨 곁으로 굽혔다. 형식의 가슴은 펄떡펄떡 뛰고, 우선과 노파의 눈은 유리로 만든 것 모양으로 가만히 형식의 손이 한 간씩 한 간씩 펴는 편지 글자 위에 박혔다. 형식은 슬픔을 억제하는 듯이 어깨를 두어 번 추더니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흐르는 듯한 궁녀체 언문으로 썼다. 우선과 노파의 전신의 신경(神經)은 온통 귀와 눈으로 모였다. 형식은 '이형식 씨 전 상서(李亨植氏前上書)'라 한 것은 빼어놓고 본문부터,
"어젯저녁에 칠 년 동안이나 그리고 그리던 선생을 (뵈오매, 마치 이미 세상을) 버리신 어버이를 대한 듯하여 기쁘기 그지없었나이다. 칠 년 전 선생께옵서 안주를 떠나실 때에 집 앞 버드나무 밑에서 이 몸을 껴안으시고, 잘 있거라 다시는 볼 날이 없겠다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던 것과, 그때에 아직도 열두 살 된 철없는 이 몸이 선생의 가슴에 매어달리며 가지 마오, 어디로 가오, 나와 같이 갑시다, 하던 것을 생각하오매 자연히 비감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를 내어 울었나이다.
이렇게 이별하온 후 칠 년 동안 의지할 데 없는 외롭고 어린 이 몸이 부평과 같이 바람 가는 대로, 물결 가는 대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동서로 표류하올 때에 눈물인들 얼마나 흘렸으며 한숨인들 얼마나 쉬었사오리이까.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평양 감옥에서 철창의 신음을 당하시는 부친을 뵈옴이라, 열세 살 된 계집의 몸이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 모양으로 이리 굴고 저리 굴며,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쳐 평양 감옥에 흙물 옷을 입으신 부친의 얼굴을 대하기는 하였사오나, 무섭게 여윈 그 얼굴을 대할 때에 어린 이 몸의 가슴은 바늘로 쑥쑥 찌르는 듯하였나이다.
이에 철없는 이 몸은 감히 옛날 어진 여자의 본을 받아 몸으로써 부친을 구하려는 마음을 품고, 어떤 사람의 소개로 기생에 판 것은 이 몸이 열세 살 되던 해 가을이로소이다. 그러하오나 이 몸을 팔아 얻은 이백 원은 이 몸을 팔아 준 사람이 가지고 도망하니 부모의 혈육을 팔아 얻은 돈으로 부친의 몸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철장에서 신음하시는 늙으신 부친에게 맛난 음식 한 때도 받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이어든, 하물며 이 몸이 기생으로 팔림을 위하여 부친과 두 형이 사오 일 내에 세상을 버리시니 슬프다, 이 무슨 변이오리이까. 이 몸이 전생에 무슨 죄가 중하여 어려서 부친과 두 형을 옥에 가시게 하고, 다시 이 몸으로 말미암아 부친과 두 형으로 하여금 원망의 피를 뿜고 세상을 버리시게 하나이까. 오호라 이를 생각하오매 가슴이 터지고 골수가 저리로소이다. 이 몸이 만일 적이 어짐이 있었던들 마땅히 그때에 부친에 뒤를 따랐을 것이언마는 차홉다 완악한 이 목숨은 그래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부지하였나이다.
부친과 두 형을 여읜 후, 이 몸이 세상에 믿을 이가 누구오리까. 선생께서도 아시려니와 이 몸이 의지할 곳이 어디오리까. 아아, 하늘뿐이로소이다. 땅이 있을 뿐이로소이다. 그리하고 세상에 있어서는 선생뿐이로소이다.
이 몸은 그로부터 선생을 위하여 살았나이다. 행여나 부평같이 사방으로 표류하는 동안에 그리고 그리는 선생을 만날 수나 있을까 하고 그것을 바라고 이슬 같은 목숨이 오늘까지 이어 왔나이다. 이 몸은 옛날 성인과 선친의 가르침을 지키어 선친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 몸을 허하신 바 선생을 위하여 구태여 이 몸의 정절을 지키어 왔나이다. 이 몸이 이 몸의 정절을 위하여 몸에 지니던 것을 여기 동봉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몸은 이미 더러웠나이다. 아아, 선생이시여, 이 몸은 이미 더러웠나이다. 약하고 외로운 몸이 애써 지켜 오던 정절은 작야에 물거품〔水泡〕에 돌아가〔歸〕고 말았나이다.
이제는 이 몸은 천지가 허하지 못하고 신명이 허하지 못할 극흉 극악한 죄인이로소이다. 이 몸이 자식이 되어는 어버이를 해하고 자매가 되어는 형제도 해하고 아내가 되어는 정절을 깨트린 대죄인이로소이다.
선생이시여! 이 몸은 가나이다. 십구 년의 짧은 인생을 슬픈 눈물과 더러운 죄로 지내다가 이 몸은 가나이다. 그러나 차마 이 더럽고 죄 많은 몸을 하루라도 세상에 두기 하늘이 두렵고 금수와 초목이 부끄러워, 원(怨)도 많고 한(恨)도 많은 대동강의 푸른 물결에 더러운 이 몸을 던져 탕탕한 물결로 하여금 더러운 이 몸을 씻게 하고, 무정한 어별로 하여금 죄 많은 이 살을 뜯게 하려 하나이다.
선생님이시어! 이 세상에서 다시 선생의 인자하신 얼굴을 대하였으니 그만하여도 하늘에 사무친 원한은 푼 것이라 하나이다. 후일 대동강상에서 선생의 옷에 뿌리는 궂은 비를 보시거든 박명한 죄인 박영채의 눈물인가 하소서. 이 편지 마치고 붓을 떼려 할 제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리오나이다. 오호라 선생이시여 부디 내내 안녕하시고 국가의 동량(棟樑)이 되셔지이다."
하고 떨리는 붓으로, '歲次丙辰六月二十九日午前二時에 죄인 朴英采는 泣血百拜(세차병진 유월 이십구일 오전 두시에 죄인 박영채 읍혈백배)'라 하였다. 차차 더 떨던 형식의 손은 그만 편지를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그러고 흑흑 느끼며 굵은 눈물을 무릎 위에 펴놓인 편지 위에 떨어뜨린다. 떨어진 눈물은 편지에 쓰인 글자를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우선도 소매로 눈물을 씻고, 노파는 치마로 낯을 가리오고 방바닥에 엎드린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 마당에서는 점점 더 단김이 오른다.

반응형